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31

希修 마음, 축복이자 저주



< 마음, 축복이자 저주 >
.
(아래 영상이 조작이나 각본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
영상을 보면 아시겠지만, 피실험자의 오른 손은 칸막이 너머에 놓고 눈앞에는 고무로 만들어진 가짜 손을 놓는다. 그리고 두 개의 막대로 진짜 오른 손과 가짜 손을 동시에 긁어 뇌 속에서 동일시가 일어나게 한다. 이제 피실험자는 가짜 손과 동일시되어 가짜 손에'만' 자극을 줘도 뇌는 '진짜로' 그 자극을 느낀다. 모든 트릭이 피실험자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실험자가 모든 과정을 정직하게 설명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피실험자의 무의식피실험자의 의식에서의 지식/이해와 무관하게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가상 현실에서 양치질을 하면 뇌는 그 가상 칫솔로부터의 '물리적 자극'을 '실제로' 느낀다는 포스팅도 최근 보았는데, 비슷한 원리 아닐까 싶다.
.
이게 바로 부처님이 상카라 (saṅkhāra), 그 중에서도 인식 (perception, 想)에 집중하신 이유다. 넓은 의미의 상카라는 의식적 무의식적 모든 행동 (인식, 인지, 사유, 감정, 말 포함)을 가리키는데, 이 실험에서 보듯 "모든 게 착각이니 내가 너의 가짜 손을 때려도 아프지 마!"라고 말한다고 해서 피실험자가 고통을 안 느끼는 게 아니다. 무의식을 해결하지 못 하면 고통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바로 이것이 "내려놓아라," "분별마라"만으로는 억압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옷과 칸막이처럼 착각이 일어나게 한 장치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진짜 손과 가짜 손을 나란히 놓고 보는 등 몇 단계의 de-programming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 de-programming이 팔정도 수행이며, 이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에만 '내려놓는' 혹은 '깨어나는' 일이 그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
우주도 각자가 경험하는 삶도 각자의 의식이 만들었다는 Dhp 1~2와 '세상'을 6감각기관과 그 대상으로 정의하는 SN 35:82를 근거로 어떤 분들은 "그러므로 모든 건 내 의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부처님이 '실재'와 '환상'을 구분하시는 장면을 초기경전에서 본 적이 없다. 만에 하나 우리의 삶이 장자의 호접지몽 같은 꿈에 불과하다 한들, '이 삶은 그저 꿈일 뿐'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 한다 - 이 영상의 피실험자처럼. 이 삶이 환상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수고스럽고 괴롭다면 깨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 깨어남의 방법을 부처님은 가르치실 뿐. 그러므로 본인의 자식이 납치와 살해를 당해도 '어차피 환상이잖아!'라며 안 괴로워할 자신이 있는 분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들로서는 이 삶이 꿈이니 환상이니 논하는 일 자체에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잠으로 인한 꿈은 5시간 후든 15시간 후든 언젠가 저절로 깨어나지만, 삶이라는 ‘꿈’은 수억 번을 윤회해도 저절로 깨어나지는 것이 아니다.
.
우리의 이승에서의 육신과 삶은 마음이 만들었고, 윤회를 끝내는 일 역시 마음의 프로그래밍 해체에 달려 있다.
윤회계 안에서 사는 동안 첫번째 화살 (생로병사 같은)은 어쩔 방도가 없지만,
두번째 화살 (첫번째 화살과 관련하여 생각/감정의 증폭으로써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은 각자의 선택이다. 사랑, 겸손, 긍정, 내려놓기, 분별 않기 같은 것들은 두번째 화살을 잠시 억압시킬 수 있을 뿐이고 해체는 팔정도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시각이다.

현재 우리를 작동시키는 프로그래밍은 인간의 숫자로 셀 수 없을 만큼 무한대에 가까운 횟수의 윤회를 거치며 강화된 것인데, 체계적 이해와 전략적 기술적 접근 없이 사랑, 겸손, 긍정, 내려놓기, 분별 않기 같은 표어들만으로 그 프로그래밍이 해체되리라고는, 나는 기대조차 되지 않는다.
.
3] '번역의 문제 3. Saṅkhāra (상카라)'
.4]
Satire Page
 
opdsSrneum51M6rhfa2cumg7h 48 
Third hand experiment Freaks him Outtt 🤯
Visual illusion! A cool experiment anyone can try! A teacher shows a student how when he hides the students right hand from his own vision, and replaces it with a prop rubber hand, it shows how the brain can fall for the visual illusion and start to feel sensation in the prop hand rather then the real one.
Please be advised that this page’s videos are intended for entertainment purposes only. The videos on this page include scripted dramas, satires, parodies, magic tricks, pre-recorded videos, and other forms of entertainment. Names, characters and incidents are often the product of the director’s imagination, so any resemblance to actual persons or actual events is purely coincidental.
崔明淑 and 7 others
3 comments
Like
Comment
Share
3 comments
    1]

希修 added 67 new photos to the album First Things First by Venerable Ṭhānissaro.

Favourites tonreSr21  O7c09be7g2ot141ct900 
< 마음공부라는 것 >
.
불교 수행을 흔히 '마음공부'라 표현하는데, 이것을

(i)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기 (delusion이거나 당장 마음 편하고 싶은 greed 일 수도 있음. 부처님은 물질적 여건에 대해서만 자족을 가르치셨고 정신적 영역에 대해서는 commplacency가 없었기에 오히려 당신이 해탈할 수 있었다고 하셨음),
(ii) 호구가 되더라도 무조건 '착하게' 살기 (타인의 악업을 묵인, 방조하는 건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악업),
(iii) 성격 고치기 등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불교 수행의 핵심은, 자신의 의식과 잠재의식 에서 일어나는 일들 (상카라?)을 이해한 후 매순간 fully mindful한 행동 (생각, 감정, 말 포함)을 선택함으로써 탐진치를 제거해 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재의식: 프로이드가 말한 잠재의식과 다름. 이전 생들로부터의 업의 결과로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의식. 의식의 초기 상태, operating system, 특정 방향으로의 동력과 속도를 장착한 채 달리고 있는 자동차 등으로 비유할 수 있을 듯.)
.
매순간 fully mindful한 행동을 선택하다 보면 자신의 이기심이나 천성을 제어 못 해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은 저절로 줄어들고 처신도 인간관계도 당연히 원만해질 테지만, 상식적인 '착함'이나 '온화함'이 불교 수행의 본질이나 목적인 것은 아니다. (성격적인 특징으로 그 사람의 의식/지혜 수준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초기불교는 말함. 초기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이나 가섭 존자의 실제 모습은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부드럽고 성격좋은'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
(1) 인간 각자의 뇌는 특정 종류의 자극을 찾아 헤매고 (자신의 업때문에 자신이 경험해야 하는 자극을 자신의 잠재의식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고 타니사로 스님은 설명), (2) 매순간 감각기관에 와닿는 무수한 자극들 중에서 극히 일부분에만 집중하며,
(3) 나름의 선택과정을 거쳐 수용하거나 거부하고,
(4) 나아가 그에 대한 해석을 함으로써
(5) 그 이후의 다른 행동 선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과거 업의 결과를 재료로 하여 새로운 업을 짓는 과정인데, 여기에는 잠재의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잠재의식에서 일어나기에 이 과정을 당사자는 '선택'이라 느끼지 않으며, 당사자에게는 사실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는' 것이라는 얘기인 듯.

아무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실제 자기객관화는 이토록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며, 부처님 수준의 완전한 메타인지를 갖고 하는 행동이 아닌 한
아무리 자신은 '열심히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행동한들
실은 여전히 좀비처럼 잠재의식대로 사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일 것 같다.

특정 방향으로 나의 행동을 몰아가는 강력한 모멘텀이 잠재의식에 이미 조건지어 있다는 얘기.
===
'운명'/'숙명'이라는 것은, 정확히 몇 월 몇 일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구체적 시나리오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i) 전생의 업으로부터 상속받아 각자가 타고난 잠재의식/경향성
(ii) 부모나 적성 등의 선천적 조건들 및 성장환경을 의미할 뿐. 물론 전생의 나=A (편의상 '나'라고 부를 뿐 이승의 나=B와 완벽하게 동일 인물인 것도 완벽하게 별개의 인물인 것도 아니며, 전생이 무수하므로 무수한 버젼의 A가 존재)의 업의 산물일 테고. 占術과 달리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찰에 근거하여 발달시킨 이론을 적용해서 이 잠재의식/경향성을 추측하는 것이 바로 사주명리학 같은 星術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
예를 들어, 술에 취해 좀비처럼 정신을 잃은( =타고난 경향성대로 사는) 운전자의 자동차( =삶)가 언덕에서 굴러내려오고 있을 경우, 그 자동차의 속도와 진행 방향( =출생 연월일시)에 근거하여 10분 후 혹은 1시간 후 그 자동차가 어디께에 도달하려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성술의 원리.) 그러나 운전자가 정신을 차리고 매초 매순간 fully mindful한 행동으로써 새로운 업을 짓는다면 그 자동차의 속도나 진행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출생 데이터를 바탕으로 했던 예측은 빗나가게 된다. 이렇듯 운명개척은 mindfulness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운명이라는 게 근본적으로는 업의 결과이니 업 자체를 공략(?)하는 것이 당연히!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해결 방법인 것. 달리 말하면, 각자 아무리 자신은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들, mindful 하지 않는 한 실은 운명=잠재의식이라는 자동차가 마음대로 폭주하게끔 놔두고서 자신은 그 차 안에서 좀비로 살게 된다는 얘기다. (그런 자동차는 무수한 사고를 낼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본의 아니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며, 바로 그렇기에 불교는 수행을 가장 큰 이타행으로 간주.) 성술이 50%를 초과하는 정확도를 보이는 것도 바로, 사람들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운명의 '주인'이 아닌 운명의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 보이고.
.
이승의 나=B의 컨트롤과 '무관'하게 형성된 운명으로 인한 결과를 B가 옴팡 감당하고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삶의 이 조건이 한편으론 섬짓하지만, B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은 전생의 나인 A의 업을 상속한 결과일 뿐이기에, 유산을 상속하면 부채도 함께 상속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라고 생각하면 억울해 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부처님 같은 분만 100% 깨어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으로 사는 것이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탐진치에 취해 잠재의식에 휘둘리며 사는 것이 너나 할 것 없는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 그러니 평범한 인간들의 삶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타고난 잠재의식의 역량을 반영할 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그렇다면, 누군가가 '잘 나가는' 것은, 100% 후천적인 노력 덕분이 아니라 그의 잠재의식 덕이 크니 그래서 겸손해야 하는 것. (후천적 의식적 노력이 작용하긴 하지만, 온전히 깬 상태에서 하는 노력이 아니라면 잠재의식의 방향대로 나아가는 노력에 불과하니, 결국은 자신이 타고난 운명의 수혜자인 측면이 큰 셈.) 또 내가 보기에 누군가가 '어리석게' 행동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잠재의식의 노예로 살고 있을 뿐 '깨어서'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며, 내가 비판하지 않아도 그 '깨어 있지 못 함'의 댓가를 스스로 치를 수 밖에 없고, 또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니, 그래서 동병상련의 연민을 가져야 하는 것.
.
운명의 주인이 되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은 탐진치에 취해 있는 의식을 깨워야 할 테고, 그 의식의 힘으로 (1)~(5)의 과정을 이해한 후, '선업' (탐진치 없는 행동)을 mindful 하게 매찰나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운명개척이며 자신이 올라탄 자동차의 속력과 방향을 변화시키는 일. 과거 무수한 전생들로부터 쌓인 태산 같은 업이 현재의 노력으로 하루아침에 180도 바뀔 리는 물론 절대 없고 부모나 적성 같은 것들처럼 이 생 안에서는 뭘 해도 절대 달라지지 않을 부분들도 있지만, 탐진치에 취해 살거나 운명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다면 수행만이 유일한 선택지다. 그러다 보면 그 효과가 때로는 노력하는 순간부터 즉시 작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몇 달 혹은 몇 년 후 가시화되기도 하며, 때로는 몇 생 후 결실을 맺기도 하는 것.
.
바로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불교의 업이론이고 또 마음공부다.

남의 기분/욕망을 떠받들어 주는 일도 아니고 (나의 자기중심주의가 내 삶을 바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나의 자기중심주의를 위해 남이 자기 삶을 바쳐야 할 이유도, 남의 자기중심주의를 위해 내가 내 삶을 바쳐야 할 이유도 없는 것), 분별 자체를 내려놓는 일도 아니다. 인간의 감각/이성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만으로 검정색을 흰색이라 말해도 곤란하고, 무수한 회색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무시해도 곤란하다. (흔히 지혜라고 번역되는 원어는 pañ'ñā로서 '작은 차이도 구분한다'라는 어근에서 파생되었다고.) 나의 기분/욕망이 아닌 인과/연기를 기준으로 정확히 분별, 실천하는 것이 오히려 불교의 수행이고 지혜다. 이 인과/연기의 법칙을 발견, 설명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
타니사로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격적이지 못 해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는 상대를 억지로 참아 내야 나의 악업을 치르는 것이 아니고, 그 상대를 멀리할 수 있는 만큼 가급적 멀리해야 오히려 나의 악업이 끝나는 것일 수도 있다고. (그 어떤 경우에도 상대에 대한 mettā는 물론 유지해야.) 업의 결과는, 과거의 원인 행동 자체에 의해서만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영향으로 인한 조건을 내가 지금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
아래의 댓글들도 참고해 주세요.
.
'업이론은 운명결정론이 아니며, 업의 작동원리도 자판기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초기불교에서의 '인연'의 뜻과 상식적으로 사용되는 '인연'의 의미는 다르다'
번역의 문제 3. Saṅkhāra (상카라)
.
박정미, 이인자 and 10 others
6 comments
5 shares
Like
Comment
Share

6 comments

Most relevant

  • Hanjin Kang
    Karma를 이렇게 설명해주시는 분이 여태 없었어요...ㅜㅠ
  • .
    “Phenomena are preceded by the mind, ruled by the mind, made of the mind.” — Dhp.
    .
    How does Buddhism view the practice of fortune telling?(GDD-8, Master Sheng Yen)
    YOUTUBE.COM
    How does Buddhism view the practice of fortune telling?(GDD-8, Master Sheng Yen)
    How does Buddhism view the practice of fortune telling?(GDD-8, Master Sheng Yen)
  • Anicca Kyungrim Kim
    오...wisdom의 원어가 pañ'ñā군요. '조견'이란 작은 차이를 구분하여 이해함으로써 달성된다고, 예전에 각묵스님 초기경전수업에서 들었던 기억이 나요.
  • 希修
    The stars impel, not compel. 그러므로 the path of the least resistance나 분투 없는 무조건적 긍정적 complacency는 운명/숙명의 주인 아닌 노예가 되겠다는 얘기. 불교는 이걸 수행이라 보지 않는다. 검정색을 흰색이라 말해도 곤란하고, 무수한 회색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무시해도 곤란하다. 나의 기분/욕망이 아닌 인과/연기를 기준으로 분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수행이다.
    .
    "I talked to a Chinese astrologer one time, and he was saying he didn’t like to do astrology for people who were practicing meditation because they weren’t simply following along with the path of least resistance. They were going against the stream, against whatever weaknesses they had in their stars. So it’s good to think about that. We have potentials, and we can make a lot out of them. Sometimes it’s hard, but we can do hard things. After all, we’re human beings. And although the example of a lot of the human beings around us is not all that inspiring, there are some who show that human beings can do something remarkable. But, as I said, one of the basic skills in becoming remarkable is learning how to read yourself, to use your strengths to make up for your weaknesses.
    That way, as you continue to read yourself and rewrite the story, you finally get to the point where it’s really good to read."
    — Venerable Thanissaro
    3
===
2] < 윤회, 우주, 12연기 >
Favourites sdoSe12 9l 127al612l71J7yfu038 
< 윤회, 우주, 12연기 >
.
.
MN28 (사진#704)에서 부처님이 "Whoever sees dependent co-arising sees the Dhamma; whoever sees the Dhamma sees dependent co-arising."이라고 하셨을 정도로 12연기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SN12:20 (사진#705)에서 부처님은, 사람들이 이해하든 못 하든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연법칙인 인과=12연기를 당신이 깨달아 설명해 줄 뿐이라고도 하셨다. 12연기가 이렇게 중요한 이유는, 12연기는 한 찰나와 그 다음 찰나 사이의 우리의 의식의 윤회를 설명할 뿐 아니라 한 생과 그 다음 생 사이의 윤회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개개 존재들의 생멸뿐 아니라 우주의 생멸까지도 관통하여 일관되게 설명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과가 '자연법칙'이라 해도 그걸 표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부처님의 인식/표현 방식 혹은 가르침을 Right 'View'라고 부르는 것. 다른 인식/표현 방식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부처님의 방식이 해탈을 위한 최선의 방식이라고 신뢰하는 것이 불교신자들의 입장이며, 윤회의 원인인 욕망의 강을 건너면 뗏목에 해당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내려놓아야 하지만 팔정도를 개발하는 동안에는 뗏목=부처님의 가르침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해탈한 아라한이라고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벗어나 산다는 얘기도 결코 아님에 주의해야 하고.)
.
사진 #647, 648, 649, 696, 697, 698, 699의 내용은 "Phenomena are preceded by the mind, ruled by the mind, made of the mind." (Dhp 1~2)의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다 (참고: https://www.facebook.com/groups/102608566443956/posts/4335614399809997). 즉, 한 개인의 생명/삶도 그 자신의 의식이 만든 것이고 각자가 경험하는 세상/우주도 각자의 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내용인데, 상카라 (saṅkhāra = fabrication)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세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
.
(1)
.
우주도 각자가 경험하는 삶도 각자의 의식이 만들었다는 위 얘기와 세상이라는 건 6감각기관과 그 대상이라는 부처님의 정의 (SN 35:82)에 근거해 어떤 분들은 "그러므로 모든 건 내 의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부처님이 '실재'와 '환상'을 구분하시는 장면을 초기경전에서 본 적이 없다. 만에 하나 우리의 삶이 장자의 호접지몽 같은 꿈에 불과하다 한들, '이 삶은 그저 꿈일 뿐'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 한다. 이 삶이 환상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수고스럽고 괴롭다면 깨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 깨어남의 방법을 부처님은 가르치실 뿐. 그러므로 본인의 자식이 납치와 살해를 당해도 '어차피 환상이잖아!'라며 안 괴로워할 자신이 있는 분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들로서는 이 삶이 꿈이니 환상이니 논하는 일 자체에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잠으로 인한 꿈은 5시간 후든 15시간 후든 언젠가 저절로 깨어나지만, 삶이라는 ‘꿈’은 수억 번을 윤회해도 저절로 깨어나지는 것이 아니다.
.
무엇보다, 해탈한 이가 감각적 욕망을 버려도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그대로 남는다고 AN 6:63은 말한다. ("The beauties remain as they are in the world, while, in this regard, the enlightened subdue their desire.") 또 AN 9:38은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는 우주의 끝에 머문다고 표현한다. ("... the dimension of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 ... This is called a monk who, coming to the end of the cosmos, remains at the end of the cosmos.") 즉, A라는 사람이 해탈할 경우 그에게는 우주가 사라지는지 몰라도 나에게 우주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라는 것이 6감각과 그 대상이라는 얘기는, 수행자는 자신의 감각대상 밖으로 관심의 범위를 넓힐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닐까 나는 추측한다. 나의 업이 나의 이승을 만들었는데, 상카라/업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견해가 새삼스레 신비할 이유가 없는 것.
.
.
(2)
.
의식이 물질세계와 상호작용한다는 얘기는 기공에서 경험하는 신기한 현상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다른 종교들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아브라하믹 종교들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했고, 베단타 전통의 우파니샤드에서는 의식 (Consciousness. 대문자 C를 씀) 자체가 우주이고 神=브라만이라고 말한다. 그 브라만이 개개의 존재로서 표현된 것이 아트만인데, 그러므로 아트만은 브라만의 일부이기도 하고 전체이기도 하며, 각각의 존재 안에서 동면하고 있는 아트만을 깨우는 것이 바로 베단타의 수행인 것. (그들이 자신들의 궁극적 목적을 대문자 S를 써서 'Self realization'이라 부르는 이유도, 김 아무개 혹은 이 아무개라는 이승에서의 정체성이 아닌 아트만으로서의 그야말로 '참 나'를 깨닫는 것이기 그들의 수행이기 때문.) 그리고 여러 종교들을 섞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베단타의 영향을 가장 강력하게 받은 소위 뉴에이지 영성이 "우리 각자는 모두 神.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물리적으로 manifest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배경이라 볼 수 있다.
.
.
(3)
.
그리고 바로 위에서 언급한 지점에서 우파니샤드와 부처님의 가르침은 서로 정확히 반대 방향을 지향한다. 우파니샤드 철학을 이어받은 전통들에서는 잠자고 있는 나의 아트만='참 나'를 깨우기 위해 명상을 할 때에도 'I am', 'I am'하며 되뇌이는 방법을 사용하고, 또 김 아무개로서의 내가 하는 행동을 관조하는 '내면의 참 나'를 늘 붙들고서 그 감각을 잃지 말라고 말한다. (바로 이 ‘진짜 나’ 개념이, 후기 대승불교가 초기불교 아닌 오히려 우파니샤드의 브라만 사상 계승이라고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러나 초기불교에선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이 궁극의 목적이고 윤회의 대표적 원인이 바로 '나 집착'에서 기인하는 욕망들이기에, 그러므로 '나'라는 렌즈를 사용해서 매사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4성제와 12연기의 관점에서만 매사를 바라보라고 말하며, 이것이 바로 無我라고 일컬어지는 Anattā (無我보다 非我가 훨씬! 나은 번역) 교리다. 다시 말해, 글자 그대로 '나라는 게 본래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I have a self'도 'I have no self'도 잘못된 견해 6가지에 들어간다고 부처님은 MN 2에서 명시하셨음),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한 존재의 굴레인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얘기다. ("Wherever one’s selfhood turns up, there that action will ripen. Where that action ripens, there one will experience its fruit, either in this very life that has arisen or further along in the sequence." -- AN 3:34)
.
즉, 우파니샤드는 Consciousness로서의 '참 나'에 집착함으로써 끊임없이 윤회를 만들어 내지만, 초기불교는 '나'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상카라를 끊음으로써 윤회를 파괴한다. 초기불교의 시각에서 해석하자면 우파니샤드 철학을 이어받은 수행은 윤회와 우주를 영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인 것. (이 점만 하나만 봐도, “모든 종교적 수행은 결국 하나의 최종 목적지에서 만난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
.
모든 위대한 철학이 그렇듯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유기체와도 같다. 그런데 부처님이 "Whoever sees dependent co-arising sees the Dhamma; whoever sees the Dhamma sees dependent co-arising."라고 하셨을 정도면, 각각의 부분적 교리/모듈들은 전부 12연기를 중심으로 하여 12연기와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마치, 맥락에 따라 '생태', '동태', '북어' 등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결국은 전부 '명태'인 것처럼, 얼음도 수증기도 모양만 다를 뿐 여전히 물인 것처럼, 無我니 空이니 中道니 하는 것들도 12연기를 좀더 쉽게 설명하기 위한 노력에 불과한 것 (사진 #706, 707, 708, 740, 741, 742). 12연기의 첫 요소가 ignorance이니 그 해결도 당연히 knowledge일 수밖에 없으며 (흔히 '깨달음'이라 불리는 것은 그러므로 무슨 신비적 초월적 추상적 득도가 아니라 12연기에 대한 Right Knowledge일 뿐), '오직 모를 뿐' 식의 불가지론이나 회의주의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DN 1, DN 15, SN 22:81의 일관된 메세지이기도 하다 (사진#760, 761, 762).
.
.
사진들 출처 => "The Wings to Awakening"
'번역의 문제 3. Saṅkhāra (상카라)'
'부처님이 사성제와 팔정도를 가르치신 배경 간단 요약'
.
.
崔明淑 and 3 others
Like
Comment
Share

0 comments

===
3] < 번역의 문제 3. Saṅkhāra (상카라) >
Favourites Sro i00iM1t1a12a01a01 lay ui:1 
< 번역의 문제 3. Saṅkhāra (상카라) >
.
번역도 이해도 까다로운 개념 상카라. SN 22:5는 오온을 만드는 일이 상카라라 설명하고, SN 22:56은 6감각과 관련된 의도라고 기술하며, Goenka라는 분은 '습관적 정신 반응'이라고 정의한다. 이 외에도 'putting together,' 'construction,' 'mental formation,' 'conditioning,' 'fabrication' 등으로 저마다 다르게 번역된다. 한국어로는 '분별'로 번역하기도 하고 '행 (行)'이라 번역하기도 하는데, '업 (業)'이라고 번역되는 원어인 kamma의 의미가 'action'/'doing'이라서 더욱 헷갈리게 만든다. 대체 상카라는 무얼 뜻하고 깜마와는 어떤 관계일까?
.
예를 들어, 함께 여행하던 두 친구가 똑같이 소매치기를 당했을 때 그 둘의 반응이 동일하지는 않은데, 그건 두 사람의 상카라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예로는, 모든 생명체는 살고자 하고 그러기 위해 '나'라는 본능적 감각 또는 의식을 발달시킨다. 동물들의 텃세나 영역싸움을 보면 그들에게도 '나'라는 의식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데, 이 역시 상카라의 결과라고 한다. 그러므로 의식적 무의식적 모든 행동 (인식, 인지, 사유, 감정, 말 포함)을 상카라라고 할 수 있겠다. 의도는 좁은 의미의 상카라이며, 깜마는 의도를 포함하는 행동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듯 하고, "Phenomena are preceded by the mind, ruled by the mind, made of the mind" (Dhp 1~2)도 상카라의 작용을 얘기하는 것 같다.
.
그럼 이 상카라는 대체 왜 중요한 것일까? 상카라 => '나' 관념 => 욕망 => 먹이추구/becoming => 윤회 이렇게 돌아가는 반복에서 어느 하나라도 완전히 끊으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하게 되는데, AN 11:2, DN 1, MN 149, SN 46:53, SN 56:11 등 해탈의 순간을 묘사하는 초기경전의 무수한 곳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표현이 'as they have come to be'라는 것이다 (타니사로 스님의 번역). 현재완료형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까지 모종의 영향을 미칠 때에만 사용한다. 즉, 무수한 전생 포함 과거의 상카라로 인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이 상황이 된 것인지를 4성제와 12연기의 관점에서 완벽히 이해함 ( ='깨달음')으로써 팔정도를 완성하고 Right Knowledge를 얻어야만 비로소 무엇에도 집착 않고 내려놓을 수 있기에 해탈이 가능해진다. 팔정도 완성 후 마지막 순간에 상카라를 완전히 끊어 해탈하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4성제를 기준으로 하는 분별/분석의 상카라가 필수!라는 역설인 것.(팔정도의 8요소들을 모두 완성하기 이전의 '내려놓자!'는 억압 혹은 현실외면=적극적 무지일 뿐, 무의식/잠재의식에선 여전히 온갖 탐진치가 요동친다. 이걸 인지, 인정 못 하고 자기기만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해탈할 수 있을 리 만무. 설사 욕망을 내려놓은들 팔정도 완성 이전에는 해탈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 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
내가 동생에게 사탕을 줬더니 동생이 기분좋아 하더라 뭐 이런 차원의 인과뿐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의식으론 인지조차 어려운 아주 미세한 차원에서까지 이 상카라를 실험, 분석, 이해하기 위해 명상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타니사로 스님은 명상이라는 것을 '상카라 기술을 연마하는 작업장/실험실'이라 부르신다. (실제로 부처님은 수행자를 요리사나 대장장이 같은 기술자에 자주 비유하셨음.) 그러니 처음부터 무조건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이거나 그저 내려놓는 건 부처님이 가르치신 수행이 아니며, 윤회의 매트릭스로부터 영원히 해방되기 위한 적극적인(proactive)! 행동(action)!이 수행이고 명상이라고 타니사로 스님은 가르치신다. 관조라는 것은 이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들 중의 하나일 뿐, 해골물을 마시고서 얻는 류의 ‘깨달음’도 초기경전이 설명하는 해탈과는 무관하다.
.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상카라는 심리학에서도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부모의 학대 속에 성장해 인간을 불신하는 A라는 사람이 있다 치자. A의 배경을 알고 나면 그 누구도 주위 사람들에 대한 A의 끝없는 의심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순수한 호의로 대해도 '저 사람이 내게 무슨 사기를 치려고 이러는 거지?'라고만 생각하는 A에게 행복한 인간관계는 거의 불가능할 것 역시 사실이기에,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 A는 자신의 이런 경향성을 이해하고 고쳐야만 한다. 다른 말로, A의 상카라 패턴이 A의 '탓'/'잘못'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A의 '책임'이기는 하다는 얘기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고통 해결 방법은 타인/세상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개조하는 것이었다. 타인/세상을 컨트롤하는 일은 세간의 관심사.)
.
누구에게나 디폴트 감정채널이 있다고 한다. TV채널을 뉴스에 맞춰 놓으면 당연히 하루종일 뉴스만 흘러나올 것이고, 음악채널에 맞춰 놓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음악만 나올 것이다. 이렇듯, 동일 사건을 경험해도 누군가는 우울함으로써 반응하는 경향이 있고 또 누군가는 짜증이나 원망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마치 처음엔 평평한 땅이었다 해도 비가 계속 퍼붓다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물길이 저절로(?) 생겨나듯, 그리고 한 번 그렇게 물길이 생겨나면 그 물길은 세월 속에서 점점 더 깊어지듯, 우리의 반응/행동 방식인 상카라 패턴도 그러하다는 얘기다. 이 때 타인을 원망하는 일이나 타인이 내게 공감/지지해 주는 일은 현재의 물길을 인지하고 새로운 물길을 내는 일에 간접적인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못 한다. 아무 분별 않고 무조건 내려놓기만 해서도 새 물길을 낼 수 없다.
.
'부처님이 사성제와 팔정도를 가르치신 배경 간단 요약'
'초보자를 위한 명상의 효과/의의 설명'
'선정 (Jhana)의 9단계와 상(想)의 분별'
.
.

希修 added 294 new photos to the album First Things First by Venerable Ṭhānissaro.

Favourites Srooi02iO1e1a03b2 c01rlat ui01 
*** You can download this book for free at https://www.dhammatalks.org/ebook_index.html under the category of 'Essays'. ***
............................................................................................................................................
#2~24: Honest to Goodness. Admirable friendship and appropriate attention. The qualities one is required to have to be someone's student, teacher or friend. This means, it is not the case that everyone qualifies as everyone's student, teacher or friend. The Buddha teaches that we should maintain goodwill even while someone is cutting off our limbs one by one (MN 21). But this does not mean that we should maintain a close personal relationship throughout our lives with every single person we run into in our lives. In fact, Sn 2:4 lists 'not associating with foolish people' ('foolish' meaning 'having no understanding or discernment regarding causality') as one of the best 'protective charms' for you.
............................................................................................................................................
#25~40: In the Eyes of the Wise. A healthy sense of shame, a healthy sense of honor and admirable friendship.
............................................................................................................................................
#41~46: Did the Buddha Teach Free Will?
............................................................................................................................................
#47~72: First Things First.
............................................................................................................................................
#73~107: The Karma of Now.
............................................................................................................................................
#108~131: The Streams of Emotion.
............................................................................................................................................
#132~172: Worlds & Their Cessation. What is 'supernatural' to you may only be 'natural' to the Buddha or others.
............................................................................................................................................
#173~199: Wisdom over Justice.
............................................................................................................................................
#200~211: All Winners, No losers.
............................................................................................................................................
#211~221: How Pointy Is One-pointedness?
............................................................................................................................................
#222~286: The Limits of Description. On the not-self strategy.
............................................................................................................................................
#287~294: The Names for Nibbāna.
Sungsoo Hong and 4 others
3 comments
Like
Comment
Share

3 comments

  • 希修
    공감과 위로를 바라는 마음도 감각적 욕망이 그 뿌리라는 말씀. 누가 내 얘기좀 들어 줬으면 하는 사람은 정작 상대가 내 얘기를 들어 주면 점점 더 타인에게 의지하면서 타인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커지며 ('나도 언젠가 마음과 귀로써 저 사람에게 보답해야지'가 아니라), 그러다 지친 상대가 어느 날 내 맘에 쏙! 드는 반응을 하지 않으면 9번 묵묵히 들어 준 것은 망각하고 그 1번만 갖고서 마치 빚 못 받은 채권자라도 된 듯 원망하는 게 인간의 심리. 타인의 감정노동이 나의 권리는 아니건만. 그러므로 얘기를 들어 주는 입장에서는 가급적 상대를 이해, 공감하려고 최선을 다 해야 하지만 (자신에게 복이 되는 일), 반대로 내가 얘기하는 입장이 될 때는 '감정 쓰레기 투척'이 아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상대에게 상담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이조차 습관은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할 듯.
    공감과 위로를 바라는 마음은 욕망을 뿌리로 한다ㅣ일묵스님ㅣ초기불교 제따와나선원 일요소참법문 63.
    YOUTUBE.COM
    공감과 위로를 바라는 마음은 욕망을 뿌리로 한다ㅣ일묵스님ㅣ초기불교 제따와나선원 일요소참법문 63.
    공감과 위로를 바라는 마음은 욕망을 뿌리로 한다ㅣ일묵스님ㅣ초기불교 제따와나선원 일요소참법문 63.
    • Like
    • Reply
    • 2 w
    • Edited
  • 希修
    세속에선 외부 환경/여건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고, 부처님 말씀은 타인/세상은 내가 콘트롤 못 하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상카라를 들여다봐야 하며 혹 타인/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부분적으로만 한다 해도 화 (瞋. 심신의 불만족이라는 첫번째 화살 위에 스스로 두번째 화살을 쏘아 심적 고통으로 키운 것. 슬픔, 우울, 억울함, 서러움, 의분義憤 등) 없이 냉철한 이성만 갖고 해야 한다는 것.
    May be an image of one or more people and flower
    • Like
    • Reply
    • 1 w
    • Edited
===
4]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