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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5

30일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관련 난상토론 2010 도법 정응기

30일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관련 난상토론

30일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관련 난상토론
김한수 기자
입력 2010.04.1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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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 문제를 놓고 30일 오후 조계종 총무원과 봉은사, 불교단체 대표들이 6시간 동안 난상토론을 벌인다.

토론회를 주선한 참여불교재가연대 등 불교단체들은 16일 오전 기자간담회를 열고 “30일 오후 2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공연장에서 총무원과 봉은사, 불교단체 대표 3명씩 모두 9명이 공개토론을 벌일 것”이라며 “이는 15일까지 모두 4차례의 실무협의 및 내부 검토를 통해 확정된 것”이라고 밝혔다.

총무원은 총무부장 영담 스님 등 3명, 봉은사에서는 주지 명진 스님 등 3명이 참가하고 불교단체 대표로는 도법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와 법안 스님(불교미래사회연구소장), 윤남진 NGO리서치 소장 등이 토론에 나선다. 사회는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가 맡게 된다.

토론 주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토론회 개최 실무협의회의 대변인을 맡고 있는 정웅기 참여불교재가연대 사무총장은 “토론회 논제는 30일 이전에 몇 차례 회의를 통해 세부조정해야 한다”며 “그러나 주제에 제한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토론회 형식 역시 세미나식으로 발표에 이어 토론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난상토론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한수 기자
김한수 기자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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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불교단체 “조건 없는 대화” 촉구
작성자 이호광 10-03-26 09:22 조회3,154회 댓글0건
불교단체 “조건 없는 대화” 촉구
연석회의 ‘안상수 사퇴-총무원장 입장 표명’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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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daybox_top.gif 2010년 03월 25일 (목) 16:32:24 여수령 기자 btn_sendmail.gifwebmaster@budgate.net newsdaybox_dn.gif


불교단체연석회의가 봉은사 사태와 관련해 “조계종 총무원과 봉은사는 사태 해결을 위해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발언에 대해서는 “안 대표는 공직을 사퇴해야 하며 총무원장도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불교 NGO및 신행단체가 참여하는 불교단체연석회의는 25일 오후 2시 긴급회의를 열고 봉은사 사태에 대해 논의한 후 오후 3시30분 브리핑을 통해 안상수 대표의 발언과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 문제에 대해 각각 중재안을 제시했다.

   
불교단체연석회의는 25일 긴급회의를 열고 봉은사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연석회의는 안 대표의 발언을 “불교종단의 자주성을 훼손하고 불교를 능멸한 망언”으로 규정하고 “국민에 사죄하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한나라당의 대국민 사과도 요청했다. 이어 연석회의는 “총무원장스님도 안 대표의 발언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뜻을 밝혔다.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 문제와 관련해서는 “평화로운 해결 원칙이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한다”며 “총무원과 봉은사는 아무런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참여불교재가연대 정웅기 사무총장은 “안상수 대표의 발언이 직영사찰 지정 논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현재로선 문제 삼지 않겠다”며 “영향을 미쳤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발언 자체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석회의는 입장 표명에 이어 내일(26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한나라당 당직자를 면담하고 입장을 전달할 계획이다. 명진스님을 만날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는 “만나고 싶다. 면담이 된다면 우리의 뜻을 전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날 연석회의에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참여불교재가연대, 불교환경연대, 조계종중앙신도회, 대한불교청년회, 청정승가를위한대중결사,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사단법인 보리, 불교인권위원회의 실무자들이 참석했다.

한편, 연석회의 참가 단체들과 사단법인 JTS, 생명나눔실천본부, 보리수모임, 지구촌공생회 등 불교계 시민사회단체 실무자들은 오후 4시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면담하고 봉은사 사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연석회의는 브리핑을 통해 밝힌 입장을 총무원에 전달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25일 오전 승가단체에 이어 오후에는 재가 불교단체 대표자 및 실무자들과 봉은사 사태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권력화· 권위주의 한국종교 최대 폐해 - 정웅기 2005

권력화· 권위주의 한국종교 최대 폐해 - 당당뉴스 2005 


권력화· 권위주의 한국종교 최대 폐해본지 공동주최 사회인 문화학교의 정웅기부소장, 류상태목사 강연 

주간불교 기사
이종수 | jslaura@chollian.net





입력 : 2005년 11월 20일 (일)[조회수 : 2739]





[당당뉴스,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 불거토피아가 함께 준비하는 "제1기 사회인 문화학교 - 한국의 종교 이대로 좋은가?" 취재기사입니다. 
기사의 전문은 "주간불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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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화·권위주의 한국종교 최대 폐해


▩ 정웅기 사찰경영연구소 부소장

불교 내부적 종교권력 폐해 답습 민주화·자본주의 극복 선행돼야





▲ 정웅기소장

“모든 사회문제도 마찬가지지만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솔직히 드러내 고치려는 개혁자나 건설자들이 많아져야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이 달라집니다. 사회가 민주-반민주의 대결구도를 넘어 격변의 길로 들어선지 5∼6년정도가 됐습니다. 불교는 그런 경계선상에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다른 어떤 집단보다 변화의 가능성은 많습니다.”
참여불교재가연대 사찰경영연구소 정웅기 부소장은 지난 1일 인권연대 사회인문화학교에서 한국불교를 이같이 진단하고 구조적인 문제점과 변화의 대안에 대해 고찰했다.

정 부소장은 현재 한국불교가 사회적으로 가지는 이미지가 긍정적인 면이 많이 비춰지고 있지만, 내부적으로 들어가면 어떠한 견제를 받지 못하는 종교권력의 폐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정칟경제·언론권력들도 종교와는 불가근불가원원칙에서 개입자체를 꺼리고 있다. 이는 종교가 가지는 막강한 조직과 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정 부소장은 설명한다.

이어 정 부소장은 한국 종교권력을 일정부분 답습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몇 가지 통계자료를 제시했다.
2004년도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따르면 종교인구는 불교가 24.4%으로 개신교·천주교보다 많았고, 교세도 지속적으로 증가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소속 종교단체 성직자 만족도에서는 불교신도들이 가장 불만족스러워했으며, 호감도 역시 이웃종교보다 낮았다. 또한 신도들이 종교에서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냐라는 질문에는 개신교가 월등히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만족도 개신교 60.6%·불교 31.3%)

정 부소장은 일련의 통계수치에 대해 한국불교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부조리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 불교의 권력화와 자본주의화는 경계해야 할 것으로 정 부소장은 손꼽았다.

정 부소장은 한국 불교의 권력화가 △출가비구 권력 독점 강화 △권력과점화 △탈색된 문중주의와 교구본사 권력 △권력 핵심으로 부상한 계파정치 등을 야기시키고 있다고 성토했다. 1998년 종단사태 이후 중앙권력이 독점에서 과점화가 되면서 나눠먹기식 분배가 이뤄지며 이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문중주의와 계파정치들이 이뤄지게 됐다는 게 정 부소장의 주장이다.

정 부소장은 일련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 불교는 △권력의 민주화 △자본주의 극복 △국가로부터 독립 △인력난 극복 등이 선행돼야한다고 제안했다.

“모든 단체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게 돼있습니다. 내부의 선량한 에너지가 얼마나 모이느냐가 앞으로 한국 불교의 변화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제 현대적 과도기에 접어든 불교는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부대중의 몫이라고 정 부소장은 역설했다.


▩ 류상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연구원

배타성·권위주의 한국교회 문제점 지적 살불살조 정신으로 목회자 개혁기치 높여야





▲ 류상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연구원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췄습니다. 1970∼80년대 급격히 성장하던 교세는 하락세로 돌아섰을 뿐만 아니라 안티기독교라는 세력 또한 양산시켰습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지적인 성장을 수반하지 않고 양적으로만 비대해졌기 때문입니다. 성인병을 앓고 있는 환자,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류상태 연구원은 지난 15일에 열린 인권연대 사회인 문화학교에서 현재 개신교가 당면해있는 상황을 이같이 진단하고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갈등과 대안에 대해 논의했다.

류 연구원은 한국교회가 가지는 사회적인 갈등이 단적이 드러난 예로 최근 5∼6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난 안티기독교인을 꼽았다. 안티기독교인들은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반종교적인 세력이다. 그들은 기독교를 ‘개독(개 같은 기독교의 준말)’이라고 서슴없이 칭하며 기독교의 ‘박멸’을 주장한다. 류 연구원은 이들의 주장을 한국교회가 주의 깊게 경청해야한다고 제안했다. 어쩌면 안티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보내준 마지막 회개의 채찍이고 쓴 약이라는 게 류 연구원의 설명이다.

류 연구원은 한국교회가 가지는 대사회적인 문제점으로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 △세속화·역사성의 결여 △가부장적 권위주의 △성서에 대한 문자해석 등을 제기했다. 특히 세계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교회만의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은 한국사회를 갈등으로 몰아가는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라고 류 연구원은 지적했다.

“현재 한국 교회는 ‘다름’과‘틀림’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다르면 곧 틀린 것, 진실이 아닌 것이라는 공식은 곧 개신교의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이 자리잡게 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이런 교리적인 문제를 해결 없이는 한국 기독교가 안고 있는 총체적인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어렵다는 게 류 연구원의 주장이다. 즉,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교리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보고 예수가 전한 가르침과 삶의 정신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게 류 연구원의 주된 논지이다.

류 연구원은 한국 교회의 변화를 위해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것 △배타적 구원관 극복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 등을 제안했다.

“이웃종교인 불교에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위해서라면 부처가 가로막으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막으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예수를 찾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의 예수를 죽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현재 젊은 신학자 중 적지 않은 수가 종교적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들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류 연구원은 전한다. 류 연구원은 말미에 존 도미닉 크로산의 말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수는 인간에게 신으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러 온 인간해방자이자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고.

신중일 기자 bono98@jubul.co.kr

2023/09/22

“화쟁위 왜 있나” vs “경책 아닌 비난” <법보신문 2015

“화쟁위 왜 있나” vs “경책 아닌 비난” < 사회 < 기사본문 - 불교언론 법보신문


“화쟁위 왜 있나” vs “경책 아닌 비난”
기자명 김현태 기자
입력 2015.09.23
댓글 22


화쟁위·화쟁아카데미, 9월22일
‘화쟁을 화쟁하다’ 주제 좌담회

3시간 동안 날선 공방만 계속
▲ 조계종 화쟁위원회와 화쟁문화아카데미는 9월22일 오후 3~6시 서울 사간동 화쟁문화아카데미에서 ‘화쟁좌담회’를 개최했다.

우리사회 갈등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쟁위 활동에 대한 찬반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양측의 견해를 ‘화쟁’하기 위한 좌담회가 마련됐다. 
이날 좌담회는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도법 스님의 행보에 비판적 입장을 밝혀온 이도흠, 우희종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석해 시종일관 날선 공방을 이어갔다. 
이에 ‘화쟁을 화쟁하겠다’는 좌담회 취지와 달리 양측의 상반된 입장차만 확인한 채 끝나 좌담회 개최의 취지를 무색케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 도법 스님 “존중·배려가 화쟁”
  • 이도흠 “구조적모순 해결부터”

“당사자 대화 이끈것 성과”에
“오히려 권력 이용 당해”비판

조계종 화쟁위원회(위원장 도법 스님)와 화쟁문화아카데미(대표 조성택)는 9월22일 오후 3~6시 서울 사간동 화쟁문화아카데미에서 ‘화쟁좌담회’를 개최했다. ‘화쟁을 화쟁하다’는 주제로 열린 이날 좌담회는 도법 스님의 화쟁 방식에 대한 비판의 원인과 쟁점의 짚어 대안을 모색하고자 마련됐다. 토론에는 

  • 도법 스님과 
  • 조성택(고려대) 대표, 
  • 정웅기 붓다로살자 연구위원과 
  •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 이도흠(한양대) 교수, 
  • 우희종(서울대) 교수가 참여했다. 

토론자 가운데 이도흠 교수는 최근 모 일간지 기고문을 통해 ‘도법 스님의 화쟁론’을 공개적으로 반박했으며, 우희종 교수도 도법 스님의 행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피력해 왔다.

◆화쟁을 말하다=좌담회는 토론자들이 생각하는 ‘화쟁’을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2023/07/14

불교평론 10년 총목차 < 총 목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불교평론 10년 총목차 < 총 목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불교평론 10년 총목차
기자명 불교평론   입력 2010.01.05 18: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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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겨울호 제1호 :::

[ 권두언 ]
불교지식사회의 새 지평을 위해 / 홍사성

[ 특집 1 ] 20세기 한국불교의 회고와 반성
불교사회운동의 갈무리와 터닦기 / 서동석
교단개혁운동의 명암 / 김광식
교육개혁, 그 멀고도 험한 여정 / 법인
한글대장경 번역사업의 공과 / 이미령
20세기 포교의 성과와 한계 / 유승무
불교복지사업이 걸어온 100년 / 김응철

[ 특집 2 ] 불교학 연구, 이대로 좋은가
‘종학주의’를 넘어서 ‘중도의 불(교)학’을 향해 / 고영섭
논쟁 부재와 긴장된 글쓰기 / 조병활
비교종교와 불교연구의 상관관계 / 윤영해
영국·일본의 불교학 연구 동향 / 안양규

[ 특집 1 ]
20세기 한국불교, 그 사상적 흐름은 무엇이었나
/ 홍사성, 종범스님, 최병헌, 정병조, 이봉춘

[ 쟁점 ]
승가의 범위, 어디까지인가 / 이종철

[ 해외불교체험 ]
다시 일어나는 몽골불교, 그 서글픔과 열정 / 김선정

[ 논 단 ]
불교에 인권이 있는가 / 안옥선
시민정치운동의 확대와 불교시민운동의 전망 / 조대엽
불교사상과 국제평화주의 / 조성렬
한국현대시의 선(禪)적 경향 / 김재홍

[ 기획연재 ] 불교에서 보는 철학, 철학에서 보는 불교 (1)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 김종욱

[ 서 평 ]
언어로 여는 언어 이전의 세계 한형조 지음, 《무문관, 혹은 ‘나는 누구냐’》 / 박영록
철학자의 삶, 수행자의 삶 ―《승려와 철학자》 /오진탁

 

:::  2000년 봄호 제2호  :::

[ 권두언 ]
새로운 세기에 불교가 해야할 일 / 홍사성

[ 특집 1 ] 한국 선불교의 제문제
한국선, 무엇이 문제인가 / 심재룡
한국 간화선의 형성과 변화 과정 / 최연식
선어록 독법의 문제점 / 신규탁
오도송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 / 김종만
또 다른 선, 위파사나의 이해 / 김열권

[ 특집 2 ] 새천년에 대응하는 불교의 저력
‘신승(新乘)불교’ 도래론 / 정병조
미래사회에서 불교사상의 위상 / 유승무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 / 김용표
정보지식사회의 도전에 직면한 불교 / 박승원
새 천년 한국불교의 도전과 비전 / 프랭크 테데스코

[ 논단 ]
시민운동에 보내는 불교의 고언 / 김성철
조계종 종권분쟁 연구 / 김경호
사찰불사의 몇 가지 과제 / 이기선

[ 기획연재 ] 불교에서 바라본 철학, 철학에서 바라본 불교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 / 김종욱

[ 특별기고 ]
법정이 철학자에게 던지는 화두 / 허우성
21세기 대안사상으로서의 禪 / 이은윤

 [쟁점 ]
대승의 소승 폄하에 대한 반론 / 조준호

[ 해외불교체험 ]
중국불교 주마간산기 / 차차석

[ 자료발굴 ]
김법린과 피압박민족대회 / 김광식 

 

::: 2000 여름호 제3호 :::

[ 권두언 ]
도전적인 논쟁에 도전하자 / 홍사성

[ 특집 1 ] 불교와 페미니즘
왜 ‘불교와 페미니즘’을 말해야 하는가 / 안옥선
불교 페미니즘의 이상과 현실 / 하정남
불교 페미니즘의 회복을 위해 / 이창숙
여성의 관점에서 본 ‘여성성불론’ / 이현옥
한국 여성 불자의 위상과 역할 / 민성효

[ 특집 2 ] 한국불교 전통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 / 심재룡
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 김종만
조계종 법통설의 형성과정과 문제점 / 박해당
무엇을 위한 ‘수행’인가 / 주민황

[ 논단 ]
불교정화운동 연구 / 박희승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보는 불교적 관점 / 박병기
불교윤리의 응용 가능성 모색 / 허남결
현대불교미술이 나아갈 길 / 김창균

[ 쟁점 ]
육조단경, 어떻게 볼 것인가 / 정성본

[ 기획연재 ] 불교에서 보는 철학, 철학에서 보는 불교 (3)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1) / 김종욱

[ 해외불교체험 ]
100일 동안 경험한 미얀마 불교 / 강은애

[ 서평 ]
한 수행자의 구도·생명 에세이 / 전재성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나룻배 / 권기종

 

:::  2000년 가을호 제4호 :::

[ 권두언 ]
동양불교도의 세계적 책임 / 홍사성

[ 특집 1 ] 생명공학과 불교
생명공학의 현재와 미래 / 최원상
불교적 입장에서 본 생명공학의 윤리문제/ 이중표
생명공학의 도전에 직면한 불교의 윤회설 / 윤호진
인간복제와 불교교리는 모순되는가 / 최정규
생명공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 / 구경국

[ 특집 2 ] 불교 개혁운동 탐구
결사운동을 통해 본 불교개혁의 성격 / 김상영
1910년대 한국불교계의 유신론 / 김상현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흐름과 그 특징 / 유승무
현대 아시아의 참여불교 운동 고찰 / 박경준

[ 기획연재 ] 불교에서 보는 철학, 철학에서 보는 불교 (4)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2) / 김종욱

[ 해외불교체험 ] 스리랑카
가난하지만 청정한 수행불교 / 송위지

[ 논단 ] 우리 시대에 필요한 불교철학
비교철학의 필요성 / 이병욱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 / 전재성
사회정의 실천을 위해 불교가 해야 할 일 / 손혁재
전국신도회의 ‘조계종단 혁신재건안’ 연구 / 김광식

[ 샤캬 디타 대회 참가기 ]
여성불자의 힘, 새로운 불교의 가능성 / 운월

 

:::  2000년 겨울호 제5호 :::

[ 권두언 ]
전도몽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 홍사성

[ 특집 1 ] 티베트 불교 그 신비와 오해를 넘어
지혜와 자비의 이중주, 티베트 불교 / 주민황
서양에 부는 티베트 불교의 열풍 / 이동호
달라이 라마, 그는 누구인가 / 김충현
티베트와 중국. 그 선연과 악연의 역사 / 김성수
한국불교속의 티베트 불교 / 허일범

[ 특집 2 ] 불교와 통일운동 그리고 북한불교
통일운동에서 불교의 역할 / 조성렬
불교 통일운동의 현 단계 / 조병활
북한불교의 어제와 오늘 / 이지범
북한의 사찰과 불교문화재 / 이정

[ 세미나 중계 ]
간화와 돈오를 넘어 새 정체성 만들기 / 한형조
출가와 재가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한 시론 / 홍사성

[ 서 평 ]
종교사상의 지평에서 본 선불교와 주자/ 신규탁

[ 논 단 ]
한국 불교학, 그 반성과 전망 / 이혜숙
사이버 불교 신행의 현 주소 / 박수호
천태지관의 현대적 의의 / 최기표

[ 쟁 점 ]
회통불교론은 허구의 맹종인가 / 이봉춘

[ 해외논단 ]
왜 여성은 ‘아라한’이라 불리지 않았는가 / 엘리슨 핀들리

 

::: 2000년 가을호 제6호 :::

[ 권두언 ]
현대 불교학이 타파해야 할 화두 / 홍사성

[ 특집 ] 불교가 보는 환경과 생태
중도와 상생을 위한 불교 환경론 / 고영섭
생태와 욕망, 그리고 불교적 상상력 / 김판동
생명살림·생태적 삶을 위한 불교의 역할 / 박석동
21세기 한국의 환경 주소―국민의 정부의 환경정책 비판 / 양장일

[ 집중조명 ] 유럽과 미국의 수행 단체
불교, 서양에서 꽃피다 / 진우기

[ 문화시평 ]
타란티노 영화에 나타난 불교적 시간의식 / 하재봉

[ 기 획 ] 간화선 논쟁의 몇 가지 관점
간화선의 본질과 수행구조 / 정성본
다시 간화선을 말한다 / 월호
위파사나와 간화선의 교집합적 접근 / 송위지
천태 4종삼매, 그리고 간화선·위파사나 / 이병욱

[ 논단 ]
생명과학·생명윤리·종교 / 김승철
아나키즘의 불교적 특성 / 방영준
주살(誅殺)된 달마―엽기 문화의 한 읽기 / 황호덕

[ 해외논단 ]
화엄철학은 어떻게 일본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되었는가 /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 최연식 옮김

[ 자료발굴 ]
이종욱의 〈초혼문〉과 〈대동단 활동의 동기〉 / 박희승

[ 서평 ]
니시다 철학과 불교철학 / 이찬수
허우성, 《근대 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

 

::: 2001년 여름호 제7호 :::

[ 권두언 ]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 / 홍사성

[ 특집 ] 기복불교를 말한다
기복불교는 불교인가 / 조준호
기복불교는 왜 생겨났는가 / 황인규
기복불교의 실태와 문제점 / 한명우
기복주의를 넘어 공덕주의로 / 유동호

[ 문화시평 ]
21세기 불교문화 개화의 조건 / 주강현

[ 해외불교체험] 일본
생활불교의 빛과 그림자 / 박보경

[ 기 획 ] 종교와 정치 그 갈등과 유착의 관계
정교분리 담론과 정교유착의 현실 / 이진구
불교의 이상정치론과 역사적 실제 / 차차석
독일 기독교 민주당의 이상과 현실 / 한승완
일본불교의 정치실험, 공명당의 한계와 비전 / 조성렬
한국의 정치문화와 종교문화 / 채규철

[ 논단 ]
승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한 담론 / 정각
세계 불전 전산화의 현황과 과제 / 김재성

[ 현대 불교사 탐구 ]
이청담과 ‘조계종 유신 재건안’연구 / 김광식
조계종 종무행정 제도 변천 고찰 / 조기룡

[ 해외논단 ]
정치적 시각에서본 붓다의 생애 / 잠농 통프라스트 , 이마성옮김

 

::: 2001년 가을호 제8호 :::

[ 권두언 ]
한글불교를 제창하며 / 홍사성

[ 특집 ]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항일운동
개항기 불교계의 현실인식 / 정광호
일제의 불교정책과 친일문제 검토 / 김순석
일제하 불교계의 독립운동 전개와 성격 / 김광식
만해 한용운의 정교분리 원칙 / 장석만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집필자에 관한 고찰 /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 나타난 만해의 독립사상 / 고명수

[ 시론 ]
연기론적 시각으로 본 미국 테러 대참사 / 송위지
한글대장경의 완간의 의미와 과제 / 김용섭

[ 논단 ]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한 재고 / 박재현
94년 불교개혁운동의 반성적 점검 / 김봉준
현대적 사찰건축과 전통의 구현 / 김개천

[ 인물비평 ]
눈뜬 승가를 기다리는 세상속을 걷다 / 정웅기
실상사 도법,정토회 법륜스님

[ 해외불교체험 ]
고난의 땅에 핀 연꽃 / 김규현

[ 쟁점 ] 제 3의 수행법 어떻게 볼 것인가
정법왜곡은 또 다른 훼불이다 / 진현종
대안 수행법을 주목해야 한다 / 동준

[ 해외불교논단 ]
법화경과 종교적 관용 / 진 리브스 , 김승철 옮김

[ 서평 ]
―우리불교학의 정체성 찾기 / 석길암
: 심재관지음 〈탈식민지시대의 우리 불교학〉
―한국불교의 종자를 찾아서 / 강창호
: 한국 유학생 인도학 불교학 연구회 〈 일본의 한국불교학 연구동향〉

 

::: 2001년 겨울호 제9호 :::

[ 권두언 ]
전통을 부정하자 / 홍사성

[ 특집 ] 서양철학과 불교, 그 접점과 경계
칸트와 불교에 있어 존재와 인식 그리고 실천 / 최인숙
니체와 불교 그리고 해체철학 / 박경일
하이데거와 불교의 만남 / 김종욱
불교와 화이트 헤드 철학의 동이점(同異點) / 장왕식

[ 논단 ]
일본불교의 한국불교 인식 / 김천학
이슬람과 불교 그 악연의 역사 / 문을식
화엄의 세계와사이버 세계의 구조 비교 / 조윤호
불이사상과 미래문명 / 이찬훈

[ 세미나 중계 ]
현대 불교학의 과제와 해결방향 / 김성철
불교와 직업노동 그리고 시민정치 / 박세일
불교의 욕망관과 경제문제의 인식 / 정기문

[ 논평 ]
‘기복불교를 말한다’를 말한다 / 박영록

[ 해외논단 ]
불교는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 피터 하비, 심재관 옮김

[ 서평 ]
―禪의 철학적 해명 / 이병욱
변상섭 지음 〈禪, 신비주의 인가 철학인가〉(컬쳐라인)〉
―무시와 배척의 대상, 묵조선을 되살리다 / 이덕진
김호귀 지음, 〈묵조선 연구〉(민족사)

 

::: 2002년 봄호 제10호 :::

[ 권두언 ]
벌거벗은 임금님을 위하여 / 홍사성

[ 특집 ] 왜 종교 다원주의 인가
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 : 그 역사적 배경과 현재 / 배국원
기독교에서 보는 종교 다원주의 / 이정배
불교에서 보는 종교 다워주의 / 이희재
그리스도교의 불교이해 : 변선환의 불교관을 중심으로 / 이찬수
한국불교의 기독교 바라보기 / 윤영해

[ 쟁점 ]
체계불학의 몇가지 문제점 / 서재영
―김성철 교수의 〈현대 불교학의 과제와 방향〉을 읽고
‘기복신앙’문제의 본질적 과제 / 마성

[ 해외불교논단 ]
동물에게도 공민권이 있다 / 폴 왈도, 박서연 옮김

[ 기획 ] 이단 불교도들의 또 다른 초상
데바닷다 그는 정말 악인이었는가 / 원필성
신행, 중국불교 최초의 민중불교주의자 / 이상현
신돈, ‘요승’의 이름뒤에 숨은 개혁자의 모습 / 정선용

[ 논단 ]
경허의 법화와 행리, 그 빛과 어둠의 이중주 / 이덕진
인도 불교부흥 운동의 현실과 한계 / 이지은
불교의 불살생계 입장에서 본 국방의 문제 / 이재수

[ 해외불교체험 ]
저잣거리를 밝히는 청정승가의 빛 / 서상문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
베살리 결집의 십사논쟁과 정법(淨法) / 이자랑

 

::: 2002년 여름―가을호 제11,12호 :::

[ 권두언 ]
목적을 위한 방편이어야 한다 / 홍사성

[ 특집 ] 대승불교의 경전 찬술 어떻게 볼것인가
대승 경전 찬술의 배경과 과정 / 안성두
천태교판론의 한계와 현대적 의의 / 이병욱
중국불교의 위경(僞經) 제작 어떻게 볼 것인가 / 김진무
불설―비불설 논의의 전개과정 / 김철
대승비불설론과 현대의 경전 해석학 / 김용표

[ 쟁점 ]
초기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에 대한 검토 / 마성

[ 현장보고 ]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2백일 / 김동훈

[ 기획 ] 서구불교의 가능성과 과제
서구인들은 왜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 / 최종석
서양 불교의 지도자들 / 진월
서구 불교학의 연구 방법 추이 / 심재관
서구불교의 가능성과 한계 / 최종남

[ 논단 ]
사형제도를 사형시켜야 하는 불교적 이유 / 연기영
대승사상과 한국 불교 영화 / 정재형
불교계 친일 행적, 어떻게 볼것인가 / 이재형

[ 해외불교논단 ]
비선형적 상호 인과율로서의 연기 / 조에너 메이시, 이중표 옮김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2)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와의 대론 / 문을식

 

::: 2002년 겨울호 제13호 :::

[ 권두언 ]
불교도는 과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 / 홍사성

[ 특집 ] 상좌부 불교의 이해
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전통 / 송위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체계 / 김재성
상좌부 불교의 현황 / 난다라타나
상좌부 불교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 / 김열권

[ 논단 ]
사형제도를 사형시켜야 하는 불교적 이유 / 연기영
원불교와 진각종의 교세 성장 요인 분석 / 정성운
가톨릭과 티베드 불교의 의례 비교 / 최로덴

[ 집중인터뷰 ] 강남포교원 20년 이끈 성열스님
용기있는 원칙, 아름다운 원칙 /노귀남

[ 시론 ]
‘불교와 불교학의 실용성’에 대한 한 생각 / 안옥선
새로운 불교미술이 나아갈 길 / 이기선

[ 해외논단 ]
불교는 페미니즘이다 / 리타 그로스,정미숙

[ 기획 ] 재가 불교운동의 현황과 전망
한국 재가불교운동의 사적 개관 / 최연
대학생 불교운동의 어제와 오늘 /김남수
여성 불교운동의 흐름과 과제 / 이윤수
직장,직능 신행단체의 현황과 과제 / 박용규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3)
공사상을 둘러싼 중관, 유식 양 학파의 논쟁 / 남수영

[ 서평 ]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선불교를 보다
박재현 〈깨달음의 신화〉,푸른역사, 2002 / 최원섭

 

::: 2003년 봄호 제14호 :::

[ 권두언 ]
새로운 강물이 흐르게 해야 한다 / 조성택

[ 특집 ] 초기불교를 다시본다
왜 초기 불교를 주목해야 하는가 / 이중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 욕망의 지멸,자유,자비 / 안옥선
초기 불교 교단의 종교의식과 생활 / 이자랑
대념처경을 중심으로 본 초기 불교 수행법 / 미산
초기경전에 나타난 재가자의 위상과 신행생활 / 조준호
붓다운동으로서의 초기불교 시대 전법활동 / 김재영

[ 집중인터뷰 ] ‘금강경 결제’ 논주 각묵스님
금강경 제대로 읽어야 외도적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이성수

[ 선학탐구 ]
선종은 왜 민중불교를 지향하였는가 / 이은윤

[ 쟁 점 ]
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 / 김종만
대―소승 논쟁의 비판적 성찰 / 조용길

[ 논 단 ]
불교에서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이유 / 윤영해
도심포교당의 유형과 성공사례 분석 / 김응철
참여민주주의와 불교 / 손혁재

[ 국제행동회의 참관기 ]
전쟁은 크게 인(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이승환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4)
삼예사의 논쟁 : 돈점론의 티베트 불교적 전개 / 안성두

[ 서 평 ]
―‘덕 윤리’의 패러다임으로 본 불교 / 임성택
안옥선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불교시대사 2002
―불교의 불이(不二)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 한자경
김종욱 〈용수와 칸트〉 운주사 2002

[사색과 성찰]
절집에서 선거해야만 하나 / 법인
사찰 경영마인드 유감 / 윤원철
탄허스님의 예언과 정보통신 문화 / 김성철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 / 홍사성


::: 2003년 여름호 제15호 :::

[ 권두언 ]
3보 1배 그것은 감동이었다 / 조성택

[ 특집 ] 현대사회와 불교윤리
계율에의 불복종 / 박정록
불교와 전쟁:불살생과 대량살생 /심재룡
현대사회에 있어서 불교계율의 의미 / 박호남

[ 논 단 ]
구술사 연구의 필요성 : 현대불교의 공백을 메우자 / 김광식
정신분석학과 선, 그리고 쇠고기 매운탕 / 박치완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김성철
철학함과 문헌학 : 불교학 방법론에 대한 성찰 / 강종원

[ 집중인터뷰 ] 요기싸르의 시인 김지하
상생의 화두를 찾아서 / 대담 조성택

[ 시 론 ]
세계화 시대의 전쟁을 보는 불교적 시각 / 류승무,임운택

[ 해외논단 ]
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에 나타난 불교 생태학 / 데이비드 킨슬레이,원병관 옮김

[ 기 획 ] 불교와 예술
생활속의 불교음악을 위한 제언 / 박금표
시간,경계 :세잔느,다빈치,그리고 용수 / 홍성기
진언과 다라니가 불교무용에 끼친 영향 / 능화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5)
청변과 호법의 공유논쟁 / 김치온

[ 선학탐구 ]
선은 종교인가 / 오강남
선종형성의 경제사상적 배경 / 이은윤

[ 서 평 ]
원전으로 읽는 금강경 / 이건준
각묵스님 지음 〈금강경 역해〉(불광출판사,2001)

[사색과 성찰]
제 통일 방안의 무궁지실 오류 / 김상일
자존심이 그리운 세상 / 이종철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 / 엄성민
결혼, 이혼, 그리고 불교 / 문을식

 

::: 2003년 가을호 제16호 :::

[ 권두언 ]
불일(不一)이라야, 불이(不二)가 산다 / 조성택

[ 특집 ]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조선불교유신론 집필의 배경과 개혁방향 / 정광호
조선불교유신론의 소회(塑會)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 / 서재영
조선불교유신론과 현대 한국불교 / 김광식
근대 계몽철학과 조선불교유신론 / 허도학
조선불교유신론과 만해의 문학관 / 고명수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근대적 세계관 읽기 / 이도흠

[ 쟁 점 ]
기복불교 논쟁의 발전방향에 관한 제언 / 윤남진

[ 논 단 ]
깨달음에 이르는 글쓰기를 위하여 / 최재목
불교 생태학과 포스트 모더니티 / 김종욱
서구에서의 불교의 미래 / 조성택

[ 선학탐구 ]
선종 형성의 문화사적 배경 / 이은윤

[사색과 성찰]
불교계가 집단 아상(我相)에 빠져 있다 / 한형조
진정한 반미 / 최준식
농자 천하지 말본 / 종명
비우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김광원
고양이의 시대,고양이를 닮은 사람들 / 전기철
‘불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가 / 곽효준

[ 해외불교논단 ]
계율과 계율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담론 / 루이스 고메즈 지음 , 최은영 옮김

[ 3회분재 ]
장기이식에 관한 불교적 관점 (1) / 곽만연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6)
고행에 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논쟁 / 김미숙


::: 2003년 겨울호 제17호 :::

[ 권두언 ]
붓다의 성도(成道)의 의미를 올바로 인식하자 / 조성택

[ 특집 ] 현대 한국불교의 비판적 성찰
초기불교의 사상,윤리성에 비추어 본 한국불교 / 김종명
키치로서의 불교 / 원신연
21세기 인문학으로서 불교철학의 가능성과 전망 / 이도흠
불교 NGO 의 현실과 과제 / 이영철

[ 집중인터뷰 ]
올곧은 현실참여 이끄는 정토회 법륜스님
불교시민운동의 새로운 길, 수행과 운동을 하나로 / 노귀남

[ 시 론 ]
누가 허물없이 자살할 수 있는가 / 안양규

[ 논 단 ]
삼독기법(三毒機法)으로 벗어나는 길 / 박치완
서산대사, 그리고 호국불교의 가능성 / 김근호
대혜종고의 공안선 비판과 간화선에서의 지(知)의 문제 / 박재현
늪, 늪의 글쓰기 / 최재목

[사색과 성찰]
악업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 성담
자살을 권장하는 사회, 삶의 의미를 읾은 개인 / 김도공
사찰 안내프로그램이 필요하다 / 이지중
이제 바른 법행(法行)을 해야할 때가 아닌가 / 태경
소박한 밥상의 아름다움 / 이승환

[ 세미나 중계 ]
일제의 한국강점과 불교 / 최병헌

[ 자료발굴 ]
한암(漢岩)의 자전적(自傳的) 구도기 ‘일생패궐’(一生敗闕) / 윤창화

[ 해외불교논단 ]
불교 인식론과 프래그머티즘 / 리차드 헤이즈,성청완

[ 3회분재 ]
장기이식에 관한 불교적 관점 (2) / 곽만연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6)
성유식론에 나타난 종자(種子)의 유래에 관한 논쟁 / 이동우


::: 2004년 봄호 제18호 :::

[ 권두언 ]
무엇이 웰빙인가 / 조성택

[ 특집 ] 깨달음과 수행에 관한 몇가지 관점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 / 홍사성
선(禪)의 깨달음, 그 정체와 문제점 / 김성철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 / 조성택
수행도의 다양성과 깨달음의 일미 / 안성두

[ 시 론 ]
탄핵을 탄핵한다 / 손혁재

[ 세미나 중계 ]
비구니 팔경계 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법인스님

[ 논 단 ]
고은의 만해론을 비판한다 / 이재형
불살생에 관한 불교의 이상과 현실 / 문을식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불교관 / 유호선
매트릭스에 나타나는 불교적 상징들 / 이은비
승조(僧肇)의 존재에 대한 사유방식과 자유 / 김영진

[사색과 성찰]
‘납골사업이 불교정신인가 / 김기덕
오래된 미래를 생각한다 / 최은영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 김호성
거울에 비친 내 속살림 / 진월

[ 해외불교논단 ]
불상생의 기원에 대한 고찰 / 람버트 슈미트하우젠,김성철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8)
영혼에 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논쟁 / 김미숙

[ 자료발굴 ]
조선 불교 학인 대회록과 불교개혁 / 김광식

[ 3회 분재 ]
장기이식에 관한 불교적 관점 / 곽만연

[ 종교학 다시보기 ]
종교란 무엇인가 / 최준식

[ 서 평 ]
죽음.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 / 이덕진
오진탁, 〈죽음 , 삶이 존재하는 방식 〉(청림출판,2004)


::: 2004년 여름호 제19호 :::

[ 권두언 ]
종교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 조성택

[ 특집 ] 현대사회를 향해 불교가 말한다
갈등 해소, ‘화쟁’이 길이다 / 이도흠
자본주의와 빈곤, 그리고 무소유 / 박경준
생태계 위기극복을 위한 사성제적 접근 / 김종욱
폭력, 끝까지 거부해야 할 이유 / 하정남
교육, 욕망의 재생산에서 연기적 자각으로 / 박범석

[ 시 론 ]
‘짱’ 신드롬, 어떻게 볼 것인가 / 문을식

[ 세미나 중계 ]
생태에 대한 선사상적 고찰 / 서재영
4·3사건과 제주불교계의 피해 현황 / 한금순

[ 쟁점 ]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 접점과 경계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다른가 / 각묵
위빠사나와 간화선, 다른 길 같은 목적 / 김재성
위빠사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 / 조준호

[사색과 성찰]
외로운 노인들을 바라보며 / 원욱스님
자비와 창업 사이에서 / 서인범
길에서 만난 부처 / 김봉현
꽃미남 붓다 / 김수정

[ 논 단 ]
열반에 대한 해석의 문제점 / 황순일
불교는 육식을 금하는 종교인가 / 마성
화엄적 글쓰기 / 최재목
왜 일하며 수행해야 하는가 / 종명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9)
설일체유부의 유위4상을 둘러싼 논쟁 / 황정일

[ 종교학 다시보기 ]
(2) 종교의 특질 / 최준식

 

::: 2004년 가을호 제20호 :::

[ 권두언 ]
종교는 과학적 진보를 제한할 수 없다 / 조성택

[ 특집1 ] 생명산업과 생태윤리, 그 불교적 모색
생명복제 대한 불교윤리적 모색 / 박병기
불교는 인위적인 생명조작을 허용하는가 / 홍욱희
배아 복제에 대한 불교적 관점 / 곽만연
생명을 파괴하는 연구산업 / 박병상

[ 시 론 ]
‘천성산 살리기’ VS ‘지율 스님 살리기’ / 윤제학

[ 논 단 ]
형이상학과 반 형이상학의 만남― 근대유럽정신과 불교 / 박진영
농지개혁과 불교계의 대응 / 김광식
하르샤는 불법왕(佛法王)인가 / 공만식

[사색과 성찰]
일상의 바닥에서 만난 불교 / 고인환
새로운 안거문화, ‘재가논강’ / 박희승
골목길, 자동차에 빼앗긴 아이들의 삶터 / 정성운

[ 특집 2 ] 윤회, 사실인가 믿음인가
고대 문명사회와 인도에서의 윤회 / 김형준
초기 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 안옥선
윤회의 공간적.시간적 조망 / 김성철
남북조 불교의 윤회설 수용과 갈등 / 차차석
윤회없는 불교는 가능한가 / 최은영

[ 기획연재] 종교학 다시보기 (3)
왜 종교인가 / 최준식

[ 해외불교논단 ]
자본의 폭주에 대한 불교적 진단 / 술락 시바라크 저, 김미숙 역

[ 서 평 ]
연기법의 서구적 수용 / 고형일
― 조애너 메이시 지음, 이중표 옮김 〈불교와 일반 시스템이론〉 불교시대사

[ 권말기획 ]
중국불교의 돈점(頓漸)논쟁 / 김진무


::: 2004년 겨울호 제21호 :::

[ 권두언 ]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세계화 / 조성택

[ 창간 5주년 특별 좌담 ] 불교 지성의 새 지평을 여는 첨병이 되라
미산(중앙승가대 교수) / 한형조(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유승무(중앙승가대 교수·본지 편집위원) / 조성택(고려대 교수·본지주간)

[ 특 집 ] 한국불교를 다시 생각한다
‘통불교’ 담론을 통해 본 한국불교사 인식 / 조은수
간화선을 위한 변명 / 박재현
기복, 한국불교 본연의 모습인가 / 이기운

[ 시 론 ]
출가자 감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유승무

[ 논 단 ]
데리다의 철학사상과 불교(1) / 김형효
공안의 기호학적 분석 / 이승훈
헤겔의 《종교철학강의》와 불교 / 박진영
불이사상과 불교미학 / 이찬훈

[사색과 성찰]
호국불교, 나라를 지키는가 정권을 지키는가 / 헨릭소렌슨·최원섭 옮김
어느 견공의 죽음 / 박도
출가를 생각하다 / 김치온
칡뿌리에 대한 단상 / 차상엽

[ 세미나 중계 ] 참선(간화선)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
또 하나의 극단, ‘최고의 수행법’ / 호진

[ 자료 발굴 ]
《포교법 개설》에 나타난 근대불교의 포교 / 김광식

[ 기획연재 ] 종교학 다시 보기 4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 / 최준식

[ 해외불교논단 ]
젠 오리엔탈리즘의 시작―니시다와 교토학파 / 버나드 포오레, 김수정 역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1
사문의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 최정규


::: 2005년 봄호 제22호 :::

[ 권두언 ]
지율스님이 얻은 것과 잃은 것 / 조성택

[ 특 집 ] 한중일 불교의 근대성을 해부한다
한중일 불교의 근대성 수용경로와 차이점 / 김경집
중국의 근대화와 불교 / 김제란
일본의 근대화는 왜 불교를 필요로 했는가 / 스에키 후미히코
근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珍景) / 심재관
한국불교 근대화의 두 얼굴 , 만해와 성철 / 김종인
중도와 서구적 근대성 넘어서기 / 유승무

[ 시 론 ]
불교계 친일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 김순석

[ 세미나 중계 ]
한국 불교의 세계화 방안 / 미산

[ 논 단 ]
데리다의 철학사상과 불교(2) / 김형효
하이데거, 무 그리고 불교 / 박진영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 사띠는 무엇인가 / 조준호
춘원 이광수의 친일 논리 / 김광식
쿠차불교의 역사와 성격 / 한지연

[사색과 성찰]
불교문화재는 성보문화재가 아니다 / 문무왕
물의 본래면목 / 이진섭
나는 회색이다 / 오진영

[ 서 평 ]
문명사적 관점에서 다시 보는 티벳 / 강종원
― R.A 슈타인 저, 안성두 역 〈티벳의 문화〉 (무우수,2004)..

[ 해외불교 논단 ]
탈현대 불교학의 새 방향 / 시모다 마사히로, 김재성 옮김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2)
천태의 제종(諸宗)비판은 정당한가 / 이병욱


::: 2005년 여름호 제23호 :::

[ 권두언 ]
우리가 선도하는 화엄적 기술문명 /김성철

[ 특 집 ] 인터넷 시대의 불교
불교의 사이버 사회 대응 양상―종교학계의 이론적 논의 종합 / 김응철
불교인의 사이버 신행과 특징 /박수호
불교 사이트의 현황과 문제점 / 김재경
한국의 사이버 교회와 영상 예배의 현황 / 허호익
원불교 원티스(WTIS) 구축의 현재와 미래 / 이한메
가톨릭의 인터넷 활용 실태와 한계 / 박문수

[ 시 론 ]
불교문화재 보존, 종단의 특단이 필요하다 / 문명대
개혁 없이 불교 미래 없다 / 박광서

[ 세미나 중계 ]
선사들의 삶을 통해 본 동물의 도덕적 지위 / 서재영

[ 논 단 ]
현대 불교미술의 시대미감과 창의성 / 윤범모
메를로―뽕띠의 철학과 보조지눌의 간화선 / 박진영

[사색과 성찰]
불자의 실천 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 박노자
햄버거 하나에 담긴 생명체의 수는 / 문윤정
놀이와 장엄 / 이성도
불교학교를 설립해야 한다 / 이학송

[ 서 평 ]
인물로보는 불교사 / 김천학
―《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 김호성 옮김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5)

[ 해외불교 논단 ]
불교생태학의 덕(德) 윤리적 접근 / 데미안 키온, 배상환 옮김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3)
용수와 니야야학파의 논법논쟁 / 문을식


::: 2005년 가을호 제24호 :::

[ 권두언 ]
다시 챙겨야 할 욕망이라는 화두 / 조성택

[ 특 집 ] 불교와 성(性)
율장을 통해 보는 ‘욕망 끊기’ / 철우스님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 정성준
정신과 상담을 통해 살펴본 불교와 성 / 최훈동
불교영화속의 섹스, 어떻게 볼 것인가 / 송희복
불교미술에 나타난 성(性) / 박영택
불교문학은 여성을 어떻게 보았는가 / 임종욱

[ 시 론 ]
불교의 눈으로 본 남북관계의 흐름 / 고유환

[ 퇴임강연 ]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철학 / 김형효

[ 논 단 ]
1554년 금강산 청년 율곡과 어느 노승의 대화 / 한형조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불교의 돈점논쟁 / 서명원
看看話禪, 간화선 다시보기 / 변희욱
간화선과 화엄, 단절을 넘어 회통으로 / 김방룡
한국 불교계 신문의 현상과 과제 / 신관호

[ 해외불교 논단 ]
환경윤리와 불교 : 고의성의 관점에서 / 피터 하비 ― 배상환 옮김

[사색과 성찰]
고인 고통을 걷어내니 맑은 내가 있구나 / 마가
2005 만해축전 세계평화시인대회 참가기 / 박시교

[ 서 평 ]
시대에 맞는 불교의 퓨전 / 최원섭
사티쉬 쿠마르, 이한종 옮김 〈부처와 테러리스트〉 (달팽이,2005)..

[ 세미나 중계 ]
한국불교학회 여름 워크숍 / 박익순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4)
소소계(小小戒)에 관한 논쟁 / 이자랑

 

::: 2005년 겨울호 제25호 :::

[ 권두언 ]
황우석 사태를 보는 불교의 눈 / 조성택

[ 특 집 ] 웰빙시대의 잘죽기(Well Dying)
웰빙시대에 왜 웰 다잉을 말하는가 / 오진탁
붓다의 죽음 / 안양규
선사들의 열반과 죽음 / 김영욱
부활, 웰 다잉의 한 해석 / 이찬수
죽음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생각 / 강신표
근사체험(近死體驗)이란 무엇인가 / 최준식

[ 시 론 ]
종교와 선거 / 금강스님

[ 기획 ] ‘불교와 사회포럼’ 창립세미나
창립기사― 창립취지문
발제 ― 불교와 현대사회 / 조성택
논평 ― 한국 불교전개의 두가지 방식 / 김종욱
발제 ― 불교와 정치 / 박세일
논평 ― 아상에 결박된 정치 벗어나기 / 이각범
발제 ― 불교와 경영 / 노부호
논평 ―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 / 손기원

[ 논 단 ]
율장은 금서인가 / 마성스님
백학명의 불교개혁과 선농불교 / 김광식
일본 불교사회복지의 발전과 한국불교에의 시사 / 박광준
공안언어의 사회적 담론가능성에 대한 상념 / 박진영
조선전기 관세음보살의 응신묘법의 도상과 그 창조적 재현 / 강소연
틱낫한의 플럼빌리지 선수행 고찰 / 김은종

[사색과 성찰]
空間畏怖, 그리고 無有恐怖 / 김징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삶 / 최협
깨달음에 적절한 몸이 있는가 / 문윤정

[ 초청강연 ]
서구불교학의 연구의 과거와 미래 / 도날드 로페즈, 조은수 번역

[ 세미나 중계 ]
불교생명윤이 정립을 위한 공개 심포지엄 / 박익순


::: 2006년 봄호 제26호 :::

[ 권두언 ]
다종교 사회와 종교자유 / 조성택

[ 특 집 ] 바람직한 불경번역과 현대적 소통모델 찾기
좌담 ― 바람직한 불경번역과 현대적 소통모델 찾기
번역은 아무나 하나―얌폴스키의 돈황본 육조단경 영역(英譯) / 박성배
한글대장경 역경사업의 문제점과 과제 / 박종린
리즈 데이비스와 빨리 경전협의 성과 / 황순일
경전연구소의 번역과 교열과정을 통해 바라본 팔리경전의 우리말 옮김 / 정준영
불교용어의 표준화는 왜 필요한가 / 이평래
불교용어 표준화의 문제점 / 김재성

[세미나 중계]
세계각국의 경전번역 실태 밑 체계에 관한 연구학술발표회 / 노병철

[ 기획연재 ]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1) / 오강남

[ 기 획 ] 사회문제에 대한 불교의 대응방식 문제없나
사회양극화에 문제에 대한 불교적 처방 없나 / 정천구
불교생명운동의 맥락과 천성산살리기 그리고 비판적 성찰 / 이정호
황우석 사태로 본 불교윤리의 대 사회적 대응전략 제고 / 허남결

[ 기 고 ]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불교 / 정용도
삼소회의 세계 종교성지 순례기 / 진명스님

[ 논 단 ]
궁즉적 실재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물리학적 관점 / 김성구
아쇼까왕의 복지사상 연구 / 성운스님
불교와 자이나교의 불살생론 비교 / 김미숙
떠오르는 장례문화 수목장(樹木葬) 문제점은 없는가 / 조동섭

[ 서 평 ]
한일 불교사를 어떻게 볼것인가 / 고영섭
일본사상의 핵을 찾는 스에키 후미히코의 ‘일본불교사’와 관련하여

[ 기획연재 ] 문화속의 禪 1
차와 선의 융합 , 다선일미 정신 / 박동춘

[사색과 성찰]
늙은 감나무와의 대담 / 한승원

[ 강연중계 ]
깨달음의 세계와 생활세계 / 조성택


::: 2006년 여름호 제27호 :::

[ 권두언 ]
불교문화― 일상성과 소통을 위한 불교 / 조성택

[ 특 집 ] 재가불교를 생각한다
프롤로그 / 성태용
재가자는 출가자에 비해 하열한가 / 박경준
재가자의 해탈은 어디있는가 / 허우성
수행과 삶은 둘이 아니다 / 박영재
원불교 재가자로서의 삶과 수행의 조화 / 최영돈
오늘날의 재가불자교육을 돌아본다 / 이영철
이상적인 재가 불교를 위한 제언 / 성태용

[ 기획연재 ]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2) / 오강남

[ 자료발굴 ]
백제성왕의 일본왕 겸임과 불교포교 / 홍윤기

[ 논 단 ]
진각국사 무의자 선시의 미학 / 학해스님
불교출판의 현황과 과제 / 홍사성
한국 영화속의 불교, 그 미래와 방향사이 / 우봉규
호탄불교, 접근을 위한 첫걸음 / 한지연
8차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초중등학교 도덕―윤리교과서의 불교(종교)관련 내용에 관한 개선 방향 / 김형중
녹색장묘문화를 향한 불교복지의 실천체계 / 박희택
한국 종교문화 현실에 비춰본 한국 종교의 미래 / 박문수
섬같은 불교, 피자같은 불교 / 이민용

[ 서 평 ]
간화선으로 가는 바른 길 / 이덕진

[ 기획연재 ] 문화속의 禪 2
건축에 스며든 선의 정신 / 김홍일

[사색과 성찰]
남북을 떠도는 도난 문화재들 / 장용철

[ 세미나 중계 ] 동국대학교 건학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지식기반 사회와 불교 생태학’ / 김철우

[ 강연중계 ]
불교와 그리스도교, 그 소통을 말하다 / 서명원


::: 2006년 가을―겨울호 제28―29 합본호 :::

[ 권두언 ]
초심으로 돌아가며 / 조성택

[ 특 집 ] 불교와 민족주의
프롤로그 / 최연식
한국 근대 민족주의와 불교 / 박노자
근대 중국 불교와 민족주의 / 김영진
천황제 국가의 형성과 근대불교의 파행 / 원익선
민족불교와 불교적 보편주의 / 서재영

[ 논 단 ]
종교평화문제에 관한 사회복지법제론적 검토 / 박희택
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은 사찰의 ‘대화주’였다 / 탁효정
콤플렉스와 한국불교의 사회적 위상, 그리고 종교적 자유 / 이정훈

[ 서 평 ]
인도불교사의 종합적 고찰 / 이병욱
― 호진스님의 〈인도불교사〉를 읽고
―책으로 바라본 쩡옌 스님의 인간불교사상과 그 실천 / 이상미

[사색과 성찰]
스스로 건너는 九江 / 김성부

[ 기 고 ] 2006, 윤이상의 숨결찾기
―독일 ‘자택’과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를 다녀와서 / 장용철
―교육, 예측 가능성에 대한 회의 / 백선혜
―간화선 입문 프로그램이란 무엇인가 / 고명석

[ 기획연재 ]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3 / 오강남


::: 2007년 봄호 제30호 :::

[ 권두언 ]
봉암사 결사를 다시 생각한다 / 조성택

[특집] 불교와 예술
불교와 영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 장선재
악보 위에 펼친 화엄세계 / 김경진
선(禪)과 그림-송대(宋代) 선화(禪畵)를 중심으로/ 김현정
현대 대중예술의 이론과 그 불교적 해석 / 이도흠

[시론]
조계종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수경스님

[논단]
신자유주의하의 이주 노동자와 노동 및 가치를 둘러싼 문제 / 이경천
운강석굴 조영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 / 문무왕
사회복지 실현을 위한 불교적 접근과 과제 / 박광준

[해외불교]
간다라 미술과 대승불교 / 미야지 아키라

[서평]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를 읽고 / 마성(摩聖)

[사색과 성찰]
썩어야 산다 / 노공
성지순례의 의미 / 원욱
한류(韓流)의 ‘한’ 덫인가 돛인가 / 김상일
불교의 생애 (The life of Buddhism) / 이민용

[집중 인터뷰]
동서를 회통하는 철학자, 김형효 / 마해륜

[세미나중계]
간다라 불전도(佛傳圖)와 불교 도상(圖像) / 유근자

 

::: 2007년 여름호 제31호 :::

[ 권두언 ]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 / 조성택

[특집]
응용불교,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 / 김영욱
생명운동과 불교생태학의 소통을 위한 제안 / 이정호
불교사회복지의 현황과 전망 / 권경임
실천적 모색으로서 응용불교윤리학의 가능성 / 허남결

[시론]
17대 대선, 불교계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 손혁재

[기획시리즈]
4.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는 더 깊은 의미 / 오강남

[논단]
민국시기 불교 간행물에 게재된 한국불교 사료에 대한 고찰 / 황신추안
미적인 것은 종교적인 것인가 / 명법
중국불교교판사상사 / 성원 스님

[사색과 성찰]
친구 / 방민호
잊혀지지 않는 기억 / 박치완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 향해스님
한국 비구니계에 거는 기대와 주문 / 이병두

[세미나중계]
진언(Mantra)과 불교수행 / 황순일

[해외불교]
불교철학과 문헌학, 전통과 혁신 그리고 지성사의 경계 / 로렌스 맥크레이·파리말

 

::: 2007년 가을호 제32호 :::

[ 권두언 ]
‘좋은 벗들의 모임’을 기다리며 / 홍사성

[특집]
보살과 금욕 : 왕과 상인들의 불교 / 루이스 랭카스터
승려의 성적행위는 왜 금지되었는가 / 아상가 틸라가란트
감각적 욕망에 대한 대승의 윤리적 담론 / 야오밍차이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 유키 시라마네
금욕은 시대착오인가? / 로버트 버스웰
유교적 세계관과 성욕의 절제 / 노영찬

[기획시리즈]
5. 초대 교회 형성과 발전 / 오강남

[논단]
들뢰즈로 〈벽암록〉 읽기 / 채운
청규는 제2의 율장인가 / 향해

[사색과 성찰]
인연의 덫에서 자유롭기 / 이석심
자전거에도 ‘불성’이 있다?! / 고미숙
진정 붓다는 없는 것인가? / 차차석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 김상현

[세미나중계]
불상보기,종교적 차원과 심미적 차원 / 이주형

[해외불교]
베르나르 포르의 선불교 / 성청환

[서평] 《중국 근대사상과 불교》를 읽고 / 석길암

[기획시리즈]
16.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에 대한 논쟁 / 이용현

 

::: 2007년 겨울호 제33호 :::

[ 권두언 ]
현대적 교상판석을 세워야 할 이유 / 홍사성

[특집]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 마성(摩聖)
생활종교로서의 동남아 불교 / 김영애
동남아 불교는 소승인가 / 송위지
정치에 나타난 동남아 불교의 힘 / 김홍구
불교적 상징과 미얀마 정치 / 장준영
말레이시아 불교문화의 특징과 그 의미 / 홍석준

[기획시리즈]
6.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개 / 오강남

[해외불교]
전쟁과 테러리즘 / 데미언 키론. 허남결

[올해의 논문]
삼론가의 호칭과 승랑의 고유사상 / 김성철

[사색과 성찰]
잃어버린 순수감각 / 노귀남
겨울날의 행복론 / 이진영
불교, 정치, 그리고 현실인식 / 조명제
행동보다 사유의 깊이가 문제 / 김형효

[논단]
한국 불교 설화에 나타난 욕망과 깨달음 / 이도흠
한국 불교학에 대한 한 불교학자의 소회 / 권오민

[서평]
나의 경계, 나의 한계로부터의 자유? / 박치완

[세미나중계]
대법원 육비구 할복(六比丘 割腹)사건 / 박부영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 퇴옹성철의 역할 / 서재영 

 

::: 2008년 봄호 제34호 :::

[ 권두언 ]
이명박 정권이 순항하기를 바라며 / 김성철

[특집]
소수자와 빈자를 위한 불교적 모색 / 이도흠
불교는 성적 소수자를 차별하는가 /  이승욱
동성애에 대한 불교의 관점― 역사적 사례와 잠정적 결론 /  허남결
소수자 새터민 문제와 불교의 대응 / 노귀남
이주노동자 문제와 불교 /  김영진
불교의 장애인 인식 /  방귀희
한국사회의 재소자와 교도소 포교 /  황수경

[논단]
한국불교사의 순교승* / 황인규
불교미학의 기초개념* / 장미진
한국의 상좌부 불교 이해 수준 / 김홍구
일본의 동남아 불교 연구현황* / 석오진

[해외불교]
티베트 불교철학의 본질* / 마쯔모토 시로

[기획시리즈]
7.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등장 / 오강남

[서평]
空(공),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은 / 김호성

[특별기고]
일과 수행이 하나되는 삶을 위하여 /  도법스님

[사색과 성찰]
다음 어느 생에 람보와 마루와 내가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를 /  이인자 
경부대운하는 무엇인가 / 조건균
4부 니까야 읽기 운동을 제안한다 / 전현수
삶과 가치관에 대한 집착과 독선 / 대화스님

 

:::   2008년 여름호 제35호    ::: 
 
[ 권두언 ]
이명박 정부가 ‘주는 것 없이 미운’ 국민들 / 허남결

[특집]종교와 정치권력
종교권력 현상의 문제점 / 유승무
정치참여에 대한 출가자의 태도 / 마성
교회권력과 정치권력, 그 만남과 갈등의 역사 / 이진구
이슬람 신정정치의 이상과 그 변질 / 김영경
유교, 정치의 시녀 혹은 잔소리꾼 / 최재목

[논단]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출가와 재가가 나누어진 사상적 이유 / 조준호
유교법회(遺敎法會)의 전개과정과 그 성격 / 김광식

[특별기고]
불교적 방황에 관한 한 보고서 / 최로덴
- 인도, 희말라야에서의 고행난행〔眞空〕과 즉신성불〔妙有〕

[세미나 중계]
온마음 상담과 연기론 / 윤호균
연기론의 인지치료적 활용 / 김성철

[사색과 성찰]
한글과 불교 / 장영길
닮고 싶은 사람 / 상현숙
신과 과학의 전쟁 / 이준
마음의 거리 좁히기 / 허지혜
우리 문화와 불교 / 심산
자연 보호는 인간 보호 / 림창홍
2008 티베트 항쟁의 발발 요인 / 정웅기

[기획연재]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⑧
근·현대 그리스도교의 전개 양상 / 오강남

 

::: 2008년 가을호 제36호  :::

[ 권두언 ]
종교편향 더 이상은 안 된다 / 황순일

[특집]  육식인가 채식인가
육식의 정치학 그리고 사회학 / 이도흠
종교문화로 본 육식과 채식 / 류제동
채식하는 서양인, 육식하는 동양인 / 현현
육식과 채식의 식품영양학적 비교  / 이승남

[진단]
불교문화재 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 김태식

[명시 감상]
고은의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 이상국
효봉선사의 〈사슴이 알을 품는 소식〉 / 효림스님

[논단]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 / 윤창화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 방경일
대승 수행의 근본 원리 / 신규탁
혜초의 후반부 생애에 대한 고찰 / 김규현
한국불교와 동남아불교 교류의 어제와 오늘 / 이치란

[사색과 성찰]
마당에 미꾸라지가 파닥이던 시절 / 임동확
맹목적 근대주의의 극복을 위하여 / 신승환
리더의 보살행 / 이태경
오디 / 김희준
인도불교 멸망사가 주는 교훈 / 이학종

[집중취재]
종단산하 법인관리 문제점과 개선 방향 / 유응오

[세미나 중계]
경허선(鏡虛禪) 다시 보기 / 변희욱

[기획연재]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⑨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그리스도교 신학 / 오강남

[논쟁의 불교학] 
미망사학파 자재신 논쟁의 불교적 요소 / 김보리 

 

::: 2008년 겨울호 제37호  :::

[ 권두언 ]
나라님의 나라인가 우리의 나라인가 / 석길암

[기획] 종교갈등, 해결의 길은 없는가
종교 갈등, 그 불행의 세계사 / 곽병찬
이웃 종교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 / 이거룡
종교 간 화해의 실마리를 찾아서 / 서명원
종교 편향과 차별 방지를 위한 외국의 사례 / 남태욱
한국 기독교의 불교 폄훼 일지 / 임연태

[특별인터뷰]
삭개오 작은교회 김경재 목사 / 김나미

[명시감상]
죽원 : 서산대사 / 효림스님
게눈속의 연꽃 : 황지우 / 이상국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
수상작 : 현장의 인도 구법과 현장상의 추이 / 남동신
수상소감 / 남동신
심사평

[기획특집 ] 불살생, 선택인가 당위인가
불교의 생명개념과 불살생계 / 김성철
불교는 왜 불살생을 권하는가 / 정덕스님
육식습관과 동물의 권리 / 허남결
통계수치로 본 동물의 희생 / 우희종

[사색과 성찰]
하나의 진리로 가는 다른 길들 / 구중서
불교논문유감 / 권오민
현대에 계율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김규칠
우리 교육을 위한 성찰 / 박병기
티베트, 순례자의 죽음 / 김영진
종교와 폭력 그리고 정치 / 김호성

[논단]
〈성철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에 대한 비판 / 방경일
다시 응용불교학을 위한 변명 / 이혜숙
한국 불교, 왜 종교개혁이 필요한가 / 강병조

[세미나 중계]
불교와 사회참여 / 박광서

[강연초록]
동아시아에서 한국 불교의 역할 / 강연 : 로버트 버스웰, 정리 이상민

[기획연재]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독교 이야기 10
그리스독교의 오늘과 내일 / 오강남

[서평]
사상사를 통해 재조명한 근대 중국 / 윤영도
천샤오밍 외 지음 , 김영진 옮김 〈근대 중국 사상사 약론〉

 

::: 2009년 봄호 제38호    :::

[ 권두언 ]
다시 작은 것이 아름답다 / 이도흠

[기획특집] 종교와 돈
돈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과 역사적 전개  / 박경준
돈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과 역사적 전개 / 임채광
한국 불교의 시주 현황과 용도 / 이학종
한국 기독교의 헌금 현황과 용도 / 서병창
종교인 면세특권 그 기원과 현황 / 정웅기

[논단]
경전과 선어록 오류 해석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 / 성본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 / 석오진
불교 연구에서 고고학의 중요성 / 성청환

[특집] 불교속의 유교, 유교속의 불교
위진(魏晋) · 당대(唐代)의 불교와 유교 / 김용남
송대(宋代)의 간화(看話)와 격물(格物) / 변희욱
불교와 양명학(陽明學) / 송재운
신유학(新儒學) 수행론에 미친 불교 수행법 / 이승환
한국사회에서 유불(儒彿)의 교류 / 김용환
보살과 선비, 그 역사성과 현재성 / 박병기

[사색과 성찰]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 남긴 것 / 김윤세
나눔의 역설 / 장기표
치유(Healing)의 불교 / 유자효
무보상의 윤리 / 장기홍
원효와 장자 / 김수중

[해외불교논단]
여래장 사상과 본각사상 / 마쓰모토 시로, 이태승 옮김

[시론]
팔레스타인 잔혹사와 이스라엘 가자 침공 / 홍미정

[북리뷰 Book Review] 
이론으로 체계화한 간화선 / 김호귀
찰나멸과 차이의 철학 / 김영진

 

:::  2009년 여름호 제39호  ::: 
 
[ 권두언 ]
걸림없음(無碍)의 지향 / 박병기

[ 특 집 ]  불교와 도교의 대립과 융합
불교와 노장의 사유 방법 동이점(同異点) / 허인섭
도가의 무(無)와 불교의 공(空) / 하유진
불교와 도교, 대립과 투쟁, 그리고 융합 / 최일범
도교의 도장(道藏)과 불교의 대장경 / 윤찬원
중국선에 미친 노장사상의 영향 / 김진무

[ 논 단 ]
생명문화 공동체를 위한 생명학 / 이기상
가톨릭의 아조르나멘토와 불교 / 곽병찬
근대불교학과 일본적 특수성 / 김용태
붓다는 왜 걸식을 했는가 / 이상호
한국 근대사회와 근대불교(Ⅰ) / 남태욱

[ 집중 탐구 ]
왜 달라이 라마인가 / 탁효정

[ 기 획 ]  한국불교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경전에 나타난 이상적 지도자상 / 김응철
총무원장은 이런 인물이어야 한다 / 이학종
조계종 선거, 이대로 좋은가 / 정성운

[사색과 성찰]
간디의 나라와 만해의 나라 / 황규호
살생 / 강병균
은혜의 인과 / 오명철
거룩함과 코믹함은 종이 한 장 차이 / 임동숙
행복에의 의지 / 동시영
한국불교의 사대주의에 대하여 / 박정진
부유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 / 이경
돈은 국가에 요구하라 / 김경호

[ 열린논단 ] 
한국 종교의 정치 종속성과 불교의 미래 / 김성철

[ 북리뷰 ]
일아 편역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 조준호
마츠모토 시로 저, 이태승 외 역 《티베트 불교철학》 / 양승규
성열 스님 저 《고따마 붓다》 / 황순일

 

::: 2009년 가을호 제40호  ::: 
 
[ 권두언 ]
무엇이 불교를 위한 길인가 / 석길암

[ 불교평론 창간 1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 문명사적 대전환, 불교가 대안인가
기조발제: 문명사적 전환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불교와 서양의 대화를 통하여 / 이도흠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와 열린 공동체
우리 시대의 공동체에 대한 불교적 모색 / 박병기
‘사성제’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
고통의 유형, 기원, 치료법, 의미에 대한 불교와 정신분석 관점 비교 / 이창재
자아중심적 세계에서 연기와 공의 불교적 세계로 / 조은수
불교와 마르크시즘의 동몽이상(同夢異床) / 유승무
탈현대철학의 도일성과 차이의 늪에서 벗어나기
희론(戱論)을 경계하고 참 진리를 참구하라! / 박치완
진화론과 뇌과학으로 조명한 불교 / 김성철

[ 특 집 ]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폴틸리히의 철학적 신학과 불교 / 김경재
불교와 화이트 헤드 / 김상일
다석 신학 속의 불교 / 이정배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 논 단 ]
창조주의와 진화론의 논쟁에 비추어 본 불자의 과학관
다윈의 진화론 150주년에 부쳐 ― / 정윤선
선과 하이데거의 현존재 / 이승훈
《님의 침묵》 판본(板本)과 본문 비평 / 김용직
자비에 대한 동서 문화간 인식의 차이 / 이  준

[ 집중 탐구 ]
왜 틱낫한인가 / 진현종

[사색과 성찰]
관심(觀心) / 오세영
극과 극의 사유 / 윤창화
라다크, 다람살라, 그리고 백담사 / 이경철
불교문화 운동의 지향점 / 이영근
비명(碑銘)을 생각하는 날 / 임연태
겨울을 기다리는 소나무 / 전보삼
일상에서 행복 찾기 / 지혜경

 불교평론 편집부

2021/03/22

08 실상사 도법, 정토회 법륜 스님의 경우 / 정웅기 불교평론 2008

실상사 도법, 정토회 법륜 스님의 경우 / 정웅기 < 인터뷰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실상사 도법, 정토회 법륜 스님의 경우 / 정웅기

기자명 정웅기
입력 2008.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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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승가를 기다리는 세상 속을 걷다

1. 글을 시작하며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오랜 세월 ‘은둔의 종교’로 여겨져 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0여 년 전만 해도 그랬다. 해방 이후 현대사에서 기독교계가 활발한 사회구제사업을 펼치던 것에 비해 불교의 사회참여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이런 평가는 당연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이 지난 지금 불교계의 사회참여는 큰 폭으로 약진했다. 물론 양적으로 아직 기독교계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사회복지나 환경운동 같은 시민사회 영역에 있어 불교계의 참여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고도성장은 또 하나의 고민을 불교계에 던지고 있다. 닫힌 빗장을 열고 사회로 나서자마자 예전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내재한 많은 모순들이 숨김 없이 세간에 공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 운영에 있어 전근대적 기제들, 이를테면 사회일반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비공개적이고 은밀한 운영방식, 비구니에 대한 성차별과 비구 중심의 독단적 교단운영, 문중을 가장한 패거리주의와 같은 전근대적 요소들은 최근에만도 여러 사건으로 외화됐다.

여기에 소비, 경쟁, 개발과 같은 세속적 요소들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무소유와 공동생활이라는 불교 전통 역시 상실 위기를 맞고 있다. 그렇다고 사회참여의 손길을 거두고 세상을 향해 다시 빗장을 잠그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아직도 열악한 사회참여를 더 확대하는 것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또 시민사회 일반의 상식에 준거한 교단운영의 체계와 전통을 세워, 전근대성과 세속화도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

두 가지 과제를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교단의 처지에서 중생을 위해 봉사하는 삶으로 국민대중의 지지를 얻고, 이러한 실천을 통해 교단이 나아갈 바를 몸으로 개척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도법(道法), 그리고 법륜(法輪) 스님은 21세기가 시작된 불교계에서 이런 삶을 사는 대표적인 인사들로 꼽을 만한 이들이다. 이들은 세간이 개발과 소비의 물신숭배에 흠뻑 젖고, 교단마저 그 뒤를 좇아가고 있는 현실을 불교적 가치와 사유로 해석하고, 개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표적 사회참여론자들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이들을 비평하는 글을 쓰기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두 사람의 세계를 보는 탄탄한 안목도 그렇거니와 10년이 넘게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왔고, 현재도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이제 갓 활동 초년병인 필자가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도법과 법륜이라는 두 인물의 삶과 실천이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고, 불교사회참여의 오늘과 내일을 조망하기에 충분한 재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단과의 관계에서 이들의 운동 궤적을 살펴보는 데는 긍정과 부정의 양 측면이 존재한다. 교단 안팎에서 이미 공인하고 있듯이 두 사람의 왕성한 활동은 불교사회참여의 사상과 방법의 개발에 있어 그 해법을 풍부히 제공해 왔다. 이를 둘러봄은 한국불교 사회참여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또 하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회참여를 둘러싼 당대 교단의 현주소를 이들의 삶을 통해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교단은 오히려 이들의 활동에 질곡이 되고 멍에가 된 적이 많았고, 이들의 삶에 대한 교단 밖의 절대적 호의와 달리 교단 내 질시와 비난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문제 역시 짚어져야 할 것이다. 이들의 삶을 통해 교단의 현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가고자 하는 지향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2. 붓다의 삶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여기는 사람들

우연이었을까. 두 사람의 행적을 좇다 보니 제일 먼저 오버랩되는 것이 법명(法名)이었다. 이름 뜻대로만 본다면 도법(道法)은 ‘이 시대 부처님의 정법이 나아갈 길’이며, 법륜(法輪)은 ‘정법을 위해 굴려가야 할 법의 수레바퀴’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지어진 이름대로 살고, 또 이름대로 살면 잘 살았다고 하는데, 이런 격언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두 사람에게도 꼭 들어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법 스님은 주로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적 해법, 즉 길을 제시하는 데 골몰해 온 이다.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나 귀농운동처럼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적 시각과 대안 제시 같은 사상적인 영역이 두드러진다. 이에 비해 법륜 스님은 북한난민돕기, 환경운동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분야에 매진해 왔다. 그가 굴리는 법륜은 아주 견고하고 충실하여, 치밀하게 세상을 훑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이들은 수행자로서 삶뿐만 아니라 사회참여의 동기 역시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으로부터 찾는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사회를 해석하며, 진정한 깨달음은 중생의 안락 위에 가능하다는 대승불교의 전통에 누구보다 충실하고자 한다. 또 부처님 당시의 교단이 결사공동체에서 출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과 회향을 함께하는 공동체 운동, 결사운동에서 출발하여 그 공과를 회향하고자 해왔다.

교단 내에서 점하는 위치와 처지는 다르지만 작금의 교단을 보는 시각 역시 비슷했다. 소비주의와 물량주의와 같은 교단의 병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물론, 오랫동안 한국불교의 전통인 양 행세해 온 호국불교, 중생의 삶에서 멀어진 채 유유자적하는 선(禪)전통에 대해서까지 이들은 단호한 비판적 자세를 잃지 않는다.

물론 역으로 두 사람에 대한 교단 내 비판도 만만치는 않다. 도법 스님은 그가 주도적으로 수습한 98년 종단사태를 두고, 감정적 비판을 서슴지 않는 그룹이 존재하며, 법륜 스님 역시 비구계 수지 문제 등을 들어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결과적으로 교단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보다는 질곡으로 다가서는 경우가 많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할수록 질시와 비난의 목소리도 잦아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의 일차적 원인이 교단 내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문제의 해결 역시 철저히 본인들의 몫일 뿐이다. 주관적 판단의 개입이 불가피하지만, 이 문제도 짚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3. 도법―소비주의문명에 정법의 칼을 들어라!

몇 년 전부터 도법 스님이 사는 남원 실상사는 한국사회 대안운동의 근원지로 주목을 받아 왔다. 최근에만도 지리산 살리기 시민연대가 주관해 온 지리산 댐 백지화 반대운동, 한국전쟁에서 죽어간 좌·우익 영령을 위한 지리산위령제가 열려 뉴스의 초점이 됐고, 또한 IMF 경제위기를 전후하여 개설한 귀농학교, 올 봄 개설한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까지 큰 사회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올해에만도 주요 일간지·월간지들이 모두 도법 스님과의 인터뷰기사를 크게 할애해 게재할 정도로 불교를 향한 세간의 이목은 실상사와 주지 도법 스님에게 향해 있다.

도법 스님은 1949년 제주생이고, 열여덟 살 때 김제 금산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월주 스님이다. 69년 해인사 강원을 나와 87년 금산사 주지를 맡을 때까지 15년간 주로 선원에서 정진했다. 초발심 시절, 그에게 화두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도 산문을 나서지 않고 내친 뒤 이에 대한 도반의 비판을 들으며 생겨난 좌절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고 한다.1) 그 뒤 그는 ‘인연의 철학’ 연기(緣起)에 깊이 매달렸다.

그처럼 연기를 강조하는 사람은 절집 안에서도 찾기 드물다. 그는 우주를 하나의 큰 그물로 보는 인드라망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돕는 생명의 길을 걷자고 주창한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화엄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화엄경》에 대한 그의 애정과 천착은 각별하다.2) 그는 《화엄경》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화엄학림을 세우고 운영하는 일을 금산사에서 시작한 이래 근 20여 년 동안 이를 위해 노력해 왔다.

금산사에서 시도한 화엄학림은 별 무위로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95년 실상사에 세운 화엄학림은 지금까지도 화엄학을 연찬하는 학승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 그의 화두는 늘 화엄의 철학을 교단과 사회에 투영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화엄 근본주의자’ ‘화엄 지상주의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출가사문을 인드라망 그물코의 중심으로, 또 이 시대 살아 있는 부처님이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가 펼친 90년대 활동은 궁극적으로 출가승단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비구결사체 선우도량 만들고 이끌어

도법 스님의 활동이 교단 안팎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승가개혁운동 결사체인 선우도량(善友道場)이 창립되면서부터다. 교단 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행풍토의 회복을 제1과제로 내걸었던 선우도량은 91년 창립부터 98년까지 매년 두 차례씩 총 14차례의 ‘수련결사’를 열어 승풍진작을 통한 교단개혁의 이론과 방법을 모색했다.3) 그는 승가대중의 결사체가 근본적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결사를 통해서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불교의 혜명을 계승하며 교단의 승풍을 진작시키고 사회역사 미래의 문제를 책임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면 그 방향은 분명해지리라. ……그러므로 지금의 결사 방향은 개인의 출가정신을 확고히 하고, 교단의 승풍을 신선하게 하며, 사회 역사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책임질 수 있는 사상체계를 확립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91년 8월 〈선우도량 창립선언문〉 중에서)

도법 스님의 지론은 94년 종단개혁을 통해 실험 계기를 맞게 된다. 94년 당시 그는 개혁회의 상임부위원장직을 맡아 개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와 선우도량은 이 과정에서 종헌·종법 개정, 교육원 별원, 교육개혁안 성안 등 주로 승가개혁 쪽에 힘을 쏟았다. 이에 따라 ‘승가교육개혁안’이 통과되고 교육원이 별원이 됐고, 기본교육 재교육 등 승려교육에 필요한 여러 제도들이 그가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마련됐다.

94년 개혁회의의 활동은 ‘종단 현대화 민주화의 전환점’이었다는 긍정적 평가와 ‘권력상층부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여전히 엇갈린다. 그에게는 개혁작업의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종단의 관리나 운영 부문을 위한 제도의 틀을 좀더 낫게 만들었지만, 종교의 바탕인 사상과 정신의 차원에서 한치도 진전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4) 95년 선우도량 수련결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94년 종단개혁활동은 개혁주체의 불교사상과 정신의 신념, 불교적인 개혁내용, 현실적인 방법 등에 대하여 조직적이고 체계 있게 챙기고 준비하지 못했음을 느꼈다. 종단개혁운동의 미흡 원인으로는 △제한된 시간 △개혁주체 역량의 미흡 △불교대중의 자주화 의식과 역량 부족 △종단역학 관계에서 힘의 부족 △개혁추제 역량의 한계 △타성에 젖은 종단풍토 등이었다. (〈종단개혁의 반성적 점검과 한국불교의 창조적인 미래〉《선우도량》 95년 7호)

그는 개혁회의가 해산한 직후 자신의 은사인 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을 뒤로 하고, 실상사로 내려갔다. 그리고 4년 만인 98년 폭력으로 점철된 종단사태가 발생했다. 종단사태는 그의 종단 내 위치와 역할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또 한편으로 수행자 도법에게는 큰 아픔을 준 사건이었다. 그는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3선공방과 총무원 청사 점거 등이 세계인의 이목을 끌 때, 분란의 와중에서 98년 조계종 총무원장 권한대행에 임명됐고,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에 선출되어 종권을 인계할 때까지 사태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했다. 후일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종단사태의 한복판에 서서 일을 수습하려고 했을 때, 부처님의 사상과 정신, 수행자의 이상과 신념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싸움에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하는 한낱 싸움꾼의 모습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며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행을 잘못한 것인지, 수행력이 부족한 탓인지,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인지, 사태의 한복판에 서서 우왕좌왕하며 떠밀려 가고 있는 남루하고 초라한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 피눈물이 났지만 현장의 큰 흐름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마음의 정리를 하였다.5)

월주 스님의 임기 마지막 날 전격적으로 권한대행에 임명된 그는 결국 공권력의 투입에 의해 종단을 정상화시킨 주역이 되어야 했다. ‘폭력을 잠재우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을 사용했다’는 비법적 현실은 공권력을 투입하여 종단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과 함께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6) 최근 해인사 대불을 둘러싼 사건에서도 확인되었듯이 도법 스님이 갖는 교단 안팎의 높은 신망에 반하여 반대자들의 음해성 공격 역시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도 사실은 여기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가 일부 반대자들의 악성비난처럼 적어도 시류와 상황에 따라 처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오래 전부터 교단활동에 있어 지극히 원칙적 입장을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90년 월간 《해인》에 발표한 글에서 “교단 문제를 풀어 가는 데 있어 원칙도 없이 법·비법을 가리지 않는 적당한 타협주의가 교단의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한 바 있고, 94년 종단개혁 당시부터 종헌·종법이 오늘날의 청규로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종헌 종법에 의한 교단운영을 중시했다.7)

실상사 근거지로 대안운동 이끌어

98년 종단사태 이후 도법 스님은 실상사를 근거지로 한 대안운동과, 공동체 운동의 전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실상사에는 귀농자들에 대한 전문 교육을 실시하는 귀농전문학교를 비롯하여 농장공동체, 작은학교 등 대안운동의 실험적 영역들이 하나둘 개척하고 있으며, 99년 9월에는 불교대안운동 단체인 ‘인드라망 생명공동체’가 창립되어 활동중이다. 98년 개설된 불교귀농학교에 이어 실상사에 개설된 국내유일의 ‘귀농전문학교’는 99년 3월 실상사가 소유 농지 3만 평을 공동체 토지로 기증한 후 매년 봄·가을 두 차례씩 현재 6기까지 13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는 졸업생 가운데 7명이 실상사에 남아 공동경작하고 있다.

실상사 농장공동체는 사찰토지와 농사공동체의 첫 시도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올 봄에 만들어진 ‘작은학교’도 관심거리다. 현재 1학년생 15명이 8명의 교사와 함께 임시 콘테이너 박스에서 거주하며 다양한 체험과 살아 있는 교육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분야별 활동들은 모두 도법 스님이 상임대표로 있는 인드라망 공동체의 사업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실상사 공동체 운동은 지역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지역경제 활성화 사업과 생활협동조합을 매개로 한 도농공동체 운동, 나아가 지리산 권역 전체를 대상으로 넓혀가고 있다.8) 올 여름 지리산에서 산화한 좌우익 영령들을 위한 위령제를 연 것도 이의 일환에서였다고 한다. 실상사를 통해 그는 사찰이 소비주의문명에 찌든 사회를 바꾸는 생명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하고 있다. 화엄과 연기의 불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바꾸는 최첨병에 서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일을 하면서 기존의 비구 중심에서 사부대중에 의한 공동체 운동으로의 전환을 실험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98년 이후 그가 사부대중 공동체 운동을 주창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실상사에서 이를 실험하면서 구체화하고 있다. 실상사에는 지난해부터 사부대중 공동체 기획위원회가 설치되어 출·재가 대중이 모두 참여하는 산중좌담회와 산중법회를 운영중이다. 물론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어쨌든 선우도량을 중심으로 비구 중심9)의 종단개혁운동을 펼쳐 왔던 그가 사부대중에 의한 사찰운영을 적극 실험하고 있는 것은 큰 변화의 하나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98년 종단사태 이후 그의 종단 내 소임은 실상사 주지 외엔 따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단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거둔 것은 아니다.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문제제기와 우담바라 논쟁의 중심에 섰던 것이 최근의 대표적 사례다. 얼마 전 불교신문이 주최한 간화선 토론회에서 그는 “깨달음이 현실과는 다른 영역에서 신비의 존재처럼 인식되어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깨달음의 문제를 현재의 삶과 통일될 수 있도록 정립해 내지 않는 한 불교수행 집단의 모순과 혼란과 무능력과 방황은 해결되지 않는다.”고 꼬집으면서 실천 없는 수행풍토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최근 불교계의 이슈가 된 바 있는 ‘우담바라’에 대해서도 불법의 대의에서 벗어난 혹세무민에 불과하다고 공개비판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얼마 전 한 교계신문의 조사 결과 가장 존경받는 스님으로 꼽힐 정도로 교단 안팎에서 지대한 역할을 점하고 있다.

4. 법륜 스님― “좌든 우든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본질”

울산 출신으로 경주에서 자란 법륜 스님은 일찍부터 포교활동에 원을 세워 불교에 투신했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절에 들어간 후 불교학생회 일에 뛰어들 때까지만 해도 불교에 심취한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겠지만, 교육과 포교에 대한 열정은 그때부터 남달랐던 것 같다.

77년 경주에 영남불교 교육원을 설립하였고, 82년 조계종 포교사가 된 이래 포교 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뉴욕, L.A. 등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그는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후 82년부터 불국사에서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불국사 포교당에서 인권문제 같은 것을 이야기하다 사찰로 모종의 압력이 들어와 못하게 됐고, 경주시내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던 때였다고 한다. “어느 날 사시예불을 모시고 있는데 불우한 상이군인 한 사람이 법당으로 들어왔다. 절에 중이 되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한 자여! 여기 부처님께서 마련하신 좋은 안식처가 있으니 여기로 오십시오.”라고 써놓았던 홍보전단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빨리 보낼 수 있을까, 다른 절을 소개해 줄까 궁리만 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나는 헌신적으로 일하는 법사다’라는 아상이 깨어짐을 느꼈다고 한다.10)

그 일이 있은 후 83년부터 대불련 상임법사로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는 출가 전이었고, 최석호 법사로 알려져 있던 때다. 그 해 10.27 법난 명예회복운동을 벌이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84년 봉천동 소림선원에서 5명의 도반과 함께 결사정진을 시작했다. 지금도 많은 초심자들이 읽는 《실천적 불교사상》이 이 해에 발간되었고, 보다 체계적인 불교교육을 위하여 중앙불교교육원(85년)을 설립한 이후 88년 홍제동에 정토포교원 개원을 시작으로 한국불교사회교육원(불교환경교육원의 전신), 민족불교학당, 한국불교사회연구소 등을 잇따라 설립했다.

아직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어본 적이 없지만 그의 행적을 알아 가면서 대단히 경이로웠음을 먼저 고백하고 싶다. 연구소 설립이나 월간지의 창간, 결사의 진행 등은 불교는 물론 당시 일반인들보다 몇 발 앞선 선구적인 일이었다. 개척자적 자세는 91년 그가 도문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고 출가승려의 길로 접어든 이후 더욱 활기를 더했다. 아직까지도 정식 비구계 수지 여부로 그에게 마땅찮은 시각을 보내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에 굴함 없이 승려 법륜으로서 더욱더 많은 일을 해냈다.

일찍이 93년 만일 결사를 시작하면서 공동체 운동을 시작했고, 이즈음 이미 불교환경운동론을 정립하고 단체를 만들어 불교와 환경운동의 접목을 시도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가 일찍부터 해외에 눈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94년부터 인도 둥게스리에 불가촉 천민을 위한 학교를 설립한 이래, 외국인 노동자 돕기·조선족 돕기, 스리랑카·태국 등 국제참여불교 단체·실천가들과의 교류, 북한 난민 돕기·몽골 빈민 돕기까지 국제활동은 해마다 그 폭이 넓어지고 있다. 많은 국제불교단체, 지도자들과 그는 깊은 연관을 맺고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미국과 독일 등 서구의 대학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 정도로 그의 국제적 명성은 높다.

‘정토회’ 중심으로 활발한 사회활동 펼쳐

법륜 스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토회다. 정토회는 환경교육원, JTS, 좋은 벗들과 같은 사회참여기구를 움직이는 모집단이자 공동체이다. 서울 서초동 정토회관에 가면 1백여 명의 상근자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접할 수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속한 기구의 활동업무 외에 정토회관에서 생활과 수행을 함께 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다. 
정토회 구성원들은 
△일과 수행의 통일 
△대중 주체의 공동체 실현 
△전인류적, 전지구적 운동의 전개 
△정보의 공유 
△무보수 자원활동 등을 약속하고 공동체 생활의 청규를 지키며, 수행과 사회활동에 참여한다. 

정토회는 농촌에 있는 생산공동체는 아니지만 사적 소유를 줄이고 사회적 회향을 중심에 두면서, 그 내적 동기와 룰을 불교신앙과 전통에 의지하고 있는 순수 종교공동체의 특성을 겸비하고 있다. 그 지향은 중생에 대한 헌신을 제일명제로 하는 이상적 인간형 ‘보살’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이란 그의 시에 그의 생각하는 보살의 상이 그려져 있다.

…(전략)
다만 현재에 집중하라
깨어 있으라
순간순간 깨어 있는 사람
보살이라네

잘못한 줄 알아서 뉘우치고
틀린 줄 알아서 고치며
모르면 물어서 알아보는 사람
천하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리

날이면 날마다
언제 어디서나
이대로 좋은 사람
바라는 바 없는 사람

배고픈 이에게는 양식이 되고
병든 이에게는 양약이 되고
목마른 이에게는 감로수가 되고
길잃은 이에게는 길잡이가 되리니
괴로운 사람 하나 없는 세상을 만든다네

그 이름도 아름다운 이
깨달은 사람, 보살
그가 사는 세상
정토(淨土)11)

정토회 같은 작은 공동체가 많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인류라는 최대의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법륜 스님의 공동체론이다. 그는 “소비자 협동조합이든, 생산협동조합이든, 몬드라곤 형태의 공동체이든, 아니면 수행공동체이든, 유기농법 공동체든 일단은 공동체가 곳곳에 만들어지고 그 안을 완전한 민주주의로, 그리고 정보가 완전히 열려 있는 사회로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이 모든 작은 공동체는 인류공동체라는 큰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의 공동체처럼 닫혀버리면 절대 근본적인 모순을 풀 수 없다. 공동체 안에서는 자기를 버리는데, 공동체 밖에서는 자기들의 이익을 보려고 하는 생각이 닫힌 생각을 낳는다. 이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인류 대안으로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12)

그는 국내에서 불교와 환경운동의 구체적 접목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다. 철저히 연기적 시각에 기초해 주로 교육사업을 펼쳐 온 불교환경교육원은 국내 최고의 환경전문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10년 동안 이미 1천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생태학교는 물론이거니와 국내에서 환경운동을 하는 젊은 활동가들 가운데 이곳을 안 거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불교적 환경교육의 산파역을 담당해 왔다.

10년전부터 기아-질병-문명 퇴치 국제운동 펼쳐

국제활동도 활발하다. 91년 설립된 국제민간구호단체 (사)제이티에스는 부처님의 나라 인도를 향해 뛰어들어13) 93년 인도현지에 법인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천대받는 불가촉천민이 모여사는 비하르주 둥게스리 마을에 학교를 설립한 이후, 주변 15개 마을에 무료진료와 지역개발 사업을 계속 진행중이다. 제이티에스는 미국과 중국에도 설립되어 있는데, 97년에 설립한 중국지부의 경우는 나진·선봉 탁아소 및 유치원 어린이 결연사업 등 북한주민과 난민을 위한 구호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연변지방에서 난민구호활동을 벌이던 이 단체 활동가 4인이 중국정부로부터 간첩혐의로 추방을 받는 등의 사건도 있었을 정도로 주목받으며 활동폭을 넓히고 있다. 국제구제사업에 참여하는 그의 논리는 단순명쾌하다. 그는 “사는 게 기적인 사람들, 기아·질병·문맹 상태에 처한 12억의 최극빈층에겐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잘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전생에 죄가 많아서 업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도 그들의 인연이라고 불자들이 지나치는 현실은 연기에 대한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아와 질병, 문맹 상태에 있는 극빈층 20%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

법륜 스님의 경우 교단문제에 대해 일체 개입하지 않는 방침을 오랫동안 고수해 왔다. 98년 종단사태가 터졌을 때처럼 특정 사안에 대해 정토회 소속 일부 단체가 참여하기는 했지만, 특히 교단 내 분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침묵해 왔다. 여기에는 비구계 수지 여부를 둘러싼 조계종단의 배타성이 원인으로 작용했겠지만, 오히려 이것보다는 법륜 스님 개인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14) 결과적으로 교단문제에 거리를 둠으로써 대사회활동에 보다 충실할 수 있었고, 이것이 결국 정토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5. 두 사람의 공통적인 세계관은 ‘연기의 철저한 적용’

약간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 있지만, 활동 스타일 역시 두 사람의 법명대로 독특하다. 실무자만 100여 명에 달하는 정토회를 이끌고 있는 법륜 스님은 굉장히 꼼꼼하고 치밀한 일처리, 왕성한 활동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면 도법 스님은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일엔 적극성이 덜하고, 또 구체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실무자들에게 맡기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활동영역과 스타일 등 전반적인 평가에 있어 길을 제시하는 역이 도법 스님이었다면, 활동영역을 개척해 온 철두철미한 실천은 법륜 스님 몫이었던 것 같다.

스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 사회참여를 이끌고 있는 두 사람이 한국불교에 던지는 메시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두 사람은 모두 

첫째, 연기(緣起)를 강조하여 ‘만 생명은 하나’임을 현실에서 줄기차게 적용하려 한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알고 보면 언제나 다른 사람의 고통과 맞물려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 위에서 자신의 행복을 쌓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공통된 주장이다.

둘째, 보살행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대승불교 전통을 계승하여 보현행으로 보리를 이루려 하는 ‘이보현행오보리(以普賢行悟菩提)’에 철저하다. 이들에 있어 보현행은 깨달음 그 자체이자, 자신의 깨달음을 현실에 드러내는 징표이다.

셋째, 붓다의 정신에서 멀어진 교단을 바로잡으려 한다. 도법 스님은 일찍이 90년 9월 월간 《해인》에 발표한 글을 통해 “언젠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시던 원로 스님이 이 정도는 내가 타고 다녀야 안 되겠나.” 하는 모습을 보며 교단이 붓다의 가르침에서 멀어졌음을 통감했다고 밝힌 바 있고, 나아가 법륜 스님은 오늘의 교단은 불교도의 이상을 담보하는 그릇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요소인 면이 많다고 주장한다.

넷째, 잘못된 교단 전통에 대해서 극복하려 한다. 교단의 세속화와 물량주의에 대한 배격과 신랄한 비판은 물론이고 ‘호국불교’와 ‘선이’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적 상징도 예외 없이 비판의 시각을 거두지 않는다. ‘호국불교’가 한국불교의 생존을 위한 일탈의 마취제였고, 선이 이를 치유하는 신비스런 영약으로서 부정적 측면이 있다 했을 때 두 사람의 활동은 공히 이 두 가지 전통의 부정적 측면에도 결별을 시도해 왔다.


6. 교단 현실 직시하고 개혁운동 포기 말아야

불교 사회참여의 길을 개척해 온 대표적 인사에 대해 경험이 일천한 필자가 언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교단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여론을 전하는 차원에서라도 언급할 필요성이 있을 듯싶다. 처지의 차이 때문에 법륜 스님보다는 도법 스님에 더 많이 해당하는 주문사항이겠지만 설혹 근거 없고 악의적일지라도 그조차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도법 스님은 

첫째, 교단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우담바라’ 소동이나, 간화선의 현재 풍토에 대한 도법 스님의 비판은 적절한 시점에서 이뤄진 용기 있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잘못은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는가이고, 나아가 이러한 문제들이 대중공사를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건강한 풍토 속에 풀려갈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특히 근래 들어서 교단 내에서는 무엇이든지 비판을 해도 정치적 배경과 색채로 제단하는 경향이 심각해졌다. 누구는 아무개 상좌, 누구는 어떤 배경으로 이 문제를 활용하고 있다는 식의 생각이 만연하다. 도법 스님은 이러한 교단의 악폐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겠지만, 역으로 이제는 이러한 왜곡이 가능한 구조를 스스로부터 남김없이 던지고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일례로 날로 심해 가는 문중이기주의와 같은 구조적 병폐에서 도법 스님 스스로 더 자유로워져야 교단 내 공감은 배가될 것이다.

둘째, 교단개혁의 열망을 놓지 말아야 하며, 개혁에 대한 원론적인 언급을 넘어 이제는 현실적인 개선점을 찾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도법 스님은 ‘부처님다운 승가상’을 확립하는 데 매진하였고, 이러한 사고에 기반하여 승가교육개혁에 집중하였던 것을 대중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승가의 정체성 확보가 쉽지 않았음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교단이 사회와 밀접해지면서 사회의 지배적 가치―소비주의와 무한경쟁 같은 자본주의적 생활양식―는 교단에 더 깊이 투영되고 있는데, 이런 상태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자는 주장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지언정 많은 이들이 따라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단문제의 핵심을 ‘승가 개혁’이라고 봤다면 이에 걸맞는 현실적 대안들을 내어놓는 데 적극 나서는 것이 과거나 지금이나 타당한 접근법일 것이다. 승가개혁이 잘되지 않았다면, 여기엔 다음과 같은 근본적 이유들이 도사리고 있다. 은사와 문중이 보잘 것 없어서 당장의 생계와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스님들이 종단에는 그렇지 않은 스님들보다 많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적 안정을 위해 이왕이면 큰 절의 주지직을 맡기 원하고, 주지로 재임하는 기간에 가급적이면 노후대비까지 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면 불사 위주의 사찰운영에 치우치는 등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부인할 수 없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개선할 것인가.

어떤 이는 “중노릇만 잘하면 걱정없다. 무능한 이들의 변명이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런 정도로 풀릴 문제가 아님은 자명하다. 사상과 정신의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을 점차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삶의 문제를 개선하지 못하는 정신과 사상의 강조가 공허해지는 것을, 그래서 결국 많은 대중들이 가치를 포기하고 생존의 문제에 얽매임을 역사와 현실은 이미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단의 현실을 점차적으로 개선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98년 99년 폭력사태에 대해서는 재발방지를 위해서라도 좀더 과감하게 자기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당시의 폭력사태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한 것은 불교정보센터와의 최근 인터뷰인데, 이 인터뷰에서 도법 스님은 “98년과 99년 폭력사태는 종헌종법과 종단의 정체성 수호라는 측면에서 분명히 본질이 다른 것이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또 98년 공권력을 투입하여 종단을 정상화시킨 것과, 99년 사법부 판결에 대한 저항 역시 다른 차원이라고 말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98년과 99년은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인해 그것이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이다. 최근의 해인사 선방 수좌들의 실상사 폭력에 대해서 21일 동안의 단식참회 기도는 저간의 사정을 지켜본 필자에게도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구조화된 폭력을 막을 수 있는 힘은 비폭력을 견지할 수 있는 정신이다. 특히 상대방이 폭력을 가해 올 때 그때를 제대로 견뎌야만 비폭력의 정신과 기운은 확산된다. 도법 스님 역시 지난해 한 교계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에서 달라이 라마를 예로 들며 이를 언급한 바 있다. 폭력의 순간에 비폭력의 정신을 견지하지 못했다면 이조차 자신의 문제로 여겨 털어놓고 ‘내 탓’임을 주장하는 것이 진정으로 폭력을 이기는 길일 것이다. 평화와 비폭력의 정신을 한층 성숙시켜 혹시 아직도 스님을 원망하고 있는 대중들이 있다면, 이들조차 진심으로 포용하기를 바란다.

넷째, 일부중이든 이부중이든 승가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을 부탁하고 싶다. 실상사에서 사부대중공의로 사찰운영을 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또 가장 모범적인 사찰로 일궈가기를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이 운동과 더불어 승가운동의 늦춰졌던 고삐도 다시 당기는 게 필요하다. 현 교단의 상황에서 파급력이나 영향력이 당분간 높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는 사부대중운동과 별도로 건강한 스님들이 결사와 공동체의 정신으로 교단을 바꿔가려는 노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참여불교재가연대는 교단자정센터라는 일을 하면서 마치 승려 전체에 대한 감시기구로 비치는 것을 적이 두려워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아니 왜 우리 출가승려들이 재가자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라며, 새로운 승가운동의 기운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교단문제를 풀어가는 핵심은 누가 뭐래도 출가승단이다. 도법 스님은 승가운동결사체인 선우도량을 결성하여 근 10여 년 동안 교단문제에 대해 깊은 연구와 실천력을 보인 바 있지만 98년 이후부터 선우도량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

필자는 도법 스님이 ‘이 시대의 부처님’인 출가사문의 공동체와 결사운동을 다시 시작하여 과거 운동의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은 극복해 가는 새 승가운동을 하루빨리 다시 시작했으면 한다. 건강한 재가운동과 건강한 출가운동은 수레의 양 바뀌와 같아야 하고, 두 바뀌가 제대로 굴러갈 때 교단은 진보한다.


7. 대중의 삶에 한 발 다가서는 공동체 운동을 기대하며

법륜 스님은 도법 스님과 교단 내 처지가 현격히 다르다. 83년 비상종단에 참여한 경험이 있지만, 94년 종단개혁운동은 물론이고, 98년 종단사태 등 종단문제에 대해서는 소속단체 일부가 이름을 내건 것을 제외하곤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비구계 미수지 문제이지만, 이면에는 교단의 배타성이 깔려 있다.

얼마 전 법륜 스님을 모 사찰로 초청하여 수련프로그램을 진행하려 했는데, 사중 소임자 일부가 반대하여 장소를 바꾼 적이 있다. 특히 비구승 중심의 배타성이 강한 이들은 지나치게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솔직히 필자는 비구계를 단일계단에서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조계종 승적이 있니 없니 하는 문제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승적을 만들고, 계첩을 나눠준 것이 교단 통제의 일환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활동에 호감을 가졌던 일부 스님들이 94년 개혁회의 출범 이후, 또 96년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하던 때, 이 문제를 풀어보기 위하여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극단적인 교단 내 비토세력의 존재로 결국 무산됐다.

물론 법륜 스님 본인도 이 문제를 풀려는 적극성이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종단이나 법륜 스님 본인에게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열쇠를 쥐고 있는 종단의 지도부는 이 문제를 대승적으로 판단하여 오히려 법륜 스님의 활동성과를 종단 내로 수렴코자 나서야 할 것이다.

법륜 스님에게는 정토회라는 공동체를 한 단계 더 열린 문명운동, 문화운동, 대중운동의 공동체로 성숙시켜야 할 과제도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정토회가 대외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위상과 활동력은 구성원들의 높은 헌신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활동 초기 공동체 건설을 위해 천막에서 거주하는 것도 마다 않았고, 지금도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위해 개인 생활을 기꺼이 희생하는 누구보다 헌신적인 그룹이다. 그러나 일정하게 제 위상을 확보한 지금은 역으로 구성원들의 헌신성이 보다 폭 넓은 대중성 확보에 장애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법륜 스님의 소신처럼 하루 24시간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가정과 직장, 여가와 같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고, 또 ‘보살’의 길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삶 터에서 일상적인 생활불교운동의 영역을 개척해 가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삶을 서원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한 평범한 소시민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평범한 소시민과 공동체는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풀어냈을 때 정토회의 공동체 운동은 대중의 삶을 바꿔가는 문명 운동으로 승화될 터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많은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공동체에 머무르고 만다.

8. 끝맺으며―이젠 교단이 그들의 삶에 화답해야

두 사람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회참여론자이면서 동시에 교단개혁가들이다. 이들의 활동에 열렬히 반응하는 것은 교단 밖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일등포교사라 해도 손색 없다. 이제 뒤늦게나마 그 반응은 교단 내로, 불자 대중에게로 메아리쳐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감동하고, 함께 나서는 사람들은 불자이거나 불교적 삶의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교단에서 출발했고, 한 사람은 아예 바깥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차이가 있지만 종착역은 같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고 있다.

이제 10여 년 이상 자신의 영역에서 사회참여의 길을 개척해 온 그들의 삶에서 교단은 중생구제의 이론과 방법을 배워야 하고, 이를 교단 전체로 확산시키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또 교단은 그들의 삶에 불교적 가치와 교단 내 지위를 부여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사사로운 이해를 갖고, 근거 없이 비방하거나 끌어내리려 하지 말고, 비판하되 육성하고 장려하는 자세로 그들의 활동의 장점이 교단 내로 온전히 수렴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깨달음과 중생 구제가 둘이 아님을 실천해 온 두 사람의 삶과 실천에 이젠 교단이 화답해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