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9

18세기 조선 성리학, 여성 주체를 일깨우다-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이은선 2022 주간기독교

<한국信연구소 오늘, 22.07.01(금)>
-한국페미니스트신학자의 유교읽기13-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드디어 18세기 임윤지당에게 왔습니다. 임윤지당과 더불어 다음 편 강정일당의 삶과 사유를 해석하면서 저는 '사유하는 집사람'이라는 언어를 썼고, 특히 이들 여성의 삶을 통해서 조선 성리학의 도학적 정신과 그 성속일여적 종교성이 지극한 수준에서 체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얼마전 한국 헤겔학회에서 오구라 기조 교수의 저술,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사>에 대한 이해가 다루어졌는데(이종철 교수), 저는 그 논평자로서, 오구라 기조교수가 놓친 조선 유교 종교성과 영성의 진면목은 그 도덕적 理추구가 명예와 돈과 함께 가는 상승적 理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겸비와 자기하강, 자기비움의 그것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 도학의 진정한 理지향성이고, 하학이상달적 유교 종교성이며, 18세기 조선여성들의 지난한 삶 속에서도 고유하게, 아니 더 진실된 모습으로 체현되어 왔다고 밝혔습니다.

매우 예민한 해석이고, 특히 오늘 서구 페미니즘 시각에서 볼 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 서구적 시각과 한국 유교 영성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저의 오랜 시도 속에서 오늘 21세기 모두에게, 여남의 구분을 떠나서 긴요한 '집의 회복'과 '사유와 삶의 하나됨'의 예시가 저는 조선 성리학 여성들의 삶에서 18세기 이후로 가능해지는 과정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 중층적이고 예민한 물음이 두 편의 짧은 글에 잘 나타났는지 여러분들의 일독과 질정을 기다립니다.


18세기 조선 성리학, 여성 주체를 일깨우다-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 주간기독교 2022



18세기 조선 성리학,
여성 주체를 일깨우다-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기자명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승인 2022.06.29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13

지난 편에서 성호 이익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어떻게 18세기 조선 성리학이 중국에 대한 오랜 속국 의식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독자적인 역사 인식과 주체적인 학문 방식을 찾아갔는지를 살폈다. 이와 유사한 주체의식의 전개가 국가의식만큼이나 기초적이고 포괄적인 성(性) 인식에서 일어났는데, 바로 18세기 조선의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으로부터 분명하게 표현된 도덕적, 윤리적 주체로서의 여성 의식의 자각을 말한다. 그런 가운데서 유교의 가부장주의나 (여)성억압적 차별의식은 오늘날까지도 그 악명을 덜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21세기 디지털 문명혁명 현실에서 지금까지 실재했던 많은 분리와 구분이 크게 해체되고 있는데도 잘 가시지 않아서 특히 여성들에 의한 유교 포비아는 여전하다.

유교에 씌워진 ‘반(反)여성주의’ 이름은 맞기도 하고, 한편 과한 오명이기도 하다. 한국 여성사 전개를 말할 때 보통 고려 시대에는 여성들의 이혼과 재혼이 훨씬 자유로웠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가 조선 시대보다 더 높았다고 하거나, 조선 중기까지도 이어진 자녀 간 재산균분상속제도 종종 유사한 근거로 거론된다. 하지만 그 속 사정을 더 들여다보면, 고려 시대의 혼인은 중혼의 폐해가 심했고, 근친혼의 풍습도 늦게까지 사라지지 않았으며, 일부일처제가 강조하는 처(안방)의 권리가 세워지지 않아서 남성들이 조그마한 정치적, 물질적 이익 앞에서도 쉽게 처를 버리고 다른 여성들과 이중 삼중으로 혼인을 맺기가 쉬웠다고 한다. 당시 여성 혼자서 독립적인 생활을 누리기 어려웠던 사회경제적 여건 아래에서 손쉬운 이혼은 여성에게 도리어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거기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집안의 여성들은 쉽게 버림받을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말하고, 실제 그러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이은선, “유교와 페미니즘-그 관계 맺음의 해석학”, 『유교, 기독교 그리고 페미니즘 2003』, 188쪽). 재산의 균등분할도 16세기 후반과 17세기 후반의 큰 인구 증가로 효율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서는 토지가 더는 작게 나뉘어서는 안 되므로 출가한 딸에게까지 계속해서 상속하기 어려운 시대적 한계가 있었을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Martina Deuchler,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1992, p.225). 이러한 모든 정황은 인류 문명의 가부장주의 시기를 꼭 양성 대결적 성 갈등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의 한계를 보여준다.

임윤지당은 조선 후기 율곡 이후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과 관련해서 한 독자적인 길을 간 녹문 임성주(鹿門 任聖周, 1711-1788)의 여동생이다. 당시 여성들이 글을 읽고 책을 쓰는 문해력으로부터 거리가 멀었던 시기에 그녀는 인간 도덕적 본성(性)과 마음(心)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오빠 임성주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글 읽는 것을 배우고, 유교 경전과 역사책을 학습하였다. 임성주는 앞에서 하곡 정제두나 성호 이익 등의 추구에서도 보았듯이, 율곡 이후 조선 후기 성리학 전개에서 핵심적인 쟁점으로 떠오른 인간 본성의 ‘자발성’ 확보 문제와 그와 연결된 세계(物)와의 관계 설정 물음(인성과 물성이 같은가 다른가人物性同異論)에서 종래의 관념론적 추상적 이해를 과감히 뛰어넘고자 했다. 그는 본성(性)에 대한 관심보다는 여기 지금의 마음(心)에 훨씬 더 집중하면서 리理와 기氣를 동체로 보고(理氣同實), 또한 그것이 인간 현실에서 표현되는 심성론에서도 본성과 마음을 하나로 파악하면서(心性一致) 마침내는 성인聖人과 평범한 범부凡夫의 마음이 모두 한 가지로 선한 도덕적 능력을 지닌 것을 강조했다(聖凡心同).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던 임윤지당은 그러한 오빠 임성주의 세계 이해를 잘 받아들였다. 하지만 임성주, 임윤지당, 막내 임정주(任靖周, 1727-1796)로 연결되는 녹문가의 학문에서 그녀가 오빠의 학문을 단지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히려 임성주의 심성론보다 여기 지금의 구체적 심의 선한 능력(“天地生物之心”)에 대한 강조로 모든 사람의 평등한 윤리적 실천 능력을 훨씬 더 명료하고 단순하게 확보했다는 것이다(김현, “현실적 도덕 주체성의 확립/녹문학파”, 『조선 유학의 학파들, 1996』, 426쪽).

“… 아아! 내 비록 부인이기는 하지만, 부여받은 성품(性)은 애초에 남녀 간에 차이가 없다. 안연이 배운 것을 배울 수는 없다 해도, 성인(聖人)을 앙모하는 뜻은 간절하다. 그러므로 간략히 소견을 펼쳐 여기에 서술하여 나의 뜻을 덧붙인다”(「극기복례위인설」,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이와 같은 성인지도聖人之道를 향한 간절한 마음과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비록 남성들처럼 자신의 공부를 모두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틈틈이 자신의 깨달은 바를 글로 적어나갔고, 사후에 남동생과 시동생에 의해서 유고로 정리되었다. 그 유고가 조선 여성에 의한 본격적인 성리학서로 전해졌다. 19세에 원주 선비 신광유와 혼인했지만 8년 만에 사별했고, 난산 끝에 낳은 아들이 어려서 죽자 양자를 들였으나 그 아들도 그녀가 40세 때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생가와 양가의 두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47세 때에 집안의 큰 어른이 되어서 모든 가사를 처리해야 하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녀가 밤 시간을 이용해서 쓴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이나 「인심도심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 「예악설禮樂說」, 「극기복례위인설」 등은 당시 조선 지성 세계의 모든 주요한 안건들을 한 자리에서 논한 논설문들이었다. 이러한 저술들에서 그녀는 여러 차원의 성찰과 논의를 거듭하면서 어떻게든 리기묘합理氣妙合적이고, 심성불리心性不離인 전일적 사고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여성으로서 현실을 살아가면서 훨씬 더 경험적으로 겉과 속, 현실과 본질, 세상과 이상의 연결을 간파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가운데 그러나 제일 중요한 관건은 『중용』 20장의 언술대로 “성취하면 똑같이 된다(及其成功一也)”라는 의미라고 강조한 것이 두드러진다. 그녀는 중국 역사 인물 중에서 특히 안연을 좋아하였고, 안연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99%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고 말하는데, 그 안연처럼 사람들이 자신에게도 요순과 같은 지극한 선한 성품이 있는 줄 알고 힘써 배워서 같은 점은 확충하고 다른 점은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설득시키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임윤지당의 인물성론은 오빠 임성주의 주장과는 달리 동론同論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고 평가받는다(이은선, “임윤지당의 성리사상과 유교 종교성”,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2009』, 118쪽).

임윤지당은 『중용』을 깊이 연구하여 「중용경의」를 지었다. 이미 심을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마음)’으로 파악한 그녀는 마지막 총론에서 『중용』이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도에서 가히 떠날 수 없다’라는 뜻을 밝힌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愼獨)’를 “만사의 핵심”이라고 하고, 그것이 “성현의 학문에서 시종을 꿰뚫는 대목”이라고 지적한다(이영춘, 『국역윤지당유고, 2001』, 230쪽). 오빠 임성주도 『중용』을 중시하여 홀로 산에 들어가 50일간을 은거하며 해설서를 냈다고 하는데, 특히 16장의 귀신의 덕에 관심이 지대했고, 그녀도 16장을 해석하면서 귀신을 이기理氣의 어느 편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가의 물음에서 먼저 리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고 하지만, 그 “은미하고 광대함(費隱)” 앞에서 후일의 연구에 대비하고 진리를 아는 자를 기다린다고 고백한다(『국역윤지당유고』, 219-220쪽). 그녀의 『중용』이해는 20장 후반부터 나오는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至誠如神)’의 ‘성誠’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고, 그러한 통찰들은 ‘도에서 떠날 수 없다’라는 명제와 잘 일치하면서 18세기 조선 여성에 의해서 구현된 극진한 성실성과 지속성, 진실한 실심으로서의 誠의 영성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한 여성이 수많은 역할 속에서 지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러한 삶의 모든 부분에서의 일이 결코 도를 실현하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그래서 자신은 한순간도 도에서 떠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유교적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의 종교성이 극진히 표현된 예라고 본인은 이해한다. 어느 남성의 그것보다 덜하지 않은 유교 성인지도聖人之道의 참된 실행이고, ‘사유하는 집사람’으로서 이룩한 유교 성인지도의 종교성과 영성의 예가 50여 년 후 또 다른 여성 선비 강정일당(姜靜一堂, 1773-1832)에게 어떻게 전수되었는지를 다음 편에서 계속 살피며 오늘 페미니즘 시대에서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cnews19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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