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 Show all posts

2023/08/26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세오녀들 (1-10) < 연재 - K스피릿 2017

일본 고대 문화에 뿌리내린 한국 고대 문화 요소 탐색 < 문화 < 기사본문 - K스피릿

일본 고대 문화에 뿌리내린 한국 고대 문화 요소 탐색
[국학 학술 특집]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세오녀들 <1> 연재를 시작하며

K스피릿  입력 2017.08.21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

『삼국유사』에는 신라초인 157년(아달라 4) 당시 신라문화권이었던 포항 일대에서 펼쳐졌던 흥미로운 연오랑·세오녀 전승을 기록하였다. 지금까지도 포항 일대에는 연오랑·세오녀와 관련한 많은 설화, 유적, 지명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연오랑·세오녀 전승은 비단 포항 시민들에게 의미가 있는 향토문화 유산일 뿐 아니라 한국 고대의 일월광명사상, 제천의례와 긴밀히 연관된 천손사상, 고대 한·일의 긴밀한 문화교류 등을 보여주는 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자산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이러한 가치로 인해 포항시에서는 연오랑·세오녀 전승의 중심지인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대에 연오랑·세오녀 공원을 조성하고 공원 내에는 세오녀가 하늘에 제천하기 위해 짠 비단을 보관하였다는 ‘귀비고(貴妃庫)’를 본따 ‘귀비고 전시관’을 조성하기도 했다. 귀비고 전시관에는 연오랑·세오녀와 관련한 한·일 양국의 전승을 모두 담기게 될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일본으로 전해진 문화 부분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연오랑·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기에 일본에 전파된 문화 요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연오랑·세오녀 전승에 담긴 한반도의 문화 요소들이 일본 고대 문화 속에 어떻게 전파되고 뿌리내렸는지를 확인하고 정리해내는 것은 한·일 고대사 연구는 물론 한·일 문화 교류의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포항의 시민단체인 포항국학원에서는 포항시의 후원을 받아 
2017년 5월 16일~20일까지 일본속의 연오랑·세오녀의 흔적을 찾는 자료 조사사업을 진행하였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홍윤기 교수(일본 고대사 전공), 
정경희 교수(한국 선도사 전공) 두 전공 교수의 학술 자문을 중심으로 하였고 
기초 조사는 
이강민(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박사과정) · 
조채영(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석사과정) 두 사람이 수고해 주었다. 

또한 자료 보완을 위해 2017년 7월중에 한차례의 답사를 더 거쳤다.

이상 두 차례에 걸친 자료 조사의 결과를 정리하여 연재한다.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다.



2023/08/25

K스피릿 기사목록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 2010-17

전체 < 기사목록 - K스피릿



===




===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2] < K스피릿 2010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2] < 문화 < 기사본문 - K스피릿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2]
K스피릿
입력 2010.09.09 16:05기자명홍윤기 석좌교수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지 100년을 맞은 치욕의 8월29일에 이번 두 번째 원고를 쓰고 있다. 아직도 일본은 그들이 저지른 불법 침략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어 우리 국민을 분노시키고 있다. 그들이 언제까지 강제 병합을 버틸 것인가.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조상이 일찍이 상고시대 일본 땅에 공고하게 심었던 우리 국조 단군왕검의 천신 신앙에 대한 역사를 바로 익히도록 힘쓰자.



▲ 일본천황이 대상제 때 입는 즉위복 오른 쪽(마주볼 때) 어깨의 해신(日神)의 상징인 우리 동이(東夷) 민족의 ‘삼족오’를 일본의 황국신도주의자들은 엉뚱하게도 ‘야타노가라스’(八咫烏)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 미에현(三重縣)에 있는 왕실 최고의 사당 이른바 국가 신도의 성전이라는 이세신궁을 세웠을 때 본래 이곳에 모신 신은 단군왕검을 신봉하던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그 터전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주신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와 같이 역사를 뒤집은 것은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역사를 조작한 ‘황국신도(皇國神道) 2천 6백년 만세일계의 천황’이라고 하는 역사 날조 당시의 처사였다. 그들은 일본 이세신궁의 단군 신앙을 말살하면서 천조대신을 신주라고 위작(僞作)했다. 대다수 일본인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으나 그것은 너무도 큰 반역사(反歷史)의 죄악이다.

19세기 말엽,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주신은 본래 부여의 영고신(迎鼓神), 고구려 동명신(東明神), 예(濊)의 무천신(舞天神) 등등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고 천조대신을 주신으로 삼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神道は祭天の古俗/신도와 제천의 옛 풍속]1891).

이 논문에 당황한 일본 군국주의자들(倉持治休 등)은 구메 구니다케 교수댁을 기습하여 일본도(日本刀)를 교수의 목에 들이대고 논문을 취소하라고 협박했다. 교수는 끝내 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고 주장했다([東京日日新聞] 1982. 3. 4일자).

살벌하기 그지없던 19세기 말엽 군국주의 치하에서도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학문의 자유와 양심에 입각한 이성적이고 냉철한 연구론을 발표했으나 극단적인 극우 반한 세력들의 가택 습격까지 받은 것이다. 일제 군국주의자들은 강압적으로 구메 구니다케 교수를 도쿄대학의 현직 교수직에서 추방하고야 말았다. 그뿐 아니라 논문을 게재한 학술지 <사학회잡지>와 <사해>는 판매금지 처분했다. 당국의 압박뿐 아니라 황국 신도가며 극우 역사가는 박사를 불경이라 매도하며 황실(皇室)의 이름을 빌어 사회적 압박을 가했다.”(무카사카 이쓰로 向坂逸郞[嵐のなかの百年/폭풍 가운데 백년‥學問彈壓小史]1962). 이렇듯 극단적인 황국 신도가들은 조선 단군 역사 말살책에 광분했다.





구메 쿠니다케 교수, “이세신궁은 본래 단군 받드는 조선민족의 모든 신을 제사모셔온 사당”발표후 핍박받아





▲ 평남 용강읍 5~6세기 벽화 고분인 고구려 고분[쌍영총] (전실 천정 연꽃 아래쪽 우측 옆의 삼족오 그림)



근년에 와서도 황국사관은 한일관계사를 부당하게 왜곡하고 있어서 양식 있는 일본역사 학자들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가토 아키라(加藤 章) 교수는 “생각하자면 전후사(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 속에서 역사교육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은 ‘황국사관’으로부터 껍질을 벗는 데서 시작되었다. 과거의 국사교육(일본 강점기의 잘못된 신도주의 황국사관 교육, 필자 주)에 대한 틀 바꿈이 시행되었으며 그 후에 학습 지도요령이 거듭하여 개정되었다.

그러나 역사교육의 목표나 내용에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이웃 나라이면서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한국과의 관계에서 일본 측으로서는 자각적으로 충분한 검토를 하는 일이 시행되어 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철저하게 행해진 일본 제국주의 비판 하에서 자라난 세대와 일본의 전후세대 사이에는 한국에 대한 역사교육에서 커다란 간격이 벌어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라고 견해를 피력했다. (논문<日韓歷史敎育交流のなかで/일본과 한국 역사교육교류에 대하여>, 1993).

<일본서기> 기사에서 천일창왕자가 신라로부터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은 신라 왕실과 신라계 스진왕가의 밀접한 혈연관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지금도 일본 각지에는 천일창왕자의 신주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들이 곳곳에 많아 그 당시 천일창의 존재가 왕에 필적하는 신분이었음을 살피게 한다.” (다니가와 겐이치 谷川健一 [靑銅の神の足跡] 集英社, 1979). 그렇다면 과연 그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오랑인가라는 추찰도 동시에 앞으로의 연구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곰신 신앙은 곧 한국 고대의 단군 신앙(檀君信仰)인 동시에 천손(天孫) 신앙

천일창 왕자에 의하여 일본에 천신 제사 의식이 등장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곰신단(熊の神籬)을 가리켜 18세기의 저명한 고증학자 도데이칸(藤貞幹, 1732~97)은 그의 역사 고증 저서인 [쇼코하쓰]([衝口發],충구발)에서 다음과 같이 신라의 신앙 체계라고 단정했다. “곰신단(熊の神籬)의 신리(神籬, 히모로기)는 후세의 신사(神社, 사당)이니라. 무릇 신리는 그분의 몸으로 삼아 제사 드리는 분을 모시는 물건이로다. 신리를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 새겨서 읽는 것은 본래 신라말(新羅語)이며, 신라어를 그 당시 일본에서 빌려서 쓰게 된 것이로다. 천일창이 가지고 온 곰신리도 천일창이 조상을 신주로 모신 것임을 알아둘 것이다.”


이처럼 도데이칸은 곰신 신앙은 곧 한국 고대의 단군 신앙(檀君信仰)인 동시에 천손(天孫) 민족인 한국 민족의 조상 단군을 섬기는 신앙의 발자취를 천일창의 곰신단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주목되는 것은 신라의 ‘이두(吏讀)’가 일본 고대에 일본어 표기법으로 처음 등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은 이두에 의하여 일본말의 한자 표기법인 ‘만엽가나(萬葉假名)’가 일본에 생겼다는 것은 일본강점기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 오구라 신페이(小倉新平) 교수가 밝힌바 있다. ([吏讀の硏究], 1925).



해마다 11월 23일 저녁이면 곰신단에 의해 일본 고대왕실 신상제(新嘗祭) 제사에 조선신 신주들 세분을 모셔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 일본 황실의 왕실법도(<延喜式 연희식> 전50권, 927년)에도 밝혀져 있다. 즉 ‘한신韓神’이라는 제목의 축문에는 원신(園神, 신라신) 한 분과 한신(韓神, 백제신) 두 분의 신주를 제사 모시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 겨레가 동이(東夷)이며 고조선과 부여(扶餘, 만주 벌판)시대에 천신(天神)에게 추수를 감사하고 제사 지낸 영고(迎鼓)며, 고구려 때의 동맹(東盟.東明)이나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10월제 등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거행했던 제사축제였다. 농본(農本)시대에 가장 고맙고 또한 두려운 존재는 하늘의 조상인 천신이었기에 결코 잊지 않고 외경하며 숭앙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농경시대는 햇빛과 비를 잘 내려주시는 ‘풍백, 운사, 우사’등 우리의 하늘 신을 우러렀고 쇠붙이를 달구어 삽, 괭이 따위 농기구며, 전쟁 도구로서 칼이며 창을 만드느라 대장간을 세웠다.

“천일창은 대장간이며 철기(鐵器)문화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왔다.”(다니가와 겐이치谷川健一 [靑銅の神の足跡])고 했거니와 곰신단을 모시고 아울러 전쟁 도구인 칼을 가지고 왜(일본)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강력한 무력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천황가의 신보인 옥과 거울도 가지고 건너감으로써 왕도(王道)를 형성하는 삼박자를 빈틈없이 갖추었던 것이다.

그가 신라인 스진왕조의 제2대 왕인 스이닌천황에게 찾아갔다는 것은 스이닌천황을 신라 왕족으로서 승인하고 일본 열도의 신라인 정복 왕조를 공고하게 떠받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대 한국인들이 하늘의 신 환인(桓因) 등 천신(天神)의 후손인 천손족 (天孫族)이라는 것은 중국 고대 역사인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등으로도 밝혀진 바 있다. 그 점은 일본 <고사기>의 신대(神代) 기사 등과 함께 일본 고대 사학자들의 공론이기도 하다. 왜나라 최초의 정복왕인 스진천황의 숭신(崇神)이라는 휘(왕의 이름)에도 ‘신을 숭배한다.’는 천신신앙사상(天神信仰思想)이 구체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을 본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우(水野 祐) 교수는 천일창왕자가 스진왕조 때 칼이며 옥과 거울 등 신보(神寶)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칼은 옛날부터 일찍이 금속기(金屬器)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옛날 귀화인계의 대장간 기술자 집단, 이를테면 천일창 전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라계 귀화인들의 신보(神寶)였다고 생각한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神寶)를 천황이 갖추어서 갖는 데서 비로소 주권의 표상으로서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고 단정했다.(水野 祐[天皇家の秘密/천황가의 비밀] 山手書房, 1977)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단군의 천신 신앙과 고대 일본 지배의 왕가 형성을 진솔하게 시인하는 증언이다. <계속>

홍윤기 석좌교수 ykhong@ube.ac.kr
00
이 기사와 관련된 기사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1]
====

댓글 11회원로그인댓글 내용입력
0 / 400등록
댓글 정렬
최신순 추천순

suu○○ (so**) 2010-09-27 16:09:33 IP무서운 교육의 힘 외곡된 사실도 교육을 통해 진실로 탈바꿈하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합니다.답글 작성
0 0

뇌비게○○ (bi**) 2010-09-26 06:39:23 IP천손문화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한국과 일본의 뿌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천손문화를 통해 진정 하나됨을 위하여.. 국혼의 부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대한민국의 홍익대통령이 국민들의 손에 의해 창조될 것을 확신합니다.답글 작성
0 0

행돌○ (tl**) 2010-09-25 18:10:06 IP단군할아버지의 당당함과 자랑스러움을 한국에서 더 많이 알고 기리길 기원합니다.답글 작성
0 0

빛의속○ (jh**) 2010-09-25 13:11:09 IP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1인!답글 작성
0 0

워터보○ (se**) 2010-09-24 17:40:12 IP일본 축구 대표팀 유니폼에도 삼족오가 있더라구요~^^ 근데.. 일본선수들은 그 의미를 모른다는거/??ㅋㅋ답글 작성
0 0

당당○ (jd**) 2010-09-24 16:33:18 IP그렇군요.. 우리의 역사가 그곳에 있었군요답글 작성
0 0

dla○○○ (비회원) 2010-09-24 15:53:59 IP삭제일본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실제 실물로 많이 보유하고 있슴을 천손 문화 탐방을 통해서 직접 확인 한 나 이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뿌리가 한국인 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문화 유적 역시 한국인 천손으로 부터 세워진 문화임도 모른채 살고 있는 민족이다. 그것보다도 한국의 더 큰 문제는 바로 우리의 "민족혼"이 없다는 것이다. "민족혼"을 되 살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찾읍시다.답글 작성
0 0

노유○ (비회원) 2010-09-16 18:08:57 IP삭제자신의 뿌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를 개척하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왜곡은 결국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평화의 에너지가 아닌 반목과 대립으로 향하게 한다. 결국 일본이라는 나라의 미래는 자신의 과거 왜곡으로 인해 자신을 치고 주변을 치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행하게 된다. 큰 의식으로 스스로를 인정하고 포용했으면 한다. 그것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첫 출발점이 될 것이다.답글 작성
0 0

방문○ (비회원) 2010-09-13 23:34:46 IP삭제단군의 자손이면 뭐합니까, 우리민족에겐 가장 큰 죄인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천왕이라는 호칭을 써줄 필요도 없습니다. 일왕이면 족합니다.답글 작성
0 0

방문○ (비회원) 2010-09-10 20:49:10 IP삭제일본의 극우파 들은 인간이기를 거부한것인가? 어찌 부모와 조상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인가? 물론 우리나라에도 그런 인간들이 있으나, 그 인간들의 뿌리는 일본의 식민사관에서 비롯된것. 일본은 처절하게 반성하고 사죄하며 보상해야 할것이다.답글 작성
0 0

ils○○○ (비회원) 2010-09-10 09:30:02 IP삭제사람이 아무리 못되어도 양심이라는것이 있습니다
극우파들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일본을 있게한 일본의 뿌리는 바로 단군이고 백제,고구려,신라임을 잊지 말아야 할텐데

스사노오의 한반도 출자에 얽힌 문제 - K스피릿 2017

스사노오의 한반도 출자에 얽힌 문제 < 문화 < 기사본문 - K스피릿
스사노오의 한반도 출자에 얽힌 문제
K스피릿 입력 2017.08.25 10:27
기자명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국학 학술기획]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세오녀들 <5>


▲ 정경희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교수
앞서 이즈모 일대의 야요이 유적·유물 분석을 통해 스사노오에 의한 초기 문명 개척 과정, 또  B.C. 3세기 이후 기나이세력에 흡수·통합되는 과정 등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다시 하나 중요한 문제가 생겨난다. 스사노오의 출자가 신라 소시모리 지방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는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 시대, 곧 단군조선시대이기에 소시모리 지방이 신라땅이 될 수 없는 문제이다. 


필자는 스사노오가 단군조선인이며, 후대에 그의 출자지인 소시모리 지역이 신라지역으로 편입되면서 신라인으로 분류된 것으로 본다.  스사노오의 본향으로서 일본 야요이문명을 선도할 정도로 대단한 문명의 고장, 또 후대에는 신라 영토가 되었던 소시모리라는 곳은 과연 어느 지역인가? 
기·기 신화에 의하면 스사노오는 다카마가하라(高天原)에 추방되자 아들 이소타케루노카미(五十猛尊)을 데리고 시라기(新羅)국에 내려와 소시모리(曾尸茂梨)라는 곳에 머물렀다가 얼마 있지 않아 ‘이 땅에서 살고 싶지 않다’며 진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해 이즈모국 히노가와(斐之川) 상류에 있는 도리카미(鳥上) 봉으로 갔고  여기에서 오로치로 상징되는 토착세력을 정복한 후 나무를 심고 궁전과 배 등을 만드는 등 문명을 개척하였다고 했다.


기왕에 많은 학자들은 소시모리를 ‘소의 머리’, 곧 ‘우두(牛頭)’로 이해, 한반도의 소시모리, 또는 우두라는 지명을 추적해왔다.  이외에 소시모리의 어원을 ‘소후루 혹은 소푸루(徐伐, 徐那伐, 徐羅伐, 徐耶伐), 곧 ‘서울’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지만 후대에 스사노오를 ‘고즈텐노(우두천왕, 牛頭天王)’로 부르고 머리 또는 이마에 양 뿔을 두른 형태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을 볼 때 ‘서울’ 보다는 ‘소머리’의 의미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실제로 한반도에는 ‘牛頭’ 또는 ‘牛首’라 적고 ‘소머리’로 읽는 지명이 여러 군데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목된 지역은 신라 중고기 행정구역중 하나인 삭주(朔州), 또는 우두주(牛頭州)였던 춘천 지방이다.  춘천 시내에는 지금까지도 우두산이라는 작은 산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황해도 김천에 우두산성이 있고, 경상도 합천·거창·예천에도 각각 우두산이 있다.  경상도 합천·거창 등지의 우두산을 스사노오의 출자지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이들 여러 후보지 중에서도 춘천 지역에 주목해 보게 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째, 스사노오가 일본에 도래하여 이즈모 지역을 개척한 문명 수준은 일본 열도 내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이 무렵 한반도의 문명 수준은 만주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후기 중심지(최근 연구에서는 요녕성 심양 일대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음)를 기준으로 하여 한반도 남부로 내려오면서 문화의 수준이 점차 떨어지는 형국이었다.  이들 후보지 중에서도 한반도 남부 경상도 지역의 후보지들에 비해 춘천 지역, 당시의 맥국(貊國) 문화는 요서·요동이나 압록강·백두산 일대 문화와 같은 계열로서 한반도 남부에 비해 수준이 현저히 높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춘천을 옛 맥국의 땅으로 기록하고 있다. 맥국은 고조선시대 여러 소국 중 하나로 2014년 중도(中島) 유적 발굴을 통해 그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1980년대 이래 춘천 일대에서는 신석기 이래 초기철기에 이르기까지 의미있는 유적·유물들이 지속적으로 발굴되어왔는데, 2014년 중도 유적에 이르러 수준높은 청동기시대 유적·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굴됨으로써 그간의 발굴 성과를 집성해 바라보게 하였다. 
2014년 그동안 발굴되지 못하고 남아있던 24만㎡에 대한 발굴 결과 둘레 400m의 환호(環濠)를 비롯해 주거지 917기, 고상가옥 9기, 저장 수혈 355기, 고인돌무덤 101기, 농경유적 등 청동기시대 유적·유물이 발굴되었다. 1000기에 달하는 대량의 주거지와 100기가 넘는 고인돌무덤이 발견된 것은 세계 고고학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사례이다. 또한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선형동부(扇形銅斧, 부채모양 청동도끼), 옥착(玉鑿)·옥부(玉斧) 등 옥기, 미송리형토기, 팽이형토기, 점토대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비파형동검도 그렇지만 청동도끼는 남한에서 두번째로 발굴된 경우이며 다섯줄 띠를 두른 형태는 남한에서 처음 발굴된 것이었다.
또한 이들 청동 유물은 중도와 가까운 천전리에서 발굴된 거친줄무늬 청동거울, 잔줄무늬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과 3종신기의 세트 조합을 맞출 수 있었다. 제천 의기 또는 권력자의 권장류로 사용된 청동제품들이 이 일대에서 골고루 출토된 것이다.  또한 고인돌 묘제의 경우 화장후 매장하는 방식으로 이는 전형적인 고조선의 장례 풍습이었다.




청동기문화 지층 위로는 고구려계 석곽묘와 함께 금제 ‘심엽형(心葉形) 태환이식’ 부분 두 점도 발굴되었다. 그간 춘천 일대 만천리, 신매리, 방동리 등에서 발견된 고구려계 석곽묘와 같은 계열로서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고구려문화권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이상 춘천 일대의 발굴 성과를 통해 맥국이 만주나 압록강·백두산 일원의 고조선계 국가임이 드러났다. 나라 이름인 ‘맥’ 또한 압록강·백두산 일원의 단군조선-고구려계 민족명인 대수맥(大水貊)·소수맥(小水貊)과 같아 압록강·백두산 일원의 맥족이 한반도 중부로 이동해 세운 나라임을 알게 하였다.  이처럼 단군조선-고구려계 국가인 맥국의 수준높은 문화가 스사노오를 통해 이즈모로 전해졌던 것이다.


둘째, 이즈모지역의 독특한 묘제인 사우돌출형분구묘가 압록강 일대 맥족계 묘제를 원류로 하는 단군조선-고구려계 묘제였다는 점도 상기한 바 첫번째 논의와 상통한다. 압록강 중류 자강도 초산군 봉무리와 운평리의 돌무지무덤 중에 사우돌출형 분구묘가 나타나는데 대체로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 무렵 압록강·백두산 일대 고조선계 세력의 무덤 양식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양식이 동해 바다를 건너 이즈모 지역으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우돌출형 분구묘는 일본 열도 중에서도 유독 동해 해안가에 위치한 산인(山陰)이나 호쿠리쿠(北陸) 지방에만 나타나며 3세기 무렵을 끝으로 사라지고 이후에는 고분시대를 대표하는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서 이즈모지역은 애초 단군조선-고구려계 세력이 바다를 건너 터전을 마련한 곳이며 수많은 도래 세력들 중에서도 스사노오는 특히 이즈모지역에 크게 문명을 개척한 그 혁혁한 공로로 인해 기록에 남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셋째, 춘천 지역 맥국의 우두산은 삼국시대 저명한 제천의 명소로서 스사노오와 긴밀히 연결되고 있었던 점이다. 『삼국사기』 중에는 300년(기림이사금 3) 3월 신라의 제15대왕이자 석씨족인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재위 298~310)이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을 향해 망제(望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신라초기 왕족인 박씨족은 태백산을 중시하여 일성왕(逸聖王)의 경우 태백산에 친히 올라 제천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기림이사금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되 우두주와 태백산을 연동해서 제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천에서 망제를 지내는 장소는 망제 대상인 제천산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곳임이 분명한데, 우두주의 성지라면 당연히 우두산이다.
지금도 춘천 시내 우두동에는 자그마한 언덕과 같은 우두산이 남아 있다.  우두산 정상은 ‘솟을 뫼’로 불리어 왔는데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이곳을 무덤이 아닌 제천단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곳의 유래에 대한 다양한 전승 중에는 이곳이 스사노오의 제단 또는 무덤이라는 전승도 있다. 

      1916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촬영한 우두산 정상의 제천단(솟을 뫼),  현재의 모습

이렇게 4세기초 우두산이 그 유명한 신라의 제천산 태백산과 함께 연동될 정도로 위상이 높은 제천산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이러한 우두산의 제신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곧 7세기 고구려 사신이 우두산에서 모셔진 우두천왕의 신주를 일본 교토로 가져가 사당을 지어 모셨는데 이곳이 현재 스사노오를 모시고 있는 야사카신사(八坂神社)라는 기록이 그러하다. 이는 우두산 제천단의 제신으로 우두천왕이 모셔지고 있었고 그가 스사노오와 동일시되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교토 야사카신사는 일본내 스사노오를 모신 주요 신사 중 하나인 야사카신사의 본원으로, 제신은 주존인 스사노오(우두천왕)를 중심으로 스사노오의 비, 자녀 등이다.  야사카신사의 원래 이름은 기온사(祇園寺, 祇園牛頭天王寺, 祇園感神院)로 메이지유신 이후에 야사카(八坂)이라는 지명에 따라 야사카신사로 불리게 되었다. 기온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을 보면 ‘656년 한반도에서 온 사신 이리시노오미(伊利之)가 신라 우두산에서 우두천왕의 신주를 모시고 와서 교토에 창건하였다’는 기록,(『八坂鄕鎭座大神之記』) 또 ‘666년 임나가야 사람 옷소안스(乙相 奄鄒)가 고구려 진조대사(進調大使)로 일본에 올 때 우두천왕 사당을 야사카에 세우고 감신원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感神院牛頭天王考』)


656년이나 666년 무렵 고구려 사신이 신라 우두주의 우두천왕 신주를 가지고 도일한 것은 그리 매끄럽게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춘천 지역은 고조선 맥국시대를 지나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다가 551년 진흥왕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죽령 이북 고현(高峴, 현 철령) 이남 고구려 10군의 땅을 점령하면서 재차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637년(선덕여왕 6) 고구려가 10군중 비열홀(현 안변)을 위시하여 일부 지역을 탈환하게 되자 신라측은 국경선 일대의 통치 체제 개편의 차원에서 춘천 일대에 우수주(또는 삭주)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우수주 설치 이후인 656년이나 666년 무렵은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멸망(660년)이나 고구려 멸망(668년)이 있었던 엄청난 격변기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신라·고구려의 국경에 위치한 우두주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고구려 사신이 신라 우두주의 우두천왕 신주를 옮긴 정황이 이해될 수 없는 것도 아닌 듯 하다.

이상에서 스사노오의 출자에 관해 단군조선계 국가인 춘천 일대의 맥국 출신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살펴 보았다.  맥국이 삼국시대에 고구려 영토가 되었고 다시 6~7세기가 되면서 신라 영토로 편입되는 상황을 통해 스사노오가 비록 고조선 맥국계 인물로서 도일하였지만 최종적으로 신라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신라신으로 알려진 스사노오의 신주를 고구려 사신이 가져오는 모습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의 고찰도 그렇지만 일본측에서도 스사노오의 본향을 춘천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일항쟁기에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서 ‘스사노오=단군설’이 주창, 스사노오 본향으로 알려진 춘천 지역이 일인들에 의해 크게 주목되었다.  1906·1907년 즈음 일선동조론으로서 ‘스사노오=단군설’이 등장하기 시작한 이래 1918년 춘천 봉의산 자락에 강원신사가 설립, 아마테라스·메이지천황·국혼대신·스사노오가 향사되었다(1938년 춘천신사로 개칭). 1925년 남산 조선신궁 제신 논의에서도 스사노오=단군을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개진되었다. 춘천지역 향토지에 스사노오가 전면 부각되었고 역사교과서에조차 실릴 정도였다.  기억해야 할 부분은 이때의 스사노오는 한반도 도래인으로서 일본에 문명을 전파한 인물이 아니라 일본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정복자로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식민통치를 위해 기·기 신화에 나타난 명명백백한 내용조차도 왜곡했다.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k-spirit@naver.com
00
이 기사와 관련된 기사
이즈모의 야요이 유적·유물을 통해본 스사노오의 이즈모 개척
야요이문명을 연 첫번째 연오랑, 신라신 스사노오
연오랑·세오녀의 시대상: 단군조선·부여계의 도래와 야요이문명의 개화
일본 고대 문화에 뿌리내린 한국 고대 문화 요소 탐색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1] - K스피릿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1]  - K스피릿

단군조선의 제후국 왜국(倭國)
기자명 고성시사신문  승인 2017.04.28 0

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 조상들이 세운 세계 역사상 첫 국가 형태인 환국에 이어, 배달국,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겨레에게는 이(夷) 또는 예맥(濊貊)이라는 별칭 외에도 가락(伽倻), 구리 또는 구려(겨레, 갈래 종족, 나라, 성스러움의 뜻)라는 별칭도 있어 이것이 후에 고구려, 고려로 이어졌음은 반복해사 밝힌바 있다. 우리의 이족(夷族)중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백이(伯夷)다. 이 백이족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옛날 발해 지역에 살다가 동쪽의 섬으로 흘러 들어가 살았다. 왜인의 본류는 위(魏)나나의 후예들이고 후에 진한과 마한 사람들 일부가 합류한 집단으로 나중에는 백제인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나중에 섬으로 이주한 왜인들은 가죽신을 신고 벼를 심고 모시로 길쌈을 했으며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쳤다. 그리고 생강, 귤, 후추, 들깨 등을 생산했다. 이 밖에도 그들은 청옥, 흑진주, 꿩 등을 생산하거나 사냥했다. 단군조선에서 맨 처음 일본 규슈(九州)지역으로 흘러 들어간 사람은 협야노(陜耶奴)다. 기원 전 2174년 가륵단군(嘉勒檀君 3세 단군)때에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단군은 대장군 여수기(余守己)에게 토벌을 명했다. 여수기는 며칠 동안 소시모리를 추격한 끝에 예 땅의 변방에서 반란군과 일대 격전을 벌여 소시모리를 격파했다. 이 때 소시모리의 참모 협야노는 격전의 틈을 타 부하 서너 명을 데리고 도망을 쳤다.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서봐야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협야노 일행은 여수기의 추격을 피해 육로를 버리고 바다를 택했다. 조각배에 몸을 싣고 성난 파도에 맞선 것이다. 한 달 동안 항해한 후 낮선 섬에 닿았으니 이곳이 삼도(三島: 九州)이다. 그 곳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몸에 뱀, 들쥐 등의 문신을 새기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었다. 키는 작고 허약해 보이는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흔히 ‘왜놈’ 하면 키 작고 볼품없는 사람을 연상하는 것이 여기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왜인(일본인)들은 우리와 같은 조선인들의 후손이니 키가 작거나 못난 사람들은 아니다. 협야노 일행은 그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익힌 무예 실력을 한껏 발휘하면서 그들을 위압하자 그들은 협야노의 말을 잘 따랐다. 씨 뿌리고 가꾸는 법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풀잎으로 옷을 만들어 앞을 가리도록 했다. 원주민들에게 대륙의 생활습관을 알려주자 그들은 순순히 협야노를 따르고 존경했다. 협야노는 삼도에 처음으로 소도(蘇塗)를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스스로 삼도의 천황위에 올랐다. 원주민들은 협야노를 천황으로 받들고 복종을 맹세했다. 이렇게 하여 협야노는 조선족이 왜를 정복한 첫 번째 인물이 된 것이다. 삼도의 인구가 점차 늘어났다. 이웃나라나 섬에서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삼도로 흘러들어 정착하는 인구가 점점 늘고 있었으니 이들을 하이도인(蝦夷島人)이라 불렀다.
 구 후 기원 전 723년 삼도에 단군조선의 특사가 파견되었다. 원주민과 하이도인 사이에 반목이 생겨 원주민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소도를 모시고 삼신에 제사 지내는 하이도인들에게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고분고분했다. 그러다가 하이도인들이 원주민들을 심하게 다루게 되자 반기를 들게 된 것이다. 원주민들이 소도를 부수고 소도를 위협했다. 협야노가 삼도의 주인이 된 후 처음으로 위협을 받은 것이다. 삼도의 구마소에서는 조선에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특사를 보낸 것이다. 이에 사벌 단군은 오가의 대표들을 모아 파병에 대해 논의했다. ‘삼도는 협야노 장군이 터를 닦은 후 우리의 예법을 숭상하는 조선의 거수(제후)국입니다. 원주민들의 행패에서 우리 배달나라 후예들을 구해야 합니다’ 오가의 의견들이 일치했다. 사벌 단군은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에게 명하여 선단을 만들어 군선을 띄웠다. 파병 군선은 파도도 없는 바다를 무사히 건너 삼도에 도착했다. 언파불합 장군은 삼도의 해변에 군막을 치고 작전 회의를 열었다. ‘원주민들이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오히려 사움은 쉽게 끝날 수 있습니다. 만일 놈들이 전면전을 피해 기습전을 펴면 이곳 지리에 어두운 우리가 불리합니다.’ 언파불합 장군의 작전참모가 말했다. ‘그렇다면 기습작전에 대비하도록 합시다. 해변의 숲을 감시하고 바다를 이용하여 쳐들어올지 모르니 방심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언파불합 장군은 난장이 같은 원주민들과 싸우려니 우스운 생각도 들었으나 그들은 음흉하고 잔인하다는데서 방심할 일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삼도에서 군막을 설치한 그 날 밤 야음을 틈타 원주민들이 습격해 왔다. 그들이 천막을 에워싸기를 기다려 몰래 숲속에 매복시켜 놓은 군사들에게 북을 쳐 공격을 명했다. 원주민 반란군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받아야 했다. 적은 궤멸되고 살아남은 적들은 도망을 쳤다. 언파불합 장군은 지리에 어두운 아군이 실수라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추격을 중단시키고 낮에 적의 진지를 휩쓸어 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척후가 보고한다. ‘궁궐이 있는 산성 밑에 놈들의 진지가 있습니다. 진지는 통나무로 만든 움막 같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돌도끼와 몽둥이 뿐이었습니다.’ 원래 삼도의 원주민과 원정군과의 싸움은 싸우기도 전에 먼저 승패가 갈린 싱거운 싸움이었다. 그들이 원정군의 칼, 창, 활 등의 무기를 한 번이라도 본 일이 있다면 희생을 무릅쓰고 싸울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원정군이 원주민군 진지를 엄습해 들어가자 원래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인지라 금방 진지가 무너졌다. 그리고 그들은 항복했다. 언파불합 장군은 더 이상의 희생자를 내지 않고 반란군 지도자들을 데리고 산성의 궁궐로 들어갔다. 협야노의 후손들과 조선에서 흘러 들어간 하이도인들이 언파불합 장군을 맞아 승리의 축하연을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언파불합 장군은 반란군 지도자들에게 이후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것이 첫 번째 일본에 대한 조선의 원정 기록이다

 그 후 반세기 동안 삼도는 평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이후 기원 전 617년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또다시 원주민들의 반란인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배반명(裵槃命) 장군을 보내어 반란을 진압했다. 이것이 두 번째 원정이다. 그 이후 왜군은 수천 년에 걸쳐 수 없이 조선을 괴롭힌 집단이 되었으며, 고려 말 원나라 통치기간 중 여 . 몽 연합군이 두 번에 걸쳐 일본으로 쳐들어 간 일이 있다. 두 번 모두 전쟁에는 확실하게 이겼지만 거센 바람을 만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바람을 일인들은 가미가제(信風)라 하여 그 신풍을 일으킨 신에 대한 신앙심을 더욱 굳건히 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느 역사가는 말하기를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역사 이래 수천 번의 외침을 잘 막아내어 이처럼 열강들 틈바구니에서도 잘 버티어왔으며, 단 한 번도 국경을 넘어 외국을 침략해 본 일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민족이라느니 하지만, 위의 전쟁기록 만으로도 사실이 아님을 말해준다. 침략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말은 결국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대한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지 미화일 뿐, 약자의 변명 치고도 너무 궁색하기만 한 변명일 뿐이다. 우리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북부여, 그리고 삼국 시대 까지 우리겨레는 힘이 넘치는 역동성을 발휘하여 적의 침입에 방어전을 펴는 한 편, 수많은 침략전쟁의 주인공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자랑해야 옳을 일이다.

 고성시사신문 webmaster@gscinews.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