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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3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장영호 2021 논평자 이수호 김말순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0930

장 영 호(전 씨알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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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석헌의 신앙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다/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리라.1)

함석헌의 시 <대선언>의 일부 입니다. 젊은 날 제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함석 헌 선생님이 기독교를 떠났나보다 했습니다. 함선생님의 말씀과 독서의 시간이 얼마 간 흐른 후에 깨달은 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넘어선’ 것이구나 라고 이해하기 시작 했습니다. 풍류신학자 유동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불교, 유교, 기독교 세 종교가 들 어왔는데, 각 그 종교에서 나왔으나 경계를 넘어선 이가 원효, 율곡, 함석헌이라 하였 습니다. ‘넘어서다’라는 우리말은 참 묘미가 있는 어휘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함석헌 시 연구서,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에서 명쾌한 풀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파주의 또는 교파주의 안에 갇혀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해 봄직 하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애독해온 불후의 고전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고침 글인데, ‘대선언’의 전후 시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도 보입 니다.

고향 평북 용천에서 어린 시절 장로교회를 다닌 함석헌은 13살까지는 순박한 기독교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2)

삼일만세운동 사건을 뼈아프게 겪은 이후, 오산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함석헌은 생 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가르침과 동서양의 명품서적 들을 읽으면서 좀 더 깊고 참된 믿음이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교회에 점점 비판적이 되어 멀어져 갔으리라 보입니다.3)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 김교신의 소개로 그는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 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아니고도 믿을 수 있다고 한 우치무라의 신앙 을 세상에서는 무교회주의라 불렀습니다. 아무 형식, 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형태로 성경과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앙관이 특색입니다.4) 그러나 함석헌의 무교회 신앙도 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무교회도 어느덧 자기주장에 집착하여 교파 아닌 교파가 되어가는 모습에 함석헌은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1) 대선언, <<수평선 너머>>, 일우사(1961), 170~171

2) <씨의소리> 1970년 4월호. 함석헌전집4.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 207~8.

3) 위 책, 214.

4) 위 책,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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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말라붙는 사람은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못 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대속(代贖)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5)

우치무라의 신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제 제자가 선생과 같 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에게 충실하는 것이 그를 스승으 로 대접하는 도리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을 두고 말 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스승은 고귀하다. 그러나 진리 는 더욱 고귀하다.”

신의주 학생사건의 배후로 몰려 죽음의 순간을 겪었던 함석헌은 동료와 제자들의 도 움으로 1947년 극적으로 월남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해 미국에서 갓 돌아온 현동완 선생이 주도하는 목요모임에 나가면서 퀘이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퀘 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놀라움 속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고, 무교회에서조차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6) 시련과 고독 속에서 맞은 1960년은 함석헌에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가져다준 한 해 입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 았다. 누가 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원망은 아니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 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7)

칼릴 지브란의 글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힘써 번역한 <<예언자>>, <<사람의 아 들 예수>>가 함석헌에게 신생의 빛을 비춰 주었다면, 1961년 겨울, 한국의 첫 퀘이커 이윤구님의 권유로 퀘이커 서울모임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또 하나의 출구였습니 다. 훗날 영국과 미국 퀘이커 친우봉사회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나 추천 받은 사실을 보더라도, 함석헌의 평화운동이 세월을 딛고 끝내 촛불 혁명으로 이어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숙연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위 책, 219~220

6) <<퀘이커 300년>>, 함석헌전집15, 352

7) <<예언자>>, 함석헌전집16. 213


2. 퀘이커(Quaker)신앙과 함석헌

1956년 1월호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 는 외침은, 2천 년 전 예언자 요한이 빈 들에서 외친 소리의 데자뷰로 들려옵니다. 오늘의 한국은 어떻습니까? 비만해질 대로 살찐 초대형교회의 행태가 이를 잘 보여주 고 있지 않습니까?

“퀘이커는 개방적이야요,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 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1983년 봄, 함선생님이 어느 잡지기자와 인터뷰에서 하신 말 씀입니다. 저는 1979년 매주 함석헌의 <노자 모임>을 다닌 인연으로 퀘이커 모임이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따른 기간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이었습니다. 서울 신촌에 자리한 ‘퀘이커 모임’에서 선생님과 함께 예배드린 시간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고요예배(silence)가 시작되면 선생님은 늘 꼿꼿 이 앉은 자세로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젖어 계십니다. 함께하던 이들 모두 고요 속으로 흐를 무렵, 선생님은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감화(vocal ministry)를 하셨 습니다.

어느 날 명상에 관해 일러주신 도움말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눈을 감고 오래 있다 보면 잡념이 끼어들어 방해를 하니, 그럴 땐 넘어가는 해를 연상하면 도움 이 될 거요.” 선생님은 예배를 마치면 당시 어지러웠던 시국에 관련해서 성경말씀 풀 이를 해주심으로써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제 퀘이커 신앙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 보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영국에 머물렀던 기간(172728)에 작성한 서신 가운데에, 퀘이커에 대한 인상이 깊었던지 무려 네 차례나 퀘이커에 관한 편지(On the Quakers)를 모국의 지 인들에게 보냈습니다.

퀘이커 같은 특수한 집단의 교리와 역사는 생각 있는 사람의 호기심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것 으로 내게 여겨졌다. 나는 이것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영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퀘이커 한 사람을 만나보러 갔다. 나는 우선 가톨릭 신자들이 신교도들에게 늘 해온 질문부터 던졌다. “선생님, 세례는 받으셨습니까?” “아니오. 나의 친우들도 모두 받지 않았어요.”라고 그 퀘이커 는 말했다.

“저런,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기독교 신자이고 또 좋은 신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지요. 하지 만 기독교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고 소금을 약간 뿌리는 것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 요.”

나는 이 불경한 말에 화가 나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 어버리셨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퀘이커교도는 온화하게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요한 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는 않았지요. 우리들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8) 이미 여러분들이 보았겠지만, 퀘이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에 의하면 첫 퀘이커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종교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부패하 기 시작하여 천 육백 년 동안 타락한 채로 남아 있었으나, 이 세상 어딘가에 늘 소수의 퀘이 커들이 은거하면서 신성한 불꽃을 보존해오다가, 마침내 1642년 영국으로 이 빛이 퍼져나갔다 는 것이다.9)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가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낡은 제도에 붙들려버린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함선생님과도 인연이 깊은 미국의 퀘이커 신학자 하워드 브린튼(H. Brinton)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의미 깊은 주장을 펼칩니다. ‘내적 체험에 근 거를 둔 신앙 신비주의’와 ‘교리와 상징으로 신앙을 표방하는 신학자’ 간의 싸움이라 는 것입니다. 그는 <<퀘이커 3백년>>에서 ‘미래에 살아남을 종교가 있다면 그래도 퀘 이커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라고 예견하였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G. Fox, 1624-1691)를 선두로 퀘이커 신앙이 싹틀 무렵 신비주의는 초미의 관심사였습 니다.

처음 기독교는 사도행전에 보이듯이 오순절 성령과 더불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퀘 이커 신앙이 단지 신비주의에만 머물렀다면 ‘기독교 제3의 형태’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처럼 세상 사람들을 떠나 사막이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새 힘과 빛을 얻는 신비체험을 긍정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소중한 체험이 개인에게만 머물러 버 린다면 그리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리라 봅니다.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야지요. 그래 서 퀘이커 신앙은 개인 신비주의를 넘어 단체 신비주의(group mysticism)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조지 폭스는 말합니다. “참 신앙이란 각 개인의 체험이자 모험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보다 더 큰 영과 만나는 일입니다.”

사실 퀘이커 신앙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이 유사 이래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것’ 이란 주장처럼 반대를 받아 온 것은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J. Calvin)의 예정설 과는 서로 상치됩니다. 퀘이커 반대자들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 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고 하면서 반박했지만, 18세기 가장 탁월한 퀘이커 신학자 로버트 바클레이(R.Barclay)는 “나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은 문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체험에 의한 깨달음에 있습니다.”라고 변호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이때에는 ‘깨달음’의 복음인 <도마복음>을 모르던 시절입니다.

8) Voltaire, Philosophical Letters, (New York : The Liberal Arts Press,1961), 3~4 9) 위 책, 11

우리는 빛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고, 단순히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아갈 수도 있습니 다. 몸은 동물적이고, 마음은 이성적이나, 속에 있는 빛은 신(神)적 입니다. 진리의 빛 은 그 이성을 지도해야 하고, 이성은 본능을 도와 올바르게 정돈된 살림을 하도록 해 야 한다는 것이 초기 퀘이커 신앙의 꽃이라 하겠습니다.

속 빛’(light within, inner light)은 화해와 일치의 근원입니다. 이 내면의 빛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것이며, 이 빛에 가까이 이를수록 사람들은 서로서로 가까워지는 것 입니다. 조지 폭스의 이상은 평화와 조용함(quietness) 이었습니다. 퀘이커 평화사상 의 토대는 어디까지나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요한 14:27). 퀘이커들은 두 길을 통해서 평화주의의 입장에 도달했는데, 하나는 우리 양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이 며, 또 하나는 신약성경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 많은 힘 가운데 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여러 힘을 하나로 통일하는 근원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 땅 위에 실현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퀘이커 신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종교적, 도덕적 진리를 알고 있다는 보편 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학적인 추상론도 띠지 않은 단순성에 있습니다. 이 단 순성을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에 최근 서양 또는 아시아 지역에서 특정 종교의 벽을 넘어선 이들(가톨릭 퀘이커, 불교인 퀘이커)이 함께 평화를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매우 영향력이 컸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조지 폭스 시대의 퀘이커 운동이 탈자적(ecstatic), 신비적 운동으로서 시대를 가로지른 급진적인(radical) 종교개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10)

이젠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수년 전 저는 한국 기독교회에 관한 우울한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가나안 기독교인’이라는 제하의 글이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성 서 지명의 ‘가나안’이 아니라 ‘안 나가’를 거꾸로 쓴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조가 놀랍게도 함석헌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지 모르게 현상유지를 원하는 기풍이 교회 안을 채워버렸고 그러니 가나안의 소망이 ‘안 나가’의 현상 유지로 타락해버렸다. 이상하게도 ‘가나안’이 거꾸로지면 안 나가가 되지 않나?11)

10) Paul Tillich,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315

11)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함석헌전집3. 33~34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나 그렇지만 신성불가침은 비 판받아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양심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대표하느니만큼 도리어 끊임없는 자기반 성이 필요하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12)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 하지 않을까?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것이지 민중의 종교 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보수주의자들이 뻔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 기만적인 현상이 다.13)

이런 연유로 선생님은 종교도 늘 거듭나야 한다며, 새 종교를 소망하셨던 겁니다. 끝으로, 새겨둘 만한 퀘이커 일화 한 토막을 올리며 마칩니다. 미국 초창기 펜실베이 니아 지역을 거룩한 실험(HolyExperiment)으로 이끌었던 장군 윌리엄 펜(W. Penn) 이 어느 날 퀘이커 집회를 마치자 조지 폭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답니다. "내가 칼 을 차고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보기에 어떻습니까?" 폭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장군께서 불편하다고 느낄 때까지만 차십시오.”

12)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함석헌전집3. 35~36 13) 위 책,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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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열린강좌 제6강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9.30.(목) 논평자 이수호

“퀘이커를 기다립니다.”

오늘 훌륭한 강의를 해 주신 장영호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제 소개를 간 단히 드리면, 저는 초등학교 교사로 지난 2015~2016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 학원에 연수파견을 갔었는데, 지도교수님의 조언으로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시 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름 교 회와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좀처럼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 는 갈증과 의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함석헌의 글은 몇십년의 간격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고백이자 절절한 외침으로 다가왔습니다. 논문 준비를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함석헌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무교회와 퀘이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 와 도봉구 함석헌기념관을 방문하면서 앞서 퀘이커를 경험하신 정지석 목사님, 김조년 교수님 등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퀘이커 예배에는 대전에 몇 번, 신촌에 한 번 정도 밖에 참석해 보지 않았으나, 기회가 된다면 퀘이커를 집중 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에 대해 핵심을 잘 소개해 주신 장영호님 의 강의에 대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평소에 궁금했던 점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함석헌이 민주화 투쟁에 직접 나섰던 인생 후반기의 기간이 퀘이커를 만나 도움을 받고 교제했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입니다. 김성수 박사님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2005.09.)”라는 논문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 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 사회적 민주 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 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 〈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함석헌이 당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이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전 세계가 하나의 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아무 나 누릴 수 없었던 해외여행을 통해 서구 사회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미국 펜 들힐과 영국 버밍험 우드브룩 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함석헌이 투옥되었을 때에도 석방을 위해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 해 주었고,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주는 등 아무도 함석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위상을 높여준 것이 영미 퀘이커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이미 성숙기에 이르렀던 함석헌의 씨사상과 300년 전통의 퀘이커 신앙이 서로 깊이 공감하고 공명하였다는 차원을 넘어서, 씨사상과 전체론의 깊이가 완성되는 데 서구 퀘이커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 함석헌을 만든 것은 사실상 퀘이커였다고 하 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둘째, 함석헌 사후 한국 퀘이커의 현황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보수교회에서 도 중고생과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어 10여 년 후에는 문을 닫는 교회들이 많 은 것으로 예상됩니다. 퀘이커도 새로운 회원들이 증가하기보다는 기존 회원들 이 고령화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신앙 유산을 우리 자녀들과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고 있는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함석헌에 대한 물심 양면의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일부 부유한 퀘이커 회원만의 노력이 아닌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는 보통 회원들의 관심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도 도움 이 절실한 이들을 찾아 지원하려면 어느 정도의 규모와 최소한의 조직은 갖추 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시대 에 퀘이커를 찾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또 해외 퀘이커의 현황은 어떠한지 최근의 기록과 통계를 알 수 있을까요?

셋째, 누가 퀘이커인가, 퀘이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퀘이 커모임을 후원했다거나 펜들힐에 다녀온 분들이 있었다는 소식은 간간히 들을 수 있으나, 내가 퀘이커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퀘이커 회원이지만 지금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지 않거나, 자신이 퀘이커라는 정체성을 굳이 외부에 드러내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퀘이커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퀘이커 신앙에는 공통적인 신조나 교리가 없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이해한 만큼에서만 퀘이커를 설명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퀘이커주의에 공감하고 혼자서도 나름대로 사회 참여를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퀘이커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요? 세계의 다른 퀘이커들과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은 부차적인 것일까요? 가나안 성도가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마 찬가지일까요? 씨사상에 공감하면 함석헌을 기리고 계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이상 제가 가지고 있던 소소한 생각을 질문의 형식으로 나누어보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여하신여러분들과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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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에 대한 논평 -

김말순


먼저 논평을 맡은 제 소개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학자도 연구원도 사상가도 아닙니다. 그냥 모태신앙으로 초대 교회 신앙인 창조의 하나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죄사함에 대해 성경을 아주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이나 강의를 접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촌 퀘이 커모임집에 살게 되면서 예배모임에 참석하고 퀘이커에 대한 공부 를 하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기념사업 회에 나오게 된 것도 선생님을 좀 배워서 알아야겠다는 욕심으로 2016년부터 모임이나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누구의 글이나 강의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서울종교친우회(퀘이커) 회원이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읽으면서 논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 석헌 선생님에 대해 많은 서적들을 통해 여기 모인 분들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고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 내용에도 잘 설명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단지 선생님의 진면목이 늘 궁금했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누구인가?” 하고 인터넷에 물어봤습니다. 아주 명쾌한 답을 알려 줬습니다.

“취래원 농사꾼 황보윤식 농부(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님의 “함석 헌 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 9. 1) “함석헌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 함석헌의 사상은 무지개 사상이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 보-로 색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색의 경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게 무지개의 본질이다. 함석헌은 무지개처럼 뚜렷한 한 가지 사상 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분명 우리 시대에 “사상의 무지 개”를 놓고 간 분이다. 다양해져 가는 열린 시대에 필요한 융합철학의 무지개를 놓고 간 사상가다. 

▷서양의 그리스도 사상(퀘이커) 을 기본으로 동양의 불교사상, 공맹사상, 노자사상, 양명사상 그리 고 다시 서양의 실존주의 사상과 아나키즘까지 융합하였다. 

그래서 함석헌은 무지개 사상을 만들어냈다. 함석헌의 무지개 사상은 문화 의 다양성 강조와 하나의 인류를 지향해 가는 곧 미래사회의 세계 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행합일의 귀감을 보이면서 세계 주의를 실천해갔다. 

세계주의는 곧 평화주의 사상이다. 세계평화는 전쟁이 종식 되어야만 가능하다 전쟁종식을 위하여 합법을 가장한 국가폭력을 반대해야 한다. 곧 국가(정부)지상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를 검색했을 때 위의 글을 읽고 깜짝 놀 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아! 바로 이런 분이었구나!!!’ 했습니다. 저는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을 좀 더 깊이, 많이 알고 논평 을 맡은 입장에서 답해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이 엮으신 [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를 읽었고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읽었습니다. 어느 한 구절도 빼놓고 요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전해 드리는 것으로 논 평을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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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 9~12 9)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 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을 주셨다

※ 요한복음 15: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 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종교친우회=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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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300년]을 옮긴이의 말

처음에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나 스스로 퀘이커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내가 퀘이커에 대해 흥미를 느 끼게 된 것은 1947년부터입니다. 그해 3월 나는 이북에서 공산주의의 사납게 구는 것을 못 견디어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그 때 사람 들은 아직도 군정 밑에 있어서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지 않은 가슴을 안고 새 역사의 나갈 방향을 더듬고 있는 때였습니다. 간 곳 마다 활발 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서울에 온지 얼마 아니 되어, 지금은 이 땅위에 있지 않은 현동완 선생이 주장해 하시는 목요 모임에 나갔는데 그 때 그는 미국 여 행을 마치고 갓 돌아온 뒤였기 때문에 여행 선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중에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말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 병령을 반대하고 나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그 뜻을 이해하고 정말 종교적 양심 때문에 하는 것이 분명하면 군대 복무를 면제하고 대신 다른 평화적인 사업으로 돌려 주는 법령을 만드는데 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습 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은 온전히 잘못이라는 이 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무교회에 서조차도 전쟁 반대를 힘써 부르짖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찌무라 선생이 러일전쟁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 쳤지 감히 국가에 대해 항쟁하는 사회적 역사적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 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것을 칭찬하고 성령을 받아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쳤지 아무도 나도 그래야 한다 하고 실천의 태도로 나간다든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으냐 하고 용 감히 주장하거나 권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퀘이커의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애 서양 책을 더러 읽노라면 ‘퀘이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수가 있었는 데 그것은 언제나 테두리 널따란 모자에 허술한 옷을 입고 좀 괴상한 사 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괴상한 사람이 괴상 정도로 그 치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길손 모양으로 어둑한 어스름 빛 밑에서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걸어오기는 하지만 그 영상은 아직 태평양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형상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서울에서 그들 을 만나는 날이 왔습니다,

무슨 팔자로 그랬는지 은혜로 그랬는지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태어났 으면서도 이날 껏 전쟁을 몸으로 당해 보지는 못했는데 6・25전쟁이 터 져 3년 동안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먹고 손으로 만지며 그 악독하고 끔찍한 맛을 속속들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다시 돌아오니 내 한 말이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전쟁 전 YMCA 큰 강당에서 주일마다 말을 했는데 언젠가 똑똑한 내 정신을 가지고 “이놈의 서울이 남대문서 동대문까지 환히 내다뵈도록 확 타버렸음 좋겠다.” 한 일이 있 었습니다.

그 말을 스스로 잊을 수 없는데 이제 정말 그대로 된 꼴을 보니 부 르르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말이 꼭 그대로 들어맞을 만한 무 슨 힘이 있다는 생각은 감히 터럭만큼도 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말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정수리에 칼이 박히듯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수복 이후에는 김명선 박사의 고마운 뜻으로 지금은 없어진 세브란스의 에비슨관을 빌려서 주일 모임을 계속했는데 그 어느 날 거기 퀘이커가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아더 미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내가 퀘이커를 본 처음입니다. 그는 그 때 우리 모임에 나오던 이윤구 님의 소개로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보다 전에 미국 퀘이커 봉사회에 서 전쟁 후의 한국을 돕기 위해 30명 가량으로 된 구호대를 보내어 군 산 도립병원의 복구 사업을 맡아서 했는데 그 때에 이윤구 님은 그들을 만나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퀘이커가 되었고 자기 생각에 나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이라 해서 내게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레지 날드 프라이스, 플로이드 슈모어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제 나는 평화주의나 양심적 거부만이 아니라, 퀘이커라는 사람들을 ‘친구(friend) 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때 서울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 몇 번 나간 일이 있었고 아주 나가게 된 것은 1960년 나의 주일 모임을 그만두게 된 후부터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매우 좋다 생각했지만 나는 나의 생각하는 바를 고쳐야 할 어떤 필요도 아직 느끼지 않았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지만 반드시 그들에게 배워야겠다는 무슨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미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시찰 여행을 하게 됐으므로 마침 기회가 좋다 해서 필라 델피아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퀘이커 수양기관인 펜들힐에 요청해서 공식 여행을 마친 후 6월 부터 연말까지 일곱달을 머물러 있으면서 공부를 했 습니다. 그리고는 밝는 해 1월부터 석 달을 또 영국 버밍햄에 있는 같은 성질의 학교인 우드브룩대학으로 가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의 대 체의 모습을 좀 짐작하게 되었고 흥미를 더욱 느껴 돌아올 때는 책도 더 러 구임해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퀘이커가 되자는 생각은 역시 없었습 니다. 나는 어느 기성교파에 속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퀘이커의 회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7년 태평양 연회의 초청으로 노드캐롤라이나 길포드대학에서 열렸던 제 4차 세계퀘이커대회 와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태평양 연회모임에 참석하고 난 다음이었습 니다. 그런 변동의 동기는 본래 말로는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안됐음 어떠냐?” “그렇다. 퀘이커가 됐담 된 것이고 안됐담 안된 것이다.” 합니다마는 그 중의 중요한 점을 말한 다면 나는 그들의 우의(friendship)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 정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 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 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 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참고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 됐습니다. 그들은 아주 넓은 마음으로 누구나 용납합니다.

퀘이커라는 안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기본 신앙의 극단적인 보수주의로부터 유니테리언,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넓으면서도 회원이라 할 때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절대로 회원 되는 것을 권하는 일 없습니다. 퀘이커 는 전도 아니하는 종교입니다. 그 점은 다른 종교와 참 다릅니다. 그것 은 그들의 직접적임과 체험과 자유를 극단으로 주장하는 데서 오는 것입 니다. 나도 처음에는 회원됨을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는 데 반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원과 참석자를 그리 구별할 것이 무엇이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별이나 차별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회원이 되는 데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강권하지 않으니만큼, 차별 하지 않으니만큼, 도리어 더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나도 후에는 그 생 각이 옳다 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정말 자유요 참 민주주의며 그들이 신 비파 운동에서 일어나기는 하면서도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 의 주관주의에도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 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고 비교적 건전히 중간노선을 걸어오게 된 까닭이요, 또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도 발언권을 가지는 까닭입니다.

하여간 나도 그들의 그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에, 시비를 들을 각오를 하고 퀘이커의 회원이 됐습니다. 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 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 있어 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적어도 지금은 마 땅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 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한번 결정하고 나니 퀘이커를 더 잘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하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연회 초청여행으로 태평양 연안 산디에이 고에서 포틀런드에 이르는 여러 퀘이커 모임과 가정방문을 마친 다음에 다시 5년 전에 일곱 달 동안을 이날까지의 내 생애에 가장 행복스런 대 목이라고 하면서 지났던 그 자유와 평화의 동산을 다시 봤을 때의 감격 을 나는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영어를 잘 할 줄 몰라 누 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내 의사를 충분히 발표도 못하 면서도 아무 부자유도 불안도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조용히 맘대로 생각 하고 거닐었던 것입니다. 5년 전이나 5년 후나 아무 변함이 없었습니다. 도서실의 책이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있고 강당 구석에 있던 어항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나갔던 아들이 어머니 품 으로 돌아온 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머물러 있던 방에 가니 바로 어제 있었던 듯했습니다. 5년 전 내가 그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창 밖 능 금나무 가지에 철새란 놈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쳐서 손으로 만질 거리 에 있어서 날마다 대화를 했었는데 그 새둥지가 비바람에 부서는 졌지만 그대로 옛 모습을 짐작할 만큼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갔던 새끼인 듯 했습니다. 알에서 깨어 나갔던 새끼가 돌아온다면 자라서 올 것인데 나도 자랐을까? 가지가지 생각이 풀려나는 내 가슴속에서는 용천 옛 집에서 어머님이 넘어가는 저녁볕 밑에서 잣던 물레에서마냥 평화의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그러한 속에 있으면서 아침으로 저녁으로 한 것이 이 책 읽기와 우리 말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이 책을 저자인 선생님 손 에서 받았고 때마침 그 일본말의 번역자인 다까하시 여사도 있어서 그 일본말 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도 선생님을 존경아니한 것 아니었습니다. 그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의 사상・지식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면 알 것이니 설명이 필요없습 니다. 그 인격과 믿음도 여러 십년을 미국, 독일, 일본에서 가르치고 봉 사하고 한 경력을 살펴보면 자연 짐작할 수 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도 이미 여든이 넘은 늙은이였지만 아주 건강해 깊고 조리 있는 강의를 했고 아침 예배시간이면 그 허연 머리털과 길다랗게 뻗친 흰 눈썹 밑에 광채를 쏘는 눈을 빛내며 앉은 모습이 성자다왔고 이따금은 뜻 깊은 감 화를 주곤 했었습니다. 5년 후 이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와서 각별한 결심으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그가 아버지처럼 생각됐습니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것은 꼭 내 이야기같이 생각됐습니다. 어쨌든 내 생각의 역사를 다 알기나 하는 듯해서 어떻게 내 소리를 썼을까 싶었 습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선생님을 뜰에서 만나면 “선생님, 그거 제 이야기 같습니다”했습니다. 나만 그렇겠습니까? 남도 그런 사람이 많 을 것입니다. 그만큼 참입니다.

그래서 첨에는 내 공부를 위해 시작했던 것이 다시 생각하니 서울 있 는 모임의 벗들에게 이것을 읽도록 해야겠다, 그뿐 아니라 일반 다름 사 람에게도 읽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퀘이커주 의만 아니라 일반 신앙의 참고로도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퀘이커는 본래 식학이 없지만, 이 책도 신학 토론은 아닙니다. 그보다도 실지로 신앙 살림을 해가는 데 많은 지침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내가 이 글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community)에 관한 이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 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 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 영웅, 이상, 로맨티시즘, 개인,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 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못났어도, 개인의 뒤에는 늘 전 체가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 로 밝히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오늘날 되어 있는 종교가 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들이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는 깊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담 또 한 가지는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 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 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적으로 예를 하나 든다면 필라델피아에 있는 가장 오랜 모임집에 가보았는데 모일 때마다 기록한 회록이 300년 전 시작하던 맨 첨에서부 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체제에 같은 글씨로 기록되어 그대로 보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변해가는 세상바다의 거친 파도에서 제 자신을 가누어가기에 미처 다른 생각이 없는데 이들 얼마 아니 되는 퀘이커만이 수세가 아니라 공세입니다. 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자 선생님 말씀대로 미래의 종교가 반 드시 퀘이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미래를 건져가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 은 퀘이커 같은 이러한 방식의 생각을 하는 종교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 됩니다.

펜들 힐에 있을 때 이미 거의 절반이 옮겨졌었는데 그 후 나라에 돌아와서 게으름을 피워 이제 와서야 겨우 인쇄에 부치게 돼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해에 부인을 앞서 보내셨고, 건강도 한때는 퍽 걱정들 을 했는데 요새 많이 회복되셨다는 소식이 와서 기쁩니다. 다만 진심으 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말씀은 한국판이 나오기를 위해서 내가 감히 말씀도 드리기 전에 선생님이 자진 노력하시어서 출판자금을 얻어 주셨는데 이날까지 이렇게 무책임하게 늦게 만들었고, 더구나 한마디 편 지도 직접 못 드려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영어를 자유로 쓸 줄 알았다면 벌써 몇 십 장도 편질 드렸겠습니다. 영어로는 도저히 제 마음을 그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 옮겨놓은 글도 의심하실는지 모르나 읽기와 쓰기는 다릅니다. 읽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 가지고 했으 니 안심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본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 지 않았나 해서 두려운 마음 많습니다. 있거든 알려지는 대로 고치겠습니다.

이 책이 보시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또 우리미래 역사의 설계와 작업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되는 점이 있으 시다면 고마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1970년 5월 9일 함 석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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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1

[김조년] 차렷! < 칼럼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차렷!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차렷!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08.09 
 
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차렷’이란 말을 처음 듣고 내 몸으로 실천해 본 적이 언제였을까? 아마도 6·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아니면 1·4 후퇴 때 겨울이지 않을까 싶다.

그 때 우리 마을에 한 국군 부대가 들어왔다. 겨울이었다. 그들은 각 집에 분산되어 숙소를 정하고,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동네 앞 꽁꽁 언 평평한 논에 모여 아침 체조를 하였다. 노래도 우렁차게 불렀다. 그 때 들은 구령이 ‘차렷’이요 ‘열중 쉬어’였다. 군인들은 그 구령에 맞추어 양 다리를 모으고, 손을 양 다리 옆으로 내려 꼿꼿이 서기도 하고, 다리를 벌리고 양 손을 뒤로하여 허리에 대는 행동을 했다. 그런 모습을 본 우리 어린애들은 자기 집에서 그것을 흉내내며 놀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앞으로 나란히’ ‘차렷’ ‘경례’ ‘열중 쉬어’라는 구령을 선생님들로부터 듣고 우리도 따라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 뜻이 무엇인지 나는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 때 하루에도 몇 수십 번씩 그 구령을 듣고 살았다. 쉬어자세는 쉬는 것이 아니고, 차렷자세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이 아님을 알았다. 차렷자세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었다. 그것은 몸과 맘과 정신을 오로지 하여야 하는 자세였다. 힘을 꽉 주는 자세이면서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텅 빈 자세였다. 비운다고 흐느적거리는 것이 아니고, 꽉 채운다고 굳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명령이 떨어져도 즉각 수행하여야 하는 유연한 자세이면서, 어떤 도전이 와도 금방 올바른 대응을 하고 반응을 할 수 있는 굳건한 자세였다. 그러니까 차렷자세는 꽉 찬 듯 비어 있고, 비어 있는 듯 꽉 찬 자세였다. 힘이 들어가고 빠지는 아주 예민한 경계선에 선 자세가 바로 그것이었다.

최근 여러 날 진행된 도쿄올림픽 경기 몇 종목을 보았다. 모든 경기 종목에서 나는 ‘차렷’과 ‘쉬어’가 모든 동작에서 반복되는 것을 보았다. 달리기에서 출발선에 설 때, 배구나 탁구 또는 배드민턴에서 서브하고 받을 때, 펜싱이나 양궁 또는 장대높이뛰기 할 때 모든 선수들은 한결같이 숨을 고르고 몸을 다듬고 가장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았다.

공격하거나 방어할 때도, 달리고 뛰는 모든 순간과 자세에서 차렷과 쉬어의 자세를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들이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집중하면서 비워주는 차렷자세가 온갖 곳에 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상당히 오래도록 훈련하고 연마한 모든 기술이 제대로 발휘되도록 하기 위한 자세는 바로 차렷자세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에는 모든 선수들이 다른 어떤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로지 출발할 때의 그 순간을 어떻게 채움과 비움의 조화를 최상으로 할 것인가에 집중하는 듯이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공격과 방어가 모두 같다. 결국 그때까지 갈고 닦은 기술의 성공과 실패는 차렷자세에서 갈린다고 보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내 삶과 우리 사회의 공동생활을 떠올렸다. 내가 잘 걸으려면 일단 잘 서야 한다. 빨리 뛰고 멀리 뛰거나 높이 뛰려면 걷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학교에서나 군대에서 왜 그토록 열심히 서는 것을 기초로 닦게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바로 선다는 것은 무념무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 그 상태에서라야 읽고 쓰고 분석하고 판단하며 종합할 수가 있다. 그림을 그리고 어떤 상을 조각하는 것이나, 글씨를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서 차렷과 쉬어는 가장 기본 되는 자세다. 곧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어가라는 명령이다.

이러한 자세는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로 필요한 일이다. 물론 사회를 위한다거나 나라를 위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더욱 더 이 문제에 조심해야 할 일이다. 자기를 과신해도 안 되지만, 자기를 너무 비굴하게 낮추어 자신감이 없게 보아도 안 된다.

또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남을 깎아 내리는 가장 비굴하고 비겁하고 쪼잔한 일을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차렷자세다. 무념무상, 비움과 채움의 경계선에 자신을 세우고, 이제까지 살아왔던 모든 자기의 삶과 사회와의 관계를 아주 날카롭게 분석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말로 개인과 사회 전체, 순간과 역사, 물질과 정신을 살릴 수 있는 삶을 이제까지 살아왔으며, 그것을 기초로 모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런 것을 살필 때 역시 차렷자세가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니 남의 더러움을 너무 아프게 파헤치지 말라. 그런 것을 보고 잘한다고 박수하며 지지할 사람은 없다. 그 대신 자신이 어떻게 자기를 갈고 닦았는가를 정성스럽게 내보이라. 겸손한 자세로 시민과 어떻게 앞으로를 일구어나가겠다는 것을 밝혀라. 일반 시민들은 정치하겠다고 나섰거나 이제까지 높은 관직이나 정치일선에서 일한 사람들을 다 똑똑하고 맑고 깨끗하고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쩔 수 없으니 저렇게 나선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좀 덜 한 이를 뽑겠다고 생각하고 마지못해 표를 주는 이가 많을 뿐이다. 그러니 잘났다고 껍적거리지 말고 맘을 오로지하여 차렷자세로 돌아가라. 언제나 시민은 그런 자세를 가진 자를 차렷자세를 가지고 살피고 찾는다. 아니지. 시민들이야말로 누구에게 지지 않게 차렷자세로,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아주 냉철하게 후보를 살펴야 한다. 경거망동, 부화뇌동은 금물이다. 시민이 차렷하고 설 때 나라와 사회는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될 것이다.


2021/07/13

[김조년] 정치와 제사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정치와 제사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정치와 제사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07.12 18:59  수정 2021.07.12 19:0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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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앤소니 드 멜로 신부가 쓴 책을 보다가 이런 대목을 읽었다.

어느 신부가 시골 한 성당에 부임하였다. 그는 오래 전에 거기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성당을 돌아볼 때, 옛날에 그곳에서 일하던 집사가 계속하여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집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마치 촛대에, 강론대에, 성찬그릇에, 계단에, 신자들이나 신부가 앉는 자리에, 풍금이나 오르간에, 벽에 걸려 있는 성화에, 드나드는 문에, 그것을 잠그는 문고리에, 성수대에 마치 하느님이 거기 계신 것처럼 그렇게 경건하고 지극한 맘으로 예배하듯이 그것들을 닦고 정리합니까?’ 그 늙은 집사가 물음으로 대답했다. ‘그럼 신부님은 그런 맘을 가지고 미사를 집전하지 않으십니까?’ 그 늙은 신도가 하는 그것이 곧 예배요 미사요 제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제사가 많았다. 매달 있었던 듯하다. 그 때가 되면 할아버지의 지시로 미리 집안 여기저기를 깨끗이 청소하였고, 길을 쓸었고,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였고,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마련할 때도 잡담을 하거나 깔깔거리고 가볍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모든 음식은 간결하지만 깔끔하고 정갈하게 차리게 하였다. 밤 열두 시 넘어서 드리는 제사까지 어린 우리에게도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시간이 임박하면 도랑에 나가 찬물로 얼굴을 씻게 하였다. 그날 제사를 받기 위하여 오는 조상신을 거북스럽게, 불편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상을 차리고 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기다리고 하는 일이나 다 끝난 뒤 음식을 같이 나누는 일이나, 이웃에게 제사음식을 나누어 드릴 때까지도 아주 거룩하고 엄숙하게 일을 치렀다. 멀리 있던 조상신이 그날 당신의 제삿밥을 드시기 위하여 오실 때 기쁘고 행복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제사하는 맘이라는 것이었다. 제사는 한 마디로 희생을 드리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조상님이 생시에 자녀들에게 하였다는 교훈되거나 좋은 일에 대한 회상을 하고는 하였다. 그렇게 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린 나에게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 말씀들을 그날, 제삿날 하루만이 아니라, 보통 때도 실천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제사를 거룩하게 하는 사람들도 일상에서는 다투고 욕하고 거짓말하고 지저분하고 속이고 도둑질하고 욕심을 부리고 악을 쓰면서 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제사 때가 되면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거룩해 진 듯하였다. 그런 말을 그 때는 몰랐지만, 저런 것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여 사는 삶, 정직하고 솔직하지 못한 거짓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자기분열의 삶을 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뒤 내 삶도 그렇게 분열되고 분리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보면서 반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삶은 제사와 일상이 비슷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린 때도 가졌었던 싶다.


 
아무튼, 아주 오랜 옛날에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다고 한다. 사람들의 지성이 깨이고, 삶이 복잡하여지면서 이 둘은 갈라서게 되었다. 지금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또 한 면으로는 아쉬움도 있다. 다행이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가 되어 있는 동안 매우 큰 폐해가 심했던 것이 사라진 것이고, 아쉬운 것은 정치나 종교는 둘 다 희생을 드리는 것, 곧 제사였다는 것이 사라진 점이다. 잘하는 정치나 종교행위는 곧 하늘에 드리는 제사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섬기는 제사행위였기 때문에, 지금은 두 곳에서 이런 것들이 사라진 것이 아쉬움이란 말이다.

현대는 정치의 시대요, 지금은 정치의 시절이다. 종교성이 사라지고 제사가 없는, 마치 다스림과 통치만이 정상인 것처럼 된 시대다. 나는 정치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만, 그런 사회가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정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같이 모여 사는 사람들이 꾸리는 자치생활이다. 자기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아주 다양하게 얽힌 그물망으로 조직된 자치조직을 통한 공동생활, 즉 모두가 모두를 섬기는 그런 공동자치생활이 되면 좋겠다는 맘이다. 그러려면 역시 어떤 깊은 철학과 종교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 말 속에는 자치생활로 이루어지는 공동생활 자체가 하나의 제사행위, 곧 희생을 바치는 생활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모든 의식의 근본이 되는 근본의식, 하늘이라거나 도라거나 사리라거나 자연이라고 흔히 말할 수 있는 개인을 초월한 보편의식이 있다고 본다. 그것을 계발하고 존중하며 섬기는 전제에서 공동생활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거짓이 아니라, 진정으로 드리는 제사와 같은 거룩한 자치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그렇다면 지금 정치시절에 떠도는 스스로 영웅이라거나 위대한 영도자라는 착각에 빠진 정치중독자들을 구제하는 일이다. 한두 가지 허울에 속아서 인간의 속 바탈을 잃어버린 데서 벗어나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정치를 하겠다고 떠들기 전에 ‘네 맘을 길러라’ 하는 말을 일반 시민은 그들에게 요청해야 한다. 편협하고 의도를 가지고 편파방송을 하는 사이비 언론에 혹하여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가랑잎 같은 줏대 없는 존재가 아니라, ‘나는 나다’ 하는 맘과 ‘내 줏대에 따라 판단한다’는 아주 냉정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시민, ‘내가 곧 제사를 받을 존재다’라는 도도하고 당당한 의식을 가진 차가운 시민의 자리로 갈 때 정치망둥이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정치는 제사행위라야 한다. 시민앞에 정치풍각쟁이들이 차리는 제사상과 자세와 맘을 읽을 수 있는 시민으로 존재할 때 바른 정치는 자리를 잡지 않을까?

2021/05/29

알라딘: 씨알 생명 평화

알라딘: 씨알 생명 평화
씨알 생명 평화 -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이규성,이기상,유헌식 (지은이),씨알사상연구회 (엮은이)한길사200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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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절 확인일 : 2011-02-24

656쪽
책소개

씨알사상연구회 월례 연구발표회에서 발표된 글 가운데 19편의 논문을 가려 실은 책. 민주화, 평화를 위한 운동가, 종교인, 문필가등으로 널리 알려진 함석헌의 철학자적 사상가적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에 천착하고, 그것을 정갈한 순우리말 표현, 사회적 운동으로 실천한 함석헌의 삶과 그의 사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지은이들은 다양한 글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왜 함석헌 사상을 연구해야 하는가 -박재순

제1부 생명의 본질은 스스로 함이다
심정과 자유의 철학 - 이규성
생명의 진리 - 이기상
씨알의 생명사상 - 박재순
문명비판과 초월적 자연주의 - 유헌식
자연과 자유 - 양명수
씨알사상과 진정성의 윤리 - 박소정
비폭력 평화정신 - 김영호
개혁적 반전 평화주의 사상 - 정지석

제2부 씨알, 오천 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나타난 '민족' 개념의 신학적 성찰 - 이정배
역사적 사실에 나타난 신의 섭리 - 김기승
함석헌의 '뜻으로 본 세계역사' -김상봉
함석헌과 우치무라 간조의 '두 개의 J' - 양현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어떻게 쓰였을까 - 이치석

제3부 나는 빈들의 소리요 바람이라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 - 김경재
씨알사상에 대한 종교적 접근 - 김명수
함석헌의 성서적, 한국적 영성과 문화신학 - 최인식
함석헌과 샤르댕의 사상 - 이병창
무교회 정신이 이끈 삶 - 백소영
함석헌과 간디 - 허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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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
책속에서
함석헌의 사상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나'와 '전체'가 소통하고, '생각하는 생각'과 '생각나는 생각'이 소통하고, '본능'과 '바탈'이 소통하고, '인위'와 '무위'가 소통하고, '스스로 함'과 '저절로 함'이 소통한다. 그래서 자연과 자유는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종합된다.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함석헌이 말하는 자연에 저항적 자유의 성격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자연과 자유' p207 중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인의 민족적 반성과 회개의 책이지만, 함석헌이라는 지성 개인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개 부분은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 일반에 대한 서술에서, 그 자신을 지식인에 포함된다고 본다면, 그 자신의 참회와 회개의 기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해방을 기존의 지식인, 엘리트의 것, 즉 자기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아니라 민중의 것, 씨알의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적 사실에 나타난 신의 섭리' p346 중에서  접기
추천글
'고난의 역사'에 핀 '대자유'의 꽃 - 고명섭 (<한겨레> 문화부장《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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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규성 (지은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89년부터 2017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2016),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2012),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2011), 『생성의 철학: 왕선산』(2002), 『내재의 철학: 황종희』(1994)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 더보기
최근작 : <중국현대철학사론>,<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마음과 철학 : 유학편> … 총 1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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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상 (지은이)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그 뒤 독일 뮌헨 예수회철학대학에서 철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로 1984~2012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초대회장이었으며, 현재 우리사상연구소 소장이다. 1992년 열암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1994년 한국출판문화상 번역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저서로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철학노트』, 『콘텐츠와 문화철학』, 『... 더보기
최근작 : <소통과 공감의 문화콘텐츠학>,<동서양 철학 콘서트: 서양철학 편 (대활자본)>,<동서양 철학 콘서트: 서양철학 편> … 총 31종 (모두보기)
유헌식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대학 철학부에서 「헤겔의 역사적 사유에 나타난 새로움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헤겔철학 논문집 『역사이성과 자기혁신』, 입문자를 위한 철학 안내서 『철학 한 스푼』, 소설 작품을 철학의 시선으로 해석한 『행복한 뫼르소』를 출간했으며, 공동 작업으로 ‘통합적으로 철학하기’ 시리즈 세 권(『호수에 비친 달은 외로울까: 고독』, 『흔들려야 날갯짓한다: 성장』, 『죽음아 날 살려라: 죽음』)을 펴냈다. 크로너의 『헤겔』과 앙게른의 『역사철학』을 번역했으며, 독일관념론, 문명론, 철학의 일상화, 문예비평이 관심 ... 더보기
최근작 : <나를 찾아가는 철학여행>,<행복한 뫼르소>,<동서의 문화와 창조> … 총 17종 (모두보기)
SNS : yoorius@dankook.ac.kr
씨알사상연구회 (엮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2001년 함석헌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2002년 5월에 '씨알사상을 연구,보급하여 자유로우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인류사회 형성과 생명 문화 창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박재순 박사가 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이문영, 김경재, 문대골, 김영호, 곽분이, 김조년, 김성수, 최정윤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함석헌기념사업회의 지원과 협력으로 매달 연구 발표회를 가졌고 매년 함석헌 탄신을 기리는 학술대화마당을 열어왔다.
최근작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씨알 생명 평화> … 총 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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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님의 사상 새창으로 보기
 
한동안 우리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분이 함석헌 선생님입니다. 1980년대까지 특히 197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을 하시면서 한국의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십니다. 이젠 세상도 많이 달라지고, 그분의 글에서 느껴지는 고어체도 약간 적응이 안되어, 잊혀져가는 옛 선각자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한번씩은 그분의 씨알의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기는 하지만요. 얼마전 서점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새로 출간된 것을 보고 무척 반가왔습니다. 그러다 함석헌 선생님에 관해 연구한 글들 중 중요한 글들을 모은 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분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두에 박재순님이 쓰신 왜 함석헌 사상을 연구해야 하는가라는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근대한국이 가진 사상가로 부를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분이시고, 그분이 말씀하신 생명사상은 동양의 정신으로 새로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담고 있는 커다란 그릇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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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라 2007-04-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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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6

학술논문, 석사논문, 에세이,잡지기고문 2002-2003 > 연구논문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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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학술논문, 석사논문, 에세이,잡지기고문 2002-2003
작성자 바보새 15-09-13 02:13 조회4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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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논 문 제 목 연 도 수록지
2002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관 2002.12 씨알사상연구회
김경재 한국신학의 태동과 흐름 2002.2 기독교사상(대한기독교서회)
김성수 함석헌과 노장사상 2002. 봄·여름 한국문화연구 제2호(이화여자대학교)
김영일 함석헌선생과 배움터 2002.3,4 씨알의 소리
김영호 함석헌의 같이살기 운동 2002.1,2 씨알의 소리
김용준 내가 본 함석헌 2002.6.18-연재 대학신문 (2002.6.18부터 연재)
김윤석 함석헌의 기독교사상에 관한 고찰 2002 전주대 선교신학 대학원 석사논문
김진 함석헌 사상의 신학적 유산 1,2 2002.9-10 기독교사상(대한기독교서회)
김치홍 함석헌의 민족정신과 우찌무라 간조 2002.11월 씨알사상연구회
東西저널 사상가 함석헌 : "민중이 깨어나야 나라가 살고 하나님 사랑도 얻게 될 것이다" 2002.4 東西저널 (월간동서저널)
박세훈 함석헌의 기독교사상 연구 :한국토착교회사관을 중심으로 2002 감리교신학대 대학원 석사논문
박재순 유영모 사상의 사상사적 위치와 현대적 의미 2002.7월 씨알사상연구회
박재순 함석헌의 씨알정신과 평화운동 2002.8월 씨알사상연구회
방석종 예언자 함석헌 선생 (원문) 2002.8.28. 기독교신문
서굉일 함석은 연구 2002.10월 씨알사상연구회
이거룡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 인도사상까지 2002.4 민족의 큰사상가 함석헌선생 (한길사)
이황직 근대 한국의 윤리적 개인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한 연구;정인보,함석헌,백석,윤동주를 중심으로 2002 연세대 대학원 박사논문(국회도서관)
진영일 함석헌의 한민족의 세계사적 사명 2002.12 公州敎大論叢 39-2호(공주교육대학교)
최영묵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 연구 2002 목원대 신학대학원 석사논문(국회도서관)
2003
김경재 함석헌의'역사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2003.1.11 교수신문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이해 2003.5,6 씨알의 소리
김경재 함석헌의 나선형 역사 이해 2003.여름 (하나님·사람·자연이 숨쉬는)샘 20호(한생명)
김삼웅 함석헌의 저항정신 2003.2월 씨알사상연구회
김삼웅 거짓예언자 함석헌' 위서 2003.8 책과 인생 116호
김용준 내가 만난 함석헌 선생님 2003.봄 사이2호(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김조년 함석헌과 한국의 사회운동 2003.9월 씨알사상연구회
김창규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1) , (2) 2003.9,10 희망세상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영신 함석헌 씨알사상의 생태유아교육적 함의 2003 부산대학교 대학원 유아교육학과 석사논문
박재순 함석헌의 민주정신 2003.3,4 씨알의 소리
석경징 함석헌의 펜들힐 명상과 무정부주의 2003.6월 씨알사상연구회
양현혜 함석헌과 우찌무라의 '두 개의 J' 2003.7,8 씨알의 소리
유헌식 씨알의 민주성에 대한 몇가지 단상 2003.3,4 씨알의 소리
이기상 다석 류영모의 인간론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2003.7월 씨알사상연구회
이문영 씨알이 연 새시대 2003.4.25 4.3제주 민중항쟁 컨퍼런스(미 하버드대)
이문영 씨알이 연 새시대 (영문) 2003.4.26 4.4제주 민중항쟁 컨퍼런스(미 하버드대)
이윤구 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시다면 2003.10월 씨알사상연구회
이치석 20세기 전쟁폭력과 씨알교육 2003.4월 씨알사상연구회
장동민 21세기를 위한 평화주의자 함석헌("Ham Sokhon, a Pacifist for the Twenty-First Century") 2003.봄 백석저널-백석기독학회
장성환 咸錫憲 翁을 생각한다 2003.1.21
장성환 다석과 씨알 2003.1,2 씨알의 소리
장회익 온생명과 함석헌 생명사상 2003.11,12 씨알의 소리
주낙황 함석헌의 종교사상에 관한 연구 2003 동아대 대학원 석사논문(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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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만남 속에 있음- 함석헌과 존재의 문제- /김상봉 바보새 04-19 3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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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학술논문, 석사논문, 에세이,잡지기고문 2019 바보새 02-29 282 0
136 학술논문, 석사논문, 에세이,잡지기고문 2018 바보새 02-29 257 0
135 함석헌의 생명교육론 고찰/한송희 바보새 02-28 27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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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세계화 시대 인권으로 보는 함석헌 씨알사상의 실천윤리적 성격과 교육적 함의/박형빈 바보새 07-08 408 0
126 함석헌의 소리/서보명 바보새 07-08 356 0
125 ‘누에의 철학’과 ‘철학의 형상화’/서보명 바보새 07-08 307 0
124 함석헌 생각/서보명 바보새 07-08 418 0
123 함석헌과 에머슨/서보명 바보새 07-08 356 0
122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잠재태로서의 씨알종교공동체/이호재 바보새 10-31 486 0
121 함석헌의 종교사상에서의 '새로움'과 한국적 종교영성의 가능성/dlghwo 바보새 10-31 386 0
1 2 3 4 5 6 7 맨끝

2021/05/18

[김조년] 좋게 경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좋게 경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좋게 경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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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일보] 또 한 번 대전체육고등학교 학생들 몇 명을 만났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답하기 더 어려운 질문을 받았다. ‘운동선수들인 저희들은 늘 경쟁하는데, 그러다가 서로 미워할 수도 있고, 상처받고 힘들기도 합니다. 경쟁을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경쟁의 끝은 곧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경쟁은 삶을 매우 피폐시키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일상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을 다 안다. 경쟁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 즐겨서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다 안다.

결국 경쟁이란 이기는 자나 지는 자 모두를 만족스럽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다 안다. 그렇게 경쟁하는 동안 인간의 아주 훌륭한 덕목을 무수히 많이 잃고 메마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도 다 안다. 어느 항목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하여 늘 그런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다 안다. 그런데 경쟁할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하면 경쟁을 피할 수 없는 강제상황에 처하여 있음을 인식할 때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질문은 운동선수 활동을 하는 고등학생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 외침이다.

나는 그렇게 질문한 그 학생이 얼마나 많이 경쟁에서 만족하였고, 또 쓰라린 아픔을 경험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일단 경기장에 투입되는 순간 물리치고 눌러야 할 적으로 돌변하는 현상을 항상 가슴 아파하였다는 것을 그 질문을 통하여 금방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질문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째로 바꾸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는 핵심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일생동안 우리가, 전체 인류가 생각하고 고민하여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그 질문은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다.

나는 물론 경쟁사회를 무척 싫어한다. 이제까지 나는 치열하게 경쟁해서 이겨본 적이 없다. 그럴 맘이 없어서 경쟁을 피했는지, 경쟁에서 이길 수 없으니 경쟁체계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모른다. 운동회 할 때 100m 달리기에서 3등까지 주는 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도 그만큼 똑같이 달렸는데, 그 등수 안에 들지 못한다고 아무 상도 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언제나 불만이 많았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사람에게 우등상이나 어떤 상을 주는 것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잘하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자신은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인데 왜 또 상을 주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으로 또 진학할 때 이득을 보는 수도 있는데, 그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하면 잘한 것이지, 그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칭찬받는 상을 받아 좋아하고, 박수를 받아야 할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경쟁체제를 싫어한다. 물론 학교에 간다거나 어떤 시험을 볼 때는 어느 정도의 경쟁에서 약간 우위에 있어서 합격한 적도 있지만 이른바 치열한 경쟁을 하여 이겨서 만족스러워한 적은 별로 없다. 그러니까 나의 경우 경쟁을 피해도 되는 삶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삶의 여정이나 상황에서는 막연히 경쟁은 좋지 않고 사람들을 깊은 부담과 상처 속에서 살게 한다고 느껴 그런 경쟁체제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삶을 위하여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경쟁체제 속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경쟁스트레스와 경쟁트라우마의 깊음을 나는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하나밖에 없는 메달이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그것을 획득하느냐 못하느냐는 것이 그의 삶의 진로를 결정하는 하나의 길이라고 배우고 느끼고 알고 있는 제도 속에서 아름다운 경쟁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경쟁 속에서는 아름다움은 나오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경쟁에 이기기 위하여 놀라운 기술이 개발되고 능력이 발휘되어 그것을 성취한 당사자와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경쟁하여 이기고 진다는 그 과정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단 말이다.

사실 나는 올림픽의 구호라고 하는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라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0.01초 더 빨리 달렸다고 하여, 1㎝ 더 높이 솟고, 더 멀리 뛰었다고 하여, 그나 그것을 심판하고 보는 사람들에게나 또는 인류에 더 질높은 삶을 보장하여 주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을 알지만, 그런 질문을 한 학생도 다 알겠지만, 그 앞에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는 노자의 말을 할 수도 없고, 좀 다른 위치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무수히 많은 장자의 이야기로 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경쟁체제가 있는 한, 그 속에 몸을 담고 있는 한 경쟁하지 않을 수 없고, 경쟁하되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아픔을 주지 않고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하고 고뇌를 말하는 그에게 만족스런 답을 우리 사회는 주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하나밖에 없다. 경쟁체제 자체를 없애는 길이다.

왜,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경쟁은 어느 누구에게도 질높은 삶을 보장하여 주지 않는다. 경쟁체제는 그 속에 들어간 사람들을 놀리는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와 학교, 지역과 지역,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경쟁시키는 자체도 옳지 않다. 스포츠라는 이름의 정치행위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경쟁놀이도 옳지 않다. 그래서 너무 일찍 경쟁체제에 몰입하게 하는, 경쟁을 통하여 진학하는 입시제도를 없애야 한다. 자유롭게 입학하되, 여러 가지를 경험하여 자기에게 맞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경쟁을 통한 선발은 가장 낮은 수준의 선발방법이라고 본다. 좀 더 즐길 수 있는 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길로 방향이 바뀌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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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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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 약속 - 해병대에서 신학원까지  |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1  
김경일 (지은이)쇠뜨기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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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381쪽

목차
프롤로그

1부_____나의 해병대 시절

1. 안경을 껴도 해병대 13
2. 변비는 젓가락으로 17
3. 특수부대에 안경은 안 돼 21
4. 제대 말년 병장의 탈선 23
5. 드럼통처럼 구르다 진해훈련소 수료 26
6. 너희는 잔칫날 돼지 29
7. 곡괭이 자루는 마술몽둥이 31
8. 이별 앞에 소녀처럼 우는 소대장 35
9. 졸보기는 서러워 38
10. 산천초목도 떠는 해병대 예비역 41
11. 대못은 손으로 박아야 제 맛 46
12. 기독교인이 되어야겠다 50
13. 졸병부터 선착순 55
14. 포크로 파리를 잡냐? 60
15. 하극상에 배빠따 67
16. 일곱 번 기절하고 돌아온 소대장 74
17. 작전참모 약혼녀를 즐겁게 하라 78
18. 졸하사, 제 머리를 돌로 치다 81
19. 해병대의 가을 체육대회 84
20. 나 살고 싶어 87
21. 쌍둥이 가수의 위기탈출방법 91
22. 연평도 겨울바다는 옴도 녹인다 95
23. 적함이 나타나기만 기다리는 나날 97
24. 소대에서의 마지막 식사 103
25. 분노조절장애 109
26. 해병대 트라우마 115
27. 도피처가 된 연극반 121
28. 수상 관상 사주 124
29. 위험한 술집 순례 127
30. 성경구절이 춤을 춘다 130
31. 총장 사퇴 주역 134
32. 긴급조치 복학생 백남기 141
33. 성공회 전국청년연합회 회장당선 156
34. 하느님이 날 데려갈 모양이다 163

2부 교회 개혁 이야기

35. 대한성공회 신학대학원 입학 181
36. 신학원 동기 이춘기 189
37. 서대문 경찰서 탐방 197
38. 함석헌 선생님을 만나다 210
39. 콘트랄데이타 사건 224
40. 일본에서-1 233
41 일본에서 ?2 245
42. 일본에서-3 254
43. 주교님의 조찬기도회 참석을 막아라 266
44. 어차피 지는 싸움 278
45. 동생 경희의 신학교 입학 288
46. 사제들의 교회개혁운동 가담 293
47. 몸도 마음도 지치고 306
48. 주님의 음성 315
49. 고해성사는 예수원에서 320
50. 이현주 목사님의 공존모임 329
51. 책도둑놈 337
52. 마지막 인사 351
53.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떠나간 친구 360

에필로그 372
추천사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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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프롤로그

2016년 3월 28일 해군참모총장에게서 전자우편으로 법원에서 우리 교회로 소장이 날아왔다. 많은 평화운동가들과 시민운동단체들과 함께 말이다. 당시 ‘생명평화결사’의 임원을 맡고 있던 나와 내가 속한 단체에 대해서도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1970년대 하반기에 해병대 졸병으로 제대한 나에게 해군참모총장이 소송의 원고로서 법적으로 말을 걸어온 셈이다. 생명평화운동조직이 ‘해군기지건설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선동하고 방조한 혐의로 피고가 되었다.
이런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자 해군과는 이상하게 악인연이라는 생각이 들며 내 몸 어딘가에서 부터 활화산의 용암처럼 뜨거운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군대 트라우마의 악몽 때문에 청춘의 기억에서 지우려고 몸부림쳤던 해병대 시절의 40여 년 전 과거가 다시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다. 해군참모총장의 손해배상소송으로 말미암아 입대 명령을 받고 입영한 신병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라고나 할까. 눈을 뜨고 있든 감고 있든 다시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갇힌 셈이 되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당시의 끔찍한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되는 모험을 치루더라도 정면돌파의 방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일상생활 속에 출몰하는 고질병인 군대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 치유되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당시의 일을 글로 써서 정리하는 것이다. 이것도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의 한 방법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8개월에 불과했던 해병대생활을 페이스북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느낀 놀라운 사실은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옛날의 기억들이 여전히 나를 뿌리에서부터 지배하고 있었고 나는 아직까지도 군대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억의 감옥에 갇혀 자유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국가로부터 제대명령은 받았으나 여전히 재입대 명령의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 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핑계라고 하겠지만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인 언행과 행동 생활패턴은 상당부분 군대생활에 기인한 것이다.

해병대 이야기의 페이스북 연재를 끝내고 나는 자연스럽게 1982년 3월에 신학원에서 만난 내 친구 ‘이춘기’를 기억에서 다시 불러내게 되었다. 같이 살 때는 잘 몰랐지만 그 역시 군대트라우마에 갇힌 채 그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춘기는 광주 상무대에서 병으로 군대생활을 하면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총을 들고 시민들과 대치하면서 직접 몸으로 겪었다. 공수부대에 밀려 쫒긴 시민군들이 도망쳐 모여 있던 조선대 뒷산에서 총에 맞아 죽은 시민군들의 시체 나르는 일을 하며 그는 심한 정신적 내상을 입었다. 소속 군대도 달랐고 겪은 상황과 체험도 달랐지만 동병상련의 관계였던 것이다.
비록 40여 년 전의 옛이야기지만 신학원 동기로 함께 생활한 친구 이춘기와의 이야기를 해병대 이야기 다음으로 이어 쓰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서 나의 깊은 병의 실체를 만날 수 있었고 또 치유의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이 글은 나의 깊은 내면에 또아리 틀고 들어앉아서 매번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격려와 결단의 용기를 주고 있는 내 친구 춘기에게 바치는 글이다.  접기
에필로그

1984년 12월 17일.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맹렬하게 타는 불이면서 동시에 섬광이 번쩍이는 칼로 존재했던 춘기는 그렇게 거짓말처럼 이 세상을 떠버렸다. 헤어질 때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만나자’던 춘기가 시체로 누워 있는 그 방안! 춘기 부모님과 누나와 친구들이 모두 모여 황망함과 서러운 울음으로 가득 찬 그 공간에서 나는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춘기야. 너 같은 놈이 우리 곁에 살아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록해 이 세상에 남겨주마.’라고. 당시 그 누구도 나의 이 약속을 귀담아 듣지는 않았겠지만 이제 나는 그 약속을 4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지킨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올곧았던 춘기! 피칠갑을 한 민중들이 온몸으로 내지르는 비명과 울음 끔찍한 죽음을 가슴에 새기고 일상으로 돌아온 춘기의 역사 앞에서의 몸부림은 우리마저도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자기 개인은 물론 그 어떤 것도 다 무시하고 오직 대의만 생각했던 춘기를 기억에서 도저히 지울 수 없었던 우리는 그의 교회갱신에 대한 불붙는 열정과 뜻을 기리고자 우리가 사제가 되기도 전 떠돌이 생활을 할 때부터 매년 추모미사를 드려왔다. 생때같은 녀석이 한이 맺혀 죽은 탓인지 이상하게도 춘기의 기일에 모이기만 하면 우리는 악령에 휘둘리듯 매번 크게 싸웠다. 20주기가 되었을 때 추모미사를 더 이상 드리지 말자고 어려운 결정을 하기도 했다. 10년을 쉬었다. 그러다 30주기부터 다시 모여 추모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교단내부에 사회의 지탄을 받는 큰 부정이 연이어 터지면서 서울교구 주교가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직무정지를 당해 중도하차하는 충격적인 상황이 왔다. 사제들과 교우들은 교회의 자정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에 대해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사제와 평신도들이 좀 더 깨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교 탓만 할 게 아니었다. 결국 문제가 된 주교도 우리 교회 안에 있던 우리가 배출한 우리들 중의 하나다. ‘주교의 교회’에서 주교가 주교노릇을 잘 해 낼 수 있도록 주교를 잘 모시고 넘어지지 않게 지탱하는 존재도 실은 사제와 평신도들이다. 교회가 이렇게 어려워진 책임은 사제인 나에게도 있다. 좀 더 잘못되기 전에 직언도 하고 저항도 할 만큼 했어야 했다. 정의감이 가장 강한 나이의 피 끓는 젊은 신학생들과 신학원생들 조차 성명서 하나 발표하지 못하는 이 답답한 현실이 나이 먹은 우리 세대의 책임임을 부인할 순 없다. 무엇보다 평신도들은 이미 교회는 희망이 없다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린 건 아닌지 우려하게 된다. 그래서 그 옛날 80년대 초 신학원 시절의 ‘이춘기’란 존재를 다시 역사 앞에 불러내게 되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 글은 80년 대 폭압적인 전두환 정권하에서 교회가 민주화와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20대 교회젊은이들에 관한 기록이자 교회에 대한 사회의 기대가 많이 소멸된 이 시대를 향해 길게 쓴 성명서이자 사죄문이라 할 수 있겠다.

시간이 갈수록 기록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누구든지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역사로 기록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지금 교회의 전반적 현실을 보면 사회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가기는커녕 한국사회에서 지탄을 받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 기독교의 본질을 뿌리 채 잃어버리고 민중의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작금의 현실을 기록으로 꼭 남겨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래야 역사에서 또 다시 같은 시행착오를 범하는 우를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후세를 위해서, 또한 아직 미련이 남은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이라고 믿는다.

부언. 첫째, 해군참모총장의 제소에 의해 제기된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손해배상재판은 문재인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의 조정으로 별 문제 없이 해결되었다.
둘째, 나의 해병대 이야기에 등장하는 계급이 대령이었던 연평도 부대장은 결국 비리가 드러나서 별을 달지 못하고 이병으로 불명예제대를 했다고 들었다. 아무 반찬 없이 간장에 밥을 비벼먹으면 밥이 목구멍을 타고 도로 넘어온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해 준 그 부대장이다. 10년 전 동창모임에서 만난 법대 동기가 내가 제대한 직후 해병대 장교로 연평도에 들어가 근무하면서 그 사실을 목격했다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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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복절도하도록 배꼽 잡는 웃음과 흘려도 흘려도 마르지 않을 눈물과 하늘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을 하는 분노의 폭발과 땅을 치며 한스러워하는 삶 속에서 특정한 틀에 매일 수 없는 자유혼이 우리에 갇혀 몸부림치는 퓨마의 절규처럼 쏟아내는 진실을 나는 이 책에서 보았다. - 김조년 (한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 ‘씨알의 소리’ 편집주간) 
돈이 만능인 시대에 올곧은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김경일 신부는 기독교계의 ‘이단아’이다. 그가 가진 신앙관이나 성서의 지식이 이단이라서가 아니라 가난과 복음의 삶을 살았던 예수의 길을 외면하는 기성교단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습이 낯설어 보이기 때문이다. 닟설다는 것은 은연중 우리 모두가 기득권의 일탈을 묵인 또는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성공회에서 벌어진 신부님의 좌충우돌 체험담은 사실 우리 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상파괴 작업이고 참 종교를 찾아 떠나는 여행기이다. - 황대권 (한국생태마을공동체네트워크 자문단장) 
독교 지도자로 지향하는 바가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는 식사 자리 몇 번밖에 가진 바 없는 나에게 추천의 글을 써 달란다. 책 이야기 속에 내가 설 자리는 한 군데도 없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어떤 동질감을 느꼈는지 나에게 추천의 글을 부탁한다. 몇 번 책 발간 추천의 글을 써 본 적이 있지만, 뭐라고 써야 할지 막막하다. 시대 역사서로 구분할지 아니면 참회록으로 분류해야 할지 경계선이 모호하다. 그러나 한 가지 만은 분명하다. 저자가 이미 밝힌 대로 이 글은 매우 사적인 글이긴 하지만, 80년대 전두환정권의 폭압 아래서 예수의 정신을 올곧게 지키고자 노력했던 투쟁의 기록으로 오늘의 신앙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거나 나눔이다. 물론 저자 개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기록이니 분명 오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70을 바라보는 인생의 후반기에 이런 책을 내는 것을 명예욕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는 온전히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20대 청년의 뜨거운 심장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발로이다.
꼭 한 마디를 더 하고 싶다. 남자치고 군대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고 나 또한 군대라면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철책선에서 육군 졸병으로 근무하였기에 할 얘기도 많다. 그러나 저자의 해병대 경험에는 전연 비할 수가 없다. 놀라운 기억력에 탄복한다. 글을 읽다 약속시간을 어겨버렸다. 내가 언제 이렇게 남의 글에 흠뻑 빠져본 적이 있었던가? 귀를 흘리는 말솜씨가 좋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심금을 울리는 글 솜씨 또한 탁월하다. - 조헌정 
여기 이 기록들은 정암이 온몸으로 쓴 젊은 날의 어두운 시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자 그것들에 맨몸으로 맞서 부서지고 깨어지면서도 용케도 버텨내고 살아온 한 사내의 처절한 서사의 단편이다.
무엇이 작고 여린 이 사내를 그렇게 맞서게 하고 또 버텨오게 한 것일까. 어떻게 그런 사내가 또 사제의 길을 택하여 여태까지 걸어올 수 있었을까.
불의한 것들에 온몸으로 부딪쳐 깨어지는 그것이 그의 삶을 지탱해온 신앙이자 사제의 길을 이어가는 신비인지도 모른다.
정암, 작은 체구의 큰 사내가 걸어온 옹골차고 치열한 지난 삶에 위로와 격려를 보내며 남은 사제의 길에 더 깊은 평화가 함께 하기를 마음 모은다. - 이병철 (시인, 생태귀농학교장) 
어거스틴 경일 신부가 두툼한 원고뭉치를 건네며, 이번에 자서전을 내게 되었는데 읽어보고 한 마디 소감을 써달란다. 대강 읽어본다. 자기 말대로, 본인도 이해되지 않는 이른바 과격한 언사와 행동들이 젊은 날의 그와 그의 주변에서 숨 가쁘게 펼쳐지고 있다.

한님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시는 방법이 참으로 가지각색이구나,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실감할 것이다.

거두절미,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 곧 그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바울로의 고백이 경일 신부의 참회록에서 입증되고 있음을 축하한다.

마침 우연찮게 인도의 어머니(The Mother)가 자식들에게 주는 말씀을 읽었는데 그대로 전해주어야겠다. (경일아, 그분이 꼭 너 들으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 같구나.)

―네가 시방 그 몸으로 이 땅에서 사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단다. 할 수 있는 대로 깨어서 네 몸을 한님의 온전한 도구로 쓰이게 하는 거지. 그분은 너한테서 무엇을 이루시려고 필요한 정신적 육체적 요소들과 주변 환경을 고루 갖추어주셨어. “아, 끔찍한 내 인생!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한 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 모두가 멍청한 당나귀다! 누구나 자기를 완벽히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생명이 있고, 자기를 완벽히 발전시키는 데 도움 되는 경험들이 있으며, 자기를 완벽히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온갖 어려움들이 있는 법이다.
너 자신을 자세히 보렴. 너만의 것인 특별한 목적과 특별한 사명이 있고, 그것들을 완벽히 실현하도록 돕는 데 없으면 안 되는 온갖 어려움들이 네 속에 있는 걸 보게 될 거다. 네 속에 빛과 그늘이 똑같이 있고, 좋은 힘과 안 좋은 힘이 함께 있는 것도 보게 될 거야. 네 속 어디에선가 커다란 어둠이 보이거든 거기 어딘가에 커다란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드물긴 하다만, 이거야말로 세상에서 으뜸으로 중요한 진실이란다. 네가 너를 자세히 보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래서 우리가, 예를 들어, 가장 큰 도둑이 가장 착실한 사람이고 가장 큰 거짓말이 가장 정직한 말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도둑이 되라는 말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지?) 그러니 네 안에서 큰 약점이 보이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라. 그게 가장 신성한 힘이 네 안에 있다는 증거일 수 있거든. “난 본디 그런 놈이야. 어쩔 수 없어!” 이런 말도 하지 마라. 그렇지 않아. 네가 ‘그런 놈’인 건 정확하게 ‘안 그런 놈’으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겪는 온갖 어려움들도 그것들을, 그것들 속에 감춰놓은 진실로 바꾸는 법을 배우기 위한 거야.
한번 이 진실을 깨친 사람은 수많은 염려들이 사라지면서 아주, 아주 행복해지지. 자기 안에서 커다란 그늘이 보이면 “내가 꽤 환해지겠군!” 하고, 자기 안에서 깊은 구렁이 보이면 “내가 아주 높이 기어오르겠군!” 하는 거라. 그런 사람을 누가 실망시킬 수 있겠니? - 이현주 (목사) 
저자 및 역자소개
김경일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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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부산출생. 중앙대 법대 졸. 중앙대 신문학과 대학원 수료. 성공회 신학원을 졸업하고 10년 만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광주에서 13년간 사목하고 2019년 10월 12일 정년 은퇴했다. 자서전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_약속’을 2019년 3월 20일 출간했다.
최근작 :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2 : 소명>,<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 약속> … 총 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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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2 : 소명 - 지하철 노가다에서 부제서품까지  |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2  
김경일 (지은이)쇠뜨기2020-07-30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2 :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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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343쪽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2 : 소명 - 지하철 노가다에서 부제서품까지

목차
프롤로그 9

1부 민중이 되어서 민중으로 살자

1. 눈물은 떨어져도 숟가락은 올라가야 17
2. 상사병 31
3. 경찰서장에게 차를 부탁하게 42
4. 보고 또 보고 51
5. 산 넘어 산 61
6. 임을 위한 행진곡 70
7. 철없는 신랑 79
8. 성직고시 89
9. 과거가 좋았던 사람들 98
10. 망미동 성자 107
11. 왕의 얼굴 신미장 116
12. 다시 예수원행 128
13. 출판 사역 141
14. ‘더불어 함께’ 창간호 발행 150
15. 천국놀이 162
16.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170
17. 농민이 되자 178
18. 파국 187
19. 당신 꼭 실성한 사람 같아 196
20. 돈벌이에 나서다 206
21.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 216
22. 자해 공갈 227
23. 빵쟁이 성직자 236

2부 교회 복귀

24. 청주성당 시보전도사 247
25. 초평교회 전도사 발령 272
26. 새 성전 건립 278
27. 초상집 순례 287
28. 억울한 누명 296
29. 억지 화해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304
30. 죽음 각인 317

에필로그 330
추천사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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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작년 3월에 출판한 자서전 1부는 해병대 시절부터 신학원 다니던 시절까지 썼다. 이번 책은 자서전 2부에 해당한다. 이 책은 신학원을 졸업하고 교회에서 말썽을 부리다 쫓겨나 사회 여기저기를 5년간 전전하다 다시 교회에 복귀하고 부제서품 받기까지 겪은 일을 기술한 책이다. 나는 신학원 학생 시절에 교회갱신운동을 하다 교회에서 쫓겨났다. 5년간 사회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교회로 복귀했다. 사회를 떠돌던 그 5년이 내 인생에는 반드시 필요한 세월이었다. 흔히 민중으로 불리는 그분들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교회 밖 그 노동의 현장에서 참으로 지혜롭고 존경할 수밖에 없는 묵직하고 향기 넘치는 스승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당시의 내 삶도 그분들의 인품과 감화에 의해 그나마 건강했음을 확신한다. 종교의 세계로 돌아와 사제가 되어서는 오히려 그런 품격 있는 분들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민중들의 고된 삶에서 종교를 느꼈다. 사제 생활 25년 동안 실제로 경험한 종교계는 땀 흘려 일하는 민중들의 삶보다 아름답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다.
성직 훈련 과정에서 부제서품을 받기까지 전도사로 일한 3년간 내가 겪은 일은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 중에서도 시보전도사로 1년간 지낸 하루하루가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해서 더욱 끔찍하다. 그 시기에 나 역시 인격과 품성이 함께 무너졌다. 시작부터 꺾이고 변질되어 출발했다. 종교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한다는 기본적 명제 측면에서 본다면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직훈련 기간 3년 동안 교회의 온갖 추악한 모습과 난맥상을 압축해서 체험하게 되었고, 이 체험 때문에 25년간의 사제 생활 내내 그런 구조적 모순과 싸울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내가 처음 신학원에 들어갔을 때는 1982년 3월 전두환 군사독재 치하의 엄혹한 공포와 억압의 시절이었다. 아무 희망 없던 그 암흑의 시기에 교수님이 수업 중에 해주신 말씀은 이것이다. ‘사제가 된 뒤에 만약 재산이 늘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재물을 훔친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잊을 수 없어서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다.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교회는 돈이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말씀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 교단은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평소에 존경하고 따랐던 원주의 장일순 선생님도 큰 뜻에서 별 차이 없는 가르침을 주셨다. 많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특히 다음과 같은 권면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마음에 남아 있다. ‘아래로 기어라. 민중들을 끌어안고 함께 뒹굴며 살아라. 성직자의 생활은 중 이하라야 한다. 중 이상이면 가난한 이에게 갈 때 부끄러워진다.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함께 나누라는 뜻이다. 예수는 세상에서 깨어진 사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기를 쓰고 자기가 정한 원칙을 일생동안 끝까지 밀고 가라.’

신학원에서는 제대로 가르쳐 주었고, 교회와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들도 시퍼렇게 날이 서서 모본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왜 이런 사회 통념에 반하는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교회에 냉소적인 친구들은 사제들이 민중들처럼 단순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철이 안 든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내가 내린 결론은 사제들이 겉으로는 멀리 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돈 권력 명예를 집요하게 추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아예 완전히 더럽혀져 있는 교회라면 더 이상 말해 볼 것도 없다. 이 상태에서 열심히 닦아내기만 하면 그런 대로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와 희망이 남아있다고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하는 것이다. 부패구조의 정착이 가장 두렵다. 노골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문제지만 범죄를 용인하는 조직 분위기가 되어서는 더 문제다.

나는 내가 직접 겪은 일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자체 정화 노력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그리고 교회의 자정능력이 아직 살아있음을 입증하려 한다. 그리고 양심을 지키며 사제의 본분을 다하려는 심지 깊은 사제들에게 떨쳐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주고자 한다. 교회의 부패를 용인해서는 안 되며 교회가 잘못 가고 있다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똑바로 서 있어야만 그 존재 의미가 있다. (프롤로그)  접기
추천글
대책이 있었다면 그는 죽었겠지,
하는 일이 잘 됐다면 기고만장했겠지
성공과 실패를 구별할 줄 알았다면
그렇게 삶을 되돌아
빈 손으로 가는 길을 몰랐겠지
결국
벗을래야 벗겨지지 않는
제십자가를 그렇게 지는 것을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죽어야 할 제 성질로만 알았지
그렇게 바쳐진 제물이었지
십자가인 줄도 모르고 - 김조년 (한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 ‘씨알의 소리’ 편집주간) 
젊다는 것은 뜨거운 것이다.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시대의 질곡과 세상의 인연들로 인해 가슴이 끓고 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높낮이를, 앞뒤를 재지 않고 계산 없이, 겁 없이 뛰어들고 만다는 것이다. 원고를 읽는 내내 이거 자서전이 아니라 신선한 소설이네. 그랬다. 어쩌자고 당신은 너덜너덜 낡아버리기에도 충분했을 옛날을 새삼 들춰 보는가. 그러나 그 불귀의 옛날로부터 젊은 날의 범람하는 강을 건너가는 한 사제의 부끄러운 고백성사 같은, 은산철벽과도 같은 권위와 기성세대의 장벽에 맞서며 물러서지 않는 곧은 기개를 읽는다. 내일은 어제를 되새김하며 오늘을 밀어 올리는 쓰러지지 않는 발걸음으로부터 오는 것, 온고지신이 다름 아니다. - 박남준 (시인) 
길에서 만난 가난한 사제, 김경일 신부님.
그 곁에는 늘 그 보다 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었고, 신부님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편에서 더 낮은 자세로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얼마나 자존감이 높으면 저렇게 자존심을 다 내려놓을까?’ 거침없지만 겸허한 신부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신부님은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질문을 툭 던졌다.

“신부님, 이 정보화 시대에 무슨 책을 내세요?”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밝혀야 하니까요.”
“그럼, 직접 겪은 일이겠군요.”
“네, 그들의 악행을 세상에 알리고 영원히 남겨야 되니까요. 내가 아니면 그 권위를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종교적폐가 견고하게 지속될 테니까요.”
“그럼, 내부자들이군요.”

캐릭터가 분명하고, 날 것의 대화체 문장 그대로 살아있는 글을 읽었다. 르와르 영화 한 편을 본 것처럼 장면이 저절로 그려졌다.
행동하는 양심과 야성으로 살아가한 청년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성공회 교단으로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절대적인 권력으로 교단을 움직이는 종교조직 내부의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줄을 서지 않아서 겪게 되는 일들을 보면, 검찰 조직처럼 ‘비리로 엮인 단단한 죄의 연대’라는 종교권력의 민낯이 드러난다. 종교인이라는 성스러워 보이는 가면을 쓴 사악한 권력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단단한 성전 같은 것이었다.

성전은 아래서 벽돌 몇 개가 빠지면 무너지는 법이다.
이 글이 그런 힘을 갖고 있다. - 주홍 
무협지 같은 김 경 일 신부의 자서전 이야기
베드로는 닭고기를 먹었을까?

‘김경일 신부의 삶이야기_소명: 지하철노가다에서 부제서품까지’의 원고를 읽으며 떠오른 구절로 유안진 시인의 작품인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닭과 마주칠까 늘 가슴 조였을 테고/ 닭 소리 들을 때마다 경기에 시달렸을 테고/ 닭살이 자주 돋아 가려움에 시달렸을 테고/ 계란이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에 시달렸을 테고/ 때 없이 닭 울음보다 깊고도 길게 울었을 테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닭고기는커녕 계란조차도 없이 살았을 게다/ 너무너무 가난해서.”

또 다른 영상(影像·映像)은 로빈 후드(Robin Hood)의 조력자로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터크 수사(Friar Tuck)다. 좌충우돌, 좌불안석,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경일 신부의 우직한 언행이 이들을 떠 올리게 한다. 실수와 실패를 달고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바른길로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항상 주변을 들뜨게 해 떠들썩하고 불안케 하지만 천진난만한 웃음과 해학으로 주변을 밝게 만드는 것이 이들과 닮았다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인상은 자서전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언제나 주변인들의 믿음과 신뢰 또한 발견할 수 있다.

“당신,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 좀 더 절여져야 해요. 그래서 신앙의 향기가 자연히 배어 나와야 해요. 잘 갈아진 칼을 하느님이 쓰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사모님 말이다.

자서전은 모두 3권인데 ‘김경일 신부의 삶이야기_소명: 지하철노가다에서 부제서품까지’는 둘째 권으로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전도사와 부제를 거쳐 사제 서품을 받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참으로 힘들게 서품을 받는다. 나라도 이런 이에게 서품을 줘야 하는가? 묻게 된다. 그만큼 일반 상식을 뛰어넘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이들 교권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교권 안에서 이뤄지는 일 들이 세상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인간사의 문제로 비친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생각이 심하게 들 뿐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과 일반 신도들의 하나님은 다른 분이란 생각이 깊게 든다.
오죽하면 사제 서품식이 끝난 자리에서 경일 신부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당부(當付)를 하였겠는가!

“첫 번째는 절대로 복수를 하지 말게.
두 번째는 서품을 받았다고 사람이 변해서는 안 되네.
세 번째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의 세계로 들어가게.
이 세 가지를 꼭 명심하도록 당부하고 싶네.”

50km 넘는 거리를 걸어와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쓴 모습으로 서품을 받은 경일 신부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당부를 남기시고 선 자리에서 오신 길을 되짚어가신 이현주 목사님의 말씀이다. 다음과 같은 독백을 보면 경일 신부는 이날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은 것 같다.

“목사님을 뵙고 나니 구정물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내가 보였다고나 할까. 도대체 사제의 그릇도 못 되는 놈이 서품은 왜 그렇게 받으려고 용을 썼는지. 무엇보다도 새 성전을 힘들게 짓고 한 판 축제를 벌여야 할 교회의 잔칫날이기도 했는데 사고뭉치인 나로 인해 마음고생만 호되게 치른 신자들에게 그저 죄송하고 미안한 하루가 되고 말았다.”

요란하게 사는 만큼 대단한 현자들 또한 만나고 깨우침을 받게도 되는가 보다. “~ ~ 사랑으로 승리하겠다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도구로 봐라. 나를 악의로 대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나를 선으로 이끌고자 하는 하느님의 도구일 뿐. ~ ~”란 말씀을 듣고 꺼이꺼이 소리 내 울기도 한다.

1982년. 신학원 학생 시절.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정권수호를 위한 조찬기도회에 당시 서울교구 주교님을 참석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벌인 일을 계기로 교회 갱신운동을 벌였던 일이 이렇게 지속적인 수난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 일로 교단 내 계파 간 갈등을 일으킨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자서전은 재미가 있다. 무협 소설을 읽는 것 같다. 그만큼 긴장과 이완이 적절히 나타나며 기절초풍을 할 광경과 사건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어쩜 그리도 다양한 사건들이 나타나는지 - - .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꺼이꺼이 울며 혼자 독백하는 것을 떠올리며 툭하면 울고 소리치며 머릴 주 뜯는 갱일 신부(경상도 사투리임)를 떠 올리게 된다. 뚱뚱한 몸으로 몽둥이 들고 숲을 지나는 사람 중 고관이나 교회 관계자들을 골탕 먹이며 그들로부터 갈취한 먹거리와 돈이나 금붙이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터크 수사의 허위허위 걸어가는 모습 또한 갱일이 신부를 떠 올리게 한다.

인성응천(人聲應天)이라, “사람의 소리가 가득 차면 하늘이 응답한다”고 했으니 결국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지만, 오늘도 쉼 없이 그 값 하느라 휘적거리며 뛰어다닌다. 그뿐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닭 소리보다 거칠게 길고도 슬피 꺽꺽 울어 쌓고, 방 한 칸 변변한 것이 없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너무너무 가진 것 없어서.

‘김경일 신부의 삶이야기_소명: 지하철노가다에서 부제서품까지’를 읽어보라고 강력히 추천한다.

새삼스레 내다뵈는 종교인들의 세상을 읽고 볼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깊고도 넓게 뻗쳐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유함으로 우리가 무엇을 반성하고 고침을 위해 어떻게 수신하고 수련해야 하는지 새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자그마한 덩치의 신부님 가슴에 이렇게 큰 불덩이가 있을 줄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의 세계란 무엇인지? 어떻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묻게 된다.

2020년 5월 19일 - 이만방 
생이란 경험하기라는 생각이 세월에 더해 갈수록 깊어진다. 이 책은 정암이 사제의 길을 향해 걸어가면서 온몸으로 경험한 생의 고백이자 증언록이다. 그 속에는 사제의 길에 앞서 인간의 길에 충실하고자한 치열한 몸부림이 담겨있다. 그가 제도교회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온몸으로 맞서며 싸울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이 한 사제의 자서전적 고백록을 넘어 한 시대의 증언록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은 그가 걸어온 경험의 깊이와 진솔함 때문이다.
- 이병철 (시인, 생태귀농학교장) 
강물처럼 시원하게 흐르지 못하고 반쯤 괴어있어야 하는, 그래서 반은 살고 반은 죽어있는, 한국교회 연못에서 하늘 섭리 좆아 때로는 몸부림치고 때로는 숨죽이다가 마침내 모가지 치켜들고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을 바라보는 이 즐거움, 이 고마움을 어디로 회향할지 모르겠구나....경일아!
- 이현주 (목사) 
김경일신부의 저서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2_약속’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소명’편을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읽었다. 책 내용의 상당한 부분이 대화체로 되어있어 마치 무슨 드라마를 보는 듯 사건 사건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어제 일인 양 생생한 대화로 풀어내는 이야기에 상황에 따라 함께 울며 분노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를 향한 신의 위대한 섭리가 깨달아지기도 하였다.

김신부와 이야기해보면 그가 얼마나 온유한 사람인 줄 알 수 있다. 화가 날만한 어떠한 이야기를 들어도 허허 웃어넘기며 항상 긍정적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상대에게 필요한 덕담을 주곤 하지만 때때로 그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형형한 안광은 사람들로 하여금 작은 체구의 그를 엄청난 거인으로 착각하게 한다.

젊은 시절 사제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겠다는 뜻을 품고 우여곡절 끝에 신학원에 들어간 후, 오랫동안 곪아 썩어 문드러진 교회의 상황을 보고 교회갱신운동에 투신했다가 교회 내 기득권 세력의 미운 털이 되어 사제 서품을 받기까지의 십 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혹독한 연단의 기간이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시련을 거치면서 그는 점점 예수를 닮아간다.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은 채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어 옳다고 여겨지는 바를 곧이곧대로 실천에 옮기는 그를 그 어떤 강압이나 권위가 누를 수 있을까. 과부와 고아 그리고 창기 등 사회의 밑바닥 인생에게 한없는 연민을 가졌으나 불의한 권력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을 무
섭게 질타했던 예수를 닮은 김신부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으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고통과 모욕을 겪었던 갈릴리의 예수처럼, 예수를 따랐으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인간 김경일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혹독한 수련과정을 겪어야 했으며 이 책에서 그는 스스로를 발가벗겨 세상에 내보임으로 더 이상 스스로에게 허위와 가식을 허용하지 않을 중대한 선포를 한 것이 아닐까.
공식 사제의 신분에서 은퇴하였으나 그의 사역은 이제야 시작된 것이라고 본다. 불의한 재물과 부패한 권력이 하느님의 의를 참칭하는 이 시대에 그의 삶의 이야기와 그에 따르는 다짐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고집불통에 괴퍅하기까지 하지만 결코 거짓을 말하거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김신부의 남은 장도에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함께 하여 그의 삶이 하느님의 위대한 걸작이었음을 모두가 증언하는 결과이기를 바란다. 참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 송현상 (바리톤) 
민주화는 정권의 교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극심한 경제적 양극화를 초래한 재벌체제, 사회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첨병역할을 하는 정치검찰과 수구언론, 부패사학 등 적폐세력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을 말하기에 이르다. 그런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종교와 진리를 가르쳐야할 대학마저 기득권에 취해 불의에 침묵하고 자본과 권력에 굴종한다면 세상에 희망이 있을까.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 2_소명: 지하철 노가다에서 부제서품까지>는 평생을 정의와 평화운동에 헌신하다 은퇴한 성공회 광주교회 김경일 신부가 기성 종교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부패기득권 세력에 맞서서 외롭게 저항해온 투쟁의 기록이다. 자서전 1권인 <김경일 신부의 삶 이야기_약속>은 김신부의 마음 깊숙이 자라잡고 있었던 해병대의 폭력과 평생 정직을 우선시 했던 신학원 시절의 벗에 대한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였다면, 이번에 출간하는 2권은 부제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증언하는 내용이다.
1권이나 이번에 나오는 2권의 일관된 질문은 왜 기성 교단이 힘없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구현하려고 애쓰는 사제를 격려하지 않고 오히려 억압하면서 그들의 사제 진출을 막으려 하고, 올바른 길을 가는 사제들을 변절시키고 순치하려 했던가 하는 것이다. 김신부의 결론은 기성 교단이 말로는 신앙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돈과 권력과 허명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신부의 이러한 용기 있는 증언과 기록이 우리 종교계를 깨우치는 각성의 종소리가 되리라 믿는다. - 김영 (전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2021/04/27

함석헌, 씨알, 씨알정신- 4월19일부터 모두 9회, 목 오후 6시 30분~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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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씨알열린강좌(씨알학당) 안내 ♣
씨알 여러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비롯해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로 답답하고 힘든 시기를 지내고 계실 줄 압니다.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어려운 때이지만, 씨알사상연구원에서는 <씨알열린강좌>를 시작하려 합니다. <함석헌, 씨알, 씨알정신>을 주제로 4월부터 12월까지 모두 9회에 걸쳐 펼쳐지는 강좌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일시: 매월(4월~12월) 마지막 주 목요일 오후 6시 30분~8시
◈장소: 함석헌기념사업회 회관 3층(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5길 21)
◈비대면 줌(ZOOM) 접속 URL 주소 회의 ID: 950 4372 7817 암호: 883339
◈참가비: 전9강 3만원, 1회 5천원
◈신청방법: 전화접수(선착순 마감) 02-716-2918
◎1강 4월 29일: 함석헌 사상의 위상: 동서 정신문화를 융합한 생명철학자-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장)
◎2강 5월 27일: 함석헌의 씨알교육: 공동수련으로서의 씨알됨-김조년(한남대 명예교수)
◎3강 6월 24일: 함석헌과 퀘이커: 함석헌의 퀘이커적 삶과 종교친우회(퀘이커리즘)-곽분이(씨알여성회 대표)
◎4강 7월 29일: 인민의 멜랑콜리와 삶의 미학: ‘아래 아’의 거침돌, dot로 풀어 밝힘-김대식(씨알사상연구원 연구위원)
◎5강 8월 26일: 함석헌의 평화: 반핵운동을 중심으로-전기호(씨알사상연구원 연구위원)
◎6강 9월 30일: 함석헌의 씨알사상의 과거와 현재: 예수의 오흘로스와 방탄소년단의 아미-조헌정(씨알사상연구원장)
◎7강 10월 28일: 함석헌의 씨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씨알의 실체성과 현재성을 중심으로-우상범(씨알사상연구원 연구원), 한송희(씨알사상연구원 연구원)
◎8강 11월 25일: 함석헌의 인간혁명: 21세기 씨알정신의 부활을 위하여-최정윤(씨알사상연구원 연구위원)
◎9강 12월 30일: 함석헌의 “생명이란 생각” 들여다보기: “‘시간’이 말을 하기 시작한” 시대에, 길을 ‘찾다!’-김형렬(씨알사상연구원 연구위원)
⊙주관: 씨알사상연구원
⊙주최: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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