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홍인식.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홍인식. Show all posts

2021/10/27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3) - 예장뉴스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 - 예장뉴스
치유 화해 생명
NCCK/연합기관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승인 2015.03.27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홍인식 목사 : (장신대를 졸업하고 현대교회에서 목회)
- 파라과이 국립 아순시온 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ISEDET 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 신학대학 교수 역임.
- 현재, 멕시코 장로교 신학대학 교수.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이후 한국에는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치만 우리가 거기서 배울 것과 극복할 것이 무언지를 알려면 우선은 잘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카토릭교회의 사회복음(사회선교)의 근거와 배경에 대하여 일부 카토릭 신학자들로 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침 우리 동문가운데 해방신학을 전공한 홍인식 목사(멕시코 장신대 교수)가 있어 개신교 학자의 눈으로 본 해방신학을 소개받으려고 합니다. 이 원고는 홍인식 교수가 “지금여기” 라는 신문사로 부터 의뢰를 받아서 집필한 것을 저자와 신문사의 허락을 받아서 다시 연재를 하게 됩니다.

지난 8월 교종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종교와 종교 지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아마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첫째는 그의 문화적 배경이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인이다. 특히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문화는 무엇보다도 그의 친밀성과 삶의 단순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교종의 행위는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의 독특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신학적 배경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인정되는 해방신학자는 아닐지라도 그의 신학적 배경에 해방신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하면 그의 파격적인 행동을 신학적 행위로 간주할 때 그것을 우리는 해방적 신학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한국에서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은 주목해 볼 만한 현상이다. 그것을 단지 교종의 한국 방문으로 인한 일시적인 분위기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교회(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하여)가 해방신학에서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에 대한 소개를 하려고 한다.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해방신학을 변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해방신학에 대한 편견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이 오늘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회와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현재도 그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는 해방 신학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는 그런 의미에서 절실하다. 레네 파댜(Rene Padilla 라틴 아메리카의 통전적 선교학의 대가)에게 데이튼 로버츠(Dayton Roberts)가 물었다. “만일 당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해방신학과 관련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한다면 당신을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 파댜는 이 질문에 “바울의 답변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1데살 5,21-23)”라고 확신을 가지고 답변하고 있다. 해방신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먼저 나의 해방신학과 얽힌 사연과 그리고 해방신학과의 만남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나의 해방신학과의 만남
나를 잘 알고 있는 어떤 분이 나에 대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지면을 통하여 나를 잘 소개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그 글에 댓글이 달렸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을 한 사람이라.....”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번은 한국의 대도시에 있는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에 응했다. 그리고 마지막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면담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가진 자, 그리고 높은 사람들을 위한 목회가 아니라 소외되고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교인들을 위한 목회를 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을 한다. “해방신학을 하셨네요....” 나는 답변했다. “바로 해방신학이 나로 하여금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자리를 향한 목회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교회 담임목사 청빙에 실패했다.

내가 해방신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2년 파라과이에서였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나의 눈에 한 책의 제목이 들어왔다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당시 파라과이는 극심한 군사독재의 학정 밑에서 민중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억압을 받고 있었다. 암울한 시절에 나는 ‘벗어남’에 상당히 목말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해방, 그것은 얼마나 시원한 단어였던지! 주저 없이 책을 구입하고 단숨에 읽어 나갔다. 그 책이 바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었다. 스페인어 원어의 제목은 “해방신학: 그의 전망에 대하여”였다.

구티에레스의 저서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때의 희열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후 나는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91년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갔다. 파라과이에서 2년 정도를 선교사로 사역한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단했다. 정보를 탐색해 본 결과 아르헨티나에 이세뎃(ISEDET)이라는 개신교 해방신학의 산실인 신학대학이 있었고 거기에 후일 나의 스승인 되신 고 호세 미게스 보니노(Jose Miguez Bonino) 박사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아르헨티나로 날아가서 그의 집을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고 그 후 아르헨티나로 거처를 옮겨 이세뎃에서 미게스 보니노 선생님의 지도로 해방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82년 우연히 시작되었던 해방신학과 나의 인연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해방신학과의 만남은 나의 삶을 변화시켰고 나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의 길이 무엇인가를 늘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해방신학이 나의 삶에 있어서 주홍글씨로 남아 많은 경우 어려운 일과 오해도 겪기는 했지만 해방신학은 나의 삶에서 전환점을 마련해 준 신학이다. 이제 몇 번에 걸쳐서 독자들과 함께 해방신학을 향한 여행길에 나서고자 한다.

해방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건과의 연계성일 것이다.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는 극심한 이농현상을 경험한다. 많은 농촌인구가 대도시로의 유입했다. 이러한 현상으로 대도시 내에 대규모 빈민촌이 급격히 형성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사역의 현장에서 그들은 많은 질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 그리고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해방신학이 태동하게 되는 상황이 형성된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삶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성찰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문제를 가슴에 품고 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해방신학은 역사의 현장과 그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해방신학이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Colombia, Medellin)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에서 발표된 문서와 1971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의 저서, '해방신학'의 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해방신학의 역사는 그의 본격적인 시작을 위한 훨씬 이전의 역사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오늘의 해방신학 이야기를 해방신학의 태동을 전제로 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언급할 것이다.

해방신학을 낳은 두 가지 사건
첫 번째는 1511년 12월 21일 도미니코회 안토니오 몬테시노(Antonio Montesino) 신부의 강론이다. 안토니오 신부는 신대륙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인디오들의 고통과 아픔에 민감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펼쳐나가게 된다. 안토니오 신부를 비롯한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신부들은 신대륙에서 벌어지는 인디오들에 대한 학살과 착취 현장을 목격하고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사역을 펼치게 된다.

그는 1511년 12월 21일 대림절 제4 주간의 강론에서 요한복음 1장 23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라고 규정하면서 강론을 시작한다. "여러분들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악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죄 없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행한 폭행과 잔악한 행위로 말미암은 죄 속에서 살고 있고 그 죄로 인하여 죽고 말 것입니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권리와 정의로 순진한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고 잔악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무슨 권한으로 평화롭고 순전하게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이들을 향하여 전쟁을 하고 그들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이 일을 계속한다면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안토니오 몬테시노 신부의 강론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를 감동하게 만들었고 그 후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오’라고 부르던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자행한 학살과 참상을 고발하고 ‘그들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는 인간’임을 선포한 예언자로 살아갔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안토니오 몬테시노 신부와 라스 카사스 주교가 선택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우선적으로 다시 선택했던 신학적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화형당하는 아투에이 추장.(사진 출처=de.wikipedia.org)

두 번째는 아투에이(Hatuey) 추장 사건이다. 아투에이는 에스파뇰라 섬(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의 타이노(Taino) 부족의 추장이었다. 그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섬에 쳐들어오자 부족 사람들을 결집시켜 용맹스러운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잘 훈련된 스페인 군인들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의 부족은 전멸하게 되고 그는 수백 명의 남은 타이노 부족 사람들과 함께 쿠바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스페인 정복자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고 1512년 2월 2일 결국 그는 사로잡혀 화형을 당한다.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 그는 스페인 가톨릭의 종군 신부로부터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갈 것”을 제의 받는다. 잠시 생각한 후에 그는 신부에게 되묻는다. “여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는 나의 가족을 겁탈하고 그리고 나의 온 재산을 빼앗고 가축들을 탈취해 간 이 군인들도 천국을 가는가?” 신부는“당연히 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천국에 간다.”라고 답변한다.

아투에이는 즉시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이들이 없는 지옥이 바로 천국이다.”라는 말과 함께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아투에이의 사건을 해방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Luis Rivera Pagán, "A violent evangelism: the political and religious conquest of the Americas",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2.) 이 같은 아투에이의 천국과 구원에 대한 이해를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첫 번째 신학적 해석행위라고 간주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아투에이와 같이 거대한 권력과 힘 앞에 쓰러져가면서도 당당하게 저항의 정신을 놓치지 않고 살아갔던 억눌리고 가난하고 착취당하던 민중들의 의식과 행위[praxis]를 오늘의 상황에서 되살린 신학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관련기사]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2)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편집위원 | oikos78@msn.com

승인 2015.03.23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2)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1968년 메데인 주교 회의 뒤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해방신학은 많은 선구자의 적극적인 헌신을 통하여 점차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앙과 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게 된다. 본 글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의 선구자들, 특히 제1세대 신학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선구자들의 신학은 학문의 세계를 넘어서서 삶의 고난의 현장과 직접 연결됨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더욱 더 큰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하다. 본 글에서는 이 선구자들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간결하게 소개할 것이다.

1.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28년 페루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1년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해방신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의 문제는 가난의 현실을 조장하고 있는 불의한 사회체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장악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이러한 구티에레스의 사회적 분석적 생각이 가톨릭교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가 해방신학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박해하게 된 것은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의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하자"는 주장이다. 성서의 해석권은 오직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해방신학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용납될 수 없었다.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은 유럽의 진보신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유럽의 전통적인 진보신학과 해방신학의 차이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신적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신학사이의 정치적 결별을 의미한다. 이것 없이 온전하게 해방신학을 이해 할 수 없다. 해방신학은 지금까지 역사의 부재자로 살아갔던 가난한 사람들의 전망에서 신학을 하자는 주장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의 신학적 질문은 "지금까지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또 그 사랑이 우리 모두를 형제자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선포할 수 있느냐" 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오늘 신학의 문제는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통하여 지금까지 역사의 주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을 역사적 해방의 주체로 인식하며 신학을 하는 것이 해방신학의 정체성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2. 후벵 아우베스(Ruben Alves)
후벵 아우베스는 브라질 장로교 소속 목사다. 그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하여 당시의 주류 신학의 신학적 언어에 대해 비판하면서 새로운 신학방법론을 제시했였다. 그는 1970년 출간된 “종교, 아편 혹은 해방의 도구인가?”라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근간으로 한 저서와 같은 해 발표한 “신학의 재건 프로그램을 위한 단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신학언어에 대한 비평을 출발점으로 하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새로운 경험을 분석한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이 경험하고 있는 저개발과 종속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으로 출발하여 후벵 아우베스는 새롭게 등장하는 신학의 언어를 정치적 인간주의적 언어(Political Humanism)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까지의 신학언어는 초월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역사와 반대되거나 혹은 역사를 넘어서는 초월적이며 추상적인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서 오직 초월의 세계만을 향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존재이기에 역사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존재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적 초월성은 '미래창조'를 향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변혁을 위한 부름은 "저 너머 세계의 성격"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초월성은 역사적 성격을 지녀야 하며 신학은 최종적으로 인간을 향하여 존재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변혁 안에서 그의 미래를 형성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 같은 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개신교 특히 장로교 내에서 매우 급진적이며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급기야 장로교 목사직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브라질 장로교 내에서 설교를 금지 당했다. 해방신학자로서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는 이 땅위에서의 정의 실현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하느님, 영혼, 구원, 그리고 영원의 세계는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브라질 장로교 목사로서 해방적 새로운 신학 언어를 전파하던 그는 2014년 7월 8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3. 레오나르두 보프(Leonardo Boff)


▲ 레오나르두 보프.(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보프는 1928년 브라질 콩코르지아에서 태어난다. 그는 1959년 박사학위 취득 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간다. 그는 60권 이상의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미국과 유럽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학 명예교수다. 그는 1984년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저서를 출간한 이후 그 내용으로 인하여 바티칸에 불려간다. 그리고 그는 신앙교리성의 재판을 받게 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당시 보프는 수백 년 전 갈릴레이가 재판 받을 당시 앉았던 의자에 앉아서 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재판에서 일 년간의 저서 출간 금지와 교수 금지라는 침묵의 징계를 받는다. 국제여론에 밀려 침묵의 징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 한다. 그럼에도 교황청은 지속적으로 보프를 탄압하고, 이에 그는 1992년 사제직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사제직을 던지면서 세계의 모든 친구들에게 보낸 공개서한 "해방여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전쟁을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참호만을 바꾸는 것이다. 투쟁은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현재 보프는 생태신학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리우데자네이루 시 근교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해방신학과 생태신학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계속하고 있다.

4. 호세 콤블린(Jose Comblin)
콤블린은 1923년 벨기에서 태어난다. 그는 1947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1950년 로바이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1958년 라틴아메리카 대륙으로 사목의 현장을 옮긴다. 그는 2011년 사망하기 전까지 칠레와 브라질에서 사목을 이어간다. 그는 1970년대 해방신학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 스스로가 해방신학자로서 라틴아메리카 신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콤블린은 1958년 사제가 부족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사목활동을 할 것을 당부하는 당시 교종 비오 12세의 요청에 따라 브라질로 간다.

▲ 호세 콤블린.(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그는 처음에 캄피나스 지역에서 교수로서 그의 사목을 시작하는데 곧 바로 가톨릭 청년노동 사목에 참여한다. 그는 칠레로 이동하는 1962년까지 그곳에서 머물며 도미니코 수도회의 신학교에서 가르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중에 후일 해방신학자로 활동하게 되는 프레이 베토와 프레이 티토가 당시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을 칠레에 머문 뒤 1965년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헤시피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다시 브라질로 돌아온다. 그의 해방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군사정부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당했으며 결국 그는 1971년 체포되어 추방당한다.

브라질 군사정권에 의해 추방당한 그는 그 뒤 7년을 칠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그러나 또 다시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의해서 칠레에서도 추방당하는 탄압을 당한다. 1979년 브라질로 다시 돌아온 그가 체류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입국하였기 때문에 매번 3개월마다 인접국가로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하면서 활동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헤시피의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협력자로서 활동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평생의 삶을 바친 철저하며 진정한 해방신학자였다.

평상시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는 2011년 88살의 나이로 브라질 북부지방의 기초공동체를 방문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바로 그 순간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콤블린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산 해방신학자다.





===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3)해방신학과 의식화 교육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승인 2015.05.11 


해방신학과 의식화 교육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3)

파울루 프레이리


오늘은 해방신학 세 번째 이야기로서 잠시 해방신학의 탄생에 관한 역사적 관찰을 중지하고 해방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에 대하여 두 번에 걸쳐 알아보려고 한다.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는 누구인가?
그는 브라질 북부 지역인 헤시피(Recife)에서 1921년 9월 19일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 다섯 형제들과 매우 화목하고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의 부모는 그와 그의 자녀들을 매우 신앙적으로 양육했으며 십자가는 그의 어린 시절에 매우 강력한 상징으로 남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헤시피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그 후 1960년 헤시피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62년 페르남부쿠 주 교육청 상담관으로 일하던 그는 1964년 그의 급진적인 교육학으로 인하여 교육청에서 해임되고 살해 위협 속에서 볼리비아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지인 볼리비아에서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그는 또 다시 칠레로 망명한다. 그는 칠레에서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거주하는데 그 시기에 칠레 교육부 농촌개발원의 상담 고문과 유네스코의 고문관으로 재직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제네바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교육학을 가르친다. 1970-79년에는 유럽으로부터 방금 독립한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국의 교육 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신생국가의 교육 시스템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준다. 1977년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인 브라질로 귀환한 그는 계속해서 그의 해방 교육을 가르치고 실천한다. 1989년, 그는 상파울루 시 교육청장으로 재직한다. 그는 1997년 4월 10일 마지막 저서인 “자아결정의 교육학”을 발간하고 같은 해 5월 2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프레이리의 저술이 처음으로 나오게 된 당시는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었던 시절이다. 그 시절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사이에서 “계급투쟁”이 점차 힘을 얻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프레이리의 교육학에서 주장하는 이론과 또 그것이 정치 사회 신학과 교육에 미쳤던 영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전 이해는 필수적이다.

라틴아메리카의 1960대와 70년대는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61),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1962, 쿠바), 좌익 계열의 노동조합의 형성과 발전, 좌익 정당의 출현,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의 증대는 당시의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고무된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인 민중운동에 대한 견제와 반발로서 케네디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발전을 위한 연합 계획”이 시작되었음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계획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정치, 교육 발전을 위하여 괄목할 만한 경제, 금융 지원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첫째는 전통적 지주에게 집중된 토지와 권력의 분산과 지역 농업의 상업적 성장을 위한 토지 개혁에 대한 지원이다. 두 번째는 수입 확장과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의 진출을 통한 공업의 발전과 다양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실현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배구조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쿠바 혁명 등으로 민중정치에 대한 꿈이 현실로 점차 드러나자 전통적 지배계층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군사반란을 통한 집권을 통하여 구질서의 회복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으로 이러한 전통적 지배계층의 움직임은 라틴아메리카 민중운동의 확산에 자극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지금까지 “침묵의 문화”에 젖어 있었던 잠자는 민중을 깨우기 위한 교육 방법론에 눈을 뜬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교육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적 교육에 반하여 교육을 해방적 실천과 연결시키고 있는 프레이리의 교육학적 제안은 당시의 민중운동가들과 진보적 교육가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프레이리의 교육학이 억압 받는 자, 잊혀진 자를 교육의 주체자로 삼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 1960년대와 70년대의 라틴아메리카는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의 탄생과 수용에 있어서 매우 적합한 시대적 환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 정치, 사회, 경제적 현실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은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진보교육계에서는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정치 상황과 더불어 프레이리의 해방 교육학의 형성과 발전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 1959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1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촉발된 가톨릭교회 내부의 변화 움직임은 프레이리의 교육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로 인하여 1968년 메데인에서 개최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교육의 목적에 있어서 획기적인 주장을 한 프레이리의 교육학을 상당 부분 채택한다. 초기 해방신학의 형성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학이 미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프레이리 교육학의 내용을 언급할 것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하나님 ‘떠나라’ 목소리 들릴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하나님 ‘떠나라’ 목소리 들릴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하나님 ‘떠나라’ 목소리 들릴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등록 :2021-10-10 
조현 기자 

[짬] 자전 에세이 펴낸 홍인식 목사

지난해 순천중앙교회 담임을 사퇴하고 목회 현장을 은퇴한 홍인식 목사가 지난 6일 인터뷰에서 자전적 신앙고백서 <엘 까미난떼>를 쓴 이유를 말하고 있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
홍인식(65) 목사는 밝고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이사장으로서 차별금지법 폐지를 주장해도, 보수 목사들조차 명랑한 그의 얼굴을 보면 험한 말을 접기 일쑤다. 인생 대부분의 시기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멕시코, 한국 등을 떠돌며 산 방랑자의 낭만과 자유와 여유를 대하면 상대방도 완고한 무장이 해제되기 마련이다. 최근 스페인어로 ‘걷는 자’란 뜻의 책 <엘 까미난떼>(신앙과지성사 펴냄)에서 명랑한 겉모습과 달리 아픈 어린 시절까지 고백한 그를 지난 6일 서울 공덕동의 한 교회 카페에서 만났다.
스페인어 걷는 자 ‘엘 까미난떼’ 출간
부모 이혼·더부살이·남미 이민 등
성공·부자 갈망했던 성장기 아픔 첫 고백
한국인 최초 ‘해방신학’ 박사학위 받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등등
10차례 ‘꽃방석’ 자리 버리고 자유롭게
신앙과지성사 제공
-
홍 목사는 20대 때 신학대학원생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했던 영락교회에 전도사로 들어갔다. 이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주목받던 한인교회에서, 50대엔 서광선 이화여대 교수·한완상 서울대 교수·이삼열 숭실대 교수 등이 활동했던 서울 압구정동 현대교회에서, 올 초까지는 전남 순천의 장자교회인 순천중앙교회에서 각각 목회 활동을 했다. 그는 그런 ‘꽃방석’을 언제나 임기나 정년도 채우지 않고 박차고 나갔다. 지위에도 돈에도 매이지 않고 언제나 떠났다. 그쯤은 놓고 떠나도 뭔가 유복한 뒷배경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가 생애 처음으로 <엘 까미난떼>에서 고백한 삶은 ‘유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만 7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짐을 싸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아빠 집으로 옮겼다. 엄마 집을 떠나는 차에서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리며 조약돌로 표시도 해놓지 않았는데 어떻게 엄마 집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길을 잃지 않으려 뇌리에 박았던 창 밖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아빠가 새엄마와도 이혼해 다시 짐을 쌌다. 옮긴 곳은 아빠를 ‘오빠’라 불렀으나 혈육은 아닌 ‘고모’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더부살이 5년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비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20일간 등교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전교 1·2등을 했지만 학교에서 쫓겨나던 날의 설움과 모욕감을 잊을 수 없다. 그는 고교 2학년 때 어머니·누나·여동생과 함께 파라과이로 농업 이민을 떠났다. 가난을 벗어나려 고국을 떠나는 날, 너무도 울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도 기어코 성공해서 가난에 보복하겠다는 마음만은 굳건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파라과이에서 고교를 다니며 옷행상과 옷가게를 했고, 아순시온국립대학 경영학과에서 성공과 부자의 꿈을 키웠다.

그런 그가 한국인 최초의 ‘해방신학’ 목사가 됐다. 해방신학은 혼자 잘 사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1960년대 이래 남미에서 독재자들과 다국적기업의 부도덕에 맞서 로메로 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를 낸 게 해방신학이었다. 그래서 해방공간 북에서 공산당에 의해 박해받고 남하해 친미·친독재의 길을 걷던 월남자들이 세운 영락교회를 비롯한 주류 교회의 보수적 크리스천들에 의해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비롯한 진보는 ‘빨갱이’로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북한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땅과 재산을 빼앗기고 남하한 아버지를 둔 그가 영락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해방신학자가 되리라곤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홍 목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방신학과 달리 마치 성령론자처럼 고백했다. 파라과이 한인교회의 환송을 받으며 “목사가 되어 다시 남미로 돌아오겠다”고 했던 그는 1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형교회인 영락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교인들을 심방할 때마다 신자들이 여비 봉투를 줘서 주머니는 늘 두둑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짝사랑했던 여성과 결혼해 ‘토끼 같은’ 아이들까지 생겼다. 가난한 파라과이로 돌아간다는 약속 같은 건 곧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미아리 산동네에서 할머니 권사가 봉투도 없이 꼬깃꼬깃한 5천원 지폐를 주었다. 마지못해 받긴 했지만 ‘내가 거지인가. 이따위 적은 돈을 주다니’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 순간 머릿속에 뚜렷한 음성이 들렸다. ‘이가봇, 내가 너를 떠났다’는 성경 구절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소리에, 하나님이 아닌 봉투를 믿는 나를 발견하고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뒤 그는 짐을 싸 파라과이로 떠났다. 그곳에서 목회를 하다 몇년 뒤 아르헨티나로 옮겨 목회를 했다. 거기서 체 게바라의 친구인 세계적인 개신교 해방신학자 호세 미게스 보니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해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교수 겸 목사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잘 나가는 신성교회 담임을 할 때였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한인장로교총회에 참석했을 때 한 지인이 그를 처음 만나는 목사에게 “아르헨티나에서 온 홍인식 목사님입니다”라고 소개했다.

“‘내가 그냥 목사인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 목사고, 박사에 교수까지 하고 있는 성공한 목사라고 소개해야지, 그따위로 소개하다니’란 생각에 불쾌해하며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다시 ‘떠나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신성교회를 떠나 남미에서도 가장 열악한 공산국가 쿠바로 가 5년간 신학대학 교수를 했다. 이후 칠레에서도, 서울 현대교회에서도, 멕시코 신학대에서도, 전남 순천중앙교회에서도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다. 무려 10차례 뒤돌아보지 않고 ‘엘 까미난떼’가 됐던 그는 말했다.

“‘신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신을 믿느냐’가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돈, 지위, 이데올로기, 명예를 믿은 건 아닌지…. 남미에서 평생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와 함께하며 군부 독재자에게 죽임까지 당하는 해방신학자에 비하면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14602.html#csidx437a30502bac4d28b0e97a62be9b3f1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영웅에서 벗어나기) / 홍인식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영웅에서 벗어나기) / 홍인식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영웅에서 벗어나기) / 홍인식
사건과 신학 2021. 10. 1. 12:07








홍인식(NCCK 신학위원,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영웅’이라는 단어는 많은 경우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영웅’은 우리 삶의 모델이기도 하며 목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영웅’들을 요구하였고 또한 그들을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영웅’을 세우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만들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영웅의 역사라고 불러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우리의 역사는 수많은 영웅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성경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영웅 이야기’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가 교회교육을 통하여 성경에 대해 배운 것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영웅’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성경 지식이 ‘영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노아를 건너 아브라함을 거친다. 이삭과 야곱 그리고 마침내 요셉의 이야기에 도달한다. 꿈꾸는 자, 요셉은 모든 학부모의 기도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모세, 그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사울이라는 ‘영웅’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절대 따라서는 안 될 ‘영웅’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사울에 비해 다윗은 어떠한가? 다윗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큰 영웅’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처럼 큰 ‘영웅’들에 의해 지배되었고 ‘영웅’은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영웅’은 우리의 삶에 의미와 에너지를 제공해 준다. ‘영웅’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영웅’ 없는 시대는 상상할 수 없고 또 다른 의미에서 ‘영웅’ 부재 현상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아직도 ‘영웅’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나는 얼마 전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민중들을 위해서 일하고 싸운다고 한다. 그런데 남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변하거나 나아진 것은 없다. 오직 남는 것은 소위 ‘영웅’들뿐이다. 슈바이처는 ‘영웅’으로 남아 있지만, 아프리카 토착민의 삶은 여전하다. ‘영웅’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지하철 타고 출근하면서 문득 객차 안 창가에 걸려있는 한 ‘영웅’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천사는 더 천사 되고 밥 얻어먹는 사람은 오늘도 밥을 얻어먹고 산다.”

‘영웅’은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그런데 화려한 ‘영웅’이 사라진 뒷자리는 어떠한가? ‘영웅’이 이끌어 온 역사는 어디를 향하여 흘러갔는가? 나는 수십 년을 라틴아메리카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실천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해왔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신학운동이다.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델린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해방신학은 70~80년대를 지나면서 혹독한 박해와 시련에 시달리며 수많은 순교자를 양산한 ‘탄압받는’ 신학의 대명사였다. 억압적이고 불의한 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순교자(영웅)들이 나타났다. 순교자뿐인가? 이름만 들어도 우리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학자들을 배출했다. 20세기에 출현한 신학 중에서 해방신학보다 더 많은 순교자와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신학운동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해방신학이 출현한 지 50년이 넘은 이 순간에 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50년 전부터 가난은 고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명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희망조차 완벽하게 사라진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 해방신학자로서의 고민이 있다. 해방신학의 영웅들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해방신학이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면서 시작되었고 또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과 구원의 주체 세력을 인정하고 있지만, 과연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주체적인 위치에서 그들의 역사적 위력을 발휘하였는가는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도 단 한 번도 가난한 사람들이 역사적 주체로서 힘을 발휘한 적이 없다.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독립은 스페인 귀족의 후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역사가 ‘영웅’ 이야기로 변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영웅이 필요할까?

최근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몇몇 유력 후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 후보들은 한결같이 청년세대들을 위한 정책을 발표한다. 위기에 처한 젊은 세대들을 구원(?)할 사람은 오직 자신 만이라고 강조한다. 이들의 정책과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이 청년세대를 위한 영웅이 되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영웅) 자신을 선택한 (젊은)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영웅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젊은이들은 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오늘도 젊은이들이 영웅에 열광하고 있을까?

오늘의 상황에서 영웅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첫째는 우리는 영웅을 찾고 그를 보면서 위안을 갖는다. 어떤 면에서 영웅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사회가 바라보고 있는 영웅은 대체로 소비적인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운동선수, 연예인 그리고 성공한 전문가들의 면면은 소비적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영웅들은 고소득과 높은 인기 그리고 세련된 일상과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환상과 꿈은 막연하다. 오히려 그것은 장 보드리야르(프랑스어: Jean Baudrillard, 1929~2007)가 지적했던 《치명적인 전략》 (Stratégies fatales, 1983)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면서 상품을 지위, 품위를 상징하는 기호(記號)로 받아들인다. 기호와 소비는 개별적인 욕구를 넘어서 사회의 욕망체계를 반영하며 우리는 그 안에 매몰되고 결국현실은 시뮬라크르 현상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제 시뮬라크르는 실재보다 더 실재가 된다. 이 영웅들은 현실 변화에 관한 비전을 빼앗아 버린다. 영웅은 젊은이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가상의 현실’ 안의 ‘가상의 나’로 만든다. 소비적 영웅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꿈을 빼앗는다. 치명적 전략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영웅으로부터 벗어남이 아닐까?

두 번째로 오늘의 소비사회에서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소비적 영웅에 의한 가상현실에 매몰되어 가는 오늘의 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또 다른 형태의 ‘영웅 찾기’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의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기후위기로 전 우주적 파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의 인류사회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는 삶을 사는 작은(?) 영웅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영웅들은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작은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서 적은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작은 영웅들을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영웅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지칠대로 지치고 희망을 상실해 가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내 주변에는 어떤 영웅들이 있을까를 살펴보자. 그리고 희망과 용기를 갖고 미래를 향하여 오늘의 삶의 발걸음을 내디뎌 보자.

그러나 결국 삶의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진정한 영웅을 찾아 그를 따라 나서는 것도 좋겠지만 오히려 영웅을 넘어서 ‘나 자신’을 찾는 ‘영웅 벗어나기’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시뮬라크르를 극복하고 온전한 현실에 근거하는 삶의 세계를 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영웅에서 벗어나서 내자신 안에 있는 진정한 영웅을 발견하게 만들지 않을까?

좋아요1
공유하기
글 요소구독하기

2021/10/25

“해방신학 이야기”(홍인식 목사, NCCK 인권센터 이사장)

(2) Facebook
“해방신학 이야기”(홍인식 목사, NCCK 인권센터 이사장)
가나안교회 특강 현대신학 시리즈로 오늘은 홍인식 목사님으로부터 “해방신학 이야기”를 들었다. 홍 목사님은 다음 두 책, 《해방신학 이야기》와 《엘 까미난떼. 남미에서 해방자 예수와 함께 걷다》의 저자이시다. 다음은 이야기를 요약하면서 글쓴이가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추가한 부분도 있다.(듣고 메모를 한 것이라 명사에 오기가 있을 수 있음)
신앙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되며, 성경도 읽는 방법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해방신학은 하나의 방법이다. 그 방법은 관점, 행하는 자가 처한 삶의 상황, 사회적 배경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의해 생겨난다. 인식은 관심에 의해 주도되는 인식인바,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들의 해방에 대한 관심에 방점이 찍힌다. 전통신학이 가진 자의 신학이라면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들의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서 출발한다.
해방신학은 제2차바티칸 공의회(1962-65년) 이후 두 차례 진행된 라틴아메리카주교회의(1968년 메델린과 1979년 푸에블라회의)와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1973)을 언급하는데 사실 16세기 콜롬부스의 정복전쟁 시부터 시작된 것이다.
1)관점의 전복
스페인 군이 도미니카와 쿠바를 점렴했을 때 타미노 추장과 아또웨이 추장이 차례로 화형을 받게 되었다. 종군신부는 화형식을 거행하기 전 세례받기를 권면했다. 추장은 세례받으면 무엇인 유익한지를 물었다. 신부는 죽어서 천당 갈 수 있으며, 형벌이 감형되어 산채로 화형시키지 않고 일단 숨을 끊어놓고 화형한다고 했다. 추장은 또 물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인디오들을 죽인 저 옆에 나열된 스페인 병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신부는 그들도 세례를 받았으니 죽으면 천국 간다고 했다. 추장은 나는 너희들이 가는 그런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의연하게 화형을 당했다. 그렇다, 천당은 처한 경험과 관점에 따라 아주 다르다. 그들만을 위한 천당이 있는 것이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천당은 없다.
2)해방신학은 고난의 신학이다. 해방 투쟁의 전선에서 목숨을 잃은 신부들이 부지기수다. 오스카 로메로와 7명의 신부, 돔 헬더 까마라.... 파블로 리차드의 고난
1511년 12월 21일 마지막 대림절 강론에서 도미니크 수도회의 안토니오 몬테시모 신부는 스페인이 어떤 권리로 라틴 아메리카를 침략하고 약탈하며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는지 심가갛게 물었다. 읽은 본문은 요한 1:23 –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그 이후 도미니크 수도회는 라틴아메리카 선교에서 배제되었다고 한다.
3)가난한자들에게서 배운다.
한 신부가 브라질 오지의 아주 가난한 동네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교회 박으로 나오자 교회당 저 구석에 한 여인이 세 어린아이를 안고 앉아 있다. 석양 무렵이어서 멀리서 볼 때 빛과 풍경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다. 가까이 접근하니 젖을 빨리는 젊은 엄마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가슴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데 어린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빨다가 흐르는 피를 먹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어린 아이를 펠리컨처러 자기 몸을 먹이로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서 미사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도대체 무엇인가?
4)성경을 가난한 자들의 경험을 통해 새롭게 읽는다.
①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가난의 현실에서 서너 명의 남자들이 애를 놓고 아내를 버리고 떠난 여인의 경험과 일치한다.
②달란트 비유(마 25장)는 성공지향적 경제체제의 관점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한 달란트도 겨우겨우 유지하기 어려운 착취가 자행되는 노동자의 체험에서 읽혀져야 한다.
③열처녀의 비유도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가 소통하고 서로 돕는 이야기로 재구성되어 읽혀져야 한다.
"이 세상 재화가 결핍된 상태의 가난은 그 자체로 볼 때 엄연한 악이다"(메델린 문헌 제 14장, <교회의 가난>)
홍인식 목사님은 화해와 전환의 의미를 담은 한국적 상황에서 해방신학을 토착화한 화전(和轉)신학 연구소 개소를 준비하신다고 한다.
Hyun Ju Kim, Paul Dongwon Goh and 84 others
7 comments
5 shares
Like
Comment
Share

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