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Ishida Baigan.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Ishida Baigan. Show all posts

2023/05/11

이시다 바이간 - Wikipedia 石田梅岩 1685 ~ 1744년

이시다 바이간 - Wikipedia







Ishida Baigan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Ishida Baigan (石田 梅岩; October 12, 1685 - October 29, 1744) was a Japanese lecturer and philosopher, born in Tanba Province,[1] who founded the Shingaku movement (heart learning) based on Neo-Confucianism, the study of the doctrines of Zhu Xi, incorporating ShintoBuddhism and so on,[1] which advocated all education include teachings in ethics and morality.[2]

His life work has been summarized with the Confucian idea that a man that cannot control his home cannot control his nation.[citation needed] This idea helped motivate many Japanese reformists fighting for Japanese feminists, human, and people's rights.[citation needed]

References[edit]

  1. Jump up to:a b Ishida Baigan / Kotobank(in Japanese)
  2. ^ Ishida Baigan. Encyclopædia Britannica.

이시다 바이간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우메이와 학원의 모습( 갤러리아 카메오카 ·교토부 가메오카시)

이시다 바이간(이시다 바이간, 사다유 2년 9월 15일 ( 1685 년 10월 12일 ) - 연향 원년 9월 24일 ( 1744년 10월 29일 ))는 에도 시대 의 사상가 윤리 학자 . 석문심학 의 개조. 는 흥장. 통칭 , 감평. 탄바국 태생. 오구리 양 운문 아래.

약력 편집 ]

단바쿠니 쿠와타 군 히가시현무라(현 : 교토부 가메오카시 히가시베쓰인)에, 부 이시다권 우에몬 , 어머니 타네의 차남으로서 태어난 [1] [2] . 1692년 , 8세에 교토의 상가에 정치봉공하고, 7개월 정도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1707년에는 다시 봉공에 나와 상가의 흑야수가에서 일한다 [ 1 ] . 1724년경 , 석문심학 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철학을 수립해, 1727년에는 쿠로야나기가를 그만두고, 1729년(우호 14년) 45세로 자택에 강석을 마련해, 평생  포교 에 노력 했다 1] . 우메이와의 강의는 수강시에 소개가 일절 불필요하고 성별도 묻지 않는 무료 강좌였다 [3] .

우메이와의 사상의 요망은 '마음을 다하여 성을 아는', 즉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성'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파악하여 '어야 한다' 행동 규범을 요구한다. 시도하는 점에 있다 [1] . 이 점에서, 무사도 서민도 다른 곳은 없고, 사농공상의 신분은 인간 가치에 의한 차별이 아니고, 직분이나 직역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1 ] . 우메이와 자신은 스스로를 유자라고 칭해 그 학문을 '성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테지마 堵庵 등의 문제들에 의해 '심학'의 말이 보급 되었다 . 1744년 60세에 사망. 히가시야마 토리베노 의 연년사 [주석 1] 에 매장된다 [4] .

주요 저서에 『도청문답』 『경약 사이가론』이 있다. 다이쇼 6년(1917년), 정5위를 추증받았다 [5] .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의 근저에 있던 것은 송학 의 흐름을 펌핑하는 천명 론이다같은 사상으로 이시다 에 선행하는 스즈키 마사 조의 직분 불행설이 사농공상 중 상인의 직분을 교묘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이시다는 오랜 상가 근무로부터 상업의 본질을 숙지하고 있어 , “상업의 본질은 교환의 중개업이며, 그 중요성은 다른 직분에 아무런 열등하지 않다”는 입장을 세워 상인의 지지를 모았다. 최성기에는 문인 400명에 이르러 교토 오옷 상인의 테지마 堵( 1718 년 -1786년 )을 비롯하여 ‘ 마쓰바타 도화 ’를 저술한 후시 마츠 쇼우 ( 1725년 -1784년 ) 심학도화의 최고봉 ‘ 비둘기 도화’ 의 시바타 비둘기 ( 1783년 -1839  ) 이 외에 사이토전문 오오시마 유린 등 뛰어난 인재 를 배출했다. 우메이와의 사후에는, 테지마 堵庵 등을 중심으로 그의 쌓아 올린 사상과 조직이 갖추어져 「이시다 심학」이 일본 각지로 펼쳐지게 되었다[4 ] .

메이지 이후에 심학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업가로 알려진 사람에게, 노마 키요지 등이 있다 [6] . 절약의 장려와 부의 축적을 천명의 실현이라고 보는 사고방식은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닐리 벨러에 의해 칼빈주의 상업윤리의 일본판으로 되어 일본의 산업혁명 성공의 원동력 이라고도 했다 .

덧붙여 마츠시타 유키노스케 가 이시다 바이간에 경도했다」라고 하는 속설이 있지만, 마츠시타 마사키 학원에서 배운 우사미 타이이치로(주식회사 뉴포트 대표 이사)에 의한 상세한 조사에 의해, 이것은 명확하게 부정되고 있다[ 7 ] . 우사미에 의하면, 마츠시타가 우메이와에 대해 발언한 것은 한번도 없고, 원래 우메이와 자체를 「직접 몰랐다」라고 한다. 또, 사상사학자의 모리타 켄지 도 「마츠시타가 이시몬 심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모릅니다. 아마, 우메이와의 책을 직접 읽은 적은 없을 것 같습니다」[ 8] 이라고 말했다.

석문심학 재평가 편집 ]

1970년 대경부터 환경문제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거나 기업의 불상사가 계속되는 가운데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구미를 중심으로 활발히 말해지게 되었지만 , 그런 배경 속에서 

"이중의 이익을 취하고 달콤한 독을 먹고 자사하는 게 많다고 한다" "실의 상인은 앞도 서서 나도 서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고 , 실로 심플한 말로 CSR의 본질적인 정신을 표현한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은, 오미 상인의 「삼방 요시」의 사상과 함께, 「일본의 CSR의 원점」으로서 각광  받고 있다 그 사상 역시 영리 활동을 부정하지 않고, 윤리라기보다는 「비즈니스의 지속적 발전」의 관점에서, 본업 속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 나가는 것을 설고 있어, 기부나 원조 등 본업 이외에서의 '사회공헌'을 활동의 중심으로 하는 구미의 CSR에는 없는 특징이 있다.

2011년 ( 헤세이 23년)에는, 우메이와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마스코트 ·캐릭터 「신가군」이 만들어져 [9] , 옷차림 에 의한 이벤트 출연이나 관련 상품 개발이 행해지고 있다.

인물·인품 편집 ]

  • 태어나는 이굴자로, 어린 시절보다 친구에게 미움받았다고 말하고 있어, 그 때문에 반골심이 강했다고 한다[10 ] .
  • 재노(민간 연구자) 오름의 학자인 이시다를 무학으로 문자에 희소하다고 비판한 자에 대해, 「문자가 없었던 옛날에, 충효은 없고, 성인은 없었다고 해도 할까 . 성인  학문 는 행위를 책으로 하고, 문자는 가지잎이 되는 것을 알게 한다」라고 하며, 스스로 덕에 이르는 길을 실행하지 않고, 단지 문자의 최말에만 구체하고 있는 것은 「문자 게이샤라고 하는 사람이야」라고 통렬 하게 반박했다 [11] .
  • 마을사람 의 유예 에는 비판적이었지만, 「지금은, 토모토모의 교제(사교)도 많아요, 고·고·차노유 등도 유의하지 않으면, 교제는 나쁘고 후”라고 사교 때문에 의 제예를 인정하는 발언은 하고 있다 [12] .
  • 무가를 「농공상의 머리」로서, 봉건제에 관해서는 시인했지만, 「아래로 태어나면 굉장히 사람에게 바뀌어야 할까」라고 말해, 서민간에서는 서로 대등하다고 주장해, 한층 더 (정치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장인상에서는 무가도 상인도 대등하다고 했다 [13] .

관련 시설 편집 ]

현재 교토부 가메오카시의 휴게소 갤러리아 카메오카 내에 이시다 우메이와 기념 시설 「우메이와 학원」이 병설되어 있다.

자상은 오사카부 사카이시 사카이구의 스가와라 신사 , 하시 가 미역 에 개축된 출신지의 JR 카메오카역의 개찰  , 출신지인 교토부 카메오카시 히가시베쓰인초에 있는 카메오카 시립 히가시베쓰인 초등학교에 놓여져 있다.

교토부 가메오카시 히가시베쓰인 출신지 주변이 '우메이와노사토'로 탄생지 정비 사업을 하고 있으며, 기념관 등이 2024년경까지 건설될 예정이다.

단가 편집 ]

자비 마코토 솔직히 모두 온몸보다 드러나는 빛조각 알아
——Dao Ge , "과거와 현재의 수백 곡" 55 by Masao Inoue

저작 편집 ]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메이지 유신 때 폐사.

출처 편집 ]

  1. ↑ e 일본 고전 문학대사전 편집원회 「일본 고전 문학대사전 제1권」이와나미 서점, 1983년 10월, 132쪽.
  2. 우에다 마사아키 외 감수 저, 삼성당 편수소 편 “콘사이스 일본인 명사전 제5판” 삼성당, 2009년, 100페이지.
  3.  "이시다 선생님 사찰", "이시다 우메이와 전집 (아래)"수록, 624-625 페이지
  4. b 키타 2007 , p. 5.
  5. ^ 다지리 사 편 “증위 제현전 증보판 위”(콘도 출판사, 1975년) 특지 증위 연표 p.43
  6. 『세계를 만든 8대 성인: 인류의 교사들의 메시지』 이치조 마야, PHP 연구소, 2008
  7. ↑ 연구 보고 “”마츠시타 유키노스케가 이시다 우메이와에 경도했다”는 소문은 과연 진짜일까?”(2016년 9월 12일 열람)
  8. ^ 모리타 켄지 「왜 명경영자는 이시다 우메이와에 배울까?」디스커버 트엔티원 11 페이지
  9. ↑ 캐릭터 결정 「신가군」 이시다 우메이와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카메오카 시민 신문
  10. ↑ 장부 히데오『불교와 자본주의』신조 신서 2004년 ISBN 4-10-610063-0 135면
  11.  장부 히데오 『불교와 자본주의』 135면
  12. 야마구치 히로시『일본인의 급여 명세서 고전에서 읽는 물가 사정』카도카와 소피아 문고 , 2015년, 268페이지.
  13. ↑ 하라다 반언 “개혁과 유신” 코단샤 현대 신서 1976년 39페이지
  14. ↑ 야마자키 2008 , p. 3.

관련 문헌 편집 ]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카테고리 :에도시대 유학자
18세기 일본 유학자
일본의 윤리학자
심리학
석문심학의 인물
탄바국의 인물
긴키 지방 마스코트
카메오카시의 역사
긍정적인 5명의 수신자
1685년생
1744 아니오

====

石田梅岩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梅岩塾の様子(ガレリアかめおか・京都府亀岡市)

石田 梅岩(いしだ ばいがん、貞享2年9月15日1685年10月12日) - 延享元年9月24日1744年10月29日))は江戸時代思想家倫理学者石門心学の開祖。は興長。通称、勘平。丹波国生まれ。小栗了雲門下。

略歴[編集]

丹波国桑田郡東懸村(現:京都府亀岡市東別院)に、父石田権右衛門、母たねの次男として生まれる[1][2]1692年、8歳で京都の商家に丁稚奉公し、7ヶ月ほどで故郷に戻ったが、1707年には再び奉公に出て商家の黒柳家で働く[1]1724年ごろ、石門心学と呼ばれる独自の哲学を樹立し、1727年には黒柳家を辞し、1729年享保14年)45歳で自宅に講席を設け、生涯を布教に努めた[1]。梅岩の講義は受講に際して紹介が一切不要、かつ性別も問わない無料の講座であった[3]

梅岩の思想の要諦は、「心を尽くして性を知る」、すなわち人間を真の人間たらしめる「性」を「あるがまま」の姿において把握し、「あるべきよう」の行動規範を求めようとする点にある[1]。この点において、武士も庶民も異なるところはなく、士農工商の身分は人間価値による差別ではなく、職分や職域の相違に過ぎないとする[1]。梅岩自身は自らを儒者と称し、その学問を「性学」と表現することもあったが、手島堵庵などの門弟たちによって「心学」の語が普及した。1744年、60歳で死去。東山鳥辺野の延年寺[注釈 1]に埋葬される[4]

主な著書に『都鄙問答』『倹約斉家論』がある。大正6年(1917年)、正五位を追贈された[5]

梅岩の思想の根底にあったのは、宋学の流れを汲む天命論である。同様の思想で石田に先行する鈴木正三職分仏行説が士農工商のうち商人の職分を巧く説明出来なかったのに対し、石田は長年の商家勤めから商業の本質を熟知しており、「商業の本質は交換の仲介業であり、その重要性は他の職分に何ら劣るものではない」という立場を打ち立てて、商人の支持を集めた。最盛期には、門人400名にのぼり、京都呉服商人の手島堵庵1718年 - 1786年)をはじめ「松翁道話」を著した布施松翁1725年 - 1784年)心学道話の最高峰とされる「鳩翁道話」の柴田鳩翁1783年 - 1839年)このほかに・斎藤全門大島有隣等優れた人材を輩出した。梅岩の死後は、手島堵庵らを中心に彼の築いた思想と組織が整えられ、「石田心学」が日本各地へと拡げられることとなった[4]

明治以降に心学の教えを引き継いだ実業家として知られた者に、野間清治らがいる[6]。倹約の奨励や富の蓄積を天命の実現と見る考え方は、アメリカの社会学者ロバート・ニーリー・ベラーによってカルヴァン主義商業倫理の日本版とされ、日本の産業革命成功の原動力ともされた。

なお、松下幸之助が石田梅岩に傾倒した」という俗説があるが、松下政経塾で学んだ宇佐美泰一郎(株式会社ニューポート代表取締役)による詳細な調査によって、これは明確に否定されている[7]。宇佐美によれば、松下が梅岩について発言したことは一度もなく、そもそも梅岩自体を「直接知らなかった」という。また、思想史学者の森田健司も「松下が石門心学に影響を受けたという事実を、私はまったく知りません。おそらく、梅岩の書を直接読んだことはないように思われます」[8]と述べている。

石門心学の再評価[編集]

1970年代ごろからの環境問題への意識の高まりや、企業の不祥事が続く中、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企業の社会的責任)ということが欧米を中心に盛んに言われるようになったが、そのような背景の中で「二重の利を取り、甘き毒を喰ひ、自死するやうなこと多かるべし」「実の商人は、先も立、我も立つことを思うなり」と、実にシンプルな言葉でCSRの本質的な精神を表現した石田梅岩の思想は、近江商人の「三方よし」の思想と並んで、「日本のCSRの原点」として脚光を浴びている。その思想もやはり営利活動を否定せず、倫理というよりむしろ「ビジネスの持続的発展」の観点から、本業の中で社会的責任を果たしていくことを説いており、寄付や援助など本業以外での「社会貢献」を活動の中心とする欧米のCSRにはない特徴がある。

2011年平成23年)には、梅岩の教えを広めるため、マスコット・キャラクター「しんがくん」が作られ[9]着ぐるみによるイベント出演や関連グッズ開発が行なわれている。

人物・人柄[編集]

  • 生まれつき理屈者で、幼年のころより友に嫌われていたと語っており、そのため反骨心が強かったとされる[10]
  • 在野(民間研究者)上がりの学者である石田を無学で文字に疎いと批判した者に対し、「文字がなかった昔に、はなく、聖人はいなかったとでもいうのか。聖人の学問は行いを本とし、文字は枝葉なることを知るべし」といい、自ら徳に至る道を実行せず、ただ文字の瑣末にのみ拘泥しているのは「文字芸者という者なり」と痛烈に反論した[11]
  • 町人の遊には批判的であったが、「今にては、朋友の交わり(社交)も多く、謡・鼓・茶の湯なども心がけなくては、交わりは悪く候」と社交のための諸芸を認める発言はしている[12]
  • 武家を「農工商の頭」として、封建制に関しては是認したが、「下々に生まるればとて人に変わりのあるべきや」と述べ、庶民間では互いに対等であると主張し、さらに(政治上ではなく)社会的な職人上では武家も商人も対等であるとした[13]

関連施設[編集]

現在、京都府亀岡市の道の駅ガレリアかめおか内に石田梅岩記念施設「梅岩塾」が併設されている。

座像は大阪府堺市堺区菅原神社橋上駅に改築された出身地のJR亀岡駅の改札前、出身地である京都府亀岡市東別院町にある亀岡市立東別院小学校に置かれている。

京都府亀岡市東別院の出身地周辺が「梅岩の里」として生誕地整備事業が行われており、記念館などが2024年頃までに建設される予定となっている。

短歌[編集]

慈悲まこと 正直も皆 我身より 現はれ出る 光ぞと知る
道歌、『今昔秀歌百撰』 55 井上雅夫

著作[編集]

脚注[編集]

注釈[編集]

  1. ^ 明治維新の際に廃寺。

出典[編集]

  1. a b c d e 日本古典文学大辞典編集員会『日本古典文学大辞典第1巻』岩波書店、1983年10月、132頁。
  2. ^ 上田正昭ほか監修 著、三省堂編修所 編『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三省堂、2009年、100頁。
  3. ^ 「石田先生事蹟」、『石田梅岩全集(下)』収録、624-625ページ
  4. a b 喜田 2007, p. 5.
  5. ^ 田尻佐 編『贈位諸賢伝 増補版 上』(近藤出版社、1975年)特旨贈位年表 p.43
  6. ^ 『世界をつくった八大聖人: 人類の教師たちのメッセージ』一条真也, PHP研究所, 2008
  7. ^ 研究報告「”松下幸之助が石田梅岩に傾倒した”という噂は果たして本当だろうか?」(2016年9月12日閲覧)
  8. ^ 森田健司 『なぜ名経営者は石田梅岩に学ぶのか?』 ディスカヴァー・トゥエンティワン 11ページ
  9. ^ キャラ決定「しんがくん」 石田梅岩の教えを広める 亀岡市民新聞、2011-08-29
  10. ^ 長部日出雄 『仏教と資本主義』 新潮新書 2004年 ISBN 4-10-610063-0 135ページ
  11. ^ 長部日出雄 『仏教と資本主義』 135ページ
  12. ^ 山口博『日本人の給与明細 古典で読み解く物価事情』角川ソフィア文庫、2015年、268頁。
  13. ^ 原田伴彦 『改革と維新』 講談社現代新書 1976年 39ページ
  14. ^ 山崎 2008, p. 3.

関連文献[編集]

参考文献[編集]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이시다 바이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바이간 강습소의 모습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 1685년 10월 12일 ~ 1744년 10월 29일)은 에도 시대의 사상가, 윤리학자이다. 석문심학을 연 사람으로 이름은 오키나가(興長), 통칭 간페이(勘平).

개요[편집]

단바국 구와다군(지금의 교토부 가메오카시)에서 백성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695년 11세 때 교토의 포목상에서 도제 생활(丁稚)을 시작했지만 너무 대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4-5년 일했을 무렵 고향에 돌아왔다.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1707년 23세때 다시 포목점 쿠로야나기가에 들어가 도제로 일했다.

1727년에 만난 재가 불자 오구리 료운(小栗了雲)으로부터 배워 사상가의 길을 시작해 45세엔 소개도, 성별도 묻지 않는 무료 강좌를 집에서 개설했다[1] 나중에 석문심학(石門心学)으로 알려지는 사상을 강의했다. 내용은 "학문과 마음의 진정성을 안다"「学問とは心を尽くし性を知る」는 생각을 기초로 마음과 자연이 일체되는 질서와 이치를 깨닫는 학문이다. 이시다는 스스로 유학자라 불렀고 그의 학문을 성(리)학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심학으로 부르고 있다. 60세로 죽었다.

주요 저서로 도비문답『都鄙問答』 검약제가론『倹約斉家論』이 있고 사후 제자들이 엮은 이시다 선생 어록石田先生語録이 있다.

가메오카시에 이시다 바이간을 기념하는 바이간 강습소(梅岩塾)가 있고 사카이구의 菅原神社에 이시다의 좌상이 있다. 가메오카역에도 새로 만들어진 좌상이 있다. 가메오카시의 초등학교(亀岡市立東別院小学校)에는 흉상이 있다.

2011년 이시다를 형상화한 마스코트 캐릭터 심학군「しんがくん」이 만들어졌다.[2]

석문심학의 영향[편집]

이시다 사상의 근저에는 성리학의 흐름에 놓인 천명론이 있다. 이시다에게 영향을 준 鈴木正三의 직분설(職分説)이 사농공상의 직업관속에서 상업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했던 것에 비해 이시다는 상인으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상업의 본질을 잘 알았다. 상업의 본질은 교환/중개업이고 그 중요성은 다른 직업들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商業の本質は交換の仲介業であり、その重要性は他の職分に何ら劣るものではない」고 설명하여 상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전성기엔 제자가 400명까지 되었다. 알려진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테지마 도안(手島堵庵)(1718年~1786年): 좌담수필의 저자
  • 나카자와 도니(中沢道二)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를 심학에 입문시킴
  • 후세 쇼오(布施松翁)(1725年~1784年): 「松翁道話」의 저자
  • 시바타 규오(柴田鳩翁)(1783年~1839年): 심학강의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는「鳩翁道話」의 저자
  • 사이토 젠몬(斎藤全門), 오시마 우린(大島有隣), 오쿠다 라이조(奥田頼杖) 등

메이지 시대 이후 심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인물 중에선 노마 세이지(野間清治)가 대표적이다.[3] 검약과 부의 축적을 천명으로 삼아 실천한다는 생각은 로버트 벨라가 일본판 칼뱅주의 상업관으로 포장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산업혁명을 이끈 주요 윤리관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커지고 기업들의 환경범죄가 늘어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서구권에서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시다 바이간은 이중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달콤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아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二重の利を取り、甘き毒を喰ひ、自死するやうなこと多かるべし」라거나 진짜 상인은 타인을 먼저 세우고 자신도 똑바로 서는 것을 생각한다「実の商人は、先も立、我も立つことを思うなり」처럼 쉬운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표현해냈다. 이런 이시다 사상은 오우미 상인近江商人들의 삼면이 좋다「三方よし」사상과 함께 일찍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 사상은 기업의 영리활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지속가능한 사업발전의 관점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며 기부나 원조처럼 본업 이외의 사회공헌을 강조한 서구의 사회적 책임론과는 조금 다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이시다 바이간에 심취했다는 속설이 있지만 관련자들은 마쓰시타가 이시다 바이간을 언급한 적이 없거나[4] 아예 몰랐을 것이라고 보고있다.[5] 기업인 중에서는 스미토모의 오구라 마사츠네(小倉正恒)가 석문심학회 회장을 맡은 바 있다.

인물, 발언[편집]

  • 워낙 도리를 중시하는 원리주의자여서 어릴때부터 친구들에게 미움받는 등 반골 기질이 있었다[6] . 나는 어릴때부터 따지기를 좋아해서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14-5세때 문득 그런 성격을 깨닫고 이래서는 안된다 생각했다.[7]
  • 재야 학자인 이시다를 배운게 없으면서 문자쓴다고 비판한 사람들에게 통렬하게 답했다. 문자가 없었던 시절이라고 충효가 없고 성인이 없었단 말인가. 성인의 학문을 하는데에 있어 문자라는 것은 지엽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文字がなかった昔に、忠孝はなく、聖人はいなかったとでもいうのか。聖人の学問は行いを本とし、文字は枝葉なることを知るべし」 스스로 덕에 이르는 길을 실천하지 않고 문자에 집착하는 자들은 문자기생이라고 불러도 좋겠다「文字芸者という者なり」고 답했다.[8]
  • 조닌의 유흥문화에는 비판적이었으나 사교를 위한 기예는 인정했다.[9] .
  • 사무라이를 농공상의 머리라고 하여 봉건적 신분제나 직업관을 인정했지만 어디에서 태어나더라도 사람에겐 변화란건 있기 마련이다「下々に生まるればとて人に変わりのあるべきや」라고 말하며 서민들 사이에서는 위아래 없이 대등하다고 했다. 또 정치적인 관점이 아니라 사회에서의 직업인으로 본다면 사무라이나 상인이나 대등할 수 있다고도 했다[10]

각주[편집]

  1.  「石田先生事蹟」、『石田梅岩全集(下)』収録、624-625ページ
  2.  キャラ決定「しんがくん」 石田梅岩の教えを広める Archived 2014년 5월 12일 - 웨이백 머신 亀岡市民新聞、2011-08-29
  3.  『世界をつくった八大聖人: 人類の教師たちのメッセージ』一条真也, PHP研究所, 2008
  4.  研究報告「”松下幸之助が石田梅岩に傾倒した”という噂は果たして本当だろうか?」(2016年9月12日閲覧)
  5.  森田健司 『なぜ名経営者は石田梅岩に学ぶのか?
  6.  長部日出雄 『仏教と資本主義』 新潮新書 2004年 ISBN 4-10-610063-0 135ページ
  7.  이시다선생 어록
  8.  長部日出雄 『仏教と資本主義』 135ページ
  9.  山口博 『日本人の給与明細 古典で読み解く物価事情』 角川ソフィア文庫 2015年 ISBN 978-4-04-409224-5 268ページ
  10.  原田伴彦 『改革と維新』 講談社現代新書 1976年 39ページ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