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허우성.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허우성. Show all posts

2024/03/15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 허우성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문학과지성사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
허우성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5월 8일 | ISBN 9788932011608

사양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547쪽 | 가격 20,000원


분야 서남동양학술총서
책소개
목차
작가 소개
독자 리뷰
가가


[개요]
이 책은 ‘생명’과 ‘논리’ 두 개념을 평생 화두로 사유를 전개한 니시다 철학의 본격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각주의와 순수 경험의 철학,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 역사·정치철학을 니시다 철학의 세 가지 발전 단계로 상정하고 그 단계를 대변할 일련의 논문을 집중적으로 읽어 정리하였다.

[책머리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정말로 미운 대상이라면 쳐다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법이다. 우리의 뿌리 깊은 반일 감정 앞에 일본은 그와 같은 대상일까. 하지만 그런 감정에 충실하여 그저 모른 채로 지나칠 수 없으리만큼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고 무시하기에는 더욱 난처한 존재다. 일본이 지리적으로 바로 이웃일 뿐 아니라, 역사·정치·외교·경제의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으며 현재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양국이 이웃으로 지내는 것은 운명이리라. 국제 사회가 한국과 일본을 2002년 월드컵 대회의 공동 주최국으로 정해준 일에도 이와 같은 역사적 운명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운명적으로 저렇게 가까운 나라인 일본을 모르고서야 어찌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본을 그중에서도 특히 근대 일본을 철학이나 사상의 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수많은 철학자 중 누구를 제일 먼저 알아두어야 할까? 근대 일본을 대표하고 그 복잡다단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철학자는 누구인가? 그건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가 아닐까. 그의 철학이 독창성과 보편성뿐 아니라 국적성까지 보이고 있음을 감안하고, 20세기 일본이 배출한 가장 탁월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일본 내외에서 널리 인정받아왔음을 고려하면, 이 주장에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니시다 철학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아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먼 얘기였다. 서양의 그 어떤 철학자보다 우리에게 멀었다. 그에 비하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베르그송은 물론이고, 심지어 데리다, 들뢰즈, 료타르도 우리에게 훨씬 가깝다. 하지만 멀찌감치 두고 보아왔던 니시다의 삶과 철학에 대한 얘기는 동아시아 근대사 전체의 정열과 파멸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니시다는 철학사의 면에서 보면 단순히 일본 철학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서양 철학의 지평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곳곳으로 헤집고 돌아다녔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베르그송 등을 읽으며 배운 바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항상 서양 철학에 대하여 비판의 태도를 견지했다. 그 비판에서 예외가 된 자로는 독일의 역사철학자 랑케 정도일 것이다. 니시다는 서양 철학에 대한 발언과 비판을 통하여 서양 철학사 내부 깊이 침투하고 있고, 연구자와 독자에게 그 정당한 자리매김을 요구하고 있다.

니시다는 생명의 창조적 약동의 한 순간을 확인하고, 그것을 구원의 순간이라고 여기고, 이를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 니시다 철학은 생명의 약동 하나하나, 하나의 생명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을 존재론의 중심에 두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사건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니시다는 생명 사건의 극치에서 생명의 진수가 실현된다 하고, 이 생명 사건에 대한 정치한 논리를 치열하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대표 정도가 아니라 세계의 일류 철학자로 볼 수 있다. 생명이 선(禪) 수행이나 베르그송 같은 서양 철학자에서 온 것이라면, 논리 부여는 생명철학을 보편화하겠다는 철학자로서의 소명 의식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서양 철학서를 깊이 읽으며, 그가 서양의 대표 논리로 간주했던 ‘일(一)의 다(多)’라는 논리를 비판하고, ‘일즉다(一卽多)’라는 생명의 논리를 창안하여 그걸 부단히 벼려 나갔다.

니시다는 처음 생명을 찾아 외부로 나가지 않고 내심으로 들어갔다. 그의 초기 철학이 보이고 있는 내향성은, 그가 패기에 찬 청년으로 출발했으나 곧 실직과 혈육의 죽음 등 인생의 여러 난관에 부딪혀 깊은 좌절과 비애를 맛보게 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 수행을 하게 되었다는 점과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었다. 청·장년기에 경험했던 이와 같은 비극의 경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순수 경험과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기에 돌입하게 되자 조국 일본의 운명에 깊이 공감하며 역사철학을 전개해나갔다.

니시다는 역사적 생명의 구현을 추구한 역사철학에서, 천황과 국체 그리고 전쟁을 옹호함으로써 일본 국민으로서의 국적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후기 여러 역사적·정치적 논문을 통해서 일본 국민은 어떤 역사적 환경에서도 창조적 응전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1943년 ‘역사철학’이란 주제로 쇼와 천황에게 어전(御前)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동아 공영권 이념을 철학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류 제국주의에 빠지게 되고, 중국과 조선인의 불행한 운명을 못보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분노와 혐오를 일으키는 얘기를 듣게 되고, 한 순간의 생명 사건을 절대화하고 보편화하려는 일즉다(一卽多)의 일(하나)이 낳은 폭력을 목격하게 된다. 니시다 철학이 단순히 일본의 것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것이라고 부른 연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에 철학자로서의 열정뿐 아니라, 일편단심 천황을 섬기고 민족을 위한다는 애국심도 분명 발휘했을 것이다. 그의 철학과 교토(京都) 학파의 철학은, 종전(終戰) 이전에는 도사카 등의 마르크시스트로부터, 이후에는 마루야마 등의 정치학자로부터 각각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 비판이 초기의 생명철학에까지 적용될 수 있을는지 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그리고 역사철학에만 국한한다고 해도 그 비판이 니시다 역사철학의 용도 폐기나 완전 실패를 의미하는지, 오늘의 눈으로 보아도 모호하다.

니시다는 우리 한국인에게 한편으로는 생명력과 위안을, 다른 한편으로는 혐오와 분노를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철학자다. 개인의 개성, 자유와 창조 행위 그리고 생명의 용출(湧出)을 주창한 생명철학에서, 우리는 상실된 생명을 회복하는 길을 확인하고 생명의 기운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천황과 국체를 옹호하는 역사철학 앞에서 우리 대다수는 혐오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니시다 철학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적어도 두 얼굴로 다가온다. 한 얼굴에서는 생명의 약동을 보고, 또 다른 얼굴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을 본다. 역사철학에 실망했다고 해서 약동하는 생명의 얼굴을 외면하려 해서도 안 되고, 생명철학에 도취하여 제국주의 일본의 얼굴을 망각해서도 안 된다.

니시다는 한 순간 한 순간의 생명, 우리의 행위에서 가장 고양된 순간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걸 우리는 생명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생명 사건을 포착하기 위하여 때로는 힘의 이미지를 때로는 빛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는 그래서 한때 19세기의 서양 인상파 화가들이 그들의 화폭에 담아내려고 했던 태양의 빛과 힘 그리고 생명을 좋아했다. 그가 절대 의지의 정점에서 노에시스(‘봄’)로 나간 것도 빛의 이미지를 따라간 결과일 것이다. 절대무의 자각 철학의 중앙에 있는 그 빛은, 불교로 말하면 심광(心光)이나 적광(寂光)을 닮아 있다. 그의 역사철학은 일장기로 상징되는 제국의 태양에 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제국의 태양에 논리의 힘까지 실어주자마자, 그는 제국주의 철학자로 변신하게 된다. 여기에서 보편 진리 주장과 제국주의, 달리 표현한다면 진리와 생존, 이 양자의 관계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니시다를 읽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과제다. 니시다가 믿었던 지애(知愛) 일치설에 따르면, 사랑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가 없으면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의 글 어디에도 조선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은 필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존재였을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존재이니만큼 공감이나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을 중앙에 모신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세상이 하나)라는 슬로건은 조선과 중국의 타자성을 근원적으로 박탈하고 말았다. 필자는 하지만 이 책에서 일본인 니시다에 대하여 그가 다 못 한 지애설을 실천에 옮기면서, 알기 위해서 사랑하려고 했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이해가 나와 우리에 대한 자기 이해를 심화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일본 철학자를 알아야 하는가? 일본이라는 타자를 알기 위해서다. 타자에 대한 이해는 자기 이해의 일부다. 타자 이해 없는 자기 이해는 원리상 불충분할 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오해와 폭력을 동반하기 일쑤다. 일본과 한국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일본의 어떤 대학에 한국학을 설치하지 않는 한, 우리도 일본학을 개설할 수 없다고 하는 목소리가 국내의 일부 대학에 있다. 이와 같은 목소리에는 일본을 쉽게 문화적·철학적 상국(上國)으로 대접해주고 싶지 않은 거부감이 깊이 배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거부감이 서양 학문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역사적 기억 때문인가? 서양이 정의로운 상국으로 보여서 그런가? 서양이 전달해주는 내용이 좀더 근사한 보편으로 보여서 그런가? 아니면 애당초 보편이 생존과 생육에 관계된 것이라 미리 이해하고, 배울 것이라면 보다 진보한 것으로부터 최후의 승자로 보이는 서양으로부터 배우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일까? 우리가 서구와 일본을 차별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본을 잘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조국 일본을 열렬하게 사랑했던 니시다 같은 사상가를 연구할 때, 한국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한국인과 일본인은 많이 다른, 때로는 상반된 역사적 기억을 물려받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1909)의 죽음이 그와 같은 예에 속한다. 이토는 일본 최초의 내각 총리대신, 추밀원(樞密院) 초대 의장, 한국 통감을 역임한 자로, 일본에서 근대 일본의 대표적 정치가, 근대 일본의 기틀을 마련한 지도자, 일본 입헌 정치를 확립한 정치가 등등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리에는 주로 일본 제국주의의 수괴, 침략의 원흉,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주범으로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의사(義士) 안중근(1879∼1910)의 의로운 행위를 통하여 이토를 민족의 원수로 기억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안중근은 흉악범이고 사형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역사적 기억 아래서 한국인이 일본인 철학자를 공정하게 연구할 수 있을까? 일본에 대한 우리 한국인의 연구와 발언에, 기억과 전통의 힘이 어느 정도 작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고, 또 그 힘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을까? 이런 여러 문제가 미제의 것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최소한 우리 민족의 역사적 기억에 짓눌려서 또는 단순한 민족 감정에서 이 책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는 이 책의 제목에서 ‘니시다 철학 비판’이라고 하는 대신에 단순히 ‘니시다 철학’이라고 했다.

생명과 논리의 니시다 철학은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자각주의와 순수 경험의 철학이고, 다음에는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이며, 마지막으로 역사·정치철학이다. 필자는 이들 세 시기를 삼부로 나누고, 각 부의 중심에 「자각주의와 순수 경험: 진정한 자기를 찾아서」(3장),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 빛 중심의 의식 다차원론」(5장), 「역사철학」(7장)이란 제목의 장을 각각 배치해두었다. 그것들 이외에도 「삶과 철학」(1장), 「두 생명과 하나의 논리」(2장), 「예술론과 신체론, 그리고 서양 예술가들」(4장), 「역사철학 이전의 ‘역사’와 전회」(6장), 그리고 「역사철학 비판」(8장)의 장을 넣어두었다.

1장은 니시다 철학이 형성되는 전기(傳記)적·역사적 배경을 다루는 장이다. 생명과 논리를 다루고 있는 2장 ‘두 생명과 하나의 논리’에 대해서는 약간 긴 설명이 필요하다. 2장은 니시다 철학의 정수이고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개론은 아니다. 이 장을 읽고 이해하게 되면 나머지 모든 부분의 윤곽이 짐작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개론적인 성격이 있다. 하지만 그 난해성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개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 위치에 둘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니시다 자신이 인생의 아주 초기부터 죽을 때까지 생명과 논리라는 두 개념들을 중심으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해왔다는 점이다. 이 두 개념은 따라서 그의 철학적 흐름을 관통하는 평생 화두에 해당한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필자에게 있다. 2장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니시다 철학 전체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필자는 2장을 뒤로 보낼 수도 없었고 빼기는 더욱 난감했다. 그리고 보다 쉬운 말로 바꿔보라는 요구도 있었지만, 그걸 들어줄 수 없었던 것이 반드시 시간의 제약 때문만이 아니다. 2장의 난해성은 오히려 니시다 철학의 난해성이다. 2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니시다 철학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독자 여러분도 필자처럼 한 번 그 이해에 도전해보라는 뜻이다.

니시다의 철학적 언어와 사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2장을 건너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무리하게 읽다가 도중 하차하게 되면 독자와 필자 모두의 손실이기 때문이다. 3장, 4장, 그리고 7장을 읽은 후에, 아니면 최소한 예술론을 다룬 4장을 읽은 후에 2장을 읽기를 권한다. 예술가의 행위를 설명하는 말 속에서 ‘생명과 논리’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술로 통하는 길은 니시다가 상당 기간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간 경로이기도 하고, 필자가 그의 철학을 이해하면서 밟아나간 길이기도 했다.(각주 1, 내용: 이 책이 출판되기 전 서남재단은 이 책에 대하여 두 분 전문가의 심사 의견을 얻어서 필자가 참고로 삼을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두었다. 심사자 한 분은 서강대 종교학과의 길희성 교수고, 다른 한 분은 역사 전공자라는 것만 알 뿐 그 이상은 모른다. 두 분의 의견에 필자가 일일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원고를 읽고 의견을 주시고 여러 가지 개선할 점들을 지적해주신 일에 대해 깊이 감사를 드린다. 특히 길희성 교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의견을 주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반영하도록 힘썼다. 길교수는 특히 ‘생명과 논리’의 장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견과 더불어 대안까지 제시해주었다. 2장이 이 책에서 가장 불만족스럽고 난해한 부분이라고 하고, 책으로 출판할 경우 빼어버려도 무방하며, 아니면 다시 써서 책의 결론 부분에 두든지, 현 위치에 두려면 대폭 수정·보완하기를 바란다는 의견이었다. 필자 스스로 뺀다는 생각까지는 못했지만 뒤로 보낼까, 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제시한 세 길 중 아무 길도 따를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설명한 대로다. 또 한 분의 심사자인 사학자는 주로 일본 역사에 대한 필자의 기술에 주목하고 있었다. 인명·역사적 사건에 대한 명칭의 오류 또는 불일치를 지적해주었는데, 그건 감사한 마음으로 금방 수용했다. 일본사가 이 책의 주제는 아니지만, 필자는 스스로 취약한 분야라고 느끼는 부분이다. 그분은 니시다 철학이 동시대 식민지 조선에 미친 영향과 그 현대적 연관성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주었다. 당장 검토에 착수할 수는 없지만 니시다가 국내 학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를 과제로 남겨둔다. 그런데 이 사학자는 필자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과 논리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니시다식으로 말하자면, 그분은 평생 시간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데 전념하고, 인격의 시간 또는 질적·내용적 시간의 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사학도의 특성 때문이리라. 하지만 특성은 동시에 한계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6장에서는 전회 이전의 역사에 대한 니시다의 이해와 전회의 과정을 추적해볼 것이다. 8장은 니시다 역사철학에 대한 다른 이의 비판을 다루는 장이 될 것이다. 거기에서 일본 내부의 세 가지의 비판적 시각과 함께, 메이지 유신에 대한 한·일 사학자들의 긍정적 태도를 검토하고, 이 긍정적 태도가 니시다 역사철학에 대한 평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해보고, 마지막으로 그의 역사철학이 제기하는 최대의 문제가 보편 진리 추구와 집단의 생존 사이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킬 것이다.

니시다는 『선의 연구』를 출판한 1911년부터 1945년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글을 썼다. 한창 기운이 왕성한 시절에는 매년 3∼4편의 논문을,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여 수백 매에서 천여 매 이상에 달하는 무게 있는 논문을, 주로 철학전문 잡지에 발표했다. 본 연구의 기본 자료로 삼았던 『니시다 전집』은, 발표된 논문들이 일정 분량 모여서 생전에 책의 형태로 출판한 것을 니시다 사후 다시 정리하여 발간한 것이다. 그는 생명·논리·개물·일반·행위·역사·시대 등의 핵심 주제들을 반복하여 다루고 있다.(각주 2, 내용: 가령 『선의 연구』(1911)는 수년에 걸쳐(1906∼1909) 발표된 네 편의 논문을 단행본의 형태로 출판한 것이다. 그 이후 7년에 걸쳐(1911∼1917) 발표한 10여 편의 글을 모아 『사색과 체험』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약간 내용을 달리하며 세 차례 출판했다. 이와나미 서점이 1665년 전집 발간시 『선의 연구』와 『사색과 체험』 둘을 하나로 합해 전집 1권으로 삼았다. ) 그 반복은 하지만 종전 입장의 되풀이가 아니라 차이와 새로운 변화를 담아나갔다. 부단히 자신의 입장을 수정·보완·발전시켜간 니시다 철학에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최후·최종의 입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가 종전 이후까지 살아 남았다면 달라진 역사적 환경에 따라 상당히 다른 철학을 전개해 갔을 것이다.

니시다의 논문 하나하나는 대체로 자기 완결적이거나 ‘자기 동일적’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개물(個物)이다. 동시에 그 논문이 집필 당시의 니시다 사유 전체의 모습을 요약하여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전체다. 논문 한 편이 하나의 논문이면서 전체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개물즉일반(個物卽一般)’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 방식은 ‘불변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유의 중점에 ‘불변’의 핵심 같은 것을 두고 부단히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여 새롭게 형성해가는 것이 그의 글쓰기 방식이었다. 자기 동일을 유지하면서도 왕성한 철학적 창조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부단히 변화해갔으므로, 한 논문과 다음 논문 사이에 불연속의 연속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동일의 유지 부분이 연속이고 변화의 부분이 불연속이다. 그 변화의 동력은 니시다의 철학적 창조력과 집요한 성찰과 더불어 시대 상황에 대한 민감한 반응, 그리고 서양 철학서 읽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니시다 철학에 대한 최선의 연구 방법은, 전집에 포함된 모든 논문을 몽땅 읽고 논문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간파하여 적시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매우 더딘 방식일 뿐 아니라, 니시다 철학에 대한 한글 최초의 연구서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주요 주제를 선별한 다음, 그 주제에 따라 여러 논문을 통하여 변화해가는 궤적을 충실히 따라가며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개별 논문이 가지고 있는 자기 완결성을 깰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의 개념이 변화해나간 궤적을 모든 논문 안에서 확인하는 일 자체가 현실적으로 매우 고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취한 방법은 니시다 철학에 세 개의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그 단계를 대변할 만한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일련의 논문을 집중적으로 읽어 정리하는 식이었다.

니시다의 언어는 매우 생경하고 난해하다. 첫째 이유는 그에 대한 국내 연구가 거의 없고, 번역 또한 『선의 연구』를 제외하면 전무한 형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그의 창조와 독창이 빚어낸 수많은 철학적 신조어들 때문이다. ‘개물즉일반’도 그런 신조어 중 하나다. 니시다는 질적으로 가장 고양된 한 순간의 생명 사건을 ‘개물즉일반’이란 말로 그 성격을 규정했다. 개물과 일반은 각기 서양 철학이 말해온 존재론의 기초 개념인데, 의미상 ‘개물즉일반’이란 개념을 사용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그런데 니시다가 개물과 일반이 상호 한정적으로 ‘즉’의 관계에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낭패와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표현 이외에도 영원이면서 찰나, 찰나이면서 영원 등과 같이, 언뜻 보면 형용모순의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런 신조어들을 이해하려는 결심과 인내가 없다면 니시다 철학의 연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니시다 언어가 갖고 있는 생경함과 난해함을 완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의 글을 직접 읽어 서서히 친숙해지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직접 인용의 방식을 다소 사용하였다. 국내 니시다 철학의 연구 여건이 아직 미숙하다는 점에 비춰보면, 원문을 읽는 것 자체가 이미 훌륭한 니시다 공부가 될 수 있다. 독자는 이러한 직접 인용을 읽음으로써 필자의 해석과 주장의 타당성을 점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하나의 장 안에서 짤막한 소제목을 달아둔 것도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것만 읽더라도 전체 내용의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보았다. 니시다 철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이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는 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싶다. 하와이 대학 박사학위 취득 논문이 니시다를 주제로 한 것이었는데, 그건 이미 십일 년 전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니시다 철학 연구를 지원 과제로 선정해준 일, 그 이후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의 중간 과정을 성실하게 밟아준 일, 등등에 대하여 재단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2000년 4월, 허우성

====

도서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사회
문지아이들
문지푸른책
블로그
Search
Home
English
로그인
회원가입

크게보기 | 미리보기
근대 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

허우성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5월 8일 | ISBN 9788932011608
====

[차례]
제1부 생명과 논리
제1장 삶과 철학
1. 역사적 환경
2. 니시다의 삶과 일기
3. 전쟁의 간접 체험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
4. 니시다 철학의 동기

제2장 두 생명과 하나의 논리
1. 생명과 논리
2. 왜 논리인가?

제2부 내적 생명의 철학
제3장 자각주의와 순수 경험
1. 자각주의
2. 순수 경험

제4장 예술론과 신체론 그리고 서양 예술가들
1. 예술론
2. 신체론
3. 모네, 고흐 그리고 로댕
4. 미의 세계를 넘어서 도덕과 종교 그리고 역사의 세계로

제5장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
1. 절대무의 신비 세계
2. 자유 의지
3. 역사적 행위와 역사적 자기: 제3위
4. 예지적 직관의 세계: 지정의(知情意)의 세계
5. 정적 예지적 직관
6. 지적 예지적 직관: 의식 일반의 단계
7. 지각적 직관과 의미 요해
8. 종교적 입장을 넘어서 철학적 입장으로

제3부 역사철학과 그 비판
제6장 역사철학 이전의 ‘역사’와 전회
1. 역사철학 이전의 ‘역사’
2. 이행기와 전회 그리고 니시다 자신의 태도
3. 전회에 대한 니시다의 태도
4. 표현: 역사철학으로 넘어가는 매개

제7장 역사철학
1. 주체와 환경의 상호 작용론
2. 행위적 직관
3. 역사적 신체론
4. 시대론과 랑케
5. 정치철학: 국가·천황·국체 그리고 동아 공영권
6. 역사철학의 예술론: 피들러로부터 리글로

제8장 역사철학 비판
1. 자기 한정의 폭력성
2. 나카에 초민과 우치무라 간조, 도사카 준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
3. 메이지 유신 불가피론
4. 니시다 철학이 던진 문제

<결론> 두 얼굴의 니시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주요 인명 색인>

디지털 시대의 선정성과 폭력성 / 허우성 < 디지털문명과 불교 < 불교평론

디지털 시대의 선정성과 폭력성 / 허우성 < 디지털문명과 불교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디지털 시대의 선정성과 폭력성 / 허우성
기자명 허우성   입력 2012.09.06

특집 | 디지털 문명 시대와 불교 : 붉은 세상을 파랗게 만들 수 있을까?

허우성
경희대 교수


서론
고타마 붓다의 출현 이후 2천여 년이 흘러서 21세기가 되었지만, 중생은 삼독과 십악을 줄이는 일에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시장경제가 과학과 기술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디지털 시대, 정보의 시대, 또는 컴퓨터 시대는 도래했다. 이 시대의 특성은 전에는 불가능했거나 어려웠던 정보에 즉각 접근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의 소형화, 개인용 컴퓨터의 출현, 생활 전 분야에 걸친 신속한 기술의 진보, 그리고 범지구적 통신과 네트워킹과 함께 정보의 시대 곧 정보사회는 왔다.

정보사회는 경제활동에서 이윤의 창출이나 증대 수단으로서의 지식과 정보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이다. 정보화에 대해 가장 빨리 반응하는 행위자 집단에는 이윤 창출을 노리는 기업과 정보를 게걸스럽게 받아먹는 일반 사용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정보사회는 정보의 생산, 소비, 유통, 광고, 시장 등의 개념들이 서로 얽혀 있는 사회이다. 그 사회는 범지구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일부, 곧 풍요, 성장, 소비와 경쟁을 앞세우고 상당한 정도의 폭력성까지 안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일부이다.

이 글은 5장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2천 년 전 중생이 가진 삼독과 십악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들을 없애면 바로 열반에 이른다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제시하며, 2장에서는 현대 한국의 폭력적 상황이 2천 년 전에 비해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추정하고, 3장에서 초기불교의 경전이 말하는 폭력의 원인들을 논의하고, 4장에서 디지털 시대는 감각적 쾌락 최다라는 사실을, 그리고 넷의 사용으로 우리가 잃은 것이 무언가를 검토한 다음, 이 시대의 특성을 붉은색과 검은색을 이용하여 상징적으로 표시해 본다. 5장에서는 현대 소비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비판을 소개하고 이를 불교와 관련지어서 논의한다.

디지털 사회에 대한 필자의 진단과 전망은 어둡다. 폭력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감각적 쾌락(까마)을 즐길 개인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길이 없다면, 쾌락의 향유에서 오는 일탈 행위를 법으로 다스리면서, 소비사회가 가져오는 폭력은 상당 부분 견뎌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교적인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교육일 것이다.  

 1. 2천 년 전 중생의 삼독과 십악

초기불교의 경전은 탐욕(rāga), 욕망(lobha, chanda), 증오(dosa)와 미망(moha)과 같은, 나쁜 행위의 뿌리(akusalamūla)들을 지적하면서, 이것들이 서로 엉켜 있는 것으로 다룬다. 탐욕을 채우는 데 실패하면 쉽게 분노나 증오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증오와 분노, 폭력이 온 세상에 퍼져 있는데도 한국의 출가자들을 포함하여 불교학자들은 이런 사회 현상을 종종 무시해왔다. 초기불교의 《법구경(Dham-mapada)》 〈분노품(kodha-vaggo)〉에서 다음 한 구절을 살펴보자. 

탐욕(rāga, 婬)만 한 불길은 없고, 증오(dosa)만 한 포수(捕手)도 없고 무지(moha)에 비할 그물도 없고, 갈애(taṇhā) 같은 격류도 없다.(Dhp.251)
 
이 시구에 나오는 ‘라가’는 보통 탐욕, 욕정, 흥분, 열정의 뜻이면서 동시에 색깔, 색조, 색칠하기, 염색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역 《법구경》은 이를 음(婬)으로 옮겨서 특히 욕정의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다. ‘라가’ 즉 음란을 상징하는 색이 있다면 붉음일 것이다.

《법구경》에 〈몽둥이품(daṇḍa-vaggo)〉이 있는데, 이 품은 초기불교 내에서 폭력이 갖는 중심적인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 한 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몽둥이를 두려워한다. 생명은 모든 이에게 귀중하다.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생각하여, 남을 죽이지도 말고 남에게 누군가를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Dhp.130) 

이 시구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폭력을 두려워한다는 점이고, 둘째 생명(jīvita)은 모든 존재에게 귀중하므로, 타인을 자신으로 여겨서 죽여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을 부추겨 누군가를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고 권유한다.

삼독과 떨어질 수 없는 십악(十惡)은 장아함의 《소연경(小緣經)》에 나온다. 이 경에 따르면, 선을 수행하지 않는 중생(衆生, puthujjana)은 흔히 열 가지 악행[akusala]을 범한다. 그것들은 살생, 훔치기[盜竊], 음란(淫亂, kāmesu micchā-cāri), 거짓말[欺妄], 이간질[兩舌], 욕설[惡口], 꾸민 말[綺語], 인색과 탐욕[慳貪], 질투(嫉妬, vyāpanna-citta), 사견(邪見)이다. 십악에는 물리적 폭력, 언어폭력, 음란 행위, 부정적 감정, 잘못된 견해 등이 들어있다. 카스트를 이루는 모든 중생은 각자 자신들의 행위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질투’를 의미하는 빨리어 ‘브야빤나 칫따’가 진에심(瞋恚心)으로도 한역된 것을 보면, 질투 안에는 이미 분노와 증오가 있어서 그것은 언제든 폭력으로 변할 수 있다. 《소연경》의 입장에서 보면 십악의 치유 방법으로서 왕을 세워서 왕으로 하여금 분노, 처벌, 추방을 통해서 중생을 다스리게 하는 것보다, 열반으로 안내하는 지계와 선정 수행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일 것이다.

《법구경》 134는 “열반(nibbāna)을 얻게 되면 어떤 적대감(sārambha)도 네 속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적대감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은 초기불교의 최고선인 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금생에 아라한이 성취한 열반계(nibbānadhātu)를 “탐욕의 지멸(rāgakkhaya), 증오와 미망의 지멸”이라고 설명한 곳도 있다.

그런데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는 승가라는 공동체로 출가하여, 계(戒), 정(禪定, jhāna, samādhi), 혜(paññā)의 삼학을 닦아야 한다. 붓다는 공동체의 유지에 계율이 필수라고 보았는데, 이 계율의 주요 목표의 하나는 감각적 쾌락을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심신 안에서 작동하는 모든 인과 연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기능이 바로 반야 지혜이다.

2. 현대 한국의 폭력적 상황

한국 시민은 2천여 년 전 인도의 중생과 비슷하게 삼독이 있고 십악 중 하나 이상에 쉽게 빠지므로, 시민의 대다수는 중생이다. 이들 ‘시민 중생’은 도덕적으로 진보하기는커녕 고대 인도의 중생보다 더 사나워 보인다. 그리고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뒤 1천 수백 년이 지났건만 우리 민족에게서 분노의 기질이나 폭력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폭행, 강간, 살인, 자살 관련 뉴스와 더불어 욕설과 막말을 연이어 보도하고 있다. 2012년 3월 15일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범죄 발생건수는 2000년 이후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2010년 발생한 형사범죄(재산범죄, 강력범죄, 위조범죄, 공무원범죄, 풍속범죄 등)는 45만여 건으로 지난 2000년보다 58%, 20년 전인 1990년과 비교하면 무려 248% 급증했다. 형사범죄 중 강력범죄로 분류되는 살인은 2000년 964건에서 2010년 1,262건, 강간은 2000년 6,982건에서 2010년 19,939건으로 10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났다. 폭행상해는 2000년 49,838건에서 2010년 180,365건으로 증가하여 10년 전보다 360% 이상 폭증했다(〈헤럴드경제〉 2012. 3. 15). 영국 경찰이 2009~2010년 10만 명당 강력범죄 발생률을 국가별로 분석한 자료에서 우리나라는 OECD 34국 중 살인은 6위, 강간은 11위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은 살인 33위, 강간은 34위로 안전한 편에 속했다고 한다. 살인은 멕시코가 월등하게 1위였고, 미국은 3위였다(〈중앙일보〉 2012. 6. 1).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세계 1위이다. 타인에 대한 공격과 자신에 대한 공격이 좀 다르지만 양자가 흔히 공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고의 자살률은 강력범죄의 증가와 함께 우리 사회에 폭력이 널리 펴져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위증과 무고(誣告)가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수백 배 많다는 통계 앞에 대한민국은 ‘거짓말 공화국’이 되었다.

한국인의 형사범죄는 대개 십악의 하나이거나 그 변형이다. 십악의 하나인 절도는 재산범죄로 되고, 살생은 살인으로 되고, 거짓말은 심하면 사기죄로 변하며, 이간질과 욕설은 명예훼손죄나 모욕죄가 될 수 있고, 음란 행위는 강간을 낳는다. 강력범죄인 살인, 강간, 폭행상해는 쾌락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탐욕이나 공격과 깊이 관련된 경우가 많다.

3. 초기불교의 경전이 말하는 폭력의 원인:     감각적 쾌락, 느낌, 분별

고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군주제는 그때, 그곳에도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구조적 폭력’은 평화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평화연구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온 요한 갈퉁(Johan Galtung, 1930~  )이 주로 유통시킨 개념인데, 그는 “구조적 폭력의 부재는 우리가 사회 정의로 불렀던 것이고, 사회 정의를 긍정적으로 정의하면 ‘권력과 자원의 공평한 분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초기불교도들은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 정의가 아니라, 주로 개인적, 의도적, 물리적 폭력에 주목했다. 다만 그들은 출가와 새로운 공동체 설립을 통하여 나름대로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필자가 이 글에서 주목하는 폭력의 원인은 감각적 쾌락(까마, kāma)이다. 까마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을 종종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고, 우리 시대는 까마가 아주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 《중부경전》에 나오는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큰 경》에서 붓다는 감각적 쾌락에서 온갖 종류의 폭력 행위가 일어난다고 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릴 것을 가르친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을 원인(hetu)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을 조건(nidāna)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을 바탕(karaṇaṃ)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왕들은 왕들과 싸우고(vivadanti), 귀족들은 귀족들과 다투고, 브라만은 브라만과 싸우고, 주인은 주인과 싸우고, 어머니는 아들과 싸우고, 아버지가 아들과 싸우고…… 친구는 친구와 싸운다.
그때에 그들은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고, 서로 주먹으로, 흙덩이로, 몽둥이로, 칼로 싸운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본다.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사람들은 칼과 방패를 들고, 활과 화살통을 몸에 차고, 화살이 쏟아지고, 창이 날아다니고, 큰칼이 번쩍이는 가운데 양쪽으로 진을 치고 있는 전장으로 돌진한다. ……또한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사람들은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도둑질하고, 매복했다 습격하고, 남의 부인을 폭행한다. 그러면 왕들은 그들을 붙잡아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한다.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몸(kāya)으로, 말(vācā)로, 마음(manas)으로 악행(duccaritaṃ)을 범한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함(chandarāgavinaya)이고, 그 욕망과 탐욕의 버림(chandarāgappahānaṃ)이다.  

이 인용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 때문에 중생의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과 싸우고, 갖가지 폭력을 낳는다. 폭력에는 전쟁, 살인, 가택 침입, 약탈, 도둑질, 매복 공격, 남의 부인 폭행하기 등이 포함되고, 폭력의 도구는 수없이 많다. 주먹, 흙덩이, 몽둥이, 칼, 화살, 창 등이 그것들이다. 이에 왕들은 폭력 행위자를 붙잡아 처벌한다.

우리는 감각적 쾌락을 향유할 때마다 폭력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인용문이 말하는 대로 감각적 쾌락은 느낌(受, 또는 감정)에서 오고, 사람이 느끼기 위해서는 접촉할 사물이나 사람을 반드시 소유해야 하고, 그 소유를 위해서 경쟁이 필수적이라면, 쾌락에서 폭력이 발생한다는 주장도 충분히 이해된다.

 2) 아래 대화는 붓다와 아난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느낌에서 출발하여 온갖 종류의 악행으로까지 나아가는 인과적 연쇄(連鎖)를 설명하고 있다.

아난다여, 이처럼 느낌(vedana)을 조건으로 갈애(taṇhā)가,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pariyesanā)가, 추구를 조건으로 획득(lābha)이, 획득을 조건으로 판별(vinicchaya)이,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욕탐, chanda-rāga)이,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ajjhosāna)이, 탐착을 조건으로 소유(pariggaha)가,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macchariya)이,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ārakkha)가, 수호를 조건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pāpakā akusalā dhammā)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수호가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는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이 대화에 나오는 인과 연쇄는 느낌에서 출발한 중생이 몽둥이질로 나가는 순서를 보여준다. 먼저 느낌에서 갈애로, 갈애에서 추구로 나가고, 획득, 판별, 욕망, 탐착, 소유, 인색, 수호를 거쳐서 마침내 무기를 드는 데까지 나간다. 그런데 12연기설에 따르면 느낌은 대상과의 접촉에서 일어난다. ‘좋다[快]’는 느낌이 생기면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나 물건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리고 소유하고 수호하는 일은 흔히 폭력이 동원된다. 그래서 소유, 소비, 풍요와 경쟁을 기본 원리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폭력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3) 다음 인용은 개념이나 판단을 수반하는 사량분별과 생각 안에 이미 폭력의 씨앗이 있다고 밝히고 있어서, 말을 해야 하는 인간에게 폭력은 거의 숙명적임을 논한다. 〈삭까(인드라)의 질문〉(《帝釋問經》)에서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께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존자시여,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그 외의 모든 무리들은 비록 ‘증오하지 않고 몽둥이를 들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고 적대감 없이 평화롭게 살리라’고 하지만(averā adaṇḍā asapattā abyāpajjā viharemu averino’ti) 무엇에 속박되어 증오하고 몽둥이를 들고 적을 만들고 적대감을 품고 원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증오나 폭력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묻는 질문에 대해, 경전은 증오심과 폭력(몽둥이질)을 낳는 최초의 원인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 papañca)을 지적하고, 사량분별에서 증오심과 폭력에 도달하기까지 몇 단계를 더 설정한다. 사량분별에서 생각(vitakka)이 나오며, 생각에서 의욕(chanda)이, 의욕에서 호오(piya-appiya)가 나오며, 호오에서 질투와 인색(issā-macchariya)이 나온다. 질투와 인색은 증오, 적대감과 폭력 행위에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질투로 번역된 ‘issā’는 질투 이외에, 선망, 악의, 분노로도 번역되고, 질투가 종종 분노를 낳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보았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량분별 역시 대상과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사량분별을 설명할 때 흔히 인용되는 아래 구절이 그것을 말해준다.

시각과 색(色)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眼識]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사량분별한다.
 
이 구절에 따르면, 시각, 색(대상), 안식, 셋이 있어서 접촉이 되고, 느낌, 지각, 생각, 그리고 사량분별이 순서대로 생긴다. 보통 접촉이나 느낌까지는 언어 이전의 단계이고 지각에서부터 이미 언어가 동원된 상태로 보인다. 이 경전이 사량분별에서 몽동이질을 하는 단계까지 설정한 것을 보면, 불교는 언어 사용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아주 민감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없다면 세속 생활도 출가수행도 불가능하지만, 붓다는 언어 행위는 정기적인 명상에 의해서 순화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터이다.

색성향미촉법: 감각적 쾌락(kāma)의 대상

폭력에 이르는 세 가지 경로 중에서, 첫 번째는 감각적 쾌락을 폭력의 핵심 원인으로 꼽았고, 두 번째는 느낌이 온갖 악행의 출발점이었다. 세 번째는 말하기를 수반하게 되는 사량분별에서 시작하여 증오심과 폭력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었다. 세 경로 모두 시청각 자극이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경전에는 자극을 낳는 여섯 감각 대상들이 가진 위험에 대한 경고가 곳곳에 나온다. 예를 들면, 《상응부경전》의 〈육처품(Saḷāyatana-vagga)〉에서 붓다는 여섯 감각 대상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기분 좋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까마와 연결된(kāmūpasaṃhita)’, 애타게 하는 형상들[色], 시각에 의해 알려지는 형상들이 있는데,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탐착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 악마의 지배를 받는 자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귀에 의해 알려지는 냄새가 있는데 ……코로 의해 알려지는 맛들이 있는데 ……혀에 의해 알려지는 맛들이 있는데 ……신체에 의해 알려지는 감촉들이 있는데 ……마음에 의해 알려지는 법들이 있는데……] 만일 ……시각에 의해 알려지는 형상들이 있는데,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지 않고 악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라고 불린다.

우리는 모양(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촉각 대상(觸), 법(法)으로 된 육처 또는 육진(六塵)들로 둘러싸여 살아간다. 이것들은 각각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육근의 대상이다. 중생에게 육처는 “기분 좋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까마와 연결된’, 애타게 하는” 대상이다. 육처는 우리를 유혹하고 악마의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욕망, 경쟁, 획득과 수호가 폭력으로 나간다는 통찰은 반드시 불교만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홉스, 프로이트, 콘라드 로렌츠 등의 서양학자들에게도 충분히 보인다.

4. 감각적 쾌락 최다의 디지털 시대:     깊은 생각, 공감, 동정심의 상실

디지털 시대 즉 정보사회는 인류 역사상 색성향미촉이라는 감각적 쾌락 대상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시대로 보인다. 그 결과 우리는 아주 산만하게 되었고, 문화는 선정적이고 외설적으로 변했다. 이런 시대의 단초는 20세기 중반에 미디어 혁명이 열었고, 인터넷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의 《천박한 자들(The Shallows)》에 따르면, 이와 같이 산만한 시대는 중세 이래 지난 550년 동안 우리의 지적 생활의 중심을 차지해 온 책조차 이제 변두리로 내몰고 있다.

이 변화는 20세기 중반 라디오, 영화, 오디오, 텔레비전 등 초기 전기전자 미디어가 제공하는 오락물에 우리의 시간과 주의를 빼앗기면서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미디어 혁명은 데스크톱, 노트북, 휴대용 기기 등 컴퓨터가 우리의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고, 인터넷이 글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고 공유하는 수단이 되면서 그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카는 말한다. “넷은 텔레비전, 라디오, 조간신문보다 훨씬 강력하게 우리의 주의를 지배한다.”라고.

카의 이러한 분석이 옳다면, 넷의 반복적 사용은 폭력의 확산에도 기여하는 것 같다. 그것에 따르면, 웹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다 보니, 사람들은 시각적인 초점을 바꾸는 속도가 빨라지고,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감소하고, 건너뛰며 읽는 습관이 배양되었다. 결과적으로 “훑어보고, 건너뛰고, 멀티태스킹을 하는 데 사용되는 신경 회로는 확장되고 강해지는 반면, 깊고 지속적인 집중력을 가지고 읽고 깊이 사고하는 데 사용되는 신경 회로는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다”고 카는 추측하고 있다.

인터넷과 SNS 매체에 대해 사용자들은 습관적으로 신속하게 반응하면서, 고요하고 주의력 깊은 마음을 상실하고, 사람됨과 인간성을 서서히 침식당하고,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카는 이와 같은 고차적인 감정이 ‘본질적으로 느린’ 신경 처리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의 설명에 깊이 공감한다. 사람의 뇌는 물리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빨리 반응하지만, 상대방의 심리적이며 도덕적 상황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카는 여기에서 “인터넷이 우리의 도덕감을 훼손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급”하다고 하면서도 넷이 성찰의 힘을 감소시킨다는 점은 시인했다. 넷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깊은 생각이나 성찰의 힘, 공감과 동정심이 줄어든다면,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개연성은 높아질 것이다. 한국의 시민 중생이 보여주는 세계적 수준의 악성 댓글은 세계 최고 수준의 IT 산업, 세계 제1위의 가구 인터넷 보급률(96.8%, 2010년)과도 분명히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봐서 카의 우려는 미국보다 한국에 훨씬 더 잘 맞는 것 같다.

검붉은 세계

‘까마와 연결된’ 행위 중에 가장 위험한 행위는 무엇일까? 색과 소리 등의 자극에 대해 우리의 반응이 가장 뜨거운 행위, 곧 뇌의 수많은 뉴런(신경세포)에 불꽃이 가장 많이 이는 성행위일 것이다. 그래서 초기 율장의 하나인 《십송률》에서는 성행위를 “결박근본부정악업(結縛根本不淨惡業)”이라고 불렀다. 사람을 결박하고 더럽게 만드는 행위 중에 성행위가 근본이라는 뜻이다. 

열반은 쾌락이나 증오심에 의해서 뉴런이 흥분되는 것이 최소화된 상태이고, 오관에 자극이 전혀 없는 ‘맑은 의식’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데서 성취된다고 해보자. 열반을 가져다주는 명상의 관점에서 보면, 명상에 비교적 가까운 것이 경청이나 독서이고, 그다음이 말하기, 그보다 더 먼 것이 인터넷에 몰입하는 것, 가장 먼 것은 성행위일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누리꾼들이 시청각 이미지를 즐겨 받아먹고, 흥분하고 취하여 뉴런에 불꽃이 많이 일면 일수록, 이는 욕정을 자극하는 선정적(煽情的)인 것이 되면서 성적 쾌락을 닮아간다. 말하기는 독서보다 사람의 공격성을 더 쉽게 자극하는 것 같다. 그래서 크게 신장된 언론 자유와 인터넷 사용의 증가는 거짓말 유포, 욕설과 막말의 확산과 관계가 깊다.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반드시 평화적인 인격일 것이다. 성관계의 색이 새빨간 색이라면, 명상 상태는 붉음이 최소화된 상태일 것이다.

앞에서 탐욕이나 음란(라가나 까마)에 색이 있다면 붉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지극히 역동적인 한국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붉음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 역사학자이면서 서양의 상징 전문가인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 1947~ )는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를 다룬 책에서 맨 먼저 빨강의 상징적인 의미를 논하고 있다. 그는 빨강이 거의 언제나 피와 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기독교 문화에서 피의 빨강은 생명을 부여하고, 더러움을 정화시키며, 영혼을 성스럽게 한다고 한다. 반대로 나쁜 피의 빨강은 불순, 폭력, 죄의 상징이고, 분노, 더러움, 죽음의 상징이다. 적어도 서양에서 빨강에는 성령의 빨강과 같이 태양처럼 휘황찬란함, 따뜻함, 비춤을 나타나는 것도 있고, 그 반대로 악마의 빨강, 즉 불태우고 상처 주고 파괴하는 지옥의 불꽃 같은 빨강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聖)과 생명의 빨강이 아니라 대립과 분노, 폭력, 죽음의 빨강을 생각해보자.

대립과 폭력을 상징하는 붉음은 동지와 적을 선명하게 나누는 ‘정치색’이다. 애국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 조각 붉은 마음’이 가진 분열의 열정은 우리 편이나 우리 민족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다른 민족에게는 배타성과 편협성을 보이면서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다. 수많은 나라의 국기에 붉음이 들어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국민, 국가는 국민이나 민족의 붉은 피와 열정을 먹고 산다. 열정이 너무 뜨거우면 우리는 이기고 싶은 적의 정체, 책략, 계산법도 파악하지 못한다. 2012년 총선 때 새누리당은 빨간색, 민주통합당은 노란색, 통합진보당은 보라색을 상징색으로 각각 선택했지만, 색깔과 관계없이 분열, 대립, 열정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까마의 붉은색을 닮아 있다.

이러한 붉음과 상반되는 색이 있다면 파랑일 것이다. 파스투로의 설명에 따르면, 파랑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색이고 우주, 하늘, 대기의 색이다. 성모 마리아의 색, 공격성이 없는 애정의 색이고 평화의 색이며, 따라서 대규모 국제조직을 상징하는 깃발의 색이다. 그런데 열반의 색은 무슨 색일까? 무색일까, 아니면 파랑이나 회색이나 흰색에 가까울까? ‘색즉시공’은 붉음에서 파랑과 같은 색으로 가자는 주문으로 볼 수 있다.

5. 현대 소비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비판

디지털 시대는 현대 소비사회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소비사회를 지극히 비관적으로 보는 사상가로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가 있다. 그에 따르면, 소비주의가 만연하고 잘 보호받고 있는 현대사회에는, 인간의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은 사라지고 사물과 같은 것만 남게 되고, 폭력은 널리 퍼져 있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 그 신화와 구조》의 마지막 장을 〈풍요 사회의 아노미〉로 명명하고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소비사회, 그것은 배려의 사회인 동시에 억압의 사회이며, 평화로운 사회인 동시에 폭력사회이다.” 그에 따르면, 이 폭력은 풍요와 나란히 가고,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함께 분석해야 한다. 풍요와 연결된 폭력은 ‘목표도 없고 대상도 없는데(sans fin et sans objet)’ 스톡홀름의 청년 집단 사건, 몬트리올의 폭동, 로스앤젤레스의 집단살인 사건 등을 그 사례로 제시한다. 그는 풍요와 성장 자체가 이미 강제와 억압을 낳는다고 본다.

만일 풍요(성장)가 강제라면 이 폭력도 저절로 이해될 수 있으며 풍요의 논리적 귀결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 폭력이 거칠고, 대상이 없고, 무형식인데, 그 이유는 그 폭력이 도전하는 강제들 자체가 무형식이고, 무의식적이고, 막연하기 때문이다. 그 강제들은 ‘자유’라는 강제, 관리된 행복을 획득하도록 하는 강제, 풍요라는 전체주의적 윤리의 강제이다.

이와 같이 풍요라는 강제가 모든 유형의 폭력을 낳고, 아노말리, 우울 상태, 또는 도피 등의 간접적인 증상도 낳는다. 보드리야르는 풍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풍요 사회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폭력은 “빈곤, 궁핍화, 착취에서 생겨나는 폭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데, “이 폭력은 필요(besoin)가 가진 철저한 긍정성에 의해서 생략되고 은폐되고 검열당한 욕망(désir)의 부정성이 행위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밖에 없는 필요는 욕망의 부정성을 생략하고 은폐하고 검열하지만, 이 부정성은 어느 순간 행위로 나타나서 폭력이 되고 만다. 이 폭력은 “생산성과 소비성이라는 지상명령을 거부하는 파괴성(죽음의 충동)이 드러난 것”이고, 이를 떠맡을 관료기구는 없다. 삼독이라는 불교 술어를 빌리면, 우리 사회에 널리 펴져 있는 필요, 생산, 소비, 풍요에 대한 욕망[貪]은, 지상명령이나 강제가 되어서 폭력[瞋]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눈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아노미 현상 이외에도 미국에 나타난 LSD 환각제, 플라워 파워(히피족), 선(禪), 팝 뮤직 등이 이런 풍요와 안정,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사회의 거부로 비쳤다. 하지만 이것들은 현대 사회 질서 전체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의 변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는 소비사회의 진정한 대안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이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소비사회의 풍요는 우리 사회에 아래와 같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아래 인용에서 ‘사물’이라는 개념이 특히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사물(또는 객체, objects),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의해 이루어진 소비와 풍요라는 놀랍도록 선명한 사실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인류의 생태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풍요 시대의 인간들은 지금까지의 어떤 시대와도 달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인간들의 일상적인 교류는 더 이상 동료 인간들과의 교류가 아니라, 통계상으로는 증가곡선을 그리면서 재화 및 메시지의 수용과 조작과의 교류가 되고 있다.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는 이 ‘사물’은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기분 좋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쾌락과 연결된, 애타게 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다.

보드리야르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소비사회를 더욱 철저히 비판하면서, 소비 위주의 포스터모던 사회를 사물(또는 객체) 패권(supre-macy of objects)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는 〈사물의 패권〉이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우리는 항상 주체(subjects)의 영광과 객체(또는 사물 objects)의 빈곤에 의지해서 살아왔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주체이고,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도 주체이다. 개인적 주체 또는 집단적 주체, 의식의 주체, 무의식의 주체, 그리고 모든 형이상학의 이상은 세계 주체의 이상이다. 주체성으로 가는 왕도에서 객체는 오로지 우회 도로에 불과하다. ……욕망에 대한 우리의 철학에서는, 주체는 절대적 특권을 보유한다. 욕망하는 것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혹을 생각하게 되면, 만사가 역전된다. 욕망하는 것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유혹하는 것이 객체이다. 만물이 유혹에서 시작하므로, 만물은 객체에서 와서 객체로 돌아간다. 주체의 태곳적부터의 특권은 전복되었다.
 
디지털 시대는 ‘사물의 패권’ 시대이고, 사물이라고 부르든 객체라고 부르든 쾌락의 대상이 강력하게 횡행하는 시대이다. ‘사물 패권’의 시대에 주체는 “세계를 일관성 있게 표상할 수 없고” “오늘날 어느 누구도 세력, 지식, 역사의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 “가능한 유일한 입장은 사물의 입장이고, 유일한 책략은 사물의 전략”인 국면에 도달했다고 한다.

불교의 무아설은 욕망의 주체나 쾌락의 향유자로서의 주체를 부인한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사물 패권론은 사물의 유혹 앞에 지식의 주체나 역사의 주체 같은 것을 부정하고, 동시에 세계를 표상하고 역사를 선도하는 행위자로서의 주체를 내세우는 모든 형이상학을 버렸다. 이제 포스트모던의 극치에 이른 것이다.

 결론: 세상을 파랗게 만들 수 있을까?
 
붓다는 중생의 일상생활에 폭력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 주요 원인으로 감각적 쾌락, 느낌, 사량분별을 지목했고, 삼독의 불을 줄이거나 끄기 위해 계율과 명상을 처방했으며, 그 최종적인 수행 목표로 열반을 제시했다. 오늘날 인도 당시보다 쾌락의 대상은 무한정 늘어났다. 쾌락과 폭력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초기불교의 통찰은 우리 사회의 범죄와 자살의 증가, 심각한 학교폭력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우리 사회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소비사회,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곳,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쾌락의 대상을 무수히 생산하는 곳이다. 메시지, 정보, 패션, 여행, 하이퍼리얼리티와 같은 사물들이 색성향미촉법의 모습을 하고 TV, 인터넷, SNS 매체, 영화, 신문 등 온갖 종류의 매체를 통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취하게 하고 흥분시키고 마침내 붉게 물들이는 곳이다.

현대의 정보사회는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수많은 사물들이 강력한 힘으로, 항상 인간의 의식을 위협하고 수시로 침투해 온다. 세계의 저편에서 일어난 일도 정보고속도로를 통하면 오늘,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을 더럽힐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상의 모든 정보는 나에게 잠재적인 유혹자이고 권력자이다. 정보사회의 목표가 미디어를 무한히 확장하여 우리의 의식 공간을 온갖 정보로써 가득 채워,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까마의 대상을 무한히 공급하여 소비하게 하는 사회라면,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이행은 진보라고 하기 어렵다. 

인터넷은 이제 우리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고, 예외자를 찾기 어려울 만큼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띠면서 우리의 두뇌까지 변화시키고,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을 크게 훼손한다고 했다. 그래서 넷 시대는 디스토피아(dystopia)로 보인다. 개개인이 더욱 사악해졌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PC, 인터넷, 휴대전화, 태블릿 PC 등이 우리를 산만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탐욕이나 증오심을 표출할 기회는 더 많아지고 그 수단은 아주 편리해졌다는 의미에서이다. 참으로 우려할 만한 일은 소비사회에서 인간 주체의 모든 기획이 불가능해졌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대로 지식의 주체도 역사의 주체도 사라졌다면, 갈퉁이 ‘권력과 자원의 공평한 분배’로 이해한 사회 정의를 이룩할 길이 없음은 물론 구조적 폭력의 전모를 파악할 수조차 없게 된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붉은 까마와 검은 폭력을 줄일 수 있을까? 소비사회와 정보사회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쾌락의 감소, 법치의 확립, 자기 교육 등이 있다. 쾌락의 감소는 엄격한 사회 통제와 자유의 제한을 의미하므로, 이는 정치경제학의 영역이고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남은 방법의 하나는 쾌락의 탐닉에서 폭력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끊는 것, 즉 수범수제(隨犯隨制)의 정신으로 법을 제정하는 길이 있다. 하지만 불교도로서 더 중요한 일은 자기를 교육하는 것, 즉 명상을 통하여 감각적 자극을 줄이고, 사물의 유혹을 극복하고 말도 순하게 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되고, 역사의 유연한 주체로서 내 안에 먼저 평화를 이루고 그것을 세상에 돌려주는 일이다. 이렇게 자기를 교육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실천하는 일이 아닐까?

파랑이나 하양을 평화와 순진무구의 색이라고 해보자. 어린 시절 다음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의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잃어가며 점점 오염된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입시 경쟁이 주는 강제와 스트레스 그리고 넷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연애라도 하게 되면 본격적인 쾌락을 맛보면서 심신은 더 붉어지고, 어른이 되면 돈벌이, 선명한 정치적 이념과 일편단심 애국심으로 새빨개진다. 여름엔 파란 하늘을 보고 겨울엔 하얀 눈을 보자.

“세상을 파랗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세상과 자신의 해방이 가능한가의 질문이다. ■
 

허우성 /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하와이대학교 철학박사. 현재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소장, 《철학과현실》 편집위원,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장

 허우성 woohuh@hanmail.net

동아시아 속의 한국 불교 사상가

동국대학교 - 불교문화연구원

제목2011년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 속의 한국 불교 사상가”
등록일2012.07.30첨부파일

구 분

내 용

제목

동아시아 속의 한국 불교 사상가

일시

2011년 12월 23일(금) 10시 ~ 18시

장소

대한불교조계종 역사문화기념관(조계사 경내)

주최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원장 김종욱), 인문한국(HK) 연구단

후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일정

 

1. 기조발제: ‘Korean Buddhist Thought in East Asian Context

발제로버트 버스웰(미국, UCLA)

2. 주제: ‘원효의 화쟁론과 종밀의 원융설

발표양웨이종(중국남경대 교수)

3. 주제: ‘동아시아 화엄사상에서 의상과 법장의 위상

발표김천학(한국금강대 교수)

4. 주제: ‘원측과 규기신라 유식과 당대 유식의 동처와 부동처

발표고영섭(한국동국대 교수)

5. 주제: ‘승랑과 승조

발표김성철(한국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6. 주제: ‘지눌과 도겐남송·고려·일본 13세기의 동아시아 선종

발표나카지마 시로(일본하나조노대 교수)

7. 주제: ‘제국에 맞서기니시다와 만해

발표허우성(한국경희대 교수)

독도를 누가 지킬 수 있나 군인인가, 시인인가? 2008

미디어붓다


 Home  종합  Top뉴스
 
독도를 누가 지킬 수 있나
군인인가, 시인인가?

2008-08-14 (목) 00:00

이학종 | urubella@naver.com


허우성 교수(경희대)가 ‘재미있는’ 제목의 논문 한 편을 썼다. 어쩌면 재미라는 표현보다는 ‘의미심장한’, 아니면 ‘튀는’ 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논문의 제목은 ‘누가 독도를 지킬 수 있을까. 시인인가 군인인가?’다. 일단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사실 이 제목이 기자가 이 논문을 읽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허 교수의 발제는 관념적이고 감정적이고,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는 결코 독도를 지킬 수 없으며, 반드시 일정한, 적어도 자기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세력을 갖추어야 함을 만해의 일관된 소신과 입장을 통해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논문이 시인들이 만해마을 옆을 흐르는 하천의 돌들 만큼이나 많이 운집한 만해축전의 ‘21세기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됐으니, 허 교수의 이 못말리는 ‘튐’은 용기인가 만용인가?

허 교수는 한 발 더 나아가 ‘국가’편에서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자고 주장한 이래 시인의 역할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플라톤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 시인들의 감상적 안일함을 논박한다.

“진리에 비해 저열한 것을 제작함으로써 그(시인)도 화가와 같으며, 혼의 최선의 부분이 아닌 같은 수준의 (저열한) 부분과 함께 지냄으로써 이 점에서 닮게 되네. 이래서, 훌륭하게 다스려질 국가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이제 정당하게 되었는데…”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을 대변해 시인을 ‘화가처럼 실재 이하의 것을 제작하고 혼의 저열한 부분을 일깨우고 강화하면서 이성적인 부분을 파멸시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은 측정하는 것, 계산하는 것, 계량하는 작용에서 부족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지적 능력이 모자라다는 것인데, 사람의 혼에도 최선의 부분, 곧 이성적 부분으로 헤아리는 기능이 있고, 이것이 개인에 있어서나 국가에 있어서나 다른 저열한 부분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민감한 대목을 논문에서 소개한 허우성 교수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막연한 절창만 나열할 것이 아니라 근현대 최고의 시인 만해가 주창한 것처럼 세력의 중요성을 오늘날의 적지않은 시인들이 간과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파헤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허 교수는 예서 그치지 않고 2005년 역시 독도문제가 불거졌을 때, 독도를 찾아간 시인들의 모습을 자신의 논문으로 불러들인다.

“동해바다에 있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 2005년 한국의 시인들은 떼를 지어 배를 타고 독도를 둘러보고 시집 한 권을 남겼다. 강은교 외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인들이 펴낸 이 시집의 제목은 『내 사랑 독도: 독도 바위를 깨면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문학세계사)이다. 이 시집에서 민족시인 고은을 비롯해 강은교, 신경림 등 시인 44명은 이구동성으로 독도사랑을 외치고 있다. 시인들이 독도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우리 땅, 조국, 우리의 혼, 겨레, 막내 자식, 아기, 혈육, 피, 국토의 분신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는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마치 주석처럼 덧붙인다.

“한국의 시인들은 신체의 일부인 독도를 지키자고 민족감정을 부추기고 의분과 용기를 일으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태부족이다.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교술과 해군술의 강화도 요구했어야 했다. 독도가 우리 자체의 일부임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지킬 만한 세력을 양성할 대책도 수립했어야 했다. 의분만으로 그치게 되면, 그것은 자칫 우리에게 실제로 없는 힘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파토스만 부추기고 계산하고 따지는 이성적인 부분은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런 시인은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허우성 교수는 결론을 내리는 부분에서 다시 만해를 끌어들인다.

“망국에 대한 만해의 울분과 한은 깊었다. 그는 조선이 패배자가 된 일에 대해서도, 그런 처지를 견디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끓어오르는 통분을 억제하지 못했다. 만해는 조선인에게 자유의 수호신인 세력이 없었으므로, 자유와 생명 그리고 민적(民籍)에의 권리를 빼앗겼다고 보고, 민족이 자신의 독립 국가를 세우고 영위해 나가는데 필수적인 세력을 갈망했고, 세력의 상징적 인물로 전략과 전술이 특출한 이순신과 을지문덕을 내세우기도 했다.”

요즘 만해를 계승한다고 하는 자들은 생명과 평화가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세력의 필요성에 대해 별로 발언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한 허 교수는 “생명과 평화는 칭송하는 것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오늘날 만해를 계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단정한다.

허우성 교수가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쓴 문장은 어쩌면 해당되는 시인들에 대한 뼈아픈 할과 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기사를 맺는다.

“만해에게 강자와 채권자의 권리주장이 만들어 내는 인과의 힘은, 한겨울에 살을 에어 낼 것처럼 휘몰아치는 북풍과도 같았다. 만해는 그것을 절절히 느끼면서 동양 평화를 위해서라도 자기를 보존할 만한 세력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강자들이 힘으로써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앗아가기 전에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나중에 망국의 한을 품거나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것보다 백번 나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물어보는 것이다. 누가 독도를 지킬 수 있을까, 시인인가 군인인가? 그런데 오늘날 야만적 문명이 정말 끝이 났다면, 시만 읊어도 된다.”

우리는 얼마나 옹졸한가 허우성

[기고] 우리는 얼마나 옹졸한가

오피니언
시론·기고
[기고] 우리는 얼마나 옹졸한가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명예교수·비폭력연구소장
입력 2019.05.07

티베트의 현대사는 비극적이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략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는 점령과 탄압은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보다 더 잔인해 보인다.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1935~ )는 중국의 침략 이후로 100만명 이상의 티베트인이 중국 정부가 실시한 정책의 결과로 죽었다고 했다. 그는 195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자유 투사들에게 가한 잔혹 행위에 대해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십자가형, 생체 해부, 희생자들의 창자를 들어내거나 손발을 자르는 일은 보통이었다. 심지어 머리를 베거나 태워 죽이고, 죽을 때까지 때리거나 산 채로 매장하기도 했다." 출가 승려에 대한 추악한 성적 고문도 기록하고 있다.

민족주의자라면 대개 이런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분노와 적개심에 불타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를 원수로 규정하기 쉽다. 그리고 중국의 압제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한 저항군을 의사(義士)로 추앙하고, 압제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한 100명 이상의 승려나 청년들의 혼을 높이 기릴 것이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사뭇 다르다. 자서전에 슬픔은 있는데 분노가 안 보인다. '간디에 대한 찬사'라는 제목의 노벨상 수락 연설(1989년)에서도 그는 중국의 압제는 비판하면서도 다음의 기도로 연설을 마치고 있다. "나는 억압자와 친구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위해, 인간적인 이해와 사랑을 통해 좀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데 우리 함께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적대감이나 분노 없이 티베트의 참상을 세계에, 그리고 중국의 선량한 인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자서전을 썼다고 했다. 그에게 기록은 미래를 위한 것이지, 과거사에 대한 분노나 청산, 복수심 때문이 아니다.

그는 놀랍게도 때때로 중국 관리들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분노, 의심,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나의 사랑, 나의 자비, 나의 용서를 주었다"고 했다. 그에게 용서는 가해자가 반성하고 난 다음에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는 거다. 이런 사랑과 자비의 기술법은 불교에서 온 것이다. 그는 민족의 생존보다 티베트 영적 전통, 즉 불교 문화를 더 중시하고 있다. 중시하는 이유는 특히 그 문화를 말살하려는 중국인들을 위해서라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불교를 세상에 다시 한 번 알렸다.

현대 한국인은 이제 일본을 가리키며 '우리'에 포함할 수 있을까? 달라이 라마에게 묻는다면 파안대소하며 '일본과의 갈등은 주로 과거사에 관한 것이고, 침략도 억압도 없는 지금, 함께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반문할 것 같다. 민족주의라는 문화 유전자가 강고한 이유는 생존 욕구 때문일 거다. 하지만 평소에 이웃과 화평을 유지하는 것도 생존에 이롭다. 한국 정부가 비자 발급을 해주지 않아서 오지 못하는 달라이 라마를 생각하며 우리 마음이 좀 넓어진다면,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내 안의 화(火)를 돌보고 안아주라 / 허우성 - 불교평론

내 안의 화(火)를 돌보고 안아주라 / 허우성  - 불교평론
화 : 마음의 불꽃을 식히는 지혜
내 안의 화(火)를 돌보고 안아주라 / 허우성
기자명 허우성   입력 2022.09.24 
추모 특집 / 틱낫한(釋一行) 스님

— 틱낫한 스님이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

필자는 틱낫한 스님(1926~2022)을 오래전에 친견한 적이 있다. 1980년대 중반 하와이대학 유학 시절 캠퍼스 강당에서 스님의 강연을 듣고, 그 직후 스님이 베트남 난민들의 처소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잠시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이 모두 명절을 맞이하는 아이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마냥 싱글벙글하며 그를 환대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이란! 옆에서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하나의 경이였다. 아,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저렇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니! 

이제 그분이 떠나셨다. 

필자는 그의 여러 책을 읽어보았고 The Sun My Heart를 《마음모음》(2004, 나무심는사람)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한 적도 있다. 여기서는 Anger: Wisdom for Cooling the Flames(2001, Riverhead Books, New York)에서 몇 부분을 골라서 번역 소개한다. 각자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화, 증오, 원한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줄여보자는 의도다. 번역하면서 행복했다.


당신은 여전히 고통과 화의 기슭에 서 있다. 왜 당신은 이쪽을 떠나 저쪽 기슭으로, 화가 없는 평화와 해탈의 기슭으로 건너가지 않는가? 그곳이 훨씬 더 즐겁다. 왜 몇 시간, 하룻저녁, 심지어 며칠 동안 화를 내며 지내는가? 당신을 피안으로 재빨리 건네줄 수 있는 배도 있다. 그 배는 바로 알아차림의 호흡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찾고 고통, 화, 우울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것들을 향해 미소를 짓게 하는 수행이다. 우리는 이렇게 고통을 극복하고 피안으로 건너간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행복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자유다.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화 · 절망 · 질투 · 미망이라는 정신적 상태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 이 독(毒)이 우리 마음에 있는 한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님을 배운다. 우리의 몸은 마음이고, 동시에 마음은 몸이다.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으니, 화는 정신적 실재만이 아니다. 불교에서 몸과 마음의 형성을 나마루파(名色)라 부른다. 그것은 심리 · 신체(psyche-soma)라는 한 물건이다. 동일한 실재가 때론 마음으로 때론 몸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화, 좌절, 절망은 우리의 몸 그리고 먹는 음식과 관련이 크다. 화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먹고 소비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 식사는 문명의 단면이다. 우리가 음식 재료를 만드는 방식, 음식의 종류, 먹는 방식은 문명과 많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택은 평화를 가져오고 고통을 덜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음식 안에 화가 들어가 있기도 하다. 우리가 광우병에 걸린 동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속에 화가 들어 있다. …… 우리는 달걀이나 닭고기를 먹을 때 거기에도 화가 많이 들어가 있음을 안다. 화를 먹으니까 화를 낸다. 오늘날 닭은 걷거나 뛸 수도 없고 흙 속에서 먹이를 찾을 수도 없는 대규모 현대식 농장에서 사육되고 있다. …… 그들은 좁은 닭장에 갇혀서 꼼짝도 못 한다. 밤낮으로 서 있어야 한다. …… 닭들은 화가 나 있다. …… 우리는 먹는 음식으로 화를 키울 뿐만 아니라 눈과 귀와 의식을 통해 소비하면서도 화를 키운다. 문화상품의 소비도 화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소비 전략을 세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잡지에서 읽는 것,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에도 독성이 있다. 그 안에 화와 좌절이 들어 있다. ……신문 기사, 심지어 대화에 화가 많이 들어 있기도 하다.

화가 나면 당신 자신에게 돌아가 화를 잘 보살펴라 ……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하지 마라. …… 집에 불이 나면 가장 급한 일은 집에 불낸 방화범으로 보이는 사람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 불을 끄는 것이다. …… 당신이 그를 쫓는 동안 집은 홀랑 타버릴 것이다. …… 따라서 화가 났을 때 다른 사람을 계속 상대하거나 말다툼하거나 벌주려고 하면, 모든 것이 화염 속에서 타는데 방화범을 쫓아다니는 사람과 똑같아진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속의 불을 끌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를 주셨다. 즉, 알아차림 호흡과 알아차림 걷기, 화를 안아주는 방법, 우리 생각의 본성을 깊이 들여다보는 방법, 그리고 다른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사람도 아주 괴로워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들은 매우 유용하며 부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것이다.

화는 아파서 울부짖는 아기와 같다. 아기는 아기를 안아줄 엄마가 필요하다. 당신은 당신의 아기인 화의 어머니다. 알아차림 호흡의 수행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아기를 안아주는 어머니의 에너지가 생긴다. 화를 안아주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기는 즉시 편안해진다.

저 엄마는 누구인가? 살아계신 부처님이시다. 알아차림의 능력, 이해하고 사랑하고 돌보는 능력은 우리 안의 부처님이시다. 우리가 알아차림을 할 수 있을 때마다, 그것은 정말로 우리 안의 부처님을 만든다. 당신 안에 부처님이 있으면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 당신 속의 부처님을 살아 있게 하는 방법을 알면 만사형통이다.

당신의 화는 꽃과 같다. 처음에는 화의 본성도 원인도 모른다. 그러나 알아차림의 에너지로 그것을 안아주는 방법을 안다면 화는 자신을 열기 시작한다. 당신이 좌선을 하거나 호흡을 따라가거나, 걷기 명상을 하면 알아차림의 에너지가 생겨서 화를 안아줄 수 있다. 10∼20분이면 당신의 화는 당신에게 자신을 연다. 그러면 당신은 홀연 당신이 내는 화의 진정한 본성을 보게 될 것이다. 화는 단지 잘못된 생각이나 미숙함 때문에 일어났을 수 있다.

화가 나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당신의 모든 고통에 대해 상대를 비난한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당신 안에 있는 화의 씨앗이 고통의 주요 원인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우리 모두의 의식 깊은 곳에 화의 씨앗이 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화의 씨앗이 사랑이나 자비의 씨앗보다 더 큰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과거에 수행을 하지 않아서 화의 씨앗이 더 클 수 있다. 우리가 알아차림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면, 우리가 얻는 첫 번째 통찰은, 우리의 고통과 불행의 주된 원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화의 씨앗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고통에 대해 그 사람을 비난하기를 멈춘다. 상대방은 부차적인 원인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부처님은 결코 우리에게 화를 억제하라고 조언하신 적이 없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으로 돌아가 화를 잘 돌보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내장, 위장, 간과 같이 우리 몸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멈추고 몸을 잘 관리해야 한다. ……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화나지 않은 척하지 마라. 고통받지 않는 척하지 마라. 상대가 당신에게 귀한 사람이면, 당신은 화가 났고 괴롭다고 고백해야 한다. 조용히 그에게 말하라.

화는 우리 안의 에너지 지대이면서 우리의 일부다. 우리가 돌봐야 하는 아픈 아기다. 가장 잘 돌보는 방법은, 화를 안아주고 돌볼 수 있는 또 다른 에너지 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에너지 지대가 알아차림의 에너지다. 알아차림은 부처님의 에너지다. 우리는 그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고, 알아차림의 호흡과 걷기를 통해서 그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우리 속의 부처님은 그저 이론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재다. …… 에너지 지대 1은 화, 에너지 지대 2는 알아차림이다. 수행이란 알아차림의 에너지로써 화의 에너지를 인지하고 안아주는 거다. 폭력 없이 부드럽게 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화를 억누르는 행위가 아니다. 알아차림도 당신이고 화도 당신이므로, 스스로를 이들이 서로 싸우는 전쟁터로 만들면 안 된다. 알아차림은 선하고 옳고, 화는 악하고 틀렸다고 믿지 마라. …… 화는 부정적인 에너지이고 알아차림은 긍정적인 에너지라는 점만 인정하면 된다. 그런 다음 부정적인 에너지를 돌보기 위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자아는 비아(非我)의 요소로 구성된다. …… 당신 자신 안에는 조상, 지구, 태양, 물, 공기, 당신이 먹는 모든 음식 등,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비아적 요소가 아주 많다. 이것들이 당신과 별개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들이 없으면 당신은 살 수 없다. 싸우고 있는 두 당사자들이 협상을 원하고, 양측이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자. 상대 정당, 상대의 나라, 상대 국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 자신의 나라, 자신의 정당, 자신의 사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아와 타자는 별개가 아니다. 왜냐하면 양측의 고통, 희망, 화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비와 비폭력으로써 행동할 때, ‘둘이 아님(不二性)’에 근거하여 행동할 때, 당신은 아주 강해야 한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화가 나서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처벌하거나 비난하지도 않는다. 당신 안에서 자비심이 계속해서 성장하니 불의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단신이었다. 그에게는 폭탄도 총도 정당도 없었다. 그는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둘이 아님’의 통찰력, 자비의 힘에 따라 행동했다. 

알아차림의 에너지에는 통찰의 에너지와 집중의 에너지 두 가지가 있다. 집중은 우리를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주목하게 한다. 집중하면 보는 에너지는 더 강해져서, 통찰이라는 돌파구를 만들어낸다. 통찰은 항상 당신을 해방시키는 힘이 있다. 알아차림이 있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방법을 안다면 집중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집중을 유지하는 방법을 안다면 통찰도 생긴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인지하고, 안아주고, 완화시킨다. 알아차림은 깊이 들여다보게 해서 통찰을 얻게 해준다. 통찰이 해방의 요인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변화시킨다. 이것이 화를 다스리는 불교 수행법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의식 깊은 곳에 화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그 씨앗에 싹이 트지 않으면 …… 당신은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 당신은 미소 짓고, 웃으며,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화가 당신 안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는 당신의 마음 의식에 나타나지 않았어도, 항상 당신의 장식(藏識) 안에 있다. 누군가가 당신 안에 있는 화의 씨앗을 건드리는 행동이나 말을 하게 되면, 화는 재빨리 거실에 나타난다. 선한 수행자는 화나 괴로움이 완전히 없어진 사람이 아니다. 이건 불가능하다. 그는 화와 고통이 생기자마자 이것들을 잘 처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 당신은 당신의 화를 돌보기 위해 알아차림의 씨앗을 초대한다. 알아차림의 호흡과 걷기는 여기에 도움이 된다.

 


최근 미국에서 대학 교수 한 사람이 플럼빌리지에 왔다. 그는 토머스 머튼과 나에 대한 책을 몹시 쓰고 싶어 했다. …… 나는 즉시 말했다. “왜 당신은 당신 자신에 관해 책을 쓰지 않습니까? …… 그것은 머튼과 나 자신에 대한 책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는 “아직 아무도 당신에 관한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나에 관한 책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당신이 당신 자신에 관한 책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자신을 불법(佛法)과 수행의 도구로 바꿔서 자유인,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책을 쓰세요. 그러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설거지나 상추 재배와 이어져 있다. 수행이란 깊은 알아차림과 집중으로 일상의 매 순간을 사는 법을 배우는 거다. 예술 작품의 구상과 전개는 정확하게 이와 같은 우리 일상의 수많은 순간에 일어난다. 음악이나 시를 쓰기 시작하는 시간은 아기를 분만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아기를 낳자면 아기가 이미 당신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 안에 아기가 없다면 책상 앞에 여러 시간 앉아 있어도 분만도 생산도 불가능하다. 당신의 통찰과 자비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쓰기 능력은 당신의 수행 나무에 피는 꽃이다. 이러한 통찰과 자비심이 꽃피울 수 있도록 우리는 일상의 매 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많은 불교도들이 매일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지혜에 대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당신이 쓴 것도 하나의 《반야심경》이다. 다른 보살이나 부처님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경이기 때문이다. …… 부디 자신의 《반야심경》을 지어 거룩한 장소에 보관하자. 그 경전을 자주 외도록 하자. 그러다가 화가 당신을 덮치고 당신이 제대로 화를 안을 수 없을 때 당신의 《반야심경》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을 집어 들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독송하자. 그러면 당장 자신으로 돌아올 것이며 고통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당신 스스로의 《반야심경》을 읽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수행자는 정말로 어머니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고 인류와 세상에 뭔가를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안에 아기, 즉 아기 부처를 품고 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의 아기 부처다. 우리는 아기 부처를 잘 돌보기 위해 알아차림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진실한 러브레터를 쓰고 다른 사람과 화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처님의 에너지다. 진실한 러브레터는 통찰, 이해심, 자비로 쓰인다. 그렇지 않으면 러브레터가 아니다. 진실한 러브레터는 상대방 안에 변화를 이루고, 그래서 세상에 변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안에 변화를 이루기 전에, 당신 안에 먼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당신은 한평생 편지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

 


허우성 woohuh@hanmail.net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하와이대 철학박사. 저서로 《근대 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과 역서로 데이비드 로이의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문명 정치 종교(마하트마 간디의 도덕 정치사상)》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명예교수,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소장. 본지 편집위원.                              

 

 허우성 woohuh@hanmail.net
 ===
이전
다음
  • 화 : 마음의 불꽃을 식히는 지혜

틱낫한 스님의 『화』가 20여 년 만에 새롭게 선보인다. 틱낫한 스님 하면 『화』(초판 2002. 4. 3)가 연상될 정도로, 이 책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대중적인 문체나 용어로 번역하면서, 고유의 색깔, 즉 불교적인 정체성을 잊어버린 측면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대표적인 예로, 원서의 mindfulless는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마음챙김’ 혹은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를 ‘자각’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이번 번역본은 이런 점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 철저히 원서에 근거하여 번역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즉 원서의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도 신경을 쓰면서 번역에 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플럼빌리지에서 수행하고 있는 한국 스님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번 번역본이야말로 틱낫한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온전히 담고 있다고 하겠다.
저자 및 역자소개
틱낫한 (Thich Nhat Hanh) (지은이)  
1926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살 때인 1942년 베트남 후에(Hue)에서 조금 떨어진 뚜 히에우(Từ Hiếu) 사원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전 세계를 돌며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 정부에서 귀국 금지 조치를 당했지만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1982년 프랑스 서남쪽에 있는 보르도 근처에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라는 작은 명상 공동체를 세웠다. 이후 파리 근교와 독일, 미국, 홍콩,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베트남 등에도 플럼 빌리지가 세워지는 등 세계적 명상 공동체가 되었다. 현재 700여 명 가량의 스님들이 플럼 빌리지 전통에서 출가하여 공동체 안에서 수행하고 있으며, 일반인에게도 수련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스님은 지난 2014년 가을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2018년 치료를 위해 태국을 방문한 후 고향인 베트남으로 향했다. 하지만 스님은 이후 회복하지 못하고 지난 2022년 1월 21일(베트남 시각 기준) 세납 96세로 입적했다. 스님의 다비식은 2022년 1월 29일 베트남 뚜 히에우 사원에서 진행됐다. 코로나 유행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승려와 일반 신도 수만 명이 참여했으며 세계 각국에서는 온라인으로 다비식이 중계됐다. 다비 후 수습된 유골은 뚜 히에우 사원과 전 세계 플럼 빌리지에 나눠 뿌려졌다. 접기
캐나다 퀸즈대학교 심리학과 박사과정의 비교문화심리 분야에서 도덕성 및 인지적 편향 등을 연구했다. 미국 UC버클리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역서로 《표정의 심리학》(공역), 《달라이 라마의 정치철학》(공역), 《화》(공역)이 있다.
    출판사 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1.
    틱낫한 스님의 『화』가 20여 년 만에 새롭게 선보인다. 틱낫한 스님 하면 『화』(초판 2002. 4. 3)가 연상될 정도로, 이 책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대중적인 문체나 용어로 번역하면서, 고유의 색깔, 즉 불교적인 정체성을 잊어버린 측면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대표적인 예로, 원서의 mindfulless는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마음챙김’ 혹은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를 ‘자각’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이번 번역본은 이런 점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 철저히 원서에 근거하여 번역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즉 원서의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도 신경을 쓰면서 번역에 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플럼빌리지에서 수행하고 있는 한국 스님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번 번역본이야말로 틱낫한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온전히 담고 있다고 하겠다.

    2.
    현대인들은 개인적, 사회적으로 ‘화(분노)’를 촉발, 촉진시키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물질주의, 이기심, 무한경쟁 등이 자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해 틱낫한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행복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자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화·절망·질투·미망 등 마음 작용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부처님은 이런 마음 작용을 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독들이 우리 마음에 있는 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 책은 화, 절망, 좌절감 등에서 벗어나 나와 상대가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것은 난해하거나 깊은 이론적 공부, 극한의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마음챙김 수행 하나면 된다.
    ‘화’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화’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스님은 화는 정신적, 심리적 현상이지만, 생물학적, 생화학적 요소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즉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니며, 몸이 마음이고 마음이 몸이다. 따라서 화의 뿌리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에도 존재하며, 결국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등 ‘마음챙김 먹기 수행’을 하라고 한다. 스님은 이 책의 시작을 이렇게 몸을 다스리는 문제, 그리고 그 핵심이 되는 먹는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의외성(?)을 보여준다. 이는 곧 일상과 수행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스님은 화를 어린아이와 같은,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화’도 우리의 일부라고 본다. 몸 어딘가가 아플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아픈 부위에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게 된다.

    “당신의 화를 아주 부드럽게 안아주세요. 화는 당신의 적이 아니라, 당신의 아기와 같습니다. 당신의 위나 폐와 같습니다. 폐나 위에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마다 버리려 하지는 않지요. 당신의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화는 우리가 내쳐야 할 대상도,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도 아니다. 우리는 화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안아주고 미소를 보내면 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마음챙김 수행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의 불꽃을 끄기 위해 아주 효과적인 도구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음챙김 호흡과 마음챙김 걷기를 하는 방법, 화를 안아주는 방법, 우리 자신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의 특성을 깊이 들여다보는 방법……”

    좋은 가르침이란 그것을 우리의 삶에 직접 적용해서, 우리의 고통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마음챙김 수행은 위대한 존재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할 수 있다.
    화는 씨앗의 형태로 우리 안에 있으며, 사랑과 자비심의 씨앗도 같은 곳에 있다. 수행이란 부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지 않고, 긍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이다. 이것을 ‘선택적인 물주기’라고 표현한다.
    간혹 화에 대한 잘못된 속설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즉 일부에서 ‘화’는 발산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화를 발산할 때 그것은 화를 먹여 살리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고, 따라서 화를 발산할수록 그것은 화의 씨앗을 자라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다. 관건은 그 화를 발산하고 상대에게 터트리느냐, 아니면 그 순간 화를 알아차리고 안아주고 미소짓느냐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챙김 수행에 달려 있다.

    3.
    이처럼, 마음챙김은 화를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를 알아차리기 위한 것이다. 마음챙김은 접하고, 인지하고, 인사하고, 안아주는 것으로, 다투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마음챙김의 역할은 아픈 아이를 안아주고 달래는 어머니와 같다. 우리 안에 있는 화는 우리가 잘 돌봐주어야 할 아기이다.
    수행자는 화와 고통이 생기자마자 이것들을 잘 돌보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반면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화의 에너지가 나타날 때 화에 압도되어 지배 당하기 쉽다.
    우리의 고통과 불행의 주요 원인은 상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속에 있는 화의 씨앗이다. 따라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 상대를 비난할 필요가 없다. 상대는 오직 부수적인 요인일 뿐이다.
    무언가-화(분노), 좌절, 절망 심지어는 사랑까지도-에 얽매여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다. 진정으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마음챙김 수행에 있다.
    이 책을 통해 ‘화’의 본성을 이해하고 ‘화’에서 자유로워져,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모두 행복에 가까워지기를 기대한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