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6

무속이 왜 안되냐고 묻는 균형주의자들에게 - NEWS M

무속이 왜 안되냐고 묻는 균형주의자들에게 - NEWS M

무속이 왜 안되냐고 묻는 균형주의자들에게
김기대
승인 2022.03.08 

재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대동 세상을 위한 선택의 날이 다가 왔다.

윤석열 후보와 그의 아내 김건희에 대한 무속 비판이 드세자 내 세울 것이라고는 균형주의 밖에 없는 일부 매체(기독교 매체 포함)들이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 왜 무속은 안되냐고 같잖은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 매체 일부는 이런 주장을 통해 자신들이 상당히 중립적이라고 착각하는 듯 하다. 물론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무속 논란을 키우면서 윤석열을 비판하는 기독교인들 중에는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서 열려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균형에 매몰된 사람들은 ‘균형’이라는 것도 하나의 정파(政派)라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를 옹호하면서 윤석열의 무속을 비판하는 것이 이율배반이라면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면서 윤석열을 지지하는 목사들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도 동시에 비판의 도마위에 올라야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비판하더라고 그들의 정치 과몰입에 대해서 비판하지 '무속과 오직 하나님'의 모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속인 윤석열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점잖은 훈수를 두려면 보수목사들과 마찬지가로 정치 과몰입에 대해서 비판해야 하는데 비판의 척도가 다르면서 자신들은 균형감각을 갖춘 객관주의자라는 자기 망상에 빠져든다.

이런 태도는 김건희씨의 과거 논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가 과거에 술집 접대부를 했건 안했건 뭐가 중하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동시에 그의 과거에 대한 관음증적 태도가 나타나 의혹에 머문 과거를 오히려 진짜로 접대부였다고 언급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균형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중립적 태도는 무속이 아니라 무속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욕망이며 김건희의 과거가 아니라 그 과거를 통해 얻은 정보와 탈법을 문제 삼는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살아있는 소의 가죽을 벗겨 제물로 바치는 행위, 대구(명태)를 높이 쳐들고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 토론회에 나오면서 개털같은 털을 붙이고 나오는 태도 , 김건희와 그의 어머니가 저지른 수많은 탈법을 보고도 어떻게 균형, 객관, 중립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있는가?




본래 굿이라는것은 대동굿이 출발점이었다. 모두가 하나되어 나누는 대동굿이 정신이 후대로 가면서 재수(財壽) 굿으로 바뀌었다. 재물의 번성과 수명의 연장을 바라는 재수는 종교 다원주의가 개입할 자리가 아니라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윤석열의 굿에 대동은 없다. 그는 한반도에 전쟁이 나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어도 그래서 일본군이 유사시에 한반도에 들어와서 민족적 자존심이 상해도 상관없다. 대동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재수만 보존되면 상관없기 때문이다.

균형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일부 식자층에도 나타난다. 이들은 한국사회가 지나친게 진영논리에 빠져 있다며 훈수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진영간의 싸움이다.

칼슈미트는 정치란 적과 나를 가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히틀러 초기에 칼 슈미트가 이론을 제공했다고 해서 비판이 따르지만 그는 히틀러가 ‘미치기 전’ 그와 결별했기에 지금도 정치철(신)학을 말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이다. 미국 우익의 사상가 레오스트라우스가 금과옥조로 삼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좌파 진영에서도 칼 슈미트를 인용한다. 지나치게 균형 감각을 중시한 것에 대한 진보 좌파들의 자아 비판이다.

그렇다. 진영의 입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가끔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주장의 과잉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극히 일부다. 하지만 ‘적’들이 아니라 균형주의자들은 이런 진영의 태도를 모두 '진영논리', ‘빠’, ‘대깨문’으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은 이런 빠가 아니라고 우겨 댄다. 하지만 그들이야 말로 균형을 빙자하면서 실제로 균형감각을 잃은 진짜 ‘한 놈만 까기 빠’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중립적 태도'에는 자신들이 모두까기 하고 있다는 착각의 징조들이 수없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양당제의 폐해’ 같은 주장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정치 과잉이 꼭 정파간의 대립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청산 못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대립이 극심한 것이다. 다당제로 간다고 해서 대립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자칫하다가 일본처럼 일당 독재로 갈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해방 이후 시민이 선택해온 투표의 결과가 양당제다. 양당자의 폐해로 인한 민주주의를 걱정하면서 선거의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반민주적이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정부수립 이후(4.19로 세워진 1년간의 짧은 민주당 정부 제외하고) 경험해온 한국 사회에서 다당제의 존립 공간이 되는 내각제로 전환될 경우 거기에 따르는 시행착오는 또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래서 나는 선거 때마다 어떤 진영을 택하기 보다 훈수와 균형, 중도를 강조하는 이들을 균형근본주의자로 부르기로 했다. 극중을 주장하던 안철수라는 근본주의자가 극우에 투항한 것을 보고도 근본주의에 남기로 한다면 뭐라 할 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