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떠나라’ 목소리 들릴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등록 :2021-10-10
조현 기자
[짬] 자전 에세이 펴낸 홍인식 목사
지난해 순천중앙교회 담임을 사퇴하고 목회 현장을 은퇴한 홍인식 목사가 지난 6일 인터뷰에서 자전적 신앙고백서 <엘 까미난떼>를 쓴 이유를 말하고 있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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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65) 목사는 밝고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이사장으로서 차별금지법 폐지를 주장해도, 보수 목사들조차 명랑한 그의 얼굴을 보면 험한 말을 접기 일쑤다. 인생 대부분의 시기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멕시코, 한국 등을 떠돌며 산 방랑자의 낭만과 자유와 여유를 대하면 상대방도 완고한 무장이 해제되기 마련이다. 최근 스페인어로 ‘걷는 자’란 뜻의 책 <엘 까미난떼>(신앙과지성사 펴냄)에서 명랑한 겉모습과 달리 아픈 어린 시절까지 고백한 그를 지난 6일 서울 공덕동의 한 교회 카페에서 만났다.
스페인어 걷는 자 ‘엘 까미난떼’ 출간
부모 이혼·더부살이·남미 이민 등
성공·부자 갈망했던 성장기 아픔 첫 고백
한국인 최초 ‘해방신학’ 박사학위 받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쿠바 칠레 등등
10차례 ‘꽃방석’ 자리 버리고 자유롭게
신앙과지성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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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목사는 20대 때 신학대학원생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했던 영락교회에 전도사로 들어갔다. 이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주목받던 한인교회에서, 50대엔 서광선 이화여대 교수·한완상 서울대 교수·이삼열 숭실대 교수 등이 활동했던 서울 압구정동 현대교회에서, 올 초까지는 전남 순천의 장자교회인 순천중앙교회에서 각각 목회 활동을 했다. 그는 그런 ‘꽃방석’을 언제나 임기나 정년도 채우지 않고 박차고 나갔다. 지위에도 돈에도 매이지 않고 언제나 떠났다. 그쯤은 놓고 떠나도 뭔가 유복한 뒷배경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가 생애 처음으로 <엘 까미난떼>에서 고백한 삶은 ‘유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만 7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짐을 싸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아빠 집으로 옮겼다. 엄마 집을 떠나는 차에서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리며 조약돌로 표시도 해놓지 않았는데 어떻게 엄마 집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길을 잃지 않으려 뇌리에 박았던 창 밖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아빠가 새엄마와도 이혼해 다시 짐을 쌌다. 옮긴 곳은 아빠를 ‘오빠’라 불렀으나 혈육은 아닌 ‘고모’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더부살이 5년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비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20일간 등교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전교 1·2등을 했지만 학교에서 쫓겨나던 날의 설움과 모욕감을 잊을 수 없다. 그는 고교 2학년 때 어머니·누나·여동생과 함께 파라과이로 농업 이민을 떠났다. 가난을 벗어나려 고국을 떠나는 날, 너무도 울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도 기어코 성공해서 가난에 보복하겠다는 마음만은 굳건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파라과이에서 고교를 다니며 옷행상과 옷가게를 했고, 아순시온국립대학 경영학과에서 성공과 부자의 꿈을 키웠다.
그런 그가 한국인 최초의 ‘해방신학’ 목사가 됐다. 해방신학은 혼자 잘 사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1960년대 이래 남미에서 독재자들과 다국적기업의 부도덕에 맞서 로메로 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를 낸 게 해방신학이었다. 그래서 해방공간 북에서 공산당에 의해 박해받고 남하해 친미·친독재의 길을 걷던 월남자들이 세운 영락교회를 비롯한 주류 교회의 보수적 크리스천들에 의해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비롯한 진보는 ‘빨갱이’로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북한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땅과 재산을 빼앗기고 남하한 아버지를 둔 그가 영락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해방신학자가 되리라곤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홍 목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방신학과 달리 마치 성령론자처럼 고백했다. 파라과이 한인교회의 환송을 받으며 “목사가 되어 다시 남미로 돌아오겠다”고 했던 그는 1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형교회인 영락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교인들을 심방할 때마다 신자들이 여비 봉투를 줘서 주머니는 늘 두둑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짝사랑했던 여성과 결혼해 ‘토끼 같은’ 아이들까지 생겼다. 가난한 파라과이로 돌아간다는 약속 같은 건 곧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미아리 산동네에서 할머니 권사가 봉투도 없이 꼬깃꼬깃한 5천원 지폐를 주었다. 마지못해 받긴 했지만 ‘내가 거지인가. 이따위 적은 돈을 주다니’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 순간 머릿속에 뚜렷한 음성이 들렸다. ‘이가봇, 내가 너를 떠났다’는 성경 구절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소리에, 하나님이 아닌 봉투를 믿는 나를 발견하고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뒤 그는 짐을 싸 파라과이로 떠났다. 그곳에서 목회를 하다 몇년 뒤 아르헨티나로 옮겨 목회를 했다. 거기서 체 게바라의 친구인 세계적인 개신교 해방신학자 호세 미게스 보니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해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교수 겸 목사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잘 나가는 신성교회 담임을 할 때였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한인장로교총회에 참석했을 때 한 지인이 그를 처음 만나는 목사에게 “아르헨티나에서 온 홍인식 목사님입니다”라고 소개했다.
“‘내가 그냥 목사인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 목사고, 박사에 교수까지 하고 있는 성공한 목사라고 소개해야지, 그따위로 소개하다니’란 생각에 불쾌해하며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다시 ‘떠나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신성교회를 떠나 남미에서도 가장 열악한 공산국가 쿠바로 가 5년간 신학대학 교수를 했다. 이후 칠레에서도, 서울 현대교회에서도, 멕시코 신학대에서도, 전남 순천중앙교회에서도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다. 무려 10차례 뒤돌아보지 않고 ‘엘 까미난떼’가 됐던 그는 말했다.
“‘신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신을 믿느냐’가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돈, 지위, 이데올로기, 명예를 믿은 건 아닌지…. 남미에서 평생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와 함께하며 군부 독재자에게 죽임까지 당하는 해방신학자에 비하면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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