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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6

다르지만 조화한다 :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기 이찬수 2015

알라딘: 다르지만 조화한다 :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다르지만 조화한다 :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기 
이찬수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15-08-31


양장본320쪽

책소개

기독교 신학자, 목회자이면서 화엄철학과 선불교를 공부한 저자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내면에서 상통하는 종교적 본질을 밝힌 책. 불교적 언어가 불자에게 주는 의미와 기독교적 언어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의 정도가 다르지 않음을 말하면서 서로를 통해 자신에게 더 깊어지는 종교 공부와 수행을 이끌어 내고, 신앙의 거룩함을 일깨운다.

불교와 기독교가 표면상 외형상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해명한다. 기독교가 절대유의 차원에 서 있다면 불교는 절대무의 차원에 서 있으나, 절대는 절대로 통하는 법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종착점은 결국 동등한 체험의 깊이를 나타내며, 붓다와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세계도 결국 동등하다는 것이다.


목차
1부_ 깨달음의 길에 서다
01 인연에 따르다 : 불교의 인간론
02 믿음과 용기, 그리고 깨달음 : 지눌의 신심론과 틸리히의 신앙론

2부_ 불교와 기독교 서로 만나다
03 법신불 일원상과 범재신론 : 원불교의 일원주의와 세계주의
04 모두 절대무 안에 있다 : 니시다의 철학과 기독교
05 창조적 만남과 궁극적 일치 : 길희성과 타나베의 신학과 철학
06 두 종교를 동시에 살아가다 : 불교적 그리스도인 니터의 고백
07 신학을 불교화하다 : 야기의 불교적 신학
08 불교를 수용하며, 신학을 변호하다 : 발덴펠스의 자기 비움의 신학

3부_ 두 세계를 다시 보다
09 종교는 해석이다 : 스힐레벡스의 신학적 해석학: 모든 종교는 해석이다
10 오늘 우리의 구원과 해탈 : 어느 불교적 신학자의 구원관
11 비종교적인 그러나 종교적인 : 비종교인 리영희가 보는 기독교와 불교
12 90점 불교와 70점 기독교 : 두 종교에 대한 애정어린 요청과 희망



책속에서
P. 37 지눌 선사상에서 믿음과 앎은 깨달음, 즉 돈오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지눌이 믿음과 앎의 해석에도 깊은 주의를 기울였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지눌은 『신화엄경론』과 만나는 체험 후에 원돈신해문, 즉 원돈교에서의 믿음과 앎으로 들어가는 문을 상세히 밝혔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선에서 강조하던 돈오를 믿음과 앎이라는 언어로 해석함으로써 화엄의 선화(禪化) 및 선의 화엄화를 꾀했고, 선의 언어로 화엄을 해석함으로써 선의 실천 속에 화엄을 포섭하려고 했던 것이다. 원돈신해문은 믿음과 앎을 통해 깨달음으로 들어간다는 선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드러내 주는 것임과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 및 앎과 깨달음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지눌 선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접기

P. 69 법신불은 구체적 “상징” 또는 “나타낸 바”의 차원과 단순히 동일시할 수 없다. 법신불은, 경험적으로는 불타에게서 알려졌으되, 논리적으로는 그 불타 및 다양한 불보살들의 존재론적 근거로, 또는 다양한 불들을 정말 불이게 해 주는 원천으로 상상된 개념이다. 상상되었다고 해서 그저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려면 먼저 그 깨달음의 존재론적 근거를 확인해야 하기에 나온 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본원·심인·본성 등의 언어는 모두 깨달음의 존재론적 근거로 요청된, 일체의 구체적 형상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근원 혹은 원천이다.  접기

P. 151 한국인은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다양한 종교 사상들을 녹여 내고 있는 한국 안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종교 사상들을 매개로 해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안에 녹아들어 가 있는 한국의 종교가 한국의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해 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국 종교가 이미 온전히 담아 왔던 그리스도성이 기독교 안에서 자기부정적으로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종교는 그저 기독교를 토착시켜 주는 단순한 매체나 고리가 아니라, 기독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이미 충분히 말해 주는 한국적 매개가 된다. 물론 기독교 역시 한국 종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이미 충분히 말해 주는 또 다른 매개가 된다. 이들 간의 차이는 도리어 서로에게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절대매개’로 작용하는 것이다.  접기

P. 186 (일본의 신학자) 야기는 이러한 불교와의 만남에서 인간은 성서와 십자가의 직접적 도움 없이도 본래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죄 없는 사람(=예수)이라 해도 한 인간이 타인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략) 십자가는 본래적 실존으로 이끄는 매개이고 성서는 실존의 근저의 표현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교의 말씀 안에서만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근저에서도 그분을 만난다.”고 야기는 말한다. 그러한 신념으로 야기는 실존의 근저, 통합에의 규정의 장을 제시하면서, 장의 신학을 세웠다. 모든 개체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관계하고 조화한다는 불교적 가르침을 야기는 장이라는 개념을 빌려 신학적으로 전개했다.  접기

P. 254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불교와 기독교의 개개 ‘형식’ 내지 ‘제도’를 벗기고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불교와 기독교란 따로 없다. ‘너’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천적 삶에는 종파가 따로 없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하는 원천적 사실에 종파 간, 성별 간, 지역 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미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있는 인간의 원천적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미 깨달아 있어 부처와 하나 되어 있는 원천적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이미 천주를 모시고 있어(侍天主) 있는 그대로 하늘과 같은 존재인 인간(人乃天)의 원천적 실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일본의 사상과 문화, 동아시아의 종교와 평화 연구자.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일본의 철학자 니시타니 케이지와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의 사상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일본)코세이 가쿠린 객원교수, (일본)중앙학술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 대우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일본정신』,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 『다르지만 조화한다』, 『평화와 평화들』, 『사회는 왜 아픈가』... 더보기
최근작 : <메이지의 그늘>,<보훈과 교육>,<보훈, 평화로의 길> … 총 6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기독교 신학자, 목회자이면서 화엄철학과 선(禪)불교를 공부한 저자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내면에서 상통하는 종교적 본질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은 불교적 언어가 불자에게 주는 의미와 기독교적 언어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의 정도가 다르지 않음을 말하면서 서로를 통해 자신에게 더 깊어지는 종교 공부와 수행을 이끌어 내고,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을 일깨운다.

■ 출판사 서평

깨달음에서 서로를 경유하여 다시 자신에게로
이 책은 ‘세계적 차원의 종교들이 균질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도 대립과 조화 사이를 오가는 기이한 종교 왕국’인 한국에서 태어난 한 신학자의 자기 고백과 그에 관한 부연이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했다. 나는 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임을 그만두지 않은 채 한 사람의 불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인도의 신학자 파니카의 말을 빌려 표현한 대로 불교와 기독교가 궁극적 차원에서는 만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저자는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소통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과정에서 고립되고 배척당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으나 그의 신학 역정과 신앙 모색은 멈추질 않았다.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심층
이 책은 불교와 기독교가 표면상 외형상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해명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종착점, 가령 공(空)과 하느님, 열반과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와 보살, 기도와 염불 등은 결국 동등한 체험의 깊이를 나타내며, 붓다와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세계도 결국 동등하다는 것이다. ‘다르지만 조화한다’라는 말은 “군자는 상대와 조화하면서 차이도 인정한다(君子和而不同)”는 공자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으로, 언어와 관념을 넘어서는 근원의 세계, 궁극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절대유의 차원에 서 있다면, 불교는 절대무의 차원에 서 있으나, 절대는 절대로 통하는 법이다.

불교적 그리스도인, 폴 니터의 불교
저자는 두 종교 사이를 넘나들며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신학자로 미국의 신학자 폴 니터(Paul F. Knitter, 1939- )를 예로 든다. 니터 또한 불교를 창조적으로 소화해낸 대표적 신학자이다. 니터는 신학자로서 불교 언어를 치열하게 소화해, 신학적 양심에 솔직하게 녹여내어 고백하는 데에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저자는 태생이 기독교인이고 일급 신학자이지만, 두 종교를 단순 병렬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로 녹여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웅변적이고 체험적으로 보여준 니터를 종교다원주의 신학자이자 불교학자라고 명명한다. 그 밖에도 원불교 사상과 기독교, 쿄토학파와 기독교, 한국의 길희성과 타나베 비교 등을 통해서도 이점을 구명한다.

90점의 불교와 70점의 기독교
저자는 종교의 깊이와 넓이를 수치화해서 불교가 90%쯤 완성된 종교라면, 기독교는 70%쯤 완성된 종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속적 수치를 넘어서서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이는 태도를 좀더 확연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밖을 받아들이려면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모자라는 30%를 채우려는 기독교인의 노력 이상으로 공부를 심화하여 부족한 10%를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 보면, 종국에는 딱히 ‘성인이랄 것도 따로 없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의 진리’를 공유하며 인류 정신계를 선도할 수 있는 공동의 길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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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3137호/2015년9월16일자]
“바른 해석으로 종교간 배타성 없애고
서로 회통하는 노력, 종교인 앞장서야”

입력 2015.09.14 
기자명 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이찬수 지음 / 모시는 사람들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이찬수 교수는 신학자다. 강남대 교수로 활동하다가 불교를 공부한다는 이유로 해직돼 긴 법정 싸움 끝에 복직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배경을 지닌 이찬수 교수가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했지만, 한국인임을 발견하고 불교를 공부했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임을 그만두지 않은 채 한 사람의 불자가 되었다”는 고백처럼, 왜 종교가 서로 회통해야 하는지를 쓴 책이다. 화엄철학과 선(禪)불교를 공부한 이 교수가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비교분석하며 “서로를 통해 자신에게 더 깊어지는 종교 공부와 수행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저자는 “불교와 기독교가 표면상, 외형상 전혀 다른 종교이지만, 심층으로 들어가면 서로 통하는 점이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공(空) 사상과 하나님, 열반과 하나님의 나날, 그리스도와 보살의 개념과 역할, 기도와 염불을 통한 체험과정 등을 비교하며 “부처님과 예수님이 말하고자 했던 세계도 결국 동등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두 종교 사이를 넘나들었던 신학자로 미국의 폴 니터를 예로 든다. 신학자인 폴 니터는 불교를 공부하고는 신학적 양심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털어놓으며 독보적인 비교종교학의 성취를 이뤄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자이자 불교학자로 분류되는 폴 니터는 “두 종교를 하나로 녹여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체험을 직접 보여준 학자다.

또 원불교 사상과 기독교, 쿄토학파와 기독교, 한국의 길희성과 타나베 비교 등을 통해서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종교의 깊이와 넓이를 수치화한다면 불교가 90% 정도 완성된 종교라면 기독교는 70% 쯤 완성된 종교다.” 그런 점에서 불교가 밖의 것(기독교 등 다른 종교 사상)을 소화해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좀 더 확고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기독교는 불자보다 더 노력해 부족한 30%를 채워야 ‘성인이랄 것도 따로 없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의 진리’를 공유하며 인류 정신계를 선도할 수 있는 공동의 길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찬수 교수의 주장이다.

“일본의 신학자 야기는 불교와의 만남에서 인간은 성거와 십자가의 직접적 도움 없이도 본래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다. 아무리 죄 없는 사람이라도 한 인간이 타인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개체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관계하며 조화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빌려 야기는 신학을 전개했다.”

이찬수 교수가 불교를 공부한 이유는 한국인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이니까 한국 사회를 이끈 불교를 알아야 했단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기독교가 된 내면에는 한국의 종교, 불교가 있다. 이미 불교에서 기독교가 말하려던 것을 충분히 말해주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한국인에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찬수 교수에게 불교와 기독교라는 형식의 구분은 의미없는 일이다. 종파도, 성별도, 지역간 차이도 없다. 형식과 제도라는 틀을 벗고 내면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편 불교학에 대한 개론서이기도 하다. 불교의 인간론, 지눌스님의 신심론과 틸리히의 신앙론 비교에 이어 니사다, 길희성, 타나베, 니터, 야기 등 세계적 비교종교학자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모든 종교는 해석이다. 바른 해석을 통해 배타성을 없애고 서로를 보려는 노력을 종교인들이 앞장서 해야 한다. 다른 종교를 공부하라.” 이찬수 교수의 주장이다.

이 교수는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와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일본)WCRP평화연구소 등을 지냈다. 그동안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 등을 펴냈다.

[불교신문3137호/2015년9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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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지만 조화한다 :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이찬수 저, 모시는 사람들)
에큐메니안 편집부 | 승인 2015.09.03

   
▲ 『다르지만 조화한다 :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2015.8.31, 이찬수 저, 출판: 모시는 사람들, 가격: 16,000

 <책소개>

기독교 신학자, 목회자이면서 화엄철학과 선(禪)불교를 공부한 저자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내면에서 상통하는 종교적 본질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은 불교적 언어가 불자에게 주는 의미와 기독교적 언어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의 정도가 다르지 않음을 말하면서 서로를 통해 자신에게 더 깊어지는 종교 공부와 수행을 이끌어 내고,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을 일깨운다.

<출판사 서평>

깨달음에서 서로를 경유하여 다시 자신에게로
이 책은 ‘세계적 차원의 종교들이 균질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도 대립과 조화 사이를 오가는 기이한 종교 왕국’인 한국에서 태어난 한 신학자의 자기 고백과 그에 관한 부연이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했다. 나는 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임을 그만두지 않은 채 한 사람의 불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인도의 신학자 파니카의 말을 빌려 표현한 대로 불교와 기독교가 궁극적 차원에서는 만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저자는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소통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과정에서 고립되고 배척당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으나 그의 신학 역정과 신앙 모색은 멈추질 않았다.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심층
이 책은 불교와 기독교가 표면상 외형상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해명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종착점, 가령 공(空)과 하느님, 열반과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와 보살, 기도와 염불 등은 결국 동등한 체험의 깊이를 나타내며, 붓다와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세계도 결국 동등하다는 것이다. ‘다르지만 조화한다’라는 말은 “군자는 상대와 조화하면서 차이도 인정한다(君子和而不同)”는 공자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으로, 언어와 관념을 넘어서는 근원의 세계, 궁극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절대유의 차원에 서 있다면, 불교는 절대무의 차원에 서 있으나, 절대는 절대로 통하는 법이다. 

불교적 그리스도인, 폴 니터의 불교
저자는 두 종교 사이를 넘나들며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신학자로 미국의 신학자 폴 니터(Paul F. Knitter, 1939- )를 예로 든다. 니터 또한 불교를 창조적으로 소화해낸 대표적 신학자이다. 니터는 신학자로서 불교 언어를 치열하게 소화해, 신학적 양심에 솔직하게 녹여내어 고백하는 데에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저자는 태생이 기독교인이고 일급 신학자이지만, 두 종교를 단순 병렬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로 녹여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웅변적이고 체험적으로 보여준 니터를 종교다원주의 신학자이자 불교학자라고 명명한다. 그 밖에도 원불교 사상과 기독교, 쿄토학파와 기독교, 한국의 길희성과 타나베 비교 등을 통해서도 이점을 구명한다.

90점의 불교와 70점의 기독교
저자는 종교의 깊이와 넓이를 수치화해서 불교가 90%쯤 완성된 종교라면, 기독교는 70%쯤 완성된 종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속적 수치를 넘어서서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이는 태도를 좀더 확연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밖을 받아들이려면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모자라는 30%를 채우려는 기독교인의 노력 이상으로 공부를 심화하여 부족한 10%를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 보면, 종국에는 딱히 ‘성인이랄 것도 따로 없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의 진리’를 공유하며 인류 정신계를 선도할 수 있는 공동의 길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본문 소개>

지눌 선사상에서 믿음과 앎은 깨달음, 즉 돈오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지눌이 믿음과 앎의 해석에도 깊은 주의를 기울였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지눌은 『신화엄경론』과 만나는 체험 후에 원돈신해문, 즉 원돈교에서의 믿음과 앎으로 들어가는 문을 상세히 밝혔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선에서 강조하던 돈오를 믿음과 앎이라는 언어로 해석함으로써 화엄의 선화(禪化) 및 선의 화엄화를 꾀했고, 선의 언어로 화엄을 해석함으로써 선의 실천 속에 화엄을 포섭하려고 했던 것이다. 원돈신해문은 믿음과 앎을 통해 깨달음으로 들어간다는 선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드러내 주는 것임과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 및 앎과 깨달음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지눌 선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본문 37쪽>

(일본의 신학자) 야기는 이러한 불교와의 만남에서 인간은 성서와 십자가의 직접적 도움 없이도 본래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죄 없는 사람(=예수)이라 해도 한 인간이 타인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략) 십자가는 본래적 실존으로 이끄는 매개이고 성서는 실존의 근저의 표현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교의 말씀 안에서만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근저에서도 그분을 만난다.”고 야기는 말한다. 그러한 신념으로 야기는 실존의 근저, 통합에의 규정의 장을 제시하면서, 장의 신학을 세웠다. 모든 개체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관계하고 조화한다는 불교적 가르침을 야기는 장이라는 개념을 빌려 신학적으로 전개했다. <본문 186쪽>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불교와 기독교의 개개 ‘형식’ 내지 ‘제도’를 벗기고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불교와 기독교란 따로 없다. ‘너’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천적 삶에는 종파가 따로 없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하는 원천적 사실에 종파 간, 성별 간, 지역 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미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있는 인간의 원천적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미 깨달아 있어 부처와 하나 되어 있는 원천적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이미 천주를 모시고 있어(侍天主) 있는 그대로 하늘과 같은 존재인 인간(人乃天)의 원천적 실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본문 254>

<목차>

1부_ 깨달음의 길에 서다

01. 인연에 따르다 : 불교의 인간론
02. 믿음과 용기, 그리고 깨달음 : 지눌의 신심론과 틸리히의 신앙론

2부_ 불교와 기독교 서로 만나다

03. 법신불 일원상과 범재신론 : 원불교의 일원주의와 세계주의
04. 모두 절대무 안에 있다 : 니시다의 철학과 기독교
05. 창조적 만남과 궁극적 일치 : 길희성과 타나베의 신학과 철학
06. 두 종교를 동시에 살아가다 : 불교적 그리스도인 니터의 고백
07. 신학을 불교화하다 : 야기의 불교적 신학 08 불교를 수용하며, 신학을 변호하다 : 발덴펠스의 자기 비움의 신학

3부_ 두 세계를 다시 보다

09. 종교는 해석이다 : 스힐레벡스의 신학적 해석학: 모든 종교는 해석이다
10. 오늘 우리의 구원과 해탈 : 어느 불교적 신학자의 구원관
11. 비종교적인 그러나 종교적인 : 비종교인 리영희가 보는 기독교와 불교
12. 90점 불교와 70점 기독교 : 두 종교에 대한 애정어린 요청과 희망

<저자 소개>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일본)WCRP평화연구소, (일본)중앙학술연구소 객원연구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동안 동서양 사유 구조의 공통성에 대해 탐색해오면서,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 <믿는다는 것>, <생각나야 생각하지>, <일본정신> 등의 책을 썼고, 최근에는 종교철학에 기반한 평화학의 심화와 확장을 연구 과제로 삼고서 종교평화학 관련 논문들과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녹색평화란 무엇인가」, 「재난과 평화」 등의 공저서를 출판했다.

편집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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