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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6

최민자 성신여대 교수 - 최현민 수녀 종교대화 씨튼연구원

최민자종교 - Google 검색

교보문고







최민자 | 정치/외교학자 - 모바일교보문고
최민자 (지은이)
- 現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총장직무대행 및 부총장·사회과학대학장 역임)
- 녹조근정훈장·대통령표창·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표창 수여
  • -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정치학 석사
  • - 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 at Canterbury) 정치학 박사
  • - 중국 북경대학교 객원교수
  • -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客座敎授)
- 1994년 장보고 대사의 해외거점이었던 중국 산동성에 장보고기념탑 건립(건립위원장, 현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 1999년 중국 훈춘에서 유엔측 대표, 중국 훈춘시 인민정부 시장, 러시아 하산구정부 행정장관 등과 중국·북한·러시아 3국접경지역 약 2억평 부지에 유엔세계평화센터(UNWPC) 건립을 위한 조인식(UNWPC 건립위원장)

- 저서로는 『한국학강의: 메타버스 시대를 여는 지혜의 보고(寶庫)』(2022), 『동학과 현대과학의 생명사상』(2021), 『호모커넥투스: 초연결 세계와 신인류의 연금술적 공생』(2020), 『무엇이 21세기를 지배하는가』(2019), 『빅 히스토리: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2018),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2015), 『새로운 문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반도發 21세기 과학혁명과 존재혁명』(2013), 『동서양의 사상에 나타난 인식과 존재의 변증법』(2011), 『통섭의 기술』(2010), 『삶의 지문』(2008), 『생명에 관한 81개조 테제: 생명정치의 구현을 위한 眞知로의 접근』(2008), 『생태정치학: 근대의 초극을 위한 생태정치학적 대응』(2007),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2006), 『동학사상과 신문명』(2005), 『세계인 장보고와 지구촌 경영』(2003), 『새벽이 오는 소리』(2002), 『직접시대』(2001), 『길(道)을 찾아서』(1997) 등이 있다.

- 논문으로는 「뉴 패러다임의 정치철학적 함의와 실천적 적용」(2020), 「포스트 물질주의 과학과 동학의 사상적 근친성에 대한 연구」(2019), 「‘한’과 동학의 사상적 특성과 정치 실천적 과제」(2018), 「포스트모던 세계와 포스트휴먼 그리고 트랜스휴머니즘」(2017), 「특이점의 도래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2016), 「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2016), 「국제 정의의 역설과 그 대안적 모색」(2015), 「『에티카』와 『해월신사법설』의 정치철학적 함의와 에코토피아적 비전」(2014), 「보수의 한계와 책임 그리고 메타윤리 탐색」(2014), 「아리스토텔레스와 해월의 정치철학과 실천의 형이상학」(2013), 「『화엄일승법계도』와 『무체법경』에 나타난 통일사상」(2012), 「켄 윌버의 홀라키적 전일주의(holarchic holism)와 수운의「 侍」에 나타난 통합적 비전」(2011)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한국학 코드>,<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먼>,<한국학강의> … 총 24종 (모두보기)





2023/04/07

최현민 > 생태 연구 > 육식소비를 줄이는 것이 생태를 살리는 길 -- 소와 함께 사는 법

최현민 연구실 > 생태 연구 > 육식소비를 줄이는 것이 생태를 살리는 길이다.
http://www.setondialog.or.kr/sd/bbs/board.php?bo_table=choi_04&wr_id=14

육식소비를 줄이는 것이 생태를 살리는 길이다.
2011-04-29

최현민


지난 겨울 우리는 매일 매스컴을 통해 구제역 사태를 접해야만 했다. 구제역 사태는 과연 나와 무관할까? 아니다! 구제역 사태가 일어난 근본원인은 공장식 축산업에 있다. 2008년 자료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75.8kg인데 비해 육식 소비량이 35.4kg이라고 한다. 이 엄청난 고기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공장식 축산업이 발전할 수 밖에 없다.


고기의 대량생산을 위해 소나 돼지의 사료에 성장호르몬을 주입해 억지로 살찌운다. 돼지의 경우 비대해진 체중을 지탱하지 못한 체 도살장에 가는 도중, 다리가 부러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러한 공장식 축산업은 생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전에는 집에서 기르는 소의 배설물을 밭에 거름으로 쓰곤 했지만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 분뇨 속에 다량의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이 섞여 있어 썩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 분뇨는 바다에 버려져 해양을 오염시켜버린다. 또한 가축의 배설물에서 나오는 이산화질소는 이산화탄소보다 296배나 지구온난화 효과가 크다.


이렇듯 육식 소비는 생명경시, 대기오염, 바다오염 등 상상을 초월할만큼 생태를 파괴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우리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육식소비를 줄여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고기 량의 반을 줄이게 되면 생태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육식소비가 줄어들면, 공장식 축산업이 줄어들고, 그로 인한 생태 파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기를 적게 먹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오히려 그것이 나를 포함하여 우리 식구가 건강하게 사는 길이고 우리 사회와 생태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생태위기는 우리 존재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하셨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사람을 만드셨다”고 한다. 사순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사제는 우리의 이마에 십자 성호를 그으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우리는 흙에서 온 존재이고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첫 조상인 ‘아담(Adam)’의 어원은 히브리어 ‘아다마(Adamah)로부터 왔다. ‘아다마’는 흙이라는 뜻이다. 아담은 흙에서 왔고 우리 모두도 그러하다. 이는 우리가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자연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숨쉬며 살아감은 공기 중에 산소가 있기 때문이고, 그 산소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렇듯 자연파괴는 우리 존재를 위기로 몰고 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겉모습이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뜻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삼라만상을 잘 관리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사제와 수도자만이 아니라 평신도인 우리 모두도 그 소명을 부여받았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생태를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청지기로서의 소명을 사는 길이 아닐까?


마더씨튼께서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 강한 분이셨다. 그분이 지닌 영원의 영성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혼에 대한 갈망은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회복하는 길,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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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함께 사는 법 
- 영성생활 41호(2011 봄)
                        
최현민 (씨튼연구원 원장)

1. 구제역과 그 이후

 올 겨울은 살벌했다. 혹독한 추위가 그러했고 개인적으로 앓았던 감기 또한 예년보다 훨씬 심했다. 매일 이어지는 영하의 날씨 속에 몸만이 아니라 마음마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혹독한 겨울날씨나 지독한 감기는 참을 수 있었다. 이번 겨울이 여느 해보다 더 힘겹게 여겨진 건 구제역으로 인한 가축들의 살처분 사태 때문이다. 정부는 구제역 대응책으로 340여만 마리의 가축을 생매장하는 살처분 방식을 채택했다. 이렇듯 엄청난 재앙과 반생명적 현실 앞에서 가슴이 막막해짐을 느낀다.
"뒷산에 올라 웅덩이라도 파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자식처럼 키운 소를 생매장한 한 농부가 쓴 글의 한 대목이다.

자신이 키운 소가 팔려가도 눈물이 나서 차마 소를 쳐다보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평생 자식같이 키워온 가축을 생매장하고 돌아서는 농부의 뻥뚫린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매스컴을 통해서나 구제역 소식을 접한 나는 농부의 그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날이 풀리면 구제역 침출수, 토사유실로 인한 토양 하천 지하수 오염, 전염병 발생 등 2-3차 오염을 걱정하는 글들이 연일 신문을 메우고 있다. 아,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나 싶다. 우리네 삶이 막장을 향해 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살처분을 감행하는 이들에게는 소나 돼지가 그저 먹거리일 뿐이니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들을 처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생태에 관해 말하고 글쓰는 나의 행위들이 이런 현실 앞에 무력하게만 느껴진다.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연대성을 강조해온 나의 생각은 가축을 그저 고기덩어리로만 보는 이들 앞에서 비웃음을 당한 듯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옛날과 비교할 때 우리의 사고가 참 많이 달라졌다. 아니, 우리 자신이 변했다. 정부의 대응책에 대해 원망해 보지만 이러한 현실에 대해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는가? 이런 재앙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2. 동물도 기본권이 있다

구제역으로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이 현실에서 우리에게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한 영화가 있다. 바로 작년에 개봉된 임순례 감독의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영화가 그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구제역과 연관지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김도연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불교적 판타지 성향을 띤 영화이다. 그러나 불교지식 없이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건 주인공이 소와 함께 여행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치유해간다는 사실이다. 분명 이 영화는 소가 인간의 식욕을 채우는 '고기덩어리'에 불과한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 영화감독인 임순례는 동물보호단체 '카라' 대표이기도 하다. 그녀는 동물의 기본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가축들에게도 적절한 음식과 거처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제공돼야 하고, 위생적인 측면이나 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인간으로부터 어떤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학대가 없어야 한다."

가축이 음식이나 재산이 아니라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더럽고 좁은 축사, 살만 찌우는 사료, 대량 살처분을 강요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동물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가? 이 영화의 스태프들은 촬영 쫑파티에서 소 '먹보'가 슈퍼마켓에서 보던 소고기가 아니라 ‘생명’임을 깨닫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이렇듯 동물의 기본권을 이야기해도 자본논리 안에서 그 해결은 쉽지 않은 것 같다.

 한국과 FTA 협상을 진행한 유럽연합 EU에서는 이미 2000년대초부터 동물권에 대해 언급해왔다. 가축은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라 감수성과 지각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게 동물의 입장을 고려해서 나온 정의라기보다, 건강한 가축을 길러 좋은 값을 받자는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동물권을 보호하자는 EU축산정책 전환이 우리 축산농가의 열악한 현실을 바꿀 동력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설혹 축산농가의 현실이 바뀐다해도 그건 '높은 상품가치'를 지닌 '질높은 고기'를 생산하자는 경제논리에 의한 것이지, 순수하게 동물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자는 것은 아니다. 동물권 그 자체를 인정해 준다는 건 자본주의적 사고 안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자본주의 논리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 그래서 동물도 최소한의 기본권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그 힌트를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영화에서 엿본다.

3.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영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선불교의 심우도(尋牛圖)를 배경에 깔고 있다. 심우도는 자기 본성을 찾아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보통 자기를 찾아가는 수행과정을 그린 10개의 소그림이라 하여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그 첫 번째 그림은 소를 찾아나서는 것인데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소와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그는 소를 팔기 위해 소를 싣고 우시장으로 향하는데 이것이 소와 함께 떠나는 여행의 동기가 된다. 소는 자신이 팔려 가는 것을 아는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고삐를 잡고 애쓰는 그의 모습은 십우도의 제4도를 연상케 한다. 제4도는 소를 발견한 후 소가 말을 듣지 않자 고삐를 잡고 낑낑대는 목동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치 우리가 자신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살아가려 한다. 영화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체험한다. 십우도에서 '소'는 자기의 본래성을 상징하는데, 영화에서도 주인공 선호는 소를 통해 자신의 마음상태를 깨달아간다. 다시 말해 그는 소를 통해 자기 내면의 문제를 깨닫고 그 안에서 치유되어 간다.
 
영화에서는 느닷없이 한 부자(父子)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막부가내로 자기 아들에게 소를 한번 타게 해달라고 주인공 선호에게 애원한다.  결국 어린 소년은 소를 타게 되는데 이는 자신을 찾고 깨침을 얻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십우도에서 제6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기우귀가(騎牛歸家)로, 소와 씨름하던 목동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영화에서는 어린 소년이 동자승이 되어 설법하는 것으로 이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거울이 아름다운 꽃을 비춘다고 거울 자체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미워할 일을 마음에 비추지 않으면 미워하는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설법은 옛 애인의 배신에 대해 증오와 분노를 지녔던 주인공 선우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여행하던 중  7년전 헤어진 옛 애인과 만나게 된다. 그녀와의 재회를 통해 그는 자신의 마음에 옛 사랑의 번뇌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고 반듯한 직장도 없이 농촌에서 힘겹게 농사짓고 살아온 그는 그런 현실을 벗어나고자 집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는 여행하면서 옛 애인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현실에서 오는 번뇌를 떨쳐 버리고 치유되어간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건 사람보다 함께 여행한 '먹보 소'와 아름다운 산골풍경이었다. 곧 그는 소와 여행하면서 '소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인 제10도는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상에 들어가 덕을 베풀다)이다. 깨침을 얻은 후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 자비행을 베푼다는 의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도 자신과 세상과 화해하고 다시 자기 현실로 돌아간다. 자기가 떠났던 그 '현실' 속으로 되돌아가지만 그는 종전의 그가 아니었다. 미움을 떠나 보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로서 돌아온 것이다.

4. 소와 함께 사는 법

앞서 구제역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분명한 건 구제역 재앙을 초래한 배경에는 육식위주의 식문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 이후 소득이 증가하면서 육류 소비도 크게 증가했다. 2008년 기준으로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75.8kg인 반면,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은 무려 35.4kg이나 된다고 한다. 이 엄청난 육식 소비를 뒷받침하려면 수십마리의 소를 몰아넣고 풀 아닌 사료를 주는 공장식 축산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이 좁은 땅에서 많은 가축을 키우기 위해  밀집사육환경이 될 수 밖에 없기에 예방차원에서 다량의 항생제를 쓰게 되고 결국 가축들은 질병에 취약해 질 수밖에 없다. 구제역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연쇄과정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정부의 부실한 대응을 비판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비난하기 전에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스스로 책임감을 느낄 때 비로소 구체적으로 내가 무얼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강우일 주교님은 주교회의 누리집에 구제역 사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성찰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2011 1월27일 한겨레신문 25면) 거기서 주교님도 이 끔찍한 사태의 진정한 배후엔 '과도한 육식문화'가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수천만명이 기아에 시달리는데도 육류생산을 위해 자국 곡식의 3분의 1가량을 가축의 사료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 후진국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뿐, 나와 무관하다고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육류를 소비하면 할수록 악순환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육류섭취를 줄인다면 산업구조가 바뀔 수 있다. 먹는 고기 양을 조금씩만 줄여도 공장식 축산업을 감축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기회'로 삼자. 문제를 단순히 문제로만 본다면 눈앞에 닥친 과제해결에만 급급하게 된다. 그러나 당장의 문제가 사라졌다 해도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같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 문제를 단순히 없애는 차원이 아니라 근원적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물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동물에 대한 인식전환이 될 때 우리는 보다 인간답게 살게 된다. 동물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바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삶의 의미가 무언지에 대한 문제와 연관이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소를 영물(靈物)이라 했다. 그래서 어른들을 소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농부들에게 소는 고단한 노동을 함께하는 동료이며 벗이고 가족이었다. 앞선 말한 영화에 나오는 '소와 인간'의 관계가 본래 우리가 소와 맺고 살아온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너무 멀리 그 본래 자리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늑대나 사자가 송아지나 어린아기와 어울리고 딩굴고 장난하며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없는’ 생명평화 공동체의 이상을 꿈꾸었다. 그런 이상적 공동체는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생태적 타자에 대한 도덕적 무감각함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나 싶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너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떨쳐 버리고 다시 자기 현실로 되돌아가 먹보 소와 함께 밭을 일군다. '먹보' 소와 함께 다시 땅을 일구는 선호에게서 나는 목우자(牧牛子)의 모습을 본다. 불가(佛家)에서 목우자는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을 닦아 가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자신을 목우자라 칭했나보다. 자기 본래면목이 무명(無明)에 가려 있을 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무명을 벗겨내려면 소와 함께 땅을, 곧 우리의 마음밭을 일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일은 너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자각함에서 시작되지 않나 싶다.

 “소비자들의 '윤리적 소비'는 지구 환경을 살리고, 제3세계 사람들의 기아문제를 해결하며, 농촌과 농민을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구제역과 같은 가축 전염병의 대재앙을 막을 수 있다.”라는 홍하일(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 대표)의 발언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 각자가 자각하고 실천할 때 희망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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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Rolling Home with a Bull

감독 임순례

개봉일 2010년 11월 3일
시간 108 ~ 110분
언어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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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민 > 기타 > 2009_불교강독수업계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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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_불교강독수업계획서


2010-10-25 
수업계획서(2009. 1학기)

과목명: 불교강독 수업시간: 09:00-10:15
과목번호: REL 3018 E-mail: chm741@hanmail.net
수강대상 : 1-4학년

1. 교과목표

불성사상은 동아시아불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성을 실체로 보는 경향 때문에 ‘불성사상은 불교사상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나온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불성사상과 관련된 불교경전과 논서를 살펴보고, 불성사상을 현대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그 해결방안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2. 교과내용

1) 불성사상 개요
2) 불성사상과 열반경
3) 불성사상과 보성론
4) 불성사상과 불성론
5) 불성사상과 선어록(조당집)
6) 도겐의 불성사상


3. 주교재
<불성사상과 생태철학> -서강대 종교학과 사료집 2009.

부교재

1) 고기직도 저, 전치수 역, 불성이란 무엇인가, 여시아문, 1998.
2) 고기직도 편, 여래장사상, 경서원, 2001.
3) 김윤주 역주, 여래장경전모음, 한산암, 2008.
4) 동국역경원, 조당집, 동국역경원, 2002.
5) 서재영, 선의 생태철학,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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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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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佛性산스크리트어Buddha-dhātu)은 '부처[佛]의 본성[性]', '깨달음[佛 · 보리] 그 자체의 성질[性]', 또는 '부처[佛]가 될 수 있는 가능성[性]'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1] 불성은 여래장(如來藏산스크리트어Tathāgatagarbha)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1]

불성은 산스크리트어 붓다 다투(Buddha-dhātu)를 번역한 것인데,[1] 붓다(Buddha)를 음에 따라 번역한 불(佛)과 다투(dhātu)를 뜻에 따라 번역한 성(性)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낱말이다. 붓다 다투(Buddha-dhātu)는 각성(覺性: 깨달음의 성품)[2]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1] 각성(覺性)은 붓다(Buddha)를 뜻에 따라 번역한 각(覺)과 다투(dhātu)를 뜻에 따라 번역한 성(性)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낱말이다. 붓다 다투(Buddha-dhātu)는 영어로는 Buddha-nature (부처 성품), Buddha Element (부처 요소) 또는 Buddha-Principle (부처 원리)로 번역된다.

원래 부처는 고타마 붓다(석가모니불)만을 지칭한 것인데,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것에는 본래 부처와 똑같은 본성(불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1] 특히 대승불교 경전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는다)이라고 언명하여 이러한 사상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1]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의 구조에 대하여,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를 갖추고 있으나 우발적 · 일시적으로 밖으로부터 마음을 더럽히게 하는 근심 · 걱정에 뒤덮여 더러워져 있을 뿐이다"라고 강조한다.[1] 따라서, 객진(客塵)인 번뇌의 진(塵)을 떨어내어 더러움(汚)이 없어졌을 때가, 즉 부처가 될 종자가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곧 깨달음(悟)이며 성불(成佛)이라고 주장한다.[1]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대승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입장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1]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 이동: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사상 > 중기 이후의 대승사상 > 일체중생실유불성,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각성(覺性: 깨달음의 성품)은 깨어 정신을 차린다는 뜻의 각성(覺醒)과는 다른 낱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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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민 > 종교 대화 >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최현민 연구실 > 종교 대화 >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2016-03-25 

종교강좌 2016.314
동아시아영성을 통한 현시대읽기 1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최 현 민

1. 자본주의의 허상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본 강좌를 시작함에 있어 문제의식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역을 주역 자체로, 공자 맹자 장자 사상을 문헌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이 강좌를 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깊이 재인식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지 그 지혜를 동양사상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저는 이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왜 우리가 2016년이라는 현대에 주역을 공부하면 되지 않은가 그 당위성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거의 종교의 수준에 와있습니다. 현대인을 아울러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종교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치관이 우리의 삶, 정신세계 안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세는 낙원, 유토피아를 내세에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말론적 사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세와 현재의 긴장관계가 있지만, 천국하면 내세를 떠올립니다.
이에 반해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유토피아는 사후의 세계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현대 신자유주의시장경제가 확립되면서 시장 자체가 힘이 되었고 자본주의 가치는 종교가 되어버린 현실.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으면 왠지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 서로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등바등합니다. 대학가는 스펙쌓기 위해 여념이 없죠.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발버둥치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하나둘 단절되고 흩어져 소외되어버린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 진보의 의미와 그 허상

자본주의의 개념들인 현대화, 세계화. 진화하고 발전하고 진보하고 있다는 표현을 우리가 끝없이 씁니다. 현대화는 80년도에 많이 쓰이던 개념입니다. 15 16세기를 기점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산업화, 도시화,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자본주의, 이런 것들의 물꼬를 터트린 세계사의 물결을 현대화라고 말합니다. 이 현대화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현상이 세계화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 간의 국경을 넘어서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경영시스템으로 묶어집니다. 세계 기업은 무한경쟁에 돌입했고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능력과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20대 80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리고 점점 그 수치는 극단적으로 되어갑니다. 20%만이 안정된 삶을 살고 80%는 실업자 노동자의 삶을 사는 형태가 되면서 점점 많은 이들이 허탈감과 소외감,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점점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우리가 발전하고 진보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발전인지를 말입니다.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우리가 접하게 되는 광고물은 더 편리하고 안락한 기기들에 대한 선전들입니다. 기술적인 발전에 의해서 내가 원하는 행복은 안락한 차를 타고 스마트폰에서 찾은 맛집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경치 좋은 곳에 드라이브 하는 것정도로 생각합니다.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직업은 요리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기술적 향상으로 인해 삶이 더 편리해지고 안락해진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진보이고 발전인지를... 생태계의 파괴문제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힘든 현실입니다.
생태계 파괴는 곧 인간중심적 사유, 아니 더 나아가 생명의 경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생명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돈) 아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첫 번째 순위는 경제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세월호 참사의 아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참사야말로 생명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보다 하위권에 놓은 적나라한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진보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사유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현대 진보사상의 밑바탕에는 어떤 이론이 깔려있는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근대진보사상을 지향해온 이론적 배경

고대에는, 최초의 완벽한 상태로부터 조금씩 쇠퇴해진다는 역사관에서 가능한 한 그 쇠락해지는 상태를 최소한 늦추는 일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중세에 와서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이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서 역사를 시작과 과정, 종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신이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실현하고 그것에 봉사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세지향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세지향적 구원의 약속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지상천국의 약속으로 바뀌었습니다. 유토피아는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다는 현세지향적인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근대 과학적 사유가 있습니다. 그 사유 중에서도 근대 고전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근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데카르트를 들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고대나 중세의 철학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의 확실한 기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성의 힘으로 확실한 기초를 찾고자 했고 의심을 그 방법으로 택했습니다.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유명한 말이 그의 방법적 회의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정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기초에서 데카르트는 “수학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 중 가장 강력한 지식획득의 수단이라고 확신한다. 수학이야말로 모든 것의 원천이다.”고 말합니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이 뉴턴에게 이어집니다. 이런 흐름의 기저에 있는 것이 기계론적 사유입니다.
기계론적 사고란 실체를 중심에 두는 사고입니다. 뉴턴의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미분과 적분의 수학적 방법 이라는 세 가지 전제 역시 기계론적 사유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뉴턴은 우주란 하나의 기계이고 이 기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연은 생명이 없는 물질적인 재료입니다. 이것이 물리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자리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경제학을 들 수 있습니다.


3) 근대 기계론적 페러다임과 근대 자본주의

오늘날 현대에 자본주의 발생을 소급해 올라가면 아담스미스를 만나게 됩니다.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시장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자본가의 자본과 노동자의 노동에 의한 생산력, 두 바퀴가 잘 맞아서 돌아가는 나라가 부유한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장경제이론을 펼치게 됩니다. 아담스미스의 인간론은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영리를 추구하게 되면 개인의 영리가 모여서 사회가 부유하게 되고 국가가 부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계론적인 패러다임이죠. 이기적인 각 개인들이 돈을 벌면 사회가 부유하게 되고 국가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부가 골고루 분배되느냐는 것입니다. 부의 불균형,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사회문제의 심각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편리하고 안락해졌지만 경제적 발전 뒤에 있는 그림자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죠. 제가 말씀드렸던 생태파괴,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 개인주의 발달로 인해서 인간관계의 단절, 더 나아가 인간성의 파괴, 자살, 정신질환들, 기술에 의한 스트레스(테크노 스트레스), 범죄율의 증가, 이런 것들이 현대사회 안에서의 그림자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은 기술발전으로 인해서 생태계가 점점 더 무질서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우리는 인간인 내가 주체이고 자연은 객체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체와 객체로.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얼마나 큰 오류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자연이 나에게 공급해주는 산소가 없이 이 시간 이렇게 존재할 수 있으까요? 주변의 이 모든 것 없이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이 파괴된다는 것은 곧 내가 파괴됨을 의미합니다. 단지 자연만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파괴된다는 자각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2. 고엔트로피 사회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부르는 열역학 제2법칙을 기억하시나요. 엔트로피는 무질서한 정도를 의미합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물질이나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그건 바로 무질서한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변하고, 획득가능한 상태에서 획득불가능한 상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흘러갑니다.
생태계 파괴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무질서의 정도인 엔트로피는 점점 증가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쓰레기는 점점 증가하고 무질서도 증가해 가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엔트로피를 없앨 수는 없으나 그 속도를 낮출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형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해법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어떻게 엔트로피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느냐입니다. 다시 말하면, 점점 고엔트로피의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속도를 늦춰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느냐 이거죠. 그렇게 되려면 지금 우리가 지닌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돼요.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에게 접해온 가치관의 인식이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동양사상 안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제가 2, 3년 전에 중국 상하이에 잠깐 들려서 하루 이틀 머문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중국에 갔을 때는 사람, 자전거, 자동차로 혼잡했었는데, 지금의 상하이는 유럽, 미국처럼 호화롭더군요. 중국이 19세기를 지나면서 서구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자본주의체제의 일부를 받아들이면서 굉장히 변하기 시작합니다. 중국은 서구의 세속주의적인 교육과 경제시스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발전된 현실의 뒷면에는 엄청난 생태계 파괴가 있었습니다. 이제 중국은 고민에 빠진 것이죠.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중국이 들고 나온 것은 놀랍게도, 공자사상입니다. 공자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국 사유의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지금 중국이 처한 이 혼란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자각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앞서 기계론적인 패러다임이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근대 서구의 기계론적 사유방식 이전에, 서구의 근본적인 사유를 살펴보면 그 중심에 존재론적인 사유가 있습니다. 서양철학은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 무엇일까를 질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흙이냐, 물이냐, 불이냐, 바람이냐. 이 4대 요소 안에서 자연과 세계를 설명해보려 했습니다. 서양철학의 최초는 아르케가 무언지 존재가 무언지 묻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서구의 사유의 뿌리는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3.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1) 영육이원론

기원적 7세기전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묻기 시작했을 때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있다고 이해해왔습니다.
실존인물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기원전 7세기 오르페우스가 고대 그리스에 깊은 영향을 준 건 사실입니다. 오르페우스교가 그리스 전역에 퍼졌으니까요. 인간의 영혼은 사악한 육체에 잡혀있어서 윤회를 계속 하는데 윤회로부터 벗어나려면 금욕생활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펼쳤고 이것이 종교화되었어요. 오르페우스교에서 몸은 죽은 물질에 불과해요.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바로 이러한 오르페우스의 사상은 서양의 철학의 밑바탕인,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플라톤의 사유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플라톤은 오르페우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이데아의 세계, 그건 바로 영혼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잠시 머물러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참된 사람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영혼이고 육체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고향인 영적인 세계,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가장 큰 이상으로 생각해왔고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비판하면서 이데아가 내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역시 영혼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했어요.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영육이원론으로 되어있다는 것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인간을 이해하는 근본이 되어온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육이원론적인 사유 안에서 존재를 이해해 왔습니다.

2) 양자물리학에 의한 자연이해

아까 뉴턴은 실체를 중심으로 해서 자신의 역학을 펼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뉴턴의 역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무너졌습니다. 20세기에 양자물리학이 나오면서 뉴턴의 실체, 물질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이구나,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하는 것이구나, 처음에 고정되어 있다고 봤던 건 확률에 불과하는 것이구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구나 하는 발견과 전환이 양자물리학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양자물리학이 얼마나 깊게 우리의 삶에 들어와 있는지 못 느껴요. 여러분이 병원에서 받는 모든 검사, MRI, CT 유전공학 모든 반도체가 양자물리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턴의 역학은 무너지고 양자물리학이 들어섰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해왔던 존재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양자물리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체중심의 존재이해가 왜곡되었음을 입증해준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코페루니쿠스적인 전환이 아니겠습니까?
자연은 물체중심의 사유에서 사건중심의 사유로의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물체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뉴턴은 물체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원자의 집합체들이 절대공간에 일정하게 점유되어 있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우리가 물질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의 한계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가 존재를 이해할 때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건너가야 하는 강이 있는데 우리는 존재론적인 사유방식에서 다른 큰 강을 건나야 한다는 것이죠. 동양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큰 강을 건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다, 주역의 핵심입니다. 3000년 전 중국인들이 지닌 사유의 중심에는 모든 존재가 변화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뉴턴이 절대성을 이야기했다면 양자역학은 상대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이중성을 말합니다. 양자론에서 소립자들은 파동성과 입자성의 두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의 존재요소들은 이중성을 갖는다”라는 명제를 받아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습니다. 물체의 처음상태를 완벽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양자역학의 입장에서는 어떤 물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봅니다. 단지 확률적으로 알 뿐이지요.
이것을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실체이론이 무너졌기 때문에 불확정성의 원리가 나온 겁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는 생각하는 건 착각에 불과하고 우리는 확률적으로 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최현민 2010.2.수양과_명상_수업_계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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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수양과_명상_수업_계획서


2010-10-25 

수 업 계 획 서(2010년 2학기)

○과 목 명 : 수양과 명상(17‐131) ○담당교수 : 최 현 민
○ 학 점 : 3 학점
○수강대상 : 2‐4학년 ○수업시간 : 화 목 13:30‐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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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과목표

본 과목은 선불교의 수행의 이론과 명상을 배우고 익힘을 목표로 삼는다. 
특히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회귀하는데 온 생애를 바친 선사 중 선사인 도겐(道元) 사상을 통해 인간의 근원 곧 나 자신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대한 답을 추구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근원적인 탐구를 통해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고자 한다.


2. 수업방법

강의:50% 토론과 나눔:20% 명상:30%

3. 교과내용

1. 불교의 명상
2. 선수행
3. 정법안장 수문기 1-6
4. 정법안장 변도화
5. 정법안장 현성공안



4.교 재

1) 주교재: 『수양과 명상』, 서강대 종교학과 편

2) 참고도서:

a. 코운 에죠,『정법안장 수문기』, 이재경 역, 동국대학교출판부
b. 스즈키 순류,『선으로의 초대』, 최세만 역, 시공사, 1995.
c. 스즈키 순류,『선심 초심』, 정창영 옮김 물병자리, 2007.
d. 한보광,『정법안장강의』, 여래장, 2006.
e. 틱낫한 『아, 붓다』, 반디미디어, 2004.
f. 틱낫한, 『삶에서 깨어나기‐금강경‐』, 장경각,1999.
g. 틱낫한, 『틱낫한 스님이 읽어주는 법화경』, 명진출판, 2003.
h. 틱낫한, 『평화로움』, 열림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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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험 및 평가방법

가.출석 및 명상 태도: 20%
나.시험 레포트: 80%

6. 기타 안내사항

명상법을 직접 체험하고 배우는 시간이므로 출석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함.
자신의 종교를 넘어서 이웃종교에 대해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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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수양과_명상_수업_계획서
2010-10-25 
수 업 계 획 서(2009년 2학기)

○과 목 명 : 수양과 명상(17-131) ○담당교수 : 최 현 민
○ 학 점 : 3 학점
○수강대상 : 2-4학년 ○수업시간 : 화 목 12:00-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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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과목표

본과목은 불교전통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고찰함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은 개체적 주체가 아니라 공동체적 주체임을 자각함을 목표로 한다. 이 자각을 위해 본 과목은 불교전통에서 발전되어온 명상에 대한 이론을 배움과 동시에 명상을 실천해봄으로써 인간 영성의 깊이를 체험하고 체득함을 목표로 한다.

2. 수업방법

강의:50%    토론과 나눔:20%      명상:30%

3. 교과개요 및 내용

가. 교과개요

1 세계종교속의 수양과 명상 강의 강의
2 틱낫한의 행선과 호흡선 강의, 행선, 좌선 강의,행선,좌선
3 위빠사나 수행 "
4 간화선 수행 "
5 간화선 수행 "
6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 강독을 통한 마음공부

나. 교과내용

1. 세계 전통 속의 수양과 명상 (Ⅰ)
2. 세계 전통 속의 수양과 명상 (Ⅱ)
3. 사성제와 명상
4. 팔정도와 명상
5. 오계수행
6. 행선
7. 좌선
8. 관명상 (위빠사나수행)
9. 간화선 수행 – 십우도
10.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 강독을 통한 마음공부


4.교 재

1) 주교재: 『수양과 명상』, 서강대 종교학과 편

2) 참고도서:

a.『평화로움』, 열림원, 2002.
b. 틱낫한 『아, 붓다』, 반디미디어, 2004.
c. 틱낫한, 『마음을 멈추고 다만 바라보라』, 꿈꾸는 돌, 2002.
d. 틱낫한, 『삶에서 깨어나기-금강경-』, 장경각,1999.
e. 틱낫한, 『틱낫한 스님이 읽어주는 법화경』, 명진출판, 2003.
f. 강건기, 『마음닦는 길』, 불일출판사, 2004.
g. 윤홍식 역, 『윤홍식의 수심결강의』, 봉황동래, 2007.

5. 시험 및 평가방법

가.출석 및 명상 태도: 20%
나.시험 레포트: 80%

6. 기타 안내사항

명상법을 직접 체험하고 배우는 시간이므로 출석을 잘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 스스로 명상법을 배워 익힐 뿐 아니라 인류역사에 소개된 명상법과 이론을 존중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개방된 마음이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