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의식의 단계.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의식의 단계. Show all posts

2023/06/02

育士道육사도 :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장휘용)

育士道육사도 :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장휘용)



育士道육사도

pasj.egloos.com

EGLOOS | LOG-IN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장휘용)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장휘용 지음




차 례



1부 신비의 세계로 여행을
제1장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신비로운 현상들
우리의 감각기관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2부 우리가 사는 세상
제2장 에너지의 세계
육감으로 느끼는 세상
기는 모든 활동의 원동력
인체 오라에 대한 연구
일곱 가지 에너지층
식물에도 의식이 있다
꼴 에너지
우리는 모두 기의 바다에 살고 있다
제3장 마음이 곧 창조주
마음이란
마음은 기를 조절한다
마음의 힘을 증명한다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능력, 텔레파시
천국도 지옥도 마음이 만들어낸다
제4장 물질의 근본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놀라운 사실들
홀로그램 우주
이 세상은 창조주가 만든 거대한 가상현실
제5장 진짜 세상 엿보기
생활의 동반자 엘로드
어린이의 육감이 더 강하다
몸 스스로 판단한다
정신적 자극에도 반응하는 몸
의식수준을 수치로 나타낸다
엘로드를 이용한 수맥 측정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응용되는 엘로드
엘로드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생각과 행동, 말,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있다
제6장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 모두는 하나
육체 뒤에 숨겨진 정신이 감동을 준다
신과 나눈 이야기
우주의 감시망, 걱정할 필요는 없다
느낌으로 판단하라
기 수련은 기를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체험한 기의 세계

3부 삶의 근원 속으로
제7장 우리는 영원한 존재
삶의 근원 속으로
윤회론
윤회의 증거들
전생체험
종교에서 바라보는 윤회설
카르마의 원리
인간은 왜 윤회하는가
나는 내가 선택한 인생을 살고 있다
제8장 깨달음을 향하여
사람은 저마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본다
배움이 많은 영혼일수록 의식수준이 높다
영혼의 성장을 방해하는 고정관념
영혼의 성장은 일상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에너지가 맑아지면 깨달음이 온다
순간에 머무르기
제9장 예 언
예언은 가능하다
후천개벽을 말한 수많은 예언가들
우주인의 메시지
우주는 인류에게 경고하고 있다
후천개벽,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제10장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예정된 삶을 살아간다
진실된 삶을 살아간다
열린 마음으로 살아간다
지식과 관념의 벽을 허문다
내면의 느낌에 따라 살아간다


저자 후기
참고 문헌


수정판 서문



도서출판 양문을 통해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를 출간한 지 벌써 2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정신세계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호평을 얻었고, 일부 사람들로부터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을 알려 줄 수 없음을 크게 아쉬워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양문으로부터 책의 판권을 돌려 받은 것을 계기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구상하고 있다. 저자가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 (www.fortruth.net)를 통해 이 책을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였고, 제본된 책을 원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구매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계기로 책을 일부 수정 보완하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책의 발간 이후 있었던 많은 체험들 중 도움이 될 만한 내용 일부를 삽입하였고, 정신세계 입문서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마지막 10장을 전면 수정하였다. 수정 작업에는 1년 후쯤 발간될 예정인 다음 책과의 관계도 고려되었다.
이 책이 수정 발간되기까지 신대산 군과 송종근 군의 정성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함께 하는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고,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확장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고대한다.

2003년 10월
장휘용



독자여러분께



책을 마무리하는 동안 나는 지난 3년 동안 내게 일어났던 내면적인 변화를 떠올리며 새삼스레 놀라고 있다.
1997년 가을까지만 해도 나는 분명 미국에서 훈련받은 전형적인 경영학자였다. 인간의 만족은 물질을 소비하는데 따라 증대된다는 경제학의 기본 개념을 충실히 받아들이고 있었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가 최고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업이 이윤을 극대화하는 행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불과 3년이 지난 지금, 이기심에 바탕을 둔 물질주의의 허구성을 이야기하고, 인생의 본래 목적은 영혼의 성장임을 말하며, 이제 인류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할 때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1953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76년 서울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에서 일하다 7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퍼듀대학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메릴랜드 주립대에서 6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경영학, 특히 회계학과 재무관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93년 귀국한 후, 대우경제연구소를 거쳐 LG그룹 회장실 이사로 근무하게 되었고, 홈쇼핑 TV, PCS와 같은 LG의 신규 사업권을 따내는 데 주역이 되기도 했다. 95년 학계로 다시 돌아온 후 현재까지 인하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중인데, 98년에는 한국회계학회로부터 학술상(최우수 논문상)을 받게 되어 학자로서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학자로서 기업의 엘리트로서 바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오면서 무엇보다도 인간의 합리성을 중요시하고, 객관성과 검정 가능성을 강조해 왔으며, 사회적 신의와 명예를 소중하게 여겨왔다.
그러던 나는 3년 전 건강 문제 때문에 시작한 단학수련을 계기로 많은 기(氣)적 체험을 하게 되었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 극적으로 확장되고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크게 살아난 기(氣)적인 감각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참된 세상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또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고교 시절부터 이따금 고민하다가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짓이라고 애써 외면해 왔던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화두, 즉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들이 많은 기(氣)적인 체험과 더불어 저절로 이해되고 정리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독서와 명상을 함으로써 크게 확장된 의식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그림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다. 1년 전쯤부터는 너와 나, 선과 악에 대한 분별이 점점 약해지고, 싫은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는 마음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희로애락의 감정 기복이 크게 줄어들어 슬퍼도 크게 슬퍼하지 않고 기뻐도 크게 기뻐하지 않게 되었고 언제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물질세계의 허구성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물질에 집착하는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처럼 나 자신의 근본적 변화를 느끼게 되면서 내가 발견한 이 귀중한 정보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어났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은 한없는 축복 그 자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스스로 끊임없이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나는 내가 발견한 세상이 동양의 성인들이 수천 년 전 직관으로 깨달아 사람들에게 전한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책을 쓴다면 단지 그분들의 말씀에 설명을 덧붙이거나 겉포장을 다르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창성이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단연히 거부해온 학자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잘못된 지식이 전달되거나 독자를 그릇된 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두 가지는 책을 쓰고 싶다는 나의 욕구를 번번이 꺾어놓곤 했다.
그러나 정신적 변화가 더 깊어지고 내 삶의 의미가 진짜 세상을 알리는 데 있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수업시간뿐 아니라 외부 강의를 하다가도 간간히 ‘기의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지난 봄에는 포항제철 간부사원들에게 ‘전략적 사고’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다가 잠시 기의 세계에 대해 언급하게 되었는데, 참석자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큰 호응을 보내주었다. 그들은 기에 관해 큰 관심을 보였고, 그 가운데 몇몇 사람은 나에게 책을 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또 ‘기와 정신세계’라는 이름으로 인하대 행정대학원에서 두 차례 특강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그저 상식 수준의 이야기를 했는데도 수강생들은 몹시 놀라워했다. 그밖에도 여러 동료 교수들이나 주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기와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제한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내가 가진 방식으로 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근본 메시지는 수천 년 전 성현들이 하신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우주와 인생에 대해 직관적이고 권위적인 설법 형태로 풀어놓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 증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기를 중심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직관적이면서 동시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정신세계에 대한 책들, 특히 성현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이 쓴 책들은 대부분 직관적인 접근 방법을 택하고 있고, 따라서 합리적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수많은 독자들은 ‘왜 그럴까?’ 하고 궁금해 하기는 하지만 우주의 진리란 애당초 우리들의 인식 능력 바깥에 있는 것이어서 합리적 설명이란 불가능한 모양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만다.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는 직관과 합리성이 결합되어 이루어질 때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직관 없이 합리성만 추구한다면 극히 제한된 능력을 가진 두뇌에만 의존하게 되어 탐구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고, 반면 합리성을 무시한 채 직관에만 의존한 결과라면 사람들이 냉철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주의 궁극적 진리는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라고들 하지만 우리의 언어로도 비교적 잘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합리성과 객관성에 대한 훈련을 받아왔다. 따라서 정신세계라는 주제에 대해 쓰여진 이 책을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일부 독자들이 지겨워할지도 모를 정도로 상당한 양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언급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삶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 결과들만으로 우주의 무한한 진리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수련을 통해 계발되기 시작한 직관력이 많은 도움을 주었고, 특히 아침 명상을 하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때로는 우주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신병기인 엘로드(L-rod : L자 모양의 탐사 막대기, 수맥봉)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제5장에서 자세히 할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의 많은 내용들이 이미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분들도 ‘왜 그럴까?’라는 질문에 대한 논리적인 대답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이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이나 관념과는 너무나 달라 믿기 어렵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독자들도 부디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한다. 내가 경험한 것처럼 그분들도 처음에는 황당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자연스레 수긍하게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여러 곳에 흩어져 존재하는 진리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기의 측면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또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전문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가능하면 많은 독자들이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문용어를 줄이고 특정 주제에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좀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언급된 참고문헌을 직접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원고를 읽고 많은 조언을 해준 문성원 교수, 김범수 교수, 장경자 교수, 임병훈 교수, 이윤정 씨, 그리고 이건호 박사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박사 과정에 있는 임태균 군, 나의 누님들 그리고 그밖의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비록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항상 응원해 준 가족들에게 이 기회를 빌려 깊은 고마움을 전하며, 이 책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간직한 채 글을 맺는다.


2001년 3월
인천 포방골에서
장휘용


1부 신비의 세계로 여행을



제1장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신비로운 현상들
우리는 이따금 이상한 체험을 하곤 한다. 어느날 문득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떠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의 전화를 받거나 우연히 길에서 그 친구와 마주치게 된다. 어떤 사람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홱’ 하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당황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돼지꿈을 꾼 후에 1등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얼마 전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곧 새 자동차를 타게 될 거라는 어린 딸의 말을 듣고 백화점 경품 행사에 응모했는데, 운좋게 당첨되어 딸이 말한 대로 새 자동차를 얻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이번 비행은 어쩐지 꺼림칙하다고 중얼대며 비행 연습을 떠난 조종사가 전투기와 함께 공중 폭발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이러한 이상 야릇한 경험들 중에는 특히 꿈과 관련된 것이 많아서 대형사고가 날 때면 자신이나 주위 가까운 사람의 꿈 덕분에 참사를 모면한 경우가 자주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경험들은 우연의 일치로 여겨질 뿐 별다른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학계에서 보고되는 믿을 만한 연구 결과들 중에도 신비로운 현상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식물을 재배할 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더욱 빠르고 튼튼하게 자랐고, 젖소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우유가 20∼30% 정도 더 생산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수년 전 발표된 적이 있다. 또 몇 년 전 미국에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이 지능 계발에 좋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후로는 어린이들에게 모차르트나 바흐의 곡을 들려주는 것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아직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진 적은 없지만 난처럼 예민한 화초를 오랫동안 길러온 사람들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재배해야 화초가 윤기 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얼마 전 국내의 한 연구팀은 물을 급속히 냉동시킨 결정체 사진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해 이전에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가 발표한 연구 결과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 있을 때는 물 결정체가 사랑스런 육각형으로 나타나고, 반대로 미움, 공포 등의 감정을 지니고 있을 때는 물 결정체가 일그러진 흉칙한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약수의 결정체는 육각형이 뚜렷한 반면 수돗물의 결정체는 육각형 일부가 떨어져나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의 결정체가 항상 일정한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크게 동떨어진 결과였다.
신비로운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몇년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인체에 해롭다고 알려진 수맥파(水脈波)에 대해 방영한 적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꿈에서 본 달마대사를 그린 어느 아마추어 화가의 그림이 수맥파를 차단하는 데 효과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방송사의 프로그램에서는 속이 텅 빈 피라미드 모양의 물체가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지에 대해 방영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피라미드 안에 음식을 보관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고 맛도 좋아지며, 무디어진 면도날을 피라미드 속에 넣어두면 칼날이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 등을 자세히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최면을 이용해 전생을 체험하고 병을 치료하는 일들이 최근 들어 전 세계에 빠르게 퍼지고 있으며, 일부 미디어에서는 최면을 통한 전생 체험을 공개 방송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는 성격이 약간 다르지만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UFO(미확인 비행물체)의 존재, 귀신과 빙의현상(귀신들림) 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신비로운 현상들을 계속 관찰하고 또 공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 자체를 부정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지만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다. 워낙 정직하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다가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는 성향을 가진 우리들로서 상식을 벗어난 현상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믿기 힘들거나 신비하게 생각되는 현상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또 끊임없이 발견되어 왔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세상은 실제 존재하는 세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감(五感)에 의존해 세상을 인지하고 있고 오감으로 인지되지 않는 것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오감은 세상을 얼마나 잘 포착하고 있는 것일까?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옛부터 사람들은 시각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사람이 받아들이는 정보 가운데 약 80%가 시각을 통해 입수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사람들의 인식이 얼마만큼 보이는 것에 의존하고 있느냐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대부분의 정보를 시각을 통해 입수하고 있고 또 시각정보를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시각정보는 극히 불완전한 것이다. 텔보트(Michael Talbot)가 쓴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Universe)에 의하면, 두뇌의 시각피질에서 최종적으로 인식되는 시각정보는 그 이전에 측두엽에서 편집되고 변형되는데, 이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내용의 50% 이상이 눈으로 들어온 정보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측두엽에서 가공된 것이라고 한다. 즉 50% 이상의 시각정보는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보여야 한다는 우리의 기대에 의해 짜깁기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아무리 열심히 자신의 원고에 대한 교정을 보아도 많은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발견되고, 간판이나 표지판의 글자가 잘못 쓰여져 있어도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는 특정 위치에 존재하는 사물은 아예 망막에 잡히지도 않는다는 맹점이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만으로도 여태껏 우리가 시각에 대해 지니고 있던 맹목적인 신뢰감은 큰 타격을 받았을 법하다. 하지만 시각정보에 대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시신경이 가시광선이라고 불리는 극히 한정된 진동수를 가진 빛만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우주에는 주파수가 다른 파동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하지만 우리 눈에는 일정 주파수 대역의 파동들만 인식되고 그밖의 파동들은 인식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현상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청각도 믿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주파수는 20∼20,000헤르츠(Hertz : 1초 간 진동수)에 국한되므로 우리는 그보다 더 낮거나 높은 주파수의 소리는 결코 들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새가 아무리 아름답게 노래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지구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돌아가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높은 진동수의 소리를 듣지만, 이는 오히려 이명(耳鳴)이라 불리는 질환으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후각이나 미각은 이보다 더 제한적이다. 우리는 수많은 물체들을 무미(無味), 무취(無臭)로 단정짓는데 이는 우리의 감각이 그 물체들의 진짜 맛과 냄새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촉각은 후각이나 미각보다도 더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가 몸에 닿더라도 어느 정도 강도를 넘어서야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 공기의 존재를 몸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공기의 흐름이 강해져 바람이 불게 되면 그제서야 공기를 인식하게 된다.
이상의 사실들은 우리가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실제 존재하는 것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과 설령 오감으로 인지된다 해도 그것이 실제 모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사람들은 각자의 오감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또 실제 세상이 그 인식대로일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불과할 뿐이다.
특히 우리의 오감은 비교적 진동수가 낮은, 소위 ‘물질’은 잘 인식하는 반면, 그보다 진동수가 높으면서 옅은 ‘비물질’은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오감의 한계에 대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감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성향이 너무나 강했다. 쉬운 예를 들면 전기가 최초로 발견된 이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까지 수백 년이 걸릴 정도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는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치게 오감만을 신뢰해 왔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오감은 물질생활을 하기 위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물질만을 인식할 수 있는 극히 불완전한 인식기관이다. 오감은 무한 광대한 비물질 세계를 전혀 인식할 수 없음은 물론 그 물질세계도 극히 불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감을 통해서 인식되는 세상이 진짜 세상과는 크게 다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기초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을 찾아나서 보자.
진짜 세상을 찾아 떠나는 우리에게 열린 마음은 새로운 ‘앎’을 위한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모든 인간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기에 무의식 세계에서는 이미 우주의 모든 정보와 접하고 있다. 따라서 사실상 새로운 정보란 없다. 단지 그 정보가 두뇌와 연결되지 않아 의식세계에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의식세계에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와 접하게 될 때 우리의 의식은 자극을 받게 되고, 그 자극을 통해 우리는 깊이 감추어진 기억의 창고를 뒤질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젠가 자연스레 그 정신적 자극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게 되고, 그 결과 우리의 ‘앎’은 확장된다.
반대로 기존의 믿음이나 신앙으로 굳게 무장한 채 세상을 본다면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것이 있다 해도 자신의 믿음이나 신앙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언제나 기존의 관념과 지식 수준에서만 맴돌게 되고, 진정한 ‘앎’의 확장과 그로 인한 의식의 성장은 결코 이룰 수가 없다.


2부 우리가 사는세상



제2장 에너지의 세계


육감으로 느끼는 세상
앞에서 우리는 몸의 감각기관들이 별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은 오감으로 인식되는 세상과 매우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독자들은 과학적인 연구 결과에 근거한 그 이야기들을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별로 와닿지 않는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들판 위를 춤추듯 날아다니는 새들, 무서운 기세로 몰려와 바위에 부딪치며 산산이 흩어지는 하얀 파도, 서로 먼저 가려고 이 차선 저 차선으로 곡예하듯 달리는 운전자들,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시청 앞에 몰려와 항의하는 노점상들……. 이렇게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는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니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단 말인가?
저자의 경우, 생생하게 느낀다고 해서 모두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몇년 전, 나는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수련을 한 적이 있다. 수련에 깊이 몰입하면 내가 상상 속에 있는지 혹 진짜로 경험하고 있는지 구별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나는 깊은 산속에 흐르는 맑은 개울물을 생각하고, 바위 위에 걸터앉아 그 개울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그러면서 그 맑은 물이 바위를 헤치며 졸졸 흘러내리는 모습을 가까이에서도 보고, 때로는 조금 떨어져서, 때로는 물속에서도 본다. 이때 귀로는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듣고 또 물속에 잠긴 발을 통해 전해지는 시원함을 그대로 느끼곤 한다. 물론 상상을 통한 체험이지만 실제로 숲속 물가에 가서 직접 체험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내가 아는 어느 교수는 너무나 생생하고 다양한 꿈을 자주 꾸는데, 차를 타고 있을 때도 꿈속에서 차를 타고 가는 것인지 아닌지를 잘 구별할 수가 없다고 한다.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영화관에서 영화에 몰입하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영화 속 주인공이 된다. 나는 미국 수도 워싱턴 근교에서 6년 동안 살았는데, 주말이면 가족들과 시원하게 뚫린 워싱턴 몰(Mall)에 자주 가곤 했다. 워싱턴 몰에 가면 널찍한 잔디밭 주위를 10여 개의 스미소니언 박물관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한 우주 항공 박물관은 그 동안 인류가 발명한 각종 비행체와 우주선들이 전시되어 있어 관광객들이 특별히 많이 찾는 곳이다.
나는 그 박물관 안에 있는 초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아이맥스(Imax) 영화관에 자주 가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비행과 관련된 영화를 방영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2인승 경비행기가 이륙해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넌다. 비행기가 갑자기 깊은 골짜기 아래로 급강하할 때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심장은 빠르게 쿵쾅거리는 것을 체험하곤 했다. 이 경우 내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한, 영화와 현실의 차이는 없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는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몇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식스센스>(Sixth Sense)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릴 때부터 귀신을 눈으로 보거나 생명체들이 방사하는 에너지를 보는 사람, 식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다. 심령가, 영능력자 혹은 초능력자 등으로 불리는 이들 대부분은 태어나면서 그러한 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어린 시절 얼마 동안 자신에게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인지되는 줄 알고 있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비관해 외로움에 시달리게 되며,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과 대화의 문을 닫고 외톨이로 자라거나 정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성장한 후에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 영능력자들의 진술은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연구 결과들과 더불어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을 탐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이 과연 어떤 것인지 하나하나 탐사해 보기로 하자. 나는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기의 세계와 기를 움직이는 마음의 위력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20세기 물리학이 발견한 물질의 근본에 대해 논의하며, 이러한 발견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또 우주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엘로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무엇을 알아낼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기는 모든 활동의 원동력
알고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의 바다, 에너지의 바다이다. 살아 있는 생물은 물론 무생물까지도 기를 내뿜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기로써 서로 교류하고 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신, 즉 물질적인 신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진동수를 가진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에너지 덩어리인 인간은 끊임없이 하늘의 태양, 별, 행성 그리고 달로부터 에너지를 받고 있고, 또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땅으로부터도 강력한 에너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생각, 소리 등을 통해 끊임없이 서로 기를 교류하고 있다. 벽에 붙어 있는 백두산 천지의 사진을 통하여 천지의 맑은 기운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기의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기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기는 오래전부터 우주의 근본 에너지 또는 생명의 에너지로 알려져왔다. 중국에서 기원전 123년에 쓰여진 회남자의 《천문훈(天文訓)》에는 “기에 의하여 우주가 창조되었고 기의 변화가 만물을 창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의학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꼽히는 《황제내경(皇帝內經)》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기는 탄생하고 변화하는 모든 생명의 근본이 되는 흐름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 가지 사물이 기의 법칙에 순응한다. ……태양과 달과 별들이 빛을 얻는 원천, 천둥과 비와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는 원천, 사계절이 운행하고 이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나고 자라고 쌓이고 허울을 벗는 힘의 원천이 곧 기이다. 모든 것이 기에 의하여 생겨나며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기로 인해서이다.”
한마디로 말해 기가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기와 유사한 개념으로 인도 요가에는 프라나(Prana)가 있고, 신지학 혹은 인지학에는 에테르(Ether) 혹은 에텔체가 있다.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전기를 띤 가스 형태의 기체인 플라즈마(Plasma)도 기와 유사한 개념으로 인식된다.
서양의 새로운 영성운동인 뉴 에이지(New Age)에서 기는 ‘어떤 신비한 생명의 에너지(Energy)’로 인식되고 있고, 바바라 브레넌(Barbara Brennan) 같은 일부 심령가들은 기를 ‘인체 에너지(Human energy)’와 ‘우주 에너지(Universal energy)’로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옛부터 우리 조상들이 사용한 ‘천지기운’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에서는 우주의 모든 기를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주로 빈 마음, 즉 공심(空心)에서 오는 순도 100%의 기를 뜻한다. 이 책에서는 에너지, 생체 에너지 혹은 플라즈마 등의 용어를 기와 같은 뜻으로 쓰기로 한다.
기는 우리 조상들의 일상적인 삶과 일체가 되어왔는데, 이 사실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연현상이나 물질을 표현하는 단어로 천기(天氣), 기상(氣象), 기후(氣候), 공기(空氣), 수증기(水蒸氣) 등이 있고, 생명력이나 심리적·정신적인 것을 표현하는 말로는 기가 막힌다, 기가 차다, 기가 살다, 기가 죽다, 상기되다, 기운이 없다, 기진맥진하다, 기승을 부린다, 기골이 장대하다, 기절하다, 기겁하다, 기분, 광기, 호기롭다 등이 있다. 이처럼 근원적인 힘을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단어들에 기(氣)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사람 몸을 기준으로 기를 구분할 때, 몸 안에서 돌고 있는 기를 ‘내기(內氣)’라고 하고 몸 바깥의 기를 ‘외기(外氣)’라고 한다. 내기는 몸 안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경락(經絡)’을 통해 운행되는데, 기는 경락 위에 있는 ‘경혈(經穴)’ 혹은 ‘혈자리’라고 불리는 곳을 지날 때면 잠시 머물렀다가 흐른다고 한다.
경혈은 몸 안의 내기와 바깥의 외기가 서로 통하는 문 구실을 하는 곳이다. 이 부분은 쉽게 막히고 이로 인해 통증이나 질병이 초래되기도 하는데, 한의사들이 침을 놓는 자리가 바로 경혈이다. 중국의 《황제내경》은 우리 몸에 365혈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일본에서 연구된 바에 따르면 약 600여 개의 경혈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통적 선도수련(仙道修鍊)에 의하면 우리 몸에는 기운이 모이는 밭과 같은 구실을 하는 곳이 있어서, 기는 이곳을 중심으로 나선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몸에는 이러한 기의 근본 자리, 즉 단전이 세 군데 있는데 이를 각각 하단전(下丹田), 중단전(中丹田), 상단전(上丹田)이라고 한다. 배 아래쪽에 위치한 하단전은 체력과 관련이 있고, 가슴 중간에 있는 중단전은 마음, 머리 부근에 위치한 상단전은 영혼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인도에서는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곳으로 일곱 개의 차크라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래쪽 부분부터 시작해 물라다나 차크라(항문 회음부), 스바디스타나 차크라(방광), 마니푸라 차크라(배꼽), 아나하타 차크라(심장), 비슈다 차크라(인후), 아즈나 차크라(미간), 사하스라나 차크라(정수리 백회)라고 부르고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기공사들이 방사하는 기의 성분을 조사함으로써 과학으로 기의 정체를 밝혀보려 시도하기도 했다. 다양한 계측기기를 이용해 기공사들이 기를 방사할 때와 방사하지 않을 때를 비교 분석해 본 과학자들은 대체로 기를 ‘전기적·자기적 성분과 원적외선 성분을 지니면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매우 높은 진동수의 파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기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기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기라는 것은 현대의 계측기기로 측정할 수 있는 주파수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 존재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서 신과학 혹은 초과학의 이름으로 기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는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 신과학은 미국을 중심으로 1960년대 이후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영성운동인 뉴 에이지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신과학에서는 뉴턴, 데카르트, 칸트로 이어지는 ‘결정론적 세계관’, 다시 말해 부분들이 질서정연하게 합쳐져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견해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과학은 아직 통일된 관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정신과학학회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기는 아직 현대 과학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 기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현재로선 과학적으로 명확히 규명할 수 없다. 하지만 다양한 문헌들과 기 과학자 그리고 기 수련자들의 체험을 종합해 본다면 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기(氣)란 정보를 가진 파장으로서 빛 혹은 소리의 형태로도 존재한다. 우주는 모든 생명과 힘의 원천인 진동하는 기로 가득 차 있고, 기가 지니고 있는 정보의 수준에 따라 그 맑음과 탁함이 결정된다.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것은 기의 진동수가 크게 낮아서 오감으로 인식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물질세계는 광대무한한 기 세계의 일부분일 뿐이다.”


인체 오라에 대한 연구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동하고 있고, 사람의 오감이 일정 범위의 낮은 진동수를 가진 ‘물질’만을 인식한다면 우리 몸에는 육체 말고도 좀더 높은 진동수를 가진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非物質)’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체의 물질적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비물질적 부분을 인체의 ‘에너지 장’ 혹은 인체 ‘오라(aura)’라고 부른다.
옛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몸에 가장 가까운 에너지층인 에테르체를 기막(氣膜)이라고 불러왔는데,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내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인체 오라를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수행중 특히 기수련 중 사람들의 몸을 감싸고 있는 흰빛 혹은 황금빛의 기막을 보게되는 경우는 상당히 흔한 편이다.
《나는 티벳의 라마승이었다》라는 책을 쓴 롭상 람파(Lobsang Rampa)는 어릴 때 인당혈 부근에 간단한 시술을 받음으로써 인체 오라를 보는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는 사람 감정에 따라 오라가 변하는 것을 이용해 해외에서 온 특사의 마음을 몰래 숨어서 읽어 당시의 달라이 라마에게 조언한 적도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티벳, 이집트 등 여러 문화권의 성자들은 그림 속에서 머리 둘레에 후광이나 원형 상징물을 지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옛날부터 인체의 오라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20세기 이후 여러 연구자들은 인체의 에너지 장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진행해 왔다. 예를 들어 1911년, 윌리엄 킬너(William Kilner) 박사는 채색된 스크린과 필터를 통해 인간의 에너지 장을 관찰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킬너 박사는 세 겹으로 된 안개 같은 것이 몸 전체를 둘러싼 채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피부 가장 가까운 곳을 두께가 4분의 1인치 정도 되는 약간 어두운 층이 둘러싸고 있고, 그 주위를 두께 1인치 정도 되는 좀더 희미한 층이 에워싸고 있으며, 그보다 좀더 바깥에는 약한 빛을 내는 6인치 정도의 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 오라가 실험 대상자의 나이나 정신적 능력, 건강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고했다.
미국, 일본 등에서는 인체의 에너지로 인해 빛의 밝기가 증가하는지를 조사하는 실험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실험 결과 암실에 사람이 들어가면 암실 내부의 밝기가 약하게나마 증가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반인들에게 인체 및 다른 생명체들의 오라 존재를 확인시켜 준 것은 러시아의 전기 기술자인 키를리안(Semyon D. Kirlian, 1900-1980)이었다. 1939년, 그는 소련의 과학자들 앞에서 자신이 발명한 사진기, 즉 키를리안 사진기로 찍은 인체 에너지 사진을 보여준 것이다. 키를리안 사진이란, 인체를 포함한 전도성 있는 물체에 고주파, 고전압을 일시적으로 가해주면 물체 주위에 방전현상이 생기는데, 이 코로나 방전을 필름에 감광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과학자가 가져온 외견상 비슷해 보이는 두 장의 이파리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한 장에선 밝고 선명한 빛이 나오는데 반하여 다른 잎에선 군데군데 희미한 빛만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이파리는 병에 감염된 식물에서 따온 것이었다.
키를리안은 자신이 발명한 사진기로 자신의 손가락 주위에서 발광하는 에너지를 찍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가 평소와는 달라져 있음을 감지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날 밝혀졌는데, 자신이 독감에 걸렸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그는 사진에 찍힌 생명체의 에너지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질병의 유무를 미리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현재 키를리안 사진은 생명체의 에너지를 촬영하는 장치로서 그리고 진단 예방 의료기기로서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키를리안 사진기들이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키를리안 사진기가 개발되었다.
그밖에도 인체 에너지 장과 관련된 다양한 과학적 연구들이 행해져 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과학적 발견은 아마도 발레리 헌트(Valerie Hunt) 박사의 연구 결과일 것이다.
물리요법가이자 미국 UCLA대학의 신체운동학 교수이기도 한 헌트 박사는 근육의 전기적 활동을 측정하는 근전도계를 이용해 인체 에너지 장이 전기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근전도계를 이용해 두뇌를 측정하면 주로 초당 0∼30사이클, 최고 100사이클의 파동이 감지되며, 근육은 초당 225사이클까지, 심장은 250사이클까지 파동이 올라가는 것이 감지된다.
헌트 박사는 근전도계를 이용해 신체적 파동들 외에도 신체에서 방사되는 다른 에너지 장이 있음을 감지했는데, 이 에너지 장은 신체의 전기보다 훨씬 미묘하고 진폭은 작지만 주파수는 초당 평균 100∼1,600사이클 혹은 그 이상으로 매우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재미있는 것은 개개인의 의식에 따라 에너지 장의 주파수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주로 물질세계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주파수는 대체로 낮은 범위에 머물러 있어서 초당 250사이클(헤르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심령가나 치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400∼800헤르츠, 몽환 상태에서 다른 존재들과 채널링(channeling,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800∼900헤르츠로 나타났다. 고도로 영성이 계발되어 우주적 상호 연결성을 인식하고 인간 경험의 모든 차원과 교감하는 사람들의 진동수는 900헤르츠 이상이었고, 근전도계가 측정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인 2만 헤르츠의 진동수를 가진 사람도 만났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헌터 교수의 발견은 인체 에너지 장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해 줄 뿐 아니라 고도로 영적인 사람들일수록 높은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는 옛말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일곱 가지 에너지층
인체 에너지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이제 겨우 그 존재를 입증하고 있는 단계이지만, 인체 에너지를 직접 보거나 느끼는 사람들에 의한 인체 에너지 연구는 상당히 진전되어 있다.
은비학(隱秘學)적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네 가지 층의 생명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에너지층은 육체에 가까운 순서대로 에테르체(ethereal body), 아스트랄체(astral body), 멘탈체(mental body, 정신체), 코잘체(causal body, 원인체)로 불린다고 한다.
에테르체는 몸 바로 바깥을 5∼8cm 두께로 감싸고 있는 에너지층으로 이곳에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몸의 병으로 나타난다. 아스트랄체는 에테르체와 인접해 있으며, 육체를 계란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인간의 감정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멘탈체는 아스트랄체보다 더 미세하고 단계가 높은 생체 에너지로서 사람의 생각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사람 머리 부분에 나타나는 후광은 의식의 단계가 높아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멘탈체라고 한다. 코잘체는 맨 바깥에 있는 가장 미세한 에너지층으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며, 전생윤회하는 근원 존재로서 수련 단계에 따라 크기가 엄청나게 확장되는 에너지층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인체의 에너지 장을 눈으로 보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 미국 LA의 캐럴 드라이어(Carol Dryer)라는 심령가와 미 항공우주국 NASA의 물리학자 출신인 바바라 브레넌(Barbara Brenne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눈으로 인체의 에너지층을 보고 몸에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며 에너지 장을 치유함으로써 몸의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브레넌은 인체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체, 나아가 무생물의 에너지까지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대부분의 심령가들이 인체를 둘러싼 한두 개 에너지층만을 식별할 수 있는 데 비해 일곱 개의 에너지층을 확실히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브레넌은 지금까지 다수의 사람들이 인식해온 4개의 인체 에너지장을 보다 세분하여 인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브레넌은 자신이 지은 《기적의 손치유》(Hands of Light)라는 책에서 각 에너지층의 위치와 색깔, 밝기, 형태, 밀도, 유동성과 기능을 자세한 도표를 곁들여 심도 있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질병의 원인과 인체 에너지 장을 통한 치유 방법, 인생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연구해 온 결과들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브레넌이 설명한 인체의 에너지 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육체에 제일 가까운 에너지층부터 7단계의 층으로 나누어진다고 할 때 1, 3, 5, 7의 홀수 에너지층은 빛의 파동 패턴들처럼 구조가 잘 짜여져 있는 반면 2, 4, 6의 짝수 에너지층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액체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1층은 에테르체로 거미줄처럼 반짝이는 미세한 에너지 선들로 이루어져 있고, 밝은 파랑색에서 회색까지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다. 이 에너지층은 육체 기능이나 감각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데 모든 장기(臟器)및 이를 포함하고 있는 육체와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제2층은 감정체(emotional body)로서 감정과 결부되어 있는데 감정의 변화에 따라 특정한 색깔로 변화한다. 사랑이나 흥분, 기쁨 또는 분노의 감정 등은 밝고 선명한 색깔로 나타나는 반면에 혼란스러운 감정들은 어둡고 탁한 색깔로 나타난다.
제3층은 정신체로서 보통 밝은 노란색을 띠고 있는데, 사고나 정신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이 층은 집중하고 있을 때 더 확장되고 밝아진다고 한다.
이상에서 설명한 1, 2, 3층은 물질세계와 관련된 에너지들과 연관되어 있는 반면 5, 6, 7층은 영적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 중간에 있는 제4층 아스트랄체는 물질 에너지가 영적 에너지로 또는 영적 에너지가 물질 에너지로 변형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나 도가니 같은 구실을 한다. 이 에너지층은 심장 차크라나 중단전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아름다운 색채로 된 구름 같은 형태로 존재하며 장밋빛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제5층은 에테르 형판체(etheric template body)로 육체에서 30∼60cm 정도 뻗어나와 있고, 병에 걸려 에테르층의 형태가 붕괴되면 그 형태를 다시 찍어낼 수 있는 원판과도 같은 구실을 한다. 또 이 층은 소리로 물질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하며 소리에 따른 수련 효과를 거두게 해주는 에너지층이다.
제6층은 천상체(celestial body)로 아름다운 아지랑이 같은 빛이며 육체에서 60∼75cm 정도 뻗어나와 있다. 이 층은 영적 차원의 감정과 관련이 있으며, 명상 같은 것을 통해 영적 황홀감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층이다.
제7층은 케테르 형판체(ketheric template body) 혹은 원인체라고 부르며 육체에서 75∼105cm 정도 뻗어나와 있는 달걀 껍질 모양의 에너지층이다. 이 에너지층은 더 높은 수준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창조주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 층에는 색채를 띤 빛의 띠 모양으로 전생의 기록들이 간직되어 있는데, 현생의 상황과 연관이 있는 전생의 기록은 머리와 목 부근에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각 에너지층들은 양파 껍질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층이 그 안쪽 층들을 감싸는 동시에 꿰뚫는 듯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체가 가장 바깥 층의 에너지 속에 그 안쪽의 에너지가 담겨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간적으로 볼 때 우리의 육체가 존재하는 공간에는 육체뿐 아니라 그보다 진동수가 높은 여러 에너지체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으며, 에테르체가 있는 공간에는 육체를 제외한 모든 진동수의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브레넌은 이러한 에너지층들 중 몸에서 더 멀리까지 퍼져 있는 에너지층일수록 더욱 옅고 높은 진동수를 가지며, 영적이며 근원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좀더 근원적이고 빠른 진동수를 가진 바깥의 에너지층은 그것보다 느린 진동수를 가진 안쪽의 에너지층이나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신체의 병은 제일 먼저 에너지체, 특히 에테르체 이상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육체의 병으로 나타나게 된다. 병을 치료할 때 수술로 육체의 증상을 없앨 수 있다고 해도 에너지체의 이상이 치유되지 않으면 재발할 위험이 크다. 반대로 에너지체가 치유되면 육체의 병은 자연스레 치료된다. 현재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대체의학은 인간의 에너지체가 육체보다 근원적이라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다.
또한 이 에너지층들은 그저 육체를 둘러싼 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활동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장소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와 저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자. 나의 오감은 그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지만 나의 에너지체는 벌써 그 사람의 에너지체와 접촉해서 다양한 사실들을 알아낸다. 필요하다면 갑작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내가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식물에도 의식이 있다
생명체의 에너지 장은 생체발광(生體發光) 현상이라는 말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눈으로도 식별이 가능한 냉(冷) 발광 현상은 세균이나 버섯, 개똥벌레, 물고기 등에게 나타나는데 이를 생체 플라즈마 작용으로 볼 수 있다.
생명체의 에너지에 대해 연구해 온 러시아 과학자 빅토르 이뉴신(Victor Inyushin)은 “모든 생명체는 아주 미약한 빛을 방사하고 있고, 모든 생명체 속에는 생체 플라즈마 장이 있어서 인체 속을 흐르는 에너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명체의 에너지 장의 존재는 앞서 이야기한 키를리안 사진을 통해 확인되고 있으며, 특히 식물의 잎 주위를 밝은 에너지가 둘러싸고 있는 사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인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명체의 물질적 부분보다는 에너지체가 더 근원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식물을 관찰해 보면 잎이 자라기에 앞서 먼저 잎 모양의 에너지 장의 원형이 투사(投射)되고, 이 에너지 장의 모습에 따라 이파리가 생겨난다고 한다. 이는 육체의 생체조직들이 그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그 뒤에서 생기를 부여하는 에너지 장 덕분이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키를리안 사진 촬영을 통해 잎을 연구한 결과 밝혀진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잎 일부가 잘려 없어진 후에도 한동안은 잘려나가기 전에 완전했던 잎 모양에서 나오던 에너지가 방사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질적 잎사귀는 일부 잘려져 나가도 에너지체는 본래의 모습을 한동안 유지한다는 것이다. 브레넌은 이러한 연구 결과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 보기로 하고 식물 잎의 에너지를 관찰한 적이 있는데, 《기적의 손치유》에는 이와 관련된 의미심장한 일화가 실려 있다.
브레넌은 먼저 온전한 잎의 오라를 관찰했는데, 그것은 물빛 같은 파란색이었다. 그 다음 잎의 일부를 잘라내자 뜻밖에도 잎 전체의 오라가 핏빛으로 변했다. 브레넌은 큰 충격을 받고 잎에게 용서를 빌었고, 그러자 놀랍게도 1∼2분 후에 잎의 오라가 다시 본래의 파란색으로 돌아왔다. 이는 동물이 아닌 식물에도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식물들의 의식을 깊이있게 연구한 책으로는 다그니 케르너(Dagny Kerner)와 임레 케르너(Imre Kerner)가 지은 《장미의 부름(Der ruf der Rose)》을 참조할 수 있다. 그들은 다양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식물은 밤낮으로 발산하는 오라를 통하여 혹은 다른 방법으로 그들끼리는 물론 동물 및 사람과도 교신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무꾼이 나무를 베어내면 그 사실을 그 숲의 다른 나무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위험에 처한 식물은 유독물질을 만들어 내어 자신을 방어하기도 한다. 식물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만, 사람들의 진지한 생각에만 반응하고 건성으로 하는 생각에는 반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브레넌은 무생물들도 오라를 가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개인 소장품들 대부분은 소유자가 지닌 에너지로 물들여져 에너지를 방사하며 각종 보석들과 수정은 층이 많고 패턴이 복잡한 흥미로운 오라를 뿜어내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수정은 금빛 오라를 지니고 있으며 결정 구조의 뾰족한 부분에서 금빛 광선을 내뿜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기 수련을 한 사람들은 무생물, 특히 수정 등이 방사하는 에너지를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꼴 에너지
최근 일부 과학자들은 ‘미약 에너지(subtle energy)’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미약 에너지란 현재의 정밀 계측기기로 측정할 수 있는 ‘강력 에너지’와 비교해서 말하는 개념으로, 에너지 강도가 약해서 측정이 되지 않는 에너지를 뜻한다. 따라서 미약 에너지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기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이 미약 에너지는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과 정신에도 영향을 미치며 장기적으로는 ‘강력 에너지’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약 에너지의 예로는 색이나 소리, 향, 금속 그리고 꼴(형상)에 따라 존재하는 특수한 에너지 등을 들 수 있는데, 최근에는 이러한 미약 에너지들을 이용한 다양한 심신 치유법들이 개발되고 있다. 옛부터 소리 에너지를 이용해 주문이나 만트라(mantra)를 외는 수련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고, 최근 국내외에서 향기를 이용한 아로마(aroma) 요법이 각광을 받고 있으며, 꼴 에너지를 이용한 다양한 기 상품들도 선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꼴 에너지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꼴이라는 것은 2차원 평면 위에 있는 형상뿐만 아니라 3차원 공간상의 특수 형상, 예를 들어 피라미드 등을 일컫는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 종교의 상징 도형이나 부적, 특수 도형 등은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고, 우리나라에서는 지형의 생김새에 따라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풍수사상이 사람들 마음속에 뿌리깊게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현대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아무런 근거 없는 미신으로 치부되어 왔지만, 특정한 형상에서 특별한 에너지가 나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전통적 사상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기적인 감각이 어느 정도 회복된 사람들은 금세 꼴 에너지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추나 엘로드 같은 간단한 기구를 사용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손바닥 혹은 이마의 인당혈을 통하여 꼴 에너지를 느낄 수 있지만 좀더 정확한 측정을 하기 위해 엘로드를 이용한다.
이러한 꼴 에너지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과학적 연구 결과물로는 1996년 유상구, 김영태 교수 팀이 발표한 논문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동양의 삼태극(三太極) 같은 평면 도형과 피라미드 같은 입체 구조가 미생물의 생존이나 생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검사했는데, 그 결과 꼴 에너지의 종류에 따라 상이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렇게 꼴에 따라 각기 다른 에너지가 방사된다는 것에는 별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그 원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정봉수는 <현대과학의 한계와 의식개혁>이라는 논문을 통해 지금까지 제기된 주장들을 요약하면서, 우리가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것과 닮은꼴 도형을 그리거나 만들면 공진(共振)의 원리에 의해 본래 물체가 가진 에너지가 유도(誘導)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진의 원리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데, 그 예로 백두산 천지를 촬영한 사진에서는 천지의 맑은 기운이 방사되어 나오고, 사람을 찍은 사진에서는 그 사람의 기운이 방사되어 나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2차원의 꼴 에너지를 활용한 예로는 부적과 얀트라(Yantra), 히란야(Hiranya) 등을 들 수 있다. 부적은 옛부터 액(厄)막이로 쓰거나, 재물이나 명예, 자식을 얻기 위해 집 안이나 가게에 붙이기도 하고 몸에 지니기도 했던 것이다. 얀트라는 인도의 승려들이 정신수양을 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형들로 벽에 붙여놓거나 천장이나 벽 같은 곳에 그려놓는 것이다. 히란야는 80년대에 일본에서 시작된 것으로 특수하게 고안되어 큰 에너지를 방출하는 평면 도형들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전통적인 천지인(天地人) 사상에서 동그라미는 하늘을, 네모는 땅을, 세모는 사람을 상징한다. 이 세 가지 꼴에서는 서로 다른 에너지가 나오지만 이 셋을 포갠 형상에서는 매우 강하고 순도 높은 독특한 에너지가 나온다.
대표적인 3차원 꼴 에너지인 ‘피라미드 에너지’는 이집트 기자 지구에 있는 대(大)피라미드 혹은 그것을 본따 만든 골조 피라미드의 내부나 주위에 모여드는 강력한 에너지를 말한다. 대피라미드가 아닌 다른 피라미드와 닮은꼴 형상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알려진 피라미드 에너지의 효과를 저자의 체험과 결부시켜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피라미드 내부에는 매우 강하고 순도 높은 기가 모이고, 이로 인해 다양한 효과들이 나타난다. 음식의 경우, 맛이 순해지고 몸에 해로운 성분이 이롭게 바뀐다. 특히 피라미드 에너지로 처리한 물은 우리 몸과 애완용 동물, 식물에도 매우 유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피라미드 에너지는 우리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고, 그 속에서 명상을 하면 집중이 잘되어 좀더 쉽게 여러 가지 기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피라미드 안에 둔 무디어진 칼날이 다시 선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밖에도 땅의 형상, 즉 지세에 따라 갖가지 다른 기운이 모여들고 각종 입체 구조물에도 그 생김새에 따라 독특한 에너지가 모이는데, 이것이 전통적 풍수지리의 원리로 생각된다. 전 세계에서 집 전체의 구조나 침실 천장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하는 건축물이 등장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건축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옛부터 우리는 ‘꼴값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써왔는데, 이는 우리 조상들이 은연중에 꼴 에너지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우리는 모두 기의 바다에 살고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한마디로 기, 즉 에너지로 가득 찬 세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들은 각기 고유한 파장의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고, 인체는 여러 층의 에너지가 겹겹이 감싸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미약하나마 에너지를 지니고 있고, 물체의 형상과 색깔에 따라 독특한 에너지 장을 형성하고 있다.
바바라 브레넌은 《기적의 손치유》에서 어릴 적 오라를 보는 능력이 개발되면서 자신이 새롭게 인식한 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가 마치 촛불 불빛과 같은 에너지 장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지요. 나는 또 모든 것이 이러한 에너지 장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며, 에너지 장이 펼쳐지지 않은 공간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은 일종의 에너지로 가득한 바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3장 마음이 곧 창조주


마음이란?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마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답답한 마음, 기쁜 마음이라고 말할 때는 감정 혹은 기분 등을 의미하고, ‘내마음 누가 알아주랴?’ 할 때는 본래의 깊은 생각 즉 본심을 의미한다. 또 ‘마음이 어질다’, ‘마음이 곱다’라고 할 때는 타고난 성격 혹은 성질을 뜻하지만, ‘내 마음대로 살아가겠다’ 고 할 때는 의사 혹은 의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마음이란 단어는 의식(意識), 생각, 감정(感情), 의도(意圖)라는 말과 혼용되고, 어떨 때는 정신이나 영혼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이란 단어가 여러 뜻으로 혼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마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제한적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마음의 영역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서 불교의 유식설(唯識說)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경숙이 《마음의 여행》에서 설명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유식설에서는 인간의 정신 활동 영역을 ‘전오식(前五識)’과 ‘후삼식(後三識)’ 등 여덟 가지로 구분한다. 전오식은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즉 오감으로 알 수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마음의 영역이다. 이에 반해 후삼식이란 여섯번째 ‘의식’, 일곱번째 ‘말나식(末那識)’, 마지막으로 여덟번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한다.
의식은 주로 이성적인 측면의 생각을 의미한다. 언어를 사용하고 이해하는 영역이나 기억을 사용하고, 판단하고, 주의를 집중하는 영역을 일컫는 말로, 마음의 영역 가운데서도 두뇌의 직접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말나식은 인간의 모든 생리 욕구나 생존 본능에 바탕을 둔 것으로 감정과 본능, 정서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이에 반해 아뢰야식은 인간이 오랜 진화와 윤회를 거듭함에 따라 얻어진 삶의 모든 기억들이 저장된 정보의 창고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마음은 육체적 감각이나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생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마음이란 유식설의 여덟가지 인식 중에서 육체적 감각기관을 통한 전오식과 제6식인 의식을 제외한 것, 다시 말해 말나식과 아뢰야식만을 주로 일컫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마음의 중요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한국 최고의 고승인 원효대사에 관한 일화이다. 중국 유학길에 나선 원효대사는 캄캄한 밤에 산속을 헤매다 겨우 조그만 토굴을 발견하고 그 속에 들어갔다. 마침 토굴 속에는 둥그런 옹기에 물이 담겨 있어서 원효대사는 그 물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잠을 청했다.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잠을 잔 곳은 무덤 속이었고 한밤중에 자신이 마신 것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발견하였다. 원효대사는 갑작스레 심한 구토와 배앓이를 했고, 얼마후 불현듯 “아, 모든 게 마음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아 중국 유학을 포기한 채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마음의 위력을 강조하는 동양적 가르침과는 반대로 뉴턴 물리학과 데카르트 철학으로 대변되는 근대 서양문명에서는 모든 현상을 기계론적으로 인식했으므로 마음의 힘을 인정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마음이 물질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는 다양한 과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양자역학에서는 어떤 물리적 현상이라도 그 현상은 관찰하는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는 세상에 완벽하게 객관적인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마음이 다양한 형태로 물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마음이 물질과 인체에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마음은 기를 조절한다
옛부터 선도수련(仙道修練)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기를 만들고 조절한다고 전해지고, 수련법은 이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인체조 혹은 기체조를 할 때 의식을 반드시 몸에 두게 하는데, 이는 마음이 집중되는 곳에 기가 모이고, 기가 모이는 곳에 힘이 생기고 혈액순환이 잘 일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단전호흡을 하는 경우에도 의식을 항상 단전에 두게 함으로써 단전에 기운이 보다 효과적으로 모이도록 유도한다 (念念不忘 意守丹田).
마음이 기를 조절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있다. 미국 스탠포드 연구소의 레이저 물리학자이며 초심리학자인 러셀 타그(Russell Targ) 박사와 심령가 제인 케이트라(Jane Katra) 박사가 최근에 공동으로 저술한 《마음의 기적들》(Miracles of Mind)에는 타그 박사가 인체 오라를 보는 바바라 브레넌을 만났을 때의 일화가 기술되어 있다.
브레넌은 타그 박사가 주위 어떤 것에 집중하기 시작할 때 그의 이마에서 집중하는 대상 쪽으로 한 줄기 빛이 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타그 박사가 원격인지(remote-viewing), 즉 멀리 떨어진 것을 알아맞히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눈을 감고 무엇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브레넌은 그가 무엇에 집중하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것을 알아내는지를 이마에서 뻗어나가는 에너지를 관찰함으로써 정확히 알아맞췄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경험은 저자에게도 있다. 2002년 봄 집에서 영성모임을 가질 때 였다. 사람들이 거실에 뺑 둘러앉은 가운데 나는 마음 속으로 참석자 중 한사람을 집중하여 생각하였는데, 그 모임에 참석한 오라를 보는 한 영능력자는 내가 누구를 생각하는지 바로 알아 맞추는 것이었다. 내 이마의 인당혈로부터 자주빛에 가까운 투명한 빛이 나와서 상대편의 이마와 연결되더라는 것이었다.
이상의 사례는 우리의 마음이 만물의 근원적인 힘인 기를 조절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마음이 두뇌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다시 말해, 두되가 마음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논리적인 생각을 이어 나가거나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할 때 두뇌에는 과부하가 걸리고, 그 결과 머리에 열이 나고 두통이 생긴다. 이는 바로 두뇌가 사용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편적으로 마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논리적인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말한다. 최종적으로는 두뇌가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지만, 그러한 생각이나 감정이 두뇌 자체의 작용으로 만들어진다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마음의 변화가 인간의 에너지체에 바로 나타난다는것은 오라를 읽는 사람들에게 의하여 확인되고 있다. 전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브레넌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감정 변화에 따라 두 번째 에너지층인 감정체의 색깔이 수시로 달라지고, 사고 혹은 생각에 따라 세 번째 에너지층인 정신체의 형태와 밝기 등이 변한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투시가들(예: LA의 드라이어)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마음의 변화가 두뇌에 앞서 에너지체에 먼저 나타난다는 사실, 다시말해 두뇌가 마음의 근원이 아님을 보여주는 과학적인 연구가 있다. 앞서 이야기한 미국 UCLA대학의 헌트 교수는 근전도계를 사용해 인체 에너지체와 두뇌의 뇌파 변화를 조사했는데, 큰소리를 내거나 밝은 빛을 비추면 에너지 장이 두뇌보다 먼저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어떤 자극에 대한 반응인 마음이 먼저 인체의 에너지 장에 나타난 다음 두뇌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볼 때, 우리 마음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두뇌가 마음의 근원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마음의 힘을 증명한다
마음의 힘에 대해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들도 많이 있다. “마음이 우주 만물을 움직이는 기를 만들어낸다”는 심생기(心生氣),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 “정신만 집중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倒 何事不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마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딘 라딘(Dean Radin) 박사가 지은 《의식의 세계》(The Conscious Universe)는 이제까지 마음에 대해 이루어진 과학적 연구 성과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마음이 물질이나 현상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연구를 들자면 제일 먼저 주사위 던지기 실험을 꼽을 수 있다. 미국 듀크대학 루이사 라인(Louisa Rhine) 박사 등은 1935∼87년 사이에 발표된 73편의 논문을 분석하고,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가 주사위를 던진 사람이 지닌 정신적 의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지 검토해 보았다.
분석 결과, 던진 사람이 의도했던 대로 결과가 나타난 경우가 전체의 51.2%였는데, 이러한 결과가 우연히 나왔을 가능성은 10억 대 1에 불과해서 사람의 의지가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 로저 넬슨(Roser Nelson)과 딘 라딘 박사는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1959∼87년 사이에 행해진 152개 논문에서 주사위 대신 RNG(Random-Number Generator, 임의 숫자 발생기)를 사용해 실험한 결과를 분석했다. 이 분석 결과, 의도했던 결과가 실제로 나온 경우가 전체의 51%였는데, 이러한 결과가 우연히 나왔을 가능성은 1조 대 1에 불과해 실제로 마음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이 논문들은 또 이러한 염력(念力) 효과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몇몇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음이 우리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고, 마음이 질병이나 치유력에 미치는 영향도 현재 의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다. 환자가 자신의 질병에 대해 낙관하느냐 비관하느냐 하는 데 따라 증세 호전 정도가 크게 좌우되며, 말기암 환자에게 사실을 그대로 알릴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대체로 일찍 죽는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마음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가짜 약으로 병을 치료하는 플라세보 효과
마음의 치유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를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의학적 증거는 매우 풍부하다. 플라세보란 진정한 의료 혹은 의약품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실제로는 인체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위장 의술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새로 개발된 두통약의 진정한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두통 환자를 세 그룹으로 나눈다. 첫번째 그룹에게는 신제품을 주고, 두번째 그룹에게는 새로운 두통약이라 속인 후 실제로는 두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비타민을 준다. 세번째 그룹에게는 아무 약도 주지 않는다.
새 두통약의 진정한 효과는 진짜 약을 먹은 첫번째 그룹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세번째 그룹을 비교함으로써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첫번째 그룹과 가짜 두통약을 먹은 두번째 그룹을 비교함으로써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가짜 약을 진짜 약이라고 속이고 투여해도 마음의 힘이 작용해서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짜 약의 효과를 플라세보 효과라고 부른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수많은 연구를 통해 플라세보 효과는 광범위하게 조사되고 입증되었다. 이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플라세보 치료를 받은 사람 중 평균 35%가 상당한 효과를 보였다고 한다.
플라세보 치료에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입증된 병에는 협심증, 편두통, 알레르기, 열병, 일반 감기, 여드름, 천식, 사마귀, 각종 통증, 구토증, 배멀미, 위궤양, 우울증, 초조와 같은 정신과적 증후군, 류머티즘, 퇴행성 관절염, 당뇨병, 암 등이 포함된다. 대체로 플라세보는 진통제를 썼을 경우의 54%, 모르핀을 썼을 경우의 56% 정도 되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마음의 작용으로 진짜 약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잘 알려져 있다. 라딘 박사는 실험 대상자 20명을 방마다 각각 10명씩 두 방에 배치하고, 한 방에는 10명중 9명에게는 활력을 주는 암페타민을 투여하고 나머지 1명에게는 수면제를 복용하게 했다. 반대로 다른 방에서는 9명에게 수면제를, 나머지 1명에게는 암페타민을 투여했다.
그 결과, 첫번째 방에서 수면제를 먹은 사람은 그 방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더욱 활기찬 모습이었고, 두번째 방에서 암페타민을 먹은 사람은 그 방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결과는 마음에 의한 플라세보 효과가 진짜 약의 효과를 능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플라세보 효과는 의약품의 부작용 실험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특정 약의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그 약을 먹은 것으로 인식한 환자는 실제로는 그 약이 아닌 가짜 약을 투여받더라도 약의 부작용 증세를 그대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술에 취하고 싶은 사람에게 가짜 알코올을 진짜라고 속여 갖다주면 실제로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운동선수들이 이용하는 심상화 기법
의학계에서 이야기하는 ‘심상화 기법’이란 환자들이 무언가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환자의 치유를 돕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암환자의 경우, 백혈구들이 힘을 얻어 암세포를 물리치는 상상을 계속 하도록 하는 의료 기법을 일컫는다.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심상화 기법의 효과를 인정하고 있으며, 최근 미국의 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 기법이 암치료 대체요법으로는 네번째로 많이 활용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상상한 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사한 실험들이 있다. 미국 텍사스대학 건강과학센터 연구 책임자이며 심리학자인 진 액터버그(Jeanne Achterberg) 박사는 한 대학생 그룹에게 백혈구 종류 가운데 수가 가장 많은 뉴트로필이라는 세포를 상상하게 하고, 다른 그룹에게는 특수 백혈구인 T형 세포(T-cell)를 상상하도록 훈련시켰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각 그룹에서 상상한 세포는 눈에 띄게 증가한 반면, 상상하지 않은 다른 세포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상화 기법을 운동 선수들에게 적용한 실험들도 있다. 1980년 뉴욕 동계 올림픽에 출전할 소련의 정상급 운동선수들 중 첫번째 그룹에게는 연습 시간에 100% 훈련만 시키고, 두번째 그룹에게는 75%는 실제 훈련을, 25%는 운동 시합에서 성과를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세번째 그룹에게는 훈련이 50%, 상상이 50%가 되게 했으며, 네번째 그룹에게는 훈련이 25%, 상상이 75%가 되게 했다. 올림픽에서 실제 기량을 측정한 결과, 경기력 향상 순위는 네번째, 세번째, 두번째, 첫번째 그룹 순서였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심리학자 앨런 리처드슨(Alan Richardson)도 비슷한 실험을 진행했다. 농구선수들에게 자유투 연습을 하게 했다. 첫번째 그룹은 하루 20분씩 연습하였고 두번째 그룹은 연습을 하지 않았으며, 세번째 그룹은 연습을 하지 않는 대신 매일 20분씩 자유투에 대해 상상하게 했다. 그 결과, 연습을 하지 않은 두번째 그룹은 기량이 향상되지 않았고, 첫번째와 세번째 그룹은 각각 24%와 23% 정도 기량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또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의 경우, 프로 골퍼들의 게임을 비디오로 반복해서 본 사람이 실제 필드에서 더 잘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3) 마음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
플라세보와 심상화 기법 외에도 몸과 마음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이 있다. 간절히 임신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여성에게는 종종 가상 임신이란 증세가 나타나는데, 실제로 임신을 하지 않았는 데도 임신한 것과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고 배도 불러오는 경우이다. 그러나 진짜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증상은 곧 사라진다.
또 각종 통증이나 사마귀, 간질, 신경성 피부염 등이 최면요법만으로 치유되는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텔보트는 《홀로그램 우주》에서 가톨릭 신자들에게서 이따금 나타나는 ‘성흔발현(聖痕發顯)’ 현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현상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던 자국이 손과 발에 나타나는 것인데, 텔보트는 마음의 위력이 신앙을 통해 표현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음의 작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1장에서 언급한 ‘물의 결정체 연구’를 들 수 있다. 일본 에모토 마사루(江本勝) 등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마음 상태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은 주위에 영향을 미치며, 특히 물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일본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그 지역 물의 결정체는 공포에 질린 형상을 나타냈고, 그뒤 다시 복구가 진행되면서 생기 있는 모습의 결정체로 바뀌었다. 우리가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 있으면 물의 결정체는 사랑스런 육각형으로 나타나지만 반대로 미움과 공포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으면 일그러진 모습으로 변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우리 마음의 정보가 물에 잘 전달되고 기억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우리 마음이 주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다.
이렇게 한 개인의 마음이 물질에 미치는 영향뿐만 아니라 집단의식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라딘 박사가 RNG를 사용해 실험한 바에 따르면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경우, RNG에는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가 감지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전 세계에서 수억 혹은 수십억 명이 동시에 텔레비전으로 아카데미 상 시상식이나 올림픽 개막식을 시청할 때는 해당 시간대의 RNG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집단의식이 물질세계에 변화를 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라딘 박사에 따르면 이러한 집단 동조성은 참가하는 인원 수, 평균 집중력, 그밖에도 심리학적·생리학적·환경적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집단의식이 강해짐에 따라 모든 물리계는 일정한 질서를 형성하고 그 질서 정도가 뚜렷하게 상승한다고 한다.
이러한 집단 동조성의 개념은 영국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가 자신의 책 《새로운 생명과학》(A New Science of Life)에서 제시한 ‘형태 발생 장(morphogenetic field)’ 개념과 유사하다. 그에 따르면 시공간을 뛰어넘어 물질체계와 생물체의 특징적 형태와 행위를 결정하는 어떤 조직적인 장(場)이 존재할 수 있고, 일단 이 장이 형성되면 특정 집단에 속하지 않는 생명체의 형태와 행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집단의식의 위력을 보여주는 예로 ‘100마리째 원숭이 현상’을 들 수 있다. 어떤 섬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우연히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는데, 이 모습을 본 다른 원숭이들이 따라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 섬에 사는 모든 원숭이들이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일정 기간이 지나자 그 섬의 원숭이들과 전혀 교류가 없는 다른 섬의 원숭이들까지 갑자기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게 되었다.
이는 습관과 의식이 바뀐 원숭이가 일정한 숫자가 되면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 혹은 형태 발생 장이 형성되고, 이것이 다른 섬에 살고 있는 원숭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이야기로 집단의식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 외에도 우리 마음의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들은 많다. 예를 들어 1988년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 랜돌프 버드(Randolph Byrd)는 다양한 종교단체에 환자 193명의 이름과 진단 결과, 건강 상태를 적어 보내면서 그 명단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 기도의 대상이 된 환자들의 상태가 그렇지 않은 환자들의 상태보다 크게 호전되었다고 한다. 이는 개인이나 집단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연구 결과들은 매우 많다.
또한 일부 초능력자들은 마음만으로 숟가락을 구부리거나 물체를 움직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염력(PK : Psycho-Kinesis)의 존재는 마음의 잠재적인 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능력, 텔레파시
마음에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멀리서 일어나는 일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오감을 통하지 않고서도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능력을 ‘초지각 능력(ESP : Extra-Sensory Perception)’이라 하고, 그 중에서도 두 사람 이상이 일상적인 감각을 동원하지 않은 채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텔레파시(telepathy)’라고 한다. 사람의 몸 안을 꿰뚫어보는 것을 ‘인체투시’, 먼 거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는 것을 ‘원격투시(clairvoyance)’ 또는 ‘천리안’이라 하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 미리 알아내는 것을 ‘예지(precognition)’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은 특별한 계기나 오랜 동안의 수련을 통해 특정한 사람들에게 초능력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인간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텔레파시는 가까운 사람에게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경우 자신이 그 감각을 영상이나 소리 또는 느낌으로 인식하게 되는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오랫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바로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떠올리는 경우, 옛 친구들로부터 한꺼번에 연락을 받는 경우 등도 모두 텔레파시의 예로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가벼운 우연의 일치로 생각해 버리지만 사실은 서로 마음에 의한 교신이 이루어져 발생했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텔레파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텔레파시에 대한 우리의 의문은 ‘과연 그것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과 존재한다면 ‘보통 사람들도 이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서구의 심리학자들은 19세기부터 텔레파시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해 왔지만, 1800년대에 행해진 초창기 연구는 주로 개인이 체험했던 사례들을 모은 것에 불과했다.
20세기 초반 스탠포드, 하버드, 듀크대학의 심리학자들은 텔레파시에 대해 본격적인 과학적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연구들에 대해서는 실험 방법상의 문제들이 제기되었고, 따라서 신뢰성 있는 과학적 증거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은 1960년대 이후 꿈을 이용한 텔레파시 실험에서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1966∼72년까지 뉴욕 정신과 의사 몬테규 울먼(Montague Ullman)과 심리학자 스탠리 크립퍼(Stanley Kripper)는 6년 동안 꿈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은 송신자가 꿈을 꾸고 있는 수신자에게 마음으로 어떤 이미지를 송신할 때 수신자의 꿈속에 그 이미지가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 송신자의 메시지가 수신자의 꿈에 이입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후 총 450건에 달하는 꿈을 이용한 실험들에서도 텔레파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었다.
좀더 최근에는 꿈을 이용한 실험을 개선한 간츠펠트(Ganzfeld) 실험이 수천 회에 걸쳐 계속되었다. 인간은 자극이 없는 상태, 예를 들어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머물게 되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평소에는 포착하지 못하는 혼미한 감각조차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태의 수신자가 멀리 떨어져 있는 송신자가 보내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그 결과 텔레파시의 존재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또 텔레파시 능력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텔레파시에 대한 연구 결과는 우리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이 그 사람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단, 수신자가 그 메시지를 실제로 인식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정황에 따라 달라진다. 라딘 박사가 밝히고 있듯이 우리 마음은 여과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밀려드는 엄청난 분량의 감각정보를 사전에 거르고 선별하는 기능으로, 이 기능 덕분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집중하기 원하는 것이나 생존에 필요한 것에 대한 정보만을 의식계로 전달할 수 있다.
또 이 기능 덕분에 시끄럽고 소란한 방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조그마한 소리는 금방 식별해 낼 수 있다. 우리가 지닌 편견과 일치하지 않는 사실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현상은 바로 이런 우리 마음의 여과기능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텔레파시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강도가 미약할 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과작용에서 걸러지기 때문에 의식계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부모가 위급한 경우라든지, 마음의 여과기능이 해제되거나 완화된 특수한 상황에서는 텔레파시 정보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텔레파시 이외의 초지감 능력에 대한 연구들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다. ESP를 이용한 원격인지 능력에 대한 실험은 수천 번 행해졌는데 수백 편의 논문과 미국 정부 보고서 등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증거들이 축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건에 대한 신경계의 무의식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는 예감, 미래의 사건을 미리 알아내는 예지 능력도 여러 연구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서구 과학자들의 발견을 기(氣)적으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마음은 기를 조절하기도 하고 기를 방사하기도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보는 기를 통해 정확하게 상대방에게 송신된다. 하지만 상대편은 그 정보가 두뇌로 인지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경우에만 인지할 수 있다.”


천국도 지옥도 마음이 만들어낸다
우리는 똑같은 상황이라도 마음 먹기에 따라 그 상황을 달리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로 흔히 ‘천국도 마음이 만들고 지옥도 마음이 만든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느낌 혹은 감정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인체나 물질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앞서 살펴본 과학적 증거들만 보더라도 마음은 놀라운 마술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은 기를 발생시키고 조절함으로써 엄청나게 다양한 일을 해낼 수 있다. 인체의 질병을 치유할 수도 있고, 병이 나게 만들 수도 있으며, 가짜 증세를 만들어내는 재주까지도 갖고 있다. 또한 마음은 실제 연습 없이도 운동기능을 향상시키는 힘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은 기를 송수신함으로써 텔레파시 현상이 일어나도록 하며, 필요없다고 인식되는 정보는 두뇌에서 인식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작용도 한다. 일부 영능력자들은 오로지 마음의 힘만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염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마음의 힘은 우리가 집중하면 할수록 더욱 증가하며 개인의 범주를 초월해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또 집단이 똑같은 염원을 가지는 경우에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은 기를 만들고 조절하는 창조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라고 하는 존재의 중심은 나의 마음이고, 두뇌는 우리 마음의 조종을 받아 물질적인 것을 이루어내는 기관에 불과하다.



제4장 물질의 근본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놀라운 사실들
과거 300여 년 동안 서구문명과 서양 의학은 그 위대성을 인류의 마음 깊숙이 새겨놓았다. 산업혁명에서 시작되어 현재 진행 중인 정보통신 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는 서구문명은 대자연의 위력 앞에 무력하게만 느끼던 인류에게 크나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또한 서양의학은 의료기법의 비약적 발전과 무수한 의약품의 개발을 통해 수많은 인명를 구하는 등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서구문명과 서양의학의 눈부신 발전은 동양적 가치관과 동양사상, 동양의학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의 전통사상과 가치를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 혹은 미신으로 치부하고 무시해 왔다. 옛부터 전해지던 동양 현자들의 가르침과 구도자들의 체험도 재현성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 하에서는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20세기 초부터 현대물리학은 서구문명을 주도해 온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사고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뉴턴과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사고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부분들이 질서정연하게 합쳐져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부분부분에 대한 이해는 바로 전체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그 결과 인류는 머지않은 장래에 우주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낳았다.
하지만 무한한 우주를 논하는 상대성 이론과 극히 미세한 세계를 파헤치는 양자역학, 그리고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홀로그램 우주론은 논리와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사고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부터는 물질의 근본을 다루는 물리학이 20세기에 들어와 무엇을 발견했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핵심을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물질이란 에너지의 한 형태이고 그 변환은 E=mc2(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빛의 속도)으로 간추려진다.
둘째, 시간이란 관찰자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모든 관찰자에게 공통되는 절대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물체를 담고 있는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에 의해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 즉 절대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전물리학에서는 공간은 3차원이고 시간은 별개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상대성 이론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공간과 시간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 시공간 연속체를 형성하므로 시간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공간을 이야기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만일 관찰자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동일한 사건을 본다고 치자. 이 경우 그들은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서로 다르게 인식할 것이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그 것이 갖는 절대적 의미를 상실하고,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것도 불가능해지며, 눈에 보이는 물질과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상호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양자역학은 원자, 소립자 등 극히 미세한 세계를 다루는 물리학 분야인데 양자역학을 통해 발견된 중요한 사실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자는 그 중심에 원자의 질량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극도로 미세한 입자인 전자들이 빠르게 돌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원자핵의 크기는 원자의 10만분의 1에 불과하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원자는 축구장 크기만한 텅 빈 공간 한가운데 야구공 하나가 놓여 있는 모습으로 비유될 수 있다.
둘째, 전자들은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데 일정한 속도로서 궤도를 따라 도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법칙 없이 여기서 툭, 저기서 툭 하고 나타난다. 이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한다.
셋째, 전자 또는 아원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이다. 즉 전자는 관찰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나타나고 없는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넷째, 전자 등의 아원자는 빛과 마찬가지로 입자인 동시에 파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입자란 아주 작은 지역에 국한된 실체이고, 파장은 넓은 공간에 퍼져 있는 파동이다. 따라서 하나의 존재는 이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닐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상식이다. 하지만 빛의 경우 파장의 특징인 ‘간섭현상’과 입자의 특징인 ‘광전효과(光電效果)’를 동시에 나타내는데, 이는 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간섭현상이란 둘 이상의 파동이 교차하면서 간섭무늬를 만드는 현상을 말하고, 광전효과란 자외선을 표면에 쏠 때 그 표면에서 전자가 튀어나오는 물리학적 효과를 이야기한다.
양자역학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발견들은 우리의 합리성과 상식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물질을 형성하는 원자의 99.999%가 텅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딱딱해 보이는 물질이라 할지라도 텅 빈 공간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아파트를 비롯해 자동차, 소파, 책상, 심지어는 내 몸까지도 실제로는 거의 100% 텅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전자를 포함한 소립자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소립자들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또 일반적으로 크기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크기가 없는 전자를 과연 존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물체든 입자로서의 성질과 파장으로서의 성질을 동시에 지닐 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두 가지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빛이나 전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전자는 관찰될 때만 입자로서 존재하는데, 이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
과학자들은 물질을 더 깊이 뚫고 들어갈수록 어떤 독립된 구성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 관계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고리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룬다. 따라서 프리초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에서 어떤 대상물의 성질도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물질은 오직 마음과 결부될 때만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립자의 세계는 관찰자의 주관이 배제된 객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주관과 객관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있고 없고는 주관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일 뿐 ‘실제로 무엇이 있다 혹은 없다’를 객관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어떤 동일한 존재나 사건도 마음의 작용으로 각각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죽음을 경험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양 사람들은 주로 죽은 후 “터널을 빠져나갔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동양 사람들은 “배를 저어 강을 건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육체의 죽음’ 이라는 똑같은 사건도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의 지식이나 편견 즉 마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공간과 시간상의 특정 위치를 규정할 수 없다는 양자의 ‘비국소성(nonlocality)’은 각 부분부분이 독립적이지 않고 전체가 상호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되고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체라도 실제로는 시공간의 제한을 초월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리학자 맨스필드(Victor Mansfield)는 이러한 측면에서 “세상은 전체가 상호 관련을 맺고 있으며 모든 것은 철저히 종속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홀로그램 우주
런던대학의 세계적인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과 스탠포드대학의 저명한 신경생리학자 칼 프리브램(Karl Pribram)은 상대성 원리와 양자역학이 발견한 사실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홀로그램 우주론을 주장하고 있다. 홀로그램이란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입체영상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이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들이 개발되어 있다.
홀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의 레이저 광선을 두 갈래로 나눈 다음, 첫번째 광선은 대상물에 반사시키고 두번째 광선은 그대로 통과시켜 이 두 광선이 서로 부딪치게 해야 한다. 이때 두 광선이 만들어내는 간섭무늬를 필름에 감광시킨 뒤 이 필름, 즉 홀로그램 필름을 다른 레이저 광선이나 빛으로 비춰보면 실물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3차원 입체 영상이 나타난다. 이를 홀로그램이라 부른다.
봄과 프리브램은 우주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시공을 초월한 우주의 어떤 실재(實在)에서 투사되는 유령 같은 영상, 다시 말해 홀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들 일상생활 속의 현실은 두뇌와 오감에 의해 생생하게 느껴지고 감각적으로 “진짜” 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이것은 사실 홀로그램과도 같은 일종의 환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프리브램에 따르면 이 우주 공간은 파동들로 가득하며, 이 파동들은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우주의 근원이나 실재로부터 투영된 그림자라고 한다. 우리의 뇌는 이 파동들의 주파수를 수학적인 방법으로 해석함으로써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객관적인 현실을 지어낸다. 이 파동과 주파수가 우리에게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은 두뇌가 홀로그램 필름 같은 간섭무늬를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들로 변환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봄은 더 깊은 차원 또는 시공을 초월한 우주의 실재를 ‘감추어진(implicate) 혹은 접힌(enfolded) 질서’로,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세계를 ‘드러난(explicate) 혹은 펼쳐진(unfolded) 질서’로 표현하며,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두 질서 사이의 무수한 접힘과 펼쳐짐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최근 텔보트는 《홀로그램 우주》에서 이 새로운 우주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텔보트는 이 책에서 홀로그램 가설의 두 태두인 데이비드 봄과 칼 프리브램을 비롯해 물리학, 생리학, 심리학, 인체의학, 정신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그들이 직면한 학문적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홀로그램 이론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종교적인 기적, 염력, 물질화 현상, 인체의 에너지 장, 텔레파시, 시공간 투시, 유체이탈, 전생체험, 임사체험, UFO 등 과학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던 현상들을 홀로그램 모형에 비추어 설명하고, 물질 우주 자체가 거대한 홀로그램적 투영물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텔보트는 홀로그램 모형을 받아들이는 과학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고, 특히 지난 6∼7년 동안 그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홀로그램적 관점은 아직도 형성 중인 개념이고, 여러 가지 상이한 관점들과 증거의 조각들이 모자이크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창조주가 만든 거대한 가상현실
물질의 근본을 연구하는 물리학은 20세기 들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논리와 합리성만으로 이해될 수 없는 곳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오히려 이 세상은 동양의 현자들이 이미 수천 년 전 직관에 의해 알아차린 것처럼 주관과 객관, 부분과 전체, 존재와 비존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요지경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 모든 것이 상호 관련을 맺고 있음을 시사하는 양자역학의 비국소성은 우주의 모든 현상들이 힌두교의 범(梵, 브라만), 불교의 법신(法身), 도교의 도(道) 같은 궁극적 실재의 다양한 모습들이며, 때문에 우주 모든 현상들이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동양적 세계관, 다시 말해 우주의 전일성(全一性)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봄과 프리브램 등이 주장하고 있는 홀로그램 우주론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물질세계가 모두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환영(maya)이고 오직 허공만이 실재이다(色不異空 空不異色色卽是空 空卽是色)”라고 한 2500년 전 석가모니 말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한 우주의 모든 정보가 홀로그램 필름처럼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데이비드 봄의 생각도 사실상 무수한 고대의 사상가들이 인식했던 대우주와 소우주의 개념, 즉 “우주의 모든 부분들 속에 온 우주가 숨겨져 있다(一卽多 多卽一)”는 사상과 일치한다.
여기서 우리는 ‘물질의 근본이 공(空)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오감과 두뇌로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물질세계 모두가 데이비드 봄이나 프리브램 또는 석가모니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내거나 우주의 실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과연 이러한 세계를 만든 창조주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 인간들이 착각하게 만들어 서로 물질을 많이 가지려고 아귀다툼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려는 것일까? 아니면 숨겨진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요즘 들어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의 발전으로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는 것이 만들어져 여러 가지 면에서 이용되고 있다. 가본 적이 없는 곳에 가 있는 듯 느끼게 해주고, 실제로 비행기를 조종하지 않고도 직접 조종하는 것같이 느끼게 해주는 가상현실은 자원 낭비 없이도 귀중한 체험을 제공해 주는 놀라운 발명이다. 그런데 20세기 물리학은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이야말로 완벽한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 세상이 홀로그램처럼 운행되는 허깨비라 해도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세상이 실제로는 파동으로 가득 찬 하나의 텅 빈 공간이라고 해도 그것이 너무나 완벽해서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한, 무엇이 진실이냐에 집착할 필요는 전혀 없다. 어쩌면 이것은 창조주의 시각에서 볼 때 아무런 낭비 없이 인간에게 인생이란 무대를 만들어줄 수 있는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렇게 욕심이 나던 물질이 알고 보니 빈 허공일 뿐임을 알아차리고 허무주의에 젖게 되는 것은 견성(見性)의 초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깨달음은 거기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러한 착각 속에 살도록 태어났을까? 물질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생생한 경험을 통해 배우고 깨침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창조주께서 만들어준 하나의 가상 무대가 아닐까? 우리는 이 가상 무대에서 제대로 된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의 답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 탐색하는 것은 제3부로 미루고 그에 앞서 지금은 진짜 세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방법 한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제5장 진짜 세상 엿보기


생활의 동반자 엘로드
앞에서 잠깐 밝힌 바와 같이, 나는 1979년 여름에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으로 그리고 교수로 활동하다가 1993년 여름에 가족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두 아이들은 한국에서 6년을 보낸 후 1999년 여름이후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귀국후 장만한 여의도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인천의 학교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 아파트는 산과 접해 있어 비교적 공기가 좋고 전망도 좋다.
하지만 이 아파트를 구입한 결정적인 동기는 다른 데 있다. 새 아파트를 물색할 때 엘로드를 가지고 다니면서 수맥파를 조사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에서는 대부분의 집에서 나타나는 수맥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몸에 좋은 지기(地氣)가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몸의 혈자리가 많이 열리고 기감(氣感)이 좋은 사람일수록 주위 기운에 상당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집 안의 수맥파는 큰 골칫거리가 된다. 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가도 앉은 자리에서 수맥파가 감지되면 옆자리로 옮기곤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의를 하는 내내 근육 통증과 두통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엘로드는 본래 수맥을 감지하는 데 이용되는 도구이지만 내게는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매우 귀중한 물건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나홀로 생활’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역시 음식이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에는 식품회사들이 다양한 종류의 인스턴트 식품들을 개발해서 판매하고 있어 큰 부담을 덜었으나, 문제는 대부분의 일회용 식품들이 몸에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엘로드와 피라미드로 간단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엘로드 반응을 통해 식품이 몸에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고, 반응이 좋지 않으면 부엌 싱크대 위에 놓여 있는 뼈대만 있는 피라미드 속에 하루 정도 집어 넣었다가 다음날 조리해 먹는다. 수돗물의 경우, 정수기를 거친 물인데도 엘로드 반응은 몸에 좋지 않게 나오는 것이 보통인데, 마시기 전에 하루 정도 피라미드 속에 넣어 두었다가 몸에 좋은 물로 바꾸어 마시고 있다.
엘로드 이용은 수맥파와 식료품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책방에 가서 책, 특히 정신세계와 관련된 책을 고를 때도 엘로드를 이용하는데, 엘로드는 그 즉시 얼마나 좋은 책인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예언서나 UFO와 관련된 책일 경우, 언뜻 보아서는 혹세무민하는 거짓된 책인지 아니면 진실을 담고 있는 책인지 판단할 길이 없는데, 이때 엘로드는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나는 좋은 책에서는 따뜻한 기운을 느낀다. 이처럼 엘로드 없이 손바닥으로 책의 기운을 느껴보기만 해도 좋은 책인지 나쁜 책인지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지만 엘로드의 반응은 정확하다. 그밖에도 나는 수없이 많은 경우에 엘로드를 이용하고 있고, 이런 이유로 엘로드가 필수 소지품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엘로드와 큰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기(氣)수련을 시작한 지 4∼5개월이 지난 후였다. 주위 사람들이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 박사의 《의식혁명》(Power vs. Force)이라는 책을 추천해서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 책은 내가 읽은 최초의 뉴 에이지 관련 서적이었다.
그 당시 이 책은 내가 읽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도 있었고 인간의 관념과 의식수준을 측정할 수 있다는 지은이의 주장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반면에 호킨스 박사에 대해서는 큰 신뢰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은 후 나는 상당한 혼란에 빠졌다.
이즈음, 같이 수련하는 사람으로부터 기가 나오는 물건인 기상품들과 수맥파를 탐지한다는 엘로드에 대해 듣게 되었다. 나는 그 즉시 수맥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았고, 수맥봉을 사서 직접 다양한 실험을 해보았다. 이를 통해 수맥파뿐만 아니라 기의 세계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게 되었고, 호킨스 박사가 발견한 것들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한 것을 정리해 <엘로드를 통하여 본 세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학회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이 장에서 소개하는 내용들은 발표된 논문을 보완하여 좀더 읽기 쉽게 재구성한 것이다. 이 글은 기로 가득한 이 우주의 진실이 엘로드라는 아주 간단한 기구를 이용해 많은 부분 밝혀질 수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세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어린이의 육감이 더 강하다
모든 생명체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연체동물들은 풀잎 위에서는 풀잎 색깔로, 나뭇가지 위에서는 나무 색깔로 변색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민물장어, 무지개송어, 연어 등은 산란기가 되면 알을 낳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바다 속 수천 마일을 항해해서 어미들이 자신을 낳은 하천을 찾아간다고 한다. 철새들도 기후가 맞는 곳을 찾아 멀게는 수천 마일을 이동하지만 결코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일은 없다.
청개구리나 종달새, 나팔꽃 등은 비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며, 쥐, 고양이 등 수많은 동물들이 지진이나 화산폭발이 있기 며칠 전 혹은 몇 시간 전에 천재지변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피할 곳을 찾아 대이동을 한다. 바다에 사는 굴은 물이 밀려 들어오는 만조 시간에 맞춰 껍질을 여는데, 서식지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 실험실로 옮겨진 굴은 그곳 실험실의 만조 시간에 맞춰 껍질을 여닫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렇게 생명체의 놀라운 초지각 능력을 생각해 볼 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오감 외에 또 다른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피부로 느끼는 다섯 가지 감각 외에 이를 초월하는 초지각 능력을 타고 나며, 어린이들은 이 능력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자리에 수맥이 지나가는 경우 아기들은 이를 피해 침대나 방 한쪽 귀퉁이에서 웅크리고 자기도 하고 또 높은 곳에서 떨어진 아기가 별다른 상처 없이 무사한 경우도 쉽게 발견된다. 또 어린이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훈련하는 것으로도 투시능력 등 초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초지각 능력은 자라면서 점점 퇴화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두뇌에서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인 신피질은 더욱 발전하게 되고 사람들의 의식은 점점 강화된다. 이에 따라 인간의 다양한 잠재능력은 더욱 깊숙한 곳에서 잠자는 상태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잠재능력은 특별한 계기나 오랜 수련을 통해 우리 몸이 인식한 특정 정보를 두뇌로 전달하는 회로가 생기면서 초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몸 스스로 판단한다
우리가 초능력자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 몸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단, 몸이 입수한 정보가 두뇌에 전달되는 통로가 막혀 있어서 그 정보를 의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음식이 특정한 사람에게 유익할 경우, 그 음식이 몸에 닿거나 몸 근처에 접근하기만 해도 우리 몸은 음식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음식의 유익함 여부를 감지할 수 있으며,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인체 반응에 바탕을 두고 발전되어 온 것이 바로 ‘운동역학(kinesiology)’이다.
운동역학이란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근육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연구해 온 학문으로, 미국의 조지 굿하트(George Goodheart) 박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운동역학에서는 긍정적인 자극은 근육 강화를 돕고 부정적인 자극은 근육을 현저히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굿하트 박사는 몸에 좋은 영양물질에 의한 자극은 근육의 힘을 증가시키는 반면, 몸에 해로운 물질에 의한 자극은 근육의 힘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천연 영양식품은 사람들의 근육을 강화시키는 반면, 인공 감미료는 근육을 약화시킨다.
미국의 의사이자 응용물리학자이며 전기공학자인 오무라 요시야키(大村惠昭) 박사는 이러한 물리적 자극에 대한 근육 반응을 더욱 발전시켜 1970년대 후반 ‘오링 테스트(Bi-Digital O-Ring Test)’를 개발했다. 오링 테스트에 따르면 사람들마다 잘 맞는 식품이 있고 그렇지 않은 식품이 있는데, 우리 몸에 잘 맞는 식품과 접촉하면 둥근 링 모양(O-Ring)을 만든 손가락 힘이 강화되어 잘 벌려지지 않고, 반대로 몸에 맞지 않는 식품과 접촉하면 손가락 힘이 약화되어 쉽게 벌려진다고 한다. 이 오링 테스트는 현재 한의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으며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정신적 자극에도 반응하는 몸
굿하트 박사의 물질적 자극에 의한 근육 반응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존 다이아몬드(John Diamond) 박사였다. 그는 물질적인 자극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고 지적인 자극에도 근육이 강화되거나 약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웃음은 근육을 강화시키고 ‘나는 너를 미워한다’ 와 같은 부정적인 말은 근육을 약화시킨다. 또 ‘여름에는 춥다’ 처럼 누구나 다 아는 허위 사실을 들으면 근육이 약화되고 증명된 사실을 들으면 근육이 강화된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좋거나 나쁘지 않은 내용인데도 어떤 그림은 모든 사람들의 근육을 강화시키고 어떤 그림은 근육을 약화시켰으며,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과 팝송이 근육을 강화시킨 반면, 하드록이나 헤비메탈은 근육을 약화시켰다. 더군다나 클래식 음악을 싫어하고 하드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실험 결과는 똑같이 나타났다.
다이아몬드 박사의 운동역학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피험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수평으로 왼팔을 벌려 바닥과 평행 상태를 유지한 채 서고, 시험자는 피험자를 마주보고 서서 오른손을 피험자의 왼쪽 손목 위에 놓는다. 실험자는 피험자에게 “왼팔을 누를 테니 온 힘을 다해 저항하라”고 말한 뒤 고른 힘으로 확실하고 빠르게 누른다. 이때 불필요하게 무리한 힘을 가하게 되면 피험자의 근육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실험의 정확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런 다음, 실험의 종류에 따라 피험자에게 무엇을 집중해서 생각하게 하거나 실험 대상인 물건들을 몸에 붙인 채 같은 방법으로 실험한다. 이때 몸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거나 아무런 생각 없이 실험한 경우와 비교해 보면 저항하는 힘이 더 강해졌는지 약해졌는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수준을 수치로 나타낸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미국 정신치료협회 종신회원으로 인간 정신의 진화에 관한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수많는 강연과 논문을 발표했으며, 직접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기도 했는데 최근 우리나라에도 두 차례 다녀간 바 있다.
그는 거의 30년 동안의 연구를 통하여 사람들의 견해나 진술 또는 관념들의 진실성이 근육 반응을 통해 1에서 1,000까지의 수치로 측정될 수 있고, 개개인의 의식수준도 같은 방법으로 측정되고 분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의 의식수준은 200 이상이다’ 혹은 ‘300 이상이다’ 하고 생각하면 근육의 힘에 즉각적인 변화가 생긴다. 이때 근육의 힘이 강화되면 그 정보가 정확하다는 것을, 반대로 근육의 힘이 약화되면 그 정보가 잘못된 것임을 의미한다. 호킨스 박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험에서 언제 어디서나 같은 측정 결과를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호킨스 박사의 의식수준에 대해서는 제3부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굿하트―다이아몬드―호킨스 박사로 이어지는 운동역학이 발견한 사실들은 놀랄 만한 것이다. 특히 인간의 관념과 의식수준까지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호킨스 박사는 인체는 우주의 무한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할 수 있는 하나의 터미널이므로 인체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우주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역학의 발견들을 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개개인의 말과 행동, 생각을 포함해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기, 다시 말해 파동의 형태로 영원히 남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 혹은 기운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생각에 의식을 집중하면 그 생각에 대한 우주의 기(氣)적 기록과 대조되고, 이에 따라 우리 몸에도 특정한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우주의 기록과 일치하는 경우에는 근육의 힘이 강화되는 반면,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근육의 힘이 빠지게 된다.
운동역학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들은 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아직도 신비주의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 또 근육 반응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필요한데, 이 때문에 실험자의 근육 힘이 강화되는지 약화되는지를 주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취약점이 있다. 이에 반해, 이제부터 이야기하게 될 엘로드 반응은 그러한 주관적 판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엘로드를 이용한 수맥 측정
수맥파는 땅속 지하수가 흐르면서 주변의 흙, 돌 등과 부딪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파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 확실하게 규명되어 있지는 않다. 독일 등에서는 땅속의 지하수 흐름과 관련된 나쁜 파장만을 수맥파라 부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땅에서 방사되는 모든 나쁜 파장들, 즉 ‘지전류(地電流)’를 통칭해 수맥파라 부르고 있다.
지하수의 흐름에서 비롯된 수맥파가 인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왜 인체에 유해한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인체의 에너지 장을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맥파는 1초에 7∼8번 진동하는 초저주파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인체 각 부위의 고유한 진동수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우리 몸이 수맥파에 노출되면 정상적인 진동수가 간섭을 받아 신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으로 추측된다.
먼저 우리 두뇌가 수맥파에 노출되는 경우를 살펴보자. 사람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의 뇌파는 12헤르츠 이상의 베타파이지만 잠이 들려고 할 때나 명상을 하고 있을 때는 뇌파가 8∼12헤르츠의 알파파로 바뀐다. 이 상태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이완되고 평온한 상태에 돌입할 수 있다.
잠이 깊어짐에 따라 알파파에서 4∼8헤르츠의 쎄타파 그리고 0.5∼4헤르츠의 델타파로 바뀌는 주기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잠을 잘 때 신체가 수맥파에 노출되면 뇌파가 7∼8헤르츠 이하로 떨어지지 않아 숙면을 이루기가 어렵고, 심한 경우에는 계속되는 악몽과 불면증, 만성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신체 다른 부위의 진동수는 대체로 200헤르츠 전후인데 초저주파인 수맥파에 노출되면 그 부위들의 정상 파동이 간섭을 받게 되고, 이것이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 인체에 각종 부작용을 유발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원인 모를 신경통이나 관절염 등이 수맥파와 관련이 있고 암, 고혈압, 뇌졸중, 중풍 환자들 대다수가 장시간 수맥파에 노출되었음이 여러 연구 결과에서 밝혀지고 있다.
기적인 감각이 개발된 사람인 경우, 수맥파가 강한 곳에 머물게 되면 그 즉시 왠지 모르게 갑갑하고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강한 수맥이 여러 개 겹치는 곳에서는 강력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심할 경우 죽음의 공포를 맛보기도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옛부터 흉가로 불리던 집에서는 반드시 강한 수맥파가 발견된다고 한다. 개나 소 같은 대부분의 가축과 새들은 수맥파를 싫어하지만 고양이나 개미, 벌 등은 수맥파를 좋아한다. 또한 수맥파는 건물이나 도로 등 건축물의 안전에도 문제를 일으키며, 특히 수직 균열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수맥파를 탐지하기 위해 버드나무나 사과나무의 가지를 이용했고, 요즘 들어 펜듈럼으로도 불리는 추나 엘로드 혹은 와이로드(Y-rod) 등을 많이 이용한다. 추를 사용할 경우 추의 움직임을 보고 수맥의 존재 유무와 양을 판단할 수 있고, 엘로드를 사용할 경우 엘로드가 몸 안쪽으로 접히는 곳에 수맥이 있다고 판단한다.
수맥파를 탐사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지만 기적으로 예민한 사람이 더욱 쉽고 정확하게 탐사기구에 반응하며, 훈련이나 기 수련을 통해서 탐사능력이 향상될 수 있다.
수맥이 어떻게 엘로드와 같은 간단한 기구를 통해 탐사될 수 있는지 그 원리는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고, 또 아무도 그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수맥 탐사는 앞서 살펴본 운동역학의 원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운동역학에 따르면 우리 몸(에너지체)에 특정한 물리적·정신적 자극이 주어질 때 몸, 특히 근력에 변화가 일어난다. 이를 기의 관점에서 보면, 인체가 특정한 기운을 감지하게 되면 그에 따라 근력의 변화가 일어나고, 추나 엘로드의 움직임은 이러한 우리 몸의 근력 반응 또는 그와 연관된 신체상의 반응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인체가 어떤 기운을 감지할 때 엘로드의 양쪽 끝은 안쪽으로 접히는 접힘 반응을 보이든지 아니면 바깥쪽으로 펼쳐지는 펼침 반응을 보인다. 근력이 강화되는 자극이 있을 경우, 엘로드는 펼침 반응을 나타내고, 근력이 약화되는 자극이 있을 경우 엘로드는 접힘 반응을 나타낸다. 몸이 수맥파에 노출되는 경우에 엘로드는 즉각 접힘 반응을 보여준다.
엘로드를 이용해 수맥을 탐사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팔을 어깨넓이 정도로 벌린 뒤, 양 손에 엘로드를 하나씩 쥔다. 이때 엘로드 끝은 정면을 향하게 하고 수평을 유지하도록 한다. 만약 수평 유지가 어렵다면 엘로드의 끝 부분을 앞쪽으로 약 10도 정도까지 기울여도 상관없다.
마음으로 수맥을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움직이다가 지하의 수맥파와 만나면 그 지점에서 엘로드 양쪽 끝이 몸 안쪽으로 접혀지기 시작하고, 보통 30∼50cm 정도 되는 수맥의 폭만큼 통과한 다음에 엘로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만약 움직이는 상태에서 엘로드가 계속 접혀 있다면 지하 수맥의 흐름을 정확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지하 수맥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엘로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지식과 엘로드 반응을 이용하면 지하의 수맥 지도를 그릴 수가 있고, 수맥파에 대비하는 것도 가능하다.
수맥파에 대한 가장 좋은 대비책은 수맥파가 없는 집이나 사무실을 구하는 것이지만 이는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집에서는 수맥파가 감지되고 있고 또 어떤 집에서는 아주 강한 수맥파가 감지된다. 차선책으로 수맥파가 감지되는 곳을 피해 침대나 책상을 배치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도 불가능하다면 수맥파를 차단하는 장치를 한다. 바닥에 가죽이나 동판, 알루미늄 호일 등을 깔면 수맥파 일부가 차단되거나 완화되는 효과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응용되는 엘로드
앞서 살펴본 운동역학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수맥 탐사뿐 아니라 다양한 물질적·정신적 자극을 테스트하는 데 엘로드를 이용할 수 있다. 우리 몸을 기준으로 자극이 유익할 때 펼침 반응이, 유해할 때 접힘 반응이 나타난다. 다음에 열거한 것들은 대부분 저자가 직접 확인한 것으로 이들 외에도 엘로드를 이용할 수 있는 사례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1) 음식과 전자제품
각종 음식이나 물건이 몸에 접근하거나 닿으면 즉각 엘로드 반응이 나타난다. 보통 인체에 유해하다고 알려진 담배는 쉽게 접힘 반응을 보이고, 특히 불이 붙어 있는 담배는 더욱 빠르고 강하게 반응한다.
이에 반해 음식은 사람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똑같은 감자라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집에서 쉽게 요리해서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는 인스턴트 식품은 대부분 유해 반응을 나타낸다. 음식에 따라 엘로드가 접혀지고 펼쳐지는 정도는 각각 다른데, 이는 몸에 해롭거나 이로운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각종 전자제품의 전자파에 노출될 때도 엘로드는 강한 접힘 반응을 보인다. 대부분의 컴퓨터는 켜놓은 상태에서 약 1m 내외 앞으로 접근하면 접힘 반응을 나타내게 하고, 텔레비전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전자제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고 하는 것이 비단 눈을 보호하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몸은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휴대 전화기에도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휴대 전화기를 손에 쥔 채 스위치를 켜면 엘로드는 접힘 반응을 나타내고, 스위치를 끄면 다시 원상태로 복귀한다. 휴대 전화기에서 나오는 전자파의 유해성 여부가 아직 과학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몸은 분명히 유해하다고 판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휴대 전화기로 오랫동안 통화하는 것은 두뇌를 장시간 전자파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최근 판매되고 있는 극소형 휴대 전화기를 와이셔츠나 티셔츠 주머니에 넣고다니는 행위는 심장을 유해한 파장에 노출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행동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고압선 주위에 형성되는 자장의 유해성 여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압선이 지나가는 지역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암과 같은 각종 질병이 많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는 서구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여러 번 발표되었는데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나는 부천에서 평촌 구간의 서울 외곽 순환도로를 지나갈 때면 머리가 쭈뼛거린다거나 답답하고 어질어질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때 주위를 살펴보면 거의 틀림없이 차가 고압선 밑이나 옆을 통과하고 있다. 엘로드를 이용해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고압선 주위에 형성되는 자장이 우리의 에너지체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엘로드는 피라미드 안과 주위에서 강한 펼침 반응을 보여줌으로써 피라미드 안쪽에는 몸에 좋은 기가 모여든다는 것을 시사한다. 엘로드는 수정과 같은 일부 광석에도 강한 펼침 반응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수정의 결정으로부터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밝은 광선이 쏟아져 나온다는 브레넌의 주장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갖가지 종류의 보석은 저마다 각기 다른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보석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엘로드는 어떤 보석이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인지도 식별해 준다.
엘로드 반응은 제2장에서 소개한 히란야나 일부 부적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이 특수 형상들이 기를 방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각 형상과 색깔은 고유한 파장을 지니고 있어서 기적인 감각이 개발된 사람들은 이를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색깔이 다른 종이에 대한 엘로드 반응을 통해, 또 다양한 모양에 대한 엘로드 반응을 통해서 자신에게 잘 맞는 색깔과 모양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 있고, 이것을 일상생활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 옷을 고르거나 집을 장식할 때 기왕이면 자신에게 잘 맞는 색깔과 모양을 많이 이용함으로써 기적인 조화를 유지하고 건강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엘로드 반응은 실험 대상 물체에서 방사하는 고유한 파장에 우리 몸이나 에너지체가 반응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엘로드 반응의 원리는 굿하트 박사가 말한 식품에 대한 운동역학 반응이나 오링 테스트의 손가락 반응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2) 참과 거짓
엘로드가 나타내는 재미있는 반응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반대되는 것을 생각하면 접힘 반응이 나타나고, 일치되는 것을 생각하면 펼침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름에는 눈이 온다’처럼 사실과 반대되는 단정형 문장을 생각할 때 엘로드는 접힘 반응을 나타내고, 반대로 ‘여름에는 덥다’처럼 사실과 일치하는 문장을 생각할 때 엘로드는 펼침 반응을 나타낸다. 우리가 ‘예’나 ‘아니오’ 같은 대답을 요하는 문장을 생각하면 엘로드는 ‘예’라고 대답해야 할 때는 언제나 펼침 반응을,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할 때는 언제나 접힘 반응을 나타낸다.
참과 거짓에 대해 엘로드가 나타내는 반응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반응은 진실을 생각하거나 이야기할 때는 우리 몸에 유익한 작용이 일어나고, 거짓을 생각하거나 이야기할 때는 우리 몸에 해로운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우주의 섭리를 암시하고 있는데, 거짓 없이 참되게 사는 사람은 몸에 계속해서 유익한 작용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반면에 거짓투성이 삶을 사는 사람은 계속해서 몸에 해로운 어떤 작용이 일어나 상대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3) 소리와 주문
다이아몬드 박사가 음악에 대한 근육 반응을 이야기했듯이 엘로드는 소리와 음악에 대해서도 쉽게 반응한다. 예를 들어 하드록처럼 청각을 심하게 자극하는 음악을 틀어주면 엘로드는 접힘 반응을 나타내지만 거의 모든 클래식 음악과 자연음악, 명상음악, 힐링음악에서 엘로드는 펼침 반응을 나타낸다. 클래식 음악 가운데서도 특히 모차르트의 곡에 강한 펼침 반응을 나타내고, 일부 대중가요에도 펼침 반응을 나타낸다.
최근에는 모차르트나 바흐의 곡이 지능 발달에 좋다고 해서 어린이용이나 태교용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다. 이러한 ‘모차르트 효과(Mozart Effect)’가 왜 나타나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한 과학적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모차르트나 바흐의 곡들에서 수준 높은 기가 발생된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발생한 좋은 기가 뇌를 활성화시켜 어린이들의 지능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요즘 발표된 연구 결과들을 보면 농사를 지을 때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면 농작물 수확량이 증가하고 젖소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면 우유 생산량이 상당히 늘어난다고 하는데, 이 또한 클래식 음악의 엘로드 반응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엘로드는 사람들이 외는 주문이나 염불에도 펼침 반응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왼다든지 천부경(天符經) 혹은 증산계열의 태을주(太乙呪) 등을 욀 때 강한 펼침 반응이 나타난다. 이러한 주문을 외는 경우, 큰 에너지나 좋은 기운이 몸에 와닿는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나는 눈을 감고 천부경을 욀 때 기운이 구름과 같은 형태로 모여드는 모습을 본다. 단군시대 이후로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경전으로서 모두 81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이 세상의 원리를 설명하는 ‘조화경(造化經)’인데, 글자 한 자 한 자에서 매우 맑고 밝은 기운이 나온다.
이렇게 소리에 의해 기운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고 있었기에 옛부터 사람들은 수련을 하거나 종교의식을 할 때는 다양한 음악과 소리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4) 그림이나 글씨, 사진이나 책
벽에 붙은 그림이나 서예 작품 또는 사진에 가까이 접근할 때도 엘로드는 반응을 나타낸다. 펼침 반응뿐만 아니라 접힘 반응도 나타내는데, 이러한 반응은 화가나 서예가의 유명도나 작품의 예술성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 작가의 의식수준, 특히 작품을 만들 때의 의식수준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의 경우, 백두산 천지나 미국 세도나 지역의 벨 락(Bell Rock) 등을 찍은 사진에서는 엘로드가 매우 강력하게 펼침 반응이 나타나는데, 이는 그 땅의 실제 기운이 사진을 통해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로드는 인물 사진을 통해서도 실제 인물의 기운을 그대로 감지할 수 있고 천부경을 새긴 액자에도 금새 반응한다.
책이나 간단한 메모의 경우에도 엘로드 반응이 나타나는데, 이때도 저자의 유명도나 책의 인기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 대체로 경제·경영서 같은 사회과학 계통의 책들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서적과 정신세계에 관한 책들에는 펼침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남을 비방하거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기사가 실려 있는 잡지에는 접힘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호킨스 박사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우주적 측면에서 책의 진실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엘로드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참고한 대부분의 책들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펼침 반응을 나타낸다.

5) 단어
엘로드는 어떤 단어를 생각한다든지 그 단어를 소리내어 말하는 경우에도 반응을 보인다. 예를 들어 사랑, 포용, 자비, 용서, 평화 등과 같은 단어를 생각하면 펼침 반응을 나타내고, 반대로 증오, 배반, 아픔, 죽음 등의 단어를 생각하면 접힘 반응을 나타낸다. 욕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어김없이 접힘 반응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단어 자체에서 나오는 기운 때문인지 혹은 특정 단어와 연관되어 기억되는 감정에 연유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우리들 언어생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강하고 부정적인 말이나 격정적인 단어를 사용해 관중을 사로잡으려는 연설이나 강연 등은 유익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6) 사건의 진위
이미 발생한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알고 싶을 때도 엘로드를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사건의 범인은 ○○○이다’, ‘그 사람의 나이는 서른 살이다’라는 단정형 글에 대해 엘로드는 그 말이 맞을 경우에는 펼침 반응을, 틀릴 경우에는 접힘 반응을 나타낸다.
‘외계인은 존재한다’, ‘나는 전생에 고려시대 사람이었다’ 같은 의문에 대해서도 엘로드는 반응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고자 하는 것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단정형 문장으로 생각하고 엘로드 반응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7) 의식수준
같은 요령으로 사람의 의식수준도 엘로드를 이용해 측정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정 방법이 있는데, 비교적 쉽고 간단한 방법은 측정 대상자를 마주 보며 엘로드를 펼쳐든 채 ‘○○○의 의식수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엘로드는 즉각 반응을 나타내는데, 엘로드가 반응하는 정도에 따라 그 사람의 의식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펼침 반응은 호킨스 박사가 이야기한 200 이상의 의식수준을 의미하고, 접힘 반응은 200 이하의 의식수준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측정 방법은 혼자서 특정 인물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엘로드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 경우, ‘○○○의 의식수준’ 하고 집중하면 엘로드가 반응한다. 호킨스 박사가 말한 0에서 1,000 사이의 수치로 더 정확하게 측정하고 싶을 때는 ‘○○○의 의식수준은 200이상이다’라는 단정형 문장을 생각하면서 엘로드의 반응을 확인하고,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정확하게 하나의 숫자를 찾아낼 수 있다. 즉, 처음에는 큰 단위에서 시작해 점점 작은 단위의 수치로 좁혀감으로써 정확한 수치를 찾아내게 된다.
이러한 의식수준의 측정 대상은 측정자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현존 인물이나 역사 속의 인물 모두 가능하다. 또 측정 대상자의 나이와 상관 없이 측정할 수 있고 심지어 갓난아기의 의식수준도 측정할 수 있다. 측정 대상자의 사진을 앞에 놓고 측정하는 것도 손쉬운 방법이다. 이름을 모른다면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하면 되는데, 주의할 점은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막연히 ‘김 아무개’ 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되며, 측정 대상 인물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엘로드로 사람들의 의식수준을 측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이후 나는 많은 사람들을 측정해 보았다. 그 경험은 놀라움과 깨달음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매우 놀라운 발견 가운데 하나는 단군에 관한 것이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상고사 교육을 받고 성장한 탓에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나는 단군왕검의 개국 이야기를 단순한 신화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단군왕검에 대해 엘로드 테스트를 해 보았는데, 단군왕검은 실존 인물이었으며 의식수준이 아주 높은 존재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우리의 건국 시조가 바로 신의 경지에 도달한 깨달은 존재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나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원효대사는 깨달음의 경지를 훨씬 뛰어넘는 성인이었고, 조선 최대의 유학자로 꼽히는 이퇴계, 이율곡,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도 너무나 의젓했다고 전해지는 안중근 의사도 예상대로 매우 높은 의식수준을 나타냈다. 그런데 우리가 위대한 인물로 손꼽는 조선시대의 한 장군은 예상과 달리 의식수준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 나는 한참 동안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지금까지 활동했거나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 정치인들 대부분은 의식수준이 낮은 편이고, 미국 남북전쟁을 종식시킨 링컨 대통령이나 공산주의 소련의 자유화를 주도한 고르바초프는 높은 의식수준을 보였다. 수백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히틀러나 스탈린의 의식수준은 100에도 못 미치는 지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의식수준을 측정하는 데 있어서 좋아한다든지 싫어한다든지 하는 누군가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 여부는 측정 결과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측정대상자에 대한 선입견은 측정결과를 크게 왜곡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수준에 대해서는 제3부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엘로드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우리는 마음이 지닌 여과기능을 이용함으로써 원하는 대상에 대한 엘로드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엘로드를 양 손에 집어들면 땅에서 나오는 파장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생물체, 그림, 책, 소리 등에서 나오는 주위의 다양한 파장이 모두 종합되어 감지된다. 만약 땅에서 나오는 파장, 특히 수맥에서 나오는 파장만을 감지하려면 마음속으로 수맥을 생각하면 된다.
엘로드의 반응을 해석할 때 양쪽 끝이 다같이 안쪽으로 접히든지 다같이 바깥쪽으로 펼쳐져야만 반응이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만약 한쪽에만 반응이 온다든지 양쪽이 서로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면 측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양쪽 엘로드가 어느 정도 시간 차를 두고 반응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수맥파를 측정하거나 식품이나 음악에 대한 테스트를 할 때는 이들 측정 대상들이 강한 기운을 방사하기 때문에 엘로드 반응이 비교적 쉽게, 그리고 빨리 나타나지만 단어나 사건의 진위 또는 의식수준을 테스트하고 싶다면 어느 정도 엘로드에 익숙해진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좋다. 이런 테스트에 대해 엘로드가 반응하기까지는 20∼30초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강한 집중력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자신이 지금 당장 엘로드를 사용할 수 있을지 알고 싶다면 앞서 설명한 수맥파 감지 테스트를 해보는 것이 좋다. 수맥파는 인체에 유해한 강력한 파장이므로 가장 쉽게 엘로드 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기 감각이 발달된 사람은 엘로드를 이용해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고, 측정하는 시각과 관계 없이 대부분의 장소에서 같은 결과가 나온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약 20% 내외의 사람들은 별다른 훈련 없이도 엘로드 반응이 나타날 것으로 짐작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쉽게 엘로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나이가 많아질수록 엘로드 반응이 나타나는 비율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엘로드 반응은 측정자가 미리 강한 선입견을 가지거나 자기암시를 할 때 결과의 정확도가 떨어진다. 이 경우 엘로드는 완전히 엉뚱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는데, 이는 우리의 마음이 기를 만들고 조종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 초능력자들처럼 마음의 힘으로 물질화된 무엇인가를 곧바로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에너지 상태는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마음속에 강한 바램이 있거나 꾸준히 자기암시를 하면 우리의 마음은 형상화되지 않은 기의 세계에서 우리가 바라는 바를 창조하고, 엘로드는 이렇게 기적으로 창조된 것에 반응하게 된다. 이 경우 엘로드 반응은 우리가 물질세계에서 알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보여주게 된다.
수맥파와 같은 강한 에너지가 흐르는 곳에서 엘로드 반응을 측정했을 때는 신뢰성이 약화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힘이나 손동작 조절로 엘로드의 반응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반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제대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엘로드는 우주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위력적인 도구로 쓰일 수 있고, 특히 스스로 지속적인 연습을 한다면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과 행동, 말,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엘로드를 이용한 실험 결과들은 우주와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점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엘로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물체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데, 각종 형상과 색깔에 반응하고, 생명체뿐 아니라 보석 같은 무생물에도 반응한다.
또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 예를 들어 생각이나 단어, 소리에도 반응한다. 이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만물이 고유한 파동을 방사하고 있으며, 우리가 다양한 에너지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기의 세상이며 파동의 세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엘로드는 실험자가 알고 있는 것과 합치되는 말이나 생각 혹은 긍정적 단어들에는 펼침 반응을 나타내고, 반대로 거짓된 말이나 부정적 단어들에는 접힘 반응을 나타낸다. 이는 우리가 거짓된 말과 행동을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 때 몸에 좋지 않은 파동과 접하게 되고, 반대로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바른 말을 사용할 때 좋은 파동과 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살아가느냐 하는 데 따라 우리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이 직접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 신체가 즉각 반응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며, 마음이 몸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앞서 말했듯이 엘로드는 호킨스 박사가 이야기한 인간의 의식수준도 측정한다. 의식수준이라는 용어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호킨스 박사는 우주의 진리를 터득하여 완성이 된 인간, 즉 신인(神人)을 최고 1,000으로 하고, 극도의 절망감과 고통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삶을 최하로 하는 의식의 단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의식수준은 우주의 절대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는 인간의 자아 완성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식수준이 존재하고 또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은 개개인에 대한 완전한 기록, 즉 모든 말과 행동과 생각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며, 또 그 기록들이 어떤 절대적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부터 인도에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건들이 ‘아카샤(Akasha)’라고 불리는 우주의 도서관에 영원히 아로새겨지고, 이렇게 새겨진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가 적당한 방법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전해져 왔다.
아카식 레코드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문헌들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20세기 최대의 예언가인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는 아카식 레코드를 봄으로써 자신의 예언과 전생영독(前生靈讀, life reading)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 예수 출생 후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는 《보병궁의 성약》(The Aquarian Gospel of Jesus the Christ)을 지은 리바이 도우링도 아카식 레코드를 열람함으로써 그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불교에서는 세 가지 업(業), 다시 말해 행위에 의한 업(身業)과 말에 의한 업(口業), 생각에 의한 업(意業)을 말하는데 인간의 윤회는 이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는 우리의 행위와 말, 생각이 모두 기록되어 보존되고, 또 절대적 기준에 따라 평가받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엘로드의 반응 또한 아카식 레코드에 근거한 작용 가운데 하나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모든 생각까지 기록되고 또 그것을 근육 반응이나 엘로드 반응 같은 적당한 방법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우주에 벌거벗은 채 서 있으며, 우리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의식수준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판단하는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의식 수준을 자아 완성도로 볼 때 그 자아 완성도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비, 사랑, 용서, 화해와 같은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엘로드 반응이 좋게 나타난다는 것은 그 절대적 기준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제6장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 모두는 하나
여태껏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기의 세상이자 파동의 세상이고,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세계는 물리학적으로 볼 때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입체적 영상 혹은 홀로그램이며, 우주의 비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특히 인체는 눈에 보이는 육체와 그 육체를 에워싸고 있는 여러 층의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살펴 보았는데, 이러한 인체의 구조는 우리의 진짜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브레넌이 “마치 촛불의 불빛 같은 에너지 장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이야기한 인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초에 불을 붙인 상태를 관찰해 보면 초에는 심지가 있고, 그 둘레를 감싸고 있는 촛불이 있으며, 불꽃의 경계를 넘어서면 촛불이 비치는 공간이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촛불에서 나오는 빛의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촛불은 초를 중심으로 한 비교적 작은 면적만을 밝힐 수 있을 뿐 그 바깥의 어둠을 밝혀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빛의 입자, 즉 광자는 촛불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방사되고 있다. 광자가 바깥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빛의 밝기는 점차 감소하지만 아무리 촛불에서 멀리 떨어지더라도 광자가 소멸하여 사라지는 법은 없다. 따라서 촛불에서 나오는 빛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체를 촛불에 비유하면 눈에 보이는 신체는 촛불에 해당되고,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에너지층들은 촛불에서 나오는 빛이 방사되는 공간에 해당된다. 그런데 촛불에서 나오는 빛의 입자가 아무리 촛불에서 멀리 떨어져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듯이, 인체에서 나오는 빛인 에너지도 무한히 퍼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브레넌은 자신이 인체의 일곱 가지 에너지층을 확실히 볼 수 있고, 제8, 제9의 에너지층도 희미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에너지층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체란 육체로 인식되는 가장 낮은 진동수의 에너지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밀도가 낮고 진동수가 높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무한히 퍼져나가는 에너지 덩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체를 눈에 보이는 육체를 중심으로 시공간에 무한히 뻗어나가는 하나의 에너지체로 인식한다면 우리가 여태껏 불확실하게 인식해 온 많은 사실들이 명확해진다. ‘나’라는 존재는 밀도는 가장 높고 진동수는 가장 적은 육체를 중심으로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에너지체이고, 나의 상대방도 똑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에너지 덩어리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동식물들도 사방으로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생물까지도 미약한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우주에는 무한히 퍼져나가는 수없이 많은 에너지 덩어리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텅 빈 공간으로 인식하는 허공에는 그 모든 존재들의 에너지가 아주 미세하기는 해도 서로 섞이고 융합된 채 존재한다. 그런데 인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에너지층일수록 더욱 근원적이고 본원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할 때, 텅 빈 우주 공간에 있는 에너지야말로 가장 근원적이고 본원적인 에너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각 개체를 중심으로 에너지가 허공으로 전개된다는 관점에서 우주를 파악하는 대신 그 반대 시각에서 우주를 보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허공에는 우주의 모든 존재를 잉태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근원적인 에너지인 천지기운이 가득하다. 이 근원적인 에너지에서 바깥으로 뻗어져 나오면 나올수록 점점 특정한 정보를 가진 에너지가 강해지고 마침내 이 특정 에너지가 하나의 개별화된 존재로 나타나게 된다. 나와 너, 그와 그녀 그리고 각각의 동식물들 모두가 특정 에너지가 강해지면서 개별화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의 오감은 근원적기운에서 뻗어져나온 가장 개별화된 부분만을 인식할 수 있으며, 개별화된 부분이 바로 우리의 육신을 포함한 물질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진짜 나인 진아(眞我)는 허공의 근원적 기운이고, 우리가 이제까지 몸이라고 불러왔던 것은 진아와 연결되어 있는 물질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이 근원적 기운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과 모든 생명체의 진아이므로 결국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하나인 것이다.
인체의 에너지 장에 근거한 이러한 해석은 인도 우파니샤드에서 우주의 실재인 ‘브라만(Brahman)’과 브라만이 개별화되어 나타난 ‘아트만(Atman;자아)’ 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해석은 옛 성현들이 직관에 의해 나를 소아(小我)와 대아(大我)로 구분하거나 가아(假我)와 진아(眞我)로 구분하고, 대아 혹은 진아를 이 세상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 바로 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 나라고 하는 것은 기를 만들고 조절하는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은 나의 육신과 에너지체를 두루 관통하여 존재하고,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나의 마음은 허공의 본원적인 에너지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진정한 나의 마음은 우주의 텅 빈 허공에 존재하는 공심(空心)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또한 우주심(宇宙心)이고 우리의 본성(本性)이다.
근원적 기운과 공심에 대한 위 설명은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의 공간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우주의 진실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말해 주듯 보통 사람들이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절대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바로 우리 곁에, 아니 우리 몸속에도 있다. 그렇다면 ‘우주의 텅 빈 허공에 존재하는 기운’이라고 할 때 그 허공은 우리에게 하늘로 인식되는 공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별과 별 사이의 허공일 수도 있고 동시에 우리 눈앞의 공간이나 인체 속 공간일 수도 있다.
우주의 만물이 하나의 근원적 기운에서 나왔고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하나라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나의 또 다른 일면이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도 실상 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또한 너와 나는 모두 다 똑같이 귀중한 존재이며, 우주적 관점에서 더 귀한 존재와 덜 귀한 존재를 구분할 수 없다. 단지 누가 앞서가고 누가 뒤쫓아 오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육체 뒤에 숨겨진 정신이 감동을 준다
텔레비전을 통하여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경기를 지켜보면서 때로는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때로는 그 빠르기와 강인함에 감탄한다. 여자체조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보며 여성의 곡선미가 주는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장대높이뛰기를 하며 새처럼 하늘을 날아오르는 인간의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느낀다. 넓이뛰기 경기에서는 토끼가 뜀박질을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허들 경기에서는 평원에서 갖가지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달리는 준마들을 발견한다.
관객들은 선수가 최선을 다하는 장면을 보며 감동하고, 우승한 선수가 시상대에서 메달을 목에 걸고 감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가슴 뭉클함을 느낀다. 그 선수가 참고 이겨왔던 수많은 어려움과 노력, 인내를 생각하면 마치 자신이 보상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국가와 인종, 종교를 초월해 모두가 한마음이 된다. 이렇게 우리가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받는 것은 선수들의 아름답고 튼튼한 육체가 아니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강인한 정신 때문이다.
이에 비해 근육질을 과시하는 보디빌딩 대회나 여성미를 뽐내는 미녀 선발대회는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런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닦아온 기량이 아니라 육체 자체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한정된 것일 뿐 모든 인류가 언제나 한결같이 느낄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 미인으로 뽑힌 미녀가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도 관객은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공허함을 느낀다. 인간 정신의 승리,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육체로 많은 것을 표현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 자체만을 추구하는 그 어떤 것에서도 깊은 감동은 받을 수 없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오랫동안 쫓아다녔던 여자라고 해도 품에 안는 순간 그녀의 얼음장같이 싸늘한 눈빛을 발견한다면 마음은 얼어붙고 육체적 열정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반면에 겉모습은 빼어나지 못해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은 언젠가는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사귀는 남성에게도 진실한 감동을 주게 된다.
인간은 근원적 기운의 개별화된 존재이고, 육체는 우리가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감각기관들로 구성된 인체의 물질화된 부분이다. 우리는 모두 에너지이며,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영속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육체는 때가 되면 폐기 처분된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내 몸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은 아니다. 나는 육체와 에너지체를 관통해서 흐르는 에너지이고, 내 몸은 나의 가장 개별화된 부분으로 물질적인 것을 느끼고 만들어내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내 몸이 바로 나는 아니다’라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가 우리 몸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이유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몸이 있기에 체험을 할 수 있고, 체험을 할 수 있기에 영혼은 성장한다. 영혼이 머무를 수 있는 성전이 되어주고 체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게 해주는 우리의 몸은 소중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일부 수련자들은 육체로 인해 인간이 타락한다는 생각 때문에 육체를 부정하거나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하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육체를 학대한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다스려 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
닐 도널드 월쉬(Neale Donald Walsch)는 미국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토크쇼를 진행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여러 차례 이혼한 전력이 있고, 적은 수입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던 닐에게는 한 가지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짜증이 날 때면 누군가에게 부치지도 않을 편지를 쓰곤 했는데, 그 편지에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모두 털어놓았다.
1992년 어느 봄날 밤, 닐은 이번에는 아예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하느님, 즉 창조주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하느님에게 왜 내 인생에서 제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지, 왜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행복하지 못한지, 왜 항상 경제적으로 쪼들려야만 하는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내 인생은 이렇게 힘이 드는지 등에 대하여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가 글을 다 쓰고 펜을 놓으려 할 때 알지 못할 힘이 그의 손목을 잡아 다시 펜을 움직이게 하고 글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닐의 질문에 대한 창조주의 대답이었다.
이때부터 닐은 수년 동안 창조주와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고 이것이 《신과 나눈 이야기》(Conversations with God)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단기간에 미국에서만 수백만 권이 팔렸고, 전 세계 28개국 말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또한 수십 개국에서 300여 개의 스터디 그룹이 만들어져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신과 나눈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지만 이를 종합하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의견으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의견은 창조주가 손을 움직여 글을 써서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설령 그러한 영적 체험이 나타난다고 해도 어떻게 몇 년 동안이나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의견은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닐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으며, 창조주 혹은 높은 영적인 존재와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쓰여질 수 없는 글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책에 실려 있는 내용들이 한 개인이 머리를 쥐어짜서 만들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는 신과 인간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기독교의 이원론적 사고에 많은 자극과 각성을 제공한다. 인간은 무한한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인간이 곧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설득력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 오직 교회만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고, 기독교 신앙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복음서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닐이 말한 창조주와의 대화란 실은 높은 영적 존재와의 채널링이라고 생각된다. 20세기 후반부터 서양에서 크게 성행하고 있는 채널링(Channeling)이란 현상은 육체를 가지지 않은 에너지적 존재와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입에서 저절로 말이 나와 메시지가 전달되거나 손이 자동적으로 움직여져 글이 쓰여지는 등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은 닐이 자신의 본성(本性)과 대화를 나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문이다. 불성, 신성, 혹은 앞서 언급한 우주의 공심(空心)과 같은 개념인 본성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우주 본래의 순수 에너지로서 세상의 움직임 등에 대한 사유 혹은 정보가 전혀 담겨져 있지 않은 에너지이다. 따라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본성과 대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일부 수행자들이 참선이나 명상 중 본성을 느끼거나 본성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상위자아, 즉 자신의 육체가 아닌 높은 파동수의 에너지체에 근거한 자아를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한국에도 여러 명의 채널러가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 채널러와 전통적 영매 혹은 무당과의 차이는 메시지 혹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존재와의 관계에 있다. 채널러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와 대등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한다면 영매는 종속적, 예속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채널러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채널러의 역할을 그만 둘 수도 있지만, 무당의 경우는 연결된 영적 존재에 예속되고 그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특별한 계기로 높은 영적 존재와 만났다 하더라도 그러한 만남을 통하여 우리가 듣거나 보았다고 느끼는 것 모두가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신의 소리라고 판단되는 것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해도 그 소리는 결국 자신의 마음과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두뇌를 거쳐 나온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고정관념들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책이든 창조주와의 대화를 통해 쓰여진 책이라고 느끼든, 책의 글자 하나하나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경전의 글자 하나하나를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부 종교인들은 같은 책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발견하고 고민하게 되며, 성인의 근본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과 나눈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들이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저자 자신이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관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참자아 혹은 상위자아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내면이란 더욱 근원적인 곳을 이야기하며, 사람의 에너지체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육체 깊은 곳이 아닌 육체를 둘러싸고 있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더욱 깊은 내면의 세계란 더욱 근원적인 에너지를 의미하고, 따라서 깊은 내면 속으로 찾아들어가 참자아를 만나라는 것은 결국 보다 높은 파동수의 에너지와 연결하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또한 참자아를 찾기 위해 우리의 의식을 점점 확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의식을 확장하면 할수록 우리 마음은 좀더 옅고 높은 진동수를 가진 에너지층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의식을 자꾸만 확장해야 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 결국 우주의 근원적인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명상을 하면서 의식을 점점 확장시키면 나라는 존재가 나의 육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나의 육체보다 점점 커지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더욱 깊은 명상 상태로 빠져들어 가다보면 궁극적으로는 내가 바로 우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의식이 육체에 머물러 있다가 차츰차츰 더욱 근원적인 에너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느끼는 황홀한 체험이다.
이러한 ‘우아일체(宇我一體)’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내가 바로 우주의 근원적 기운이고 내 마음이 바로 우주심임을 깨닫게 되며, 우주 만물이 결국 하나라는 우주의 전일성을 체험할 수 있다.


우주의 감시망, 걱정할 필요는 없다
브레넌이 말한 인체의 일곱번째 에너지층에는 전생의 기록들이 영상의 띠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최면이나 명상을 통해 스스로 전생의 기록을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우리 의식이 육체에서 에너지층, 특히 일곱번째 에너지층으로 옮겨 감으로써 그곳에 있는 전생의 기록들을 열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부 초능력자들은 유물이나 유품을 만져봄으로써 그것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영상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어떤 시대에 존재했던 인물이든 관계없이 그의 가장 종합적인 정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수준까지도 측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의 말과 행동, 모든 생각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기에 의하여 기록되고 보관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언제든 읽혀질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주의 감시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 이에 대해 호킨스 박사는 《의식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주는 잊는다는 것을 모른다. ……우주의 모든 것은 특정 파장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 에너지 유형은 영원히 존재하며, 그 원리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 읽혀질 수 있다. 모든 언어와 행동, 생각은 영원한 기록으로 남게 되고 저절로 알려지게 된다. 거기에는 어떤 비밀도 없고 아무것도 숨겨질 수 없다. 우리 영혼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시간 안에 벌거벗은 채 서 있다.”
우리가 우주에 벌거벗고 서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현대인들은 사생활의 비밀을 중요시하고 비밀 보장을 강조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나지막한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가 널리 보급된 요즘은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을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한다. 또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거래를 할 때도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한다.
이렇게 숨기고 싶은 것들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조차 모두 우주에 기록된다는 사실은 상당한 불안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주는 결코 인간의 비리를 감시하고 추적해 징벌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우주에는 비리나 감시, 징벌 같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누군가 과거의 말이나 행동, 생각으로 인해 사후에 심판을 받거나 벌을 받을까봐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 주입된 고정관념 때문이다. 수백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히틀러나 스탈린이 지금쯤 지옥에서 호된 맛을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이다. 고정관념에 대해서는 제8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느낌으로 판단하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특히 그 느낌이 이성적 판단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느낌은 간단한 수학 문제 풀기처럼 두뇌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정치인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하거나 기업인이 중요한 사업적 결정을 해야 할 경우, 혹은 일반인들이 정리가 잘 되지 않는 복잡한 의사결정을 해야 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성으로 판단해 결정했을 때와 느낌에 의존해 결정했을 때 어느 쪽이 더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아마도 느낌에 따른 결정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고, 느낌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를 기(氣)적인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이성과 두뇌에 근거하여 의사결정을 할 때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인식된 정보에만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할지라도 극히 한정된 정보에 근거하여 결정하게 된다. 반면 우리의 느낌을 적극 활용한다면 보다 많은 정보를 이용하게 되어 보다 나은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느낌은 많은 경우 기적인 감각에서 오고, 기적 감각은 오감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위대한 정치인이나 기업인, 뛰어난 수사관 중에는 느낌이나 육감, 영감에 의존해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깊은 수련이나 명상 중에 받는 느낌은 상위자아로부터 받는 메시지인 경우가 많다.
느낌은 종종 마음의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왠지 모르게 답답하고 불편한 데도 왜 불편한지 정확히 알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의 두뇌가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인 것을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두뇌는 모르고 있지만 더욱 깊은 차원에서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지는 것이다. 수련을 통해 기감이 살아나고 맑아질수록 마음의 불편함을 더 자주,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는 우리들이 더 깊은 차원과 좀더 잘 소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느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적 감각을 증대시켜야 하는데 이는 명상이나 기 수련등을 통해 경혈 혹은 혈자리라고 불리는 부분을 활짝 열어줌으로써 가능하다. 육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체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하는 경혈들이 활짝 열리면 육체와 에너지층 사이의 기 순환이 왕성해지는 것은 물론 우리의 에너지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이 느낌이라는 형태로 두뇌에 전달된다. 따라서 기감이 발달한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빠르고 정확하다. 즉, 직관력이 개발되는 것이다.
느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 수련 등을 통해 경혈을 열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받는 느낌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더라도 그 느낌이 우리의 합리적 사고와 다를 때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실제 어떤 느낌을 받고 있을 때에도 ‘내가 과연 느낌을 받고 있을까?’ 하며 의심하는 경우도 많다.
느낌을 무시하거나 의심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 느낌에 집중하게 되면 느낌은 점점 강해지고, 강해진 느낌은 어느새 우리의 새로운 감각으로 자리잡게 된다.


기 수련은 기를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기 수련이란 한마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기 에너지로 가득한 세상임을 인지하고 기의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도모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기 수련은 우리 몸의 에너지 순환을 촉진시켜 신체적 건강을 증진시키고 기감을 발달시켜 우주의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우주의 정보와 접하게 되면 우리 삶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마음은 자연히 안정을 찾게 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는 우주 공간에 가득한 생명의 에너지이며 모든 생명체의 생명현상과 무생물의 움직임까지 주관하고 있다. 기 수련은 생명체와 우주의 기를 느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를 느끼는 수련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몸에서 방사되는 기 에너지를 느끼는 데서 시작한다. 기를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오감을 정지시키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기는 우리의 오감으로 인지될 수 없는 것이고, 또 오감을 통한 인식의 강도는 기감을 통해 인식되는 것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의식이 오감에 머무르고 있는 한 기적인 느낌은 감지되기 어렵다. 따라서 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오감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거나 완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오감을 멈춘다’는 의미에서 기를 느끼는 수련을 ‘지감(止感) 수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감 수련의 요령은 다음과 같다. 먼저 두 손을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보는 상태로 하여 약 1∼2cm 정도 띄운다. 모든 의식을 두 손바닥 사이에 집중하고 호흡과 일치시켜 두 손을 천천히 벌리고 모으기를 반복한다. 숨을 들이쉴 때 두 손을 벌리고, 숨을 내쉴 때 두 손을 모으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수련을 계속하다 보면 두 손바닥 사이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오기도 하고, 서로 당기거나 밀치는 자력감을 느낄 수도 있으며, 따뜻한 열감을 느낄 때도 있다. 수련을 계속할수록 그 느낌은 강해지고 두 손바닥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기적 감각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한다. 몸 안에서 경락이라는 기의 통로를 따라 돌고 있는 내기는 감정 같은 마음의 작용에 의해 오염되어 서서히 탁해진다. 따라서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기가 몸 바깥의 외기와 끊임없이 교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몸 안의 탁한 기운을 바깥으로 배출시키고 대신 외부의 맑은 기운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에너지 교환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때 우리의 신체에 기적인 조화가 유지되고,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에너지 교환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몸 안팎의 기가 들락거리는 문의 역할을 하는 경혈이 열려야 한다. 경혈은 어릴 적에는 열려 있으나 나이가 들수록 막히는 경향이 있고, 특히 부정적 사고를 많이 하는 경우 몸의 기운이 탁해져서 빨리 막혀버린다. 이렇게 막힌 경혈을 뚫어 기운이 몸 안팎으로 잘 교환될 수 있게 함으로써 기적인 감각은 회복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경혈들이 활짝 열려 있을수록 바깥의 기를 많이 받아들일 수 있어서 느낌은 강해지고 정확해진다.
몸의 어느 부분에 있는 경혈들이 열리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배 아래쪽 하단전 부근의 경혈들이 열리면 주로 신체적 건강이 증진된다. 가슴을 중심으로 한 중단전 부근 경혈들이 열리면 사랑이 커지고 의식이 성장하고, 머리를 중심으로 한 상단전 부근 경혈들이 열리면 영능력이 계발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전통적 선도수련에서는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의 순서대로 수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는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마음의 수련이 덜 된 상태에서 영능력이 개발될 때 발생할 수도 있는 부작용을 우려해서 나온 말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부 수련자들은 이를 확대 해석해 반드시 하단전이 완성된 다음 중단전 수련을 시작하고, 중단전이 완성된 다음 상단전 수련을 시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순차적 수련법을 따르게 되면 평생을 기 수련에 바친다 해도 상단전 수련으로 들어가기 어렵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단전을 완성시키고 그 다음 중단전 수련으로 들어가는 경우, 여생을 이곳에 머물게 되어 사실상 상단전을 수련할 기회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수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음, 즉 혼의 완성이고 이는 곧 중단전의 완성을 뜻하므로 중단전이 완성되면 상단전 수련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상·중·하단전을 동시에 개발시키는 수련법이 바람직해 보인다. 몇 가지만 조심한다면 상단전을 먼저 개발시킨 후 백회나 전정혈에서 들어오는 기운을 아래로 내려주어 하단전을 개발시키는 것도 효과적인 수련법이 될 수 있다. 상단전을 수련할 때는 의식이 머리 쪽에 있기 때문에 기운이 위로 쏠리기 쉬운데, 이럴 경우 적절한 도인체조나 절 수련으로 조절해 주어야 한다.
닫혀 있는 경혈들을 열어주는 것은 기 수련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개혈(開穴) 수련’이라고 한다. 경혈들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먼저 근육을 충분히 이완시킨 상태에서 기를 제어할 수 있는 우리 마음의 힘을 이용해 막힌 혈자리를을 뚫어주는데, 이때 기의 또 다른 형태인 소리를 동시에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우리의 의식을 뚫어주고자 하는 경혈에 의식을 집중하고 큰소리를 내거나 듣게 함으로써 비교적 쉽게 개혈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게 경혈이 열리기 시작하면 그 부위에 스멀스멀한 느낌이 나 옥죄는 듯한 느낌,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 오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느낌이 강해진다. 반드시 열어주어야 할 중요한 경혈로는 양손 한복판에 있는 장심혈을 비롯해 발바닥의 용천혈, 단전호흡을 할 때 기가 들어오는 배꼽 정반대 위치에 있는 명문혈, 에너지 교환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머리끝 정수리 부근의 백회혈, 이마 중간의 인당혈, 가슴 한가운데 있는 단중혈 등을 꼽을 수 있다.
중요한 혈자리들이 열리게 되면 단전호흡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단전호흡이란 코로 숨을 쉬는 동시에 경혈을 통해 바깥 기운이 들어와 하단전에 모이는 수련법을 이야기하는데, 국선도와 단학선원에서는 명문혈을 통해 기운이 들어오는 명문호흡을 이야기한다. 일부 기 수련자들은 단전호흡을 복식호흡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호흡에 맞추어 혈자리를 통해 몸 바깥의 기운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단전호흡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혈들이 열린 상태에서 숨을 들이쉬면 아랫배가 불룩 나오면서 몸의 혈자리로 바깥의 기운이 들어와 단전에 모이고, 숨을 내쉴 때는 아랫배가 들어가면서 경혈들을 통해 몸 안의 탁한 기운이 빠져나간다. 단전호흡을 계속하게 되면 몸 안에 기운이 충만하게 되어 몸 전체에 기운이 돌게 되고, 이에 따라 힘이 생기고 질병 치유와 예방 효과가 나타난다. 단전호흡이 우리 몸의 면역력과 자연 치유력을 크게 증가시킨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 결과들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기 수련을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으로는 명현현상(瞑眩現想)과 주화입마(走火入魔) 를 꼽을 수 있다. 명현현상은 주로 수련 초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수련을 통해 기가 왕성해진 상태에서 경락이 막혀 있으면 몸 안의 기운이 제대로 순환되지 못해 겪게 되는 몸살 같은 증세를 겪게된다. 이러한 명현현상은 보통 계속적인 수련을 통해 경락들이 열리면서 자연스레 사라지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에 반해, 주화입마란 기공을 단련해 가는 과정에서 기적인 부조화가 초래되어 환각이나 환청이 일어나고, 심할 경우 발작 증세가 일어나는 상태를 이야기한다. 주화입마는 주로 수련자가 호흡 수련을 할 때 숨을 오래 참으려고 억지로 노력함으로써 나타나는 부작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무술 차원이 아닌 건강 차원에서 기 수련을 할 때는 절대로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작용에 대한 걱정 없이 집에서 혼자 쉽게 할 수 있는 수련법으로는 절 수련을 들 수 있다. 절 수련은 절대적 존재에게 경배하거나 무엇인가를 염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정화시키고 마음을 밝히기 위한 수련법인데,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가 있다. 수련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몸을 낮추는 불교식 절보다는 두 팔을 쭉 뻗어 머리 위에서 합장한 채 몸을 숙이며 합장한 손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형태가 좋다.
이러한 절 수련을 통해 경혈이 열리고 기혈순환이 촉진되면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이 이루어지고 몸은 유연성이 증가한다. 특히 수련을 할 때는 의식을 몸에 집중함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 매일 일정한 횟수(예:103배, 108배 등)의 절 수련을 ‘밥 먹듯이’ 꾸준히 하면 몸에서 탁한 기운이 제거되고 몸의 건강은 물론 마음의 안정과 영적인 성장까지도 도모할 수 있다.
가끔씩 300배, 500배, 1,000배 혹은 3,000배의 절을 하는 것은 몸을 정화시키고 인내심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절 수련 직후에 우리 몸은 완전히 이완되고 경혈은 열린 상태가 되는데, 이때 눈을 감고 20∼30분 정도 명상을 하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내가 체험한 기의 세계
원리적으로 볼 때 기 수련은 다른 어떤 운동이나 수련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시일 안에 효과적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적인 건강을 회복시켜 준다. 기 수련은 무엇보다 몸 안의 기운이 잘 돌게 해줄 뿐만 아니라 몸의 경혈들을 활짝 열어 줌으로써 육체와 에너지체 간의 기적 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기 수련은 신체의 경혈들을 열어 줌으로써 우리가 우주의 더 많은 정보를 느낌의 형태로 받아들이게 해주고, 의식을 점차 확장시켜 줌으로써 참 나를 찾고 우주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기 수련이 다른 정신 수련법들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수련자들이 수련을 통해 다양한 기적 체험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더 쉽게, 더 깊게 수련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최초로 기적 체험을 한 것은 수련한 지 약 20일 정도 지나서였다. 지감 수련을 할 때 손바닥의 장심혈로 조금씩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느낌은 점점 강해져서 나중에는 끈적끈적한 물체가 양 손바닥에 붙어 있는 듯한 느낌으로 변했다.
그 다음 체험은 개혈 수련을 할 때 왔다. 양 손을 직각으로 꺽은채에서 양 팔을 앞으로 쭉 뻗은 기마자세로 서 있었는데, 갑자기 양 손의 장심혈로 말할 수 없이 강력한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강철로 된 굵은 말뚝이 손바닥에서 어깨 사이에 콱 박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약 20분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어야만 했다. 그 다음에는 배꼽 뒤의 명문혈이 열리면서 등이 뜨듯해지는 것을 경험했고, 특히 추운 겨울철에 자동차를 운전할 때 등허리가 뜨듯해지는 기분 좋은 경험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약 1년이 지날 무렵부터는 머리 부근에 있는 혈자리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체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는 이마 중간에 있는 인당혈에 압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어서 머리끝 백회혈과 그 앞쪽 전정혈이 차례로 죄어오는 듯이 아팠는데, 이러한 증상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이따금 하늘의 기운이 이 혈자리들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온 머리를 얼려버리고 가슴을 뜨듯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떨 때는 차가운 기름이 머리 끝에서부터 꿀렁거리며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몇 시간씩 혹은 며칠씩 계속되기도 했다.
머리 부근의 수많은 혈자리들이 제각기 들락날락하며 숨을 쉬기 시작해 얼굴 전체가 짓뭉개진 것 같은 느낌도 자주 받았는데, 한번은 얼굴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궁금해서 수련 후에 얼른 거울을 본 적도 있다.
한동안은 하늘의 기운이 굵고 투명한 관을 통해 머리 앞부분으로 끊임없이 들어오고, 내가 어디를 가든 그 관이 따라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상단전 혈자리들이 비교적 조용하게 숨을 쉬는 듯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이때를 즈음해 눈을 감으면 수많은 파장들이 이마와 머리에 와닿는 듯한 느낌이 강해졌고, 또 기운의 움직임이 빛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념(意念)으로 소주천(小周天 : 상체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임맥과 독맥이라고 불리는 경락을 통해 기를 돌리는 것)을 몇 번 돌리면 온 몸이 빛으로 변하는 체험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늘의 맑은 기운이 계속 백회나 전정혈을 통해 들어와서 언제나 머리가 시원하게 느껴졌고,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아도 보름달 못지않은 밝은 빛에 휩싸여 있는 것을 느꼈으며, 눈을 감고 있을 때가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더 밝게 느껴지는 경우도 흔했다.
이러한 기적 체험들이 일어나면서 정신적인 면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한동안은 사람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져 모든 사람들을 껴안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한밤중에 수련을 할 때 사람들이 남이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모두 사랑스러운 내 형제자매들로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는데, 아마도 그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면 오해받을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세상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답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쁨과 환희에 젖기도 했다. 세상이 너무나 평화롭고 조화롭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잔잔한 호수 같다는 말이 실감났고, 운전하다가 다른 차가 불쑥 끼어들어도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을 정도로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는 관심이 없어져서 두 종류나 받아보던 경제신문은 물론 일간지와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몇 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동시에 잠재능력도 조금씩 계발되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파장과 빛의 형태로 기의 움직임을 강하게 느꼈고, 잠들기 직전이나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는 선명한 영상들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상상하면 그것이 내면의 눈으로 선명하게 보였고, 눈을 감고 뇌파가 떨어진 상태에서 나 자신에 집중하면 나의 신체가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선명하지는 않지만 흑백 X-레이 사진처럼 보이는 것으로, 골격만 보겠다고 마음 먹으면 골격만 보였고 장기(臟器)만 보겠다고 마음 먹으면 장기만 보였다. 또 신체 각 부분의 탁하고 맑은 상태가 곧바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나의 잠재능력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였지만, 이후 더 이상의 개발은 중단되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알게 되고 나의 나아갈 길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잠재 능력의 개발이 나의 길을 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의 기운이 상단전의 혈자리들을 통해 들어와 나의 몸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작업, 즉 환골탈태(換骨奪胎)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다. 근래 들어서는 몸 전체가 하늘의 기운에 푹 빠져 있는 느낌 속에서 상단전의 혈자리들, 특히 인당혈이 받는 심한 압박감으로 인해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흔해졌다.
이러한 나의 수련 체험은 기수련자 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정신수련자들의 체험 중 자신의 마음이 연관된 영적인 현상은 너무나 다양해서 체험의 공통성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 기운의 유통으로 인한 체험은 공통성이 있다. 나의 체험들은 몸 안의 기운이 잘 돌고 상단전의 혈자리들이 많이 열린 상태가 되어 기의 순환이 빛의 움직임으로 감지되어 겪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다른 수련자들에게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일부 독자들은 앞서 소개한 나의 기 체험들이 낯설고 또 믿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체험들은 결코 과장되게 기술된 것이 아니며, 그 대부분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나에게 바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모든 것이 기로 운행되는 세계에서 그것은 결코 놀라운 일도, 신비로운 일도 아닌 것이다.


3부 삶의 근원속으로



제7장 우리는 영원한 존재


삶의 근원 속으로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보다 미래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의 전망이 좋으면 현재의 고통을 쉽게 견디지만 미래가 불안하면 현재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만족하고 기뻐하지 못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살고 있는데, 미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걱정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런 걱정은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태어나서 몇 해 지나지 않아 어린이들은 인간의 육체가 결국 죽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나름대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과연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사후세계의 문제는 인생의 근본 화두인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것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조차 포기한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다 갑작스런 부음을 전해 듣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던 친구가 화장터에서 한줌 재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다시금 그 근본적인 화두를 떠올리고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 봉사하는 삶을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릴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무언가 미흡하다고 느낄 것이다. 불교 신앙 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나는 윤회하는 존재이고, 이 생에서 베푸는 삶을 살면 다음 생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일부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중얼거리며 인생무상을 절감하지만, 그들도 죽고 나면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지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2부에서 우리는 인간이 우주의 근원적인 기운의 개별화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우리가 왜 인생이라는 힘든 항해를 해야 하는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20세기 물리학은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이 파동으로 가득한 텅 빈 공간으로서 하나의 완벽한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지만, 이렇게 속고 사는 우리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았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앎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는 지난 세기 동안 축적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사후세계를 여행해 보고 이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또한 지금까지 행해진 동서양의 예언들을 살펴보고, 그 예언들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음미해 보기로 한다.


윤회론
각 종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사후세계는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인도에서 유래한 윤회론(輪廻論)과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천국·지옥론으로 나눌 수 있다. 20세기 후반 들어 이들 두 견해 가운데 윤회사상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증거들이 계속 제시되어 왔고, 그 결과 서양에서도 윤회를 믿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사람들 가운데 과반수가 윤회나 환생을 믿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고, 일부 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70% 정도가 윤회를 믿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식 변화를 반영하듯 미국의 책방에는 윤회를 다룬 뉴 에이지 관련 책들이 책꽂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뉴 에이지 관련 음악과 영화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어모으고 있다.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윤회론은 우주의 창조와 파괴가 끝없이 계속된다는 우주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오랜 세월 동안 연속되는 생을 거치면서 서서히 진화하여 궁극에는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환생설(還生說)’은 윤회론과 비슷하지만 진화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이는 불멸하는 순수 영혼이 존재하고, 이 영혼이 육신을 바꾸어 태어나고 죽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으로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플라톤, 플로티누스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영국과 프랑스 북부 지역에 살았던 고대 켈트족의 사제 계급인 드루이드, 유대의 카발라 철학 등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요즘은 많은 경우 환생이 윤회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윤회와 같은 인간의 사후세계에 대한 정보는 단순히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차원을 넘어 우주와 인생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을 제시해 준다. 윤회설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의 존재가 현재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론으로서의 윤회론이나 천국론은 별다른 흥미를 유발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때 중요한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일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먼저 윤회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를 살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윤회의 증거들
지금까지 서양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하여 다양한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이 연구들은 전생과 윤회에 대해 수많은 증거를 쏟아놓았다.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에 대한 사례가 계속 축적되고 있고, ‘연령퇴행 최면요법(hypnotic age-regression)’으로 전생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환자의 정신적 질환을 치료하는 전생 치료사들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죽었다는 진단을 받은 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사후세계 및 환생에 대한 증언들도 많이 축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에드가 케이시 같은 초능력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전생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질병을 치유했으며, 수련자들은 깊은 명상중이나 특별한 계기를 통해 자신의 전생이라고 확실히 느껴지는 영상을 보기도 한다.
윤회와 관련되는 이러한 사례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것이 과학적 증거로 채택되려면 우선 그 기억들이 구체적이고 자세해야 한다. 또 전생에 전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것일수록 좋고,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이 모든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윤회의 증거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고, 또 부정하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인 전생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속속 출판되고 있다.

1)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은 전 세계에 많이 존재한다. 이들은 대부분 열 살 미만인 경우가 많은데, 그 나이로는 달리 알길이 없을 특정인의 일생 즉, 자신의 전생에 대해 자세히 기억하고 있으며, 실제 조사한 결과가 그 기억과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우에는 윤회의 과학적 증거로 인정받게 된다.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 박사는 버지니아대학교 정신과 교수로 30년 이상이나 전생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어린이들을 탐문하고 연구해 왔다. 그는 전 세계에서 수천 건의 사례들을 모아서 분석하고, 그 주요 결과들을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이라는 책으로 발간하였다.
뉴 에이지 운동의 리더 중 한 사람인 지나 서미나라(Gina Cerminara)는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에 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다음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인도 델리에 사는 샨티 데비라는 소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가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샨티 데비는 자신이 전생에 무트라 시에 살았다고 하면서 그때 일을 하나하나 더듬어 아주 자세히 기억해 냈다. 그는 꼭 한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부모를 졸랐고, 이에 부모가 샨티 데비를 무트라 시로 데리고 갔다.
샨티 데비는 저명한 변호사, 유력한 신문사 편집장 등 여러 사람이 증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전생의 남편과 오빠, 자신이 죽어가며 낳은 아들을 찾아냈고, 부부생활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까지도 모두 기억해 냈다.
일본의 여덟 살 난 가츠고로는 자신이 전생에 호도쿠보라는 마을에 살았다고 말했다. 당시 자신의 이름은 도조였고, 아버지는 규베이로 불리는 농부였으며, 어머니의 이름은 싯주였다고 했다. 자신은 아버지가 죽은 다음 해에 여섯 살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다며 자신의 장례식 광경을 자세히 묘사하고, 그 당시 부모와 살던 집의 모습을 그림 그리듯 자세히 설명했다.
가츠고로는 현생의 부모와 함께 호도쿠보를 방문했는데, 아무런 안내를 받지 않고도 전생에 살던 집을 찾아냈고, 전생의 부모를 찾아냈으며, 자신이 말한 다른 이야기들도 사실이었음을 입증해 냈다.
스티븐슨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어린이들이 자신의 다른 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은 두 살에서 네 살 사이로 보통 10여 건의 전생을 기억해 낸다고 한다. 그 내용 가운데는 흔히 자신의 이름, 식구들과 친구의 이름, 살았던 장소, 집 생김새, 직업, 죽게 된 경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도 자라면서 홍수처럼 밀려드는 새로운 정보와 사건에 파묻히게 되고, 전생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열 살 무렵이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다고 한다.
어린이들이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나 열린 감각을 통해 입수한 다양한 정보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어린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들의 말을 무시함으로써 그 사례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스티븐슨 박사의 또 다른 발견은 전생이 현생의 육체 조건이나 모습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비행기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미얀마 상공에서 격추되어 죽은 뒤 미얀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이 있는데, 이 경우를 보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유난히 밝은 머리색과 피부색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 또 특징적인 얼굴 생김새 등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었고, 신체의 부상이나 흉터 등이 다음 생에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2) 전생을 기억하게 해주는 최면요법
연령퇴행 최면요법이란 최면을 통해 환자를 조금씩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하고 현재의 정신질환과 관련이 있는 기억들을 살려냄으로써 환자를 치료하는 정신과 치료 기법이다. 최근 들어 이 기법을 이용해 특정인을 전생으로 유도함으로써 당시 일들을 기억해 내게 하고, 또 그것으로 현생의 질병이나 고민의 해답을 얻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물론 최면을 통한 전생 기억이 전생의 존재를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전생의 인물이 별로 유명하지 않아야 하는 등 앞서 언급한 조건들에 잘 들어맞아야 한다.
과학적 증거로 인정받는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1956년에 일어난 브라이디 머피 사건을 들 수 있다. 미국 콜로라도 주 프에블로 시에 사는 모리 번스타인(Morey Bernstein)은 루이 시몬스라는 여성에게 최면을 걸어 그녀가 전생에 브라이디 머피라는 사람이었음을 기억해 내게 했다. 또한 루이 시몬스는 19세기 아일랜드에서 자신이 살았던 장소, 특정한 사건, 화폐제도, 농작물, 문화, 책 등에 대한 수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사 결과 모두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미국 마이애미대학 정신과 교수이며 정신의학계의 귄위자인 브라이언 와이스(Brian Weiss) 박사는 최면에 의한 전생퇴행으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함으로써 ‘전생 박사’로 불리게 되었다. 본래 정통 유대인으로 성장한 와이스 박사는 전생과 윤회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유 없이 불안과 공포 증세에 시달리는 정신병 환자인 캐서린을 만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와이스 박사 스스로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와이스 박사는 연령퇴행 최면요법으로 캐서린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캐서린의 전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전생퇴행이 여러 차례 진료에서 반복됨에 따라 캐서린은 전생에 대한 많은 기억들을 찾아냈고, 또 그렇게 전생을 회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병이 치유되었다.
최면상태에서 캐서린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전이하는 과정인 ‘바르도’ 상태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이 상태에서 만난 ‘영적 존재(spirit entity)’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비밀을 전달해 주었다. 캐서린을 통한 이러한 충격적 체험은 와이스 박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는 이러한 감동을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Many Lives, Many Masters)라는 책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토론토대학 정신과 교수인 조엘 휘튼(Joel Whitton) 박사도 수십년 동안 윤회의 증거들을 모아왔다. 그의 전생에 대한 연구 결과 중에는 윤회의 원리와 관련된 중요한 발견이 있다. 최면을 통해 사람들을 삶과 삶 사이의 과도기로 퇴행시키면 피험자들은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찬 세계로 인도되는데, 피험자들은 이 세계가 그들이 다음 생에서 경험할 중요한 사건과 상황을 설계하는 데 필요하다고 진술했다. 현재의 생은 이 세상에 나오기 전 스스로가 설계한 것이라고 진술한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전생 치료사로 널리 알려진 임상심리학자 헬른 웸바크(Helen Wambach)와 모리스 네더톤(Morris Netherton), 에디스 피오레(Edith Fiore), 알렉산더 캐넌(Alexander Cannon) 등도 그들의 저서를 통하여 전생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경정신과 의사인 김영우가 최면을 통한 전생체험에 관한 책을 출판했으며, 설기문, 엄영문 등은 전생 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다. 요즘은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이루어지는 공개 전생체험도 시도되고 있는데, 프로그램 관련자들의 진지하지 못한 태도가 아쉬움을 남긴다.

3) 임사체험자들의 공통된 증언
‘임사체험(臨死體驗, Near-Death Experience)’이란 사망 진단을 받았다가 소생한 사람들의 체험을 말하는데 전 세계에 수많은 임사체험 사례들이 축적되어 있다.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로 의학박사이며 철학박사이기도 한 레이먼드 무디(Raymond Moody)는 이 분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오랜 세월 연구한 결과들을 보여주는 《삶 뒤의 삶》(Life After Life)이라는 책에는 임사체험자들의 체험담들이 실려 있는데,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 체험담들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먼저 자신이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인식한 후 잠시 동안 평화롭고 유쾌한 기분을 느끼며 공중을 떠다니다 터널을 통과하거나 강을 건너 어떤 고귀한 ‘빛의 존재’를 만난다. 다음으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생생하게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 이 세상에 돌아오기 싫다는 기분을 느끼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 대체로 공통되는 줄거리이다.
1990년대 말에 행해진 갤럽여론 조사에 따르면 임사체험은 미국인 약 1,300만명이 경험하였고, 죽음에 이른 환자들 약 3분의 1이 경험하고 있을 정도로 흔하다. 이 임사체험자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도저히 알 수 없는 병원 안팎의 일들을 자세히 진술하고 있으며, 또 이 진술들이 진실로 판명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문병 온 친지들이 병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든지, 의사나 간호사만이 알 수 있는 일을 알고 있는 것 등이다. 이러한 사실은 임사체험자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진술의 신뢰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제까지의 임사체험 연구 결과를 보면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들 대부분이 급격한 인격 변화와 더불어 삶의 전환을 경험한다고 한다. 임사체험자들은 이전보다 행복하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되며, 마음이 편안해진 것을 느끼게 된다.
더욱 놀라운 변화는 그들 모두 사랑이 크게 증대되어 가족들에게 냉담하던 가장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내성적이던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들은 또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는데 인간 영혼의 불멸을 확고히 믿게 되며, 윤회설이나 동양의 종교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게 된다. 또한 임사체험자 가운데 상당수는 영능력을 가지게 되는데 흔히 텔레파시나 치유능력이 생기고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도 많이 발현된다고 한다.
임사체험자들이 자신의 체험을 직접 저술한 책도 여러 권 출간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니언 브링클리(Dannion Brinkley)가 쓴 《죽음 저편에서 나는 보았다》(Saved by the Light)이다. 이 책은 브링클리 자신이 경험한 두 차례의 임사체험과 체험 이후의 삶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브링클리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빛의 존재’를 만났고, 그 존재의 안내를 받아 영계(靈界)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인류의 앞날을 예언해 주는 117가지 영상을 보았는데, 자신이 본 영상들이 대부분 현실로 나타났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임사체험 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또 누군가를 보거나 그의 소지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과거를 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4) 그밖의 증거들
에드가 케이시는 자기최면 상태에서 ‘신체영독(身體靈讀, physical reading)’ 혹은 ‘신체투시’라고 불리는 능력을 이용해 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전생영독을 통해 사람의 전생을 읽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 또한 윤회의 패턴을 찾아냈으며, 미래에 대해 수많은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다른 영능력자들의 경우와 달리 케이시가 영독한 것에 대한 기록은 매우 방대하고 후손들에 의해 잘 보관되고 있다. 이러한 케이시의 기록들은 20세기 후반 서양에서 전생의 존재와 윤회의 의미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앞서 소개한 바바라 브레넌을 비롯해 수많은 영능력자들도 전생영독을 하고 있고, 많은 기 수련자들도 자신의 전생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전생에 대한 직접 증거나 경험은 아니지만 신동들의 존재 또한 전생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해 준다.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하이네켄은 신동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1721년 독일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죽었다. 그는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말을 하고, 죽기 전까지 성경의 역사와 세계사, 지리학을 숙달했으며, 독일어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프랑스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이미 네 살 때 미뉴에트과 피아노 협주곡, 소나타 등을 작곡했다. 또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세 살 때 그리스어를 익혔으며 여섯 살 때는 크세노폰, 헤로도투스, 이솝, 루시앙의 책을 읽고 이해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신동의 존재는 전생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것으로, 환생을 믿었던 플라톤이 남긴 다음 말은 신동과 전생의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쉽게 얻어지는 지식은 영속적인 자아가 전생에서 이미 갖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쉽게 복구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윤회의 증거는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며, 이러한 증거들은 전생의 존재를 부정하는 다른 어떤 가설로도 설명되기 어렵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제시된 증거들에 근거해 볼 때 전생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전생 체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윤회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생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별다른 확신이 없이 그냥 막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기수련 전까지만 해도 저자 역시 전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알 수 없는 사후세계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직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다 몸과 마음의 근본적 변화를 겪으며 그동안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해 왔던 많은 것들에 대해 열린 자세,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전생의 존재도 점차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전생과 윤회라는 것이 확신을 넘어서 그것을 생생히 느끼기 시작한 것은 나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였다. 특히 어떤 여자분의 전생체험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전생의 존재 뿐 만 아니라 전생의 의미에 대해서 확실히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분의 경우, 처음에는 자신과 나의 전생을 읽고 그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시작하였지만 곧 자신의 전생 의식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최면상태로 유도되는 과정이 없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전생의 의식 속으로 들어갔는데, 5600년 전 고대 중국의 삶으로 들어가서는 그 때의 생생한 감정 속에서 연인과 주고 받았던 이야기를 그 당시의 언어로 반복하여 이야기하였다. 티벳의 림포체로 살았던 생으로 들어가서는 몽고족의 침입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괴로워하는 등 많은 것들을 티벳어로 이야기하고, 일본에서의 전생에서는 일본어로 이야기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 노래를 중얼대기도 하였고, 미국에서의 전생에서는 자동차 사고의 현장에서 외쳤던 소리 등을 영어로 반복하기도 하였다. 인간에게는 전생을 살면서 전개되었던 삶의 장면들 뿐만 아니라 그 때 그 때의 감정상태까지 고스란히 기억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게 해 주는 체험이었다.
이후 나는 몇몇 사람들에게 직접 최면을 걸어 전생으로 유도해 보기도 하였다. 최면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 피최면자는 뚜렷한 영상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느껴지는 바도 아주 희미하고, 또한 피최면자의 진술에는 자신의 의식이 개입될 가능성이 높아 그것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반면, 완전한 최면 상태에서 전생으로 들어가면, 피최면자는 자신이 오감으로 인지하며 살아가는 일상 생활과 마찬가지의 생생함을 경험하게 된다. 서양의 여러 전생치료사들이 보고한 바와 같이, 전생 퇴행의 과정에서 특정의 생(生)이 아닌 생과 생의 사이 즉 바르도(Bardo)라고 불리는 상태로 들어가기도 하였고,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가거나 우주에 있는 고향별에서의 생활을 기억해 내는 것도 여러 번 지켜보았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전생과 윤회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생이 현재의 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과거 전생에서 경험했던 것들은 모두 인체의 오라에 기억되어 있고, 그 때 살면서 경험하였던 감정들과 앎은 지금의 삶에서 내가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혹은 어떤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침을 알게 해 주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하여 이유없이 호감을 갖는다든지 혹은 적의를 가진다면 그것은 전생에서 경험했던 그 존재와의 기억이 느낌의 형태로 와 닿아서 그런 것이 보통인 것이다.


종교에서 바라보는 윤회설
윤회설은 힌두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리그베다》에 “인간의 육체는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만 그 영혼은 불멸한다”라는 관념으로 제일 먼저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이 힌두교의 철학체계가 완성되는 우파니샤드 시대의 철학자 야쥬냐발카가 주장한 선악의 업(業), 즉 카르마(Karma)의 관념과 결부되면서 현재의 선행이 내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인과응보적 윤회관으로 정착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윤회설을 이야기하면서 신들의 세계 천(天), 인류의 세계 인(人), 신들의 적인 마신(魔神)의 세계 아수라(阿修羅), 동물류의 세계 축생(畜生),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르는 아귀(餓鬼), 지옥(地獄) 등 여섯 세계를 돌고 도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말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와 불교 윤회설의 근본적 차이는 윤회하는 주체에 관한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윤회의 주체로 영혼의 존재, 다시 말해 자아(自我)를 인정하고 있다. 사물이나 사건들의 궁극적이고 근원적 존재인 브라만이 인간 영혼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트만이며, 윤회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무아설(無我說), 다시 말해 무아윤회(無我輪廻)를 주장한다.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지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영혼이나 자아 없이 인과적 계속성에 의해 윤회가 진행된다고 하는 카르마의 윤회를 이야기한다. 즉 한 물결이 다른 물결에 연결되는 것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인간 또한 선행(先行)했던 존재의 결과일 뿐 윤회의 주체는 없다는 것이다.
윤회 주체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차이는 얼핏 보기에 엄청나게 커 보인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사실을 두 측면에서 바라보고 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제6장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우리들 각자는 우주의 근본기운이 개별화된 존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윤회를 거듭하고 있고, 따라서 윤회하는 개별 영혼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동일한 우주기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라고 주장하는 윤회의 주체는 사라지고 다만 윤회 현상만이 남게 된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인간을 개별화된 존재로 인식하느냐, 인간 모두를 하나의 우주기운으로 인식하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윤회나 환생설이 처음부터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환생을 인정했고, 특히 그노시스주의자(Gnostics)들은 환생을 확신했다고 한다.
환생의 개념이 기독교 교리에서 축출된 것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서기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환생이 언급된 신약 부분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서기 553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를 소집해 환생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환생설을 악마의 재림이라 경고했는데 이때부터 기독교에서 환생 개념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카르마의 원리
많은 사람들은 윤회가 카르마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 관계, 즉 연기(緣起) 관계에 있고, 각 개인이 전생에서 행한 행동이나 말, 생각이 잠재적인 힘이 되어 현생(現生)을 결정하며, 현생의 행위가 다시 내생(來生)을 결정한다는 것이 카르마의 법칙이다. 우리의 영혼은 오랜 세월 동안 연속되는 생을 거치면서 서서히 진화를 계속해 카르마에서 벗어남으로써 궁극에는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지나 서미나라는 에드가 케이시가 행한 전생영독 사례 수천 건을 분석해 나름대로 윤회의 법칙을 정리했다. 그녀가 지은 《윤회의 진실》(Many Lives, Many Loves)에 따르면 카르마에는 연속성과 보복성,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카르마의 연속성이란 인간이 가진 어떤 특성들이 여러 생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오랫동안 연마된 재능이나 능력은 내생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종교와 인종, 정치, 성, 동물 등에 대한 태도와 관심도 내세에서 계속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반면 카르마의 보복성이란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해치는 행동을 하면 반드시 적절한 방법으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전생에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한 사람은 현생에 장님이 되어 태어나고, 전생에 과식하던 사람은 현생에서 소화기관 이상으로 고통받으며, 전생에 도움을 청하는 말에 귀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현생에서 말 그대로 귀머거리가 되어 태어난다는 것이다. 또 현생에서 심한 고독감이나 소외감에 시달리는 것은 전생에서 자살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밖에도 지나 서미나라는 모든 영혼이 의지의 자유를 가지며, 그 자유의지가 심하게 오용되고 있을 때만 카르마의 법칙에 의해 간섭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또 환생하는 영혼은 자석이 쇠에 이끌리는 것처럼 자신의 신체적 유전과 과업 수행에 필요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부모에게 이끌리게 되는데 신체적 유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정신적 유전이 그에 우선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 서미나라가 분석한 결과들, 특히 카르마에 연속성과 보복성이 있다는 해석은 오해의 소지가 있고 좀더 명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인간의 일부 특성들이 여러 생을 거치는 동안에도 계속 나타나는 것을 카르마의 연속성으로, 한 생에서의 환경이 다음 생에서 완전히 뒤집혀 나타나는 것을 카르마의 보복성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는 피상적 분석에 따른 잘못된 해석일 수 있다.
카르마의 연속성으로 거론되고 있는 인간의 일부 특성들, 예를 들어 인종과 종교에 관한 편견들이 여러 생에 걸쳐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그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인종으로 태어나고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남으로써 결국에는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생을 살면서 윤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카르마의 보복성에 대해서도 신중히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면에 의한 전생퇴행을 통해 수십 년 동안 윤회의 증거를 수집해 온 조엘 휘튼 교수나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를 연구해 온 이안 스티븐슨 교수, 임사체험을 연구해 온 사람들은 모두 카르마의 보복성을 인정하지않고 있다. 현재의 생은 우리가 전생을 마감하고 생과 생 사이의 바르도 상태에 있을 때 ‘빛의 존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계획한 것으로, 우리의 행위에 대해 우주적으로 단죄를 받는다는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휘튼 교수는 전생에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내생에서도 가까운 주위 사람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그들은 그 이전 생에서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들에게 보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태어나는 길을 택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외부의 심판은 없다. 잘잘못에 따라 우리를 삶에서 삶으로 배치시키는 어떤 존재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빚어내는 자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우파니샤드 시대 야쥬냐발카에 의해 시작되고, 여태껏 인도인과 불교도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믿음으로 전해 내려 온 윤회사상에 대한 인과응보적 해석은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주를 움직이는 근본 힘은 사랑이고 우주 변화의 대원칙은 진화이다. 전생에서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현생에서 이러이러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사랑과 진화라는 우주의 원리에 어긋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우주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창조주이며 우주의 근원적 기운인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징벌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사람은 한 생과 다음 생 사이의 바르도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의 인생을 미리 설계하지만 육신을 가지지 않은 영혼의 상태에서는 육신을 가진 상태에서 받게 될 고통에는 개의치 않는다. 오직 영혼의 성장을 꾀하려는 목적으로 영적인 스승 ‘빛의 존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인생을 설계한다. 전생에서 어떤 행위를 했는지 가장 효과적으로 깨닫고 배우기 위해서는 그 정반대 처지를 경험해야 하고, 바로 이 때문에 현생에서 전생과 반대되는 처지에 있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윤회현상이 인과응보적이고 보복성이 있는 카르마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가 계획하고 선택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은 왜 윤회하는가
인간이 윤회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 대한 심오하고도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윤회는 무엇보다도 육신은 죽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 두려움인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죽음이란 인체 에너지의 재구성을 의미하고, 영혼의 측면에서는 휴식이나 재충전을 의미한다.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생생한 체험이 필요하고 이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몸을 받아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육신이 병들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영혼은 그 육신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 몸에 깃들어 있던 영과 혼은 육신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몸을 에워싸고 있던 에너지 일부와 함께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죽음이라 불리는 과정이다. 이러한 죽음을 통해 영혼의 에너지는 다시 구성되고, 다음 인생이 시작될 때까지 휴식의 시간을 갖게 된다.
죽는다는 것이 헌 차를 버리고 새 차를 구입하는 것이나 해진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 혹은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날 준비를 하는 과정 같은 것으로 인식되면 이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또 우리들 모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변화’에 대한 우리의 근본 태도도 바뀌게 마련이다. 변화가 두려워 현재 상태에 머물려고 하는 보수성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것을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다.
윤회를 받아들일 때 죽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하나의 통과의례로 인식되고 따라서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으로 여겨지게 된다. 대다수 인도인들이 너무나도 차분히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윤회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윤회는 또한 우리가 진화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해탈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한평생 살다 없어지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정과 육체적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욕망을 좇아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음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생활이 일시적 체험을 위해서는 필요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윤회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잠시 동안 필요한 물질을 위해 영원히 함께 할 다른 존재를 해치며 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음을 의미하고,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임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윤회의 존재는 인생이 영혼의 성장을 위한 수련장임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수많은 편견과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분별하고 집착한다. 인간의 분별심은 모든 사물과 인간이 오직 하나의 기운으로부터 나왔다는 우주의 전일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고, 인간의 집착은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와 인생의 본질을 미처 깨닫지 못한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다른 생을 거듭하며 때로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때로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낮은 신분에서 높은 신분으로,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거듭 태어나면서 분별과 집착에서 해방된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성적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낮은 신분으로 살면서 신분제도의 모순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으며, 서로 적대적이었던 다른 민족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의 허구성을 알게 되고 민족간 반목과 불화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체험하게 된다. 또한 여러 종교의 신앙인으로 거듭 태어남으로써 다른 종교를 포용하는 마음을 배우게 된다.


나는 내가 선택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윤회하는 존재이며,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서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매우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무엇보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인생이라는 옷감은 주어진 환경이라는 씨줄과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날줄로 짜여져 있는데, 이 씨줄과 날줄 모두가 계획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건에 연루되고, 또 어떤 결과에 봉착했을 때 그 모두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며, 이 세상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인생의 고달픔을 잊을 수 있고 가슴 뛰는 삶, 메시지 중심의 삶을 살게 된다. 고난으로 점철된 삶일지라도 더욱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태어나기 전에 스스로 설계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 나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느껴진다. 고아로, 혼혈아로, 장애인으로 태어나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멸시, 가난 속에서 살아온 것이 실은 더 많은 배움을 위한 내 선택, 내 영혼의 선택이었음을 알게 되면 인생이 너무나 멋있게 느껴진다.
이제는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미리 걱정하지도 않고, 어려움이 닥쳐도 감내하게 되며, 예전에 느끼던 원망과 분노와 슬픔도 사라진다. 설령 불행한 사건이 생기더라도 그 사건이 내게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불행을 느끼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 불행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갑작스레 중병에 걸리면 사람들은 대부분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왜 되는 일이 없지?’, ‘하나님은 왜 나만 미워하시는 걸까?’ 하며 자기 운명을 원망하고 괴로워한다. 그럴 때 ‘왜 나는 인생을 설계할 때 이 병에 걸리도록 각본을 짰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사건이 인생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를 알아낼 수 있다. 그럼으로써 고통은 크게 완화되고 배움은 가속화될 수 있다.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해서 태어났다는 것은 현실세계에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일임을 일깨워준다. 일을 추구하는 한순간 한순간은 내게 귀중한 체험을 제공하지만 그 결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패를 통해 그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되고 또 성공을 통해 또 다른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더 이상 일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하고 나서 초조하게 그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 없어지고, 성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모한 행위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자신이 미리 설계한 인생이 현실세계에서 성공이 되든 실패가 되든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미래의 일들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지고, 마음은 항상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인생이란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면서 체험하는 장(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삶을 산다는 것 자체를 크나큰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행이 어느 경지에 이르러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정교하게 짜여진 대본대로 진행된 것임을 느낀다. 우리는 분명 자신의 의지 혹은 느낌으로 순간순간 선택하며 살아가지만, 그 결과는 본래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못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역학이나 천문을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예정"과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을 강조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100% 예정된 것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인생을 누구의 간섭이나 조언도 없이 마음대로 설계했다' 는 식의 해석은 경계되어야 한다.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을 피하기 위해, 혹은 보다 멋지게 보이는 인생을 살기 위해 본래 계획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얼마든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8장 깨달음을 향하여


사람은 저마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본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또한 각기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주어진 시대와 사회 환경은 같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인지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본 세상이 어른이 되어 인식하는 세상과 아주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나에게 기억되어 있는 고향집은 마을 입구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초가지붕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 다시 고향을 찾고 보면 고향집은 마을 어귀 바로 근방이고 초가지붕은 유난히도 낮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들이 저마다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신체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 각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데 있다. 수치심과 절망감에 빠져 살면서 세상을 염세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축복으로 생각되고 세상이 너무나 평화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세상의 어떤 것도 걱정할 일이 못되고,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진정한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호킨스 박사는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의식수준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20여 년 동안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는 의식수준을 “개개인이 세상을 판단하고 분석할 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인식 방식” 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그가 이야기하는 의식수준은 앞서 말한 단순한 ‘관점의 차이’라는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의식수준이라는 말에는 진화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점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는 무엇이 ‘더 좋은 것’이라든가 ‘진화된 것’이라든가 하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의식수준은 인간의 진화에 따라 의식수준이 점점 높아져 간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호킨스 박사가 이야기하는 의식수준의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가 든 예를 한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 허리가 굽고 옷차림이 아주 남루한 한 노인이 부자 동네 화려한 집 앞을 서성이고 있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은 ‘왜 젊을 때 좀더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까?’ 하고 노인을 무력하고 창피한 존재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저 노인이 언제 도둑으로 변할지 모르니 경계해야겠군’ 하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 빈부격차를 해소시키지 못해 저런 노인이 있게 한 사회제도가 문제야’ 하고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은 ‘노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이야’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동일한 사건을 보고도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천차만별인데, 이처럼 같은 사건을 주관적으로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의식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식수준은 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세상에 발생하는 사건들에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호킨스 박사는 인체의 근육 반응을 이용해 의식수준을 1에서 1,000까지의 수치로 측정했다. 다음 페이지에 보이는 표는 앞에서 살펴 본 ‘남루한 노인’의 예와 결부시켜 인간의 의식수준을 정리해 본 것이다.
호킨스박사는 의식의 지도, 즉 각 의식수준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제시하고있다. 200이라는 수치는 내재된 ‘진실한 힘(power)’과 눈에 보이는 ‘억지스런 힘(force)’의 분기점을 표시하는데, 대체로 의식수준 200 미만인 사람들은 살아남기에 급급한 파괴적인 삶을 사는 반면 의식수준 200 이상인 사람들은 대체로 건설적인 삶을 산다고 한다. 의식수준 350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에너지가 강해지는 수준을 말하며, 500은 사랑의 에너지, 540은 환희의 에너지, 600은 평화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수준을 의미한다.
전 인류의 의식수준은 몇 세기 동안이나 190 수준에서 머물렀으나 20세기 말에 갑자기 상승해 2000년 현재 207이라고 한다. 의식수준 200 이상인 사람들이 전 인류의 15% 정도이며, 깨달음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되는 의식수준 500에는 전 인류의 극히 일부만이 도달해 있다고 한다.
호킨스 박사가 제시한 의식의 지도는 그가 수십 년 간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측정한 결과를 토대로 만든 것이지만, 이를 해석하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즉, 그가 제시한 의식수치별 특징은 그 수치에 머무는 사람들의 “경향”을 나타낸 것이고, 따라서 그 특징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의식수준이 500으로 올라가면 갑자기 사랑이 커질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가 제시한 것은 의식수준 500내외에 이른 사람들에서 사랑이 아주 커진 사람들이 상당수 발견되었다는 것이고, 500미만 의식수준에서 혹은 500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사랑이 충만하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의식수준에 따라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나만을 위한 삶을 사는가, 남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가, 혹은 남을 위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물질적·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은 가장 낮은 수준의 삶이라 할 수 있고, 이웃과 남을 배려하고 정신적 건강을 중요시하는 삶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삶이라 할 수 있으며,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은 최고 수준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 영혼과 내세에 대한 긍정적 태도, 자비와 사랑의 실천, 겸손하고 헌신적인 태도 등은 높은 의식수준의 특징인 반면, 자기 위주의 태도, 이기적이고 뻔뻔스러운 행동, 현세적이고 현실적이거나 물질주의적 사고, 거만함, 위선, 과시욕, 파괴성, 폭력성 등은 낮은 의식수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배움이 많은 영혼일수록 의식수준이 높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식수준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체계라고 할 수 있지만, 교육 정도나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 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의식수준은 어린이의 경우에도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또 대부분의 경우 일생 동안 아주 조금만 상승할 뿐이라는 호킨스 박사의 연구 결과를 고려해 볼 때, 의식수준은 연속되는 삶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영적 수준 혹은 자아 완성도로 해석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근기(根氣)’도 바로 의식수준을 말하는 것인 듯싶다.
이처럼 의식수준의 존재는 윤회론적 세계관과 잘 부합되고, 윤회를 통해 얼마나 많은 체험을 했느냐 하는 데 따라 의식수준이 달라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이 각각 다른 의식수준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인체의 에너지 장 측면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브레넌이 인식하는 일곱 가지 에너지층 중 마지막 일곱번째 층은 신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층인데, 앞서 말했듯이 이곳에는 전생의 기록들이 영상의 띠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진정한 앎이란 삶에서의 체험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앎의 크기나 이에 따라 결정되는 의식수준은 우리가 윤회를 통해 얼마만큼 많은 것을 배웠느냐 하는 데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더욱 다양하고 강렬한 체험을 한 영혼일수록 일곱번째 에너지층에 있는 에너지가 더 순수하고 높을 것이다.
윤회를 통해 많은 체험을 한 사람의 경우, 보다 순수한 에너지로 구성된 일곱번째 에너지층은 감정과 육체를 조절하는 안쪽의 에너지층과 육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이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반면 가장 바깥쪽 에너지층이 덜 순수한 사람은 감정과 육체를 관할하는 하위 에너지층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타고난 의식수준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높은 의식수준을 타고난 사람도 비교적 낮은 에너지 수준에 머물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타고난 수준을 회복하면서 그때부터 그 이상의 의식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제7장에서 이야기한 임사체험자들 대부분은 임사체험을 통해 급격히 영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본래 높은 수준의 의식을 타고난 사람들이 그보다 낮은 에너지 수준에서 머물다가 인생의 시나리오에 포함된 임사체험이라는 극적 계기를 통해 타고난 높은 의식수준을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초능력이나 영능력 자체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의식수준과 동일하게 보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깨달은 사람들이나 그 수준에 근접한 사람들에게는 흔히 초능력이 나타나지만 반대로 영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의식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가 귀신이라고 부르는 저급한 에너지와 소통할 수 있는 영매들의 의식수준은 천차만별이어서 영매들 모두가 의식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의식수준은 낮더라도 거듭되는 생을 통해 영적인 능력을 계발시키고 발휘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은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여러 명이 둘러앉아 텔레비전 뉴스에서 나오는 같은 사건을 보고 있을 때도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각자의 의식수준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 이것은 사실상 사람들간의 완전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비슷한 의식수준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비슷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되고 쉽게 친해지게 되는데, 이를 우리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불러왔다. 반면에 의식수준이 서로 다를 경우, 말하는 사람의 의사나 감정이 듣는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없어서 서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의식수준이 낮을 경우에 더욱 심각해진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높은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의식의 경지에 있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자신보다 낮은 의식수준의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낮은 단계의 의식을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은 팽개치고 남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지만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의식수준의 차이에 따른 의사소통 문제는 주로 의식수준이 높은 소수의 사람들이 의식수준이 낮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성자들은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따돌림을 받는가 하면 처형을 당하기도 했는데, 지금이라고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의식수준이 높다고 해서 모두 다 오해받으며 지내는 것 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보다 의식수준이 훨씬 높은 사람의 언행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신보다 의식수준이 조금 더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그 수준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선망하고 존경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높은 의식수준을 가진 사람이 유사종교를 만들어 교세를 급팽창시키거나 큰 수련단체를 운영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영혼의 성장을 방해하는 고정관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수없이 많은 ‘하라’ 혹은 ‘하지말라’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이러한 훈계는 자연스레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대부분의 고정관념은 어린이들을 사회에 잘 적응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부모나 선생님, 성직자, 그밖의 수많은 어른들로부터 주입되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도덕적, 윤리적, 혹은 종교적 관점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해 반복해서 배운다. 이렇게 형성된 고정관념은 그때그때 사회를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는 유익하고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현실적 이익과 부합되기는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볼 때 여러 기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고정관념은 우주적 가치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과 윤리, 제도, 심지어는 종교의 교리 해석까지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회교 문화권에서 당연시되는 일부다처제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죄악으로 여겨지고, 어떤 문화권에서는 자신의 아내가 밤에 손님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이 최고의 손님 접대이지만 다른 문화권에서는 크나큰 지탄을 받을 행위인 것이다. 재물을 멀리 할수록 훌륭한 인물로 평가한 시대도 있었지만 현대는 재물을 많이 모을수록 더 능력있는 사람으로 평가한다. 이렇게 시대와 장소,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관념이라면 절대적 가치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고정관념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불필요한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선생과 학생의 관계, 직장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등에 대해 많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자식된 도리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당신이 내게 이럴 수 있어?’ 하고 반발한다. 어쩌면 인간이 받는 비극과 고통의 대부분이 자신의 고정관념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문화적 고정관념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심리적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종교적 고정관념이다. ‘이렇게 하라’ 혹은 ‘저렇게 하지 마라’ 하는 계명 혹은 계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함으로써 오는 심리적 부담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저자는 미국 유학시절 한 한인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몇 년 동안 교회에 다니다 그만 둔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오랫동안 교회 담임 목사의 설교 중 “하나님을 멀리하면 지옥에 갈 것입니다”라는 말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었다.
세계적인 논란거리 되고 있는 임신중절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임신중절을 살인 행위로 간주하고 있으며, 임신부의 건강이 염려되는 상황에서도 종교적인 이유에서 임신중절을 막는 경우가 많다. 임신중절 금지는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수많은 여성들을 괴롭히는 잘못된 종교적 고정관념이다.
태아는 수태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9개월 동안 지구에서 수억 년에 걸쳐 진행되어 왔던 생물의 진화 단계를 밟는다고 한다. 즉, 태아는 단세포 생물, 강장동물, 어류, 양서류, 그리고 포유류 단계를 거쳐 7∼8개월 후에야 드디어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인체 에너지는 임신 초기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해 7∼8개월이 되면 불완전하게나마 에너지층이 형성되지만 완전한 에너지층이 형성되려면 태어난 후 상당 기간이 지나야 한다. 또한 최면을 통한 연구에 따르면 태아는 태어날 무렵이 되어서야 사람의 기본적인 인식능력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사람은 수태하는 시점부터 시작해 출생 후 2∼3년이 될 때까지 점차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갖추어 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태아의 모습과 각 신체 부위의 기능, 에너지층, 기본적 인식능력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임신 7∼8개월이 되는 시점부터 태아를 하나의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들이 그러하듯 태아의 생명은 매우 소중하고 가급적이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임신 초기의 인공유산을 살인 행위로 간주하고 당사자를 죄책감 속에 몰아넣는 것은 잘못된 종교적 고정관념이다. 전생박사 브라이언 와이스는 최근 자신의 책 《빛의 존재로부터의 메시지》(Messages From the Masters)에서 인간의 형체를 완전히 갖춘 태아를 유산하더라도 영적인 측면에서 실질적인 해로움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문제점들보다 더 근본적인 고정관념의 폐해는 그것이 우리의 의식 성장을 방해한다는 데 있다. 과거의 경험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이 새롭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적용될 때 우리는 과거의 인식 패턴을 반복하게 되고 이는 끊임없이 과거의 체험만을 반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의 고정관념은 과거에 일어난 유사한 사건들에 적용되었던 대처 방안을 찾아내어 이번 사건에도 적용시킴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구실을 한다. 우리의 의식과 영혼은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정관념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관념들은 대부분 우리의 참 자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서 생긴 분별심에 기인한다. 내가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며, 사실은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분별심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이제 더 이상 내가 옳고 남이 틀렸다든지, 내가 남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또한 다른 민족을 비하하거나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일도 하지 않게 된다.
이 우주에서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주 잠시 동안 지나가는 멋진 여자를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우리가 사는 기의 세상에서는 모두 기록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나쁜 짓’으로 간주하고 있는 수많은 생각과 행위들은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극히 자연스러운 것을 우리에게 주입된 고정관념이 나쁜 것으로 판단하도록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수많은 잘못된 고정관념은 우리를 제약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며 우리를 죄책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거기서 벗어날 때 우리는 고통과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순간순간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고정관념이 우주적인 관점이나 영적인 관점에서 잘못된 것일까? 우주적 관점에 부합되는 관념이나 기준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봄으로써 찾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근원적 기운이 개별화된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가진 똑같이 귀중한 존재이다. 따라서 어떤 개별화된 존재가 다른 개별화된 존재의 자유의지를 방해하거나 침해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고 그밖의 일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태껏 정치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종교적 혹은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행해 온 갖가지 억압과 강요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행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잘못일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무수히 행해졌고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횡포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영혼의 성장은 일상의 삶속에서 이루어진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의식수준을 높이고 영혼을 성장시키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영혼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도 억지로 남에게 양보하고 혼자 속상해하는 것이 영혼의 성장을 위한 길일까? 깨달음을 위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친 채 입산하여 금욕생활을 한다고 집착에서 벗어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분별심을 버린다며 모든 것에 대한 사리 판단을 중단해서 현실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과연 진정한 수행의 길일까?
우리의 의식,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련이나 수행이 중요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대다수의 수행자들은 일상을 떠난 수행이란 항상 좋은 것이고, 일상적인 삶은 수행과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가 생생한 체험을 통해 진정한 앎을 축적하는 것에 있음을 이해한다면 일상적 삶을 통한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수련이나 수행은 우리 몸을 정화시키고 경혈을 열어 우주의 기운과 통할 수 있도록 도와 주며, 물질세계가 아닌 더욱 근원적인 세계가 존재함을 일깨워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늘, 우주, 절대자와의 관계 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게 한다. 반면, 일상적인 삶에서는 주로 다양한 인간 관계들에 대하여 배우고, 우리가 머리 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관념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체험들이 제공된다.
영적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앎이 다른 앎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수행자의 삶이 비수행자의 일상적인 삶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각 영혼의 진화정도 및 그 때까지 축적된 앎에 비추어 보아 보다 시급한 체험과 덜 시급한 체험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영혼의 성장이나 깨달음을 위해 수련에만 매달린다든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입산하여 혼자 지내는 것은 대부분의 수행자들에게 최선의 방법이라 말하기 어렵다. 물론 생활 공부를 통한 앎이 충분히 축적된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금욕과 수행에 전념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6년 동안 수행한 끝에 성불(成佛)하였다 한다. 수없이 많은 윤회를 통해 이미 전생에 성불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석가모니에게는 출가 후 6년 동안의 수행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지에 오르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인간관계를 체험할 수 있는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어려움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토굴을 파고 들어가 혼자서 생활한다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는 것과도 같다.
영혼의 성장에는 공적(公的) 공부 또한 필요하다. 공적 공부란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남을 위해 일을 함으로써 지고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이를 통해 우주의 본성이 내게 있음을 확인하고 스스로 그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진정한 공적 공부는 수행 공부, 생활 공부와 더불어 우리 영혼을 성장시키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남에게 베풀 때 조금이라도 거만한 마음이 들거나 과시하려는 욕심이 마음속에 숨어 있다면 공적 공부의 효과는 사라져버린다.
우리의 진정한 앎은 일단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체험함으로써 증대된다. 그런데 우리는 전생에서 이미 배우고 깨우친 것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특히 강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경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때 중요한 것은 먼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는 자세이다. 제3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들 마음에는 여과작용을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을 닫고 있으면 새로운 앎은 증가될 수 없고 따라서 영혼의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지닌 수없이 많은 관념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하나하나 깨쳐 나갈때 우리의 마음은 점점 열리고 우리의 진정한 체험은 증대되어 간다.


에너지가 맑아지면 깨달음이 온다
정신세계에 관심을 갖고 마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깨달음을 추구하게 된다. 지금까지 깨달음은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見性), 부처가 되는 것(成佛), 해탈하는 것 혹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등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깨달음은 존재 혹은 인식의 근본적 변화를 수반하기에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기와 의식수준의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은 근원적기운의 개별화된 존재로서 자신만을 고집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가에 따라 개개인의 ‘기의 수준’이 결정된다. 다시 말해 기의 맑고 탁함은 그에 포함된 정보 수준에 달려 있는데, 이기심의 정도가 심할수록 에너지가 탁해지는 반면 이기심이 없어지고 만물에 대한 포용력이 커질수록 에너지가 맑아진다. 세상 만물이 모두 같은 근원에서 뻗어져 나온 것이라는 정보가 입력됨으로써 우리의 에너지는 만물을 포용하는 더욱 맑은 에너지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깨달음은 의식수준과 관련해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생을 살면서 체험을 통해 진정한 앎을 축적하고 조금씩 의식수준을 상승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깨달음이란 이렇게 의식 진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앎이 충분히 축적되어 특정의 수준에 이를 때 겪게 되는 심신의 큰 변화" 혹은 "그러한 변화를 수반하는 특별한 체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2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신을 포함하여 그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다양한 파동의 에너지로서 구성되어 있다. 계속되는 윤회를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체험,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앎을 축적한다. 다음 생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때는 자신의 의식성장을 위하여 혹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에너지가 보충될 수 있는 체험을 계획한다.
여러 전생들을 통하여 다양한 에너지가 인체 오라에 축적되고 진정한 앎이 크게 증가되어 의식이 특별한 수준 다시 말해 우주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심신의 특별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축적된 오라 에너지가 특정의 조화점에 이르게 되면 심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앎의 체계적 정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깨달음이라 일컬어져 왔던 경지인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을 의식수준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의식수준이 낮고 앎의 축적이 부족한 어린 영혼이 하루 아침에 득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이따금씩 어떤 일을 계기로 갑자기 깨달음을 얻게 되는 사람을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깨달음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 즉 돈오(頓悟)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의 결과이다. 이번 생의 관점에서만 볼 때 그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것으로 보이겠지만, 오랜 윤회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별안간 일어나는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한 전생의 삶을 통해서 이미 충분한 앎이 축적되었기에 이번 생에서의 깨달음이 가능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서두른다고 해서 단시간에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을 빨리 얻으려고 조급해 할 이유도 없다. 모든 영혼은 결국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거쳐 진화하며,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우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게 된다. 자신보다 먼저 가는 자는 자신이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이미 배웠기 때문이고, 뒤에 오는 자들은 자신보다 배움이 늦었기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결코 앞서가는 자를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뒤쳐져 오는 영혼을 얕볼 이유도 없다. 각자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입니다. 그 길을 가다 보면 앎은 계속적으로 축적되고, 그러다가 문득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수련자들은 깨달음을 위해서는 집착과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렇게 집착과 분별심을 버리겠다는 마음이 또 다른 집착, 즉 그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집착을 낳게 되어 수련자의 의도는 성취되지 못한다.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면 집착과 분별심은 저절로 없어진다. 하지만 이는 깨달은 결과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 깨닫기 위해서 집착과 분별심을 버리도록 억지로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집착하고 분별해야 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면 우리의 에너지는 맑아지고 집착과 분별심은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다시말해, 진정한 앎이 우리를 집착과 분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더욱 효과적인 수련을 위해서는 수련자가 깨닫겠다는 마음도, 집착과 분별심을 버리겠다는 마음도 버려야 한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 집착과 분별심을 버리겠다는 집착이 수련자를 깨달음의 길에서 더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자신이 모르는 새에 의식이 확장되고 앎이 증가되어 이루어지는 것이지, 깨달아 보겠다고 마음 먹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순간에 머무르기
내가 내 인생을 설계하여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 스스로 설계한 삶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생의 지상 목적은 체험을 하는 것이고, 그 체험은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마음이 현재의 순간순간에 머무르고 이를 통해 충분한 체험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닥친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미래를 상상함으로써 고뇌하고 고통받는다. 사람들은 앞으로 해결해야 될 의식주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곧 만나게 될 새로운 사람들과 어떤 인간관계를 맺게 될지 염려하며, 조만간 예상되는 사업의 어려움과 경제불황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고 있다.
물론 미래를 미리 계획하는 것은 다가올 시간을 좀더 충실히 보낼 수 있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대개는 미래에 대한 부질없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현재의 순간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러다가 막상 걱정하던 미래가 도래하면 그럭저럭 견뎌내는 것이 보통이다.
요즘 번지점프가 유행하고 있다. 담력을 길러줄 뿐만 아니라 짜릿한 쾌감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 현대인의 입맛에 잘 맞는 모양이다.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뛰어내리기 전에 큰 두려움에 휩싸인다. 특히 높은 점프대에 올라가 곧 뛰어내리게 될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점프대에 올라올 때까지 가졌던 자신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 몸은 공포감으로 후들후들 떨린다. 하지만 막상 뛰어내리는 순간에는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짜릿한 쾌감을 맛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번지 점프를 하기 직전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는 순전히 점프 후에 겪게 될 것에대한 근거없는 두려움에 의한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의 슬픔과 분노는 주로 이미 일어난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쳐다보면서 살아계실 때 좀더 효도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눈물짓는다. 또 얼마 전 누군가가 내게 무례한 행동을 했던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치밀어오르는 불쾌한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다음에 만나면 꼭 그 수모를 되돌려주리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특히 노인들은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경향이 있다.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흐뭇해 하기도 하고,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나 잘못들을 떠올리며 혼자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희로애락의 감정, 특히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주로 미래에 대해 걱정할 때나 과거를 회상할 때이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나 미래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에 머무르게 되면 이러한 부정적 에너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몇 년전 저자는 미국 방문길에 디트로이트 공항에 몇 시간 동안 머물러야 했던 적이 있다. 서울에서 도쿄를 경유해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했고, 세관 검사를 끝내고 오후 5시경 가족이 있는 인디애나 주로 가는 연결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항공사는 별다른 이유 없이 갑자기 그 항공편을 취소시키고 밤 11시 비행기를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생긴 6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던 나는 ‘우연히’ 공항에 있는 책방에 들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유난히도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나는 이마 중앙에 있는 혈자리인 인당혈이 열려 있어서 기운이 이마 부근에서 가장 예민하게 느껴지는데, 그 책에서 나오는 기운은 다른 책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것은 서양에서 새로운 영적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는 독일 태생의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가 지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라는 책이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사춘기 때부터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느껴온 심한 우울증 환자였는데,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깬 그에게 전보다 더 심한 우울증과 함께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가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과 같이 살 수 없어(I can not live with myself any longer)” 하고 중얼거리던 에크하르트는 문득 “아니?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둘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고,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진짜고 다른 하나는 가짜겠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그는 의식이 중지된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자신이 볼텍스 에너지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고, 강한 진동이 시작되었으며,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체험했다.
그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 상태로 얼마쯤 시간이 지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창 밖에 새 한 마리가 지저귀고 있었는데, 그 새의 울음소리는 전에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였다. 아침 태양은 창문 커튼 사이로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그 햇살이 바로 사랑 그 자체로 느껴졌으며, 그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음을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에크하르트의 삶에는 근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 영국과 캐나다,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현재에 머무는 것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현재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며, 과거나 미래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창조물로서 기억이나 기대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고 따라서 의미있고 보람된 삶은 지금 현재에 머무르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 머무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어도 우리 마음은 여전히 과거나 미래에 머물고 있고, 이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 현재에 머물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앎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인생을 스스로 설계해서 태어났고, 인생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때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인생을 계획해서 태어났다. 따라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 때문에 부끄러워하거나 기분 나빠할 필요도 없고 나 자신이 설계한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우리는 오직 이 순간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명상이란 생각을 멈추거나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명상 상태에서 우리의 생각이 멈추게 되면 자신을 우주로부터 분리시키던 마음이 만든 장막이 걷히게 되어 우주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규칙적으로 명상을 하게 되면 신체적·정신적·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명상이란 본래 인도를 중심으로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수련법 가운데 하나지만 지금은 서양에서 훨씬 더 큰인기를 모으고 있다. 서양에서 명상의 효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매일매일 명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으며, 명상자들을 위한 다양한 안내서들이 많이 출간되어 있다.
이 명상의 관건은 바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만 가지 상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상념 없이 단 1분, 아니 30초를 보내기도 쉽지 않다.
이렇게 눈만 감으면 몰려오는 상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명상시 특정한 것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 좋다. 선도수련에서는 몸의 느낌에 집중하게 하고, 간화선(看話禪)에서는 특정한 화두(話頭)에 의식을 모으게 하며, 위빠사나 수련에서는 떠오르는 상념들 혹은 느낌 그 자체를 바라보게 한다. 이 모두가 끊임없이 떠오르는 상념들을 중지시키기위한 것이다.
인생이란 스스로 계획한 삶을 살면서 체험하기 위한 것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면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부터 해방된다. 이때 마음은 자연히 현재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명상을 할 때도 더 이상 과거나 미래와 관련된 오만 가지 상념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되며, 생각을 비우고 효과적인 명상을 할 수 있다.
아니, 우리가 현재의 순간순간에 머물게 되면 우리의 삶 자체가 명상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육체를 중심으로 한 소아(小我)에서 벗어나 우주의 본성과 연결되게 된다. 그 결과 에너지는 정화되고 자연스레 건강이 회복된다.
자신의 일을 즐기며 그것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현재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하며 바쁘게 지내는 사람은 며칠씩 밤을 꼬박 샐 때도 안색이 나빠지지 않고, 건강에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현재에 머무는 상태에서는 에너지가 활발하게 교환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쁘게 일을 할 때 오히려 더 힘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면에 평상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그 고민이 과거와 관련된 것이든 닥쳐올 미래와 관련 것이든 안색이 좋지 않고,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자주 느끼게 된다. 이는 현재에 머물지 못한 결과이며 에너지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해서 생기는 결과이다.


제9장 예언


예언은 가능하다
사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느끼는 육감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주로 꿈을 통해 이러한 예지력을 발휘하는데 특히 재앙이 닥쳤을 때 현몽(現夢)에 의해 그 재앙을 피한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예지력을 과학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로는 네덜란드 태생 심령가인 크로이제트(Croiset)가 고안해 직접 자신의 예지력을 보여준 ‘의자 실험’을 들 수 있다. 크로이제트는 곧 공연이 열리게 될 큰 연주회장이나 공연장 좌석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 공연장은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상관없다. 다만 아직 좌석이 예약되어 있지 않은 공연이어야 한다. 실험자는 공연장 이름이나 위치, 공연의 성격 등을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크로이제트에게 특정한 공연일에 특정한 좌석에 앉게 될 사람을 묘사하게 한다.
크로이제트는 25년 동안 유럽과 북미의 수많은 연구자들로부터 엄격한 의자 실험을 받았는데, 그는 거의 매번 그 의자에 앉을 사람의 성별, 얼굴 모양, 옷차림, 직업, 심지어 과거에 일어난 일까지 상세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텔보트의 《홀로그램 우주》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인간의 예지력은 지금까지 위대한 예언가로 알려져 있던 사람들의 예언을 살펴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프랑스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그가 살던 당시의 많은 일들을 예언해 적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등장, 제2차 세계대전, 케네디 암살 사건 등과 같이 20세기에 일어났던 굵직굵직한 큰 사건들에 대한 예언을 적중시켰다. 20세기 최대의 예언가인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도 몽환 상태에서 수많은 예언을 하였고 이를 적중시켰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최소한 몇몇 사람들은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른 한편, 아무리 뛰어난 예언가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정확히 예언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스트라다무스나 에드가 케이시 모두 20세기 말 지구에 크나큰 재앙이 있을 거라고 예언했는데 새천년이 시작되고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물론 이 예언들이 완전히 틀렸는지 아니면 해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류인지는 지금으로서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 없다. 만약 해석 과정의 오류라면 그들이 예언한 지구 대재앙이 멀지않은 장래에 닥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미래를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지에 대하여 확실히 밝혀 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투시가들이 미래를 읽는 것은 과거를 읽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각 개인의 전생의 기록들은 인체 오라 중에서도 일곱 번째 에너지층에서 발견되고, 그 기록들은 최면 혹은 명상상태에서 다시 재생되거나 꿈에서 나타나기도 하며, 투시가들에 의하여 읽혀지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태어나기 전 미리 설계된 인생의 설계도는 사람의 에너지체 어디엔가 보관되어 있다가 특별한 경우 혹은 특별한 능력자에 의하여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사회 혹은 인류의 미래 설계도 또한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고, 이는 예언가들에 의해 읽혀 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라 치유사인 테드 앤드류(Ted Andrews)의 진술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사람에게 인생의 전환점이나 중요한 사건이 다가오면 그것을 나타내는 징조가 인체 오라 속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먼 미래에 나타날 사건의 징조는 인체에서 멀리 떨어진 오라에서 보이다가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인체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이런 오라 속의 징조에 근거하여 그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조언을 하는데, 그의 조언은 거의 언제나 정확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이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고, 적절한 때에 그 프로그램에 따른 신호가 인체 오라에 나타남을 의미한다.
개개인의 미래를 읽는 투시가들은 대체로 상대방의 기운을 느낌으로서 그의 미래를 그냥 알게 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 사람의 에너지체에 들어있는 미래의 정보를 느낌의 형태로 읽는 것으로 보인다. 예언가들의 경우 미래의 영상을 수정구를 통해 보는 경우가 많고, 노스트라다무스는 대야에 받아 놓은 물 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미래를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제3의 눈이 개발된 사람들은 그 눈을 통해서 미래의 영상을 보기도 한다.


후천개벽을 말한 수많은 예언가들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 몇몇 위대한 예언가들이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예언한 것의 중심 내용은 후천개벽(後天開闢)에 관한 것이다. 후천개벽이란 새로이 하늘과 땅이 열린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예언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격암(格庵) 남사고(南思古)와 일부(一夫) 김항(金恒),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을 꼽을 수 있다.
먼저 격암 남사고는 조선 명종 때의 철인(哲人)으로 동양을 대표하는 위대한 예언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격암유록》(格庵遺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조선조의 운세, 일제 침략과 해방, 국토 분단과 6·25, 이승만 정권의 등장, 5·16 군사 쿠데타 등이 예언되어 있다고 한다. 남북 통합의 시기로는 ‘용과 뱀이 만나는 붉은 개의 기쁜 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격암유록》은 또 다가올 엄청난 시련과 구원의 길 그리고 인류 구원을 주도할 정도령(鄭道令)의 출현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다. 다가올 시련에 대한 예언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먼지와 안개는 하늘에 넘치니, 지금까지 없었던 대재앙으로 하늘이 변하고 지진이 일어나며 삼재팔난이 일어나는 때를 아는가? 3년 흉년이 들고, 2년 동안은 괴질과 돌림병이 돌아 열 집에 한 집 꼴로 살아남는다. …… 작은 집착으로 진법(眞法)을 외면하니 조상은 천 명이나 후손은 하나밖에 없는 비참한 운세로다. 괴상한 기운으로 중한 병에 걸려 죽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연이어 그치지 않으니 과연 말세로다. 이름없는 괴질병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을,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진법을 모르니 병을 앓다 죽은 이들의 시체가 산과 같이 쌓여 계곡을 메우니 길조차 찾기 힘들더라.”
또 구원의 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늘의 도를 따르는 자는 살 것이요, 모르는 자 죽으리라. 피난처는 마음에 있으니 마음을 깨달으라. 요술조화가 무궁무진한 해인(海印)을 찾음으로써 구원될 수 있다.”
또 정도령에 대한 예언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기운으로 풍운조화를 부리는 왕이 나타나는데, 그를 따르는 순수한 사람이 인산인해라.”
조선 후기에 살았던 일부 김항은 18여 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우주 대개벽의 신비경을 《정역》(正易)으로 체계화시켜 놓았다고 한다. 《정역》의 핵심 내용은 인류 구원을 위해 절대자이신 하느님이 후천개벽의 정역 시간대의 기운을 타고 이 조선 땅에 내려온다는 것이다.
《정역》이 전하는 개벽의 핵심은 지구자전 축의 정립과 공전궤도의 변화인데, 이러한 천체 이동에 따라 지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고 예언했다. 1년이 365일에서 360일로 바뀌고, 23.5도 기울어져 있는 지축이 똑바로 섬으로써 춘하추동 계절 구분이 없어지고, 천지 음양기운이 고르게 되어 음력과 양력의 날짜가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이 지상에 새로운 생명의 주기가 시작되어 신천지(新天地)의 새 우주 질서가 열린다고 예언했다.
증산 강일순은 1871년 전라북도 고부군에서 태어났고, 서른한 살 되던 해에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한 지 며칠 만에 크게 깨달았다고 전해진다. 증산은 도를 이룬 뒤 9년 동안 자신의 신통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이적(異蹟)을 보이면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이나 태어날 인물들에 대한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다가오는 개벽, 즉 선천세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후천세계를 맞이하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이야기하고, 이러한 후천개벽 때는 먼저 지축의 변화에 따라 지진과 홍수, 해일이 전 지구를 덮치게 되고 사람들은 물과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게 되며, 급기야 전쟁이 발생한다고 했다. 또 한반도에서 괴질이 발생해 전 세계에 퍼져 나가면서 3년 동안 온 세계가 거의 진멸된다고 했고, 이러한 환란 가운데 한반도에서 수많은 도통군자들이 나타나서 세계적으로 활동하며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했다.
이 환란이 끝나면서 후천세계가 시작되는데, 이때는 모든 사람이 다 도통하게 되고,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원리에 의해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국이 된다고 했다.
후천개벽과 관련된 예언은 위에서 살펴본 것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조선시대 중종과 명종 때 학자인 정북창(鄭北窓)은 ‘궁을가(弓乙歌)’를 지어 미래사 전개 과정을 가사 형식에 담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살기 어렵다고 조국을 떠나지 말라는 것으로, 도통군자가 한반도에 나타 나서 태평성대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1997년에 김중태는 동해안의 수중왕릉인 문무대왕암에서 발견된 자료의 일부인 ‘해도금묘장(海島金卯章)’을 해석해 《원효결서》(元曉訣書)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간했다. 김중태의 해석에 따르면 해도금묘장에는 국토분단에 대한 예언부터 시작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대한 예언과 그 다음 과도 정부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고, 이후 진사년(辰巳年)에 진인(眞人)이 등장해 우리나라를 태평성대, 세계 중심 국가로 이끌어갈 것이 예언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예언가인 명나라 사람 주장춘(朱長春)은 《진인도통연계》(眞人道通聯系)에서 유교, 불교, 기독교 성자들의 도맥(道脈)이 이루어진 원리를 밝히고 있는데, 대환란 때 인류를 구원해 지상선경을 이룰 일만이천 도통군자가 한반도에서 나타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도 한국이 동방의 등불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고, 러시아 출신으로서 세계적 화가이며 영적 지도자인 니콜라이 뢰리히가 1930년대에 쓴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뢰리히는 히말라야를 여행하면서 그 곳 영적 스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을 1930년대 초기에 러시아어로 출간하였는데, 거기에는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동방의 한 작은 나라가 인류 구원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1930년대 한국은 일제 치하에서 국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작은 동방의 나라는 한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불교의 미륵신앙에서도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벌어지게 될 엄청난 환란과 그 이후에 나타날 미륵세계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동양의 예언들 외에 서양의 몇몇 대예언들도 후천개벽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예로는 노스트라다무스와 에드가 케이시가 20세기 말에 일어날 것으로 예언한 지구 대환란,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가 예언한 인류 파멸 등을 들 수 있다.


우주인의 메시지
이상에서 살펴본 예언들은 비교적 오래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가장 최근의 예언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채널링을 통한 우주인으로부터의 메시지를 들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주인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으며 더군다나 우주인이 인류를 위해 메시지를 보내온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광대한 우주에 우주인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전 우주에는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계 우주에 견줄 만한 소우주들이 무수히 많고, 은하계 우주만 해도 태양계와 같은 별들이 1000억 개가 있다고 한다. 그 별들은 대부분 우리의 태양보다 더 크고, 그 중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것들도 있으며, 별들 주위에는 대부분 지구와 같은 행성들이 공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인간과 같은 고등 생물체들이 은하계 한쪽 귀퉁이에 있는 작은 행성인 지구에만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인간보다 더 진화된 존재가 반드시 우리들처럼 물질화된 육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 또한 정당화되기 어렵다.
근래 들어 미확인 비행물체를 발견했다거나 우주인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증거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어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태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플라이아데스 성단에서 온 우주인과의 교신이나 시리우스 별자리에서 온 우주인과의 교신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들이 전하는 공통 메시지는 인류가 지금 대변혁의 시기에 처해 있으며, 지구 환경이 급변할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이제까지 지구는 비교적 수준이 낮은 영혼들의 배움터였지만 대변혁을 통해 지구의 위상은 높아지고 수준 높은 새로운 배움터로 바뀌게 되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게 될 여러 가지 시련에 대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바바라 핸드 클로우(Barbara Hand Clow)의 《플레이아데스의 비망록》(The Pleiadian Agenda)은 플레이이아데스 성단에서 거의 여신의 경지에 도달한 알키오네 별의 ‘샤티아’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저자가 채널링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을 보면 인류가 당면한 급박한 대변혁과 그에 따른 대비, 그리고 지구의 역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구는 1987년 3월 16일부터 23일까지 광자대(光子帶 : 광자 에너지로 가득 찬 거대한 고리 모양의 우주 구역) 안에 들어 있었고, 또 1988년에도 3주 동안 광자대 안에 들어 있었다. 지구가 광자대에 들어가 있는 기간은 매년 2주일씩 증가하고 있고, 2012년 동지가 되면 지구의 공전궤도 전체는 완전히 이 빛의 파도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후 2천 년 동안 태양계 전체가 완전히 광자대 안에 들어가 있게 된다.
광자대로 완전히 진입하고 나면 아무도 3차원 형태로 남아 있을 수 없다. 3차원에서 땅에 뿌리를 내린 상태로 9차원까지의 모든 차원들로부터 진동수를 받아들일 수 없는 한 사람들은 육체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광자대 안에 있을 때 지구인은 5차원 형태가 되어 은하 중심과 동조하게 되고, 은하적인 진동에 공명할 수 있는 지구의 생물학적 지성체는 빛의 정보 고속도로를 타고 은하계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태양계가 광자대로 진입하는 우주적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차크라를 열고 감정체들을 정화해야 한다.”
이러한 채널링을 통한 메시지는 사실상 앞서 살펴본 동서양의 예언들과 다를 게 없다. 광자대 진입에 따른 인류의 시련과 그 이후에 나타날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예언은 바로 ‘대환란을 겪은 후 인류가 새로운 이상세계를 맞이할 것’이라는 후천개벽의 예언과 일치하는 것이다.


우주는 인류에게 경고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부 위대한 예언가들은 미래를 예언해 왔는데 그 예언들은 적중되기도 하지만 또 틀리기도 한다. 동서양의 대예언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후천개벽에 대한 예언도 결국 예언일 뿐이어서 이 또한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해진 다른 예언들과 달리 우리가 후천개벽의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또 그에 대비해야만 할 몇 가지 중요한 이유들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 앞서 ‘후천개벽의 예언’이라고 통칭한 동서양의 예언들은 사실 그것이 행해진 시대나 성격면에서는 아주 다르지만 내용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예를 들어 우주인들이 전해 준 채널링 메시지에 따르면, 지구가 광자대에 완전 진입할 때를 대비해 “우리가 평소에 차크라를 열고 감정체를 정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꾸준한 수련을 통해 우리 몸의 혈자리를 열고 몸을 정화시킴으로써 환란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한 《격암유록》의 메시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단 일부 서양 예언들이 주로 닥쳐올 환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우리나라의 예언과 채널링 메시지는 환란 뒤에 나타날 새로운 이상세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후자에 속하는 예언들은 지구 대변혁의 지향점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높은 차원의 사회, 이기심에 바탕을 두지 않고 사랑과 조화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가 지구 위에 출현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동서양의 대예언가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후천개벽이나 대환란을 비켜가기 힘들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젊은 시절,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는 대환란을 미리 내다보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피할 수 있을지 고심했는데, 임종 직전 한 줄기 희미한 구원의 빛을 발견하고 그것이 인류의 일부라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북창, 강증산 같은 동양의 대예언가들도 후천개벽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피력했고, 채널링을 통한 우주인의 메시지도 지구의 광자대 진입은 전 우주적 사건이므로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셋째, 세계적인 투시가들과 채널러들은 의식수준이 높았던 옛 아틀란티스인들이나 ‘빛의 가족(Family of Light)’이라 불리는 우주인들 그리고 옛 성현들이 집단적으로 지구인으로 환생해 후천개벽에 대비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은 오직 인류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으로 육화(肉化)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주인들이 인류를 돕기 위해 많은 지구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각성의 파장을 보내고 있다는 말도 전해진다.
넷째, 후천개벽에 대한 예언은 지금까지 제기된 종말론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제까지의 종말론은 대부분 특정 종파에서 특정한 하나의 예언이나 해석에 바탕을 두고 주장해 온 것으로, 특수한 행위나 믿음을 통해 몇몇 선택된 자만이 구원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예언이 실현되지 않게 되자 예언을 믿고 따랐던 신도들은 정신적·경제적 파탄을 맞이했고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폐해를 초래했다.
이에 반해 후천개벽에 관한 예언은 한두 종파에서 나온 예언이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민족의 신화와 설화를 통해 전해져 온 것이고 세계적 대예언가들과 영적 지도자들의 공통적 메시지이다.


후천개벽,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제까지 살펴 본 후천개벽의 예언들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지구상의 물질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정신문명이 도래할 것을 말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예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특히,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인류의 물질문명이 하필 지금 이 시대에서 끝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극히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인류는 물질 문명의 심각한 한계에 부딪혔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최근 OECD (선진국경제협력기구) 포럼에서 연설한 빌 조이(Bill Joy)는 "왜 미래는 우리 인류를 필요치 않을까? (Why the future doesn't need us)" 라는 글에서 현재 급속도로 발전되고 있는 세가지 기술들 즉, 로봇기술(Robotics), 유전공학 (Genetic engineering) 그리고 분자나 원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다양한 부문에 응용하려는 나노기술(Nanotech)의 발전속도를 고려할 때 인류의 미래는 극히 암울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멀지 않은 장래에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든지, 몇몇 엘리트의 꼭두각시로 되든지 아니면 스스로 멸종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류의 의식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 한 기술의 계속적인 발전은 인류의 멸망만을 재촉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살펴 볼 때, 지금 우리 인류는 분명 물질 문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인류를 지복의 상태로 끌어올릴 것이라는 애초의 기대는 무너져 버리고, 그것이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물질 문명의 발전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선물하였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것이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세계화로 인하여 국제 투기자본에 의한 외환위기 등을 겪게 되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의 변화, 자연재해의 증가를 경험하면서 이기심에 바탕을 둔 물질문명의 발전은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물질 문명을 추구하는 그 자체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의식수준 상승이 동반되지 않는 물질문명은 그 자체에서 한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행복에 기여하지 못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의 비율이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줄어들고, 물질적으로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는 나라 특히 인도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물질적 여유를 즐기는 나라들보다 훨씬 높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접하면서, 물질적 풍요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강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후천개벽의 예언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할 것인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체험을 통하여 앎을 축적해 가고 의식을 성장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우리가 미래를 미리 안다면 제대로 된 체험은 이루어 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미래란 원칙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고, 만약 미래가 미리 예언된다면 그것은 나름대로의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듯, 널리 알려진 예언은 그것의 실현 여부와 상관없이 큰 의미가 있다.
예언은 무언가를 경고함으로써 인류를 각성시키거나 당면한 위험을 피하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줌으로써 그것에 충분히 대비케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전달되는 후천 개벽의 메시지를 현실과 동떨어진 황당한 것으로 치부하기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열어 두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제10장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예정된 삶을 살아간다
많은 지성인들이 말하듯 지금은 분명 물질문명의 위기이고, 후천개벽의 예언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물질적 파괴가 수반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자신의 영혼이 설계한 것이고, 이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원했기 때문이며,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영혼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나에게 닥치는 모든 것, 그리고 미래에 닥칠 모든 것은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고, 모두 나를 위한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
이 우주란 결국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내 눈에 보이는 다양한 사물들과 생명체들 그리고 나의 사랑스런 가족, 친구, 동료들까지도 사실은 나에게 하나의 환경이 되어 주는 존재이다. "이 세상에는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天上天下 唯我獨尊)"고 한 석가모니의 말씀은 어쩌면 이런 뜻이었는지 모른다.
인생이 이러할진대, 어떤 인생이 가장 멋지고 성공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물질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별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물질세계에서 "성공"이라고 불리는 체험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라고 불리는 체험을 하기도 하지만, 그 구분은 오직 물질적 측면에서 가능할 뿐, 영적, 본질적 측면에서 어느 것이 더 소중한 체험이라 말할 수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이루어 가는 것 혹은 창조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정신적 어려움이 올 때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하는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룬다', '극복한다' 하는 생각 때문에 인생의 온갖 시련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근심과 초초함을 불러오고, 무엇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오만함과 우월감을 초래한다. 또한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이 열등감, 패배감을 불러오고 마음의 고통을 낳는다.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은 '인생이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체험하는 것' 임을 깨닫는 것이다. 어떤 느낌이 올 때는 그것을 행하되 그 결과로부터 초연해 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의 승리자란 예정된 삶을 살면서 자신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정된 인생의 항로를 따라 수많은 물질적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체험의 순간들을 얼마나 충실히 보냈느냐, 그리고 그 결과로 얼마나 많은 자각과 각성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진정한 성패가 결정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앎을 얼마나 축적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이런 시각에서 바라 볼 때, 멋지고 훌륭한 인생을 살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언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진실된 삶을 살아가는 것,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지식과 관념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 그리고 내면의 느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진실된 삶을 살아간다
사회적 관점에서는 진실과 거짓을 말과 행동의 일치 여부에 따라 판단하지만, 수행의 관점에서는 거짓은 보다 넓게 그리고 진실은 보다 좁게 정의되어야 한다. 진실한 삶이란 자신의 언행에 모순이 없어야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언행과 일치할 때에 확보되는 것이다. 거짓이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악의(惡意) 여부와는 상관없이 진실을 왜곡하거나 축소 혹은 과장하는 것이며, 의도적으로 진실의 핵심을 감추는 것 역시 거짓이다. 예를 들어,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행위 역시 거짓된 행동이다. 자신의 마음과는 다른 언행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거짓된 삶이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태어나자마자 부모, 형제, 친지와 관계를 맺고, 자라면서 스승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서는 동료, 애인, 배우자, 도반 등과의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항상 진실만을 추구하고 일관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해도 문제될 것은 없고, 그의 마음은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을 행하는 사람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언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를 철저히 기억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자신이 한 이야기들의 모순이 드러나 상대방의 불신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거짓된 사람은 언제 자신의 거짓이 드러날까 항상 불안해하고 머리 속은 그와 관련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게 된다. 또한 가식적이고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내면적으로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리는 것이 보통이다.
거짓은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습(習)으로서 자리잡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성격이 전반적으로 왜곡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거짓 성향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럴 것으로 여기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이로 인해 매사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경향이 심화되고,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며 그들과 불화(不和)하게 된다.
정직과 성실 그리고 상호 신뢰가 없는 관계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고, 그 속에서 화합과 조화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오랜 윤회 속에서 무수한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결국 진실한 삶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삶을 살아갈수록 의식수준은 상승하게 마련이다.


열린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매 순간 많은 정보들이 오감을 통해 전달되지만 대부분의 정보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제3장에서 언급한 마음의 여과기능(필터링: Filtering) 때문이다. 이 기능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보만을 인식하게 하고 불필요한 많은 정보들을 차단해 줌으로써 인간을 보호해 주는 필수적인 기능이다.
의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집 주위에 있는 무수한 옷가게들을 훤히 꿰고 있지만 옷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런 가게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 물질 이외의 것을 거부하는 유물론자에게는 비물질적, 영적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매체에 넘쳐흘러도 그의 눈과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여과기능의 결과이다. 이 여과기능은 자신의 선입견이나 관심 등에 의하여 작동되기 때문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믿지 않는 정보들의 유입을 차단하고 새로운 정보를 통한 인식의 확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 에너지 세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세상 혹은 에너지 세상에 대한 정보가 이런 저런 이유로 차단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그런 정보에 대하여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이 책을 읽고 이해하고 공감한 분들에게는 앞으로 에너지 세상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 세상에 대한 마음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신세계에 대한 강연을 할 때 참가자들에 대한 당부의 말로써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설령 나의 강연 내용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일단은 받아들이고, 의심은 돌아가서 하시라고 부탁드린다. 상대방의 말을 의심하는 순간 마음의 문은 닫히고, 에너지의 교류, 정보의 교류는 차단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매사를 먼저 의심하고 시작하는 것이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를 불신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며 살아가는 세상인지라, 상대방에 대한 섣부른 믿음은 큰 낭패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항상 닫혀 있고, 그들에게는 기존의 지식이나 관념에서 벗어난 어떠한 새로운 정보도 유입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의 세계는 확장될 수 없고 기존의 체험들만 되풀이 된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영적 체험 특히 '거듭남’의 체험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닫힌 마음은 신체적 건강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닫힌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 자신의 내기와 바깥의 외기가 통하는 차크라와 경혈들이 닫gl기 때문에, 기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건강은 점차로 악화된다.
일단 에너지의 세상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믿어지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많은 현상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제1장에서 언급한 신비로운 현상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홱 돌아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일종의 텔레파시 현상이 나타난 것이고, 돼지꿈 등에 관한 것은 미리 계획된 프로그램을 읽는 인간의 예지력이 발현된 경우이다. 클래식 음악이 동식물의 성장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클래식 음악에서 나오는 높은 수준의 에너지 때문이며, 에모토 마사루 등의 물의 결정체 사진들은 기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는 물의 성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파장은 에너지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물질 중에는 물이 마음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맥파를 차단한다는 그림 등은 그 그림에서 나오는 높은 수준의 에너지가 낮은 수준의 수맥파를 상쇄시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언급된 다른 현상들도 에너지의 세상을 알게 되면 모두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의 세상을 이해하게 되면 세상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에너지를 의식하게 됨에 따라 내 몸의 혈자리들은 자연히 열리게 되고, 그 결과 기운의 유통이 활발해 져 건강은 점차 회복된다. 숲 속에 뛰노는 다람쥐와 토끼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지고, 보잘 것 없이 느껴졌던 길가에 핀 들꽃 하나도 이제는 소중하게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나는 예전과 같은 세상을 살지만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런 인식의 확장은 모두 마음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지식과 관념의 벽을 허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지식과 관념으로 중무장되는 과정을 밟는다. 어릴 적부터 반복적으로 주입된 많은 관념들과 더불어 진실 혹은 진리라고 여겨지는 많은 지식들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주입된다. 이렇게 지식과 관념으로 잘 무장 된 사람일수록 사회는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좋은 대우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가진 관념과 편견에 만족해하고, 자신이 지닌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저자도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지식과 관념의 좁은 틀 속에서 살아 왔다. 여름철 TV에서 방송하는 귀신들을 소재로 한 납량특집극을 시청하면서 사람들은 왜 저런 황당한 이야기에 매료될까 생각하였고, 점을 치러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앞섰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UFO를 목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착각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또한 단군 신화를 비롯한 각국의 신화들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생각해 왔고, 어머님이 수시로 들려주시던 나의 출생과 관련된 특별한 체험도 어머님의 착각이었다고 완전히 무시해 왔었다. 오감으로 인식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식인의 수치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저자가 지금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받아들이지 못할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황당한 이야기라고 치부되는 것들을 그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 역시 현재 몸담고 있는 학계에서 존중받는 학자의 한 사람이지만, 학문의 성과와 그것이 제시하는 지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근본적 인식 변화는 저자가 겪은 다양한 체험들 때문이다. 전생체험자들이 거침없이 쏟아 내는 역사적 사실들과 그들이 체험의 과정에서 구사하는 다양한 지구의 언어들과 우주어, 그리고 우주 여행 속에서 발견해 내는 '물질화 공식' 등에 대하여 들으며, 이번 생에 배우는 지식이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란 우주적 차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자신이 체험하는 지구에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인식을 얼마나 제한하고 의식의 확장을 방해하는 지에 대해서는 제8장에서 비교적 자세히 논의하였다. 여기서는 지식의 문제점들을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몇 가지 분야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과연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인지를 생각해보고, 기존의 지식에 의한 문제점들을 살펴본다.

1) 한민족의 역사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운 역사 지식을 대체로 진실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크게 다르다. 다양한 정보매체를 통해 많은 뉴스들이 신속하게 전달되는 요즈음이지만, 정보의 신뢰성은 그리 높지 못하다. 뉴스의 종류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어떤 기사는 기자들이 쓴 소설 정도로 취급될 만한 것도 적지 않다. 이렇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실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는 우리들인데, 수백 년 전 혹은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일들을 제대로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은 우리의 기대일 뿐이다.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도 그것을 기록한 사람이 과연 얼마만큼 진실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자신이 얼마나 객관적 입장에서 기록하였는지에 따라 진실성은 크게 달라지게 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와 같이 외세의 침입으로 역사가 조직적, 체계적으로 왜곡된 경우 (예: 식민사관) 교과서에 실린 역사란 침략자의 홍보책자 수준으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왜곡된 역사책을 공부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군왕검을 한낫 신화상의 등장인물로 생각하고, 한민족이란 2천년 역사 내내 중국, 몽고, 왜구 등으로부터 유린되어 온 불쌍한 민족인 것처럼 인식하여 왔다.
이렇게 왜곡된 민족사를 받아들이고 있던 우리들이기에, 4천년 이상 된 성곽 등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들이 북만주 이곳 저곳에 흩어져 존재하고, 그 수준이 당시의 중국 문명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벌써 2천년 전에 바퀴 달린 우마차 등을 이용하는 발달된 농경문화가 한반도에 정착되어 있었고, 신라 말 장보고는 동북아의 해상권을 장악한 채 멀리 페르시아까지 진출하였다는 사실도 크나큰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직도 역사가들 사이에 논란은 있지만, 환단고기, 부도지 등의 몇 가지 사료와 민족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민족은 환인, 환웅, 그리고 단군으로 이어지는 성인들을 통치자로 둔 민족이라는 것이다. 환인이 아시아 중원에서 환국을 세우며 깨달음에 근거한 통치를 시작한 이후, 그 맥을 이은 환웅은 중국 북부 신시(神市)에서 하늘을 열어 이후 18대를 이어왔고, 이를 계승한 단군왕검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연 이후 47대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여러 정황적 증거들을 고려해 볼 때, 환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하는 환국은 전 인류의 시원(始原)을 가리키는 것이고, 환웅은 환인의 통치이념을 계승하여 동이족(東夷族)을 다스린 통치자였고, 환웅의 건국정신은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인 단군들에 의하여 이어져 온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혈통적으로 볼 때 한민족의 직접적인 시조는 단군이지만, 환인이 펼친 깨달음의 문명을 지금까지 계승해 오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문명을 계승한 천손(天孫)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오랜 세월 동안 척박하고 처절한 환경 속에 살아 온 한민족을 지탱해 온 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지구와 인류의 역사
우주는 빅뱅에 의하여 탄생된 이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는 중이고 (빅뱅이론), 우리가 사는 지구는 40-50억 년 전 탄생한 이후 몇 차례 큰 지질학적, 생물학적 변화를 겪으며 지금의 상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빅뱅이론이란 지금까지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많은 천체물리학의 이론들 중 가장 유력한 것일 뿐, 지금까지 다른 이론들이 그래왔듯이 언젠가 또 다른 이론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의 역사도 지질학자와 생물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유력한 학설에 근거한 것일 뿐, 그것이 반드시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학문의 발전 과정을 고려할 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생성의 원리와 지구의 역사가 진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남겨진 문헌들이 없는 경우 역사학자들은 잔존하는 유물과 유적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것들의 연대를 추정할 때 채택되는 방사선동위원소를 이용한 탄소연대측정법은 정확성의 측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 문헌 기록의 진실성 여부와 추정연대의 정확성 여부 등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기록이나 유물, 유적이 남아 있는 시대는 그런 대로 역사의 골격은 파악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러한 증거조차 거의 없는 시대, 다시 말해 오천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들은 그야말로 일부 역사학자, 지질학자의 상상 혹은 추측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원숭이가 진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유인원이 수백만 년 전 지구에 나타남으로서 시작되었고, 현대 인류의 조상이라고 말해지는 호모 사피엔스는 그보다 훨씬 뒤인 4-5만 년 전에 나타나 구석기, 신석기 등의 석기시대와 청동기,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지금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배워왔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의문은, 지난 수백 만 년 동안 별다른 진화를 이루지 못한 인류가 어떻게 약 4, 5천년 전부터 갑자기 문명의 도약을 시작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상당수의 유물들 특히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남미의 마야문명과 잉카문명 등은 그 정밀성과 거대함에 있어서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 지식으로는 인류가 어떻게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의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여러 민족들에서 오랫동안 구전되어 온 신화나 설화들을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배워왔다.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신화들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선사시대 역사 보다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100여 년 전 독일의 실리이만이 호머의 서사시를 읽고 힌트를 얻어 거대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한 것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와 매우 유사한 내용의 대홍수 이야기가 세계 여러 민족들의 설화들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인류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한 대홍수가 역사상 진실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일부 투시가들과 채널러들에 의하면, 지금까지 지구에는 문명의 부침이 여러 번 반복되었고, 몇 만 년 전까지만 해도 레무리아 문명이 태평양에, 아틀란티스(Atlantis) 제국은 대서양에 실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아틀란티스 제국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 언급한 이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탐구되어 왔다. 20세기 최대의 예언가로 꼽히는 에드가 케이시는 자신의 수많은 전생영독을 통하여 약 만 년 전까지 아틀란티스 제국이라는 매우 발달된 문명이 있었고, 그 제국은 어떤 엄청난 대폭발로 인하여 대서양 바다 깊숙히 가라앉아 버렸음을 확언하고 있다.
아틀란티스 제국 혹은 그 이전의 인류 문명에 대한 주장은 아직 학문적으로 입증되지는 못하였으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그 존재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에드가 케이시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생을 읽고 그것에 근거하여 질병을 치유한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었고, 또 그의 전생영독에 관한 방대한 기록은 지금도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Norfolk)에 잘 보관되어 있다. 그의 전생영독과 질병치유 등이 계기가 되어 많은 미국민들이 전생과 윤회를 믿고 있음은 앞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한 케이시가 행한 수천 건 전생영독 중에서 절반 가량이 아틀란티스 제국에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의 개인적 체험도 아틀란티스 제국이 실존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저자가 최면을 통해 전생체험을 유도한 사람 중 두 사람은 아틀란티스 시대로 들어가 그 때의 여러 가지 상황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한 사람은 아틀란티스 귀족의 딸로서 태어나 참혹한 대규모의 전쟁을 경험하면서 인생을 극도로 회의하며 약물을 마시고 자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른 사람은 아틀란티스가 멸망하기 약 150년 전쯤 태어났고, 어렸을 때 여사제로 간택되어 평생을 하늘을 섬기고 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늘의 계시를 받아 아틀란티스 왕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제국의 몰락이 멀지 않았음을 경고하고, 그에 대비해 몸과 마음을 닦을 것을 조언하였다.
우리들 대다수의 인식과는 달리, 이제까지 지구의 기후적 혹은 생태학적 변화가 매우 급작스레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도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시베리아 빙판과 알래스카에는 수만 년 전에 생존했던 맘모스들이 얼음 밑에 파묻혀 있고, 알래스카에서는 그런 맘모스를 이용해 맘모스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냉동되어 있는 일부 맘모스의 위장에서 채 소화되지도 않은 풀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맘모스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가 순식간에 몰아닥친 한파로 냉동된 채 얼음에 파묻혀 버렸음을 시사하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따뜻하던 북극권이 하루아침에 오늘날 같은 동토(凍土)가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남극대륙도 불과 몇만 년 전까지만 해도 온화한 기후였지만 지각변동 혹은 다른 이유로 인하여 갑작스레 얼음의 대륙으로 변화하였다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그레이엄 핸콕이 지은 《신의 지문》 참조).

3) 정신분석학과 윤회현상
그동안 현대 의학은 의료장비의 발전과 다양한 의약품의 계속적인 개발을 통하여 인류의 물질문명에 큰 기여를 해 왔고, 지금은 생명공학의 진전으로 인체를 복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눈부신 의학의 발달 속에서도 유독 정신분석학, 정신의학만은 빠른 진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제대로 탐구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서양 의학의 풍토 속에서 정신세계를 다루는 정신의학이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생의 근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세계와 윤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정신질환의 대다수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다른 학문들과는 달리,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는 아직도 100여 년 전 프로이드에 의하여 제시된 꿈의 해석, 즉 꿈을 인간의 성적 욕구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가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꿈은 억압된 욕구, 욕망 등 자신의 마음이 4차원 에너지 세상 (아스트랄체)에서 만들어 낸 것이 나타날 수 있고, 전생의 장면들이 꿈에서 재현되기도 하며, 외부의 에너지와 연결되어 미래를 보여주는 꿈을 꾸게 되기도 하는데 (예지몽),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정신분석학자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반 집단 무의식 개념을 도입하여 정신분석학을 한 단계 도약시킨 융과 같은 학자 즉 영적 세계를 이해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타나지 않는 한,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지식은 큰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정신질환과 전생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브라이언 와이스박사가 언급한 한 사례를 살펴 볼 수 있다. 남미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은 자신이 사귀고 있는 애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서로 너무나 사랑하고 둘 사이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 여인은 그 남자를 잃을까봐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었고, 그것이 때로는 자살충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면을 통해 그 증세와 관계된 전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는 17세기 프랑스였고 현재의 애인은 그 당시 사랑하는 남편이었다. 그 남편은 어느 날 울며 반항하는 가운데 경비대에 의하여 끌려갔고, 더 이상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전생을 알게 된 그 여인은 자신의 증세에서 급격히 벗어나게 되고, 애인과 정상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또 다른 사례로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공포증(Phobia)을 들 수 있다. 이런 공포증이 어릴 적의 경험에 의하여 형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전생과 관련되어 있다. 별다른 이유없이 바다를 두려워하는 것은 대개 바닷물에 빠져서 죽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비행기 타기를 극단적으로 두려워하거나 좁은 공간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그와 관련된 전생의 기억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전생체험을 통해 쉽게 치유되는 것이 보통이다.
전생체험을 통한 다양한 치유사례는 세계적으로 많이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계에서는 여전히 전생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많은 정신질환이 전생과 관련이 있고 또 전생체험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가 당연한 것, 진실인 것으로 여겨왔던 지식들은 사실 진실과 크게 동떨어진 것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물질세계란 광대무변의 에너지 세상의 극히 일부일 뿐인데, 그 물질세계만을 전부로 알고 탐구해 온 학문이 제시하는 지식은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지식들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고정관념들과 더불어 인식 확장을 크게 방해하여 왔다. 관념과 기존의 지식에 맞지 않은 것은 아예 배제함으로써,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진실을 받아들이고 의식을 확장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근원적이고 무한한 에너지 세상을 인정하지 않은 채 오직 물질에 초점을 맞추어 탐구된 모든 지식은 결코 100% 진리를 제공하지 못하며, 인간의 분별심을 조장하는 관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상대적인 진실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를 확실히 가슴으로 인식할 때 우리의 인식은 급속히 확장되고 의식은 성장한다.


내면의 느낌에 따라 살아간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오감을 통해 체험하는 존재로서, 매순간 일어나는 체험으로 인해 배움은 이루어진다.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체험을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 이는 각자의 영혼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함으로써 시작된다. 태어나기 전 자신에게 가장 시급한 앎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다음 생에서 집중적으로 배워야 할 것을 결정한다. 이에 따라 가장 적절한 인생항로를 정하게 되는데, 누구를 부모로 해서 태어날 것인지를 결정하고 인생의 무대에서 펼쳐 보일 역할을 미리 선택한다. 성별, 직업, 건강 등 인생의 모든 조건들이 이에 맞추어 결정된다.
이러한 인생의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를 선택하는 것이다. 부모의 선택은 유전적 형질을 선택하는 것임은 물론 어릴 적의 성장환경을 결정해 준다. 이에 따라 자신이 어떤 관념들과 지식을 주입받게 될 것이며,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인지 조차도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각자에게 최선인 인생의 설계도를 지닌 채 살아간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고 물질세계만이 전부인양 인식하는 사람들은 삶을 고통스러워하고 하늘을 원망한다. 인생을 설계할 때 영혼의 성장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제대로 된 배움을 위하여 많은 경우 물질적 빈곤과 신체적 고통이 수반되는 삶을 설계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혹은 육체적 욕망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채,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그리고 내면의 느낌을 무시한 채 물질적 행복에 한발자국이라도 더 접근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삶을 적극적인 삶, 창조적인 삶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미리 설계되어 있는 최적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순리(順理)대로 사는 삶도 아니요, 도(道)를 따라 사는 삶도 아니다. 최선의 삶은 본래 설계된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고, 이는 내면의 느낌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느낌은 자신을 본래 예정된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다. 그 예정된 길을 가면서 사람들은 기쁨과 환희, 만족을 느끼기도 하지만, 비애와 고통 그리고 허무를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결국 예정된 길을 걸으며 현재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면의 느낌을 따라 살다보면 본래 설계한 삶을 살게 되고, 순간에 충실함으로써 체험의 극대화, 배움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 속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에 대한 우려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순간에 충실하게 된다. 매순간 느껴지는 감정들과 느낌에 보다 충실하게 되고, 이를 통해 보다 많은 각성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삶, 즉 내면의 느낌을 따라 살면서 순간 순간에 충실하는 것, 이것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통하는 최선의 삶일 것이다.


저자 후기



오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돌아온 후 다시 적응해야 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한글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영어로 논문을 쓸 때 하던 방식대로 ‘……할지도 모른다’ 또는 ‘……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투로 한글 논문을 썼다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자신 없어 보이는 글을 누가 읽겠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후로 내 한글 어투도 좀더 단정적으로 바뀌었고, 이 책도 그런 연장선에서 서술되었다.
사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것을 100%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육체를 지닌 어떤 사람도 육체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고, 깨달음을 통해 인식 능력이 크게 확장되어도 인간은 결코 전지전능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상 어떤 책도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단지 어떤 책이 조금 더 진실에 접근했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내가 아무리 단정적으로 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독자들에게 나의 확신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잘못된 것이거나 부정확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이 책의 주요 내용이 주관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알고 있다’고 판단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서술했고, 각 장의 기운을 엘로드로 측정한 결과, 아주 높은 진실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이 책의 진실성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독자 여러분들이 이 책의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책이 아무리 우주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들 일반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또 독자들이 책 내용에 수긍한다고 해도 이 책이 삶의 가이드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책에 제시된 지식들이 ‘진정한 앎’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신의 몸으로 체득되어야 한다. ‘우리는 천지기운의 개별화된 존재이고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가 몸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여전히 너와 나를 분별하게 된다.
‘인생의 목적은 오직 영적 성장이며, 우리는 스스로 설계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금방 바뀌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충분한 체험 없이는 여전히 과거에 매달리고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이 진짜 세상을 찾는 계기를 제공하고 진짜 세상으로 안내하는 가이드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몸으로 확인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 여러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규칙적인 수련과 명상이 도움이 된다. 특히 기 수련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몸으로 확인시켜 줄 것이고, 명상은 바로 내 안에 신성(神性)이 있음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독자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여러분의 영적 성장을 위한 하나의 계기로서 미리 계획된 우주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다.
나와 독자 여러분과의 인연은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내용과 그밖에 여러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을 환영한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다음 주소로 된 인터넷 홈페이지를 준비하고 있으니 부디 한번 방문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독자 여러분 모두가 진짜 세상을 발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참고 문헌



김영우, 《김영우와 함께 하는 전생여행》, 정신세계사, 1996.
김영현, 《선도기공 단전호흡》, 하남출판사, 1993.
김인곤, 《초승달이 뜨면 여행을 떠나지 말라》, 지식산업사, 1997.
김중태, 《원효결서》 1, 2권, 화산문화, 1997.
박순용, 《남사고의 마지막 예언》, 삼한, 1996.
설기문, 《최면과 전생퇴행》, 정신세계사, 1998.
설영상, <꼴 에너지의 이해와 활용>, 한국정신과학학회 99년 춘계 학술발표회, 1999.
유상구·김영태, <피라미드와 삼태극, 히란야가 형성하는 공간 에너지가 미생물에 미치는 영향>, 한국정신과학학회 96년 추계학술발표회, 1996.
이경숙, 《마음의 여행―과학으로 풀어본 삶, 죽음, 영혼》, 정신세계사, 1999.
이대우, 《수맥은 과학이다》, 대광출판사, 1994.
이병조, 《수맥의 모든 것》, 한나라, 1995.
이상명, 《기과학》, 대광출판사, 1994.
이승헌, 《단학》, 한문화, 1992.
이충웅·방건웅·이상명 외, 《과학자들이 털어놓는 氣 이야기》, 양문출판사, 1998.
장휘옥, 《불교학 개론 강의실 J301》 1, 2권, 장승, 1994.
장휘용, <엘로드를 통해 본 세계>, 한국인체과학학회 춘계 학술발표회, 1999.
정봉수, <현대과학의 한계와 의식개혁>, 한국정신과학학회 95년 추계 학술발표회, 1990.
정종호, <땅의 바이오 에너지>, 한국정신과학학회 99년 춘계 학술발표회, 1999.
지승, 《부도와 한단의 이야기》, 대원출판, 1996.

町好雄, 박완서 옮김, 《기를 과학한다》, 한국적외선 응용연구소, 1996.
春山茂雄, 반광식 옮김, 《뇌내혁명》(腦內革命), 사람과 책, 1995.

Bachler, Kathe. 이만호 옮김, 《수맥이 뭐길래》(Earth Radiation), 가람출판사, 1998.
Bentov, Itzhak. 류시화·이상무 옮김, 《우주심과 정신물리학》(Stalking the Wild Pendulum), 정신세계사, 1987.
Borges,Jorge Luis. 김홍근 옮김,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Que뭙s el budismo), 여시아문, 1998.
Brennen, Barbara. 김경진 옮김, 《기적의 손치유 》(Hands of Light), 대원출판, 2000.
Brinkley, Dannion. 김석희 옮김, 《죽음의 저편에서 나는 보았다》(Saved By the Light), 정신세계사, 1997.
Browne, Sylvia. 《Life on The Other Side》, Dutton, 2000.
Capra, Fritjof. 김용정·김동광 옮김,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 범양사, 1998.
Capra, Fritjof. 이성범·김용정 옮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 범양사, 1998.
Cerminara, Gina. 권미옥·서민수 옮김, 《윤회의 진실》(Many Lives, Many Loves), 정신세계사, 1995.
Clow, Barbara Hand. 《플레이아데스의 비망록》(The Pleiadian Agenda), 대원출판, 1999.
Essene, Virginia., Nidle, Sheldon. 홍준희 옮김, 《포톤벨트》(You Are Becoming A Galactic Human), 대원출판, 1996.
Fisher, Joe. 손민규 옮김, 《나는 아흔여덟 번 환생하였다》(The Case of Reincarnation), 태일출판사, 1996.
Hancock, Graham. 이경덕 옮김, 《신의지문》(Fingerprints of the God),까치,2002.
Hawkins, David. 김종수 옮김, 《의식혁명》(Power vs. Force), 한문화, 1997.
Joy, Bill. 《Why the Future doesn뭪 need us》, Wired, 2000.
Kerner, Dagny. & Kerner, Imre. 송지연 옮김, 《장미의 부름》(Der Ruf der Rose), 정신세계사, 2002.
Lonegren, Sig. 김태윤 옮김, 《펜듈럼 길라잡이》(The Pendulum Kit), 물병자리, 1997.
Moberg, Kent Davis.《 The Magic of our Universe》, Camelot Productions, 1999.
Radin, Dean. 유상구·전재용 옮김, 《의식의 세계》(The Conscious Universe), 양문출판사, 1999.
Rama, Swami. 박재원·박광수 옮김, 《히말라야의 성자들》(Living with the Himalayan Masters) 상·하권, 정신세계사, 1989.
Rampa, Lobsang. 박영철 옮김, 《나는 티벳의 라마승이었다 2권》 (Doctor From Lhasa), 정신세계사, 1987.
Rampa, Lobsang. 방건웅·박희순 옮김, 《나는 티벳의 라마승이었다 3권》(The Rampa Story), 정신세계사, 1988.
Redfield, James. 김옥수 옮김, 《천상의 예언》(The Celestine Prophecy), 한림원, 1994.
Sambhava, Padma. 류시화 옮김, 《티벳 사자의 서》(The Tibetan Book of The Dead), 정신세계사, 1998.
Spalding, Baird T. 정창영 옮김, 《초인생활》(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 정신세계사, 1992.
Talbot, Michael. 이균형 옮김,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Universe) 정신세계사, 1999.
Targ, Russell., Katra, Jane. 《Miracles of Mind》, New World Library, 1999.
Tolle, Eckhart. 노혜숙 옮김,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 양문출판사, 2001.
Walsch, Neale Donald. 조경숙 옮김, 《신과 나눈 이야기》(Conversations with God) 1, 2, 3권, 아름드리, 1999.
Weiss, Brian. 김철호 옮김,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Many Lives, Many Masters), 정신세계사, 1997.
Weiss, Brian.《Messages From the Masters》, Warner Books, 2000.




# by 育士道(육사도) | 2005/07/04 15:39 | 育士道(육사도)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