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내 삶: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할 수밖에 없는 것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4.02.06
입춘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입춘대길’ ‘건양다경’ ‘만사형통’ ‘기운생동’ ‘윤집궐중’ 등 가족이나 집단이나 개인에게 축복하고 기원하는 글을 써서 대문이나 다른 쪽문에 한자 팔(八)자 모양이나, 한글의 ㅅ 모양으로 붙여 놓았다. 그 문을 통하여 그런 기운이 들어오기를 바라기도 하였을 것이고, 그것을 보거나 그 문을 통하여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그런 기운이 들기를 바라는 맘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말들을 새봄을 맞는 인사로 써서 붙이거나 아는 벗들에게 보낸다. 나는 이것을 지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고쳐서 ‘새봄 새날같이 산뜻하고 팔팔하게’라고 써서 나 자신에게 보냈고 또 몇 벗들에게 보냈다. 이 말을 생각하고 쓰고 보내면서 내 삶은 어떠한가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는 일 중에 어느 것이 더 많을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정말로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만을 하고 살 수 있을까? 사람은 정말로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 잘 사는 것일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끊으면 정말로 행복할까? 이쯤에서 나는 가만히 이제까지 내가 살아오는 동안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살아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얼마만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얼마만큼 많이 하고 싶지 않지만 하였든지, 아니면 할 수밖에 없어서 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 삶은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지 않은 일, 하고 싶은 것인지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거나 하지 않는 일, 또는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어떤 의무감이나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 따위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은 것 중 어느 것을 했으며, 지금 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 할 가능성이 있고, 전혀 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분류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고 싶지 않은 것 중에서 이미 한 일, 지금 하고 있는 일, 언젠가는 그만두고 싶은 일과 하고 싶지 않지만 도저히 그만 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일 따위로 나누어 따져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큰 종이에 그런 것들을 나열하여 써보고는, 그것들의 우열이나 경중을 살펴서 분류하여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벌려놓고 보니 하고 싶은 일 중에 내가 잘하였다고 판단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하여 능력이 좋은 것도 있고, 전혀 능력이 없어서 지루하거나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다. 또 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아주 탁월하게 그 일을 잘 수행한 것도 있고, 하기 싫지만 삶의 형편을 보아서 도저히 중단할 수 없는 것이거나, 또 중단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때로는 그러한 일들을 내가 스스로 찾거나 맡아서 하는 것도 있고, 남이 떠넘기기에 받아서 하는 일도 있다. 어떤 것은 은근히 바라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마치 떠밀려서 하는 것처럼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어영부영하다가 세월을 보내면서 한 삶을 유지한 때도 있다. 어떤 흐름에 밀려 사는 삶도 있다. 따지고 보니 이것도 내 삶이요, 저것도 내 삶이다. 그러나 또 엄격히 살피면 이것도 내 삶이 아닌 듯, 저것도 내 삶이 아닌 듯한 것이 얼마나 많던가? 아무리 따져도 딱 이것은 내 삶이고, 저것은 내 삶이 아니라고 자르고 갈라서 판가름할 것이 나타날 것 같지 않은 것도 참 많다. 그래도 새해가 되고, 새봄이 되니 내가 참살이를 하는가 아니면 헛살이를 하는가를 따져본다.
어찌 보면 내가 고르고 바라는 것이 내 삶인 듯이 보이지만, 어떤 때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냥 내 앞에 그 때 그렇게 다가왔기에 그것을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인 듯이 보이기도 한다. 한 발 살짝 옆으로 비켜섰더라면 전혀 그 때와 같은 그 삶을 만날 수 없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삶이 이렇게 진전되지 않고, 아주 딴 방향으로 흘러가는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 우연인 듯 필연이고, 필연인 듯 우연으로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던가? 겉으로 나타나는 내 삶은 꼭 이것이라야 한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아니라고 하여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 의지에 의하여 선택하여 사는 삶인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더 엄밀히 따지면 그런 내 의지에 의한 것인 듯 전혀 나 밖의 어떤 것에 의하여 그렇게 이끌리어 된 삶인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누구는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서’ 산 삶이라고 자신의 삶을 규정하기도 했다. 꼭 그이의 삶만이 ‘그의 발길에 채여서’ 산 것이던가? 모든 삶에는 ‘그이의 이끄심’이 있어서 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 삶이 아닌가? 언젠가 말했듯이 내 삶으로 엮여진 것들은 다 내 것인 듯 공공한 것이란 말이다. 내가 살지만 남과 함께 그렇게 사는 것이고, 사사로운 듯 공공한 삶을 산단 말이다. 모든 삶이 다 내 삶이 아닌 듯 내 삶이다. 싫다 좋다를 떠나서 일단 내게 다가오는 그것은 다 내 삶이란 말이다. 거기서 가질 자세는 불을 보듯이 분명하다. 어떤 삶의 양상이든지 나는 그것을 통하여 행복하고 정의롭고 당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또 내 삶의 방향설정은 어떤 삶의 상태가 아니라 ‘선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내 삶이라고 선언하고, 또 이 삶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선언’하면서 긴 나그네 길을 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