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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1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 유영모" [1-10]

“없이 계신 하느님”, 비(非)케리크마의 신 - NEW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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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의 맥락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현장아카데미 원장) 승인 2022.07.06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1)

몇 차례에 걸쳐 <성서와 문화>지에 다석 유영모(1890-1981)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지면을 허락하신 관계자분들께 감사하며 방대한 다석 사상의 핵심을 간추려 전달코자 노력할 것이다. 

다석 유영모

이번 첫 글에서는 다석을 ‘다석’ 되게 했던 그의 사상적 배경을 살피고 필자가 다석을 연구하는 이유에 대해서 정리하겠다. 그간 필자는 고 김흥호 선생과 함께 펴낸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솔, 2002)>>을 비롯하여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 사람들 2009)>>, <<빈탕한데 맞혀 놀이(동연 2011)>> 그리고 <<귀일신학(밀알북스 2020)>>등을 출판했고 다석학회 회원으로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아주경제>에서 단행본 출판을 목적하여 다석 연구자들 12명을 인터뷰했고 연구 동향을 취재했는데 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올해 말 이 책이 출판되면 다석 유영모를 조망하는 다양한 시각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2008년 세계 철학자 대회가 한국(서울대학교)서 열렸고 여기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몇 분이 세계적으로 공식화되었다. 불교의 원효와 지눌, 유교의 퇴계와 율곡 그리고 역사는 짧지만 다석 유영모와 그의 제자 함석헌이 세계가 인정하는 기독교 사상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다석 사상은 이 ‘빛을 꺼라’고 명했고 의식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빛, 곧 의식 탓에 인간은 더 큰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영모의 무엇을 세계 철학계가 인정한 것인지를 물어야겠다. 다석(多夕)이란 말에서 보듯 유영모의 호는 저녁 석(夕)자가 세 개씩이나 겹쳐있다. 한 마디로 많은 저녁이란 뜻이다. 그의 사상이 밝은 대낮보다 어둔 밤을 선호, 중시했음을 적시한다. 이는 밤이 지닌 동양적 에토스 때문이었다. 지금껏 서구 기독교는 어둠을 이기는 빛의 종교로서 빛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악을 이기고 어둠을 극복하는 선을 대변했던 것이다. 이 빛은 곧 의식이기도 했다. 빛으로 만사가 드러나듯 일체를 분별, 판단하여 가치를 드러내는 기준이 바로 의식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서구는 의식을 앞세워 주체(동일)성의 철학을 탄생시켰고 그로써 세계 지배이데올로기를 정초했다.

하지만 다석 사상은 이 ‘빛을 꺼라’고 명했고 의식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빛, 곧 의식 탓에 인간은 더 큰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사라질 때 비로소 장대한 우주, 서구가 보지 못한 존재의 여여성(如如性)이 드러날 수 있다. 이로부터 동양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했고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인 것을 역설해 왔다. 어둠, 곧 ‘텅 빔’ 속에 모든 것이 가득 찼으며 ‘있음이 곧 없음’ 이란 서구에 낯선 논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기껏해야 동일률과 모순율에 익숙한 서구로서는 배중률에 근거한 다석의 하느님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비롯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서구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지를 후술한 글에서 논할 수 있겠다. 김흥호가 다석 사상을 일컬어 ‘동양적 기독교’라 말했던바 서구 철학계의 평가는 이에 대한 긍정이자 인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석 사상도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그 혼자만의 창작물도 아닐 것이다. 앞선 이들의 영향사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녹여 자신 것으로 만든 치열한 과정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다석 사상을 전후좌우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위로는 동학, 풍류, 천부경에 맥이 닿았고 옆으로는 신채호, 내촌, 톨스토이, 간디 등과 소통했고 아래로는 함석헌, 김흥호, 안병무, 박영호 등에게 영향을 주어 소위 ‘다석 학파’ 내지 씨알 학파‘의 길을 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다석 사상의 출처부터 서술하겠다. 정작 다석은 동학에 대한 말을 아꼈으나 필자는 양자의 관계성에 주목했다. 다석은 천부경을 오롯한 우리글로 번역할 만큼 이 책을 중시했다. 그 속에 인간을 중심에 둔 삼재사상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천부경의 생각은 다석과 동학의 핵심이자 풍류적 인간 이해의 본질에 속한다. 다석이 강조한 귀일(歸一) 개념도 결국 ’인중천지일‘의 뜻에서 찾아야 옳을 것이다. 물론 다석 스스로 이런 생각을 언술한 바 없다. 하지만 그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다석 사상은 동학을 기독교적으로 토착화시킨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최근 도올의 동학 연구가 출판되어 세인의 주목을 받는 상황이다. 동경대전을 주해한 것인데 1. 2권의 각각의 부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는 코리안이다‘와 ’우리는 하느님이다‘가 바로 그것이다.

다석 역시 이 점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 그가 천부경을 중시하는 것은 삼재사상 때문이고 그것이 한글 창제의 원리, 특별히 모음(ㅡ, ㅣ, ㆍ)의 원리가 된 까닭이다. 다석에게 한글은 우리 민족을 하늘로 부르는 하늘의 소리(천문)이었는데 그 근거는 삼재에 대한 뜻풀이에 있다. 세상(ㅡ)을 뚫고 하늘(ㅣ)에 오를 때 고통 하는 소리, 아(ㆍ)를 십자가로 봤다. 인간 누구나가 하늘이고 고통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동학의 21자 주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늘을 품은 인간, ’시천주‘의 자각은 ’인중천지일‘의 다른 표현이자 삼재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후일 긴 논문을 통해 정교하게 밝힐 생각이다.

다석과 동시대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여기서는 다석 이후, 그의 영향 사 속에서 자기 소리를 내는 아래쪽 사람들, 즉 후학들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이렇듯 필자가 다석으로부터 이후의 영향사를 논하는 것은 선불교 바탕에서 신학을 재구성한 일본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견줄 목적에서이다.

다석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상적 발전 속에서 앞서 말했듯이 ’다석 학파‘ 내지 씨알 학파’의 기독교를 충분히 말할 여지가 있다. 일본뿐 아니라 서구와 변별된 토착적 기독교 사상을 여기서 찾을 일이다. 민중 신학도 의당 이 속에 포함될 수 있겠으나 그것으로 ‘다석 학파’의 기독교가 환원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다고 봐야 옳겠다.

동학 시천주의 다석식 표현인 ‘바탈’(성)이 함석헌에게서 역사 속 ‘뜻’으로 해석되었고 김흥호는 그것을 동서를 아우르는 ‘실존’으로 표현했으며 박영호는 ‘얼 나’라는 이름하에 기독교 안팎을 넘나드는 개념으로 확대시킨 까닭이다. 안병무는 이를 씨알 민중이란 계급적 차원에서 이해했다.

이후 여러 신학자들이 이 개념을 부여잡고 나름 신학적 작업을 하고 있는바 이들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속성 차원에서 학파로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가톨릭 성서 신학자 정양모 신부도 이 반열에 서 있고 하이데거 연구자인 이기상 교수 역시 가톨릭을 배경 삼아 다석 언어관을 주목하고 있다.

사실 이 모두는 <<대학>>의 ‘민(民)’ 개념을 ‘씨알’로 풀었던 다석의 본래 해석에 빚진 결과였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늘이 준 바탈을 갖고 태어난 존재로서 그를 씨알로 명명했다. 물론 이들 간에도 상호 차이점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역사와 개인, 기독교와 이웃 종교, 동양과 서구, 개신교와 가톨릭, 각기 어디에 방점을 두는 가에 따라 다석을 이해하는 차원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학파 안에서의 발전적 동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향후 다석 학파의 기독교는 이런 지향성 하에서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다. 필자가 <<귀일신학>>을 펴내면서 펜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 사상이라 이름한 것도 민중 신학을 넘어 향후 영성 및 생태 신학을 위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잠재되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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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多夕) 유영모가 품은 사상가들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7.20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2)

이번 호에는 다석에게 영향을 주었던 동시대 사상가 및 사조들에 대해 언급을 할 것이다. 앞선 글에서 다석의 영향사를 <<天符經(천부경)>>에 이르기까지 종적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다소 시차는 있지만 횡적 관계망 속에서 다석 사상을 조망할 생각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사상가라 할지라도 시대의 영향 없이 홀로 우뚝 설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석과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들
다석과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들
다석 유영모에게 직간접적인 큰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들을 재차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신채호, 여준, 레오 톨스토이, 간디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 등. 이들 영향력이 날줄 씨줄로 엮이면서 다석사상, 곧 씨알철학이 생겨난 것이다. 혹시 이번 지면에 여백이 생긴다면 한글, 훈민정음에 대한 다석의 생각도 살펴볼 것이다. 역시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던바, 다석은 한글, 곧 훈민정음을 <<天符經(천부경)>>의 골자인 천지인 삼재론의 빛에서 뜻을 찾고 구했다. 목하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된 한글은 다석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으나 그가 뜻을 확대 재생산(창조)시키기도 했다. 그렇기에 향후 한류의 전개와 더불어 다석의 한글이해 또한 확산될 것을 소망한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는 다석에게 민족으로서의 ‘我(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대종교에 몸담고 상해 임정에도 참여했던 신채호는 후일 아나키스트로 평가받아 부정적으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사실 그의 민족이해는 씨알 사상의 단초가 되었다. 

주지하듯 역사를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라 보았으나 그에게 ‘我(아)’는 고루한 민족주의 차원을 벗었고 약자의 우선성을 내포했다. 강대국들에 맞서 민족을 강조했으나 민족 안에서도 민중과 여성 등 약자는 항존했기에 이들을 ’아‘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다. 당시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비롯한 한국을 정복하는 현실에서 의당 민족이 강조되었을 뿐 ‘아’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항시 달리 표현될 수 있었다. 그가 일제가 주입한 민족 폄하사관, 소위 恨(한)의 민족사를 거부하고 강감찬, 을지문덕, 광개토왕 등의 민족 영웅들 역사, 영웅사관을 소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다석은 이런 기저 하에서 대종교가 중시하는 <<天符經(천부경)>>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순수 우리말로 이 책 81자를 풀어냈고 신채호의 ‘我(아)’를 ,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 즉 후일 그의 핵심 사상이 된 歸一(귀일)의 본원 처로 확대 시킨 것이다. 

여준이란 분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오산학교 시절 다석이 만났던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다. 남강 이승훈의 권유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던 그는 그곳에서 몽양 여운형의 친척인 여준을 만났고 그를 통해 불교 경전, 노자 <<道德經(도덕경)>> 등을 만나 읽고 연구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교경전에 익숙했던 다석이었으나 여타 동양경전에 대해서는 배움이 없었던 터라 여준을 통해 자신의 사유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론을 주창했던 여운형 집안은 사실 동학교도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단양, 양평 등지에서 해월 최시형과 더불어 활동했던 분이기도 했다. 여운형은 후일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기까지 했지만 여준은 家學(가학)으로서 동양경전에 더욱 심취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다석이 동학의 중요성을 인지 못 한 것이 필자에게 여전히 의아스럽다.

다석의 사상 속에 당대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두 외국인이 있었다. 톨스토이와 간디가 그들이다. 주지하듯 톨스토이는 자신만의 바이블을 만들어 소위 비정통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다. 산상수훈이 그를 매료시킨 성서의 전부였고 실제로 그 정신대로 살고자 했다. 

다석이 특히 주목한 것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 제도와 사유재산제에 대한 톨스토이의 부정적 생각이었다. 우선 神人(신인) 간의 중개자 개념을 부정한 것에 다석은 동의했다. 성직자들의 중개 없이 인간은 누구나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은 탓이다. 예수조차 중개, 대리자가 될 수 없다는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견해와 흡사했다. 이런 이유로 정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했고 객사한 그의 장례식을 교회가 거부하기까지 했지만 살아생전 톨스토이는 산상수훈 정신만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역설했다. 다석이 자신의 기독교 이해를 비정통이라 여긴 것도 톨스토이 영향 때문이었다. 사유재산제의 부정도 그를 가족들은 물론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은 큰 이유였다. 사후 자기 재산을 시민단체에 기부키로 한 결정을 두고 유족들과 시민사회가 갈등했다. 다석이 자기 재산을 동광원에 기부하며 생을 마감한 것도 이런 사건이 배경 되었다. 

성자로 불리는 간디는 자서전 제목을 ’My Life is my message’로 적을 만큼 삶과 사상의 일치를 꾀한 존재였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거룩한 길을 걸을 수 있음을 확신시켰다. 하지만 자기 삶이 메시지가 되기 위해 인간은 거듭 貪瞋痴(탐진치)와 씨름해야만 했다. 정통 기독교가 말하듯 원죄 상태로의 인간 탄생을 거부했으나 몸을 지닌 인간의 獸性(수성)을 거듭 떨쳐 낼 것을 강조한 것이다. 조혼 탓에 부친 죽음 앞에서도 성욕을 참지 못했던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냈던 간디였지만 이후 다른 삶을 펼쳤고 영국 식민지에 대행했으나 비폭력의 방식으로 적대감을 이겨냈으며 하루 일식을 하며 소유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석이 일식과 解婚(해혼)을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삼은 것도 간디의 영향이 컸다. 다석에게는 이것이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 기독교인 우찌무라 간조를 만나면서 더욱 신학화 되어갔다.

물리학 공부를 위해 일본에 유학 갔던 다석은 거기서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를 만났다. 이것은 이후 그의 제자들 - 예컨대 함석헌, 김교신, 김흥호 등 - 이 서로 정도차는 있었으나 무교회주의를 수용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본래 양명학에 심취했던 우찌무라는 기독교를 수용한 이후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 루터의 以信稱義(이신칭의) 사상을 수용했으나 일체 교회 제도는 부정했으며 일본식 기독교를 만들고자 했다. 루터 대속사상에 근거하여 기존 형식에 무관하게 성서를 읽었고 깨친 은혜를 갖고 일본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동양정신에 몰두한 다석은 루터의 대속적 기독교를 수용키 어려웠다.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여겼던 것이다. 남의 생명을 먹고 생활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 오히려 대속적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 스스로도 자신의 몸을 줄여(십자가) 마음을 확장시키는(부활) 방식으로 하늘과 하나 된 분으로 보았으며 그 예수가 우리 또한 그 길로 부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촉발한 비정통적 기독교가 우찌무라 간조를 경유하며 동양적 기독교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간디가 말했던 탐진치의 극복이 골자이자 관건이었다. 이에 더해 다석은 이웃을 침략하는 일본적 기독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김교신에 의해 가시화되었지만 다석 역시도 대속적 기독교 이상으로 일본적 기독교에 거부감을 표출했던 것이다. 다석이 <<천부경>> 속의 三才論(삼재론)에 기초하여 자신의 기독교 이해를 도모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한글을 訓民(훈민) 차원이 아니라 백성을 하늘로 이끄는 天文(천문)이라 했고 한글을 통해 가독교를 표현하려는 창조적 노력을 경주했던 것이다. 지면 관계상 한글에 관한 다석의 설명은 다음 호의 주제로 남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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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소리’, 한글에 깃든 다석(多夕)의 사상
 뉴스M 편집부 승인 2022.08.0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3)

지난 호에서 말했듯이 다석은 한글을 ‘천문(天文)’, 곧 ‘하늘의 소리’라 하였다. 이것은 백성을 가르치는 소리, 훈민이라 언급했던 창제자 세종의 감각을 뛰어넘는 한글 이해라 할 것이다. 최근 한글을 자국어로 택한 소수민족도 있다고 들었다. 최근 BTS의 인기에 힘입어 세계인들이 한글 가사로 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으니 한글이 한류의 핵심이 될 미래를 기대해 본다. 감신대를 은퇴한 구약학자 방석종은 몇몇 음역 표기를 보충할 경우 한글이 세계 공용문자로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글이 사람을 하늘로 부르는 소리라면 그 뜻과 소리는 한국인에게만 독점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1446년 한글 창제 반포일은 세계를 구원하는 날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다석이 어떤 이유로 한글을 천문이라 했을지 살필 일이다.


주지하듯 한글은 모음(母音)과 자음(子音)으로 구성되었다.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고 자음 즉 ‘아설순치후’의 다섯 소리는 오행(五行)론과 관계있다. 한마디로 삼재론과 음양오행론이 한글 창제의 원리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지인, 삼재가 어머니 소리이고 오행론으로 구성된 자음이 그의 소리를 쫓는 아들 소리란 점이다. 어미 소리를 듣고 그가 부르는 곳으로 따라갈 때 즉 모음과 자음이 옳게 만날 경우 정음(正音), 바른 소리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다석은 모음을 하늘소리, 일명 ‘계’ 소리라 했고 자음을 지금 여기서의 소리 ‘예’ 소리라 헸으며’ 소리가 ‘계’ 소리를 따를 때 그것을 ‘제’소리라 일컬었다. ‘제’ 소리가 정음, 바른 소리이자 구원의 길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한글 창제 원리에 있어 삼재론이 의뜸이란 사실이다. 삼재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하 아래의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반도 내 백두대간을 중심하여 시베리아 북부까지 선을 그릴 때 그 오른쪽은 수렵 문화 지역이었고 반대편은 중국 농경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농경문화의 경우 빛의 있고 없음에 따른 음양 철학을 발전시켰고 삼재론은 짐승들의 목숨을 담보로 삶을 이어갔던 수렵문화를 배경 삼았다. 음양 철학이 오행의 관계철학으로 되었다면 삼재론은 ‘없음’을 우선하는 종교적 세계를 상상했던 것이다. 사냥 직전까지 작동한 생명력이 졸지에 사라진 그 현실에 주목한 결과다. 눈앞에 먹거리로 던져진 사체, 그 물질 보다 앞서 있던 생명력에 대한 경외가 수렵문화의 특징이자 삼재론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기본 철학은 삼재론 중심의 오행론 체계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고 체제를 담은 책이 바로 <<天符經천부경>>이었다. 이미 <<道德經도덕경>>을 순수 우리말로 번역했고 몇 개의 불경을 풀었지만 다석은 궁극, 최종적으로 <<천부경>> 또한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시적 세계(地지)속에 비가시적으로 현존 활동하는 하늘의 도(天천)를 인간(人인) 속에서 찾을 것을 삼재론을 갖고 역설한 책이 바로 <<천부경>>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다석이 말하는 ‘없이 있음’을 불교 혹은 노장사상의 영향이라 일컫지만 <<천부경>>까지 소급해야 옳다.

몸의 숨만 쉰다고 해서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얼의 숨도 쉬어야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이제 한글 모음의 구성 원리로서 인간을 하늘로 이끄는 삼재론에 대한 다석의 풀이를 말해야겠다. 의당 <<천부경>>, 곧 ’없이 있음‘의 세계관의 토대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탐진치로 만연되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대물림된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탐진치는 다석에게 기독교 원죄와도 같다. 이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이 인간 속에 감춰진 하늘 ’바탈‘ 이다. 이런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을 갖고 태어난 인간(l)은 그렇기에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오를 존재이다. 인간이 여타 동물과 달리 직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인간 세상을 뚫고 하늘 본성을 따르기가 결코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인간(l), 그 과정에서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순간, 세상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 그것이 십자가(+)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늘 뜻대로 하시라’는 예수의 절규가 터져 나온 시공간이다. 이 길은 인간이라면 가야 할 길이다. 누구에게도 ’대신’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예수 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삼재, 즉 ‘-‘. ‘l' 그리고 ‘ㆍ'가 서로 만날 때 ’으이아‘ 즉 고통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것이 인간이자 인간의 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롯이 인간을 이렇게 부르는 보이지 않는 세계, ’계‘소리 덕분이다. ’계‘ 소리가 있기에 이 길을 걸을 수 있다. ’계‘소리에 ’예‘소리로 답하며 그것을 ’제‘소리로 만들라는 큰 뜻이 한글 속에 담겼다는 것이 다석의 지론이다.

이처럼 삼재 사상은 인간을 하늘로 부르는 어미 소리로서 ’계‘의 세계에 속했다. 예수 역시 이 소리에 답한 존재이다. 그가 짊어진 십자가는 우리를 대속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다 우리 역시 ’길이 될‘ 것을 주문한다. 이런 길이 우리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 은총이자 대속이라면 대속일 것이다. 

이렇듯 삼재론은 자음, 곧 ’예‘ 소리를 힘껏 추동하여 ’제‘소리로 이끈다. 다른 어떤 외국 언어에서도 찾을 수 없는 3단계 자음 변화가 바로 삼재론과 잇댄 사상적 열매인 까닭이다. 예컨대 ’ㅁ ㅂ ㅍ‘, ’ㅅ ㅈ ㅊ’을 다석은 물음, 부름, 푸름, ‘삶, 잠, 참’으로 풀었다. 삶의 물음을 꽉 물고 불려서 풀어내라는 뜻이고 삶은 죽음(잠)을 통해서만 진실(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가르쳤다. ‘목숨’, ‘말숨’ 그리고 ‘얼숨’이 바로 이런 뜻을 담았다. 몸의 숨만 쉰다고 해서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얼의 숨도 쉬어야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이런 선상에서 다석은 소리글자인 한글을 뜻글자로 풀어내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상술한 내용을 근거로 한글에 상형문자인 한문 이상으로 뜻을 부여했던 것이다. 농사를 ’열음 질‘,즉 열매를 맺는 일로 풀었고, ’얼굴(골)‘을 하늘로부터 받은 얼의 골짜기라 했으며 사람을 하늘에서 받은 바탈을 불사르는 존재란 뜻으로 이해했다. 꽁문이와 꼭대기의 풀이도 흥미롭다. 아랫도리(항문)를 꼭 물어 단단히 조여야 하늘에 꼭 대일(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석은 한글이 인간을 하늘로 이끄는 천문이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한글로 신학 하기‘란 긴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다석은 지금 사용치 않은 꼭지 없는 히읗 등 한글 4자 역시 되살렸고 그를 통해 뜻을 만들고자 하였다. 동시에 표준어 사용 탓에 사라진 지방 언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사투리가 그저 변방언어가 아니라 뜻이 담긴 언어인 것을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은 하이데거가 말대로 한글을 우리 민족의 존재의 집으로 본 것이 틀림없다. 한글을 하늘이 준 소리라 믿고 우리 인간을 ’없이 있는‘ 그 세계로 이끌고자 했던 다석의 노력이 참으로 귀하다. 

다음 호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다석 사상을 서구사상과 견줘 풀어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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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계신 하느님”, 비(非)케리크마의 신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8.19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4): 다석의 신론

이번 글에서는 다석의 하느님 이해, 곧 그의 신관을 살펴보겠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다석은 '있음'보다 '없음'을, 빛보다는 어둠을 우선시했다. 많은 저녁(밤)을 뜻하는 다석이란 이름 속에 이런 의미가 담겼다. 이는 서구 기독교나 그쪽 철학 사상과 견줄 때 대단히 낯설다. 하지만 다석은 이를 대립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없이 있는 하느님’이란 말이 적시하듯 없음과 있음은 결코 양자택일적이지 않다. ‘없음이 곧 있음'이고 ‘빛이 곧 어둠’이란 것은 서구 논리들, 동일률이나 배중률로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적시하는 다석의 예를 소개한다. 사람들은 나뭇가지에 핀 꽃을 보며 좋아하나 정작 나무와 꽃을 가능케 하는 허공을 보지 못하다는 것이다. 허공 없이는 나무도 꽃도 존재할 수 없다. 허공(무)이 우선이나 나무나 꽃과 둘일 수 없다(不二불이)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다. 이 점에서 다석의 신론은 ’무위적 유위‘를 말하는 노자의 도,현상과 실재의 궁극적 일치(“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를 말하는 불교적 공(sunjata) 사상과도 회통할 수 있다.

하지만 다석의 하느님 이해가 이들 사상과 변별되는 지점 또한 없지 않다. 신적 초월성과 인간의 의지가 이들에 비해 강조된 까닭이다. 초월성은 대종교의 경전이 된 <<천부경>>의 영향이겠고, 인간 의지는 유교적 토양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통섭하여 다석은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룬 예수를 설명했다. 인습적 기독교를 떠났지만 예수 없이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대속적 죽음으로 예수를 의미화하는 기성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는 다음 호에서 설명할 것이다.

얼마 전 <<없이 계신 하느님- 절대자에 대해 동양적으로 사유하기>>란 책이 동연에서 출판되었다. 성공회 윤정현 신부가 영국 버밍햄 대학에서 썼던 다석 관련 최초의 박사 논문이다. 2003년에 제출한 논문을 거의 20년 만에 한국어로 재탄생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좋은 자료라 생각하며 일독하면 좋을 책이다. 서구인들에게 하느님을 논하는 다른(동양) 논리가 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석 신론의 논리적 전거를 밝히는 일에 주력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한정된 지면을 통해 다석 신론의 속성과 의미 등에 초점을 두고 살필 것이다. 다시 후술하겠으나 다석이 즐겨 사용하는 ‘귀일’(歸一)이라는 말뜻도 소개하겠다.


하느님은 항시 인간 속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인간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다.

없이 있는 하느님, 도대체 이 말뜻은 무엇인가?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없음을 강조하고 실체를 부정하면서도 ‘있음'을 말하는 다석의 신관은 서구 기독교적 사유, 교리체계에 안주한 사람들에게는 많이 낯설고 난해할 것이다. 다석 신관의 구조와 의미는 <천부경>의 한 구절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말 속에 모두 담겼다. 높이 계신 하느님이 육신을 지닌 인간 속에 내주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존재 자체가 초월의 내주라는 뜻이다.

가톨릭 신학자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초월을 초월한 것이 땅 중의 땅인 ‘인간’이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독생자가 될 수 있다. 다음 호 주제지만 예수만이 초월적 육화일 수 없다고 봤다. 인간은 누구나 하늘(초월)을 ‘받’아 몸속에 모신 존재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석이 즐겨 쓰는 용어로- '바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바탈은 ‘받 할’, 즉 위로부터 ‘받’아 ‘할’ 것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받 할’을 자음 접변하여 읽으면 '바탈'이 된다.

이 '바탈'은 유교의 경우 본연지성이겠고 불교에는 불성일 것이며 동학은 인내천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 ’독생자‘로 언표될 수 있다. 이는 모두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살아야 할 인간의 공통된 모습들이다. 인간에게 얼굴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얼굴은 내면의 '바탈'이 드러나는 얼의 골짜기인 까닭이다. 따라서 하늘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이 바로 ‘없이 있는’ 하느님의 실상이다. 하느님은 항시 인간 속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인간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다. 이때 바탈은 얼이자 성령이라 말 할 수 있다. 봐도 보이지 않는 비실체적 존재인 까닭이다. 초월의 내주로서 이것은 본디 초월성을 인정치 않는 불교나 노장사상과는 조금 달랐다. 이들 종교들은 세상 ‘밖’을 인정치 않았으나(0도=360도의 세계관) 다석은 ‘밖’을 중시했으니 말이다. 물론 ’밖’을 실체로 여겼던 기독교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로써 다석은 모든 종교가 저마다의 '바탈'의 실현을 통해 온통 하나가 되길 바랐다. 종교가 하나 되는 것을 통해 세상 전체가 바르게 될 것을 희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일사상(신학)의 핵심이자 골자였다. 한마디로 인간 마음이 곧 빈탕이신(없이 계신) 하느님과 같음을 알라는 것이다. ‘빈탕한데 맞혀 노는 일’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의 할 일이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해왔던 신적 보편성의 실상이다. 여성 신학자 이은선의 말을 빌리자면 성’(聖)의 평범성’일 것이다.

이런 보편성에 이르려면 인간은 거듭 자신의 탐진치를 축소시켜내야 한다. 이는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둘이 아닌 것을 알 때 가능하다. 자신의 삶도 하느님 존재가 그렇듯이 없이 있듯이- 빈탕한데 맞혀서- 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인간은 덜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느님처럼 없이 있지 못하며 늘상 덜 없는 상태로 살고 있을 뿐이다. 바탈이 하늘인 것을 잊었기에, 둘 사이에 분리가 발생한 탓에 없음은 실종되고 견물생심을 일으키는 '있음'의 세계에 미혹된 탓이다. 따라서 ’덜‘ 없기에 더럽게 된 것이 인간의 실상, 곧 죄(인)라 할 것이다. 그럴수록 덜 없는 인간을 없이 계신 하느님으로 이끄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다.

이런 점에서 다석은 ‘목숨’, ‘말 숨’ 그리고 ‘얼 숨’을 순차적으로 구별하며 강조했다. 탐진치에 속한 인간이 목숨, 곧 육체의 숨을 쉬는 반면에 이를 벗고자 애쓰는 존재를 일컬어 '말 숨’을 쉰다고 했다. 종교들의 가르침이 곧 ‘말 숨’인 셈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은 ‘얼 숨’에 달렸다는 것이 다석의 지론이다. 세상이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과 땅이 인간 속에서 하나가 된 상태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뭇 종교는 자신들 가르침을 절대화시키는 누로부터 해방되어야 마땅하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회통시켜 하나에로 이끄는 ‘영(성령)’인 까닭이다. 이 주제는 인간론과 귀일사상을 논하는 지면에서 재차 다룰 것인바 여기서 더 이상 진척시키지 않겠다.

주지하듯 서구 신학은 그간 ‘비신화화’(불트만), ‘비종교화’(본회퍼), 그리고 ‘비케리그마화’(부리)라는 신학적 방법론을 통해 기성 기독교의 틀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비신화화가 서구 전통 내에서 메시지의 시간적 차이를 극복한 경우라면 비종교화는 기독교 메시지를 윤리적 차원으로 확대시킨 차원일 것이다. 이에 반해 비케리그마화는 기독교 메시지가 공간 차에 따라 달리 의미화 될 수 있다는 신학적 견해다.

다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은 이 점에서 비케리그마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말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논할 예수에 대한 이해 역시 신앙의 그리스도와도 다르고 역사적 예수상과도 크게 변별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각각의 공간적 풍토에 따라 케리그마가 달리 표현될 수 있다는 비케리그마화가 다석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그 신학적 배경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글 말미에 사족처럼 덧붙였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이해된 다석의 예수상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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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길이 되라"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9.09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5): 다석의 예수 이해

다석의 하느님 이해 –없이 계신 이- 가 서구사고에서 낯설 듯이 그의 예수론 또한 전통적 서구신학의 틀에서 많이 빗겨나 있다. 죄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서구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대속론을 전혀 달리 해석했던 까닭이다. 이는 인간이 탄생 시부터 죄를 품었다는 원죄론에 대한 부정과 맥을 같이 한다.

최근 서구에서 적극 논의 되는 바, 원죄보다는 원은총(Original biessing)을 강조하는 편이다. 물론 다석도 인간 죄성을 인정했다. 인간 몸의 속성(기질)과 연관된 貪嗔痴(탐진치) 즉 욕심내고, 분노하고 치정에 얽힌 인간 삶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 삶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만들어 왔는지를 절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白死千難(백사천난)의 수행과정 속에서 인간이 극복할 일이지 누군가에 의한 속죄의 대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점에서 다석은 톨스토이에 잇대어 자신의 기독교를 스스로 ’비정통‘이라 일컬었다. 여기서 비정통이란 말은 ’동양적‘이란 말과 뜻이 다르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다석은 예수의 유일성을 보편화 시켰다. 앞서 본대로 聖(성)의 보편성을 뜻한다. 예수만이 하늘의 독생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저마다 하늘의 독생자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없이 게신 이가 인간 속에 바탈(본성)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참을 그리워하고 참에 이르고자 애써야 할 존재이다. 다석은 이런 존재를 ’얼‘ 혹은 ’얼나‘라고 불렀다. 성령의 동양적 표현일 것이다. 비록 탐진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를 이길 수 있는 힘, 곧 하늘로부터 ’받‘아서 ’할‘ 것(바탈)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속알‘로서의 ’얼‘이다. 이점에서 예수가 독생자 듯이 우리 또한 독생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독생자인 것, 곧 자신의 ’얼‘을 믿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옳다.

이점에서 예수와 우리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없다. 하지만 예수와 우리 간의 구별(차이) 또한 없을 수 없다. 일상 속 우리와 다르게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석은 이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탈각시켰다. 그에게 십자가란 몸(탐진치)를 지닌 예수가 ’자기 뜻 버려 하늘 뜻‘ 구한(이룬) 지난한 수행의 꽃이자 열매였다. 그렇기에 다석은 종종 십자가와 부활을 ’몸 줄여 마음을 크게 만드는 일‘이라 풀었다. 탐진치라는 한계이자 제약을 스스로 해결한 존재, 그가 바로 예수였다는 것이다. 하늘 뜻에 따라 맛을 추구했던 자신의 삶(몸)을 이겨 하늘로 솟난 존재가 되었다. 이런 예수를 길이라 믿고 따르다 우리 역시 길 되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목표이자 이룰 과제이다. 이를 대속과 대별되는 일종의 ’자속‘사상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십자가를 걸머진 예수가 없다면 우리 갈 길도 분명치 않았을 것이다. 이점에서 예수가 갔던 길, 십자가는 그 자체로 은총이자 대속의 또 다른 의미라 하겠다. 길을 걸었던 사람이 앞서 있다는 것 이것이 구원이자 희망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던 바, 이를 우리는 스승 기독론이라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다석 자신도 유불선 모두가 하늘로부터 받을 것은 다 받은 종교이지만 자신의 스승은 오로지 예수뿐이라 말했다. 피한방울을 나누지 않았으나 부모, 자식 지간보다 더 가깝고 무제약적인 존재, 그가 바로 동양적 의미에서 스승이다. 스승, 길을 간 사람이 앞서 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필자는 불교와 기독교 대화에 전념하는 교토학파의 기독론과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예수이해를 다석 사상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토학파의 경우 신과 인간의 접촉에 주목했다. ’신이 우리와 늘 상 함께 한다‘는 ’임마누엘‘ 개념을 불교의 ’불성‘과 연계 시킨 것이다. 인간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과 신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같이 보았다. 하지만 이를 ’일차적 접촉‘이라 보고 진일보된 견해를 피력한 이도 있다. 예수의 경우 임마누엘에 만족치 않고 그 스스로 신이 된 ’이차적 접촉‘을 이뤘다는 것이다. 일견할 때 이들의 일차, 이차 접촉은 각기 다석의 ’얼‘ 사상과 스승 예수 이해와 유사한 듯 보인다. 하지만 교토학파의 경우 예수의 이차 접촉을 각(깨달음), 곧 돈오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다석과 달리 곧 자신 속 獸性(수성)과의 백사천난의 투쟁 차원을 간과했던 것이다. 다석의 시각에서 볼 때 의지의 결핍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토학파와 견줄 때 다석이 불교만큼이나 유교를 중시했던 까닭이다.

반면 역사적 예수 연구는 기존의 교리화된 대속사상을 깨는 측면에서 다석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역사적 연구가 예수의 비유, 어록에 초점을 두는 까닭에 예수는 교회가 고백하듯 결코 대속주가 될 수 없다. 그의 죽음보다 삶이 강조된 까닭이다. 하지만 다석과 비교시 역사적 예수연구도 문제가 없지 않다. 역사 연구는 역사적 예수가 오늘을 사는 우리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 하지 못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이 정작 그와 우리의 관계설정을 방해한 탓이다. 역사적 예수는 기존의 교리적 고백적 차원이 전제될 때만 유의미하다. 하지만 다석은 예수나 우리가 같은 바탈(얼)을 지녔다고 봤기에 역사적 예수 연구의 난점을 극복했다. 모두가 하늘의 독생자란 사실, 없이 계신이의 존재근거란 것을 통해 우리와 예수를 관계시켰다. 반면 역사적 예수에게 얼 기독론은 매우 낯설 수밖에 없다. 바탈(얼)의 힘으로 길가다 길 되신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며 우리 역시 길 되는 것이 스승기독론의 요체이다. 결국 다석 사상은 교토학파를 스승 기독론으로, 역사적 예수연구를 얼 기독론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었다.

다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실컷‘과 ’대충‘이란 두 말이었다.  예수와 같은 ’그이‘가 되고자 한다면 이 두 말과 멀리해야 옳다.

이런 다석의 예수론은 신론에서 언급한 바처럼 비케리그마화의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다. 성서 속 예수 상이 다석에 이르러 동양적으로 재해석(구성)된 까닭이다. 예수가 ’없이 계신 이‘의 삶을 체화시켰다면 서구적 신관에서 비롯한 예수이해와 변별되는 것이 당연하다. 앞서 봤듯이 전통적으로 대속적 구세주가 대세였고 역사적 예수연구는 제국 체제에 저항하는 지혜자 내지 혁명가로 예수를 각인시킨 반면 다석은 비정통적, 동양적 예수 상, 즉 수행적 차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경우 수행이라 해서 사적, 개인적 차원만 생각할 수 없다. 탐진치는 개인적 차원의 수성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탐욕, 사실을 왜곡하는 저널리즘 그리고 N 번방사태가 말하듯 사회의 구조적 차원까지 적시한다. 후술하겠지만 기후붕괴와 구조적 불평등 사회에서 탐진치와의 싸움은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다. 여기서 다석은 전통적인 대속 사상을 동학의 '侍’(모심), 불교의 ’緣起‘(연기)와 같은 차원에서 풀어냈다. 남의 생명을 먹고 사는 일상사가 곧 대속이란 것이다. 종교로서의 대속, 그 의미를 한껏 확장시킨 결과였다. 이는 세상에 관계 아닌 것이 없고, 이것과 저것이 상호적으로 발생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말한 생명 외경론도 같은 맥락이겠다. 그럴수록 남의 생명(삶의 의지)을 적게 탐하는 일이 중요하다. 단순하게 사는 삶이 몸 줄여 마음 넓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남의 생명대신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삶이 수행이고, 자속이며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기독론의 본질이다.

다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실컷‘과 ’대충‘이란 두 말이었다. 실컷 먹고 대충 사는 것을 복이라 여기며 맛을 추구하며 산다. 길을 가다가 길 되려면, 즉 예수와 같은 ’그이‘가 되고자 한다면 이 두 말과 멀리해야 옳다. 이것은 ’자기 몸을 산제사로 바치라‘는 성서 언어와 지극히 대치된다. 그러려면 종교를 통해 복 받는 일과 효용을 얻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옳다. 하지만 대속적 기독론이 가져온 폐해가 너무 크다. 종교개혁이 말한 3개의 ’오직’(Only)교리가 자본주의 체제- 탐진치-를 유지, 존속, 확대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이점에서 다석의 수행적 기독론은 탐욕에 젖은 병든 기독교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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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없어 더러운 존재, 빈탕한데 맞혀 놀이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9.17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6): 다석의 인간 이해

다석의 인간론을 쓰려하니 이미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에서 기독론- 예수이해 –이 인간 문제 해결을 위한 궁극적인 상수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다석의 경우 인간을 예수에 종속시키지 않았다. 기독론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교리로 여기지 않은 결과였다. 예수처럼 인간도 ‘빈탕(없이 있음)’의 독생자로 여겼을 뿐이다. 이웃 종교들도 하늘로부터 받을 것은 모두 다 받았다 했으니 기독교든 불교든 인간 이해에 있어 종교 간 차이도 없다.

지난 세월 형성된 서구 기독교의 두 유형, 가톨릭과 개신교의 두 신학원리들- 존재유비(Analogia entis)와 신앙유비(Analogia fidei)–에 의지해서 다석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선험적 죄 성 자체가 부정되었기에 유비(가톨릭)나 역설(개신교)의 논리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각성은 서구 어느 것보다 깊다하겠다.

이점에서 이 글 제목이 ‘덜 없어 더러운 존재, 빈탕한데 맞혀놀이’로 되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앞서 본대로 하느님은 ‘없이 계신 분’이다. 인간이 하느님 형상이라면 그 역시 ‘없이 있어야 할’ 존재여야만 했다. 하지만 인간 속 獸性(수성), 탐진치로 인해 인간의 현존은 ‘덜 없는’ 상태에 놓였다. 한마디로 소유, 욕망 지향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없음의 존재가 되지 못한 인간 상태, 곧 ‘덜 없음’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더러움’이 된다. 더러움은 깨끗함의 반대어로서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때 더러움은 서구 기독교가 말했던 원죄와는 많이 다르다. 본래 인간은 없이 있는 존재, ‘바탈’로서 세상에 태어났던 까닭이다. 없이 있는 하느님이 바탈(얼)로서, 좀 더 넓게 화장시켜 말하자면 세상을 가득채운 영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그렇듯이 하느님과 세상도 이점에서 不二(불이)적 관계 속에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설명을 독점해온 서구 기독교로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탐진치 탓에 더러워진 인간은 자신을 깨끗게 하면 된다. 어기서 ‘깨끗’은 거룩을 표현하는 다석 고유한 언어로서 한번 ‘깨’어져서 ‘끝’을 보라는 뜻을 지녔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 속 바탈에 의지하여 깨끗의 과정을 통해 ‘없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늘 계신 하느님의 거룩하심처럼 너희도 거룩 하라는 성서말씀의 본뜻이라 여겼다. 김흥호는 다석의 경우 인습화된 언어 ‘거룩’ 보다 ‘깨끗’이란 말을 더 선호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없음’과 ‘있음’에 따른 인간이해는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주지하듯 기독교는 영혼을 자신의 육체보다 절대 우월하게 생각해 왔다. 그래서 곧잘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형상과 등가로 여긴 것이다. 여타 피조물과 견줘 인간은 월등히 우월한 존재로 봤다.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유색인에 대한 백인 우월주의로 확장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토미즘 신학의 역할 탓이었다. 식물은 生魂(생혼)만을, 동물의 경우 생혼과 覺魂(각혼)을 그리고 인간은 이에 더해 靈魂(영혼)을 지녔다고 가르친 것이다. 생혼과 각혼은 죽음과 더불어 소멸하지만 영혼만큼은 지속하기에 신적 속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몸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죽음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최근 場(장, Field)이론을 근거로 인간 본질인 영혼이 달리 설명되는 추세이다. 몸속에 영혼이 있지 않고 영혼 속에 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과학적 개념인 장(Field)과 호환될 수 있는 바, 영이라 불러도 좋고 ‘온생명’이란 말도 낯설지 않다. 거대한 생명공간으로서의 장(영)안에서 개체는 전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차별 없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를 ‘새로운 애니미즘’(New Animism)이라 불러도 좋겠다. 이 때 영, 혹은 장은 다석이 말한 ‘빈탕’ 곧 ‘없음’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 허공이 곧 있음의 근거였던 까닭이다. 텅빈 곳에 영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었다. 그것이 유교의 경우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었고 불교는 ‘진공묘유(眞空妙有)’로 언표 되었으며 기독교의 하느님을 ‘없이 계신 이’로 부른 이유였다. 이처럼 하느님 영이 줄 곧 우리와 더불어 있었기에 다석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다. 한시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었기에 누가 누구에게 베풀 수혜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물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영의 산물로 알라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다석이 성리학의 인식론, 격물(格物)을 盡物性(진물성)이라 달리 표현한 것에 주목한다. 격물은 만물이 동일한 理(이)를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理(이)가 사물의 이치와 교감하다가 어느 순간 주객의 일치가 이뤄진다는 성리학의 으뜸 개념이다. 다석은 이를 ‘진물성’으로 재 개념화 시켜 사물과 인간 본성 간 간격이 사라진 하나 된 상태를 더욱 강조했다. 경물에서 보듯 사물을 대상화 시키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물성과의 일치를 역설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은 주희의 理學(이학)이 아닌 왕양명의 心學(심학)과 유사하다.

동학에서 말하는 내 마음이 곧 네(그)마음이라는 ‘吾心卽汝心’(오심즉여심)의 경지라고 말해도 좋다. 사실 동학이 敬天(경천), 敬人(경인)을 넘어 敬物(경물)을 강조한 것도 이런 선상에서였다. 하지만 다석의 ‘진물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物(물)을 존경한다는 말 속에서 지행합일의 경지를 살폈다. 예컨대 닭을 마음에 품고 귀하게 생각했다면(경물) 사람은 새벽닭이 그렇듯이 부지런한 닭의 성질까지 닮아야 했던 것이다. 닭처럼 부지런한 존재가 되는 것이 진물성의 과제이자 목표였다. 이런 논의는 결국 ‘덜 없어’ 더러워진 존재, 탐진치에 찌든 인간을 치유, 해방 시킬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없이 계신 하느님처럼 존재하기 위한 길이었다. 예수의 십자가가 땅으로부터 하늘로 솟난 길이었듯이 우리 역시 솟난 존재가 되길 바라서였다. 누구든지 자기 몸을 제물삼아야(자속) 가능한 일이다.

다석의 십자가는 이렇듯 ‘덜 없는’ 인간이 ‘없이 계신 이’와 하나 되는 길을 적시한다. 이것이 단적으로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즉 사람 또는 사물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언어로 표현되었다. 주지하듯 ‘덜 없는’ 인간은 뭇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견물생심의 존재이다. 그럴수록 사물의 본성을 알고 그와 하나 되면 자기 마음을 지킬 것을 역설했다. 사물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영의 산물로 알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각성은 자연과의 동근원성을 말하는 지점까지 확장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몸성히(목숨), 마음놓이(말숨)의 단계를 거쳐 자신의 바탈(얼숨)을 실현시킨 ‘바탈태우’의 경지라 할 것이다. 십자가는 대속의 상징이 아니라 스스로를 태워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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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있음의 존재론과 생태학   이정배 교수 승인 2022.10.04 0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7): 기후붕괴 시대의 다석 사상

지난 장에서 우리는 견물생심에 반하는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물건을 보고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논했다.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현실과 맞서는 주체적 인간태도를 다석의 말로 표현한 것이다. 주지하듯 홀로세 말기의 지구생태계가 자본주의 폐해로 기후붕괴시대에 접어들었다. 물건에 마음이 홀려 인류가 욕망 덩어리로 살 경우 2050년 거주 불가능한 지구가 될 것이란 경고가 끊이질 않고 있다. 자연의 질적 파괴가 임계점을 넘어선 탓이다.

이런 난제를 해결키 위해 기독교 내부에서 여러 형태의 생태신학이 등장했다.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등장했고 신론의 모형변이, 곧 어머니 하느님 이란 말도 회자되었다. 기독교내부의 뿌리은유-하느님, 그리스도 등-들을 생태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연과 관계하는 인간의 태도를 바꿀 목적에서였다. 일리가 없지 않으나 이들 경우는 여전히 ‘있음’의 표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전 인류의 생태적 회심을 위해 다석이 말했던 ‘없음’의 존재론적 차원을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없이 있는 하느님을 닮은 ‘없이 있는 인간’이 될 때 자연 역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달리 말하자면 인간위주의 도구적 관점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론적 관점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점에서 ‘없이 있는 하느님’은 생태학적 회심의 전거라 말할 수 있겠다.

  다석 신론의 요체인 ‘없이 있음’이란 말은 서구 주류 담론 어느 것으로도 해명될 수 없었다. ‘없음’을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초월적 근거이자 전체로 봤던 까닭이다. 더욱이 이것이 인간 속에 바탈- 받아서 할 것-로서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인간 역시 하느님처럼 없이 있어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빈탕의 자녀인 인간은 자연을 욕망 대상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성찰해야 옳다. <다석 일지> 곳곳에 누차 언급 되었던 바,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旣成佛’(기성불)이었다. 우주만물을 신의 현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 속성을 우주 만물 속에서 찾았다는 말을 누차 남겼다. 반면 인간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未成佛(미성불)상태로 있다. 자신을 없이 있는 존재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망을 지닌 몸으로서의 존재, 탐진치의 삶을 벗겨내지 못한 탓이다. 이런 현실에서 생태적 위기극복은 緣木求魚(연목구어)이고 생태적 회심은 言語道斷(언어도단)일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다석은 성령이란 말로 ‘없이 계신 하느님’과 인간의 ‘바탈’을 상호 소통시키고자 했다. 우주를 지속시키는 ‘하나’이자 자기 속의 ‘바탈’로서의 영을 우주 만물 속에서 봤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 속에 깃든 영을 찾는 것 역시 인간의 할 일로 여겼다. 지난 장에서 언급한 ‘盡物性’(진물성)이란 말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이는 사물(자연)의 본성과 인간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상태를 일컫는 바, 몸나(개체존재)의 극복을 전제한다. 절대생명인 ‘하나’와의 일치를 위해 자신의 바탈을 태울 때(바탈태우) 가능하다. 목숨만이 아니라 말(얼) 숨을 쉬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인간이 져야할 십자가라 했으며 이로써 누구든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자신의 바탈을 태우는 것을 십자가로 본 것이다.

다석은 예수 십자가를 ‘一坐食 一言仁’(일좌식일언인)이란 말로 다시 풀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했듯이’ 자기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란 말뜻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다석에게서 ‘몸 줄여 마음 늘리는 일’로 재구성된 결과였다. “쌀 한 알을 심어 천 알, 만 알 수학하는 것도 이득이지만 斷食(色)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 하느님 아들(그리스도)로 변하는 이득이 더 크다”는 그의 말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몸나가 이웃과 자연을 해치는 탐욕스런 자아이듯 말 숨 쉬는 참(얼)나는 우주만물과 하나 된 존재를 적시한다.

다석은 우주만물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禮’(예)라 했고 그것을 ‘알맞음’(中庸)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렇기에 참 나는 생태적 자아, 곧 생태적 회심을 이룬 존재라 말해도 좋겠다. 이런 차원에서 다석은 대속교리를 다음처럼 생태적으로 풀어냈다. “내가 먹는 낱알과 체소가 나의 생명을 위해 희생되어 힘을 내게 대속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죄다 그리스도입니다.” 등. 그렇기에 앞서 말한 ‘盡物性’(진물성)은 우주만물을 성례전적 대속 제물로 이해하기위한 전거였다. 대속하는 물질(자연)의 본성을 옳게 알아야 인간 역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닭고기를 먹으면 닭처럼 일찍 깨어 기도하고 일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들 생명에 대한 보답이라 여긴 것이다. 한마디로 맛으로, 욕망으로 먹지 말고 뜻으로 살자는 것이다. ‘일좌식, 일언인’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이를 ‘단식’과 ‘단색’으로 줄여 말해도 좋다. 

 一食(일식), 혹은 단식은 見物生心(견물생심)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남의 생명을 탐하지 말고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라는 것이다. 남의 생명 소중함을 깨달아 자기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였다.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사물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제물로 삼는 일식은 일종의 ’자기 비움‘으로서 인간을 생태적으로 재 주체화시킬 수 있다. 기후붕괴를 여실히 경험 중인 21세기의 화두가 평등도 자유도 아닌 단순성(Simplicity), 곧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일인 것도 일식의 뜻과 무관치 않다.

性(성)의 문제 역시 생태적으로 중요하다. 인류 존속을 위해 필요하겠으나 절제 없어 몸을 망치는 일들로 세상이 시끄럽다. 생존을 위해 살생하고 교미하는 동물과 인간이 같을 수 없다. 자연이 무너지듯 자기 몸을 해하는 욕망은 인간이 失性(실성)했다는 반증이다. 그럴수록 다석은 ’夫婦有別‘(부부유별)을 강조했다. 다석의 , 解婚(해혼)즉 부부로 살되 남녀로 사는 관계를 끊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성에 있어서도 금욕이 필요한 시대가 된 까닭이다. OECD 국가 중에서 포르노 문화가 가장 센 나라가 한국이란 사실이 많이 부끄럽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놓이고 자신의 바탈을 불사를 수 있다. 앞전에서 말한 꽁문이와 꼭대기란 말을 다시 기억하면 좋겠다. 다석은 남녀문제를 해결한 존재를 일컬어 ’마음 씻어난 이‘라 불렀다. 

  결국  일식과 단색은 없이 있는 하느님과 하나 되려는 인간의 수행이다. 빈탕한데 맞혀 놀아야 할 종교적 삶의 본질인 셈이다. 다석은 이를 自贖(자속)의 길이라 했다. 빈탕의 큰 하나를 모르면 탐진치의 지배를 벗을 길이 없다. 탕자처럼 매순간 몸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석은 거듭 강조한다. “꽃을 볼 때 온통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을 둘러싼 허공, 곧 빈탕을 보지 않습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 꽃을 꽃 되게 하는 것이 빈탕인 한 이것은 소유대상일 수 없다. 꽃만 볼 때 그것은 꺾고 싶고 갖고 싶은 물질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서구 생태학적 위기의 본질이다.

빈탕을 알아야 맛이 아닌 뜻을 따라 살 수 있다. 있음이 아니라 없음에 걸맞게 살자는 것이다. 덜 없어 더러운 인간 삶을 끝내야 인류에게 미래가 열릴 수 있다. 없음에 근거한 생태학적 회심 이것이 자신과 인류 나아가 우주를 구하는 길일 것이다. 기후붕괴 시대에 인간에게 절실한 것은 에코지능이다. 이는 자연 따라 사는 능력(Biomimicry)이러 불러도 좋다. 윤리적 소비란 말도 이로부터 비롯할 수 있다. 자연의 한계를 극복 대상이 아니라 적응대상으로 성찰하는 것이 옳다. 다석이 ’진물성‘ 개념을 내세워 견물불가생의 삶을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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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의 ’없음‘과 성 프란시스코의 ’가난‘   이정배 교수 승인 2022.10.19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8): 없음과 가난

다석은 1959년도 11월 경 <<다석 일지>>를 통해 독일의 신비 영성가 마이스터 에카르트를 두 차례나 연거푸 다루었다. ’없이 계신‘ 하느님을 인간의 바탈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구분하고 자신을 찾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서구 신비사상 속에서 확인했던 까닭이다. 필자 역시 이 점에 공감하며 이런 구조 속에서 양자를 비교 성찰할 의욕을 느낀다. 하지만 논리적 구조에서만이 아니라 누구 게나 주어진 바탈로서의 ’얼‘이 삶을 통해 구체화되는- 길을 가다 길이 되라- 白死千難(백사천난)의 과정을 생각할 때 에카르트 보다는 가난을 살아냈던 성 프란시스코가 더 적합한 비교 파트너라 확신한다. 프란시스칸 작은 형제회 창립 80주년을 맞아 필자에게 연구과제를 주었기에 당시 이런 관심을 약술한 바 있었다.

사실 프란치스칸 전통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성보다 의지를 강조했고 보편보다 개체를 앞세운 이 전통은 개신교 탄생의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농민전쟁을 진압하고 군주들 편에 섰던 루터와 견줄 때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프란시스코가 더 많이 생각났다. 차라리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말고 그가 두세기 앞서 종교개혁의 주창자가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고 많다. 프란시스코 교단에 속한 현 교황이 했던 말, ’교회의 복음화 없이 는 세상의 복음화 없다‘는 말을 주목한다. 가난을 통해 예수와 하나 된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의 삶, 아마 그것이 그가 말하는 복음화의 실재(Reality)였을 것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프란치스칸 정신은 자본세를 맞아 사실적 종말로 치닫는 지구를 구할 백신일 수 있겠다. 그에게 가난은 곧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산 이가 예수였으며 우리를 그 길로 부르기 때문이다. 다석의 말로는 없이 계신 하느님 곧 ’빈탕‘한데 맞혀 사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들은 이것-가난과 없음-을 선이라 일컬었다. 더욱이 ’믿음‘에 근거한 속죄론을 앞세우지 않았고 하느님 주신 자유의지를 중히 여겼으며 오로지 가난-없이 있음-을 통한 신비적 합일을 지향했다. 바로 여기서 관상을 통해 신비적 합일을 이룬 에크하르트와 변별된다. 자연을 토미즘 전통에서 말하듯 신과의 유비(Analogia entis) 차원에서 보지 않고 신적 계시로 본 것도 자연을 旣成佛(기성불)로 여긴 다석과 전혀 다르지 않다.

프란치스칸 전통의 변별력은 ’하느님은 ’선(bonum)‘이고 창조된 모든 것 역시 ’선‘이다’는 말로 축약해서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가난은 선의 다른 말이다. 왜냐면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가난한 자로 살았던 까닭이다. ‘내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의 십자가, 제 뜻마저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은 십자가에서 가난의 절정을 보았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고 세상(피조물)이 선이자 가난이란 것이 프란치스코 신학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하여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 속에서 선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자연의 전적 타락을 말했던 개신교 신학과는 발상이 동이 서에서 멀 듯 달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육화’란 개념이다. 인간을 포함한 온갖 피조물에게 하느님 –가난- 善(선)에 참여케 하는 근원적 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창조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원 축복(Original Blessing)이란 말과 흡사하다. 일차적으로 하느님은 예수에게 자신과 일치된 본성을 갖게 했고 그것이 그가 걸머졌던 가난의 길, 십자가로서 나타났다. 그로써 그는 인간 및 피조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선을 이루도록 도울 수 있었다. 피조물들에게 그리스도의 인간성, 곧 가난(선)을 덧입게 했던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일체가 자기개별화 과정을 통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프란시스코는 이를 육화된 그리스도의 성취로 이해했다. 자연의 창조성에 대한 대 긍정이라 하겠다. 이는 대속에 대한 다석 생각과 정확히 일치된다.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 以天食天, 이천식천)’는 동학의 말처럼 다석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 저마다 상이한 것들이 서로를 살리고-대속하고- 있음을 강조한 까닭이다. 일체의 존재를 예외 없이 利他自利(이타자리)의 차원에서 봤던 것이다. 타자를 위한 방식으로 각기 개별화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육화의 실현이었다.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십자가)가 중요하다. 

이처럼 성 프란시스코는 선, 창조(피조물) 그리고 구원을 하나로 보았다. 그 하나는 결국 완벽한 가난에서 성취된다. 세상을 치유하고 완성하는 길이 가난에 있다고 본 까닭이다. 그에게 종말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하느님 목적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세상 밖이 아니라 그 안에서 말이다. 따라서 자연이 하느님 선을 드러내 세상을 유익(대속)하게 하듯 인간 역시 자신 삶을 가난케 하여 여타 피조물을 살려내야만 했다. 여기서 가난은 세상을 치유하고 살려내는 일로써 ‘그리스도를 행함’, 즉 십자가를 지는 일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칸은 사적인 것을 결코 인정치 않았다. 존재하는 것 일체가 선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일체 존재가 신적인 사랑의 대상일 뿐 필요나 소유를 위한 것일 수 없었다. 여기서 사적 가난과 사회적 가난은 상호 무관치 않다. 한마디로 ‘共生共貧’(공생공빈)의 가치를 적시한다. 가난이자 선 자체인 하느님 본성에 상응토록 세상 만드는 것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존재이유라 본 것이다.

지금은 본뜻에서 많이 빗겨났으나 수도 공동체 역시 이련 연유로 생겨났다. 다석 역시 이런 차원에서 개신교 공동체, 歸一園(귀일원)건립을 위해 상당한 사적 재산을 기부했다. 말년의 다석은 이현필이 세운 동광원에 머물며 강의하고 예배하는 일을 즐겼다. 수도 공동체가 가난의 실험장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이처럼 프란치스코와 다석은 가난이 인간과 자연을 복원시켜 세상을 구원하는 최적의 백신이라 여겼다. 그럴수록 하느님의 선(가난)을 자기 무화의 방식으로 살아 낸 예수들 ‘모방’을 너머 윤리적 ‘합일’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는 貪瞋痴(빈진치), 즉 욕심, 분노, 치정과 결별할 때 가능하다. 이들 제거하는 일이 십자가였던바 이 과정이 ‘빈탕한데 맞혀 노는’ 일로서 구원이었고 우리 모두를 예수처럼 독생자로 탄생(A Child is new born)시키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폈듯 다석의 ‘없음’은 프란치스코가 말했던 선(bonum)과 다르지 않다. 말했듯이 선이 곧 가난이기도 했다. 이 선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속에 내재(육화)했으며 예수는 이들 피조물을 완성시키고자 하느님처럼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게 사셨다. 자신을 내어준 하느님처럼 가난(십자가)했던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들 인생 목적이었다. 그렇기에 내재된 선에 근거해서 인간은 누구나 예수처럼 살아야 했고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는 교리화 된 주류 기독교의 속죄론(대속)이 자리 할 여지가 없다. 선행적 은총인 ‘그리스도 육화’란 개념 때문이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우리 속에 바탈로서 내주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이렇듯 없음은 善(선)이자 靈(영)이었고 세상을 존속, 유지시키는 이었다. 하지만 하늘 ‘바탈’을 지닌 인간은 기성불인 자연과 달리 외물에 혹해 자신의 선한 본성을 잃고 ‘덜’없는 失性(실성)한 존재로 전락했다. 한마디로 ‘盡物性’(진물성)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럴수록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십자가)가 중요하다. 우리에게 갈 길(십자가)을 제시하며 그 길을 걷도록 추동하는 까닭이다. 길을 가다가 스스로 길이 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렇듯 이들 두 사람은 대속과 모방 차원을 넘어 예수와 하나 되는 신비적, 실천적 길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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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사상과 동학, 이들은 서로 낯설까?
 이정배 승인 2022.11.0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9): 다석과 동학

평소 다석의 글을 읽으면서 큰 물음이 생겼다. 불교, 유교의 경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기독교를 풀이하고 죽음과 부활의 뜻을 펼쳤던 다석 이었지만 정작 동학, 천도교에 대한 그의 언급을 찾을 수 없었던 탓이다. 간혹 말씀이 있었으나 긍정적이기 보다 오히려 부정적 톤이 강했다. 이점은 그의 제자 함석헌에게서도 예외 없이 그대로 이어졌다. 심지어 폄하하는 내용까지 찾을 수 있다. 한글을 천문이라 말하며 그 뜻을 가르쳤으나 최초로 한글 경전을 갖고 시작된 동학을 낯설게 느낀 이유가 많이 궁금했다.

평소 필자는 동학과 다석 사상은 같은 뿌리에 연원을 두었고 동일한 줄기에서 서로 색깔만 다른 열매를 맺은 것이라 여겼다. 동학사상의 본질과 구조를 기독교적 언어로 재구성한 것을 다석 사상이라 여길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필자의 궁금증을 풀고자 이들 두 사상의 공통기원과 사상적 관계를 밝히는 논문을 썼던 적이 있다.<<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모시는 사람들 2009)>>.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에서 발표했으나 논의가 많이 확산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3.1선언 백주년(2019) 이래로 동학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필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짧은 지면이지만 본고에서 이 점을 체계적으로 적시해 보겠다.

서세동점시기에 대처했던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우리 것을 지키려는 위정척사와 서구 것을 수용하려는 개화파의 시각이 그것이다. 물론 東道西器(동도서기)와 같은 틈새의 논리도 있었으나 器(물질, 서구)에 대한 道(정신, 동양)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본질상 위정척사파의 관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동학 연구자들 중심으로 온전한 제 3의 시각, 즉 ‘개벽’적 차원이 회자되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나 서구를 답습, 추종했던 것과 달리 독자적 근대를 우리 식으로 잉태했다는 발상이다. 우리에게도 기독교 서구와 다르지만 동학사상에 토대한 ‘개벽적 근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서구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고자 하는 주체적 태도로서 숙고할 가치가 있다.

본 주제를 갖고 출판된 연구서적 -<<개벽의 사상사-문명전환기의 한국사상(창비 2022)>>-을 참고하면 좋겠다. 물론 논쟁할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동학을 폄하 내지 무시한 듯 보인 다석과의 비판적 대화를 위해 본 논지를 일단 수용할 것이다. 동학에 대한 다석의 부정적 편견 이면에 다음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무엇보다 그가 기독교적 세례를 받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기독교적 세계관, 개화파의 시각을 지녔다고 말 할 수 있겠다. 후일 정통기독교로부터 벗어났지만 기독교 –스승 예수론- 에 근거해서 사유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불선을 통합시킨 歸一(귀일)사상도 결국 기독교적 색체를 강하게 띄고 있다. 다석 연구자들 대다수가 기독교 신학자인 것도 이를 반증한다. 다석이 천체 물리학에 남다른 관심을 지닌 것 역시 개인적 취향을 넘어 근대적 세계관의 영향이었다.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다

영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합리적 사유 또한 중시했던 까닭이다. 하여 비합리와 초합리 간의 범주오류를 범치 않고자 애썼다. 이점에서 전쟁터에서 주문을 외라 가르치는 동학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영부를 불태워 물에 타 마시면 죽지 않는다는 설도 수용할 수 없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유교, 불교와 견줄 때 자생적 종교인 동학이 미신(비합리)처럼 여겨진 탓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一理(일리)를 지닐 뿐 全理(전리)가 될 수는 없었다. 씨ᄋᆞᆯ(민)을 강조했으나 민중 종교성과 접하지 못했고 ‘다른’ 세상을 찾는 개벽의 불온성을 수용치 못한 까닭이다. 이는 다석 사상이 ‘우익’ 민족주의 사유와 연계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지하듯 해방 전후 공간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독립이란 목표는 같았으나 이르는 방법에 있어 입장을 달리했다.

민족주의가 계급적 사유에 냉담했던 반면 사회주의는 민중 모순에 둔감한 민족주의를 비판했던 것이다. 대다수 종교들이 민족주의와 결탁하여 사회주의와 맞섰고 이들 중심으로 나라가 세워졌다. 우익 민족주의가 대한민국의 건국 주체가 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 역시 사회주의와의 연결점을 갖지 못했다. 이에 반해 동학의 경우 사회주의 경향성을 지닌 그룹과 인물이 적지 않았고- 물론 모두가 그렇지 않았으나- 폭력도 불사한 측면도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다석은 물론 제자 함석헌도 미신성 및 사회주의 성향을 띤 동학에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살아생전 다석이 관계했던 사람들 면모에서 우익민족주의에 경도된 그를 살필 수 있다.(<<다석전기 류영모와그의 시대>> 교양인 2012). 허나 그럴수록 필자는 동학과 다석 사상의 관계성을 역설할 필요를 느껴왔다.

짧은 지면에 이들 연관성을 모두 적시할 수 없지만 골격은 밝혀야겠다. 필자는 다석 사상이 동학을 경유, 최치원의 풍류사상과 만날 수 있으며 누차 언급했듯이 <<천부경>>에까지 소급한다고 생각해왔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실린 ‘玄妙之道, 包含三敎, 接化群生’(현묘지도, 포함삼교, 접화군생)이란 말이 동학의 경우 侍(시)자를 풀이한 ‘內有神靈, 外有氣化, 各知不移’(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란 개념은 물론 다석이 언급한 계소리(하느님), 예소리(예수), 제소리(성령)와 내용 및 구조적으로 비슷함을 넘어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들 사상 모두가 天地人(천지인)삼재사상의 틀거지 하에 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즉 하늘, 땅, 사람, 곧 삼재론을 펼쳤으며 특히 사람에게서 하늘과 땅이 하나(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가 되었다는 <<천부경>>에 토대를 둔 사유체제란 것이다. 따라서 이들 각각은 표현에 있어 다르지만 구조 및 뜻으로는 전혀 다를 수 없다.

한국 고유한  道(도), 風流(풍류)는 본질에 있어 <<천부경>>속에 담긴 天地人삼재론과 관계있다. 유불선을 품는 모체이자 일상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힘인 풍류가 바로 삼재론이 산물이었다. 하지만 풍류의 핵심을 멋(조화)에서 봤던 유동식과 달리 필자는 生(생), 곧 살리는 일(接化群生, 접화군생)에 그 본질이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接’이란 말이 包含三敎(포함삼교)의 ‘包’와 합쳐져 후일 동학은 包接 제도를 발전시킨 것이다. 최치원과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모두 경주 崔(최)가로서 家學(가학)으로 연결된 된 것도 이런 관계성을 뒷받침한다.

동학에서 말하는 내유신령은 우리들 속에 거룩한 영이 내주한다는 것이며 외유기화는 이 영이 우주만물 속에서 활동한다는 뜻이고 각지불이는 이들 생명의 영을 누구도 옮기거나 망가트릴 수 없다는 의미를 지녔다. 다석은 이를 순수 우리글을 사용하여 ‘계’, ‘예’, ‘제’ 소리로 풀었다. 계는 인간을 하늘로 이끄는 하늘의 소리, 예는 그곳으로부터 이어 이어져 이 땅에 까지 이른 말씀 그리고 제는 그 말씀을 만나 그와 하나 된 삶(바탈태우)을 일컫는다. 이렇듯 최치원, 동학 그리고 다석 사상은 형식적으로는 삼수 변화에 토대를 두었고 내용적으로는 ‘인중천지일, 곧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다’는 사상이며 단순한 조화(멋)가 아니라 세계와 삶 자체를 바꾸려는 뜻을 담고 있다. 짧게 이야기 했지만 이들 사상 간의 골격과 맥을 잡아 함께 이해할 때 우리는 다석을 좀 더 발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학의 민중성, 생명성이 다석을 통해 드러나길 소망한다.

Tag#다석#동학#최제우#유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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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의 귀일(歸一)사상    이정배 승인 2022.11.2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10): 다석과 귀일사상


다석 사상의 핵심이자 결론은 귀일(歸一) 속에 있다. 귀일, 그 말은 하나에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하나’가 뭔지를 묻고 찾고자 지금껏 여러 말을 해왔다. 여기서 귀일은 통일과 많이 다르다. 상호 다른 것을 원만하게 조정하는 것이 통일이다. 이 과정에서 타협과 대충, 속임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귀일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이다. 근원으로 돌아갈 때 남북도 하나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상적으로 다양한 종교들 역시 귀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서구 종교다원주의와 다석 사상이 같을 수 없는 이유이다. 제종교가 하나인 것 이상으로 세상 전체가 정의로울 수 있다고도 확신했다. 마지막 글인 본고에서 다석이 정치적 이념과 종교들을 어떻게 하나로 엮었는지를 서술할 것이다. 필자의 책 <<귀일신학(신앙과 지성사 2021)>>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다석은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정의(大同正義)를 ‘온통 하나’란 말로 풀었다. 대동은 크게 같아진다는 뜻으로 어떤 ‘-ism’으로 환원될 수 없다. 세상은 이런 큰 하나를 모르기에 편 나눠 싸울 뿐이다. 인간 속에 이런 ‘하나’로부터 온 소중한 것이 내재한다. 이 하나로부터 수백 수천가지가 비롯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큰 하나’를 간직한 자신 속 깊은 곳을 굳게 믿고 이를 위해 자신을 거듭 비워야 옳다. 즉 전체를 품은 하나가 내주한 곳이 바로 자신의 ‘속알’(본성)이기에 이는 비울수록 커진다. 마치 모든 것을 채우는 허공, 곧 진공모유(眞空妙有)의 우주처럼 말이다. 다석은 이를 ‘속곧이 믿븨’란 말로 표현했다. 자기 속의 하나를 깨쳐서 그를 싹 티워 지속해서 성장시키는 일을 적시한 것이다. 인중천지일로서의 인간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주지하듯 대동의 ‘大’를 둘로 나누면 사람 ‘人’자가 두 개 생긴다. ‘同’을 쪼개면 ‘司(판단)’가 되고 ‘正’은 ‘下’와 ‘止’로, ‘義’는 ‘羊’과 我‘로 파자된다. 이를 종합하면 의견 분분한 사람들이지만 옳은 판단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판단을 받아 양처럼 묵묵히 그 뜻을 따라야 한다는 말뜻이다. 온통 하나가 된 세상은 이렇게 이뤄진다. 이를 위한 방편이 경신중정(敬愼重正)이다. 언제든 요지부동한 마음을 갖고 ’하나‘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생각과 삶이 나뉠지라도 다른 것 속에 늘 상 같음이 있어 ’큰 하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신종추원‘(愼終追遠). 큰 하나로 돌아가는 것(귀일)이라 불렀다. 온통 하나인 것이 내주했기에 차이가 있지만 서로 닮을 수 있고 그 하나 탓에 모두 옳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사, 곧 예배의 본질로 여겼다. 결국 귀일 사상은 허공(빈탕)과 마음이 하나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절대는 본래 나를 떠나서는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이 하나를 온전히 감(感)하여 지(知)하는 일이 사람이 되는 길이자 사는 이유겠다. 인간이 이런 절대(온통 하나)의 아들로 느껴질 때 누구나가 독생자가 된다. 그렇기에 다석은 예수나 나나 모두 독생자인 것을 강조했다. 다석의 멋진 말을 소개한다. “허공이 공간을 만들고 이 공간에 뜻을 명령하는 것은 시간이다”시자명야(時者名也). 절대 하나를 느낀 바로 그 순간을 일컬어 시간이라 한 것이다. 빈탕(절대 하나)의 활동이 자기 것이 되는 때(시간제단)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의 자리(공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하나(빈탕)에 맞혀 살면 우리 마음을 빼앗길 여지가 없다. 신앙(믿음)은 자신 속에서 큰 하나를 찾아 그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다. 이것은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누고 쪼개진 세상만 알뿐 온통 하나인 그를 외려 배척한다. 그럴수록 다석은 귀일로서만 정의로운 대동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다석은 현상적으로 달라 보이는 종교들 간의 회통을 강변할 수 있었다.

동양적 기독교, 비케리그마적 기독교, 비정통적기독교라 불렸던

다석 신학은 아시아적 ’大孝기독교(론)‘라 불려도 좋겠다

부언하지만 개체는 그에 앞서 존재했던 전체에서 나왔기에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귀일 사상의 핵심이다. 유교의 추원보본(追遠報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귀일 사상은 전체와 개체의 관계를 중시했다. 전체로서의 하나는 비록 알 수없는 것이나(不測)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은 작은 것이 큰 것 속에 흡수 통합되는 러시아 인형 같은 통섭(統攝)이 아니라 마치 소금물처럼 형체를 없이하며 맛을 내는 통섭(通涉)의 방식으로 그렇다. 따라서 기독교를 변증한 종래의 서구적 논리들- 천주교의 존재유비나 개신교의 신앙유비- 과는 전혀 달랐다. 불측의 존재인 큰 하나(빈탕)가 만물 속에 천지인 셋으로 머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온전히 품게 했던 까닭이다. 이 셋은 오로지 사람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셋의 귀일처가 바로 밑둥(바탈)인 것이다. 이런 하나를 찾아 그와 일치되려는 것이 종교들의 할 일이자 본질이다.

비록 존심/양성(유교), 돈오/점수(불교), 칭의/성화(기독교), 시천/양천(동학) 등 개념적 구별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온통 하나와 일치한 삶을 목적하기에 이들 간 소통은 항시 가능하다. 다석은 이런 삶을 일컬어 대효(大孝)라 칭했다. 그에게 예수는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대효의 존재였고 우리에게 그 길로 나설 것을 청하는 존재였다. 석가와 공자 역시 이점에서 차이가 없다. 단지 다석은 예수를 통해 대효의 길을 가려고 했을 뿐이다. 이런 연유로 다음과 같은 등식이 가능하다. 지면 여유가 없어 구조만 밝혀 보겠다. 앞서 말한 계소리/예소리/제소리를 기준하여 이에 상응하는 종교개념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예수(십자가)/성령(기독교), 견성/고행/성불(불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수로지위교(修道之謂敎,유교), 시천주(侍天主)/양천주(養天主)/체천주(體天主, 동학). 말했듯이 이들 개념들 모두는 큰 하나(빈탕)와 일치하기 위해 자기 속 깊은 곳을 곧게 믿고 자신을 비우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속곧이 믿븨‘의 삶을 명시한 것이다. 이점에서 그간 동양적 기독교, 비케리그마적 기독교, 비정통적기독교라 불렸던 다석 신학은 아시아적 ’大孝기독교(론)‘라 불려도 좋겠다. 다석의 귀일사상은 한마디로 大孝의 종교성을 견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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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0건)


없이 계시는 하느님 | 윤정현 - 교보문고 2022

없이 계시는 하느님 | 윤정현 - 교보문고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윤정현 저자(글)
동연 · 2022년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종교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일반 > 기독교일반



수상내역/미디어추천
전문기관 추천도서 > 세종도서 우수학술도서 > 2022년 선정

다종교 문화 속에서 하느님 생각하기

다양한 인종이나 민족, 언어,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닌 구성원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많이 써왔지만, 활발해진 국제적인 인적 교류와 유입으로 인해서 한국 역시 다문화 사회에 진입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사실 문화에는 종교가 포함되기 때문에 다종교 문화의 경험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종교적 다원주의 상황과 마주치는 일을 적어도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하다. 흔히 다툼이나 갈등이 야기되는 경험을 가졌을 것인데, 그것은 신불(神佛)로 표현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귀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책의 저자는 종교적 다원 상황을 유년 시절부터 겪기 시작했었다고 술회한다. 그런 상황은 그러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지속적이었으며, 드디어 종교적 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하느님 이해를 연구의 주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동양적 사고를 통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이 분야의 선구자 가운데 한 분인 다석 유영모 선생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20년 전의 일이었고, 더욱이 저자는 동양적으로 재개념화한 하느님 이해를 영문으로 발표해 세계에 알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책은 저자의 20년 전 논문을 번역하고 다듬어 우리말로 펴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동양적 종교문화의 언어로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를 위한 귀한 연구서가 될 것이다.

2023/09/01

이은선 - TV인터뷰와 책출판-

이은선 -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9.01(금)> -8월의 춤학교, TV인터뷰와 책출판- 8월 1일부터... | Facebook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9.01(금)>
-8월의 춤학교, TV인터뷰와 책출판-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유럽 오스트리아 린츠, 불가리아 플로브디브에서 열린 '아코섬머 댄스학교(최보결 춤의 학교)'에 놀라운 즐거움으로 참여하고 16일에 귀국했습니다.
오자마자 가기 전에 결정되어 함께하게된 '백낙청TV 기독교초대석' 인터뷰를 두 주에 걸쳐 두 번에 나누어 찍고 드디어 어제 마무리했습니다.
참 진한 경험들이었습니다. 몸의 직접성의 문제, 진실(truths)로 받아들이기 위한 사실(facts)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더 배우고자 춤을 경험 하고자 했습니다.
다녀와서 백낙청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위해서 다시 신앙이 무엇인지, 왜 여전히 기독교 신앙인이고자 하는지, 민족적 국가적 자각 내지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믿음과 나의 종교적 사유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특히 유교문명과의 대화를 통해서 한국여성신학자로서 무슨 의미를 던지고자 하는지 등, 많은 질문을 받았고, 거기에 적실하게 답하기 위해서 2주간 힘들었습니다.
백낙청 선생님의 우리시대 이중과제에 대한 답으로서 그분의 인문학과 분단에 대한 사유, 서구의 개벽사상가로 보시는 D.H. 로런스, 20세기 한국 개벽사상의 꽃으로 여기시는 원불교의 일원상의 진리를 만나면서 또다른 도전과 응전이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남편 이정배 교수와 함께 '개벽적' 기독교 신앙의 변증자로서 역할하기도 했지만 두 남성학자에 대한 여성학자로서의 독자성 유지를 위해서도 쉽지않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유럽가기 전에 서문을 쓰고 간 <한국페미니스트신학자의 유교읽기>가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의 수고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서문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리되어 드러났지만 인터뷰에서 정제된 언어로 다시 서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한국여성신학의 현재적 열매로서 '神學에서 信學으로'의 전환 의미를 밝히는 설명을 마무리로 대담을 끝냈습니다.
오늘은 일본 관동대지진 참사 100주년의 날입니다. 거기서 일본인들의 거짓되고 조작된 말소리를 통해 희생된 조선인들이 공식된 집계만으로 6616명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씨알재단 함인숙 목사님이 단장이 되서 심우성 민속학자 기원의 넋전 리추얼이 오늘 일본에서 행해진다고 합니다.
사실과 몸과 이미 혼이 흩어진 시신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한국 전래의 장례와 제례 문화를 통해서 희생되신 분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려는 이 소수분들의 수고, 그를 통해서 오늘 가상현실과 챗지피티 시대에 더욱 중요하게 된, 넋이 깃들어있던 장소와 사물에 대한 인간적 믿음이 지켜지는 것에 깊이 감동하고 감사드립니다.
저의 책 <한국폐미니스트신학자의 유교읽기>는 그런 몸과 삶의 정신을 한국 유교전통이 어떻게 이어오고 전개시켜왔으며, 오늘 기독교가 그 본래의 생명성과 진실성, 영성을 다시 회복하고 찾는데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한국의 유교는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새로운 또는 개벽적 유교읽기를 통해서 어떻게 다른 유교이해를 만날 수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오늘 출판계가 많이 어렵고 사람들이 책을 안읽는다고 매번 책낼때마다 듣지만, 그래도 저는 다시 일독을 부탁합니다. 책의 종말이라면 인간문명의 귀하고 뛰어난 많은 부분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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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4

불교평론 10년 총목차 < 총 목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불교평론 10년 총목차 < 총 목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불교평론 10년 총목차
기자명 불교평론   입력 2010.01.05 18: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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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겨울호 제1호 :::

[ 권두언 ]
불교지식사회의 새 지평을 위해 / 홍사성

[ 특집 1 ] 20세기 한국불교의 회고와 반성
불교사회운동의 갈무리와 터닦기 / 서동석
교단개혁운동의 명암 / 김광식
교육개혁, 그 멀고도 험한 여정 / 법인
한글대장경 번역사업의 공과 / 이미령
20세기 포교의 성과와 한계 / 유승무
불교복지사업이 걸어온 100년 / 김응철

[ 특집 2 ] 불교학 연구, 이대로 좋은가
‘종학주의’를 넘어서 ‘중도의 불(교)학’을 향해 / 고영섭
논쟁 부재와 긴장된 글쓰기 / 조병활
비교종교와 불교연구의 상관관계 / 윤영해
영국·일본의 불교학 연구 동향 / 안양규

[ 특집 1 ]
20세기 한국불교, 그 사상적 흐름은 무엇이었나
/ 홍사성, 종범스님, 최병헌, 정병조, 이봉춘

[ 쟁점 ]
승가의 범위, 어디까지인가 / 이종철

[ 해외불교체험 ]
다시 일어나는 몽골불교, 그 서글픔과 열정 / 김선정

[ 논 단 ]
불교에 인권이 있는가 / 안옥선
시민정치운동의 확대와 불교시민운동의 전망 / 조대엽
불교사상과 국제평화주의 / 조성렬
한국현대시의 선(禪)적 경향 / 김재홍

[ 기획연재 ] 불교에서 보는 철학, 철학에서 보는 불교 (1)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 김종욱

[ 서 평 ]
언어로 여는 언어 이전의 세계 한형조 지음, 《무문관, 혹은 ‘나는 누구냐’》 / 박영록
철학자의 삶, 수행자의 삶 ―《승려와 철학자》 /오진탁

 

:::  2000년 봄호 제2호  :::

[ 권두언 ]
새로운 세기에 불교가 해야할 일 / 홍사성

[ 특집 1 ] 한국 선불교의 제문제
한국선, 무엇이 문제인가 / 심재룡
한국 간화선의 형성과 변화 과정 / 최연식
선어록 독법의 문제점 / 신규탁
오도송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 / 김종만
또 다른 선, 위파사나의 이해 / 김열권

[ 특집 2 ] 새천년에 대응하는 불교의 저력
‘신승(新乘)불교’ 도래론 / 정병조
미래사회에서 불교사상의 위상 / 유승무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 / 김용표
정보지식사회의 도전에 직면한 불교 / 박승원
새 천년 한국불교의 도전과 비전 / 프랭크 테데스코

[ 논단 ]
시민운동에 보내는 불교의 고언 / 김성철
조계종 종권분쟁 연구 / 김경호
사찰불사의 몇 가지 과제 / 이기선

[ 기획연재 ] 불교에서 바라본 철학, 철학에서 바라본 불교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 / 김종욱

[ 특별기고 ]
법정이 철학자에게 던지는 화두 / 허우성
21세기 대안사상으로서의 禪 / 이은윤

 [쟁점 ]
대승의 소승 폄하에 대한 반론 / 조준호

[ 해외불교체험 ]
중국불교 주마간산기 / 차차석

[ 자료발굴 ]
김법린과 피압박민족대회 / 김광식 

 

::: 2000 여름호 제3호 :::

[ 권두언 ]
도전적인 논쟁에 도전하자 / 홍사성

[ 특집 1 ] 불교와 페미니즘
왜 ‘불교와 페미니즘’을 말해야 하는가 / 안옥선
불교 페미니즘의 이상과 현실 / 하정남
불교 페미니즘의 회복을 위해 / 이창숙
여성의 관점에서 본 ‘여성성불론’ / 이현옥
한국 여성 불자의 위상과 역할 / 민성효

[ 특집 2 ] 한국불교 전통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 / 심재룡
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 김종만
조계종 법통설의 형성과정과 문제점 / 박해당
무엇을 위한 ‘수행’인가 / 주민황

[ 논단 ]
불교정화운동 연구 / 박희승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보는 불교적 관점 / 박병기
불교윤리의 응용 가능성 모색 / 허남결
현대불교미술이 나아갈 길 / 김창균

[ 쟁점 ]
육조단경, 어떻게 볼 것인가 / 정성본

[ 기획연재 ] 불교에서 보는 철학, 철학에서 보는 불교 (3)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1) / 김종욱

[ 해외불교체험 ]
100일 동안 경험한 미얀마 불교 / 강은애

[ 서평 ]
한 수행자의 구도·생명 에세이 / 전재성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나룻배 / 권기종

 

:::  2000년 가을호 제4호 :::

[ 권두언 ]
동양불교도의 세계적 책임 / 홍사성

[ 특집 1 ] 생명공학과 불교
생명공학의 현재와 미래 / 최원상
불교적 입장에서 본 생명공학의 윤리문제/ 이중표
생명공학의 도전에 직면한 불교의 윤회설 / 윤호진
인간복제와 불교교리는 모순되는가 / 최정규
생명공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 / 구경국

[ 특집 2 ] 불교 개혁운동 탐구
결사운동을 통해 본 불교개혁의 성격 / 김상영
1910년대 한국불교계의 유신론 / 김상현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흐름과 그 특징 / 유승무
현대 아시아의 참여불교 운동 고찰 / 박경준

[ 기획연재 ] 불교에서 보는 철학, 철학에서 보는 불교 (4)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2) / 김종욱

[ 해외불교체험 ] 스리랑카
가난하지만 청정한 수행불교 / 송위지

[ 논단 ] 우리 시대에 필요한 불교철학
비교철학의 필요성 / 이병욱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 / 전재성
사회정의 실천을 위해 불교가 해야 할 일 / 손혁재
전국신도회의 ‘조계종단 혁신재건안’ 연구 / 김광식

[ 샤캬 디타 대회 참가기 ]
여성불자의 힘, 새로운 불교의 가능성 / 운월

 

:::  2000년 겨울호 제5호 :::

[ 권두언 ]
전도몽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 홍사성

[ 특집 1 ] 티베트 불교 그 신비와 오해를 넘어
지혜와 자비의 이중주, 티베트 불교 / 주민황
서양에 부는 티베트 불교의 열풍 / 이동호
달라이 라마, 그는 누구인가 / 김충현
티베트와 중국. 그 선연과 악연의 역사 / 김성수
한국불교속의 티베트 불교 / 허일범

[ 특집 2 ] 불교와 통일운동 그리고 북한불교
통일운동에서 불교의 역할 / 조성렬
불교 통일운동의 현 단계 / 조병활
북한불교의 어제와 오늘 / 이지범
북한의 사찰과 불교문화재 / 이정

[ 세미나 중계 ]
간화와 돈오를 넘어 새 정체성 만들기 / 한형조
출가와 재가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한 시론 / 홍사성

[ 서 평 ]
종교사상의 지평에서 본 선불교와 주자/ 신규탁

[ 논 단 ]
한국 불교학, 그 반성과 전망 / 이혜숙
사이버 불교 신행의 현 주소 / 박수호
천태지관의 현대적 의의 / 최기표

[ 쟁 점 ]
회통불교론은 허구의 맹종인가 / 이봉춘

[ 해외논단 ]
왜 여성은 ‘아라한’이라 불리지 않았는가 / 엘리슨 핀들리

 

::: 2000년 가을호 제6호 :::

[ 권두언 ]
현대 불교학이 타파해야 할 화두 / 홍사성

[ 특집 ] 불교가 보는 환경과 생태
중도와 상생을 위한 불교 환경론 / 고영섭
생태와 욕망, 그리고 불교적 상상력 / 김판동
생명살림·생태적 삶을 위한 불교의 역할 / 박석동
21세기 한국의 환경 주소―국민의 정부의 환경정책 비판 / 양장일

[ 집중조명 ] 유럽과 미국의 수행 단체
불교, 서양에서 꽃피다 / 진우기

[ 문화시평 ]
타란티노 영화에 나타난 불교적 시간의식 / 하재봉

[ 기 획 ] 간화선 논쟁의 몇 가지 관점
간화선의 본질과 수행구조 / 정성본
다시 간화선을 말한다 / 월호
위파사나와 간화선의 교집합적 접근 / 송위지
천태 4종삼매, 그리고 간화선·위파사나 / 이병욱

[ 논단 ]
생명과학·생명윤리·종교 / 김승철
아나키즘의 불교적 특성 / 방영준
주살(誅殺)된 달마―엽기 문화의 한 읽기 / 황호덕

[ 해외논단 ]
화엄철학은 어떻게 일본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되었는가 /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 최연식 옮김

[ 자료발굴 ]
이종욱의 〈초혼문〉과 〈대동단 활동의 동기〉 / 박희승

[ 서평 ]
니시다 철학과 불교철학 / 이찬수
허우성, 《근대 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

 

::: 2001년 여름호 제7호 :::

[ 권두언 ]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 / 홍사성

[ 특집 ] 기복불교를 말한다
기복불교는 불교인가 / 조준호
기복불교는 왜 생겨났는가 / 황인규
기복불교의 실태와 문제점 / 한명우
기복주의를 넘어 공덕주의로 / 유동호

[ 문화시평 ]
21세기 불교문화 개화의 조건 / 주강현

[ 해외불교체험] 일본
생활불교의 빛과 그림자 / 박보경

[ 기 획 ] 종교와 정치 그 갈등과 유착의 관계
정교분리 담론과 정교유착의 현실 / 이진구
불교의 이상정치론과 역사적 실제 / 차차석
독일 기독교 민주당의 이상과 현실 / 한승완
일본불교의 정치실험, 공명당의 한계와 비전 / 조성렬
한국의 정치문화와 종교문화 / 채규철

[ 논단 ]
승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한 담론 / 정각
세계 불전 전산화의 현황과 과제 / 김재성

[ 현대 불교사 탐구 ]
이청담과 ‘조계종 유신 재건안’연구 / 김광식
조계종 종무행정 제도 변천 고찰 / 조기룡

[ 해외논단 ]
정치적 시각에서본 붓다의 생애 / 잠농 통프라스트 , 이마성옮김

 

::: 2001년 가을호 제8호 :::

[ 권두언 ]
한글불교를 제창하며 / 홍사성

[ 특집 ]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항일운동
개항기 불교계의 현실인식 / 정광호
일제의 불교정책과 친일문제 검토 / 김순석
일제하 불교계의 독립운동 전개와 성격 / 김광식
만해 한용운의 정교분리 원칙 / 장석만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집필자에 관한 고찰 /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 나타난 만해의 독립사상 / 고명수

[ 시론 ]
연기론적 시각으로 본 미국 테러 대참사 / 송위지
한글대장경의 완간의 의미와 과제 / 김용섭

[ 논단 ]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한 재고 / 박재현
94년 불교개혁운동의 반성적 점검 / 김봉준
현대적 사찰건축과 전통의 구현 / 김개천

[ 인물비평 ]
눈뜬 승가를 기다리는 세상속을 걷다 / 정웅기
실상사 도법,정토회 법륜스님

[ 해외불교체험 ]
고난의 땅에 핀 연꽃 / 김규현

[ 쟁점 ] 제 3의 수행법 어떻게 볼 것인가
정법왜곡은 또 다른 훼불이다 / 진현종
대안 수행법을 주목해야 한다 / 동준

[ 해외불교논단 ]
법화경과 종교적 관용 / 진 리브스 , 김승철 옮김

[ 서평 ]
―우리불교학의 정체성 찾기 / 석길암
: 심재관지음 〈탈식민지시대의 우리 불교학〉
―한국불교의 종자를 찾아서 / 강창호
: 한국 유학생 인도학 불교학 연구회 〈 일본의 한국불교학 연구동향〉

 

::: 2001년 겨울호 제9호 :::

[ 권두언 ]
전통을 부정하자 / 홍사성

[ 특집 ] 서양철학과 불교, 그 접점과 경계
칸트와 불교에 있어 존재와 인식 그리고 실천 / 최인숙
니체와 불교 그리고 해체철학 / 박경일
하이데거와 불교의 만남 / 김종욱
불교와 화이트 헤드 철학의 동이점(同異點) / 장왕식

[ 논단 ]
일본불교의 한국불교 인식 / 김천학
이슬람과 불교 그 악연의 역사 / 문을식
화엄의 세계와사이버 세계의 구조 비교 / 조윤호
불이사상과 미래문명 / 이찬훈

[ 세미나 중계 ]
현대 불교학의 과제와 해결방향 / 김성철
불교와 직업노동 그리고 시민정치 / 박세일
불교의 욕망관과 경제문제의 인식 / 정기문

[ 논평 ]
‘기복불교를 말한다’를 말한다 / 박영록

[ 해외논단 ]
불교는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 피터 하비, 심재관 옮김

[ 서평 ]
―禪의 철학적 해명 / 이병욱
변상섭 지음 〈禪, 신비주의 인가 철학인가〉(컬쳐라인)〉
―무시와 배척의 대상, 묵조선을 되살리다 / 이덕진
김호귀 지음, 〈묵조선 연구〉(민족사)

 

::: 2002년 봄호 제10호 :::

[ 권두언 ]
벌거벗은 임금님을 위하여 / 홍사성

[ 특집 ] 왜 종교 다원주의 인가
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 : 그 역사적 배경과 현재 / 배국원
기독교에서 보는 종교 다원주의 / 이정배
불교에서 보는 종교 다워주의 / 이희재
그리스도교의 불교이해 : 변선환의 불교관을 중심으로 / 이찬수
한국불교의 기독교 바라보기 / 윤영해

[ 쟁점 ]
체계불학의 몇가지 문제점 / 서재영
―김성철 교수의 〈현대 불교학의 과제와 방향〉을 읽고
‘기복신앙’문제의 본질적 과제 / 마성

[ 해외불교논단 ]
동물에게도 공민권이 있다 / 폴 왈도, 박서연 옮김

[ 기획 ] 이단 불교도들의 또 다른 초상
데바닷다 그는 정말 악인이었는가 / 원필성
신행, 중국불교 최초의 민중불교주의자 / 이상현
신돈, ‘요승’의 이름뒤에 숨은 개혁자의 모습 / 정선용

[ 논단 ]
경허의 법화와 행리, 그 빛과 어둠의 이중주 / 이덕진
인도 불교부흥 운동의 현실과 한계 / 이지은
불교의 불살생계 입장에서 본 국방의 문제 / 이재수

[ 해외불교체험 ]
저잣거리를 밝히는 청정승가의 빛 / 서상문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
베살리 결집의 십사논쟁과 정법(淨法) / 이자랑

 

::: 2002년 여름―가을호 제11,12호 :::

[ 권두언 ]
목적을 위한 방편이어야 한다 / 홍사성

[ 특집 ] 대승불교의 경전 찬술 어떻게 볼것인가
대승 경전 찬술의 배경과 과정 / 안성두
천태교판론의 한계와 현대적 의의 / 이병욱
중국불교의 위경(僞經) 제작 어떻게 볼 것인가 / 김진무
불설―비불설 논의의 전개과정 / 김철
대승비불설론과 현대의 경전 해석학 / 김용표

[ 쟁점 ]
초기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에 대한 검토 / 마성

[ 현장보고 ]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2백일 / 김동훈

[ 기획 ] 서구불교의 가능성과 과제
서구인들은 왜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 / 최종석
서양 불교의 지도자들 / 진월
서구 불교학의 연구 방법 추이 / 심재관
서구불교의 가능성과 한계 / 최종남

[ 논단 ]
사형제도를 사형시켜야 하는 불교적 이유 / 연기영
대승사상과 한국 불교 영화 / 정재형
불교계 친일 행적, 어떻게 볼것인가 / 이재형

[ 해외불교논단 ]
비선형적 상호 인과율로서의 연기 / 조에너 메이시, 이중표 옮김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2)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와의 대론 / 문을식

 

::: 2002년 겨울호 제13호 :::

[ 권두언 ]
불교도는 과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 / 홍사성

[ 특집 ] 상좌부 불교의 이해
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전통 / 송위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체계 / 김재성
상좌부 불교의 현황 / 난다라타나
상좌부 불교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 / 김열권

[ 논단 ]
사형제도를 사형시켜야 하는 불교적 이유 / 연기영
원불교와 진각종의 교세 성장 요인 분석 / 정성운
가톨릭과 티베드 불교의 의례 비교 / 최로덴

[ 집중인터뷰 ] 강남포교원 20년 이끈 성열스님
용기있는 원칙, 아름다운 원칙 /노귀남

[ 시론 ]
‘불교와 불교학의 실용성’에 대한 한 생각 / 안옥선
새로운 불교미술이 나아갈 길 / 이기선

[ 해외논단 ]
불교는 페미니즘이다 / 리타 그로스,정미숙

[ 기획 ] 재가 불교운동의 현황과 전망
한국 재가불교운동의 사적 개관 / 최연
대학생 불교운동의 어제와 오늘 /김남수
여성 불교운동의 흐름과 과제 / 이윤수
직장,직능 신행단체의 현황과 과제 / 박용규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3)
공사상을 둘러싼 중관, 유식 양 학파의 논쟁 / 남수영

[ 서평 ]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선불교를 보다
박재현 〈깨달음의 신화〉,푸른역사, 2002 / 최원섭

 

::: 2003년 봄호 제14호 :::

[ 권두언 ]
새로운 강물이 흐르게 해야 한다 / 조성택

[ 특집 ] 초기불교를 다시본다
왜 초기 불교를 주목해야 하는가 / 이중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 욕망의 지멸,자유,자비 / 안옥선
초기 불교 교단의 종교의식과 생활 / 이자랑
대념처경을 중심으로 본 초기 불교 수행법 / 미산
초기경전에 나타난 재가자의 위상과 신행생활 / 조준호
붓다운동으로서의 초기불교 시대 전법활동 / 김재영

[ 집중인터뷰 ] ‘금강경 결제’ 논주 각묵스님
금강경 제대로 읽어야 외도적 발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이성수

[ 선학탐구 ]
선종은 왜 민중불교를 지향하였는가 / 이은윤

[ 쟁 점 ]
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 / 김종만
대―소승 논쟁의 비판적 성찰 / 조용길

[ 논 단 ]
불교에서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이유 / 윤영해
도심포교당의 유형과 성공사례 분석 / 김응철
참여민주주의와 불교 / 손혁재

[ 국제행동회의 참관기 ]
전쟁은 크게 인(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이승환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4)
삼예사의 논쟁 : 돈점론의 티베트 불교적 전개 / 안성두

[ 서 평 ]
―‘덕 윤리’의 패러다임으로 본 불교 / 임성택
안옥선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불교시대사 2002
―불교의 불이(不二)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 한자경
김종욱 〈용수와 칸트〉 운주사 2002

[사색과 성찰]
절집에서 선거해야만 하나 / 법인
사찰 경영마인드 유감 / 윤원철
탄허스님의 예언과 정보통신 문화 / 김성철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 / 홍사성


::: 2003년 여름호 제15호 :::

[ 권두언 ]
3보 1배 그것은 감동이었다 / 조성택

[ 특집 ] 현대사회와 불교윤리
계율에의 불복종 / 박정록
불교와 전쟁:불살생과 대량살생 /심재룡
현대사회에 있어서 불교계율의 의미 / 박호남

[ 논 단 ]
구술사 연구의 필요성 : 현대불교의 공백을 메우자 / 김광식
정신분석학과 선, 그리고 쇠고기 매운탕 / 박치완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김성철
철학함과 문헌학 : 불교학 방법론에 대한 성찰 / 강종원

[ 집중인터뷰 ] 요기싸르의 시인 김지하
상생의 화두를 찾아서 / 대담 조성택

[ 시 론 ]
세계화 시대의 전쟁을 보는 불교적 시각 / 류승무,임운택

[ 해외논단 ]
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에 나타난 불교 생태학 / 데이비드 킨슬레이,원병관 옮김

[ 기 획 ] 불교와 예술
생활속의 불교음악을 위한 제언 / 박금표
시간,경계 :세잔느,다빈치,그리고 용수 / 홍성기
진언과 다라니가 불교무용에 끼친 영향 / 능화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5)
청변과 호법의 공유논쟁 / 김치온

[ 선학탐구 ]
선은 종교인가 / 오강남
선종형성의 경제사상적 배경 / 이은윤

[ 서 평 ]
원전으로 읽는 금강경 / 이건준
각묵스님 지음 〈금강경 역해〉(불광출판사,2001)

[사색과 성찰]
제 통일 방안의 무궁지실 오류 / 김상일
자존심이 그리운 세상 / 이종철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 / 엄성민
결혼, 이혼, 그리고 불교 / 문을식

 

::: 2003년 가을호 제16호 :::

[ 권두언 ]
불일(不一)이라야, 불이(不二)가 산다 / 조성택

[ 특집 ]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조선불교유신론 집필의 배경과 개혁방향 / 정광호
조선불교유신론의 소회(塑會)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 / 서재영
조선불교유신론과 현대 한국불교 / 김광식
근대 계몽철학과 조선불교유신론 / 허도학
조선불교유신론과 만해의 문학관 / 고명수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근대적 세계관 읽기 / 이도흠

[ 쟁 점 ]
기복불교 논쟁의 발전방향에 관한 제언 / 윤남진

[ 논 단 ]
깨달음에 이르는 글쓰기를 위하여 / 최재목
불교 생태학과 포스트 모더니티 / 김종욱
서구에서의 불교의 미래 / 조성택

[ 선학탐구 ]
선종 형성의 문화사적 배경 / 이은윤

[사색과 성찰]
불교계가 집단 아상(我相)에 빠져 있다 / 한형조
진정한 반미 / 최준식
농자 천하지 말본 / 종명
비우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김광원
고양이의 시대,고양이를 닮은 사람들 / 전기철
‘불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가 / 곽효준

[ 해외불교논단 ]
계율과 계율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담론 / 루이스 고메즈 지음 , 최은영 옮김

[ 3회분재 ]
장기이식에 관한 불교적 관점 (1) / 곽만연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6)
고행에 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논쟁 / 김미숙


::: 2003년 겨울호 제17호 :::

[ 권두언 ]
붓다의 성도(成道)의 의미를 올바로 인식하자 / 조성택

[ 특집 ] 현대 한국불교의 비판적 성찰
초기불교의 사상,윤리성에 비추어 본 한국불교 / 김종명
키치로서의 불교 / 원신연
21세기 인문학으로서 불교철학의 가능성과 전망 / 이도흠
불교 NGO 의 현실과 과제 / 이영철

[ 집중인터뷰 ]
올곧은 현실참여 이끄는 정토회 법륜스님
불교시민운동의 새로운 길, 수행과 운동을 하나로 / 노귀남

[ 시 론 ]
누가 허물없이 자살할 수 있는가 / 안양규

[ 논 단 ]
삼독기법(三毒機法)으로 벗어나는 길 / 박치완
서산대사, 그리고 호국불교의 가능성 / 김근호
대혜종고의 공안선 비판과 간화선에서의 지(知)의 문제 / 박재현
늪, 늪의 글쓰기 / 최재목

[사색과 성찰]
악업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 성담
자살을 권장하는 사회, 삶의 의미를 읾은 개인 / 김도공
사찰 안내프로그램이 필요하다 / 이지중
이제 바른 법행(法行)을 해야할 때가 아닌가 / 태경
소박한 밥상의 아름다움 / 이승환

[ 세미나 중계 ]
일제의 한국강점과 불교 / 최병헌

[ 자료발굴 ]
한암(漢岩)의 자전적(自傳的) 구도기 ‘일생패궐’(一生敗闕) / 윤창화

[ 해외불교논단 ]
불교 인식론과 프래그머티즘 / 리차드 헤이즈,성청완

[ 3회분재 ]
장기이식에 관한 불교적 관점 (2) / 곽만연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6)
성유식론에 나타난 종자(種子)의 유래에 관한 논쟁 / 이동우


::: 2004년 봄호 제18호 :::

[ 권두언 ]
무엇이 웰빙인가 / 조성택

[ 특집 ] 깨달음과 수행에 관한 몇가지 관점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 / 홍사성
선(禪)의 깨달음, 그 정체와 문제점 / 김성철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 / 조성택
수행도의 다양성과 깨달음의 일미 / 안성두

[ 시 론 ]
탄핵을 탄핵한다 / 손혁재

[ 세미나 중계 ]
비구니 팔경계 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법인스님

[ 논 단 ]
고은의 만해론을 비판한다 / 이재형
불살생에 관한 불교의 이상과 현실 / 문을식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불교관 / 유호선
매트릭스에 나타나는 불교적 상징들 / 이은비
승조(僧肇)의 존재에 대한 사유방식과 자유 / 김영진

[사색과 성찰]
‘납골사업이 불교정신인가 / 김기덕
오래된 미래를 생각한다 / 최은영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 김호성
거울에 비친 내 속살림 / 진월

[ 해외불교논단 ]
불상생의 기원에 대한 고찰 / 람버트 슈미트하우젠,김성철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8)
영혼에 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논쟁 / 김미숙

[ 자료발굴 ]
조선 불교 학인 대회록과 불교개혁 / 김광식

[ 3회 분재 ]
장기이식에 관한 불교적 관점 / 곽만연

[ 종교학 다시보기 ]
종교란 무엇인가 / 최준식

[ 서 평 ]
죽음.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 / 이덕진
오진탁, 〈죽음 , 삶이 존재하는 방식 〉(청림출판,2004)


::: 2004년 여름호 제19호 :::

[ 권두언 ]
종교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 조성택

[ 특집 ] 현대사회를 향해 불교가 말한다
갈등 해소, ‘화쟁’이 길이다 / 이도흠
자본주의와 빈곤, 그리고 무소유 / 박경준
생태계 위기극복을 위한 사성제적 접근 / 김종욱
폭력, 끝까지 거부해야 할 이유 / 하정남
교육, 욕망의 재생산에서 연기적 자각으로 / 박범석

[ 시 론 ]
‘짱’ 신드롬, 어떻게 볼 것인가 / 문을식

[ 세미나 중계 ]
생태에 대한 선사상적 고찰 / 서재영
4·3사건과 제주불교계의 피해 현황 / 한금순

[ 쟁점 ] 간화선과 위빠사나, 그 접점과 경계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다른가 / 각묵
위빠사나와 간화선, 다른 길 같은 목적 / 김재성
위빠사나에 대한 몇 가지 오해 / 조준호

[사색과 성찰]
외로운 노인들을 바라보며 / 원욱스님
자비와 창업 사이에서 / 서인범
길에서 만난 부처 / 김봉현
꽃미남 붓다 / 김수정

[ 논 단 ]
열반에 대한 해석의 문제점 / 황순일
불교는 육식을 금하는 종교인가 / 마성
화엄적 글쓰기 / 최재목
왜 일하며 수행해야 하는가 / 종명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9)
설일체유부의 유위4상을 둘러싼 논쟁 / 황정일

[ 종교학 다시보기 ]
(2) 종교의 특질 / 최준식

 

::: 2004년 가을호 제20호 :::

[ 권두언 ]
종교는 과학적 진보를 제한할 수 없다 / 조성택

[ 특집1 ] 생명산업과 생태윤리, 그 불교적 모색
생명복제 대한 불교윤리적 모색 / 박병기
불교는 인위적인 생명조작을 허용하는가 / 홍욱희
배아 복제에 대한 불교적 관점 / 곽만연
생명을 파괴하는 연구산업 / 박병상

[ 시 론 ]
‘천성산 살리기’ VS ‘지율 스님 살리기’ / 윤제학

[ 논 단 ]
형이상학과 반 형이상학의 만남― 근대유럽정신과 불교 / 박진영
농지개혁과 불교계의 대응 / 김광식
하르샤는 불법왕(佛法王)인가 / 공만식

[사색과 성찰]
일상의 바닥에서 만난 불교 / 고인환
새로운 안거문화, ‘재가논강’ / 박희승
골목길, 자동차에 빼앗긴 아이들의 삶터 / 정성운

[ 특집 2 ] 윤회, 사실인가 믿음인가
고대 문명사회와 인도에서의 윤회 / 김형준
초기 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 안옥선
윤회의 공간적.시간적 조망 / 김성철
남북조 불교의 윤회설 수용과 갈등 / 차차석
윤회없는 불교는 가능한가 / 최은영

[ 기획연재] 종교학 다시보기 (3)
왜 종교인가 / 최준식

[ 해외불교논단 ]
자본의 폭주에 대한 불교적 진단 / 술락 시바라크 저, 김미숙 역

[ 서 평 ]
연기법의 서구적 수용 / 고형일
― 조애너 메이시 지음, 이중표 옮김 〈불교와 일반 시스템이론〉 불교시대사

[ 권말기획 ]
중국불교의 돈점(頓漸)논쟁 / 김진무


::: 2004년 겨울호 제21호 :::

[ 권두언 ]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세계화 / 조성택

[ 창간 5주년 특별 좌담 ] 불교 지성의 새 지평을 여는 첨병이 되라
미산(중앙승가대 교수) / 한형조(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유승무(중앙승가대 교수·본지 편집위원) / 조성택(고려대 교수·본지주간)

[ 특 집 ] 한국불교를 다시 생각한다
‘통불교’ 담론을 통해 본 한국불교사 인식 / 조은수
간화선을 위한 변명 / 박재현
기복, 한국불교 본연의 모습인가 / 이기운

[ 시 론 ]
출가자 감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유승무

[ 논 단 ]
데리다의 철학사상과 불교(1) / 김형효
공안의 기호학적 분석 / 이승훈
헤겔의 《종교철학강의》와 불교 / 박진영
불이사상과 불교미학 / 이찬훈

[사색과 성찰]
호국불교, 나라를 지키는가 정권을 지키는가 / 헨릭소렌슨·최원섭 옮김
어느 견공의 죽음 / 박도
출가를 생각하다 / 김치온
칡뿌리에 대한 단상 / 차상엽

[ 세미나 중계 ] 참선(간화선)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
또 하나의 극단, ‘최고의 수행법’ / 호진

[ 자료 발굴 ]
《포교법 개설》에 나타난 근대불교의 포교 / 김광식

[ 기획연재 ] 종교학 다시 보기 4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 / 최준식

[ 해외불교논단 ]
젠 오리엔탈리즘의 시작―니시다와 교토학파 / 버나드 포오레, 김수정 역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1
사문의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 최정규


::: 2005년 봄호 제22호 :::

[ 권두언 ]
지율스님이 얻은 것과 잃은 것 / 조성택

[ 특 집 ] 한중일 불교의 근대성을 해부한다
한중일 불교의 근대성 수용경로와 차이점 / 김경집
중국의 근대화와 불교 / 김제란
일본의 근대화는 왜 불교를 필요로 했는가 / 스에키 후미히코
근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珍景) / 심재관
한국불교 근대화의 두 얼굴 , 만해와 성철 / 김종인
중도와 서구적 근대성 넘어서기 / 유승무

[ 시 론 ]
불교계 친일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 김순석

[ 세미나 중계 ]
한국 불교의 세계화 방안 / 미산

[ 논 단 ]
데리다의 철학사상과 불교(2) / 김형효
하이데거, 무 그리고 불교 / 박진영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 사띠는 무엇인가 / 조준호
춘원 이광수의 친일 논리 / 김광식
쿠차불교의 역사와 성격 / 한지연

[사색과 성찰]
불교문화재는 성보문화재가 아니다 / 문무왕
물의 본래면목 / 이진섭
나는 회색이다 / 오진영

[ 서 평 ]
문명사적 관점에서 다시 보는 티벳 / 강종원
― R.A 슈타인 저, 안성두 역 〈티벳의 문화〉 (무우수,2004)..

[ 해외불교 논단 ]
탈현대 불교학의 새 방향 / 시모다 마사히로, 김재성 옮김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2)
천태의 제종(諸宗)비판은 정당한가 / 이병욱


::: 2005년 여름호 제23호 :::

[ 권두언 ]
우리가 선도하는 화엄적 기술문명 /김성철

[ 특 집 ] 인터넷 시대의 불교
불교의 사이버 사회 대응 양상―종교학계의 이론적 논의 종합 / 김응철
불교인의 사이버 신행과 특징 /박수호
불교 사이트의 현황과 문제점 / 김재경
한국의 사이버 교회와 영상 예배의 현황 / 허호익
원불교 원티스(WTIS) 구축의 현재와 미래 / 이한메
가톨릭의 인터넷 활용 실태와 한계 / 박문수

[ 시 론 ]
불교문화재 보존, 종단의 특단이 필요하다 / 문명대
개혁 없이 불교 미래 없다 / 박광서

[ 세미나 중계 ]
선사들의 삶을 통해 본 동물의 도덕적 지위 / 서재영

[ 논 단 ]
현대 불교미술의 시대미감과 창의성 / 윤범모
메를로―뽕띠의 철학과 보조지눌의 간화선 / 박진영

[사색과 성찰]
불자의 실천 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 박노자
햄버거 하나에 담긴 생명체의 수는 / 문윤정
놀이와 장엄 / 이성도
불교학교를 설립해야 한다 / 이학송

[ 서 평 ]
인물로보는 불교사 / 김천학
―《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 김호성 옮김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5)

[ 해외불교 논단 ]
불교생태학의 덕(德) 윤리적 접근 / 데미안 키온, 배상환 옮김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3)
용수와 니야야학파의 논법논쟁 / 문을식


::: 2005년 가을호 제24호 :::

[ 권두언 ]
다시 챙겨야 할 욕망이라는 화두 / 조성택

[ 특 집 ] 불교와 성(性)
율장을 통해 보는 ‘욕망 끊기’ / 철우스님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 정성준
정신과 상담을 통해 살펴본 불교와 성 / 최훈동
불교영화속의 섹스, 어떻게 볼 것인가 / 송희복
불교미술에 나타난 성(性) / 박영택
불교문학은 여성을 어떻게 보았는가 / 임종욱

[ 시 론 ]
불교의 눈으로 본 남북관계의 흐름 / 고유환

[ 퇴임강연 ]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철학 / 김형효

[ 논 단 ]
1554년 금강산 청년 율곡과 어느 노승의 대화 / 한형조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불교의 돈점논쟁 / 서명원
看看話禪, 간화선 다시보기 / 변희욱
간화선과 화엄, 단절을 넘어 회통으로 / 김방룡
한국 불교계 신문의 현상과 과제 / 신관호

[ 해외불교 논단 ]
환경윤리와 불교 : 고의성의 관점에서 / 피터 하비 ― 배상환 옮김

[사색과 성찰]
고인 고통을 걷어내니 맑은 내가 있구나 / 마가
2005 만해축전 세계평화시인대회 참가기 / 박시교

[ 서 평 ]
시대에 맞는 불교의 퓨전 / 최원섭
사티쉬 쿠마르, 이한종 옮김 〈부처와 테러리스트〉 (달팽이,2005)..

[ 세미나 중계 ]
한국불교학회 여름 워크숍 / 박익순

[ 권말기획 ] 논쟁의 불교학 (14)
소소계(小小戒)에 관한 논쟁 / 이자랑

 

::: 2005년 겨울호 제25호 :::

[ 권두언 ]
황우석 사태를 보는 불교의 눈 / 조성택

[ 특 집 ] 웰빙시대의 잘죽기(Well Dying)
웰빙시대에 왜 웰 다잉을 말하는가 / 오진탁
붓다의 죽음 / 안양규
선사들의 열반과 죽음 / 김영욱
부활, 웰 다잉의 한 해석 / 이찬수
죽음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생각 / 강신표
근사체험(近死體驗)이란 무엇인가 / 최준식

[ 시 론 ]
종교와 선거 / 금강스님

[ 기획 ] ‘불교와 사회포럼’ 창립세미나
창립기사― 창립취지문
발제 ― 불교와 현대사회 / 조성택
논평 ― 한국 불교전개의 두가지 방식 / 김종욱
발제 ― 불교와 정치 / 박세일
논평 ― 아상에 결박된 정치 벗어나기 / 이각범
발제 ― 불교와 경영 / 노부호
논평 ―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 / 손기원

[ 논 단 ]
율장은 금서인가 / 마성스님
백학명의 불교개혁과 선농불교 / 김광식
일본 불교사회복지의 발전과 한국불교에의 시사 / 박광준
공안언어의 사회적 담론가능성에 대한 상념 / 박진영
조선전기 관세음보살의 응신묘법의 도상과 그 창조적 재현 / 강소연
틱낫한의 플럼빌리지 선수행 고찰 / 김은종

[사색과 성찰]
空間畏怖, 그리고 無有恐怖 / 김징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삶 / 최협
깨달음에 적절한 몸이 있는가 / 문윤정

[ 초청강연 ]
서구불교학의 연구의 과거와 미래 / 도날드 로페즈, 조은수 번역

[ 세미나 중계 ]
불교생명윤이 정립을 위한 공개 심포지엄 / 박익순


::: 2006년 봄호 제26호 :::

[ 권두언 ]
다종교 사회와 종교자유 / 조성택

[ 특 집 ] 바람직한 불경번역과 현대적 소통모델 찾기
좌담 ― 바람직한 불경번역과 현대적 소통모델 찾기
번역은 아무나 하나―얌폴스키의 돈황본 육조단경 영역(英譯) / 박성배
한글대장경 역경사업의 문제점과 과제 / 박종린
리즈 데이비스와 빨리 경전협의 성과 / 황순일
경전연구소의 번역과 교열과정을 통해 바라본 팔리경전의 우리말 옮김 / 정준영
불교용어의 표준화는 왜 필요한가 / 이평래
불교용어 표준화의 문제점 / 김재성

[세미나 중계]
세계각국의 경전번역 실태 밑 체계에 관한 연구학술발표회 / 노병철

[ 기획연재 ]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1) / 오강남

[ 기 획 ] 사회문제에 대한 불교의 대응방식 문제없나
사회양극화에 문제에 대한 불교적 처방 없나 / 정천구
불교생명운동의 맥락과 천성산살리기 그리고 비판적 성찰 / 이정호
황우석 사태로 본 불교윤리의 대 사회적 대응전략 제고 / 허남결

[ 기 고 ]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불교 / 정용도
삼소회의 세계 종교성지 순례기 / 진명스님

[ 논 단 ]
궁즉적 실재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물리학적 관점 / 김성구
아쇼까왕의 복지사상 연구 / 성운스님
불교와 자이나교의 불살생론 비교 / 김미숙
떠오르는 장례문화 수목장(樹木葬) 문제점은 없는가 / 조동섭

[ 서 평 ]
한일 불교사를 어떻게 볼것인가 / 고영섭
일본사상의 핵을 찾는 스에키 후미히코의 ‘일본불교사’와 관련하여

[ 기획연재 ] 문화속의 禪 1
차와 선의 융합 , 다선일미 정신 / 박동춘

[사색과 성찰]
늙은 감나무와의 대담 / 한승원

[ 강연중계 ]
깨달음의 세계와 생활세계 / 조성택


::: 2006년 여름호 제27호 :::

[ 권두언 ]
불교문화― 일상성과 소통을 위한 불교 / 조성택

[ 특 집 ] 재가불교를 생각한다
프롤로그 / 성태용
재가자는 출가자에 비해 하열한가 / 박경준
재가자의 해탈은 어디있는가 / 허우성
수행과 삶은 둘이 아니다 / 박영재
원불교 재가자로서의 삶과 수행의 조화 / 최영돈
오늘날의 재가불자교육을 돌아본다 / 이영철
이상적인 재가 불교를 위한 제언 / 성태용

[ 기획연재 ]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2) / 오강남

[ 자료발굴 ]
백제성왕의 일본왕 겸임과 불교포교 / 홍윤기

[ 논 단 ]
진각국사 무의자 선시의 미학 / 학해스님
불교출판의 현황과 과제 / 홍사성
한국 영화속의 불교, 그 미래와 방향사이 / 우봉규
호탄불교, 접근을 위한 첫걸음 / 한지연
8차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초중등학교 도덕―윤리교과서의 불교(종교)관련 내용에 관한 개선 방향 / 김형중
녹색장묘문화를 향한 불교복지의 실천체계 / 박희택
한국 종교문화 현실에 비춰본 한국 종교의 미래 / 박문수
섬같은 불교, 피자같은 불교 / 이민용

[ 서 평 ]
간화선으로 가는 바른 길 / 이덕진

[ 기획연재 ] 문화속의 禪 2
건축에 스며든 선의 정신 / 김홍일

[사색과 성찰]
남북을 떠도는 도난 문화재들 / 장용철

[ 세미나 중계 ] 동국대학교 건학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지식기반 사회와 불교 생태학’ / 김철우

[ 강연중계 ]
불교와 그리스도교, 그 소통을 말하다 / 서명원


::: 2006년 가을―겨울호 제28―29 합본호 :::

[ 권두언 ]
초심으로 돌아가며 / 조성택

[ 특 집 ] 불교와 민족주의
프롤로그 / 최연식
한국 근대 민족주의와 불교 / 박노자
근대 중국 불교와 민족주의 / 김영진
천황제 국가의 형성과 근대불교의 파행 / 원익선
민족불교와 불교적 보편주의 / 서재영

[ 논 단 ]
종교평화문제에 관한 사회복지법제론적 검토 / 박희택
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은 사찰의 ‘대화주’였다 / 탁효정
콤플렉스와 한국불교의 사회적 위상, 그리고 종교적 자유 / 이정훈

[ 서 평 ]
인도불교사의 종합적 고찰 / 이병욱
― 호진스님의 〈인도불교사〉를 읽고
―책으로 바라본 쩡옌 스님의 인간불교사상과 그 실천 / 이상미

[사색과 성찰]
스스로 건너는 九江 / 김성부

[ 기 고 ] 2006, 윤이상의 숨결찾기
―독일 ‘자택’과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를 다녀와서 / 장용철
―교육, 예측 가능성에 대한 회의 / 백선혜
―간화선 입문 프로그램이란 무엇인가 / 고명석

[ 기획연재 ]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3 / 오강남


::: 2007년 봄호 제30호 :::

[ 권두언 ]
봉암사 결사를 다시 생각한다 / 조성택

[특집] 불교와 예술
불교와 영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 장선재
악보 위에 펼친 화엄세계 / 김경진
선(禪)과 그림-송대(宋代) 선화(禪畵)를 중심으로/ 김현정
현대 대중예술의 이론과 그 불교적 해석 / 이도흠

[시론]
조계종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수경스님

[논단]
신자유주의하의 이주 노동자와 노동 및 가치를 둘러싼 문제 / 이경천
운강석굴 조영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 / 문무왕
사회복지 실현을 위한 불교적 접근과 과제 / 박광준

[해외불교]
간다라 미술과 대승불교 / 미야지 아키라

[서평]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를 읽고 / 마성(摩聖)

[사색과 성찰]
썩어야 산다 / 노공
성지순례의 의미 / 원욱
한류(韓流)의 ‘한’ 덫인가 돛인가 / 김상일
불교의 생애 (The life of Buddhism) / 이민용

[집중 인터뷰]
동서를 회통하는 철학자, 김형효 / 마해륜

[세미나중계]
간다라 불전도(佛傳圖)와 불교 도상(圖像) / 유근자

 

::: 2007년 여름호 제31호 :::

[ 권두언 ]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 / 조성택

[특집]
응용불교, 미래를 준비하는 화두 / 김영욱
생명운동과 불교생태학의 소통을 위한 제안 / 이정호
불교사회복지의 현황과 전망 / 권경임
실천적 모색으로서 응용불교윤리학의 가능성 / 허남결

[시론]
17대 대선, 불교계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 손혁재

[기획시리즈]
4.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는 더 깊은 의미 / 오강남

[논단]
민국시기 불교 간행물에 게재된 한국불교 사료에 대한 고찰 / 황신추안
미적인 것은 종교적인 것인가 / 명법
중국불교교판사상사 / 성원 스님

[사색과 성찰]
친구 / 방민호
잊혀지지 않는 기억 / 박치완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 향해스님
한국 비구니계에 거는 기대와 주문 / 이병두

[세미나중계]
진언(Mantra)과 불교수행 / 황순일

[해외불교]
불교철학과 문헌학, 전통과 혁신 그리고 지성사의 경계 / 로렌스 맥크레이·파리말

 

::: 2007년 가을호 제32호 :::

[ 권두언 ]
‘좋은 벗들의 모임’을 기다리며 / 홍사성

[특집]
보살과 금욕 : 왕과 상인들의 불교 / 루이스 랭카스터
승려의 성적행위는 왜 금지되었는가 / 아상가 틸라가란트
감각적 욕망에 대한 대승의 윤리적 담론 / 야오밍차이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 유키 시라마네
금욕은 시대착오인가? / 로버트 버스웰
유교적 세계관과 성욕의 절제 / 노영찬

[기획시리즈]
5. 초대 교회 형성과 발전 / 오강남

[논단]
들뢰즈로 〈벽암록〉 읽기 / 채운
청규는 제2의 율장인가 / 향해

[사색과 성찰]
인연의 덫에서 자유롭기 / 이석심
자전거에도 ‘불성’이 있다?! / 고미숙
진정 붓다는 없는 것인가? / 차차석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 김상현

[세미나중계]
불상보기,종교적 차원과 심미적 차원 / 이주형

[해외불교]
베르나르 포르의 선불교 / 성청환

[서평] 《중국 근대사상과 불교》를 읽고 / 석길암

[기획시리즈]
16.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에 대한 논쟁 / 이용현

 

::: 2007년 겨울호 제33호 :::

[ 권두언 ]
현대적 교상판석을 세워야 할 이유 / 홍사성

[특집]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 마성(摩聖)
생활종교로서의 동남아 불교 / 김영애
동남아 불교는 소승인가 / 송위지
정치에 나타난 동남아 불교의 힘 / 김홍구
불교적 상징과 미얀마 정치 / 장준영
말레이시아 불교문화의 특징과 그 의미 / 홍석준

[기획시리즈]
6.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개 / 오강남

[해외불교]
전쟁과 테러리즘 / 데미언 키론. 허남결

[올해의 논문]
삼론가의 호칭과 승랑의 고유사상 / 김성철

[사색과 성찰]
잃어버린 순수감각 / 노귀남
겨울날의 행복론 / 이진영
불교, 정치, 그리고 현실인식 / 조명제
행동보다 사유의 깊이가 문제 / 김형효

[논단]
한국 불교 설화에 나타난 욕망과 깨달음 / 이도흠
한국 불교학에 대한 한 불교학자의 소회 / 권오민

[서평]
나의 경계, 나의 한계로부터의 자유? / 박치완

[세미나중계]
대법원 육비구 할복(六比丘 割腹)사건 / 박부영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 퇴옹성철의 역할 / 서재영 

 

::: 2008년 봄호 제34호 :::

[ 권두언 ]
이명박 정권이 순항하기를 바라며 / 김성철

[특집]
소수자와 빈자를 위한 불교적 모색 / 이도흠
불교는 성적 소수자를 차별하는가 /  이승욱
동성애에 대한 불교의 관점― 역사적 사례와 잠정적 결론 /  허남결
소수자 새터민 문제와 불교의 대응 / 노귀남
이주노동자 문제와 불교 /  김영진
불교의 장애인 인식 /  방귀희
한국사회의 재소자와 교도소 포교 /  황수경

[논단]
한국불교사의 순교승* / 황인규
불교미학의 기초개념* / 장미진
한국의 상좌부 불교 이해 수준 / 김홍구
일본의 동남아 불교 연구현황* / 석오진

[해외불교]
티베트 불교철학의 본질* / 마쯔모토 시로

[기획시리즈]
7.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등장 / 오강남

[서평]
空(공),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은 / 김호성

[특별기고]
일과 수행이 하나되는 삶을 위하여 /  도법스님

[사색과 성찰]
다음 어느 생에 람보와 마루와 내가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를 /  이인자 
경부대운하는 무엇인가 / 조건균
4부 니까야 읽기 운동을 제안한다 / 전현수
삶과 가치관에 대한 집착과 독선 / 대화스님

 

:::   2008년 여름호 제35호    ::: 
 
[ 권두언 ]
이명박 정부가 ‘주는 것 없이 미운’ 국민들 / 허남결

[특집]종교와 정치권력
종교권력 현상의 문제점 / 유승무
정치참여에 대한 출가자의 태도 / 마성
교회권력과 정치권력, 그 만남과 갈등의 역사 / 이진구
이슬람 신정정치의 이상과 그 변질 / 김영경
유교, 정치의 시녀 혹은 잔소리꾼 / 최재목

[논단]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출가와 재가가 나누어진 사상적 이유 / 조준호
유교법회(遺敎法會)의 전개과정과 그 성격 / 김광식

[특별기고]
불교적 방황에 관한 한 보고서 / 최로덴
- 인도, 희말라야에서의 고행난행〔眞空〕과 즉신성불〔妙有〕

[세미나 중계]
온마음 상담과 연기론 / 윤호균
연기론의 인지치료적 활용 / 김성철

[사색과 성찰]
한글과 불교 / 장영길
닮고 싶은 사람 / 상현숙
신과 과학의 전쟁 / 이준
마음의 거리 좁히기 / 허지혜
우리 문화와 불교 / 심산
자연 보호는 인간 보호 / 림창홍
2008 티베트 항쟁의 발발 요인 / 정웅기

[기획연재]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⑧
근·현대 그리스도교의 전개 양상 / 오강남

 

::: 2008년 가을호 제36호  :::

[ 권두언 ]
종교편향 더 이상은 안 된다 / 황순일

[특집]  육식인가 채식인가
육식의 정치학 그리고 사회학 / 이도흠
종교문화로 본 육식과 채식 / 류제동
채식하는 서양인, 육식하는 동양인 / 현현
육식과 채식의 식품영양학적 비교  / 이승남

[진단]
불교문화재 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 김태식

[명시 감상]
고은의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 이상국
효봉선사의 〈사슴이 알을 품는 소식〉 / 효림스님

[논단]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 / 윤창화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 방경일
대승 수행의 근본 원리 / 신규탁
혜초의 후반부 생애에 대한 고찰 / 김규현
한국불교와 동남아불교 교류의 어제와 오늘 / 이치란

[사색과 성찰]
마당에 미꾸라지가 파닥이던 시절 / 임동확
맹목적 근대주의의 극복을 위하여 / 신승환
리더의 보살행 / 이태경
오디 / 김희준
인도불교 멸망사가 주는 교훈 / 이학종

[집중취재]
종단산하 법인관리 문제점과 개선 방향 / 유응오

[세미나 중계]
경허선(鏡虛禪) 다시 보기 / 변희욱

[기획연재]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⑨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그리스도교 신학 / 오강남

[논쟁의 불교학] 
미망사학파 자재신 논쟁의 불교적 요소 / 김보리 

 

::: 2008년 겨울호 제37호  :::

[ 권두언 ]
나라님의 나라인가 우리의 나라인가 / 석길암

[기획] 종교갈등, 해결의 길은 없는가
종교 갈등, 그 불행의 세계사 / 곽병찬
이웃 종교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 / 이거룡
종교 간 화해의 실마리를 찾아서 / 서명원
종교 편향과 차별 방지를 위한 외국의 사례 / 남태욱
한국 기독교의 불교 폄훼 일지 / 임연태

[특별인터뷰]
삭개오 작은교회 김경재 목사 / 김나미

[명시감상]
죽원 : 서산대사 / 효림스님
게눈속의 연꽃 : 황지우 / 이상국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
수상작 : 현장의 인도 구법과 현장상의 추이 / 남동신
수상소감 / 남동신
심사평

[기획특집 ] 불살생, 선택인가 당위인가
불교의 생명개념과 불살생계 / 김성철
불교는 왜 불살생을 권하는가 / 정덕스님
육식습관과 동물의 권리 / 허남결
통계수치로 본 동물의 희생 / 우희종

[사색과 성찰]
하나의 진리로 가는 다른 길들 / 구중서
불교논문유감 / 권오민
현대에 계율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김규칠
우리 교육을 위한 성찰 / 박병기
티베트, 순례자의 죽음 / 김영진
종교와 폭력 그리고 정치 / 김호성

[논단]
〈성철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에 대한 비판 / 방경일
다시 응용불교학을 위한 변명 / 이혜숙
한국 불교, 왜 종교개혁이 필요한가 / 강병조

[세미나 중계]
불교와 사회참여 / 박광서

[강연초록]
동아시아에서 한국 불교의 역할 / 강연 : 로버트 버스웰, 정리 이상민

[기획연재] 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독교 이야기 10
그리스독교의 오늘과 내일 / 오강남

[서평]
사상사를 통해 재조명한 근대 중국 / 윤영도
천샤오밍 외 지음 , 김영진 옮김 〈근대 중국 사상사 약론〉

 

::: 2009년 봄호 제38호    :::

[ 권두언 ]
다시 작은 것이 아름답다 / 이도흠

[기획특집] 종교와 돈
돈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과 역사적 전개  / 박경준
돈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과 역사적 전개 / 임채광
한국 불교의 시주 현황과 용도 / 이학종
한국 기독교의 헌금 현황과 용도 / 서병창
종교인 면세특권 그 기원과 현황 / 정웅기

[논단]
경전과 선어록 오류 해석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 / 성본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 / 석오진
불교 연구에서 고고학의 중요성 / 성청환

[특집] 불교속의 유교, 유교속의 불교
위진(魏晋) · 당대(唐代)의 불교와 유교 / 김용남
송대(宋代)의 간화(看話)와 격물(格物) / 변희욱
불교와 양명학(陽明學) / 송재운
신유학(新儒學) 수행론에 미친 불교 수행법 / 이승환
한국사회에서 유불(儒彿)의 교류 / 김용환
보살과 선비, 그 역사성과 현재성 / 박병기

[사색과 성찰]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 남긴 것 / 김윤세
나눔의 역설 / 장기표
치유(Healing)의 불교 / 유자효
무보상의 윤리 / 장기홍
원효와 장자 / 김수중

[해외불교논단]
여래장 사상과 본각사상 / 마쓰모토 시로, 이태승 옮김

[시론]
팔레스타인 잔혹사와 이스라엘 가자 침공 / 홍미정

[북리뷰 Book Review] 
이론으로 체계화한 간화선 / 김호귀
찰나멸과 차이의 철학 / 김영진

 

:::  2009년 여름호 제39호  ::: 
 
[ 권두언 ]
걸림없음(無碍)의 지향 / 박병기

[ 특 집 ]  불교와 도교의 대립과 융합
불교와 노장의 사유 방법 동이점(同異点) / 허인섭
도가의 무(無)와 불교의 공(空) / 하유진
불교와 도교, 대립과 투쟁, 그리고 융합 / 최일범
도교의 도장(道藏)과 불교의 대장경 / 윤찬원
중국선에 미친 노장사상의 영향 / 김진무

[ 논 단 ]
생명문화 공동체를 위한 생명학 / 이기상
가톨릭의 아조르나멘토와 불교 / 곽병찬
근대불교학과 일본적 특수성 / 김용태
붓다는 왜 걸식을 했는가 / 이상호
한국 근대사회와 근대불교(Ⅰ) / 남태욱

[ 집중 탐구 ]
왜 달라이 라마인가 / 탁효정

[ 기 획 ]  한국불교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경전에 나타난 이상적 지도자상 / 김응철
총무원장은 이런 인물이어야 한다 / 이학종
조계종 선거, 이대로 좋은가 / 정성운

[사색과 성찰]
간디의 나라와 만해의 나라 / 황규호
살생 / 강병균
은혜의 인과 / 오명철
거룩함과 코믹함은 종이 한 장 차이 / 임동숙
행복에의 의지 / 동시영
한국불교의 사대주의에 대하여 / 박정진
부유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 / 이경
돈은 국가에 요구하라 / 김경호

[ 열린논단 ] 
한국 종교의 정치 종속성과 불교의 미래 / 김성철

[ 북리뷰 ]
일아 편역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 조준호
마츠모토 시로 저, 이태승 외 역 《티베트 불교철학》 / 양승규
성열 스님 저 《고따마 붓다》 / 황순일

 

::: 2009년 가을호 제40호  ::: 
 
[ 권두언 ]
무엇이 불교를 위한 길인가 / 석길암

[ 불교평론 창간 1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 문명사적 대전환, 불교가 대안인가
기조발제: 문명사적 전환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불교와 서양의 대화를 통하여 / 이도흠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와 열린 공동체
우리 시대의 공동체에 대한 불교적 모색 / 박병기
‘사성제’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
고통의 유형, 기원, 치료법, 의미에 대한 불교와 정신분석 관점 비교 / 이창재
자아중심적 세계에서 연기와 공의 불교적 세계로 / 조은수
불교와 마르크시즘의 동몽이상(同夢異床) / 유승무
탈현대철학의 도일성과 차이의 늪에서 벗어나기
희론(戱論)을 경계하고 참 진리를 참구하라! / 박치완
진화론과 뇌과학으로 조명한 불교 / 김성철

[ 특 집 ]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폴틸리히의 철학적 신학과 불교 / 김경재
불교와 화이트 헤드 / 김상일
다석 신학 속의 불교 / 이정배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 논 단 ]
창조주의와 진화론의 논쟁에 비추어 본 불자의 과학관
다윈의 진화론 150주년에 부쳐 ― / 정윤선
선과 하이데거의 현존재 / 이승훈
《님의 침묵》 판본(板本)과 본문 비평 / 김용직
자비에 대한 동서 문화간 인식의 차이 / 이  준

[ 집중 탐구 ]
왜 틱낫한인가 / 진현종

[사색과 성찰]
관심(觀心) / 오세영
극과 극의 사유 / 윤창화
라다크, 다람살라, 그리고 백담사 / 이경철
불교문화 운동의 지향점 / 이영근
비명(碑銘)을 생각하는 날 / 임연태
겨울을 기다리는 소나무 / 전보삼
일상에서 행복 찾기 / 지혜경

 불교평론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