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1

알라딘: 남명집 조식 (지은이), 2001

알라딘: 남명집


남명집  | 한길그레이트북스 52
조식 (지은이),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옮긴이)한길사2001-10-30






정가
32,000원


Sales Point : 704

9.2 100자평(0)리뷰(5)

622쪽

책소개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여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펴낸 완역본. 10여 종의의 <남명집> 판본 가운데서 가장 완선(完善)된 판본을 선택해 번역했던 1995년 판본을 다시 검토해 일반인들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롭게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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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허권수
천왕봉처럼 우뚝한 남명의 정신세계/최석기
일러두기

1. 국역 남명집

본집(本集)
시(詩)
-오언절구(五言絶句)
-육언절구(六言絶句)
-오언사운(五言四韻)
-칠언절구(七言絶句)
-칠언사운(七言四韻)
-고풍(古風)
-칠언장편(七言長篇)
부(賦)
명(銘)
서(書)
기(記)
발(跋)
묘지(墓誌)
소(疏)
논(論)
잡저(雜著)

보유(補遺)
시(詩)
-오언(五言)
-칠언(七言)
명(銘)
서(書)
기(記)
묘지(墓誌)
소(疏)
잡저(雜著)

2. 교감 남명집

일러두기

本集






墓誌


雜著

補遺

후기
남명 조식 선생의 연보
찾아보기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조식 (지은이)

조선의 유학자.

1500년대 경상도 일대의 산림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했던 유학자이다. 성리학 이론보다는 실천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황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당대의 학문적 위상이나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이황 이상이었다.

여남은 번 이상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간신들이 권력을 잡고 얼토당토않은 정치를 펼치는 때에 벼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에 상소를 올려 조정의 정치를 정면으로 추궁했다. 1555년 을묘년에 명종에게 올린 <을묘사직소>에서는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다”고 썼다. 이로써 유학자의 마땅함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올바른 유학자의 전형을 세웠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1572년 진주목 덕산동(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의 산천재(山天齋)에서 일생을 마쳤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제자들이 그의 글을 모아 묶은 <남명집>을 통해 그의 삶과 학문을 접할 수 있다. 접기

최근작 : <을묘사직소, 조선을 움직인 한 편의 상소>,<[POD] 남명 조식>,<남명 문집> … 총 8종 (모두보기)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1991년 창립되었다.

최근작 : <병사공 한범석의 생애와 활동> … 총 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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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내가 홍범도다>,<환상적인 문어>,<이성의 오롯한 한계 안의 종교>등 총 755종
대표분야 : 역사 4위 (브랜드 지수 839,518점), 미술 이야기 16위 (브랜드 지수 25,960점), 철학 일반 17위 (브랜드 지수 28,520점)



평점 분포

9.2

마이리뷰


살아있는 지식인

남명 조식 선생은 평생 한 차례도 관직에 있지 않았다. 당시 모든 지식인의 목표가 과거 합격임에 비추어 선생은 살아있는 지식인이었다. 한편, 선생은 당대 현실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임금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직언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산림처사로 평기받게 되었다. 임진왜란때 의병장이었던 곽재우 장군은 선생의 제자이었다. 이로 비추어 선생은 행동하는 지식이었다.
신흥동 2011-10-18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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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란 무엇인가?

좌우명(座右銘)

언행(言行)을 신의 있게 하고 삼가하며, 庸信庸謹
사악(邪惡)함을 막고 정성(精誠)을 보존하라. 閑邪存誠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岳立淵沖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燁燁春榮

금인명(金人銘)

굳세고도 -의(義)이다. 장중하니, -인(仁)이다. 剛而重
그 덕을 아무도 당할 수 없도다. 德莫戡
이미 말이 없거늘,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已無言
게다가 세 번이나 봉하였도다. 緘復三
-말로 신(神)을 감격(感格)시키지 않고, 행동이 지극히 공경스럽다.
이상은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極其誠敬
태묘(太廟) 앞에 있으면서, 在太廟
참사(參祀)하는 사람들을 엄숙하게 한다. 肅鬼參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한 덕을 말했다.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에 또한 친림(親臨)하는 것이다.
이상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조심함을 말한 것이다. 謹獨

남명은 그가 죽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내 평생 한가지 장점이 있었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구차하게 복종하지 않았던 정신이다. 사후에 나를 처사라고 불러라. 그것이 내 평생의 뜻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명망있는 학자로도, 관직으로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처사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이다. 남명에게 처사는 부조리한 현실에 야합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꿋꿋하게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많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한 번 말을 하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 있었던 기개를 보여주었던 남명이었다.

이 갈증나는 세상에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는 남명 같은 지식인들의 모습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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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튼 2003-12-17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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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선비의 명철한 글의 모음

칼을 찬 선비로 알려진 남명 조식! 북인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하고, 일생을 벼슬과 부귀영화를 떠나서 살아도 후세에 그에게는 많은 문도와 또한 역사가 그를 말해준다. 하지만 실제 그는 후에 북인이 몰락하면서 남인의 사상적 뿌리 퇴계나 서인의 뿌리인 율곡보다 어찌보면 조금은 미약하게 혹은 후세에 덜 알려졌다. 하지만 베스트셀러보다 은근히 감춰진 책이 더 매력있듯이 남명의 글을 모아놓은 이 남명집 또한 은은한 향이 500년이 지난 현재의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것이다.
호랑이아저씨 2009-07-2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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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사람의 책임

외국의 고전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조상의 글 가운데에는 인류에게 전해내려오는 고전이 없을까? 물론 아직 접하지 않은 책들이 많아 그렇겠지만 우리 조상의 덕과 얼 그리고 정신을 계승함이 후손으로서 또한 도리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분들의 글을 이해하고 또 이 시대에 재현해야할 능력의 한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지만.




시대마다 참 스승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참 스승은 누구일까? 참 스승의 부재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여러가지 참담한 현상을 만든건 아닐까? 나라의 부름을 받고도 거절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 양성에 힘을 모았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그 시대의 참 스승답게 임금에게 잘못된 정치에 대한 간언도 아끼지 않았기에 그의 명성을 자자했고, 비록 관직에 나아가진 않았으나 당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같은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시대의 스승이 꼭 실존하는 인물이어야 하는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하며 그의 사상과 철학을 접하기 위한 노고도 아끼지 말아야 하리라.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토록 위대한 책을 학자들의 수고를 통해 쉽게 이해할만한 말로 풀이를 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글이 후손에게 남겨져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의 책임또한 적잖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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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Gimm 2014-10-0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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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예언

근래 남명 조식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뜨겁다. 이유는 아마 그 동안 남명 사상이 퇴계와 율곡에 비해 크게 과소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명하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따라서 퇴계의 제자라고 아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 그는 퇴계와 동갑인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아직도 그가 조선후기 활동했다는 이유로 그를 성리학자의 범주에 귀속시키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도 좀 그렇다. 남명의 거친 글들을 대하면 그는 결국 우리가 말하는 율곡과 퇴계의 조선성리학에 대한 비판론자이자 비관론자였다는 것을 이처럼 알 수 있다. 나는 남명의 글들을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조선성리학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관점이 이제 개화된 세상에서나 사람들의 인식이 깨어져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발생한 즉시 그 단점이 적나라할 정도로 실랄하게 공격당했던 매우 자명한 관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실린 남명의 을묘사직서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하겠다.

그런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명이 퇴계에 보낸 서찰 한 편인데 당시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론을 두고 하는 듯한 남명의 언급이었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며...>

글을 읽어보면 정말 실랄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단성현감 사직소에서는 당시의 혼란한 실정에 대해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오늘 날 우리가 조선후기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예언과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조식은 율곡이나 퇴계처럼 소위 천리를 담론하는 글들을 짓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소신이었기도 했지만. 또 그의 별명이 칼을 찬 유학자 였다는 것도 기억할 만하다. 실록에는 그가 늘 방울을 차고 칼을 턱에 받치고서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잡곤 했다한다. 정말 이런 정신으로 바른 말을 했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 정말 학자로서 효과가 컸을 것이란 생각이다. 오늘날 나태한 수험생들이 있다면 대입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그와 그의 문도들의 활약을 극화한 <정인홍과 광해군>이란 조여항씨가 지은 소설이 있는데 극적인 효과를 위해 상대당파에 대해 지나치게 깍아 내린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런대로 아주 거짓은 아니다. 한 6할은 진실이라고 보장할 수 있다. 당세의 영웅이었던 대유 조식과 의병장 정인홍을 저버린 역사에 대해 나역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은 없다.

또, 성리학에 대해 이런식으로 한마디 하자면 이상하게 아직 우리사회에는 아직까지 아주 니까짓게 무엇을 하느냐는 식으로 호통을 치며 훈계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이런 분들 때문에 정말 피곤하다. 대부분 그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이다. 조식과 더불어 나는 그들에게 역시 분개한다. 하나는 그들의 우물안 개구리식 신토불이 사상과 둘째는 그들의 개구리 세계관이 가져온 학문적 졸렬함. 전자에 나는 분개하며 그들의 엉터리 학문에 대해서 전혀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정말 이 자리에서 조선 성리학을 변호하고 싶은 분들께 꼭 권하고 싶은 남명의 글들이다.
- 접기
INDIGNATION 2006-07-3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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