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2

이웃과 세상에 대한 경청(敬聽) / 박성준(성공회대 교수)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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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세상에 대한 경청(敬聽) / 박성준(성공회대 교수)
신행
입력 2003.06.25 13:02
호수 152

“불교의 좋은 점?” 우선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면, -‘도그마’가 없다.-인간을 신이라 하지 않는다.-현대 과학의 지식과 융화한다.-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다.-사람마다 저 나름의 방식으로 깨달음과 해탈의 길을 추구할 수 있다.-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 한다. 누구라도 존재의 실상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불교에 대해 대강 이러한 호감을 가진 지는 오래됐다. 그런데도 불교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나는 대학 재학 중 군에 입대하여 병영생활 틈틈이 영어 성경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인간 예수의 인품과 매력에 이끌려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그 후 40여년의 세월동안 기독교 신앙으로 인한 마음의 갈등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역사와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해석에 눈떴던 나는 서구 기독교세계의 폭력성과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해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따금 내 마음속을 파고드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인막?태어난 내가 서양종교인 기독교인이 되어 기독교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 조상들이 삶의 근거로 삼아왔던 종교와 사상과 문화 전통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자각이었다. 나는 그래서 나름대로 노력해 보았다. 특히 불교의 경우 제법 많은 시간을 들여 불교의 골자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의 이런 시도들은 한마디로 실패였다.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탓인지 한문투로 표현되어 있는 불교의 언어들이 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러던 중 199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공부하게 되었는데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퀘이커의 작은 학교에서 내가 존경하게 된 퀘이커들 가운데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는 분들을 만났다.그들은 베트남 출신의 승려 틱낫한스님의 책들을 읽어보라고 권해 주었다. 쉬운 영어로 읽기 때문에 한문 투의 추상적 언어에 부딪치지 않아 좋았고 적절히 예화를 섞어 친절하게 풀면서도 시적(詩的) 여운을 풍기는 틱낫한 스님의 문체는 신선했다. “아, 드디어 나도 불교 서적을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게 되었구나!” 나는 오랜만에 만족했고 행복을 느꼈다. 나는 이 책과 또 내가 접한 그의 모든 다른 책들에서 ‘mindfulness’가 불교적 수행의 ‘심장’에 해당할 만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mindfulness’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이 말을 우리말로 옮기고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나는 ‘mindfulness’를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 ‘따뜻한 마음으로 깨어있기’ 등으로 옮긴다. 그리고 ‘mindfulness’를 풀어서 설명하기를,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은 “어느 한 구석도 이지러짐이 없는 보름달처럼 가득하게 따뜻한 마음으로 나 자신과 이웃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깨어있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하곤 한다. 나의 이런 이해는 “참다운 불교수행은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실상사 도법스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하다.나는 ‘mindfulness’를 퀘이커의 ‘고요한 귀기울임’(listening)에 접맥시켜 경청(敬聽; mindful listening)’ 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경청’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임”이다. 마음을 열고 자기를 온전히 내맡겨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듣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청(敬聽)’을 ‘움직이는 학교’(이것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만남의 방법론이다)의 원리로 삼고 있다. <사진제공 열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