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오구라 기조.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오구라 기조. Show all posts

2023/10/19

18세기 조선 성리학, 여성 주체를 일깨우다-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이은선 2022 주간기독교

<한국信연구소 오늘, 22.07.01(금)>
-한국페미니스트신학자의 유교읽기13-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드디어 18세기 임윤지당에게 왔습니다. 임윤지당과 더불어 다음 편 강정일당의 삶과 사유를 해석하면서 저는 '사유하는 집사람'이라는 언어를 썼고, 특히 이들 여성의 삶을 통해서 조선 성리학의 도학적 정신과 그 성속일여적 종교성이 지극한 수준에서 체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얼마전 한국 헤겔학회에서 오구라 기조 교수의 저술,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사>에 대한 이해가 다루어졌는데(이종철 교수), 저는 그 논평자로서, 오구라 기조교수가 놓친 조선 유교 종교성과 영성의 진면목은 그 도덕적 理추구가 명예와 돈과 함께 가는 상승적 理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겸비와 자기하강, 자기비움의 그것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 도학의 진정한 理지향성이고, 하학이상달적 유교 종교성이며, 18세기 조선여성들의 지난한 삶 속에서도 고유하게, 아니 더 진실된 모습으로 체현되어 왔다고 밝혔습니다.

매우 예민한 해석이고, 특히 오늘 서구 페미니즘 시각에서 볼 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 서구적 시각과 한국 유교 영성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저의 오랜 시도 속에서 오늘 21세기 모두에게, 여남의 구분을 떠나서 긴요한 '집의 회복'과 '사유와 삶의 하나됨'의 예시가 저는 조선 성리학 여성들의 삶에서 18세기 이후로 가능해지는 과정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 중층적이고 예민한 물음이 두 편의 짧은 글에 잘 나타났는지 여러분들의 일독과 질정을 기다립니다.


[오구라 기조 인터뷰] "자신감 잃은 日本人, 한국이 중국으로 쏠리자 嫌韓(혐한) 감정 거세져" 2014

[오늘의 세상] "자신감 잃은 日本人, 한국이 중국으로 쏠리자 嫌韓(혐한) 감정 거세져"



[오늘의 세상] "자신감 잃은 日本人, 한국이 중국으로 쏠리자 嫌韓(혐한) 감정 거세져"

['韓·日관계 전문가' 오구라 기조 교토大 교수 인터뷰]

-韓·中 잘나가자 '아시아와 결별'
타자를 포용하려는 힘 없어져
기세 드센 이들과 엮이지 말고 우리끼리 잘살자는 심리 팽배

-혐한엔 '日헤게모니 비판' 포함
韓·日우호 내세운 아사히 등 좌편향·중도 논리가 힘 잃자
혐한파, 日 주도권 바꾸려 해

-日 바꿀 힘은 한국에 있다
'韓·日화합의 노력' 인정 않고 한국인들이 日비판만 한다면 아베정권에 에너지 공급하는 것
최원석 기자
입력 2014.11.25.

"한국에서는 재특회(在特会·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모임)로 대표되는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증오 발언) 세력과 혐한파(嫌韓派)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엄연히 다릅니다. 헤이트스피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통 일본인들 사이에서 혐한파가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오구라 기조(小倉紀 ·55) 교토(京都)대 종합인간학부 교수는 24일 서울대 일본연구소에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재특회 중심의 헤이트스피치 세력은 언행이 저급하고 과격해 이들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거의 없고 한·일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제한적"이라면서도 "일본에 일반인 혐한파가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국도 객관적 시각으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날 서울대 일본연구소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23일 한국을 찾았다.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24일 서울대 일본연구소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구라 교수는“1980년대와 비교하면 지금의 일본은 심리적으로 좁아지고 타자(他者)에 대한 포용력도 줄었다”며“여유가 줄고 고독감이 일본 사회를 지배하면서 혐한(嫌韓) 정서가 강해졌다”고 말했다.


―혐한파의 주장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면 '한국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50년간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어 왔는데, 일본인 시각에서 보면 '일본과 더 이상 사귀지 말자'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을 배척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은 한국의 중국 쏠림 현상을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본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매력이 많은 중국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일본이 지금까지 한국과 우호적으로 지내온 오랜 과정이 있는데, 어떻게 한국이 중국 쪽으로만 가버리느냐는 서운한 마음이 일본인들에게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것이 혐한 감정을 더 부추긴다."

―계속 확산되고 있나?

"자신을 혐한파라 부르지는 않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혐한파로 분류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꽤 많아졌다."

―왜 늘어나나?

"일본 사회가 심리적으로 좁아지고 있다. 타자(他者)를 포용하려는 힘이 줄어들고 있다. 1980년대 일본과 비교하면 지금의 일본은 완전히 달라졌다. 총체적인 자신감 상실, 고독감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혐한파는 동아시아를 사절(謝絶)하고 싶어 한다. 과거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일본이 19세기 중·후반 근대적 통일국가를 형성해나간 과정) 당시의 대표적 정치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가 아시아와 결별하겠다는 '탈아(脫亞)론'을 내세웠을 때는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를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한국이 앞서가니까 '기세 드센 이들과 엮이지 말고 우리끼리 조용히 살자'는 심리다. 메이지유신 때와 정반대인 '역(逆)후쿠자와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도 혐한 현상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나?

"아베 정권의 경우는 혐한파와 또 다르다. 혐한파는 한국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지는 순진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성향이 달라질 수 있지만, 아베 정권은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 하는 확신범에 가깝다."

―한국에서는 혐일 서적이 눈에 안 띄는데, 일본에서는 왜 그렇게 혐한 서적이 잘 팔릴까.

"한국인들의 경우 일본에 대한 정보가 축적돼 있다. 일본 역시 최근 10년간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됐지만, 보통의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아직 낯설다. 한류가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고, 한국을 제대로 알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일 우호를 주장했던 친한(親韓) 일본인들이 그렸던 모습과 다르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에 대한 존재를 부각시킨 것이 2005년부터 본격화된 혐한파들이었다."

―한류의 반동(反動)인가?

"한국의 좋은 면, 안 좋은 면을 두루 접하면서 종합적인 정보를 흡수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혐한 서적이 거의 모두 비슷한 내용에 수준도 낮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곧 다음 단계의 한국을 보는 과정으로 넘어갈 것이다. 내가 한국에 유학했을 당시인 1990년대 한국에서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나왔다. 기성세대로부터 지금까지는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말만 들었는데, 직접 접해보니 '그런 일본은 없더라'는 내용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혐한 서적들은 기존의 친한파 일본인들이 말했던 한국은 '실제 접해보니 없더라'는 식의 내용을 좀 더 수준 낮고 과격한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혐한 현상의 다른 성격은 없는가.

"혐한 현상은 한국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전후(戰後) 일본의 헤게모니(주도권·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일본의 혐한은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혐한파들은 전후 일본의 언론·학계 등이 전부 좌편향 혹은 중도에 치우쳐 있다고 본다. 매스컴의 경우 아사히(朝日)신문을 대표로 하는 한·일 우호 주장 세력이 지금까지 주도권을 잡아왔고, 한국을 연구하는 학계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조선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라고 하는 식의 풍조가 지배해 왔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아사히로 대표되는 좌파 논리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 혐한파의 주된 목표 중 하나다. 최근 '아사히 배싱(때리기)'은 단순히 아사히의 위안부 강제 동원 기사 철회 및 사과 문제뿐 아니라 이 같은 의도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이 어떻게 일본에 접근하고 또 일본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물론 일본이 변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도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양국이 함께 축적해왔던 화합의 노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 측의 그런 노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제스처를 취한다면, 일본 사회 분위기가 단번에 달라질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을 비판만 한다는 인식을 주면 혐한파와 아베 정권에 성장 에너지를 계속 공급해주는 것밖에 안 된다. 지금의 한·일 사회를 보면 일본보다 한국이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다. 혐한파를 친한파로 돌려놓을 수 있는 능력이 한국에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오구라 기조 교수

오구라 교토대 교수(종합인간학부)는 도쿄대 졸업 후 일본 최대 광고 회사 덴츠(電通)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중 한국에 왔다가 당시 일본과 달리 다이내믹한 사회 분위기에 매혹됐다. 1988년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대에서 동양철학 전공으로 석·박사를 수료했다. 1992년 이후 현재까지 한·중·일 관련으로 20여권의 책을 썼으며 10여권을 편저 또는 일본어로 번역했다.


100자평
74
도움말삭제기준

찬성순반대순관심순최신순
전정출

2014.11.25 07:01:29
한국을 중국 쪽으로 가버리게 한 장본인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이 한국을 이웃으로 취급하기 보다 침략의 대상으로 생각하는데 환멸을 느끼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나...?
답글3
200
20
최은애

2014.11.25 08:33:07
일본이 언제는 한국인을 존중한적 있는가? 과거엔 조용히 차별했고 현재는 들어내 놓고 무시 할 뿐이다.. 한국 탓하지 말고 못된 일본종자의 본성때문이다..
답글작성
28
2
양찬일

2014.11.25 08:20:05
독일 정부는 유태인 피해자들에게 무려 20조원 이상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그런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역사적 사실, 양심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라는 거다. 사람 죽여놓고, 내가 언제 그랬대? 하는 사람과 피해자가 악수를 나눌 수 있다고 보는가? 일본은 그만한 능력과 지성을 갖춘 나라인데 왜 그렇게 하는 행동은 멍청할까? 답답할뿐

이은선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한국 ‘생물(生物)’여성주의의 시각에서

(1) 이은선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한국 ‘생물(生物)’여성주의의 시각에서> 3.1운동백주년이... | Facebook


이은선 20190110
dpoSosnetrg t4 1671f50i9ult06c8nut1600hl672cy0au52tlrh53aJh9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한국 ‘생물(生物)’여성주의의 시각에서>

3.1운동백주년이 다가오면서 한일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자주 올라온다. 그 중에서도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가 종종 인용되고 그에 대한 평가들이 눈에 뜨인다. 나는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가로서 오구라 교수의 한국 이해가 많은 것을 밝혀주고 시사해주지만 큰 맹점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아래의 글은 1년전 대학을 떠나면서 묶어냈던 <세월호와 힌국여성신학>의 서문으로도 썼고, 이후 4월의 한나아렌트학회 월례회에서도 한 번 읽었던 것을 약간 축약한 것이다. 한국적 '생물'(生物, 만물을 낳고 살리는)여성영성의 시각에서 오구라 교수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그가 한국의 고유한 '한국혼'을 놓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오구라교수의 책이 다시 계속 회자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나의 입장을 다시 밝히고자 한다.

1.
 
일본의 귀한 한국학 연구가 오구라 기조 교수의『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쓴 오구라 교수는 지난 1980-90년대 한국에 유학 와서 8여 년 동안 한국 철학을 공부한 뛰어난 지한파이고, 최근에는 한국의 ‘영성’에 대한 관심까지 폭을 넓혀서 이웃나라 한국에 대한 바른 상을 세우려고 분투하는 소중한 한국학 학자이다. 이 책의 글들은 원래 오구라 교수가 199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한류 붐이 막 일어나는 시점에 일본의 한 잡지사 독자들을 위해서 쓴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들을 모아서 낸 문고판의 후기를 보면 저자는 한 때 한국에 살 때 “한국인이 되자”는 결심까지 하면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싶다”라고 소망을 가졌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는 일본에서의 한국 인식이 너무도 왜곡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또한 거기에 더해서 한국인들조차도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인식이 매우 조악하고 허위에 찬 것임을 보고서 자신이 발견한 한국을 ‘놀람’과 ‘찬탄’, 그러나 동시에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한 마디로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고 밝힌다.
 
그러한 저자에 따르면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그것도 특히 유교, 그중에서도 뼛속까지 유교 주자학의 '리(理)'로 체화된 나라로서 그것은 한국이 이웃 일본 등과는 달리 항상 하나의 '도덕'을 지향하는 “도덕 지향성 국가”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거기서 도덕 지향성이란 삶에서 그렇게 도덕과 명분(理)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일을 통해서 현실적 삶에서의 성공과 번영(氣)까지도 함께 얻으려는 한국 사회의 “상승을 향한 열망”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한국 사회를 계속 역동적이게 하고, 지치지 않게 하는 젊음과 패기, 뛰어난 천재의 나라로 만들지만 거기에 바로 한국인들의 깊은 피로(恨)와 외부지향성, 극심한 경쟁 사회의 각축을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이 그처럼 리와 도덕지향의 나라인 것을 드러내는 좋은 일례로 한국에서는 운동선수들조차도 도덕성을 갖추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일을 지적하는데,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에 대한 소개와 칭찬에도 여지없이 그들의 좋은 인성과 도덕성이 수없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
 
지난 여름 안동 도산서원 퇴계학회에서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했던 오구라 교수의 이 지적과 성찰을 읽고 탁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과 학문도 바로 이러한 측면이 많이 있고, 어쩌면 남들보다 먼저 교수직에서 떠나려 하는 것도 그들보다 더 ‘먼저’, 또는 더 ‘많이’ 다시 한 번 ‘도덕성’(理)을 성취하려는 상승열망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어서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책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오구라 교수는 한국인의 이 理 지향성을 단지 지향성 그 자체에서만 평가하면서 거기서의 지향의 내용이나 방향성에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한국에서의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이완용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것을 들어서 그러한 일은 한국에서 민족주의적 ‘리’가 여전히 승하기 때문이고, 언젠가는 그들(친일파)도 “그 나름의 ‘리’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시각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오구라 교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추구(理)했다는 것 자체이지 거기서의 내용(氣)이나 방향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의 관점은 나에게는 오히려 한국 사상(유교)이 끊임없이 넘어서고자 했던 ‘리’(理) 또는 ‘기’(氣) 일원론에 머문 것이고, 그런 면에서 오히려 그가 참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한국적인 특성, ‘리기불이’(理氣不二) 또는 ‘리기묘합’(理氣妙合)의 특성을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3.
 
나는 그렇게 된 이유가 오구라 교수가 한국 사상 또는 유교 사상에서의 ‘종교적(영적)’이고 ‘여성적’인 특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고 하면서 그 철학을 특히 ‘유교’ 철학, 주자학적 ‘도덕’(리)지향성으로 보면서, 그러나 거기서의 도덕은 그 “최고 형태”를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로 여겨지고 있다”라고 적시하고 있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21쪽). 다시 말하면 오구라 교수는 한국 유교를 철저히 하나의 “현세주의적인” ‘도덕 철학’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한국 유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현세적 도덕성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그가 말하는 ‘도덕․권력․부’의 삼위일체를 넘어 그것이 깨지더라도 그 모순과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며 삶을 지속하려는 정신의 노력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을 말한다. 나는 한국 유교에서의 이와 같은 특성-어떻게든 삶과 존재에서 ‘리기 불이성’(理氣 不二性)과 그 통합성을 함께 담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그 ‘종교성’(religiosity)내지는 ‘영성’( spirituality)으로 이름 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측면은 일본인 오구라 교수뿐 아니라 사실 한국 사상가들도 지금까지 크게 주목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영성적 특성을 특히 조선 유교여성들의 지난했던 삶에서 관찰하고, 그것을 오늘 한국적 여성신학과 영성의 구성을 위한 의미로 잘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19세기 조선 여성선비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 )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에 대한 연구가 그 한 예이고, 오늘의 상황에서도 곳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 특성에 대한 연구를 나는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수행하였다.
오구라 교수의 한국 사상 이해에서는 ‘상승’이나 ‘지향’, ‘열망’ 등의 성공의 이야기만 있지 ‘자기희생’이나 ‘비움’(謙虛), ‘겸비’(孝)나 ‘인내’ 등의 이야기는 드물다. 그렇게 그의 이해는 ‘철학’과 ‘도덕’, ‘자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인데, 나는 한국적 유교가 하나의 ‘영성’으로서 단순히 어떤 성취의 상승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고(捨己從人), 스스로가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을 통한 이룸(求仁成聖)의 차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명제보다는 이미 우리가 함석헌 선생 등에게서 들었던 ‘한국은 하나의 뜻이다’라는 명제가 한국적 삶의 특성을 훨씬 더 적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
 
2천 년대 와서 나의 이러한 유교적 여성신학 언어가 다시 서구 여성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 1906-1975)의 것과 많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이나 『정치의 약속』, 『인간의 조건』등에서 나타나는 궁극과 현실의 연결, 전통과 현재의 새로운 관계, 전통과 과거에 대해서 참으로 급진적이고 전복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견실한 보수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 사고의 불이성(不二性)이 내가 유교 영성과 종교성의 핵심으로 바로 여기․이곳의 적나라한 관계의 현실 속에서 그 궁극성(聖․性․誠)을 실현하려는 노력(聖學之道, to become a sage)이라고 본 관점과 매우 잘 상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생각이 적실하다는 것을 최근에 다시 한 하이데거 전기 연구에서 발견했는데, 그 전기 연구가(뤼디거 자프란스키)는 아렌트가 나중에 서양철학의 집대성이라고 하는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의 사상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전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죽음으로 달려감”의 ‘사멸성’(死)을 말하는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탄생성’(生)으로 응답했으며, 하이데거가 이 세계에서 지향하는 개방성을 “각자의 본래성”이라고 본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타자와 함께 하는 행위 능력”(acting in concert)의 ‘다원성’과 ‘공공성’을 강조했고,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세인(Man)의 세계에 빠져있음”을 비판하는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세계사랑”(amor mundi)을 제시했다고 밝히는 것이다(『하이데거』,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243쪽).
 
여기서 서술된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관계에서 드러난 대로 나는 하이데거를 서구 철학 또는 기독교적 사고의 종말로 보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아렌트에게서 보여지고, 그 아렌트적 사고가 한국 전통 여성들의 ‘천지생물生物지심’(천지의 낳고 살리는 마음)의 영성과 잘 연결되며, 인간의 관계와 공적 책임을 강조하는 ‘다원성’과 ‘공공성’에 대한 강조(仁), 그리고 바로 이 낮은 세계에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는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과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한국적 유교 영성의 추구가 아렌트의 ‘세계사랑’과 잘 연결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탐색은 그리하여 그 이후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종교聖․여성性․정치性의 한몸짜기(2011)>나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관계 속에서(2013)> 등으로 묶여졌고,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2016)>의 탐색 등으로 지속되었다.
 
5.
 
이번 저서(『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2018』는 이상과 같은 생각에 있던 내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를 맞아서 어떻게 그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물음들 속에서 그 시간들을 지나왔는가를 보여주는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참사를 겪은 후 이명박 대통령의 시간을 지내고 박근혜 대통령을 맞아서 일어난 참사 속에서 온 국민은 너무나 엄청나고 끔찍한 일이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했고, 특히 당시 그 참사 앞에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유족들과 한국 사회에 보여준 행태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 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나 아렌트의 시각들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세계 제1,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 제국주의와 나치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겪었고, 그러한 끔찍한 재앙들이 어떻게 인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서구 유럽 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과 통찰을 통해서 밝혔기 때문에 그러한 통찰들이 21세기 신제국주의 시대, 기업가 출신 이명박 대통령과 철저히 사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에 일어난 우리의 일들을 파악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또한 한국 교회와 신학이 그러한 종말적 상황과 비극 앞에서 보여준 비신앙적 행태와 무기력, 무능력은 우리가 신앙을 계속해서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세상의 삶과 정치와 경제가 저세상의 삶과 교회와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의 물음을 묻게 해서 앞에서 언급했던 아시아 유교전통과 대화하면서 나온 ‘聖․性․誠의 여성신학’과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이 어떻게 대안을 제안할 수 있는지를 더욱 고민하도록 했다.
 
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한 달 만에 쓰인 맨 처음의 글을 시작으로 해서 이번 참사에서 제일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월호)의 사실적 진실과 정치의 충돌 이야기는 바로 아렌트가 나치 전체주의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대참사에 직면해서 어떻게 정치와 권력에 의해서 사실이 왜곡되고, 은폐․조작되며, 폐기되면서 인간 함께함의 삶이 불가능해지는가의 과정을 살핀 논리가 잘 드러난다. 이렇게 인간 상식과 모든 인간 공동 삶의 생명줄과 토대가 되는 사실과 말이 부패하고 왜곡되었을 때 다시 그 회복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거기서 종교와 정치, 교육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을 우리 시대의 한 평범한 여성의 삶을 통해서 조명해보기도 하였다. 이런 우리의 질문들은 근본적으로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물음과 죽음과 부활, 용서와 약속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다음에 이어지는 질문들은 바로 한국 기독교와 교회, 신학이 전통의 화석화된 신이야기와 부활 이야기 등에 사로잡혀서 이런 대참사의 시기에 오히려 유족들을 교회와 신앙 밖으로 내몰고 여전히 자신들이 견고하게 쌓은 아성 속에서 남아서 자기 것을 지키려는 시도들을 근본에서 흔드는 물음들을 제기한 것이다. 에티 힐레줌이라는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어간 여성의 신앙과 인간적 삶의 모습을 살피면서 세월호 이후의 한국 교회와 유족들의 삶이 어떻게 되어야 할 까를 물었고, 또 이렇게 어린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제일 직면하게 된 죽음과 부활의 문제를 물은 것이 세월호 1주기 이후의 글들이다. 2주기를 맞아서도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고 오히려 유족들이 억압받고 조롱받고 정말 코너에 몰려서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가야할지를 몰라서 매우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부활의 물음을 더욱 급진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7.
 
세월호 2주기가 지나면서 떠났던 산티아고 기행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삶의 질문을 인터뷰 형식으로 고백한 글이 있고, 결국 세월호 유족들의 삶도 포함해서 이런 모든 신앙과 정치와 의식의 물음들은 이 세상에서의 신앙을 지키는 ‘소수자’(pariah)의 물음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상상'(imagination)과 연관되는 것을 말하는데,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즉 너희들의 잘못된 상상을 금하라는 이야기와 그러나 동시에 다시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너희 상상으로 언어와 내러티브에 그려진 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믿고 신뢰하며 살라는 두 차원의 ‘믿음’과 ‘상상’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제 우리 삶의 진정한 문제와 관건은 바로 ‘믿음’과 ‘신뢰’(信)의 문제이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우리 신학(神學)은 ‘신학’(信學), 즉 ‘믿음의 학’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싶었다. 즉 오늘 세월호와 같은 것을 겪고 난 사회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사이에 신뢰와 믿음이라는 것이 다시 가능한 것인지, 무슨 방식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우리 공동 삶의 토대가 되는 말과 사실이 왜곡되고 거짓과 폭력과 고립만이 난무한 세상에서 다시 서로를 관계시키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이제 하나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어떤 의미인지, 우리 공동 삶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용서하고 약속하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지, 이러한 ‘믿음’(信)과 관계되는 것들을 물어가고 탐구하는 것이 나는 세월호 이후의 신학, 특히 한국 여성신학이 몰두해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8.

한나 아렌트는 이 세상이 새로워지는 두 가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녀에 따르면 이 세상의 새로워짐은 이 세상에 ‘늦게 도착한’(belated) 새로운 세대의 새 탄생과 창조에 의해서인데, 그러한 ‘늦게 온 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 늦게 온 자들에게 기성세대의 대변인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서 소개해주고, 안내해주고, 늦게 온 세대가 이 세상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성세대의 ‘세계에 대한 사랑’(amor mundi)을 말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참으로 염려하고 계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세계를 계속 새롭게 하고 책임져나갈 늦게 온 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기성세대의 세계사랑이라는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미투운동’이 크게 번지고 있고, 한국 여성신학이 일찍이 시작하고 탄생시켰던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의 성폭력문제와 성평등의 물음을 어떻게 더 전개시켜나가야 할지의 과제 앞에 다시 섰다. 오늘 교회와 신학이 한없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맛 잃고 빛 잃은 소금처럼 길에 던져짐을 당하는 현실에서, 그리고 오늘 매일, 매 순간에 절박하고 긴급하게 만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큰 난제 앞에서 한국 여성신학이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의 물음 앞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하고, 그것을 체화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희생’이나 ‘비움’, ‘겸비’(謙虛)와 ‘용기’, ‘인내’ 등의 이야기가 우리 것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덕과 철학과 과학의 길옆에서 그들과 함께, 아니면 앞서서 신앙과 믿음과 종교의 길을 가는 것이 한국 여성신학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 모여 함께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로 나눌 때 그 무게와 짐이 감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임을 안다. 그것을 아는 믿음 속에서 함께 그 길을 가고 싶다.



All reactions:103박길수, Sunghwan Jo and 101 others


Myun-joo Lee

"늦게 온 세대에 대한 사랑"이 곧 우리 기성세대가 행하여야 할 '세계사랑'이라~ 가슴을 울립니다.

이은선

Myun-joo Lee 고맙습니다.


2023/10/18

오구라 기조, 왜 한국인들은 극단적으로만 생각하는가? 이종철 2023

왜 한국인들은 극단적으로만 생각하는가?

by이종철Aug 19. 2023

https://brunch.co.kr/@35a0b96c4e334fd/7

Why Koreans? 6탄

교토 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는 일본내 대표적인 지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수년 전 그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2017)를 출간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가 있다. 조선이 '철학의 나라'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조선에서 오직 하나의 리(理)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자 독식하는 현상을 밝힌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 이후 현대에까지 이르러 오늘 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진영논리'도 그런 현상을 대표하고 있다. 그는 <조선 사상사>(도서출판 길, 2021)라는 책에서 일본인의 사유방식과 한국인의 사유방식을 비교해서 두드러진 특징을 기술한다. 이러한 기술은 과거 루스 베네틱트가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서 일본인의 대표적인 특성으로서 한편으로는 평화를 상징하는 국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성을 상징하는 사무라이의 칼로 상징한 것과 비슷하다.


오구라 기조는 한국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사고는 '뒤집기'(개변)라고 보는 반면 일본인의 사고는 '브리꼴라쥬'라고 본다. 일본 문화가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문화에 대해 브리콜라주(수선)적인 포섭 방법을 취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조선은 외부로부터 도래한 사상이 기존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변을 추진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주도 사상으로 사회 변혁을 시도했고, 조선에서는 주자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면서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근대에 기독교가 새로 들어오면서 그런 역할을 했고, 이런 전통은 현대에 들어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공산주의라는 사상(주체사상)이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은 사상이 연속성을 띄기 보다는 새로운 사상에 의해 끊임없이 대체되고 개변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오로지 하나를 쟁취하려는 싸움이 득세하고, 이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 그러다 보니 써움은 목숨을 건 사생결단 식으로 이루어질만큼 격렬해진다. 조선시대 사색당쟁에서 지면 삼족이 멸해지는 전통은 최근의 조국 집안을 도륙내는 검찰의 행태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뒤집기와 부정은 현대인의 한국인들에게도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드러난다. 진영논리가 일상화되면서 지역 간 갈등, 계층 간 갈등, 도능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남여 간 갈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 진보와 보수 간 갈등 등 거의 전반에서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서 했던 일 중에 아무리 좋은 일 조차 다 뒤집어 팽개치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 한다. 최근 김훈 작가가 '내 새끼 지상주의'를 중앙일보에 싣자 기다렸다는 듯 온갖 비난과 증오를 내뱉는다. 구글이나 페이스 북에 보면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김훈에 대해 저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반응이다. 김훈 작가가 핵심으로 생각한 '내 새끼 지상주의'와 '공교육의 죽음'은 아예 관심도 갖지 않고, 오직 그가 조국 교수 부부를 소환한 단 두 줄이 문제삼기 때문이다. 사실 김훈의 이런 논지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빠졌을 뿐 아니라 공교육의 문제를 학부모의 민원으로 치부한 데서 심각한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유리한 비판의 호재를 두고 반대세력들은 오로지 조국사수!의 투쟁 대열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감정적인 반응의 정도가 심해지더니 개딸 등 강성 지지층은 드디어 과거 이문열의 책을 태웠던 악몽을 일깨우려는 듯 김씨의 책을 갖다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한국과 같은 대표적인 문명 국가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극단적 분열 상황에서 중도나 양비를 이야기하면 너무 쉽게 사이비나 회색분자로 매도된다. "양끝으로 떨어지지 말라"는 불락이변(不落二邊)은 불교의 중도 사상의 핵심이고, 중용은 유학의 오래된 경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오래 전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을 강조한 바 있다. 중용은 극단이 빚는 악덕, 이를테면 지나침과 모자람과 같은 악덕을 피하기 위한 중간의 논리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산술적 의미의 중간이 아니라 실천적 이성의 지혜를 요구하는 논리이다. 무엇이 만용이고, 무엇이 비겁인 지는 때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용기라는 중요의 덕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것은 삶의 쓰고 단 맛을 본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통찰이다. 반면 극단적 사고는 쉽게 감정에 휘둘리는 이른바 초짜들의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선명 투쟁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너 죽고 나 살자"는 벼랑 끝 논리가 전부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오랜 고난의 역사를 경험했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삶의 지혜와 통찰로 끌어 올리지 못한 셈이다. 한국인들은 도대체 언제 쯤 철이 들 것인가?


2023/10/12

일본 학자가 본 한국사회의 작동 원리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일본 학자가 본 한국사회의 작동 원리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오구라 기조, 성리학, 리기론
by오태규May 02. 2022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신체 구조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신을 제대로 관조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실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철학, 사상을 전공한 일본 교토대학교의 오구라 기조 교수(인간, 환경연구과)가 쓴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모시는사람들, 조성환 옮김, 2017년 12월)은 타자의 눈으로 한국사회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책이다. 한국 사람이 아닌 외부의 사람이 본 한국이기 때문에 더욱 실체와 가까운 모습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한국 사람이 싫어하는 일본 사람이 썼기 때문에 반발감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오구라 기조 교수와는 인연이 있다. 한일 유식자들이 참가하는 한일포럼 등의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고, 오사카총영사 시절에도 그가 근무하는 대학이 관할지 안에 있기 때문에 때때로 만나 얘기를 나눴다. 한일관계가 대법원의 강제동원 노동자에 관한 위자료 지급 판결(2018년 10월) 이후 한창 악화됐던 2019년 2월에는, 그가 자신이 주관하는 '저고리와 기모노'라는 교토의 연례포럼(교토시 국제교류협회 주최)에 나를 초청해 한일관계 좌담을 한 적도 있다.

국내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부인은 재일동포다. 그의 장인은 총련이 만든 조선대학의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이런 개인적인 인연이 그가 한국, 한국사회, 한국철학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치열하게 공부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사회는 주자학이 사실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사회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 왕조에 의한 사회 전체의 유교화 이후, 한국은 줄곧 유교 국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주자학 국가였다. 체제나 이데오르기가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줄곧 주자학 국가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는 주자학은 '리'와 '기'로 모든 문제를 설명하는데, 한국사회는 기보다 리가 압도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리가 도덕과 이념을 의미한다면 기는 욕망과 현실을 뜻한다. 그런데 기보다 리가 주도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도덕과 이념을 장악하려는 '도덕 쟁탈전'이 모든 분야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급속한 발전으로 이런 모습이 다소 완화되고 다양화한 면도 있지만 사회의 리 중심의 기본 작동원리는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심지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도 연기나 실력 외에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으면 끝장 나는 것도 이런 구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역시 도덕 쟁탈전이 가장 극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되는 분야는 정치 쪽이다. 그는 도덕 쟁탈전을 "도덕을 내세워 권력을 잡은 세력이 얼마나 도덕적이지 않은가를 폭로하는 싸움"이라고 정의한다. 이 설명은 바로 20대 대선 선거전에서 우리가 목도했던 바를 연상시킨다. 정책보다는 상대 흠집내기로 일관했던 20대 대선의 선거전이 특수한 양상이 아니라 우리 정치의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유교 사회의 지식인은 죽을 때까지 도덕으로 싸우는 격투기 선수"로 비유했는데, 20대 대선에서 활약한 지식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이전투구를 하지 않았던가.

이 책은 한국 사람이 잘 보지 못하는 한국의 모습, 한국사회의 작동원리를 객관적으로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하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정말 한국 사회가 그가 말하듯이 주자학의 선악관, 리기론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사회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는 이 책이 한국에 대한 찬탄과 비판의 책이라면서 찬탄은 제목의 '철학'이란 말에 비판은 '하나'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한국사회는 '주자학 원리주의'"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찬탄보다는 비판에 방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오만하게도 한국 사회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느낌을 내내 받았는데, 저자 스스로 후기에서 오만과 건방짐을 각오하고 쓴 책이라고 설명하니 오해가 다소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한 권으로 한국에 대한 모든 의문을 해소해주겠다는 저자의 태도는 겸허함과 거리가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후기 마지막에 한국과 일본의 대학이 "서양적 세계관의 대리인들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지배되고 있다"고 지적한 대목은 경청할 만하다. 그는 "특히 최근에는 한국 연구라는 분야에 과거에는 없던 '우등생'이라는 사람들이 대거 가담하게 되어, 이 식민지화는 더욱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권위를 인정받은 저명한 서양적 세계관(방법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한국을 인식했다는 흉내를 내고, 적당한 논문을 써서 대학에서 자리를 얻고, 대량의 예산(세금)을 확보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하는 주구들을 나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결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는 2011년에 쓴 문고판 후기에서 "다시 한 번 내가 한국에 접근하는 일이 있을까, 한국이 나에게 접근하는 날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남겼지만, 2017년 11월 다시 <조선사상전사, 치쿠마신서>라는 대작을 들고 다시 한국에 접근했다. 이 책은 조선사상사(길, 이신철 옮김, 2022년 3월)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됐다.

2023/10/11

Sejin's Library search 조성환


Sejin's Library search 조성환
=====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19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2.
  •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3.
  •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4.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20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스프링분철 서비스 이용이 가능한 도서입니다. 자세히보기
5.
  • ePub
  •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 퇴계ㆍ다산ㆍ동학의 하늘철학 
  • 조성환 (지은이) | 소나무 | 2022년 6월
  • 17,600 (종이책 정가 대비 20% 할인), 마일리지 880원 (5% 적립)
  • 3.83 MB | TTS 지원
  • 이 책의 종이책 : 19,800원 종이책 보기
6.
  •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 이 책의 전자책 : 15,400원 전자책 보기
7.
  •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 이 책의 전자책 : 17,600원 전자책 보기
8.
  • 이 책의 종이책 : 11,700원 종이책 보기
9.
  •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10.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19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11.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19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12.
  •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13.
  •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14.
  •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15.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19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16.
  •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
17.
  •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
  • 이 책의 전자책 : 10,400원 전자책 보기
18.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21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지역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