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1

기공(氣功)

The Lotus Networks / WS Institute(WSI) :

lotus21 2017. 2. 14. 16:06


 

          <기공[氣功]: 동양 전래의 기(氣)를 다스리는 수련>

 


기는 우주만물 작용력의 근원이며, 공(功)은 정성을 다해 기를 단련하는 방법이다. 현대 기공은 크게 무술기공 ·보건기공 ·의료기공 등 3가지로 나눈다. 195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보건 ·의료기공 측면에서 기공학(學)을 강조한 중국은 1979년 이후 2차례의 기공 대 논쟁을 통해 기공이란 기의 흐름을 정상적으로 유도하여 심신의 건강을 도모하기 위한 동양체육학의 집대성이다. 기는 사람의 오관을 통해 감촉하는 형태(넓은 의미의 기)와 의지력, 영감, 심체로써 느끼는 형태(좁은 의미의 기)로 존재하며, 이 2가지가 서로 간섭 교차하여 변화를 꾀한다. 사람은 인체 내의 경락(經絡)을 열어주는 기공의 삼조(三調)를 통해 인체 내외의 기를 잘 조화시켜 심신 긴장완화, 진기 촉진, 도덕수양, 지력과 특수능력개발, 질병예방을 통한 무병장수를 꾀한다고 일단락지었다. 세계 의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기공학은 중국에서는 중의학과 함께 인체과학의 양대 봉(峯)으로 정립되고 있으며, 한국도 한 ·양 의학 모두 의료기공과의 접목을 꾀하고 있다.

 

기공은 내용상으로는 성공(性功:정신수양)과 명공(命功:신체단련), 형태상으로는 정공(靜功:서거나 앉거나 누워서 수련)과 동공(動功:체조나 무술처럼 걷거나 뛰며 수련), 작용상으로는 경공(硬功:무공연마나 차력 등 강한 공법)과 연공(軟功:병치료나 체조 등 부드러운 공법)으로 나뉜다. 중국에서는 기공의 종류가 300여 가지나 되는데, 도가양생(道家養生) ·장수술 등 10여 가지는 일반화되어 있다. 기공의 기원은 동양문화가 시작된 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학 ·의학 ·천문학은 물론 각종 예술의 이론적 뿌리이자 줄기로 인식되는 동양 전래의 기공은 의가(醫家) ·도가 ·불가 ·유가 ·무가(武家) 등 여러 유파가 현대적 기공으로 종합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기공은 또 선(禪)을 위주로 하는 유파, 의념(意念) 집중을 위주로 하는 존상파(存想派), 주천파(周天派), 도인파(導引派) 등으로 나눈다. 의가는 예방의학, 곧 양생(養生)을 으뜸으로 1,700년 전 중국 삼국시대의 명의 화타(華陀)가 호랑이 ·사슴 ·곰 ·원숭이 ·학 등 5가지 동물 자세에서 고안한 오금희(五禽戱) 등이 유명하다. 도가는 내단술(內丹術)에 바탕한 단학(丹學) 또는 단도(丹道)로 발전했다. 음양오행 원리의 황제음부경(皇帝陰符經), 도장경(道藏經) 등이 단학 도인법의 대표 경전이다. 한국에서는 조선조에 바라문 도인법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이황(李滉)의 활인심방(活人心方)이 1992년 체육학계에 의해 민속건강체조로 발굴되었다. 불가에는 고대 인도의 참선과 요가 등의 행법이 함께 전해져 현대 기공 수련의 핵인 삼조, 즉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의 틀을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무가에서는 내공력(內功力)을 키우는 핵심수련법으로 기공을 중시했다. 외가권(外家拳)의 대표인 숭산(嵩山)의 소림기공과, 도가에 뿌리를 둔 내(內)가권의 대표인 무당산(武當山)의 무당기공이 대표적이다.

 

송나라 말 도가의 본산인 무당산에서 나왔다는 태극권은 오늘날 건강 ·호신 기공으로 세계에 보급되어 있다. 태극권의 기공 심제법(心齊法)은 도가단공의 비법으로 전래되었다. 한국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인 택견, 불가의 선무도(禪武道), 전승 선도(仙道)의 하나인 기천문(氣天門)과 심무도, 국선도(國仙道), 천도선법(天道仙法), 단학선원 등에서 선(禪)호흡이나 단학, 특히 단전(丹田)호흡을 건강 도인법으로 세웠다. 이들은 19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중화에 성공했고, 1980년대 들어서면서 해외 기공 수도자들이 잇따라 귀국하면서 기공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단전호흡은 한국에서 특히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것은 음양오행의 기를 인체의 단전에 충만시켜 자연 속의 기와 교감을 꾀하는 수련법이다. 가슴으로 숨을 들이마시는 서양의 흉식호흡과는 다르며, 배꼽 5 cm 아래의 단전(丹田)에 기를 모으는 양생호흡법으로, 숨을 들이마실 때 단전이 위로 볼록 솟아오르며 숨을 뱉을 때 배가 다시 밑으로 내려간다. 몸의 힘을 뺀 상태에서 코로만 숨을 내쉬는 것이 특징이다. 기공에 관련된 국내 사회단체로는 위의 단체 외에 한국기공연합회, 한국기공협회, 중국 중심의 내공국제협회, 홍콩 중심의 국제기공협회, 타이완 중심의 태극권국제연맹의 한국지부와 조계종한국참선체조구도회, 한국태극권동호회(진식태극권) 등이 있다.

 

 

단전(丹田) : 

 

본문

단전은 흔히 제하(臍下:배꼽 밑) 3치(9cm쯤)의 부위를 말한다. 선경(仙經)에 의하면 뇌(腦)는 수해(髓海)로서 상단전(上丹田)이 되며, 심(心)은 강궁(絳宮)으로서 중단전(中丹田)이 되고, 제하 3치의 부위를 하단전(下丹田)이라고 한다. 하단전은 장정(藏精)의 부(府)이며, 중단전은 장기(藏氣)의 부이고, 상단전은 장신(藏神)의 부라고 하였다.

 

인신(人身)은 정(精)·기(氣)·신(神)이 주가 되는데, 신은 기에서 생기며, 기는 정에서 생기므로 정·기·신 3자는 항상 수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동양의학적 측면에서 볼 때 양생(養生)의학상 중요한 부위이기도 한데, 특히 단전호흡법이라 하여 정기(精氣)를 이곳에 집중시키는 특수 호흡법은 양생에 의의가 있다.

 

 

 

 

 

大氣道整体法では特に「任脈(じんみゃく)」「督脈」とよんでいる部分を大氣道バリ、氣功ボによってうまく刺激します。任脈は、体の前を走ります。督脈は背骨のある体の後に走ります。下丹田と呼ばれているお腹の下より、おしりの仙骨を通って背骨(督脈)に登り、頭の中の上丹田に登ってから、次に任脈に降り、下丹田にります。
「小周天」と呼ばれる地球の自を表します。このエネルギの循環です。
この小周天、自運動が一番、力、体力の生まれてる場所です


 

「小周天」生命エネルギの循環作用。
下丹田仙骨督脈上丹田中丹田下丹田にもどる。(任脈に流れる)


背骨(督脈)は陰陽の氣をする場
仙骨は生命の氣の源が集合する場
下丹田は氣の海

丹は生命の氣
田は生命の氣を作る場
丹田は生命の氣を蓄える場


 

http://cyberspacei.com/jesusi/inlight/philosophy/chinese/taoism/taoism_o.htm

 


             <도가와 도교 (道家 道敎, Taoism)>

 

개요: 중국의 전통적인 철학사상 및 종교.

 

도가사상은 유교사상과 더불어 2,000년 동안 중국과 그 주변국의 생활과 사상을 형성해온 중국 고유의 종교철학이다. 도가사상의 특징은 실용주의적인 유교와는 달리 현실세계에 대한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에 있다. 도가에 대한 엄격한 정의에는 3가지 측면이 있다. 즉 도가철학은 〈노자 老子〉 또는 〈도덕경〉, 〈장자 莊子〉·>〈열자 列子〉 등과 같은 경전의 사상, '도'를 숭배하는 종교로서의 도교, 도가를 모두 포함한다. 도가사상은 중국문화의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스며 있다. 종교로서 도교는 국교인 유교와 비정형적인 민간신앙의 중간에 위치한다. 도가사상과 도교는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의 한국·일본·베트남 등지로 퍼져나갔다. 한대(漢代 : BC 206~AD 220)를 전후하여 이전의 위대한 도가사상과 이후의 미신적인 도교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상 도교는 형성 때부터 고래(古來)의 주술사상과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도교를 철학과 종교로 구분하는 것은 단지 서술의 편의를 위한 것뿐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도가사상과 유교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양자는 고대의 전통 속에서 인간·사회·군주·하늘·우주에 대해 많은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공유점 위에서 유교는 중국의 도덕과 정치체제에 관심을 두었고 도교는 보다 개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부분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한편 불교는 개인의 자아를 부정하고 현실세계의 허망함을 주장하기 때문에 도교와 극히 대립적이다. 그러나 경쟁적인 포교과정 속에서 양자는 많은 유사성을 갖게 되었다. 송대(宋代) 이후 민간종교에서 도교와 불교는 명확한 구분없이 공존했다.

 

도가와 경전:


노자와 도덕경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노자에 대해서는 〈장자〉에서 처음 나온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당시까지의 전설을 모아 그에 대한 체계적인 최초의 전기를 썼다. 이들에 따르면 노자의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이고, 주(周) 조정에서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史官)을 지냈다. 공자가 그에게 예를 질문했다고 하며 뒤에 은퇴하여 〈노자〉(또는 〈도덕경〉)를 지었다. 그러나 〈도덕경〉은 노자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니고 여러 사람에 의해 BC 3세기경에 편찬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도덕경〉은 군주에 대한 지침서이다. 이 책에서는 "성인(聖人)만이 군주가 되어야 하고 성군(聖君)은 백성에게 어떠한 금지나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 분별·도덕·욕심 때문에 모든 번잡한 문제가 일어나므로 성군은 백성들이 이것을 제거하도록 다스려야 한다"고 규정짓고 있다. 이 책에서 성인의 개념은 중국의 다른 경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왕의 권위를 둘러싸고 있는 신성한 영기(靈氣)는 여기에서 '무위'(無爲)로 표현된다. 이 무위는 우주론적 정향을 지향하는 것, 즉 부자연스런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강경함을 제압하는 정치의 한 방법으로 여성적인 유약함이나 소극성이 찬양되는 것이다. 또한 〈도덕경〉은 보편적인 도(道) 자체의 궁극적인 통일을 사회적 이상으로 본다. 문학에서는 당시대의 대화법과 일화를 소개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도덕경〉은 신비적인 주제들을 간결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표현해낸 고도의 압축된 문체로 유명하다.

 

장자의 해석


〈사기〉는 장자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학문은 엿보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근본에서는 노자의 사상으로 귀결된다……" 이와 같이 장자는 노자와 도가사상을 계승했고 더 나아가 노자와 구분되는 사상적 특색을 가지고 자신의 독특한 철학사상 체계와 학풍, 그리고 문풍(文風)을 형성시켰다. 〈도덕경〉이 성군을 향한 것으로서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목표로 했다면 〈장자〉는 개인의 생활·본성을 보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노자가 그의 책과 삶에서 도가의 기본원리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면, 몇 세대 뒤의 장자는 사회 참여를 일절 거부하고 궁극적인 관심을 소요유(逍遙遊)에 두었다. 〈장자〉에서는 또한 모든 가치의 상대성이 강조된다. 만물일제(萬物一齊)의 사상, 즉 "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에서 귀하고 천한 것의 구분이 없다"(以道觀之, 物無貴賤)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같으며 따라서 죽음 자체는 도에 합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도가사상


도가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 다시 말하면 우주와 인간사회의 상호작용, 시간의 주기적 성격과 우주의 리듬, 복귀(反者道之動)의 법칙 등이다.

 

도가와 도교의 구분 이유


중국에서 도가와 도교는 구분하여 인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철학유파로, 후자는 중국의 전통적인 종교와 교단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도가와 도교를 구분하는 데에는 3가지의 관점이 있다. 첫째, 중국학자들은 도교는 도가사상이 복잡한 다른 사상이나 신앙을 섭취함으로써 본래의 순수성을 잃은, 타락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도가 속에 도교가 포함된다. 둘째, 프랑스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학자들은 도교는 도가사상의 발전형태로 이해해야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도교가 도가사상의 타락한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기준에 의거하여 도가와 도교를 구분하지 않고 다오이즘(Taoism)의 한 단어로 양자를 모두 호칭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가를 철학적 다오이즘(Philosophical Taoism)이라고 불러, 도교와 구분하기도 한다. 셋째, 일본학자들은 도가와 도교를 명확히 구분하여 전자를 철학, 후자를 종교라고 한다.

 

우주와 자연질서의 개념


① 우주론 : 노자는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고 했다. 이는 중국 고대사상 중에서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려면 각자의 이름[名 : 신분]에 걸맞는 내용을 갖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명론(正名論)과는 그 범주에서 다르다.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초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모태(母胎)이다." 즉 무명과 유명, 무와 유는 상호의존적이며 영원한 도의 양 측면이다. 무는 아무 것도 없음이 아니라 감지할 수 있는 질(質)이 없음을 의미한다. 노자에게서 무는 유보다 상위개념이다. ② 소우주와 대우주 개념 : 인간은 대우주에 대응하는 소우주이다. 인간과 우주 사이에는 그 체계에서 일치하는 점과 연관성이 존재한다. 인간과 자연질서가 통일적으로 융합되어야 한다는 신비로운 사상은 중국사상의 고유한 특징이며 도가가 특히 이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③ 도에로의 복귀 : 자연질서로서 도의 법칙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이 애초에 시작한 시점으로 계속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휘어지면 온전하게 되고 굽으면 곧게 되고 움푹 패이면 꽉 차게 되고 낡으면 새롭게 되고…… 등등은 모두 "되돌아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反者道之動)라는 법칙에서 나온 말이다. 삶과 죽음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무'에서 '유'로, 다시 '무'로 반복되는 영원한 변화 속에 놓여 있지만 그 기초가 되는 최초의 합일성은 상실되지 않는다. ④ 발전과 분화 : 〈주역 周易〉의 5행(五行)과 64괘의 이론에 따르면 변화 자체는 어떤 체계를 가지고 일어나며 또한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조에 대한 장자의 생각은 도공과 장인의 활동, 즉 '형성시키고 변화시키는 것'(造化)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동일한 과정의 두 국면이다. 즉 미지의 도가 태초의 혼돈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우주를 형성시킨다. 그리고 음(陰)과 양(陽)의 반복에 따른 우주의 영원한 변화(밤과 낮, 겨울과 여름 같은 것)는 동일한 도의 바깥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개념


① 무위 :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과장하지 않음을 뜻한다. 무위는 억지로 하지 않고 인공의 힘을 가하지 않은 자연스런 행위를 뜻한다. "완전한 행위란 그뒤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모든 자연의 과정에서 인위적인 것이 끼어들게 되면 그것은 항상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되거나 실패로 끝날 것이기 때문에 무위 없이는 진정한 성공이란 있을 수 없다. ② 도가 원시사상의 사회적 이상 : 초기의 도가사상에서는 계획적인 인간의 간섭은 자연의 변화과정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다고 믿었다. 원시농경사회의 자연적인 리듬과 자연의 커다란 움직임 속에서 사심없이 공동체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도가가 이상으로 여기는 사회이다. 장자는 유가에 의해 찬양되는 문화영웅이나 문화·제도의 창시자, 사회의 의식과 규범을 만든 성현들까지도 비난했다. 심지어는 '지식욕'까지도 그것이 경쟁심을 자아내고 물욕을 자아내어 분쟁을 일으킨다고 하며 비판했다. ③ 지식과 언어에 대한 사상 : 장자는 중국의 논리학자인 혜시(惠施)로부터 자극을 받아 그의 지식과 언어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도가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와 만물은 근본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의견대립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전체적인 시야를 갖지 못하고 부분적인 진리를 절대적으로 간주할 때만 일어난다. 따라서 장자가 생각하는 성인(聖人)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등과 같은 관념의 상대성을 완전히 인지한 사람이다. "그대가 변론(辯論)할 때면 그대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가장 위대한 도는 어떠한 이름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훌륭 한 변론에서는 어떠한 것도 말해지지 않는다." ④ 삶과 죽음의 동일성 : 신비로운 깨달음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구분을 없앤다. 이러한 사상은 죽음에 대한 장자의 태도를 규정지었다. 삶과 죽음은 단지 낮과 밤, 여름과 겨울처럼 쌍으로 이루어져 있는 주기적인 단계의 하나에 불과하다. 인간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거대한 베틀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베틀에서 나와 베틀로 돌아간다." 일상적인 지(知)의 분별을 잊은 망(忘)의 상태에서 본다면 생시의 장자와 꿈에서 나비가 된 장자를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생과 사를 구분하기 어렵다. ⑤ 인간의 종교적 목표 : 유교에서 성인(聖人)은 고대의 의례를 회복하는 길을 가르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도가의 성인개념이 정적주의(靜寂主義)를 통해서 세상을 도의 길로 인도하는 외왕(外王)에 의해 분명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가에서의 성인은 내성(內聖)이다. 보통사람은 세속적인 탐욕과 부, 특히 일상적인 지(知)에 의해 흐트러지고 자신의 힘을 마르게 하지만 성인은 "통일성을 파악하고", "하나를 굳게 잡는다"(抱一). 즉 성인은 의식의 기초를 이루는 태초의 혼돈상태의 도를 가지고 통일성을 희구한다. '통일성의 파악'은 또한 자기 자신 내부의 음양의 조화를 유지하고 혼(魂)과 백(魄)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혼백을 보존하고 조화시키는 것은 육체적인 생활을 위해서와 똑같이 인간의 실재 전체를 통일시키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옛 도가의 진인(眞人)들은 오랜 삶을 통해 스스로를 함양함으로써 성인이 되었다. 그들의 장수(長壽) 자체야말로 그들의 성인다움과 도와의 일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오묘한 성찰 속에서 장자는 육체적인 수행을 통해 장수와 불사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그렇지만 육체적 불사는 도교 신비주의가 전개됨에 따라, 그리고 이전부터 오랫동안 도가의 목표였다. ⑥ 상징주의와 신화 : 도가들은 그들의 좌망(坐忘) 상태에서의 통찰력을 상징과 우화를 사용해 표현했다. 예를 들면 도는 골짜기와 같이 낮으며 수동적이고, 물과 같이 유연하며 생명력을 주는 것이다. 도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만물의 어머니이며, 신비에 싸인 듯한 여성과 같은 것이다. 또한 수레의 축이며, 들보이고, 바퀴의 비어 있는 중심이라고 했다.

 

많은 고대 중국의 신화는 도가에 의해 보존되었는데 그들은 도가의 사상을 예시하기 위해 신화를 끌어들였다. 신비로운 낙원, 구름을 타고 다니는 여행, 날아다니는 용에 대한 꿈은 혼백의 방황, 도의 깨달음, 꿈과 현실의 동일성에 대한 은유이다.

 

초기의 이론적 절충


① 음·양과 기(氣)의 사상 : 음과 양은 모든 중국철학의 공통된 줄기이다(→ 색인 : 음양오행설). 음과 양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교대로 일어나는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의존적인 2개의 원리 또는 국면이다. 음·양은 우주의 모든 대립쌍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상징이다. 음·양의 변화와 상호작용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자주 2개의 '기'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원초적인 생명력의 한 부분인 '기'를 갖고 있다. 사람이 할 일은 그에게 주어진 생애를 모두 마치기 위해 '기'를 강하게 하고 다스리며 키워나갈 수 있도록 분별있는 생활을 해 '기'를 해치지 않는 것이다.음양가(陰陽家)와 관련해 또다른 중요한 개념으로는 오행과 오덕(五德)이 있다. ② 양주(楊朱)와 열자(列子) : 양주(BC 400경)는 '사회를 개선하려는 공자의 열정을 비웃은' 초기 도가 운둔자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다. 양주는 모든 사람은 어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생명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세상을 다 준다 하더라도 자기의 머리카락 한 올도 희생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은 〈열자〉에 잘 나타나 있다. 열자는 많은 고대전설 속에서 영혼의 여행을 했다고 하는 유명한 인물로 나오며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작용 전체를 기계론적으로 파악한 철학자였다. ③ 관자(管子)와 회남자(淮南子) : 도교의 색채가 들어 있는 〈관자〉의 몇몇 부분은 '심술'(心術)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 있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듯이 '심'은 육체를 다스린다. 〈회남자〉는 그당시까지에서 가장 정교한 우주철학, 즉 대우주 속의 인간의 위치, 사회 질서, 인간의 '성인다움'을 지향한 이상에 대해 논했다.

 

도가의 역사 ;


진·한 시대의 도교


중국의 신선사상 전통


진·한 시대(BC 221~AD 220) 동안 도교사상과 수행의 발전은 주로 황실이라는 유리한 장소에서 발전했다. 권력의 공고화와 확대를 열망했던 황제들은 자연히 비법가(秘法家)를 우대했다. 동부 해안지역[山東]으로부터 일련의 비법가들이 진과 전한의 조정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신선들이 사는 섬들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섬은 장자가 말한 바 있는 섬이었다. 그들 동부인들은 황제의 건강과 장수를 보장해주는, 신선에 대한 제사의식 등을 제국의 수도에 끌어들였다. 여기에서 최초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신선방술이 복잡하게 발전했다.

 

황로(黃老) 전동


황로사상가란 전설상의 황제(黃帝)와 노자의 숭배자를 말한다. 그들은 노자를 완전한 통치술을 밝힌 사람으로 존경한다. 사마천(司馬遷)이 황제의 치세와 더불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기술했듯이 황제(黃帝)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다스림으로써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황로사상의 가르침은 산둥[山東] 지방에 있던 제(齊) 왕실에서부터 곧 모든 지식인과 관리들에게 확산되었다. 전한시대의 많은 정치가들은 황로사상의 가르침에 따라 무위(無爲)로 통치하려고 노력했다. 한 무제(武帝 : BC 141/140~ 87/86) 때에는 직접적인 정치적 관련성은 상실했지만 이상적 통치와 장수비결에 대한 황로사상의 가르침이 계속해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도가운동이라 할 만하다.

 

혁명적 구세사상


감충가(甘忠可)의 〈태평경 太平經〉에서부터 나온 혁명적 구세사상(救世思想)은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을 물리치고 후한을 세우는 데 기여했지만 후한이 쇄락해가자 민중들은 더이상 한의 부흥을 바라지 않았다. 황로사상을 신봉한 운동이었던 황건(黃巾)의 난(184)은 결국 실패했다. 이후에도 이와같은 혁명적 구세사상에 따른 반란은 역사상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과 운동은 후한 말기에 종교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도교의 활동과는 무관한 것으로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진·한(秦漢) 이후 도가사상의 발전


3~4세기에 도가는 3방향으로 발전했다. 첫째, '현학'(玄學)으로 왕필(王弼 : 226~249)의 〈노자주 老子注〉나 곽상(郭象 : ?~312)의 〈장자주 莊子注〉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왕필은 송학(宋學)보다 앞서 이(理)를 말했고, 곽상은 자연을 중심개념으로 서술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성인은 부자연스러운 행위는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완성된 생활을 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이 생각하는 최대의 성인은 노자가 아니라 공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둘째, 열자가 출현하여 숙명론적 자연주의를 말했다. 셋째, 세속적 가치를 멀리하는 청담사조(淸談思潮)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 사조는 2세기 중엽부터 6세기초까지 계속되었다. 11세기에 도가사상은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이 도가의 정적주의와 무위사상을 호되게 비판한 결과, 도가사상은 11세기 이후에는 철학체계로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정서에서는 중국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도교의 출현


진·한(秦漢) 때의 신선방술(神仙方術)과 황로지학(黃老之學)이 도교의 전신이다. 후한의 순제(順帝) 때 장릉(張陵)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창시하여 노자를 교주로 삼아 도교를 형성시켰다. 또한 후한의 영제(靈帝) 때에 장각(張角)이 세운 '태평도'(太平道)는 초기 도교의 중요한 파벌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신비한 방술로 장생불사를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파종단(敎派宗團)으로서의 도교가 시작되었다. 태평도란 후한의 간길(干吉 : 혹은 于吉)이 창시하고, 그후 184년 장각을 중심으로 하여 황허 강[黃河] 이북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황건적(黃巾賊)이 신봉하던 종교이다. 〈태평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병의 치료, 권선(勸善), 수일(守一 : 靜坐에 의한 정신통일), 천·지·인(天地人)의 조화 등을 꾀했다. 오두미도는 그 교문(敎門)에 들어갈 때 5두(斗)의 쌀을 바친다고 하여 오두미도라 불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천사도(天師道)라고 했으며 13세기부터는 정일교(正一敎)라고 불렀다.

 

천사도와 도교조직에 관한 국가의 인정


장릉이 죽은 후에, 아들 장형(張衡)과 손자 장로(張魯)가 그 술(術)을 전했다. 이들을 3장(三張)이라 하고 각각 천사(天師)·사사(嗣師)·계사(係師)라 불렀다. 장릉은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천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2세기 후반까지 그의 자손들의 지도하에 천사도는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독립적인 종교·정치 조직으로 발전했다. 215년에 장릉의 손자 장로가 조조(曺操)에게 투항했다. 이후 조조가 세운 위(魏)에서 천사도는 하나의 국가적인 종파로 인정되었다. 그대신 천사도는 위를 한을 대신한 왕조로 합리화해주었다. 이와 같이 국가와 타협함으로써 도교의 교리 또한 체제 인정의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천사도는 위와 서진(西晉)의 궁중에서 3세기말까지 꾸준히 발전했고 북조(北朝) 여러 나라의 많은 권세가들이 교도가 되었다.

 

도교의 체계적 성립과 전통


① 방술(方術)의 발전 : 도교의 사상과 방술은 4세기 진대(晉代)에 와서 갈홍(葛洪)의 〈포박자 抱朴子〉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갈홍은 내편(內篇) 2권과 외편(外篇) 50권 속에서 신선양생술(神仙養生術)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도가사상과 신선설이 결합을 보게 된다. 또한 이때부터 태평도와 오두미도는 천사도로 총칭되었다.

 

구겸지(寇謙之)는 천사도를 계승하여 북위(北魏)의 세조(世祖) 때에 국교화시켰다. 그는 장로의 방술을 닦았고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는 대신(大神)에게서 〈운중음송신과지계 雲中音誦新科之誡〉를 받고 천사의 자리를 물려받아 장릉 이후의 천사도를 쇄신하라는 명을 받았다. 구겸지는 유(儒)·불(佛) 양교에 대해 자신들의 종교를 처음으로 '도교'라 칭했다. 여기에서 도교는 하나의 종교교단으로서 성립을 본 것이다.

 

6조(六朝) 도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양(梁)나라의 도홍경(陶弘景 : 456~536)을 꼽는다. 그는 각지를 순례하고 도교를 체계화했으며 도교사상을 집대성했다. 37세에 구용(句容)의 마오산 산[茅山]에 은거했고, 이때 양의 무제(武帝)가 산 속에 있는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그의 저작으로는 마오산파에게 강신(降神)한 진인(眞人) 말씀의 필사본을 교정한 〈진고 眞誥〉와 〈등진은결 登眞隱訣〉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포박자〉가 선인이 되는 방법으로 금단(金丹)의 제조나 복용을 강조한 데 반해 도홍경은 수일(守一)의 실제적인 수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마오산파에 속해 있으면서 조정의 관리였던 허매(許邁)와 그의 아들 허목(許穆)은 강력한 신(新)도교 계시의 주요한 수혜자였다. 허씨 부자의 봉사 속에서 양희(楊羲)는 상청(上淸)의 하늘에서 온 진인들의 방문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 ② 제의(祭儀) : 도교의 핵심은 주기적인 제의를 거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극히 적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1년중 특별히 1, 7, 10월에 올리는 축제인 제초(齊醮)이다. 또한 도첩(道牒)을 처음 받거나 도량[道場]을 봉헌할 때 하는 제의도 중요한 것이다. 이들 제의는 상황에 따라 정성의 정도가 다양하다. 제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합기(合氣)라고 하는 공동의 성적(性的) 제의인데 매달 거행된다. 불교에서는 이를 극히 방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 제의는 고대 농경사회의 축제 등의 관습이 통합된 형태로 보인다

 

도교 비교주의(秘敎主義) 문학


① 주석가들 : 〈도덕경〉에 대한 많은 주석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필이 쓴 것이다. 그는 현학파(玄學派)의 시조이다. 〈장자〉에 대한 주석은 곽상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 책은 원시유교적 경향이 농후했다. 행정관리의 입장에서 도가사상의 도전에 직면했던 그들은 도교경전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취하려 하지 않았다. 정관주의(靜觀主義)적인 도교경전에 대한 해석적 주석서는 계속하여 씌어졌는데 이때의 해석에는 불교를 포함한 매우 다양한 철학들이 동원되었다. ② 신선들 : 〈장자〉에 나오는 신선들은 한대까지 보편적인 흥미의 대상이었다. 전설적인 신선들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모은 책은 2세기초의 〈열선전 列仙傳〉이다. 이 책은 72명의 제자가 등장하는 〈논어 論語〉와 같이 72명을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고, 신선들 각각의 전(傳) 끝에는 짧은 찬(讚)이 붙어 있다. 전기문학의 이러한 형식은 이후 시문의 발전단계에서 시에 산문이 섞인 형태의 발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③ 노자숭배의 경전 : 중국의 종교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노자가 성인(聖人)에서 신으로 바뀌어가는 현상이다.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노자변화경 老子變化經〉은 노자를 모든 생의 기원으로서 어느 때나 나타날 수 있는 전능한 우주적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당·송 이후의 도교 :


당의 도교


중국을 재통일한 당이 들어서자 도교는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 고조 이연(李淵)은 노자와 성이 같다고 하여 자신을 노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당의 거대한 영토 전역에 걸쳐 도교가 널리 전파된 사실은 둔황의 석굴에서 발견된 수많은 도교 서적에서도 증명된다. 도홍경의 맥을 이은 왕원지(王遠知)가 남북의 도교를 종합하여 당대 도교의 기초를 다졌다. 중국의 극서지방에 위치한 둔황은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여기에서 도가들은 불교를 비롯하여 교의상으로 매우 다른 조로아스터교·마니교와도 접촉했다. 〈장자〉의 사본이 토번(吐蕃) 왕에게 보내졌고 카시미르 왕의 명에 의해 산스크리트로 번역되었다.

 

송·원 시대의 도교

① 중국 내에서의 발전 : 송(宋 : 960~1279)과 원(元 : 1271~1368)에서 도교는 종교적으로 크게 활기를 띠었다. 이것은 송대에는 부분적으로 이민족 침입에 자극받은 것이고, 원대에는 몽골 지배층에서 당시 유행하던 금강승(金剛乘)으로부터 자극받은 것이다. 남송시대가 되면서 이민족에게 점령된 북부 중국에서 많은 수의 새로운 도교 종파가 생겨나고 이들은 급속히 세력을 확대시켰다. ② 도교 서적의 발전 : 일찍이 570년경 모든 도교학파의 학설을 알기 쉽게 이해할 필요성에 따라 최초로 방대한 도교 백과사전이 편찬되었다. 이것은 갖가지 서적에서 추출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러한 편찬서들은 송·원대에 상당히 많이 저술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운급칠첨 雲 七籤〉(1022경)으로 송 이전의 도교를 총괄한 것이다. 전교(傳敎)를 위한 교훈적 소책자는 한층 대중적인 양식을 갖추었다. 또한 모든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수많은 비문(碑文)이 있는데, 이것은 도가와 그들의 후원자에 대한 중요한 역사자료이다. ③>금단(金丹)의 발전 : 학식있는 전문가들이 연단술(鍊丹術)을 정제하면서 내단(內丹)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제약용어인 내단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말할 때 쓰인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연단술에 대한 은유는 매우 일찍부터 생리학에 적용되어왔다. 예를 들면 갈홍은 정액을 '음(陰)불로장생약'으로 불렀다. 그러나 송대에 오면 체계적으로 내밀화되고 세련된 연단술이 매우 넓게 퍼져나감으로써 더 일찍부터 씌어진 외단(外丹)에 관한 모든 책이 이때부터는 내단에 대해 쓴 것으로 믿어졌고 또한 이때까지 진짜 불로장생약을 만들려던 시도들을 더이상 속임수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④ 학설의 융합 : 유교는 이미 불교로부터 많은 점을 수용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도가들 또한 뒤늦지 않게 선종(禪宗 : 수행에서 직관을 강조함)와 성리학(性理學 : 지식과 이성을 강조함)의 학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것과 종합했다. 또한 민간 도교의 성격을 띤 3교(三敎) 절충의 움직임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도가사상의 영향

도가는 선진(先秦)시대의 중요한 학파 중의 하나로 중국 고대철학의 전체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사상 도가철학은 정통 유학에 비판적인 인물들인 한대(漢代)의 양웅(揚雄)·왕충(王充) 등의 사상을 변화시켰으며, 송·명(宋明) 이학과 같은 관변유학에 흡수되기도 했다. 또한 한대 초기의 황로학(黃老學)이나 위·진 현학(魏晉玄學)에서와 같이 통치철학이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도가철학은 도교의 종교철학체계 수립과 불교의 사상발전에 기여했다. 한대나 위진남북조 시기의 불교는 종종 도가사상을 원용해 인도의 불경을 해석하기도 했다. 양진(兩晉) 시기의 불교인 반야학(般若學)은 도 (玄學)·불 결합의 산물이다.

 

중국과학에 대한 도가의 공헌

도가의 생리학 연구기술 그 자체에는 신앙적 성격이 없다. 의학자와 똑같이 건강을 지키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이들의 최대관심사였다. 의학은 1세기경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많은 도가 치료자와 위생학자들이 의학지식을 더해 주었다. 전설적인 선사(仙師)가 황제(黃帝)에게 말한 가르침을 기록한 〈황제내경 黃帝內經〉은 현존하는 최초의 의학서이다. 도가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는 유교와는 반대로 도가들이 물(物)의 성질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을 중시했던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세 문학에 대한 영향

전국시대와 전한시대부터 도교에 대한 내용은 이미 다른 학파의 저술 속에서 나타난다. 직접적인 인용과 분명한 모방이 자주 발견되며 〈도덕경〉과 〈장자〉로부터의 인용은 이후 모든 시대의 중국문학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의 문체와 내용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많다.

 

신선술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았다. 많은 시에서 신선과 불로초를 찾아다닌 경험을 직접 또는 은유적으로 쓰고 있으며 불로장생약을 지으려고 했던 사실을 묘사했다. 방술상의 많은 용어들이 시어의 기본이 되었다. 마오산파의 저술들은 중국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唐詩)에서 특히 마오산파의 문헌을 그대로 언급한 것이 많다. 이백(李白)과 같은 위대한 시인도 마오산파에 정식으로 입문했다.

 

다른 사상과의 관계

유교와 도가사상이 '사회 참여'와 '사회 초월' 사상으로 대조를 이룬다고 하는 기존의 평가는 〈역경〉과 같은 유교경전에서 나타나는 비(非)사회적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도교에 대한 평가도 도가철학의 사회사상과 도교의 정치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

 

중국불교는 인도종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중국 종교의 나무가 인도의 자극을 받아 개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중국적 특징을 보존하고 있다. 중국에서 불교가 가장 먼저(AD 65) 언급된 곳은 황로사상을 신봉하던 한 도가의 저술 속에서였다. 따라서 불교는 처음에는 단순히 도교의 다양화로 간주되었다. 붓다의 깨달음은 득도(得道)로, 불교의 성인들은 진인으로, 열반(니르바나)은 무위(無爲)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AD 166년 한의 황제는 노자와 붓다를 함께 제사지냈다. 초기의 도교조직·문헌·의식이 불교로부터 영향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4세기경에는 도교 문헌의 문학적 형식 속에서, 그리고 최고 수준에 달한 도가들의 철학적 표현 속에서 불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상호적인 것이어서 도교가 불교와 다른 외래종교의 영향 아래 사상의 폭을 넓혀갔다면, 불교는 중국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도교화'를 진행시켰다. 도교와 불교의 궁극적인 통합은 선(禪) 사상에서 이루어졌다. 도교의 불로장생이라는 종교적 목적과 불교의 윤회사상은 서로 유사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융합되었다. 선불교의 사상은 '도학'(道學)이라고 일컬어진 송대 성리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일찍이 당대부터 '3교'의 통합이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송과 명대에 이르러 대중적인 운동이 되었다.

 

현대의 도교

20세기 도교의 중심지는 타이완이다. 타이완의 도교는 17~18세기 푸젠 성[福建省]에서 옮겨간 대규모 이주민 때문에 비롯된 것이지만, 새로운 발전은 제63대 선사(仙師)인 장언푸[張恩溥]가 1949년 피난온 것 때문이다. 타이완의 도교는 여전히 전통적 형태로 남아 있다. 오늘날 선가(仙歌)의 음송은 장도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1960년대에 타이완의 도교는 부흥기를 맞았다. 도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또한 서양학자까지도 참가하여 진행중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도교가 앞으로 크게 발전하여 서양에까지 전파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현재는 장위안셴[張源先]이 64대 천사로 있다.

 

Macropaedia| 趙京蘭 참조집필

 

 

http://21.new21.net/technote/read1.cgi?board=zen&y_number=273&nnew=2

 

 

52. 8만겁을 산다해도 / 도사 여동빈 (呂洞賓)

 

도사 呂洞賓은 河陽 滿故 사람으로 당나라 천보(天寶:742∼755)년간에 태어났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인데 여러번 진사(進君)시험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華山에 놀러 갔다가 鍾離權을 만났다. 종리권은 晋代 에 낭장(將) 을 지내다가 난리를 피해 양명법(養命法:건강장수하는 비결)을 익힌 사람이었다.

그는 여동빈을 시험해 보려고 먼저 재물을 주어보기로 하였다. 하루는 여동빈이 종리권을 모시고 길을 가는데, 종리권이 돌 한덩어리를 주워 약을 바르니 금새 황금덩이가 되었다. 그것을 여동빈에게 주면서 앞으로 길을 가다가 팔으라고 하니, 여동빈이 "이것도 부서지는 것이냐고 물었다. 종리권이 5백년은 되어야 부서진다고 하자,뒷날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하면서 던져버렸다. 종리권이 다시 여색으로 시험하려고 여동빈에게 산에 들어가 약을 캐오라하고 조그만 초막을 꾸며 놓았다. 그 안에 아름다운 부인이 있다가 여동빈을 맞으면서 지아비가 죽은지 오래 되었는데 이제 그대를 만났으니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는 손을 잡으며 가까이 오려 하였다. 여동빈은 여자를 밀어 제치면서 가죽푸대로 나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는데, 말이 끝나자 여자는 보이지 않고 종리권이 그곳에 있었다.

이에 종리권이 金丹術과 天仙劍法을 전수하니 드디어 아무 걸림없이 다니는 경계를 얻고 시를 지었다.

 

아침에는 南越 땅에 갔다가

저녁에는 蒼梧  들녘에 노니네

소매 속의 푸른 뱀

날아오르는 기운이 으스스한데

사흘동안 악양루에 있어도

알아보는 이 없어서

소리높이 읊조리며

동정호를 날아 지나갔도다.

 

朝遊南越暮蒼梧  袖裏靑蛇膽氣序

三日岳陽人不識  朗吟賑過洞庭湖

 

한번은 용아 (龍牙 居遁:835∼923) 스님을 찾아뵙고 불법의 큰 뜻을 물었는데 용아스님이 게송을 지어 주었다.

 

어찌하여 아침시름이 저녁시름에 이어지는가

젊어서 공부 안하면 늙어서 부끄러우리

이룡(瘻龍) 은 明珠를 아끼지 않는데도

지금 사람들 그것을 구할 줄 모른다네

 

何事朝愁與暮愁  少年不學老還羞

明珠不是瘻龍惜  自是時人不解求

 

한번은 악주( 州) 黃龍山을 지나가다가 자주빛 기운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도인이 살지나 않을까 하여 산에 들어가보니, 마침 기機 선사가 상당법문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선사는 이상한 사람이 자리에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는 큰소리로 꾸짖었다.

대중 속에 법을 훔치려는 자가 있구나!"

그러자 여동빈이 썩 나서서 물었다.

좁쌀 한알 속에 세계를 갈무리하고, 반되짜리 솥 안에 산천을 삶으니, 이 무슨 도리인지 한번 말해보시오." 선사가 시체나 지키는 귀신이로구나" 하니, 여동빈은 주머니 속에 장생불사하는 약이 있다면 어쩌겠소?" 하였다. 선사가 설령 8만겁을 산다 해도 결국에는 허무 속에 떨어질 것이다" 하니 여동빈은 분한 기색도 없이 떠났는데, 밤이 되자 칼을 날려 선사를 위협하였다. 선사는 미리 알고 법의로 머리를 감싸고 방장실에 앉아 있었다. 칼이 들어와 몇바퀴 돌다가 선사가 손으로 가리키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여동빈이 사죄하자 선사가 꼬투리를 잡아 따져 물었다.

반되짜리 솥 안은 묻지 않겠지만, 어떤 것이 좁쌀 한알에 세계를 갈무리 하는 일인가?"

여동빈은 이 말끝에 느낀 바가 있어 게송을 지었다.

 

노래하는 아이*를 잡아당겨

거문고를 부숴버리니

지금은 물 속의 금 (金) 을

그리워 하지 않네

황룡스님 (機선사) 을 보고나서야

이제껏 마음 잘못썼음을 알게 되었네.

 

拗却瓢兒碎却琴  如今不戀水中金

自從一見黃龍後  始覺從前錯用心「선원유사 (仙遺遺事)」

 

 

여동빈의 고사(古事) 

 

종리권( 鍾離權-雲房道人 )이 여동빈( 呂洞賓 )을 입문시킬때 시험한 열가지 사항들이다. 


(1) 속세간의 의리에 쉽게 빠지지 말 것.

(2) 눈앞의 이익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 것.

(3) 수양하는 마음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말 것.

(4) 몸을 생각하지 않고 고난에 임하는 정신상태를 확립 할 것.

(5) 본능적인 욕구에 이끌리지 말 것.

(6) 남의 잘못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겸손히 가꿀것.

(7) 자기의 손해를 마음에 두지 말고 타인의 어려움을 방치하지 말 것.

(8) 말의 진위를 잘 파악 할 것.

(9) 생사의 기로에 처했을 때 태연자약 할 것.

(10) 어떤 방해와 박해에도 진리심을 굽히지 말 것.

 

 

                 한국의 도교 >

 

한국의 도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특별히 교단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교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봉건 권력이나 지식인뿐 아니라 민간신앙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성격

 

일반적으로 도교의 역사는 삼국시대의 중국도교 유입이나 고려시대의 의례 중심의 도교, 그리고 조선 중엽의 여러 인물의 행적이나 저술에서 드러나는 수련적 도교, 즉 내단(內丹)을 중심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에 비해 한국 도교의 원류를 고유의 신선사상에서 찾는 입장도 있다.

 

즉 단군신화를 비롯한 건국신화를 신선사상의 표현으로 보거나 중국 도교의 발생이 해동(海東)의 신선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 중엽에 조여적(趙汝籍)이 〈청학집 靑鶴集〉을 저술하며, 조선 단학(丹學)의 계보를 밝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조여적은 조선 단학의 계보가 광성자(廣成子)-명유(明由)-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문박(文朴)-영랑(永郞)-보덕(普德)-도선(道詵)-최치원(崔致遠)-위한조(魏韓朝)-편운자(片運子)를 거쳐 자신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신빙성은 없으나 조선 중기 도교적 수련에 관심을 지닌 지식인들의 민족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이같은 입장은 〈조선도교사 朝鮮道敎史〉를 쓴 이능화(李能和)에게서도 두드러지며 오늘날에도 많은 호응을 받고 있으나 그 사실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용과 전개

 

한국 도교의 시발은 624년(영류왕 7)에 당(唐) 고조가 고구려에 도사(道士)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한 일이다. 이전에도 중국의 오두미교를 고구려인들이 신앙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643년(보장왕 2)에는 연개소문이 도교를 들여와 천하의 도술을 다 갖추어야 한다는 건의를 하여 당으로부터 숙달(叔達) 등의 도사와 〈도덕경〉을 들여오고 도교를 유교나 불교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고구려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승려 보덕(普德)이 백제 땅이던 완산주(完山州)의 고대산(孤大山)으로 이주하는 등 불교측의 거센 반발이 일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김유신(金庾信)이나 그의 증손인 김암(金巖) 등이 도교적 방술에 능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보다는 신라 하대 유당학인(留唐學人)들에 의한 수련도교(修練道敎)의 유입이 보다 중시된다.

 

도교가 극성하던 당에 유학한 신라 하대의 지식인들 중 김가기(金可紀)· 최승우(崔承祐)와 승려 자혜(慈惠)는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의 알선으로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여러 도서(道書)와 구결(口訣)을 전수받고 수련하여 단(丹)을 이루었다. 이중 김가기는 중국의 도교전적인 〈운급칠첨〉 중 속선전(續仙傳)에 의하면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에서 백주등선(白晝登仙)했다고 하며 유당학인인 최치원과 이청(李淸)에게 구결을 전수했다.

 

최승우와 자혜는 신라에 돌아와 후인들에게 도요(道要)를 전수했다. 이로써 한국에 처음으로 중국의 수련적인 도교가 전해져 이후의 도맥(道脈)을 형성했고, 이러한 한국 도맥의 서술은 조선 중엽에 한무외(韓無畏)가 저술한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에 의한 것으로 그 실제적인 전승과 내용은 신빙성이 약하다.

 

고려시대의 도교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왕실의 복덕을 비는 국가의례 중심의 과의(科儀) 도교가 성했다고 평가된다. 기록으로는 현종 때부터 재초(齋醮)가 행해졌다고 하나 가장 성행한 것은 예종 때이다. 예종은 송(宋) 휘종(徽宗) 치하의 문물제도를 거의 받아들였는데, 휘종은 대단한 도교 애호가였다.

 

예종의 대표적인 도교숭상 사례가 복원궁(福源宮)의 건립과 30여 회에 걸친 재초의 시행이다. 복원궁 건립은 고려시대 최대의 도교 연구자인 이중약(李仲若)의 건의에 따라 건립되었다. 이중약은 어려서부터 〈도장 道藏〉을 즐겨 읽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도서를 읽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도교적 의술도 연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도교는 이처럼 국가와 왕실의 소재초복(消災招福)을 비는 의례 중심의 도교로서 수련적 도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히 국가의례 중심의 과의적 도교였던 것만은 아니며 의학의 발전과 수경신(守庚申)과 같은 민간 풍습의 형성 등 이후의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이 컸다.

 

조선시대의 도교

 

조선시대에 와서 고려시대의 과의적 도교는 초기에 왕실의 비호 아래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했으나 성리학적 이념과 의례를 절대시하는 유림의 득세 이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감히 제후의 나라에서 천지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재초를 거행할 수 없다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1518년(중종 13) 재초 담당 관청인 소격서(昭格署)가 혁파(革罷)되었다.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도교적 흐름은 수련도교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저술은 한무외(韓无畏)의 〈해동전도록〉이다. 한무외는 이 저술에서 조선의 도맥이 태상노군(太上老君)- 위백양(魏伯陽)-종리권(鍾離權)-최승우(崔承祐), 자혜(慈惠)-최치원(崔致遠), 이청(李淸), 명오(明悟), 김시습(金時習)-서경덕(徐敬德), 홍유손(洪裕孫)-곽치허(郭致虛)를 거쳐 자신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중 태상노군은 노자(老子)를 가리키며, 위백양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연단(煉丹) 중심의 당 도교에 〈주역〉과 황노(黃老), 즉 황제와 노자의 도를 배합하여 그 이론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도교의 양생법(養生法)을 강조한 〈참동계 參同契〉의 저자이다. 이 〈참동계〉는 주자(朱子)도 관심을 갖고 〈참동계주석 參同契註釋〉을 펴냈다.

 

종리권은 금대(金代)에 성립된 전진교(全眞敎)의 종조(宗祖)인 여동빈(呂洞賓)에게 도를 전한 인물로 금단도(金丹道), 이른바 본성적 단학(丹學)의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처럼 조선 중엽의 저술에서 주장되고 있는 도맥은 실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당시 도가적 수련에 심취한 지식인들의 가탁(假託)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들 도맥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신라 하대와 조선시대 사이의 실존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명백해진다. 즉 조의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는 보다 합리적이고 수련지향적인 전진교 계통의 도교를 받아들인 이 시기 지식인들이 유교적 도통론(道統論)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계통을 밝힐 필요성을 느낀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조선에서 수련도교나 도교적 은둔생활의 기풍이 형성되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저술이나 의식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후 조선에서의 단학의 도맥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도교와 연관된 인물 등의 각종 이적(異蹟)을 기술한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 海東異蹟〉이나 도교 관계의 각종 변증설(辯證說)을 수록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등 도교 관계 저술들이 연이은 것으로 보아 지식층의 관심이 지대했고, 그러한 생활양식이나 수련법이 꾸준히 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도교는 이외에도 민간신앙이나 의학 및 민간풍습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도교가 민간신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성수신앙(星宿信仰)이다. 이는 특히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신앙으로서 고려시대의 팔성당(八聖堂)에서 보듯이 도교적 성수신앙과 고유한 산악숭배가 결합된 조선 특유의 신앙을 형성하였다.

 

또 민간에서 가신(家神)의 하나로 숭배되는 칠성은 바로 이 도교적 성수신앙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수련적 도교는 본디 예방의학적인 양생법이기에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결과 유명한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東醫寶鑑〉에는 도교적인 양생법과 세계관이 깊숙한 영향을 미쳤다. 또 도교 계통의 위경(僞經)인 〈옥추경 玉樞經〉은 질병을 낫게 해준다는 내용 때문에 민간은 물론 불교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한편 유·불·도 3교를 배합하여 선행을 권장하는 선서(善書)가 조선 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널리 보급되었는데, 그중 선행[功]과 악행[過]을 각각 점수로 매기는 〈공과격 功過格〉이 널리 유포되어 민간의 생활윤리를 앙양하는 데 일조를 했다.

 

<참고문헌>

 

도교사상의 한국적 전개(한국도교사상연구총서 3) : 한국도교사상연구회 편, 아시아문화사, 1989

조선도교사 : 이능화 편술, 이종은 역주, 보성문화사, 1977

출전 : '도가와 도교', 브리태니커백과사전, 2001

 

 

***민족 수련 도교의 비조(鼻祖)***


한국의 선인 열전 2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최치원(857∼?)은 신라말의 대학자이자 문호(文豪)로서 저명하지만 한국 도교의 비조(鼻祖)로 칭해지는 인물이기도 한다. 공식 역사에서 그는 유학자나 관료로서의 면모를 더 많이 보여준다. 그러나 야사(野史)나 사적 글쓰기의 세계에서 그는 득도한 대신선으로 자주 묘사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후세의 도인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전범(典範)으로 각인되어 한국 도교사상 불멸의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계급적 한계로 순탄치 않았던 초년

 

최치원의 공적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헌안왕(憲安王) 1년, 육두품(六頭品)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신은 비록 귀족이긴 해도 진골(眞骨)과 같은 왕계(王系) 혈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래적으로 벼슬길이 한계지워져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唐)으로 유학을 떠나 마침내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고 율수( 水)의 현위(縣尉)로 임명되었다.

 

그는 잠시 지방관으로 근무하다가 큰 포부를 이루기 위해 이를 사직하고 당시의 세력가였던 절도사(節度使) 고변(高騈, 821∼887)의 막하로 들어가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마침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고변의 막부(幕府)에서도 이민족이었던 그의 출세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외로움과 좌절감 속에서 그는 모국으로의 귀환을 생각하게 된다. 다음의 시는 아마도 당시의 그의 착잡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쓸쓸하게 담겨 있다.

 

秋夜雨中 가을밤 빗속에서

秋風惟苦吟 가을바람 애처로이 부는데

世路少知音 세상에는 날 알아주는 이 적다네.

窓外三更雨 창밖에는 한밤중의 비가 내리고

燈前萬里心 등불 앞의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현실을 떠나 초월적 은둔자의 길로

 

결국 그는 29세 되던 해 즉 헌강왕(憲康王) 11년(885), 오랜 객지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그는 헌강왕으로부터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의 관직을 수여받고 모국에서 정치적 이상을 펼쳐볼 꿈에 젖는다. 그의 꿈은 헌강왕이 곧 승하하고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난정(亂政)이 시작되면서 깨지고 만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양길, 궁예 등 반란세력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그는 난국을 바로잡기 위해 시무책(時務策)을 임금께 올리나 시행되지 못하고 다시금 실의에 잠긴다.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무리들, 신분상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그는 모국에서도 뜻을 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는 마침내 현실에의 모든 집착을 버리고 벼슬길에서 은퇴한다. 이후 그는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고 문학과 예술을 즐기다가 만년에는 가야산에 은거하여 삶을 마쳤다.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고려 현종(顯宗) 때에 문창후(文昌侯)로 추증(追贈)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중국의 사부총간(四部叢刊)에 편입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최치원의 자(字)인 고운(孤雲)은 그의 인생의 쓸쓸한 한 단면을 보여주듯 어딘지 우리에게 적막한 느낌을 전해준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공적인 인생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실의와 불우 끝에 침잠해버린 서글픈 삶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운이라는 글자는 또 한편 우리에게 초월자, 은둔자의 신비한 이미지를 전해주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이미지와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 그의 도인으로서, 전설적 존재로서의 삶인 것이다.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최치원의 탄생설화는 영웅들의 비범한 출생처럼 신비화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가 금돼지에게 납치되어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최치원을 낳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당대(唐代) 전기(傳奇) 소설인 『보강총백원전(補江總白猿傳)』에서 신령스러운 흰 원숭이에게 납치되었던 한 부인이 구출되어 후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을 낳았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이다.

 

중국서 내단(內丹) 도교 등 섭렵

 

아무튼 최치원은 유년시절에 중국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도교를 배우게 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한 가지는 최치원이 율수의 현위를 그만두고 고변의 막하로 들어가기 전까지 2년 정도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했던 시절, 유학생 선배인 최승우(崔承祐)로부터 내단(內丹) 도교를 전수받았을 가능성이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당시 김가기(金可記)·최승우 등 신라 유학생들이 신선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도법을 배웠고 최승우가 다시 이를 최치원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종남산은 최승우 등 유학생들의 수련 장소이기도 하고 후일 김가기가 이 산의 자오곡(子午谷)이라는 곳에서 승천하였으니 최치원 역시 자신의 은둔처였던 이 산에서 도교를 수련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최치원이 고변의 막부에서 근무할 때 도교를 배웠을 가능성이다. 고변은 도교를 돈독히 믿어 휘하에 방사(方士) 여용지(呂用之)·제갈은(諸葛殷) 등을 두고 수련과 도교적 행사에 열중하였는데 이같은 막부의 분위기 속에서 최치원도 자연스럽게 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최치원은 고변의 종사관으로서 막부에서 행했던 도교의례의 제문 즉 청사(靑詞)를 짓기도 하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당시의 저명한 소설가인 배형(裵 )이 최치원과 함께 종사관으로서 근무했다는 사실이다. 배형의 『전기(傳奇)』라는 작품을 보면 신선·도술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도교의 강한 영향을 짐작케 하는데 이로 미루어 최치원까지 포함된 고변 막부 문인들의 도교적 소양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왕건을 영웅으로 알아보고 격려도

 

이상과 같은 최치원의 두 가지 도교학습 경로를 모두 긍정한다고 할 때 한 가지 통합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즉 종남산에서 최승우로부터 사적으로 도교를 전수받은 후 도교신자인 고변에게 발탁되어 막부의 도교집단 속에서 다시 새롭고 다양한 체험을 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두 가지 경로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과정으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귀환한 후 신라 말의 정치적 현실에 좌절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그는 속세에의 욕망을 단념하고 산수간을 방랑하며 자연 속에 마음을 맡겼다. 지금까지도 국토의 곳곳에는 그의 발자취가 전설로써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만년에 전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최치원은 그 곳에서 친형인 중 현준(玄俊)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즐김과 동시에 수련에도 열중하였는데, 그가 주로 익힌 수련법은 시해법(尸解法)이었다. 그러나 최치원은 완전히 세속 정치에의 관심을 끊지는 않은 듯 태조 왕건(王建)이 등장했을 때 그가 영웅임을 알고 참언(讖言)을 보내 격려했다고 한다. 참언은 {계림은 누런 잎이고 곡령은 푸른 솔이네(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로 왕건이 천명을 받아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게 될 것을 암시한 것이다. 최치원의 이러한 행위는 중국의 저명한 도인들이 개국 영웅들에게, 천자가 되리라는 신탁(神託) 즉 부명(符命)을 전했던 경우와 동일한 것이다.

중국에는 일찍이 도홍경(陶弘景)이 양무제(梁武帝)에게, 왕원지(王遠知)가 당고조(唐高祖)에게 부명을 전했던 사례가 있었다. 최치원은 이렇게 은밀히 왕건의 창업을 도왔다는 공로로 인해 현종 때에 문창후의 봉작을 추증받게 된다.

 

자생적인 민족 선도에 대한 천착

 

최치원의 최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다만 야사에 의하면 어느 날 그가 일찍 집을 나가 갓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신발을 풀숲에 버려둔 채 사라져 버렸고, 해인사의 중들은 그가 신선이 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최치원의 마지막 종적이 이처럼 묘연하기 때문에 이후 조선시대에까지도 그가 가야산 홍류동, 지리산 청학동 등 산속에서 신선으로 살고 있다는 설화가 끊임없이 떠돌았다.

p; 『지봉유설(芝峯類說)』 『梧溪日誌集』 등의 책을 보면 최치원이 산 속에서 노승과 바둑을 두고 있다던가 여러 신선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던가 하는 장면에 대한 목격담이 나온다. 이러한 설화들은 모두 최치원을 시해선이나 지선(地仙)으로 간주하고 있는 일반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끝으로 최치원 도교학의 성격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해동전도록』에서는 최치원이 종리권 계통의 도교를 전수 받은 것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그 실체는 종리권으로부터 여동빈(呂洞賓)으로 이어지는 종려금단도(鍾呂金丹道)의 내단학이다. 당대(唐代)에는 아직 외단(外丹)이 성행했기 때문에 최치원은 당시 신경향의 도교를 전수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계통 도교의 실제 내용은 무엇인가?

최치원은 가야산에서 중 현준과 더불어 가야보인법(伽倻步引法)을 연마하고 이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가야보인법은 곧 시해법과 같은 것으로서 최치원이 갓과 신발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설화는 그가 이 도법을 수련하였음을 암시한다. 시해법에서는 흔히 도인이 의복이나 소지품을 남기고 선화(仙化)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치원 도교학의 훌륭한 점은 그가 중국에서 귀국한 후 신라에 자생하고 있는 민족의 선도를 재인식하고 그 지위를 중국 도교보다 우위에 둔 점이다.

 

그는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나라에 오묘한 도가 있으니 이름을 풍류도라 한다. 그 가르침이 만들어진 내력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있다. 사실 이 도는 유·불·도 삼교의 취지를 다 지니고 있어 모든 생령을 교화시킨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고 언급하여 고유의 선도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표명하였다. 결국 최치원은 중국의 내단수련법을 체득하고 이를 다시 풍류도의 삼교합일 체계안에 수용함으로써 한국 수련 도교의 독특한 경지를 이룩해낸 것이다. 최치원 도교학의 이러한 경지는 이후 이자현(李資玄)·이명(李茗)·김시습(金時習)·정렴(鄭 ) 등에 의해 계승되어 고려·조선시기 문인·사대부 수련도교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최치원을 한국 도교의 비조라고 일컫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최치원의 저작으로는 시문과 청사가 수록되어 있는 『계원필경집』 이외에도 귀국 후 지은「사산비명(四山碑銘)」「난랑비서」 등 단편 문장들이 있고, 후일 이들을 집성한 『최문창 후전집(崔文昌侯全集)』이 있다. 그리고 그의 자전적 전기체(傳奇體) 소설인 「쌍녀분기(雙女墳記)」가 실려있는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도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기에는 그에 관한 설화들을 바탕으로 『최고운전』과 같은 국문소설도 창작되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정재서

1952년. 서울대 문리대와 동 대학원 중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이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 도교문화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 도교의 학문적 정립에 진력하고 있다.

 

  

***조선 단학을 발흥시킨 도인(道人)***

 

한국의 선인 열전 3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용호결

[용호결] '북창결(北窓訣)' 또는 '용호비결'로 알려져 전해내려 오고 있다이조 중종(中宗원년(1506) 음력 3월 갑신일에 태어난 정염 선생이 남기신 글이다이 어른은 1490년대 중엽이후 3대에 걸쳐 벼슬하던 집안에 태어났으며아버지 순붕(順朋)께서 중종인종명종세 임금을 섬겨 벼슬 자리에 있었고어머니는 태종(太宗)의 장왕자 양녕대군의 증손녀였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마음을 가다듬어 신과 통할 줄 알았다고 전해온다어렸을 때 산사(山寺)에서 선가(禪家)의 육통법(六通法)을 시험하려고 3일 동안 마음을 가라앉혀 사물을 바라보아가까이는 동리 집안의 사소한 일에서부터멀리는 산너머 백리 밖의 일까지도 통달하였으며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산수·외국어를 두루 배워서 못하는 바가 없었다비록 천리 밖의 일이라도 마음을 고요하게 집중하면 곧 알아내었다.
선생은 유··선의 삼교에 관통하였으나근본을 성학(星學)에 돌려 그의 유혼에도 효제(孝悌)를 오로지 힘쓰게 하고, '소학' '근사록' 초학자의 지름길로 삼았다.

일찌기 선생께서는 “성학은 인륜을 중시한다그러므로 긴요하고 오묘한 곳을 말하지 않는다그러나 선불(仙佛)은 오로지 마음을 닦고 본성을 깨닫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그러므로 상달(上達)한 곳은 많고낮고 쉬운 것을 배움은 전혀 없다이것이 삼교가 제각기 목적하는 바가 다른 까닭이고 선불은 대동소이하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늘 탄식하시기를 “말하여도 믿어주지 않고행하여도 알아주지 않는다.”하고는 마음껏 노래부르며 스스로 희롱하며 방랑의 행각에 낙을 붙였다그러면서도 남과 더불어 말할 적에는 단 한 마디도 공자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다고 한다.그 깨달음은 부처와 같고그 행동은 노자와 같았으며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한결같이 성인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전기로 전해 온다.

 

◀ 원문에 관하여 ▶
단학에 관한 문헌으로 이 [용호결]보다 뛰어남이 없다고 믿어오늘 날까지 전해오는 여러 책들을 모아 한자한자 검토하여 본문과 같이 정리해보았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연세대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것과 민간에 유포된 몇 종을 저자가 대조해 본 결과 문맥에는 큰 차가 없으나글자의 사용에 있어서 아래와 같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1) 主와 住
(2) 相과 常
(3) 氣와 그 옛글자
그래서, (1)은 住로 통일하고 (2)는 구별하였고 (3)은 氣로 통일하였습니다.

원문에 주문과 주해가 구별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주문은 큰 글자로 주해는 작은 글자로 하고 글체를 달리 하였습니다현대문도 주문과 주해의 글자 크기를 달리하여 원문의 뜻을 살렸고그 다음에 <한방울의 글>이라는 이름으로 저자의 소견을 피력해 보았습니다.
한글 세대에 낯설게 느껴질 한문을 먼저 실은 것은 옛 원문의 뜻을 받드는 어른에 대한 예의로써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동인 선생이 엮은 "단학비전 조식법"에서 전문을 인용함 -


단을 닦는 일(修丹之道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쉽다이제 이 도에 관한 책이 너무 많아서 서고에 가득찰 지경이나말로는 나타내기가 너무 어렵고 황홀하여 읽는 사람이 알기가 어렵다그 때문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처음 배우려는 사람은 손댈 방법을 몰라서 불로장생 하려다가 오히려 도중에는 그만 두는즉 요절하는 자가 많았다.

<참동계>란 책은 실로 단학의 시조가 되는 책이나그 내용이 우주의 이치를 설명한 역의 표현 방법인 괘와 효를 빌어비유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처음 배우는 사람으로는 도저히 짐작조차 못할 바가 많다그래서 이제 입문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사항을 알기 쉽게 약간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하려 한다만약능히 깨달을 수 있으면한마디 말로 충분하다즉 공부 시초에는 폐기하는 일뿐이다.

 450년전의 선비를 위하여 쓴 글로 당시로는 상식에 속한 글을 인용한 것이 오늘날에는 알기 어려운 글이 되었습니다단을 닦는 방법은 폐기 즉 기를 가두는 일이라는 것을 천명하셨습니다그 구체적인 방법을 다음에 주해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 마디의 비결이다매우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나옛사람은 비밀로 하여 선선히 말로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그래서 처음 배우려는 사람들이 쉽게 손댈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자기자신의기식 속에서 단을 닦는 법이 있는것을 모르고밖으로 금석에서 구하여 오래 살려다가 오히려 요절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참동계>는 한말의 도사 위백양(魏伯陽)이 선단의 제조법을 논한 책으로 주자(朱子)도 주석한 일이 있었고우리나라의 이퇴계(李退溪) <계몽전의>(啓蒙傳疑)에서 논한 바가 있습니다. <참동계>란 물과 불납과 수은으로 오래사는 신선되는 약을 만드는 원리도 쓰여져 있는 책인데 많은 이들이 참 뜻을 잘못받아들여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행하였던 듯 합니다.
㉯ 자기의 숨속에는 단을 닦는 법이 있는 줄 모르고 신선이 되겠다는 분에 넘친 욕심 때문에 금석지제 즉 요새 말로 영양제인 각종 미네랄을 먹음으로써 그렇게 될 줄 알고 본말이 뒤바뀌어진 수련을 한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몸에 좋다면 무엇이든 앞뒤 가리지 않고 먹는 요새 일부 사람과 서로 통하는 데가 있음을 봅니다.


이제 폐기를 하려는 이는 맨 먼저 마음을 고요히 하고책상다리를 하여 단정히 앉아  ·주렴을 드리운 것 같이 감은 듯 뜬 듯한 눈으로 콧등을 보고 콧구멍으로 배꼽 언저리를 마주하여 공부는 정신을 전적으로 이렇게 하는 데에 있으며이때 등뼈를 구부려 수레바퀴가 둥굴게 휘어지 듯 해야 한다.
들이쉬는 숨은 솜에서 실을 뽑아 내듯이 가늘게 솔솔 끊임없이 길게 계속 뽑아내고내쉬는 숨은 미미하게 조금씩 계속 토하여늘 신과 기가 서로 엉퀴어 배꼽 아래 한 치 세푼의 자리에 있는 단전에 항상 머물어 살도록 하라.


㉮ 폐기하는 마음 가짐과 자세한 요령을 적은 글입니다형식으로부터 정신내용으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 위 원문의 마지막 줄의 상주의 주를 注로 쓴 책이 있습니다폐기의 초기에는 신과 기를 따로따로 생각하여 쏟아 넣는 뜻으로 注로 쓴 듯 합니다원저자가 어느 쪽으로 쓴 것인지는 이제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 시선··배꼽·등뼈호흡 요령을 주의하십시요이 글 가운데서 등뼈를 구부려 수레 바퀴 휘어지 듯 둥글게 하라는 글이 불교의 참선 자세와 다른 점이며또 오해가 많이 생길 수 있는 구절입니다.
㉱ 이 자세와 호흡 요령은 초습자가 꼭 습관화할 일입니다자세에 있어 그렇게 못할 사람을 위하여 26쪽에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모름지기 굳게 닫을 필요는 없다참지 못함에 이르러도 밖으로 내보내지 아니하고다만 아래로 내보내려는 생각을 더 하며오줌눌 때와 같이 은근히 하면이른바 취어 뢰손풍 상태가 된다즉 내쉬어야 할 숨이 몸안의 유순한 바람의 덕을 보게 되어 마음과 몸이 화평하게 된다그러므로 능히 마음을 안정시켜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아 눈으로 코끝을 보고코와 배꼽을 마주 대하게 하면 기가 부득불 내려가게 된다.
폐기의 초기단계에는 가슴이 점차 번거롭게 꽉 차고때로는 찌르는 듯이 아프기도 하고혹 뱃속에서 꾸루룩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무엇인가 내려가는 현상들이 모두 폐기가 되어가는 좋은 징조이다.
 부분의 풍사즉 간장의 풍과 심장의 화가 바른 기운의 핍박을 받으면 비어있는 곳으로 흘러들어가서 기를 전해보내는 길이 생긴 다음부터라야 기가 스스로 편안하게 되고 병은 저절로 삭아 없어지게 되는데바로 이것이 실마리가 된다그래서 가히 잠시의 증험이라고 할 수 있다항상 가슴앓이나 배병이 있는 사람은 정성껏 폐기하면 좋은 효과와 묘미를 느낄 수 있다.


㉮ 위 주문과 주석문으로 초습자가 수련할 전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맨먼저 마음을 고요히 하라선수정심의 심법이 가장 기초가 됨을 잊어서는 아니될 일입니다.
㉯ 가슴·횡경막·배의 삼위일체 된 호흡으로 단전으로 기가 흘러들어 가는 <전송지도>(傳送之道)가 이루어져야 됨을 강조합니다.
㉰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북창선생의 아우 고옥(古玉)이 인용한 듯한 아래 글이 있습니다. <눈이 이르는 곳에 마음이 또한 이르는 것이므로 몸을 단련하는 법에 눈으로 코를 내려다 보고코의 끝이 배꼽과 상대케 하여 심화(心火)를 단전에 하강(下降)시키는 법이 있으니 잠깐의 공부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 편향이란 간식·중참을 뜻합니다.


생각하고 염원함을 항상 이와 같이 하여 공부가 좀 익숙해져 이른 바 현빈의 한 구멍을 뚫어 얻으면 백 구멍이 비어 있어 모두가 통하게 된다구멍 안에서 태식을 하여 이 한구멍을 얻으면 선을 닦는 길이 된다.


㉮현빈의 현은 신비하고 심오함을 뜻하고빈은 암컷생산생성을 뜻합니다그래서 현비은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신비한 암컷을 뜻하게 됩니다이 글귀는 노자 도덕경 제 6장에 비롯합니다.
()는 구멍 비어있을 구멍 뚫을  입니다.


이것으로 태식을 하게 되고태식함으로써 주천화후를 하게 되고주천화후를 함으로써 결태가 된다그러니 현빈일규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
어떤 이는 이것을 방문의 보잘 것 없는 술이라 해서 긍정하고 즐겨하지 않으니 안타깝다공부해서 변하고 화하여 날고 속구치는 술법 따위는 감히 내가 말할 것이 못 되지만 양신하는 데는 여러 방문이나 여러 약이 있더라도 이에 비할 바가 못된다이 방법을 여러 달 행하면 백 가지 질병이 두루 없어질 터이니 어찌 성심껏 행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대개 풍사 우환은 혈맥 속으로 숨어들어 몸안을 돌아다니게 되며부지중에 사람을 죽이는 도끼 같은 흉기가 됨을 알지 못하고원을 찾아 가서 약을 써도 이미 때가 늦다의가는 병이 난 후에 병을 치료하지만도가는 병이 나기 전에 미리 병을 다스린다.


㉮방문은 곁문직계가 아닌 다른 계통이단을 뜻합니다.
고황 ; 고는 심장 밑황은 횡경막 위 부분을 가르킵니다좌전 이란 책에 진나라 경공잉 병의 정이 어떤 의사도 치료하지 못하는 자리로 숨는 꿈을 꾸엇는데 바로 그 자리가 고황이었다 합니다.


정기와 풍사는 얼음과 숯이 서로 받아들이지 않음과 같다기가 머물러 있으면 풍사는 스스로 달아나고백맥이 자연스럽게 유통하여 삼궁의 기도 자연스레 오르내리게 되니질병이 무엇을 핑계하여 생길 수가 있겠는가좀더 정성을 다하여 근면하면 반드시 수명을 연장하여 죽음을 물리침에 이르겠지만그 찌꺼기라도 얻으면 역시 평생을 편안하게 누리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이 일을 사랑함은 영생을 원함이니내가 항상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것 역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이 글을 보는 이는 내 뜻을 짐작하여 망념을 용서하면 다행으로 생각하겠노라.


㉮이른 바 양생(養生), 양신(養神)을 논한 글입니다.
삼궁 ; ① 가슴머리  ② 단전심장이환   ③ 척추가 밑에서 끝나는 자리 즉 미려를 하궁배꼽아래 한치세푼의 자리 즉 단전을 중궁머리의 이완을 상궁이라 하는 이도 있습니다.


삼가 생각컨데 옛 어른께서 말씀하시기를 <순으로 따르면 사람이 되고역으로 거스르면 신선이 된다>고 하셨다.
대개 하나가 둘을 낳고둘이 넷을 낳고넷이 여덟을 낳게 되어 64에 이르게 되며더 나아가서 만 가지 일로 이루어지게 됨이 인도이다.  순추공부
다리를 포개어 단정하게 앉아서발을 드리우듯 눈꺼풀을 내리고 입을 꼭 다물고세상 만사의 분요를 수습하여 오로지 무의 경지인 태극으로 돌아감이 선도이다.  역추공부
<참동계>에 소위 "뜻을 다 맡겨 허에 돌림으로써아무런 생각도 없다는 생각마저 없는 경지가 상례로 되게 하라"는 것이다.  무는 태극의 본체이다.
스스로 경험하고 실험하며 증명하여그 경험을 다음 할 일에 옮겨서 추진하여마음을 하나로 하여 딴 생각없이 흔들리지 아니함이 신선이 되는 첫 순서이다.
다만 뜻을 세움은 일찍함이 귀하고몸의 원기가 쇠퇴한 후에는 백배의 공을 들여도 선의 줄에 올라가서 함께 자리하기가 어려우니라.


㉮도를 배움에는 아래와 같이 때가 있음을 오진편(悟眞篇)의 주()에 있습니다. <여순양이 64세에 정양진인을 만나게 되고갈선옹은 64세에 정진인을 만났으며마자연은 64세에 유해섬을 만남으로써 신선이 되었다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젊을 때부터 그 방면에 뜻을 두었으니 비결을 얻어서 신선이 된 것이니 어찌 그의 효용이 적다 하겠는가세상사람들은 즐겨하는 욕심에 집착하여 정기를 상실하게 되고생각함을 심하게하여 신이 줄어 없어지고과도한 피로로 진기를 손상하니한번 진양을 잃으면 비록 비결의 큰 길을 64세 전에 배워도 성공하기는 어렵다일찍 욕심을 끊고 장년에 도를 구하면 색상이 있는 육체가 무너지지 않고 정기가 줄어 없어지지 않았을 때 스승을 만나 참을 얻어 실행을 빨리하면 도를 깨달을 수 있다>
㉯여자 14남자 16세 전에 전송지도를 얻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현 교육 학제로는 그렇게 하기 어려우니 가정교육으로 또는 뜻있는 분의 자녀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폐기

복기 또는 누기라고도 한다.
정경 <신선·도사는 선에 있음이 아니라정을 쌓고 기를 포개어 참되고 바르게 됨을 말한다.>하였다.

폐기하려면 눈으로 깃발을 삼아기의 오르내림이 좌우·전후 어디로나 마음먹은 데로 가게 하면 된다.

기를 올라가게 하려면 위로 보고내려가게 하려면 아래로 본다다오른 눈을 감고 왼 눈을 뜨고 위로 보면 왼쪽 기가 돌아서 오르고왼눈을 감고 오른 눈을 뜨고 위로 보면 오른쪽 기가 돌아서 역시 오른다.
기를 아래로 내리려면 몸 앞쪽의 임맥을 사용하고위로 올리려면 몸 등쪽의 독맥을 사용하여신을 행하면 기도 행하고신이 멈추면 기도 멈추어 신이 가는 곳이면 기가 가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눈으로 명령하는 것은 흡사 군에서 깃발을 신호로 하여 부대를 움직임과 흡사하다또 위로 보고자 하면 눈을 뜨지 아니하고 눈동자만 굴려 위로 보아도 역시 그렇게 된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모두 몸 윗쪽은 왕성하고아래 쪽은 허해서아플 때는 언제나 기가 올라가기만 하여아래 위가 서로 교류하지 못하기 때문에이런 기가 내려 가도록 힘써중궁에 있도록 하여비장과 위장으로 화창하게 하면혈맥이 두루 잘 흐르게 된다이렇게 함은 건강을 위한 사람 뿐 아니라 단을 지키고 간직하는 요령으로도 이 규칙을 지켜야 한다.


능히 혈맥으로 두루 돌고 흐르게 하여 임맥과 독맥이 모두 통하게 되면 수명이 길어져 장수함을 누릴 것이다어찌 그렇게 되지 아니 하랴.
그렇기 때문에 단을 거두려면 반드시 폐기하는 일로 손대는 방법으로 삼는다폐기하는 방편으로발을 포개고 손을 단정하게 하고얼굴에 화창함이 나타나는 마음을 하여눈썹을 내려 아래로 보아신과 기가 배꼽 밑 단전 한 가운데에 반드시 서로 모여 있도록 하면윗쪽에 있는 풍사가 마치 구름 걷히듯 안개 걷히듯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서먼저 가슴과 배쪽으로 달려가서


처음에는 배에 가득 차고다음에는 배가 아파진다.

전하여 보내는 길이 생긴 이후 신체가 화평해지고땀기가 밖으로 나와몸이 부드러워져서 온 맥이 두루 크게 돌게 되면마음먹은 일이 서로 깊이 융화하여 화기가 돌아서눈앞에 흰 눈이 솔솔 내려자기가 육신에 깃들어 있는지 육신이 자기 속에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고요하면서도 어둡고 깊은듣지도 볼수도 없는 은미함이 있는 눈부시게 황홀한 음양이 갈라지기 전의 태극의 경지에 이미 들어 있으리라.
이 경지가 이른바 진경계이며 진짜 길이다이 외는 모두 그릇됨이고 망령될 뿐이니라.


㉮ 폐기하는 기초 요령은 앞의 총론에서 논하였기 때문에 이 폐기장()에는 언급이 없습니다그 대신 눈으로 깃발을 삼아 심기를 통제하는 요령과 사람 몸의 상성 하허를 논하여 몸을 화창하게 하는 요령을 말합니다.
㉯ 비결을 적은 옛글에는이상하게도 반대로 적은 것이 흔하게 전해오고 있습니다이를 테면 좌우의 글자를 우좌로 바꾸어 적은 따위 입니다어느 심술 궂은 분이 한 번 써놓은 것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전해 온 모양입니다비결에 속하는 것을 누구나 알게 써 두면 고마움을 모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또는 어지러운 시대에 그것을 갈망하는 이에게만 전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전해오는 책 모두 원문의 폐기 장 끝에서 열째 줄의 폐기는 폐식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렇다면 총론의 [일언지결]에 맞지 아니합니다.
㉰ 중궁을 원문에서 <무기토>로 설명하였습니다오행 사상으로 무는 토의 양정(陽精)이고기는 토의 음정(陰精)을 나타냅니다또는 한 가운데를 상징하며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성질이 있습니다사람의 몸에 있어서토는 영양의 흡수기관인 위와 장에 해당됩니다.
㉱ 용호결에서 임독맥을 통하게 하는 글귀는 여기 뿐입니다단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아니하는 사람이나임맥과 독맥은 언제나 제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몸에 고장이 생겼을 때 이 임맥과 독맥에 신호가 재빨리 오게 됩니다그래서 [혈맥을 두루 돌게 하여]하는 글귀의 전제가 됩니다.
폐기를 하여 태식을 하게 되고태식하는 가운데서 주천화후를 겪게 되어 결태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 임맥과 독맥은 그때 그에 알맞는 제 구실을 다할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초보자가 폐기함으로써 얻는 조그마한 기를 독맥으로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은 성급한 짓입니다.
 <용호결>에서는 일체의 언급없이 주천화후 장에서 실법을 전해주시고 있습니다.
㉲ 영추경(靈樞經)이란 고전에는 기의 주행법칙으로 양경(陽經)은 하강하고음경(陰經)은 상승한다는 글귀가 있습니다독맥은 양경임맥은 음경의 하나입니다. [상성하허]라는 글귀와 [상허하실]이라는 글귀를 혼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단전에 폐기함도 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 진경계 진도로를 천명해 주신 글귀는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이 경지를부지런히 정심·잠심하며 폐기하여 하루 빨리 체험하도록 하십시오.
㉴ 한문 세대인 단학인이 즐겨 암송하던 글귀가 위 폐기장의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이 경계를 한 번 체험한 분은 이 수련을 그만둘 수 없게 됩니다폐기를 옳게 못하면서 폐식으로 환상을 잘못 보고 떠드는 일도 무리가 아닌 듯 합니다.

 

태식

경에태는 복기하는 가운데서 응결하고기는 태중의 숨에 따른다기가 몸안에 들어오면 살게 되고 신이 형체에서 떠나면 죽게 된다오래 살고자 하면 신과 기가 서로 살게 하라신이 행하면 기도 행하고 신이 머물면 기도 머문다부지런히 이렇게 행함이 바로 진정한 길이다.


㉮ 이 글을 태식경이라 합니다태식경으로 전해오는 글을 마지막으로 실어 두겠습니다.


폐기함이 좀 익숙하여져 신기가 차차 안정되면 조금씩 조금씩 배밑 털난 데까지 세심하게 이치로 미루어 끝까지 규명하여 기식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따라 나가고 들어오는대로 첫째로 호하고 둘째는 흡하여언제나 그렇게 하는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머물러 있다.  이것이 이른바 현빈일규이며 단을 닦는 일은 이에 있을 뿐이다이렇게 호흡하여 입과 코사이 밖으로 기가 나가지 아니하게 하라. 그렇게 하여 언제나 한 치의 남은 기는 늘 입과 코 사이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이른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태속에서 숨쉬는 법으로 이른바 뿌리에 되돌아가 생명을 다시하는 귀근복명의 길이다.


근본으로 되돌려서 본원으로 돌아감은사람이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는 코와 입으로 호흡하지 아니하고다만 탯줄로 어머니의 임맥과 통하고임맥은 폐로 통하고 폐는 코로 통하여어머니가 숨을 내쉬면 태아도 내쉬고들이쉬면 태아도 들이쉬게 된다태어나서 탯줄이 한 번 떨어지면자기 입과 코로 호흡하게 되므로 몸가짐과 영양이 잘못되면 어느 사이에 진기가 소모되어 녹아져 질병이 생겨 요절하게 된다만약 이 귀복하는 법을 익혀 정진하여 그치지 아니하면 벽곡과 등선이 모두 여기에있다.

옛 시에도 <집이 부숴져도 고치기  듯 약이 말라도 살기가 어렵지 아니하네귀복법을 알고 익히면 금 같은 보물을 쌓음이 산과 같네>라고 했다.


그래서 태식이 능한 후에야 기가 부드러워져 화해지고기가 화해지면 심신이 안정되며호흡이 없는 숨의 경지에 이른다.
경에도 <기가 정하여 지면 호흡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옛날 갈선옹이 매년 한더위에 깊은 못 속에 들어가 열흘동안이나 있다가 나왔다는데 이것은 폐기로 태식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 현빈일규라는 글귀가 이제 두번째입니다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게 되는지를 알도록 하십시오.
㉯ 원문에 밀추자가 두번 나오는데 이 글자에 주의하여야 합니다미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옛글 그대로 옮기면용신가의(用神加意)와 불용신가의(不用神加意)입니다신과 의를 사용하는 법과 그렇게 하지 않는 법입니다의를 가한다는 것은 힘을 가한다는 뜻이 됩니다저자는 이 두가지 방법을 처해진 상황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임을 강조합니다.
㉰ 현빈일규는 단전에 기가 모여 팽창이 한계에 이르면 터짐을 말합니다그렇기 때문에 겸손하게 충분히 부드러운 수련을 하여 저절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뜻을 잘못 가하면 덧나는 일이 꼭 일어납니다.
㉱ 귀근복명은 이른바 선천기(先天氣)의 회복을 가르키는 것입니다영양을 섭취함은 후천기로 도우는 일이고조식으로 기를 단전에 모음은 흩어진 기를 모으는 일이 됩니다.

 

주천화후

화의 상황에는 안팎이 있고 느리고 빠름이 있다처음에는 기와 혈이 모두 허하고폐기한 지가 오래 되지 않아서 화후가 일어나기 쉽다.
배꼽과 아랫배 사이에 기가 한동안 오래 흩어지지 아니하면 반드시 따뜻함이 있다따뜻한 기가 그 사이에서 나온다.
이 때를 맞이하면 혈기가 점차 실해지고 화기도 역시 늦어진다.또 문무진퇴의 법이 있으니 상세하게 몸소 살펴 참작하여 수련하지 않을 수 없다.


㉮ 나무나 연탄에 불을 지필 때불붙는 과정을 살펴보면 위글의 이해가 빠를 듯 합니다물건에 따라 나름대로의 인화점이 달라 불쏘시개만 확타고 불을 붙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체력이 약한 사람에는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불쏘시개에 불을 붙이는 과정이 세세 미미하게 호흡하여 단전에 기를 모으는 과정이라면 기가 자라나는 과정은 불이 붙어 잘 타는 과정입니다타는 불에도 강하게 잘 탈 때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빨리 타면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이 불을 쓸만하게 계속 탈 수 있게 하는 과정이 태식과정이며조식법 제5과에서 그 행로를 설명하였습니다.
㉯ 화후는 단학용어로 기후와 어금버금한 말이며 조식에서 생긴 열기와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 화후가 일어나면 이를 다스리는 법에 문무진퇴란 법이 있습니다문과 무는 서로 맞먹는 대립된 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문은 부드러움을 무는 강함을 뜻하며또 문은 신()을 쓰지도 뜻을 가하지도 아니하고 자연의 법에 따름을 말하고무는 신을 쓰고 뜻을 가하여 자기 생각을 따르도록 함을 나타냅니다때와 자리 따라 이 두 법을 알맞게 사용하여 나아가고 물러남을 문무진퇴라고 합니다.
㉱ 아래의 원문은 큰 글자의 주문(主文)과 작은 글자의 주해문(註解文)을 따로 따로 주문을 읽은 다음 주해문을 읽는 편이 이해가 빠를 듯 합니다.


주천화후라함은 열기가 온 몸을 돌아 퍼짐을 말하는데 불과하다신기가 서로 배꼽과 아랫배 사이에 함께 엉켜 살고 있을 때기회를 용하게 잡아 뜻을 가하여 훅 흩지어지게 하면

이 때에 강약의 화후와 경중의 법도가 있으며또 진퇴의 법이 있으니 잘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된 후에 화기의 추진을 법대로 하면 방광이 불같이 뜨거워지는 동시에 양 신장이 탕()같이 끓으며 허리 아래는 시원하고 상쾌하여 여느때와는 다르다만약 가볍게 화후를 푸허하지 아니하면 온 몸에 화열이 확 나돌게 되어 도리어 크게 몸이 상하게 된다.


따끈따끈한 기가 미미한 상태에서 뚜렷하게 변하여 위로 올라가서  열기가 닿는 데는 점차 열리고 벌어지면서 위로 올라간다.


마치 꽃봉오리가 점차 피어 벌어짐과 같으니이른바 <화지에서 연꽃이 핀다>는 것이다.


신수화지라 함은 허의 극치에 이르러 정숙하고 돈독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점을 지킴을 말하는 것이다바로 이 일이 가장 긴하고 중요한 때와 자리이다.

이 경지를 잘 간직하여 좀 지속하고 있으면열이 점차 성하게 일어나서


이것이 이른바 꽃봉오리가 바야흐로 피어 감로가 점차 진하게 나타나는 경지이며이때에 역류하는 물이 올라 달콤한 침이 입에 고여 예천이 되니 이른바 옥장금액이다.

배속이 크게 열려 텅 빈 것같이 되어삽시간에 열기가 바로 온몸으로 퍼지는 데 이것을 주천화후라고 이른다.


운화를 법대로 능히 하면 인내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지는 아니한다.


㉮ 수련자를 위하여폐기·태식을 바탕으로 하여 이룬 기에 따른 열기·화의 처리 방법의 심법을 가르쳐 주신 글입니다매우 중요한 부문이라 주문이나 주해문을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입니다건성으로 지나기 쉬운 귀절입니다.
㉯ 법대로 하라는 그 법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되는 대목입니다이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조식법에서 시종일관하여 강조해온 바가 있었습니다이 장에도 두 군데나 그렇게 된 뒤에 행동에 옮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 태식을·조식을 고도로 할 수 있게 되면 무호흡에 가까운 상태에 들어갈 수 있고그렇게 되면 신기가 요지부동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이 때 비로소 간직된 기의 덩어리에서 나오는 화기를 몸으로 돌게 하는 일을 주천이라 하고 그 때의 화기 상황을 화후라고 알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 취허(吹噓)는 이두(吏讀)식으로 푸허라고도 읽습니다푸하듯이 가볍게 뜻을 짧게 가하여야 함을 나타내는 글입니다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신을 가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 이 장에서도 함부로 덤벼서는 아니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독자 여러분 중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책을 많이 읽어 본 분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여러 책과는 달리 이 <용호결>에는 임맥과 독맥을 지나가게 하는 구절로써 폐기편에 혈맥을 두루 흐르게 하여 즉 단재를 이룬후에 그렇게 하라고 한 구절 뿐임을 함부로 보아 넘겨서는 아니됨을 거듭 강조하면서 아울러 그점이 세상에 나도는 책과 바로 다른 점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고 체온이 남달리 올라간 상태에서 태연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같은 체온이지만 체온의 질이 다를 뿐입니다그래서 때로 화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곧 원 상태로 쉽게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 주천화후에 이르는 순간을 햇볕이 계속내려 쬐는 수반(水盤)의 수증기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바람이 있으면 수증기가 보이지 아니합니다바람없이 햇볕만 쪼이고 있을 때 한점의 산들바람이 불면 수증기가 크게 퍼집니다이런 상황을 고도의 태식하는 가운데서 포착하는 것이 정독의 시점입니다신행기행의 원칙따라 푸허하는 것이며 그것도 열기가 오그라드는 마지막 찰나를 포착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 책에 따라 <신수화지>의 신수가 없는 것도 있습니다.


배꼽 아래 한치 세푼이 바로 하단전이며 상단전인 이환궁과 더불어 서로 응하여 공명하면 이른바 옥로라고 하는데 불이 따뜻하여 정상인 이환을 따뜻하게 하면붉은 노을인 자하가 이환에서 나르게 된다위아래로 쏟아져 상하가 고리같이 둥글게 되어 끝없이 될터이다성심껏 옥로불을 더욱 따뜻하게 길러서 계속 잃지 아니하면

하룻동안 자···유시에즉 밤낮 열두 시와 여섯 시에는꼭 진화하여 온온지기로 하여금 잠시도 쉼도 없게 하여 언제나 밤낮이 한결 같게하면 열 달 뒤에 태가 가히 이루어지리라.


청명한기가 올라 이환궁에서 결정하게 된다이 결정체를 선가에서는 현주불가에서는 사리라고 한다그렇게 되는 이치가 반드시 있는 것이니 도가 이루어지는 여부는 수도하는 사람의 정성에 달린 것이다.


다만 일찍 달성함을 귀하게 여긴다.
또 듣기에 불로써 약을 고으고단으로 도를 이룸은 신으로 기를 거느려 기를 형체에 머물게 하여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아니 함에 지나지 않는다.
술은 알기 쉬우나도의 어려움을 만나 어지럽게 끝나니 전심전력으로 행하지 아니하여 여럿이 배우기는 하나 필경은 한 둘의 이름도 없이 끝난다그래서 배우는 이의 성의를 귀하게 한다.


㉮ 하단전과 상단전이 서로 공명하여 정수리에 자하가 나르게 되면이른바 도통의 문에 접어든 것입니다그래서 독맥을 통하면 도통하게 된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하단전의 기로 상단전을 따뜻하게 하여 옥로를 이루게 하면 이른바 삼화(三火)가 뜨는 단계에 듭니다.
㉯ 이 주천화후 장에서 일어나는 몸의 별별 증상을 그럴듯하게 소설화한 책이 많습니다이런데 현혹되지 마십시오.
㉰ 위 원문 끝에서 3째 줄 끝 “술죽이지” 바로 앞에 이하결문(以下缺文)이라는 네 글자가 더 있는 책이 많이 전해 옵니다이것은 마치 유교의 경전인 대학(大學)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란에 글의 빠짐이 있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이는 이단성도(以丹成道)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인 듯 합니다단으로 도를 이루는 과정은 청명지기가 이환궁에서 결정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굳이 쓴다면 <자네가 그 자리에 스스로 가서 알아 보게나>하시는 글 외에는 없는 듯 합니다.


또 시에 <정기가 항상 몸 속에 가득하니편안한 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는데 걸릴 것이 무엇인가달마대사가 태식법을 얻었기 때문에 능히 벽을 면하여 마음을 보았는데하였다.


황정경 <사람들은 모두 오곡의 정으로 배를 불리나 나는 홀로 이 음양의 기로 배불리네하였으니 이 두 시로 보면벽곡은 전적으로 태식에 의한 것이니 진실로 능히 벽곡을 하고 홀로 음양의 기로 배불리면 땅의 문은 닫히고하늘문이 열리리라어찌 평탄한 길로 신선에 오르지 못하랴


위의 세 조목은 비록 각각 이름을 붙이기는 하였으나오늘에 한 조목내일 또 한 조목 행하는 것이 아니고행하는 공부는 오로지 폐기하는 중에 있어야 함을 명싱하라.
다만 공부에는 얕고 깊음이 있고등급의 높고 낮음이 있어변화하고 비승하는 술이라 할지라도 모두 이 셋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다만 정성에 달려 있을 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