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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4

#휴먼라이브러리 #김복기 선교사 "회복적정의를 외치는 그들은 누구인가?"#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휴먼라이브러리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김복기 선교사 
"회복적정의를 외치는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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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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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초청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어 몇 시까지 하는지를 좀 알고 싶거든요 보통 이 아둘람 이 보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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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 10시에 시작해서 10시까지 보통 모임을 가지시는 지 좀 보통 30분 30분 30분에서 1시간 반이 지나는 데 1시간 사는 부분 맥시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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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까지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선교사님이 이젠 09:00 이쪽이 10시 11시 13분 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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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또 30분 동안 말씀을 25분정도 말씀을 해 주셔도 되요 20분에서 예수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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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맙습니다 우리 조금 분위기를 조금 바꾸기 위해서 저도 동안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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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겠습니다 저도 우리 시작할 때 예배중 을 쳤는데 이렇게 적으로 평화의 흡혈 정 이렇게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마크 호흡이 가쁜 것 같은데
0:49
아 방 깐 우리 침묵으로 초청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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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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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놀라움 서당 이더라고요 오늘 보니까 놀람 서당에 초청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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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먼저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함께 믿음의 주 라고 고백하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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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한분 한분에게 천하고 싶구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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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적 목사님께서 약 2년 전에 저희 서울내 그 맨 yt 교회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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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매너에 교회가 이렇게 많지 않아요 안되게 정도 접근한 교회들이 있는데 서울에서 에라이 게 없어서 교회 개척을 한다고 시작을 했을 때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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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에 저희 모임을 방문하셨어요 2년이 조금 안된 시기인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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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카페에서 이렇게 5 임을 갖고 있었는데 조용히 참여 하시다가 쟤들이 매주 성경공부를 하거든요 성경공부를 2시간 합니다 저희들은 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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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에 모여서 o 4시까지 성경공부를 하는데 성경공부를 다 마칠 즈음에 한 말씀 그렇게 하시라 그랬더니 이렇게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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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그럼 또 있군요 이렇게 말씀해 주시면서 어 자칫 성경공부가 지적 위로 흐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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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은 좀 경계에 된다라는 귀한 조언도 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 조언의 말씀을 저희 잘 간직하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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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밖에 이제 갑자기 기초 아둘람 공동체 로 초청 응원해주셔서 면화
2:31
이치에 대해서 조금 말씀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적격자 인지는 잘 모르겠구요
2:37
여기서 보니까 이제 몇몇 분들은 형제님 자매님 이렇게 부르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사실 선교사 라는 그 타이틀을 리 가지 뭐 이런 그 기능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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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는 한 데에 그렇게 불림 을 받기 보다는 사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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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때문에 김복기 형제 이렇게 불러 주시면 더 좋을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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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제가 이제 그 서울의 지금 코로나 때문에 서울에서 있는 모임은
3:05
아 이렇게 주므로 모이고 있고 이제 지역사회에서 나름 열심히 제역할을 감사하면서 살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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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사실 맨 라이츠 rt 쑥 u 에 대해서 들어보신 분들이 이렇게 많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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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 중에 또 외국에서 기독교를 다 뭐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이 아나벨 뜻은 엘라 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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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잘 아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은것 같아요 요즘에 조금조금 알려지기 시작하고 분제 오늘 모임 같이 시작하기 전에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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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어 나이트 와 안압 x 가 어떻게 다른가요 뭐 이렇게 질문도 좀 하셨는데 그 얘기를 조금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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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외 나이 찬 약속에 대해서 들어 오고 눈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한국의 교단이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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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왜 넌 라이트 교회가 어찌 보면 한국 토양에 조그마한 마실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끔 제 나름대로 개인적으로 해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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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 태초 그러니까 어 태생적으로 도 굉장히 그 제국주의 라든지
4:02
어떤 이런 그 즉 그 파워를 행사하는 그런 그룹화 건은 잘 안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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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매너 라이트 들이 3개월을 할 때에도 어떤 제국주의적 인 방식의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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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인 선교로 를 차 채택하지 않고 신 민주주의적인 맥락에서 진행되는 성교육 이렇게 열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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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좀 능동적 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고
4:29
조용히 사는 그런 사람들 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마 잘 알려지지 않고 한국
4:34
정서에 좀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점점 시간이 가면서 대해서 스스로 생각을 해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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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20분 30분 정도가 주어졌는데 시간을 잘 맞춰 보도록 한번 노력해 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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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않아 베티 스트가 는 아직 낯선 용어가 있어요 야 남의 테스트는 100t 스타 면 침내 교인 대 않아 벳 이스트는
4:55
어 이렇게 그점 적도 를 붙여서 재세례파 이렇게 이제 어 해석을 좀
5:00
번역을 좀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제 3 레 파 라 는 말씀을 들어 보신 분들도 계실텐데
5:05
제안 아베 티스 하고 매너 라이트는 조금 헷갈릴 일은 하는데 그걸 좀 설명을 장착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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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표현할 줄 아나 뵙길 수 있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매너 라이트는 교회에 내지는 교단 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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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구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보면은 큰 그 기독교 중에서 여러 교단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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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독교 중에서 않아 의 부스 란 그룹이 있고 또 이제 기독교 중에서 개신교가 있고 태 틀린데 개신교 중에 여러 가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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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도 있고 루터교 되고 여러 교회가 쭉 교단이 있는 것처럼 어 그렇게 이제 안압의 디스트 라는 그룹이 하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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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그런데 16세기의 4 우리들이 그 종교개혁 일어났을 때에 한 가지 종류 기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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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 났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러 지역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났어요 물론 제 보아서는 맞지 노턱 씩 맞춤 노턱 아 아 그 우리가 잘아는 캐톨릭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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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보면 그 경험 패 라든지 폐단을 이야기하면서 교황의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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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가 잘 알고있는 그 뭐라 그러죠 그 어 연어 게 서구권 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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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서 몇 명 걸 브라우저 면제 부 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어 정력에도 와서는 일으켰다고 하면 사실 그것은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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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선이 됐지만 그 이후에 여러 다양한 그 종교 계약에 운동이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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썼죠 어째서인지 독일에서 루터가 계약을 했고 스위스 나모 프랑스 라든지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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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서 이제 추리에서 채 빙글 이가 개혁이 있었구요 뭐 스위스 접경 지역인 뭐 제 4화 약해서 칼뱅의 의해서 또 다른 개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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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구요 사실 여기까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잘 다루지만 그취 뒤에서 있었던 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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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 의 개혁 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연구가 되지만 그 이후에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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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갔던 그룹이 이제 아랍의 아티스트 그룹이 됐어요 사실 외주 빙글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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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공부를 시키다가 특히 이제 복음서를 본인 이제 언어의 또 능통하고 하니까 복음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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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으로 얘기하면 강해설교 식으로 이제 하나하나 가르치게 되면서 복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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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삶의 이제 맞닥뜨리는 그런 일이 생겨 났는데 복음 4 반응해서 사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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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보지 말아야 된다 며 특히 누구 누이의 눈치를 보지 말아야 하는 하려면 권력과 들의 눈치를 보지 말아야 된다 이런 제 생각이 있었던 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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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 그룹이 있었는데 그 절망 그룹들이 스승인 취지 년 아 쭙 잉글리 하고 서로 이제 그 성경을 가지고 공부를 하다가 어느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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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건가 라는 그런 질문을 하다가 이제 복음 의 말씀 대로 따라야 서 살아야 되지 않느냐 이런 그 개혁의 에 굉장해요 그 급진적인 그런 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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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한 거죠 그럴 때 쭉 잉글리 도 개혁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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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오더라도 성경에서 보면 또 국가에 대한 권리도 존중을 해야 하니 우리가 그 c 적시 의해 랑도 또 논의를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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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게 좀 속도 차이가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쉽게 얘기하면 그래서 그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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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리나 굳이 아 그 c 우애가 하라는 대로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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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어 그 당시 때 유아 세례를 이제 모든 아이들에게 태어나면 할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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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그랬었는데 그것이 하나의 그 요즘으로 얘기하면 호적 신고하는 그런 기능을 했었어요 당시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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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될 때에 그래서 이제 그런 것은 믿음의 고백이 없이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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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서 발견해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의지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야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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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맞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믿음 없이 받은 세배를 미워하고 자기네들이 이제 스스로 모여서 선생님이랑 같이 개혁을 하려 그러다가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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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기 때문에 이제 한 10명정도 남지 파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세례를 주는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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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사건이 일어나 줘 이제 그것이 어떻게 보면 어 종교개혁이 1517년 에 일어났는데 이 그제 셀에 신앙 재 셀의 운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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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난 것을 1525년 1월 21일을 진짜 오르자 봐요 그래서 그 당시 때 서로 세례를 주고 받은 사람들이 이름들이 뭐 클라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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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의 라지 것들이 이런 이런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아그들이 이제 그 세례를 주면서 우리가 앞으로는 이제 목숨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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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한번 따라서 살아 보자 하고 했든 것이 이제 어떻게 보면 운동으로 돼서 그런 어 그 믿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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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반응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면서 이제 않아 뱁티스트 운동이 어여 유럽의 이제 먼져 지게 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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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 지금 말씀 드렸던 것처럼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한 가지가 이제 거의 인력에 대한 파워에 대한 문제인데 국가의 권위에 순종하는 야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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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이 옳음 어마어마하게 큰 2시 잖아요 그래서 카톨릭에서 개신교를 그 반대한 것도 사실 이제 권력에 대한 문제가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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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촉발된 사건은 그 유아세례 로 드러났지만 그래서 그제 세대로 드러났지만 실제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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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느냐 누구의 권위의 속해 있느냐 라는 그런 본질적인 문제가 있어서 2분들이 이제 그 운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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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큰 문제가 됐고 일환으로 정제 받기 시작하면서 역사의 한 오백 년 역사에 지금까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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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이제 한국어로 된 교회사 책에서 보면 2000년대 우리나라 2000년대까지 않아 뵙지 스를 이단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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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아 썼구요 요건 급증 주의자 열광 주의자 들고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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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요즘으로 얘기하면 점이 단 처럼 이렇게 격 도외시 해서 가르치지 않거나 아니면 이제 그 약점들이 있잖아요 언어 그룹의 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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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점들을 많이 왜곡되게 이제 부각시켜서 왜곡되게 가르친 그런 역사가 좀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한국교회가 기독교가 정체 내지 노세 택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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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교회가 무엇이지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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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시작을 했어요 그러면서 어 2000년대 이제 어떻게 보면서 밀레니엄 들어오면서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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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특수 운동의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라미의 있었구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 이제 않아 메티스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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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사실은 이제 장로교 백그라운드를 갖고 있구요 이제 공부 외국에 공부하러 갔다가 제가 이제 미국의 3년 살금 캐나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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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 년을 살았는데 어이 왜 넌 라이츠 1 베티스 를 통해서 아이들이 믿고 있는 그 예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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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대한 이게 뭐 복음에 대한 평화의 신학에 대한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접하게 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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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제 제 인생의 조금 바뀌었다고 좀 볼 수 있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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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서 어쨌든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찾다 보니까 그리고 그 이후에 여러 가지 번역서 들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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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고 그러면서 안하게 디스트 가 운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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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도 비슷한 어간에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한국에서 공동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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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동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분들은 아랍의 트 순도의 랑 많이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기독교 공동체 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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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성경에서도 굉장한 매력을 가 느끼는 것인지 4 백병전이 장구 세상에 있는 유 무상 통에 대한 공동체에 대한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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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뭐 어 그 신앙촌 이라든지 아니면 뭐 이렇게 이름만 대면 아는 사이비종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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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는 뒤 도끼에서 나왔으나 좀 이단이라고 그 정죄 받는 그런 그룹들이 공동체 공동생활 참 많이 했어요 4 그 우리나라의 어떤 민족성이 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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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안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는데 어쨌든 공동체 로 알려진 그룹들이 예 면화 이즈나 바나나 100g 실험 관련된 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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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자나 베 트 스 운동 에 속해 있는 공동체 중에 유무 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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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무상 통에 공동체 로 알려진 후처 라이트라는 공동체가 있구요 애프터 라이트 공동체는 1500 27년 에 이제 그 생겨난 아주 올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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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오백 년 동안 내려오는 공동체의 요 말 그대로 유머 상동의 0 시작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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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명 이든지 150명이 든지 적게는 모한 70명 정도 사는 그 공동체가 지갑이 하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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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뭐 이렇게 사는 공동체 가 있고 이후 타라의 잊으라는 공동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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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어 2 텃 도 1에서 시작했지만 영국에서 정착을 했던 브루더 우후라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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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있습니다 2% 도 소공동체 는 전세계 지금은 3천 명 밖에 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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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영향력을 주고 있죠 평화에 대한 목소리를 낸 다든지 다정 이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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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동체에 대한 그런 그룹이 있구요 그 다음에 스위스 형 제단이 있고 이제 그 다 비슷한 어간에 15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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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웬 웨이츠 바 매너에 이라는 그룹의 생겨나요 그리고 이제 암 이슈 라는 그룹도 여기 한국 사람들에게 조금 알려져 있는데 이런 그룹들이 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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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스 운동 에 속해 있는 그런 그룹들이 구요 어떤 그룹들은 교회 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그냥 우리는 커뮤니티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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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쓰거나 이제 뭐 여러 독특한 언어를 쓰고 있는데 메모 나이트는 교회라는 말을 좀 주로 많이 쓰고 공동체와 비교 라는 말
14:12
것 거의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규모가 아주 작아서 잘 알려져 있을 있지 아 않을 뿐만 아니라
14:18
사는 방식도 독특해서 오해를 많이 받아왔습니다 근데 사실 본질을 이야기하는 그런 그룹들은 안 하게 d 스토어 이리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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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고리가 폐 많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아 아님 공동체 라든지 제작을 하든지 평화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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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본질과 연결된 이런 주제를 탐구하다 보면 이 아랍의 트 소 운동과 맥이 만이다 있거나 연결 우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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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의 중에는 무정부 주 의 자리를 아라치 때 들이 있는데 아나키스트 들과도 의심이 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런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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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고요 왜냐하면 제 이 땅에 있는 나라가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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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있으면서도 좀 신비적인 그런 부분들이 좀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서로 연결 우리 가지고 있는 거다 그래서
15:03
폭이 굉장히 좀 넓어요 그래서 변화의 태는 1 100 숯 운동이 그거 이 박해로 인해서 이제 그
15:10
안하겠지 리더들이 다 죽어가고 이제 멸종 대결에 있었어요 거의 어 그런데 임
15:17
아나를 티를 박해를 누가 했냐면 캐톨릭 2막 해야하고 개신교에서 양쪽에서 밖에 를 좀 했어 째 16세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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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거의 운동 사라질 차에 카톨릭 사제 어떤 매너 심어 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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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증언을 한 거죠 왜 우리는 똑같은 하림을 믿고 있는데 이렇게 서로 바퀴를 하고 그 색체를 다시 받았다는 이유가 사람을
15:39
죽일 만한 일인가 라는 이런 질문을 하면서 본인이 사제가 되어 지만 성경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15:47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정말로 문제가 되었던
15:52
유아 세례가 성경이 성경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고민을 하다가 발견한 것이 아 그렇지 않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저그 이제 굉장히 좀
16:03
사제 로써 충격을 받습니다 어떤 충격을 반야 하면 많은 설교를 해서
16:09
이렇게 살아라 고 설교를 하는데 사제의 나는 그런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16:14
더더군다나 사제들 사제로서 우리 교회의 는 사람들이 정말 예수의 제자들이
16:20
됐으면 좋겠는데 우리들이 박해하고 죽이는 저사람들은 60 예수의 제자들 로써 굉장히
16:26
성실하게 살고 있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저렇게 의 워낙에 본 인지 진리라고 믿는 것에 대해서 목숨을 바치는 데 뭐 이런 지금 이런 신춘
16:34
것이 충격으로 다가 오면서 11년 동안 씨름을 합니다 4 제 역할을 하면서 갈등을 하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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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하지도 않고 사제복을 벗고 자기가 안 했든 리더가 돼요 그래서 풍전등화의 있던 이 아랍의 테스트 운동이 2
16:50
왜 너 10온스 라는 사람에 의해서 다시 힘을 받아서 네덜란드에서 굉장히 좀 크게 일어나는 드러운 어
16:56
일이 있는데 그 때부터 이 그 않아 벳 이스트 루터를 따른 사람부터 루터교 이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그때부터 매너 나이트 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17:05
이것이 한 500년 가까이 역사를 지나오면서 면할 교회로 이렇게 정착을
17:11
했습니다 어쨌든 그 않아 베트 손 등을 소개할 때에 에 저는 그 매너에 장악에
17:17
뜻이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 지금은 면허에 계획 매너에 그룹이 않아 100 순종 중에서 가장 큰 그룹 이래서 서로 혼용해서 사용하고
17:27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우리가 따지지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17:32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에 얽매여 있는 분들은 이제 면허 누리려 그래도 매너 나이트 지 혹은 라는 메노나이트 보다는 좋 안에는 속하고 쉽지 않고
17:40
않아 맵 뜻의 정신을 따르고 싶어 이런 분들이 한국에는 좀 페어 많이 생겨나고 있는 그런 상황이구요 왜냐고 교단을 가질 순 없으니까 그렇게
17:49
진행되고 있구요 그 저는 않아 베티스 운동을 소개할 때 교회의 정체성과 연결 지어서 설명
17:55
하는데요 그 좀 낯선 영어로 제가 오늘 설명을 몇가지 지겠습니다 하나가 그 어
18:03
신자들의 교회 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 교육은 다 신자들이 교회 지 뭐 그런거는 신자들의 기회가 아닌가 그런데 신자들의 교회 빌리 벌 수 철 7
18:10
하는 그런 전통이 있고요 그 다음에 자 유교 의술이 차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유 기회라는 것이 있고
18:17
우리들이 조금 많이 들어 온 회중 교회 에 그 다음에 고백 교회 모평 하교 이런 말들이 좀 있습니다
18:23
4 이 정의가 1 에페스 교회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가져왔는데요 빌리버스 처치 신자들의 교육하는 것은 사실상 은 16세기
18:34
맥락으로 가면 신앙고백이 없이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 들 때에 우린
18:39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및 예수 그리스도를 어 고백하고 일상 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18:45
따르려고 하는 그 신자들의 모임이 바로 신자들의 교회다 이렇게 얘기한 거죠
18:51
요즘으로 얘기하면 당연한 것 같은데 요 신자들의 교회에 대한 것들을 우리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 될 이유는
18:58
어 사실 그 우리가 그 믿음에 대해서 검증 시스템이 참 없습니다 한국에도
19:05
요 부분에 대한 서 한번쯤 생각을 같이 해봤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요
19:10
그 다음에 그 비슷한게 어 개념으로 자유 교회 가 있는데요 이 자유 교회는 역사적으로 16세기 만 17세기 이유를 지나오면서 사용되는
19:19
시각적인 용어 에요 그래서 종교 개혁 이후의 교회 본질을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국가가 교회를
19:25
지나치게 통제하고 권력을 행사 하니까 국가의 힘과 국가가 적 제공하는 그 도움은 어떤 것도 받지 않겠다
19:34
그래서 거기서부터 자를 자유로운 교회의 돈이랑 돈에서 부터 자유로운 교회 그래서 풀이 차체 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물론 이것이 감리교 맥락으로 가면
19:43
감 내게도 스위처 지혜의 그런 그 그룹 중의 하나로 속해 있는데 어떤 지역의 옛날에 그 특별한 자리를 돈 주고 사기도 하고 뭐 그래 싸 그래요
19:52
원제 우리가 본 주구 면 제부도 사고 이런 이런 전통이 개신교에서 좀 다른 면으로 특별한 자리 특별한 사람이 않고 이런 것인데 그렇게 하지
20:02
말자 그런거 없애자 해서 프리 처지 라고 이야기하는 역사가들이 이야기 도 있는 약간 그
20:09
핵심은 국가의 통제 로부터 자유롭게 따 이런 것이구요 그 다음에
20:15
고백 교회는 뭐 우리들이 잘 알고 있지만 보내 포 를 통해서 고백 교회에 대한 전통을 잘 알고 있는데
20:21
독일에서 그 고백 기회가 생겨 날 쎄 쎄 쎄 쎄 쎄 쎄 쎄 쎄 쎄 쎄 보내 포 하고 이제 아랍의 애틋하고 서로 교류가 좀 있었는데 직접 만남은
20:29
없었다 그럽니다 근데 어 일상 생활 속에서 뭐 제자로 살아야 되고 제자도 로 강조하고 공동체를
20:35
강조하는 공동 색을 강조한 이런 그룹인데요 그런 고백 교회가 있구요 그럼 li 뛰어났는데 고백 교회 줘 그런 면에
20:43
있어서 어 그 일상 생활 속에서 자기들의 신앙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20:49
어떤 어떻게 드러나는 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그런 교회 구요 평화교회 에는 16 20세기 들어서
20:57
어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너무나 지지를 하게 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 국가에 대한 관계 속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21:05
성경의 맹세하지 말라 라는 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도 맹세하지 말라 그러는데
21:10
우리는 이제 맹세 기도를 많이 하셔서 원기 도도 맹세 중에 하난데 구약 의 전통이 있고 예수께서는 와서 맹세하지 마라 도무지 맹세하지 마라
21:17
언제나 못 지킨다 뭐 이런 맥락도 있는데 국가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21:23
어 사실상 은 이제 너무 전쟁을 지지 하니까 이 것은 아니다 해서 이제 평화 교회 란 전통이 생겨 납니다 그래서 1935년 정도의 생겨나는
21:32
그러니 시각적인 이름인데요 전쟁과 폭력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태도를 어 반대하면서 그 전쟁
21:40
반대하면서 붙여준 이름 이구요 그래서 뭐 전쟁 참 장을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많이 겪었기 때문에 이 부분
21:47
평화 교에 대한 이슈가 굉장히 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하는 일은 그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 함께 고민하고
21:54
모자만 하기도 하는데 사실 제 회중 교회 가 있는데 벼 우리나라에서는 회중 교회 라는 말 보다도 평신도 교회 5 이런 얘기를 많이 썼어요 근데
22:03
사실 이 평신도 교회의 도 좀 뜯어 떠서 보면 면밀하게 살펴보면
22:08
어 정말로 잘 정착되어 있는 평신도 교회 있을까 라는 질문이 좀 들 정도인데요 일례로 제가 최범 위한 년 전에
22:15
평신도 교회를 하시 또한 17년 동안 하셨던 분 지 전자 멘붕이 와서 이제 잠을 하셨어요
22:21
본인이 목회자 한테 공동 목회도 했고 친목회 도 하면서 평신도 교회를 했는데 휨 안하면 싸운다 그러는 거예요 쓰이게 뭐지 왜 왜 우리는 그렇게
22:32
민주주의적인 교회를 한다고 17년 동안 노력을 해왔는데 회의를 하나 제대로 타지 그런데 그냥 뭐 별 대수롭지 않은 이슈는 그냥 넘어가는데
22:41
뭔가 조금 2권이 달려 있거나 좀 민감한 주제가 나오면 싸운다는 거지요
22:48
그래서 어 본인이 17년 동안 목회 한 것에 대한 자괴감이 들고 그래서
22:53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하다보니까 회중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면 와의 꼬리가 있다 그래서 이제 자문을 한 적이 있는데요 일단 평신도 교회나
23:01
회중 교회에는 요렇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23:07
때문에 일단은 이제 회중 교회 라든지 회중 교회는 어떤
23:12
대척점에 있는 것이고 교회라 오니까 직제 가 있는 교회 고 권이 순위가 있는 그 수직적인 교회 랑 반대되는 것이 해준 교회인데 성직자 중심이
23:21
아니라 회정 중심이고 멤버 중심이 줘 그래서 멤버의 자격의 굉장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멤버들이 수준이 좀 높아야 되요 그런데 그거를 하려면 좀
23:32
시간도 좀 오래 걸릴 어 야 되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목살이 몇 분들이 아무리 평신도의 하자 이렇게 해서 시작을 하다보니까 풀뿌리 에서 시작된
23:40
게 아니라 탑다운 이 된거예요 전이 부조가 그러 면에서 보면 은 우리 진짜 해준 교회를 어떻게 입어야 될 건가 뭐 그런 그 교회의 본질적인
23:48
문제를 이야기 좀 해야 되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구요 어 일단은 저 16세기의 않아 베티스 가 됐든 21세기에 웬 원화의
23:56
교회가 됐든 지향 하는 점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때 두 군데를 이야기하는데 지향점이 이제
24:04
손가락을 가르치면서 좋은 교육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 하나는 16세기 로 돌아가자 는 거에요 그 지금도 한가지 16세기에 돌아가보면 1세기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24:12
얘기가 있어요 성경의 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건데 이제 저희들은 그런 질문 합니다 그러면 1세기에 언어 지적으로 돌아 갈 거냐
24:21
그럴때 이제 아랍의 디스 들은 1세기에 뭐 바울이 하기 했던 그런 교회로 돌아 가는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자 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24:29
그래서 어이그 안함 에디스 핵심적인 신학은 뭐냐면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에 요
24:35
그래서 영어로 이야기 하면 크리스 크리스티 센터를 주 뭐 뛰어 가지고 철 친구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굉장히 머 상식적인 이야기
24:44
인데 의외로 우리가 예수 중심으로 보이지 않거든요 그런데 아까 우리 신현 에 대해서 만식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안식일에 대해서 핵심은
24:53
사람인 것 같은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신현희
24:58
필요한 거고 안식년 이 필요한 거고 안식일이 필요한 건데 학비로 살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출해 낸 여호와 가 너네들
25:07
과 함께 씨라고 얘기하는거 그 중에서 주인 안식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님이 줘 근데 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25:15
인간들에 그 어떤 부분을 계속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돌려 놓는 그런 날이
25:21
이지아 시계 된거죠 어쨌든 이제 아래 뜻이나 메노나이트 는 아주 굉장히 단순합니다 그래서
25:27
신학도 굉장히 복잡하지 않아요 어제 자도 평화 공동체 라는 말을 할 때 모든 것이 지향점이 예수
25:34
그리스도의 제작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는데요 그래서 예수
25:41
그리스도를 핵심 해두고 지향 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 그리고 질문을 이렇게
25:46
합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말이 있을 때 누구 말을 들 거냐 그럼 그 하나님의 말을 어떻게 검증할 거냐 이런 질문을 할 때에
25:54
굉장히 좀 그 성경을 공동체 로 해석하는 그래서 0 더해서 그 성 성경을
26:00
해서 탈 때의 공동체적 으로 해석한다 는 말을 좀 많이 하구요 같은 어 * * 것이 없으나 굉장히 조금 삶 속에 3번 몇 빨리 뒤집어
26:12
볼 수 있는 그런 요소들이 몇가지가 있구요 시간이 조금 많이 지났는데요 이제 지금 제가 25분 있었는데요
26:19
이정도로 소개를 마치고 다만 책을 좀 소개를 드리고 싶어요 제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뭐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초대교회의 대해서 우리들이 의미를
26:28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초대교회의 대해서 이제 그 많은 눈물 쓰신 초대 게 역사가 달랜 클레이
26:35
더 선생님이 회심의 변질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지금은 이제 좀 급진적 이거나 굉장히
26:41
레디 카라 안쪽에 그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성경의 본문 대로 살아갈려고 역사를 알고
26:47
싶어하시는 분들이 교회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보면 콘스탄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26:54
황제가 회심 하는 것 부처가 기독교 그 공연한 것부터가 굉장히 큰 문제가
26:59
있다 라고 보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지금 지만 이어 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는데
27:05
알랭 크라이 더 의 회심의 변질 추천하고 싶구요 그 다음에 이제 그 않아 백 티 스 트 에 대해서 명 쉽게 이해 하시려면
27:14
않아 베티 즘에 대해서 않아 100g 짐 이란 책이 있습니다 않아 멀티 증기가 긴 제법 으로는 가톨릭 또 아니고 프로테스탄트 도 아닌 않아 100t
27:23
정도에서 않아 베티스 는 어떤 사람은 개 신규로 소개를 하는데요 개 신규 적인 요소도 있고 가 7로 카톨릭 적인 요소도 있는데 뒤집어서
27:31
연계 얘기하면 카톨릭 도 아니고 갯 그게 신규 도 아닌 제 4회 길이에요
27:36
그래서 1 분들이 제 3회 방법 뭐 이렇게 얘기를 많이 했을 때의 그 제 4회 방법이라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의 길이 거든요
27:44
이 세상에 있는 거 이게 옳으냐 저 옳으냐 가 아니라 이거 또 잃지 않고 적어도 옳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이 있는데 그걸 우리 봐야 된다고
27:52
이야기하는 그룹 이라는 거죠 그리고 또 한가지 좀 소개를 드리고 싶다면 이제 2 도날드 던 바라는
27:59
사람이 신자들의 교회 라는 책을 썼어요 좀 울림이 좀 같은데
28:05
eh 신자들이 교회를 추천하고 싶은 것은 기도 9 튀겨도 1 2000년 사에 있었던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했던 그룹들을
28:15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좀 추천하고 싶구요 그건 너무나 짧은 시간에 간단히 뭐 소개를
28:21
듣다보니까 흐름만 늦게 잡아들인 것 같은데요 어 와트 여기까지 이렇게 제가 말씀 나는 것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0
28:29
지금 8번을 쓴 것 같아요 30분 내로 좀 더 내려고 애를 써 썼구요 네
28:34
고맙습니다 네 제가 좋은 경쟁 감사 * 한데 그
28:41
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이해하면 좋습니다 그 종교 개혁이 은 하잖아요 근데 종교개혁의 여러가지가 를 애가
28:53
이 찍혀 근데 그중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간 그룹 이미
28:59
그러니까 믿음 이라는 걸 가지고 가장 극단적으로 나간 그름이 아나벨 수도 있지 수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니까 1 조 가장 독종이 줘
29:07
그래서 가장 망 여기 순결을 당했어요
29:13
왠 양쪽에 사랑했으니까 가 거래가 계신 거기서 가장 덕종
29:19
음 기도 크다 이렇게 생각하며 런 뭐 거의 들리며 없구요 그러니 분들은
29:25
자존심이 자긍심이 대단히 높아서 지금 말씀 하신 것을 우리는 카드 뻔히
29:30
고 계신 것도 아니고 저위에 초 랩교 에서부터 직방 미뤄 보다
29:35
초대 교회에서 부터 않아 뵙지 뒤에 전통 그 당시 또 그런거 그럼 어제
29:41
사장한테 와가지고 이렇게 얘기 나오면 그거 있었거든요 근데 그때도 그러면
29:46
부정하고 어 사랑이 장애아 커서 자기가 알아서 제 받는
29:51
그렇게 있었거든요 그걸 우리는 바로 내려왔다 뭐 이렇게 아직 고집스럽게 m 있는 분들입니다 4 참고로 이 분들만
30:01
극단적 이 아니라 아이 종교개혁의 3가지 흐름에 극단적인 그런 있어요 하나의 믿음 자체를
30:08
가지 극단적으로 끌고 간 분들이 아나벨 쓰고 이 성소에 내 살이 이성을 극단적 을 끄는 것이 유이 되어야 알겠고
30:17
어떤 사회적으로 극단적으로 총 순돌이 끌고 한 것이 민주의 토마 수도 있겠습니다
30:23
그렇게 닿아 있기만 극단적으로 갈라진 2 에 그룹의 하나죠
30:29
어머 그렇게 이해하시면 좁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예 지성 주연 감사합니다 김밥 형제님 아주 설명 좋은 설명 감사하구요
30:38
제가 이제 마치 더 빌레 볼 셔츠가 있는데요 여기 보면 더 히스토리
30:43
아 히스토리 앤 채널 줄 없 어 왜 디카 r 프로테스탄티즘의 이렇게
30:48
되있어요 예 아까 말씀하셨던 책 중에 1 봅니다 어 여러분들 자유롭게 질문해 주시는 데요 제가 먼저 1 질문드리겠습니다
30:59
저는 에라 뱁티스트 하면 줄이 에서 켈빈 2 갤 문주의 자들이
31:06
아 차가우니 주리의 겨울 강 에다가 에나 뱁티스트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
31:13
뜬다 물에 집어넣고 빠져 죽이면서 모를 헤치고 올라올때 짝대기 로 다시
31:19
물속으로 집어넣으면서 물로 죄를 지었으니 물로 망할 지어다
31:25
이런 휘팍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들을 어떻게 l 뱁티스트 나 메노나이트 교회 가 극복했는지
31:33
그 상황을 어떻게 어 평 않아 용서 했는지 제가 좀 한번
31:38
어김 뽑기 형제님 에 어떤 그 교단 또는 이에 4 베티 전통에서 그
31:43
용서와 화해의 문제를 어떻게 자체적으로 했는지 한번 묻고 싶고요 두 번째 질문은 아 애나 뵙지 수나 메노나이트 눈으로 파실때
31:54
오늘 처음 오셨지만 우리 아둘람 온라인 공동체 갈 길이 뭔지 어떻게 팁을
32:01
좀 주시면 어 요런거 않은 키에 가라 뭐 요런거 이제 말씀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32:10
먼저 이제 추리에서 있었던 그 리 마트당 에다가 수정을 시킨 그런 4살
32:16
했는데요 스타 실 뭐 그것은 한가지 예고 어 죽음을 당할 때 화영을 시켜서 주기도 하고 참수형을 시켜서 죽기도
32:26
하고 수장 형을 시키기도 하고 여러가지 끔찍한 일들이 이제 가장은 끝 깜찍한 방법을 사용하여 서 이제 그 박해를
32:34
한 거지요 그래서 사실 우리들이 종교개혁 때문에 믿음 때문에 순교를 상했다는 분들이 다 이제 그 몸통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32:42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16세기의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아베 디스트 였던걸로 이해를
32:49
하시면 되구요 그래서 이 아랍의 디스트 들은 이것이 트라우마로 있어요 근데 2차 엄마가
32:55
어 그냥 00 트라우마는 아니라 이것을 승화시킨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33:01
히브리서 11장에 믿음 장애 보면 뭐 톱으로 켜고 뭐 굴에 가지고 뭐
33:06
여러가지 이제 믿음의 선진 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엇 그 한 장의 간략하게 다만 왔는데
33:13
어 이 않아 베티 스트 들은 1 1000 1000 페이지가 넘는
33:19
그 순교자들의 열전 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 이후 이후부터 1660 년까지
33:28
믿음 때문에 기독교에서 순교한 사람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열두 제자들은 숨겨 장르 근데 거기 다 들어 있거든요
33:35
그것을 역사적으로 다모아 나서 그것은 하나의 기록화 시켰어요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어 믿음 믿음 과 이제 이 세상에서 살아 는 것이 정말
33:46
어려움이 잖아요 나그네 라고 생각을 하는데 진짜 나그네로 살아요 그래서 정말 가난하게 살고 밖에 를 받으면서 사랑했는데
33:55
그것을 두 가지 방법이죠 도망가거나 순교 하거나 그러나 보카 지는 안 된다 그래서 이제 용서와 화해 뭐 이런 이야기를
34:03
많이 하는데요 처음에는 이것이 너무 힘들어서 안 하베스 왕국도 만들어서 무력으로 충돌
34:10
까지 했는데 완전히 그 캐톨릭 하고 계신 루프 연합군에 의해서 아주 전 섬멸 당하죠 그런 역사가 있어서 그런 얘기도 한다 아랍의 테스트에서
34:18
만약에 이 운동이 무력으로 하룬 도 다양한 운동이 성공했다면 아마도 않아 그친 데 평화주의자 가 되지 않아 씨카이런 그 역사적으로 있어 뭐 역사
34:27
속에서 만약 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지만 뭐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근데 뭐 또 그거에 대한 반론으로 서는
34:34
아 그렇지 않다 그 텐 처음 시작할 때부터 평화주의자 내지는 그 예수
34:39
그리스도의 평화 신학의 대해서 잘 발전해 시켰다 이렇게 이제 2 설명이다 있는데요
34:44
뭐 이 설명을 다 할 수 있는 거고 역사적인 사실 있었던 건 있었던 거지만 이 그림 아트 강에서 수장 되었던 것들을 그것에서
34:53
아 이제 핵심적인 내용 그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다면
35:01
어떻게 우리가 이 박해를 박해에 대해서 전전 해야되고 또 박해 하지 말아야 되는 무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될 이러한 것들을 좀 잘 이야기로 좀
35:10
전승 시켜 온것 같구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안압의 디스 매너 나이트들은 요 평화에 대한
35:15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할머니들이 옛날 얘기를 해줄 해 주듯이 그
35:24
숨겨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 도 많이 해주고요 여인에 대해 여인들이 순교한 것들 어린이들이 숨 즉 뭐 이렇게 죽임을 당한 것들
35:31
이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요 아둘람 공동체 지금 현재의 대해서 제가 오늘 처음 온 사람으로서 는 뭐 이렇게 말씀드릴 수는 없는 것 같고요
35:40
다만 제 우리가 그 1 빨 화 시켜서 이야기하자면 어 우리 기독교 공동체들이 여기저기에서 이제 그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
35:50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저희도 그런 그룹 중에 하나인데 서로 연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어떠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이제 평 환해지는
35:59
평화에 대한 감수성 또 거꾸로 얘기하면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잘 살릴
36:04
건가 요즘에는 뭐 감수성이 얘기가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성인지 감수성 니 뭐 이런게 얘기가 나 많이 나오는데
36:10
우리들의 어떤 망 하는 것과 생각하는거 저도 이제 굉장히 조심 하거든요 그런데 어
36:16
이러한 부분들을 어떻게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어 잘 훈련 할
36:23
건가 그 우리 공동체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성경 중의 하나가 이제 배 소설인데 웹에서도 공부하고 있는데 거기에 그런 표현이 나온다 술에 서브
36:31
크라이스트 란 말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실상 인적 교회 든 이 세상에는 모두가
36:38
그리스도의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날이 있고 이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그 발아래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36:47
그런 그룹인데 실제로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과연 어떻게 그것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
36:53
건가 우리 아까 이제 안식일에 향할 때 하는 것도 그런 질문에 맥락이 고다 폭발이 되는 부분인데
36:58
그런 고민을 좀 많이 하는 공동체가 된 되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서로 배려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서로의 그 작은
37:07
목소리를 닫을 수 있으며 뭐 이런것들 하죠 아까 우리 조 매너에 소개할 때 조금 빠진 것이 있는데요 사실 교회의
37:15
갇혀 있지 않구요 사회적인 사회적인 복음 차 10분에 그러죠 사회 복음에 대해서 굉장히 1
37:21
친구들도 없고 예전부터 그래서 뭐 그 사회 주 의 사 회복으로 이야기
37:27
했었던 18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전에 사실상 으 나눠지며 나이트는
37:33
사회적인 문제에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래서 어 그 중에서 이제 그 하나의 꽃을 피운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37:42
하나가 평화 운동이고 평화 신학이 이제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갖게 되고요
37:47
그것이 구체적으로 한국의 지금 정착되어 서 알려지고 있는 거 교육청 이라든지 경찰청이 라든지 이런 데에서 회복적 정의 라는 거 아마 들어
37:55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회복적 정의의 운동 같은 경우에는 어 맨 메노나이트 에서 시작된 그런 운동 이거든요 그래서 어 성폭력 피해 여성이
38:04
라든지 뭐 어떤 피해자 가해자 공동체를 갑시다 어떻게 보면 어 그 어떤
38:10
폭력의 영향을 받은 그런 피해자로 보면서 또 그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38:15
이런 이야기들을 어 또 사회 속에서 하는데 우리가 기독교가 교회의 갖춰져 있는 게 아니라
38:21
초대 교회에서 그렇게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욕하면서 그 사람들 부러워한 거의 찍어야 이런 인데
38:27
모순인 것 같은데 저 크리스 그리스도 적 예수쟁이 놈들 알고 저 못된 것
38:33
같으니 라고 얘기하는데 실은 자기네들이 못된 거거든요 그러면서 내가 거 그런 삶을 살 준비가 안돼서 안됐지만 욕하면서
38:41
부러워하는 그런 존재가 했던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38:46
아예 수정이를 접어들 내가 미워 가하는데 미워할 수가 없어 이런 표현들이 있잖아요 그런 존재가 돼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좀 쓰는데요
38:56
아둘람 이란 이름이 좀 저한테는 굉장히 좀 인상 깊게 다가 왔어요 있다 다윗이 정말 거기에서 어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랑 모여서 이거 뭔가
39:06
리체 하는 그 왕이 되기 전까지 유리하는 방 나방 엄 하는 여정을 사랑
39:12
거잖아요 거기에 맞게 좀 고민도 진지하게 하 하고 계시지만 조금 더 깊게 진지하게
39:18
하시고 공동체를 말씀하실 때 공동체가 어떻게 좀 촘촘하게 서로 가까이 갈 수 있을까
39:24
이 공동체가 지금 매매 앤 용어가 됐어요 공동체에 대한 정의가 어 1950년 60 년인가 그때 적인
39:32
사회 학자들이 이야기할 때 공동체의 정의가 94개 라 그랬어요 4 요즘에는 공동체에 대해 저희가 글로벌 커뮤니티 됐죠
39:40
자기들이 사는 동안에 는지 끄 사이버 커뮤니티 그대로 됐단 말이에요 쓰이게 공동체의 가게 그 바운드 리가 어딘가 그리고 국 공동체의
39:49
구성원으로서 멤버십 으로서 어떻게 서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뭐 이런 것들은 제 아둘람 공동체 에서 고민을 많이 하시면 주차는 그런 생각이 좀
39:58
듭니다 내가 감사합니다 우리 권속 수영장에 말씀하십시오 4 김포 굉장 님 꿀처럼 됐지만
40:07
아 아주 반갑습니다 뭐 말씀 잘 들었구요 음 언제 제 침략 파 라고 하는 말에서 고 들리는 것처럼 침해라는 행위가
40:22
믿음과 연관 돼서 굉장히 중요한 걸로 인정하시는 이게 직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구요 실제 소리가 그 제 개인적으로
40:31
신앙을 읽어보면 어 두가지 영어 있습니다 서생 반 되는데 어떤 겨운
40:39
소위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에게 침례를 어 딱 허락하고 침 별을
40:45
이제 없는지 그런 상황이 있는가 하면 안대로 오히려 그 지금 신약의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만 보면
40:55
신뢰를 받아야 이제 믿음이 있는걸로 인정 않은지 이런 모습들이 혼재돼 있는 걸로 생각을
41:03
해서 평소에도 이 문제를 제 개인적으로 어떤 결정이 쓴다 마라
41:10
그럼 이제 칩 내파 분은 맨 온 rt 에서는 이 치맥 또는 제 침대로
41:16
표현되어 질 e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게 안 해서 그 침대를 행하게
41:23
는 이것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과연 그 미군과의 서로 관계에서 어떤 것을
41:33
중시하고 어떤 것을 중요하게 보시는 것인지 더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걸
41:40
한번 여쭤보고 싶어요 네 딸 네 그 질문 너무 가 암사 드리고요
41:46
그 늘 지금 받는 어 여러가지 질문들 중에 하나인데요
41:51
어 우리가 사도행전 11장 해보며 어 어 어
41:59
그이 그 이전에는 그 그리스 그리스도 이란 말을 쓰지 않다가 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신자들이 라는 표현이 쓰다 표현을 쓰다가 어느
42:08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아침 아니라는 그 안디옥에서 대칭을 봤는데 그 그 성경을 번역을 그렇게 잘 해 놨는데 사실상은 그게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42:18
쟁 애들 예수쟁이 들이 가 예수 다른 사람들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이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불러서 그때부터 이제 그리스도인이라 체험을 받은
42:26
거죠 이하나 벳 티 스 트 돌도 우리가 안압 x 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이
42:32
캐톨릭 이라 이런 사람들 고전의 들의 어제 세례를 받은 놈들이 내 라고 해서 걔네들은 한테 이렇게 레이블링 을
42:39
준 거예요 그 요즘으로 얘기하면 악인을 찍어 놓는 거죠 전에 들은 아벡 지스트 하면 크게
42:45
우리는 요즘에 대한민국에서 그 어느 순간에 이제 성공적인 그런 기독교인들이 대해서 우리는 기독교인이 하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데 원래
42:54
맥락은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 은 쓰 이름이었던 거죠 근데 그 사람들이
42:59
불러 쓰니까 불림 을 당하면서도 우리들이 본질은 그들이 어떻게 부르든 지 간에 상관없이 정말 예수
43:06
그리스도의 작은 예수로 써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수도 있는 거 연인이었던
43:12
것처럼 사실 승 침례교 우 그제 침내 파도 언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고 요 그런데 일단은 그 믿음이 있는 가운데서 고백 가운데서 하는 것이기
43:22
때문에 선호를 굳이 따지자면 어 당연히 믿음이 먼저 줘 니 믿음을 어떻게 검증할 건가
43:28
이제 그것을 16세기 때는 아 그냥 9시가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건데
43:33
그럼에도 그건 않은 않음에 디스크로 살겠다고 1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대가 먼저냐 방식이 문제는 이게 중요 하지는 않았던 거에요
43:42
그런데 이제 그것이 예전 와 되다 보니까 세례를 준다는 것은 맥락이 교회
43:47
거든요 그래서 믿음의 그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서로 믿음을 인정하면서 하는데 그 검증과정을
43:54
제도와 하다 보니까 이제 뭐 장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세례를 줘야지 그 다음부터 그
44:02
세례에 걸맞게 산다 이것도 맞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름에 걸맞게 사는게 있고 삶에 있어서 이름 이름을 드러내는
44:10
경우가 있고 한데요 이 두분을 2분을 더는 분리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거든 야 근데 어쨌든
44:16
지금 뭐 뭐 질문 하신 걸로 돌아가자면 어 않아 100 디스 들은 믿음을 굉장히 먼저 생각을 하고 그래서 세례를
44:25
일찍 안좋아요 될수있으면 늦게 주거나 후타 라이트 나 브루더 후 같은 경우에는
44:31
될 수 있으면 세례는 밀어라 믿음의 고백이 사라지는 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자기가 성인이 돼서 그래서 이제 신자들의 3 다른 말이 마음 성인
44:41
셀의 유아 세례를 받는데 말로써 성인 되는데 핵심은 뭐냐면 어린아이들을
44:46
에 대한 구원 문제는 그냥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들이 성인으로서 의지가 있을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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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그 고백을 기초로 해서 우리가 세례를 줘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 성인 셀의 핵심입니다 답변이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45:01
네 감사합니다 또 우려의 감사합니다 예 지성수 형제님 말씀 맛있나요 4
45:08
빨 꽃 아래 맑은 켜져 있나요 4 안전합니다 어 머 무기 끼워야 됐으니까
45:16
그 아나벨 달리지도 매우 나의 쯤 와요 노동당 웅담이 입니다
45:22
내 나라에 들어갈 큰 한국사회의 지금 피해를 끼친 게 있어요 그럼 먼저 하세요
45:29
회복적 정의를 부르잖아요 그거를 사먹고 정리 형편상 가벼워서
45:37
휴 옥 쩍 사업 이란 말을 낸 들었어요 아시오 네 그래 가서 이재용 이럴 용서를 해 주면
45:46
그래서 회복적 사법 이란 말을 그이가 있는 그래서 그걸 이재룡이 핥고 써버리고
45:52
지금 큰 박박 이렇게 씁니다 예 2만 제 처도 극 뉴스를 봤는데요 그러니까 이제 이런 거죠 기독교를
46:01
폄하할 때에 기독교에 대한 어떤 그 본질에 대해서 잘 살고 있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46:08
놔두고 이제 전도 물을 일으킨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 한데 그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부분은 제가 다 쓰신거 줘 그리고 의도는 좋으나 사실 잘못
46:19
이제 적용한 사례 라고 이제 부착이 들어옴 보고 있습니다 예 같은 뭐 농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에 신성장 현재 님
46:27
말씀하실 아 제가 알기로는 매너 라 에드가 공동 생활하고 있는데 맞습니까
46:34
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데요 정보 하시는 만 하구요 네 아까 말씀을 하실까 노트 인 것처럼 공동체에
46:43
대한 개념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가 어떤 모습의 공동체 냐 라고 질문을 해야지
46:49
예 그 그렇다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후타 라이트 처럼 뭐 지갑을 하나 로 쓴다
46:55
그러면 아니고요 그렇지만 교회 중심으로 모여서 산다 그러면은 어 뭐 맞다 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어느 정도까지 나눈 연회 않은
47:03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그래서 그 연세 드신 분들을 위한 공동체 대로만 아니까 요즘을 해는 시니어 홈이 라든지 이런 것들이 너무나 발달이
47:11
잘 되어 있구요 고 션 이라는데 동네에 가면 요 1500명이 사는 그 공동체가 있어요
47:19
어 그린 크러스트 라는 102 처음에는 이제 믿음의 공동체를 시작하다가 이게 너무 정신이 좋으니까
47:26
사회 사회의 그거 뭐라 그러죠 그 소셜의 이전 스가 4 에이전트가 에이전시가 됐어요 그게 뭐냐면 하여 그냥 c 니아어 그 콤 타월이
47:34
됐는데요 어 거기에는 어떻게 보면 모든 어른들이 들어가 어서 살고 싶을 정도로
47:40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저도 이제 한국에 이런 공동체가 좀 생겨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도 하는데 뭐 추위가 좀 다양한 다 그리고 작게는 1
47:50
200명 300명 되는 교회의 2주에 가 5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이 열 사람이 소리 한번 빌딩 프로젝트 를 하자 그래서 돈 모아서 연립주택 주고
47:58
사는 뭐 이런것들도 공동체 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 그거를 웬 라이트 전체적으로 다 공동체로 산다 라고 이야기 하면 그것은 좀 어폐가 있구요
48:06
예전에 농경 사회 때에는 마을을 이루면서 농사짓고 교회 기회가 가까이
48:11
있고 해서 교회 중심으로 보여서 농사 지으면서 정말로 많은 것들을 서로 나누는 그런 공동체 성이 좀 강 했었는데 이 도시와 가지 한 문제 아파트
48:20
문화가 좀 문젠데 옛 도시와 되고 아파트 화 되면서 개인주의가 이제 그 변화의 단어
48:27
뱁티스트 에도 찾아 왔는데 제가 굉장히 저 그 존경하는 돌아가신 분인데
48:32
않아 100d 쓰 역사학자 중에 이제 그런 분이 계셔요 500년 동안에 그 박해가
48:39
바꿀 수 없던 왜 너 그 않아 베티스 에 신앙을 자본주의 안락함이 바꿨다 이렇게 얘기해요
48:48
네 이게 지금 대한민국 교회가 들어야 할 얘기가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전합니다
48:54
네 감사합니다 혹시 다음 주에 우리 형을 라이브 해주실 김 반하자 님
48:59
혹시 지금 아 캘리포니아 그 1대 1의 거주 하시는데 혹시 한 말씀
49:05
포토 해주실 수 있으시겠죠 마이크 키시고 네 감사합니다
49:11
예 반갑습니다 함 저는 일찍이 2화 여 중 고를 나왔어요
49:19
아 1964년 도에 한국을 부모님 따라서 한국을 떠나서 이민을 나갔는데
49:25
2화 여중 거 다니면서 어 매일 아침마다 그 학교 학생들 선생 줘 선생님들 모두가 모여서
49:36
노천극장에서 예배를 봤어요 그러면서 기독교를 접했는데
49:43
저는 어 이민 나가서 생활하면서 결국은 기독교 조직 조직 종교를 떠나 게 됐어요
49:54
음 네 그것은 저한테는
50:01
저는 일찍이 전쟁 동안은 1953 년 1950 년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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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때 부모님 따라서 p 남을 갔다가 흰 충청북도 입장 이라는
50:14
곳에 산속으로 피난을 갔는데 거기에서
50:19
나이가 4살 5살 그럴 때에 큰 그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그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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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로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렇게 해서 완전히 체 이 머리 뚜껑이 열리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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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체험했어요 그리고 나가지고 선언이 와여 줌 고해 에 들어가서
50:42
이노 그 학교가 이쪽 쿄 학교로서 모든 걸 하는 것을 봤을 때 이건 너무
50:50
쪽 답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구 가장 크게 철을 그 기독교를 떠나게 만든 것은 우리는 죄인이다
50:59
하는 그런 그 교목 선생님이 울먹이면서 기도하는 것이
51:05
저한테는 이거 아닌데 으 니 까 elt 그리고 그림에서 이제 그게 저한테 그런 편견을
51:15
그 갖게 했다 할까 아 그러면서 부채 겪고 쭉 짜
51:22
저는 이제 입력 나가서 브라질에 가서 살고 캐나다를 맨날 갖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그랬어요
51:29
그 일이고 나가 그 3 미국에서 어 중소 부에서 미드웨스트 에서 살면서
51:35
어 스핑크스의 누드 미술 이라는 데 살았는데 저희 그 그 살던 곳의 어 주변에는 전부다
51:44
아미쉬 피플들이 살았어요 그래서 암시 피프 뜻 아주 저는 그 암시 피플들의 이론적으로는 전혀 몰랐을 때 그냥 그
51:55
사람들을 주 주변에서 함께 살면서 엄마는 감명을 받았고
52:02
어 근데 그것이 저한테는 기독교라는 그런 것 보다는 그냥 가장 인간적인
52:08
그런거 스 키스 저는 그 지금 얘기 그 그 1 뱁티스트 맨날 그런 얘기를
52:14
들으면서도 어 기부 쭈 굉장히 깊이 들어 오는데 그거를
52:20
그 제가 편견을 갖고 봤던 기독교 그거하고 이렇게 좀 다른게 있기 때문에
52:27
디그 기독교 라고 하셔서 안하면 쑥 듣게 되는거 기수 차별이 어반 없다 라고 생각이 들고요
52:36
그리고 어 지금 우리 엄 김복희 형제님이
52:41
여기 처음 참석하신 것 같은데 이렇게 그 그런거를
52:47
이렇게 통해서 듣게 되서 참 음 감사하고
52:54
1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년이 아직 깊으신 에요
53:00
왠 이 씨는 아직 모르시는 분을 위해서 아까 김보경 길 말씀하셨는데 에라 뱁티스트 공동체 중에 하나고 저희도 여기 그 펜실베니아 뉴저지에서 바로
53:11
옆 주인 펜실베니아 미시 타운이 굉장히 관광지로서 유명합니다
53:19
또 다른 분들 거침없이 안 툴이 김 바나 우리 자매님 다음 주에 아
53:25
휴먼 라이브러리 해 주실 텐데 제가 공지 하도록 하는 부분을 이렇게 1주 미리 들어오셔서 너무 감사하고
53:31
김복희 환경 님도 다음주에 다시 또 나타나서 도우리 굉장히 약합니다
53:37
다른것들 거 말씀을 수운 처벌을 드릴께 김 바나나 얘기하는데 서울로
53:42
드릴게 있는데요 그 우뇌가 기독교 근본주의 라고 잖아요 어 근본 주에서
53:47
문제라고 잖아요 이폰 렉 달 리스트가 오늘은 날 이즈미 진짜 건강한 보아도 멘탈 잊으면 바로 아미쉬 남의 은하의 m
53:56
이런 거죠 건강한 이걸로 한국의 근본주의는 무늬만 무늬만 건 뭐예요
54:04
한국 바빙크 마찬가지죠 미국의 지금 가장 그 골자 부었던 그 뭐라
54:10
뭐 저렇게 도덕적 다소 내내 뭐다 도덕적 다수 라고 하는 남쪽 지방에서 의 근본주의 그런거죠 물이 막은 뭔지 진짜 건강 근본주의는
54:21
나로 암이 지나 애마 이드가 끈 그런 적이 있다 라고 생각해요
54:27
4 여러분 혹시 여러분도 없으십니까 4 우리 김복기 언제 말씀하십시오
54:33
예 일화가 하나 있는데 이제 암이 씨들을 전도 하려고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간답니다
54:38
아 또 사람들 먼저 게 있어요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없다고 보는데 예 이용한 이런데 어우 리갈 저 그 당신의 들한테 예수님 전하라 왔다니까
54:48
그러냐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했더니 그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한 야 그래서 키스의 우리가 그리고 죽으면 은 하나님 나라 갈 거냐고 이렇게
54:56
질문하면 글쎄 우리가 잘 모르겠다고 근데 나보다 도저 밑에 있는 마을 사람들한테 가서 우리가 죽음의 하나님을
55:05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그 사람들 한테 물어 보라고 그 사람들이 간다 그럼 우리가 갈 거고
55:10
아마 뭐 까닭은 우리가 문제가 좀 있을 거라고 이런식으로 이제 이야기하는 것은 1화 듯이 서 있어요 근데 이제 뭐 우스갯소리로 하는 것이기는
55:18
하지만 실제적으로 웃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다 하나님의
55:24
형상을 갖고 있잖아요 저는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다 라는 것도 하나의 우리가 박스 안의 사람들을 이렇게 그저 징 하는 거거든요
55:33
그래서 레이블링 하는 건데 그게 어느 장소에서 는 써서는 안되는 그런 부분들이 좀 있다고 저는 봐요 그런데 그럴 때 우리들이 어떻게요 어떤
55:42
용어를 사용해야 될 건가 때와 장소에 있어서 사실 그리고 우리들이 그
55:47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이 정말 우리 안에서 갖추어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55:53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하나님이 심어놓은 형상이 모든 사람들한테 있는데
55:59
우리가 우리가 갖고 있는 기독교의 그걸 가지고 아 여기에 들어오면 당신은 하나님이 나를 백성 여기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닌거 이렇게 할 수가 없는
56:08
그 굉장히 교만한 것이고 정말 자기가 하나님 되는 일이 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런 부분에서 보면
56:13
우리들이 계속 질문을 해야 될 것은 과연 내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
56:21
그래서 아까 우리 적인 바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기도하실 때 그런
56:26
모습들과 모든 사람을 무조건 죄로 규정하는 원죄로 닌데 원 제로의 신학적으로 보면 용어도 없어요 사실 그리고 게
56:34
이제 어거스틴의 위한 어떤 차례로 기 라든지 이런 데에서 이제 비롯된 것은 개념 들인데
56:39
어가 1 100 테스트는 원제 론에 대한 어이 이야기할 때 원 제로는 성경 상의 5가 아니다
56:46
그리고 실제적으로 더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여전히 있다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속 부르고 계신다 그래서 스틸 인더
56:55
이미지 굳이 10 표현하자면 모든 사람에게는 아무리 잘못을 크게 하고 줄을 졌어도
57:01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은 아버지로써 어머니 로써 기다리고 계신다 이런 것에 대한 어떤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57:09
들이 갖고 어렸을 때부터 배워왔던 걸 신학에 대한 용어들을 계속 한번 질문해 보고 왜 이럴까 궁금한거 를 그냥 내 거두지 말고
57:18
용어 하나를 살펴보다 보면 굉장히 큰 배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 그 똥을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구요
57:27
같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제법 입니다 예 아 10:10 이라 마무리를 하고 싶습니다
57:34
그리고 더 밤을 세워서 얘기를 하고 싶은데 저는 오늘 우리 김복기 형제는
57:40
말씀 들으면서 아둘람 공동체 에게 주시는 말씀 중에 하나는 회복적 정의 가 아닐까
57:48
제가 고민하는 것은 아들넘 공동체도 2배 타선과 포용성 그래도 우리는
57:57
잘랐다 라고 말하면서 메카 줘 신학적 신앙적 고집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58:04
2 베타 성에 대해서 내 속에 가시가 아닌가 그렇다면 저 다님 독사 들과
58:13
저 태그 키 극우 어 짱돌 어 무늬만 아 극우파 정광훈 이들을
58:23
내가 찔러 죽일 거 가 어 전원이 회복적 정의를 어떻게 아둘람 공동체 는
58:30
고민 할 건가 라는 고민이 참 많이 됐는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 김복희 형제 님께서 장로 그 배경을 가지고
58:38
에라 뵙게 쓰듯 스트로 전향하고 메노나이트 로 전향 하면서 어떤 인생이
58:45
어떻게 구체적으로 큰 충격과 변화와 관련이 되는 지요 얘기 정말
58:51
궁금하시면 시간이 아까 시간이나 돼 가지고 다음에 한번 또 모셔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되는데
59:00
고것도 뭐 30초 안 해주면 한번 한 말씀 좀 예고편으로 해주시면 안되요
59:05
어떻게 인생은 전력 저는 전향 한 적이 없구요 우리 아까 우리 이번에 선생님께서 기반해서
59:12
주님께서 그 저 제도 기회를 말씀하셨는데 지도 교회와 조직 교회는 노라죠 문어 젖고 사실은 그건 교회가 하고 볼
59:20
수 없다고 저는 봐요 물론 무조건 다 아니다 이렇게 볼 수는 없으나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 것이
59:27
아니라 우리의 그 그리스도의 그 신앙의 그 예수를 따른다 라는 삶이 우리
59:33
그냥 사람을 바꾸어 놓는 것 같아요 해서 장로교 도 괜찮고 뭐 뭐 안
59:39
먹어도 괜찮아요 근데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차 끌리는 기회가 되어 질이 사람을 죽이는 교회가 돼서는 안 된다고 이런
59:46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전에 전장은 적이 없어요 4 알겠어 수십 년씩 4 그 다음에 한번 기회가 되시면 보셔서 재능 점보 바닥이 있었습니다
59:55
내 감사

2023/07/19

[하나님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207호 다시 쓰는 기독교세계관⑭]9장 교회 : 하나님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中) < 복음과상황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207호 다시 쓰는 기독교세계관⑭]9장 교회 : 하나님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中)
기자명 복음과상황  승인 2007.12.18 14:46 
===

교회는 가족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개인과 개인의 응답과 윤리, 혹은 그들의 집합으로서의 집단이 아닌 하나의 공동체, 세상과 구별 짓는 공동체를 창설하는 것이다. 구원은 개인적이고 인격적 측면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다. 본질적으로 사회적 차원을 지닌다. “복음은 바로 공동체적인 사안이다. 이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공동체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뱅크스, <바울의 공동체 사상>, 62). 하나님나라는 그것이 나라인 한에 있어서 결코 개인의 차원으로 축소될 성질이 아님을 자명하게 전제한다. 하나님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의 공동체요 사회이다. 하나님나라가 단순히 내세의 지복과 열락, 현세의 성공과 욕망의 결정체도 투사체도 아니다.

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새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어찌나 철저한지 가족 관계를 능가한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 어떤 의무에도 우선하는 부친의 장례도 후차적인 것으로 뒤로 밀쳐놓도록 만든다(마 8:21~22). 가족이 원수가 되고(마 10:34~39) 예수와 복음을 위해 가족과 재물마저 포기해야 한다(막 10:29~30). 대신에 당신과 함께 한 자들을 한 가족으로 선언(막 3:31~35)한다. 예수야말로 세상의 어떤 집단이 요구하는 충성과 족히 비길 수 없는 절대적 충성을 명령하신다. 그러한 충성을 바치는 이들의 모임이 이전의 가족 질서와 구별되는 대안적 가족을 만드는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 모든 기이한 본문을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N.T.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615).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는 혈연·지연·학연 등 온갖 인연으로 얼키설키 얽혀진 집단을 반대한다. 그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자신의 어떠함이 아닌 그의 이력과 경력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진군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나라는 이전에 소속되었고, 정체성이 형성되고, 충성을 다하던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인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인종·민족·씨족·가족에 근거한 혈과 육의 집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배타하는 예수에 대한 절대 충성과 어떤 것도 배타하지 않는 만인에 대한 절대 사랑으로 형성된 공동체이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에는 첫째,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다(<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154~62). 인종적·민족적 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 가족이 되는 데에 걸림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직 주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있을 뿐이다. 특수하게 민족과 인종의 교회가 예외적으로 가능하다. 허나, 타민족과 인종의 무시와 배제는 그리스도의 몸을 피부 색깔로 규정하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바울에게 율법과 할례가 그토록 불붙는 논쟁이 된 것을 이제 조금 이해하게 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축소한다. 바울은 복음과 교회가 내장하고 있는 민족과 인종 공동체를 넘어서는 비전을 보았다.

둘째, 노예도 주인도 없다. 바울이 빌레몬을 돌려보낸 것이나 종으로 그대로 있으면서 주인을 섬기라고 한 권면을 보아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어떠한 사회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는 그런 구별이 철폐된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스런 형제로 대우해야 마땅하다(몬 16).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소유에 따라 교회에서도 상응하는 발언권과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경제·사회적 신분이 타파되는 것은 사회가 지향하고 나아갈 바를 선취하는 것이다. 미리 보는 청사진이다.

셋째, 남자도 여자도 없다. 성(性)의 구별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남성이라는 이름만으로 우월하거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으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침묵이 강요되고, 순종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의 가족 질서와 대조되고 대척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체제의 반영일 뿐 창조의 동등성과 평등성에서 멀찌감치 이탈한 것이다. 여성이기에 사역과 직분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성을 판단 척도로 삼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서는 예수의 뜻과 길에 무지몽매한 남성 제자들과 그 길을 준비하고 동행하고 동참하는 여성 제자들을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지 않는가?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원수처럼 여기는 이들, 성적인 소수자들이나 이념의 차이 등, 그런 모든 것들은 세상이 그어놓은 온갖 경계와 위계일 뿐이며 교회 안에서 제 역할과 구실을 할 수 없다. 교회는 창조주를 다 함께 아빠(Abba)라고 서슴지 않고 고백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와 자매가 되는 한 가족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이들을 한 가족의 일원으로 대해야 마땅하다. “지금 예수를 따라가는, 하나님나라 때문에 종래의 것들을 물리치고 떠나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의 새 가족이 된다. 하나의 새로운 가정에 역설적으로 다시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들과 자녀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75).

교회는 신자들의 가족 공동체다. 가족이라는 상징은 교회란 모든 것을 넘어서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공동체를 말한다(Yoder, Body Politics, 34~35). 스토아 철학도 모든 인간의 존엄을 강조했지만 공동체 안에서 통합되고 통일되는 비전은 오로지 그리고 전적으로 예수의 것이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꿈이기도 하다. 그는 흑인들만의 사회를 추구한 맬컴 X와 달리 흑백이 차별 없이 한 식탁에 나란히 앉게 되는 미래와 현실을 소망했다. 한때나마 주인과 노예였으나, 한 형제 자매가 되어 피부색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지 않고 인격으로 사람을 대하고 평가하는 차별 없는 자유의 나라(카슨 엮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289)의 원천은 초대교회와 바울을 경유하여 예수에게로, 그리고 창세기의 하나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 그 꿈은 한갓 꿈이 아니다. 현실이요 실재이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은유는 필연적으로 교회를 가정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교회가 가족이기에 초대 교회는 정기적으로 가정에서 만났다. 모임의 빈도수를 확정할 수 없고, 크기는 저마다 달랐고, 공간 역시 다양했지만 가정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가족과 가정이라는 메타포가 함축하는 것 중의 하나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교회 공동체가 친밀한 관계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면 족하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독특성은 “가정에 기반을 두었다는 사실보다 그들 모임의 성격과 그 역동성의 원천에 있었다”(<바울의 공동체 사상>, 91). 그들은 가정에서 모이는 지역 교회를 우주적 교회의 일부도, 하나님나라의 부분으로도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교회 = 가정 교회였고, 지역 교회 = 하늘 교회였다(86~88).

또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내 뜻 삼고 그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침례(baptism)이다.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한편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나라의 가족이 된다. 그러니까 침례는 중생과 입교의 의미가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침례를 주라는 명령과 침례가 아닌 복음을 전한다는 바울의 말(고전 1:13~17)을 일치시키는 길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롬 6장)의 외적, 아니 공적인 표현이자 실천이라는 점에만 동의하도록 하자.

침례를 그 나라와 교회의 일원이 아닌 세속 사회의 멤버십 확보로 전락시킨 유아세례는 분명히 거부되어야 한다. “유아 세례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 세계, 기독교 사회의 기초이며,(중략)  민족 교회의 토대”이기 때문이다(몰트만,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334). 갓 태어난 아이에게 칭의의 관점에서 세례를 베풀 하등 이유가 없다. 게다가 오늘과 같은 다문화적, 다종교적 사회에서 “왜 기독교인 아이들만 아이들로서 세례를 받”(336)아야만 한단 말인가? 그러니 아이들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위탁하고, 아이에 대한 소명을 확인하는 하나의 행사는 될 수 있을 것이다(349).

내가 여기서 상당히 휘발성이 강한 침례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침례가 일면 교회 공동체의 한 가족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일뿐더러 또한 세계관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듭나서 받는 침례는 이전의 관계와 관점의 변화를 의미한다. 침례를 받는 것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이다. 로드니 클랩은 입양되는 아이가 새로운 가족과 친척, 이름, 전통을 물려받는 것처럼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A Peculiar People, 100). 이전의 생물학적 가족과 다른 인격, 국가와 다른 세계에 소속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새로운 피조물의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고후 5:17).

“이러한 빛에서 본다면, 침례는 상당히 전복적이다.” 가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 이전에, 그리고 그와 견줄 수 없는 충성을 전적으로 주님에게만 둔다는 것, 그래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례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이며, 교회와 국가의 분리이며, 그에 따른 사회·정치·경제적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는 재빨리,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확하게 하나의 시민 불복종 행동으로 볼 수 있다”(102). 위험한 적이, 이원론이 아니라 혼합주의라면, 유아세례가 국가와 민족에 근거한 것이라면, 침례가 이전의 관계와 관점의 변화의 공적 표명이라면, 침례가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회와 문화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면 유아 세례는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여간에 교회는 새로운 정체성과 문화를 갖는 가족 공동체이다.

교회는 대조된다

신구약 전체를 일관되게 통합시켜주는 주제 중 하나는 대안 공동체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땅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애굽의 노예인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고, 바벨론에서 포로 된 백성들을 불러내신 것은 제국의 질서와 체제와 철저하게 단절된 새로운 사회 건설의 의미가 있다. 월터 부루그만의 말이면 족하다. “출애굽에서 출현한 현실은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종교이거나 하나의 새로운 종교적 관념이거나 자유의 한 비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한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의 출현, 역사적 몸을 지닌 하나의 공동체의 출현, 법률을 만들고, 지배와 질서의 패턴을 만들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규범과 책임 있는 권위를 내세워야 할 공동체의 출현이다”(<예언자적 상상력>, 19). 이스라엘은 제국에 대한 대안적 질서이자 세상에 대한 대답이다.

예수의 사역은 구약의 옛 이스라엘을 계승하면서도 대체하는 새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뉴비긴은 예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고 부정적인 진술을 먼저 한다(<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 33,46). 예수가 한 권의 책도 쓰거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 가지 긍정적 답변 중 첫째가 공동체이다. 그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예수를 통해 온전히 계시된 하나님의 이야기를 살아내는 제자 공동체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즐겨 듣고 기억하고 인용한다. 그 속에 담긴 진리가 참으로 오묘하고 깊은 탓이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를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로서는 글의 한계와 글의 최종적 지향이 다름 아닌 공동체 형성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다.

리처드 헤이스는 신약 전체의 포괄적인 윤리적 비전을 파악하는 느슨한 통일성을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라는 세 가지 이미지로 사용한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10장). 이것들은 신약의 가르침을 조화롭게 잘 설명하며 실제적인 윤리적 지침을 제공하는 틀이다. 여기서 공동체는 교회론이고, 십자가는 기독론, 새 창조는 종말론이다. 하나님나라는 십자가에서 완성되고 절정을 이루었으며, 종말에 있을 새 창조는 십자가로 인해 드러난 부활의 능력을 장차 도래할 그 날과의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현 시대를 변혁한다. 교회는 십자가의 삶과 새 창조의 삶을 예증하고 확증한 공동체이다. “성경 이야기는 언약 백성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초점을 맞춘다. 공동체는 그 집단적 삶을 통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표시로 서서 대안적 질서를 구현하라는 부르심을 입었다”(311).

교회란 세상에 대한 대안적 질서의 구현이며 하나님나라 질서를 미리 보여주는, 예시이자 예증이다. 이것이 신구약 전체의 일관된 주제와 일치한다. 이제 이것이 한국교회에 갖는 함의를 살펴보자. 김동춘은 그의 논문 “바른 교회를 향한 탐색: 양극적 교회론, 통전적 교회론, 대안적 교회론”에서 왜 교회가 대안이고, 대안 공동체인지를 잘 짚어주고 있다. 그가 보기에 현재의 교회는 영혼과 개인 구원을 지향하는 보수 교회와 사회 참여와 정의를 추구하는 진보적 교회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두 통전적 교회론으로 이동 추세가 뚜렷하다. 복음 전도와 사회 책임이 어찌 둘이며 분리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기독교철학연구> 2호, 164).

하지만 통전주의는 양극적 교회론을 극복하였지만 하나에 다른 하나를 더하는 것은 바른 교회 정립에 얼마나 기여할지 의문시 된다. “성장주의 교회론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지 않은 채 기존의 성장논리에 약간의 사회봉사적 교회관을 더하기 하는 형태의 통합적 교회론은 한국교회의 병리적 실체를 인식하고 근원적인 교회쇄신을 던져주기에는 역부족”이다(170~71). 물론 과연 통전적 교회론이 양자를 기계적으로 짜 맞추고 있는지는 의문이 남지만, 적어도 한국교회의 현실이 외형적 성장과 팽창을 가속화하기 위해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사회 참여와 봉사를 끌어들이지 않느냐는 지적은 십분 옳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교회론적 정체성의 상실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일차적 과제는 양적 성장도, 사회적 책임 수행 기관이 되는 것도 아닌 교회가 교회되는 것, “세속적 삶의 방식에 비타협적으로 대항함으로써 하나의 대안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세상질서와 차별화된 대조사회로서 교회, 그런 교회가 우리 시대의 대안적 교회상이 아닌가 한다”(178). 조금은 완곡하게 표현되었지만 입장은 분명하다. 자신의 본질은 그대로 둔 채 다른 어떤 것을 가져다가 포장하고 덧칠하는 형식의 교회 이해로는 성장주의를 벗어날 도리가 없으며, 더 나아가 예수가 원했던 공동체를 결코 이룰 수 없다.

자, 그러면 세상의 질서와 선명하게 구분되는 대안 질서의 실체는 무엇인가? 로핑크는 산상수훈에서 세 가지를 추려냈다. 폭력의 단념(5:38~42), 무조건 화해(5:23~24), 물질에 의지하지 않는 서슴없는 신뢰(6:25~34)이다(<산상설교는 누구에게?>, 184~200). 나중에 이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도 보탠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저 한정적인 몇 가지 규정일 뿐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목록들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에베소서(5:22~6:9)와 골로새서(3:18~4:1), 베드로전서(2:13~3:7)의 가정 규례는 신약의 윤리적 가르침을 인상적으로 집약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질서와 정체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들이다.

나는 오히려 예수의 광야 유혹 사건(마 4:1~11; 눅 4:1~13)에서 대조성을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상수훈은 워낙 대표적 본문인지라 상투적이고 진부할 수 있고, 예수 스스로 유혹으로 느꼈을 문제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도 동일한 유혹의 실체들이면서도 예수와 달리 유혹을 소명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작금의 상황을 폭로하기에 유익하다. 유혹의 핵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어떻게 인식하고 증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마귀는 돈, 성(聖), 힘을 리트머스 시험지 삼아 예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의 제자라면 응당 그런 것들을 활용해서 너의 너다움을 만천하에 드러내라고.

헨리 나우웬이 잘 간파하였듯이 오늘 우리에게는 “보통 그것이 시험으로 간주되지 않고 소명으로 간주”된다(<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39). 우리 안에 내재된 상향성을 향한 충동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상황에 부합하고, 이목을 집중하고, 권력을 확보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한다는데 무슨 시비며 그 얼마나 경건하기 그지없는 모습인가라고 경탄하는 우리에게 그것이 시험이 아니라 사명이요, 목표요, 긍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낮아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동참케 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자기의 욕망과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활용한다.

한국교회 안에 그러한 징후들이 안타깝게도 많이 포착된다. 언필칭 기독교 기업이라 자처하던 모 기업은 돈을 더 많이 확보하여 더 많은 섬김과 나눔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사회적 약자를 양산한다. 목전의 유익을 위해 기업 무를 자의 신성한 권리와 사명을 포기한 자를 성서는 ‘아무개’라고 기록한다. 영어성경은 친구라고 번역하고 있고, 공동과 새번역은 ‘여보게’로 하고 있으나 오히려 개역처럼 ‘아무개’로 하는 것이 어원적으로나 문맥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타당해 보인다(Ruth/Esther, WBC, 196은 아무개(So-and-So)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가난한 자를 돌본 자의 이름을 ‘보아스’로 기억한다. 눈에 보이는 돈을 따라 살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을 따라 살 것인가? 보아스로 기억될 것인가? 아무개로 기록될 것인가?

7,80년대 혹독한 독재 체제에 저항하고 투쟁하던 분들이 권력 쟁취에 골몰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저항이나 권력 획득을 통해 교회 밖의 정치적 구조를 개혁하려 했다는 증거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221). 교회의 대 사회적 참여가 권력의 재편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적잖이 염려된다. 우리는 한 사회의 진보나 보수가 하나님나라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나 여하 한에 있어서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19세기 문화 개신교를 통해, 그리고 월터 라우센부쉬를 통해 본 바 있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특별히 보수적인 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분단과 독재 체제와 암묵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하여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리고 그것도 지금?

마지막으로 교회가 대조되기 보다는 순응하고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경건 이해이다. 우리의 신앙과 종교 자체도 유혹거리가 된다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마태복음 6장은 경건을 과시하려는 우리 안의 끈질긴 유혹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리처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도 보듯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반복적으로 예수는 은밀하게 행할 것을 당부한다(6:4; 6; 18). 교회들이 너무나 요란하게 종교적 행위를 실천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로 불거진 교회의 선교 양태는 복음의 진정성으로부터도 멀고,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김동춘이 지적했듯이 교회 성장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바보다. 요는 그런 것들이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의 거부는 빵의 경제, 경건한 종교, 힘의 정치가 아니고, 그것들이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공적으로 증언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으로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왜곡이자 불순종이라는 점이다. 생각해 보라. 그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면 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예수가 거부한 것은 당시 시대의 발전이 뒤쳐있기 때문도 아니고, 사용 방법을 몰라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지혜롭다(고전 1;26). 그것으로 세상을 개혁할 수 없고,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광야 유혹 사건을 끄집어낸 것은 현재 우리가 세상과 대조되기 보다는 세상에 순응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고, 바로 이러한 영역에서 교회의 대조성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 이다.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에게 신실하며 세상을 대하여 대조되는 고유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독교 고유의 삶의 방식을 창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통합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안에서 창조적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엘룰,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53).

이는 세상에 대한 ‘저항의 도덕’도, ‘순응의 윤리’도 아니다. ‘대조의 정치’이다.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할 빛으로 어둠에 처한 세상과 극명히 대조될 때, 악으로 악을 더하는 세상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드러낼 때, 높아지기 보다는 도리어 섬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을 때, 교회는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행 2:12, 표준)라는 질문을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며, “마음이 찔려서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행 2:37)라며 세상이 한 번도 의심해보지 못한 자신의 타당성 구조를 반성하고 회심하게 된다.

간주곡

지금까지 나는 교회의 개념과 본질에 대해 세계관적 고찰을 하였다. 앞으로의 논의는 교회의 존재 보다는 행동에 집중하고자 한다. 하나님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를 살폈다면 당연히 그 교회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하나님나라를 반영하는 성품을 형성하는 곳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교회는 자신의 행동 기준을 찾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성서로 삼고 따르는 무리이다. 당연히 제자의 삶은 성서 이야기의 최신판 번역이며, 쉽고도 정확한 해석이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증언하는 증인 공동체이다. 이를테면 선교 공동체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국가와 관련 하여서는 자유하다.

여기서는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주는 것이 혼란을 줄이고, 이해가 증진될 것이다. 하여 나는 “독자들의 효과적인 이해를 위해 교차대구법을 선택했다”(<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168). 그 각각은 서로 교차한다. 천국 = 예배, 교회 = 자유, 신자 = 반영, 가족 = 해석, 대조 = 증언이다. 그리고 “이 간주곡은 교차대구법의 이음쇠에 해당한다.”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앞과 뒤에서 호응하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사실 형식적으로 미리 짜놓은 구성에 맞춰 책을 쓰기가 쉽지는 않다.” 어색한 조합으로 보일런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억지 조합은 아니다. 양자를 촘촘하게 결합하여 내적인 연관을 부각시키지 못한 것은 내 과문한 탓이니 다만 교회의 존재와 행동을 파악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이 전일적으로 통치하는 천국이기에 교회의 우선적 과제는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교회 = 천국이었으니, 교회는 예배한다. 둘째로 교회는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의 다른 말이다. 이는 교회가 국가가 아니란 말과 상통하고 일치한다. 교회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이해와 이익이라는 유무형의 자율적이고 타율적인 통제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신자는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다. 그러기에 교회는 자유인 것이다.

다음으로 신자는 반영한다. 교회 = 신자의 정식의 요체는 전 신자 제사장 교리이다. 세상에서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기준과 방법을 따르게 된다.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반영하고 반사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신자이다. 예수의 ‘주되심’과 ‘주다움’을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다. 넷째, 교회는 가족이라고 했다. 예수의 정의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의 모임이요, 그들이 한 형제요, 자매가 되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인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대조된다. 이는 증언과 상응한다. 대조가 지배와 분리, 폭력의 거부라면, 우리의 선교 양식 또한 그러해야 할 터. 어느 때나 그랬지만 지금처럼 콘스탄틴 이전의 선교 방식에 대해 처절히 반성하고, 이후의 선교 방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때는 드물다. 그 길은 지배하지 않으면서, 폭력과 무력으로 개종을 강제하지 않고, 복음의 담지자요 수혜자인양 행사하지 않는 방식의 전도와 선교이며, 이는 세상의 기업과 국가의 확장과 확대와는 분명 다르다. 자, 그러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에서 ‘교회답게’ 하는 것으로 논의를 넘어가도록 하자.

교회는 반영한다

먼저 작게 시작해 보도록 하자. 교회가 신자 공동체이므로 전 신자가 교회 안팎에서 사명을 따라 사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의 구원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듯이 우리의 사역 역시 억지로 짜내거나 퍼내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내면과 외면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외부 세계의 변혁을 꿈꾸는 자, 반드시 내면세계도 정돈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둘은 함께 그러면서도 서로 공존하면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외적인 행동이 우리의 내면의 성품을 형성하고 강화하기도 하고, 반대로 내면의 성품이 외적 행동을 유발하고 초래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이고, 하나님나라가 예수 자신이라면, 당연히 교회는 예수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다. 교회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을 본다. 마치 우리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듯이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세계 경영의 경륜이 무엇이고 어떠한지를 정사와 권세들이 알고자 한다면, “모든 성도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바울 자신과 교회를 주시해야 한다고 대담하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를 시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엡 3:10).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의 가시적 구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예수의 성품을 닮은 공동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 시대의 지상 과제인 통일에 대입해 보자. 김창수는 ‘페스카마호의 비극’을 통해 내용과 과정을 묻지 않은 채 무조건 통일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간 독재 시대에 적절한 구호였고, 지금은 통일을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 34~37). 페스카마호 사건은 비인격적 대우와 구타를 참지 못한 조선족 선원들이 한국인 선원 11명을 집단 살해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동포들 반응은 예사롭지 않다. 이들은 끔찍한 살인 사건을 일으킨 피의자들에 대해 광범위한 동정을 탄원서를 통해서 나타냈다. 그만큼 중국 동포와 한국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다. “조선족 사기 피해 사건,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은 관용을 실천하며 더불어 살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따라서 그는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을 연습하지 않은 채 맞이하는 통일은 ‘페스카마호의 비극’을 연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비극을 지양하고 공존을 연습할 수 있는 최고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물론 현재 교회는 일치보다는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불일치라는 스캔들은 우리가 사회적 과제를 인식하면 할수록 상당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화스러운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는 자가 되라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Hauerwas, The Peaceable Kingdom, 100).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분명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이며, 신자는 그 나라의 백성이다. 우리는 예수를 세상에 반사한다. 그것이 성도의 사명이자 과업이다.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도 용납되고 인정을 받는다. 예수가 원했던 교회 공동체가 ‘페스카마호의 비극’을 중지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교회 안에서는 “받아들여진 사람이며 따라서 하나님나라가 돌입하는 거기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종교적으로 완전한 가치가 없는 양으로 자격이 박탈되어서도 안 된다”(<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148). 하나님나라의 새 질서를 구현하는 교회 안에서 어떠한 억압이나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된다. 여자이기에, 어리다고, 가난하다고, 냉대를 받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인종적·민족적 차별도, 성차별도 없고,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사회적이고 신분적 인 차별도 없고, 그것이 더 이상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는 곳이다.

이것을 김창수의 말처럼 미리 연습하는 훈련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사회·경제·정치적 이해관계에도, 민족과 인종·성·나이·지역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가족이 되는 훈련과 경험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교회다움이고, 또한 그것이 통일의 준비요 과정이다. 따라서 교회가 복음에 신실한 것은 사회와 격리나 후퇴가 아니라 통일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사회변혁운동이 된다. 분단된 조국은 교회를 통해서 통일 이후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과정이 어떠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잠꼬대처럼 들리겠지만, 하나님의 꿈과 소원을 자신의 꿈과 소원으로 삼는 자의 마땅한 모습이 아닐까?

이러한 공동체와 삶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성품(character)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신자의 성품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바로 예수의 이야기를 살아내는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다. 모든 실천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와 이야기를 갖고 있다면,(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311) 응당 성서 이야기가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출처이자 결정의 근거이다. 이 성품은 자동적으로 습득되지 않고 노력해서 획득해야 한다(Hauerwas, Vision and Virtue, 49). 예수 이야기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실천하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예수의 성품을 수련하게 된다. 물론 개인과 공동체 간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각 개인의 성품은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다.

신자는 교회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다. 알란 크라이더는 교회 안에서의 삶을 평화를 만드는 자의 반사행동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평화교회는 가능한가?>, 45~48). 그는 평화교회로 알려진 메노나이트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그림을 들어 설명한다. 더크 윌렘스라는 사람이 물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 내는 그림이다. 17세기경 네덜란드에서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게 되자 이를 피해 달아난다. 마침 자신을 추적하던 사람이 물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다. 더크는 도망하는 대신에 그 사람을 구하고, 그 결과 체포되어 순교를 당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크라이더가 주목하는 것은 더크의 반사 행동이다. 얼음 속에 빠진 사람은 빨리 가라앉고 신속히 구조하지 않으면 생명을 구할 수 없다. 추적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즉각적이고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을 취해야 한다. 아주 잠시 머뭇거릴지라도 즉각 행동해야 구조할 수 있다. 완전히 순간적이고 반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더크로 하여금 그런 반사행동을 하게 했을까? 그는 어떻게 원수의 필요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행동과 습관을 개발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크라이더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를 믿는 제자가 되겠다는 결정과 다른 하나는 그가 속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에서 찾는다. “그러한 반사 행동은 더크에게는 개인적으로도 가능했지만, 주로 습관적으로 몸에 익히고 그런 규율을 지키는 사람들의 집단을 통하여 형성된다. 필자는 그가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원수를 사랑한 특정한 종류의 교인이었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행동 그대로 반응했다고 말할 수 있다.”
크라이더는 우리에게 묻는다.

누가 당신을 만드는가? 누가 당신의 반사행동을 훈련시키는가? 당신의 교회인가? 가족과 친구들인가? 아니면 TV 광고, 영화, 화장품인가? 만약 그 훈련의 주체가 교회라면, 당신의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분의 길을 세상에 증거 하기 위해서 당신의 일상생활에서처럼 개인적인 반사행동을 구체화하도록 도와주는가?(48)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반사적으로 뒤따르는 행동을 연습하고 지금 행하고 있다고 말이다. 교회는 예수의 성품을 반영하는 공동체요, 그것을 훈련하는 공동체이다.

김기현 목사 (부산 수정로교회)

2023/04/25

알라딘: 갈등전환 | 정의와 평화 실천 시리즈 존 폴 레더락

알라딘: 갈등전환
Conflict Transformation Clear Articulation

갈등전환 
 | 정의와 평화 실천 시리즈
존 폴 레더락 (지은이),박지호 (옮긴이) 대장간2018-08-15
































기본정보
112쪽



목차


추천의 글
역자 후기
1장·갈등전환이란
2장·갈등전환의 렌즈들
3장·갈등전환 정의하기
4장·갈등과 변화
5장·갈등해결과 갈등전환 연결하기
6장·갈등 지도 그리기
7장·과정-구조: 변화를 위한 토대
8장·수용능력 키우기
9장·갈등전환 틀 적용하기
10장·갈등전환, 변화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내라


추천글
존 폴 레더락 교수는 갈등을 보다 깊고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하려 한다. 인간과 세계, 그리고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대화를 중시하고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한다. 갈등전환(conflict transformation)이란 다소 낯선 이름을 붙인 것도 그런 관점과 접근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니 ‘해결’과 ‘전환’을 도식적으로 나누고, ‘갈등해결’ 분야를 너무 좁게 본 아쉬움은 있지만, 레더락 교수의 그런 문제의식과 강조점은 나 역시 깊이 공감한다. 이 분야의 명저로 꼽히는 그의 저서가 깔끔한 번역본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것을 환영한다.
- 강영진 (갈등해결학 박사.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갈등해결연구센터장·겸임교수)

남북관계를 말하면 언제나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틀 속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런 논쟁은 정치적, 군사적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해결할 수 없는 갈등만 증폭시키고 만다. 한반도의 평화구축을 위해서는 정치적 접근뿐 아니라 시민사회 구성원이 평화 감수성을 높이고 평화적 삶의 방식을 체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책을 통해 갈등전환적 패러다임으로 한반도 상황을 성찰하고 갈등을 긍정적으로 전환해내는 평화역량을 쌓게 되길 기대한다.
-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존재하고 당장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이 일반적인 한국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갈등전환”이라는 문제 설정과 접근 방법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대한민국은 왜' 저자)

‘갈등전환’이란 말을 역자에게 처음 들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 갈등해결적 접근에는 강자의 논리가 내포되어 있어 폭력적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갈등’ 자체를 창조적 힘과 변화의 동력으로 바라보는 데서부터 갈등전환이 시작된다는 저자의 설명에 깊이 공감한다. 갈등 속에서 한 편이 무릎을 꿇고 다른 한 편이 승리하는 모양새가 아닌, 서로 상생하는 지혜를 이 책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방인성 (하나누리 대표)

우리의 인간관계, 사회 그리고 교회 속에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어디서도 이런 갈등 해결방법을 우리가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갈등을 지혜롭게 전환시켜 저자의 말처럼 “폭력은 최소화 하고 정의는 최대화하는” 법을 교회가 먼저 배우고 익혀, 갈등으로 갈래갈래 찢겨진 사회 속에 대안을 제시하며, 더 나아가 사회적 구심점이 되길 기대한다.
- 김형국 (나들목교회 대표목사, 신학박사, 하나복DNA네트워크 대표)




저자 및 역자소개
존 폴 레더락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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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턴 메노나이트대학의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현재 노틀담대학의 존비크록국제평화연구소에서 갈등전환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갈등과 분쟁 현장에서 20년 넘게 활동하며 탁월한 업적을 남긴 국제분쟁조정 전문가로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북미 등지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콜로라도대학에서 사회학(사회갈등 프로그램)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풍부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평화교육에 관련된 15권의 책과 매뉴얼을 영어와 스페인어로 저술 및 공동집필했다. 가족으로는 아내, 웬디 여사와 두 자녀 앤지와 조쉬가 있다.

최근작 : <갈등전환>,<도덕적 상상력>,<화해를 향한 여정> … 총 4종 (모두보기)

박지호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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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스턴 메노나이트대학에서 갈등전환학을 공부하고, 현재 (사)하나누리 산하의 한국갈등전환센터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 언론사 기자 및 편집장으로 일했고, 한국평화교육훈련원 회복적정의 전문강사 및 ReconciliAsian 한국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난이도가 높은 편이지만 갈등 전환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seogarden 2023-02-0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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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Book of Conflict Transformation: Clear Articulation Of The Guiding Principles By A Pioneer In The Field Paperback – 1 January 2003
by John Lederach (Author)
4.5 out of 5 stars 235 ratings

This clearly articulated statement offers a hopeful and workable approach to conflict―that eternally beleaguering human situation.
John Paul Lederach is internationally recognized for his breakthrough thinking and action related to conflict on all levels―person-to-person, factions within communities, warring nations. He explores why "conflict transformation" is more appropriate than "conflict resolution" or "management." But he refuses to be drawn into impractical idealism.
Conflict Transformation is an idea with a deep reach. Its practice, says Lederach, requires "both solutions and social change." It asks not simply "How do we end something not desired?", but "How do we end something destructive and build something desired?" How do we deal with the immediate crisis, as well as the long-term situation? What disciplines make such thinking and practices possible?
A title in The Little Books of Justice and Peacebuilding Series.

80 pages
Product description

Review
"What I see is that our human community, local and global, is on the edge of historical change: Patterns of violence and coercion will be replaced with respect, creative problem-solving, individual and social capacities for dialogue, and nonviolent systems for assuring human security and social change."
About the Author


John Paul Lederach, a scholar with the Joan Kroc Institute of Conflict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Notre Dame and a distinguished scholar with the Conflict Transformation Program at Eastern Mennonite University, writes out of his more than twenty years of work in Central America, Asia, Africa, Central Asia, and North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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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details
Publisher ‏ : ‎ Good Books; Original ed. edition (1 January 2003)
Language ‏ : ‎ English
Paperback ‏ : ‎ 80 pages
ISBN-10 ‏ : ‎ 1561483907
ISBN-13 ‏ : ‎ 978-1561483907
Dimensions ‏ : ‎ 13.97 x 0.76 x 21.59 cmBest Sellers Rank: 248,351 in Books (See Top 100 in Books)17 in Communications Law (Books)
27 in Parental & Juvenile Law
27 in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Books)Customer Reviews:
4.5 out of 5 stars 235 ratings


Top reviews from other countries

Kindle Customer david hollis
4.0 out of 5 stars Where the problem truly Lies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2 March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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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verview worth putting into practice with persons who claim to be leaders and have not
The ability to go beyond their group as their intellect is very limited. They like to believe they are leaders but are seen by many as educationally abnormal. They are caught in a time warp and need to see they have to stand aside as they continue to be a hindrance in working to a successful recognition of the first step in Trans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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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ames
2.0 out of 5 stars Incomprehensible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12 Apri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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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 recommended this book by a lawyer dealing with mediation, and as a trained counsellor I thought it would be good to develop my skills. The book is written in very academic language, is repetitive and to be honest I could have summarised what I have learned so far in a single paragraph. To be fair, I have only got 75% thro' the book, but I will persevere and hope it gets better.

2 people found this helpfulReport

Mrs KT Degroot
4.0 out of 5 stars Great New Vision!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16 Februar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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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esting concepts. Lots to ponder on. I reccomend it in the field of Peace & Development studies.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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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ifer Ene
4.0 out of 5 stars ... mind into an academic frame this is a very useful and informative book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28 Jul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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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you get your mind into an academic frame this is a very useful and informative book.
concentration is required but it"s excellent for students of conflict resolution etc.
definitely increased my understa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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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iva
5.0 out of 5 stars Review The Little Book of Conflict Transformation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2 Ma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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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ing book for anyone involved in the peace, conflict resolution and transformation field. it is also handy for those willing to understand the root basics of conflict be it in personal life and one to one individual relationship. as well as how to transform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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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1

[페친][메노나이트] 한국 메노나이트의 기원과 사토시 타카히 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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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메노나이트] 한국 메노나이트의 기원과 사토시 타카히 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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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토시 상은 한국 출생 일본국적인으로 혹카이도에서 농장을 하며 사는 분이다. 일본이름으로 한글로 글을 쓰니, 미리 그 배경 설명부터 좀 해놓는다. 내가 사토시 상을 알게 된 것은 메노나이트 종파와, 한국 메노나이트에 대해 공부를 하다가 일본 메노나이트인 줄 알고 페친신청을 하고 난 후였다.
- 내가 메노나이트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우선 메노나이트가 퀘이커 처럼 평화교회라는 것이었고, 또 미국 퀘이커 처럼 북한에서 지원사업을 해 왔다는 것인데서 시작했으나, 또 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국에서는 퀘이커보다 메노나이트가 더 숫자도 많고, 활동도 많은 것을 알게되어, 그 이유를 이해하려는 데 있었다. 그 이유의 현재적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쓰기로 하고, 여기서는 메노나이트가 한국서 어떻게 시작했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이 사토시 상이나 한국 메노나이트의 현재와 어떻게 관계되었는가를 짧게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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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퀘이커는 거의 함석헌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이기도 하나, 물론 실제로는 미국 퀘이커가 한국에 "선교'활동을 하러 온 것이 함석헌과의 만남의 시작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메노나이트도 한국에 선교를 하러 온 것이 한국 메노나이트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퀘이커의 경우에는 함석헌 같은 큰 인물이 한국에서의 퀘이커 사상의 전달자 역활을 하게 되었으나, 그 외로는 그 전수의 매체가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메노나이트의 경우에는 퀘이커보다 10년이나 먼저인 1950년대에 메노나이트가 한국에 새운 고아들을 위한 직업훈련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이 직업훈련학교는 약 5-6년간 계속하고, 메노나이트 선교단은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당시에 이 학교를 통하여 지나간 아이들이 그 후로 한국 메노나이트의 제 1세대가 된 것같다. 그리고 그 자식들 중에 카나다나, 미국의 메노나이트 대학을 가게 된 사람들이 제 2세대가 된 것이다. 한국 퀘이커의 경우에는 이런 매체가 없었던 것이 한국 퀘이커가 자라지 않은 이유인 것 같다.
- 사토시 상 (47년생) 은 이 메노나이트 직업훈련학교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 직업훈련학교의 출신들은 모두 이 학교의 "은혜"를 잊지 않고 뭔가를 통해 갚으려고 하는 것 같다. 우선은 자신이 메노나이트가 되는 것이고, 또 메노나이트로서 사회에 공헌하려는 것이다. 사토시상의 경우에는 농업기술 전문가가 되어 일본에 오게 되고, 나중에는 정착하여 혹카이도에서 농장을 사서 성공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는데, 은퇴할 나이가 되었지만, 그 농장안에 메노나이트 교회와 학교를 새우는 꿈을 실천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짧은 줄거리이다.
- 언제인가 더 긴 이야기로 쓰게되기를 바란다.







Satoshi Takahi
onSpstreodm40cf 20a ir4h79c85fhi0cy37a1u10Jc092i2nc32h5ucc2a ·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되었으며 좋겠다. 요즈음 날씨는 많이도 추운것이 우사안의 온도가 영하로 내려간다. 누구인가가 길가에 버려둔 고양이를 데리고 와서 목장안에서 함께 지낸지가 몇년이 지났다. 요즈음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송아지 등에 올라 가만히 앉아 있다. 아마 서로가 얼굴을 익혔는지 아니며 야 고양이야 내 등에 올라와 봐 아마 따뜻할것야. 그러면 무겁고 귀챦을텐데 괜챦을까라고 물어보는 고양이 에게 너 얼마나 무거운데 그런말 하니 나야 아무렇치도 않아 우선 추우니까 잠깐이라도 올라와서 앉았다 가 라고 이야기 하는것 같다. 그래 우리네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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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u Kim, Yuik Kim and 1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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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relevant

  • Satoshi Takahi
    예. 고맙습니다. 미국메노나이트는 한국에서 1951-1970년까지 약 20년간 구호, 봉사, 교육, 농촌개몽등 한국에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문없이 많은 봉사를 하여 왔습니다.
  • Cha Mikyung Seraphina
    맞습니다. 전쟁 당시 구호활동을 펼친 후 퀘이커는 군산, 전주 등지에서 의료활동을 전개하였고, 메노나이트는 대구 경산을 중심으로 사무소가 꾸려졌죠, 케이커 그룹 중 미국 AFSC가 1981년 방미를 시작으로 남한, 북한 관계를 유지했다면, 메노나이트는 베트남전 구호활동을 위해 한국을 떠날 때 한국보다 더 어려운 베트남. 이후 북한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죠.
    • Sejin Pak
      Seraphina Cha 퀘이커의 초기 의료활동에 대한 기록을 어데서 읽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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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y
      • Edited
    • Cha Mikyung Seraphina
      Sejin Pak 제가 내일 중 메신저로 전해드릴게요. 참 웰링톤 퀘이커하우스에서 일주일 머무르는데 호주 퀘이커 분들 몇분이 묵으셨어요 첫 방북 사업 글 읽고 반가웠습니다.
  • Yoshiko Hatano
    メノナイト?聞いたことがありません?にほんでは何と言いま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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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e translation
    • 2 y
  • 지성수
    유니테리언도 한국 구호 사업을 하고 철수 했지요.
  • Cha Mikyung Seraphina
    메신저 안 되서 여기다 써요. 군산도립의료원 역사사료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