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화쟁적 성찰’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화쟁적 성찰’
등록 2016-06-02
진영 논리를 앞세운 극단적 배제와 쟁투가 일상화된 우리 사회에서 ‘공존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라”는 원효의 ‘화쟁’ 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통합과 상생을 기원하며 전국을 걸어 순례한 조계종 화쟁코리아 100일순례단이 2014년 6월10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모든 여정을 마무리하는 회향식을 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9) 화쟁
지금 한국에 정치가 있는가? 만약 정치의 목적이 오로지 권력 쟁취에 있고, 개인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서 이해된다면, 정치는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치가 본래의 역할, 즉 ‘서로 다른 것들을 어울리게 하는 기술’로서 이해된다면 지금 한국에 정치는 ‘없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이 목표인 정치, 내 편은 옳고 저들은 그르고, 패거리에 충성하는 게 곧 정치생명을 보전하는 일이 되는 정치, 내가 살기 위해서 상대를 죽여야 하는 쟁투의 정치가 오늘날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최근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협치’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협치를 ‘다수’를 만들기 위한, 정치공학적인 게임으로 이해하는 한 한국 정치의 현실은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다수결’을 유일무이한 민주주의의 원리로 신봉하는 셈법의 정치가 우리 정치의 또다른 민낯이다.
쟁투의 정치, 패거리 정치는 직업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시민사회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사회적·정치적 현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것을 꺼린다. 특히 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는 침묵을 금(金)처럼 여겨야 한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진영논리 속에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해 증오와 혐오의 딱지를 붙이는 것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같은 공론의 장에서 언어폭력과 정신적 폭력은 거의 일상화되었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토론하는 대화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세월호, 북핵 문제 그리고 최근의 강남역 화장실 여성 살해 사건 등, 심각한 사회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사회는 둘로 쪼개져 버린다. 사람들은 자신의 진영 안에서만 발언하려고 한다.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진영 안에서 발언의 편향성은 점점 강화되고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편이 갈리고 극단적 주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건의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증발되어 버리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직업 정치인들에게 있다. 갈등과 분쟁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역할임에도 지역민 혹은 특정 계층의 이해 다툼으로 변질·악화시키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부재하는 사회다.
다른 견해에 증오·혐오의 딱지
폭력 일상화…‘진영’ 점점 강해져
특정계층 이익만 추구하는 정치
‘다양성’ 추구 다원적 세계관 부재
원효 화쟁사상 ‘복수의 옳음’ 용인
독선적 정의 아닌 ‘다름’ 인정해야
지난 세기 동안 한국인들은 국권 상실, 식민지, 분단, 그리고 전쟁이라는 참혹한 시련을 겪어오면서 집단적으로 내면화해온 꿈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반듯한’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한국인들에게 반듯한 나라를 세우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개인의 성취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며 중요한 일이었다. 이는 한국인들만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에서 만들어진 집단적 정서와 같은 것으로, 민족주의와 같은 개념의 잣대만으로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추동했던 역사적 동기 또한 ‘개인’의 이익추구와 권리신장이라는 서구적 관점만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개발도상국의 한국인들에게 자유와 민주 그리고 윤택한 삶이란 개인적 동기 이전에, ‘반듯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집단적 염원 같은 것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이제 우리 모두가 살고 싶은, ‘반듯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정치를 개혁하는 일이다. 이 글에서 제안하는 ‘화쟁의 정치’는 정치개혁의 청사진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시작을 재촉하기 위한 것이며,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정치문화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함이다.
화쟁(和諍)은 원효(617~683) 고유의 용어다. 화쟁은 특정한 사상체계가 아니라 일종의 세계관이다. 화쟁은 다양성을 긍정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경전을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의 상호 배타성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화쟁론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들이 결코 모순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원효가 들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예화에서 잘 드러난다. 코끼리 전모를 다 볼 수 없는 장님들은 각자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코끼리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하며 또다른 이는 “기둥과 같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가(百家)의 이쟁(異諍)’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원효는 “모두 옳다”(개시, 皆是)고 한다. 각 주장들이 코끼리가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원효는 “모두 틀렸다”(개비, 皆非)고 한다. 코끼리 ‘전체’를 생각한다면 각각의 주장 모두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개시와 개비는 동전의 양면이다. 개시개비는 A가 맞으면 B가 틀렸고, B가 옳다면 A가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복수의 옳음’을 용인하는 것이며 나아가 ‘나의 옳음’이 절대적일 수 없음을 인정함으로써 더 큰 옳음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개시가 ‘벽’과 ‘기둥’ 둘 다 코끼리의 모습이라고 하는 모순과 역설을 공존하게 하는 원리라면 ‘개비’는 모순적 상황을 새로운 변화로 이끌고자 하는 ‘갈등전환’의 관점이다.
이제 원효의 ‘코끼리’를 정치적 상황에 적용해보자. 코끼리의 전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주장도 제한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되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때 점차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해갈 수 있다. 다만 코끼리 아닌 것을 코끼리라 우기거나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주장들이 한자리에서 펼쳐지면서 어지럽고 혼란스럽기도 하겠지만, 이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서만 조금씩 코끼리의 전모에 다가갈 수 있다. 한 사회의 발전 또한 마찬가지다.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놓고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때론 갈등도 빚고 다툼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길만이 지속적 발전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길이다. 화쟁의 정치란 단 하나의 옳음이 아니라 복수의 옳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옳음’이 절대적일 수 없으며 ‘저들의 옳음’과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함께 ‘더 큰 옳음’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정치를 말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1892~1971)는 정당정치에 관한 그의 명저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정치란 갈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완화하거나 조절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이 공존하는 것, 갈등이 늘 상존하는 것이 정치가 작동하는 현실이며 정치가 필요한 현장이다. 샤츠슈나이더 그리고 화쟁의 정치학에서 갈등은 그 자체가 문제적 상황이 아니다. 갈등의 상황은 오히려 각자만의 코끼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온전한 코끼리’를 볼 수 있는 기회다. 갈등을 현안 해결과 더 큰 발전의 에너지로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ㄱ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을 실천하려는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정의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옳음만을 정의라고 집착하면서, 다른 사람의 옳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분열되고 대립과 갈등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쟁의 양상이 바로 그러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옳음’을 관철하고 ‘저들의 그름’을 타도하려는 독선적 정의감이 아니다.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고, 서로의 옳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개시개비의 화쟁적 성찰이다. 화쟁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정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화쟁의 정치란 다툼이 없는 평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다.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ㄱ민족문화연구원 원장
※ 이 기획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