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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9

풍류신학의 선교신학적 고찰: “포월(包越)”사상의 기하학적 예술성을 중심으로

풍류신학의 선교신학적 고찰: “포월(包越)”사상의 기하학적 예술성을 중심으로



풍류신학의 선교신학적 고찰: “포월(包越)”사상의 기하학적 예술성을 중심으로A Missiological Perspective of PyungRyu Theology: with Geometric Artistry of Powol (Inclusive Transcendence)Thought




선교신학

2018, vol., no.49, pp. 181-220 (40 pages)

DOI : 10.14493/ksoms.2018.1.181


발행기관 : 한국선교신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기독교신학 > 선교신학
김현섭 /HyunSub Kim 1


1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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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류동식의 신학사상의 중심을 “포월(包越)”사상으로 파악하고, 기하학적인 해석을 통해 선교신학적으로 조명한다. 류동식의 신학은 토착화된 풍류신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예술신학으로 보아야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류동식의 신학적 사유구조가 기하학적이고 도형적이기 때문이다. 포월 사상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상황은 대립과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기하학적으로 디아드(Dyad), 즉 양극이 이질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밀어내는 동시에 끌어당기는 속성과 ‘하나’에 대한 기억은 파르마콘, 즉 약이면서 동시에 독인 상황에서 혼돈을 초래한다. 그러나 이 역설과 모순이 포월에서 극복된다. 무엇보다도 포월사상이 완성되는 곳은 트리아드(Triad), 즉 삼태극이다. 절대적인 타자였던 하나님이 자기 부정의 인격적 매개인 그리스도의 심허속천(心虛屬天)으로 인해 인간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삼태극에서 역동하는 부활이다. 풍류신학의 삼태극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하늘과 사람 사이의 중심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심을 이어주는 것은 지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건을 만드는 선교적 예술가인 것이다.


The aim of this paper is to identify the center of Dong-Sik Ryu’s theological thought with “Powol” ideas and to illuminate it in a missiological way through geometric interpretations. This is because the theoretical framework of Ryu is geometric and graphic. The situation in which “Powol” thought works most strongly is the point where conflicts and differences arise. Geometrically, this is called a Dyad. That is where the anode collides heterogeneously. Pushing and pulling the attributes of Dyad and the memory of ‘one,’ cause chaos in the “Pharmacon.” However, this paradox and contradiction is overcome in Powol. Above all, it is the Triad (Samtaeguk) where the idea of the Powol is complet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geometric Triad (Samtaeguk), Christ is a missionary artist who connects the center between heaven and human and connects the center between human and human to create the most beautiful event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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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식,
풍류신학,
포월,
파르마콘,
삼태극

Dong-Sik Ryu, PyungRyu Theology, Inclusive Transcendence, Pharmacon, Samtaeguk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Orte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17428




"풍류신학, 우리 민족의 영적 DNA 중요성 알려" : 교계/교회 : 베리타스

"풍류신학, 우리 민족의 영적 DNA 중요성 알려" : 교계/교회 : 베리타스

"풍류신학, 우리 민족의 영적 DNA 중요성 알려"
'하늘 나그네' 고 유동신 전 연세대 교수 장례예식 열려
김진한 jhkim@veritas.kr
입력 Oct 20, 2022
 

(Photo : ⓒ사진=김진한 기자)
▲'하늘 나그네' 유동식 선생이 떠났다. 20일 오전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고 유동식 교우 장례예식이 열렸다.

'하늘 나그네' 유동식 선생이 떠났다. 20일 오전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고 유동식 교우 장례예식이 열렸다. 곽호철 목사(연세대대학교회 담임목사)의 집례로 진행된 이날 장례예식에서는 이계준 목사(전 연세대대학교회 담임목사)의 설교와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의 추모사가 있었다. 이 밖에 전주는 곽동순 연세대 명예교수(교회음악과)가 맡았고 손호현 연세대 교수(문화신학)는 고인의 약력을 소개했다.

이 목사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제하의 설교에서 고인이 남긴 토착화 신학의 유산인 '풍류신학'이 갖는 의미를 곱씹었다. 서구 신학 연구에 기울어진 당시 한국 신학 풍토에서 유 전 교수의 풍류신학은 가히 혁명적이었을 만큼 당시 신학계에 큰 충격을 준 도전적인 시도였다고 이 목사는 전했다.

이 목사는 특히 "유 전 교수가 평신도 신학자로서 연구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풍류신학은)이단으로 낙인이 찍힐 만큼 충격적인 시도였다"고 설명하며 우리 민족 고유의 혼과 얼을 도외시 하지 않고 그 바탕 위에서 한국적 신학의 꽃을 피운 유 전 교수의 '풍류신학'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김경재 교수의 추모사도 있었다. 고인과 같이 문화신학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학문적 교류를 이어왔던 김 교수는 고인이 주창한 풍류신학과 그가 말년에 꽃피운 예술신학에 대해 조명했다. 김 교수는 풍류신학에 대해 "서구 신학이라는 나무를 그대로 옮겨 심는데 열중했던 당시 한국 신학계에 큰 충격을 던져준 혁명적 시도였다"며 "풍류신학은 나무를 옮겨 심는데 쏠려있는 한국 신학계가 간과하고 있는 나무가 심겨지는 토양에 주목한 신학이었다"고 설명했다.

(Photo : ⓒ사진=김진한 기자)
▲'하늘 나그네' 유동식 선생이 떠났다. 20일 오전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고 유동식 교우 장례예식이 열렸다.

김 교수는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라는 고유한 영적 DNA의 바탕 위에 신학을 전개한 것"이라며 "민중신학은 여러 표피로 둘러싸인 복음의 외피를 벗기고 갈리래아 원복음을 밝히는 데 주목했다면 풍류신학은 이처럼 토양의 문제에 관심하며 민중신학과 함께 토착화 신학의 큰 축을 형성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고인의 예술신학에 대해서는 "풍류신학과 별개로 전개된 또 다른 신학이 아니다"라며 "풍류신학이 연꽃의 뿌리라면 예술신학은 그 뿌리의 양분을 흡수해 피어나는 연꽃이다. 풍류신학과 예술신학은 한 몸통이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전시회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예술신학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자체가 행위예술이고 종합예술임을 자각시키며 불신과 반목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진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연세대학교 성가대 장정권, 최혜경 교우의 추모곡 순서가 있었는데 고인이 작사했고 서유석이 곡을 붙인 노래 '하늘 나그네'가 제창됐다. 아래는 고인의 '하늘 나그네' 시 전문.

고향을 그리며
바람따라 흐르다가
아버지를 만났으니
여기가 고향이라
하늘저편 가더라도
거기또한 여기거늘
새봄을 노래하며
사랑안에 살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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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僊)이란 무엇인가? -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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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僊)이란 무엇인가?변찬린의 선맥신학과 유동식의 풍류신학(1)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2.18 01:56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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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67)



예시 1) 혹자가 ‘신선’이라는 말을 들으면 구름을 타고 긴 지팡이를 들고 흰 머리를 휘날리는 인간의 모습을 상기할 터이고, 혹자는 불룩 나온 배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지팡이를 가진 산신 옆에 익살스런 호랑이와 소나무 가지에 까치가 있는 한국의 신선도를 연상할 것이다. 눈 밝은 이는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상상할 터이다. 그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로마 군병이 찢으려고 한 속옷이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는 성구는 어떻게 이해할까? 이 통으로 짠 속옷이 바로 영화(靈化)하고 선화(仙化)하는 궁극적 인간이 입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1)





예시 2) 종교학자인 동료 교수가 한국 목회자의 초청으로 강연을 한 후 질의에 대한 응답과정에서 나온 얘기라고 한다.

목회자 : 강의는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름타고 우화등선 하는 신선의 얘기를 정말로 믿습니까?

종교학자 : 그럼 목사님들은 예수가 빈 무덤에 세마포를 남겨두고 부활했다는 얘기를 믿으십니까?

목회자들 : …



예시 3) 변찬린은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에서 말하는 ‘거듭난 자’가 단지 도덕적인 개과천선이 아닌 ‘영으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바람같다 하였다. 바람! 바람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바람은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항상 흐른다. 절대 자유한 존재는 바람처럼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고 흘러야 한다. 그러므로 바람은 절대 자유한 자이다. 율법과 죽음에서 해방 받은 자이다. 진리로 자유하게 된 존재이다. 절대 자유한 자는 풍류체가 되어야 한다. 무애자유한 거듭난 사람, 이것이 영으로 다시 난 사람의 정체이다.”(2)


선맥(僊脈), 한국의 전통사상이자 한국 종교의 근본 흐름

선(僊)은 한국 종교문화의 기층을 형성하는 원류이자 본류이다. 중국의 13경에도 보이지 않고, 『노자』에도 없으며,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B.C. 403-B.C.221)의 『장자』에 와서야 신선설이 등장한다.(3) 도교는 신선사상을 기반으로 노장 사상, 그리고 유교와 불교와 교섭하면서 다양한 중국 민중신앙을 받아들여 형성된 중국 종교로 알려져 있다. 교단 도교는 중국에서 자생한 제도 종교이지만, 신선사상의 원류는 동이족이다.

선맥(僊脈)의 전통은 동이족이 살던 청구(靑丘)이며, 선맥의 하늘을 개천한 사람은 동이족이라고 한다. 선맥은 한국의 종교기층을 형성하는 종교의 핵이다. 선맥 전통은 단군신화에 이어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 그 종교적 정체성을 나타낸다. 바로 ‘풍류’이다.

변찬린은 1960년대 중반부터 풍류에 대한 언급을 시작한다. 1979년에는「선고僊(仙)攷」에서 동이족의 선맥사상, 풍류도를 성경텍스트와 이해지평에서 융합시키는 작업을 시도한다.(4) 이때는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상)』을 세간에 선보이며 새 교회 운동을 펼치던 시기이다.

▲ 변찬린, 「僊(仙)攷」, 『甑山思想硏究』 5輯, 1979)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을 가 문필을 떨친 엘리트 학자로서 당시 장안은 동서종교의 교류지인 국제도시였다는 점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변찬린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서도 풍류의 얼을 고이 간직한 고운”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한국의 주체적 종교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그가 “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했을까?” 김정설은 ‘풍류’의 이해가 한국 종교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개념이라고 지적한다.

변찬린은 풍류의 첫 출전인 「난랑비서」의 난랑(鸞郞) 자체가 신선을 일컬으며, 난랑은 신선의 다른 이름이라고 논증한다. 난랑의 난새(鸞)는 봉황(鳳凰)이고 봉황은 동방에서 난 신선을 상징하는 바람새(鳳凰은 風+ 鳥, 風+皇의 합성어이다)이다. 이처럼 ‘풍류’는 신선인 난랑을 기리는 문서에 기록되어 선맥을 발현된 최초의 종교적 언어이다.

또 『삼국유사』의 미시랑(未尸郞)도 미륵불의 은어이며 시신을 남기지 않기에 미시(未尸)라고 표현한다. 미륵불의 용화세계도 잃어버린 선맥의 자취이다.

▲ 청와대 앞 봉황새


이런 선맥은 근대의 최제우와 강일순 등에 의해 주체적인 근대 종교체험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근대 신종교의 창교자가 동이족의 고유한 하늘님 체험을 통해 공통적으로 개벽과 신선사상을 주장하는 것은 토착화된 근대의 풍류도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원시반본(原始反本)’이라 한다.

변찬린은 한국의 종교적 바탕인 선맥을 고증하기 위해 떼이야르 드 샤르댕, 『성경』, 『장자』, 『노자 도덕경』, 『중용』, 『시경』, 『성경통지(盛京通志)』, 『삼국사기』, 『대순전경』, 『삼일신고』, 송호수 편 『민족정통사상의 탐구』, 『동방사상논총』, 이능화의 『조선도교사』, 최인의 『한국학강의』, 『단재전서』, 『동문선』, 『포박자』, 『고려도경』을 참고하여 그의 논지를 전개한다.

1979년에는 발표된 「선고僊(仙)攷」는 1987년 류병덕이 『한국철학사(상)』의 「화랑도와 풍류사상」, 1988년에 김상일이 『한밝 문명론』, 또 유동식이 책임편집한 『한국종교사상사(증산교, 대종교, 무교)』(1998)에도 인용된 이 연구분야의 선구자적인 논문이다.(5)

한국종교 문화의 원류는 무맥(巫脈)이 아닌 선맥이며, 선맥의 관점에서 죽어가는 실존인 인간의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바로 잃어버린 선맥의 복원에 달려있다. 그런데 희랍의 헬레니즘에 의해 해석된 서구신학의 해석전통은 ‘산 자의 하나님’을 증언하는 성서텍스트를 ‘죽은 자의 영혼이나 구원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의 문서로 만들었다고 변찬린은 비판한다.

선맥과 도맥의 지평융합

성서의 죽은 자를 살리는 도맥은 교리화된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에서는 성경사상의 핵인 부활의 도맥과 변화의 도맥은 규명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선(僊)을 은장한 문서이다.”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성경의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기사와 모세와 예수의 부활사상을 동방의 ‘풍류’인 선맥과 이해지평에서 융합시키고 있다.

변찬린은 풍류에 담긴 종교적 함의를 궁극적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존재양태를 ‘풍류체(風流體)’라 하고, 삼교를 포함하는 융합적인 인식체계를 ‘풍류심(風流心)’,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종교적 황금율을 실천하는 인간을 ‘풍류객(風流客)’이라는 신조어를 발명한다. 즉 풍류는 새로운 실존인 풍류체라는 존재론적 탈바꿈을 한 궁극적 인간, 다양한 학문을 통섭하고 회통하는 인식론적 차원의 ‘풍류심’, 그리고 생활세계에서 신행일치하는 ‘풍류객’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그의 풍류세계의 밑바탕을 형성한다. 이런 풍류적 개념을 가진 것이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상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풍류신학의 풍류가 ‘불 혹은 광명’의 이두어라고 하면서, 요한복음 3장 8장을 연계하여 개념화하고 있지만 ‘광명’이라는 개념과 성서텍스트와의 내적 맥락이 결핍되어 있다. 더 나아가 풍류가 ‘불, 태양과 광명’과 연관성을 가지는데 이것이 어떻게 ‘멋진 한 삶’이라는 유비적 관계를 가진 언어가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선맥신학의 풍류는 바람이라는 상징어로 영화(靈化), 영기화(氣化), 선화(仙化)의 인간 존재의 변화와 탈바꿈의 창조적 영적 에너지를 일관되게 개념화하여 변찬린은 내적 맥락을 가진다고 평가된다. 성서의 영화(靈化)와 동아시아의 선화(仙化)는 ‘풍류’라는 상징어에서 맥락적으로 ‘이해지평’을 이루고 성서해석에 적용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예수는 땅에 속한 자의 형상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변화받은 존재가 되었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은 자유한 형상이다. 자유한 형상은 풍류체가 되어 어떠한 시공에도 자유자재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선(僊)은 곧 풍류체이다. 형체없는 바람처럼 자유한 자가 되어 생명의 피리구멍으로 나들이 하는 영, 영은 바람이며 바람은 영이다. 영은 풍류체이다. 본래 모습이 없지만 방편따라 자유자재로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무형(無形)이면서 무한형(無限形)>의 모습! 이것이 풍류체이다. 풍류체가 되면 지구의 좁은 마당을 뛰어넘어 우주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우주적 그리스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6)


이런 동방의 선맥인 ‘풍류’의 사건을 변찬린은 유·불·도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성서에서 발견한다. 변찬린은 “성경은 선(僊)의 문서이다.”라고 하면서 “에녹과 멜기세덱과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로 이어지는 도맥(道脈)은 이날까지 미개발의 황금광맥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창조적 진화의 완성태인 풍류체는 존재탈바꿈의 궁극적 신인(神人)으로 동방의 선맥과 성서의 변화와 부활사상은 이해지평에서 융합된다.

변찬린의 선맥신학

영이란 무엇이며, 영기(靈氣)란 무엇인가? 예수가 부활 후 남겨놓은 세마포(마 27:59-61;요 20:6-7)와 빈 무덤 사건(요 20:13-15)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에녹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지 않고(창 5:24) 하나님과 동행한 사건(히 11:5)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타고 승천했다(왕하 2:11)는 소식은 문학적 상상력에 불과할까? 부활과 승천 사건은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는 생명과 영생의 이야기이다.

선맥신학에서 인간은 영과 육이 죽지 않고 거듭나는 에녹과 엘리야적 변화와 모세와 예수처럼 죽어서 부활하는 두 유형으로 존재론적 탈바꿈을 예시하고 있다. 이런 변화체와 부활체를 새 실존으로 거듭난 영화된 사람을 풍류체라고 변찬린은 말한다. 성령의 한국적 표현이 풍류이다. 영화의 선가적 표현이 선화이다. 동학의 언어로 ‘지기(至氣)’이다. 풍류는 하나님의 영으로서 인간을 영화(靈化)시키는 구원의 영적 에너지, 선화(仙化)에너지이다.

그러나 선서와 신선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의 비합리주의 현상을 배척하는 유학자에 의해 미신화되었으며, 불가에 의해 무시당하였다. 이성신학과 피안신학에 의해 오해되는 ‘변화와 부활’이라는 성경적 사건은 당대인과 새로운 관점으로 소통되어야 하며, 변찬린은 이에 대해 하나의 가능성 있는 해석학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선맥신학에 나타나는 풍류는 종교적 영성(靈聖)으로서 궁극적 인간이 시공우주에서 종교적 황금율을 실천하는 성스러운 종교적 기제이며, 죽지 않고 영성(靈聖)우주로 가는 동방의 사유체계와 서방의 사유체계를 포월하는 종교적 상징어이다. 즉 영화이고, 기화이고, 선화로서 존재론적 탈바꿈을 말하는 창조적 진화의 완성체인 새 인간을 말한다.

선맥신학은 선(僊)이라는 한국 종교의 중핵과 성서의 핵심인 부활사상을 한국의 종교적 정체성인 ‘풍류’를 상징어로 대화하고 소통시키고 있다. 앞으로 선맥신학의 하나님론, 예수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등은 조직신학적 방법으로 조명해 나갈 것이다. 그는 신학의 틀을 만드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성서가 신학의 틀 안에서 화석화되지 않고 종교적 인간과 관계성을 맺고 생활세계에서 재현되어야 하는 성서해석에 주력하고 있다.

변찬린은 선(僊), 즉 “풍류는 천하의 신기(神機)”라고 하며 다종교적 언어, 간텍스트적 해석, 다학제적 방법으로 성서텍스트를 해석하며 그의 종교적 사유체계를 펼치고 있다. 이런 성서해석의 체계를 필자는 ‘ᄒᆞᆫ밝성경해석학’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선맥신학은 ‘한밝 성경해석학’이라는 틀 안에서 그의 신학적 의미를 밝히기 위한 학문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변찬린의 선맥신학과 유동식의 풍류신학(2) : 선교신학으로 토착화 신학은 토착될 수 없다“는 주제로 글을 이어간다.

미주
(미주 1) 변찬린, 『성경의 원리(下)』, 한국신학연구소, 2019, 542.
(미주 2) 변찬린, 『聖經의 原理』(서울: 文岩社, 1979), 187-188.
(미주 3) 구두 전승으로 이어오던 다음 성구가 형성된 성서 문서편집의 시기를 상기해 비교해 보라. 창세기 2장 7절에 아담의 생령(a living soul)의 기사와 이를 인용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 창세기 5장 4절의 에녹의 승천기사, 열왕기하 2장 11절의 엘리야의 회오리 승천사건, 요한복음 3장 6절-8절의 예수와 니고데모의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습, 고린도전서 15장 14절의 바울이 말한 “신령한 몸”등이 우리의 주제와 관련되는 주요 성구의 일부분이다.
(미주 4) 변찬린의 선맥사상과 성경해석과의 관련성을 이해하려면 다음을 참고할 것: 변찬린, 「僊(仙)攷」, 『甑山思想硏究』 5輯, 1979, 179-212; 변찬린, 『성경의 원리(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62-90; 변찬린, 『성경의 원리(下)』, 한국신학연구소, 2019, 557-570 등에 주로 있으며 이 외에도 『성경의 원리』 4부작 여러 곳에 발견할 수 있다.
(미주 5) 물론 현대적 기준으로 볼 때 엄밀한 학술적 기준은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그의 논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영모, 함석헌 등이 논문식 글을 쓰지 못한 것이 강단학계에서 수용되지 못한 큰 원인 중의 하나라고 박재순은 지적한 바 있다.
(미주 6) 변찬린, 『성경의 원리(下)』, 같은 책, 568.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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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 -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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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한국 토착화 신학의 성과와 한계(1)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2.04 


청년 변찬린은 어릴 적부터 받은 한문 교육으로 유가 경전에 익숙하였고, 중학교 때 캐나다 장로교 계통의 신앙에 입문하여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한다. 청년 시절에 칼 바르트의 『교의학』, 라인홀드 니버의 『비극의 피안』, 에밀 부르너의 신학, 알버트 슈바이처의 『문화철학』 등 서구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청년기를 보내면서 한국 교회에서 ‘살아있는 예수’를 보지 못하고 서구 신학의 한계를 인식한다. 스스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으로 세계 종교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겠다는 종교적 목표를 세운다. 이때는 한국 그리스도교가 토착화 담론이 촉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토착화신학의 발전

한국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조성된 토착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1984년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한국 선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가 개최되어 『사목』 발간과 1987년 설립된 한국사목연구소가 토착화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2007년 주교회의 결정으로 『사목』 폐간과 한국사목연구소가 해체를 맞이하였고 지금은 토착화에 대부분 냉담한 실정이다.(1)

개신교는 서구 교회전통에 근거를 둔 교파교회가 설립되고 서구에서 신학적 사유체계를 배운 신학자에 의해 교파 신학의 지형이 공고화된다. 이를 유동식은 태동시대(1885-1930), 정초시대(1930-1960), 그리고 전개시대(1960-1980)로 구별하면서, 길선주와 박형룡 등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윤치호와 김재준의 사회 역사 참여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 신학, 그리고 최병헌과 정경옥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한국 신학의 광맥이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신-합동), 한국기독교장로회(한신-기장)과 기독교대한감리교(감신-감리교)의 학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김흡영은 여기에 신정통주의의 이종성을 거론하며 한국 최대 교단인 예수교 장로회(통합)을 대변하는 장신(광나루)학맥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신학을 한국에 소개한 공로는 있지만, 한국의 독창적인 신학을 수립했다기 보다는 서구신학을 한국의 종교적 토양에 이식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신학적 환경에서 감신과 기장을 중심으로 한 토착화 신학자와 조직신학자는 상당한 신학적 성과물을 내었다. 유동식의 ‘풍류신학’,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 서남동·안병무·함석헌 등의 사상이 응축된 ‘민중신학’, 성(誠)을 실천적으로 해석한 김광식의 ‘언행일치신학’, 그리스도교와 불교와의 대화를 촉발한 변선환의 ‘대화신학(?)’, 김흡영의 ‘도의 신학, 박종천의 ‘상생의 신학’, 이정배의 ‘생명신학’ 등이다.



이 가운데 풍류신학은 토착화 신학의 큰 성과물이며, 민중신학은 세계신학계에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으로 알려졌으며, 김흡영의 도의 신학과 박종천의 상생의 신학도 세계 신학계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토착화 신학은 이미 낡은 신학적 주제이고, 주요 계승자들은 ‘문화신학’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 신학적 사유를 확대하고 있다. 어찌 보면 토착화 신학은 한국 종교문화와 ‘이해지평’에서 융합하지도 못한 채 ‘토착화의 개념’조차도 정립되지 못하고 방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토착화 신학은 개신교 내에서조차 토착화 신학의 성과물이 한국 교회에 주류담론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한국 종교지평에서 토착화 신학이 수용되지 못한 채로 어정쩡한 상태라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오히려 토착화 신학이 서구 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종교문화를 왜곡하는 미완성의 신학이라고 말하면 과언일까?(2) 예를 들면 한민족의 고유한 ‘하늘님’(3)을 가톨릭은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이라고 하며 신의 이름조차 통일시키지 못하고 한국의 하늘님을 분열시키고 있다. 푸코가 말한 ‘언어와 권력’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굳이 상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할 것이다. 종교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변찬린의 한국 토착화신학에 대한 비판

이런 토착화 신학에 대해 1982년 변찬린은 신약 사건과 인물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 (하)』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동안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가 논의되어 메스콤의 파도를 타는 듯 하더니 판소리 찬송가 몇 편을 부르는 행사로 끝났다. 구미 신학자들이 부는 마적魔笛에 놀아난 우리들은 꼭두각시의 춤을 추었을 뿐 한국인의 심성, 그 깊은 곳에서 흥겹게 울려 나오는 가락과 신들린 춤사위를 우리는 이날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갓 쓰고 양복을 입은 몰골로 어릿광대의 춤을 춘 모습이 우리들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이었다.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녹아든 노래 가락은 판소리의 한맺힌 가락과 흥겨운 서도민요西道民謠, 구성진 남도창南道唱의 신들린 선율과 농악이지 바그너의 가극과 베토벤의 교향곡과 헨델의 할렐루야가 아니다. 마늘과 된장 냄새가 우리들의 체취이지 치-즈나 뻐터의 누린내가 아니다.(4)


풍류학자로서의 변찬린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리지 못한 서구신학의 한국화를 비판하며, 한민족의 종교적 근본어인 ‘풍류’를 사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1970년대 전후하여 ‘풍류’를 메타-언어로 하여 궁극적 인간을 ‘풍류체(風流體)’, 화쟁하고 회통하는 인식체계를 ‘풍류심(風流心)’, 자유자재하고 원융무애한 삶을 사는 인간을 ‘풍류객(風流客)’이라고 하며 그의 종교적 상표로 사용한다. 유동식이 풍류신학을 말하기 전인 10여 년 전의 일이다.

변찬린의 ‘풍류’해석과 유동식의 ‘풍류’신학은 한국 기층종교 문화인 선맥과 무맥의 대척점에 있으며, 또한 풍류(도)라는 창조적 영성이 화랑도라는 제도조직과 팔관회 등의 국가의례에서 발현되는 것인가 하는 핵심질문과 연계되어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성서의 복음이 한국 종교문화가 ‘이해지평’에서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만난다면 어떻게 만나는가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물음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풍류’를 가지고 성서와 한국 종교문화를 동시에 고찰한 두 종교인은 종교비평되어 한국 학계에 새로운 담론으로 토론되어야 한다.

풍류신학에 대한 이해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짧은 지면에 풍류신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풍류신학은 유동식의 신학적 상표로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무교로 보고 한국 종교문화에 그리스도교 신학을 토착화시키려 한 신학이다. 풍류신학의 풍류(風流)는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鸞浪碑序」에 출전을 둔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일컬어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이 선사(仙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고 군생을 접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의 가르침이요, 무위하게 일을 대하고, 말함없이 가르침을 배푸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으뜸가는 가르침이요, 모든 악을 짓지않고 모든 선을 힘써 행하닌 이는 측건태자(석가)의 교화다.


풍류는 이두식 한자로 우리 말의 불(夫婁)이며, 광명, 태양과 관련되는 뜻을 가진다. 또한 풍류는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희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는 의미와 유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풍류신학은 「난랑비서」에 담긴 풍류의 개념을 세속을 초월한 종교적 자유와 삶에 뿌리내린 생동감과의 조화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멋’이라고 보며, 또한 유·불·선을 다 포함하는 포월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의미를 ‘한’이라고 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사람다운 사람을 되게 하는 풍류도의 효율성을 ‘삶’이라는 우리 말로 개념화한다. 풍류는 ‘멋진 한 삶’ 혹은 ‘한 멋진 삶’으로 현대화하여 신학의 골격을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풍류도의 원시 종교적 표출인 무교(고대)를 토대로 불교(신라, 고려)와 유교(조선)와 그리스도교(기독교)가 교체하며 전개되어 온 역사”라고 한국의 종교사상을 개괄한다. 또한 “멋진 한 삶”이라는 풍류도의 기본 구조로 “무교는 원시적 형태의 멋의 종교요, 불교는 철학적 한의 종교요, 유교는 윤리적 삶의 종교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종교문화사는 민족의 꿈인 ‘멋진 한 삶’의 실현 과정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 문화사적 위치로 보아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명은 분명해진다.”고 말하고 있다.(5) 이런 풍류적 사유를 통해 1983년부터 ‘풍류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정립하고 있다.

김경재는 풍류신학에 대해 「복음과 한국종교와의 만남」이란 부제가 붙은 『해석학과 종교신학』이란 책에서 복음이 한국 종교문화에 토착화될 때 네 가지 모델을 언급하면서 풍류신학이 접목모델로서 바람직한 문화신학의 형태로 소개하고 있다. 이정배도 유동식의 선구자적인 업적은 신학의 영역만이 아니라 예술신학으로까지 확장된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풍류신학에 대한 한국 종교학계의 평가

그럼 한국 종교사의 지평에서 풍류신학은 어떻게 자리매김이 가능할까? 최준식은 풍류신학은 한국 전통문화가 그리스도교에 완성된다는 성취설을 바탕에 둔다고 비판하며(6), 김상근은 유동식의 종교적 정체성을 종교학자 혹은 토착화 신학자로 보지 않고 선교신학자라고 본다.(7)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한국 종교문화가 성취되어야 한다는 선교신학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평가이다.

과연 한국 종교문화는 선교신학에 바탕을 둔 풍류신학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까? 2002년 8월 30일 유동식, 김경재, 이정배, 최인식이 연세대학교 알렌관에서 풍류신학을 주제로 한 좌담회에서 최인식은 “저는 유 선생님께서 어떤 조직신학을 쓰고 성서를 주해하고 체계화시키지는 않으셨지만, 일생을 한국 신학을 위한 틀 짜기, 그것을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이룩해 주셨다.”고 한다.(8) 또 허호익도 풍류신학이 성경해석의 원리로 제시되지 못하고 수사적인 작업에 머물렀다고 평가한다.(9)

김광식은 근본적인 평가를 한다. “1960년대 토착화 논쟁을 거쳐서, 1970년대에의 무교문화론을 낳았고, 1980년대 이후로 풍류신학 즉 복음의 무교적 예증이 시도되어온 것이다”라고 말한다.(10) 이 말에는 그리스도교 복음이 한국의 종교원류인 무교에 의해 왜곡되며, 한국 종교문화의 본류를 무교로 보는 신학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에 이진구도 동일한 논지를 전개하며 유동식의 무교문화론이 보수적인 기독교가 지닌 무교에 대한 미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였지만 무교를 한국종교의 원형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하다는 평가를 동시에 하고 있다.(11)

풍류신학으로 성서해석이 가능한가

신학자는 기본적으로 풍류신학의 한국 종교문화에 대한 해석은 성과라고 평가하지만, 풍류신학으로 성서해석에 적용이 가능한 신학인지를 반문한다. 반면에 우리는 한국 종교지평에서 성서해석에 적용이 되지도 않는 풍류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 즉 선교신학으로 한국 종교문화를 재단하지 않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선교신학에 바탕을 둔 토착화 신학은 한국 종교문화를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초는 아닐까?

이런 상반된 평가의 공통점은 ‘풍류’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이며, 한국의 기층 종교문화가 선맥(僊脈)이냐 혹은 무맥(巫脈)이냐를 둘러싼 한국종교의 중핵을 판단하는 핵심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한국종교와 한국신학』을 발간기념으로 유동식, 김경재, 김광식, 이정배가 참석한 좌담회에서 풍류신학의 풍성한 신학적 성과를 평가하면서 나온 말이다.
유동식 : [중략] 전에 누가 이런 말을 합디다. 성서에서 “道”만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선(仙)”맥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이죠. 선맥이 흐르는 것 그것을 보지 못하면 성서를 제대로 못본다는 거예요.
김경재 : 선맥(仙脈)이 무슨 뜻입니까?
유동식 : [중략] 유·불·선에서도 말하는 … 하나의 새로운 존재, 그것을 요한이 제시해 준 것이거든요. 도성인신이라고 하는 그 표현 자체부터 … 결국은 우리가 “도”를 통해야 하늘나라에 가는데 …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는 말은 방법과 목적이 하나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동양적 인식입니다.(12)


‘도’만이 아니라 ‘선맥’을 찾아라

유동식은 누구에게서 “성서에서 ‘도’만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선맥”을 찾아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까? 변찬린은 세계 신학계에서 최초로 선(僊)과 선맥 등의 도맥(道脈)을 성서해석에 적용한 비조(鼻祖)이다. 1979년에 “성경 속에 뻗어내린 대도(大道)의 정맥(正脈)은 선맥[僊(仙)脈]이었다. 성경은 선僊을 은장한 문서이다. 에녹과 멜기세덱과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로 이어지는 도맥(道脈)은 이날까지 미개발의 황금광맥이었다”고 1979년 『성경의 원리 (상)』 머리말에서 말한다.

세계 신학자 가운데 동방의 신선사상과 선맥을 성서해석에 적용한 자가 없었다. 변찬린이 세계 최초이다.(13) 심지어 변찬린은 ‘풍류는 선(僊)’이라고 한다.

다음 호에서 “변찬린의 선맥신학과 유동식의 풍류신학”을 주제로 대화하기로 한다.



미주
(미주 1) 심상태, 「새 50주년을 위한 토착화 신학 진로 모색」, 『신학전망』177, 30-64,
(미주 2) 길희성, 「한국 개신교 토착신학의 전개와 문제점들」, 『종교·신학 연구』1, 347-356; 최준식, 「한국의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 본 기독교 토착화 신학」, 『신학사상』 82, 1993, 113-124.
(미주 3) 필자가 하늘님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천주교의 하느님과 개신교의 하나님과 구별한 한국의 고유한 지고신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미주 4) 변찬린, 『聖經의 原理』下(서울: 도서출판 가나안, 1982), 1.
(미주 5) 유동식의 저술은 『素琴 柳東植 全集(10권)』(2009)에 간행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미주 6) 최준식, 「한국의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 본 기독교 토착화 신학」, 『신학사상』82, 1993, 115-116.
(미주 7) 김상근, 「1980년대의 풍류신학과 21세기 선교 신학」, 『신학사상』, 『한국문화신학회논문집』10, 2007, 164-183.
(미주 8) 소금 유동식 전집 간행위원회, 『素琴 柳東植 全集(10권)』, 한들출판사, 2009, 476-477.
(미주 9) 허호익,「단군신화의 기독교 신학적 이해」『단군신화와 그리스도교』, 대한기독교서회, 2003, 253.
(미주 10) 김광식, 「샤마니즘과 風流神學」, 『신학논단』 21, 1993, 59-81.
(미주 11) 이진구, 「샤마니즘을 보는 개신교의 시선」, 『기독교사상』, 2017, 59-61.
(미주 12) 소금 유동식 박사 고희 기념논문집 출판위원회, 『한국종교와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3, 126-127.
(미주 13) 김상일, 「한국의 풍류사상과 기독교를 선맥사상으로 융합한 사상가의 복원」, 《교수신문》 6면, 2017.12.18.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생전 인터뷰1-3] 유동식 교수, “신학의 동기는 초월의 의지” : 베리타스

[생전 인터뷰1] 유동식 교수, “신학의 동기는 초월의 의지” : 학술 : 베리타스



[생전 인터뷰1] 유동식 교수, “신학의 동기는 초월의 의지”
[기획 대담]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 1부
입력 Feb 19, 2015 


[편집자 주]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의 자택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듯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운 정원을 끼고 있었다. 목줄 달린 강아지 한 마리가 오랜 지인인 듯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정원에서는 정원을 가득 메웠을 목향의 기억과 30년간 드나들던 인적의 기억도 약간의 낯설음을 실은 반가운 얼굴을 하고 문가에 서있었다. 나무와 토양의 향취, 그리고 사람살이의 흔적은 그 정원뿐만 아니라 집의 건물에도 스며있어서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음,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음의 의미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유 교수의 토착화 신학은 이처럼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토착화 신학은 하나님의 위상을 지역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유 교수로부터 그의 신학적 토대와 가능성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을 총 3부에 걸쳐 싣는다.

▲2월 초 한국 신학계의 대표적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를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에서 본지는 토착화신학의 1세대라 불리는 그의 신학과 삶의 궤적을 조명하며 한국 신학의 어제와 오늘을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해 봤다. ⓒ사진=지유석 기자


이인기 국장(문): 황해도 남천에서 출생하셨는데, 험난한 한국사의 격량을 겪으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 항간에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혹시 이 영화를 보셨는지요?
유동식 교수(유):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가 데려가지 않으면 외출하기가 힘이 듭니다. 밤에 외출하거나 시내에 나갈 때는 교인들이 나를 데리러 와요. 최근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봤는데 <국제시장>은 못 봤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과거이니까 그 영화의 내용은 알고 있지요.
문: 혹시 625동란 중에 피난을 오셨나요?
유: 아니요. 황해도에서 국민학교 때 춘천으로 이사를 왔지요. 그 대신 일본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학병에 끌려갔고 학병으로 2년간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구마모도에서 학병으로 있었어요. 약 20여명이 끌려갔는데 반은 중국으로 보내고 반은 남양으로 보내게 되었거든요. 그때 중국으로 갈 사람들은 갔는데, 남양으로 갈 사람들은 폭격 때문에 출발을 못하고 기다리다가 결국 못 갔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지요.
문: 이렇게 역사적 체험과 관련하여 질문을 시작하는 이유는 토착화 신학의 기저에 역사적 체험의 특이성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신학적 사고가 역사와 현실과 신앙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유: 그렇지요. 역사를 이야기하니까 말하는데 나의 인생에 있어서 두드러진 역사적 경험은 내가 체험한 구원과, 그리고 외적으로 815해방, 625동란 두 번다 죽을 고비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을 받았던 일입니다. 모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원을 체험한 경우에 해당해요.
구원을 역사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현장 속에서 내가 겪은 초월적 체험이 나의 신학을 구성하는 씨앗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적인 입장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난으로부터의 초월, 혹은 승화가 내 신학의 동기였다는 말입니다.
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개인적인 체험을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개인의 독특한 경험은 실로 중요하다. 유동식 교수 역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높이 사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일방적 은총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유: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초월적인 체험이 나의 인생 이력에서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는 원리를 부지불식간에 나에게 알려주었지요. 우리 세대는 민족적 열등의식에 많이 시달렸거든요? 그 열등의식이 현실이었고 그러한 열등의식 때문에 초월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릴 때 나는 사람들이 모두 다 크리스천인줄 알았어요. 나는 3대째 기독교인입니다. 어릴 때 조부모님과 살았는데 조부모님들은 예배보고 기도하는 것이 생활이었지요. 조그만 시골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늘 반복되니까 그것이 생활인 줄 안 겁니다. 동네 아이들이 교회에 안 가는 것이 이상해 보였어요. 신앙생활 자체가 나의 성장환경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을 겪고서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나는 유아세례 받고 난 뒤 공식적인 절차로서 신앙고백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문: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이어왔던 상황이라면 딱히 핍박을 경험한 것은 아닐 텐데, 식민지인으로서의 열등의식이 신학을 공부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말씀이신지요?
유: 우리 세대는 민족적인 열등의식에 많이 시달렸어요. 나는 일제시대에 학창생활을 하면서 1937년까지는 조선어를 한 시간 배웠는데, 그 이후에는 그 시간을 없애고 교련을 시키더니 창씨개명을 시키고 우리말을 못하게 하더군요. 거기서 오는 반발심도 있었지만 민족적인 열등의식이 더 컸습니다. 집에서는 장손이라서 떠받들려 살았는데 밖에 나오니까 그 민족적 열등의식은 나의 전 존재를 압박했어요. 그 당시에 이런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할까가 나의 화두였습니다.
당시는 취직을 잘하려면 과학을 전공해야 했는데 연희전문에 가서 과학 공부를 했었지요. 그러다가 적성이 안 맞아서 고민하던 중에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대상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문: 일본 동부신학교에서 신학을 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유: 네, 1943년에 동부신학교에 입학했지요. 전시에 동경에 있던 아오야마, 명치, 일본, 루터 신학교가 동부신학교로 통합되었습니다. 관서, 동지사를 합쳐서 서부신학교라고 불렀고요. 그런데 입학하기 전에 성경과목에 자신이 없어서 신학교에 합격하지 못하면 미술을 해볼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미술에 자질이 있었거든요. 미술에 뛰어났던 동생으로부터 예술은 고난을 승화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예술도 현실의 고난을 극복할 방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족적 열등의식과 전쟁 통의 규제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신학과 예술에 모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문: 실존적인 고민이 그러한 결정을 하게 하셨군요? 이것은 토착화 신학의 문제와 관련 있는 듯 들립니다. 젊었을 때부터 ‘토착화신학’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감신대학보에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란 논문을 게재해 일명 토착화 논쟁을 일으키셨지요?

▲유 교수가 신학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유 교수는 일제 강점기 하에 조선인으로 살았던 데서 비롯된 "열등의식"도 중요 원인 중 하나였다고 설명해 주목을 모았다. ⓒ사진=지유석 기자


유: 그것은 두 번째 열등의식과도 관련 있습니다. 625를 겪고 1956년도에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갔는데, 한국에 있을 때는 기독교가 서양종교라는 인식이 없었어요. 미국에 가보니까 문화자체가 기독교적이더군요. 그러니까 또 하나의 열등의식이 내 속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말도 모자라고 글쓰기도 모자라고 늘 소외된 처지였거든요. 거기서 그야말로 민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지요.
미국에서 기독교문화적인 소외감 혹은 열등의식이 닥쳐오게 되자 요한복음에 달라붙었지요. 배화학교 종교주임을 하는 동안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 요한복음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었는데, 문화적인 차원에서 복음서를 읽어보니까 요한복음이 탈유대주의적인 헬레니즘의 틀에서 씌어졌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불트만을 한국에서는 읽을 수는 없었는데, 미국에서 존 매커리(John Macquarrie) 성공회 신부가 하이데거와 비교하면서 불트만 신학개설서로서 집필한 『실존주의 신학: 하이덱거와 불트만 비교 연구』(An Existentialist Theology: A Comparison of Heidegger and Bultmann, 1955)를 발간한 것을 읽었습니다. 그것을 읽으니까 눈이 확 트였지요. 그후 나는 불트만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국내에서는 식민지인으로서의 열등의식, 미국에서는 문화적인 열등의식에 시달렸기 때문에 토착화 신학에 대한 생각이 든 것이지요.
문: 그러면 토착화 신학의 근거는 요한복음에서 찾으신 것입니까?
유: 그렇지요. 기원후 90년이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는 상황이었거든요.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을 죄인, 혹은 바리새인으로 취급했단 말입니다. 민족적인 한계를 벗어난 해석학적 토대가 거기서 밝혀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에요. 우리역사도 잘 모르고 우리말도 못 썼으니까. 그래서 미국에서 귀국한 뒤에 토착화 신학의 해석적 틀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63년에 스위스 제네바의 보세이 에큐메니칼 센터에서 단기강좌를 듣게 되었는데 주제는 종교간의 대화였고 주 강사가 폴 틸리히였어요. 그때 2주간에 걸친 강의를 받으면서 나름대로 토착화 신학의 윤곽을 그렸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쓴 책이 『한국종교와 기독교』 (1965)입니다. 그 이후로 선교적 과제로서의 토착화를 주제로 논문을 썼고 그때부터 한국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문: 당시로서는 교수님의 논문이 큰 반향을 일으켰겠습니다?
유: 그랬었지요. 진리는 하나인데 민족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요지의 반박이 주류였어요. 결국 불트만의 해석을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단 시비도 일었지요.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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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인터뷰2] “풍류신학, 우주적인 하나님의 복음의 실재를 추구”
[기획 대담]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 2부
입력 Feb 27, 2015

[편집자 주]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의 자택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듯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운 정원을 끼고 있었다. 목줄 달린 강아지 한 마리가 오랜 지인인 듯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정원에서는 정원을 가득 메웠을 목향의 기억과 30년간 드나들던 인적의 기억도 약간의 낯설음을 실은 반가운 얼굴을 하고 문가에 서있었다. 나무와 토양의 향취, 그리고 사람살이의 흔적은 그 정원뿐만 아니라 집의 건물에도 스며있어서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음,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음의 의미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유 교수의 토착화 신학은 이처럼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토착화 신학은 하나님의 위상을 지역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유 교수로부터 그의 신학적 토대와 가능성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을 총 3부에 걸쳐 싣는다.


▲토착화 신학과 관련된 논란이 촉발된 지점은 어디였을까? 혹 제사 문제는 아니었을까? 유동식 교수는 "제사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며 오히려 "축자영감설, 즉 해석학의 문제가 주요 논란 거리였다"고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토착화 신학과 관련된 논란은 주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전개되었습니까? 예를 들어, 제사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유: 제사 문제는 교회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어요. 교회에서는 축자영감설, 즉, 해석학의 문제가 주요 논란거리였습니다. 해석학을 허락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주요 초점이었던 것이지요. 그 당시에 교회 강단의 설교는 여전히 구약성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분이신데 설교는 유대교의 전통에 매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지요. 토착화 신학이 쑥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데도 유대문화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대화하려고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계시하셨지만, 유대민족문화를 중요시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우주적인 진리인데도 굳이 유대민족의 이야기를 문자대로 믿고서 설교를 하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이해에 따라서 하나님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었지요.
문: 토착화 신학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교수님께서 실제로 연구해오셨던 과정을 곁들여서 설명해주시면 시대상황적 이해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유: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말은 스리랑카의 감리교 주교 나일스(D. T. Niles)가 처음 사용했어요. 나는 한국토착화신학으로서의 풍류신학을 연구했습니다. 풍류신학이란 일종의 해석의 틀이지요. 우리가 이해하는 진리도 모두 다 틀에 의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영성의 틀에 의해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우리의 존재로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68년에 샤머니즘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습니다. 우리 민족정신의 뿌리가 샤머니즘이고 우리 민중의 가치관적 뿌리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당시 일본 동경 국학원대학의 호리 이치로 교수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그 분은 멀치아 엘리아데 교수의 친구인데 그 분이 함께 연구하자고 승낙해서 샤머니즘을 공부하게 되었지요.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하고 약간의 해외장학금을 얻어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협동연구를 하는 동안 민간신앙 세미나를 주로 했습니다. 일본의 민간신앙 전통을 연구하면서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를 썼지요. 여기서 주로 다룬 것이 화랑도이며 풍류도였습니다.
나는 화랑도, 풍류도를 천착하는 동안 그것이 기독교와도 연결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에 달하는데, 아시아에서도 특이한 일이거든요? 이것은 기독교가 샤머니즘의 유목문화(기마문화)적 구조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맥족이 기마민족이거든요? 부여, 고구려, 백제, 일본으로 그 문화가 전달된 것이에요. 우리 민족은 샤머니즘을 전수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문화를 가미했습니다. 바이칼 호수 부근의 원시종교가 문화의 옷을 입고 전승되어온 것이 우리의 문화라는 말이지요. 아주 독특합니다.
두드러진 것은 가무를 즐기는 모습, 즉,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대로 제천의식에서 연일 주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 풍습입니다. 이것은 성경 레위기에 나오는 초막절의 행사 풍습과 흡사해요. 그리고 구약에서는 갯버들 가지를 꺾어서 춤을 췄다고 하거든요? 갯버들이 생명을 상징하는데 우리 탈춤에서는 취발이가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춤을 춥니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의 정신이 우리 민족 문화의 DNA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며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정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이런 특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 화랑도이고 풍류도라는 말씀이시군요? 거기서 풍류신학이 창출된 것입니까?
유: 그래요. 이런 특성을 국가교육이념화한 것이 화랑도입니다. 9세기경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화랑도에서 유불선(儒佛仙)의 이념을 포괄하는 민족의 얼을 확인했지요. 중국이나 일본에는 화랑이라는 말이 없어요. 고운 선생이 파악한 화랑의 교육과정에는 유불선의 철학적 사고를 훈련하는 상마이도의(相磨以道義)와 노래와 춤으로써 즐기게 만드는 상열이가락(相悅以歌樂) 그리고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단련하는 유오산수(遊娛山水)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고운 선생이 이것을 풍류도라 명명했지요.
문: 이러한 풍류의 정신이 우리 민족 문화의 DNA라고 보시는 군요. 그러면 현대 한국의 기독교 문화 속에 그러한 문화의 DNA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풍류신학의 주지입니까?
유: 그렇습니다. 그러한 풍류의 정신이 우리의 기독교 문화에서도 드러나야 하는데, 현대 한국기독교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찬송을 잘 부르는 민족이 없는데 한국 기독교는 답습되어온 유교적인 전통에 매달려서 그러한 DNA를 억압해 왔어요. 풍류신학이란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DNA를 되살리는 것입니다. 유교적인 기독교, 율법적인 기독교가 우리의 본래적인 영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 문서와 계율을 숭상하는 문화적 압력이 우리의 본래적인 영성에 작용했다는 말이군요?
유: 영성을 억압한 데는 그러한 문자숭상의 태도와 기복신앙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대 한국의 기독교는 그 영향아래 복음 정신이 왜곡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의 한 원리가 기복신앙인데 거기에 유교적인 형식주의가 결부되어서 현대 한국 기독교의 문화적 특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지요. 나는 우리의 본래적인 모습을 복음의 이해와 연결시켜야 진정한 의미의 복음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샤머니즘의 기복신앙과 유교의 형식주의를 결부시켜서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930년에 이용도라는 부흥사가 있었는데, 그이가 부흥회를 하면서 3년 동안 전국을 휩쓸며 성령의 불을 지폈지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이를 이단으로 매장해버렸습니다. 하나의 역사적인 사례입니다. 우리의 신명에 와 닿는 복음, 우리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복음적 해석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헬레니즘의 보편주의를 통해서 유대교의 계시내용을 신학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풍류도를 틀로 삼아서 복음을 해석해야 합니다.
문: 현재 한국의 교육은 거의 서구화되어 있고 생활풍습도 서구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데 이런 단계에서도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계십니까?
유: 지금은 2단계라고 생각해요. 1930년대만 해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거든요. 이제는 외국박사가 넘치잖아요? 21세기에는 수입신학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풍류신학, 예술신학이 전개될 것이라 전망합니다. 내가 해마다 연초에는 연세대 대학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번에는 풍류신학의 도표를 설명했어요. 풍류라고 하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서 요즘은 예술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외국의 신학이론을 수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내용을 설교한 것이지요.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토착적인 신학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유동식 교수가 2015년 1월11일 연세대학교회 설교 시간에 활용한 복음적 실존의 도해 자료.


문: 우리의 신명에 와 닿는 복음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신학, 토착화 신학이라면, 그것은 통합적 세계관을 기반할 것으로 짐작합니다. 이 통합적 관점을 기독교 신앙과 접목할 때 제일 우려스러운 점은 그것이 혼합주의로 흐를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풍류신학은 혼합주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습니까?
유: 통합이라는 용어를 쓰면 혼합의 우려가 생기지요. 예술과 토착화 신학은 통합보다는 승화에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혼합주의는 종교 간에 쓰는 용어입니다. 한국에서의 혼합주의는 종교혼합을 말하지요.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인데 그것을 흐리니까, 그 점에 대해서 이단시하는 것입니다. 내 입장은 로고스가 역사적 예수로 육화하는 공간, 즉, 도성인신(道成人身), 성육신의 단계가 ‘종교’의 세계인데 이것을 넘지 못하면 혼합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의 세계는 도를 자율적으로 깨닫는 경지가 가능한 영역입니다. 불교가 이러한 ‘종교’의 세계를 대표하지요.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신’의 영역입니다. 도를 닦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율(神律, theonomy)적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십계명)으로 다스리는 타율적 차원과 득도를 목표로 삼는 자율적 차원이 통합된 단계이기도 하구요. 대표적인 것이 성례전입니다. 성찬식에서는 눈에 보이는 포도주와 떡을 먹지만 영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 몸에 지닌다는 의미가 있지 않아요?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은혜입니다. 신율, 즉, 신이 역사하는 경지이지요.
요한복음 14장20절은 이 신율적 경지의 완성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궁극적 완성태인데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헤매면 혼합주의가 되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내가 하나가 되는, 소위 ‘삼태극’의 경지로 들어오면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인격적인 승화를 이루게 됩니다. 복음이 살아나지요. 불교는 여기까지 못 옵니다. 불교는 자율적인 깨달음에까지는 도달하지만 나를 영생으로 구원하는 경지,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에요. 니고데모는 불교의 차원까지는 갔어요. 율법을 넘어서 불교의 차원까지는 갔지만 마지막을 모르니까 예수님을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지요? 거듭나야 한다고. 그 경지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원리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이 주신 은혜를 받아야 도달할 수 있지 자신의 의로만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혼합주의는 자신의 의로 득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지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토착화 신학은 복음의 핵심을 문자나 제도의 틀에 따라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고 우주적인 하나님을 전제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에요. 이 말은 하나님의 우주적 특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주 도처에 임재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종교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서로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어느 단계에 와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완성의 경지를 복음적 실존이라고 지칭한다면, 복음적 실존의 삶을 살 때 “하늘 저편에 가더라도 거기 또한 여기거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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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인터뷰3] “복음적 실존은 하나님의 예술이며 사랑이다”
[기획 대담]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 3부
입력 Mar 05, 2015 



[편집자 주]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의 자택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듯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운 정원을 끼고 있었다. 목줄 달린 강아지 한 마리가 오랜 지인인 듯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정원에서는 정원을 가득 메웠을 목향의 기억과 30년간 드나들던 인적의 기억도 약간의 낯설음을 실은 반가운 얼굴을 하고 문가에 서있었다. 나무와 토양의 향취, 그리고 사람살이의 흔적은 그 정원뿐만 아니라 집의 건물에도 스며있어서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음,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음의 의미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유 교수의 토착화 신학은 이처럼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토착화 신학은 하나님의 위상을 지역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유 교수로부터 그의 신학적 토대와 가능성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을 총 3부에 걸쳐 싣는다.


▲유동식 교수는 "우리는[그리스도인은] 복음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며 "[그]승화의 한 과정으로서 우리의 영성에 의한 복음 이해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주장하는 신학의 방법론으로서의 풍류신학은 우리 민족이 이성 보다는 감성에 의한 존재 이해가 있다는 데에 근거한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복음적 실존이 결국 예술적 성격을 띤다는 말씀이시군요. 고난의 승화가 예술의 원리라면 복음적 실존도 승화를 통해 가능한 영역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수님께서는 현대 한국의 기독교가 타율과 자율의 차원을 넘어서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승화의 경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종교’의 차원에서 그러한 노력을 하다보면 득도는 하겠지만 성령의 은혜를 통한 승화는 불가능합니다. 승화의 한 과정으로서 나는 우리의 영성에 의한 복음 이해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풍류신학입니다.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잖아요? 우리 민족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한 존재 이해가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실상에 대한 전이해를 토대로 복음의 핵심에 접근해야 합니다. 일종의 방법론인 셈이지요.
문: 그러면 풍류신학이 추구하는 복음적 실존이 무엇이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유: 나는 복음적 실존이 삼태극의 경지라고 봅니다. 요한복음 14장20절에 나온 대로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경지입니다. 놀랍게도 그 말씀 뒤에 사랑의 이야기가 나와요. 저 삼태극적인 복음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즉, 복음적 실존은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문: 복음적 실존의 내용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구현되는 공간이 바로 예술의 세계,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풍류신학은 우리의 삶의 속성이 예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겠군요?
유: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과 우주가 모두 예술입니다. 역사와 개인의 삶을 예술로 봐야지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요. 열심히 정직하게 사는데 가난해요... 이것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해요? 계명으로 따지면 십계명 잘 지키고 헌금 잘하면 잘 살아야 하잖아요? 예수님을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고난을 당하지요? 예술이라는 것은 합리의 단계를 넘어선 승화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저 그림 속의 현실에는 고난이 있거든요. 예술은 고난을 승화시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술의 속성이 복음적인 것입니다.
대담 첫머리에 나에게 던진 첫 질문이 “<국제시장>을 봤느냐?” 였지요? 그 영화 속의 실상은 비극이잖습니까? 전쟁이 벌어진 것이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는단 말입니다. 예술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그 차원이 아니고는 복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유동식 교수의 저서 『제3시대와 요한복음』 (동연, 2014) 28쪽에 나오는 '요한의 삼태극 복음' 도해 자료.


문: 승화가 복음의 세계에 토대를 구성하는 원리라는 말씀이시군요.
유: 나는 그것을 복음의 원리라고 말해요. 신앙은 나를 하나님께 맡기는 동시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불가능한 경지입니다. 신율(神律, theonomy)이라는 말은 폴 틸리히가 쓴 말인데 내가 주관적으로 활용하기는 했지만, 자율과 타율이 결합된 경지라는 차원에서는 그 의미가 통합니다.
문: 교수님께서는 풍류신학, 예술신학을 신학적 방법론의 차원에서 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독자들을 위해서 풍류신학이란 이것이다라고 간명하게 정의를 내려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유: 다른 게 아니에요. 첫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복음적 실존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풍류신학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에 나를 죽이고 부활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자기의 의로 득도의 경지에 이르려는 행위적 신앙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는 풍류신학이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복음 정신이 생활 속에서 구현되는 현장을 놓치면 복음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고 보시는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나는 요한이 매우 놀라운 통찰력을 가졌다고 봅니다. 예술적 통찰력을 가졌어요. 표현할 수 없는 야훼를 “빛이다, 영이다, 사랑이다”라고 전제하고서는 빛의 형상화, 영의 형상화, 사랑의 형상화를 논리적으로 전개하잖아요? 우리의 삶의 양상이 복음적 실존을 구현하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 예술이 현실을 초월하여 그것을 승화시키지만 그 본 바탕인 현실을 소실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듯이, 풍류신학도 바로 그러한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하겠지요?

▲유동식 교수가 풍류신학을 통해 추구하는 복음적 실존이란 무엇일까? 그의 복음적 실존은 현실을 초월하면서도 현실을 포용하는, 승화의 경지를 넘어 서 있다. ⓒ사진=지유석 기자

유: 나는 차원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초월된 본 바탕으로서의 차원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갖고서 승화하는 것입니다. 일차원 없이 이차원이 없고 이차원 없이 삼차원이 없는 것 아니겠어요? 영의 세계인 5차원과 시간의 세계인 4차원이 하나가 된 것이 6차원의 세계, 즉, ‘종교’의 차원입니다. 성육신은 6차원적인 세계의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7차원적인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차원을 통과하지 않으면 4차원의 틀 안에서만 맴도는 것입니다. 4차원에서 7차원의 일을 도모하려면 장삿속으로 흐를 수밖에 없어요. 구원파 유병언이 대표적입니다. 4차원적인 생각들에 머물다보니 성적이거나 금전적인 문제들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문: 현실을 초월하면서도 현실을 포용하는 것이 승화의 경지라면 티끌 속에 우주가 있고 한 순간이 영원을 담보하는 경지가 복음적 실존의 세계인 것이지요?
유: 복음적 실존은 그 경지를 넘어섭니다. 예를 들어, 복음적 실존은 하루가 천 날 같고 천 날이 하루 같은 경지를 포함하지만 복음적 실존의 완성태를 고려한다면 천 날도 너무 짧아요. 그것은 영원의 세계이니까. 절대시간이자 절대공간을 지칭합니다.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그 경지에 대한 이해가 절실해져요. 언제 부르실지 모르니까.
지금 내가 당신과 대화하는 순간이 영원에 기록되는 일이거든요? 이런 사실을 알아야 현재를 의미 있게 살 수 있어요. 복음적 실존을 구현하면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문: 그런 복음적 실존이 교회 안에서 구현된다면 현재의 교계의 분열도 해결될 것 같습니다.
유: 그럼요. 교회일치는 복음 이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개개인이 개성을 갖고 사는 것이니까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다보면 분파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그것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안 됩니다. 다만 복음의 핵심을 훼손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않다면 환경 따라서 문화 따라서 얼마든지 모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니에요.
문: 지금은 너무 분열해서 탈입니다.

▲유동식 교수가 직접 그린 삼태극.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나가 하나로 되는 경지를 나타낸다. ⓒ사진=지유석 기자


유: 왜 남의 일에 간섭들을 하는지 몰라요. 원효의 글에 위관규천(葦管窺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갈대의 구멍으로 하늘을 본다는 말입니다. 각자는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면서 자기만 하늘을 봤다고 우기는 거에요, 다른 사람은 못 봤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세상을 알차게 봤다고 주장하는데 고작 갈대 구멍 속의 하늘이잖아요? 문제는 최종지향이 복음적 실존이냐 아니냐입니다. 사랑이냐 돈벌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을 판단해야 해요. 복음적 실존, 즉, 삼태극적 존재...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만 확실하면 그 이외는 문화운동일 따름이에요. 각자가 개성에 따라서 활동하는 것을 인정해야지요.
문: 결국은 복음적 실존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은 채 신앙을 제도로서, 계율로서 이해하다보니 한국교회 자체가 형식주의, 기복신앙에 매달린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비판을 극복하는 길은 복음적 실존에 대한 이해가 명백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유: 그래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해요. 종교개혁에서 ‘믿음만으로, 성서만으로’라는 정신을 지금 말로 하면, ‘복음만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어요. 물론 해석의 틀이 여기서도 달라지겠지만, 나는 예술신학적인 차원에서 해석합니다. 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 했듯이, 나는 복음적 실존이 창조적 사랑이라고 봅니다. 모든 행복과 기쁨은 거기서 나오거든요. 이것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밤낮 장삿속으로 교회가 운영되는 것입니다.
문: 귀한 말씀을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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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인터뷰2] “풍류신학, 우주적인 하나님의 복음의 실재를 추구”



[생전 인터뷰1] 유동식 교수, “신학의 동기는 초월의 의지”



“붓 놀림속에서 창조 세계와 복음의 실존을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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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신학’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 100세로 소천 : 목회/신학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풍류신학’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 100세로 소천 : 목회/신학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풍류신학’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 100세로 소천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입력 : 2022.10.19 




▲故 유동식 교수. ⓒ크투 DB
원로 신학자 소금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가 18일 오후 12시 15분 향년 100세로 소천받았다.






1922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유동식 전 교수는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고쿠가쿠인(國學院) 대학 등에서 공부했다. 연희전문 재학 중엔 윤동주 시인과 함께 공부했다.


감신대 교수로 재직한 후 1973-1988년 연세대 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인은 민족적 열등감 극복 차원에서 유불선(儒佛仙)을 통합한 최치원의 ‘풍류도’에 기초해 ‘풍류신학’을 정립했다. 그는 풍류신학에 대해 “억압된 민족 고유의 영적인 DNA를 되살려내는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예수의 신>(1954), <한국감리교회 사상사>(1993)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1997), <제3시대와 요한복음>(2014) 등 수십 권이 있다.



지난해에는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를 기리며 한국학과 관련 분야에서 업적을 쌓은 석학에게 주는 용재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고인의 시신은 생전 유지에 따라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됐다.


유족으로는 아들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8호실이다. 장례예배는 20일 오전 9시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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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식 (신학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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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식 (신학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금(素琴) 유동식(柳東植)
본명유동식(柳東植)
출생1922년 11월 22일
황해도 평산군 남천
사망2022년 10월 18일
서울시 서대문구 봉천동
국적대한민국
학력춘천고등학교 졸업
감리교신학교 졸업
보스턴대학교 신학석사
스위스 에큐메닐칼연구원 Dipl.
동경대학교 종교학/종교사학 연구
국학원대학 문학박사
경력공주여자사범학교 교사
전주사범학교 교사
배화여자고등학교종교주임
감리교신학대학 전임강사/조교수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
세계신학교육기금위원회 위원
연세대학교 교수
국제기독교대학 객원교수
직업신학자
상훈한국출판 문화상 저작상
3.1 문화상 학술상
용재학술상

유동식(柳東植, 1922년 11월 22일~2022년 10월 18일)은 대한민국 신학자이다. 그는 한국에서 토착화(土着化) 신학의 논쟁을 일으킨 장본인[1]으로 한국의 토착종교인 무교(巫敎, 무속신앙)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해석[2]을 시도했다. 그는 고운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고유한 (영성)을 풍류도로 보고, 풍류신학을 제안하고 발전시켰다. 유동식은 한국에서 예술신학이라는 미지의 분야를 개척한 최초의 신학자로 평가[3] 받고, 그의 저작은 한국적 신학의 남상(濫觴)으로 평가[4] 받는다.

백수(白壽)를 누린 평신도(平信徒) 예술(藝術) 신학자[5][편집]

소금 유동식 선생은 백수(白壽)를 누린 평신도(平信徒) 예술(藝術) 신학자이다. 물론 우리는 ‘신학자’라는 꼬리표와 몇 가지 수식으로 선생의 삶을 제한할 수 없다. 여기서는 학자로서 유동식을 단편만을 소개하려 한다.

백수를 누린 신학자[편집]

1922년 11월 22일에 황해도 평산군 남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동문 근처 자택에서 말년을 보낸 선생은 2022 년 10월 18일에 소천했다. 생전 숫자 2와 인연이 깊다 말한 선생이 2022년에 생을 마쳤으니, 그 인연이 한 층 더 깊어졌을까. 선생은 세는나이 101세로 백수(百壽)를 넘기고, 만 나이 99세로 백수(白壽)였다. 이 또한 한국과 서양의 나이 사이에서 100을 맞춰 살았으니, 평소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던 선생답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삶은 그 긴 시간만큼이나 역동의 근대 한국사를 그대로 품고 지나왔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과 피난의 삶,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 과정을 모두 겪었다. 말년에는 ‘강남스타일’로 대표되는 이른바 ‘한류’까지 목도하고 이를 자신의 풍류신학과 관련하여 논하기도 했다. 화랑의 풍류도에서 시작된 그의 풍류신학은 기마민족(騎馬民族)의 기상이 세계에 위상을 떨친 소위 ‘말춤’으로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평신도 신학자[편집]

선생이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신도 신학자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음주에 거리낌이 없어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다 말했지만, 제도적 겉치레가 선생의 삶과 사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때때로 학문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국 신학계에서, 그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한국적 기독교 영성을 화랑의 정신에 기초한 풍류도에서 찾고자 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1960년 홍콩에서 열린 평신도와 청년 지도자를 위한 강습회에 초청되어 참가했다. 또 그는 1963년과 1964년에는 스위스 보세이 에큐메니컬 연구원으로서 타 종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72년에 일본 국학원대학에서 한국 무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한국에 많은 신학자가 있지만, 한국 전통 종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자는 그가 유일하다. 그는 교계와 학계의 정해진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사상을 펼친 신학자였다.

예술 신학자[편집]

선생은 성서학, 선교학, 조직신학 등 신학의 다양한 분과에 두루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신학을 넘어 예술에 대한 선생의 학문적 관심과 성과는 그를 예술 신학자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작품 속의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의 미학구조와 관계를 분석하고, 이를 기독교 계시와 연결하여 재해석한다. 선생은 자신의 풍류신학의 본론과 결론이 예술신학이라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생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학과 출장길에 항상 그림도구를 챙겨 다니며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선생에게 예술은 학문적 연구 대상이자 취미이자 중요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소금 유동식은 자신이 펼친 사상 그대로, 한 멋진 삶을 살아낸 풍류객이었다.

생애[6][편집]

유동식을 신학의 길로 이끈 것은 가정의 분위기와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22년 11월 22일 황해도 평산군 남천에서 3대째 기독교인으로 태어났으며, 당시에 황해도에 남감리교가 선교하고 있었기에 그의 가족은 모두 감리교인이 되었다. 유동식은 그의 조부가 “성경에 파묻혀 언제나 유유자적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조리가 가득한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환경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인권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 같은 것이 생리화”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유동식은 어려서부터 일제강점기를 살았고, 그 시대 속에서 신앙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는 민족성이 말살되고,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을 경멸하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 신앙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갈등을 느꼈고, 그 결과 민족과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찾기 시작하였 다. 즉, 일제의 무단 수탈과 억압, 민족적 아픔의 현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기반으로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서 신념을 가졌던 그에게 있어서 기독 교 신앙의 의미와 가치에 관하여 묻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의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이 ‘절대적 가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 즉,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는 ‘신학의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1943년 봄에 동경으로 건너가 동부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유동식은 동부신학교로 가고 일 년도 안 되어 “반도 학도의 특별 지원병 제”를 통해 강제 징집되어, 1년 8개월여 동안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 시절에 대하여 “비인격화된 군인생활과 폭격의 공포는 매일같이 「죽음의 연습」을 되풀이하게” 해주었다고 회상한다. 후에 그는 전쟁터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 해방의 경험에 대하여 “실존적인 부활을 체험”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 리고 이러한 전쟁과 해방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신학의 전통에 매이지 않게 만들었으며, 그의 인생과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뿌리체험 혹은 원체험”이 되었다.

해방 후, 유동식은 감리교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고, 이 시기에 동양적인 영성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함석헌과 승려인 탄허로, 유동식이 보기에 함석헌의 강의에는 종교, 시, 동양사상이 융합된 세계가 있었으며, 탄허를 통하여 공부하게 된 『장자(莊子)』 「내편(內篇)」은 그에게 성서만큼 이나 ‘참 사람’의 경지를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는 눈을 주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동식은 피난 중에 전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목회자로 있었던 고득순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에 대하여 그는 “6.25가 내게 준 하나의 큰 혜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고득순이 유동식의 심허속천(心虛屬天)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그를 통하여 유동식은 한국의 이상적인 목회자상을 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유동식은 1954년부터 배화여자고등학교에서 종교 주임으로 학생들을 가르 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예수의 교훈을 중심으로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만 가르쳐주면 족하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1954년에 『예수의 근본문제』라는 책으로 발간된다. 그곳에서 2년 남짓의 종교 주임으로 일한 후에 1956년에 유동식은 ‘십자군 장학기금’을 받고 보스턴대학에서 신약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성경』, 『노자(老子)』, 영어사전을 가지고 갔으며, ‘요한복음의 근본사상’을 주제로 그것을 동양의 도(道)의 입장에서 연구하고자 하였다. 즉, 유동식은 학문으로서 신학 작업 이전에 이미 “동양사상과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신학, 곧 토착화신학 수립을 위한 기틀”을 서서히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스턴대학교에서 유동식에게 주어진 문제의식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였다. 그는 미국에서 C. H. 다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과 루돌프 불트만(Rudolf K. Bultmann)의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특별히 불트만의 신학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東西의 벽이 무너지고, 道와 로고스가 서로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했을 때엔 몹시 기뻤다. 非神話化論은 성서해석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분야에서도 응용될 수 있는 解釋學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한 다. 그리고 그의 영향으로부터 시대적, 문화적 제약 아래에 있는 표현 양식보다는 진리의 본질을 실존론적(實存論的)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유동식이 불트만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동식은 “성서를 다시 보는 눈을 그분[불트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불트만의 신학이 아닌, 그의 성서해석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김경재와 김광식은 유동식의 신학이 불트만의 신학 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스턴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 그는 복음의 실상과 한국문화 속에서 그것을 의미 있게 전달하는 문제를 고민하였 고, 『요한서신 주석』을 집필하면서 먼저 복음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1960년 겨울, 홍콩에서 열린 평신도와 청년 지도자를 위한 강습회에서 유동식은 헨드릭 크래머(Hendrik Kramer)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타 종교 이해와 커뮤니케이션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크래머의 영향으로 유동식은 성서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 전통을 구분하게 되었으며, 동양종교도 성서적 실재(實 在)의 입장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1963년 5월, 유동식은 WCC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 가게 되며, 제네바 근처에 있는 보세이 에큐메니컬 연구원으로 지내면서 타 종교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에 관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내면서 기독교가 서양의 종교라고 느끼게 되었고, 한국종교의 의미에 관하여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 입장에서 한국종교에 대하여 정리하고, 선교 신학적인 관심에서 글을 쓰면서, 『한국종교와 기독교』와 『도와 로고스』가 출판된다. 이러한 점에서 유동식에게 있어서 한국의 문화와 종교, 토착화 신학이라는 주제는 식민지 치하와 서양과의 만남을 통하여 한국인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면서 도출된 신학적 주제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종교와 기독교』가 출간된 이후에, 유동식은 한국인의 종교적 영성을 본격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유동식이 보기에 한국 문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 종교였고, 복음이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이 영성이었기에, 토착화를 위해서도 한국인의 영성이 규명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무교(巫敎)가 한국인의 전통종교라는 생각으로 1968년 9월부터 도쿄대학(東京大学) 문학부 대학원에서 연구하게 된다. 유동식은 그곳에서 민속종교학자인 호리 이치로(堀一郎)에게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를 배우면서 샤머니즘에 대하여 폭넓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고, 1972년에 “한국샤머니즘의 歷史와 構造的 特質”이라는 이름의 논문으로 고쿠가쿠인대학(國學院大學)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라는 책이 1975년도에 출간된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6월 말까지 유동식은 동경에 있는 국제기독교대학(ICU)에서 한국 사상사를 강의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그는 한국인의 얼(영성)을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는 유동식이 한국의 사상사를 한국인의 얼(영성)의 전개사(展開史)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의 영성을 풍류도(風流道)로 규정하고, 풍류도의 전개를 바탕으로 한국신학 사상사와 한국종교 사상사의 구조를 정리하였으며, 한국 문화사(文化史)를 풍류 문화의 형성 과정사(過程史)로 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유동식은 한민족의 문화와 기독교 신앙, 신학과 만남의 장으로서 풍류도를 발견하게 되었고,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풍류신학의 정립, 곧 “풍류도와 기독교 복음과의 접목을 통해 한국신학을 정립하는 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신학 여정을 “풍류신학으로의 여로”로 표현하게 된다.

후에 유동식은 종교와 예술이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이며, 풍류도가 종교적 영성이자 예술적 영성이기에 “예술신학은 풍류신학의 본론인 동시에 결론”이 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신학 사상을 예술신학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여기에 서 그는 “역사, 민족, 인간, 삶, 복음, 전쟁과 사랑, 자유 등을 예술론적으로 해석” 하며, 서양과 한국의 미술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도를 한다. 그리 하여 유동식은 예술신학에서 불교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불교문화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 가운데에서 “석굴암은 불교 미술의 결정체요,... 인류 문화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하나님의 묵시가 담겨 있는 거작”이라고 말한다.

약력[7][편집]

학력[편집]

1940. 춘천고등학교 졸업
1948. 감리교신학교 졸업
1958. 보스턴대학교신학석사
1964. 스위스 에큐메니칼연구원 Diploma
1968-1969. 동경대학교 종교학/종교사학 연구
1972. 국학원대학 문학박사

경력[편집]

1948-1950. 공주여자사범학교 교사
1951-1953. 전주사범학교 교사
1954-1956. 배화여자고등학교 종교주임
1959-1967. 감리교신학대학 전임강사/조교수
1962-1972.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
1971-1977. 세계신학교육기금위원회 위원
1973-1988.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1979-1980. 국제기독교대학 객원교수

수상[편집]

1976. 한국출판 문화상 저작상한국일보사
1998. 3.1 문화상 학술상3.1문화재단
2021. 용재학술상연세대학교

저작[8][편집]

소금 유동식 전집[편집]

소금유동식전집편찬위원회. 『素琴 柳東植 全集』 제1권, 성서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제2권, 선교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제3권, 종교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제4권, 신학사.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제5권, 교회사 I.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제6권, 교회사 II.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제7권, 풍류신학 I.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제8권, 풍류신학 II.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제9권, 풍류신학 III.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제10권, 소금과 그의 신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9.
_____. 『素琴 柳東植 全集』 별권, 신학과 예술의 만남. 서울: 한들출판사, 2010.

저서 및 편서[편집]

유동식. 『택함받은 나그네 들에게』 전주: 南門外敎會基督靑年會, 1952. - 소금 유동식 전집 1권에 실림.
_____. 『예수의 根本問題』 서울: 心友園, 1954. - 소금 유동식 전집 1권에 실림.
_____. 『요한서신 주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2. - 소금 유동식 전집 1권에 실림.
_____. 『韓國 宗敎와 基督敎』 서울: 大韓基督敎書會, 1965. - 소금 유동식 전집 2권에 실림.
_____. 『神은 죽었는가?』 서울: 弘人書院, 1966.
_____. 『文獻目錄 : 韓國의 家族과 宗敎에 關한 硏究, 1945-1970』 Tokyo: Centre for East Asian Cultural Studies, 1972.
_____ 외. 『聖書神學과 宣敎 : 晩穗金正俊博士華甲紀念論文集』 서울: 韓國神學大學 出版部, 1974.
_____. 『예수 바울 요한』 서울: 大韓基督敎書會, 1975. - 소금 유동식 전집 1권에 실림.
_____. 『韓國 巫敎의 歷史와 構造』 서울: 延世大學校 出版部, 1975. - 소금 유동식 전집 3권에 실림.
_____ 외. 『韓國 思想史의 主流』 韓國思想硏究會 編. 서울: 景仁文化社, 1975.
_____. 『道와 로고스 : 宣敎와 韓國神學의 課題』 서울: 大韓基督敎出版社, 1978. - 소금 유동식 전집 2권에 실림.
_____. 『民俗宗敎와 韓國 文化』 서울: 現代思想社, 1978. - 소금 유동식 전집 2권에 실림.
_____. 『散花歌 : 柳東植 隨想集』 서울: 正宇社, 1978. - 소금 유동식 전집 8권에 실림.
_____ 외. 『한국 교회 성령운동의 현상과 구조』 크리스챤아카데미 편. 서울: 크리스챤아카데미, 1982.
_____. 『韓國 神學의 鑛脈 : 韓國 神學思想史 序說』 서울: 展望社, 1982. - 소금 유동식 전집 4권에 실림.
_____. 『韓國巫敎의 歷史와 構造』 서울: 延世大學校 出版部, 1985. - 소금 유동식 전집 3권에 실림.
_____, 금장태. 『韓國 宗敎思想史, 2, 儒敎 基督敎 篇』 서울: 延世大學校 出版部, 1986.
_____. 『韓国のキリスト教』 일본: 동경대학출판회, 1987. - 소금 유동식 전집 6권에 실림.
_____. 『風流神學으로의 旅路』 서울: 展望社, 1988. - 소금 유동식 전집 7권에 실림.
_____.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1988. - 소금 유동식 전집 5권에 실림.
_____.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사 : 1906-1990』 서울: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 1990. - 소금 유동식 전집 6권에 실림.
_____. 『정동제일교회의 역사 : 1885-1990』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정동제일교회, 1992.
_____. 『風流道와 韓國神學』 서울: 展望社, 1992. - 소금 유동식 전집 7권에 실림.
_____. 『韓國 宗敎思想史, 5, 經典集』 서울: 延世大學校 出版部, 1992.
_____ 외. 『공동체 신학의 모색』 크리스챤 아카데미 신학연구위원회 편. 서울: 展望社, 1992.
_____ 외. 『韓國 宗敎와 韓國 神學 : 素石 柳東植 博士 古稀 記念 論文集』 서울: 韓國神學硏究所, 1993.
_____.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 1884-1992, 1권』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1994.
_____.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 1884-1992, 2권』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1994.
_____. 『風流道와 한국의 종교사상』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7. - 소금 유동식 전집 8권에 실림.
_____ 외. 『기독교와 한국 역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7.
_____. 『한국신학의 광맥』 서울: 다산글방, 2000. - 소금 유동식 전집 4권에 실림.
_____. 『종교와 예술의 뒤안길에서』 서울: 한들출판사, 2002. - 소금 유동식 전집 10권에 실림.
_____ 외. 『한국문화와 풍류신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2. - 소금 유동식 전집 10권에 실림.
_____ 외. 『韓國佛敎學硏究叢書. 74 : 新羅佛敎篇 : 阿彌陀·觀音信仰 및 기타 1』 고양: 불함문화사, 2003.
_____ 외. 『韓國佛敎學硏究叢書. 3 : 總說篇 : 佛敎와 民俗』 고양: 불함문화사, 2003.
_____. 『풍류도와 예술신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6. - 소금 유동식 전집 9권에 실림.
_____. 『풍류도와 요한복음』 서울: 한들출판사, 2007. - 소금 유동식 전집 9권에 실림.
_____. 『한국문화와 기독교』 서울: 한들출판사, 2009. - 소금 유동식 전집 9권에 실림.
_____ 외. 『내가 믿는 부활 : 삶의 신학 콜로키움』 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12.
_____ 외.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찾아서 : 신반포교회 평신도 아카데미』 서울: 동연, 2012.
_____. 『제3시대와 요한복음』 서울: 동연, 2014.
_____, 최종고. 『화가목사 이연호 평전 : 신과 인간, 미술에서 만나다』 서울: 한들출판사, 2014.
_____ 외.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 '나'라는 물음 끝에 다시 던져진 질문』 파주: 21세기북스, 2016.
_____. 『소금산조』 서울: 한들, 2017.
윤정은. 『영혼의 노래 : 흰돌 윤정은 시집』 유동식 엮음. 서울: 한들출판사, 2005. - 소금 유동식 전집 9권에 실림.

역서[편집]

녹스, 존. 『人間 그리스도 예수』 유동식 옮김. 서울: 조알社, 1955.
불트만, 루돌프. 『聖書의 實存論的 理解 : 新約聖書와 神話論』 유동식 옮김. 서울: 新楊社, 檀紀4292[1959],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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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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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의 일본어와 영어 논문은 『소금 유동식 전집』 제10권 544-545쪽 참조.

관련 기사[편집]

백승인. 연세신학 시민강좌서 ‘한국문화와 기독교’ 다뤄. 천지일보. 2009년 3월 11일.
강수경. 토착화 신학 선구자 소금 유동식 박사. 천지일보. 2012년 5월 9일.
정성경. 소금(素琴) 유동식 교수(연세대학교 신학과 은퇴교수), “신학은 역사와 철학의 터 위에 배워야…”. GOSPELTODAY. 2019년 1월 17일.
김한수. 안경·보청기 없이 12년째 신년 설교… 내년 예배계획까지 세워둔 99세 신학자. 조선일보. 2020년 7월 16일.
조현. 100살 신학자 유동식 “우리의 혼 풍류도를 발현해 세계인을 열광케 하라”. 한겨레. 2021년 1월 20일.
명승일. 제27회 용재상에 유동식 연세대 은퇴교수 선정. 천지일보. 2021년 3월 18일.
김한수. ‘풍류 신학’ 개척자 유동식 박사… 만 99세로 용재상 수상. 조선일보. 2021년 3월 19일.
한상형. 유동식 연세대학교 은퇴교수, 제27회 용재학술상 수상. 한국강사신문. 2021년 3월 19일.
박명윤. ‘100세 건강’ 유동식 풍류신학자 2021 용재학술상. THE ASIAN. 2021년 4월 5일.
김광주. 연세대, 제27회 용재상학술상에 '기독교계 석학' 유동식 교수. 뉴시스. 2021년 11월 18일.
이원지. 연세대, 용재학술상에 유동식 연세대 은퇴교수 선정. 한국대학신문. 2021년. 11월 18일.
김한수. 연말엔 102세, 연초엔 100세 어르신이 설교하는 교회. 조선일보. 2022년 1월 12일.
김한수. 유·불·선 통합한 ‘풍류 신학’의 개척자… 유동식 前 연세대 교수 별세. 조선일보. 2022년 10월 18일.
이지수. ‘풍류신학’ 소금 유동식 박사 별세. 베리타스. 2022년 10월 18일.
조현. 토착신앙인 무교 연구해 ‘풍류신학’ 주창한 원로신학자. 한겨례. 2022년 10월 18일.
신효령. '풍류 신학' 개척자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 별세…향년 100세. 뉴시스.
김진한. “풍류신학, 우리 민족의 영적 DNA 중요성 알려”: ‘하늘 나그네’ 고 유동신 전 연세대 교수 장례예식 열려. 베리타스. 2022년 10월 20일.
이대웅. ‘풍류신학’ 유동식 전 연세대 교수, 100세로 소천. 기독일보. 2022년 10월 20.
이연경. ‘풍류신학’ 창시한 유동식 선생 별세. 주간기독교. 2022년 11월 8일.

관련 영상[편집]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1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2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3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4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5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6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7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8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9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10 of 11) - 유튜브
소금 유동식 박사 초청 특별 신학 강좌 (11 of 11) - 유튜브
79회 국민강좌 - 유튜브
예술목회에 대하여(1부 하나님의 작품 우주와 인간)-유동식 교수(예술목회연구원 미디어특강) - 유튜브
예술목회에 대하여(2부 말씀과 예수)-유동식 교수(예술목회연구원 미디어특강) - 유튜브
예술목회에 대하여(3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 유동식 교수(예술목회연구원 미디어특강) - 유튜브
예술목회에 대하여(4부 그리스도인의 예술적인 삶) -유동식 교수(예술목회연구원 미디어특강) - 유튜브
예술목회에 대하여(5부 예술적인 목회)-유동식 교수(예술목회연구원 미디어특강) - 유튜브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풍류도와 한국문화의 구조 (유동식 교수) - 유튜브
하나님의예술과복음적실존1 - 유튜브
하나님의예술과복음적실존2 - 유튜브
하나님의예술과복음적실존4 - 유튜브
하나님의예술과복음적실존5 - 유튜브
한국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 인터뷰 - 유튜브
서유석TV 1회 유동식 박사와 함께 - 유튜브
한국문화와 기독교 1강 풍류도와 진생도 2강 통전적 우주 - 유튜브
한국문화와 기독교 3강 통전적 인간 4강 통전적 종교 - 유튜브
한국 문화와 기독교 5강 종교와 그림예술 6강 성서계 만다라 - 유튜브
한국 문화와 기독교 7강 한국종교문화와 기독교 8강 아름다운움과 복음의 예술 - 유튜브
한국 문화와 기독교 9강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인 10강 한 멋진 삶의 복음 - 유튜브
기독교인이 일본엔 적고, 한국엔 많은 이유 | 유불선을 통달해서 나오는 한국 특유의 멋 | 풍류신학 유동식 교수 | 무사도와 풍류도의 차이 - 유튜브
유동식 교수 설교와 기도의 핵심 | 기독교와 삼태극의 접목 | 풍류신학 - 유튜브
백세의 풍류도인(風流道人) 유동식(柳東植) 교수를 만나다 - 유튜브
2022.01.09 주일 예배 | 말씀증언 - 성령의 역사와 복음적 실존 - 유튜브

출처[편집]

  1.  손호현. "한 멋진 삶의 풍경화". 『素琴 柳東植 全集』 제10권. 소금유동식전집편찬위원회 편. 서울: 한들출판사, 2009. 576.
  2.  손호현. "한 멋진 삶의 풍경화". 『素琴 柳東植 全集』 제10권. 소금유동식전집편찬위원회 편. 서울: 한들출판사, 2009. 577.
  3.  손호현. "한 멋진 삶의 풍경화". 『素琴 柳東植 全集』 제10권. 소금유동식전집편찬위원회 편. 서울: 한들출판사, 2009. 578.
  4.  김용옥. 『요한복음 강해』 통나무, 2007. 508; 김경재. "유동식의 문화신학에서 삼태극적 구조론의 의미." 『素琴 柳東植 全集』 제10권. 소금유동식전집편찬위원회 편. 서울: 한들출판사, 2009. 549에서 재인용.
  5.  이 글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소금유동식아카이브를 위한 소개글로 편집되고 있습니다.
  6.  오혁.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의 신학적 의미에 관한 고찰: 유동식의 종교신학의 변화를 중심으로." 석사학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23. 11-17. "유동식의 생애" 전문.
  7.  소금유동식전집편찬위원회 편. 『素琴 柳東植 全集』 제10권. 서울: 한들출판사, 2009. 539.
  8.  소금유동식전집편찬위원회 편. 『素琴 柳東植 全集』 제10권. 서울: 한들출판사, 2009.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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