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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5

“예수는 유일한 구세주인가?” 피터 판 신부 초청 열린토론회

“예수는 유일한 구세주인가?”
 
종교
“예수는 유일한 구세주인가?”

써니2022 2008. 11. 23



[교회] “예수는 유일한 구세주인가?” -아시아신학연대센터 피터 판 신부 초청 열린토론회 

글쓴이: 지금여기

조회수 : 175

08.10.22 10:22http://cafe.daum.net/cchereandnow/L7iH/486

취재: 지금 우리 교회

“예수는 유일한 구세주인가?”

-아시아신학연대센터 피터 판 신부 초청 열린토론회 열어

입력 2008.10.22. 한상봉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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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1층 성당에서 ‘지금여기, 구원은 어떻게?’라는 주제로 특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 날 토론은 피터 판 신부와 천주교의 정양모 신부, 개신교의 이현주 목사, 불교의 도법 스님이 이야기 손님으로 참석하고 길희성 교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우리신학연구소 부설 아시아신학연대센터(CATS)에서 초대한 피터 판 신부는 베트남 출신 신학자로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가톨릭신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아시아주교회의연합(FABC)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고, 현재 미국의 조지타운 대학교 신학부 석좌교수로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종교간 대화와 토착화의 문제를 아시아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피터 판 신부, 길희성 교수, 도법 스님, 이현주 목사, 정양모 신부

예수는 여러 구원자 가운데 하나인가?

‘종교간 대화와 예수 그리스도가 보편적이고 유일한 구세주라는 주장에 관하여’ 발제를 맡은 피터 판 신부는 종교간 대화를 가로막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는 “자기 종교 창시자가 유일하고 보편적인 구원자라는 확신”이라고 밝혔다. 예수밖에 구원자가 없다고 믿는 이들 배타적 그리스도인들은 개종시키는 일을 의무로 여기고 있다. 한편 예수 외에 다른 구원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결국 다른 구원자들은 예수보다 못하거나 예수에게 의존한다고 믿는 게 포괄주의다. 그리고 예수는 단지 세계 역사상 수많은 구원자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믿는 게 ‘종교다원주의자’다.

판신부에 따르면,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인간 지식을 역사-문화적 산물로 보거나 신을 절대신비로 본다고 한다. 그들은 월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견해에 따라, 각 종교는 신에 대한 상(像)을 갖고 있는데, 이 상을 절대시하면 ‘우상’이 된다고 본다. 야기 세이치의 말마따나, 예수와 우리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부활한 예수’나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는 예수는 우리보다 더 철저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한편 아시아신학자인 피어리스는 유일성과 보편성에 관한 주장은 신앙적인 것이며,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실천이라고 본다. 즉, 폴 니터처럼 가난한 이들의 해방에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시금석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니카의 경우엔 종교간 대화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신앙에 관하여 일시적으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판신부는 판단중지가 종교현상 연구에는 괜찮지만 종교간 대화에는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장 깊은 종교적 믿음을 유보한 채 이루어지는 대화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 대한 공허한 수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판신부는 예수가 유일하고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교가 유일하고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고 본다. 그래서 포도나무와 가지들처럼 예수와 교회 역시 밀접하게 얽혀있지만 동일하지 않으며, 이런 구분이 모호해지면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한다.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드러내는 ‘성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고 경배하지, 그리스도교를 믿거나 숭배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판신부는 포괄주의적 입장에서 자기 종교전통을 충분히 확신하는 가운데 다른 종교전통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영적 유산과 사회적 기여에서 더욱 풍요로와질 수 있다고 본다.

예수는 하느님을 독특하게 체현하신 분

패널로 참가한 정양모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에 따라 종교간의 대화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 도 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 타고난 도사로 보면 비교적 대화가 쉬울 것이나, 예수를 신으로 내세우게 되면 아무래도 타종교 창시자들보다는 여러 수 위라는 말이 되어서 종교간 대화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정신부는 “개인적으로는 예수를 하느님으로 보는 신조를 버린 지가 오래”라고 밝혔다.

정신부는 사람이란 인류의 위대한 현자에 대해서 자꾸 존칭을 붙이기 마련인데, 예수 역시 부활을 체험한 이들이 그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흘러넘쳐서 유대와 헬레니즘 세계에 있던 극존칭을 모두 드렸고, 마침내 100년 경에 요한계 문헌을 쓴 사람들이 ‘예수는 하느님이다’라는 존칭을 준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은 공관복음서에는 없고, 다만 요한 복음서 1장 로고스 찬가와 토마스의 입에 담아놓은 요한복음 20장 28절 신앙고백문에만 나온다는 것이다. “325년 니케아에서 지중해 주교 350명이 예수가 하느님이냐 사람이냐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하느님이냐 라고 논쟁하다가 2명만 빼고 모두 ‘예수는 하느님이다’라고 정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여기에 이의를 단 사람은 유배를 보내버렸다”고 한다. 정신부는 그후 교회에서 한 번 예수에게 극존칭을 주고는 후퇴를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양모 신부는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진술은 로고스 찬가라는 노래 안에 들어있는 “시적인 언어”이며, 사랑고백 같은 “고백언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발동하면 과장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이라기보다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신 분이라 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정양모 신부. 토론회가 열리는 성당 벽면으로 부활하신 예수상이 또렸하다.


모든 종교는 결국 버려야 할 뗏목

한편 도법스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는 가장 보편적인 가르침”이며 “불교라는 종교에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누구나가 알아야 할 실천해야 할 내용이 되는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인이 되든 불교인이 되든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진보든 보수든,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두에게 적용되는 근본적이고 위대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이라서 종교에는 어떤 벽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초기불교에서는 인격화된 개념이 별로 없지만, 후기에 대승불교의 화엄경처럼 인격화된 개념을 사용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즉 초기에는 진리 법이라고 표현하던 것이 나중에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도법 스님은 이게 말만 보면 다르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감기에는 감기약이 설사에는 설사약이 더 좋듯이, 어느 하나만을 절대화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의 문제를 풀어내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만약 걸림돌이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도 버리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즉, “종교도 강을 건너는 나룻배와 같아서 강을 건너고 나면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개신교 신자에서 사람이 되기까지

이현주 목사는 “내가 개신교 신자라고 하면 신부님과 다른 종교니까 대화를 해야 하지만,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같은 편이니까 대화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나한테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떨어져서 그냥 ‘교인’이라고 한다면 같은 종교인이라서 도법스님과 나는 하나가 된다”고 말하면서, 모두가 다른 게 없이 한 식구이며 한 울타리 안에 사는 것이라 한다. “어쩌다가 ‘교인’이라는 말도 떨어지고 ‘사람’만 남으면 제가 가는 마지막 길”이며, 각자 자기 종교에 충실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성심껏 따른다면 다른 종교와의 대화는 아주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가?“ 물었다.







피터 판 신부는 패널들과 토론회 참석자들의 질의응답을 지켜본 뒤에 “그리스도 없이도 참다운 인간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사실 자체를 보라”고 주문하였다. 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성스럽고 거룩한 불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불교라는 교리에 대해 말하지 말고 불자들을 보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판신부는 베트남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절에 자주 갔었는데,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불전함에다 보시를 하는 어머니에게 “ 어머니,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많이 하셔도 돈은 교회에다 많이 하세요”라고 말했더니, 어머니 말씀이 “부처님은 상당히 거룩하신 분”이라고 하셨단다. 판신부는 “물론 부처님이 예수님을 알 리가 없죠. 그렇지만 내가 아는 것은 부처님은 그리스도를 모르고서도 참다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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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이시도로, 지금여기 편집국장

2023/06/04

백승종 무위당 장일순

 백승종

21 February 2021
무위당 장일순, 물질 만능의 세태를 질타하다

장일순(1928~1994)은 평생 단 한 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언어도단(言語道斷) 곧, 말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서양의 종교와 고전에 두루 해박하였고 특히 노자(老子)를 믿고 따랐다.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노자의 이 말씀 따라서 그는 입을 다문 것이 아니었을까.
당호 ‘무위당(无爲堂)’이 상징하듯, 그는 돈과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두문불출하고 살다시피 한 사람이다 보니, 뭐라고 붙일 딱지가 없어요.” 
실은 일평생 그가 종사한 일이 여럿이었다. 약자를 구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그였다. 평화와 정의의 세상을 만들고자 그가 노심초사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재사였다. 
장일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려우나, 굳이 말하면 ‘생명사상가’요 20세기 이 땅을 대표하는 ‘양심적 지성’이었다고 말해도 좋겠다. 식자들은 그의 사상을 요약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가지를 하나로 보았다고 말하곤 한다. 
장일순의 가장 큰 매력은 언행일치에 있었다. 사소한 일상사부터 어렵고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장일순은 언제나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며, 서로를 극진히 모시며 살고자 했다. 그는 세속(朝市)에 숨은 ‘대은(大隱)’이요, 난세의 ‘대현(大賢)’이었다. 

교육사업과 민주화운동을 넘어 

일제 말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그런데 해방 직후 점령군인 일개 미군 대령을 서울대학교 총장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이 나왔다. 장일순은 이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제적되었다. 6ㆍ25전쟁 직후에는 도산 안창호의 구국정신을 본받아, 고향 원주에 ‘대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때아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교육자 장일순의 삶을 망가뜨렸다. 군부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그를 3년간이나 옥에 가두었다. 평소 장일순은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중립화’론을 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형기를 마친 장일순은 1963년 대성학원 이사장직에 복귀하였는데, 이번에는 독재정권이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걸려 사회활동이 금지되었다. 
정권의 엄혹한 감시 아래서도 그는,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1968년에는 고향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또 1971년 10월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함께 독재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흥기를 알리는 횃불이었다. 
그 2년 뒤에는 홍수로 재난을 입은 강원도민을 구제하고자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민청학련사건’의 구속자 석방을 위해 국제사회의 연대를 꾀했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의 숨은 대부였다. 

생명 사상으로 

그의 삶에 일대전환이 일어난 것은 1977년이었다.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 그는 일체의 사회운동을 공생의 원리에 따른 ‘생명운동’으로 전환했다. 1983년에 그는 농촌과 도시의 직거래를 위한 ‘한살림’이 출범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그는 생명 사상의 원류였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기념비를 원주에 세웠다.
말년의 장일순은 생명사상을 주제로 숱한 강연회를 열었다. 노자에 정통했던 그였기에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풀이했다. 이현주 목사는 그 내용을 정리해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이 나오고 몇 달 지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장일순은 영영 눈을 감았다. 
돈에 환장한 세상! 
“지구 전체가 지금 온통 장삿속으로 돌고 있어요.” 장일순은 어느 강연에서 세태를 그렇게 비판했다. “돈이 기준이 돼 있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적당한가, 알맞나 이러한 문제는 얘기도 안 되는 거라.”
“내 자식이 꼭 일등 해야 되고, 요놈이 꼭 출세해야 되고, 요놈이 꼭 돈 많이 모아야 되고. 그러니까 공해가 올 수밖에 없잖아요. 일등만이 가치 있고, 나머지는 무시되는 이건 엄청난 공해입니다.” 
과학을 비롯한 일체의 학문이 인간의 오만과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장일순은 현대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까지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이익이 제일 많아요. 전부 무기장사라고….” 
이런 사태는 종국적으로 “반(反)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 비극을 빚게 될 것이다. 한정된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고 말 것도 당연한 일이다. “도깨비도 이런 짓은 안 해요.” 장일순은 장차 현대문명과는 정반대되는 새 문명이 출현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밥 한 사발에 우주가 담겨 있다 
“일체 현상은 유기적 공존체(有機的共存體)요, 서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니, 개체와 전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하나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 (만물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관계의 회복이 본질적인 과제로 부각될 터다. 우리가 지나친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생태계의 질서가 되살아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장일순은 어디서 이런 확신을 얻었을까.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서 감화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해월 선생은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아느니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밥 한 사발이 되려면, 많은 농부가 땀을 흘려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가 되어야만 밥 한 사발의 농사가 이뤄진다. 그러니까 그 밥 한 사발은 우주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생전에 장일순이 자주 언급했듯, 최시형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고 일렀다. 이때 하늘은 사람을 비롯해 곡식 한 알, 돌멩이나 버러지 하나까지도 포함한다. 모두가 하늘이며, 그 하늘이 서로를 극진히 위해야 평화도 정의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의 장일순 사상의 중심이다. 

노자의 삼보(三寶)를 실천하며 

우주 만물이 내 한 몸이라는 생각은 노자에게서도 발견된단다. 장일순은 그렇게 보았다. 하여, 그는 노자의 ‘삼보’를 실천하자고 주장했다. 그 첫째는 자애 곧 사랑이다. 어머니가 객지에 두고 온 자식 생각하듯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검약이다. “하늘과 땅과 만물의 도움으로 생긴 모든 물건을 알뜰하게 모시고, (쓰고)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자”고, 장일순은 주장했다. 물론 현대인의 삶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다들 빚 살림을 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나라도 가계도 부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더러 지하의 장일순은 과연 뭐라고 일갈할 것인가. 
셋째는 겸손이다. “큰 나무가 이렇게 되자면, 그 밑에 수많은 잔뿌리가 있어야 해요. 잔뿌리 없이 큰 나무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대(大)와 소(小)는 하느님 아버지의 차원에서 보면 같은 거라.” 장일순의 비유는 곧 생명과 진리의 본바탕에서 사물과 나의 관계를 세우자는 뜻이다. 
그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어지러워진 남북문제도 우리는 풀 수 있겠다. “주인인 우리가 미국이나 소련, 그리고 그네들 욕심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관계 없이, 남북이 스스로 내왕하고 우리 전통, 우리 살던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더라면 분단이 되었겠어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 현대사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주판을 잘못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털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장일순의 쩌렁한 목소리가 아직 귓전에 남아 있다.

출처: 백승종 ,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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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3 April 2018
  · Pyeongtaek, South Korea  · 
생명운동가 장일순, 농촌 살리기 노력에 반독재 투쟁 앞장

장일순(張壹淳, 1928~1994, 호는 无爲堂)은 평생 단 한 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언어도단(言語道斷) 곧, 말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동서양의 종교와 고전에 두루 해박하였다. 특히 노자(老子)를 믿고 따랐다.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노자의 이 말씀 따라서 그는 입을 다문 것이 아니었을까.
당호 ‘무위당(无爲堂)’이 상징하듯, 그는 돈과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두문불출하고 살다시피 한 사람이다 보니, 뭐라고 붙일 딱지가 없어요.”
실은 일평생 그가 종사한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약자를 구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그였다. 평화와 정의의 세상을 만들고자 그가 노심초사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재사였다.
장일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굳이 말하면, ‘생명사상가’요, 20세기 이 땅을 대표하는 ‘양심적 지성’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식자들은 그의 사상을 요약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가지를 하나로 보았다고 말하곤 한다.
장일순의 가장 큰 매력은 언행일치에 있었다. 사소한 일상사부터 어렵고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장일순은 언제나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며, 서로를 극진히 모시며 살고자 했다. 그는 세속(朝市)에 숨은 ‘대은(大隱)’이요, 난세의 ‘대현(大賢)’이었다.

교육사업과 민주화운동을 넘어
일제 말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그런데 해방 직후 점령군인 미군의 일개 대령을 서울대학교 총장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이 나왔다. 장일순은 이를 극력 반대했다가 제적되었다. 6ㆍ25전쟁 직후에는 도산 안창호의 구국정신을 본받아, 고향 원주에 ‘대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때 아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교육자 장일순의 삶을 망가뜨렸다. 군부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그를 3년간이나 옥에 가두었다. 평소 장일순은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중립화’론을 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형기를 마친 장일순은 1963년 대성학원 이사장직에 복귀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재정권이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다시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걸려 사회활동이 금지되었다.

정권의 엄혹한 감시 아래서도 그는,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1968년에는 고향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또 1971년 10월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함께 독재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흥기를 알리는 횃불이었다.
그 2년 뒤에는 홍수로 재난을 입은 강원도민을 구제하고자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민청학련사건’의 구속자 석방을 위해 국제사회의 연대를 꾀했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의 숨은 대부였다.

생명사상으로

그의 삶에 일대전환이 일어난 것은 1977년이었다.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 그는 일체의 사회운동을 공생의 원리에 따른 ‘생명운동’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1983년에는 농촌과 도시의 직거래를 위한 ‘한살림’이 출범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그는 생명사상의 원류였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기념비를 원주에 세웠다.
말년의 장일순은 생명사상을 주제로 숱한 강연회를 열었다. 노자에 정통했던 그였기에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풀이했다. 이현주(1944-) 목사는 그것을 정리해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이 나오고 몇 달 지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장일순은 영영 눈을 감았다.

돈에 환장한 세상!

“지구 전체가 지금 온통 장삿속으로 돌고 있어요.” 장일순은 어느 강연에서 세태를 그렇게 비판했다. “돈이 기준이 돼있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적당한가, 알맞나 이러한 문제는 얘기도 안 되는 거라.”
“내 자식이 꼭 일등 해야 되고, 요놈이 꼭 출세해야 되고, 요놈이 꼭 돈 많이 모아야 되고. 그러니까 공해가 올 수밖에 없잖아요. 일등만이 가치 있고, 나머지는 무시되는 이건 엄청난 공해입니다.”
과학을 비롯한 일체의 학문이 인간의 오만과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장일순은 현대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까지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이익이 제일 많아요. 전부 무기장사라고….”
이런 사태는 종국적으로 “반(反)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 비극을 빚게 될 것이다. 한정된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고 말 것도 당연한 일이다. “도깨비도 이런 짓은 안 해요.” 장일순은 장차 현대문명과는 정반대되는 새 문명이 출현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밥 한 사발에 우주가 담겨있다

“일체 현상은 유기적 공존체(有機的共存體)요, 서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니, 개체와 전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하나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 (만물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관계의 회복이 본질적인 과제로 부각될 터다. 우리가 지나친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생태계의 질서가 되살아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장일순은 어디서 이런 확신을 얻었을까.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서 감화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해월 선생은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아느니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밥 한 사발이 되려면, 많은 농부가 땀을 흘려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가 되어야만 밥 한 사발의 농사가 이뤄진다. 그러니까 그 밥 한 사발은 우주적인 만남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생전에 장일순이 자주 언급했듯, 최시형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고 일렀다. 이때 하늘은 사람을 비롯해, 곡식 한 알, 돌멩이나 버러지 하나까지도 포함한다. 모두가 하늘이며, 그 하늘이 서로를 극진히 위해야 평화도 정의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의 장일순 사상의 중심이다.

노자의 삼보(三寶)를 실천하며

우주만물이 내 한 몸이라는 생각은 노자에게서도 발견된단다. 장일순은 그렇게 보았다. 하여, 그는 노자의 ‘삼보’를 실천하자고 주장했다. 그 첫째는 자애 곧 사랑이다. 어머니가 객지에 두고 온 자식 생각하듯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검약이다. “하늘과 땅과 만물의 도움으로 생긴 모든 물건을 알뜰하게 모시고, (쓰고)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자”고, 장일순은 주장했다. 물론 현대인의 삶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다들 빚 살림을 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나라도 가계도 부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더러 지하의 장일순은 과연 뭐라고 일갈할 것인가.

셋째는 겸손이다. “큰 나무가 이렇게 되자면, 그 밑에 수많은 잔뿌리가 있어야 해요. 잔뿌리 없이 큰 나무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대(大)와 소(小)는 하느님 아버지의 차원에서 보면 같은 거라.” 장일순의 비유는 곧 생명과 진리의 본 바탕에서 사물과 나의 관계를 세우자는 뜻이다.

그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난마처럼 어지러워진 남북문제도 우리는 풀 수 있겠다. “주인인 우리가 미국이나 소련, 그리고 그네들 욕심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남북이 스스로 내왕하고 우리 전통, 우리 살던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더라면 분단이 되었겠어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현대사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주판을 잘못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털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장일순의 쩌렁한 목소리가 손에 잡힐 듯하다.

* 이 글은 제 책,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의 한 대목입니다. 장일순 선생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에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백승종 拜

2023/03/13

뜯어고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 : 이현주 목사: 한겨레

뜯어고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뜯어고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
이현주 목사
등록 :2023-03-13


이현주 목사와 함께 마음공부를 하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학교 공동체원들. 순천사랑어린학교 제공

# 꿈결에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 모르겠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큰 그것(IT) 안에 무수한 작은 그것(it)들이 있다. 둘러 말하면 무수한 작은 그것들의 총합이 큰 그것이다. 작은 그것들 가운데 어떤 그것이 자기가 ‘나’(I)라는 생각을 하면서 ‘너’(you)가 생기고 나와 너 사이에 당기고 미는 에너지가 작용하기 시작한다. 서로 당겨 마침내 하나 되는 에너지를 사랑이라 부르고 서로 밀어 갈 데까지 가는 에너지를 임시로 다툼이라 부른다. 왜 임시냐 하면, 작은 그것(it)들 모두가 큰 그것(IT)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너’와 ‘나’가 끝내 서로 다투기만 할 수는 없고 언젠가 서로 당겨 하나 되는 사랑의 코스로 돌아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작은 그것들이 자기가 본디 큰 그것이므로 다른 작은 그것들도 모두 자기인 것을 깨치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게 되는 거다! 인생이 마라톤이란 말, 과연 맞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바깥 화장실 수도를 틀어본다. 물이 ‘쇄~’ 하고 나온다. 아, 고맙다. 서산 목사가 물탱크에 전선을 연결하고서 이제 수도관이 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효선이 뉴질랜드 집 앞에 흐르는 강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준다. 자연은 언제 어디서나 친숙하고 평안하다. 맞다. 강물은 지구가 안방이니 뉴질랜드라고 다른 모양으로 흐를 이유가 없다. 사람도 그 몸은 어김없는 자연인데 그래서 몸처럼만 살라는 건가?

# 셋이 어려서부터 단짝이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셋 중 하나가 적에 포섭되어 둘을 배신한다. 둘 중 하나가 죽는다. 나머지 하나도 목숨이 위태롭다. 배신한 하나가 나머지 하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그런데 그 일격이 본인에게 치명타로 바뀌어 죽어간다. 살아남은 하나가 배신한 친구에게 말한다. “우리가 너를 ‘사람’으로 보았다. 그게 착오였어.” 잠들기 전 아브라함 헤셸의 <누가 사람이냐?>에서, 사람이 머리로 알 수 없지만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었더니, 그래서 이런 꿈을 꾼 것일까? “어두운 밤에 새벽을 확신하는 것, 저주를 축복으로 고뇌를 노래로 바꾸는 힘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괴물의 격렬한 분노를 알면서 그 앞에 떳떳이 나서는 것, 지옥의 한복판을 걸으면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참 인생에 주어지는 도전이요 길이다.”(아브라함 헤셸).

# 여러 갈래로 길들이 얽혀있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데 누가 말한다. “망설일 것 없다. 여태 온 길이 앞으로 갈 길이다. 굽이굽이 땅 위를 흐르는 모든 강물이 바다로 직진하듯이, 네 중심으로 내려가는 모든 길이 하늘로 가는 직진 코스다.” 꿈속에서 생각한다. 망설일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 지금 네가 네 발로 가는 게 아니라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아니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아멘! 소리치다가 깨어난다.

천지인 수업하고 점심 먹고 열차로 귀가. 왕복 열차에서 아브라함 헤셸의 <누가 사람이냐?>를 읽는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알든 모르든, 우주적 연극의 한 역을 맡는 것이다.”


# 잠에서 나오는데 들어오는 생각.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은 사람을 부리는 힘과 사람이 부리는 힘, 데이비드 호킨스의 말로, 자연의 힘(power)과 인위적 힘(force)의 대결이다. 이 대결의 연속이 이른바 인류 역사인데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저마다 선택할 수 있어서 사람이다. 이 선택 자체를 할 수 없게 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게 진짜 폭력이다. 하지만 그런 폭력은 본인이 허용하지 않으면 아무 힘도 없는 허풍선이다.

# 일어나는 길로 명상하고 펼쳐 든 책에서 헤셸이 말한다. “사유 곧 삶이다. 어떤 사상도 두뇌의 동떨어진 세포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어떤 사상도 섬(島)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방식은 생활방식에 영향을 받고, 우리의 명상은 옹근 실존의 정수다. 지금 내가 이 펜, 종이, 책상이라는 존재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하는 그 방법이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나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자아도취적 사유에는 아무런 힘도 없다. 진정한 사유란 세계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말에 힘이 있는 까닭은 그것이 머리 아닌 몸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1972년에 타계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오늘 아침 동방의 한구석에서 곰지락거리는 한 벌레로 말미암아 그는 아직 죽지 못했다.

# 헤셸의 책에 인용된 오스카 와일드의 한 마디가 어깨를 툭 치며 빙그레 웃는다. “세상에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함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손에 넣음이다. 후자야말로 진짜 비극이다.” 그러니 비극을 맛보지 않으려면 원하는 것이 없기를 간절히 원할 일이다. 음, 큰 것은 바라는 게 별로 없는데 작고 미미한 것들이 고물거리며 가슴을 성가시게 하니 딱한 노릇이다.

# ‘이즈 쉬 유징 허 캔’(Is she using her can?’·그 여자, 자기 캔을 쓰고 있는 건가?) 이 비슷한 문장 하나를 놓고 뒤척거리다 잠에서 깨어난다. 여기서 묻는 것은 그 여자가 자기 능력을 제대로 쓰고 있느냐, 아니면 빈 깡통을 두드리고 있느냐다. ‘캔’(can)을 ‘할 수 있음’과 ‘깡통’으로 동시에 읽는, 이를 테면 일종의 말장난이다. 누구에게나 힘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스스로 만든 힘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힘이다. 데이비드 호킨스가 말하는 인위적 힘도 실은 자연스러운 힘의 작용으로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몸속에서 피를 돌리는 힘의 작용 없이는 아무 짓도 할 수 없는 거다. 폐로 공기를 빨아들이지 않고서는 사랑은 물론 살인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쓰고 있는 힘이 하늘에서 주신 것인 줄 알고 쓰면 제대로 힘을 쓰는 것이고, 그것을 제가 만든 자기 힘인 줄 알고 쓰면 빈 깡통을 두드리는 거라는 얘기다. 음, 근사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행위는 혼신의 힘을 다 쏟은 것 같지만 그 몸이 사라짐과 동시에 물거품처럼 꺼지고 어떤 사람의 행위는 전혀 힘들인 것 같지 않은데 그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서 끊임없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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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자신의 곤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 곤경이 곤경을 위한 곤경이 아니라 하나의 사명임을 깨달아 아는 데 있다. 우리는 ‘자기 앞에 있는 것에 응답하라’는 도전과 초대를 아울러 받고 있다.”(아브라함 헤셸) 아침에 펼쳐 든 책에서 헤셸이 한 뻔한 말을 읽는다. 문제는 이 뻔한 말을 너무 쉽게 망각하여 자기 앞에 있는 곤경을 곤경으로만 알고서 괜한 일로 허둥댄다는 데 있다. 그렇다, 곤경은 없다, 소중한 기회가 있을 뿐.

# 새벽 꿈. 낡은 책방 한구석에서 <너는 뭐냐>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본다. 굵은 고딕체로 제목이 인쇄된 표지를 잘 드는 칼로 잘라 주머니에 넣으면서 “너는 뭐냐고 묻는 너는 뭐냐”고 말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나머지는 모두 지워졌다. 깨어나서 대답한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에워싸인 나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그러므로 나 아닌 모든 것들이 나요, 나는 나 아닌 모든 것들이다. 더 묻지 마라, 할 말 없다.”

# 동네 뒷산 같은 산을 맨발에 흰 고무신 신고 올라간다. 만만하게 보여 금방 오를 것 같더니 오를수록 산이 높아지는 느낌이다. 누가 말하기를 이 산이 우리나라에서 으뜸 높은 백두산이란다. 아무리 높아도 천천히 걸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한 걸음씩 발을 옮긴다. 후배 하나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 뜯어고치겠다며 여기저기 온갖 말썽 다 부리고 다닌다. 힘이 세어서 말릴 사람이 없다. 그에게 정작 뜯어고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너라고 속삭여 말해준다. 그가 깜짝 놀라며 “형님, 나 태어나서 그런 말 처음 들었소!”라고 훌쩍훌쩍 울더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저 친구 혼자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있는 데를 모르겠다. 놔둬라, 그에게도 제 한님이 있다, 뭐 이런 음성을 꿈에서 들은 것 같다. 언제 어떻게 꿈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글 관옥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연재[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2023/02/12

알라딘: 마음 농사 짓기 농부 전희식의 나를 알아채는 시간

알라딘: 마음 농사 짓기


마음 농사 짓기 - 농부 전희식의 나를 알아채는 시간 
전희식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19-03-20























Sales Point : 100

8.7 100자평(0)리뷰(6)


책소개
글쓰는 농부 전희식이 그의 시골집에서 동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읍내를 넘어 버스를 타고 오가는 도시의 아스팔트, 마침내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중국과 남미에 이르는 해외까지 삶의 현장에서 농작물을 기르고, 사람과 더불어 일하고, 세상을 살리는 ‘농사 너머의 농사’를 통해 내 마음의 행방을 알아채고, 내 마음 농사를 짓는 이야기들을 담아낸 책이다.


목차


제1부 ………… 농부, 마실을 나가다
나를 알아채는 시간 / 30년 저 너머에 / 황금 개띠라고 하는데 / 나에 대한 믿음의 과잉 사태 / 단순하게 살기와 잡동사니 / 술과 헤어진 뒤 / 야단스럽게 반기기 / 백중 풀베기 / 오늘도 역시나 피난 보따리 / 난방비 제로와 노동의 다양성 / 상류 사람의 도덕적 의무 / 개장수 노릇 / 내가 만든 송곳 하나 / 들깨와 참새 그리고 가로등 / 산과 들판은 겨울 채비로 바쁘다 / 내 식으로 차레 지내기 / 우리 동네 순애 씨 / 밥상 앞에서의 신미란다 원칙 / 믿음의 조건과 유효기간 / 밑그림이 없는 사람

제2부 ………… 농부, 더불어 살다
막상막하 연극놀이 / 할머니와의 약속 / ‘노인의 날’은 언제인가? / 눈 오는 날의 우편배달부 /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 빛나는 졸업장 / 동북아시아 농민들 / 자연농법과 한울살림 / 잘 먹는다는 게 뭘까 / 고속도로 공짜 뒷담화 / 참 스승의 길을 간 김인봉 교장선생님 / 소농을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 / ‘소농’을 ‘혁명’이라 부르게 된 현실 / 동학으로 새로 짜는 모심의 삶

제3부 ………… 농부, 세상 속으로 가다
촛불광장에 서서 / 동학농민군과 세월호 참사 / 잠들지 못하는 영혼 / 영덕의 핵전 막기 / ‘진보’의 신개념 / 꿈같은 상상 / 재생에너지는 영원한가? / 자제된 힘 / 농촌 도로에는 왜 인도가 없을까? / 정의로운 음식과 정의로운 사람 / 공동체에서 조화롭게 살기 / 경고? 부탁? 협박? 고백의 언어 / 사람이면 다야? / 밥상을 점령한 유전자조작식품 / 나도 가해자다 / 살충제 달걀, 육식 문화가 문제다 / ‘혁명’과 ‘깨달음’ / 북핵 운전석 앉으려면 미국 움직여야 / “동물복지농장에 대한 살처분을 중단해 주십시오” / 상업성 친절의 뿌리, 공짜 점심은 없다 / 농민기본소득, 또 말하기 입 아프다 / ‘가빠 농법’으로 풀 관리하기


책속에서


P. 14~16 명상을 마치고 열이틀 만에 내 휴대전화와 책, 필기도구를 돌려받고 든 생각은, 평소에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참 많이 하며 산다는 것이었다. (중략) 감각에 매이지 않고 단지 바라볼 수 있는 힘, 그 힘을 기르는 일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닥친 일을 바르고 조화롭게 처리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P. 37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돌보는 곳에서 일하는 그 후배는 늘 긴장이 연속되는 상황에 있었고 긴장은 사건과 사고를 유발했다. 악순환이었다.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오르내렸다. 그에게 ‘요란스럽게 반겨 주는 놀이’를 제안했다. 사소한 일들에도 한꺼번에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는 ‘놀이 시간’을 가져 보라고 했다. 특별한 조건이 없이 해 보라고 했... 더보기
P. 44~45 지난겨울은 추위가 유난히 심해서 난방비가 많이 들었다고들 하는데, 가만히 돌이켜보니 우리 집 난방비는 거의 제로(0)에 가까웠다. (중략) 보일러가 없다. 전기장판도 안 쓴다. 대신 아궁이에 불을 때 방을 덥힌다. 그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스위치만 건드리면 난방이 되는 게 아니고, 몸 노동이 필요하다. 나무를 해 와야 하고 (... 더보기
P. 68 (겨울나무는) 추위가 몰려오는데도 껴입지 않고 도리어 한 꺼풀씩 벗는다. 엄한 겨울을 견뎌야 할 자연의 겨울 채비는 실은 봄 채비다. 꽃 피울 새봄을 위해 벗고 버리는 것이다. 비상시국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자연의 가르침이다.
P. 74~75 도리깨질은 칼질 노련한 외과의사 못지않은 정교한 타격이 요구된다. 한 마당만 두드려 주고 가리라 했는데 순애 씨의 입꼬리가 양 귀에 걸린 모습을 보고 한 마당만 더 인심을 쓴다는 게 들깨 다발이 한마당 거리만 남게 되었다. (중략) 내가 도리깨를 내려놓았을 때는 타작마당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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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그의 발길 따라 글맛이 다르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를 닮은 입담이 세태를 밝히기도 하고, 질긴 실사구시의 쓴소리가 영성 회복을 일구기도 한다. 줄기차게 자기성찰하며 발품 파는 글 쓰는 농부 전희식의 땀내가 향기로 퍼지기를 바란다. 틈날 때마다 맨발걸음하는 그가 맘 편히 디딜 곳이 많도록.
- 김유경 (예술평론가, 자유기고가)

온전한 존재로 성장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한울님을 ‘모시고 살리는’ 일상의 삶을 엮은 선생의 글은 읽는 재미와 독서하며 얻는 성찰도 크다. 삶을 수행처럼, 수행을 삶으로 행하며 얻은 통찰 덕분에 하루하루가 신비의 연속이고 매 순간이 신성함을 깨달으니 어찌 感於物 謝於心(감사)하지 않으리. 행함은 부족하고 말만 많은 시대. 行으로 마음 길 내는 힘을 선생에게서 받아 모신다.
- 최현미 (중학교 교사,『나는 오늘도 교사이고 싶다』공동 저자)

저자는 묻는다. 먹고살려면 얼마나 벌어야 하는가. 그만큼 벌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 내 돈벌이는 생태윤리적으로 당당한가.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는 이야기를 엮었다. 나도 살고, 농사도 살고, 땅도 살고 그래서 지구도 살 수 있는, 글 쓰는 농부 전희식의 지혜가 아름답고 즐겁다.
- 강성미 (사단법인 유기농문화센터 원장)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한 편의 영상을 보는 것처럼 눈앞에 선명한 이미지가 그려질 때가 많다. 그것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일상의 생생한 체험과 실천으로부터 우러나온 살아있는 글이기 때문일 게다. 소소한 일상의 깨달음에서부터 문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긴 ‘리얼 다큐 수필’들을 한 편씩 시청하다 보면 따뜻한 된장 국물처럼 위로를 얻을 때도, 혹은 겨울산 약수처럼 정신이 번쩍 들 때도 있을 것이다.
- 윤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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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9년 4월 10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전희식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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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에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인천에서 살다가 시절 인연을 만나 1994년에 농촌으로 내려가서 전북 완주에서 12년 전북 장수에서 16년을 살았다.
요즘은 온 삶 상담과 수련 지도, 농촌 지역 통합 돌봄 일에 집중하고 있다.
쓴 책으로 <똥꽃>(2008. 그물코), <아름다운 후퇴>(2012, 내일을 여는 책), <소농은 혁명이다>(2016. 모시는 사람들), <삶을 일깨우는 시골살이>(2016. 한살림) <마음 농사 짓기>(2019, 모시는 사람들) 등이 있으... 더보기

최근작 : <습관 된 나를 넘어>,<지구별 생태사상가>,<개벽의 징후 2020>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글 쓰는 농부, 마음 농사를 짓다!!

농사, 농업, 농부, 농촌
한때 ‘아스팔트농사’가 유행이었다. 쌀이나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위해, 농민들이 서울로 몰려와 아스팔트를 점거(?)하고 투쟁을 벌인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쌀농사가 오래되었다지만, 그에 못지않은 건 ‘자식농사’다. 전통적인 의미야 어쨌건 간에, 지금으로서는 자식들이 정의롭고 자주적이며 행복한 삶을 산다면, 자식농사 잘 지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겠다. ‘도시농업’이라는 말이 생긴 지도 오래 되었으니, 도시농부가 있는 건 당연하다. 초기에는 ‘텃밭’ 등에 한정되었으나, 이제 생물 다양성 보전, 기후조절, 대기정화, 토양보전, 공동체문화, 정서함양, 여가지원, 교육, 복지 등의 다원적 가치를 도시에서 구현하며 지속 가능한 도시, 농업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전반적인 활동을 일컫는 말로 확장되었다.

농사는 심어서 기다리며, 기르고 살리는 일
이러저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농사란 단지 농촌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농촌에 사는 농민들이 도시로 올라오고, 도시 삶에 찌든 사람들이 귀농하는 것만이 농사 문제의 전부일 수는 없다. 어느 경우든 농사란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를 가리키는 속 깊은 뜻을 가진 단어임을 알 수 있다. 결론을 말하면, 농사란 기르는 일이다. 씨앗을 심고서 기다리는 일이다. 비를 기다리고, 햇빛을 기다리고, 바람을 기다리며 그것들을 모시는 일이다. 기르는 것, 기다리는 것이 시간을 따라 흘러가되, 그것에 정성을 들이는 일이 농사다. 그 정성들임을 일컬어 ‘살림’이라고 한다. 그래서 농사는 심어서 기다리며, 기르고 살리는 일이다.

농사짓는 사람이 모두가 농부, 농부가 하는 일이 모두가 농사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농부가 된다. 그러므로 농부는 도시에도 있고 농촌에도 있다. 학교에도 있고 병원에도 있고, 촛불광장이나 공장, 바닷바람 드센 배 위에도 농부는 있다. 기르는 사람, 살리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정성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농부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농사가 된다. 먹을 것을 기르는 일, 입을 것을 만드는 일, 살 집을 만들고 가꾸는 일, 함께사는 세상, 더불어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이 모두 농사가 된다.

세상에는 ‘20모작+’을 하는 농부도 있다
오직 내 한 몸으로 지탱하고 경작할 수 있는 농사에 충실한 농부도 있지만, 세상의 심어서 기르고 살리는 정성이 필요한 온갖 일들에 두루 손품과 발품, 하다못해 말품이라도 파는 농부도 적지 않다. 『마음 농사 짓기 – 농부 전희식의 나를 알아채는 시간』의 저자 ‘글쓰는 농부 전희식’이 바로 그런 경우다. 『똥꽃』을 위시해서 『소농은 혁명이다』에 이르기까지 이미 여러 권의 저서를 낸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는 ‘글쓰기’와 ‘(작물)농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전국 곳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품앗이에 여념이 없다. 그가 간여하는 농사일들을 헤아려 보면, 20모작은 너끈히 되고도 남는다.

도리깨질에서 지구의 미래 걱정까지
이 책에 등장하는 그의 농사 너머의 농사일을 눈에 띄는 대로만 언급해 봐도 이는 금방 드러난다; “마음(영성)수행, 민주화운동 역사증언, 이웃 할머니와 어울리기, 마실 다니기, 농촌 체험 단체손님 안내, 해외 명상 유적 탐방, 귀농과 마음수양 강연, 동네 쓰레기 청소, 환경 친화적 난방(땔감나무), 강아지 분양, 농사 용품 재활용, 친환경 생활여건 조성 공공신고 활동, 촛불시위 참여, 동네 어른들 봉양, 동네사람들, 농부의 시각으로 세상 바라기, 농업 관련 국제행사 참가, 귀농 강연, 시민사회활동, 한울살림 활동, 한울농법 보급, 사회장 장례 치르기, ‘\소농혁명운동, 핵전반대 활동, 동학 활동….”

모든 농사는 마음 농사로 통한다
개인적인 활동이든, 긴급한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활동이든 그는 모든 ‘농사현장’에서 단지 당면한 농사일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거리감을 잃지 않고 반성과 조심을 거듭한다. 그 하나하나가 마음 농사짓기이다. 백남기 농부 또는 의로운 한 교장선생님의 장례식장에서 지나가던 마을에서 우연히 일손을 거들게 된 도리깨 타작마당에 이르기까지, 서울 광화문에서 중국의 한 농촌 마을에 이르기까지 그의 마음 농사짓기는 계속된다. 분명히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에서도 그는 관성적으로 사람과 사건을 대한 태도를 스스로 경계한다. 뿐만 아니라 사물 하나하나에도 그의 마음은 소홀하지 않는다. 동학의 경물(敬物) 사상을 굳이 가져오지 않더라도, 그에게는 그것이 체화(體化)되고 심화(心化)되고, 의식화(意識化)되어 있다. 그 눈으로 사람과 만물을 바라보고 그 마음으로 그들과 소통하고, 그 마음을 따라 실천하고 살아간다.

성내지 않는 그 마음이 살리는 마음
일이 많다고 바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마음을 늘 챙긴다고 긴장된 삶의 연속은 더더욱 아니다. 저자가 스스로 “어떤 조건에서도 긴장 없이 균형을 유지하며 평화로운 일상. 시골에 살면서 겪는 여러 일화들 중심으로 정리한 글들”(9쪽)을 모았다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농촌의 삶’이 선사하는 평화와 행복을 만끽하며 산다. 이제는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가 평소에 그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성을 안 내는 기 고마워. 늘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아.”(205쪽)라고 말한 그대로 그는 치열한 전투 현장이든, 해학과 풍자 넘치는 마을에서든 웃는 표정과 넉넉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기다려주고, 함께해주고, 살리고, 기른다. 그 갈피, 순간마다 그는 ‘나를 알아챈다.’

이야기를 만들다, 기록하다, 노래하다
그러고 보면 농사 중에서도 제일은 마음농사다. 마음농사는 쌀농사나 다른 농사를 뒷자리에 놓는 농사가 아니라, 그것을 모시는 농사다! 마음농사는 그 자체로 살리는 일이다. 마음으로 짓는 농사요, 마음을 짓는 농사다. 농사를 짓되 마음에 거리낌을 남기지 않는 농사요, 농사를 지으면서, 마음을 기르는 농사다. 글쓰는 농부 전희식은 그 갈피와 순간들에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기록하고, 노래한다. 스스로 정의하기를, 그 마음 농사짓기는 모두 “나를 알아채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마음 농사의 시간은 소중하다. 이야기를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이 소중한 것은 그곳에 공감이 담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담은 다시 시간을 따라 그 공간(마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야기텃밭이다, 생각의 텃밭이다, 마음의 텃밭이다.

지금 왜 다시 마음 농사인가?
귀농귀촌은 이제 ‘하면 좋은 것’에서 ‘해야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나는 자연인인다!’ 같은 프로그램이 장년층에게 인기 프로그램으로 고정되는 현실이다. 무엇 때문일까? 1인당 소득 1000불일 때도, 자식 둘셋은 대학을 다녔는데, 소득 3만 불이 되어서는 아이 하나 키우기도 힘들고 50, 60대는 일할 곳이 없는 데 산업현장에서는 일손이 부족하고, 5000만이 넘는 인구에도 ‘출산율’이 안 오른다고 아우성인가. 무엇 때문일까?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숙고하기보다 여전히 외형의 크기와 성장 신화에 매여 있는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마침 3.1운동 100주년이지 않은가.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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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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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마이리뷰



농사, 우리 몸과 마음을 살리는 길



귀농해서 살고 있는 전희식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몇 년에 걸쳐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 일들을 겪어가는 농부의 일상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모습도 나오고, 우리나라 정치의 모습도 나오고, 농사에 관한 전희식의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원하는 것은 농사는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 어떤 존재 하나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 하나만 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과 공생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이 바로 농사라는 것.



그런 농사의 바탕은 바로 마음이고, 그러므로 농사는 곧 마음 농사이기도 하다는 것. 우리가 마음 농사를 잘 짓는다면 사회가 어지러워질 이유가 없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있는데 어떻게 혼란한 사회,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겠는가.



그가 촛불을 보면서 한 생각도 바로 이것이다. 특정 권력자를 쫓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삶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촛불이 지닌 의미다. 그런데 지금은? 촛불이 권력자들의 모습만 바꿔놓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만큼 농사에 대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먹을거리가 우리 삶에 기본이 되는데, 그 먹을거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회는 암울한 미래로 나아갈 뿐인데...



농사를 짓지 않으면 오히려 잘한다고 장려금을 주는 나라, 농민들이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빚만 늘어나는 사회에서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주자고 하면 무슨 이상한 소리냐고 되받아치는 사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수만 잘 사는 성장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농사를 무시하고 어떻게 성장이 지속될 수 있단 말인가. 전희식은 그점을 답답해 한다. 그래서 그는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먼저 소득 상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최고임금상한제... 아니면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과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의 차이가 20배를 넘지 않도록 하는 법안을 내야 한다고... 그 차익은 다른 사람에게 써야 한다는 것. 만약 돈을 더 벌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임금을 올려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고...



차액으로 남은 이익들은 복지나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귀농해서 살아간다고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귀농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회문제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함께 살아감이 중요함을 농사를 지으면서 매순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희식의 글은 농사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한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농사에 대해서, 어떤 농사가 바람직한지, 또 농사를 통해서 우리는 공생의 의미를 깨우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교육에 대해서 지금 말들이 많다. 공정을 추구하는 정권에서 공정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입시의 공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대학입시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누구도 교육에서 농사를 다뤄야 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농사에 대해서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그렇게 흙을 만지고 다른 생명을 기르고, 그 생명으로 인해 살아감을 깨우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냥 지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와 공정한 기회를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



농사를 통해서 공정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데, 함께 살아가는 마음을 지니게 할 수 있는데, 또 인간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데, 미세먼지, 기후변화 이런 것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데, 교육개혁에서 농사는 다뤄지지 않는다.



그렇게 학생들은 삶에서 농사를 저 먼 우주, 우리가 알 수 없는, 가지도 못하는 우주 이야기로 인식하게 된다. 아마도 전희식이 강연을 거절하지 않고 다니는 이유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못한 이런 농사에 대해서 학생들이 조금이라고 알려주려고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들에게도 농사가 왜 중요한지를 알게 해주고 있으니...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많은 사람들이 즐겨본다는데, 그들 자신이 바로 그런 자연인이 아니더라도 자연인처럼 자연과 동화되어 살 수 있음을, 농사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이 책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인공지능 시대 운운하는 이때,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농사가 시대를 이끄는 길임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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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ye91 2019-09-27 공감(1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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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농사 짓기] 농부 전희식이 들려주는 ‘리얼 다큐 수필‘



농부 전희식이 들려주는 '마음 농사 짓기'라는 제목만 보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 책이 나의 마음에 이렇게 울림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읽을까 말까 고민했던 것은 일단 읽고 보니 안 읽었으면 후회했을 법한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들려주는 이야기『마음 농사 짓기』는 다양한 주제로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전희식. 글 쓰는 농부이자 생태영성운동가다. 도시에 살다가 1994년부터 전라북도 완주, 2006년부터 장수에서 농사짓고 산다. 농민단체와 생명평화단체, 채식과 명상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마음 농사 짓기- 농부 전희식의 나를 알아채는 시간'이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도 결국은 나를 알아채는 시간이라는, 그런 시간을 살자는, 마음의 심층을 꿰뚫어보자는 권유라고 할 수 있다. (5쪽_머리말 中)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 '농부, 마실을 나가다', 2부 '농부, 더불어 살다', 3부 '농부, 세상 속으로 가다'로 나누니다. 나를 알아채는 시간, 30년 저 너머에, 단순하게 살기와 잡동사니, 백중 풀베기, 막상막하 연극놀이, 자연농법과 한울살림, 잘 먹는다는 게 뭘까, 촛불광장에 서서, 동학농민군과 세월호 참가, 영덕의 핵전 막기, '진보'의 신개념, 재생에너지는 영원한가?, 농촌 도로에는 왜 인도가 없을까?, 밥상을 점령한 유전자조작식품, 나도 가해자다, 동물복지농장에 대한 살처분을 중단해주십시오, '가빠 농법'으로 풀 관리하기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머리말부터 공감하며 읽어나가게 되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세상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농부이기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명상도 하러 다니고, 자동차를 없애고 자전거를 타거나, 집에 냉방기와 선풍기는 안 들이는 고집도 있다. 세상 일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때에는 높일 줄 아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농촌에서의 삶이 궁금해서 읽어나갔지만 그곳에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여행을 가거나 명상 혹은 연수를 다녀와서 들려주는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기대 이상의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한 편의 영상을 보는 것처럼 눈앞에 선명한 이미지가 그려질 때가 많다. 그것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일상의 생생한 체험과 실천으로부터 우러나온 살아있는 글이기 때문일 게다. 소소한 일상의 깨달음에서부터 문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긴 '리얼 다큐 수필'들을 한 편씩 시청하다보면 따뜻한 된장 국물처럼 위로를 얻을 때도, 혹은 겨울산 약수처럼 정신이 번쩍 들 때도 있을 것이다.

_윤덕현 (다큐멘터리 감독,『가슴의 대화』저자)




이 책은 읽기 전보다 읽으면서 글의 힘을 느낀 책이다. 각각의 글이 <경남도민일보>에 실렸거나 <불교신문>, <오마이뉴스> 등에 썼던 글을 묶는 등 이미 발표한 글이기에 완성도가 더 높은 글을 엄선해서 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느낌으로 책을 접하든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줄 책이라 생각된다. 그야말로 '리얼 다큐 수필'의 진수를 볼 수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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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라스 2019-04-1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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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아갈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책..



마음 농사 짓기 조금 생소한 책 제목 때문에 책을 선택해서 읽게 되었다.
친환경농사 관련 도서인가? 아님 시골로 내려간 도시사람 얘기인가? 하는 생각으로 책을 읽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농사 관련도서가 아닌 읽는 사람들에게 시골의 따뜻한 모습과
감성을 전달해주는 책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정도로 농사관련 내용보다는 저자 자신이
시골 생활에서 겪고 느끼는 삶의 한부분을 표현한 책으로 보는것이 맞을듯 싶다.
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농사에 전념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닌 자신이 시골이 좋아서 도시생활하다가
시골로 내려가서 시골생활 이야기과 채식, 명상 관련 책을 쓰고 여기저기 바쁘게 강의도 하면서 살아가는
농부 보다는 농부의 마음을 가진 전형적인 마음이 시골인 사람으로 생각해볼수 있다.
책의 내용은 3부분으로 1부는 자신의 시골생활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룬다면 2부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골생활 모습에 대한 궁금한 내용을 다루는 시골생활의 궁금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보였고 3부에서의 내용은 우리모두가 함께 생각해봐야 하는 사회문제까지
커져가는 먹거리 문제에 대한 내용으로 많은 의견과 생각이 필요한 책으로 시작은 궁금함으로 책을 읽었다면
마지막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지 말고 어서빨리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미래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중요한
사항에 대한 내용까지 다루어서 사회적 이슈 문제로 크게 생각해봐야 되는 내용으로 1부에서는 작은 개인적인 사실 내용을
다루고 2부에서는 우리라는 생각으로 좀더 커다란 내용을 만들어 갔다면 3부에서는 모두의 문제로 아주 커다란 사회문제까지
그냥 농부가 아니라 책 내용 그대로 세상속으로 가는 농부를 심도있게 이끌어 보인 책이다.
저자의 말처럼 예전에 있던 시골 인심도 사라져가고 먹거리 농산물로 기업에서 장난으로 인해서 우리가 가정의 식탁의 의험해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우리의 모든 시작이 땅에서 시작해서 땅으로 끝나는 것인데 사회가 너무 이익을 보기위해서 어서빨리 달라져야 함을
이책 곳곳에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촛불광장 이야기..
세월호 참사 이야기..
살충제 달걀 이야기.. 등등 이제는 달라지지 않으면 모두가 함께 사라져버리는 위기의 단계까지 왔음을 인지하고
모두가 함께 생각해보고 이제라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밝은 미래가 없음을 저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알리고자 강연회와 세계 여러곳을 다니며 알리고 있다.
지금은 저자 하나의 작은 소리로 생각 되지만 모두 함께 외친다면 커다란 소리가 될수 있음을 인지하고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저자의 이야기를 이 책을 읽으므로해서 나부터도 아주 작은것부터라도 실천을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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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mhanmail 2019-04-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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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주장도 아니‘고 ‘특별하지도 않은‘ ? - [마음 농사 짓기]



'별난 주장도 아니'고 '특별하지도 않은' ? - [마음 농사 짓기]



'글 쓰는 농부'이자' 생태영성 운동가' 의 글을 만난다. 요란 떨지 않고 말 그대로 차분하고 소소하고 마땅한 이야기들이다. 쉬 읽히고 쉽게 다가온다. 책장을 넘기는 게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하다. 물론 적극적?으로 자극적인 글을 찾아 만나는 내게는 참 많이도 심심하고 담백한 그러 이야기들이다.


오늘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라 ( ~ ) 오늘의 나는 오늘 이렇게 살고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과거 모든 순간들의 총합이라는 ( ~ ) 과거 어느 한 부분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모두는 한 덩어리로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 ( ~ ) 별난 주장도 아니요 특별하지도 않은 진리다 (19)

세상은 뭐가 바뀌어야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가. 세상은 ㅜㅁ엇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거기에서 나는 무엇인가. 어디쯤에 위치하는가. (20)

살아가며 문득 던져 보았거나 생각해보았던 질문들이 곳곳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농부의 발길을 따라가다, 나는 멀리 떨어져 있구나, 그렇지 나는 도시생활을 하는 '생태'도 '영성'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그러다가 늘 알고 있지만 실천은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눈길이 멈춘다.


"정리정돈의 핵심은 제자리에 놓기가 아니라 버리기" (30)

조건을 따지지 않고 수용하는 것,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박수와 환호로 상대를 반기는 것, 자연의 속성이 그러할 것이다. (37)

그래서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이리라. 너덜너덜해지는 일상 속에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시간 속에서 평소 지나치던 순간을, 뻔한 이야기를, 다른 눈으로 다른 소리로 들려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차례'가 아니라 '차레'라는 말과 '저를 드린다'는 '절'의 어원까지, 신선하고 설득력 있는 얘기들이다.


차례가 아니고 차레하는 것이다. 차례(茶禮)는 한자말의 훈에 있듯이 차를 올려 제사를 지낸다는 것으로 물이 탁해서 늘 차를 달여 마셨던 중국 얘기이고, 앞뒷산에 약수가 철철 흐르는 우리나라는 차례가 아니라 차레를 했다는 것이다. 차레는 채우고 비운다는 뜻이다. 모든 재례는 결국 채우고 비우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비워 내고 나서 채우는 게 아니라 맑고 밝은 사랑과 용서와 포옹으로 채워 나가면 탁하고 어리석은 욕심스런 것들이 그냥 비워진다는 얘기다. (69)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일러 주었다. "절을 드린다."는 "저를 드린다."가 어원이라고 (203)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바라보게 될 다양하고 넓은 시선, 몸과 마음의 이분법을 넘어 도달하는 지점, 밖과 안에서 동시에 싸워야만 이룰 수 있는 그 '어떤 혁명'에 대한 이야기도.


어떤 혁명도 개인의 버릇과 삶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면 실패하는 법이다. 한 개인이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근본적으로 바뀌고 그 변화가 사회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라고 본다. (113)

내용과 형식, 안과 밖이 하나 되는 삶이란 지루하고 길고 힘든 시간을 거쳐야만 다다를 수 있는 곳이리라. 그렇게 분투하고 채우고 버리며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고민해야겠다. 그러니까 심심하고 담백하게 보이던 책 속에서 이처럼 여러 생각의 뿌리들이 쏟아져 나오니 지루할 틈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글 쓰는 농부'이자' 생태영성 운동가' 의 소소한 일상이.


먹고살려면 얼마나 벌어야 하는가. 그만큼 벌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 꼭 그렇게 벌고 쓰고 살아야 하는가. 내가 쓰는 돈이 다 나를 살리는 지출인가. 나를 도리어 지치게 하는 지출인가. 내 돈별이는 생태윤리적으로 당당한가. 전 세계인들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써도 괜찮은가 (186)

내 대답은
"뜨끔"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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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처럼 2019-04-22 공감(0) 댓글(0)




마음농사 짓기


1998년 12월 6일 우리 부부가 결혼한 날이다. 햇수로 20년이 되었다. 성격이 많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났으니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이런 싸움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경상도 사람 특유의 무뚝뚝함과 큰 목소리가 꼭 싸우자는 듯하다. 게다가 성격이 느긋한 것 같은데 급하다. 그래서 버럭 거리기 일수다. 오죽했으면 아내가 버럭이 아빠라고 부를까? 매년 신년 계획을 세울 때 1차 목표가 다정다감으로 삼는다. 물론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세상살이가 만만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가족에게 주는 고통이 작은 것이 아니다.

농부 전희식의 나를 알아채는 시간 [마음 농사짓기] 와의 만남은 7년 대한에 만난 한줄기 단비와 같다. 농사는 심어서 기다리며 기르고 살리는 일이다. 새해가 시작되면 날 좋은 날을 가려 씨앗을 심어서 온 정성을 드려 보듬어 주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랑을 나누며 기다려 주는 것, 그렇게 결실을 맺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꼭 결실을 거둬야겠다. 는 마음 또한 욕심이다. 그것조차 내려놓고 편안함으로 만나는 것이다. 책에는 그런 마음이 잘 담겨져 있다. 더욱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두려워한다. 혼밥, 혼술, 혼영등 혼자서 즐기기를 원한다. 이것이 단지 혼자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 혹시 누군가와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마음 농사짓기] 이럴 때 이 책이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생태농부 전희식이 일상에서 펼치는 다양한 마음씀씀이가 두려워하는 당신을 잘 감싸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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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학 2019-04-1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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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 결과 총 16

1.
  • [국내도서] 똥꽃 - 농부 전희식이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치유의 기록 
  • 전희식김정임 (지은이) | 그물코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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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도서] 소농은 혁명이다 - ‘똥꽃’농부 전희식이 꿈꾸는 희망농촌 
  • 전희식 (지은이) | 모시는사람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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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국내도서] 엄마하고 나하고 - 치매 어머니, 아들과 함께 다시 세상을 만나다 
  • 전희식 (지은이) | 한국농어민신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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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국내도서] 마음 농사 짓기 - 농부 전희식의 나를 알아채는 시간 
  • 전희식 (지은이) | 모시는사람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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