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3

알라딘: 류달영 박사의 생애와 사상

알라딘: 류달영 박사의 생애와 사상




류달영 박사의 생애와 사상 - 폐허의 땅에 덴마크 부흥 모델을 제시하다 
김홍근 (지은이)상상의숲2021-05-10

344쪽

책소개

류달영은 일제 감정기와 6·25 전쟁이란 한국 현대사의 절망적 고난을 고스란히 겪었다. 그가 일생 동안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정신으로 ‘나라 사랑’을 최우선에 둔 것은 의분에 찬 국민으로서 너무나 절박한 선택이었다. 일제의 ‘가난’과 ‘무식’이란 식민지 정책 속에서 교육 기회를 빼앗기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90%가 농민인 나라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이어 갔고, 전쟁에 패하고 황무지로 쫓겨난 덴마크가 복지국가로 부흥한 ‘덴마크 부흥사’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20여 년 동안 ‘덴마크 부흥사’를 연구한 그는 6·25 전쟁의 피난지에서 《새 역사를 위하여》를 펴내 ‘덴마크 부흥사’를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절망 속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었고, 국가 재건의 불씨를 당겼으며, 이후 류달영이 ‘나라 사랑’에 헌신한 수많은 놀라운 업적의 신호탄이 되었다. 우리는 험난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 시대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 자랑스런 한국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목차
1. 나의 삶, 사람 노릇 잘하기-유년기에서 죽남보통학교 시절
사랑의 실천가|역사의 거센 소용돌이
동냥젖 먹고 자란 아이|책임감 강한 아버지
어머니의 눈물|아버지와 아들의 정
죽을 고비를 넘다|거짓말을 모르는 농심
산을 지키는 마을 사람들|9살 소년의 ‘독립 만세!’
아들의 신식 교육|공부 열정과 진로 변경

2. 인생관,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양정고등보통학교 시절
김교신 선생을 만나다|자긍심과 독립 정신
이순신을 알게 되다|스승은 인생을 가르친다
명 질문에 명 대답|독서 생활의 시작
독립 의지와 냉수마찰|거지 울음소리와 양심의 소리
나의 친한 친구, 검둥이 개|대장부의 호기와 정신적 성숙
‘농촌 운동’ 서원을 세우다

3. 독립운동과 농촌 운동-수원고등농림학교 시절
자족적인 삶을 버리다|선후배가 독립운동 동지가 되다
불사조 같은 독립 정신|김교신, 사토, 소노다
여성 애국자 최용신을 만나다|맏딸이 태어나다
총독부로 가지 않겠습니다

4. 여성 교육에 젊은 열정을 쏟다-호수돈고등여학교 교사 시절
여성 교육을 선택하다|젊은 정열을 불태우다
수요회에서 동지를 기르다|무감독 시험과 자부심
개성의 독립 정신과 자부심|일본의 탄압과 빛나는 교가
33인, 백두산에 오르다|헬렌 켈러의 열차 연설
도산, 춘원, 백범|최용신의 전기를 쓰다
눈물 밥이 가장 맛있다|기도의 사람
류달영은 교육자다|역사의식, 민족의식을 깨우다
아버지의 나라 잃은 설움

5. 독립을 향한 저항의 불꽃-감옥 생활에서 해방 전후까지
짙은 어둠의 식민지|감옥에서 마음을 수련하다
요행을 바라지 마라|하심(下心)을 배우다
공자, 열심히 배운 사람|감옥에서 쓴 편지
일본인 검사의 뜻밖의 처분|전쟁 말기, 여주에 은신하다
무식과 가난|김삿갓의 글씨
흥남 일본질소연료주식회사|장사 김교신 계장
거목이 쓰러지다|재운 좋은 종묘회사 전무
해방과 조선 이야기|인재 양성과 보이 스카우트 운동
개성 시대의 막이 내리다

6. 이 땅에 덴마크 부흥을 실현하자-서울대 농대 교수 시절
서울대 농대 교수가 되다|폐허로 만든 6·25 전쟁
잿더미가 된 서울|새 역사를 위하여
국민의 부유, 건강, 교육, 복지 사회|그룬트비의 국민 교육
크리스텐 콜|달가스와 황무지 협회
미국의 교육 지원|학문의 바다 미네소타대학교
한국의 밤|코넬대학교와 한국의 들잔디
영국과 독일의 인상|덴마크를 찾아가다

7. 나라의 부름을 받고-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 시절과 이후
박 의장과 조건부 수락|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 취임
동양의 덴마크 건설|국민운동의 네 기둥
공과 사|김두한의 사과|혁명 정부에 부치는 직언
군사 정부와 국민운동 해산|박정희에 대한 평가
새마을 운동|평화 농장과 농민 운동
전국농업기술자협회|농업진흥관 건립
농민 대학|한국유기농업협회|한국농산물유통연구회
초인적인 사회봉사 활동|나라꽃 무궁화

8. 마지막 필생의 사업-성천문화재단을 세우고
성천문화재단의 창립|생활문화아카데미의 동서인문고전강좌
보람찬 노년|아내 이창수 여사|만능인
유머는 인생의 맛을 내는 향신료|극진한 건강 관리
참 잘 되었구만|누구와도 흉금 트고

후기
성천 류달영의 사상-김홍근

부록
밟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류달영 연보
류달영 저서
류달영 작사 노래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인간은 살려고 태어났다.
추천글
선생은 인생을 재미있고도 풍요롭게 사셨습니다. 유머러스한 말씀으로 항상 우리에게 즐거움을 나눠 주었습니다. 선생은 겉으로는 그렇게 즐겁게 사시는 것 같아도 마음속은 바닷물같이 넓고 깊은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이 박정희 정권을 도왔다고 해서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4·19 이후의 혼란기에 누군가가 나라 일을 수습해야겠다는 남모르는 걱정을 했습니다. 6·25 전쟁을 겪은 우리 세대는 내부적 혼란보다도 공산 정권의 이념과 물리적 남침을 더 걱정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저에게 남겨 준 뜻은 어떤 정권이든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지지하고, 피해와 고통을 주는 정치는 반대하는 것이 탈 정치적인 애국심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성천 선생을 회고할 때마다 그분의 애국심과 인생을 지혜롭고 즐겁게 해 주는 스승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류달영 선생. 내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기업인도 재벌도 아닌, 게다가 자본과는 거리가 먼 대학 교수가 사재를 털어 재단을 설립한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산업화를 거의 완성해 가던 시기였다. 하지만 문화의 토대인 정신적 가치와 창조성을 잃어버린 번영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또한 우리는 거친 시대를 거치며 민주화를 성취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 선생은 이를 예견한 것일까? 공익재단을 설립해 정신적 가치를 드높이는 인문학 교육 및 문화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화적 결실, 나아가 세계인의 마음에 불 지핀 한류는 류달영 선생처럼 인간 정신의 가치를 드높인 이들의 문화적 안목과 통찰이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책에서 독자는 그의 업적뿐 아니라 인간 류달영을 진심으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저자 및 역자소개
김홍근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중남미 문학을 전공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서 <옥타비오 파스의 시 사상>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성천문화재단에서 실무책임자로 20년간 고전아카데미를 운영했다. 지금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와 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의식교육 연구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선화> <참선일기> <보르헤스 문학 전기> <인생교과서 부처(공저)> 등을 펴냈고, 번역서로는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 더보기
최근작 : <류달영 박사의 생애와 사상>
출판사 제공 책소개
류달영, 폐허의 땅에 부흥의 길을 제시한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
저자 김홍근은 성천(星泉) 류달영이 창설한 성천문화재단에서 20년간 실무 책임자로 일하면서 류달영을 가까이 모셨다. 김홍근은 류달영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의 이력과 저서 등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류달영의 전기이자 평전인 《류달영의 생애와 사상》을 펴냈다.

류달영은 일제 감정기와 6·25 전쟁이란 한국 현대사의 절망적 고난을 고스란히 겪었다. 그가 일생 동안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정신으로 ‘나라 사랑’을 최우선에 둔 것은 의분에 찬 국민으로서 너무나 절박한 선택이었다. 일제의 ‘가난’과 ‘무식’이란 식민지 정책 속에서 교육 기회를 빼앗기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90%가 농민인 나라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이어 갔고, 전쟁에 패하고 황무지로 쫓겨난 덴마크가 복지국가로 부흥한 ‘덴마크 부흥사’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20여 년 동안 ‘덴마크 부흥사’를 연구한 그는 6·25 전쟁의 피난지에서 《새 역사를 위하여》를 펴내 ‘덴마크 부흥사’를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절망 속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었고, 국가 재건의 불씨를 당겼으며, 이후 류달영이 ‘나라 사랑’에 헌신한 수많은 놀라운 업적의 신호탄이 되었다. 우리는 《류달영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험난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 시대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 자랑스런 한국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역사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 노릇하기
1911년 5월 6일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2004년 10월 27일 94세의 나이로 소천하기까지 성천(星泉) 류달영의 삶은 자신의 생명을 최대한 꽃피우는 모습, 그것이었다. “선생님이 가시고 나면 어떤 한마디 말로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자 “나의 삶은 그저 사람 노릇 잘해 보려 했던 것뿐이지.” 평소 ‘하늘은 서로 돕는 자를 돕는다(相助者天助).’를 강조한 그는 좌우명인 ‘호학 친교 위공(好學 親交 爲公: 배우자 사귀자 이바지하자)’을 평생 실천한 사람이다. 종교가 무엇인지 묻자 “굳이 내 종교를 말하자면, 나라 사랑이 곧 내 종교라고 할 수 있겠지.” 태어나 보니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었고, 일제 강점기 36년을 고스란히 살아온 그. ‘나라 사랑’을 자신의 종교로 삼은 이유는 그가 태어난 시기에 기인한다. 태어나자마자 어쩔 수 없이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쓸려 살게 되면서 모든 가치를 자신보다 먼저 나라를 위하는 데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류달영은 이 사실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나라 먼저 나는 나중(公先私後)’의 삶을 살았다.

운명적 만남, 김교신 선생
1919년 3월 1일, 마을 산에 올라 횃불을 든 어른들 틈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9살 소년,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신식 교육을 받기 위해 1922년 죽남공립보통학교(현 설성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서울의 5대 사립학교 중 하나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일제는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일관되게 교육 기관을 최소화시켰지만 류달영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막지 못했다. 1928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류달영은 1학년 담임으로 김교신 선생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김교신은 월간지 <성서조선>의 편집인이기도 했고, 사상적 깊이를 지닌 종교인이자 교육자였다. 그의 동경고등사범학교 동기 동창인 함석헌이 《뜻으로 본 조선역사》를 냈다면, 김교신은 ‘뜻으로 본 조선 지리관’을 담은 《조선지리소고》를 냈다. 이 책은 근대 지리학 관점에서 조선 지리를 평가한 최초의 책이다. 류달영은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모두 김교신 선생과의 만남의 산물이라며 참 스승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김교신은 일제 교과서를 무시하고 조선 역사와 조선 지리를 가르치며 독립 정신을 심어 주었다. 당시 교육은 일본의 우수성만 가르치고 한민족의 역사는 까맣게 지우던 때다. 류달영은 이순신을 처음 알게 된 날을 잊지 못했다. 이 시기에 그의 가슴속에서 민족의식이 깨어났고, 독서를 본격화했으며, 냉수마찰로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진취적인 젊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침투해 활동한 러시아 농촌 계몽 운동인 ‘브 나로드’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1931년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청년 학생들이 ‘브 나로드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의 구호는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모두 합쳐야 2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들 중 상급생 일부가 이 운동에 참여했고 그중 류달영도 있었다. 당시 전국 농민들의 90퍼센트 이상이 문맹이었다. 지식인과 학생들은 주로 농민들에게 한글과 기초 산수, 보건 위생 상식 등을 가르치는 계몽 활동에 주력했다. 류달영은 사람들에게 글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무식을 벗어나고 사람답게 떳떳이 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또한 남자 못지않게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설득했다.

운명적 만남, 《덴마크의 이야기》
1933년 류달영은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을 앞두고 조국과 농촌의 암담한 현실을 체험한 피 끓는 청년으로서 자족적인 삶에 일생을 바칠 수 없었다.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농민이니 그들을 계몽시키지 않고는 나라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농학을 전공해 농민 운동을 해야겠다는 소망을 품고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에 진학했다. 사립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학생들이 민족의식이 강한 것을 알고 있는 일제는 그들의 입학을 꺼렸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30여 명 정도로 기숙사 방에 ‘자유 독립’이란 구호를 써 붙이는 등 ‘개척사’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다 발각되어 퇴학당하거나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후배는 동지가 되어 비밀 결사 활동을 이어 갔고, 암암리에 농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시절, 류달영은 운명적인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 김교신 선생은 일본 무교회주의 창시자로 세계적인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문하생이었다. 류달영은 김교신 선생으로부터 우치무라 간조의 저서 《덴마크의 이야기》를 받게 되어 덴마크 부흥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6·25 전쟁 때 피난지에서 《새 역사를 위하여》를 집필했다.

여성 교육을 선택하다
1936년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류달영은 보다 현명하게 나라를 위한 길을 찾아야 했다. 류달영은 《덴마크의 이야기》를 읽고 청년 교육과 협동 운동이 광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는 인재 양성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암흑천지인 여성 교육을 선택한다. 그는 어머니의 정신이 국가와 사회를 좌우하는 밑거름이라고 생각했다. 개성의 호수돈고등여학교(현 호수돈여고)가 첫 부임지다. 호수돈고등여학교는 미션 스쿨이어서 일본인들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류달영은 정규 수업 외에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과목을 수당 없이 가르치며 여성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매주 수요일 수업이 끝난 뒤 박물 표본실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성경 공부와 더불어 조국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면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관해 토론했다. 또한 제자들의 오빠나 친척을 소개 받아 수요일 밤이면 남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교육을 시작했다. 이 공부 모임을 수요회라고 정했고, 수요회 회원 중에서 후일에 목사, 대학교수, 농촌 사업가 등이 나왔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되다.
1942년 봄, 김교신이 발간해 온 <성서조선>의 권두문이 문제가 되어 필화를 겪게 된다. <성서조선>은 1927년 7월에 창간한 무교회주의 신앙 잡지로 함석헌의 ‘뜻으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하는 등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실어 왔다. 일제는 권두문에서 김교신의 조선 해방에의 의지를 읽고, 당장 300여 명의 <성서조선> 동인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류달영도 검거되어 11개월 동안 유치장 감방과 구치소 감방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김교신, 함석헌 등과 동경고등사범학교 동창이면서 무교회주의의 스승인 우치무라 간조를 사모하는 일본인 검사가 ‘성서조선 사건’을 맡게 되면서 관련자 전원이 불기소 처분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류달영은 해방된 조국을 위해 할 일을 고민한다. ‘백만사(百萬事)는 모두 인간이 한다.’는 실천 원리를 떠올리고 인재 양성을 위한 방법을 찾는다. 교육은 시간이 많이 걸리니 단시간 내에 사람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찾다가 신념 있는 청소년이 육성되는 것을 경계해 일본인들이 해산시킨 보이 스카우트를 조직한다. 훈련을 마친 소년들은 조를 짜서 혼란한 질서를 바로잡는 봉사를 했다. 또한 행정과 치안이 공백 상태여서 개성 유지들이 모여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개성시 자치 위원을 선출해 행정과 치안을 맡겼다. 류달영은 10여 명의 자치 위원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새 역사를 위하여》를 집필하다
1946년 류달영은 모교인 서울대 농과대학(전 수원고등농림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류달영은 농대에서 화훼 원예학을 가르쳤다. 그는 화훼를 산업화해 수출 작물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장려했다. 1950년 여름 한국 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 갔고, 1·4 후퇴 때는 대구로 피난 갔다. 전쟁 통에 남루한 차림의 대구 시민들과 피난민들이 한데 뒤섞여 물결처럼 흘러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되찾은 해방인데 다시 나라가 두 쪽으로 나눠 싸우고, 이번에는 미국, 소련, 중국이 먹이를 놓고 서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또 자립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게 된다. 조국의 살길은 덴마크처럼 국민정신이 깨어나는 수밖에 없고, 이 시점에 그의 사명은 국민정신을 일깨우는 책을 쓰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47일 만에 집필을 끝낸 《새 역사를 위하여》(부제: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 운동)를 읽고 다석 유영모는 감격했으며, ‘한국 농민 운동의 바이블’로 불리면서 아래로는 농민으로부터 위로는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애독서가 되었다. 또한 공무원과 군인들의 필독서이기도 했다. 당시 지성인치고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10여 년 후 국무총리급인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아 동분서주하며 봉사하게 된 것도 출발점은 이 책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면 이 책으로 류달영의 인생이 바뀌었다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저서였고, 저자의 의도대로 국민정신이 깨어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암울한 피난 시절을 생애 최고의 창조적 시간으로 바꾼 그의 지혜와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새 역사를 위하여》, 동양의 복지 국가를 꿈꾸다
류달영은 우리처럼 약소민족이면서 무서운 시련을 겪고도 망하지 않고 자주독립과 부흥의 길을 걸은 본보기로 덴마크를 꼽는다.
“보기 드문 역경 속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고 교육으로 건실한 국가 터전을 만들었고, 약한 힘을 한데 모아 협동하는 슬기를 길러 목적한 복지 국가를 건설한 농민의 나라 덴마크는 우리에게 살길을 지시하는 신의 계시처럼 느껴진다.”
“하늘도 감동케 하는 애국자들의 성실, 소박하고도 우둔한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의 꾸준한 분투, 조국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건전한 슬기 등 약자로서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번영의 원리를 그들은 남김없이 찾아내어 도탄에 빠진 조국뿐 아니라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여러 나라를 오늘의 복지 국가로 바꾸어 나갔다.”
그렇다. 류달영의 꿈은 대한민국을 동양의 덴마크, 동양의 복지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한 것이 곧 류달영의 일생이다.
또한 류달영은 ‘덴마크 부흥’에서 역사의 재평가에 관심을 갖는다. 1801년과 1807년에 영국 함대는 덴마크를 침공해 수도 코펜하겐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 해전은 영국 해전사의 빛나는 업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덴마크에는 치욕의 역사로 남아 있다. 1837년 덴마크의 위대한 애국자 그룬트비는 청년들에게 코펜하겐 해전에서 활약한 해군 장교 윗모스에 대해 강연하곤 했다. 강연장은 그룬트비가 작사한 ‘용사 윗모스의 노래’를 청중들이 합창하며 뜨거운 애국심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때부터 코펜하겐 해전은 참패한 치욕적인 전쟁이 아니라 덴마크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던 애국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를 계기로 덴마크에서는 ‘애국 노래’ 운동이 벌어져 수많은 국민가요가 유행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국민가요는 국민을 단결시켜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류달영은 이렇게 말한다. “한 나라의 발전은 그 나라 국민들의 건전한 애국심의 총화에 정비례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 없는 나라는 지탱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일본인이 덮어씌운 식민사관을 빨리 벗어 던져야 한다. 역사를 보는 각도를 우리는 크게 돌려야 한다. 나는 온 국민이 역사를 재발견할 것을 거듭 강조한다.”

류달영은 덴마크의 온 국민이 패전의 어둠 속에서 비탄에 잠겨 있을 때, 비록 전쟁에서 패했지만 정신은 전혀 패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대표적인 사람이 그룬트비와 크리스텐 콜 그리고 달가스라고 했다. 그룬트비는 덴마크 청년들을 교육시킬 국민 교육을 창안했고 국민 교육 방법론으로 ‘국민고등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크리스텐 콜은 그룬트비의 이상을 받아들여 국민고등학교 교육을 실천하고 발전시킨 선구자였다. 덴마크의 교육 목표는 뜨거운 인격 교육이었다. 교육 목표의 명확함, 교사 양성의 철저함, 형식을 초월한 실천적인 교재, 실질적인 능력 배양 등 ‘실사구시’하고 ‘무실역행’하는 덴마크의 모습에서 류달영은 큰 감동을 받았다. 달가스는 또 어떤 사람인가? 달가스는 조국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모두가 실의에 빠져 허둥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살아날 길은 없는 것일까? 그는 모두가 개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황무지를 기름진 땅으로 바꾸는 것만이 패망한 덴마크가 살아날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황무지 협회’를 만들어 기적처럼 숲을 이뤄 냈다. 나무 한 점 없는 참혹한 황무지 유틀란트반도는 서서히 푸른 숲과 그림 같은 목장과 아름다운 농가가 펼쳐지는 낙원으로 변해 갔다. 황무지 협회 창설 30년 만에 황무지의 90퍼센트가 개간되었다. 달가스는 덴마크 사람들에게 지상 최고의 복지 국가라는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류달영은 달가스를 통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오히려 새 역사를 창조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개척 정신을 가진 사람만이 값진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류달영은 덴마크가 조국 재건에 성공한 근본 원인은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확실한 교육 목표와 특유의 교육 제도를 창안해 전 국민을 단시일 내에 교육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 농업을 일으켰다. ‘교육과 농업’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한 국가가 앞으로 전진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두 요소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류달영은 농업은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덴마크가 산 증거라고 했다. 다른 나라들의 협동 사업은 주로 도시에서 이뤄졌다면 덴마크에서는 철저히 농촌에서 진행되었다. “무슨 일을 시작할 때면 미국 사람들은 먼저 기계를 생각하고, 덴마크 사람들은 먼저 조합을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덴마크의 경제적 번영은 협동 사업의 성공에 기인한 바 크다. 덴마크의 거의 모든 사업이 협동조합화 했다. 농촌에는 심지어 체조 조합, 강연 조합까지 조직되었다. 덴마크 농산물은 조합에서 철저히 관리되기 때문에 외국에 수출해도 최고의 품질로 신뢰를 받는다. 덴마크 협동조합의 최고 장점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인간이 신뢰를 만들고, 신뢰는 다시 인간을 만든다.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이 되다
1961년 류달영은 5·16 군사 정변 직후 조직된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이 된다. ‘덴마크 부흥사’에 조예가 깊은 류달영을 본부장으로 위촉하고 싶었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세 차례에 걸쳐 부탁을 했다. 군사 정부의 산하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던 류달영은 마지막엔 조건을 내세워 완곡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는 박 의장은 즉석에서 승낙했다.
1961년 9월 7일, 류달영은 취임사에서 “지금 우리의 마음씨, 지금 우리의 몸차림, 지금 우리의 행동은 그대로 삼천만 민족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국가재건국민운동의 분명한 목적은 하루속히 군정을 끝내는 데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어쩌면 당시 한국에서 국민운동을 이끌 사람으로 류달영만 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여러모로 ‘준비된 본부장’이었다. 류달영은 덴마크의 국민 교육을 벤치마킹해 전국 청년들의 정신 교육부터 실시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시와 군에 교육원을 설치하고 연수 교육을 계속 이어 갔다. 거국적인 국민 의식 교육은 대성공을 거뒀다. 국민 의식이 단기간에 이처럼 고양된 예는 고금에 전례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류달영의 속마음은 한국을 하루속히 ‘동양의 덴마크’로 만들자는 것이다.
류달영은 밤낮없이 온몸을 바쳐 뛰었다. 취임한 지 일 년 동안 국가재건국민운동의 네 기둥인 국민 교육, 향토 개발, 생활 혁신, 사회 협동 부문의 모든 사업에서 앞장섰다. 발이 닳도록 경향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

시간이 갈수록 군사 정권 아래 국민의 자유의사가 완전히 봉쇄되어 민심은 굳을 대로 굳어 갔다. 지성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데도 툭 하면 잡혀가고, 중앙정보부에서 곤욕을 치렀다. 류달영은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지만 군사 정부를 향해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충고하기로 결심했다. 1962년 12월, 류달영은 밤중에 장충단의 의장 공관으로 직접 찾아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박 의장에게 그는 메모해 온 글을 읽어 주었다. 박 의장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주된 내용은 이랬다.

- 군인들은 정치인이 아니다. 본인들이 정치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군정이 아무리 정치의 성과를 거둔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상적 정치라고 할 수 없다. 또 나라 안의 질서가 잡혀 평온하지만 그것은 계엄령하의 상태이지 정상적인 평온은 아니다.
- 군사 정부는 혁명 공약을 발표했는데,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 군인들의 기질로 모든 일을 서둘러 해결하려 드는데, 그것은 큰 과오를 범하기 쉬우니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 군사 정권은 후일의 역사가 값지게 평가할 수 있도록 당당한 업적을 남기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은 국민의 협조를 얻는 대의(大義)의 혁명을 성취하는 일이다.

하루는 김형욱 정보부장이 조용히 충고했다. 류달영이 차기 대통령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모종의 음모가 진행 중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일종의 사퇴 압력이었다. 류달영은 더 이상 본부장 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류달영은 1963년 5월 사표를 냈고, 오래지 않아 군사 정부는 하루아침에 국가재건국민운동 설립 법을 폐기하고 해산시켰다. 류달영은 군인들의 정치 바람에 함께 휩쓸리지 말고 독자적으로 국민운동을 계속해 나가자고 역설했고, 민간단체인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발족되어 초대 회장으로 류달영이 선출되었다.
중앙회는 나름대로 값진 사업을 추진했다. 우선 국민신문 발간, 재건 학교 사업, 마을금고 사업이었다. 마을금고는 지역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고, 후일 새마을 금고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류달영은 5·16 군사 정변 4주년 하루 전날인 1965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에 군사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류달영의 사진과 서명까지 곁들인 장문의 글이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실렸다. 제목은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이었다. 군정은 슬픈 촌극이고 실패작이라고 논리적으로 지적했다. 4년이 지난 오늘 혁명 공약을 실천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도 했다. 류달영은 군사 정권하에서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지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념대로 대한민국의 국민운동을 한 것이지 군정의 국민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또한 장군 시절의 박정희가 《새 역사를 위하여》를 읽고 감동받아 혁명을 일으키자마자 국가재건국민운동을 추진하고 이것이 새마을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누가 뭐래도 한국이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한 나라로 변신한 데는 국가재건국민운동과 새마을 운동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을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모든 일은 인간이 하고 인간을 만드는 것은 정신이다. 만사를 시작할 때 의식 교육 사업부터 손대는 류달영의 정신 자세는 귀감이 될 만하다.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제2대 총재
류달영은 1972년 한국의 농민 단체로서 역사가 가장 오래고 회원도 가장 많은 전국농업기술자협회의 제2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류달영은 전국농업기술자협회에서도 먼저 교육 사업을 추진했다. 농업진흥관 내에 농민들을 교육하는 농민 대학부터 설치한 것이다. 농민 대학은 농업의 최신 기술을 가르쳤다. 막상 교육을 시작하자 의외로 농민들의 배움의 열기가 대단했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는 언론이 정직하게 농약과 화학 비료의 폐단을 보도했다. 우리나라는 농약과 비료를 일본보다 훨씬 많이 쓰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심한 데도 정부는 증산에만 신경을 쓰고 부작용을 쉬쉬하며 덮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에 류달영은 ‘한국유기농업협회’를 창설했다. 협회는 고추 생산 왕이나 벼 수확 왕을 차지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유기농업으로 지질이 회복된 까닭이다. 또 류달영은 일본의 농산물 유통 사례를 접하고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은 농민들이 농산물 유통을 배워 실질 소득을 높이고 있었다. 이에 ‘한국농산물유통연구회’를 창설해 농민, 상인, 공무원 등 모두에게 유통 교육을 실시했다.
류달영은 타블로이드판 <유통정보>를 발행해 널리 보급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정보지는 후에 <한국농어민신문>으로 발전해 농어민의 친구가 되었다. 류달영은 큰 보람으로 여겼다.

1974년 이미 60대를 훌쩍 넘긴 류달영은 엄청난 일복과 만나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총재, 서울대학교 교수협의회 회장, 국민윤리학회 회장, 대한가족계획협회 회장, 전국재해대책협의회 회장, 한국덴마크협회 회장, 카운슬러협회 회장, 4H운동 회장, 건전생활중앙협의회 회장, 한국원예협회 회장, 인간교육원 회장,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 이사장, 세종기념사업회 부회장,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대한적십자 서울지사 상임위원, 사회교육 심의위원, 한국잡지윤리위원회 위원, 국제가족계획협회연맹 이사 등의 일을 맡아 국내외에서 초인적인 활동을 벌였다. 1972년에는 건국대학교에서 명예 농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1976년 서울대 교수로 30년을 근속하고 정년 퇴임한다. 그리고 명예 교수가 되어 사회봉사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류달영은 서울대 농대의 화훼학 교수로서 그 어떤 꽃보다 겨레의 상징인 무궁화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이 보이는 족족 뽑아 버린 나라꽃. 무궁화와 비슷한 문양을 사용해도 죄가 되던 시대였다. 해방이 되고 서울대 농대에서 무궁화 연구를 시작하려 할 때 무궁화 품종 자체가 너무 귀했다. 일제에 의해 모조리 제거된 것이다. 그는 무궁화 연구를 위해 마라도에서 판문점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일본은 한국의 무궁화를 일본으로 가져가 육종 연구에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우리에게는 ‘쓸모없는 나무’라고 속이고, 자기들은 몰래 연구하고 개량하고 있었다. 진딧물이 많은 나무라고 악선전을 하더니 알고 보니 효과가 큰 약용 식물이었던 것이다. 류달영은 자신의 평화 농장에서 무궁화를 직접 가꾸었고, 100여 종의 신품종 무궁화를 개발했다.

성천문화재단의 창립
스스로 농민이 되어야 농민과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한 류달영은 일찍이 《새 역사를 위하여》의 인세로 땅을 구입해 평화 농장을 가꾸었다. 그런데 80세에 접어든 1990년 무렵, 평화 농장의 반 정도가 동수원 인터체인지로 수용되었다. 그는 뜻밖의 큰돈을 보상금으로 받게 되었고, 성천문화재단을 창립한다.
전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농민이던 시대에는 농촌 운동에 뛰어들어 매진했다면, 우리나라가 산업 국가로 바뀌어 도시민이 농촌 인구를 훨씬 능가하게 되자 이제는 도시인의 의식을 개혁하는 평생 교육 사업을 생애의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고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성천문화재단의 아카데미에서는 한국인들이 건전한 정신문화와 건실한 생활 문화를 영위할 수 있도록 성현들의 인문고전 강좌를 매년 개설하고 있다.

류달영은 2004년 10월 27일에 별세했다. 막상 그분이 돌아가고 난 뒤에 돌아보니 류달영이란 인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거인이다. 마치 뿌리는 깊은 땅속에 박고, 머리는 구름 위로 내놓은 거목을 보는 듯한 느낌. 그가 살아온 이력을 살펴보면 그를 ‘인간오케스트라’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다재다능했던 그의 생애는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교향악단 같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