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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7

'퀘이커 평화주의자' 이행우 선생을 보내며

'퀘이커 평화주의자' 이행우 선생을 보내며


'퀘이커 평화주의자' 이행우 선생을 보내며

[기고] 평화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의 '진주알 잇는 실' 같았던 삶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 2021-10-26 

나는 1980년 대 초반 함석헌(1901-1989)을 처음 만나며 금방 '함석헌에 미친 사람'이 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3554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5180)

1984년 5월 군대에서 제대하고 철도청에 복직한 나는 서울 명동 전진상교육관과 향린교회에서 매주 함석헌이 강의하는 노자와 장자 공부모임을 참석했다. 한 번은 노자 공부모임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은 분이 퀘이커 교도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85년 어느 날 그의 손에 이끌려 서울 신촌 봉원동에 있는 퀘이커모임을 처음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예배 후 함석헌이 강의하는 성경과 퀘이커 공부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의 재미동포가 미국에서 한국 퀘이커 모임을 방문했다. 그는 예배 후 그의 생생한 '북한방문기'를 들려주었다. 그 재미동포가 이행우 선생(1931-2021)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한국전쟁 중 함경남도 북청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전쟁피난민' 출신이라 이행우 선생의 북한방문기에 온 시각을 곤두세우고 깊은 관심을 갖고 들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9329)

▲오른쪽 끝이 이행우 선생이다. ⓒ김성수 제공

당시는 광주학살로 손에 피를 묻히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기라 북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사항이었다. 그래서 이행우 선생은 전두환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재미동포라 전두환 정권은 그를 철저히 감시는 하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지는 못했다. 이행우 선생은 그 후에도 거의 매년 평생 40번 이상 북한을 방문했고 방한 할때 마다 퀘이커모임에서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이행우 선생은 그의 스승 함석헌을 모시고 서울퀘이커모임에 참석했고 1960년엔 함석헌과 함께 서울퀘이커모임을 창립했다. 그리고 1968년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퀘이커연구소 펜들힐로 유학을 갔고 그 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다. 전주고등학교와 서울대 수학과 출신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곧 컴퓨터 전문가로 직장을 잡아 지난 2003년 73세의 나이로 현업에서 은퇴했다. 컴퓨터 전문가 1세대로 수입도 좋았지만 그는 그와 가족이 평생 살 집 하나 마련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평생 번 돈을 한반도 평화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썼기 때문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휴가나 여행을 가기 보다는 그는 자비를 털어 미국, 북한. 일본, 중국, 유럽을 방문해 정치인, 관리, 시민활동가, 학자, 언론인들을 만나며 한반도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고 국제회의를 개최했으며 그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 외에도 그는 자비를 털어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영어논문집을 제작해 이들에게 배포했고 민주화운동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한국의 재야인사나 정치범들을 위해 미국에서 모금을 해 한국으로 돈을 송금해주었다.

1974년 한국민주화운동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미국에 결성하면서 그는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인사들이 거의 수입이 없는 실업 상태였기 때문에 재미동포들에게 모금활동을 하여 국내에 돈을 보냈던 것이다.

1982년에는 미국 퀘이커(AFSC)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해 북한 관리들을 만나 한반도 평화통일문제, 조미관계 개선문제, 북조선대표단을 미국에 초청하는 문제 등을 협의했다.

1986년 그는 한겨레 미주홍보원을 설립, 'Korea Report'라는 영문보고서를 발간해 대미홍보와 국제연대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이 보고서를 발간하기 전에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미국에서 한국문제를 분석한 영문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미국 고위관리, 정치인, 학자. 언론인들이 그가 낸 보고서에 큰 관심을 보였고 미국사회에 한반도평화통일의 중요성에 대해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엔 그는 미국의 지인들과 한국지원연대(Korea Support Network)를 결성,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국제사회에 알렸다.

1989년엔 전국대학생협의회를 대표해 방북한 대학생 임수경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일이 있었다. 그 때 이행우 선생은 대학생 임수경을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미리 문규현 신부와 함께 방북해 '임수경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북한당국의 협조를 구했다.

1994년에는 대기근으로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다. 그러자 이행우 선생은 기근으로 고통받는 북한동포들을 인도적으로 돕기 위해 미국 퀘이커들과 함께 방북해 북한의 농업을 지원하고 인적교류를 추진했다.

1995년 그는 미주평화통일연구소, 1998년에는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을 설립했다. 이런 단체들을 통해 이행우 선생은 한반도 평화통일문제에 대한 논문을 발간했다. 그리고 그가 발간한 논문들은 남북과 해외동포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그런 긍정적 반응을 바탕으로 다른 한반도 평화통일운동단체들과 적극적 연대활동을 벌였다.

이행우 선생의 이런 물밑 작업과 각고의 노력은 마침내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가능하게 했고 한반도 평화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행우 선생의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보이지 않는 헌신적 봉사와 희생 덕에 마침내 지난 2000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늦게나마 그의 한국 민주화운동, 남북한 긴장완화, 한반도 평화통일 노력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지난 2011년 이행우 선생은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았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3611)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2013년, 45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그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고 곧 한국국적 회복을 신청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박근혜 정권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행우 선생의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한편, 지난 2012년 8월 나는 북한 실향민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실의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중 그 다음해인 2013년 귀국한 이행우 선생을 나는 매주 서울퀘이커모임에서 만나며 마치 아버지가 죽음에서 돌아온 것처럼 느꼈다. 그는 내가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극우 인사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을 상대로 고소한 법적소송에서도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79063)

그리고 그런 이행우 선생의 따스한 격려에 힘입어 나는 지난 2016년 마침내 이영조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https://www.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1605281843001

한편, 지난 2020년 8월 그는 광복회로부터 "한반도 분단극복과 통일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광복평화상'을 받았다.

올해 9월 나는 암으로 병상에 누워계신 이행우 선생께 문안인사차 영국에서 국제전화를 드렸다. 올해 3월 어머니를 보내고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 장례도 참석 못해 힘들어 하던 내게 선생은, "성수, 힘내야지! 그리고 오래 살자!"라며 오히려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그런 선생이 지난 10월 16일, 암으로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그의 부인과 두 아들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장례를 진행한 뒤 그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모셨다.

함석헌 선생이 내게 정신적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였다면 이행우 선생은 내게 정신적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6447

이행우 선생은 달변가가 아니었지만 그 말씀의 내용은 늘 놀라웠다. 그의 가장 큰 무기가 '진실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화려한 무대 뒤에서 남을 위해 조용히 일만 하셨다. 그는 아름다운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분이었다. 진주목걸이가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한 여인의 목에 당당하게 걸릴 수 있는 것은 그 진주 하나하나 속을 관통하여 이어주는 가느다란 '보이지 않는 실' 때문이다. 내가 보는 이행우 선생은 그런 분이었다. 그는 입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몸소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런 이행우 선생이 너무 그립다. 내년에 모국에 가면 반드시 어머니와 그의 묘지를 찾아가 머리 숙이고 목 놓아 마음껏 울고 싶다. 선생님, 너무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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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행우 선생 : 1931년 1월 3일 전북익산 생. 1955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수학과 졸업, 그 해에 해군장교에 임관,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 교수. 1957년 군복무를 마치고 이리 남성고등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 숭문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 한양대학교 출강. 종교는 퀘이커교. 1968년 미국퀘이커교단 초청으로 유학, 퀘이커교육기관인 펜들힐(Pendle Hill)에서 1년간 퀘이커교에 대하여 공부. 공부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정착, American Bank(1969-1979), Burroughs Corp.(1979-1980), Polymer Corp.(1980-1986), Delaware Investments(1986-2003) 등에서 Systems Analyst로 근무. 2011년 한겨레통일문화상, 2020년 '광복평화상' 수상. 2021년 10월 16일 하늘나라로 가심.


▲이행우 선생 추도식 안내문


2021/10/20

Sungsoo Kim [Obituary] Hangwoo Lee (1930-2021), a quite Quaker and an active Peace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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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Sungsoo Kim

[Obituary] Hangwoo Lee (1930-2021), a quite Quaker and an active Peacemaker

In 1985, I began to attend the Quaker Meeting in Seoul, South Korea where I met Hangwoo Lee. One Sunday afternoon, after a Meeting for Worship, Lee gave a talk about his visit to North Korea. As my father was a North Korean refugee, I listened to Lee's fascinating talk with great interest. At that time, South Korea was ruled by a military dictatorship, thus Lee's talk on North Korea was a forbidden topic. Naturally Seoul Friends were very cautious about possible interference by the military regime.

Lee was a Korean-American Quaker and visited South and North Korea nearly every year and whenever he came to Seoul Quaker Meeting, we talked about North Korea. Thus, he was blacklisted by the military regime of South Korea.
In 1960, together with a well-known Korean Quaker, Ham Sok Hon (1901-1989), Lee founded a Korean Quaker Meeting in Seoul. In 1968, Lee went to Pendle Hill (Quaker Study Center in the USA) to study Quakerism for a year then he settled in Philadelphia with his family. He worked there as a computer analyst and retired in 2003, when he was 73 years old. However, he did not even own a home of his own and he spent most of his wages and holidays working for the peaceful reunification movement of two Koreas.

Rather than going on family holidays with his wife and children, he met government officials and lawmakers of the USA, North Korea, China, Japan, and Europe and with them, he discussed, appealed and sought a way for the peaceful reunification of two Koreas. Moreover, Lee spent most of his wages on publishing reports on Korea's peaceful reunification issues and sent money to help South Korean dissidents and political prisoners.

He was not a good speaker, but he was a quiet man of action. He spoke through his life.
In 1974, he founded a 'Meeting for Suffering for Koreans in the USA to help and support South Korean dissidents and their families
In 1982, as one of the delegates of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Quakers), he visited North Korea and tried to promote peace between the two Koreas. Since then, he has visited North Korea more than 40 times with this goal in mind. 
In 1986 he founded the 'Korea-US Public Relations Center' in the USA, where he published a 'Korean Report' in the English language, which was widely read among the US lawmakers, officials, activists, and journalists as well as the overseas Korean experts.
In 1987, he also founded the 'Korean Support Network (KSN)' in the USA and through the KSN, he not only supported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movement but also raised public awareness among American politicians, officials, and scholars in relations to South Korean democracy.
In 1993, when North Koreans suffered famine, as one of delegates of AFSC, he visited North Korea and supported agriculture facilities there.
In 1995, Lee founded the 'Peaceful Reunification Institute for two Koreas' in the USA, and the institute published various papers on peaceful reunification issues of two Koreas.

Lee laid the foundation for the peaceful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nd due to his relentless contribution, in June 2000, South Korean president, Kim Dae-jung, was able to visit North Korea and held a summit meeting with the North Korean leader Kim Jung-il. It was the first summit meeting of the two Korean leaders since the cease fire of the Korean War in 1953. Subsequently in October 2000, Kim Dae-jung received the Nobel Peace Prize, thanks to Lee's invisible toil and effort.

In 2009, Lee led an International Conference on 'Ending of Arms Race in the Asia-Pacific Region.'
Due to his contribution, in 2011, Lee received the 'Korean Reunification Culture Award' from South Korea.

In 2013, after 45 years of life in the USA, Lee returned to South Korea for good. After that I was able to meet him every week at Seoul Quaker Meeting. During this time, Lee gave me courage, comfort and inspiration while I was engaged in a lawsuit against a right wing government minister. Thanks to his kind support, in 2016, I won this legal battle. http://english.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606031507077&code=710100&fbclid=IwAR3KjQri4-g9X-tfQVThmjrvLpI024-2sgqMGiqm4PitJjRmjIsHtHDXpsc
In August 2020, Lee received the 'Liberation and Peace Award'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o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 for peaceful reunification of two Koreas.
In September 2021, when I rang him by an international telephone call, he was on his sickbed and he said to me , "Sungsoo, let's live cheerfully!" He passed away in the morning of 16th October 2021 of prolonged cancer. To me, he was like a father figure, and he talked to me through his life. An active peacemaker and quiet Quaker, Hangwoo Lee, I miss you!

* Sungsoo Kim is a member of Seoul Monthly Meeting and Leicester Quaker Meeting of Britain Yearly Meeting of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He is author of 'Biography of a Korean Quaker, Ham Sok Hon.'
** Photos: Hangwoo Lee with Sungsoo Kim








2021/10/03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장영호 2021 논평자 이수호 김말순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0930

장 영 호(전 씨알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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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석헌의 신앙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다/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리라.1)

함석헌의 시 <대선언>의 일부 입니다. 젊은 날 제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함석 헌 선생님이 기독교를 떠났나보다 했습니다. 함선생님의 말씀과 독서의 시간이 얼마 간 흐른 후에 깨달은 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넘어선’ 것이구나 라고 이해하기 시작 했습니다. 풍류신학자 유동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불교, 유교, 기독교 세 종교가 들 어왔는데, 각 그 종교에서 나왔으나 경계를 넘어선 이가 원효, 율곡, 함석헌이라 하였 습니다. ‘넘어서다’라는 우리말은 참 묘미가 있는 어휘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함석헌 시 연구서,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에서 명쾌한 풀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파주의 또는 교파주의 안에 갇혀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해 봄직 하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애독해온 불후의 고전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고침 글인데, ‘대선언’의 전후 시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도 보입 니다.

고향 평북 용천에서 어린 시절 장로교회를 다닌 함석헌은 13살까지는 순박한 기독교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2)

삼일만세운동 사건을 뼈아프게 겪은 이후, 오산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함석헌은 생 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가르침과 동서양의 명품서적 들을 읽으면서 좀 더 깊고 참된 믿음이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교회에 점점 비판적이 되어 멀어져 갔으리라 보입니다.3)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 김교신의 소개로 그는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 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아니고도 믿을 수 있다고 한 우치무라의 신앙 을 세상에서는 무교회주의라 불렀습니다. 아무 형식, 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형태로 성경과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앙관이 특색입니다.4) 그러나 함석헌의 무교회 신앙도 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무교회도 어느덧 자기주장에 집착하여 교파 아닌 교파가 되어가는 모습에 함석헌은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1) 대선언, <<수평선 너머>>, 일우사(1961), 170~171

2) <씨의소리> 1970년 4월호. 함석헌전집4.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 207~8.

3) 위 책, 214.

4) 위 책,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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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말라붙는 사람은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못 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대속(代贖)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5)

우치무라의 신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제 제자가 선생과 같 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에게 충실하는 것이 그를 스승으 로 대접하는 도리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을 두고 말 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스승은 고귀하다. 그러나 진리 는 더욱 고귀하다.”

신의주 학생사건의 배후로 몰려 죽음의 순간을 겪었던 함석헌은 동료와 제자들의 도 움으로 1947년 극적으로 월남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해 미국에서 갓 돌아온 현동완 선생이 주도하는 목요모임에 나가면서 퀘이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퀘 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놀라움 속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고, 무교회에서조차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6) 시련과 고독 속에서 맞은 1960년은 함석헌에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가져다준 한 해 입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 았다. 누가 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원망은 아니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 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7)

칼릴 지브란의 글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힘써 번역한 <<예언자>>, <<사람의 아 들 예수>>가 함석헌에게 신생의 빛을 비춰 주었다면, 1961년 겨울, 한국의 첫 퀘이커 이윤구님의 권유로 퀘이커 서울모임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또 하나의 출구였습니 다. 훗날 영국과 미국 퀘이커 친우봉사회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나 추천 받은 사실을 보더라도, 함석헌의 평화운동이 세월을 딛고 끝내 촛불 혁명으로 이어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숙연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위 책, 219~220

6) <<퀘이커 300년>>, 함석헌전집15, 352

7) <<예언자>>, 함석헌전집16. 213


2. 퀘이커(Quaker)신앙과 함석헌

1956년 1월호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 는 외침은, 2천 년 전 예언자 요한이 빈 들에서 외친 소리의 데자뷰로 들려옵니다. 오늘의 한국은 어떻습니까? 비만해질 대로 살찐 초대형교회의 행태가 이를 잘 보여주 고 있지 않습니까?

“퀘이커는 개방적이야요,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 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1983년 봄, 함선생님이 어느 잡지기자와 인터뷰에서 하신 말 씀입니다. 저는 1979년 매주 함석헌의 <노자 모임>을 다닌 인연으로 퀘이커 모임이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따른 기간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이었습니다. 서울 신촌에 자리한 ‘퀘이커 모임’에서 선생님과 함께 예배드린 시간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고요예배(silence)가 시작되면 선생님은 늘 꼿꼿 이 앉은 자세로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젖어 계십니다. 함께하던 이들 모두 고요 속으로 흐를 무렵, 선생님은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감화(vocal ministry)를 하셨 습니다.

어느 날 명상에 관해 일러주신 도움말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눈을 감고 오래 있다 보면 잡념이 끼어들어 방해를 하니, 그럴 땐 넘어가는 해를 연상하면 도움 이 될 거요.” 선생님은 예배를 마치면 당시 어지러웠던 시국에 관련해서 성경말씀 풀 이를 해주심으로써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제 퀘이커 신앙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 보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영국에 머물렀던 기간(172728)에 작성한 서신 가운데에, 퀘이커에 대한 인상이 깊었던지 무려 네 차례나 퀘이커에 관한 편지(On the Quakers)를 모국의 지 인들에게 보냈습니다.

퀘이커 같은 특수한 집단의 교리와 역사는 생각 있는 사람의 호기심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것 으로 내게 여겨졌다. 나는 이것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영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퀘이커 한 사람을 만나보러 갔다. 나는 우선 가톨릭 신자들이 신교도들에게 늘 해온 질문부터 던졌다. “선생님, 세례는 받으셨습니까?” “아니오. 나의 친우들도 모두 받지 않았어요.”라고 그 퀘이커 는 말했다.

“저런,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기독교 신자이고 또 좋은 신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지요. 하지 만 기독교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고 소금을 약간 뿌리는 것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 요.”

나는 이 불경한 말에 화가 나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 어버리셨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퀘이커교도는 온화하게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요한 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는 않았지요. 우리들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8) 이미 여러분들이 보았겠지만, 퀘이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에 의하면 첫 퀘이커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종교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부패하 기 시작하여 천 육백 년 동안 타락한 채로 남아 있었으나, 이 세상 어딘가에 늘 소수의 퀘이 커들이 은거하면서 신성한 불꽃을 보존해오다가, 마침내 1642년 영국으로 이 빛이 퍼져나갔다 는 것이다.9)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가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낡은 제도에 붙들려버린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함선생님과도 인연이 깊은 미국의 퀘이커 신학자 하워드 브린튼(H. Brinton)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의미 깊은 주장을 펼칩니다. ‘내적 체험에 근 거를 둔 신앙 신비주의’와 ‘교리와 상징으로 신앙을 표방하는 신학자’ 간의 싸움이라 는 것입니다. 그는 <<퀘이커 3백년>>에서 ‘미래에 살아남을 종교가 있다면 그래도 퀘 이커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라고 예견하였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G. Fox, 1624-1691)를 선두로 퀘이커 신앙이 싹틀 무렵 신비주의는 초미의 관심사였습 니다.

처음 기독교는 사도행전에 보이듯이 오순절 성령과 더불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퀘 이커 신앙이 단지 신비주의에만 머물렀다면 ‘기독교 제3의 형태’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처럼 세상 사람들을 떠나 사막이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새 힘과 빛을 얻는 신비체험을 긍정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소중한 체험이 개인에게만 머물러 버 린다면 그리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리라 봅니다.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야지요. 그래 서 퀘이커 신앙은 개인 신비주의를 넘어 단체 신비주의(group mysticism)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조지 폭스는 말합니다. “참 신앙이란 각 개인의 체험이자 모험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보다 더 큰 영과 만나는 일입니다.”

사실 퀘이커 신앙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이 유사 이래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것’ 이란 주장처럼 반대를 받아 온 것은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J. Calvin)의 예정설 과는 서로 상치됩니다. 퀘이커 반대자들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 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고 하면서 반박했지만, 18세기 가장 탁월한 퀘이커 신학자 로버트 바클레이(R.Barclay)는 “나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은 문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체험에 의한 깨달음에 있습니다.”라고 변호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이때에는 ‘깨달음’의 복음인 <도마복음>을 모르던 시절입니다.

8) Voltaire, Philosophical Letters, (New York : The Liberal Arts Press,1961), 3~4 9) 위 책, 11

우리는 빛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고, 단순히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아갈 수도 있습니 다. 몸은 동물적이고, 마음은 이성적이나, 속에 있는 빛은 신(神)적 입니다. 진리의 빛 은 그 이성을 지도해야 하고, 이성은 본능을 도와 올바르게 정돈된 살림을 하도록 해 야 한다는 것이 초기 퀘이커 신앙의 꽃이라 하겠습니다.

속 빛’(light within, inner light)은 화해와 일치의 근원입니다. 이 내면의 빛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것이며, 이 빛에 가까이 이를수록 사람들은 서로서로 가까워지는 것 입니다. 조지 폭스의 이상은 평화와 조용함(quietness) 이었습니다. 퀘이커 평화사상 의 토대는 어디까지나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요한 14:27). 퀘이커들은 두 길을 통해서 평화주의의 입장에 도달했는데, 하나는 우리 양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이 며, 또 하나는 신약성경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 많은 힘 가운데 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여러 힘을 하나로 통일하는 근원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 땅 위에 실현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퀘이커 신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종교적, 도덕적 진리를 알고 있다는 보편 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학적인 추상론도 띠지 않은 단순성에 있습니다. 이 단 순성을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에 최근 서양 또는 아시아 지역에서 특정 종교의 벽을 넘어선 이들(가톨릭 퀘이커, 불교인 퀘이커)이 함께 평화를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매우 영향력이 컸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조지 폭스 시대의 퀘이커 운동이 탈자적(ecstatic), 신비적 운동으로서 시대를 가로지른 급진적인(radical) 종교개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10)

이젠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수년 전 저는 한국 기독교회에 관한 우울한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가나안 기독교인’이라는 제하의 글이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성 서 지명의 ‘가나안’이 아니라 ‘안 나가’를 거꾸로 쓴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조가 놀랍게도 함석헌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지 모르게 현상유지를 원하는 기풍이 교회 안을 채워버렸고 그러니 가나안의 소망이 ‘안 나가’의 현상 유지로 타락해버렸다. 이상하게도 ‘가나안’이 거꾸로지면 안 나가가 되지 않나?11)

10) Paul Tillich,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315

11)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함석헌전집3. 33~34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나 그렇지만 신성불가침은 비 판받아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양심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대표하느니만큼 도리어 끊임없는 자기반 성이 필요하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12)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 하지 않을까?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것이지 민중의 종교 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보수주의자들이 뻔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 기만적인 현상이 다.13)

이런 연유로 선생님은 종교도 늘 거듭나야 한다며, 새 종교를 소망하셨던 겁니다. 끝으로, 새겨둘 만한 퀘이커 일화 한 토막을 올리며 마칩니다. 미국 초창기 펜실베이 니아 지역을 거룩한 실험(HolyExperiment)으로 이끌었던 장군 윌리엄 펜(W. Penn) 이 어느 날 퀘이커 집회를 마치자 조지 폭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답니다. "내가 칼 을 차고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보기에 어떻습니까?" 폭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장군께서 불편하다고 느낄 때까지만 차십시오.”

12)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함석헌전집3. 35~36 13) 위 책,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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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열린강좌 제6강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9.30.(목) 논평자 이수호

“퀘이커를 기다립니다.”

오늘 훌륭한 강의를 해 주신 장영호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제 소개를 간 단히 드리면, 저는 초등학교 교사로 지난 2015~2016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 학원에 연수파견을 갔었는데, 지도교수님의 조언으로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시 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름 교 회와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좀처럼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 는 갈증과 의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함석헌의 글은 몇십년의 간격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고백이자 절절한 외침으로 다가왔습니다. 논문 준비를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함석헌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무교회와 퀘이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 와 도봉구 함석헌기념관을 방문하면서 앞서 퀘이커를 경험하신 정지석 목사님, 김조년 교수님 등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퀘이커 예배에는 대전에 몇 번, 신촌에 한 번 정도 밖에 참석해 보지 않았으나, 기회가 된다면 퀘이커를 집중 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에 대해 핵심을 잘 소개해 주신 장영호님 의 강의에 대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평소에 궁금했던 점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함석헌이 민주화 투쟁에 직접 나섰던 인생 후반기의 기간이 퀘이커를 만나 도움을 받고 교제했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입니다. 김성수 박사님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2005.09.)”라는 논문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 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 사회적 민주 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 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 〈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함석헌이 당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이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전 세계가 하나의 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아무 나 누릴 수 없었던 해외여행을 통해 서구 사회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미국 펜 들힐과 영국 버밍험 우드브룩 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함석헌이 투옥되었을 때에도 석방을 위해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 해 주었고,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주는 등 아무도 함석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위상을 높여준 것이 영미 퀘이커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이미 성숙기에 이르렀던 함석헌의 씨사상과 300년 전통의 퀘이커 신앙이 서로 깊이 공감하고 공명하였다는 차원을 넘어서, 씨사상과 전체론의 깊이가 완성되는 데 서구 퀘이커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 함석헌을 만든 것은 사실상 퀘이커였다고 하 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둘째, 함석헌 사후 한국 퀘이커의 현황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보수교회에서 도 중고생과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어 10여 년 후에는 문을 닫는 교회들이 많 은 것으로 예상됩니다. 퀘이커도 새로운 회원들이 증가하기보다는 기존 회원들 이 고령화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신앙 유산을 우리 자녀들과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고 있는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함석헌에 대한 물심 양면의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일부 부유한 퀘이커 회원만의 노력이 아닌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는 보통 회원들의 관심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도 도움 이 절실한 이들을 찾아 지원하려면 어느 정도의 규모와 최소한의 조직은 갖추 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시대 에 퀘이커를 찾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또 해외 퀘이커의 현황은 어떠한지 최근의 기록과 통계를 알 수 있을까요?

셋째, 누가 퀘이커인가, 퀘이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퀘이 커모임을 후원했다거나 펜들힐에 다녀온 분들이 있었다는 소식은 간간히 들을 수 있으나, 내가 퀘이커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퀘이커 회원이지만 지금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지 않거나, 자신이 퀘이커라는 정체성을 굳이 외부에 드러내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퀘이커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퀘이커 신앙에는 공통적인 신조나 교리가 없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이해한 만큼에서만 퀘이커를 설명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퀘이커주의에 공감하고 혼자서도 나름대로 사회 참여를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퀘이커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요? 세계의 다른 퀘이커들과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은 부차적인 것일까요? 가나안 성도가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마 찬가지일까요? 씨사상에 공감하면 함석헌을 기리고 계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이상 제가 가지고 있던 소소한 생각을 질문의 형식으로 나누어보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여하신여러분들과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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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에 대한 논평 -

김말순


먼저 논평을 맡은 제 소개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학자도 연구원도 사상가도 아닙니다. 그냥 모태신앙으로 초대 교회 신앙인 창조의 하나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죄사함에 대해 성경을 아주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이나 강의를 접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촌 퀘이 커모임집에 살게 되면서 예배모임에 참석하고 퀘이커에 대한 공부 를 하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기념사업 회에 나오게 된 것도 선생님을 좀 배워서 알아야겠다는 욕심으로 2016년부터 모임이나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누구의 글이나 강의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서울종교친우회(퀘이커) 회원이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읽으면서 논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 석헌 선생님에 대해 많은 서적들을 통해 여기 모인 분들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고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 내용에도 잘 설명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단지 선생님의 진면목이 늘 궁금했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누구인가?” 하고 인터넷에 물어봤습니다. 아주 명쾌한 답을 알려 줬습니다.

“취래원 농사꾼 황보윤식 농부(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님의 “함석 헌 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 9. 1) “함석헌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 함석헌의 사상은 무지개 사상이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 보-로 색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색의 경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게 무지개의 본질이다. 함석헌은 무지개처럼 뚜렷한 한 가지 사상 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분명 우리 시대에 “사상의 무지 개”를 놓고 간 분이다. 다양해져 가는 열린 시대에 필요한 융합철학의 무지개를 놓고 간 사상가다. 

▷서양의 그리스도 사상(퀘이커) 을 기본으로 동양의 불교사상, 공맹사상, 노자사상, 양명사상 그리 고 다시 서양의 실존주의 사상과 아나키즘까지 융합하였다. 

그래서 함석헌은 무지개 사상을 만들어냈다. 함석헌의 무지개 사상은 문화 의 다양성 강조와 하나의 인류를 지향해 가는 곧 미래사회의 세계 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행합일의 귀감을 보이면서 세계 주의를 실천해갔다. 

세계주의는 곧 평화주의 사상이다. 세계평화는 전쟁이 종식 되어야만 가능하다 전쟁종식을 위하여 합법을 가장한 국가폭력을 반대해야 한다. 곧 국가(정부)지상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를 검색했을 때 위의 글을 읽고 깜짝 놀 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아! 바로 이런 분이었구나!!!’ 했습니다. 저는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을 좀 더 깊이, 많이 알고 논평 을 맡은 입장에서 답해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이 엮으신 [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를 읽었고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읽었습니다. 어느 한 구절도 빼놓고 요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전해 드리는 것으로 논 평을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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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 9~12 9)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 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을 주셨다

※ 요한복음 15: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 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종교친우회=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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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300년]을 옮긴이의 말

처음에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나 스스로 퀘이커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내가 퀘이커에 대해 흥미를 느 끼게 된 것은 1947년부터입니다. 그해 3월 나는 이북에서 공산주의의 사납게 구는 것을 못 견디어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그 때 사람 들은 아직도 군정 밑에 있어서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지 않은 가슴을 안고 새 역사의 나갈 방향을 더듬고 있는 때였습니다. 간 곳 마다 활발 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서울에 온지 얼마 아니 되어, 지금은 이 땅위에 있지 않은 현동완 선생이 주장해 하시는 목요 모임에 나갔는데 그 때 그는 미국 여 행을 마치고 갓 돌아온 뒤였기 때문에 여행 선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중에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말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 병령을 반대하고 나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그 뜻을 이해하고 정말 종교적 양심 때문에 하는 것이 분명하면 군대 복무를 면제하고 대신 다른 평화적인 사업으로 돌려 주는 법령을 만드는데 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습 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은 온전히 잘못이라는 이 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무교회에 서조차도 전쟁 반대를 힘써 부르짖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찌무라 선생이 러일전쟁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 쳤지 감히 국가에 대해 항쟁하는 사회적 역사적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 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것을 칭찬하고 성령을 받아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쳤지 아무도 나도 그래야 한다 하고 실천의 태도로 나간다든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으냐 하고 용 감히 주장하거나 권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퀘이커의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애 서양 책을 더러 읽노라면 ‘퀘이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수가 있었는 데 그것은 언제나 테두리 널따란 모자에 허술한 옷을 입고 좀 괴상한 사 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괴상한 사람이 괴상 정도로 그 치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길손 모양으로 어둑한 어스름 빛 밑에서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걸어오기는 하지만 그 영상은 아직 태평양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형상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서울에서 그들 을 만나는 날이 왔습니다,

무슨 팔자로 그랬는지 은혜로 그랬는지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태어났 으면서도 이날 껏 전쟁을 몸으로 당해 보지는 못했는데 6・25전쟁이 터 져 3년 동안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먹고 손으로 만지며 그 악독하고 끔찍한 맛을 속속들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다시 돌아오니 내 한 말이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전쟁 전 YMCA 큰 강당에서 주일마다 말을 했는데 언젠가 똑똑한 내 정신을 가지고 “이놈의 서울이 남대문서 동대문까지 환히 내다뵈도록 확 타버렸음 좋겠다.” 한 일이 있 었습니다.

그 말을 스스로 잊을 수 없는데 이제 정말 그대로 된 꼴을 보니 부 르르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말이 꼭 그대로 들어맞을 만한 무 슨 힘이 있다는 생각은 감히 터럭만큼도 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말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정수리에 칼이 박히듯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수복 이후에는 김명선 박사의 고마운 뜻으로 지금은 없어진 세브란스의 에비슨관을 빌려서 주일 모임을 계속했는데 그 어느 날 거기 퀘이커가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아더 미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내가 퀘이커를 본 처음입니다. 그는 그 때 우리 모임에 나오던 이윤구 님의 소개로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보다 전에 미국 퀘이커 봉사회에 서 전쟁 후의 한국을 돕기 위해 30명 가량으로 된 구호대를 보내어 군 산 도립병원의 복구 사업을 맡아서 했는데 그 때에 이윤구 님은 그들을 만나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퀘이커가 되었고 자기 생각에 나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이라 해서 내게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레지 날드 프라이스, 플로이드 슈모어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제 나는 평화주의나 양심적 거부만이 아니라, 퀘이커라는 사람들을 ‘친구(friend) 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때 서울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 몇 번 나간 일이 있었고 아주 나가게 된 것은 1960년 나의 주일 모임을 그만두게 된 후부터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매우 좋다 생각했지만 나는 나의 생각하는 바를 고쳐야 할 어떤 필요도 아직 느끼지 않았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지만 반드시 그들에게 배워야겠다는 무슨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미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시찰 여행을 하게 됐으므로 마침 기회가 좋다 해서 필라 델피아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퀘이커 수양기관인 펜들힐에 요청해서 공식 여행을 마친 후 6월 부터 연말까지 일곱달을 머물러 있으면서 공부를 했 습니다. 그리고는 밝는 해 1월부터 석 달을 또 영국 버밍햄에 있는 같은 성질의 학교인 우드브룩대학으로 가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의 대 체의 모습을 좀 짐작하게 되었고 흥미를 더욱 느껴 돌아올 때는 책도 더 러 구임해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퀘이커가 되자는 생각은 역시 없었습 니다. 나는 어느 기성교파에 속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퀘이커의 회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7년 태평양 연회의 초청으로 노드캐롤라이나 길포드대학에서 열렸던 제 4차 세계퀘이커대회 와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태평양 연회모임에 참석하고 난 다음이었습 니다. 그런 변동의 동기는 본래 말로는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안됐음 어떠냐?” “그렇다. 퀘이커가 됐담 된 것이고 안됐담 안된 것이다.” 합니다마는 그 중의 중요한 점을 말한 다면 나는 그들의 우의(friendship)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 정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 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 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 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참고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 됐습니다. 그들은 아주 넓은 마음으로 누구나 용납합니다.

퀘이커라는 안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기본 신앙의 극단적인 보수주의로부터 유니테리언,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넓으면서도 회원이라 할 때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절대로 회원 되는 것을 권하는 일 없습니다. 퀘이커 는 전도 아니하는 종교입니다. 그 점은 다른 종교와 참 다릅니다. 그것 은 그들의 직접적임과 체험과 자유를 극단으로 주장하는 데서 오는 것입 니다. 나도 처음에는 회원됨을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는 데 반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원과 참석자를 그리 구별할 것이 무엇이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별이나 차별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회원이 되는 데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강권하지 않으니만큼, 차별 하지 않으니만큼, 도리어 더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나도 후에는 그 생 각이 옳다 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정말 자유요 참 민주주의며 그들이 신 비파 운동에서 일어나기는 하면서도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 의 주관주의에도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 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고 비교적 건전히 중간노선을 걸어오게 된 까닭이요, 또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도 발언권을 가지는 까닭입니다.

하여간 나도 그들의 그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에, 시비를 들을 각오를 하고 퀘이커의 회원이 됐습니다. 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 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 있어 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적어도 지금은 마 땅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 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한번 결정하고 나니 퀘이커를 더 잘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하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연회 초청여행으로 태평양 연안 산디에이 고에서 포틀런드에 이르는 여러 퀘이커 모임과 가정방문을 마친 다음에 다시 5년 전에 일곱 달 동안을 이날까지의 내 생애에 가장 행복스런 대 목이라고 하면서 지났던 그 자유와 평화의 동산을 다시 봤을 때의 감격 을 나는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영어를 잘 할 줄 몰라 누 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내 의사를 충분히 발표도 못하 면서도 아무 부자유도 불안도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조용히 맘대로 생각 하고 거닐었던 것입니다. 5년 전이나 5년 후나 아무 변함이 없었습니다. 도서실의 책이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있고 강당 구석에 있던 어항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나갔던 아들이 어머니 품 으로 돌아온 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머물러 있던 방에 가니 바로 어제 있었던 듯했습니다. 5년 전 내가 그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창 밖 능 금나무 가지에 철새란 놈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쳐서 손으로 만질 거리 에 있어서 날마다 대화를 했었는데 그 새둥지가 비바람에 부서는 졌지만 그대로 옛 모습을 짐작할 만큼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갔던 새끼인 듯 했습니다. 알에서 깨어 나갔던 새끼가 돌아온다면 자라서 올 것인데 나도 자랐을까? 가지가지 생각이 풀려나는 내 가슴속에서는 용천 옛 집에서 어머님이 넘어가는 저녁볕 밑에서 잣던 물레에서마냥 평화의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그러한 속에 있으면서 아침으로 저녁으로 한 것이 이 책 읽기와 우리 말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이 책을 저자인 선생님 손 에서 받았고 때마침 그 일본말의 번역자인 다까하시 여사도 있어서 그 일본말 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도 선생님을 존경아니한 것 아니었습니다. 그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의 사상・지식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면 알 것이니 설명이 필요없습 니다. 그 인격과 믿음도 여러 십년을 미국, 독일, 일본에서 가르치고 봉 사하고 한 경력을 살펴보면 자연 짐작할 수 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도 이미 여든이 넘은 늙은이였지만 아주 건강해 깊고 조리 있는 강의를 했고 아침 예배시간이면 그 허연 머리털과 길다랗게 뻗친 흰 눈썹 밑에 광채를 쏘는 눈을 빛내며 앉은 모습이 성자다왔고 이따금은 뜻 깊은 감 화를 주곤 했었습니다. 5년 후 이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와서 각별한 결심으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그가 아버지처럼 생각됐습니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것은 꼭 내 이야기같이 생각됐습니다. 어쨌든 내 생각의 역사를 다 알기나 하는 듯해서 어떻게 내 소리를 썼을까 싶었 습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선생님을 뜰에서 만나면 “선생님, 그거 제 이야기 같습니다”했습니다. 나만 그렇겠습니까? 남도 그런 사람이 많 을 것입니다. 그만큼 참입니다.

그래서 첨에는 내 공부를 위해 시작했던 것이 다시 생각하니 서울 있 는 모임의 벗들에게 이것을 읽도록 해야겠다, 그뿐 아니라 일반 다름 사 람에게도 읽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퀘이커주 의만 아니라 일반 신앙의 참고로도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퀘이커는 본래 식학이 없지만, 이 책도 신학 토론은 아닙니다. 그보다도 실지로 신앙 살림을 해가는 데 많은 지침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내가 이 글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community)에 관한 이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 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 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 영웅, 이상, 로맨티시즘, 개인,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 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못났어도, 개인의 뒤에는 늘 전 체가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 로 밝히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오늘날 되어 있는 종교가 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들이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는 깊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담 또 한 가지는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 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 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적으로 예를 하나 든다면 필라델피아에 있는 가장 오랜 모임집에 가보았는데 모일 때마다 기록한 회록이 300년 전 시작하던 맨 첨에서부 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체제에 같은 글씨로 기록되어 그대로 보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변해가는 세상바다의 거친 파도에서 제 자신을 가누어가기에 미처 다른 생각이 없는데 이들 얼마 아니 되는 퀘이커만이 수세가 아니라 공세입니다. 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자 선생님 말씀대로 미래의 종교가 반 드시 퀘이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미래를 건져가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 은 퀘이커 같은 이러한 방식의 생각을 하는 종교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 됩니다.

펜들 힐에 있을 때 이미 거의 절반이 옮겨졌었는데 그 후 나라에 돌아와서 게으름을 피워 이제 와서야 겨우 인쇄에 부치게 돼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해에 부인을 앞서 보내셨고, 건강도 한때는 퍽 걱정들 을 했는데 요새 많이 회복되셨다는 소식이 와서 기쁩니다. 다만 진심으 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말씀은 한국판이 나오기를 위해서 내가 감히 말씀도 드리기 전에 선생님이 자진 노력하시어서 출판자금을 얻어 주셨는데 이날까지 이렇게 무책임하게 늦게 만들었고, 더구나 한마디 편 지도 직접 못 드려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영어를 자유로 쓸 줄 알았다면 벌써 몇 십 장도 편질 드렸겠습니다. 영어로는 도저히 제 마음을 그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 옮겨놓은 글도 의심하실는지 모르나 읽기와 쓰기는 다릅니다. 읽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 가지고 했으 니 안심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본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 지 않았나 해서 두려운 마음 많습니다. 있거든 알려지는 대로 고치겠습니다.

이 책이 보시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또 우리미래 역사의 설계와 작업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되는 점이 있으 시다면 고마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1970년 5월 9일 함 석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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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1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3-100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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