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학/종교학 -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 박성준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 박성준민중신학조회 수 1923 추천 수 221 2005.11.26 12:48:11
허호익*.218.50.53
http://theologia.kr/board_korea/27585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民衆’ 理解의 새 지평을 모색하며--
박 성 준
1999. 11. 3
一. 문제제기
서남동은 한국민중의 ‘恨’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독특한 기여를 했다. 나는 ‘한’을 민중신학의 핵심 주제로 설정하는 데 대하여 서남동에게 확고한 지지를 보내왔고 그 점에 있어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동학=崔水雲) 또는 ‘내재하는 빛’(the Light within) (퀘이커=George Fox)을 민중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놓는, 그래서 ‘한’과 더불어 또 하나의 핵심되는 주제로 삼는 민중신학의 새로운 얼개를 구상해 보게 되었다. 민중의 ‘한’이라는 하나의 핵심에 편중되면 역사창조 주체로서의 민중의 생명력(자율성, 자주성, 창조성, 자기 구원의 주체성)이라는 다른 하나의 핵심이 가려지거나 약화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중 안에 있는 ‘恨’은 보면서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빛’(=그리스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민중의 일면 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서남동이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의 언어인 ‘한’을 제시한 것은 옳다. 그러나 이제는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 안에 있는 ‘빛’을 제시할 차례이다. 민중의 ‘한’과 함께 ‘빛’을 보고 그 상호관계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면서 그 양자를 민중신학의 중심에 역동적으로 위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남동의 신학에서 민중의 ‘한’과 ‘고난’이 민중의 ‘메시아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능력’이라는 기독교의 正統 敎義에 있었다. 민중의 메시아성을 이렇게 대속적 능력 쪽으로만 치우쳐 이해할 것이 아니라 민중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빛과 창조력에도 동시에 주목하면서 그 메시아성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안병무가 이따금 언급하며 경탄해 마지않았던 민중의 자기초월의 능력은 ‘초월’이면서 동시에 민중에게 본래 ‘내재’하는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씨(함석헌)인 민중의 속 깊이 숨겨져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 가능성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씨의 살아 숨쉬는 보배로운 생명력, 그 경이로운 역동성에 새삼 눈뜨고 이를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21세기와 새 천년(the New Millenium)의 ‘새 민중신학’을 힘차게 열어가야 한다.
나는 결코 민중에 대한 美化나 낭만화(romanticize)를 찬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민중을 말해야 한다. 낭만화된 관념 속의 민중, 비현실화되고 박제화된 민중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민중, 질긴 생존력으로 일상의 삶의 터전에 뿌리내린 ‘생활하는 주체’로서의 민중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 자기 속에 ‘한’을 품고 살지만 ‘빛’도 품고 살아가는 온전한 민중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서남동, 안병무의 민중이해에 다음과 같은 점들을 보완하거나 새롭게 추가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첫째로, 함석헌의 민중 이해로부터 ‘씨’을 받아들이되 <ㅇ ㄹ>의 각 요소를 적극적으로 深化 發展시킨다. 즉 <ㅇ>은 초월적인 하늘을, < >는 내재적인 하늘을, <ㄹ>은 활동하는 생명을 나타낸다고 그가 스스로 설명해 놓은 그 각 項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서 한층 더 심오하고 풍부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사상적 源泉(resources)으로서는, 한쪽으로는 東學이라는 큰 사상의 젖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함석헌 자신이 훗날 그 멤버가 되었던 퀘이커의 사상, 그 중에서도 특히 초기 퀘이커 사상(Early Quakerism)이라는 큰 광맥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로, 민중의 목마름의 重層구조를 천착하는 것이다.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 곧 민중의 영성은, 예컨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日常의 안전과 편안함, 경제적 안정 등에의 갈망이라는 層位가 있는가 하면, 우정과 고독, 사랑의 아픔과 번뇌,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오는 고민 등의 層位가 있으며, 영혼의 虛飢, 생애를 통해 지속되는 인격의 성숙과 자기완성에의 渴求, 진실과 진리를 향한 목마름, 疾苦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등의 層位, 이렇게 複雜하고 重層的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
셋째로, 민중신학은 ‘사건’의 신학을 보완하기 위해 ‘사건’과 ‘日常’을 손의 앞뒤면 처럼 설정하여, 사건과 일상이 갖는 각각의 의미와 함께 둘 사이의 긴밀한 상호관련성을 올바르게 밝힐 필요가 있다. 민중은 1970년대,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연쇄적으로 분출하는 활화산 기슭에서, 또는 언제 터질지 모르게 꿈틀대는 화산맥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민중은 아마도 더 많은 일상의 시간을 너른 들녘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여름 한철 가뭄에 강바닥으로 스며들어 소리 없는 지하수로 흐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땅 속으로 흐르는 지하수가 없다면 장대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샘의 분출은 있을 수 없다. 물이 콸콸 솟는 샘은 실은 땅 속을 흐르는 저류(the underground stream)와 연결되어 그것에 의해 지탱되고(sustained) 있는 것이다. 사건과 일상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사건’의 신학에 균형을 가져다주는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가 요청된다.
넷째로는, 민중 공동체 운동이다. 이거, 저 70년대, 80년대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왔던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그러나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민중이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운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근본적으로(radically) 다시 묻고,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
二. 민중 이해의 새 지평
1. 민중신학의 先驅: 함석헌의 씨 사상
함석헌은 씨의 은유로 역사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根幹이 되는 사람, 곧 민중을 나타내고자 했다. 민중은 씨이다. 태어난 그저 그대로인 씨, 풀씨 같은 존재. “씨이란 다른 거 아니고 자연이지요. 문명은 결국은 자연에서 멀어져 가는 방향이고(참 문명이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니깐 지금은 사람의 큰 잘못이 자연을 잊어버리고 자연에 반항하고 하는 건데, 근본의 절대적인 의지랄까 그게 곧 자연인데, 자연 속에 있는 건데----”(“씨의 소리, 씨의 사상” <씨의 소리> 76년 9월호)
씨은 이 끝에서 보면 있는 그대로인 ‘나’이고 저 끝에서 보면 하나님이라고 한다. 결국 민중 곧 씨과 하나님은 이 끝과 저 끝으로 서로 연결된, 둘이 아닌 한 <>이다.
“민중이 뭐냐? 씨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사람이다. 은 실(實), 참, real이다.............정말 있는 것은, 은, 한 뿐이다. 그 한 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씨의 설음”, 함석헌 전집 제4권, 66면)
나아가, 함석헌은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을 불러내자고 한다. 그렇게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불러내느냐가 문제다. 속에는 다 개인의 행위와 역사의 사건으로 영향을 입지 않는, 입힐 수 없는 혼이 잠자고 있다. 그것을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씨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라가 있다. 그것은 일할 터를 찾고 일할 거리를 기다린다. 그것을 능히 알아 불러내어 동원하면 산을 옮길 수 있고 바다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제4권 129면)
이와 더불어, 씨은 마땅히 ‘남의 종교’가 아닌 ‘내 종교’를 가져야 한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 위대한 종교지. 하지만 남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은 우리 초가삼간 보다 작은 집이다. 내 종교가 큰 종교지, 내 것이 되지 못한 종교...........종교의 허울이 무슨 위대한 종교일 수 있을까? 제 종교만이 큰 종교다. 제 종교를 가진 한 사람만 있어도 온 세상이 다 구원될 것이다.”(“씨의 설음”, 전집 제4권 65면)
“큰 것은 하나님이요, 큰 것은 나다. 하나님과 직접 연락된 내가 ‘한’ 곧 큰 것이요, 그 직선을 종축으로 삼으면 온 우주를 돌릴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까지 뚫리지 못한 종교, 나와 하나님을 맞대주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 아니다. 나의 종교가 종교다. 교도(敎徒)가 있는 것은 종교 아니다. 참 종교는 한 사람의 신자를 가질 뿐이다...........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라..........아무도 이 결혼의 중간에 서지 마라.”(“씨의 설음”, 전집 제4권, 65면)
민중은 자기 속 깊이에 계신 하나님, 그 창조적인 생명과 무한한 힘의 源泉에 깊숙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민중 곧 씨은 자기 속의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 한다. 그 하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한다. 내 안의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해답을 간절히 구하고 거기에 맞추어 각자 자기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재정립하고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이를 관철해야 한다.
씨 속에, 곧 내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하나님(‘나라’, I am.)을 일깨우고 ‘불러내자.’ 그리하여 하나 하나의 씨은 함께 새 시대, 새 나라를 바로 지금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힘차게 열어가야 한다.
2. 퀘이커 사상과 민중신학의 만남의 가능성
퀘이커는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 시대는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격동의 시대, 혁명과 변화의 시대였다. 당시 영국 국교회에서는 외적인 종교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국교에 반대하는 침례파와 장로회파의 교회들은 신앙을 성경의 권위나 공식적 신조와 대체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의식이나 신조에 염증을 느끼게 된 수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갔다. 혹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사람들은 개인적 체험의 종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갈구하고 있었다.
죠오지 폭스(George Fox, 1624-1689)도 그런 사람들--당시 영국에서는 그들을 ‘구하는 자들’(seekers)이라고 불렀다--중의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했다. 製靴工의 徒弟, 소먹이 목동 등으로 지내는 동안 홀로 고요한 묵상에 잠기는 습관을 익혔고, 성경을 읽고 깊이 생각에 잠겼으며, 온 피조세계의 오묘하고 미세한 소리에도 예리하게 반응하곤 했다. 열 아홉 살 때에 집과 부모의 곁을 떠나 절절한 목마름으로 진리를 찾는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에 나섰다. 4년간의 영혼을 달구는 숱한 시험과 연단 끝에 Pendle Hill이라는 작은 山頂에서 그는 드디어 진리를 깨닫고 환상(vision)을 보았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성직자들)에게 걸었던 나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리하여 외적으로는 내가 의지할 아무 것도 없게 되었을 때, 내가 어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니, 그는 너의 처지에 맞게 말씀하신다.’(‘There is one, even Christ Jesus, that can speak to thy condition.’)라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듣자 내 가슴은 歡喜雀躍하였다. ........ 주님을 향한 나의 갈구,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지식에의 열망은 더욱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Fox, 11)
그가 얻은 다음과 같은 진리는 재래적이고 인습적인 신조들(creeds)과 날카롭게 충돌하는 것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精髓이다. 우리 각자의 깊은 속에 하나님의 씨앗(the Seed), 하나님의 영(the Spirit), 그리스도(the Christ), 내면의 빛(the inner Light)을 지니고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즉 성직자나 교회의 儀式이나 어떤 다른 매개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역사적인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아 (신적인)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계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영속된다는 것(the continuing revelation). 이것이 그의 새로운 깨달음의 내용이었다. 자기 자신 속에 불타오르는 이 깨달음(revelation)을 지니고서, 죠오지 폭스는 세상를 향해서 힘차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회개하고 돌아섭시다. 자기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러한 (즉 하나님을 모신) 존엄한 존재로서 살아갑시다.”라고.
그 깨달음을 근거로 그는 오늘날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는 별명이다.)로 알려진 신앙적 結社의 기치를 올렸다. 죠오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physically)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 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음으로 해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죠오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transformed)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私的인 내면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 초기 퀘이커들(Early Friends)은 당대의 사회에 불을 지피는 불씨의 전령이었다. 그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 온갖 종교집단, 모든 사회조직에 불을 붙였다.
죠오지 폭스는 17세기 영국인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과 우리 시대를 위해서도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 그는 과거의 사람만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깊은 개인적 경험과 메시지, 그리고 초창기 퀘이커들의 묵시록적인 삶과 행동은 우리 시대의 긴박한 필요에도 절실하게 말을 걸어오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함석헌은 197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의 펜들 힐(Pendle Hill; A Quaker Center for Study and Contemplation)에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씨 사상을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나 자신이 비교 검토해 본 바로는 그의 씨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酷似하다.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과 더불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에 주목할 수 있다면 주체로서의 민중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민중을 세계와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데 새로운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3. 동학의 전통으로부터 배우기:
우리는 이제 19세기 말엽 한반도에서 출현한 동학운동, 그 중에서도 1860년-98년의 水雲 崔濟愚와 海月 崔時亨, 그리고 갑오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 동학의 재건을 의도했던 甑山 姜一淳의 사상과 실천에 주목할 차례다.
동학은 19세기말, 조선의 봉건제가 한계에 도달, 근대사회로 이행되기 시작하는 세기말적인 일대 전환기에 피어난 한국사상문화종교의 꽃이고, 조선의 근대역사가 시작되는 發源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 동학이 창시되던 1860년 당대의 조선의 현실에 대한 수운의 인식은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 질서의 모든 차원에서 총체적 위기 그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 신분제의 문란(紊亂), 도탄(塗炭)에 빠진 민중의 잦은 봉기와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양세력의 동아시아 침략으로 과거의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고 구미제국의 근대문명이 압도해오는 가운데, 전통적 종교인 儒佛仙은 정신적 지주나 새로운 사회이념의 기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윤리와 가치규범의 붕괴, 사상의 혼돈, 민중의 정신적 방황이 극도에 달한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조선사회에는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민중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있었다.
절망과 암흑의 시대, 바로 그 한가운데서, 수운은 先天문화 질서의 종말과 후천개벽의 새 문화, 새 시대의 도래를 예감했다. 수운은, 동양문명의 해체와 몰락, 서양문명의 침략적 폭력성을 확인하면서, 전통적 지배이념인 朱子學을 대체할 새로운 道學을 갈구했다. 그는 前人未踏의 새 길, 동서양의 기존의 종교와 사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찾아내어 新天地, 新文明을 구현하고자 고난에 찬 구도의 길을 홀로 걸었다.
“庚申年에 이르러 전하여 오는 말을 들으니 서양사람들은 한울님을 위한다는 뜻으로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들의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의 교를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므로, 나는 과연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느니라.”<東經大典, 前編 五>
“서양사람들은 전쟁을 하면 이기므로 쳐서 빼앗아 그들의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이리하여 천하가 다 멸망한다면, 어찌 입술이 상하여 없어지면 이가 시려 견디기 어려운 것과 같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東經大典, 前編 九>
본격적인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6년째 되던 1860년 음력4월, 그의 나이 37세 때 그는 결정적인 종교적 체험을 통해 得道에 이른다. 그의 신비체험은 한울님 마음과 하나가 된 경지에서 ‘天語’를 듣게 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울님과의 사이에 문답 형식으로 여러 달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내용을 냉철히 반성 체득하면서 일년 여에 걸쳐 동학의 신관, 세계관, 인간관, 修行法 등을 글로 체계화해 나갔다. 득도한 이듬해(1861년) 6월부터 그는 布敎에 나섰다. 득도로부터 체포되기까지 불과 2년 6개월 사이에 수운은 漢文體의 <東經大典>과 한글로 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수운의 가르침은 고통과 시련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 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그 시대의 민중들의 가슴에 심었다. 사방에서 그의 소문을 듣고 그의 거처인 경상북도 慶州 龍潭亭으로 찾아오는 민중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수운의 가르침을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따랐다.
1864년 3월 수운은 41세의 나이로 斬首刑에 처해졌는데, 세상을 어지럽게 한 邪術의 傀首라는 죄목이었다.
수운의 제자이자 동지였던 해월은 道統 承繼 후 殉道할 때까지 30여년 간 가시밭 길을 걸으며 조선 땅에 동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人乃天’, ‘事人如天’의 교의로써 교도들을 지도하는 한편, 지배권력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接’조직을 확장해나가다가 1898년(72세) ‘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스승 수운의 뒤를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2) 동학의 인간 이해의 핵심은,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데 있다. 사람이 곧 한울님, 한울사람, 섬김 받아야 할 신령한 존재이다. 사람은 자신이 이러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때 자기 자신과 타인을 지극히 공경(敬人)하게 되고 한울님을 공경(敬天)하게 되며 한울님의 뜻을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주체로서 바로 서게 된다. 즉 현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신령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한울사람(God's person)을 통해서만 사회와 세상의 聖化(한울나라의 실현)가 가능해진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주체성은 우주 가족의 일원으로서 더 큰 생명인 우주를 어버이로서 섬기며(敬物), 우주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相生(서로 살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적 존재이다.
동학에서는 지금까지 저 밖에 있는 신(God without)을 향해 놓았던 祭床과 位牌를 나를 향해(向我) 돌려놓도록 하는 새로운 祭祀法을 창안했다. 이것을 ‘向我設位’라고 하는데, 저 밖에 있는 초월적 신을 상정한 인류 문명 문화 樣式의 일대전환과 정신개벽을 이로써 상징한다.
또한 ‘同歸一體’라고 하여 후천개벽운동의 동반자들의 공동체, 새 인간(한울사람), 새 천지(한울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인류문명사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신령한 도덕적 주체들의 공동체를 제시한다. 이 공동체는 타종교 공동체의 전통을 존중하며 관용의 정신과 개방적 태도로써 후천개벽의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길동무(道伴)들의 공동체이다. 동학에서는 특히 생활의 주인이자 新天地 창조의 주역으로서의 여성의 지위가 강조된다.
3) 강증산은 스무 살 무렵에 동학당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甲午동학혁명이 실패한 뒤, 시체가 가득 널려진 폐허의 강산을 여러 해에 걸쳐 편력했다. 그때에 그는 구천에 사무치는 울부짖음과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민중의 고통을 보았으며 민중이 그 얼마나 절실하게 생명의 회복을 바라고 있는가를 사무치게 절감했다. 따라서 간증산은 자기의 목표를 동학의 동세개벽 실패 이후의 민생의 재건과 활인(活人)에 두게 되었다.
갑오동학혁명이 민중반란의 조직적 확대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혁파함으로써 후천개벽을 실현하려 했다면, 강증산의 실천은 하나 하나의 이름 없는 민중들의 그날 그날의 먹고, 살고, 입고(衣食住), 고통받고, 병들고, 죽고, 두려움과 굶주림과 죽임 당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구체적인 삶, 곧 민중생존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매일 매일의 自助 自活의 작은 공동체 건설과 협동생활의 조직을 통해 후천개벽을 실천해 나가는 방향이었다.(김지하 사상기행, 2권, 206-9면 참조)
그렇다면 강증산의 사상과 실천은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를 꾀하려는 우리들의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동학의 인간관은, 매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퀘이커 사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민중신학은 퀘이커 사상의 인간이해로부터 배움과 동시에 동학의 인간관을 민중이해에 적극 도입함으로써 민중의 대상화, 객체화를 극복하고 민중의 ‘주체화’에 진실로 기여하는 큰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三. 민중적 영성론의 가능성:
1. 영어권에서도 spirituality란 말이 등장한 것은 지난 30년 어간의 일이라 한다. 이렇게 새로운 말이고 보니 한국에서는 그 용법이나 의미를 둘러싸고 적잖은 오해와 혼선이 있기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카리스마 집회나 성령파 교회들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연유로 해서 민중신학자들은 애써 이 말을 기피했고 금기시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남미 해방신학 쪽에서 spirituality라는 범주를 사용하여 심도있는 신학작업을 전개하는 것은 보고서야 새로운 관심과 눈으로 이 말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중신학 내부에서 spirituality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아직 드문 것 같고, 여전히 개념의 혼란이 가셔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 자신 아직 본격적인 공부가 부족하여 spirituality의 정의조차 내리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지만, 민중적 영성론의 필요성과 가능성의 예감만은 절실하다.
2. 함석헌은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을 불러내자고 했다. 그렇게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씨의 혼’이라. 혹시 이것이 바로 민중의 영성 아닐런지? spirituality는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서 그 존재를 관통하고 그 존재를 떠받치고 그 존재를 推動하는 영적 힘, 에너지, 불꽃과 같은 그 무엇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우리가 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spirituality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spirituality는 기독교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인의 영성, 무신론자의 영성도 있을 수 있다.(나는 사실 감옥에서 무신론자들의 심오한 영성에 무수히 접했다.)
3.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이 바로 민중의 영성 아닌가. 나는 앞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이라는 범주로 다루어온 영역과 크게 겹치는(overlap) 영역이어서 민중의 恨과 민중 spirituality의 관계와 구조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4. spirituality는 우리의 日常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의 욕망과 애정, 고통과 슬픔, 고독, 야심과 좌절감, 불안과 초조, 공포와 희망 등등, 이 하나 하나가 spirituality와 깊이 관련된다. 어떤 사람의 영성은 그가 자기 속의 그 영적 에너지 혹은 불꽃을 가지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 무엇을 행하는가와 깊이 관련된다. 즉 spirituality는 신앙이나 종교성과 관련된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매일 매일의 일상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compassion)과 자비(mercy), 평화와 화해를 간절히 구하는 마음, 참된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갈구하는 정치적 각성, 깨어있는 양심, 도덕적 민감성 등은 민중적 영성의 불가결한 요소들(integral elements)이다.
5. spirituality는 개인적인 것 만이 아니다. 개인적인 것임과 동시에 사회적, 공동체적인 것이다. ‘나의 영성’과 동시에 ‘우리의 영성’이 존재한다. 개인주의에 물든 사회와 그 문화(individualistic culture)에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촛점이 맞춰지기 쉽다. 그래서 개인적 영성은 자칫하면 ‘개인주의적 영성’으로 頹落할 수 있다. 개인적 영성에만 집착하거나 매몰되면 영적 개인주의와 영적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고 영적 우상숭배의 위험에 떨어질 수 있다. 반면에 공동체적 영성의 경우에는, 개인의 영적 생활(personal spiritual life)에 기울이는 집중력이 떨어질 때, 영적 메마름과 세속화라는 또 다른 위험이 있다.
개인의 영적 체험과 공동의 영적 수련은 상호 의존적이다. 서로 보완하고 서로 북돋아 준다. 민중신학은 개인의 영적 체험 또는 개인적 영성수련과 공동체적 영성 또는 영적 공동 생활(spiritual life together)에 같은 비중을 두어 이 양자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
공동체적 영성은 함께드리는 예배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된다. 각자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바친 영적 생활의 밀도는 함께 드리는 예배의 質을 좌우한다.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묵상과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 깊이를 더해갈 때, 개인과 공동체의 영성을 고양시켜주는 높은 질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6. 밥상(식탁)공동체는 공동체적 영성의 실천 모델이 되며 민중적 영성의 엣센스를 집약한 것이다. 민중신학은 해월의 밥 사상과 향아설위의 밥상 차리기로부터 배우면서 다음과 같이 相生의 식사예법을 고안할 수 있을 것이다.
(1)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다. (2)원을 그리고 둘러앉는다. (3)기쁨과 감사에 넘치는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손을 잡고 잠시 묵상(또는 짧게 한마디씩 기도)한 후 함께 담소하며 서두르지 않고 즐겁고 느긋하게 식사한다. (4)설거지도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여한다. (5)음식찌꺼기는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아서 거름으로 쓴다.
7. 민중적 영성은 서로 모시고 섬기는 相生의 영성이다. 그 엣센스는 겸허하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깊이 귀기울여 듣는 데(敬聽, mindful listening) 있다. 나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 놓고 하나님에게, 자연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고요히,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민중신학에는 이 敬聽의 영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여겨진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자임하다보니 민중, 씨에게 귀기울여 듣는 마음의 餘白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말하는’(preaching) 종교지 ‘듣는’(listening)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큰 약점의 하나다.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이 관계의 그물에 얽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의존하고 있는 이 우주와 세계 공동체 안에서 ‘敬聽의 spirituality’가 없이는 相生의 관계를 창조해나갈 수가 없다. 이제 21세기와 새 천년의 입구에서 기독교는, 그리고 민중신학은, 말하는 ‘입’으로부터 듣는 ‘귀’로의 radical한 파라다임 전환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8. 예언자적 선포(prophetic speaking)는 중요하다. 그러나 예언자적 경청(prophetic listening)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예언자적 경청은 권력과 富에 억눌리고 빼앗겨온 자연과 민중, 곧 씨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씨에게 경청한다 함은 하나님께 경청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을 때, 더 깊숙이 귀를 기울여 고요히 기다려 보라. 소리 아닌 소리가 내 마음의 귀에 들려오지 않는가. 민중인 씨(들)에게 말과 설교를 가지고 가는 대신에 마음의 귀를 가지고 가본 사람은 안다. 경청하는 사람이 자신의 계획이나 용건, 판단이나 충고 따위를 완전히 접어놓고, 오로지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나를 내맡기는 방법으로 귀를 기울일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가 둘 사이에 싹튼다는 것을.
듣기에만 길들여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씨이, 그래서 자기 주견이나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이 보였던 민중이 비로소 가슴을 열고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기 시작할 때, 그(들) 자신 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놀라운 지혜와 꿈과 비전이 엉킨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 나오지 않던가. 이 새로운 관계, 새 카이로스 속에서 상처가 아물고 한풀이가 시작된다. 씨이 제 이야기에 스스로 격려를 받고 힘이 북돋아져 현재의 곤경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열리고 문제에 해답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함석헌이 말한 “씨의 혼(魂)을 불러내는” 방법이 아닐까.
四. 21세기, 새 천년기에 민중은 어떻게 살 것인가?
-- 민중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살림 공동체’ --
공동체 운동은 개인과 민족의 생존(survival)을 위해, 우리들의 문화와 지구 자체의 존속을 위해 비상히 중요하다. 현대 사회와 현대적 생활양식은 자연적 내지 가족적 공동체를 해체한 결과이다. 현대인의 삶은 파편화되었고 공동체 감각을 잃어버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고립되어 있고 까닭 모르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한편 그들은 사랑받고 싶어하고 함께 살아갈 동반자를 찾고 있으며, 꿈과 理想을 서로 나눌 친구를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현대인은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절실히 필요한 공동체, 그 중에서도 민중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공동체는 어떤 내용, 어떤 모습의 공동체일까? 우리는 김지하가 먼저 주목해서 그의 생명사상 체계 속에서 중요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던, 그리고 안병무가 몹씨도 아꼈던 아름다운 우리말 ‘살림’을 붙여 ‘살림공동체’를 구상해 볼 수 있다. ‘살림’이란 무엇인가?
살림은 相生 즉 서로 살리기, 살림은 生命敬畏, 살림은 죽임의 반대, 살림은 물질의 나눔, 살림은 상호존중, 살림은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 살림은 거룩한 경청, 살림은 섬김, 살림은 그저 우리네 살림살이. 그럼 살림공동체는?
나는 살림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다음의 7가지 원리로 정리해 본다.
첫째로,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균형과 조화이다.
김지하식 표현을 빌리면, “개별 인격들의 자유로운 전체인 민중”의 공동체이다.
살림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이 존중된다.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진정으로 존중된다. 그러나 그 개인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전체를 형성하되 그 전체가 또한 자유와 창의성이 넘치는 탄력적인 전체를 이룬다. 이 자유로운 전체인 살림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창의성(individual initiative)과 공동생활(corporal life)의 규율이 조화를 이루며 개인적 생활영역과 공동 생활영역이 공존하고 균형을유지한다.
둘째로,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된다. 인종, 성, 피부색, 민족, 종교, 사상, 문화, 언어, 음식, 관습 등에 있어서의 차이와 다양성이 권장되고 존중된다.
셋째로, 깊은 영성적 修行(spiritual practices in depths)과 활발한 사회적 관심과 행동(social concern and action) 간의 균형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이 균형을 강조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면, 영성적 수행을 통해 사회적 불의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의해 야기되는 고통에 대해 민감해지도록 노력하면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동참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일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또한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이나 지구상의 다른 種(species)의 고통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힘쓴다.
넷째로, 일의 평등성(equality at work)을 추구한다. 공동체 내에서 일과 역할의 기능적 분화가 인정되나 신분이나 지위의 개념은 인정되지 않는다. 역할의 기능적 분화가 가져올 수 있는 공동체 성원간의 평등성의 저해 또는 약화를 방지하기 위한 방도가 강구되며 평등성을 높이기 위한 다방면적인 노력이 경주된다.
다섯째, 공동체성원 간의 인간관계는 동학의 ‘侍’(모심)을 기본정신으로 한다. 즉 누구든지 사람을 대할 때 그 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과 자세로써 대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에 통하고, 베트남 출신의 스님 Thich Nhat Hanh이 강조해 마지 않는 ‘정념’(正念; ‘mindfulness’)와 일치하는 것이다.
여섯째로, 質素한 삶(plain life)을 산다. 질소한 삶이란 (1)자원과 물자를 아껴 쓰고 사치를 하지 않으며, (2)경제적 정의에 우선적 관심을 갖고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며, (3)기도와 묵상을 생활화한 삶의 방식을 말한다. 질소한 삶은 단순함(simplicity)을 소중히 여기고 餘白이 있는 삶을 사랑한다. 여기서 여백이라 함은, 일을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바쁘게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일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알맞게 남길 줄 아는 여유를 말한다. 또한 너무 많이 말하지 않고 남이 말할 여지를 남기며 언제나 상대방에게 조용히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현대인의 삶의 병적 奔忙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이따금 물어야 한다. “말씀이 들릴 만한 고요함이 있는가?”(Are there enough silence for the Word to be heard?)
일곱째로, 축제가 있는 공동체를 가꾼다. 축제(festival)와 祝賀(celebration)는 공동체 생활의 한 中心軸이다. 축제와 축하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생활의 시련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북돋아준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유한 나라 사람들 보다 축제를 더 사랑한다.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축제의 감각과 기술을 상실했다. 그것은 공동체의 전통을 상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축제는 음식을 나누는 것과 함께 공동체 성원들에게 공동체의 참 의미를 손으로 만지듯이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축제는 생활 속에 일어나는 마찰과 사소한 분쟁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는 청량한 바람이 된다. 축제 속의 환희와 엑스타시(ecstasy)의 요소는 생명의 흐름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성원을 관통해서 흐르게 해주며 우리들의 가슴을 하나로 묶어 준다. 축제는 육체와 감각의 기쁨을 영의 기쁨에 연결시켜 주는 경이로운 시간이다. 따라서 축제는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 요소이다.
살림 공동체는 대안적 문화로서의 음악, 詩, 춤, 노래, 이야기, 연극 등을 적절히 생활 속에 도입한다. 노약자나 장해자 등 누구나 쉽게 배워서 출 수 있는 춤(universal dances)을 개발하고 쉬운 춤사위에 공동체의 정신을 나타내는 소박한 말을 붙여(곡에 가사를 붙이듯이) 일하는 틈틈이 함께 추기도 한다.
五. 에필로그
나는 미국 펜실바니아주에 있는 Pendle Hil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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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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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에필로그
나는 미국 펜실바니아주에 있는 Pendle Hill이라는 퀘이커의 공동체에서 지난 한해를 보냈다. 위에서 제시한 공통체像은 그 Pendle Hill을 모델로 하여 대체적인 윤곽을 그려본 것이다. 다만 Pendle Hill을 좀 더 민중적인 쪽으로 끌어당겼다고 할 수 있겠다.
살림공동체의 7가지 원리 하나 하나를, 구원과 해방을 절절히 갈망하는 민중의 가슴과 눈으로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들을 구체적인 공동체운동에 응용할 때에는 내가 몸담고 사는 사회현실과 자신의 문화전통, 그리고 공동체의 조건에 맞추어 창조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세계의 중심부가 아닌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한 주변부에 떨어진 작은 씨들의 눈이 지금 터지고 있다. 민중이라고도 불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 그들이 자신 속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에 눈떠 깨어나고 있다. 그들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근본이다. 씨들은 자신의 문화와 사상과 전통에 돌아가 그 토양에 튼튼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아가 그들을 에워싼 동양과 서양의 온갖 문화, 문명, 사상, 전통들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여 그들 자신의 잠재력, 생명력을 꽃피워 나갈 것이다.
바야흐로 21세기, 새 천년의 새 문명, 새 문화, 새 인류의 도래를 예비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 곧 ‘살림 공동체’의 창조라는 가슴 뿌듯한 과제가 아시아의 민중에게 맡겨져 있다. 이 창조에서 민중신학의 몫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이 민중신학의 새로운 전개 가능성의 단초만이라도 전달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겠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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