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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승인 2015.03.27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홍인식 목사 : (장신대를 졸업하고 현대교회에서 목회)
- 파라과이 국립 아순시온 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ISEDET 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 신학대학 교수 역임.
- 현재, 멕시코 장로교 신학대학 교수.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이후 한국에는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치만 우리가 거기서 배울 것과 극복할 것이 무언지를 알려면 우선은 잘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카토릭교회의 사회복음(사회선교)의 근거와 배경에 대하여 일부 카토릭 신학자들로 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침 우리 동문가운데 해방신학을 전공한 홍인식 목사(멕시코 장신대 교수)가 있어 개신교 학자의 눈으로 본 해방신학을 소개받으려고 합니다. 이 원고는 홍인식 교수가 “지금여기” 라는 신문사로 부터 의뢰를 받아서 집필한 것을 저자와 신문사의 허락을 받아서 다시 연재를 하게 됩니다.
지난 8월 교종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종교와 종교 지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아마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첫째는 그의 문화적 배경이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인이다. 특히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문화는 무엇보다도 그의 친밀성과 삶의 단순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교종의 행위는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의 독특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신학적 배경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인정되는 해방신학자는 아닐지라도 그의 신학적 배경에 해방신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하면 그의 파격적인 행동을 신학적 행위로 간주할 때 그것을 우리는 해방적 신학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한국에서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은 주목해 볼 만한 현상이다. 그것을 단지 교종의 한국 방문으로 인한 일시적인 분위기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교회(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하여)가 해방신학에서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에 대한 소개를 하려고 한다.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해방신학을 변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해방신학에 대한 편견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이 오늘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회와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현재도 그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는 해방 신학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는 그런 의미에서 절실하다. 레네 파댜(Rene Padilla 라틴 아메리카의 통전적 선교학의 대가)에게 데이튼 로버츠(Dayton Roberts)가 물었다. “만일 당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해방신학과 관련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한다면 당신을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 파댜는 이 질문에 “바울의 답변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1데살 5,21-23)”라고 확신을 가지고 답변하고 있다. 해방신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먼저 나의 해방신학과 얽힌 사연과 그리고 해방신학과의 만남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나의 해방신학과의 만남
나를 잘 알고 있는 어떤 분이 나에 대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지면을 통하여 나를 잘 소개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그 글에 댓글이 달렸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을 한 사람이라.....”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번은 한국의 대도시에 있는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에 응했다. 그리고 마지막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면담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가진 자, 그리고 높은 사람들을 위한 목회가 아니라 소외되고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교인들을 위한 목회를 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을 한다. “해방신학을 하셨네요....” 나는 답변했다. “바로 해방신학이 나로 하여금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자리를 향한 목회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교회 담임목사 청빙에 실패했다.
내가 해방신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2년 파라과이에서였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나의 눈에 한 책의 제목이 들어왔다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당시 파라과이는 극심한 군사독재의 학정 밑에서 민중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억압을 받고 있었다. 암울한 시절에 나는 ‘벗어남’에 상당히 목말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해방, 그것은 얼마나 시원한 단어였던지! 주저 없이 책을 구입하고 단숨에 읽어 나갔다. 그 책이 바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었다. 스페인어 원어의 제목은 “해방신학: 그의 전망에 대하여”였다.
구티에레스의 저서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때의 희열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후 나는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91년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갔다. 파라과이에서 2년 정도를 선교사로 사역한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단했다. 정보를 탐색해 본 결과 아르헨티나에 이세뎃(ISEDET)이라는 개신교 해방신학의 산실인 신학대학이 있었고 거기에 후일 나의 스승인 되신 고 호세 미게스 보니노(Jose Miguez Bonino) 박사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아르헨티나로 날아가서 그의 집을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고 그 후 아르헨티나로 거처를 옮겨 이세뎃에서 미게스 보니노 선생님의 지도로 해방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82년 우연히 시작되었던 해방신학과 나의 인연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해방신학과의 만남은 나의 삶을 변화시켰고 나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의 길이 무엇인가를 늘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해방신학이 나의 삶에 있어서 주홍글씨로 남아 많은 경우 어려운 일과 오해도 겪기는 했지만 해방신학은 나의 삶에서 전환점을 마련해 준 신학이다. 이제 몇 번에 걸쳐서 독자들과 함께 해방신학을 향한 여행길에 나서고자 한다.
해방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건과의 연계성일 것이다.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는 극심한 이농현상을 경험한다. 많은 농촌인구가 대도시로의 유입했다. 이러한 현상으로 대도시 내에 대규모 빈민촌이 급격히 형성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사역의 현장에서 그들은 많은 질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 그리고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해방신학이 태동하게 되는 상황이 형성된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삶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성찰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문제를 가슴에 품고 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해방신학은 역사의 현장과 그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해방신학이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Colombia, Medellin)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에서 발표된 문서와 1971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의 저서, '해방신학'의 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해방신학의 역사는 그의 본격적인 시작을 위한 훨씬 이전의 역사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오늘의 해방신학 이야기를 해방신학의 태동을 전제로 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언급할 것이다.
해방신학을 낳은 두 가지 사건
첫 번째는 1511년 12월 21일 도미니코회 안토니오 몬테시노(Antonio Montesino) 신부의 강론이다. 안토니오 신부는 신대륙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인디오들의 고통과 아픔에 민감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펼쳐나가게 된다. 안토니오 신부를 비롯한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신부들은 신대륙에서 벌어지는 인디오들에 대한 학살과 착취 현장을 목격하고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사역을 펼치게 된다.
그는 1511년 12월 21일 대림절 제4 주간의 강론에서 요한복음 1장 23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라고 규정하면서 강론을 시작한다. "여러분들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악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죄 없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행한 폭행과 잔악한 행위로 말미암은 죄 속에서 살고 있고 그 죄로 인하여 죽고 말 것입니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권리와 정의로 순진한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고 잔악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무슨 권한으로 평화롭고 순전하게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이들을 향하여 전쟁을 하고 그들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이 일을 계속한다면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안토니오 몬테시노 신부의 강론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를 감동하게 만들었고 그 후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오’라고 부르던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자행한 학살과 참상을 고발하고 ‘그들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는 인간’임을 선포한 예언자로 살아갔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안토니오 몬테시노 신부와 라스 카사스 주교가 선택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우선적으로 다시 선택했던 신학적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화형당하는 아투에이 추장.(사진 출처=de.wikipedia.org)
두 번째는 아투에이(Hatuey) 추장 사건이다. 아투에이는 에스파뇰라 섬(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의 타이노(Taino) 부족의 추장이었다. 그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섬에 쳐들어오자 부족 사람들을 결집시켜 용맹스러운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잘 훈련된 스페인 군인들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의 부족은 전멸하게 되고 그는 수백 명의 남은 타이노 부족 사람들과 함께 쿠바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스페인 정복자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고 1512년 2월 2일 결국 그는 사로잡혀 화형을 당한다.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 그는 스페인 가톨릭의 종군 신부로부터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갈 것”을 제의 받는다. 잠시 생각한 후에 그는 신부에게 되묻는다. “여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는 나의 가족을 겁탈하고 그리고 나의 온 재산을 빼앗고 가축들을 탈취해 간 이 군인들도 천국을 가는가?” 신부는“당연히 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천국에 간다.”라고 답변한다.
아투에이는 즉시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이들이 없는 지옥이 바로 천국이다.”라는 말과 함께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아투에이의 사건을 해방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Luis Rivera Pagán, "A violent evangelism: the political and religious conquest of the Americas",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2.) 이 같은 아투에이의 천국과 구원에 대한 이해를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첫 번째 신학적 해석행위라고 간주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아투에이와 같이 거대한 권력과 힘 앞에 쓰러져가면서도 당당하게 저항의 정신을 놓치지 않고 살아갔던 억눌리고 가난하고 착취당하던 민중들의 의식과 행위[praxis]를 오늘의 상황에서 되살린 신학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관련기사]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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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2)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편집위원 | oikos78@msn.com
승인 2015.03.23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2)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1968년 메데인 주교 회의 뒤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해방신학은 많은 선구자의 적극적인 헌신을 통하여 점차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앙과 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게 된다. 본 글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의 선구자들, 특히 제1세대 신학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선구자들의 신학은 학문의 세계를 넘어서서 삶의 고난의 현장과 직접 연결됨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더욱 더 큰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하다. 본 글에서는 이 선구자들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간결하게 소개할 것이다.
1.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28년 페루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1년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해방신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의 문제는 가난의 현실을 조장하고 있는 불의한 사회체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장악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이러한 구티에레스의 사회적 분석적 생각이 가톨릭교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가 해방신학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박해하게 된 것은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의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하자"는 주장이다. 성서의 해석권은 오직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해방신학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용납될 수 없었다.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은 유럽의 진보신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유럽의 전통적인 진보신학과 해방신학의 차이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신적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신학사이의 정치적 결별을 의미한다. 이것 없이 온전하게 해방신학을 이해 할 수 없다. 해방신학은 지금까지 역사의 부재자로 살아갔던 가난한 사람들의 전망에서 신학을 하자는 주장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의 신학적 질문은 "지금까지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또 그 사랑이 우리 모두를 형제자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선포할 수 있느냐" 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오늘 신학의 문제는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통하여 지금까지 역사의 주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을 역사적 해방의 주체로 인식하며 신학을 하는 것이 해방신학의 정체성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2. 후벵 아우베스(Ruben Alves)
후벵 아우베스는 브라질 장로교 소속 목사다. 그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하여 당시의 주류 신학의 신학적 언어에 대해 비판하면서 새로운 신학방법론을 제시했였다. 그는 1970년 출간된 “종교, 아편 혹은 해방의 도구인가?”라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근간으로 한 저서와 같은 해 발표한 “신학의 재건 프로그램을 위한 단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신학언어에 대한 비평을 출발점으로 하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새로운 경험을 분석한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이 경험하고 있는 저개발과 종속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으로 출발하여 후벵 아우베스는 새롭게 등장하는 신학의 언어를 정치적 인간주의적 언어(Political Humanism)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까지의 신학언어는 초월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역사와 반대되거나 혹은 역사를 넘어서는 초월적이며 추상적인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서 오직 초월의 세계만을 향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존재이기에 역사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존재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적 초월성은 '미래창조'를 향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변혁을 위한 부름은 "저 너머 세계의 성격"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초월성은 역사적 성격을 지녀야 하며 신학은 최종적으로 인간을 향하여 존재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변혁 안에서 그의 미래를 형성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 같은 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개신교 특히 장로교 내에서 매우 급진적이며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급기야 장로교 목사직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브라질 장로교 내에서 설교를 금지 당했다. 해방신학자로서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는 이 땅위에서의 정의 실현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하느님, 영혼, 구원, 그리고 영원의 세계는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브라질 장로교 목사로서 해방적 새로운 신학 언어를 전파하던 그는 2014년 7월 8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3. 레오나르두 보프(Leonardo Boff)
▲ 레오나르두 보프.(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보프는 1928년 브라질 콩코르지아에서 태어난다. 그는 1959년 박사학위 취득 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간다. 그는 60권 이상의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미국과 유럽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학 명예교수다. 그는 1984년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저서를 출간한 이후 그 내용으로 인하여 바티칸에 불려간다. 그리고 그는 신앙교리성의 재판을 받게 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당시 보프는 수백 년 전 갈릴레이가 재판 받을 당시 앉았던 의자에 앉아서 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재판에서 일 년간의 저서 출간 금지와 교수 금지라는 침묵의 징계를 받는다. 국제여론에 밀려 침묵의 징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 한다. 그럼에도 교황청은 지속적으로 보프를 탄압하고, 이에 그는 1992년 사제직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사제직을 던지면서 세계의 모든 친구들에게 보낸 공개서한 "해방여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전쟁을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참호만을 바꾸는 것이다. 투쟁은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현재 보프는 생태신학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리우데자네이루 시 근교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해방신학과 생태신학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계속하고 있다.
4. 호세 콤블린(Jose Comblin)
콤블린은 1923년 벨기에서 태어난다. 그는 1947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1950년 로바이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1958년 라틴아메리카 대륙으로 사목의 현장을 옮긴다. 그는 2011년 사망하기 전까지 칠레와 브라질에서 사목을 이어간다. 그는 1970년대 해방신학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 스스로가 해방신학자로서 라틴아메리카 신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콤블린은 1958년 사제가 부족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사목활동을 할 것을 당부하는 당시 교종 비오 12세의 요청에 따라 브라질로 간다.
▲ 호세 콤블린.(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그는 처음에 캄피나스 지역에서 교수로서 그의 사목을 시작하는데 곧 바로 가톨릭 청년노동 사목에 참여한다. 그는 칠레로 이동하는 1962년까지 그곳에서 머물며 도미니코 수도회의 신학교에서 가르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중에 후일 해방신학자로 활동하게 되는 프레이 베토와 프레이 티토가 당시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을 칠레에 머문 뒤 1965년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헤시피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다시 브라질로 돌아온다. 그의 해방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군사정부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당했으며 결국 그는 1971년 체포되어 추방당한다.
브라질 군사정권에 의해 추방당한 그는 그 뒤 7년을 칠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그러나 또 다시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의해서 칠레에서도 추방당하는 탄압을 당한다. 1979년 브라질로 다시 돌아온 그가 체류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입국하였기 때문에 매번 3개월마다 인접국가로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하면서 활동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헤시피의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협력자로서 활동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평생의 삶을 바친 철저하며 진정한 해방신학자였다.
평상시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는 2011년 88살의 나이로 브라질 북부지방의 기초공동체를 방문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바로 그 순간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콤블린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산 해방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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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3)해방신학과 의식화 교육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승인 2015.05.11
해방신학과 의식화 교육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3)
파울루 프레이리
오늘은 해방신학 세 번째 이야기로서 잠시 해방신학의 탄생에 관한 역사적 관찰을 중지하고 해방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에 대하여 두 번에 걸쳐 알아보려고 한다.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는 누구인가?
그는 브라질 북부 지역인 헤시피(Recife)에서 1921년 9월 19일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 다섯 형제들과 매우 화목하고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의 부모는 그와 그의 자녀들을 매우 신앙적으로 양육했으며 십자가는 그의 어린 시절에 매우 강력한 상징으로 남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헤시피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그 후 1960년 헤시피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62년 페르남부쿠 주 교육청 상담관으로 일하던 그는 1964년 그의 급진적인 교육학으로 인하여 교육청에서 해임되고 살해 위협 속에서 볼리비아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지인 볼리비아에서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그는 또 다시 칠레로 망명한다. 그는 칠레에서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거주하는데 그 시기에 칠레 교육부 농촌개발원의 상담 고문과 유네스코의 고문관으로 재직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제네바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교육학을 가르친다. 1970-79년에는 유럽으로부터 방금 독립한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국의 교육 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신생국가의 교육 시스템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준다. 1977년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인 브라질로 귀환한 그는 계속해서 그의 해방 교육을 가르치고 실천한다. 1989년, 그는 상파울루 시 교육청장으로 재직한다. 그는 1997년 4월 10일 마지막 저서인 “자아결정의 교육학”을 발간하고 같은 해 5월 2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프레이리의 저술이 처음으로 나오게 된 당시는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었던 시절이다. 그 시절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사이에서 “계급투쟁”이 점차 힘을 얻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프레이리의 교육학에서 주장하는 이론과 또 그것이 정치 사회 신학과 교육에 미쳤던 영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전 이해는 필수적이다.
라틴아메리카의 1960대와 70년대는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61),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1962, 쿠바), 좌익 계열의 노동조합의 형성과 발전, 좌익 정당의 출현,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의 증대는 당시의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고무된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인 민중운동에 대한 견제와 반발로서 케네디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발전을 위한 연합 계획”이 시작되었음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계획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정치, 교육 발전을 위하여 괄목할 만한 경제, 금융 지원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첫째는 전통적 지주에게 집중된 토지와 권력의 분산과 지역 농업의 상업적 성장을 위한 토지 개혁에 대한 지원이다. 두 번째는 수입 확장과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의 진출을 통한 공업의 발전과 다양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실현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배구조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쿠바 혁명 등으로 민중정치에 대한 꿈이 현실로 점차 드러나자 전통적 지배계층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군사반란을 통한 집권을 통하여 구질서의 회복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으로 이러한 전통적 지배계층의 움직임은 라틴아메리카 민중운동의 확산에 자극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지금까지 “침묵의 문화”에 젖어 있었던 잠자는 민중을 깨우기 위한 교육 방법론에 눈을 뜬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교육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적 교육에 반하여 교육을 해방적 실천과 연결시키고 있는 프레이리의 교육학적 제안은 당시의 민중운동가들과 진보적 교육가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프레이리의 교육학이 억압 받는 자, 잊혀진 자를 교육의 주체자로 삼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 1960년대와 70년대의 라틴아메리카는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의 탄생과 수용에 있어서 매우 적합한 시대적 환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 정치, 사회, 경제적 현실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은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진보교육계에서는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정치 상황과 더불어 프레이리의 해방 교육학의 형성과 발전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 1959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1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촉발된 가톨릭교회 내부의 변화 움직임은 프레이리의 교육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로 인하여 1968년 메데인에서 개최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교육의 목적에 있어서 획기적인 주장을 한 프레이리의 교육학을 상당 부분 채택한다. 초기 해방신학의 형성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학이 미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프레이리 교육학의 내용을 언급할 것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2)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편집위원 | oikos78@msn.com
승인 2015.03.23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2)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1968년 메데인 주교 회의 뒤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해방신학은 많은 선구자의 적극적인 헌신을 통하여 점차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앙과 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게 된다. 본 글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의 선구자들, 특히 제1세대 신학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선구자들의 신학은 학문의 세계를 넘어서서 삶의 고난의 현장과 직접 연결됨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더욱 더 큰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하다. 본 글에서는 이 선구자들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간결하게 소개할 것이다.
1.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28년 페루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1년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해방신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의 문제는 가난의 현실을 조장하고 있는 불의한 사회체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장악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이러한 구티에레스의 사회적 분석적 생각이 가톨릭교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가 해방신학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박해하게 된 것은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의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하자"는 주장이다. 성서의 해석권은 오직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해방신학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용납될 수 없었다.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은 유럽의 진보신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유럽의 전통적인 진보신학과 해방신학의 차이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신적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신학사이의 정치적 결별을 의미한다. 이것 없이 온전하게 해방신학을 이해 할 수 없다. 해방신학은 지금까지 역사의 부재자로 살아갔던 가난한 사람들의 전망에서 신학을 하자는 주장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의 신학적 질문은 "지금까지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또 그 사랑이 우리 모두를 형제자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선포할 수 있느냐" 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오늘 신학의 문제는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통하여 지금까지 역사의 주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을 역사적 해방의 주체로 인식하며 신학을 하는 것이 해방신학의 정체성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2. 후벵 아우베스(Ruben Alves)
후벵 아우베스는 브라질 장로교 소속 목사다. 그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하여 당시의 주류 신학의 신학적 언어에 대해 비판하면서 새로운 신학방법론을 제시했였다. 그는 1970년 출간된 “종교, 아편 혹은 해방의 도구인가?”라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근간으로 한 저서와 같은 해 발표한 “신학의 재건 프로그램을 위한 단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신학언어에 대한 비평을 출발점으로 하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새로운 경험을 분석한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이 경험하고 있는 저개발과 종속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으로 출발하여 후벵 아우베스는 새롭게 등장하는 신학의 언어를 정치적 인간주의적 언어(Political Humanism)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까지의 신학언어는 초월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역사와 반대되거나 혹은 역사를 넘어서는 초월적이며 추상적인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서 오직 초월의 세계만을 향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존재이기에 역사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존재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적 초월성은 '미래창조'를 향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변혁을 위한 부름은 "저 너머 세계의 성격"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초월성은 역사적 성격을 지녀야 하며 신학은 최종적으로 인간을 향하여 존재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변혁 안에서 그의 미래를 형성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 같은 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개신교 특히 장로교 내에서 매우 급진적이며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급기야 장로교 목사직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브라질 장로교 내에서 설교를 금지 당했다. 해방신학자로서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는 이 땅위에서의 정의 실현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하느님, 영혼, 구원, 그리고 영원의 세계는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브라질 장로교 목사로서 해방적 새로운 신학 언어를 전파하던 그는 2014년 7월 8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3. 레오나르두 보프(Leonardo Boff)
▲ 레오나르두 보프.(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보프는 1928년 브라질 콩코르지아에서 태어난다. 그는 1959년 박사학위 취득 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간다. 그는 60권 이상의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미국과 유럽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학 명예교수다. 그는 1984년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저서를 출간한 이후 그 내용으로 인하여 바티칸에 불려간다. 그리고 그는 신앙교리성의 재판을 받게 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당시 보프는 수백 년 전 갈릴레이가 재판 받을 당시 앉았던 의자에 앉아서 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재판에서 일 년간의 저서 출간 금지와 교수 금지라는 침묵의 징계를 받는다. 국제여론에 밀려 침묵의 징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 한다. 그럼에도 교황청은 지속적으로 보프를 탄압하고, 이에 그는 1992년 사제직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사제직을 던지면서 세계의 모든 친구들에게 보낸 공개서한 "해방여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전쟁을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참호만을 바꾸는 것이다. 투쟁은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현재 보프는 생태신학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리우데자네이루 시 근교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해방신학과 생태신학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계속하고 있다.
4. 호세 콤블린(Jose Comblin)
콤블린은 1923년 벨기에서 태어난다. 그는 1947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1950년 로바이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1958년 라틴아메리카 대륙으로 사목의 현장을 옮긴다. 그는 2011년 사망하기 전까지 칠레와 브라질에서 사목을 이어간다. 그는 1970년대 해방신학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 스스로가 해방신학자로서 라틴아메리카 신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콤블린은 1958년 사제가 부족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사목활동을 할 것을 당부하는 당시 교종 비오 12세의 요청에 따라 브라질로 간다.
▲ 호세 콤블린.(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그는 처음에 캄피나스 지역에서 교수로서 그의 사목을 시작하는데 곧 바로 가톨릭 청년노동 사목에 참여한다. 그는 칠레로 이동하는 1962년까지 그곳에서 머물며 도미니코 수도회의 신학교에서 가르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중에 후일 해방신학자로 활동하게 되는 프레이 베토와 프레이 티토가 당시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을 칠레에 머문 뒤 1965년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헤시피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다시 브라질로 돌아온다. 그의 해방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군사정부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당했으며 결국 그는 1971년 체포되어 추방당한다.
브라질 군사정권에 의해 추방당한 그는 그 뒤 7년을 칠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그러나 또 다시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의해서 칠레에서도 추방당하는 탄압을 당한다. 1979년 브라질로 다시 돌아온 그가 체류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입국하였기 때문에 매번 3개월마다 인접국가로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하면서 활동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헤시피의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협력자로서 활동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평생의 삶을 바친 철저하며 진정한 해방신학자였다.
평상시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는 2011년 88살의 나이로 브라질 북부지방의 기초공동체를 방문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바로 그 순간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콤블린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산 해방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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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3)해방신학과 의식화 교육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승인 2015.05.11
해방신학과 의식화 교육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3)
파울루 프레이리
오늘은 해방신학 세 번째 이야기로서 잠시 해방신학의 탄생에 관한 역사적 관찰을 중지하고 해방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에 대하여 두 번에 걸쳐 알아보려고 한다.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는 누구인가?
그는 브라질 북부 지역인 헤시피(Recife)에서 1921년 9월 19일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 다섯 형제들과 매우 화목하고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의 부모는 그와 그의 자녀들을 매우 신앙적으로 양육했으며 십자가는 그의 어린 시절에 매우 강력한 상징으로 남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헤시피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그 후 1960년 헤시피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62년 페르남부쿠 주 교육청 상담관으로 일하던 그는 1964년 그의 급진적인 교육학으로 인하여 교육청에서 해임되고 살해 위협 속에서 볼리비아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지인 볼리비아에서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그는 또 다시 칠레로 망명한다. 그는 칠레에서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거주하는데 그 시기에 칠레 교육부 농촌개발원의 상담 고문과 유네스코의 고문관으로 재직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제네바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교육학을 가르친다. 1970-79년에는 유럽으로부터 방금 독립한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국의 교육 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신생국가의 교육 시스템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준다. 1977년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인 브라질로 귀환한 그는 계속해서 그의 해방 교육을 가르치고 실천한다. 1989년, 그는 상파울루 시 교육청장으로 재직한다. 그는 1997년 4월 10일 마지막 저서인 “자아결정의 교육학”을 발간하고 같은 해 5월 2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프레이리의 저술이 처음으로 나오게 된 당시는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었던 시절이다. 그 시절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사이에서 “계급투쟁”이 점차 힘을 얻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프레이리의 교육학에서 주장하는 이론과 또 그것이 정치 사회 신학과 교육에 미쳤던 영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전 이해는 필수적이다.
라틴아메리카의 1960대와 70년대는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61),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1962, 쿠바), 좌익 계열의 노동조합의 형성과 발전, 좌익 정당의 출현,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의 증대는 당시의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고무된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인 민중운동에 대한 견제와 반발로서 케네디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발전을 위한 연합 계획”이 시작되었음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계획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정치, 교육 발전을 위하여 괄목할 만한 경제, 금융 지원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첫째는 전통적 지주에게 집중된 토지와 권력의 분산과 지역 농업의 상업적 성장을 위한 토지 개혁에 대한 지원이다. 두 번째는 수입 확장과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의 진출을 통한 공업의 발전과 다양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실현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배구조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쿠바 혁명 등으로 민중정치에 대한 꿈이 현실로 점차 드러나자 전통적 지배계층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군사반란을 통한 집권을 통하여 구질서의 회복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으로 이러한 전통적 지배계층의 움직임은 라틴아메리카 민중운동의 확산에 자극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지금까지 “침묵의 문화”에 젖어 있었던 잠자는 민중을 깨우기 위한 교육 방법론에 눈을 뜬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교육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적 교육에 반하여 교육을 해방적 실천과 연결시키고 있는 프레이리의 교육학적 제안은 당시의 민중운동가들과 진보적 교육가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프레이리의 교육학이 억압 받는 자, 잊혀진 자를 교육의 주체자로 삼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 1960년대와 70년대의 라틴아메리카는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의 탄생과 수용에 있어서 매우 적합한 시대적 환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 정치, 사회, 경제적 현실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은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진보교육계에서는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정치 상황과 더불어 프레이리의 해방 교육학의 형성과 발전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 1959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1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촉발된 가톨릭교회 내부의 변화 움직임은 프레이리의 교육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로 인하여 1968년 메데인에서 개최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교육의 목적에 있어서 획기적인 주장을 한 프레이리의 교육학을 상당 부분 채택한다. 초기 해방신학의 형성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학이 미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프레이리 교육학의 내용을 언급할 것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