사업가 야곱 이야기(자신과의 불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에 대하여, 긴글 주의)
나에게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을 꼽으라면 야곱을 택하고 싶다.
그의 엄마 리브가는 태중에 에서와 야곱, 두 이란성 쌍둥이를 잉태했을 때 '복중에 두 나라가 나뉘었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다.
그리고 출산의 날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다. 본능적으로 형과의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었으리라..
복중에서부터 분단된 두 형제 나라의 비극은 아빠 엄마의 취향 차이(아빠는 사냥, 엄마는 요리)에서 비롯된 편애로부터 싹이 트고,
팥죽 한 그릇에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면서 커져 가다가, 엄마의 계략으로 아빠 이삭을 속여 에서에게 주려 했던 장자의 축복을 야곱이 가로 채며 절정에 이른다.
결국 야곱을 죽이러 나선 형 에서를 피해 야곱은 정든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길고 긴 피난길을 떠난다.
라반의 집에서 그는 운명적 사랑에 빠지고, 무려 14년의 시간을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장인이 될 라반에게 무료 봉사한다.
모든 면에서 누구보다 치밀하고 똑똑해 보이는 그가 사랑에 눈이 뒤집혀 인생의 가장 혈기 왕성한 기간을 허송하며 보내는 듯한 장면은 지극히 낭만적이다. 솔직히 현실주의자의 눈으로보면 대단히 멍청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랑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 성경에 이보다 더 순정적인 러브 스토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눈먼 사랑에 포로가 되어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던 그는, 순간적으로 찾아온 기회 앞에서 엄청난 순발력과 사업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약간은 속임수로 보이는 수완이었지만, 어쨋든 합법적으로 그가 외삼촌에게 당했던 모든 무료 봉사의 댓가를 넉넉히 돌려 받는다.
물론 이 과정이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이 없이는 불가능했겠지만,
애굽에 피난 가서 아내를 파라오에게 강탈 당할 뻔했다가,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 상황을 모면하고, 그 쓰린 경험의 댓가로 파라오에게 사과의 선물을 받아 벼락 부자가 된 할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이미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로 태어 나서 평생 큰 평지풍파 없이 무난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 이삭에 비해서(물론 그도 극심한 기근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을 떠나지 않는 뚝심으로 100배의 수확을 얻는 대박을 터뜨린 적이 있긴하다.)
무려 14년을 자원 봉사만 하던 빈털털이 가출 소년에서, 한순간에 자신의 능력으로 거부가 된 자수성가한 수완 좋은 사업가라는 면에서, 나로서는 가장 부러우면서도 존경스러운 인물이다.
사업가로서 야곱의 재능은 부의 축적이라는 면에서도 돋보이지만, 일궈낸 부를 수성하기 위한 리스크 관리 면에서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경지를 보여 준다.
첫번째 위기는, 합법적인 계약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핵심 재산을 고스란히 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라반의 아들들에의해 찾아 왔다.
그러나 야곱은 아마도 오랜 도망 생활로 체득되었을 놀랄만한 눈치로 상황을 일찍 파악했고, 미련 없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와 같던 사업을 포기하고 야반도주를 한다.
아마도 '조금만 더' 하는 심정으로 알토란 같은 사업 모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미적거렸다면 결국 철수 시점을 놓쳐 한방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겨우 첫 위기를 탈출한 야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 모든 모험의 시작점이었던, 무서운 형, 에서와의 재회였다.
혈혈단신으로 도망 나와 40년만에 네명의 아내와 12명의 자녀 그리고 엄청난 종들과 가축을 거느린 자수성가한 거부가 되었지만,
잊을만하면 불현듯 살아 돌아와 늘 그를 우울 모드에 빠지게 했던 흑역사,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트라우마가, 외나무 다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형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먼저 문제를 일으켰던 것은 야곱이었다. 장자권을 끝없이 탐내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가지려했던 야곱에 비해, 형 에서는 어찌 보면 쿨하게 동생을 대했다.(물론 성경은 이것을 망령된 것으로 평가하지만...)
야곱이 에서를 보기 힘들어 했던 것은 단순히 자기로 인해 화난 형을 만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 보아야 했기에 그 순간이 세상 그 무엇보다 두렵고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파수꾼의 보고로 형이 무려 400명의 전사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후, 야곱은 평생 자신을 지탱해 온 수완을 총동원하여 이중 삼중의 대비책을 세워 에서의 습격에 대비한다.(다시 한번 놀라운 수준의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 준다.)
모든 가족들을 철저하게 전략적 순서에 따라 배치하여 얍복강을 건너 보낸 후, 이제 자신이 건너 가야 할 차례지만, 야곱은 차마 건너가지 못하고 혼자 망설이고 있다.
밤이 늦도록 나룻터에 서성이던 그는 갑작스런 자객의 습격을 받아 밤새 처절한 육박전을 벌인다. 싸움의 결과로 그는 평생 남을 장애를 갖게 되었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당한다.(단순한 씨름 경기가 아니라 목숨을 건 혈투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내가 야곱을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인물로 꼽는 것은 바로 이 장면에 대한 해석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씨름을 하나님과의 투쟁이라 해석하여, 특히 기도할 때 하나님과 싸워서 이겨야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라 믿는다. 일종의 쟁취인 셈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고, 꾸짖지 않으시고 후하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권고한다.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과 왜 싸워야 하나? 주고 싶어하는 사람과 싸워서 강제로 빼앗는게 가능한가?
성경의 하나님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서 억지로 빼앗아야만 하는 욕심많은 신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도로 찾아 온다면 누구보다 기뻐하실 분이 그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딱뜨려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야곱과 생사를 건 씨름을 하셔야 했을까?
내가 이 씨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예전 글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의 통로라 소개한 '무력감'이라는 단어였다.
압복강을 건너기 전까지 야곱에게 '무력감'은 무척 낯선 단어였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올 정도로 그는 집념 그 자체였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격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설사 그것이 옳지 않은 속임수를 쓰는 것일지라도) 쟁취하고야 마는 그의 사전에 '무력감'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평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온 야곱이 이날 밤만은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맞딱뜨렸다.
그 좋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 보아도, 이 일생일대의 위기를 벗어날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평생을 그에게는 거침돌이자, 공포 그 자체인 형 에서를 넘어서야만 한다. 그런데 도저히 자신도 없고 복잡한 생각과 정리되지 않는 마음에 잠도 오지 않는다.
그 때 갑자기 자객이 덥쳤다. 어쩌면 야곱은 얼씨구나 잘 됐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도 답답하고, 어딘가 분풀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는데, 누군가가 덤벼 주니 잘됐다. 오늘 니가 죽든 내가 죽든 정말 죽어라 한번 싸워보자...
그런데 싸우면 싸울수록 좀 이상했다.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인줄 알았는데, 늘 가까이 있던 사람처럼 익숙하다. 매일같이 상대했던 사람처럼 모든 것이 친숙하기 그지없다.
밤이 맞도록 치열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이 사람은 떠나기 직전 불의의 한 수로 야곱을 벌러덩 나가 떨어지게 만든다. 얼마나 큰 부상을 입었는지, 이 때로부터 야곱은 평생을 절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사람을 붙잡고 뜬금없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며 물고 늘어진다. 결국 이 사람은 야곱을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는 새 이름을 준다.
아니 분명 부상은 야곱이 입었는데, 왜 이 사람은 하나님을 이겼다는 칭호를 주었을까? 난해해, 난해해...
야곱이 에서를 극복하지 못하고 늘 그를 의식하며, 그의 것을 어떻게든 빼앗으려 했던 것은, 사실 에서의 문제가 아니었다.
에서는 거의 야곱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야곱을 경쟁의 상대로 생각하는 듯한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늘 두 관계에서 안달했던 것은 야곱이었다.
도대체 야곱은 왜 이렇게 형의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 자신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했던, 늘 형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래서 병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어떻게든 자기 손으로 성공하려 했던 야곱의 거친 자아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성경의 어떤 인물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 앞에 한번도 수동적이었던 적이 없던 인물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요셉 등 주요 인물들이 모두 중매 결혼에 만족할 때, 유독 그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즉 연애 결혼을 하기 위해 14년의 세월을 허송하며 보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달리 철저히 자신의 수완으로 이뤄졌다.
나는 그의 이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이 보기 좋지만 않다. 왠지 애처롭고 외로워 보인다.
내 생각에 그가 그렇게 미친 듯이 연애에 매달리고, 악착같이 부를 축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형을 편애하는 아빠와 자신을 편애하는 엄마 사이에서 삐뚤어질 수밖에 없었던 자아 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 삐뚤어진 자아의 시각으로 바라 본 하나님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기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분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으며, 그의 축복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장자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자신을 이렇게 밖에 대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적극적인 원망은 아닐지라도 미묘한 불만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자신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분을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대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하기로 했다. 심지어 그것이 형과 아버지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을 속이고 죄를 짓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느니 죄를 짓더라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가 마치 양과 목자와 같이 깊은 신뢰 속에 막막해도 일단 믿고 따르는 관계였다면,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는 감정이 배제된 비즈니스를 보는 듯하여 좀 불편하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 가다가 돌베게를 베고 자다, 하늘 사다리를 타고 천사가 오르내리는 유명한 꿈을 꾼 후 처음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던 장면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매달린 다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든지 이런 개인적이고 친밀감이 담긴 기도를 드리는게 아니라 이 길에서 무사히 돌아 오면 십일조를 하겠다는 일종의 사업적 거래를 제안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기도라기보다는 무슨 사업 제안서 같은 딜을 시도했던 야곱의 바램처럼 40년의 이민 생활을 마감하고 고국으로 돌아 오게 되었다. 수많은 고초도 겪었지만 야곱의 집요함과 뛰어난 수완,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잘 버무려 져 큰 부를 일구고 대가족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마지막 고비에서 이 모든 것을 한방에 날리게 될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맞딱 뜨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야곱이 맞딱뜨린 가장 큰 위험은 에서와 400명의 전사가 아니었다. 끝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틀어 놓는 내면의 원망과 비뚤어진 자아, 그리고 죄를 짓더라도 충족해야만 했던 강렬한 욕망이 문제였다.
아무리 외부의 위기를 귀신 같이 피해 다니고 적절히 관리해도, 내면의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얍복에서의 그날밤 그는 폭발하고 말았다. 갑작스레 덤벼드는 자객에게 평생의 한을 가득담아 죽일듯이 덤벼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분이, 그가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으면서도, 결국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체 자신의 삶 깊숙히 들어 오는 것은 거부했던, '그 분'이라는 것을....
'그 분'임을 알고 나서도 그는 싸움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이름 야곱(당시 씨름에 사용되었던 속임수)답게 온갖 속임수로 그분을 이기려 들었다. 그러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을만한 무렵, 상대는 지금껏 숨겨왔던 강력한 수로 야곱에게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혔다.
아곱은 이 사람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평생 자신이 이 사람으로부터 얻지 못해 죽을 것만 같았던, 그것을 얻어야만 이 사람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기대했던 축복대신 이 사람은 평생을 절뚝발이로 살아야만 하는 장애를 안겨주며, '너는 하나님과 싸워 이긴자'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만 남기고 가버렸다.
나 같으면, 평생의 분노보다 더 큰 증오로 까무려쳤을 법도 한데, 야곱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이름으로 그 처절한 전투장을 기억하며, 그는 감격스러운 아침을 맞이한다.
이 후 그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에서와의 만남은 너무나 싱겁게 아름다운 화해로 마무리가 된다.
도대체 이렇게 극적인 화해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야곱은 그날 밤,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묵묵히 야곱의 온갖 공격을 다 받아 주셨다. 마치 일부러 야곱에게 져주기 위해 오신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 분 앞에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다 보여 준 후에, 더 이상의 밑바닥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야곱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쌓아 두었던 높은 담을 허물 수 있었던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가장 악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낸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도 오래 불화해 온 자신과의 화해가 이뤄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로 결심한 순간, 지금껏 하나님과 아버지 그리고 형에게 죄를 지어 가면서까지 쟁취하려 했던 욕망에 대한 회개도 이뤄졌을 것이다.
결국 형 에서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나님은 이 화해의 확실한 증표로 야곱의 몸에 평생 사라지지 않을 장애를 남겨주셨다. 야곱은 그것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이후로 야곱은 인생은 이전과는 달랐다. 여전히 말못할 고초와 어려움이 덥쳤지만, 더 이상 안달복달하며 머리를 쥐어 뜯으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말년에 애굽에서 죽기 전에 열 두 아들을 축복할 때 그가 보여 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의 깊이는 오래도록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한 사람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심오한 것이었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감 브니엘에서 야곱의 속사람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그랬듯, 이삭이 그랬듯, 하나님과 완전한 화해가 이뤄졌고,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그 '무력감'이 야곱의 삶에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준 것이다.
400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오는 형을 만나기 위해 그에게 필요한 무장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무기가 아니었다.
밤새도록 싸우느라 초췌해진 얼굴에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야곱 생애에서 가장 무력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최고의 무장이었다.
무력하기 그지없는 야곱의 모습 앞에서 에서의 미움은 녹아 내렸다. 그도 분명 자신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간 동생이 엄청난 거부가 되어 돌아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한켠에 비켜 두었던 분노가 주체하지 못할만큼 타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최정예들을 데리고 동생을 손보려 했을 것이다. 그가 받았어야할 복을 가로채 거부가 된 동생을 어찌 가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가 맞이한 동생의 모습은 소위 성공한 이의 기름이 좔좔 흐르는 그것이 아니었다. 초라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절뚝이며 오는 동생을 보며 에서의 분노는 연민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야곱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 그의 유능함이 아니라 무능함이 인생 최대의 위기를 돌파하는 무기가 된 것이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어쭙잖은 내 인생을 야곱에 우겨 넣어 보자면,
나도 한 때 과도하리만치 하나님의 복에 집착한 적이 있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성장 과정을 거쳐 온 나에게 청년의 때에 맛본 하나님의 복은 너무나 달콤했고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바닥에서 통할만한 재주도 적절히 있어서, 제법 그 영역에서 성공을 거뒀고, 나름 괜찮게 사역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 또 하나님에 대해 철저하게 정직하지 못했던 나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위기 앞에서 쉽게 무너져 내렸다.
어설픈 유능함과 몇 몇 신앙적 성공에 의존해 있던 내 자존감은 믿기 힘든 결과 앞에 버티기 힘들었고 약한 수준의 우울증도 경험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멀리 달아 나는 쪽을 선택했다. 그나마 내 유능함이 아직 먹힐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찾아 왔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빈손 쥐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홀가분했고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좋았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고생의 기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술술 잘 풀렸고, 제법 괜찮은 성취를 이뤘다.
그러다 또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이전에 내게 많은 성공을 가져다 주었던 비즈니스 모델에 큰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안이하게 집착하다간 모든 것을 다 날릴 판이다.
급하게 방향을 바꿔 이것 저것 시도하고 있지만, 지금 내 기분은 마치 얍복 나루터에 앉아 400명의 전사를 몰고 오고 있는 형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야곱이 된 기분이다.
낯선 나라에 와서 제법 나쁘지 않은 성취도 이뤘지만, 앞에는 과거의 원수인 형 에서가 뒤에는 현재의 원수인 라반의 아들들이 이를 갈고 있는 진퇴양난에 빠진 야곱과 같이 막막한 느낌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게 무엇일까? 400명의 전사와 싸워 이길 용기와 유능함? 아니면 또 다시 그들을 속여 넘기고 위기를 모면할 지혜와 계책?
아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해임을 느낀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싸우시러 오셨는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의 삶과 나의 모습과, 나의 하나님께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내 유능함으로 내 인생을 성취하고 싶은, 무능함과 무력감을 견디지 못하는 내게 오셔서, 내 자신과의 불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불화를 다루고 싶어 하신다.
만약 이 얍복의 전투에서 철저하게 무력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거듭 나지 못한다면, 여전히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위기를 헤쳐 가려 한다면, 내 삐뚤어진 욕망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다면, 브니엘의 아침을 맞지 못할 것이며, 400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덥쳐 오는 에서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무력해진 야곱에게 비로소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고 바로 그 이름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름이 된다.
마흔, 내게 주어진 씨름은 스물, 서른 때처럼 더 이상 얼마나 유능하냐의 싸움이 아니다. 에서와의 비교와 경쟁, 라반의 아들들과의 경쟁도 아니다.
얼마나 더 철저하게 무력해 지느냐의 싸움이며,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과 또 나 자신과 불화했던 내가 하나님과 또 나 자신과 화해하느냐의 싸움이다.
사우디 불황의 깊은 터널을 지나고 있는 고독한 사업가로서 절로 기도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나를 축복하시지 않으면, 당신을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