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9

변선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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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환

최근 수정 시각:
변선환
21971 16948 620
한자명
邊鮮煥
영문명
Sun Hwan Pyun
일아(一雅)
출생
사망
1995년 8월 8일 (향년 67세)
종교
배우자
(사별)
신옥희[2]
자녀
3남[3]
학력
평양 상공학교 기계과(졸업)
성화신학교(중퇴)[4]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사(B. Th.))
한신대 대학원 (신학석사(M. Th.))
미국 드류대학교 (신학석사(S. T. M.)
스위스 바젤 대학교 (신학박사(D. Th.))
경력

1. 개요2. 생애3. 사후

1. 개요[편집]

대한민국신학자, 교수, 목사. 1927년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출생하여 감리교 목사가 된 후, 미국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후 귀국,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1967년부터 1992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교수로서 기독교불교의 대화를 추구하며 토착화 신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후학 양성에 힘쓰다 1988년 감신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불교와의 대화, 토착화 신학 연구를 문제 삼은 교단 관계자들에 의해, 1992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출교 처분을 받았다. 1995년 8월 8일, 사망하였다.

2. 생애[편집]

변선환은 1927년 9월 23일 평안남도 진남포(지금의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태어났다. 진남포는 중국과의 교역으로 인해 번성하던 무역 도시이자 공업 도시로서 발전 중에 있었다. 변선환은 진남포 교외에 위치한 고향에서 숲과 산, 바다를 즐기며 자라났고, 진사였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변선환은 평양 상공학교 기계과에 입학하여 1945년 졸업하였다.

상공학교 졸업반이던 그 해에 변선환은 신석구 목사의 설교를 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신석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진남포 제련소에서 잠시 설계사로 일하던 변선환은 1948년 평양에 있는 성화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성화신학교는 삼팔선으로 사실상 남북이 분단된 후, 이북의 감리교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석구 목사 등이 세운 신학교였다. 당시 성화신학교에서는 정경옥의 "기독교 신학 개론"을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변선환은 정경옥의 책을 통해 처음 신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6.25 전쟁이 터지고, 변선환은 1.4 후퇴 때 월남하여 1951년 부산으로 이동한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열악했던 성화신학교와 달리, 이미 개교한 지 60년 정도 되던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뛰어난 교수진으로부터 신학을 배울 수 있었다. 윤성범으로부터 폴 틸리히 신학을, 홍현설로부터 라인홀드 니버의 신학을 배웠다.

1953년 변선환은 육군 군목으로 임관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군목으로 일하며 틈틈이 어학 공부를 지속했다. 제대 후인 1958년에는 한신대 대학원에 입학, 박봉랑 교수 밑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배웠으며, 1960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은 존 웨슬리의 은총론을 주제로 하였다. 이 당시에 변선환은 신정통주의 신학에 강하게 매료되어 있었기에 존 웨슬리 신학도 신정통주의의 빛 아래에서 재해석하려고 하였다.

석사 학위 취득 후 잠시 이화여고 교목으로 지내다, 1962년 미국 드류대학교로 유학하여 실존주의 신학자인 칼 마이켈슨의 영향을 받았다. 칼 마이켈슨은 유럽 신학을 통해 미국 신학계에 큰 영향을 준 학자였으며, 이를 통해 변선환은 유럽 유학을 꿈꾸게 된다. 드류대학고에서 변선환은 프리츠 부리의 저서를 통해 동양 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대화를 접하게 되었다. 드류대학교에서 다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변선환은 귀국하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하였다.

강사 생활 중 아내를 암으로 잃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변선환은 1968년 이화여대 철학 강사였던 신옥희 교수와 재혼하였다. 1971년에는 스위스 바젤대학교로 유학하였다. 바젤에서 변선환은 박사 과정을 밟으며 동양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변선환은 1975년 "기독교와 선불교의 만남에서 본 그리스도의 궁극성의 문제"라는 박사 논문을 제출하였고, 1976년 통과되어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명강의로 큰 인기를 끌었고, 동시에 많은 후학을 양성하면서 대학원장 등과 같은 행정직도 수행하였다.

1982년 현대사회연구소가 주최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 모임에서 한 주제 강연이 문제가 되어 변선환은 처음 이단 시비를 받게 되었다. 강연 내용은 "기독교인인 우리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입장을 떠나 무신론자까지도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었지만 "무신론자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와전되었다. 그리하여 변선환 교수에 대한 규탄 성명과 감리회 정회원 자격 정지 요구가 이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당시 감독회장인 오경린 목사의 중재로, 변선환 교수가 해명서와 신앙고백서를 발표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1988년 변선환 교수는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하였다. 학장 재임시 변 교수는 학교 발전을 위해 부지를 매입하는 등 행정가의 모습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2년 변선환은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그의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가 다시 문제시 된 것이다. 10년 전에는 변선환의 해명서와 신앙고백서로 일단락되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모든 각본이 변선환의 출교로 미리 짜여져 있었다. 변선환은 굴욕적인 종교재판을 받으면서도 차분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였지만 1992년 출교 처분을 받았고, 동시에 정년 은퇴 및 임기 만료로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도 퇴임하였다.

종교재판의 울분 속에서도 변선환은 1994년 국제 아시아 철학 종교학회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오랜 연구 등을 통해 건강이 좋지 않던 변선환은 종교재판의 충격 속에서 1995년 8월 8일 자택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유고인 "한일 양국의 근대화와 종교"라는 논문을 집필 중의 일이었다.

사후 장례 방식을 놓고 논의가 분분했다. 응당 감리교신학대학교 주관 학교장으로 치러야 했지만, 종교재판의 후유증으로 학교 측이 겁을 낸 결과, 40여 년을 재직한 학교 측은 학교장을 치르길 주저했다. 결국 장례는 동문회장으로 치러졌다.

3. 사후[편집]

그의 사후에도 감신대의 학자들이 토착화 신학, 비교종교학적 신학 탐구를 계승하였다. 이전만큼 활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1] 1992년 교단에서 제명되었다.[2] 이화여대 명예교수[3] 2남은 사별한 전처 소생, 1남은 신옥희 교수 소생이다.[4] 성화신학교는 1946년 개교하였다가 1950년 북한 정권에 의해 폐교되었다.

변선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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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변선환
邊鮮煥
본명변선환
로마자 표기Byun, Sun-Hwan
출생1927년 9월 23일
사망1995년 8월 8일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
경력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원장,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
직업신학자, 목사, 철학자
소속감리교회
종교개신교

변선환(邊鮮煥, 1927년 9월 23일 ~ 1995년 8월 8일)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신정통주의와 진보적 신학, 종교다원주의를 연구한 한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이면서 목사이며 철학자이다. 개신교 감리교회의 목사이자 신학자로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원장과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1]으로 재직하였다. 호는 일아(一雅)이다.

그는 '토착화 신학'을 추구함과 동시에 다른 종교를 인정하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불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다가, 1992년 감리교 교단으로부터 감리교회 신도로서 지위와 목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제명되었다.[2]

생애

1927년 평안남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열 여덟살에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그가 "영혼의 아버지"라고 부른 감리교의 목사이며 3.1 독립선언문 33인 중 한 명인 신석구 목사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1948년 취직한 제련소 설계자를 그만두고 평양 성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국 6.25 전쟁으로 평양 성화 신학교를 떠나 감리교 신학대학교에 편입해 졸업하였다. 한신대 대학원에서 신학석사, 미국 드류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석사, 그리고 스위스 바젤대학교 신학부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 여름부터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였다.[3]

그는 조직신학의 20세기 경향이었던 신정통주의 신학과 유럽 실존주의 철학 등을 연구하였고, 점차 다양성의 문제를 교회가 수용하여 다른 종교인들, 다른 신앙도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감리교회의 성직자를 육성하는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로서 변선환은, 다른 종교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보수적인 신학자들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다. 그는 "토착화 신학"을 추구하면서 불교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의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논문이 문제가 되어, 1992년 감리교 교단 총회 끝에 감리교 교단으로부터 출교 당하였다.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종교재판에 회부된 변선환은 최후진술에서 개종을 전제로 한 전도활동은 다른 종교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종교적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하였다.

1995년 8월 8일 자택에서 글을 쓰던 중 숨을 거두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시절에, 변선환이 그 대학의 종교 철학과 교수로 채용되도록 힘썼던 측근 김영민 (철학자)은 다음과 같이 그를 회고하였다.

생전의 변선환 박사는 신학계에서 그 위명이 대단했다. 그는 감리교 신학대학의 총장을 지냈고, 계몽주의마저도 늙어 끝물에 밀리던 1992년, 종교재판을 받아 목사직을 박탈당한 채 추방당했다. 그는 에라스무스나 모어같은 재기(才氣)를 잃고 말년을 우울하게 보내다가 책 위에 엎어진 채로 신(神)에게로 돌아갔다.

파문과정

1990년 변선환은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변선환의 다원주의 신학(다른 종교간의 대화와 존중을 추구하는 개방적인 신학)과 홍정수의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이 드러나 있었는데, 당시 감리교 교단의 목사들 중 부흥사 출신의 목사들이 중심이 되어 두 사람의 신학을 이단 사상으로 규정하고 비판하였다. 김홍도 목사, 유상렬 장로, 박기창 목사, 배동윤 목사 등은 교리수호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교리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감리교내 위원회장이었던 김홍도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감신대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의 주장은 적그리스도 또는 사탄의 역사이므로 반드시 추방해야 하며 만일 이것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교단 분열도 불사할 것이다."[4] 감리교단내 형제들(김선도 목사, 김국도 목사)의 도움을 등에 업고 김홍도 목사는 종교재판의 과정을 막후에서 주도하며, 마지막에는 종교재판 장소로 자신이 담임목사로 재직하던 금란교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재판 전 소위 영성집회라는 명목으로 1시간 이상의 부흥회식 집회를 하기도 했다. 결국 그 종교적 광신의 열기 속에서 변선환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종교재판 기소에 대해 변선환은 자신의 토착화 신학이단사상이라는 논리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신학이 지닌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헬라 철학이나 독일 철학을 사용하여 만든 서구 신학은 혼합주의가 아니고, 유단 동양 철학의 범주를 가지고 복음을 재해석한 모든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적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는 이유를 본인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복음을 아시아의 심성에 울림 하는 아시아 종교나 아시아 혁명의 새 언어를 가지고 설명하는 우리 아시아 신학을 개발할 때, 그때 아시아 교회는 독립 신학의 바벨론 포수에서 벗어나서 비서구화 된 아시아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찾게 됩니다."

또한 최후진술에서 "흑백논리만이 횡행하는 감리교의 현실이 안타깝다"며 "기독교는 더 이상 정복자의 종교가 아니며 전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종교간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종교적 다원주의감리교의 세계적 추세"라고 역설했다. 1992년 5월 7일 감리교 서울연회 재판위원회는 변선환과 홍정수를 출교시켰다. 당시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일부 대학원 학생들과 일부 목사들의 반발로 감신대가 장기간 분규에 휩싸이기도 했을 정도로 변선환 목사의 파문사건은 감리교회내에서 파장이 컸다. 2005년 변선환 학장 사망 1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강연회개최 당시 추모논문집 《변선환 신학 새로 보기》(한들출판사)가 출판되면서 고 변선환 선생의 신학은 변선환 학회의 후배들에 의해서 재평가받았다.[5]

신학사상

초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선환은 서구 신학의 영향 아래에 있다가 점차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정립해 갔다. 국내 신학교에서 서구 신학을 소개받은 그는, 미국, 스위스 등으로 유학 하면서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시아종교에 관심을 갖고, 특히 불교와의 대화에 주력하다가 80년대 이르러 다른종교와의 개방과 대화를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를 제창하게 되었다.

같이 보기

각주

  1. 변선환은 공식적으로 학장을 지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는 1993년 이전에 교육부의 "대학구분"에서 4년제 단과대학으로 구분되어 대학의 대표가 학장이었다. 1993년 이후 "대학구분" 방식이 변경되어 감리교신학대학교의 대표는 총장이 되었다.
  2. 이러한 처리는 감리교 목사에게 교단이 과거 강점기 시절 일제 부역자와 이단 추종자에게 내렸던 처리 수준과 동일하였다.
  3. 변선환 추모 홈페이지에 나오는 약력, 보관됨 2007-10-21 - 웨이백 머신
  4. (출처:“변선환, 홍정수 교수의 이단사상 및 통일교 연루사실을 폭로한다.”〈조선일보,1992.1.26.)
  5. 최서영 기자,'종교다원론자 변선환', 사후 10년 만에 사실상 복권되다 - 프레시안,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