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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1

마성스님 도올 초기불교관 비판/"中道 참뜻 최초 깨달은듯 과장 약간의 지식 있으면 알수있어"

마성스님 도올 초기불교관 비판/"中道 참뜻 최초 깨달은듯 과장 약간의 지식 있으면 알수있어"


마성스님 도올 초기불교관 비판/"中道 참뜻 최초 깨달은듯 과장 약간의 지식 있으면 알수있어"
입력 200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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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문헌연구소장인 마성(摩聖ㆍ46) 스님이 도올 김용옥씨가 최근 펴낸 책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에 드러난 도올의 초기불교관을 비판했다. 이 글은 도올의 최근 활동에 대한 불교계의 첫번째 반응이어서 논쟁이 예상된다.마성 스님은 19일 배포된 현대불교신문에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을 읽고’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싣고 도올이 일부 기초적인 지식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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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 스님은 먼저 “김씨가 원시 경전인 ‘팔리 삼장’과 ‘한역 아함’의 조직 체계와 그 대응관계는 물론 팔리 율장의 편제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다”고 꼬집었다.

가령 책의 1권 주(註) 4에 “이 4부4함과 5니까야의 양전(兩傳)을 대조 연구함으로써”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팔리경장은 다섯 니까야, 즉 5부(部)이고 이에 대응하는 한역은 4아함으로 이뤄져 있으므로 위 문장은 ‘4아함과 5니까야’라고 표기해야 하므로 ‘4부’라는 부분은 명백한 오류라는 것.

그는 또 김씨가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PTS)에서 발행된 로마자 팔리삼장 즉 PTS본(本)을 4차례나 PTA본이라고 잘못 표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성 스님은 이어 “도올의 초기불교 이해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초기불교에 관한 새로운 학설이나 특기할 만한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 단적인 예로 김씨는 마치 최초로 중도(中道)의 참뜻을 파악한 것처럼 과장하고 있지만 초기 불교에 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중도는 고(苦)와 낙(樂)의 중간이 아니라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길임을 알 수 있다는 것. 도올은 책에서 “이(중도) 깨달음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New Way였다”고 적고 있다.

마성 스님은 “김씨가 책과 강연을 통해 ‘붓다가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였다’면서 마치 연기가 불교의 핵심인 것처럼 몰고 가고 있다”며 “그러나 연기야말로 붓다의 가르침이고, 다른 교설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처럼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어느 한 교설만이 붓다의 핵심사상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또 다른 도그마에 빠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스님은 “그의 배움에 대한 끝없는 열정, 달라이 라마와 나눈 진지한 대화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낸다”면서도 “지적 우월감에서 나온 비아냥과 남을 무시하는듯한 어투는 인도를 다녀온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1973년 경남 진해 대광사에서 출가한 마성 스님은 92년부터 4년 간 스리랑카 팔리 불교대학에서 초기불교를 연구했다. 현재 가야사 주지로 있으며 팔리문헌연구소를 세워 팔리 경전의 보급과 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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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마성스님의 지적에 "건전비판 환영"
입력2002.08.20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02082067028

원시불교에 대한 신간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을 내며 방송강연에 복귀키로 한 도올 김용옥씨가 20일 사전 연락없이 정대(正大) 조계종 총무원장을 방문,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만남을 화두로20여분간 환담했다.

불교 인터넷언론인 '붓다뉴스'(buddhanews.com)에 따르면 김씨는 이날 아무런 연락없이 총무원장을 방문, 우리 불교계가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는 문제 등을 화제로 공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책을 선물했다.

김씨는 "달라이 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총무원장의 물음에 "정직하고 깨끗한 분"이라고 답했다. 이어 총무원장이 "달라이 라마의 초청 여부는 정치적 문제 등이 얽혀 쉽지 않다"고 하자 "정치적 사안을 떠나 초청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29일부터 시작하는 EBS 강연 '도올, 인도를 만나다'와 관련해, 김씨가 "이번 기회를 한국 지식대중에게 불교를 인식시키는 계기로 삼겠다"고 밝히자 총무원장은 "불교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많지 않다.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김씨는 "한국 불교는 이론적 토대와 수행풍토가 서 있고 우리 민족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데 이런 불교는 흔치 않다"고 평했다. 

그는 "달라이 라마가 방한하면 내가통역을 맡겠다"고도 했다.


김씨는 총무원 방문을 마치고 자신의 저서를 비판한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摩聖) 스님의 기고를 실은 <현대불교신문>이 운영하는 서점 '여시아문'을 들러 현대불교신서 시리즈 30여권을 구입했다.

마성 스님의 비판에 대해 김씨는 "건전한 비판은 언제든지 환영한다"며 "논쟁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교가 그만큼 발전한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또 EBS 강연에 대한 건전한 비판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마성 스님은 "'붓다가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였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이미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한 이야기이다"면서 김씨의 신간에서 드러난 오류와 과장을 4개 항목에 걸쳐 지적했다.


'팔리 삼장'과 '한역 아함'의 편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됐고 '중도'(中道)가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길'이라는 사실과 '붓다가 깨달은것은 연기였다'는 사실 등은 이미 진부한 이야기라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서울=연합뉴스) 신지홍 기자 shin@yna.co.kr



2020/09/30

홍창성 불성佛性에 대한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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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is in Mendota Heights, Minnesota.

mtS9nps toAuugfunshnthre 2s0u1ooo8red  ·

지난 토요일 이 페북에 올린 글 <불교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페친님들의 코멘트에 힘입어 그 내용을 다듬어 월간불교문화 편집인께 보냈다. 특히 Bruce Park님과 조기현님께 감사드린다. 물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유선경교수가 가장 많은 코멘트로 도와 주었다.

개학까지 그래도 보름이 남아 있어 연재하고 있는 에세이를 한 편 더 완성했다. 내게 주어진 분량은 원고지 20매인데, 지금까지 한번도 20매 안에서 글을 맺지 못하고 편집장님 속을 썩여 왔어서, 이번에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23매까지 줄였다.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인데, 내 한 호흡의 길이는 40매이고, 좀 편하게 숨쉬려면 120매는 되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원고지를 사용하지 않는 미국에서 내가 글쓰기에 편하다고 느껴 온 분량은 영어로 최소 6,000단어 이상인데, 그것을 한글 원고지로 환산하면 120매 분량이다. 그래서 결국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내 글쓰기 호흡의 길이를 한글 원고지로는 가늠 못하며 헤맸던 꼴이었다.

새로 쓴 에세이 <불성의 현대적 이해>는 바로 밑에 PDF 파일로 원고를 연결해 보았고, 또 밑에 전문을 붙이기도 했다. 짧은 글에 중요한 논증을 새로 도입하느라고 글이 좀 지나치게 응축되고 (constrict) 상세한 설명을 더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논증을 앞으로 계속 사용하며 더 세련되게 다듬고 또 이 논증 자체를 분석하는 글도 따로 쓸 계획이다. 관심 있으신 페친들께 코멘트를 부탁드린다.

아, 밑에 있는 사진은 우리 미네소타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Welcome Table'인데, 밑둥을 보면 파인애플 모양으로 되어 있다. 하와이에서 환영한다는 표시로 파인애플을 선사한다고 해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https://www.dropbox.com/.../%EB%B6%88%EC%84%B1%EC%9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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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강의실 357호 09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홍창성

불성佛性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는 학생들과 매시간 5분 정도 입정入定한 다음에 강의를 시작한다. 그러면 학기 중반을 넘어설 무렵 학생 몇몇이 명상의 교리적 근거에 대해 질문하곤 한다.

"5분의 참선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집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도 종종 참선을 합니다. 그런데 참선이 깨달음과 열반에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마음이 한없이 맑아지면 깨닫게 되나요? 아니면 명상과 관련된 다른 근거가 있어서 깨닫는가요?"

구체적인 예로 문제에 접근하기 좋아하는 영미권英美圈 학생들을 위해 나는 선禪에서의 수행방법을 소개한다. 일본 조동종曹洞宗 선사들을 통해 소개되어 서구에서 인기 있는 묵조선黙照禪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잡념이 모두 떨어져 나가게 해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비추어 보아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불성佛性을 깨치면 깨닫는다고 한다. (주석: 선문禪門에서는 돈오頓悟로서의 깨침과 증오證悟로서의 깨달음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미국대학 학부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본고에서는 이 둘 사이의 엄밀한 구분 없이 논의를 전개하겠다.) 한편 한국 불교의 간화선看話禪은 화두花頭를 잡아 그것을 마치 마음을 청소하는 세제처럼 사용해 마음속 모든 상념을 씻어 내어 어느 순간 웅크리고 있던 불성을 깨치면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투철하게 이해하려는 미국학생들은 또 반대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불성은 깨끗한 영혼 같은 것 같습니다. 참선수행을 통해 원래의 순수한 영혼을 되찾으면 기독교에서 구원받듯이 불교적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아도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불성이 영혼이나 아뜨만과 어떻게 다릅니까?"

이것은 선문禪門의 불성에 관한 견해가 붓다의 무아론無我論과 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느냐는 의문이다. 똑똑한 학생들이 제기할 수 있는 좋은 질문이다. 주지하듯이 불성 여래장 사상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선禪이야말로 이 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해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의 형태이다. 그래서 선禪이 현대적으로 해석되어 계속 진화하기를 희망하는 나는 그 목표를 위해 학생들과 함께 일단 불성 사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도한다.

 불성 사상이란 모든 유정물有情物이 (혹자는 모든 무정물無情物까지도) 이미 근본적으로 깨쳐 있어서 (本覺) 원래부터 붓다라는 주장이다. 이 사상에는 모든 유정물이 깨달아 붓다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으로부터 이미 모두 부처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기만 하면 성불成佛한다는 강한 주장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해석이 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공통된 주장은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한 본성本性으로서의 불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성사상이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에 그것을 그것이게끔 만들어 주는 아뜨만atman 또는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붓다의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과는 과연 양립가능한가(compatible)? 그럴 수 없는 것 같다.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서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붓다의 연기에 관한 가르침이 불교 교리의 근본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붓다의 연기론을 받아들이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다음과 같은 내 철학적 논증으로 불성(과 아뜨만 그리고 자성)의 존재가 반박된다고 생각한다.

불성이 존재한다면 불성은 조건의 의해 생멸生滅하거나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다.

(1)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면 불성의 존재는 조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無常한) 조건들에 의지하는 한 불성은 사물의 고정불변한 본성(本性 intrinsic nature)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하다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지 않았다면 그 불성은 스스로부터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성의 자기기원self-origination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불성은 자기기원 당시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2-1) 불성이 자기기원 당시 존재했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다시 솟아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2-2)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지 않았으면서 자기기원 당시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는 없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1)과 (2)에 의해 고정불변하며 상주(常住)하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의 논증에서 ‘불성’ 대신 ‘아뜨만’이나 ‘자성’을 대입하면 그것은 바로 아뜨만이나 자성의 존재를 반박하는 논증이 된다. 내 불교철학강의를 들은 미국 학생 가운데 아직 아무도 위의 논증에 이의를 제기한 녀석은 없다. 오히려 강력한 논증이라며 논증의 매력을 즐기는 녀석들이 여럿 있었다, 가끔 자기들이 믿는 영혼이나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같은 구조의 논증을 적용해 보면서.

 그런데 실은 나는 ‘불성’이라는 대단히 편리한 개념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겠다. 일상 언어에는 우리가 흔히 쓰기 때문에 마치 그 말의 대상이 세계에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어휘가 많다. 책상, 펜, 엔진, 날개 등 그것들이 수행하는 기능(function)에 의해 정의定義되는 사물들이 모두 그렇다. 예를 들어 엔진은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변환시켜 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라고 정의된다. 자동차 엔진은 휘발유를 연소시켜 나오는 화학에너지를 이용해 바퀴를 돌리는 운동에너지를 생산한다. 엔진의 모양은 다양하며, 그 재질이 반드시 금속일 필요 없이 원칙적으로 세라믹이나 돌 또는 플라스틱 같은 재료로도 엔진을 만들 수 있다. 어떤 물체가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변환시키기만 한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재질, 모양, 색깔, 크기 등에 상관없이 모두 엔진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책상, 펜, 날개 등에도 모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내 눈 앞에 주차해 있는 이 자동차의 엔진, 한강위에 떠 있는 저기 저 작은 보트의 선박용 엔진, 그리고 하늘을 나는 저 은빛 비행기의 엔진을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또 원칙적으로 만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엔진 그 자체와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어떤 구체적인 엔진이면 엔진이지 어떤 황당한 형이상학적 공간에 존재한다는 (플라톤이 말할 법한) 엔진의 형상形相 같은 것을 존재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펜, 날개, 선풍기, 냉장고 등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은 이 내 손안의 볼펜, 하늘을 나는 저 새의 날개,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도는 옆방의 선풍기, 그리고 우리 집 냉장고 같이 구체적인 물체들이다.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의 펜 그 자체, 날개 그 자체,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선풍기의 형상, 냉장고의 본성 그 자체와 같은 추상적인 대상들은 우리 자연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단지 ‘펜’이라는 개념, ‘날개’라는 표현, ‘선풍기’라는 지시어, 그리고 ‘냉장고’라는 편리한 말에 불과할 뿐, 그것들이 가리키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대상들이 우리 세계에 존재한다고 보아 줄 이유가 없다.

 불성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불성도 이 세계 안에 형이상학적 존재인 추상적 대상으로 내재內在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비록 추상적인 엔진이나 날개는 존재하지 않지만 구체적인 개개의 엔진 장치나 각각의 날개들이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듯이, 만약 우리가 ‘불성’을 ‘어떤 한 유정물이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깨달음과 열반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몸과 마음의 특정한 상태’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나는 구체적인 존재자로서의 불성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그 근기根機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는데 적합한 심신心身의 상태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에서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깨달음을 위해 가장 적절한 심신의 상태가 상이하게 결정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다양한 심신의 상태에 공통된 어떤 필연적 속성 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각각의 경우 주어진 유정물에 있어서 깨달음을 위해 가장 적합한 구체적인 심신의 상태를 그때그때마다의 불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 그 다양한 펜들을 경우마다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펜’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듯이, 나는 우리가 각 유정물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깨달음과 열반을 위한 최적의 심신 상태를 그때그때 지시하기 위해 ‘불성’이라는 말과 개념을 얼마든지 써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불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다, 물론 내가 말하는 불성은 모든 유정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을 가진 아뜨만과 같은 실체가 아니고 각 유정물마다 다르고 또 한 유정물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찰나마다 다른 심신의 최적화된 상태를 말할 뿐이지만.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를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Comments

Jae Kwon Kim

"불성은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거나,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거나이다." A exclusive or B

에너지는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기도 하다. A and B

 · 2 y

한시우

 · 2 y

Chang-Seong Hong

재미있는 댓글 잘 읽었습니다. 논리학자들은 앞 문장을 “Av~A (A or not-A)”라고 표기하고, 뒷 문장을 “B&~B (B and not-B)”라고 표기합니다. 앞 문장은 그것이 exclusive or 이든 inclusive or 이든 상관없이 그 논리적 형식에 의해 언제나 참인 문장입니다. 언제나 참이기에 별로 재미없습니다. 그리고 뒷 문장은 그 형식이 논리적으로 모순이어서 언제나 거짓입니다. 언제나 거짓이기에 우리가 피해야 할 주장입니다.

그런데 뒷 문장을 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루뭉술한 해석을 가져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형식논리학 (수리논리학 또는 기호논리학)은 이런 방법에 관심이 없습니다만, 헤겔류의 변증론자들만 해도 (마이클 조단은 키가 작다) & (마이클 조단은 키가 작지 않다) 라는 문장이 참이라고 보아도 좋답니다. 정(正)은 반(反)을 정립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첫 부분이 조단이 3살 때 말해졌고 뒷 부분이 20살 때 말해졌다면 둘 다 옳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또 앞부분이 평균키 7피트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옳고 뒷 부분은 평균키 5피트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옳으니, 이 두 그룹을 요령있게 배치하면 앞뒤부분 모두 옳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조건’을 어느 범위까지 확대해서 해석하느냐입니다. 남방불교식으로 어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어떤 물리량, 어떤 물리적 사건, 어떤 의식상태와 같이 ‘실질적인(real)’ 존재자들까지만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북방 대승불교에서처럼 조건을 연기의 두 항에 들어갈 수 있는 그 다른 모든 것들까지 (예를 들어 언어적 개념, 수, 논리적 관계, 공간적 관계, 사회적 관계, 관점, 배경 이론, 배경 가치관, 배경 종교, 등등) 포함하느냐입니다. 제가 앞으로 월간불교문화에서 10월부터 시작해서 3회에 걸쳐 차례로 논의하겠습니다만, 저는 대승불교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에너지는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기도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 ‘조건’이라는 것이 모든 관점이나 배경이 되는 물리학 이론까지 포함시켜도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앞 부분의 ‘조건’과 뒷 부분의 ‘조건’이 같은 조건입니까 아니면 다른 조건입니까? 마찬가지로, 앞 부분의 ‘에너지’와 뒷 부분의 ‘에너지’가 같은 에너지입니까 다른 에너지입니까? 이 문장의 의미를 좀더 더 분명히 해 주시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한편, 불교에서도 사물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고들 해 왔지요. 어떤 사물도 자성을 가진 실체로서 상주하며 존재하지는 않지만,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이 공空한) 가상(假相, 幻)으로는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문장이 그럴듯한 신비감을 주는 이유는 두 개의 상이한 관점을 섞어 놓아 ‘존재’라는 동일한 단어를 ‘상주하는 실체’와 ‘가상’이라는 두 개의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논리적 오류(the fallacy of equivocation)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문장에서 사용하는 같은 단어는 같은 관점에서 같은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논리학의 법칙을 따라야 논의가 헛돌지 않게 됩니다. 아, 물론 선생님의 문장이 그런 문제가 있다는 말씀은 전혀 아닙니다.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아, 위에서 "Bv~B (B or not-B)"가 아니라 "B&~B (B and not-B)"여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방금 고쳤습니다.

 · 2 y

Jae Kwon Kim

Yumaa Hill 상세하고 유익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비판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든 느낌을 아주 간략하게 표현해본 것이 었습니다.

제가 인용한 A exclusive or B 에서 불성 대신에 아트만 등을 대입해도 또 "그것" 이라는 존재자를 대입해도 논의가 성립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명백히, A and B 가 성립하는 것이 있다면, "고정 불변하여 상주하는 <불성,그것> 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문제가 있는 것이 되는데, 그 "그것"의 예로 에너지를 들었을 뿐 입니다.

 · 2 y

Jae Kwon Kim

Yumaa Hill 에너지는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기도 한다면, 에너지는 상주하는 본성을 가지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 2 y

Jae Kwon Kim

에너지는 그것의 총합은 불변하는 것이므로 조건에 무관하게 상주하는 무엇이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개체의 에너지는 조건에 따라서 변화지만, 총계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총계의 의미 속에있는 어떤 본성은 불변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2 y

Chang-Seong Hong

Jae Kwon Kim 제가 스마트폰이 아직도 서툴러서 쓴 것이 거의 지워졌습니다. 다시 쓰지요.

만약 신이나 영혼, 아뜨만이나 브라만처럼 상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생멸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그 정의definition에 의하면 불변합니다. 예를 들어 영혼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것이 멸할 수 있으려면 물리적 또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불변한다면 결코 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변하면 불멸이고, 불멸이면 영원합니…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그리고 제가 예상한대로 원래 쓰신 문장에서 생멸하는 에너지는 개개 경우의 에너지이고 생멸하지 않는 에너지는 에너지의 총량으로서 불변하는 것으로 쓰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도 흔히 이렇게 같은 단어를 한 문장에서 다른 뜻으로 쓰기도 합니다만, 이제는 21세기이니 불교도 좀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표현을 다듬을 때가 되었습니다 (실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났습니다). 우리 불교가 논리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예를 여전히 가르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어쨌든…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한편, 저는 전체로서의 에너지의 총량이라는 것도 뉴튼 이래 주어진 우리 물리학의 전제로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 이것은 객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우리의 물리 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기본 가설 또는 공리 같은 것에 해당할 뿐입니다. 그리고 (2) 불변하는 에너지의 총량이라는 것은 오직 우리의 물리학을 배경 이론으로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연기론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받아들이는 물리학'이라는 조건에 의해서만…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제가 한정된 물리학의 지식으로 답변드려 보았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을 제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 y

Jae Kwon Kim

에너지 보존의 법칙 역시 물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엇이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뉴톤 역학의 체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리고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더 추상적인 그러면서 a priori 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에 바탕하고요...

잠깐 비켜나서 … See more

 · 2 y

조기현

약간 다른 얘기긴 하지만, 특수상대성이론이 등장하기 전에는, 에너지보존과 질량보존은 따로 취급되었습니다. 핵합성 등에서 질량결손이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것은 특수상대성이론의 프레임 안에서 비로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에너지보존과 질량보존이라는 별개의 원칙이 생각 밖의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에너지-질량보존으로 확장(expand)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에너지보존이라는 자명해보이는 원리도 뉴턴물리학이냐 상대성이론이냐 하는 (쿤의 … See more

 · 2 y

조기현

이런 것이 연기의 일부로도 생각될 수 있겠고요.

 · 2 y

Chang-Seong Hong

조기현 예, 넓은 의미에서의 연기로 포함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고맙습니다.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댓글 감사합니다. 님의 댓글은 부분적으로 옳은 것이지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상대성 이론에 기인한다는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총에너지 보존의 법칙의 이론적 근거는 time homogeneity, 즉, 물리법칙이 시간의 원점을 잡는 것과 무관하게 성립한다고 하는, 일종의 연속 대칭성에 바탕한 것입니다. 그기에 따른 Noether's theorem 이죠.

 · 2 y

Jae Kwon Kim

물론 모든 이론은 근거에 바탕하므로 그것까지 연기이다라고 말할수 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far-fetching 이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앞에도 언급했지만, 이것의 근거는 너무나 a priori 한 일반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부정되어야 할 어떤 모순도 찾아진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에너지가 있었고 그것에서부터 모든 물질들이 생겼났지만, 그 것의 총합은 불변하다.

 · 2 y

Jae Kwon Kim

연기론을 거의 절대적 진리"로 모실려고 하는 그 근거까지도 여러가지 잡다한 논증과 현실에 대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면, 그 연기론까지 조건에 의존하는 (연기) 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그것의 결론조차 절대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지요. 연기론의 절대성에 필요한 논증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필요한 시간의 동질성 중에서 어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선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살펴 보십시요

 · 2 y

Chang-Seong Hong

Jae Kwon Kim 너무 나가는 것 같은 소리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에너지'라는 개념도 물리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만약 누군가 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어떤 물리학 이론에 따라 창조했을 겁니다.

그리고 에너지는 에너지 아닌 것에 대비해서만 에너지입니다 - 즉, 에너지는 에너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이기 때문에, 에너지는 에너지가 아닌 것과 연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 See more

 · 2 y

Jae Kwon Kim

Yumaa Hill 제가 거의 결론적으로 쓴 댓글이 지금 글의 바로 위에 있습니다. 저는 철학적 논증을 즐기고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편이지만, 그리고 연기론이 대체적으로 매력있는 견해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의 절대성에 대한 논증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의 근거보다 더 확실해 보이지 않음은 너무나 분명해 보입니다. 수식과 같은 더 정확한 언어 그리고 확립된 근거에 바탕하지 않는 논증들이 가질 수 있는 허점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히 이해한다고 믿기 때문입니…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Jae Kwon Kim 연기론 자체도 절대성을 지닐 수 없다는 고찰은 연기의 대승적 해석인 공에 대한 오래전부터의 고찰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을 결여해 공한데, 이런 공조차도 자성을 가질 수 없어 공하고 (공공), 공공조차도 공하고 (공공공), 이런 과정은 무한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자는 이런 무한 부정의 과정이 (그래서 모든 개념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과정이)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보기까지 합니다. … See more

 · 2 y · Edited

Jae Kwon Kim

"연기에도 절대성이 없다" 는 좋은 결론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2 y · Edited

Jae Kwon Kim

논의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 y

Jae Kwon Kim

일부 사람들의 가능한 흥미를 위해서 여기에 댓글들을 일부 포스팅해도 될까요? 물론 최대한 논리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

 · 2 y

조기현

기인한다는게 아니라 유효하기 위해서 의존한다는 겁니다. 뇌써의 정리는 결국 수학적인 형식이며, 그 안의 물리적인 내용물은 라그랑지안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너지보존법칙이 실험에서 유효하려면 적절한 라그랑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적절한 라그랑지안을 세우려면, 물리적인 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See more

 · 2 y

조기현

에너지보존법칙은 결국 어떠한 이론적 맥락에서 의논되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며, (에너지와 질량을 예로 들어 누차 설명했습니다) 이를 맥락의존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교수님은 에너지보존법칙의 작업가설성과 배경의존성을 말씀하셨는데, 이중 배경의존성을 맥락의존성이란 형태로 partially 지지합니다. 배경의존성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파악되지가 않아서...

 · 2 y

Jae Kwon Kim

조기현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통찰은 최소작용의 원리와 시간의 동질성인데, 이 둘은 패러다임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죠... 그리고 모든 논의 또는 논리-- 연기론이니 무아, 불행 등등 포함-- 은 어떤 이론적 또는 관찰적 근거에 입각하므로, 이러한 논의 또한 절대적 일 수 없음으로 이미 결론 내렸습니다.

 · 2 y

조기현

저는 과학사적인 입장에서 에너지보존법칙을 논했는데, 물리이론의 입장에서 논박하시는군요. 물리이론 입장에서 이 문제는 상당히 delicate해서, 어렵습니다. 용어는 보다 엄밀히 정의되어야 하며,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고전물리에서, 운동량(mv)보존법칙은 뉴턴의 작용반작용(Fxy=-Fyx)에 기인하지요. 이는 측정대상이 명확히 정의된 (질량과 속도) 운동량의 보존여부를 실험적으로 잘 테스트할 수 있으므로, 실험적으로 좋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 See more

 · 2 y

조기현

이러한 미꾸라지 진리는 패러다임이 유효하다면, 놓친 조각(missing piece)를 찾는데 유용한 guidance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패러다임 쉬프트(고전역학에서 상대성이론으로 등)가 일어나는 현상에서는, 놓친 조각(missing piece)을 찾기는 커녕 엉터리 조각으로 생각을 자꾸 유도하겠지요.… See more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물리 또는 물리철학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견해의 일치가 있어 보이지 않네요...

고전 역학에 관한한-- 물론 상대성 이론 포함-- 그것은 유클리드 기하학같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실험에 의존할 것이 없고, 실험에 비추어 볼 것도 없지요. (Chaos 는 논외)… See more

 · 2 y · Edited

조기현

Jae Kwon Kim 죄송합니다만, 최소작용의 원칙은 전자기학의 라그랑지안의 결정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또한 local U(1) gauge symmetry 또한 양자역학적인 파동함수와 전자기장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군이므로, "고전" 전자기학의 라그랑지안 결정 (F*F+jA)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2 y

Jae Kwon Kim

조기현 여기서 서술한 것은, Landau series 의 volume 1 (고전 역학) & volume 2 (classical fields) 에 이미 다 나와 있는 것입니다.

 · 2 y · Edited

Jae Kwon Kim

양자 전자기학은 고전 역학의 라그랑지언 자체를 구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며, 그것을 quantization 시키는 이슈에 관한 것입니다.

 · 2 y

조기현

이해가 안 되네요. local U(1) transformation은 양자역학적인 파동함수의 국소적 위상 변환인데, 그게 위상을 갖는 파동함수로 기술되지 않는 고전적인 물체와 전자기학의 라그랑지안을 어떻게 얘기합니까?

 · 2 y

조기현

양자전자기학은 여기에 second quantization을 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old term이지만요...)

 · 2 y

조기현

연역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싶으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과학철학자들과 과학사가들은 연역적 체계 외에 실험을 통한 입증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 2 y

Jae Kwon Kim

나의 전공이 양자 장론과 임계 현상입니다. 그리고 해당 논문이 20여편 이상 있으며, PRL 의 referee 까지 했습니다. 란다우 series 를 읽어 보십시요. 양자장론은 주어진 local gauge symmetry 의 양자화, 재규격화 등에 관한 이론이며, 그것의 classic Lagrangian form 을 결정하는 것은 상대성 원리와 local gauge symmetry 입니다. 다시말해서 대칭성이 주어지면 라그란지언 (좀더 엄밀하게 … See more

 · 2 y · Edited

조기현

Jae Kwon Kim 뭐, 디락스피너장을 "고전적인 장"으로도 간주하고 그것으로 "고전적인 라그랑지안 밀도"를 만드신다면야 할 말은 없습니다만, 스핀 1/2장을 고전적인 장으로도 간주할 수 있을까요?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디락장은 전자에 대한 것이지 전자기장에 대한 것이 아니죠. 장과 전하를 띤 입자 사이에 작용을 결정하는 것은 이미 고전 역학에서 결정된 것이지요.

 · 2 y

조기현

Jae Kwon Kim 그러니까 제 말이 local U(1) symmetry는 (양자장론의 경우) 디락장 또는 (학부양자역학의 경우) 슈뢰딩거파동함수와, 전자기장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전적인 물체와 전자기장 사이의 상호작용에는 국소적 U(1) 대칭성이 등장할데는 없다는거죠...

 · 2 y

Jae Kwon Kim

지금 논의되어 온 것은 고전적 전자기학(전자와 장의 작용하지 포함) 한 것이었는데, 디락장을 도입해서 논의가 흐려지는 면이 있네요.

디락장의 장론적 도출은 group theory 에서 보는 것이 가장 간명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좌표 변환 SL(2,c) 에 대응하는 전자의 상태 함수의 변환은 su(2)× su(2) 인 것으로 기억...… See more

 · 2 y

조기현

Jae Kwon Kim 예 감사합니다. 제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서로 논점이 안 맞았던 것 같네요.

말씀하신대로 주어진 대칭성에 대해 라그랑지안이 유일하게 결정됩니다.… See more

 · 2 y

조기현

페체이퀸 대칭성 등도 새로운 대칭성을 더해가는, 좋은 예가 된다고 봅니다.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네 감사

 · 2 y

Jae Kwon Kim

조기현 한가지만 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라그랑지언의 form 과 무관합니다. Noether theorem 을 참고해 보십시요

 · 2 y

조기현

Jae Kwon Kim 예. 김재권님이 말씀하시는 에너지보존법칙과 제가 얘기한 에너지보존법칙이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실험적으로 측정할게 명확하고, 실험적으로 성립여부를 테스트 가능한 에너지보존식(법칙과의 혼동을 피해...)으로, 구체적인 라그랑지안에 따라 형태가 다릅니다. … See more

 · 2 y

Bruce W. Park

저까지 언급해 주셔서 부끄럽습니다. 불성에 대한 정의와 해석을 쉽게 서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작업가설적 (operational definition) 정의로 읽히게 됩니다. 불성에 대한 고찰에 앞서 만물이 갖는 영원성, 청정성, 완전성을 담보한 법성에 대한 고찰이 후기대승에서 언급을 많이 하였다고 봅니다. 제법실상을 논구하는 측면서 법성의 공함까지 논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불성은 붓다의 깨달음보다도 붓다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불성은 누구든지 붓다처럼 되고 싶은 소망에서 성불의 근거를 추적해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대승불교는 두 가지로 정리햇던 듯 합니다. 불성사상과 보살사상이지요. 성불의 근원은 불성이 있기 때문이고 보살의 행을 성취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불성은 극히 신앙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엇고 그 기능과 효력이 지대했다고 봅니다. 교수님의 해석은 무기력한 논쟁을 물리치고 건설적이고 역동적인 불자의 삶을 이끌어주게 합니다. 교수님의 설명을 보니 불성은 서양종교의 성령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뚜렷해집니다. 기독교의 신이 자아를 지녀 심판하는 전능자라고 하지만 불성은 어떤 자성도 지니지 않는 개념적 언어로 공성 (연기성)의 총체를 표현한 것으로도 읽힙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 2 y

Chang-Seong Hong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반쯤을 미리 해 주셨네요.^^ 저는 공을 단순히 논리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이어서 그것에 어떠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시도에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기 대승의 견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실은 저는 불교계에서 공을 언급할 때 '공성'이라는 표현을 쓰며 마치 공에 무슨 본질적인 성품이 존재하는 듯하게 표현하는 것조차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서양불교학자들은 그 옛날 불교승려들이 힌두교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신도들을 더 확보하고자 당시 인도의 보통사람들이 더 편하게 받아들일 아뜨만과 비슷한 불성의 개념을 도입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 2 y

허만항

“이 법계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연기), 이 법계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법성)(無不從此法界流, 無不還歸此法界).

 · 2 y

Chang-Seong Hong

허만항 감사합니다. 물론 옳고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만, 저는 또다시 '법성'이라는 단어가 불편합니다. 그냥 '법의 모습,' '존재의 모습,' '이것이 진리'라고 하면 될 것을 '법성'이라고 하여 마치 무슨 고정불변의 속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여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물론 '성'을 여유있게 해석하면 별 문제 없다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 2 y

허만항

“법성은 제법의 진실체성真實體性, 또한 우주간의 일체현상에 갖추고 있는 진실불변의 본성을 가리킨다. 이는 또한 진여법성으로 진여의 다른 명칭이다. 법성은 만법의 본질이다. 《대지도론》 33권에서는 일체법의 총상과 별상은 다 같이 법성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제법은 각자의 차별상과 실상이 있다. 말하자면 각자 차별상은 예를들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이 문득 이전의 상을 읽어 그 고정된 것이 없는 까닭에 이를 분별하여 구하면 얻을 수 없다, 불가득不可得인 까닭에 공(무자성)인 즉 공은 제법의 실상이라 말한다. 일체차별상에 대해 말하면 그 자성이 공한 까닭에 모두 동일하여 이를 여如라 한다. 일체상은 다같이 공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공을 법성이라 한다. 또한 황색돌에 금의 성질을 갖추고 있듯이 일체세간법에는 모두 열반의 법성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제법본연의 실성을 법성이라 한다. 이는 《원각경》의 이른바 「중생과 국토는 동일한 법성」라는 경문과 같은 뜻이다.”

《유식명사백화唯識名詞白話》

 · 2 y

Chang-Seong Hong

허만항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교계에서 언제 중관과 유식을 서로 너무 조화롭게만 해석하려 하지 말고, 서로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논쟁도 한번 진지하게 해 보았으면 신나겠습니다.^^

 · 2 y

허만항

감사합니다 저는 대승기신의 입장에서 믿음과 행을 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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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감천

불성이라는 개념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초기 경전에는 없고 후대에 개발되어 쓰여진 단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단어를 가지고 논쟁해봐야 불교를 왜곡할 뿐 도움이 않된다고 봅니다.

언어의 희론 밖에 안된다고 봅니다.

 · 2 y

Chang-Seong Hong

저는 후대에 이루어진 불교 교리도 초기경전에서의 가르침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불성 참나 참마음도 논리적으로 문젯거리가 있다고 해서 쉽게 옆으로 치워버리기보다는, 그 동안 이 개념들이 수행해 온 긍정적인 역할도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초기경전의 가르침과 일관성 있는 방향으로 재해석해서 끌어 안으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시도가 반드시 설득력이 강하거나 성공할 것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 2 y · Edited

김근중

본불은 중국 황벽승려가 만든 허구입니다. 석가모니불이 가르친 불성은 괴로움(고성제)을 아는 것이고,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깨닫는 것이랍니다.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 두 극단이 묶여 결박된 가운데 연기한 '괴로움 소멸'의 중간을 닦는 것의 도성제(팔정도)이랍니다.

그래서 꼰단냐 존자의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고 한 생멸에 대한 '중도' 깨달음을 감흥어로 기뻐하신거랍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초전법륜경을 읽어보시고요.

뭍 사람들이 가진 내외입처의 일체를 벗어나 일체를 거론하지 않는 불교 철학을 논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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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댓글 감사합니다. "뭍 사람들이 가진 내외입처의 일체를 벗어나 일체를 거론하지 않는 불교 철학을 논하시길..."고 하셨는데, 제 글의 문장문장이나 에세이 하나하나로는 그렇게 할 수 없겠습니다만, 전체적인 철학적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결국 선생님께서 바라보시는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믿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 2 y

서근하

대단하신 분들의 대화를 들으니..참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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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두

'시간과 장소에 따라 깨달음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심신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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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예, 수학적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 2 y

Chang-Seong Hong

강교수님께서 우려하신 문제를 고려해 문장의 표현을 바꾸었습니다. 원래 제가 영어로 써 놓은 에세이들에서는 그냥 'optim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수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었는데 한글로 쓰다보니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Optimal이란 말 앞에는 most 같은 말을 붙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는데, 그래서 한국어로 '적절한' '적합한' 정도로 바꾸어 썼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 2 y

Chae Soo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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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Moon

글을 읽으며 전통 불교학자분들의 의견이 몹시 궁금해지는군요.제가 일단 불교학자가 아니라서요. 더더욱 이쪽 견해로도 의견을 듣기를 바래봅니다.패북에 고수님들 많아 보이던대요.

 · 2 y

Chang-Seong Hong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경에는 이렇다고 하더라, 저 경에는 저렇다고 하더라는 식의 의견에는 별로 재미를 못 느낍니다. 제가 그런 내용들을 대충 다 알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내용들이 왜 옳은가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우리 시대의 상식에 맞도록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전개하며 논쟁에 임하시는 분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스님께서 좀 많이 이쪽으로 초대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2 y

Why Moon

저랑 생각이 좀 다르군요. 저는 경을 의지해서 해석하는 것을 흥미있어해서요.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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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Moon

다시 생각해 보니 경보다는 논장에 의거해서 토론 하는 것이 현대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접근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생각을 돌려보니 공부거리가 풍부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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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Su Hee Elena

교수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불교 경전에도 주석이 있고 또 해석학이 있을펜데 어떻게 저희들이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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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 Su Hee Elena

경에 대한 논쟁이 해석학문야겟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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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Chang Su Hee Elena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의 권위를 100% 받아들이고 학문하면 불교학자이겠고, 철학자 나름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자들은 이 세상 어느 권위도 일단 도전해 보고 나서 그것에 동의하고 난 후에야 그 권위를 겨우 인정할까 말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친구하기 별로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 2 y

Sung Soon Kim

‘깨달음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심신의 상태’로 정의하면 배제되는 요소들이 너무 많을 것 같네요. 불성론을 제기한 대승논사들이 초기 교리와 충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제기했던 이유는 ‘평등’과 ‘보편’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 점에 배치될 수 있는 거죠.

 · 2 y

Chang-Seong Hong

저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불성론의 방편으로서의 효용에 대해서 찬성한다는 입장을 실은 이미 (3년전에 쓰고 작년에 영어로 써서 발표했지만) 다른 논문에서 다루었습니다. 동의합니다. 단지 원고지 20여매에 그 내용까지 담지 못했을 뿐입니다. 좋은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 2 y

Chang-Seong Hong

다만, 그렇게 적합한 심신의 상태가 지구상 수십억의 인구 모두에 똑같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워서, 개개인에 따라 또 한 개인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를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2 y

Chang-Seong Hong

우려하신 내용을 제 최종 원고에 반영했습니다. 그러나 불성의 보편적 존재가 제법무아와 공의 가르침과 충둘하기 때문에, 비록 불성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가진 방편으로서의 효용은 인정하지만,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내용으로 볼 수는 없어서 제 원래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2 y

김광현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남방 상좌부 불교를 수승하게 생각하시는 많은 분들이 ‘무아’의 관점에서 대승의 여래장이나 불성론이 힌두교나 다름없다고 비판하는데, 남방 아비달마에서 ‘열반’을 무위법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은 또 어떻게 봐야 하나 뭐 이런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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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좋은 질문 고맙습니다. 저는 실은 불교학자가 아니라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을 전공하는 서양철학자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주로 저를 비난하시는 분들이 저를 '재미 불교학자'라고들 하시는데, 저는 감히 불교학자축에는 못 끼고 불교를 철학으로 연구하는 서양철학자입니다. 그래서 열반에 대해서도 그것을 철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것이 주 관심사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월간불광에 짧게 줄여서 발표하기도 했었는데, 원래 더 상세하고 덜 점잖게 쓰여진 글… See more

 · 2 y · Edited

마성

홍창성 교수님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을 페북에 올려 주셔서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성(佛性, Buddha-nature)을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의 동의어로, 불변하는 아뜨만(ātman)과 같은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 교수님께서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하다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신선해 보입니다. 특히 이 글에서 불성도 조건에 의해 생성되고 조건에 의해 소멸한다는 논증은 크게 돋보입니다.

그러나 잘 나가다가 “나는 불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홍 교수님께서 말하는 “불성은 모든 유정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을 가진 아뜨만과 같은 실체가 아니”라는 전제를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불교철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진짜로 불성은 존재하는구나!’라고 오해할 염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사견으로는 후반부의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비약적인 것 같습니다. 한정된 지면 관계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 y

Chang-Seong Hong

고맙습니다. 예, 후반부는 지면 관계로 제대로 논증을 전개하지 못했습니다. 이 논증은 제가 20년전 완성한 박사학위논문에서부터 갈고 닦아서 자신이 있는 부분인데, 원고지 불과 몇 매에 정리하자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저희집 유선경 교수도 제가 '불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오해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물론 스님은 그렇지 않으시지만요), 제가 고집해서 그냥 놔두었습니다. 아무래도 표현을 더 다듬어야겠습니다. 2년 전 깨달음 논쟁 당시 제가 미디어붓다에 발표했던 다음의 논문에 더 자세한 논증이 있습니다. 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8330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미디어붓다:“‘참나’ ‘참마음’은 ‘2차 지시어’”

MEDIABUDDHA.NET

미디어붓다:“‘참나’ ‘참마음’은 ‘2차 지시어’”

미디어붓다:“‘참나’ ‘참마음’은 ‘2차 지시어’”

 · 2 y

마성

답변 감사합니다. 홍 교수님의 지난 글들을 찾아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

 · 2 y

Chang-Seong Hong

마성 스님의 지적에 도움받아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표현을 바꾸었습니다. 발표될 글에서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 2 y

Why Moon

Jun Bark

 · 2 y

Lee Minji

😊 공유부터 하고^^

차분히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 y

2020/09/14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저, YES24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지은이)민족사2013-12-27

304쪽

책소개

머무는 순간 곧 집착하는 순간 이미 불교에서 멀어진다는 뜻을 내포한 제목과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라는 부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오늘날 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붓다께서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성법 스님은
  1.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화엄경을 첨단 과학이론과 접목하여 해설한 『이판사판화엄경』, 
  2. 동서양 철학과 물리학·뇌과학·생명과학·심리학 등을 토대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3. 천수경을 통해 불교의 기초에서 깨달음의 완성까지 모두 이해시키고자 고심한 『왕초보 천수경 박사되다』 등
그동안 책이 출간될 때마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양한 관점으로 명쾌하게 경전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한국불교의 병폐와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그 대안을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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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_ 13

제1장 붓다로의 시간 여행

027 붓다의 위대한 도전
불교의 탄생
030 붓다, 반고행주의의 성공
붓다의 깨달음
034 붓다, 수행 방법을 ‘업그레이드’ 하다
탈고행주의, 중도 수행
037 중생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붓다, 진정한 승리자의 서원

제2장 붓다, 다르마를 설하다

043 힌두이즘을 제압하다
붓다의 연기緣起
045 인과는 연기의 부분집합이다
연기緣起 속의 인과因果
049 붓다에 주파수를 맞추라
연기, 산은 산 물은 물
052 엉뚱한 자문자답
이율배반도 연기緣起로 해결된다
055 물에 가라앉는 돌을 뜨게 할 수는 없다
업, 고
058 인因과 연緣의 결과물
060 정해진 업業은 없다
업의 개념이 안고 있는 업
066 붓다, 연기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다
업과 윤회는 일반언어
068 무아無我가 아니라 공아空我다
무아와 윤회
073 윤회를 바로 보라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077 진화해야지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업과 윤회의 논리
093 다른 사상을 알아야 불교가 제대로 보인다
6사외도와 불법
098 겉은 불교, 속은 자이나교인가?
자이나교와 불교의 업과 윤회
100 인간을 구성하는 5가지 요소
오온
102 이해관계 없이 감각기관을 다스리라
12처 18계

제3장 붓다, 제자들과의 기막힌 인연

107 붓다, 세월을 함께 할 유일한 분
출가
110 왜 사람들은 붓다만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출가했을까?
붓다의 출가주의
112 유마경에서 만난 부처님의 으뜸제자들
10대 제자
116 조로아스터교의 개종 제자
가섭 3형제를 제도하다
119 붓다의 아들 사랑
외아들 라훌라를 교화하다
122 데바닷다는 극악무도한 자인가?
억울한 데바닷다
126 붓다의 말씀을 되살려 낸 아난존자
억울한 아난
129 현명한 불자, 바보 같은 불자
붓다와 춘다의 대화
133 붓다의 최고 후원자, 사랑과 영혼의 주인공
빔비사라 왕과 위제희 부인

제4장 경전의 바다에서 붓다를 만나다

141 각 나라와 지방의 언어로 법을 전하라
초기 경전들의 언어적 격의 문제
144 극락에 가서나 만날 수 있는 붓다라면
석연치 않은 삼처전심
147 중생의 필요에 따른 맞춤 구원
삼신불과 다불·다보살 사상
151 붓다의 진심은 어디에 담겨 있는가?
금강경과 법화경
157 열린 마음, 창의적으로 해석해야
열반경 속의 무상과 적멸
160 마음을 해부할 수 있는가?
중관과 유식
167 인류 최고·최상의 희망
여래장, 불성
172 고통이 피워낸 희망사항
정토사상, 미륵사상

제5장 붓다의 깨달음, 수행이 희망이다

179 일어나는 마음만 집중 관찰하라
사념처와 위빠사나
183 사람에 따라 수행법도 달라야 한다
위빠사나와 간화선
190 간화선 제일주의 이대로 좋은가?
간화선
193 보면 사라진다
마음 관찰하기
196 이타행, 수행의 척도
수행과 자비
201 사람은 왜 화를 낼까?
화, 수행
204 깨달음과 중생 구제
대승사상과 보살
209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꼭 실천해야 할 것
상구보리 하화중생과 사섭법


제6장 붓다, 과학을 끌어안다

215 불교의 요체와 과학의 극적인 통섭
일체유심조

219 과학, 미래의 불교를 위한 새로운 대비책?
과거심·현재심·미래심

225 현대, 신神들의 최대 수난기
진화론과 연기


제7장 중생이 있으므로 붓다가 있다

235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성숙해 있는가
삼보三寶
238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가지라
삼귀의
241 붓다가 되겠나이다, 붓다처럼 살겠나이다
서원, 출가는 신분 상승인가
247 말귀부터 알아들어야
춘성 스님의 일화와 원각경
252 막간 우스갯소리
미국 법정에서 오간 대화들
255 용서가 반드시 최선은 아니다
인욕의 양면성
258 중생의 소원에 따라 진화된 만능 불·보살
불·보살의 본원
262 믿음을 저버린 ‘양심’이 더 종교적일 수 있다
종교적 신념과 믿음의 공허
266 신비주의 주의보
수행의 마장을 경계하라
270 단지 감각의 오류일 뿐
우주인, 임사체험, 심령현상
275 종교인의 오류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나?
뉴턴은 종교인이 아니었다
278 중생이 바라는 대로 맡기겠나이다
기복불교, 원력불교
283 다른 눈으로 세상 보기
사이언톨로지교와 라엘리안 무브먼트
289 동서양을 넘나든 종교적·문화적 아이콘
만卍자, 나치 문양, 십자가 문양
292 힌두이즘의 쓰나미가 덮치다
인도에서 불교의 멸망

부록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_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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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한국불교의 현재는 따지고 보면 염세주의보다 훨씬 위험한 낙관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붓다 입멸 후 1,500여 년이나 지나 중국에서 발생한 선불교禪佛敎의 선사들의 입에서 나온 “네가 곧 부처다”라는 말을 붓다의 가르침의 요체로 인식하는 엄청난 착시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술 더 떠, 수행을 하는 데는 무식할수록 유리하니 붓다께서 설하신 경전도 보면 안 되고, 세간의 이치와 논리는 하찮은 것이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차단해야 비로소 바른 수행이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붓다께서는 염세적인 출발에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는 극적 반전으로 낙관적 회향을 보여 주셨지만, 이들은 “네가 부처다”라는 낙관적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가 맞다는 당연한 회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선불교)의 근본적 한계인 것입니다. 스님들이 신도들과 늘 같이 독송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붓다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로 일체가 공空함을 강조하는데도 스님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이든 사실과 다르든 낙관주의적 착시를 신도들에게 오염시켜야 신도들의 보시가 많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승가의 끝없는 욕심과 증명된 무능력은 따지고 보면 ‘배고픈 신도에 배부른 승가’에 그 원인과 해법이 있습니다. 승가는 해방 이후 타종교인에 비해 너무나도 편안하게 살아왔고, 지금은 오히려 종단과 본사에 돈이 넘쳐 출가정신을 다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머리말 중에서-  접기
P. 48 붓다의 깨달음은 퍼펙트한 것이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붓다의 퍼펙트에 1~10%만 가까이 다가서도 보통의 인간의 사유를 단번에 넘어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붓다의 온전한 깨달음은 12연기가 아니라, 우주의 이理와 사事의 근본 원리인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상의상관 관계의 원리인 군더더기 없는 연기緣起입니다. - 44p -
인과응보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는 인과에 징벌적 도덕률을 극대화시킨 것입니다. 연기의 부분집합으로 벌어지는 인과에는, 선이나 악이라는 인간의 자기 편의적 분별이 섞일 수가 없습니다. 인과는 연기의 한 단면이고 연기는 우주와 법계의 존재 그 자체와 질서로, 인간의 분별심이 오염시킬 수 없는 자리입니다. 붓다께서는 이 원리를 깨달으셨기에 시비와 분별, 선과 악, 태어남과 죽음, 이런 온갖 양변을 여의고 중도의 자리에 안착하셨던 것입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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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성법 (지은이) 

20세에 출가하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하고, 현재 고양시 대한불교조계종 용화사 주지로 있으면서 불교신자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바른 불교’를 알려 주고, 바른 신행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2001년부터 경전 전산화 불사의 원을 세워, 초기불교에서 주요 대승경전의 다양한 해설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자료의 장(場)인 불교경전총론 세존사이트(www.sejon.or.kr)를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운영하고 있다.

잘못 인식된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로잡고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 모든 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사이버 불사(佛事)와 불서(佛書) 저술과 아울러 지난 2017년 설립한 세존학술연구원 원장으로 세계불교 학술명저 번역 출간 불사(세존학술총서 출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 기존의 훈고학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해석한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와 화엄경을 첨단 과학이론과 접목하여 해설함과 아울러 현재의 ‘비불교적’ 요소를 날카롭게 비판한 『이판사판 화엄경』, 동서양 철학과 물리학·뇌과학·생명과학·심리학 등 다양한 관점을 토대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천수경 해설서인 『왕초보 천수경 박사되다』, 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칼럼집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접기

최근작 : <그래도 불교>,<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이판사판 화엄경> … 총 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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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콕콕 정곡을 찌르듯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지난 한 해를 반조하고 새로운 한 해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12월 말, 지금까지 왜곡되고 잘못 인식해 온 불교 교리, 승가의 잘못된 행태 등에 대해 콕콕 정곡을 찌르듯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비판하면서 대안을 제시한 책이 민족사에서 출간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머무는 순간 곧 집착하는 순간 이미 불교에서 멀어진다는 뜻을 내포한 제목과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라는 부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오늘날 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붓다께서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매우 돋보인다.

이 책의 저자 성법 스님(57세)은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화엄경을 첨단 과학이론과 접목하여 해설한 『이판사판화엄경』, 동서양 철학과 물리학·뇌과학·생명과학·심리학 등을 토대로 반야심경을 해설한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천수경을 통해 불교의 기초에서 깨달음의 완성까지 모두 이해시키고자 고심한 『왕초보 천수경 박사되다』 등 그동안 책이 출간될 때마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양한 관점으로 명쾌하게 경전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한국불교의 병폐와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그 대안을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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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답답했던 점을 스님이 풀어주어서 고맙다.”
“불교를 믿고 공부하면서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던 의심의 덩어리를 성법 스님의 글을 읽고 확연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책을 통해서나마 바른 생각, 바른 소리를 하는 스님을 만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는 독자들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마니아층이 형성되었다.

7장과 부록으로 나뉘어 편집된 이 책은 그동안 출간되었던 경전 해설서와는 달리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총망라하여 다룬 만큼 성법 스님의 사상과 견해를 응축해 놓은 문자사리 같은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불교의 탄생부터 붓다의 깨달음, 교리 발달사, 수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순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인간 최고의 지성인 붓다의 가르침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중국의 기호에 가미되지 않았는지 반문하고, 중국에서 발달한 선수행, 한국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이 내세우는 간화선과 선사들의 가르침의 전달 방법은 완전한 것인가를 물으면서 현대인들에 맞는 수행법을 창안하여 제시하고 있다.

“업은 지금도 왜곡되어 불자들의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으나 힘에 부쳐, 스님에게 해법을 의논하면 “그건 네 업이니 참고 지내라”는 3,000여 년 전의 정답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작 문제는 정답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스님들이 모여 있는 승가, 그중에서도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수록 ‘자신의 업’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행태가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65쪽 중에서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불교는 상당 부분 붓다 이전의 업과 윤회의 개념으로 신도를 유인하고, 신도들은 고달픈 길인 깨달음으로 향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빨리 또 손쉽게 얻으려는 심사로 불교를 믿는다는, 참으로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68쪽 중에서

스님은 “종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영혼과 순수성을 담보로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힌두교인지 자이나교인지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방편에 물들어 거래를 하고 있는 듯한 한국불교의 비불교적 모습에 대해 강렬하게 비판하면서 불교의 근본교리인 연기법과 업설의 개념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 놓고 있다.

불교는 ‘지금’ ‘나와 우리’의 문제를 논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실시간의 종교여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는 단순 마음 정화학(淨化學) 수준의 개인적 평안을 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정도라면 마음을 화두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 뇌과학과 진화심리학, 일반 도덕론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지금’ ‘나와 우리’의 문제를 논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실시간의 종교여야 합니다. 그렇기에 불교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무엇이고, 어떻게 중생들과 더불어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항상 고민해야 합니다.” -머리말 중에서

성법 스님은 지난 2001년부터 경전전산화불사의 원을 세워 불교경전총론(www.sejon.or.kr) 세존사이트를 운영해 오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주요 대승경전의 다양한 해설을 통해 방대한 자료의 장(場)을 만들고 잘못 인식된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로잡고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하기 위해 사이버 불사를 하는 스님의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스님은 이 책을 통해 실시간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비록 수십 년이 걸릴 지라도 붓다의 참된 가르침(s 라인)을 대·소승 경전 속에서 명확하게 정리해 나가는 제 5결집을 시작해야 할 때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는 ‘붓다께서 진정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이고 그에 대한 대안이다. 스님은 세상의 물질적 혁명은 결국은 정신적 세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에, 불교도 혁신을 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면서 오늘날 붓다의 수행 방법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이에 대해서도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위빠사나, 명상, 선수행의 장단점은 무엇이고, 스님이 경험을 바탕으로 창안한 현대인에게 맞는 수행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승가는 수행의 ‘마장’ ‘장애’의 개념조차 사라져 원로스님들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상황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짚고 있다.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 승가에 이런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내 모양을 천 개 만 개 조성해 복 지으라며 팔고, 사법(邪法)을 내 말이라고 중생들을 현혹하면서 정작 내 가르침의 진위에는 관심조차 없구나’라고 말입니다.” -부록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중에서

부록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은 성법 스님이 한국불교의 총체적 문제들을 하나씩 지적한 내용으로 이 책의 정수요, 이 책에서 설파하고자 한 메시지를 함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법 스님의 원력에 뜻을 같이 한 세존아카데미 재가불자 학인들의 보시에 힘입어 지난 2012년 불교신문에 광고 형식으로 연재해 실었던 내용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비교적 긴 머리말부터 부록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태동과 교리, 경전, 수행, 한국불교 등 불교 전반을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한국불교의 현실을 바로 보고 바른 불교를 세우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날카롭고 까칠한 지적만큼이나 보석 같은 지혜와 대안이 돋보이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불교계에 이런 스님도 있구나’ ‘아직은 자정 능력이 있구나’ 하는 마음에 책을 읽는 동안의 이런저런 불편함에서 해탈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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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중도를 말하면서 착시에 빠져있고, 염세주의보다 훨씬위험한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질타하는 참수행자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다. 승가의 욕심과 무능력을 꾸짖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스님의 죽비와 같은 정신이 불자들의 가슴에 널리 스며들기를 기대한다.  구매
현정 2018-05-2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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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연기를 통해 바로보는 부처의 가르침

성법스님을 처음 알게된 것은 2006년경에 해인사에서 구입했던 한권의 책이 인연이 되었다. 그책은 성법스님의 저서는 아니었고, 만현이라는 사이비 중이 스스로를 부처라 칭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써낸 "21세기 붓다의 메세지"라는 책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불교에 대해서 매력과 호기심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인 관심을 가지고 왕성하게 불교와 관련된 모든 것은 다 찾아보려고 애쓰던 시기였다. 

만현이라는 자가 썼던 책은 아주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아도 사이비 처럼 여겨졌으나 - 2014년에 누군가가 자신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스스로를 재림예수 혹은 재림붓다라고 칭한다면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 해인사 경내에 있는 서적 코너에서 당당하게 팔리고 있었고, 서점에서 그 책을 판매하는 보살님께 여쭈어 보아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해인사가 어떤 절인가?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법보사찰" 이라고 불리우는 절이다. 그 상징성을 생각해볼 때 그런책이 해인사 경내에서 당당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참 맥이 빠지는 일 아닌가? 기독교는 워낙에 수많은 종파가 있으니 비교가 힘들지만, 명동성당 서점에서 재림예수라 칭하는 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 당당히 팔리고 있고 그 누구하나 그 책에 대해서 비판조차 없다고 생각해 보면 이건 뭔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인터넷으로 그 책에 대한 내용을 검증해 보던 중 그 책과 저자에 대해서 조목 조목 비판을 하고 있던 스님이 유일하게 한분 계셨는데 그 분이 성법스님이었다. 또한 세존싸이트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때도 그렇지만 한국불교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서 이미 대중은 거의 승가의 부패에 무감각해져 버린 듯한 2014년의 지금까지 한국 불교에 대해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스님을 찾기가 힘들다. 달콤한 사탕발림이나 그럴 듯한 현실도피와 신비주의로 포장되지 않은, 석가모니라는 실존했던 한 인간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를 당당하게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하는 분도 극히 드물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성법스님의 가르침을 신뢰했고 보다 많은 사람이 스님의 가르침에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절실히 바란다. 이제 막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 냉철한 이성으로 깨달음이라는 신비주의를 경계하지만 부처의 위대한 가르침과 지혜는 무엇이었는지 진실로 궁금한 그 어떤 사람도 성법스님의 신간에서 바른 이정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스님의 신간을 아래와 같이 간추려 본다. 성법스님의 신간은 300페이지가 넘는다. 보다 많은 이들이 스님의 가르침에 인연이 닿기를 바란다.

14p. 불교는 끊임없는 자기반조와 참다운 가치에 대한 의문을 통해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고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는 반 염세적인 메시지를 핵심으로 삼는 다는 말씀입니다.

16p. 붓다께서는 염세적인 출발에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는 극적반전으로 낙관적 회향을 보여 주셨지만, 이들은 "네가 부처다" 라는 낙관적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가 맞다는 당연한 회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의 근본적인 한계인 것입니다. 이렇듯 理의 세계인 진여문에서 한국불교의 착시 현상은 매우 심각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事의 세계인 생멸문에서의 착시현상은 어떨까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돈으로 공덕도 살 수 있고 악업은 보시를 해서 소멸시킬 수 있고, 앞으로 받아야 될 업도 지금 보시를 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법당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면 공덕중의 공덕으로 삼대가 복을 받는다고 자신합니다. 이것 역시 낙관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신도들과 늘 같이 독송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붓다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로 일체가 空함을 강조하는 데도 스님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이든 사실과 다르든 낙관주의적 착시를 신도들에게 오염시켜야 신도들의 보시가 많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37p. 우주적 진리인 연기를 관하신 붓다께서는 그 마음의 여운을 간직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5비구에게 자신이 방금 깨달은 경지를 자신 있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가 5비구에게 설한 내용은 4성제 였습니다. 붓다께서 이들에게 12연기를 처음 설하셨다는 단 한 줄의 증거도 없습니다. 이건 상식에 어긋납니다. 즉, 5비구에게 설한 첫 가르침이 12연기법이어야 기존의 주장에 맞는데 실상은 4성제를 설하신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합니다. 12연기가 아니라 4성제를 최초로 설하셨다고 전해지는 이유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찾은 해결 방법은 12연기는 후대에 조합된 것이고, 연기적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설하셨다고 결론짓는 겁입니다. 붓다께서는 5비구에게 12연기가 아닌 법계의 '연기성'을 언어적이 아니라, 4성제라는 의미적으로 재차 확인해 주신 것이라고 이해하면 접근이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좀 더 과감한 추론을 한다면, 붓다께서는 연기법의 부분인 '인과'가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부분에 상당한 고민을 하셨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연기에는 의도나 선악이 없지만, 세상은 인과에 의도와 선악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44p. 실제로 붓다의 깨달음은 퍼펙트한 것이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붓다의 퍼펙트에 1~10%만 가까이 다가서도 보통의 인간의 사유를 단번에 넘어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붓다의 온전한 깨달음은 12연기가 아니라, 우주의 理와 事의 근본 원리인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는 상의 상관 관계의 원리인 군더더기 없는 緣起입니다.
 
45p. 물질(事)과 정신 혹은 마음(理)은 상호 緣起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인.연.과는 간단 없는 이와 사의 한 단면을 '사건적'으로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46p. "연기는 내(여래)가 태어나기 이전이나, 내(여래)가 멸한 후라도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고 하셨습니다. 이 연기에 확철한 경계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작위로 인한  인因과 연緣을 엮어 가서 만들어 내는 과果라는 것을, 아주 미미하고 소소한 일로 여길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의 무한 팽창을 이룩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인간이 어떤 문제에 자신의 마음의 10%쯤 빼앗기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것을 반인 5%로 줄여 집착과 번뇌 역시 반으로 줄이는 일도 가능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10배로 확장 시킨 다면 이 역시 빼앗기는 마음을 10%에서 1%로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마음을 극대화시켜 인간이 갖는 모든 욕망을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낮추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초기 수행의 방법론이며, 번뇌의 불을 다른 곳으로 번지지 못하게 단속한 붓다의 열반의 경지였던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도 곳곳에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을 야단치고, 우열도 가리고, 갈증이 일 때는 목말라 하며, 늙고 병드는 육체적 고통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연기의 관점에서는 마치 태양에 물 한방울 더한 것과 같은의미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48p. 대부분의 경전과 논서들에서 인과는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불이 있으면 뜨거우니, 인과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생에 가난한 인은 과거생에 인색하기 살았기 때문이다"라는 모범적인 경전적 해석과 의존은, 붓다의 연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원죄론적 인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연기 자체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인과에도 선악이 없습니다.
 
50p. 세상의 시공의 변화와 관계없는 영원한 가치는 오직 연기를 체득하여 세상의 고와 낙, 생과 사를 무상으로 인식하며, 집착과 오욕을 일으키는 자신의 마음이 실은 무아無我(空我)라는 진리라고 '느끼라' 한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이 '느끼라'의 방법론(수행법)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발생하게 되니 지금과 같이 불교가 아주 번잡스러워진 것입니다. '번잡'이라는 것은 문화적.시대적 다양성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지금의 한국불교는 단순히 수행론의 번잡만이 아닌,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는 망각하고 오직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로 퇴락해 버린 것이 문제 입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앙성을 배제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신앙성 즉, '믿음'은 연기라는 진리에 나 자신도 한 축을 담당하고 있어 법계의 일원이라는 믿음, 법계에 편재한 곧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후 느낀, 바로 그 마음의 파장에 나도 하나가 되어 같은 파장을 이룰 수 있다는, 법신불法身佛에 대한 귀의와 발원이 불교의 종교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53p. '불법이 무상.무아에 해당이 되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저는 해당이 된다는 견해입니다. 무상은 제행무상의 줄임이고, 무아는 제법무아의 줄임입니다. 제행무상은 연기를 사事의 논리로 표출한 것이고, 제법무아는 연기를 이理의 논리로 표출한 것입니다. 이 구별은 사실 삼법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이와 사가 원융되고 다시 진아와 합일되는 안팎세계의 불이가 바로 궁극적 깨달음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모조리 연기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67p. 그 '무엇'은 바로 연기라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업과 윤회도 연기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이러우지고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12연기가 아닌 그냥'연기'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화두인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불교는 상당 부분 붓다 이전의 업과 윤회의 개념으로 신도를 유인하고, 신도들은 고달픈 길인 깨달음으로 향하기 보다는 내 욕심을 빨리 또 손쉽게 얻으려는 심사로 불교를 믿는다는, 참으로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내친김에 첨언하면, 아무런 대안 없이 '지식'을 깨달음의 장애로 매도하는 禪병에 대해 인간의 지성과 통찰력을 확신하는 저로서는, 선은 물론 지식을 포함한 모든 사상과 존재가 연기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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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y 2014-02-03 공감(1) 댓글(1)
Thanks to
 
공감
     
진정 불자라면 꼭 봐야 할 책입니다.

정말 충격적입니다. 불법의 틀을 좀 더 크고 확실하게 전달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불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개굴된장 2015-07-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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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도서 리뷰 : 근본에서 멀어진 한국 불교에 대한 쓴 소리... | YES24 블로그 - 내 삶의 쉼표

근본에서 멀어진 한국 불교에 대한 쓴 소리...

벤투의스케치북 2014.01.25 댓글 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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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도서]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 성법 스님의 까칠한 불교 이야기
성법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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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는 지난 2001년부터 세존 사이트(www.sejon.or.kr)를 운영하고 있는 성법 스님이 한국 불교에 대해 던진 고언(苦言)이다. 세존 사이트는 경전 전산화 불사(佛事)의 원(願)에 따라 초기불교에서 대승경전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실은 사이트이다. 스님은 한국 불교가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는 낙관주의라는 착시현상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신다. 스님의 눈에 비친 한국 불교는 상당 부분 힌두화(또는 자이나교화)가 진행된 불교이며, 기복불교보다 더 큰 문제일 수 있는 진리의 관념화에 빠진 불교이다.

스님은 탐진치를 벗어나면 단박 깨달은 것이라 말하지만 실은 그것은 법계를 아우르는 수행의 시작일 뿐이라 말씀하신다. 스님의 가르침은 담담하게 들리지만 공력은 만만치 않고 내용은 래디컬하다. 붓다가 깨달은 후 최초로 설법하신 것이 4성제(4聖諦)였고 12 연기(緣起)는 후대에 조합된 것이라는 말씀, 무아(無我)보다 공아(空我)라는 말이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는 말씀, 베다와 우파니샤드, 힌두이즘을 제압할 수 있는 붓다의 가르침은 (12 연기가 아닌) 오직 연기(緣起)라는 말씀, 윤회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 등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만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렇게 이러한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76 페이지)란 말씀을 보라. 사실 불교도가 아닌 나에게도 12 연기는 윤회를 실체로 상정하는 힌두교의 가르침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반면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주지(主旨)로 하는 연기(緣起)는 초기불교의 가르침(붓다의 원음)이 담긴 핵심 사안이다. 이는 성법 스님의 근본 취지이기도 하다.

스님에 의하면 연기는 마음과 물질이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스님은 인과(因果)에는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오직 식(識)만이 있고 밖의 경계인 물질은 없다는 세친의 유식무경(唯識無境)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한국 불교가 붓다의 핵심 가르침인 연기는 망각하고 오직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로 퇴락했다고 비판하신다. 그러나 불교에도 신앙이 있다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다. 그 신앙이란 연기의 진리에 나 자신도 한 축을 담당하는 법계의 일원이라는 믿음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 불교는 자신의 의사나 행위와 무관하게 일어난 결과까지도 자신의 업(業)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럴 경우 업은 기독교의 원죄(原罪)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스님은 업은 내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신다. 스님은 살아 있는 나도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데 죽은 내가 정체성이 있을 리 없다며 영혼과 윤회를 부정하신다. 스님이 인용한 정세근 교수의 ‘윤회와 반윤회’가 말하듯 영혼과 윤회를 말하고 가르치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름이 없는 종교다.

스님은 불멸(佛滅) 후 400년 경에 있었던 4차 결집(結集) 이후 단 한 차례도 사상 점검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결집과 유사한 것도 없었음을 지적하며 제 5차 결집을 제안하신다.(스님은 경전 전산화 불사를 제 5차 결집의 시작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신다.) 불법(佛法) 역시 무상(無常)의 진리(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가르침)에 해당한다는 스님의 말씀 역시 파격적이다. 물론 모든 세부 사항에서까지 그 분들의 문제의식이 같지는 않지만 스님과 문제의식을 같이 하는 분들도 꽤 있다. 학계에서는 ‘윤회와 반윤회’를 쓴 충북대학교 정세근 교수가 그렇고, 불교 수행자 가운데에서는 각묵 스님이 그렇다.

각묵 스님의 경우 금강경에 의거해 한국 불교의 힌두화를 집중 거론한 분으로 유명하다. 금강경은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지만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강조한 경전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소의 경전이란 기본적으로 의거하는 텍스트라는 의미이다.) 각묵 스님은 금강경의 메시지를 ‘산냐(sanna)’ 한문 경전의 용어로는 ‘상(相)‘을 극복할 것을 강조한 경전으로 설명하신다. 극복할 것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修者相) 등 네 가지 상이다. 각묵 스님에 의하면 금강경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보시 바라밀은 불자들이 가져서는 안 되는 산냐(인식, 관념, 개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금강경 결제 논주 각묵 스님 인터뷰 ‘금강경 제대로 읽어야 외도적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조)

금강경에는 붓다는 수보리에게 중생이라는 산냐, 자아(自我)라는 산냐, 영혼이라는 산냐, 개아(個我)라는 산냐가 생긴 자는 보살(菩薩: 구도자)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씀이 나온다.(본문과 관련해 내가 참조한 금강경 해설서는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와, 감산(憨山: 1546 - 1632)이 번역하고 오진탁 교수가 해설한 ‘감산의 금강경 풀이‘ 등이다. 전자는 65 페이지, 후자는 33 페이지에 산냐(상)가 생긴 자는 보살이 아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금강경은 대승불교 경전群들 가운데서 가장 초기불교적인 향기가 많이 풍기는 경이라고 말씀하시는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는 산스크리트 원문을 철저히 분석한 뒤 구마라집역본과 현장역본을 대조하고, 번역, 대역, 주해(註解) 등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공(空) 사상이 설파되고 있지만, 경전의 어디에도 공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한 필자의 글이다. 이 필자는 이 사실을 지적하며 공을 공이라 하면 이미 공이 아니라는 ’노자‘의 지취(旨趣)를, 공적(空寂)하게 보이려는(드러내려는) 것일까?“란 말을 한다.(김영민 교수 지음 ’보행‘ 18 페이지)

김영민 교수는 공(空)은 무(無)가 아니라 모든 현상이 상호연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이라는 말을 인용하지만 공을 가르친 금강경에 공이란 단어가 없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바꾸는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공(空)이라는 개념을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일 뿐이다.(’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 70 페이지) 각묵 스님은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무아(無我) 또는 공(空)을 가르치셨는데 대아(大我), 진아(眞我) 등을 내세워 그것에 몰입하는 것은 힌두교적 발상의 외도선(外道禪)이 되어가는 것이라 비판하신다.(금강경 결제 논주 각묵 스님 인터뷰 ‘금강경 제대로 읽어야 외도적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조)

각묵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반야를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 한다면 이처럼 반야를 따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척파되어야 할 산냐 중의 산냐 아니겠습니까? 증도가는 환여피익이투화(換如避溺而投火) 즉 물에 빠지는 것을 피해 불로 뛰어든다고 했습니다. 물에서 나오면 그만이지 다시 불로 뛰어들면 죽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산냐를 척파하면 되지 따로 반야를 설정하는 것은 물을 피해 불로 뛰어드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란 말씀이다. 각묵 스님은 산냐의 척파가 반야의 실천이라 말씀하신다.(참고로 말하자면 척파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다. 추측하건대 척파는 척결(剔抉)의 척(剔: 뼈 바를 척)과 논파(論罷)의 파(罷)를 결합한 척파(剔罷)이거나 척결(剔抉)의 척(剔)과 격파(擊破)의 파(破)를 결합한 척파(剔破)가 아닐까 싶다.

지난 2002년 홍제동 수미정사에서 열린 10주 일정의 아미담마 강의를 통해 직접 말씀을 들을 때 스님의 배대라는 말씀에 낯설어 했던 기억이 어제인 듯 생생하다. 역시 국어 사전에는 없는 배대라는 말은 배配와 대對의 결합어가 아닌가 싶다. 배정과 대응의 개념을 아우른 말로 보인다. 언제 다시 그 분을 뵐 수 있을까?)

서유럽의 불교학자들은 고다마 싯다르타의 삶을 위대한 포기라 표현하지만 포기라는 말은 싯다르타의 욕망과 기득권을 포기한 소극적 의미를 담는 데에 그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붓다의 삶은 위대한 도전이라는 말로 수식되어야 한다. 붓다는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사장인 브라만을 신성시하고 피지배 종족들을 영원히 굴복시키기 위해 업과 윤회를 무기로 네 가지 차별적 계급제도를 강제한 아리안들의 제도와 사상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려 했던 분이다. 고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명확히 한 붓다의 면모 역시 중요하지만 붓다의 위의(威儀)는 위대한 도전이라는 말로 여실하게 드러난다.

아리안들은 출생 역시 계급별로 신체의 각기 다른 곳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설파했다. 제사장인 브라만들은 머리에서,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야는 옆구리에서, 평민인 바이샤는 허벅지에서, 천민인 노예인 수드라는 발가락 사이에서 각각 태어난다는 것이다. 붓다 역시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경전은 전한다. 붓다는 크사트리야 계급이었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2천년 경 현재의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 남쪽에 위치했던 한 종족으로 우월한 기동성과 호전성 등을 무기로 페르시아를 거쳐 남진해 인더스 문명과 마주친 세력이다. 이들은 다수의 토착민들을 평민 이하로 지배했다. 윤회와 업 등은 이 지배 과정의 산물이다.

‘생각의 끝에도 머물지 말라’를 읽는 것은 초기 불교의 가르침(붓다의 원음)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도를 정복한 이, 도를 말하는 이, 도에 사는 이, 도를 더럽히는 이를 말씀하신 붓다는 원음의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도를 정복한 이는 의혹을 넘어서고 번뇌를 떠나 열반을 즐기며 탐욕을 버리고 신들을 포함한 세계를 이끄는 사람이며, 도를 말하는 이는 이 세상에서 최상의 것을 가장 최상의 것으로 알고, 법을 설하고 판별하는 사람, 의심을 버리고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며, 도에 사는 이는 잘 설해진 가르침에 의지해 살며 스스로 자제하고 허물없는 삶을 사는 수행자들이며, 도를 더럽히는 이는 맹세한 계율을 잘 지키는 체하지만 고집 세고 가문을 더럽히며 오만하고 거짓이 있으며 자제함이 없고 말이 많고 그러면서도 잘난 체하는 사람이다.

스님은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듯 대승 불교 흥기 후 무려 2,000년 이상이 지난 지금 불교가 또 한 번의 사상적 진화를 이루어 내지 않으면 후대 언젠가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설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신다.(146 페이지) 스님 역시 금강경을 언급하신다. ”불법을 한 마디도 설한 바 없고, 한 중생도 구제한 바 없다.“는 부정을 통해 금강경 자체를 초월적 믿음의 단계로 승화시킨 붓다에 대한 언급이다. 각묵 스님이 금강경을 대승불교 경전群들 가운데서 가장 초기불교적인 향기가 많이 풍기는 경이라고 말씀하셨듯 스님은 금강경을 붓다의 진심이 가장 잘 담긴 가르침이자 신앙성이 거의 배제된 경전이라 말씀하신다.(153 페이지)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다(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같은 가르침으로 모양 있는 것으로서의 공덕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 금강경은, 법화경이 있는 곳에 탑을 쌓아 온갖 꽃과 향과 영락과 비단 등으로 장식하고 예배하고 공양하라는 불멸 이후의 대승경전인 법화경(154 페이지)과 너무 다르다. 아니 법화경이 금강경과 너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님은 방편을 쓴 법화경에 의해 일어나는 신앙이 금강경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말씀을 하신다. 중관 불교와 유식 불교의 비교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스님에 의하면 세친(世親)이 유식학에서 말한 아뢰야식 연기가 붓다께서 깨달으신 연기에 부합이 된다면 후대에 더 깊은 식(識)인 8, 9, 10, 11 식까지 고려해야 할 까닭이 없다. 붓다의 사상을 후대에 보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불교는 수행의 목적지는 중관(中觀)의 공(空)인데 방법론은 유식을 들어 설명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163 페이지)

스님의 설명을 듣다 보면 유식 불교가 말하는 근본 마음인 제 8식인 아뢰야식이라는 근본 마음은 대아, 진아 등의 논의에서 지적된 무아와 배치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스님은 조계종을 대승이라 칭하고 남방불교를 소승이라 폄하하는 한국 불교가 구족계를 제대로 받은 스님이 없어 지난 1973년 비구로서 상좌부 율맥을 이어온 태국의 스님들을 모셔와 구족계를 수계한 사실을 언급하신다.(불교평론 44호: 2010년 가을호 마성 스님 글 참조)

스님은 불교의 살 길은 양자역학, 불확정성 원리, 유전공학, 뇌과학 등 최신 과학의 성과를 적극 수용해 불법을 정교하게 이론화하는 데에 있다고 가르치신다. 진화론을 믿지 육도윤회를 믿지 않는다는 스님은 붓다는 업과 윤회에서 떠나야 하고 오로지 연기만이 진리라고 누누이 말씀했지만 당시 사성계급제와 더불어 거의 일상화된 업과 윤회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고는 윤회를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라 말씀하며 하지만 붓다께서 사용한 업이라는 용어는 브라만들이 사성제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악용했던 의미가 아니라 이미 벌어진 결과로 인간의 힘으로는 역전시킬 수 없는, 당연히 수용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하신다.(230 페이지)

스님은 윤회 또한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우주적 윤회라 해석하면 업과 더불어 어떻게 윤회하느냐는 본원적 질문에 고민할 이유도 없게 된다고 가르치신다.(230, 231 페이지) 그렇다면 불교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스님이 말씀하셨듯 사실과 현상을 망상과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스님은 한국의 사찰들이 지금부터라도 승가의 이익이 아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곳이라는 의미의 불교 최초의 사찰인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의 본래 취지에 맞게 모든 양극화 해소에 앞장서길 서원(243 페이지)하신다.

화를 잘 내신다고 자신을 드러내신 스님은 절의 주지임에도 인터넷 전법에 전념하며 입시기도나 천도재 등 일체의 기복 행위를 하지 않고 10여 년을 그렇게 순수 보시에만 의존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 절 살림이 난감해지는 사태를 겪으면서도 붓다 흉내 내기 삶을 바꾸려 하지 않는 당신이 스스로 야속할 때가 있다고 고백하신다.(265 페이지) 불교 신자들의 돈이 출세와 성공, 안락을 위한 조건부로서 입시기도 하고 천도재 하는 절로 몰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스님은 임사체험도 죽음을 맞기 전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 그 농도가 아주 미약해지면 뇌세포들이 에러를 내는 것이라는 과학 실험 결과를 소개하신다.(272 페이지)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너희 구성원은 4부대중이 아닌 4부계급제로구나, 총무원 직책과 본사 주지는 바라문, 말사 주지는 왕족, 일반 출가자는 평민, 재가신도는 천민 아니냐“라고, 도박하고 술집 드나들고 폭력이 난무하는 한국 승가에 ”데바닷다가 교단을 혼란케 하고, 야사로 인해 교단이 분열되었지만 지금의 너희들은 나보다 그들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불교도도 아닌 나에게까지 아프게 다가온다.

스님이 제기한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시리즈는 35 개에 이른다. 핵심적인 것만 간추려졌을 것이다...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2020/09/04

16 마성스님 “초기불교 깨달음과 禪의 구경각은 다른 차원”

붓다의 옛길

실론섬 2016. 2. 18.   
http://blog.daum.net/gikoship/15782760
“초기불교 깨달음과 禪의 구경각은 다른 차원”
마성스님, 깨달음 논쟁 관련 논문 ‘초기불교에서 본 깨달음’ 기고
“논쟁 대상 아닌 것 놓고 논쟁…선정은 지혜 얻기 위한 전제 조건”
2016-02-17 (수) 10:29


마성스님 | ripl@daum.net


[율장과 초기불교 전공자 마성스님(철학박사, 팔리문헌연구소장)이 정초부터 <미디어붓다> 지면을 통해 불붙은 ‘깨달음 논쟁’과 관련하여 짧은 논문을 한 편 작성해 보내왔다. 일찍이 계율, 초기불교 분야와 관련하여 많은 논문과 고견을 제시해온 마성스님의 이번 논문은 ‘초기불교에서 본 깨달음’이라는 제목으로, 이번 논쟁의 근본을 해박한 초기불전에 대한 식견을 통해 밝혀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날 연휴 ‘휴지기’를 거쳐 다소 열기가 식은 듯한 깨달음 논쟁이 스님의 이번 논문을 통해 다시금 가열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편집자

초기불교에서 본 깨달음

Ⅰ. 머리말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 현응(玄應) 스님이 2015년 9월 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제하의 기조발제문에서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른바 ‘깨달음 논쟁’이 촉발되었다. 처음 이 기사가 보도된 이후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조차 없이 개인적인 신념이나 의견들을 개진함으로써 불필요한 논쟁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주제에서 벗어난 엉뚱한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사회정책연구소장 법응(法應) 스님이 수불 스님과 현응 스님의 공개토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일 공개토론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두 스님 사이의 견해차는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보다 생산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초기성전에 나타난 붓다의 깨달음’, 즉 ‘붓다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럴 때 현응 스님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초기불교에서 본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초기성전에 묘사된 깨달음

1. ≪율장≫의 <대품>에 대하여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증명하기 위해 ≪율장≫의 <대품>에 언급된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빨리어로 기록된 ≪율장(Vinayapiṭaka)≫의 <대품(Mahāvagga)>은 초기불교의 깨달음을 언급한 문헌이 아니다.

빨리 ≪율장≫은 크게 숫따비방가(Suttavibhaṅga, 經分別), 칸다카(Khandhaka, 犍度), 빠리와라(Parivāra, 附隨)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경분별은 율장의 본문 골자인 조문(條文), 즉 빠띠목카(pātimokha, 波羅提木叉)를 설명한 부분이다. 둘째, 건도는 교단의 제도와 규정을 편품(編品)으로 구분하여 설명한 부분이다. 셋째, 부수는 앞의 경분별과 건도에서 설명한 사항을 분류하고 요약 정리한 보유편(補遺編)이다.

그러나 빨리성전협회(PTS)에서 발행한 로마자 빨리 ≪율장≫은 건도, 경분별, 부수의 순으로 편찬되어 있다. 이것은 빨리 ≪율장≫을 로마자로 편찬한 독일의 헤르만 올덴베르크(H. Oldenberg, 1854-1920)가 율장의 건도(犍度)부터 편찬했기 때문이다. 그는 승려들이 지켜야 할 바라제목차보다 교단의 제도나 규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너(I. B. Horner, 1896-1981) 여사는 원래의 빨리 ≪율장≫ 그대로 경분별, 건도, 부수 순으로 영역(英譯)했다.[I. B. Horner, tr. The Book of the Discipline (London: PTS, 1938-1966) vol. Ⅰ, p.vii] 어쨌든 ≪율장≫의 <대품> 첫 번째 편은 마하칸다까(Mahākkhandhaka, 大犍度 또는 受戒編)이다. 이 마하칸다까는 출가입단법(出家入團法), 즉 수계의 방법, 수계자의 자격 등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수계편(受戒編)에 언급된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붓다는 깨달음을 이루고 제일 먼저 바라나시로 가서 꼰단냐(Koṇḍañña), 밥빠(Vappa), 밧디야(Bhaddiya), 마하나마(Mahānāma), 앗사지(Assaji) 등 다섯 고행자들에게 법을 설했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제일 먼저 꼰단냐가 깨달음을 이루었다.[Vin Ⅰ, p.11] 그때 꼰단냐는 “대덕이시여, 저는 세존께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 upasampadā)를 받고자 합니다.”[Vin Ⅰ, p.12]라고 말했다. 그러자 붓다는 “오라. 비구여(ehi bhikkhu, 善來比丘), 법은 잘 설해져 있으니, 바르게 괴로움의 끝을 이루기 위해 범행(梵行)을 닦으라. 이것이 사실 이 존자의 구족계였다.”[Vin Ⅰ, p.13, “ehi bhikkhū 'ti bhagavā avoca, svākkhāto dhammo, cara brahmacariyaṃ sammā dukkhassa antakiriyāyā 'ti. sā 'va tassa āyasmato upasampadā ahosi.”]고 말했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선래비구구족(善來比丘具足, ehi-bhikkhu- upasampadā)’이다.

비록 붓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이루었더라도 반드시 구족계를 받아야만 한다. 그래야 ‘상가(Saṅgha, 僧伽)’의 구성원이 되기 때문이다. 제자가 구족계를 받는 것은 승가 성립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이다. 이어서 밥빠,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 등도 같은 방식으로 구족계를 받았다.[Vin Ⅰ, p.13] 그때 비로소 ‘승가’가 형성되었다. 왜냐하면 율(律)에서 승가의 최소 단위는 네 명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섯 비구가 모두 구족계를 받았기 때문에 승가, 즉 승단(僧團)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장≫에서는 승가 성립에 관한 언급은 없다. 다만 “그때 세간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었다.”[Vin Ⅰ, p.14, “tena kho pana samayena cha loke arahanto honti.”]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야사(Yasa)를 찾아 나섰던 야사의 아버지가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그 자리에서 삼귀의를 외우고 최초로 재가신자가 되었다. ≪율장≫에서는 “이와 같이 그는 삼귀의를 외움으로써 이 세상에서 첫 번째의 우바새가 되었다.”[Vin Ⅰ, pp.16-17, “so 'va loke paṭhamaṃ upāsako ahisi tevāciko.”]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다섯 비구가 구족계를 받았기 때문에 이미 ‘승가’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율의 편찬자들도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야사(Yasa)도 구족계를 받아 붓다의 여섯 번째 제자가 되었다.[Vin Ⅰ, pp.17-18] 이어서 야사의 친구, 즉 위말라(Vimala), 수바후(Subāhu), 뿐나지(Puṇṇaji), 가밤빠띠(Gavampati) 등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족계를 받아 승가에 합류했다.[Vin Ⅰ, pp.18-19] 또한 야사의 친구였던 50명의 젊은 귀족의 자제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족계를 받아 승가에 합류했다.[Vin Ⅰ, p.20] ≪율장≫에는 “그때 이 세상에는 61명의 아라한들이 있었다.”[Vin Ⅰ, p.20, “tena kho pana samayena ekasaṭṭhi loke arahanto honti.”]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붓다는 60명의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전도선언(傳道宣言)이다.[Vin. Ⅰ, pp.20-21; SN Ⅰ, pp.105-106] 그런데 제자들이 교화를 하게 되면 출가를 원하는 자에게 구족계를 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승가를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선래비구구족’에 의해 승가에 합류시켰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구족계 의식이 제정되었다. 그것이 바로 ‘삼귀의에 의한 구족계(tīhi saraṇagamanehi upasampadā)’ 의식이다.[Vin. Ⅰ, p.22]

제자들이 전도를 떠난 뒤, 붓다는 다시 마가다국의 우루웰라(Uruvalā)로 돌아왔다. 그때 붓다는 우루웰라의 숲속에서 유흥을 즐기고 있던 30명의 젊은이들을 교화시켰다. 그들은 붓다로부터 ‘오라. 비구들이여!(etha bhikkhavo)’라는 구족계를 받고 승가에 합류했다.[Vin. Ⅰ, pp.23-24] 그런 다음 깟사빠(Kassapa, 迦葉) 삼형제와 그들의 추종자를 교화시켜 승가에 합류시켰다. 이른바 우루웰라깟사빠(Uruvelakassapa)와 그의 제자 500명, 나디깟사빠(Nadīkassapa)와 그의 제자 300명, 가야깟사빠(Gayākassapa)와 그의 제자 200명이었다. 이들을 동시에 개종시킨 것은 큰 사건이었다. 특히 우루웰라깟사빠와 같은 당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를 개종시킴으로써 붓다의 명성은 크게 드높아졌다.[Vin Ⅰ, p.24]

그 후 마가다국의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에서 산자야(Sañjaya)의 제자였던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lāna)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이어서 산자야의 제자 250명도 개종했다. 그들은 모두 붓다로부터 ‘오라. 비구들이여!’라는 구족계를 받고 승가에 합류했다.[Vin Ⅰ, p.43] ≪율장≫의 <대품>에서는 여기까지만 언급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율장≫의 <대품>에 언급된 내용은 초기승가의 성립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장≫의 <대품>은 다섯 비구가 어떻게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는가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의 제자 중에서 최초로 꼰단냐(Koṇḍañña)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은 ≪상윳따 니까야≫의 <전법륜경(轉法輪經)>(SN56:11)에 설해져 있다. <전법륜경>의 내용을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붓다의 깨달음, 즉 붓다는 무엇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붓다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붓다는 앗삿타(assattha, pippala라고도 함)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다가 드디어 ‘위없는 바른 깨달음’(anuttara sammāsambodhi, 無上正等覺)을 얻어 붓다(Buddha), 즉 각자(覺者)가 되었다. 이것을 중국․한국․일본에서는 ‘성도(成道)’라고 부른다. 붓다의 성도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의 완성이며 현세에서의 열반을 실현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붓다의 깨달음 자체가 바로 불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붓다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것은 예로부터 매우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테면 중국의 선승(禪僧)들이 ‘무엇이 곧 부처인가’라든가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도 ‘붓다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체득한 경지가 붓다의 깨달음과 일치하는가를 점검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후지타 코타츠 外, ≪초기․부파불교의 역사≫, 권오민 옮김(서울: 민족사, 1989), pp.64-65]

그러나 초기성전에서는 붓다의 깨달음에 대해 여러 가지 형태로 서술하고 있다. 초기경전에 언급된 붓다의 깨달음에 관한 내용은 일치하지 않으며 많은 이설(異說)들이 나타난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열다섯 가지 정도의 이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열다섯 가지 이설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사성제(四聖諦)나 십이연기(十二緣起)와 같은 이법(理法)의 체득에 의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支․八正道)과 같은 수행도(修行道)의 완성에 의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와 같은 제법(諸法)의 관찰에 의했다는 것이다. 넷째는 사선(四禪)․삼명(三明)의 체득에 의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붓다의 깨달음은 문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특정한 교설로서 고정시켜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붓다는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설하는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내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붓다의 깨달음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붓다의 깨달음은 연기(緣起)의 자각(自覺)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때의 연기(緣起)는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처럼 완성된 형태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기의 자각이란 다른 말로 사성제에 대한 통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을 실천수행의 체계로 조직한 것이 사성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성제(苦聖諦)와 집성제(集聖諦)는 유전연기(流轉緣起)에 해당되고, 멸성제(滅聖諦)와 도성제(道聖諦)는 환멸연기(還滅緣起)에 해당된다. 부파불교시대에 ‘깨달음에 이르는 서른일곱 가지 부분’이라는 삼십칠조도품(bodhipakkhiya-dhamma)으로 조직화된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 등의 실천 수행법도 연기의 역관(逆觀)에서 드러나는 무명(無明)․갈애(渴愛)를 소멸하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후지타 코타츠 外, ≪초기․부파불교의 역사≫, p.65]

붓다의 최초 설법으로 알려져 있는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는 붓다가 사성제의 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을 통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전법륜경>에 의하면 붓다는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三轉十二行]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지 못했다면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신(神)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SN Ⅴ, pp.422-423, “yāva kīvañca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na suvisuddham ahosi, neva tāvāham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n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m abhisambuddho ti paccaññāsiṃ.”]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붓다는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통찰함으로써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게 되었다.

<전법륜경>에서 붓다는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SN Ⅴ, p.422, “idaṃ dukkham ariyasaccan 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ṇ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고 말했다. 이에 대응하는 한역 <전법륜경>에서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과거에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사유하라. 그러면 그때 눈[眼]․지혜[智]․밝음[明]․깨달음[覺]이 생길 것이다.”[≪잡아함경≫ 권15 제379경(T2, p.103c), “此苦聖諦, 本所未曾聞法, 當正思惟. 時, 生眼․智․明․覺.”]고 설해져 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사성제라는 진리를 통해 눈[眼]이 생기고, 지혜[智]가 생기고, 통찰지[慧]가 생기고, 명지[明]가 생기고, 광명[光]이 생겼던 것이다. 한역에서는 이것을 안(眼)․지(智)․명(明)․각(覺)이 생겼다고 옮기고 있다.

Ⅲ. 수행의 단계와 깨달음의 경지

1. 초기경전에 묘사된 아라한 
<전법륜경>에 의하면 붓다의 설법을 들고 마침내 “꼰단냐(Koṇḍañña) 존자에게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SN Ⅴ, p.423,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ṃ vītamalaṃ dhammacakkhum udapādi,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 taṃ nirodhadhamman ti.”]고 묘사되어 있다. 그때 세존께서는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SN Ⅴ, p.424,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ti.”]라고 읊었다. 이렇게 해서 꼰단냐 존자는 안냐꼰단냐(Aññāta-Koṇḍañña)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SN Ⅴ, p.424]

이와 같이 꼰단냐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일어난 법은 모두 소멸한다.(集法卽滅法)’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은 꼰단냐가 사성제에 대한 붓다의 설법을 듣고 연기(緣起)의 이치를 터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진리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법안(法眼, dhamma-cakkhu)이 생겼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율장≫의 <대품>에서는 최초의 다섯 비구를 비롯한 야사와 그의 친구 네 명, 그리고 귀족의 자제 50명이 붓다의 설법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 초기경전에서는 붓다께 귀의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은 곧바로 아라한이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최초의 다섯 비구들은 붓다께 귀의한 지 5일 만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후지타 코타츠 外, ≪초기․부파불교의 역사≫, p.134] 붓다의 상수제자였던 사리뿟따(Sāriputta)는 라자가하에서 유행하다가 다섯 비구 중 한 명이었던 앗사지(Assaji, 馬勝)를 만나 그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 듣게 되었다. 앗사지는 사리뿟따에게 “모든 법은 인(因)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여래께서는 이 인(因)을 설하셨다. 모든 법의 소멸에 대해서도 위대한 사문은 그와 같다고 설하셨다.”[Vin Ⅰ, p.40,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ṃ heuṃ tathāgato āha, tesañ ca yo nirodho, evaṃvādī mahāsamaṇo.”] 사리뿟따는 이 게송을 듣고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소따빤냐(sotāpanna, 預流果)를 얻었다.[Vin Ⅰ, p.40] 목갈라나(Mogallāna)도 사리뿟따로부터 앗사지가 전해준 게송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 그리고 목갈라나는 붓다께 귀의한 지 7일 만에 아라한과를 증득했고,[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DPPN),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1983), vol. Ⅱ, p.542] 사리뿟따는 2주가 지나기 전에 아라한이 되었다.[DPPN, vol. Ⅱ, p.1109]

또한 사마(Sāmā) 장로니는 아난다 존자의 법문을 듣고 통찰력을 얻은 후 7일째 되는 날 아라한이 되었다.[Thig. vs. 37-38; ThigA. 44] 수자따(Sujātā) 장로니는 사께따(Saketa)의 백만장자의 딸이었는데, 같은 부류의 남편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날 그녀는 여행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안자나와나(Añjanavana)에서 붓다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었다. 그녀는 붓다의 법문을 듣고 곧바로 아라한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의 허락을 얻어 출가했다.[Thig. 145-150; ThigA. 136f] 한편 닷바 말라뿟따(Dabba-Mallaputta) 장로는 여섯 살에 아라한이 되었으며,[DPPN, vol. Ⅰ, p.1059] 밧다(Bhadda) 장로는 일곱 살에 아라한이 되었다.[DPPN, vol. Ⅱ, p.348] 이러한 기술은 붓다에게 귀의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들이 어떻게 도(道)를 구했는가 하는 사실을 설명하는 동시에 아라한에 대한 초기불교의 입장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응 스님은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 같다.

이처럼 초기경전에서는 붓다의 제자가 된 사람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수행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누었던 것은 아니며, 사과(四果: 預流果․一來果․不還果․阿羅漢果)라는 것도 일단의 목표로서 설해졌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의 네 가지 수행 단계는 나중에 체계화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중에 체계화된 네 가지 수행단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예류과(預流果, sotāpanna, 須陀洹으로 음역되기 함)로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단계이다. 둘째는 일래과(一來果, sakadāgāmin, 斯陀含으로 음역되기 함)로서 한 번만 욕망․미혹의 세계로 돌아오고 해탈을 얻는 단계이다. 셋째는 불환과(不還果, anāgamin, 阿那含)로서 다시 미혹한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단계이다. 넷째는 아라한과(阿羅漢果, arahant)로서 최고의 해탈을 완성한 단계이다.

이 가운데 세 번째까지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유학(有學)의 성자라고 한다. 반면 마지막 아라한은 모든 수행을 완전히 실천하여 더 이상 배워야 할 어떠한 것도 없는 단계이기 때문에 무학(無學)의 성자라고 한다. 이러한 네 가지 단계는 다시 그것으로 향하는 상태와 거기에 도달한 상태로 나누어 모두 여덟 가지의 상태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것을 사향사과(四向四果) 또는 사쌍팔배(四雙八輩)라고 부른다.

그러나 후대 부파불교의 아비달마 논사들에 의해 수행의 단계는 매우 복잡한 체계로 정리되었다. 그 결과 마지막 아라한과는 대단히 높은 수준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설해져 있는 아라한은 수행에 의해 도달되는 것이지 아비달마 교학의 그것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최초기 아라한의 경지는 어떤 것인가? 나중에 체계화된 네 가지 수행단계에 의하면, 처음 다섯 비구들이 터득한 경지는 성자의 초기단계인 예류향(預流向)이나 예류과(預流果)를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꼰단냐의 경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비록 꼰단냐가 연기의 원리를 터득함으로써 법안(法眼)이 생겼지만, 그가 궁극의 목적인 열반을 증득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열반은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이 완전히 소멸된 경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율장≫의 <대품>에서는 “오라. 비구여, 법은 잘 설해져 있으니, 바르게 괴로움의 끝을 이루기 위해 범행(梵行)을 닦으라.”[Vin Ⅰ, p.3]고 설해져 있다. 이것은 꼰단냐가 비로소 법의 눈[法眼]을 뜨게 되었으므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범행을 닦으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비록 다섯 비구들이 붓다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도선언(傳道宣言)’을 통해서도 초기 아라한들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상윳따 니까야>의 <올가미경(pāsa-sutta)>(SN4:4)에 “비구들이여,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SN Ⅰ, p.105; Vin Ⅰ, p.20, “mutto-ham bhikkhave sabbapāsehi ye dibbā ye ca mānusā.]라는 대목이 나온다. 빨리어 빠사(pāsa)는 ‘올가미’, ‘덫’을 의미한다. 이 경과 대응하는 ≪잡아함경≫ 권39 제1096경에는 “나는 이미 인간과 천상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인간과 천상의 속박을 벗어났다.”[T2, p.288a, “我已(以)解脫人天繩索, 汝等亦復解脫人天繩索.”]고 설해져 있다.

붓다는 60명의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의 떠나라고 당부하면서 제일 먼저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대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했다. 이것은 ‘전법자의 자격’을 말한 것이다. 즉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은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의 전변설(轉變說)과 사문들의 적취설(積聚說)을 상징한 것이다. 바라문들의 전변설은 상주론(常住論)이고, 사문들의 적취설은 단멸론(斷滅論)이다. 붓다는 연기의 자각을 통해 전별설과 적취설, 혹은 상주론과 단멸론이 진리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60명의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러자 60명의 제자들은 짧은 기간에 그 이치를 터득했다. 그래서 붓다는 각자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때 60명의 제자들이 터득한 경지는 그렇게 높은 차원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필자는 초기불교 아라한들의 경지는 ‘진리에 대한 눈뜸’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되며 점차 그 깊이를 더하게 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것을 해탈의 완성, 혹은 현세에서의 열반을 실현한 것이라고 한다.

≪율장≫의 <대품>에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구족계를 받은 제자가 60명이 되었을 때, “그때 이 세상에는 61명의 아라한들이 있었다.”[Vin Ⅰ, p.20, “tena kho pana samayena ekasaṭṭhi loke arahanto honti.”]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붓다도 아라한들 가운데 한 명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이처럼 초기승가에서는 붓다도 다른 아라한들과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추대로 내려오면서 붓다와 다른 아라한들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아라한들은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해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붓다누붓다(buddhānubuddha)’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즉 아라한의 경지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구경각(究竟覺)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논쟁의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 법을 본다는 의미와 점차적 수행 
≪맛지마 니까야≫(MN28)에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MN Ⅰ, pp.190-191,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 瞿曇僧伽提婆譯, <中阿含經> 권7 제10 象跡喩經(<大正藏> 1, p.467a), “若見緣起便見法, 若見法便見緣起.”]고 했다. 또한 ≪상윳따 니까야≫(SN22:87)에서 붓다는 왁깔리 존자(āyasmā Vakkali)에게 “법을 보는 자는 나[붓다]를 보고, 나[붓다]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SN Ⅲ, p.120, “yo kho 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增壹阿含經> 卷20(<大正藏> 2, p.652c), “若觀法者, 則觀我已.”]고 설했다. 왁깔리 존자는 이러한 붓다의 설법을 듣고 곧바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자결했다.[SN Ⅲ, p.119f]

여기서 ‘본다’는 동사 빳사띠(passati)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철저한 부정의 사고로 내부의 성품이나 본연의 진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지니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진리(법)를 보는’이란 무아(無我)를 이해하는 것이고, ‘연기를 보는’이란 인과법을 이해하는 과학적 눈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들은 상관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깨우치는 진리의 눈(法眼, dhamma-cakkhu)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응 스님이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해서 전혀 근거가 없는 틀린 말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붓다는 사성제를 통찰함으로써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지만 사성제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SN Ⅴ, p.452 이하] 이를테면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차례대로 하나씩 깨달아 나간다. 이처럼 사성제의 깨달음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시각이다.

≪맛지마 니까야≫(MN70)에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ññā)의 성취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실천하고 점차적으로 닦아 완전한 지혜의 성취가 있게 된다.”[MN Ⅰ, pp.479-480, “nāhaṃ bhikkhave ādiken’ eva aññārādhanaṃ vadāmi, api ca bhikkhave anubbasikkhā anupubbakiriyā anupubbapaṭipadā aññārādhanā hoti.”]고 설해져 있다. 이것은 완전한 지혜의 성취, 즉 아라한과는 단박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붓다는 점차적인 닦음에 의해 점진적으로 무르익는 깨달음을 가르쳤다.

초기불교에서 가르치는 깨달음에 대해 임승택 교수는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결코 현실과 유리된 초월적 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붓다가 이룬 사성제의 깨달음이란 일상에서 출발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실현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단박에 성취하였던 것이 아니며 또한 성취하고 나면 그만인 그러한 경지도 아니다. 그것은 탐욕과 집착이 남아있는 한에서 끊임없이 닦아나가야 할 과제로 제시되는 그러한 경지하고 할 수 있다.”[임승택, ≪초기불교: 94가지 주제로 풀다≫(서울: 종이거울, 2013), p.30]고 말했다.

3. 선정 없는 지혜는 없다 
현응 스님은 선정이 없어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정 없는 지혜는 상상할 수도 없다. 초기불교에서 팔정도(八正道)는 수행의 근간이다. 또한 팔정도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불교수행의 핵심은 계․정․혜 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 고유의 전통설이다. 

붓다는 선정을 배척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수행자들이 수행의 목적을 선정에 두었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했을 뿐이다. 즉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것을 붓다가 지적했을 뿐, 선정 자체를 배척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선정 없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은 바른 견해라고 할 수 없다. 불교의 모든 수행은 계․정․혜 삼학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빳사나(vipassanā, 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따라서 지관겸수(止觀兼修)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수행의 지남침이 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디가 니까야≫의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에 의하면, “이것이 계(戒)이다. 이것이 정(定)이다. 이것이 혜(慧)이다. 계(戒)가 실천되었을 때, 정(定)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정이 실천되었을 때, 혜(慧)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가 실천되었을 때, 마음은 번뇌, 즉 욕루(欲漏, kammāsava)․유루(有漏, bhavāsavā)․견루(見漏, diṭṭhāsavā)․무명루(無明漏, avijāsavā)로부터 해탈하게 된다.”[DN Ⅱ, p.81, “iti sīlaṃ iti samādhi iti paññā, sīla-paribhāvito samādhi mahapphalo hoti mahānisaṃso, samādhi-paribhāvitā paññā mahapphalā hoti mahānisaṃsā, paññā-paribhāvitaṃ cittaṃ sammad eva āsavehi vimuccati seyyathīdaṃ kāmāsavā bhavāsavā diṭṭhāsavā avijjāsavā ti.”]고 했다.
≪법구경(Dhammapada)≫에서도 “지혜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사람은 열반에 가까이 간다.”[Dhammapada(=Dhp), ed. O. van Hinüber and K.R. Roman, (Oxford: PTS, 1995), v.372, “n'atthi jhānaṃ apaññassa paññā n'atthi ajhāyato, yamhi jhānañ ca paññā ca sa ve nibbānasantike.”]고 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계(戒)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도덕적 기초 없이는 어떠한 정신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계는 선정이나 지혜를 얻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지계를 다른 말로 ‘심신(心身)의 조정(調整)’이라고도 한다. ‘심신의 조정’ 없이는 정신을 통일․집중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선정이 필요한가? 통일․집중된 정신을 통해 올바른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붓다 당시 외도(外道) 중에는 선정을 수행의 최후 목적으로 삼아 선정을 얻으면 그것으로 열반의 이상경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붓다가 성도 전에 사사(師事)했던 알라라 깔라마(Āḷā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라는 두 선인과 62견(見) 가운데 초선(初禪) 내지 제사선(第四禪)의 선정 그 자체를 열반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을 주정주의자(主定主義者), 혹은 수정주의자(修定主義者)라고 부른다. 붓다가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체험했지만, 그들의 곁을 떠났다. 이것은 붓다가 선정이나 수정주의를 버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정 수행 자체를 그 목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의 곁을 떠났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붓다가 수정주의를 버린 것으로 잘못 해석하지만, 붓다는 결코 선정이나 수정(修定)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붓다는 선정이 무익(無益)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조준호, 「석가모니 붓다는 수정주의(修定主義)를 버렸는가」, <韓國禪學> 제11호(한국선학회, 2005), pp.193-238 참조] 선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초기경전은 수없이 많다.

선정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지혜를 얻기 위한 전제 조건임은 분명하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의 도리를 깨달은 것은 선정의 상태에서였다. 올바른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얻고자 하는 지혜가 고도로 순수한 것일수록 선정도 극도로 순화되고 통일되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선정은 올바르고 뛰어난 반야의 지혜를 획득하는 데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미 얻은 지혜․경험을 최고도로 활용하는 데에도 필요한 것이다. 가령 우리가 이미 뛰어난 지혜․경험을 얻었다고 해도, 정신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냉철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지혜․경험을 충분히 구사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팔정도가 없는 수행은 바른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깨달았다는 자가 사성제와 연기법을 잘못 이해하거나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삼특상(三特相)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그의 깨달음은 한 번쯤 의심해 볼만 하다. 사성제, 연기법, 삼법인에 벗어난 것이라면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아직도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바르게 수행했다고 볼 수 없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의 증득에 있기 때문이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특히 중국의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개념이나 정의는 전혀 다르다.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오직 자신의 견해만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불교사상 전체를 이해하는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불교는 단일한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교설은 정반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모든 불교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불교사상사나 불교교리발달사 또는 경전성립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끝으로 현응 스님의 기조발제문은 논리정연하지는 않지만, ‘불교의 핵심은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다’고 강조한 그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불교의 핵심은 보리(bodhi, 깨달음)와 살타(sattva, 역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응 스님의 불교관은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여기서’ 어떻게 지혜와 자비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현응 스님은 한국의 많은 승려들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깨달음’에 함몰되어 있는 것을 지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현응 스님은 ‘지금 여기서’ 대승의 보살로서 보리살타(菩提薩埵)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급선무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성/ 철학박사․팔리문헌연구소장


비밀댓글입니다
어떤 하나의 교리나 주제에 대해서 초기불교적인 관점과 선불교적인 관점이 많이 다른 경우가 마성스님이 지적하신 내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그동안 깨달음이나 선정이라는 것 자체가 선불교적인 관점으로 치중되어 있다가 이제는 초기불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성스님 지적대로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선불교와 초기불교의 관점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사실 논쟁의 대상이 되는게 아니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논쟁이라기 보다는 어느것이 옳으냐하는 취사선택의 기로에 서있다고 봐야 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먹을 쥐고 보여주면서 손 안에 보석이 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 말대로 그대로 믿든가 아니면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못믿겠다든가 양자 택일을 해야 할 것 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진리를 통찰하여 꿰뚫는다를 본다(SEE), 알았다, 확인했다라는 뜻입니다. 경전에서는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내 눈으로 보석을 직접 확인했다는 말이지 결코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 상상으로만 저 사람 손안에 보석이 있을꺼야..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보석이라는 진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알아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즉 보석이구나 돌이구나 하는 그 눈을 어떻게 만드냐는 바로 선정의 목적입니다. 선정은 진리를 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수행법일 뿐 결코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이지 않습니다. 선정은 지혜의 힘을 키우는 수행방법이고 수단일 뿐입니다. 본문에서도 강조를 하고 있지만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면 이건 불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정이라는 것은 불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에서도 엄청 하는 것이며 이러한 선정으로는 누구나 비상비비상처까지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 두 사람의 요가수행자를 떠난 이유가 바로 선정이 선정일뿐 결코 궁극의 지혜를 보는 지혜의 힘을 키우는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씀드리지만 해탈이라는 것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해탈 자체가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법에서 이미 존재했던 것이고 또한 누구나 해탈은 얻습니다. 카톨릭의 명상만으로도 8해탈중 일정한 해탈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해탈을 넘어서 열반이라는 새로운 덕목을 세움으로써 불교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해탈하고 열반한다"라고 하지 결코 해탈=열반을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또한 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해탈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불교적 해탈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코 외도들이 얻는 그런 해탈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외도들에게는 해탈이 해탈로써 끝나지만 불교에서는 해탈하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당연히 팔정도에 의한 수행이 중요하고 올바른 수행에 의한 불교적인 혜안 즉 법안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팔정도 수행에 의한 올바른 법안 즉 불교적인 지혜를 갖추어야 비로소 사성제 무아 무상 고를 보는 것입니다. 같은 해탈자들이라도 불교적인 혜안이 없다면 무아 무상 고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타종교와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다시말씀드려서 보석을 보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수많은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보석을 보는 것은 같겠지만 외도들은 빛난다 아름답다 영롱하다라고 하겠지만 불교도들은 그 보석에서 무상 무아를 보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에서 깨닫는다 알아챈다 안다라는 뜻은 진리를 보는 눈 즉 보석을 보더라도 영롱하다거나 빛난다라는 것으로 보는게 아니라 사성제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일반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불교에서는 안다=알음알이라고 하여 상당히 폄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거나 또는 오해를 한 아주 서글픈 것입니다.
맑은 물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찌꺼기가 가라앉은 상태이고 또다른 하나는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입니다. 이 둘은 맑은 물이긴 하지만 180도 다릅니다. 찌꺼기가 가라앉은 맑은 물은 언제든지 찌꺼기가 올라와서 물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된 맑은 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맑은 물을 유지합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건데 선승들의 선정은 찌꺼기가 가라앉아서 맑게 보일뿐이지 결코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8 해탈중 하나를 획득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열반을 획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근 한국의 고승들이 보여준 몇몇가지 행태를 보면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분들은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분별을 하며 어떤분은 책을 펴냈다가 절판하라고 하고 어떤 분은 간화선만이 최고다라고 편협된 사고방식까지 보입니다. 간화선만 옳다면 팔정도 사띠 위파사나를 말한 붓다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불교의 간화선이 일견 옳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 주장하듯이 그렇게 ONLY ONE WAY 라고 한다면 그럼 간화선이 아닌 천태대사나 그밖의 화엄성자들 그리고 또 법화 고승들 등등은 모두다 어떻게 설명을 할련지 궁금합니다.

깨달음의 논쟁이 한국불교에서 일어나는 것은 저는 개인적으로 대환영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논쟁이나 대론을 통해서 초기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바로 설 수 있고 또한 계-정-혜에 대한 올바른 수행법이 정립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덧붙여서 선불교를 옹호하는 일부 승려들이나 재가자들의 글을 보면 케케묵은 중국한자 용어를 동원하거나 조사들의 아리송한 말들을 들고나오는데 솔직히 안타깝습니다. 물론 그분들 입장에서야 자신의 지식을 포장하기 위해서 그런 어려운 한자용어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조사들의 선문답을 들고 나오겠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어리석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입니다.
실론섬 님의 평소 신념들 중 ~ 계-정-혜 ~ 정 없이도 계를 구족할 수 있고, 정 없이도 혜를 증득할 수 있으리라는 그 신념들이 혹시 바뀌셨나요? 아님 아직도 쉽디 쉬운 탐진치-소멸을 믿고 계시는지 또 머리로 굴리는 경안과 불혜를 주장하고 계시는지 문득 궁금하군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그럼 계 없이도 올바른 선정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또 할려고... 내가 언제 정 없이도 계가 구족되고 정 없이도 혜를 증득한다고 했나요? 거참...

계는 필요없고 그냥 선정만 하면 구경각을 이룬다고 그리 생각하면 그렇게 수행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남의 집에 와서 시비를 거는지..ㅉㅉㅉ 그대 부류들은 계율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수행에는 계가 필요없다는 부류들 아닌가?

그리고 내 주장은 선정은 선정이 목적이 아니라 지혜를 획득하는 수행의 방편 혹은 수단에 불과하다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구만 그건 눈에 안 보이나 봅니다. 거참... 선정이 왜 지혜를 획득하 수단에 불과하냐고 따지고 싶으면 다른 곳에 가셔서 따지든가 하시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솔직히 이런 말씀도 드리고 싶네요.

저는 대론이나 토론을 좋아 합니다.
하지만 마성스님말씀처럼 토론 자체가 안되는 것을 토론이라고 입씨름하고 싶지 않습니다.

요즈음 세상은 내 자식도 마음대로 안되는 세상이더군요.
그런데 타인의 마음을 바꾸고 잘잘못을 지적하여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입니다. 붓다 재세시에도 붓다의 설법을 들은 사람들이 전부다 불교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듯 붓다도 못바꾸는 중생 마음을 제가 어찌 바꿀수 있겠는지요.

내 동생이라면 머리통을 한대 쥐어박기라도 하겠지만 그러지도 못하니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멋대로 뜻대로 사세요.
님이 내생각에 따라 오라고 하고 싶지 않듯이 나도 님의 생각에 따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 멋대로 살다 갑시다.
해탈이라는 것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해탈 자체가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법에서 이미 존재했던 것이고 또한 누구나 해탈은 얻습니다. 카톨릭의 명상만으로도 8해탈중 일정한 해탈에 도달합니다.
......

말씀 감사합니다.
카톨릭에서도 명상과 기도로 인한
선정상태에서의 해탈을 경험하신 분들이 엄청 많다더군요.
힌두교와 도교, 이슬람,기독교 등 모든 종교와
일반인조차 나름의 깊은 도를 가지신 분들도 그러하시구요..
한국불교의 간화선이나 선정을 통해 깨달음 운운하며
부처님과 아라한에 비견한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자들의
말이나 글들을 보면 실소가 나옵니다.

그건 말씀처럼 단지 정신세계의 강물 속에
찌꺼기가 가라앉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 보기 때문이죠.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라고 내지르면 사실상 아무도
터치하지 못하는 개인적 영역이기에 더 그러할테죠.
그래서 전 다른 무엇보다 제대로 누군가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해하고 비슷한 경험이라도 했다면
일단 그사람은 최소한 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유자재 제어할 줄 알며, 독선에 사로 잡히지 않고,
속세인 아니 재가자 누구라도 그들의 마지막을
공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일례로 
아라한과에 도달하셨다던
성철스님조차 괴팍한 화를 자주 내셨다 들었으며

법정스님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겠다는 이유로
그 엄청난 인쇄를 사후 장학금이나 기부에 쓰시지 않고
모든 저작을 절판하시는 모습을 보고
,
도대체 그분들은 그 어떤 깨달음에 도달 하셨기에
속세인들조차 이해하고 납득하기 힘든 행동과 결정을
하셨는지 전 아직도 불가사의입니다.

물론 그분들의 선업과 업적이 높디 높으심을 잘 알기에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_()_
기독교나 카톨릭 그리고 이슬람교등에도 감히 일반인들이 흉내낼 수 없는 뛰어난 행적을 보여준 많은 성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가는 초기대승불교의 유식학파들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요가하면 몸을 비틀고 묘한 자세를 취하는 체조정도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실제 요가는 엄청난 정신훈련이고 수행입니다. 그리고 범망경에 보면 62가지 외도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도 과거생을 볼 정도로 엄청난 수행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훗날 수행교리가 정립되면서 사선정과 그리고 요가수행등의 인도전통적인 수행법에서 가져온 사무색정을 합쳐서 구차제정이라는 단계를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요한 것은 비상비비상처까지는 누구나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붓다께서 출가후 찾아간 두 분의 요가수행자의 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비상비비상처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 그 다음 단계 즉 사성제와 고 무아 무상을 꿰뚫어 통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스개이야기이지만 저는 김수환 추기경도 화장했으면 아마도 사리 엄청 나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죄송한 말씀일지는 몰라도 이분의 수행정도는 웬간한 출가승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붓다께서는 당시의 인도수행법등을 모두다 경험하시고 6년간의 기나긴 고행도 해봤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당시 알려져있던 모든 수행법은 경험했고 그리고 비상비비상처까지도 도달했던 분입니다. 그러한 모든 수행법을 경험하신 후에 정각을 얻으셨고 그리고 올바른 수행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팔정도 입니다. 그리고 이를 37조도품으로 넓게 펼쳐서 세세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제시한 이런 수행법으로만이 비로소 법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법안이란 바로 불교적 지혜 즉 무상 무아 고를 꿰뚫어 통찰하는 지혜입니다. 손안의 보석을 누구나 보되 영롱하다 아름답다 비싸겠다라고 보느냐 아니면 무상 무아 고를 보느냐 이것이 타종교와 불교의 갈림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분들이 굉장히 착각하고 오해를 하고 착시현상을 일으키고 있는게 바로 선불교의 고승들 즉 조사들입니다. 마치 그분들이 불교의 전부인냥 착각들을 하시는데 ... 선불교는 중국불교 종파의 일개 분파에 불과한 것입니다.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이 한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갖고 있다보니 착시현상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만 .. 이제는 배운 불자라면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서 올바르게 볼 때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리지만 고승전을 한번쯤은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모든 고승전에 나오는 그 수많은 고승들이 전부다 선불교의 선승들이 아닙니다. 화엄 법화 정토등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탄생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혜능조사와 천태지의대사중 어느 누가 도력이 높겠는지요? 왜 헤능조사는 알아도 천태지의 대사는 모르는지요? 천태대사가 선불교의 선승 아닙니다. ^^ 화엄성자로 불리우는 법장스님이 선승은 아닙니다. 김묘각 스님이 선승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절에가면 꼭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님 찾으시지요. 그분들 선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 나오는 본존불이나 보살님들이 아닙니다. ...^^ 참으로 안타까운 오해입니다. 아이고 ~~ 그러고 보니 저도 선승들의 선어록이나 선문답을 잔뜩 올려 놓았네요. ㅎㅎ
손안의 보석을 누구나 보되 영롱하다 아름답다 비싸겠다라고 보느냐 아니면 무상 무아 고를 보느냐 이것이 타종교와 불교의 갈림길이라는 것입니다.
.......

옳으신 말씀 이십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고승들의 선 수행과 그들의
선문답이 불교의 모두 인냥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과 같다고
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한국 조계종으로 인한 참된 불교의 왜곡이 심각한 상황이죠.
요근래 초기불교의 대중적 확산으로 많은 분들이
깨치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초기불교vs대승불교란 편협한 시각을 버려야만
진정 한국불교의 개혁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_()_
마성스님이 지난번에 올린 기고를 참조해 보면 선불교와 초기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각각의 결론은 간단하며 명명백백하여 더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질 않습니다. 논쟁이 대상이 되질 않고 특히 물과 기름과 같은 것을 계속하여 논쟁하고 우유와 물처럼 섞일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 같습니다. 즉 마성스님의 말씀처럼 "초기불교 깨달음과 禪의 구경각은 다른 차원" 입니다. 그런데도 논쟁을 계속 한다면 이건 맛지마 니까야의 아래 경구들과 조금도 다름없습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미혹한 자들이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본생담‧미증유법‧문답 같은 법을 배우지만 그 법을 배워 통찰지로 그 법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 그 법의 뜻을 통찰지로 자세히 살피지 않을 때 그들에게 그 법들은 확립되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다른 이들을 논박하고 자기 교리를 주장하기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을 배우므로 법을 배우는 그 궁극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한다. 그들이 잘못 파악한 그 법들은 그들을 긴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법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다시말씀드려서 최근 한국불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깨달음의 논쟁은 전혀 무의미하며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뿐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승이 초기불교로 전부다 개종을 하든가 아니면 초기불교가 대승으로 전부다 개종을 한다면 소란이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천년 만년을 논쟁을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승과 초기불교는 어차피 소의경전도 다르며 수행방법도 다릅니다. 아무리 초기불교에서 사성제가 깨달음이라고 목이 쉬도록 외쳐도 대승불교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선불교의 간화선수행이나 참나 같은 것들이 옳다고 하더라도 초기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불교(Buddism)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른 불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로가 내것이 최고이고 내것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 결과는 서로의 공멸뿐일 것입니다.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대로 갈 길을 가고,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대로 갈 길을 가면서 서로 존중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그런 대내외적으로 화합된 모습만이 상호 상생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교설등을 내세워 자신의 지식이 대단하다는 식으로 논쟁하기 보다는 대승과 초기불교가 모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인 보시.자비등에 더 힘을 써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상호 보완하고 의존하는 상생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깨달음이란 논쟁이 일어나자 전혀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깨달음을 가지고 그것을 부추키고 편승하여 자신의 이름을 드 날리거나 또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분들에게는 뱀의 비유경을 재삼 꼽씹어 보라고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