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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is in Mendota Heights, Minnes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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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이 페북에 올린 글 <불교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페친님들의 코멘트에 힘입어 그 내용을 다듬어 월간불교문화 편집인께 보냈다. 특히 Bruce Park님과 조기현님께 감사드린다. 물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유선경교수가 가장 많은 코멘트로 도와 주었다.
개학까지 그래도 보름이 남아 있어 연재하고 있는 에세이를 한 편 더 완성했다. 내게 주어진 분량은 원고지 20매인데, 지금까지 한번도 20매 안에서 글을 맺지 못하고 편집장님 속을 썩여 왔어서, 이번에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23매까지 줄였다.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인데, 내 한 호흡의 길이는 40매이고, 좀 편하게 숨쉬려면 120매는 되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원고지를 사용하지 않는 미국에서 내가 글쓰기에 편하다고 느껴 온 분량은 영어로 최소 6,000단어 이상인데, 그것을 한글 원고지로 환산하면 120매 분량이다. 그래서 결국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내 글쓰기 호흡의 길이를 한글 원고지로는 가늠 못하며 헤맸던 꼴이었다.
새로 쓴 에세이 <불성의 현대적 이해>는 바로 밑에 PDF 파일로 원고를 연결해 보았고, 또 밑에 전문을 붙이기도 했다. 짧은 글에 중요한 논증을 새로 도입하느라고 글이 좀 지나치게 응축되고 (constrict) 상세한 설명을 더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논증을 앞으로 계속 사용하며 더 세련되게 다듬고 또 이 논증 자체를 분석하는 글도 따로 쓸 계획이다. 관심 있으신 페친들께 코멘트를 부탁드린다.
아, 밑에 있는 사진은 우리 미네소타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Welcome Table'인데, 밑둥을 보면 파인애플 모양으로 되어 있다. 하와이에서 환영한다는 표시로 파인애플을 선사한다고 해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https://www.dropbox.com/.../%EB%B6%88%EC%84%B1%EC%9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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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강의실 357호 09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홍창성
불성佛性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는 학생들과 매시간 5분 정도 입정入定한 다음에 강의를 시작한다. 그러면 학기 중반을 넘어설 무렵 학생 몇몇이 명상의 교리적 근거에 대해 질문하곤 한다.
"5분의 참선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집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도 종종 참선을 합니다. 그런데 참선이 깨달음과 열반에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마음이 한없이 맑아지면 깨닫게 되나요? 아니면 명상과 관련된 다른 근거가 있어서 깨닫는가요?"
구체적인 예로 문제에 접근하기 좋아하는 영미권英美圈 학생들을 위해 나는 선禪에서의 수행방법을 소개한다. 일본 조동종曹洞宗 선사들을 통해 소개되어 서구에서 인기 있는 묵조선黙照禪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잡념이 모두 떨어져 나가게 해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비추어 보아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불성佛性을 깨치면 깨닫는다고 한다. (주석: 선문禪門에서는 돈오頓悟로서의 깨침과 증오證悟로서의 깨달음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미국대학 학부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본고에서는 이 둘 사이의 엄밀한 구분 없이 논의를 전개하겠다.) 한편 한국 불교의 간화선看話禪은 화두花頭를 잡아 그것을 마치 마음을 청소하는 세제처럼 사용해 마음속 모든 상념을 씻어 내어 어느 순간 웅크리고 있던 불성을 깨치면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투철하게 이해하려는 미국학생들은 또 반대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불성은 깨끗한 영혼 같은 것 같습니다. 참선수행을 통해 원래의 순수한 영혼을 되찾으면 기독교에서 구원받듯이 불교적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아도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불성이 영혼이나 아뜨만과 어떻게 다릅니까?"
이것은 선문禪門의 불성에 관한 견해가 붓다의 무아론無我論과 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느냐는 의문이다. 똑똑한 학생들이 제기할 수 있는 좋은 질문이다. 주지하듯이 불성 여래장 사상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선禪이야말로 이 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해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의 형태이다. 그래서 선禪이 현대적으로 해석되어 계속 진화하기를 희망하는 나는 그 목표를 위해 학생들과 함께 일단 불성 사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도한다.
불성 사상이란 모든 유정물有情物이 (혹자는 모든 무정물無情物까지도) 이미 근본적으로 깨쳐 있어서 (本覺) 원래부터 붓다라는 주장이다. 이 사상에는 모든 유정물이 깨달아 붓다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으로부터 이미 모두 부처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기만 하면 성불成佛한다는 강한 주장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해석이 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공통된 주장은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한 본성本性으로서의 불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성사상이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에 그것을 그것이게끔 만들어 주는 아뜨만atman 또는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붓다의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과는 과연 양립가능한가(compatible)? 그럴 수 없는 것 같다.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서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붓다의 연기에 관한 가르침이 불교 교리의 근본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붓다의 연기론을 받아들이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다음과 같은 내 철학적 논증으로 불성(과 아뜨만 그리고 자성)의 존재가 반박된다고 생각한다.
불성이 존재한다면 불성은 조건의 의해 생멸生滅하거나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다.
(1)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면 불성의 존재는 조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無常한) 조건들에 의지하는 한 불성은 사물의 고정불변한 본성(本性 intrinsic nature)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하다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지 않았다면 그 불성은 스스로부터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성의 자기기원self-origination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불성은 자기기원 당시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2-1) 불성이 자기기원 당시 존재했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다시 솟아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2-2)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지 않았으면서 자기기원 당시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는 없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1)과 (2)에 의해 고정불변하며 상주(常住)하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의 논증에서 ‘불성’ 대신 ‘아뜨만’이나 ‘자성’을 대입하면 그것은 바로 아뜨만이나 자성의 존재를 반박하는 논증이 된다. 내 불교철학강의를 들은 미국 학생 가운데 아직 아무도 위의 논증에 이의를 제기한 녀석은 없다. 오히려 강력한 논증이라며 논증의 매력을 즐기는 녀석들이 여럿 있었다, 가끔 자기들이 믿는 영혼이나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같은 구조의 논증을 적용해 보면서.
그런데 실은 나는 ‘불성’이라는 대단히 편리한 개념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겠다. 일상 언어에는 우리가 흔히 쓰기 때문에 마치 그 말의 대상이 세계에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어휘가 많다. 책상, 펜, 엔진, 날개 등 그것들이 수행하는 기능(function)에 의해 정의定義되는 사물들이 모두 그렇다. 예를 들어 엔진은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변환시켜 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라고 정의된다. 자동차 엔진은 휘발유를 연소시켜 나오는 화학에너지를 이용해 바퀴를 돌리는 운동에너지를 생산한다. 엔진의 모양은 다양하며, 그 재질이 반드시 금속일 필요 없이 원칙적으로 세라믹이나 돌 또는 플라스틱 같은 재료로도 엔진을 만들 수 있다. 어떤 물체가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변환시키기만 한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재질, 모양, 색깔, 크기 등에 상관없이 모두 엔진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책상, 펜, 날개 등에도 모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내 눈 앞에 주차해 있는 이 자동차의 엔진, 한강위에 떠 있는 저기 저 작은 보트의 선박용 엔진, 그리고 하늘을 나는 저 은빛 비행기의 엔진을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또 원칙적으로 만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엔진 그 자체와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어떤 구체적인 엔진이면 엔진이지 어떤 황당한 형이상학적 공간에 존재한다는 (플라톤이 말할 법한) 엔진의 형상形相 같은 것을 존재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펜, 날개, 선풍기, 냉장고 등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은 이 내 손안의 볼펜, 하늘을 나는 저 새의 날개,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도는 옆방의 선풍기, 그리고 우리 집 냉장고 같이 구체적인 물체들이다.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의 펜 그 자체, 날개 그 자체,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선풍기의 형상, 냉장고의 본성 그 자체와 같은 추상적인 대상들은 우리 자연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단지 ‘펜’이라는 개념, ‘날개’라는 표현, ‘선풍기’라는 지시어, 그리고 ‘냉장고’라는 편리한 말에 불과할 뿐, 그것들이 가리키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대상들이 우리 세계에 존재한다고 보아 줄 이유가 없다.
불성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불성도 이 세계 안에 형이상학적 존재인 추상적 대상으로 내재內在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비록 추상적인 엔진이나 날개는 존재하지 않지만 구체적인 개개의 엔진 장치나 각각의 날개들이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듯이, 만약 우리가 ‘불성’을 ‘어떤 한 유정물이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깨달음과 열반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몸과 마음의 특정한 상태’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나는 구체적인 존재자로서의 불성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그 근기根機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는데 적합한 심신心身의 상태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에서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깨달음을 위해 가장 적절한 심신의 상태가 상이하게 결정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다양한 심신의 상태에 공통된 어떤 필연적 속성 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각각의 경우 주어진 유정물에 있어서 깨달음을 위해 가장 적합한 구체적인 심신의 상태를 그때그때마다의 불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 그 다양한 펜들을 경우마다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펜’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듯이, 나는 우리가 각 유정물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깨달음과 열반을 위한 최적의 심신 상태를 그때그때 지시하기 위해 ‘불성’이라는 말과 개념을 얼마든지 써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불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다, 물론 내가 말하는 불성은 모든 유정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을 가진 아뜨만과 같은 실체가 아니고 각 유정물마다 다르고 또 한 유정물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찰나마다 다른 심신의 최적화된 상태를 말할 뿐이지만.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를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Comments
Jae Kwon Kim
"불성은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거나,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거나이다." A exclusive or B
에너지는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기도 하다. A and B
· 2 y
한시우
· 2 y
Chang-Seong Hong
재미있는 댓글 잘 읽었습니다. 논리학자들은 앞 문장을 “Av~A (A or not-A)”라고 표기하고, 뒷 문장을 “B&~B (B and not-B)”라고 표기합니다. 앞 문장은 그것이 exclusive or 이든 inclusive or 이든 상관없이 그 논리적 형식에 의해 언제나 참인 문장입니다. 언제나 참이기에 별로 재미없습니다. 그리고 뒷 문장은 그 형식이 논리적으로 모순이어서 언제나 거짓입니다. 언제나 거짓이기에 우리가 피해야 할 주장입니다.
그런데 뒷 문장을 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루뭉술한 해석을 가져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형식논리학 (수리논리학 또는 기호논리학)은 이런 방법에 관심이 없습니다만, 헤겔류의 변증론자들만 해도 (마이클 조단은 키가 작다) & (마이클 조단은 키가 작지 않다) 라는 문장이 참이라고 보아도 좋답니다. 정(正)은 반(反)을 정립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첫 부분이 조단이 3살 때 말해졌고 뒷 부분이 20살 때 말해졌다면 둘 다 옳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또 앞부분이 평균키 7피트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옳고 뒷 부분은 평균키 5피트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옳으니, 이 두 그룹을 요령있게 배치하면 앞뒤부분 모두 옳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조건’을 어느 범위까지 확대해서 해석하느냐입니다. 남방불교식으로 어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어떤 물리량, 어떤 물리적 사건, 어떤 의식상태와 같이 ‘실질적인(real)’ 존재자들까지만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북방 대승불교에서처럼 조건을 연기의 두 항에 들어갈 수 있는 그 다른 모든 것들까지 (예를 들어 언어적 개념, 수, 논리적 관계, 공간적 관계, 사회적 관계, 관점, 배경 이론, 배경 가치관, 배경 종교, 등등) 포함하느냐입니다. 제가 앞으로 월간불교문화에서 10월부터 시작해서 3회에 걸쳐 차례로 논의하겠습니다만, 저는 대승불교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에너지는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기도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 ‘조건’이라는 것이 모든 관점이나 배경이 되는 물리학 이론까지 포함시켜도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앞 부분의 ‘조건’과 뒷 부분의 ‘조건’이 같은 조건입니까 아니면 다른 조건입니까? 마찬가지로, 앞 부분의 ‘에너지’와 뒷 부분의 ‘에너지’가 같은 에너지입니까 다른 에너지입니까? 이 문장의 의미를 좀더 더 분명히 해 주시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한편, 불교에서도 사물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고들 해 왔지요. 어떤 사물도 자성을 가진 실체로서 상주하며 존재하지는 않지만,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이 공空한) 가상(假相, 幻)으로는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문장이 그럴듯한 신비감을 주는 이유는 두 개의 상이한 관점을 섞어 놓아 ‘존재’라는 동일한 단어를 ‘상주하는 실체’와 ‘가상’이라는 두 개의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논리적 오류(the fallacy of equivocation)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문장에서 사용하는 같은 단어는 같은 관점에서 같은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논리학의 법칙을 따라야 논의가 헛돌지 않게 됩니다. 아, 물론 선생님의 문장이 그런 문제가 있다는 말씀은 전혀 아닙니다.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아, 위에서 "Bv~B (B or not-B)"가 아니라 "B&~B (B and not-B)"여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방금 고쳤습니다.
· 2 y
Jae Kwon Kim
Yumaa Hill 상세하고 유익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비판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든 느낌을 아주 간략하게 표현해본 것이 었습니다.
제가 인용한 A exclusive or B 에서 불성 대신에 아트만 등을 대입해도 또 "그것" 이라는 존재자를 대입해도 논의가 성립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명백히, A and B 가 성립하는 것이 있다면, "고정 불변하여 상주하는 <불성,그것> 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문제가 있는 것이 되는데, 그 "그것"의 예로 에너지를 들었을 뿐 입니다.
· 2 y
Jae Kwon Kim
Yumaa Hill 에너지는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기도 한다면, 에너지는 상주하는 본성을 가지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 2 y
Jae Kwon Kim
에너지는 그것의 총합은 불변하는 것이므로 조건에 무관하게 상주하는 무엇이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개체의 에너지는 조건에 따라서 변화지만, 총계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총계의 의미 속에있는 어떤 본성은 불변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2 y
Chang-Seong Hong
Jae Kwon Kim 제가 스마트폰이 아직도 서툴러서 쓴 것이 거의 지워졌습니다. 다시 쓰지요.
만약 신이나 영혼, 아뜨만이나 브라만처럼 상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생멸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그 정의definition에 의하면 불변합니다. 예를 들어 영혼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것이 멸할 수 있으려면 물리적 또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불변한다면 결코 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변하면 불멸이고, 불멸이면 영원합니…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그리고 제가 예상한대로 원래 쓰신 문장에서 생멸하는 에너지는 개개 경우의 에너지이고 생멸하지 않는 에너지는 에너지의 총량으로서 불변하는 것으로 쓰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도 흔히 이렇게 같은 단어를 한 문장에서 다른 뜻으로 쓰기도 합니다만, 이제는 21세기이니 불교도 좀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표현을 다듬을 때가 되었습니다 (실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났습니다). 우리 불교가 논리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예를 여전히 가르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어쨌든…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한편, 저는 전체로서의 에너지의 총량이라는 것도 뉴튼 이래 주어진 우리 물리학의 전제로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 이것은 객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우리의 물리 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기본 가설 또는 공리 같은 것에 해당할 뿐입니다. 그리고 (2) 불변하는 에너지의 총량이라는 것은 오직 우리의 물리학을 배경 이론으로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연기론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받아들이는 물리학'이라는 조건에 의해서만…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제가 한정된 물리학의 지식으로 답변드려 보았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을 제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 y
Jae Kwon Kim
에너지 보존의 법칙 역시 물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엇이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뉴톤 역학의 체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리고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더 추상적인 그러면서 a priori 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에 바탕하고요...
잠깐 비켜나서 … See more
· 2 y
조기현
약간 다른 얘기긴 하지만, 특수상대성이론이 등장하기 전에는, 에너지보존과 질량보존은 따로 취급되었습니다. 핵합성 등에서 질량결손이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것은 특수상대성이론의 프레임 안에서 비로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에너지보존과 질량보존이라는 별개의 원칙이 생각 밖의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에너지-질량보존으로 확장(expand)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에너지보존이라는 자명해보이는 원리도 뉴턴물리학이냐 상대성이론이냐 하는 (쿤의 … See more
· 2 y
조기현
이런 것이 연기의 일부로도 생각될 수 있겠고요.
· 2 y
Chang-Seong Hong
조기현 예, 넓은 의미에서의 연기로 포함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고맙습니다.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댓글 감사합니다. 님의 댓글은 부분적으로 옳은 것이지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상대성 이론에 기인한다는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총에너지 보존의 법칙의 이론적 근거는 time homogeneity, 즉, 물리법칙이 시간의 원점을 잡는 것과 무관하게 성립한다고 하는, 일종의 연속 대칭성에 바탕한 것입니다. 그기에 따른 Noether's theorem 이죠.
· 2 y
Jae Kwon Kim
물론 모든 이론은 근거에 바탕하므로 그것까지 연기이다라고 말할수 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far-fetching 이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앞에도 언급했지만, 이것의 근거는 너무나 a priori 한 일반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부정되어야 할 어떤 모순도 찾아진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에너지가 있었고 그것에서부터 모든 물질들이 생겼났지만, 그 것의 총합은 불변하다.
· 2 y
Jae Kwon Kim
연기론을 거의 절대적 진리"로 모실려고 하는 그 근거까지도 여러가지 잡다한 논증과 현실에 대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면, 그 연기론까지 조건에 의존하는 (연기) 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그것의 결론조차 절대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지요. 연기론의 절대성에 필요한 논증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필요한 시간의 동질성 중에서 어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선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살펴 보십시요
· 2 y
Chang-Seong Hong
Jae Kwon Kim 너무 나가는 것 같은 소리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에너지'라는 개념도 물리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만약 누군가 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어떤 물리학 이론에 따라 창조했을 겁니다.
그리고 에너지는 에너지 아닌 것에 대비해서만 에너지입니다 - 즉, 에너지는 에너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이기 때문에, 에너지는 에너지가 아닌 것과 연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 See more
· 2 y
Jae Kwon Kim
Yumaa Hill 제가 거의 결론적으로 쓴 댓글이 지금 글의 바로 위에 있습니다. 저는 철학적 논증을 즐기고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편이지만, 그리고 연기론이 대체적으로 매력있는 견해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의 절대성에 대한 논증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의 근거보다 더 확실해 보이지 않음은 너무나 분명해 보입니다. 수식과 같은 더 정확한 언어 그리고 확립된 근거에 바탕하지 않는 논증들이 가질 수 있는 허점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히 이해한다고 믿기 때문입니…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Jae Kwon Kim 연기론 자체도 절대성을 지닐 수 없다는 고찰은 연기의 대승적 해석인 공에 대한 오래전부터의 고찰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을 결여해 공한데, 이런 공조차도 자성을 가질 수 없어 공하고 (공공), 공공조차도 공하고 (공공공), 이런 과정은 무한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자는 이런 무한 부정의 과정이 (그래서 모든 개념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과정이)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보기까지 합니다. … See more
· 2 y · Edited
Jae Kwon Kim
"연기에도 절대성이 없다" 는 좋은 결론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2 y · Edited
Jae Kwon Kim
논의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 y
Jae Kwon Kim
일부 사람들의 가능한 흥미를 위해서 여기에 댓글들을 일부 포스팅해도 될까요? 물론 최대한 논리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
· 2 y
조기현
기인한다는게 아니라 유효하기 위해서 의존한다는 겁니다. 뇌써의 정리는 결국 수학적인 형식이며, 그 안의 물리적인 내용물은 라그랑지안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너지보존법칙이 실험에서 유효하려면 적절한 라그랑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적절한 라그랑지안을 세우려면, 물리적인 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See more
· 2 y
조기현
에너지보존법칙은 결국 어떠한 이론적 맥락에서 의논되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며, (에너지와 질량을 예로 들어 누차 설명했습니다) 이를 맥락의존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교수님은 에너지보존법칙의 작업가설성과 배경의존성을 말씀하셨는데, 이중 배경의존성을 맥락의존성이란 형태로 partially 지지합니다. 배경의존성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파악되지가 않아서...
· 2 y
Jae Kwon Kim
조기현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통찰은 최소작용의 원리와 시간의 동질성인데, 이 둘은 패러다임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죠... 그리고 모든 논의 또는 논리-- 연기론이니 무아, 불행 등등 포함-- 은 어떤 이론적 또는 관찰적 근거에 입각하므로, 이러한 논의 또한 절대적 일 수 없음으로 이미 결론 내렸습니다.
· 2 y
조기현
저는 과학사적인 입장에서 에너지보존법칙을 논했는데, 물리이론의 입장에서 논박하시는군요. 물리이론 입장에서 이 문제는 상당히 delicate해서, 어렵습니다. 용어는 보다 엄밀히 정의되어야 하며,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고전물리에서, 운동량(mv)보존법칙은 뉴턴의 작용반작용(Fxy=-Fyx)에 기인하지요. 이는 측정대상이 명확히 정의된 (질량과 속도) 운동량의 보존여부를 실험적으로 잘 테스트할 수 있으므로, 실험적으로 좋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 See more
· 2 y
조기현
이러한 미꾸라지 진리는 패러다임이 유효하다면, 놓친 조각(missing piece)를 찾는데 유용한 guidance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패러다임 쉬프트(고전역학에서 상대성이론으로 등)가 일어나는 현상에서는, 놓친 조각(missing piece)을 찾기는 커녕 엉터리 조각으로 생각을 자꾸 유도하겠지요.… See more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물리 또는 물리철학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견해의 일치가 있어 보이지 않네요...
고전 역학에 관한한-- 물론 상대성 이론 포함-- 그것은 유클리드 기하학같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실험에 의존할 것이 없고, 실험에 비추어 볼 것도 없지요. (Chaos 는 논외)… See more
· 2 y · Edited
조기현
Jae Kwon Kim 죄송합니다만, 최소작용의 원칙은 전자기학의 라그랑지안의 결정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또한 local U(1) gauge symmetry 또한 양자역학적인 파동함수와 전자기장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군이므로, "고전" 전자기학의 라그랑지안 결정 (F*F+jA)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2 y
Jae Kwon Kim
조기현 여기서 서술한 것은, Landau series 의 volume 1 (고전 역학) & volume 2 (classical fields) 에 이미 다 나와 있는 것입니다.
· 2 y · Edited
Jae Kwon Kim
양자 전자기학은 고전 역학의 라그랑지언 자체를 구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며, 그것을 quantization 시키는 이슈에 관한 것입니다.
· 2 y
조기현
이해가 안 되네요. local U(1) transformation은 양자역학적인 파동함수의 국소적 위상 변환인데, 그게 위상을 갖는 파동함수로 기술되지 않는 고전적인 물체와 전자기학의 라그랑지안을 어떻게 얘기합니까?
· 2 y
조기현
양자전자기학은 여기에 second quantization을 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old term이지만요...)
· 2 y
조기현
연역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싶으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과학철학자들과 과학사가들은 연역적 체계 외에 실험을 통한 입증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 2 y
Jae Kwon Kim
나의 전공이 양자 장론과 임계 현상입니다. 그리고 해당 논문이 20여편 이상 있으며, PRL 의 referee 까지 했습니다. 란다우 series 를 읽어 보십시요. 양자장론은 주어진 local gauge symmetry 의 양자화, 재규격화 등에 관한 이론이며, 그것의 classic Lagrangian form 을 결정하는 것은 상대성 원리와 local gauge symmetry 입니다. 다시말해서 대칭성이 주어지면 라그란지언 (좀더 엄밀하게 … See more
· 2 y · Edited
조기현
Jae Kwon Kim 뭐, 디락스피너장을 "고전적인 장"으로도 간주하고 그것으로 "고전적인 라그랑지안 밀도"를 만드신다면야 할 말은 없습니다만, 스핀 1/2장을 고전적인 장으로도 간주할 수 있을까요?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디락장은 전자에 대한 것이지 전자기장에 대한 것이 아니죠. 장과 전하를 띤 입자 사이에 작용을 결정하는 것은 이미 고전 역학에서 결정된 것이지요.
· 2 y
조기현
Jae Kwon Kim 그러니까 제 말이 local U(1) symmetry는 (양자장론의 경우) 디락장 또는 (학부양자역학의 경우) 슈뢰딩거파동함수와, 전자기장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전적인 물체와 전자기장 사이의 상호작용에는 국소적 U(1) 대칭성이 등장할데는 없다는거죠...
· 2 y
Jae Kwon Kim
지금 논의되어 온 것은 고전적 전자기학(전자와 장의 작용하지 포함) 한 것이었는데, 디락장을 도입해서 논의가 흐려지는 면이 있네요.
디락장의 장론적 도출은 group theory 에서 보는 것이 가장 간명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좌표 변환 SL(2,c) 에 대응하는 전자의 상태 함수의 변환은 su(2)× su(2) 인 것으로 기억...… See more
· 2 y
조기현
Jae Kwon Kim 예 감사합니다. 제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서로 논점이 안 맞았던 것 같네요.
말씀하신대로 주어진 대칭성에 대해 라그랑지안이 유일하게 결정됩니다.… See more
· 2 y
조기현
페체이퀸 대칭성 등도 새로운 대칭성을 더해가는, 좋은 예가 된다고 봅니다.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네 감사
· 2 y
Jae Kwon Kim
조기현 한가지만 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라그랑지언의 form 과 무관합니다. Noether theorem 을 참고해 보십시요
· 2 y
조기현
Jae Kwon Kim 예. 김재권님이 말씀하시는 에너지보존법칙과 제가 얘기한 에너지보존법칙이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실험적으로 측정할게 명확하고, 실험적으로 성립여부를 테스트 가능한 에너지보존식(법칙과의 혼동을 피해...)으로, 구체적인 라그랑지안에 따라 형태가 다릅니다. … See more
· 2 y
Bruce W. Park
저까지 언급해 주셔서 부끄럽습니다. 불성에 대한 정의와 해석을 쉽게 서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작업가설적 (operational definition) 정의로 읽히게 됩니다. 불성에 대한 고찰에 앞서 만물이 갖는 영원성, 청정성, 완전성을 담보한 법성에 대한 고찰이 후기대승에서 언급을 많이 하였다고 봅니다. 제법실상을 논구하는 측면서 법성의 공함까지 논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불성은 붓다의 깨달음보다도 붓다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불성은 누구든지 붓다처럼 되고 싶은 소망에서 성불의 근거를 추적해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대승불교는 두 가지로 정리햇던 듯 합니다. 불성사상과 보살사상이지요. 성불의 근원은 불성이 있기 때문이고 보살의 행을 성취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불성은 극히 신앙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엇고 그 기능과 효력이 지대했다고 봅니다. 교수님의 해석은 무기력한 논쟁을 물리치고 건설적이고 역동적인 불자의 삶을 이끌어주게 합니다. 교수님의 설명을 보니 불성은 서양종교의 성령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뚜렷해집니다. 기독교의 신이 자아를 지녀 심판하는 전능자라고 하지만 불성은 어떤 자성도 지니지 않는 개념적 언어로 공성 (연기성)의 총체를 표현한 것으로도 읽힙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 2 y
Chang-Seong Hong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반쯤을 미리 해 주셨네요.^^ 저는 공을 단순히 논리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이어서 그것에 어떠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시도에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기 대승의 견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실은 저는 불교계에서 공을 언급할 때 '공성'이라는 표현을 쓰며 마치 공에 무슨 본질적인 성품이 존재하는 듯하게 표현하는 것조차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서양불교학자들은 그 옛날 불교승려들이 힌두교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신도들을 더 확보하고자 당시 인도의 보통사람들이 더 편하게 받아들일 아뜨만과 비슷한 불성의 개념을 도입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 2 y
허만항
“이 법계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연기), 이 법계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법성)(無不從此法界流, 無不還歸此法界).
· 2 y
Chang-Seong Hong
허만항 감사합니다. 물론 옳고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만, 저는 또다시 '법성'이라는 단어가 불편합니다. 그냥 '법의 모습,' '존재의 모습,' '이것이 진리'라고 하면 될 것을 '법성'이라고 하여 마치 무슨 고정불변의 속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여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물론 '성'을 여유있게 해석하면 별 문제 없다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 2 y
허만항
“법성은 제법의 진실체성真實體性, 또한 우주간의 일체현상에 갖추고 있는 진실불변의 본성을 가리킨다. 이는 또한 진여법성으로 진여의 다른 명칭이다. 법성은 만법의 본질이다. 《대지도론》 33권에서는 일체법의 총상과 별상은 다 같이 법성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제법은 각자의 차별상과 실상이 있다. 말하자면 각자 차별상은 예를들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이 문득 이전의 상을 읽어 그 고정된 것이 없는 까닭에 이를 분별하여 구하면 얻을 수 없다, 불가득不可得인 까닭에 공(무자성)인 즉 공은 제법의 실상이라 말한다. 일체차별상에 대해 말하면 그 자성이 공한 까닭에 모두 동일하여 이를 여如라 한다. 일체상은 다같이 공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공을 법성이라 한다. 또한 황색돌에 금의 성질을 갖추고 있듯이 일체세간법에는 모두 열반의 법성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제법본연의 실성을 법성이라 한다. 이는 《원각경》의 이른바 「중생과 국토는 동일한 법성」라는 경문과 같은 뜻이다.”
《유식명사백화唯識名詞白話》
· 2 y
Chang-Seong Hong
허만항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교계에서 언제 중관과 유식을 서로 너무 조화롭게만 해석하려 하지 말고, 서로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논쟁도 한번 진지하게 해 보았으면 신나겠습니다.^^
· 2 y
허만항
감사합니다 저는 대승기신의 입장에서 믿음과 행을 중시합니다
· 2 y
이감천
불성이라는 개념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초기 경전에는 없고 후대에 개발되어 쓰여진 단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단어를 가지고 논쟁해봐야 불교를 왜곡할 뿐 도움이 않된다고 봅니다.
언어의 희론 밖에 안된다고 봅니다.
· 2 y
Chang-Seong Hong
저는 후대에 이루어진 불교 교리도 초기경전에서의 가르침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불성 참나 참마음도 논리적으로 문젯거리가 있다고 해서 쉽게 옆으로 치워버리기보다는, 그 동안 이 개념들이 수행해 온 긍정적인 역할도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초기경전의 가르침과 일관성 있는 방향으로 재해석해서 끌어 안으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시도가 반드시 설득력이 강하거나 성공할 것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 2 y · Edited
김근중
본불은 중국 황벽승려가 만든 허구입니다. 석가모니불이 가르친 불성은 괴로움(고성제)을 아는 것이고,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깨닫는 것이랍니다.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 두 극단이 묶여 결박된 가운데 연기한 '괴로움 소멸'의 중간을 닦는 것의 도성제(팔정도)이랍니다.
그래서 꼰단냐 존자의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고 한 생멸에 대한 '중도' 깨달음을 감흥어로 기뻐하신거랍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초전법륜경을 읽어보시고요.
뭍 사람들이 가진 내외입처의 일체를 벗어나 일체를 거론하지 않는 불교 철학을 논하시길...
· 2 y
Chang-Seong Hong
댓글 감사합니다. "뭍 사람들이 가진 내외입처의 일체를 벗어나 일체를 거론하지 않는 불교 철학을 논하시길..."고 하셨는데, 제 글의 문장문장이나 에세이 하나하나로는 그렇게 할 수 없겠습니다만, 전체적인 철학적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결국 선생님께서 바라보시는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믿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 2 y
서근하
대단하신 분들의 대화를 들으니..참 힘이 됩니다
· 2 y
강석두
'시간과 장소에 따라 깨달음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심신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읍니다.
· 2 y
Chang-Seong Hong
예, 수학적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 2 y
Chang-Seong Hong
강교수님께서 우려하신 문제를 고려해 문장의 표현을 바꾸었습니다. 원래 제가 영어로 써 놓은 에세이들에서는 그냥 'optim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수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었는데 한글로 쓰다보니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Optimal이란 말 앞에는 most 같은 말을 붙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는데, 그래서 한국어로 '적절한' '적합한' 정도로 바꾸어 썼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 2 y
Chae Soo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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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
Why Moon
글을 읽으며 전통 불교학자분들의 의견이 몹시 궁금해지는군요.제가 일단 불교학자가 아니라서요. 더더욱 이쪽 견해로도 의견을 듣기를 바래봅니다.패북에 고수님들 많아 보이던대요.
· 2 y
Chang-Seong Hong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경에는 이렇다고 하더라, 저 경에는 저렇다고 하더라는 식의 의견에는 별로 재미를 못 느낍니다. 제가 그런 내용들을 대충 다 알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내용들이 왜 옳은가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우리 시대의 상식에 맞도록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전개하며 논쟁에 임하시는 분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스님께서 좀 많이 이쪽으로 초대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2 y
Why Moon
저랑 생각이 좀 다르군요. 저는 경을 의지해서 해석하는 것을 흥미있어해서요.알겠습니다.
· 2 y
Why Moon
다시 생각해 보니 경보다는 논장에 의거해서 토론 하는 것이 현대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접근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생각을 돌려보니 공부거리가 풍부해지네요)
· 2 y
Chang Su Hee Elena
교수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불교 경전에도 주석이 있고 또 해석학이 있을펜데 어떻게 저희들이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 2 y
Chang Su Hee Elena
경에 대한 논쟁이 해석학문야겟죠
· 2 y
Chang-Seong Hong
Chang Su Hee Elena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의 권위를 100% 받아들이고 학문하면 불교학자이겠고, 철학자 나름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자들은 이 세상 어느 권위도 일단 도전해 보고 나서 그것에 동의하고 난 후에야 그 권위를 겨우 인정할까 말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친구하기 별로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 2 y
Sung Soon Kim
‘깨달음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심신의 상태’로 정의하면 배제되는 요소들이 너무 많을 것 같네요. 불성론을 제기한 대승논사들이 초기 교리와 충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제기했던 이유는 ‘평등’과 ‘보편’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 점에 배치될 수 있는 거죠.
· 2 y
Chang-Seong Hong
저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불성론의 방편으로서의 효용에 대해서 찬성한다는 입장을 실은 이미 (3년전에 쓰고 작년에 영어로 써서 발표했지만) 다른 논문에서 다루었습니다. 동의합니다. 단지 원고지 20여매에 그 내용까지 담지 못했을 뿐입니다. 좋은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 2 y
Chang-Seong Hong
다만, 그렇게 적합한 심신의 상태가 지구상 수십억의 인구 모두에 똑같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워서, 개개인에 따라 또 한 개인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를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2 y
Chang-Seong Hong
우려하신 내용을 제 최종 원고에 반영했습니다. 그러나 불성의 보편적 존재가 제법무아와 공의 가르침과 충둘하기 때문에, 비록 불성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가진 방편으로서의 효용은 인정하지만,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내용으로 볼 수는 없어서 제 원래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2 y
김광현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남방 상좌부 불교를 수승하게 생각하시는 많은 분들이 ‘무아’의 관점에서 대승의 여래장이나 불성론이 힌두교나 다름없다고 비판하는데, 남방 아비달마에서 ‘열반’을 무위법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은 또 어떻게 봐야 하나 뭐 이런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 2 y
Chang-Seong Hong
좋은 질문 고맙습니다. 저는 실은 불교학자가 아니라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을 전공하는 서양철학자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주로 저를 비난하시는 분들이 저를 '재미 불교학자'라고들 하시는데, 저는 감히 불교학자축에는 못 끼고 불교를 철학으로 연구하는 서양철학자입니다. 그래서 열반에 대해서도 그것을 철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것이 주 관심사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월간불광에 짧게 줄여서 발표하기도 했었는데, 원래 더 상세하고 덜 점잖게 쓰여진 글… See more
· 2 y · Edited
마성
홍창성 교수님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을 페북에 올려 주셔서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성(佛性, Buddha-nature)을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의 동의어로, 불변하는 아뜨만(ātman)과 같은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 교수님께서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하다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신선해 보입니다. 특히 이 글에서 불성도 조건에 의해 생성되고 조건에 의해 소멸한다는 논증은 크게 돋보입니다.
그러나 잘 나가다가 “나는 불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홍 교수님께서 말하는 “불성은 모든 유정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을 가진 아뜨만과 같은 실체가 아니”라는 전제를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불교철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진짜로 불성은 존재하는구나!’라고 오해할 염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사견으로는 후반부의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비약적인 것 같습니다. 한정된 지면 관계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 y
Chang-Seong Hong
고맙습니다. 예, 후반부는 지면 관계로 제대로 논증을 전개하지 못했습니다. 이 논증은 제가 20년전 완성한 박사학위논문에서부터 갈고 닦아서 자신이 있는 부분인데, 원고지 불과 몇 매에 정리하자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저희집 유선경 교수도 제가 '불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오해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물론 스님은 그렇지 않으시지만요), 제가 고집해서 그냥 놔두었습니다. 아무래도 표현을 더 다듬어야겠습니다. 2년 전 깨달음 논쟁 당시 제가 미디어붓다에 발표했던 다음의 논문에 더 자세한 논증이 있습니다. 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8330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미디어붓다:“‘참나’ ‘참마음’은 ‘2차 지시어’”
MEDIABUDDHA.NET
미디어붓다:“‘참나’ ‘참마음’은 ‘2차 지시어’”
미디어붓다:“‘참나’ ‘참마음’은 ‘2차 지시어’”
· 2 y
마성
답변 감사합니다. 홍 교수님의 지난 글들을 찾아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
· 2 y
Chang-Seong Hong
마성 스님의 지적에 도움받아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표현을 바꾸었습니다. 발표될 글에서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 2 y
Why Moon
Jun Bark
· 2 y
Lee Minji
😊 공유부터 하고^^
차분히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 y
초기불교에서는 진리를 통찰하여 꿰뚫는다를 본다(SEE), 알았다, 확인했다라는 뜻입니다. 경전에서는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내 눈으로 보석을 직접 확인했다는 말이지 결코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 상상으로만 저 사람 손안에 보석이 있을꺼야..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보석이라는 진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알아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즉 보석이구나 돌이구나 하는 그 눈을 어떻게 만드냐는 바로 선정의 목적입니다. 선정은 진리를 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수행법일 뿐 결코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이지 않습니다. 선정은 지혜의 힘을 키우는 수행방법이고 수단일 뿐입니다. 본문에서도 강조를 하고 있지만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면 이건 불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정이라는 것은 불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에서도 엄청 하는 것이며 이러한 선정으로는 누구나 비상비비상처까지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 두 사람의 요가수행자를 떠난 이유가 바로 선정이 선정일뿐 결코 궁극의 지혜를 보는 지혜의 힘을 키우는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씀드리지만 해탈이라는 것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해탈 자체가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법에서 이미 존재했던 것이고 또한 누구나 해탈은 얻습니다. 카톨릭의 명상만으로도 8해탈중 일정한 해탈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해탈을 넘어서 열반이라는 새로운 덕목을 세움으로써 불교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해탈하고 열반한다"라고 하지 결코 해탈=열반을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또한 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해탈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불교적 해탈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코 외도들이 얻는 그런 해탈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외도들에게는 해탈이 해탈로써 끝나지만 불교에서는 해탈하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당연히 팔정도에 의한 수행이 중요하고 올바른 수행에 의한 불교적인 혜안 즉 법안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팔정도 수행에 의한 올바른 법안 즉 불교적인 지혜를 갖추어야 비로소 사성제 무아 무상 고를 보는 것입니다. 같은 해탈자들이라도 불교적인 혜안이 없다면 무아 무상 고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타종교와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다시말씀드려서 보석을 보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수많은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보석을 보는 것은 같겠지만 외도들은 빛난다 아름답다 영롱하다라고 하겠지만 불교도들은 그 보석에서 무상 무아를 보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에서 깨닫는다 알아챈다 안다라는 뜻은 진리를 보는 눈 즉 보석을 보더라도 영롱하다거나 빛난다라는 것으로 보는게 아니라 사성제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일반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불교에서는 안다=알음알이라고 하여 상당히 폄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거나 또는 오해를 한 아주 서글픈 것입니다.
하나는 찌꺼기가 가라앉은 상태이고 또다른 하나는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입니다. 이 둘은 맑은 물이긴 하지만 180도 다릅니다. 찌꺼기가 가라앉은 맑은 물은 언제든지 찌꺼기가 올라와서 물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된 맑은 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맑은 물을 유지합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건데 선승들의 선정은 찌꺼기가 가라앉아서 맑게 보일뿐이지 결코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8 해탈중 하나를 획득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열반을 획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근 한국의 고승들이 보여준 몇몇가지 행태를 보면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분들은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분별을 하며 어떤분은 책을 펴냈다가 절판하라고 하고 어떤 분은 간화선만이 최고다라고 편협된 사고방식까지 보입니다. 간화선만 옳다면 팔정도 사띠 위파사나를 말한 붓다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불교의 간화선이 일견 옳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 주장하듯이 그렇게 ONLY ONE WAY 라고 한다면 그럼 간화선이 아닌 천태대사나 그밖의 화엄성자들 그리고 또 법화 고승들 등등은 모두다 어떻게 설명을 할련지 궁금합니다.
깨달음의 논쟁이 한국불교에서 일어나는 것은 저는 개인적으로 대환영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논쟁이나 대론을 통해서 초기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바로 설 수 있고 또한 계-정-혜에 대한 올바른 수행법이 정립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덧붙여서 선불교를 옹호하는 일부 승려들이나 재가자들의 글을 보면 케케묵은 중국한자 용어를 동원하거나 조사들의 아리송한 말들을 들고나오는데 솔직히 안타깝습니다. 물론 그분들 입장에서야 자신의 지식을 포장하기 위해서 그런 어려운 한자용어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조사들의 선문답을 들고 나오겠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어리석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 계 없이도 올바른 선정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또 할려고... 내가 언제 정 없이도 계가 구족되고 정 없이도 혜를 증득한다고 했나요? 거참...
계는 필요없고 그냥 선정만 하면 구경각을 이룬다고 그리 생각하면 그렇게 수행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남의 집에 와서 시비를 거는지..ㅉㅉㅉ 그대 부류들은 계율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수행에는 계가 필요없다는 부류들 아닌가?
그리고 내 주장은 선정은 선정이 목적이 아니라 지혜를 획득하는 수행의 방편 혹은 수단에 불과하다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구만 그건 눈에 안 보이나 봅니다. 거참... 선정이 왜 지혜를 획득하 수단에 불과하냐고 따지고 싶으면 다른 곳에 가셔서 따지든가 하시면 될 것 같네요.
저는 대론이나 토론을 좋아 합니다.
하지만 마성스님말씀처럼 토론 자체가 안되는 것을 토론이라고 입씨름하고 싶지 않습니다.
요즈음 세상은 내 자식도 마음대로 안되는 세상이더군요.
그런데 타인의 마음을 바꾸고 잘잘못을 지적하여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입니다. 붓다 재세시에도 붓다의 설법을 들은 사람들이 전부다 불교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듯 붓다도 못바꾸는 중생 마음을 제가 어찌 바꿀수 있겠는지요.
내 동생이라면 머리통을 한대 쥐어박기라도 하겠지만 그러지도 못하니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멋대로 뜻대로 사세요.
님이 내생각에 따라 오라고 하고 싶지 않듯이 나도 님의 생각에 따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 멋대로 살다 갑시다.
......
말씀 감사합니다.
카톨릭에서도 명상과 기도로 인한
선정상태에서의 해탈을 경험하신 분들이 엄청 많다더군요.
힌두교와 도교, 이슬람,기독교 등 모든 종교와
일반인조차 나름의 깊은 도를 가지신 분들도 그러하시구요..
한국불교의 간화선이나 선정을 통해 깨달음 운운하며
부처님과 아라한에 비견한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자들의
말이나 글들을 보면 실소가 나옵니다.
그건 말씀처럼 단지 정신세계의 강물 속에
찌꺼기가 가라앉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 보기 때문이죠.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라고 내지르면 사실상 아무도
터치하지 못하는 개인적 영역이기에 더 그러할테죠.
그래서 전 다른 무엇보다 제대로 누군가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해하고 비슷한 경험이라도 했다면
일단 그사람은 최소한 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유자재 제어할 줄 알며, 독선에 사로 잡히지 않고,
속세인 아니 재가자 누구라도 그들의 마지막을
공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일례로
성철스님조차 괴팍한 화를 자주 내셨다 들었으며
법정스님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겠다는 이유로
그 엄청난 인쇄를 사후 장학금이나 기부에 쓰시지 않고
모든 저작을 절판하시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그분들은 그 어떤 깨달음에 도달 하셨기에
속세인들조차 이해하고 납득하기 힘든 행동과 결정을
하셨는지 전 아직도 불가사의입니다.
물론 그분들의 선업과 업적이 높디 높으심을 잘 알기에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_()_
훗날 수행교리가 정립되면서 사선정과 그리고 요가수행등의 인도전통적인 수행법에서 가져온 사무색정을 합쳐서 구차제정이라는 단계를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요한 것은 비상비비상처까지는 누구나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붓다께서 출가후 찾아간 두 분의 요가수행자의 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비상비비상처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 그 다음 단계 즉 사성제와 고 무아 무상을 꿰뚫어 통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스개이야기이지만 저는 김수환 추기경도 화장했으면 아마도 사리 엄청 나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죄송한 말씀일지는 몰라도 이분의 수행정도는 웬간한 출가승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붓다께서는 당시의 인도수행법등을 모두다 경험하시고 6년간의 기나긴 고행도 해봤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당시 알려져있던 모든 수행법은 경험했고 그리고 비상비비상처까지도 도달했던 분입니다. 그러한 모든 수행법을 경험하신 후에 정각을 얻으셨고 그리고 올바른 수행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팔정도 입니다. 그리고 이를 37조도품으로 넓게 펼쳐서 세세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제시한 이런 수행법으로만이 비로소 법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법안이란 바로 불교적 지혜 즉 무상 무아 고를 꿰뚫어 통찰하는 지혜입니다. 손안의 보석을 누구나 보되 영롱하다 아름답다 비싸겠다라고 보느냐 아니면 무상 무아 고를 보느냐 이것이 타종교와 불교의 갈림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리지만 고승전을 한번쯤은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모든 고승전에 나오는 그 수많은 고승들이 전부다 선불교의 선승들이 아닙니다. 화엄 법화 정토등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탄생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혜능조사와 천태지의대사중 어느 누가 도력이 높겠는지요? 왜 헤능조사는 알아도 천태지의 대사는 모르는지요? 천태대사가 선불교의 선승 아닙니다. ^^ 화엄성자로 불리우는 법장스님이 선승은 아닙니다. 김묘각 스님이 선승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절에가면 꼭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님 찾으시지요. 그분들 선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 나오는 본존불이나 보살님들이 아닙니다. ...^^ 참으로 안타까운 오해입니다. 아이고 ~~ 그러고 보니 저도 선승들의 선어록이나 선문답을 잔뜩 올려 놓았네요. ㅎㅎ
.......
옳으신 말씀 이십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고승들의 선 수행과 그들의
선문답이 불교의 모두 인냥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과 같다고
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한국 조계종으로 인한 참된 불교의 왜곡이 심각한 상황이죠.
요근래 초기불교의 대중적 확산으로 많은 분들이
깨치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초기불교vs대승불교란 편협한 시각을 버려야만
진정 한국불교의 개혁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_()_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미혹한 자들이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본생담‧미증유법‧문답 같은 법을 배우지만 그 법을 배워 통찰지로 그 법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 그 법의 뜻을 통찰지로 자세히 살피지 않을 때 그들에게 그 법들은 확립되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다른 이들을 논박하고 자기 교리를 주장하기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을 배우므로 법을 배우는 그 궁극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한다. 그들이 잘못 파악한 그 법들은 그들을 긴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법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다시말씀드려서 최근 한국불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깨달음의 논쟁은 전혀 무의미하며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뿐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승이 초기불교로 전부다 개종을 하든가 아니면 초기불교가 대승으로 전부다 개종을 한다면 소란이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천년 만년을 논쟁을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승과 초기불교는 어차피 소의경전도 다르며 수행방법도 다릅니다. 아무리 초기불교에서 사성제가 깨달음이라고 목이 쉬도록 외쳐도 대승불교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선불교의 간화선수행이나 참나 같은 것들이 옳다고 하더라도 초기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불교(Buddism)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른 불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로가 내것이 최고이고 내것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 결과는 서로의 공멸뿐일 것입니다.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대로 갈 길을 가고,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대로 갈 길을 가면서 서로 존중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그런 대내외적으로 화합된 모습만이 상호 상생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교설등을 내세워 자신의 지식이 대단하다는 식으로 논쟁하기 보다는 대승과 초기불교가 모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인 보시.자비등에 더 힘을 써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상호 보완하고 의존하는 상생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깨달음이란 논쟁이 일어나자 전혀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깨달음을 가지고 그것을 부추키고 편승하여 자신의 이름을 드 날리거나 또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분들에게는 뱀의 비유경을 재삼 꼽씹어 보라고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