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6
2023/04/07
최현민 > 생태 연구 > 육식소비를 줄이는 것이 생태를 살리는 길 -- 소와 함께 사는 법
http://www.setondialog.or.kr/sd/bbs/board.php?bo_table=choi_04&wr_id=14
육식소비를 줄이는 것이 생태를 살리는 길이다.
2011-04-29
최현민
지난 겨울 우리는 매일 매스컴을 통해 구제역 사태를 접해야만 했다. 구제역 사태는 과연 나와 무관할까? 아니다! 구제역 사태가 일어난 근본원인은 공장식 축산업에 있다. 2008년 자료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75.8kg인데 비해 육식 소비량이 35.4kg이라고 한다. 이 엄청난 고기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공장식 축산업이 발전할 수 밖에 없다.
고기의 대량생산을 위해 소나 돼지의 사료에 성장호르몬을 주입해 억지로 살찌운다. 돼지의 경우 비대해진 체중을 지탱하지 못한 체 도살장에 가는 도중, 다리가 부러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러한 공장식 축산업은 생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전에는 집에서 기르는 소의 배설물을 밭에 거름으로 쓰곤 했지만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 분뇨 속에 다량의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섞여 있어 썩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 분뇨는 바다에 버려져 해양을 오염시켜버린다. 또한 가축의 배설물에서 나오는 이산화질소는 이산화탄소보다 296배나 지구온난화 효과가 크다.
이렇듯 육식 소비는 생명경시, 대기오염, 바다오염 등 상상을 초월할만큼 생태를 파괴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우리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육식소비를 줄여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고기 량의 반을 줄이게 되면 생태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육식소비가 줄어들면, 공장식 축산업이 줄어들고, 그로 인한 생태 파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기를 적게 먹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오히려 그것이 나를 포함하여 우리 식구가 건강하게 사는 길이고 우리 사회와 생태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생태위기는 우리 존재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하셨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사람을 만드셨다”고 한다. 사순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사제는 우리의 이마에 십자 성호를 그으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우리는 흙에서 온 존재이고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첫 조상인 ‘아담(Adam)’의 어원은 히브리어 ‘아다마(Adamah)로부터 왔다. ‘아다마’는 흙이라는 뜻이다. 아담은 흙에서 왔고 우리 모두도 그러하다. 이는 우리가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자연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숨쉬며 살아감은 공기 중에 산소가 있기 때문이고, 그 산소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렇듯 자연파괴는 우리 존재를 위기로 몰고 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겉모습이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뜻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삼라만상을 잘 관리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사제와 수도자만이 아니라 평신도인 우리 모두도 그 소명을 부여받았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생태를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청지기로서의 소명을 사는 길이 아닐까?
마더씨튼께서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 강한 분이셨다. 그분이 지닌 영원의 영성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혼에 대한 갈망은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회복하는 길,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
최현민 > 기타 > 2009_불교강독수업계획서
2009_불교강독수업계획서
2010-10-25
수업계획서(2009. 1학기)
과목명: 불교강독 수업시간: 09:00-10:15
과목번호: REL 3018 E-mail: chm741@hanmail.net
수강대상 : 1-4학년
1. 교과목표
불성사상은 동아시아불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성을 실체로 보는 경향 때문에 ‘불성사상은 불교사상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나온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불성사상과 관련된 불교경전과 논서를 살펴보고, 불성사상을 현대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그 해결방안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2. 교과내용
1) 불성사상 개요
2) 불성사상과 열반경
3) 불성사상과 보성론
4) 불성사상과 불성론
5) 불성사상과 선어록(조당집)
6) 도겐의 불성사상
3. 주교재
<불성사상과 생태철학> -서강대 종교학과 사료집 2009.
부교재
1) 고기직도 저, 전치수 역, 불성이란 무엇인가, 여시아문, 1998.
2) 고기직도 편, 여래장사상, 경서원, 2001.
3) 김윤주 역주, 여래장경전모음, 한산암, 2008.
4) 동국역경원, 조당집, 동국역경원, 2002.
5) 서재영, 선의 생태철학,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7.
불교 |
---|
펼치기 성지 |
불성(佛性, 산스크리트어: Buddha-dhātu)은 '부처[佛]의 본성[性]', '깨달음[佛 · 보리] 그 자체의 성질[性]', 또는 '부처[佛]가 될 수 있는 가능성[性]'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1] 불성은 여래장(如來藏, 산스크리트어: Tathāgatagarbha)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1]
불성은 산스크리트어 붓다 다투(Buddha-dhātu)를 번역한 것인데,[1] 붓다(Buddha)를 음에 따라 번역한 불(佛)과 다투(dhātu)를 뜻에 따라 번역한 성(性)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낱말이다. 붓다 다투(Buddha-dhātu)는 각성(覺性: 깨달음의 성품)[2]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1] 각성(覺性)은 붓다(Buddha)를 뜻에 따라 번역한 각(覺)과 다투(dhātu)를 뜻에 따라 번역한 성(性)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낱말이다. 붓다 다투(Buddha-dhātu)는 영어로는 Buddha-nature (부처 성품), Buddha Element (부처 요소) 또는 Buddha-Principle (부처 원리)로 번역된다.
원래 부처는 고타마 붓다(석가모니불)만을 지칭한 것인데,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것에는 본래 부처와 똑같은 본성(불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1] 특히 대승불교 경전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는다)이라고 언명하여 이러한 사상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1]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의 구조에 대하여,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를 갖추고 있으나 우발적 · 일시적으로 밖으로부터 마음을 더럽히게 하는 근심 · 걱정에 뒤덮여 더러워져 있을 뿐이다"라고 강조한다.[1] 따라서, 객진(客塵)인 번뇌의 진(塵)을 떨어내어 더러움(汚)이 없어졌을 때가, 즉 부처가 될 종자가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곧 깨달음(悟)이며 성불(成佛)이라고 주장한다.[1]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대승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입장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1]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최현민 > 종교 대화 >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2016-03-25
종교강좌 2016.314
동아시아영성을 통한 현시대읽기 1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최 현 민
1. 자본주의의 허상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본 강좌를 시작함에 있어 문제의식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역을 주역 자체로, 공자 맹자 장자 사상을 문헌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이 강좌를 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깊이 재인식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지 그 지혜를 동양사상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저는 이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왜 우리가 2016년이라는 현대에 주역을 공부하면 되지 않은가 그 당위성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거의 종교의 수준에 와있습니다. 현대인을 아울러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종교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치관이 우리의 삶, 정신세계 안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세는 낙원, 유토피아를 내세에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말론적 사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세와 현재의 긴장관계가 있지만, 천국하면 내세를 떠올립니다.
이에 반해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유토피아는 사후의 세계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현대 신자유주의시장경제가 확립되면서 시장 자체가 힘이 되었고 자본주의 가치는 종교가 되어버린 현실.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으면 왠지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 서로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등바등합니다. 대학가는 스펙쌓기 위해 여념이 없죠.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발버둥치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하나둘 단절되고 흩어져 소외되어버린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 진보의 의미와 그 허상
자본주의의 개념들인 현대화, 세계화. 진화하고 발전하고 진보하고 있다는 표현을 우리가 끝없이 씁니다. 현대화는 80년도에 많이 쓰이던 개념입니다. 15 16세기를 기점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산업화, 도시화,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자본주의, 이런 것들의 물꼬를 터트린 세계사의 물결을 현대화라고 말합니다. 이 현대화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현상이 세계화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 간의 국경을 넘어서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경영시스템으로 묶어집니다. 세계 기업은 무한경쟁에 돌입했고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능력과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20대 80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리고 점점 그 수치는 극단적으로 되어갑니다. 20%만이 안정된 삶을 살고 80%는 실업자 노동자의 삶을 사는 형태가 되면서 점점 많은 이들이 허탈감과 소외감,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점점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우리가 발전하고 진보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발전인지를 말입니다.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우리가 접하게 되는 광고물은 더 편리하고 안락한 기기들에 대한 선전들입니다. 기술적인 발전에 의해서 내가 원하는 행복은 안락한 차를 타고 스마트폰에서 찾은 맛집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경치 좋은 곳에 드라이브 하는 것정도로 생각합니다.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직업은 요리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기술적 향상으로 인해 삶이 더 편리해지고 안락해진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진보이고 발전인지를... 생태계의 파괴문제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힘든 현실입니다.
생태계 파괴는 곧 인간중심적 사유, 아니 더 나아가 생명의 경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생명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돈) 아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첫 번째 순위는 경제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세월호 참사의 아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참사야말로 생명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보다 하위권에 놓은 적나라한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진보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사유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현대 진보사상의 밑바탕에는 어떤 이론이 깔려있는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근대진보사상을 지향해온 이론적 배경
고대에는, 최초의 완벽한 상태로부터 조금씩 쇠퇴해진다는 역사관에서 가능한 한 그 쇠락해지는 상태를 최소한 늦추는 일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중세에 와서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이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서 역사를 시작과 과정, 종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신이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실현하고 그것에 봉사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세지향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세지향적 구원의 약속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지상천국의 약속으로 바뀌었습니다. 유토피아는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다는 현세지향적인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근대 과학적 사유가 있습니다. 그 사유 중에서도 근대 고전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근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데카르트를 들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고대나 중세의 철학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의 확실한 기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성의 힘으로 확실한 기초를 찾고자 했고 의심을 그 방법으로 택했습니다.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유명한 말이 그의 방법적 회의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정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기초에서 데카르트는 “수학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 중 가장 강력한 지식획득의 수단이라고 확신한다. 수학이야말로 모든 것의 원천이다.”고 말합니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이 뉴턴에게 이어집니다. 이런 흐름의 기저에 있는 것이 기계론적 사유입니다.
기계론적 사고란 실체를 중심에 두는 사고입니다. 뉴턴의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미분과 적분의 수학적 방법 이라는 세 가지 전제 역시 기계론적 사유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뉴턴은 우주란 하나의 기계이고 이 기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연은 생명이 없는 물질적인 재료입니다. 이것이 물리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자리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경제학을 들 수 있습니다.
3) 근대 기계론적 페러다임과 근대 자본주의
오늘날 현대에 자본주의 발생을 소급해 올라가면 아담스미스를 만나게 됩니다.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시장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자본가의 자본과 노동자의 노동에 의한 생산력, 두 바퀴가 잘 맞아서 돌아가는 나라가 부유한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장경제이론을 펼치게 됩니다. 아담스미스의 인간론은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영리를 추구하게 되면 개인의 영리가 모여서 사회가 부유하게 되고 국가가 부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계론적인 패러다임이죠. 이기적인 각 개인들이 돈을 벌면 사회가 부유하게 되고 국가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부가 골고루 분배되느냐는 것입니다. 부의 불균형,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사회문제의 심각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편리하고 안락해졌지만 경제적 발전 뒤에 있는 그림자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죠. 제가 말씀드렸던 생태파괴,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 개인주의 발달로 인해서 인간관계의 단절, 더 나아가 인간성의 파괴, 자살, 정신질환들, 기술에 의한 스트레스(테크노 스트레스), 범죄율의 증가, 이런 것들이 현대사회 안에서의 그림자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은 기술발전으로 인해서 생태계가 점점 더 무질서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우리는 인간인 내가 주체이고 자연은 객체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체와 객체로.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얼마나 큰 오류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자연이 나에게 공급해주는 산소가 없이 이 시간 이렇게 존재할 수 있으까요? 주변의 이 모든 것 없이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이 파괴된다는 것은 곧 내가 파괴됨을 의미합니다. 단지 자연만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파괴된다는 자각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2. 고엔트로피 사회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부르는 열역학 제2법칙을 기억하시나요. 엔트로피는 무질서한 정도를 의미합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물질이나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그건 바로 무질서한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변하고, 획득가능한 상태에서 획득불가능한 상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흘러갑니다.
생태계 파괴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무질서의 정도인 엔트로피는 점점 증가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쓰레기는 점점 증가하고 무질서도 증가해 가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엔트로피를 없앨 수는 없으나 그 속도를 낮출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형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해법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어떻게 엔트로피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느냐입니다. 다시 말하면, 점점 고엔트로피의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속도를 늦춰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느냐 이거죠. 그렇게 되려면 지금 우리가 지닌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돼요.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에게 접해온 가치관의 인식이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동양사상 안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제가 2, 3년 전에 중국 상하이에 잠깐 들려서 하루 이틀 머문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중국에 갔을 때는 사람, 자전거, 자동차로 혼잡했었는데, 지금의 상하이는 유럽, 미국처럼 호화롭더군요. 중국이 19세기를 지나면서 서구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자본주의체제의 일부를 받아들이면서 굉장히 변하기 시작합니다. 중국은 서구의 세속주의적인 교육과 경제시스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발전된 현실의 뒷면에는 엄청난 생태계 파괴가 있었습니다. 이제 중국은 고민에 빠진 것이죠.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중국이 들고 나온 것은 놀랍게도, 공자사상입니다. 공자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국 사유의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지금 중국이 처한 이 혼란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자각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앞서 기계론적인 패러다임이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근대 서구의 기계론적 사유방식 이전에, 서구의 근본적인 사유를 살펴보면 그 중심에 존재론적인 사유가 있습니다. 서양철학은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 무엇일까를 질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흙이냐, 물이냐, 불이냐, 바람이냐. 이 4대 요소 안에서 자연과 세계를 설명해보려 했습니다. 서양철학의 최초는 아르케가 무언지 존재가 무언지 묻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서구의 사유의 뿌리는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3.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1) 영육이원론
기원적 7세기전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묻기 시작했을 때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있다고 이해해왔습니다.
실존인물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기원전 7세기 오르페우스가 고대 그리스에 깊은 영향을 준 건 사실입니다. 오르페우스교가 그리스 전역에 퍼졌으니까요. 인간의 영혼은 사악한 육체에 잡혀있어서 윤회를 계속 하는데 윤회로부터 벗어나려면 금욕생활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펼쳤고 이것이 종교화되었어요. 오르페우스교에서 몸은 죽은 물질에 불과해요.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바로 이러한 오르페우스의 사상은 서양의 철학의 밑바탕인,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플라톤의 사유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플라톤은 오르페우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이데아의 세계, 그건 바로 영혼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잠시 머물러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참된 사람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영혼이고 육체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고향인 영적인 세계,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가장 큰 이상으로 생각해왔고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비판하면서 이데아가 내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역시 영혼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했어요.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영육이원론으로 되어있다는 것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인간을 이해하는 근본이 되어온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육이원론적인 사유 안에서 존재를 이해해 왔습니다.
2) 양자물리학에 의한 자연이해
아까 뉴턴은 실체를 중심으로 해서 자신의 역학을 펼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뉴턴의 역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무너졌습니다. 20세기에 양자물리학이 나오면서 뉴턴의 실체, 물질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이구나,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하는 것이구나, 처음에 고정되어 있다고 봤던 건 확률에 불과하는 것이구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구나 하는 발견과 전환이 양자물리학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양자물리학이 얼마나 깊게 우리의 삶에 들어와 있는지 못 느껴요. 여러분이 병원에서 받는 모든 검사, MRI, CT 유전공학 모든 반도체가 양자물리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턴의 역학은 무너지고 양자물리학이 들어섰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해왔던 존재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양자물리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체중심의 존재이해가 왜곡되었음을 입증해준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코페루니쿠스적인 전환이 아니겠습니까?
자연은 물체중심의 사유에서 사건중심의 사유로의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물체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뉴턴은 물체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원자의 집합체들이 절대공간에 일정하게 점유되어 있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우리가 물질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의 한계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가 존재를 이해할 때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건너가야 하는 강이 있는데 우리는 존재론적인 사유방식에서 다른 큰 강을 건나야 한다는 것이죠. 동양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큰 강을 건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다, 주역의 핵심입니다. 3000년 전 중국인들이 지닌 사유의 중심에는 모든 존재가 변화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뉴턴이 절대성을 이야기했다면 양자역학은 상대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이중성을 말합니다. 양자론에서 소립자들은 파동성과 입자성의 두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의 존재요소들은 이중성을 갖는다”라는 명제를 받아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습니다. 물체의 처음상태를 완벽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양자역학의 입장에서는 어떤 물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봅니다. 단지 확률적으로 알 뿐이지요.
이것을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실체이론이 무너졌기 때문에 불확정성의 원리가 나온 겁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는 생각하는 건 착각에 불과하고 우리는 확률적으로 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최현민 2010.2.수양과_명상_수업_계획서
2010.2.수양과_명상_수업_계획서
2010-10-25
수 업 계 획 서(2010년 2학기)
○과 목 명 : 수양과 명상(17‐131) ○담당교수 : 최 현 민
○ 학 점 : 3 학점
○수강대상 : 2‐4학년 ○수업시간 : 화 목 13:30‐14:45
‐‐‐‐‐‐‐‐‐‐‐‐‐‐‐‐‐‐‐‐‐‐‐‐‐‐‐‐‐‐‐‐‐‐‐‐‐‐‐‐‐‐‐‐‐‐‐‐‐‐‐‐‐‐‐‐‐‐‐‐‐‐‐‐‐‐‐
1. 교과목표
본 과목은 선불교의 수행의 이론과 명상을 배우고 익힘을 목표로 삼는다.
2. 수업방법
강의:50% 토론과 나눔:20% 명상:30%
3. 교과내용
1. 불교의 명상
2. 선수행
3. 정법안장 수문기 1-6
4. 정법안장 변도화
5. 정법안장 현성공안
4.교 재
1) 주교재: 『수양과 명상』, 서강대 종교학과 편
2) 참고도서:
a. 코운 에죠,『정법안장 수문기』, 이재경 역, 동국대학교출판부
b. 스즈키 순류,『선으로의 초대』, 최세만 역, 시공사, 1995.
c. 스즈키 순류,『선심 초심』, 정창영 옮김 물병자리, 2007.
d. 한보광,『정법안장강의』, 여래장, 2006.
e. 틱낫한 『아, 붓다』, 반디미디어, 2004.
f. 틱낫한, 『삶에서 깨어나기‐금강경‐』, 장경각,1999.
g. 틱낫한, 『틱낫한 스님이 읽어주는 법화경』, 명진출판, 2003.
h. 틱낫한, 『평화로움』, 열림원, 2002.
5. 시험 및 평가방법
가.출석 및 명상 태도: 20%
나.시험 레포트: 80%
6. 기타 안내사항
명상법을 직접 체험하고 배우는 시간이므로 출석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함.
자신의 종교를 넘어서 이웃종교에 대해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