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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Namgok Lee | 크릴의 공자 마지막 장 ‘공자와 中華民國’

(4)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19 April at 07:15
  · 
크릴의 공자 마지막 장 ‘공자와 中華民國’을 읽었다.

쑨원孫文의 제5權(西歐의 삼권분립 이외에 감찰원과 고시원을 두어 5권분립을 주장)의 기초가 되는 고시제도는 공자가 제안한 것이 아니지만, 공자가 그 기초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공자는 ‘올바른 사람을 승진시키고 덕망있고 유능한 사람의 손에 정치를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듭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또 적절한 교육을 통하여 행정책임을 맡을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을 관료로 선발하는데 있어서는 인격과 능력 이외의 어떤 요건도 고려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는데 고시제도는 이 원칙을 실천에 옮기려는 시도였다.
쑨원은 유럽과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민주주의 성과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못하다고 확신하였으며 그것은 주로 잘못된 인간평등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공자나 제퍼슨(미국 독립선언 기안자, 대통령 역임)과 마찬가지로 세습적인 귀족정치를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공자나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인간은 본래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실현될 수 있는 평등이란 기회균등 뿐이다. 
“개인 간의 지능과 능력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절대평등을 고집하기 위하여 뛰어난 사람을 억눌러 버린다면 인류는 진보는커녕 퇴보할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평등을 논하면서 동시에 세계의 진보를 원할 때는 그 평등이란 자연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것이지만,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평등이란 정치적 지위의 평등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쑨원은 모든 사람이 보통 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동등한 힘을 가져야 하지만, 반면에 필요한 지식과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공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자격을 갖출 수 있는 동등한 기회는 부여되어야 하지만, 그 자격은 고시제도를 통하여 시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쑨원은 “모든 관리 지망생은 –그 관직이 선거에 의한 것이건 임명에 의한 것이건 간에, 또 지방관이건 중앙관이건 간에- 필요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를 확인받기 위하여 먼저 중앙  정부가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안을 제시하였다.
그런 제도에는 정치적 조작이 개재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쑨원은 시험의 관장권을 독립된 정부 기관 즉 고시원에 부여함으로써 이 위험성을 극소화하려고 생각하였다.
이런  쑨원의 구상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정치나 행정이 구체적인 사람에 의해 집행되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하나의 항상(恒常)적 테마임에는 분명하다.

여러 테마들이 있다.

지금의 우리를 생각하게 된다.
1. 교육을 통한 자질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 균등이 지금의 체제 안에서 가능한가? 신분세습제도는 사라졌다지만, ’합법적 불공정‘이 지배하는 현상을 어찌할 것인가?  
2. 지적 능력은 공정한 고시제도로 시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덕성은 어떻게 시험할 수 있는가?
3. 고시원 같은 독립된 기관이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이나 문화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선거로 뽑는 경우 주권자인 선거인단의 높은 선별력이 전제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2023/04/17

Namgok Lee | 크릴의 공자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2 h
  · 
크릴의 공자 15장 ‘유교와 서구민주주의’를 읽고 있다.

근대 서양에 중국의 유교를 전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선교 목적으로 중국에 가서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중국의 전통 사상과 접했고, 그것을 서양에 전했다.
원래 목적인 선교의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근대 서양에 중국의 사상 특히 공자 사상을 전한 가교 역할을 한 것이야말로 그들이 역사에 남긴 큰 공적이었다.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목적의 수행을 위해 “주자철학(신유학)과 공자 도덕철학을 결합하고 있는 긴밀한 유대를 파괴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신을 통하여 그토록 열광적으로 유럽에 보고한 유교가 17,8세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된 정통 유교가 아니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흔히 신유교라고 불리는 그 정통유교는 복합적인 학설로서 공자사상을 구체화시킨 점도 많지만, 불교의 요소를 받아들인 정교한 형이상학적 철학체계이다. 그러므로 공자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으며 예컨대 볼테르 같은 유럽인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수도 없었거니와 명석하고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예수회 선교사들의 마음을 끌지도 못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독자적인 형이상학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면 할수록 당시 유행하고 있는 철학이 원시 유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떤 개종자는 유교를 배신하였다는 비난을 받자 자신은 전혀 그런 일이 없으며 ‘후세 유가들’의 ‘왜곡된 유교’보다는 가톨릭 안에 공자의 가르침과 더 가까운 교의가 있음을 발견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마테오리치의 말이다. “이  책(유교경전)들을 모두 주의 깊게 조사해보면 이성의 빛과 상반되는 것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과 조화되는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이 책들은 서구 어떤 철학자들의 저술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요점을 정리해보자.
중국철학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그들이 주로 보고한 것은 그들이 최선으로 생각한 것 즉 공자 개인의 사상과 초기 유교 사상이었다. 이 철학은 성격상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영향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세상에서 온 혁명의 복음처럼 환영받았다. 그러나 얼마 뒤에 유럽인들은 유교의 후세 형태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군주권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공자 철학의 일부를 전도시킨 것이었다. 동시에 그처럼 높이 찬양되었던 중국정치에는 적어도 전제정치의 특성이 실제로 많다는 것이 강조되었으며, 실제 중국 예찬자 가운데는 전제정치의 모범으로 중국을 찬양한 사람도 있었다. 공자의 덕성도 중국정치의 미점도 모두 예수회 선교사들이 선전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발명한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와 동시에 예수회 선교단도 철저하게 불신되었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추방된 끝에 1773년 교황의 명에 의해 해산되었다.  환상은 철저히 깨졌으며 ‘중국의 꿈’은 사라졌다. 18세기 서양은 중국에 대한 관심과 존경이 그처럼 높았지만, 18세기 말 이래로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이 일련의 기이한 사건 결과 프랑스혁명이나 미국혁명의 배경을 추적하는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이 중국사상이 민주주의 철학의 성장에 기여한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게 되었다.>
선교 목적으로 중국에 간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서 문명의 가교 역할을 한 것과 같은 일들이 원래의 선교 목적보다 더 큰 역사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일들은 긴 역사를 볼 때 너무나 많다.


Namgok Lee
17 h
  · 
아, 아가페 정원!!!


Namgok Lee
1 d
  · 
크릴의 공자를 읽고 있다. 
제14장 승리(勝利)의 일부분을 발췌한다.

“한무제(漢武帝)의 치세(유교의 왜곡) 이후 약간의 기복은 있었지만, 유교는 정부의 후원을 계속 받았으며 때로는 너무 지나칠 정도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그 결과로 유가를 자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유교는 때때로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백성을 억압하는 데조차 이용되었다. 어느 시대건 정부가 학문을 후원하면 사상의 표준화 경향이란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한무제 같은 황제들이 유교를 후원함으로써 유교를 지배하려고 노력한 것도 결코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누가 누구를 삼키느냐?’는 것은 긴 역사의 안목으로 봐야 한다.
정치에 끼친 유교의 영향은 시대에 따라 강도가 달랐지만, 그 영향은 구석구석 스며들었고, 대체로 민주주의라고 할만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부란 백성의 만족과 복리를 위하여 존재하며 그 책임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비판은 물론 전복되는 것조차 당연하다는 이론이 2천년간 이처럼 일반화되었던 대국(大國)은 아마 유례가 없을 것이다.
민주정치를 위한 공자의 출발은 괄목할만한 것이었지만, 그 후 그가 제시한 원리에 추가된 것도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원리 자체도 충분치 못하였다. 민주정치가 효과적으로 구현되려면 일반 백성들이 군주를 선택하는데 효과적인 발언권을 가져야하며 이 목적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창출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것이 발전되지 못하였으며 다른 곳에서 이것이 성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이와 관련하여 흥미있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 문제를 고찰하려면 유럽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제 15장 유교와 서구 민주주의)”
마르크스 주의는 러시아 혁명 과정과 만나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변모하면서  한 때 세계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으나 70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 생명력을 잃었다, 중국에 와서는 중국의 현실과 만나 변모하였다. 마오쩌뚱, 덩샤오핑을 거쳐 시진핑에 이르고 있다. 
유교의 2천년 역사에 비하면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짧은 것이다.
요즘 공자를 들어올리고는 있지만, ‘누가 누구를 삼킬 것인가?’라는 크릴의 흥미로운 질문 앞에 서게 되는 것 같다.
☆ 7년전  아시아 경제신문에 유학의 왕초보가 '시진핑 주석에게 보내는 공자의 메시지'를 써봤군요.
이진홍님의 댓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진홍
https://cm.asiae.co.kr/article/2016113013282113027
[이남곡의 인문의 창]시진핑 주석에게 드리는 글(3)
CM.ASIAE.CO.KR

[이남곡의 인문의 창]시진핑 주석에게 드리는 글(3)
입력2016.12.01 


국가는 인간과 사회의 진화를 가로막는 직간접의 범죄와 부정과 부패를 제거하는 가장 강력한 기구입니다. 개방을 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하면 덩샤오핑(鄧小平)의 말대로 창(窓)을 열면 파리 모기와 온갖 벌레가 함께 들어오듯 여러 부정적 현상들도 나타나게 됩니다.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할 정도의 시 주석의 노력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지향하는 이상만은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 또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들입니다. “법제로 다스리고 형벌로 질서를 유지하면, 인민들이 형벌을 면하는 데 급급하여 부끄러움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덕으로 다스리고 예로써 질서를 유지하면 부끄러움을 알고 바르게 될 것이다.”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제2편 위정)


“송사를 듣고 판결을 함에는 나도 다른 사람과 같으나 반드시 송사가 없도록 해야 한다.”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제 12편 안연)


위의 구절들은 국가와 정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고금을 통해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최고 최선의 인권 보장은 좋은 정치와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범죄자의 인권 보장을 포함한 근대 서양의 형벌 제도에 대해서는 진지한 검토와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는 것은 오래된 동양의 이상주의에 더 부합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목적을 가진 당(黨)이나 국가일수록 그 절차나 과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남곡의 인문의 창]시진핑 주석에게 드리는 글(3)


물론 저 같은 촌부(村夫)가 짐작할 수 없는 많은 고충이 거대한 국가를 경영하는 시 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충분히 존중합니다만,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자본주의 국가의 불평등이나 차별 같은 실질적인 수많은 합법적인 인권침해보다 오히려 중국의 정치범 탄압이나 범죄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더 이슈화되는 것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시 주석님,


마지막으로 민족문제와 새로운 문명에 대해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5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그 자체로 세계국가입니다. 미국이 이민(移民)에 의해 몇 백 년 동안에 인위적으로 형성된 세계국가라면, 중국은 수천 년의 역사, 수많은 분열과 통일을 경험해 온 세계국가입니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이후로 '이념의 종언'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불완전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를 이념이라고 하면 성립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이념을 '우주 자연의 리(理)에 부합하는 인간의 관념'으로 해석한다면, 그런 이념의 시대는 온 적이 없습니다. 이제 와야 합니다.


중국에게는 패권다툼이라는 현재의 세계질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의연히 대처해야겠지만, 그 힘의 원천은 내부에 진정으로 리(理)에 바탕을 둔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권력은 총구(銃口)에서'라는 말은 지금까지의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는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새로운 질서는 '이념'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와 제자의 대화입니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반드시 명(名)을 바로 세울 것이다."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이 '정명(正名)'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정하지 않음'은 공자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정명' 또한 고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시대정신을 가장 바르게 실현할 수 있는 종합철학을 세우는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정명'은 진정한 의미의 '이념'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이제 인간과 자연 ·인간 상호간·물질과 정신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이 우주 자연의 '리'에 부합하는지가 엄청난 파국적 위기와 함께 근원적으로 물어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중국 공산당이 진정한 이념정당으로 진화하여 민족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함으로써 미래에 도래할 세계정부의 모델을 만드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여러 민족의 자치와 분권을 최대한 확대하면서,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협력 통합하는 실험은 중국 같은 나라가 아니면 어려운 일입니다.


동시에, 지구적 인류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지금의 소비와 소유 중심의 문화를 정신적 예술적 가치나 욕구가 증대되는 생태적 삶의 문화로 전환하는 새로운 문명의 선두에 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현실에서 더욱 절실한 요구로 됩니다. 8500만명의 중국 공산당원들이 이런 문명적 전환을 시도한다면 인류에 대한 최대의 기여로 될 것입니다.


과거 혁명 시기의 '조사 없이는 발언권 없다'라는 실사구시의 전통을 넘어, '생활 없이는 발언권 없다'는 자각이 중국공산당의 자율적 문화로 자리 잡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화혁명의 길입니다.


존경하는 시진핑 주석님,


저의 글을 이제 마치려 합니다. 너무 잘 아시고 실천하고 계시는 것들에 대해 촌부의 중언부언을 너그러이 받아들여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중국과 중국 인민을 사랑하고, 시 주석의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에서라는 것을 헤아려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2023/04/08

230408 Namgok Lee | 공자

(4) Namgok Lee | Facebook
230408
Namgok Lee
1 d
  · 
유가(儒家)로서 학문을 시작하였으나 유가와 절연(絶緣)하고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한 묵자가  유가를 격렬히 비판한 배경이 된 것은 유가 가운데 유교의 진정한 원리는 전혀 알지도 못하거나 거기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정치적인 출세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에만 몰두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와 동시에 공자의 사상과 행태에 만족하지 못한 묵자의 급진성(공자는 이런 사람을 狂者라고 부른 것 같다)을 현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공자보다 더 높이 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급진성이 비록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감각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인류 보편사(人類普遍史)의 진행에서는 그 영향력이 공자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국소적이다.

그 중요한 차이를 H.G.크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묵자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세상의 악을 고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으며, 공자와 달리 다른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이나 판단의 여지를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나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가르침을 버리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것은 추수를 포기하고 낟알을 줍는 것과 같다.”
묵자는 빈곤, 무질서 및 전쟁을 비롯한 이 세상의 죄악을 엄격한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각 집단의 구성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지도자와 일치되어야하며” 각 집단의 지도자는 다시 그 상급자와 일체가 되는 방식으로 최종적으로는 천자(天子)에게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가운데 다음 구절을 연상케 한다. “통합국가의 헌법을 제정하는 원리는 모든 지도자는 하급자에 대해 권위를 갖고, 하급자는 상급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공자는 사유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였지만, 진리의 고정된 척도는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는 책임을 맡겼고 그것도 각자의 자유에 일임하였다.
그러나 지적(知的)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정신적 노고가 따르기 때문에 인간은 대체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공자가 인간의 정신에 제공한 것은 ‘평화가 아닌 검(劍)’이었다.
제자 가운데 공자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따라서 공자의 시체가 식자마자 제자들이 아늑한 지적 안식처를 세우고 그 안에서 성전(聖典) 및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성인의 권위를 찾기 시작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크릴의 맹자에 대한 다음의 언급도 시대를 넘어 오늘의 유사(類似) 진보주의자들을 돌아보게 한다.
<맹자는 당시의 비교적 우수한 유가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이지만, 유가 특유의 약점 즉  상류사회를 선망하는 속물(俗物)이었다. 그의 생활이나 여행은 사실 극히 사치스러웠지만 그는 훨씬 더 사치스러운 왕후(王侯)들을 크게 선망하였다.
맹자는 정의만 구현된다면 자기도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지위나 사치를 경멸하고 덕(德)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였지만, (햄릿에 나오는) 귀부인처럼 도에 지나친 항의를 많이 하였다.>


Namgok Lee
1 d
  · 
'일미진중함시방'
내 마음 안에는 내가 싫어하고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들어있다.
몸이 안좋으니까 잘 보인다.
공자가 일관한 것은 오직 '수기修己' 였다는 것.
그의 모든 외적 활동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외화外化.
공자 사상이 그 숱한  풍랑과 왜곡을 겪으면서도 고전古典으로 살아남아 미래를 열어가는 메시지로 작용하는 핵심.

Namgok Lee
3 d
  · 
H.G.크릴의 공자를 읽으면서 드는 단상 하나.
맹자 대(代)에 오면 유자들 가운데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당당하게 유세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맹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조언할 때는 그들을 경멸해야 한다.”고 말하며, 
순자는 “진정한 군자는 천지와 동격이기 때문에 훌륭한 유자가 극도의 궁핍한 처지에 빠져도 왕후는 감히 그와 명예를 다툴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의 자존감을 높였다.
그런데 어떻게 포악한 군주들이 유자들이 ‘혁명’을 설교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으며, 극단적인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였는가?
군주들이 전(全) 중국(中國)을 차지하려는 각축전에서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경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맹자는 수십 대의 수레와 수백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여행하였고 제후(諸侯) 사이를 전전하면서 식록(食祿)을 받았다.
물론 구성원의 수가 많아지면 뛰어난 사람들이 다수를 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맹자는 당시 사람들이 인격을 수양하는 유일한 목적이 높은 지위를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단 목적을 달성하면 주의주장은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내던져 버린다고 말하고 있으며 순자도 자기 자신이 유가이면서도 그가 속유(俗儒)라고 부른 자들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일찍이 공자는 ‘예(禮)’의 자구(字句)에 얽매여 그 정신을 망각하는 것을 특별히 경고하였으며, ‘도(道)’에 뜻을 두고 있는 척하면서 개인적인 쾌락과 출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였다.
논어 옹야 편에 자하라는 제자에게 소인유(小人儒)가 되지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당부하는 말이 나온다.
군자(君子)의 특성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는 말이다.
실제로 인간은 어느 한 쪽으로만 되어 있는 경우는 없다. 다만 이(利)와 의(義) 어느 쪽에 더 끌림이 있는가는  인간을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한다.
공맹시대의 유자를 요즘 말로 하면 폴리페서(polifessor) 쯤 될 것이다.
맹자나 순자 정도 되는 당당한 폴리페서(polifessor)도 드물지만, 소인유(小人儒)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
내가 보기에는 진보냐 보수냐 하는 차이보다 군자유(君子儒)와 소인유(小人儒)의 차이가 더 본질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의(義)에 끌림이 더 강한 지식인이나 정치인이라면 그가 보수건 진보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위기들을 넘어설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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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6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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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시카고에서 출생한 미국의 학자 H.G.크릴이 ‘개혁가 공자’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시도야말로  인류 보편의 사상적 거인으로서 또 위대한 개혁가로서 공자의 진면목을 밝히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일부 발췌한다. 
“공자가 주장한 개혁이 과연 ‘민주적’이었다고 말해도 좋은지, 또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 ‘민주적’이었는가?
오늘날의 민주정치는 19세기말 및 20세기의 산물이며 최근에 확대된 인류의 경험 뿐 아니라 자연과학 사회과학 및 산업화 등과 같은 현대적 혁신에 크게 기초를 둔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처했던 상황이 현대민주주의 옹호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크게 상이相異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사상 사이의 相致點(상호일치점)이 있다면 오히려 특별한 흥미를 자아낸다.
매리앰(C.E.Merriam)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 차별보다는 우애 원칙에 근거한 개성의 보호 및 함양의 중요성, 근거도 없이 또는 과도하게 인간차별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된 특권의 폐지.
2. 인류의 완벽성을 부단히 지향하는 것에 대한 확신.
3. 국가의 수익은 본래 집단적인 수익이므로 크게 지연되거나 지나친 차별없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전사회에 분배되어야 한다는 가정.
4. 사회의 방향과 정책의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 최후 결정을 대중이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결정을 표현하기 위한 절차를 인정하고 그 결정이 정책으로 반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5.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합의 과정을 거쳐 의식적인 사회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
이 가운데 4개의 항목은(4번을 제외한 모두)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 분명하고 어떤 것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도 있다.
투표와 관련된 나머지 한 항목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공자는 대중이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더 지적하였지만 고대 중국에는 투표라는 개념은 없었던 것 같다. 프랑스 혁명이 한참 진행중이었던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제출되었을 때, “보통선거안을 부결하는 것이 무산계급은 문맹이고, 투표를 하려면 일정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변호될 수 있었다면” 기원전 500년경 공자가 중국의 정치를 농민계급에게 넘길 것을 제안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공자가 이상적인 교육상태나 그 비슷한 상황이라면 대중이 정치를 좌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지의 여부다. 이것은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을 종합하여 정치 권력에 관한 그의 의견을 체계적인 서술로 제시해보자.(공자가 결코 이런 것을 제시한 일은 없는 것 같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정부의 고유한 목적은 전체 백성의 복리와 행복이다.
이 목적은 정치에 가장 유능한 사람이 국정을 담당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위정자의 능력은 가문, 재산 또는 지위와 필연적인 관련성이 없으며, 오직 인격과 지식에 달려 있다.
인격과 지식은 적절한 교육의 산물이다.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교육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따라서 적절한 교육을 받은 결과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사람을 전체 국민 가운데서 선발하여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
이것은 백성 전체가 정치를 좌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결국 일종의 귀족정치 제도이지만, 가문이나 재산에 의한 귀족정치가 아니라 덕망과 능력에 의한 귀족정치이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태도에는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임용되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없다는 결함이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공자의 제도에는 전체 백성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치란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론은 확실히 백성들에게 막연하나마 ‘이론상’의 거부권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정부의 형태나 제도적인 장치의 중요성은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형태나 제도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데도 필요한 정신이나 철학보다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진리는 (또는 적어도 진리의 이해는) 부단히 발전 또는 개화 과정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다는 신념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반면에, 진리를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실재로 생각하는 철학은 모두 정치적 전체주의의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중략)
공자가 절대론의 입장이 아니라 진리의 부단한 탐구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진리를 말하지도 않았고, 절대적인 가치척도를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도록 교육하였다.”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하여 목숨을 뺏고 뺏기는 권력투쟁이  공자의 제자를 자처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빗나간 것인가?
서양의 학자가 본 공자가 그 유명한 주자(朱子)가 본 공자보다 훨씬 공자의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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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 April at 08:45
  · 
크릴의 공자를 읽고 있다.
개혁가로서의 공자를 논하는 장(章)의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공자의 교육론이 혁명적 성격을 띄었다는 것은 여러 다른 주장들 예컨대 노자나 한비자와 비교해볼 때 뚜렷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혁명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자 당시에 그의 정치적 주장에 아무도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자가 개혁가로서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 맹자와는 달리 공자는 결코 폭군을 죽여야 한다거나 제왕과 농민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직선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전체적인 운동은 시작도 되기 전에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좀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1세기 뒤에 맹자가 아무 탈 없이 직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방침에서 나온 것 같은데, 부패한 정부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기회가 오면 용감하게 행동할 용의를 갖고 있어야 하지만 말을 할 때는( 그 자체로는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없기때문에) 다소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를 공자는 표명한 적이 있었다. (憲問 편)”
이 글을 읽으면서 이와 상반되는 상황이 요구되는 시대나 사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극단적 상황에 극단적 대응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이 극단적 대응 또한 또 다른 극단(極端)이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개혁을 이루기가 어렵지만, 그 후에 나타날 건강하고 조화로운 개혁을 예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악순환으로 전체가 붕괴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렇게만 된다면 역사는 거칠게나마  순항(順航)할 것이다.
사후(事後)에는 보이지만, 진행 중일 때는 모르는 일들이 역사 속에는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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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6 March at 09:57
  · 
이수태 저 ‘공자의 발견’에 이어 H.G.크릴 저 ‘공자, 인간과 신화’를 두 번 째 읽고 있다.
크릴에게서 학자의 진면모(眞面貌)를 느끼게 한다. 
나는 논리적인 성격도 있지만, 직관적인 성향이 강해서 학자의 길에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요즘은 학자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사람들과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오늘 읽다가 ‘예언자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것은 백발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는 코멘트 앞에서 혼자 웃는다.
나는 80이 다 되었지만, 흑발(黑髮)이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예언자의 길을 갔어도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사이비 예언자의 유혹에서 아예 생래적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머리 색깔이 아닌 말과 행동으로 사이비 예언자를 감별하는 능력은 다소나마 갖추고 있다는 생각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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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2

알라딘:공자의 발견 脫朱子 論語學 이수태

알라딘: 공자의 발견




공자의 발견 
脫朱子 論語學
이수태 (지은이) 바오 2015-11-17

정가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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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포인트 137
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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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의 저자 이수태의 새 저작. 논어라는 텍스트를 넘어 철저하게 공자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논어 속의 단편들이 지닌 다양한 메시지들의 내적 연관과 교호를 통해 공자라는 컨텍스트를 엮어내고 있다. 아울러 논어에 대한 진지하고 엄밀한 탐구를 통해 공자의 3대 관점이나 위대한 개념들의 탄생을 제시한다.

저자는 본문 속의 여러 글들에서 공자의 목소리를 논어라는 고전 속의 텍스트로만 가두어 두지 않고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당면한 많은 문제에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인식론적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오랜 세월 공자의 진의를 왜곡하고 가려 왔던 주자의 턱없는 논어 해석은 이제 수사학의 영역에서 종말을 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수기'와 '불이과', '양단을 넘어서'로 이루어진 공자의 3대 관점을 제시한다.

모두 5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은 공자에 대해 비교적 평이하고 개괄적인 차원의 글을 묶은 것이다. 제2장은 공자의 3대 관점으로, 주자가 잘못된 공자 이해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졌는가를 밝히고 있다. 제3장은 논어가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제4장에서는 논어 단편에 대한 해석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종합하고 있다. 제5장에서는 공자라는 인물을 좀 더 긴 역사 앞에 세워 놓고 그 모습을 추적해 본 글들을 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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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5

Ⅰ.젊은 공자
1. 젊은 공자17/2. 낯선 방문자들22/3. 사마천과 공자28/4. 공자와 소년33/5. 성인에의 꿈38/6. 세기의 대화43/7. 자로와 세례자 요한50/8. 공자와 예수, 너무나도 닮은 그들55/9. 공자, 그는 과연 누구인가?61/10. 오늘날의 공자, 어디에 있나?74/11. 논어, 언제까지 한문 공부의 차원에만 머물 건가?79

Ⅱ. 공자의 3대 관점
1. 수기修己85/2. 불이과不貳過117/3. 양단兩端을 넘어서138

Ⅲ. 논어 깊이 읽기
1. 아이러니165/2. 화이부동169/3. 순수함과 순진함176/4. 덕이란 무엇인가?180/5. 음악 마니아 공자의 음악 이해192/6. 경제의 본질은 굶주림이다197/7. 말과 글, 그 거짓되기 쉬운 도구203/8. 명예욕을 어떻게 볼 것인가?207/9. 어짊仁213/10. 정명225/11. 위대한 개념들의 탄생229/12. 학이편의 비밀243/13. 아! 옛날이여254/14. 펼치는 일과 간직하는 일261/15. 의로운 사회와 어진 사회267

Ⅳ. 논어의 무덤?<논어집주論語集注>
1. 논어에 여색女色이? 275/2. 주자는 없었다 282/3. 논어의 무덤, <논어집주> 287/4. 나의 논어 해석에 대한 나의 입장 304

Ⅴ. 수사洙泗의 본류를 찾아서
1. 주나라의 신비331/2. 무왕과 백이숙제339/3. 공자와 주공345/4. 공자의 관중 평가352/5. 공자와 양호359/6. 최술崔述 이야기379/7. 공자가 <춘추>를 짓다?386/8. 논어와 제자백가393/9. 논어 편집자를 말한다400/10. 공자적 입장에서 본 노자407/11. 공자,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이었을까?428

추록·논어와 나434
-부록448
공자 연표/공자 제자 일람/중국 역대 왕조/주周나라의 변천 /공자 생존 시 주요국 세계世系/공자 생존 시 노나라 삼환三桓 세계世系/춘추시대의 중국/춘추시대의 중원 제후국/ 춘추시대의 노나라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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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번의 책은 확실히 논어라는 ‘텍스트’를 넘어 공자라는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같은 텍스트를 경유했으면서도 이번의 책은 논어 단편이 지닌 다양한 메시지들의 내적 연관과 교호를 통해 공자라는 ‘컨텍스트’를 엮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본다. 공자의 진의가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목적이었다. 주자의 턱없는 해석은 이제 수사학洙泗學의 영역에서 확실히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왜냐하면 <논어집주>가 건재하게 유통되는 한 공자는 저 2500년의 혼곤한 잠을 지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자와 주자는 더 이상 공존할 수 없다. 주자를 살리기 위하여 공자가 계속 죽어 있을 수 없다면 우리의 남은 선택은 분명하다. …… 이번 책을 내는 목적은 분명하다. 나는 논어에 관한 한 이제 <논어집주> 800년의 역사는 단호히 종막을 고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논어는 다시 번역되고 쓰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25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공자의 진짜 육성을 듣고, 그 육성이 답이 없는 오늘의 현실에 대하여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타진해 보기 위해서도 그것은 불가피한 절차라고 생각한다. -머리말 중에서

논어와 공자에 초점을 맞추고 나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내 나름대로 그 희유한 전적과 기이한 인물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리고 미미하게나마 그 자구가 읽히고 어렴풋하게나마 그 인물의 자태가 눈에 들어오는 환희의 순간, 내 시야 속에 주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자는 없었다! 이것을 나는 증언해 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경험에 입각하여 나는 망설임 없이 선언하는 바, 누구든 주자의 옷자락을 잡고 논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한 그는 결코 공자라는 저 희유한 인물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본문 중에서




저자 소개
지은이: 이수태

최근작 :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300개의 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화두들>,<공자의 발견> … 총 19종 (모두보기)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서울사대부고와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들어가 32년간 한 직장에서만 복무하며 대전지역본부장, 일산병원 행정부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9년 「한국 가곡의 재인식 문제」로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에는 격월간 에세이스트사가 제정한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현재는 강화도에 집필실을 마련하여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하는 한편, 특히 수사학(洙泗學)을 연구하고 강연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논어 관련 저작, 『논어의 발견』(1999), 『새번역 논어』(1999) 『공자의 발견』(2015), 수필집으로 『어른되기의 어려움』(2002) 『누룩곰팡이의 노래』(2004)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2012) 『영원한 공직』(2013) 『300개의 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화두들』(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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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25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공자의 참된 목소리를 흔들어 깨웠던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의 저자 이수태의 새 역작!

여기, 공자의 참된 목소리가 있다!

1999년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을 출간하여 “주자류의 논어 해석에서 벗어나 새롭고 독창적인 해석과 정확하고 유려한 한글 번역”으로 한국의 경학계와 언론의 찬사를 받았던 저자 이수태가 논어 관련 신작을 출간했다. 이전에 출간한 두 권의 저서가 주자의 그릇된 해석에 뒤덮여 온 논어를 구제하여 그 원음을 되살리는 것이었다면, 이번 신작 <공자의 발견>은 논어라는 ‘텍스트’를 넘어 철저하게 공자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이번 신작은 논어 속의 단편들이 지닌 다양한 메시지들의 내적 연관과 교호를 통해 공자라는 ‘컨텍스트’를 엮어 냈다는 점에서 논어 연구에서 일대 진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논어에 대한 진지하고 엄밀한 탐구를 통해 이제까지 어떤 연구자도 보여 주지 못했던 ‘공자의 3대 관점’이나 ‘위대한 개념들의 탄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저자의 논어 연구가 이제 완숙함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본문 속의 여러 글들에서 공자의 목소리를 논어라는 고전 속의 텍스트로만 가두어 두지 않고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당면한 많은 문제에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인식론적 단초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논어, 탈주자 시대의 선언

저자가 논어를 연구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공자의 진의가 살아나야 한다는 것, 즉 공자의 참된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저자는 논어를 해석하면서 엄격한 사료 비판과 가혹하리 만큼 치열한 자기 성찰을 통해 “공자가 무덤에서 나와 틀렸다고 말해도 물러서지 않을 만큼 자신 있는 부분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오랜 세월 공자의 진의를 왜곡하고 가려 왔던 주자의 턱없는 논어 해석은 이제 수사학洙泗學의 영역에서 종말을 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마디로 “논어, 탈주자 시대 선언”이다. <논어집주>가 여전히 건재하게 유통되는 한 공자는 저 2500년의 혼곤한 잠을 지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진짜 육성을 듣고, 그 육성이 수많은 답을 요구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타진해 보기 위해서라도 논어의 탈주자 시대 선언은 불가피한 절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자의 3대 관점을 제시하다

모두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제2장 ‘공자의 3대 관점’이다. ‘수기修己’와 ‘불이과不貳過’, ‘양단兩端을 넘어서’로 이루어진 ‘공자의 3대 관점’은 이제까지 그 어떤 논어 연구자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기’에서는 수기야말로 ‘모든 것, 즉 배움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공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불이과’에서는 ‘무지와 과오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 ‘양단을 넘어서’에서는 인간 사회에서 흔히 접하는 급진성과 결곡함,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 가운데와 하찮음의 문제를 공자의 관점에서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특히 ‘양단을 넘어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저자는 이토록 중요한 공자의 관점들이 간과되어 온 것은, 주자가 공자 특유의 관점이 반영된 최고 수준의 단편에서 줄줄이 해석을 그르친 것이 그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의 간략한 구성과 내용

모두 5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젊은 공자’는 공자에 대해 비교적 평이하고 개괄적인 차원의 글을 묶은 것이다. 대부분의 글이 기존의 낡은 공자관을 시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제2장은 앞서 언급한 ‘공자의 3대 관점’이다. 이 글은 이번 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글로써 주자가 잘못된 공자 이해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졌는가를 밝히고 있다. 제3장 ‘논어 깊이 읽기’는 논어가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신영복 선생의 화이부동和而不同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제4장 ‘논어의 무덤-<논어집주>’에서는 논어 단편에 대한 해석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종합하고 있다. 제5장 ‘수사의 본류를 찾아서’에서는 공자라는 인물을 좀 더 긴 역사 앞에 세워 놓고 그 모습을 추적해 본 글들을 묶은 것이다. 마지막에 수록한 ‘추록-논어와 나’는 저자와 논어와의 인연에 대한 글로 저자의 논어와 공자에 관한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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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 d
이수태 저 ‘공자의 발견'을 읽고 있다.

그는 공자의 3대 관점으로 <①수기(修己) ②불이과(不貳過)③양단(兩端)을 넘어서>로 요약 이해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副題)처럼 주자학(朱子學)으로 집대성된 ‘왜곡된 공자의 사상’을 제대로 찾고 그것을 현대에 살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많이 공감하는 바가 있다.
나는 주자학(朱子學)도 모르고, 공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논어를 읽었기 때문에 대칭적 비교가 없이 논어를 연찬하면서 읽었다.
나증에 보니 공자의 사상이 그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져간 유학(儒學)과 다르다는 것, 어떤 점에서는 심한 왜곡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한편 7장에 나오는 다음 문장은 내가 논어를 통해 공자 사상의 기본으로 읽혀졌던 문장이다. 공자가 스스로 밝힌 자기정체성 즉 호학(好學)의 ‘학(學)’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이 수태 선생도 이 문장을 대단히 중시한다.
그러나 그 관점이 나와 좀 다르다.
이 다름은 ‘논어’에 접근하는 각각의 경로와 경험의 다름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다름이야말로 논어 또는 공자 사상의 생명력을 풍부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내 나름의 해석이다..
“내가 아는 것이 있을까? 나(인간)는 실재(사실 그 자체)를 알 수 없다(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자신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필터를 거쳐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누가 물어오더라도 모른다고 피해버리지 않고(불가지론이나 회의론에 머물지 않고) 영위(零位)에 서서(무지의 자각을 바탕으로) 그 양 끝을 두들겨(철저 검토) 끝까지 (진실을) 밝혀 가보겠다.”
이 수태 선생의 해석이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 없다. 못난 사람이 있어 내게 물어오면 나는 막막하다. 나는 단지 그 양단을 두드려주는 것이 고작이다.”
나는 ‘무지(無知)의 자각과 탐구태도(연찬)’에 방점(傍點)이 찍혔다면, 이 수태 선생은 ‘그 양단을 두드린다’에 방점(傍點)이 찍힌다.
‘무지(無知)’라는 표현이 겸사(謙辭)가 아니라 실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 공공여야(空共如也)가 비부(鄙夫)를 수식하는 말이 아니라 공자를 수식하는 말이라는 것은 나와 관점이 같다.
그러나 공공(空空)을 보는 관점이 좀 다르다. 나는 공자의 탐구 태도의 출발점으로 보고, 그것을 영위(零位)에 서려는 즉 무지의 자각에 서려는  태도로 보았다. 
고기양단(叩其兩端)의 양단(兩端)을 보는 관점은 비슷한데, 나는 철저 탐구의 연찬태도에 방점이 찍히는데, 이 수태 선생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떠올린다. ‘줄탁동시’의 ‘탁(啄)’의 역할에 주목한다. 
나와는 방점이 좀 다른 곳에 찍히지만, 이 해석도 존중한다.
사람이 깨달아가는 주체는 그 자신이 주체다. 어떤 스승도 ‘탁(啄)’이라는 보조적 역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敎)의 바탕이다.
나는 공자의 무지(無知)를 학(學)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이 수태 선생은 ‘양단을 두들기는 것(叩其兩端)’을 가르침의 기본으로 보았다.
이 둘 다 공자의 사상과 실천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공자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 동안 사회를 정체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해온  오래된 유학의 왜곡을 바로잡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더 절실한 현실적인 테마는 양극단(兩極端)이 정치무대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적 혼란을 넘어서기 위해 인식과 실천의 방향을 근본에서 바꾸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외교와 내치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제도에서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양단(兩端)의 진폭이 너무 크거나 그 바뀜이 거친 것이 문제다.
우리는  짧은 기간의 압축적 변화(산업화를 통한 경제 성장과 군사독재를 벗어난 제도의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이런 정치문화를 선진화시키는데는 상당한 시간과 진통을 겪을 것이다.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이다.
심리적 내전에 가까운 양극단의 충돌을 비극적 결말의 출발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양극단의 진폭을 줄이고 변화 과정의 거칠음을 부드럽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넘어서야할 테마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심경을 어제 광주포럼에서 함께 나누었다.
실제로 그런 국민적 자각이 크고 넓어지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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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논어를 원체 기초적인 학습 과정이 없이 접했다보니, 내 책이 출판된 이후 여러 책들을 보며, 그 역사적 배경이나 사람들을 점차 알아가게 되었다.
많지는 않지만, 열댓 권 정도는 읽은 것 같다.

그 가운데 다음 세 권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
이수태 저 ‘공자의 발견- 脫朱子論語學’, H.G.크릴 저 ‘공자-인간과 신화’ , 리링 저 ‘논어, 세 번 찢다’

이수태 선생의 책을 먼저 보기 시작한다.
‘탈주자논어학脫朱子論語學’이라는 부제(副題)에 걸맞게 70여개의 장(章)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정통 유학자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나와 비슷하고, 주자 뿐 아니라 중용이나 맹자에 대해서도 공자를 왜곡했다고 보는 점은 나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공부의 양(量)이나 깊이는 나와 비교가 안된다.
나는 아무런 기초적 학습과정이 없이 논어를 ‘연찬’ 식으로 읽다보니, 나중에 주자(朱子)의 관점과 많이 다른 것을 발견했지만, 그는
논어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해서 보는 나름의 관점이 있다.
나도 논어를 15년 정도 읽다보니 나름의 일이관지하는 관점이 생긴다.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런 느낌이 논어가 일목요연하게 보여오는 점은 있지만, 그것은 공자와는 별개의 자신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맹자도 주자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런 안목이 생길수록 더욱 더 ‘연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읽다보니까, 이 수태 선생의 관점도 처음 볼 때보다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오늘 읽은 대목의 하나인데, 주자(朱子) 류(流)와 크게 다른 점이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자공이 말하기를, “만일 백성들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해 줄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어찌 인이라고만 하겠느냐? 반드시 성(聖)이라고 할 수 있다. 요순 같은 사람도 오히려 그렇게 못함을 걱정하였을 것이다. 무릇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서고 싶은 곳에 남도 세워주며,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 것을 남도 이루게 한다. 가까운 자신을 가지고 남의 처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인(仁)의 올바른 방향이라 이를 수 있다.”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 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의 해석이 아주 다르다.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신이 달하고 싶으면 남을 달하게 한다.’와 비슷하게 대부분의 책들이 해석하는데 대해, 저자는 ‘스스로 서기를 바라서 남을 세우고, 스스로 통달하기를 바라서 남을 통달시킨다.’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에는 저자가 일관되게 바라보는 공자가 있다.
자신을 뒤로 하고 오히려 남을 앞세우니 인(仁)이 아닌가? 라고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장이 저자에게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대부분의 이타주의가 엎어놓은 이기주의에 불과하듯, 그것은 인(仁)이 아니라 탐욕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공자가 경계한 말로 저자에게는 다가온다.
공자는 베푸는 일을 근본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남을 위한다는’ 욕망들이 직접적으로 발현되는 한 그것은 아무것도 개선시킬 수 없다는 입장으로 보고, 세상을 향한 그런 직접적 욕망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변화시키는데 더 근본적인 실천을 대부분 가로막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고 이 장(章)을 읽는다.
나도 일정한 부분에서 저자와 공감하는 바가 있다.
내가 말했다면 <‘남을 위한다는’ 허위의 욕망들이 선차적으로 작동한다면> 정도로 말했을 것이다.
나선형 순환의 오랜 경로를 거치며, 결국 현대적 용어로 표현하면 ‘자기혁명과 세계 혁명은 하나’, ‘자기혁명 없는 세계혁명은 허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저자가 역사 상 인물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예수’와 ‘공자’로 보는 것도 그가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관점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요즘 담론(談論)과 도덕(道德)이 동반 붕괴하는 현상을 보면서 일면식도 없지만, 이 수태 선생과 이런저런 생각들을 나눠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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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31

박석 2010 |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의 삶과 깨달음 - 이남곡

장수좋은마을 |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의 삶과 깨달음 - Daum 카페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의 삶과 깨달음

이남곡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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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석 교수가 보내주신 논문을 옮긴 것입니다.



1. 들어가는 말

공자와 노자는 西周時代 초기에 확립된 봉건질서가 와해되면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던 과도기이자 혼돈기였던 春秋時代 말기의 사상가들로서, 그들로부터 나온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은 春秋戰國時代에 성행하였던 여러 사상들을 누르고 후대 중국 사상의 양대 축이 되었다. 유가와 도가는 서로 대립적인 측면도 있지만 상호보완적인 측면도 있어서 오랜 세월에 걸쳐 교류하면서 중국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위대한 두 명의 사상가는 생전에 서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공자가 노자보다 연하이고 또한 배우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당시 현자로 소문이 난 노자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하였다고 한다. 주로 도가계열의 저서에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한 우화들이 많이 보이고 있지만 유가계열의 전적에도 공자가 노자에게 禮를 물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노자에 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인 『史記』의 「老莊申韓列傳」에서도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고 믿을만하기 때문에 삶의 흐름과 사상적 변화를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낼 수 있지만 노자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그나마 신빙성이 부족하여 역대이래로 제가의 설이 분분하다. 「老莊申韓列傳」에 수록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고, 심지어 노자라는 인물 자체의 실존성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老莊申韓列傳」에 나타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한 기록은 그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노자와 공자의 삶의 태도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노자가 공자에게 준 가르침의 핵심 내용은 필자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和光同塵’ 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和光同塵’은 ‘和其光, 同其塵’의 줄임말로서 『老子』의 4장1)과 56장2)에 등장하는 구절이다.3) ‘화광동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역대로 다양한 설이 있지만 대체로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서 수도를 통하여 얻어진 깨달음의 빛 내지 덕성의 빛을 안으로 감추고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화광동진’이라는 자구는 도덕경에 두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노자 수양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서 노자의 삶과 깨달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4)

필자의 관점에서는 노자의 삶 자체가 ‘화광동진’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그는 깊은 수도를 통하여 우주만물의 근원인 도를 체득하는 경지에 올랐고 아울러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깨달음과 지혜를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감추고 은자의 길을 택하여 문명 밖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떠나기 전에 남겨놓은 5000여자의 책 한 권과 후대에 전해진 모호한 전설을 통해서만 그의 삶과 깨달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공자는 노자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사상가이다. 그러나 ‘화광동진’의 의미를 곱씹어온 필자의 관점에서는 흥미롭게도 공자의 삶과 깨달음에도 ‘화광동진’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광동진’의 의미를 좀 더 심층적으로 재해석해볼 때 공자가 노자보다 더 철저하게 ‘화광동진’을 삶 속에서 구현하였다고 본다.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인지, 또한 공자가 정말 노자로부터 ‘화광동진’의 가르침을 수용하였는지는 규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화광동진’을 매개로 해서 두 위대한 사상적 거인의 삶과 깨달음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 老子와 孔子의 만남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는 고사는 『史記』의 「孔子世家」, 「老莊申韓列傳」, 「仲尼弟子列傳」에 나타나고 있고, 『莊子』중에 8조목의 관련 자료가 있고, 『呂氏春秋』의 「當染」편에도 나타나고 있고, 『禮記』의 「曾子問」편에도 4측의 자료가 나타나고 있고, 이와 비슷한 시기의 유가의 저서인 『韓詩外傳』과 『孔子家語』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중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가장 높은 것은 『史記』의 「老莊申韓列傳」이다.

「老莊申韓列傳」에 의하면 노자는 楚나라 苦縣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李氏’이고, 이름은 ‘耳’이고, 자는 ‘聃’이다. 주나라의 守藏室의 관리를 지냈는데 일찍이 공자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만년에 주나라가 쇠퇴하자 關을 떠나 은둔하려고 하였는데 關令 尹喜의 부탁으로 道와 德에 관련된 글 5000여자를 남기고 사라졌다. 사마천은 이어서 공자와 동시대 사람인 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음을 밝히고 있고 공자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인 太史儋 또한 노자일지도 모른다는 설을 부가하고 있다. 그런데 『사기』외의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李耳 대신에 老聃이 주로 등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후대 노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혼동이 있었다.

이미 위진시대부터 노자의 설에 대한 이설이 등장하였고 고증학이 유행한 청대에 이르러서는 엄밀한 문헌고증을 통해서 노자와 노자의 저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특히 20세기 초 희의주의적 학풍이 유행하였을 때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사기』의 설을 부정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 전국시대 후기의 사람이라고 주장하였고 『노자』라는 책도 전국시대 중기 내지는 후기, 심지어 한대 초에 지어졌다고 주장하였다.5) 만약 노자가 공자보다 후대에 생존하였던 사람이라면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성립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 西漢 초기의 고분인 馬王堆에서 帛書本 『노자』가 출토되고 특히 90년대에 郭店에서 전국시대 초나라 고분에서 竹簡本 『노자』가 출토되면서 노자에 대한 담론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고증에 의하면 竹簡本의 성립 시기는 전국시대 중기인데 당시 서적의 유통속도를 고려해 보면 『노자』가 널리 유행하여 副葬品으로 쓰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아 노자의 생존연대와 『노자』의 성립시기의 하한선은 더욱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노자』가 춘추시대 말기의 저서라는 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6) 근래에 나온 노자에 대한 주요한 저서들은 대개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추세이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에서 노자를 李耳라고 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고증에 의해 老聃이 와전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7) 이에 따라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도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이 논문의 목적은 엄밀한 고증을 통해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임을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노자와 공자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많은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유가와 도가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만 상호보완적인 측면도 있고 실제로 오랜 역사를 통해서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문화적 상징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필자는 특히「老莊申韓列傳」에 기록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그 속에서 제기된 ‘화광동진’의 사상이 노자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문을 보도록 하자.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하여 물었다. 노자는 말하였다.

“그대가 하는 말은 그 말을 하였던 사람과 뼈는 이미 썩었고 그 말만 남아 있는 것이오. 게다가 군자는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고 때를 얻지 못하면 남루한 모습으로 다니는 법이오. 내가 듣기에 좋은 장사치는 깊게 감추어 마치 텅 빈 듯이 하고 군자는 큰 덕을 갖추고 있으나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듯이 해야 하오. 그대의 교만한 기운과 많은 욕심, 태를 내려는 기색과 넘쳐흐르는 뜻을 버리시오. 이들은 모두 그대 자신에게 무익할 뿐이오. 내가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오.”

공자는 물러나서 제자에게 말하였다.

“새라면 나는 그것이 능히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라면 헤엄칠 수 있음을 알고, 들짐승이라면 그것이 달릴 수 있음을 안다. 달리는 놈은 올가미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로 잡을 수 있고, 나는 놈은 주살로 잡을 수 있다. 용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구나.”8)




먼저 공자가 노자에게 질문한 것은 ‘禮’였다. 천하가 혼란해진 근본원인을 예의 붕괴로 보았고 주공이 세웠던 예를 회복함으로써 천하를 구하고자 하였던 공자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노자는 공자가 말하는 예를 이야기한 사람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恒常의 도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이미 죽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경전은 더욱 항상의 도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던 예, 실체는 알 수 없고 껍질만 남아 있는 예, 그래서 항상의 도가 될 수 없는 예로써는 지금 사회의 폐단을 구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에 노자는 군자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때를 얻으면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때를 얻지 못하면 포의로 살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노자의 생각으로는 당시는 천하의 도가 무너지는 시기로서 이러한 시기에는 마땅히 물러나 포의지사로서 은둔의 길을 가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노자는 벼슬에서 물러나 은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시기야말로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구제하기에 앞장서야 할 시기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노나라에서 정치를 펼치려고 노력하였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받아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였다.

이렇게 공자는 나아감과 물러남의 시기 판단에 대해서는 노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지만 나아감과 물러남의 기본 관점에 대해서는 수용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만년에는 정치적 포부를 버리고 조용히 제자들의 양성에만 힘을 썼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맹자에게 이어져 “궁할 때는 혼자 자신이라도 선하게 해야 하고 영달할 때는 천하를 두루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9)라는 말을 낳았던 것이다. 진퇴의 처세 부분은 유가와 도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후대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양자를 융합한 삶의 모형을 취한 사람들이 많다.

노자는 이어서 훌륭한 장사치가 천하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감추어 그 가치를 더 높이듯이 군자는 위대한 덕을 품고 있어도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이 보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노자의 ‘화광동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이 노자의 “大成若缺, 大盈若沖, 大巧若拙.” 구절의 뜻과 서로 부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10) 이미 필자의 여러 논문에서 밝혔듯이 ‘대교약졸’은 ‘화광동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공자의 세상에 대한 의욕과 야망이 지나침을 경계하였다.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한 시기에 대해서는 17, 18세, 31세, 34세, 42세, 46세, 51세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노자가 공자더러 의욕이 과다하고 기색이 너무 밖으로 뻗친다고 충고를 준 것으로 볼 때 아마도 30대 전후로 보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11) ‘無爲淸靜’과 ‘少私寡欲’의 수양을 주장하는 노자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선배로서 어지러운 천하를 구하겠다는 의지와 신념에 찬 젊은 공자의 모습을 보고 우려가 되는 마음에서 진지한 충고를 하였을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온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노자를 용이라고 칭하였는데 이것은 물론 공자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공자에 대한 노자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도가계열의 후인들이 지어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공자가 노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 자체가 도가계열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도 많다. 그렇지만 일단 본고에서는 겸손한 공자가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노자에 대해 경의를 표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노자가 공자에게 준 가르침은 예에 대한 답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처세와 수양에 관련된 내용이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노자 수양의 핵심은 ‘화광동진’에 있고 공자와의 대화에서도 그것이 잘 드러나고 있다. 중간 단락의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이 보인다.”는 부분도 그렇지만 앞부분의 “때를 얻지 못하면 남루한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와 재주를 안으로 감추고 살아가라는 이야기로서 결국 빛을 안으로 감추고 먼지와 더불어 살아가라는 뜻이다. 뒷부분의 교만한 기운과 욕심, 태를 내려는 기색과 뜻이 지나치게 넘치는 것을 버리라는 말은 양생과 수심에 관련된 것인데 그 지향점 또한 ‘화광동진’에 있다. 그러면 ‘화광동진’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풀이해보고 그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과 깨달음에서 ‘화광동진’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3. ‘和光同塵’에 대한 새로운 해석

‘和光同塵’은 4장에서는 ‘挫其銳, 解其紛’과 더불어 나오고 56장에서는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과 더불어 나오고 있다. 이 모두는 수양과 관련이 있는 구절들이다. ‘塞兌閉門’은 많은 주석가들이 감각적 쾌락을 막고 욕망을 끊는 것으로 주해하고 있고 ‘挫銳解紛’은 마음의 날카롭고 얽힌 부분을 정리하는 것으로 주해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이자 가장 높은 경지인12) ‘화광동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지혜의 빛을 안으로 거두고 다시 범속함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河上公本에는 각각의 구에 대해 “비록 홀로 보는 밝음이 있어도 마땅히 어두운 듯이 하고 빛으로써 사람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 무리와 함께 하고 먼지와 같이 해야지 스스로 특별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12)라고 하고 있다. ‘和其光’을 지혜의 빛을 감추는 것으로 보고 있고 ‘同其塵’은 범인과 동화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宋代의 蘇轍은 보다 깊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사람이 도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성인이 능히 그것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그 날카로움을 꺾는 것은 망령됨에 빠질 것을 두려워함이다. 얽힘을 푸는 것은 외물에 얽히게 될까봐 두려워함이다. 망령됨에 빠지지 않고 외물에 얽히지 않게 되면 외부의 근심은 이미 사라지고 빛이 생길 것이다. 그런 뒤에 그것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외물과 차별이 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빛은 지극히 순결한 것이고 먼지는 지극히 잡된 것이다. 비록 먼지라 할지라도 동화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만물을 버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人莫不有道也, 而聖人能全之. 挫其銳, 恐其流於妄也. 解其紛, 恐其與物搆也. 不流於妄, 不搆於物, 外患已去, 而光生焉. 又從而和之, 恐其與物異也. 光至潔也. 塵至雜也. 雖塵無所不同, 恐其弃萬物也.)13)




소철의 관점에서는 빛이란 단순한 지혜의 빛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으나 성인만이 온전하게 밝힐 수 있는 깨달음의 빛이요 성스러움의 빛이다. 범인들이 그 깨달음의 빛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망령됨에 빠져 있거나 외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거하면 내면의 빛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다시 그 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외물과 차별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지극히 순결한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잡된 티끌과 동화가 되는 것은 만물을 버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광동진’에는 회귀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수양의 과정에 들어가기 전의 처음의 상태는 범속함이다. 이것은 아직 내면의 깨달음의 빛을 자각하지 못한 단계이다. 수양을 거쳐서 내면의 깨달음의 빛을 자각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렇게 될 때 일반적인 범속함과는 전혀 다른 성스러움의 빛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빛을 부드럽게 하여 감추고 속세와 하나가 되는 ‘和其光 同其塵’의 과정을 통하여 다시 원래의 범속함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회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회귀는 아니다. ‘화광동진’ 이후의 범속함은 당연히 처음의 범속함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표면적으로는 범속해보지만 속으로는 깨달음의 빛이 감추어져있는 것이다. 그것은 순환을 하면서도 한 단계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 나선형적 회귀라고 할 수 있다.

‘화광동진’에서 나선형적 회귀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일차적 의미는 감추기이다. 얕은 성스러움을 넘어서 더 깊은 성스러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성스러움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감추기가 노자의 수양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도덕경 곳곳에서 이 감추기를 다른 말로 풀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밝고 환하게 사방에 통달하고도 무지할 수 있는가?”14),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킨다.”15) 등의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사방에 통달하는 큰 지혜를 얻고 수컷의 강건함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감추고 무지한 듯이 보이고 유약한 듯이 보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의 修道와 修德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는 ‘화광동진’의 나선형적 회귀가 단순히 감추기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대립되는 양극성을 통합한다는 의미도 있다.

소철의 주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빛과 티끌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다. 하나는 지극한 성스러움과 고결함의 상징이고, 하나는 지극한 범속함과 잡됨의 상징이다. 또한 빛은 본체의 세계 내지는 초월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고, 먼지는 현상의 세계 내지는 범속한 일상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철저하게 대립된다.

범인들은 대부분 범속한 일상의 세계에서 잡된 욕망의 포로가 되어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기 십상이다. 이에 비해 수도자들은 성스러운 초월의 세계에 심취하여 일상의 현실을 무시하기가 쉽다. 수도의 과정으로 볼 때 성스러움과 고결함을 추구하는 것은 범속함과 잡됨에 머물러 있는 것에 비해서는 분명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 또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다. 대립적인 양자를 통합하는 것이 더욱 깊고 원숙한 성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관점으로는 노자가 성스러움과 고결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다시 범속함과 잡됨과 동화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은 결국 성스러움과 속됨의 대립적 요소를 하나로 통합하여 더 깊은 성스러움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라고 보고 싶다.

감추기와 통합은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실 ‘화광동진’이라는 자구만 찬찬히 뜯어보아도 그것이 감추기와 통합의 두 단계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광’이라는 말은 성스러움의 빛을 부드럽게 하여 감추는 것이므로 당연히 감추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비해 ‘동진’은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범속한 세계와 동화되는 것이므로 성과 속의 통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스러움과 범속함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스러움을 감추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스러움의 빛이 밖으로 강하게 발산되면 범속함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숭배하거나 경계심을 가지고 멀리할 수밖에 없다. 성스러움의 빛을 감출 수 있을 때 비로소 범속함과도 동화될 수가 있다.

그러나 ‘화광’을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실 ‘동진’의 정의와 관련이 있다. 만약 동진을 단순히 겉으로 깨달음의 티를 내지 않고 속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으로만 정의한다면 ‘화광’과 ‘동진’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 빛을 감추는 것 자체가 바로 먼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진정한 ‘동진’이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동진’이 이루어지려면 단순히 깨달음의 티를 내지 않고 범인과 어울리는 단계를 넘어서 진정으로 범인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단계로 나아가야한다. 소통과 교류가 없는 것을 어찌 ‘同化’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소통과 교류라는 요소를 고려하여 ‘동진’을 정의하는 경우 ‘화광’과 ‘동진’은 동의어가 아니다. 성스러움의 빛을 감추고 범인들 속에 살고 있지만 그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 교류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필자는 ‘화광동진’을 ‘화광’의 단계와 ‘동진’의 단계 둘로 나누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기 단계는 깨달음의 빛을 감추는 ‘화광’에 중심을 두고 있는 단계이다. ‘화광’에 초점을 맞춘 대표적인 유형은 바로 은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은자는 그냥 현실에 불만을 품고 은둔해서 지내고 있는 보통의 은자가 아니라 속으로 깊은 지혜와 성스러움을 가지고 있되 그것을 감추고 살아가는 은자를 말한다. 노자 당시에 이미 덕과 지혜를 갖춘 은자들이 많이 있었고 『논어』에도 공자에게 충고하는 은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은자들 중에서도 감추기에 더욱 급급하여 아예 인간세상을 떠나 깊은 산중에서 은거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세상 사람들 속에 묻혀 범인처럼 지내는 사람도 있다.

‘화광’의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성스러움과 지혜를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는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범인들 속에서 어울려서 티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러나 내면에서 성과 속의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범속함을 수용할 뿐 여전히 성스러움과 초월의 세계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거나 내면의 심원한 세계에 도취하여 범인들과는 깊게 소통하거나 교류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심리적 거리를 두고 동정을 할 뿐 더불어 진정으로 그 아픔을 공감하며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상태에서는 육신이 산속에 있든 저자거리에 있든지 간에 마음은 여전히 홀로 고원한 성스러움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동진’의 단계에 이르러야 몸만 범속한 세상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고 마음 또한 범속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깨달은 자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물론 자신의 성스러움을 과시하거나 우월자의 관점에서 동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진심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말없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주게 된다.

그런데 ‘동진’이 더욱 무르익게 되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범속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차원에서 현실의 모순과 질곡을 직시하며 이를 변혁하려고 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개개인의 범속한 일상의 삶은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모두 그 사회의 구조와 문명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회가 모순에 빠지고 문명이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보통 사람의 일상성은 망가지고 피폐해진다. 진정으로 성과 속을 통합하려고 한다면 표피의 일상에서 심층의 일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그러므로 범속한 일상성의 심층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적 구조와 문명의 성격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회와 문명과의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의 몇몇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사회와 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현실 개혁의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동진’이 더욱 확장된 규모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4.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

노자와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서주 초기에 확립된 봉건질서와 예악제도가 와해되어가던 시기였다. 노자와 공자는 모두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로서 비록 생애의 노정과 사상적 성향은 달랐지만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대안을 내놓았다는 면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먼저 노자의 삶과 깨달음을 보도록 하자.

사실 사마천의 노자의 생평에 대한 기록은 워낙 소략하기 전체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주나라의 수장실의 관리를 지냈다는 것이다. 수장실의 관리를 지내면서 책을 가까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금의 역사와 문물제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그러나 주나라가 쇠퇴함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어떤 이는 대략 5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나이에 주나라 왕실에서 일어났던 정변으로 인해 왕실 도서관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데16),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노자 당시에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지배계층에서 물러나서 초야에 머물면서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을 하였던 은자의 무리들이 많이 있었다. 『논어』「微子」편에 등장하는 接與, 長沮, 桀溺, 荷蓧丈人 등이 그러한 무리들이다. 이러한 은자들의 무리가 후대 도가학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고 은자들 중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을 펼칠 수 있었던 노자가 그들의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노자』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상은 단순히 현실비판의 은둔자의 사상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그 속에는 우주본체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다룬 정치사상,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양생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다룬 수양과 처세론, 그리고 당시 현실에 대한 비판까지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보면 훨씬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분명히 정신적 수양을 통하여 심오한 내적 체험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虛靜의 극치 속에서 감각과 개념의 세계를 넘어서는 본체의 세계에 다가갔던 것으로 보인다.17)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화광’의 지혜를 체득하며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진’을 심화시켜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노자의 글 속에서 현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문명비판에 대한 글이 많은 것은 물론 노자 자신이 수장실의 관리를 지낸 최고의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초월적 세계, 본체의 세계에만 경도되었다면 현실에 대해 그렇게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자의 계승자라고 불리는 莊子만 해도 노자만큼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구만리 상공을 나는 大鵬과 같이 현실을 멀리 초월해서 物外의 세계에서 逍遙遊를 즐기는 데에 있다. 물론 『장자』 속에서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과 혼탁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주류가 아니다. 장자 사상의 주류는 역시 초월적 대자유에 있다.

불교 중에서 ‘화광동진’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선종의 선사들 또한 초월의 세계에 경도되기보다는 일상의 중요성을 더 많이 강조하면서 성속 양자를 통합하려고 하였다.18) 그러나 선사들이 강조한 일상성이란 주로 밥 먹고 차 마시고 물 깃고 장작 패는 일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매우 중요한 일상성임에는 틀림없지만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다. 우리의 일상성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정치사회구조와 문명이 깔려 있다. 정치사회 구조의 문제와 문명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그냥 밥 먹고 차 마시는 표피적인 일상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과의 소통이 단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사들의 ‘화광동진’은 아직 감추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사회에 대해 비판하면서 문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노자의 ‘화광동진’은 이후에 노자를 추종하였던 도가계열의 사상가나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의 토착화를 추구하였던 선사들보다 훨씬 높은 단계에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실문명에 대한 그의 주장들이 현실 속에서의 실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식인의 관념에서 도출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관념상으로는 분명히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통합보다는 감추기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현실 속으로 뛰어들기보다는 은자의 삶에 머물렀고 만년에는 결국 문명 세계를 등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사마천은 노자의 학문을 간략하게 총평하면서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았는데 그 학문은 스스로 감추고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일로 삼았다.”19)라고 언급하였는데 정확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감추기에 지나치게 치중하였기에 노자의 생애는 이미 사마천 당시에도 모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가서는 여러 가지 전설과 범벅이 되어 신선으로 추앙되고 심지어는 신의 대열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제시한 현실문명에 대한 처방 또한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상은 법가가 극성을 부린 뒤 휴식기를 필요로 하였던 한대 초에 잠시 받아들여졌고 유가사상이 관학이 된 뒤부터는 현실정치에서 별로 활용될 수가 없었다. 주로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 사이에서 환영받았을 뿐이다. 이것은 바로 노자가 관념적으로는 ‘동진’의 규모를 크게 확장시키는 단계까지 나갔지만 실제 현실의 삶에 있어서는 ‘화광’에 머무름으로 인해 나타난 한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노자의 ‘화광동진’은 미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공자를 살펴보자. 우선 공자 또한 노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도의 경지와 덕성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감추기를 좋아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논어』의 다음 구절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叔孫武叔이 조정에서 대부들에게 “子貢이 공자보다 현명합니다.”라고 말하였다. 子服景伯이 자공에게 알려주자 자공이 말하였다. “궁궐의 담에 비유하자면 저의 담은 어깨 높이여서 방과 집이 좋음을 다 엿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부유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적기 때문에 손숙무숙의 이야기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20)




당시 일반 사람들 중에는 공자의 도와 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보다는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을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해 자공은 황송해하며 스승을 변론하였다.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부유함을 볼 수 없다는 말 속에서 공자 또한 ‘화광’을 잘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은 공자의 덕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오랫동안 공자를 접하고 그에게서 배워본 제자들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더 가까운 제자일수록 공자의 도와 덕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고, 뚫고 들어갈수록 더욱 견고하다. 앞에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어느 새 뒤에 있다.”21)라고 하면서 공자의 도와 덕의 경지에 대해 극찬을 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위대한 점은 감추기에만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스러움과 범속함의 통합,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즉, ‘동진’을 제대로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공자가 노자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웠다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도와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정진하여 사십이 되었을 때는 그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 잡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공자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도가 계통의 은자들 가운데서는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버둥거리는 공자를 비웃고 공자더러 명리를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논어』「미자」편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진’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한 공자는 어지러운 난세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두고 혼자 편안하게 은둔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자는 “새나 짐승과 무리지어 함께 살 수 없으니,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천하에 올바른 도리가 행해지고 있다면 나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22)라는 말을 하였다. 실제로 그는 한 평생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명적 대안은 노자처럼 현실과 괴리된 주관적 직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현실과 결합된 실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후대 중국문명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동진’의 극치라고 보고 싶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화광동진’이란 먼저 내면의 빛을 체득한 뒤에 그 빛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그런 내면의 빛을 체득하지 못하였다면 세상 속에서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도 ‘화광동진’이라고 할 수 없다. 과연 공자는 깨달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러한 깊은 깨달음 없이 그저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현실개혁에 급급한 사람이었을까?

전통적으로 도가나 불가에서는 공자의 깨달음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에는 구도와 종교의 세계에서 추구하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세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상의 정치사회적인 윤리나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초월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눈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장자』 속의 공자에 대한 우화를 보아도 대부분 공자를 폄하하고 있고 불교의 승려 가운데서도 공자를 폄하한 사람이 많다. 晩唐五代의 雲門禪師는 일찍이 “고인도 오히려 아침에 도를 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사문에게 있어서이랴! 아침저녁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크게 노력하고 진중하기를 노력하시오.”23)고 말하기도 하였다. 공자를 일개 출가자보다 못한 속인으로 폄하한 말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도가나 불가에서 공자의 도를 폄하한 것은 그들의 도에 대한 기준 자체가 지나치게 초월적인 측면에 경도되어 공자 속에 있는 초월성과 일상성의 통합을 볼 수 없었던 데서 기인한 것이다. 좀 더 깊게 바라보면 공자의 깨달음과 삶 속에는 분명 초월적 성스러움의 요소가 있다. 다만 감추어져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Fingarette은 공자의 가르침은 모세, 예수, 부처, 노자, 혹은 우파니샤드 교사들의 그것과는 달리 신비적 요소가 거의 없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무미건조한 도덕주의적 가르침 같지만 자세히 보면 주술적 힘(magic power)에 대한 신뢰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고, 공자는 의례를 통하여 인간존재의 본질인 성스러움을 고양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하였다.24) 일리가 있는 학설이다. 그러나 필자에 관점에서는 공자의 성스러움은 단순히 의례를 통해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치열한 구도의 과정과 깨달음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자기 스스로를 ‘生而知之’가 아니라 ‘學而知之’라고 하였다. ‘생이지지’란 태어나면서 안다는 뜻으로 타고난 천재 내지는 성인을 가리키고, ‘학이지지’란 배움을 통한 꾸준한 노력으로 성스러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얼마나 배움을 좋아하였는가는 『논어』의 첫머리가 “배우고 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25)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好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공자의 배움은 단순한 지식습득이 아니었다. 『논어』에 나오는 ‘好學’을 살펴보면 주로 인격도야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단순한 인격도야라기보다는 바로 구도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눈을 감기 얼마 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삼십에 바로 서고 사십에 불혹하고 오십에 천명을 알고 육십에 귀가 순통하고 칠십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26)라고 말했다.

철이 막 들기 시작한 열다섯 살부터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의 삶은 치열한 구도의 삶이었다. 그는 실로 아침에 도를 들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도를 구하였다. 비록 점진적인 구도의 연속이었지만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하늘의 명을 알게 되었다는 오십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하늘이란 초월적인 존재, 우주의 주재가가 거하는 곳으로 여겨졌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 내지는 구도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중국문명의 발전과정을 보면 殷代 이전에는 巫俗的 성격이 강한 神本主義에서 周初에 이르러서 점차 人文化의 길로 나아간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신본주의 문명에서 인문적 성격의 문명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역시 춘추시대 말기라고 볼 수 있고 공자는 그 전환기에서 인문화로 나아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공자 당시에는 하늘에 대한 관념도 점차 인문화 되기는 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하늘이라는 말 속에는 단순한 윤리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는 신성함이 남아있었고 공자의 하늘에 대한 여러 언급들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27)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천명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 도덕적 수양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도를 통한 깨달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근래 학자 李冬君도 공자의 성스러움의 의미에 대해 체계적으로 기술하면서 ‘불혹’까지는 군자의 단계이고 ‘지천명’이후부터 성인의 단계에 들었다고 보고 있다.28)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다 宋나라에서 桓魋에 의해 생명의 위험에 처하였는데 그때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와 같은 자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29)”라고 말했고, 匡 지방에서 생명의 위협에 처하였을 때도 “하늘이 이 예악제도를 없애고자 한다면 뒤에 태어난 내가 이 예악제도에 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이 예악제도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데 광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30)라고 말했다. 생명의 위협에 처하였을 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천명을 확실히 자각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육십에는 ‘耳順’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순’이라는 말은 실로 모호한 말이어서 제설이 분분하였는데 대체로 역대의 주요한 주석가들은 말을 듣고 그 뜻을 깊게 이해한다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31) 아마도 ‘지천명’하고 난 다음에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 다 이해하게 되는 경지로 나아갈 것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李冬君도 ‘이순’은 ‘지천명’을 체화하는 과정으로서 말없이 천명에 따르고 동화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32)

‘이순’에 대해서는 대부분 ‘지천명’의 결과 내지는 심화로 바라보고 있는데 필자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順’이라는 말은 따른다는 뜻이다. 그것은 듣는 대로 다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다시 겸허하게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따르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천명을 알게 되면 내면에서 엄청나게 강한 확신이 밀려오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는 귀에 잘 들려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면의 신념에 도취되어 세상과의 소통이 막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다시 타인의 비판과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있고 문명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순’은 자신의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다시 세상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 귀를 열어 놓는 경지로서 ‘화광동진’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다음에 칠십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내와 외의 조화를 가리킨다. 여기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란 내면의 욕구, 신념, 의지 나아가 깨달음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 내면의 깨달음은 외면의 현실세계와 충돌한다. 노자의 경우만 해도 결국 내면의 깨달음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등진 은자의 길을 택하였다. 공자는 깨달음 이후에도 세상과의 소통을 원하였고 만년에 눈을 감기 전에는 내면의 깨달음과 외면의 현실을 서로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화광동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볼 때 공자의 가르침 속에 내면의 성스러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인 스스로의 체득마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후대 공자의 가르침에서 본원적 성스러움이나 초월적 세계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었던 것은 바로 공자 자신이 ‘화광’을 통하여 그것을 감추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다. 그래서 제자들은 “선생님이 예악제도와 문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가히 들을 수 있지만 선생님이 타고난 본성이나 하늘의 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가 없다.”33)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빛은 말없는 가운데 삶에 묻어나왔을 것이고 제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만약 공자가 깊은 깨달음 없이 단순히 정치사상이나 윤리 도덕만을 가르쳤다면 제자들로부터 그렇게 성인으로까지 추앙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공자는 구도의 새로운 차원, 성스러움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에는 소수의 제자들 외에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헌신적인 계승자들에 의해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차 확산되었고 마침내 중국 문명의 주류가 되었다. 李冬君은 중국 문명의 긴 흐름을 夏殷周의 ‘神化’, 殷周之際에서 시작되어 공자에 이르러 완성되어 19세기말까지 계속된 ‘聖化’,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公民化’, 삼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는 ‘성화’란 성인이 주체가 되는 문화라는 뜻으로 공자는 ‘下學上達’로써 성화의 모델을 제시하고 실천하였으며 공자의 성화는 이후 계승자들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결국 중국문명의 주류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34) 일리가 있는 설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화광동진’의 가르침은 실로 근대서구의 문명이 침투하기 전까지 중국문명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서는 사회의 혼란을 틈타 유교는 점차 쇠퇴하고 도교와 불교가 크게 흥성하였다. 특히 인도에서 수입된 불교는 중국인들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종교적 성스러움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이에 수많은 지식인들은 인도적 성스러움의 강렬한 빛에 깊게 심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흘러갈수록 ‘화광동진’의 영향으로 깨달음의 빛을 안으로 감추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강조하는 선종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대를 지나 송대에 와서는 유교가 다시 사상계의 주류를 찾게 되었다. 일상적 범속함에서 초월적 성스러움으로 갔다가 다시 일상적 범속함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물론 송명대의 신유학이 단순히 범속함만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다. 신유학은 불교로부터는 심성론과 수양론을 대폭적으로 수용하였고, 도교로부터는 우주론을 보완하여 천근한 일상사에서 심원한 본체의 세계, 본성의 세계에 이르는 종합적인 학문체계를 건립하였다. 범과 성의 새로운 통합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성스러움을 안으로 감추고 표면적으로는 ‘日用之間’을 적극 제창하였다. 결국 최후의 승리는 ‘화광동진’을 터득한 유교 측으로 돌아갔다. 중국사상사의 거대한 흐름 자체가 ‘화광동진’의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5. 맺는 말

‘화광동진’은 노자의 수양론 중의 한 부분이다. 물론 『노자』의 많은 구절이 그러하듯이 이 또한 노자 자신의 독창적인 언어라기보다는 전승되어오던 금언이나 격언들을 옮긴 것인지도 모른다. 내용으로 볼 때 아마도 은둔 사상가들 사이에 내려오던 금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자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또한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였기 때문에 노자 사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광동진’의 일차적 의미는 성스러움의 빛을 감추는 것이다. 그러나 ‘화광동진’의 의미에 대해서 오랫동안 천착해온 필자의 관점에서는 ‘화광동진’ 속에는 성스러움의 감추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과 범속함을 통합하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후자가 더욱 심화된 단계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자는 분명히 ‘화광동진’을 중시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였지만 궁극의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미완의 ‘화광동진’이었다. 오히려 공자가 ‘화광동진’의 심층적 의미를 체득하고 삶 속에서 그것을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많다. 그리고 노자라는 인물의 실재성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 공자 당시에 죽간본 『노자』를 쓴 은둔 사상가 내지는 그와 비슷한 부류의 은둔 사상가들은 존재하였을 것이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던 공자가 그들로부터 ‘화광동진’의 사상에 대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가르침을 받았을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공자의 삶과 깨달음 속에도 ‘화광동진’의 사상이 묻어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노자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사상을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자의 사상이 우주만물의 근원인 도를 강조하면서도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나 공자의 사상이 초월적인 세계보다는 일상의 세계에 더욱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들은 모두 ‘화광동진’과 많은 관계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초월적인 성스러움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사상이 만개하였던 인도나 유럽 내지 아랍문명권과는 달리 중국문명권에서는 현실적 실용성을 강조한 정치사상이 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또한 ‘화광동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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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孔子和老子是春秋末期的偉大的思想家. 西漢初的史家司馬遷在<老子列傳>中記載了孔子曾向老子問禮的故事. 歷代以來很多學者對司馬遷的記錄表示懷疑, 其實對老子其人和其書的問題至今未能達到一致的見解. 但最近不少學者依據馬王堆帛書本和郭店楚簡本的發掘主張司馬遷的記錄是可靠的. 不論孔子向老子問禮的故事是否史實, 這個故事給我們很多啓發.

我認爲老子對孔子的忠告的主旨就在於作爲老子修養論的樞紐的‘和光同塵’, 因而擬以‘和光同塵’的觀點比較一下他們的生平和悟境. ‘和光同塵’的意思是把修道以後發露的神聖的光芒隱藏起來, 與那些塵俗的人和世界相同. 其基本意義在於聖俗的調和. 我認爲同塵有兩個層次. 第一個是表面上的同塵. 雖然講究跟塵俗的人和世界相同, 可是沒有溝通和交流. 第二個深層的同塵是能够跟塵俗的人和世界進行溝通和交流的階段, 這才可以說是達到聖俗的調和.

從『老子』裏面的許多句子我們可以推測老子體會到作爲宇宙本體的道, 可是他沒有離開塵世, 對於當時的社會情況表示了較大的關心, 提出了救濟混世的方法, 這說明他推究聖俗的調和. 從這方面來看, 老子與力求逍遙遊於物外世界的莊子截然不同. 可惜的是他不能達到現實生活中的實踐, 究竟以隱者留了名. 孔子則不一樣. 從『論語․子張』中的“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來看, 我們可以知道孔子也能够把修道以後發露的光芒隱藏起來, 因此除了他的弟子以外當時一般人不能推測孔子的悟境有多深. 但是他的特點不在於‘和光’, 而在於‘同塵’. 他不但提出救濟混世的方法, 而且在現實生活中不斷地努力實踐他的理想. 這可以說是眞正的‘和光同塵’.




주제어 : ‘和光同塵’, 修養論, 悟境, 神聖, 塵俗, 聖俗的調和

1) “道盅, 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2) “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3) 『老子』는 판본에 따라 자구의 차이가 많고 특히 근래에 발굴된 帛書本은 通行本과 순서가 다르고 竹簡本은 내용의 편차도 심하다. 여기서는 통행본 가운데서 河上公本을 저본으로 한다.




4) 이에 대해서는 박석, 「老子 修養의 삼 단계」(韓國中國文化學會, 『中國學論叢』18집) 참조.




5) 노자와 『노자』의 연대에 대한 다양한 주장에 대해서는 熊鐵基 등,『中國老學史』,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1995, 1-20쪽 참조.




6) 熊鐵基 등, 『二十世紀中國老學』,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2003, 512-3쪽; 陳鼓應 白奚, 『老子評傳』, 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1, 9-10쪽 참조.




7) 熊鐵基 등,『中國老學史』(福州: 福建人民出版社, 1995); 張智彦,『老子與中國文化』(貴州: 貴州人民出版社, 1996); 陳鼓應 白奚, 『老子評傳』(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1); 熊鐵基 등,『二十世紀中國老學』(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2003) 등의 저서에서 모두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郭沂, 郭店竹簡與先秦學術思想』(上海: 上海敎育出版社, 2002)에서도 공자가 만났던 노자는 바로 老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죽간본 『老子』의 저자와 백서본 『老子』의 저자가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전자의 저자가 老聃이고 후자의 저자는 太史儋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8) “予所言者, 其人與骨皆已朽矣, 獨其言在耳. 且君子得其時則駕, 不得其時則蓬累而行. 吾聞之, 良賈深藏若虛, 君子盛德容貌若愚. 去子之驕氣與多欲, 態色與淫志, 是皆無益于子之身. 吾所以告子, 若是而已. 孔子去, 謂弟子曰, 鳥吾知其能飛, 魚吾知其能游, 獸吾知其能走, 走者可以爲網, 游者可以爲綸, 飛者可以爲矰, 至於龍,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也.” 司馬遷, 『史記․列傳』卷63 「老子韓非列傳」 北京: 中華書局, 1985




9)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孟子』, 「盡心下」




10) 郭沂, 『郭店竹簡與先秦學術思想』, 上海: 上海敎育出版社, 2002, 519쪽 참조.




11) 차주환, 『공자-그 신화를 밝힌다』, 서울: 솔출판사, 1998, 79-89쪽에서는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대략 34세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13) 帛書本이나 竹簡本에 의하면 通行本과는 달리 56장에서는 ‘和光同塵’이 挫銳解紛 앞에 나온다. 대신 4장에서는 통행본과 마찬가지로 ‘和光同塵’이 挫銳解紛의 뒤에 위치한다. 죽간본은 4장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수양론의 관점에서 볼 때 순서에 상관없이 ‘和光同塵’이 보다 높은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박석, 「老子 修養의 삼단계」, 中國文化學會, 『中國學論叢』, 제18집, 379-401쪽 참조.




12) “言雖有獨見之明, 當如闇昧, 不當以曜亂人也. 當與衆庶同坵塵, 不當自別殊.” 王卡, 『老子道德經河上公章句』, 14쪽




13) 焦竑, 『老子翼』, 『四部要籍注疏叢刊․老子』, 北京: 中華書局, 1998, 1229쪽




14) “明白四達, 能無知乎.” 『老子』10장.




15) “知其雄, 守其雌” 『老子』28장.




16) 張智彦,『老子與中國文化』, 貴州: 貴州人民出版社, 1996, 54-5쪽 참조.




17) 『老子』의 1장, 14장, 16장, 25장 등에서 이를 알 수 있다.




18) 박석, 「‘和光同塵’이 선종 깨달음에 미친 영향」, 상명대 어문학연구소, 『어문학연구』8집, 1999 참조.




19) “老子脩道德, 其學以自隱無名爲務.”『史記』권63 「老莊申韓列傳」




20) “叔孫武叔語大夫於朝曰, 子貢賢於仲尼. 子服景伯以告子貢.子貢曰, 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 得其門者或寡矣, 夫子之云 ,不亦宜乎.” 『論語』「子張」




21)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論語』「子罕」




22)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論語』, 「微子」




23) “古人尙道朝聞道夕死可矣, 況我沙門. 日夕合履踐個什麽事, 大須努力, 努力珍重.” 道原,『景德傳燈錄』卷19, 中國電子佛典協會, 『大正新脩大藏經』51冊.




24) Herbert Fingarette, 노인숙 역, 『공자입니다 성스러운 속인』, 서울: 일선기획, 1990, 21-41쪽 참조.




25)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論語』, 「學而」




26)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論語』, 「爲政」




27) 林存光, 『歷史上的孔子形象』, 濟南: 齊魯書社, 2004, 12-29쪽 참조.




28) 李冬君, 『孔子聖化與儒者革命』,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4, 49-51쪽 참조.




29)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論語』「述而」




30)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論語』「子罕」




31)『論語正義』에서는 鄭玄의 말을 인용하여 “聞其言而知其微旨”라고 풀이하였고 朱熹는 『四書集註』에서 “聲入心通, 無所違逆, 知之之至, 不思而得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32) 李冬君, 위의 책, 50쪽.




33)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論語』 「公冶長」




34) 李冬君, 『孔子聖化與儒者革命』,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