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환을 위한 항소, ‘종교신학의 봄’을 기다리며
기자명 정경일
입력 2026.09.29
감신대 학술행사 무산 사태로 다시 묻는 종교다원주의 논쟁
지난 9월 17일 저녁, 감리교신학대학교(감신대)에서 충격적 사태가 일어났다. 한국의 대표적 감리교 신학자 변선환의 신학사상을 조명하려던 학술행사가 일부 신학생들의 반대 행동으로 무산된 것이다.
“일아 변선환의 동서 문명 통섭을 위한 고난의 길”이라는 주제로 열릴 예정이던 이 행사는 한국信(신)연구소(소장 이은선)가 “한국적이어라, 복음적이어라, 생명적이어라”라는 대주제 아래 네 전위적 한국 신학자 김경재, 변선환, 박순경, 이신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연속 학술행사의 하나였다. 감신대에서 오랫동안 가르친 이정배 명예교수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동 연구 프로젝트다. 네 신학자가 가르쳤던 대학에서 그들을 기리는 것이 기획 의도의 하나였다. 창조적 한국 신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학술’ 토론의 장이었기에, 이런 사태는 예상하지 못했다.
행사를 반대한 학생들이 내세운 이유는, 감리교가 이단으로 규정해 출교한 변선환을 교단 신학교에서 기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구호를 외치고 찬송을 부르며 행사를 방해했다.
한국 감리교가 변선환의 신학을 이단으로 판결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신학적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그 판결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당시 판결문은 변선환과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을 “동일한 ‘범법자’로 간주”하겠다고 명시했다. 그럼에도 변선환의 제자였던 신학자와 목회자 상당수가 스승을 지지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불이익을 받기도 했지만, 변선환처럼 종교다원주의를 이유로 재판을 받아 출교된 이는 없었다. 감신대 교정에서는 변선환을 추모하는 행사와 학술대회가 꾸준히 열려 왔고, 그에 대한 연구서도 여러 권 나왔다. 변선환의 신학은 현대 한국 감리교 신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단 규정 및 출교와 신학적 유산으로서의 수용이 혼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변선환에 대한 종교재판의 불충분성과 불명료성을 드러낸다. 만약 그의 신학에 관한 철저한 연구와 토론을 거쳐 감리교 공동체 전체가 확고한 신학적 결론에 도달했다면, ‘변선환 지우기’에 맞선 ‘변선환 지키기’가 이토록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그가 옳다”, 김정숙, 송순재, 이은선, 이정배, 장왕식, 한인철 외 (지은이), 변선환아키브 (엮은이), 동연출판사, 2023. (표지 출처=동연출판사)1992년 5월 7일 금란교회에서 열린 변선환 재판은 그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이단적이라는 고발로 소집된 ‘신학 재판’이었다. 그러나 그 재판에서 ‘신학 토론’을 한 이는 종교다원성의 현실에 응답하는 현대 신학서들을 한 보따리 들고 피고석에 선 변선환뿐이었다. 그의 ‘48년’ 신학 여정의 결과에 대한 심문은 고작 ‘15분’에 그쳤다. 신학적 관점을 판정하는 자리에서 정작 신학적 논쟁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 종교재판의 배경에는 사회적·교회적 맥락이 놓여 있다. 당시는 1980년대 후반 민중 저항을 통해 권위주의 체제가 해체되면서 민주화 요구가 사회 각 영역으로 흘러넘치던 시기였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 개신교 진영은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결성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간 이어져 온 급격한 교세 성장이 둔화한 것도 중요한 변화였다. 이처럼 안팎의 위기에 직면한 각 교단의 교권 세력은 교회와 신학 교육 기관에 대한 내부 단속을 강화하려 했고, 때마침 세계적으로 확산하던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그 한 쟁점이 됐다.
변선환이 종교다원주의에 깊은 신학적 관심을 두고 탐구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역사적 조건이 작용했다. 하나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신학인 ‘토착화 신학’의 산실로 이름을 떨쳤던 한국 감리교의 신학적 전통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화에 따른 다종교성을 정면으로 다룬 현대 종교신학의 부상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1965년 문헌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 우리 시대(Nostra Aetate)” 이후, 타종교의 진리와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은 전통적 배타주의 일변도에서 포용주의로 이동했고, 1980년대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원주의를 향한 신학적 탐구와 모색이 본격화했다.
1986년에는 존 힉, 폴 니터, 라이문도 파니카 등 현대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신학자들이 참여한 다원주의 신학 회의가 미국 클레어몬트대에서 개최됐다. 이때 나온 논의는 이듬해 The Myth of Christian Uniqueness: Toward a Pluralistic Theology of Religions (그리스도교 유일성의 신화: 다원주의적 종교신학을 향하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세계 신학계에 큰 충격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신학계의 동향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포착했던 변선환도 종교다원주의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가 우선시한 과제는 서둘러 신학적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던지는 신학적 화두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그의 글에서는 ‘규범적 주장’보다 여러 이론에 대한 ‘기술적(記述的) 소개’의 비중이 더 크다. 피할 수 없는 주제라면 함께 신중하게 탐구하고 토론하자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신대 학장을 지낸 신학자 변선환. (사진 출처=일아 변선환 박사 추모 페이지)종교다원주의 논쟁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학 자체에 내재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에는 하느님이 모든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보편성의 차원과 그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특수성의 차원이 공존한다. 이 둘 사이의 긴장 또는 모순에 대한 신학적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현대 그리스도교가 시대적 정합성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종교문화는 그러한 신학적 탐구와 논쟁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전통적으로 유·불·선 삼교가 공존해 왔고, 그리스도교 역시 어떤 형태로든 그 전통의 영향사 속에서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변선환이 한국의 그리스도교 안에 ‘유교적 그리스도교’, ‘불교적 그리스도교’, ‘무교적 그리스도교’가 공존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 토론을 교권으로 봉쇄하고 중단시킨 것이 1992년 종교재판이다. 이 사건은 감리교는 물론 한국 신학계 전반의 종교신학 토론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특히 신학자들은 집단적 공포에 사로잡혔다. 변선환은 주변부의 이름 없는 신학자가 아니라 대표적 교단 신학교인 감신대 학장이었고, 당시 한국 신학계를 대표하던 한국기독교공동학회 회장을 지낸 이였다. 그처럼 영향력 있는 신학자조차 한순간에 이단으로 정죄되고 출교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한 신학자들은 종교다원주의는 물론 종교신학 자체를 다루기를 두려워하며 자기검열에 빠졌다. 세계 신학계가 종교신학 논의를 심화하는 한편 비교신학으로 지평을 넓히면서 타종교의 경전, 전통, 이성, 경험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자원으로 삼아 풍요로워지는 동안, 한국 신학계와 교회는 기나긴 ‘종교신학의 겨울’을 맞이하게 됐다.
이번 사태는 큰 충격이지만, 동시에 종교신학의 겨울이 끝나간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사태 이후 감리교 내부에서 1992년 변선환 재판의 정당성을 묻는 비판적 목소리가 일고 있다. 감리교 신학자, 목회자, 평신도, 신학생 사이에서 변선환 신학을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는 논의가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곳곳에서 돋아나고 있다. 스승을 위한 제자들과 후학들의 ‘신학적 항소’다.
부디 이번 사태가 또 하나의 시대착오적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변선환이 정직하게 붙들고 씨름했던 물음들—다종교·다중고통의 세계에서 복음화란 무엇인가, 타종교의 진리와 구원의 가능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공동선을 위해 이웃종교인과 어떻게 만나고 대화하고 협력할 것인가—을 다시 묻는 성찰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종교신학의 봄이 시작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