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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7
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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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
기사승인 2024.02.28
- 적의 계보학 ②
▲ 서보혁 연구위원
훗날 통일을 기록하는 역사가들은 2024년을 어떻게 생각할까? 2024년을 통일의 분기점으로 볼까, 아니면 분단의 새로운 기점으로 평가할까? 북한을 지배하는 조선노동당의 김정은 총서기는 2023-24년 언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시이자 한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아니라 여느 국가와 같은 국제관계, 그것도 “적대적 두 국가관계”라 규정하였다.
김정은은 올 1월 최고인민회의 전원회의에서 “공화국 민족력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받아 북한 정권은 관련 법제도와 기구를 폐지하고 시설을 철거해나가고 있다. 김정은 정권의 이런 조치들의 배경을 두고 전문가들은 뒤로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앞으로는 김정은 정권의 독자적인 국가발전전략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향후 전망도 남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위와 같은 김정은 정권의 통일전략은 수정될 수 있다거나, 그 반대로 더 이상 북한은 통일전략을 복원하지 않고 북중러 협력으로 고립주의 노선을 지속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보통의 국가관계로 전환한다는 김정은 정권의 태도에 한국의 정부는 물론 대북 교류협력을 전개해온 민간단체들에게도 충격을 주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비판하고 통일정책을 지속한다는 입장이다. 민간단체들은 통일된 입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그간의 활동을 성찰하고 새로운 방향을 준비하겠다는 신중한 입장인데 비해, 다른 소수의 단체는 북한의 입장을 추종하고 있다. 북한의 통일 포기 선언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중요하게 고려할 바가 국민들의 북한·통일 여론이다. 이를 소개하며 국내 대북 인식의 현 주소와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은 한국인들의 통일의식을 가장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조사해오고 있다.(1) 2023년 조사에서 북한에 대한 인식은 가장 악화되었다. 이전 해에 비해 대북 적대의식이 13.6%→18.6%로 높아지고, 경계의식이 17.7%→24.0%로 높아진 반면, 협력의식은 47.9%→37.7%로 10.2%p 낮아졌다. 그 결과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대북 부정적 인식이 42.6%로, 이 조사가 실시된 2007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연구원은 북한에 대한 피로감이 높은 상황에서 북한의 적대적 행보가 한국인의 대북 인식에 다분히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응답자의 69.0%는 북한정권과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응답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또 국민들의 78.1%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인의 다수는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연구원측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한다’는 인식이 2018년과 2019년에 40%로 반짝 상승하였고, 2020년에 24.6%로 하락한 이후 23.7%→21.5%→22.0%로 2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은 87.6%로 나타났는데, 최고치를 기록했던 2022년의 92.5%에 비해 소폭 하락하였으나 여전히 높은 편이다.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에 대한 위기와 불안은 64.8%로 이전 해(60.9%)에 비해 소폭 상승했다. 이상 나타난 바와 같이 국민들의 대북 인식은 부정적임을 알 수 있고 그 양상은 2018년 짧은 평화 분위기 이후부터 나타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위와 같은 한국민들의 부정적인 대북 인식에서 어떤 함의와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까? 우선 국민들은 김정은 정권에 대한 적대의식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김정은 정권이 핵능력을 고도화시키고 이를 위해 자원을 군사력 증강에 우선 투자하는 대신 주민들의 인권 개선에 나서지 않고, 북한식 통일전략에 호응하지 않는 남한과 적대관계를 천명하고 긴장을 고조시킬 우려 등 여러 가지이다. 이런 적대의식을 규범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하여 필자는 이를 ‘적정 적대의식’이라 이름 붙여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해야 할까, 또 남북대화는 불필요할까? 나아가 이제 통일은 물 건너간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국민 여론을 보면 그 합리성을 읽을 수 있다.
▲ 서로간의 적대의식이 높아가는 가운데 통일을 향한 걸음이 정체되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연구원이 2023년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2)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남북대화가 별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66.25%로 나타났다. 또 경제제재가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은 72.9%로 더 크게 나타났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비핵화 유도 방안에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통일연구원측은 북한의 잦은 미사일 도발과 핵위협에 대한 피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거기에 북한의 집요한 핵개발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다는 체념의식과 그런 북한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겠다는 국민들의 실리적 태도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대북 인식은 통일의식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위 2023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국민들은 통일의 필요성에 43.8%가 찬성한 반면, 반대는 29.8%였다. 참고로 2007년에는 통일 찬성 63.8%, 반대 15.1%였다. 통일 찬성 여론이 20% 줄어들어 들었다. 그런 전제 하에서 통일이 필요한 이유로는 ‘남북 간 전쟁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가 38.9%로 나타났는데, 기존에 일순위로 나온 응답인 ‘같은 민족이니까’는 30.6%로 나왔다.
통일에 대한 찬성 여론이 줄어든 가운데 그 이유로 민족 동질성보다는 평화정착이 앞선 것이다. 여기서 통일에 반대하는 이유로 통일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33.9%), 통일 이후 생겨날 사회적 문제(28.7%), 남북 간 정치체제의 차이(20.0%)가 나왔다. 또 통일로 기대할 이익이 남한에 이익이 된다(53.6%)와 자신에 이익이 된다(27.9%) 간에 격차가 큰 점도 인상적이다. 대북정책에서 시급한 문제로는 북한 비핵화, 북한의 인권개선, 군사적 긴장해소 등이 80% 가깝게 나왔다.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것인데, 그것이 협력 및 지원 대상으로서의 긍정적 대북 인식을 압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정권의 권력 세습, 북한의 평화 위협, 인권 침해 등 국민들은 물론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이유 있는 것들이다. 다만, 북한의 부정적인 행태는 북한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남북관계, 북한과 미국의 관계, 국제정세 등 다차원적인 분석을 할 때 그 평가는 물론 대안 마련에도 합리성을 높여줄 것이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통일에 대한 유보적인 여론 증가를 동반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평화조성을 전제로 한 통일, 점진적인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통일 자체가 무용함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평화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평화통일’론은 규범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평화적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지 선평화, 후통일의 의미가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및 민족 포기 선언이 단기적으로 남북 간 대화 및 통일 논의를 어렵게 할 것은 사실이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논의 포기는 북한체제의 통일 역량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남한체제 주도의 통일로 간단히 환원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북한 주민들의 자결권, 북한 정권의 무장력, 그리고 기후위기 등 글로벌 위기의 실존적 위협 등을 고려할 때, 통일은 기존의 체제·민족·이념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공감·공존·공영과 같은 ‘열린 통일’, ‘다함께 통일’을 요청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럴 때 이유 있는 대북 적대의식은 보다 이유 있는 통일의식으로 변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주
(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은 2007년부터 한국갤럽에 의뢰해 매년 ‘통일의식조사’를 해오고 있다. 전국에 거주하는 성인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1대1 개별 면접조사를 하고 있는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8% 포인트이다.
(2) ‘통일연구원(KINU) 통일의식 조사 2023’은 전국 거주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총 1,001명을 대면 면접조사로 진행했는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 포인트이다.
서보혁(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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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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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계보학 ②
▲ 서보혁 연구위원
훗날 통일을 기록하는 역사가들은 2024년을 어떻게 생각할까? 2024년을 통일의 분기점으로 볼까, 아니면 분단의 새로운 기점으로 평가할까? 북한을 지배하는 조선노동당의 김정은 총서기는 2023-24년 언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시이자 한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아니라 여느 국가와 같은 국제관계, 그것도 “적대적 두 국가관계”라 규정하였다.
김정은은 올 1월 최고인민회의 전원회의에서 “공화국 민족력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받아 북한 정권은 관련 법제도와 기구를 폐지하고 시설을 철거해나가고 있다. 김정은 정권의 이런 조치들의 배경을 두고 전문가들은 뒤로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앞으로는 김정은 정권의 독자적인 국가발전전략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향후 전망도 남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위와 같은 김정은 정권의 통일전략은 수정될 수 있다거나, 그 반대로 더 이상 북한은 통일전략을 복원하지 않고 북중러 협력으로 고립주의 노선을 지속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보통의 국가관계로 전환한다는 김정은 정권의 태도에 한국의 정부는 물론 대북 교류협력을 전개해온 민간단체들에게도 충격을 주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비판하고 통일정책을 지속한다는 입장이다. 민간단체들은 통일된 입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그간의 활동을 성찰하고 새로운 방향을 준비하겠다는 신중한 입장인데 비해, 다른 소수의 단체는 북한의 입장을 추종하고 있다. 북한의 통일 포기 선언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중요하게 고려할 바가 국민들의 북한·통일 여론이다. 이를 소개하며 국내 대북 인식의 현 주소와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은 한국인들의 통일의식을 가장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조사해오고 있다.(1) 2023년 조사에서 북한에 대한 인식은 가장 악화되었다. 이전 해에 비해 대북 적대의식이 13.6%→18.6%로 높아지고, 경계의식이 17.7%→24.0%로 높아진 반면, 협력의식은 47.9%→37.7%로 10.2%p 낮아졌다. 그 결과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대북 부정적 인식이 42.6%로, 이 조사가 실시된 2007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연구원은 북한에 대한 피로감이 높은 상황에서 북한의 적대적 행보가 한국인의 대북 인식에 다분히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응답자의 69.0%는 북한정권과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응답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또 국민들의 78.1%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인의 다수는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연구원측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한다’는 인식이 2018년과 2019년에 40%로 반짝 상승하였고, 2020년에 24.6%로 하락한 이후 23.7%→21.5%→22.0%로 2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은 87.6%로 나타났는데, 최고치를 기록했던 2022년의 92.5%에 비해 소폭 하락하였으나 여전히 높은 편이다.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에 대한 위기와 불안은 64.8%로 이전 해(60.9%)에 비해 소폭 상승했다. 이상 나타난 바와 같이 국민들의 대북 인식은 부정적임을 알 수 있고 그 양상은 2018년 짧은 평화 분위기 이후부터 나타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위와 같은 한국민들의 부정적인 대북 인식에서 어떤 함의와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까? 우선 국민들은 김정은 정권에 대한 적대의식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김정은 정권이 핵능력을 고도화시키고 이를 위해 자원을 군사력 증강에 우선 투자하는 대신 주민들의 인권 개선에 나서지 않고, 북한식 통일전략에 호응하지 않는 남한과 적대관계를 천명하고 긴장을 고조시킬 우려 등 여러 가지이다. 이런 적대의식을 규범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하여 필자는 이를 ‘적정 적대의식’이라 이름 붙여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해야 할까, 또 남북대화는 불필요할까? 나아가 이제 통일은 물 건너간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국민 여론을 보면 그 합리성을 읽을 수 있다.
▲ 서로간의 적대의식이 높아가는 가운데 통일을 향한 걸음이 정체되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연구원이 2023년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2)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남북대화가 별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66.25%로 나타났다. 또 경제제재가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은 72.9%로 더 크게 나타났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비핵화 유도 방안에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통일연구원측은 북한의 잦은 미사일 도발과 핵위협에 대한 피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거기에 북한의 집요한 핵개발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다는 체념의식과 그런 북한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겠다는 국민들의 실리적 태도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대북 인식은 통일의식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위 2023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국민들은 통일의 필요성에 43.8%가 찬성한 반면, 반대는 29.8%였다. 참고로 2007년에는 통일 찬성 63.8%, 반대 15.1%였다. 통일 찬성 여론이 20% 줄어들어 들었다. 그런 전제 하에서 통일이 필요한 이유로는 ‘남북 간 전쟁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가 38.9%로 나타났는데, 기존에 일순위로 나온 응답인 ‘같은 민족이니까’는 30.6%로 나왔다.
통일에 대한 찬성 여론이 줄어든 가운데 그 이유로 민족 동질성보다는 평화정착이 앞선 것이다. 여기서 통일에 반대하는 이유로 통일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33.9%), 통일 이후 생겨날 사회적 문제(28.7%), 남북 간 정치체제의 차이(20.0%)가 나왔다. 또 통일로 기대할 이익이 남한에 이익이 된다(53.6%)와 자신에 이익이 된다(27.9%) 간에 격차가 큰 점도 인상적이다. 대북정책에서 시급한 문제로는 북한 비핵화, 북한의 인권개선, 군사적 긴장해소 등이 80% 가깝게 나왔다.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것인데, 그것이 협력 및 지원 대상으로서의 긍정적 대북 인식을 압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정권의 권력 세습, 북한의 평화 위협, 인권 침해 등 국민들은 물론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이유 있는 것들이다. 다만, 북한의 부정적인 행태는 북한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남북관계, 북한과 미국의 관계, 국제정세 등 다차원적인 분석을 할 때 그 평가는 물론 대안 마련에도 합리성을 높여줄 것이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통일에 대한 유보적인 여론 증가를 동반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평화조성을 전제로 한 통일, 점진적인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통일 자체가 무용함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평화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평화통일’론은 규범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평화적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지 선평화, 후통일의 의미가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및 민족 포기 선언이 단기적으로 남북 간 대화 및 통일 논의를 어렵게 할 것은 사실이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논의 포기는 북한체제의 통일 역량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남한체제 주도의 통일로 간단히 환원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북한 주민들의 자결권, 북한 정권의 무장력, 그리고 기후위기 등 글로벌 위기의 실존적 위협 등을 고려할 때, 통일은 기존의 체제·민족·이념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공감·공존·공영과 같은 ‘열린 통일’, ‘다함께 통일’을 요청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럴 때 이유 있는 대북 적대의식은 보다 이유 있는 통일의식으로 변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주
(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은 2007년부터 한국갤럽에 의뢰해 매년 ‘통일의식조사’를 해오고 있다. 전국에 거주하는 성인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1대1 개별 면접조사를 하고 있는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8% 포인트이다.
(2) ‘통일연구원(KINU) 통일의식 조사 2023’은 전국 거주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총 1,001명을 대면 면접조사로 진행했는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 포인트이다.
서보혁(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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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
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 이찬수
에큐메니안 모바일 사이트, 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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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
기사승인 2024.02.14
- 적의 계보학 ①
적의 계보학
나에게 ‘적’(敵)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너희와 갈등하는가. 전쟁을 비롯한 모든 폭력적 사건의 근저에는 자기중심성이 있고, 갈등은 자기중심성에 도전하는 세력을 적대시하면서 생긴다.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배경 연구자들의 국제적 모임인 ‘아시아종교평화학회’에서는 나와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적대성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다각도로 성찰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자기중심성의 근간을 돌아보고, 적과의 관계를 조화로 역전시키기 위한, 종교적으로는 ‘사랑과 자비’의 윤리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사회적 과정의 근간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정기적으로 ‘적의 계보와 현상’을 두루 정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 특히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는 직접적 폭력에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이 작동한다. 그런데 폭력을 먼저 행사한 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거나,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주장하곤 한다. 서로가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자기를 우선 변호하는 과정에 폭력적 분위기는 계속된다. 서로 자기중심적으로 주장하면 할수록 서로를 더 적대시하게 된다. 같은 세력끼리 ‘동지’를 맺으며 투쟁을 이어간다. 토마스 홉스는 이런 현상을 ‘자연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한 바 있다. 칼 슈미트는 ‘적’을 이질적 타자로 보고,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상호 적대시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셈이다.
▲ 이찬수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안과 밖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정치적’ 행위는 고대 유대교의 계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십계명의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때의 살인 금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 윤리가 아니다. 그 계명을 지켜야 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내집단’이다. 다른 신을 믿는 외집단에는 이 계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외집단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하고 장려하기까지 한 사례가 더 많다. 외집단은 잠재적 위협이자 제거의 대상이며, 그런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런 계명은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전제한, 내집단 중심의 ‘정치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시대는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한 ‘정치적’ 행위가 지배적이었다. 적과 투쟁하면서 나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 세력에 대한 방어력을 키워가는 시대였다. 이 시대 폭력의 양상은 적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몇 단계로 나뉜다. 장 보드리야르가 규정한 ‘적(敵)의 계보학’이 이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의 계보학’의 첫 단계는 적이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다. 늑대는 노골적으로 공격해오는 외부의 적의 비유로서, 사람들은 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바리케이트를 친다. 둘째는 적의 몸집이 쥐처럼 작아지는 단계이다. 쥐는 지하에서 활동하기에 벽이나 철책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 새로운 위생 장비를 갖춰 쥐가 퍼뜨리는 위험을 예방하려 한다. 셋째는 적이 바퀴벌레 같은 벌레의 형태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벌레는 삼차원의 틈새에서 공격해온다. 이 역시 각종 방역 장비로 막아야 할 대상이다. 넷째는 적이 미세한 ‘바이러스’ 형태로 출현하는 단계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기생충은 몸 밖이 아닌 몸 안을 공격하며, 시스템의 심장부 안으로 들어온다. 안에 있기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면서 미세한 적은 마치 유령처럼 경계를 넘어 전 지구로 확산되고, 혈관을 타고 퍼지듯 도처에 스며든다. 이 적은 시스템 안에 둥지를 틀었다가 어느 순간 활성화되면서 적대적 활동을 개시한다. 이들은 ‘내부 속의 외부’를 형성하며 내부 시스템을 공격한다. 이 공격은 시스템 외부에서 막아내기 힘들다. 그것이 바이러스 같은 적의 특징이다.
이 계보학에 의하면, 적의 크기는 계속 작아져 왔지만, 위험은 더 커져 왔다. 늑대에서 쥐로, 쥐에서 바퀴벌레로, 다시 바이러스로... 바이러스라는 적은 내 몸을 숙주 삼아 나의 일부처럼 행동한다. 이 폭력은 미세하고 은밀해서 적대의 지점, 폭력의 출처를 특정하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늑대의 폭력’이 그렇듯이, 자·타가 구별되고 적대적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구도는 비슷하다.
문제는 이런 ‘적의 계보학’을 새로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적이 바이러스보다 더 작아지다가 급기야 나와 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이 나의 DNA가 된, 즉 내가 나에게 적이 된 것이다. 내가 나의 경쟁 상대이자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나에게 폭력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편에서는 늑대의 폭력에서 바이러스의 폭력까지 중첩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실종된 단계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 끊임없이 적을 재생산해야 유지되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Getty Images
슬라보예 지젝이 ‘체계적 폭력’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기존의 폭력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혹은 사회가 비정상적이어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면, 체계적 폭력은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데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현대사회와 문명의 정점에서 벌어졌다고 말한 것도 이 폭력의 특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그러한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무후무한 폭력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사회의 작품이다. 사회의 체계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자 결과인 것이다.
‘체계적 폭력’이라는 모순적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크게 보면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온 결과이다. 자연법칙에서 기술을 발견하고, 그 기술로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문명을 일으키고, 찬란한 문명이 요구하는 대로 문명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온 결과이다. 자본의 축적을 찬양하고 이익을 앞세우는 정책에 환호하고 종교마저 더 많이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해온 결과이다. 그 자본주의적, 성과 지향적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며, 그 구조 속에 자신도 모르게 종속되어온 탓이다. 문명의 체계에 맞추어 스스로를 종속시킨 탓에 문명의 힘은 더 장대해지고, 그에 반비례해 문명을 일으켰다는 주체는 사실상 실종되었다. 인간을 극도의 피로와 자기소외로 몰아가는 힘은 한편에서는 거대한 문명 자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성과를 낳으려 자발적으로 투신했던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폭력은 더 교묘하게 구조화되었지만, 그럴수록 그 원인은 특정하기도 힘들고 따라서 제거하기도 어려워졌다.
사회의 요구와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다 보니 자연스러움의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그 폭력은 끝없이 성과를 산출하라고 스스로를 닦달하는 데서 오는 피로함, 자기 소외 결국은 자기 파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어제의 나를 넘어서 내일의 더 낳은 나를 꿈꾸며, 끝없이 자신을 닦달해온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을 최고의 승리로 여기면서, 자기가 자기를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어제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자신과 끝없이 경쟁한다. 그렇게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자기 파멸이라는 단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렇게 폭력은 구조화하고 적이 나의 모습으로 내면화되어버렸다.
‘적의 계보학’의 마지막 단계라고나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한 문제를 천착해온 한병철은 최근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그는 혁명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정말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나를 넘어서는 데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연재에서 하나씩 생각해봐야 할 물음들이다.
이찬수(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종교평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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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
기사승인 2024.02.14
- 적의 계보학 ①
적의 계보학
나에게 ‘적’(敵)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너희와 갈등하는가. 전쟁을 비롯한 모든 폭력적 사건의 근저에는 자기중심성이 있고, 갈등은 자기중심성에 도전하는 세력을 적대시하면서 생긴다.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배경 연구자들의 국제적 모임인 ‘아시아종교평화학회’에서는 나와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적대성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다각도로 성찰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자기중심성의 근간을 돌아보고, 적과의 관계를 조화로 역전시키기 위한, 종교적으로는 ‘사랑과 자비’의 윤리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사회적 과정의 근간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정기적으로 ‘적의 계보와 현상’을 두루 정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 특히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는 직접적 폭력에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이 작동한다. 그런데 폭력을 먼저 행사한 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거나,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주장하곤 한다. 서로가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자기를 우선 변호하는 과정에 폭력적 분위기는 계속된다. 서로 자기중심적으로 주장하면 할수록 서로를 더 적대시하게 된다. 같은 세력끼리 ‘동지’를 맺으며 투쟁을 이어간다. 토마스 홉스는 이런 현상을 ‘자연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한 바 있다. 칼 슈미트는 ‘적’을 이질적 타자로 보고,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상호 적대시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셈이다.
▲ 이찬수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안과 밖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정치적’ 행위는 고대 유대교의 계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십계명의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때의 살인 금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 윤리가 아니다. 그 계명을 지켜야 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내집단’이다. 다른 신을 믿는 외집단에는 이 계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외집단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하고 장려하기까지 한 사례가 더 많다. 외집단은 잠재적 위협이자 제거의 대상이며, 그런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런 계명은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전제한, 내집단 중심의 ‘정치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시대는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한 ‘정치적’ 행위가 지배적이었다. 적과 투쟁하면서 나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 세력에 대한 방어력을 키워가는 시대였다. 이 시대 폭력의 양상은 적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몇 단계로 나뉜다. 장 보드리야르가 규정한 ‘적(敵)의 계보학’이 이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의 계보학’의 첫 단계는 적이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다. 늑대는 노골적으로 공격해오는 외부의 적의 비유로서, 사람들은 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바리케이트를 친다. 둘째는 적의 몸집이 쥐처럼 작아지는 단계이다. 쥐는 지하에서 활동하기에 벽이나 철책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 새로운 위생 장비를 갖춰 쥐가 퍼뜨리는 위험을 예방하려 한다. 셋째는 적이 바퀴벌레 같은 벌레의 형태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벌레는 삼차원의 틈새에서 공격해온다. 이 역시 각종 방역 장비로 막아야 할 대상이다. 넷째는 적이 미세한 ‘바이러스’ 형태로 출현하는 단계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기생충은 몸 밖이 아닌 몸 안을 공격하며, 시스템의 심장부 안으로 들어온다. 안에 있기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면서 미세한 적은 마치 유령처럼 경계를 넘어 전 지구로 확산되고, 혈관을 타고 퍼지듯 도처에 스며든다. 이 적은 시스템 안에 둥지를 틀었다가 어느 순간 활성화되면서 적대적 활동을 개시한다. 이들은 ‘내부 속의 외부’를 형성하며 내부 시스템을 공격한다. 이 공격은 시스템 외부에서 막아내기 힘들다. 그것이 바이러스 같은 적의 특징이다.
이 계보학에 의하면, 적의 크기는 계속 작아져 왔지만, 위험은 더 커져 왔다. 늑대에서 쥐로, 쥐에서 바퀴벌레로, 다시 바이러스로... 바이러스라는 적은 내 몸을 숙주 삼아 나의 일부처럼 행동한다. 이 폭력은 미세하고 은밀해서 적대의 지점, 폭력의 출처를 특정하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늑대의 폭력’이 그렇듯이, 자·타가 구별되고 적대적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구도는 비슷하다.
문제는 이런 ‘적의 계보학’을 새로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적이 바이러스보다 더 작아지다가 급기야 나와 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이 나의 DNA가 된, 즉 내가 나에게 적이 된 것이다. 내가 나의 경쟁 상대이자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나에게 폭력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편에서는 늑대의 폭력에서 바이러스의 폭력까지 중첩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실종된 단계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 끊임없이 적을 재생산해야 유지되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Getty Images
슬라보예 지젝이 ‘체계적 폭력’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기존의 폭력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혹은 사회가 비정상적이어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면, 체계적 폭력은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데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현대사회와 문명의 정점에서 벌어졌다고 말한 것도 이 폭력의 특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그러한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무후무한 폭력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사회의 작품이다. 사회의 체계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자 결과인 것이다.
‘체계적 폭력’이라는 모순적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크게 보면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온 결과이다. 자연법칙에서 기술을 발견하고, 그 기술로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문명을 일으키고, 찬란한 문명이 요구하는 대로 문명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온 결과이다. 자본의 축적을 찬양하고 이익을 앞세우는 정책에 환호하고 종교마저 더 많이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해온 결과이다. 그 자본주의적, 성과 지향적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며, 그 구조 속에 자신도 모르게 종속되어온 탓이다. 문명의 체계에 맞추어 스스로를 종속시킨 탓에 문명의 힘은 더 장대해지고, 그에 반비례해 문명을 일으켰다는 주체는 사실상 실종되었다. 인간을 극도의 피로와 자기소외로 몰아가는 힘은 한편에서는 거대한 문명 자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성과를 낳으려 자발적으로 투신했던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폭력은 더 교묘하게 구조화되었지만, 그럴수록 그 원인은 특정하기도 힘들고 따라서 제거하기도 어려워졌다.
사회의 요구와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다 보니 자연스러움의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그 폭력은 끝없이 성과를 산출하라고 스스로를 닦달하는 데서 오는 피로함, 자기 소외 결국은 자기 파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어제의 나를 넘어서 내일의 더 낳은 나를 꿈꾸며, 끝없이 자신을 닦달해온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을 최고의 승리로 여기면서, 자기가 자기를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어제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자신과 끝없이 경쟁한다. 그렇게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자기 파멸이라는 단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렇게 폭력은 구조화하고 적이 나의 모습으로 내면화되어버렸다.
‘적의 계보학’의 마지막 단계라고나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한 문제를 천착해온 한병철은 최근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그는 혁명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정말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나를 넘어서는 데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연재에서 하나씩 생각해봐야 할 물음들이다.
이찬수(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종교평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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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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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들통문24-17] 새책, 출판기념회 겸 다음책 발간과 연계된 학술세미나 안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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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8
적과 나의 경계를 넘어서: 인드라망세계관으로 보는 적과 나 - 에큐메니안
적과 나의 경계를 넘어서: 인드라망세계관으로 보는 적과 나 - 에큐메니안
적과 나의 경계를 넘어서: 인드라망세계관으로 보는 적과 나적의 계보학⑪
이명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인드라망연구소) | 승인 2024.07.03 04:31댓글2
▲ 이명호 연구원
연기(緣起)법을 핵심 교리로 하는 불교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그물’에 비유한다.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인도 토착신인 제석천(인드라신)이 머무는 궁전 위에는 그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사방으로 끝없는 이 그물의 모든 그물코에는 보배구슬이 달려 있다. 이 보배구슬에 다른 모든 구슬이 비치고 그 구슬은 동시에 다른 모든 구슬에 비춰진다. 그 구슬에 비춰진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다시 다른 모든 구슬에 거듭 비춰진다.
관계의 이어짐이 끝없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펼쳐진다. 구슬들은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인드라궁에 있는 그물(인드라망)의 구슬들이 서로서로 비추어 끝이 없는 것처럼 세계의 모든 현상과 존재들도 중중무진하게 관계를 맺으며 연기하고 있다는 인식이 바로 불교의 인드라망세계관이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투영되고 자연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나는 너에게 투영되고, 너는 나에게 투영된다.
우주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은 그물코에 달려 있는 구슬처럼 중중무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서로 의지하고 있고, 서로서로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 본래부터 하나로 분리된 개체로서 나[我]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無我)로, 그리고 무아들의 관계 및 연결로 이어진다.
너와 나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만 편안한 일이나 좋은 일은 가능하지 않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남의 고통을 모른체 할 수 있을까? 불교의 문구로 이야기하면, 천지는 나와 한 뿌리, 만물은 나와 한 몸(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1)이기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고통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보살은 ‘중생이 아프며, 나도 아프다’라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성불을 늦춘다. 모든 불교인이 보살의 삶을, 보살행의 실천을 목표로 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등을 향하는, 즉 다른 존재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하고 소통하는 보살행, 혹은 자비행을 대부분 사람이 큰 저항 없이 실천한다. 나의 구슬에 비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타인의 고통에 자신도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소위, 공업(共業)의 개념을 논리적,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의 감소 혹은 해소를 위해 기꺼이 노력한다.
인드라망세계관에 따라 연기법을 철저하게 논리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고통을 대하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향하는 우리의 자세는 ‘적’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나의 구슬에 비치는 사람들은 이웃, 친한 사람, 동료, 선한 사람뿐만 아니다.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혹은 가치가 달라서 대립하는 사람들, 하나의 목표를 두고 경쟁하는 사람들, 여러 이유에서 다투는 사람이나 집단도 나의 구슬에 비치고 있다. 그들과도 나는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을 벗어나더라도 세상은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서로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Getty Images
틱낫한 스님은 <부디 나를 참이름으로 불러다오>라는 시에서 ‘작은 배로 조국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가 해적한테 겁탈당하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열두 살 소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도 ‘나’이고, ‘열두 살 소녀를 겁탈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해적’도 ‘막강한 권력을 움켜잡은 공산당 정치국 요원’도 ‘나’라고 하였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도법스님도 불교 내 진보 진영에서 지지받지 못하는 총무원장 체제에서 소임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평소 지론인 ‘화쟁’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소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통받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마음과 재산, 시간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들도 자신과 대립, 투쟁하는 사람들, 그래서 적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두 스님 모두 세상의 범부들에게 질타와 지지 철회, 비판을 받았다.
우리는 적과 나를 구분하고, 나는 선이요 적은 악이라고 분별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이는 적은 곧 나이며, 나도 곧 적이라는 연기론적 사유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드라망세계관에서는 선도 악도 연기(緣起)되어진 것이고, 그와 연관된 적과 나도 연기된 존재이다. 소녀와 해적, 정치국 요원과 수용소의 수용자, 총무원장과 도법스님, 적과 나 모두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연결되어 의존하는 관계이다.
나와 너는 분리되어 있다는 전도몽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일반인들의 노력이 바로 이 지점에서는 중지된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었던 무경계의 사유가 적에게는, 나와 가치가 다른 사람/집단에게는, 대립하고 투쟁하는 사람/집단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와 너를 분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나와 그들을 분리하는 개체론적 사고가 지속된다. 나는 그들과 격리된 선한 세계에 존재하고, 적들은 나와 아무 연관이 없는 악한 세계에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다.
인드라망세계관의 본질은 관계의 이어짐이며 관계를 통한 소통이다. 일반적으로 소통을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해는 적과 나의 관계가 끊어져 있음을 인정하고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 이후에나 가능하다. 지금 당장은 깊은 심연을 넘어설,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줄 다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은 너에게도 나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는 조건에 있다. 적을 제거한다고 지금의 상황이, 문제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직면해 있는 문제 혹은 실상을 그대로 들여다볼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해체해다오>라는 시에서 언급된 틱낫한 스님의 당부는 바로 이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지혜를 말하는 듯 하다.
“당신들이 나를 돌보려면 / 많은 인내심과 냉정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 나는 알고 있다. / 나는 또한 당신들 안에도 / 해체시킬 폭탄이 있음을 안다. / 그러니 왜 우리는 서로를 돕지 않는가?”
미주
(1) 『조론( 肇論)』 「열반무명론(涅槃無明論)」
이명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인드라망연구소)
적과 나의 경계를 넘어서: 인드라망세계관으로 보는 적과 나적의 계보학⑪
이명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인드라망연구소) | 승인 2024.07.03 04:31댓글2
▲ 이명호 연구원
연기(緣起)법을 핵심 교리로 하는 불교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그물’에 비유한다.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인도 토착신인 제석천(인드라신)이 머무는 궁전 위에는 그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사방으로 끝없는 이 그물의 모든 그물코에는 보배구슬이 달려 있다. 이 보배구슬에 다른 모든 구슬이 비치고 그 구슬은 동시에 다른 모든 구슬에 비춰진다. 그 구슬에 비춰진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다시 다른 모든 구슬에 거듭 비춰진다.
관계의 이어짐이 끝없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펼쳐진다. 구슬들은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인드라궁에 있는 그물(인드라망)의 구슬들이 서로서로 비추어 끝이 없는 것처럼 세계의 모든 현상과 존재들도 중중무진하게 관계를 맺으며 연기하고 있다는 인식이 바로 불교의 인드라망세계관이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투영되고 자연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나는 너에게 투영되고, 너는 나에게 투영된다.
우주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은 그물코에 달려 있는 구슬처럼 중중무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서로 의지하고 있고, 서로서로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 본래부터 하나로 분리된 개체로서 나[我]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無我)로, 그리고 무아들의 관계 및 연결로 이어진다.
너와 나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만 편안한 일이나 좋은 일은 가능하지 않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남의 고통을 모른체 할 수 있을까? 불교의 문구로 이야기하면, 천지는 나와 한 뿌리, 만물은 나와 한 몸(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1)이기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고통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보살은 ‘중생이 아프며, 나도 아프다’라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성불을 늦춘다. 모든 불교인이 보살의 삶을, 보살행의 실천을 목표로 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등을 향하는, 즉 다른 존재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하고 소통하는 보살행, 혹은 자비행을 대부분 사람이 큰 저항 없이 실천한다. 나의 구슬에 비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타인의 고통에 자신도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소위, 공업(共業)의 개념을 논리적,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의 감소 혹은 해소를 위해 기꺼이 노력한다.
인드라망세계관에 따라 연기법을 철저하게 논리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고통을 대하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향하는 우리의 자세는 ‘적’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나의 구슬에 비치는 사람들은 이웃, 친한 사람, 동료, 선한 사람뿐만 아니다.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혹은 가치가 달라서 대립하는 사람들, 하나의 목표를 두고 경쟁하는 사람들, 여러 이유에서 다투는 사람이나 집단도 나의 구슬에 비치고 있다. 그들과도 나는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을 벗어나더라도 세상은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서로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Getty Images
틱낫한 스님은 <부디 나를 참이름으로 불러다오>라는 시에서 ‘작은 배로 조국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가 해적한테 겁탈당하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열두 살 소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도 ‘나’이고, ‘열두 살 소녀를 겁탈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해적’도 ‘막강한 권력을 움켜잡은 공산당 정치국 요원’도 ‘나’라고 하였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도법스님도 불교 내 진보 진영에서 지지받지 못하는 총무원장 체제에서 소임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평소 지론인 ‘화쟁’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소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통받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마음과 재산, 시간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들도 자신과 대립, 투쟁하는 사람들, 그래서 적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두 스님 모두 세상의 범부들에게 질타와 지지 철회, 비판을 받았다.
우리는 적과 나를 구분하고, 나는 선이요 적은 악이라고 분별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이는 적은 곧 나이며, 나도 곧 적이라는 연기론적 사유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드라망세계관에서는 선도 악도 연기(緣起)되어진 것이고, 그와 연관된 적과 나도 연기된 존재이다. 소녀와 해적, 정치국 요원과 수용소의 수용자, 총무원장과 도법스님, 적과 나 모두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연결되어 의존하는 관계이다.
나와 너는 분리되어 있다는 전도몽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일반인들의 노력이 바로 이 지점에서는 중지된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었던 무경계의 사유가 적에게는, 나와 가치가 다른 사람/집단에게는, 대립하고 투쟁하는 사람/집단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와 너를 분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나와 그들을 분리하는 개체론적 사고가 지속된다. 나는 그들과 격리된 선한 세계에 존재하고, 적들은 나와 아무 연관이 없는 악한 세계에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다.
인드라망세계관의 본질은 관계의 이어짐이며 관계를 통한 소통이다. 일반적으로 소통을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해는 적과 나의 관계가 끊어져 있음을 인정하고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 이후에나 가능하다. 지금 당장은 깊은 심연을 넘어설,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줄 다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은 너에게도 나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는 조건에 있다. 적을 제거한다고 지금의 상황이, 문제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직면해 있는 문제 혹은 실상을 그대로 들여다볼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해체해다오>라는 시에서 언급된 틱낫한 스님의 당부는 바로 이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지혜를 말하는 듯 하다.
“당신들이 나를 돌보려면 / 많은 인내심과 냉정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 나는 알고 있다. / 나는 또한 당신들 안에도 / 해체시킬 폭탄이 있음을 안다. / 그러니 왜 우리는 서로를 돕지 않는가?”
미주
(1) 『조론( 肇論)』 「열반무명론(涅槃無明論)」
이명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인드라망연구소)
===
인드라 신이 사는 궁전 지붕에는 그물이 드리워져 있고, 각 그물코마다 영롱한 구슬이 달려 있답니다. 그 구슬이 어찌나 영롱한지 작은 구슬이 전 우주를 비추고, 다른 구슬이 비춘 우주를 다시 비춰냅니다. 이 장면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서로 겹치고 겹침이 끝없이 계속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비유입니다.
이명호 박사가 쓴 "적의 계보학"(11)에서는,
'적'은 수술하듯 도려내는 방식으로 극복되기 보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관계의 논리에 대한 통찰과,
적과 나를 연결지을 수 있는 심층에 대한 지혜,
그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대성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을 그냥 잊고 넘어가라는 얘기는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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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
2024/04/26
적(敵)의 계보학: 우리에게 적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아시아종교평화학회(한국지부) ㆍ 연세대 교양교육연구소
공동학술회의
적(敵)의 계보학:
우리에게 적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일시: 2024년 4월 26일(금) 2시~6시
장소: (원불교) 원남교당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22길 23)
제1부 (2시~3시 40분)
사회: 이찬수(연세대)
인사말씀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학회장/욧카이치대학 명예교수)
기조발표
양권석(성공회대): 적의의 정신화, 경합주의
김엘리(성공회대): 적대와 혐오의 감정정치
토론 |
제2부(4시~6시)
사회: 서보혁 (통일연구원)
라운드테이블 발표
강혁민(이화여대): 적의 정치적 이해
박현도(서강대): 폭력의 외주화 열강과 이슬람 극단주의
최영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적대의 정치와 자본의 권력
자승주(강원대): 평화의 적, 무관심
박연주(동국대): 약자의 적대화와 부종부횡(不縱不横)의 윤리
이층범(협성대): 복음주의의 가련한 적들
토론
공동주최
아시아종교평화학회·연세대 교양교육연구소
♣ 참기비 1만원 (자료짐 및 저녁식사 제공)
배경이미지: 전북고장1by 김덕일, 공유마당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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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
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
에큐메니안 모바일 사이트, 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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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
기사승인 2024.02.14 09: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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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계보학 ①
적의 계보학
나에게 ‘적’(敵)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너희와 갈등하는가. 전쟁을 비롯한 모든 폭력적 사건의 근저에는 자기중심성이 있고, 갈등은 자기중심성에 도전하는 세력을 적대시하면서 생긴다.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배경 연구자들의 국제적 모임인 ‘아시아종교평화학회’에서는 나와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적대성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다각도로 성찰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자기중심성의 근간을 돌아보고, 적과의 관계를 조화로 역전시키기 위한, 종교적으로는 ‘사랑과 자비’의 윤리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사회적 과정의 근간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정기적으로 ‘적의 계보와 현상’을 두루 정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 특히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는 직접적 폭력에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이 작동한다. 그런데 폭력을 먼저 행사한 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거나,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주장하곤 한다. 서로가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자기를 우선 변호하는 과정에 폭력적 분위기는 계속된다. 서로 자기중심적으로 주장하면 할수록 서로를 더 적대시하게 된다. 같은 세력끼리 ‘동지’를 맺으며 투쟁을 이어간다. 토마스 홉스는 이런 현상을 ‘자연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한 바 있다. 칼 슈미트는 ‘적’을 이질적 타자로 보고,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상호 적대시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셈이다.
▲ 이찬수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안과 밖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정치적’ 행위는 고대 유대교의 계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십계명의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때의 살인 금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 윤리가 아니다. 그 계명을 지켜야 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내집단’이다. 다른 신을 믿는 외집단에는 이 계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외집단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하고 장려하기까지 한 사례가 더 많다. 외집단은 잠재적 위협이자 제거의 대상이며, 그런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런 계명은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전제한, 내집단 중심의 ‘정치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시대는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한 ‘정치적’ 행위가 지배적이었다. 적과 투쟁하면서 나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 세력에 대한 방어력을 키워가는 시대였다. 이 시대 폭력의 양상은 적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몇 단계로 나뉜다. 장 보드리야르가 규정한 ‘적(敵)의 계보학’이 이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의 계보학’의 첫 단계는 적이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다. 늑대는 노골적으로 공격해오는 외부의 적의 비유로서, 사람들은 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바리케이트를 친다. 둘째는 적의 몸집이 쥐처럼 작아지는 단계이다. 쥐는 지하에서 활동하기에 벽이나 철책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 새로운 위생 장비를 갖춰 쥐가 퍼뜨리는 위험을 예방하려 한다. 셋째는 적이 바퀴벌레 같은 벌레의 형태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벌레는 삼차원의 틈새에서 공격해온다. 이 역시 각종 방역 장비로 막아야 할 대상이다. 넷째는 적이 미세한 ‘바이러스’ 형태로 출현하는 단계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기생충은 몸 밖이 아닌 몸 안을 공격하며, 시스템의 심장부 안으로 들어온다. 안에 있기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면서 미세한 적은 마치 유령처럼 경계를 넘어 전 지구로 확산되고, 혈관을 타고 퍼지듯 도처에 스며든다. 이 적은 시스템 안에 둥지를 틀었다가 어느 순간 활성화되면서 적대적 활동을 개시한다. 이들은 ‘내부 속의 외부’를 형성하며 내부 시스템을 공격한다. 이 공격은 시스템 외부에서 막아내기 힘들다. 그것이 바이러스 같은 적의 특징이다.
이 계보학에 의하면, 적의 크기는 계속 작아져 왔지만, 위험은 더 커져 왔다. 늑대에서 쥐로, 쥐에서 바퀴벌레로, 다시 바이러스로... 바이러스라는 적은 내 몸을 숙주 삼아 나의 일부처럼 행동한다. 이 폭력은 미세하고 은밀해서 적대의 지점, 폭력의 출처를 특정하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늑대의 폭력’이 그렇듯이, 자·타가 구별되고 적대적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구도는 비슷하다.
문제는 이런 ‘적의 계보학’을 새로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적이 바이러스보다 더 작아지다가 급기야 나와 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이 나의 DNA가 된, 즉 내가 나에게 적이 된 것이다. 내가 나의 경쟁 상대이자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나에게 폭력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편에서는 늑대의 폭력에서 바이러스의 폭력까지 중첩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실종된 단계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 끊임없이 적을 재생산해야 유지되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Getty Images
슬라보예 지젝이 ‘체계적 폭력’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기존의 폭력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혹은 사회가 비정상적이어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면, 체계적 폭력은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데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현대사회와 문명의 정점에서 벌어졌다고 말한 것도 이 폭력의 특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그러한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무후무한 폭력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사회의 작품이다. 사회의 체계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자 결과인 것이다.
‘체계적 폭력’이라는 모순적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크게 보면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온 결과이다. 자연법칙에서 기술을 발견하고, 그 기술로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문명을 일으키고, 찬란한 문명이 요구하는 대로 문명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온 결과이다. 자본의 축적을 찬양하고 이익을 앞세우는 정책에 환호하고 종교마저 더 많이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해온 결과이다. 그 자본주의적, 성과 지향적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며, 그 구조 속에 자신도 모르게 종속되어온 탓이다. 문명의 체계에 맞추어 스스로를 종속시킨 탓에 문명의 힘은 더 장대해지고, 그에 반비례해 문명을 일으켰다는 주체는 사실상 실종되었다. 인간을 극도의 피로와 자기소외로 몰아가는 힘은 한편에서는 거대한 문명 자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성과를 낳으려 자발적으로 투신했던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폭력은 더 교묘하게 구조화되었지만, 그럴수록 그 원인은 특정하기도 힘들고 따라서 제거하기도 어려워졌다.
사회의 요구와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다 보니 자연스러움의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그 폭력은 끝없이 성과를 산출하라고 스스로를 닦달하는 데서 오는 피로함, 자기 소외 결국은 자기 파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어제의 나를 넘어서 내일의 더 낳은 나를 꿈꾸며, 끝없이 자신을 닦달해온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을 최고의 승리로 여기면서, 자기가 자기를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어제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자신과 끝없이 경쟁한다. 그렇게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자기 파멸이라는 단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렇게 폭력은 구조화하고 적이 나의 모습으로 내면화되어버렸다.
‘적의 계보학’의 마지막 단계라고나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한 문제를 천착해온 한병철은 최근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그는 혁명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정말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나를 넘어서는 데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연재에서 하나씩 생각해봐야 할 물음들이다.
이찬수(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종교평화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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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적의 계보학 ①
이찬수(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종교평화학) | 승인 2024.02.14 09:35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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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
나에게 ‘적’(敵)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너희와 갈등하는가. 전쟁을 비롯한 모든 폭력적 사건의 근저에는 자기중심성이 있고, 갈등은 자기중심성에 도전하는 세력을 적대시하면서 생긴다.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배경 연구자들의 국제적 모임인 ‘아시아종교평화학회’에서는 나와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적대성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다각도로 성찰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자기중심성의 근간을 돌아보고, 적과의 관계를 조화로 역전시키기 위한, 종교적으로는 ‘사랑과 자비’의 윤리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사회적 과정의 근간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정기적으로 ‘적의 계보와 현상’을 두루 정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 특히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는 직접적 폭력에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이 작동한다. 그런데 폭력을 먼저 행사한 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거나,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주장하곤 한다. 서로가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자기를 우선 변호하는 과정에 폭력적 분위기는 계속된다. 서로 자기중심적으로 주장하면 할수록 서로를 더 적대시하게 된다. 같은 세력끼리 ‘동지’를 맺으며 투쟁을 이어간다. 토마스 홉스는 이런 현상을 ‘자연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한 바 있다. 칼 슈미트는 ‘적’을 이질적 타자로 보고,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상호 적대시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셈이다.
▲ 이찬수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안과 밖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정치적’ 행위는 고대 유대교의 계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십계명의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때의 살인 금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 윤리가 아니다. 그 계명을 지켜야 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내집단’이다. 다른 신을 믿는 외집단에는 이 계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외집단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하고 장려하기까지 한 사례가 더 많다. 외집단은 잠재적 위협이자 제거의 대상이며, 그런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런 계명은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전제한, 내집단 중심의 ‘정치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시대는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한 ‘정치적’ 행위가 지배적이었다. 적과 투쟁하면서 나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 세력에 대한 방어력을 키워가는 시대였다. 이 시대 폭력의 양상은 적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몇 단계로 나뉜다. 장 보드리야르가 규정한 ‘적(敵)의 계보학’이 이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의 계보학’의 첫 단계는 적이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다. 늑대는 노골적으로 공격해오는 외부의 적의 비유로서, 사람들은 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바리케이트를 친다. 둘째는 적의 몸집이 쥐처럼 작아지는 단계이다. 쥐는 지하에서 활동하기에 벽이나 철책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 새로운 위생 장비를 갖춰 쥐가 퍼뜨리는 위험을 예방하려 한다. 셋째는 적이 바퀴벌레 같은 벌레의 형태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벌레는 삼차원의 틈새에서 공격해온다. 이 역시 각종 방역 장비로 막아야 할 대상이다. 넷째는 적이 미세한 ‘바이러스’ 형태로 출현하는 단계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기생충은 몸 밖이 아닌 몸 안을 공격하며, 시스템의 심장부 안으로 들어온다. 안에 있기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면서 미세한 적은 마치 유령처럼 경계를 넘어 전 지구로 확산되고, 혈관을 타고 퍼지듯 도처에 스며든다. 이 적은 시스템 안에 둥지를 틀었다가 어느 순간 활성화되면서 적대적 활동을 개시한다. 이들은 ‘내부 속의 외부’를 형성하며 내부 시스템을 공격한다. 이 공격은 시스템 외부에서 막아내기 힘들다. 그것이 바이러스 같은 적의 특징이다.
이 계보학에 의하면, 적의 크기는 계속 작아져 왔지만, 위험은 더 커져 왔다. 늑대에서 쥐로, 쥐에서 바퀴벌레로, 다시 바이러스로... 바이러스라는 적은 내 몸을 숙주 삼아 나의 일부처럼 행동한다. 이 폭력은 미세하고 은밀해서 적대의 지점, 폭력의 출처를 특정하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늑대의 폭력’이 그렇듯이, 자·타가 구별되고 적대적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구도는 비슷하다.
문제는 이런 ‘적의 계보학’을 새로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적이 바이러스보다 더 작아지다가 급기야 나와 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이 나의 DNA가 된, 즉 내가 나에게 적이 된 것이다. 내가 나의 경쟁 상대이자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나에게 폭력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편에서는 늑대의 폭력에서 바이러스의 폭력까지 중첩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실종된 단계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 끊임없이 적을 재생산해야 유지되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Getty Images
슬라보예 지젝이 ‘체계적 폭력’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기존의 폭력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혹은 사회가 비정상적이어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면, 체계적 폭력은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데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현대사회와 문명의 정점에서 벌어졌다고 말한 것도 이 폭력의 특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그러한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무후무한 폭력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사회의 작품이다. 사회의 체계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자 결과인 것이다.
‘체계적 폭력’이라는 모순적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크게 보면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온 결과이다. 자연법칙에서 기술을 발견하고, 그 기술로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문명을 일으키고, 찬란한 문명이 요구하는 대로 문명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온 결과이다. 자본의 축적을 찬양하고 이익을 앞세우는 정책에 환호하고 종교마저 더 많이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해온 결과이다. 그 자본주의적, 성과 지향적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며, 그 구조 속에 자신도 모르게 종속되어온 탓이다. 문명의 체계에 맞추어 스스로를 종속시킨 탓에 문명의 힘은 더 장대해지고, 그에 반비례해 문명을 일으켰다는 주체는 사실상 실종되었다. 인간을 극도의 피로와 자기소외로 몰아가는 힘은 한편에서는 거대한 문명 자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성과를 낳으려 자발적으로 투신했던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폭력은 더 교묘하게 구조화되었지만, 그럴수록 그 원인은 특정하기도 힘들고 따라서 제거하기도 어려워졌다.
사회의 요구와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다 보니 자연스러움의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그 폭력은 끝없이 성과를 산출하라고 스스로를 닦달하는 데서 오는 피로함, 자기 소외 결국은 자기 파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어제의 나를 넘어서 내일의 더 낳은 나를 꿈꾸며, 끝없이 자신을 닦달해온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을 최고의 승리로 여기면서, 자기가 자기를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어제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자신과 끝없이 경쟁한다. 그렇게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자기 파멸이라는 단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렇게 폭력은 구조화하고 적이 나의 모습으로 내면화되어버렸다.
‘적의 계보학’의 마지막 단계라고나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한 문제를 천착해온 한병철은 최근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그는 혁명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정말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나를 넘어서는 데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연재에서 하나씩 생각해봐야 할 물음들이다.
이찬수(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종교평화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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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등록서보혁 2024-02-25 20:17:24
한병철의 책을 들으니,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가 생각나는군요. 서문에 푸코는 그책이 얼마나 많은 땅이 가려있었던가, 그래서 우리를 더 멀리 가도록 자극한다고 했죠. 이어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파시즘을 지적하면서 맑스와 프로이드를 결합하되 그 너머, 인간의 창조성을 기대하면서 68이후 그 열기가 식은 대륙, 아니 오늘의 이 시대를 넘어설 전망을 탐색한거 아닐까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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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2024-02-15 11:24:38
제가 불교전공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목사님의 마지막 부분 < 내가 나를 넘어서는 데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가 불교가 극복하고자 했던, 아니 모든 종교가 극복하고자 하는 내용을 설파해주셨네요~~ 어느 시대든 결국 모순과 부조리한 사회에서 성자들처럼 자기 희생이 동반되는 종교적 정열이 더욱 요구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삭제
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적의 계보학 ①
이찬수(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종교평화학) | 승인 2024.02.14 09:35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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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
나에게 ‘적’(敵)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너희와 갈등하는가. 전쟁을 비롯한 모든 폭력적 사건의 근저에는 자기중심성이 있고, 갈등은 자기중심성에 도전하는 세력을 적대시하면서 생긴다.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배경 연구자들의 국제적 모임인 ‘아시아종교평화학회’에서는 나와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적대성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다각도로 성찰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자기중심성의 근간을 돌아보고, 적과의 관계를 조화로 역전시키기 위한, 종교적으로는 ‘사랑과 자비’의 윤리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사회적 과정의 근간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정기적으로 ‘적의 계보와 현상’을 두루 정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 특히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는 직접적 폭력에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이 작동한다. 그런데 폭력을 먼저 행사한 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거나,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주장하곤 한다. 서로가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자기를 우선 변호하는 과정에 폭력적 분위기는 계속된다. 서로 자기중심적으로 주장하면 할수록 서로를 더 적대시하게 된다. 같은 세력끼리 ‘동지’를 맺으며 투쟁을 이어간다. 토마스 홉스는 이런 현상을 ‘자연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한 바 있다. 칼 슈미트는 ‘적’을 이질적 타자로 보고,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상호 적대시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셈이다.
▲ 이찬수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안과 밖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정치적’ 행위는 고대 유대교의 계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십계명의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때의 살인 금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 윤리가 아니다. 그 계명을 지켜야 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내집단’이다. 다른 신을 믿는 외집단에는 이 계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외집단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하고 장려하기까지 한 사례가 더 많다. 외집단은 잠재적 위협이자 제거의 대상이며, 그런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런 계명은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전제한, 내집단 중심의 ‘정치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시대는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한 ‘정치적’ 행위가 지배적이었다. 적과 투쟁하면서 나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 세력에 대한 방어력을 키워가는 시대였다. 이 시대 폭력의 양상은 적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몇 단계로 나뉜다. 장 보드리야르가 규정한 ‘적(敵)의 계보학’이 이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의 계보학’의 첫 단계는 적이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다. 늑대는 노골적으로 공격해오는 외부의 적의 비유로서, 사람들은 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바리케이트를 친다. 둘째는 적의 몸집이 쥐처럼 작아지는 단계이다. 쥐는 지하에서 활동하기에 벽이나 철책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 새로운 위생 장비를 갖춰 쥐가 퍼뜨리는 위험을 예방하려 한다. 셋째는 적이 바퀴벌레 같은 벌레의 형태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벌레는 삼차원의 틈새에서 공격해온다. 이 역시 각종 방역 장비로 막아야 할 대상이다. 넷째는 적이 미세한 ‘바이러스’ 형태로 출현하는 단계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기생충은 몸 밖이 아닌 몸 안을 공격하며, 시스템의 심장부 안으로 들어온다. 안에 있기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면서 미세한 적은 마치 유령처럼 경계를 넘어 전 지구로 확산되고, 혈관을 타고 퍼지듯 도처에 스며든다. 이 적은 시스템 안에 둥지를 틀었다가 어느 순간 활성화되면서 적대적 활동을 개시한다. 이들은 ‘내부 속의 외부’를 형성하며 내부 시스템을 공격한다. 이 공격은 시스템 외부에서 막아내기 힘들다. 그것이 바이러스 같은 적의 특징이다.
이 계보학에 의하면, 적의 크기는 계속 작아져 왔지만, 위험은 더 커져 왔다. 늑대에서 쥐로, 쥐에서 바퀴벌레로, 다시 바이러스로... 바이러스라는 적은 내 몸을 숙주 삼아 나의 일부처럼 행동한다. 이 폭력은 미세하고 은밀해서 적대의 지점, 폭력의 출처를 특정하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늑대의 폭력’이 그렇듯이, 자·타가 구별되고 적대적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구도는 비슷하다.
문제는 이런 ‘적의 계보학’을 새로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적이 바이러스보다 더 작아지다가 급기야 나와 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이 나의 DNA가 된, 즉 내가 나에게 적이 된 것이다. 내가 나의 경쟁 상대이자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나에게 폭력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편에서는 늑대의 폭력에서 바이러스의 폭력까지 중첩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실종된 단계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 끊임없이 적을 재생산해야 유지되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Getty Images
슬라보예 지젝이 ‘체계적 폭력’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기존의 폭력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혹은 사회가 비정상적이어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면, 체계적 폭력은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데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현대사회와 문명의 정점에서 벌어졌다고 말한 것도 이 폭력의 특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그러한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무후무한 폭력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사회의 작품이다. 사회의 체계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자 결과인 것이다.
‘체계적 폭력’이라는 모순적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크게 보면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온 결과이다. 자연법칙에서 기술을 발견하고, 그 기술로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문명을 일으키고, 찬란한 문명이 요구하는 대로 문명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온 결과이다. 자본의 축적을 찬양하고 이익을 앞세우는 정책에 환호하고 종교마저 더 많이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해온 결과이다. 그 자본주의적, 성과 지향적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며, 그 구조 속에 자신도 모르게 종속되어온 탓이다. 문명의 체계에 맞추어 스스로를 종속시킨 탓에 문명의 힘은 더 장대해지고, 그에 반비례해 문명을 일으켰다는 주체는 사실상 실종되었다. 인간을 극도의 피로와 자기소외로 몰아가는 힘은 한편에서는 거대한 문명 자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성과를 낳으려 자발적으로 투신했던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폭력은 더 교묘하게 구조화되었지만, 그럴수록 그 원인은 특정하기도 힘들고 따라서 제거하기도 어려워졌다.
사회의 요구와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다 보니 자연스러움의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그 폭력은 끝없이 성과를 산출하라고 스스로를 닦달하는 데서 오는 피로함, 자기 소외 결국은 자기 파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어제의 나를 넘어서 내일의 더 낳은 나를 꿈꾸며, 끝없이 자신을 닦달해온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을 최고의 승리로 여기면서, 자기가 자기를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어제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자신과 끝없이 경쟁한다. 그렇게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자기 파멸이라는 단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렇게 폭력은 구조화하고 적이 나의 모습으로 내면화되어버렸다.
‘적의 계보학’의 마지막 단계라고나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한 문제를 천착해온 한병철은 최근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그는 혁명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정말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나를 넘어서는 데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연재에서 하나씩 생각해봐야 할 물음들이다.
이찬수(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종교평화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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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책을 들으니,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가 생각나는군요. 서문에 푸코는 그책이 얼마나 많은 땅이 가려있었던가, 그래서 우리를 더 멀리 가도록 자극한다고 했죠. 이어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파시즘을 지적하면서 맑스와 프로이드를 결합하되 그 너머, 인간의 창조성을 기대하면서 68이후 그 열기가 식은 대륙, 아니 오늘의 이 시대를 넘어설 전망을 탐색한거 아닐까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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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불교전공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목사님의 마지막 부분 < 내가 나를 넘어서는 데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가 불교가 극복하고자 했던, 아니 모든 종교가 극복하고자 하는 내용을 설파해주셨네요~~ 어느 시대든 결국 모순과 부조리한 사회에서 성자들처럼 자기 희생이 동반되는 종교적 정열이 더욱 요구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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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
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 - 에큐메니안
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 - 에큐메니안
ME 학술 레페스 포럼
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적의 계보학 ②
서보혁(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연구위원) |
ME 학술 레페스 포럼
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적의 계보학 ②
서보혁(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연구위원) |
승인 2024.02.28
▲ 서보혁 연구위원
훗날 통일을 기록하는 역사가들은 2024년을 어떻게 생각할까? 2024년을 통일의 분기점으로 볼까, 아니면 분단의 새로운 기점으로 평가할까? 북한을 지배하는 조선노동당의 김정은 총서기는 2023-24년 언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시이자 한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아니라 여느 국가와 같은 국제관계, 그것도 “적대적 두 국가관계”라 규정하였다.
김정은은 올 1월 최고인민회의 전원회의에서 “공화국 민족력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받아 북한 정권은 관련 법제도와 기구를 폐지하고 시설을 철거해나가고 있다. 김정은 정권의 이런 조치들의 배경을 두고 전문가들은 뒤로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앞으로는 김정은 정권의 독자적인 국가발전전략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향후 전망도 남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위와 같은 김정은 정권의 통일전략은 수정될 수 있다거나, 그 반대로 더 이상 북한은 통일전략을 복원하지 않고 북중러 협력으로 고립주의 노선을 지속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보통의 국가관계로 전환한다는 김정은 정권의 태도에 한국의 정부는 물론 대북 교류협력을 전개해온 민간단체들에게도 충격을 주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비판하고 통일정책을 지속한다는 입장이다. 민간단체들은 통일된 입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그간의 활동을 성찰하고 새로운 방향을 준비하겠다는 신중한 입장인데 비해, 다른 소수의 단체는 북한의 입장을 추종하고 있다. 북한의 통일 포기 선언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중요하게 고려할 바가 국민들의 북한·통일 여론이다. 이를 소개하며 국내 대북 인식의 현 주소와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은 한국인들의 통일의식을 가장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조사해오고 있다.(1) 2023년 조사에서 북한에 대한 인식은 가장 악화되었다. 이전 해에 비해 대북 적대의식이 13.6%→18.6%로 높아지고, 경계의식이 17.7%→24.0%로 높아진 반면, 협력의식은 47.9%→37.7%로 10.2%p 낮아졌다. 그 결과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대북 부정적 인식이 42.6%로, 이 조사가 실시된 2007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연구원은 북한에 대한 피로감이 높은 상황에서 북한의 적대적 행보가 한국인의 대북 인식에 다분히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응답자의 69.0%는 북한정권과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응답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또 국민들의 78.1%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인의 다수는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연구원측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한다’는 인식이 2018년과 2019년에 40%로 반짝 상승하였고, 2020년에 24.6%로 하락한 이후 23.7%→21.5%→22.0%로 2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은 87.6%로 나타났는데, 최고치를 기록했던 2022년의 92.5%에 비해 소폭 하락하였으나 여전히 높은 편이다.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에 대한 위기와 불안은 64.8%로 이전 해(60.9%)에 비해 소폭 상승했다. 이상 나타난 바와 같이 국민들의 대북 인식은 부정적임을 알 수 있고 그 양상은 2018년 짧은 평화 분위기 이후부터 나타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위와 같은 한국민들의 부정적인 대북 인식에서 어떤 함의와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까? 우선 국민들은 김정은 정권에 대한 적대의식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김정은 정권이 핵능력을 고도화시키고 이를 위해 자원을 군사력 증강에 우선 투자하는 대신 주민들의 인권 개선에 나서지 않고, 북한식 통일전략에 호응하지 않는 남한과 적대관계를 천명하고 긴장을 고조시킬 우려 등 여러 가지이다. 이런 적대의식을 규범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하여 필자는 이를 ‘적정 적대의식’이라 이름 붙여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해야 할까, 또 남북대화는 불필요할까? 나아가 이제 통일은 물 건너간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국민 여론을 보면 그 합리성을 읽을 수 있다.
▲ 서로간의 적대의식이 높아가는 가운데 통일을 향한 걸음이 정체되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연구원이 2023년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2)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남북대화가 별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66.25%로 나타났다. 또 경제제재가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은 72.9%로 더 크게 나타났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비핵화 유도 방안에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통일연구원측은 북한의 잦은 미사일 도발과 핵위협에 대한 피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거기에 북한의 집요한 핵개발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다는 체념의식과 그런 북한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겠다는 국민들의 실리적 태도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대북 인식은 통일의식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위 2023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국민들은 통일의 필요성에 43.8%가 찬성한 반면, 반대는 29.8%였다. 참고로 2007년에는 통일 찬성 63.8%, 반대 15.1%였다. 통일 찬성 여론이 20% 줄어들어 들었다. 그런 전제 하에서 통일이 필요한 이유로는 ‘남북 간 전쟁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가 38.9%로 나타났는데, 기존에 일순위로 나온 응답인 ‘같은 민족이니까’는 30.6%로 나왔다.
통일에 대한 찬성 여론이 줄어든 가운데 그 이유로 민족 동질성보다는 평화정착이 앞선 것이다. 여기서 통일에 반대하는 이유로 통일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33.9%), 통일 이후 생겨날 사회적 문제(28.7%), 남북 간 정치체제의 차이(20.0%)가 나왔다. 또 통일로 기대할 이익이 남한에 이익이 된다(53.6%)와 자신에 이익이 된다(27.9%) 간에 격차가 큰 점도 인상적이다. 대북정책에서 시급한 문제로는 북한 비핵화, 북한의 인권개선, 군사적 긴장해소 등이 80% 가깝게 나왔다.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것인데, 그것이 협력 및 지원 대상으로서의 긍정적 대북 인식을 압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정권의 권력 세습, 북한의 평화 위협, 인권 침해 등 국민들은 물론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이유 있는 것들이다. 다만, 북한의 부정적인 행태는 북한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남북관계, 북한과 미국의 관계, 국제정세 등 다차원적인 분석을 할 때 그 평가는 물론 대안 마련에도 합리성을 높여줄 것이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통일에 대한 유보적인 여론 증가를 동반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평화조성을 전제로 한 통일, 점진적인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통일 자체가 무용함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평화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평화통일’론은 규범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평화적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지 선평화, 후통일의 의미가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및 민족 포기 선언이 단기적으로 남북 간 대화 및 통일 논의를 어렵게 할 것은 사실이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논의 포기는 북한체제의 통일 역량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남한체제 주도의 통일로 간단히 환원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북한 주민들의 자결권, 북한 정권의 무장력, 그리고 기후위기 등 글로벌 위기의 실존적 위협 등을 고려할 때, 통일은 기존의 체제·민족·이념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공감·공존·공영과 같은 ‘열린 통일’, ‘다함께 통일’을 요청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럴 때 이유 있는 대북 적대의식은 보다 이유 있는 통일의식으로 변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주
(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은 2007년부터 한국갤럽에 의뢰해 매년 ‘통일의식조사’를 해오고 있다. 전국에 거주하는 성인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1대1 개별 면접조사를 하고 있는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8% 포인트이다.
(2) ‘통일연구원(KINU) 통일의식 조사 2023’은 전국 거주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총 1,001명을 대면 면접조사로 진행했는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 포인트이다.
서보혁(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연구위원) webmaster@ecumenian.com
▲ 서보혁 연구위원
훗날 통일을 기록하는 역사가들은 2024년을 어떻게 생각할까? 2024년을 통일의 분기점으로 볼까, 아니면 분단의 새로운 기점으로 평가할까? 북한을 지배하는 조선노동당의 김정은 총서기는 2023-24년 언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시이자 한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아니라 여느 국가와 같은 국제관계, 그것도 “적대적 두 국가관계”라 규정하였다.
김정은은 올 1월 최고인민회의 전원회의에서 “공화국 민족력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받아 북한 정권은 관련 법제도와 기구를 폐지하고 시설을 철거해나가고 있다. 김정은 정권의 이런 조치들의 배경을 두고 전문가들은 뒤로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앞으로는 김정은 정권의 독자적인 국가발전전략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향후 전망도 남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위와 같은 김정은 정권의 통일전략은 수정될 수 있다거나, 그 반대로 더 이상 북한은 통일전략을 복원하지 않고 북중러 협력으로 고립주의 노선을 지속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보통의 국가관계로 전환한다는 김정은 정권의 태도에 한국의 정부는 물론 대북 교류협력을 전개해온 민간단체들에게도 충격을 주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비판하고 통일정책을 지속한다는 입장이다. 민간단체들은 통일된 입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그간의 활동을 성찰하고 새로운 방향을 준비하겠다는 신중한 입장인데 비해, 다른 소수의 단체는 북한의 입장을 추종하고 있다. 북한의 통일 포기 선언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중요하게 고려할 바가 국민들의 북한·통일 여론이다. 이를 소개하며 국내 대북 인식의 현 주소와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은 한국인들의 통일의식을 가장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조사해오고 있다.(1) 2023년 조사에서 북한에 대한 인식은 가장 악화되었다. 이전 해에 비해 대북 적대의식이 13.6%→18.6%로 높아지고, 경계의식이 17.7%→24.0%로 높아진 반면, 협력의식은 47.9%→37.7%로 10.2%p 낮아졌다. 그 결과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대북 부정적 인식이 42.6%로, 이 조사가 실시된 2007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연구원은 북한에 대한 피로감이 높은 상황에서 북한의 적대적 행보가 한국인의 대북 인식에 다분히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응답자의 69.0%는 북한정권과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응답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또 국민들의 78.1%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인의 다수는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연구원측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한다’는 인식이 2018년과 2019년에 40%로 반짝 상승하였고, 2020년에 24.6%로 하락한 이후 23.7%→21.5%→22.0%로 2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은 87.6%로 나타났는데, 최고치를 기록했던 2022년의 92.5%에 비해 소폭 하락하였으나 여전히 높은 편이다.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에 대한 위기와 불안은 64.8%로 이전 해(60.9%)에 비해 소폭 상승했다. 이상 나타난 바와 같이 국민들의 대북 인식은 부정적임을 알 수 있고 그 양상은 2018년 짧은 평화 분위기 이후부터 나타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위와 같은 한국민들의 부정적인 대북 인식에서 어떤 함의와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까? 우선 국민들은 김정은 정권에 대한 적대의식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김정은 정권이 핵능력을 고도화시키고 이를 위해 자원을 군사력 증강에 우선 투자하는 대신 주민들의 인권 개선에 나서지 않고, 북한식 통일전략에 호응하지 않는 남한과 적대관계를 천명하고 긴장을 고조시킬 우려 등 여러 가지이다. 이런 적대의식을 규범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하여 필자는 이를 ‘적정 적대의식’이라 이름 붙여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해야 할까, 또 남북대화는 불필요할까? 나아가 이제 통일은 물 건너간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국민 여론을 보면 그 합리성을 읽을 수 있다.
▲ 서로간의 적대의식이 높아가는 가운데 통일을 향한 걸음이 정체되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연구원이 2023년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2)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남북대화가 별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66.25%로 나타났다. 또 경제제재가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은 72.9%로 더 크게 나타났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비핵화 유도 방안에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통일연구원측은 북한의 잦은 미사일 도발과 핵위협에 대한 피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거기에 북한의 집요한 핵개발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다는 체념의식과 그런 북한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겠다는 국민들의 실리적 태도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대북 인식은 통일의식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위 2023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국민들은 통일의 필요성에 43.8%가 찬성한 반면, 반대는 29.8%였다. 참고로 2007년에는 통일 찬성 63.8%, 반대 15.1%였다. 통일 찬성 여론이 20% 줄어들어 들었다. 그런 전제 하에서 통일이 필요한 이유로는 ‘남북 간 전쟁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가 38.9%로 나타났는데, 기존에 일순위로 나온 응답인 ‘같은 민족이니까’는 30.6%로 나왔다.
통일에 대한 찬성 여론이 줄어든 가운데 그 이유로 민족 동질성보다는 평화정착이 앞선 것이다. 여기서 통일에 반대하는 이유로 통일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33.9%), 통일 이후 생겨날 사회적 문제(28.7%), 남북 간 정치체제의 차이(20.0%)가 나왔다. 또 통일로 기대할 이익이 남한에 이익이 된다(53.6%)와 자신에 이익이 된다(27.9%) 간에 격차가 큰 점도 인상적이다. 대북정책에서 시급한 문제로는 북한 비핵화, 북한의 인권개선, 군사적 긴장해소 등이 80% 가깝게 나왔다.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것인데, 그것이 협력 및 지원 대상으로서의 긍정적 대북 인식을 압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정권의 권력 세습, 북한의 평화 위협, 인권 침해 등 국민들은 물론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이유 있는 것들이다. 다만, 북한의 부정적인 행태는 북한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남북관계, 북한과 미국의 관계, 국제정세 등 다차원적인 분석을 할 때 그 평가는 물론 대안 마련에도 합리성을 높여줄 것이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통일에 대한 유보적인 여론 증가를 동반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평화조성을 전제로 한 통일, 점진적인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통일 자체가 무용함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평화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평화통일’론은 규범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평화적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지 선평화, 후통일의 의미가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및 민족 포기 선언이 단기적으로 남북 간 대화 및 통일 논의를 어렵게 할 것은 사실이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논의 포기는 북한체제의 통일 역량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남한체제 주도의 통일로 간단히 환원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북한 주민들의 자결권, 북한 정권의 무장력, 그리고 기후위기 등 글로벌 위기의 실존적 위협 등을 고려할 때, 통일은 기존의 체제·민족·이념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공감·공존·공영과 같은 ‘열린 통일’, ‘다함께 통일’을 요청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럴 때 이유 있는 대북 적대의식은 보다 이유 있는 통일의식으로 변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주
(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은 2007년부터 한국갤럽에 의뢰해 매년 ‘통일의식조사’를 해오고 있다. 전국에 거주하는 성인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1대1 개별 면접조사를 하고 있는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8% 포인트이다.
(2) ‘통일연구원(KINU) 통일의식 조사 2023’은 전국 거주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총 1,001명을 대면 면접조사로 진행했는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 포인트이다.
서보혁(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연구위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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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기회 2024-02-29 16:48:02
적대의식이 없었던 적은 없으니 적대의식이 적정선에서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것도 평화의 길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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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익선 2024-02-28 15:54:44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평화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평화통일’론은 규범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평화적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지 선평화, 후통일의 의미가 아니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위기의 시대, 전쟁보다는 평화가 우선임을 잘 깨우쳐 주고 계시네요. 어떻게든 적을 끌어안고 선의의 목적을 향해 함께 가는 것이 바른 문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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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
적을 정치적으로 사유하기 -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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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학술 레페스 포럼
적을 정치적으로 사유하기적의 계보학③
강혁민(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박사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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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정치적으로 사유하기적의 계보학③
강혁민(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박사후연구원) |
승인 2024.03.13 04:22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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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민 박사
폭력과 적대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인류역사를 통틀어 전쟁과 폭력이 부재한 시대를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거의 모든 문명, 모든 역사, 모든 국가에서 우리는 폭력과 적대를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폭력을 배태한 또는 폭력으로부터 잉태된 ‘적’과의 동침일지 모른다. 이렇듯 ‘적’은 인간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 핵심 요소다.
적을 향한 부정적 인식을 다급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 적이 곧장 ‘악’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다원적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에게 타자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논쟁의 맞수임을, 싸움의 상대자가 아니라 대화의 참여자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적은 논쟁에 참여하는 상대자일 뿐이며 이들과의 쟁투를 통해 최선의 선택을 만들어 내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사회에서 적은 절대 악이 아닌 논쟁적 타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과 악을 동일시해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만 하다. 인간이 가진 폭력의 역사, 전쟁의 경험은 평화공존이나 도덕적 공동체를 긴박하게 요청하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다.
칼 슈미트(Karl Schmitt)는 이 궁금증을 풀게 해 줄 좋은 출발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슈미트의 ‘적’ 개념을 통해 우리는 적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정치적 맞수로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슈미트의 적 개념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온전하게 이해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바로 그것인데, 이 단순하고 명료한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포괄적 의미규정 뿐만 아니라 적을 구분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적인 것임을 일깨웠다.
슈미트에게 적은 ‘구분된’ 타자다. 타자는 구분되며, 친구가 아닌 존재들이다. 그러나 적은 마땅히 부정되고 제거되어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으로 시인되어야 할 존재들이다.(미주 1) 슈미트에게 적은 자유주의적 인식에 따른 도덕관념이 적에게 부여한 악의 형상을 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적은 구분된 타자로서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이자 실존적 대립항일 뿐이다. 내가 적을 구분하듯이 적도 나를 적으로 구별하는 상호적 행위가 바로 정치적인 것이며 따라서 적은 불가피하며 상호적이다.
슈미트의 적, 그리고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누구보다 활발히 논의한 것은 벨기에 출신 정치이론가 샹탈 무페다. 무페는 에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포스트-맑시즘과 급진민주주의를 주장한 대표적 여성학자다. 무페는 그의 수많은 저작에서 현대 민주주의가 갖는 맹점, 즉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무능력을 꼬집고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다시 주목했다. 그가 보기에 유럽의 현실정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좌파정치는 자유주의가 제안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본질주의에 갇혀 정치적 사유를 하기에 역부족하다고 보았다.(미주 2)
무페가 주장하는 급진민주주의는 기존의 정치적인 사유의 무능력을 드러낸 좌파정치를 소생시키고 보다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를 되새겨 정치를 도덕주의, 보편주의, 합리주의로 몰아가는 ‘비정치적인’ 관습이나 인식과 절연한 급진적 기획을 가리킨다. 급진민주주의는 정치를 쟁투 또는 경합의 장소이자 과정으로 이해한다. 정치는 결코 최종적 결론이나 상태를 경험할 수 없으며, 불균등한 헤게모니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정치적 집단들의 선택 과정이다.
▲ 적대 감정 혹은 존재론적으로 실존하는 적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사유하냐가 중요하다. ⓒGetty Images
무페의 급진적 기획은 한 사회와 국가에 발생하는 갈등이나 적대가 어떤 일탈의 결과가 아닌 - 슈미트의 주장과 같이 - 정치적으로 자연스러운 결과다. 적 또는 적대는 사회를 구성하는 본연의 모습이자 필연적 상태다. 무페가 보기에 인간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과 쟁투의 상태에 있으며 민주주의는 이러한 쟁투의 과정을 추동하고 다원적 이익 집단들의 상호공존을 위해 갈등적 합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적은 정치적 기획 안에 존재하는 구분된 타자이며 그렇기에 적은 제거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적은 언제나 이렇게 낭만적으로 실재할까? 절대 그렇지는 않다. 존재론적으로 적은 우리 곁에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것의 실재와 발현은 결코 온순하지도 않으며 정의롭지도 않다. 적은 때때로 파국적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적대적 감정을 부추겨 인간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사유를 폐기하고 전쟁이나 폭력을 일삼게 한다. 적은 실로 대량학살의 현장에, 종교적 폭력에, 일상적 범죄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하여 중요한 것은 적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다. 적에 대한 증오감정, 편견, 기억에 녹아든 적대적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다스리고 민주적인 관리를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정말 극복이 가능한 것일까? 적에 대한 급진적 관점이 이러한 질문들에 줄 수 있는 답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익, 관심, 정체성 등이 생겨난 조건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그 원인을 정치적으로 경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적대를 파국적 폭력이 아닌 경합적 쟁투의 현장으로 초대하여 서로를 인식하고 정치적 선택에 참여하도록 돕는 것이다. 사실, 이유 없는 폭력은 상상하기 힘들다. 정치적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폭력은 야만일 뿐이다. 많은 경우 폭력은 정치적 욕구와 관련되며 그것이 만족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따라서 폭력의 구조를 정치적 사유하는 것, 그리고 적대적 집단들을 경합의 과정으로 초청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이 초갈등사회로 진입했다. 갈등의 다양성은 물론이거니와 갈등의 경험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적의 계보학은 바로 이러한 갈등해결의 다급한 요청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갈등의 현상만 바라보고 성급히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습적 정치행위는 위험하다. 시급한 해결은 적이 아닌 악을 규정하게 하며, 악을 하루 빨리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등을 아니, 적을 정치적으로 사유하고 이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길 원한다면, 양립할 수 없는 정치적 입장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경합적 쟁투로 변환시킬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다름이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비정치적 갈등인식을 벗고, 항존하는 적대를 받아들여 서로 쟁투할 수 있는 민주적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적을 정치적으로 사유하고 적들을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미주
(1) 성정엽,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 개념”, 민주법학 제72호 (2020), 49-79.
(2) 샹탈 무페/이보경 역, 『정치적인 것의 귀환』, 서울: 후마니타스, 2007.
강혁민(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박사후연구원) hyukmin2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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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등록좋은기회 2024-03-14 09:56:14
"내가 적을 구분하듯이 적도 나를 적으로 구별하는 상호적 행위가 바로 정치적인 것이며 따라서 적은 불가피하며 상호적"이라는 문장(슈미트의 입장), "정치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익, 관심, 정체성 등이 생겨난 조건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그 원인을 정치적으로 경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무페의 경합적 민주주의의 핵심을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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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2024-03-14 09:48:01
잘 읽었습니다. 현실 정치에서 귀감이 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정치화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적이자 타자를 받아들여 삶의 조화를 이룰 것인지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공부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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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민 박사
폭력과 적대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인류역사를 통틀어 전쟁과 폭력이 부재한 시대를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거의 모든 문명, 모든 역사, 모든 국가에서 우리는 폭력과 적대를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폭력을 배태한 또는 폭력으로부터 잉태된 ‘적’과의 동침일지 모른다. 이렇듯 ‘적’은 인간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 핵심 요소다.
적을 향한 부정적 인식을 다급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 적이 곧장 ‘악’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다원적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에게 타자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논쟁의 맞수임을, 싸움의 상대자가 아니라 대화의 참여자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적은 논쟁에 참여하는 상대자일 뿐이며 이들과의 쟁투를 통해 최선의 선택을 만들어 내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사회에서 적은 절대 악이 아닌 논쟁적 타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과 악을 동일시해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만 하다. 인간이 가진 폭력의 역사, 전쟁의 경험은 평화공존이나 도덕적 공동체를 긴박하게 요청하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다.
칼 슈미트(Karl Schmitt)는 이 궁금증을 풀게 해 줄 좋은 출발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슈미트의 ‘적’ 개념을 통해 우리는 적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정치적 맞수로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슈미트의 적 개념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온전하게 이해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바로 그것인데, 이 단순하고 명료한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포괄적 의미규정 뿐만 아니라 적을 구분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적인 것임을 일깨웠다.
슈미트에게 적은 ‘구분된’ 타자다. 타자는 구분되며, 친구가 아닌 존재들이다. 그러나 적은 마땅히 부정되고 제거되어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으로 시인되어야 할 존재들이다.(미주 1) 슈미트에게 적은 자유주의적 인식에 따른 도덕관념이 적에게 부여한 악의 형상을 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적은 구분된 타자로서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이자 실존적 대립항일 뿐이다. 내가 적을 구분하듯이 적도 나를 적으로 구별하는 상호적 행위가 바로 정치적인 것이며 따라서 적은 불가피하며 상호적이다.
슈미트의 적, 그리고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누구보다 활발히 논의한 것은 벨기에 출신 정치이론가 샹탈 무페다. 무페는 에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포스트-맑시즘과 급진민주주의를 주장한 대표적 여성학자다. 무페는 그의 수많은 저작에서 현대 민주주의가 갖는 맹점, 즉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무능력을 꼬집고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다시 주목했다. 그가 보기에 유럽의 현실정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좌파정치는 자유주의가 제안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본질주의에 갇혀 정치적 사유를 하기에 역부족하다고 보았다.(미주 2)
무페가 주장하는 급진민주주의는 기존의 정치적인 사유의 무능력을 드러낸 좌파정치를 소생시키고 보다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를 되새겨 정치를 도덕주의, 보편주의, 합리주의로 몰아가는 ‘비정치적인’ 관습이나 인식과 절연한 급진적 기획을 가리킨다. 급진민주주의는 정치를 쟁투 또는 경합의 장소이자 과정으로 이해한다. 정치는 결코 최종적 결론이나 상태를 경험할 수 없으며, 불균등한 헤게모니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정치적 집단들의 선택 과정이다.
▲ 적대 감정 혹은 존재론적으로 실존하는 적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사유하냐가 중요하다. ⓒGetty Images
무페의 급진적 기획은 한 사회와 국가에 발생하는 갈등이나 적대가 어떤 일탈의 결과가 아닌 - 슈미트의 주장과 같이 - 정치적으로 자연스러운 결과다. 적 또는 적대는 사회를 구성하는 본연의 모습이자 필연적 상태다. 무페가 보기에 인간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과 쟁투의 상태에 있으며 민주주의는 이러한 쟁투의 과정을 추동하고 다원적 이익 집단들의 상호공존을 위해 갈등적 합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적은 정치적 기획 안에 존재하는 구분된 타자이며 그렇기에 적은 제거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적은 언제나 이렇게 낭만적으로 실재할까? 절대 그렇지는 않다. 존재론적으로 적은 우리 곁에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것의 실재와 발현은 결코 온순하지도 않으며 정의롭지도 않다. 적은 때때로 파국적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적대적 감정을 부추겨 인간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사유를 폐기하고 전쟁이나 폭력을 일삼게 한다. 적은 실로 대량학살의 현장에, 종교적 폭력에, 일상적 범죄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하여 중요한 것은 적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다. 적에 대한 증오감정, 편견, 기억에 녹아든 적대적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다스리고 민주적인 관리를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정말 극복이 가능한 것일까? 적에 대한 급진적 관점이 이러한 질문들에 줄 수 있는 답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익, 관심, 정체성 등이 생겨난 조건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그 원인을 정치적으로 경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적대를 파국적 폭력이 아닌 경합적 쟁투의 현장으로 초대하여 서로를 인식하고 정치적 선택에 참여하도록 돕는 것이다. 사실, 이유 없는 폭력은 상상하기 힘들다. 정치적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폭력은 야만일 뿐이다. 많은 경우 폭력은 정치적 욕구와 관련되며 그것이 만족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따라서 폭력의 구조를 정치적 사유하는 것, 그리고 적대적 집단들을 경합의 과정으로 초청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이 초갈등사회로 진입했다. 갈등의 다양성은 물론이거니와 갈등의 경험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적의 계보학은 바로 이러한 갈등해결의 다급한 요청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갈등의 현상만 바라보고 성급히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습적 정치행위는 위험하다. 시급한 해결은 적이 아닌 악을 규정하게 하며, 악을 하루 빨리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등을 아니, 적을 정치적으로 사유하고 이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길 원한다면, 양립할 수 없는 정치적 입장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경합적 쟁투로 변환시킬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다름이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비정치적 갈등인식을 벗고, 항존하는 적대를 받아들여 서로 쟁투할 수 있는 민주적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적을 정치적으로 사유하고 적들을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미주
(1) 성정엽,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 개념”, 민주법학 제72호 (2020), 49-79.
(2) 샹탈 무페/이보경 역, 『정치적인 것의 귀환』, 서울: 후마니타스, 2007.
강혁민(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박사후연구원) hyukmin2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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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등록좋은기회 2024-03-14 09:56:14
"내가 적을 구분하듯이 적도 나를 적으로 구별하는 상호적 행위가 바로 정치적인 것이며 따라서 적은 불가피하며 상호적"이라는 문장(슈미트의 입장), "정치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익, 관심, 정체성 등이 생겨난 조건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그 원인을 정치적으로 경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무페의 경합적 민주주의의 핵심을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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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 2024-03-14 09:48:01
잘 읽었습니다. 현실 정치에서 귀감이 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정치화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적이자 타자를 받아들여 삶의 조화를 이룰 것인지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공부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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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
불교에서 본 적의 본질 - 에큐메니안
불교에서 본 적의 본질 - 에큐메니안
불교에서 본 적의 본질 적의 계보학④
원영상(원광대학교) | 승인 2024.03.27
▲ 원영상 원광대학교 교수
전쟁만큼 적과 아군으로 명백히 나뉘는 것은 없다. 전쟁의 폭력성은 어떤 형태로든 승자와 패자의 삶으로 귀속된다. 석존은 자신의 조국이 강자에게 먹히는 이러한 극한의 현실을 목격했다. 『증일아함경』에는 부친의 왕국인 카필라국이 코살라국의 침입으로 멸망한 이야기가 나온다. 카필라국의 비류왕이 침입해 올 때, 석존은 군사들이 지나가는 도로 옆의 마른 나무 아래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비류왕이 “잎이 무성한 니그로다 나무도 있는데 왜 마른 나무 밑에 앉아 계시냐”고 묻자, 석존은 “친족의 그늘이 남보다 낫기 때문이요”라고 답했다.
군사들이 철수했다. 다음 침략 때에도 만류했지만 결국 카필라국은 코끼리를 앞세운 코살라국의 전력에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석존은 “전생의 업보란 하늘로 옮길 수도, 쇠그물로 덮을 수도 없다”고 한탄했다. 그는 양자의 인연에 대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증오와 원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까지 윤회의 사슬을 형성해 왔음을 밝혀준다.
전쟁은 살인을 동반하는 것으로 불교의 첫째 계율인 불살생계를 파괴한다. 이는 출가는 물론 재가에게도 해당되는 계율이다. 『쌍윳따 니까야』에서는 전사마을의 촌장이 “전쟁 중에 싸우다 죽으면 하늘에 태어난다는 속설”에 대해 묻는다. 석존은 잘못된 견해라며, 그처럼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는 “지옥이나 축생 두 가지 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설한다. 윤회의 가장 낮은 층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그렇듯이 현실은 언제나 전쟁의 연속이다. 이상과 현실은 그 거리가 멀다. 정법에 의거하여 통치한다는 전륜성왕 또한 사방에 강력한 군대를 갖춘 뒤에 이뤄진다. 실제로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불법에 귀의한 것은 처참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의 일이다. 불법의 통치는 강력한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을 앞세운 대승불교에 와서는 정의로운 전쟁을 주장하기도 한다. 대승의 초기경전인 대살차니건자소설경에는 전쟁은 최대한 피해야 하지만 불가피할 경우, 통치자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고 한다. 중세의 기독교가 정의의 전쟁을 말한 것과 같은 논리다.
이러한 정의의 전쟁에서는 살인이라고 하더라도 나쁜 업장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 석존은 의도하지 않는 업은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명백한 적이 존재하는 이상 이 적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딜레마다. 왜냐면 겹겹이 얽힌 상극의 인연이 전쟁 이후에도 유전(流轉) 되기 때문이다.
석존의 초기 설법인 숫타니파타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죽이지도 말고, 남을 시켜서 죽이지도 말라. 그리고 죽이는 것을 용인하지도 말라”고 하며, “모든 존재자에 대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라는 당위를 설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약육강식이 지배한다. 석존이 세상에 의문을 가진 것도 왕자 시절에 농경제 행사 때 목격한 것에 있다. 보습으로 일구어진 흙덩이에서 뒹구는 벌레를 새가 날아와서 쪼아 먹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을 통해 세상 또한 약자가 강자에게 잡아먹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승불교의 정의로운 전쟁은 이러한 현실의 불가피한 타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경에서 적에 대한 기록은 아마도 석존의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내면의 욕망을 비유로써 제시한 것이 처음일 것이다. 이 욕망을 마왕이라고 보았다. 그 적을 최후에 정복함으로써 대각을 성취했다.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적, 극복 대상으로서의 현실의 적은 대승경전에 자주 등장한다.
『관무량수경』에서는 아예 부왕을 가두고 어머니를 살해하고자 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여주며, 상극의 인연으로 뒤덮인 예토(穢土)를 싫어함으로써 극락정토를 구하는 구도가 설정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돌파구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그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대신 극락을 희구함으로써 여전히 선악이 교차하는 상극과 오탁악세의 사바세계는 그대로 남는다.
비켜둔 현실과 관련하여 피아를 상정한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과 『과거현재인과경』에는 원친(怨親)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라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를 믿는 사회, 예를 들어 일본 중세에서 원친평등의 논리로 발전하기도 했다. 파멸시킨 적의 장례를 함께 지냄으로써 그들을 동등하게 대했다는 역사다. 그러나 이는 평등성보다는 적의 원한을 제거함으로써 우환을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Samyutta Nikaya」. 보살의 출가와 부처가 된 후 교리를 가르쳐 달라는 브라마 사함파티의 요청 사이의 사건을 보여주는 신할리어 표지(안쪽)와 야자수 잎 페이지가 삽화로 그려져 있다. ⓒWikipedia
불교 본래의 사상적 차원에서는 피아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동질성, 즉 적의 본성과 아군의 본성은 동일하다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피아라는 적대성은 항상성, 실체성은 없다. 이는 대승불교에 와서 깊은 사색이 낳은 결과다. 사회적 연기 차원에서 모든 대립은 의존 관계에 놓여 있다는 불교적 상식에 입각해 있다. 주객, 선악, 미추, 시비, 이해 등의 모든 이원적 세계는 상대적이다. 오늘날 국제사회가 보여주듯이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가까울수록 철천지원수가 된다. 멀리 있던 적이 어느새 가까운 이웃이 된다. 이해관계는 새옹지마처럼 끊임없이 요동친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모든 것을 긍정하는 쌍조(雙照)이거나 부정하는 쌍차(雙遮)다. 함께 존재하는 동시에 함께 소멸한다. 상대적 현상은 나무의 잎과 가지와 꽃과 같다. 그것의 뿌리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피아 각각의 본성은 무선무악이다. 마음이 요동치면 능선능악이 된다. 인간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천국에서 극락으로 오가는 것은 이러한 마음의 변화 때문이다. 적에 대한 인식은 분별의식 때문이다. 피아를 구분하는 것은 아(我)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자기보호의 본능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피아의 식별로 이어진다.
석존 이후 불교는 지극히 인간적이며,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행을 추구한 것은 인간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해소를 위해서다. 피아, 선악, 능소(주체와 객체)의 무분별은 삶에 드리운 그림자 제거를 통해 참된 평화에 이른다. 번뇌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열반, 즉 평화라는 것은 결코 관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별과 집착에 의해 생긴 현상의 차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여 『법구경』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적의(敵意)들은 결코 적의에 의해 멈추지 않는다. 그것들을 멈추게 하는 건 오직 무적의(無敵意)뿐이다”라며 적을 소멸시키는 불타의 방식이 등장한다. 또한 “분노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악은 선으로 다스리고, 인색한 사람은 보시로 다스리고, 거짓말쟁이는 진실로 다스려라. 그가 전쟁터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을 정복했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그가 사실상 더 고귀한 승리자이다”라고 한다. 적과 적의의 본질은 마음에 있으며, 그것의 뿌리가 같음을 상대적 차원에서 보여줌으로써 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모든 이원적 세계를 초월하여 다른 세계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명확한 파사현정의 계기가 있다. 무분별의 경지는 피아, 선악, 시비의 이원론적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쌍윳따 니까야』에서는 “학살자는 학살자를 부른다. 정복자는 정복자를 부르고, 학대하는 사람은 학대를 당하고, 격분하는 자는 격노한 사람을 부른다. 따라서 업의 진전에 의해, 강탈한 자는 강탈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 피아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상대적인 대결로 인해 쌓이는 업의 증강을 막기 위한 것이다. 업의 악순환을 끊는 것, 즉 업으로부터의 자유로 인해 자신과 적을 무화(無化)시킨다. 그것의 본질이 무아든 청정법신이든 진여본성이든 무엇이라고 해도 좋다.
인류가 가보지 않은 이 길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이원성이 붕괴됨으로 인해 정체성의 상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무상의 세계 내에서 과연 나라는 정체성이 있기나 한 것일까. 진여법신이든 하느님의 세계든 테두리 없는 바다에 풍덩 빠질 용기가 절실한 시대다.
원영상(원광대학교) wonyo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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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상(원광대학교) | 승인 2024.03.27
▲ 원영상 원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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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들이 철수했다. 다음 침략 때에도 만류했지만 결국 카필라국은 코끼리를 앞세운 코살라국의 전력에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석존은 “전생의 업보란 하늘로 옮길 수도, 쇠그물로 덮을 수도 없다”고 한탄했다. 그는 양자의 인연에 대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증오와 원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까지 윤회의 사슬을 형성해 왔음을 밝혀준다.
전쟁은 살인을 동반하는 것으로 불교의 첫째 계율인 불살생계를 파괴한다. 이는 출가는 물론 재가에게도 해당되는 계율이다. 『쌍윳따 니까야』에서는 전사마을의 촌장이 “전쟁 중에 싸우다 죽으면 하늘에 태어난다는 속설”에 대해 묻는다. 석존은 잘못된 견해라며, 그처럼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는 “지옥이나 축생 두 가지 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설한다. 윤회의 가장 낮은 층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그렇듯이 현실은 언제나 전쟁의 연속이다. 이상과 현실은 그 거리가 멀다. 정법에 의거하여 통치한다는 전륜성왕 또한 사방에 강력한 군대를 갖춘 뒤에 이뤄진다. 실제로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불법에 귀의한 것은 처참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의 일이다. 불법의 통치는 강력한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을 앞세운 대승불교에 와서는 정의로운 전쟁을 주장하기도 한다. 대승의 초기경전인 대살차니건자소설경에는 전쟁은 최대한 피해야 하지만 불가피할 경우, 통치자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고 한다. 중세의 기독교가 정의의 전쟁을 말한 것과 같은 논리다.
이러한 정의의 전쟁에서는 살인이라고 하더라도 나쁜 업장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 석존은 의도하지 않는 업은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명백한 적이 존재하는 이상 이 적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딜레마다. 왜냐면 겹겹이 얽힌 상극의 인연이 전쟁 이후에도 유전(流轉) 되기 때문이다.
석존의 초기 설법인 숫타니파타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죽이지도 말고, 남을 시켜서 죽이지도 말라. 그리고 죽이는 것을 용인하지도 말라”고 하며, “모든 존재자에 대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라는 당위를 설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약육강식이 지배한다. 석존이 세상에 의문을 가진 것도 왕자 시절에 농경제 행사 때 목격한 것에 있다. 보습으로 일구어진 흙덩이에서 뒹구는 벌레를 새가 날아와서 쪼아 먹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을 통해 세상 또한 약자가 강자에게 잡아먹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승불교의 정의로운 전쟁은 이러한 현실의 불가피한 타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경에서 적에 대한 기록은 아마도 석존의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내면의 욕망을 비유로써 제시한 것이 처음일 것이다. 이 욕망을 마왕이라고 보았다. 그 적을 최후에 정복함으로써 대각을 성취했다.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적, 극복 대상으로서의 현실의 적은 대승경전에 자주 등장한다.
『관무량수경』에서는 아예 부왕을 가두고 어머니를 살해하고자 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여주며, 상극의 인연으로 뒤덮인 예토(穢土)를 싫어함으로써 극락정토를 구하는 구도가 설정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돌파구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그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대신 극락을 희구함으로써 여전히 선악이 교차하는 상극과 오탁악세의 사바세계는 그대로 남는다.
비켜둔 현실과 관련하여 피아를 상정한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과 『과거현재인과경』에는 원친(怨親)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라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를 믿는 사회, 예를 들어 일본 중세에서 원친평등의 논리로 발전하기도 했다. 파멸시킨 적의 장례를 함께 지냄으로써 그들을 동등하게 대했다는 역사다. 그러나 이는 평등성보다는 적의 원한을 제거함으로써 우환을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Samyutta Nikaya」. 보살의 출가와 부처가 된 후 교리를 가르쳐 달라는 브라마 사함파티의 요청 사이의 사건을 보여주는 신할리어 표지(안쪽)와 야자수 잎 페이지가 삽화로 그려져 있다.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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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모든 것을 긍정하는 쌍조(雙照)이거나 부정하는 쌍차(雙遮)다. 함께 존재하는 동시에 함께 소멸한다. 상대적 현상은 나무의 잎과 가지와 꽃과 같다. 그것의 뿌리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피아 각각의 본성은 무선무악이다. 마음이 요동치면 능선능악이 된다. 인간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천국에서 극락으로 오가는 것은 이러한 마음의 변화 때문이다. 적에 대한 인식은 분별의식 때문이다. 피아를 구분하는 것은 아(我)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자기보호의 본능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피아의 식별로 이어진다.
석존 이후 불교는 지극히 인간적이며,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행을 추구한 것은 인간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해소를 위해서다. 피아, 선악, 능소(주체와 객체)의 무분별은 삶에 드리운 그림자 제거를 통해 참된 평화에 이른다. 번뇌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열반, 즉 평화라는 것은 결코 관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별과 집착에 의해 생긴 현상의 차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여 『법구경』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적의(敵意)들은 결코 적의에 의해 멈추지 않는다. 그것들을 멈추게 하는 건 오직 무적의(無敵意)뿐이다”라며 적을 소멸시키는 불타의 방식이 등장한다. 또한 “분노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악은 선으로 다스리고, 인색한 사람은 보시로 다스리고, 거짓말쟁이는 진실로 다스려라. 그가 전쟁터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을 정복했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그가 사실상 더 고귀한 승리자이다”라고 한다. 적과 적의의 본질은 마음에 있으며, 그것의 뿌리가 같음을 상대적 차원에서 보여줌으로써 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모든 이원적 세계를 초월하여 다른 세계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명확한 파사현정의 계기가 있다. 무분별의 경지는 피아, 선악, 시비의 이원론적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쌍윳따 니까야』에서는 “학살자는 학살자를 부른다. 정복자는 정복자를 부르고, 학대하는 사람은 학대를 당하고, 격분하는 자는 격노한 사람을 부른다. 따라서 업의 진전에 의해, 강탈한 자는 강탈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 피아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상대적인 대결로 인해 쌓이는 업의 증강을 막기 위한 것이다. 업의 악순환을 끊는 것, 즉 업으로부터의 자유로 인해 자신과 적을 무화(無化)시킨다. 그것의 본질이 무아든 청정법신이든 진여본성이든 무엇이라고 해도 좋다.
인류가 가보지 않은 이 길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이원성이 붕괴됨으로 인해 정체성의 상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무상의 세계 내에서 과연 나라는 정체성이 있기나 한 것일까. 진여법신이든 하느님의 세계든 테두리 없는 바다에 풍덩 빠질 용기가 절실한 시대다.
원영상(원광대학교) wonyo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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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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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4), 원영상, "불교에서 본 적의 본질"
불교 본래의 사상적 차원에서는 피아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동질성, 즉 적의 본성과 아군의 본성은 동일하다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피아라는 적대성은 항상성, 실체성은 없다. 이는 대승불교에 와서 깊은 사색이 낳은 결과다...
『법구경』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적의(敵意)들은 결코 적의에 의해 멈추지 않는다. 그것들을 멈추게 하는 건 오직 무적의(無敵意)뿐이다” 그리고 "그가 전쟁터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을 정복했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그가 사실상 더 고귀한 승리자이다”라고 한다. 적과 적의의 본질은 마음에 있으며, 그것의 뿌리가 같음을 상대적 차원에서 보여줌으로써 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모든 이원적 세계를 초월하여 다른 세계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명확한 파사현정의 계기가 있다. 무분별의 경지는 피아, 선악, 시비의 이원론적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이상 본문 중에서...
문제는 이런 경전의 메시지와 현실 존재들 사이의 상호관계가 복잡하다는 것일 것이다. 내 생각과 네 생각은 늘 다르고, 쉽게 풀리는 경우도 거의 없다. 적대성을 극복하는 일은 늘 어렵다.
그래서 '적의 계보학'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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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
2022/12/16
만들어진 종교 - 메이지 초기 일본을 관통한 종교라는 물음 호시노 세이지 2020
만들어진 종교 - 메이지 초기 일본을 관통한 종교라는 물음
호시노 세이지 (지은이)
호시노 세이지 (지은이)
글항아리2020-08-21
미리보기
408쪽
책소개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메이지 시기 일본, 서양의 학문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개념과 용어가 유입되고 생성되었다. ‘종교’ 또한 그중 하나다. 신도, 불교 등 일본 고유의 종교 전통은 이미 있어왔지만, 근대적 종교 개념이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초기에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가 채택되면서다. 특히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기존 종교 전통들은 스스로를 변증하기 위해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종교 개념 자체를 고찰해야 했다.
『만들어진 종교』는 이처럼 종교 개념의 정립 필요성이 촉발된 메이지 초기에서부터 종교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메이지 후기를 대상으로 하여 그 역사성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낸 연구서다. 자칫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쉬운 ‘종교’ 개념을 그 역사성에 주목하여 검토하면서, 메이지 시기 일본에서 ‘종교’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어 나갔는지를 탐구한다.
목차
서론
제1장 종교 개념의 역사성이라는 관점
제1절 서론: 종교 개념을 역사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
제2절 종교 개념과 관련 연구
제3절 결론: 종교 개념을 다시 이해한다는 것
제1부 문명으로서의 종교
제2장 개화·종교·기독교
제1절 서론: ‘문명의 종교’를 다시 생각한다
제2절 제시된 기독교와 종교
제3절 수용된 기독교와 종교
제4절 결론: 동태로서의 제시와 수용
제3장 ‘이학’과 ‘종교’: 메이지 10년대의 학문과 종교의 위상
제1절 서론: 학문과 종교의 조화라는 주장
제2절 다카하시 고로와 『육학잡지』
제3절 다카하시 고로의 ‘종교’와 ‘이학’: 「종교와 이학의 관섭 및 그 긴요함을 논함」(1880)을 중심으로
제4절 결론: 학문과 종교의 조화와 그 귀결
제4장 불교를 연설하다: 메이지 10년대 중반의 ‘불교 연설’의 위상
제1절 서론: 왜 ‘불교’를 ‘연설’하는가
제2절 ‘불교 연설’의 위상? ‘연설’‘설교’‘불교 연설’
제3절 ‘불교 연설’에 보이는 불교·기독교
제4절 결론: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제2부 문명에서 종교로
제5장 고자키 히로미치의 기독교·종교 이해의 구성
제1절 서론: 고자키 히로미치의 『종교요론』과 『정교신론』
제2절 『종교요론』
제3절 『정교신론』
제4절 결론: 종교와 기타 종교들
제6장 나카니시 우시오의 종교론
제1절 서론: 불교변증론에서 바람직한 종교
제2절 메이지 중기까지의 개관
제3절 이노우에 엔료
제4절 나카니시 우시오
제5절 결론: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제7장 문명에서 종교로: 메이지 10~20년대에 걸친 우에무라 마사히사 종교론의 변천
제1절 서론: 기독교와 여타 종교의 단절과 연속
제2절 메이지 10년대 - 문명과 진화론
제3절 전환점 ? 서양 인식과 기독교 이해의 전환
제4절 메이지 20년대 - 종교라는 영역
제5절 결론: 문명에서 종교로
제3부 종교와 도덕의 재배치
제8장 도덕과 종교의 위상
제1절 서론: 도덕과 종교라는 문제
제2절 교육칙어와 우치무라 간조의 불경 사건 - 도덕과 종교 1
제3절 이노우에 데쓰지로 『교육과 종교의 충돌』을 둘러싸고 - 도덕과 종교 2
제4절 결론: 기독교와 국민 도덕의 재배치
제9장 나카니시 우시오 『교육과 종교의 충돌에 대한 단안』에 대해: 기독교 재해석과 바람직한 종교라는 관점에서
제1절 서론: 나카니시 우시오의 종교·일본·기독교
제2절 『교육과 종교의 충돌에 대한 단안』 집필 이전의 나카니시 우시오와 유니테리언
제3절 나카니시 우시오 『교육과 종교의 충돌에 대한 단안』
제4절 결론: 종교 배치의 이중성
제10장 『종교 및 문예』로 본 메이지 말기 기독교의 한 측면
제1절 서론: 『종교 및 문예』와 시대
제2절 우에무라 마사히사와 『종교 및 문예』
제3절 메이지 말기와 기독교
제4절 『종교 및 문예』
제5절 결론: 종교의 학문적 탐구의 행방
결론: 종교 개념과 종교의 영역을 둘러싸고
미주
참고문헌
후기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종교 개념의 역사성은 이 책이 주안점을 두는 부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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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호시노 세이지 (星野 靖二)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73년생. 도쿄대학에서 인문사회계연구과 문학박사를 받았다. 고쿠가쿠인대학國學院大學 일본문화연구소 조교, 하버드대학 라이샤워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현재 고쿠가쿠인대학 일본문화연구소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종교학, 근대종교사, 근대일본종교사로, 최근 연구로 「일본문화론 속 종교/무종교日本文化論の中の宗教/無宗教」(『지금 종교와 마주하다 2 감춰진 종교, 드러난 종교隠される宗教、顕れる宗教(シリーズ・いま宗教に向きあう・2)』, 2018), 「막부 말기 유신 시기의 기독교라는 ‘곤란’幕末維新期のキリスト教という「困難」」(『신과 부처의 막부 말기 유신-교착하는 종교 세계カミとホトケの幕末維新――交錯する宗教世界』, 2018), 「나카니시 우시오-‘신불교’의 창도자中西牛郎-「新仏教」の唱導者」(『일본불교와 서양세계日本仏教と西洋世界』, 2020)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만들어진 종교>
이예안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일본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림대 한림과학원 HK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근대 서양의 정치사회적 개념과 사상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을 경유해 한국에 번역ㆍ수용된 문제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 《사고를 열다: 분단된 세계 속에서》(번역, 2015), 《번역과 문화의 지평》(공저, 2015), 《근대번역과 동아시아》(공저, 2015), 《동아시아 예술담론의 계보》(공저, 2016), 《음빙실자유서》(공역, 2017), 《비교와 연동으로 본 19세기 동아시아》(공저, 2020)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유길준의 사상 세계>,<동아시아 예술담론의 계보> … 총 7종 (모두보기)
이한정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도쿄대학에서 근대일본문학을 전공하고 문학/문화 비교에 관해 공부했다. 일본 고전문학, 세계문학, 지역문화 등을 흡수해 새로운 문학 작품을 창조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상명대학교 글로벌지역학부에서 교육과 연구에 힘쓰고 있으며, 최근 관심사는 한일 간 문학작품 번역, 재일조선인의 자서전을 대상으로 한 언어 표현의 복잡성과 디아스포라의 자기존재성이다. 저서로는 『일본문학의 수용과 번역』, 『김시종, 재일의 중력과 지평의 사상』(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열쇠』, 사카이 나오키의 『과거의 목소리』, 호시노 세이지의 『만들어진 종교』(공역)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일본문학의 수용과 번역>,<근대 동아시아 담론의 역설과 굴절>,<재일코리안 문학과 조국> … 총 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메이지 시기 근대화‧서구화의 소용돌이 속 종교를 둘러싼 충돌과 논쟁,
그 가운데 구성된 근대 종교 개념의 역사성!
일본 기독교, 불교계 중심인물을 통해 고찰한 계보학적 연구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메이지 시기 일본, 서양의 학문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개념과 용어가 유입되고 생성되었다. ‘종교’ 또한 그중 하나다. 신도, 불교 등 일본 고유의 종교 전통은 이미 있어왔지만, 근대적 종교 개념이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초기에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가 채택되면서다. 특히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기존 종교 전통들은 스스로를 변증하기 위해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종교 개념 자체를 고찰해야 했다.『만들어진 종교』는 이처럼 종교 개념의 정립 필요성이 촉발된 메이지 초기에서부터 종교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메이지 후기를 대상으로 하여 그 역사성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낸 연구서다. 자칫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쉬운 ‘종교’ 개념을 그 역사성에 주목하여 검토하면서, 메이지 시기 일본에서 ‘종교’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어 나갔는지를 탐구한다.
문명, 개화, 학문으로서의 기독교
메이지 시기 종교가 새롭게 제시되고 수용된 국면은 기독교와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보편성, 진리 등에 대한 질문이 촉발되었고 종교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초기 선교사들은 서양의 선진 지식, 특히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 지식을 기독교 전도의 수단으로 삼았다. 과학적 법칙성과 자연의 질서를 제시하고 그것을 신의 존재와 연결 지어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성을 변증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종교를 문명, 개화, 학문과 결부시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일본 사회가 기독교를 선진문명이라고 하여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일본기독교회의 지도자적 인물인 우에무라 마사히사는 서양에서 온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독교를 수용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신문명으로서가 아니라 문명과 조화를 이루는, 올바른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강조했다. 다카하시 고로는 종교와 이학(학문)을 나란히 두고, 진리 탐구의 행위와 신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보편적 도덕률을 명확하게 한다고 보았다. 한편 메이지 전기의 계몽사상가인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유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독교 재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자연신학에서 주장하는 자연의 질서를 유교의 리(理), 천(天) 등에 호응시키면서 기독교의 합리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때 신과 인간을 잇는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다소 소거된 형태로, 나카무라의 독자적인 기독교 이해가 구축되었다.
문명에서 종교로 ― 독자적 영역으로 발전해나가다
메이지 2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종교를 차차 문명이나 학문, 학술로부터 분리하여, 종교의 본질을 고찰하려는 논의가 일어났다. 고자키 히로미치는 J. H. 실리의 책 『길, 진리, 생명』을 번역해 소개하면서 문명과 종교,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교육자이기도 했던 실리는 물질적인 진보가 문명의 목적이 되는 것을 배척하고, 완전한 자유와 정의, 행복을 얻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종교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며, 종교가 문명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고자키 또한 도덕과의 관련에 초점을 맞추어 도덕을 주체적으로 행하게 하는 것으로서 종교를 이해했다. 특히 유교의 경우 정치적 군주인 왕이 권위의 원천이 되는데, 현실의 왕이 충분한 덕을 갖추고 있지 못할 때도 있다며 비판했다. 반면 기독교의 신은 초월자를 근원으로 삼고 있으며, 도덕의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도덕이 국가를 문명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나카니시 우시오는 불교도의 관점에서 이와 유사한 논의를 개진했다. 초월성과의 관련성만이 종교를 종교답게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그는 기독교보다 불교가 한층 더 고도의 종교라 주장하며 불교를 옹호했다. 이러한 불교 변증의 핵심은 불교가 자연교가 아닌 범신교이며, 기독교가 취하는 일신교 형태보다 범신교가 더 발전된 종교라는 논리였다. 이러한 나카니시의 주장은 근대적인 인간지와의 관련 속에서 종교를 파악했던 당대의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메이지 10년대에는 종교를 문명과 불가분한 것으로 이해했던 우에무라 마사히사 역시 종교와 문명을 분리하여 이해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서양 체험 및 자유주의적 기독교 이해의 일본 유입 등을 계기로 우에무라는 종교를 초월성과의 관계를 본질로 하는,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문명과 분리된 보편적 진리성을 주장하며, 종교를 희구하는 인간의 마음에 방점을 찍었다. 이처럼 초월성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논의가 기독교와 불교 모두에서 전개되면서 점차 종교의 영역이 명확해지고, 종교와 종교가 아닌 것의 구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도덕과 종교의 문제 ― 국체사상과의 충돌
초월성에 기반한 종교 이해는 메이지 20년대 중반~메이지 후기에 종교와 도덕의 관계에 재배치를 불러왔다. 여기서 도덕과 종교의 충돌이 극렬하게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우치무라 간조의 불경사건이다. 1890년 학생들을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 교육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교육칙어가 배부되었는데, 천황의 서명이 있는 그 신서에 기독교도인 우치무라가 배례를 하지 않고 머리를 조금 숙이는 것에 그쳐 논란이 된 사건이다. 이에 기독교가 ‘일본의 국체 본성에 맞지 않는다’, ‘나라의 안녕질서를 방해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기독교도들은 여러 관점에서 반론을 펼쳤다. 우치무라의 행동이 불경하다는 비판부터, ‘외형의 예식’과 ‘종교적 예배’를 바르게 구별해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예식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까지 다양했다. 특히 우에무라 마사히사는 “진실로 천황의 뜻에 따른다면 문명적이지 못한 습속은 폐기되어야 한다”면서 기독교도의 양심과 천황에 대한 충성이 충돌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사랑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애국이란 단순히 일본이라는 나라를 넘어 ‘인류의 개화진보’ ‘인성의 완성’ 등과 같은 보편적인 목적의 달성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봤다. 이처럼 우에무라는 기독교를 서양의 종교가 아닌, 서양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가진 종교임을 역설하며, 국수주의가 성립되어 가는 시대적 흐름과 호응하고자 했다.
불교의 입장에서 활동하던 나카니시 우시오도 불경 사건에 의해 발단된 기독교 비판의 국면에서 국체주의를 넘어서지 않는 새로운 기독교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유니테리언적 기독교 이해를 참조하며, 일본에 입각한 일본의 기독교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카니시의 이러한 비교종교학적 시도는 일본과 기독교, 일본과 종교라는 동시대적 과제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는 근대 일본에서 종교를 생각하는 데 시사적 역할을 했으며, 이전에는 조화 속에서 파악되던 종교와 도덕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 했다.
풍부한 사료를 통해 분석하는 종교가들의 ‘말’
일본 근대 역사 속에서 종교 개념이 새롭게 제시되고 그 틀을 잡아 나가는 과정을 살펴봄에 있어『만들어진 종교』는 종교가들의 말, 종교가들의 담론 작업에 집중한다. 당대에 활동했던 기독교와 불교의 지도자적인 인물, 예를 들어 우에무라 마사히사, 나카니시 우시오, 다카하시 고로 등이 종교를 둘러싼 논의의 장을 어떻게 구축해나갔는지 살핀다. 이들의 저작물뿐 아니라 그 시기 발행된 잡지, 연설 기록 등 1차 자료를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종교를 둘러싼 종교가들의 발화 및 유통의 과정을 다각도에서 살펴보는, 일종의 미디어 연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만들어진 종교』는 근대 사료를 구체적으로 검토하며 일본인 기독교도가 기독교를 지적‧반성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노력, 기독교와의 경합 속에서 스스로를 옹호하고 갱신하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 등을 꼼꼼하게 분석해낸다. 종교 개념의 역사성을 추적하는 이 작업은 일본의 근대 종교 개념이 완성된 형태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문명, 도덕, 초월성의 문제를 둘러싼 종교가들의 적극적인 논쟁들 과정 속에서 구성된 결과임을 논증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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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호-‘종교자’의 언어에 드러난 ‘종교’ 개념 연구
호시노 세이지의 『만들어진 종교」가 번역, 출간되었다(이예안, 이한정 옮김, 글항아리, 2020). 이 책의 원제는 ==== 이고 부제는 '종교자의 언어와 근대'로, 저자가 2006년에 제출했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하여 2012년에 출간한 것이다.
'종교자'1)라는 용어를 처음 눈여겨보게 된 것은 작년 여름 박규태 선생님의 「초고령다사사회 일본에 있어 종교 의 새로운 지평: '임상종교사'를 중심으로」라는 특별강연에서 종교자 • (임상)종교사 • 스피리추얼케어사 등의 용어를 접하면서 였다.2)
호시노는 이 책에서 다루는 종교자들이 기본적으로 지식인이며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언어화하고 그것 을 특정 매체를 통해 공개했으나, 관학 아카데미즘의 종교학과는 다른 위치에서 정통적인 학문으로서의 권위를 배경으로 종교 를 말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그는 종교학이 일본에서 제도적으로 확립된 메이지 30년대 이전에, 몇몇'종교자'들이 서양의 기 독교론과 그 비판론 및 동시대에 학문으로 발흥하던 비교종교학 등의 활동을 참조하여, 이를 자신들의 변증론을 위하여 재해석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왜 종교를 말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말했는지를 학문적 자리에서 종합, 분석 하여 그 의미 맥락을 부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의 구성을 보자면, '종교 개념의 역사성이라는 관점'이라는 제목을 가진 제1장에서 '종교' 개념에 관한 선행 연구와 자신의 연 구 관점을 제시하였고, 이어서 제1부(2-4장) • 제2부(5-7장) • 제3부(8-10장)는 대체로 시기 순으로 서술하였는데, 시간적인 변 화를 드러내기보다는~ 저자가 「후기」에서 말했듯이-대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문맥'을 제공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제1부에서는 메이지 초기부터 10년대의 중반까지 '종교'가 어떻게 일본 사회에 제시, 수용되었는가를 고찰하였다. 즉, 기독교가 문 명의 종교로 제시되었던 상황에서 '종교'와 '문명'은 불가분의 존재로 수용되었으며, 동시에 전통적 세계관을 통한 재해석이 이 루어졌던 상황도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당시의 종교자들이 주로 기독교와 불교의 '변증'이라는 문맥에서 한층 추상도가 높은 '종교'를 '문명' • '학술' • '도리' • '도덕' 등의 사항과 결부하여 논의했던 양상을 서술하였다. 제2부도 기독교와 불교 측에서 이루 어진 변증의 국면에서 종교 개념이 형성되어갔던 과정을 다루는데, 다만 메이지 20년대를 전후하는 시기에는 '문명'이나 '학 술'에서 분리되어 '종교'의 독자적인 영역이 모색되었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예컨대 당시의 지도자적 기독교도의 한 사람인 고자키 히로미치(1 내츄리,)는 종교란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며 도덕을 주체적으로 실천하게 한다고 여겼고, 새로운 형 태의 불교변증론을 제시했던 나카니시 우시오(77수(3)와 또 다른 지도자적 기독교도였던 우에무라 마사히사(자치>)는 모두 종교의 본질을 초월성과의 관계에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의 독자성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제3부는 메이지 20년대 중반부 터 후기까지를 포함하는 시기를 다루는데, 핵심적인 주제는 '종교'와 '도덕'의 관계 양상이다. 저자는 종교 개념의 본질을 초월성 에서 찾을 경우 종교가 도덕의 우위에 놓이지만, '우치무라 간조(치크) 불경사건'과 '교육과 종교의 충돌 문제'의 경우 국민 도덕적인 '도덕'에 기독교와 같은 '종교'는 필수적이 아니거나 심지어 불필요하다는 입장도 생겨났다고 하였다. 나카니시 우시오 의 경우, 종교의 독자성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일본과 관련된 가치가 더 상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하면서, 저자는 일본에서 믿 는 종교는 일본 국체주의와 충돌해서는 안 된다는 이해가 대두되면서 기독교와 불교 모두 개혁이 요구되었던 맥락을 소개하였 다.
이 책의 서론에서 저자는 각 장의 내용을 간명하게 제시하였고,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이 책에 대한 대표적인 리뷰 및 그 안에서 지적되었던 비판점과 그에 대한 자신의 답변까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평가를 덧붙일 필요는 없고,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생각을 몇 가지 적어보겠다. 첫째, 호시노 세이지가 근대 일본에 대해서 했던 작업을 근대 한국에 대해 서 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떤 구도가 될까? 이 의문은 한국에서는 이런 작업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 고 있는데, 관련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기보다는, 호시노와 같이 '종교자'들의 언설에 근거하여 과연 어떤 계기에서 불 교나 유교 혹은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개념을 구사하게 되었는지, 또 그 대척점에는 어떤 개념군들이 어떻게 포진되어 있었 는지를 맥락화한 연구는 아직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료의 부재뿐 아니라 축적된 연구의 부족이라는 문제가 있으리라 생 각되는데, 이러한 미비점들을 어떻게 보완하고 극복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수행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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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쪽
책소개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메이지 시기 일본, 서양의 학문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개념과 용어가 유입되고 생성되었다. ‘종교’ 또한 그중 하나다. 신도, 불교 등 일본 고유의 종교 전통은 이미 있어왔지만, 근대적 종교 개념이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초기에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가 채택되면서다. 특히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기존 종교 전통들은 스스로를 변증하기 위해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종교 개념 자체를 고찰해야 했다.
『만들어진 종교』는 이처럼 종교 개념의 정립 필요성이 촉발된 메이지 초기에서부터 종교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메이지 후기를 대상으로 하여 그 역사성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낸 연구서다. 자칫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쉬운 ‘종교’ 개념을 그 역사성에 주목하여 검토하면서, 메이지 시기 일본에서 ‘종교’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어 나갔는지를 탐구한다.
목차
서론
제1장 종교 개념의 역사성이라는 관점
제1절 서론: 종교 개념을 역사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
제2절 종교 개념과 관련 연구
제3절 결론: 종교 개념을 다시 이해한다는 것
제1부 문명으로서의 종교
제2장 개화·종교·기독교
제1절 서론: ‘문명의 종교’를 다시 생각한다
제2절 제시된 기독교와 종교
제3절 수용된 기독교와 종교
제4절 결론: 동태로서의 제시와 수용
제3장 ‘이학’과 ‘종교’: 메이지 10년대의 학문과 종교의 위상
제1절 서론: 학문과 종교의 조화라는 주장
제2절 다카하시 고로와 『육학잡지』
제3절 다카하시 고로의 ‘종교’와 ‘이학’: 「종교와 이학의 관섭 및 그 긴요함을 논함」(1880)을 중심으로
제4절 결론: 학문과 종교의 조화와 그 귀결
제4장 불교를 연설하다: 메이지 10년대 중반의 ‘불교 연설’의 위상
제1절 서론: 왜 ‘불교’를 ‘연설’하는가
제2절 ‘불교 연설’의 위상? ‘연설’‘설교’‘불교 연설’
제3절 ‘불교 연설’에 보이는 불교·기독교
제4절 결론: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제2부 문명에서 종교로
제5장 고자키 히로미치의 기독교·종교 이해의 구성
제1절 서론: 고자키 히로미치의 『종교요론』과 『정교신론』
제2절 『종교요론』
제3절 『정교신론』
제4절 결론: 종교와 기타 종교들
제6장 나카니시 우시오의 종교론
제1절 서론: 불교변증론에서 바람직한 종교
제2절 메이지 중기까지의 개관
제3절 이노우에 엔료
제4절 나카니시 우시오
제5절 결론: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제7장 문명에서 종교로: 메이지 10~20년대에 걸친 우에무라 마사히사 종교론의 변천
제1절 서론: 기독교와 여타 종교의 단절과 연속
제2절 메이지 10년대 - 문명과 진화론
제3절 전환점 ? 서양 인식과 기독교 이해의 전환
제4절 메이지 20년대 - 종교라는 영역
제5절 결론: 문명에서 종교로
제3부 종교와 도덕의 재배치
제8장 도덕과 종교의 위상
제1절 서론: 도덕과 종교라는 문제
제2절 교육칙어와 우치무라 간조의 불경 사건 - 도덕과 종교 1
제3절 이노우에 데쓰지로 『교육과 종교의 충돌』을 둘러싸고 - 도덕과 종교 2
제4절 결론: 기독교와 국민 도덕의 재배치
제9장 나카니시 우시오 『교육과 종교의 충돌에 대한 단안』에 대해: 기독교 재해석과 바람직한 종교라는 관점에서
제1절 서론: 나카니시 우시오의 종교·일본·기독교
제2절 『교육과 종교의 충돌에 대한 단안』 집필 이전의 나카니시 우시오와 유니테리언
제3절 나카니시 우시오 『교육과 종교의 충돌에 대한 단안』
제4절 결론: 종교 배치의 이중성
제10장 『종교 및 문예』로 본 메이지 말기 기독교의 한 측면
제1절 서론: 『종교 및 문예』와 시대
제2절 우에무라 마사히사와 『종교 및 문예』
제3절 메이지 말기와 기독교
제4절 『종교 및 문예』
제5절 결론: 종교의 학문적 탐구의 행방
결론: 종교 개념과 종교의 영역을 둘러싸고
미주
참고문헌
후기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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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종교 개념의 역사성은 이 책이 주안점을 두는 부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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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호시노 세이지 (星野 靖二)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73년생. 도쿄대학에서 인문사회계연구과 문학박사를 받았다. 고쿠가쿠인대학國學院大學 일본문화연구소 조교, 하버드대학 라이샤워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현재 고쿠가쿠인대학 일본문화연구소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종교학, 근대종교사, 근대일본종교사로, 최근 연구로 「일본문화론 속 종교/무종교日本文化論の中の宗教/無宗教」(『지금 종교와 마주하다 2 감춰진 종교, 드러난 종교隠される宗教、顕れる宗教(シリーズ・いま宗教に向きあう・2)』, 2018), 「막부 말기 유신 시기의 기독교라는 ‘곤란’幕末維新期のキリスト教という「困難」」(『신과 부처의 막부 말기 유신-교착하는 종교 세계カミとホトケの幕末維新――交錯する宗教世界』, 2018), 「나카니시 우시오-‘신불교’의 창도자中西牛郎-「新仏教」の唱導者」(『일본불교와 서양세계日本仏教と西洋世界』, 2020)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만들어진 종교>
이예안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일본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림대 한림과학원 HK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근대 서양의 정치사회적 개념과 사상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을 경유해 한국에 번역ㆍ수용된 문제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 《사고를 열다: 분단된 세계 속에서》(번역, 2015), 《번역과 문화의 지평》(공저, 2015), 《근대번역과 동아시아》(공저, 2015), 《동아시아 예술담론의 계보》(공저, 2016), 《음빙실자유서》(공역, 2017), 《비교와 연동으로 본 19세기 동아시아》(공저, 2020)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유길준의 사상 세계>,<동아시아 예술담론의 계보> … 총 7종 (모두보기)
이한정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도쿄대학에서 근대일본문학을 전공하고 문학/문화 비교에 관해 공부했다. 일본 고전문학, 세계문학, 지역문화 등을 흡수해 새로운 문학 작품을 창조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상명대학교 글로벌지역학부에서 교육과 연구에 힘쓰고 있으며, 최근 관심사는 한일 간 문학작품 번역, 재일조선인의 자서전을 대상으로 한 언어 표현의 복잡성과 디아스포라의 자기존재성이다. 저서로는 『일본문학의 수용과 번역』, 『김시종, 재일의 중력과 지평의 사상』(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열쇠』, 사카이 나오키의 『과거의 목소리』, 호시노 세이지의 『만들어진 종교』(공역)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일본문학의 수용과 번역>,<근대 동아시아 담론의 역설과 굴절>,<재일코리안 문학과 조국> … 총 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메이지 시기 근대화‧서구화의 소용돌이 속 종교를 둘러싼 충돌과 논쟁,
그 가운데 구성된 근대 종교 개념의 역사성!
일본 기독교, 불교계 중심인물을 통해 고찰한 계보학적 연구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메이지 시기 일본, 서양의 학문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개념과 용어가 유입되고 생성되었다. ‘종교’ 또한 그중 하나다. 신도, 불교 등 일본 고유의 종교 전통은 이미 있어왔지만, 근대적 종교 개념이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초기에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가 채택되면서다. 특히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기존 종교 전통들은 스스로를 변증하기 위해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종교 개념 자체를 고찰해야 했다.『만들어진 종교』는 이처럼 종교 개념의 정립 필요성이 촉발된 메이지 초기에서부터 종교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메이지 후기를 대상으로 하여 그 역사성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낸 연구서다. 자칫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쉬운 ‘종교’ 개념을 그 역사성에 주목하여 검토하면서, 메이지 시기 일본에서 ‘종교’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어 나갔는지를 탐구한다.
문명, 개화, 학문으로서의 기독교
메이지 시기 종교가 새롭게 제시되고 수용된 국면은 기독교와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보편성, 진리 등에 대한 질문이 촉발되었고 종교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초기 선교사들은 서양의 선진 지식, 특히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 지식을 기독교 전도의 수단으로 삼았다. 과학적 법칙성과 자연의 질서를 제시하고 그것을 신의 존재와 연결 지어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성을 변증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종교를 문명, 개화, 학문과 결부시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일본 사회가 기독교를 선진문명이라고 하여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일본기독교회의 지도자적 인물인 우에무라 마사히사는 서양에서 온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독교를 수용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신문명으로서가 아니라 문명과 조화를 이루는, 올바른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강조했다. 다카하시 고로는 종교와 이학(학문)을 나란히 두고, 진리 탐구의 행위와 신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보편적 도덕률을 명확하게 한다고 보았다. 한편 메이지 전기의 계몽사상가인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유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독교 재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자연신학에서 주장하는 자연의 질서를 유교의 리(理), 천(天) 등에 호응시키면서 기독교의 합리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때 신과 인간을 잇는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다소 소거된 형태로, 나카무라의 독자적인 기독교 이해가 구축되었다.
문명에서 종교로 ― 독자적 영역으로 발전해나가다
메이지 2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종교를 차차 문명이나 학문, 학술로부터 분리하여, 종교의 본질을 고찰하려는 논의가 일어났다. 고자키 히로미치는 J. H. 실리의 책 『길, 진리, 생명』을 번역해 소개하면서 문명과 종교,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교육자이기도 했던 실리는 물질적인 진보가 문명의 목적이 되는 것을 배척하고, 완전한 자유와 정의, 행복을 얻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종교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며, 종교가 문명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고자키 또한 도덕과의 관련에 초점을 맞추어 도덕을 주체적으로 행하게 하는 것으로서 종교를 이해했다. 특히 유교의 경우 정치적 군주인 왕이 권위의 원천이 되는데, 현실의 왕이 충분한 덕을 갖추고 있지 못할 때도 있다며 비판했다. 반면 기독교의 신은 초월자를 근원으로 삼고 있으며, 도덕의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도덕이 국가를 문명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나카니시 우시오는 불교도의 관점에서 이와 유사한 논의를 개진했다. 초월성과의 관련성만이 종교를 종교답게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그는 기독교보다 불교가 한층 더 고도의 종교라 주장하며 불교를 옹호했다. 이러한 불교 변증의 핵심은 불교가 자연교가 아닌 범신교이며, 기독교가 취하는 일신교 형태보다 범신교가 더 발전된 종교라는 논리였다. 이러한 나카니시의 주장은 근대적인 인간지와의 관련 속에서 종교를 파악했던 당대의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메이지 10년대에는 종교를 문명과 불가분한 것으로 이해했던 우에무라 마사히사 역시 종교와 문명을 분리하여 이해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서양 체험 및 자유주의적 기독교 이해의 일본 유입 등을 계기로 우에무라는 종교를 초월성과의 관계를 본질로 하는,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문명과 분리된 보편적 진리성을 주장하며, 종교를 희구하는 인간의 마음에 방점을 찍었다. 이처럼 초월성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논의가 기독교와 불교 모두에서 전개되면서 점차 종교의 영역이 명확해지고, 종교와 종교가 아닌 것의 구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도덕과 종교의 문제 ― 국체사상과의 충돌
초월성에 기반한 종교 이해는 메이지 20년대 중반~메이지 후기에 종교와 도덕의 관계에 재배치를 불러왔다. 여기서 도덕과 종교의 충돌이 극렬하게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우치무라 간조의 불경사건이다. 1890년 학생들을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 교육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교육칙어가 배부되었는데, 천황의 서명이 있는 그 신서에 기독교도인 우치무라가 배례를 하지 않고 머리를 조금 숙이는 것에 그쳐 논란이 된 사건이다. 이에 기독교가 ‘일본의 국체 본성에 맞지 않는다’, ‘나라의 안녕질서를 방해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기독교도들은 여러 관점에서 반론을 펼쳤다. 우치무라의 행동이 불경하다는 비판부터, ‘외형의 예식’과 ‘종교적 예배’를 바르게 구별해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예식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까지 다양했다. 특히 우에무라 마사히사는 “진실로 천황의 뜻에 따른다면 문명적이지 못한 습속은 폐기되어야 한다”면서 기독교도의 양심과 천황에 대한 충성이 충돌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사랑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애국이란 단순히 일본이라는 나라를 넘어 ‘인류의 개화진보’ ‘인성의 완성’ 등과 같은 보편적인 목적의 달성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봤다. 이처럼 우에무라는 기독교를 서양의 종교가 아닌, 서양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가진 종교임을 역설하며, 국수주의가 성립되어 가는 시대적 흐름과 호응하고자 했다.
불교의 입장에서 활동하던 나카니시 우시오도 불경 사건에 의해 발단된 기독교 비판의 국면에서 국체주의를 넘어서지 않는 새로운 기독교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유니테리언적 기독교 이해를 참조하며, 일본에 입각한 일본의 기독교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카니시의 이러한 비교종교학적 시도는 일본과 기독교, 일본과 종교라는 동시대적 과제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는 근대 일본에서 종교를 생각하는 데 시사적 역할을 했으며, 이전에는 조화 속에서 파악되던 종교와 도덕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 했다.
풍부한 사료를 통해 분석하는 종교가들의 ‘말’
일본 근대 역사 속에서 종교 개념이 새롭게 제시되고 그 틀을 잡아 나가는 과정을 살펴봄에 있어『만들어진 종교』는 종교가들의 말, 종교가들의 담론 작업에 집중한다. 당대에 활동했던 기독교와 불교의 지도자적인 인물, 예를 들어 우에무라 마사히사, 나카니시 우시오, 다카하시 고로 등이 종교를 둘러싼 논의의 장을 어떻게 구축해나갔는지 살핀다. 이들의 저작물뿐 아니라 그 시기 발행된 잡지, 연설 기록 등 1차 자료를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종교를 둘러싼 종교가들의 발화 및 유통의 과정을 다각도에서 살펴보는, 일종의 미디어 연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만들어진 종교』는 근대 사료를 구체적으로 검토하며 일본인 기독교도가 기독교를 지적‧반성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노력, 기독교와의 경합 속에서 스스로를 옹호하고 갱신하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 등을 꼼꼼하게 분석해낸다. 종교 개념의 역사성을 추적하는 이 작업은 일본의 근대 종교 개념이 완성된 형태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문명, 도덕, 초월성의 문제를 둘러싼 종교가들의 적극적인 논쟁들 과정 속에서 구성된 결과임을 논증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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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호-‘종교자’의 언어에 드러난 ‘종교’ 개념 연구
호시노 세이지의 『만들어진 종교」가 번역, 출간되었다(이예안, 이한정 옮김, 글항아리, 2020). 이 책의 원제는 ==== 이고 부제는 '종교자의 언어와 근대'로, 저자가 2006년에 제출했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하여 2012년에 출간한 것이다.
'종교자'1)라는 용어를 처음 눈여겨보게 된 것은 작년 여름 박규태 선생님의 「초고령다사사회 일본에 있어 종교 의 새로운 지평: '임상종교사'를 중심으로」라는 특별강연에서 종교자 • (임상)종교사 • 스피리추얼케어사 등의 용어를 접하면서 였다.2)
호시노는 이 책에서 다루는 종교자들이 기본적으로 지식인이며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언어화하고 그것 을 특정 매체를 통해 공개했으나, 관학 아카데미즘의 종교학과는 다른 위치에서 정통적인 학문으로서의 권위를 배경으로 종교 를 말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그는 종교학이 일본에서 제도적으로 확립된 메이지 30년대 이전에, 몇몇'종교자'들이 서양의 기 독교론과 그 비판론 및 동시대에 학문으로 발흥하던 비교종교학 등의 활동을 참조하여, 이를 자신들의 변증론을 위하여 재해석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왜 종교를 말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말했는지를 학문적 자리에서 종합, 분석 하여 그 의미 맥락을 부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의 구성을 보자면, '종교 개념의 역사성이라는 관점'이라는 제목을 가진 제1장에서 '종교' 개념에 관한 선행 연구와 자신의 연 구 관점을 제시하였고, 이어서 제1부(2-4장) • 제2부(5-7장) • 제3부(8-10장)는 대체로 시기 순으로 서술하였는데, 시간적인 변 화를 드러내기보다는~ 저자가 「후기」에서 말했듯이-대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문맥'을 제공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제1부에서는 메이지 초기부터 10년대의 중반까지 '종교'가 어떻게 일본 사회에 제시, 수용되었는가를 고찰하였다. 즉, 기독교가 문 명의 종교로 제시되었던 상황에서 '종교'와 '문명'은 불가분의 존재로 수용되었으며, 동시에 전통적 세계관을 통한 재해석이 이 루어졌던 상황도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당시의 종교자들이 주로 기독교와 불교의 '변증'이라는 문맥에서 한층 추상도가 높은 '종교'를 '문명' • '학술' • '도리' • '도덕' 등의 사항과 결부하여 논의했던 양상을 서술하였다. 제2부도 기독교와 불교 측에서 이루 어진 변증의 국면에서 종교 개념이 형성되어갔던 과정을 다루는데, 다만 메이지 20년대를 전후하는 시기에는 '문명'이나 '학 술'에서 분리되어 '종교'의 독자적인 영역이 모색되었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예컨대 당시의 지도자적 기독교도의 한 사람인 고자키 히로미치(1 내츄리,)는 종교란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며 도덕을 주체적으로 실천하게 한다고 여겼고, 새로운 형 태의 불교변증론을 제시했던 나카니시 우시오(77수(3)와 또 다른 지도자적 기독교도였던 우에무라 마사히사(자치>)는 모두 종교의 본질을 초월성과의 관계에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의 독자성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제3부는 메이지 20년대 중반부 터 후기까지를 포함하는 시기를 다루는데, 핵심적인 주제는 '종교'와 '도덕'의 관계 양상이다. 저자는 종교 개념의 본질을 초월성 에서 찾을 경우 종교가 도덕의 우위에 놓이지만, '우치무라 간조(치크) 불경사건'과 '교육과 종교의 충돌 문제'의 경우 국민 도덕적인 '도덕'에 기독교와 같은 '종교'는 필수적이 아니거나 심지어 불필요하다는 입장도 생겨났다고 하였다. 나카니시 우시오 의 경우, 종교의 독자성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일본과 관련된 가치가 더 상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하면서, 저자는 일본에서 믿 는 종교는 일본 국체주의와 충돌해서는 안 된다는 이해가 대두되면서 기독교와 불교 모두 개혁이 요구되었던 맥락을 소개하였 다.
이 책의 서론에서 저자는 각 장의 내용을 간명하게 제시하였고,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이 책에 대한 대표적인 리뷰 및 그 안에서 지적되었던 비판점과 그에 대한 자신의 답변까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평가를 덧붙일 필요는 없고,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생각을 몇 가지 적어보겠다. 첫째, 호시노 세이지가 근대 일본에 대해서 했던 작업을 근대 한국에 대해 서 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떤 구도가 될까? 이 의문은 한국에서는 이런 작업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 고 있는데, 관련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기보다는, 호시노와 같이 '종교자'들의 언설에 근거하여 과연 어떤 계기에서 불 교나 유교 혹은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개념을 구사하게 되었는지, 또 그 대척점에는 어떤 개념군들이 어떻게 포진되어 있었 는지를 맥락화한 연구는 아직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료의 부재뿐 아니라 축적된 연구의 부족이라는 문제가 있으리라 생 각되는데, 이러한 미비점들을 어떻게 보완하고 극복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수행해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사나 한국불교사의 19-20세기를 서술하는 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식의 변화에 따라 자료도 변화, 확장되어야 할 것이고, 자료의 부재를 그저 부재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자료들을 맥락화에 동원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할 것 이다. 둘째, 앞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이지만, 19-20세기 한국의 종교문화 및 종교 이해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는 일차자료의 발 굴과 정리가 절실하다. 예컨대, 근대 일본의 학지(쇠) 체계를 구축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노우에 데쓰 지로(#노합 소테, 1856-1944)는 1891년부터 개설했던 '비교종교와 동양철학' 강좌에서 비교종교의 형식으로 세계의 종교들 을 검토하였고, 그 수업을 들은 도쿄제국대학의 제자들은 개별 종교의 전문가들로 성장하였는데, 놀랍게도 이들 대부분의 자료 가 전집으로 출간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도 21세기에 들어서 제국대학 및 경성제대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하면서 관련 연구가 빠른 속도로 축적되고 있는데, 최근에 읽은 「종교민족학자 김효경의 학문훈련과 제국배경」이라는 논문3)을 통하여 식민지 시기 한국의 종교학 및 한국인 종교(학)연구자들에 대한 연구가 종교학계에서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통감하였다.
공부가 점차 두어 가지 주제로 수렴되면서 깊어져야 할 나이가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 오히려 점점 더 분산되면서 잡다해지기만 하는 것 같아서 답답하다. 엉뚱하지만, 소풍 나온 세상살이라고 맘 편히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다.
1) '웃※®'라는 용어는 국어사전에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올라가 있고,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몇 차례 의 용례도 있었다. 일본어에서는 종교를 가진 사람을 웃※로 통칭하고, '웃※시'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듯하며,
'웃※충’는 특정 종교의 성직자나 전도사 등 종교 종사자를 뜻하는 용어로 쓰인다. 원서의 '‡화?'라는 용어를 번역서에서는
'웃짧충‘라고 하였으므로, 독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2) 초종파적 입장에 선 종교자들을 교육하여 임상종교사를 양성해내는 일에 종교학자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내용을 접하면서, 이 런 현상은 다수의 성숙한 종교인들이 있기에 가능한 면도 있겠지만, 뭔지는 몰라도 일본에서 형성되어갔던 독특한 '종교' 이해라 는 토대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탈아(BG)를 꿈꾸며 아시아 속에서의 구화(없 16)를 추구하던 메이 지 시기, 일본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일본인들이 형성해나갔던 '종교' 이해, 나아가 일본 국제주의 하에 모든 종교들이 국가의 안 녕질서에 위배되지 않음이 우선시되는 분위기와 연결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③) 이는 『민속학연구」 제36호(2015. 6)에 실린 전경수의 논문이며, 『근대서지 제15호(2017.6)에는 「사진으로 보는 김효경 선생, 이라는 같은 저자의 글이 실려 있다.
공부가 점차 두어 가지 주제로 수렴되면서 깊어져야 할 나이가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 오히려 점점 더 분산되면서 잡다해지기만 하는 것 같아서 답답하다. 엉뚱하지만, 소풍 나온 세상살이라고 맘 편히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다.
1) '웃※®'라는 용어는 국어사전에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올라가 있고,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몇 차례 의 용례도 있었다. 일본어에서는 종교를 가진 사람을 웃※로 통칭하고, '웃※시'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듯하며,
'웃※충’는 특정 종교의 성직자나 전도사 등 종교 종사자를 뜻하는 용어로 쓰인다. 원서의 '‡화?'라는 용어를 번역서에서는
'웃짧충‘라고 하였으므로, 독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2) 초종파적 입장에 선 종교자들을 교육하여 임상종교사를 양성해내는 일에 종교학자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내용을 접하면서, 이 런 현상은 다수의 성숙한 종교인들이 있기에 가능한 면도 있겠지만, 뭔지는 몰라도 일본에서 형성되어갔던 독특한 '종교' 이해라 는 토대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탈아(BG)를 꿈꾸며 아시아 속에서의 구화(없 16)를 추구하던 메이 지 시기, 일본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일본인들이 형성해나갔던 '종교' 이해, 나아가 일본 국제주의 하에 모든 종교들이 국가의 안 녕질서에 위배되지 않음이 우선시되는 분위기와 연결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③) 이는 『민속학연구」 제36호(2015. 6)에 실린 전경수의 논문이며, 『근대서지 제15호(2017.6)에는 「사진으로 보는 김효경 선생, 이라는 같은 저자의 글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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