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2021/10/27
'퀘이커 평화주의자' 이행우 선생을 보내며
'퀘이커 평화주의자' 이행우 선생을 보내며
[기고] 평화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의 '진주알 잇는 실' 같았던 삶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 2021-10-26
나는 1980년 대 초반 함석헌(1901-1989)을 처음 만나며 금방 '함석헌에 미친 사람'이 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3554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5180)
1984년 5월 군대에서 제대하고 철도청에 복직한 나는 서울 명동 전진상교육관과 향린교회에서 매주 함석헌이 강의하는 노자와 장자 공부모임을 참석했다. 한 번은 노자 공부모임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은 분이 퀘이커 교도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85년 어느 날 그의 손에 이끌려 서울 신촌 봉원동에 있는 퀘이커모임을 처음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예배 후 함석헌이 강의하는 성경과 퀘이커 공부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의 재미동포가 미국에서 한국 퀘이커 모임을 방문했다. 그는 예배 후 그의 생생한 '북한방문기'를 들려주었다. 그 재미동포가 이행우 선생(1931-2021)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한국전쟁 중 함경남도 북청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전쟁피난민' 출신이라 이행우 선생의 북한방문기에 온 시각을 곤두세우고 깊은 관심을 갖고 들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9329)
▲오른쪽 끝이 이행우 선생이다. ⓒ김성수 제공
당시는 광주학살로 손에 피를 묻히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기라 북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사항이었다. 그래서 이행우 선생은 전두환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재미동포라 전두환 정권은 그를 철저히 감시는 하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지는 못했다. 이행우 선생은 그 후에도 거의 매년 평생 40번 이상 북한을 방문했고 방한 할때 마다 퀘이커모임에서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이행우 선생은 그의 스승 함석헌을 모시고 서울퀘이커모임에 참석했고 1960년엔 함석헌과 함께 서울퀘이커모임을 창립했다. 그리고 1968년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퀘이커연구소 펜들힐로 유학을 갔고 그 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다. 전주고등학교와 서울대 수학과 출신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곧 컴퓨터 전문가로 직장을 잡아 지난 2003년 73세의 나이로 현업에서 은퇴했다. 컴퓨터 전문가 1세대로 수입도 좋았지만 그는 그와 가족이 평생 살 집 하나 마련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평생 번 돈을 한반도 평화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썼기 때문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휴가나 여행을 가기 보다는 그는 자비를 털어 미국, 북한. 일본, 중국, 유럽을 방문해 정치인, 관리, 시민활동가, 학자, 언론인들을 만나며 한반도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고 국제회의를 개최했으며 그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 외에도 그는 자비를 털어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영어논문집을 제작해 이들에게 배포했고 민주화운동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한국의 재야인사나 정치범들을 위해 미국에서 모금을 해 한국으로 돈을 송금해주었다.
1974년 한국민주화운동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미국에 결성하면서 그는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인사들이 거의 수입이 없는 실업 상태였기 때문에 재미동포들에게 모금활동을 하여 국내에 돈을 보냈던 것이다.
1982년에는 미국 퀘이커(AFSC)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해 북한 관리들을 만나 한반도 평화통일문제, 조미관계 개선문제, 북조선대표단을 미국에 초청하는 문제 등을 협의했다.
1986년 그는 한겨레 미주홍보원을 설립, 'Korea Report'라는 영문보고서를 발간해 대미홍보와 국제연대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이 보고서를 발간하기 전에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미국에서 한국문제를 분석한 영문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미국 고위관리, 정치인, 학자. 언론인들이 그가 낸 보고서에 큰 관심을 보였고 미국사회에 한반도평화통일의 중요성에 대해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엔 그는 미국의 지인들과 한국지원연대(Korea Support Network)를 결성,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국제사회에 알렸다.
1989년엔 전국대학생협의회를 대표해 방북한 대학생 임수경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일이 있었다. 그 때 이행우 선생은 대학생 임수경을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미리 문규현 신부와 함께 방북해 '임수경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북한당국의 협조를 구했다.
1994년에는 대기근으로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다. 그러자 이행우 선생은 기근으로 고통받는 북한동포들을 인도적으로 돕기 위해 미국 퀘이커들과 함께 방북해 북한의 농업을 지원하고 인적교류를 추진했다.
1995년 그는 미주평화통일연구소, 1998년에는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을 설립했다. 이런 단체들을 통해 이행우 선생은 한반도 평화통일문제에 대한 논문을 발간했다. 그리고 그가 발간한 논문들은 남북과 해외동포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그런 긍정적 반응을 바탕으로 다른 한반도 평화통일운동단체들과 적극적 연대활동을 벌였다.
이행우 선생의 이런 물밑 작업과 각고의 노력은 마침내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가능하게 했고 한반도 평화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행우 선생의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보이지 않는 헌신적 봉사와 희생 덕에 마침내 지난 2000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늦게나마 그의 한국 민주화운동, 남북한 긴장완화, 한반도 평화통일 노력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지난 2011년 이행우 선생은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았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3611)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2013년, 45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그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고 곧 한국국적 회복을 신청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박근혜 정권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행우 선생의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한편, 지난 2012년 8월 나는 북한 실향민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실의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중 그 다음해인 2013년 귀국한 이행우 선생을 나는 매주 서울퀘이커모임에서 만나며 마치 아버지가 죽음에서 돌아온 것처럼 느꼈다. 그는 내가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극우 인사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을 상대로 고소한 법적소송에서도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79063)
그리고 그런 이행우 선생의 따스한 격려에 힘입어 나는 지난 2016년 마침내 이영조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https://www.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1605281843001
한편, 지난 2020년 8월 그는 광복회로부터 "한반도 분단극복과 통일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광복평화상'을 받았다.
올해 9월 나는 암으로 병상에 누워계신 이행우 선생께 문안인사차 영국에서 국제전화를 드렸다. 올해 3월 어머니를 보내고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 장례도 참석 못해 힘들어 하던 내게 선생은, "성수, 힘내야지! 그리고 오래 살자!"라며 오히려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그런 선생이 지난 10월 16일, 암으로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그의 부인과 두 아들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장례를 진행한 뒤 그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모셨다.
함석헌 선생이 내게 정신적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였다면 이행우 선생은 내게 정신적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6447
이행우 선생은 달변가가 아니었지만 그 말씀의 내용은 늘 놀라웠다. 그의 가장 큰 무기가 '진실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화려한 무대 뒤에서 남을 위해 조용히 일만 하셨다. 그는 아름다운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분이었다. 진주목걸이가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한 여인의 목에 당당하게 걸릴 수 있는 것은 그 진주 하나하나 속을 관통하여 이어주는 가느다란 '보이지 않는 실' 때문이다. 내가 보는 이행우 선생은 그런 분이었다. 그는 입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몸소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런 이행우 선생이 너무 그립다. 내년에 모국에 가면 반드시 어머니와 그의 묘지를 찾아가 머리 숙이고 목 놓아 마음껏 울고 싶다. 선생님, 너무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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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행우 선생 : 1931년 1월 3일 전북익산 생. 1955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수학과 졸업, 그 해에 해군장교에 임관,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 교수. 1957년 군복무를 마치고 이리 남성고등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 숭문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 한양대학교 출강. 종교는 퀘이커교. 1968년 미국퀘이커교단 초청으로 유학, 퀘이커교육기관인 펜들힐(Pendle Hill)에서 1년간 퀘이커교에 대하여 공부. 공부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정착, American Bank(1969-1979), Burroughs Corp.(1979-1980), Polymer Corp.(1980-1986), Delaware Investments(1986-2003) 등에서 Systems Analyst로 근무. 2011년 한겨레통일문화상, 2020년 '광복평화상' 수상. 2021년 10월 16일 하늘나라로 가심.
▲이행우 선생 추도식 안내문
2021/10/20
Sungsoo Kim [Obituary] Hangwoo Lee (1930-2021), a quite Quaker and an active Peacemaker
김성수
In 1985, I began to attend the Quaker Meeting in Seoul, South Korea where I met Hangwoo Lee. One Sunday afternoon, after a Meeting for Worship, Lee gave a talk about his visit to North Korea. As my father was a North Korean refugee, I listened to Lee's fascinating talk with great interest. At that time, South Korea was ruled by a military dictatorship, thus Lee's talk on North Korea was a forbidden topic. Naturally Seoul Friends were very cautious about possible interference by the military regime.
Lee was a Korean-American Quaker and visited South and North Korea nearly every year and whenever he came to Seoul Quaker Meeting, we talked about North Korea. Thus, he was blacklisted by the military regime of South Korea.
In 1960, together with a well-known Korean Quaker, Ham Sok Hon (1901-1989), Lee founded a Korean Quaker Meeting in Seoul. In 1968, Lee went to Pendle Hill (Quaker Study Center in the USA) to study Quakerism for a year then he settled in Philadelphia with his family. He worked there as a computer analyst and retired in 2003, when he was 73 years old. However, he did not even own a home of his own and he spent most of his wages and holidays working for the peaceful reunification movement of two Koreas.
Rather than going on family holidays with his wife and children, he met government officials and lawmakers of the USA, North Korea, China, Japan, and Europe and with them, he discussed, appealed and sought a way for the peaceful reunification of two Koreas. Moreover, Lee spent most of his wages on publishing reports on Korea's peaceful reunification issues and sent money to help South Korean dissidents and political prisoners.
He was not a good speaker, but he was a quiet man of action. He spoke through his life.
In 1974, he founded a 'Meeting for Suffering for Koreans in the USA to help and support South Korean dissidents and their families
In 1982, as one of the delegates of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Quakers), he visited North Korea and tried to promote peace between the two Koreas. Since then, he has visited North Korea more than 40 times with this goal in mind.
In 1986 he founded the 'Korea-US Public Relations Center' in the USA, where he published a 'Korean Report' in the English language, which was widely read among the US lawmakers, officials, activists, and journalists as well as the overseas Korean experts.
In 1987, he also founded the 'Korean Support Network (KSN)' in the USA and through the KSN, he not only supported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movement but also raised public awareness among American politicians, officials, and scholars in relations to South Korean democracy.
In 1993, when North Koreans suffered famine, as one of delegates of AFSC, he visited North Korea and supported agriculture facilities there.
In 1995, Lee founded the 'Peaceful Reunification Institute for two Koreas' in the USA, and the institute published various papers on peaceful reunification issues of two Koreas.
Lee laid the foundation for the peaceful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nd due to his relentless contribution, in June 2000, South Korean president, Kim Dae-jung, was able to visit North Korea and held a summit meeting with the North Korean leader Kim Jung-il. It was the first summit meeting of the two Korean leaders since the cease fire of the Korean War in 1953. Subsequently in October 2000, Kim Dae-jung received the Nobel Peace Prize, thanks to Lee's invisible toil and effort.
In 2009, Lee led an International Conference on 'Ending of Arms Race in the Asia-Pacific Region.'
Due to his contribution, in 2011, Lee received the 'Korean Reunification Culture Award' from South Korea.
In 2013, after 45 years of life in the USA, Lee returned to South Korea for good. After that I was able to meet him every week at Seoul Quaker Meeting. During this time, Lee gave me courage, comfort and inspiration while I was engaged in a lawsuit against a right wing government minister. Thanks to his kind support, in 2016, I won this legal battle. http://english.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606031507077&code=710100&fbclid=IwAR3KjQri4-g9X-tfQVThmjrvLpI024-2sgqMGiqm4PitJjRmjIsHtHDXpsc
In August 2020, Lee received the 'Liberation and Peace Award'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o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 for peaceful reunification of two Koreas.
In September 2021, when I rang him by an international telephone call, he was on his sickbed and he said to me , "Sungsoo, let's live cheerfully!" He passed away in the morning of 16th October 2021 of prolonged cancer. To me, he was like a father figure, and he talked to me through his life. An active peacemaker and quiet Quaker, Hangwoo Lee, I miss you!
2021/10/03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장영호 2021 논평자 이수호 김말순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0930
장 영 호(전 씨알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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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석헌의 신앙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다/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리라.1)
함석헌의 시 <대선언>의 일부 입니다. 젊은 날 제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함석 헌 선생님이 기독교를 떠났나보다 했습니다. 함선생님의 말씀과 독서의 시간이 얼마 간 흐른 후에 깨달은 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넘어선’ 것이구나 라고 이해하기 시작 했습니다. 풍류신학자 유동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불교, 유교, 기독교 세 종교가 들 어왔는데, 각 그 종교에서 나왔으나 경계를 넘어선 이가 원효, 율곡, 함석헌이라 하였 습니다. ‘넘어서다’라는 우리말은 참 묘미가 있는 어휘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함석헌 시 연구서,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에서 명쾌한 풀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파주의 또는 교파주의 안에 갇혀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해 봄직 하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애독해온 불후의 고전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고침 글인데, ‘대선언’의 전후 시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도 보입 니다.
고향 평북 용천에서 어린 시절 장로교회를 다닌 함석헌은 13살까지는 순박한 기독교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2)
삼일만세운동 사건을 뼈아프게 겪은 이후, 오산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함석헌은 생 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가르침과 동서양의 명품서적 들을 읽으면서 좀 더 깊고 참된 믿음이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교회에 점점 비판적이 되어 멀어져 갔으리라 보입니다.3)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 김교신의 소개로 그는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 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아니고도 믿을 수 있다고 한 우치무라의 신앙 을 세상에서는 무교회주의라 불렀습니다. 아무 형식, 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형태로 성경과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앙관이 특색입니다.4) 그러나 함석헌의 무교회 신앙도 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무교회도 어느덧 자기주장에 집착하여 교파 아닌 교파가 되어가는 모습에 함석헌은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1) 대선언, <<수평선 너머>>, 일우사(1961), 170~171
2) <씨의소리> 1970년 4월호. 함석헌전집4.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 207~8.
3) 위 책, 214.
4) 위 책,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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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말라붙는 사람은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못 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대속(代贖)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5)
우치무라의 신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제 제자가 선생과 같 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에게 충실하는 것이 그를 스승으 로 대접하는 도리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을 두고 말 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스승은 고귀하다. 그러나 진리 는 더욱 고귀하다.”
신의주 학생사건의 배후로 몰려 죽음의 순간을 겪었던 함석헌은 동료와 제자들의 도 움으로 1947년 극적으로 월남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해 미국에서 갓 돌아온 현동완 선생이 주도하는 목요모임에 나가면서 퀘이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퀘 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놀라움 속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고, 무교회에서조차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6) 시련과 고독 속에서 맞은 1960년은 함석헌에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가져다준 한 해 입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 았다. 누가 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원망은 아니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 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7)
칼릴 지브란의 글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힘써 번역한 <<예언자>>, <<사람의 아 들 예수>>가 함석헌에게 신생의 빛을 비춰 주었다면, 1961년 겨울, 한국의 첫 퀘이커 이윤구님의 권유로 퀘이커 서울모임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또 하나의 출구였습니 다. 훗날 영국과 미국 퀘이커 친우봉사회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나 추천 받은 사실을 보더라도, 함석헌의 평화운동이 세월을 딛고 끝내 촛불 혁명으로 이어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숙연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위 책, 219~220
6) <<퀘이커 300년>>, 함석헌전집15, 352
7) <<예언자>>, 함석헌전집16. 213
2. 퀘이커(Quaker)신앙과 함석헌
1956년 1월호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 는 외침은, 2천 년 전 예언자 요한이 빈 들에서 외친 소리의 데자뷰로 들려옵니다. 오늘의 한국은 어떻습니까? 비만해질 대로 살찐 초대형교회의 행태가 이를 잘 보여주 고 있지 않습니까?
“퀘이커는 개방적이야요,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 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1983년 봄, 함선생님이 어느 잡지기자와 인터뷰에서 하신 말 씀입니다. 저는 1979년 매주 함석헌의 <노자 모임>을 다닌 인연으로 퀘이커 모임이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따른 기간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이었습니다. 서울 신촌에 자리한 ‘퀘이커 모임’에서 선생님과 함께 예배드린 시간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고요예배(silence)가 시작되면 선생님은 늘 꼿꼿 이 앉은 자세로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젖어 계십니다. 함께하던 이들 모두 고요 속으로 흐를 무렵, 선생님은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감화(vocal ministry)를 하셨 습니다.
어느 날 명상에 관해 일러주신 도움말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눈을 감고 오래 있다 보면 잡념이 끼어들어 방해를 하니, 그럴 땐 넘어가는 해를 연상하면 도움 이 될 거요.” 선생님은 예배를 마치면 당시 어지러웠던 시국에 관련해서 성경말씀 풀 이를 해주심으로써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제 퀘이커 신앙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 보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영국에 머물렀던 기간(172728)에 작성한 서신 가운데에, 퀘이커에 대한 인상이 깊었던지 무려 네 차례나 퀘이커에 관한 편지(On the Quakers)를 모국의 지 인들에게 보냈습니다.
퀘이커 같은 특수한 집단의 교리와 역사는 생각 있는 사람의 호기심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것 으로 내게 여겨졌다. 나는 이것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영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퀘이커 한 사람을 만나보러 갔다. 나는 우선 가톨릭 신자들이 신교도들에게 늘 해온 질문부터 던졌다. “선생님, 세례는 받으셨습니까?” “아니오. 나의 친우들도 모두 받지 않았어요.”라고 그 퀘이커 는 말했다.
“저런,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기독교 신자이고 또 좋은 신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지요. 하지 만 기독교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고 소금을 약간 뿌리는 것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 요.”
나는 이 불경한 말에 화가 나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 어버리셨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퀘이커교도는 온화하게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요한 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는 않았지요. 우리들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8) 이미 여러분들이 보았겠지만, 퀘이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에 의하면 첫 퀘이커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종교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부패하 기 시작하여 천 육백 년 동안 타락한 채로 남아 있었으나, 이 세상 어딘가에 늘 소수의 퀘이 커들이 은거하면서 신성한 불꽃을 보존해오다가, 마침내 1642년 영국으로 이 빛이 퍼져나갔다 는 것이다.9)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가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낡은 제도에 붙들려버린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함선생님과도 인연이 깊은 미국의 퀘이커 신학자 하워드 브린튼(H. Brinton)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의미 깊은 주장을 펼칩니다. ‘내적 체험에 근 거를 둔 신앙 신비주의’와 ‘교리와 상징으로 신앙을 표방하는 신학자’ 간의 싸움이라 는 것입니다. 그는 <<퀘이커 3백년>>에서 ‘미래에 살아남을 종교가 있다면 그래도 퀘 이커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라고 예견하였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G. Fox, 1624-1691)를 선두로 퀘이커 신앙이 싹틀 무렵 신비주의는 초미의 관심사였습 니다.
처음 기독교는 사도행전에 보이듯이 오순절 성령과 더불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퀘 이커 신앙이 단지 신비주의에만 머물렀다면 ‘기독교 제3의 형태’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처럼 세상 사람들을 떠나 사막이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새 힘과 빛을 얻는 신비체험을 긍정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소중한 체험이 개인에게만 머물러 버 린다면 그리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리라 봅니다.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야지요. 그래 서 퀘이커 신앙은 개인 신비주의를 넘어 단체 신비주의(group mysticism)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조지 폭스는 말합니다. “참 신앙이란 각 개인의 체험이자 모험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보다 더 큰 영과 만나는 일입니다.”
사실 퀘이커 신앙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이 유사 이래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것’ 이란 주장처럼 반대를 받아 온 것은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J. Calvin)의 예정설 과는 서로 상치됩니다. 퀘이커 반대자들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 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고 하면서 반박했지만, 18세기 가장 탁월한 퀘이커 신학자 로버트 바클레이(R.Barclay)는 “나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은 문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체험에 의한 깨달음에 있습니다.”라고 변호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이때에는 ‘깨달음’의 복음인 <도마복음>을 모르던 시절입니다.
8) Voltaire, Philosophical Letters, (New York : The Liberal Arts Press,1961), 3~4 9) 위 책, 11
우리는 빛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고, 단순히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아갈 수도 있습니 다. 몸은 동물적이고, 마음은 이성적이나, 속에 있는 빛은 신(神)적 입니다. 진리의 빛 은 그 이성을 지도해야 하고, 이성은 본능을 도와 올바르게 정돈된 살림을 하도록 해 야 한다는 것이 초기 퀘이커 신앙의 꽃이라 하겠습니다.
‘속 빛’(light within, inner light)은 화해와 일치의 근원입니다. 이 내면의 빛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것이며, 이 빛에 가까이 이를수록 사람들은 서로서로 가까워지는 것 입니다. 조지 폭스의 이상은 평화와 조용함(quietness) 이었습니다. 퀘이커 평화사상 의 토대는 어디까지나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요한 14:27). 퀘이커들은 두 길을 통해서 평화주의의 입장에 도달했는데, 하나는 우리 양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이 며, 또 하나는 신약성경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 많은 힘 가운데 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여러 힘을 하나로 통일하는 근원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 땅 위에 실현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퀘이커 신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종교적, 도덕적 진리를 알고 있다는 보편 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학적인 추상론도 띠지 않은 단순성에 있습니다. 이 단 순성을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에 최근 서양 또는 아시아 지역에서 특정 종교의 벽을 넘어선 이들(가톨릭 퀘이커, 불교인 퀘이커)이 함께 평화를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매우 영향력이 컸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조지 폭스 시대의 퀘이커 운동이 탈자적(ecstatic), 신비적 운동으로서 시대를 가로지른 급진적인(radical) 종교개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10)
이젠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수년 전 저는 한국 기독교회에 관한 우울한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가나안 기독교인’이라는 제하의 글이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성 서 지명의 ‘가나안’이 아니라 ‘안 나가’를 거꾸로 쓴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조가 놀랍게도 함석헌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지 모르게 현상유지를 원하는 기풍이 교회 안을 채워버렸고 그러니 가나안의 소망이 ‘안 나가’의 현상 유지로 타락해버렸다. 이상하게도 ‘가나안’이 거꾸로지면 안 나가가 되지 않나?11)
10) Paul Tillich,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315
11)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함석헌전집3. 33~34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나 그렇지만 신성불가침은 비 판받아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양심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대표하느니만큼 도리어 끊임없는 자기반 성이 필요하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12)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 하지 않을까?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것이지 민중의 종교 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보수주의자들이 뻔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 기만적인 현상이 다.13)
이런 연유로 선생님은 종교도 늘 거듭나야 한다며, 새 종교를 소망하셨던 겁니다. 끝으로, 새겨둘 만한 퀘이커 일화 한 토막을 올리며 마칩니다. 미국 초창기 펜실베이 니아 지역을 거룩한 실험(HolyExperiment)으로 이끌었던 장군 윌리엄 펜(W. Penn) 이 어느 날 퀘이커 집회를 마치자 조지 폭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답니다. "내가 칼 을 차고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보기에 어떻습니까?" 폭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장군께서 불편하다고 느낄 때까지만 차십시오.”
12)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함석헌전집3. 35~36 13) 위 책,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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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열린강좌 제6강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9.30.(목) 논평자 이수호
“퀘이커를 기다립니다.”
오늘 훌륭한 강의를 해 주신 장영호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제 소개를 간 단히 드리면, 저는 초등학교 교사로 지난 2015~2016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 학원에 연수파견을 갔었는데, 지도교수님의 조언으로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시 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름 교 회와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좀처럼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 는 갈증과 의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함석헌의 글은 몇십년의 간격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고백이자 절절한 외침으로 다가왔습니다. 논문 준비를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함석헌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무교회와 퀘이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 와 도봉구 함석헌기념관을 방문하면서 앞서 퀘이커를 경험하신 정지석 목사님, 김조년 교수님 등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퀘이커 예배에는 대전에 몇 번, 신촌에 한 번 정도 밖에 참석해 보지 않았으나, 기회가 된다면 퀘이커를 집중 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에 대해 핵심을 잘 소개해 주신 장영호님 의 강의에 대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평소에 궁금했던 점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함석헌이 민주화 투쟁에 직접 나섰던 인생 후반기의 기간이 퀘이커를 만나 도움을 받고 교제했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입니다. 김성수 박사님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2005.09.)”라는 논문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 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 사회적 민주 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 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 〈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함석헌이 당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이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전 세계가 하나의 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아무 나 누릴 수 없었던 해외여행을 통해 서구 사회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미국 펜 들힐과 영국 버밍험 우드브룩 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함석헌이 투옥되었을 때에도 석방을 위해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 해 주었고,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주는 등 아무도 함석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위상을 높여준 것이 영미 퀘이커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이미 성숙기에 이르렀던 함석헌의 씨사상과 300년 전통의 퀘이커 신앙이 서로 깊이 공감하고 공명하였다는 차원을 넘어서, 씨사상과 전체론의 깊이가 완성되는 데 서구 퀘이커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 함석헌을 만든 것은 사실상 퀘이커였다고 하 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둘째, 함석헌 사후 한국 퀘이커의 현황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보수교회에서 도 중고생과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어 10여 년 후에는 문을 닫는 교회들이 많 은 것으로 예상됩니다. 퀘이커도 새로운 회원들이 증가하기보다는 기존 회원들 이 고령화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신앙 유산을 우리 자녀들과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고 있는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함석헌에 대한 물심 양면의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일부 부유한 퀘이커 회원만의 노력이 아닌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는 보통 회원들의 관심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도 도움 이 절실한 이들을 찾아 지원하려면 어느 정도의 규모와 최소한의 조직은 갖추 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시대 에 퀘이커를 찾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또 해외 퀘이커의 현황은 어떠한지 최근의 기록과 통계를 알 수 있을까요?
셋째, 누가 퀘이커인가, 퀘이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퀘이 커모임을 후원했다거나 펜들힐에 다녀온 분들이 있었다는 소식은 간간히 들을 수 있으나, 내가 퀘이커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퀘이커 회원이지만 지금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지 않거나, 자신이 퀘이커라는 정체성을 굳이 외부에 드러내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퀘이커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퀘이커 신앙에는 공통적인 신조나 교리가 없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이해한 만큼에서만 퀘이커를 설명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퀘이커주의에 공감하고 혼자서도 나름대로 사회 참여를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퀘이커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요? 세계의 다른 퀘이커들과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은 부차적인 것일까요? 가나안 성도가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마 찬가지일까요? 씨사상에 공감하면 함석헌을 기리고 계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이상 제가 가지고 있던 소소한 생각을 질문의 형식으로 나누어보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여하신여러분들과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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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에 대한 논평 -
김말순
먼저 논평을 맡은 제 소개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학자도 연구원도 사상가도 아닙니다. 그냥 모태신앙으로 초대 교회 신앙인 창조의 하나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죄사함에 대해 성경을 아주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이나 강의를 접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촌 퀘이 커모임집에 살게 되면서 예배모임에 참석하고 퀘이커에 대한 공부 를 하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기념사업 회에 나오게 된 것도 선생님을 좀 배워서 알아야겠다는 욕심으로 2016년부터 모임이나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누구의 글이나 강의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서울종교친우회(퀘이커) 회원이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읽으면서 논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 석헌 선생님에 대해 많은 서적들을 통해 여기 모인 분들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고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 내용에도 잘 설명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단지 선생님의 진면목이 늘 궁금했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누구인가?” 하고 인터넷에 물어봤습니다. 아주 명쾌한 답을 알려 줬습니다.
“취래원 농사꾼 황보윤식 농부(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님의 “함석 헌 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 9. 1) “함석헌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 함석헌의 사상은 무지개 사상이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 보-로 색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색의 경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게 무지개의 본질이다. 함석헌은 무지개처럼 뚜렷한 한 가지 사상 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분명 우리 시대에 “사상의 무지 개”를 놓고 간 분이다. 다양해져 가는 열린 시대에 필요한 융합철학의 무지개를 놓고 간 사상가다.
▷서양의 그리스도 사상(퀘이커) 을 기본으로 동양의 불교사상, 공맹사상, 노자사상, 양명사상 그리 고 다시 서양의 실존주의 사상과 아나키즘까지 융합하였다.
그래서 함석헌은 무지개 사상을 만들어냈다. 함석헌의 무지개 사상은 문화 의 다양성 강조와 하나의 인류를 지향해 가는 곧 미래사회의 세계 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행합일의 귀감을 보이면서 세계 주의를 실천해갔다.
세계주의는 곧 평화주의 사상이다. 세계평화는 전쟁이 종식 되어야만 가능하다 전쟁종식을 위하여 합법을 가장한 국가폭력을 반대해야 한다. 곧 국가(정부)지상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를 검색했을 때 위의 글을 읽고 깜짝 놀 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아! 바로 이런 분이었구나!!!’ 했습니다. 저는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을 좀 더 깊이, 많이 알고 논평 을 맡은 입장에서 답해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이 엮으신 [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를 읽었고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읽었습니다. 어느 한 구절도 빼놓고 요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전해 드리는 것으로 논 평을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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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 9~12 9)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 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을 주셨다
※ 요한복음 15: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 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종교친우회=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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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300년]을 옮긴이의 말
처음에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나 스스로 퀘이커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내가 퀘이커에 대해 흥미를 느 끼게 된 것은 1947년부터입니다. 그해 3월 나는 이북에서 공산주의의 사납게 구는 것을 못 견디어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그 때 사람 들은 아직도 군정 밑에 있어서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지 않은 가슴을 안고 새 역사의 나갈 방향을 더듬고 있는 때였습니다. 간 곳 마다 활발 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서울에 온지 얼마 아니 되어, 지금은 이 땅위에 있지 않은 현동완 선생이 주장해 하시는 목요 모임에 나갔는데 그 때 그는 미국 여 행을 마치고 갓 돌아온 뒤였기 때문에 여행 선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중에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말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 병령을 반대하고 나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그 뜻을 이해하고 정말 종교적 양심 때문에 하는 것이 분명하면 군대 복무를 면제하고 대신 다른 평화적인 사업으로 돌려 주는 법령을 만드는데 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습 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은 온전히 잘못이라는 이 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무교회에 서조차도 전쟁 반대를 힘써 부르짖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찌무라 선생이 러일전쟁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 쳤지 감히 국가에 대해 항쟁하는 사회적 역사적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 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것을 칭찬하고 성령을 받아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쳤지 아무도 나도 그래야 한다 하고 실천의 태도로 나간다든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으냐 하고 용 감히 주장하거나 권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퀘이커의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애 서양 책을 더러 읽노라면 ‘퀘이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수가 있었는 데 그것은 언제나 테두리 널따란 모자에 허술한 옷을 입고 좀 괴상한 사 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괴상한 사람이 괴상 정도로 그 치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길손 모양으로 어둑한 어스름 빛 밑에서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걸어오기는 하지만 그 영상은 아직 태평양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형상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서울에서 그들 을 만나는 날이 왔습니다,
무슨 팔자로 그랬는지 은혜로 그랬는지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태어났 으면서도 이날 껏 전쟁을 몸으로 당해 보지는 못했는데 6・25전쟁이 터 져 3년 동안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먹고 손으로 만지며 그 악독하고 끔찍한 맛을 속속들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다시 돌아오니 내 한 말이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전쟁 전 YMCA 큰 강당에서 주일마다 말을 했는데 언젠가 똑똑한 내 정신을 가지고 “이놈의 서울이 남대문서 동대문까지 환히 내다뵈도록 확 타버렸음 좋겠다.” 한 일이 있 었습니다.
그 말을 스스로 잊을 수 없는데 이제 정말 그대로 된 꼴을 보니 부 르르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말이 꼭 그대로 들어맞을 만한 무 슨 힘이 있다는 생각은 감히 터럭만큼도 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말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정수리에 칼이 박히듯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수복 이후에는 김명선 박사의 고마운 뜻으로 지금은 없어진 세브란스의 에비슨관을 빌려서 주일 모임을 계속했는데 그 어느 날 거기 퀘이커가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아더 미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내가 퀘이커를 본 처음입니다. 그는 그 때 우리 모임에 나오던 이윤구 님의 소개로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보다 전에 미국 퀘이커 봉사회에 서 전쟁 후의 한국을 돕기 위해 30명 가량으로 된 구호대를 보내어 군 산 도립병원의 복구 사업을 맡아서 했는데 그 때에 이윤구 님은 그들을 만나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퀘이커가 되었고 자기 생각에 나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이라 해서 내게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레지 날드 프라이스, 플로이드 슈모어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제 나는 평화주의나 양심적 거부만이 아니라, 퀘이커라는 사람들을 ‘친구(friend) 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때 서울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 몇 번 나간 일이 있었고 아주 나가게 된 것은 1960년 나의 주일 모임을 그만두게 된 후부터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매우 좋다 생각했지만 나는 나의 생각하는 바를 고쳐야 할 어떤 필요도 아직 느끼지 않았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지만 반드시 그들에게 배워야겠다는 무슨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미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시찰 여행을 하게 됐으므로 마침 기회가 좋다 해서 필라 델피아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퀘이커 수양기관인 펜들힐에 요청해서 공식 여행을 마친 후 6월 부터 연말까지 일곱달을 머물러 있으면서 공부를 했 습니다. 그리고는 밝는 해 1월부터 석 달을 또 영국 버밍햄에 있는 같은 성질의 학교인 우드브룩대학으로 가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의 대 체의 모습을 좀 짐작하게 되었고 흥미를 더욱 느껴 돌아올 때는 책도 더 러 구임해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퀘이커가 되자는 생각은 역시 없었습 니다. 나는 어느 기성교파에 속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퀘이커의 회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7년 태평양 연회의 초청으로 노드캐롤라이나 길포드대학에서 열렸던 제 4차 세계퀘이커대회 와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태평양 연회모임에 참석하고 난 다음이었습 니다. 그런 변동의 동기는 본래 말로는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안됐음 어떠냐?” “그렇다. 퀘이커가 됐담 된 것이고 안됐담 안된 것이다.” 합니다마는 그 중의 중요한 점을 말한 다면 나는 그들의 우의(friendship)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 정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 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 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 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참고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 됐습니다. 그들은 아주 넓은 마음으로 누구나 용납합니다.
퀘이커라는 안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기본 신앙의 극단적인 보수주의로부터 유니테리언,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넓으면서도 회원이라 할 때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절대로 회원 되는 것을 권하는 일 없습니다. 퀘이커 는 전도 아니하는 종교입니다. 그 점은 다른 종교와 참 다릅니다. 그것 은 그들의 직접적임과 체험과 자유를 극단으로 주장하는 데서 오는 것입 니다. 나도 처음에는 회원됨을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는 데 반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원과 참석자를 그리 구별할 것이 무엇이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별이나 차별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회원이 되는 데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강권하지 않으니만큼, 차별 하지 않으니만큼, 도리어 더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나도 후에는 그 생 각이 옳다 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정말 자유요 참 민주주의며 그들이 신 비파 운동에서 일어나기는 하면서도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 의 주관주의에도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 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고 비교적 건전히 중간노선을 걸어오게 된 까닭이요, 또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도 발언권을 가지는 까닭입니다.
하여간 나도 그들의 그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에, 시비를 들을 각오를 하고 퀘이커의 회원이 됐습니다. 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 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 있어 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적어도 지금은 마 땅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 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한번 결정하고 나니 퀘이커를 더 잘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하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연회 초청여행으로 태평양 연안 산디에이 고에서 포틀런드에 이르는 여러 퀘이커 모임과 가정방문을 마친 다음에 다시 5년 전에 일곱 달 동안을 이날까지의 내 생애에 가장 행복스런 대 목이라고 하면서 지났던 그 자유와 평화의 동산을 다시 봤을 때의 감격 을 나는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영어를 잘 할 줄 몰라 누 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내 의사를 충분히 발표도 못하 면서도 아무 부자유도 불안도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조용히 맘대로 생각 하고 거닐었던 것입니다. 5년 전이나 5년 후나 아무 변함이 없었습니다. 도서실의 책이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있고 강당 구석에 있던 어항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나갔던 아들이 어머니 품 으로 돌아온 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머물러 있던 방에 가니 바로 어제 있었던 듯했습니다. 5년 전 내가 그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창 밖 능 금나무 가지에 철새란 놈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쳐서 손으로 만질 거리 에 있어서 날마다 대화를 했었는데 그 새둥지가 비바람에 부서는 졌지만 그대로 옛 모습을 짐작할 만큼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갔던 새끼인 듯 했습니다. 알에서 깨어 나갔던 새끼가 돌아온다면 자라서 올 것인데 나도 자랐을까? 가지가지 생각이 풀려나는 내 가슴속에서는 용천 옛 집에서 어머님이 넘어가는 저녁볕 밑에서 잣던 물레에서마냥 평화의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그러한 속에 있으면서 아침으로 저녁으로 한 것이 이 책 읽기와 우리 말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이 책을 저자인 선생님 손 에서 받았고 때마침 그 일본말의 번역자인 다까하시 여사도 있어서 그 일본말 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도 선생님을 존경아니한 것 아니었습니다. 그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의 사상・지식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면 알 것이니 설명이 필요없습 니다. 그 인격과 믿음도 여러 십년을 미국, 독일, 일본에서 가르치고 봉 사하고 한 경력을 살펴보면 자연 짐작할 수 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도 이미 여든이 넘은 늙은이였지만 아주 건강해 깊고 조리 있는 강의를 했고 아침 예배시간이면 그 허연 머리털과 길다랗게 뻗친 흰 눈썹 밑에 광채를 쏘는 눈을 빛내며 앉은 모습이 성자다왔고 이따금은 뜻 깊은 감 화를 주곤 했었습니다. 5년 후 이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와서 각별한 결심으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그가 아버지처럼 생각됐습니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것은 꼭 내 이야기같이 생각됐습니다. 어쨌든 내 생각의 역사를 다 알기나 하는 듯해서 어떻게 내 소리를 썼을까 싶었 습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선생님을 뜰에서 만나면 “선생님, 그거 제 이야기 같습니다”했습니다. 나만 그렇겠습니까? 남도 그런 사람이 많 을 것입니다. 그만큼 참입니다.
그래서 첨에는 내 공부를 위해 시작했던 것이 다시 생각하니 서울 있 는 모임의 벗들에게 이것을 읽도록 해야겠다, 그뿐 아니라 일반 다름 사 람에게도 읽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퀘이커주 의만 아니라 일반 신앙의 참고로도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퀘이커는 본래 식학이 없지만, 이 책도 신학 토론은 아닙니다. 그보다도 실지로 신앙 살림을 해가는 데 많은 지침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내가 이 글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community)에 관한 이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 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 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 영웅, 이상, 로맨티시즘, 개인,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 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못났어도, 개인의 뒤에는 늘 전 체가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 로 밝히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오늘날 되어 있는 종교가 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들이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는 깊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담 또 한 가지는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 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 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적으로 예를 하나 든다면 필라델피아에 있는 가장 오랜 모임집에 가보았는데 모일 때마다 기록한 회록이 300년 전 시작하던 맨 첨에서부 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체제에 같은 글씨로 기록되어 그대로 보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변해가는 세상바다의 거친 파도에서 제 자신을 가누어가기에 미처 다른 생각이 없는데 이들 얼마 아니 되는 퀘이커만이 수세가 아니라 공세입니다. 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자 선생님 말씀대로 미래의 종교가 반 드시 퀘이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미래를 건져가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 은 퀘이커 같은 이러한 방식의 생각을 하는 종교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 됩니다.
펜들 힐에 있을 때 이미 거의 절반이 옮겨졌었는데 그 후 나라에 돌아와서 게으름을 피워 이제 와서야 겨우 인쇄에 부치게 돼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해에 부인을 앞서 보내셨고, 건강도 한때는 퍽 걱정들 을 했는데 요새 많이 회복되셨다는 소식이 와서 기쁩니다. 다만 진심으 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말씀은 한국판이 나오기를 위해서 내가 감히 말씀도 드리기 전에 선생님이 자진 노력하시어서 출판자금을 얻어 주셨는데 이날까지 이렇게 무책임하게 늦게 만들었고, 더구나 한마디 편 지도 직접 못 드려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영어를 자유로 쓸 줄 알았다면 벌써 몇 십 장도 편질 드렸겠습니다. 영어로는 도저히 제 마음을 그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 옮겨놓은 글도 의심하실는지 모르나 읽기와 쓰기는 다릅니다. 읽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 가지고 했으 니 안심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본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 지 않았나 해서 두려운 마음 많습니다. 있거든 알려지는 대로 고치겠습니다.
이 책이 보시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또 우리미래 역사의 설계와 작업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되는 점이 있으 시다면 고마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1970년 5월 9일 함 석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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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1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3-100
- [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이것이 잃어버린 '광주소리'다 ...명창 박동실을 들어보라박동실(朴東實 1897∽1968) 박동실(朴東實 1897~1968)은 판소리를 통해 항일운동을 한 행동하는 명창이자 이론가였다. 그가 1945년 광복 전후에 창작한 열사가(烈士歌) 중 ‘윤봉길 열사가’의 한 대목을 보자. 윤봉길(尹奉吉) 열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 홍커우(虹口)공원에서 폭탄을 터트려 시라카와(白川)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킨 그 사건의 그 장면 말이다. “(휘모리)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번개 같이 일어서서 백천 앞으로 우루루루루. 폭탄을 던져 후닥툭탁 와그르르르 불이 번뜻. 백천이 넘어지고 중광이 꺼꾸러지고 야촌이 쓰러지고 시종관이 자빠지다 혼비백산. 오합지졸이 도망하다 넘어지고 뛰어넘다 밟혀죽고…그 때여 윤봉길 씨 두 주먹을 불끈 쥐고…하하 그놈들 잘 죽는다.… 대한독립 만세를 불러노니…” 이 노래를 듣고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쾌했을 것이다. 마침 광복이 아닌가.(‘윤봉길 열사가’는 광복 이후 창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판소리하면 우리는 신재효(申在孝 1812~1884)가 정리한 전승 5가(歌), 곧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흥부가를 떠올린다. 박동실은 이 5가를 잘해서 명창이고, 덧붙여 판소리까지 만든 사람이다. 문외한도 술자리에서 한번쯤은 들었을 사철가(사절가)도 그의 작품이다. “이산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다/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 허구나/….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 1945년 10월, 광주시 광주극장에선 이 지역 국악인들이 다 모여 해방 기념 공연을 가졌다. 마지막에 출연진 전원이 나와 ‘해방가’를 불렀고, 관객들도 일어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반가워라 반가워/ 삼천리 강산이 반가워/모두들 나와서 손뼉을 치면서/활기를 내어서 춤을 추어라/이런 경사가 또 있느냐/…/반가워라 반가워라/새로운 아침을 맞이하세/…” 이 해방가도 박동실이 작사 작곡한 것이다(박선홍, 『광주 1백년 2』, 2014년). ‘사철가’와 ‘해방가’는 단가(短歌)여서 완창에 몇 시간씩 걸리는 전승 판소리와는 구별된다. 박동실은 전승 5가에 터를 잡은 양반‧특권층의 판소리를 시대와 함께 하는 판소리, 민족성이 깃든 판소리, 대중성이 살아 있는 판소리로 바꾸었다. 윤봉길 외에도 ’열사가‘의 대상 인물인 이준(李儁 1859~1907),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의 항일 행적을 비장미 넘치는 판소리에 담음으로써 본격적인 창작 판소리의 시대를 열었다. 그만큼 판소리의 외연을 넓힌 것(정병헌, ‘명창 박동실의 선택과 판소리사적 의의’ 2002년). 물론 ‘열사가’는 광복 전후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친 항일과 일제 잔재 청산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박동실의 창작물이고, 어디까지가 구전(口傳)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박동실은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 월북해버려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열사가’는 판소리라는 전통음악의 그릇에 항일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민족적, 예술적 의의가 심대하다. 그를 빼고 예향(藝鄕), 광주의 정신을 논할 수 없는 이유다. 박동실은 담양 객사리 241번지에서 태어났지만 제적등본에 따르면 부모는 광주 본촌면 용두리현 북구 용두동 467번지에 살다가 도중에 담양으로 옮겼다고 한다. 1929년 어머니 배금순(裵今巡)이 사망한 곳도 광주 용두리였다고 한다(박선홍, 앞의 책). ‘하얀나비’를 부른 김정호의 외조부 박동실은 대대로 소리하는 집안 출신이다. 9살 때부터 아버지(박장원)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는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배희근)도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박동실은 명창 김소희와 같은 집안인 김이채와 결혼해 1남3녀를 뒀다. 이 중 둘째딸(숙자)의 아들, 곧 박동실의 외손자가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같은 히트곡을 남긴 송라이터 가수 김정호다. 그는 1985년 34세에 폐렴으로 요절할 때까지도 꽹과리와 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박동실은 김채만에게 서편제를, 부친에겐 동편제를 배웠다. 제자 한애순(韓愛順1924~2014)은 “선생님은 동편과 서편을 섞어서 소리가 맛있었다.”고 회고했다(배성자, ‘박동실 판소리 연구’, 2008년). 박동실은 스승 김채만(金采萬 1865~1911)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김채만은 담양의 전설적 명창 이날치(李捺治 1820~1892)를 잇는 서편제의 대가. 그에게서 뻗어나간 소리를 ‘광주소리’라고 하는데, 박동실이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이경엽, ‘박동실과 담양 판소리의 전통’, 2019). 그의 ‘심청가’가 대표적인 서편제, 박동실제(制) 광주소리다. 서편제는 광주, 나주, 보성, 고창 등 호남의 서남부 평야지역에서 발달한 유파로, 세련된 기교와 섬세한 감성이 부각된다. 동편제는 구례, 남원, 순창, 곡성 등 호남 동부 내륙지방의 유파로 선이 굵고 꿋꿋한 소리제의 특성을 갖는다. 흔히 동편제는 담담하고 채소적(菜蔬的)이며, 천봉월출격(千峯月出格)이고, 서편제는 육미적(肉味的)이며, 만수화란격(萬樹花爛格)이라고들 한다(한국민속예술사전). 박동실은 1930년대 중반, 담양 창평 출신의 후원자 박석기(朴錫驥 1899~1953)를 만나면서부터 후학 양성에 전념하게 된다. 박석기가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에 국악초당을 짓고 그를 선생으로 초빙했기 때문이다. 모두 30여명을 가르쳤는데 공부에 게으르면 나이 불문하고 체벌을 가할 만큼 엄격했다고 한다. 김소희, 한애순, 김녹주, 한승호, 박귀희, 장월중선, 김동준, 임춘행, 박후성, 임유앵 등 당대의 명창들이 다 그의 제자다.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박동실은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월북한다. 친일파의 득세와 소리꾼에 대한 홀대 탓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국악계도 일제 청산 문제를 놓고 좌우 갈등을 겪었다. ‘열사가’를 창작한 박동실로서는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는 꼴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정병헌, ‘담양소리의 역사적 전개’, 2019년). 박동실의 조카 박종선은 “큰아버지가 북에 간 것은 소리꾼 신분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김기형, ‘박종선 명인 대담’, 2001년). 박동실은 북에서 인민의 전투적 투쟁심을 고무하는 단가와 장가(長歌) 수십 편을 창작한다. 창극 ‘춘향전’을 현대화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성악 유산을 수집 정리하고 여러 편의 논문도 발표했다. 1957년 9월 김일성이 차려준다는 환갑상과 함께 공훈배우의 칭호를 받았고, 1961년 7월 예술인 최고의 영예인 인민배우가 된다. 그러나 1964년 김일성이 판소리가 양반의 노래이고 듣기 싫은 탁성(濁聲)을 낸다며 불쾌감을 드러낸 이후 판소리는 사라진다. 대신 혁명가극이 등장하고, 박동실은 1968년 12월 4일 71세로 생을 마감한다. 박동실이 월북하면서 그에 관한 모든 게 금기(禁忌)가 됐다. 제자들은 1988년 박동실이 해금(解禁)될 때까지 그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는 사실조차 숨겨야 했다. 판소리의 한 맥(脈)이 끊긴 것이다. 그러나 끊어지면 이어지고, 이어지면 끊어지는 게 세상사. 소리는 梨大 출신 명창에게 이어지고 박동실이 죽기 하루 전날. 남쪽 그의 고향 담양에선 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그 아이가 명창 권하경(權夏慶‧53). 그는 박동실의 제자 한애순에게 소리를 배워 지금 ‘박동실제 판소리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전병헌에 따르면 “한애순은 박동실의 소리를 가장 완벽하게 보유한 명창으로, 그가 광주예술고에서 판소리 선생으로 있을 때 학생이었던 권하경을 만나 박동실제 ‘흥보가’와 ‘심청가’를 그대로 전승했다.”고 한다. 실로 절묘한 인연이다. 환생? 권하경은 ‘흥보가’ 이수자로 국가무형문화재 5호이자, ‘명인’이다. 전남대 예술대 국악과를 거쳐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심청가 진계면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담양창극예술단장, 담양소리전수관장도 맡고 있는 그는 요즘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아이들에게 판소리와 남도민요, 고법(鼓法)과 장구 등을 가르친다. 그에게 판소리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유네스코(UNESCO)는 2003년 우리 판소리를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했지만 박동실 등 주요 명창의 소리는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습니다. 죄송함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판소리는 한문, 역사. 음악 등 많은 분야를 알아야 할 수 있는 종합예술입니다. 삶의 희로애락을 잘 녹여서 관객에게 전달하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흰 종이 위에 한 일(一)자만 그려도 인생이 보이는 판소리를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경엽 교수는 “박동실제 판소리를 특화한 판소리 감상회를 열어 자연스럽게 관광 상품화해야 한다.”면서 ”음원자료가 특히 중요한데 지금껏 알려진 박동실의 녹음자료는 ‘오케이 레코드’ 12227번에 수록된 ‘흥보가’ 중 ‘흥보치부가’가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정병헌은 “박동실이 월북해 담양소리가 위축됐지만 결과적으로 담양소리는 북한으로 그 영역을 넓힌 셈”이라면서 “남북 사이에 장차 예술교류가 활발해질 때를 대비해 이제라도 담양소리를 복원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사철가’ 끄트머리에서 박동실은 “…국곡투식(國穀偸食-나라의 곡식을 훔쳐 먹음) 허는 놈과 부모불효 허는 놈과 /형제화목 못허는 놈 차례로 잡어다가/저세상 먼저 보내버리고/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앉아서/한잔 더먹소 덜먹게 허면서/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라고 노래 한다. 남북이 그런 날이 올랑가 모르겠다. 명창 권하경(權夏慶‧53)2021-06-24 21:01:30
- 다석 류영모의 생존 직제자 임락경 "그는 3%의 성자"다석이 1981년 91세로 숨을 거둔 지 어언 40년이 넘게 흘러갔다. 다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석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는 박영호 임락경(1945~ ) 두 사람뿐이다. 임 목사는 열일곱 살에 광주 동광원에 들어가 1년에 두 차례씩 동광원에 와서 강연을 하던 다석을 만났다. 서울 구기동에 살던 다석은 계명산 자락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도 자주 와서 말씀을 전했다. 임 목사는 양주 장흥의 동광원 남자 수도원에 있을 때 계명산을 넘어가 다석의 동광원 강의를 들었다. 임 목사는 다석의 구기동 집에도 박영호 선생과 함께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갔다. 순창은 행정구역으로는 전북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광주에 가깝다. 임 목사가 순창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찾아간 곳이 동광원이었다. 그는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하고 화폐개혁(1962)을 한 해라고 말했다. 임락경 소년은 동광원에서 최흥종 목사(1880~1966)를 만났다. 최 목사는 광주 YMCA 초대 회장을 지냈고 평생을 나환자 돌봄과 빈민구제,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한 광주의 별이다. 그는 최 목사와 이현필 선생 그리고 다석을 인생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당시 한국은 6·25 전쟁을 겪고 나서 먹을 것이 모자라 대부분 가정에서 1일1식을 했고 좀 여유가 있는 집이라야 1일2식을 하던 때였다. 임 목사는 춘궁기에 2일1식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석을 알기 전부터 1일1식을 실천한 셈이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으로서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신 가르침을 얻고자 찾아간 곳이 광주 동광원이다. “남원에 셋이서 공동경영하는 삼일 목공소가 있었습니다. 순창 고향교회의 오북환 장로, 서재선 배영진 집사, 세 분이 목공소를 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남원을 찾아오면서 크게 감화를 받은 오국환 서지선 집사가 이 선생을 따라가는 바람에 목공소가 해체되다시피 했습니다. 서 집사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배영진 집사는 고향교회에서 장로로 있으면서 이현필 류영모 함석헌 선생과 현동완 YMCA 총무님 말씀을 자주 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조금만 더 크면 이분들을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동광원에 들어갔는데, 군 생활을 마치고 갔더라면 이현필 최흥종 선생은 못 뵐 뻔했지요. 다석은 해방 이후부터 매년 광주 동광원에 강사로 왔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선생님과 같은 방에서 잤지요. 새벽 2시에 함께 일어나 같이 요가를 했죠. 가난해서 강사 숙소가 없었던 게 어쩌면 행운이었어요.” 젊은 시절 다석을 댁으로 찾아뵌 임 목사. 다석은 전주 근교에 있던 절 용흥사를 매입해 동광원에 기증했다. 다석이 지은 ‘진달네’라는 시 제목에서 따 진달네 교회라는 이름을 지었다. 다석의 붓글씨를 새겨 현판을 걸었다. 무등산 결핵요양원에서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이 전주 진달네 교회로 옮겨와 닭을 기르고 산양 젖을 짜 콜라병에 담아 팔며 자급자족했다. 임 목사도 1969년 군에서 제대한 후 진달네 교회에서 3년 동안 살았다. 다석이 광주 동광원에 강의를 오면 임 목사가 전주로 모시고 가서 진달네 교회에서 하룻밤 묵고 서울로 올라갔다. 다석은 30만원에 절을, 20만원에 인근 산 13 정보를 사서 결핵이 나은 수도자들이 밭을 일구고 살도록 했는데 다석이 세상을 뜬 후 동광원 운영자가 가톨릭 전주교구에 기증했다. 임 목사는 진달네 교회에서 나와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했다. 그 뒤 화천에서 ‘시골교회’를 개척했다. 군대생활을 할 때 일요일마다 예배 보러 갔던 교회가 있던 마을이었다. 화천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55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전북 정읍 옥정호반에 있는 근사한 한옥 건물은 화천 시골교회의 부설 요양원 ‘사랑방’이다. 손자의 난치병 치유에 감사한 할머니가 헌금한 돈으로 지었다. 난치병 환자들이 임 목사로부터 민간요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이다. 임 목사는 낮이면 일하느라 전화를 잘 받지 않았고 저녁에는 묵묵부답. 문자 메시지도 씹었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과 유희영 군산 YMCA 사무총장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 날짜를 힘들게 잡았다. 그날 인터뷰어가 서울에서 촬영 기자와 인턴 기자를 태우고 네 시간 운전을 해서 정읍 사랑방에 내려갔다. 그리고 두 시간 인터뷰하고 한 시간 식사하고 다시 다섯 시간 운전을 해서 돌아오는 당일치기 강행군이었다. 임 목사는 밭일을 하던 허름한 옷차림새로 서울서 찾아간 손님을 맞았다. -교회 이름이 하필 시골교회입니까? “내가 최흥종 목사를 알게 되면서 시골교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최 목사는 결핵 환자들과 함께 살았죠. 1980년대 되니까 관절염, 뇌성마비, 전신마비 환자들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서 30명이 됐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끼리 사는 건 시설 인가가 나지 않아서 불법이었어요. 교회 차원에서 하면 규제가 덜했죠. 그래서 교회 간판을 걸었습니다. 장로가 교회를 하고 있다간 목사가 바뀌면 끝나니까 ‘내가 목사가 되자’는 생각을 했죠. 늦게 신학을 배워서 목사가 되고 교회 이름을 ‘망할 교회’라고 지으려고 했지요. 수용할 장애인들이 없어져 교회가 망해버려야 좋은 세상이 되거든요. 그런데 신도들이 교회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냈습니다. 지금 같으면 그냥 밀어붙였을 텐데 그땐 초년 목사라…고향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보니까 ‘시골 향’ 자를 따서 시골교회라고 했죠. 2010년도까지 30~40년 잘 지냈는데, 지금은 장애인들이 갈 곳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 암환자들이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이곳 사랑방은 시골교회의 암환자 교육관으로 지은 거예요. 암 환자들 교육을 내가 1년에 30회 이상 나갔습니다. 이 건물에서 암환자들이 모여 숙식까지 할 수 있죠. 여기는 교회라기보다는 사랑방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광주 YMCA 총무를 지낸 최흥종 목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다석보다 10년 연상으로 광주 YMCA를 창립하셨죠. 최 목사는 조선이 망해가던 말기에 의병을 살려내기 위해 순검을 했다더군요. 체포된 의병 수십 명을 다음 날 처단해야 하는데 한밤에 최 순검이 ‘너희를 풀어줄 테니 나를 묶어 놓고 도망가라’ 했답니다. 아침에 의병이 다 달아나버린 것이 알려져 난리가 났는데 최 순검은 ‘나 혼자 지키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발뺌을 했습니다. 순검을 그만두고 나와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3·1운동 때 광주 지역 책임자였어요(최 목사는 서울종로경찰서에서 체포돼 징역 3년을 받았다). 그땐 나병 환자들이 갈 곳이 없었어요. 최흥종 목사가 나병환자들을 위한 시설을 지으라고 선산을 내놓았습니다. 최 목사는 젊은 시절 주먹이 세다고 소문이 나서 나환자들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광주에 가면 최 목사가 돌봐준다고 하니 나환자들이 광주로 우르르 몰려왔죠. 도지사한테 나환자를 수용할 집을 지어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는데, 답이 없자 총독부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광주에서 걸어서 서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150명이 출발했는데 중간에 숫자가 불어나 500명이 모이더래요. 그것을 ‘구나(救癩)행진’이라고 하는데요. 총독부에선 깜짝 놀랐죠. 그래서 만들어준 곳이 여수 요양원입니다. 여수 요양원 박물관에 가면 최흥종 목사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소록도 박물관에도 최 목사 사진이 있죠. 다석 선생이 광주에 올 때면 최흥종 선생과 무척 가깝게 지냈죠.” -다석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뜨고 없어서 보물 같은 존재가 되셨는데요. 다석의 강연은 어땠습니까? “다석 기념 학회나 기념 발표할 때 후진들이 글로만 읽고 발표하니까 다석의 모습을 흉내도 못 내요. 촬영 기자가 왔으니 내가 그 모습을 한번 보여주고 싶습니다.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아오’” 임 목사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노래를 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음성으로 설명하지 않고는 무슨 뜻인지 몰라요. 책에 그저 써놓아도 모르죠. 다석 선생이 하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다석 선생님은 주시경 선생이 큰 실수를 했다고 했죠. 지금의 한글 자모 24자에 옛글자 4자를 그대로 두었더라면 외국어를 표기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죠.” 우리가 보통 하는 ‘가나다라마바사…’를 다석은 ‘기니디리’로 대신한 모양이다. 다석은 한글을 사랑했고 한글학자들과 가까워 사전 편찬 비용도 내주었다. 임락경 목사가 개척한 화천 시골교회. 여느 교회와 다르게 한옥으로 지었다. <광명시민신문 제공> -다석에 대해 ‘내가 삶의 큰 빚을 진 스승’이라고 말했던데요. “원래 큰 나무 밑에선 나무가 큰 줄 모르는 거예요. 최초에 최흥종 목사님 영향을 받았고, 이현필, 다석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세 분 다 나로선 빚쟁이죠.” 이현필의 일생을 알고 나면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성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 인터뷰 때 가보니 벽제 동광원에 웅장하게 이현필 기념관을 짓고 있었다.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현필 선생은 생전에 그런 기와 집에서 하룻밤도 자보지 못했을 것이다. -심중식 소장이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크게 짓자고 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이곳에 와서 보니 사랑방도 호수가에 한옥으로 멋지게 지었네요. “불교는 어느 나라에 들어가든지 그 나라 건축양식으로 사찰을 짓고 그 나라 옷을 입고 그 나라 악기를 쓰거든요. 기독교는 어느 나라에 가든지 뾰족집 짓고 그 나라 풍속을 안 따라요. 일본에 갔더니 사찰과 신사 건물이 구분 안 될 정도로 비슷해요. 스님들은 일본 정장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복 잘 입으면 중 옷 같다고 하지요. 다석도 평소에 한복 입고 머리 깎고 다니니 중 같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건물을 이렇게 지어놓으니 교회가 아니라 절간 같다고 하는데…. 기독교는 여기서 진 거예요. 불교는 건물 하나를 지어놓고 예불도 드리고 교육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다 하거든요. 그런데 기독교는 이렇게 하려면 건물을 5채 지어야 해요. 예배당 따로, 교육관 따로, 숙소, 식사 따로…. 1채로 해결하는 것이 우리 전통 한옥 방식이죠. 화천의 시골교회도 이렇게 한옥으로 지었어요.” -초등학교만 졸업했다고 하는데요. 책도 10여 권 쓰고 목회자로 활동하시고…. 독학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나는 낮에는 한 번도 책을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그래요. 밤에 공부했죠. 낮에는 일해야 하죠. 오늘도 여러분들 오기 전까지 부지런히 일했어요. 그리고 아직까지 책 열 권을 안 사봤어요. 아직 삼국지도 안 읽어봤어요. 내 앞에 없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책이 100권이 안 됩니다. 책 한 권 사고 싶어도 계속 지킨 전통이 깨질까 봐 안 사고 있어요. 대부분 남의 책을 빌려 읽었어요. 공책도 남이 쓰던 것을 썼죠. 밤에 조카나 동생들이 연필로 쓴 헌 공책에 나는 펜으로 덧입혀서 쓰면 되거든요. 학교 안 다니고 공부하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학교 다닌 사람보다 노력을 배로 해야 해요. 나중에 교수들 하고 회의를 해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 -김성훈 상지대 총장이 국제환경유기농센터를 설립하면서 임 목사를 교수로 임명했는데 ‘초등학교 졸업자가 대학 교수가 된 것은 처음’이라고 소감을 말했더군요. “김성훈 농림부 장관 때 마침 내가 정농회 회장이었죠. 친하게 지냈어요. 상지대 총장 취임식 날 갔더니 친환경 농업과를 세운다고 하더라고요. 이후에 일부러 찾아갔어요. 친환경 농업과를 설립하는데 친환경 농업이 무언지도 모르는 교수랑 운영하시겠냐고 물었어요. 실제 친환경 농업을 실천한 사람이 교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더니, 총장이 학장에게 각 도에 한 명씩 임명하라고 했어요. 강원도의 임락경 등에게 교수 임명장 수여식을 하고 나서 김 총장이 ‘가보로 보관하십시오’라고 해서 화천 집에 임명장을 보관하고 있죠. 미국에서 한 달간 강의 초청이 왔는데 농민과 목사 타이틀로는 비자가 안 나왔어요. 그런데 교수재직 증명서 내니까 금방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미국 가서 한 달간 강의했죠. 서부에서 동부까지 주파했습니다. 가자마자 미주한국일보와 기자 회견했죠. 이현주 목사와 제가 같이 갔어요. 강의는 주로 교민들을 상대로 했죠. 김동성이라는 사람이 중학교 때 나를 따랐는데 미국서 방송을 하고 있었죠. 한인 투표율이 15%였는데, 김동성이 한인 유권자 센터를 만들어서 65%로 끌어올렸어요. 미국 정치인 중에 김동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버락 오바마가 상원의원 때 찾아왔대요. 김동성은 오바마 당선에도 도움을 주고 미국에서 훨훨 날았죠. 김동성을 뉴욕서 만났는데 ‘선생님 내일 방송하셔야 한다’ 하더라고요. 미국에서 방송한다는 것이 신났죠.” -초등학교 학력으로 목사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야간 신학대학을 정식으로 다녔습니다. 호헌총회 신학대학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대학이지요.” 대한예수교장로회에도 교단이 많다. 호헌총회는 그중에서도 군소교단이다. 신학대학들은 고졸 학력을 기본으로 요구하지만 농어촌 목회자 특별전형은 학력을 따지지 않는다. 임 목사는 정농회 회장을 했고 상지대 초빙교수를 한 경력으로 특별전형을 통과했다. -기성 대형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기독교 방송에서 추석특집이 나가는데, 목사님 교단이 무엇인지 제일 궁금하대요. ‘대한예수팔아 장사회’라고 적어두고 다신 물어보지 말라고 그랬어요. 다른 목사한테 항의가 오면 어떡하냐기에 ‘나한테 바꿔주라’고 했어요. 전화 바꿔주면 ‘당신은 예수 팔아서 장사 안 하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상품이 같으면 싸워요. 가게가 나란히 있어도 상품이 다르면 싸우지 않죠. 예수 팔아 장사하는 사람은 나와 싸우겠지만 거룩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겠느냐 하고 글을 썼더니 다시 한 통화도 안 와요. 그래서 나는 기독교 방송에서 인정해준 대한예수팔아장사회예요. 어디든지 97대 3이라고 하더라고요. 진리를 제대로 하는 것은 3%래요. 제대로 생활하는 사람, 교회, 절이 3%래요. 거기에 다석이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이판사판이 있는데, 이현필 스승님은 ‘이판’이죠. 이판은 청렴결백하게 고기 한 점도 안 먹고 기도만 하는 스님을 말하고, 절 크게 짓고 시주를 좋아하는 걸 사판이라고 하는데요. 나는 이때까지 이판이 훌륭하고 사판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불교를 지금까지 유지한 것은 이판이죠, 기독교도 마찬가지죠. 이판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유지됐고, 사판 같은 사람이 욕을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영성가 이야기> 책 쓰기 며칠 전에 훌륭한 사판 스님을 만나서 깜짝 놀랐어요. 이판은 자기 밥벌이도 못 한대요. 포교는 누가 하고 절은 누가 지키냐는 것이죠. 그래서 ‘아 사판 중에서 훌륭한 사람이 있고 이판 중에서도 못된 사람이 있구나’하고 판단했어요. 내가 판단하기엔 사판 중에서도 이판 냄새가 나고 이판 중에서도 사판 냄새가 나야 해요. 이판 쪽으로만 가면 외골수가 되고, 사판 쪽으로만 가면 안 되죠. 둘 다 겸할 수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석은 두 가지를 겸했죠.” 다석 묘소 앞에 선 임락경 목사. -다석은 수행에서 ‘몸성히’를 강조했는데요. 어려서 콜레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론 병을 앓은 적이 없지요. 비결이 궁금합니다. “다석은 체조와 요가를 했는데요. 그 시절에도 인도 요가가 있었다면 굉장히 잘했을 거예요. 다석은 스스로 창안한 요가를 했어요(임 목사는 유튜브 동영상용으로 시범을 보였다). 그 체조를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하세요. 두 시간 동안 그 체조만 하는데, 선생님이 허리가 좀 굽으셨거든요. 꼿꼿이 영감님이 왜 그런가 봤더니 앞으로 구부린 체조만 한 거죠. 지금 같으면 뒤로도 펴고 다양한 요가를 했을 텐데…. 그리고 바지 입을 때 손으로 벽 짚지 마라. 목욕탕에서 때 밀어 달라고 하지 마라. 이렇게 생활에서도 요가를 했죠. 내가 한번 선생님께 병원에 간 일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2층에서 떨어졌을 때 ‘내가 왜 낮잠을 자지?’ 하고 돌아보니 병원이라고 했어요. 그때 이후론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었대요. 일제 강점기에 아들 며느리가 모두 홍콩 독감에 걸렸는데 다석은 안 걸렸답니다. 눈병도, 감기도 안 걸렸다고 해요.” -다석의 건강법인 1일1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다석 선생님의 1일1식을 따라 해봤어요. 1식도 해보고 2식도 해보고…. 정오가 되기 전에 밥 안 먹기로 결심한 적이 있는데, 아침 4시에 일어나서 타작을 하고, 5시에 밥 먹으러 가면서 산행하는데 배가 고파서 무거운 짐을 들 수가 없더라구요. 밥을 먹으니 둘러멜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1일1식은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땀 흘리는 일을 안 하는 불한당(不汗黨) 이론에 휘말릴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다석 선생께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일하는 사람은 제때 먹어!”라고 했어요. 무릎 꿇고 앉은 모습을 따라 하니까 “그렇게 앉지 마! 일하는 사람은 그러면 안 돼!”라고 했어요. 항상 예외는 있더라고요. 당시에는 다석 선생님을 따라 한다고 1식을 굉장히 오래 했죠. 그런데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다석 선생님은 항상 땀 한 번 안 흘리고 사신 것에 미안해해요. 돈을 안 벌어보고 사셨다고 내가 스승을 불한당이라고 하죠. 종로 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한 번 이사 가서 십 여 년 살고, 이사 한 번 또 가서 20년 정도 살고, 환갑 지나서 아들이 먹여 살리니까 평생 돈을 안 벌어보셨지요.”<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임락경 약력> -1945년생 -1958년 순창 유등국민학교 졸업 -1962년 동광원 입소 -1966~1969 화천에서 육군 복무 -1969~1971 전주 진달네 교회 생활 -1972년 벽제 동광원에서 생활하며 다석을 자주 찾아뵘 -1979년 3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 수사받음 -2006~2012년 정농회 회장 -2005~2012년 상지대 국제친환경유기농센터 초빙교수 -1980년 화천에 시골교회 세움 -2018년 정읍 옥정호반에 사랑방 개소2021-06-16 17:24:04
- [중국 심장에 우뚝선 한국로펌] ①광장 "중국기업 韓 상장 60% 우리 손에"내년은 한·중수교 30주년이다. 중국은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이자 전략적 협력 동반자 지위를 굳건히 하고 있다. 많은 우리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는 것과 맞물려 국내 대형 법무법인(로펌)들도 2004년부터 현지에 사무실을 열었다. 한·중수교 30주년을 앞두고 국내 로펌 진출 성과와 계획을 현지 변호사에게 직접 들어본다. <편집자 주> 법무법인 광장 중국 북경사무소 한·중 변호사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해실(중국)·권현희(중국)·강윤아(한국)·장봉학(중국)·최산운(중국) 변호사. 중국 기업을 상대로 한 성과도 늘고 있다. 세계 게임업계 매출 상위 10위권 기업인 릴리스게임즈와 창유, 선전거래소에 상장한 반도체기업 지앙수야커·배터리제조기업 닝더스다이(CATL), 상하이거래소에 상장한 배터리소재기업 화유구에 등이 한국에 법인을 세울 때 법률 자문을 맡았다. 특히 중국 기업의 한국 상장 부문에선 독보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10곳 중 6곳이 광장 북경사무소 도움 아래 성공적으로 상장을 마쳤다. 국내 상장 첫 해외기업인 화풍방직을 비롯해 중국식품포장·에스앤씨엔진그룹·글로벌SM테크·차이나하오란·완리인터내셔널·차이나크리스탈신소재 등이 대표적이다. 광장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현지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강 변호사는 "처음 진출했을 땐 우리 기업 자문 비중이 컸지만 지금은 중국 업체 의뢰가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며 "앞서 도움을 받았던 중국 회사가 다른 현지 기업을 소개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고 전했다. 해외 로펌 특성상 중국 내부에선 소송이나 대관 업무를 할 수 없다. 광장은 중국 로펌과 협업해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국제중재 부문도 강화 중이다. 한국과 중국 기업 간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 분쟁이나 중국 업체가 우리 기업을 상대로 제기하는 대한상사중재원 분쟁 중재를 대리한다. 한국에서 민·형사소송이 제기되면 서울 본사에 있는 광장 중재팀·송무팀과 협업해 대응하기도 한다. 강 변호사는 "한국과 중국 모두 대륙법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아주 다르다"며 "북경사무소는 중국 경험이 풍부한 한국 변호사와 우리나라 법률 이해가 높은 중국 변호사가 한·중 양국 기업에 최고 수준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요가 있다면 상하이나 선전에도 사무실을 여는 걸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2021-06-16 03:00:00
- 다석같은 큰 스승 다시보기 어렵습니다정 신부는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책 머리에 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유영모>를 옮겨 놓았다. 고은의 시는 다석의 삶을 시적으로 잘 표현했는데 마지막 연이 걸린다. 여기저기 도토리 나무 솎아 베는 나무꾼만 못함이여 무슨 큰 뜻이 있는 듯하나 그저 부질없음이여 -고은의 시가 다석이라는 큰 인물에 대해 불경스러운 표현을 쓴 것 아닌가요? “세계 위인들을 칭송하는 찬탄사도 많고 헐뜯는 말도 많아요. 서울대 법대생 제자가 하루는 다석 선생을 찾아가 물었어요. ‘부처님과 예수님을 비교하면 누가 더 훌륭합니까?’ 다석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비교 연구해야 하는 일이 참으로 많지만, 비교 연구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지금 질문이 그러하다.’ 내가 그 책 앞에 고은 시인과 박영호 선생의 시를 함께 실었습니다. 박 선생은 다석을 칭송하는 시를 쓰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이죠. 제자들은 다석이라면 껌뻑 죽습니다. 다석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면 아주 언짢아 해요. 고은 시인은 다석을 주제로 다룬 시에서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파고 들어가보면 잡히는 것이 없다고 했거든요. 다석을 균형 있게 보라는 소리겠죠. 고은 시인이 근자에 여류 시인 몇 사람에게 고발당했잖아요. 시 한 수 배우러 온 아가씨를 괴롭혔다는 말도 있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신학자로서 다석의 예수 이해가 기독교 전통 안에서 수용 가능할 수 있다고 보는지요? 다석이 기독교 전통 밖으로 나갔다고 보는지요? “수용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석 스스로 정통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일제 강점기 말기에 김교신이 이끈 무교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북적거리는 것 싫다’ ‘우리끼리 모여서 목사 없이 설교 없이 성경공부 하겠다’는 무리였죠. 다석은 그 무리에도 끼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15살에 종로5가 연동교회에 다니다가 5년 후 20세에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선생을 하면서 ‘목사한테 배운 것과 다른 길이 있구나’하고 전통적인 성경 버리고 성경의 진수를 뽑아서 ‘내 맘대로 톨스토이’ 기독교를 새로 세웠거든요, 오산에서 선생으로 있을 적에 동료 선생이 이광수입니다. 그분이 갖고 있던 톨스토이 전집을 빌려서 읽고 정통을 떠나서 이단 기독교인이 된 것이죠. 본인 스스로 ‘이단 기독교인’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정통 기독교지만, 나는 예수를 무한히 존경해서 나한테는 진짜 스승은 예수 한 분이지만’ 예수님을 일컬어서 대덕사(大德師)라는 칭호를 드린다.’ 덕이 대자로 있는 분이라는 뜻이죠. 부처님이나 공자님에게는 그런 칭호를 안 드렸죠. ‘일생 동안 내가 예수 공부하면서 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신은 아닌 거다. 예수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과공(過恭)이다’고 보셨어요. 그러니까 전통 기독교를 벗어난 분이죠. ‘그런데 무교회주의자들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모임에 가서 내 속 이야기를 하게 되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난 거기에 안 간다’ 하셨죠. 딱 한 번 거기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은 있지만 그 얘기까지 하면 너무 기니 생략하지요.” 정양모 교수 정년 퇴임식에서. 왼쪽 끝이 김성수 성공회 대주교, 한 사람 건너 유달영 성천문화재단 이사장, 바로 그 오른쪽이 정 신부. -다석에 대한 김흥호 식 이해와 박영호식 이해 중 어느 것이 다석 본래 사상과 더 가깝다고 평가하는지요? “제가 다석학회를 2005년에 조직하면서 다석의 직제자(直弟子) 두 분을 고문으로 모셨어요. 김흥호 박영호, 이 두 분은 다석이 정통 기독교인이냐, 정통 기독교에서 벗어났느냐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김흥호 목사는 아버지도 목사, 본인도 목사였죠. 그는 이화여대 기독교 학과의 교수였고 교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통 기독교를 옹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정통 기독교인 가운데서 진짜 기독교인이 우리 선생님 다석이라는 입장일 것이에요. 다석에 대해 비정통이라고 하면 용서 못하죠. 그에 비해 박영호 선생은 무교회주의자, 좋게 얘기하면 다석식 기독교인이죠. 박 선생은 다석이 ‘예수의 신성을 이야기 안했다. 기독교 관점에서 이단자’라고 얘기합니다. 다석 학회 고문으로 두 분을 모시고 있었는데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10년은 고민했을 것입니다. 다석 강의를 총정리해서 현암사에서 초판을 펴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다석의 저작물은 20년 동안 쓴 다석일지입니다. 절반은 우리말 시조이고, 나머지 절반은 한시입니다. 이분은 우리 말보다 한시가 더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한문도 어렵지만 우리말 표현도 옛 말투이고 신조어를 남발했습니다. 세종대왕이 만들어낸 28개의 글자가 부족하다며 더 만들어냈어요. 다석 시조를 읽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봤어요. 우리말이지만 불통(不通)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안 되겠다. 내가 한문에 약하지만 공부해서 밝혀 내야겠다’고 생각했죠. 다석 시조 2500수를 2006년부터 작년까지 십 수년 동안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다석의 시조 원문, 윤문, 풀이, 이렇게 2500번을 반복해서 원고를 쓰다 보니까 만 페이지가 넘어요. 인쇄해서 800페이지짜리 1,2,3권으로 나옵니다. 그거를 십 수년 동안 매달리고 나서 ‘이게 내 한계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다. 내가 미처 못 본 것은 후학이 알아서 해주길 바란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이건 안 팔리는 책이죠. 현암사에 돈을 들고 가서 책을 내달라고 했더니 그 돈으론 어림도 없다고 합니다. ‘몇 천만원 가지곤 안 됩니다. 적자가 너무 커요. 일억 이상 가져오세요’라고 해요. 내가 연금 받아서 겨우 먹고 사는데 그럴 돈이 없잖아요. 그보다 작은 출판사를 찾아갔어요. 길 출판사라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 5000만원 줄 테니까 책을 좀 내달라 했더니 기꺼이 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잘 하면, 금년 말에 1,2,3권으로 다석 시조풀이가 나올 것입니다.” 인터뷰어가 “크게 출판기념회도 해야겠어요. 좋은 일이니 사람들에게 알려야죠”라고 했더니 정 신부는 “출판사가 할 일이죠”라고 말했다. 신부도 돈이 들어가는 일에는 기가 죽는 모양이다. -정 신부가 고른 다석의 명언 4가지 중에 “사람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그 앞에 절을 할 분은 하나님뿐이다. 종교는 사람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예수를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올려놓은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얘기했던 데요. 가톨릭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보는지요? “기원후 430년, 제3차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만든 게 시초입니다. 지중해 사람들, 특히 이탈리아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한 공경심이 지극해요. 그것이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공경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어머니가 노년기에 접어들게 되면 어머니는 한 집안의 왕초입니다. ‘맘마미아!’ 내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있죠. 가톨릭과 정교회는 예수님을 공경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운 면이 있지만, 성모님은 다 사랑하고 공경하지요. 예수 이외에는 별 볼 일 없다는, 예수 중심의 신심(信心)을 강조하는 교회가 개신교 아닌가요. 그런데 다석은 ‘어머니를 우리가 공경하듯이 성모님을 공경하는 건 당연하다’고 했죠. 다석 말씀에 따르면 한국 아버지는 아들이나 딸이 ‘학교 가는 길에 무언가를 사야 한다’고 말하면 꽥하고 소리를 지르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서 돈을 얻어다 준다는 것이에요. 다석의 경험이에요. 어머니가 간청을 전해준다는 것이죠. 그걸 가톨릭에서는 전구(轉求)라고 합니다. 간청을 아버지 하느님께 전해준다. 우리 일상에서도 아버지를 대하기는 거북하니까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런 인간의 심정이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모 마리아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며, 비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석이 정통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말을 죽어도 안 하겠지요. 다석은 자신이 자라난 집안 환경을 생각할 적에 ‘아버지에게 바로 말했다간 혼이 날 수 있으니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이 낫더라. 어머니에게 기도하는 것이 나는 이해가 된다’고 한 거죠. 다석이 서양 개신교를 뛰어 넘은 겁니다.” -다석어록 중 ‘사람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다석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가요? “그렇지요. 너무 높이는 것도 안 되죠. 다석 영감도 평생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세수와 맨손체조 하고 난 뒤 4시부터는 명상에 들어가서 아침 점심 굶고 저녁 드실 때까지 명상을 하셨잖아요. 생각이 딱 떠오르면 시조 한 수를 짓고, 어떤 때에는 생각이 정리 안 되면 날짜만 적었어요. 생각이 용솟음치면 하루에 시조 7수까지 지은 적도 있습니다. 보통은 하루에 시조 1수 또는 한시 1수였죠. 제자들이 말하기를 ‘선생님은 암탉 같아요. 하루에 시를 한 수씩 낳아요’라고 했습니다. 동서고전이나 어떤 사건을 읽고 우리가 무엇을 깨우쳐야 하는지 골똘히 생각해서 탁 트이면 시 한 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어른입니다. 평생 그렇게 사셨거든요. 목사들이 광화문에 모여서 데모하고, 주일마다 목청 돋우어서 설교하고, 굉장히 많은 말을 쏟아 내는데, 언제 명상할 시간이 있겠어요. 다석 닮은 분을 우리 시중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어요.” -데레사 수녀에게 성녀라는 칭호를 쓰는데. 다석에게도 성자라는 표현을 써도 되지 않을까요? “가톨릭이 공인한 성인은 따로 있죠. 마더 데레사는 공인된 성녀입니다. 한국에서 순교한 1만 천주교 신도들 가운데 로마 교황청에서 103명을 간추려 성인품(聖人品)에 몇 년 전에 올렸어요. 교황청에서 신심이 돈독한 사람이 있다더라 해서 조사를 시작하면 짧게 10년, 길게 몇 십 년, 아주 길게는 몇 백 년 걸립니다. 교황청은 어느 누구가 성인이라고 소문이 나면 진짜 성인인지 조사해서 3단계 칭호를 줍니다. ‘가경자(可敬者)’ ‘복자(福者)’ 그 위에 ‘성인’. 일반 대학에서의 학사, 석사, 박사처럼 나눈 것인데 부질없는 짓이죠. 내면의 됨됨이를 어떻게 조사해서 알겠어요. 이승에서 조사해본들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인품을 등급 매기는 것은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스승으로 받들면 되지, 큰 칭호를 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다석 같은 분이 5000만 국민 가운데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가죽을 취급하는 피혁방을 크게 했어요. 아버지는 다석을 위해 적선동에 솜공장을 차려주셨어요. 아버지 3년상을 치르고 나서 가게를 팔아 북한산 밑 구기동 농장으로 이사했습니다. 피혁방과 솜공장을 할 적에 ‘이렇게 수를 부리면 돈이 좀더 벌린다’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정직하게 사는 법은 농사밖에 없다고 했죠. 그때만 해도 대학을 나오면 자동적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했어요. 그리고 배운 사람들이 어리숙한 사람들을 등쳐 먹기 일쑤였죠. 그래서 상당히 경제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아들 셋 다 고등학교까지 보내고 대학 공부를 안 시켰어요. 그리고 내 아들, 내 제자들은 ‘장가가지 말라’ ‘대학 가지 말라’ ‘오로지 농사를 지어라’하는 세 가지 유언을 남겼죠.” 정양모 신부(오른쪽)을 자택에서 인터뷰하는 황호택 고문. -다석은 종로 상인이던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는데요. 그런데 다석이 자식들에겐 왜 그렇게 했을까요? “부자인 선대에서 물려받은 토지가 상당 부분 있었어요. 소작인들이 찾아와서 생활이 어렵다고 하니 공짜로 땅을 다 넘겨주었어요. 다석은 ‘대학 나오지 말라’ ‘관공서에 취직할 생각하지 말라’ ‘농사지어라’라고 했죠. 그런데 첫째와 셋째는 아버지 말을 안 들었습니다. 첫째는 미국으로, 셋째는 일본으로 이민 갔죠. 90세가 넘을 때까지 거기서 살다가 몇 년 전에 다 죽었습니다. 첫째 셋째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거죠. 아버지 장례식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오는 지인들을 만나면 ‘우리 아버지가 특이한 분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귀영화를 멀리 했지만 대단히 생각이 고귀한 분’이라는 말을 했답니다. 둘째 아들이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다석학회 연구 활동에 보태 쓰라고 돈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미국 아들과 일본 아들도 둘째 아들을 통해 아버지 연구를 위해 쓰라며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가족들의 돈으로 다석학회를 운영한다고 보면 맞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농사를 짓겠다고 했지만 이미 소작인들에게 땅을 다 나눠주어서 농사 지을 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강원도 화전민 땅에 가서 밭을 일구고 그 옆에 삼형제와 아버지, 어머니가 묻혀있습니다. 부인 목포댁이 다석의 괴팍한 뜻을 다 따랐지만, 두 가지에선 대들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모두 서울에서 경기고 휘문고 나와서 출중한 데다가 대학 공부시킬 돈이 있는데도, 대학 가면 틀림없이 아랫사람을 짓밟을 가능성이 크다며 안 보냈거든요. 자녀교육을 놓고 목포댁이 다석과 대판 싸웠다고 해요. 다석이 천안 광덕에 있는 땅을 소작인에게 거저 주다시피 했지요. 목포댁은 ‘자식들 농사지으라고 해놓고 땅을 다 남 줘버리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한 거죠.” 인터뷰어가 “다석은 세속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거들자 정 신부는 “다석은 출세, 돈벌이, 공명심, 세 가지 욕심을 다 끊은 분”이라고 말했다. -다석과 함석헌 선생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을 통해 다석을 알게 된 분들이 많지요. 그런가 하면 다석과 함석헌 이 두 분을 모두 따르는 사람도 있고, 그 중 한 분을 더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 분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요? “두 분 다 위대하고. 두 분 다 기이한 면이 있죠. 다석이 오산학교 교장 그만두고 떠날 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자네 하나를 만나려는 것인가 봐’라고 할 정도로 제자 함석헌을 애지중지했지요. 함 선생에 대해 우리는 듣기 좋게 ‘실덕(失德)’이라고 말합니다. 성천 유달영 선생한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천도 다석의 제자 중 한 분입니다. 함 선생이 민주화 운동을 하기 전에도 반반한 여자만 보면 가만히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석 일지에 보면 아마 50번 정도 제자를 나무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독한 표현은 안 나와요. 함석헌이라고 이름도 잘 안 나옵니다. ‘함’이라고만 나오죠. 제자 이름을 최대한 노출 안 시키려고 하면서도 새벽 3시에 일어났을 적에 ‘그도 일어났을까’ ‘내가 저를 생각하듯이 저도 나를 생각할까’라고 생각하죠. 제자가 괘씸하지만 잊을 수 없었어요. 함석헌 선생이 등장하는 시조가 50편 이상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아주 많습니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함석헌을 그리워하는 시조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사정을 잘 아는 성천(유달영)이 ‘함석헌이 자꾸만 여자를 탐하는 것은 병적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서 치료를 받게 해야 했는데 우리가 손가락질만 했다'고 후회하는 말을 했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죠. 나처럼 자세히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다석 일지를 통독했지요. 다석을 존경하는 사람, 제자 함석헌을 존경하는 사람, 둘 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위대한 민주운동가 함석헌을 공개적으로 나무란 다석이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제각각입니다.” 조카뻘 되는 먼 친척이 1980년대 초에 함 선생의 여자관계를 폭로한 책을 안전기획부의 지원을 받아 발간한 적이 있다. 함 선생의 제자인 김용준 전 고려대 교수는 2005년 11월호 <신동아> ‘황호택이 만난 사람’ 인터뷰에서 그 책에 ‘따라다니는 여자는 모두 건드리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는 질문을 던지자 “함 선생님을 접해보면 알지, 어떻게 따라다니는 여자를 전부 건드려요”고 반론을 폈다. -함 선생의 여자관계에 대한 팩트는 어느 쪽이 맞는가요. “내가 성천 선생님에게 듣기로는 안기부에서 터뜨린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민주화 운동을 포기 안 하면 여성 행각 다 폭로하겠다고 했데요.” 인터뷰어가 “안기부가 협박을 한 거군요”라고 묻자 정 신부는 “네. 없던 사실이 아니라 실제로 여성편력이 화려한 것을 찾아낸 것이죠”라고 답했다. “함 선생에게 ‘민주화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여자관계를 폭로해 만천하의 웃음거리로 만들겠다’고 했답니다. 함 선생은 안기부의 협박을 받고 고민하다가 ‘폭로하라’고 했답니다. 내가 다석의 제자이고 함 선생과도 아주 가까운 성천 선생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다석 연구와 대중화의 장애물은 그가 쓰는 단어의 난해성(難解性)이다. 훈민정음에도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고 소리글자인 한글을 뜻글자로 활용해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석 낱말사전은 박영호 선생과 함께 편찬 작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박영호 선생한테 완전히 맡겼습니다. 종로2가 YMCA 회관에서 한 강의 1년치를 속기사가 기록했습니다. 아주 악필(惡筆)이에요. 그것을 그냥 읽을 수가 없어서 다석학회에서 고쳐 쓰는데 꼬박 1년이 걸렸어요. 그러고 난 다음에 박영호 선생에게 부탁했습니다. '선생도 연세가 높고, 나도 나이가 지긋하니 우리가 아니면 앞으로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박영호 선생은 다석 낱말사전 하고, 나는 다석 시조 2500수를 맡았지요. 나는 일을 마쳐서 금년 말에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죠. 이 책이 나오면 석 박사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 편해지겠죠. 이제 한시를 다루는 분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대만문화대학에서 중국문학박사를 하신 분에게 한시를 맡아달라고 말해보았는데, 중국 사람들이 쓰는 한문과 뜻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법도 다르고. 도저히 접근을 못 하겠다고 합니다.” 파티마의 성모 프란체스코 수녀원에서 수녀들과 함께 한 정양모 신부. -서강대 재직시절 예수회와 갈등으로 학교를 떠나셨다면서요? “서강대가 예수회 재단입니다. 예수회수도원 원장, 총장, 이사장, 세 우두머리가 다 예수회원이에요.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과를 세우고 난 뒤에 강의계획표를 짜다 보니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가 부족했어요. 예수회원 교수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박사학위가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와 서공석 신부, 장익 신부를 불렀어요. 나는 서강대에서 1998년부터 20여년간 근무했어요. 예수회는 그동안 젊은 예수회원들을 외국으로 보내서 박사를 많이 배출했죠. 그러니까 자기네 사람을 쓰고 싶었겠죠. 예수회 재단에서 나와 서공석 신부한테 나가주면 좋겠다고 했죠. 정교수에게 정년을 3년 앞두고 나가 달라는 것은 법적으로 절대 안 될 일이죠. 그쪽에서 나가주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내가 법원으로 가져가면 승소하지요. 그러나 천주교 신부가 교수 자리를 두고 법원에서 다툰다는 것이 얼마나 꼴사나운 일이 되겠어요. 정나미가 떨어졌죠. 예수회에서 나를 배척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법원에 안 가고 사표를 쓰고 나왔어요. 나와서 집에서 1년 정도 쉬고 있는데 성공회대학 이재정 총장이 교파가 다른 데도 나를 교수로 불러줘서 정년퇴직까지 잘 지냈어요. 아마 한국종교 역사상 타교파 대학에 가서 교편을 잡은 사람은 나 혼자일 겁니다. 앞으로도 좀처럼 나오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 나오는 다석 시조풀이 책에 붙인 다석 연보(年譜)를 만드는데 공을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다석이 잘 안 알려진 분이거든요. 전기로 쓰자면 너무 기니까 연보로 쓴 것이죠. 연보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끝부분 ‘출가(出家)하고 임종’이지요. 그분이 87세가 되었을 적에 출가한 적이 있잖아요. 예수님과 톨스토이 두 분 다 객사(客死)했죠 .” 인터뷰어가 여기서 예수는 객사가 아니라 사형당한 거라고 끼어들자 정 신부는 “집안에서 안 죽으면 객사지요”라고 받았다. “두 분이 모두 객사를 했는데, 어떻게 내가 집에서 편하게 죽을 수가 있는가. 그래서 민증(신분증)을 주머니에 넣고 소나무 숲을 찾아간 거예요. 예수님과 톨스토이의 중생을 생각하며 객사 결심을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91세로 돌아가셨잖아요. 둘째 아들에게서 딸만 넷이 태어났어요. 다석을 추모하는 모임이 성천문화재단에서 매년 있는데 둘째 아들의 둘째 딸 유희원이 꼭 대표로 참석합니다. 둘째 아들과 며느리가 다석의 임종을 지켜봤어요. 3년 동안 말이 없으셨는데 숨을 몰아쉬다 말고 “아들에게 내 몸을 일으켜 다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상반신을 일으켜 주니까 한마디 말도 없이 묵언하던 분이 전력을 다해 ‘아바디’라고 큰 소리를 지르며 돌아가시더라.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고 해야 할까. 왜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아바디’라고 평안도 말씀을 하셨을까. 김흥호 박영호 선생, 두 분의 풀이가 조금 달라요. 박영호 선생은 ‘아 밝으신 분이여 디디고 서시오’라는 뜻으로 아바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기록에는 안 남아있어요. 저도 박영호의 뿌리죠. 다석은 ‘내가 죽으면 관을 사지 말아라. 화장터로 가져 가거라”고 했지만 후손들이 유언을 들어주지 않았죠. 화장 대신에 토장을 해서 세 번 옮겼어요. 화장하라는 유언을 안 들어준 게 잘 됐다고 제자들이 말합니다. 선생님 묻혀 있는 곳에 제자들이 참배를 가거든요. 화장해서 뿌렸으면 갈 데가 없었을 거예요. 제자들은 장례식 때 다석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고 했지만 둘째 아들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묘소가 남아있게 됐죠. 기일(忌日)에 제자들이 모여 참배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조그만 뜻이 있겠다 싶어요." 정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다석을 어떤 분이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느냐”고 묻자 “동방의 큰 스승”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분도 참 외로운 분이었잖아요. 스승이 전혀 없고. 하루 종일 성경 한 구절, 어느 한 단락 물어볼 곳이 없고 참고서가 없으니 혼자 명상을 할 수밖에 없었죠. 항상 명상에 빠져 있던 분이시죠.” 인터뷰를 끝내고 정 신부는 인근의 단골 추어탕 집으로 안내했다. 정 신부는 추어탕 대신에 미꾸라지 튀김을 주문했고 나도 따라갔다. 함께 간 여성 두명(인턴기자와 영상팀 AD)은 처음에는 다른 음식을 찾다가 추어탕으로 돌아왔다. 남의 이야기들 듣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뭐든지 맛있게 잘 먹어야 한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 이주영 인턴기자>2021-05-05 16:29:26
- 문재인 대통령이 맛본 인생의 쓴맛은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오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주글로벌모터스에서 열린 준공 기념행사에서 근로자와 대화를 하고 있다. “저는 제가 살아오면서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경험했던 쓴맛, 그게 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게 언제냐 이렇게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는데 제가 대학 다니다가 유신 반대 시위로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구속이 되었었는데 그때 구치소라는 곳을 갔을 때 정말 참 막막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삶에서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세상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었는데, 그때 그 막막했던 그 시기의 쓴맛들, 그게 그 뒤에 제가 살아오면서 이제는 무슨 일인들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다 이런 자신감도 주고 제 성장에 아주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광주 광산구 빛그린산단 내 광주글로벌모터스(GGM)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GGM 사원 6명과의 간담회 중에 나온 발언이다. 문 대통령은 경희대 재학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구속됐었다. 입사 당시 인공지능(AI) 역량 면접을 받으면서 “살아오면서 가장 성장에 도움이 됐던 경험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한 직원이 문 대통령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자 이같이 답변했다. GGM 공장은 현재까지 385명의 직원을 채용했는데, 이들은 인공지능(AI) 역량면접을 거쳐 입사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사회자가 “지금 답변은 AI도 미처 예상 못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에 “인생은 단맛이 아니라 쓴맛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여기 계신 분들은 입사 이전까지 쓴맛을 다 겪으셨을 테니까 앞으로는 이제 단맛만 보시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문 대통령은 간담회에 앞서 기념 축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을 떠올리며 “광주에서 열렸던 광주형 일자리 모델 토론회에 참석을 했었다”고 회상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강조해 온 지역상생형 일자리를 강조했다. 지역상생형 일자리는 줄어든 임금을 정부·지자체가 주거·문화·복지·보육시설 등 후생 복지비용으로 지원하는 형태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반드시 실현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겠다’고 공약했다”면서 “정말 오랜 세월 동안 끈질기게 노력해서 기어코 성공시킨 우리 광주 시민들, 또 우리 광주시 정말 대단하다. 정말 존경하고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광주형 일자리는 전국 1호 모델이다. 광주지역 노·사·민·정은 4년 반 동안의 노력 끝에 지난 2019년 1월 광주시와 현대자동차가 투자 협약을 맺었다. 문 대통령은 투자협약식에 참석한 이후, 2년 3개월 만에 광주형 일자리 현장인 GGM 공장을 다시 방문했다. 현재 상생협약은 경남 밀양, 대구, 경북 구미, 강원 횡성, 전북 군산, 부산, 전남 신안까지 총 8개 지역에서 체결됐다. 8개 지역을 합하면 직접고용 1만2000명(간접 포함 시 13만명)과 51조1000억원의 투자가 기대된다. GGM은 전국 첫 지역 상생형 일자리 모델이다. 이번에 1998년 삼성자동차 부산공장 준공식 이후 23년 만에 국내에 첫 완성차 공장을 지었다. 자동차 양산 시점은 오는 9월이 목표다. 문 대통령은 “오늘의 성공은 광주의 성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성공을 본받아서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국 곳곳에 상생형 일자리가 생겨났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새로운 노사관계, 새로운 노사문화를 제시하고 있다”면서 “광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인데, 거기에 더해서 ‘상생’을 상징하는 도시까지 됐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상생형 일자리와 관련해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상생형 지역일자리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이 전국 각지에서 계속되고 있고 몇 곳은 올해 안 협약체결 목표로 하고 있다”면서 “총 51조원 투자와 13만개 고용창출을 예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광주형 일자리 정신은 지역균형 뉴딜로도 이어졌다”면서 “지역과 주민 이익 공유에서부터 행정구역의 경계를 뛰어넘는 초광역 협력까지, 다양한 시도가 모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제 대한민국은 광주형 일자리 성공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함께 더 높이 도약하는 포용혁신국가를 위해 나아갈 것이고, 정부도 적극 뒷받침하겠다”면서 “다양한 지원을 통해 상생형 일자리를 우리 경제의 또 하나의 성공전략으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다.2021-05-01 06:00:00
- [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빛고을의 진정한 魂 오방 최흥종(下)“함께 정치하자”는 金九의 청을 사양 우리는 오방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오방이 생전에 아들처럼 아꼈다는 고 이영생 전 광주 YMCA 총무(1992년 타계)는 1986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동해(東海) 물입니다. 지금 나는 그것을(오방을) 말로 표현하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거예요.…무어라 표현해도 그분을 다 얘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 우리 취재팀의 심정이 꼭 그랬다. 선생에 대해 우리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2000년 오방 기념사업회가 각계 인사들로부터 추모 기고를 받아 오방을 기리는 문집, 『화광동진의 삶』을 펴냈다. 거기에는 고 리영희 교수도 참여했다. 그는 오방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했다. “해방 이후, 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속세의 영달, 출세를 거부한다. 노자의 도교에서 불교의 선까지 모든 것을 수렴해서 완전한 성숙한 삶, 노자의 무위의 삶, 예수의 삶, 부처님의 삶과 같았다. 대체로 성 프란치스코와 슈바이처와 간디와 톨스토이,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와 닮은 실천하는 삶이다.”(『화광동진의 삶』) 가가와 도요히코(かがわとよひこ‧1888∼1960년)는 ‘20세기의 성자’ ‘빈민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일본의 목사, 사회운동가다. 시인 신경림(동국대 석좌교수)은 이 문집에서 오방이 영적(靈的) 부가가치를 창출했으며, 우리들에게 그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영감과 에너지를 주었다고 말했다. 오방 기념관의 최영관 관장(전남대 명예교수)은 취재팀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대학시절 함석헌 선생을 광주에 모셔서 특강을 듣곤 했는데 함석헌 선생님은 꼭 무등산으로 오방을 뵈러 갔다. 그때마다 ‘형님 저 왔습니다. 절 받으세요.’라며 오방에게 큰절을 올렸다.” 최 관장은 오방을 “참으로 광주가 낳은 위대한 기독교적 선지자였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민족의 큰 족적을 남기신 지도자”라고 했다. 그런 오방이지만 기독교 내부에선 반드시 긍정적인 시선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각에선 그를 기인, 또는 이단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인식은 오방이 그의 무게에 비해 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차종순은 “일제 치하에서 현실과 타협했던 목사들, 예컨대 신사참배를 하고, 심지어는 일제에 무기까지 헌납했던 목사들이 해방이 되어서도 교권을 잡고 득세한 데 대해 오방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고, 이런 오방을 목사들은 경계하고, 경원시했다”는 것이다. 오방선생이 있어 福받은 광주시민 이 과정에서 초기에 호의적이었던 외국인 선교사들마저 일제의 정치 배제 논리에 순응해 오방과는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차종순은 “오방이 지향했던 것은 결국 ‘사회적 복음주의’였다”면서 “선교사들이 서구식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달했다면 오방은 이를 한국식 예수님, 즉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복음적 예수로 재해석해서 우리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신학자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는 2016년 10월 오방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는 세미나에서 오방의 일생을 관통한 하나의 사상(신념)을 ‘생명존중’으로 보았다. “생명존중의 핵심은 예수의 아가페적 사랑(love as agape)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불완전한 타자가 인격적으로 자기성취와 자기실현을 이루도록 돕는 사랑이다. 나병환자들과 오방 자신의 생명은 분리돼 있지 않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 생명일체감의 사랑이다. 오방은 아가페적 사랑의 실재성(實在性)을 경험했고 믿었다.” 오방은 생전에 ‘애적 전융성’(愛的轉融性)이란 제목의 한시(漢詩)를 통해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자기의 손해를 돌보지 않는 사랑이요/남을 사랑하여 새로운 삶을 이루도록 하는 사랑이요/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용서하는 사랑이요/다함이 없이 새롭고 새롭게 사랑하는 사랑”이라고. 김 교수는 오방의 생명존중의 신앙과 삶이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로, 다음 네 가지를 들었다. 모든 생명은 서로 의존하며 함께 존재함을 깨달아야하고, ‘신앙생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활신앙’이 중요하며, 종교와 교육은 생명의 자기초월적 영원성에 눈을 뜨도록 본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며, 이를 통해 생명존중을 제1가치로 삼는 제4 인류문명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방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영원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광주에 살면서, 매일 무등산을 올려다보고 오방을 생각하고 그의 생명존중의 사랑에 대해 고뇌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福)이다. 이재호 논설고문 ‧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2021-04-23 06:00:00
- 자산운용업계 ESG 경영 가속화…조직 신설·글로벌 협의체 가입국내 자산운용사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및 투자 강화에 나서고 있다. 20일 자산운용업계에 따르면 KB자산운용과 삼성자산운용, 삼성액티브자산운용 등은 최근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에 가입했다. TCFD(Task Force on Climate-reated Financial Disclosure)는 기후 변화 관련 정보 공개와 관련 투자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2015년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협의체인 금융안정위원회(FSB) 주도로 창설된 조직이다. 현재 전 세계 1900여개 기업과 단체가 TCFD에 가입했고 국내에서는 34곳이 가입 중이다. KB자산운용은 TCFD 가입과 더불어 내부에 ESG운용위원회도 신설했다. 위원회는 이현승 KB자산운용 대표를 위원장으로 각 운용본부장들로 구성됐다. 위원회는 앞으로 통합 및 자산별 ESG 전략 수립을 비롯해 ESG 투자 성과 분석, 위험 관리 등 운용 프로세스에 대한 의사결정을 담당한다. 특히 상품위원회를 통한 신규 상품 심의에도 관련 요소를 반영해 상품 출시 단계에서부터 ESG 요소를 적극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자산운용도 이달 중 이사회 내에 ESG위원회를 설치해 ESG 경영을 본격화한다는 전략이다. 한화자산운용의 경우, ESG위원회 설치를 위한 정관 변경을 완료하고 이사 3인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한화자산운용 ESG위원회는 ESG 관련 경영 전략 및 정책 수립, 관련 규정 제·개정, 활동보고서 발간 등을 담당한다. 특히 한화자산운용은 ESG 활동 지원을 위해 지속가능전략실을 간사조직으로 활용하고 ESG 관여 활동 및 의결권 행사, 리서치 및 평가시스템 등 ESG 투자 기반 체계화 및 내재화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한화자산운용 관계자는 "ESG위원회 설치는 운용업 본연의 투자활동을 넘어 ESG 요인까지 면밀히 살피고 반영해 우리 사회와 투자자의 신뢰 및 기대를 받는 운용사로 발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2021-04-21 00:00:00
- [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다섯 가지 욕망을 다 버린 큰 사람 (上)이재호 논설고문 ‧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2021-04-16 05:49:26
- 말기 암환자가 하루라도 더 살려는 건 다석 알리기 위해서죠독립운동가, 농민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성천 유달영(1911~2004)은 함석헌과 함게 다석이 아끼던 제자다. 유달영은 농장이 경부고속도로에 편입되면서 받은 보상금으로 성천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의 좌우명이 호학위공(好學爲公)이다. 열심히 배워서 공익을 위해 봉사하자는 것이다. 다석사상연구회는 매주 화요일 서울 여의도 성천문화재단 사무실에서 공부 모임을 갖고 있다. “2015년 다석 공부를 하려고 한국에 왔거든요. 한국에 나온 동기가 다석 사상을 제대로 공부해 한국에 널리 보급해보겠다는 것이었어요. 20년 전에 처음 접했던 다석 사상의 고향을 찾아온 거죠. 호주에서 심장병으로 쓰러진 적은 있었지만 건강은 좋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암이 발생했죠. 내가 참여한 것은 박영호 선생이 성천문화재단에서 다석 강의를 시작한 지 20년 됐을 때였어요. 그런데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서로 잘 모르고 지내더라고요. 강의를 듣고 각자 헤어지는 거예요. 서로가 인사는 하고 지내야 할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내가 횡적인 조직을 만들었어요. 그게 다석사상연구회가 된 거죠. 박영호 선생의 승낙을 받아 내가 대표가 됐습니다. 지금은 20~30명 회원이 있습니다.” 성천문화재단은 ‘진리의 벗이 되어’라는 계간지(季刊誌)를 발행한다. 141호(2021년 봄호)까지 나왔다. 1년이 4계절이니까 지령(誌齡) 35년을 넘긴 잡지다. 유달영이 살아 있을 때는 매호 ‘성천 단상’이라는 글을 썼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아포리즘(잠언)이 많다. 이 중에는 ‘훌륭한 신앙은 종교 냄새가 안 난다. 애국심은 반드시 인류애로 연결돼야 한다. 재산 약간 부족한 상태가 최선이다’라는 글도 있다. 최 목사가 좋아하는 글이다. “제자들 중에서도 유달영 선생이 다석 사상 전파를 위해 크게 공헌했습니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양쪽 다요. 다석사상연구회 책임자로 있으면서 성천문화재단에 사용료를 내려고 했더니 유달영 선생이 일절 돈을 받지 말라는 유지(遺志)를 남겼다더군요.”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이 재건국민운동을 시작했다. 먼저 함석헌에게 본부장을 맡아달라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유진오를 세웠으나 만족스럽지 않자 유달영에게 요청했다. 유달영은 안 하려고 하다가 다석에게 자문하고 수락했다. 그리고 다석을 중앙위원으로 모셨다. 그러다 유달영이 본부장을 물러나자 다석도 곧바로 그만두었다(다석 전기). 다석은 그 정도로 유달영을 아끼고 신뢰했다. 오른쪽부터 류달영, 함석헌, 다석. “다석의 말씀은 살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죽을 때 필요하고, 죽고 나서 필요한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 분은 평생 무릎 꿇고 살았습니다. 평생을 걸어 다녔지요. 평생 일일일식 했습니다. 이런 것은 육신을 영화(靈化)시키기 위한 삶이라고 봐야지 이것을 부수려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치 육신을 저버리고 얼나, 참나를 위해 산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오해지요.” 유달영의 저서 <행복의 발견>에는 신문기자가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을 인터뷰하면서 “왜 하늘나라에 목사들이 안보이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느님이 “그들은 세상에서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하늘나라에서 못 온 것”이라고 대답했다. 유달영은 ‘가장 비참한 것은 거짓된 교리에 묶여 정신적 노예가 된 것이다. 모든 성자들이 말하는 진리의 말씀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라고 이 글의 결론을 내린다. -최 목사는 17년간 목회를 했는데요. 일부 목사들이 거짓 교리의 노예가 돼 있다고 할 수 있는지요? “위선자가 많이 모인 집단이 목회 현장이라고 보면 돼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구약은 이스라엘 역사 책이죠. 신약은 바울의 기독교 서적입니다. 지금은 다 그렇게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합니다.” 한국에 나가 쓸 돈을 벌기 위해 3년 동안 목회를 하지 않고 열심히 노동을 했다. 그렇게 1억5000 만원가량 모았다. 인터뷰어가 “돈 버는 수완이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최 목사는 “안 쓰고 모은 거죠”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1억5000 만원이면 전원주택을 살 수 있대요. 전원주택 살 돈을 모아 한국에 가자고 해서 왔는데 막상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인천에 거처를 정했지요. 목회에서 손 딱 떼고 일반인과 똑같이 땀 흘려 돈 벌어서 다석에 올인 하려고 나왔는데, 아시다시피 만만치 않네요. 복부암이 있어서 5일 간격으로 항암 치료를 받습니다. 인천에서 지하철 타고 여기까지 오는데 몇 번 쉬었다가 왔어요. 지하철 광화문역 계단 올라올 때 넘어질 뻔했습니다. 열정은 있는데 뜻대로 안 되네요.” -재미교포들은 이민 초기에 교회에 다니면 물 설고 낯선 땅에서 네트워크가 생겨 정착할 때 크게 도움을 받는다 지요. 호주는 어떻습니까? “내가 목회하던 교회도 교인의 95%가 불법 체류자였어요. 적발되면 바로 잡혀가는 거예요. 관광비자는 6개월 후에 비자가 소멸돼요. 비자가 없는 삶은 범죄자 아닌 범죄자입니다. 무비자로 불안에 떨다가 교회에 나오면 일자리도 생기고 비자 없는 사람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죠. 40~50명 식구들이 거의 한 가족처럼 지냈지요. 아이들은 일정한 연령이 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죠. 그럼 영주권을 가진 아들의 부모도 영주권을 받을 수 있죠. 그렇게 정착한 교민들 중에서 변호사 회계사도 나왔습니다. 이들이 한국에 들렀을 때 나를 찾아오면 인생의 보람을 느끼죠.” '이단목사' '해결사 목사' 소리 들으며 다석사상 전파 -호주하면 백호주의가 연상되고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도 있다고 하는데요? “인종차별 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인종차별을 받는 것입니다. 호주 사람들은 청소할 때 장갑을 안 껴요. 그런데 한국 청소부들은 장갑을 끼죠. 저도 장갑을 안 끼고 청소했어요. 변기를 맨손으로 닦았죠. 오물이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면 청소하지 말아야죠. 자기들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맨손으로 거리낌 없이 닦아내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죠.” -호주에서 17년간 목회하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았을 텐 데요? “아이들이 학교에 못 가면 부모가 일터에 간 사이에 방치되잖아요. 그래서 학교 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비자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 38명을 내가 학교에 넣어줘 소문이 났어요. 그 아이들이 내 손자, 자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 못 들어갈 때 학교에 가서 교장을 면담하는 거예요. 처음에 ‘노’ 했던 교장이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교감을 불러서 비자가 없는 아이를 ‘오늘부터 수업 받게 하라’고 해요. 이런 경험을 하면 신앙인으로서 보이지 않는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체감하겠더라고요.” -호주에서 ‘해결사 목사’ ‘이단 목사’라는 별명이 붙었다면서요? “학교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아이를 학교에 들여보내다 보니까 해결사 목사가 됐죠. 내가 교단에 목사 라이선스만 반납 안 했지 완전히 쫓겨났잖아요. 나를 보는 사람마다 피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단 목사로 소문 난 거죠. 무슨 일이든지 예수를 품고, 진짜 하나님의 전능함을 믿고 목회를 한다면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의로운 목사는 자기 일에 무능합니다. 자신의 일에는 무능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는 전능해야 해요.” -목사들도 제 머리를 못 깎는 군요. “헌신적으로 목회하는 분들 보세요. 자신의 일은 아무 것도 못해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잠자리 하나 정할 데가 없다고 그랬잖아요. 자기가 무능할 적에 능력이 나오는 것이거든요. 나는 지금도 암세포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서 남들이 보면 기적 같겠지만 항암치료를 5년째 받고 있어요.” -다석은 성경에도 해박했지만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등 동양철학에도 밝았는데요. 다석이 동서양의 종교를 회통(會通)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불경이나 성경이나 맥이 같아요. 쭉 연구하다 보면 극락이나 천국이나 같은 것이고. 다석은 궁극적으로 한 점에서 만난다고 했죠. 유교도 공자가 천생덕어여(天生德於予) 라고 해서 ’하늘의 덕이 나를 낳았다‘고 했죠. 하늘의 덕이 뭐냐, 성령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성령과 공자의 덕(德)과 석가의 불성(佛性)이나 이름만 다르지 다 똑같습니다. 서로를 보완해야지 싸울 것이 아닙니다. 다석은 동서양의 종교를 회통했습니다. 최제우의 동학사상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석 사상과 일맥상통하죠.” 다석사상연구회가 주최하고 성천문화재단이 후원한 다석 탄긴 기념강좌에서 강연하는 최성무 목사. -최 목사가 웹진 <새길 이야기>에 다석이 ‘51세에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 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고 썼던데요. 깨달음과 거듭남을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다석의 삼각산 체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나는 목회하기 전에 방탕 생활을 많이 했어요. 술도 많이 먹고…. 그 대가를 지금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활했지만,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서는 어느 순간부터 맥주 한잔도 안 넘어가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건 내 힘, 내 의지대로 안 되는 거예요.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식색(食色)은 내 의지로 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끊어준 것이라 생각해요. 암 수술을 해서 먹는 밥통을 완전히 없애버렸잖아요. 식에서 완전히 해방됐죠. 내가 방광을 두 차례 수술받아 떼어 냈잖아요. 이후 식색을 내가 인위적으로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통째로 없애버리지 않았나 스스로 생각하는데요. 하여간 느낀 사람만이 알 수 있지, 설명을 할 수 없어요. 다석의 삼각산 체험도 다른 사람은 느낄 수 없어요." -다석의 ‘하루살이’를 풀이하면….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잖아요. 오지 않은 내일이 오늘에 와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미래와 과거와 오늘이 같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영원이라는 것은 현재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직선 상에 같이 있는 것이에요. 시간적으로 제한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시작을 발견한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시작과 끝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설이지, 실제로는 영원 속에 살다 영원 속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의 하루가 오늘입니다. 하루를 열심히 잘사는 것이 영원을 잘사는 것이죠.” 하루 하루 열심히 살면 영원을 잘 사는 것 -다석은 평생 무명 베옷 입고 고무신을 신었죠. 그 시대 서민의 전형적인 모습인데요. 그리고 어디든 걸어 다니고… 잣나무 널판에서 자고... 해혼했지요. 기독교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고행(苦行)을 하는 불교의 구도자 같습니다. ”잘 지적했는데요. 그런 면을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렵겠지요. 다석의 신앙과 행동은 우리가 따라하기에는 거리가 있다는 시각이 있어요. 노동자가 일일일식하면 일을 못 하잖아요. 자기 형편에 따라 하는 것이죠. 저도 호주에서 1식을 해봤어요. 청소를 하면서 1식을 했더니 영양실조로 쓰러졌어요. 그래서 멈췄죠. 미련하게 해봤더니, 2년 정도는 그렇게 하겠는데 나중에는 그냥 쓰러지더라고요. 그러나 그분 나름대로의 상황에서 신앙의 형태를 가졌는데, 거기에서 본받을 것은 본받고, 따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석이 늘 무릎 꿇고 경건한 자세로 산 것에 대해서는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 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라고 했는데요. 다석이 말한 얼나를 찾기 위해서는 넓은 문 놓아두고 굳이 좁고 험한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요? “자기 얼나를 찾으려면 탐진치(貪瞋痴)로부터 벗어나야 하거든요. 예수도 석가도, 노자장자도 모두 탐진치에서 벗어나라고 말했는데, 세상 살면서 벗어나기 쉽지 않잖아요. 이런 것을 초월해서 우리가 얼나를 찾는다는 것은 나에게서 탐진치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좁은 문이죠. 물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해요. 성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물질보다 어려워요. 명예욕, 과시욕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탐진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는 건 다석이나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두려워 해야 할 것이 영적 교만이라고 하셨던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요? “내 신앙이 존중 받으려면 우선 타인의 신앙도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 홀로 충만한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같은 교인 중에도 믿음이 있다, 없다 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영적 교만이 지금 교회의 코로나 대응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믿음은 서로가 다른 대로 나름대로 같다고 봐주고 인정해줘야지, 내 믿음만 옳다 하면 안 됩니다.” 5년째 암과 싸우는 최성무 목사는 다석 공부를 하면서 다석 사상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다석은 공자 석가 노자 다 위대한 스승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스승은 예수라고 이야기 했는데요, 다석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석 사상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에 바탕을 두었어요. 누구든 제일 먼저 들어온 신앙이 자리매김하게 되어있습니다. 나도 신앙생활 할 적에 통일교에 상당히 매료된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 2,3학년 쯤이었죠. 거기서 탈출하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현재는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거기에 대한 미련이 조금 있어요. 자리매김한 신앙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다석도 16세 때 입문한 기독교의 정신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신채호 선생 여러 사람이 그에게 불경을 읽어보라고 권유했지요. 다석은 불경과 노장사상의 진리를 공부했지만 기독교 범주 안에 흡수하고 받아들여서 회통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석사상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기독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라는 분과 석가나 노자나 장자를 견줄 수 없는 것은 영적인 문제에 들어가서 해결해야 해요. 예컨대 석가나 노자나 장자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리매김하기에는 왠지 뭔가 그렇잖아요? 다석은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심중에 두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암 투병 중인데…죽음의 그림자가 겁나지 않나요? “처음에 위암이 생겼을 때 병원에서 말기(末期)래요. 다른 곳으로 전이 된 것을 말기라고 해요. 췌장으로 전이되어서 췌장까지 잘랐어요. 췌장을 자르면 물 한잔도 못 먹어요. 췌장액이 나와서 다른 장기를 녹이기 때문에. 그래서 41일간 금식했죠. 항암제를 1년 반 동안 안 맞고 멋대로 있다 보니 간으로 전이됐어요. 그런데 항암치료를 하고 3개월 만에 사라졌어요. 그렇지만 끝나지 않고 방광으로 암이 넘어갔어요. 지금 방광을 두 번 수술했어요. 그러다 보니 장기를 둘러싼 복막에까지 암이 번졌어요. 처음에는 진짜 다석처럼 초월한 마음으로 견뎠는데, 이제 그게 안 되더라고요. 항암주사를 일주일에 두 번 맞은 적도 있지요. 몸이 못 견뎌요. 5일 만에 맞았는데 완전히 내가 아니에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죽는 것 외엔 방법이 없어요. 신앙인이 아니라면 자살한 사람들이 이해가 되겠더라고요. 오늘 일주일 만에 외출한 거예요. 이를 악물고 나왔습니다. 다석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도 더 살아야 할 텐데요.” 그는 “다석사상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다석사상연구회 회원들에게 우리가 불쏘시개가 되고 거름이 되자고 말하고 있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2021-04-07 17:03:15
- 美 올해 7% 성장하나?…나날이 높아지는 회복 기대감미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가 다시 속속 상향조정되고 있다. 유럽과 남미 등에서 코로나19 3차 확산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미국의 경우 백신 접종이 속도를 내면서, 집단면역을 다른 지역보다 빨리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밀고 있는 대규모 부양정책은 경제의 회복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1조 9000억 달러에 달하는 부양책에 더해 3조달러 규모의 인프라 패키지가 논의되면서 기대는 더 커지고 있다. 일단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지난 16~17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뒤 미국의 올해 경제성자률 전망치는 4.2%에서 6.5%로 크게 올렸다. 골드만삭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올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기준 성장률을 이전보다 상향 조정한 7.0%로 전망하고 있다. UBS는 올해 성장률을 6.6% 정도로 보고 있다.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이들 은행의 예상대로 된다면, 미국의 성장률 중국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2021-03-28 09:35:00
-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1950, 60년대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유명한 부흥 목사들이 와서 현란한 쇼맨십을 보여주는 설교를 했다.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를 끄는 장경동 목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TV도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교육 수준이 낮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우선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한나신 아들 예수> 머리말에 나온 것처럼 다석이 동광원에서 한 강의는 학력이 거의 없는 신도들을 상대로 비교적 쉽게 풀어서 한 말씀이다. 그래도 여전히 딱딱하고 어렵다. 엔터테이너 부흥사가 인기를 끌던 시대에 다석을 모셔와 강의를 들은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은 기성교회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물론 다석이 강의할 때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듣는 이는 이현필 정인세 김준호 김금남 등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석은 한 사람, 아니 반 사람만 있어도 그 영혼을 위해 말씀을 다했을 분입니다. 그리고 다석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마디라도 기억했다가 두고두고 곱씹으며 사는 동광원 언님들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옥남 언님은 “일러 이에 이르시니 이겨 일즉 이러나서 이룬 일을 이루어라”는 구절을 늘 외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언님은 “있다시 온 옛다시 간 없이 있을 나”라는 구절을 외며 살았습니다. 수녀 수사로서 순결과 초월의 믿음으로 사는 그 수도의 길에 다석이 동행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힘이요 격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벽제 동광원을 자주 찾았던 다석 -심 소장이 책으로 출간한 다석의 마지막 강의는 다석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석은 책을 저술하지 않고 20여 년 간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일기를 모아서 나온 책이 <다석 일지> 4권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로 시(詩)로 되어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석 직제자들의 풀이를 읽어봐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가 간단히 해설을 붙인 <다석일지 공부> 7권을 솔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속기사를 시켜 1년 동안 다석의 YMCA 강의를 속기한 자료가 책으로 나온 것이 <제소리>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이를 보강하고 해설을 붙인 책이 <다석강의>입니다. 그리고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연경반 강의를 주규식이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박영호 선생이 펴낸 책이 <다석 씨알강의>입니다. 그리고 다석이 1971년 동광원 여름수양회에서 1주일 간 한 강의를 녹취해 나온 책이 <다석 마지막 강의>입니다. 이같이 여러 책이 나왔지만 다석의 육성과 대조할 수 있는 책은 <다석 마지막 강의> 뿐입니다. 내가 이번에 새로 <한나신 아들 예수>를 다시 편집한 경위는 머리말에 적어 놓았습니다. 다석의 남아있는 유일한 육성이기 때문에 그 사상과 믿음과 영성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자료라 하겠습니다. <다석 일지>도 다석이 직접 기록한 1차 자료이지만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석에서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석의 동광원 강의는 쉽게 풀어서 말한 내용이라 훨씬 이해하기 용이하고 해석상 논란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다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광원 마지막 강의를 직접 듣는 것입니다. 다만 녹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것을 듣기 쉽게 책으로 나온 것이 <한나신 아들 예수>라 하겠습니다. <한나신 아들 예수>도 녹취 과정에서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찾아내 자꾸 보완해 나감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책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동광원을 만들고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산 성자 이현필의 초상 1964년 이현필 선생은 광주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벽제에 와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가 있는 계명산 골짜기의 모임에 다석은 자주 참석했다. 이현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석은 무릎을 탁 치시며 “아, 시원히 잘 가셨소!” 했다고 한다. 다석은 계명산을 찾아올 때마다 “이 선생~ ! 이 선생 ~” 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심 소장은 전했다. 이현필은 죽기 직전에 “나는 죄인이니까 거적에 싸서 그냥 아무나 밟고 다니는 길에 묻어라.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平土葬)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필의 스승인 이세종도 산골에서 숨을 거두며 관, 수의, 비, 묘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이공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제자인 이현필 선생도 세상을 떠나며 수의나 관을 쓰지 말고 길가에 묻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관을 구해서 가까운 산 언덕에 무덤을 썼다. 1990년대 말에 동광원 출신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갔던 박찬섭 목사가 이현필 선생의 무덤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헤맸다. 스승의 무덤을 어렵게 찾아낸 박 목사는 ‘성인의 무덤을 이렇게 방치해서 되겠느냐’고 주위를 설득해 봉분을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묘비의 글은 엄두섭 목사가 짓고, 묘비엔 현재의 붓글씨를 새겼다. 벽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동광원에서 이현필과 다석의 가르침을 받은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짓자고 발의해 이현필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근사한 집을 갖게 됐다. -수도권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서 수녀들이 밭농사 짓는 것도 좋지만 젊은이들이 찾아와 다석과 이현필의 정신을 잇는 영성공동체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던데요. “좋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동광원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할 때 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며 신학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생명력이 있지, 그렇지 못하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다석과 이공의 귀일신앙으로 평신도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하면 교회가 달라질 것이고 갱신된 교회라야 사회에 새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양극화와 생태계 및 환경파괴, 그리고 가치관 혼돈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한국 사상과 영성이 다석과 동광원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벽제 동광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언님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계명산의 쑥과 찹쌀로 빚은 쑥개떡이 별미였다. 김치와 깍두기도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채소에 젓갈을 쓰지 않아 맛이 담백했다. 점심 후에는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와 이현필 선생의 묘소, 기념관을 둘러보고 계명산을 떠났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2021-03-24 16:43:38
- 다석은 통일 대신 귀일(歸一)하자고 했죠광주 동광원과 벽제 동광원은 육신의 즐거움을 끊고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삶을 산 무명(無名)의 성자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 류영모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다석은 1948년 광주 동광원 수양회에서 첫 강의를 했고 1971년 여름 수양회까지 매년 연초와 광복절 전후에 광주에 찾아와 말씀을 전했다. 다석이 81세이던 1971년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한 마지막 강의는 학력이 낮은 동광원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다석의 신앙과 생각을 풀어내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이 오래 돼서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테이프를 원음에 충실하게 풀어 <한나신 아들 예수>라는 책으로 펴냈다. 동광원을 세운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1877~1942)은 집안이 가난해 어린 시절부터 머슴으로 살았지만 근검절약해 동네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무학의 이세종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깨쳤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부터 가난한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며 차마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한 잠도 잘 수 없다”며 채무자들을 모아놓고 빚문서를 태워버렸다. 창고 문을 열어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길 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대접해 보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수도자의 삶을 살던 이세종은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생활을 끊고 해혼(解婚)을 했다. 하루 한끼만 먹고 육식도 금했다. 그가 부엌 구정물 통에 빠져 버둥거리는 쥐를 구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주식은 쑥범벅이었다. 그는 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가 기도터를 세우고 성경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193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정경옥은 전남 화순에 살던 기독교인 이세종을 만나고 나서 신학잡지 <새사람>에 “도암의 숨은 성자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로 소개했다. 정경옥은 마하트마 간디보다 더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세종은 세속적 명리와 욕심을 끊겠다며 원래 이름을 버리고 ‘빌 공(空)’자를 써서 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마하트마 간디와 이공이 실천한 일일일식(一日一食)과 해혼을 다석도 따라 했다. 이공의 수제자가 바로 이현필이다. 벽제 동광원 뒷산에서 심중식 소장. 그후 나도 일식을 시작하면서 현재의 강의를 녹취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석의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人)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식과 해혼(解婚)은 일언이고, 일좌는 현재의 강의를 듣는 것이고, 일인(一仁)은 녹취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다석이나 현재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일식 일언 일좌 일인입니다. 일식은 주야통(晝夜通)이요, 일언은 생사통(生死通)이요, 일좌는 천지통(天地通)이요, 일인은 유무통(有無通)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역강해>로부터 시작하여 <법화경 강해> <화엄경 강해>까지 계획대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땅 파고 김 매며 농사짓고 예배드리는 일이 동광원의 일상인데요. 이런 수도자적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일상에서 수도자로 사는 삶, 그것이 가장 자연스런 삶이요, 가장 자기답게 사는 삶이요,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일상적 수도자의 삶이 되면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있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고 고단하면 자는 생활, 그처럼 그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까, 자유요, 평화와 기쁨의 삶이지 조금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길은 좁고 험난합니다. 선불교에서 3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런 1단계에서 얻는 평상심은 도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라는 2단계를 거쳐서 마지막에 산은 역시 산이요, 물은 역시 물이라 하는 3단계에 이르러 고요한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런 평상심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마지막 수도자의 삶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3단계를 심우도(尋牛圖)에서는 10단계로 표시하는데 일체 공(空)이 되었다가 마지막에 시정 바닥으로 다시 내려가서 남을 도우며 살아간다는 입전수수(入廛垂手)입니다. 공자로 말하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입니다.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을 지나 평상심이 되니까 이제 마음대로 해도 조금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그런 자유의 경지입니다. 동광원에서는 일생 험난한 온갖 역경을 겪고 난 뒤에 일체를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언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심중식 소장 약력> -1957년 출생 -1977~81년 서울대학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대학시절 5.18을 겪고 좌절을 겼다 이화여대 김흥호 교수를 만나 다석 유영모의 동양적 기독교와 주체적 신앙을 알게 됨 -1981~83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 -1981~2011년 30여년 동안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에게 동양경전과 성경을 배움. -1992년부터 일일일식하며 스승의 강의를 녹취 편집하여 주역강해, 원각경강해, 양명학공부, 법화경강해, 화엄경강해 등을 출간. -2003년부터 다석과 김흥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자생적 기독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 귀일원에서 수양회 강사로 참여 -2010년 귀일연구소소장으로 활동하며 귀일영성학교 운영중 -2018년 <맨발의 사랑 이현필의 삶과 신앙> 편저 -2020년 다석이 1971년 8월 광주 동광원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를 정리한 <한나신 아들 예수>를 편찬2021-03-17 17:09:10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00)] 타고르를 넘는 한국의 시성(詩聖) 류영모의 '복음성가'1913년 '기탄잘리'로 동양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는 인도의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영국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이 시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영문원고를 며칠간 기차와 버스, 식당에서 읽었습니다. 저를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남이 볼까 책을 덮기도 하였습니다. 이 글은 제가 평생 꿈꾸던 세계를 보여줍니다. 시와 종교가 함께 하는 문화를 이어받은 이 글은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모두의 정서를 함께 모으고, 고귀한 지식층의 생각을 대중에게 돌려줍니다." 일상에서 신의 뜻을 찾다, 시조 '참' 함석헌은 사상계에 '진리에의 향수'라는 글을 실었다. 함석헌이 말하는 진리는, 생명체가 추구해야 할 진리다. 이것을 이기상 교수는 '생명학적 진리'라고 표현했다. 진리 앞에 '생명학적'이란 말을 붙인 까닭은, 그것이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식론적 진리와 다르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 글 속에 류영모의 시조 '참'을 인용했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잘 참가 참 참이 참아 깨새 하늘 끝 참 밝힐 거니 참 든 맘 참 빈 한 아 참 사뭇 찬 참 찾으리 다석 류영모의 시조 '참' 우리말로 '참'은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진리의 참, 짧은 시간(때)인 참, 차례를 의미하는 참, '참다'의 어근인 참, '진실로'라는 의미의 강조어, 가득 차 있음의 참, 갑자기 깨닫는 말인 '참'. 우리말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결을 읽어내는 빼어난 예인(藝人)인 류영모는, '참'이라는 시에서 함석헌이 말한 생명의 진리를 풍성한 뉘앙스로 돋을새기고 있다. 한번 풀어보자. 진리를 찾아 가는 길에 / 한참 오래 길게, 한 차례 두 차례 쉬자고 할 태세인가 / 그때 그때 참아서 깨어있을 사이/ 하늘 끝에 있는 가득 찬 진리를 밝힐 것이니 진리가 들어온 마음/ 진실로 비어있는 하나, 아 참!(깨닫는 소리)/ 사뭇 가득 들어차 있는 진리를 찾으리 '참'은 인간에게 접속된 신의 숨결이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인간이 숱하게 벌여놓은 허상과 오류 속에서,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오롯한 신의(神意)다. '참 든 맘 참 빈 한 아 참'은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한 우리말의 별미(別味)를 독창적으로 보여준다. 신의 명령을 노래하다, 한시 '생명' 天命是性命 천명天命은 올바른 하느님(是性)의 명령이다 革命反正命 혁명革命은 뒤집어 바로잡으라는(反正) 명령이다 知命自立命 지명知命은 스스로 바로 서라는(自立) 명령이다 使命必復命 사명使命은 반드시 돌아오라는(必復) 명령이다 다석 류영모 한시 '생명(生命)' 류영모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늘에게서 명령을 받은 것을 생명(生命)이라고 했고, 그 구체적인 명령인 <천명과 혁명과 지명과 사명>으로 나눠 풀어주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그것을 알았으면 세상의 아닌 것을 바로잡기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예수처럼 하느님에게 기필코 돌아가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받은 생명 속에는 이런 네 가지의 하느님 뜻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성서의 이 구절을 정밀하게 부연한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니라."(요한 1:1) "본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느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 1:18) 신은 천지창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보였으나 스스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천지창조라는 프로그램이 실현되는 모습을 통해서만 드러났다. 그런데 예수란 인간의 육신을 입고 등장한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 그 프로그램의 핵심을 직접 전했다. 천지창조의 핵심은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에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한 프로그램이기도 하지만 천지를 끝없이 사멸해 새로운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지속성임을 말한 것이다. 류영모의 시에서 '천명'은, 바로 인간이 부여받은 하느님의 프로그램 진본(眞本)이다. '혁명'은, 인간이 잘못 알고 있고 왜곡하고 있는 하느님의 프로그램을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예수가 한 일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지명(知命)'은 하느님의 프로그램을 스스로 꿰뚫어 자기 속의 성령을 바로 세우라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것을 '얼나'라고 불렀다. 얼나는 곧 예수를 예수이게 한 비밀이었고,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기적이기도 했다. '사명'은,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 나아간 길이며 류영모가 파사(破私)의 깨달음을 통해 돌아간 루트다. 그것을 필복(必復, 반드시 신에게로 복귀함)의 명령이라고 한 류영모의 생명 의식은, 그의 신앙사상의 정수를 드러낸다. 이 시는 성경 구절에 담긴 신과 성령과 예수의 신비(神秘, 신의 비밀)를 심령으로 내통한 희귀한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류영모는 한글시 약 1700수, 한시(漢詩) 약 1300수 등 3000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다. 특히 한글시는 시조를 활용해 정형의 율격으로 신의 숨소리를 드러냈다. 다석의 시편은, 가장 가까운 데 와 있는 신과 가장 먼 곳까지 닿아있는 신에 대한 깨달음의 언어수행이라 할 만하다. 신과 독대하는 인간의 뚜렷한 지향, 자기 탐구와 삶의 성찰, 해박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인류 보편의 거룩함을 향한 열정이 가득하다. 문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처럼 쌓여있는 다석 시편들을 그 영성적 높이와 사유의 깊이만큼 풀어내고 감당하고 호흡할 만한 뒷사람이 존재하느냐일 것이다. 이 지상의 누구도 가보지 못한 성령의 광맥이 묻힌 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말씀은 신의 말을 받아쓰는 것이라 했던 류영모가, '받아써놓은' 불후의 시편을 살짝 맛보는 것만으로도 시성(詩聖)을 대하는 감동이 일어난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시리즈 100편의 대장정은, 시로 남은 '다석 복음성가'를 전하는 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끝>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3-15 09:51:34
- [빈섬 이상국의 뷰] 131주년 다석 오신 날, 강원도 평창 묘소에서 코로나시대 참삶을 생각하다다석 차남이 귀농의 수신(修身)을 했던 계촌리 2021년 3월 13일, 류영모 탄신 131주년을 하루 앞둔 날 강원도 평창군 계촌2리 해발 700m의 산등성이에 있는 다석묘소를 찾았다. 이곳은 1960년 류영모 차남 류자상이 결혼하면서 자강식(自强植, 스스로를 먹일 푸성귀를 재배함)으로 은거 농경을 시작했던 곳이다. 류영모는 아들의 이런 결단을 크게 반기면서 '하늘의 은혜를 되갚아 올리고, 인간의 속알마음이 하늘에 닿아 다시 내려오는 승은강충(昇恩降忠)'이라고 하였다. 그는 해마다 서울 구기리에서 머나먼 강원도 길을 일흔의 몸으로 달려갔다. 하늘과 닿은 산마루, 아들의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길.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먼 산길을 지치지도 않고 걸어 올랐다. 현재 묘소가 있는 곳 부근, 어느 너럭바위에 앉아 호흡과 명상을 즐기기도 했다. 류영모의 삶과 죽음이 이토록 생생하게 공존하는 자리가 바로, 다석의 묘소다. 오른쪽에는 부친 류명근, 왼쪽에는 아들 류자상 부부의 비석이 저마다 나지막한 높이로 서 있었다. 다석 묘비 옆엔 꽃을 꽂을 수 있는 작은 석제화병이 하나 놓여 있었으나, 흔한 조화(造花) 한 송이도 꽂혀 있지 않았다. 몸이란 대저 이런 것이다. 찬 기운을 돋우는 봄비와 빈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으스스함을 돋웠다. 코로나 시대 어렵사리 묘소를 찾기로 한 조촐한 일행(곽영길 아주경제 회장과 필자, 다석연구회 김성언 총무이사와 정수복 연구회원이 동행)은 류영모·김효정 부부의 비석 부근에서 '아바의 노래'(김성언 총무이사)를 부르고, '참 많은 저녁입니다'라는 시(필자, 이상국 아주경제 논설실장·시인)를 낭송하고, 간결하나마 그를 기리며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관해 생각해보는 대담을 나눴다('아바의 노래'와 '참 많은 저녁입니다' 가창 및 낭송 영상과 현장 대담 영상은 아주TV 유튜브 영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참 많은 저녁입니다 @ 다석 긔림노래 1 붉음도 끄고 푸름도 끄고 밝음도 끄고 어둠도 끄고 눈꺼풀 뒤로 캄캄한 곳으로 캄캄하니 캄캄한 곳으로 먼 곳을 지나 중심을 지나 변경을 지나 눈 먼 사람이 되어 눈 뜬 사람이 되어 먼 눈사람이 되어 눈이란 게 아주 없는 한 톨의 눈길이 되어 님을 찾아가는 길 님을 찾아오는 길 나는 없어지고 나는 더없이 사라지고 너도 나도 없는 길 너도 나도 없어져 하나인 길 길이 길을 찾는 하루저녁 얼 싸안은 길 생각의 불꽃 올려 참으로 참으로 얼싸안은 길 생각의 불꽃 내려 참으로 참으로 얼싸안은 빛 빈탕 속으로 먼지 발자국들 저홀로 걸어감 저홀로 걸어간 발자국 먼지 가라앉는 빈탕 마침내 머리 속에도 마음 속에도 생각 속에도 아무 님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저 캄캄하여 그저 입이 없어 마음이 꿀꺽이는 목젖소리만 참 많은 저녁입니다 참 없는 저녁입니다 캄캄하여 나는 내가 누군지 잃어버렸습니다 환환하여 님은 내가 누군지 잊었을 것입니다 하나도 하나의 하나도 하나의 하나의 하나도 속을 뒤집어 겉이 되는 하나의 숨 겉을 돌아 다시 속을 뒤집는 하나의 꿈 시방 천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꺼풀 뒤에서 회오리치는 어둠 소리치는 적막 속에서 나는 님을 보았습니다 깊고 깊어서 보았다고 할 수도 없는 빛 한 알 빈 한 줌 들었다고 할 수도 없는 뜻 한 점 빈 한 올 푹 꺼진 눈으로 웃는 님을 보았습니다 입 없는 허공이 말하는 님을 들었습니다 천지의 비밀이 새나간 회오리와 회오리 사무치며 울어터지던 운명과 인연의 어긋짐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첫사랑이 숨진 자리 그 캄캄한 뺨을 비추는 눈물의 깨달음 님이 계셔서 님이 오셔서 님이 문득 손을 잡으셔서 참 많은 저녁도 참 많은 어둠도 별빛 한 빛에 모두 환해지며 나너 되고 너나 되는 찰나조차 적어놓지 못했습니다 님이 지난 자리에 잠시 남은 빛의 냉기 어둠을 받아내던 그 희고 여윈 손 나는 아직도 님을 만나러 가는 길일 뿐 길은 아직 멀었습니다 참 많은 저녁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하나가 있다는 소식 혹여 들으셨습니까 사무치는 빈 너울 회오리치는 빈 님 소용돌이 치는 한복판 거기 거기 가려운 등짝 같은 거기거기 닿지 못하여 꼬물꼬물 영원한 하룻밤 가물가물 어둑어둑 참 없어 없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참 있어 있음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없는 줄 있는 줄 어찌할 줄 모르다가 님이 내 품에 안겼는지 그제야 알았습니다 빈섬 이상국의 시 '참 많은 저녁입니다' 1년 6개월 '다석시리즈' 대장정의 대단원 이런 행사를 준비한 배경에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매주 200자 원고지 30장 이상의 글로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시리즈를 해온 아주경제의 기획이 3월 16일로 100회 대단원을 맺는 일에 대한 자축의 의미도 있었다. 장기에 걸친 시리즈로 다석 사후 40년 만에 그를 재조명하는 '다석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 그의 사상이 한국의 현실과 미래를 비출 의미있는 영성적 가치의 표석임을 공감하는 이도 늘어났다. SNS와 유튜브에서 류영모 공부 모임과 사상 강연이 점차 대중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종교인과 지식인들이 신문에서 전개하는 영성가치 시리즈에 공명을 표시하고 관련 인터뷰를 통해 그 류영모의 사상적 지평에 대해 발언하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는 류영모의 '자율신앙'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집단 회합과 행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종교가 허식에 빠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류영모는 삶의 어느 곳, 어느 시각에나 신과 닿아 있는 '얼나'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일행은 상징적이지만, 다석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에서 그 삶과 사상을 논하는 글이 실린 신문들을 펼쳐놓고 한바탕 '연경(硏經) 모임' 같은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류영모가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 그 말씀이 무엇이든, 멸망의 생명인 몸나에서 영생의 생명인 얼나로 나아가는 길을 가리켰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은 뜻도 오로지 참사람이 되자는 것일 뿐이다. 류영모가 그리운 까닭은, 왜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죽음이란 우리에게 대체 무엇인가 시원하게 말해줄 그 목소리가 간절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창궐하는 전염병으로 인간의 사이사이가 뿔뿔이 갈리고 흩어지는 시대를 살면서, 집단으로 모여 신을 향해 통성하는 믿음이 과연 어느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 또한 커졌다. 코로나 이후 정신가치 상실 시대, 다석이 그리운 까닭 그는 우선 자기를 들여다보라고 했다. 신을 향하려면 수신(修身)을 제대로 하자고 했다. 창궐하는 욕망들부터 아끼고 줄여, 그 마음을 오롯이 성스러운 데로 향하라고 했다. 아예 상놈의 삶, 거지의 삶을 지향한 '백범(白凡, 가진 것 없고 평범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 어떤 종교든 그 재산 없고 지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고 신의 뜻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종교계에 일어나는 회의와 불신들, 혹은 사회 곳곳에 일어나는 절망과 분노들, 경제가 좋아질수록 더욱 비참한 사람이 생기는 이상한 '발전'들. 이것이 모두 같은 이유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류영모는 통찰했다. 그것은 몸이 시키는 대로 탐진치로 살기 때문이며, 탐진치를 진짜 가치인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제대로 시작하는 것임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인간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신이 원하는 근본의 창세관(創世觀)이라는 것을 놓쳤기 때문이다. 또 저마다 이토록 불행하고 불안하고 불편한 까닭은 스스로 신을 만나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석탄신일을 '다오신날'로 기립니다 그의 탄신일을 '다석 오신 날(줄여서 다오신날)'로 부르면 어떨까 싶다. 다석이 오심으로써 우리에겐 '참'이 왔고, '참의 깨달음'이 왔고, 참으로 사는 삶과 죽음이 왔다고 볼 수 있으니, 모든 것이 오신 날이고, 참 많은(多) 것이 온 날이기도 하다. 또 다오신날은 대충 오고만 날이 아니라 제대로 다 오신 날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못미더워하는 날이 아니라, 얼나로 그 관계가 온전하게 다 이뤄진 날이다. 그리고, '다오심'은 '답다'에서 나온 우리말로 '그 격에 어울리며, 그 자리에 걸맞다'는 뜻도 된다. 다오신날은, 사람이 사람다우신 날이고 하느님이 하느님다우신 날이며 사람과 하느님이 사람과 하느님다우신 날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인간의 인간됨과 공평의 세상을 아름답게 아우르는 말인 셈이다. 이상국 논설실장2021-03-14 16:08:05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9)] 우리말 5개로 신학사상을 혁명하다영적인 우리말을 찾아낸 '언어혁명가' ▶ 얼나 = 류영모가 정립한 가장 중요한 '영적인 한국어'는 '얼나'다. 류영모 사상이 최근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되는 까닭은, 2000년 이상 인간을 번성하게 해온 '밀착적 인간문명'의 '좁은 사이'를 코로나 바이러스가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의 종교 또한 신과 인간의 단독자 대면이 아닌, 밀착한 인간 군집(群集)이 신에게로 나아가려는 제의(祭儀)처럼 여겨져 왔다. 이런 종교적 형식이 코로나를 번성시키는 난감한 역설을 불렀다. 류영모는 교회의 이런 형식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 바탕이 바로 '얼나' 개념이다. 얼나는 인간 개개인의 생각 속에 들어있지만, 신과 개인을 잇는 매체이다. 다석에게 이런 사유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말의 힘일지도 모른다. '얼'은 한자의 '영(靈)'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얼은 '알(卵)'이며 '속(내면)'이며 '씨앗'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줏대'이며 '영혼'이며 '신의 정수'이다. 이 '얼'이라는 한 글자가 있었기에, 다석은 종교적 사유를 폭넓고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었다. 서구기독교에서 정착시킨 '성령'이란 말에는, '나'를 가리키는 뜻이 없다. 그런데 예수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성령을 받은 존재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부여받았기에 '나'라는 자아관 또한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그 '나'와 신의 뜻인 '성령'을 한 존재 속에서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자(人子)였다. 이 개념의 합일을 뚜렷이 하기 위해 성부-성자-성신이라는 삼위일체의 로직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류영모의 '얼나'는 굳이 그런 설득의 장치조차 필요없는 간명한 개념이다. 얼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며 나는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 육신의 한계를 지닌 존재의 얼이라는 일견 모순적인 개념을 '얼나'라는 낱말로 빚어낸 것이다. 신의 존재론을 규명한 네 가지 열쇠말도, 우리말을 살린 것이다. ▶ 없이계심 = '없이 계심'은 신의 존재 논증이다.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서구 사회에선 오랜 질문과 회의가 있어 왔다. 신의 존재를 신앙하는 것이, 종교의 핵심일 정도로 그 문제는 치열하고 치명적인 중요함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다석은 '없다'는 말과 '계시다'는 말을 양립시킴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드러냈다. '신이 없다'는 것은 상대세계의 당연한 관점이다. 절대주(絶對主)가 상대세계에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절대세계의 근거를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신이 계신다'는 말을 붙였다. 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이 상대세계에 없는 것일 뿐이다. '없다'는 상칭(常稱, 높이지 않은 말) 대신 '계시다'는 경칭으로 한 것을 보라. 인간이 감관으로 찾으려 하는 실물적 존재는 실물의 상태인 '없음'으로 표현했고, 참된 절대적 존재의 양상을 '계심'으로 표현했다. 신의 존재론에 대한 류영모의 공로는, 존재나 부재냐의 양자 택일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차원이 다른 부재와 존재를 양립하는 방식으로 간명하게 표현해낸 것이다. '없이 계심'은 우리말의 의미를 심오하게 한, 독창적이면서도 놀라운 철학적 언술이었다. 그 말은 또한 노자의 사유인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 있음이 없는 것은, 사이가 없는 것 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을 근거로 삼아, 신이 상대세계에 접속하는 방식인 '성령'의 작동을 정밀하게 설명해내는 효용이 있기도 하다. ▶ 빈탕한데 = 인격신의 오래된 전통과 상상력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서구적인 신앙의 애매한 '신'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낸 말이 있다. 한글 표현이지만 류영모의 창안에 가까운 낱말 '빈탕한데'이다. 이 말의 뜻을 풀어내기는 쉽지 않지만, '빈'은 허공을 가리키며, '탕'은 한 바탕이나 바탕이란 말에서 보이듯이 동일체인 근본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며, 그것을 짚어 읽으면 '한 허공으로 이뤄진 어떤 곳'이 빈탕한데이다. 이 말은 단일허공으로 표현되며, 공간적 넓이와 형상을 초월한 무엇을 가리킨다. 신은 단일허공인 '빈탕한데'라고 류영모는 언급했다. 사람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형상도 없으며, 실체도 없다. 그 단일허공이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단일허공을 움직이는 뜻이 있다. 그것이 성령이며 '얼'이다. 절대세계의 신이 존재하는 양상을 인간의 영적 감관으로 이만큼 생생하게 드러낸 것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 긋 = ㄱ(위에서 내려온 존재, 신)과 ㅅ(땅에 있는 인간) 사이에 접속(ㅡ)이 있는데 그것이 '긋'이란 말로 표현된다. 그 접속이 상대세계에도 있다면 그것의 존재 또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류영모는 '긋'을 점(點)과 같이, '개념으로 상정할 수는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점'은 아무리 작게 찍어 그 실상을 표현하려고 해도 찍는 순간 점이 아니라 면이나 입체적 실체로 되어버린다. 왜 그런가. 그것은 3차원인 상대세계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원의 근원을 이루는 가상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이 접속하는 '긋'이란 말을 활용하여, 류영모는 '제긋(내 속에 있는 긋, 즉 얼나)'이란 개념을 만들어낸다. ▶ 말씀 = 말씀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낸다. 말씀은 우리말에서 '말'을 높인 표현이지만, 류영모는, '신의 말을 인간이 받아씀'이란 혁신적인 의미를 찾아냈다. 성서에 등장하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을, 새롭고도 의미심장하게 만든 '해석적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은 '말'을 통해 서로 태초 이래로 접속해왔고, 예수는 바로 '신의 말을 받아쓰는 인간'의 전범을 보여준 모델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무한한 신의 사랑이다. 우리말 '말씀'이, 신학의 지지부진하던 신인관계 규명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킨 키워드가 되었다. 류영모의 '우리말 신학'은, 위에서 골격으로 삼고 있는 저 다섯 개의 개념만으로도 이미 신학혁명이라 할 만하다. 의미가 정밀할 뿐 아니라, 동서양이 그간 추구했던 신앙의 맹점 같은 자리에 서슴없이 들어간 영적 직관이 표현된 것이다. 거기에 인간의 생명성과 근본성을 표현한 '씨알'이라든가, 하느님을 표현한 '한얼(하나의 얼, 큰 얼)'이란 개념 또한 류영모 신학의 중심을 형성한다. 그가 즐겨쓴 시조나 한시를 비롯한 다양한 시편과 노래는, 한글과 우리말 그리고 한자 속에 들어있는 다채로운 말빛과 어감과 다중적 의미를 통해 그의 영적인 소통의 면모를 신명나게 보여준다. '진달래'라는 꽃을 노래하면서, 지다(落, 죽음)와 지다(敗, 죽음), 진(眞, 참), 달래다(慰), 달라하다(請與), 달(月)과 같은 의미들을 중첩하고 어긋지게 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문제들을 거듭 흔들어 새롭게 돌이키게 한다. '참'이라는 노래는 참이란 말이 진(眞), 참음(忍), 적합함(適), 짧은 시간, 기회, 간절함의 감탄사 등으로 쓰이면서 진리파지(眞理把持)를 생동감있게 풀어낸다. 이런 점에서 류영모는, 이 땅이 낳은 세계적인 영성시인(靈性詩人)으로 새롭게 가치 매김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류영모의 공은 우리말을 사랑하고 이 땅의 언어를 스스로의 사상에 활용하려 애를 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우리 언어를 채택한 것은, 서구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있는 신을 보편의 신관으로 바로잡고, '비(非) 서구적인' 우리 문화를 기반으로 한 영적 소통체계가 새롭게 필요하다는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류영모가 직조해낸 우리말 신학이 어떤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의 담론과 강의와 문학을 해석하고 경탄을 보태는 일도 의미 있지만, 그가 왜 그 일에 이토록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왔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우리 언어로 독보적인 신학적 경지를 구축하고 있는 그를, 과연 우리가 그에 걸맞게 제대로 조명해 왔는지 그 성취의 크기가 지금 평가된 정도가 맞는지를 심각히 돌이켜봐야할 때가 되었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3-08 10:42:2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8)] 다석은 왜 "나를 정음교라 해도 좋다"라고 했나정음사상을 읽는 두 가지 방법 류영모의 '정음사상'은 두 가지로 살필 수 있다. 첫째, 한글을 신학 용어로 숙성시킨 관점으로 읽어내면서 그가 이룬 성취를 살피는 방법이다. 둘째는, 성서의 첫머리에 기술된 '말씀'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류영모의 신학적 모색을 살피는 방법이다. 정음사상은 전체를 통합하면 하나가 되지만, 그 영역은 다를 수 있는 두 가지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읽은 류영모의 한글 예찬 시를 찬찬히 살펴보면, 창의적이면서도 능란하게 우리 말글을 구사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 속에는 예수가 들어가 있으며 하늘나라가 기입되어 있다. 서구 기독교의 곁불을 쬐어 그 온기를 활용해 그곳의 오랜 믿음의 역사에 편승하는 구조로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가 포착한 믿음의 정수인 신(神)과 신의 말씀이 이 땅에도 태초부터 있었으며 깊은 소통을 해왔음을, 류영모가 평생을 통해 꾸준히 발견하고 인식하고 체계화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음교는 그런 과정에서 빚어진 소산이라 할 만하다. 류영모는 우리말글로 사상을 펼쳤다는 이유만으로 위대한 사람인 건 아니다. 정음교 또한 그런 우리 얼과 문화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만 언급한 것도 아니다. 서구의 사상과 동양의 여러 사유체계를, 뛰어난 언어 체계인 우리말글로 아울러 뚜렷한 통합을 이룬 것이다. 그 속에서 신에 대한 '참'을 재발견하여 제시했다. 이 점을 놓치면, 그를 '한글 전도사' 정도로 오도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는 한글을 사랑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한글 속에 있는 말씀의 생명을 숨쉬고 '치킨(북돋아 위로 올린)' 것이다. 우선, 성서의 말씀에 관한 류영모의 창조적인 관점부터 살피려 한다. 그는 '천음인언(天音人言, 하느님 말씀과 인간의 말, 1956.11.16)'이란 한시를 남겼다. 生來有言借口能(생래유언차구능) 死去無口還本音(사거무구환본음) 代代斷言猶遺志(대대단언유유지) 世世欲言大蓄音(세세욕언대축음) 태어나 말할 수 있으니 빌린 입으로 할 수 있고 죽어선 입이 없으니 하느님 말씀으로 돌아가네 죽어 대대로 말이 끊기지만 하느님 뜻이 남고 살아 대대로 말하려 하니 하느님 말이 크게 쌓이도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직 하느님의 뜻밖에 없다.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어도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 상대세계의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이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그 시간 속에 쌓이는 축음(蓄音)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말을 하다 다 못하고 죽고, 그 말은 끊기지만 그 말한 만큼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 남는다. 그것이 전승되고 전파되고 하느님 말이 쌓인다고 류영모는 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믿음이며 사상이며 철학이며, 지혜의 실체다. 인간의 말은 덧없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을 준 것이 신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신에게서 빌린 입으로 하는 것이다. 죽으면 그 입이 사라지지만, 입이 한 말은 하느님의 말 속에 돌아가 합류한다는 생각. 류영모가 얼마나 말을 귀하게 여겼으며, 그 말 속에 곧 신의 뜻이 존재함을 간절하게 믿었는지 깨닫게 하는 한편의 시다. 지금 그 입으로 하는 말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하며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인간이여. 그는 이렇게 신앙을 강의하고 있다. 성경은 왜 신보다 말씀을 앞세웠는가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한다. 성경의 이 말은 신과 인간이라는 간명한 신앙 구조를 처음부터 뒤흔들어 놓고 있다. 태초에 존재해야 할 것은 창조주여야 하는데, 성경은 창조주를 앞세우지 않고 창조주와 함께 있었던 말씀을 앞세운 것이다. 창조주가 그의 뜻대로 말씀을 하는 것이라면, 굳이 둘을 분리할 필요도 없고 또한 말씀을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말씀'이 먼저 나왔는가. 이 미스터리가 기독교가 이룬 신앙의 근원적인 것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은 인간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음성(音聲) 기호다. 그것은 목구멍과 입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로서, 그것을 듣는 대상을 전제로 하며 조직적인 언어 구성을 통해 의미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성서가 말하는 '말씀'은 물론, 인간의 말을 비유하여 신의 뜻이 구현되는 전달체계를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말씀은 인격신(人格神) 신앙 체계의 산물이다. 신이 말을 한다는 것은 신을 인간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말'은 아니다. 인간의 말을 떠올림으로써 신의 '말씀'을 유추할 수 있는 효용이 있는 비유다. 신보다 신의 말씀을 앞세운 것은 신을 근원시(根源視)하고 신성시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보인다. 신과 인간의 소통은 절대세계와 상대세계의 무접점(無接點)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접점을 '말씀'으로 드러낸 것이다. 즉, 신이 상대세계로 들어와 천지를 창조할 수 있는 '상대세계의 무엇'이 바로 말씀이다. 상대세계로 들어와 창조를 한 것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곧 절대세계의 하느님과 같이 있는 것이며, 하느님과 다르지 않은 동일존재라고 밝혀놓은 것이다. 인간의 말은 저 하느님의 '말씀'의 기능적 측면(소통행위)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인간의 말과 신의 말이 어떻게 통하는지에 대해 깊은 사유를 펼쳤다. "당나귀 귀는 말씀을 못 듣는다. 우리의 귀는 당나귀 귀와 다르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하느님 아들의 귀는 말씀을 듣는 귀다. 귀 있는 자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의 귀를 말한다."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고 있어도 하느님의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말이 다 쓸데없다.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귓구멍이 바로 뚫리지 않으면 보살이나 천사가 아니라 하느님이 말해도 소용이 없다." "말씀을 하는 하느님을 누가 봤는가. 하느님께서 이 마음속에 출장을 보낸 정신을 통해서 위에서부터 말씀이 온다." 이제 성서를 읽어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니라."(요한 1:1) "본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느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 1:1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는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이다. 천지창조 당시에 말씀과 하느님은 함께 이미 있었으므로, 말씀과 하느님은 창조된 것이 아니며 창조 이전에 있었던 창조의 주체다. 말씀과 하느님은 천지의 근원이다. 말씀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뜻이다. 이 뜻은 명령으로 구현된다. 말씀은 천지창조의 프로그램이며, 하느님은 천지창조의 설계자라고 비유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설계자와 같은 시공(時空)에 있었고, 이 프로그램은 곧 설계자라고 동일화했다. 이렇게 말한 까닭은 프로그램과 설계자가 완전일치하기에 설계자의 프로그램이 여럿일 가능성과 여러 설계자가 이 프로그램에 가담했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다. 즉, 하느님은 오직 하나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독생하신 하느님이 하느님을 나타내셨다= 독생하신 하느님은 인자(人子) 예수다. 예수가 하느님을 나타내셨다. 한 인간이 하느님의 현현(顯現)임을 말한 것이다. 예수는 인간으로 독생했다는 점에서 피조물이다. 피조물이 조물주를 나타냈다는 이 파격(破格)의 구절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재설정한 위대한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조물주가 피조물과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태초에 이미 존재했던 것 중에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말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예수에게 말씀 즉, 신의 창조 프로그램에 가담할 길을 열어준 것이다. 신은 천지창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보였으나 스스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천지창조라는 프로그램이 실현되는 모습을 통해서만 드러났다. 그런데 예수란 인간의 육신을 입고 등장한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 그 프로그램의 핵심을 직접 전했다. 천지창조의 핵심은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에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한 프로그램이기도 하지만 천지를 끝없이 사멸해 새로운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지속성임을 말한 것이다. 독생한 하느님이 전한 말씀은 '잘 살려고 애쓰는 만큼 잘 죽어라'는 메시지였다. 이 말은 살려고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만을 깨우치는 절망적인 선언이 결코 아니었다. '육신의 삶'이 프로그램의 전부가 아니라, 육신의 삶을 통해 육신과 동봉했던 하느님의 뜻인 말씀을 부양하여 프로그램의 진정한 본체가 되는 길을 알려준 것이었다. 말하는 신, 받아쓰는 인간 류영모 사상의 출발점은 '말씀'이었다. 아니 그의 사상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말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었다. 그 말씀은 성서의 구절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었고, 영성의 귀를 열고 치열한 수신(修身)으로 직접 신의 말씀을 수신(受信)하는 것이었다. 그는 '말씀'이라는 존댓말을 다르게 해석했다. 말씀은 '윗사람이 말을 쓰심'이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그는 오히려 '하늘의 말을 인간이 받아 쓰는 일'이라고 풀었다. '씀'이라는 표현을 발화자(發話者)의 행위가 아니라 수화자(受話者)의 행위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인간과 신의 긴밀한 소통은 천지창조 때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즉, 태초에 신의 말이 있었고, 그것을 받아서 삶과 믿음에 쓰는 인간이 있었다는, 정교한 복합어로 '말씀'이 재정의된 것이다. 류영모의 '말씀론'은 인간 신앙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이며 주체적이라는 그의 신념을 담고 있다. 동양에선 '깨달음'이 종교사상적 화두로 정착되어 왔다. 그 깨달음은 우연한 행운으로 닥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철저한 수련과 집요한 사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신의 말을 인간이 쓰는 '씀'은 바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깨는 것인 파사(破私)는 신의 말을 쓴 것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는 '씀'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백척간두에 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궁극의 수행이다. 그 앞의 허공에 내딛는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다. 허공에 내딛는 '일보(一步·한 걸음)'는 바로 신의 말이며, 그것을 행하는 '진(進·나아감)'이 바로 씀이다. 말씀은 바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그 결단의 행위를 가리킨다. 류영모는 신의 말씀을 찾아 적극적인 전진을 했을 뿐 아니라, 그 말씀 안에서 살고 말씀을 딛고 일어서고자 했다. 말씀을 숨쉬는 것을 '말숨'이라고 했고, 말씀으로 서는 것을 '말슴'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런 이유다. 우리의 몸생명을 목숨이라 하면 얼생명은 말숨이다. 그 말숨을 쉼으로써 '말씀이 하느님'이라는 성서의 명제를 실천할 수 있다고 했다. 말숨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도 했다. 정음(正音)은 류영모가 새롭게 닦아 그 면모를 찾아낸 복음(福音)이며 말씀이다. 말씀은 신에게서 그저 '자비'에 의해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쓰는 인간의 영적 교통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사모하면서 해야 할 모든 일은 참말씀을 받아 쓰는 일이며 그 말씀으로 숨을 쉬는 일이며 제대로 서는 일이다. 그 말을 받기 위해서는 신과의 교통을 유지하라고 류영모는 말했다. 그릇된 말이 나오는 까닭은 신과 말씀의 교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현존재를 마음속에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는 성화로(聖火爐)라고 표현했다. 인간 현존재를 누가 이렇게 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말숨을 쉬어야 사람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단언했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3-01 10:26:5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7)] '천하효자 류영모'하느님과 인간이 진짜 부자(父子) 관계다 히브리어 '벤 아담'(그리스어 '휘오스 투 안드로푸)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말은 인자(人子) 혹은 사람으로 번역됐다. 신약에서는 마가복음 2장에 나온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느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마가 2:6~11) 영어성경에서는 벤 아담을 '선오브맨(son of man)'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모털(mortal,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이라고도 번역한다. 즉, 인간의 자식이기에 신처럼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류영모는 이 말에서 깊은 영감(靈感)을 얻었다. 예수는 신을 향해 '하느님 아버지'란 호칭을 썼다. 사람의 자식이면서 하느님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의 '시범'은, 다른 인간에게도 신이 그런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호칭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면서 인간 사이의 혈육관계가 지닌 친연성(親緣性)을 지니고 있다는 함의를 나타낸다. 인간의 부자(父子) 관계는, 자(子)를 생산(生産)한 부(父)가 이뤄낸 관계다. 이 관계의 본질은 보다 근원적인 관계에서 빌려온 것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 창조주인 신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는 '부자(父子)' 관계가 성립한다. 오히려 인간 부자(父子)는 신의 창조를 거든 인간과 그의 대리 행위 속에서 생겨난 자식간의 '대리(代理) 부자관계'라고 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의 부자 관계야 말로 '참 부자(父子)관계'라는 걸 뚜렷하게 직시한 사람이 류영모다. 인간 어버이가 보편적으로 자식에게 지니는 감정은, 자비와 '동일성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핏줄인 자식을 저절로 사랑하게 되며, 그 자식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연스런 마음을 지니게 된다. 인간 부자관계가 만들어낸 이런 감정은 천부(天父)와 인자(人子) 사이에 그 원형적 양상이 있었을 것이다. 유추해보면, 신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신과 동일한 존재로서 인간을 응시하는 시선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신의 무한한 사랑을 강조한 나머지 인자(人子)가 지니고 있을 '유전적 동일성'을 부각시키지 않은 측면이 있다. 오직 신의 뜻에 의해 간택(揀擇)되는 인간을 주목하며 그런 대상을 향한 신의 각별한 사랑을 강조하는 서사 구조만을 발전시켜왔을 뿐이다. 그래서 성령을 입은 인간인 예수의 본질적인 측면을 깊이 살피지 못한 점이 있다. 예수가 스스로를 인자(人子)라 칭한 것은 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을 넘어서서 신과 동일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신과 인간의 동일성인 유전자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성령'에 있다. 류영모가 말하는 '얼'이다. 인간에게 신의 '얼'로서 이뤄진 정체성이 바로 '얼나'다. 아버지의 얼을 받은 아들의 자아인 셈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모든 것이 일치하지는 않듯이, 신과 인간 사이에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 육신을 받은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현재성은 신성(神性)과 일치하지 않는다. 육신과 생명을 벗는 순간을 귀일(歸一)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신성으로 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이 회복되는 접점이다. 공자의 '효(孝)'는 동양적 영생 프로그램 신(神)인 아버지의 관점에서 인간을 사랑하고 동일시한다면, 인간인 자식의 관점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서구에서는 오직 믿음만을 강조해왔다. 인간이 신을 향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믿음뿐이며, 믿음으로 천국에 들 수 있다는 교리를 갖춰왔다. 그 믿음이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 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런 신앙윤리가 강화된 까닭은, 종교가 오랫동안 핍박을 받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신앙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최소한의 검문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등장하면서 이미 신인(神人) 관계에 있어서, '신앙 검문' 이상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파했으나 그 의미를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천부인자(天父人子) 관계를 뚜렷이 증명함으로써, 사람아들이 해야할 관계윤리에 대한 영감(靈感)을 던져준 것이다. 예수가 말한 가장 긴요한 메시지는 '사랑하라'였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자비에 대한 당연한 보은(報恩)이며 미덕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아들이 그 이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은 바로 동양적인 교양과 수행을 쌓은 류영모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부자(父子) 윤리에 관한 세심한 실천덕목들이 오래전부터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효(孝) 혹은 효도(효의 도리)다. 효(孝)를 처음으로 설파한 사람은 공자(孔子)다. 효는 인간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기도 한다. 원래 '효'는, 동양사회에서 다양한 리스크(전쟁, 폭정, 질병, 빈곤)에 대응하기 위해 혈연 중심의 공동체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강조된 윤리의 핵심이었다. 즉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안정을 모색하는 핵심네트워크가 부모자식이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가족이었기에, '효'라는 가치를 부양하여 근본적인 불안을 완화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효'는 단순히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이 아니라,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인간이 영생과 불멸을 얻는 유일무이한 방안으로 채택된다. 나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지만, 나는 그냥 태어나기 전과 같이 무화(無化)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낳아, 나의 몸과 나의 혼과 나의 생각을 지상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문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통시적 자아개념으로 발전한다. 개체적 죽음보다 가치있는 것은 통시적 자아의 '끊이지 않는 삶'이다. 공자는 이런 기본적 틀을 지니고, '효'를 단기적 사회 안정화의 소극적 수단으로만 여기는 데서 더 나아가, 삶과 죽음으로 갈라선 부모와 자식이라는 통시적 자아를 결합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것이 '제사'라는 방식의 미팅이다. 제사는 죽은 부모와 살아있는 자식을 정기적으로 만나게 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공자의 야심찬 기획이었다. 이것은 생존 때에만 강조되던 '효'를, 영원으로 확대하여 인간의 삶의 가치를 완전하도록 하는 혁신적 사고였다. 공자가 부자(父子)라는 사적인 관계를 집요하게 코치하려고 한 까닭은,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차이가 부자(父子)윤리를 자주 훼손해왔기 때문이다. 즉 어버이가 자식에게 하는 사랑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에 가깝지만, 그 사랑에 보은하고 봉양하고 기억하는 치사랑은 교육되고 장려되고 분발하게 하지 않으면 이기심에 매몰되기 쉬운 감정인 것이 사실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은 거기에서 나왔다. 부성애는 윤리라고 볼 수 없지만, 효는 윤리로 요구되는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도 다르지 않다. 신의 자비는 당위이지만, 그 자비에 응답하는 인간의 신앙은 '윤리'에 가깝다. 그 윤리는 바로 효(孝)에 근접한다. 류영모는 하늘의 효자가 되라고 말했다 류영모는 공자의 효(孝)가 늙은 부모를 부양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공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이상의 동양적 '영생관(永生觀)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을 주목했다. 인간 부자관계 또한 그 '영생'을 추구하는 일부로 본 것이다. 인간관계도 이러할진대 신과 인간의 부자관계는 당연히 영생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류영모는 이런 점에서 유교가 지나치게 부자관계에 얽매인 나머지 망천(忘天, 하늘을 잊음)을 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조상을 받들고 아래 권속들을 하솔하는 것이 인간의 본연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태극에서 음양만 말하듯 그 윗자리인 무극(無極)을 잊은 까닭이다. 유교가 활발히 발전하지 못한 것은 그 근원을 잊었기 때문이다. 부모보다는 하느님 아버지가 먼저라야 한다." 천도(天道, 하늘의 가르침)인 유교가 마땅히 서야할 자리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 그 본연의 위치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효(孝)사상은 전근대적 봉건도덕이라고 낙인 찍혀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가부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자주성을 상실한 노예의 덕목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류영모 또한 이것이 공자의 가르침에서 궤도를 이탈한 것이라고 일갈한 것이다. 그런데 동양사상으로 정립되었을 당시의 진짜 '효'는, 놀라운 진실을 감추고 있다. 효 윤리를 정리해놓은 '효경(孝經)'의 간쟁(諫爭, 윗사람을 비판하여 논리를 다툼)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옛날 황제가 쟁신(爭臣) 일곱 명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다 할지라도 천하를 잃어버리지 않았고, 아비에게 쟁자(爭子)가 있으면 그 몸이 불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의를 당해서는 자식이 아비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고, 신하가 임금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불의를 당해서 다툴 때, 아비의 명령을 좇는다면 어찌 효라 하겠는가." 효는 충과 더불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不義)가 어디에 있는가를 치열하게 따져서 상하(上下)에 구애받지 않고 옳음을 추구하는 민주적 윤리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충신이란 말이, 군주의 말에 잘 복종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군주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대의를 추구했던 신하를 가리키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효자 또한, 어버이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집안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 직언하는 자식을 가리켰다. 단순히 효도하고 공경함은 소효(小孝)이고, 의(義)를 좇고 아비를 좇지 않는 것을 대효(大孝)라고도 말하고 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도 그런 정신을 담고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효(孝)'가 철저히 옳음을 확인하는 가운데 행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런 효의 근본정신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 정치 권력의 폭압에 굴복하면서 타협적인 굴절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류영모는 오로지 위계질서로 여겨져온 신인(神人)관계를, '예수모델(人子)'을 근거로 명실상부한 부자 관계로 정립하고자 했다. 동양에서 부자관계가 군신관계로 확장되는 관계론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부자관계와 신인(神人)관계를 상징으로 연결지었다. 류영모는 오히려 생물학적인 부자관계보다, 신인(神人)의 부자관계가 훨씬 더 참된 관계로 이해했다. 천부(天父)와 인자(人子)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 감정의 핵심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 아들의 '효도'다. 사람 아들의 효도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천하효자(天下孝子)' 예수처럼 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에 동양의 쟁자(爭子, 옳은 것을 따지는 아들) 사상이 개입된다. 류영모는 신에 대한 반론없는 복종이 참된 효가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에 걸맞은 치열한 참의 추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류영모에게 그 치열한 참은, 인간 육신(몸나)에 대한 미신(迷信)을 극복하고 인격화한 서구 신(神)을 그 본연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에 있었다. 인간의 효도는, '참'의 회복에 있었고 끝없이 그것을 따지고 캐묻는 쟁자(爭子) 노릇에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 아들 노릇은 하느님이 주신 얼나로 하느님 아버지와 같아지고 하나 되자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얼나는 '몸나의 극복'이며, 아버지와 같아지는 것은 얼나로서의 본질 회귀를 의미한다. 서구 신앙이 오직 '신을 믿느냐'는 심문으로만 이뤄진 것은, 참된 효(孝)의 면모를 잃은 것이다. 류영모는 아들과 아버지의 대의(大義)를 바로세우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그가 꿈꾼 귀일(歸一)은 완전한 부자(父子) 상봉이었다. 류영모가 운명하면서 했던 말은 "아바디"였다. 이 말은 평생 그가 믿고 실천해온 신인부자(神人父子) 사상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아바디'는,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 밝음을 디딘다(아, 신의 뚜렷함을 실천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부자유친'에 관한 한시를 썼다. 自信固執充忠臣 (자신고집충충신) 唯信瞻仰永學士 (유신첨앙영학사) 主心同意聖旨精 (주심동의성지정) 父子有親靈人子 (부자유친영인자) 제 믿음을 굳게 지킴은 충실한 하늘나라 충신이요 오직 믿음으로 쳐다보고 우러르니 영생을 배우는 학생이요 주의 마음과 오롯이 함께 하는 것이 성령의 참뜻이요 하느님과 인간이 얼마나 가까운지 말해주는 게 얼나 예수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2-22 11:00:5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6) 신의 진짜 얼굴을 보았나. 빈탕한데류영모의 허공신관 허공은 허(虛)와 공(空)으로 이뤄진 말이며,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쓰여 오해가 많은 말이기도 하다. 허공 자체는 인간이 존재하는 대지 위의 빈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하늘'이란 말과 겹치는 점이 있다. 우주라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며, 다양한 빈 곳을 가리킨다. 공(空)과 허(虛)의 의미는 상당한 유사성이 보인다. 두 낱말은 모두, 채워져 있는 상태를 전제하면서 이를 부정한다. 즉 비어있음은 비어있지 않은 것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다. 공(空)과 대립되는 말로 충(充)이나 만(滿)을 상정하기도 하나, 사실은 비어있음의 반대가 가득 차 있을 필요는 없다. 비어있지 않은 모든 상태가, 비어있음에 대립된다고 할 수 있다. 공과 대립되는 말은 정확하게는 비공(非空)이다. 공(空,비움)과 만(滿, 채움) 사이에는 우주만물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간 과정이 다 들어있다. 공(空)은 실상의 개념이 아니라 관념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가상적으로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허(虛) 또한 공(空)과 비슷해 보이지만, 허는 공보다 덜 철저히 비운 듯한 뉘앙스가 있다. 허는 주로 실(實)과 대립하는데, 이때 허는 명목뿐인 겉을 말하고 실은 명목에 걸맞은 속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 공(空)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표현한 사람은 바로 부처다. 지금 꽉 차 있어서, 있음으로 보이는 것을 부처는 색(色)이라고 했다. 상대세계의 모든 존재는 색이다. 색은 모든 물질을 말한다. 그런데 색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공(空)이다. 텅 빈 것과 다름없다. 왜 그런가. 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물질들이 잠정적으로 결합해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상황이나 공간에 따라 해체될 수 있고 그 형상과 빛깔과 특징이 사라질 수 있다. 왜 그런가. 모든 물질은 그것 자체가 본래의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잠시 모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무자성(本無自性)이라고 했다. 본질적으로 그 스스로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언제든지 흩어져 공(空)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이 부처의 공관(空觀)이다. 상대세계에서 무(無)를 발견한 사람은 노자다. 그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말했다. 상대세계(물질세계)는 철저히 대립쌍의 세계라고 했다. 그릇 속의 비어있는 곳을 무(無)라고 하고, 그릇의 실체를 이루는 것을 유(有)라고 볼 때, 그릇의 실체는 비어있는 곳 때문에 유용성을 지닌다. 비어있는 곳이 없다면 그릇은 소용이 없다. 그릇의 실체가 없으면, 그릇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빈 곳과 실체가 모두 있어야 그릇이 있는 셈이다. 유무는 상생하는 것이 진리다. 그는 무(無)가 없는 것이 아니며, 유용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동양적인 사유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공이며 모든 무(無)는 유(有)와 상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공(空)과 무(無)는 상대세계를 이루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이런 관점은 상대세계의 인식과 관점을 넓혀놓았지만, 상대세계 바깥의 진짜 공과 무에 대한 생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류영모는 이들과 달리, 상대세계의 대립쌍으로 존재하지 않는 절대세계의 허공과 무를 가리켰다. 대립쌍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방식은 '차원(次元)'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상대세계와는 다른 차원으로 존재하는 절대세계의 무를 그는 '절대무(絶對無)'라고 불렀다. 상대세계의 시공(時空)관념을 따르지 않는 '단일허공'이라고도 했다. 류영모는 허공을 '빈탕한데'라는 인상적인 용어로 규정했다. 단순히 허공을 공간이나 시간으로 인식한 것을 표현한 말이 아니라, 인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위치개념처럼 여겨지는 낱말이다. 그가 표현한 '제계(저기그곳)'와도 통하는 말이다. 신의 존재성은 절대허공으로 표현되며, 상대세계와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그 차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상대세계에 실체로 존재할 수 없는 '점(點)'을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점은 '긋'이며 단일허공이다. 단일허공은 상대세계까지 포함한다. 그것을 면밀히 규명할 수 없으나, 신의 인간아들로 온 예수가 그것을 입증했고 신의 메신저인 예수를 통해 모든 인간이 신과 접속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 받았다. 그 접속할 수 있는 기호가 바로 '얼나'다. 얼나는 단일허공이 상대세계로 틈입한, 신의 얼굴이다. 신은 허공 자체이다. 이것이 류영모의 '허공신관'이다. 신은, 차원이 다른 '빈탕한데'에 존재한다. 상대세계를 벗어난 절대세계를 이토록 뚜렷하게 그려낸 신학자는 지금껏 어느 누구도 없었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2-15 10:47:09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5)] 신의 존재 논쟁을 일거에 타파한, 무유(無有)신학노자와 다석이 '얼나'에서 만나는 풍경이다. 류영모는 '긋'이라는 개념을 썼다. 긋은 하늘(ㄱ)과 땅(ㅡ)과 인간(ㅅ)이 모여있는 글자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아무런 제약도 벽도 거리도 없이 모여들 수 있는 것이 '긋'이다. 류영모는 자리만 있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점(點)을 '긋'이라고 말했다. 점은 상대세계에서 찍는 순간 점이 아닌 면이나 입체가 된다. 점은 상대세계에서 드러날 수도 없고 표현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론적으로 혹은 가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점은 실체가 될 수는 없지만 점을 가상하지 않고는 선(線)도 불가능하며 면(面)도 입체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류영모는 '긋'이라 한 것이다. 긋은 바로 '얼나'다. 얼나가 인간에게 감지되고 존재하는 양상을 '점(點)'이 존재하는 방식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참(하느님)을 찾으려면 내 속에 있는 긋(제긋, 즉 얼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이르기를 "하느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 17:21-개역성경)고 했다. 참(하느님)과 긋(點)은 그 크기가 다르다. 참(하느님)은 가장자리 없는 무한대(無限大)이고 긋은 자리만 있고 없는 점과 같다." (1956, 다석어록) 신은 상대세계 어딘가 먼 곳에 혹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방식에도 구속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 '긋'처럼 존재한다. 긋은 점(點)처럼 실체로 드러낼 수 없지만 모든 것에 긴요한 역할로 존재한다. 그보다 더 뚜렷한 하느님이 있겠는가.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2-08 10:00:43
- [40년만에 쓴 부음기사] 다석 류영모…우리에게 이런 큰 사람이 있었다(풀스토리)얼나, 얼삶, 탐진치 수신, 무유신관, 말숨사상 ■ 류영모의 사상 그의 사상은 크게 얼나사상, 몸죽얼삶(죽음)사상, 참삶사상, 무유신관(無有神觀), 정음(正音)사상으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다석사상의 기틀은 기독교사상이며 그 본령을 벗어나지 않았다. 동양의 사유체계나 철학적 관점들을 두루 꿰뚫으며 서양사상을 새롭고도 뚜렷하게 읽어내는 동서회통(東西會通)의 대지식인이었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세속화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신과의 참된 접속을 보정(補正)하는 방편으로 석가, 노자, 공자가 추구하고 득의(得意)한 경지를 빌어 쓴 것에 가깝다. 다석의 통지(通知, 두루 통달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지(正知, 제대로 아는 것)다. 빼어난 서구사상의 동맥경화를 동양의 깊은 성찰로 뚫어 바르게 통하게 했다는 점에서 '동서 회통(會通)'을 이룬 것이 다석사상이다. 1. 얼나사상, 내 속의 하느님 만나기= 얼나사상은 다석이 제창한 종교적 사유의 핵심이다. 얼나는 기독교의 성령(얼)을 '나'라는 주체적 인간과 결부함으로써 '신앙의 개별성(個別性)과 자율성'을 부각한 개념이다. 즉, 내 속에 하느님의 소립자(素粒子)인 얼나가 산다. 그 소립자는 상대세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얼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죽지도 않는다. 몸생명과는 다른 생명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신은 몸나가 아닌 진짜 나다. 예수는 바로 스스로가 '얼나'이며, 얼나를 증명하러 온 신의 메신저다. 인간의 얼나는 신의 사랑이 들어온 것이며, 그것은 죽지 않는다. 그렇게 부활과 영생을 설파했다. 2. 얼삶사상, 죽음은 얼생명의 탄생 순간= 얼삶(靈生)사상은 얼나사상이 결국 '죽음의 역발상'을 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죽는 것은 죽는 게 아니다. 생명을 받은 짐승인 몸이 죽는 것일 뿐이다. 죽음의 순간은 신과 귀일(하나에게로 돌아감)하는 얼생명 탄생의 순간이다. 예수는 '죽는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 온 존재다. 죽음이 어떻게 삶이 되는지를 십자가 위에서 몸으로 증명했다. 예수도 몸은 죽었다. 이 사상은 육신멸망이 빚어내는 생물학적인 충격에 휘둘리지 말고, 죽음과 참삶의 교차를 직시하라는 신의 명령을 들려준다. 그것을 우린 생명(生命, 살아숨쉬는 인간에게 신이 내린 명령)이라 부른다. 3. 참삶사상, 탐진치원죄론과 신앙적 수신(修身)= 참삶사상은 '죽음'에 대해 확고한 관점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사상이다. 우선 몸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몸은 짐승들이 받은 육신과 다르지 않다. 짐승 성질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것이 탐진치(貪瞋痴)다. 류영모는 기독교의 원죄론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오작동'을 겨냥한 것이라고 본다면, 인간의 짐승 욕망이 선악과일 수 있다고 봤다. 즉, 식욕(貪)과 성욕(痴)과 호전성(瞋)이 선악과이다.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 위해 제어하는 수신(修身) 매뉴얼이 필요한데, 기독교는 이것을 교리와 교회로 풀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 수신은 개인이 스스로 신과 직면하면서 해야 하는 수신이다. 탐진치 원죄론은 류영모가 확립한 사상이다. 그는 이 원죄를 제어하는 생을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참삶사상은 또한 살아있는 기간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를 담는다. 그가 제시한 것은 하루살이 사상이다. 예수가 3년여의 공생활 끝에 죽음을 맞은 그 절박한 '생명의 대기(待期)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삶을 경영하는 핵심으로 봤다. 하루살이처럼 살라. 9억번의 숨을 쉬는 시시각각으로 살라. 날수 계산은 '예수의 시간'을 살자는 것이다. 4. '없이계심' 신관(神觀)= '무유(無有)'신관은 류영모가 주창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탁월한 존재 논증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노자 도덕경에 등장하는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에서 따온 말이기도 하다. '있음이 없으면 없음 사이로 들어간다'란 의미다. 서구에서 신의 존재논증을 꾸준히 벌여왔으나 명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고대 때부터 유지해온 '로고스'의 세계관 때문이다. 즉, 신과 인간이 존재론적인 로고스 아래에서 그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 보니 절대의 세계를 표현해내지 못한 것이다. 동양은 로고스를 넘은 존재에 대해 오래전부터 사고해 왔다. 그 존재논리를 설명한 것이 도덕경의 무유입무간이다. 상대세계와 절대세계의 접속을 표현하고 있다. 류영모의 '긋'이란 개념 또한 그렇다. 점(點·긋)이란 것이 개념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상대세계에서 실체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는 긋으로 얼나의 위치와 신과의 접점을 가리켰다. 5. 정음(正音)사상은 말숨 살이= 정음사상은 훈민정음이란 말에서 빌린 것이다. 정음은 인간에게 참된 바른 말, 즉 신의 복음을 의미한다. 훈민은 사람들을 일깨운다는 의미다. 정음으로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신의 메시지'다. 말숨은 신과 인간 사이에 '말'이 숨결(생명)을 불어넣어 준다는 의미다. 류영모는 한글이 지닌 형상의 기호를 신학으로 숙성시켜 '한글신학'을 낳았다. 한글은 천지인(天地人)의 형상을 바탕으로 동양의 철학적 관념을 기호화하여 대중들이 문자소통을 할 수 있도록 조선의 군주가 직접 창안한 유례없는 문자다. 류영모는 한글과 우리말로 탁월한 사상체계를 오롯이 전개했다.빈탕한데, 없이계심, 한얼, 긋, 깨달음, 가온찍기, 신의 막대기(한글 모음 'ㅣ'), 신비와 신통 등 언어를 십분 활용한 개념들을 제시했다. 류영모의 사상은 우리말사상이자 한글사상이다. 이런 주체적인 사고방식은 한국의 언어로 우주와 세계를 고차원으로 사고한 K-영성의 독보적인 모델이다. 이런 뚜렷한 철학사상가를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미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함부로 묻어둔 채 살아온 일이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이다. 몹시 늦었으나, 솟나로 거듭나신 날 그 값진 길을 새삼 우러르며. 이상국 논설실장2021-02-05 18:54:45
- [40년만에 쓴 부음기사] 한국 산업화-민주화의 영적 스승 다석 류영모, 하늘로 솟난 날이상국 논설실장2021-02-03 18:30:1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4)] 하루가 일생이다, 예수의 시간을 살다다석 긔림노래(4) - 하루살이 백년도 일년도 한철도 한달도 없다 하늘시계엔 그런 바늘이 없다 그저 눈뜨고 눈감는 하루를 살아라 오직 눈감고 눈뜨는 개벽을 살아라 오, 늘 내게 와 있는 오늘 오, 늘 내가 숨 쉬는 목숨 오, 늘 지나가면 없는 오늘이 있다 오, 늘 기다려도 없을 오늘이 있다 캄캄한 영원에서 온 오늘 아득한 미래에서 온 오늘 내게는 오직 오늘이 있다 내게 단하루 안긴 날이 있다 누군가가 내게 준 아무 말 없이 그냥 준 참으로 놀라운 하루가 있다 영원에서 길어온 오늘이 있다 어둠에서 빛까지 깊이 스미는 빛에서 어둠까지 무슨 영문인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말숨이 있다 나즉히 부르는 음성이 있다 새벽이 있고 한낮이 있고 어둠이 있다 먼동이 트고 햇살이 쬐고 빛이 꺼진다 하루 공부로 하늘을 보라 하루살이로 하늘을 보라 하루마다 늘 하늘을 보라 하늘보며 늘 하루를 살라 영원도 무한도 하루로 시작된 것 하루가 끝나면 영원도 무한도 하루살이다 오늘 받은 하루를 살 수 있을 뿐 하루를 쓸 수 있는 사형수일 뿐 하루를 품에 안은 가난한 자일 뿐 하루를 숨쉬는 꽃송이일 뿐 우리의 눈길에 우리의 콧속에 우리의 가슴에 우리의 발밑에 우리와 함께 살아 숨쉬는 하루를 사랑하라 하루를 같이 사는 모든 것들을 눈물겹게 사랑하라 아낌없이 포옹하라 하루가 지나면 오늘은 없다 하루가 지나면 내일도 없다 영원의 심연으로 하루를 던지는 셈 가만가만 숨을 쉬며 하루를 다 쉬어라 하루이면 3만번을 숨쉬고 일년이면 천만번을 숨쉬고 평생이면 9억번을 숨쉬나니 한 숨을 평생으로 살고 하루를 영원으로 살아라 오늘 쉬는 숨이 영원의 마지막 숨이니 숨쉬는 순간마다 맥박 뛰는 순간마다 틈틈이 하루하루 그때를 살아라 오, 늘 내게 와 있는 오늘 오, 늘 내가 숨 쉬는 목숨 오, 늘 지나가면 없는 오늘 오, 늘 기다려도 없을 오늘 하루 공부로 하늘을 본다 하루살이로 하늘을 본다 하루살이가 하루 공부다 하늘보며 오, 늘 하루를 산다 이빈섬(필자의 시인필명(詩人筆名))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2-01 10:55:1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3)] "마음속 식욕-색욕의 짐승이 원죄다"믿음의 매뉴얼을 동양사상에서 찾아내다 서구 기독교와 동양의 사상들 간에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인상적인 차이는 '삶에 대한 매뉴얼'이다. 기독교의 근간을 새롭게 한 예수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반면 제자들에게 삶의 교본이나 모범적인 인생경영 방식에 관한 가르침이나 구체적인 언급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다만, 신을 증거하는 죽음을 보여주고 갔다. 이 일은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예수의 육신은, 신의 메시지를 적재한 캐리어(Carrier)였으며, 그걸 증거하였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이 '얼나'로 함께 있고, 신이 인간에게 얼나로 임재할 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죽음으로 알려준 일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유대교가 지니고 있던 '특정 민족에 대한 사랑'을 확장하여, 그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신의 성령에 들 수 있다는 확고한 메시지를 보여준 것이, 기독교를 인류의 종교로 성장하게 만든 기폭제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신앙에 대한 매뉴얼은 투철하고 확고하게 갖추게 되었으나, 인간 삶에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매뉴얼은 신앙하는 이들이 스스로 찾아야 했다. 예수의 삶이 오직 '죽음'의 미션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긴급한 일이 아닌 일상사의 코칭은 할 겨를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 신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자율이지, 신이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알맞지 않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류영모는 자기 삶의 길을 스스로 찾아 나섰다. "한 가지 뚜렷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기존 이론에 묶이거나 매달리지 말고 내 생각을 맘대로 하는 것이다. 맘에 따라서 미정고(未定稿, 완성되지 않은 이론)를 이어받아 완결을 짓도록 노력하는 것이다"(다석어록). 류영모는, 기독교를 만나면서 죽음에 대한 문제들이 완전하게 풀리는 것을 경험했으나 삶의 경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삶의 경영에 관한 윤리철학은 오히려 그가 그 전부터 배웠던 동양철학이나 사상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문제는 중요하다. 서구 기독교가 '신앙에 따른 삶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편으로 교리와 교회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신의 메시지와 예수의 가르침을 세속화했다는 혐의를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동양 사상의 수신(修身)은, 신의 존재를 설정하여 거기에 닿으려는 방편이 아니라, 인간 몸과 삶의 문제들을 윤리와 규범으로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상태를 고등(高等)의 정신으로 높이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불교와 유교와 노장사상은 상당 부분이, 수신의 사상이다. 그것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목표보다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을 우선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은 이기적 삶이 아니라, 흐름을 통찰하여 번민을 줄이는 한편 세상을 위해 기여하는 사회적 덕목을 강조하는 취지들이다. 물론 사상이 저마다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한꺼번에 묶을 순 없다. 불교는 '개관(槪觀)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고, 노장은 '관점의 교정을 통한 성찰적 행동'을 요구하고, 유교는 "윤리적 본질과 모델을 통한 사회적 성숙'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나름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유불선(儒佛仙)은 모두 깨달음과 성찰과 성숙을 향한 수신(修身)을 권장하고 있다. 선악과 원죄론과 대속(代贖)의 의미 류영모는 기독교의 근본적 문제가, '신앙이 지녀야 할 자율적 수신(修身) 교과서'가 없다는 점에 있다는 동양적 직관을 해냈을 것이다. 수신은, 나를 믿느냐는 '믿음 검문(檢問)과 확인'이 아니라, 신앙하는 자로서의 자기 완결성을 갖추려는 노력이다. 류영모는 이 대목에서 기독교의 원죄론을 주목했다. 성서는 최초의 인간이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근본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죄악은 신이 줬던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수 있는 근본적인 결함을 타고났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바울은 원죄론을 '신과의 단절과 죄의 유전'이라는 의미로 확장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인간은 불순종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형상을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사망에 이르게 됐다(롬 5:12)." 바울은 인간 본성의 사악함 때문에 신과의 교신이 끊어졌으며, 오직 대속(代贖, 예수의 죽음)으로 신의 마음을 돌려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의 문제는,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뭉뚱그려 죄 사함을 받은 불안정한 상태의 해결이라는 점이다. 은유적인 선악과 스토리에 묶어 '원죄를 지닌 인간'을 대책없이 비판해온 논리는, 신의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는 진실된 면모가 없다고 류영모는 판단했다.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종교적인 결속을 이끌어내려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원죄론을 동양적 '수신론'에 결부함으로써, 삶의 규범으로 이끌어냈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貪瞋痴)가 그것이다. 탐진치는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해탈을 막는 인간 마음의 삼독(三毒,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말한다. 티벳의 윤회도에는 탐욕을 수탉으로, 분노를 뱀으로, 어리석음을 돼지로 그려서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한다. 탐진치를 짐승이 지닌 성질로 본 것이다. 류영모는 불교의 탐진치를, 인간이 타고나온 원죄의 진상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바울의 원죄와 대속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삶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요강(要綱)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식욕,공격욕,색욕이 인간 원죄다 불교에서 탐진치를 짐승으로 표현한 것처럼, 류영모는 이것을 인간 안에 들어있는 수성(獸性)이라고 말했다. 인간과 짐승은 태어나면서 탐진치를 내장하고 나왔지만, 인간은 영성을 함께 타고 났기 때문에 수성을 제어하고 극복하여 신과 완전한 결합을 이룰 수 있다고 밝혔다. 류영모는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를 좀 더 구체적인 의미로 직결해 인간의 본능적 약점을 관리하는 3가지 포인트로 삼도록 했다. 탐욕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식욕(食慾)을 중심으로 한 탐심이라고 보았고, 진에(瞋恚, 성내는 일)는 남을 공격하는 욕망이라고 했고, 우치(愚癡, 어리석음으로 저지르는 일)는 색욕으로 규정했다. 류영모는 이것을 사람이 지닌 짐승 성질이라고 했다. 짐승은 먹고 교접하고 으르렁거린다. 인간도 이 성질에 빠져 있으면 짐승을 벗어나지 못한다. 동물학자들이 동물의 본능을 feeding(貪) , fighting(瞋) , sex(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인간의 '몸나'는 짐승성질을 원죄로 타고 났으며, 얼나로 거듭나는 길은 그 탐진치를 극복하는 수행이라고 밝힌 것이다. '탐진치 원죄론'은 류영모가 정립한 기독교 사상이다. 기독교가 까닭 없이 죄의식을 지닌 채 신에게 빚진 존재처럼 굽신댈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여 시험한 선악과처럼 인간 속에 깃든 짐승의 욕망들을 능동적으로 제어하는 일상적 수신(修身)을 제안하고 그 스스로 평생 실천했다. 탐진치는 우리 안에 들어있는 짐승 "우리는 분명히 노여움을 타고났기에 삼독이 내 속에 들어 있다. 삼독을 이겨나가는 일은 올라감이지만 삼독에 지면 떨어지는 것이다. 이 몸은 진생(瞋生, 싸움으로 태어난 목숨)이다. 진(瞋)이 없으면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정자와 우리 어머니의 난소가 무슨 인격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서로 활동하고 경쟁을 하여서 나온 나다. 진이 동해서 나온 나도 진이다. 그리하여 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작도 경쟁이니 일생 동안 진이 내게서 떠날 리가 없다. 삼독으로 잉태되었고 삼독으로 자라난다. 성경을 보면 원죄가 있다고 하나, 나는 원죄가 아니라 이 삼독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삼독보다 구체적인 원죄가 어디 있는가"(다석어록). 류영모는 하루한끼(일일일식) 식사와 간헐적인 단식으로, 식욕을 평생 다스렸다. 51세 때인 1941년부터 타계하는 1981년까지 40년간 이어진 수행이었다. 류영모는 말했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끼씩 먹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것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야 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우리 몸은 신이 머무는 성전이다. 성전에 드리는 제사가 바로 밥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밥 먹는 일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밥을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이 흐뭇함이 아니라 먹지 않는 거기에 흐뭇함이 있다." 이런 스승을 보고, 많은 이들이 한끼를 따라 실천하기 시작했다. 함석헌, 김흥호, 서완근, 박동호는 한끼에 성공했고 염낙준, 주규식, 류자상(아들)은 하루 두끼를 먹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실천이 과연, 저 류영모의 원죄에 갈음하는 기독교도의 수신(修身)이라는 심오한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느냐일 것이다. 정신이 육체를 먹으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낸다는 뜻은, 얼나를 부양하기 위해 짐승을 죽여 바치는 '희생양'의 의식을 의미한다.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데, 유교에서는 기도를 수신이라고 한다. 입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 그러면 마침내 머지않아서 하느님께 다시 이르게 된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도록 참나를 길러가는 것이다"(다석어록). 일식(一食), 해혼, 시골살이는 몸으로 하는 기도 남을 공격하고 싸우는 '진에'의 행위를 이기는 일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과도 같다. 예수가 인간의 삶을 향해 던진 최고의 메시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였다. 류영모가 어려운 이를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스스로가 모아온 재산을 봉사에 기꺼이 내민 것은, '무진(無瞋, 성냄이 없음)'의 자비를 실행하는 일이었다. 시골로 내려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짓는 삶은 인류를 향한 가장 진실한 봉사의 수행이라고 류영모는 생각했다. 자식에게도 그 삶을 권했다. 스스로가 높이 되는 게 아니라 씨알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생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같은 사상은, 류달영이나 김교신, 함석헌과 같은 제자들에게도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 1941년 류영모는 가족을 모아놓고 아내 김효정과의 해혼(解婚)을 선언한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결혼(結婚)을 풀어주는 해혼으로 세상에 적극적으로 봉사하겠다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류영모의 해혼은 그런 풍조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죄로 부여받은 짐승 성질의 하나인 치(痴, 색욕)를 극복하기 위한 수행의 일부였다. 하루 한끼와 동시에 해혼을 선언함으로써 금욕수행의 수준을 높인 것이다. 이날 부부의 방 한가운데에 '사랑의 만리장성'이라 불린 긴 책상이 놓였다. ""남녀의 정사를 쾌락이라고 하지만 대개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도 51세까지 범방(犯房·성생활)을 했으나 이후엔 아주 끊었습니다. 아기 낳고 하던 일이 꼭 전생에 하던 일같이 생각됩니다. 물론 정욕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최대 흥미와 관심은 식색(食色)입니다. 일체 문화활동의 노력하는 초점이 식색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식색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짐승입니다. 짐승은 고뇌도 없이 식색을 자유로이 충족하며 사는 목적이 오직 그것입니다. 사랑은 남녀의 맛이 아니라 남녀의 뜻을 읽어야 합니다. 남녀의 뜻은 신의 거룩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류영모의 금색론(禁色論)이다. " 얼나로 깨어나지 못하면 짐승새끼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짐승 새끼가 아닌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결코 예수가 겸손해서 한 말이 아니다. 살로만 사는 살살이(肉體生活)는 살 너머는 못 간다. 이것은 정말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도 살은 살이요 영(靈)은 영이라고 했다. 사람은 몸으로는 분명 짐승이다.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는 얼사람으로 솟나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다석어록). 류영모가 자기 삶을 혁신했던 것은, 짐승의 몸으로부터의 탈출을 꾀하는 '얼나의 혁명'이었다. 기독교인이 동양의 수신(修身)을 '하늘로 가는 길'에 접목한 사건이었다. 류영모에게 몸은, 생명을 지니고 태어나는 바람에 얻은 짐승이었고 그 짐승을 얼나의 고등(高等)한 수준에 맞게 길들이는 일이 삶 속에서 행한 수행의 핵심이었다. 영(靈)을 좇는 일과 육(肉)을 길들이는 일이 신과 짐승 사이의 존재인 '인간(人間)'의 길이라고 여겼다. "짐승을 길들이는 데는 알맞게 굶기고 먹여야 한다"고 밝힌 그의 말은, 그가 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표현이다. 탐진치의 짐승을 극복하는 수신만이 얼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이토록 천명했던 기독교인은 없었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1-25 09:41:35
- "나를 섬기면 종교된다" 다석이 경계윤 신부와 나는 1955년생 양띠 갑장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교과서(국정)를 읽고 박종철 사건을 비롯해 동세대의 경험을 공유했다는 이야기다. 나이를 알고 나니 또래집단(cohort) 의식이 생겼다. 윤 신부가 차를 따를 동안에 서울서 갖고 간 내 저서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을 내놓았다. 내가 “제가 3년 전에 쓴 책인데요. 박종철 탐사보도가 6월 항쟁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는 관점에서 썼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6월항쟁이면 제가 사제 서품받았을 때인데…”라며 책을 들춰봤다. 나중에 보니 “없이 계시는 하나님” 박사학위 논문 첫머리의 ‘연구동기와 목적’ 주석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언급돼 있었다. 그는 대학입시에서 공과대학을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재수 학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대화를 하던 중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했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고자질하는 바람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얽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을 산 전과 때문에 공대를 나와 가지고는 취직이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 연세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독재정권 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윤정현 신부가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 책을 보고 있다. 이 일대에는 전라관찰사 이서구의 일화가 많이 있다. 이서구가 전라관찰사로 와서 비결서가 있다고 하니 꺼내보려고 했다. 그런데 열어보다가 벼락이 떨어져 ‘전라관찰사 이서구가 본다’라는 대목만 읽고 덮었다. 여기에 손화중이 이서구가 보지 못한 비결서 내용을 다 보았다는 전설이 붙은 것이다. 아마 비결서를 갖고 있다는 말 때문에 농민군이 많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을 엿볼수 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총을 가졌는데 농민군은 부적을 품고 죽창으로 돌격하다가 실패했는데…? ”동학군도 총을 피하기 위해 큰 대나무 방패를 밀면서 가기도 하고 나름대로 전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식 총이 워낙 위력을 발휘하니까 겁나서 도망가다 서로 넘어지면서 죽은 경우도 많습니다.“ 천부경도 배달민족 사상이 구전되다 기록된 것 -대종교의 천부경에 대해서 사학계가 위서(僞書)로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천부경을 다석이 해석한 것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하나요? ”예수님의 말씀도 나중에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도 옛 어른들이 말로 ‘창세기에 어떻더라’는 이야기가 율법사들을 통해 구전(口傳)되다가 기원전 500년 경에 문자로 기록이 된 것 아닙니까. 그와 같이 천부경도 배달민족의 사상이었는데 나중에 내려오는 얘기들이 기록됐다고 봅니다. 그 기록이 역사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자료냐, 이런 것보다도 우리 민족의 사상, 철학을 엿볼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구전으로 ‘단군은 이런 분’ 이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내려왔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사상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석은 중국과 다른 우리 민족 고유 사상을 찾고 해석했습니다. “ 인터뷰를 마치자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렸다. 윤 신부의 안내로 심원 앞바다 ‘금단양만’이라는 식당에 가 고창 복분자주에 장어를 먹었다. 이제 자연산 장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 인공부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아 치어를 사와 사료를 먹여 키운다. 신부는 식당에서 장어를 손질하고 남은 부스러기 고기를 받아 다시 고영재로 왔다. 개들이 밥을 가져온 줄 알고 꼬리를 치며 달려왔다. 산양들도 내려왔다. 윤 신부는 바로 옆 국가지질공원으로 우리를 데려가 병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술병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병바위를 오르는 마삭덩굴과 담쟁이들은 암벽 타기에 지친듯 모두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 박하늘 인턴기자)2021-01-20 16:16:4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2)] 죽음을 오해하지 말라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은 '무덤 속의 예수(Christ in the Tomb)'를 그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죽은 예수는 눈을 뜨고 있고 오른쪽 중지손가락은 펴진 채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려다 만 듯 멈춰있다. 이것은 단순한 그림이지만, 인류 속에 깃든 종교적 상상력을 일거에 깨는 '팩트 폭격'일 수 있다. 관찰자의 시선 앞에 놓인 예수의 주검이라는 피사체는, 신화로 덧칠해온 이미지와 해석을 제한하면서 리얼리즘이 지닌 명료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죽삶사상은 '얼나예수'의 참가르침 다석사상의 핵심은 '얼나사상'이다. 몸이 죽고 얼은 산다는 '몸죽얼삶(肉死靈生, 죽삶)'의 전제는 '몸이 죽는다'는 엄연하고 당연한 사실이다. 죽삶사상은 얼나에 매진하고 얼나를 신앙하며 얼나와 영원히 함께하는 전제로, 죽음이 그 역할을 뚜렷이 한다는 생각이다. 몸이 죽을 수 있음을 기뻐하라. 그래야 얼이 온전히 신에게로 귀일하기 때문이다. 몸을 건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몸이 부르는 충동에 빠지는 삶은, '얼나'로부터의 이탈일 수밖에 없다. 얼나사상의 완결은 반드시 '죽음'이라는 경로를 통해서 가능하다. 도마복음서 5장에는 인상적인 예수의 말이 담겨 있다. "사람에게 잡아먹혀서 사람이 되는 사자는 복이 있다. 그리고 사자에게 잡아먹힐 인간은 저주받은 것이다. 그리고 사자는 여전히 인간이 될 것이다." 인간과 사자가 육식(肉食)을 하는 동물임을 빗대어 표현한 이 말은, 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 내부에는 '인자(人子, 신이 내린 사람의 아들)'인 사람이 있고, 여느 짐승과 다르지 않은 사자가 있다. 사자는 배고프면 먹으려 들고, 다른 사자를 보면 공격하려고 들고, 또 이성(異性)을 보면 교접하려고 든다. 인간이 마음속에서 사자를 잡아먹으면, 그는 얼나로 거듭난다. 그러나 사자가 인간을 잡아먹으면, 신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자가 인간인 것처럼 살아가다가 사자의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토록 통렬한 비유가 어디 있겠는가.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1-18 10:19:37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1)] 십자가는 무엇인가, 참죽음이 복음이었다예수는 죽으러 왔다. 성서가 기록한 예수의 위대한 길은 오로지 '죽음의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예수의 죽음 외에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모두 죽음을 위한 준비 같은 것이었다. 그 죽음은 신의 명령이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죽는 방법'이었고, 신의 사랑 또한 거기에 있었다. 류영모는 성서 중에서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한 기도(요한복음 17장 결별의 기도)를 가장 주목했다. 이것이야 말로 메시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말했다. "예수는 죽음을 앞에 놓고 나는 죽음을 위해서 왔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러 왔다. 예수는 죽음을 생명을 깨는 것으로 본 듯하다. 나무가 불이 되는 것이 죽음이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진리정신을 드러낼 때가 왔다. 진리정신은 죽음을 넘어설 때 드러난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정신이다. 사람은 때와 터와 람(값어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죽을 때 죽어야 하고, 죽을 터에서 죽어야 하고, 죽을 보람으로 죽어야 한다. 예수는 세 가지를 다 계산해본 결과,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새가 알맞은 때에 알을 까듯이 지금이 죽을 적기(適機)라고 결정한 것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다. 계산은 끝났다." 인간의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류영모는 평생 그것에 대해 집요하게 궁구(窮究)했다. '생명(生命)'이라는 말이 있다. 태어나는 일과 명령받는 일 즉 죽는 일을 결합한 말이다. 생명을 타고난 모든 존재는 생명의 명령을 받는다. 하나는 태어났으니 살아라 하는 명령이고 하나는 살았으니 죽으라 하는 명령이다. 생명은 결코 이를 위반할 수 없다. 태어나지 않은 생명이 없었듯이 죽지 않은 생명도 없었다. '부활과 영생' 기적의 미스커뮤니케이션 기독교가 역사상 인류의 가장 방대한 지지를 받게 된 까닭은, 예수가 보여준 '죽음의 시전(示展)'을 철저히 오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예수는 탄생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생명체의 한계를 사는 인간에게 놀라운 기적을 전했다. 인간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인간이 가능하며, 죽지 않는 인간이 가능하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인간이 가능하다는 메시지였다. 탄생과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다. 그 메시지를 받아든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탄생과 육신의 죽음, 그리고 육신의 부활을 상상했다. 예수가 전한 신의 메시지는, 얼나로 탄생하는 것, 얼나로 죽는 것, 얼나로 재탄생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육신이 살고 싶었던 인간에게는 스스로 듣고 싶은 말들이 들렸고, 얼나로 표현된 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던 예수는 목숨을 바쳐 이것을 전했다. 류영모는, 이 충격적인 미스커뮤니케이션을 바로잡으려 한 '후지자(後知者)'였다. 오직 얼나로 귀일하는 인간과 신의 믿음을, 사상의 중심으로 삼았던 그였기에, 예수의 죽음이 예수 이후의 인간 중에서 가장 생생하고도 정확한 메시지로 읽혔을 것이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믿었으며, 그 죽음이 곧 신의 고결한 사랑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실천하고자 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듯이 죽는 게 죽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반어(反語)는, 인간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영생(永生)이 오직 '얼나의 삶'을 말하는 것임을 후련히 드러낸다. 류영모는 죽지 않았다. 그의 얼나는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다. 이 '참'을 직면해야 류영모 사상을 만난 것이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1-11 05:16:05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0)] 기독교의 얼나는 인류 최고의 사상예수 "얼나를 모독하는 자 용서받을 수 없다" 얼나는, 상대세계에 가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점(點)'과도 같다. 상대적인 인간의 육신에 깃든 절대적인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세계와 절대세계가 공존할 수 없다는 이론적 관점에서는 모순이며 역설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얼(靈)'은 몸 속에 어떤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 생각의 끝에 닿아있으며, 그 생각의 지향을 만들어내며 그 생각의 비약과 초월을 자극하며 인간 외의 어떤 생물에게서도 포착되지 않은 승화(昇華)하는 영적 성질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꾸준히 인간 사유의 화두가 되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런 말을 했다. "만약 육신이 영혼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만약 영혼이 육신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그건 놀라운 일 중에서도 놀라운 일일 것이다. 나는 영혼의 엄청난 풍요로움이 어떻게 이런 빈약한 육신 속에 깃들게 되었는지 놀란다"(도마복음 29장). 얼나가 있어서 몸이 만들어졌는가. 혹은 몸이 만들어지면서 얼나가 생겼는가. 이 수수께끼를 예수도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얼이 몸을 생겨나게 한 것보다, 몸이 얼을 깃들게 했다면 그게 더 놀라운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예수가 말한 얼의 풍요는 바로, '하느님의 임재(臨在)'가 자아낸 풍요다. 예수가 언급한 것은 자신의 육신과 성령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의 육신과 성령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얼과 몸으로 이뤄진 두 개의 자아를 인정하면서, 예수 자신 또한 육신에 존재하는 영혼의 놀라움을 가장 뚜렷하게 실현한 존재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예수는 이런 말도 했다. "아버지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 아들(예수)을 모독하는 자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도마복음 44장). 성령은 곧 얼나다. 하느님과 자신을 모독하는 것을 참을 수는 있지만, 자신과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인 '얼나'를 모독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단언이다. 예수가 인자(人子)로 보내진 뜻은, 인간 속의 얼나를 통해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얼나'가 결코 육신의 죽음에 제약을 받지 않고 오히려 육신의 죽음으로 신에게 귀일하는 강력한 에너지를 드러내보인 위대한 전시(展示)였다. 얼나는 바로 예수의 유일한 메시지였고,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 그 자체였다. 류영모 사상은, 이 지점에서 발화한다. 그는 얼을 지닌 인간을 표현하는 간명하면서도 강력한 말을 만들었다. 그것이 '얼'과 '나'를 결합한 얼나다. 얼나는 몸나(身我) 혹은 제나(自我)로 불리는 육신에 대비한 자아의 개념이다. 몸나와 얼나는 두 개의 '나'가 아니라 하나의 '나'에 결합되는 양상이나 면모를 말하는 것이다. 얼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예수가 표현했듯, 몸에 속한 얼이나 몸을 낳은 얼이 '나'라는 존재에 얼마나 순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합일하느냐에 따라 뚜렷해지거나 희미해지는 '얼의 나'다. '얼나'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인심유위 도심유미(人心惟危 道心惟微)처럼 위태롭고 아리송하여 늘 추스르고 생각의 불꽃으로 정진해야 하는 '잠정적인 상태'에 가깝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얼나라는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다. 모든 게 얼나가 원점이 되어서 나온다. 얼나를 생각하면 묵은 것도 새것도 없다. 얼나가 중심이다. 불교의 중도, 노자의 수중(守中), 유교의 중용은 일체가 하느님께 돌아가자는 것이다. 얼나는 예사롭게 저거니 하고 갈 게 아니다. 이 얼나가 대실존(大實存)일 것이다. 이 얼나는 진실이니 할 정도가 아니다. 이 사람 생각은 늘 얼나를 떠나지 않고 얼나에서 모든 게 나온다. 이것을 모르면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얼나는 '얼라'의 영(靈)에 가깝다 우리 말 사투리 중에 '얼라(어린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예수는 '얼나'의 이상적 모델을 자주 '얼라'로 표현하곤 했다. 동심이 지닌, 인간 내면의 원형적인 순수야말로 신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예수는 "너희 중에 어린아이가 된 자는 누구나 아버지의 나라를 알 수 있으며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도마복음 46장)고 말하기도 했다. 또 자신(예수)을 만날 수 있으려면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이 없고 아이들처럼 발밑에 벗어놓은 옷을 함부로 밟는 그런 마음일 때"(도마복음 37장) 인자(人子)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보며 예수는 "이 아기들은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의 영성)과 같다"고 했고 "태어난 지 7일 밖에 안되는 어린아이에게 노인들은 생명의 장소를 물어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나의 이상적인 영적 상황을, 인간의 탐욕이나 사회적인 에고와 성적 욕망이 육신에 들어앉기 이전인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얼라와 통하는 얼나는, 우리 언어가 낳은 우연한 닮음이겠지만 '얼라'의 말뿌리를 이루는 '어리다'는 말이, '얼'이 고착되지 않았다는 뉘앙스가 있는 만큼 완전한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예수는 육신의 할례를 받는 것을 비판하고(정말 필요했다면 모체에서 이미 할례를 받고 태어났을 것이다), 얼의 할례를 받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의 할례야말로 성령에 합당한 '얼나'로 가는 수행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류영모는 말했다.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얼줄이 드리워져 있다. 이 우주에는 도라 해도 좋고 법이라 해도 좋은 얼줄이 영원히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 얼줄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이 한 얼줄을 생각으로 찾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 이 얼의 줄, 정신의 줄, 영생의 줄, 말씀의 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1-01-03 16:30:2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9] 류영모는 예수를 스승이라 불렀다섣부른 생각이 감히 용훼하기엔, 다석 류영모는 너무 크고 깊은 사람이다. 원고 30장을 꽉 채우는 시리즈 88회로, 그 생애를 일별하는 작업을 끝냈다. 지금부터는, 그의 사상을 나름으로 추슬러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나의 깜냥으로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알 수 없다. 좋은 의욕의 발로라 해도, 위험천만한 상황이지만, 지금에 와서 그걸 생략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여러 제자들이 이미 많은 말씀을 하셨고, 정리도 하셨으며, 깊고 다양한 분석도 나와 있다. 그걸 살피며 가만히 돋는 갈증이 있었다. 정작 다석사상의 정수(精髓)를 정면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의 위대함을 캐내려고 한, 곡괭이 자국은 미약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석사상은, 한국의 사상이 아니라 세계의 사상이며 역사적으로는 인류의 사상이다. 그것을 아울러 인간의 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한끼의 실천이나 동서양을 아우르는 해박함이나 우리말로 철학을 한 독창성과 같은, '방편'의 위대함에 치중하지 않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본질은, 그의 사상이 무엇을 지향했으며 어떤 성취를 거뒀으며 후세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남겼느냐는 점이 아닐까 한다. 다석은 무엇이었나. 무디기 짝이 없을 곡괭이 날 하나로, 한 사상의 거대한 광맥 속으로 무모하게 파고 들고자 한다. 거친 작업이니 감안과 용서를 바란다. 첫편은 다석사상 중에서 무비(無比)의 명료함을 지닌 고갱이라 할 수 있는 '얼나사상'이다. 예수는 얼나를 증언하러온 얼나 예수 말하시기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人子)가 너희에게 주리니 아버지 하느님께서 도장을 찍으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한 6:27~29) 썩을 양식은 몸을 위한 양식이고 영생의 양식은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인 얼나를 위한 양식이다. 얼나의 양식을 주는 이는 인자인 예수다. 예수는 하느님이 도장을 찍어 보증한 존재다. 천부(天符)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는 명쾌하게 말해주었다. 얼나의 양식을 주는 존재이자, 얼나의 시범자(示範者)인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성서는, 인간 속에 '하느님의 얼'을 불어넣어준 예수를 믿는 일이 곧 하느님을 믿는 일이라고 설명해준다. 예수의 이 말은 인간에게 몸 이외에 영생하도록 있는 무엇이 깃들어 있으며 이것에 양식을 주는 일을 충실히 하라는 조언이다. 하느님이 도장을 찍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업인 예수는 바로 '인간 속에 든 얼나'다. 그 얼나를 부양하면, 예수와 같이 인자가 될 수 있으며 육신이 생을 멈추었을 때 하느님의 영생에 합일할 수 있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어떤 이라도 예외없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는 예수의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표현으로 인간 육신의 탄생과는 다른 탄생을 말하고 있다. 아래로부터 나는 탄생인 몸생명에 비하여 성령의 생명이자 하느님 그 자체인 얼생명은 위로부터 난다고 했다. 이 얼생명의 탄생은, 몸생명과는 상관없는 생명이지만 몸생명 위에 다시 태어나는 부활임을 암시하고 있다. "몸으로 난 것은 몸이요, 얼(靈)로 난 것은 얼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한 3:6~7)고 예수는 그 뜻을 분명히 한다. 류영모는 "피와 살을 가진 짐승인 우리가 개나 돼지와 다른 것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얼을 가졌다는 것 밖에 없다. 예수는 뚜렷이 하느님을 모시고 태초부터 자기가 모신 하느님이라 불렀다. 나도 이에 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하느님의 아들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한마디만 하고 싶은 것이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예수가 예수다운 것은 영원한 생명인 성령의 나를 가르쳐준 데 있다. 류영모와 간디가, 예수를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예수는 '얼나'의 앞길을 간 스승이기 때문이다. 기독교회가 예수라는 이름과 성경이라는 경전을 우리에게 건네주었지만, 그들은 핵심진리인 얼나를 제대로 전수해주지 못했다. 그야말로 '얼'빠진 종교를 전해줬다는 비판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마태복음은 이 어리석음을 이미 경고하고 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 7:21)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2-28 11:54:32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8) 9억번의 숨이 멈추다석도 유형재(兪衡在, 1955~ )는 10대 때부터 붓을 잡은 대전 출신의 서예가로 국내 10대 서예가로 손꼽힌다(서법예술사 선정). 그는 다양한 서법(書法)뿐 아니라 탄탄한 한학 실력까지 갖춰 시서화(詩書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전통적으로 글씨와 그림은 뿌리가 같기(書畵同源) 때문일까. 그는 10여년 전부터 인물화에 손을 댔다. 인물화에도 묘하게 자신의 뿌리인 서법이 드러난다. 진한 먹을 바탕으로 윤곽을 강조하면서 속도감 있게 인물을 묘사한다. 그는 글씨를 쓰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모습을 담은 '완당집필도'를 비롯해, 왕희지 같은 서예 대가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기도 했다. 유형재는 류영모 제자 박영호를 만나 이런 말을 했다. "글씨는 진리(道)를 담을 그릇인데 진리를 모르고 글씨만 쓰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박영호는 유형재의 서실에서 6년간 다석사상 강좌를 열게 됐다.(1990년부터 1995년까지) 유형재는 연초서(連草書, 이어서 쓰는 초서 글씨)를 즐겼는데, 일필휘지하면 붓끝이 종이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글자들이 한 글자인 것처럼 흐르며 쓰여진다. 박영호는 이 글씨를 보며 세상의 사람들이 한 '얼'로 꿰뚫린 모습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유형재는 먹냄새가 짙게 밴 듯한 류영모 초상화를 그렸다. 동서양의 신학과 종교를 회통(會通)한 류영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2-23 11:33:00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7)] 나 어디 좀 간다, 다석 실종사건그눠 제게 듬이 이런 일이 있은 직후인 7월에 박영호는 류영모 실종사건을 알게 됐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열흘 쯤 지난 때였다. 박영호가 물었다. "선생님, 이번에 어떤 생각으로 집을 나가셨습니까." 류영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며 이렇게 말했다. "나, 전과 같아요." 그때 부인 김효정이 물었다. "무엇이 같아요?" "똑같은 만큼 같지요." 선문답 같은 대화였다. 박영호가 집에서 나올 때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자주 올 생각 말아요. 바쁠 터인데 이길 저길 갈릴 때나 오면 되지 그 전에는 안 와봐도 그저그저 짐작이 가는 것 아니오. 잘 가시오." 류영모가 '전과 같아요' '똑같은 만큼 같지요'라고 한 말은, 음미할 만하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나선 길은, 평소의 생각을 실천한 것이며, 특별한 결행이 아니며 지금에 와서 달라진 일도 아니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목숨은 한 번은 끊어져야 다시 이어집니다. 말씀은 깨끗, 그러니까 끝까지 깨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달으면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내 속에 벌써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죽지 않는 생명이기에 몸은 아무 때나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기 위해, 류영모는 옷을 깨끗이 차려 입고 나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신은 그를 부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류영모는 다만 '그눠 제게 듬이'를 마음속으로 외고 있었다. "'그눠 제게 듬이' 요즘 내가 생각하는 기도입니다. 그눠는 마르(乾)다는 뜻입니다. 제게는 하늘나라입니다. 듬은 죽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눠 제게 듬이'.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소서. 그눠 제게 듬이.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2-21 10:32:4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6)] 마지막 숨을 끄는 게 '소식'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2-14 11:22:5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5)] 생에서 24일을 잃어버렸다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2-09 11:16:42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4)] "우리 만남은 바람꽃이었소" 류영모의 탄식'류영모 강좌'의 평생 집사였던 창주(滄柱) 현동완 1922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YMCA로 파견된 그는 4년간 퀘이커교도와 교류하며 정신적인 눈을 새롭게 떴다. 1926년 귀국해, 당시 복음사회주의 경향에 반대하여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YMCA 소년 평화구락부가 그 활동의 중심이었다. 기도회와 체력 단련, 그리고 사회봉사가 수련 내용이었다. 이 운동은 전 연령을 망라한 '참운동'으로 전개된다. 현동완은 '류영모 금요강화(講話)'를 개설하여 참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 운동은 기독교 교계 내에서 반발에 부딪쳤고 보수세력과 사회복음주의의 저항에 흔들리게 된다. 현동완은 YMCA연합회 순회간사를 맡으면서 참운동을 확장하고자 하였으나 기독교 청년회의 반발로 1937년 사임을 하고 함북지방에 은둔한다. 해방 이후 그는 미군정청 교통부장 고문으로 일했고 1948년에 서울YMCA총무를 맡는다. 그는 복음운동의 대중화를 외치며, 매주 3대 신앙강좌(류영모, 한에녹,함석헌)를 열었다. 현동완은 식민지시대에 불굴의 의지로 지속했던 류영모 강좌를 다시 열어, 해방 공간으로 이어지는 정신운동을 전개한 셈이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꾸준히 류영모를 강단에 모셨던 그는 1957년 3월 총무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1959년 병을 얻어 난지도 삼동소년촌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3년 눈을 감는다. 그의 생은 YMCA와 함께했으며, '류영모 강좌'와 함께한 것이기도 하다. 문학가이자 목사였던 황광은은 현동완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세기 종로의 성자였습니다. 그는 분명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천당 속에 높이 앉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는 것은 복이 있다고 외친 그 주님께 미쳤던 것입니다. 그가 커피를 안 마신 것은 나라를 위함이었고, 고기를 안 먹은 것은 세계평화를 위함이었습니다. 하루 한끼씩 안 먹은 것은 불행한 고아를 위함이었고, 사과를 안 먹은 것은 병자를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는 두 벌 옷이 없었습니다. 불우한 형제에게 다 나눠주고 남은 한 벌로만 살았습니다. 그는 머리 둘 집이 없었습니다. 난지도 소년촌 단칸방을 병실로 쓰다가 거기서 돌아갔습니다." 오직 이웃의 삶, 고통받는 불우한 이들의 벗으로 살고자 했던 현동완은, 그 실천의 엔진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스승 류영모를 통해 자양분처럼 섭취했을 것이다. 스승의 '참'이야 말로, 그리스도에 미친 삶에 다름 아니었기에 그는 그 '참'을 필생의 신앙으로 삼아 죽음까지 나아갔을 것이다. 류영모는 난지도 소년촌으로 그를 문병한 뒤 '다석일지'에 이렇게 썼다. 언님 이제 아무 일도 못보심 만큼 싸흐심! 벽새에 앉은 이 아운 한우님 계로만 생각 한님계 이기신 님계 이길 싸움만 봅소사! (형제여, 이제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만큼 홀로 싸우고 있구려. 벽 사이에 앉은 이 동생은 하느님이 거기 계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거기를 이기신 님의 거기, 이기는 싸움만 바라보시기를.) 류영모에게 현동완은, 그가 세상에 내놓을 복음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평생의 '복음집사(執事)'였다. 1963년 현동완이 돌아간 뒤 류영모의 YMCA연경반은 끝이 났다. 전택부가 총무를 이어받았으나, 그는 '류영모 강좌'를 만들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35년 강연역사가 급작스럽게 종지부를 찍었다. 류영모는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겨놓았다. "창주도 이젠 우리 인생 만났다던 것이 바람꽃만이었던 것을." 류영모가 80세 때 문득 제자에 관해 남긴 말이 있다. 그의 제자들에게는 뼈아픈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나무가 많으면 그 속에는 반드시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낢이 있습니다. 그런데 산 사람은 많으나 재목으로 쓸 만한 사낢은 없을까. 내가 여든을 살면서 아직껏 저 사람이면 사낢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류영모는 나무 중에서 쓸 만한 나무를 가리켜 '낢(材)'이라고 표현하면서, 뛰어난 제자를 '사낢'이라 표현했다. 낢은 '날(飛)'과 남(生)'이 함께 들어가, '뛰어오르는 후생'의 의미가 된다. 사람의 낢이니 인재(人材)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제자 중에서 '저 사람이면 뒤를 맡길 인재라 할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970년에 한 말이니, 이미 많은 제자들이 품을 거쳐 떠나간 다음이다. 그의 사상과 길을 온전히 믿고 맡길 이를 찾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했을 것이다. 제자들에 대한 폄하나 불신이라기보다는, 류영모의 잣대와 기대하는 높이가 만들어내는 미흡이라고 봐야 하리라. 하지만 류영모의 아낌과 칭찬을 받은 제자는 적지 않았다. 함석헌이 구속되었을 때 류영모는 하느님께 하는 기도는 영원한 생명만 구해야지 세상 일을 어찌해 달라고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그가 구속되었다 하니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김흥호가 공부 모임에 다녀오느라 약혼녀에게 파혼당한 것을 두고도, 그의 열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류승국이 석가와 공자, 예수처럼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갈 수 있겠다고 말했을 때도 기뻐했다. 서완근이 천안 광덕에서 농촌운동을 했을 때도, 류달영이 <새 역사를 위하여>란 책을 썼을 때도 칭찬을 했다. 35년간의 강의에 찾아왔던 사람들 중에는, 한학자 범부 김정설, 논어를 영어로 번역한 변영태,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신도안의 정도령이라 불린 양도천, 시인 김관식, 도인 대오 석종섭 등도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간 모임은 광화문 문정길 사무실에 있었던 모임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2-07 10:30:5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3)] "다석은 인간의 최고경지"예수의 좁은 길을 걸은 사람 류영모의 신앙생활에서 큰 변화는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구금될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1일1식을 시작했다. 이충우는 이렇게 그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매일 새벽 3시경에 일어나 체조하고 냉수마찰을 한 다음, 하오 5시에 저녁 한끼니만을 들었다. 유일한 식사를 할 때 그는 보통 1시간 이상 음식을 씹었다. 그렇게 40년간을 1일1식으로 살았다." 류영모의 하루 한끼는 신에게로 몰입하고 섬기는 자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그 부수적인 결과로 그를 평생 병 없이 건강하게 살게 했다. 1식은 질병에서 헤어날 수 있는 강력한 건강식임을 류영모가 입증한 셈이다. 그의 한끼는 이른 저녁이었고, 천천히 음식을 씹는 느린 식사였다. 이 같은 간소하고 느린 식사 습관이 요즘 시대의 많은 문명질환과 비만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묘책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성자가 40년의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또 새벽 냉수마찰도 중요한 포인트다. 둘째 아들 류자상은 이렇게 증언한다. "아버지는 통풍이 잘돼야 한다면서 사방 창문이 달린 방에 기거하셨습니다. 방안에 대야물을 항상 받아놓았는데, 한겨울밤엔 그것이 꽝꽝 얼어붙었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얼음을 깨고 그 찬물로 냉수마찰을 하셨지요.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다석(多夕)이란 호를 쓰게 된 것에 관해 이충우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어둠과 허공에서만 우주의 실재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 다석은 어둠이 분명 빛보다 크다면서 '먼저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는 창세기와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햇빛이 쓸데없다'는 묵시록을 인용하며 '처음도 저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저녁은 영원하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라고 갈파했다. 저녁은 해가 빛나는 낮보다도 절대세계인 하늘나라를 더 잘 나타내고 있다. 낮에는 빛에 현혹되어 세상에 미혹되므로 하느님을 그리기보다 세상에 얽매이게 마련이다. 낮에 기도할 때 왜 눈을 감는가. 저녁을 만들기 위해서다. 맘과 뜻과 힘을 합해 하느님을 사모했던 다석으로서 저녁을 좋아했던 건 당연하다. 2000년 전 '섬기는 자'를 한국서 보다 '성서신애(聖書信愛)'를 펴냈던 이진구씨(李瑨求)는 류영모를 일컬어, "아무나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신 분"이라고 말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과 섬김이다. 류영모는 자녀들에게도 결코 잔심부름을 시키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단정한 한복을 입고 수십리 길을 오로지 걸어다녔으며 약속은 늘 한치 틀림없이 지켰다. 시계도 차지 않았다. 또한 얼음과자나 음료수는 입에 대지를 않았다. 과수원에서 손수 딴 감이나 자두 외에 비싼 과일도 전혀 먹으려 하지 않았다. 먹는 일에서, 입는 일에서, 자는 일에서, 사는 모든 일에서, 그는 자신의 몫을 줄이고 비워 그 삶을 오직 하느님에게로 향하도록 하였다. 이미 스스로의 육신이 '입다가 버릴 옷' 같은 것으로 여겼으니, 자기의 것에 대한 욕심이 스며들 곳이 없었다. 세상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과 욕망과 겉치레와 허튼 자아감 같은 것을 모두 거둬들였으니 오직 할 일은, 신과의 소통과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눠주고 싶은 뜨거운 강연뿐이었다. 이토록 하늘에 경건하고 인간을 섬기는 이를, 인류는 2000년 전 '예수'라는 이에게서 뚜렷이 본 적이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2-02 10:51:3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2)] 천하효자(天下孝子) 예수처럼 살고싶소참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 김흥호는 류영모가 '진인무몽(眞人無夢, 참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의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장자(莊子)의 말이다. 진인무몽에 대한 풀이가 구구했으나, 왕필(王弼, 226~249)이 이를 정리해 말하기를 "참사람은 꿈을 꾸긴 하지만 그 꿈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했다. 꿈조차도 그를 어찌 하지 못하는, 맑고 단호하며 망상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류영모의 진인무몽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시 한 편(1975년 1월 31일작)을 소개한다. 痴後犯房貪食症(치후범밤탐식증) 齋先斷房節食明(재선단방절식명) 痴貪無斷滅人類(치탐무단멸인류) 齋明有續救生靈(재명유속구생령) 류영모의 단식유감(斷食有感) (1957.1.31) 욕정이 있으니 섹스를 하고 먹는 것을 탐하는 병이 생긴다 마음을 가다듬어 섹스를 끊고 먹는 것을 줄이면 밝아진다 욕정과 식욕을 못 끊으면 인간 되기는 다 글렀다 목욕재계하여 몸을 깨끗이 하기를 꾸준히 살아있는 영성을 구하라 류영모 '단식하면서 느낌이 있어' 그는 간헐적으로 단식을 했고, 일일일식(一日一食)은 날마다 철저히 실천했다. 그 속에서 색욕과 식욕을 단속하는 자기 경계(警戒)의 시를 썼을 것이다. 섹스는 수욕(獸慾, 짐승의 욕망)이라고도 한다. 먹고자 하는 욕망과 교접하고자 하는 욕망은, 짐승과 인간이 공히 지닌 것이다. 이것에 생의 모든 것을 기울이는 건, 짐승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류영모는 말했다. 그렇기에 이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멸인류(滅人類)'라고 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멸망하는 것과도 같다. 즉, 인간이 되지 못한 짐승이라고 했다. 류영모가 왜 뛰어난 제자 함석헌의 허물을 끝내 덮을 수 없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것은, 신앙하는 인간이 지녀야할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효(孝) 사상은 기독교 본질과 일치 김흥호는 류영모 사상을 '동양적으로 이해한 기독교'라고 설명한다. 유교의 핵심인 효(孝) 사상을 기독교의 신앙 본질과 일치시켰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완성태가 기독교라고 했다. 물론 유교에서 말하는 뜻은 혈육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만 류영모는 이 개념이 훨씬 더 심오하고 본질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다. 이 천부(天父)사상은 동양에도 있었다. 예수가 단순히 신을 친근하게 부르기 위해서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천명한 말이라는 얘기다. 세상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오히려 신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를 인간의 지혜로 비유해 확장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시대의 군거(群居) 인간에게는 부자(父子)개념이 뚜렷하지 않았고, 인지(人智)가 발달함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그 관계적 의미가 만들어진 것이다. 효(孝)는 그 관계에 깊은 의미를 담은 사상이다. 어미가 새끼를 사랑하는 동물적인 감정을 넘어서서, 새끼가 어미에게 바치는 깊은 사랑의 감정을 부각시킨 것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내리사랑으로 당연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일은 깨달음과 '존재의 연결(連結)'에 대한 깊은 각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예수야 말로 효자의 극치로 보았다. 류영모가 운명하면서 했던 말은 "아바디"였다. 이 말은 평생 그가 믿고 실천해온 길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아바디'는,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 밝음을 디딘다(아, 신의 뚜렷함을 실천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류영모는 '부자유친'에 관한 한시를 쓰기도 했다. 성령의 하느님과 예수(인자,人子)가, 아버지와 아들로서 서로 가까운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부자유친이라고 말하고 있다. 自信固執充忠臣 (자신고집충충신) 唯信瞻仰永學士 (유신첨앙영학사) 主心同意聖旨精 (주심동의성지정) 父子有親靈人子 (부자유친영인자) 스스로 믿음을 굳게 지킴은 충실한 하늘나라 충신이요 오직 믿음으로 쳐다보고 우러르니 영생을 배우는 학생이요 주의 마음과 오롯이 함께 하는 것이 그분의 참뜻이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를 생각함이 성령을 받은 예수다 다석 류영모의 '부자유친' 류영모는 천하지효(天下之孝, 하늘에 바치는 효)를 아버지가 계시고 그 근본을 좇는 일(부재종본, 父在從本)이라고 했다. 하늘의 아버지는 그 위치로 존재하기에 빈 곳으로 볼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기에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변역(變易, 만물은 변한다는 법칙)이다. 그 변역이 창조를 만들고 변화를 만들었다. 그 신의 생각을 좇으니, 아버지와 내가 같아진다. 이밖에 무슨 신앙이 있겠는가. 우리가 남인가?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부자무타(父子無他). 能空能物全知能(능공능물전지능) 變易不易一二易(변역불역일이역) 父在從本來如是(부재종본내여시) 吾玆今心稍肖亦(오자금심초초역) 류영모의 '무타(無他)'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지 그게 전지전능함 아닌가 변한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의 변화법칙이지 아버지가 계셔서 뿌리를 좇으니 이같은 생각이 찾아오네 나의 여기 지금 마음이 서서히 또한 그를 닮아가네 류영모의 '같다(다름 없다)' 김흥호는 류영모의 성(性,깨달음)과 교(敎, 가르침)도 놀랍지만 가장 경이를 느낀 것은 그의 도(道, 궁구함과 실천함)였다고 했다. 이 말은 중용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류영모는 중용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를 동양사상의 프리즘을 이루는 실마리로 읽었다. 즉 깨달음을 바로 말한 성(性)은 불교이며, 그 깨달음을 궁구하여 실천하고자 하는 도(道)는 도교이며, 그 실천을 가르침으로 전파하고자 하는 교(敎)가 바로 유교라고 보았다. 이 세 가지 사상은 각기 다른 것을 말하는 듯하지만, 오로지 같은 것인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 불교는 하느님의 본질을 말하며, 도교는 하느님에게 가는 길을 말하며. 유교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윤리로 풀어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불교의 성(性)은 하느님이고 유교의 교(敎)는 인간이다. 노자가 풀어놓은 도(道)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학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흥호는 류영모의 이 점을 정확하게 읽어낸 것이다. 류영모는, 서양의 기독교가 하느님을 부르짖으며 '신앙'해온 2천년 역사 속에서 놓친 그 부자유친을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효자효녀가 부모에 대해 지니는 간절하고 충직한 시선을 하늘로 옮겨 하느님의 인자(人子)일 수 있는 인간들이 저마다 일효(一孝)로 연결하는 신앙의 원형을 발굴해내고 실천했다. 류영모의 혁명(革命, 하느님의 뜻을 깨우쳐 찾아냄)은 여기에 있다. 예수는 살신성인의 표본 김흥호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도는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이다. 일좌(一坐)라는 것은 언제나 무릎을 굽히고 앉는 것이다. 그것을 위좌(危坐)라고도 하고 정좌(正坐)라고도 한다. 일식(一食)은 일일일식(一日一食)이다. 일언(一言)은 남녀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일인(一仁)은 언제나 걸어 다니는 것이다." 즉 류영모의 도(道)는 4가지를 꿰뚫는 '하나'다. 일좌, 일식, 일언, 일인이다. 일좌는 무릎꿇고 앉기다. 일식은 하루 한끼다. 일언은 단색(斷色, 색을 끊음)이다. 일인은 항보(恒步, 늘 걷는 것)다. 이 네 가지의 투철한 실천이 류영모의 삶의 정수다. 류영모는 십자가를 일식으로, 부활을 일언으로, 승천을 일좌로, 재림을 일인으로 봤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 기독교 교리이며, 그 교리를 현실적으로 사는 것이 일식일언 일좌일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그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무극이태극은 송나라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나오는 말이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태초에 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을 설명한 말이다. 즉 십자가를, 절대세계와 상대세계의 대전환을 이루는 '없음과 있음의 경계'로 읽은 것이다. 또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 나라를 열기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이었다고 말한다. 류영모는 또한 예수를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표현했다. 즉 태양빛을 반사해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라고 본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성만찬은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류영모에겐 일식(一食)이 성만찬을 실천하는 길이었다. 헛된 끼니를 줄이는 일은 스스로의 살과 피를 마시는 일과 같으며 하늘에 대한 예배와도 같다고 여겼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1-25 11:30:07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1)] "아바디 아바디" 깨끗과 거룩을 산 류영모, 제자 김흥호의 증언김흥호는 스승의 삶을 이렇게 증언했다. 아바디 아바디 < 그는 저녁 8시에 자서 밤 12시에 깼다. 4시간이면 수면은 충분했다. 그만큼 깊은 잠을 잤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잠 속에서 하느님 말씀도 듣고 인생의 근본 문제도 풀었다. 잠 속에서 지은 시를 읊기도 하였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때다. 선생은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정좌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푸는 것이다. 풀어지는 대로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는 YMCA에 들고 나가 그것을 몇 시간이고 풀이했다. 너무도 엉뚱한 소리라 듣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어떤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혼자 20리 길을 걸어와서 한 시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또 20리를 걸어서 집으로 갔다. YMCA 간사 가운데는 선생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동완이 간 뒤 류영모 선생은 YMCA에서 쫓겨났다. (그는) 이집 저집을 헤매고 다녔다. 나중에는 집에서 사람 오기를 기다렸다. 한 사람이라도 오면 몇 시간이고 말씀을 퍼부었다. 류 선생은 언제나 “아바디 아바디”하고 소리내서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리만이 아니다. ‘아’는 감탄사요 ‘바’는 밝은 빛이요 ‘디’는 실천이다. 인생은 하나의 감격이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삶은 감격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선생의 삶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뒤에는 하느님의 빛이 비치고 있다. 그 기쁨은 진리에서 솟아나오는 기쁨이요 그리스도로부터 터져나오는 기쁨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법열이요 참이었다. 진리의 충만이요 영광의 충만이다. 그래서 선생은 아바디라고 했다. 아바디는 단순히 진리의 충만뿐이 아니다. 그뒤에는 생명의 충만이 있고 힘의 충만이 있다. 그 힘으로 선생은 이 세상을 이기고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다. 선생은 욕심과 정욕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깨끗과 거룩을 살았다. 그것이 선생의 실천이다. 선생은 죄악을 소멸하고 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하며 살았다. 그것이 도다. 도는 억지로 하는 율법이 아니다. 성령의 부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그것은 하나의 유희다.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노는 것이다. (류영모,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다석 탄생 101주기, 서거 10주기 김흥호의 기념강연 ) 중에서 >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1-18 04:50:54
- [금요명상] 다석 류영모가 칭송한 두 사람 '맨발의 성자' 방림 이현필 편“음란과 돈을 이기는 일이 곧 세상을 이기는 일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니 자기가 선택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방림 이현필 한국이 낳은 20세기 위대한 사상가 다석 류영모가 칭송한 사람 중 한 명, 방림 이현필 선생. 이현필 선생은 온종일 맨발로 다니며 하루 한 끼로 생활하는 검소와 자기극복의 삶을 실천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맨발의 성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또, 이현필 선생은 매일 밥을 지을 때 자기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는 ‘일작운동(一勺運動)’과 누구나 십 원씩 덜 쓰고 모으는 ‘십원운동’을 벌여 불쌍한 겨레를 도왔으며, 이는 오늘날 각종 모금사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이번주 <금요명상> 다석을 아십니까에서는 이현필 선생의 치열한 삶과 실천가적 모습, 그리고 다석과의 인연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러 일화를 통해 배움과 깨달음을 얻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한편, <금요명상> ‘다석을 아십니까’는 유튜브 채널 <다석 류영모의 생각교실>에서 매주 금요일 오전에 공개됩니다.2020-11-13 11:11:3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0)] 신은 '가운데'에 있다1962년 춘설헌에서 만난 세 사람은, 그런 인연의 징검다리를 통해 함께 모이게 된 것이다. 최흥종이 류영모에게 청하여, 춘설헌의 허백련을 만나기를 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나환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방 최흥종은, 1933년 '나환자 구하기 도보행진'을 벌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의 응답을 받아낸 사람이다. 평생 빈민운동과 독립운동을 했던 고결한 삶을 살았고, 한국 최초의 나환자병원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허백련은 동양화 근대 6대가에 꼽히는 화인(畵人)으로, 작품활동과 함께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농업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섰고, 차(茶) 문화의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다. 82세의 '위대한 실천가' 최흥종, 71세의 동양화 거장 허백련, 그리고 72세의 류영모.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마음껏 무엇인가를 하여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 경지)의 경계를 넘어선 세 사람이, 춘설차를 앞에 두고 아이처럼 웃으며 나눴을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없등뫼' 자락에서 거리낄 것도 없고 덧댈 것도 없는, 홀연한 삶의 한 경지를 공유했을까. 이윽고 저마다 삶의 헛된 허물을 벗어낸 지금, 그 무등삼소(無等三笑, 차별도 구별도 없는 세 사람의 웃음)는 뒷사람의 귓전에 청아한 그리움 같이 잠깐 머무는 것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1-11 11:10:4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9)] 바보새의 눈물과 다석의 고함소리한 사람 봤구나 했더니 잘못 봤는가 그러나 일기에는 씌어 있었다. "우리 언니(함석헌)는 큰 그믐이 될수록 위로 틔울 줄은 모르고 밑으로 빠져들어감으로 보이니 나는 모르겠어요, 영결(永訣, 영원한 이별)인지도. 그가 헤맬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벗이여 갔는가. 오랜 벗이여 아주 갔는가. 다시 돌아올 길 없는가. 나는 허전하구나. 한 사람 봤구나 했더니 본 처음이 잘못이던가." 1989년 함석헌은 죽음을 앞두고 이런 글을 썼다. "하느님은 시간이니 공간이니 무슨 이 따위 작용이 들어갈 데가 없는 초월한 절대의 자리지. 그런 것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말로 해줘야지. 그것을 직접 자세하게 말하기도 어렵지만, 말로는 표시가 안되는 것이니까. 그 자리를 체험해야 돼요. 큰 무슨 경계 같은 게 있나봐요. 내 안에도 영계(靈界)가 있어요. 아마 나는 이 정도에서 이러다가 죽을는지 모르겠소마는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모르는 게 아닌가,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것을 반성할 수 있어요."(1989년 씨알의소리 2월호) 1982년 2월 3일 류영모 1주기에 함석헌이 참석했다. 사람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잘못 되었으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잘못이 많으나 그래도 이만큼 된 것도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라 솔직히 말할 수 있습니다." 1988년 3월 13일 서울 혜화동에 있는 도산기념회관에서 열린 류영모 추모 모임에서 3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그는 눈물을 보이며 참회의 말을 다시 했다. "무조건 잘못되었으니 용서하시길" 한때 함석헌의 제자였고, 류영모의 '마침보람'(졸업장)을 받은 제자가 된 박영호는 <씨알의 말씀>(다석 한시 16수를 풀이한 책)의 서문을 함석헌에게 부탁했다. 그 참회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한 배려였다. 함석헌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글도 읽어보고 서문도 쓰지요." 그러나 서문을 쓰지 못한 채 서울대병원에 입원한다. 1989년 2월 4일 5시25분에 숨을 거뒀다. 3월 13일 생월생일이 같은 두 사람은, 하루 차이로 돌아간다(류영모는 2월 3일에 눈을 감았다). 박영호는 간결하지만 인상적으로 두 사람의 인연을 표현했다. "류영모도 함석헌도, 따지고 보면 모두 하느님의 작품이기도 하다." 류영모는, '얼'로는 예수도 나도 같은 하느님의 씨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1-04 09:40:30
- [얼나의 성자(78)] 꿈에 육체적 욕망을 느낀 류영모의 충격'죽는 날' 다음날, 강의하러온 류영모 1956년 4월 27일, 류영모는 YMCA 금요강좌를 위해 출근했다. 그 전날인 4월 26일이 죽기로 한 날이었는데, 별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이튿날 연경반 강의에 나온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선 제자 김흥호의 증언이 가장 실감난다. 김흥호는 한동안 병을 앓았다가 오랜만에 류영모의 강의에 나갔다가 사람들로부터 곧 스승이 돌아가실 거라는 청천벽력의 얘기를 들었다. 류영모는 여러 차례 고별강연을 했다. 마지막 목요강좌라고 신문에 광고도 냈는데 그때 청중이 100여명이나 몰렸다. 김흥호는 다시 들을 수 없을 류영모의 강의들을 보존하기 위해 속기사에게 의뢰하여 강의내용을 기록하게 한다. 4월 26일 그날에 관해 김흥호는 이렇게 적었다. "돌아가신다는 그날은 선생님께서 자기 집에 오지말라고 하여 나는 초조하게 집에 있었다. 정성을 다해 가르쳐주신 선생님께서 오늘 세상을 떠나신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나는 그동안 선생님께 배운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선생님처럼 한시로 적어보았다. 다음날인 4월 27일 선생님의 장례를 치러야할 것 같아 자하문 고갯길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자하문에 이르렀을 때 선생님께서 책보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그날이 금요일이었다. YMCA모임에 나오고 계셨다. 나는 돌아가셨던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듯하여 너무도 반가웠다. 인사를 하면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라고 말씀드리자 '누가 죽어요, 밥이 죽어요'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YMCA로 걸어왔다. 청년회의 어두운 방에서 어제 내가 적은 한시를 선생님께 보였다. 선생님은 무언가 긍정해 주셨다. 무언가 4월 26일은 선생님이 죽은 날이 아니라 내가 죽은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류영모는 왜 죽는 날을 선언했고, 그날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까. 금요강연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4월 26일날 돌아간다는 말이 빗나간 뒤, 어떤 사람이 미리 안다고 하더니 왜 못 맞혔느냐고 물었을 때 류영모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함석헌의 증언). "돈을 쓸 때는 예산을 세워야 하지 않느냐. 예산을 세웠다고 꼭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남으면 남기고 모자라면 추가해서 쓰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일단 예산을 세워야 하지 않는가.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날을 떠올리며, 마지막인 것처럼 살다 죽음 선언의 의미에 대해 가장 음미할 만한 해설은, 제자 최원극에게서 나왔다.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남은 생애의 날수를 여러 번 예언하셨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도 태연자약했고, 남은 시일도 많아서 그리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망예정일이 점점 가까워지므로 제자로서 관심이 없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날 날을 영감으로 예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가정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게 중요한 일도 아니다. 다만 선생님께서는 몸은 죽지만 얼은 산다는 선생님의 믿음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선생님의 예정이 맞아도 좋고 안 맞아도 좋다. 다만 선생님께서 죽음의 순간을 바라보며 태연자약하게 나아가시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바로 이것이다. 죽음의 순간을 뚜렷이 바라보며 삶의 마지막에 임하여 몸의 모든 것을 덜어내며 오로지 얼의 나로 집중해 겉은 태연자약하고 안은 치열하고 고요하게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수행. 시시각각으로 '사망시계(死亡時計)가 돌아가는 걸 느꼈을 365일. 그의 4월 26일은 그 죽음의 한 관문을 넘는, 스스로 낸 시험이었다. 류영모는 1년 뒤에 그날을 기념하며 이렇게 말했다. "1956년 4월 26일은 내가 죽기를 기원한 날인데, 오늘이 그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내 자신의 장례를 내가 치르고 내 소상(小祥, 1년 첫 기일에 지내는 제사)을 내가 치르는 날입니다. 내 대상(2년 뒤 두번째 기일에 지내는 제사)을 내가 치르게 될지 모릅니다. 이 지구 위의 잔치에 다녀가는 것은 너와 나 다름없이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더 살자고 애쓰지를 말아야 합니다. 여기는 잠깐 잔치에 참여할 곳이지 본디 여기서 살아온 것도 아니요, 늘 여기서 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생각으로 초월하자는 것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0-28 09:29:5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7)] 류영모와 나훈아의 이구동성? 테스형과 '다석형'전쟁 유발자, 국가는 무엇인가 사람은 국가 속에서 태어나고 그 속에서 죽는다. 태어나면 좋든 싫든 국가구성원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싫다고 이 나라의 구성원 자격을 포기할 수 없다. 국가는 강제적으로 국민을 통치한다. 7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곳은 모두 국가가 지배하고 있다. 무정부였던 소말리아도 2012년 연방정부를 세웠다. 국가는 그 국가 내에서 폭력을 독점한다. 왜 국가에게 이런 권력이 주어졌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 체계화되어온 영토 공동체의 주된 지배 형식이란 점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해서 철학자 최진석(서강대 명예교수)은 이렇게 설명한다. "국가 안에서 폭력은 관리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임의대로 사용하면 국가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가진 모든 폭력성을 다 거두어서 국가가 총체적으로 관리한다. 국가가 대외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때는 군대가 나서고, 대내적으로는 경찰이 나선다, 군대와 경찰로 한 국가의 폭력은 관리되고 대외적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는 것이다. 국가가 안전과 이익을 공유하는 배타적 집단임을 감안할 때, 결국 최종적인 일은 전쟁으로 나타난다."<최진석, 국가란 무엇인가, 2019.7.2> 국가는 추상적인 말에 가깝다. 국가의 독점적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정부다. 정부는 총과 형무소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집단이다. 그들은 국가가 수행하는 폭력을 대신 행한다. 국가 구성원은 자동적이고 강제적이지만, 정부 구성원은 자동적이지도 강제적이지도 않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지배-피지배의 양상을 지닐 수밖에 없기에 위계적 질서를 지닌다. 국가는 지배하고 국민은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해야할 통치를 대신하는 '정부'는 좀 다르다. 국가가 해야할 역할을 위임받았지만, 국민에 의해 그 역할을 부여받는 형식을 지님으로써 형식적으로는 '위계질서의 반전(反轉)'이 이뤄진다. 국민이 정부를 지배하고, 정부가 국민에게 지배를 받는 형식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국가의 역할을 대행하는 정부가, 그 독점적 국가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르기가 쉽다. 국민과 정부 사이 위계질서의 양면성이 정부의 위선과 국민의 고통을 낳는 이유다. 국가의 문제는 정부의 오작동(권력 남용)이 허용되어 있는 원천적인 약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독점적 국가 권력을 제어하여 그 폐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오히려 그 독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사회의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닌 쪽도 있다. 누가 왜, 137만명을 죽였는가 한국전쟁은 이 땅에서 137만명을 죽였다.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낸 편람(2019년 6월 25일 국제신문 보도)에 나오는 기록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렇다. 한국군 13만8천명, 경찰 3천명이 숨졌고 북한군은 5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군 사망자는 3만8천명이고 중공군 사망자는 14만8천명이다. 남한 민간인은 24만명이 숨졌고 북한 민간인은 28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1955년 정부(내무부 통계국)가 발표한 통계연감에는 남한측 전쟁 인명피해자를 99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엔 부상자 23만명과 행방불명자 30만명, 피랍자 8만명이 포함되어 있다. 137만명을 죽인 건 누구인가. 이 땅을 137만 구의 주검으로 뒤덮은 악마는 누구인가. 요행히 죽음은 피했으나 그 이후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껏 전쟁과 분단의 생채기로 온 국민을 고통받게 한 그 주체는 누구인가. 그런 죽음의 늪으로 내몰았던 이들은 그것에 대해 무슨 책임을 졌던가. 그것이 국가였다면, 그 137만명의 원혼에게 진실로 국가가 필요한 존재였던가. 전쟁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던지게 했다. 자력이 아닌 타력(他力)으로 '국가'를 되찾은 뒤, 거의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비워진 땅에 36년간 국가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국민들이 잠깐 환호했다. 그러나 곧 지도자들은 우왕좌왕했고, 서로 다른 견해와 비전들이 좌충우돌 하며 갈등을 빚었다. 독립을 찾아준 국가들은 국제연합의 위임을 받아 이 혼란이 진정될 때까지를 기한 삼아, 신탁통치를 저울질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채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참혹한 내전(內戰)이 일어났다. 전쟁은 갈등의 양쪽을 최악으로 할퀴고는, 이념으로 나라가 쪼개진 분단을 고착화한다. 한반도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두개의 국가가 대치하는 '2국(國)'시대를 맞게 됐다. 전쟁은 많은 희생자를 낸 만큼, 그 희생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느냐에 대한 질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희생을 명령하고 그 희생을 감수하게 한, 국가는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국가 폭력은 종교 신념에 위배된다? 6·25는 국가 권력을 대행하는 정치집단이 충돌한 전쟁이었다. 그 정치집단은 국가가 지닌 독점력과 강제력을 이용해 스스로가 추구하는 어떤 이념을 위해 국민 전체를 희생의 총알받이로 내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137만명의 주검이 쌓인 이유이며, 이 땅의 분단과 이념갈등을 자아낸 원인이다. 걸출한 신학자였던 톨스토이는, 국가의 이런 폭력에 대해 주목하고 이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종교적 신념에 원천적으로 위배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정치적 리더들이 각료들의 조언에 의지하여 수백만명을 도살할 작전을 올해 안에 시작해야 하는지, 시간을 두고 시작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톨스토이는 18세기 중엽 러시아에서 생긴 기독교의 한 교파를 주목했다. '두호보르'라 불리는 이 교인들은 원시기독교의 교의를 지키며 무저항주의와 사해동포주의를 실천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만을 인정했고, 국가 법률과 병역의무를 부정했다. 러시아정부는 이들을 탄압했다. 톨스토이는 71세에 소설 '부활'을 써서 그 원고료로 두호보르 교인들을 캐나다로 이주하는 데 썼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가 군대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도둑이나 폭력범을 체포할 수 있는 경찰의 역할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만약 국가가 이런 생각에 방해가 된다면 지구상에서 국가라는 개념이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할 정도였다. 제자에게 전쟁터로 가라고 한, 류영모 그러나 전쟁을 겪으면서 류영모는 국가의 오작동을 보았지만, 국가를 지키려는 숭고한 희생정신이 타오르는 것을 함께 보았다. 기독교의 참뜻인 '원수를 사랑하라'를 지키되,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함으로써 '독점적 폭력'이 자행되는 상황을 지혜롭게 막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에 섰다. * 사실 류영모는 '국가(國家)'라는 말이 옳지 않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국가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가(家)'는 유교의 가족주의 발상에서 나온 말이다. 이 나라가 망한 것도 지나친 가족주의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이 쓰는 말인 '국가'란 말을 굳이 따라쓸 필요가 있는가. 류영모는 국가 대신 '국방(國方)'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이 말은 나라라는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영토 개념을 담고 있고 또한 사방천하(四方天下)라는 포괄적 의미도 담는다. 그는 또 민족이란 말 또한 틀렸다고 했다. 즉 민족 대신, 유기체의 개념을 담아 '민체(民體)'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뚜렷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방(國方)과 민체(民體)란 말을 제안한 까닭은 뭘까. 우리가 서있고 몸담은 곳이 분명해야, 생각과 깨달음의 방향과 좌표가 정해지며 삶과 죽음의 초석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 서완근이 입대 통지서를 받고 고민하다가 류영모에게로 달려왔다. "스승님, 인민군과 싸우기 위해 전선으로 가는 것이 옳습니까. 평화와 사랑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감옥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까." 류영모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그 은혜를 몰라서는 안돼요. 그렇게 목숨을 바친 것이 평화정신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전선에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는 일도 귀합니다." 전쟁의 경험은, 국가의 근본적인 폭력성에 대한 자각을 낳았고 그것이 국민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라는 국가의 대리행위자들을 통해 독점적 폭력을 잘못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인식도 낳았다. 또 전쟁이 발생하는 상황은 인간이 지닌 수성(獸性)인 '탐진치(貪瞋痴)'가 집단적으로 폭발한 경우라고 보기도 한다. 더 가지려는 욕망과,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성적인 약탈심리가 더해져 극악한 양상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 탄생의 근원이 탐진치라고 류영모는 말한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무슨 인격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서로 활동하고 경쟁을 하여서 나온 것이 나입니다." 그러니까 진(瞋, 공격 욕망)이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전쟁이란 무엇이던가. 남을 먹으려는 탐(貪)이 움직이고 남을 이기려는 진(瞋)이 들끓고 남을 굴복시키려는 치(痴)가 꿈틀거리면서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 수성을 제어하지 못한 인류의 집단 비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함석헌은 6·25 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은 미국과 소련이 38도 선을 그어 나라를 동강낸 데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된 것은 조선왕조가 백성을 지나치게 수탈했기 때문이다. 남과 북으로 나눠진 이 나라가 하나 되자면 자주(自主)하려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자주하는 정신이 있으려면 깊은 종교를 낳아야 한다. 깊은 종교를 낳으려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찍이 역사상 위대한 종교 없이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민족이 없다. 또 종교가 잘못 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함석헌 '새 시대의 신앙'> 분열의 극복과 전쟁의 방지를 위해서는 깊은 종교가 있어야 하고, 깊은 종교를 낳기 위해선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함석헌의 주장은 전후(戰後) 피폐한 삶과 무너진 민족적 자부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류영모는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말씀을 듣다 "전쟁을 겪으면서 말씀이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의 임자가 누구인가. 성령이 말씀의 주인공입니다. 마태복음 10장20절에서, 말하는 이는 성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맘 속에서 말하는 이는 성령입니다. 참말을 듣는 이가 많아야 나라가 바로 되어 흥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말씀을 빼면 재 한줌 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결국 사는 길은 말씀뿐입니다." 류영모를 지나간 전쟁은, 류영모를 더욱 단단하게 하였을 뿐이었다. 류영모는 죽음의 광기로 가득 찬 전쟁의 한복판에서 오직 '말씀'을 듣고 있었다. 천지가 광란일수록 그의 내면은 고요하고 순일(純一)했다. 이 땅에서 이 전쟁을 겪어내면서 이렇게 고요한 '영성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 또 있었을까. 그가 성자로 불릴 수 있는 까닭은, 호화로운 말이나 현학적인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토록 담담한 영적 기풍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전란'이란 지독한 어리석음과 고통을 떨치고 나라를 바로세우는 일은, 함석헌이 말하는 자주정신이나 깊은 종교일 수도 있지만, 각자의 생각 속에 성령의 불꽃을 더욱 지피는 것이라는 류영모의 '근본'이 우리의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0-26 10:16:03
- [이상국의 파르헤지아] 고교생 이건희가 홍사덕에게 했던 이상한 말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전 회장과 소년시절 이건희. 한국 현대사의 걸출한 기업가 한국 전후(戰後)70년은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 기적의 길이었다. 그 기적의 길에서 걸출했던 기업가 한 사람을 들라면 단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1942~2020, 10월25일 별세)이다. 한국 산업화를 주도했던 박정희 정권의 지원에 힘입어 기업보국(企業報國)을 주창하며 이 땅의 주춧돌을 놓은 대기업 창업1세대가 가고, 그 '미션'을 이어받은 사람 중의 하나인 이 회장은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바꿔놓은 기업 리더십의 사표(師表)였다. 그는 경영의 문무(文武)를 선친(이병철)과 장인(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 선친은 그에게 '무(武, 실행력)'의 스승이었다. "부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해 일을 직접 해보라고 주문했다.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현장에서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했다. 경영이 이론이 아닌 실천이며 감(感)이란 것을 거기서 깨달았다." 문(文, 지혜·철학·비전)은 장인의 도움을 받았다. "그분은 기업경영과 정치, 경제, 법률, 행정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무엇이 진정한 극일(克日)이 무엇인가. 그 질문의 답을 보여준 사람은 이건희회장이다. 홍사덕 전 의원(지난 6월 별세)은 1950년대 그와 서울사대부고 동창이었다. 그는 당시의 기억 한 자락을 꺼낸 적이 있다. 청소년 이건희는 홍사덕에게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일본어를 배워두라고 말했다. 홍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느냐고 묻자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시 소년은 과묵했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상한 말을 가끔 했다. 이를테면,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이다" "미국에서 차관을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질 수 있다"는 따위의 '초(超)고교'스러운 말이었다. 일본어를 배우라고 말하던 그 소년은 결국 2006년 글로벌TV시장에서 최강 일본 소니를 제치고 삼성을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당시 일본의 잘 나가던 기업들과 지금의 삼성을 비교해보라. 일본을 이기는 건 구호가 아니고, 저 투철한 '준비'와 승부의식과 실천에서 나온다는 걸 그는 평생의 길로 보여준 셈이다. 이건희 회장을 보는 시선은 우리 사회에서 다면적인 게 사실이다. 관점이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가 경영한 기업이 지닌 본질적 빛과 그늘일 수도 있다. 이 땅의 대기업들은 탄생 환경이 독재적 권력의 산업화 의지에서 형성되었던 것인 만큼 정치적 특혜를 누린 원죄를 부인할 수 없는 데다, 그렇게 이룬 기업 기반을 물려받은 사람에 대한 부드럽지 않은 관점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한 기업가가 그의 역량과 비전과 소신으로 삼성이란 국가 대표의 기업을 환골탈태시킨 '성과'와 가치는 분명히 인정받아야 한다. 초일류와 신경영의 삼성신화 창조자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오른 그는 취임 일성으로 "도전적인 경영으로 90년대까지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밝힌다. 얼핏 들으면 상투적인 수사(修辭)로 들렸을 이 말은 한국의 기업들을 혁신의 궤도에 올리는 선언이었다. 낯설게 들렸던 '초일류'는 이후 지금까지 기업의 화두가 됐다. 그의 초일류 도약의 핵심은 당시 이병철 회장과 삼성 내부의 신중론을 무릅쓰고 도전한 '반도체'다. 그는 1974년 사재를 출연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다. 오일쇼크로 불확실성이 커져가는 가운데, 첨단산업에 대담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신념에서였다. 14년 만인 1988년 반도체사업은 흑자로 돌아섰고, 삼성전자 연매출은 최초로 3조원을 넘었다. 회장 취임 1년 만에 보여준 성과로, 반도체는 '이건희사업'으로 불리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2020년 2분기 기준으로 세계 D램시장의 42.1%, 낸드시장의 33.8%를 점유해 1위다. 두쪽 다 2위와의 격차가 10% 포인트 이상이다. 그의 경영적 선택이 세계적 주목을 받은 것은 1993년이었다. 미국의 어느 가전매장에서 삼성전자 제품이 구석진 자리에 놓인 것을 보고, 그는 이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충격타를 날리기로 했다.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삼성 경영진들이 모였다. 이날 쏟아진 말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가 주목했다. "뛸 사람은 뛰어라.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 6개월 밤을 새워 일하다가 6개월 놀아도 좋다.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삼성은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생산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다.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집단이다. 과장에서 부장까지는 5시에 모두 사무실을 나가세요. 이건 명령이오." 폭풍 같은 이 말들로 구성된 '신경영' 선언은 한국 사회 전체에 충격을 던진다. 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제가 시행됐다. "불량 삼성폰은 모두 불 태우시오." 회장의 이 단호한 명령에 수억원어치의 휴대폰을 쌓아놓고 불을 붙인 '애니콜 화형식'이 벌어졌다. 창업주가 이뤄놓은 기업기반을 탈바꿈하는 그의 결단은 삼성을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끌어올리는 전기(轉機)를 만들었다. 이후 삼성이 내외 여건에 따른 여러 가지 위기를 겪으면서도 급성장을 이어온 것은 '이건희 정신'이 중대한 기폭제가 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의 복합위기 타개 과제 남기고 그가 일으킨 경영혁신의 핵심은 '품질경영'이었다. 제품경쟁력을 강조한 그는 스마트폰과 가전, TV 등에서도 삼성을 글로벌 1위로 끌어올린다. 2009년 삼성 지펠냉장고 폭발사고와 2016년 갤럭시노트7 폭발사고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이건희의 부재'를 떠올렸다. 이후 6년여 '와병(臥病)의 부재' 기간은 이재용 부회장에겐 혁신경영 역량을 검증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 시대의 혁신가'와 결별한 삼성이 향후 선대의 품질경영을 어떻게 고도화하고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 나갈지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이건희 회장은 '위기경영'이란 말을 자주 썼다. 이 말은 위기가 닥쳤을 때 임기응변의 경영을 어떻게 하느냐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위기를 예측하고 그 시나리오에 따라 경영의 유연하고 신속한 결정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시장변화가 격심할수록 이런 경영방식은 유효했다. 위기에 강한 삼성 체질을 만들어낸 셈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에는 이런 바탕이 있었다. 삼성은 지금도 내외적으로 복합위기를 맞고 있다. 기업 내부의 모순(기업지배 구조와 그룹 승계문제)이 부른 결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순의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는 것이 삼성에는 중대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한편 이 회장의 흑역사로 꼽히는 사업은 삼성자동차일 것이다. 취임 초기인 1987년 비서실에 자동차사업 진출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기아차 인수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협력을 맺고 1995년 삼성자동차를 설립한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환경과 비효율적 투자구조로 허우적거리다가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가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던 건 미국 유학시절의 꿈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당시 그는 자동차에 빠져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고, 직접 자동차를 분해하며 내부 구조를 스스로 연구했다. 그는 수많은 희귀 외제자동차를 소장하는 수집광이었다. 그의 경영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그의 어린 시절 야심과 끼를 실현하는 끝없는 도전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상국 논설실장2020-10-26 08:32:23
- [광화문갤러리] 초일류 삼성의 두뇌 이건희 회장, 그 찬란했던 삶1987년 회장 취임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러한 남다른 사물에 대한 관심과 집중력은 결국 반도체 산업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미국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나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이전을 받아오기 위해 직접 나서며 한국 반도체의 신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1993년 삼성서울병원 건설 현장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2020-10-25 12:29:5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6)] 류영모 집에 인민군이 총을 겨눴다총부리를 막아 선, 아버지 류영모 밤마다 몰래 라디오 단파방송으로 유엔군 방송을 들었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서울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몰래 환호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을 수복하고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경인가도로 진격하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자, 류자상은 죽을 좀 끓여달라고 했다. 어머니 김효정은 미음을 끓였고, 그는 기운을 차렸다. 9·28 서울수복 직전이었다. 류영모 집의 앞뜰 감나무에는 감이 붉은 노을색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기력을 얻은 류자상이, 감이 먹고 싶어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고 있을 때였다. 북한군 세 명이 다가와 류자상을 보고 소리쳤다. "동무, 양식을 좀 내놓으시오." 류자상은 기겁을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북한군은 말했다. "양식이 없어서 그러니 좀 꿔주시오." 류자상은 쭈뼛한 기분을 느끼며 감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보리쌀을 퍼서 가져다 줬다. 군인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아마도 정상보급이 끊긴지라 약탈 같은 구걸에 나선 것 같았다.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듯 영수증을 써주면서 다음에 올 때 꼭 갚아주겠다고 했다. 그들이 떠나가자, 저승사자를 돌려보낸 듯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이튿날 새벽에 북한군 장교 복장을 한 사람이 권총을 뽑아들고 대문 안으로 들이닥쳤다. "다 알고 왔으니 악질 반동경찰은 나와!" 그가 소리쳤다. 잠깐 공포의 침묵이 흘렀다. 류자상이 겁을 먹은 채 마당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는 경찰이 아니오!" "거짓말 말라우, 이 새끼. 밖으로 나갓!" 그러면서 장교는 권총을 그의 가슴에 겨눴다. 류자상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교는 그가 버티자 반격하려는 줄 알고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들은 퇴각 준비를 막 끝낸 참이었는데, 어제 보리쌀을 얻어온 군인들에게서 경찰을 봤다는 얘기를 듣고 떠나기 전에 즉결처분하려고 장교가 달려온 것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멈춰서 있는 류자상. 이제 막 사격을 하려는 인민군 장교. 그때 수염이 날리는 깡마른 노인 하나가 비호같이 뛰어들었다. 아버지 류영모였다. 자신을 쏘라는 듯 아들 앞을 가로막았다. 장교는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 류영모가 말했다. "자상아, 나가자면 나가면 되지. 자, 같이 나가자." 주춤거리는 채로 부자(父子)가 함께 엉켜 대문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북한 병사 두 명이 장총을 들고 안으로 겨누고 있었다. 여차하면 지원사격을 할 요량이었던 것 같았다. 장교는 권총을 내리고 류자상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세검정초등학교 교사요.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소." "마을에 경찰이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소. 난 당신인 줄 알았소. 미안하오." 그들이 물러갔다. 아버지의 용감한 행동 때문에 목숨을 건진 류자상은 눈물을 흘렸다. "그때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난 이 세상에 살아있지도 못할 겁니다." 류영모는 이날의 일에 대해 이후에 별 말이 없었다. 전란 속에서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육신이 전부인 줄 알고 광기에 내몰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일 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삶과 죽음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 마음속의 거룩한 생각을 돋우는 일이라고 여긴 류영모의 사생관(死生觀)을 그 참혹의 아수라장 속을 헤매는 군인들이 이해할 리도 없었다. 다만 인민군들은 죽음 앞에서 차분하고 태연했던 노인의 굳센 인상만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갔을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이광수, 정인보, 윤기섭, 현상윤 등 이른바 이름이 났던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게 납치됐다. 그러나 류영모는 그 무명(無名)으로 하여 관심을 받지 않았고 강제로 끌려가는 일도 겪지 않았다. 사람들은 평생토록 '이름'을 날리고 그것을 남에게 기억시키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 전쟁통에 묶여간 것은 바로 그 '이름'이었다. 공명(功名)의 역설을 여기서도 보았던가. 장자가 말한 '성인무명(聖人無名, 천하의 큰 사람은 이름이 필요없다)'이란 말도 떠오른다. 1·4후퇴 때 부산행 열차를 타다 1950년 9월 28일.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파죽지세로 북위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선봉대는 압록강에 다다라 푸른 강물을 손으로 움켜 마셨다. 이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만주 벌판을 채웠다는 뉴스가 들어왔다. 1950년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중국공산군이 그야말로 '사람바다'의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1951년 1월 4일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되찾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남쪽으로 밀려간 날이다. 이것이 1·4후퇴다. 지난번 피란사태 때 미처 떠나지 못해 악몽을 겪었던 많은 이들이 이번엔 모두 짐을 꾸려 서울을 떠났다. 제자 최원극(崔元克)이 찾아와, 류영모에게 피란을 떠날 것을 권했다. 스승을 위해 기차편과 머무를 곳까지 주선했다. 부산에 도착한 류영모 가족은 수정동 언덕 마루에 있는 옥(玉)씨 집에 셋방을 든다. 류영모는 1955년부터 '다석일지'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 기록 속에 '1951년 6월 23일 부산 수정동 옥씨 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 나온다. 전쟁이 끝난 뒤, 그때의 일을 기억하여 정리해둔 귀한 기록이다. "70살, 60살, 50살, 30살, 20살 안팎 되는 여인들이 일곱 여덟 사람이 있었는데 단추를 맺을 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알던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89살 되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맺을 줄 알 뿐이신가. 단추를 야물게 맺으시는 솜씨다. 그러나 귀가 어두우시므로 이런 말썽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계시다가 집의 딸이 할머니께 여쭈어 본 뒤에야 '옳지 알겠다' 하면서 단추를 맺고 있다. '나도 어려서 어머니께 한번 배웠는데 이제는 잊어버린 축에 들게 되었나' 하고 솜씨를 잇는 뜻을 다시 배웠다." 단추 다는 솜씨를 보여준 어머니 김완전은 이런 일이 있은 뒤 넉달이 되지 않아 생을 마친다. 1951년 10월 10일 전쟁통에 피란지 부산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이때 화장(火葬)을 했기에 천안 풍산공원 묘지에는 아버지 류명근의 묘는 있으나 어머니의 묘는 없다. 류영모는 3·1운동 이후 아버지의 옥살이를 기억하면서, 일본 형사 앞에서 자신 대신 모든 책임을 덮어쓰고자 한 아버지의 눈빛을 기억했다. 아버지의 눈빛을 기억하던 류영모는 문득 어머니를 바라보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눈길을 늘 상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눈길을 생각하면 한없이 평화로운 감정이 들었으며 삶의 온기를 느꼈다. 피란지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그에게 어머니는 묵묵히 가정을 지켜온, 꺼지지 않던 화롯불 같은 존재였다. 부친을 여읜 뒤, 일제 말기와 해방을 함께 넘었던 어머니는 전쟁의 피란길까지만 동행한 셈이다. 류영모는 이 영별(永別)을 "혈육의 근본은 흙"이라고 덤덤하게 표현해놓았지만, 그의 일기에는 그 날을 헤아리는 기록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육신의 이별은 거기까지였다. 화장을 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서울 YMCA총무 현동완(玄東完)은, 피란지 부산에서도 바쁘게 움직였다. 곳곳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정부 지원 양곡으로 죽을 쑤어 굶주린 피란민들을 구호했다. 그는 광복동의 YMCA 회관에서 류영모의 공개강연을 여러 번 열었다. 고봉수(高鳳壽)라는 사람은, 류영모 선생 강의를 듣고 삶의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여기엔 2만2천일 기념 류영모 서울강연을 들었던 염낙준도 찾아왔다. 그러나,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이때 류영모가 들고다니던 작은 노트에 '맹자초(抄), 장자초'란 말이 보인다. 맹자와 장자를 인용해, 진리를 잃어버린 전쟁의 광기와 어리석음을 질타했던 것 같다. 그는 전쟁과 관련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1955년 강의). "공산주의 천하가 되면 먹고 사는데 많은 발전이 된다고 합니다. 밥 이상의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뜻이 있어요. 진리가 그것이고 하느님이 그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아무리 좋은 이상을 내걸어도 죽이기를 좋아하고 거짓말을 떡 먹듯이 한다면 그것은 악마의 짓입니다. 사람은 이해타산으로 싸우기를 좋아하는데, 진짜 싸울 대상은 나이지 남이 아닙니다. 세상에 예수처럼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이는 없고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겠다는 놈만 가득찼으니 우리가 다 김일성이지 무엇입니까?" 류영모는 일요일에는 현동완의 단칸방으로 출근했다. 현 총무는 그를 모시고 '일요강좌'를 열었다. 방이 하나 밖에 없는지라, 강의 시간에 그의 아내 권봉겸(權奉謙)은 밖에서 내내 서성이며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현동완의 피란지 구호사업을 높이 평가해 보사부장관 자리를 맡기려 했다. 하지만 현동완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0-21 08:23:1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5)] 이런 것이 큰손! …날 위해 왜 쓰나, 남 위해 왜 아끼나신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瞬息實存虛空心(순식실존허공심) 茶飯現在觀世音(다반현재관세음) 性焰自燒却垢肉(성염자소각구육) 禍種無妄逆福音(화종무망역복음) 류영모의 '觀太自然界(관태자연계, 태초의 자연계를 보라)' 눈 깜짝하고 숨 한번 쉴 때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 빈탕의 마음 차 마시고 밥 먹는 바로 지금이, 세상 소리를 관조하는 하늘의 눈 얼나의 불꽃은 제나를 태워 때묻은 육신을 없애건만 재앙의 씨앗은 '없음(無, 하느님)'을 알지 못하니 신의 뜻을 거스르노라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0-19 09:37:52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4)] 나는 얼나 제너레이션이다世와 代, 한 사람의 삶과 '뿌리 이음' 세대(世代, generation)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세(世, 사람의 한평생)와 대(代, 대신해서 잇는 것)를 합친 말이다. 세대는 한 사람의 삶과 그 이후를 물려받는 다른 사람의 삶의 관계를 말한다. 세와 대는 가계(家系)체계를 구성하는 핵심개념이다. 자신의 뿌리가 되는 조상을 1세(世)로 할 때, 2세, 3세로 내려와 자기까지 세어 몇세손(世孫)이라고 말하게 된다. 족보는 대개 가문의 세계(世系, 세의 계통)를 밝히는 것으로 세보(世譜)라고 부른다. 대(代)는 자신을 빼고 계산하는 상하의 관계도이다. 위로 부모는 1대이며 조부모는 2대, 증조부모는 3대가 된다. 아래로는 자식은 1대, 손자손녀는 2대, 증손자증손녀는 3대가 된다. 세(世)는 혈족의 먼 근원을 밝히는 것이며 대(代)는 자기 위의 90년과 자기 아래의 90년을 밝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한 세대는 30년으로 잡는다. 30년은 수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대 교체가 일어나는 핵심시기를 말한다. 공자는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고 말했다. 30세(歲)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하늘 아래 이윽고 똑바로 서는 나이라고 본 것이다. 30세는 자식의 생산(生産)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때로 보기에, 세대가 바뀌는 삶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30세는 또한 육체적인 성장과 부모의 보육(保育) 행위가 완전히 끝나는 때이며, 또다른 세대를 보육하는 일을 경험하는 때라고 볼 수 있다. 몸의 성장이 멈추면서, 인간은 영(靈)의 성장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성장기'를 맞이한다. 영적인 성장은 인식의 성장이며 성찰의 진전을 낳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생각'이 고도화하면서 자신의 생명이 종료되는 죽음을 살피게 되는 때이다. 60세는 하느님 말씀 듣는 귀가 제대로 되는 때 류영모의 30세는 1919년 3·1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맞는다. 만세운동 거사 자금 6000원을 맡았던 류영모를 대신해 부친 류명근이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105일간 옥살이를 했다. 31세 때인 1921년 류영모는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한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의 사상을 기독교의 '비정통 신앙'으로 스스로 규정하며 자기 중심을 세웠다. 제자 함석헌을 만난 시기이기도 하다. 류영모의 60세는 그 이후 30년간의 영적 성장을 정리하는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40대 때 집중적으로 겪은 주변의 죽음들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깨달아가기 시작했으며 북한산(은평면 구기리) 칩거로 주체적인 삶의 방식을 마련했다. YMCA 연경반 강의와 활발한 성서조선 기고 활동, 광주 동광원의 정신적 지도 활동 등으로 영적인 역량을 세상에 발휘해왔던 시기들을 지나, 주체적인 사유를 펼치는 '한 시대의 스승'으로 자리매김 했던 때이다.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갖춰가는 때이기도 했다. 1955년(65세)에 1년 뒤 죽음을 예고한 '사망예정일'을 선포하기도 한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다석일지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공자는 육십에 이순(耳順)이라고 하였다. 60살이 되면 영원한 존재의 소리를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사람은 짐승처럼 몸을 바치자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바치자는 것이다. 하느님은 고요히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印)치듯(도장을 찍는 듯이) 교훈하신다. 존재의 소리가 들려온다. 하느님의 말씀을 막을 길이 없다. 생각할 때, 기도할 때, 잠잘 때 꿈속에서도 말씀하신다. 존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존재의 소리가 나를 멸망에서 영생으로 구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공상이 아니다. 진실이다. 하늘에 비가 차도 그릇에 따라 받은 물이 다르듯이 사람은 마음의 진도에 따라서 존재의 소리를 듣는 내용이 다를지도 모른다"(류영모 '다석어록'). 류영모는, 공자의 이립(而立)과 이순(耳順)을 신학적으로 읽어냈다. 30세는 믿음의 뜻을 세워 하느님 앞에 주체적으로 서기 시작한 때를 가리키며, 60세는 마침내 하늘을 향한 귀가 열려 존재의 소리를 듣는 때라고 본다. 1950년 3월 13일이 그의 60세(우리 나이로 61세) 환갑일이었다. 류영모는 환갑잔치를 벌이는 일을 불편해 했다. 음식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것은 죽은 이를 대접하는 방식이지 산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류영모가 나이를 기념하는 것에 대해 손사래를 친, 보다 근본적인 까닭은 그것이 육신에 대한 경배이기 때문이었다. 60년을 살아낸 몸뚱이의 생존을 과연 기념해야 할 일인가. 그는 인간의 뿌리를 찾는, 유교적인 세대 관념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류영모에게 '세(世)'는 오직 그 뿌리인 하느님이며, '대(代)'를 잇는 것은 혈육을 통해서가 아니고 정신의 계승과 영성의 공유를 통해서라고 생각했다. 류영모는 '하느님 세대'였고 오직 '얼나 제너레이션'이었다. 옛날 참사람은 사는 걸 기뻐하지도 죽는 걸 싫어하지도 않았네 세상에 난 것을 좋아하지도 세상을 뜨는 걸 거부하지도 않았네 허허롭게 떠나고 허허롭게 올 따름이네 그 태어난 것을 잊지도 않지만 그 죽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네 목숨 얻을 때 기꺼이 받고 그걸 잃을 때 기꺼이 돌려주나니 이를 가리켜, 마음이 진리를 내치지 않고 사람이 하늘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고 하네 진선미를 줬건만, 탐진치를 찾는 육신 육신은 짐승일 뿐이다. 류영모는 '민신불인(民身不仁, 사람들의 몸은 하느님과 상관없다)'이란 5언절구 한시를 남겼다. 鼻突擊眼窓(비돌격안창) 明眸釀暗洟(명모양암이) 企待眞善美(기대진선미) 副産貪瞋痴(부산탐진치) 코는 솟았으나 눈망울을 가렸고 밝은 눈동자는 어두운 눈물을 빚네 뜻하고 기다린 건 바름-좋음-고움인데 곁다리로 나온 건 식탐-분노-색욕이네 불인(不仁)이란 말은 노자 도덕경 5장에 등장한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생성화육(生成化肉)하는데, 어느 대상을 편애하여 더 어진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고 차가운 자연의 법칙에 맡길 뿐이라는 말이다. 불인(不仁)은 '어질지 않음'이지만 천하의 대의(大義)를 위해선 견지해야 할 원칙이다. 그런 것처럼, 인간의 육신 또한 우뚝한 코와 아름다운 눈동자를 주었으나, 그것이 반드시 어질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코는 제 욕심과 자존심을 세워 제대로 봐야할 일을 못보도록 가리고, 눈은 부질없는 탐욕에 헛된 눈물을 만들어낸다. 인간육신이 어질지 못한 것은, 하늘이 공평하지 못함이 아니라 하늘이 성령의 진선미와 육신의 탐진치를 그 생각 속에 모두 부여하고 인간에게 그 선택을 맡겼기 때문이다. 눈과 코를 자랑할 일인가, 아니면 그 눈과 코가 짐승을 벗는 어진 승화(昇華)를 추구할 일인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0-14 09:32:07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3)] 십자가는 무엇인가# 예수 그 자신을 위한 기도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뚜렷하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살팽이에게 늘삶을 주게 하시려고 거느리는 지팽이를 저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늘삶은 곧 오직 하나이신 참한웃님과 그의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누리에서 뚜렷하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맨첨부터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뚜렷함으로써 이제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뚜렷하게 하옵소서. 기독교 사상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天父) 사상'이라고, 류영모는 생각했다. 예수를 스승으로 받든 까닭은, 그가 하느님 아버지에게 목숨까지 바치며 효도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비유한 일은 동서양 종교사상에 드물지 않으나, 그 하느님 아버지를 일상 속에서 육친의 아버지를 부르듯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예수가 처음이 아닐까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간절히 부르는 이 모습만으로도, 그는 인류에 큰 공헌을 했다고 류영모는 말했다. 지상에 육신을 낳은 육친(肉親)이 있다면, 하늘에는 성령을 낳은 '영친(靈親)'이 있다. 그는 염천호부(念天呼父, 하느님을 생각하고 아버지를 부르는 일) 하는 것이 참믿음이요 참효도라고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부른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부르는 내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는 내 마음속에 있다. 생각은 내가 하지만 나만이 하는 게 아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도 생각하고 계신다. 그렇게 하여서 나도 있다"(류영모 '다석어록). 예수는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했다. 때는 무슨 때인가. 바로 예수 자신이 죽을 때를 말한다. 류영모는 이를 시자명야(時者命也, 시간을 타고난 인간은 죽음의 천명을 받는다)라고 했다. 그 천명(天命)은 바로 '죽을 때가 이르렀다'는 명령이다. "예수는 죽음을 앞에 놓고 나는 죽음을 위해 왔다고 했다. 죽으러 왔다. 예수는 죽음을 깨어남(覺)으로 본 듯하다. 나무가 불이 되는 것이 죽음이다. 죽을 때 죽어야 하고 죽을 터에서 죽어야 하고 죽을 람(이유)에 죽어야 한다. 새가 알맞은 때에 알을 까듯이 지금이 죽을 적시(適時)라고 생각했다"(류영모 '다석어록). 그는 '영광'을 '뚜렷하게'로 옮겼다. 아버지가 아들을 뚜렷하게 하는 것은 성령을 주는 것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몸의 생명보다 값진 얼의 생명이 뚜렷해지는 장면이다. 살팽이는 '이리저리 도는 살몸뚱이'를 말한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 누리 가운데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 것이었는데 내게 맡기셨으며 저희는 아버지 말씀을 지니었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누리를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이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뚜렷함을 받았나이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누리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그득히 가지게 하려 함이나이다. 내가 아버지 말씀을 저희께 주었사오매 누리가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누리에 붙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누리에 붙지 아니한 탓이니이다. 류영모는 맹자에 나오는 '우기덕야(友其德也)'란 말을 강의에 인용하곤 했다. '벗이란, 벗이 지닌 참마음(성령)을 벗하는 것'이란 이 의미는, 동지(同志)나 지기(知己)가 가지고 있는 말뜻과 같다고 했다. 기독교 사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이 보낸 성령인 얼나로 사귄다는 뜻이다. 성령은 한 생명인지라 사람과 사람을 참으로 통하게 한다. 성령이 아니면 참으로 통할 수 없다. '내가 누리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그득히 가지게 하려 함이나이다'란 예수의 말이 바로 그, '우기덕야'의 마음이다. 예수는 죽음을 '기쁨'이라고 말했다. 고통 속의 죽음이 왜 기쁨이 되는가. 류영모는 임종에 다다라 일초도 더 늘일 수 없는 게 생명이며 그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몸으로는 누구나가 사형수이며 예수만이 십자가 사형수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형선고가 내려져 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잡념과 욕망과 교만이 찾아온다. 예수의 죽음은, 죽음이 삶을 삼킨 게 아니라, 삶이 죽음을 삼킬 수 있었기에 얼삶의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섬김에 있다. 사람 본연의 모습은 섬김에 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참으로 하느님을 받들고 사람을 섬김에 으뜸가는 목숨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느님과 인류를 섬기는 것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은 이가 예수 그리스도다."(류영모 '다석어록') 예수가 제자들에게 드린 기도는, 제자들에게 '말씀의 이유(離乳)'를 시키는 절차라고 볼 수 있다. 믿음의 무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Counselor)라고 한다. 이 말씀의 젖떼기야 말로 보혜사 예수가 제자들을 성령으로 직접 나아가게 하는 사랑의 진면목이었다. #모두(우리)를 위한 기도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누리에서 데려가시기를 바람이 아니요 오직 못된 데 빠지지 않게 돌보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누리에 붙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누리에 붙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참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말씀은 참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누리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보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참으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로 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누리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뚜렷함을 내가 저희께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는 모든 이들이 참(진리)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을 기도하고 있다. 십자가 보혈로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낸 참인 '성령'으로 하느님의 부림을 스스로 받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겨우 초발심(初發心)의 경계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그의 죽음이 깊은 영감(靈感)이 되어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죽는 것에 대해 돌이켜 보도록 하라는 얘기다. 하느님과 예수가 하나가 된 것 같이, 많은 이들에게도 '하나'가 될 그런 기회를 주도록 하라는 기도다. '아버지께서 나를 누리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보냈고'라는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하느님이 성령으로 예수를 이 상대세계 세상에 보낸 것처럼, 나 또한 절대세계로 가는 존재로 많은 사람들을 성령으로 상대세계 세상에 보낸다는 기원을 담은 것이다. 이 기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은혜와 축복의 말들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려함이니이다'로 이 기도를 맺고 있다. 류영모는 이런 시를 읊었다. 父爾絶大中 不肖微小子 存存唯一在 孜孜代多仔 (부이절대중 불초미소자 존존유일재 자자대다자) "아버지 당신은 절대세계 님입니다 저는 못나고 미약한 어린 아들입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저마다 오로지 '하나'로만 있는 것이옵고 아들(子)과 아버지(父)는 저마다 수많은 예수(人子, 하느님의 아들)를 대신할 것입니다 孜孜代多仔(자자대다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예수의 길을 따를 것이라는 류영모의 기도다. 자(子)와 부(父)를 합성한 글자(부지런할 자(孜), 보통의 부자관계)와, 인(人)과 자(子)를 합성한 글자(새끼 자(仔), 人子는 예수다)를 활용해, 수많은 '육친의 아들'이 결국 '하느님 영친(靈親)의 아들' 예수를 따를 것이라고 기도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0-12 10:35:3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2)] 육체를 믿는 것은 기독교엔 없다기도와 찬송가와 예배 의식이 종교가 아니다 祈禱陪敦元氣息(기도배돈원기식) 讚美伴奏健脈搏(찬미반주건맥박) 嘗義極致日正食(상의극치일정식) 禘誠克明夜歸託(체성극명야귀탁) 힘차게 숨 잘 쉬는 것이 기도를 독실하게 지키는 것이며 맥박이 잘 뛰는 것이 찬송가 잘 부르는 것이며 날마다 밥을 잘 먹는 것이 가을 예배(嘗) 올리는 것이며 밤에 모든 걸 맡기는 것이 낮을 이기는 5년 예배(禘)다 (*3행에 나오는 상(嘗)과 4행의 체(禘)는 '중용(中庸)' 19장에 나오는 말이다. '체상지의(禘嘗之義, 하늘에 지내는 제사 체와 상의 뜻)에 밝으면 나라 다스리는 일은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는 구절이다. 禘(체)는 5년마다 종묘에 지내는 여름제사이고 嘗(상)은 가을제사이다. 논어 '팔일(八佾)'편에도 '체'가 등장한다.) 이 시엔 날렵한 풍자가 숨어있다. 서구 기독교가 교리와 교회의식에 의존하고 그 종교적 일상에 매몰되어 그것이 종교행위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기도는 마음이 하는 것이며, 찬송도 마음이 하는 것이며, 예배도 마음이 드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 생각의 불꽃에 닿아야 그것이 하느님에게 보내는 것이요 하느님이 받는 것이요 하느님에 닿는 것이다. 신앙은 삶 전부에서 깊이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며, 우러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에서 꾸준히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류영모는, 2천년 기독교 역사가 '하느님과 통한 보증수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생각 속에 깃든 오롯한 성령만이 하느님에 닿는 티켓이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이, 기독교에 대한 평생의 열광이었으며 또한 평생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엄격하고 때로는 고독했던 '참 교리(敎理)'의 길이 아니었을까. 그대는 이런 신앙을 가졌는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0-07 10:03:30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1)]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다태양을 우러르면 밝다. 사람 속에 천지가 있으니 하나이다. 하나가 끝나도 끝난 건 없다.하나는 그대로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란 말을 주목하라. "사람 속에 하늘과 땅이 있으니 하나다." 류영모는 이 말에서 '예수'를 느꼈을 것이다. 성령이 천지인으로 분리된 셋이 아니라, 천지인에게 공유된 '하나'라는 사실을 이렇게 명쾌하게 밝힌 글이 있었던가. 천부경은 '하나'가 어떻게 확장되느냐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상논서이다. 하나가 만상을 만들어내면서도 어떻게 '하나'를 유지하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하느님이며 성령이며 얼나이다. 그것은 모두 하나이며 사라지는 법이 없으며 생겨나는 법도 없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10-05 09:35:3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0)] 없음의 신, 죽음의 맛反(반)육신주의 육신에 대한 철저한 태도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혼동하여 자체 모순에 빠지는 혼동(混同)을 극복하는 이론적 명쾌함을 만들어낸다. 신은 절대세계에 존재하며, 육신은 신과 상관이 없다. 물론, 상대세계를 창조한 신이지만, 생태계를 신의 권능으로 간섭하여 육신의 조건이나 규칙을 바꾸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흔들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와 다석사상은 서로 공명(共鳴)하며 신학의 경지를 고차(高次)로 들어올린다. 다시 살펴보자. 내 몸이란 무엇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혈기(血氣)가 만나서 생명체를 이뤘다. 급속한 세포분열로 자라서 열달 만에 모체(母體) 속에서 3㎏쯤 되는 무게의 살덩이가 나온다. 그게 '나'였다. 부모는 자식을 얻었다고 기뻐한다. 나는 무엇인가. 몸뚱이였다. 몸뚱이의 삶이 시작됐다. 몸과 내가 오로지 같은 것으로 인식되는 몸나였다. 싯다르타 태자는 카비라 성문 밖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허리 굽은 노인과 고통받는 병자와 죽은 송장을 보았다. 태자는 처음엔 이들의 상황이 특별한 불행이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그것이 '나'임을 알아차렸다. 태어난(生) 이상 노(老)와 병(病)과 사(死)는 불가피하구나. 생로병사를 겪는 건 대체 무엇인가. 나의 몸이었다. 석가는 병(病)을 고칠 수 있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자 박카리(발가리)가 중병에 걸렸다. 수행을 하지 못하고 외진 곳 옹기 굽는 곳에 누워 간병을 받고 있었다. 부처가 찾아가 병세에 대해 물었다. 좀 어떤가. 밥은 먹을 수 있는가. 불편이 많지 않은가. 견딜 수는 있겠는가. 고통은 좀 덜해 가는가. 박카리는 대답했다. "부처님, 고통은 심하고 입맛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병은 더 심해질 뿐입니다. " 부처 또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병고를 덜어줄 수 없었다. 석가는, 사람의 생로병사를 고치거나 바꾸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지만 그런 일을 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몸은 생로병사로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살덩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육신 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믿으라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너희 죄로 죽으리라' 하였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인 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로 죽으리라." (요한 8:23~24) 성경에서 예수는 분명히, 자신이 누구임을 밝혔다. '아래'는 지상(地上)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혈기가 만들어낸 '육체 생산 방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하늘 아래서 났다는 보편적인 말이 아니라, 인간의 다리 아래서 낳았다는 뜻이다. '너희의 몸'은 상대세계(이 세상)에 속하는 존재이며, 나(예수)는 절대세계에 속한다고 밝혔다. 내가 보여준 '그(절대세계의 신)'를 믿지 않으면, 너희는 '몸'의 한계에 갇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언명한 것이다. 류영모는 석가가 제기한 몸과 생로병사의 굴레, 그 굴레를 이탈하는 구도(求道)의 의미가, 예수의 '육신 부정(否定)과 같은 것임을 알아챘다. 문제는 '몸'이었다. 몸으로만 살려고 하는, 그리고 몸의 안녕에 생의 전부를 거는 인간들에게 몸과 함께 부여된 중요한 것을 일깨우는 석가와 예수의 같은 노력에 주목했다. 인간에게 몸과 함께 부여된 중요한 것, 예수의 참된 본질이기도 한 것. 그것은 '성령'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디폴트'로 내장된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이것을 얼(靈)의 나, 즉 얼나라고 했다. 신이 세상과 인간을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했지만, 신과 인간은 서로 전혀 접속할 수 없는 절대세계와 상대세계로 이격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신을 만날 수 있는가. 노자는 자연 생태계에 작동하고 있는 '신의 숨결'을 벤치마킹하라고 했고, 공자는 신이 사물에 존재하는 방식인 중용(中庸)의 바른 뜻을 배우기 위해 성심성의의 예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가는 지금 현세의 육신으로 이뤄진 '나'를 벗고, 영속하는 '나'의 본질을 찾으라고 했고, 예수는 인간의 육신의 형상을 지녔으나 그 진상은 오직 신의 뜻인 성령으로 이뤄진 스스로의 '기적'을 믿고 그 속에 들어있는 신의 의지를 따르라고 했다. 저마다 다른 듯하지만, 그 모든 것에는 '신의 뜻'이 인간에게 접속하여 신의 본질을 일깨우는 '얼나'가 숨어있다. 이렇게 생각을 가다듬은 류영모에게, 석가는 핵심적인 통찰을 주는 스승이었을 것이다. 왜 태어났는가, '죽음의 맛'을 보기 위해서다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신(神)을 찾는다, 죽음 이후에 있을 '모를 일'에 관하여 무엇인가 보험(保險)이라도 드는 심정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석가는 가섭(카샤파)에게 이런 얘기를 해준다. 석가가 설산선인(雪山仙人)으로 구도할 때, 제석천이 나타났다. 그는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여덟 글자를 읊으며 지나갔다. "모든 행위가 영원한 게 없으니 이것이 태어나 죽는 법이로다." 이 게송을 들은 설산선인이 너무나 감동하여 혹시 나머지 법문이 있으면 더 듣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제석천은 지금 몹시 시장하니 그대 몸을 내게 먹이로 달라고 말한다. 설산선인은 '곧 죽을 육신을 아끼겠습니까. 법문을 주시면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석천은 나머지를 읊어준다. '생멸멸기 적멸위락(生滅滅己 寂滅爲樂)' "인간이 태어나 죽는 것은, 제 몸이 죽어보는 경험을 하기 위함이라. 죽어 고요해지니 그것이 즐거움이로다." 설산선인은 이 사구게(四句偈)를 받아 돌벽에 써놓고,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던졌다. 제석천은 설산선인을 공중에서 받아 땅 위에 앉혀놓으며 말했다. "참다운 보살입니다. 도를 성취할 때 저도 구제하여 주소서." 대승열반경에 나오는 이 스토리는, 석가가 깨달은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죽음의 맛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다. 태어나야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죽음의 맛을 보는가. 바로, 애지중지하던 육신을 벗어나는 그 순간에 '신'과 합일하는 최고의 랑데부를 하기 위해서다. 류영모는 이런 점에 관해 강렬한 어록을 남겨놓았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허공이 된다. 허공이 열반(니르바나, Nirvana)이다. 니르바나는 없이 계신다. 왜 죽기를 싫어하는가. 우리는 죽음 맛을 한번 보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죽음이란 참으로 없다. 하늘에도 땅에도 죽음이란 없는 것인데 사람은 죽음의 노예가 돼 있다." 그러면서 몸뚱이를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 몸뚱이는 멸망한다. 멸해야 하는 것이니까 멸하는 것이다. 회개란 쉽게 말하면 몸뚱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몸은 죽더라도 얼은 죽지 않는다는 게 회개다. 나는 몸뚱이의 일은 부정한다. 모든 것을 몸뚱이를 위해 일하다가 죽어 그만두게 된다면 정말 서운한 일일 거다. 나는 이를 부정한다." 1957년 9월 17일 류영모는 스스로 우리말로 옮긴 '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이렇게 강의를 했다. "누구든지 생명을 생각하는 이나 정신을 생각하는 이는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이쯤 갔다는 것은 고귀한 재산임에 틀림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인 불성(佛性, 불교에서 말하는 영성)을 꼭 잡는 것이 반야심경이 말하는 아눗다라삼먁삼보디(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란 뜻으로 '최상의 바른 깨달음'이란 의미)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9-28 09:03:00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9)] "나는 하느님 빽이 있다" 공자가 외친 까닭하늘이 날 보냈는데 사람들이 어쩌겠는가 류영모는 20세 때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갔다. 여기서 학생을 가르치던 시당 여준(1862~1932)과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만나면서 동양학에 눈을 뜬다. 노자와 불경, 그리고 '중용'을 읽었다. 월남 이상재(1850~1927)의 뒤를 이어 서울 종로YMCA 연경반 강단에서 35년간 강의를 하면서 류영모는 기독교 신앙인들 앞에서 동양고전을 두루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유교경전 가운데서 특히 중용을 직접 우리말로 풀어 강의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왜 류영모는 중용을 그토록 귀하게 여겼는가. 중용은 유학(儒學)의 정수(精髓)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BC483~BC402, 이름은 급(伋)이라고 한다)가 공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풀어 쓴 경전이다. '다석을 아십니까' 대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2020-09-23 10:06:5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8)] 류영모는 왜 노자를 펼쳐 기독교를 강의했나아무리 써도 남는 것이 하느님이다 도덕경은 상대세계 문제의 본질을 파헤친 뒤 바로, 절대세계를 그려보인다. 그게 도덕경 제4장이다. 道冲而用之 或不盈(도충이용지 혹불영) 淵兮 似萬物之宗(연혜 사만물지종)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도(道, 진리)는 비어있어서 아무리 퍼 담아도 가득 차지는 않는다. (비어있음. 이것이 노자가 처음으로 언급한 절대세계의 모양이며, 그것이 상대세계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비어있는 도는 깊어서 만물을 낳았다. 너무나 맑아서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 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날카로운 것을 부드럽게 하고 얽힌 것을 풀고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을 뭉치게 한다(挫銳解紛 和光同塵). (이런 현상을 어디서 보았는가. 자연에서 우리가 보지 않았는가.) "도는 허공이다. 천지만물을 낳을 만큼 깊고, 있는지도 아리송할 만큼 맑은 허공이다." 이것이 노자가 한 말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허공의 아들이라 허공을 바라야 한다. 우주는 허공 안에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과 허공을 동일시했다.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노자의 하느님도 세상을 창조했다. 그러나 노자의 하느님은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개념의 '인격신(人格神)'이 아니다. 노자의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한 절대세계의 '허공'이다. 노자의 행간을 살피면, 하느님은 텅빈 골짜기로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 같다. 첫 생명은 무(無)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무(無)의 자식일 수밖에 없다. 하느님은 생명을 일일이 창조하지 않았고, 생명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자율방식 혹은 위탁방식으로 생태계가 유지되게 했다. 노자는 이렇게 형성된 생태계의 법칙이, 절대세계에서 파견보낸 '하느님의 뜻'이라는 점을 거듭 밝혔다. 인간은 그 하느님의 뜻을 받아내어 스스로의 삶에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자의 하느님은 사람같이 생긴 존재도 아니고, 초인도 아니며, 오로지 저 자연으로 드러나는 생멸과 순환의 이치 속에 들어있으며, 자연 속에 '진리'로 존재하는 것들의 원천(源泉)이라고 생각했다. 자연 속에 법칙과 진리로 존재하는 것들은, '최고의 인격(人格)'이라 할 만한 높고 깊은 도를 지니고 있다.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은 '자신'과 닮은 존재를 구상했으며, 그것이 도(道)로 드러난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노자의 신 또한 인격신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인간의 급(級)을 매겨놓았다. 가장 아래의 급은 '신'을 무시하는 사람들(侮之)이다. 그 위의 급은 겁내는 것(畏之)이다. 또 그 위의 급은 좋아하고 우러르는 사람들(親而譽之)이다. 가장 높은 급은, 그것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不知有之)이다.(도덕경 17장) 가장 오묘한 것은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의 인격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인격성과 인간의 인격성이 같아졌기에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워진 상태를 말한다. 즉 신이 가르칠 필요가 없는 인간. 신성을 이룬 '신격인(神格人)'이야말로 인격신이 강림하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 신격인이 바로 성인이다. 인간 육신을 벗지 못한 신 기독교의 하느님은 어떤가. 신에 대한 기독교의 상상력은, 고대의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상상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신화적 신은, 육체가 있으며 감정도 있으며 인간과 같은 실수와 죄도 저지르는 '인간을 닮은 신'이었다. 구약에 등장하는 신은, 그리스의 신과 비슷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후 기독교의 신은 육체를 벗어났지만, 노자의 표현처럼 아무런 실체가 없는 '빈 것'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인간을 닮은 형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기독교의 신이 형상없는 '숨은 신'이 되는 것은 예수의 시대 이후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서 창조되었으나, 그 '형상'은 육체적이고 실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인격적 특질'을 본떠서 창조되었다고 본다. 하느님은 절대세계에 있고 인간은 상대세계에 있기에, 상대세계의 형상이나 경험으로 하느님을 접할 수 없다. 이런 완전한 단절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믿음'뿐이며, 믿음으로 강화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동질성'의 힘뿐이다. 이 동질성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뜻'이 바로 성령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많은 기독교도들에게 완전하게 공유되거나 동의된 것은 아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하느님의 '육체적 형상'을 이미지로 그리고 있으며, 육체적 특질로 다가오는 하느님이 인간과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대 전통의 상상을 기반으로 한 '육체적 인격신'이야 말로 매우 강력하고 뿌리깊은 믿음의 바탕이며 근거가 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우주의 근본 원인이나 도덕의 근원, 미의 근원을 하느님으로 보는 인격신의 관점이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엔가 인간의 익숙한 신관(神觀)은 물질세계의 형상을 빌린 하느님을 떠올리기 쉽다. 신은, 육체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문제다 류영모는 '육신'에 대한 서구의 집착이, 기독교를 왜곡시켜 놓은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성령 잉태나 부활, 기적 같은 것들은 모두 육신으로 보여준 이적(異蹟)이다. 류영모는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육신을 받은 독자(獨子)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독생자(獨生子)임을 강조한다. 모든 기적은 성령에 있으며, 부활이나 영생 또한 성령의 문제라고 말한다. 부활은 몸이 되살아난 게 아니며 영생은 몸이 영원토록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육신은 하느님에게 소용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몸뚱이는 혈육의 짐승이다. 질척질척 지저분하게 먹고 싸기만 하는 짐승이다. 한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몸나에서 얼나로 솟날 때 비로소 사람이 회복된다. 예수가 말한 인자(人子)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회복된 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로고스적 관점이 거듭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까닭은, 신을 물질세계의 존재로 소환하려 하기 때문이다. 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려 상대세계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신일 수 없다. 신이 물질세계에서 권능을 발휘하며 무엇인가를 초자연적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믿는 모든 믿음은, 기복적(祈福的) 사유의 결과다. 약한 인간이 상상의 무엇에 의지하려는 욕망에 부응하는 지점에 등장하는 '물신(物神)'일 뿐이다. 류영모는 말한다. "하느님이 계시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사람의 마음이 하나(절대)를 그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류영모는 노자를 통해, 기독교의 신관(神觀)을 일신했다. '빈탕'(空)이 세상 창조의 원천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을 갈파했다. 노자는 빈탕의 리더십으로 세상을 깨우치려 했지만, 류영모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빈탕'의 절대세계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세웠다. 과감히 육체 중시의 기복적인 면모를 혁신하고, 몸나를 이겨 오직 얼나(성령)로 나아가는 영적 수행을 실천해 나갔다. 도덕경은, 류영모를 만남으로써, 21세기 인간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고차 인격(高次人格)을 지닌 하느님을 자율적으로 접속하는 참된 도(道)를 드러내게 됐다. 류영모가 놀라운 사상가인 건 여기에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9-21 08:35:4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8, 풀버전)] 육체와 상대세계를 벗어나라, 류영모의 '노자신학''상대적 빈곤'이 갈등을 부른다 도덕경 제3장에선 '상대적 빈곤'을 없애는, 신의 리더십을 귀띔해준다. 닦아남을 좋이지 말아서 씨알이 다투지 않게 不尙賢 使民不爭(불상현 사민부쟁) 쓸몬이 흔찮은 건 높쓰지 말아서 씨알이 훔침질을 않게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하고잡 만한 건 보이지 말아서 맘이 어지렵지 않게 하여야 不見可欲 使民心不亂(불현가욕 사민심불란) 이래서 씻어난 이의 다스림은 그 맘이 비고 그 배가 든든하고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시이성인지치 허기심 실기복) 그 뜻은 무르고 그 뼈는 세어야 弱其志 強其骨(약기지 강기골) 그 씨알이 앎이 없게 하고잡이 없게 하이금 常使民無知無欲(상사민무지무욕) 그저 아는 이도 구태여 하지 않게끔 하여야 使夫知者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함없이 하매 못 다스림이 없으리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 즉무불치) - 류영모 도덕경 제3장 한글풀이 '똑똑함'은 좋은 가치로 보이지만,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을 표현하는 상대적 잣대일 뿐이다. 똑똑한 것을 높이 치면, 서로 똑똑하다고 주장하는 분쟁이 일어나고 서로에 질시가 생겨나 사회의 안녕을 해치게 된다. 또 재화는 좋은 가치로 보이지만, 재화를 귀히 여기면 그 재화를 훔치는 도둑이 생겨나 사회의 갈등을 만들어낸다. 사회의 안녕을 해치게 되는 원인은, 백성(씨알)에게 함부로 욕망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식과 재화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노자는 상대세계에서 생겨나는 이런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이 공동체의 평화로움을 깬다는 점을 갈파했다. 그가 꿈꾼 세상은 '원시공산주의 사회'의 평화나, 혹은 동물들의 공생 및 동거와 비슷했다. 상대적인 가치를 자극하는 일은, 그 가치가 비록 좋은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불화를 낳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노자가 사회의 가치를 보는 관점을 철저히 '절대세계'의 시선으로 하는 까닭은, 상대세계의 상대적인 관점들을 충격적으로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재물은, 절대세계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상대세계에서 그것을 중히 여겨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논점이다. 아무리 써도 남는 것이 하느님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건(상대세계 인간의 마음상태) 짐승이다. 깜짝 정신을 못 차리면 내 속에 있는 하느님 아들을 내쫓고 이 죄악의 몸뚱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노자가 말한 지식과 재화는 죄악의 몸뚱이가 만들어낸 '가치'이다. 도덕경은 상대세계 문제의 본질을 파헤친 뒤 바로, 절대세계를 그려보인다. 그게 도덕경 제4장이다. 길은 골루 뚤렷해 쓰이고 아마 채우지 못할지라 道冲而用之 或不盈(도충이용지 혹불영) 깊음이여 잘몬의 마루 같구나 淵兮 似萬物之宗(연혜 사만물지종) 그 날카로움 무디고 그 얽힘 풀리고 그 빛에 타번지고 그 티끌에 한데 드니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맑음이여 아마 있을지라 湛兮 似或存(담혜 사혹존) 나는 기 누구 아들인 줄 몰라 하느님 계 먼저 그려짐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 류영모 도덕경 제4장 한글풀이 도(道, 진리)는 비어있어서 아무리 퍼 담아도 가득 차지는 않는다. 비어있음. 이것이 노자가 처음으로 언급한 절대세계의 모양이며, 그것이 상대세계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비어있는 도는 깊어서 만물을 낳았다. 너무나 맑아서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 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날카로운 것을 부드럽게 하고 얽힌 것을 풀고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을 뭉치게 한다. 이런 현상을 어디서 보았는가. 자연에서 우리가 보지 않았는가. 절대세계에서 온 '도'는 바로,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자연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들이다. 나는 그 맑은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즉 누가 낳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신에게서 나온 것이란 건 안다. "도는 허공이다. 천지만물을 낳을 만큼 깊고, 있는지도 아리송할 만큼 맑은 허공이다." 이것이 노자가 한 말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허공의 아들이라 허공을 바라야 한다. 우주는 허공 안에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과 허공을 동일시했다. 노자가 밝힌 절대세계의 원리는 이것이다. 좌예해분 화광동진(挫銳解紛 和光同塵). 날카로운 것을 부드럽게 하고 얽힌 것을 풀고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을 뭉치게 한다. 절대세계는 그러니까, 부드럽고 풀려있으며 빛은 온화하고 약한 것은 뭉쳐지는 그런 성질을 가진 세계다. 이것이 성령이다. 하느님의 뜻이 구현되는 방식이다. 노자의 하느님은 골짜기의 조물주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노자의 하느님도 세상을 창조했다. 그러나 노자의 하느님은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개념의 '인격신(人格神)'이 아니다. 노자의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한 절대세계의 '허공'이다. 허공의 형상은 어떤 측면에서도 인간을 닮지 않았다. 허공은 생명이 아니며, 그러나 '사멸한 상태'도 아니다. 하느님이 왜 세상과 만물을 창조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어떤 '좋은 의도(사랑)'에 의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노자의 행간을 살피면, 하느님은 텅빈 골짜기로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 같다. 첫 생명은 무(無)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무(無)의 자식일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은 생명을 일일이 창조하지 않았고, 생명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자율방식 혹은 위탁방식으로 생태계가 유지되게 했다. 하느님이 생태계를 창조하는 방식은, 생태계에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인간도 그 생태계 속에서 생겨났다. 첫 인간이 다른 동물에서의 진화를 통해 생겨났든, 혹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영성'을 받아낼 정신을 지닌 첫 인간이 새롭게 창조된 것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 인간의 출현에 하느님이 근거를 제공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노자는 이렇게 형성된 생태계의 법칙이, 절대세계에서 파견보낸 '하느님의 뜻'이라는 점을 거듭 밝혔다. 인간은 그 하느님의 뜻을 받아내어 스스로의 삶에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자의 하느님은 사람같이 생긴 존재도 아니고, 초인도 아니며, 오로지 저 자연으로 드러나는 생멸과 순환의 이치 속에 들어있으며, 자연 속에 '진리'로 존재하는 것들의 원천(源泉)이라고 생각했다. 자연 속에 법칙과 진리로 존재하는 것들은, '최고의 인격(人格)'이라 할 만한 높고 깊은 도를 지니고 있다.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은 '자신'과 닮은 존재를 구상했으며, 그것이 저 도(道)로 드러난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노자 또한 인격신이라 할 수 있으나,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인격신과는 상당히 다르다. 노자의 도(道)는 '인격신' 노자의 도(道)는, 인간이 지켜야할 최고 윤리이며 유일한 윤리체계이다. 인간이 지켜야할 윤리야 말로, 신이 지닌 인격성(人格性)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신의 인격성'을 발현할 수 있는 동기(動機)를 불어넣었고, 인간은 그것을 구현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신의 인격성 혹은 '인격신'을 인간 모두가 제대로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자는 그 급(級)을 매겨놓았다. 가장 아래의 급은 '인격신'을 무시하는 사람들(侮之)이다. 그 위의 급은 겁내는 것(畏之)이다. 또 그 위의 급은 좋아하고 우러르는 사람들(親而譽之)이다. 가장 높은 급은, 그것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不之有之)이다.(도덕경 17장) 가장 오묘한 것은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의 인격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인격성과 인간의 인격성이 같아졌기에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워진 상태를 말한다. 즉 신이 가르칠 필요가 없는 인간. 신성을 이룬 '신격인(神格人)'이 인격신이 강림하는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노자는 보고 있다. 고대인(古代人)인 노자는, 절대세계에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허공의 하느님이 '섭리'를 통해 상대세계에 보여준 인격의 정본(正本)을 마스터한 사람을 꿈꾸었다. 그것이 그의 도(道)의 완성이었다. 도를 완성한 사람은 바로 성인(영적인 인간)이었다. 이 도(道)는, 인간이 그간 추구해온 가치와는 어떻게 다른가. 노자는 또 리얼하게 그 '수준'을 매겨준다. 이른 바 인의예지충효는 어디서 나왔는가. 하느님의 도(道)가 사라졌을 때 생겨난 것이 인의(仁義)다. 하나님의 '도'에 닿지 못한 이들이 그 대용품으로 '인의'를 강조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상대적인 가치인지라 늘 잣대가 애매하고 시비에 휘말린다. 그 다음, 인간이 숭상하는 '지혜'가 등장했을 때 그와 함께 거짓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지혜 또한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서로 거짓말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을 우린 자주 보지 않는가. 또 '효와 자애로움'이란 가치는, 가족의 불화 때문에 중요시되었고, '충성'이란 가치는 국가가 혼란하기 때문에 높여졌다. (도덕경 18장) 즉, 인간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모두 상대적이며 잠정적인 것일 뿐이다. 영원하지 않으며 확고하지도 않다. 상대적인 '가치'들은 아무리 높이 쳐주어도, 사실은 불안한 것들이다. 진짜 가치는 어디 있는가. 절대세계인 신에게 있다. 노자는 이런 생각이 뚜렷했다. 인간의 육신을 벗지 못한 신 기독교의 하느님은 어떤가. 신에 대한 기독교의 상상력은, 고대의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상상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신화적 신은, 육체가 있으며 감정도 있으며 인간과 같은 실수와 죄도 저지르는 '인간을 닮은 신'이었다. 구약에 등장하는 신은, 그리스의 신과 비슷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후 기독교의 신은 육체를 벗어났지만, 노자의 상상처럼 아무런 실체가 없는 '빈 것'이란 상상까지는 나아가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을 닮은 형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기독교의 신이 내용적으로 완전한 '숨은 신'이 되는 것은 예수의 시대 이후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본따서 창조되었으나, 그 '형상'은 육체적이고 실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인격적 특질'을 본따서 창조되었다고 본다. 하느님은 절대세계에 있고 인간은 상대세계에 있기에, 상대세계의 형상이나 경험으로 하느님을 접할 수 없다. 이런 완전한 단절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믿음' 뿐이며, 그 믿음으로 강화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동질성'의 힘 뿐이다. 이 동질성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뜻'이 바로 성령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많은 기독교도들에게 완전하게 공유되거나 동의된 것은 아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하느님의 '육체적 형상'을 이미지로 그리고 있으며, 육체적 특질로 다가오는 하느님이 인간과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대 전통의 상상을 기반으로 한 '육체적 인격신'이야 말로 매우 강력하고 뿌리깊은 믿음의 바탕이며 근거가 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우주의 근본 원인이나 도덕의 근원, 미의 근원을 하느님으로 보는 인격신의 관점이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엔가 인간의 익숙한 신관(神觀)은 물질세계의 형상을 빌린 하느님을 떠올리기 쉽다. 신은, 육체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문제다 류영모는 '육신'에 대한 서구의 집착이, 기독교를 왜곡시켜 놓은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성령 잉태나 부활, 기적 같은 것들은 모두 육신으로 보여준 이적(異蹟)이다. 류영모는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육신을 받은 독자(獨子)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독생자(獨生子)임을 강조한다. 모든 기적은 성령에 있으며, 부활이나 영생 또한 성령의 문제라고 말한다. 부활은 몸이 되살아난 게 아니며 영생은 몸이 영원토록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육신은 하느님에게 소용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몸뚱이는 혈육의 짐승이다. 질척질턱 지저분하게 먹고 싸기만 하는 짐승이다. 한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몸나에서 얼나로 솟날 때 비로소 사람이 회복된다. 예수가 말한 인자(人子)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회복된 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로고스적 관점이 거듭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까닭은, 신을 물질세계의 존재로 소환하려 하기 때문이다. 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려 상대세계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신일 수 없다. 신이 물질세계에서 권능을 발휘하며 무엇인가를 초자연적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믿는 모든 믿음은, 기복적(祈福的) 사유의 결과다. 약한 인간이 상상의 무엇에 의지하려는 욕망에 부응하는 지점에 등장하는 '물신(物神)'일 뿐이다. 류영모는 말한다. "하느님이 계시느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사람의 마음이 하나(절대)를 그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신은 약속과 이행을 통해, 인격성을 드러낸다 과학적 사유가 발달한 서구에서는 '신의 인격성'을 역사적인 약속 이행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과학신학자인 존 호트(John Haught,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1942~ )가 '과학과 신앙'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구약성서의 전통에서 하느님의 인격성은 언약의 체결과 이행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났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내용이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이며, 과학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우주가 비인격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우주의 드라마는 처음부터 인격성의 함양을 약속하고 있었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창조적인 결과를 미래에 허용함으로써 그 약속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인격적인 돌봄은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미래를 피조물에게 선사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하느님이 곧 세계의 미래다. 피조물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는 것보다 더 인격적인 돌봄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 피조물에게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심어주는 것보다 더 인격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일은 없다. 자연을 향한 약속, 그 약속을 이행하는 신실함 속에서 우리는 구약에 등장한 인격적 하느님을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노자를 통해, 기독교의 신관(神觀)을 일신했다. '빈탕'(空)이 세상 창조의 원천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을 갈파했다. 노자는 빈탕의 리더십으로 세상을 깨우치려 했지만, 류영모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빈탕'의 절대세계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세웠다. 과감히 육체 중시의 기복적인 면모를 혁신하고, 몸나를 이겨 오직 얼나(성령)로 나아가는 영적 수행을 실천해 나갔다. 도덕경은, 류영모를 만남으로써, 21세기 인간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고차 인격(高次人格)을 지닌 하느님을 자율적으로 접속하는 참된 도(道)를 드러내게 됐다. 성서 요한복음 14장 5~6절이, 노자의 묵은 책과 류영모의 깊은 사유(思惟)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께 말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나는 절대세계의 변치 않는 도(道)이며, 오직 절대세계의 가치를 이루는 진리이며, 너희가 성령으로 영원히 사는 그 생명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9-18 17:14:3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7)] 노자와 다석은, 놀라운 '없음'을 발견했다'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한 다석 노자의 '없음'이, 기독교의 하느님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임을 알아챈 사람은 다석 류영모 이전엔 세상에 없었다. 노자의 생각이 마치 기독교의 원천 교리(敎理)를 풀어놓은 것처럼 생생하고 정밀하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도 류영모였다. 류영모의 노자(老子)는, 이전에 많은 이들이 읽었던 노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다석의 노자를 읽은 이들은 '노자의 충격'을 새롭게 받았고, 그 생각을 따라온 이에겐 '새로운 노자' '참노자'가 보였다. 그리고 류영모는 기독교의 하느님을 곧 '없이 계시는 하느님'으로 정의함으로써 2000년 신앙의 구구한 '신의 존재증명론'의 모순에서 오는 회의(懷疑)를 명쾌하게 걷어냈다. '없음'과 '있음'의 통합은, 바로 노자사상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는 노자(老子)의 한자를 풀어 '늙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류영모에게 '늙은이'는 나이든 사람에 대한 조롱이나 경멸이 아니라, 탄생보다 죽음이 가까운 사람이며 하느님에 다가가는 인간에 대한 극존칭이기도 하다. 류영모는 20세 때인 1910년 오산학교 교사 시절에 '노자'를 처음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타계 11년 뒤인 1992년에 그의 강의록을 편집한 '에세이 노자'(류영모 우리말 옮김, 박영호 풀이, 무애출판사)가 나왔으니 82년 만의 결실이었다. 그 생이 노자를 품은 나날이었으며, 그 자신이 '늙은이'였다. '노자의 절대세계'를 뼛속 깊이 들이마신 영혼에, 서구신앙인 기독교가 산들바람처럼 들어왔다. 그의 눈에는, 성령을 입은 예수가 전파한 기독교가 2000년의 '종교적 생존과 번성'의 역사 속에서 본질을 놓치고 껍질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가야할 길을 깨달았다. 인간을 현혹하는 인격신(人格神)과 기복신(祈福神)을 벗어나, 예수처럼 성령으로 와 있는 하느님 그리고 텅빈 하느님을 향한 천로역정(天路歷程)을 걷기 시작했다. 제자 박영호는 이렇게 말했다. "류영모는 일생 동안 노자를 가까이 두고 읽었습니다. 그는 서울YMCA강좌에서도 '노자'를 강의했습니다. 정통 신앙인들만 모인 김교신의 성서집회에 초청되어 가서는 성경 얘기는 두고 노자를 말하여 듣는 이들이 당황하였지요. 류영모만큼 노자를 깊이 새기고 널리 알린 이는 없을 겁니다. 류영모의 노자 얘기를 들은 이는,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함석헌 김흥호에 이르기까지 몇 만 명이 넘습니다. 노자가 이 나라에 처음 들어온 고구려 이래 노자사상을 중흥하는 데 으뜸가는 이가 류영모일 것입니다."(박영호 역저 '노자, 빛으로 쓴 얼의 노래'의 머릿말 중에서) 도올 김용옥은 그의 책 '노자와 21세기'를 내면서 이렇게 썼다. "다석 류영모 선생을 만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류영모가 노자를 우리말로 옮겨가며 YMCA에서 강의했던 때는 1959년(69세)이었다. 강의 내용을 등사해서 수강생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노자를 '학문'을 한 지식인이 아니라, '구도(求道)'를 한 도인으로 이해했다. 노자는 자아를 초극한 사람이었다. 자아를 초극한 사람은 자아를 초극한 사람만이 얻는 진실을 말하고 있기에, 문헌 연구자의 수준으로 노자를 읽을 수 없다고 보았다. "도(道)는 세상을 초월한 진리를 말합니다. 도는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이 없이 언제나 주인을 섬기는 종의 마음을 가질 때 이루어집니다. 참으로 진리를 찾으려면 생명을 내걸고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도는 참나입니다." 류영모는 노자가 말한 '도(道)'를 참나로 읽었다. 그러면서, 도덕경은 이전에 없던 '성서(聖書)'의 언어들을 품게 되었다. 다석과 함께 노자1장 읽기 우선 다석이 우리말로 풀이한 '도덕경 1장'을 음미해보자. 길 옳단 길이 늘 길 아니고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이를 만한 이름이 늘 이름이 아니라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이름 없어서 하늘 땅이 비롯고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이름 있어서 잘몬의 어머니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므로 늘 하고잡 없어서 그 야므짐이 뵈고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늘 하고잡 있어서 그 돌아감이 보인다 常有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 이 둘은 한께 나와서 달리 이르니 此兩者 同出而異名(차양자 동출이이명) 한께 일러 감아-감아 또 감암이 同謂之玄 玄之又玄(동위지현 현지우현) 뭇-야므짐의 오래러라 衆妙之門(중묘지문) 류영모가 풀어놓은 우리말은 우선 아름답다. 그냥 읽어도 걸림이 별로 없다. 말은 쉬워보이지만, 뜻은 깊고 다양한 의미 갈래를 품어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노자는, 지식을 자랑하려고 한 게 아니라 세상사람에게 진실을 알려주려고 한 사람이다. 일종의 강의록이란 얘기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 노자는 왜 도(道, 길)라는 말을 먼저 꺼냈을까. 누군가, 도(道)가 무엇인지 말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도(道)를 뭐라고 말하든 그것은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따라 '도'가 아닐 수도 있다. 노자는 '진리는 불변할 것'이라는 세상의 믿음을 흔들어놓고 있다. 이 한 마디가 노자가 할 말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왜 도는 지금은 도일수 있지만 다른 때 다른 곳 다른 경우엔 아닐 수도 있는가. 인간이 불변의 진실을 '도'라고 설정해 놓았지만, 그것마저도 인간이 처한 상대세계의 가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다.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 노자는 이 말을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도'라는 명칭은 지금은 도라는 명칭이지만, 다른 때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명칭'을 거론한 이 말은, '도'가 '도' 아닐 수도 있는 경우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사례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도'가 아니라 '참'이라는 말로만 쓰일 수도 있다. 그럴 땐 '도'는 도가 아니다.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 명칭의 사유로, 노자는 문제의 지평을 펼쳐 보인다. 명칭이 없는 상태, 태초엔 그랬다. 명칭이 붙으면서, 만물을 낳았다. 명칭은 왜 생겼는가. 만물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누가 구분하는가. 인간이 구분한다. 그러므로, 명칭이 없는 상태는 인간이 없는 상태이다.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 그 명칭이 없던 상태의 묘함(妙)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늘 욕망이 없어지고, 명칭이 생겨난 상태의 이것저것(徼, 만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늘 욕망이 일어난다. 묘한 곳과 이것저것은, 같은 데서 나왔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同謂之玄, 玄之又玄(동위지현 현지우현) = 명칭이 없는 곳은 절대세계이며, 명칭이 있는 곳은 상대세계이다. 상대세계는 현(玄)이라 표현했고, 절대세계는 현지우현(玄之又玄)이라 했다. 노자사상 전체를 현학(玄學)이라 부를 만큼 '玄(현)'은 중요한 말이다. 검다, 가물가물하다, 아스라하다, 어둠 속에 보일 듯 말 듯하다. 류영모는 이 '감음(검음)'은 바로 하느님이라고 했다. 상대세계에 있는 현(玄, 감아)은 바로 '얼나'로 와있는 하느님이고, 절대세계에 있는 현지우현(玄之又玄, 감아 또 감암이)은 빈탕의 하느님 그 본좌다. 현과 현지우현의 규명이야 말로, 류영모 신학(神學)의 정수다. 衆妙之門(중묘지문) = 그는 질문자를 오래(문의 옛말)에 세웠다. 중묘의 문이다. 중(衆)은 '뭇 만물이 있는 곳'이고, 묘(妙)는 '야므짐의 텅빈 곳'이다. 이쪽을 보면 만물이 있고 저쪽을 보면 빈탕이 있다. 노자는, 이 심오한 경계로 인간을 초대한 것이다. 왜, 그는 갑자기 인간 현재의 '도(道)'가 급한 사람의 손을 이끌어, 태초의 무(無)를 보여주는가. 노자는 절대세계에서 상대세계를 관찰하는 법을 일깨워주려고 작심하고 있다. 다석 류영모가, 이 사람에게서 성령의 예수를 느낀 까닭은 여기에 있다. 상대세계에서 절대세계를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도'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세계의 문턱에서 상대세계를 들여다보면, 인간이 그토록 찾아헤매고 있는 진리의 진상이 짚인다. 관점과 시선의 이동을 활용한 '도'의 깨우침. 노자의 역발상이다. 류영모는 말한다. "마음이 더없이 크면 '없(無)'에 들어간다. 없는 것은 참나가 얼나가 되는 것이다. 없는 데 들어가면 없는 게 없다. 아무것도 않으면 일체를 가지는 것이다. 다시 없는 큰 '없'에 들어가는 것. 이것만은 우리가 할 일이다. 서양 사람들은 '없'을 모른다. '있(有)'만 가지고 제법 효과를 보지만 원대한 '없'을 모른다. 그래서 서양문명은 벽돌담 안에서 한 일이라 갑갑하기만 하다." 서양문명이 벽돌담 안에 있다는 것은 중묘지문의 경계로 나와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노자의 시선'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류영모는 노자의 중묘지문에 서서 육체의 세상과 영성의 빈탕을 읽었다. 그는 말했다. "이 몸은 참나가 아니다. 참나를 실은 수레일 뿐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9-16 09:47:22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6)] 함석헌 철학의 알짬이 된, '류영모의 참'성경 바깥에도 하느님 말씀이 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만이 말씀(로고스)으로 된 게 아니다. 개똥조차도 말씀으로 되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한얼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한얼님이었다. 그는 태초에 한얼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1~3) 예수교인의 생리는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예수만 말씀으로 되었고 우리는 딴 데서 왔다고 생각한다. 이게 겸양인지 뭔지 모르겠다. 말씀 밖에 믿을 게 없다. 믿을 건 우리 몸인데 이건 언제 죽을는지 모른다. 나는 말씀 밖에는 아무것도 안 믿는다. 기독교만 말씀이 아니다. 불교도 말씀이다. 설법이라 하는데, 법(法, 다르마)이란 진리란 말이다. 말씀을 하는 한얼님을 누가 봤는가. 한얼님께서 이 마음속에 출장을 보낸 정신을 통해서 위에서부터 말씀이 온다." 1959년 류영모는 '노자'를 우리말로 완역했다. 9년 뒤인 1968년엔 '중용'을 우리말로 풀었다. '장자'와 '논어', '맹자'와 '주역', '서경'의 번역에도 팔을 걷었다. 주렴계의 '태극도설'과 장횡거의 '서명'도 풀어냈다. 성서 요한복음의 '결별기도'를 새롭게 번역해내기도 했다. 그는 왜 평생에 걸쳐 다양한 동서양의 경전들을 번역하고 풀어냈을까. 이것은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훈민정음을 만들어낸 세종의 뜻과 정확히 일치했다. 옛 경전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말로 되어있지 않아, 많은 이들이 이를 읽어낼 수 없었다. 생명체라면 반드시 알아야할 참(하느님의 뜻)을 더 많이 알리고 더 많이 깨닫게 하기 위해 류영모는 '우리말 경전 풀이'에 온힘을 쏟았다. 그에게 이 일이야 말로, 세상을 향한 참 전도(傳道)였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하기에 우리말로 반드시 옮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이런 생각에는, '진리' 혹은 '하느님의 뜻'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의 중요한 경전에도 들어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류영모는 어느 종교이든 구경(究竟, 지극한 깨달음의 경계)에 가서는 진리의 하느님을 나의 참생명으로 받들고 따르는 것으로 같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밝혔다.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서로 비춰보아야 서로서로가 뭔가 좀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적어도 구약과 신약은 성경으로서 오래 가도 버릴 수 없는 정신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신약성경을 위조해서 말하는데 신약 말씀도 구약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의 경전도 다 구약성경과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실상 성경만 먹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유교의 경전도 불경도 먹습니다. 희랍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 맷감량(소화력)으로 소화 안되는 것이 아니고 내 (정신)건강이 상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말은 헤르만 헤세의 이 말과 닮아 있다. "나는 종교를 두 가지 형태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경건하고도 정직한 신교도의 자손으로서, 다른 하나는 인도인들의 계시의 독자로서입니다. 인도의 계시 가운데서도 나는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 그리고 부처의 설법을 가장 위대하다고 여깁니다. 인도의 정신세계보다 더 늦게 나는 중국의 정신세계를 알게 되었으며 또 새로운 발전이 펼쳐졌습니다. 나는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형제처럼 보이게 하는, 덕에 대한 개념에 열중했고, 신비적인 힘을 지닌 노자의 은밀한 지혜에 아주 빠져들었습니다. 나의 종교생활에서 기독교가 유일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지배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결코 종교 없이는 살지 않았고, 종교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생 동안 교회 없이 살아왔습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9-10 10:13:5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5)]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똑같은 점 하나가 보인다다석 한시 - 죽음순간을 들여다본 '종여시(終如始)' 精子始初出發時(정자시초출발시) 母體先驗酷似險(모체선험혹사험) 生物最終感觸末(생물최종감촉말) 色黃音玄幻一點(색황음현환일점) (1957.1.10) 죽음은 탄생과 닮았다 정자가 처음 생겨나 움직이기 시작할 때 엄마가 먼저 겪는 건 죽음과 비슷한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맨 마지막으로 느끼는 것은 빛깔은 노랗고 소리는 어둑한 환각같은 한 점이다 탄생과 죽음은 맞물려 있다. 무엇이 태어날 때, 그 무엇은 죽는다. 그것이 생태계다. 태어나는 것이 죽이는 것이며 죽는 것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죽어야 태어나고 태어나면 죽는다. 바로 직결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전체가 경영되는 원리는 반드시 그렇다. 우리는 하나의 개체로 하나의 생명과 한번의 죽음만을 맞을 수밖에 없기에, 이 거대한 원리를 비켜보거나 유예하거나 부정해보려 한다. 조금 더와 덜은 있겠느나 저 필생과 필멸은 피하지 못한다. 류영모는 정자가 생겨날 때, 모체는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을 통찰했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 탄생의 매체가 된 다른 생명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실제로 예전엔 많은 여성들이 출산 과정에서 죽었고, 그 죽음 속에서 아기만 살아나기도 했다. 인간은 이것을 슬퍼하고 애달프다고 여겨왔지만, 이것이 삶과 죽음이 맞물린 단호한 불변의 섭리에서 빚어진다는 것을 그리 주목하지는 않았다. 류영모는 그 교체와 순환의 고리를 똑바로 들여다본다. 태어날 때 우리는 무엇을 느꼈는가. 우리가 처음 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점 하나였다. 햇빛에서 기인한 노란 빛으로 된,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소리로 된, 점 하나가 문득 감관에 찍혔다. 그것이 '색황음현(色黃音玄)'이다. 이 점을 삶이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에 다시 본다는 것이다. 그 점으로 줄어들며 사라지는 그 환각의 끝. 그것을 류영모는 피하지 않고 인식하며 바라보고 있다. 그 일점(一點)은 육신의 생이 사라지는 점이지만, 그것은 다시 성령이 오롯이 탄생하는 점이기도 하다. 이걸 보여주는 영상 기법이 디졸브(dissolve)다. 하나의 화면이 페이드아웃 하면서 다음 화면이 페이드인 한다. 인간이 신과 접면하는 순간, 생과 사가 교체하는 그 순간. 색황음현의 일점이 찰나로 디졸브하는 상황을 묘사해 놓은 시다. 이 치열한 사유(思惟)야말로, 류영모가 견지한 수행의 궁극을 보여준다. 파사(破私)와 깨달음은 저 일점에서의 대혁명이며 일생일대의 대전환이 아닌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9-09 09:22:2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4)] 한글 속에 하느님 있다, 류영모는 '우리 말글의 성자'다석 한시 '천음인언(天音人言, 하느님 말씀과 인간의 말, 1956.11.16)' 生來有言借口能(생래유언차구능) 死去無口還本音(사거무구환본음) 代代斷言猶遺志(대대단언유유지) 世世欲言大蓄音(세세욕언대축음) 태어나 말할 수 있으니 빌린 입으로 할 수 있고 죽어선 입이 없으니 하느님 말씀으로 돌아가네 죽어 대대로 말이 끊기지만 하느님 뜻이 남고 살아 대대로 말하려 하니 하느님 말이 크게 쌓이도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직 하느님의 뜻밖에 없다.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어도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 상대세계의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이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그 시간 속에 쌓이는 축음(蓄音)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말을 하다 다 못하고 죽고, 그 말은 끊기지만 그 말한 만큼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 남는다. 그것이 전승되고 전파되고 하느님 말이 쌓인다고 류영모는 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믿음이며 사상이며 철학이며 지혜의 실체다. 인간의 말은 덧없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을 준 것이 신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신에게서 빌린 입으로 하는 것이다. 죽으면 그 입이 사라지지만, 입이 한 말은 하느님의 말 속에 돌아가 합류한다는 생각. 류영모가 얼마나 말을 귀하게 여겼으며, 그 말 속에 곧 신의 뜻이 존재함을 간절하게 믿었는지 깨닫게 하는 한편의 시다. 지금 그 입으로 하는 말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하며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인간이여. 다석은 이렇게 신앙을 강의하고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9-07 10:34:4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3)] 인도서 났으면 부처가 됐을 분입니다류영모는 한복을 자주 입었다. 때로 아내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국민복'을 지어 입기도 했다. 국민복은 넥타이를 안 매는 양복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입었던 레닌복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삭발한 머리에 무명옷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천으로 된 손가방을 들었다. 가방 속에는 YMCA 강의교재를 넣고 다녔다. 이런 차림을 보고 누군가 "관상(觀相)쟁이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뒤 류영모는, "이왕 그런 말을 들은 차에 하느님 관상을 한번 봤다"면서 자작 한시 한 편을 소개했다. 하느님은 어떻게 생겼는가. 노자가 도덕경에서 일깨워줬다. '곡신불사(谷神不死)'라고. 觀相(관상), 곡신불사(谷神不死)' (1951.11.4) 空相莊嚴物現象(공상장엄물현상) 色相好惡我隱惑(색상호오아은혹) 小見渾盲鬼出晝(소견혼맹귀출주) 大觀分明神渾谷(대관분명신혼곡) 관상, 없이 계신 신은 영생합니다 빈탕(허공)의 얼굴은 장엄하여 만물의 진상을 드러냅니다 세상의 얼굴은 좋고싫음으로 자아의 미혹됨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인간을 보건대, 침침하여 헛된 것이 나오는 대낮이요 신을 보건대, 또렷하여 성령이 다니는 허공길입니다 신의 관상을 보았더니 어땠는가. 다석은, 공상(空相)이라고 했다. 텅 빈 얼굴이다. 스스로 텅 비어 있기에 만물을 그대로 드러낸다. 반면 인간은 이미 온갖 색(色, 표정)을 가진 얼굴이다. 그 얼굴의 소유자들은, 마음속에 온갖 의심과 번뇌와 질투와 자랑을 지니고 있다. 인간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스스로 눈을 감은 것처럼, 온갖 헛된 생각이 훤한 대낮에도 들끓는 꼴이다. 신의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저절로 또렷하여 골짜기 신이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골짜기 신은 무엇인가. 인간의 상대세계에 내려온 신이 아니라 골짜기로 표현된 허공 그 자체이다. 류영모의 표현으로 하자면, '빈탕한데'에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다. 다석이 본 신의 관상 종합 : 없음의 얼굴은 장엄하여 만물을 있는대로 드러내고, 우주 허공은 또렷하니 빈 골짜기 같은 하느님은 영생하는 것을 알겠도다. 노자의 '곡신불사'는 그 깨달음에 이른 것이었다. 텅 빈 신은 죽음이 없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9-02 09:40:19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2)] 수녀들의 '진달래 할아버지'와 류영모 작대기송(頌)류와 이의 심오한 종교사상 논쟁 만약 류영모의 '이이이 송(頌)'(막대기 모양의 'ㅣ'를 노래한 것이라 '막대기송'이라고도 부른다)을, 이현필이 뜻 그대로 정확하게 알아차렸다면? 이현필은 광주의 총무 정인세에게서 류영모의 '한글 다룸'에 관해 이미 들었을 것이다. 한글로 심오한 종교사상을 표현해내는 그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걸어가면서 부른 낯선 노래가 무엇인가를 개념화한 것이라는 점을 짐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ㅣ'가 하늘과 통하는 정신의 꼿꼿한 막대기를 형상화한 기호임을 알아챈 뒤, 이현필은 문득 슬쩍 그것을 부정(否定)하는 방식으로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자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ㅏ'가 먼저 있어야 'ㅣ'가 있지 않으냐고 응답한 것이다. 즉, 인간관계와 인간들끼리의 소통으로 세상을 닦은 다음, 하늘과 소통하는 'ㅣ'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에 대해 류영모는 단호히 '하늘 소통'이 먼저라고 반박 응수했다. 이현필의 'ㅏ'는 그의 정통 기독교 전도사를 지낸 이력을 떠올리게 하며 동광원 운동으로 전개된 그의 구세(救世) 활동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류영모는 이 지상의 삶과 육신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어디까지나 인간은 파사(破私)를 통해 신에게로 나아가는 자율적 깨달음만이 중요할 뿐이라고 다시 강조해준 것이다. 이 짧은 대화에 담긴 무궁하고 심오한 철학적 소통이야 말로, 큰 스승 류영모와 큰 목자 이현필의 진면목인지 모른다. 일견, 불교 '화두(話頭)'의 교환 같은 한 장면은 두 사람의 지향과 실천을 드러내는 중요한 암시의 일장(一場)으로도 읽힌다. 류영모 '이이이 송(頌)'은 계천(繼天)노래 이때 나직히 불렀던 류영모의 '이이이 송'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 때에 쓰던 작은 수첩에 이 노래가 적혀 있다. ㅣ (이) 소리 (하늘소리) ㅣㅣㅣㅣ ㅣㅣㅣㅣ ㅣㅓㅣㅓ ㅣㅓㅣㅓ ㅓㅣㅓㅣ ㅓㅣㅓㅣ ㅣㅣㅣㅣ ㅣㅣㅣㅣ ㅣㅓㅣ ㅣㅕㅣㅡㄹㅣ ㅓㅣㅣㅕ ㅣㅓㄹㅏ 모음만 있으니 낯설어 보인다. 자음을 붙여보자. 이이이이 이이이이 이어이어 이어이어 어이어이 어이어이 이이이이 이이이이 이어이 이여이으리 어이이여 이어라 하느님과 소통하는 소리다.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정신을 세운다. 이이이이 이이이이 정신을 세워 하늘과 잇는다. 이어이어 이어이어 하늘과 이르려니 어찌 이을지. 어이어이 어이어이 하늘을 향해 정신을 세운다. 이이이이 이이이이 이것을 어찌 하늘과 이으리. 이어이 이여이으리 어찌 잇는가 그냥 하늘과 이어라. 어이 이여 이어라 하느님의 뜻을 잇는 것을 '계천(繼天)'이라 한다. 류영모는, 하늘과 인간을 직접 잇는 기도와 찬송을 '이이이송'으로 표현했다. 한글의 모음(母音)인 'ㅣ'라는 언어기호가 지닌 심오한 형상을 인간신앙의 이미지로 승화해놓았다. 그 형상의 핵심은 인간과 신을 잇는 것(繼)이다. 류영모 사상의 간결하고 탁월한 면모는 이런 점에 있다. 이현필의 해혼(解婚) 해혼(解婚)은 부부의 연(緣)을 다시 풀어주는 행사로,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해혼식을 결혼식만큼이나 의미있게 여긴다. 해혼과 이혼이 다른 점은 불화로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을 마무리하고 자유로워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1906년 37세의 마하트마 간디는 부인 카스투라바이와 해혼을 한 뒤 고행의 길을 떠난다. 간디의 결행에 감명을 받은 일본에서는 당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해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로 종교적 금욕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 바람은 조선에도 들어왔다. 1930년대 이세종은 성경을 만난 뒤 부부 동침을 하지 않는 '사실상 해혼'으로 아내가 여러 번 가출한 바 있고, 최흥종의 사위 강순명은 해혼으로 금욕을 실천하는 독신전도단을 만들기도 했다. 1941년 류영모의 해혼 또한 그런 시대적 맥락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현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7년 이현필은 스승 이세종을 만나면서 그의 삶이 바뀌었다. 그런데 1939년 이현필은 스승의 만류를 무릅쓰고 황홍윤과 결혼을 한다. 그런데 1940년 해산으로 아내가 죽다가 살아난 뒤 이현필은 '일방적 해혼'을 한다. 그는 아내에게 이제부터 남매로 살자면서 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해혼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아내와의 숨바꼭질과 갈등이 시작됐다. 아내가 앞문을 열고 침실에 들어오면 남편은 뒷문을 열고 달아났다. 이런 수모를 겪자 아내는 격분하여 칼을 들고 남편을 뒤쫓으며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나도 죽고 당신도 같이 죽읍시다"라고 소리질렀다. 남편은 집을 나갔고, 가끔 귀가해서도 아내를 피해 다녔다. 이러기를 6년, 황씨는 통곡하며 집을 나갔다. 아내는 여순경이 되었고 다른 곳에 개가를 했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가정이 깨지는 이런 풍경은 지금의 관점에선 낯설고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후 그가 실천한 '성자'의 길은 세상의 소금이 되는 인상적인 역정(歷程)이었다. 예수처럼 살고자 했던 이현필 이현필은 성령의 바람을 일으켰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며 육체적인 매력이 남다른 것도 아니었던 이현필이었지만, 그가 지나는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버리고 기꺼이 그를 따랐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끌어당긴 것일까. 엄두섭은 이현필 전기 '맨발의 성자'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현필에게는 인격의 진동력이 있었다. 말이 적은 분이나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놀라운 감화력이 있었다. 그 감화력 때문에 그를 한두번 대한 사람은 주저없이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재산도 팽개치고 그를 따랐다. 그는 선풍적인 존재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깊은 감동을 주는 신비스런 힘이 있었다. 누구나 그의 얘기를 한번 들은 이는 그를 잊지 못했다." 이현필을 따라왔으나 머물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무리는 집집마다 구걸하며 굶주림을 면했고 다리 밑에 가마니를 깔고 잠을 청했다. 평양신학교를 나온 광주YMCA 총무 정인세까지 직을 버리고 그를 따랐다. 그들은 국유지를 일궈 농사를 지었다. 극심한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을 지키며 다른 사람을 돕고 품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는 51세로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자신이 사랑한 예수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서울 종로 거리에 나가 "깨끗하게 사십시오" "가난을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전했다. 이현필은 예수의 인격을 묵상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예수처럼 살기를 열망했다. 예수를 닮으려는 이현필은 뭇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제자들은 겸손함과 예의, 남녀간의 순결, 무릎을 꿇은 모습, 독실한 신앙과 사랑, 감동적인 영혼의 노래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남겼다. 깨끗한 가난과 깨끗한 사랑. 그것이 이현필 운동의 빛이었다. 이현필은 종교인에게는 청부(淸富)도 용납될 수 없다고 했다. 오직 청빈이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영성은 바로 죽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맨발의 성자로 불린다. 이현필도 좋아했던, 류영모 '진달래야' 시 동광원(東光園)의 본원은 광주 방림동에 있었고, 곡성, 함평, 진도 완주, 벽제 능곡에 분원이 있었다. 벽제 웃골에 자리잡은 분원은 수녀들이 집단생활을 하고 있어서 '수녀촌'이라고 불린다. 계명산 입구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1971년 9월 류영모는 제자 박영호와 함께 그곳에 들렀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나 할머니의 지도 아래 30여명의 수녀가 수행을 하고 있었다. 여성들이 스스로 돌산을 일궈 논과 밭을 만들었다. 여기에 농사를 직접 지어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디딜방아도 만들어 직접 사용했다. 계명산의 산나물과 딸기, 도토리와 머루, 다래와 버섯도 채취해 먹거리로 삼았다. 류영모는 일제 때 '진달래야'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었다. 이현필은 이 시를 몹시 좋아하여 류영모에게 '진달래야' 강의를 자주 요청했다. 2~3년에 한번씩 다섯 차례나 초청해 들었다. 우선 시를 한번 들어보자. 진달내야 진달래야 어느 꽃이 진달레지 내 사랑의 진달네게 홀로 너만 진달내랴 진달내 나는 진달내 임의 짐은 내질래 진달래에 앉은 나비 봄 보기에 날 다지니 안질 나비 갈데 없슴 지는 꽃도 웃는고야 안진 꿈 늦게 깨니 어제 진 달내 돋아 진달래서 핀 꽃인데 안 질랴고 피울랴맙 피울덴 아니 울고 질데 바 웃음 한 가지니 님 땜에 한갓 진달 낼 봄 차질하이셔 류영모의 '진달래야' 진달래란 이름에서 여러 가지 함의를 포착해낸 흥미로운 시다. 우선 '진달래'는 꽃이 진다는 의미가 숨어있고. 참(眞)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달래'는 요구하는 의미도 있고, '래'는 '내'와 '네'로넘나들면서 나와 너, 그리고 '누군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느낌'까지 포함한다. '진달'은 떴다가 사라진 달을 기리키고, '달내'는 달의 냄새를 가리킨다. 처음엔 꽃이 '진다'로 풀어냈던 것이 나중엔 짐을 '진다'의 뉘앙스로 확대되어, 언어들이 파문을 일으키듯 다양한 변주로, 종교적인 함의를 품게 되는 희한한 시다. 뜻을 풀어보면 대체로 이렇다. 진 달이 비치는 개울(내)아, 진달래야 어느 꽃이 져버린 달이지 내 사랑이 네게서 진다고 해도 너만 사랑이 진다고 하랴 나도 지는 것을 내가 (세상을) 질래 내가 지는 사람이네 하느님의 짐은 내가 질래 진달래에 앉은 나비 봄날을 구경하다 날이 다 지니 꽃이 졌는데 아직 안 지는 나비 앉을 데 없어 지는 꽃도 안쓰러워 웃어주는구나 꽃은 져도 마음은 지지않고 앉아있는 꿈 늦게 깨어나보니 어제 졌던 달 냄새가 돋네 진다고 해서 피어난 꽃인데 굳이 지지 않겠다고 꽃 피우려고 애쓰지 마라 꽃 피울 땐 아니 울었지만 질 때가 되면 웃는 것과 마찬가지니 하느님 때문에 한갓되이 져도 다음 해 봄을 다시 차지할테니 수녀들은 이 시를 읊어주는 류영모를 '진달래 할아버지'라 불렀다. 꽃은 피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 꽃은 어찌 이름부터 지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가. 이 세상에 와서 가장 잘사는 것은 가장 잘 죽는 것이라고 말했던 류영모가 바로 '진달래'가 아닌가. 수녀들이 인생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잘 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잘 지는 일'을 해내려는 뜻 때문이다. 류영모의 강의를 들은 수녀들은 이 시를 그 자리에서 그대로 외웠다. 동행한 제자 박영호에게 한 수녀가 말했다. "선생님은 여기서도 저녁 한끼만 잡수셨어요. 음식을 드리면 뱃속에 들어가면 섞이게 마련이라며 비벼서 잡수셨죠."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8-31 10:27:09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1)] 광주역에 내린 류영모가 만난 그 눈빛이세종을 성인이라 호칭한, 다석 이세종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산 것이 내게 붙어있다. 그것이 떠나면 나는 죽는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살 것이요, 하느님께서 내게서 당신의 선한 것을 도로 찾아 가시면 그때는 찌꺼기 밖에 남지 않으니 나의 육체도 살 수 없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것을 죽었다고 한다.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서 맑은 것을 도로 찾아가시므로 남은 것은 썩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썩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무를 불에 태워버리면 그 나무는 죽은 줄로 알지만 태운 재를 거둬 다른 나무에게 거름으로 주면 그 비료 성분 덕택으로 잘 산다. 그 나무가 죽었다고 해서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육체도 이와 같다." 류영모는 이현필과 함께 이세종이 살던 화순군 도암면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세종을 '성인'이라고 호칭했다. 류영모의 말. "성인은 무엇인가. 물질에 빠지고 미끄러지는 나를, 물질을 차버리고 깨끗해져 보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는 자는 지각이 없기로 마치 철없는 사람과 같다. 자기 머리가 가장 위인 줄 알고 일을 저지르니 못되고 못난 짓이 될 수밖에 없다." 이세종의 사상은 류영모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류영모가 '성인'이라는 호칭을 서슴없이 붙인 것은, 그가 인간 속의 짐승 본능인 탐진치(耽瞋痴) 욕망을 완전히 끊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류영모가 얼나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데에는, 거침없이 깨달음의 길을 걸어간 선각(先覺)의 결행이 하나의 의미심장한 표지판이 되어줬을 것이다. 거기에 이세종의 제자 이현필이 두 성자의 영적 가교(靈的 架橋)가 되어주었던 점도 특기할 만하다. 광주에서 이세종이 죽기 한달 전인 1942년 1월 4일, 서울의 류영모는 중생(重生, 거듭남)을 체험하고 있었다. 하느님을 생전에 느끼는 파사(破私)에 든 것이다. 류영모가 '십자가에 기대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신앙'을 말했을 때, 이세종은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이 없다, 행위를 고치고 어려움을 참고 거듭난 생활을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다"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핍박받는 식민지 조선의 남쪽과 북쪽에서 놀랍게도 서구 기독교의 영성이 그 원형의 뜻을 돋우며 피어오르고 있었던 셈이다. 이 '기적'의 시대, 뜻밖의 심오한 역사를 우린 잊을 수 없다. 류영모와 이현필의 만남 1946년 광주YMCA 총무인 정인세는 서울에 와서, 서울YMCA총무인 현동완에게 이현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정인세는 이현필을 보기 드문 기인(奇人)으로 소개했다. 현동완은 류영모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광주에 가서 강연도 하고 이현필도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이리하여 그해 봄날 광주YMCA에서 류영모 강연이 잡힌다. 당시 광주YMCA 이사회 회장은 최흥종이었다. 류영모와 현동완은 호남선 열차를 타고 광주역에 도착했다. 역사에는 정인세와 이현필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류영모와 이현필은 정중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을 깊이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두 사람은 그렇게 서 있었다. 강연시간이 촉박하였기에 서둘러 일행은 충장로의 YMCA로 향했다. 앞에는 류영모와 이현필이 걷고 뒤에는 현동완과 정인세가 걸었다. 류영모와 이현필이 말없이 걷자 따라오던 현동완과 정인세도 묵묵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류영모가 입을 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8-26 09:01:05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0)] 류영모는 왜 광주를 빛고을이라 명명했나빚문서 태우고, 곳간 연 부자 한편, 동네 사람들은 마을의 큰 부자였던 그에게 쌀이나 돈을 꿔갔고 빚을 가을 추수철에 갚곤 했다.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든 해에, 도암 마을엔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세종은 곳간을 열어 이웃들에게 쌀을 퍼가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빚을 진 채무자들을 모아놓고 빚문서를 모두 태워 채무를 탕감해줬다. 이날 빚걱정을 한순간에 덜게 된 마을사람들이 서로 껴안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자진해서 송덕비를 세웠다. 이세종은 이를 사양하며 비석을 땅에다 묻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공(李空)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세상에 없는 사람이며 텅 빈 허공과 함께 하느님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이세종은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고 초상화 하나도 그려진 게 없다. 일제 말기에 돌아간 사람이지만, 그가 어떻게 생긴 분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조차 남지 않았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 놀라운 생의 반전들 속에서 펼쳐진 사상과 언행들뿐이다. 그에게 감화를 받은 이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남은 '거룩한 기운'들을 더듬더듬 전하는 그 조각 속에 숨어있는 영성(靈性)뿐이다. 이세종은 낙스(R. Knox)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밤에는 성경을 읽고 낮에는 청년들에게 그 성경을 다시 읽어주며 함께 토론하기를 청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참진리는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의심나게 하는 것이 참진리입니다. 진리에 대해 의심이 나는 까닭은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편히 살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오래 살고 부귀하고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축복과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부모처자와 단란하게 사는 걸 마다하고 고생을 자처하며 종교진리를 따르니 세상사람 눈으로 볼 때에 정반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게 됩니다. 그러니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길에서 만난 거지와 옷을 바꿔입고 이세종은 깊이 파야 깊이 깨닫는다고 말했다. 어설프게 파면 믿음이 죽고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배움을 청하러 몰려왔다. 이현필, 이상복, 박복만, 이대영, 전도부인 오복희, 수레기 어머니 손임순, 최흥종 목사, 그의 사위 강순명과 백영흠, 이만식, 최원갑, 현동완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산중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한번은 광주 교회의 공식모임에 초청받아 가던 중에 길에서 거지를 만났다. 문득 그와 옷을 바꿔입고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다. 남의 집 처마 아래서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다.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서 먹었다. 거지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 없기에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 하였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뿐 아니라 산천초목과 금수곤충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풀잎을 쓰다듬어 주었고 길에 뻗어나온 칡넝쿨을 누군가 밟아 진액이 흐를 때 사람의 피를 보는 것처럼 아파했다. 발에 밟힌 개미를 보고 눈물을 흘렸고 빈대도 파리도 죽이지 않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내보냈다. 이세종은 혼자 성경을 읽고 체득한 바를 실천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금욕과 절제를 통한 순결이었고, 생명에 대한 외경이었으며, 그 외경이 발전한 세상 모두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확신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 나누고자 했다.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이세종은 석달간 곡기를 끊었다. 자기 몸을 깨끗이 비우기 위함이었다. 임종 즈음에 그는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고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상여를 만들었다. 상여를 좁은 방 안에 넣고 그 위에 이불을 펴고 누워 말하기를 '숨이 지면 꼭 이대로 묻어주시오'라고 했다. 아내가 곁에서 울음을 터뜨리자,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나 '예수를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나는 올라가오'라고 말한 뒤 다시 누웠고 조금 뒤 눈을 감았다. 1942년 2월, 향년 63세였다. 그는 완전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 없었다. 이후 이현필을 비롯한 제자들이 동광원을 세워 그 정신을 기리고 개신교 영성의 터전으로 일군다. 이세종의 아내가 죽었을 때 류영모는 '다석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1971년 2월 11일 이세종님의 마나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씀 듣다. 듣건대 거듭거듭 많이도 거듭 사시어서 돌아가시었구나."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8-24 09:35:3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9)] '얼나 사망' 조의(弔意)를 표함육신과 영(靈)…신은 어디에 있는가 류영모가 자신의 뒷머리를 만지며, 색욕이 강할 수 있는 육체적 특징을 타고 났다고 말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그가 색욕과 그토록 단호하고 격렬하게 싸우며 날마다 실천했던 것은, 그런 자신의 '짐승'을 제어해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여전히 '십자가신(神)'이나 인격신에 기대는 일부 '정통'기독교의 주술(呪術)과 기복(祈福)은 여전히 육체를 믿는 신앙에 가깝다. 노평구는 류영모의 말을 들으면서, 기독교가 과연 '금욕'을 추구해왔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고개를 흔들고 있다. 본질과 지엽을 구분 못한 것이다. 금욕이 단순히 고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육신이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이라는 '근원적인 사유'를 노평구는 읽어내지 못했다. 영(靈)이란 말에 관해 묻는 류영모와, 그것에 반응하는 시큰둥한 노평구의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노평구에게 영(靈)은 '젊은 여자가 접신하여 무당이 되는' 이상하고 섬찟한 무엇일 뿐이었다. 류영모는 인간의 생각 속에 하느님의 생명인 영이 들어와 있다고 보았고 그것을 성령 혹은 얼나라고 불렀다. 예수 또한 마리아 속에 성령이 들어와 잉태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 속에 성령이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활'의 개념은, 육신의 부활이 결코 아니며, 하느님의 생명을 받는 성령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류영모는 생각했다. 영(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하느님과 만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육신 속에서 피워올린 생각의 불꽃이 신의 생명력과 합일하는 그 기적을 향해 하루살이로 전진했던 류영모가, 노평구에겐 재래신앙의 무당 이미지로 밖에 해석되지 못했다. 그 사상의 불통(不通)에 대해 류영모는 일체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다만 "노평구 그이도 꽤 애쓰지요"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8-14 10:39:55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8)] 류영모는 알고, 김교신·함석헌은 몰랐던 것류영모 사상과 거의 일치해가는 함석헌 함석헌은 "국가주의로는 안된다"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썼다. 여기까지 오면, 함석헌은 류영모 사상과 거의 일치하는 면모를 보인다. "생명은 발전합니다. 조직은 고정되어지면 변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자라난 시대에는 국가 없이는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인간이 국가보다 더욱 성장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국가란 제도는 국가 지상주의가 계속되면 인간의 성장을 방해하게 됩니다. 지금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로 나누어져 있지만, 양쪽 다 국가주의란 점에는 다른 게 없습니다. 양쪽이 싸우고 있을 때에도 저는 이데올로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해 왔습니다.지금은 이데올로기 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데올로기가 달라도 양쪽 모두에 국가 지상주의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 사회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국가가 정말 인간의 논리적 생활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주의에 빠져있습니다.그렇기에, 장래의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들의 국가관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정치 없이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아무리 이상주의라 하더라도 불완전한 인간인 이상, 바른 의미의 정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조직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입니다. <함석헌 '역사의 의미' 중에서> 함석헌은 남한에 민주주의가 있고 북한에 공산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을 나눠 점령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서 문제를 이렇게 들여다 보기도 했다. 민족이 둘로 갈라져 있으면 언제든지 외국 세력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본래 분열이 올 때는 외국세력의 침입으로 시작됐다. 남한에 데모크라시가 있어서 미국을 끌어들이고 북한에 공산주의가 있어서 소련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고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요점이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에 있는 것 아니다, 남의 나라의 그 세력을 빌어서 제가 정권을 쥐어 보려하는 그 마음에 있다.<함석헌 '우리나라의 살 길' 중에서> 효(孝)논쟁과 국가주의자들 1961년 11월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중앙위원회를 두면서 사회명망가들을 위원으로 뽑았다. 여기에 류영모와 함석헌을 비롯해 김정설이 포함됐다. 김정설(호는 범부(凡夫), 1897~1966)는 소설가 김동리의 큰 형이다. 영남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계림학숙의 초대학장을 지냈다. 그는 1963년에 박정희의 오월동지회 민간 측 부회장이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 비공식 정치자문을 맡았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국가의 개념을 재설계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다. 김정설은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으며 '화랑외사(花郎外史)' '풍류정신(風流精神)', '건국정치의 이념'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국가철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 핵심은 '인륜적 국가관'이다. 그는 국민윤리를 강조하면서 그 초점을 효(孝)로 잡았다. "효는 부모한테 하는 것이고, 이것을 나라에 옮길 때는 충(忠)이 되는 것입니다."(김범부 '동방사상강좌') 효는 집안의 윤리이고 충은 '나라라는 집안'(國家)의 윤리라고 보았다. "나라에 대한 심정도 기실인즉 이해득실을 초월해서 당연히 그리 해야 하고 그리 않고는 할수 없는 '무조건의 감분(感憤)' 다시 말해서 효자가 부모에 대해 지니는 지극한 감정이라 할 밖에 딴 이유가 없는 것이다."(김범부 '방인(邦人, 국민)의 국가관과 화랑정신). 김범부는 화랑정신의 핵심인 사군이충(事君以忠: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사친이효(事親以孝: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를 국가가치의 기틀로 삼았다. 박정희 시대 요란했던 화랑정신 강조는 이런 배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국가가치를 세운 사람에는 박종홍(1903~1976)도 있었다. 평양태생인 박종홍은 한국 철학계의 태두로 꼽히는 1세대 서양철학자이다. 경성제대 철학과에서 독일철학을 전공한 그는 서울대 교수를 지내며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는 5.16 이후 국가재건회의 사회분과 위원이었고 1970년엔 대통령 교육문화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사람이다. 박종홍은 민족주체성과 공적(公的)인간의 전형을 강조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국민들의 어깨에 묵직한 짐을 안기던 그 구절을 그런 사상에서 태어났다고 할 만하다. 류영모 "권력에 효(孝)할 게 아니라 신에 효(孝)하라" 한편 류영모는 김범부의 '충효(忠孝) 일체'에 대해 비판했다. "학생을 국가의 동량이라 하는데 그 따위 말은 집어치워야 합니다. 이 집 가(家)의 가족제도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한 게 아니겠습니까. "(1956년 11월22일 다석강의) 그는 효(孝)가 국가이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부장적인 국가리더가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가정과 국가를 상징화하여 사회질서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온 유교적 사고방식에 제동을 건 셈이다. 그는 육친인 아버지에 비유될 수 있는 대상은 국가수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효(孝)'는 충(忠)으로 확장될 것이 아니라, 천부(天父)에 대한 효로 직결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류영모가 가부장적 대통령에 대해 우려했던 것은, '가부장(家父長)'의 당시 역할이 견제없는 전횡이 가능했기 때문인 점도 있다. 그는 리더의 강력한 역할은 국가가 국민을 괴롭히는 부작용으로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류영모는 '씨알'의 자율을 통한 민주주의의 번성을 꿈꾸었다. 그것이 그의 기독교적인 세계관과도 통했으며, 자율신앙의 정신과도 맞았다. 그는 노장사상 속에 숨어있는 조물주(造物主)의 섭리가 국가 정치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말은 '군무위인자연(君無爲人自然, 리더(그대)가 팔걷어 모든 것을 하려하지 말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게 하라)'의 메시지였다. 조물주가 자연 생태계를 유지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국가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 국가 리더의 의욕이 커질수록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우린 유신독재와 정권의 비극적 결말에서 확인한 바 있다. 함석헌 또한 이런 흐름을 비판했다. "이 나라의 정신적 파산! 사상의 빈곤! 한다는 소리가 벌써 켸켸묵은 민족지상, 국가지상, 화랑도나 팔아먹으려는 지도자들, 이 민족의 정신적 빈곤을 무엇으로 형용할까?" 그는 '나라 국(國)'자를 쓰는 경우는 대개 도둑놈'이라고 하기도 했다. 국가주의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경고한 말이다. 류영모와 함석헌은 조국근대화를 외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국가지상주의가 낳을 깊은 병폐를 우려하며 경고했던 국가사상의 큰 선지자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8-10 11:37:0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7)] 누가 바보새였나사상계 주필 활약···두 차례 노벨상 후보에 한편 함석헌은 1953년 장준하의 주재로 창간된 월간지 '사상계'의 주필을 맡는다. 사상계는 한국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겨레의 앞길을 마련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함석헌이 사상계에 쓴 첫 글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1956년 1월호)였다. 전쟁에 즈음해 기독교는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비판한 글이다. 이듬해 '할 말이 있다'(1957년 3월호)를 실었다. 군인과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있어서 장준하가 그 내용을 뺐다. 이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958년)라는 글에 다시 그 내용을 넣었다. 함석헌은 필화로 투옥된다. '생각하는 백성...'에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외부(소련과 미국의 갈등)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책임을 살피자는 제안이 들어있다.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만들었다. 간디의 아슈람(Ashram)을 본받은 공동체다. 이때 함석헌에게 불미스런 일이 일어났다. 파문이 커지자 그는 무교회와도 결별했고 거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 스승 류영모도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함석헌에 대한 기대를 버린 건 아니었다. 이 무렵 다석일지에는 "함은 이제 안 오려는가, 영 이별인가"라는 구절이 보인다. "내게는 두 개의 벽이 있다. 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던 그가 실수를 이유로 제자를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직접적 인연'은 여기까지로 멈춰 있다. 사무치는 고립의 시절, 기록해놓은 함석헌의 정신적 공황의 자취가 남아있다. "무너진 내 탑은 이제 아까운 생각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우뚝 서는 돌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 든다." 이 말은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쫓아오던 햇빛인데/지금 교회당 꼭대기/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함석헌 또한 이런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그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투쟁의 필전(筆戰)을 계속했다. 5·16 이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를 실었다. 군인들이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주문하는 글이었다. 당시 지식인 중에서 5·16을 쿠데타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던 사람은 함석헌 밖에 없었다. 이 글 때문에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방미(訪美)한다. 퀘이커교도와 교류하고 퀘이커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것은 이때였다. 퀘이커는 십일조에 반대하고 목사를 두지 않는 개신교의 일파이다. 인디언을 옹호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것도 이들이다. 박 정권에 정면도전 하다 징역형을 받는다. 사상계 폐간 이후엔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폐간과 재발행의 투쟁을 거듭했다. 1974년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의 고문을 맡아 시국선언에 참여했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다.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다. 200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경기도 마차산에 묻혔던 주검은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됐다. 류영모와 함석헌 사상 비교 함석헌의 사상은, 거의 모두 류영모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씨알사상은 1948년 함석헌이 월남한 뒤 YMCA에서 류영모의 '대학(大學)' 강의를 듣고 깨우쳐 응용한 것이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이란 구절을 류영모는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고,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뭄에 있나니라"고 풀었다. 민(民)을 백성이나 민초라고 하지 않고 '씨알'로 풀었다. 함석헌은 이 씨알을 주체성을 가진 백성, 근본성을 가진 백성, 순수성을 가진 백성, 생동력을 지닌 백성, 관계성으로 뭉치는 백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확장했다. 함석헌 사상은 신앙의 생명성과 주체성을 강조한다. 자라나는 신앙을 역설했고,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을 중시했다. 이 또한 류영모가 실천을 통해 보인, 자율신앙과 씨알정신의 정수이다.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사상 또한 류영모의 가르침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영성을 받은 인간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육신의 예수가 아니라 영성의 예수이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예수가 인간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대속신앙과 십자가의 예수육신 경배에 대한 문제의식을 낳게 된다. 함석헌은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윤동주가 '십자가'에서 표현한 바로 그 염원이다. 이것은 스승 류영모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평화주의와 인도주의를 강조하는 사상, '사랑이 이긴다'는 함석헌의 슬로건은 류영모가 성서를 통해서 얻은 신의 단호한 직설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명령의 실천을 함의한다. 함석헌은 이 사랑을 공동체에 적용하여 지상천국을 꿈꾸었지만, 류영모는 성서를 통해 신이 보여준 '투철한 무저항과 비폭력 정신'을 인간이 지녀야할 근본적인 지향이라고 믿는 경지까지 나아갔다. 함석헌은 세상에 나서서 한국 민주화를 일구는 '투사'의 역할을 했지만, 류영모는 은둔과 금욕을 통해 신과의 대화로 고독하지만 강력한 사상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자율신앙과 치열한 생각의 불꽃으로 피운 '얼나'의 전진은 류영모에게 고유한 것이었다. 류영모와 함석헌은 서로에 대한 경모(敬慕)를 유지하면서도, 사상의 결론은 상당한 차이로 벌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은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공동체의 실천으로 종교적 신념을 관철하며 세상의 진화에 기여했지만, 이 땅의 신앙사상이 개척한 류영모의 '영적 공간'에는 온전히 접근할 수 없었다. 스승 류영모와 달리, 함석헌에겐 성령으로 임재한 '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류영모의 우주론적 사유, 가온찍기에서 드러나는 독창적인 존재론과 실존의식. 성령에 대한 심오한 탐구, 사상을 개념화하는 고유언어의 발굴과 해석과 제시, 인간 육신에 대한 단호하고 실천적인 분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류영모의 사상은 아직도 본령이 드러나지 않은 채 묻혀 있는 이 시대 위대한 생각의 중심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참으로 신천옹(信天翁)은 류영모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7-27 08:58:50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6)] 스승과 같은 날 죽고싶었던 함석헌함석헌이 몰래 봤던, 류영모 교장실 "한번은 선생님 방 앞을 슬쩍 지나다보니 방문이 좀 열렸는데, 벽에다 큰 글씨로, (아마 한자가 손바닥보다도 더 크게) "夜靜海濤 三萬里(야정해도 삼만리)"라 써 붙인 것이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손수 쓰신 것으로 아는데, 그때는 나도 왕양명(王陽明)을 읽지 못해 그것이 그의 글인 줄도 몰랐지만,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그것을 쓰셨을까 혼자 생각을 해 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들어가서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1983. 10.18) 함석헌이 1983년에 류영모 스승을 추억하며, 고교시절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가 스승을 존경하며 교장실을 서성거리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그 무렵 수줍음을 많이 탔던 그가, 대자(大字)로 써서 교장실 벽에 붙인 글씨의 내용을 궁금해 하면서도 감히 묻지도 못하는 모습이 눈 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다. 소년 함석헌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저 시를 속시원히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 시는 왕수인(王守仁, 호는 양명(陽明), 1472~1528)이 쓴 '바다 위에 떠서(泛海, 범해)'라는 작품이다. 險夷原不滯胸中(험이원불체흉중) 何異浮雲過太空(하이부운과태공) 夜靜海濤三萬里(야정해도삼만리) 月明飛錫下天風(월명비석하천풍) 험하고 평탄한 것 따위 원래 가슴에 담아두지 않거늘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밤은 고요한데 바다의 파도는 삼만리에 이르고 달은 환한데 고리 쩔렁거리며 날릴듯한 지팡이는 하늘 바람 아래에 있네 호쾌한 기상을 담은 시원스런 시다. 중국이 대륙으로 된 곳인지라 바다여행을 담은 노래가 많지 않기에 드물게 보는 작품이다. 지금 배가 출렁거리고 있어서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인데,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셀프최면'을 걸고 있는 듯한 구절이 인상적이다. 내 본시 죽거나 살거나 별로 개의치 않거늘 뭘 이 정도의 파도에 겁을 낸단 말인가? 하는 기분의 두 구절을 뽑은 뒤, 눈앞 전후좌우로 펼쳐진 웅대한 풍경을 그려놓았다. 사방엔 뭍도 섬도 보이지 않는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 있고, 큰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데 지팡이(석장,錫杖)에 붙은 쇠고리가 쩔렁거릴 만큼 바람이 세차다. 다석 류영모는 이 시 중에서, 위태로운 상황들을 다 걷어내고 달빛 아래 바다 삼만리를 둘러보는 호연지기의 구절을 뽑아 교장실에 붙여놓았다. 당시 오산학교의 분위기와 스승들이 후세에게 기대를 걸며 나라의 꿈을 키운 자취를 엿볼 수 있다. 비록 밤길을 바다 위에 출렁거리고 있지만, 언젠가 날이 밝고 우리의 땅에 닿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이 글귀를 썼으리라. 함석헌은 그 염원과 기운에 대해선 알지 못했지만 그 글씨의 기운과 류영모의 고결한 풍모에 감동한 셈이다. 함석헌의 '소롯길' 지나면, 류영모의 산 류영모가 그의 사상을 가장 깊고 오래 교유한 두 사람을 들라면, 김교신과 함석헌일 것이다. 류영모는 1890년이고 김교신과 함석헌은 1901년생이다. 류영모와 김교신은 1927년부터 1945년까지 18년을 함께 했고, 류영모와 함석헌은 1921년부터 1957년까지 36년간 사제(師弟)의 정을 나눴다고 할 수 있다. 그 기간으로만 볼 때, 김교신은 단명(短命)으로 일찍 보냈지만 함석헌과는 오랫동안 사상적 동행자로서 깊은 소통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함석헌은,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따르다가 류영모의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무교회주의의 '십자가 신앙'을 벗고, 주체적 자율적 신앙과 문명적 비전을 결합한 독창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의 길을 걷는다. 함석헌을 이해하는 것은, 류영모에 닿는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소롯길을 만나는 것과 같다. 36년간 서로 오가며 반들반들하게 닦인 길이 거기 놓여있다. 2008년 서울서 열린 세계철학대회에서 근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소개된 두 사람은 류영모와 함석헌이다. 함석헌은 다석1주기에 다석선생의 집에서 가진 추모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족하지만 이만큼 된 것도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류영모와 함석헌은 같은 날(3월 13일) 태어났고 하루 차이(류 2월 3일, 함 2월 4일)로 돌아갔다. 박재순(함석헌의 제자)에 의하면, 함석헌은 운명하기 전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스승 류영모가 돌아간 날과 날짜를 맞추려는 듯이 말이다. 1923년 함석헌은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 입시준비를 위해 정칙(正則)학교에 다니던 9월 관동대지진으로 도쿄의 3분의 2가 불타버렸다. 일본은 민심을 돌리는 책동으로 '조선인이 폭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후 조선인 6000명이 학살되었다. 함석헌은 일본경찰에 이미 체포되어 유치장에 있는 바람에 죽음을 면했다. 일본 당국이 일본의 살귀(殺鬼)들을 막아 조선인인 그를 살려준 셈이었다. 이 구사일생(九死一生)은 그에게 삶과 죽음을 더욱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교육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찾아간 교회에서 김교신을 만났고, 류영모가 언급한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참석한다. 함석헌은 이 때, 자신이 조선에서 할 일이 '참된 기독교와 성경읽기'에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역사교사가 됐다. 그런데 역사를 가르치면서 부끄러움이 일었다. 한국역사가 '비참과 수치의 연속'이어서 뭘 가르쳐야할지 난감했다. 고심 끝에 역사교육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 민족을 버려선 안되고, 둘째 하느님을 버려선 안되고, 셋째 과학과 세계국가주의를 버려선 안된다. 마지막 항목은 영국 역사가 H.G. 웰즈(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의 <세계사개요>(The Outline of History)를 읽은 뒤의 선택이었다. 이후 김교신이 내는 '성서조선'에,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한다. 이 글은 나중에 다시 정리되어 <뜻으로 본 조선역사>라는 개정판으로 나온다. 함석헌의 이 글은, '성서에서 고난을 받는 메시아가 영광의 메시아라면, 조선의 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없나'하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는 한국역사의 핵심을 '고난'으로 보는 역사관을 세운 것이다. 우치무라에게 배운 '무교회' 오산학교에 있으면서, 그의 무교회주의 신앙에도 새로운 자각이 생겨났다. 무교회가 하나의 교파로 굳어가는 점에 대해 우려가 생겼고, 우치무라의 십자가 대속신앙(인류의 죄를 속죄하려 예수가 죽음을 맞은 십자가 상징을 경배하는 신앙)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류영모의 길로 조심스럽게 방향을 바꾼 셈이다. 그는 그러나 신앙교육을 통해 농촌과 겨레를 살려내고자 하는 애국적 신념은 꾸준히 유지했다. 1938년 봄 함석헌은 학교를 간섭하는 식민지 정책에 맞서려다가 한계를 느끼고 오산학교를 떠난다. 그는 "눈물로 교문을 나왔다"고 술회한다. 1940년 3월 김두혁이 평양 근교에 설립한 덴마크식 송산농사학원을 맡게 되었다. 그해 8월 일본 도쿄에서 터진 계우회(鷄友會, 도쿄대 농학부의 조선인 학생 독립운동 단체) 사건으로 김두혁이 검거되면서 함석헌도 함께 구속됐다. 송산학원에는 양정고보 출신 박동호도 함께 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함석헌이 구속된 뒤 학원을 운영할 수 없어서 서울로 왔다. 박동호는 김교신의 집에 머물면서 구기리의 류영모를 찾았다. 함석헌의 근황을 들은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 하는 기도는 영원한 생명만 구해야지 세상 일을 어찌해 달라는 건 참기도가 못됩니다. 하지만 함석헌이 구속되었다 하니 하느님께 기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김교신은 이 일을 박동호로부터 전해듣고 일기에 적어놓았다. "경애하는 함석헌형이 일을 당한 뒤로 매일 몇 차례 함형을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기도 안 할 수 없으니 하노라고 하였다 한다." 함석헌은 1년간의 투옥 중에 부친상을 당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다시 1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감옥살이를 통해 얻은 것이 많았다고 했다. 특히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깨달음을 만난 것도 감옥 속에서였다. 해방 뒤 함석헌은 임시자치위원장과 평안북도 교육부장을 맡기도 했다. 신의주 학생시위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감옥에 두 차례 투옥된 뒤 그는 1947년 3월 17일 북한을 탈출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함석헌의 월남을 가장 반긴 사람은 류영모였다. 생사조차 몰랐던 제자의 귀환이었다. 이후 함석헌은 류영모의 YMCA 연경(硏經,성경연구) 강의를 빠짐 없이 들었다. "매주 스승님만큼 정신적인 생산을 많이 하는 이는 본 적 없습니다." 함석헌은 혀를 내둘렀다. 류영모의 '노자'와 '중용' 강의는 구기동 집에서 했는데, 함석헌은 오류동에서 구기동까지 걸었다. 김흥호, 이철우도 구기동 강의에 참여했다. 서영훈(1920~2017)이 청소년 적십자 국장으로 있을 때인 1953년, YMCA에서 하는 류영모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 함석헌을 존경하여 그를 찾아왔다가 류영모 강의를 듣게 되었다. 서영훈이 묘사해놓은 그때의 장면이 생생하다. "그때 한국전쟁에서 막 수복한 뒤라 가건물인 조그마한 판잣집 방에 10여명이 앉아있었습니다. 가운데 앞에서 말씀하시는 선생님보다 더 긴 흰 수염을 기른 제자 함석헌 선생이 류영모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나도 함선생 옆자리에 앉아 류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첫 인상이 류선생님 말씀은 지식이 아니라 영감(靈感)에서 나오는 소리인 것을 직감했습니다. 높은 경지에 이르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선생님의 선생님이 되실 만하였지요."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7-20 09:53:4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5)] 증오와 질투로 천국 만들겠다고?주민들이 만장일치로 류영모 선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 일본천황이 라디오방송에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한 뒤, 일본인들이 사라졌다. 한반도에 그야말로 쥐 죽은 듯한 고요가 일순간에 찾아왔다. 조선총독부가 사라지니 나라의 행정공백도 함께 찾아왔다. 마치 옛 부족사회로 돌아간 듯 주민들이 나서서 자치기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면사무소에도 면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면민들이 모였다. 그날 면사무소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만장일치로 류영모를 자치위원장으로 뽑은 것이다. 구기리에 들어와 은거생활을 한 지 10년, 55세의 류영모는 그 일대 마을에서 가장 신망이 높은 인물이 되어 있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 성서조선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 그리고 오래전 은평면협의회에서 2년간 일한 경험도 있는 사람. 그의 정신적 면모까지 주민들이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경륜과 인품을 갖춘 이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류영모는 오롯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세상 권력의 일을 앞장서 맡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를 뽑아준 주민들에게 자치위원장직을 고사(固辭)했다. 면협의회는 결렬되어 행정 공백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음을 돌렸다. 이걸 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인(仁)으로 여기기로 했다. 류영모는 마침내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당장 주민들의 양식 배급과 도둑 경비가 급했다. "자, 청년들은 일본군인들이 두고간 총들을 모두 수거해 오시오. 오늘밤부터 마을 순찰을 돌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뒤 일본인 경찰관이 은평면사무소로 불쑥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는 면사무소에 있는 모든 무기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류영모가 담담히 일본인의 권총 총구 앞에 나섰다. "왜 이리 무례한 행동을 하시오. 권총을 거두시오. 지금 면에서 하는 일은, 치안을 수립하는 것이오. 치안이 수립되어야 당신들이 무사히 돌아가도록 보호를 해줄 수 있지 않겠소. 지금에 와서 굳이 남아있는 일본인을 공격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소. 헛된 걱정 말고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시오." 일본인 경관은 그 말을 듣고는 권총을 다시 옷속에 집어넣고 "오해해서 미안하오"라고 말하면서 물러났다. 총 들고 들이닥친 일본경관에게 한 말 은평면 관할인 수색 지역에 일본군 7사단 군창고가 있었다. 8월 2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9월 7일 미군 24사단이 서울 용산에 주둔한다. 이 사단의 중대병력이 은평면으로 배치됐다. 일본군 사단의 군창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은평면사무소에 온 미군들은, 뜻밖에 영어가 제법 유창한 사람을 만나 반가워했다. 류영모의 맏아들 류의상이었다. 그는 서울 제2고보를 졸업한 뒤 집에서 농사를 돕고 있었다. 미군들은 류의상을 용산본부로 데리고 갔다. 이틀간 의상은 그곳에서 통역을 했다. 이후 미군 군속이 되어 일했고 이어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류의상은 영국잡지 '인카운터(Encounter)'에 황순원 소설 '소나기'를 영역(英譯) 응모해 인도인과 함께 '번역 최우수상'을 공동수상하기도 했고,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영역해 미국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해방 공간의 이 경험들은, 국가질서의 기초를 새로 놓으며 이 나라에 대한 사명감을 새겨보는 기회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동네일을 볼 마을 이장감이 많아야 나라가 바로 됩니다. 온나라 이장들이 다 훌륭하면 나라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대들보감을 찾는다고 하는데, 서까래도 있어야 지붕을 덮지요. 대들보 쪼개서 서까래 만들겠습니까." 지역 곳곳의 실핏줄을 이루는 행정에서 '인재'가 살아있어야 국가가 건강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몹시 유효하지 않은가. 어느 날 면 자치위의 상위기구인 고양군 자치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연락이 왔다. 은평면 자치위원장이었던 류영모는 그 자리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군 자치위원회가 아니라 군 인민위원회라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참여한 이들이 서로를 '동무'라고 부르고 있었다. 공산당원들이 위원회에 대거 참여한 것이다. 류영모는, 그날 바로 면 자치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해방 공간은 어느새 공산주의자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다. 항복을 앞둔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의 안전 귀환을 위해 송진우에게 총독부의 역할을 대행해달라고 당부했다. 송진우는 거절했다. 그러자 여운형에게 부탁을 했다. 여운형은 그 일을 인수받아 8월 15일 12시 일본천황의 항복 방송이 있은 직후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자신이 위원장을 맡았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사상에 우호적이었다. 1922년 1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인민대회에 참석한 바도 있다. 그의 주위엔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지시를 받는 이강국, 최용달, 김세용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참모로 있었다. 이들은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는 9월 7일보다 하루 앞선 6일 밤에 경기여고 강당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9월 14일 인민공화국 내각을 발표한다. 이후, 전국 각지의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그는 왜 공산주의에 대해 단호했나 미군정이 들어선 뒤 인민위원회를 다시 몰아냈다. 공산당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이 혼란스런 정국에서 류영모는 단호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오직 신을 우러르며 은둔적 삶을 살고자 하였고 투철한 기독사상을 지닌 그가, 저 이념에 대해 유독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근현대에 들어와 중요한 개념이 된 '공산주의'는, 현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대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말한다. 마르크스는 프랑스혁명의 자유와 평등이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조국 독일에 비해 프랑스는 당시 사상선진국이었다. 그가 자본가계급(부르주아지) 대신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트)을 혁명의 주체로 내세운 것은, 경제적으로 낙후한 독일의 상황을 고려한 결과였다. 인간성의 상실태(喪失態)인 노동자들의 자기회복, 즉 '해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물질생산력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역사적 유물론). 한 시대의 생산관계는 그 시대의 생산력에 의해 결정된다. 생산관계와 생산력은 사회의 토대이며, 정치, 법률, 사상, 종교, 문화는 이 경제토대 위에 구축된 상부구조로 보았다. 그런데 생산력은 과학기술 발달에 의해 발전변화한다. 생산력은 새로워졌는데, 생산관계는 예전의 것이 유지되고 있을 때 '모순'이 생겨나고, 계급 간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난다. 이 결과 새로운 생산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그 위의 상부구조까지 바꾼다고 설명했다. 류영모는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이 스며들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물질'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 물음이고, 또 하나는 '국가'란 무엇인가(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또다른 근본 물음을 품고 있다. 서구에서 거의 동시에 들어온 근대의 두 이념체제는 모두, '물질'이 가장 중요하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물질이 이토록 중요시된 까닭은, 획기적인 기술적 진보로 이뤄진 근대문명과 그것에 대한 열광이 인간의 가치체계 전체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류영모는 당연히, 서구가 제시하고 있는 '물질 중심'의 가치로 세상을 경영하겠다는 발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물질은 인간이 진실로 추구해야 할 '정신적인 가치'를 폄하하고 인간의 가치체계를 왜곡시키는 '경계해야 할 욕망의 대상'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와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 무엇인가 공통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이름 부르는 이가, 신이 일러준 말씀을 그대로 하면 공산주의가 필요했겠습니까." 류영모의 이 말은, 원시 공산주의 사상을 환기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신의 것이므로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써야 한다고 여겼다. 물질에 대해 지나친 의미부여와 의존을 경계해 사유재산을 배격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물질(노동의 산물)의 충분한 소유를 인간 삶의 최대 목표로 전제하고,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토대만으로 사회의 양상과 변화를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랑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빵 이상의 것이 있다. 인생에는 반드시 뜻이 있다. 진리가 그것이고 하느님이 그것이다. 물질을 모으는 것을 그만두고 마음을 비워두라. 그래야 하느님이 들어오신다." 류영모가 사사(師事)한 톨스토이는 훨씬 더 단호하게 말한다. "사회주의자에게는 사실상 사랑이 없다. 다만 지배자에 대하여 증오만 느끼고 있으며, 유복한 사람의 삶을 넌지시 질투한다. 배설물에 모여드는 파리떼의 욕망이다. 사회주의가 승리한다면 세상은 살벌해질 수밖에 없다." 이 이념의 경우, 오직 인간 행복과 삶의 만족을 계량하는 저울로, 물질적 충족만을 내세웠다는 점 또한 류영모로서는 가납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물질은, 인간 삶의 본질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이 이념은 다른 계급에 대한 증오와 그것을 넘어뜨리는 혁명을 중심으로, 평등한 사회로의 변혁을 설계하고 있었다. 증오나 분노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만족? 류영모는 이 대목에서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근대에 정립되는 '국가'라는 개념은, 경제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는 물질의 공동생산과 공평분배에 초점을 맞췄고,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을 활용한 생산 경쟁과 시장을 통한 소비가 중심이 되는 자율적 분배를 꿈꾸었다. 국가가 생산과 분배의 관리자가 되는 공산주의는 통제경제 혹은 관리경제를 선택했고, 자본주의는 사기업의 경쟁생산시스템과 시장경제를 택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비해 '국가'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류영모는 '국가'의 권력이 커질수록, 그 해악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 분명히 밝혔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태복음 5:38, 39)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신의 단호한 이 말은, 국가 권력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담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국가는 때로 전쟁을 수행하고, 법을 제정하여 '악한 자'에게 형벌을 주고, 인간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행사해왔기에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예수의 말을 근본적으로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필요악'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국가의 '악행'에 해당하는 권력적 역할을 파격적으로 증대하여 '기층(基層)계급의 이익'을 확대하겠다고 나선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선 더더욱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류영모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사람들은 세상을 잘 다스려야 한다, 나라를 잘해나가야 한다고 한다. 신에게 가는 것을 잘해야지 그걸 버린 채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건 헛일이다. 예수가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 18:36)라고 한 것보다 더한 국가 부정 사상은 없을 것이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마태오 10:5~6)고 한 예수만큼 나라를 사랑한 이도 없다." 예수가 말한 나라는 천국이며, 지상의 나라는 육신을 잠시 기탁한 곳에 불과하다. 국가행위가 모두 '성경'을 위반한 인간행위일 수 있다는 근본문제에 대해 류영모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식민지의 고통과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일어선 이 나라에 대해서는 예수가 수난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보낸 시선처럼, 깊은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가 나란 줄 알면 잘 살 나라 참 좋은 나라 누가 내라 내가 내지 우리나라 좋은 나라 등걸님(단군) 우리 한울(하늘)로 열어놓으신(開天) 좋은 나라 류영모의 시조, '우리나라' '나라'라는 말이 '나'와 비슷한 것에 주목한 시다. 개인의 주체적인 자율종교를 역설한 류영모는 국민인 내가 '나라'의 마음으로 행동하면 이 나라가 잘살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 행에서 나와 나라의 통합뿐 아니라, 나와 나라와 종교의 통합까지 천명을 하고 있다. 개천(開天)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말한다. 하늘을 연 것은 하느님과 '나'가 서로 만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라'가 생겨났으니, 나라와 신앙이 하나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7-13 08:42:02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4)] 신의 저녁콜이 왔다, 다석(多夕)의 비밀낮은 왜 낮고 밤은 왜 높은가 이 시를 읽으면, 류영모와 김흥호가 나아간 길이 보이는 듯하다. 삶은 단단(斷斷)했고 신을 향한 수행은 통통(通通)했다. 육신 안의 짐승을 향해선 '단단'했고, 생각 안의 영성을 향해선 '통통'하며 솟나는 경지로 나아간 자취다.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낮은 밝아 세상이 눈에 보여 우리의 생각이 낮아지기 때문에 낮이라고 한다. 밤은 어두워 세상이 물러가고 먼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밤(바람)이라고 한다. 대낮처럼 밝은 게 한없이 좋긴 하지만 그 대신 잊어버리는 것이 많게 된다. 더구나 굉장한 것을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다름이 아니라 얼이신 하느님과의 정신적인 거래를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낮을 좋아하고 밤은 쉬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밤중에 저 깜박이는 별들이 영원(하느님)과 속삭이는 것을 모르고 있다"라고 하였다. 사실 '밤'과 '낮' 같은 한 글자(음절) 낱말은, 어원을 찾기 어렵다. 원시 인간이 처음에 말을 시작했을 때, 본능적으로 선택한 말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특유의 직관으로, 사물이 보이는 '낮'은 많은 것이 시야에 들어오므로 낮아지는 느낌이 있고, 사물이 보이지 않고 시야에는 오로지 천공의 별만 보이는 '밤'은 높게 느껴지며 우러르게 되는, 태초 인류의 태도를 읽어내고 있다. 낮이 되면 현실적인 태도와 행동을 취하던 이들이, 밤이 되면 본성적으로 두려움을 알게 되며 믿음의 우러름이라는 신앙(信仰)의 본령을 접하게 되는 것을 통찰한 말이다. 오히려 후세에 와서, 저 원초적인 정신적 거래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깨우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7-06 10:35:09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2)] 김교신이 죽자, 자신이 죽을 날을 정한 류영모"나도 죽어 쫓아가 다시 볼 수 있을지" 한편 김교신의 부음을 들은 류영모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1945년 4월25일 저녁 오류동에서 통지 오기를 '함흥에 있는 김교신이 별세, 전보 보고'라고. 류영모 본디 함석헌을 통해 김교신을 알았다. 제일 늦게 온 김교신이 오히려 제일 먼저 갔다. 류영모 비록 늦었으나 136개월 지난 즈음에 혹시 가까이 따라붙여 돌아가 서로 볼 수 있을지. 하느님께서 이렇게 생각하게 한다." 류영모가 11년 4개월(136개월) 뒤를 말한 까닭은 그 기간이 함석헌과의 나이 차이이기 때문인데, 세 사람의 운명이 어떤 고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교신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연결할 만큼 류영모에겐 그가 각별했다. 하지만 죽음은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1956년 8월 이후에도 그는 생을 계속 부여받았다. # 다석 한시(漢詩) - '창조시말(創造始末)'(1959 12.1) 衆生無他死刑囚(중생무타사형수) 終身有待執行日(종신유대집행일) 判決宣告虛誕日(판결선고허탄일) 猶豫期間壽夭日(유예기간수요일) <인간창조 경위서> 뭇생명이란 다름 아닌 사형수라네 종신형 살면서 집행일을 기다리네 판결은 헛되이 태어날 때부터 선고됐고 유예기간은 오래 살고 일찍 죽는 날 차이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6-22 10:14:55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1)] 왜 그는 우주인임을 역설했는가................................. ▶ 신은 저녁에 깨고 아침에 주무신다 다석 명상한시(漢詩) - 晝夜(주야, 낮과 밤, 1957.9.18) 初月枕去多晨省(초월침거다신성) 南斗牀來一昏定(남두상래일혼정) 昏定晨省曾缺如(혼정신성증결여) 醉生夢死何頓整(취생몽사하돈정) 초승달 지는 저녁, 베개를 걷으니 늘 새벽 살핌이고 남두성 별들 지는 새벽, 침상을 펴니 그게 저녁자리 펴드림인 것을 저녁자리 펴드리고 새벽 살피건만 역시 뭔가 모자랐구나 취한 생, 꿈같은 죽음에 어찌 정리정돈이 있으리 이 시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이 열쇠말이다. 예기(禮記) 곡례편에 나오는 말이다. 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淸 昏定而晨省(범위인자지례 동온이하청 혼정이신성). 무릇 사람의 자식 되는 예법은 겨울에는 (부모님을)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맑게 해드리는 것인데, 저녁에는 잠자리를 펴드리고 새벽에는 잘 주무셨는지 살피는 일이다. 류영모는 인자(人子)로서 하느님에게 예법을 다하는 일을 생각했다. 하느님에게 어떻게 잠자리를 펴드리고 어떻게 잘 주무셨는지 문안 인사를 올릴 것인가. 신과 일심동체로 살아가는 삶을 꿈꾼 그에게, 이 시는 매일매일 성찰한 하룻밤의 경건을 표현해낸 인상적인 '언어풍경'이다. 하느님을 모시고 자는 잠이란 어떤 것인가. 초승달은 대개 아침 9시에 떠서 저녁 9시에 지는데, 해가 지면 서쪽하늘에서 잠시 보이다가 지는 달이다. 베개를 걷는 것은 일어나는 시각을 뜻한다. 저녁답에 이 달이 지는 무렵이 바로 하느님이 깨어나시는 시각이다. 왜 그러냐 하면 하느님은 암흑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남두성(南斗星) 별빛은 밤새 비치다 새벽 무렵 사라진다. 남두성은 여름밤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궁수자리의 여섯개 별이다.전통신앙에서 북두칠성이 죽음의 별이라면, 남두육성은 생명의 별이라고 한다. 북두칠성의 칠성판에 앉아 생활한 다석이 굳이 남두성을 거론한 것이 우연일까. 죽음의 별을 깔고 앉은 사람이 생명의 별을 지켜보며 신을 생각한다. 어둠에서 영원한 생명을 읽어내는 그의 촉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별이 지키는 새벽이 바로 하느님이 주무실 시각으로 자리를 펴드릴 시간이다. 달이 질 때 일어나셨다가 별이 질 때 잠자리에 드는 분. 그러니까 하느님이야 말로 '암흑세계'에 활동하시는 분이 아닌가. 그 말을 저렇게 아름답게 그려놓은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과 주야가 바뀐 분이라는 통찰. 이건 류영모만이 다다를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그 뒤에 이렇게 읊는다. 그러하시니, 인간이 새벽기도를 하고 저녁기도를 하지만 뭔가 허전한 게 있지 않았던가. 신은 저녁에 깨시고 새벽에 주무시는데, 인간은 엉뚱하게 때 아닌 메시지를 보내고 있으니 제대로 통한 것이 맞겠는가. 인간의 효도 예법인 혼정신성(昏定晨省)이 신에게 늘 생뚱맞지 않겠는가. 그런 깨달음을 얻은 뒤, 그는 취생몽사하돈정(醉生夢死何頓整)이라며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효도'라는 것이 형편 없음을 일갈한다. '살아있는 것은 취한 것이요 죽은 것은 꿈꾸는 것'이란 말이 취생몽사다. 살아있어도 제 정신이 아니요, 죽어도 제 정신이 아닌 상태다. 살아있어도 제 정신이 아닌 까닭은, 제 삶에 골몰하느라 신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요, 죽어도 제 정신이 아닌 것은 죽어서 닿아야 할 것이 신이건만 엉뚱한 것을 꿈꾸기 때문이다. 살아도 제대로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제대로 죽은 것이 아닌 어리석은 존재다. 그런 취생몽사로 살고 죽으니 어찌 생각의 정돈이나 믿음의 정돈이나 경배(敬拜)의 정돈이 있겠는가. 삶에서 죽음을 볼 줄 알고, 죽음에서 삶을 볼 줄 아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이르는 효도예법이요 진정한 '혼정신성'이다. 밤과 낮이 바뀐 것만 알아도, 하느님 만날 일이 보인다는 걸 류영모는 시 한편에 또렷이 밝혀놓았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6-15 15:38:5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0)]금성을 맨눈으로 세번이나 본 사람꽃송이보다, 꽃 위의 허공이 아름답다 ◆ 다석 한시(漢詩) '공색일여(空色一如) - 허공과 꽃은 같다' 物色不得一色物(물색부득일색물) 꽃빛은 그 빛을 영원히 갖지는 못하지 空虛蔑以加虛空(공허멸이가허공) 허공을 비웃다가 스스로도 허공으로 간다네 諛有侮無後天痴(유유모무후천치) 뵈는 것만 좋아하고 안보이는 건 비웃으니 이 세상 천치로다 同空異色本地工(동공이색본지공) 허공에서 나와 꽃빛 각각 나뉜 것이 이 세상의 꾸밈이라 花容虛廓天啓示(화용허곽천계시) 꽃송이 위의 허공 둘레엔 하느님이 있다네 花語虛風人妄動(화어허풍인망동) 꽃을 말하며 헛된 소리만 말하니 사람의 헛짓 服膺體面容納止(복응체면용납지) 가슴과 눈과 얼굴로 본 것으로 말하지 말게 直內方外中空公(직내방외중공공) 안으로 진실하고 바깥으로 반듯한 건 허공 속의 님뿐 (1956.12.27) 이 시는 부처가 말한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묘리를 류영모의 허공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허공을 우습게 여기지만, 그건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에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천치 중에서 후천의 천치 생각이라는 얘기다. '꽃송이와 꽃둘레'라는 개념으로 전체 시를 풀어보았다. 조금 더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物色不得一色物(물색부득일색물) - 사물의 빛은 단 하나의 빛을 지닌 사물도 지니지 못한다네. (예를 들어 단풍잎은 곧 그 단풍빛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바래진다. 아름다운 여인은 곧 늙어가는 여인이 된다. 왜 그럴까. 그 조건을 지킬 수 있던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얻을 수 있는 물색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묘미는 '물색(物色)'에 있다. 물색은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물의 빛에서 물색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한 빛깔도 없다. 저승에 가져갈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꼭 같다.) ▶空虛蔑以加虛空(공허멸이가허공) - 지금 사물의 빛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텅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을 경멸하지. (그렇게 경멸함으로써 그 자신이 아무것도 없이 텅빈 곳에 들어간다(한 점 허공을 보탠다). 인간은, 허공엔 아무것도 없다고 경멸한다. 그러나 죽으면 허공 이외에 어디로 가겠는가. 제 자신인 허공을 경멸하는 것이다.) ▶諛有侮無後天痴(유유모무후천치) - 눈에 보이는 건 좋다고 감탄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업신여기지. 세상살이에 눈이 팔리면 허공 따윈 믿지 않지. 허공이 선천(先天)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후천(後天)의 바보들아. ▶ 同空異色本地工(동공이색본지공) - 같은 허공에서 나서 색으로 갈라진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생김새라네 ▶花容虛廓天啓示(화용허곽천계시) - 꽃송이를 보지 말고, 꽃송이를 둘러싼 허공을 보게. 하늘의 뜻은 거기에 있는데 ▶花語虛風人妄動(화어허풍인망동) - 꽃을 말하면서 꽃둘레의 허공은 볼 줄 몰라 헛소리만 하니 사람들의 어리석은 짓이라네. ▶服膺體面容納止(복응체면용납지) - "꽃향기가 좋다"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복응), "꽃빛이 좋다" 면목으로 실질을 삼는 것(체면), "꽃이 싱싱하다" 얼굴로 받아들이는 것(용납)은 모두 색(色)의 행동이니 그것을 그만두면 ▶直內方外中空公(직내방외중공공) - 꽃의 진정한 상태를 볼 수 있고 꽃의 바깥을 제대로 알 수 있으니 허공 한복판의 신을 볼 수 있으리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6-08 15:00:42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9)] "마땅히 일본도 항복할 것" 류영모 풍자시조"류영모, 너는 한국의 독립을 바라는가" 류영모를 검거한 일본 형사들은, 그를 집중적으로 취조했다. 우선 '독립운동 지하단체'를 조직했느냐고 캐물었다. 자신들이 짜맞춰놓은 각본에 들어오기를 바란 것이다. "조직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기독교의 조직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어서 교회에 나가던 것을 그만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조직을 만들려고 하겠는가. 김교신도 무교회 운동을 하고 있지만, 나는 그 집회조차도 나가지 않을 만큼 조직을 멀리하는 사람인데 무슨 지하단체 조직이란 말인가." "김교신의 글에 독립운동 일을 하던 이승훈과의 접선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당신이 김교신의 스승이라 할 수 있으니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게 아닌가?" "안국동에서 김교신이 이승훈을 만난 일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증거도 없는 추측을 이유로 삼아 나를 강박하는 일이 무슨 수사인가." 그들의 말이 궁해질 때쯤, 형사는 고문기구 앞으로 류영모를 끌고 갔다. 그 기구들의 사용방법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고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한다. 류영모는 고문기구를 바라보며, 이 형틀에서 고통 받고 죽어간 우리 동포들을 위해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공중변소가 일본만큼 깨끗해지면 독립할 것" 그 무렵 불쑥 일본 형사가 질문을 던졌다. "너는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있는가?" '예'라고 대답하면 죄의 올가미를 씌울 것이고, '아니오'라고 하면 우리 겨레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일 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죄를 범하는 상황이 된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조선의 사람이 되어 어찌 이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선의 공중변소를 보라. 참담하다. 저 변소가 최소한 일본의 공중변소만큼 깨끗하게 되는 날엔 독립의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이 말에 형사는 더 이상 추궁할 말이 없어 취조를 진행하지 못했다. 류영모의 '공중변소론'을 전해 들은 송두용(宋斗用)은 그 말이 지니고 있는 깊은 뜻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후 그는 오류역에 딸린 공중변소를 날마다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독립운동은 공중변소를 청소하여 일본을 이기는 일이었다. 어디가 감옥이냐, 이 세계가 큰 감옥이다 부인 김효정은 성서조선 사건 이후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를 바삐 오갔다. 그때의 일을 이렇게 말했다. "함석헌 선생 부인은 고향인 신의주에 있었는지라 서울에 오지 못했고 김교신, 송두용 선배 부인과 함께 종로와 서대문을 오가며 면회를 신청했고 사식(私食)을 넣었지요. 내가 남편과 아들 두 사람을 면회신청하면 간수가 이렇게 말했지요. '어쩌다가 남편과 아들을 모두, 이런 나쁜 사람들을 두었소? 참 딱하오.' 나를 조롱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이 모두 큰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서 오히려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이 사건은 처음에 악질로 이름난 구로다(黑田) 검사가 맡았다. 초기에 혹독한 수사는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담당 검사가 바뀐다. 새로 맡은 검사는 도쿄제대 출신의 후지키(藤木)였다. 후지키는 김교신을 취조하며 이렇게 물었다. "만주사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건 마치 일본이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것과 다름없다. 섣부른 짓을 저지른 것이다. 타고 가도 결국 물려 죽고 내려도 죽고 마는 딱한 사정에 놓인 것이다." 거침없는 김교신의 대답에, 후지키는 분노하는 대신 오히려 침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검사는 증거물로 제출되었던 성서조선을 꼼꼼히 읽고 이들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글들을 읽으면서 이들에 대해 일정하게 공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조서를 넘기면서 그는 "당신들 때문에 공부 많이 하였소"라고 말했고 "기독교가 좋은 종교인 줄 처음 알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후지키는 함석헌에게 조선역사가 고난의 역사라면 세계의 역사 모두가 고난의 역사 아니냐면서, 일본의 역사를 한번 기술해 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류달영은 일본인 간수의 승진시험을 돕기 위해 개인교사 노릇을 해주기도 한다. 일본인들이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제로부터 정당한 대우만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일부의 그런 태도가 이채롭기에 기록으로 남은 셈이다. 실상은 그들에게 호통을 친 어느 일본경찰의 말 속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지금껏 잡은 조선인 중에 가장 악질 부류다. 종교의 허울을 쓰고 민족정신을 심어서 500년 뒤에라도 독립을 이룩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자들이다." 저 500년이란 말 속에 들어 있는 시간의 감옥에 숨이 콱 막힌다. 그만큼 절망적인 시대였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욕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위대한 힘'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류영모는 고려 500년과 조선 500년도 망했는데, 너희라고 망하지 않을 것 같으냐며 시를 써놓지 않았던가. 장지연의 감방에 머물렀던 57일 류영모는 구속수감 57일 만인 1942년 5월 25일 석방된다. 그가 머물렀던 서대문 형무소 미결수 감방은 위암 장지연(張志淵·1864~1921)이 25일간 머물렀던 곳이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 목놓아 통곡하노라)'을 외쳤던 이 땅의 자존심이었던 그를, 류영모는 15세의 소년 시절에 접했을 것이다. 장지연이 나라를 생각하며 시대를 통분했을 그 자리에서, 궤좌로 앉은 류영모가 사상적인 도약을 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었을까. 이 형무소는 다만 좁은 감옥이며 세상 모두가 감옥이라는 인식이다. "집이라는 것이 감옥입니다. 몸이라는 것도 감옥입니다. 예수와 석가가 가정에 갇혀 살았습니까. 하느님의 속인 무한대에서 살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은 집이 없습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일본 시인 다쿠보쿠(啄木)의 시가 떠올랐다. "사람마다 집을 가졌다는 설움이여 마치 죽은 사람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듯 모두가 자기 집으로 들어가고 있다" 류영모는 감방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옥살이를 하다 보니 <오는 이 섭섭히 맞으며, 가는 이 반기네>란 말을 쓰더군요. 감옥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감정이겠지만,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오는 이를 섭섭히 맞고, 신에게로 돌아가는 일을 반긴다'는 뜻이 되지요. 이 세상이 큰 감옥인 만큼 그런 마음을 지니는 것을 배워갈 만합니다." 그는 귀가하자마자 집의 뜨락에 있는 돌에다 '수(囚, 감옥 사는 사람)' 한 글자를 새겨놓았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6-03 09:05:54
- 황석영 “한국문학에 빠져 있었던 산업노동자 삶 다뤘다”황석영 작가가 2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에서 열린 신작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문학에 산업 노동자를 정면으로 다룬 장편소설이 없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빠져있었다. 그것을 채워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장 황석영이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쓴 이유는 분명했다. 한국 근현대문학을 돌아봤을 때 산업 노동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황석영은 2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창비서교빌딩에서 ‘철도원 삼대’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철도원 삼대’는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고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실감나게 다룬 작품이다. 초판 1만부가 출고된 지 1주일도 안 돼 모두 판매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이 소설은 이백만·이일철·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오늘날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이백만의 증손이자 공장 노동자인 이진오의 이야기가 큰 축을 이룬다. 아파트 16층 높이 정도 되는 45m의 발전소 굴뚝 위에 올라가야만 했던 이진오의 현재를 시작으로 장편소설이 펼쳐진다. 황 작가는 “굴뚝은 지상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중간 지점이다. 일상이 멈춰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상상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며 “삼대의 이야기를 4대 후손인 이진오가 회상하는 형식으로 구성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리얼리즘의 세계를 확장해서 쓸려는 노력을 하면서 형식적인 실험도 했다. 예로부터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인 민담의 형식을 빌렸다. ‘철도원 삼대’가 근현대문학에서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철도원 삼대’라는 제목은 자연스럽게 염상섭의 ‘삼대’를 연상시킨다. 한기욱 문학평론가는 “염상섭의 ‘삼대’가 구한말에서 자본주의의 등장까지를 펼쳐 보였다면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는 일제강점기와 분단의 역사, 현재의 노동운동까지를 다뤘다. 이 두 작품을 함께 읽는 데서 한국문학의 근현대가 완성된다”고 평했다. 황 작가는 “염상섭이 ‘삼대’를 통해 식민지 부르주아를 나는 ‘철도원 삼대’를 통해 산업 노동자를 다뤘다. 한국 문학사에서 연결되는 두 작품이다”고 말했다. ‘철도원 삼대’는 구상부터 집필까지 30년이 걸린 작가 필생의 역작이다. 1989년 방북 때 평양백화점에서 만난 ‘아버지뻘’ 부지배인과의 대화가 구상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서울 영등포가 고향이라는 공통점, 그리고 같은 추억을 갖고 있었다. 그와 술잔을 나누며 5~6시간동안 나눈 이야기는 무척 감동적이었다. 황 작가는 이를 소설로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620쪽의 장편 소설을 막 펴낸 황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바로 다음 작품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른과 어린아이가 함께 볼 수 있는 ‘철학동화’다. 어린 성자가 사물에 대해서 깨닫기 시작하는 과정을 그릴 예정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도 관심이 크다. 그는 “코로나19가 ‘너희 잘 살았냐?’ ‘여태까지 잘 해온거야?’라는 질문을 하는 것 같다”며 “중요한 화두가 말년에 생겼다. 운명적으로 시대 변화와 같이 가고 있다. 탈 인간 중심주의와 생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작품 활동을 하려고 한다. ‘장길산‘을 쓸 때처럼 새로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설명했다. 1943년생인 거장의 심장은 젊은이들처럼 다시 빠르게 뛰고 있다. 그는 “2017년 자전적인 ‘수인’을 쓴 후 간이나 쓸개 같은 내장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이제 할 만큼 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작가는 은퇴 기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작가가 세상에 가진 책무이기도 하다. 기운이 남아 있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써야 한다. 계속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2020-06-02 15:25:3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8)] 일본의 종교탄압 '개구리를 애도함' 필화사건◆다석의 명상(冥想)한시 - 새벽마음 欲明未明晨省心(욕명미명신성심) 欲定未定每時局(욕정미정매시국) 欲平未平當世人(욕평미평당세인) 欲和未和臨天國(욕화미화임천국) 밝아질듯 말듯 새벽의 마음이로다 뚜렷해질듯 말듯 모든 때가 그렇구나 담담해질듯 말듯 사람 일이 흔히 그렇지만 고요해질듯 말듯 하니 천국이 가깝구나 새벽의 어원은 '새밝'이다. '새'는 새로운 것이란 뜻이지만 원래 동쪽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샛별(동쪽별·금성), 샛바람(동풍)과 같은 말에 그 쓰임이 남아 있다. '벽'은 밝다(明)는 우리말(밝)에서 왔는데 ,한자어 '벽(闢, 연다는 의미)'으로 차음하여 풀이하기도 한다. '동(東)이 튼다'는 말은 새벽 숲을 뚫고 햇살이 비치는 장면을 가리키는 말로, 동쪽이 밝아온다는 '새벽'이란 의미와 맞춤으로 일치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벽은 바로 깨우침의 '경계'이다. 류영모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궤좌(跪坐, 무릎꿇기)로 앉았다. 하늘 아래 꿇어앉은 사람으로, 가만히 명상에 드는 일. 그게 새벽마음이다. 새벽은 기나긴 밤의 끝이지만 아직도 채 다 밝아지지 않아 마음으로는 긴가민가하게 되는 때이다. 정말 새벽이 오긴 오는 건가 하는 의심이 홑겹으로나마 남아 있는 것도 그때이다. 어둠이 걷히고 밝아지는 순간은 깨달음의 순간이며 '파사(破私, 나를 깸)'의 찰나다. 아직은 조금 어둡지만 모든 것이 명료해져가는 타이밍이다. 세상 문제에 대해 초연해지고 담담해지는 일도 그렇다. 온갖 인연과 탐진치를 벗어나 완전한 평화를 얻기 직전의 경계에 있다. 일견 아리송하고 답답함이 남았지만 이 경계야말로 천국이 다가왔음을 말해주는 징표가 아니랴? 류영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절연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경계에 은거하며 신을 향해 나아간 사람이다. 영혼의 새벽은 어떻게 오는가. 미명(未明)과 광명 사이 미묘한 순간에 스민다. 한 점의 남은 미혹을 다 뚫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사람의 찰나를 그려놓은 놀라운 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6-01 13:58:57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7)]동양사상도 신의 품에 있다, 기독사상 혁신가노자의 '도(道)'와 조물주, 그리고 영생 노자 도덕경 속에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노자는 '도(道)'를 말했으며, 도는 하느님에 근접한 개념이다. 노자는 무극(無極)의 하느님을 가르치고 천도(天道)의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 주었다. 도는 도덕경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으로, 우주와 인간이 공유하는 큰 진리를 의미한다. 도가 행해지는 방식은 무위자연이다. 아무것도 간섭하여 행함이 없이 스스로 이뤄지는 자연계의 작동 원리다. 무위자연은 바로 조물주의 원칙이다. 신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했다는 창조론에 바탕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노자의 사유와 긴밀하게 부합하는 점이 있다. 류영모는 지모(地母)론을 밝힌 바 있다. 죽음의 과정은 지구가 나를 하늘로 출산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영국 과학자 블록의 '가이아가설'과도 닮아 있음을 이미 지적했다. 도덕경은 조물주의 여성성을 부각하면서 생산의 수고를 하는 존재의 끝없는 겸손에 대해 주목하기도 한다. 이런 성찰은 기독교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영생의 약속과도 닮은 맥락을 제공하고 있다. 류영모는 20세 때부터 도덕경을 즐겨 읽었고 69세 때 우리말로 완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노자사상을 육신의 영생과 결부시킨 도사와 방사(方士)들의 어리석음은 반면교사로 삼았다. 노자는 "생물은 한창 때부터 늙어가니 이것은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닌 것은 오래 갈 수 없다(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도덕경 30장)고 말한 바 있다. 노자는 이렇게 갈파했지만 뒷사람들은 헤아리지 못했다. 몸뚱이가 영생불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은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다. 서양의 연금술이나 동양의 연단술 (煉丹術)이 모두 그런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구 기독교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육신 부활'과 '육신 영생'의 기대감 또한 물장즉로(物壯則老)를 인정하지 않는 헛된 꿈일 뿐이다. 노자 또한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하느님은 진리의 편에 서 있다. 육신은 피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요, 성령은 영생하는 것이다. 류영모는 예수와 같은 인자(人子)로서 적극적으로 성령의 품으로 귀의하는 기독교적인 본질을 바탕 삼으면서, 석가가 행한 '깨달음'과 해탈의 방식으로 자아를 깨고 하느님과 합치하는 '하나로 나아감(一進)'을 이뤄냈고 빈탕(허공)의 실존을 확인했으며, 공자가 말한 극치의 효를 신에게 실천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길을 열었고, 또한 노자의 도(道)가 주목하고 있는 '육신의 삶이 아닌 진정한 생명'의 영생을 탐구했다. 서구의 신앙이 지니고 있던 모호한 구석들을 털어내고 단호한 믿음으로 죽음을 향해 담담하게 나아갔다. 유불선을 '귀한 방편(方便)' 삼아 기독교의 참을 찾다 동양의 깊은 사유 속에서 건져올린 유불선 사상과 수행들은 죽음 이후에 대면할 '신'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볼 수 있을까. 류영모는 그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석가의 해탈론과 노자의 우주론과 공자의 천명(天命)론을 믿음수행의 자양분과 추진체로 삼았다. 그리고 서구 하느님 신앙의 풍부한 내면을 구축하는 자율 기독사상의 중대한 기원을 열었다. 이것이 류영모의 진면목이다. 그는 다원주의 종교사상가가 아니라, 동양사상들의 정수를 기독교 일원론의 에너지로 태워 신앙적 활기를 돋운 기독교사상의 혁신가이자 실천궁행자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5-27 08:54:39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6)]부처·노자·공자가 모두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었다유불선을 들러리로 세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가가 예수와 기독신앙을 예찬하기 위해 유불선을 들러리로 세웠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일지 모른다. 류영모가 부른 이 '사신가(四信歌, 네 가지 믿음을 노래함)'는 노자와 석가, 그리고 공자를 단순히 폄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또한 예수와 같이 깊은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것으로 하나의 도를 이룬 이들에 틀림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에서 예수가 보여준 '인자(人子)'의 단호함에 미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오히려, 류영모가 예수 시대와는 달리, 유불선의 우주관과 세계관 그리고 생사와 자아에 대한 심원한 인식들을 섭렵하고 있었기에, 신에게 인자(人子)로 나아가는 길을 보다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류영모가 서구 기독교 세계가 일궈놓은 신학적 바탕을 확보하면서도 동양적 사상 전개와 실천의 전개 방식을 '습합(習合)'할 수 있었던 점은, 그가 세계 종교사상사 속에서도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틀이기도 하다. 류영모는 유불선의 관점을 기독교적 신의 이해에 습합한다. 동서양의 서로 다른 기원을 지닌 종교와 사상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견강부회의 위험이 없을 수 없다. 동양사상 속의 신은 서구의 신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세계 속에서 저마다 창의적으로 고안해낸 존재가 아니라, 인간 보편의 영성이 닿은 절대적 존재를 저마다 해석하고 인식하는 방식들이 탐구한 유사한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동서양의 지역이나 문명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로 수렴되는 방향성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류영모의 도(道)'를 만들어낸 전제에 해당한다. 신앙사상가이자 근세 한국의 철학자인 류영모의 독보적인 비중은 유불선과 기독교를 통합하거나 혹은 다원주의나 근본주의적인 입장에서 종교를 새롭게 풀어내려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는 기독교 사상의 진리성과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데에 있다. 서구의 과학기술적 전통과 인문학적 바탕과 인본주의적 사회윤리 위에서 성숙해온 기독교가 그것이 지니고 있던 핵심적인 빛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유불선의 방법론과 세계관(우주관)과 가치체계가 긴요하다는 관점이다. 류영모는 서구사상의 근본 질서를 뼈대로 삼되, 동양의 콘텐츠를 응용하여 그 내면과 실질을 확장한 종교혁신가다. 그가 한국 사상가로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글로벌한 존재감을 지닌 까닭은 여기에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5-25 12:55:25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5)]나를 깼다, 예수가 그랬듯이전미선作 '파사' 그림과 다석 초상화 앞에 선 박영호 회장. 백척간두진일보, 나를 깨고 나아가다 류영모는 제나에서 얼나로 나아간 깨달음을 '파사일진(破私一進)'이라고 했다. 나를 깨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의미다. 송나라 도원의 불교기록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오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수행묘리를 기독교 사상에 적용한 것이다. 백척의 꼭대기에 올라가 더 디딜 수 없는 허공에서 한 걸음 내딛는 백척간두진일보는 현재의 상태(삶)를 감연히 포기함으로써 큰 깨달음을 얻어 영생으로 나아간다는 동양적 화두(話頭) 수행이다. 류영모의 파사일진은 서양의 신앙사상에선 보기 드문, '삶과 죽음'의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경계 넘기이다. 즉 기독교 사상에 불교적 깨달음을 습합(習合)한 것이 '파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신앙의 항상성과 두터움을 강조하며 인간의 삶을 지배해온 기독사상은 류영모를 만나면서 인간과 신의 참된 합일을 실천하는 궁극의 수행을 담게 된다. 그의 사상은 말로만 아버지가 아니라 진짜 아버지로서의 신을 향해 합일의 과정을 전개해 나간 초유의 간증이라 할 만하다. 불교적인 개념인 열반과 해탈이 기독교적인 '신과의 합일'과 동질성을 얻음으로써 신앙은 놀라운 역동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대진전을 이뤄냈다. 류영모 사상의 특별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1941년 11월 28일 류영모는 자신이 산 날의 숫자인 18888일을 '파사(破私)의 날'이라고 명명했다. 1은 '하나'이며 '이(사람)'라는 점에서 나를 가리킨다. 8888은 '팔사(八四)'로, '파사'로 음역했다. 즉, 18888은 '내가 파사를 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18888, 내가 나를 깬 그날 이로부터 37일 만인 1942년 1월 4일(제18925일) 새벽 치통으로 괴로워하는 아내를 위해 기도를 하다가 신앙의 큰 희열을 경험한다. '파사일진'이 흐름을 타고 온 것이다. 파사(破私)가 한달여 만에 일진(一進)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일진'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나(一)'의 품에 안겨 드디어 합일하는 것이기도 하다. 류영모의 말을 들어보자. "기도 중에 모든 허공계가 마무(魔霧, 사탄의 안개, 지독한 안개) 중인 것을 알고 저 안개를 없애기 위해서는 성신(聖神)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게으름과 족한 줄 모름에서 몸은 사람의 짐이 되고 육체가 병의 보금자리가 된 것을 보고 게으름을 제치고 모든 미련을 떼어내고 앞만 향해 내달려 가야 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을 것을 지키고 있다가는 죽음에 그칠 것이요, 나중에 죽을 것을 거두어서 앞의 삶에 양식으로 제공하는 것으로만 몸이면 성한 몸이나 생명을 여는 몸이 될 것을 보았습니다. 제칠 것은 제치고 떨칠 것은 떨치고 내칠 것은 내쳐가는, 이기는 목숨 앞에는 병도 감히 침범치 못할 것이오 침범된 것도 퇴각격멸할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그는 사탄의 안개를 걷을 성신을 만났다. 예수를 재발견한 것이다. 파사일진의 기쁨을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로 남겼다. "나는 시름 없구나, 이제부턴 시름 없다. 님이 나를 차지하여 님이 나를 맡으셨네. 님이 나를 가지셨네. 몸도 낯도 다 버리네. 내거라곤 다 버렸네. 죽기 전에 뭘 할까도, 남의 말을 어쩔까도, 다 없어진 셈이네. 새로 삶의 몸으로는 저 말씀을 모셔 입고, 새로 삶의 낯으로는 이 우주가 나타나고, 모든 행동에 선을 그으니 만유물질이 늘어섰다. 온세상을 뒤져봐도 거죽에는 나 없으니, 위이무(位而無, 자리는 있으나 존재는 없음)인 탈사아(脫私我, 나를 벗어남)되어, 반짝 빛(요한 1장4절), 님을 만난 낯으로요 말씀 바탕한 빛이로다. 님 뵈옵자는 낯이요, 말씀 읽을 몸이라. 사랑하실 낯이요, 뜻을 받들 몸이라. 아멘." 류영모는 이날 "아버지 품으로 들어갔다"고 밝히면서 중생일(重生日)로 선언한다. 1월 4일을 요한복음 1장4절(생명은 말씀에 있으니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과 결부시켜 그 의미를 돋을새김한다. 류영모는 요한복음 7장52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에서 느낀 바 있어 북한산 비봉으로 들어갔다. 문수계곡에서 나오는 물과 비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주친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다석일지 제4권 633쪽). 요한복음 읽은 뒤 북한산 비봉으로 그는 요한복음의 그 이후 구절을 거듭 읽었다. (예수를 비난하던 무리들은 날이 저물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7장53절)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셨다(8장1절). 류영모가, 그의 거듭남이 예수의 깨달음을 얻은 것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비봉은 '류영모의 감람산'이었다. 류영모의 '파사'와 '중생'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었다. 40대 후반부터 그의 내면에서 꾸준히 한 줄기의 파도를 이루며 그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49세 때 호암 문일평의 죽음(1939년 4월 3일)으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처럼 서 있는 죽음을 느꼈다. 인간 일생이 생선토막 같은 삶. 그 끝에 있는 죽음은 무엇인지를 궁구했다. 그 아뜩한 현기증 가운데 50대를 맞았고 이듬해인 1941년 8월 5일 집 부근의 아카시아나무에서 가지치기를 하려 삼각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낙상 사고를 당했다. 2주일간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허리뼈의 참담한 고통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죽음이 가장 새로운 세계일 수 있겠다. 고통과 쾌감이 실은 한 맛인 것을 고통으로만 알고 있어서 크게 겁먹고 있는 수가 많지 않은가. 사람의 살림이 대부분 몸뚱이의 자질구레한 일이다. 하느님의 성령과 함께하는 참된 삶을 살려고 할 때 몸뚱이란 마침내 큰 짐이요, 감옥이요, 못된 장난이 아닌가."(성서조선 152호 '기별') 그의 깨달음은 해안선을 벗어나는 '육리(陸離)'라는 개념으로도 전개된다. 몸나에서 얼나로 솟나는 것이 바로 찬란한 육리라는 것이다. "해안선(海岸線)을 떠난다는 육리라는 말은 영광이 찬란하다는 말이다. 인생의 종말은 찬란한 육리가 되어야 한다. 난삽(難澁)한 인생의 마지막이 육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나에서 얼나로 솟나야 한다."(1956) 육리는 바로 '육리(肉離)'가 아닌가. 몸을 떠나는 것은 찬란하다. 류영모는 "나를 죽이자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이 오는 것을 체험하였다. 진리의 성령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신다."(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고 했다. 파사일진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전미선作 '파사(破私)'(2017). '파사'는 류영모가 나를 깨고 신과 하나된 결정적 순간의 깨우침을 의미한다. 류영모의 지구 모체론과 '가이아 가설' 류영모는 지구를 어머니 뱃속이라고 표현했다. 이 배를 버리고 다른 배를 타는 것. 이것이 얼나로 거듭나는 일이다. "이 사람이 60년 전에 어머니의 배를 차고 나와서 지금 지구라는 어머니(地母) 뱃속에 있다. 머지않아 이 배를 버리고 다른 배를 타게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1956) "죽음이란 어린이가 만삭이 되어 어머니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지구는 어머니 배나 마찬가지다. 어린이가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있듯이 사람이 백 년 동안 지구에 있다가 때가 되면 지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우리는 다시 신정(新正)을 맞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어머니 뱃속에서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의 아들(얼나)이 충실하게 무럭무럭 자라 열 달이 차면 만삭공(滿朔空)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아들이 자라기 위해서는 식색(食色)을 절제하면서 하느님께 기도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입은 묵혀 두고 맘을 비워 둔다."(1957) 류영모의 '지모(地母, 지구어머니)론'은 1972년 영국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1919~)이 제기한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을 떠올리게 한다. 지구는 약 38억년 전에 스스로 거대한 생명체로 태어났으며, 각각의 생물과 무생물을 이용해 지구 환경의 생존 조건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생명체의 개별성에만 주목을 했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지구생명체'가 스스로 활동하며 죽지 않는 생을 영위해 가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가이아'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으로, 스스로 지구 환경을 치유하는 항상성(homeostasis) 기능을 지닌 존재를 상징한다. 가이아는 종교계에도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의 심상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어떤 잠재의식을 이 가이아가 표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러브록은 성모 마리아를 가이아로 해석하기도 했다. 동정녀 마리아가 아기를 낳은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가이아를 구성하는 존재들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해나가는 그 생명체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의 일부이며 우리를 영생케 하는 존재라는 류영모의 말은 가이아 가설에서 봐도 오류나 모순이 없다. 전미선作 '다석 류영모'(2017) 중생 이후 성령이 임한 류영모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쳤다. 제자 김교신은 스승의 그런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선생은 보는 바와 같이 원고를 손수 지니고 오셨다. 흥분의 홍조를 띠시고 넘치는 기쁨을 누르지 못하시면서 오신 뜻을 말씀하셨다. '이 사람의 원고를 성서조선 잡지에 실어주신 것이 고마운 때도 있었고 미안한 때도 있었으나 이번 원고만은 반드시 실어주셔야 합니다' 하면서 내놓으신 것이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글이었다. 38년이라는 말과 얼굴 가득 넘쳐흐르는 환한 빛을 번갈아 보면서 우리는 한동안 대답할 바를 찾지 못하고 오직 어안이 벙벙하였다."(김교신, 성서조선 157호) 그가 내면에 넘쳐오르는 희열을 표현한 것은 가득 찬 성령의 기운이었을 것이다. 제자 김흥호는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은 가끔 강의를 하다가도 수무족도(手舞足蹈)로 둥실둥실 춤을 추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류영모는 왜 얼나로 거듭난 영성체험을 간증한 글을 들고 김교신에게 달려갔을까. 김교신 성서조선에 '파사의 간증' 실은 까닭 류영모가 김교신에게로 달려간 까닭은 동지애나 후학에 대한 존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통신앙을 안고 살았던 김교신에게 스스로가 추구했던 '참의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간증하러 간 것이 아닐까. 예수는 성령을 받고 태어나, 광야의 시험과 십자가의 대속을 거쳐 인자(人子)임을 인정받았다. 파사(破私)의 과정이 뚜렷하다. 그러나 이후의 기독교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재확인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체계가 구성된다. 신과의 대면은 나를 극복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불변의 믿음을 증명하는 일상신앙에 가까웠다. 그 믿음의 일상화를 주도한 것이 교회라는 매개이기도 했다. 류영모는 그 정통에서 벗어나왔고 입문 38년 만에 예수와 같은 '파사일진'을 경험한 것이다. 성서조선은 당시 조선 기독교의 '정통'을 상징하는 신앙체계의 중심이기도 했다. 김교신과 성서조선에 비정통 신앙의 '승전보'를 알리는 일은 류영모의 종교적인 신념이 옳음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100마디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이보다 중요한 증거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데 류영모의 글을 읽고 난 뒤, 김교신은 그의 뜻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그 글 속에서 류영모가 예수를 주(主)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 어른이 어찌 예수를 주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성서조선 동인들은 류영모가 그들의 정통신앙으로 돌아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가 '주(主)'라고 부른 것은 하느님이 보내신 얼의 나였다. 예수의 마음속에도 들어왔고 류영모의 마음속에도 들어온 바로 그것이었다. '주'는 말씀이며 성령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정통신앙에서 예수를 가리켜 구세주라고 말하는 한정적 의미의 '주'가 아니었다. 류영모의 승전보를 오히려 항복문서처럼 오해한 어리석음이었다. 그는 이렇게 예수('우리 아는 예수')를 노래하고 있었다. "예수는 믿은 이, 아버지 아들인 성령 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고저 선악 생사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 한뜻 계신 믿은 이, 없이 계심 믿은 이." 예수의 길과 류영모의 길이 일치하고 있는 것을, 김교신은 몰랐던 것 같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5-20 09:10:0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4)]죽을 때 너에게 묻노니, 너는 사람이었나예수와 석가가 얻은 생명이 내게 나타났다 이 말에는 죽음과 깨달음에 대한 그의 인식이 들어 있다. 수명대로 다 산다는 것은 오히려 깨달음을 얻지 못할 수 있으며(죽을 것을 지키고 있다가는 죽어 끊어질 것), 그렇게 뒤의 수명을 당겨 거두어서 성령의 삶에 먹이로 줌으로써 얼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의 깨달음은 그의 몸생명의 일부를 양식으로 제공했다는 의식이다. 이런 생각은 이후에 죽음의 일시를 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던 '실천'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머니 배에서 나온 나는 참나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보내시는 얼이 참나입니다. 거짓나가 죽어야 참나가 삽니다. 제나가 완전히 없어져야 참나입니다. 참나는 얼이라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참나와 하느님은 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유한과 무한이 이어집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진선미한 얼생명입니다. 예수와 석가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이 내게도 나타났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류영모의 말은 그의 얼나사상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성경에 나오는 이 말이 그 증거다. "하느님이 내게 보내신 이를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므로 죽지 아니하니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 5:24)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영원한 생명을 얻은 그것이 얼나다. 류영모는 공자가 말한 지천명(知天命, 성령을 깨닫게 됨)의 나이에 궁신(窮神)하여 마침내 그 새로운 세계에 닿게 되는 지화(知化)에 이른 것이다. 다석한시 - 얼사람(人子) (1957.8.23) 大我無我一唯一(대아무아일유일) 眞神不神恒是恒(진신불신항시항) 恒一唯是絶對定(항일유시절대정) 不忮無求自由郎(불기무구자유랑) 큰 나는 내가 없으니 하나가 오로지 하나일 뿐 참 신은 여느 신이 아니라 늘 있는 것이 늘 있는 것 늘 하나로 유일하게 옳으니 절대세계에 자리잡고 앉았다 부러워할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으니 자유로운 사람이라네 인자(人子)란 무엇인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 인자다. 인자는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는가. 참나를 얻고 나니 몸나나 제나(에고)가 없다. 하느님과 이어진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얼과 이어진 나이기 때문이다. 진짜 하느님은 따로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늘 우리에게 있는 그 하느님이다. 질투하고 화내지 않는 것, 탐욕함이 없는 것. 그렇게 몸나와 제나에서 자유로운 존재일 뿐이다. 마침내 '인자'의 경지를 얻은 류영모가 자유자재한 대아무아 진신불신(大我無我 眞神不神)을 천명한 노래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5-18 14:14:2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3)] 새벽3시 냉수마찰과 '류영모체조법'다석어록 = 아랫배에 숯을 굽는 법, '좌망'의 비밀 아랫배에 단단하게 단(丹)이 박힌 사람이 도인이다. 그들의 기운은 상쾌하며 정신은 고상하다. 그들이 시행한 것은 정좌(正坐)다. 깊이 숨을 들이쉬면서 배 밑에 마음을 통일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이것을 장자는 좌망(坐忘)이라고 했는데 불교의 참선과 같다. 아랫배에 힘이 붙기 시작하면 기해단전(氣海丹田, 기의 바다와 단의 밭, 즉 아랫배 부위)에서 '단(丹)'이 만들어진다. 마치 나무를 불완전연소시켜서 숯을 굽는 것과 같다. 밥의 알짬(精)으로 단(丹)을 만드는 것이다. 아랫배 안에서 숯과 같은 '단'이 굳어지면서 거기서 나오는 열이 기운이다. 이 숯이 금강석이 되면 지혜가 신(神)이다. 정(精)을 함부로 내버리지 말고 아끼고 아껴서 그것으로 숯을 구워 석탄을 만들고 금강석을 만드는 것이 좌망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없어지고 신선이 된다. 사람에게 힘이 있다면 정(精)이라는 기름을 불 태워서 기관을 움직이는 것일 것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5-13 14:06:3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2)]하루종일 무릎꿇고 산 분을 아시오하느님 시하(侍下)에 무릎 꿇은 것 류영모는 석가처럼 배숨쉬기(단전호흡)를 일상적으로 했다. 그는 "숨쉴 식(息) 자는 코(自=鼻)에 심장(心=心臟)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곧이 곧장 가려면 숨이 성해야 합니다. 세상 모르고 잠에 들 때도 숨은 더 힘차게 쉽니다. 건강하려면 식불식(息不息)을 해야 합니다." 들숨과 날숨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이 한결같이 지속되게 하면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나아가서는 무의식 속에서도 올바른 호흡이 이뤄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이여, 들숨과 날숨을 생각하는 것을 잘 익혀야 한다. 그러면 몸이 피로하지 않게 되고 눈이 아프지 않으며 진리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움에 머물 수가 있고 애착에 물들지 않게 되리라. 이와 같이 들숨과 날숨을 닦으면 좋은 결실과 큰 복리를 얻게 되리라. 이리하여 깊은 선정(禪定, 삼매경)에 들면 드디어는 자비심을 얻을 것이며 미혹을 떠나 깨달음에 들어갈 것이다." 가슴속에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을, 류영모는 '성불'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는 꿇어앉은 참선을 통해 이런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기도와 찬송, 성경 해석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참선기도를 합니다." 교회식의 예배 대신 홀로 참선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그리스도가 태어나야 하고 부처가 찾아와야 합니다. 성탄과 성불이 이뤄져야 합니다. 가슴속에 그리스도가 나지 않고 마음속에 부처가 오지 않았다면 그 기도나 참선은 쭉정이일 뿐입니다." 그의 말이다. 류영모의 궤좌는 천부시하(天父侍下)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맘이 풀어지고 몸이 놀아나는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늘 가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늘 가는 것을 구합니다. 사람이 한때는 지성을 할 수 있지만 늘 끊기지 않게는 잘 안 됩니다. 지성과 열성이 우리 속에 조금씩은 있습니다. 그러나 곧 없어져 이완돼 버립니다. 맘이 이완되기에 무엇에 끌려갑니다. 한가로움을 잘못 쓰면 죄악이지만 한가로움을 팽팽하게 쓰면 영구히 후회하지 않습니다. 게으르게 멍청하게 있다가 어디 가서 말을 하려 해도 머리가 멍해져 말 한마디 못하는 그런 지경에 가서는 안 됩니다." 류영모의 시 '좌망'에 담긴 하루 일과 그는 이 좌법을 '하나(一)'를 찾는 일좌(一坐)법이라고 했다. 그의 삶은 두루 통하는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일식, 일인(一仁), 일좌, 일언(一言)으로 꿰뚫어진 삶이었다. 그의 궤좌는 복성침은 지성좌망(複性寢恩 至誠坐忘)이었다. 1955년 10월 28일 다석일지에 쓴 한시 절구 '좌망(坐忘)'에 나오는 말들이다. 坐忘消息晝 複性不息課(좌망소식주 복성불식과) 寢恩安息宵 至誠成言曉(침은안식소 지성성언효) 앉아서 잊으니 숨을 쉬는 낮이요 다시 얼나에 드니 쉬지 않는 저녁 일과라 잠자리에 은총을 입으니 편안하게 쉬는 밤이요 지극한 정성으로 말씀을 이루는 새벽이 오는구나 이 시는 류영모답게 '식(息, 쉰다, 숨을 쉰다)'이란 말의 묘미를 한껏 살린 것이다. 제목에 나오는 '좌망'은 장자가 말한 수행법으로 '심재좌망(心齋坐忘)'이라고도 한다. 마음의 제단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심재'이고, 앉은 채 마음이 육체를 벗어나고 세속의 지식을 잊어버려 하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좌망'이다. 류영모는 무릎을 꿇고 앉아 몸나(육신)를 벗고 제나(자아, '나'라는 의식)를 잊으며, 참나(내 안의 성령)를 찾아 얼나(성령인 나)로 나아갔다. 저 시는 궤좌와 호흡으로 줄기차게 수행한 하루 일과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나하나 풀어서 읽어보자. '앉아서 잊으니' - 장자가 말한 좌망의 상태에 이르니 '숨을 쉬는 낮이요' - 소식(消息)은 '숨을 꺼버린다'는 말로 숨을 쉬지 않는다(숨을 쉬지 않을 만큼 몰입한다)는 말이 되지만 '쉼(휴식)을 꺼버린다'로 보면, 쉬는 일이 없다는 뜻이 된다. 거기에다 '소식'은 우리 말로 하늘에서 오는 뉴스이다. 즉, 깨달음이다. 류영모는 '소식'이라는 말 한 마디로, 숨소리도 꺼버린 듯한 몰입과 쉼없이 정진하는 수행과 하늘의 한 소식을 듣기 위해 치열하게 궁신하는 장면을 절묘한 중의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다시 얼나에 드니' - 복성(複性)은 '성(性, 천성이며 성령이며 얼나를 말한다)'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복성(復性)과 같다. 이 또한 장자의 수양론에 나오는 말이다. 신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은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우리의 전통사상인 복본(復本)사상과도 통한다. 참나는 신에게서 온 것이며 지금 나에게 있다가 다시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로 시작되었으나 사실은 시작된 게 없으며 끝까지 남는 하나라는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묘리에 닿아 있는 말이기도 하다. '쉬지 않는 저녁 일과라' - 과(課)는 하루 일과를 수행한 저녁 무렵을 함의한다. 낮에는 좌망으로 하늘과 닿았고, 저녁에는 참나로 돌아가는 일을 쉬지 않는다는 얘기다. 낮에는 '진행'하는 수행이고, 저녁에는 반성하는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잠자리에 은총을 입으니' - 침은(寢恩)은 왕조시대에 궁녀가 잠자리를 찾은 왕의 성은을 입는 것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굳이 그렇게 속된 해석을 할 필요도 없다. 잠을 자는 은총은 신이 인간에게 베푼 휴식이다. 그러나 잠을 자면서 나는 내 '몸'과 내 '의식'은 놓지만, 놓지 않는 게 있다. 그것이 신과 연결된 참나의 '얼줄'이다. 잘 때 몸을 건드리면 잠을 깨고 의식이 돌아오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는 것은 바로 참나라는 얘기다. '편안하게 쉬는 밤이요' - 얼나이자 하느님이 나를 지켜주니 '안식소(安息宵)'가 된다. 안식은 편안하게 휴식한다는 뜻도 되지만, 숨을 편히 쉰다는 뜻도 된다. 몸과 의식이 없어도 숨을 편히 쉴 수 있는 까닭은 그 또한 참나와 만나고 있는 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쩌면 잠 속에서는 순수하게 신의 은총 아래서 평안한 상태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극한 정성으로' - 편안하게 쉬는 밤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얼줄을 유지하는 그 지극함이 있다. 굳이 생각하고 의식하고 행위함으로써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정성으로 '참나'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이루는 새벽이 오는구나' - 낮에는 좌망과 복성으로 수행했다면, 밤에는 하늘의 은총을 느끼는 것과 복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그 수행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가 무릎을 꿇고 낮과 저녁을 보내며, 다시 칠성판 위에서 고요히 잠들며 죽음과 대면했던 까닭이 여기 '하나의 동영상' 같은 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지 않은가. 그는 손님을 맞을 때나 책을 읽을 때나 식사를 할 때나 언제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스승이 무릎을 꿇고 말씀을 하니 제자들이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30분이 지나면 모두들 다리가 아파서 쩔쩔 매게 된다. 함석헌을 비롯한 몇 명의 제자는 몇 시간을 버텼다. 류영모는 제자들에게 꿇어앉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숨을 깊게 쉬면서 단전에 중심을 두면 좀 나을 것이라고 했다. 88세부터 그는 기억력이 흐려졌는데, 무릎 꿇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잣나무 널판 위에 무릎 꿇고 오뚝이 인형처럼 앉은 모습이 곧 쓰러질 것 같아 편히 앉으시든지 누우시라고 하면 "괜찮아요"하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석어록 - 성령을 호흡하라, 원기식(元氣息) 우리의 기도는 정신적인 호흡,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호흡인 원기식을 두텁게 조심하여 깊이 숨쉬는 것이다. 나는 찬송할 줄 모른다. 그러나 찬미는 표한다. 찬미는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이다. 맥박이 뚝딱뚝딱 건강하게 뛰는 소리가 참 찬송이다. 다른 것은 부러워하지 않는다. 세례라고 해서 물 한 방울 어디에다 뿌려주는 것이 세례가 아니다. 날마다 낯 씻고 몸 닦는 세례이다. 우리는 몸의 먼지를 떼어버리는 데 열심히 해야 한다. 이 세상을 지나가는데 자꾸 먼지가 우리에게 날아온다. 그러므로 자꾸 씻고 닦는 일을 해야 한다. 단식하는 것도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고생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보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나 간디의 피와 살은 먹을 수 없으니까 제 몸을 고생시키면 제 살, 제 피를 좀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이런 점을 인도에서는 알고 있었다. 아니 전 인류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다른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데, 유교에서는 기도를 수신이라고 한다. 입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 그러면 마침내 머지않아서 한얼님께 다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한얼님의 아들이 되도록 참나를 길러 가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5-11 10:54:1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1)] 나는 밤마다 죽는다, 류영모의 칠성판 '메멘토 모리'우린 태어날 때부터 사형선고 받은 몸 식색(食色, 식사와 정사)을 끊기로 한 일은, '몸'을 바꿔보기로 한 것이다. 삶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몸을 삶의 수족(手足)으로 길들이려는 것이었다. 삶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식욕과 색욕으로 나를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 식(食)을 죽이고 색(色)을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식색을 죽이는 것은 몸을 죽이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라면 실없는 호언일 수 있지만, 이후 평생이었던 40년이라면 극기(克己)에 이른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왜 밥을 못 잊을까? 죽을까봐 그런 것이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체적 생각을 내던져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죽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이 무서워 몸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이를 놓아주려 하는 것이 신의 말씀이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이다. 죽는 연습은 영원한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단식하고 단색(斷色)하는 것이 죽는 연습이다. 진실로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이다. 단식하는 것은 내 몸을 내가 먹는 것이다. 몸으로 죽는 연습이 얼로 부활하는 연습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 몸을 넘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뭘까. 제 육신이 활동을 멈추는 죽음이다. 식색을 금하는 일은 몸의 요구를 낮추는 일이지만, 몸이 느끼는 숱한 공포와 불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음이 무엇인지 시시각각으로 깨닫는 일이야 말로 몸나의 한계를 벗는 기폭제가 아닐 수 없다. 육신을 지닌 자, 살아있는 자가 어떻게 죽음과 적극적으로 대면(對面)할 수 있을까. 금식·금색의 51세를 보낸 그는 그 이듬해인 1942년에 몸이 기거(起居)하는 방식을 바꿔버린다. 이것은 식색의 단절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며 시시각각의 삶의 조건이었다. 이런 전환이 있기 전에, 중생(重生)을 체험하는 획기적 순간이 있었다(중생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기존의 삶의 모든 양식들을 일거에 깨고 순식간에 가 닿는 '깨달음'을 얻은 뒤, 류영모는 죽음을 깔고 죽음에 눕는 고행(苦行)을 일상화한다. 류영모는 단도직입이다. 이렇게 말해준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형무소에서 죄수를 사형시킬 때 사형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끌고가서 마루청이 뚝 떨어지면 목이 졸려서 죽는다. 우리도 그렇다. 지금 마루청이 뚝 떨어지지만 않았지 언제 발밑에 그게 떨어질지 모르는 형편에 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쓸데없는 잡념에 사로잡히고 욕망에 시달리고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 관 바닥에 까는 널판을 구입 52세의 류영모는 안방 윗목에다 잣나무 널판을 들여놓았다. 상가(喪家)에서 쓰던 널판이었다. 당시 시장에 가면 조선시대 왕족이 쓰던 홍제동 구사니숲의 100년 된 소나무와 잣나무 널판 재목이 팔리고 있었다. 친척의 이종조카에게 부탁해서 그중 하나를 샀다. 잣나무 판의 두께는 세 치였고 폭은 석 자, 길이는 일곱 자였다. 그것을 닦아 널판으로 만들었다. 널판으로 만들었으나, 관 속에 넣으려고 만든 건 아니다. 상징적인 죽음의 공간을 사는 자리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관 속 바닥에 까는 널판을 칠성판(七星板)이라 한다. 북두칠성을 본떠 7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판으로, 염습(殮襲, 주검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힘)한 시신을 눕히는 자리다. 북두칠성을 만들어놓은 데에는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기원(칠성신은 전통 신앙과 도교의 신앙이 서로 섞인 것이다)이 담겨 있다. 칠성판은 시신을 고정시키는 판으로 시정판(屍定板)이란 명칭을 쓰기도 한다. '칠성판을 등에 졌다'는 말은 죽어서 관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남들은 죽어서 칠성판을 등에 졌지만, 류영모는 살아서 그것을 밤마다 지고 잠을 잤다. 낮에는 칠성판을 방석삼아 꿇어앉아 있고 밤에는 거기에 잠을 자니, 낮에는 살아났다가 밤에는 죽는 형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전무후무한 기행(奇行)을 죽을 때까지 일삼았으니, 사람이 이렇게 산 경우는 인류 역사에 없었다. 대체 그는 왜, 이런 섬뜩하고 불편한 기거를 자초했을까. 晨兀夕展屈伸狀(신올석전굴신상) 三十星霜柳老潤(삼십성상류로윤) 自初至終運年輪 (자초지종운년륜) 百世生成柏子板(백세생성백자판) 새벽에 벌떡 저녁엔 쭈욱, 굽히고 펴는 일 삼십년 별과 서리 맞아 류씨 늙은이 빛깔 좋네 몇 살까지 살지의 자초지종은 백년을 산 잣나무 백자 널판에 새겨지리 류영모의 시 '백판거사(柏板居士, 잣나무 널판에 사는 사람)' 널판 위에서 해방-전쟁-쿠데타를 맞았다 류영모는 어린 시절 몸이 연약하고 왜소해서 의사로부터 "오래 살지 못할 것"이란 얘길 들었다. 의사의 이 예언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언제고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은 하루하루를 사는 기분을 느꼈다. 이 시는 칠십 수를 넘긴 뒤에 썼을 것이다. 1942년에 시작한 백판(柏板)생활을 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생기가 흐른다는 자기 진단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백판거사'라고 자호(自號)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신올석전(晨兀夕展, 아침에 벌떡 일어나고 저녁에 쭉 뻗어 자는 일)을 거듭했으니 백판과 자신이 드디어 일심동체처럼 여겨질 만하다. 백판에서 식민지 최악의 시기를 건너 해방을 맞았고, 한국전쟁의 난리를 겪었으며,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겪었다. 군사정권의 곡절과 류달영(1911~2004, 류영모를 평생 추앙했던 사람이다)이 기획한 새마을운동과 근대화를 지켜보았다. 서른 해의 성상이 백판 위에 아로새겨진 셈이다. 시에서 말한 운년륜(運年輪, 나이테의 운명)은 어릴 적 의사가 말한 불길한 예언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을 것이다. 의사는 일찍 죽는다 하였는데, 벌써 칠십을 넘겼으니 허튼소리였음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런 뜻만은 아니다. 이 딱딱한 나무 바닥에 기거했기에 그런 뜻밖의 수(壽)를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류영모는 백판생활을 이야기할 때 '등뼈론'을 말했다. 등뼈는 설 때는 기둥역할을 하고 엎드리면 용마루 역할을 한다. 사람이나 짐승이 필요로 하는 유기물질을 보관하는 창고이기도 하다. 등뼈 속에는 온몸의 여러 기관과 뇌를 이어주는 신경조직이 들어 있다. 등뼈만 잘 간수해도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악기요, 등뼈는 조율기관 짐승은 기어다니므로 등뼈에 부담을 덜 주지만 사람은 기립 생활을 하기 때문에 등뼈에 부담을 많이 줄 수밖에 없다. 척추디스크에 쉽게 걸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경추, 흉추, 요추 가운데 요추(허리등뼈)에 이상이 잘 일어난다. 이 등뼈를 꼿꼿이 바르게 가진다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낮에 활동을 하다 보면 등뼈가 굽어지기 쉽다. 그래서 밤에 잘 때는 딱딱한 나무판 위에 누워서 비뚤어진 등뼈를 펴주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류영모는 사람의 몸은 악기(樂器)와 같다고 했다. 음악을 옛사람들은 율려(律呂)라고 했는데, 그때의 여(呂)자가 등뼈를 표현한 글자라고 말한다. 악기가 제대로 소리를 내려면 조율이 되어 있어야 하듯이, 사람의 몸 또한 등뼈를 중심으로 잘 조율이 되어 있어야 신이 인간이란 악기를 탈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몸'이란 글자도 등뼈악기 '여(呂)'와 닮아 있으니 묘하다. 널판에서 잠을 잔 까닭은 허리를 보호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골골했던 까닭은 허리가 약한 데 있었고, 그는 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바른 자세를 잡으려 애를 썼다. 백판생활을 하기 한 해 전(1941년 8월), 류영모는 아카시아나무 울타리 가지를 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쳤다. 허리에 대한 경각심을 크게 가지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딱딱한 나무 바닥에서 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저 날 당한 사고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그는 처음엔 반원(半圓)으로 된 나무 목베개를 베었으나 나중엔 그것마저 없이 잤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겨울에만 담요 한 장을 깔았을 뿐이다. 방문객, 칠성판 위의 산 사람 보고 기겁 류영모의 북한산 뇌곡산장(牢谷山莊)을 방문한 이들은 칠성판 위에 꼿꼿이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속으로 기겁을 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 널판 위에 앉은 꼴이었다. 하기야 간밤에 관 속에 누웠다 다시 일어난 사람이니 그런 느낌을 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엽기적인 널판생활은 건강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시시각각의 예행연습 같은 것이었다. 이 점이 류영모의 '영성생활'의 핵심이다.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한다. 류영모가 관 속의 널판 위에서 잠을 잔 것은 한국 버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볼 수 있다. 옛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지금은 개선장군이지만, 언젠가는 죽은 장군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이벤트였다. 죽음은 매 순간마다 인간을 노리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굳이 인간의 유한성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려 하지 말고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류영모의 관 속 생활도 그랬다. 삶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죽음의 자리를 늘 분명하게 의식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주어진 생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하는 깨어 있는 의식이기도 하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어느 신부는 날마다 무덤을 한 삽씩 팠다고 한다. 자신이 묻힐 곳이었다. 무덤을 파면서 삶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했으며, 죽음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깨달아 나갔던 셈이다. 류영모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덤생활'을 40년간 한 것이다. 피테르 클라스(1597~1661)의 '바니타스 스틸 라이프(Vanitas Still Life)'. 바니타스는 허무·덧없음을 의미하는 말로, 이를 주제로 한 정물화가 한때 유럽에서 유행했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말하는 메시지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였다. 얼생명엔 죽음이 없다, 두려움 없이 살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인간 3대 독성을 뽑아내려면 죽음을 의식해야 했다. 3독은 바로 '제나'의 얼굴이며, 제나에게 죽음을 기억하라고 끝없이 경고하는 까닭은, 제나의 죽음은 곧 얼나에 닿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3독의 노예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선한 언행을 하면 '저 사람이 죽으려고 마음이 변했나'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죽으려고 마음이 변했다는 그 마음이 바로, 본심이며 얼나에 닿는 마음이다.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변하지 말고, 미리 변하여 나아가라는 뜻도 숨어 있다. 류영모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영생이란 죽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얼생명에는 죽음이란 없습니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거지 참나인 얼은 죽는 게 아닙니다. 죽음을 무서워하고 싫어할 까닭이 없습니다. 죽음이란 이 몸이 퍽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이 껍데기가 그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진리인 얼생명은 영원합니다." '백판거사' 시를 썼던 그 무렵, 그러니까 1970년대쯤에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 나이 일흔 살에 가깝습니다. 일흔이라는 뜻은 인생을 잊는다는 뜻이 아닐지요. 이 세상에 좀 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석은 두려움 없이 살라고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몸나가 있어서 걱정인데 몸나로 죽고 얼나로 솟난 신의 아들이 무엇이 두려운가. 시편에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두려움 없이 살라.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5-06 10:42:2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0)]부부 침실에 만리장성을 쌓다다석어록 = 껍질로 사귀는 피상교(皮相交)가 무슨 사람사귐이냐 사람이 사귀는 데 얼마만큼 깊이 사귀는 것이냐 하면 껍질만 서로 관계가 있는 피상교에 지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서러운 일의 하나이다. 알고 싶은 것은 그 속의 속인데, 남의 속에 들어가서 보지 못할 때에는 피상교에 불과하다. 부부지간, 부자지간도 피상교이다. 서로 좋으면 껍질(낯짝)이 좋다고 칭찬을 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평생을 지나가는데 마침내 참나를 찾아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본래 하느님께서 내게 준 분량을 영글게 노력하면 반드시 사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랑으로 인해서 범죄에 이른다면 독한 탄산가스와 같은 죄악이다. 그렇지만 사랑을 너무 에누리해서 죄악만을 강조한다면 사랑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사랑에는 원수가 없다. 원수까지 사랑하는데 적이 있을 리 없다. 언제나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언제나 무서운 힘을 내놓은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평등각(平等覺·평등한 이치를 깨달아 아는 이)이다. 하느님도 사랑이다. 아침·저녁으로 반성할 것은 '내가 남을 이용하려 하는가', '내가 남을 섬기려 하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집사람을 더 부리려 하는가, 아니면 더 도우려 하는가. 반성해봐야 할 일이다. 몸이거나 집이거나 나라거나 남을 이용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무조건 봉사하자는 것이 예수정신이다. 오늘의 급선무는 지금 씨알들의 가장 아픈 곳을 분명하게 말하는 데 있다. 지금 아픈 곳을 말해야 하는 이는 종교인이다. 그들 대부분이 밥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아픈 것을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4-27 13:10:1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9)]'100년 비만문명을 꾸짖는 영성의 만찬' 류영모 하루한끼그가 실천한 한끼는 '영성의 만찬' 류영모가 하루 한끼의 삶을 선언하고 실천한 것은 육체의 건강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건강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영성을 가꾸기 위해 건강한 몸은 꼭 필요하기에, 건강은 신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게 육체는 벗어버릴 허물이나 옷일 뿐이었다. 육체 위에 다시 옷을 입는 것은 육체가 옷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옷은 아무리 겹겹이 입었더라도 다 벗어야 할 것들이다. 그가 실천한 '한끼'는 오직 인간이 지닌 짐승의 욕망을 극복하고 절제함으로써 영성에 집중하는 힘을 얻고자 하는 방편이었다. 한끼는 그의 얼나 사상을 실천하는 수행이며 궁신지화(窮神知化)였다. 영성에 대해 절박한 궁리를 하여 마침내 만물의 조화를 터득하는 길에, 스스로의 '도시락'을 그런 방식으로 싼 것이다. 이것이 '한끼 건강식'을 실천하려는 부류와는 애당초 다른 차별점이다. 류영모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하루 두끼를 수십년간 실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하루 한끼는 그 단계를 높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먹는 것에 대한 욕망과 교접하고자 하는 욕망은 짐승에게도 고스란히 있다. 그것을 제외해야 짐승과 다른 '인간'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류영모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계속했고, '금식금색(禁食禁色)'이 짐승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동력을 이루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느님을 내 안에 들일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먹는 욕망은 부(富)에 대한 환상을 불렀고, 색욕은 귀(貴)에 대한 망념을 키웠다. 부귀란 식욕과 색욕의 변형이며, 부귀영화는 식욕과 색욕을 마음껏 누리고픈 마음의 너울일 뿐이라는 통찰이다. 세상에는 그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를 묻는 현세주의자들이 넘친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삶과 죽음을 관통하여 짐승을 벗어나는 초월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의 한끼는 '영성의 만찬'이었다. 한끼는 단순한 식생활의 변화가 아니라, 짐승의 길과 영성의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었고, 몸나의 길과 얼나의 길의 분기점이었다. 짐승에서 하느님으로 '솟나'는 혁명의 밥그릇이었다. 예수는 익은 몸을 바친 '밥'이었다 금식금색을 선언했을 때 그는 단색(斷色)은 가능했으나 단식(斷食)은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알았기에 부득이 하루 한끼를 먹기로 했다. 일일불이식기(一日不二食飢)란 말이 있다. 하루 두끼를 못 먹으면 굶주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니, 한끼는 '단식'에 준하는 최소한의 생존식사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밥의 사상'을 말했다. 누구나 목숨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을 돌이켜 봐야 한다. 밥은 익은 것이다. 완전한 사람, 무르익은 사람이 아니고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 밥은 정말로 익은 사람에게 제 익은 몸을 공양하는 것이다. 스스로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 밥을 함부로 떠먹겠는가. 밥 앞에서 그 생각을 하여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자신을 바쳤다. 바쳤다는 것은 밥이 되었다는 말이다. 밥이 되었다는 것은 밥을 지을 쌀이 되었다는 말이다. 쌀이 되기 위해선 열매가 무르익어야 했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은, 인생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어서 먹는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신의 은혜로, 수많은 사람들의 덕으로, 대자연의 공으로 주어져서 먹게 된 것이다. 밥을 먹지 않을 수 없지만, 밥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한끼사상의 핵심이다. 먹어야 산다는 것은 몸일 뿐이며, 안 먹어야 사는 것은 정신이다. 그는 가끔 금식을 하면서 육신과 정신의 대화를 느끼곤 했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금식을 했다. 부모가 돌아갔을 때도 그랬고, 상가에 갔을 때도 그랬고, 제삿날에도 그랬다. 먹거리를 돌려 대접을 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다석은 자신의 다른 수행방식이나 깨달음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루 한끼를 다른 이에게 강제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로지 '자율일식(自律一食)'이었다. 류영모는 자신의 일일일식을 건강식으로 제안할 뜻도 없었고 남들에게 굳이 따르라고 권하지 않았다. 타율적인 금식은 오히려 반대를 했다. 신의 제물을 감히 도적질하는가 하루 세끼는 짐승의 식사, 두끼는 사람의 식사, 한끼는 신선의 식사다. 류영모가 하루 한끼를 실천하면서 했던 말이다. 사람답다는 말이 있다. 짐승과 같음을 면했다는 뜻이다. 짐승은 오직 두 가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산다. 배 고프면 먹는 것, 그리고 짝을 만나 교접을 하는 것. 식색(食色)은 생명체가 저마다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식색으로만 사는 것을 면하는 일이 '사람다움'이며, 그것은 식색으로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채우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식색은 육신의 바탕을 잃지 않을 만큼의 최소한을 지키되, 있는 힘을 다해 참된 나를 찾고 만나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람다움이라고 말한 사람이 류영모다. 그는 하루를 일생처럼 일생을 하루처럼 살았다. 오늘을 잃으면 일생을 잃는다. 오늘을 잡으면 일생을 얻는다. 류영모가 역설하던 말이다. 하루 한끼를 먹고, 하루살이로 살고, 일일일인(一日一仁)을 실천한다. 이것이 그의 간절한 신앙생활인 '하루정신'이었다. 류영모의 한끼의 강의를 들어보자.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야 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우리 몸은 신이 머무는 성전이다. 성전에 드리는 제사가 바로 밥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밥 먹는 일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밥을 먹는 것이다. 알찬 쌀을 쭉정이 같은 내가 먹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부족한 우리는 떳떳이 먹을 수 없다.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으나 안 먹을 수 없으니 먹는 것이다. 먹는 까닭은 구차한 생명을 연장하자고 먹는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깨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깨우치는 약으로 먹는다.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먹어야 쌀에 대해 덜 미안하지 않겠는가. 신의 뜻에 욕심을 붙일 수가 있는가. 식탐으로 먹을 일이 아니라 신의 뜻을 깨우치는 각성제로 먹는 약이다. 실컷 먹겠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은 일부러 금식을 한다. 먹을 것이 모자라서 먹기를 끊을 때는 신의 은혜로 알고 감사히 받는 게 맞는다. 안 먹으면 물론 죽는다. 안 먹고는 못 사니까 먹는다는 말은 맞는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는다. 적게 먹고 편히 살 수 있는데도 많이 먹고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한다. 사람이 안 먹으면 병이 없다. 말씀을 바로 아는 집에서는 '나쁘듯 먹여라'는 말을 한다. 온당한 말이다. 줄곧 곧이(貞)의 정신을 가지고 입 다물고 숨을 쉬어라. 그러면 숨이 잘 쉬어진다. 먹는 것이 지나치면 식곤이 생겨서 잠이 많아지고 앉아도 바로 앉지 못한다. 숨도 제대로 못 쉰다. 숨쉴 식(息) 자는 '코(鼻)'에 '염통(心)'이 붙어 있는 글자다. 사람이 곧이 가려면 숨쉬는 일이 왕성해야 한다. 세상 모르고 잠이 들 때도 숨은 더 힘차게 쉰다. 불식(不息)은 묘한 말이다. 숨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쉬지 않으니 불식이다. 그런데 쉬지 않는 것이 숨이요 쉬는 것이 바로 숨이 아닌가. 건강은 식불식(息不息, 숨쉬기가 쉬지 않는 것)에 있다.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닥할닥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이 참생명일 수 있겠는가.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생명이다. 참생명에선 숨쉬지 않아도 끊기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과식하면 왜 숨쉬기가 불편하겠는가 확실히 과식하면 숨쉬기가 불편하다. 그것은 신의 뜻에 합당하게 먹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신에게 불경한 것이다. 제사 음식을 내가 훔쳤으니, 어떻게 신이 부여한 숨길과 숨결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겠는가. 먹는 것이 흐뭇함이 아니라 먹지 않는 거기에 흐뭇함이 있다. 짐승을 길들이는 데는 알맞게 굶기고 먹여야 한다. 우리의 몸도 짐승인 만큼 몸이 함부로 욕망을 내고 제멋대로 설치지 않도록 알맞게 절제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오롯한 생각이었다. 류영모를 본받아 일일일식을 시도하는 이가 많았다. 함석헌, 김흥호, 서완근, 박동호는 한끼에 성공했고 염낙준, 주규식, 류자상(아들)은 하루 두끼를 먹었다. 2012년쯤에 절식(節食) 바람이 불었을 때, 류영모의 하루 한끼가 새삼 부각된 적이 있었다. 그의 한끼사상을 읽어낸 게 아니라 그의 한끼의 '과학적 비밀'을 찾아낸 것이라 아이러니하지만, 류영모의 실천이 과학적 이치에도 한 치 틀림이 없음을 입증했다 할 만하다. 일본의 의사인 이시하라 유우미(1948~ )는 '하루 한끼 공복의 힘'이라는 책을 냈다. 나가사키 원폭 병원 혈액과에서 근무했던 그는 공복이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이는 것을 발견했다. 배가 고플 때 백혈구들이 더 활발히 움직여 몸 속의 세균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하루 한끼, 우리 몸에 맞는 최적 식사법 혈액의 오염이 질병의 근원이라는 동양의학의 관점을 받아들인 그는 과식과 운동부족 그리고 스트레스가 혈액 오염을 부른다고 지적했다. 암 질병도 혈액 오염이라고 한다. 특히 과식은 몸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어서 여분의 영양분을 처리하기 위해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역시 일본의 의사인 나구모 요시노리(1955~ )의 '1일1식, 52일 공복 프로젝트'도 관심을 끌었다. 그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한번 들리면 내장 지방이 연소한다는 의미이고, 두번 들리면 외모가 젊어진다는 뜻이며, 세 번 들리면 혈관이 젊어진다는 것이라고 구체적인 효과로 하루 한끼 건강론을 전파했다. 성인병이라 불리는 당뇨·고혈압·위장병·뇌졸중·암은 생활습관 질병이라고도 불리는데, 생활습관 중의 핵심은 식습관이다. 영양을 계속 섭취해야 건강하다는 낡은 생각이 질병을 부른다는 얘기다. 나구모는 10여년간 1일1식을 실천하면서 체험과 의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1일1식이 우리 몸에 맞는 최적의 식사법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류영모가 이미 80년 전에 실천하고 터득했던 진리를 뒤늦게나마 정리한 셈이다. 100년 되지 않은 비만문명, 류영모의 경고 영국의 노화 연구진은 쥐의 음식물 섭취량을 40% 줄이니 수명이 30% 늘어났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쥐의 수명을 인간의 삶으로 환산하면 20년 정도의 시간이다. 장수 유전자인 시르투인은 '공복'에 작동을 한다. 신이 인간의 수명을 위해 만들어놓은 유전자를 인간이 과식으로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것도 오래 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루 세끼를 먹은 것은 대개 100년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장 지방을 저장하는 까닭은 혹독한 추위에서 '지방'을 태워 연소함으로써 체온을 유지할 수 있게 함이었다. 그런데, 추위도 막아버렸고, 지방은 그저 쓸모없이 잔뜩 쌓이게 만들었다. 류영모가 '신의 제사'로 경고한 것이 과학적으로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신의 제사를 인간의 탐욕을 위해 거침없이 쓴 결과, 그 후환을 당하는 것이다. 비만으로 인한 질병은 신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다석의 건강어록 = 얼음과 술과 담배는 사람이 취할 것이 아니다 어른이고 어린이고 여름에도 얼음을 안 먹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뱃속에는 얼음이 필요 없다. 얼음을 먹으면 건강을 해친다는 얘기다. 여름에도 부채가 필요 없어야 건강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얼음을 먹이면서 키우는 것은 크게 잘못하는 일이다. 불도 얼음도 다 친구가 아니다. 또한 내 원수도 아니다. 서늘한 것을 물리치려 불에 너무 아첨해서도 못쓰고 또 더운 것을 피하려고 얼음에 너무 아첨해서도 못 쓴다. 과학적으로 잠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고단해서 잔다. 고단한 것은 몸속의 노폐물이 나가지 않아서 그렇다. 현대인이 지나치게 섭취하기 때문에 나갈 게 나가지 못해서 고단하다. 순결한 생활을 하면 고단함이 적다. 밤에 숙면을 하고 나면 몸속의 노폐물이 다 빠져나가 정신이 맑아진다. 사람이 입에는 얼음, 담배, 술은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몸 하나 가졌으니 편할 수 없다. 몸 없는데 가서야 무슨 걱정이냐고 노자가 말했다. 그러니 이 몸뚱이가 병이다. 몸이 있어 병이 없는 상태가 소강(小康) 상태다. 감사라면 이걸 감사해야 한다. 몸 성하면 다른 것은 바라지 말라. 몸이 성하면 몸 성하지 않은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 나보다 성하지 않은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2020-04-22 09:51:3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8)] 하루 한끼 먹고 40년, 91세까지 살다다석어록 = 아기를 위해 앓을 수 없는 어머니처럼, 신을 위해 앓을 수 없는 몸을!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몸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내 몸을 그저 건강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있으니까 건강하게 가지라는 것이다. 마치 천리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자동차를 닦고 정비를 하듯이 온 인류를 구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 우리의 몸을 잘 정비하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건강은 책임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아기를 위해서 앓을 수 없는 어머니처럼 인류 구원을 위해 앓을 수 없는 몸을 가지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육체는 건강한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몸은 부모로부터 받았으면 다치지 말고 가야 할 것이다. 몸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 얼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도 성하고 담은 것도 성해야 그 정신행위가 올바르게 된다. 성하게 성(誠)의 길을 가야 한다. 적극적으로 성해야 한다. 몸 성히 가는 것이 그리스도 정신이다.2020-04-20 10:40:19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7)]'북한산 톨스토이' 류영모와 '질투'의 최진실'북한산인' 류영모와 이웃이 된 이광수 일주일 뒤(5월 12일) 류영모의 맏아들 의상이 이광수를 구기리 집으로 초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모란이 활짝 피었으니 오셔서 함께 보시기를 (아버님이) 바라고 계십니다." 이날 이광수의 일기를 보면, 지금 현대빌라가 있는 그곳이 '장아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였으며 류영모의 집은 절터 부근에 지은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광수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슬과 참새와 함께 가다. 장아사 법당터의 두 느티나무 신록이 아침햇살에 비친 미관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경내에 들어서니 모란의 화향이 풍겼는데 수십 그루의 모란이 활짝 피어 있었다. 의상군의 편지에는 지난 밤 비로 꽃들이 상하였다고 하나 그래도 좋았다." 류영모는 모란을 보면서 "이 꽃은 중국적이야, 홍백지에 복(福)자를 써놓은 것 같지"라고 말했다. 이광수는 "그래도 빛깔이나 향기가 동양적이고 한국적이라서 좋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북한산인', '비봉거사'. 구기리의 '농부' 류영모는 이런 호칭을 듣고 살았다. 은자(隱者)의 삶을 택한 그에겐 자연스러운 별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나타나려고 하지 않고 숨는 게 좋습니다. 숨을수록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위로 오르려는 사람은 깊이 숨어야 합니다. 숨음은 준비하고 훈련하는 일입니다." 은자(hermit)라는 말은 그리스어 erēmitēs에서 유래하는데, '사막에 사는 사람'을 뜻한다. 3세기 이집트나 팔레스타인의 사막에서 고독한 수행을 행하는 에레미테스가 등장한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가혹한 자연조건을 구태여 선택해 약간의 먹고 마실 것과 최소한의 의복만으로 살았다. 생명을 위협할 만큼의 극단적 금욕고행을 견디며 구도의 수행과 명상을 했다. 이집트의 은자들은 그리스 정교에 수용되어 '황야의 외치는 자'를 선지자와 예언자로 인정하게 된다. 유럽의 수도원제는 은자의 삶을 집단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숨을수록 높이 올라간다'는 류영모의 말은 그의 은둔에 대한 뚜렷한 종교적 인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고행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았고, 땀을 흘리며 사는 인간의 투철한 신앙윤리를 추구했던 것 같다. 류영모는 구기리 은거시절의 자기인식을 '가련자비(可憐自卑)'라는 시로 남겨놓았다. 제목의 의미는 '가히 연민을 느껴 스스로 낮춤'이란 뜻도 되지만, '가린 자(隱者)의 몸낮춘 생활'이나 '가린 자의 돌없는 비(碑)'를 의미할 수도 있다. 自下門博人 紫霞門外生 ('자하문박'인 자하문외생) 陽止所居處 陰直以己行 ('양지소거'처 '음직이기'행) 어머니 하문(下門)에서 바깥 너른 세상에 떨어진 사람(육신) 자하문 밖에서 살고 있다네 양지 속에 거처를 정하고(해가 지면 집안에 들어가고) 움직이기로 수행한다네(그늘이 내리면 몸을 움직인다네) 이광수 "선생의 도덕경 강의를 듣고 싶습니다" 대문에는 "참을 찾고자 하는 이는 문을 두드리시오'라는 글을 써붙여 놓았다. 참을 찾음은 삶의 진리를 찾는 구도(求道)를 의미하고, 뒷말은 마태복음 7장 7절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petite et dabitur vobis quaerite et invenietis pulsate et aperietur vobis)'라는 구절을 자신과 방문객에게 환기한 말일 것이다. 이웃동네 이광수에게 류영모는 젖소에서 짠 우유를 보냈다. 이광수는 긴 편지로 답장을 했다. "우유를 베풀어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우와 같이 병약한 사람에게 우유는 좋은 식량이온데, 시장에 파는 것이 늘 만족하지 못했는데 보내주신 것을 먹어보니 참으로 진짜 우유(駝酪·타락)의 맛이 느껴집니다. 시장에 나온 제품은 비록 순수우유라 하지만 크림을 안 걷어낸 걸 기대할 수 없고 끓여 소독하여 단백질이 굳어지는 걸 면할 수 없으며 사료를 싼 것을 써서 영양도 풍부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데, 보내주신 우유와 비교하면 색깔과 윤기·농도·풍미가 탈지우유인 것처럼 희멀겋습니다. 아드님 말씀이 선생은 우유를 숭늉이나 김치처럼 상용하였다 하니 진실로 명언입니다. 만일 선생께서 집에서 쓰시고 아직도 남은 것이 있으면 저의 아이들을 위해 1리터라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드리는 돈 12원은 젖소 먹이값에 보태시고 매일 우유를 가지고 오는 사람의 신발값으로 적당히 써 주십시오. 아드님으로부터 들으니 전번에 송아지가 났다 하는데 여러 중생에게 단 젖을 공급할 귀중한 사명으로 세상에 나온 손님이라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소나기 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우유그릇을 엎었다는 아드님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장자'에 눈동자가 새로난 송아지 눈동자 같다(瞳焉 若初生之犢, 동언 약초생지독)는 글귀가 연상되어 그 송아지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날이 좀 따뜻해지면 지팡이를 끌고 선생을 찾아 오래 막혔던 회포도 풀 겸 선생의 도덕경 강의도 듣고 싶습니다. 내내 도안(道安)하시기를 빌며, 이광수 배." 해방 이후 류영모는 이광수에 대해 물으면 말을 아꼈다. 옛벗의 허물을 굳이 꺼내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자꾸 채근하면 "재주있는 사람이지요"라고 답하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류영모 일기 중에는 춘원의 소설을 언급하는 대목이 한 군데 등장한다고 한다. 그의 재능을 아꼈고 소설을 찾아 읽었던 옛 시절의 자취이리라. 류영모에게 40대는 부친을 비롯해 한 세대 앞선 어른들을 보내며 생사에 대해 깊이 성찰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산중생활을 결행한 것도 그런 내면의 반영이었다. 1937년 김정식이 가고 1939년 문일평이 간 뒤 "주검의 사열 행진을 보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죽음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에 포위된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마지막 혹(惑)'이라는 시를 썼다. "다 아니다 다 죽는다 빈탕(허공)이 한데이다/다 아니다 다 죽는다 오직 하나 그만이다/줄곧 왼 한 고디(貞) 말씀 그만이다" 필멸의 존재와 빈탕의 오직 하나.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호해져 갔다. 51세때 사다리에서 낙마 부상 류영모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하느님 한분이 계셨고 우주가 생긴 뒤에도 하느님 한분이 계시고 우주가 없어진 뒤에도 하느님 한분이 계신다. 모든 상대적 존재는 하느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하느님의 한 부분이다. 나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다." 1941년 8월 5일 류영모는 집 옆의 아카시아나무 가지를 삼각사다리에 올라가 자르다가 떨어져 허리뼈를 크게 다쳤다. 2주일간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다. 이때 그는 죽음이 고통이 아니라 좋은 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을 쾌감으로 여기는 것과 쾌감을 고통으로 여기는 것. 이것이 죽음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통과 쾌감은 실은 한맛이다. "몸이란 마침내 큰 짐이요, 감옥이요, 못된 장난이다." 그의 50대는 이런 생각과 함께 깊어지고 있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4-13 13:39:5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6)]삶은 하루살이 생선토막이오류영모와 문일평의 담담한 교유 문일평의 삶 속에는 류영모가 등장한다. 육당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금방 알아보았다. 문일평은 두살 아래인 류영모가 불교, 노장, 기독교에 통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도우(道友)로 여겼다. 문일평은 6㎞ 길을 걸어서 자하문 고개 넘어 비봉 밑에 사는 류영모를 자주 찾았다. 때로는 국문학자 이병기나 조선일보 설의식과 함께 오기도 했다. 당시 문일평은 이런 시를 썼다. 紫霞門 訪牢谷山莊(자하문 방뇌곡산장, 자하문 뇌곡산장을 방문함) 家住靑山裡 水雲共一鄕 가주청산리 수운공일향 林花秋更艶 石磵水猶凉 임화추경염 석간수유량 採藥穿幽俓 種松護別堂 채약천유경 종송호별당 邸廚珍味足 盤上乳茄香 저주진미족 반상유가향 * 뇌곡산장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산속의 집'이란 뜻이다. 집은 푸른 산 속에 있다네 물과 구름이 함께 솟아나는 곳 숲속의 꽃은 가을에 더 곱고 바위개울 물은 더욱 시원하네 약초 캐느라 어둑한 길이 뚫려있네 큰 소나무는 별당을 지키며 섰고 부엌에는 맛있는 것이 충분하니 상 위에 우유와 토마토 향기가 나네 문일평은 이 시에 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졸구(拙句)는 일전에 북한산 기슭에 사는 류 처사를 방문했을 때 읊은 것인데 한 번에 다 지은 것이 아니다. 처음엔 즉경(卽景)으로 임화추경염(林花秋更艶) 석간수유량(石磵水猶凉) 1연을 구성하고, 그 나머지는 그 다음 날에 다 이룬 것이다. 끝 구절은 류 처사의 실생활의 일단을 그린 것이니, 그는 손수 우유를 짜서 손수 재배한 토마토(蕃茄)에 화하여 저녁밥상에 놓았으므로 여기 유가(乳茄)라 함은 이 우유와 번가(蕃茄)와 화락(和樂)을 약칭한 것이다."(문일평의 '호암전집' 중에서) 좋은 의식(衣食) 않은 것 우리집 자랑이요 명리(名利)를 웃 보는 게 내 버릇인데 아직껏 바람 물 주려 씀이 죄 받는 듯하여라 --- 류영모의 시조 "이 시조는 류 처사가 일찍 자기의 뜻을 읊은 것이니 그는 오산고보(五山高普) 교장으로서 교육에 종사한 적도 있었고 그 뒤엔 상업을 경영한 일도 있었지만, 오늘날은 이 시조에 표시한 것과 같이 바람과 물을 찾아서 북한산 밑에 들어가 경전을 읽는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문일평의 '호암전집' 중에서) 1939년 4월 3일 문일평은 급성단독(丹毒)으로 눈을 감았다. 월북한 그의 큰딸 문채원의 아들은 호암이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민족21'). 일본경찰이 가택 수색을 할 때 면도날에 독약을 발라놓았으며 이튿날 면도를 하다가 살짝 베인 곳이 크게 붉어지더니 사망했다는 것이다. 일제가 독립지사를 제거하기 위해 쓰던 수법이었다고 한다. 의혹은 가지만 정확한 증거는 없다. 그가 병약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죽음이 급작스럽고 의아했던 정황은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류영모 또한 돌연한 지음(知音, 뜻을 알아주는 벗)의 타계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추모의 글을 남겼다. 문일평의 죽음에 부친, 류영모 추모글 "호암 문일평 형이 먼저 가는데 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의 결별의 인사하는 것을 굽어 들으시는 듯하다. 1939년 4월 4일 서울 내자동 호암댁을 찾다가 대문 기둥에 조등(弔燈)이 걸렸다. 물은즉 어제 아침에 주인 별세란다. 연전(年前)에 중병 뒤에 느낌을 말씀하기를 멀리 불교문화, 가까이 기독교문화를 많이 입은 조선에서 두 종교의 깊은 조예가 없이 국사(國史)를 학구(學究)함은 망(妄)이었다고 하였다. 이제 종교를 좀 더 알아 가지고 사학(史學)을 말하겠다고 하시고, 날더러 '형은 전도에라도 충실하고 우리가 헛사는 것이 큰일났다' 하시던 씨는 드디어 가시도다. 호암 씨는 52세(1만8545일)로 가시니, 나보다 627일 먼저 나시었다. 올해로 나에게 지명(知命)의 나이(50살)를 주신 하느님께서 앞뒤에 구름기둥(雲柱)·불기둥(火柱)을 세우시니 이 어찌하신 처분일까. 헛사는 어리석음을 알아보게 하시는 채찍이신가. 근년(近年) 내에 앓는 것을 모르고 오던 몸이 1월 9일경에는 투병(鬪病)을 하였다기보다 투인생(鬪人生)의 기회를 가졌다. 건강이 일생의 태양인 것을 건행(乾行)·건적(乾的)인 건강을 보았다. 영생을 힘써 빼앗으려는 건강이다. 일찍이 투병을 인과(因果)로 입맛을 위하는 식사에서는 떠나게 하신 은혜가 있었는데, 만년(晩年)에 또한 은혜를 더 하심인가. 이 결별의 인사를 할 수 있는 준비시었나. 이 인사로 새로 베푸시는 은혜를 굳게 함인가." 불교와 기독교를 연구하지 않고 나라의 역사를 알겠다고 한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류영모에게 말한 대목이 눈에 띈다. 문일평은 류영모를 만남으로써 역사 인식을 종교사상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안목을 갖게 된 셈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민족의 인식을 이해하는 것은 이 국가의 '내면의 힘과 규칙성'을 발견하는 것과도 통한다. 류영모의 '씨알론'은 역사를 움직이는 인간의 사상이 어떻게 역동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지 않은가. 류영모는 그를 갑자기 여읜 뒤 창졸간에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서는 영별에 대한 감회가 깊어졌던지, 성서조선에 '이승'이란 시를 남긴다. 이승의 목숨이란 튀겨논 줄(絃) 쟁쟁히 울리우나 멀잖아 끊질 것 이승의 목숨이란 피어난 꽃 연연히 곱다가도 갑작이 시들 것 이승의 목숨이란 방울진 물 분명히 여무지나 덧없이 꺼질 것 --- 류영모의 '이승' /성서조선 1939년 5월호 생선토막 인생 담은, 추도시 '一生鮮' 그는 또, 문일평에 대한 인상적인 추도시 '일생선'을 썼다. <스스로 느낌, 일생선(一生鮮)> * 일생선은 '한 마리 생선'이란 의미와 '한 생애가 빛나다'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거기에 하루하루 시간이 생선토막처럼 쌓여 생을 이루며 마침내 죽음을 이룬다는 '류영모다운 철학적 사유'에 닿는다. 한 마리면 몇 토막에 한 토막은 몇 점인가 하루하루 저며내니 어느덧 끝점 하루 하루는 죽는 날인데 만(萬)날 수(壽)만 여기네 맛 없이도 머리 토막 죅여내여 없이 했고 세간살이 한답시고 가운데 토막 녹았으니 님께는 무얼 바치나 꼬리를 잡고 뉘웃네 국거리는 못되어도 찌개라도 하시려니 찌개감도 채 못되면 고명에는 씨울거니 성키만 하올 것이면 님께 돌려보고져 오십 구비를 돌아드니 큰 토막은 다 썼고나 인간의 도마 위에선 쓸데없는 찌거기나 님께서 벌러주시면 배부르게 5천 사람 김교신은 류영모의 추모문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근래에 읽는 문자 중에 본호에 실린 '호암 문일평 형이 먼저 가시는데'라는 문자처럼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없다. 류영모 선생의 앞뒤에 섰는 운주(雲柱)·화주(火柱)를 평생토록 인식 못 하는 사람은 차라리 행복한(그 행복은 돼지의 행복과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자라 할 것이며, 앞뒤의 운화주를 보고서도 꼼짝없는 자는 화(禍)를 면치 못할진저." 더욱이 문일평의 추모문에 딸려 실린 류영모의 연시조 '일생선(一生鮮)'은 <성서조선> 독자들이 거의 모두가 외울 만큼 회자되었다. 함석헌은 1981년 함석헌 자신의 팔순 기념 모임에서 답례인사를 할 때 류영모의 '일생선' 얘기로 화제를 이끌었다. 그만큼 충격을 준 시였다는 뜻이리라. 류달영도 류영모 추모문에서 이 얘기를 꺼냈다. "그 글(문일평 추도문)은 참으로 감회 깊은 글이었다. 그 글 끝에 ‘한 마리 생선(一生鮮)'이란 연시조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내가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두 번째 연이다. 진실된 사람의 생애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절실한 비유의 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4-08 09:49:4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5)]스무살에 나는 짐승 노릇을 면했다농민과 노동자는 예수입니다 류영모가 1928년 YMCA 연경반 교재로 쓴 작은 수첩에는 톨스토이 생활10계가 적혀 있다. 1. 밤이나 낮이나 신선한 대기 속에 살 것 2. 날마다 방 밖에서 운동할 것 3. 음식을 절제할 것 4. 냉수욕을 할 것 5. 넓고 가벼운 옷을 입을 것 6. 청결에 힘쓸 것 7. 규율에 맞춰 일할 것 8. 밤에는 반드시 푹 잘 것 9. 이웃에 착한 마음을 쓸 것 10. 볕이 잘 드는 넓은 집에 살 것 톨스토이가 원했던 생활을 적어놓은 것이지만, 류영모의 '워너비'이기도 했을 것이다. 삶의 무욕과 부지런함, 타인에 대한 관용의 미덕을 강조하는 가운데, 건강한 농촌생활을 꿈꾸는 세목들이 많이 들어 있다. 몸은 비록 서울 종로에 있지만, 그는 톨스토이의 귀농주의를 늘 간직하고 있었다. 저 10계에는 은자(隱者)의 꿈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삶의 건강성을 유지하며, 타인에게는 관대한 청정생활.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검은 수염을 기른 그의 모습은 농부의 행색에 이미 가까웠다. 그는 농부를 예수라고 하기도 했다. "농민들은 그리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짐을 지는 예수들입니다. 그들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들이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라고 이사야 53장5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왜 고생을 합니까. 우리 대신 고생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은 농촌에 있었으나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연경반 강의를 시작하던 그해(1928년) 아버지(류명근)는 솜공장(경성제면소)을 차려준다. 김교신은 이런 말을 했다. "서울 장안 종로 시장바닥에서 자란 사람이라서 그런지 돈벌이 재주만은 유달리 풍부하다. 조금만 재주 부리면 돈벌이 할 구멍이 보이지만 감히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시며 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되 이처럼 믿고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성서조선) 성서조선 동인인 송두용의 제자 이진구가 1960년대 초에 미터법이 시행되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터 환산기를 만들어 특허를 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견본제품을 들고 류영모에게 보이며 자문을 구했다. 미터 환산기를 이러저리 보더니 류영모 왈 "장사를 하려거든 생활필수품 쪽으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소"한다. 이진구는 이미 일이 많이 진행된 처지라 중단할 수 없어서 그냥 시행하였다가 큰 손해를 봤다. 이진구는 "선생님은 철학자인지라 세상 물정을 모르시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그 일로 똑똑히 알았다"고 말했다. 경성제면소 7년간의 경영자 류영모 어느 날 류영모의 솜공장에 불이 났다. 솜 타는 기술자 박여상이 실수로 불을 냈는데, 류영모는 아무 말도 없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느냐고 묻자 "장사하여 이익이 생기면 이익이 생겼다고 자랑을 합니까. 불이 난 일도 마찬가지지요." 사업과 재물에 대한 그의 말. "사람들은 돈을 모으면 자유가 있는 줄 알지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영업이나 경영이 자기 몸뚱이만을 위한 일이면 서로의 평등을 좀먹지요. 경영을 하게 되면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평생 동안 모으려고만 하게 됩니다. 자유나 평등이 있을 리 없지요. 돈에 매여 사는 몸이 무슨 자유이겠어요?" 그는 7년간 솜공장을 경영했다. 북한산 비봉 아래 농사를 지으러 떠날 때까지 말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난 부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뭐든 더 바라지 않는 맘의 부자가 되고 싶어요. 몸이 성하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맘을 비워놓아야 하느님의 성령을 담을 수 있습니다." 류영모는 40대 때 3명의 어른을 차례로 영별한다. 1930년 5월 9일 이승훈이 눈을 감았다. 오산학교를 세우고 그 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만들었던 사람, 3·1운동을 사실상 총괄 기획했던 사람, 류영모의 뛰어남을 알고 교육사업에 이끌었으며 여준·신채호·윤기섭을 만나게 해서 영혼의 개안을 하게 한 사람. 스무살에 만났던 그를 마흔에 보냈다. 40대, 이승훈·류명근·김정식의 죽음 앞에서 1933년 11월 2일 부친 류명근이 돌아갔다. 정주 오산학교의 이승훈 장례식에 다녀온 뒤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돌아간 날을 추념하여 5일간 금식을 했다. 돈을 옳게 버는 실천의 삶을 보여준 부친에게 류영모는 '미쁨(믿음)'이란 시조를 바친다. 옳은 거면 그리하마 외인 일엔 아니 된다. 해달 견줘 뚜렷하고 땅에 견줘 무거움이. 한 마디 그 한 말슴에 기초인가 하노라. 미뻐서 좇은 장사 장사 속에 닦은 미쁨 한때의 돈 꿈 아니오 예순 해 장사시리라 늙도록 한결 같으심 미쁨인가 하노라. - 류영모 시조 '미쁨' 1937년 1월 13일 김정식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YMCA의 역사이며, 류영모에게는 신앙의 은사였던 사람이다. 김정식은 일본의 우치무라와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7년 성서조선 5월호에 류영모의 김정식 추모글이 실렸다. "기독교도의 생애란 십자가에 기대어서 덕을 보는 것이냐, 그 작은 부분이나마 짊어지는 것이냐로 구분할 수 있다. 김정식 선생의 생애는 짊어지는 편이었다. 선생은 여전히 괴로운 속에 종종 참척(자식이 먼저 죽음)을 당하고, 배고프고, 추우며, 벗들은 소원하고, 인생은 의문되고, 세상의 불평을 온 가슴에 부둥켜 안으셨던가. 만년에 노자, 장자를 탐독하셨고 사문을 심방하셨으니 오히려 인생의 의문이 계셨음이다. 세고참변(世苦慘變)에 못 살겠다는 사람에게는 선생 말씀이 '날 보라, 나도 살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한 세대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류영모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두루 보면서 40대를 보냈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죽지 않는다고 야단을 쳐도 안 됩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해도 안 됩니다. 몸이 죽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죽으면 얼이 하늘로 간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갑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4-06 13:47:30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4)] 없이 계신 하느님, 얼마나 시원한 말인가마더 테레사 "50년간 나는 신을 의심했다" 2007년 그러니까 그가 돌아간지 10년이 지난 뒤, 책이 하나 출간됐다. '마더 테레사, 내게 빛이 되어주소서'라는 책은 인류에게 충격을 안겼다.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가까웠던 마이클 반 데어 피트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실린 이 책은 인도에서의 봉사활동을 시작한 1948년부터 눈을 감은 1997년까지 '신의 부재'를 느끼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1979.9. 피트신부에게 쓴 편지) 1979년은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해이다. 저 편지를 쓰고난 뒤 석달 뒤의 일이다. 그때 그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받는 웃음 안에도 있다"고 말했다. 봉사를 위해 인도로 들어가던 1948년 하반기의 글에서는 "내가 얼마나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세기 세상이 우러른 완전한 성자로 살았으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를 섬기며 사는 봉사로 생을 일관했던 마더 테레사가 그의 내면을 진솔하게 드러낸 이 글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당시에 겪고 있던 외로움과 고통과 어둠을 지옥으로 비유하고, 이 상황들이 천국을 의심하게 할 뿐 아니라 신의 존재까지도 믿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고백을, 외양과 다른 이중적인 내면으로 읽어야 할 것인가. 그는 스스로의 미소를 '모든 것을 감추는 가면이거나 외투'라고 말하기도 했다. 신을 믿지 않은 게 아니라 존재론적인 고백을 한 것 카톨릭계에서는 이런 고백이 그가 보여준 삶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2003년 로마 교황청은 그를 '시복(諡福 , beatification, 교회가 공경할 복자로 선포하는 일)'의 대상자로 선언했다. 시복은 뛰어난 신앙을 가졌거나 순교를 한 사람에게 주어지며 성인 칭호의 바로 전단계다. 이해인 수녀는 마더 테레사의 편지와 관련해 "나 또한 40여년 수도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말 그분이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위기상황을 겪는다"고 말한 이해인 수녀는 "테레사의 편지는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고백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고 피력했다. "신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테레사가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이해인 수녀는 1994년 테레사 수녀를 만났을 때 신앙, 수도생활, 봉사에 관해 불안이나 회의 혹은 시련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테레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하느님이 계신데 내가 왜 걱정하는가, 모든 것은 그분이 다 해결해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신앙의 깊은 공허나 회의가 어디에서 오는가. 신에 대한 근원적인 오해에서 온다. 류영모는 '신의 부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신은 실제로 부재하기 때문이다. 신은 그 자체가 육신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 육신과 교류하는 존재가 아니다. 상대적인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이미 신이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았기에 생겨나는 의심이라는 것이다. 신은 육신의 인간과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 속에 깃든 하느님 그 자체인 성령과 교류하는 것일 뿐이다. 신은 '없이 계신다'는 게 다석 류영모의 명제다. 부재한다는 것은 육신이 존재하는 상대적인 세계의 인식이며, 없이 계신다는 것은 영성이 영성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인식하게 되면 더없이 시원하다고 류영모는 말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4-01 08:42:45
- [다석 류영모(31)] 내 마음 속에 얼나가 와 있다, 염재신재(念在神在)이승만과 류영모의 만남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어느 날 이승만(李承晩·1875~1965) 대통령이 YMCA 연경반 금요강좌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류영모의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승만이 이곳을 찾은 까닭은 그가 YMCA학관의 교사를 지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제자였던 현동완은 사제(師弟)의 인연으로 이승만과 일생 동안 가까이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동완의 능력을 인정하여 장관직(농림부, 보사부)을 두 번 추천한 적도 있었다. 지식인 김흥호, 류영모 강의에 귀가 뚫리다 류영모의 강의를 들은 사람 중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김흥호일지 모른다. 그 어렵다는 강의를 들은 그는 '생명'을 받았다. 김흥호(金興 浩·1919~2009)는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부친이 기독교 목사였다. 평양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와 교목실장,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를 지낸 분이다. 이 화려한 이력의 김흥호는 1948년 봄 류영모의 성경 강의에 참석한다. 강단에 선 류영모는 문득 김흥호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그는 문득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 무서운 힘을 느꼈다. 말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이 무게는 어디서 오는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류영모의 말들은 투철한 실천을 매달고 있는 말이었다. '하나, 둘, 셋'의 질문은 이후 김흥호의 동양적 기독교를 설명하는 삼재(三才) 사상을 이룬다. 김흥호는 류영모를 따라다닌 지 3년 만인 1951년 북한산 구기동 계곡 폭포가 있는 곳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요한복음 구절에 대한 류영모의 설명을 듣고 문득 귀가 뚫리는 성문(聲聞)을 체험한다. 6년째 되던 1954년 김흥호는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류영모는 그의 병이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는다. 그는 이후 병상에서 일어나 45년간 병치레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4년 3월 17일 김흥호는 주역을 읽고 있었다. 매일 한 괘씩 종이에 그려놓고 들여다보다가 아침 나절에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김흥호는 이때의 경험을 '시간제단(時間際斷, 시간이 끊어지는 체험)'이라고 설명했다. 이날부터 그는 스승의 일일일식(一日一食)을 본받아 실천한다. 21세기엔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보완 역활 석달 뒤에 김흥호는 '대학'을 우리말로 옮겨, 류영모를 찾아가 보여준다. 얼마 후 다시 '중용'을 해석해 보였다. 류영모는 훈민정음을 연구한 이정호(전 대전대 총장)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김흥호의 '대학 번역서'를 내놓으며 "공자가 오셔서 번역해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김흥호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쓰기는 김군이 썼지만, 이건 하느님의 소리요." 김흥호의 호 '현재(鉉齋, '깨달음의 귀' 즉 계시의 의미)'는 그때 류영모가 지어준 것이다. 김흥호는 이렇게 말했다. "다석사상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혼합종교 아니냐고도 하고 다원주의 아니냐고도 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일원다교(一元多敎, 하나의 하느님의 다양한 가르침)라고 할까요. 겉으로는 무슨 종교를 표방해도 결국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아마도 21세기에는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과 불교의 좋은 점을 제대로 가려내서 저렇게 매치를 시켜놓은 분이 선생님입니다." 21세기의 정신가치 지형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앞서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류영모라는 얘기다. 류영모는 참으로 고요하다. 가장 소란하고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도 어떻게 저토록 고요한 길을 걸어갔는가. 그는 이름을 취(取)하지 않았다. 그가 오로지 바라본 것은 자기 속에 살고 있는 하느님, 이름도 없는 본바탕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불교가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통용될 수 있는 까닭은 시종일관 그 이름도 없는 본바탕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성령이며 '얼나'다. 그가 35년간 YMCA에서 가르친 것은 스스로가 길을 얻은 '얼나'에 대한 굳세고 한결같은 동어반복이었다. 생각을 거기에 두라, 신이 거기에 있다. 염재신재(念在神在).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다석어록 = 얼나는 이름이 없다 사람 중에는 이름을 자기로 아는 이도 있다. 명예에 취하여 체면을 지키다가 거짓말을 하고 속 빈 겨껍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름이란 남이 부르기 위하여 붙여놓은 것이며, 내 이름 류영모도 이름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란 마치 감옥에서 죄수에게 붙여주는 죄수번호와 같은 것이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감옥 속에 갇힌 죄수라는 것뿐이다. 이름이란 수치스러운 것이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름 없는 얼나가 내 본바탕이다. 나는 영원한 생명이 폭발하여 나타나는 참나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나를 찾아 자각한 인생은 이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리인 얼나에 무슨 이름이 붙을 리가 없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름 석 자를 외우느라고 애쓰지만 영원한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다. 살아서 죄수번호인 이름에 잡혀서 사는 이도 가엾지만 죽어서까지 이 이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돌에 새겨두는 것은 한심하다. 영원한 것은 얼나뿐이다. 얼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내 속에 얼나가 와 있다. 내 마음속에 온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이 얼나이다. 내 마음속에 온 하느님(1956).2020-03-23 14:43:39
- [다석 류영모] (30) 종교는 셀프다, 직접 신을 만나라오른쪽부터 함석헌, 김흥호, 류영모, 현동완, 방수원. 이 땅에서 학력과 학벌은 한 인간의 평생능력을 보장하거나 해명하는 놀라운 증거능력을 지닌다. 이 뿌리 깊은 관행이 일정하게 한 사람의 이력을 쉽고도 명쾌하게 파악할 수 있는 효율을 제공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외국도 비슷한 현상들이 있지만, 유독 견고한 선입견이 형성되어 학교과정 졸업 이후의 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되어 있는 사회적 체계로는 이 나라가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다석 류영모는 예수와 같은 메시아를 자처하지도 않았거니와 스스로 개창한 교의를 바탕으로 한 교회를 만들어 사상의 리더가 되고자 한 적도 없다. 생시에도 오히려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거부했으며, 그런 집단적인 신앙행위가 도움이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은자처럼 단호한 확언을 내놓은 뒤 내내 깊고 견고한 침묵으로 고독한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시대의 필연적 요청이었겠지만, 학교에서 사도(師道)의 길을 걷는다. 1909년 19세 때 중학교 과정 재학생 신분으로 급한 권유를 받고 양평의 신설학교에서 교원직을 시작했던 그는 1910년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 2년간의 교직 생활을 한다. 이후 1921년 31세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고 1년을 근무한다. 오산학교 교사와 교장 생활을 합치면 3년여 동안의 기간이 된다. 이때의 교육활동은 그야말로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 가르치는 일을 통해 스스로도 지적이면서 영적인 성장을 했으며 또한 많은 후학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학벌 만능사회와 다석의 이력서가 뜻하는 것 당시는 민족학교를 위한 여건들이 갖춰져 있지 않았기에 교육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은 때였다. 학생이던 류영모가 차출되어 갑자기 교육자로 바뀌는 건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력서'를 내밀었다면 교사 자격 요건이 한참 미비할 수밖에 없다. 류영모는 10세 때인 1900년부터 2년간 수하동소학교를 다녔고, 1903년부터 3년간 서당에서 맹자를 공부했으며, 1905년에 경성학당(한성일어학교)에 들어가 2년간 일본어를 공부했다. 1907년에 경신학교에 입학해 성경과 한문 공부를 한다. 경신학교 3학년 때 교사로 차출되었다. 그의 학력은 대략 중졸 정도로 볼 수 있다. 오산학교 교사직을 물러난 뒤 도일(渡日)해 유학준비를 위한 공부를 한 때도 있었지만, 도중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한 바 있다. 한편 신앙 이력을 보면, 1903년 YMCA에서 기독교를 접한 뒤, 1905년 연동교회에서 김정식을 통해 정식으로 기독교 신도가 된다. 1911년 오산학교를 나올 무렵, 그는 교리신앙을 탈피했다. 중간중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진행된 학력 자체가 물론 그의 지적 성취의 전부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얻어진 것도 있겠지만, 많은 지식과 성찰은 스스로의 학구열에서 증강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점이 류영모의 위대한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학교가 그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가 학교를 만들었다. 스승들이 그를 이끌었던 점도 있지만, 그보다 그는 스스로 배움의 감관(感官)을 열어놓고 그에게 다가온 지식과 정보와 통찰들을 적극적으로 섭렵했기에 학문과 사상과 안목(眼目)에서 괄목할 만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35년간 'YMCA연경반의 스승'이 되다 류영모의 성취를 어떻게 학교 이력으로 견적 낼 수 있겠는가. 류영모의 수신(修身)을 어떻게 외형적인 증거들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학력과 학벌에 중독된 한국사회에 류영모의 배움과 가르침은 교육의 새로운 길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31세의 류영모가 오산학교로 들어왔을 때, 그가 딛고 있던 '경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당시 학생들도 짐작할 수 없었겠지만 후세의 우리 또한 가히 그 수심(水深)을 짚기 어렵다. 그는 단순한 교장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읽는 '성령의 선각자'였다. 오산학교 교장직을 벗어난 지 6년 뒤, 류영모에게 인생의 중대한 '미션'이 다가왔다. 1928년 YMCA 간사이던 현동완이 그의 적선동 집을 찾아와 종로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강의를 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 전해인 1927년, YMCA전국연합회장이자 언론인(조선일보 사장)이며 민족운동가이던 이상재(李商在)가 76세로 타계한 뒤, 정신적인 빈자리를 채워줄 명망 있는 인사가 필요하던 때였다. YMCA 초대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부터 시작한 류영모의 연경반 지도는 식민지배 시대를 넘어 35년간(1963년까지) 지속된다. 시대의 스승, 생각의 리더, 신앙의 사표(師表)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음 속에서 샘솟는 말들을 전하는 '소명'을 실천할 기회였다. 기독교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기존 지식을 전달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진정한 하느님의 메신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가르침이란, 무엇인가를 머릿속에 넣어주는 일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깨닫는 방법과 방향을 일깨워주는 것임을 류영모는 알고 있었다. 은둔은 몸의 위치가 아니라 영혼의 위치다 종교는 자율(自律)이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기에 오로지 스스로 해야 하는, 신과의 대면이다. 밥을 먹어줄 수 없고 오줌을 누어줄 수 없듯이,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가장 절박하고 가장 긴급하며 오직 한번 뿐인 '할 일'이며 '볼 일'이다. 그는 이 하나를 진북의 별처럼 접한 뒤 마치 이미 '없는 세상'처럼 자기의 길로 걸어나갔다. 도시에 나와 있을 때도, 은처에 들어앉아 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 땅의 역사에서 거의 보지 못했던 '완전한 은둔자(隱遁者·Hermit)'였다. 은둔은 몸의 위치가 아니라 마음의 위치이며, 영혼의 위치다. 그가 세상에 나와서 했던 말도 은둔한 영혼의 말이었다. 굳이 사람을 피해 숨은 것이 아니라, 호젓한 어둠을 찾아 영성의 길을 낸 것이다.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며 수신(修身)과목을 맡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진정한 수신'은 인간이 만나야 할 확고한 진실에 대한 것이었다. 단호하게 그 길에 대해 역설하던 그는 일제의 압박으로 다시 교장 자리를 내려놓고 은거에 들어갔다. 그를 다시 불러낸 YMCA 총무 현동완(玄東完). 현동완은 그 스스로 풍운의 역사 속에서 성자의 삶을 보여주었지만, 평생 성자를 찾아 헤맨 사람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성자 이세종을 찾아 전라남도 화순(도암면 등광리)으로 찾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이세종은 이미 타계한 뒤였고, 제자 이현필을 만나 성인의 자취를 잠깐 느꼈을 뿐이다. 현동완 부부는 '이세종 기념사업'에 그동안 모았던 돈을 내놓았고, 제자 최흥종·정인세·이현필은 작은 예배당을 짓는다. 이 땅의 성자를 찾으려고 횃불을 든 사람, 그게 바로 현동완이었다. 1928년 그가 류영모를 YMCA연경반 강사로 모셨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은둔자를 찾아낸 그는 이 땅의 진정한 복음이 될 '영성의 언어'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현동완의 죽음 이후 눈물을 흘린 류영모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 가슴속에 생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을 찾는 이는 말을 뱉어내고 싶어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성령이 있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과의 연락에서 성령이 건네주는 것이 생각입니다. 성령이 건네주지 않으면 참된 생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에 사로잡힌 사람은 못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잊어버리도록 하느님을 생각할 때 하느님이 오십니다. 생각이 성령인가. 나는 모릅니다. 나오는 것은 생각이고 오는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내가 낳았지만 나를 닮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성령의 씨는 하늘에서 옵니다. 내가 몇십 년 동안 인생에 참여해서 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동완이 타계했을 때 장례에서 조사(弔辭)를 쓰고 읽었던 사람은 류영모였다. 9살 아래인 현동완의 죽음 앞에서 그는 의연했지만, 나중에 구기동 자택에서 현동완의 얘기가 나왔을 때 눈물을 보였다. 고요한 은둔자에게도 깊이 마음으로 오간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류영모에게 '35년 종교강의'의 길을 내준 현동완의 삶에 대해 짚고 가는 게 예의일 것 같다. 현동완은 1899년 서울 마포구 현석동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서울중앙YMCA학관을 거쳐 이듬해 YMCA 체육부 간사로 취임한 뒤 평생을 YMCA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다. 그의 큰아버지 현흥택은 구한말 군인으로 전권대사 민영익을 수행해 미국과 유럽을 여행했다. 1896년 독립협회 창설에도 활약을 했고,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될 때 자문위원을 맡았다. 1907년 기독교회관을 지을 때 대지 400평을 기증했다. 4년 미국생활에서 '경건주의' 신앙혁신을 접한 현동완 1916년 서울YMCA 실내체육관이 생겼고, 현동완은 YMCA농구팀 감독 겸 선수를 맡아 일본 원정경기를 펼쳤다. 이 경기에서 2승3패의 놀라운 전적을 남겼다. 1920년 그는 미국 클리블랜드YMCA에 파견되어 4년간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현동완은 퀘이커교도와 깊이 사귀었고 벽지의 수도원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이때 그는 경건주의(Pietism)를 접한다. 이 신앙운동은 17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으로 루터가 주창했던 '윤리주의적 신앙'의 재기를 추구했다. 즉, 교의(敎義·공인된 종교적 가르침)의 승인만이 아니라 성서를 체득하여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체험을 존중했다. 금욕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적 실천이 강조되었고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을 통한 인간변혁과 세상변혁을 꿈꾸었다. 경건주의는 교회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내의 자주적 집회인 '소교회'를 만들어 활동한 게 특징이다. 현동완은 1926년 귀국해 이 경건주의를 국내에서 실천하기 시작한다. YMCA소년들로 구성된 '평화구락부(Peacemakers'club·PMC)'를 창설한 것이 그 첫걸음이다. 매주 금요일에 집회를 열고 수련과 사회봉사를 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난 11월 11일에는 매년 평화를 기리는 대규모 행사를 개최했다. 연말에는 본관 로비에 "동지여, 빈민을 위하여 사흘간 길 위의 거지가 되자"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한 개에 5전하는 메달을 파는 이른바 '거지운동'이었다. 1930년의 기록에는 이 행사로 800여원을 모아 서울 인근의 극빈자 400여 가구에 전했다고 나온다. 전쟁 직후 난지도에 소년도시를 만들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평화봉사활동을 '참운동'이라는 사회운동으로 발전시킨 것도 현동완이다. 그가 간청해서 시작한 류영모의 '금요강화'는 이 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교육프로그램이었다. 1935년 현동완은 YMCA 총무를 맡으면서 참운동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일제 극성기의 경제적 침체와 다양한 곤경으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1937년 그는 YMCA를 떠나 함북지방에 은둔한다. 해방 후 현동완은 미군정청 교통부장 고문으로 일하다가 1948년 재건된 서울YMCA 총무로 취임한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2년 삼동부녀회관을 설립해 전란에 고통받는 여성들을 구호했고, 전쟁이 끝난 1953년엔 난지도 100만평을 사들여 삼동소년시(보이즈타운)를 지었다. 전후 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을 데려와 양육하며 민주시민으로 육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오며 감사, 가며 감사, 있어 감사'라는 현동완의 글귀가 씌어진 강의장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류영모. 그는 소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며 '오며 감사, 가며 감사, 있어 감사'의 마음을 강조했다. 류영모의 강의실 뒤쪽에 붙어 있던 그 표어가 바로 현동완의 감사생활 신조이다. 그는 김삿갓처럼 한자어를 활용해 우리말을 함께 표현하는 데도 능했다. 교육생들에게 써준 '多白衣考見大慈(다백의고견대자)'는 "우리 민족이 흰옷을 많이 입는 점을 고려할 때 큰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라는 의미지만, "다들 배기고 (힘들지만) 견디자"라는 응원이 숨어 있다. 또 이런 7언절구도 썼다, '憂巨志國眼目高 建邦之計養淡輩(우거지국안목고 건방지계양담배)'는 "나라를 걱정하는 큰 뜻, 안목이 높구나/나라를 세울 뜻으로 맑은 후배를 키워내는구나" 이런 뜻으로 읽히지만, 소리나는 대로 읽어보면 "(이 나라 사람이) 우거지국 안 먹고 건방지게 양담배(나 피운단 말이냐?)"라고 힐난하는 시다. 현동완은 이렇게 뛰어난 언어감각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난지도 삼동소년시는 1969년 물난리 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현동완은 이 뜨거운 실천의 열정으로 '고아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는다. 서울YMCA 내부의 이념대립이 격화되던 1957년 그는 총무직을 사임했다. 1959년부터 4년간 삼동소년시의 단칸방에서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그는 1963년 눈을 감는다. 그와 함께 삼동소년시 활동을 했던 목사 황광은(黃光恩)은 이렇게 추모했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천당 속에 높이 앉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주님께 미친 것입니다. 그의 생애 40년은 오로지 청소년교육에 몸을 바친 것입니다. 그는 20세기 종로의 성자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3-18 10:05:10
- [다석을 아십니까] 1편 19세기 세 사람의 진인(眞人)…간디, 톨스토이, 다석다석(多夕)을 아십니까?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의 삶을 소개합니다. 아주경제에서 연재되고 있는 '다석 류영모의 재발견' 시리즈를 좌담 형식으로 한 편씩 톺아봅니다. 가장 먼저 시리즈의 1편인 '19세기 세 진인(眞人)이 있었다…간디, 톨스토이, 다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곽영길 아주뉴스코퍼레이션 발행인, 이상국 아주경제 논설실장 그리고 김성언 다석 학회 총무 세 분이 다석의 초창기를 돌아봤는데요. 다석의 탄생부터 52세 중생체험에 이르기까지를 조명해보았습니다. 한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특정 종교 내에서 집단 발병하며 여러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데요. 이에 각성을 요구하는 사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일련의 흐름을 지켜보며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계시진 않은가요? 만약 다석이 현재의 사태를 지켜봤다면 어떤 이야기를 건넬까요? '다석을 아십니까'를 통해 그 해답을 만나보세요.2020-03-13 08:52:5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8) 나는 하루살이다일년살이와 하루살이의 차이 하루는 일주일이나 한달, 혹은 1년과는 다르다. 하루는 해가 돋는 새벽과 아침이 있고, 해가 중천에 있는 한낮이 있으며, 해가 지는 저녁과 해가 사라진 밤이 있다. 하루를 인식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다. 해의 이동 그리고 낮과 밤의 순환이 뚜렷이 관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인위적으로 나눠진 단위에 가깝다. 월요일이 달과 관련 있는 날도 아니고, 일요일이 해가 특별해지는 날도 아니다. 인간의 사회활동 속에서 일주일이란 기간의 구분은 중요하지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하늘만 보고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달이란 기간은 달의 위치와 관련이 있고 천체 속의 지구 움직임과 분명히 관련이 있지만, 하루만큼 직관적이지는 않다. 달의 모양을 보고 알아내거나 월급날을 기준으로 실감하는 경우가 많다. 1년이란 기간 또한 태양계를 공전하는 지구의 움직임 때문에 획정되는 시간이며, 우리의 경우 4계절이 차례로 한 바퀴 순환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1년을 세(歲)로 표현하여, 인간 삶의 중요한 시간 개념인 '나이'가 생겨났다. '세'는 겨울의 가장 추운 때를 말하는데, 이것을 1년의 끝과 시작으로 보고 이 포인트를 거쳐야 1년을 산 것으로 친다는 개념이다. 우리는 1년이란 시간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가 살아온 1년의 시간들을 살피며 삶을 준비하고 실행하며 반성하는데 익숙하다. 어떤 사람이 몇 살인지를 아는 것은 그가 삶의 어느 시간을 가고 있는지에 대한 중대한 좌표가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대개 '한해살이'로 인생의 과정을 인식해 왔다고 볼 수 있다. 1년이란 시간은 순간순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아니기에, 삶의 시시각각을 조금은 느슨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도 된다. 1년의 단위로 보면, 하루는 365개나 되는 하루 중의 하나일 뿐이며, 하루 뒤에는 또 하나의 하루가 있다. 하루는 자꾸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겨울엔 봄을 기다리며 봄엔 여름을, 그리고 가을을, 또 겨울을 기다린다. 1년을 지나고 나서야,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는지 돌아보며 놀란다. 10년도 그렇고 50년도 그렇다.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시간에 대해 당황하는 방식이다. '하루하루 살아요'를 복음성가에 넣은 스탠필 목사 하루살이라는 곤충은 딱 하루만 사는 건 아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애벌레로 물 속에서 살다가 반쯤 되는 성충으로 변태를 한 뒤에 날벌레로 육상생활을 시작한다. 탈피를 한 이 날벌레는 서둘러 교미를 하고 알을 낳는다. 일주일쯤 날아다니며 제 할 일을 마친 뒤 죽는데, 인간의 눈에는 금방 죽는 것처럼 보여서 하루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루살이의 삶에서 '하루'란 일생에 가깝다. 하루살이가 사람의 삶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아득해 보일까. 하루살이처럼 치열하게 매일을 산다면, 그 삶은 얼마나 길고 아득한 것일까. 여기살이와 가온찍기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줄곧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정지(停止)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다 자꾸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 공간이라 하지만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세상 안의 시간, 공간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변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변화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몰래 옮긴다는 '밀이(密移)'라는 말을 씁니다. 만물이 은밀하게 움직여 갑니다. 옮겨 간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늘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참으로 밀이(密移)입니다. 그래서 머무름이 없다는 무주(無住)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 몸이 머무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 몸의 피는 자꾸 돌고 있으며, 우리의 숨으로 태울 것을 죄다 태우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실은 지구 또한 굉장한 속도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은 허공(우주공간)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지나쳐 갑니다. 도대체 머무르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 사이에 이제 여기가 접촉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접촉점을 이제 여기라 한 것입니다. 지나가는 한 점이, 그것이 이제 여기인 것입니다. 그 한 점이 영원이란 미래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산다는 것은 이제 여기에 당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여기 있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발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오랜 세상이라도 이제입니다. 가온찍기(나의 한복판을 맞추어 참나를 깨닫는 일)입니다. 이것이 나가는 것의 원점(原點)이며 나라는 것의 원점입니다. 이제(여기)는 참 신비입니다. 그 이제의 목숨을 태우는 우리 인생은 역시 이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신비입니다. 한 찰나에 구십생사(九十生死)가 있다는 인도사상은 분명히 신비사상일 것입니다. 이제라고 '이' 할 때 이제는 이른 것입니다. '이' 할 때 실상은 이미 과거가 됩니다. 이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입니다. '이'의 계속이 영원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3-11 09:25:1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7)구원받겠다고 믿는 건 참종교 아니다영화 '예수 그리스도(The King of Kings, 1927년작)'의 한 장면. 서른 즈음에 믿음의 대역사가 이뤄졌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는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about thirty) 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성서기록을 바탕으로 따져보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때가 32세쯤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인류가 경험한 영적인 신념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강력한 믿음을 수립한 이가 30대 초반이었으며, 그분이 이룩해놓은 역사(役事)가 인류의 신앙을 2000년 동안 이끌어온 큰길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늘의 성자를 내는 데 인간의 '나이'가 깨달음을 가늠할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30대 초반은 신체의 성장이 거의 멈추고 영적인 성장이 이뤄지는 '청년기'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비로소 어떤 일에도 움직이지 않는 신념이 서게 되었다는 바로 그 나이다. 류영모가 38세 조만식에 이어 31세의 나이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한 일은 한 인물의 이력 중 하나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 의미를 넘어선 영성 개안(開眼)의 모멘텀으로 읽을 수 있다. 오산학교는 창립 기념행사로 운동회를 했는데, 갑자기 상부에서 '운동가'(이광수가 지은 노래였다)가 불온하다며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교장 류영모는 급하게 '운동가'를 지었다. 이 노래에 대한 기억은 학생이었던 함석헌이 살려낸 것이다. 함석헌은 노랫말을 생생하게 외고 있었다. 다석어록 = 예수 믿는다는 건 십자가 믿는다는 게 아니다 "예수는 바람을 영원한 생명의 운동으로 비유하고 있다. 성령의 바람은 범신(汎神)이다.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동이다. 사람은 사는 동안에 지나친 욕심을 지니고 산다. 신선이 되어 영생불사하기를 바라는가 하면, 예수 믿으면 예수가 내려와서 죽지 않도록 살려서 하늘로 구름 타고 올라가기를 바라고 있다. 몸으로 살 욕심 때문에 이런 것을 믿는다. 예수의 영생의 정의는 이렇다. 오직 하나이신 하느님을 아는 것과 그가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다(요한복음 17:3). 이를 기도할 때는 언제나 외워야 한다. 절대 유일(唯一)을 알고 거기에 붙잡히는 것이 영생이다. 여기에 삶의 참맛이 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 영생한다고 하는 것은 피와 살과 뼈가 사는 게 아니고 성령인 말씀이 사는 것이다." 다석의 제자 박영호는 이렇게 부연한다. "성경에 오류와 오해가 있다면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마음에 부담이 안 될 수 없다. 그러나 9할이 잘못되었고 1할이 바로 되어 있다고 해도 그 1할을 찾아내면 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문자화되기 전의 말씀인 성령이 내 마음속에 와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성경 연구를 하려면 예수의 말대로 하느님 아들이 되어서 연구하여야 바르게 할 수 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단어나 문법만 안다고 성경 연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인 성령은 성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 성경은 성령이 스치고 지나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이 하느님 아들인 그리스도다. 사람들은 예수의 영원한 생명인 성령은 제쳐놓고 예수의 육체를 그리스도로 알고 있다. 이런 무지한 일이 어디 있는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3-09 12:45:47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6) 가치와 믿음 '혼란시대', 류영모같은 큰 스승이 있는가"3·1운동은 이승훈의 작품이었다" 류영모 교장실 문고리만 쥐다 놓은 함석헌 교장 류영모는 11년 아래였던 스무살 함석헌 학생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함석헌은 이 분과 무슨 말이든 나눠보고 싶었다. 그는 이런 일을 털어놓았다. "류 선생님께서 오산학교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생님을 조용히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 무엇 때문이랄 것도 없이 그저 그러고 싶어서, 계시는 방문 앞에까지 가서 문고리를 잡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서 무슨 말을 어떻게 여쭈어야 할까 그것이 두려워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내 맘이 여리고 수줍음이 많아서 그런 것인데, 그때 용기를 내서 들어갔더라면 선생님 편에서 아시고 무슨 말로나 말문을 열어주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결점이 있습니다. 의지가 약하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것입니다. 류영모 선생님을 그토록 존경하면서도 한번도 질문을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후회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스스로 나는 이때까지 인생을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무 살이 되도록 인생이란 문제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숨'이나 '참' 같은 낱말을 들어본 일이 없었지요. 이제 겨우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모든 문제를 좀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 한스럽지요. 선생님은 누구를 두들겨서 깨워주는 성격은 아니었거든요." 두 사람이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데에는 만남이 길지 않았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졸업반이었고, 류영모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교장 인준이 거부되어 1년 만에 그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신원조회를 해본 결과, 3·1운동 48인 중의 한 사람인 류명근의 아들임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을까. 전임 교장 조만식과 같이 한복만 입고 다니는 류영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작동했던 것일까. 내가 오산에 온 건, '함'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1922년 여름 류영모는 오산학교를 떠난다. 학교 사환이 짐을 들고 따라왔다. 밤길을 걸어 고읍(古邑)역을 가는데 문득 함석헌이 따라왔다. 함석헌은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로서는 잘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함(咸錫憲),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보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저 송구스럽기만 했습니다." 이후 함석헌의 생후 2만 날을 기념하는 생일잔치 때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일생 중에서 정신적으로 단층(斷層)을 이루며 비약한 때가 있었는데 그중 한 번이 류영모 선생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10년쯤 뒤에 낸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읽고 가장 기뻐한 사람이 류영모였다. 함석헌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한 대목은, 1940년 8월호 '성서조선'(통권 139호)에 실린 류영모의 글 '저녁찬송'에 살짝 보인다. "근 20년 전에 그때는 여름비로 길에 물이 넘치고 밤이 어두운데 오산학교에서 고읍역까지 형(함석헌)이 나를 전송해줄 때, 허방에 빠지면서 이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어둠이 분명히 빛보다 크다'고." 그날 비가 와서 길 위로 물이 범람해 있는지라 어둠 속에서 여러번 물웅덩이에 빠졌다. 이렇게 캄캄한 길을 걸으며 물에 빠져보니 어둠이 과연 빛보다 더 크다는 걸 알겠군. 이렇게 중얼거리듯 말을 한 것이다. 함석헌은 당시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류영모는, '어둠이 빈탕(허공)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그의 철학을 내비친 것이다. 류영모는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우주의 속삭임을 방해하며 밤이야말로 영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1940년경부터 사용한 다석(多夕)이란 호에도 빛보다 어둠이 지닌 진실을 담으려 한 것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3-04 10:53:21
- [다석 류영모] (25) 참종교는 이래야 한다, 3.1운동 이끈 그들처럼류영모는 식민지-전쟁-분단에 내몰리는 시대, 즉 이 땅의 역사 중에서도 역경으로 가득 차 있던 소란한 시기를 살면서 강력한 '고요'를 유지했던 사람이었다. 역사적 소란함을 내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삶과 죽음의 본질을 깊고 꾸준히 밀어붙였다.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서 그의 심령으로 쇄도한 종교와 문명과 지식들은 특유의 강인한 성찰력과 집요한 자기완성의 희구로 하나의 가닥을 이루며 고요함을 구축해 나갔다. 영국의 TV프로그램 제작자이자 명상가인 피터 프랜스(Peter France)는 '은둔자들'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은둔은 모든 가면과 위선을 벗기는 일이다. 은둔은 결코 허위를 참아주지 않는다. 명백한 확언, 그리고 침묵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그를 둘러싼 숲의 고요에 의해 조롱받고 심판받는다." 명백한 확언과 침묵. 다석 류영모의 삶은 여기에 닿는다. 피터 프랜스는 마치 류영모를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은둔'을 풀어놓고 있다. "모든 죄악은 바로 인간의 거짓된 자아, 말하자면 자신의 이기주의적인 욕망에서만 존재하는 거짓된 자아가 삶의 근본적인 본체라고 가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거짓된 자아를 장식하고 그것의 무가치한 본질을 대단한 무엇으로 포장하기 위해 쾌락과 경험, 권력과 명예, 지식과 사랑을 축적하느라 삶을 소진해 버린다." 류영모는 이 자아를 '제나'라고 불렀고, 이것을 '얼나'로 거듭나게 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것이 류영모의 명백한 확언이며, 그의 놀라울 만큼 고요한 삶은 거짓된 자아의 입을 다물게 한 견고한 침묵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0년 전에, 인간의 피상적인 궤도를 이탈해 은둔자로 숨쉬며 깊고 완전한 어둠과 적막을 향해 나아간 성자가 있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3-02 10:11:39
- [다석 류영모] (24)"나는 공자보다 뛰어난 성인을 보았다"류달영, '새마을운동의 아버지' 그러나 군사정부가 민간정권으로 옷을 갈아입던 1964년 국민재건운동법이 폐기되고 본부가 해체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용당한 모양이 됐다. 1965년 5월 15일 동아일보에는 류달영의 기고가 실렸다. “5·16군사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이 나라의 하나의 비극으로 종말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 존재하였고, 또 그것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류달영의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 이후 류달영은 민간 차원의 재건국민운동중앙회(사단법인)를 결성했다. 그는 자신이 펼친 재건국민운동을 새마을운동과 연관 짓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류달영이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실질적인 힘이 되어준 것은 사실이었다. 새마을운동연수원장 김준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서울대 농대)이 이 운동의 주요 간부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는 박정희의 가장 가치있는 성과로 꼽히는 새마을운동의 원천기획자이자 실행의 핵심두뇌였다. 식민지 시절 우연히 받아든 한권의 책이 이 나라의 운명을 바꾼 거대한 동력이 되었다. 류달영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세운 숨은 힘이다. 여의도에 있는 성천재단과 다석연구회 류영모의 사상과 삶을 배우는 다석사상연구회는 서울 여의도 63빌딩 옆의 조촐한 건물인 라이프오피스텔 강의실에서 매주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에는 류영모의 정통 제자라 할 수 있는 박영호 회장과 최성무 대표, 김성언 총무를 비롯해 다석을 좇는 '언님'과 후학들이 모여 신앙행사와 강연, 학습의 시간을 갖고 있다. 다석사상을 꽃피우고 있는 이 '교실'을 무기한으로 쓰도록 유지(遺旨)를 남긴 사람이 류달영이다. 그의 재단인 성천(星泉·류달영의 호)문화재단이 다석을 기려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류달영은 농업시범을 목적으로 경영해 오던 수원의 평화농장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로 편입되었을 때 그 보상비 10억원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문화재단을 세웠다. 이것이 1991년 설립된 성천문화재단이다. 발기인으로는 류달영을 비롯해 구상, 김도창, 류화숙, 서영훈, 전택부 등이 참여했다. 이 재단은 정신 및 생활문화 창달을 위한 고전과 현대와 미래 교육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재단의 키워드는 문화이며, 문화사업과 문화민주주의,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추구한다. 이 재단은 특히 류영모와 관련된 사업과 행사들을 팔을 걷어 지원하고 있다. 류달영은 왜 스승의 스승(스승 김교신의 스승인 류영모)을 이렇듯 사후에까지 길이 모시려 했을까. 그는 류영모가 예수나 석가처럼 사람들에게 진리의 생명을 가르쳐 주었기에 그 가르침이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고통받던 겨레를 구하는 중차대한 역할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류영모의 정신혁명, 류달영의 경제혁명 그 스스로가 뛰어난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류달영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강권에 '국가 기틀을 잡는 작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바를 꿋꿋이 지키며 문화 창달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랬기에 류영모의 '크기'를 읽은 것이다. 이 나라의 '정신'이 걸어온 본연의 길과 마땅히 서야 할 자리를 가리키면서도 서양이 수천년에 걸쳐 이뤄놓은 종교의 원천적 본령(本領)으로 치달아 올라 기독교의 지순한 경지를 개척한 성자의 '가치'를 헤아린 것이다. 중국의 공자가 해놓은 동양 정신가치의 혁명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류영모 앞에 옷깃을 여민 후학(後學) 류달영 또한 예사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 내면엔 이 나라를 위한 위대한 비전과 에너지가 꾸준히 솟아나, 우리가 선진국으로까지 도약하는 경제의 주춧돌과 엔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역사는 지하수처럼 숨은 물길로 이렇게 흐른다. 류영모의 정신혁명과 류달영의 경제혁명은 20세기 이 나라를 각성시키고 도약시킨 놀라운 저력의 비밀이었다. 류달영은 중·고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수필가이기도 하다. 그의 수필 '슬픔에 관하여'는 생에 대한 비감(悲感)과 관조를 이해하게 되는 명편이었다. 그의 인간적 면모를 이해하게 되는 글이라 소개한다. 막내아들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다음에 쓴 절절한 문장들이다. "나의 막내아들은 지난봄에 국민학교 1학년이 되어 있어야 할 나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이 아이는 '신장종양'이라고 하는 매우 드문 아동병에 걸렸다. 그러나 곧 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왔다. 그런데 오늘, 그 병이 재발한 것을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의학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선고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손목을 하나씩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우리 내외는 천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은 시골에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 사람의 물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티끌만한 근심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자기의 마지막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맹목(어두운 눈)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빠, 구두." 그는 구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두가 신고 싶었나 보다. 우리 내외는 그가 가리킨 가게로 들어가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어린 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는 그의 기쁜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오늘이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할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한 것이다. 6·25때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이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아이가 밖으로 놀러나갈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넌 커서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사가 너의 병을 고쳐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나쁜 병을 고쳐줄 수 있게 말이다." 하고 말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든지 의사가 되겠다고 말해왔었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없이 총명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류달영의 '슬픔에 대하여' 중에서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2-26 14:33:3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2)오직 오늘을 똑바로 살아라한국 첫 출판사 '신문관'과 잡지 '소년' 최남선은 1902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성학당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부립중학에 입학한다. 그런데 3개월 만에 공부를 포기하고 귀국한다. 2년 뒤인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한다. 이때 유학생 회보인 '대한흥학회보'를 편집한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당했고 이듬해 귀국한다. 그는 당시 도쿄의 가장 큰 인쇄소였던 수영사(秀英舍)의 활판인쇄기, 자모기, 제판시설, 식자시설을 들여온다. 최남선은 인쇄소를 드나들면서 인쇄기술을 배웠다. 1907년 서울에 신문관(新文館)이란 인쇄소 겸 출판사를 설립한다. 청계천변의 을지로2가 21번지 중소기업은행 본점 뒷골목 일대에 있던 건물로,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출판사였다. 1908년 11월 1일 신문관에서 '소년'이 창간된다.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란 시가 그 창간호에 실린다. 이날은 우리나라 '잡지의 날'로 지정됐다. '소년'은 매달 2500부 정도를 발행했는데 거듭 매진사태를 빚었다. 신문 발행부수가 1000부이던 시절이었으니, 경이적인 부수에 경이적인 매진사태였다. 신문관은 이 잡지 이외에도 '청춘'과 어린이잡지 '붉은 저고리', '새별' 등을 냈다. 최남선은 '소년'을 창간한 이듬해 일본으로 가서 석달간 머물렀다. 이때 소설가 벽초 홍명희가 이광수를 소개해준다. 홍명희는 21세, 최남선은 19세, 이광수는 17세였다. 최남선은 이광수를 보자마자 '천재'임을 알아보았다. 그에게 잡지 '소년'에서 일해달라고 했다. 1910년 '소년'에 최남선의 편집장 레터가 실린다. 최남선 편집장은 잡지 발행에 참여할 이광수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장래 우리나라 문단을 건설하고 증광(增廣)도 할뿐더러 다시 한 걸음 나아가 세계의 사조를 한번 갈아치울 포부를 가지고 바야흐로 경인충천(驚人衝天, 사람을 놀라게 하고 하늘을 찌름)의 준비를 하는 잠룡이오." 최남선의 잡지에 글을 쓴 류영모 이광수는 최남선을 만난 그날을 이렇게 말한다. "하루는 홍명희군이 오라고 하기에 가 보니 낯빛이 검은 청년을 소개하는데 그가 최남선이었다. 그는 와세다대학 예과를 버리고 문장보국(文章報國)을 목적으로 서울에 돌아와 '소년'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로 하였으니 나더러도 집필하라고 하였다. 최남선군은 나보다 2살 위였다. 형으로 경모하였다."('춘원전집') 류영모가 최남선을 알게 된 것은 '소년' 잡지 편집을 돕던 이광수가 어느 날 최남선과 함께 자신의 집에 찾아오면서였다. 함께 오산학교 교사를 3년 지낸 이광수는 류영모를 잘 알고 있었다. 1914년 7월 잡지 '청춘'을 창간할 무렵이었다. 류영모는 그 다음호인 8월호에 글을 싣는다. '청춘'에 처음 기고한 글은 '나의 1234'(1914년 8월 1일 청춘 2호)였다. 이후 꾸준히 글을 실었다. '활발(活潑)'(청춘 6호), '농우(農牛)'(청춘 7호), '오늘'(1918년 6월 청춘 14호), '무한대(無限大)'(청춘 15호) 등이다. '활발'이란 글은 당시 중학교 교과서인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전재되었다. '청춘'에 이어 나온 주간지 '동명(東明)'에 '남강 이승훈전'을 싣기도 했다. 28세 류영모의 '지금-여기-나' 철학 당시 실린 류영모의 글을 하나 읽어보자. '오늘'이란 글이다. 28세 때의 생각으로 믿기지 않는다. "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는 힘있는 충고다. "나의 삶으로 산다는 궁극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가로대 오늘 살이에 있다 하노라. 오늘 여기 '나'라 하는 것은 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 함께 났으나 이름이 다른 것)이라 하지 않으면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할 것이니 '오늘'이라 할 때엔 여기 내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라 하는 곳이면 오늘 내가 사는 것이 분명하고 '나'라 하면 오늘 여기서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 하는 뜻이로다. 무수지점(無數地點)에 광겁시간(曠劫時間)에 억조인생(億兆人生)이 살더라도 삶의 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다. 어제라 내일이라 하지만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 뿐이다. 거기라 저기라 하지만 거기란 거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 산 사람은 다 나를 가졌고 사는 곳은 여기가 되고 살 때는 오늘이다. 오늘 오늘 산 오늘 오늘 어제의 나, 거기의 나는 죽은 나가 아니면 남된 나, 나 여기 사는 나를 낳아놓은 부모라고는 하겠으리. 현실아(現實我)는 아니니라. 내일을 생각하려거든 어떻게 하면 내일의 위함이 되도록 오늘을 진선(盡善)하게 삼가는 맘으로나 할 것이요. 너무 내일만 허망(虛望)하다가 오늘을 무료히 보내게 되면 이것은 나지도 않은 용마를 꿈꾸다가 집에 있는 망아지까지 먹이지 않는 격이라. 산 것은 사는 때에 살 것이니라." 류영모와 최남선은 닮은 점이 많다. 같은 해에 서울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장사(제화재료상과 한약국)를 한 점도 같다. 둘 다 일어를 배우려 경성학당에 다녔고 도쿄에 유학을 갔다가 중도 귀국한 것도 비슷하다. 다만 류영모는 종교와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최남선은 문학과 역사에 열정이 많았다. 두 사람 스스로 상놈을 자처할 만큼 조선조 양반제도에 대해 반감이 컸다. 두 사람이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일제의 압박에 무너진 최남선의 훼절 때문이다. 이광수는 최남선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의 티끌은 잘 보이는 법이다. "최남선은 자부심이 강하고 고집이 있다. 그러나 의지가 굳은 사람은 아니다. 그의 생활방향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인 것 같다. 고집이 센 듯하면서 사람에게 넘어가는 일이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춘원전집) 감정주의와 유명함이 그를 훼절시켰다 노자(老子)는 "세상의 큰 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지어진다"(天下大事 必作於細, <노자> 63장)고 하였다. 홍자성은 "속알(德)을 삼감에는 반드시 아주 작은 일을 삼가야 한다. 작은 일을 어설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謹德須謹於 至微之事 小處不滲漏)"고 하였다(홍자성, 채근담). 최남선은 작은 일에 조심할 줄을 몰랐다. 나라를 위하여 문화사업을 하는 그에게는 돈이 많이 필요하였다. 일제(日帝)가 최남선을 훼절시키는 것은 오히려 쉬웠을지 모른다. 최남선은 유명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한국 최초의 근체시이고, '단군론'은 최초의 단군신화 연구이다. 민족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민족정기를 살린 올바른 논지와 힘찬 문장은 이 겨레를 크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이 그를 반드시 넘어뜨려야 할 표적이 되게 했다. 그는 압박과 회유에 약했고 모든 공을 허사로 만드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류영모는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원대한 뜻을 지녔으나 땅에서의 몸가짐은 지극히 조심하였다. 도덕적인 실수나 실족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최남선에 비교하여 무명이었기에 일제의 표적이 되지도 않았다. 광복된 뒤에 최남선은 친일 시비로 겨레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남선은 괴롭고 외로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류영모는 현동완(玄東完·1899~1963·사회운동가)과 함께 최남선을 찾았으며, 6·25전쟁 뒤에도 난지도에 있는 현동완의 거처에서 최남선과 함께 묵으면서 그간 뜸해졌던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최남선이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류영모는 문병을 갔다. 류영모 자신이 죽기로 날 받은 해에 최남선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류영모는 성당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추모의 글을 썼다. 아 언니의 이 누리에 부린 지고 지련 무거운 짐 아 언니의 보인 걸음 예고 예련 멀직 얼 길 이 날로 웃(하느님) 하이심(使命) 한참 그치시닛가 (아 동지가 이 땅에 내린, 지고졌던 무거운 짐 아 동지가 보여준 걸음, 가고 갔던 머나먼 정신의 길 오늘부터 하늘의 사명을 한동안 그치십니까) 다석 류영모의 최남선 추모글 '육당에 떨어진 쓰림' 중에서 최남선이 '신음소리'라면 나는 '곡소리' 류영모는 홍일식(洪一植·1936~·전 고려대 총장)이 지은 '육당연구'를 읽었다. 홍일식이 육당의 시조는 병자의 신음과 같다고 평하였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시대는 병환 깊은 시대요. 육당(六堂)은 선명(善鳴)이다. 물론 병자의 신음이었어야겠지. 신음이 무요(無要)하면 시조는 무용(無用)이리. 각설코 육당이 병자 신음만 하였다면 다석(多夕)은 망자(亡者)의 귀곡(鬼哭) 같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六堂 時調(육당시조) 신음설 六堂病者呻吟音 多夕亡者鬼哭陰(육당병자신음음 다석망자귀곡음) 若到無用時調日 可能不要聞呻吟(약도무용시조일 가능불요문신음) 육당의 시가 앓는 이의 앓는 소리라면 다석의 시는 땅 속 귀신의 울음소리라 만일에 시조가 쓸데없는 날에 이르면 앓는 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으리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2-19 11:25:5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1) 아버지를 불러보라다석 어록 = 하늘아버지, 땅아버지 "눈을 감고 나 자신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해보면 머리는 물론 온몸이 시원해진다. 이 다섯 자 몸뚱이를 보면 한심하다. 이에서 박차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머리가 위에 달린 게 위로 '솟나'자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진리되시는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드는 것이다. 머리는 생각한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께 머리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이 내 머리다. 내가 예수를 스승으로 받든 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부자유친하여 효도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예수만큼 효도를 다한 사람이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부터가 남다르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가정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부르듯이 그렇게 친근하게 부른 사람이 예수가 처음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만으로도 예수는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예수처럼 하느님을 우러러 아버지라고 부를 때 몸속의 피가 용솟음치고 기쁨이 샘솟는다.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부른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부르는 내 마음속에 있다. 십자가 소리보다 아버지 소리를 많이 하라. 언제나 염천호부(念天呼父)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화두이며 공안(公案, 석가의 말과 행동)이다. 일요일 어느 곳에 가서 어떤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다. 마음머리, 말머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아버지를 불러야 한다. 이 땅에 아버지를 모시면서 나쁜 짓 하는 아들은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는 효자에 악인은 없다. 유교가 잘못된 것은 하늘의 아버지를 버리고 땅의 아버지만 찾다가 땅의 아버지조차 버리게 된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를 먼저 찾아야 땅의 아버지도 찾게 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2-17 11:10:2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0) 사랑 없는 시대, 결혼이란 무엇인가종교는 저마다 "사랑하라"고 외치는데··· 경기침체와 고령화, 급격한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 등 총체적 사회변동의 멀미일까. 사람들은 이전에 지니고 있던 '정신줄'을 놓은 것 같다. 정신적 가치와 목표를 상실한 채 일상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안과 우울과 고독에 시달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거의 자부심도 없고 현재의 자의식도 없고 미래의 자신감도 없다. 청년세대는 사회 진입이 힘겨워지면서, 힘차게 꿈을 펼쳐야 할 시점에 급습하는 피로감으로 잔뜩 위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세대에게 '사랑'은 공허해 보이고 '결혼'은 사치스러워 보인다. 비혼(非婚)이란 말이 어느새 일상용어처럼 됐다. 결혼과 비혼은 거의 동일한 비중의 선택지(選擇肢)가 되었다. 수많은 종교들의 메시지를 딱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뭘까. 강조하는 방식이나 수식어가 다를 수 있지만 핵심은 "사랑하라"이다. 사랑한다는 일은 자기의 에고(ego)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해 마음을 쓰고 헌신하고 배려하는 일이다. 자기의 삶을 살아가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인간에게 타자를 향한 사랑은 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과 이웃과 이성과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무아(無我, 자기를 초월함)'의 경지를 갖는 것이 이상적 신앙의 원형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폐단인 양극화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조건들을 더욱 버겁게 만들었고 희망의 싹을 잘라버렸다. 거기에 디지털 문명의 급진전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가치 변동은 기존 삶의 질서들을 심각하게 흔들어놓고 있다. 이 같은 시대야말로 신앙적 가치 회복이 절실하지만, 종교는 스스로 세상의 가치에 매몰된 듯 맹렬한 욕망의 대열에 줄을 선 듯하다. 이런 사회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거나 공허하게 느껴진다. 남녀 간의 사랑조차도 그 원관념을 잃고, 오직 욕망의 거래나 득실의 저울질로 뒤바뀌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시대에, 결혼은 더욱 '의문시되는' 행위가 되어간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사회생활을 하고 개별적인 소득을 내는 시대에, 서로 삶을 합치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소득의 합산'을 통해 삶의 수준을 높이는 장점만을 높이 살 뿐이다. TV드라마가 날마다 보여주듯 권력과 금력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거미줄일 뿐이다. 거기에 사랑은 한가한 '장식품'이 되어 있다. 이것이 행복하거나 의미있는 삶의 구현인가. 종교가 내놓는 '사랑'이 전혀 실현되지 않은 채, 생활의 방편을 얻기 위해 하는 결혼식들. 그리고 그런 것에 환멸을 느껴 비혼을 택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종교와 사상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사랑 없는 시대에, 결혼은 작가 이만교의 말처럼 '미친 짓'인가. 류영모와 김효정의 중매 결혼 류영모는 "결혼은 안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인격의 온전함이 능히 독신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순 없다. "만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완전을 이룬다면 한 번 하는 것이 좋아요. 결혼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데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류영모의 둘레에는 등장하는 여인이 없다. 오산학교 교사를 지냈고 동경물리학교 유학을 다녀온 류영모이지만 비혼(非婚)을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했던 까닭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듯 사귀어본 사람이 없었다. 곁에서 독신인 그를 지켜본 목사 김필성이 중매에 나선다. 김 목사는 자신의 친구인 김건표의 누이동생 김효정(金孝貞)을 소개한다. 김건표는 류영모보다 7살 위로 전주 신흥학교 교사와 군산 우체국장을 지냈다. 신부 될 김효정은 충남 한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현성(金顯成), 어머니는 임씨(林氏)이다. 위로 오빠 건표가 있고, 3살 아래의 동생 숙정(淑貞)이 있다. 김현성은 구한말 무관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했다. 일찍이 김옥균·박영효와 함께 개화운동에 가담했고 뒷날 전남과 목포에서 공직생활을 하였다. 김효정은 아버지와 오빠의 직장을 따라 광주·목포·전주·군산·이리 등 호남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효정과 숙정 자매는 군산에서 소학교 3년, 중학교 3년 과정의 학교를 다녔다. 여학생이라고는 두 자매뿐이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학교에 다녔다. 여름에는 덮어 쓴 장옷으로 잔등에 땀띠가 나 고생을 하였다. 나이 많은 남학생 틈에 자매가 학교에 다닌다고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어찌나 말이 많던지 자매가 도중에 학교에 가기를 그만두었다. 학교 측에서 집으로 찾아와 자매가 학업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도록 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두 사람이 도중에 그만두면 앞으로 다른 여학생들이 입학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자매는 다시 학교에 나가 졸업을 하였다. 동생 숙정은 서울에 와서 경기고녀를 졸업한 뒤에 교사가 되었다. 김효정의 부모는 오빠와는 달리 신랑감 류영모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부친은 사위도 자신처럼 건장한 무인형(武人型)을 바랐다. 류영모는 작은 체격에 지적인 면모의 선비형이다. 류영모는 "지금은 서울에 살지만 앞으로 시골로 가서 농사지으며 살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말 때문에 김효정의 모친이 싫어하였다. 사위 될 사람이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면 체력이 약한 맏딸이 농사바라지를 감당해낼 수 없을 거라고 걱정했다. 남편 따라 밭이랑에서 김 매고 오줌항아리를 이고 나르고 마당질에 도리깨질을 해야 할 터인데 효정의 체력으로는 역부족이란 것이다. 어긋날 뻔한 혼담 성사시킨, 류영모의 편지 김효정은 나중에 팔순이 되어갈 무렵에, 류영모와 혼담이 있던 처녀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때 오빠의 말씀이 신랑될 사람은 학식이 깊고 생활이 철저한 사람이라고 하였어요. 사람은 참되게 살려면 농사 짓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드시 국산품을 쓰는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류영모는 당시 목포에 살고 있는 신부감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중매하는 김필성의 얘기만 듣고 참한 규수라 하여 혼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장인·장모될 분들이 완강하게 반대를 한다니 난감하였다. 시골에 가서 농사하면서 살겠다는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혼담이 그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류영모는 생각 끝에 장인이 될 김현성에게 허혼(許婚)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김효정의 집에서는 류영모의 편지를 받고 술렁이었다. 사위가 될 사람으로부터 장인 될 사람에게 편지가 왔으니 그때로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김현성은 사윗감 류영모의 편지를 읽고는 그 문장과 글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둘째 딸 숙정이를 불러서 읽어 보라고 하였다. 언니 효정이 사랑방에서 나오는 숙정에게 편지에 무슨 말이 씌어 있더냐고 물었다. 숙정의 대답은 이러했다. "붓글씨로 쓴 편지글이 논어를 읽는 것 같았어.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어." 당시 숙정은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려운 한자가 많았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만, 학교 교사도 못 읽는 글이라니, 대체 뭐라고 썼기에? 그렇다고 아버지께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류영모는 이 편지 한장으로 혼담을 성사시켰다. 남녀는 '성별(聖別)'을 해야 결속이 깊어 "연애를 옛날에는 상사(相思)라 하였어요. 서로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연애가 장사처럼 여겨집니다. 별 타산(打算)이 다 꿈틀거립니다.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다, 당신의 종이 되어도 좋다, 당신 아니면 나는 죽는다는 것은 다 흥정을 하느라 그런 것입니다. 남녀가 교제를 황망히 해선 안 됩니다. 성별(性別, 남녀간의 구별)이 뚜렷해야 상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별(聖別, 성스러운 거리)이라 합니다. 성별을 해야 구속(救贖, 죄를 대신해 구해줌)이 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시간적으로 여유를 두고 공간적으로 멀리하여, 서로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간격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급하게 사귀는 것은 경솔입니다. 좋다고 달려가고 곱게 보인다고 곧바로 가까이 하면 상사의 마음이 굳세지 못합니다." 류영모의 연애론이다. 당시 풍속은 신랑이 장가(처가집)를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랑 류영모는 신부에게 시집(시가)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임금이 아내를 맞아들이는 친영례(親迎禮)와 같이 잔치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굳이 양가를 오가는 이중잔치를 벌일 필요 없이 처음부터 시댁으로 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서로 이런 논란이 오가던 끝에, 신부 집에서 양보를 했다. 장인 김현성은 혼례에 오지 않았고 오빠인 김건표가 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신부 김효정은 목포항에서 인천항으로 가는 여객선을 탔고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경인선 기차를 탔다. 신부는 배멀미와 차멀미를 연속으로 했다. "남녀는 최선 다하라" 주례사에서 읽은 성경구절 서울 당주동 신랑집 마루에서 혼례가 올려졌다. 목사 김필성이 주례를 맡았다. 신부도 14살 때부터 교회에 나간 기독신자라 교회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신랑 류영모는 주례에게 예식 때 읽을 성경구절을 미리 지정해 줬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편지인 고린도전서 7장 1절에서 6절까지였다. "남자와 여자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자기 아내를, 여자는 자기 남편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 할 일을 다 하십시오.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서로 합의하여 얼마간 떨어져 있는 것은 무방합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힘이 없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니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말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혼례를 올린 때가 1915년 9월, 늦더위가 느껴지는 초가을이었다. 25살의 신랑은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22살의 신부는 옥색 치마저고리를 혼례복으로 입었다. 김효정에게 오빠 김건표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남편은 훌륭한 분이다. 네가 남편의 뜻을 거스르면 너와 나 사이에 남매의 의를 칼로 자르고 소금을 치듯 끊을 것이다." 58년 전의 얘기를 80살이 된 김효정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빠의 말을 깊이 품고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2-12 10:05:0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9)그분은 오직 '사랑'을 말했을 뿐이었다복음서에는 오늘날의 '교회'가 없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실존적 신앙고백의 핵심에는 예수가 말한 '무욕과 사랑'은 전혀 없고 오직 인간과 다른 초인적인 기적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재확인하는 내용들만 담겨 있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교회'라는 현재의 개념이 비성서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복음서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딱 두 차례 나오는데, 단순한 모임을 가리킬 뿐 신앙의 기관이나 시스템을 가리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의 교리문답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교회를 문제 삼는 더 큰 까닭은 스스로를 무오류로 주장하고 '이단'을 설정하는 개념으로 활용하여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대한 추구를 억압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가 자임했던 '사람과 신의 중재자'는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스스로 가르침을 인간 각자에게 알려주러 왔는데 왜 또 다른 중재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교회가 세워놓은 교리들이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허구임이 밝혀질 수밖에 없다. 교회에 대해 이렇게 놀랄 만한 발언을 쏟아낸 이가 대문호이자 종교사상가인 톨스토이였다. 이 땅에서 톨스토이의 이 같은 사상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그것을 한국에서 구체적이고 확장적으로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 다석 류영모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2-10 10:28:09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8)사무라이의 아들, 그는 왜 불경죄에 휘말렸는가승려나 유학자가, 일본에게 하느님을 알린 예언자? 우치무라는 미국이나 영국이 자신들의 기독교를 유일한 기독교인 것처럼 일본에 강요하는 것은 정신적인 폭력이며, 일본 기독교는 기독교의 본질을 제외한 그 외의 것에 대해 일본인의 명예와 책임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모세의 십계명과 부처의 계명들을 비교해본 공정한 재판관이라면 두 종교의 차이가 낮과 밤만큼 현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부처나 공자 그리고 다른 이교도 스승이 가르치는 청렴한 생활을 기독교인들이 자세히 연구해 본다면 부끄러워질지도 모른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공자가 가르친 것만 제대로 지켜도 기독교 국가보다 더 뛰어난 기독교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 대목은 류영모의 통찰과 닮아 있다. 우치무라는 기독교의 하느님이 불교의 승려나 유교의 유학자들을 예언자로 보내 일본에 신의 섭리를 일깨워줬다는 주장까지 한다. 우치무라는 3년반 만에 일본에 귀국해 니가타의 호쿠에쓰학관 교장으로 부임한다, 그러나 선교사의 원조를 받는 일이 교육의 독립성을 해친다며 원조 거부를 주장하다가 넉달 만에 학관을 나오고 만다. 1889년 2월 11일 메이지 정부는 제국헌법을 발표한다. 그간 논란이 되어온 천황제와 입헌제를 결합한 헌법이었다. 제3조에 '천황은 신성해서 침범할 수 없다'는 조항을 뒀다. 이 헌법은 기독교의 신과 천황이라는 일본적 신의 충돌을 예고하고 있었다. 우치무라의 천황 불경사건 그해 9월 우치무라는 도쿄영어학교의 후신인 제일중고등학교 촉탁교사로 일하게 된다. 취직한 지 얼마 안 된 10월 30일 '교육칙어'가 발표된다. 천황제의 절대화 작업을 교육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1월 9일 교육칙어 봉배식(받들어 절하는 행사)이 열렸다. 모든 교사와 학생들은 단상에 올라가 칙어에 명기되어 있는 천황의 사인 앞에 머리를 조아리도록 되어 있었다. 세 번째로 올라갔던 우치무라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1월 17일자 진보당 계열 신문 '민보'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종이를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주의에 반한다." 이 신문이 인용한 우치무라의 말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우치무라의 '불경(不敬)사건'이다. 우치무라는 일본 내 어디서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국적(國賊·나라의 역적)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 학계에서는 '기독교가 일본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라는 도쿄대 교수의 시론이 등장해 논쟁을 확산시킨다. 기독교는 일본의 국가주의, 충효주의, 현세주의를 담은 교육칙어의 윤리를 벗어나 있다는 주장이었다. 결론은 기독교인 우치무라는 '불경한(不敬漢)'이란 말이었다. 우치무라는 당시 한국 사상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우치무라의 가장 열성적인 조선인 제자는 김교신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2-05 11:24:0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7) 위대한 생각을 깨운 놀라운 그들이 있었다주체적인 기독교 교리해석을 고민하다 김정식은 조선 유학생들을 위한 강연회에 우치무라를 강사로 자주 초빙했다. 류영모는 동경물리학교에 다니는 동안 몇 차례 우치무라의 강연을 들었다. 하지만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류영모는 우치무라가 서양에서 출발한 기독교를 그대로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 이식하는 것에 대해 갖는 문제의식은 공유했지만, 교회와 교리 문제, 일본 국가주의와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문제 등에선 일정한 이견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우치무라가 이 땅의 초기 기독교 정착 과정에서 주체적인 '교리 해석'에 눈뜨게 했고 독립운동과 같은 국가적 현실논리의 신앙적 구현을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의 종교사적 존재감은 지금도 상당해 보인다. 류영모가 우치무라의 신앙적 실천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청년시절 '영성(靈性)의 주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계기를 우치무라에게서 자양분처럼 섭취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일본인의 하느님(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따로 있다"고 주장한 우치무라의 삶과 사상에 관해선 다음회에 좀더 깊이 다뤄볼 예정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2-03 14:58:4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6) 삶은 물음이고, 죽음은 깨달음이다오산학교 '톨스토이 신앙' 탄압사건 그 추도식(1910년 11월 7일) 이후 류영모는 톨스토이 사상에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오산학교에서는 '톨스토이 신앙탄압'이라 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1910년 12월 학교설립자 이승훈은 기독교 신자가 된 뒤 평양신학교장이자 선교사인 로버트와 가까워졌다. 그간 교장 역할을 하던 여준이 만주로 떠나자 로버트 선교사에게 교장을 맡긴다. 이듬해 2월엔 이승훈은 안명근 사건으로 감옥에 갔고 로버트가 학교를 관리하게 됐다. 로버트는 오산학교를 기독교 장로회 학교로 만들어갔다. 학생들에게 교리문답을 하게 하고 교회교리 신앙을 고백하게 했다. 이광수는 이런 방침과 충돌하다 1913년 11월 오산학교를 떠난다. 류영모는 어떻게 됐을까. 1912년경 이 학교와 결별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일제의 탄압을 받는 것만도 고통스러운데 선교사에게 사상 감시를 받는 일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그마(dogma, 기독교 교리)로 자유로운 생각을 구속한다면 거기에 진리가 살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1912년 오산학교를 떠나면서 그는 교회 교리 신앙도 떠난다. 오산학교에 정통 기독교를 심었던 류영모는 그 정통 기독교의 배척을 받아 자기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대체 톨스토이는 류영모에게 어떻게 다가온 것일까. 우선 통일복음서 얘기부터 하자. 톨스토이는 기독교의 4대 복음서를 하나로 요약했다. 이것을 '요약복음서' 혹은 '통일복음서'라 부른다. 그런데 그는 복음서를 요약하면서 교회가 지금껏 중요시해온 것들의 일부를 빼버렸다. 류영모의 천로역정 천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 Progress)은 영국작가 존 버니언의 17세기 종교소설 제목이다. 옥중에서 씌어진 이 소설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손에는 한권의 책 성서를 들고 멸망의 도시를 떠나 하늘의 도시로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낙담의 늪과 죽음의 계곡과 허영의 거리를 지나 마침내 천국에 닿는다. 하늘길 여행에서 만나는 낙담과 죽음과 허영은 인간의 신앙이 겪는 리스크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믿음'은 방해를 받지 않고 하늘길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유혹과 장애물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다석 류영모의 천로역정은 서양인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길이었다. 20세기는 수천년간 거의 단절상태로 있었던 동서양 문명이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 세기였다. 서양에서 수많은 역정(歷程)을 거쳐 당도한 '천로(天路·천국으로 가는 길)'는 동양적 사유체계 소유자의 낯선 시선 앞에서 부조리함이 정밀하게 발견되기 시작했다. 류영모라는 통찰적 지식인은 성경과 함께 불경과 노장을 섭렵하면서 인류 전체의 영성(靈性)이 찾아낸 보편적인 '천로'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게 된다. 동양적 신앙체계가 서양 기독교를 재해석하면서 주체적인 신앙적 안목으로 거듭나는 과정이었다. 이런 사유로 나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교회 교리를 비판하고 기독교의 근본정신으로 복귀할 것을 주창한 톨스토이라는 동시대 선배의 영감(靈感)이 작동했다. 왜 하느님은 서양식인가라는 단순한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면서 나라 잃은 민족이 신앙 속에서 주체성을 회복하는 극적인 전환점을 찾아낸다. 이런 사상체계는 일본인 주체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문제의식에 일정하게 힘입었을 것이다(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얘기는 다시 제대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동생 류영묵의 죽음이 부른 일대 충격 1911년 21세 때 두 살 아래 동생인 류영묵이 죽음을 맞았다. 이때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졌다. YMCA도 같이 다녔고 연동교회도 같이 다녔던 아우였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 의사는 자신에게 이미 서른 살을 못 넘길 거라고 예언하지 않았던가. 교회가 강조해온 교리들은 죽음의 문제에 정색을 하고 답을 해주지 않는 듯 보였다. 이 무렵 그는 성경을 두고 불경과 노자에 매달렸다. 살려고 태어난 인간은 왜 죽는가. 죽음 앞에서 잠정적인 삶은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이 응답 없는 질문들에 매달리며 사생의 진리를 찾아 나선 시기였다. 갈증은 커졌지만 신앙은 답보상태에 있었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죽는 연습이 철학입니다.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입니다. 죽음의 연습은 영원한 얼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입니다. 몸으로 죽는 연습은 얼생명으로 사는 연습입니다." 죽음에 대한 깊은 고뇌 끝에 나온 말일 것이다. 삶은 끝없는 물음의 길이며, 죽음은 깨달음의 도(道)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육신의 죽음에서 얼생명의 하늘길까지. 류영모가 찾아낸 천로역정은 바로 그 대전환의 길이었다. # 다석어록 : 하느님 아들이 되는 것은 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죽음을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과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죽음과 깨달음은 같은 말입니다.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죽음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완전히 내가 없어져야 참나입니다. 참나가 우주의 중심이요 나의 주인입니다. 나의 주인이란 나를 지배하고 책임질 수 있는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아는 것이 아닙니다.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얼이 아버지의 얼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깨달음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순수한 것이 참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기쁨을 맛보려면 '나'라는 것이 적어져야 합니다. '나'가 적어져서 아주 적어져서 없어지면 기쁨만이 남습니다. 석가는 이것을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고 하였습니다. 적멸위락 이외에는 모두가 사도(邪道·올바르지 못한 길)입니다. '나'가 없어진 척한 것입니다. 도박·음행·오락·게임·구경·음주·마약에 일시 황홀해져 나를 잊는 것, 이런 게 사도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1-29 09:32:40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5)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류영모에게 여준이 다가왔다는 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 '사람이 온다는 건' 중에서> 톨스토이 종교사상에 주목한 류영모 톨스토이에 쏟아진 당대와 후대의 많은 예찬들은 주로 그의 문학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위대함의 진면목이 종교사상에 있음을 제대로 주목한 사람은 류영모였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정통 기독교 신앙과 거의 같은 유속(流速)으로 흘러들어온 '기독교에 대한 톨스토이적인 성찰'을 동시에 만난다. 놀라운 신앙사상가이자 종교실천가 톨스토이. 그는 20세기를 숨쉰 '성자'였고 기독교의 교리신앙에 의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새로운 눈을 열게 해준 영적인 스승이었다. 1910년 3월 오산학교에 이광수가 왔을 때, 18세였던 그의 머릿속에는 톨스토이가 깊이 들어와 있었다. 이광수는 오산학교에 오기 전에 일본 도쿄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했다. 그 시절 동급생이었던 일본인 야마사키가 가지고 있던 톨스토이의 책을 탐독한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 아예 톨스토이 전집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오산학교로 올 때는 톨스토이의 통일복음서를 지니고 왔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해 11월 톨스토이 추도식은 '교사 이광수'의 8개월여 교육의 힘이 컸을 것이다. 그날 학생들은 걸출한 러시아 문학가를 추도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숨쉬다 간 위대한 성자를 추도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라는 저술을 남겼다. 책상 위나 침대 머리맡에 두고 늘 읽어야 할 구절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중에 '참나'라는 제목의 글은 신앙사상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육체를 위해 산다면 자기 자신만이 유일하게 소중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이렇게 혼자만 행복하려는 이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기에 서로 반목한다. 우리는 육체가 영원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갈등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진정한 '나'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영혼은 사랑을 통해 타인과 합일을 이룬다. 여기에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영원한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곳일 뿐 곧 스러질 존재에 불과하다." <톨스토이의 '참나' 중에서>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1-20 13:16:1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4)오산학교에 신앙을 심었지만 나는 부끄럽다오산학교에 기독신앙 전파를 부끄러워한 까닭 류영모는 오산학교에 4년 반을 머물렀다. 20살 때 가서 3년을 있었고 32살 때 가서는 1년 반을 있었다. 그러나 류영모가 없었더라면 오산학교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가 이승훈과 함께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더라면, 3·1운동 민족대표 이승훈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오산학교가 민족정신을 강건하게 키워나갈 수 있었던 신앙의 힘 또한 갖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스무 살의 물리선생이 전파한 기독신앙이 사람을 바꿨고 학교를 바꿨고 세상을 바꿨다. 그러나 류영모 자신은 이런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겸손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부끄러워했다. 스무 살밖에 안 된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다고 감히 전도를 했는지 돌이켜보면 부끄럽다는 말이었다. 듣고 배운 것을 전한 녹음기 노릇이었다고도 말했다. 인생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면서 남에게 전도를 한 것에 대해 그는 가급적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비록 미성숙한 상태에서 전도를 했다 해도 거기엔 '성령(얼나)'이 임한 것은 어김없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의 진짜 부끄러움은 당시 '정통 교회신앙'을 섣불리 전도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사람 숭배를 해서는 안 돼요. 그 앞에 절을 할 것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바로 깨닫지 못하니까 사람더러 하느님이 되어 달라는 게 사람 숭배하는 이유입니다. 예수가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를 떠날 때까지 정통 교회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학교를 떠나면서 그 신앙을 벗었다. 오산학교에 교회신앙을 전파했던 류영모는 다른 길로 나아갔다. 그래서 그때의 전도를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된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속알(얼나)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마음속에 계시는데 교회로 찾아다닐 까닭이 있는가. 이것이 류영모의 길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1-15 10:55:40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3)신앙의 씨알 심은 100년전 선지자1915년의 오산학교 풍경. 춘원 이광수와 교대한 물리선생 류영모 류영모가 오산학교에 부임한 때는 1910년 10월 1일이었다. 8월 29일이 국치일이었으니 한달 남짓 지난 무렵. 빼앗긴 들에도 계절은 오고 있었다. 평북 정주엔 곱기만 한 단풍이 들고 산들바람 속에서 갈잎의 노래가 들려왔다. 교사 류영모가 간 오산학교엔 아직 1회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4년제 학교에서 아직 3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던 때다. 1907년 12월 24일에 설립했으니 3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은 모두 합쳐 8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한옥이었던 오산학교에는 딴 지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합숙을 했다. 전원이 기숙사 생활이었다. 교사 류영모는 당시 3학년이던 김여제, 이인수와 한 방을 쓰며 기거했다. 교사와 학생이 나이도 어슷비슷했다. 한해 전에 먼저 온 선생으로 춘원 이광수가 있었다. 과학 교사를 맡고 있던 이광수(1892~1950)는 18세였고, 류영모는 두살 위인 20세였다. 이후 류영모가 수학과 물리화학, 천문학을 맡게 된다. 류영모가 당시 교재로 쓰던 물리교과서를 훑어 보니, 서울 종로에 있는 출판사 보성관에서 번역한 한자투성이의 책이었다. 우선 한자부터 가르쳐야 읽기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산학교의 아침 풍경은 이랬다. 학생들은 새벽 기상종에 맞춰 일어나 열을 지어 구보를 하며 황성산(黃城山)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오산동 북쪽에 있는 이 산은 누런 점토로 축조한 토성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학생들은 구령에 맞춰 교가를 제창했다. "뒷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러/비에나 눈에나 변함 없이/이는 우리 정신 우리 학교로다/사랑하는 학교 우리 학교" 이 교가 소리에 맞춰 마을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 교가를 지은 사람은 교사 여준이었다. 그는 수신(도덕), 역사, 지리, 산수를 가르치던 선생이다. 열심히 구령을 부르며 구보하는 학생을 이끄는 교사는 서진순이었다.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육군 연성학교를 나왔기에 학생들의 체조와 훈련을 담당했다. 깐깐한 교사로 스파르타 교육을 했다. 구보를 마친 학생들은 학교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소금으로 이를 닦고 얼굴을 씻었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학생들은 아침 식사를 했고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은 여준 선생에게 글도 배웠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쓸고 화장실 청소를 했다. 이승훈에 대해서, 오산학교 출신인 함석헌이 지은 시조가 남아 있다. "남강(이승훈의 호)이 무엇인고 성(誠, 정성)이며 열(熱, 열정)이로다 / 강(剛, 굳셈)이며 직(直, 곧음)이러니/의(義, 옳음)시며 신(信, 믿음)이시라/나갈 젠 단(斷, 단호)이시며 그저 겸(謙, 겸손)이시더라 일천년 묵은 동산 가꾸잔 큰 뜻 품고/늙을 줄 모르는 맘 어디 가 머무느냐/황성산 푸른 솔 위에 만고운(萬古韻, 만년의 운치)만 높았네" 이광수가 지은 오산학교 교가 한편 일본에서 중학교를 나온 춘원 이광수가 교사로 온 뒤, 문학 자질을 발휘하여 교가를 새로 지었다. 요즘도 불리는 오산의 교가다.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자인의 곡을 붙였다. "네 눈이 밝구나 엑스빛(레이) 같다/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온가지 진리를 캐고 말련다/네가 참 다섯메(오산)의 아이로구나" 류영모는 그 무렵에 열렸던 정주군 학교 연합 체육대회를 기억해냈다. 나라가 망하는 이유가 교육이 없어서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사람들이 그야말로 있는 힘을 다해 학교를 세우려고 했다. 정주에만 70여개교나 됐다. 학교만 많았지 학생수는 볼품이 없었다. 대운동회를 하는데, 교기를 든 기수 빼고 나팔수 빼고 북치는 사람 빼니 운동할 선수가 없었다. 학교이름 '○○之校(지교)'를 잘못 읽어서 '○○上校(상교)'로 읽는 판이니, 운동회가 요즘의 개그 프로를 방불케 했다. 그래도 류영모는 이 풍경을 기억하면서 한 마디 더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때는 분명 석기시대였어요. 하지만 철기시대의 기구를 만든 건 바로 석기시대의 돌이었다는 사실." 다석어록 =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인데도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 공명을 느껴 금방 동지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흔하지가 않다. 죽을 때까지 사귈 수 있는 친구도 이렇게 맺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을 알고 몇 백리 밖에서 찾아오는데 죽마고우를 만나는 것같이 금방 익숙해진다. 하룻밤을 새더라도 참 즐겁다. 평생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알려질지도 모르는 나를 찾아와서 예수교, 불교, 유교는 다 다를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 것을 얘기하니 이보다 더 좋은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1-13 12:18:22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2)가르침만이 희망이었다오직 가르침만이 희망이었다, 학교란 무엇인가 세상을 시작하는 아이에게, 두리번거리는 마음과 기웃거리는 마음을 불어넣은 이는 누구일까. 누가 인간에게 호기심이란 동력을 심어놓았을까. 그 호기심이 생을 진전시키고 경험을 축적하고 생각을 넓히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라는 걸 맨 처음 발견한 이는 누구일까. 호기심을 끌어모아 생각을 넓히는 곳을 만들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인간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해낸 사람은 누구일까. 그 배움을 실천할 학교를 맨 처음 연 사람은 누구일까. 학교를 열어 쌓은 지식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하고자 했던 선각자는 누구일까. 마치 신과 인간이 서로 닿은 손끝으로 어떤 '뜻'을 넘겨주듯,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기적이 일어났다. 인간에게 학교가 생겨난 것이다. 획기적인 인간 진화가 그로부터 시작됐다.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학교이며 층층의 교실이기도 하다. 세계는 또한 하나의 광대한 학교이며 칸칸의 교실이다. 인생이란 시간은 100년의 학교이며 시간제 수업들이기도 하다. 종교 또한 하나의 학교이며 교과서들과 참고서들로 가득 찬 도서관이다. 태초의 학교는 말씀이 존재하는 우주였고, 목숨의 첫 학교는 모체 속이었다. 인간 생명의 학습본능이 실현되는 과정을 누군가가 구체적인 실행파일로 만든다. 그것이 교육이다.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 시스템과 프로그램과 커리큘럼, 인간관계로 실현한다. 그것이 학교다. 체계적 성장과 성숙의 장(場)은 '인간'을 업그레이드한다. 교육이 백년대계인 까닭은 사람을 혁신시키는 뚜렷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나라를 잃은 조선은 그 구성원들이 제대로 성장하고 성숙할 시스템을 가지지 못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들이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허기진 표정으로 '학교'를 세우는 풍경을 생각한다. 이 땅의 사람들은 모든 희망이 암전(暗轉)된 식민지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었다. 짐승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선 생각을 전할 언어가 필요했다. 생각을 다듬을 지식이 필요했다. 생각을 펼칠 비전이 필요했다. 생각을 깊고 높은 곳으로 이끌 믿음이 필요했다. 우리는 지금, '배우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던 시간으로 이동할 것이다. 캄캄한 절망을 뚫는 깨우침과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온 나라의 어두운 백성들이 몸부림치던 그 한복판에서 류영모를 만날 것이다. 한일합병 직전의 19세 소년선생 1909년 여름, 학생 36명 중에서 성적이 수석이었던 경신학교 3학년 류영모는 다른 학교의 교사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경기도 양평의 신설학교였다. 군청의 주사보였던 정원모가 세운 학교로, 당시 상황으로 봐서 학생이 10명도 안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디에 있던 학교인지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천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를 봤다는 류영모의 말을 참고하면 용문산 아래 용문사 근처였을 것이다. 학교를 세우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은 우선 설립부터 해놓고 봤다. 학생들은 몇 명 구했는데 가르칠 선생이 없으니, 마치 입도선매(立稻先賣)하듯 다른 학교 재학생인 류영모를 교사로 뽑아간 것이다. 교단에 선 류영모가 살펴보니, 학생 중에는 류영모보다 나이가 많은 이가 여럿이었고 장가를 든 이도 있었다. 이 학교에서 류영모는 수업 중에 일본에 대한 비판을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밤에 류영모가 있던 하숙집에 일제 헌병보조원들이 찾아와 "너 이 자식 조심해"라며 위협을 했다. 이 시골에서도 마음 놓고 바른 말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류영모는 정확하게 1년 만인 1910년 여름에 집으로 돌아왔다. 갈수록 뒤숭숭해지는 시절이었다. 그해 9월 28일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고 나라는 사라져 버렸다. 그 사라진 나라에서 이제 성년이 된 스무살 류영모는 터질 듯한 심장을 벌럭거리며,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 목놓아 통곡하노라)'을 한 글자 한 글자 가슴에 끌로 새기는 아픔으로 읽었다. '당일조대한통읍(當一朝大韓痛泣, 하루아침에 대한이 비통하게 우는구나)' 일곱 자를 더해 그의 통곡을 더했다. 오산학교와 이승훈 이승훈은 1864년생으로 류영모보다 26살 위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어머니(홍씨)를 여의었다. 할머니 품에서 자라난 그는 10살 때 할머니와 아버지를 잃었다. 두 달 간격으로 일어난 비극이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소년은 11살에 유기공장 부자였던 임일권의 심부름꾼으로 일한다. 주인의 사랑방을 청소하고 재떨이, 화로, 요강을 비우고 씻는 일을 했다. 그는 주인이 버리는 종이를 모아두었다가 틈틈이 글씨공부를 한다. 소년의 학문적 열의를 알게 된 임일권은 직접 글을 가르쳐주었고, 이후 그를 깊이 신임하여 돈을 관리하는 수금일을 시켰다. 그가 15살이 됐을 때, 이도제라는 사람이 사위로 삼겠다고 나섰다. 결혼을 한 이승훈은 임일권의 집에서 나와 가정을 꾸렸다. 그는 임일권의 유기그릇을 떼어다가 파는 행상이 됐다.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10년간 번 돈으로 유기공장을 차린다. 모자라는 돈은 장사하면서 알게 된 평안도 갑부 오삭주에게서 빌렸다. 공장을 차린 이승훈은 일터를 깨끗이 했다. 노동자들에게 작업복을 지어서 입혔다. 또 품삯도 후하게 주었다. 이승훈의 공장은 금방 소문이 났다. 사업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평양에 지사를 냈으며 서울에도 지점을 갖췄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상인으로 성장한다. 당시의 유행을 따라, 돈으로 참봉 벼슬을 사서 '양반'이 됐다. 이승훈은 문중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용동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종친들을 모았다. 여주이씨 집성촌을 만들었다. 마을엔 서당을 지어 '강명의숙'이란 간판을 달았다. 빈곤과 무교육과 '상것'의 한을 모두 푼 셈이다. 1905년 그의 나이 42세 때 을사조약이 맺어졌고, 나라 안에서는 민영환이 자결했고 나라 밖에서는 이준이 독립을 외치며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의 성취나 성공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나라를 빼앗긴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안창호가 이승훈을 깨우다 1907년 이승훈은 안창호(1878~1938)가 평양 모란봉 기슭에서 연설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창호는 농촌재건운동을 벌였고 미국으로 건너가 교민 자치기구인 공립협회를 설립해 활동하다가 귀국한 29세의 청년이었다. 안창호는 귀국하자마자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강연을 하고 있었다. 비장하면서도 차분한 안창호의 목소리는 청중을 사로잡았다. "나라를 회복하는 오직 한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새로운 교육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2천만 겨레가 사람마다 인덕과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믿고 돕는 거룩한 단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승훈은 천둥과 지진을 함께 만난 것 같은 깊은 울림을 느꼈다. "선생의 음성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았습니다. 중음계였죠. 부드럽고도 비장한 목소리였습니다. 미사여구를 쓰지도 않았고 어려운 말도 없었습니다. 솔직 간결한 말투를 툭툭 던지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일깨우고 숨어 있던 마음을 힘있게 끄집어 냈습니다." 안창호의 말투는 고요하게 흐르는 물결 같았다. 세계의 대세를 말하고 이 나라의 국제적 지위가 빈약하고 위태하여 국가존망이 경각에 있음을 경고했다. 정부 관리들이 부패했음을, 국민이 무기력함을 한탄했다. 이 민족의 결점을 지적할 때는 가차 없었다. 지금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누가 망국을 막겠느냐고 부르짖을 때는 안창호의 목소리가 울고 있었고, 청중들이 따라 흐느꼈다.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서슴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이승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연단 쪽으로 나아갔다. 막 단상에서 내려오는 안창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부터, 이제부터는 안 선생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소." 그러자 안창호는 말했다. "선생과 곧 조용히 논의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45세 이승훈과 29세 안창호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 장면이었다. 이튿날 이승훈은 안창호가 보낸 사람을 따라가 그를 만났다. 안창호는 그에게 신민회 평안북도 총감(책임자)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올해 안으로 오산에 신식학교를 세우겠습니다." 이승훈이 말하자,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다. "예, 저도 평양에 학교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이승훈은 문득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것 같았다. 평양에 올 때는 무거운 걸음이었는데, 정주로 돌아갈 때는 바쁘고 힘찬 걸음이었다. 이날 이후 그는 술과 담배를 끊었고 상투를 잘랐다. 꺼져가는 나라에 희망을 육성하다, 오산학교의 기적 안창호는 이승훈의 '열정'을 어디에 써야 할지 방향을 잡아준 사람이었다. 이승훈은 '위대한 미션'을 단박에 알아듣고 오산학교를 창립한다. 안창호를 만난 그해 12월 24일이었다. 안창호가 평양에 세우기로 약속했던 대성학교보다 먼저 개교를 한 것이다. 그만큼 이승훈은 온힘을 다해 학교 설립에 매진했다. 용동에 세운 문중 서당 강명의숙을 신식학교로 바꿔 소학교를 만들었고, 향교인 승천재를 수리해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관서 지방의 80세 유학자 백이행을 초대 교장으로 모셨고, 막역했던 박기선에게 교감직을 맡겼다. 학생은 7명이었다. 이 작은 학교가 일제 36년 민족사의 핵심인재들을 배출한 최고의 요람이 된다. 안창호의 뜻과 이승훈의 열정이 스파크를 일으켜 민족정신의 메카를 창출한 것이다. 우선 교사가 급했다. 배울 사람만 있고 가르칠 사람이 없었던 오산학교였다. 설립자 이승훈의 마음은 다급했다. 그는 18세의 이광수를 찾아냈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학생으로 고국의 조부가 위독한 바람에 귀국했던 때였다. 이승훈은 이광수에게 사정 반 강요 반으로 교사직을 맡겼다. 물리와 화학 과목을 담당하라고 했다. 얼마나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선생이 있어야 했기에 그냥 강단에 세운 것이다. 3년 뒤인 1910년 이승훈은 교사를 구하러 서울의 경신학교를 찾아갔다. 당시 경신학교 교장 밀러(Miller·密義)는 안창호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선 인연이 있었다. 밀러는 류영모에게 과학을 가르쳤던 교사이기도 했다. "(류영모는)최우수 성적을 받은 학생이죠. 과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교사를 시켜도 잘해낼 겁니다." 밀러의 천거를 받은 이승훈은 류영모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후 류영모는 오산학교의 과학선생이 되었다. 1910년 8월 29일엔 국치를 당했고, 한달 뒤인 9월 말에 그는 평안북도 정주로 향했다. 류영모가 부임한 것은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기였던 해의 가을(10월 1일)이었다. # 다석어록= 식자우환이라지만 참으로 알면 괜찮은데 반쯤 아니까 우환이다. 이 세상이 괴롭고 혼란된 것은 반쯤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반쯤 깨게 하다가 그만두려면 애초에 깨우지 않는 것이 낫다. 글을 읽을 때 입으로만 읽으면 그것은 원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글을 줄줄 읽는 가운데 그 글이 내 속에 피가 되고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체득이라고 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1-08 13:36:18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1)류영모를 증언한다, 함석헌 가상인터뷰오산학교의 류영모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1861~1930)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 메이지시대와 다이쇼시대의 개신교 사상가로, 서구 기독교가 아닌 '일본 기독교'를 주창한 사람이다. 그는 일본인에게 '말씀'을 전하는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주체적 신앙을 역설했다. 그는 성서가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라고 보는 '오직성서(Sola Scriptura)'주의자였다. 우치무라 간조의 신학은 '무교회주의'로 일컬어지면서 일부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불온시된 바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이며, 교회와 일련의 종교적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형식의 일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 함석헌 선생(1901~1989)은 누구인가= 함석헌은 일제와 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씨알'이라는 신학사상을 정립한 신학자 지식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개인의 영적 수행과 사회적인 투쟁을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했으며, 기독교의 형식주의와 교리주의에 반대했다. 특히 숙성되지 않은 채 받아들인 수입신학의 무생명성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평북 용천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1921년 오산학교에 진학한 뒤 '영적인 개안'을 한다. 남강 이승훈의 민족주의와 다석 류영모의 신앙과 사상을 전수받는다. 특히 '씨알'사상은 류영모가 창시한 독창적 사유체계로, 기독교 사상과 노장과 맹자, 불교사상의 정수의 보편성을 찾아낸 '신학의 창조적 광맥'이었다. 함석헌은 씨알사상을 폭넓게 발전시킨 공로가 있다. 또 일본 유학 중에 '무교회 운동'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 모임에 참여해 그의 신앙적 지평을 새롭게 했다. 그의 사상은 안병무(민중신학자), 김용준(고려대 명예교수), 김동길(전 연세대교수)의 사유체계에 영향을 주고 그 기반이 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주체적 해석의 토양을 마련했다. 그는 하느님이 허공에 있지 않고 땅 위에 임하여 있으며, 노동 속에서 체험되고 잘못을 용서하는 삶 속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20-01-06 11:30:00
- [노자와 다석/안내영상] 老子 도덕경 읽는 성자 ‘다석 류영모’, 그는 누구인가“노자는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한 끝에 몸나가 지닌 탐·진·치의 수성(獸性)을 버리고 속알(德)로 살아야 함을 알았다. 곧은 마음으로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이 덕(德)이다” -박영호 2020년 경자년(庚子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분열과 혼란, 상실의 시대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땅의 앞날에 근본적인 철학이 간절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의 메시지를 ‘노자와 다석’ 인문학 수업 속에서 찾아가려고 합니다. (*『노자와 다석』은 다석 류영모의 《노자》 번역을 바탕으로 그의 제자 박영호가 풀이를 덧붙인 책으로 유교·불교·노장 사상과 기독교를 하나로 꿰뚫어 독창적인 사상 체계를 담았다) ‘노자와 다석’의 첫 페이지를 열기에 앞서 ‘길잡이 씨알’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老子의 도덕경을 읽는 성자’ 다석 류영모는 누구이며, 그의 철학과 사상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석 류영모의 유일한 수제자인 박영호 다석학회 고문을 비롯해 김성언 다석학회 이사, 곽영길 아주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 함께 자리해주셨는데요. 세 분은 ‘노자와 다석’ 인문학 수업을 이끌어나갈 주인공이시기도 합니다. ‘혼란과 분열의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릴’ 특별한 인문학 강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기획 곽영길 아주뉴스코퍼레이션 발행인, 구성 주은정PD, 출연 박영호 다석학회 고문, 김성언 다석학회 이사, 곽영길 아주뉴스코퍼레이션 발행인, 촬영·편집 주은정PD, 이지연PD2020-01-02 17:49:37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0)날마다 한치씩 나아간다'습득'이란 말 속에서 배움의 묘리를 발견하다 류영모는 1907년 6월 경성학당을 마친 뒤 경신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이 학교는 류영모가 다니던 연동교회를 교실로 쓰고 있었기에 그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입학 무렵, 경신학교의 전체 학생수는 128명이었고, 급우는 36명이었다. 류영모는 선교사 게일에게서 성경을 배웠고, 밀러 목사에게서 물리를, 그리고 김도희 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경신학교에 들어간 입학생들은 김도희 선생으로부터 한자대자전 한권씩을 받았다. 류영모에게 한자의 문리(文理)가 틔었던 것은 이때였다. 그는 한자의 어원이 소개되어 있는 이 사전을 보물처럼 여겼다. 집에서 혼자 한자공부를 하다가 '습득(習得)'이란 낱말을 곰곰히 들여다보게 됐다. 학문이나 기술을 배워서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지식이 어떻게 사람 속에 들어오는지를 담아놓은 표현이 아닌가. 17세 소년은 이 말이 신기했다. 한자 얻을 '득(得)'자의 자획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이것을 파자(破字)라고 부른다. 그랬더니 일(日)과 행(行), 그리고 일촌(一寸)이 나왔다. 그는 학교에 가서 김도희 선생께 이 발견을 전했다. "그러니까 '득(得)'이란 글자의 어원적 의미는 '날마다 한 치씩 나아간다'는 뜻이 아닐지요?" 파자를 한 내용을 설명하자, 김도희 선생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여줬다. 조선의 대학자 화담 서경덕이 '조삭비(鳥數飛)'를 발견한 것에 비견되는 깨달음이었다. 화담은 소년시절 어린 새가 날마다 조금씩 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배움이란 저래야 하는구나"라고 무릎을 쳤다. '조삭비'는 새가 (부지런히) 자주 날개를 퍼득여 본다는 의미다. 류영모는 경신학교의 교명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경신(儆新)이란 말은 '깨우쳐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이 이름은 선교사 게일이 당시 한문에 능통한 김정식·이창식·유성준과 상의한 끝에 지은 이름이었는데, 원래는 '경신(敬神, 신을 경배함)'이란 한자를 검토했다고 한다. 이 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잠언 1장 7절 -개역성경)"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다가 좀더 대중적인 취지가 담긴 '경신(儆新)'이 채택됐다. 그는 지식의 근본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일임을 평생의 신념으로 삼고 실천했다. 2000년 동서양이 그의 심장 속에서 '합일' 2학년이 될 무렵, 류영모는 '일일역행(一日力行)'이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날마다 힘써 행하자'는 의미의 이 시에는 한자의 어원과 파자(破字)가 많이 활용되어 있다. 17세 때 만난 '한자대자전'의 힘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한자는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생각한 것을 담아놓기 좋아서 뜻을 알기 쉽고 기억하기가 좋지요." 그가 불경과 공맹노장을 넘나들 수 있게된 것 또한 한자에 대한 폭넓은 이해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동양적 사유의 기틀을 갖추고 성경 구절에 담긴 함의를 살폈을 때, 그의 생각의 용광로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의 신앙 속에서 어떻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는지 그 종횡무진의 사유(思惟)를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는 '동일(同一)'과 '합일(合一)'의 개념 차이를 설명하면서 "물질적인 것이 같아질 때 동일을 쓰고 정신적인 것이 같아질 때는 합일을 쓴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의 심장 속에서, 2000년 이상 각자 쌓아온 동양과 서양의 신앙적 기틀이 놀라운 '합일'을 찾아가고 있었다. 언드우드가 세운 경신학교와 다석 류영모가 다닌 경신학교는 지금의 경신중고등학교의 모체이며, 지금의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경신학교 대학부에서 출발했던 만큼, 유서 깊은 우리나라 근대학교 중의 하나다. 이 학교를 창립한 사람은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Underwood H.G·1859~1916)다. 그는 1885년 이 나라에 들어왔고 그 사흘 뒤에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86년 서울 중구 정동에 살던 집에 딸린 건물을 이용해 '언더우드 학당'을 만들었다. 고아원을 겸한 학교였다. 언더우드가 당시 조선의 아이들을 살펴보니 거의 기아(棄兒) 상태와 다름없는 신세가 많았다. 우선 그들을 구제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고종에게 이 계획을 제시한다. 왕실의 승낙이 있은 뒤 남학생 40여명을 받아들여 학당을 개교했다. 언더우드 학당을 연 지 4년이 지났을 무렵인 1890년, 언더우드가 일본에 있던 피어슨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이 고아원엔 25명의 남자아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방을 청소하고 자기가 먹을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학교 운영에 필요한 일도 합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몸차림을 정돈한 뒤 한문 공부를 8시까지 합니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엔 영어와 성경을 공부합니다. 오후엔 주로 놀도록 했고 복습과 한문공부를 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한문은 한국인 교육에서 중요한 과목입니다. 미국의 선교본부에서 이 학교의 예산을 크게 줄인다고 하니 걱정입니다." 언더우드학당은 이후 예수교학당, 민노아학당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유지하다가 1901년 종로구 연지동 연동교회를 교실로 쓰는 경신학교로 출발한다. 경신학교는 배재학당과 더불어 근대교육의 주축을 이루는 학교로 성장한다. 임정 부수석 지낸 김규식을 키운, 언더우드 학당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1881~1950)은 언더우드 학당 출신이다. 8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던 어학의 천재는 어떻게 이 학당에 갔을까. 그의 아버지는 민씨정권을 비판하다가 귀양을 갔고, 어머니는 사망하여 고아와 다름없는 처지가 됐다. 그는 영양실조와 열병으로 죽은 아이로 취급받으며 뒷방의 병풍 뒤에 누워 있기도 했다. 그의 숙부가 언더우드 학당을 찾아 아이를 맡기려 했으나 8살이 안 되는 아이는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후 죽어가는 김규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언더우드가 분유와 약을 들고 강원도로 그를 찾아간다. 언더우드가 도착했을 때, 어린 김규식은 울부짖으면서 먹을 것을 찾으며 벽지를 뜯어먹고 있었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아이를 업고 학당으로 돌아와 그를 살려냈다. 그는 이 학당의 가장 어린 학생이 되었다. 이렇게 성장한 그는 17세 때 미국에 건너가 버지니아주 로녹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05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에서는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그는 "조국의 앞날이 걱정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귀국했다고 한다. 이후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경신학교 일을 돕기도 했지만, YMCA학교 학생부 담당과 학감을 맡아 분주하게 일했다. 3·1운동을 촉발한 정재용과 다석 1907년 17세로 입학한 류영모는 경신학교에서 9살 위인 26세의 유학생 출신 김규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교유를 한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류영모는 재학 중 교장의 명으로 오산학교 교사로 가는 바람에 경신학교 졸업생이 되지는 못했다. 당시 경신학교에는 다석보다 한 학년 아래에 정재용(1886~1976)이 있었다. 이 이름이 혹시 생소할지 모르지만, 사실상 탑골공원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분이다. 탑골공원 내의 비석에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정재용의 동상이 있고 비문도 새겨져 있다. 류영모보다 네 살이 많았던 정재용은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해주 의창학교 교감을 지냈는데 이때 기미년을 맞았다. 그는 연락을 받고 3월 1일 파고다공원에 왔는데 약속을 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민족대표들이 약속을 바꾸어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긴 것을 몰랐던 것이다. 정오를 알리는 오포 소리가 울렸는데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모였던 수천명의 군중들이 웅성거리며 흩어지려 했다. 그때 정재용이 분연히 앞으로 나와 팔각정으로 올라갔다. 그는 품속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2월 26일 고성관에서 2만1000장을 인쇄하여 전국으로 배포하고 남은 한 장이었다. 선언서를 읽고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갑자기 파고다공원의 군중들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33인을 대신해 뜻밖의 사람이 이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다. 류영모는 고양군 벽제면 웃골에 있는 동광원에 들를 때면 꼭 학교 후배인 정재용을 찾았다. 해주 출신인 정재용은 자신을 수양산인이라 자칭하기도 했다.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씹으며 절조를 지킨 백이숙제의 자부심과 고향의 수양산을 함께 새긴 것이다. 다석일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1972년 11월 17일 수양산인장(莊) 정재용 선생 경심(敬尋, 옷깃을 여미며 찾아뵙다)" 1976년 정재용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부음이 실린 신문기사를 오려서 평생 애지중지하던 '한자대자전' 표지 안쪽에 붙여넣고는 타계한 시간을 적어놓았다. 평생 지기(知己)를 잃은 아쉬움은 간결하게 거기 담겼을 것이다. # 다석어록 : 자각 없는 학문은 노예짓에 불과하다 학문의 시작은 자각(自覺)부터다. 자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학문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노예에 불과하다. 우선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을 들고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씀과 같다. 거울 경(鏡)이 말씀 경(經)이다. 이 거울 속에 참나(얼나)가 있다. 말씀이 바로 참나이다. 말씀을 풀어보는 동안에 붙잡히는 것이 진리인 이치요 참나인 정신이다. 우리가 할 것은 가온찍기(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점을 찍는 것)밖에 없다. 점을 찍는 것은 생각 속에 말씀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참나를 무시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기막히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참나처럼 값비싼 것이 없는데 이를 무시하고 덧없이 살고 있다(1956).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19-12-30 13:38:24--
-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누구?자신만의 특별한 신념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독립운동을 펼쳤던 손정도 목사의 삶이 재조명됐다. 지난 24일 KBS 성탄특집 다큐멘터리 '걸레성자 손정도'가 방영됐다. 이날 방송에서는 일제 모진 고문 후유증에도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독립운동 지원을 하다 49세 일기로 눈을 감은 손정도 목사의 지난했던 삶이 그려졌다. 손정도 목사는 1982년 지금의 북한인 평안남도 강서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관리직 임용을 위해 준비를 하던 와중 교회와 연이 닿아 집에서 의절을 당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손 목사는 모금과 강연, 설교와 노동 등을 통해 자력으로 비용을 마련해 이층예배당을 헌당했으며 한국인을 위한 공동묘지까지 마련하는 열정으로 교회를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교회가 한인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어가자 하얼빈 일본총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1912년 7월 하얼빈에서 이른바 '가쓰라 다로 암살모의사건'의 주모자라는 혐의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3개월간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과 악형을 받았고, 전남 진도로 유배 되었다가 1년만에 석방됐다. 손 목사는 평생의 신념으로 걸레철학을 주창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의 현장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들이 마다하는 궂은일을 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손 목사는 일제 치하의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으나 과로가 계속되며 1931년 베이징 지인의 집에서 식사 도중 각혈을 하며 사망에 이르게 된다. 손 목사의 동생인 손경도가 1960년대 중국 미산(密山)에 마련한 묘소로 시신을 이장했고, 이후 조카 손원진이 묘소를 관리해 왔다. 1996년 한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9월 12일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2019-12-25 10:44:1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영혼의 개벽은 어떻게 왔는가이 땅에 처음 들어온, 정동YMCA의 추억 “조선 청년들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이 다시 소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예로부터 하느님을 믿는 민족으로 기독교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데에 처음부터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전통신앙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03년 4월, 당시 조선의 기독교 선풍을 기록한 미국 내 ‘코리아 리뷰’(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의장 H.B. 헐버트의 기고)에는 이런 얘기가 실려 있다. 조선 청년들이 기독교에 비교적 저항 없이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전에 지녀왔던 신념체계와의 동질감 때문이라고 분석한 외국인 선교사의 관점은 인상적이다. 류영모 또한 그런 청년들 속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1844년 영국 런던에서 22세의 조지 윌리엄스가 중심이 되어, 산업혁명 이후의 가치 혼란으로 고통받던 청년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자는 취지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방법은 ‘영적인 상태를 개선하는 친교’였다. 유럽과 미국으로 뻗어나간 이 운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60년 뒤였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1885년이었고, 교회와 학교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교회청년회는 애국계몽의 선두에 서 있었다. 1899년 150여명의 청년들은 조선에도 YMCA 창설이 필요함을 역설했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북미 YMCA국제위원회에 이 같은 뜻을 전했다. 북미 YMCA국제위원회는 조선의 요구를 접수한 뒤 D.W. 라이언을 보내 조선 현지 조사를 했고 회관 건립예산 5000달러를 책정했다. 1903년 10월 28일 수요일 저녁 8시 서울 유니언회관(정동 공동서적실)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탄생한다. 초가집에 나무간판만 붙인 곳이었지만 모두들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제임스 게일, ‘하나님’이란 말을 창안 헐버트가 의장이었고 제임스 게일(奇一) 목사가 헌장 초안을 낭독했다. 제임스 게일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캐나다 출신의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토론토대학 YMCA의 후원으로 1888년 부산에 왔고 40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이 땅의 개신교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명 기일(奇一)은 ‘낯선 사람’이란 의미도 되지만, ‘진기한 하나님’이란 뜻도 품고 있다. 그는 성서 번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는데, 1925년에 최초의 개인역 성경인 ‘신역신구역전서’를 낸다. 특히 그는 'God'의 번역을 천주로 할 것이냐 하나님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언더우드와 긴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결국 ‘하나님’이란 독특한 우리말을 보편화시켰다. 게일은 당시 한성감옥에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는 일을 시작했다. 감옥에는 이상재, 이승만 등 개화파 지식인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 일은 지식인들의 개종을 확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00년에 그는 서울 연못골 교회(연동교회) 초대 목사를 맡은 뒤 1927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봉사를 했다. 그가 떠날 때의 한 마디는 “내 언제까지나 내 마음에 한국을···”이란 말이었다. 큼직한 서양식 건물로 YMCA가 새로 지어진 것은 5년이 지난 뒤인 1908년 12월이다. 게일과 삼성(三醒) 김정식(金貞植)이 주축이었다. 김정식은 YMCA 초대총무를 지냈다. YMCA 창설 초기에 연단에 나온 지사들은 안창호,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남궁억, 이승만, 윤치호, 김규식, 홍재기, 안국선, 신흥우 등이었다. 연설을 듣고자 서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 사람들도 올라왔다. 어른들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청소년들도 모여들었다. 소년 류영모, 김정식 연동교회와의 인연 YMCA에 모여든 아이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서울 안동교회에서 13년간 목회를 한 김우현(金禹鉉)의 회고가 남아 있다. 그는 1895년생으로 류영모보다 5살 아래다. 1903년 10월 28일 8세의 서당학동이었던 그는 태화궁 사랑채에서 가진 청년회 모임에 구경을 갔다. “사랑채엔 갓 쓴 청년들이 앉아 있었고 양복을 입은 사람 둘이 나서서 연설을 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안창호와 이승만 두 분이었어요. 그때까지 전 예수란 전혀 몰랐어요. 이곳에 자주 나가서 얘기를 듣다 보니 기독신자가 되었습니다.” 류영모는 언제 기독교에 입문했을까. 그는 13세부터 YMCA에 동생(류영묵)과 함께 자주 구경을 갔던 소년이었다. 2년이 지난 1905년 봄에 이 모임에 참석한 김정식(金貞植)이 연동교회에 나가보라고 권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인이 됐다. 서당을 그만두고 경성학당에 가서 일본어를 배우게 된 것도 이런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를 기독교에 입문시킨 김정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정식은 요즘의 치안감쯤 되는 구한말의 고위 경찰관이었으나, 당시 도탄에 빠진 국가의 개혁을 주장하는 독립협회에 동조하다가 국사범(國事犯)으로 1902년 3월 22일 투옥되었다. 김정식은 감옥에서 선교사 게일이 넣어준 신약전서를 읽게 된다. 4대 복음서 속에서 예수의 생애를 접하면서 그는 몹시 놀랐다. 자신의 억울함은 예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예수가 취한 태도는 너무도 의연했다. 신약전서를 7번 완독하고 8번째 읽는 가운데 1904년 2월 25일에 무죄 석방이 되었다. 김정식이 직접 쓴 회개 입신의 신앙고백서가 남아 있다. "허다한 죄상과 허다한 회포를 다 고할 때에 두 눈에 눈물이 비오듯 베개를 적시더니, 예수께서 손으로 내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시되 네 회개함을 내 아나니 너무 서러워 마라. (......) 만일 이 몸이 옥중에 들어오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이런 은혜를 얻었으리오. 그런즉 우리의 몸을 모함한 사람이라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의 뜻에 맡길 뿐이로다." 무죄로 석방된 김정식은 게일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연동교회와 YMCA 일을 보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한국인 목사가 없던 때이고, 선교사는 여기저기에 교회를 세워 나가니 모든 교회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김정식은 연지동 136번지, 지금의 연동교회 자리에 애린당(愛隣堂)이라는 현판이 달린 건물에 주거하였다. 그때 연동교회는 판잣집에 볏짚 이엉을 덮은 건물이었다. 류영모는 "15세 때 성경을 보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라고 말하였다. 선교사 게일의 설교 "이게 꿈일지라도 좋은 꿈입니다" 1905년 봄부터 류영모는 서울 연동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이 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112년이 되고 개신교가 들어온 지 22년이 된 때이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이 나라에서 기독교 신자의 증가는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기록이었다. 1884년 알렌이 이 나라에 와서 개신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1907년에 이미 기독교 신자가 10만명에 이르렀다. 류영모가 연동교회에 나간 1905년에 이 교회는 늘어나는 신도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한 해 동안에 판잣집 교회당을 세 번이나 뜯어서 넓혔다. 1907년 연동교회에 등록된 신자가 어른이 550명, 주일학생이 800여명이 되었다. 연동교회에 다닐 때의 일을 류영모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일요일 오전에는 연동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오후에는 승동교회에서 연합예배를 보았어요. 그리고 밤에는 새문안교회에서 밤 예배를 보았어요." 그때는 한국인 목사가 없었고 선교사들이 직접 목회를 하였다. 류영모가 다닌 연동교회에서는 선교사 게일이 주로 설교를 하였다. 류영모는 그때 들은 게일의 설교 한마디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선교사(게일)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가 사는 이게 모두 꿈인지 몰라요. 그러나 꿈이더라도 깨우지는 마세요. 나는 지금 좋은 꿈을 꾸고 있어요. 여러분 모두 나와 같이 좋은 꿈을 꾸어 봅시다'라고요." 우리말로 옮긴 성경은 신약성경이 1887년에 나오고 구약성경은 1910년에 나왔다. 류영모는 아브라함을 아백라한이라 옮긴 중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읽었다. 류영모는 연동교회에 다닐 때 산 신약전서를 일생 동안 고이 간직하면서 날마다 읽었다. 1909년(대한 융희 3년 기유년) 미국 성서공회가 출판한 것으로 실제로 인쇄하고 제본한 곳은 일본이었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갈 때도 이 신약전서는 들고 갔다. # 다석어록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장6절-개역성경) 하느님이 주신 얼나(성령의 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하느님이 예수의 마음속에 보낸 얼나가 예수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얼나와 길, 얼나와 진리, 얼나와 생명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얼나를 길(道)로 표현한 이가 노자이며, 얼나를 진리로 표현한 이가 석가이며, 얼나를 생명으로 표현한 이가 예수다.(1956)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19-12-23 15:22:35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세기의 벽두에 서서 묻다, 나는 무엇인가망국의 모순과 세계사적 기회 앞에서 다석 류영모는 한 세기(世紀)의 벽두에 서 있었다. 동 트는 시대의 여명을 온몸으로 느끼며 새로운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다. 2000년이 시작되던 기점(起點) 무렵에 태어난 사람들을 밀레니얼 세대라고 부른다면, 1900년이 돋아나던 날들을 10살의 맹렬한 감관(感官)으로 숨쉰 그를 20세기의 신인(新人)이라 할 수 있을까. 함께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은 많았지만 류영모가 돋보이는 것은, 20세기 태동과 함께 시작된 망국의 역사적 모순과 동서 문명이 개통되고 융합되는 세계사적 기회를 동시에 읽어냈기 때문이다. 읽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세기의 주체적 인간으로 참여하여 이 땅에 심오한 생각의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20세기는 19세기에 이어지는 하나의 100년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의 모든 세기와는 '결별'했다고 할 만큼 다른 시대이기도 했다. 단군이 이 땅에 나라를 개창한 이래 삼국과 고려·조선으로 맥을 이은 전통이 그 정점에 이르러 무너지고 있는 지점이었고, 서양의 새로운 문명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들어오면서 혼란과 충격으로 그간의 삶과 가치를 서둘러 청산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이웃나라 일본의 침탈로 국가정체성을 상실하는 악몽 속으로 진입하는 시간이었다. 다석은 이 다중적인 전환기에 서서 '나는 무엇인가',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진실로 무엇이 중요한가'를 깊이 고뇌하며 성찰한 세기적 인간이었다. 100년을 건너온 지금, 류영모를 얘기하는 것 또한 저 세기적 인간이 이루고 보여준 시대인식과 삶의 본질 포착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류영모의 길'이 더욱 절실한 형태로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최호 선생 댁을 방문했을때,방명록에 남긴 다석의 글씨. 중용(中庸) 32장의 "肫肫其仁 淵淵其淵 浩浩其天(준준기인 연연기연 호호기천, 간곡하고 간곡하다 그 어진 마음, 깊고 깊도다 연못처럼, 넓고 넓도다 하늘처럼)" 중에서 집주인의 '浩'자의 뜻을 살리기 위해 仁, 淵, 天을 빼고 '肫肫至 淵淵其 浩浩其(준준지 연연기 호호기, 간곡하고 간곡함이 끝이 없구나 깊고 깊은 그것처럼 넓고 넓은 그것처럼)라고 썼다. 20세기 벽두 류영모의 길, 21세기 대한민국의 길 식민지의 굴레 속에서, 그리고 밀려오는 서구문명의 해일 속에서, 거기에 수천년 왕국의 신민(臣民)으로 살아온 체제와 삶의 불가피한 혁신 속에서, 많은 가치들이 전도되거나 뒤엉키고 삶의 의미 전체가 의문시되는 혼돈 속에서, 그 20세기의 격정적인 태동 속에서, 류영모는 어떤 길을 걸었는가. 그는 석가와 공맹과 노자와 단군이 밝혀놓은 동양의 사유가 예수에 의해 정립된 서양의 기독문명의 핵심적 기틀과 놀라운 일치율을 보이고 있음에 깊이 주목했고, 그의 사유(思惟)의 바닷속에서 그것을 하나의 씨알로 돋웠다. 인류 모두가 갈 수 있는 위대한 길을 찾아내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남의 생각, 이미 정의된 관점들을 인용하고 추종하는 '신자'가 아니라, 자신의 말과 생각으로 철학과 종교를 말하고 주체적으로 삶과 세상과 인간의 문제를 성찰해 나간 대지식인이자 행동가였다. 류영모의 길은 21세기의 문을 열어젖힌 우리에게 목표가 아니라 방식을 가르쳐준다. 20세기의 대변동은 인류역사가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는 상황의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전시대 문명의 많은 체계와 노하우를 버리고 디지털 세계 속으로 발을 디뎠다. 전시대의 정답이 지금의 정답이 아닐 수 있으며 오래된 가치가 더 이상 가치가 아닐 수 있는 시대. 우리가 겪고 있는 '신문명 앓이'의 핵심은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이제 지금 우리에게 옳은 것,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 문제들의 본질과 진실들, 세대 간에 공유되고 전승되어야 할 핵심은 무엇인가. 이 시대 대한민국은 무엇이며, 지도자는 무엇인가. 왜 이 나라는 이토록 심각한 불화와 갈등을 겪으며, 불안과 불행까지 느끼며 미로를 헤매는 듯한 인상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시대의 질곡과 정치의 난맥과 경제의 차질과 혼선을 시원하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류영모의 길을 통해 착안하고 기획하자는 것이다. 1905년 국치(國恥)의 시절에 시작한 일본어 1905년 11월 17일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날이며 열사흘 뒤인 30일은 충정공(忠正公) 민영환이 지도층으로서 망국의 책임을 통감하며 목숨을 끊어 사죄한 날이다. 이 뜨겁고 고통스럽던 그 11월에, 류영모는 나라를 병탄한 일본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15세의 소년은 왜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고 일어학교인 경성학당에 들어갔을까. 격변기에 시대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은 소년다운 탐구심이 있었을 것이다. 우선 일본의 말을 아는 것이 일본의 마음과 영혼을 읽는 방편이라고 판단했을까. 류영모는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언어가 단순히 소통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개념을 만들어내고 생각의 방식을 결정하고 또 철학의 폭을 확장할 수 있는 힘임을 느끼고 있었다. 말이 생각이며 믿음이며 교유(交遊)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말은 일본의 뿌리를 담고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에 이보다 유용한 것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그의 흉중에 3년간 서당에서 습자지처럼 빨아들였던 ‘맹자’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맹자는 그에게 인간이 영원할 수 있는 비밀을 일깨워주었다. 맹자는 인간에게 들어 있는 선천적인 마음인 성(性)이 있고, 감각으로 이뤄진 에너지인 명(命)이 있다고 말했다. 그 두 가지를 살펴볼 때, 일본은 ‘본성(性)’을 망각하고 ‘목숨(命)’에 딸린 탐욕을 극대화하여 조선 침탈을 감행한 셈이다. 일본어를 배워, 우선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향후 기회가 오면 ‘맹자의 가르침’을 벗어난 무도한 그들이 돌려받게 될 뼈저린 후환(後患)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창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리라. 분노를 감추고 원수(怨讐)국가의 말을 배우는 소년의 비장하고 착잡한 얼굴. 경성학당(한성 일어학교)은 일본인 와다세(渡瀬常吉)와 한국인 홍병선(洪秉璇)이 함께 경영하고 있었는데, 일어학교로 당시 이름이 나 있었다. 이광수는 ‘춘원전집’에서 당시 서울의 학교에 대해 언급하면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관립 외국어학교와 육군연성(陸軍硏成)학교가 있었으며 또 일어학교로는 경성학당이 꽤 유명했다”고 말하고 있다. 류영모가 이 학당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람으로 류일선(柳一宣)이 있었다. 류영모처럼 수학을 좋아했던 학생으로, 이후 중앙학교의 수학·물리학 교사가 된다. 언론에도 관심이 있어서 ‘가뎡잡지’를 출간하기도 했다.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구름과 구모(일어), 씨름과 스모(일어), 닭과 도리(일어), 옷의 고름과 고로모(일어)처럼 우리말과 일본어가 닮은 게 많다는 걸 확인한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이 침략한 것은 어머니 나라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실세(失勢)하여 쫓겨간 한이 맺혀 있다 하여도 그들의 뿌리를 외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불경(佛經)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외울 때 ‘아노구다라노산막구’라고 하죠. 이 말은 ‘저 백제(구다라)의 산맥’이란 뜻입니다. 이게 바로 그들의 뿌리인 것을···.” 류영모는 이 학교에서 2년간 일어를 배워 그들의 언어에 능통해졌다. 교사이자 농촌운동 동지였던 홍병선 경성학당에서 알게 된 사람 중에는 경성학당의 경영자이자 일본어 교사였던 홍병선이 있다. 그보다 두 살 많았던 홍병선은 목사이기도 했다. 그는 기독청년회(YMCA) 사업 중에서 농촌운동 분야를 맡아 실제로 농촌에 들어가 ‘농협운동’을 지도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농촌협동조합과 조직법’(1930)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농협중앙회 본부 건물에는 농협선구자 홍병선의 사진이 걸려 있다. 홍병선은 1967년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추석(1969년 9월 26일)에 류영모는 홍병선을 그리워하는 시를 ‘다석일지’에 남겼다. 昨年在淸秋月食(작년재청추월식) 今年晋光夜明郎(금년진광야명랑) 洪牧去疎八百日(홍목거소팔백일) 柳生依昔信且仰(유생의석신차앙) 작년엔 맑은 가을 월식날이더니 올해는 환한 밤이 밝디 밝구나 홍목사가 간 지 800날이니 류영모는 옛날처럼 믿고 우러를 뿐 그가 홍병선에 대해 친구로서의 믿음과 우러름을 보였던 것에는 농촌운동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에 공명했던 점도 있었다. 그가 일생동안 농촌생활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톨스토이의 영향이었다. 일본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다. 농촌운동은 신앙생활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십계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마에 땀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러시아의 톨스토이가 깊은 감화를 받고 늘 새겼던 말이라고 합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거역하는 행위라고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 # 다석어록 = 태양 빛을 끄고 어둠을 보라 "태양이 크다고 '클 태(太)'를 씁니다. 큰 대(大)에 점 하나 찍고 한번 더 크다는 뜻으로 이렇게 씁니다. 엄청나게 크다고 태양이라고 합니다. 뭐가 그렇게 엄청나게 크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언제, 빛이라는 게 있어서 완전한 빛을 보았습니까. 기껏 태양 하나, 큰 불덩어리를 가리켜 빛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서산에 해가 지면 왜 캄캄해집니까. 무슨 빛이, 얄팍한 구름 한 점에 가려져도 금세 캄캄해집니까. 광명이 흑암(黑闇, 완전한 어둠)을 완전히 밀어낼 수 있습니까. 우주는 넓고 큰 암흑입니다. 태양이 엄청나게 크다고 하고 그 밖의 발광체도 많다지만 우주의 어둠을 밀어냈습니까. 갇힌 몸으로 생각하니까 그 정도밖에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인 하느님이 베푼 말씀으로 보면 우리는 광명을 결코 본 일이 없습니다. 대부분 흑암 속에서 아물아물합니다. 흑암이야말로 큰 것이며 태양은 큰 것이 못 됩니다. 넓고 큰 것은 흑암이요, 광채는 미미합니다." 이 말은, 서구의 핵심사유 체계인 태양 중심 사고를 비판한 말이기도 합니다. 서양사상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고, 다른 문화와 문명을 어둠으로 이해합니다. '계몽'이라는 말은 자기 문화만을 중심권에 놓는 태양계의 관점으로, 남을 밝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다석은 태양보다 크고 위대한 어둠이 우주의 본질이라고 일갈합니다. 다양한 문화 간의 열린 소통과 상호 융합을 표방한 그의 철학적 기반이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19-12-18 10:22:53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13세에 맹자 읽고 하느님을 발견하다석파정 부근, 교육자 이세정과의 우정 삼계동서당에서도 평생의 벗을 얻었으니 일해(一海) 이세정이 바로 그 사람이다. 류영모의 아버지와 이세정의 아버지는 삼계동에서 같이 자랐다. 그러니 류영모와 이세정은 세교(世交)를 물려받은 것이다. 류영모는 석파정(石坡亭) 가까이에 사는 이세정의 집으로 자주 놀러 갔다. 이세정은 류영모보다 5살 아래로 뒤에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자가 되었다. 진명(進明)여학교 교장으로 30년 동안 근속하였다. 이세정의 헌신적인 교육은 서울 시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류영모는 딸을 진명여학교에 보낸 인연도 있다. 1972년 77살의 나이로 이세정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교육자로서는 드물게 사회장(社會葬)으로 안장되었다. 류영모도 장의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으나 그때 건강이 나빠져 장례의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류영모와 이세정은 서로가 그리울 때 종종 만났다. 언젠가는 이세정이 류영모의 YMCA 모임에 나와서 얘기를 한 일도 있었다. 1955년 5월에 이세정의 회갑잔치가 있었다. 이세정의 아들 이태섭(일명 其雨)이 류영모의 집으로 찾아와 참석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류영모 자신은 회갑잔치고 생일잔치고 하지 않았지만 옛 벗의 회갑잔치에는 참석하였다. '채근담'에도 이르기를 "옛 벗을 만나 사귐에는 정의를 더욱 새롭게 하여야 한다"(遇 故舊之交 意氣要愈新-채근담 165)고 하였다. 류영모는 벗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우(友)는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그림의 글자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친구인양 악수를 함부로 하고 있어요. 벗은 하느님의 뜻을 가진 사람을 말해요. 하느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은 나의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모두가 예수가 되지 않고는 벗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수는 벗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였어요. 원수를 사랑할 줄 알면 벗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기난득(知己難得)이고 득우극난(得友極難)입니다." * 다석어록 = 시작해서 끝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상대를 끝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나서 죽는 것이 몸나이다. 몸나가 죽어서 사는 것이 얼나이다. 얼나는 제나(자아)가 죽고서 사는 삶이다. 말하자면 형이하(形而下)의 생명으로 죽고 형이상(形而上)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몸나로 죽을 때 얼나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몸나의 인생을 단단히 결산을 하고 다시 얼나의 새 삶을 시작한다. 몸삶을 끝내고 얼삶을 시작한 그 삶에는 끝이 없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1956).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19-12-16 17:30:12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가"사람이 상대세계에 빠져버리면 아는 것(知, '알')이 굳어져버리고 만다. 절대세계를 놓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이든지 아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완고해지고 교만해지고 자기가 제일이라는 어리석음을 가지게 된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하느님의 향내라 할 수 있는 신비를 느껴야 한다. 신비를 느끼면 자신의 무지와 부지(不知)를 알아야 한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이다. 이 하나를 님으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이 아닌가. 하느님이 따로 계시지 않는다. 어린아이 되는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에게로 가는 것이다. 우리 생각의 '긋(끝)'은 참을 찾아간다. 참되신 절대자는 우리 속에 참의 긋점을 주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19-12-11 10:18:54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공부 좀 하셨습니까내 맘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알인 독생자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 것이다. 위로 거듭날 생각을 안 하니, 그것을 모르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몸의 숨은 붙어 있지만 벌써 멸망한 것이다. 이 몸이 죽지 않는다거나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면 못쓴다. 위로 난 생명(얼나)을 믿어야 한다. 몸이 죽는 게 멸망이 아니다. 벗겨질 게 벗겨지고 멸망할 게 멸망해야 영원한 생명의 씨알이 자란다. 거듭난 생명의 씨알로서 위로 나야 그게 사람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다. 얼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짐승의 새끼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19-12-09 15:43:40
- 문대통령이 지금 다석 류영모를 읽어야 할 이유이상국 논설실장2019-12-08 00:56:56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4)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사정(射亭) 앞 홰나무, 네다섯 살 적부터 외가(外家) 갈 적에 활 쏘는 정자 앞을 지나면 저 큰 나무 봬. 우리 다 왔구나. 우리 외갓집에. 그 나무는 그저 날 보네. 여든 바퀴 몇 바퀴." ('다석일지(多夕日誌)' 중에서) 세검정을 지나서 구기동 입구에 활 쏘는 사정(射亭)이 있으며 그 자리에는 늙은 홰나무(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80세 이후 류영모가 그 나무를 보고 옛날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 어머니는 박석고개 너머에서 시집을 왔는데, 나중에 친정이 구기동으로 이사를 간다. 류영모가 구기동에서 살게 된 것도 외가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외가 갈 때 보던 회화나무를 보면서 삶을 여기까지 오게 한 시간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수백년을 사는 회화나무에 비하면, 자신의 나이테 팔십 몇 바퀴는 그리 길지 않지 않은가. 그 회화나무 근처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거기엔 1960년대까지도 장판지를 만드는 제지공장이 있었는데 구기터널이 뚫리면서 아주 달라져 버렸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19-12-04 08:46:02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3) 너의 생각이 하느님이다"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얼줄이 드리워져 있다. 이 우주에는 도라 해도 좋고 법이라 해도 좋은 얼줄이 영원히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 얼줄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이 하나의 얼줄을 생각으로 찾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 이 얼의 줄, 정신의 줄, 영생의 줄, 말씀의 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1956) *얼줄은 성령정신의 탯줄이며 곧 하느님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2019-12-03 15: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