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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3

그룬트비 | 인물을 통해 본 short mes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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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트비 | 인물을 통해 본 short message

2012. 7. 10. 15:07
http://blog.daum.net/topreacher/174


---그룬투비---

● 그룬투비(Nikolai Grundtvig)의 생애와 업적


그룬투비는 코펜하겐 대학의 신학과를 수석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공부는 워낙 잘했고 졸업 마지막 시험인 설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 "라는 설교 제목으로 여러 교회 목사와 지도자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그러자 교회 목회자들은 그를 교만히 여겨 목사 안수도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원망하며 불평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룬트비는 1812년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한 ‘세계사 연대기’를 발표했다. 이 책에는 당시 합리주의 경향에 기울었던 덴마크 교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룬트비는 이후 10년 동안 덴마크 교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이 기간에 그는 시골의 교회를 떠돌아다니며 찬송시를 쓰고 문학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기독교는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세례식과 성찬식, 즉 살아있는 성례전 속에서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역사적계시라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교회가 루터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 그룬트비는 목사직을 그만둬야 했고 7년간 설교를 금지 당했다.

또한 후에 그룬트비는 조그만 섬에 목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섬에서 우울증을 겪으며 생활하다가 42살의 나이에 성령을 체험하고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나서 그 이전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달라졌다. 불모의 땅, 가진 것이 없는 나라를 생각하며 그룬트비 목사는 민족의 앞날을 환상을 통해 보면서 세 가지를 선포했다.

첫째, 덴마크 사람들이여, 하나님을 사랑하자.

둘째, 덴마크 사람들이여, 덴마크(땅)를 사랑하자.

셋째, 덴마크 사람들이여, 백성(이웃)을 사랑하자.






말씀으로 일어나 나라를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힘이 아니라 국민성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고 외치며 국민 성격개조 운동과 농촌 부흥운동을 벌여 오늘의 선진 낙농국가인 덴마크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의 사상과 설교를 접한 달가스(Dalgas, 덴마크 공병대 대령)는 그룬트비와 함께 덴마크의 불모지를 경작지로 일구며 덴마크의 녹화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슬레스빅 홀슈타인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다. 남겨진 스칸디나비아 땅은 북해와 발트해의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돌과 모래, 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였다. 국가 경제는 당연히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중앙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덴마크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다.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났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그룬트비는 덴마크 국민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는 국민이 실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하는 의식개혁운동을 주창했다. 그 바탕은 루터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이념이었다. 그룬트비는 또 덴마크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선 스칸디나비아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새로운 낙농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국민의식 구조가 개혁돼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덴마크 역사상 최초의 성인기숙교육학교 설립을 주장했고 마침내 국민고등학교를 세웠다. 기숙학교는 자발적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생활을 통해 소극적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개척정신을 갖도록 가르쳤다. 국민고등학교는 덴마크 전역으로 확산돼 덴마크 국민의 의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국민고등학교를 마친 사람들의 변화된 삶을 목격한 덴마크 국민 사이에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룬트비는 낙농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의 목사들을 먼저 설득했다. 그는 목사들이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전령이 돼야 한다며 3애정신과 함께 낙농기술을 가르쳤다. 각 지역의 교회는 낙농기술을 가르치는 주민 센터가 됐다.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농업운동이 확산됐다. 덴마크의 위대한 중흥이 시작됐던 것이다.

1848년 그룬트비는 의회정치 도입을 요구하는 운동에 뛰어들어 자신이 직접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코펜하겐 제11구에서 56표 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다시 보궐선거가 실시돼 무투표로 당선된다. 국회의원이 된 그룬트비는 국방의 의무와 신앙·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주창하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역설했다. 그룬트비는 국회에서 “덴마크 국민은 누구나 덴마크 안에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역설해 덴마크 특유의 소농제도를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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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잘 사는 나라’라고 말할 때 ‘어느 정도 잘 사는 나라인가’라고 하는 것을 정하는 잣대는 첫째, 의료보험제 둘째, 퇴직수당, 셋째. 교육제도라고 할 수 있다.

1.덴마크는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의료보험제도가 발달되어서 누구든지 병이 나면 한 푼의 돈도 지불하지 않고 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는다. 그 나라는 몇 년 전에 의료보험제도를 폐지해 버리고 나라에서 그 제도를 인수하여 덴마크 국민이면 누구나 다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고 한다.

2.퇴직수당이나 실업보험도 국가에서 인수하여 국민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직장에서 퇴직한 후에는 어떤 종류의 보험 불입 여부를 막론하고 65세 이후부터 연금을 타서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3.이 나라의 교육제도는 유치원에서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등록금, 수업료를 내는 것이 없어진지 오래 되었고, 모든 교육은 국가에서 담당을 하고 있다. 외국 유학생이 그 나라의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에도 역시 등록금, 수업료를 안 내는 것은 물론이며 오히려 대학교로부터 한 달에 300달러 정도씩 용돈까지 지급되고 있다고 한다.

덴마크는 9세기 초에 복음을 접한 이후 개신교 국가가 되었는데 교회는 국가에서 설립하며 목사의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나 발령을 내는 것도 국가에서 한다. 현재 덴마크 국공립학교의 50%가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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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동으로 다가 온 그룬트비의 업적


1. 교육 천국

세계의 국가수가 약 230개국이 넘는다. 일본, 중국, 미국, 한국, 영국, 소련, 독일 등등... 무수히 많은 나라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오직 덴마크만 대학까지 의무교육이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떨릴 정도의 위대한 교육 유산을 갖고 있는 나라다. 이 나라 국민이면 대학까지 의무교육을 누구든 받아야 한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체험하겠는가? 수없는 분야에서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성경 잠언서에 보면 < 감추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라고 나와 있다. 이 말은 숨긴 것을 찾아내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지혜라는 말이다. 모든 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대학까지의 의무교육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인류를 향한 축복이다. 이와 같이 감춰놓은 것을 드러내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지하자원을 한번 보라. 금, 은, 다이아몬드 등의 각종 보석들, 특히 석유와 같은 귀중한 자원일수록 모두 하나님이 깊은 땅속에 감춰 놓으셨다. 이것을 캐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교육에 있어서의 보물 중, 보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학까지의 의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육제도는 왜 중요한가? 그것은 교육제도가 사회전반을 근본적으로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치원 1-2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대학원 2년, 박사코스 3년이다. 20~23년을 학생으로 보낸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공부하며 다 보낸다. 그만큼 교육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을 대학까지 의무로 교육받도록 제도화 했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것을 덴마크는 개신교 기독정신에 입각해서 이룬 것이다. 기독정신의 핵심은 사랑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 핵심정신에서 이런 것이 이뤄진 것이다.






2. 십일조 천국

세계에 오직 이 나라만 십일조 세가 있다. 십일조 세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원래 십일조는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 그리고 레위인(주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자기 수입의 1/10을 국가에 낸다. 이것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 선교사나 목회자와 전도사들 )을 위해서 전적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이것이 복지기금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해외 입양을 보낸 곳이 바로 덴마크다. 1982년 당시 벌써 한국에서 입양 온 입양자의 수가 6만 명이었고 대부분이 벌써 성인이 다 되었다. 우리나라 어린아이들을 덴마크에서 데리고 가서 자신의 자녀로 삼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십일조의 정신이다. 고아를 돕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나라들을 축복한다. 실제 세계 역사를 통해 볼 때 복지국가가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남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지혜를 줘서 일으켰던 것을 보게 된다. 덴마크가 바로 그러한 예다. 근대 300년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제일 안정을 누리는 복지국가가 어떤 나라들인가? 그 나라가 모두 복지국가들이다. 성경에 십일조를 하면 녹슬지 않고, 좀먹지 않으며, 도둑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십일조, 즉 위대한 복지법(십일조정신)을 따르면 반드시 하나님이 다음의 3가지를 축복한다.

1) 녹슬지 않는다.

녹슬지 않는 국가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립경제와 자주독립을 이룬 국가를 말한다. 이것은 모든 나라가 희구하는 국시다. 이것을 이룬 나라가 바로 선진국이고 바로 강대국이다. 십일조를 하는 나라는 절대로 국가존립에 있어서 녹슬지 않는다.

2) 좀먹지 않는다.

좀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가의 소기업, 중소기업, 대기업이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부도직전인 기업, 즉 속이 썩은 기업을 말한다. 십일조를 하는 나라는 이런 기업이 없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다. 그래서 자동으로 경제 강국이 된다. 국가의 수입은 계속해서 늘고 지출은 계속해서 줄어든다.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닌가?

3) 도둑이 들지 않는다.

이는 병충해, 태풍, 홍수, 쓰나미, 지진재해, 전쟁 피해 등등의 천재지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런 일이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나라에는 일어나지 않으며 설혹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철통같은 방어벽을 미연에 마련해 놓고 산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이런 나라는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겠는가?




3.교회 천국 / 국가가 주는 균등한 월급과 교회 장관 제도

덴마크에서는 목회자들이 대형 교회를 맡으려고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시 중심의 대형교회나 시골 변두리의 작은 교회 목회자의 월급이 같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는 목회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영감을 준다.도시 대형교회를 기웃거릴 필요 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얼마나 귀한 일인가?

현대신학을 탄생시킨 위대한 신학자 키엘케골이 바로 덴마크의 시골교회 목사였다. 현대 신학과 그 이전의 신학은 무엇이 다른가? 그 이전은 말 그대로 교리중심이었다. ‘예수가 제일이다’ 혹은 ‘성령이 제일이다’ 혹은 ‘하나님이 제일이다’ 혹은 ‘교회가 제일이다 ’등등의 주장이 있어왔던 시대를 통 털어 교리중심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통폐합 시킨 인물이 바로 덴마크의 시골교회 목사, 키엘케골이었다. 현대 신학은 한마디로 교리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인 말씀, 즉 메시지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시대적 신학의 천재가 나올 수 있었던가? 바로 국가가 교회의 크기를 묻지 않고 목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목회천국의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 준 데서 나올 수 있었던 기적이라고 본다.

또한 교회장관 제도다. 이것은 국무총리제나 국무장관제도와도 같다. 교회장관은 그 정신을 바로 성서에 그 뿌리를 둔다. 미국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반드시 성서에 손을 얹고 국민 앞에 서약한다. 그런데 덴마크에서는 이런 정도가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 법을 실생활에 적용하고 실행하도록 제도화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4. 낙농 천국

한 나라의 부를 형성하는 요소가 많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요소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그것이 겉으로는 보잘 것 없는 것 같으나 사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가져온다. 그 실례를 살펴본다. 덴마크는 세계 최초로 돼지축사의 기계화와 공업화를 이룬 나라다. 돼지축사가 수세식으로 기계화 되어있다. 돼지가 오줌과 인분을 방출하는데 이것이 자동으로 정화조로 가도록 만들었고 거기서 다시 프로판 가스를 만들어낸다. 이 프로판 가스만 팔아도 우리가 돼지를 키워 판 가격보다도 더 비싼 이윤을 창출한다. 그리고 돼지를 100여 가지 이상, 부위별로 가공한다. 이것 또한 그냥 돼지를 파는 것보다 몇 배의 이익을 가져온다. 그러면 돼지에게서 버릴 부분이 무엇일까? 보통 그 꿀꿀거리는 시끄러운 목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돼지의 꿀꿀거리는 자연적인 소리와 클래식을 잘 접목시켜 전자음악으로 만들면 신경증 및 스트레스 치료 음악이 되어 음악을 통한 치료법에 사용된다고 한다. 돼지 털은 여자들이 화장할 때 사용하는 메이크업의 작은 부러쉬(솔)로 아주 귀하게 사용된다. 돼지의 발톱은 어떤가? 돼지의 발톱은 언제나 물에 잠겨져 있는데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이용하여 부러치 원료로 만들어 비싸게 판매한다고 한다. 돼지 한 마리에서 버릴 것이 없이 100% 가공하고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받아 일반 돼지고기로만 판매해서 받을 수 있는 수익보다 수배의 이익을 창출할 수가 있다. 무엇으로 이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다. 돼지를 키우고 가공하며 활용할 지혜를 받아 막대한 수익 창출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돼지만이 아닌, 소나 양 등 다른 가축도 이런 방법으로 키운다면 얼마나 큰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성경에 < 이 민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도다. >라고 한탄하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로 지혜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언제라도 그 지혜를 통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자산을 형성할 수가 있다. <그룬트비>는 바로 이와 같이 덴마크를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한 위대한 목자며 국가를 극도로 부흥시킨 시대의 예언자로 오늘날까지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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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판 천국을 이룬 그룬트비의 겨자씨

판자촌에 사는 사람은 ‘월세 집’을 부러워하고, 월세 집에 사는 사람은 ‘전세 집’이라도 가졌으면 하며, 전세 집에 사는 사람은 ‘내 집’ 한 번 가져보는 게 소원일 것이고,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아파트 평수 ‘넓은 집’으로 가려할 것이며, 넓은 집에 사는 사람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저택’을 꿈꿀 것이다. 판자촌에 살던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대 저택의 현관 열쇠를 건네며 ‘이곳이 당신이 살 집’이라고 말하면 그는 ‘현실 속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와 같이 일생을 종교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룬투비가 일구어 놓은 덴마크의 천국이 바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저택 이상의 꿈과 로망임을 본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1800여 년 그 시대에 이미 이런 복음, 교육, 치유의 천국 씨를 뿌린 것이 오늘의 천국을 이루었음을 본다. 모든 정치인이 주창하고 국가가 의도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복지 천국 지향임을 볼 때, 다시 한 번 그룬트비의 위대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가 일궈놓은 화려하고 위대한 업적 뒤편에 어둡고 칙칙했으며 외롭고 고독했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서려있음을 본다. 갓 졸업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목회에 막 뛰어들려는 그로부터 돋아나고 있는 싹을 기득권 세력들은 싹둑 도려내고 만다. 수석 인생의 두뇌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꿈틀대며 새로운 책을 써 내면 다시 ‘교계의 이단아’로 단칼에 목을 베어 교계의 사각지대로 내팽개쳐 버린다. 20대에 신학을 졸업하고 그가 42세가 되기까지 방황하고 번민하며 신음했던 그 20여년의 잿빛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토록 어둡고 암울했던 생지옥의 터널로부터 죽지 않고 살아 꿈틀대며 다시 빠져나올 수 있게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한다.

성경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에

---“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라고 나와 있다.

그룬트비가 유형지와도 같은 섬에 처박혀 있으면서 정신이상이 걸릴 정도의 암담한 세월을 견뎌내며 그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겨자씨, 그것이 있었던 것이다. 자기 속에 피부처럼 붙어있는 지성, 피처럼 흐르고 있는 목회자로서의 사명이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을 수 없게 했다. 그는 울고 또 울며, 괴로움을 끌어안고 뒹굴고 또 뒹굴며 생각하고 기도하고 다시 생각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왜 이 땅에 왔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를 묻고 또 물었다. 그래서 겨자씨 같은 답을 얻어낸 것이다.

1. 삶과 괴리된 죽은 종교와 죽은 교육의 실상

2. 좌절과 실의에 빠진 사회 분위기 속 침체된 국민정신

3. 돌과 모래, 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경제

이런 거대한 어둠의 실체들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것과 싸워야 할 당사자가 바로 자신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금도, 은도, 돈도, 권력도, 배경도 없었다. 단지 있다면 겨자씨처럼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믿음과 사명, 확신과 지성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백성을 사랑했던 그에게 하나님은 시대를 가로지르는 천재적 하늘의 지혜를 물 붓듯 퍼부어 주어 교육천국, 십일조 및 목회천국, 복지 천국, 낙농 천국의 겨자씨를 심을 수 있게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며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왔던 나에게조차 꿈과 영원한 로망이 되는 그런 천국이 이뤄지는 씨를 그는 19세기 때 이미 심어나갔던 것이다.

현실의 요구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삶과 유리되고, 일상의 삶과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버린, 즉 기능이 마비된 병든 기독교의 모습을 본다. 키엘케골이 주창한 대로 생명의 말씀을 기초로 확립된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한 활기차고 살아있는 기독교의 삶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회복되어져야 할 필연성을 읽는다.

만약 교회가 진정으로 삶에 이로움을 주는 기관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교회는 교리나 장정 등에 치중하기보다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삶 자체가필요 조건이 되어야 하고 삶을 있는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 삶의 유용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믿음과 사명, 소망과 비젼을 주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룬트비가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국가의 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전 인류적·역사적 정신 계발의 단초이자 훈련 공간으로써 제시한 교육정책과 종교정책은 2세기나 지난 21세기에서조차 전 세계에서 감히 그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교육 천국과 개신교 천국을 만들었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데 깊은 공감을 느껴 다시 소개한다.

---북유럽 국가의 역사는 교회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다. 신앙은 삶 속에서, 삶은 신앙과 더불어 북유럽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들에게 복음은 구원을 전하는 기쁜 소식, 역사의 현장에서 발견한 진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초적인 힘,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복음이 되고 있다. 북유럽 국가의 국기에 담겨 있는 십자가는 북유럽의 신앙 유산이 그들의 삶과 역사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연이 아름다운 북유럽에서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것, 수많은 신화와 아픈 역사를 감싸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십자가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국기와 함께 펄럭인다.




우리나라가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한 새마을 운동도 그룬트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며 새마을운동의 초기 주창자들은 그룬트비의 사상과 그의 실천적인 성인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활용했는데 새마을 운동의 의식개혁 및 품종개량 운동 등이 모두 그룬트비의 활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고 한다. 우리 민족 가난의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는 1등 공신이 새마을 운동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한다.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100여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지만 낙농국 덴마크의 농업 정책을 그대로 본받아 새마을 운동의 기적을 이뤄냈던 것처럼 한국 기독교계 제2, 제3의 한국 그룬트비 목사가 쏟아져 나와 세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교육, 종교, 치유의 천국을 향한 겨자씨가 심기어질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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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2012.07.11 
수정/삭제 답글
그룬트비, 그의 전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라 재건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나라를 재건한다’는 것은 정말 하늘이 내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많은 종류의 꿈이 그 수대로 있겠지만 그 모든 꿈 중에서 최고로 가치가 있는 꿈은 나라재건일 것이라 생각한다.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위대한 과학자, 세계적 재벌, 화가, 음악가, 예술가 등등... 꿈의 품목은 대충 잡아도 5만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나라재건, 그것도 하나님의 정신이 뿌리가 되는 그런 나라재건을 꿈꾸고 그것을 이룬 사람은 흔하지가 않다. 그런데 그룬트비가 바로 그 분야의 영원한 전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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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던 그의 핵심요소를 다음의 4가지로 나눠 생각해본다.

1.그는 자비심의 귀재였다.
자비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자비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냥 사랑의 ‘동의어’이거나 ‘사촌’ 쯤으로만 생각한다.
사실 사랑은 < 인간의 절실한 필요를 찾아서 그것을 채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절실한 필요가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다. 성공과 구원이다. 성공의 반대는 실패다. 실패를 하면 반드시 버림을 받게 되고 버림을 받게 되면 혼자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생동안 성공적인 삶을 생의 목표로 삼으며 살아간다. 구원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선포치 않는다. >고 하셨는데 구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다.
큰 배 한척, 즉 군함이 있다. 이 군함이 산산조각이 날 수 있는 방법은 3가지로 <빙하>,<암초>,< 어뢰폭탄>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배였던 <타이타닉>은 빙하에 부딪혀 침몰했다. 아무리 큰 군함도 암초에 부딪히거나 어뢰에 맞으면 침몰하게 된다. 거대한 군함이 산산조각이 나서 바다 아주 깊이 가라앉아 한없이 떠내려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흔적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자. 총알 하나가 유리창을 뚫고 지나가 대형 유리창이 산산 조각이 난다. 이것을 촬영한 뒤, 그 필림을 다시 거꾸로 돌려보자. 그러면 산산 조각난 유리조각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된다. 이와 같이 <산산 조각난 것>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독일에 짓밟혔던 조국, 국민, 신앙---‘산산조각이 난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을까’가 그룬트비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삶의 주제였다.
사랑은 인간의 절실한 필요를 찾아서 채워주는 것이다. 그것도 조건 없이 채워주는 것을 영어로 MERCY or GRACE, 즉 자비 또는 은총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랑의 실현을 자비나 은총이라고 말한다. 자비나 은총은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비다. 그룬트비는 국가 재건자로서 끝없는 자비를 조국에 쏟았다. 그는 1) 조각난 조국 2) 조각난 국민 3) 조각난 신앙을 다시 원 상태로 회복시키려고 하는데 초점을 맞춰 국가 재건에의 목표를 가졌으며 마침내 그것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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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는 희생의 천재였다.

희생은 무엇인가? 영어로 OFFERINGS or SACRIFICE, 즉 제공, 헌물, 혹은 희생이다. 여기서 희생은 남김없이 다 쏟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배경, 능력, 학력, 혈연에 달려있지 않다.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성공에 영향을 미칠수는 있으나 그것 때문에 성공이 오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을 마지막 한 푼까지도 아낌없이 쏟으면 그 누구도 성공할 수가 있다. 그래서 역사 속, 희생의 영웅을 <아낌없이 쏟는 자> 혹은 <모든 것을 제공한 자 >라고 말한다. offerings은 끝없는 제공자라는 의미가 영어 단어 속에 담겨져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라. 수천 년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더욱 더 많은 물이 그쪽으로 몰려오고 더욱 더 많은 물을 쏟아내고 있다. 그야말로 <끝없는 제공자며 끝없는 소유자>라고 볼 수있다. 그룬트비는 실의에 잠겨 정신착란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각이 일어났고 자신에게 남은 것을 남김없이 쏟는 희생의 화신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드는 요인을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개인적 동기로, 개인의 판단에 의한, 개인을 위한 행동을 말한다. 둘째는 사회적 동기로, 개인의 사정이 아니라 사회적 요인에 의한 행동을 말한다. 셋째는 글로발 요인으로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국가적이거나 세계적인 요인에 의한 행동을 말한다.
이러한 구분에 준하여 볼 때 그룬트비는 글로발 요인에 의해서 행동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글로발 동기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나라 건국에 쏟은 것이 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생이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이가라폭포와 같이 그의 희생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아있던 금전, 재능,시간을 비롯한 모든 자원을 남김없이 조국에 쏟았다.


아브라함
2012.07.17 22:26
수정/삭제 답글
아무런 조건이 없이 사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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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는 누구에게나 영감을 주는 수재였다.

영감(靈感)은 무엇인가? 영감을 영어로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이라고 한다. 이 말은 원래 땀(PERSPIRATION)이란 말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99%의 애씀과 땀으로 이뤄진 말이 곧 영감이란 말이다. 그런데 영감은 원래 < 절대로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음 >을 뜻한다.

세상에는 2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주도적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반응적 인간이다. 주도적 인간은 어떤 불리한 환경이 와도 그 환경을 자신을 위한 도움세력으로 바꾼다. 반면에 반응적 인간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 와도 그것을 다 망치고 언제나 그 환경의 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디애나 주에 살고 있던 한 인디언이 자기 땅에서 석유를 발견하여 하루 아침에 거부가 되었다. 그래서 비싼 캐딜락을 사서 말 두필이 그것을 끌고 다니게 했다. 시속 2백 마일이나 달릴 수 있는 최고급 승용차를 2마력밖에 속력을 내지 못하는 말 2필에게 맡겼다. 왜냐하면 운전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급 캐딜락을 단 한번 타보지도 못한 채, 2필의 말이 그 차를 끌고 다니게 했던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리의 능력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의 능력을 쓰지 않으면, 즉 자신에 대해서 주도적이 되지 않으면 바로 이와 같이 반응적인 비극적 인물이 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좋은 환경을 얼마든지 주도할 수 있는 주도권이 있음에도 반응적인 인간이기를 자처하여 그 주도권을 상실하고 망각하며 포기한 것이다. 어떤 상황이 왔을 때 그것에 대해 주도적이거나 영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반응적 인간으로 전락하며, 곧바로 실패하는 생으로 타락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주도적이며 영감을 뿜어내는 사람은 주저앉아 있는 주위의 수없는 사람들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영감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사람임을 뜻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감을 뿜어냈던 사람이 바로 그룬트비였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자임을 믿었고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신앙의 가치를 언제나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즉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은 어떤 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여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불모지로 뒤덮여있던 자신의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낙농국으로 바꿀 기회라고 생각했다. 모든 불리한 조건과 문제를 그는 위대한 기회로 바꾸었다. 영감의 사람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자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주인공이며, 모든 장애물을 귀중한 기회로 바꾸는 기적창출자인데 그룬트비가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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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는 영향력을 폭발시키는 인재였다.

영향력이란 무엇인가? 결의로 가득찬 삶을 의미한다. 영향력은 다음 4가지를 불러온다.
1) 반드시 어떤 경우에도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에 원망이 없다. 원망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로버트 슐러의 말처럼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자>다. 인생의 철든 자는 언제나 책임의 한가운데 서 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일이든 반드시 승리로 이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구경꾼이 아닌 주인이 되어서 하기 때문이다.
2)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생활을 통제한다. 성경에 ‘자신을 통제하는 자는 성곽을 지키는 자보다 훌륭하다’고 했다. 자신의 생활을 환경과 상관없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군사보다 강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 <될 수 있다>는 강한 결의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집중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쁜 소식은 <할 수 있다>는 소식일 것이다. ‘당신은 할 수 있다’는 것보다 강한 힘을 주는 소식은 없을 것이다.
4) 반드시 주어진 상황을 목적한 바의 결과로 바꿔 놓는다. 세상에 바꿔지지 않을 운명이나 숙명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어진 가난을 부유함으로, 얻어진 질병도 건강함으로, 덮어 쓰여진 죄와 실패를 승리와 성공으로 바꿀 수 있다고 강렬하게 믿고, 믿은 대로 행동하여 결과를 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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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그는 자비심과 희생, 영감과 영향력의 화신으로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이룩할 수 없었던 지상 천국의 나라를 세웠다. 오늘을 사는 나에게까지 그는 말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쳐 내 속에 새 시대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의 씨를 품고 살아가게 했다.


이번부터 저술하고 있는 작가의 프레임(FRAME)을 통한 메세지 전개는 아주 뛰어난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폭발이라고 본다. 1.원작가의 견해 2. 일반적 견해 3.작가의 견해로 나눈 것도 별미중의 별미다. 뿐만 아니라, 이 세구분에 대해서 각각 1.WHAT 2.WHY 3. HOW의 질문을 들어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답을 끌어내는 작가의 특이한 재능은 내게 무한한 영감으로 다가와 하루 종일 휘감겨 지내게 한다. 대학에서 어떤 과목에 대해서 특이하게 뛰어날 때 A+를 받게 된다. 이번 작가의 프레임 도입 자체도 뛰어나지만 이에 대해서 아주 인생의 근원적인 물음인 WHAT, HOW, WHY의 물음으로 우리를 초대함은 작가만이 가진 특별한 천재적 글 표현 및 분석 능력이라고 본다. 글을 읽는 내게 이렇게 큰 깨달음을 줘서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한다.

50년 전통의 '원조' 대안학교, 풀무학교 홍순명 전 교장

50년 전통의 '원조' 대안학교, 풀무학교

50년 전통의 '원조' 대안학교, 풀무학교

<박원순의 희망탐사 35>  홍성 풀무학교 홍순명 전 교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 
 기사입력 2007.09.04. 

'대안'(alternative)이라는 말은 무겁다.

사회의 여러 문제를 깊게 고민하고 근본적인 한계를 직시하며, 이를 극복하고자 시도하면서 가시적인 해결책이 아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거나 제시할 수 있다는 책임감까지 얹혀있으니 그 무게가 가벼울 리 없다. 그 무거운 말, '대안'이라는 단어가 붙은 말 가운데 가장 일반화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대안학교'일 것이다.

대안학교가 펼치는 대안교육에 대해 명확한 합의가 이뤄진 바는 없으나 기존의 학교와는 다른 다양한 교육실천이 점차 뚜렷한 형태로 자리 잡아가고 있으며 그 이름에 걸맞게 대안학교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실험은 진행 중이며, 조금씩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 교과서와 교실을 벗어나 땀 흘리는 노동을 통해,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보는 여행과 탐방을 통해 더 많은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교육의 방식만큼이나 그 이념 또한 전혀 새롭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눈을 낮췄다는데 있다. 대안학교는 거창하게 세계의 리더양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같이 어울려 사는 멋진 이웃으로 크는데 목표가 있다. 일류대학 합격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일류대학보다 자연과 평화와 공동체를 생각한다.

세속적인 잣대에서는 낮춰졌을지 몰라도 그 눈은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셈이다. 순위로 매겨진 대학에 멈춰있지 않으며 인간에만 멈춰있지도 않다. 지구를 향하고, 인류를 향한다. 학교에 따라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도 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살줄 아는 인간을 목표로 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 목표가 평화에 있기도 하고, 시민사회에 있기도 하고, 농촌에 있기도 하다.

대안학교는 1990년대 들어 확대되었으나 그 이전인 1970년대 초부터 대안교육의 운동 흐름이 일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대안학교의 뿌리는 1970~1980년대 야학이나 공부방에서 찾기도 하고, 더 멀게 1950년대 홍성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대안학교의 뿌리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충남 홍성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도시가 아닌 홍성이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아닌 농업과 사람을 가르치는 학교, 풀무학교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찾아갔다.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민을 기르는 더불어 사는 교육, 엘리트가 아니라 누구나 타고난 자기를 실현하는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믿고, 그러한 학원을 위하여 학교는 작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라는 그 믿음만큼 남다른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의 홍순명 교장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풀무학교, 이렇게 시작됐다.

풀무학교는 민족학교로 유명한 오산학교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오산학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기독교 학교이다. 그러나 그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산실로 자리매김하면서 '민족학교'로 불리기 시작했다. 평안 정주군에 있던 오산학교는 1956년 현재 위치인 서울 용산구로 옮겨졌다.

이 오산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던 씨알 함석헌 선생의 동급생인 이찬갑 선생은 월남 후 오산학교를 부흥시키려다 풀무학교를 설립하게 됐다. 오산학교가 이곳 충남 홍성에서 풀무학교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1958년 설립했는데 설립자 중 한 분인 이찬갑 선생은 이기백 교수의 선친인데 오산학교 출신이에요. 그래서 오산학교의 정신을 이곳에서 실천하고 싶어 하셨죠. 다른 설립자 분은 주옥로 선생이신데 감신대를 나온 뒤 홍동에서 전도를 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찬갑 선생과 손을 잡고 풀무농업기술학교를 열게 됐습니다."

학교만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해에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그때는 학용품 공급이 주된 역할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농협과 같은 것이다. 우체국이나 은행 등을 학교 안에 설치하는 것이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실험이었는데 그것이 풀무학교에서 실현되었다.
"이찬갑 선생은 학교가 지역과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바탕에서 기둥이 된 것이 생활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인데 졸업생들이 거기에서 일을 하고, 그것들을 키워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회의 3분의 2가 졸업생이죠."

실제로 홍순명 교장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만난 풀무신협의 정규채 전무는 "풀무신협은 우리 동네의 알짜 은행"이라면서 "풀무학교가 그 원천"이라고 말했다. 또 풀무생협의 박종권 이사장은 이 학교의 17회 졸업생이기도 하며, 홍성마을의 대표 주형로씨 또한 14회 졸업생이니 그야말로 홍성의 마을 자체가 풀무학교와 함께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 소박한 삶을 즐겁게 만끽하며 풀무학교에서 젊음을 바친 홍순명 교장. ⓒ희망제작소

그러나 이 학교를 책임지면서 마을 공동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홍순명 교장은 이 학교 졸업생은 아니다. 그는 풀무학교에 감동을 받은 '풀무학교의 팬'이었다.

"군대에서 풀무학교 기사를 '새벽별'이라는 잡지를 통해 처음 접했어요. 보고 감동을 받았죠. 제대하고 바로 이 학교로 왔습니다. 그 이후 여기에서 결혼도 하고, 내 청춘을 이곳에 묻었죠."

풀무학교의 팬이 되어 이곳에 청춘을 묻고,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고 살고 있는 홍 교장은 일흔에 이르는 느지막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6개 국어를 자랑하는 실력파다. 일본잡지를 보고 좋은 기사는 번역해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어디가나 서점을 먼저 찾는다. 배움에 쉼이 없는 그이기에 그의 가르침에도 쉼이 없다.

작은 학교가 좋은 학교이다

풀무학교는 작은 학교다. 큼지막한 건물에 수백 명의 학생과 교사들, 각종 시설이 있어야 좋은 학교라는 기존의 선입견과는 달리 작은 학교가 좋은 학교라는 게 이곳 교사들의 믿음이고, 설립자의 철학이기도 했다.

"학교의 역할은 사람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덴마크, 영국 어디서나 학교가 사회변화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풀무학교의 설립자 자체도 처음부터 학교는 작아야 한다고 철칙같이 믿었습니다. 한 학년 한 학급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작은 학교로 하기 위해서 기술학교로 허가신청을 냈죠. 농업도 있고 공업도 있지만 농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설립하신 이찬갑 선생은 덴마크 교육에 관심이 높았는데 전인교육이나 건전한 나라가 되기 위해 작은 학교를 고집하신 겁니다."

1950년대 만들어져 허가를 받았고 풀무농업기술학교라는 대안학교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풀무학교는 한국 대안학교의 기원으로 인정받고 있고 대안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지금은 대안학교로 완전 편입되는 게 어떤지 제안을 받기도 하지만 예전 이름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있고, 그 이름 안에 이미 지금까지 펼쳐온 대안교육의 내용이 담겨 있으니까요. 학교 교훈이 '더불어 사는 평민'입니다. 엘리트 교육, 출세 교육이 아니고 평민들, 개성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그래서 혼자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 지향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키운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는데 어떻게 성적이라는 일괄적 잣대로 차별을 받을 수 있나요? 열매보다 뿌리를 가꾸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열매를 따는 사람보다 사회의 뿌리를 바꾸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설립자들이 많이 했죠.

요즘 대안학교라는 이름도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데 대안학교든 공교육이든 교육의 기본을 지켜야 하겠지요. 전통교육과 전인교육이 기본이 아닐까 합니다. 학생들이 교육받는 과목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뭔가 학생들이 학교에서 활발히 움직일 수 있는 학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10년 후의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거죠. 전통에 뿌리를 박고 활발히 현재를 움직이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겁니다. 유엔에서도 지속가능한 교육을 선포했는데 지속가능성이 21세기의 도전이죠. 교육의 측면에서는 우리들의 건강과 직결되는 건강과 직결되는 환경, 문화, 다양성의 존중, 환경에 대한 책임감,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 등이 평화교육이 핵심이 되는거죠. 평화가 특별한 것이 아니고 21세기사회와 교육의 핵심이라고 보면 됩니다."

풀무학교에서 다져지고 더욱 단단해진 홍순명 교장의 교육철학은 변함없고 그 교육철학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안교육의 지향방향과 다름없다.

개교 50년에 접어든 풀무학교는 특히 그러한 교육철학을 지향하며 동시에 지역과 호흡하는 학교를 만들어가고 있다. 졸업생이 1200명이고 그 중 250여 명이 지역에 남아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역 내 다양한 단체, 기관과 박자를 맞춰 함께 지역의 발전도 도모하고 있다. 그러기에 풀무학교에서는 그 지역의 농업이야기가 빠질 수 없으며, 하다못해 작은 가게에서도 풀무학교의 숨결이 묻어난다.

풀무학교가 홍동면을 새롭게 만들다…지역조직의 부화장 풀무학교

풀무학교가 있는 홍동면은 모든 게 다른 곳과 약간씩 다르다. 풀무학교가 그렇고 풀무신협과 생협이 그렇고 언론 또한 그렇다. 대안은 어느 한쪽의 힘만으로 이뤄지지 않기에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대안을 만들어내고 그 대안은 새로운 홍동면, 새로운 농촌의 길로 향한다.

"지역에서도 언론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무직원으로 있으면서 홍동신문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홍성신문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것이 전국 최초의 지역신문이었습니다. 생협은 1977년부터 시작해서 비누, 빵 등을 만들며 유지해오다 요구르트 공장이 생기고 자치센터, 은퇴자 농장, 어린이집 등도 설치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민조직도 굉장히 발달해서 10여개가 넘는 주민조직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인구가 적어서 이러한 주민조직이 활성화되는데 20년이 걸리긴 했지만요. 유기농은 1975년부터 도입했죠. 당시는 유기농하면 농업 망친다고 해서 핍박을 많이 받을 때였는데, 지금은 전국 최대의 오리농법 농업단지로 성장했고 무엇보다도 유기농업 하는 농민과 농민회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모두가 잘 협력을 하고 있어요. 그게 이 지역의 정신이고, 이 지역이 다를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어요. 학교도 대체로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유리될 수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지역사회와 학교간이 소통하고 협력하는 게 너무 자연스럽고 잘 이뤄지고 있거든요."



▲ 홍동면 마을의 오리농법을 체험하는 학생들. 풀무학교 출신들이 마을 지도자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희망제작소

유기농에 앞장서는 이들도, 각종 주민조직에서도 풀무학교의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고 있다. 그야말로 지역조직의 부화장으로서 풀무학교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풀무학교 뿐만이 아니다. 홍동면에는 초등학교부터 전문학교까지 웬만한 교육시설은 다 갖춰져 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같이 지역을 향해있다. 지역에서 학생을 받고 지역주민과 함께 호흡하는 지역학교가 되는 것이 목표이다.

"홍동면에 5000명가량이 사는데 초등학교부터 전문학교까지 다 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만큼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데, 이는 졸업생이 농업이 소중한 것을 알고, 지역에 기여하고 싶어 남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농업도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어떤 농민이냐에 따라 농업이 변화하게 되겠죠."

귀농자들이 선호하는 이유

그렇기에 홍동면에는 귀농자도 많고, 그들의 역할도 크다. 귀농자들이 시도해볼 수 있는 새로운 농업과 기술이 이곳에서는 몇 십 년째 이뤄지고 있으며 시멘트 건물을 벗어난 교육도 대안교육을 지향하는 때문이다.

"홍동면에 16가족의 귀농자들이 들어와 있어요. 모두 열심히 입니다. 귀농후보지가 여러 곳 있는데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고, 몇 년 후 쯤 자립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해요. 저 스스로 귀농자들에게 이웃을 잘 보라고 이야기 하죠. 이곳은 협동조합이 4개나 있고, 아이들을 믿고 맡길 곳이 있으니 귀농지 조건으로서 좋은게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홍동면에는 여성과 아이들도 저항감이 크지 않게 귀농하고 있다. 홍동면의 어린이집도 주민들이 만든 법인체로, 스스로 만들어서 본인의 아이들을 맡기니깐 열심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과 통합교육을 하며 원장도 2년 임기제다. 유기농 급식제, 주민들과 식단위원회도 실시하며 어려서부터 텃밭을 가꾸도록 하고 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릴 때부터 땅과 사람을 중히 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귀농자 등을 위한 생태교육도 실시된다.

"풀무환경농업전문학교는 2년제 전공과정으로 운영되는데 주민들의 평생교육장이 되고 있습니다. 풀무생협 조합원들도 의무적으로 조합의 정신 등을 여기서 교육받고 있어요. 홍성군의 다른 면장들이 젊은이들을 추천해서 유기농의 모든 과정을 기술센터와 더불어 이 곳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일꾼을 기르는 거죠. 2년 학생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평생교육을 진행합니다. 주민도 강의를 듣고 전공과정이 있어 유기농 연구하고 그 지식을 배포할 수 있죠. 어느 지역이나 이런 간단한 학교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 풀무학교 생활협동조합 ⓒ희망제작소

홍순명 교장의 이야기는 교육에서 시작해 지역과 농업과 귀농자와 농업유통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이뤄졌다. 우리밀에 대해서도 그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했으며 농촌이 살아남기 위해 생산 뿐 아니라 가공업과 유통업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유통에 있어 농민 스스로가 주체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홍동면의 마을직판장 '갓골 작은가게'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홍순명 교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풀무학교가 더욱 특별한 것은 대안교육을 실천하는 대안학교여서가 아니라 지역과 호흡하는 살아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학교는 학생들이 지식을 배우는 곳만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교과서 교육으로만 이뤄지지 않으며, 좋은 곳을 탐방하거나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학교가 지역과 호흡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곳이 살아있는 학교이며, 그곳이 바로 여기 풀무학교다.

덧붙이는 말

지난 2006년 6월에 홍순명 선생을 만났다. 그때 그는 위 인터뷰와 같이 풀무학교의 교장이었다. 스물넷의 총각선생으로 1960년에 풀무학교에 부임했던 그는 그러나 올해 초 정년퇴임을 했다. 42년만이다. 풀무학교에 있는 동안 홍동면의 사람과 결혼해 6남매를 낳았고, 아이들을 모두 풀무학교에 보내 수업시켰다. 풀무학교의 첫 졸업생부터 2007년 졸업생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제자가 없다. 그런 그는 학교를 떠나면서 "이제 농민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가 일궈낸 수많은 제자들만큼 알찰 그의 알곡들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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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일시 : 2006. 6. 2
면담장소 : 홍동면 갓골작은가게
면담자 : 풀무농업기술학교 홍순명 교장

알라딘: 류달영 박사의 생애와 사상

알라딘: 류달영 박사의 생애와 사상




류달영 박사의 생애와 사상 - 폐허의 땅에 덴마크 부흥 모델을 제시하다 
김홍근 (지은이)상상의숲2021-05-10

344쪽

책소개

류달영은 일제 감정기와 6·25 전쟁이란 한국 현대사의 절망적 고난을 고스란히 겪었다. 그가 일생 동안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정신으로 ‘나라 사랑’을 최우선에 둔 것은 의분에 찬 국민으로서 너무나 절박한 선택이었다. 일제의 ‘가난’과 ‘무식’이란 식민지 정책 속에서 교육 기회를 빼앗기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90%가 농민인 나라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이어 갔고, 전쟁에 패하고 황무지로 쫓겨난 덴마크가 복지국가로 부흥한 ‘덴마크 부흥사’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20여 년 동안 ‘덴마크 부흥사’를 연구한 그는 6·25 전쟁의 피난지에서 《새 역사를 위하여》를 펴내 ‘덴마크 부흥사’를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절망 속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었고, 국가 재건의 불씨를 당겼으며, 이후 류달영이 ‘나라 사랑’에 헌신한 수많은 놀라운 업적의 신호탄이 되었다. 우리는 험난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 시대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 자랑스런 한국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목차
1. 나의 삶, 사람 노릇 잘하기-유년기에서 죽남보통학교 시절
사랑의 실천가|역사의 거센 소용돌이
동냥젖 먹고 자란 아이|책임감 강한 아버지
어머니의 눈물|아버지와 아들의 정
죽을 고비를 넘다|거짓말을 모르는 농심
산을 지키는 마을 사람들|9살 소년의 ‘독립 만세!’
아들의 신식 교육|공부 열정과 진로 변경

2. 인생관,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양정고등보통학교 시절
김교신 선생을 만나다|자긍심과 독립 정신
이순신을 알게 되다|스승은 인생을 가르친다
명 질문에 명 대답|독서 생활의 시작
독립 의지와 냉수마찰|거지 울음소리와 양심의 소리
나의 친한 친구, 검둥이 개|대장부의 호기와 정신적 성숙
‘농촌 운동’ 서원을 세우다

3. 독립운동과 농촌 운동-수원고등농림학교 시절
자족적인 삶을 버리다|선후배가 독립운동 동지가 되다
불사조 같은 독립 정신|김교신, 사토, 소노다
여성 애국자 최용신을 만나다|맏딸이 태어나다
총독부로 가지 않겠습니다

4. 여성 교육에 젊은 열정을 쏟다-호수돈고등여학교 교사 시절
여성 교육을 선택하다|젊은 정열을 불태우다
수요회에서 동지를 기르다|무감독 시험과 자부심
개성의 독립 정신과 자부심|일본의 탄압과 빛나는 교가
33인, 백두산에 오르다|헬렌 켈러의 열차 연설
도산, 춘원, 백범|최용신의 전기를 쓰다
눈물 밥이 가장 맛있다|기도의 사람
류달영은 교육자다|역사의식, 민족의식을 깨우다
아버지의 나라 잃은 설움

5. 독립을 향한 저항의 불꽃-감옥 생활에서 해방 전후까지
짙은 어둠의 식민지|감옥에서 마음을 수련하다
요행을 바라지 마라|하심(下心)을 배우다
공자, 열심히 배운 사람|감옥에서 쓴 편지
일본인 검사의 뜻밖의 처분|전쟁 말기, 여주에 은신하다
무식과 가난|김삿갓의 글씨
흥남 일본질소연료주식회사|장사 김교신 계장
거목이 쓰러지다|재운 좋은 종묘회사 전무
해방과 조선 이야기|인재 양성과 보이 스카우트 운동
개성 시대의 막이 내리다

6. 이 땅에 덴마크 부흥을 실현하자-서울대 농대 교수 시절
서울대 농대 교수가 되다|폐허로 만든 6·25 전쟁
잿더미가 된 서울|새 역사를 위하여
국민의 부유, 건강, 교육, 복지 사회|그룬트비의 국민 교육
크리스텐 콜|달가스와 황무지 협회
미국의 교육 지원|학문의 바다 미네소타대학교
한국의 밤|코넬대학교와 한국의 들잔디
영국과 독일의 인상|덴마크를 찾아가다

7. 나라의 부름을 받고-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 시절과 이후
박 의장과 조건부 수락|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 취임
동양의 덴마크 건설|국민운동의 네 기둥
공과 사|김두한의 사과|혁명 정부에 부치는 직언
군사 정부와 국민운동 해산|박정희에 대한 평가
새마을 운동|평화 농장과 농민 운동
전국농업기술자협회|농업진흥관 건립
농민 대학|한국유기농업협회|한국농산물유통연구회
초인적인 사회봉사 활동|나라꽃 무궁화

8. 마지막 필생의 사업-성천문화재단을 세우고
성천문화재단의 창립|생활문화아카데미의 동서인문고전강좌
보람찬 노년|아내 이창수 여사|만능인
유머는 인생의 맛을 내는 향신료|극진한 건강 관리
참 잘 되었구만|누구와도 흉금 트고

후기
성천 류달영의 사상-김홍근

부록
밟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류달영 연보
류달영 저서
류달영 작사 노래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인간은 살려고 태어났다.
추천글
선생은 인생을 재미있고도 풍요롭게 사셨습니다. 유머러스한 말씀으로 항상 우리에게 즐거움을 나눠 주었습니다. 선생은 겉으로는 그렇게 즐겁게 사시는 것 같아도 마음속은 바닷물같이 넓고 깊은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이 박정희 정권을 도왔다고 해서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4·19 이후의 혼란기에 누군가가 나라 일을 수습해야겠다는 남모르는 걱정을 했습니다. 6·25 전쟁을 겪은 우리 세대는 내부적 혼란보다도 공산 정권의 이념과 물리적 남침을 더 걱정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저에게 남겨 준 뜻은 어떤 정권이든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지지하고, 피해와 고통을 주는 정치는 반대하는 것이 탈 정치적인 애국심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성천 선생을 회고할 때마다 그분의 애국심과 인생을 지혜롭고 즐겁게 해 주는 스승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류달영 선생. 내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기업인도 재벌도 아닌, 게다가 자본과는 거리가 먼 대학 교수가 사재를 털어 재단을 설립한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산업화를 거의 완성해 가던 시기였다. 하지만 문화의 토대인 정신적 가치와 창조성을 잃어버린 번영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또한 우리는 거친 시대를 거치며 민주화를 성취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 선생은 이를 예견한 것일까? 공익재단을 설립해 정신적 가치를 드높이는 인문학 교육 및 문화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화적 결실, 나아가 세계인의 마음에 불 지핀 한류는 류달영 선생처럼 인간 정신의 가치를 드높인 이들의 문화적 안목과 통찰이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책에서 독자는 그의 업적뿐 아니라 인간 류달영을 진심으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저자 및 역자소개
김홍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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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중남미 문학을 전공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서 <옥타비오 파스의 시 사상>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성천문화재단에서 실무책임자로 20년간 고전아카데미를 운영했다. 지금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와 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의식교육 연구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선화> <참선일기> <보르헤스 문학 전기> <인생교과서 부처(공저)> 등을 펴냈고, 번역서로는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 더보기
최근작 : <류달영 박사의 생애와 사상>
출판사 제공 책소개
류달영, 폐허의 땅에 부흥의 길을 제시한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
저자 김홍근은 성천(星泉) 류달영이 창설한 성천문화재단에서 20년간 실무 책임자로 일하면서 류달영을 가까이 모셨다. 김홍근은 류달영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의 이력과 저서 등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류달영의 전기이자 평전인 《류달영의 생애와 사상》을 펴냈다.

류달영은 일제 감정기와 6·25 전쟁이란 한국 현대사의 절망적 고난을 고스란히 겪었다. 그가 일생 동안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정신으로 ‘나라 사랑’을 최우선에 둔 것은 의분에 찬 국민으로서 너무나 절박한 선택이었다. 일제의 ‘가난’과 ‘무식’이란 식민지 정책 속에서 교육 기회를 빼앗기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90%가 농민인 나라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이어 갔고, 전쟁에 패하고 황무지로 쫓겨난 덴마크가 복지국가로 부흥한 ‘덴마크 부흥사’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20여 년 동안 ‘덴마크 부흥사’를 연구한 그는 6·25 전쟁의 피난지에서 《새 역사를 위하여》를 펴내 ‘덴마크 부흥사’를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절망 속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었고, 국가 재건의 불씨를 당겼으며, 이후 류달영이 ‘나라 사랑’에 헌신한 수많은 놀라운 업적의 신호탄이 되었다. 우리는 《류달영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험난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 시대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 자랑스런 한국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역사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 노릇하기
1911년 5월 6일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2004년 10월 27일 94세의 나이로 소천하기까지 성천(星泉) 류달영의 삶은 자신의 생명을 최대한 꽃피우는 모습, 그것이었다. “선생님이 가시고 나면 어떤 한마디 말로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자 “나의 삶은 그저 사람 노릇 잘해 보려 했던 것뿐이지.” 평소 ‘하늘은 서로 돕는 자를 돕는다(相助者天助).’를 강조한 그는 좌우명인 ‘호학 친교 위공(好學 親交 爲公: 배우자 사귀자 이바지하자)’을 평생 실천한 사람이다. 종교가 무엇인지 묻자 “굳이 내 종교를 말하자면, 나라 사랑이 곧 내 종교라고 할 수 있겠지.” 태어나 보니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었고, 일제 강점기 36년을 고스란히 살아온 그. ‘나라 사랑’을 자신의 종교로 삼은 이유는 그가 태어난 시기에 기인한다. 태어나자마자 어쩔 수 없이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쓸려 살게 되면서 모든 가치를 자신보다 먼저 나라를 위하는 데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류달영은 이 사실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나라 먼저 나는 나중(公先私後)’의 삶을 살았다.

운명적 만남, 김교신 선생
1919년 3월 1일, 마을 산에 올라 횃불을 든 어른들 틈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9살 소년,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신식 교육을 받기 위해 1922년 죽남공립보통학교(현 설성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서울의 5대 사립학교 중 하나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일제는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일관되게 교육 기관을 최소화시켰지만 류달영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막지 못했다. 1928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류달영은 1학년 담임으로 김교신 선생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김교신은 월간지 <성서조선>의 편집인이기도 했고, 사상적 깊이를 지닌 종교인이자 교육자였다. 그의 동경고등사범학교 동기 동창인 함석헌이 《뜻으로 본 조선역사》를 냈다면, 김교신은 ‘뜻으로 본 조선 지리관’을 담은 《조선지리소고》를 냈다. 이 책은 근대 지리학 관점에서 조선 지리를 평가한 최초의 책이다. 류달영은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모두 김교신 선생과의 만남의 산물이라며 참 스승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김교신은 일제 교과서를 무시하고 조선 역사와 조선 지리를 가르치며 독립 정신을 심어 주었다. 당시 교육은 일본의 우수성만 가르치고 한민족의 역사는 까맣게 지우던 때다. 류달영은 이순신을 처음 알게 된 날을 잊지 못했다. 이 시기에 그의 가슴속에서 민족의식이 깨어났고, 독서를 본격화했으며, 냉수마찰로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진취적인 젊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침투해 활동한 러시아 농촌 계몽 운동인 ‘브 나로드’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1931년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청년 학생들이 ‘브 나로드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의 구호는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모두 합쳐야 2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들 중 상급생 일부가 이 운동에 참여했고 그중 류달영도 있었다. 당시 전국 농민들의 90퍼센트 이상이 문맹이었다. 지식인과 학생들은 주로 농민들에게 한글과 기초 산수, 보건 위생 상식 등을 가르치는 계몽 활동에 주력했다. 류달영은 사람들에게 글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무식을 벗어나고 사람답게 떳떳이 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또한 남자 못지않게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설득했다.

운명적 만남, 《덴마크의 이야기》
1933년 류달영은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을 앞두고 조국과 농촌의 암담한 현실을 체험한 피 끓는 청년으로서 자족적인 삶에 일생을 바칠 수 없었다.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농민이니 그들을 계몽시키지 않고는 나라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농학을 전공해 농민 운동을 해야겠다는 소망을 품고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에 진학했다. 사립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학생들이 민족의식이 강한 것을 알고 있는 일제는 그들의 입학을 꺼렸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30여 명 정도로 기숙사 방에 ‘자유 독립’이란 구호를 써 붙이는 등 ‘개척사’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다 발각되어 퇴학당하거나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후배는 동지가 되어 비밀 결사 활동을 이어 갔고, 암암리에 농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시절, 류달영은 운명적인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 김교신 선생은 일본 무교회주의 창시자로 세계적인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문하생이었다. 류달영은 김교신 선생으로부터 우치무라 간조의 저서 《덴마크의 이야기》를 받게 되어 덴마크 부흥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6·25 전쟁 때 피난지에서 《새 역사를 위하여》를 집필했다.

여성 교육을 선택하다
1936년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류달영은 보다 현명하게 나라를 위한 길을 찾아야 했다. 류달영은 《덴마크의 이야기》를 읽고 청년 교육과 협동 운동이 광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는 인재 양성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암흑천지인 여성 교육을 선택한다. 그는 어머니의 정신이 국가와 사회를 좌우하는 밑거름이라고 생각했다. 개성의 호수돈고등여학교(현 호수돈여고)가 첫 부임지다. 호수돈고등여학교는 미션 스쿨이어서 일본인들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류달영은 정규 수업 외에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과목을 수당 없이 가르치며 여성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매주 수요일 수업이 끝난 뒤 박물 표본실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성경 공부와 더불어 조국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면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관해 토론했다. 또한 제자들의 오빠나 친척을 소개 받아 수요일 밤이면 남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교육을 시작했다. 이 공부 모임을 수요회라고 정했고, 수요회 회원 중에서 후일에 목사, 대학교수, 농촌 사업가 등이 나왔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되다.
1942년 봄, 김교신이 발간해 온 <성서조선>의 권두문이 문제가 되어 필화를 겪게 된다. <성서조선>은 1927년 7월에 창간한 무교회주의 신앙 잡지로 함석헌의 ‘뜻으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하는 등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실어 왔다. 일제는 권두문에서 김교신의 조선 해방에의 의지를 읽고, 당장 300여 명의 <성서조선> 동인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류달영도 검거되어 11개월 동안 유치장 감방과 구치소 감방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김교신, 함석헌 등과 동경고등사범학교 동창이면서 무교회주의의 스승인 우치무라 간조를 사모하는 일본인 검사가 ‘성서조선 사건’을 맡게 되면서 관련자 전원이 불기소 처분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류달영은 해방된 조국을 위해 할 일을 고민한다. ‘백만사(百萬事)는 모두 인간이 한다.’는 실천 원리를 떠올리고 인재 양성을 위한 방법을 찾는다. 교육은 시간이 많이 걸리니 단시간 내에 사람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찾다가 신념 있는 청소년이 육성되는 것을 경계해 일본인들이 해산시킨 보이 스카우트를 조직한다. 훈련을 마친 소년들은 조를 짜서 혼란한 질서를 바로잡는 봉사를 했다. 또한 행정과 치안이 공백 상태여서 개성 유지들이 모여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개성시 자치 위원을 선출해 행정과 치안을 맡겼다. 류달영은 10여 명의 자치 위원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새 역사를 위하여》를 집필하다
1946년 류달영은 모교인 서울대 농과대학(전 수원고등농림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류달영은 농대에서 화훼 원예학을 가르쳤다. 그는 화훼를 산업화해 수출 작물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장려했다. 1950년 여름 한국 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 갔고, 1·4 후퇴 때는 대구로 피난 갔다. 전쟁 통에 남루한 차림의 대구 시민들과 피난민들이 한데 뒤섞여 물결처럼 흘러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되찾은 해방인데 다시 나라가 두 쪽으로 나눠 싸우고, 이번에는 미국, 소련, 중국이 먹이를 놓고 서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또 자립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게 된다. 조국의 살길은 덴마크처럼 국민정신이 깨어나는 수밖에 없고, 이 시점에 그의 사명은 국민정신을 일깨우는 책을 쓰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47일 만에 집필을 끝낸 《새 역사를 위하여》(부제: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 운동)를 읽고 다석 유영모는 감격했으며, ‘한국 농민 운동의 바이블’로 불리면서 아래로는 농민으로부터 위로는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애독서가 되었다. 또한 공무원과 군인들의 필독서이기도 했다. 당시 지성인치고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10여 년 후 국무총리급인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아 동분서주하며 봉사하게 된 것도 출발점은 이 책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면 이 책으로 류달영의 인생이 바뀌었다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저서였고, 저자의 의도대로 국민정신이 깨어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암울한 피난 시절을 생애 최고의 창조적 시간으로 바꾼 그의 지혜와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새 역사를 위하여》, 동양의 복지 국가를 꿈꾸다
류달영은 우리처럼 약소민족이면서 무서운 시련을 겪고도 망하지 않고 자주독립과 부흥의 길을 걸은 본보기로 덴마크를 꼽는다.
“보기 드문 역경 속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고 교육으로 건실한 국가 터전을 만들었고, 약한 힘을 한데 모아 협동하는 슬기를 길러 목적한 복지 국가를 건설한 농민의 나라 덴마크는 우리에게 살길을 지시하는 신의 계시처럼 느껴진다.”
“하늘도 감동케 하는 애국자들의 성실, 소박하고도 우둔한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의 꾸준한 분투, 조국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건전한 슬기 등 약자로서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번영의 원리를 그들은 남김없이 찾아내어 도탄에 빠진 조국뿐 아니라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여러 나라를 오늘의 복지 국가로 바꾸어 나갔다.”
그렇다. 류달영의 꿈은 대한민국을 동양의 덴마크, 동양의 복지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한 것이 곧 류달영의 일생이다.
또한 류달영은 ‘덴마크 부흥’에서 역사의 재평가에 관심을 갖는다. 1801년과 1807년에 영국 함대는 덴마크를 침공해 수도 코펜하겐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 해전은 영국 해전사의 빛나는 업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덴마크에는 치욕의 역사로 남아 있다. 1837년 덴마크의 위대한 애국자 그룬트비는 청년들에게 코펜하겐 해전에서 활약한 해군 장교 윗모스에 대해 강연하곤 했다. 강연장은 그룬트비가 작사한 ‘용사 윗모스의 노래’를 청중들이 합창하며 뜨거운 애국심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때부터 코펜하겐 해전은 참패한 치욕적인 전쟁이 아니라 덴마크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던 애국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를 계기로 덴마크에서는 ‘애국 노래’ 운동이 벌어져 수많은 국민가요가 유행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국민가요는 국민을 단결시켜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류달영은 이렇게 말한다. “한 나라의 발전은 그 나라 국민들의 건전한 애국심의 총화에 정비례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 없는 나라는 지탱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일본인이 덮어씌운 식민사관을 빨리 벗어 던져야 한다. 역사를 보는 각도를 우리는 크게 돌려야 한다. 나는 온 국민이 역사를 재발견할 것을 거듭 강조한다.”

류달영은 덴마크의 온 국민이 패전의 어둠 속에서 비탄에 잠겨 있을 때, 비록 전쟁에서 패했지만 정신은 전혀 패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대표적인 사람이 그룬트비와 크리스텐 콜 그리고 달가스라고 했다. 그룬트비는 덴마크 청년들을 교육시킬 국민 교육을 창안했고 국민 교육 방법론으로 ‘국민고등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크리스텐 콜은 그룬트비의 이상을 받아들여 국민고등학교 교육을 실천하고 발전시킨 선구자였다. 덴마크의 교육 목표는 뜨거운 인격 교육이었다. 교육 목표의 명확함, 교사 양성의 철저함, 형식을 초월한 실천적인 교재, 실질적인 능력 배양 등 ‘실사구시’하고 ‘무실역행’하는 덴마크의 모습에서 류달영은 큰 감동을 받았다. 달가스는 또 어떤 사람인가? 달가스는 조국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모두가 실의에 빠져 허둥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살아날 길은 없는 것일까? 그는 모두가 개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황무지를 기름진 땅으로 바꾸는 것만이 패망한 덴마크가 살아날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황무지 협회’를 만들어 기적처럼 숲을 이뤄 냈다. 나무 한 점 없는 참혹한 황무지 유틀란트반도는 서서히 푸른 숲과 그림 같은 목장과 아름다운 농가가 펼쳐지는 낙원으로 변해 갔다. 황무지 협회 창설 30년 만에 황무지의 90퍼센트가 개간되었다. 달가스는 덴마크 사람들에게 지상 최고의 복지 국가라는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류달영은 달가스를 통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오히려 새 역사를 창조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개척 정신을 가진 사람만이 값진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류달영은 덴마크가 조국 재건에 성공한 근본 원인은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확실한 교육 목표와 특유의 교육 제도를 창안해 전 국민을 단시일 내에 교육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 농업을 일으켰다. ‘교육과 농업’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한 국가가 앞으로 전진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두 요소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류달영은 농업은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덴마크가 산 증거라고 했다. 다른 나라들의 협동 사업은 주로 도시에서 이뤄졌다면 덴마크에서는 철저히 농촌에서 진행되었다. “무슨 일을 시작할 때면 미국 사람들은 먼저 기계를 생각하고, 덴마크 사람들은 먼저 조합을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덴마크의 경제적 번영은 협동 사업의 성공에 기인한 바 크다. 덴마크의 거의 모든 사업이 협동조합화 했다. 농촌에는 심지어 체조 조합, 강연 조합까지 조직되었다. 덴마크 농산물은 조합에서 철저히 관리되기 때문에 외국에 수출해도 최고의 품질로 신뢰를 받는다. 덴마크 협동조합의 최고 장점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인간이 신뢰를 만들고, 신뢰는 다시 인간을 만든다.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이 되다
1961년 류달영은 5·16 군사 정변 직후 조직된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이 된다. ‘덴마크 부흥사’에 조예가 깊은 류달영을 본부장으로 위촉하고 싶었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세 차례에 걸쳐 부탁을 했다. 군사 정부의 산하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던 류달영은 마지막엔 조건을 내세워 완곡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는 박 의장은 즉석에서 승낙했다.
1961년 9월 7일, 류달영은 취임사에서 “지금 우리의 마음씨, 지금 우리의 몸차림, 지금 우리의 행동은 그대로 삼천만 민족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국가재건국민운동의 분명한 목적은 하루속히 군정을 끝내는 데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어쩌면 당시 한국에서 국민운동을 이끌 사람으로 류달영만 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여러모로 ‘준비된 본부장’이었다. 류달영은 덴마크의 국민 교육을 벤치마킹해 전국 청년들의 정신 교육부터 실시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시와 군에 교육원을 설치하고 연수 교육을 계속 이어 갔다. 거국적인 국민 의식 교육은 대성공을 거뒀다. 국민 의식이 단기간에 이처럼 고양된 예는 고금에 전례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류달영의 속마음은 한국을 하루속히 ‘동양의 덴마크’로 만들자는 것이다.
류달영은 밤낮없이 온몸을 바쳐 뛰었다. 취임한 지 일 년 동안 국가재건국민운동의 네 기둥인 국민 교육, 향토 개발, 생활 혁신, 사회 협동 부문의 모든 사업에서 앞장섰다. 발이 닳도록 경향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

시간이 갈수록 군사 정권 아래 국민의 자유의사가 완전히 봉쇄되어 민심은 굳을 대로 굳어 갔다. 지성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데도 툭 하면 잡혀가고, 중앙정보부에서 곤욕을 치렀다. 류달영은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지만 군사 정부를 향해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충고하기로 결심했다. 1962년 12월, 류달영은 밤중에 장충단의 의장 공관으로 직접 찾아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박 의장에게 그는 메모해 온 글을 읽어 주었다. 박 의장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주된 내용은 이랬다.

- 군인들은 정치인이 아니다. 본인들이 정치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군정이 아무리 정치의 성과를 거둔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상적 정치라고 할 수 없다. 또 나라 안의 질서가 잡혀 평온하지만 그것은 계엄령하의 상태이지 정상적인 평온은 아니다.
- 군사 정부는 혁명 공약을 발표했는데,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 군인들의 기질로 모든 일을 서둘러 해결하려 드는데, 그것은 큰 과오를 범하기 쉬우니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 군사 정권은 후일의 역사가 값지게 평가할 수 있도록 당당한 업적을 남기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은 국민의 협조를 얻는 대의(大義)의 혁명을 성취하는 일이다.

하루는 김형욱 정보부장이 조용히 충고했다. 류달영이 차기 대통령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모종의 음모가 진행 중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일종의 사퇴 압력이었다. 류달영은 더 이상 본부장 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류달영은 1963년 5월 사표를 냈고, 오래지 않아 군사 정부는 하루아침에 국가재건국민운동 설립 법을 폐기하고 해산시켰다. 류달영은 군인들의 정치 바람에 함께 휩쓸리지 말고 독자적으로 국민운동을 계속해 나가자고 역설했고, 민간단체인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발족되어 초대 회장으로 류달영이 선출되었다.
중앙회는 나름대로 값진 사업을 추진했다. 우선 국민신문 발간, 재건 학교 사업, 마을금고 사업이었다. 마을금고는 지역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고, 후일 새마을 금고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류달영은 5·16 군사 정변 4주년 하루 전날인 1965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에 군사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류달영의 사진과 서명까지 곁들인 장문의 글이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실렸다. 제목은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이었다. 군정은 슬픈 촌극이고 실패작이라고 논리적으로 지적했다. 4년이 지난 오늘 혁명 공약을 실천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도 했다. 류달영은 군사 정권하에서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지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념대로 대한민국의 국민운동을 한 것이지 군정의 국민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또한 장군 시절의 박정희가 《새 역사를 위하여》를 읽고 감동받아 혁명을 일으키자마자 국가재건국민운동을 추진하고 이것이 새마을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누가 뭐래도 한국이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한 나라로 변신한 데는 국가재건국민운동과 새마을 운동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을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모든 일은 인간이 하고 인간을 만드는 것은 정신이다. 만사를 시작할 때 의식 교육 사업부터 손대는 류달영의 정신 자세는 귀감이 될 만하다.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제2대 총재
류달영은 1972년 한국의 농민 단체로서 역사가 가장 오래고 회원도 가장 많은 전국농업기술자협회의 제2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류달영은 전국농업기술자협회에서도 먼저 교육 사업을 추진했다. 농업진흥관 내에 농민들을 교육하는 농민 대학부터 설치한 것이다. 농민 대학은 농업의 최신 기술을 가르쳤다. 막상 교육을 시작하자 의외로 농민들의 배움의 열기가 대단했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는 언론이 정직하게 농약과 화학 비료의 폐단을 보도했다. 우리나라는 농약과 비료를 일본보다 훨씬 많이 쓰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심한 데도 정부는 증산에만 신경을 쓰고 부작용을 쉬쉬하며 덮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에 류달영은 ‘한국유기농업협회’를 창설했다. 협회는 고추 생산 왕이나 벼 수확 왕을 차지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유기농업으로 지질이 회복된 까닭이다. 또 류달영은 일본의 농산물 유통 사례를 접하고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은 농민들이 농산물 유통을 배워 실질 소득을 높이고 있었다. 이에 ‘한국농산물유통연구회’를 창설해 농민, 상인, 공무원 등 모두에게 유통 교육을 실시했다.
류달영은 타블로이드판 <유통정보>를 발행해 널리 보급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정보지는 후에 <한국농어민신문>으로 발전해 농어민의 친구가 되었다. 류달영은 큰 보람으로 여겼다.

1974년 이미 60대를 훌쩍 넘긴 류달영은 엄청난 일복과 만나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총재, 서울대학교 교수협의회 회장, 국민윤리학회 회장, 대한가족계획협회 회장, 전국재해대책협의회 회장, 한국덴마크협회 회장, 카운슬러협회 회장, 4H운동 회장, 건전생활중앙협의회 회장, 한국원예협회 회장, 인간교육원 회장,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 이사장, 세종기념사업회 부회장,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대한적십자 서울지사 상임위원, 사회교육 심의위원, 한국잡지윤리위원회 위원, 국제가족계획협회연맹 이사 등의 일을 맡아 국내외에서 초인적인 활동을 벌였다. 1972년에는 건국대학교에서 명예 농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1976년 서울대 교수로 30년을 근속하고 정년 퇴임한다. 그리고 명예 교수가 되어 사회봉사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류달영은 서울대 농대의 화훼학 교수로서 그 어떤 꽃보다 겨레의 상징인 무궁화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이 보이는 족족 뽑아 버린 나라꽃. 무궁화와 비슷한 문양을 사용해도 죄가 되던 시대였다. 해방이 되고 서울대 농대에서 무궁화 연구를 시작하려 할 때 무궁화 품종 자체가 너무 귀했다. 일제에 의해 모조리 제거된 것이다. 그는 무궁화 연구를 위해 마라도에서 판문점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일본은 한국의 무궁화를 일본으로 가져가 육종 연구에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우리에게는 ‘쓸모없는 나무’라고 속이고, 자기들은 몰래 연구하고 개량하고 있었다. 진딧물이 많은 나무라고 악선전을 하더니 알고 보니 효과가 큰 약용 식물이었던 것이다. 류달영은 자신의 평화 농장에서 무궁화를 직접 가꾸었고, 100여 종의 신품종 무궁화를 개발했다.

성천문화재단의 창립
스스로 농민이 되어야 농민과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한 류달영은 일찍이 《새 역사를 위하여》의 인세로 땅을 구입해 평화 농장을 가꾸었다. 그런데 80세에 접어든 1990년 무렵, 평화 농장의 반 정도가 동수원 인터체인지로 수용되었다. 그는 뜻밖의 큰돈을 보상금으로 받게 되었고, 성천문화재단을 창립한다.
전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농민이던 시대에는 농촌 운동에 뛰어들어 매진했다면, 우리나라가 산업 국가로 바뀌어 도시민이 농촌 인구를 훨씬 능가하게 되자 이제는 도시인의 의식을 개혁하는 평생 교육 사업을 생애의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고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성천문화재단의 아카데미에서는 한국인들이 건전한 정신문화와 건실한 생활 문화를 영위할 수 있도록 성현들의 인문고전 강좌를 매년 개설하고 있다.

류달영은 2004년 10월 27일에 별세했다. 막상 그분이 돌아가고 난 뒤에 돌아보니 류달영이란 인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거인이다. 마치 뿌리는 깊은 땅속에 박고, 머리는 구름 위로 내놓은 거목을 보는 듯한 느낌. 그가 살아온 이력을 살펴보면 그를 ‘인간오케스트라’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다재다능했던 그의 생애는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교향악단 같다. 접기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4)"난 공자를 능가하는 성인을 만났다" : 네이버 블로그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4)"난 공자를 능가하는 성인을 만났다" : 네이버 블로그

새마을운동의 아버지가 추앙한 다석 류영모 - 이빈섬.
막내아들이 시한부생명 선고를 받고난 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며 쓴 '슬픔에 대하
여'는 류달영이 쓴 수필이다. 교과서에도 실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았던 명편이다. 
류달영은,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강권으로,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맡는다. 그는 한국전쟁
무렵 '덴마크 농업혁신'과 관련된 책을 내서 전쟁통에 베스트셀러를 낸 바 있었다. 이것을 박정
희가 본 것이다. 정부의 혁신조직에 참여한 류달영은 향후 새마을운동의 근간이 되는 정책들을
기획하고 입안한다. 
이후 독재정권과는 불화의 길을 걸어갔지만, 그의 농촌대혁신은 국가경제의 기틀을 만들어냈
다. 류달영은 명실상부한 새마을운동의 아버지다. 류달영이 덴마크농업을 공부하게 된 것은 스
승 김교신이 준 책(우치무라가 썼다) 덕분이었다. 
김교신의 오산학교 스승은 바로, 다석 류영모다. 그러니까, 류영모는 류달영의 스승의 스승이었
다. 류달영은 류영모를 가리켜 '간디와 이순신 같이 시대가 낳은 성인이며, 공자보다 뛰어난 일
을 했다'고 평가하며 그를 추앙한다. 
류달영이 남긴 성천재단은 아직도 류영모 사상연구회에게 사무실을 무료로 쓰게 하고 있다. 류
영모 같은 큰 인물이 탄생한 것만으로도 일제36년의 고통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류
달영. 오늘은 그의 삶과, 그를 통해 바라본 다석 류영모이다. /빈섬.
다석 류영모
[
==
"인도가 300여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피해는 식민지 기간 동안에 마하트마 간디의 탄
생으로 보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36년 동안 일제(日帝)의 식민지가 되었던 손해는
식민지 기간 동안에 류영모의 탄생으로 보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순신이란 인물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인물은 그 시대의 소산입니다. 나라에는 참
된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류영모 한 사람의 탄생이 일제 36년 동안 온 겨레가 겪은 고통의 값만큼 크고 귀하다(이 말은
결코 겨레의 고통을 낮춘 것이 아니라 그 극한의 고통만큼이나 류영모가 이룬 정신적 성취가
값지고 높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고 말한 사람은 농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류달영(1911~20
04)이다. 인도의 간디에 비견되는 사람,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해낸 일과 비교되는 사람으로 류
영모를 꼽은 류달영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왜 류영모를 이 겨레붙이가 낳은 최고의 성자로 손
꼽았는가. 그에게 매료된 한 지식인의 과도한 평가였는가. 아니면 그뒤의 많은 이들이 잊어버리
거나 놓쳐버린, 한 인물의 어마어마한 가치를 그가 일찍이 발견하고 저토록 명쾌하게 밝혀놓은
것인가.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류영모 선생을, 공자를 능가하는 성인이라고 하여도 전혀 거부감이 일어
나지 않습니다." 인물은 시대의 열매이며, 나라를 바꾸는 견인차라는 게 류달영의 생각이었다.
그는 왜 그토록 단호하게 류영모를 한국의 빅리더로 지목했던가. 
러시아 레닌을 바꾼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
1870년대 러시아 차르의 전제정치를 극복하려는 지식인들의 몸짓은 농촌으로 파고들었다. '브
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은 농촌을 계몽하여 나라를 바꾸려는 청년들의 작은 혁명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이었던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는 감옥 생활 속에서 소설 '쉬토 젤라치(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다. 이 책은 러시아 청년의 혁명고전이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1902년 발표한
공산당 조직론을 '쉬토 젤라치'라고 이름 붙였다.
브나르도 운동은 러시아에선 실패했지만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부활한다. 청년들은 농촌
계몽을 하러 저마다 시골로 내려갔다. 이때의 분위기를 담은 소설이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
록수'다. 소설 '상록수'는 박동혁과 채영신이란 작중 인물을 겨레의 뇌리에 기억시킨 작품이다.
채영신은 실제 인물 최용신(1909~1935)을 모델로 했으며, 그와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펼친 이
는 류달영이었다(그는 나중에 이 소설이 팩트를 바꾼 점을 바로잡기 위해 '농촌계몽의 선구 최
용신 소전'이란 책을 펴내기도 한다). 1931년 여름 양정고보 4학년이던 류달영은 동아일보의
브나르도운동에 참여하면서 농민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의대를 보내려는 가
족의 뜻을 물리치고 수원고등농림학교(3년제, 서울대 농대 전신)에 입학한다.
류달영의 삶을 바꾼 책 '덴마크 이야기'
양정고보 시절 5년간 류달영의 담임선생이었던 김교신은 이 무렵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
야기'라는 책을 선물한다. 농업국가 덴마크의 부흥 스토리가 소개되어 있는 이 책을 읽은 류달
영은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해방 뒤인 1952년 서울대 농대교수 류달 2 0
빈섬학당
영은 피란지 대구에서 책 한권을 펴낸다. '새 역사를 위하여: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란 책
이었다. 전쟁통에 찍은 이 책은 몇년 새 26쇄를 찍어낼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류달영을 여러 차례 만나 "덴마크 연구에 조예가 깊은 류 선
생을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으로 위촉하고 싶다"고 밝혔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 업무에 당시
군사정부(국가재건최고회의)가 간섭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직책을 수락한다. 그해 9월 본부
장을 맡은 류달영은 덴마크 모델에 따른 국민운동계획을 수립한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나의 숙소에는 1956년 덴마크에서 사온 그곳 지도자 그룬트비 사진을 걸어놓았고, 출근 때마
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나왔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중에서)
이때 류달영이 시도한 재건국민운동은 박정희 새마을운동의 모델이 된다. 그는 국민교육, 향토
개발, 생활혁신, 사회협동의 네 분야로 사업을 나눠 농촌운동 지도자를 교육하고 마을 청년회관
과 농로 및 수로를 건설한다. 결식아동 급식제와 부엌, 화장실 등의 생활환경 개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류달영(1911~2004)]
류달영, '새마을운동의 아버지'
그러나 군사정부가 민간정권으로 옷을 갈아입던 1964년 국민재건운동법이 폐기되고 본부가
해체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용당한 모양이 됐다. 1965년 5월 15일 동아일보에는 류달영의 기
고가 실렸다.
“5·16군사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이 나라의 하나의 비극으로 종말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야 한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 존재하였고, 또 그것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류달영의 ‘비극의 5
·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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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류달영은 민간 차원의 재건국민운동중앙회(사단법인)를 결성했다. 그는 자신이 펼친 재건
국민운동을 새마을운동과 연관 짓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류달영이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실
질적인 힘이 되어준 것은 사실이었다. 새마을운동연수원장 김준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서울대
농대)이 이 운동의 주요 간부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는 박정희의 가장 가치있는 성과로 꼽히
는 새마을운동의 원천기획자이자 실행의 핵심두뇌였다. 식민지 시절 우연히 받아든 한권의 책
이 이 나라의 운명을 바꾼 거대한 동력이 되었다. 류달영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세운 숨은 힘이
다.
여의도에 있는 성천재단과 다석연구회
류영모의 사상과 삶을 배우는 다석사상연구회는 서울 여의도 63빌딩 옆의 조촐한 건물인 라이
프오피스텔 강의실에서 매주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에는 류영모의 정통 제자라 할 수 있는 박
영호 회장과 최성무 대표, 김성언 총무를 비롯해 다석을 좇는 '언님'과 후학들이 모여 신앙행사
와 강연, 학습의 시간을 갖고 있다. 다석사상을 꽃피우고 있는 이 '교실'을 무기한으로 쓰도록
유지(遺旨)를 남긴 사람이 류달영이다. 그의 재단인 성천(星泉·류달영의 호)문화재단이 다석을
기려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류달영은 농업시범을 목적으로 경영해 오던 수원의 평화농장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로 편입되
었을 때 그 보상비 10억원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문화재단을 세웠다. 이것이 1991년
설립된 성천문화재단이다. 발기인으로는 류달영을 비롯해 구상, 김도창, 류화숙, 서영훈, 전택부
등이 참여했다. 이 재단은 정신 및 생활문화 창달을 위한 고전과 현대와 미래 교육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재단의 키워드는 문화이며, 문화사업과 문화민주주의,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추구
한다. 이 재단은 특히 류영모와 관련된 사업과 행사들을 팔을 걷어 지원하고 있다. 
류달영은 왜 스승의 스승(스승 김교신의 스승인 류영모)을 이렇듯 사후에까지 길이 모시려 했
을까. 그는 류영모가 예수나 석가처럼 사람들에게 진리의 생명을 가르쳐 주었기에 그 가르침이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고통받던 겨레를 구하는 중차대한 역할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류영모의 정신혁명, 류달영의 경제혁명
그 스스로가 뛰어난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류달영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강권에 '국가
기틀을 잡는 작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바를 꿋꿋이 지키며 문화
창달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랬기에 류영모의 '크기'를 읽은 것이다. 이 나라의 '정신'이 걸어온 본연의 길과 마땅히 서야
할 자리를 가리키면서도 서양이 수천년에 걸쳐 이뤄놓은 종교의 원천적 본령(本領)으로 치달아
올라 기독교의 지순한 경지를 개척한 성자의 '가치'를 헤아린 것이다. 중국의 공자가 해놓은 동
양 정신가치의 혁명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류영모 앞에 옷깃을 여민 후학(後學) 류달영 또한 예사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 내면엔 이 나
라를 위한 위대한 비전과 에너지가 꾸준히 솟아나, 우리가 선진국으로까지 도약하는 경제의 주
춧돌과 엔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역사는 지하수처럼 숨은 물길로 이렇게 흐른다. 류영모의
정신혁명과 류달영의 경제혁명은 20세기 이 나라를 각성시키고 도약시킨 놀라운 저력의 비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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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학당
류달영은 중·고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수필가이기도 하다. 그의 수필 '슬픔에 관하
여'는 생에 대한 비감(悲感)과 관조를 이해하게 되는 명편이었다. 그의 인간적 면모를 이해하게
되는 글이라 소개한다. 막내아들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다음에 쓴 절절한 문장들이다.
"나의 막내아들은 지난봄에 국민학교 1학년이 되어 있어야 할 나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이 아이는 '신장종양'이라고 하는 매우 드문 아동병에 걸렸다. 그러나 곧 수술을 받고 지금
까지 건강하게 자라왔다. 그런데 오늘, 그 병이 재발한 것을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의학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선고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손목을 하나씩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우리 내외는 천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을 쉬
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은 시골에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 사
람의 물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티끌만한 근심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얼
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자기의 마지막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맹목(어두운 눈)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빠, 구두."
그는 구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두가 신고 싶었나 보다. 우리 내외는 그가 가리킨 가
게로 들어가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어린 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는 그의 기쁜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오늘이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할 듯한 암담한 날임
을 누가 알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한 것이다. 6·25때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이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득히 못 미침
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아이가 밖으로 놀러나갈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넌 커서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사가 너의 병을 고쳐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나
쁜 병을 고쳐줄 수 있게 말이다."
하고 말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든지 의사가 되겠다고 말해왔었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없이 총명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
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의 영
혼을 정화시키는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류달영의 '슬픔에 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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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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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4)] 우리 만남은 바람꽃이었소 류영모의 탄식 | 아주경제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4)] 우리 만남은 바람꽃이었소 류영모의 탄식 | 아주경제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4)] "우리 만남은 바람꽃이었소" 류영모의 탄식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2020-12-07 10:30
류달영과 현동완, 류영모가 아낀 제자들


[다석 류영모]

스승이라는 말 속엔 허허벌판이 있다. 눈 내리는 허허벌판에 크고 굳센 어른 하나 서 있다. 스승은 말하지 않는다. 그 삶이 거울이 되어 내내 한 존재를 비춘다. 스승은 원래 앞날을 예언하는 여자무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죽음이 늘 가깝게 내려와 있던 맨발의 시절에 부락의 중심에 좌정하고 앉아 가야할 길을 읽어내던 지혜로운 자였다. 스승이 교육이라는 백년대계를 책임지게 된 것은 거기서 연유한 것일까. 그 뒤 부처의 가르침에 한 나라가 귀의하면서 왕을 길러내는 스님을 스승이라 불렀다. 한 사람의 덕망이 어린 왕자에게로 스며들어가 교화중생(敎化衆生)의 눈밝음과 향기가 되는 것. 그것이 스승의 옛뜻이다.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는 것. 거기엔 허허벌판에서 허허벌판으로 이어지는 진수(眞髓)의 이동이 있다. 누군가가 나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가슴에 평생 지지 않는 해를 달아 거는 일이다. 나를 스승으로 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또한 나를 해 삼아 세상을 비춰보는 것이다. 눈 내리는 막막한 삶에 문득 홀로 서서 앞을 내다보고 하늘을 쳐다보는 스승. 그 스승의 안광(眼光)을 빌려 세상을 읽고 다시 묵묵히 걸어가는 일이야 말로 인생공부의 간명한 요약이다. 류영모는 하느님의 말씀을 체현(體現)한 '예수'를 스승으로 삼아 스스로 큰 길을 연, 스승이 되었다. 그가 말하고 행하는 '참(眞)'을 실감하고 인식한 제자들이 그를 모셨으며, 본받고 따르고자 했다. 그중에 류달영과 현동완의 길을 살펴본다.



[류달영 전 서울대교수. 박정희정부가 주도한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다. 본부 해체 이후 1964년 민간 주도의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결성했다. 류달영은 서울 양정고보에서 김교신(1901~1945)을 담임교사로 만났고, 그를 깊이 존경했다. 김교신은 류영모 강좌를 열었고, 또 성서조선의 필진으로 모신 바 있다.]
박정희의 재건국민운동과 류달영



관련기사"다석은 인간의 최고경지"
신은 '가운데'에 있다류영모는 세상에서 뭔가를 도모(圖謀)하는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라의 정신적 기반이 된 두 제자를 두게 된다. 그의 씨알사상으로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함석헌이 그의 제자였고, 역시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한 이후 국가재건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이후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주춧돌을 놔줬던 류달영(1911~2004) 또한 그의 제자였다. 말하자면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중요한 국가발전의 축을 기초한 두 사람이 그를 사사(師事)한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였다.

류달영은 박정희가 설립한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맡았다. 권력 찬탈을 한 박정희에게 뜻을 굽혀 복무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사정권을 싫어한다. 국민운동의 첫째 목적은 군정(軍政)을 단축시키는 데 있다." 박정희는 5·16 이후 권력을 잡은 뒤 위축되고 이반된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재건국민운동을 구상했다. 박정희는 그 본부장에 함석헌을 생각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유진오에게 맡겼는데, 그는 두 달을 맡고 물러났다. 이후 유달영에게 본부장직을 제안했다. 그 또한 바로 거절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끈질기게 그에게 요청을 했다. 그때의 상황을 류달영은 이렇게 회고한다.

"1961년 이 나라에는 불행하게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정신개혁과 생활혁신을 목표로 재건국민운동이라는 사회운동을 폈다. 유진오가 초대 재건운동본부장을 두 달 맡고 내가 2대 본부장으로 위촉되었다. 직위는 총리와 동급이었다. 내가 그 직책을 맡기까지는 적지 않은 사연이 있다. 하루는 박정희 장군이 나를 불러 본부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즉석에서 거절했다. 대학에서 학구의 생활로 일생을 보내려는 것이 나의 소신이라고 했다. 두 번째 만나서는 거절하면서 적절한 인물을 추천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며칠 뒤에 추천자 명단을 내놓았더니 웃으면서 모두 검토가 끝난 인물들이라고 했다. 그 뒤에도 인편으로 서너 차례 교섭이 왔으나 번번이 거절했다. 여섯 번째의 면담에서 그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는 수락하지 못할 만한 조건 3가지를 제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을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 3가지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정부는 일체 간섭을 안 한다는 조건이었다. 류달영은 박정희의 육고초려(六顧草廬) 끝에 철저한 자율을 약속받고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이 됐다. 이 제안을 수용한 까닭은 덴마크 그룬트비처럼 위기의 나라에 정신운동을 일으켜 후진적 정치와 경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애국적 열정 때문이었다. 류달영이 본부장이 되고난 다음, 그의 스승 류영모는 위촉장을 받았다. '중앙위원'으로 모시고자 하는 요청이었다. 중앙위원에는 함석헌, 이관구, 고재욱, 김팔봉, 김재준, 김활란이 포함되어 있었다. 류영모는 제자 류달영의 좋은 뜻을 도와주자는 생각에서 이를 응낙했다. 물론 류영모가 생각하는 '재건'의 의미는 훨씬 컸던 것 같다.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 위촉장을 받고난 뒤 류영모는 YMCA연경반에서 그 일을 공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재건(再建)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 같습니다. 새삼스레 재건이 뭡니까. 우주혁명이라고 하는데 우주재건이라고 해야 합니다. 석가와 예수는 우주재건을 가르쳤습니다. 우주 자체는 자연이라 내버려두고 나부터 혁명을 해야 합니다. 우주혁명이란 인간혁명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이 뚜렷해야 합니다. 내 속에 하느님이 보낸 성령인 얼이 뚜렷하면 됩니다."

이후 류영모는 1년 8개월 뒤에 류달영이 본부장에서 물러났을 때 중앙위원을 그만두었다. 당시의 상황을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정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육사8기 출신 군인들의 행패도 적지 않았어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때 국민운동은 민간인이 주도한 민주적 향토건설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에 의한 관주도 운동이었습니다. 국민운동의 방법은 덴마크 부흥의 핵심이었던 연수원 교육의 실천이었어요. 서울에 중앙연수원을 비롯하여 각 시도에 시도연수원 그리고 시군에 시군연수원을 세운 뒤 향토건설을 위해 청년교육을 실시한 것입니다."

즉 재건국민운동은 민주적인 운동으로 시작했으며 류달영이 생각했던 덴마크 농촌 부흥의 '국가번영 시나리오'를 실천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일을 국민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나서서 진작하고 추동(推動)하여 이끌고 나가는 '새마을운동' 쪽으로 바꾼 것이다. 류영모는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철학과 취지는 류달영의 민주적인 재건국민운동에서 나왔으나, 실행 방식은 독재정권의 강제적인 스타일로 진행된 변종이었다는 얘기다.

류영모와 류달영은,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국가번영 철학의 바탕을 제공하였으나, 그 권력의 전횡에는 동의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았다. 박정희가 류달영에게서 얻은 민주적 방식의 농촌 부흥과 경제 발전을 꾀했더라면 이 땅에 산업화와 민주화가 함께 이뤄지면서, 박정희 정권이 독재의 말로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함석헌 또한 민주화를 위한 치열한 투쟁 대신 정신적인 추구를 하는 데 평생의 열정을 쏟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역사에는 만약(萬若)이 없다. 긴 상처로 점철된 비극의 결말이 남았을 뿐이다.



[창주 현동완.] '류영모 강좌'의 평생 집사였던 창주(滄柱) 현동완

1922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YMCA로 파견된 그는 4년간 퀘이커교도와 교류하며 정신적인 눈을 새롭게 떴다. 1926년 귀국해, 당시 복음사회주의 경향에 반대하여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YMCA 소년 평화구락부가 그 활동의 중심이었다. 기도회와 체력 단련, 그리고 사회봉사가 수련 내용이었다. 이 운동은 전 연령을 망라한 '참운동'으로 전개된다.

현동완은 '류영모 금요강화(講話)'를 개설하여 참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 운동은 기독교 교계 내에서 반발에 부딪쳤고 보수세력과 사회복음주의의 저항에 흔들리게 된다. 현동완은 YMCA연합회 순회간사를 맡으면서 참운동을 확장하고자 하였으나 기독교 청년회의 반발로 1937년 사임을 하고 함북지방에 은둔한다.

해방 이후 그는 미군정청 교통부장 고문으로 일했고 1948년에 서울YMCA총무를 맡는다. 그는 복음운동의 대중화를 외치며, 매주 3대 신앙강좌(류영모, 한에녹,함석헌)를 열었다. 현동완은 식민지시대에 불굴의 의지로 지속했던 류영모 강좌를 다시 열어, 해방 공간으로 이어지는 정신운동을 전개한 셈이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꾸준히 류영모를 강단에 모셨던 그는 1957년 3월 총무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1959년 병을 얻어 난지도 삼동소년촌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3년 눈을 감는다. 그의 생은 YMCA와 함께했으며, '류영모 강좌'와 함께한 것이기도 하다.

문학가이자 목사였던 황광은은 현동완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세기 종로의 성자였습니다. 그는 분명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천당 속에 높이 앉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는 것은 복이 있다고 외친 그 주님께 미쳤던 것입니다. 그가 커피를 안 마신 것은 나라를 위함이었고, 고기를 안 먹은 것은 세계평화를 위함이었습니다. 하루 한끼씩 안 먹은 것은 불행한 고아를 위함이었고, 사과를 안 먹은 것은 병자를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는 두 벌 옷이 없었습니다. 불우한 형제에게 다 나눠주고 남은 한 벌로만 살았습니다. 그는 머리 둘 집이 없었습니다. 난지도 소년촌 단칸방을 병실로 쓰다가 거기서 돌아갔습니다."

오직 이웃의 삶, 고통받는 불우한 이들의 벗으로 살고자 했던 현동완은, 그 실천의 엔진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스승 류영모를 통해 자양분처럼 섭취했을 것이다. 스승의 '참'이야 말로, 그리스도에 미친 삶에 다름 아니었기에 그는 그 '참'을 필생의 신앙으로 삼아 죽음까지 나아갔을 것이다.

류영모는 난지도 소년촌으로 그를 문병한 뒤 '다석일지'에 이렇게 썼다.


언님 이제 아무 일도 못보심 만큼 싸흐심!
벽새에 앉은 이 아운 한우님 계로만 생각
한님계 이기신 님계 이길 싸움만 봅소사!

(형제여, 이제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만큼 홀로 싸우고 있구려.
벽 사이에 앉은 이 동생은 하느님이 거기 계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거기를 이기신 님의 거기, 이기는 싸움만 바라보시기를.)


류영모에게 현동완은, 그가 세상에 내놓을 복음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평생의 '복음집사(執事)'였다. 1963년 현동완이 돌아간 뒤 류영모의 YMCA연경반은 끝이 났다. 전택부가 총무를 이어받았으나, 그는 '류영모 강좌'를 만들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35년 강연역사가 급작스럽게 종지부를 찍었다. 류영모는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겨놓았다. "창주도 이젠 우리 인생 만났다던 것이 바람꽃만이었던 것을."

류영모가 80세 때 문득 제자에 관해 남긴 말이 있다. 그의 제자들에게는 뼈아픈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나무가 많으면 그 속에는 반드시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낢이 있습니다. 그런데 산 사람은 많으나 재목으로 쓸 만한 사낢은 없을까. 내가 여든을 살면서 아직껏 저 사람이면 사낢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류영모는 나무 중에서 쓸 만한 나무를 가리켜 '낢(材)'이라고 표현하면서, 뛰어난 제자를 '사낢'이라 표현했다. 낢은 '날(飛)'과 남(生)'이 함께 들어가, '뛰어오르는 후생'의 의미가 된다. 사람의 낢이니 인재(人材)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제자 중에서 '저 사람이면 뒤를 맡길 인재라 할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970년에 한 말이니, 이미 많은 제자들이 품을 거쳐 떠나간 다음이다. 그의 사상과 길을 온전히 믿고 맡길 이를 찾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했을 것이다. 제자들에 대한 폄하나 불신이라기보다는, 류영모의 잣대와 기대하는 높이가 만들어내는 미흡이라고 봐야 하리라.

하지만 류영모의 아낌과 칭찬을 받은 제자는 적지 않았다. 함석헌이 구속되었을 때 류영모는 하느님께 하는 기도는 영원한 생명만 구해야지 세상 일을 어찌해 달라고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그가 구속되었다 하니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김흥호가 공부 모임에 다녀오느라 약혼녀에게 파혼당한 것을 두고도, 그의 열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류승국이 석가와 공자, 예수처럼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갈 수 있겠다고 말했을 때도 기뻐했다. 서완근이 천안 광덕에서 농촌운동을 했을 때도, 류달영이 <새 역사를 위하여>란 책을 썼을 때도 칭찬을 했다.

35년간의 강의에 찾아왔던 사람들 중에는, 한학자 범부 김정설, 논어를 영어로 번역한 변영태,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신도안의 정도령이라 불린 양도천, 시인 김관식, 도인 대오 석종섭 등도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간 모임은 광화문 문정길 사무실에 있었던 모임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김진홍 두레수도원장, 횡령혐의, 고발돼:올인코리아

김진홍 두레수도원장, 횡령혐의, 고발돼:올인코리아

김진홍 두레수도원장, 횡령혐의, 고발돼

네티즌 반응은 '모함'과 '위선'으로 갈라져


허우 올인코리아 기자








김진홍 두레수도원장이 교회돈을 횡령한 혐의로 고발됐다고 한다. “김 수도원장은 자신이 세운 경기 구리시 두레교회 담임목사를 2011년 그만 둔 뒤 동두천시에서 같은 이름의 교회와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다”며 동아닷컴은 “의정부지검 형사5부(신승희 부장검사)는 7일 구리 두레교회 장로 등 교인 13명이 김 수도원장을 횡령 혐의로 고발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인들은 지난해 교회 명의 계좌를 확인하다 김 수도원장이 담임목사로 재직할 때 만든 통장 3개를 발견했고, 2005년부터 약 3년간 총 22억여 원이 입금됐다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해 6월 검찰에 고발했다”며 “이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조사하고 있는 검찰은 고발내용이 확인되는 대로 김 수도원장을 불러 조사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연합뉴스도 이날 “김 수도원장은 1997년 구리에 두레교회를 세워 2011년까지 운영했다. 2005∼2010년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았으며 2007년에는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취임준비위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며 2007년 8월 뉴라이트전국연합 비상대책위가 “김진홍 상임의장이 금품을 받고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며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고발했다고 전했다. “제4회 지방선거가 치러진 2006년에는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가 김 수도원장이 담임목사로 있던 두레교회 관계자 14명의 이른바 ‘쪼개기 후원금’과 관련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며 연합뉴스는 “두 건 모두 무혐의 처리됐다”며, 검찰 관계자의 “아직 김 수도원장 소환 계획은 없다”는 입장도 전했다.



9월 6일 김진홍 목사는 경기신문에 기고문(새 역사를 위하여)을 통해 “내가 대학시절에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책이다. 나의 서재 한켠에 묻혀 있던 책을 찾아내어 오늘 다시 읽고 있는 중”이라며, 1952년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유달영 교수의 “1952년 공산군 침략 때에 대구에 피난하던 중 단칸방에 4·5인이 복작이면서 휴지조각에 초고를 쓴 것이 이 책이다. 처참한 전쟁 중에서 나는 이 민족을 구원하는 길을 찾아보고자 애태우는 심정으로, 밤과 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내버리는 광고지 뒤에 이 원고를 썼다”며 “전선이 일진일퇴하는 중에 가족들은 갈라져 생사도 모르는데… 덴마크의 역사 속에서 우리도 살길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기에 쓴 책”이라는 서문을 소개했다.



이어 “대학시절 이 책을 읽으며 감명을 받은 나는 졸업할 즈음에 진로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의 길을 갈 것인가, 그룬트비 같은 개척자의 길을 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의 철학자였고, 그룬트비히는 목사이면서 개척자였다”며 김진홍 목사는 “나는 철학을 전공하였기에 키에르케고르 같은 순수철학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목사가 되어 그룬트비히 같은 개척자의 길을 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 것”이라며 “결국은 목사가 되어 개척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인격과 실력이 부족하여 그룬트비히의 흉내도 못내는 처지로 지내왔지만, 내가 바라고 추구하는 목표는 지금도 변함없이 가슴 속에서 불타고 있다”고 고백했다.



“김진홍 두레수도원장, 교회 돈 20억 원 횡령 혐의로 고발돼”라는 동아닷컴의 뉴스에 네티즌들의 반응은 교차됐다. 한 네티즌(g7571)은 “김진홍 목사의 글을 보고 참으로 너무나 감동했던 시절이 되살려진다. 그런데 어찌타, 백성들, 신도들의 신망을 받던 당신, 왜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질 일을 저질렀소?”라고 했고, 다른 네티즌(광솔잎)은 “종교계를 사회공익단체로 법제화하여 재정관리 투명성 차원에서 매년 회계감사 받도록 하고 개인이 횡령하거나 불법전용 되는 사례를 예방해야 하며 수익자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해야 합니다”라고 했고, 또 다른 네티즌(자유민주)은 “수사를 해봐야 죄의 유무를 알겠지만, 한국은 종교인들의 부패 단죄를 엄히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한 네티즌(Hyun Lee)은 “김 목사가 좋은 일 많이 했다하는데 왜 좀 조용히 겸손히 하지 못하고 책을 출판하여 자기 자랑이나 하고 돈이 없었을 때는 겸손한 척 하더니 돈 멋을 보고는 확 돌아버린 것 같다. 왼손이 한일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을 목사들은 다 잊어버렸나?”라고 했고, 다른 네티즌(toot)은 “이 참에 하나님 사업 빙자하며 세금 한푼 안 내는 교회 목사들도 세금 소득세 부과하고 교회 엉터리 재정처리도 철저한 외부감사를 받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나라 교회 짝퉁목사들 거의 대다수가 교인 헌금을 자기 쌈지돈 쓰듯 마구 꺼내 쓰는 엉터리들 수두룩할 것이다!”라고 했고, 또 다른 네티즌(songgaxi)은 “진실성이 없이 설치는 자는 모두 나쁜 쪽으로 한몫하는군”이라고 했다.



중앙일보의 한 네티즌(kywoo22)은 “존경받는 인물을 못 만드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절차상의 하자는 있을 수 있으나 그럴 분이 아님은 모든 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기사 마지막에 예전에 피소된 건들도 혐의 없이 음해당한 것입니다. 기다려보십시오”라고 했지만, 다른 네티즌(Tae Hyung Lee)은 “대한민국에는 이런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드글드글 하다. 종교계 법조계 교육계 정계 재계는 물론이고 국가차원의 정화사업이 절실하다”고 했고, 또 다른 네티즌(Hyun Lee)은 “교회가 돈이 없을 때는 말썽이 없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가 부흥(?)하고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온통 잡음투성이 집단으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이라고 했다. [허우 올인코리아 기자: hursuaby1@hanmail.net/]

 

 


[책리뷰] 김건우 - 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 동아마라톤 이야기

[책리뷰] 김건우 - 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 동아마라톤 이야기

[책리뷰] 김건우 - 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다. 손기정은 김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니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도 무엇이...세부 요약 내용이 짧은 글로 이루어져, 이미지나 동영상이 기반이 되는 게시물입니다. 세부 내용은 본문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2020 . 04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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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마사 누스바움의 책은 내용은 알찼지만 재미는 좀 없었다. 그래서 진도가 좀 느렸지만 이 책은 참 재미있었다. 그래서 진도가 잘 나갔다. 확실히 한국인이 쓴 책이 몰입도가 더 좋다. 물론, 내가 관심있었던 내용이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친일을 하지 않은 보수 우파의 맥을 살펴 보는 책이다. 이승만, 여운형, 김구, 안창호 이런 "거물급" 지도자들은 큰 그림을 그렸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설계도와, 조직, 행동에 나선 이들은 아랫세대 사람들이다(12). 그 세대에서 가장 주목해 봐야 하는 사람들은 "평안도와 황해도(좁은 의미의 서북 지방)를 주요 근거지로 하던 우익 기독교인들과 지주, 상공인이 대거 월남한 사람들", "간도(동만주)와 함경도를 근거로 하던 우익 민족주의자들"(14)을 가장 먼저 다뤄야 한다. 이들을 월남 지식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가장 주된 중심은 "반공"이다. 이들은 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와 전쟁을 치뤘던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했던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사상으로 이어져 있다. "교육과 계몽을 통해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 일제 시기 독립의 방략으로도 제시되었던 이 모델이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중요한 밑그림 중 하나가 되었다."(15) 그 인물들을 언급하면 이렇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든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의 인물들은 당당히 건국의 주체가 되고자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표적 인물들만 거론해 본다.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등이다.
그리고 남쪽 출신이지만 학교를 매개로 이들과 이어졌던 류달영 같은 인물들, 사상의 계보로는 다르지만 정확히 학병세대의 중심에 있는 종교인 김수환, 지학순, 문인 조지훈, 김수영, 더하여 세대는 훨씬 위이지만 "우익 진보 진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 같은 종교 사상가들과 그 제자들, 또한 비교적 아랫세대로 해방을 맞이했지만 오늘날 언론계와 학계의 밑그림 하나를 놓았던 천관우, 이기백 등 정치, 언론, 교육, 종교, 학술, 사상 각계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이다.
앞으로의 글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들을 만든 배경, 이 사람들이 했던 활동과 생각을 살핀다. 종합적으로 이 책은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한편으로 "남쪽을 선택한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학병세대에 대한 보고서"에 해당한다. 인물에 대한 열전이면서 세대에 대한 평전이기도 한 이 책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한국 우익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15-16)
학병이라는 세대, 거기에 장준하, 사상계 지식인들 등 친일을 하지 않았으면서 좌파를 경계하던 서북지역에서 내려온 철저한 반공주의자들, 곧 정통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 다수가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여러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이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정말 내가 궁금했던 내용들이던가 읽다가 궁금했던 내용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흥미로운 부분을 몇 개 옮겨보겠다.

장준하 vs 박정희
이 책에서는 장준하 선생님을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다룬다. 장준하 선생님하면 유명한 것이 돌베개이다. 돌베개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주일학교를 꾸준히 다닌 분들은 돌베개하면 야곱의 돌베개가 떠오를 것이다. 장준하 선생님의 돌베개도 성경에서 나온 것이 맞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여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가는데 도망 가는 도중에 잠을 잘 때 돌배게를 봤다. 신학적으론 그때 꿈을 꾼 장면이 나중에 훨씬 중요한데 그보단 여기에서 돌배게가 중요하다. 왜 돌배게냐면 장준하선생님은 일본군에서 목숨걸고 탈출해서 광복군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그 거리가 정말로 멀었던 여정이었다. 6000리였는데 Km로 환산하면 대략 2,356Km이다. 이렇게 긴 여정을 마치고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왜 박정희와 라이벌 구도로 볼 수 있을까? 둘은 나이도 비슷하지만 삶의 여정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1918년생, 박정희는 1917년생이다. 박정희의 인생을 잠깐 말해보겠다. 그는 군인이었다. 만주군. 독립운동가를 잡아 다니던. 그러니 친일의 행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셋째 형은 공산주의자였다. 대구 10.1 사건으로 죽었는데 여기에 분노해서 그는 남조선로동당에 가입을 한다. 남로당, 즉 그도 공산주의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솔직히 친일과 빨갱이 프레임을 박정희에게 다 씌울 수 있다. 박정희는 빨갱이로 몰릴 수 있기에 자신은 전향한 티를 내어야 했고 더욱 잔인하게 공산주의자들을 찾아내고 죽여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미국과도 사이가 나빴다.

장준하 선생님은 어떤가. 그는 앞서 말했듯이 임시정부의 광복군 출신이다. 그리고 해방 전 광복군 시절에 미군의 OSS(미 전략정보기관, CIA의 전신)에서 훈련을 받았다. 완전히 미국통이다. 그리고 평안도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반공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과연, 장준하 선생님이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면 미국은 누굴 밀어줄까? 당연히 장준하 선생님이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님은 군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김재규 역시도 장준하 선생님을 존경했다. 이정도라면 박정희의 입지를 흔들 수 있는 너무나 큰 적이었다. 그러니 그를 반드시 암살하여야 했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님은 1975년 추락사고로 돌아가신다. 후에 시신을 살펴봤는데 머리에 무언가 맞은 자국이 두개골에 확실히 보였다. 무거운 무언가로 내려친 흔적이다. 누군가 암살한 것이다. 배후는 분명 박정희 정권일 것이다. 암살을 하지 않았다면 장준하 선생님이야 말로 박정희의 가장 큰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대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우리는 좀더 역사에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임시정부의 맥락을 이을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독립운동도 하셨고 민주화 운동도 하셨기에 더더욱 그 뿌리가 아쉬워 진다. <사상계>를 만드셨기에 누구보다도 지성이 깊은 사람이기도 했다. 참 아쉬울 뿐이다. 장준하 선생님을 말하려면 <사상계>를 말해야 하지만 이를 리뷰에 옮기지는 않겠다. 참 아쉽다.

임시정부의 안창호
당시 임시정부는 상당히 복잡했다.

당시 충칭 임시정부는 파벌 난립으로 인해 연립 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상하이를 떠난 후 임시정부는 파벌별로 흩어져 있다가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겨우 모양만 통합을 이룬 상태였다. 파벌들은 각자 정당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김구와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김규식과 김원봉의 조서민족혁명당, 신익희의 한국청년당, 그 밖에도 서너 정당이 난립 중이었다. (27)
책에서는 이렇게 난립 중일 때 장준하 선생님은 도착했고 김준엽 선생님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좌충우돌을 보인다. 이들은 나이가 어렸기에 위의 인물들이 포섭 공작을 벌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장준하 선생님은 "다시 일본군에 돌아가 항공대에 지원, 중경 임정 청사를 폭격하고 싶다."(27)는 폭탄발언을 하셨다. 얼마다 대단하 포구인가. 이런 기개로 임정의 분열과 졸렬에 한방을 날린 것이다.

그러한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국무총리대리, 노동총장 등을 맡았다.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과연 안창호 선생님은 이 분열에서 어떤 고민과 역할, 행동을 하셨을까? 물론 분열을 수습하지 못하고 떠나시긴 했지만 그분이 중도를 향한 발걸음을 봤을 땐 상당히 귀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분의 일본에 대한 글을 봤는데 상당히 충격이었다. 일제시대를 겪고도 그 시기를 넘어서서 나아가야 한다는 그 말이 대단히 새로웠다. 이러한 분이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실력양성론으로도 유명한 안창호 선생님인데 역시 서북인들은 안청호 선생님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의 수제자는 이광수와 주요한이다. 모두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로 유명하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후배들을 배출했지만 그의 두 수제자들은 왜 친일을 저질렀을까. 이러한 궁금증에 최근에 나온 안창호 선생님의 전기를 구입할까 말까 망설여 지기도 하다.

우리는 화해의 정신을 보인 안창호 선생님에게 배워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그런 분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무교회주의(김교신, 함석헌, 손기정, 류달영, 윤석중, 농심, 풀무, 성서조선)
그래도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무교회주의자들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 가장 존경했던 분이 무교회주의자들을 이야기했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나 역시 이들에게 관심이 갔다. 그래서 배운 사람은 우치무라 간조이다. 그리고 간조의 제자들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나는 김교신 선생님에게 왠지 정이 간다. 이름이 멋있어서 그런가? 김교신 선생님의 제자가 있는데 그 제자는 엄청 유명한 사람이다. 그 제자는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다. 손기정은 김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니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도 무엇이 저절로 배워지는 것 같은 분이셨다." (118)
김교신은 양정 고등보통학교의 선생이었다. 이곳에서 손기정 선수를 만난 것이다. 김교신은 손기정 선수의 비공식 트레이너이기도 했다. 둘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나는 어렸을 적 존경하던 분이 설교때 이 이야기를 해주어서 많이 들었던 내용이었다. 1935년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손기정 선수의 요청에 따라서 김교신 선생님이 자전거로 앞서 달렸던 일화가 있다(이 책에서 자동차라고 나왔는데 내가 알기로는 자전거이다). 이때 외쳤던 말이 "기정아! 나라를 생각해서 뛰어라" 를 외쳤었다(설교때 들었던 내용으로는 "예수님 생각해라"는 말이 있었는데 예전에 이 부분을 봤을 때 이 말은 없었다. 아마도 설교하신 분이 은혜롭게 보이려고 각색한 것이리라).

그의 제자들 중에는 유독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위에 언급한 손기정이고, 동시 작사가로 유명한 윤석중, 새마을 운동의 기틀을 세운 류달영이 있다. 윤석중은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졸업식 노래", "떳다 떳다 비행기", "새나라의 어린이" 등 유튜브로 그의 동요를 들어보니 어렸을 때 한 번 쯤은 들어보았던 동요였는데 이 동요의 작사가가 윤석중이다.

그의 애제자는 류달영이다. 류달영은 김교신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모두 김교신 스승과의 만남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김교신의 주일 성서 모임과 또 이후 일상을 같이하는 시간도 가졌다. 류달영은 우리나라에 농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다. 이분이 "농심"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신 분인데 "농심"이라는 기업의 말고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튼, 이분이 농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무교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맥락을 보자.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는 한국의 무교회주의자들에게 사회 개조 모델 이전에 기본적으로 큰 정서적 "격려"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덴마크는 1864년 프로이센(독일)과의 전쟁에서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곡창 지대(현 독일 북부)를 빼앗긴 역사가 있었다. "나라 없는" 조선의 무교회주의자들에게 덴마크의 아픈 역사는 특별히 강한 인상을 주었던 듯하다. 덴마크가 "밖에서 잃은 것(땅)을 안에서 찾자"를 모토로 새롭게 설계되고 정비된 것처럼, 조선도 덴마크 모델을 살피며 길을 찾을 것으로 보였다. 덴마크의 성공담은 이십대 청년 류달영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훗날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3년 수원고등농림 재학 시절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라는 수첩 크기의 작은 책을 읽고 나라 없이 살던 그 시절에 나는 국가관을 확립했다. 내가 일생 동안 할 일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일이며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드는 일이었다. (135-136)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를 건네준 사람이 바로 김교신이었다. 류달영은 훗날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 정부에서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맡았다. 박정희가 여러 차례 직접 류달영을 만나 본부장 직책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단, 박정희가 일체 간섭을 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승낙했다. 이후 류달영은 덴마크 모델에 따라 국민운동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착수 했다.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류달영은 사업 파트를 크게 국민 교육, 향토 개발, 생활 혁신, 사회 협동 넷으로 나누었다. "국민 교육"은 덴마크 모델에 따라서 "농민 교육"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중앙과 도지부, 시군 지부의 3개 각급에 교육원을 두고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향토 개발"은 농로 수로 개설과 농지 개간 사업으로, "생활 혁신"은 주택과 식생활 등 생활환경 개선 지도로, "사회 협동"은 도농 자매결연과 결식아동 급식, 학생 봉사 활동 조직으로 전개했다.
운동은 추진력 있게 이루어졌으며, 취임 한 해 만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새마을운동 연수원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중앙 교육원과 시도 지부 교육원에서 각각 7000명여 명과 6만 4000여 명의 농촌 운동 지도자를 교육했고 마을 청년 회관 약 7000동, 농로 5만 4000여 킬로미터, 수로 3300여 킬로미터를 개설했다. 부엌, 변소 등 생활환경 개선과 농촌 결식아동 급식을 하고 41만여 명의 농어촌 학생 봉사대를 조직했다. (138)
후에 재건국민운동은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이 되었다. 왜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은 사라지고 새마을 운동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국가주의자들과의 대립때문이다. 확실히 무교회주의자들은 국가랑 친하질 못하다. 우치무라 간조도 고등학교 선생이었는데 천황의 교육 칙어에 대한 불경 사건으로 학교에서 짤렸고 러일전쟁을 반대해서 일본의 적으로 몰려 있었다. 간조가 한 말 중에 일본이 이렇게 제국주의를 계속한다면 벼락을 맞을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중에 유명한 사람이 여럿 있지만 대표적으로 야나이하라 다다오이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에 반대하여 도교대학교 교수직에 쫓겨나기도 했다. 쫓겨난 이후 1940년, 1942년 두 차례 한국에 와서 서울과 평양 등지에 무교회주의 집회를 열기도 했다. 모두 김교신이 주최한 것이다. 1942년 평양 방문때는 김교신 선생님께서 장기려 선생님께 지시를 내려 모임을 준비하게 했다. 장기려 선생님의 전기를 보면 그 모임에서 조선총독부의 감시가 있었다고 한다. 왜냐면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반정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훗날 도쿄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아,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들 중에 수상, 도쿄대학 총장, 교육부 장관 등 전후 일본을 일으키는데 힘이 되는 인물들이 대개 있었다. 그래서 우치무라 간조는 현대 일본을 일으킨 인물 20명 중에 한 명에 꼽힐 정도이다.

결국 군사정부와의 알력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해체되었다. 이용만 당한 것이다. 그래서 동아일보에 박정희 군사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민간이 중심이 되는 걸 꿈꿨던 류달영이기에 군사정부의 개입은 참으로 맞지 않았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과 새마을운동을 연관시키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실질적인 힘을 보탰다. 새마을운동 중앙 연수원 원장이 된 김준 등, 자신이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던 시기에 운동에 참여시켰던 서울대 농대 제자들 중 많은 수가 이후 새마을운동의 주요 간부가 되었던 이유도 있었다. 류달영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농민이 잘살게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는 농민을 사랑했고 "농심"이란 말을 창안해 사용하기도 했다. ...
류달영이 국가 정책에 참여함으로써 이룬 성과는 크다. 대한민국 사회에 류달영이 기여한 것은 농촌 사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평생교육" 개념은, 1980년 헌법 개정 심의위원으로 참여한 류달영이 "평생교육" 조항을 헌법으로 제정케 함으로써 대중화된 것이다. 이 때도 류달영은 덴마크 교육 모델을 참조했다. (143)
무교회주의자들이 농촌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위에서 서술하였다. 그들은 공동체를 열었는데 그 공동체가 바로 풀무 공동체다. "이찬갑의 풀무 공동체는 한국 무교회주의자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방법론을 집약해서 보여 주는 사례이다"(152) 나중에 홍성에 풀무학교가 새워졌다. 우리가 아는 풀무원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풀무원의 창립자 원경선은 풀무학교 이사진 중 한 사람이었고, 풀무학교의 이름을 따서 농장 이름을 지었다"(159). 원경선 장로의 아들이 바로 국회의원 원혜영이다. 여튼, 풀무라는 이름은 "녹슨 쇠붙이를 녹이고 정련해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뜻이다. 작가는 성서에도 등장하는 용어여서 이를 이름으로까지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개역개정 성경으로 풀무를 검색했을 때 위와 같은 맥락에서 쓰인 단어는 없다. 개역한글도 마찬가지다. 저자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말했는지 각주가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위의 맥락에 쓰이는 성경 구절은 있긴하다. 이사야서 2장 4절이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인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것만 같아서다. 개역한글의 풀무는 심판을 말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인데 어떤 성경구절을 보고 풀무를 붙였는지 모르겠다.

무교회주의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건 성서조선이다. 성서조선 사건은 근현대사 교과서에더 실려 있다. 나는 이 장면을 고3 때 수업시간에 봤는데 전율을 느꼈다. 성서조선 사건이 무엇인가? 바로 조와 사건이다.

혹독한 추위로 개구리들이 얼어 죽은 일을 묘사한글로,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다.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연못 밑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 글로 인해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김교신, 함석헌, 류달영(후일 서울대 농대 교수), 이찬갑(후일 풀무학교), 장기려(후일 부산 복음 병원) 등 필자들은 물론 정기 구독자 전원이 검거되었고 김교신과 함석헌 등 열세 명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꼬박 한 해 동안 옥고를 치렀다. 물론 <성서조선>도 폐간되었다.
어느 일본인 형사로부터 "독립운동 하는 놈들보다 더한 최악질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성서조선>그룹은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의 가장 비타협적 지점에 서 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삶 전체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124-125)
이처럼 이들은 저항했던 이들이었다. 일제에 저항했고 독재에 저항했다. 나에게 전율을 일었던 그 기억이 아직도 난다. 내가 고등학생때였을 때 이만열 교수님이 국사편찬위원회였는데 아마 그 영향에 교과서에 실렸던 것일까? 그전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후대에도 계속해서 알려지길 소망한다.

이렇게 무교회주의자들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왜 어렸을 적부터 그룬트비를 들었는지도 풀렸다. 존경하는 분이 우치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았기에 덴마크 그룬트비를 언급했던 것이다. 그분은 그룬트비와 키에르케고르를 알려준 분이다. 차마 그분의 이름은 이제 볼드모트가 되어 밝힐 수는 없으나 내 어린시절 나를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끼친 분이시다. 옛 기억과 나의 사상의 뿌리를 탐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교회주의자들이 뿌린 씨앗이 이토록 많구나 느낀 시간이이도 했다. 김교신 선생님은 이른 나이에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1945년에 돌아가셨기는 하지만 해방 날 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분은 짧게 생을 사셨지만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두어 대한민국에 값진 보물들을 남기셨다. 양현혜 선생님이 도쿄대학교 박사학위로 김교신과 윤치호에 대한 내용을 썼다고 하던데 읽고 싶어 진다.

그밖에 홍익인간은 누가 만들었나?
오랫동안 한국 교육 이념의 근간이 되었던 "홍익인간"은 백낙준이 미군정 시절에 안출한 것이다. 백낙준은 1945년 12월 미 군정청 한국교육심의회에서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제안하여 채택하도록 했다.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최초의 교육법 제1조는 이렇게 나왔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공유케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며, 인류 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54)
백낙준은 한국교회사를 공부할 때 배웠던 인물이다. 그런데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그가 홍익인간의 만든 사람이라고?! 안수를 받았으면 목사일 것인데 검색해보니 목사 안수를 미국에서 받은 듯하다. 그렇다면 목사가 홍익인간을 제정한 것이다. 나는 홍익인간을 무슨 대종교의 영향으로 한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참 의외였다.

조선일보의 이데올리거가 진보의 거두 리영희를 옹호?
리영희 하면 빨갱이로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조선일보를 만든 선우휘가 리영희를 옹호했다! 리영희가 삼십대 중반 젊은 기자였을 때 중립국들이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안을 제출할 조짐을 보인다는 내용을 썼다. 이 내용은 남한 단독 가입을 추친하던 정부 정책에 배치되는 기사였다. 편집국장이던 리영희와 기사를 쓴 리영희는 구속을 당했다. 리영희는 구속 만기로 스무이레 만에 석방되었고, 선우휘는 법원의 구속적부심으로 닷새 후 석방되었다. 리영희를 석방하는 대가로 선우휘는 편집국장 직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면서 극우였던 선우휘는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한다. 일본으로 간 지명관은 일본의 시사 월간지 <세카이>에 한국 정치 상황과 민주화 운동을 바깥에 알린다. 익명으로 알렸는데 필명은 "TK생"이었고, 오랜 뒤에 지명관으로 알려진 것이다. ""TK"생 지명관을 중앙정보부가 추적할 때, 이를 따돌린 인물도 선우휘였다"(103). 그는 말한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입장이 "피차 달랐어도 철저하게 그는 자가기 내 형이다, 동생을 돌본다, 하는 생각이 철저했다.""(103) 함석헌에 대해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도 격분했다.

리영희, 지명관, 함석헌의 공통점은 서북 사람이다. 그렇다. 선우휘는 지역주의가 아주 강했다. 이데올로기보다 더 강했다. 한면으로는 서북지역의 끈끈함(긍정적인 면에서, 부정적인 면에서)을 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서러웠던 과거 때문일까?

국문학자가 왜 역사책을?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왜 역사책을 썼는지 나온다.

문학은 일반의 통념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특히 지성사는 문학 연구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더구나 오늘날 학문 영역의 경계는 새롭게 그어지고 있다. 누군가 필자에게 전공이 무엇인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한국학입니다. 현대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293)

2017년 봄
김건우
신학을 전공하는 분들 중에도 자신을 역사학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도 범위가 넓어서 일까? 그럼 신약을 전공한 사람들은 전공을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고대 유대학? 고대 로마학? 팔레스타인학? 음, 그냥 포괄적으로 역사학이라고 말하는게 더 깔끔할 듯하다. 학문의 경계가 새롭게 그어지고 있다는 말에 신학도 역시 역사학, 문화인류학, 언어학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기에 어떤 전공을 말해야 할까 고민되기도 하겠다. 2000년 전 있었던 일을 탐구하기에 역사학자라고 말하는 것도 나는 타당하다고 본다. 그것이 불신앙의 표현이라거나, 기독교를 안 믿는 사람들에게 어필해 보이려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정말 신학적인 내용을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 물론, 이때는 조직신학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지 싶다.

나가면서
이 외에도 김교신과 함석헌의 차이, 진보개신교 이야기, 강원룡 목사님 이야기 등 많은 부분이 있다. 전체적인 일관성이 뛰어나다 할 수 없지만 내 취향 저격이었기에 너무너무 재미있는 책이었다!

페이스북 글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안 읽히는 책은 그냥 넘기고 잘 읽히는 책을 읽었어야 되나 싶었다.
임시정부 이야기로 드라마를 만들면 정말 재미있겠다 싶다. 그 안에서도 좌파, 우파 갈등이 있었고 장준하를 위시한 어린(?) 학병 세대가 가세해 윗세대에 한방을 가하고ㅎㅎ
장준하라는 거대한 인물을 읽었고 그가 여운형에 대해서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던데 여운형에 대한 괜찮은 자서전을 한 번 구입해야겠다.
그 외에도 도산 안창호의 오른팔과 왼팔이 이광수, 주요한이라는 데에 놀람.
선우휘는 지금의 조선일보의 포지션을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은 준 사람인데 리영희를 지켜줬다는 데에 놀랐다. 이데올로기보단 같은 지역 출신이 앞섰다. 그만큼 서북지역의 끈끈함이라는 게 있나보다.
그래도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10-12장. 김교신의 제자는 손기정 선수가 가장 유명하다. 류달영은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토록 농촌부흥에 영향을 준 사람인지 이제 알았다. 농심이라는 용어를 류달영이 처음 썼다.
풀무 역시도 성경에서 가져온 용어였단다. 풀무학교를 세웠고, 거기에서 원경선이 자신의 농장을 풀무원이라고 지었단다. 물론 그도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왜 그토록 한때 존경했던 분이 덴마크 그룬트비를 얘기했는지 이제 알 것같다. 우치무라 간조때문이었다. 그것말고도 김교신은 철저하게 성경주의자였던듯 하다. 류영모와 함석헌이 도교적인 것을 혼합하려 했을 때 경계하고 거리를 뒀다는 것이다.

여튼, 전체적인 구성이 완전히 맞춘 것같진 않지만 그래도 많이 배웠다. 궁금했던 것들과 몰랐던 내용들을 채울 수 있었기에 좋았다.

왜 문학자를 역사학자로 부르는지 말하는데 신학자도 역사학자라고 부르는데 비슷한 걸까?.

책 맛보기
서영훈은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주류의 길을 가지 않았다. 공부는 하되 학력에 무관심했고, 사상을 추구하되 화려한 것에 끌리지 않았다. (59)

새마을 운동 정신은 어디서 왔는가?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룬트비

부산갈매기/지식경영자(CKO)

새마을 운동 정신은 어디서 왔는가? | 머리식히기

부산갈매기 2009. 5. 22. 07:24

http://blog.daum.net/oceanpro88/194


19세기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자.”는 이른바 ‘3애(三愛)정신'을 내세워 전쟁과 가난으로 깊은 좌절과 자탄에 빠진 덴마크 국민들에게 등불이 되어주었다. 오늘날의 덴마크는 북유럽의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지만 19세기 중엽만 해도 상황은 딴판이었다.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슬레스빅, 홀슈타인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다. 남겨진 스칸디나비아 땅은 북해와 발트해의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돌과 모래, 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였다. 국가 경제는 당연히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중앙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덴마크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다.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났다.

1783년 9월8일 덴마크의 우드비에서 태어난 그룬트비는 “힘이 아니라 국민성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고 외치며 국민 성격개조 운동과 농촌부흥운동을 벌여 오늘의 선진 낙농국가인 덴마크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룬트비는 그 파탄에 빠진 덴마크를 구하기 위해 ‘국민의식 구조가 개혁돼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국민성 개조운동’을 펼쳐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 국민들 사이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러한 믿음이 경제 재건의 활력소가 되면서 덴마크는 아름답고 부유한 낙농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부흥기>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고 류달영 선생은 참고할 만한 변변한 문헌도 없고 원고지조차 구하기 힘든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대구에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시멘트 포대 속지에 조국을 다시 일으켜세우겠다는 의지와 다짐을 담은 부흥사를 써내려갔다. 그는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가진 ‘되는 일이 없다’는 식의 부정적 문화를 ‘열심히 해서 잘살아보자’는 긍정적 문화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1953년에 출간된 류달영의 <새 역사를 위하여>는 전후 한국재건운동의 바이블이 되었다. 특히 그가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자조’는 이후,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 운동 정신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처럼 150년 전만 해도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던 자조가 그룬트비와 우치무라 간조, 류달영 선생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정진홍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2>에서

덴마크의 그룬트비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 2002

덴마크의 그룬트비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 < 문화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덴마크의 그룬트비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끊어진 교육의 맥 여기서 찾자
기자명 이경근  승인 200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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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8일 성공회대학교 새천년기념관에서는 '덴마크교육에서 배우자'란 주제로
하반기 교육사랑방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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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는 성공회대학교 민주사회교육원이 '덴마크 교육에서 배우자'라는 주제로 진행하는 2002년 하반기 교육사랑방에서 논의되는 내용을 연재한다. 첫째로 9월 28일 첫 모임에서 발표한 고병헌 교수(성공회대·광명시평생학습원장)의 발표 내용을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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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동안 열리는 하반기 교육사랑방  오리엔테이션을 겸한 이날 강의에서, 고 교수는 왜 우리가 덴마크 교육과 그룬트비에 주목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두 번째 모임은 10월 18일 광명시평생학습원에서 진행되며 풀무학교 교장을 지내신 홍순명  선생에게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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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이라는 단어를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지금 정부  교육정책의 큰 그림은 95년 5월 31일의 교육개혁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 몇몇  분들과 함께 대안교육에 관한 워크숍을 열었다. 이후 일본·유럽 등지의  대안교육과 대안학교가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졌다. 대안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대안교육은 수단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나라 대안교육은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대안교육을 크게 법적인 면과 철학적인 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는 법적인 면만 생각하고  있다. 즉, 대안교육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슨 무슨 대안학교라고 이름 붙인다고 저절로 대안교육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학교를 대안학교로 만들겠다'란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란 말과 같다.대안교육은 철학적인 면으로 접근해야 한다. 기존의 학교교육에서 무엇이 실현되지  않는지, 대안교육으로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는지,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연구해서 추구하려는 가치에 맞는 교육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기존의 교육으로 가능하다면 현 교육제도를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고, 그것과는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면 대안이 될 만한 교육을 찾는 것이다.

대안교육은 '무슨 무슨 대안학교'라는 이름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실현하고픈 가치를 기존의 교육과는 다른 대안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안교육의 본질은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고 교육을 통해 실현하고픈 이상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살아있는 언어에 대해서

그룬트비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혹자는 교육 3요소를 교사·학생·교재라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3요소에는 학생과 선생의 '만남'이 있어야 하고, 삶을 매개로 한 '내용'도 있어야 한다. 그 때 중요한 것이 서로간의 '말'이다.

덴마크 교육학자 에기디우스 선생은 그룬트비의 정신적 유산이 글이 아닌 말에 의해 전해져 왔다고 말한다. 교육의 기본 수단은 살아있는 언어(the living word), 즉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쓰이는 말은 너무나 오염되었다. 한 문장을 말하는데  비속어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모른다. 뜻이 맞는 우리말을 놔두고 영어 또한 얼마나 많이 쓰고 있는가.

이러니 교육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실제 쓰는 말로  교육을 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실제로 쓰는 말과 교육을 위한 '정제된' 글이 분리되어 있다. 그룬트비의 영향을 받은 톨스토이는 지식인들이 말로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죽은 글, 거짓 글이 되고 있다고 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도 말은 알아듣는다. 말을 올바르게 쓰는 것은 교육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다.

그룬트비가 살아있는  언어라고 정의한 '말'은  교사와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동등한 입장에서의 대화이며, 감정을  표현하게 하고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들어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의 원천이다. 우리가 그룬트비를  공부하고 덴마크 교육의 본질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앞서 말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풀무학교는 왜 그룬트비에 주목하는가

그룬트비는 19세기 활동했던 사람이며, 덴마크의  괴테라고 불린다. 덴마크 사회 모든  곳에 영향을 끼쳐 지금의 덴마크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다. 그룬트비의  사상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 톨스토이, 간디를 거쳐 마틴 루터 킹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함석헌, 김교신, 이찬갑 등이 영향을 받았다. 즉 우리 나라의 선구자적  교육 사상이 그룬트비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정신적 흐름의 연결선 위에 풀무학교가 세워졌다. 풀무학교는  40년 동안 세상의 관심 밖에 있다가 90년 이후 조금씩 알려졌다. 그나마  아는 사람들도 '시골에 있는 대안학교' 정도로 알고 있다. 하지만 풀무학교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풀무학교의 교육은 세계적 수준이다.

풀무학교에서 사용하는 국어책에 이런 문제가 나온다. '전쟁 원인이 되는 사회적 긴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글쓴이는 비폭력 실행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현 교육은 논술시험 성적을 매기기 위해 이런 문제에 대한 자기  표현을 평가한다. 하지만 풀무학교는 그렇지 않았다. 풀무학교는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논술을  수단으로 삼는다. 엄청난 저력을 가진 학교다.

'그 나라의 역사와 말'이 아니고는 그 민족을 깨칠 수 없다는 그룬트비의 가르침으로 풀무학교를 만든 이찬갑과 주옥로. 이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예수를 본  받아 묵묵히 이 세상 짐을 지고 갈 일꾼, 참된 평민을 키워내는 일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승훈, 이찬갑 등이 건설하고자 했던 이상촌의 맥박에서부터 지금  시대의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일 까지, 1백년을 이어온 자아 혁신의 이상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것이 대안교육이며 이 사회를 위한 대안이다. 하지만 규모의 경제학이 위세를 떨치고,  온갖 '화려한' 교육이론과 교육 방법론이 교육현장을 휘두르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저력이  40년 가까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풀무학교는 저 외딴 시골구석에서  반세기동안 서야 할 자리를 조용하고 묵묵하게 지키며 끊어진 우리 교육의 맥을 그룬트비를 통해 찾으려 하고 있다.

이제 우리 정신적 원류를 찾아야  한다. 전통으로부터 이어져 왔어야 할  교육의 맥을 지금 다시 이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덴마크를, 그 중에서도 그룬트비를 주목하는 이유다.
---
이경근

2022/05/22

N. F. S. Grundtvig - Wikipedia 니콜라스 그룬트비 한일위키

N. F. S. Grundtvig - Wikipedia

N. F. S. Grundtv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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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F. S. Grundtvig
N-f-s-grundtvig-portræt.jpg
Grundtvig in pastoral garments
Born8 September 1783
Died2 September 1872 (aged 88)
OccupationLutheran minister, teacher, author, poet, philosopher, historian
ChildrenSvend Grundtvig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Danish: [ˈne̝koˌlɑjˀ ˈfʁeðˀˌʁek ˈse̝vəˌʁiˀn ˈkʁɔntvi]; 8 September 1783 – 2 September 1872), most often referred to as N. F. S. Grundtvig, was a Danish pastor, author, poet, philosopher, historian, teacher and politician. 

He w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people in Danish history, as his philosophy gave rise to a new form of nationalism in the last half of the 19th century. It was steeped in the national literature and supported by deep spirituality.[1][2]

Grundtvig holds a unique position in the cultural history of his country. Grundtvig and his followers are credited with being very influential in the formulation of modern Danish national consciousness. He was active during the Danish Golden Age, but his style of writing and fields of reference are not immediately accessible to a foreigner, thus his international importance does not match that of his contemporaries Hans Christian Andersen and Søren Kierkegaard.[3][4]

Early life and education[edit]

N. F. S. Grundtvig (1831)

Called Frederik rather than Nikolaj by those close to him. N. F. S. Grundtvig was the son of a Lutheran pastor in Udby, Johan Ottosen Grundtvig (1734–1813) and was born there. He was brought up in a very religious atmosphere, although his mother also had great respect for old Norse legends and traditions. He was schooled in the tradition of the European Enlightenment, but his faith in reason was also influenced by German romanticism and the ancient history of the Nordic countries.[5]

In 1791 he was sent to Thyregod in Sydjylland to live and study with pastor Laurids Svindt Feld (1750–1803). He subsequently studied at the Aarhus Katedralskole, the cathedral school of Aarhus, from 1798 until graduation. He left for Copenhagen in 1800 to study theology and was accepted to the University of Copenhagen in 1801.[6][7] At the close of his university life, Grundtvig began to study Icelandic and the Icelandic Sagas.[8]

Career[edit]

Bronze statue of Grundtvig by Vilhelm Bissen at Frederik's Church

In 1805 Grundtvig took a position as tutor in a house on the island of Langeland. The next three years he used his free time to study writers ShakespeareSchiller, and Fichte.[9] In 1802 his cousin, the philosopher Henrich Steffens, returned to Copenhagen full of the teaching of 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 His lectures and the early poetry of Adam Oehlenschläger opened Grundtvig's eyes to the new era in literature.[10] His first work, On the Songs in the Edda, attracted no attention.

Returning to Copenhagen in 1808, Grundtvig achieved greater success with his Northern Mythology, and again in 1809 with a long drama, The Fall of the Heroic Life in the North. Grundtvig boldly denounced the clergy of the city in his first sermon in 1810.[11] When Grundtvig published the sermon three weeks later it offended the ecclesiastical authorities, and they demanded him punished.[11][12]

In 1810 Grundtvig underwent a religious crisis and converted to a strongly held Lutheranism. He retired to his father's country parish in Udby as his chaplain.[13] His new-found conviction was expressed in his The First World Chronicle (Kort Begreb af Verdens Krønike i Sammenhæng) of 1812, a presentation of European history in which he attempted to explain how belief in God has been viewed throughout human history and in which he criticized the ideology of many prominent Danes.[14][15] It won him notoriety among his peers and cost him several friends, notably the historian Christian Molbech.[15] Upon his father's death in 1813, Grundtvig applied to be his successor in the parish but was rejected.[16]

In the following years his rate of publication was staggering: aside from a continuing stream of articles and poems, he wrote a number of books, including two more histories of the world (1814 and 1817); the long historical poem Roskilde-Riim (Rhyme of Roskilde; 1813); and a book-sized commentary, Roskilde Saga.[17] From 1816 to 1819 he was editor of and almost sole contributor to a philosophical and polemical journal entitled Danne-Virke, which also published poetry.[14]

From 1813 to 1815, he attempted to form a movement to support the Norwegians against the Swedish government. Later he preached on how the weakness of the Danish faith was the cause of the loss of Norway in 1814. His sermon was met by an enthusiastic congregation in Copenhagen. Grundtvig withdrew from the pulpit because of lacking his own parish, and being barred by other churches.[18] In 1821 he resumed preaching briefly when granted the country living of Præstø, and returned to the capital the year after.

N. F. S. Grundtvig by Constantin Hansen

In 1825 Grundtvig published a pamphlet, The Church's Rejoinder (Kirkens Gienmæle), a response to Henrik Nicolai Clausen's work on the doctrines, rites and constitutions of Protestantism and Roman Catholicism. A professor of theology at the University of Copenhagen, Clausen argued that although the Bible was the principal foundation of Christianity, it was in itself an inadequate expression of its full meaning. He described the church as a "community for the purpose of advancing general religiousness."[19] In his reply, Grundtvig denounced Clausen as an anti-Christian teacher and argued that Christianity was not a theory to be derived from the Holy Bible and elaborated by scholars. He questioned the right of theologians to interpret the Bible.[20][21] Grundtvig was publicly prosecuted for libel and fined. The Church of Denmark forbade him to preach for seven years. During this time he published a collection of theological works, visited England three times (1829–31), and studied Anglo-Saxon.[16]

In 1832 Grundtvig obtained permission to again enter active ministry. In 1839 he was called as pastor of the workhouse church of Vartov hospital in Copenhagen, a post he held until his death. Between 1837 and 1841 he published Sang-Værk til den Danske Kirke (Song Work for the Danish Church), a rich collection of sacred poetry; in 1838 he brought out a selection of early Scandinavian verse; in 1840 he edited the Anglo-Saxon poem "The Phoenix", with a Danish translation. In 1843 he visited England for a fourth time.[22] [23]

From 1844 until after the First Schleswig War, Grundtvig took a prominent part in politics, developing from a conservative into an absolute liberal. In 1848 he was part of the Danish Constituent Assembly which wrote the first constitution of Denmark. In 1861 he received the titular rank of Bishop in the Church of Denmark, but without a see. He continued to write and publish until his death. He spoke from the pulpit at Vartov Church every Sunday until a few days before his death. His preaching attracted large congregations, and he soon had a following. His hymn book effected a great change in Danish church services, substituting the hymns of the national poets for the slow measures of the orthodox Lutherans. In all Grundtvig wrote or translated about 1500 hymns, including "God's Word Is Our Great Heritage" and "Det kimer nu til julefest".

Christian thinking[edit]

Grundtvig's theological development continued over his lifetime, and took a number of important turns. He moved from his "Christian awakening" of 1810 to believing in a congregational and sacramental Christianity in later years. He was most notable for the latter thinking. He always called himself a pastor, not a theologian, reflecting the distance between his ideas and academic theology. The chief characteristic of his theology was the substitution of the authority of the "living word" for the apostolic commentaries. He desired to see each congregation act as a practically independent community.

Thought on education[edit]

Sculpture of Grundtvig in Vartov (Grundtvigsk Forum) by Niels Skovgaard

Grundtvig is the ideological father of the folk high school, though his own ideas on education had another focus. He advocated reforming the ailing Sorø Academy into a popular school aiming at another form of higher education than what was common at the university.

 Rather than educating learned scholars, he believed the university should educate its students for active participation in society and popular life. Thus practical skills as well as national poetry and history should form an essential part of the instruction. This idea came very close to implement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Christian VIII, whose wife Caroline Amalie was an ardent supporter of Grundtvig. The death of the monarch in 1848 and the dramatic political development in Denmark during this and the following years put an end to these plans. However, by that time, one of Grundtvig's supporters, Kristen Kold, had already established the first folk high school.

Grundtvig's ambitions for school reform were not limited to the popular folk high school. He also dreamed of forming a Great Nordic University (the School for Passion) to be situated at the symbolic point of intersection between the three Scandinavian countries in Gothenburg, Sweden. The two pillars of his school program, the School for Life (folk high school) and the School for Passion (university) were aimed at quite different horizons of life. The popular education should mainly be taught within a national and patriotic horizon of understanding, yet always keeping an open mind towards a broader cultural and intercultural outlook, while the university should work from a strictly universal, i.e. humane and scientific, outlook. [24]

The common denominator of all Grundtvig's pedagogical efforts was to promote a spirit of freedom, poetry and disciplined creativity, within all branches of educational life. He promoted values such as wisdom, compassion, identification and equality. He opposed all compulsion, including exams, as deadening to the human soul. Instead Grundtvig advocated unleashing human creativity according to the universally creative order of life. Only willing hands make light work. Therefore, a spirit of freedom, cooperation and discovery was to be kindled in individuals, in science, and in the civil society as a whole. [25]

Beowulf and Anglo-Saxon literature[edit]

In 1815 Grímur Jónsson Thorkelin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the Epic of Beowulf titled De Danorum rebus gestis secul. III & IV : Poëma Danicum dialecto Anglosaxonica in a Latin translation. Despite his lack of knowledge of Anglo-Saxon literature, Grundtvig quickly discovered a number of flaws in Thorkelin's rendering of the poems. After his heated debate with Thorkelin, Johan Bülow (1751–1828), who had sponsored Thorkelin's work, offered to support a new translation by Grundtvig — this time into Danish. The result, Bjovulfs Drape (1820), was the first full translation of Beowulf into a modern language (previously, only selections of the poem had been translated into modern English by Sharon Turner in 1805). [26]

Grundtvig went on to explore the extensive literature of the Anglo-Saxons which survived in Old English and Latin. In both poetry and prose, it revealed the spirituality of the early Church in Northern Europe. Grundtvig was very influenced by these ancient models of Christian and historical thought (notably the 8th-century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written in Latin). Using the resources of the Royal Library in Copenhagen and of the libraries at the universities of Exeter, Oxford and Cambridge in three successive summer visits to England (1829–31), he went on to make transcriptions of two of the four great codices of Anglo-Saxon poetry: the Exeter Book and the codex designated Junius 11 in the Bodleian Library at Oxford. Although he thought to publish them, this project was never realized. Beowulf and Anglo-Saxon literature continued to be a major source of inspiration to Grundtvig. It had a wide-ranging influence upon his work.[27][28][29]

Marriage and family[edit]

Grundtvig was married three times, the last time in his seventy-sixth year. His first wife, Elisabeth Blicher (1787–1851), was a clergyman's daughter. They were married in 1818 and had three children. His second wife, Marie Toft (1813–54) was the daughter of a landowner. She died a few months after giving birth to a son. In 1858, he married Asta Reedtz (1826–1890) of an old aristocratic Danish family. His son Svend Grundtvig (1824–83) collected and edited Danish ballads.[30]

Legacy[edit]

Grundtvig's Church

Veneration[edit]

Bibliography[edit]

Editions[edit]

No comprehensive foreign language edition of his work exists. A three-volume edition in German, however, is under preparation and projects for an English edition are in progress as well. Grundtvig's secular poetical works were published in a nine-volume edition, the first seven volumes by his second son, the philologist Svend Grundtvig. The philological practice of this work, however, is not up to the standards of modern philology. His hymns have been collected in the philologically more stable five-volume edition Grundtvigs Sang-Værk.

The best overall collection of his writings is the 10 volume edition Grundtvigs udvalgte Skrifter edited by Holger Begtrup (1859–1937). His enormous oeuvre is presented in Steen Johansen: Bibliografi over N.F.S. Grundtvigs Skrifter (I-IV, 1948–54).[33]

The most important editions are:

  • Grundtvigs Sang-Værk 1–6. Magnus Stevns (and others, editors). Copenhagen: Det danske Forlag. 1948–64.
  • Poetiske Skrifter 1–9. Udgivet af Svend Grundtvig (and others, editors). Copenhagen: Karl Schönberg og Hyldendal. 1880–1930.
  • Udvalgte Skrifter 1–10. Holger Begtrup (editor). Copenhagen: Gyldendal. 1904–09.
  • Værker i Udvalg 1–10. Hal Koch and Georg Christensen (editors). Copenhagen: Gyldendal. 1940–46.

English translations[edit]

  • N.F.S. Grundtvig - A Life Recalled. An Anthology of Biographical Source-Texts.Edited and translated by S.A.J. Bradley.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08.
  • The School for Life. N.F.S. Grundtvig on Education for the People. Translated by Edward Broadbridge.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11.
  • Living Wellsprings. The Hymns, songs and Poems of N.F.S. Grundtvig. Translated by Edward Broadbridge.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15.
  • Human Comes First. The Christian Theology of N.F.S. Grundtvig. Translated by.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18.
  • The Common Good. N.F.S. Grundtvig as Politician and Contemporary Historian. Translated by Edward Broadbridge. 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19

Bibliography[edit]

  • Abrahamowitz, Finn (2000), Grundtvig Danmark til lykke (in Danish), Copenhagen: Høst & Søns Forlag, ISBN 87-14-29612-8.
  • Allchin, Arthur Macdonald (1997), NFS Grundtvig, Århus: Århus University Press, ISBN 87-7288-656-0.
  • Reich, Ebbe Kløvedal (2000), Solskin og Lyn — Grundtvig og hans sang til livet (in Danish), Copenhagen: Forlaget Vartov, ISBN 87-87389-00-2.
  • Johansen, Steen (1948–54), Bibliografi over NFS Grundtvigs Skrifter 1–4, Copenhagen: Gyldendal.

References[edit]

  1. ^ Mogens Brøndsted. "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Store norske leksikon. Retrieved 15 December 2015.
  2. ^ John A. Hall, Ove Korsgaard, Ove K. Pedersen (2014) Building the Nation: N.F.S. Grundtvig and Danish National Identity (McGill-Queen’s Press) ISBN 9780773596320
  3. ^ "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Denmark. Retrieved 15 December 2015.
  4. ^ "Grundtvig Sought a Transformed Denmark". Christianity.com. Retrieved 15 December 2015.
  5. ^ Allchin 1997, pp. 30–31.
  6. ^ Abrahamowitz 2000, pp. 20–25.
  7. ^ Reich 2000, p. 33.
  8. ^ Pia Andersen (2005). "N.F.S.Grundtvig". Forfatterweb. Retrieved 15 December 2015.
  9. ^ Allchin 1997, pp. 31–32.
  10. ^ Reich 2000, p. 35.
  11. Jump up to:a b Allchin 1997, p. 33.
  12. ^ Reich 2000, p. 48.
  13. ^ Allchin 1997, pp. 33–36.
  14. Jump up to:a b Allchin 1997, p. 39.
  15. Jump up to:a b Abrahamowitz 2000, pp. 115–117.
  16. Jump up to:a b Lundgreen-Nielsen, Flemming, NFS Grundtvig (Biografi) (in Danish), DK: Arkiv for Dansk Litteratu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 July 2007, retrieved 8 August 2007
  17. ^ Abrahamowitz 2000, pp. 125–133.
  18. ^ Reich 2000, pp. 55–57.
  19. ^ Allchin 1997, p. 105.
  20. ^ Allchin 1997, pp. 105–106.
  21. ^ Grundtvig, Nikolaj Frederik Severin (1825), Kirkens Gienmæle (in Danish), DK: Arkiv for Dansk Litteratu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6 July 2011, retrieved 9 August 2007
  22. ^ "Vartovs historie". Grundtvig. dk. Retrieved 15 December 2015.
  23. ^ "Vartov kirkes bygningshistorie" (PDF). Grundtvig. dk. Retrieved 15 December 2015.
  24. ^ S.A.J.Bradley. "N.F.S.Grundtvig – A Life Recalled" (PDF). University of Aarhus. Retrieved 15 December 2015.
  25. ^ "N. F. S. Grundtvig, folk high schools and popular education". YMCA George Williams College. Retrieved 15 December 2015.
  26. ^ "Hofembedsmand – Bülow, Johan, 1751–1828". Dansk biografisk Lexikon. Retrieved 15 December 2015.
  27. ^ Bradley, SAJ (2006), "Grundtvig, Bede and the Testimony of Antiquity", Grundtvig Studier57: 110–131, doi:10.7146/grs.v57i1.16495
  28. ^ Bradley, SAJ (2004), "Before Irenaeus. The Making of Grundtvig the Medievalist", Grundtvig Studier55: 234–254, doi:10.7146/grs.v55i1.16461
  29. ^ Bradley, SAJ (1999), "The Recovery of England's 'skrinlagt fortid' — a Progress Report", Grundtvig Studier50: 138–161, doi:10.7146/grs.v50i1.16337 and various other related articles by this author in the same journal.
  30. ^ "Biografi – Nik. Fred. Sev. Grundtvig". Arkiv for Dansk Litteratur. Retrieved 15 December 2015.
  31. ^ "Litteratur: Lyrikantologi" (PDF)Kulturkanon (in Danish). DK: Ministry of Culture. 2006. p. 47. Archived from the original (PDF) on 29 October 2013. Retrieved 30 January 2013.
  32. ^ "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Renewer of the Church". Field Guide To Lutheran Saints. 2 September 2010. Retrieved 15 December 2015.
  33. ^ "Grundtvig Tekstoplysninger Tekstbeskrivelse". danske litterære tekster efter 1800. Retrieved 15 December 2015.

Further reading[edit]

In English[edit]

  • Allchin, AM (1998), NFS Grundtvig. An Introduction to his Life and WorkLossky, NO, afterword, London: Darton, Longman & Todd, ISBN 87-7288-656-0. The single most important work on Grundtvig in English.
  • A.M. Allchin. (2015.) N.F.S. Grundtvig: An Introduction to his Life and Work. Aarhus University Press.
  • A.M. Allchin, ed. Heritage and Prophecy: Grundtvig and the English-Speaking WorldISBN 1-85311-085-X. Essays by leading international Grundtvig scholars.
  • E.L. Allen (ca. 1940). Bishop Grundtvig, a Prophet of the North. In series, Modern Christian Revolutionaries. London: J. Clarke & Co. N.B.: Brief biography and study (of 94 p.).
  • M. Eliade, Encycklopedia of Religion, Second Edition (editor in chief Lindsay Jones), "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s 3704-3706 (Synnøve Sakura Heggem 2005)
  • S.A.J. Bradley, tr., ed. (2008). N. F. S. Grundtvig: A Life Recalled. An Anthology of Biographical Source-Texts. Aarhus University Press. ISBN 978-87-7288-969-6. Very extensive Index documents the broad context of Grundtvig's life and work. Complementary to Allchin (1998).

Holm, Anders (2019). The Essential N.F.S. Grundtvig. Translated by Edward Broadbridge. Aarhus: Filo.

Important, too, are the numerous articles in English published in the yearbook Grundtvig-Studier (Grundtvig Studies) from 1948 and onwards. Danish is the main language of the journal, but the English articles are prominent and increasing in recent years.

In other languages[edit]

The most important works on Grundtvig are a series of dissertations published since the founding of Grundtvig-selskabet (The Grundtvig Society). All of them contain summaries in major languages, most of them in English. This series includes:

  • Aarnes, Sigurd Aa. (1960). Historieskrivning og livssyn hos Grundtvig. Oslo: Universitetforlaget.
  • Auken, Sune (2005). Sagas spejl. Mytologi, historie og kristendom hos N.F.S. Grundtvig. Copenhagen: Gyldendal. ISBN 87-02-03757-2
  • Bugge, Knud Eyvin (1965). Skolen for livet. Copenhagen: GAD.
  • Christensen, Bent (1998). Omkring Grundtvigs Vidskab. Copenhagen: GAD. ISBN 87-12-03246-8
  • Grell, Helge (1980). Skaberånd og folkeånd. Copenhagen: Grundtvig-Selskabet. ISBN 87-7457-072-2
  • Grell, Helge (1987). Skaberordet og billedordet. Aarhus: Anis. ISBN 87-981073-0-5
  • Heggem, Synnøve Sakura (2005): Kjærlighetens makt, maskerade og mosaikk. En lesning av N. F. S. Grundtvigs "Sang-Værk til den Danske Kirke". Oslo.
  • Høirup, Henning (1949). Grundtvigs Syn på Tro og Erkendelse. Copenhagen: Gyldendal.
  • Lundgreen-Nielsen, Flemming (1980). Det handlende ord. Copenhagen: GAD. ISBN 87-503-3464-6
  • Michelsen, William (1954). Tilblivelsen af Grundtvigs Historiesyn. Copenhagen: Gyldendal.
  • Thaning, Kaj (1963). Menneske først — Grundtvigs opgør med sig selv. Copenhagen: Gyldendal.
  • Toldberg, Helge (1950). Grundtvigs symbolverden. Copenhagen: Gyldendal.
  • Vind, Ole (1999). Grundtvigs historiefilosofi. Copenhagen: Gyldendal. ISBN 87-00-37308-7

External link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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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그룬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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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그룬트비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N-f-s-grundtvig-portræt.jpg
작가 정보
출생1783년 9월 8일
덴마크 셸란 지역 우드뷔
사망1872년 9월 2일(88세)
덴마크 코펜하겐
직업루터교 신학자
개신교 루터 교회 목사
시인
민족운동가
역사가
민속학자
정치가
저술가
교육자
교육학자
철학자
언어덴마크어
국적덴마크의 기 덴마크
학력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 신학과 학사
종교개신교(루터회)
필명독일어식 이름은 니콜라스 그룬트비히(Nikolas Grundtvig)
스웨덴어식 이름은 니콜라스 그룬트비그(Nikolas Grundtvig)
활동기간1808년 ~ 1872년
장르시문학신학교육학 저술
배우자아스타 레츠 그룬트비(3번째 부인)
자녀스벤 그룬트비(아들)

니콜라이 프레데리크 세베린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년 9월 8일 ~ 1872년 9월 2일)는 덴마크의 신학자루터교 목회자시인민족운동가역사가민속학자정치가저술가교육자교육학자철학자이다.

일생[편집]

생애 초기[편집]

그는 덴마크 셸란 지역 우드뷔의 작은 섬마을에 있던 독실한 개신교 루터 교회 신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다. 그는 3세 때부터 5세 때까지 부모를 따라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2년간 어린 시절을 보내었으며 이어 5세 때부터 6세 때까지도 부모를 따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1년간 어린 시절을 보내었고 6세 때 덴마크에 귀국하여 고국 덴마크의 향리에서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졸업을 거쳐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 신학과에서 학사 학위 취득하였으며 루터교 목사 자격을 얻은 이후에는 향리 교회에서 소박한 농민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1808년에는 《북유럽 신화(Nordens mythologi)》라는 시집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첫 입문하였다.

저술 활약을 비롯한 덴마크 민족 운동[편집]

1825년 《교회의 대답》이란 저서를 발표하여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다가 7년간 설교 금지 조치 처분되었다.

1848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방의 의무신앙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를 위하여 지도적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각자 자기 자신의 토지를 소유할 권리가 있음을 역설하면서, 국민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민중고등학교의 창설을 주장하였다.

같은 덴마크인 철학자이기도 한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의 실존주의 철학 이론을 극찬하였으며 아울러 같은 덴마크인 작가이기도 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의 동심 사랑을 극찬하기도 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땅을 사랑하자..."라고 호소하며 박토인 조국 덴마크를 개척하였고 덴마크를 세계적인 아름다운 나라로 개혁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여 "덴마크 중흥의 국부(國父)"라 일컬어진다.

주요 경력[편집]

가족 관계[편집]

그의 아들 스벤 그룬트비(Svend Grundtvig)도 시인이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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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J "Wikipedia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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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S·그룬트비
NFS·그룬트비

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년 9월 8일 - 1872년 9월 2 일 )는 덴마크 목사 , 작가 , 시인 , 철학자 , 교육자 , 정치인 . 보통, 이름은 N·F·S·그룬트비 로 약칭된다.

덴마크 역사 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으로, 그 철학은 19세기 후반, 덴마크의 새로운 내셔널리즘을 형성할 때 큰 자극을 주었다. 그는 첫번째 이름을 3번 바꾸고 3번째는 그의 76년의 삶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룬트비와 그의 후계자들은 현대 덴마크의 국민 의식에 현재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국민문학 속에 널리 스며들어 있으며, 그것은 깊은 신앙의 힘에 의해서도 지지되고 있다.

평생 편집 ]

어린 시절과 교육 편집 ]

루터파 목사인 요한 오토센 그룬트비의 아들로 셰란  의 우즈뷔(Udby)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다. 친밀한 사람들에게서는 니콜라이가 아니라 프레데릭으로 불려 자랐다. 그는 매우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지만 북유럽 의 옛 전설과 전통에도 경의를 표했다. 그는 유럽의 계몽주의 전통에서 학교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지적인 신앙심은 독일의 로망주의 와 북유럽 국가의 역사에서 흔들렸다. 1791년에 유틀랜드 반도 의 목사인 라우리드 펠드에게 보내져 거기서 생활하게 되었고, 1798년부터 오르후스 의 대성당 학교에서 배우고, 동교를 졸업했다. 1800년에 신학을 배우기 위해 코펜하겐 에 가서 1801년에 코펜하겐 대학 에 입학을 허락했다. [1] [2] 학생 생활과 병행하여, 글룬트비는 아이슬란드어와 아이슬란드 사가 (이야기) 공부를 시작했다.

경력 편집 ]

1805년, 그룬트비는 로랑섬 의 한 집에서 가정교사의 직업을 얻었다. 그 후 3년간 그는 자신의 자유가 되는 시간의 대부분을 윌리엄 셰익스피어 , 프리드리히 실러 , 그리고 피히테 의 공부에 맞춘다. [3] 1802년 그의 종형제로 철학자인 헨릭 슈테펜스 (1773년 - 1845년)가 독일 유학으로부터 셸링의 가르침을 탭리로 받아 코펜하겐 으로 돌아왔다. 그의 강의와 아담 고트 로프 에일렌스 레이어(Adam Oehlenschläger)의 초기 시작이 그룬트비에게 문학에 대한 새로운 눈을 열게 한다. [4] 그의 최초의 저작 『에다의 노래에 대해서』는 세상의 주목을 끌기에는 이르지 않았다. 1808년 코펜하겐으로 돌아온 그룬트비는 '북유럽의 신화'라는 저작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1809년에는 장편의 희곡 '북방 영웅 전설의 몰락'으로 새로운 성공을 거둔다. 그룬트비는 1810년 첫 설교에서 마을 성직자를 몰래 비난했다. [5] 몇 주 후, 그룬트비가 교회의 권위자들을 공격한 설교를 출판하자 그들은 그룬트비에게 징벌을 요구했다. [5] [6] 1810년, 그룬트비는 종교적인 위기에 빠져 지금까지 짙게 안고 있던 루터파로 개종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작은 교구에 예배당이 있는 목사로서 끌려 버린다. [7] 그가 새롭게 믿음은 그의 1812년의 '첫 번째 세계 연대기'에 자주 나타나고, ( Kort Begreb af Verdens Krønike i Sammenhæng ) 모습을 드러냈는지 말하려고 했던 것을 유럽사 속에서 재현하려고 한 것으로, 그 중 그는 또 많은 유명한 덴마크인들의 사상을 비평하고 있다. [8] [9] 이 책은 그의 동세대 동료들 중에서도 특히 그에게 인율력을 주고 수많은 친구를 주었지만,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역사가인 크리스티안 몰벡(Christian) Molbech). [9] 1813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룬트비는 교구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그것은 스스로 고사했다. [10]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간행 템포는 압도적인 것이 있었다. 기사나 시작에서 넘쳐나는 일과 병행하여 수많은 책을 집필했다. 그 중에는 세계의 역사에 관련된 2권의 책(1814년과 1817년)이 있었다. 즉 장편의 역사적인 이야기시 '로스킬레 찬가'( Rhyme of Roskilde ; 1813)와 서적 사이즈의 주석책 '로스킬레 사가'이다. [11] 1816년부터 1819년까지 그는 Danne-Virke라는 제목의 시의 잡지의 편집자로, 거의 유일한 기고자였다. [8]

콘스탄틴 한센의 NFS 글룬트비

1813년부터 1815년까지 그는 스웨덴에 저항하는 노르웨이를 돕는 운동을 시작하려고 시도했다. 나중에 그는 1814년 노르웨이가 패한 원인이 덴마크의 믿음의 약점에 기인하는 설교를 하기도 한다.

그의 설교는 코펜하겐에서 열광적인 신도들에 의해 환영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스스로의 교구를 가지지 않고, 또 다른 교회로부터의 방해도 있어 설교단으로부터 발이 멀어져 가게 되었다. [12] 1821년, 그는 프레스트에서 시골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이 설교를 짧게 정리하고 있다. 그가 수도로 돌아오는 것은 그 1년 후이다. 1825년 그룬트비는 '교회의 항변'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한다. Kirkens Gienmæle ), 이것은 개신교와 가톨릭 교리, 의식, 제도에 대한 헨릭 니콜라이 클라우센의 저작에 대한 대답이다. 코펜하겐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클라우센은 성경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기초이지만, 성경 자체는 기독교가 완전히 의미하는 것의 부적절한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야말로 "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보편적인 종교성을 위한 공동체"라고 썼다. [13] 그룬트비는 이에 반론하고, 클라우센은 반 그리스도의 교사라고 선언했고, 그리스도교는 성경에서 파생되었고 학자들이 마무리한 이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들의 권리를 문제시했다. [14] [15] 그룬트비는 중상비방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루터교 교회는 그에게 몇 년 동안 교회에서 설교를 금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련의 신학 저작을 출판하고 영국을 세 번 방문하여 (1829-31) 고대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10] 1832년, 그룬트비는 다시 설교할 허가를 회복했다. 1839년, 그는 코펜하겐의 바토프 병원의 구빈원 교회 목사로 임명되었고,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지위에 있었다. 1837년부터 1841년까지 그는 '덴마크 교회를 위한 찬가집'을 간행했다. 이것은 방대한 찬송가의 수집이 되고 있다. 1838 년 그는 스칸디나비아의 옛 시대 시가의 선집을 간행. 1840년에는 앵글로 색슨의 시집 '불사조'를 덴마크어 번역으로 편찬, 1843년에는 영국 4번째 방문을 했다. 1844년부터 제1차 슈레이스비히 전쟁 이후에 이르기까지, 글룬트비는 보수파로부터 절대적인 리버럴파에 이르기까지의 정계에서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861년, 그는 주교의 지위에 맡겨졌지만, 감독하는 교회가 없는 명목만의 것이었다. 그는 계속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죽을 때까지 출판 활동을 계속하고, 바토프 교회에서는 사망하기 2, 3일 전까지 매주 일요일에는 설교를 실시했다.

그의 설교는 청중을 매료시키고 곧 추종자들도 나타나게 된다. 그의 찬가책은 덴마크 교회 예배에서 정통 루터파의 느긋한 운율을 국민적 시인의 찬가로 변경하는 등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룬트비가 집필, 혹은 번역한 찬가는 1,500편에 오르고, 그 중에는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큰 유산」도 포함되어 있다.

결혼과 가족 편집 ]

세 번 결혼하고 마지막 결혼은 76세 때이다. 아들 스벤 그룬트비 ( 1824년 -1983  )는 덴마크의 이야기시 (발라드)를 수집하고 편집했다.

기독교 사상 편집 ]

그룬트비의 신학 사상의 발전은 그의 생애에 건너고 있으며, 게다가 여러 번 중요한 방향 전환(개심)이 일어나고 있다. 그는 1810년 '기독교 신앙의 각성'에서 조합 교회를 믿는 분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비밀주의 기독교로 바뀌었다. 그는 그 밤새의 사상에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항상 목사라고 부르며, 결코 신학자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자신의 종교관과 대학 등 세계의 신학 사이의 거리를 반영한 ​​표현이다. 그의 신학의 주인이었던 특징은 사도의 주석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대체한다는 것에 있다. 그는 실제로 독립된 마을에서 신도들의 집회를 만나는 것이 항상 열망했다.

교육관 편집 ]

그룬트비 는 포르케 호이스 콜레 의 이념적인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그룬트비의 교육관은, 그것과는 약간의 시점의 차이는 있지만. 그는 쉐란섬의 솔레에 있던 청식 한숨의 아카데미가 대학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같은 교육과는 다른 형태의 것을 목표로 하는 인기 있는 학교가 되어 가도록 촉구했다. 그는 학생을 교육하는 것보다 대학이 사회와 평범한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학생을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실용적인 스킬이야말로 국민적인 문학이나 국민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수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독교 8세 의 통치 시대에 뿌리를 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왕의 여주인 칼로리네 아마리 에는 그룬트비의 열렬한 지원자이기도 했다. 1848년 왕제가 끝을 알리고 그 해와 그 뒤를 이은 몇 년 동안 덴마크 정치의 격변기가 왔을 때, 이러한 계획은 반고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룬트비의 후계자 중 한 명인 크리스틴 콜 은 이미 최초의 포르케 호이스 콜레를 창립했다. 학교 개혁에 대한 그룬트비의 야망은 인기의 포르케 호이스 코레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북유럽 참가국이 국경을 접하는 스웨덴 예테보리에 대북방 대학(열정 학교)을 설치하는 것을 계속 꿈꾸고 있었다. 그의 학교 계획의 두 개의 기둥, 생활을 위해, 혹은 살기 위한 학교(포르케 호이스 코레)와 열정을 위한 학교(대학)는, 생활의 별개의 지평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교육은 물론, 폭넓은 문화적이고 지적인 옷차림을 향해 눈을 뜨고 들어가지만, 결국은 국민적이고 애국주의적인 것의 사고방식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만 , 이것에 대해 대학은, 엄밀하게 보편적인, 즉 인간적이고 과학적인 의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룬트비의 교육적 노력의 공통된 분모는 교육적인 삶의 모든 지엽에서 자유, 시가, 그리고 창조성의 정신을 밀어내려는 것이었다. 그는 지혜, 슬픔, 자기 확인, 평등 등의 가치를 추진했다. 그는 시험처럼 사람의 영혼을 망치는 모든 강제에 저항했다. 대신 그룬트비는 생명의 보편적인 창조적 질서에 따라 사람의 창조성을 풀어내는 것을 옹호한 것이다. 다만 「의지가 있는 손이 빛의 업을 하는 것이다.」 는 안 되는 것이다.

베오울프와 앵글로 색슨 문학 편집 ]

1815년, 그리몰 용슨 토르켈 린이 '베오울프 ' Epic of Beowulf titled De Danorum rebus gestis secul. III & IV : Poëma Danicum dialecto Anglosaxonica 라틴어 번역으로 출판했다. 앵글로 색슨 문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글룬트비는 즉시 톨케린의 시가 번역에서 일련의 오역을 발견했다. 톨 케린과의 격렬한 논쟁 후, 톨 켈린의 일의 경제적인 뒤 방패였던 요한 뷰로가 그룬트비의 새로운 번역, 이번에는 덴마크 Ⅴ로의 번역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제기했다. 그 결과, Bjovulfs Drape (1820년)가, 「베오울프」의 최초의 근대어로의 번역으로서 출판되었다.

그룬트비는 더 오래된 영어와 라틴어로 남아있는 다른 앵글로 색슨 문학 조사에 나섰다. 그 양자의 시가와 산문 중에는 북방의 초기 교회의 정신성이 계시되어 있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그룬트비는 고대 기독교인과 역사적인 사고의 모델에 (특히 8 세기 베다에 의해 라틴어로 쓰여진 " 구제사 ") 매우 영향을 받았다. 코펜하겐의 왕립 도서관과 엑서터 대학,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의 각 도서관의 장서를 연속 3기 여름방학의 영국 방문(1829년-31년)에서 이용하면서 그는 앵글로 색슨 문학의 4가지 중요한 사본 안에 2개의 사본을 만들었다. 옥스포드 대학 보돌리안 도서관에 있는 '엑서터 책'과 '유니우스 11'이다.

그는 이들을 출판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베오울프'와 앵글로 색슨 문학은 그룬트비에게는 그 발상의 영감의 근원으로 계속 존재했다.

그것은 그의 저작에 광대하고 중요한 충격을 가하고 있다. [16] [17] [18]

일화 편집 ]

그룬트비는 그의 모국의 문화사 속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덴마크의 칼라일 로 비유되거나 에머슨 과 대비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작문 스타일과 관련된 분야는 직접 누군가 또는 선인의 표본이 있는 것 같지 않고, 그의 중요성은 그의 동시대인 한스 기독교 안델센 과 세일렌 키에르케골 에서도 굵게 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찬송가인 'De Levendes Land'는 2006년 덴마크의 문화적 지보의 집대성의 문학적 부문이 되는 '문학목록'(Lyrikantologi) 안에 담겼다. [19] 코펜하겐의 유명한 그룬트비 교회 는 그룬트비를 기념하여 덴마크 건축가 옌센 클린트가 설계한 것이다. 네오고딕의 표현주의 양식으로 노란 벽돌을 쌓아 세워 1940년에 완성했다. 나이지리아의 그룬트비 국제 세컨더리 스쿨은 그의 어쨌든 명명된 것이다. 이것은 독립적인 남녀 공학의 중등 교육 학교이다.

현창 편집 ]

그룬트비는, 미국 복음 루터파 교회 의 성 인력 으로, 교회의 주교로 해 쇄신자로서 9월 2일의 성인으로서 축하되게 되었다. 그는 성회 의 교회 달력 에서 9월 8일에 저 공휴일이 있다.

문헌 편집 ]

제판 편집 ]

그룬트비 세속의 문학 작품은 9권본의 저작집에서 간행되고 있다. 첫 번째 7권은 그의 둘째자로 문학학자인 스벤 그룬트비의 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작의 문헌학적 검증은 현대의 문학학 수준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의 찬가는 문헌학적으로는 보다 확고한 5권본의 '그룬트비 찬가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저작의 최상의 전집은, 홀거 베그트랩(Holger Begtrup)의 10권본의 전집 「Udvalgte Skrifter」이다. 그의 편이 되는 유명한 전집은 스텐 요한슨(Steen Johansen)의 'NFS 글룬트비 문헌목록'에도 게재되고 있다. 그의 저작 전집의 잘 생긴 외국어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어판에서는 3권본의 선집이, 간행 준비중이며, 영어판에서도 저작권의 계획이 있다.

중요한 전집, 선집은 다음과 같다.

  • Grundtvigs Sang-Værk 1–6. Magnus Stevns (and others, editors). Copenhagen: Det danske Forlag. 1948–64.
  • Poetiske Skrifter 1–9. Udgivet af Svend Grundtvig (and others, editors). Copenhagen: Karl Schönberg og Hyldendal. 1880–1930.
  • Udvalgte Skrifter 1–10. Holger Begtrup (editor). Copenhagen: Gyldendal. 1904–09.
  • Værker i Udvalg 1–10. Hal Koch and Georg Christensen (editors). Copenhagen: Gyldendal. 1940–46.

전기 편집 ]

  • Abrahamowitz, Finn (2000) (Danish), Grundtvig Danmark til lykke , Copenhagen: Høst & Søns Forlag, ISBN  87-14-29612-8 .
  • Allchin, Arthur Macdonald (1997), NFS Grundtvig , Århus: Århus University Press, ISBN 87-7288-656-0  .
  • Reich, Ebbe Kløvedal (2000) (Danish), Solskin og Lyn — Grundtvig og hans sang til livet , Copenhagen: Forlaget Vartov, ISBN 87-87389-00-2  .
  • Johansen, Steen (1948–54), Bibliografi over NFS Grundtvigs Skrifter 1–4 , Copenhagen: Gyldendal .

독서 안내 편집 ]

영어에 의한 것 편집 ]

  • Allchin, AM (1998), NFS Grundtvig. An Introduction to his Life and Work Lossky, NO , afterword, London: Darton, Longman & Todd, ISBN 87-7288-656-0  . The single most important work on Grundtvig in English .
  • AM Allchin, ed. Heritage and Prophecy: Grundtvig and the English-Speaking World . ISBN 1-85311-085-X . Essays by leading international Grundtvig scholars.
  • EL Allen (ca. 1940). Bishop Grundtvig, a Prophet of the North . In series, Modern Christian Revolutionaries . London: J. Clarke & Co. NB: Brief biography and study (of 94 p.).
  • SAJ Bradley, tr., ed. (2008). NFS Grundtvig: A Life Recalled. An Anthology of Biographical Source-Texts . Aarhus University Press. ISBN 978-87-7288-969-6 . Very extensive Index documents the broad context of Grundtvig's life and work. Complementary to Allchin (1998).

이들과 나란히 중요한 것은 1948년부터 매년 간행되고 있는 「그룬트비 연구」(Grundtvig-Studier)에 영어로 발표되고 있는 수많은 논문이다. 이 잡지의 주된 언어는 덴마크어이지만, 최근의 뛰어난 연구는 영어의 것이 많아, 또 그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다른 외국어 문헌 편집 ]

The most important works on Grundtvig are a series of dissertations published since the founding of Grundtvig-selskabet (The Grundtvig Society). All of them contain summaries in major languages, most of them in English. This series includes:

  • Aarnes, Sigurd Aa. (1960). Historieskrivning og livssyn hos Grundtvig . Oslo: Universitetforlaget.
  • Auken, Sune (2005). Sagas spejl. Mytologi, historie og kristendom hos NFS Grundtvig . Copenhagen: Gyldendal. ISBN 87-02-03757-2
  • Bugge, Knud Eyvin (1965). Skolen for livet . Copenhagen: GAD.
  • Christensen, Bent (1998). Omkring Grundtvigs Vidskab . Copenhagen: GAD. ISBN 87-12-03246-8
  • Grell, Helge (1980). Skaberånd og folkeånd . Copenhagen: Grundtvig-Selskabet. ISBN 87-7457-072-2
  • Grell, Helge (1987). Skaberordet og billedordet . Aarhus: Anis. ISBN 87-981073-0-5
  • Heggem, Synnøve Sakura (2005): Kjærlighetens makt, maskerade og mosaikk. En lesning av NFS Grundtvigs "Sang-Værk til den Danske Kirke" . Oslo.
  • Høirup, Henning (1949). Grundtvigs Syn på Tro og Erkendelse . Copenhagen: Gyldendal.
  • Lundgreen-Nielsen, Flemming (1980). Det handlende ord . Copenhagen: GAD. ISBN 87-503-3464-6
  • Michelsen, William (1954). Tilblivelsen af ​​Grundtvigs Historiesyn . Copenhagen: Gyldendal.
  • Thaning, Kaj (1963). Menneske først — Grundtvigs opgør med sig selv . Copenhagen: Gyldendal.
  • Toldberg, Helge (1950). Grundtvigs symbolverden . Copenhagen: Gyldendal.
  • Vind, Ole (1999). Grundtvigs historiefilosofi . Copenhagen: Gyldendal. ISBN 87-00-37308-7
  • 할콕

외부 링크 편집 ]

각주 편집 ]

  1. ↑ Abrahamowitz 2000 , pp. 20–5.
  2. ↑ Reich 2000 , p. 33.
  3. ↑ Allchin 1997 , pp. 31-2.
  4. ↑ Reich 2000 , p. 35.
  5. b Allchin 1997 , p. 33.
  6. ↑ Reich 2000 , p. 48.
  7. ↑ Allchin 1997 , pp. 33-6.
  8. b Allchin 1997 , p. 39.
  9. ↑ b Abrahamowitz 2000 , pp. 115–7.
  10. ↑ b Lundgreen-Nielsen, Flemming (Danish), NFS Grundtvig (Biografi), DK : Arkiv for Dansk Litteratur 2007년 8월 8일에 확인함. .
  11. ↑ Abrahamowitz 2000 , pp. 125–33.
  12. ↑ Reich 2000 , pp. 55-7.
  13. ↑ Allchin 1997 , p. 105.
  14. ↑ Allchin 1997 , pp. 105-6.
  15. ↑ Grundtvig, Nikolaj Frederik Severin (1825) (Danish), Kirkens Gienmæle , DK: Arkiv for Dansk Litteratur 2007년 8월 9일에 확인함. .
  16. ↑ Bradley, SAJ (2006), “Grundtvig, Bede and the Testimony of Antiquity”, Grundtvig Studier : 110–31 .
  17. ↑ Bradley, SAJ (2004), “Before Irenaeus. The Making of Grundtvig the Medievalist”, Grundtvig Studier : 234–54 .
  18. ↑ Bradley, SAJ (1999), “The Recovery of England's 'skrinlagt fortid' — a Progress Report”, Grundtvig Studier : 138–61 and various other related articles by this author in the same journal.
  19. “ Litteratur: Lyrikantologi PDF ) ” ( Danish). Kulturkanon . Ministry of Culture. p. 47 (2006년) 2013년 1월 30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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