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9

二宮尊徳 손토쿠 - Wikipedia Ninomiya Sontoku

니노미야 손토쿠  - Wikipedia

二宮尊徳

니노미야 존덕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니노미야 존덕
존덕자상( 오카모토 아키요시 , 보덕 박물관 창고)
시대에도시대
탄생천명 7년 7월 23일 ( 1787년 9월 4일 )
사망안마사 3년 10월 20일 ( 1856년 11월 17일 )
별명통칭 :금지로(김지로), 호:존덕
계명성명원 공예보덕 중정거사
묘소도쿄도 분쿄구 의 스와야마 키치죠지
관위선종 4위 (메이지 24년)
막부에도막부
주군오오쿠보 타다 마사 , 도쿠가와 가제 → 가케이
사가 미 오다와라 번사 , 막신
부모아버지: 니노미야 리우에몬 (백성)
어머니:요시(카와쿠보 타이베에의 딸)
형제존덕 (가네지로)
토모요시(죠고로), 토미지로(조세)
아내실:키노(나카지마 야미오에몬의 딸, 나중에 이연
)
아이도쿠타로(토이타로), 존행 (야타로), 후미(후미코. 토미타 타카 케이실)
입양: 리카 (가와쿠보 타이베에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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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존덕
인물정보
탄생천명 7년 7월 23일 ( 1787년 9월 4일 )
사가미국 아시가라 카미군
사망안마사 3년 10월 20일 ( 1856년 11월 17일 )
시모노 쿠니 쓰가군 이마이치무라
배우자버섯, 나미
부모아버지 : 리에몬
어머니 : 요시
어린이도쿠타로, 존행, 후미
학문
연구분야경세, 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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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손토쿠 にのみや そんとく  

에도 시대 후기 경세가 , 농정가 , 사상가 이다. 자필 문서에서는 긴지로 (金治郎)라고 서명하고 있는 예가 많지만, 일반적으로는 「긴지로」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1] . 또한의 '존덕'은 정확하게는 ' 타카리 ' 라고 읽지만, ' 그렇게'라는 독서로 정착하고 있다 [2] .

경세제민을 목표로 보덕사상을 외치고 보덕사법 이라 불리는 농촌부흥정책을 지도했다.

평생 편집 ]

사가미국 아시가라 카미군栢山村(현재의 가나가와현 오다 와라시栢山(카야마))에, 백성二宮利右衛門[주석 1] 의 장남으로서 태어난다. 어머니는 소가베쓰쇼무라·카와쿠보 타이베에의 딸·호(요시). 존덕의 동생에는 니노미야 사부로 사에몬의 양자 토모요시(죠고로)와 토미지로가 있다.

존덕은, 우선 호리노우치무라의 나카지마 야미오에몬의 딸·키노(키노)를 아내로 하지만, 이연. 이어 20세 젊지만 사숙 온난한 이즈미무라의 오카다 미네오에몬의 딸 나미(나미코)를 불렀다. 후자는 현부인이라고 불린다. 자식은, 버섯 사이에 장남의 도쿠타로가 있었지만 해절하고 있어, 나미와 사이에, 적남의 존행(야타로), 장녀 후미(토미타 타카케이실)

어린 시절 편집 ]

당시 栢山村은 오다와라 번영이었다. 부리 우에몬은 양부은 우에몬으로부터 13석의 논밭과 저택을 계승하고 있어, 당초는 풍부했지만 산재를 거듭하고 있었다. 거기서, 긴지로가 5세 때의 관정 3년( 1791년 ) 8월 5일, 남관동을 덮친 폭풍으로, 부근을 흐르는 사카 노가와 의 사카구치의 제방이 결괴해, 긴지로가 사는 히가시도산 일대가 탁류로 밀려났다. 그 영향으로 아버지의 타바타는 모래로 변해 집도 유실했다. 개간 에 종사해 타바타는 수년에 복구했지만, 차재를 안고 가계는 가난하다.

관정 9년( 1797년 ), 아버지가 안병을 앓는다. 김지로 12세 때, 사카노가와 제방 공사 의 부역 을 아버지를 대신해 맡았지만, 연소 때문에 일이 부족하다고 우울해, 스스로 밤에 잔디를 만들고 배포해 헌신 했다 . 이 무렵, 절에 담겨 있던 동생 토모요시가 견디지 못하고 절에서 돌아왔다. 관정 12년( 1800년 ), 아버지의 질병이 악화되어 9월에 몰린다. 어머니 요시가 일하기 위해 전년에 태어난 토미지로를 사람의 집에 맡기지만, 유장이 심해서 집으로 되돌린다. 14세의 김지로가 아침은 일찍 일어나 쿠노야마에 장작을 찍고 , 밤에는 쿠사나리 만들기를 하고, 일가 4명의 생계를 세웠다.

향화 2년( 1802년 ), 빈곤 속에서 어머니가 죽었다. 아직 어린 두 남동생 은 어머니의 친가가와 쿠보가에게 맡기고, 김지로는 할아버지(백부 그러나 이 해에 또 사케가와가 범람해, 김지로의 토지는 수해에 습격되어 모두 유출해 버렸다.

김지로는 본가·할아버지의 집에서 농업에 힘쓰고 몸을 가루로 하여 일했지만, 케치한 만병위는 김지로가 밤에 독서를 하는 것을 “등유의 낭비”로 싫어, 종종 입 더럽게 매달렸다 . 거기서 김지로는 책을 강구해, 제방에 아브라나를 심어, 그러면 유채 기름을 취해 등유로 했다. 또, 모내기 때에 남아 버려진 모종을 용수 해자에 심어, 미이치바키의 수확을 얻었다.

문화 원년( 1804년 ), 만병위의 집을 떠나, 동촌의 친족·오카베 이스케 방에 기숙. 이 해에 여경의 고타쿠를 얻고, 다음 해는 친척으로 명주의 니노미야 시치사에몬쪽에 기숙 . 또한 여기에서 여경의 20개를 얻어 문화 3년( 1806년 )에 집으로 돌아와 20세에 생가의 재흥에 착수한다. 집을 수리하고, 질입전지의 일부를 다시 사고, 논밭을 소작 에 내는 등 수입 증가를 도모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생 토미지로는 요즘 죽었다.

생가의 재흥에 성공하면, 김지로는 지주·농원 경영을 실시하면서 자신은 오다와라에 나와, 무가 봉공인으로서도 일 했다 . 또, 이 무렵까지, 신장이 6척(약 180센티강)을 넘고 있었다고 하는 전승도 있다. 체중은 94kg [3] 있었다고 한다. 오다와라 번사의 이와세 사베에, 마키시마 소우에몬 등을 섬겼다.

청소년 시대 편집 ]

문화 5년( 1808년 ), 어머니의 친가가와 쿠보가가 빈궁하면 이를 자금 원조해, 다음 해에는 니노미야 총본가 이우에몬터의 재흥을 선언해, 기금을 시작했다. 그 무렵 오다와라 번에서 1,200개 이시토리의 가로를 하고 있는 핫토리 주로 효위가 친족 의 조언에 의해 김지로에게 핫토리가의 가정 재건축을 의뢰했다. 김지로는 5년 계획 절약으로 이를 구할 것을 약속하고, 문화 11년( 1814년 )에 핫토리가의 재무를 정리해 천량의 부채를 상각해, 잉여금 300량을 주었지만, 스스로는 일전의 보상도 받지 않았다. 이 평판에 의해 오다와라 번내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문화 13년( 1816년 ), 전년에 집으로 돌아온 토모요시(죠고로)를 만병위의 장남·사부로 사에몬의 입양으로 해, 스스로도 최초의 아내를 불렀다. 문정 원년( 1818년 ), 번주 오오쿠보 타다마사 가 효자절부 기특자의 표창을 했을 때, 그 중에 김지로의 이름도 있었다.

분정 2년( 1819년 ), 갓 태어난 장남이 가후절. 가풍에 맞지 않는다는 구실로 아내 키노가 이별을 제기했기 때문에 이연했다. 이듬해 34세의 김지로는 16세의 나미와 재혼했다. 같은 해, 충진공이 민간의 건의를 요구했을 때, 김지로는 공미 영수장의 개정을 건언. 이것이 채용되어 두량을 개정했다. 또한 오다와라 번사를 위한 저리조대법 및 오상강을 일으켰다.

분정 4년( 1821년 ), 두 번째 이세예 에서 돌아온 긴지로는, 오다와라 번주 오오쿠보가의 분가·우츠가 의  모토 지행  였던 시모노 쿠니 요시가군 사쿠라 마치[주석 2] 가 황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재흥구제를 번주로부터 명령받았다. 분정 6년( 1823년 ), 김지로는 명주역·고5석 2명 부지의 대우, 이동료 쌀 50개, 근무료 쌀 200개 50금을 급여, 사쿠라마치에 이주해 재건에 착수했다 .

분정 9년( 1826년 )에는 우츠 가문 가신·요코야마 슈헤이가 동역근번이 되어 에도에 갔기 때문에, 김지로가 조두격으로 승진해 사쿠라마치 주석이 되었다. 재건은 촌민의 저항에 있어 난항하고 있었지만, 덴포 2 년( 1831년 )에는 정미 426개를 납입하는 성과를 올리기에 이르고, 같은 5년에는 1,330개를 반납해, 같은 7년에 는 봉지 4,000석 900석의 곳을 실수 3,000석으로까지 늘렸으므로, 분도(지출의 한도)를 2,000석으로 정해 재건을 이루었다. 그 방법은 보덕사법 으로서 다른 범주가 된다. 다만 이들 부흥정책은 반드시 잘 갔다는 것은 아니고, 마을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상사인 도요타 마사루에 방해되었을 때는 갑자기 행방 불명 이 되었다 . 곧 나리타산 에서 금식 수업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마을사람들의 반감도 없어졌다고 한다.

만년 편집 ]

텐포 3년( 1832년 )에는 사쿠라마치보다 미사토 앞의 상륙국 마카베군 아오키무라 의 기 모토 가와 부카츠 사부로로부터 의뢰를 받아 전수. 텐포 4년( 1833년 )부터 덴포 7년(1837년)에 걸쳐 덴포의 대기근이 관동 에 피해를 가져온다. 텐포 5년( 1834년 )에는 타니다부 호소카와가의 가정을 나카무라 현순을 통해 개선. 텐포 7년(1836년)에는 시모노 카라스야마 번 (번 주는 오오쿠보 충보)의 재정 재건을 맡겨 궁민의 긴급 구제로부터 착수해, 이어 황무지의 개간 사업에 임했다.

텐포 7년( 1836년 ), 중병의 충진공에 의해 오다와라에게 불리며, 공적을 수상함과 동시에, 기근에 있는 오다와라의 구제를 명령 받는다 . 스루가 · 사가 미·이즈 의 미슈의 구제는 긴급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김천양을 주어진다. 김지로는 오다와라 가신과 협의해, 자메를 방출해 마을들을 구급.

유식의 존덕묘(닛코시 이마이치의 보덕 니노미야 신사)
존덕묘(도쿄도 분쿄구의 키치죠지)

텐포 9년( 1838년 ), 이시카와씨의 하관 의 소령 1만 3,000석이 3분의 1로 감수하고 있던 것을 부흥해, 3만금의 부채를 상각해, 분도외의 잉여 500바위 을 꺼낸다. 텐포 11년( 1840년 ), 이즈의 다이칸 에가와씨의 초대를 받고, 타카타군 타다 야지차 우에몬가를 재흥.

텐포 13년( 1842년 ), 막부에 부름받아, 보청역격이 되어 인바누마 개척·도네가와 리수 에 대해서 2건의 제안을 실시했지만, 결국, 그것은 채용되지 않았다. 이듬해 막부 직할령( 천령 ) 시모총대생향촌의 마법을 명령받고 홍화 원년( 1844년 )에는 닛코산령의 마법을 명할 수 있다. 이듬해, 시모노 마오카의 다이칸 야마우치씨의 속우가 되어, 마오카에 이주. 닛코 신령을 돌고 닛코 봉행의 부하로 마법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3번째의 병을 발해, 야스마사 3년(1856년) 시모노쿠니 이마이치무라(현재의 도치기현 닛코시 ) 의 보덕 관공서 에서 몰 했다. 향년 70.

계명 은 세이묘인 교예보덕중 정거사. 메이지 24년( 1891년 ) 11월 16일에 종 4위가 추증되고 있다 [4] . 무덤은 도쿄도 분쿄구 의 스와야마 키치죠지 .

일화 편집 ]

존덕에 관해서는 많은 일화가 남아 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 전기 등에 많이 기술되는 대표적인 일화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들 일화의 대부분은 제자인 도미타 타카케이 가 현저한  덕의 전기 '보덕기'를 유래한다. 다만 존덕 자신은 어린 시절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카케이는 마을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고, 이러한 일화에 대해서는 타카케이 자신도 신빙성은 보증할 수 없다고 한다[5 ] .

오다와라 시대 편집 ]

  • 일두공을 개량하여 번내에서 통일규격화시켰다. 장교가 부정한 고개를 사용하여 양을 속이고 차분을 횡령하고 있던 것을 이것으로 막았다.
  • 절약을 장려해, 카마도반으로부터 남은 장작을 돈을 지불해 다시 되찾았다.

사쿠라마치 시대 편집 ]

  • 가지 를 먹은 곳, 아직 여름 앞인데 가을 가지 가지 맛이 있었기 때문에, 그 해는 냉 여름이 될 것을 예측 . 마을 사람들에게 지시 해 냉해 에 강한 희를 대량으로 심었다. 존덕이 예측한 대로 그 해는 냉 여름이 되어, 덴포의 대기근이 발생했지만, 사쿠라 마치에서는 히에의 축적이 충분히 있었던 덕분에 아사자가 나오지 않았을 뿐, 여분의 히에를 주변의 마을들에게 나누어 준다 수 있었다는 [주석 3] .
  • 개간해 얼마 지나지 않은 논밭은 기존의 논밭에 비해 조세 부담 이 가벼운 것에 주목하여 새로운 논밭의 개간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주석 4] .
  • 마을 사람들의 개척 작업을 둘러보고 있었을 때, 한 남자가 다른 마을 사람들의 몇 배나 격렬한 기세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러한 기세로 하루 종일 계속 일할 리가 없다. 는 타인이 보고 있을 때만 열심히 일하는 흔들림을 하고, 그늘에서는 게을리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울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남자의 부정을 엄격히 꾸짖었다고 한다.
  • 한편, 나이가 들고 무력하면서도 음날 없이 진지하게 일하고,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나무의 그루터기를 파내는 번거로운 작업을 매일 꾸준히 계속해 온 이득 노인에 대해서는, 개간  방해 한 나무의 그루터기를 그가 전부 제거해 준 덕분에 다른 마을 사람들의 작업이 쉬워져 개간이 벌어졌다는 이유로 보통 임금 외에 위로금으로 15량의 대금을 주었다고 한다 .
  • 나리타산에 끌려들었을 때, 거기서 만난 노파에게 가르쳐, 오타니 산시와 만나, “농민이나 관리가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 가장 중요한 것은 부흥 그렇다면?」이라는 오타니의 말로, 우선 장교와 마을을 개심시키려는 자신의 완전주의에 무리가 있다고 깨닫고, 설득보다 부흥 작업을 우선 개시하려고 결심해, 사쿠라마치에 돌아갔다고 한다 [ 6] .

평가 편집 ]

  • 카츠카이후나「니노미야 존덕은 한 번 만났지만, 굉장히 정직한 사람이었어. 전체 그런 시세에는, 그런 인물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자손 편집 ]

  • 니노미야 존행 - 두 남자 . 통칭, 야타로. 분정 4년( 1821년 ) 출생. 존덕의 장남 토쿠타로가 생후 곧 몰렸기 때문에 능남이 된다. 존덕몰 후에도 보청역의 생명을 받아 유지를 계승해 닛코산령 89마을의 마법을 추진했다. 가나가 5년(1852년) 4월, 오미 오미 조 번사 ·미야케 요모의 딸·코코(코코)와 시모노국 도고 진야에서 결혼한다. 게이오 4년( 1868년 ) 6월,戊辰戦争의 전화가 이마이치에 및 어머니, 처자와 육오상마 나카무라 번영 내로 옮겼다. 이에 따라 닛코산령의 마법은 중단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존덕부인(카코)과 존행몰한다.
    • 니노미야 존친 - 존행의 장남 . 통칭은 가네노스케, 김이치로. 안정 2년( 1855년 ) 11월 16일생. 메이지 4년(187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록 700석을 급여받는다. 메이지 10년(1877년), 보덕농법을 민간에서 실천하기 위해, 도미타 다카요시를 사장으로 흥복사가 설립 되어 , 부사장에 사이토 고행이 취임하지만 곧 존친이 취임했다. 도미타 다카케이가 몰리면 사장으로 취임하여 신천지에서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메이지 29년(1896년)에 사원과 탐험대를 조직해, 개간에 적합한 토지를 찾아 주위, 우시슈베츠하라노  발견 했다. 메이지 30년( 1897년 ), 제1기 이주민 75명과 함께 홋카이도 토 요코무라 마을 (현재의 토 요코로마치 시게이와 지구 )에 이주해 니노미야 농장 으로서 토요코로 무라 우키슈베츠(우시슈베츠)하라노를 10년에 840ha도 개척하고, 택지나 방풍림 등을 포함해 흥복농장 은 1,345ha에 달하는 대농장이 되었다. 또 그동안 어머니의 鉸子는 존친의 아들 토쿠 (토쿠)를 삿포로에 살고 양육했다. 메이지 40년(1907년), 개척이 일단락했기 때문에, 다시 소마에 내주해, 아내는 보덕 부인회 회장이 되어, 존친은 나카무라성 산의 환적에 있는 소마가 사무소에 집사로서 근무해, 「보은 전집」 의 편찬을 했다. 그 후, 은행의 이사, 다이쇼 6년 후쿠시마현립 가오루 도원 원장, 다이쇼 8년(1919년)에는 보덕학원 2대째 교장에 취임했다.
    • 도미타 타카히데 - 존행의 두 남자 . 통칭, 노노노스케. 안정 5년(1858년) 출생. 도미타 타카케이 의 딸과 결혼해 타카케이의 입양이 된다. 딸은 소마가에게 며느리다.
  • 니노미야 세이조 - 존덕의 현손 .

문인 편집 ]

  • 도미타 타카케이 - 리쿠오 소마 나카무라 번사 사이토 (토미타) 가타카의 차남. 소마 나카무라 번사. 통칭은 쿠스케. 홍도 임재라고 호한다. 존덕의 아가씨. 문화 11년(1814년) 출생. 번세계의 소마 충원의 근사가 되지만 번 부흥의 뜻 아래 에도에 나온다. 텐포 10년(1839년) 6월 1일, 입문. 4대문인 중 한 명으로 보덕사법을 지지했다. 존덕의 한팔로 활약해, 가나가 5년(1852년)에 존덕의 딸·분코와 결혼하지만, 다음 해 출산으로 돌아온 친가에서 모자 모두 죽었다. 닛코 마법, 소마 마법에 종사했다. 소마 마법은 존덕의 대리로서 홍화 2년(1845년)부터 폐번치현 까지 영내 226마을 중 101마을을 대상으로 하여 성과를 얻었다. 유신시 존행 일가와 함께 소마로 이주했다. 메이지 2년(1869년), 소마 나카무라 번가 노상석 및 정치 총재가 되었다. 폐번치현 후에는, 메이지 10년(1877년)에 흥복사를 설립해 사장이 되었다. 또 존덕몰 후 '보덕기' '보덕론'을 저술했다. 메이지 23년(1890년), 77세에 몰린다. 니노미야 존행의 차남 고영을 사위양자로 했다.
  • 오토모 카메타로 - 구 막부 아래에서 삿포로 마을 의 개척을 지도. 삿포로 개척의 시조라고 불렸다.
  • 오카다 료이치로 - 4대문인 중 한 명.
  • 사이토 타카유키 - 4 대문인 중 한 명. 도미타 타카케이의 조카. 구메노스케. 홍화 2년(1845년), 입문. 소마 마법의 후반을 타카케이를 대신해 지도했다. 만년에 오하라무라(미나미소마시 하라마치)에 은거해 오하라 산인이라고 호했다. 메이지 27년(1894년) 6월, 76세에 나카무라에서 몰렸다.
  • 후쿠주 마사오 - 홍화 2년(1845년)에 입문.
  • 신부 조교
  • 시가 나오미 - 시가 나오야 의 할아버지.

숭경·기념 편집 ]

니노미야 존덕의 동상(오다와라시 니시오토모)

신사 편집 ]

존덕을 모시는 니노미야 신사 가, 천의 오다와라( 보덕 니노미야 신사 ), 종언의 땅·이마이치( 보덕 니노미야 신사 ), 마법의 땅·도치기현 마오카시(사쿠라마치 니노미야 신사 ) 등에 있다.

보덕 니노미야 신사의 존덕상에는 「경제 없는 도덕은 희언이며, 도덕 없는 경제는 범죄이다」라는 말이 내려져 있다[8 ] .

존덕·금지로상 편집 ]

보덕 니노미야 신사 내의 니노미야 긴지로 동상
콘크리트제 니노미야 긴지로 동상
일본 은행권 A1엔권(유효권)

각지의 초등학교 등에 많이 지어진, 장작을 짊어 지면서 책을 읽고 걷는 모습(「부장독독도」라고 불린다)에 관한 기술은, 메이지 14년(1881년) 발행의 「보덕기」가 초출 로 있다. 거기에는 「대학 의 책을 그리워, 도중 걸음부터 부디 포기하고, 조금 게을리하지 않고.」라고 있다. 이 '책을 그리워'를 '회중'인지 '가슴 앞에서 들고'라고 해석할지는 판단에 헤매는 곳이지만, 김지로상에서는 후자로 해석되고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보덕기'의 존덕유소기의 기술은 신빙성이 얇아서 이런 모습으로 실제로 걷고 있었다는 사실이 있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보덕기'를 바탕으로 한 유키타 노반 저의 '니노미야 존덕 봉'(1891년 10월)의 삽화( 고바야시 영흥 화)에서 처음으로 '부장독서도'의 삽화가 사용되었다. 다만, 이전부터 이미 이 그림에 가까운 소년상은 존재하고 있었다. 김지로의 초상화의 뿌리는 중국의 「주매신도」에 있어, 이것이 카노파 에게 전통적인 화제로서 대대로 전해져, 그 후예의 영흥도 이것을 참고로 했다고 상정된다 [9] [10] . 확인된 최초의 이 모습의 동상은 메이지 43년( 1910년 )에 오카자키 유키나가 가 도쿄조공회에 출품한 것이다. 메이지 37년(1904년) 이후 국정교과서 에 수신 의 상징으로 존덕이 다루어지게 되었다. 초학창가에도 『니노미야 킨지로』라는 곡이 있다. 그러나, 수신국정교과서에는 김지로의 일화는 다루어졌지만, 「부장독서도」는 한번도 게재되어 있지 않다[11 ] . 「부장독서도」가 퍼진 것은 매약판화나 인찰, 어린 이용 의 전기류에 의한 12] .

이러한 학교교육이나 지방자치에 있어서 국가의 지도에 '김지로'가 이용된 경위에는 존덕이 실천한 자조적인 농정을 모델로 하여 자주적으로 국가에 헌신·봉공하는 국민의 육성을 목적 한 통합 정책의 전개가 있었다. 이 「금지로」의 정치 이용은, 야마가타 유토를 중심으로 하는 인맥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특히 히라타 토스케 · 오카다 료헤이 · 이치기 키토쿠 로 등에 의한 지도가 컸다 [13] .

초등학교의 교정 등에서 볼 수 있는 「가네지로상」은, 그들의 정책에 의해 전개된 사회 환경을 전제로 하고, 국가의 정책 논리에 동조하는 것으로 영업 활동을 실시한 석재업자나 석공 등에 의해 보급되었다고 여겨진다 한다. 초등학교에 세워진 「가네지로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다이쇼 13 년( 1924년 ), 아이치현 마에시바무라다치 마에시바 고등 심상초등학교(현 토요하시 시립 마에시바 초등학교 )에 세워진 것이다. 그 후, 쇼와 초기에 현지민이나 졸업생의 기부에 의해 각지의 초등학교에 상이 많이 지어졌다. 입상의 크기는 1 미터 로 되어, 아이들에게 1미터의 길이를 실감시키는데 한몫 샀다고도 한다. 실제로는, 입상은 확실히 1미터가 아닌 것이 많다. 이것은, 1940년경  양산된 특정의 상에 관한 일화가 혼자 걸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상이 전후, GHQ 의 지령에 의해 폐기되었다고 말해지는 일이 있지만, 니노미야 존덕이 점령하의 1946년(1946년)에 일본 은행권(1엔권)의 초상화에 채용되고 있는 것으로 부터 도 , 이미지의 감소와 GHQ는 특별히 관계가 없다. 전전의 상은 청동제 의 것이 많지만, 대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금속공출 에 의해 철거되었기 때문에, 혼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금속공출시에 교육적 배려로서 교사나 아동의 입회 하에서 동상에 활기를 들여 장행식을 거행하고 전지에 내보내거나 철수 후의 받침대에 「니노미야 존덕 선생 동상 대동아 전쟁 노타메 응소」 지폐가 세워진 적도 있었다 [14] [주석 5] .

반도 이치리 는 동상이 금속공출되기 전의 시기에 동상의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조사한 바 있다. 각 학교에 의해 새겨진 문자가 달라, 「충효」의 2문자, 또는 「논어」나 「교육 칙어」의 일절이 새겨지는 것, 혹은 백지의 것까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 .

석상은 그 후의 시대도 남았다. 또, 남은 받침대 위에 새롭게 동상이나 콘크리트상 등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동상처럼 장작을 짊어진 채 책을 읽고 걸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것과 아동이 동상을 흉내내고 책을 읽으면서 도로를 걸으면 교통 안전상 문제가 있기 때문에 1970년대 이후 서서히 철거되어 상 수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현재의 아동의 교육 방침에 맞지 않는다」등의 이유로, 파손해도 보수에 난색을 나타내는 교육위원회도 있다[16 ] . 기후시 역사박물관 조사에 의하면, 시내의 초등학교의 55.1%에 「니노미야 긴지로상」이 존재하고(2001년 현재), 인근 시정촌을 포함하면, 58.5%의 초등학교에 「니노미야 긴지로상」이 존재한다 또, 2003 년 에 오다와라역이 개축되어 다리가미화되었을 때, 덱에 존덕의 상이 새롭게 세워졌다 .

2010년대에 들어가 걷는 스마트폰 의 위험성이 사회 문제가 되었지만, 이 문제를 받아 「이마이치 일엔회」가 2016년에 닛코 시립 남원 초등학교에 기증한 석상은 입상이 아니라 좌상이 되고 있다 [17] .

덧붙여 학교의 괴담 에서는, 「니노미야 가네지로상」이 한밤중의 교정을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전형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니노미야 존덕생가

기념관 편집 ]

존덕 기념관이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栢山에 있다. 인접해 니노미야 존덕생가가 있다. 정비에는 진주 양식 으로 알려진 미키모토 유키요시 가 지원했다 [18] . 또한 오다와라시 미나미마치에 공익재단법인 보덕복운사가 운영하는 보덕박물관이 있다 [19] . 도치 기현 마오카시 에도 니노미야 존덕 자료관이 있다 [20] .

현창비 편집 ]

황폐한 마을을 재건한 존덕의 위업을 칭찬하고, 이바라키현 사쿠라가와시 마카베마치(구 아오키무라)에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노래·가요곡 편집 ]

관련 작품 편집 ]

만화
소설

연기한 인물 편집 ]

사료 편집 ]

현대 디지털 라이브러리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b 利右衛門은 만병위의 차남이자 만병위의 동생인 은우위문 입양이 되었다. 은우위문은 차남보면서 약간의 토지에서 몸을 일으켜 중농까지 된 인물. 만병위는 김지로의 할아버지이지만, 본가와 분가와의 차이가 있어, 본가의 입장에서는 백부이다.
  2.  현재의 도치 기현 마오카시 , 또 합병전의 니노미야초의 마을명의 유래는 존덕이다.
  3. ^ 실제로는 냉해의 몇 년 전부터 히에의 작부를 준비시키고 있던 것을 알고 있다. 존덕은 기근에 대비해 1인당 5俵(약 300kg)씩의 비율로 히에를 축적하도록 마을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4.  당시의 일본에서는, 타바타의 개간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위해, 새롭게 개간한 타바타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일반적으로는 3 - 5년 정도)에 걸쳐 연공을 면제 혹은 대폭 경감하는 제도가 있었다 . 이 제도는 흔히 「괘하 연계」 라고 불렸다.
  5. 여동생 오동 의 「소년 H」에 교장 선생님이 훈시로 「드디어 니노미야 긴지로씨의 동상도 출정하게 되었습니다. 동상은 적을 우울하기 위한 대포의 탄이 됩니다.오늘 여러분은, 하교 할 때 김지로씨에게 헤어져 주세요」라는 장면이 있다. 야마나카 등의 지적에서는 시대가 조금 이른다고 한다.

출처 편집 ]

  1. ↑ 오오토 슈 「인물총서 니노미야 존덕」요시카와 히로후미칸, 2015년 5월, 2페이지. ISBN  9784642052740 .
  2. ↑ 오오토 슈 「인물총서 니노미야 존덕」요시카와 히로후미칸, 2015년 5월, 3페이지. ISBN 9784642052740 . 
  3. 고바야시 고지 저 『니노미야 존덕 -재의 생명은 덕을 살리는데 있어-』미네르바 서방 , 22페이지.
  4. ^ 다지리 사 편 “증위 제현전 증보판 위”(콘도 출판사, 1975년) 특지 증위 연표 p.4
  5. ↑ 이와이(2010) , pp.31-32.
  6.  일본박학 클럽부[도설]역사의 「결정적 순간」(애장판) 전자서적판 주식회사 PHP연구소 2013년 제3장 column
  7.  “해배 전집 제10권”
  8.  「도덕과 경제원리 융합을」 일본의 잠재력2, 경제교실, 일본경제신문, 2014/04/11
  9.  이와이 시게키 「니노미야 킨지로 「부장독서도」원유고」 「일본연구」 제36집, 대학공동이용기관법인 인간문화연구기구, 국제 일본 문화 연구 센터 , 2007년 9월 28일, pp.7- 46.
  10. ↑ 이와이(2010) , pp.200-201.
  11. 이노우에 쇼이치 “노스탈직·아이돌 니노미야 긴지로” 신주쿠 서방, 1989년, pp.32-33.
  12. ↑ 이와이(2010) , pp.142-161.
  13. ^ 이세 히로시 「국민통제 정책에 있어서의 동상과 사회―교정에 「니노미야 긴지로상」이 세워질 때까지―」「스루다이 사학」 제140호, 2010년 8월.
  14. 히라세 레이타 , 「전시하, 학교에서 차례차례 사라진 「니노미야 긴지로상」」(동상은 괴로워 십선 4), 일본 경제 신문, 2013년 12월 18 일
  15. 반토 이치리 "역사에 "무엇을"배우는지" 치쿠마 프리머 신서 2017 년 ISBN 978-4-480-68987-0 pp.79 - 80.
  16. 니노미야 킨지로 동상 : 근면 정신 지금은 옛날, 각지에서 철거 잇따른다
  17. 걸으면서는 위험하기 때문에···긴지로도 “자상”에 닛코·미나미하라 소에서 제막식 시모노 신문 , 2016년 3월 3일 열람.
  18. ↑ 미키모토 유키요시의 니노미야 존덕 현창 공익 재단법인 오쿠라 정신 문화 연구소
  19. ↑ 보덕박물관 공익재단법인 보덕복운사
  20. ↑ 니노미야 존덕 자료관 마오 카시 공식 사이트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Ninomiya Sontoku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Ninomiya Sontoku
二宮 尊徳
Since the Meiji period, statues of Ninomiya have been installed in many schools in Japan as a model person of diligence and frugality.
Born
二宮 金次郎 (Ninomiya Kinjirō)

September 4, 1787
DiedNovember 17, 1856
EraLate Edo period
Ninomiya Sontoku
Japanese name
Hiraganaにのみや そんとく
Katakanaニノミヤ ソントク
Shinjitai二宮 尊徳

Ninomiya Sontoku (二宮 尊徳, September 4, 1787 – November 17, 1856), also known as Ninomiya Kinjirō (二宮 金次郎), was a Japanese agriculturalist. He lost his parents when he was a boy, but through hard work and diligence, he rebuilt his fallen family at the age of 20. Later, he rebuilt approximately 600 villages and became a shogunate retainer. His ideas and actions were inherited as the Hōtokusha Movement.

Life[edit]

Ninomiya Sontoku was born to a poor peasant family with a name of Kinjiro in Kayama (栢山), Ashigarakami-gunSagami province. His father died when he was 14 and his mother died two years later. He was then placed in his uncle's household.

While working on his uncle's land, Sontoku studied on his own. He later obtained abandoned land on his own and transformed it into agricultural land, eventually restoring his household on his own at the age of 20. He achieved considerable wealth as a landlord while in his 20s. He was then recruited to run a small feudal district which was facing considerable financial difficulty. He achieved this by reviving the local economy, particularly through agricultural development. The daimyō, hearing of his achievement, eventually recruited Sontoku to run Odawara Domain then Sagami Province.

It is said that during his administration a famine struck Odawara. Sontoku proposed opening up the public granaries to feed the starving populace. He was opposed by his fellow bureaucrats who reminded him that permission had to be granted by the shōgun for commoners to have access to the rice stores. In that case, Sontoku replied, no one, including the bureaucrats, could eat the public rice before getting the shōgun's approval. They quickly changed their minds and decided that, since it was an emergency, the people should be fed immediately. He was eventually entrusted with one of the shogunate's estates, which was a great honor for someone of his low origin.

His philosophy and methodology became a standard format in feudal land developmental and economic management. The name "Sontoku" was given to him for his accomplishments. After his death, the emperor awarded him with Juji'i (従四位), which was the Lower Fourth Honor under the ritsuryō rank system.

Philosophy[edit]

Though he did not leave written philosophical work, his ideas were later transcribed by his disciples: Tomita Takayoshi, Fukuzumi Masae and Saitō Takayuki. Ninomiya combined three strands of traditional teachings — BuddhismShintōism and Confucianism — and transformed them into practical ethical principles that matured out of his experiences. He saw agriculture as the highest form of humanity because it was the cultivation of resources given by the Kami.

Economics[edit]

Ninomiya Sontoku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compound interest which was not well understood among samurai and peasants.[citation needed] He calculated the maturity of each interest rate for 100 years to show its significance by using the Japanese abacus (soroban).[1]

He viewed agricultural village life as communal, where surpluses from one year were invested to develop further land or saved for worse years, and shared by members of the community. He was aware that developed land had a lower tax base than established agricultural land, and he was adept at financial management which he applied to his estate. He encouraged migrants from other estates and rewarded them if they successfully established an agricultural household.

He started his own financial institutions called gojoukou (五常講, ごじょうこう), which appear to be forerunners of credit unions. Each member of the village union could borrow interest-free funds for 100 days, while the entire membership shared the cost in case of default. The combination of land development, immigration, and communal finance all managed under the diligent use of abacuses was a success and became the standard methodology of economic development in feudal Japan.

Popular culture[edit]

It is not uncommon to see statues of Ninomiya in or in front of Japanese schools, especially elementary schools. Typically they show him as a boy reading a book while walking and carrying firewood on his back. These statues depict popular stories that said Ninomiya was reading and studying every moment he could.

There is a reference to him in the novel Obasan by Joy Kogawa. The father often tells the story of Ninomiya Sontoku to his children, relating how

"Up early to the mountains for wood before the rooster calls 'ko-ke-kok-ko!' He studies and works every day to feed his baby brother and his mother. That is how he becomes the great teacher, Ninomiya Sontaku of Odawara, Japan."[2]

War loot[edit]

In October 1994, Rollins College, a small private liberal arts college in Winter Park, FloridaUnited States made international headlines when the government of Japan, per a request from Okinawa Prefecture, asked for the return of a statue that was taken as war loot. It was taken by Clinton C. Nichols, a lieutenant commander in the United States Navy and Rollins graduate, after the Battle of Okinawa. Nichols presented the statue of Ninomiya Sontoku in 1946 to then Rollins President Hamilton Holt who promised to keep it in the main lobby of the college's Warren Administration Building forever.[3]

At first, the college rejected the offer made by Okinawan officials, who suggested that a replica of the statue would be presented to the school if the original was returned. However, after consulting with the U.S. State Department and the college's board of trustees, then Rollins President Rita Bornstein accepted the offer. The statue was returned to Okinawa in 1995 in commemoration of the 50th anniversary of the end of World War II.[4] In addition to providing the college with a replica of the original statue, the government of Okinawa and Rollins signed an "agreement of cooperation" that pledges to develop cooperative projects between the college and Shogaku Junior and Senior High School — where the original statue has been placed.[5]

References[edit]

  1. ^ Kouta Kodama edt., Ninomiya Sontoku ; Chuokoronshinsha, 1984, p.42-43.
  2. ^ ObasanJoy Kogawa, 63
  3. ^ 'Okinawa Seeks Return of Statue' from The New York Times, October 24, 1994.
  4. ^ 'College Is Returning Statue to Okinawa' from The New York Times, November 5, 1994.
  5. ^ 'New Twist in Cultural Saga' from The New York Times, May 27, 1996.

Further reading[edit]

  • Havens, Thomas R. H. "Religion and Agriculture in Nineteenth-century Japan: Ninomiya Sontoku and the Hotoku Movement." Japan Christian Quarterly 38 (1972): 98–105.
  • Walthall, Anne. "The Perception of Work in Tokugawa Japan: A Study of Ishida Baigan and Ninomiya Sontoku." The Journal of Japanese Studies 25#1 (1999), pp. 189–193 online

Commentary[edit]

The primary reference in English is:

  • A peasant sage of Japan: the life and work of Sontoku Ninomiya (1912), a translation by Tadasu YOSHIMOTO (1878–1973) of Hōtokuki by Kōkei TOMITA (1814–1890) (富田高慶『報徳記』宮内省 1883年).

This was a record of Sontoku's life written by his disciple Tomita in the decades after Sontoku's death. As this is out of copyright, various editions exist, including freely online, together with reprints. These inc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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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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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소토쿠 편집 ]

무료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
니노미야 츠노리
니노미야 츠노리
즈토쿠 좌상( 오카모토 아키히 작 , 호토쿠 박물관 소장)
연대에도 시대
생일천명 7년 7월 23일 (1787년 9월 4일)
사망일안세이 3년 10월 20일 (1856년 11월 17일) (69세)
별명긴지로(킨지로)
반지 이름Chengmingyuan의 장점은 Zhongzheng 평신도에 의해 보상됩니다
무덤도쿄도 분쿄구 스와야마 기치조지 절
황실 위치4명의 신하에게 증여 (메이지 24년)
막부 지위에도 막부
주님오쿠보 다다마 , 도쿠가와 이에키 → 도쿠가와 이에키
가신오다 와라 사가미 영주, [ 막부]
부모니노미야 리에몬(아버지)
유키(어머니)
형제손토쿠 (킨지로),
토모키치(츠네고로), 토미지로(어린 시절)
부인木の(방)
なま(뒷방)
아들도쿠타로(유년기 사망), 타카시 (야타로), 미즈(후미코)
의 양자: 유키
일본어 쓰기
일본 원작니노미야 소토쿠
아호에노미やそんとiku
일반 로마자니노미야 손토쿠

니노미야 손토쿠 (일본어: Ninomiya Sontoku /にのしやそんとKUNinomiya Sontoku , 1787년 9월 4일(텐메이 7년 7 월 23일) ~ 1856년 11월 17일( 안세이 3년 10월 20일)) , 라고도 알려진 일본 농업인 에도시대 말기의 정치가 이자 사상가 . 그는 촌주의 개혁과 부흥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그가 창설한 '보덕샤 운동'은 신용사업의 설립과 농업기술의 대중화 등을 통해 메이지 시대 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에서는 학교에서 니노미야 순토쿠의 동상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일본에서 가장 많은 동상"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학교 괴담 니노미야 걷는 동상 "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

인생 편집 ]

일본 사가미국 아시 가라가미 (현 가나가와 현 오다와라 시) 의 부유한 농민 가문 에서 태어나 , 어릴 적 이름은 긴지로(통칭 긴지로)로 리에몬 가문의 장남이었다.

쓰토쿠가 태어난 일본은 막부체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사무라이 가문은 재정적으로 고갈되었고, 자연재해와 기근이 계속되었으며, 막부가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심각한 농촌 황폐화와 농업 쇠퇴를 초래했습니다. 쑨토쿠가 5살이 되던 해, 관동 지방에 큰 홍수가 나서 밭이 파괴되고 가문이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2세 때 쑨토쿠는 중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슈사카강 물 조절 사업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14세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뒤 어머니의 생계를 도우며 남동생을 돌보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낮에는 산에 가서 장작을 패고 밤에는 짚신을 엮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팔기 위해. 메이지 국민수양교과서에 실린 '문부과학성 노래' 가사 - '장작 패기, 밧줄 꼬기, 짚신 만들기 쉬지 않고. 부모는 좋은 조력자, 어린 형제들은 부지런히 보살펴주고, 형제애는 깊고, 부모는 효도한다. 니노미야 긴지로는 세상에 좋은 본보기가 된다.

농업 개혁 편집 ]

순토쿠는 에도 시대의 유명한 효자 였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대신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

준데는 짚신을 만들어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땅을 사서 지주가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산수 와 서예를 배우고 농업 기술을 연구했습니다. 1822년, 오다와라 가문은 공식적으로 순토쿠를 임명하고 그에게 사쿠라 정 영토(현재의 도치기 현 하가 군)를 활성화할 것을 요청 했습니다 . 순토쿠는 먼저 영주에게 10년 동안 공물을 줄여달라고 요청한 후, 이웃 가신들로부터 농부를 모집하고 , 농로와 수로를 건설하고, 새로운 비료를 도입하고, 농부들에게 종자를 빌려주고, 농부들에게 절약과 근면을 가르치는 계몽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일련의 조치로 사쿠라 마을이 성공적으로 활성화되어 준도쿠가 유명해졌고, 농촌 지역을 여행하여 수확량이 적은 많은 농촌 지역을 구했습니다.

1842년, 니노미야 손토쿠는 막부의 노장인 미즈노 다다쿠니에 의해 "오후 세이요게"로 승격되어 도네가와 관리 계획 수립에 참여하고 사회 조사 및 연구를 실시하고 농촌 건설 계획을 책정했습니다("보토쿠 사회법"). ), 텐료를 활성화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니노미야 순토쿠는 1856년 닛코 신사 경내에서 농촌 개발 계획을 시행하던 중 사망했습니다. 그의 계획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일본 전역에서 '보덕샤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신용사업을 설립하고 농업기술을 향상, 대중화하려는 그의 계획과 활동은 메이지 시대 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편집 ]

  • 외국 역사 유명인 사전, Zhuang Xichang 편집, Jiangxi Education Press, 1989, 2페이지.

외부 링크 편집 ]

현대적인 데지타르라이브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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