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8

붓다의 생애와 사상 – 마성 글, - 산자야 (13 mentions)

붓다의 생애와 사상 – 디지털 불교

붓다의 생애와 사상


불타(佛陀)와 불전(佛傳)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년 4월호), pp.11-19에 게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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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이번 호부터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계에서는 출가 · 재가를 막론하고, 붓다의 생애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거나 거의 무시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재가 불자들은 붓다의 생애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국불교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인 기복적인 신앙과 잘못된 신앙 형태들은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야기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자신의 인격향상과 올바른 불교관 정립은 물론 잘못된 불교 신앙을 바로 잡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500여 년 간 인류의 스승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고, 불교의 개조(開祖)로서 받들어져 온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께서 실제로 어떠한 생애를 보냈으며, 또 그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가능한 한 정확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 공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붓다의 생애 속에는 신화적(神話的) · 전설적(傳說的)인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붓다께서 가르쳤다는 교설(敎說) 속에도 후세 사람들의 가필(加筆)과 윤색(潤色)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러한 후대의 요소들을 되도록 배제(排除)하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서의 붓다의 생애와 그 가르침을 가능한 한 사실에 가깝게 접근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실시해 온 연구 방법론입니다. 주로 서구의 불교 학자들은 신화와 전설로서의 붓다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자 시도하였으며, 지금도 이러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기영(李箕永) 박사가 처음으로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붓다의 생애를 다루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이기영 지음,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의 불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높게 평가 받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출판될 당시(1965)에는 아직 학문적으로 이러한 접근 방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책이 한국의 불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더라면 한국불교는 지금보다는 좀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상황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제는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생애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찬 불전문학(佛傳文學)에 기록된 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붓다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연속 강좌를 마련하게 되었음을 밝혀둡니다.

2. 붓다의 호칭(呼稱)과 불전(佛傳)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를 가리킬 때, 일본의 불교 학자들은 대부분 ‘석존(釋尊)‘이라고 부릅니다. 예로부터 중국 · 한국 · 일본에서는 관례적으로 ‘석가족(釋迦族)의 존자(尊者)’라는 의미로 ‘석존(釋尊)’이란 존칭을 널리 사용해 왔습니다. 이 말은 원래 중국에서 ‘석가모니 세존(釋迦牟尼 世尊)’ (혹은 釋迦牟尼尊) 또는 ‘석가세존(釋迦世尊)’ (혹은 釋迦尊)이라고 하던 것을 줄여 쓴 말입니다.1)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석가(釋迦)’라고 하는 호칭도 사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붓다가 출생한 종족의 이름이지 자신의 이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관용적으로 쓰여진 익숙해진 호칭입니다.2) 그런데 “불타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3)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석존의 호칭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붓다(Buddha)’입니다. 이것은 인도 · 동남아시아 및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널리 채용되고 있는 호칭입니다. 중국에서는 ‘불(佛)’, ‘불타(佛陀)’로 음사(音寫)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4) ‘붓다’라는 말은 불교의 전용어가 되었지만, 본래는 보통명사이며 자이나교(Jaina)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붓다란 ‘깨달은 사람(覺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석존 이외에 또 다른 붓다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석존 이전에 여섯 명의 붓다가 존재하였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존을 고타마(Gotama)라고 하는 그의 족성(族姓)에 따라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팔리어 경전에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 용례가 있어5) 흔히 남방불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호칭입니다. 서양의 많은 학자들도 이 명칭을 쓰고 있으며, 근래에는 일본의 학자들도 즐겨 사용하게 되었습니다.6)

그러나 이기영 박사는 그의 저서 <석가>라는 책에서 붓다란 말은 불교의 이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서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개조(開祖) 개인을 지칭할 때에는 ‘고따마 붓다’란 호칭을 쓰거나 ‘석가모니(釋迦牟尼)’란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원래의 인도음 샤캬무니(Sakyamuni)를 한자로 음사한 것인데, ‘샤캬(釋迦)’란 고따마 붓다가 탄생한 종족의 이름이고, ‘무니(牟尼)’란 ‘거룩한 분'(聖者)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샤캬무니’라고 하면 샤캬족 출신의 성자란 뜻이 되므로 고유명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7)

필자는 개인적으로 ‘붓다’라는 호칭을 선호합니다만 여기에서는 특별한 구별 없이 ‘붓다(佛陀)’, ‘석존(釋尊)’, ‘세존(世尊)’, ‘석가모니(釋迦牟尼)’ 등의 호칭을 두루 사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여러 호칭들은 서로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붓다’라는 호칭이 낮춤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 단어 속에는 이미 깨달은 자라는 뜻과 존경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높임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붓다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매우 많습니다. 불교경전 중에서 부처님의 생애를 주제로 한 것을 일반적으로 ‘불전(佛傳)’, ‘불전경전(佛傳經典)’,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고 합니다. 불전은 산스끄리뜨어, 팔리어, 한역(漢譯), 티베트어 역본(譯本) 등 오래된 불전만 하더라도 20여 종에 이릅니다.8) 그 중 중요한 것으로는 산스끄리뜨어로 씌어진 <마하바스뚜(Mahavastu, 大事)>, <랄리따비스따라(Lalitavistara)>와 불교시인 아쉬바고사(Asvaghosa, 馬鳴; A.D. 2세기경)에 의해서 카비야체(體)라는 아름다운 미문(美文)들로 씌어진 <붓다짜리따(Buddhacarita, 佛所行讚)>, <자따까(Jataka, 本生潭)>의 서문에 해당되는 인연품(因緣品), 한역으로는 <보요경(普曜經)>,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등이 있습니다.9)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붓다가 입멸한 후 수 백년이 지난 뒤 성립한 것이고, 더구나 불타로서의 석존의 위대함을 찬탄하는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여러 가지 창작과 가탁(假託)이 부가되어 비역사적·신화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습니다. 따라서 붓다를 역사적 존재로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불전문학의 원천이 되었던 것, 다시 말해서 초기불교 성전인 <율장(律藏)>과 <아함경(阿含經)> 가운데 전해지고 있는 붓다의 전기적인 기술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기성전의 기술은 불전을 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하여진 것이 아니라 교단 규칙의 제정이나 중요한 설법과 관련하여 붓다의 사적(事蹟)을 단편적으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적 역시 창작이나 신화적 요소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 붓다의 생애 전모를 있는 그대로 묘사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지만, 초기성전이 전하는 바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붓다의 단서는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10)

3. 붓다의 전기(傳記)를 대하는 태도

지금까지 우리는 불전 혹은 불전문학에 기록된 내용으로써 붓다를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헌들을 통해서는 역사적인 붓다의 생애 혹은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붓다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헌에 나타난 부처님의 일대기는 너무나 신격화(神格化)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쉬바고사(馬鳴)에 의해 씌어진 장편 서사시(敍事詩) <불소행찬(佛所行讚)>이 그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아쉬바고사는 인도 카니쉬카(Kanisika)왕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대략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11) 불교시인(佛敎詩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붓다의 모습보다도 신격화된 부처님의 덕[佛德]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헌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부처님은 우리와 너무나 동떨어진 인물입니다. 그의 능력은 감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스리랑카 출신 불교 학자인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과거의 여러 종교 지도자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붓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도 온갖 형태의 신화와 전설들로 점철되어 왔다. 신화와 전설을 역사적인 실제 사건과 구분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열렬한 광신도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문제이다. 신화를 해석하는 사람은 신화란 독실한 신도의 소박한 상상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광신도의 저항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냉정하고 신중하게 분석해 보면, 신화란 극적인 설명이 요구되는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이나 복잡한 인물 성격과 관련하여 감정이나 정신상의 사태들을 상징화한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12)

위에서 지적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의 생애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애에 있어서 신화와 전설의 부분을 삭제한다고 해서 부처님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붓다의 모습을 통해 진실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참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붓다의 생애를 공부하는 목적은 그러한 붓다의 생애를 거울삼아 우리들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여 역사적 인물로서의 고따마 붓다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근대 학문의 원전비평(原典批評)의 방법을 채택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성전(聖典)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소산(所産)임을 인정하고, 그것은 사상의 발전에 기초하여 성립한 것임을 생각할 때, 후대의 전적(典籍)보다도 오래된 전적에 의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된 전적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분에 의거할 것입니다.13)

둘째, 우리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자료에 의거하여 확실한 증거를 찾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성전 중의 가장 오래된 부분에는 비교적 신화적 요소나 붓다의 초인화(超人化), 신격화(神格化)는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혀 신화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헌에 근거하는 한, 신화적이지 않은 석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묘사(描寫)를 꿰뚫고, 역사적 면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 즉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4)

셋째, 우리는 불교경전 중의 가장 오래된 것과 그와 거의 동시대의 다른 종교의 성전과를 비교해서 그 사상의 같고 다름을 밝히는 것이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의 교설이 지니는 의의(意義)를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15)

넷째, 우리는 남방계의 불전(佛傳)에 의거하여 붓다의 생애를 조명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불전경전(佛傳經典)은 남방에 전해진 것(南傳)과 북방에 전해진 것(北傳)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하는 방법에도 남전과 북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방의 불전에는 부처님의 생애를 ①탄생, ②깨달음을 이루다(成道), ③최초의 설법(初轉法輪), ④열반에 들다 라는 네 가지 사건(四大佛事)을 중심으로 설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와는 달리 북방의 불전에서는 ①도솔천에서 내려오시다(下天), ②마야부인의 태내에 들다(托胎), ③탄생(降誕), ④출가(出家), ⑤마귀 파순과 싸워 이기시다(降魔), ⑥깨달음을 여시다(成道), ⑦처음으로 설법하시다(初轉法輪), ⑧열반에 들다(涅槃)의 여덟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기에 더 상세히 하여 청년 시대, 결혼, 규방 생활, 고행, 깨달음의 자리에 있다 라고 하는 네 가지 항목이 더 추가되어 12 항목으로 된 것도 있습니다.16)

이와 같이 북전의 불전에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생활을 거쳐 출가하고 고행해서 마왕을 항복 받고 성도하기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로 남전의 불전에 의거하여 붓다의 생애를 조명해 나갈 것입니다.

Notes:

1) 비교적 오래된 ‘釋尊’의 용례는 曇無讖 譯 <金剛明經> 권1에 나온다.
2)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민족사, 1989), p.34.
3)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샘터, 1990), p.5.
4) 후지타 코타츠 外, 앞의 책, p.35.
5) 이를테면 <테라가타(Theragatha, 長老偈> 91게송.
6) 후지타 코타츠 外, 앞의 책, p.35.
7) 李箕永 著,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知文閣, 1965), pp.278-281 참조.
8) 후지타 코타츠 外, p.35.
9) 스가누마 아키라 지음·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 (서울: 봉은사출판부, 1991), p.35.
10) 후지타 코타츠 外, 앞의 책, p.35.
11) E. H. Johnston, Buddhacarita or Acts of the Buddha (Delhi: Matilal Banarasidass, 1984), p. xvi, (初版本은 Calcutta에서 1935년에 刊行되었다. 金浩星, “Buddhacarita(불소행찬)에 나타난 초기 Sankhya 思想 硏究” (碩士學位論文, 東國大 大學院, 1988), p.3에서 재인용.
12) David. J. Kalupahana, 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Continuities and Discontinuitie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 D. J. 칼루파하나, 김종옥 옮김, <불교철학사-연속과 불연속> (서울: 시공사, 1996), p.54.
13) 이기영, <석가>, pp.1-2 참조.
14) 이기영, <석가>, p.2.
15) 이기영, <석가>, p.2.
16) 스가누마 아키라 지음, 앞의 책, pp.35-36 참조.

붓다 탄생 이전의 인도

1. 인도의 자연환경

붓다의 생애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살았던 당시 인도의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애와 사상은 어떤 형태로든 그 당사자가 몸담고 있던 자연환경 및 생활환경 그리고 사회환경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붓다께서 살았던 시대 상황과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완전히 알아야만 비로소 붓다의 생애와 그 역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 등에 대한 정보는 곧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도 역사적 산물(産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가 태어나 살았던 인도와 인도의 문명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도(印度)라는 말은 본래 대수(大水), 대해(大海), 대하(大河) 또는 인더스(Indus)강을 뜻하는 산스끄리뜨어(범어) 신두(Sindu)로부터 유래한 말입니다. 신두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받아 힌두(Hindu)로 변하고, 다시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아 인더스(Indus)로 바뀌고, 인더스에서 현재의 인디아(India)라는 영어가 파생되었습니다.1) 하지만 인도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인도(India)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래 범어나 힌디어로 된 인도의 호칭인 브하라뜨 칸다(Bharat-khanda) 또는 브하라뜨 와르샤(Bharat-varsa)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영원히 번영하는 사람들’ 또는 ‘영원히 번영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2) 후자의 ‘브하라뜨 와르샤’를 한국의 백과사전에서는 ‘바라타-바르샤’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명칭은 바라타족(族)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자이나교의 성전(聖典)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일찍이 리그베다시대에 갠지스강(江) 상류의 광활한 지역을 통일하여 성세를 이룬 전설적인 바라타족에 자긍심을 가져, 외국인이 붙인 인도라는 국호보다 이렇게 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3)

인도는 히말라야산계(山系)의 남쪽에 가로놓인 유라시아 대륙의 반도로서 그 면적은 서유럽의 전지역에 필적하는 약 450만 ㎢이며, 현재는 인도공화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등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인도의 북쪽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Himalaya)산계(山系)와 힌두쿠쉬(Hindukush)산맥(山脈)을 경계로 아시아 대륙과 구분되고, 동서는 그 지맥(支脈)인 아라칸과 술라이만의 양 산맥으로 구분되며, 남쪽으로는 코모린 곶(Comorin cape)을 꼭지점으로 하는 광활한 역삼각형의 모양으로 펼쳐져 인도양(印度洋)에 돌출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인도는 그 지리적 특색에 따라 ①히말라야 지역, ②힌두스탄(Hindustan) 평원(平原), ③인도반도 또는 데칸(Decan) 고원 지역 등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러한 분류 외에도 인도를 ①인더스강 유역, ②갠지스강 유역, ③빈드야산맥 이남 지역 등 세 지역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습니다.4)

이처럼 인도의 국토는 광대하기 때문에 기후도 매우 다양합니다. 남쪽은 북위 8도에서 북쪽은 37도까지 이르러, 대부분은 아열대(亞熱帶)에 속하나, 그 기후는 몬순(moonsoon, 계절풍)에 의해서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뚜렷이 구분되고, 하천(河川)의 수량도 연중 크게 변화합니다. 또 몬순의 도래시기가 일정하지 않아 봄베이(현재의 뭄바이)가 며칠씩 큰 비로 시달려도 델리는 건조한 날이 계속됩니다. 강수량도 아샘의 실롱 구릉(丘陵)이 세계에서 최대량을 기록하는데 반하여 라자스탄의 서부에는 사막이 전개되어 있습니다.5)

이러한 자연환경의 차이는 곧 생활문화의 차이로 연결됩니다. 아직도 원시림이 남아 있는 히말라야 산록의 계곡이나 분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더위가 극심한 평야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라자스탄의 모래 먼지와 열풍이 몰아치는 지방과 벵갈이나 아샘처럼 다습한 지방과는 자연의 모습도 사람들의 의식주나 기질도 전혀 다릅니다. 데칸의 고원 지대에는 그 나름의 정신적·문화적인 풍토가 존재합니다. 다양한 인도의 자연은 참으로 다양한 생활문화를 산출하며, 거기에 인종이나 언어 상황마저 결부되게 되면 그 다양성은 더욱더 심화되는 것입니다.6)

2. 언어의 다양성

인도의 자연환경이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인종과 언어도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인도의 언어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도의 언어에 대한 전모를 파악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 1961년 시행된 국세조사에 의하면 인도에서 ‘모국어’로 신고된 언어가 실로 1,652가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언어이지만 부족에 따라 명칭이 다른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해 보면 방언을 포함하여 826종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1971년의 조사에서 사용자가 100만을 넘는 언어는 33가지가 있고, 5천명 이상의 언어는 281가지를 헤아립니다. 이 가운데서 14개 언어는 헌법에 의해서 ‘특히 발전 · 보급시켜야 할’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사용 인구가 많은 순서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①힌디어, ②델구어, ③벵갈어, ④마라티어, ⑤타밀어, ⑥우르두어, ⑦구자라티어, ⑧칸나다어, ⑨말라야람어, ⑩오리야어, ⑪판자비어, ⑫앗샤미어, ⑬캐시미르어, ⑭산스끄리뜨어 순입니다.7)

산스끄리뜨어는 고대로부터 문학과 사상을 담당해 온 문장어인데, 그래도 2,544명이 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으로 신고되어 있습니다. 인도 문화의 담당자라는 뜻에서 인도 정부는 이 산스끄리뜨어를 ‘특히 발전 · 보급시켜야 할’ 언어 속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인도에는 21개 주가 있는데, 이는 대체로 언어 지역에 따라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하르 주나 라자스탄 주와 같이 일반적으로는 힌디어가 통용이 되고, 그 지역의 고유 언어는 위에서 언급한 공용어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도 존재합니다. 반면에 우르두어나 산스끄리뜨와 같이 특정의 주를 가리지 않는 언어도 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12개 언어가 이른바 공용어로서 통용이 되고 있습니다.8)

이러한 인도의 언어는 크게 몇 가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인도-유럽어족의 인도-아리야어계가 있고, 주로 남인도에서 통용되는 드라비다어계가 있으며, 이 밖에 티베트-버마어계와 호주-아시아어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인종과 어계(語系)를 같이 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문화인류학이나 언어학에서 보여주고 있는 주목할 만한 성과는 어계와 인종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종적으로 같은 집단이라 할지라도 단일한 어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어계의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9) 그렇지만 인도의 언어는 종족과 분리할 수 없는 어떤 깊은 관계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3. 힌두문화의 형성

이와 같이 광대한 인도의 자연환경 속에서 다양한 종족에 의해 그들만의 독특한 인도문화, 즉 힌두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힌두문화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종족들에 의해 형성된 각양각색의 문화가 하나로 어우러진 혼합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리야(Arya)인들이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에 침입한 것은 기원전 1,500년 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인도에는 선주민족(先主民族)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10) 그들이 바로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을 이룩한 비아리야계로 알려진 드라비다(Dravida)인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룩했던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나 하랍빠(Harappa), 기타의 유적 발굴에 의하여 그 실체가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드라비다인 보다 먼저 인도에 들어온 종족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일찍이 네그로이드(Negroid)인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이란연안을 거쳐 남인도 및 서인도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곧 북인도에도 나아갔으며, 후에는 안다만제도에서 마레의 방향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세의 인도문화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11)

그 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호주-아시아계(Austro-Asia)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대의 중인도의 콜족(Kol)과 문다족(Munda), 아삼의 카시족(Khasi)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또한 벵갈에서 비하르에 이르는 지방에 거주하는 산탈족(Santal)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얀마와 타일랜드의 몬족(Mon), 캄보디아의 크메르족(Khemer)도 동일한 계통에 속합니다. 그들은 당시 전 인도에 유포되어 있었으며, 그 후 인도문화의 여러 형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12)

다시 그 후에 유입된 사람들이 바로 드라비다(Dravida)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중해 지역 및 소아시아 방면에서 이주해왔다고 하며, 현대의 남인도 사람들은 주로 이 계통에 속합니다. 드라비다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총인구의 20퍼센트가 넘습니다. 이 외에 현재의 벵갈지방에서 비하르, 오릿사 일대에는 티베트·버마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13)

이와 같이 인도에는 여러 이민족(異民族)들이 들어와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인도의 문화는 대체로 바라문 문화가 과거 3천년 동안 그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바라문 문화를 형성한 주체는 바로 아리야(Arya)인들이었습니다. 이 민족은 피부가 희고 금발이며 코가 높은 것이 특색입니다. 민족학이나 비교언어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란인·희랍인·로마인·게르만인들과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습니다.14) 이들이 인도아대륙(亞大陸)에 침입해 온 시기는 대략 기원전 15세기 이후라고 합니다. 그들은 먼저 서북인도의 판잡(Panjab, 五河) 지방으로 침입하였습니다. 판잡은 지금의 파키스탄에 해당됩니다. 이곳에는 인더스강을 이루는 다섯 지류가 있습니다. 판잡은 이와 같은 다섯 물의 흐름(panca ap)이라는 명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보통 오하(五河) 지방으로 불리는 이곳에 아리야인이 침입하여 원주민을 무력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점차 동진(東進)하여 북인도의 중앙으로 확장하여 갔습니다. 물론 단일 민족이 한번 침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집단이 파상적으로 이 지방으로 침범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15)

서북인도에 침입한 아리야인은 인더스강 상류의 판잡지방에 정착하여 리그베다(Rg-veda)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시기는 대략 기원전 1,200년 경입니다. 이것은 주로 천공(天空) · 비 · 바람 · 우뢰 및 기타의 자연계의 힘을 신으로 숭배하는 다신교(多神敎)였습니다. 그 후 기원전 1,000년 경부터 아리야인은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야무나(Yamuna)강과 갠지스(Ganga)강 중간의 비옥한 토지를 점거했습니다. 이 땅은 토질이 매우 비옥해서 항상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었고, 외부로부터 침공하는 외적도 없어서 태평한 가운데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후세의 인도문화의 특징이 되는 갖가지 제도는 대개 이 시대(대략 B.C. 1,000-500)에 확립되었습니다.16)

이 시대에 아리야인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농경과 목축을 위주로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상공업도 상당히 발달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도시는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직업의 분화도 이루어져 신을 제사 지내는 제식을 담당하는 바라문계급(Brahmana, 브라흐마나), 군대를 통솔하고 정치를 담당하는 왕족계급(Ksatriya, 刹帝利), 그 밑에서 농경 · 목축 · 상업 · 수공업 등에 종사한 서민계급(Vaisya, 毘舍), 위의 세 계급에 봉사하는 것이 의무로 부여된 노예계급(Sudra, 首陀羅)이라는 사성(四姓, varna)의 구별도 이 시대에 확립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분화된 카스트(Caste)제도의 모태가 되는 것입니다.17)

한편 정치적으로는 아리야인들이 발전함에 따라 부족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생기고, 점차 군소 부족이 통합되어 독재권을 가진 왕(Rajan, 라잔)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습니다.18) 그리고 아리야인의 문화와 토착민의 문화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상호 융합과 변용 작용을 거쳐 정착된 것이 곧 힌두교 혹은 힌두문화입니다. 최초기의 힌두문화는 바라문 문화라고 할 요소가 많았지만, 이는 결코 정체적 · 고정적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리야인의 생활문화가 표면화되면서도 내면으로는 아리야인과 원주민의 인종적 · 문화적 혼혈이 착실히 진행되어 갔던 것입니다. 경제적 · 사회면으로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으며, 점차 기원전 6-5세기의 소위 인도고대사의 격동기로 이어져갔습니다.19)

끝으로 인도는 자연환경과 민족, 그리고 종교와 언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습니다.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가 말한 것처럼, “한 국가 내에서 이처럼 많은 수의 언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이 다르고, 자연이 다르며, 이에 덧붙여 언어도 다른 것입니다. 인도라는 광대한 지역에는 사막도 있고 기름진 평야도 있습니다. 산악 지대가 있는가 하면 고원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 조건의 차이에 따라서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다르고 생활 문화도 다릅니다. 실제로 인도에 가 보면 사람들의 용모나 체격 또는 의복이나 식생활, 그리고 생활 풍습 등이 지방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누구든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다양성과 그 위에서 그 다양성을 포괄하면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인도라는 세계인 것입니다.”20) 이러한 나라, 인도에서 기원전 6세기 경 석가모니 붓다께서 탄생하였습니다.

Notes:

1) 元義範, <印度哲學思想> (서울 : 集文堂, 1990), p.11, p.81, p.361.
2) 원의범, 위의 책, p.11.
3) <두산세계대백과> ‘바라타’ 항 참조.
4) 朴京俊, “原始佛敎의 社會·經濟思想 硏究” 박사학위논문 (동국대 대학원, 1992), pp.11-12.
5) 박경준, 위의 글, p.13.
6) 中村元 著·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85.
7) 中村元, 위의 책, p.85.
8) 中村元, 위의 책, p.86.
9) 조준호, “석가족의 인도-유럽인설에 대한 반박” <인도연구> 제6권 2호, 2001, p.94.
10) 平川彰 著·李浩根 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 (서울 : 민족사, 1989), p.28.
11)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 지음 ·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서울 : 민족사, 1990), p.29.
12) 나라 야스아키, 위의 책, p.29.
13) 나라 야스아키, 위의 책, p.29.
14)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36, 참조.
15) 나라 야스아키, 앞의 책, pp.29-32, 참조.
16) 平川彰, 앞의 책, p.28.
17) 平川彰, 앞의 책, p.28-28.
18) 平川彰, 앞의 책, p.29.
19) 나라 야스아키, 앞의 책, p.37.
20) 中村元, 위의 책, p.86.

붓다시대의 정치·경제적 상황

1. 베다 종교의 출현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 아대륙(亞大陸)에는 여러 인종들이 들어와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인더스 문명의 주체자였던 드라비다(Dravida)인과 호주-아시아(Austro-Asia)계 이후 인도 아대륙의 새로운 주인공은 인도-아리야(Indo-Arya)인이었습니다. 인도-아리야인들은 인도-유럽인 가운데에서도 인도-이란인(Indo-Iranian)의 지파(支派)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리야인이라는 말이 모든 인도-유럽인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인도 아대륙의 인도-유럽계 사람들만을 한정해서 쓰고 있습니다.1)

이들은 원래 인도 아대륙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유럽과 인도 아대륙의 어느 중간 지점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분산·이동하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들 중 일부가 힌두쿠쉬(Hindukush)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부를 통해 인더스강과 쟘나강 사이의 판잡(Panjab) 지방에 침입하여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600-1,300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2) 그 시기는 정확한 것이 아니고 학자들에 따라 약간 다르게 추정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리야(Arya)라고 부르면서 다른 원주민들과 엄격히 구별하였습니다. 아리야란 고결한(noble), 명예로운(honorable)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리그-베다(Rg-veda) 등에 나오는 이 말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선주민(先主民)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리야인들이 처음에는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수백 년 동안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갠지스강 유역에 도달, 거기에서 다시 남인도 쪽으로도 뻗쳤습니다. 현대에 이르는 동안 선주민족(先主民族)과 혼혈하고 문화적으로도 복잡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3)

인도에 들어온 아리야인은 <베다>라는 오래 된 성전(聖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베다>에 의지하여 세습적인 바라문이 희생(犧牲) 등의 종교 의식을 집행,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다}는 절대 신성하며, 바라문은 나면서부터 최고라고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리야인의 생활은 주로 목축이었습니다. 따라서 우유나 유제품(乳製品)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바라문과 함께 소를 신성한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리야인은 목축민이라 농경(農耕)은 그렇게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4)

그러나 아리야인들이 판잡 평원(平原)에서 점차 동진(東進)하면서 농경생활에 적합한 문화와 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는 주로 농경에 관계가 깊은 신(神)들을 모시는 제의종교(祭儀宗敎)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습니다. 이를 일컬어 베다(Veda)종교 또는 브라흐마니즘(Brahmanism, 바라문교)이라고 합니다.5)

그들은 기원전 1,100년-900년경에는 이미 갠지스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합니다. 그들은 다시 동쪽과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자연환경에 힘입어 농업을 더욱 발전시켜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본래는 사제(司祭)였던 바라문들이 점차 하나의 사회계급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들은 주술(呪術)의 힘을 기조(基調)로 하는 제식(祭式)의 효과를 강조하고 이 제식을 독점함으로써 종교권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라문 지상주의(至上主義), 제식(祭式) 만능주의(萬能主義)를 특징으로 하는 바라문 중심의 문화가 이른바 바라문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꽃피게 됩니다.6)

이와 같이 바라문 문화는 서력 기원전 10-6, 5세기 경에 성립되었으며, 그 본거지는 남북으로는 빈디야산맥과 히말라야산맥으로 한정되며, 동으로는 프라야가, 서(西)로는 비나샤나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현대의 웃타르 프라데쉬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곳을 중국으로 불렀습니다. 즉 ‘바라문 중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붓다가 활약했던 비하르주의 동방은 이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변방이었습니다.7)

2. 정치적 과도기(過渡期)

아리야인이 발전함에 따라 부족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생기고 점차 군소 부족이 통합되어 독재권을 가진 왕(Rajan, 라잔)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부족간의 전쟁으로서는 당시 최강의 부족이었던 바라따(Bharata)와 뿌루(Puru)족간의 전쟁이 유명한데, 그 결말은 마하바라따(Mahabharata)라는 장편의 서사시로 구전되고 있습니다.8)

붓다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격변기(激變期)였습니다. 종래의 군소 부족국가들이 점차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 체계가 형성됩니다. 초기경전에는 이른바 16대국(大國)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앙가(Anga), 마가다(Magadha), 카시(Kasi), 코살라(Kosala), 밧지(Vajji), 말라(Malla), 체띠(Ceti), 방사(Vamsa). 쿠루(Kuru), 판찰라(Pancala), 맛챠(Maccha), 수라세나(Surasena), 앗사카(Assaka), 아반띠(Avanti), 간다라(Gandhara), 캄보자(Kamboja) 등입니다.

이러한 16대국의 명칭은 고대 통일국가를 이룩했던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붓다 당시에 모두 실재(實在)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것은 당시의 복잡했던 정치상황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16대국을 포함한 붓다 당시의 여러 나라에서는 공화정(共和政)과 군주정(君主政)의 두 가지 형태의 통치가 행해지고 있었고, 이들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전제군주(專制君主) 국가들은 주로 야무나강과 갠지스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공화정은 히말라야의 산기슭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군주국가의 팽창에 맞서 공화국들(ga a-sa ghas)은 존립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또한 군주국끼리의 큰 전쟁도 빈발했고, 공화국끼리의 작은 싸움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공화국은 점점 쇠퇴해가고, 군주국은 영토와 국력을 증대시켜 갔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추세였습니다.9)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의하면, 붓다 당시의 석가족은 코살라국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10) 장아함(長阿含) 유행경(遊行經)에는 마가다국의 아사세왕이 밧지(Vajji)를 정복하고자 하여 대신(大臣) 우사(禹舍)로 하여금 붓다께 자문을 구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마가다국의 파탈리가마(Pataligama)는 대신 우사가 밧지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했다는 등의 내용이 나옵니다.11) 또 사분율(四分律) 권39에는 코살라의 파사익왕(波斯匿王)과 마가다의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비구들이 그 죽은 사람들의 옷을 가서 가져오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는 베살리(Vesali)의 릿차비족(Licchavi)과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12) 이 밖에도 붓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은 상당히 많습니다.13)

그런데 본래 고대 인도의 공화제는 종족사회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고, 또한 전제군주제는 이러한 공화제 국가 및 그 주변에 잔존(殘存)하는 종족을 정복함으로써 발전하였습니다. 붓다시대의 존존 종족으로는, 사캬족(Sakya)을 비롯하여 말라종족(Malla), 리챠비종족(Licchavi), 비데하종족(Videha), 박가종족(Bhagga), 불리종족(Buli), 콜리야종족(Koliya), 몰리야종족(Moliya), 브라르마나종족(Brahmana), 칼라마종족(Kalama), 티바라종족(Tivara), 판다바종족(Pandava), 카칸다종족(Kakanda) 등이 알려지고 있습니다.14)

원래 종족사회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한 사회로서, 당시 종족사회는 원시공동체 사회의 최고 조직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공화제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과정에서 해체되어 갔던 것입니다.

결국 전제군주제 국가든 공화제 국가든 모든 국가들은 종족사회가 붕괴한 폐허 위에 건설되었던 것이며, 더욱이 강력한 전제군주국가는 다른 약소국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종속시켜갔습니다. 코살라국에 의한 석가족의 멸망, 그리고 마가다국에 의한 코살라국의 멸망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정복적·노예적 관계를 거부하고 종족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종족들은 서로 연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밧지족은 리차비족과 비데히족의 연합종족으로서, 고대 인도 최후의 민주제 사회로 알려져 있습니다.15)

3. 상업의 발달과 도시화

붓다시대에 있어서 사회기구의 변동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경제적 사회를 확립하였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확립한 근본기조(根本基調)는 촌락사회기구로부터 도시국가기구에로의 변동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병행해서 직업의 분화(分化), 생산기술의 향상, 대상인(大商人)의 출현, 동서교통로, 특히 서방제국(西方諸國)과의 교통로의 확립 등, 종래의 사제자(司祭者) 바라문에 의한 농촌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던 현저한 사회변동을 가져왔습니다.16)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대략 기원전 800년경에 철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철의 사용에 의해 농기구와 그 이외의 도구가 개량되었으며, 이는 숲의 개간과 농업 생산의 증대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수공업 제품의 증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토지가 증가하고,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민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풍부하게 생산된 제품은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어 상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를 사고 파는 상인계층이 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적과 교통의 불편함 등의 난관을 극복하고 시골과 도시 사이를 왕래하며 교역했습니다. 그들은 점차로 이 교역로의 안전을 위하여 무력을 지닌 왕족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들은 무력에 의해 보호받았으며 교역의 이익을 확장하였으며, 동시에 왕족은 재정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육로와 하천을 이용한 교통로가 개척되고, 시장이 생기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리·도시가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폐쇄적인 농촌의 부족사회는 도시에서 붕괴되어 갔습니다.17)

특히 상업의 발달은 자연히 교환의 매개체로서 화폐를 필요로 했습니다. 육로와 수로의 무역에서 제일 먼저 취급된 것은 금, 은, 보석 등의 사치품과 특산물이었습니다. 먼지 지역을 운반하기에 부피가 적으면서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취급하다가 점점 다양한 품목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물물교환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점차 금속통화(金屬通貨)가 많이 이용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주조(鑄造) 동화(銅貨)나 타각인(打刻印)을 지닌 방형, 원형의 은화, 금화, 동화를 이용한 교환 경제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화폐의 발행권은 국정의 최고 수반인 국왕의 손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18)

이와 같이 군주제 국가가 신장됨에 따라 국가의 장벽을 넘는 통상, 경제행위가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불가분 왕권의 강화와 결부되어갔습니다. 화폐경제가 일반화되고, 도시에는 상공업자의 길드도 생겼습니다. 조합장과 대상인의 자본가와 왕족은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의 상층계급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라문들이 주장하는 사성제도(varna)에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재래의 농촌과는 다른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가치관의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바라문의 종교적 권위는 옛날의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19)

4. 반바라문적 사상운동의 태동

당시 바라문이 독점했던 제식(yajna)은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의례였습니다. 현세이익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서민의 종교적 요청이지만, 이 시대에는 그 제식에 부수된 동물의 희생이 혐오되었으며, 그 효과도 의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푸자(puja)라는 새로운 예배의식도 토착문화에서 출발하여 번성하게 됩니다. 옛날의 신들은 몰락하고, 쉬바 또는 비슈누와 같은 신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던 것도 이 시기부터였습니다.20)

동시에 인간의 지식의 발달은 종교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해탈’의 경지를 희구하게 되었습니다. 해탈에 관한 수행법과 사상이 정비되고, 그 가치는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윤회와 업의 사상도 이 시대에 일반화되었는데, 당시의 문헌은 왕족이 이러한 새로운 설을 바라문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제, 사회, 지성, 종교성 등의 여러 면에서 바라문 지상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초기의 불교경전이 사성을 기록함에 있어 크샤트리야를 바라문 보다 앞서 열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21)

이러한 변모를 겪으면서 초기의 힌두문화는 급격히 동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지역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변모를 수반하였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인도에서 현저하였습니다. 동인도는 바라문중국(中國)의 입장에서 보면 변방지역이며, 그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바라문 문화의 속박을 덜 받는 지방이었습니다. 힌두세계에 동화되어 가면서도 독자적인 생활양식과 관행을 많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바라문적 또는 반바라문적 분위기도 강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상운동이 꽃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운동을 담당한 사람들은 슈라마나(Sramana, 沙門)라는 출가유행자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바라문적 색채를 감추려 하지도 않고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였습니다.22)

붓다도 이러한 슈라마나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불교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문화 등 인간생활의 여러 면에서 재래의 전통이 의심되었던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신흥종교의 하나로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23)

Notes:

1) 조준호, “석가족의 인도-유럽인설에 대한 반박” <인도연구> 제6권 2호, 2001, p.89.
2) 박경준, “원시불교의 사회 · 경제사상 연구” (박사학위논문, 동국대 대학원, 1992), p.14.
3)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36.
4) 와다나베 쇼오꼬, 위의 책, p.36.
5) 박경준, 앞의 글, p.14.
6) 박경준, 위의 글, p.15.
7) 나라 야스아끼(奈良康明) ·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서울 : 민족사, 1990), p.37 참조.
8) 平川彰 著 · 李浩根 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 (서울 : 민족사, 1989), p.29.
9) 박경준, 앞의 글, pp.18-19.
10) 大正藏 2, pp.690上-693下.
11) 大正藏 1, p.11上-12下.
12) 大正藏 22, p.850上中.
13) 박경준, 앞의 글, p.18. 註 15 참조.
14) 박경준, 위의 글, p.19.
15) 박경준, 위의 글, p.20.
16) 박경준, 위의 글, p.32.
17) 나라 야스아키, 앞의 책, pp.37-38.
18) 박경준, 앞의 글, pp.36-37.
19) 나라 야스아키, 앞의 책, p.39.
20) 나라 야스아키, 앞의 책, p.39.
21) 나라 야스아키, 앞의 책, p.39.
22) 나라 야스아키, 앞의 책, p.40.
23) 나라 야스아키, 앞의 책, p.40.

붓다의 가계(家系)

1. 석가족은 어느 종족인가

석가모니 붓다의 가계(家系)를 추적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서구학자나 인도학자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학자들까지 석가족(釋迦族)1) 이 인도-아리야계 즉, 인도-유럽인의 일족(一族)이었다는 전제 아래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학자들은 석가족이 아리야계로 자신들과 동족이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석가족의 인종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석가족이 비(非)아리야 계통의 종족이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석가족이 비아리야계 인종이었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면서 주목받고 있습니다.2)

그러면 과연 석가모니 붓다가 속한 석가족은 어느 인종에 속하였을까? 조준호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도 유럽인(백인종)이었을까? 몽고 인종(황인종)이었을까? 아니면 드라비다(Dravida)인이나 호주-아시아(Austro-Asia)인이었을까? 아니면 이러한 인종들간의 혼혈이었을까?”3)이러한 네 가지 인종은 인도 아대륙에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 온 주요한 구성원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석가족은 기원전 1,700년경 인도 서북부 지역으로 들어와 점차 동남쪽의 야무나강과 갠지스강을 따라 이동하였던 인도-아리야계의 한 부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는 석가족이 아리야계라는 단정 아래 고대인도사나 불교사가 서술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 저명한 인도사학자 스미스(Vincent A. Smith)씨가 석존은 몽고인종이라는 설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석가족에 근접하여 살았던 릿차비(Licchavi)족이 티베트의 장례 풍습과 사법절차가 행해졌던 점을 증거로 들어 그 근친 종족인 석가족 또한 아리야계가 아닌 티베트 계통의 몽고계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4) 그러나 당시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계에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5)

한편 일본의 불교학자 미야사카 유쇼(宮坂宥勝)는 석가족은 비아리야족이며 지리문화적 배경으로 보아 몽고계 인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붓다의 씨족은 인도에 베다(Veda) 문화를 일으킨 아리야족과는 다른 몽고계의 한 부족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6)

또한 이와모토 유타카(岩本裕)도 석가족은 비아리야 인종이라는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7) 그의 주장 내용은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의 <인도불교>에 일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의 주장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불전은 사캬족이 <리그 베다> 이래의 영웅으로 일종족(日種族)의 선조인 이크슈바쿠(Iksuvaku)왕의 후예라고 합니다. 팔리어로 오카카(Okkaka) 왕이라고 하며, 감자왕(甘蔗王)으로 한역되는데, 이 역어는 언어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왕은 푸르족과 야다바족의 선조라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비아리야계의 부족입니다. 따라서 이 왕의 후예라고 하는 불전 자체의 기록에 따르는 한, 사캬족은 아리야인 계통이 아닙니다. 그리고 석존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콜리야족 출신이라고 하였는데, 이 콜리야족도 오스트로-아시아계의 문다어를 사용하는 코르인과 관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8)

그리고 태국의 불교학자 잠농 통프라스트(Chamnong Tongprasert)는 초기경전을 근거로 붓다의 생애를 정치적 시각에서 재조명한 매우 독창적인 논문을 발표했습니다.9) 그는 이 논문에서 석가족은 틀림없이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락카나 숫따(Lakkhana Sutta, 三十二相經)>에 묘사된 “그들의(석가족)의 안색은 청동 빛과 같았으며, 그들의 피부는 우아하고 부드럽고, 그들의 눈과 머리칼은 흑색이었다”10)라는 신체적인 특성과 “석가 왕국이 설립되었던 네팔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히말라야 산맥 기슭을 따라서 분포된 민족의 대부분은 몽고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석가족들은 틀림없이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11)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민족학적 연구에 의하면 당시 히말라야 산록 일대로부터 비하르, 벵갈 지방에 이르기까지 티베트·버마 인종의 제부족이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히말라야 산간 지역에 이 계통의 부족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사캬족이 티베트·버마계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12)

그러나 사캬족이 아리야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캬족은 크샤트리야(Kshatriyas)라는 것입니다. 크샤트리야는 아리야인의 계급으로 사캬족이 그 안에 위치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아리야인임은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캬족의 사람들 그리고 석존이 아리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셋째, 사캬족의 사회는 부계사회로서 모계제 사회가 아니라는 점도 사캬족이 아리야계 인물이라고 결론짓는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13)

이에 대한 반론은 사캬족이 크샤트리야라고 하지만 새로운 부족이 아리야 문화권에 흡수되어 갈 때, 무력과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크샤트리야로 자칭함으로써 아리야화되어 가는 사례가 여러 차례 있으므로, 크샤트리야라고 해서 아리야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14)

또한 사캬족이 아리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로 아리야인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인종집단과 어계(語系)를 같이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현재의 문화인류학이나 언어학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어계와 인종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즉, 인종적으로 같은 집단이라 할지라도 단일한 어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어계의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도 마찬가지로 인도-유럽계통의 언어를 쓴다고 해서 인종적으로 모두 인도-유럽인이 아니고 인도-유럽인 가운데도 드라비다계통의 언어를 쓸 수 있고 드라비다인 가운데도 인도-아리야어를 쓴다는 것입니다.15)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캬족에 비바라문, 반바라문적인 요소가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라문 계급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는 공공연히 부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베다적인 제사도 수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석존이 슈라마나(沙門)로 수행을 시작하였던 것도 비바라문적 요소가 강한 동인도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6)

나라 야스아키의 지적에 따르면, “그 후의 불교문화의 발전을 살펴보면 비바라문적 토착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요가의 중시, 사리(유골)숭배, 스투파(탑)숭배, 동물숭배, 지모신(地母神) 계통의 야크샤니(Yaksan, 불전의 夜叉, 藥叉의 여성), 그 남성으로 귀령(鬼靈)의 하나인 야크샤 숭배, 나가(Naga, 뱀, 龍神) 숭배 등이 그러한 것이다. 물론 아리야 계통의 사람들도 이러한 토착문화를 흡수하였으므로, 이러한 점을 가지고 사캬족이 인종의 계통에 있어 비아리야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캬족, 그리고 석존에서 시작되는 불교가 비아리야적 요소가 농후한 인도의 토착문화적 토양 가운데에서 성립·발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17)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캬족이 아리야인이라는 설의 근거도 박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캬족이 비아리야계의 인종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도 불충분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연구 성과에 의하면 사캬족은 아리야계와 비아리야계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나라 야스아키가 말한 것처럼 현재로서는 사캬족이 아리야인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되어 확증적인 증거들이 나타나면 사캬족이 비아리야 계통의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

석가모니 붓다의 가계(家系)에 관한 기술은 대부분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인지 밝혀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헌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사카족은 자기의 종족에 대한 계보(系譜)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왕국이 코살라(Kosala)나 마가다(Magadha)에 비해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18)

초기경전인 숫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에 석가모니 붓다께서 직접 자신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9) 석존께서 출가하여 깨달음을 이루기 전,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에서 탁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탁발 모습을 높은 누각에서 바라보고 있던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 왕이 그의 뛰어난 용모와 비범하지 않은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신하를 보내 석존이 머물고 있던 처소를 알아냅니다. 그런 다음 왕이 직접 그를 찾아가서 “나는 당신의 태생을 알고 싶으니 말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기슭에 한 정직한 민족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코살라 나라의 주민으로 부(富)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20)

“가계(家系)는 아딧짜(Adicca, 태양)이고, 태생(가문)은 사끼야(Sakiya, 석가족)입니다. 나는 그런 가문에서 출가했습니다. 내가 기쁨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입니다.”21)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붓다는 분명히 자신의 가계는 아딧짜(Adicca, 태양를 의미함)이고, 가문은 사끼야(Sakiya), 즉 사캬(Sakya)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숫따니빠따>에서는 석존이 ‘감자왕(甘蔗王, Okkakaraja)의 후예’이고 ‘석가족의 아들(Sakya putta)’22)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태양의 후예(Adiccabandhu)’2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딧짜(Adicca)라는 호칭은 좀더 빈번히 쓰이는 수리야(Suriya, 태양)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붓다는 종종 ‘태양의 후예(Adiccabandhu, 日種族)’로 불렸습니다.24)

또한 디가-니까야(Digha Nikaya, 長部)의 암밧타-숫따(Ambattha-sutta, 阿摩晝經)에서는 석가모니 붓다의 친설의 형식을 빌어 사캬족의 선조는 옥까까(Okkaka, 감자왕)라는 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25)

이 전설은 암밧타(Ambattha)라는 바라문 청년이 붓다께 석가족의 비천함에 대하여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석가족의 기원과 옥까까(Okkaka)왕으로부터 청정한 혈통이 유지된 석가족의 기원과 함께 암밧타의 혈통도 같은 왕과 하녀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암밧타여, 만일 너의 이름과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씨족을 생각한다면, 사캬족은 성스럽게 태어났지만, 너는 사캬족의 하녀의 아들이다. 사캬족의 선조는 옥까까(Okkaka) 왕이다. 오랜 옛적에 옥까까 왕의 왕비는 자기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서 다른 부인에게서 태어난 옥까무카(Okkamukha), 까라깐다(Karakanda), 핫티니까(Hatthinika), 시니뿌라(Sinipura)를 왕국에서 추방시켰다. 그들은 추방당한 뒤, 히말라야 기슭의 연못 근처, 거대한 사까(Saka) 숲에서26)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혈통이 타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누이들과 결혼하였다. 옥까까 왕은 왕자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의 신하에게 물었다. ‘왕이시여, 그들은 히말라야 기슭의 연못 근처, 거대한 사까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혈통이 타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누이들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러자 옥까까 왕은 감격적인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왕자들은 진실로 훌륭하다(Sakya). 왕자들은 진실로 가장 훌륭하다.’ 그때부터 그들은 사캬족(Sakyas)으로 알려졌으며, 옥까까 왕은 사캬 종족의 시조가 되었다.”27)

이것은 완성된 전설 중의 일부이며, 마하바스뚜(Mahavastu, 大事)와 티베트 율장 및 팔리 주석서 등의 여러 곳에 실려 있습니다. 특히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주석서에서는 옥까까 왕 이전의 계보 등이 보다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설, 즉 “첫 번째 사카족으로부터 왕들의 가계는 마하바스뚜와 티베트 문헌 및 팔리 연대기들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각자 서로 너무나 다르다. 이것은 한 계통의 가계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년대기에 있는 명단들은 자따까(Jataka, 本生譚)에 나타나는 여러 왕들처럼 대부분 분명히 인위적으로 끼워 넣은 것들이다?28)라고 에드워드 토마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파우스뵐(Fausboll)은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은 라마야나(Ramayana) 설화와 그 변형된 것이 자따까(본생담)에서도 발견된다고 지적했습니다.29)

지금까지 살펴본 사캬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 붓다의 씨족은 아딧짜(Adicca)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사카족이 아리야계의 태양씨족(太陽氏族)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30) 하지만 정반대로 이것을 근거로 사캬족이 비아리야계임을 증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31)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Notes:

1) 석가족(釋迦族)의 원어는 팔리어로는 사캬(Sakya), 삭까(Sakka), 사끼야(Sakiya) 등으로, 산스끄리뜨로는 샤캬(Sakya)로 표기되거나 발음된다. 사캬(Sakya)는 ‘사까(saka) 나무에 속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조준호, “석가족의 인도-유럽인설에 대한 반박” <인도연구> 제6권 2호, 2001년 11월, pp.88-123.
3) 조준호, 위의 글, p.89.
4) 조준호, 위의 글, p.90.
5) 나라 야스아키 지음 ·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서울 : 민족사, 1990), p.67.
6) 宮坂宥勝, <佛敎の起源> (東京: 山喜房佛書林, 1971), p.81; 김진열, <불교사회학 원론(1)> (서울 : 운주사, 1993), p.16에서 재인용.
7) 이와모토 유타카(岩本裕) 저 · 권기종 역, <불교, 그 세계> (서울 : 동화문화사, 1980), pp.15-38.
8) 나라 야스아키 지음 ·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p.67.
9) Chamnong Tongprasert, “My Political Thought on the life of the Buddha” Overseas Going Buddhist Missionary Monks. Class V, (Bangkok : Dhammaduta Bhikkhus Going Abroad, 2000), pp.77-96. 이 논문은 필자가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 잠농 통프라스트 지음·이마성 옮김,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불교평론> 제7호(2001년 여름호), pp.359-389.
10) Dialogues of the Buddha (Digha-nikaya), Part Ⅲ, tr. by T. W. Rhys Davids and C. A. F. Rhys Davids (London : PTS, 1975), p.138.
11) 잠농 통프라스트 지음 · 이마성 옮김, 앞의 글, p.362 참조.
12) 나라 야스아키 지음 ·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pp.67-68.
13) 나라 야스아키 지음 ·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pp.66-67.
14) 나라 야스아키 지음 ·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p.67.
15) 조준호, 앞의 글, p.94.
16) 나라 야스아키 지음 ·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p.68.
17) 나라 야스아키 지음 ·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p.68.
18)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知文閣, 1965), p.12-13.
19) Dines Andersen & Helmer Smith (ed.), Sutta-nipata (=Sn.) (London : PTS, 1913), pp.72-74.
20) Sn. v.422: “Ujum janapado raja Himavantassa passato, dhanaviriyena sampanno Kosalesu niketino.”
21) Sn. v.423: “Adicca nama gottena, Sakiya nama jatiya, tamha kula pabbajito’mhi raja na kame abhipatthayam.”
22) Sn. v.991: “Pura Kapilavatthumha nikkhanto lokanayako apacco Okkakarajassa Sakya putto pabhamkaro?
23) Sn. v.1128: “Te tosita cakkhumata Buddhen’ Adiccabandhuna, brahmacariyam acarimsu varapannassa santike.”
24) tr. H. Saddhatissa, The Sutta-nipata, (London : Curzon Press, 1985), p.133, Note No. 1.
25) Digha Nikaya (=D.), ed. T. W. Rhys Davids & J. E. Carpenter, 3 volumes, (London : PTS, 1890-1911), Ⅰ, pp.92-93.
26) 사까(saka)는 티크 나무(Tectona grandis)가 아니고 살(sal) 나무(Shorea robusta)를 말한다. 티크 나무는 네팔 테라이 숲의 토착 식물이 아니라고 한다. Edward J. T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Indian edition 1992), p.7 No.2 참조.
27) Edward J. T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6-7.
28) See Edward J. T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10.
29) Edward J. T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10.
30) 이기영, <석가>, p.12 참조.
31) 이와모토 유타카(岩本裕) 저, 권기종 역, 앞의 책, pp.15-38.

석가족의 나라

1. 석가국의 실체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에 의해 창시된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인도 동북부에서 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 경에 활약했던 분입니다. 그는 북인도에서 네팔에 이르는 지방에 있던 석가국1)에서 태어났지만, 출가하여 중인도 갠지스강 남쪽의 마가다(Magadha)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수행을 하여 35세가 되던 때,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는 붓다의 조국인 나라 이름[國家名]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를 국왕, 즉 슛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라고 칭하고, 그의 어머니를 마야(Maya, 摩耶) 왕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어린 시절을 말할 때 태자(太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붓다가 속했던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붓다의 고국인 석가국이 큰 나라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가능한 석가국에 대해 좋게 묘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석가국은 붓다 당시 정치적으로 주권을 가진 독립적인 국가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붓다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꼬살라국에 예속된 작은 영토의 자치주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으로 엄격히 말해서 석가국이라 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다만 편의상 석가국이라 지칭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고향, 사캬족(석가족)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직 불교도의 저작에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인도의 정치사에서 석가국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석가족의 나라는 바흐라이치(Bahraich)와 고라크뿌르(Gorakhpur) 사이 네팔의 접경에 인접해 있는 여러 주들의 동북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경전들의 서두에 나옵니다. 경전들에서는 수도 까삘라밧투(Kapilavatthu, Skt. Kapilavastu, 迦毘羅城)와 석가족의 여러 마을 혹은 군구(郡區), 그리고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avatth , Skt. Sravasti, 舍衛城)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것만으로는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2)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정보는 세 가지 자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석서와 그 주석서에 기초를 둔 편찬물들에 기록된 전통에 의한 것입니다. 둘째는 인도 성지(聖地)를 직접 방문했던 중국의 순례승, 즉 법현(法顯, 399-414 A.D.), 현장(玄奘, 629-645 A.D.) 등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셋째는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것입니다.

2.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

석가족의 근거지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였습니다. 까삘라밧투를 중국의 역경가들은 가비라성(迦毘羅城)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의 고향이 굉장히 큰 고대 도시의 성(城)으로 연상하기 쉽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대한 성이었는지는 의문이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더라도 웅장하고 화려했던 성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실제로 이 까삘라밧투가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 밝혀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조사와 중국의 구법승(求法僧)이었던 법현과 현장의 기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기 5세기 초에 중국의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땅을 밟은 구법승(求法僧) 법현(法顯)이 까삘라밧투를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행문 <불국기(佛國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동쪽을 향해 1요자나(약 9마일) 남짓 가면 까삘라밧투에 이른다. 성(城)안은 왕도 백성도 없고 황폐하여 다만 얼마간의 승려들과 민가가 수십 호 있을 뿐이었다.”

또 7세기 경, 저 현장(玄奘)이 그곳에 갔을 때는 더욱 황폐해서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어느 곳에 성이 있었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장은 석가족의 수도 까삘라밧투는 사왓티(舍衛城)에서 동남쪽으로 약 5, 6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서 19세기 말 경에 영국의 탐험가 커닝엄(Cunningham)3) 이 여러 문헌을 섭렵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였으나 까삘라밧투라는 이름의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4)

그러나 그 뒤 빈센트 스미스 등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은 드러나 있습니다.5) 스미스씨는 “비록 법현이 보았던 거의 모든 성스러운 장소[聖地]를 현장 또한 보았다. 현장은 여러 가지 다른 부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였는데, 두 기록자들이 같은 장소를 묘사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매우 다르다”6)고 지적하였습니다. 스미스씨에 의하면 법현이 보았다고 하는 까빌라밧투는 빠다리아(Padaria) 남서쪽 9말일 지점에 있는 삐쁘라바(Piprava)였고, 현장이 보았다고 하는 까삘라밧투는 서북쪽 14마일 지점에 위치한 띨라우라 곳(Tilaura Kot)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7) 이러한 자세한 지리적 사항에 대해서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은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밧투(vatthu)’란 ‘지방’ 또는 ‘지구(地區)’라는 말입니다.8) 까삘라밧투는 까삘라뿌라(Kapilapura, 迦維羅弗羅)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이 까삘라 선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삘라 선인은 전설적 인물이므로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까삘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이 꼭 맞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9)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의 시조는 이크슈바꾸(Ikshvaku, Okka ka, 甘蔗王)라고 합니다. 옛날에 이크슈바꾸, 즉 감자왕(甘蔗王)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야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사남오녀(四男五女)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젊은 왕비가 왕자를 낳자, 이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왕의 환심(歡心)을 사서, 그 네 왕자를 국외(國外)로 추방(追放)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네 왕자들은 다섯 왕녀(王女)들과 함께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까지 가서,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이 수도하고 있던 근처에까지 가서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혈통을 존중하는 생각에서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사왕자(四王子), 사왕녀(四王女)가 서로 혼인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크슈바꾸왕은 뒤에 왕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잘 시작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잘 했다’는 뜻을 가진 ‘사캬’라는 말이 이 네 왕자의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서울이 까삘라 선인의 암자(庵子)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 서울을 까삘라밧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관해서 후대(後代)의 중국 순례승(巡禮僧) 현장(玄奘)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며, 농사를 짓되, (적당한) 시기에 파종(播種)을 한다. 사계(四季)의 운행(運行)은 규칙적이며 (주민의) 풍속은 화창(和暢)하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석가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석가의 부왕(父王)의 이름을 숫도다나(깨끗한 쌀, 淨飯)라고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10)

3. 석가국의 정치적 위치

석가족의 나라는 전체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Rohi ) 강을 사이에 두고, 다른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을 꼴리야(Koliyas, 拘利)족이라고 부릅니다. 석가족의 수도는 까삘라밧투였고, 꼴리야족의 수도는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였습니다. 이 두 종족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11)

붓다 시대의 정치체제는 크게 두 가지, 즉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와 공화제(共和制)가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과 꼬살라국과 같은 아리야계 종족들은 전제 군주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밧지족(Vajjis)과 말라족(Malla s) 등과 같은 비아리야계 종족[몽골계]는 공화제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석가족과 꼴리야족은 비아리야계 종족이었으나, 이미 아리야 계통의 전제군주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12)

석가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貴族的) 공화제였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合議)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불전(佛典)에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및 낙성식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하였습니다.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대전제왕국(大專制王國)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다왕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Anga, 鴦伽)를 비롯한 밧지, 말라의 군소국가(群小國家)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꼬살라 왕국은 까시(Kasi, 迦尸)국을 점령하고, 석가족의 나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석가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던 것입니다.13)

석가족과 꼴리야족이 살던 지대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으로 로히니강(江)을 비롯해 하천(河川)이 많고, 지미(地味)도 비옥(肥沃)하고, 목축(牧畜)에도 적당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석가 일가(一家)의 가문(家門)의 이름을 고타마(Gotama, 喬答摩)라고 했는데, 그 뜻은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란 의미이므로 이 이름도 역시 석가족이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종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족의 정치적 지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석가족의 모든 활동은 언제나 꼬살라국에 의해 감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석가 왕국은 꼬살라국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았습니다. 석가족은 전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꼬살라국은 가장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14)

비록 꼬살라국이 석가족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기를 허용했을지라도, 그것은 섭정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석가족은 경제, 통상과 재판에 있어서 만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석가족이 독립을 원하긴 했지만 대군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꼬살라국도 물론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15)

석가족은 오직 꼬살라국에서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의 생각은 독립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의 주체는 여러 큰 종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석가족의 수령들을 자신들은 캇띠야(Khattiya, Skt. Kshatriya)’나 ‘전사(戰士)’ 혹은 때로는 ‘라자(Raja)’라고 불렸는데, 서양 개념의 왕은 아닙니다. 그들은 대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의에서 그들은 의장직을 수행할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직위를 매우 잘 실행했다면 그는 석가족의 숫도다나(Suddhodana)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의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의장직은 밧지족의 경우와 같이 윤번제로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16)

석가족의 정치적 위치가 이러한 때에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최고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나라를 꼬살라국의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17)

그러나 싯닷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씨족의 지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강건함과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싸움에 의해 꼬살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몇몇 유능한 친구들과 작은 군대는 잘 훈련된 꼬살라국의 거대한 군대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전혀 현명한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곤충이 불 속으로 날아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방법, 즉 유혈 없는 평화적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꼬살라국에서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출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18)

Notes:

1) 히라가와 아끼라(平川彰)씨는 붓다의 고향을 ‘석가국’이라고 표현했다. 平川彰 著·李浩根 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 p.15.
2)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vt Ltd, 1992), p.16 참조.
3) 커닝엄(Cunningham, 1814-1893)은 영국 웨스트민트에서 출생했다. 인도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림. 원래 엔지니어였으나 1831년 이후 인도 고고학에 전념. 1834-1854년까지 마니칼라, 싸르나트, 비슬라 등의 유적을 발굴. 유적지 발굴을 통하여 불교역사의 재발견을 이룸. 만년에는 화폐학연구에 전념하다가 런던에서 죽음. 논문은 “캐시미르 사원에 대한 일련의 저작” 외 24권의 고고학 보고서가 있음. 인도역사가들에게는 귀중한 문헌이다. [피야다시 스님 지음·정원 스님 옮김, <부처님, 그분> (서울 : 고요한 소리, 1988), p.87 No.3.]
4) 마스다니 후미오 지음·반영규 옮김, <붓다, 그 생애와 사상> (서울 : 대원정사, 1987), p.18-19.
5)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16-18 참조.
6)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19에서 재인용.
7)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19.
8) 마스다니 후미오 지음, 위의 책, p.19.
9)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17.
10) 이기영, <석가>, p.17.
11) 이기영, <석가>, p.13 참조.
12) 잠롱 통프라스트 지음 · 이마성 옮김,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불교평론> 제7호 (2001년 여름호), pp.362 참조.
13) 이기영, <석가>, p.14.
14) 잠롱 통프라스트 지음 · 이마성 옮김, 앞의 글, pp.362-363.
15) 잠롱 통프라스트 지음 · 이마성 옮김, 위의 글, p.363.
16) 잠롱 통프라스트 지음 · 이마성 옮김, 위의 글, p.363.
17) 잠롱 통프라스트 지음 · 이마성 옮김, 위의 글, pp.363-364.
18) 잠롱 통프라스트 지음 · 이마성 옮김, 위의 글, p.364.

붓다의 탄생(誕生)

1. 탄생에 관한 전설

붓다의 생애 가운데 탄생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가장 많습니다. 붓다의 탄생에 관한 유명한 전설의 골자는 이미 초기성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석존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투시타(Tusita, 兜率天)에 있다가, 거기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胎)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석존의 탄생을 일반적으로 ‘강탄(降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1)

이러한 강탄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한 인간이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완벽한 인격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부처 되기 이전에 무수한 생애를 거쳐오는 동안 끝없이 자기 희생의 공덕을 쌓았고, 그 결과 도솔천에 올라가 거기에서 신들을 교화하면서 지상에 내려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 그래서 보살의 수많은 전생 설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생 설화들은 대부분 여러 생애를 통해 선행의 공덕을 쌓았다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 도솔천에 머물고 있으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가 교화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솔천 하강설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도솔천은 보살(菩薩)이 다음 생애에는 지상에 태어나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문다고 합니다. 이때 보살은 하생의 시기와 대륙과 나라와 집안에 대해 살핀다고 합니다. 시기라 함은, 인간 사회가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종교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타락한 세상에서는 종교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므로 그 중간의 알맞은 시기를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륙[洲]이라 함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 의한 네 개의 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 잠부드비파(閻浮提)라는 곳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인간 사회를 말한 것인데 부처님의 출현에는 거기가 제일 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같은 인도 중에서도 변경(邊境)이 아닌 중앙부가 좋다고 선택됩니다. 인도 사회의 계급은 세습 종교가인 바라문과 무사 귀족의 크샤트리야(刹帝利)가 상위(上位)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크샤트리야 쪽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보살도 그런 집안에 태어나기로 한다는 것입니다.3)

여러 신들은 어느 나라의 왕을 고를까를 의논하여, 열여섯 큰 나라를 하나씩 들어보지만 보살이 태어나기에 적당한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들이 다시 보살에게 그 조건을 물으니, 보살은 국토에 대해서는 예순 네 가지, 어머니가 되실 분에 대해서는 서른 두 가지 조건을 내어놓습니다. 말하자면 국토의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말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그 인품이 뛰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들은 여러 보살과 신들은 석가족의 숫도다나왕(淨飯王)과 마야비(摩耶妃)야말로 그런 분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었다고 합니다.4)

한편 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합니다. 신과 천녀들은 머지않아 보살과 작별할 것을 슬퍼합니다. 보살은 자기의 후임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정했다고 합니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하고 언젠가는 석가모니를 본받아 지상에 내려가 부처가 될 날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5)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손으로 태자를 받들었다고 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두 줄기의 온수(溫水)가 쏟아져 태자의 몸을 씻어드렸고, 그러자 태자는 선뜻 대지(大地)에 일어서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디고서 오른 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사자후(獅子吼)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탄생게(誕生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붓다의 탄생에 관한 설화는 일찍부터 신화화(神話化) 되었습니다. 초기경전에도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설화들은 후대로 가면 갈수록 더욱더 윤색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오늘날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정전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하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을 빼버리고, 나머지 부분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6) 다만 우리는 이러한 설화를 통해 이렇게 해서라도 상징(象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欽慕)의 정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7)

2. 역사적 붓다의 탄생

석가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의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함)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정치 또는 귀족정치(혹은 과두정치)를 행하였습니다. 왕(rajan)이라고 하는 수장(首長)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꼬살라 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8)

붓다는 이러한 석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야(Maya, 摩耶) 부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수장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으로 불렸으며, 석존도 왕족 출신이었다고 합니다.9) 그러나 결코 대왕(大王)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支配者)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大國)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왕(淨飯大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理想化)한 데서 생긴 호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야부인도 후세에는 마하마야(Mahamaya) 왕비로 높여 불렸습니다. 그녀는 같은 석가족의 한 별계(別系)인 꼴리야(Koliyas)족의 공주였습니다.10)

초기성전에서는 고따마(Gotama, Gautama, 瞿曇)라고 하는 이름이 종종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좋은 소’라고 하는 의미의 족성(族姓)입니다. 그의 이름은 싯닷타(Siddhattha, Siddhartha, 悉達, ‘목적을 성취한 자’의 뜻)이지만 초기성전의 오래된 부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후세에 와서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보입니다.11)

숫도다나(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존을 낳은 것은 아마 당시 40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 석존의 탄생이 이 가문(家門)의 얼마나 큰 경사(慶事)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12)

마야 왕비는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향하던 중,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Lumbin )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수 아래서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13)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 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바라문들은 심사숙고한 후 일곱 명은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의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면 왕자님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는 언젠가는 진리를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등각자가 될 것입니다.”14) 그런데 어머니 마야부인은 석존을 낳은 지 이레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가 양모가 되어 석존을 양육하였습니다.

3.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 )라고 전해지는데, 1896년 퓨러(A. Fuhrer)15)가 네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에서 발견한 아소까 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불타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석존 탄생지에 대한 초기성전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16) 이곳은 현재 룸민데이(Rummindei)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룸비니 동산은 마야비(妃)의 친정인 석가 일족의 데바다하(천비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친정 어머니 이름을 따서 룸비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온갖 아름다운 꽃과 수목,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울창하고, 연못과 늪과 흐르는 시내도 있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훌륭한 동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기 405년 이곳을 찾은 중국인 승려 법현(法顯)은 여기에 두 용왕이 태자에게 첫 목욕물을 끼얹어주었다는 유적이 그때도 우물과 연못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그 근처에 살고 있던 불교 승려들의 음료수로도 사용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633년 이 지방을 찾아간 현장(玄 )은 연못과 샘말고도 그 고장 사람들이 유하(油河)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냇물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더라고 적었습니다. 해산한 뒤 마야비가 목욕한 강이라는 것입니다.17)

현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에 무우왕(無憂王, 아소까왕을 가리킴)이 세운 큰 돌기둥[石柱]이 있고 그 꼭대기에 마상(馬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뒷날 벼락으로 돌기둥이 중간에서 꺾이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8)

이 룸비니 동산의 유적은 오랫동안 정글에 묻혀서 잊혀진 채 겨우 그 고장 사람이 조그만 집을 짓고 지켜왔었습니다. 그러다가 1896년, 그 당시 인도 정부의 노력으로 퓨러(A. Fuhrer)라는 사람이 네팔에 들어가, 이른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라는 마을이 룸비니의 고적임을 확인했습니다.19) 특히 아소까왕이 세운 돌기둥이 발견됨으로써 결정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현장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 돌기둥의 위쪽은 꺾여진 채 없어지고 말았지만, 아랫부분은 그대로 있어 거기에 적힌 비문의 넉 줄 반의 글자는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석주에는 93자로 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습니다.


“신들의 보호를 받는 덕 높은 왕(아소까)이 왕위에 오른지 20년 되는 해에 친히 이곳에 와서 공양을 올렸다. 여기서 붓다 사캬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팔 분의 일만을 지불하게 된다.”20)

위의 석주에는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dhe jate Sakyamuni)21)라는 대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해 이곳이 룸비니 동산이었음이 분명히 밝혀진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석주는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법사가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4. 탄생 연대

붓다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전과 북전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제국의 불교도들은 불멸(佛滅)을 기원전 544년(또는 543년)으로 보는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세일론(스리랑카) 불교의 전설에 근거한 것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있으며 학문적으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학문적 입장에서 볼 때 현재 학계에서 쓰이고 있는 붓다의 재세 연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22)

첫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560-480년 설입니다. 이것은 주로 서양의 여러 학자들이 세일론의 사서(史書) 등의 자료를 검토하여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멸 연대를 서력 기원전 489년(A. Bareau), 487년(V. A. Smith), 484년(H. Jacobi), 483년(W. Geiger 등), 482년(J. Fleer) 혹은 478년(J. Filliozat), 477년(F. Max Muler 등)으로 보는 등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이들의 학설은 이른바 중성점기(衆聖點記; 많은 聖者들이 불멸 후 <律藏>에다 매년 점을 하나씩 찍어 온 기록)에 희한 486년 설(수정설은 485)과도 거의 일치합니다.23)

두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460-380년 설로서 일본의 우이하쿠주(宇井伯壽)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학설입니다. 우이(宇井)은 아소까 왕의 즉위 연대를 기원전 271년으로 추정하고 이 즉위가 불멸 후 116년에 거행되었다고 하는 북전(北傳)의 불교 전승에서 역산(逆算)하여 불멸을 서력 기원전 386년으로 산정하였습니다. 아소까 왕의 연대는 그 후의 연구에 의해 다소 수정되어 현재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는 268년 즉위설을 취합니다. 따라서 붓다의 연대는 서력 기원전 463-383년으로 수정됩니다.24)

이상의 두 가지 학설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지만 고대 인도에 있어 역사 관념의 결여, 연대의 불명확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100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25)

우리나라에서 붓다의 탄생일을 4월 8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방의 불교국에서는 베사카(Vesakha, Vaisakha, 인도력의 2월로서 태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함) 월의 만월일(滿月日)을 붓다의 탄생·성도·열반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도와 중국의 역법(曆法)이 서로 틀리기 때문입니다.

Notes:

1)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p.36-37.
2) 와타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18.
3)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p.18-19 참조.
4)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p.19-20.
5)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0.
6)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tv Ltd, 1992), pp.27-29 참조.
7)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26.
8)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6.
9)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6.
10) 이기영, 앞의 책, p.18.
11)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6.
12) 이기영, 앞의 책, p.18.
13) 피야다시 지음·정원 옮김, <부처님, 그 분 : 생애와 가르침> (서울 : 고요한 소리, 1988), p.10.
14) 피야다시 지음, 앞의 책, pp.10-11.
15) 피야다시(Piyadassi Thera) 장로는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룸비니 동산을 1896년 저명한 고고학자 커닝엄(Cunningham) 장군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피야다시 스님의 착오에 의한 것 같다. 피야다시 지음, 위의 책, p.10 참조.
16)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7.
17)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3.
18)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3.
19)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4.
20) “When king Devanampiya Priyadar in had been anointed twenty years, he came himself and worshipped (this spot), because the Buddha kyamuni was born here. He both caused to be made a stone bearing a horse(?) ; and caused a stone pilar to be set up (in order to show) that the Blessed one was born here. (He) made the village of Lummini free of taxes, and paying (only) an eighth part (of the produce).” translated by Dr. Hultzsch. See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18-19.
21) 피야다시 지음, 앞의 책, p.10.
22)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7.
23)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7-38.
24)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8.
25)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8.

붓다의 젊은 시절

1. 태자의 어린 시절

태자가 탄생한 후 7일 만에 그의 생모(生母)였던 마야(Maya) 왕비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야 왕비의 사망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너무 미화시킨 것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마야 왕비가 일찍 사망한 원인은 아마 산후 몸조리를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가던 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태자를 낳았습니다. 야외에서 출산한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이동하여 왕궁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태자가 자라면서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사실은 태자의 인격과 성격 형성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봅니다.1)

그 후 태자는 그의 이모(姨母)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언니인 마야 왕비의 뒤를 이어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부인이 되었으며, 나중에 난다(Nanda, 難陀)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나중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교단(敎團)은 그녀의 출가로 인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붓다의 어린 시절을 종합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붓다는 어려서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어느 날 농부가 일구어 놓은 땅 속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자 새가 날아와 그 벌레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태자는 생물은 서로 해친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합니다.

둘째, 붓다는 천성적으로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2)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명상(冥想)을 좋아하는 형의 소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석가족의 왕인 그의 아버지는 국가적인 행사인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습니다. 이때 어린 왕자도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농경제가 진행되는 동안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나무 밑에서 좌선을 하여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었다고 합니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29권의 <유연경(柔軟經)>에 따르면, 붓다께서는 출가 전에 이미 초선(初禪)의 경지를 체험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또 옛날을 생각하면, 농부가 밭 위에서 쉬는 것을 보고 염부(閻浮)나무 그늘에 가서 가부를 맺고 앉아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떠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어, 욕계(欲界)의 악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 초선(初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었다.”3)

이 때가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을 때인지 아니면 다른 때인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태자가 홀로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쾌 지나간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해가 돌아감에 따라 모두 그 그림자 자리를 옮겨갔는데, 태자가 앉은 나무의 그늘만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오래된 조각(彫刻)들에는 그 광경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시간도 태자의 명상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미래의 붓다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설사 이것이 후대의 추측인 첨가라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4)

한편 후대에 성립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의 제4권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태자의 선정에 대해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태자가 염부수(閻浮樹) 아래에서 사선(四禪)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이것은 붓다께서 출가하여 성도(成道)를 향한 고행을 마치고, 과거 소년시절 체험했던 명상의 시간을 회상하여 그와 같은 방법으로 좌선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셋째, 붓다의 젊은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붓다께서 만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여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앞에서 인용했던 <중아함경> 제29권 유연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자신을 위해 겨울·여름·봄 세 계절에 어울리는 세 가지 종류의 궁전(三時殿)이 지어졌다는 등 유복하고 호화로운 생활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내가 부왕(父王) 숫도다나(悅頭檀) 집에 있을 때에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궁전, 곧 봄 궁전과 여름 궁전 및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시 푸른 연꽃 연못·붉은 연꽃 연못·빨간 연꽃 연못·흰 연꽃 연못 등 여러 가지 연꽃 연못을 만들고, 그 연꽃 가운데에는 온갖 물꽃, 곧 푸른 연꽃·붉은 연꽃·빨간 연꽃·흰 연꽃을 심어서 언제나 물이 있고 언제나 꽃이 있었으며, 사람을 시켜 수호하여 일체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네 사람을 시켜 나를 목욕시키고는 붉은 전단향( 檀香)을 내 몸에 바르고 새 비단옷을 입혔으니, 위아래나 안팎이나 겉과 속이 다 새 것이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언제나 일산(日傘)을 내게 씌웠으니, 나로 하여금 밤에는 이슬에 젖지 않고 낮에는 볕에 그을지 않게 하기 때문이었다. ……

내가 옛날의 아버지 숫도다나 집을 생각하면 여름 4개월 동안은 정전(正殿)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남자는 없고 오직 기생만 있어서, 스스로 즐기면서 당초에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동산으로 나가려고 할 때에는 삼십명의 제일 훌륭한 기병(騎兵)을 뽑아 의장(儀仗)이 앞뒤에서 시종하고 인도하게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런 여의족(如意足)이 있었으니, 이것이 가장 유연(柔軟)한 것이었다.”6)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7) 이와 같이 태자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 보다 좋은 조건과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붓다는 세속적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즐기며 지내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하지만 이 젊은 왕자는 온갖 안락과 사치를 누리며 예기(藝妓)들의 시중을 받는 궁궐생활에 오히려 싫증을 느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세속적 야망에 만족하기에는 감수성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입니다. 초기 팔리어 사료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슬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하며 환멸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8)

보통 사람들은 추한 노인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어느 누구도 병의 고통이나 병자의 추잡스러움을 바라지 않지만, 병에 걸리는 것 역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 누구에게도 죽음은 반드시 닥쳐옵니다. 젊은 날의 붓다는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두려움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 젊음이 넘치는 그의 신체로부터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9)

이러한 세속적 쾌락에 대한 혐오감과 인생이 단지 끝없는 고통이라는 생각은 이 젊은 왕자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종교적 삶을 통해서 평화와 고요를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0)

2. 태자의 교육

태자는 당시 왕족의 교양으로서 필요한 모든 학문·기예(技藝)를 배웠으며, 비범한 재간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후대의 불전(佛傳)에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 교육이란 어떠한 내용의 것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었을까?

태자가 취학(就學)을 한 것은 일곱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도의 관습에 의하면 보통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은 여덟 살부터 12년 동안, 크샤트리아 계급의 사람들은 열 한 살부터 12년 동안, 바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열두 살부터 12년 동안, 스승 밑에서 인도인이 가장 존중하는 고전(古典)인 <베다>를 배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학문에 뛰어난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일곱 살부터 스승을 맞이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태자가 이와 같은 부류의 소년이었을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1) 그리고 태자는 <베다>는 물론 <베다>의 보조학(補助學)도 학습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의 경전에는 세 개의 <베다>와 자휘학(字彙學), 어원학(語源學),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순세파학(順世派學), 대인상학(大人相學)으로 되어있고, 이것들에 통하는 것이 브라만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자이나교 측에서는 네 개의 <베다>와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시의 수재들은 <베다>의 본문 암송(暗誦), 그것에 의한 문법, 어원(語源)에 관한 학문, 사전(史傳)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밖에 당시의 일반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록들에는 인도 사상 중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진 <우파니샤드>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붓다 당시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이미 주지(周知)되어 온 사실이기 때문에 태자가 학습한 과목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은 명백합니다. 불교의 원시경전 중 가장 오래된 층의 것들 속에 우파니샤드적 표현이 많은 것은 석존의 태자 시대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교양을 말하고 있음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2)

또한 태자가 크샤트리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文)의 면만이 아니라, 무(武)의 면도 같이 연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무사계급(武士階級)인 크샤트리야족 출신으로서 필요한 무술(武術)을 배우고 닦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후대의 불전에는 태자가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나 있었다고 했고, 그가 야소다라비(妃)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도 그가 궁중에서 열린 무술대회에서 발군(拔群)의 성적을 올린 까닭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13)

태자는 인도의 언어와 고전 문학 등의 일반적인 학습만을 한 것이 아니라 도보경주, 원반 던지기와 창 던지기 등의 육체적인 단련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족에게 필수적인 네 가지 기예, 즉 말타기, 코끼리 타기, 전차 몰기 그리고 군대의 배치법을 배웠다고 합니다.14) 이와 같이 전기나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태자는 왕족으로서의 교양을 쌓는데 필요한 온갖 학문과 기예를 습득했고, 비범한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습니다.15)

3. 태자의 결혼

태자가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리고 그 태자비(太子妃)가 라훌라(Rahula, 羅候羅)란 아들을 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모든 불전(佛傳)이 다 그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6) 결혼의 시기는 16세, 17세, 19세 20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 따르면 16세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16세에 결혼한 것을 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자비의 이름은 남방성전(南方聖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북방성전(北方聖典)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서는 라훌라마따(Rahulamata, ‘라훌라의 어머니’의 뜻)라든가 밧다깟짜(Bhaddhakacca) 혹은 밧다깟짜나(Bhaddhakaccana, 跋陀迦旃延)로 불려지고 있지만 북방의 전승에서는 범어로 야소다라(Yasodhara, 耶輸陀羅, ‘영예를 지닌 여성’의 뜻)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뒷날 팔리어 성전의 주석서에서도 ‘야소다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전승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이름도 정하고 있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습니다.17)

남방의 팔리어 전기(傳記)에서는 다만 ‘라훌라의 어머니'(羅候羅母)라고만 불려지고 있는데, 이런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호칭법으로 옛날 인도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일이 흔했던 것 같습니다. 붓다의 제자나, 신자들 중에도 아들 이름을 붙여 그 어머니를 호칭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방의 성전에서는 태자의 비를 야소다라(耶輸陀羅)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이 야소다라에 관한 이야기는 붓다께서 성도한 뒤 옛 왕성(王城)을 방문했을 때, 출영(出迎)한 것과 그 후에 이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더불어 열심히 출가를 원해서 허락을 받고 니승(尼僧)이 되었다는 두 가지 사실밖에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18)

붓다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삶의 문제를 통찰하는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결혼 이후에도 그러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후 얻게 된 그의 깨달음은 그의 단순한 천재성이나 직관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지속된 내성적 성숙과 노력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19)

Notes:

1)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 46.
2) 平川彰 著 · 李浩根 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卷 (서울 : 민족사, 1989), p. 41.
3) <中阿含經> 제29권(大正藏 1, pp. 607c-608a), “我復憶昔時看田作人止息田上. 往詣閻浮樹下結跏趺坐. 離欲惡不善之法. 有覺有觀. 離生喜樂得初禪成就遊.”
4) 이기영, <석가>, pp. 47-48.
5) <方廣大莊嚴經> 제4권 (大正藏 3, p. 560b), “諸欲惡有覺有觀 離生喜樂住初禪內淨一心滅覺觀 離生喜樂住二禪 離喜受 聖說住捨有念有想 身證樂住三禪 斷除苦樂滅憂喜 不苦不樂 念淸淨住四禪.”
6) <中阿含經> 제29권(大正藏 1, p. 607c).
7) F. L. Woodward and E. M. Hare, Gradual Saying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2), I, p. 128.
8) 케네스 첸 지음, 길희성 · 윤영해 옮김, <불교의 이해> (왜관 : 분도출판사, 1994), p. 35.
9) 平川彰, 앞의 책, pp. 41-42.
10) 케네스 첸 지음, 길희성 · 윤영해 옮김, <불교의 이해>, p. 35.
11) 이기영, <석가>, p. 48.
12) 이기영, <석가>, p. 49.
13) 이기영, <석가>, p. 50.
14) 길희성 · 윤영해 옮김, 앞의 책, p. 34.
15) 정승석, <불교의 이해> (서울 : 대원정사, 1989), pp. 23-24.
16) 이기영, <석가>, p. 50.
17) 후지타 코타츠 외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 39.
18) 이기영, <석가>, p. 52.
19) 정승석, 앞의 책, p. 25.

붓다의 출가와 수행

1. 출가의 동기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ha, Sk. Gautama Siddhartha)는 온갖 호화로움과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한 학문이나 무예도 결코 싯닷타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싯닷타는 부족함이 없는 왕궁의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인간이나 세계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그를 괴롭힌 것은 생(生) · 노(老) · 병(病) · 사(死)와 같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와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Sk. Mahaprajapati Gautama, 摩訶波闍波提瞿曇彌)는 이런 왕자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싯닷타가 훌륭하게 자라나 왕위를 잇고 석가족(釋迦族)의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그런 세속의 일보다는 항상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혹시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수행자가 되지나 않을까 늘 염려하였습니다. 싯닷타를 서둘러 결혼시킨 것도 이러한 걱정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1)

이와 같이 젊은 날의 싯닷타는 자신이 처한 위치와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였던 것입니다. 여러 문헌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호사스런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의 고뇌는 주로 생·노·병·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로서 정리되었던 것입니다.2)

초기경전인 <마하빠다나 숫따(Mahapadana sutta, 大本經)>에는 과거세(過去世)의 비바시불(毘婆尸佛)의 ‘사문유관(四門遊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붓다는 유원(遊園)으로 가기 위해서 곱게 꾸민 수레를 신두산(産) 말에 매고 가던 중,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진 채 지팡이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떠는 노인을 만남으로써 살아있는 모든 것이 늙는다면 태어나는 일 자체가 화(禍)라고 느꼈으며, 마찬가지로 질병과 죽음을 보고 인생의 덧없음을 알았고, 최후로 출가 수행자를 보고 자신도 집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3)고 합니다. 이것이 후세에는 정형화(定型化)하여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전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4) 이 전설에 의하면 태자는 왕성(王城)의 네 개의 문으로부터 출유(出遊)하여 각각 노인·병자·죽은 사람, 그리고 수행자를 만났다는 것이며, 이것이 출가의 동기(動機)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붓다의 출가 동기로서 널리 전해지고 있는 ‘사문출유’의 전설은 후대의 불전문학(佛傳文學)인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 普曜經)>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태자는 동쪽의 성문을 나와 노인을 만나고, 남쪽의 성문을 나와 병자를 만났으며, 서쪽 문을 나와 죽은 자를 만나 비애(悲哀)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북쪽 문을 나와 출가 수행자를 만나 그의 숭고한 모습에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팔리어로 씌어진 <자따까(Jataka, 本生經)>의 주석서 서설(序說)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처음 세 차례의 출유(出遊)에서 노인과 병자와 죽은 사람을 만나 도중에서 되돌아섰던 태자는, 네 번째의 출유 때 사문을 만나고서 자기 생애의 목표를 분명히 깨달았으므로 마음 가볍게 그대로 동산에 가서 해질 녘까지 즐겁게 놀았습니다. 동산의 못에서 미역을 감고 향을 뿌린 몸에 새 옷을 입고 산뜻한 기분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립니다. 바로 이때 성 안에서는 태자비가 사내아이를 낳았으므로 숫도다나왕은 기뻐하면서 급히 시종을 보내어 태자에게 알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자는, “라훌라가 생겼구나!” 라고 외쳤습니다. 라훌라(Rahula)란 ‘장애(障碍)’라는 뜻입니다. 은애(恩愛)의 굴레가 늘면 출가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로 인해서 그 아이는 라훌라(羅候羅)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날 태자의 귀로에는 시민들의 환영으로 떠들썩했다. 어느 길가에 왔을 때, 한 높은 누상(樓上)에서 무사 귀족의 딸 끼사 고따미(Kisa Gotami, 機舍喬答彌)가 태자의 행렬(行列)과 그 행렬 속의 태자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행복하겠네,
저런 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행복하겠네,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 받드는 부인은 행복하겠네.

이 노랫소리가 태자의 마음을 끈 것은 그 노래 속의 ‘행복하겠네'(Nibbuta)란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태자가 늘 구해 마지않던 열반(涅槃)과 관련이 있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5) 태자는 ‘드디어 출가할 시기가 온 것을 깨우쳐주었다’라고 생각하고 아주 기뻐하며, 그 답례로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벗어 그녀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끼사 고따미는 ‘태자는 날 사랑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기뻐 어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궁전에 돌아온 태자는 출가의 결심을 하고, 그 날밤 마부 찬나(Channa, Sk. Chandaka, 車匿)에게 분부하여 애마(愛馬) 깐타까(Kanthaka, 犍陟)를 채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에게 이별을 고하고자 하지만, 태자비의 팔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를 만지면 태자비가 눈을 떠 출가의 기회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말없이 떠나버렸다고 합니다.6)

이처럼 불전문학(佛傳文學)에 씌어진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이야기는 사실 그대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있었겠지만, 이것은 후대의 불전 작가들이 보다 드라마틱하게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7) 이것은 ‘인간 고뇌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붓다의 출가 목적을 확실히 드러내려고 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8)

여하튼 싯닷타 태자가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들 라훌라(Rahula, 羅候羅)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출가를 결행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싯닷타는 남몰래 왕궁을 빠져 나와 출가 구도(求道)의 길을 나섰습니다. 후대 불전에 의하면 태자는 어느 날 밤 몰래 마부 찬나(Channa)를 앞세워 애마 깐타까(Kanthaka)를 타고 까삘라밧투를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나이는 29세였습니다.

싯닷타가 뒷날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된 다음, 그는 자신의 출가 동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9)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중아함경 권56, 라마경>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잡아함경 권14, 346경>

위에서 살펴본 사문유관의 도식적인 묘사나 이같은 붓다 자신의 술회는 다같이 싯닷타의 절실한 출가 동기가 무엇이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고, 그 필연적인 인생의 괴로움을 슬퍼하였으며, 불완전한 인간 세상의 모습을 괴로워했습니다. 그 끝에 마침내 그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왕궁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을 찾아 세속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 버린, 참으로 ‘위대한 버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10)

2. 구도의 편력

이렇게 해서 사문(沙門), 즉 출가 구도자가 된 싯닷타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후대의 문헌에 속하는 테리가타(Theragatha, 長老尼偈)의 주석서에서는 그의 편력(遍歷)에 대해서 처음 박가와(Bhaggava)의 은신처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우선 이들 고행자들의 목적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일 또한 생과 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난 싯닷타는 다시 브라흐만(Brahman, 梵天)과 해와 달과 불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도 그는 역시 자신이 닦을 만한 수행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11)

이 외에도 많은 수행자들을 찾아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에 의하면, 그는 출가하여 바라문 여성 싸끼(Saki)와 바라문 여성 빠드마(Padma)의 은신처에 초대를 받았으며, 바라문 라이와따(Raivata) 성인과 뜨리만디까(Trimandika)의 아들 라자까(Rajaka)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때는 싯닷타가 베살리에 도착하여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를 만나기 전이었습니다.12)

이렇게 싯닷타의 구도 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0리 거리에 위치한 베살리(Vesali, Sk. Vaisali, 毘舍離城)로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 Sk. Arada Kalama, 阿羅羅伽羅摩)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당시 큰 나라였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Sk. Rajagrha, 王舍城)에 도착했습니다. 신흥의 도시 라자가하는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싯닷타는 그곳에서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 Sk. Udaraka Ramaputra, 優陀羅羅摩子)라는 스승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13) 웃다까 라마뿟다는 ‘상념(想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는데, 싯닷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은 ‘무소유처정’보다 더욱 미묘한 선정의 경지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묘한 선정에 들면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마치 마음이 ‘부동(不動)의 진리’와 합체(合體)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선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일상의 동요하는 마음으로 되돌아옵니다. 따라서 선정에 들어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해서 진리를 체득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선정은 심리적인 마음의 단련이지만, 진리는 논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진리는 지혜에 의해 얻어집니다. 그래서 싯닷타는 그들이 택하고 있는 수정주의(修正主義)의 방법으로는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14)

베살리에서 헤어진 알라라 깔라마와 함께 웃다까 라마뿟따는 당시 가장 명망높은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해서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수행 목적이었습니다. 선정(禪定)주의자 또는 수정(修定)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지도 아래, 싯닷타는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인정하는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모든 괴로움이 없는 완전한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정신통일이란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지이며, 정신적 작용의 완전한 정지 또한 결국 죽음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5)

그들은 수행의 목적과 방법을 혼동한 채 오로지 수행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같은 모순을 알게 된 싯닷타는 더 이상 수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답습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스승으로 삼아왔던 웃다까 라마뿟따와도 작별하였습니다.16)

싯닷타는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라자가하에서 남쪽으로 80㎞ 가량 떨어진 우루웰라(Uruvela, Sk. Uruvilra, 優樓頻螺)의 세나(Sena, 斯那)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Sk. Nairanjana, 尼連禪河) 강 근처의 숲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리던 이 곳은 현재의 보드가야(Bodhgaya) 동쪽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17)

싯닷타가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라자가하의 성 밖의 판다바 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왕은 성 안에서 탁발하고 있는 싯닷타를 발견하고, 그 단정한 태도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을 시켜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알아낸 다음, 스스로 수레를 갖춰 판다바산으로 가서 동굴에 거주하던 싯닷타를 방문하고, 코끼리 무리를 선두로 하는 군대와 재력을 제공하여 원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빔비사라 왕은 싯닷타의 출가 수도를 중지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자신이 유서 깊은 샤카족 출신으로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벗어나 열심히 수도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라 하여 이 원조의 약속을 거절했다고 합니다.18) 이때 빔비사라 왕은 당신의 뜻을 이룬 다음 자신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뒤 붓다는 빔비사라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그에게 법을 설하게 되었습니다.

Notes:

1)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교재편찬위원회 편, <불교사상의 이해> (서울 : 불교시대사, 1997), pp. 53-54 참조.
2)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 39 참조.
3) Digha Nikaya II, p. 21 ff;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 187.
4)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 59.
5) Edward J. T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vt Ltd, 1992), pp.53-54 참조.
6)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p. 67-68.
7) 이기영, <석가>, p. 61 참조.
8)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 39.
9) <불교사상의 이해>, p. 55.
10) <불교사상의 이해>, p. 55.
11) <불교사상의 이해>, p. 55-56.
12) Edward J. T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 69-70.
13) <불교사상의 이해>, p. 56.
14) 平川彰 著 · 李浩根 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卷 (서울 : 민족사, 1989), pp. 42-43.
15) <불교사상의 이해>, p. 56.
16) <불교사상의 이해>, p. 56.
17) <불교사상의 이해>, p. 57.
18)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 194.

고행과 중도의 실천

1. 수정(修定)에서 고행(苦行)으로

붓다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기까지 몇 단계의 수행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출가하여 알라라 깔라라(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라는 두 스승 밑에서 선정(禪定)을 주로 배우고 닦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스승들의 경지를 체득하였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들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 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할 수정주의(修定主義)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석존은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를 떠나 남서쪽 가야(Gaya, 伽倻) 교외,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Sena)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강 근처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고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이곳은 부근에 고요한 삼림이 있었고 강물은 맑아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오직 혼자서 여러 가지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수정(修定)을 버리고 고행(苦行)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행(苦行)은 당시 아지비까(Ajivika)나 자이나교(Jaina) 등의 사문들이 즐겨 실천했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아지비까는 숙명론자(宿命論者)였던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가 이끌고 있던 교단이었습니다. 아지비까라는 명칭은 원래 단순히 각각의 ‘생활법(生活法)에 따른 자’라는 의미이지만 교단의 명칭으로 사용하여 ‘생활법의 규정을 엄격히 지키는 자’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사상에서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로 이해되었고, 훗날 한역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로 폄칭(貶稱)되었습니다. 아지비까에서는 고행도 자연의 정해진 이치, 즉 결정으로 보았다거나 고행 그 자체를 목적시하였다거나, 혹은 고행에 어떠한 실천적 의의를 인정하였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지비까 교도들은 생계수단을 위해서이건 철저한 고행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이나교는 그 어느 종교 단체보다도 고행을 중요시하는 교단이었습니다. 자이나교의 교주 마하비라(Mahavira, 大雄)는 업(業, karma)을 미세한 물질로 보고 이 업이 외부로부터 신체 내부의 영혼에 유입(流入, asrava) 부착하여 영혼은 속박(bandha)하기 때문에 윤회의 생존이 되풀이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업에 의해 속박된 윤회에서 벗어나 영혼이 그 본성을 발현하여 해탈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업 물질을 지멸(止滅, nirjara)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고 고행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출가수행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출가 수행자는 불살생(不殺生) · 진실어(眞實語) · 부도(不盜) · 불음(不淫) · 무소유(無所有) 등 ‘다섯 가지 대금계(大禁戒)’ 즉 오대서(五大誓)를 엄격히 지키고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형(裸形)으로 여러 가지 고행을 행하였으며, 때로는 단식 수행으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붓다 당시 가장 엄격한 고행주의를 실천했던 사람들이 바로 자이나 교도들이었습니다.

2. 고행의 실천 내용

이러한 당시의 수행풍토에 따라서 석존도 본격적으로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석존께서 실천했던 여러 종류의 고행들을 경전에서는 언급하고 있는데, 석존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실수(實修)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마음을 제어하는 것, 호흡을 멈추는 것, 단식(斷食)에 의한 것, 절식(絶食)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을 제어하는 고행이란 단정히 앉아 아랫니와 윗니를 맞닿게 모으고 혀는 위턱에 붙이고 마음을 억제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멈추는 고행이란 먼저 입과 코로부터의 호흡을 막으면 귀로 숨이 들락날락하게 되며 커다란 이명(耳鳴)이 들려 격심한 고통이 따릅니다. 이 귀의 호흡을 막으면 날카로운 정수리를 빠개는 듯한 고통이 일어나며 또한 질긴 가죽끈으로 머리를 휘감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그 숨이 하복부로 옮겨가면 배를 가르는 듯한 고통이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이같은 호흡을 막고 있으면 마치 힘이 센 남자들이 힘이 약한 남자의 팔을 잡아 잿불 속으로 집어넣어 불에 타는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온몸에 타는 듯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앗기벳사나(Aggivesana)여, 신들은 나를 보고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이미 죽었다’고. 어떤 신들은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죽을 것이다’고. 어떤 신들은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아라한이다. 실로 아라한의 경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고. [<中部經典> I, p.245]

석존은 그의 고행을 본 사람들이 그가 죽어버렸다고 여길 정도로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안은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일체의 음식을 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절식(絶食)에 의한 고행, 감식(減食)에 의한 고행을 계속한 결과 석존의 전신은 살이 빠져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눈은 움푹 들어가고 몸의 털은 부식하여 뽑혀지고 피부는 생기를 잃어 그때까지 아름답게 빛나던 황금색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한 석존의 말을 경전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앗기벳사여,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옛날 어떤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았다 해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또 미래의 어떠한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 또 현재의 어떠한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는다 해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격심한 고행에 의해서도 나는 일상의 인간이나 법(法)을 초월한 최고의 지견(智見)에 도달할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도(道)가 있을 것이다.[<中部經典> I, p.246]

이 밖에 초기경전에서는 석존이 실천하였던 고행으로서 식사에 관한 고행, 신체적인 고행, 항상 먼지나 오물로 더렵혀져도 결코 몸을 씻지 않겠다고 하는 따위의 맹세를 지키는 것 등의 고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석존이 실제로 실수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석존은 고행은 심신(心身)을 훼손시키는 것일 뿐 깨달음에 이르는 도(道)는 아니라고 명확하게 단정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석존은 마음을 제어하고 호흡을 멈추고 감식(減食)하고 혹은 단식(斷食)하였습니다.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육체를 괴롭혔으며, 그러한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강한 의지를 확립하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행은 6년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3. 중도의 실천

그러나 그것으로도 역시 궁극의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고행이 해탈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이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고행에 의해 극도로 쇠약해지고 더러워진 몸을 네란자라 강물에 깨끗이 씻고, 마을 처녀 수자따(Sujata, 善生)가 바친 우유죽을 섭취하여 심신을 회복한 후 깨달음에 이르는 자기 자신만의 수행 방법을 강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정주의와 고행주의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 Majjhim Patipada)인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욕망에 따라 쾌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열악하고 야비하며 범부가 행하는 것이며 천하고 이익이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에 탐닉하는 것으로, 괴롭고 천하며 이익됨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에 가까이 가지 않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眼)이 되고 지(智)가 되어 적정(寂靜) · 증지(證智) · 정각(正覺) · 열반(涅槃)으로 이끄는 것이다.[<相應部經典> V. p.42.]

이러한 중도를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中道)라고 하며, 구체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 Ariya-atthangika-magga)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팔정도란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 네 가지 진리 가운데 도제(道諦)의 내용이 되는 것으로, 바로 ‘열반으로의 삶’이다. 중도는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닌 중도(中道)를 말하지만 이는 단지 중간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석존이 스스로 실천하여 정각에 도달한 도(道),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라면 누구든지 실수(實修)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道)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에서 ‘도(道)’라고 할 경우 여기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도라고 할 때의 도(道, patipada)로서 석존이 정각을 얻은 행도(行道)로서의 도(道)이며,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도법(道法)으로서 도(道, magga, Sk. marga)입니다. 전자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자가 석존의 실천방법에 따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 도(道)이고, 후자는 객관적인 도로서의 도(道)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정각을 얻은 석존에게 있어 눈(眼)이 되고 지혜(智)가 되어 깨달음으로 이끄는 도(道)이기 때문에 다만 객관적인 진리성을 나타내는 도(道)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인 도(道)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 중도의 실천적·철학적 의미

한편 붓다 당시 인도의 철학과 종교는 크게 바라문(波羅門) 계통과 사문(沙門) 계통의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전자는 베다·우빠니샤드에 근거한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유일의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 梵)으로부터 전 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점이 사상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전변설(轉變說, parinama-vada)이라고 합니다. 바라문 계 사상에 있어서는 전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할 때 먼저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근본원리를 세우고, 이러한 근본원리인 브라흐만이 자기 자신을 전개시켜 질료인(質料因)도 되고 동력인(動力因)도 되어 전 세계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이러한 바라문 계 사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 자유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들이 주장한 사상의 특징은 유일(唯一)의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은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제(諸)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설하였습니다. 빠꾸다 깟차야나(Pakudha Kaccayana)는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고(苦) · 낙(樂) · 명아(命我) 등 칠요소(七要素)를 인정하였고, 사명외도(邪命外道, Ajivika)로 대표되는 막갈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살아 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혼(靈魂) ·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허공(虛空) · 득(得) · 실(失) · 고(苦) · 낙(樂) · 생(生) · 사(死) 등 12 가지 원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인간 및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주장을 초기경전에서는 적집설(積集說 또는 積聚說, arambha-vada)이라고 합니다. 이 적집설은 바라문 계의 전변설에 비해 유물론적 색채가 강하며, 업(業, karma)이나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종교상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라문 계의 사상은 한결같이 선정을 실수함으로써 해탈을 얻는다고 주장한 데 반해, 이 적집설의 입장을 취하는 자들의 수행방법은 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집설의 입장에 서서 육체와 정신의 두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인간은 정신이 육체에 의해 지배되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육체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정신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석존이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의 가르침을 버리고, 또한 고행생활에 들어갔다가 이것마저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수정주의(修定主義)로서 주장된 전변설과 고행주의의 근거로 삼는 적집설 양자를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석존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이러한 두 가지 입장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도 보다 높은 차원을 획득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변설과 같은 절대 유일의 원리를 주장하며 그것으로부터 세계가 전개하였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는 상호 의존의 관계에서 성립하였다고 관찰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모든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 도리는 법으로서 정해져 있다’고 말하였던 것과 같은 우주의 이법(理法)이며,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보는 자이다’라고 설하였던 것처럼 석존은 이같은 연기를 자각하여 각자(覺者) 불타(佛陀)가 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깨달음[成道]

1. 깨달음의 완성

싯닷타 태자가 네란자라(Neranjara) 강가에서 목욕하고, 우루벨라(Uruvela) 근처의 세나니 마을의 촌장 세나니(Senani)의 딸 수자따(Sujata, 善生)가 공양 올린 우유죽을 먹고 체력을 회복한 뒤, 근처에 있는 앗삿타(assattha)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명상에 들었습니다. 앗삿타 나무는 아사왓타(asvattha) 나무 또는 삡빨라(pippala, 畢鉢羅) 나무라고도 하는데, 무화과 나무의 일종입니다. 거기서 드디어 석존은 ‘깨달음’ (anttara sammasambodhi, anuttara samyaksambodhi, 無上正等覺·無上菩提)을 얻어 붓다(Buddha, 佛陀) 즉 ‘깨달은 자'[覺者]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중국이나 한국 · 일본에서는 흔히 ‘성도(成道)’라고 합니다. 이 말은 ‘깨달음의 완성’이란 뜻입니다.

태자가 깨달음을 이룬 시기는 35세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뒷날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이곳을 붓다가야(Buddhagaya, 佛陀伽倻, 현재의 보드가야)라 이름하였으며, 앗삿타 나무를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리수 밑에는 금강보좌(金剛寶座, 성도할 때 앉았다고 하는 돌로 된 좌대)가 있으며 그 옆에는 사각 형태의 대탑(大塔)이 우뚝 솟아 있어 불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4각4면(四角四面)으로 위쪽으로 갈수록 좁혀져 있는 높이 52미터의 대탑입니다. 이 탑은 굽타 왕조의 위풍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장은 오랫동안 인도교(힌두교)의 손에 있다가 1953년 5월에야 불교도의 관리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탑 그 자체보다도 사실은 그 뒤에 있는 보리수에 이 성지(聖地)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성도한 것은 이 보리수 아래에서였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 이 보리수는 부처님이 입멸한 2백년 후에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왕(阿育王)을 비롯하여 굽타 왕조 때에도 대대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중국의 법현(法顯)이나 현장(玄奘) 스님도 여기에 찾아와 보리수 울타리가 쳐 있다는 것과 그 주변에 정사(精舍)와 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유적은 그 뒤 정글에 파묻혀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1881년에 이르러 영국인 커닝햄이 발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2)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은 후대의 전승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12월 8일이라고 하며 남방의 불교국가에서는 베사카(Vesakha 月)3)의 만월일(滿月日)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태양력으로 고치면 5월의 만월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한역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 까닭은 베사카 달이 인도력의 둘째 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역법(曆法)은 자주 바뀌었으나 주(周)의 역법에 의하면 음려의 11월을 첫째 달로 헤아림으로 둘째 달은 음력 12월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는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을 음력 12월 8일로 보고 경축하게 되었습니다.4)

2.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석존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후의 사정을 불전문학에서는 아주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불전문학에서는 석존께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악마(惡魔)와의 싸움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어로 씌어진 <마하삿짜까-숫따(Mahasaccaka-sutta, 薩遮迦大經)>5)에서는 악마와의 싸움 부분을 생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6)



“이제 나는 단단한 음식이나 끊인 쌀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안으로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희열이 사라진 뒤, 아직 신체적으로 즐거움을 느끼지만, 깊이 새기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평정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했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초경에 도달한 첫 번째의 지혜입니다.7)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삶(중생)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보았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이경에 도달한 두 번째의 지혜입니다. ……8)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습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밤의 삼경에 도달한 세 번째의 지혜입니다.9)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10)

위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태자는 먼저 사선정(四禪定)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태자의 마음은 고요하고, 맑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태자는 과거를 상기(想起)하고 먼 몇 세대 이전의 일들을 상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태자는 초경(初更)에 제1의 명지(明知)를 얻고, 이경(二更)에서는 제2의 명지를, 삼경(三更)에서는 제3의 명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명지를 한역경전에서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제3의 명지, 즉 누진통은 곧 네 가지 온전한 지혜[四聖諦]를 알고, 세속의 허망함이 연기(緣起)의 탓임을 아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지막 지혜가 생긴 것은 새벽이 통틀 무렵이었던 것입니다.11)

한편 불전문학에 속하는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묘사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라를 굴복시킨 보살은 사선정(四禪定)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사선정은 보살만이 아니고 다른 많은 수행자들에게도, 또 나중에는 부처님의 제자에게도 공통되는 수행 방법입니다. 성도한 날 밤의 보살은 이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한 날 밤 보살의 체험은 초저녁(初夜) · 한밤중(中夜) · 새벽(後夜)의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 중 새벽, 즉 먼둥이 틀 무렵 부처로서의 자각(自覺)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선정에 의해서 바르게 마음을 통일하고 청정 결백하여 광명으로 빛나며 더러움을 여의고 번뇌를 떨쳐버려 자유로이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부동(不動)의 상태에 도달한 초저녁에 보살은 천안통(天眼通)을 얻었습니다. 천안통에 의해 중생이 살고 죽는 운명을 관찰하여 바른 지(智)를 실현하며, 어둠을 없애고 광명을 일으키고 있을 때 초저녁은 지나갔습니다.

다음으로 보살은 역시 전과 같이 선정(禪定)에 든 맑은 심성으로 한밤중에는 숙주지(宿住智) 혹은 숙명지(宿命智)를 얻었습니다. ‘숙주지’라고 함은, 마음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자기 자신과 다른 중생들의 무수한 과거의 생애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다음에 보살은 역시 앞에서처럼 선정에 든 맑은 마음으로 새벽에 들어갔습니다. 그 새벽을 맞을 때 보살은 인간적인 고뇌를 말끔히 없애고, 미혹(迷惑)의 근원이 되는 번뇌를 죄다 쳐부수는 지견(智見)의 광명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누진지(漏盡智)를 체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보살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무엇으로 인해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원인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단 말인가. 태어남을 원인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태어나게 될까. 생존[有]으로 말미암아 태어난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생존하게 되는 것일까. 집착[取]으로 말미암아 생존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갈망(渴望·愛)으로 말미암아 집착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갈망이 생길까. 감수(感受 · 受)로 말미암아 갈망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접촉이 생기는가. 여섯 가지 감각[六處]으로 말미암아 접촉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여섯 가지 감각이 생기는가. 모양과 물체[名色]로 말미암아 여섯 감각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모양과 물체가 생기는가. 인식[識]으로 말미암아 모양과 물체가 있다. 무엇으로 인해 인식이 생기는가. 현상[行]으로 말미암아 인식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현상이 생기는가.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현상이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인간 고뇌의 원인을 연쇄적으로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 고찰한 결과, 모든 것의 근원에는 ‘무명’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무명에서 시작되는 이 연쇄 즉,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를 십이인연(十二因緣) 혹은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3. 깨달음의 내용

사실 붓다께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성도(成道)의 과정은 일치하지 않으며 많은 이설(異說)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이설은 15가지 정도가 되는데, 크게 네 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12)


①사제(四諦)·십이연기(十二緣起)와 같은 이법(理法)의 증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②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이를 모두 합해 三十七助道品 혹은 菩提分法이라고 함)와 같은 수행도(修行道)의 완성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③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사계(四界)와 같은 제법(諸法)의 여실한 관찰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④사선(四禪)·삼명(三明)의 체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이처럼 성도의 과정이 전승하는 바에 따라 일치하지 않은 것은 붓다 자신이 깨달음의 내용을 특정한 교설로서 고정시켜 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설하는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내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13)

그러나 성도의 과정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교설 가운데 만약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결국 연기사상(緣起思想)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연기(緣起)라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십이연기(十二緣起)처럼 완성된 형태의 연기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십이연기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기 이전의, 심원한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연기(緣起)에 대한 자각이 바로 성도(成道)의 근본적 입장일 것입니다.14)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도 “붓다가 깨달은 존재 법칙으로서의 법이란 결국 연기의 도리였음이 확실하다.”15)라고 말했습니다.

붓다의 성도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의 완성이며 현세에 있어서 ‘열반(涅槃, nibbana, nirvana)’을 실현한 것입니다. 성도하기 이전의 붓다를 ‘보살(菩薩, bodhisatta, bodhisattva, ‘깨달음을 구하는 자’의 뜻)’이라고 하고 붓다가 된 후에는 ‘세존(世尊, Bhagavad)’이라고 존칭(尊稱)되었습니다.16)

Notes:

1)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106.
2)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p.107.
3) 팔리어 베사카(Vesakha)는 비사카(Visakha, 毘舍去) 혹은 비사카(Visakha)로 표기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범어 바이사카(Vaisakha)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베사카는 인도력 2월인데, 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된다.
4)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98.
5) Majjhima Nikaya (PTS) Vol. I, pp.237-251; 南傳大藏經 9, pp.409f. 이 경전은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의 제자인 삿짜까(Saccaka)가 부처님께 몸을 닦는 수행과 마음을 닦는 수행에 관한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붓다 자신이 깨달음을 이루게 된 전후 사정을 삿짜까에게 설한 것이다.
6) 아래 인용문은 전재성 역주,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제2권, pp.130-134에서 발췌한 것이다.
7)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를 한역경전에서는 숙명지(宿命智) 혹은 숙명통(宿命通)이라고 번역하였다.
8) ‘뭇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를 한역경전에서는 천안지(天眼智) 혹은 천안통(天眼通)이라고 번역하였다.
9)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를 한역경전에서는 누진지(漏盡智) 혹은 누진통(漏盡通)이라고 번역하였다.
10) 전재성 역주,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제2권, pp.130-134..
11) 이기영, <석가>, p.97.
12)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41.
13)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1.
14)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3.
15) 마스터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개정2판 (서울 : 현암사, 2001), p.25.
16)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2.

악마의 유혹

붓다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불전문학(佛傳文學)에서는 붓다의 성도(成道)와 악마(惡魔)의 유혹(誘惑)을 결부시켜 서술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후대의 불전에서는 악마의 유혹과 그것의 극복이 성도 직전의 일인 것처럼 씌어져 있으나, 그것은 후대의 불전작가들이 성도의 극적 효과를 인상적으로 강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묘사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기 어렵습니다. 초기의 불교도들은 후세의 불전작가들과는 달리 부단한 정진, 유혹에 대한 7년 간의 부단한 투쟁이 붓다의 수행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1) 이처럼 악마들은 태자가 출가하여 수행하는 동안 줄곧 따라다니면서 깨달음[正覺]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려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악마의 유혹이라는 전설입니다.

1. 고행과 애욕의 유혹

악마의 유혹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수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에 편찬되어 있는 <빠다나-숫따(Padhana-sutta, 精勤經)>입니다. 이 경전은 붓다께서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回想)하여 술회(述懷)한 것인데, 그 내용은 제자들에게 열심히 정진하라고 당부한 가르침입니다. 이 경전에 나오는 악마와의 대화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네란자라 강 기슭에서 명상에 전념하고 있을 때, 실제로 붓다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갈등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우선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네란자라 강 기슭에서 평안을 얻기 위해 힘써 닦고 명상하는 나에게,
악마 나무찌(Namuci)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입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만 모든 착한 일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베다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청정한 행을 하고 성화(聖火)에 제물을 올리는 고행을 쌓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애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같은 시를 읊으면서 악마는 눈뜬 분 곁에 섰다.
악마가 이렇게 말하자, 스승(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게으름뱅이의 친척이여, 악한 자여, 그대는 세속에 선업(善業)을 구해서 여기에 왔지만,
내게는, 세속의 선업을 찾아야 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다. 악마는 선업의 공덕을 구하는 자에게 가서 말하라.
내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
힘써 정진하는 데서 일어나는 이 바람은 강물도 마르게 할 것이다. 오로지 수도에만 정진하는 내 몸의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
몸의 피가 마르면 쓸개도 가래침도 마를 것이다. 살이 빠지면 마음은 더욱더 밝아지리라. 내 생각과 지혜와 순일한 마음은 더욱더 편안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토록 편안히 살고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내 마음은 모든 욕망을 돌아볼 수가 없다. 보라, 이 마음과 몸의 깨끗함을!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혐오이며, 셋째 군대는 기갈, 넷째 군대는 애착이다.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잘못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나무치여, 이것들은 너의 병력(兵力)이다. 검은 악마의 공격군이다.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를 이겨낼 수가 없다. 용자는 이겨서 즐거움을 얻는다.
내가 문자풀2)을 입에 물 것 같은가? 이 세상의 생은 달갑지 않다. 나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들은 너의 군대에게 패해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덕 있는 사람들의 갈 길조차 알지 못한다.

병력이 사방을 포위하고 악마가 코끼리를 탄 것을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를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라.

신들도 세상 사람도 너의 병력을 꺾을 수 없지만,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깨뜨린다. 마치 굽지 않은 흙 단지를 돌로 깨뜨려버리듯이.

생각대로 사유(思惟)를 하면서 신념을 굳게 하고 이 나라 저 나라로 편력할 것이다.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들은 내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게으르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근심할 것이 없고, 욕망이 없는 경지에 그들은 도달하리라.”

악마는 말했다.

“우리들은 칠 년 동안이나 그를 한 걸음 한 걸음 따라다녔다. 그러나 항상 조심하고 있는 정각자(正覺者)에게는 뛰어들 틈이 없었다.

까마귀가 기름을 발라놓은 바위 둘레를 맴돌며 ?이곳에서 말랑말랑한 것을 얻을 수 없을까. 맛 좋은 먹이가 없을까?하며 날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까마귀는 날아 가버렸다. 바위에 가까이 가 본 그 까마귀처럼, 우리는 지쳐서 고따마를 떠나간다.”

근심에 잠긴 악마의 옆구리에서 비파(琵琶)가 뚝 떨어졌다. 그만 그 야차는 기운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3)

이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악마 나무찌가 나타나 고행 중인 석존에게 고행을 포기할 것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석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정진함으로써 그 유혹을 극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악마의 군대가 나타나 석존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석존은 지혜로써 악마의 여덟 무리 군대를 격파시켜 버렸다는 것이 이 경전의 핵심입니다.

이 경전에서는 악마와의 결투를 아주 리얼하게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악마의 여덟 무리의 군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악마의 군대는 ①까마(Kama, 애욕), ②아라띠(arati, 혐오), ③꿋삐빠사(khuppipasa, 기갈), ④땅하(tanha, 갈애), ⑤티나밋다(thinamiddha, 혼침 수면), ⑥비루(bhiru, 공포), ⑦위찌낏차(vicikiccha, 의혹), ⑧막카탐바(makkha-thambha, 위선과 오만) 등의 여덟 가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욕망과 미혹과 나태의 측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명백합니다.4)

위에서 인용한 <수따니빠따>에 나오는 악마의 유혹과 비슷한 내용이 한역 아함경에도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때에 마라 빠삐만(Mara papiman, 惡魔波旬)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지름 우루벨라촌 네란자라 강가에 계시는데, 보리수 밑에서 도를 이룬 지 오래지 않다. 나는 거기 가서 교란시키리라.”

그는 곧 젊은이로 화해 부처님 앞에 가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혼자서 쓸쓸한 곳에 들어와
선정에 들어 고요히 생각한다.
나라와 재물 이미 버리고
여기서 다시 무엇을 구비하는가.

만일 마을의 이익을 구한다면
어찌하여 사람을 친하지 않는가.
이미 사람을 친하지 않거니
마침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그 때에 세존께서는, ‘이것은 악마 빠삐만의 교란시키려는 짓이다’ 생각하시고,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미 큰 재물의 이익을 얻어
마음이 만족하고 편하고 고요하다.
모든 악마를 무찔러 항복 받고
어떠한 욕망에도 집착하지 않노라.

혼자 고요히 생각하면서
선정의 묘한 기쁨 먹고 있거니
그러므로 구태여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가까이 친하여 않노라.
악마는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고따마여, 만일 스스로
그 안온한 열반길 알았거든
너 혼자 스스로 무위(無爲)를 즐겨하라.
무엇하여 구태여 남을 교화하려는가.

악마의 속박 받지 않는 이
내게 와 ‘저 언덕’ 건너기 물으면
나는 곧 그에게 바른 대답으로써
그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한다.


악마는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어떤 흰 돌이 어린 기름 같아서
새가 날아 와 먹으려 하였으나
마침내 그것을 맛보지 못하고
주둥이만 다치고 허공으로 돌아갔네.
이 나도 또한 그 새와 같거니
헛되이 수고하고 하늘로 돌아가네.

악마는 이렇게 말하고 근심과 슬픔을 품고 마음으로 뉘우쳤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땅에 엎드려 손가락으로 땅을 그었다.5)

경전은 계속됩니다. 석존과의 대화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빠삐만에게 애욕(愛欲), 애념(愛念), 애락(愛樂)이라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석존을 유혹하고 돌아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석존을 유혹시키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경전을 근거로 후대의 불전작가들이 악마의 유혹에 대해 좀더 윤색하고 보완하여 드라마틱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실제로 앞에서 인용한 {수따니빠따}에 나오는 악마의 군대는 <본행집경(本行集經)>과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2. 악마유혹 전설의 의미

악마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는 석존이 성도한 후의 일화에서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빠삐만(波旬)이라고 불리는 악마는 석존을 공포에 몰아넣으려고 때로는 거대한 코끼리의 상왕(象王)으로, 때로는 큰 뱀(大蛇)의 왕으로 변하여 큰 바위를 부수고 큰 굉음을 울리며 석존에게 접근했지만 그럴 때마다 석존은 이를 피하곤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마왕은 석존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특히 비구니(여성 출가자)를 유혹하거나 협박했습니다. 경전에는 악마가 “당신은 젊고 아름답다. 나 역시 한창이니, 함께 와서 즐겁게 악기를 타면서 놀자”거나, “여성의 몸으로 정각을 얻어 성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니, 어서 수도를 단념하라”는 유혹을 던진 이야기가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 악마는 마라(mara, 죽음의 신), 나무찌(namuci, 한역 경전에는 ‘장해탈(障解脫)’이라고 번역되어 있음), 깡하(kanha, 검은 것), 아디빠띠(adhipati, 통치자), 안따까(antaka, 죽음의 신, 죽음의 악마) 등, 갖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통틀어서 ?악한 것? 즉 빠삐만(papiman)이라고 불립니다.6)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악마유혹의 전설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석존이 출가할 때 국왕의 자리로써 유혹 받았다는 전설이나, 네란자라 강변에서 고행을 할 때 건강을 유지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정통 바라문교도들이 행하듯이 행실을 삼가며 한 가정의 장으로서 성스러운 불에 제물을 바치고, 아그니(agni, 불의 신, 火天) 호트라의 제사를 지내고, 공덕을 쌓으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전설 등은 모두 일반 세속세계로의 복귀, 즉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유혹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팔마군(八魔軍)의 유혹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7)

또 주목되는 것은 악마 빠삐만의 세 딸에 의한 석존 유혹의 전설입니다. 땅하(tanha, 갈애), 아라띠(arati, 혐오)이며, 라가(raga, 탐욕)라 불리는 세 딸은 부친인 빠삐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 젊은 처녀, 남의 아내, 노파 등으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석존에게 접근했지만, 일체의 번뇌를 떠나 정각의 경지에 도달한 석존은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내 마음은 고요하다’라는 말로써 일축해 버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 마녀의 유혹에도 성적 충동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는 옛 전설({수따니빠따})이나, 또는 후대의 한역 경전에서 볼 수 있는 전설, 즉 우루벨라 마을의 네 명의 여자가 유혹했다는 이야기와({사분율, 四分律}) 아울러 생각해 볼 때, 금욕 생활을 지켜나가려는 석존에 대한 유혹이 투영된 전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경전에 나타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악마에 의한 유혹의 전설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즉 인간 존재의 근원에 깔린 욕망과 불안, 공포, 고뇌 등이 인간과 벌이는 투쟁의 경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번뇌에 대한 인식 및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후대의 경전에서는 악마의 수가 더욱 증가하고, 그 내용도 여성뿐 아니라 추상적으로 발달해 갑니다. 불상이나 불화의 제작이 시작되어 항마성도(降魔成道)의 주제가 많이 이용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실제로 악마가 달려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8)


Notes:

1)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77.
2) 문자풀을 입에 문다는 것은 적에게 항복한다는 뜻.
3) Suttanipata v.425-449; 法頂 옮김, <숫타니파타> (서울 : 샘터, 1991), pp.128-132.
4)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198.
5)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3권, pp.146-152 참조.
6)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198.
7)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198.
8)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198.

깨달음의 즐거움

1. 윤회의 삶은 끝나다

붓다께서는 우루벨라(Uruvela) 마을의 네란자라(Neranjara, 尼連禪河) 강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는 성도(成道)에 관한 여러 경전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동일합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약간 다른 점도 있습니다. 붓다의 성도와 관련하여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항마(降魔)의 이야기는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항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경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아함(中阿含)의 <라마경(羅摩經)>1)과 이에 해당하는 팔리어로 씌어진 아리야빠리예사나 숫따(Ariyapariyesana Sutta, 聖求經)2)에서는 항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오직 깨달음만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석존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의 곁을 떠나 마가다(Magadha)국을 편력하던 중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Senanigama, 將軍村)로 갔습니다. 그곳은 수행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석존은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수행정진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자리를 깔고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출가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자기의 몸이 ‘태어난다’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이 태어난다는 것에 불행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태어남을 초월한 최상의 평안, 즉 열반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몸이 ‘늙는다’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병에 걸린다’는 자연의 법칙, ‘죽는다’는 자연의 법칙, ‘근심한다’는 자연의 법칙, ‘더러워진다’는 자연의 법칙, 이와 같은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그러한 존재 속에 불행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초월한 최상의 평안, 즉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3)

그때의 경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하여 내게 지견(智見)이 생겼다. 나의 해탈(解脫)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애이고 이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을 한역 <라마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생(生)은 이미 다하고, 청정한 수행은 이루어져, 소작(所作)도 모두 가려졌네. 다시 유(有)를 받지 않으며, 진여(眞如)를 알았다.”

즉 과거로부터 무수한 생애를 두고 정진 노력한 결과가 성숙해서 여기 최고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므로 이제는 더 이상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온 생사의 유전은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맑고 깨끗한 수행은 완성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해놓았으며 또다시 생사를 되풀이함이 없이 최고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4)

이러한 팔리문이나 한역 중아함 <라마경>에는 보리수 아래 앉기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 즉 마을 처녀의 공양, 강에서의 목욕, 길상초의 보시를 받은 일, 그리고 보리수의 일 같은 것은 전혀 적혀 있지 않습니다. 또한 마라 빠삐만(Mara papiman)에 대해서도 한마디 비치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일본의 불교학자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라마경}은 원래 부처님이 제자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수행시절의 체험을 말한 것을 기록한 경전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제자들의 수행에 직접 관계가 깊은 사항에 대한 설명에 주력하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밖에 통용될 수 없는 항마(降魔)나 성도(成道)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간단히 보살은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와서 경치가 아름다운 언덕진 숲속에 앉아 좌선,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 더러움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한 결과 그런 것들의 본질을 깨닫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만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가지 사건 특히 마라와의 싸움 같은 것은 전기 작가의 창작이라거나 후세 사람이 첨가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학자가 지금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불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도 없다.”5)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라마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2. 깨달음의 경지

사실 범부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와다나베 쇼오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능력에 알맞은 범위 안에서만 사물을 생각하려고 한다. 선천적인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빛깔이나 소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설명을 듣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부처님이 아니므로 부처님의 심경이나 그 경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없다고 해서 부처님의 특수한 모습이 실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르는 대로 경전에 나오는 말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 헤아려볼 수는 있다. 경전에 사용되고 있는 말의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실한 그 뜻을 체득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6)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이 그러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깨달음을 이룩한 붓다의 경지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처님께서 성취한 깨달음의 경지는 감히 우리 범부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를 ‘이지불이(理智不二)’의 세계, ‘불불상념(佛佛相念)’의 세계,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의 경계라고 불려집니다. 이지불이(理智不二)란 지혜와 이치가 하나된 상태를 말하고, ‘불불상념(佛佛相念)’이란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서로 생각하는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7) 그리고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이란 법의 즐거움을 스스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 누린 붓다의 만족감과 한동안의 안도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8)

우리 범부는 다만 우러러 존숭(尊崇)하고 찬탄하며 경앙(敬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만상(萬象)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을 비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맑은 마음에는 모든 경계가 다 와서 거기에 머뭅니다. 그 마음을 바다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마음의 바다에 와서 머무는 것입니다. 실로 깨달은 그 분의 심경(心境)은 이와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도 합니다.9)


3. 깨달음의 즐거움


여러 율장과 불교문헌들에 의하면 붓다는 성도한 후 4주(28일) 동안 혹은 7주(49일) 동안 보리수 밑에서 또는 그 밖의 다른 나무들 밑에서 홀로 가부좌한 채 열반의 즐거움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팔리 율장(律藏) 대품(大品)에 의하면,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뒤, 첫 번째 7일 동안은 보리수 밑에서 보냈고, 다시 7일 동안은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ala-nigrodha)10) 나무 밑에서 보냈으며, 세 번째 7일은 무짤린다(Mucalinda) 나무 밑에서 보냈고, 네 번째 7일은 라자야따나(Rajayatana) 나무 밑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첫 번째 7일 동안 붓다는 보리수 밑에서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三昧)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이 때 붓다는 연기(緣起)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다고 합니다.

두 번째 7일 동안에는 모든 것을 비웃는 버릇이 있는 거만한 브라흐마나(Brahmana, 波羅門)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진정한 브라흐마나(바라문)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기록한 율장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11)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보리수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 동안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때 교만한 바라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존께 와서 안부를 여쭙고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뒤 한쪽에 서서 말했습니다.

“사문 고따마(Gotama)여, 그대는 어째해야 바라문이 되는지 아시오? 어떤 수행을 해야 바라문이 되는지 아시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습니다.

“바라문은 죄악을 멀리하고, 마음이 교만하지 않다. 때가 없고 자제(自制)하고, 베다(Veda)에 정통하며 청정한 수행을 완성한다. 바라문이란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니, 그에게 세상 어디에선들 교만함이 있겠는가?”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를 떠나 무짤린다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 동안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구름이 일어나 7일 동안 비가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날씨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그러자 무짤린다 용왕(龍王)은 자신의 거주처에서 나와 긴 몸으로 세존을 일곱 번 둘러싸고, 고개를 굽혀 세존의 머리 부분을 가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추위나 더위가 세존을 침범치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파리·모기·바람·열기·뱀 등이 세존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일이 지난 뒤 세존께서는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용왕은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갠 것을 보고 세존에게서 자신의 몸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동자의 모습으로 변한 뒤 세존을 향해 합장한 채 경배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습니다.


“진리를 듣고 보아
혼자서도 만족함은 즐거움이다.
생명에 대해 조심해서
해치지 않음도 세상의 즐거움이다.
애욕(愛欲)을 극복하여
세상살이에 탐착하지 않음도 즐거움이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교만심을 누를 줄 아는 것,
이것이 최상의 즐거움이다.”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무짤린다 나무를 떠나 라자야따나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 동안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때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두 상인이 욱깔라(Ukkala) 지방에서 세존이 계신 곳으로 향하는 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생에 두 상인의 친척이었던 천신(天神)이 그들 앞에 나타나 세존께 공양을 올리도록 권했습니다.

“벗들이여, 이제 막 깨달음을 이루신 세존께서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에 계십니다. 그분께 보리죽과 꿀을 공양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들은 오랫동안 즐거움과 안락함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리죽과 꿀을 가지고 세존에게 다가가 공손히 절한 뒤 한쪽에 서서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보리죽과 꿀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저희들은 오랫동안 즐거움과 안락함을 누릴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생각하셨습니다.

‘여래(如來)가 저들의 손에서 직접 음식을 받을 수는 없다. 나는 어떤 것을 사용하여 보리죽과 꿀을 받아야 할까?’

그러자 사대왕(四大王=四天王)이 세존의 생각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알아낸 뒤, 사방에서 다가와 수정으로 만든 네 개의 그릇을 바치며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으로 보리죽과 꿀을 받으십시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수정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 드셨습니다.

두 상인은 세존께서 음식을 다 드시고 그릇에서 손을 거두는 것을 보고서는, 세존의 발에 머리를 숙이며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과 법(法)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상인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는 세존과 법이라는 두 의지처에 귀의한 최초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위 내용은 팔리 율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따뿟사와 발리까라는 두 상인이 500대의 수레에 짐을 싣고 웃깔라 마을에서 중부 인도로 가던 도중 마침 이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수신(樹神, 일설에는 조령이라 함)의 권고로 앞으로의 이익과 안락을 기원하며 보리죽과 꿀떡을 공양하고 불(佛)과 법(法)에 귀의함을 허락 받아서 붓다의 최초 재가 신자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12)

그 때는 아직 출가한 제자들의 집단이 없을 때인데, 이와 같이 세속생활을 그대로 하면서 부처님을 받들어 그의 가르침을 실행해 가는 남자들을 우빠사까(Upasaka, 優婆塞)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우루벨라의 숲속에서 고행(苦行)을 할 때에 이미 사람들로부터 대성자(大聖者)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부처님이 고행을 버리고 지금 보리수 밑에서 성도한 뒤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그 거룩한 위덕(威德)에 감화를 입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13)

Notes:

1) 大正藏 1권, pp.775c-778c.
2) Majjhima Nikaya (PTS), Vol. Ⅰ, pp.160-175; 南傳大藏經 9권, p.290f.
3)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샘터, 1990), pp.133-134.
4)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샘터, 1990), p.134.
5)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샘터, 1990), p.135.
6)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샘터, 1990), pp.135-136.
7)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102.
8)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불타의 세계(The World of Buddha)> (서울: 김영사, 1984), p.207.
9)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102.
10) 니그로다(Nigrodha)는 인도 무화과나무에 속한다. 키가 매우 크며, 9-15m 정도까지 자란다. 이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더위를 피하고 수행하기에 적합하다. 이 나무를 아자빨라(aja-pala)라고 하는데, 아짜빨라란 ‘염소지기’라는 뜻이다. 염소를 치는 목동들이 자주 이 나무 밑에서 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11) Vinaya Pitaka (PTS), Vol. Ⅰ, p.2-4.
12)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불타의 세계(The World of Buddha)> (서울: 김영사, 1984), p.207.
13)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102.

범천의 권청(勸請)

1. 정각자의 고독

붓다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직후의 상황들은 팔리어 <율장(律藏)> ‘대품(大品)’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율장>에 의하면, 붓다께서는 성도 후 5주째 7일 동안은 라자야따나(Rajayatana) 나무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ala Nigrodha) 나무로 다시 자리를 옮겨 깨달음의 희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함빠띠(Sahampati)라는 범천(梵天)이 나타나 세존께 법을 설하시도록 간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설화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범천의 권청이 있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한 경전이 있습니다.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의 ‘공경(恭敬, Garavo)이라는 경’1)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경전에 묘사된 내용도 세존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번째 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2) 이 경전에 깨달음을 이룩한 정각자의 고독을 표현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경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괴롭다.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중하고 가까이해야 하랴.”3)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더 없는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은 붓다 자신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같은 생각을 지닌 자가 있다면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토로할 대상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무엇인지 모를 고독과 불안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것을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정각자의 고독’이라고 표현했습니다.4) 그때 붓다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차라리 내가 깨달은 법, 이 법을 존중하고 가까이하면서 살리라.”5)

이 대목을 한역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범천의 입을 빌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바른 법이 있어서, 세존께서 스스로 깨달아 다 옳은 깨달음을 성취하였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께서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할 만한 것으로써, 그것을 의지해 살아 가셔야 할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모든 여래 · 응등정각(應等正覺, 다 옳게 깨달은 이)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았고, 미래의 모든 여래 · 응등정각(應等正覺)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도 그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셔야 할 것이옵니다.?6)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에서는 범천의 입을 빌리지 않고, 붓다께서 직접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일체 세간에 살고 있는 생류(生類) 중에서 계(戒, sila) · 정(定, samadhi) · 혜(慧, panna) · 해탈(解脫, vimutti) · 해탈지견(解脫知見, vimuttinanadassana)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내 마땅히 가까이 하여 그에게 의지하고 공양·공경하겠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세간의 인천(人天) · 마(魔) · 범(梵) · 사문(沙門) · 바라문(波羅門)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일체의 세간에서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나는 의지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바에야 ‘내가 깨달은 법(法)’을, 내가 지금 마땅히 가까이 하고 공양·공경하며 성심껏 존중할 것이다.”7)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후세의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내가 깨달은 법’을 객관화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확립해 놓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거기에서 설법이라는 과제가 새로이 그의 앞에 다가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8)

2. 범천의 권청

붓다께서 설법하시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은 앞에서 소개한 팔리어 <율장>의 [대품]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9) 여기서는 가능한 필자의 의견을 생략하고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다. 그리고 라자야따나 나무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로 가서 머무셨다.

그곳에서 홀로 선정(禪定)에 잠기신 세존의 마음에는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숭고하다. 단순한 사색에서 벗어나 미묘하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하기 좋아하여, 아예 집착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도리와 연기의 도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모든 행(行)이 고요해진 경지, 윤회의 모든 근원이 사라진 경지, 갈애(渴愛)가 다한 경지, 탐착을 떠난 경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경지 그리고 열반(涅槃)의 도리를 안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게송을 떠올리셨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다.
그러나 지금 결코 드러낼 수 없다.
탐착과 분노에 억눌린 자들은
이 법을 원만히 깨달을 수 없다.
흐름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미묘하고 깊고 보기 어렵고 섬세하니,
탐착에 물든 자들이
어떻게 이 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이와 같이 깊이 사색한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셨다.
그때 사함빠띠(Sahampati)라는 범천이 자신의 마음으로 세존의 마음속을 알고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세상은 멸망하는구나. 아! 세상은 소멸하고 마는구나. 여래 · 응공(應供) ·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리하여 사함빠띠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혔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굽히는 것처럼 재빠르게 범천의 세상에서 사라진 뒤 세존 앞에 나타났다.

그는 한쪽 어깨에 상의(上衣)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다음 세존을 향해 합장하며 간청했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선서(善逝)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衆生)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 쇠퇴할 것입니다.”

사함빠띠는 다시 게송으로 간청했다.


“세존 이전의 마가다국에는
어지러운 법이 설해져 있었으니
때묻은 자들이 사유한 것이었네.
이제 세존께서 오셨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여시어
그 법을 듣고 때 없는 자들이 깨닫도록 하소서.
지극히 현명한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는 분이시여,
슬픔이 제거된 분이시여,
산의 정상에 있는 바위 위에 오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법으로 이뤄진 누각 위에 올라서
태어남과 늙음에 정복당하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의 승리자시여,
일어나소서.
빚 없는 대상(隊商)들의 지도자처럼
세상을 다니소서.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사함빠띠의 청을 들으신 뒤 그에게 말씀하셨다.

“범천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보기 어렵고 …… 열반의 도리를 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범천아, 그때 나에게 이런 게송이 떠올랐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다.
……
이떻게 이 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범천아, 이런 깊은 사색 끝에 나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사함빠띠 범천은 다시 그리고 또다시 반복해서 세존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범천의 청이 지극함을 아시고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켜 부처님의 눈[佛眼]10)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셨다. 그리고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음을 아셨다. 더러움이 적은 사람, 더러움이 많은 사람, 영리한 사람, 둔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 그 중에는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고서 사는 사람,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셨다.

비유하면 연못의 연꽃들과 같으니, 그곳에는 푸른 연꽃, 붉은 연꽃, 흰 연꽃이 있다. 그들은 모두 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물의 보호를 받는데, 어떤 연꽃은 물에 잠긴 채 자라고 어떤 연꽃은 물의 표면에 있고 어떤 연꽃은 물 위로 솟아 나와 물에 젖지 않은 채 있다.

그와 같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었다. ……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사함빠띠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함빠띠는 세존이 설법을 허락하셨음을 알고는 공손히 절하고 오른쪽으로 돈 다음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상에서 인용한 ‘범천권청’의 내용을 요약하면, 붓다께서 처음에는 설법을 망설였는데, 사함빠띠라는 범천이 나타나 붓다의 마음을 되돌려 마침내 설법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 심리적 전환의 경위를 이 경은 ‘범천의 권청’이라는 신화적 수법을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범천(Brahma)이란 인도인이 받들어 오던 신인데, 그 신이 붓다의 속마음을 알고 붓다를 예배하면서 설법을 하여 주시도록 권청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답고 구성면에서도 빈틈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불교학자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붓다의 설법 결의는 결코 그러한 객관적인 계기로 이루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11)고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무릇 고대인의 문학적 수법은 거의 심리 묘사를 무시하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들은 흔히 심리적 과정을 객관적 사건을 통해 묘사한다. 마음속에 나쁜 생각이 떠오르면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표현하고, 훌륭한 생각이 떠오르면 범천 같은 신을 등장시킨다. 그것이 불교 경전의 문학 형식의 상례이다. 그러면 이에 범천 설화의 양식으로써 묘사된 붓다의 설법 결의의 진상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푸는 열쇠 또한 앞에 든 ‘정각자의 고독’을 이야기한 경 속에 감추어져 있는 듯하다. 새로운 사상을 자기 혼자 지니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리라. 그것을 어떻게든 남에게 알려서 동조를 얻고 싶어지리라. 인간이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며, 붓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12)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붓다의 설법 결의는 ‘범천권청’ 때문이라기보다도 ‘정각자의 고독’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여튼 붓다께서 범천의 간청에 의해서 최초로 설법을 하려고 결심한 ‘범천권청’의 설화는 그 실재성 여부를 떠나서 불교의 출발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즉 깨달음의 내용을 설법의 형식을 통해 객관화시키는 것은 깨달음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13)

Notes:

1) Samyutta Nikaya(PTS) Vol. Ⅰ, pp.138-140; <雜阿含經> 권44, 1188經(大正藏 2, p.321下); <別譯雜阿含經> 권5, 101經(大正藏 2, p.410上–中) 전재성 역주, <쌍윳따 니까야>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제1권, pp.316-319.
2) Samyutta-Atthakatha(Saratthappakasini), Ⅰ, p.203.
3) Samyutta Nikaya(PTS) Vol. Ⅰ, p.139.
4)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개정2판(서울 : 현암사, 2001), pp.131-134 참조.
5) Samyutta Nikaya(PTS) Vol. Ⅰ, p.139, “Yam nunaham yvayam dhammo maya abhisambuddho tam eva dhamma sakkatva garukatva upanissaya vihareyyan-ti.”
6) <雜阿含經> 44권, 1188經(大正藏 2권, p.322上), “唯有正法. 如來自悟成等正覺. 則是如來所應恭敬宗重奉事供養. 依彼而住者. 所以者何. 過去諸如來應等正覺. 亦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 依彼而住. 諸未來如來應等正覺. 亦當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 依彼而住. 世尊亦當於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 依彼而住.”
7) <別譯雜阿含經> 권5, 101經(大正藏 2, p.410上).
8)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p.132.
9) Vinaya Pitaka(PTS) Vol. Ⅰ, pp.4-7; 최봉수 옮김, <마하박가1> (서울 : 시공사, 1998), pp.47-53.
10) 불안(佛眼, Buddhacakkhu)은 부처님이 갖추게 되는 완전한 직관 능력을 말한다. 오안(五眼)의 하나이다. 오안을 북방에서는 ①육안(肉眼), ②천안(天眼), ③혜안(慧眼), ④법안(法眼), ⑤불안(佛眼)이라고 한다. 그런데 남방전통에서는 ①육안(肉眼), ②천안(天眼), ③혜안(慧眼), ④불안(佛眼), ⑤보안(普眼, samantacakkhu, 두루 빠짐없이 살피는 눈) 등으로 분류한다.
11)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p.134.
12)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p.134.
13) 스가누마 아키라 지음 · 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 (서울 : 봉은사출판부, 1991), p.58.

전도의 개시

첫 설법의 대상

붓다께서는 마침내 법을 설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설법을 결심한 다음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어떻게 설할 것인가를 고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깨달은 성도의 내용과 최초로 다섯 비구들에게 설한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우선 누구를 대상으로 첫 설법을 해야할지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새로이 준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미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을 설함으로써 남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대로 붓다가 획득한 깨달음 자체의 첫 시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1)

붓다는 첫 설법의 상대로 처음 출가하여 수행할 때 선정(禪定)을 가르쳐준 스승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를 생각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라면 분명히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두 스승에 관한 이야기는 팔리 “율장(律藏)”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붓다는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는 큰 지혜를 갖춘 자였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이 법을 들었다면 곧바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생각하셨다.

‘이제 누구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할까?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까? 그렇다. 다섯 명의 비구가 있다. 그들은 내가 고행(苦行)할 때 늘 나를 보살폈고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다섯 비구에게 먼저 이 법을 설해야겠다.’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살피셨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청정한 하늘의 눈[天眼]으로 다섯 비구가 바라나시(Baranaasi, 波羅奈城) 근처의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에 머물고 있음을 보셨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우루벨라에서 좋은 만큼 머무시고는 바라나시로 떠나셨다.2)

붓다께서 처음 법을 설하기 위해 그 대상으로 생각한 두 사람의 스승과 다섯 비구는 모두 출가자들입니다. 전도를 시작함에 있어서 붓다는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의 수행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후에 붓다의 제자가 되어 불교 교단의 확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나 목갈라나(Moggalana, 目(牛+建)連) 등도 모두 이교(異敎)의 가르침을 받들어 제자를 두고 이미 일파를 이루고 있던 출가사문으로부터의 개종이었던 것입니다.3)

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 붓다의 설법 대상은 주로 당시 사회의 부유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거나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들을 꿀라뿟따(kulaputta, 善男子)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좋은 가문의 아들’, 즉 ‘귀족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붓다의 가르침은 계급의 차별을 초월해서 만인이 평등함을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평등하게 그 교단에 들어올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출가수행자나 ‘귀족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그의 가르침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일반 세속 사람들도 교단에 합류하거나 재가 신자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우빠까와의 만남

세존께서 가야와 우루벨라 사이에 있는 큰길을 가고 계셨을 때였습니다. 그때 아지바까(Ajivaka, 邪命外道) 교도인 우빠까(Upaka, 優波迦)가 세존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존께 여쭈었습니다.

“그대의 감관은 매우 깨끗하고 모습은 아주 밝습니다. 그대는 누구를 모시고 있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또 그대는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고
모든 것에 더럽혀지지 않았고
모든 것을 버렸다. 갈애가 다한 해탈을 얻었다.
스스로 깨달았으니 누구를 따르겠는가?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천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자는 없다.
어떤 자도 나와 동등하지 못하다.
나는 세상에서 완전한 자이므로
내가 최고의 스승이다.
나는 홀로 모든 것을 깨달아
적정한 경지에 이르렀고 열반을 얻었다.
법륜을 굴리기 위해 나는 까시로 간다.
어두운 이 세상에 불사(不死)의 북을 울리기 위해.”

우빠까는 반신반의하여 말했다.

“그대의 주장대로라면 그대는 무한의 승리자일 수밖에 없군요.”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와 같은 자가 있다면
그들은 참으로 승리자이다. 번뇌를 쳐부수어 승리했기 때문이다. 우빠까여, 모든 그릇된 법을 나는 부수었으니 진실로 나는 승리자이다.”

그러자 우빠까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는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다른 길로 가 버렸다.

이상은 팔리 “율장”에 묘사된 그대로를 소개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빠까는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인연 없는 중생은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합니다만 이 우빠까가 바로 그런 사람에 해당됩니다. 만일 그가 그때 부처님께 귀의했다면 역사상 최초의 출가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부처님을 만났지만 부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그를 떠나갔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빠까와 같이 불법을 만났지만 불법을 버리고 떠나는 불행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나시 여행

예전에 붓다와 함께 고행하였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붓다가 고행을 포기한 것을 보고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바라나시(현재의 베나레스)의 녹야원(鹿野苑, Migadaya, ‘사슴의 동산’이란 뜻, 베나레스 교외의 사르나트)으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선인(仙人)들이 모여 사는 곳’(Isipatana, Isipatana, 仙人住處)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우루벨라를 떠나 녹야원을 향해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도중에 우빠까를 만나기도 하였지만, 여행을 계속하여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녹야원에 이르러, 마침내 다섯 비구가 머물고 있는 근처에 나타나셨습니다. 다섯 비구와 붓다와의 재회에 관해서는 팔리 “율장”에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다섯 비구들은 멀리서 세존께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벗들이여, 수행자 고따마가 오고 있다. 그는 타락한 자로서 고행을 싫어하여 사치스런 생활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해서도 안 되고, 일어서서 영접해서도 안 되고, 발우와 옷을 받아서도 안 된다. 단지 그가 앉을 자리만은 비워 두어 앉고자 하면 앉을 수 있게 하자.”

그러나 세존께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일어나서 세존을 영접했다. 한 사람은 발우와 옷을 받아 들었고 한 사람은 자리를 준비했고 한 사람은 발 씻을 물과 발판과 수건을 가져왔다. 세존께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아 발을 씻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세존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거나 “벗이여.”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래를 이름이나 벗이라는 말로 불러서는 안 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할 분이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분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나는 불사의 경지를 증득하였다. 이제 법을 설하겠다. 설한대로 수행하는 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이 출가할 때 품었던 목적인 범행(梵行)의 궁극적인 완성을 스스로 잘 알고 똑똑히 보아 살아 생전에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자 다섯 비구는 말했다.

“벗 고따마여, 고행을 닦고 실천하고 수행하여도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지견(智見)을 얻기 어려운데 하물며 타락하여 고행을 싫어하여 사치스런 생활로 되돌아간 그대가 어떻게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지견을 얻었겠는가?”

다시 세존께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타락하지 않았다. 고행을 싫어하여 사치스런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분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이제 법을 설하겠다. 설한대로 수행하는 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이 출가할 때 품었던 목적인 범행의 궁극적인 완성을 스스로 잘 알고 똑똑히 보아 살아 생전에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자 다섯 비구는 똑같은 내용을 두 번째 세 번째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물으셨다.)

“비구들이여, 잘 기억해 보아라. 내가 예전에 이와 같이 말한 적이 있었느냐?”

“세존이시여,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분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이제 법을 설하겠다. 설한대로 수행하는 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이 출가할 때 품었던 목적인 범행의 궁극적인 완성을 스스로 잘 알고 똑똑히 보아 살아 생전에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의 생각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세존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잘 들으려 했고, 참된 앎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4)

종교의 성지 바라나시

붓다께서는 왜 최초의 설법을 바라나시에서 하게 되었을까? 우루벨라에서 바라나시까지는 직선 거리로도 약200㎞ 정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붓다의 여정은 무척 먼 길이었을 것입니다. “니다나 카타”에 의하면, 그 여행은 아사르하월(인도력의 6-7월) 14일과 15일이었다고 합니다. 새벽녘에 의발(衣鉢)을 챙겨 가지고 18요자나의 먼 길을 걸은 붓다는 그 날 저녁 무렵에 이시빠따나에 닿았다고 합니다.5) 그러나 5세기 경에 성립된 “마하바스투”에 의하면, 붓다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 7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문헌에는 붓다께서 거친 여러 지명과 갠지스강을 건넌 일화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6)

이 경전에 의하면, 붓다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는 18유순(由旬, 요자나)이었다고 하는데, 1유순이란 멍에를 건 암소가 걸어서 하루가 걸리는 거리를 말합니다. 이를 7마일(약12㎞)로 보는 설에 따르면 실제 거리와도 합치됩니다. 현재는 붓다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 버스로 약 8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붓다께서는 붓다가야(佛陀伽倻)에서 약200㎞나 떨어진 갠지스강 맞은편 언덕인 바라나시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왜 거기까지 가서 제일성(第一聲)을 올렸을까? 오래 전부터 빔비사라(Bimbisara, 頻婆裟羅)왕을 비롯해 많은 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마가다국에서 왜 최초의 설법을 하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실제적으로나 교리적인 면으로 보아 여러 가지 해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기야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녹야원에서 우연히 최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을 나중에 전기 작가들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처럼 설명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나시가 지닌 종교사상적인 위치를 두고 생각할 때 그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7)

바라나시라는 명칭은 이 곳이 갠지스강으로 흘러드는 바라나 강과 아시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두 강 모두 큰 하천이라고 부르기에는 적당치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바라나시는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로부터 바라나시는 하르드와르, 웃자인, 마투라, 아요다, 두와르카, 칸치푸람 등과 비견되는 칠대영장(七大靈場)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곳에는 3만 이상의 바라문 승려가 살고 있으며, 또 연간 백만 명에 이르는 순례자들이 찾아듭니다. 강기슭에는 가트라고 불리는 성스러운 목욕장이 줄지어 있습니다.8)

이처럼 바라나시는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에 있는 온갖 종교의 성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성스러운 갠지스강의 연안 중에서도 특히 이곳이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제일 먼저 이 바라나시를 방문한 것은 많은 수행자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자신이 얻은 정각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Notes:

1)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개정2판 (서울 : 현암사, 2001), p.142.
2)Vinaya Pitaka(PTS), Vol. Ⅰ, pp.7-8.
3)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서울 : 김영사, 1983), p.209.
4)Vinaya Pitaka(PTS), Vol. Ⅰ, pp.8-10; 최봉수 옮김, “마하박가 1” (서울 : 시공사, 1998), pp.53-59, 참조.
5)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p.209.
6)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p.209.
7)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156.
8)中村元著,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p.210.

초전법륜(初轉法輪)

1. 최초의 설법

붓다는 바라나시(현재의 베나레스) 근처의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을 만났습니다. 붓다께서 녹야원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처음에는 환영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였지만 붓다의 위의(威儀)에 압도되어 결국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붓다는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법을 설하였는데, 이 최초의 설법을 일반적으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붓다께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세계의 통치자가 되고, 출가를 하면 부처님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해탈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전륜성왕과 부처님은 완전한 정복자라는 의미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는 외면적인 지배자인데 반해서 후자는 내면적인 지도자입니다. 전륜성왕의 상징인 윤보(輪寶)가 나아가는 곳에 저항하는 자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설법도 또한 반론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는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법륜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1)

고대 인도에서는 우주의 바퀴를 ‘범천의 바퀴’, 즉 브라흐마 차크라(Brahma Cakra)라고 하여, 이를 돌리는 자는 신들 가운데서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상에서의 이상적인 왕은 일곱 개의 보물을 소유하고, 그 하나인 윤보(輪寶)를 굴리는 자라는 뜻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행한 최초의 설법도 이와 같은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법(진리)의 바퀴’, 즉 다르마 차크라(Dharma Cakra)를 처음으로 굴린다고 비유되었던 것입니다.2)

아쇼카왕이 건립한 석주에는 가끔씩 ‘법의 바퀴’가 등장합니다. 또 최초의 설법을 표현하는 불상의 대좌 등에 법륜을 묘사하는 일이 많은 것은 이때 석존이 법의 바퀴를 굴렸다고 하는 전승에 의거한 것입니다. 불상의 인계(印契, mudrā) 중에는 양 손가락을 서로 끼고 있는 설법인(說法印)이 있는데, 이것은 ‘법륜을 굴린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법륜이 붓다의 설법뿐만 아니라 붓다의 교법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친숙해져 있습니다.3)

이와 같이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선포하시어, 법륜이 구르기 시작하였고, 또 다섯 고행자가 귀의한 곳이기 때문에 교법[法]과 승단[僧]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아쇼카왕은 이 성스러운 지점을 순례하고서 많은 건조물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기운찬 사자 네 마리를 새긴 대접받침(柱枓)의 석주는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 대접받침은 법륜을 떠받치고 있어 불법의 흥륭(興隆)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르나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오늘날 인도의 공식적 국가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기리는 법륜제(法輪祭)가 지금도 스리랑카에서 봉행되고 있습니다.4)

자와할랄 네루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베나레스 근처 사르나트에서 나는 부처님이 첫 법문을 설하고 계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경에 나오는 말씀들이 250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곧장 나의 귀에 먼 메아리처럼 다가오는 것 같았다. 명문(銘文)에 새겨진 아쇼카의 석주는 그 장엄한 언어로 나에게 한 인간, 황제였지만 황제 이상으로 위대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5)

2. 최초 설법의 의의

초전법륜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이 이를 갖가지로 전하고 있으며, 또 후대의 경전은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중도(中道), 무아설(無我說), 십이인연(十二因緣) 등 체계화된 불교 교리의 모든 것이 여기서 설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6)

비교적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는 전승을 보면 쾌락과 고행 두 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과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 초전법륜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예로부터 붓다가 행한 최초의 설법의 내용이 중도(中道), 팔정도(八正道), 사제(四諦)로 인정되어 왔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7)

붓다의 설법을 듣고 다섯 명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먼저 가르침을 이해한 이는 꼰단냐(Kondañña, 憍陳如)입니다. 그는 붓다께서 다시 출가 수계(受戒)하여 최초의 출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나머지 네 명도 가르침을 이해하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불교교단(sangha, 僧伽)이 성립하여 비로소 불(佛), 법(法), 승(僧) 삼보가 갖추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붓다는 다시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인 [무아상경(無我相經)]을 설하였는데, 이것을 들은 다섯 명의 비구는 모두 아라한(阿羅漢, 聖者)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8)

3. <전법륜경>의 내용

초전법륜의 내용은 [전법륜경(轉法輪經)]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때 붓다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한 동쪽 지방의 방언으로 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팔리어, 산스끄리뜨어, 한역, 티베트어역으로 20여종이 전해지며 이전(異傳)도 적지 않습니다. 남방불교의 전승인 팔리 [율장(律藏)]에 의하면, 최초의 설법, 즉 [전법륜경]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9)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여러 가지 애욕에 빠져 그것을 즐기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이고 범부의 짓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니, 그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원만히 잘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요함과 수승(殊勝)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를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여기에 성스러운 고제(苦諦)가 있다. 곧 태어남도 괴로움, 늙음도 괴로움, 병듦도 괴로움,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도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集諦)가 있다. 곧 재생(再生)을 유도하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여 이곳 저곳에 집착하는 갈애이다. 다시 말하면 애욕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滅諦)가 있다. 곧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리고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고제이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이미 두루 알았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를 이미 끊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를 이미 증득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를 이미 수습했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만약 내가 이 사성제(四聖諦)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沙門),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성제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았기 때문에,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알고 보게 되었다. 나의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최후의 생존이니, 이제 다시 괴로운 존재를 받지 않는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다섯 비구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세존께서 이 가르침을 설하시자, 꼰단냐는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法眼)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렸을 때, 땅의 신들이 소리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범천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땅의 신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 사왕천(四王天)의 여러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들의 소리를 듣고서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야마천(夜摩天)의 신들도 도솔천(兜率天)의 신들도, 화락천(化樂天)의 신들도,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 소리를 듣고서 범천(梵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순식간에 범천에까지 그 소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일천 세계(一千世界)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신들의 위엄을 능가하는 한량없는 광채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다.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이리하여 꼰단냐 장로는 그때부터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로 불리게 되었다.

진실로 안냐 꼰단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가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안냐 꼰단냐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나머지 비구들에게도 교법을 설하셨다. 그때 밥빠(Vappa) 장로와 밧디야(Bhaddiya)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가져온 음식을 드시고 난 뒤, 다시 나머지 비구들에게 교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세존과 비구들은 세 비구가 걸식해 온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세존의 교법을 듣던 사이에 마하나마(Mahānāma) 장로와 앗사지(Assaji)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Notes:



1)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160.
2) 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서울 : 김영사, 1984), p.211.
3) 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p.211.
4) 피야다시 지음, 정원 옮김, [부처님, 그분: 생애와 가르침] 법륜, 하나 (서울 : 고요한 소리, 1988), p.37.
5) 자와할랄 네루, [인도의 발견], p.44: 피야다시 지음, 정원 옮김, [부처님, 그분 : 생애와 가르침], p.37 No.2에서 재인용.
6) 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p.211.
7)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43.
8)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3.
9) Vinaya Pitaka(PTS), Vol. Ⅰ, pp.10-13; 최봉수 옮김, [마하박가 1] (서울 : 시공사, 1998), pp.59-66; E. H. 브루스터 편저, 박태섭 옮김, [고타마 붓다의 생애] (서울 : 시공사, 1996), pp. 74-79 참조.

불교 교단의 성립

1. 다섯 제자와 상가의 성립

불전(佛傳)에 의하면, 석존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바라나시(Bārānasi, 波羅奈城, 현재의 베나레스)의 이시빠따나 미가다야(Isipatana Migadāya, 仙人住處 鹿野苑)에서 다섯 명의 고행자들을 향해 최초로 설법하였습니다. 이 최초의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며,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에피소드와 함께 불전(佛傳)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습니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설하기로 결심하고 설법의 상대로서 먼저 생각한 것이 옛날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Ālā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고행자들이었습니다. 다섯 명의 고행자 이름은 팔리 율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꼰단냐(Kondañña, 憍陳如),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那摩, 摩訶男), 밧파(Vappa. 婆破, 婆濕婆), 앗사지(Assaji, 阿說示, 馬勝), 밧디야(Bhaddhiya, 跋提伽, 婆提) 등입니다.

이 다섯 명의 고행자들은 석존이 출가했을 때, 그를 지키기 위해 부왕 숫도다나(淨飯王)가 딸려 보냈다고도 합니다만 그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1) 이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석존의 수행시절의 동료로서 함께 고행하였으마, 석존이 고행을 멈추고 깨달음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을 보고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나 바라나시 교외에서 계속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석존이 붓다가 되어 미가다야(Migadāya, 鹿野苑) 가까이 온 것을 보고 이들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고행을 포기하였던 석존이 가까이 와도 경의를 표시하지 않기로 서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가까이 다가오자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경의를 표하지 않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예배하고 의발(衣鉢)을 받아주기도 하고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면서 붓다를 맞이하였습니다. 붓다는 준비된 자리에 앉자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옛날의 습관대로 ‘고따마여’ 또는 ‘친구여’라고 불렀는데, 붓다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비구들이여,2) 이름을 말하거나 ‘친구여’라고 여래(如來)를 불러서는 안 된다. 여래는 존경받아야 할 사람, 정각자(正覺者)이다. 비구들이여, 잘 들어라.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다. 나는 가르치려 한다. 나는 법(法)을 설하려 한다. 너희들이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머지않아, 훌륭한 집안의 아들들이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無上) 불도(佛道) 수행의 구극(究極)을 현세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실증(實證)할 것이다.3)

다섯 명의 비구들은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붓다께서 이 말을 세 번 반복하자 저절로 붓다의 설법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때 붓다는 자신에 넘치는 태도로 깨달은 바를 거짓없이 설했습니다. 그러자 먼저 꼰댠냐(Kondañña)라는 수행자가 깨달음의 문에 들어섰습니다. 경전에는 그때 붓다께서는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4)라는 감탄의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깨달은 꼰단냐’의 뜻으로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맨 처음으로 정각을 얻은 꼰단냐의 뒤를 이어서 밥파(Vappa)와 밧디야(Bhaddhiya)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당시에 곧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전에는 이미 정각을 얻은 세 사람의 비구가 탁발하여 얻은 공양으로 여섯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동안 최후의 두 사람인 마하나마(Mahānāma)와 앗사지(Assaji)가 정각을 얻어, 붓다를 포함한 여섯 명의 아라한(阿羅漢, Arahat: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5)

이렇게 해서 미가다야에서 다섯 명의 비구들이 붓다께 귀의함으로써 최초의 출가 제자의 무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불교 상가(Samgha, 僧伽)가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불교는 우주의 진리성인 법(法)을 자각하여 ‘깨달은 자[覺者]’가 된 붓다와 그의 가르침인 ‘법(法)’과 그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단(敎團)이 갖추어져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성립하였습니다.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라고 할 때, 승(僧)이라고 하는 것은 상가(Samgha)라고 하는 원어를 승가(僧伽)라고 음사하고 이를 줄여서 승(僧)이라고 한 것으로, 이 불, 법, 승 중의 어느 하나가 빠져도 불교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6)

그런데 다섯 명의 비구가 교단에 들어오기 전에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붓다께서 아직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우유죽을 공양한 수자따(Sujāta, 善生)와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바라문 가족의 남녀, 그리고 붓다의 성도(成道) 직후 보리죽과 꿀을 세존께 공양올리고, 붓다께 귀의한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두 상인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재가 불자들로서, 아직 공식적으로 교단이 형성되기 전에 붓다께 귀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다섯 비구의 귀의는 조직적 교단의 형성에 관련된 최초의 사건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 비구에 대한 그 후의 동정은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최후의 앗사지 장로에 대한 기록으로는, 후에 사리뿟다(Sa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가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에서 이들을 만났을 때, 그의 자세가 단정한 것을 보고서 자신들도 붓다의 제가가 될 단서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야사의 출가

다섯 명의 비구들로부터 귀의를 받은 붓다는 다음에는 바라나시에 사는 부유한 장자의 아들인 야사(Yasa, Skt. Yaśas, 耶舍)를 교화하여 출가시켰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야사의 청소년 시대와 출가 전후의 기록은 붓다의 경우와 매우 비슷합니다. 겨울, 여름, 우기를 위한 세 개의 궁전 속에서 오직 홀로 기녀들에게 둘러싸여 지낸 온 야사는 어느 날 밤, 문득 잠에서 깨어나 시녀들이 머리칼을 흩트리고 잠꼬대를 하면서 보기 흉하게 잠들어 있는 광경을 보고, 마치 눈앞에 묘지를 보는 것 같은 심한 혐오감을 느껴 출가의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집을 뛰쳐나온 야사는 붓다께서 머물고 있던 이시빠따나로 오게 되었는데, 붓다는 괴로워하는 야사를 자리에 앉게 한 뒤 다음과 같은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

보시(布施)을 실천하고 계율(戒律)을 준수하면 하늘에 나게 된다. 여러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기 마련이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7)

이와 같이 붓다가 야사에게 들려준 법문은 보시와 계율, 그리고 생천(生天)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각각 시론(施論),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이라고 불리는 이들 세 가지를 차제설법(次第說法: 순서대로 설법함)이라 하는데, 특히 재가 신자에 대한 교화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시(施)는 보시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갖가지 공덕을 말하고, 계(戒)는 계율을 준수함으로써 얻어지는 질서의 유지라는 두 가지 덕행을 기반으로 하여 도덕적인 선(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이 일상 생활을 영위한다면, 사후에는 하늘에 태어날 수 있다는 생천론은 당시 인도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었던 사상이므로, 붓다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난해한 교리를 설한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로써 우선 일반적인 도덕론을 설했던 것입니다.

야사는 이어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즉 인간의 괴로움과 그 원인,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과 그에 도달하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일체의 집착에서 떠나 마음속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다음에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습니다.

3. 재가 신자 – 우바새와 우바이

아들의 출가를 막으려고 뒤쫓아온 야사의 아버지는 아들의 출가를 슬퍼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전하지만, 야사의 결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장자도 붓다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귀의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한 첫 번째 남성 재가 신자, 즉 우빠사까(upāsaka, 優婆塞)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야사의 어머니와 아내도 붓다께 귀의하여 최초의 여성 재가 신자, 즉 우빠시까(upāsika, 優婆夷)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앞서 말한 남성 출가자(比丘)와 함께 상가의 사중(四衆) 가운데서 여성 출가자(比丘尼)를 제외한 기타의 성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가자가 계를 받고 머리와 수염을 깎아 버리고 황색 가사를 입는 데 대하여, 재가 신자는 계를 지키고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불, 법, 승에 귀의하겠습니다”라는 소위 삼귀의(三歸依)를 외움으로써 불교 신자가 됩니다. 재가 신도는 가정에 거주하면서 출가자 교단을 경제적으로 지탱해 나가도록 뒷받침해 주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시빠따나에서 이루어진 재가 신자의 귀의는 후에 불교 교단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야사에게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고 작은 부호의 아들들로서, 비말라(Vimala, 無垢), 수바후(Subāhu, 善臂), 뿐나지(Punnaji, 滿足), 가밤빠띠(Gavampati, 牛王)였습니다. 이들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습니다.8) 그 뒤 다시 야사가 재가 시절에 사귀었던 50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거나 그 다음 오래된 가문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이들 야사의 친구 50명도 출가하여 교단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불교교단에는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있었던 것입니다.9)

4. 전도의 길

이제 붓다는 60명의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아라한으로서 법을 깨닫고 충분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갖추 분이었습니다. 우기(雨期)가 끝나자,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너희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 축복, 행복을 위해서. 둘이서 한 길로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한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아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간다.10)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전도선언(傳道宣言)’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순 한 사람의 아라한이 각기 갈 곳을 정해서 포교활동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때 붓다는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곧바로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붓다 가야로 되돌아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도중에 길에서 좀 떨어진 밀림 속에 들어가 한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고장의 상류층 청년 서른 사람이 그 숲으로 놀이를 왔었습니다. 저마다 아내를 데리고 왔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독신자는 기녀를 데리고 왔었습니다. 다들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그 기녀는 여러 사람의 옷가지와 패물 등을 가지고 도망쳐버렸습니다. 청년들은 허둥지둥 그 뒤를 쫓다가 부처님이 좌선하고 있는 장소에 이르러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혹시 보지 못하셨습니까?”
“여자를 어떻게 하려는가?”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그 여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청년들을 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여자를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물론 자기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좋다, 그러면 거기들 앉거라.”

이와 같이 해서 서른 사람의 청년들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설법을 듣고 모두 즉석에서 출가했습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새로운 교단은 점점 성장해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입멸하시는 날까지 계속하게 되는 성스러운 전법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인도의 크고 작은 길을 빠짐없이 두루 편력(遍歷)하시며 무한한 자비와 지혜의 광명으로 그 모든 길을 가득히 채우셨습니다. 처음 승단은 겨우 60여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수천으로 늘어났습니다.11)

Notes:



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213.
2) 붓다는 이 다섯 명의 고행자들을 ‘비구(Bhikkhu, 比丘)’라고 호칭하였는데, 이 때는 아직 붓다의 제자가 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붓다 당시 출가하여 유행하며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구’라고 불렸다. 당시의 출가자들은 모두 걸식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비구’라는 단어 자체가 ‘걸식한다(begged food)’ 또는 ‘구걸한다(mmendicant)’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불교교단의 남성 출가자를 일컫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3) Vinaya Pitaka(=Vin.), ed. H. Oldenberg, 5 volumes (London: PTS, 1879-1883), Ⅰ, p.9.
4) Vin. Ⅰ, p.12; “aññasi vata bho Kondañño aññasi vata bho Kondañño’ti.”
5) Vin. Ⅰ, pp.10-13.
6)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올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p.107.
7) Vin. Ⅰ, p.15; “dānakatham sīlakatam saggakatham kāmānam ādīnavam okāram samkilesam nekkhamme ānisamsam pakāsesi.”
8) Vin. Ⅰ, pp.18-19.
9) Vin. Ⅰ, p.19.
10) “Mutto-ham bhikkhave sabbapāsehi ye dibbā ye ca mānusā, Tumhe pi bhikkhave muttā sabbapāsehi ye dibbā ye ca mānusā. caratha bhikkhave cārikam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ak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m. Mā ekena dve agamettha, desetha bhikkhave dhammam ādikalyānam majjhe kalyānam pariyosāna-kalyānam, sāttham savyanjanam kevala-paripunnam parisuddham brahmacariyam pakāsetha. Santi sattā apparajakkha-jātikā, assavanatā dhammassa parihāyanti, bhavissanti dhammassa aññātāro. Aham pi bhikkhave yena Uruvelā Senānigamo ten’upasankamissāmi dhamma- desanāyā ti.” <S.Ⅰ, pp.105-6; V.Ⅰ, pp.20-21.>
11) 피야다시 지음, 정원 옮김, [부처님, 그 분: 생애와 가르침] (서울: 고요한소리, 1988), p.39.

초기의 교화활동

녹야원에서의 설법을 계기로 붓다의 교화활동은 급속히 전개되었습니다. 팔리어 [율장(律藏)] 「대품(大品)」에서는 그러한 교화활동 상황을 역사적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라나시에서 장자(長者)의 아들 야사(Yasa, 耶舍)가 교화를 받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으며, 그의 부모와 아내도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재가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뒤 야사의 친구 4명과 50명의 옛친구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 교단에는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 때 붓다께서는 저 유명한 ‘전도선언(傳道宣言)’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전도의 여행을 떠나라고 당부하고, 자신은 홀로 성도지(成道地) 우루벨라(Uruvelā, 優樓頻螺)로 향하였습니다. 붓다께서 우루벨라로 돌아오는 도중에 30명의 젊은이들을 교화하여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30명의 젊은이들은 각자 아내를 거느리고 숲속으로 나들이를 나와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아내가 아닌 기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이 놀이에 빠져 있는 동안 기녀는 그들의 귀중품을 모두 가지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들이 도망간 여인을 찾느라고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숲속에서 명상 중이었던 붓다를 발견하고, 붓다께 여인의 행방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도망간 기녀를 찾는 일과 자신을 찾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묻고, 그들에게 법을 설하여 교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모두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 깟사빠 삼형제

초기불교 교단에서 가장 큰 수확은 깟사빠(Kassapa, 迦葉) 삼형제를 개종시킨 사건일 것입니다. 이들 깟사빠 삼형제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야(Buddhagayā, 佛陀伽倻, 현재의 보드가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장 명성이 높은 종교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일 먼저 이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 삼형제 중 첫째는 우루벨라 깟사빠(Uruvelā Kassapa, 優樓頻螺迦葉)입니다. 그는 우루벨라 숲속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는 5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나디 깟사빠(Nadī Kassapa, 那提迦葉)인데, 그는 우루벨라 숲과 가야를 연결하는 네란자라 강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팔리어 나디(Nadī)는 강(江) 또는 하(河)이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3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가야 깟사빠(Gayā Kassapa, 伽倻迦葉)입니다. 그는 하류(下流)인 가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도 2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머리를 땋고 불을 숭배하면서 해탈을 목표로 고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불의 신 ‘아그니(agni, 火神)’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사화외도(事火外道) 혹은 배화교도(拜火敎徒)라고 불렸으며, 머리를 땋고 주로 고행하였기 때문에 결발행자(結髮行者) 혹은 결발외도(結髮外道)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의 교리와 수행 내용 등과 같은 자세한 사항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팔리 [율장] 「대품」에는 붓다께서 우루벨라 깟사빠를 신통력으로 교화하는 내용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루벨라의 신통’으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경전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세존께서는 결발의 행자 우루벨라 깟사빠가 머물고 있던 수행처로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깟사빠여,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나는 오늘 하룻밤을 그대의 화옥(火屋)에서 지내고자 한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저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흉악하고 신통한 용왕이 살고 있는데, 그 용은 맹렬한 독을 뿜는 독사여서 당신을 해치게 될까 걱정됩니다.”

이렇게 세존께서는 깟사빠에게 세 번 반복하여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깟사빠는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여기서 화옥(火屋)이란 불을 섬기는 성화당(聖火堂)을 말하는데, 이곳에 나가(Nāga)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팔리어 나가(Nāga)는 용(龍), 코끼리(象), 뱀(蛇)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아마 거대한 독을 가진 뱀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드디어 세존께서는 화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풀로 엮은 자리를 깔고 그 위에 가부좌로 앉으신 뒤 몸을 세우고 선정(禪定)에 드셨습니다. 큰 독을 가진 뱀은 세존께서 들어와 계시는 것을 보고는 괴롭고 쓰라린 심정으로 독의 연기를 내뿜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이 독을 가진 뱀의 피부와 가죽과 살과 힘줄과 뼈와 골수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나의 불로써 독뱀의 불을 소멸시켜야겠다.’

세존께서는 신통력으로 연기를 뿜어 내셨습니다. 그러자 독뱀은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불을 뿜었습니다. 세존 역시 화계삼매(火界三昧)에 들어 불을 뿜으셨습니다. 세존과 독뱀, 그 둘이 불꽃에 휩싸이자 성화당 안은 마치 거세게 불타는 것과 같았습니다. 수행자들은 성화당 주위에 모여 말했습니다.

“아, 그 위대한 사문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이제 독뱀에게 죽임을 당하는구나.”

세존께서는 피부, 가죽, 살, 힘줄, 뼈, 골수 등 그 어느 것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자신의 불로써 독뱀의 불을 소멸시켰고, 밤이 지나자 그 독뱀을 발우에 담아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보여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대의 독뱀이다. 이 독뱀의 불은 나의 불로 소멸되었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생각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문의 위력은 참으로 훌륭하다. 이 흉악하고 신통한 독뱀이 맹렬한 독으로 불을 뿜는데도, 그 불을 자신의 불로써 소멸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와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께서 보이신 신통을 보고 존경심을 일으켰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승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여기서 머무십시오. 언제나 제가 당신께 공양 올리겠습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깟사빠의 수행처 근처에 있는 숲에서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밤이 으슥한 무렵에 사대천왕(四大天王)이 뛰어난 용모를 한 채, 숲 전체를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 왔습니다. 그들은 세존께 공손히 절하고 사방에 서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밤이 지나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께로 다가와서 아뢰었습니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때가 되었습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문이시여, 어젯밤에 뛰어난 용모를 한 채, 숲 전체를 밝히면서 당신이 계신 곳으로 와서 공손히 절하고 사방에 서 있던, 거대한 불기둥과 같았던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깟사빠여, 그들은 사대천왕으로 법을 듣기 위해 나에게 온 것이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생각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문의 위력은 참으로 훌륭하다. 사대천왕조차 법을 듣기 위해 그에게 오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나와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깟사빠가 준비한 음식을 드시고는 숲으로 돌아가 머무셨습니다.

그 뒤에도 붓다는 여러 가지 신통력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팔리 [율장] 「대품」에는 3,500가지의 신변(神變), 즉 신통력을 보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신통력으로써 우루벨라 깟사빠를 계속적으로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세존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존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이 어리석은 자는 나를 위대한 사문으로, 그리고 나의 위신력을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자신과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 자가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겠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깟사빠여, 그대는 아라한도 아니고, 아라한의 경지에 들지도 못했다. 아라한과 아라한의 경지에 들기 위한 도(道)를 그대는 갖추지 못했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의 발에 머리를 대는 예를 갖추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깟사빠야, 그대는 500명의 수행자들을 이끌고 있는 최고의 지도자이다. 그대는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루벨라 깟사빠는 수행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저 위대한 사문 곁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길 바랍니다.”

“깟사빠여, 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저 위대한 사문에게 큰 믿음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만약 깟사빠께서 저 위대한 사문에게 가서 청정한 수행을 하신다면 우리들 모두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은 머리를 깎고, 소지품과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 등을 모두 물에 떠내려보내고, 세존께 가서 머리를 발에 대는 예를 갖추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이렇게 그들은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때 강의 하류에 살던 나디 깟사빠는 물 위에 머리카락과 짐과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들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에게 어떤 재난도 닥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수행자들을 형이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300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우루벨라 깟사빠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더 뛰어난 것입니까?”

“그렇다. 이것이 진정 더 뛰어나다.”

그리하여 나디 깟사빠와 그 제자 300명이 세존께 귀의하고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야 깟사빠도 자신의 제자 200명과 함께 세존께 귀의하고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깟사빠 삼형제는 자신들의 제자 1,000명과 함께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붓다는 우루벨라에서 결발의 행자였던 우루벨라 깟사빠를 신통력으로써 항복시키고, 나디 깟사빠와 가야 깟사빠 및 이 세 명의 깟사빠가 이끄는 제자 천 명을 귀의시켜 교단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승은 마가다국 최대의 도시인 가야로 되돌아 온 붓다께서 전통 힌두교와는 다른 출가자 교단의 지도자와 격렬한 종교 논쟁이나 또는 종교상의 대결을 통해서 그를 물리치고 불교 교단의 기반을 이 지역에 구축해 나간 것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불교 교단은 개종자를 흡수하면서 계속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2. 불의 설법

붓다는 이제 6년 전에 마가다국의 국왕 빔비사라와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깟사빠 삼형제를 비롯한 천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마가다의 수도 왕사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왕사성 교외의 가야시사(Gayāsīsa, 伽倻尸沙)에 머물렀습니다.

가야시사는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역되었습니다. 현장(玄奘) 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시사는 가야성(伽倻城)의 서남(西南) 5-6리(里)에 있었다고 하였고, [우다나]의 주(註)에는 가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못과 내가 있는데 그곳은 세속의 사람들이 악(惡)을 씻어버리는 영장(靈長)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거기에 한 산이 있는데, 코끼리의 머리와 비슷한 큰 바위가 있어 천 명의 비구를 수용할 수 있어 상두산이라고 불린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사촌동생 데와닷따(提婆達多)가 부처님을 배반하고 독립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우루벨라에서 좋을 만큼 지내신 뒤, 예전에 결발외도(結髮外道)였던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가야시사를 향해 떠나셨습니다. 이윽고 가야 지방의 가야시사에 도착하여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눈이 불타고 색(色)이 불타고, 안식(眼識)이 불타고, 안촉(眼觸)이 불타고, 안촉에 기대어 발생한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타고 노여움의 불로 타고 어리석음의 불로 타고, 출생, 늙음, 죽음, 슬픔, 눈물, 괴로움, 근심, 갈등으로 불탄다.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비구들이여, 들은 것이 많은 나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와 같이 보는 까닭에 눈도 싫어하고 색들도 싫어하고 안식도 싫어하고 안촉도 싫어하고 안촉에 기대어 발생한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싫어한다.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에 대해 탐욕을 제거하고 그들로부터 해탈한다. 그리고 해탈했다는 지혜를 일으킨다.

나의 괴로운 생존은 끝났다.
청정한 수행은 완성되었다.
실천해야 할 바를 모두 실천했다.
다시는 괴로운 생존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불의 설법이 베풀어졌을 때, 천 명의 비구들은 집착이 사라져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였다.

이것이 저 유명한 ‘불의 설법(燃火經)’입니다. 이 법문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壇)을 꾸미고 불을 태워 그 타오르는 화염(火炎) 속에 제사를 지냈던 자들에게 설한 것입니다. 이 법문의 핵심은 외부의 불보다 인간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더 무서우며, 그 불길을 꺼버리고 해탈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王舍城에서의 敎化

1. 왕사성과 초기불교 교단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는 붓다 당시 인도의 사대강국(四大强國) 중의 하나인 마가다(Magadha, 摩揭陀)국의 수도(首都)였습니다. 라자가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는데,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옛 도시는 기릿바자(Giribbaja, 山圍域)로 널리 알려졌던 언덕 위의 요새, 즉 산성(山城)이었습니다. 이 산성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능숙한 건축가였던 마하고빈다(Mahāgovinda)왕이 설계하고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1) 신도시는 산 기슭의 평지에 빔비사라(Bimbisāra)왕이 세웠습니다. 신(新), 구(舊) 도시 모두 기릿바자(Giribbaja)로 불렸습니다. 그 이유는 주위에 빤다바(Pandava, 白善山), 깃자꾸따(Gijjhakūtā, 靈鷲山), 베바라(Vebhāra, 負重山), 이시기리(Isigili, 仙人掘山), 베뿔라(Vepulla, 廣普山) 등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자가하는 붓다의 활동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붓다께서 처음 출가하여 90마일 거리의 아노마(Anomā) 강을 건너 걸어서 라자가하를 방문했습니다. 빔비사라왕은 거리에서 탁발하는 싯다르타를 발견하고,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출가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빔비사라왕은 나중에 그가 목적을 이루면 라자가하를 다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싯다르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2) 그래서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뒤, 자띨라(Jatila, 結髮外道)를 개종시키고, 가야(Gayā)에서 라자가하로 와서 1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빔비사라왕과 그의 백성들은 붓다를 열렬히 환영했으며, 왕은 붓다와 제자들을 왕궁으로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붓다께서 왕실 구역 안으로 들어오던 날 삭까(Sakka)는 어린 아이로 변신하여 붓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대열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 첫 번째 방문 때, 빔비사라 왕은 벨루와나(Veluvana, 竹林)를 붓다와 승단에 기증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도 라자가하에서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가장(家長)들이 승단에 합류했는데, 사람들은 붓다가 자신들의 가정을 파괴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은 채 일주일도 넘기기 못하였습니다.

붓다는 라자가하에서 첫 번째 왓사(vassa, 安居)를 보내고, 겨울과 그 이듬해 여름까지 라자가하에서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스님들을 뵙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붓다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먼저 닥키나기리(Dakkhināgiri)에 갔으며, 이어서 까삘라왓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붓다방사(Buddhavamsa, 佛種性史)의 주석서에 의하면, 붓다는 세 번째, 네 번째, 열일곱 번째, 스무 번째의 안거를 라자가하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붓다는 20년 동안 라자가하를 중심으로 그의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왓티(Sāvatthī, 舍衛城)를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종종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머물었습니다. 많은 율의 규정들도 라자가하에서 제정되었습니다. 붓다는 입멸 직전 마지막으로 라자가하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王)는 밧지족(Vajjian)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자신의 성공 여부를 알기 위해 대신 왓사까라(Vassakāra)를 깃자꾸따(Gijjhakūta, 靈鷲山)에 계시던 붓다께 보냈습니다.3)

붓다께서 열반하신 뒤, 마하깟사빠(Mahākassapa, 大迦葉)와 여러 스님들에 의해 제1차 결집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써 그들의 본부로 라자가하를 선정했습니다. 제1차 결집은 삿따빤니구하(Sattapanniguhā, 七葉窟)에서 행해졌는데, 아자따삿뚜왕은 진심으로 후원해 주었습니다. 또한 왕은 자신의 몫으로 차지했던 붓다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라자가하에 탑을 세웠습니다.

마하방사(Mahāvamsa, 大史)에 의하면, 약간 후대에 마하깟사빠(대가섭)의 제안에 따라 아자따삿뚜왕은 라자가하의 일곱 장소에 분산하여 보관해 오던 붓다의 사리 중 라마가마(Rāmagāma)에 봉안된 것을 제외하고 모두 거두어 한 곳에 모아 대탑(大塔, Mahāthūpa)를 세웠습니다. 후세의 아소까(Asoka)왕이 세운 사찰과 탑에 봉안된 사리는 모두 대탑에서 꺼낸 것입니다.

라자가하는 붓다 재세시 육대(六大) 도시 가운데 하나였으며, 중요한 무역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의 육대 도시는 라자가하를 포함하여 짬빠(Campa, 앙가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꼬살라의 수도), 사께따(Sāketa, 고살라의 도시), 꼬삼비(Kosambi, 밤사의 수도), 바라나시(Bārānasī, 까시의 수도) 등입니다.4)

붓다께서 입멸했을 때, 라자가하에는 열 여덟 개의 큰 사원이 있었습니다. 그 후 따뽀다(Tapodā)와 삿삐니(Sappinī) 강의 범람으로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붓다 생존시 라자가하에는 인구가 1억 8천만 명이었는데, 도시 안에 9천만 명이 살았고, 도시 밖에 9천만 명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위생 시설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라자가하의 회계원과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給孤獨)는 서로 자기들의 여동생과 바꾸어 결혼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결혼을 위해 라자가하로 가는 도중에 처음으로 붓다를 만났습니다. 붓다 입멸 후 곧바로 라자가하는 그 중요성과 번영을 모두 잃어버리고 쇠퇴하였습니다. 시수나가(Sisunāga)왕은 수도를 베살리(Vesāli)로 옮겼으며, 깔라소까(Kālāsoka)왕은 다시 빠딸리뿟따(Pataliputta)로 천도(遷都)하였습니다. 빠딸리뿟따는 이미 붓다 당시에 전략상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던 곳입니다. 중국의 현장(玄奘) 스님이 라자가하를 방문했을 때는 바라문들이 라자가하를 차지하고 있었고, 도시 전체가 매우 황폐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2. 빔비사라왕과의 만남

붓다는 깟사빠 삼형제를 교화한 다음, 가야시사(Gayāsīsa, 象頭山)를 출발하여 라자가하에 도착했습니다. 붓다는 깟사빠 삼형제를 비룻한 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랏티와눗야나(Latthivanuyyāna, 杖林)의 수빠띳타 쩨띠야(Supatittha cetiya)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가다국의 세니야 빔비사라(Seniya Bimbisāra)왕은 세존께서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라자가하에 도착하여 수빠띳따 쩨띠야에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빔비사라왕은 마가다국의 12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을 거느리고 세존을 찾아뵈었습니다. 왕은 세존께 공손히 절하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그때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저 위대한 사문이 우루벨라 깟사빠(Uruvela Kassapa, 優樓頻螺迦葉)를 모시고 청정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루벨라 깟사빠가 저 위대한 사문을 모시고 청정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게송으로 “어찌하여 불에 제사 지내던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우루벨라 깟사빠는 “제사를 지내는 일에도 즐겁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세존의 발에 머리를 대는 예를 갖추고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며, 저는 세존의 제자입니다.”라고 반복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리하여 12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은 ‘우루벨라 깟사빠가 저 위대한 사문을 모시고 수행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보시를 실천하고 계율을 준수하면 하늘에 나게 된다. 여러 애욕에는 환란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라는 요지의 법문을 설했습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본래 진실한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러자 때 없는 흰 천이 잘 염색되듯이, 빔비사라 왕을 비롯한 11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은 그 자리에서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을 얻었습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때 빔비사라왕은 붓다께 왕자 시절에 자신이 세운 다섯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섯 가지 소원이란 첫째는 왕위에 오르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영토에 평등하시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오셨으면 하는 것이고, 셋째는 세존을 모셔 봤으면 하는 것이고, 넷째는 그 세존께서 자기에게 법을 설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세존의 법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빔비사라왕이 붓다를 친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다섯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빔비사라왕은 붓다를 찬탄한 뒤, 자신을 재가 신자로 받아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붓다께 귀의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세존과 비구 승단을 내일 왕궁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붓다는 침묵으로 승낙하였습니다.

다음 날 세존께서는 가사를 두르고 발우를 든 채, 예전에 결발외도였던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갔습니다. 그 장면은 참으로 거룩하고 감동적입니다. [율장(律藏)] 「대품(大品)」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5)

그때 천신들의 왕 삭까(Sakka)가 동자의 모습으로 변한 뒤, 세존이 지도자이신 비구 승단의 선두에 나아가 게송을 읊었다.

“세존께서는 이미 극복했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극복했고 해탈하였네.
금(金)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우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세존께서는 이미 벗어났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벗어났고 해탈하였네.
금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운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세존께서는 이미 건너셨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건넜고 해탈하였네.
금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우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세존께서는 이미 멈추셨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멈추었고 해탈하였네.
금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우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열 가지에 거주하고 열 가지 힘이 있고
열 가지 법을 알고 열 가지를 갖추신 세존께서는
천 명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사람들은 천신들의 왕 삭까를 보고 말했다.

“아! 저 동자는 너무도 수려하다. 아! 저 동자는 너무도 아름답다. 아! 저 동자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저 동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말을 듣고 천신들의 왕 삭까는 그 사람들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확고부동하고 모든 것을 극복했으며
청정하고 세상에 짝할 이 없으며
아라한이고 선서(善逝)이신 세존의 시자(侍者)이다.

세존께서는 빔비사라왕의 거처에 이르러 비구 승단과 함께 준비된 자리에 않으셨다. 왕은 세존을 비롯한 비구 승단을 위해 손수 시중들고 봉사했다. 세존께서 식사를 끝내고 그릇에서 손을 거두시니 왕은 한쪽에 앉았다.

왕은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어떤 장소에서 지내셔야 할까?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가기에 편하며,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고,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 바로 그런 곳에 머물러야 하실텐데.’

왕은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벨루 숲이 있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리하고,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고,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이다. 나는 벨루 숲을 세존이 지도자이신 비구 승단에게 승원(僧園)으로 사용하도록 바쳐야겠다.’

그리하여 왕은 왕금으로 만든 병을 세존게 올리면서 말했다.

“세존이시여, 벨루 숲을 세존이 지도자이신 비구 승단에 승원으로 사용하도록 바치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승원을 받으셨다. 그리고 다시 빔비사라 왕에게 법을 설하신 뒤 왕이 그것을 받들고 기뻐하는 것을 보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셨다.

세존께서는 이 인연으로 법을 설하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승원을 받기로 하였다.”

Notes:



1) G. P. Malalasekera(ed.),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Vol. II, p.489, 참조.
2) 出家經(Pabbajja sutta)와 그 주석서 참조.
3) Dīgha-nikāya(PTS), Vol. II, p.72.
4) D. II, p.147.
5) 아래의 번역은 최봉수 옮김, [마하박가1](서울: 時空社, 1998), pp.112-115에서 인용한 것임.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귀의

붓다께서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중심으로 교화를 펼치고 계실 때, 라자가하 부근에는 여러 종교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tthiputta)도 25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우빠띳사(Upatissa, 優波帝須)와 꼴리따(Kolita, 俱律陀)라는 두 사람의 수제자(首弟子)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붓다께 귀의하여 초기불교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입니다.

사리뿟따의 본명은 우빠띳사(Upatissa)였습니다.1) 주석가들은 우빠띳사가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라고 하지만,2) 다른 곳에서는 나라까(Nāraka)가 그의 마을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3) 사리뿟따의 아버지는 바라문 방간따(Vanganta)4)이고, 그의 어머니는 루빠사리(Rūpasāri)입니다. 그가 사리뿟따(사리의 아들)로 불린 것은 그의 어머니 이름 때문이었습니다.5) 우빠띳사라는 이름은 경전들에서 아주 드물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쭌다(Cunda), 우빠세나(Upasena), 레와따(Revata)라는 세 명의 남동생과 짤라(Cāla), 우빠짤라(Upacāla), 시수빠짤라(Sisūpacāla)라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출가하여 승단에 입단했습니다. 또한 경전에는 그의 숙부와 조카의 이야기도 언급되어 있습니다.6)

목갈라나는 라자가하 근처의 꼴리따가마(Kolitagāma)에서 태어났습니다. 같은 날 사리뿟따도 태어났다고 전합니다.7) 그는 나중에 그의 마을 이름인 꼴리따(Kolita)로 불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목갈리(Moggalī) 혹은 목갈라니(Moggallāni)로 불렸던 여성 바라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마을 촌장이었습니다.8) 그의 이름 목갈라나는 그의 어머니 이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갈라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승단에 너무 많았기 때문에 붓다의 두 번째 제자인 목갈라나는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로 불렸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라자가하의 축제를 구경하며 함께 즐기고 있었는데, 그들은 문득 백년 후에 이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무상(無常)을 느껴, 해탈의 길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을 떠나 육사외도의 하나인 회의론자 산자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산자야의 문하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먼저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하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알려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불사라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최고의 이상을 표현하는 말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절대의 경지 또는 해탈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9)

산자야의 두 수제자였던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붓다께 귀의하게 된 것은 불교교단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입니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개종에 관해서는 팔리 『율장(律藏)』「대품(大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10) 그 전후 사정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사리뿟따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있는 거동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문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앗사지(Assaji, 馬勝)였습니다. 앗사지 비구는 나아가고 물러서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굽히고 펴는 것이 의젓하였고, 눈은 땅을 향하여 훌륭한 몸가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사리뿟따는 이러한 앗사지 비구의 위의(威儀)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앗사지 비구의 걸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벗이여, 당신은 누구에게 출가하였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벗이여, 사캬족 가문(Sakyakulā)의 사캬의 아들(Sakyaputta)로서 출가한 위대한 사문이 있습니다. 그 분은 세존이십니다. 나는 세존에게 출가하였으며, 세존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세존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대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설하십니까?”

“벗이여, 저는 어리고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법과 계율에 대해서는 배움이 짧습니다. 저는 세존의 가르침을 자세히 가르쳐 줄 수는 없고 다만 간략한 의미만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앗사지 비구는 사리뿟따에게 법문(法門, dhammapariyāyam)을 설하였습니다.

“모든 법은 인(因)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여래께서는 이 인(因)을 설하시었다.
모든 법의 소멸에 대해서도
위대한 사문은 그와 같다고 설하시었다.”11)
(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塵 是大沙門說.)

사리뿟따는 이 법문을 듣고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法眼)을 얻었습니다. 곧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12)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첫 단계인 예류과(預流果, sotāpanna)를 성취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송을 읊었습니다.

“비록 이것뿐이라고 하여도 이것은 바른 법이다.
수만 겁(劫)을 헤매어도 보지 못하였던
슬픔 없는 이 법구(法句)를 그대들은 깨달았네.”13)

사리뿟따는 목갈라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앗사지 비구를 만난 사실과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목갈라나 역시 친구가 전해주는 게송을 듣고서 곧바로 깨침의 첫 단계를 얻었습니다. 이때 목갈라나는 사리뿟따에게 말했습니다.

“벗이여, 우리 세존의 곁으로 갑시다. 세존만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그런데 벗이여, 250명의 유행자(遊行者)들이 우리를 의지하며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정을 알려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합시다.”

이러한 말을 전해들은 다른 동료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그대들에게 의지하며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약 그대들이 저 위대한 사문에게 가서 청정한 수행을 하신다면 저희들도 모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산자야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갑니다. 세존만이 저희들의 스승입니다.”

그러자 산자야는 “안된다. 가지 마라. 우리 셋이 함께 이 무리를 보살피도록 하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250명의 유행자들을 이끌고 벨루와나(Veluvana, 竹林)를 향해 떠났습니다. 산자야는 그곳에서 뜨거운 피를 토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저기에 오고 있는 두 사람은 꼴리따(Kolita)와 우빠띳사(Upatissa)이다. 그들은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나의 한 쌍의 제자가 될 것이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세존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세존의 발에 자신들의 머리를 대는 예를 갖추고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이렇게 그들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산자야의 제자들 중에서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부처님에게 귀의한 것은 불교교단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후에 불교교단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널리 포교하였기 때문입니다.14)

위에서 언급한 앗사지가 전한 붓다의 가르침은 게송(偈頌)의 형식으로 전하는데 매우 유명한 것입니다. 물론 그 게송의 형식이 앗사지가 말한 그대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부처님의 가르침의 중심 골자가 들어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게송은 후대에 매우 중요시되어 법신게(法身偈) 또는 법사리(法舍利)라고 불리어지게 되었습니다.15) 여러 불전(佛典)에는 이 게송이 조금씩 다른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16)

붓다께서는 제자가 된 이들 두 사람을 모든 제자의 상좌(上座, 윗자리)에 두었습니다. 이는 하루라도 일찍 교단에 들어온 자를 상좌에 두는 전통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고참 비구들로부터의 불평이 많이 있었지만 붓다는 이들을 잘 달랬다고 합니다. 이 일은 두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사실을 잘 나타내 줍니다.

사리뿟따는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는 중 자기를 부처님께 인도해 준 앗사지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일생동안 앗사지가 있는 쪽으로는 다리를 뻗고 자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방위(方位)를 믿는 이교도(異敎徒)라는 비난이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17)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두 사람이 부처님게 귀의한 이래 부처님의 명성(名聲)은 더욱 높아지고 라자가하의 명문 자제로서 출가하는 사람의 수효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그 때문에 ‘고따마 사문은 부모에게서 자식을 빼앗아 가고, 아내로부터 남편을 빼앗아 가고, 집안의 혈통을 끊는 자’라는 비난마저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한 때 그 제자들의 탁발까지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법(正法)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숙연한 태도에 그 비난의 소리도 점차 가라앉아 교세(敎勢)는 더욱 늘어가기만 하였습니다.18)

사리뿟따는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갖가지 지식에 통하고 통찰력도 뛰어났으며, 더욱이 교단의 통솔에도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경전 가운데도 세존을 대신해서 사리뿟따가 교리를 상세하게 설하고, 붓다께서 그것을 추인하는 형식이 가끔 보입니다.

목갈라나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안색이 너무나 좋아서 사리뿟따가 그 이유를 물은 즉, “오늘 나는 붓다와 법담(法談)을 나누었는데, 붓다와 내가 모두 천안천이(天眼天耳)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신통력은 붓다와 동등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는 가끔 쁘레따(preta, P. peta, 餓鬼)를 보고 웃곤 했는데, 그 이유를 묻는 이에게 쁘레따에 대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쁘레따는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조상의 영혼이나 전세에 지은 악업의 대가로 기아와 갈증에 시달리며 배회하는 귀신을 뜻합니다. 또 마리지(摩利支) 세계에 살고 있는 죽은 모친을 천안으로 보고서, 그곳으로부터 모친을 구출했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소위 목련구모(目連救母)의 전설인데, 이것은 중국 등지에서 거행되는 우란분(盂蘭盆; 지옥에 떨어진 이의 혹심한 괴로움을 구원하기 위하여 닦는 법)이나 시아귀회(施餓鬼會; 굶주림에 고통 받는 망령을 위안하기 위하여 베풀어 주는 법회)에서의 인연 설화의 기원이 되고 있습니다.19)

목갈라나는 붓다와 함께 사왓티(Sāvatthi, 舍衛城) 교외의 미가라마뚜빠사다(Migāramātupāsāda, 鹿子母 講堂)에 있을 때, 많은 비구들이 단정치 못한 자세로 잡담을 즐기는 광경을 보고, 신통력을 써서 발가락으로 강당을 흔들었기 때문에 비구들이 놀라서 도망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20) 또 모여든 비구 중에 부정한 자가 있음을 알고 그의 팔을 잡아 축출해냈다고도 합니다. 그는 아난다, 사리뿟따와 함께 교단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므로, 교단의 통제를 위해서도 그는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21)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모두 붓다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붓다보다 먼저 입멸했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 모두가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또 붓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사실입니다. 붓다 자신도 “두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비구들이 허전해 하는 것 같다”라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사리뿟따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갈라나의 게(偈)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리뿟따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됩니다.22)

현장은 라자가하와 날란다의 중간 지점에서 사리뿟따의 출생지로 알려진 카라피나카 마을을 찾아 스투파에 참배했다고 하며, 목갈라나의 고향인 꼴리따 마을의 스투파에도 참배했다고 합니다.23)

사리뿟따는 고향 나라까 마을에서 시종이기도 했던 동생 쭌다의 임종 간호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쭌다는 그 유골과 남긴 주발, 입었던 가사 등을 가지고 사왓티에 체류 중이던 붓다 앞에 이르러, 아난다와 함께 그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붓다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합니다. 현장은 이 두 제자가 모두 자신의 출생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현은 마투라에 사리불탑과 목련탑이 있었다고 전하고, 현장도 그곳에서 목건련과 그 밖의 다른 불제자의 사리탑에 참배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24)

Notes:



1) Majjhima-nikāya(PTS), Vol. I, p.150.
2) Dhammapadatthakathā(PTS), Vol. I, p.88ff; Anguttaratthakathā(PTS), Vol. I, p.155ff;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third edition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49), pp.84-85.
3) Satipatthāna Samyutta의 Cunda Sutta와 그 주석서에 의하면, 사리뿟따의 탄생지는 나라까(Nālaka) 혹은 Nālagāma로 되어 있다. 이 이름은 저 유명한 나란다(Nālanda)와 매우 가깝다. Nyanaponika Thera, The Life of Sariputta, The Wheel Publication No. 90-92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66), p.7 No.1.
4) Dhammapadatthakathā(PTS), Vol. II, p.84.
5) Sanskrit 경전들에서는 그의 이름이 Sāriputra, Śāliputra, Śārisuta, Sāradvatīputra로 나타난다. 또한 譬喩經(Apadāna, II, p.480)에서는 Sārisambhava라고 불렸다.
6)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Oriental Books Reprint Corperation, 1983), Vol. II, p.1109.
7)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95.
8)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II, p.541.
9)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샘터, 1990), p.186.
10) Vinaya Pitaka(=Vin.) Vol. I, pp.39-44.
11)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ñ ca yo nirodho/ evamvādī mahāsamano.” <Vin. I, p.40.>
12) “생겨난 것은 소멸하는 것”이라는 말은 팔리어 “yam kiñci samudayadhammam sabbam tam nirodhadhammam”를 번역한 것이다.
13) “es’eva dhammo yadi tāvad eva paccavyathā padam asokam adittham abbhatitam bahukehi kappanahutehīti.” <Vin. I, p.40.>
14) 스가누마 아키라 지음, 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서울: 봉은사출판부, 1991), p.107.
15) 이기영, 『석가』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155.
16) 四分律 33: “如來說因緣生法 亦說因緣滅法 若法所因生如來說是因 若法所因滅大沙門亦說是義 若法此是我師說..”; 五分律: “我師說法從緣生 亦從緣滅 一切諸法空無有主.”; 因果經 4: “一切諸法本因緣生無主 若能解此者卽得眞實道.”; 佛本行集經: “諸法因生者 從法隨因滅 因緣滅卽道 大師說如是.”; 大智度論 18: “諸法從緣生 是法緣及晝 我師大聖主 是義如是說.”; 南海寄歸傳 4: “若法종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滅 是大沙門說.”
17) 이기영, 『석가』, p.157.
18) 이기영, 『석가』, p.157-158.
19)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김영사, 1984), p.217.
20) Pasādakapana sutta(S. V. 269ff.; Utthāma sutta, SNA. I. 336f.).
2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7.
22)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8.
23)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8.
24)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8.

디가나카와 마하까싸빠의 귀의

붓다께서 성도한 이후의 행적은 팔리어 『율장(律藏)』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헌에는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가 250명의 무리와 함께 붓다께 귀의하여 교단에 들어왔다는 사실까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대 불전(佛傳)에는 계속하여 디가나카(Dīghanakha, 長爪)와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의 귀의나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을 방문하여 사캬족(Sakya, 釋迦族)을 교화했다는 사실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적을 편년사적(編年史的)으로 더듬어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후 상세한 내용이 알려지고 있는 것은 입멸 전후의 사건뿐입니다.1)


1) 디가나카의 귀의

역사적으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불교교단에 들어온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붓다께 귀의한 사람은 디가나카(Dīghanakha, 長爪)였습니다. 디가나카는 사리뿟따의 조카로서2) 숙부인 사리뿟따가 붓다께 귀의한지 겨우 반달이 지났을 때 붓다를 친견했습니다.3) 팔리어 디가나카(Dīghanakha)라는 말은 ‘긴 손톱’이라는 뜻이며, 한역에서는 장조(長爪)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마 손톱을 깍지 않고 길게 길렀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바라문 가문의 출신자였지만 바라문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던 회의주의자 혹은 절멸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라문의 전통에서 보면 이단자였던 것입니다.4) 불교 경전에서는 그를 편력자(遍歷者)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가나카는 그의 숙부 사리뿟따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대체 붓다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려고 붓다를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수까라카따(Sūkarakhatā, 豚崛洞, ‘멧돼지 동굴’이라는 뜻)에서 처음으로 붓다를 친견했습니다.5) 디가나카와 붓다의 대화는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 中部) 제74경 디가나카 숫따(Dīghanakha Sutta, 長爪經)6)에 실려 있습니다. 이 팔리어 경전과 대응하는 한역은 잡아함경(雜阿含經) 34권 장조경(長爪經)7)과 별역잡아함경 11권 5경8)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전들에 의하면, 그는 붓다를 친견한 뒤 곧바로 “나는 일체의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신의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러자 붓다께서는 “당신은 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붓다는 “주의주장에는 일체를 긍정하는 것, 일체를 부정하는 것, 일부를 긍정하는 것,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있으나, 이 중 일체를 긍정하는 견해는 탐욕과 계박(繫縛)과 집착에 가깝고, 또 일체를 부정하는 견해는 적이 생기고 장애가 나타나므로 이 두 견해는 모두 다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9)

이 경전에서 붓다는 그를 악기베싸나(Aggivessana, 火種)10)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한역 『장조경』에 의하면, 붓다의 설법을 듣고 디가나카는 “티끌과 때를 멀리 떠나 진리의 눈이 깨끗하게 되어, 법을 보아 법을 얻고 법을 깨달아 법에 들어갔다. 모든 의혹을 끊되 남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바른 법, 율에 들어가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11)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붓다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비구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는 “곧 선래(善來)비구가 되어 ‘착한 남자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바른 믿음으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는 까닭’을 생각하고 내지,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어 『디가나카 숫따』에서는 그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재가불자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13) 다시 말해서 남전의 팔리어 경전에서는 디가나카(長爪)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재가 신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북전의 한역 아함경에서는 그가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전승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마하까싸빠의 귀의

붓다께서 입멸하신 뒤 실제로 교단을 이끌었던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가 붓다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마하까싸빠는 붓다의 저명한 제자 가운데 한 분이며, 가장 엄격한 두타행(頭陀行, dhutavādānam)14)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에 ‘두타제일(頭陀第一)’ 혹은 ‘행법 제일(行法第一)’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마하까싸빠는 마가다국의 마하띳타(Mahātittha) 바라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까삘라(Kapila) 바라문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수마나데비(Sumanādevī)였습니다.15)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삡빨리(Pippali)였습니다. 그가 성장했을 때 그의 부모들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결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부모들의 강요를 회피하기 위해 그는 아름다운 황금 인형을 만들어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한다면 결혼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들은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춘 밧다 까삘라니(Bhaddā Kāpilānī)라는 여인을 사가라(Sāgala)에서 찾아냈습니다. 두 사람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비록 결혼하지만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이틀 밤을 함께 지냈지만 꽃으로 만든 사슬을 경계로 서로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삡빨리는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혼자서 많은 양의 향료를 사용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토지는 엄청나게 광대하였습니다. 그 토지에 농사를 짓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열여섯이었다고 합니다.16)

어느 날 그가 들에 나가서 농부들이 밭갈이 할 때, 기어 나오는 벌레들을 새들이 쪼아 먹는 것을 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저토록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버리고 출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같은 시간 그의 아내 밧다(Bhaddā)도 까마귀가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고, 이 때 밖으로 뛰어나온 씨앗들이 말라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잃는 아픔을 생각하며, 그녀도 출가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17)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둘은 함께 출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각자 머리를 깎고 황색 가사로 갈아입고, 발우를 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함께 같이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도착하여 서로에게 장애가 될 것을 염려하여 남편은 오른쪽으로 아내는 왼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18)

아내와 헤어져서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던 삡빨리는 어느 날 붓다를 친견하게 됩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벨루와나(Veluvana, 竹林精舍)의 간다꾸띠(Gandhakuti, 香室, 부처님의 거실)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지진이 일어날 징후를 아시고, 세 가부따(gāvuta, 길이의 단위, 1/4 由旬)19)를 걸으신 다음, 라자가하(Rājagaha)와 나란다(Nālandā) 사이에 있는 바후뿟따까(Bahuputtaka, 多子) 니그로다(Nigrodha, 榕樹) 나무 밑에 앉으셨습니다. 이 여행으로 붓다의 명성은 더욱 빛이 났다고 합니다. 삡빨리(이제부터는 마하 까쌋빠라고 부른다)20)는 붓다를 발견하고, 곧바로 붓다를 자신의 스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붓다께서 그를 굴복시키기 전에 그는 이미 붓다의 위대함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그를 자리에 앉도록 하고 세 가지 설교를 한 다음, 그에게 구족계를 주었습니다.21)

붓다와 함께 라자가하로 돌아오던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몸이 위대한 성자의 상징인 32호상 가운데 일곱 가지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붓다는 길옆의 어느 나무 아래 앉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가사를 접어 붓다께서 앉을 수 있도록 바닥에 갈아드렸습니다. 붓다께서 그곳에 앉으신 다음, 그 가사를 만져보시고 매우 부드럽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가사를 세존께서 받아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입지?”라고 붓다께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까싸빠는 붓다께서 입고 계시는 누더기 가사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사용하여 빛이 바랬다”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였으나, 까싸빠는 전세계에서 이것이 최상이라고 찬양하고, 가사를 교환했습니다.22) 보통 사람들은 붓다께서 벗어버린 가사를 입기에 적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까싸빠의 공덕에 의하여 다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까싸빠는 이것을 매우 영예롭게 생각했으며, 자기 스스로 열세 가지 명세들[dhutagunā, 頭陀의 德]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으며, 그리고 8일 뒤 아라한이 되었습니다.23)

마하까싸빠는 두타제일로 불리는 것과 같이 엄격함을 지니고 살았으며 부처님이 입멸한 후의 불교교단에 중심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우루벨라 까싸빠(Uruvela Kassapa), 나디 까싸빠(Nadi Kassapa), 가야 까싸빠(Gayā Kassapa) 등 까싸빠 삼형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로 불리어졌습니다. 그에 관한 전기는 남, 북 양전에 달리 나타나지만, 애욕이 부정한 것임을 알아 아내를 맞이해도 끝내 육체관계를 멀리 했으며, 아내와 함께 출가를 했다는 점에선 남전과 북전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나와 있으며, 그에 관한 시구가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제1051-1090게(偈)에 전하고 있습니다.24)

북전에 의하면 마하까싸빠와 헤어진 아내는 외도의 수행자 밑에 있었지만, 부처님의 교단에 비구니의 출가가 허용되었을 때 마하까싸빠가 아내의 일이 염려되어 천안(天眼)으로 그녀의 소재를 알고 비구니 한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비구니 교단에 들어온 그녀는 비구니 교단의 수석이었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i)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꾸준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얼마 안 있어 불제자로서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25)

마하까싸빠는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누르고 간소한 생활 규율(頭陀行)을 지켰습니다. 붓다께서 당신은 이미 늙었으니 부드러운 옷을 입고 신자의 초대를 받으면서 나의 곁에 있으라고 권했을 때도 그는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또 언젠가 그는 지난날 함께 수도를 하던 동료가 환속을 하여 도적질을 하다가 체포당해서 형장으로 끌려갈 때, 곧 달려가서 여러 가지로 훈계를 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형리의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당시의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평소 마하까싸빠가 어떻게 생활했는가는 그가 남긴 시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으 시들은 그가 남긴 시구 가운데 일부입니다.

“나는 침상에서 내려와 시내로 탁발을 나갔다. 밥을 먹고 있는 한 문둥병자에게 가, 그의 곁에 가만히 섰다.”<1054게>

“그는 문드러진 손으로 덩이의 밥을 주었다. 발우 안에 밥을 담아줄 때, 마침 그의 문드러진 손가락이 ‘툭’하고 그 안에 떨어졌다.”<1055게>

“담 벽 아래에서 나는 그가 준 밥을 먹었다. 그것을 먹고 있는 동안,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내게는 혐오스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1056게>

“문전에 서서 탁발로 얻은 것을 양식으로 삼고, 소 따위의 냄새나는 오줌으로 만든 것을 약으로 삼으며, 나무 밑을 침상으로, 누더기 기운 것을 옷으로 삼아, 그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사방(四方)의 사람26)이다.”<1057게>

이처럼 마하까싸빠는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된 이후, 철저한 두타행을 실천함으로써 승가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후대의 대승불교에서는 그가 붓다의 정법(正法)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존께서 입멸 하신 뒤 세존의 유해를 넣은 관은 마하까싸빠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리 해도 불이 붙지 않아서 다비를 행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열반에 든 직후, 교단의 동요와 분열을 염려한 그는 아난다와 함께 비구들을 라자가하의 칠엽굴에 모이게 하고, 세존의 바른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한 이른바 제1차 결집을 거행하였습니다.

Notes:



1)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서울: 민족사, 1989), p.44 참조.
2) 어떤 책에서는 디가나카가 사리뿟따의 숙부라고 하였으나, 디가나카는 사리뿟따의 여동생의 아들(조카)임이 거의 확실하다. I. B. Horner(tr.) The Middle Length Sayings(Majjhima-nikāya) (London: PTS, 1957), Vol. Ⅱ, p.176. No.4.;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Ⅰ, p.1081.
3) “堂於爾時尊者舍利弗受具足始經半月.”[大正藏 2, p.249下.]
4)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Ⅰ, pp.1081-2.
5) 漢譯 『長爪經』에서는 왕사성(王舍城)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이라고 되어 있다.[大正藏 2, p.249上.]
6) Majjhima-nikāya Ⅰ, pp.497-501; 南傳藏 10, pp.333f.; I. B. Horner(tr.), The Middle Length Sayings, Vol. Ⅱ, pp.176-180.
7) 大正藏 2, pp.249上-250上.
8) 大正藏 2, p.449上-中.
9) 李箕永, 『釋迦』세계사상대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158.
10) 악기베싸나(Aggivessana, 火種)는 그가 속한 바라문 종족의 이름인 것 같다. I. B. Horner(tr.) The Middle Length Sayings(Majjhima-nikāya) (London: PTS, 1957), Vol. Ⅰ, p.280. No.6; 전재성 역주,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제2권 (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p.89. No.56 참조.
11) “爾時長爪外道. 出家遠塵離垢. 得法眼淨. 長爪外道出家. 見法得法覺法入法. 度諸疑惑. 不由他度. 入正法律. 得無所畏.”[大正藏 2, p.250上.]
12) “卽得善來比丘出家. 彼思惟所以. 善男子剃除鬚髮. 著袈裟. 正信非家. 出家學道. 乃至心解脫. 得阿羅漢.”[大正藏 2, p.250上.]
13) “Esāham bhavantam Gotamam saranam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nghañ-ca. Upāsakam-mam bhavam Gotamo dhāretu ajjatagge pānupetam saranagatan ti.”[M. I, p.501.]; “I am going to the revered Gotama for refuge and to dhamma and the Order of Monks. May the revered Gotam accept me as a layfolloer going for refuge from today forth for as long as life lasts.”[I. B. Horner(tr.), The Middle Length Sayings (Majjhima-nikāya), Vol. II, p.180.]
14) Anguttara-nikāya(PTS), Ⅰ, p.23.
15) 그러나 Apadāna(譬喩經) Ⅱ, p.583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꼬시야곳따(Kosiyagotta)로 불렸다.
16)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p.476-7.
17)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p.477.
18)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p.477.
19) 이 붓다의 여행은 자주 인용된다. MA. Ⅰ, p.347, 357.
20) 왜 그를 까싸빠(Kassapa)라고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도 설명되어 있지 않다. 아마 그의 성(性, gotta-name)이었을 것이다. 註 10 참조.
21)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477.
22) 이 사건으로 까싸빠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S. II, p.221.] 이것은 붓다께서 까싸빠가 자신의 사후에 결집(結集)을 주도하고, 자기 종교의 영존(永存)을 도울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영예를 그에게 주었다고 말해진다.[SA. II, p.130.]
23)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p.477-8.
24) 스가누마 아키라(管沼晃) 지음, 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서울: 봉은사 출판부, 1991), p.137.
25) 스가누마 아키라(管沼晃) 지음, 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 pp.137-8.
26) 역사적으로 승가를 형성한 주체는 출가자들이었으며, 재가자들이 승가를 형성한 적은 없었다. ‘사방승가(四方僧伽)’란 관념적으로 사방 또는 지역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출가집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눈앞에 현실로 존재하는 출가집단은 ‘현전승가(現前僧伽)’라 부른다.

붓다의 까삘라밧투 방문

1) 계율 제정의 배경

붓다께서 처음 녹야원에서 다섯 고행자를 교화하고, 붓다가야로 되돌아가서 까싸빠(Kassapa) 삼형제를 개종시킨 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로 돌아와 교화를 펼치고 계실 때, 승단에는 이미 천 명이 훨씬 넘는 출가자가 모인 큰 집단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와 같은 뛰어난 제자들도 있었지만, 질서를 지키지 않고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도 더러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승단에는 사성(四姓)의 계급차별 없이 누구나 출가할 수 있도록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구의 수가 점차 많아지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공동체의 통제상 여러 가지 규칙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규칙을 계(戒, sīla)라고 하는데, 계의 조항은 교단 안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 하나씩 제정하여 실행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총괄적으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1) 처음에는 붓다께서 가르친 생활상의 대원칙인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는 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러한 가르침만으로는 교단을 통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외부적인 구속적 계율로 발전해 갔던 것입니다.2)

먼저 새로 들어온 비구들은 각자 일상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감독을 받을 수 있는 스승을 정하는 것이 규정되었습니다. 물론 최고의 스승이 붓다인 것은 사실이지만 옷을 입는 법, 식사하는 법으로부터 그 밖의 모든 일상적인 교훈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같이 가르쳐주는 스승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도 처음에는 삼보에 대한 귀의를 선언하는 간단한 것이었는데 점차 복잡하게 제정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많은 귀의자(歸依者) 가운데 혹시 결심이 견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섞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3)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의 질서 유지를 위해 계율이 제정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사회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다국은 그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동시에 종교 활동이 특히 융성했습니다. 불교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교단과 종교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연 종교 활동에 대한 사회적 요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달마다 정해진 날에는 사람들이 사원에 모여 설법을 듣는다거나 무슨 행사가 있다거나 하는 것 등입니다. 또 교단에 속한 출가 수행자에 어울리는 태도나 비난받을 행위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통념이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계나 율로 정해진 것도 이와 같은 요청에 따르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4)

2) 최초의 까삘라밧투 방문

붓다는 일생동안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몇 차례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붓다께서 성도(成道)한 뒤 고향을 찾게 된 최초의 방문이 언제였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 후 첫 겨울을 라자가하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에 까삘라밧투를 방문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한 뒤 6년쯤 지난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붓다께서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에서 고향으로 갔다는 것이고, 후자는 꼬살라(Kosala)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Sk. Śravastī, 舍衛城)에서 고향을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붓다의 아들 라훌라(Rāhula, 羅睺羅)의 출생과 출가 시기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의 불교학자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는 후자의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싯다르타 태자가 성을 나와 고행하기 6년이 지난 다음에 성도하고, 그 후 다시 6년이 지나 고향 땅을 밟게 되는 것이므로 부왕과의 대면은 12년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5)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붓다의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는 아들이 성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방문해 달라고 수차례 사신을 파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좌부 권에서는 대체로 전자의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성도 직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최초로 고향 까삘라밧투를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제 토마스(Edward J. Thomas)는 “붓다는 까싸빠 삼형제를 개종시키고 한겨울에 라자가하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달 동안 머물렀다. 붓다의 다음 방문지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이것은 정전(正典)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장로들이 읊은 게송들의 모음집[Theragāthā, 長老偈]에 씌어진 깔루다이(Kāludāyī, 迦樓陀夷)6) 장로의 게송7)에서 이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을 제외하면 이해하기 어렵다.”8)라고 말했습니다.

숫도다나 왕은 자기 아들이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를 까삘라밧투로 초청하기 위해 많은 수행원을 거느린 신하들을 여러 차례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붓다의 설법을 듣는 순간 아라한이 되어 그들의 임무를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은 깔루다이를 파견했습니다. 붓다께서 그의 출가를 허락할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9) 그는 붓다께로 가서 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대지에 꽃과 잎들이 피어날 때, 깔루다이는 붓다께서 그의 혈족들을 방문하기에 좋은 때라고 느끼고, 자신에게 부과되었던 초청의 뜻을 아름다운 시의 형식으로 노래했습니다. 라자가하에서 까삘라밧투까지는 거리적으로 60리그(1리그는 3마일)였는데, 붓다는 60일이나 걸려 까삘라밧투에 도착했습니다. 깔루다이는 매일 공중으로 숫도다나의 왕궁으로 가서 여행의 진행과정을 왕에게 말하고, 발우 가득히 특별한 음식을 왕궁에서 붓다께로 날랐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친척들은 붓다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깔루다이가 이러한 재주로 그것을 성취했으며, 붓다께서는 종족을 기쁘게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분이라고 전했기 때문입니다.10)

이처럼 붓다의 최초 고향 방문과 관련된 이야기 속에는 약간 과장된 듯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의 주석서에 의하면, 깔루다이는 숫도다나 왕의 궁전 신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붓다의 생일날에 태어났으며, 붓다의 놀이 친구로 함께 자랐다고 합니다. 숫도다나 왕이 붓다께서 라자가하에서 법을 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초청하기 위해 천명과 함께 한 궁중 신하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붓다께서 법을 설하고 있는 동안 도착하여, 군중의 가장자리에 서서 교리를 듣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붓다는 곧바로 그들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장로들의 모습으로 바뀌어서 발우와 가사를 걸치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라한들은 세속의 일에는 무관심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의 메시지를 붓다께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숫도다나는 다른 신하와 천명을 보냈지만 결과는 동일하였습니다. 그는 아홉 차례나 반복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깔루다이를 붓다께 보냈습니다. 만일 붓다께서 그의 출가를 하락하신다면, 고향 방문의 약속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승단에 들어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라자가하에 두 달 동안 머물고 팍구나(Phagguna, 2월-5월) 달의 보름인 봄이 될 때까지 숫도다나 왕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미루었습니다. 갈루다이는 여행을 하기에 적합한 때가 되었음을 알고, 『테라가타』에 나오는 다음의 게송을 읊었습니다.11)

거룩한 분이시여, 이제 진홍빛으로 물든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으면서 화염을 일으키며 불타오르듯 찬란합니다. 거룩하고 당당하신 분이여, 지금은 가르침을 음미하며 즐겨야 할 때입니다.<527게>

아름다운 나무들은 꽃을 피워 사방에 널리 향기를 날리면서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습니다. 당당하신 분이여, 이제 길을 나서 행각해도 좋을 때입니다.<528게>

춥지도 않고 또한 덮지도 않습니다. 즐거운 계절, 여행에 알맞습니다. 당신이 서쪽을 향해 로히니 강을 건너시는 모습을 사캬족 콜리야족이 뵐 수 있도록 하소서.<529게>

꿈을 안고 밭을 갈았고, 꿈을 안고 씨를 뿌렸습니다. 상인들은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가 재물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내게도 꿈이 있거늘, 부디 저의 꿈을 이루어 주소서.<530게>

사람들은 되풀이하여 씨를 뿌리고, 신들은 때맞추어 비를 내린다. 농사꾼은 되풀이하여 밭을 갈고, 수확물을 어김없이 나라에 바친다.<531게>

걸인들은 변함없이 방랑을 하고, 시주(施主)들은 되풀이하여 보시를 한다. 그들은 되풀이하여 보시를 해서 거듭 천계(天界)에 태어난다.<532게>

지혜롭고 당당한 사람이 어떤 가문(家門)에 태어나면, 실로 7대(代) 조상까지 업이 소멸된다. 석가모니(釋迦牟尼)시여, 실로 당신은 신(神) 가운데의 신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석가라고 불리는 성자가 당신의 탄생으로 오셨기에.<533게>

위대한 선인(仙人)의 부친은 숫도다나라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붓다의 모친인 마야 부인은 보살(菩薩; 깨닫기 전의 석가모니)을 잉태하신 분으로서, 돌아가신 뒤에 삼십삼천계(三十三天界)를 두루 노니셨습니다.<534게>

고타미 부인은 죽어 세상을 떠난 뒤 天界에 태어나, 신들에 둘러싸여 오욕락(五欲樂)을 즐기고 계십니다.<535게>

나는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견디어낸 비할 바 없이 훌륭하신 붓다, 그리고 앙기라사의 자손입니다. 석가모니시여, 당신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이십니다. 고타마여, 당신은 진리에 관한한 나의 할아버지이십니다.<536게>12)

붓다께서 제자들과 함께 까삘라밧투에 도착했을 때, 석가족들은 그들이 니그로다(Nigrodha) 동산에 머물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석가족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붓다께 경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공중에 떠올라 쌍신변(雙神變, yamaka-pātihāriya)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석가족 친척들은 붓다의 발에 존경의 예를 표했다고 합니다.13)

다음날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도시의 이집 저집을 돌면서 탁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싯닷타(Siddhattha) 태자가 걸식을 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붓다의 탁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붓다의 아내 역시 그를 보고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은 흥분하여 붓다께로 달려가 “왜 우리의 가문을 부끄럽게 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이것은 우리의 관습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우리의 가계(家系)는 마하삼마따(Mahāsammata)의 끄사뜨리야(kshatriya) 가계이며, 끄사뜨리야는 단 한번도 걸식을 행한 적이 없소.”라고 왕은 말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왕계(王系)는 당신의 가계(家系)이지만, 나의 가계는 디빵까라(Dīpamkara, 燃燈佛), 곤단냐(Kondañña, 憍陳如佛)에서 까싸빠(Kassapa, 迦葉佛)에게로 전해져 온 붓다의 가계입니다. 그 분들과 수천의 붓다들은 걸식에 의해 삶을 유지했던 것이오.”14)

숫도다나 왕과 붓다와의 이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숫도다나는 자기의 아들이 끄사뜨리야의 왕계를 계승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붓다는 결코 왕계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는 거리의 중간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나 일어나 게으르지 말고,
법을 잘 실천하시오.
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축복 속에 안락하리.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나.

왕은 곧바로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흐름에 들어감’[預流果]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붓다의 발우를 들고 붓다와 그의 제자들을 왕궁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공양을 했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라훌라의 어머니를 제외한 왕궁의 여인들은 붓다께 다가와서 존경의 예를 표했습니다. 이때 붓다는 앞서 설한 시구와 비슷한 내용의 시를 읊었습니다.15)

그러자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ī)는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했고, 숫도다나는 두 번째 단계인 ‘한번 되돌아 옴’[一來果]을 얻었습니다. 『마하바스투(大事)』에서는 그 뒤 라훌라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다음 날은 붓다의 이복동생이자 마하빠자빠띠의 아들인 난다(Nanda)의 왕실 성별식(聖別式)이 거행되었습니다. 이것은 붓다의 경우처럼 16세가 되면 별도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또한 난다가 결혼할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날 붓다는 자신의 발우를 난다에게 주고 축복의 게송(mangala)을 읊으시고, 발우를 돌려받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난다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발우를 들고 붓다의 처소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만일 그가 출가한다면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를 그만두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난다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붓다는 난다를 출가시켰습니다.16)

Notes:



1)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201.
2) 이기영, 『석가』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160.
3) 이기영, 『석가』, p.161.
4)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p.201-2.
5)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227.
6) Edward J. Thomas는 이 사람의 이름을 깔루다인(Kāludāyin)이라고 표기했지만, G. P. Malalasekera의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를 비롯한 다른 서적들에서는 깔루다이(Kāludāyī)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표기법을 따른다. 깔루다이(Kāludāyī)는 시민들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던 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다이(Udāyī)로 불렸으며, 그의 피부색이 약간 검었기 때문에 깔라(Kāla)라고도 불렸다.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83), Vol I, p.589,
7) Theragāthā v. 527-536.
8)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97.
9) 『마하바스뚜(Mahāvastu, 大事)』ed. Senart, Vol. III, p.233에 의하면, 그는 예전에 붓다의 마부였던 찬냐(Channa)와 함께 출가했다고 한다.
10) A. I. 25; Theragāthā 527-36; Jātaka I. 54, 86f; AA. I. 107, 117; ThagA. I. 497ff; UdA. 168; DA. II. 425;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Vol I, p.589.
11)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97-98.
12) 하야시마 쿄쇼 외 편, 박용길 옮김, 『비구의 고백 비구니의 고백』(서울 : 민족사, 1991), pp.114-115.
13)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98-98.
14)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99-100.
15) 누구나 법을 잘 실천해야 한다./ 누구나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축복 속에 안락하리./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나.
16)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100.

라훌라의 출가 인연

1) 라훌라 어머니와의 재회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루고 난 뒤, 처음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까삘라밧투 방문의 둘째 날, 붓다는 거리에서 탁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라훌라의 어머니(Rāhulamāta)는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녀는 탁발하고 있는 붓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훌륭한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때 그녀는 붓다를 찬탄하는 여덟 수의 게송을 읊었습니다. 이 게송들은 나라시하가타(Narasīhagātha, 人獅子偈)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1)

붉은 성스러운 두 발은 탁월한 법륜으로 장식되고, 긴 팔꿈치는 성스러운 징표들로 치장되셨고, 발등은 불자(拂子)와 양산으로 분장되셨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우아하고 고귀한 석가족의 왕자님, 몸은 성스러운 징표로 가득 차시고, 세상의 이익을 위하는 사람 가운데 영웅이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얼굴빛은 보름달처럼 빛나고 하늘사람과 인간에게 사랑받으며, 우아한 걸음걸이는 코끼리의 제왕과 같으시니 인간 가운데 코끼리,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왕족으로 태어난 귀족으로서 하늘사람과 인간의 존귀함을 받는 님, 마음은 계율과 삼매로 잘 이루어진 님,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잘 생긴 목은 둥글고 부드러우며, 턱은 사자와 같고, 몸은 짐승의 왕과 같고, 훌륭한 피부는 승묘한 황금색이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훌륭한 목소리는 부드럽고 깊고, 혀는 주홍처럼 선홍색이고, 치아는 스무 개씩 가지런히 하야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칠흑 같은 심청색이고, 이마는 황금색 평판처럼 청정하고 육계는 새벽의 효성처럼 밝게 빛나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많은 별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달이 창공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수행자들의 제왕은 성스러운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2)

그날 붓다께서는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 왕의 초대에 응하여 왕궁에서 공양을 하셨습니다. 붓다께서 공양을 마치자 라훌라의 어머니를 제외한 왕궁의 모든 여인들이 붓다께 경의(敬意)를 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라훌라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녀에게 도덕적으로 어떠한 결함도 없다면 붓다께서 그녀에게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붓다께 인사하도록 허락한다고 말하고, 두 수제자와 함께 그녀에게로 갔습니다. 그녀는 붓다의 발에 엎드려 손으로 발을 붙잡고 자신의 머리를 그곳에 대었습니다. 숫도다나 왕은 붓다께서 출가한 이후 라훌라의 어머니는 스스로 모든 사치를 포기하고, 붓다께서 가사를 걸치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는 것을 듣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지냈다고 붓다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짠다낀나라 자따까(Candakinara Jātaka)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그녀 역시 충절이 대단했었다는 내용입니다.3)

그녀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팔리고유명사사전』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남전의 경전들에서는 라훌라의 어머니(Rāhulamāta)4) 또는 고따마(Gotama)의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밧다깟짜(Bhaddakaccā)5)로 불렸으며, 후대의 문헌들에서는 야소다라(Yasodharā),6) 빔바데비(Bimbādevī)7)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아마 빔바순다리(Bimbāsundarī)8)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북전의 경전들에서는 ‘야소다라’라는 이름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다빤니(Dandapāni)의 딸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고따마의 부인 이름은 빔바(Bimbā)이고, 밧다깟짜(Bhaddakaccā), 수밧다까(Subhaddakā), 요사다라(Yosadhāra)와 그 밖의 이름들은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녀에게 적용했던 일종의 별명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따마 왕실에서는 야소다라(Yasodharā)와 단다빠니((Dandapāni)의 딸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나중에 혼동되었을 것입니다. 주석서9)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의 몸이 빛나는 황금색이었기 때문에 밧다깟짜나(Bhaddakaccānā)로 불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10) 한편 그녀의 이름이 깟짜나(Kaccāna) 종족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깟짜나(Kaccāna)는 바라문 종족이었고, 석가족(Sākyans)은 바라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11)

나중에 붓다께서 여인의 출가를 허락했을 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ī) 밑에서 비구니가 되었습니다.12)

2) 라훌라의 출가 인연

라훌라(Rāhula, 羅睺羅)의 출가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 『율장(律藏)』「대품(大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붓다께서 까삘라밧투를 방문한지 칠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왕궁에서 공양을 마치고 붓다께서 떠나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때 라훌라의 어머니(Rāhulamāta)는 어린 라훌라에게 말했습니다. “라훌라야, 저 분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가서 너의 유산을 달라고 해라.” 라훌라는 세존께 다가가서 그 앞에 섰습니다. “사문이시여, 당신의 곁에 있으니 즐겁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라훌라는 세존의 뒤를 따라 가면서 “사문이시여, 저의 유산을 주십시오. 사문이시여, 저의 유산을 주십시오.”

그러자 세존께서는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 존자에게 말했습니다. “사리뿟다여, 그대가 라훌라를 출가(pabbajjā)시켜라.”

“세존이시여, 라훌라는 어떻게 출가시켜야 합니까?” 그러자 세존께서는 법을 설해 주고자 할 때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마네라(Sāmanera, 沙彌)의 출가는 삼귀의에 의해 허락한다. 하지만 출가는 이러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깎고, 황색 가사를 몸에 걸치게 한다. 그리고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비구들의 발에 예배하게 한다. 무릎을 꿇게 하고, 두 손을 올려 합장 한 채, 삼귀의를 낭송하게 한다. 곧 ‘저는 붓다(Buddha, 佛)께 귀의합니다. 저는 담마(Dhamma, 法)에 귀의합니다. 저는 상가(Sangha, 僧)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저는 붓다께 귀의합니다. 두 번째 저는 담마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저는 상가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저는 붓다께 귀의합니다. 세 번째 저는 담마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저는 상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말하게 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사미의 출가는 이와 같이 삼귀의를 함으로써 이루어지느니라.”

그리하여 사리뿟따 장로는 라훌라를 출가시켰습니다. 그러자 숫도다나 왕이 세존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세존께 공손히 절하고 한쪽에 앉은 뒤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고따마시여,13) 여래는 은혜를 초월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부탁은 적절하며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고따마시여, 그렇다면 말해 보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출가하실 때 저는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난다(Nanda)14)가 출가할 때도 그러했는데, 이제 라훌라까지 출가하니 저는 너무나 괴롭습니다.15) 세존이시여,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저의 피부를 도려냅니다. 피부를 도려낸 뒤 살갗을 도려내고, 살점을 도려내고, 힘줄을 끊고, 뼈를 자르고, 골수를 뽑아내는 듯합니다. 세존이시여, 원하건대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아들은 출가시키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세존께서는 숫도다나 왕에게 법문을 베푸셨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지니게 하고 격려하고 기쁘게 하셨다. 세존의 법을 받아 지니고 기뻐한 숫도다나 왕은 세존께 공손히 절한 뒤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올리고 떠났다.

이러한 인연으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모이게 한 뒤 법문을 베푸신 뒤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아들을 출가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악작을 범하는 것이다.”16)

여기서 우리는 숫도다나 왕의 마음을 한번쯤 헤아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붓다가 돌아온 후 아들 난다를 빼앗기고, 손자 라훌라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통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특히 그 손자를 잃은 슬픔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왕계(王系)가 단절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은 직접 붓다를 찾아가서 앞으로는 부모의 허락 없이는 자식을 출가시키지 못하도록 금해 주시기를 간정했던 것입니다. 붓다는 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라훌라는 혹독한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때에는 잠잘 곳이 없어서 붓다가 쓰는 뒷간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붓다께서 라훌라에게 한 교훈의 말씀들을 보면 라훌라는 장난삼아 거짓말을 잘하는 버릇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버릇을 없애기 위해 붓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사문의 법임을 강조하였다고 합니다.17)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中部)에는 ‘라훌라에게 주는 말씀’이란 제목의 경전이 세 개나 실려 있습니다.18) 어린 라훌라에게 법을 가르치고 있는 이 경전들은 대부분 계율과 선정을 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하라훌로와다-숫따(Mahā-Rāhulovāda Sutta)』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라훌라야! 자애[愛, mettā]19)를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자애로운 마음을 닦으면 나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더불어 아파함[悲, karunā]를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불어 아파하는 마음을 닦으면 잔인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를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을 닦으면 혐오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평온함[捨, upekkhā]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평온한 마음을 닦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육신의) 더러움[不淨, asubha]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러움을 관하는 공부를 닦으면 애욕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무상의 개념(無常想, anicca-saññā)20)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무상의 개념을 관하는 공부를 닦으면 아만(我慢, asmi-māna; ‘내가 있다’ ‘나다’라는 생각)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출입식(出入息)을 염하는 공부(ānapāna sati)를 닦아라. 라훌라야! 출입식을 염하는 공부를 닦아 자주 익히면 얻는 바가 많아서 크게 이익되리라.”21)

라훌라를 불전(佛典)에서 ‘학족제일(學足第一)’의 제자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정진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22)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의 주석서23)에 의하면, 라훌라는 12년 동안 침대에 눕지 않았다고 합니다. 라훌라가 읊은 네 개의 게송은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24)

사람들은 나를 ‘행복한 라훌라’라고 부른다. 나는 두 가지 행운을 누리고 있다. 하나는 내가 붓다의 제자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일체의 도리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295게>

나의 오염은 소멸되어, 이제 헛된 삶을 받는 일은 없다. 나는 존경받아야 할 사람, 공양받아야 할 사람, 세 가지 명지(明知)를 체득한 사람, 불사(不死)를 얻은 사람이다.<296게>

그들은 갖가지 욕망에 눈이 멀어, 삿된 올가미에 걸리고 망집(妄執)에 들씌워져 게으름뱅이 친족들에게 얽매어 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같이.<297게>

나는 애욕을 떠나 악마의 속박을 끊고 애착을 뿌리 뽑아, 서늘해지고 평안해졌다.<298게>

후대의 문헌에서는 라훌라를 붓다의 십대제자 가운데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밀행제일이란 계율을 정해진 그대로 세세한 것까지 지켜, 실천하는 데에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Notes:



1)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Vol. Ⅱ, p.742.
2) K. Sri Dhammananda, Daily Buddhist Devotions (Kuala Lumpur : The Buddhist Missionary Society, 1991), p.216; 전재성,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 『불교평론』제4호(200년 가을), pp.303-304에서 재인용.
3)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Vol. Ⅱ, p.742.
4) Vinaya Pitaka (PTS), Vol. I, p.82.
5) Buddhavamsa (PTS). XXVI. 15; Mahāvamsa, ed. Geiger(PTS). II. 24에서는 그녀를 밧다깟짜나(Bhaddakaccānā)라고 불렀다. 또한 그녀를 수밧다까(Subhaddaka)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아마 밧다까짜나(Bhaddakaccānā)의 와전일 것이다.
6) Buddhavamsa Commentary (SHB), p.245; Divyāvadāna, ed. Cowell and Neill (Cambridge), p.253.
7) Jatāka, II, p.392 f.; Sumangala Vilāsinī (PTS), II, p.422.
8) Jatāka, VI, p.478.
9) AA. II. 204.
10)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Vol. Ⅱ, pp.741-742.
11)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London : Routleledge and Kegan Paul, 1949), p.49.
12) AA. I. 198;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Vol. Ⅱ, p.743.
13) 여기서 말하는 고따마(Gotama)는 종족을 일컫는 말이다. 즉 숫도다나 왕을 붓다께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14) 난다(Nanda)는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i)의 아들이기 때문에 붓다의 배 다른 동생이다.
15) 율장의 주석서(VA. 1010)에 의하면, 숫도다나(Suddhadana) 왕은 혈족인 3명 모두 출가했기 때문에 가계(家系), 즉 왕계(王系)가 끊어졌기 때문에 어디서 왕을 데려와야 되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I. B. Horner(tr.), The Books of the Disciplines(Vinaya Pitaka), Vol. IV, p.104. No. 5 참조.
16) Vinaya Pitaka(PTS), Vol. Ⅰ, pp. 82-83.
17) 李箕永, 『釋迦』세계사상대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166.
18) No. 61 Ambalatthika-Rāhulovāda Sutta(敎誡羅睺羅菴婆藥林經); No. 62 Mahā-Rāhulovāda Sutta(敎誡羅睺羅大經); No. 147 Cūla-Rāhulovāda Sutta(敎誡羅睺羅小經).
19) 자애[慈]의 원어 Mettā는 친구 사이의 우정(friendship)을 의미하며, 친구의 우정과 같은, 동등한 입장의 평등한 사랑을 말한다.
20) 무상상(無常想, anicca-saññā)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상념하는 것을 말한다.
21) Piyadassi Thera, The Buddha : His Life and Teaching, The Wheel Publication No. 5A/B pp.35-36; 피야다시 스님 지움, 정원 스님 옮김, 『부처님, 그분: 생애와 가르침』(서울 : 고요한 소리, 1988), pp.67-68.
22) 李箕永, 『釋迦』, p.166.
23) DA. III. 736.
24) Theragāthā, vv. 259-98.

석가족 사람들의 출가

붓다는 성도 후 몇 차례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방문하였습니다. 붓다는 첫 고향 방문 때,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배다른 동생 난다(Nanda, 難陀)를 제일 먼저 출가시켰습니다. 이어서 아들 라훌라(Rāhula, 羅睺羅)도 출가시켰습니다. 그 이후 붓다의 교화를 받고 많은 샤카(Sakya, 釋迦)족의 청년들이 출가하였습니다. 당시 출가한 샤카족 청년은 사촌 동생인 아난다(Ānanda, 阿難)와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를 비롯하여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밧디야(Bhaddiya, 跋提伽, 婆提), 바구(Bhagu, 跋俱), 낌빌라(Kimbila, 金毘羅) 등이었습니다.

샤카족 청년들의 출가 인연과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 『율장』「소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들 샤카족 청년 여섯 명이 출가할 때 이발사였던 우빨리(Upāli, 優波離)도 함께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아난다와 데와닷따가 먼저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1) 팔리 율장에 묘사된 샤카족 청년들의 출가 인연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때 붓다께서 말라(Malla)의 작은 도시 아누삐야(Anupiyā, 阿奴比耶)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때 많은 샤카족의 특별한 청년들이 출가한 붓다를 모방하여 출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샤카족에는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那摩, 摩訶男)와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라는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샤카족의 아누룻다는 고상하게 양육되었습니다. 그는 세 개의 궁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 그런데 마하나마는 그 동생을 보고 “우리 종족에서 부처님이 나셔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쫓아 출가를 하였으니, 우리들도 출가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아누룻다는 느낀 바가 있어 출가할 결심을 세우고 그 뜻을 어머니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좀처럼 승낙을 하지 않고 “만약 밧디야(Bhaddiya)가 출가한다면 너도 출가해도 좋다.”고 대답을 회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니룻다의 어머니는 밧디야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할 까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 아누룻다는 밧디야에게로 가서 그로 하여금 출가할 마음을 하게끔 하고 더 나아가 아난다, 바구, 낌빌라, 데와닷따의 출가를 권유하고, 또 이발사 우빨리를 데리고 부처님 뒤를 쫓아갔습니다. 국경을 넘어서자 그들은 몸에 매달았던 금환보식(金環寶飾)을 다 떼버리고, 이것을 우빨리에게 주어 귀국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발사 우빨리는 “만약 내가 이런 금은보식(金銀寶飾)을 가지고 혼자 나라에 돌아가면 나는 공자님들을 죽인 사람처럼 오해를 받아 혹은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공자님들도 출가를 하신다니 저도 출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귀국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빨리는 샤카족 청년들의 뒤를 따라 붓다를 친견하고 자신의 출가를 허용해 달라고 간청했다. 율장에 의하면, 이들이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갈 때 붓다께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우리 샤카족 사람들은 자만심을 갖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Upāli, 優波離)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하인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를 먼저 출가시켜 주십시오. 우리들은 그를 공경하고 일어서서 맞으며, 합장하고 예경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우리 샤카족 사람들은 샤카족으로서의 자만심을 제거할 것입니다.4)

샤카족 출신의 비구들은 샤카족으로서의 자만심 때문에 평등을 본지(本旨)로 삼는 불교교단의 질서가 어지럽혀지지 않게 할 것을 결의하고 이같이 원하자 붓다는 이를 받아들여 우빨리를 먼저 출가시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일곱 사람의 새 출가제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율장에 의하면, 출가 후 이들 가운데 밧디야는 세 가지 지혜[三明]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고, 아누룻다는 이러한 지혜의 두 번째인 천안통(天眼通)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난다는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과(預流果)를 얻었고, 데와닷따는 아직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을 개종시킬 수 있는 신통력을 얻었습니다.5) 나중에 바구와 낌빌라는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다른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6) 이때 출가한 샤카족 청년들의 출가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보겠습니다.

1) 밧디야(Bhaddiya, 跋提伽, 婆提)

밧디야는 깔리고다뿟따(Kāligodhāputta)로도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샤카족의 귀부인이었던 깔리고다(Kāligodhā)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7) 그는 귀족 출신의 승려 가운데 으뜸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숫도다나 왕의 뒤를 계승한 왕이었다면, 초기불교 교단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출가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그를 ‘귀성제일(貴性第一)’이라고 했습니다.8)

밧디야는 출가한 그 해에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고 합니다.9) 그는 계속해서 숲속의 나무 밑이나 길가 혹은 빈 집에서 정진하였습니다. 그는 ‘아! 기쁘다, 아! 기쁘다’를 외치곤 하였습니다. 비구들은 그가 출가의 청정한 수행을 좋아하지 않고 왕이던 때의 쾌락을 회상하면서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붓다께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그를 불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왕으로 있을 때는 아무리 경비가 튼튼해도 불안했고 근심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 기쁘다, 아! 기쁘다’라고 탄성을 올리는 것입니다.”10)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붓다는 그를 칭찬하고 시를 읊어주었습니다. 그 뒤 그는 귀족 출신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제자라고 붓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2)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아누룻다는 붓다의 사촌동생으로서 출가 후 붓다를 도와 교단의 통솔에 진력했습니다. 비구들이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던 꼬삼비(Kosambi, 憍賞彌城)의 동쪽, 대나무 숲에서 두 동료와 사이좋게 지내는 화합의 모범을 보여, 마침 이곳을 방문한 붓다를 기쁘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붓다를 뒤따르는 일이 많았으며, 특히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에서 붓다의 입멸을 머리맡에서 지켜보았던 분입니다. 그는 붓다께서 입멸했을 때 “스승은 언젠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헤어질 때가 있다고 설법하셨다. 슬퍼하지 말라. 통곡하지 말라.”고 하여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한편, 아난다에게 명하여 붓다의 입멸을 꾸시나라의 말라족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아누룻다는 또 석존의 입멸 후, 교법이 분산되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개최된 불전결집(佛典結集)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3) 낌빌라(Kimbila, 金比羅)

낌빌라도 샤카족 명문(名門)의 출신인 것은 틀림없으나 붓다와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출가 후 특히 아누룻다와 난디야(Nandiya, 難提)와 의좋게 지내며 수행한 분입니다. 꼬삼비에서 비구들 사이에 쟁론(爭論)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 세 사람만은 숲속에 있어 수행에 전념(專念)하여 붓다로부터 칭찬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4) 바구(Bhagu, 跋俱)

바구는 샤카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친척인 아누룻다, 낌빌라와 함께 출가하여 발라까로나(Bālakalona) 마을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졸음을 내쫓기 위해 작은 방을 나와서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더욱 정진한 결과 자기를 극복하고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습니다. 그 뒤 그가 깨달음의 희열로 생활하고 있을 때, 붓다는 그를 축하하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던 벽지로 찾아갔습니다.11) 그 기회에 붓다는 하루 낮 하룻밤 동안 바구에게 설법했다고 합니다.12)

5) 아난다(Ānanda, 阿難)

아난다는 붓다의 제자로서 너무나 유명한 분입니다. 아난다의 부친과 붓다의 부친이 형제 관계에 있었으므로 붓다와 아난다는 사촌형제의 관계가 되는 셈입니다. 데와닷따도 같은 관계입니다. 아난다는 마음씨가 곱고, 퍽 사람들에게 친절한 인물이었습니다. 나중에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되어 25년 동안 한결같이 붓다를 모셨습니다. 또 매우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붓다 곁에서 들은 말씀들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붓다 입멸 후 최초의 불전결집 때에는 마하깟사빠(Mahākassapa, 摩訶迦葉)와 더불어 교단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였습니다. 그는 ‘다문제일(多聞第一)’, ‘정념제일(正念第一)’, ‘행지제일(行持第一)’, ‘근시제일(近侍第一)’이라고 불렸습니다.

석존은 성도 후 20년간 특정한 시종을 거느리지 않고, 여러 제자들이 때와 형편에 따라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처음 20년간은 비구 나가사말라(Nāgasamāla), 나기따(Nāgita), 우빠바나(Upavāna), 수낙캇따(Sunakkhatta), 사가따(Sāgata), 라다(Rādha), 메기야(Meghiya), 쭌다(Cunda) 사미(沙彌) 등 여덟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성도 후 20년이 지난 다음에는 일정한 시자를 정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등 80여 명의 대아라한들이 모두 스승을 시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붓다께서는 이들 아라한들이 자신을 시봉하기 보다는 인류를 위해 보다 큰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장로들은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아난다 장로에게 시자로 받아주실 것을 청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아난다 장로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스승께서 나를 시자로 삼기를 원하신다면 직접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다른 사람들의 권유를 기다리지 말라. 너 혼자서 나를 시봉하도록 하여라.”13)

그 후 25년간 아난다는 그림자처럼 붓다를 따라다니면서 신변의 모든 일을 뒷바라지해 드리고, 붓다께서 병석에 누우면 계를 범하면서까지 특별한 식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또한 가르침을 구하여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고, 고민을 가진 동료의 상담역을 맡기도 했으며, 때로는 붓다를 대신하여 설법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난다는 사리뿟따, 목갈라나, 마하까싸빠, 아누룻다 등과 친교가 깊었으며, 특히 사리뿟따와는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경전에는 그가 사리뿟따를 칭찬하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사리뿟따의 입적 소식을 듣고 아난다가 낙심하는 모습은 “고양이의 습격을 간신히 피해서 허탈감에 빠진 수탉과 같이” 매우 딱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아난다는 아누룻다와 함께 석존의 최후를 지켜보고, 이어서 그때까지 개별적으로 전해지던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경전으로 편집하기 위하여 마하까싸빠와 함께 제1결집을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아난다는 붓다의 최측근으로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었기 때문에 ‘경(經)’을 편집하는 일을 주관했습니다.

아난다는 매우 오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테라가타』에는 비구들이 “다문(多聞)한 사람, 법을 소유한 사람, 어둠 속에서 어둠을 헤치는 사람인 아난다 장로는 보배의 근원이로다.”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게송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6)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

데와닷따는 한역경전에서는 대체로 아난다의 형제라고 하고 있으나 팔리 경전에서는 야쇼다라비의 오빠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물로서는 상당히 위대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데와닷따는 엄격한 계율주의자였으나 붓다는 일방적인 계율주의를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데와닷따는 후에 붓다의 목숨을 빼앗고 스스로 교단을 인솔하려 획책했다는 이유로, 교단의 화합을 파괴하는 반역자의 표본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와 데와닷따 사이에 있었던 대립의 이면에는, 교단 본연의 자세와 비구의 생활 방법에 관한 의견 차이가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후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추종자는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7) 우빨리(Upāli, 優波離)

우빨리는 샤카족 명문 인사들에게 봉사해 온 이발사였습니다. 불제자가 된 후 그는 늘 새로운 출가자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일에 종사하였으므로 그 때마다 부처님이 설하는 계율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일결집 때에는 계율의 송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불교 교단의 규율 및 규칙에 정통했으며, 또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율제일(持律第一)’ 혹은 ‘지계제일(持戒第一)’로 불렸습니다.

Notes:



1) Dhammapada Commentary Ⅰ. 133; Ⅳ. 124; Anguttara Nikāya Commentary Ⅰ. 183, 292; Jātaka Ⅰ. 87;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 102 No. 2.
2) Vinaya Pitaka Mahāvagga Ⅰ, p. 7에는 야사(Yasa)에 대해서도 똑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J. 토마스는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Edward J. Thomas, op. cit., p. 103 참조.
3) 밧디야(Bhaddiya)는 샤카족의 왕(Sakya-rāja)으로 불렸다. 이에 대해서 Edward J. Thomas는 그를 다른 샤카족 귀족과 같이 라자(rāja, 왕)로 불렸던 것 같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왕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Edward J. Thomas, op. cit., p. 104 참조.] 그러나 와다나베 쇼오고(渡邊照宏)는 그 무렵 까삘라의 성주(城主) 숫도다나는 이미 은퇴하고 붓다의 사촌 되는 밧디야가 왕위를 계승하고 있었다고 한다.[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 232.]
4) Vinaya Pitaka(PTS), Ⅱ, p. 183.
5) Ibid., Ⅱ, p. 183.
6) AA. Ⅰ. 191; I. B. Horner tr., The Book of the Discipline(Vinaya Pitaka) (London: PTS, 1975), Vol. Ⅴ, p. 257 No. 3.
7) I. B. Horner, Ibid., p. 255.
8) Anguttara Nikāya(PTS), Vol. Ⅰ, p. 23.
9) AA. Ⅰ, p. 191; I. B. Horner tr., The Book of the Discipline, p. 257 No. 1.
10) Thag. vss. 842-865; UdA. Ⅱ. 10; Vin. Ⅰ. 183 f.; J. Ⅰ. 140.
11) Thag., vss. 271-4; ThagA. Ⅰ. 380 f.,; cf. M.Ⅲ. 155; vin. Ⅰ. 350, Ⅱ. 182; DhA. Ⅰ. 56, 133; J. Ⅰ. 140, Ⅲ. 489; Mil. 107;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roper Names, Vol. Ⅱ, p. 344.
12) SA. Ⅱ. 222; 이 법문은 Kilesiya Sutta와 관련이 있다.
13) Piyadassi Thera, The Buddha: His Life and Teaching, The Wheel Publication No.5A/B (Kandy, Sri Lanka :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p.24.

교화지역과 佛敎中國

1) 마가다국에서의 교화활동

붓다께서 깟싸빠(Kassapa) 삼 형제를 교화하고 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방문했을 때, 세니야 빔비사라(Seniya Bimbisāra, 頻婆娑羅) 왕이 붓다께 귀의하여 재가 신자가 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귀의로 말미암아 붓다의 교화활동은 마가다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은 라자가하 교외에 벨루와나(Veluvana, 竹林精舍)를 지어 승단에 기증하였습니다. 이러한 빔비사라 왕의 후원은 초기불교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붓다는 라자가하에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습니다. 붓다의 두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lāna)의 개종도 이 때 이루어졌으며, 마하 깟싸빠(Mahā Kassapa)가 붓다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마하 깟싸빠와 붓다의 첫 만남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붓다께서 벨루와나의 간다꾸띠(Gandhakutī, 香室, 붓다의 거실)에 앉아 계실 때, 붓다는 지진이 일어날 조짐을 미리 아시고 밖으로 나오신 뒤,1) 라자가하와 나란다 사이의 뿌리가 많이 달린 니그로다 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붓다의 몸에서는 후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마하 깟싸빠가 이러한 붓다의 모습을 뵙자마자 단번에 이 분이야말로 자신의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붓다 앞에 엎드렸습니다. 붓다는 그를 자리에 앉히고 세 가지 설교를 한 뒤 구족계를 주었습니다. 그 후 둘은 함께 라자가하로 돌아왔는데, 마하 깟싸빠는 이미 붓다의 32호상 가운데 일곱 가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붓다께 귀의한 마하 깟싸빠는 8일 후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2) 그는 일생 동안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붓다의 입멸 후에는 제1회 결집을 주도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마가다 출신의 유명한 제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는 벨루와나 외에도 의사 지바까(Jīvaka, 耆婆)가 기부한 망고 숲(Jīvakambavana)을 비롯한 정사(精舍)들이 여러 곳에 건립되었습니다. 붓다는 라자가하 근처의 깃짜꾸따(Gijjhakūtā, 靈鷲山 혹은 耆闍崛山, ‘독수리 봉우리’의 뜻), 삿따빠니구하(Sattapanniguhā, 七葉窟), 랏티와나(Latthivana, 杖林) 등에 머물면서 교화활동을 펼쳤습니다.

붓다의 만년에는 돈독한 신자였던 빔비사라 왕이 그의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왕 역시 얼마 후 잘못을 뉘우치고 붓다에게 귀의하였다고 전합니다.

2) 꼬살라국에서의 교화활동

붓다 당시 가장 번성했던 도시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와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舍衛城)였습니다. 학자들은 지금의 사헤트 마헤트(Sāhet-Māhet)가 사왓티의 유지(遺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3) 사왓티라는 도시 이름은 그곳에 사왓타(Savattha)라는 성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전통에서는 그곳에 대상(隊商)들의 숙박소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만나 각자 “무슨 물품이 있는가?(Kim bhandam atthi?)”라고 물으면, “모든 것이 있다(Sabbam atthi.)”라고 대답했는데, 이 ‘삿방아티’라는 대답이 곧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4) 어느 설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도시가 붓다 당시에는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음은 분명합니다.

꼬살라국에서의 붓다의 교화활동은 처음에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방에는 바라문의 세력이 강하였고,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등도 왕성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붓다가 꼬살라국에 예속된 석가족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장애가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5) 그러나 아나타삔디까(Anāthapindika, 給孤獨, ‘고독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자’의 뜻)라 불렸던 사왓티의 장자 수닷따(Sudatta, 須達)의 귀의를 계기로 비로소 이 나라에서의 교화의 거점이 확보되었습니다. 그때는 붓다께서 성도한 지 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수닷따가 붓다를 만나 재가신자가 된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율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아나타삔디까는 사업차 라자가하에 갔다가 ‘깨달으신 분’ 즉 붓다(Buddha, 覺者)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금이라고 빨리 붓다를 친견하고 싶은 마음에 밤이 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캄캄한 밤중에 성문(城門)을 나와 새벽녘에 시따와나(Sītavana, 寒林)로 가서 붓다를 친견하였습니다. 그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일생 동안 재가자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받들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이튿날 붓다와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베풀고, 사왓티에서 우기(雨期)를 보내도록 붓다를 초청했는데, 붓다는 그것을 승낙하였습니다. 사왓티로 돌아온 그는 붓다께서 머물 수 있는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런데 제따(Jeta, 祗陀) 왕자의 공원이야말로 모든 조건을 갖춘 곳임을 확인하고, 왕자를 찾아가 양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제따 왕자는 양도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그 금액을 지불하기로 하고, 황금을 수레에 싣고 와서 공원을 덮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련한 동산에 아나타삔디까는 건물들을 세웠습니다. 그는 회랑을 설계하고, 문들을 만들었으며, 대기실을 짓고, 화실(火室), 창고, 화장실을 지었습니다. 또한 산책길을 다듬고, 우물을 마련하고, 공중목욕탕를 짓고, 욕실을 준비했으며, 연못을 파고, 천막들을 세웠습니다.6)

이와 같이 원래 이 땅은 제따 태자가 소유하였던 원림(園林)이었기 때문에 ‘제따와나-아나타삔디까라마(Jetavana-Anāthapindikārāmā)’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말은 ‘제따 태자의 원림에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세운 정사’라는 뜻입니다. 한역에서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하였으며,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부릅니다. 아나타삔디까는 ‘보시 제일’이라는 호칭과 함께 80명의 으뜸가는 제자들의 명단에 나타납니다.

사왓티에서 비사카(Visākhā, 毘舍佉)라는 여인도 아나타삔디까와 마찬가지로 ‘보시 제일’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신심 돈독한 재가 여신도였습니다. 그녀는 붓다와 상가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비사카는 원래 앙가(Anga, 鴦伽)국의 도시 밧디야(Bhaddiya)의 대부호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젊어서 붓다께 귀의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다난자야(Dhanañjaya)는 빔비사라 왕에 의해 꼬살라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꼬살라국의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이 자신의 왕국에 재산이 많은 사람을 보내 달라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에게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다난자야는 사왓티로 오는 도중 21마일 떨어진 한 장소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그곳에 정착하고 싶다고 빠세나디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왕의 허락을 받아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저녁에 첫 주민이 살게 되었다고 해서 ‘저녁’이라는 의미의 사께따(Sāketa, 娑鷄多)가 그곳의 지명(地名)이 되었습니다.7)

비사카는 사왓티의 부자 미가라(Migāra)의 아들 뿐냐왓다나(Punnavaddhana, 分那婆陀那)와 결혼했습니다. 시아버지 미가라는 나체 고행자들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들은 비사카가 붓다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게 하라고 미가라에게 충고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어떤 모함으로 그녀를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들의 그릇됨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을 때, 불교 승려들에게 봉사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더 이상 머물지 않겠다고 거부했습니다. 붓다께서 그의 집을 직접 방문했을 때, 미가라는 개종했습니다. 그는 며느리를 통해 예류과(預流果)를 얻었기 때문에 자기의 어머니에게 하는 것처럼 비사카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녀에게 ‘미가라의 어머니(Migāramātā, 鹿母)’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습니다.8)

『법구경주(法句經註)』에 의하면, 비사카는 시집올 때 값비싼 옷을 입고 왔는데, 그 옷을 희사하여 정사를 건립하겠다고 붓다께 요청했습니다. 붓다의 승낙을 받고 목갈라나가 감독하여 9개월이 걸려 사왓티 동쪽에 2층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건물은 위, 아래 각각 500실을 갖춘 큰 규모였습니다. 이 승원의 이름은 뿟바라마(Pubbārāma, 東園)이지만, ‘미가라마뚜-빠싸다(Migāramātu- pāsāda, 鹿母講堂)로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9)

꼬살라 국왕 파세나디(Pasenadi, 波斯匿)도 나중에 왕비 말리카(Mallika, 末利) 부인의 인도로 붓다께 귀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빠세나디 왕은 제따와나(기원정사) 반대편에 ‘라자까라마(Rājakārāma, 王園)’ 즉 왕실 사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사왓티에서 붓다의 으뜸가는 후원자는 아나타삔디까, 비사카, 숫빠와사(Suppavāsa), 빠세나디였습니다.10)

붓다는 성도 후 20년이 지난 후부터 입멸하기 한 해 전까지 25년간의 안거(安居)를 사왓티에서 보냈습니다. 기원정사에서 19번, 녹모강당에서 6번의 안거를 보냈습니다.11) 이것은 붓다가 사왓티를 중심으로 교화생활의 후반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붓다께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오는 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사왓티 출신의 유명한 불제자도 많이 출현하였습니다. 경전에 나타난 제자들의 이름을 보면 사왓티 출신의 비구가 80명이나 되며, 비구니가 14명, 우빠사까(Upāsaka, 信男)가 19명, 우빠시까(Upāsika, 信女)가 10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 중에는 당시의 카스트 제도를 무시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로는 왕가(王家)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아래로는 도로청소부에 이르기까지 사왓티 일대의 주민 대부분이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12)

3) 그 밖의 중요한 교화지역

붓다의 고향인 까삘라밧투에서의 교화도 두드러진 자취를 남겼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한편 밧지(Vajji)국의 릿차비(Licchavi, 離車)족 수도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에는 비교적 일찍부터 교화가 미쳤던 것 같습니다. 이 땅은 자이나교가 성행했던 곳이었는데, 그 신봉자인 삿짜까(Saccaka, 薩遮)나 시하(Sīha, 獅子) 등은 붓다를 만나 불교로 전향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의 재가신자로서 유명한 이는 욱가(Ugga, 郁伽) 장자입니다. 또한 암바빨리(Ambapālī, 菴婆婆利)도 원림(園林)을 기부하였으며, 뒷날 출가하여 여성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붓다는 밤사(Vamsa)국의 수도 꼬삼비(Kosambi, 憍賞彌城)에도 종종 유행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성도 후 9년째 되던 해의 안거를 여기서 보냈다고 합니다. 고시따(Ghosita, 瞿師羅) 장자가 기부한 승원, 즉 고시따라마(Ghositārāma, 瞿師羅園)는 잘 알려져 있으며, 국왕 우데나(Udena, 優塡)는 뒷날 삔도라 바라드바자(Pindola Bhāradvāja, 賓頭盧頗羅墮)와 왕비 한 명과 함께 붓다께 귀의하였다고 합니다.

붓다는 성도 후 입멸에 이르기까지 45년간 인도 각 지방을 유행하며 교화하였습니다. 붓다의 교화가 인도 어느 지역까지 미쳤는가 하는 문제는 초기성전에 나타나는 붓다의 유행 경로나 설법 장소로서 대충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후대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붓다가 성도한 후 안거하였던 곳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이것도 추정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붓다의 교화지역은 앙가, 마가다, 밧지, 말라, 꼬살라, 까시, 밤사 등의 여러 나라를 중심으로 멀리는 꾸루, 빤짤라까지 이르렀던 흔적이 있습니다. 설법이 많이 행해졌던 장소는 사왓티(꼬살라의 수도), 라자가하(마가다의 수도), 베살리(밧지의 수도), 까삘라밧투(석가족의 수도), 꼬삼비(밤사의 수도) 순이며, 그 중에서도 사왓티와 라자가하 두 도시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붓다의 유행도 이 두 도시의 왕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안거 역시 이 두 도시에서 많이 시행되었다고 전합니다.13)

붓다의 교화지역은 ‘불교중국(佛敎中國)’과 거의 일치합니다. 불교중국(Majjima-janapada 또는 Majjhima-desa)이란 원래 ‘수계(受戒)할 때 필요한 10명의 스승을 얻을 수 있는 중앙지역’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불교문화의 중심지를 가리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중국의 범위에 대해서는 많은 종류의『율장』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14)

이와 같이 붓다의 교화활동은 불교중국 곳곳에 미쳐 그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붓다는 몸소 교화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전도 선언 이래 출가 제자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권장하였습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서쪽 아반띠(Avanti)국 출신의 마하캇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나 그 서남쪽의 스나빠란따(Snāparanta, 현재의 뭄바이 서북방에 해당함) 출신 뿐나(Punna, 富樓那)와 같은 탁월한 교화력을 지닌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붓다의 직제자(直弟子)들의 출신지나 교화지역을 조사해 보면 그 교화범위는 불교중국을 훨씬 넘어 동으로는 갠지스 강 유역, 서북으로는 탁샤실라(Taksaśilā) 부근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15) 붓다 재세시(在世時) 이미 불교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Notes:



1) 이 때 세존께서는 세 가부따(gāvuta)를 걸어 나오셨다고 한다. 가부따는 거리의 단위로서 1/4유순(由旬)이라고 한다.
2)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DPPN),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Vol. Ⅱ, p. 477.
3) Cunningham, AGI. 469; DPPN. Vol. Ⅱ, p. 1127.
4) Suttanipāta Commentary(PTS), Ⅰ. 300; Patisambhidāmagga Commentary(SHB). 367; DPPN. Vol. Ⅱ, p. 1126.
5)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초기, 부파불교의 역사』(서울 : 민족사, 1989), p. 47.
6) Vinaya Pitaka(PTS), Vol.Ⅱ, pp. 154-159; I. B. Horner tr., The Book of the Discipline (London: PTS, 1952), pp. 216-223.
7)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1992), pp. 105-6.
8)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 105-6.
9) 『望月佛敎大辭典』5권, p. 5061上.
10) DhA.Ⅰ. 330; DPPN. Vol. Ⅱ, p. 1126-7, 참조.
11) DhA. Ⅰ. 4; DPPN. Vol. Ⅱ, p. 1126.
12) 李箕永, 『석가』세계대사상전집5 (서울 : 지문각, 1965), pp. 172-3, 참조.
13)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앞의 책, p. 44.
14)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위의 책, p. 45.
15)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위의 책, p. 48.

비구니 교단의 성립과 발전

1) 비구니 교단의 성립

불교교단에서 비구니 상가(Samgha, 僧伽)의 성립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상가가 언제 성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비구 상가보다 나중에 성립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처음 붓다는 여성의 출가에 대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 이와 같은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불교교단에서 여성출가자, 즉 비구니가 출현했다는 것은 종교사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불교교단에서 최초의 비구니는 붓다의 양모였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ī, 摩訶波闍波提瞿曇彌)였습니다. 팔리어 율장에 의하면, 슛도다나왕이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붓다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의 교외에 있는 니그로다(Nigrodha, 榕樹) 동산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붓다를 찾아와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녀는 세 번씩이나 교법과 계를 베풀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아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 붓다는 까삘라밧투를 떠나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 교외에 있는 마하바나(Mahāvana, 大林)의 꿋따가라살라(Kūtagārasālā, 重閣講堂)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마하빠자빠띠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은 다음 붓다의 뒤를 좇아 베살리의 중각강당까지 찾아왔습니다. 이때 같은 뜻을 가진 사캬족의 여인들도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맨발로 걸어서 발은 부어터지고 얼굴은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마하빠자빠띠와 사카족의 여인들이 정사의 문밖에 선 채로 출가의 허락을 재차 간청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난다가 세 번이나 붓다께 그들의 뜻을 전했지만 붓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난다는 다시 붓다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여인이 이 가르침을 따라 출가하여 수행한다면 남자와 같이 수행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난다야, 물론 그럴 수 있다.” 이 대답을 듣고 용기를 얻은 아난다는 다시 마하빠자빠띠가 붓다께 바친 은혜를 말하고 꼭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몇 번이고 간청을 했습니다. 붓다는 마침내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덟 가지 조건이 따랐습니다.1)

첫째, 출가하여 백년의 경력을 가진 비구니(比丘尼, 尼僧)일지라도 바로 그날 자격을 얻은 비구(比丘)에 대해서는 먼저 합장, 존경을 해야 한다.

둘째, 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장소에서 안거(安居)를 해서는 안 된다.

셋째, 비구니는 한 달에 두 번씩 비구 승단으로부터 계율의 반성[布薩]과 설교를 들어야 한다.

넷째, 비구니는 안거가 끝난 뒤 남녀 양쪽의 승단에 대해서 수행이 순결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다섯째, 비구니가 중대한 죄를 범했을 때에는 남녀 양쪽의 승단으로부터 반 달 동안 별거(別居) 취급을 당해야 한다.

여섯째, 비구니의 견습(式叉摩那, Siksamānā)은 2년 동안 일정한 수행을 거친 다음 남녀 양쪽의 승단으로부터 온전한 비구니가 되는 의식(儀式)을 받아야 한다.

일곱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비구니는 비구를 욕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여덟째, 비구니는 비구의 허물을 꾸짖을 수 없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허물을 꾸짖어도 무방하다.2)

아난다는 마하빠자빠띠에게로 가서, 만약 이 여덟 가지 조항을 받아들인다면 여성의 출가가 허락되리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젊은이가 머리를 감고 아름다운 꽃을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듯이, 나는 이 여덟 가지 조항을 한평생 소중하게 지켜가겠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이 여덟 가지 조항(尼八敬戒, 八重法이라고도 함)을 받아들임으로써 마하빠자빠띠는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그때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난다야, 만약 여성에게 불교교단에 출가가 허용되지 않았더라면 수행의 순결이 유지되어 1천년 동안 정법(正法)이 존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성이 출가하게 되었으니, 수행의 순결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정법은 5백년밖에 존속되지 못하게 되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 집안에는 도적이 침범하기 쉽다. 또 논밭에 물것이 성하면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출가하게 되면 수행의 순결은 유지되기 어렵다. 큰 연못 둘레에 미리 둑을 쌓아 물의 범람을 막듯이, 나는 비구니들에게 이 여덟 가지 조항을 베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 교단에 여성의 출가가 인정되었습니다. 여성을 독립된 인격으로 볼 경우, 남성과 같이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붓다 자신도 인정한 바와 같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별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비구니들 중에서도 수행과 학덕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테리가타(Therīgāthā, 長老尼偈)]의 예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붓다는 수행에 의해서 여성도 성자(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여성의 이름도 몇 사람 기록되어 있습니다.3)

2) 비구니 교단의 성립 시기와 그 배경

불교교단에서 비구니 상가가 성립된 것은 붓다 성도 후 20년경이라고 봅니다. 일부 학자들은 붓다 성도 후 5년째에 비구니 상가가 성립되었다고 합니다만4)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마하빠자빠띠가 처음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성도 후 5년째 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베살리의 중각강당에서 비구니의 출가를 승인한 것은 아난다 존자가 붓다의 시자로 책봉된 이후임이 분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아난다는 붓다 성도 20년 후부터 시봉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법인 스님은 비구니 교단의 성립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구니 승가는 부처님 성도 후 20년경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즉 부처님의 이모이며 양모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출가를 간청 드린 것이 붓다 성도 후 15년경이며, 허락을 받은 것은 아난 존자가 붓다의 시봉을 들기 시작한 첫 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미 비구 승가와 재가신도가 탄탄하게 형성된 후에 비구니 승가가 성립된 것이다.”5)

이와 같이 법인 스님은 마하빠자빠띠가 붓다께 출가를 간청 드린 것이 붓다 성도 후 15년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처음의 간청은 성도 후 5년경이고, 실제로 출가를 허락한 것은 성도 후 20년경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여인의 출가를 처음부터 승낙할 경우 당시 바라문들의 극심한 비난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바라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잠롱 통프라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붓다는 여성의 출가를 허가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첫째, 붓다는 여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라한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둘째, 여성은 위험, 특히 나쁜 남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승려들에게 부담을 더하게 된다. 비구니들은 비구들의 사찰에서 떨어져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그들이 비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불교를 반대했던 다른 종교, 특히 바라문교에게 불교를 공격하도록 기회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바라문교의 사회 제도를 뒤엎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바라문 사회에서 여성들은 점점 더 불교도가 되어 갔다. 이것은 바라문의 제도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바라문들은 온갖 수단으로 방해할지도 모르며, 자신의 새로운 교리를 전파하는 데 어려움이 될 수도 있었다. … 이와 같이 그는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갔다. 마침내 그의 속도 조절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를 낳았다. 사실, 붓다는 먼저 바라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기를 원했었다. 왜냐하면 성직을 요청했다는 마하빠자빠띠의 소문은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바라문들은 어떻게 했는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붓다는 그녀가 요청했던 것과 같이, 그녀와 석가족 여성 일행의 입단을 허가하기로 결심했다.”6)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구니의 상가 입단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제시한 ‘여덟 가지 조항’ 즉, 팔경법(八敬法, Attha-garudhammā)은 상당히 후세에 정리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팔경법의 내용 중에는 비구니 교단이 성립되지도 않았는데, 식차마나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 등을 예로 들어 붓다께서 직접 제정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팔경법의 내용과 합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전제 조건을 붓다께서 제시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붓다께서 여성을 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바라문 사회의 극심한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방편에서 마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행의 팔경법은 부파불교 시대에 첨가 보완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비구니에게 요구한 팔경법 때문에 불교에서는 여성을 폄하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여성 출가자 수용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적 여건에서 볼 때 거의 혁명적인 사건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도의 사회구조와 반여성적 풍토는 여성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으며, 특히 종교행위를 가장 신성한 행위로 간주했던 인도인의 생활방식에서 여성의 종교생활은 커다란 도전이었고 파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여성의 몸 그대로는 성불(成佛)할 수 없다는 ‘여성불성불론(女性不成佛論)’에 근거한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과 ‘여성변성남자성불론(女性變性男子成佛論)’ 등을 말하는 문헌들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붓다의 참뜻이 아님은 거의 확실합니다.8)

3) 비구니의 출가 설화

마하빠자빠띠에 이어서 붓다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를 비롯하여 사캬족의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했는데, 이들과 그 밖의 여성 출가자들을 합하여 비구니 교단이 발족되었습니다. 비구니 중에는 남성 출가자를 능가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폭넓은 활동을 하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들 비구니의 설화는 팔리어 경전인 [테리가타]에 기록되어 있는 이외에도 여러 경전과 그 주석서에도 가끔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성 출가의 원인이나 동기에 대해서는 갖가지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웃자이니의 왕녀 수메다는 어려서부터 붓다의 가르침에 접하고, 정신적으로 충실한 생활을 찾아서 결혼식 직전에 풍요로운 검은 머리를 잘라 버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또 빔비사라왕의 교계사(敎戒師)의 딸인 소마는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어둠의 숲’에서 명상을 하던 중, 유혹하러 나타난 악마를 일언직하에 물리치고 있습니다. 이들 여성은 원래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등을 돌려, 이상적인 경지에 마음을 안착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한편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도 그 비참한 환경에 절망하여 출가한 여성도 많았습니다. 바라문의 딸인 뭇타는 용모가 괴이한 가난한 남성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국 남편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소나와 바다마타는 나이가 들어 늙게 되자 애지중지하여 키운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됨으로 교단에 의탁하고자 출가했습니다.

사랑하는 육친과의 생각지 못했던 이별로 인하여 출가한 여성도 많았습니다. 사왓티에 사는 상인의 딸인 빠따짜라(Patācāra)는 부모의 뜻에 맞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여 집을 나갔지만, 믿고 의지하던 남편이 독사에게 발을 물려 죽고, 또 남은 두 자식도 하나는 독수리에게 채여 가고 하나는 강물에 쓸려 들어가 버리자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양친과 형제들 모두가 태풍으로 쓰러진 집에 깔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슬픔에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헤매다가 붓다에게 구원을 받아서 출가했다고 합니다. 빠따짜라가 어느 날 항아리에 물을 길어 발을 씻을 때, 흘려보낸 물이 처음에는 조금 흘러갔고, 두 번째는 좀 더 앞에까지 흘렀으며, 세 번째는 더 앞에까지 흘러갔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안 그녀는 사람의 수명도 비록 장단은 있지만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정각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또한 같은 사왓티의 가난한 가정의 딸 끼사 고따미(Kisa Gotamī)는 어쩌다가 자신의 아이가 죽자 죽은 아이를 가슴에 안고, 그 아이를 소생시킬 수 있는 약을 구하려 다니다가 붓다를 만났습니다. 붓다는 이제까지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가 겨자씨를 얻어 오면 아이를 소생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집을 찾아다녔지만 물론 조건에 맞는 겨자씨를 얻지 못하니,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슬픔을 극복하고 비구니 교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여성 출가의 설화는 이밖에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 출가자에 비해서 지켜야 할 계율이 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출가에 진력한 아난다가 나중에 비난을 받는 등, 불교 교단 통제 상의 갖가지 문제를 야기 시킨 일을 기술한 문헌도 있습니다.9)

Notes:



1) 中村元著, 金知見譯, [佛陀의 世界](서울 : 김영사, 1984), p.221.
2)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p.263-4.
3)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pp.264-5.
4)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 1992), p.107.
5) 법인, “비구니 팔경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불교평론]제18호(서울: 불교평론사, 2004년 봄호), p.97.
6) 잠농 통프라스트, 이마성 옮김,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불교평론]제7호(서울: 불교평론사, 2001년 여름호), pp.378-379.
7) 이현옥, “여성의 관점에서 본 ‘여성성불론’”, [불교평론]제3호(불교평론사, 2000, 여름), p.85.
8)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샘터, 1990), pp.264-5; 이현옥, 위의 글, pp.89-93, 참조.
9) 中村元著, 金知見譯, [佛陀의 世界](서울: 김영사, 1984), p.221.

붓다의 마지막 여로(1)

1)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붓다는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시작한 이후, 사십여 년 동안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교화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붓다는 북인도의 거리에서 거리로, 마을에서 마을로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그 역사적 전후 관계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경전은 모두 붓다께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설법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1)

그러나 붓다의 만년(晩年), 즉 입멸 전후의 사정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전의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長部)의 세 가지 경전2)에서는 붓다의 마지막 나날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 sutta, 大般涅槃經)]는 그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현재 팔리어 [대반열반경] 외에도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산스끄리뜨어 사본(寫本)의 단편과 티베트어역, 그리고 다섯 종류의 한역본이3) 전해지고 있습니다.4) 이로 미루어 이 경전은 다른 부파에서도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 역본들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모두 붓다 입멸 전후의 사정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성(事實性)이 높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후대에 삽입된 부분도 포함되어 있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약간의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묘사된 내용은 역사적, 지리적 사실에 가깝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전의 핵심 내용은 위대한 분의 크나큰 죽음과, 그 죽음을 앞에 두고 설해 남기신 최후의 설법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전이 지니는 가치와 크나큰 매력은 역시 이 크나큰 죽음의 사실과 그 최후 설법에 있어서의 주옥같은 가르침의 말씀입니다.5)

그런데 대승경전에도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라는 같은 이름의 경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전은 붓다께서 입멸할 때의 설법을 주제로 한 것으로 아주 딴 경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반열반경]은 팔리어 경전과 그에 해당되는 한역본을 가리키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팔리어로 씌어진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붓다의 마지막 여정은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출발하여 갠지스강을 가로질러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에 이르러 안거를 마치고, 말라(Mallā)국의 도시였던 꾸시나라(Kusinārā, Kusinagara, 拘尸那竭羅)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입적(入寂)하게 됩니다. 그리고 붓다의 입멸 후 화장과 사리분배 등에 관한 후대의 기사까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팔리어 경전에 근거하여 붓다의 마지막 여로에 대한 줄거리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2) 라자가하에서 설한 칠불퇴법(七不退法)

[대반열반경]은 붓다께서 입멸하기 반 년 내지 일 년 정도 전 라자가하의 깃자꾸따(Gijjhakūta, 耆闍崛山, 靈鷲山)에 머물고 있을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무렵 마가다국의 아자따삿투(Ajātasattu, 阿闍世) 왕은 밧지(Vajji)국을 정복할 야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밧사까라(Vassakāra)라는 대신(大臣)을 붓다께 보내 그 의향을 여쭤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붓다는 아자삿투왕의 대신 밧사까라에게 직접 답하지 않고, 제자 아난다에게 밧지족 사람들이 다음의 일곱 가지 사항을 실행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① 밧지족 사람들은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② 밧지족 사람들은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며 밧지족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함께 행하는가.

③ 밧지족 사람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옛날에 정해진 오래된 밧지족의 법에 따라 행동하는가.

④ 밧지족 사람들은 밧지족 중의 밧지 노인들을 존경하고 환대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⑤ 밧지족 사람들은 종족의 부인이나 여자아이를 폭력으로 꾀어내거나 그것을 만류하지 않은 일은 없는가.

⑥ 밧지족 사람들은 내외(內外)의 밧지족 조상의 사당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이전에 바치고, 이전에 시행한 올바른 공양물을 버리지는 않는가.

⑦ 밧지족 사람들은 아라한에 대하여 올바로 보호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 아직 오지 않은 아라한이 이 땅에 오도록 하고 이미 오고 있는 아라한이 이 땅에서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하는가.6)

밧지족 사이에 이러한 일곱 가지 사항이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고 아난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밧지족 사람들이 이러한 일곱 가지 사항을 실행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번영하고 결코 마가다국에 의해 멸망되지 않는다고 설했습니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이들 밧지족의 멸망을 초래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七不退法)을 설한 다음 계속하여 동일한 내용을 그대로 불교승가에 적용시켜 다음과 같이 설했습니다.

① 비구들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② 비구들이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고 함께 승가의 제반 행사를 치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③ 비구들이 이전에 정해진 적이 없는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모든 학처(學處=戒本)에 따라 행동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④ 비구들이 출가한 지 오래되어 경험이 풍부한 장로비구들, 승가의 어른들, 승가를 이끄는 사람들을 모두 존경하고 존중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⑤ 비구들이 이미 생기(生起)해 있는 재생(再生)을 초래하는 갈애(渴愛)에 지배되지 않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⑥ 비구들이 숲속의 좌와소(坐臥所)에 있기를 원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⑦ 비구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단련하고 또 착한 수행자들을 거기에 오게 하고 또 거기에 오고 있는 수행자들을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7)

이 외에도 교단이 쇠퇴하지 않는 다른 네 가지 종류의 칠불퇴법과 한 가지 종류의 육불퇴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8) 이와 같이 비구들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비구들이 모이는 것, 비구들이 공동으로 승가의 제반 행사를 치르는 것, 정해진 학처(學處)에 따라 행동하는 것 등은 불교승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사항들입니다. 이러한 승가 운영상의 중요한 사항들이 밧지족 사이에서 시행되고 있던 관습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9)

3) 최후의 여정에 오름

얼마 후 붓다는 80세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라자가하를 떠나 최후의 여정에 오릅니다. 붓다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북쪽의 베살리를 향해 라자가하를 출발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암바랏티까(Ambalatthika) 동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붓다는 암바랏티까 동산의 ‘왕의 집(Rājâgārake)’에 머무셨습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에도 비구들에게 수많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즉 “이것이 계율이다. 이것이 선정이다. 이것이 지혜이다. 계(戒)가 실천되었을 때, 정(定)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정(定)이 실천되었을 때, 혜(慧)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慧)가 실천되면 마음은 번뇌, 즉 욕루(欲漏, kammâsavā), 유루(有漏, bhavâsavā), 견루(見漏, ditthâsavā), 무명루(無明漏, avijjâsavā)로부터 해탈하게 된다.”10) 계율과 선정과 지혜, 이 셋은 불교 전체를 통해 가장 기본적인 실천 형태이며, 흔히 ‘삼학(三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우 학(學)은 배운다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라는 뜻입니다.11) 이 삼학은 불교의 매우 중요한 교설로서, 이 경전에서 붓다는 반복해서 비구들에게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학에 관한 교설은 이 경전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암바랏티까 동산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붓다는 나란다(Nālanda, 那爛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붓다는 나란다에 도착하여 그곳의 빠와리까(Pāvārika)의 망고 숲에 머무셨습니다. 그 때 존자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가 세존의 처소를 찾아와서 세존께 예배드리고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러한 신앙을 품고 있습니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바른 깨달음에 대해 세존만큼 심오하고 철저하게 도달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며, 현재에도 물론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12)

그러자 붓다는 사리뿟따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사리뿟따는 자기는 과거, 현재, 미래의 제불세존(諸佛世尊)에 대해서 샅샅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릇 불세존이라는 분은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함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목은 팔리문 [대반열반경]에는 있지만, 한역의 해당 부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 팔리문과 한역(漢譯) 아함(阿含)의 다른 곳에 나와 있습니다.13)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리뿟따의 신앙 고백은 다른 기회, 즉 붓다의 입멸 직전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일로 여겨집니다.14) 그러니까 팔리문 [대반열반경]의 편집자는 나란다 마을이라는 지명(地名)이 나오기 때문에 이 고장과 관련되어 알려진 사리뿟따의 고백을 여기에 삽입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15)

4) 빠딸리 마을과 갠지스강

이어 붓다는 나란다를 떠나 길을 서북쪽으로 잡고 갠지스강 남쪽 기슭에 있는 빠딸리가마(Pātaligāma, ‘빠딸리 마을’이라는 뜻)에 도착하였습니다. 붓다께서 빠딸리 마을에 도착하자 그 고장의 신자들은 붓다와 제자들을 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 지은 공회당에 와서 법문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빠딸리 마을 사람들에게 계율을 지킬 때의 다섯 결과와 계율을 지키지 않을 때의 다섯 결과를 설하셨습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재산을 잃게 되고, 나쁜 소문이 일어나고, 모임에 참가할 때 자신이 없고, 죽을 때 우둔하게 죽게 되고, 죽고 나서 지옥에 가게 됨을 설하셨습니다.16)

이와 같이 붓다는 빠딸리 마을 신자들을 위해 밤늦게까지 설법하여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붓다의 분부로 신자들은 물러갔습니다. 붓다는 잠시 후 조용한 곳에 가서 쉬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의 대신(大臣) 수니다(Sunīdha)와 밧사까라(Vassakāra)가 밧지족을 물리치기 위해 빠딸리가마에 요새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수많은 신들이 빠딸리 마을을 수호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 날 아난다에게 “고귀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중에서, 모든 상업의 중심지 중에서 빠딸리뿟따(Pātaliputta, Pātaliputra, 華氏城)17)가 가장 큰 도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빠딸리뿟따는 화재와 수재, 또는 내란[불화]의 위험이 염려된다.”라고 예언했습니다.

한편 마가다국의 대신 수니다와 밧사까라는 붓다와 제자들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붓다께서 나간 문을 ‘고따마의 문(Gotama Gate)’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붓다께서 갠지스강을 건넌 장소를 ‘고따마의 나루터(Gotama Fort)’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갠지스강을 건너기 위해 강기슭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배를 타거나 혹은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너려고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때 붓다는 마치 역사(力士)가 굽힌 팔을 펴거나 혹은 폈던 팔을 굽히듯이 순식간에 저쪽 강가에 모습을 나타내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이 기적에 관한 종교적 의미는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18)

Notes:



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 김영사, 1984), p.233.
2) Mahāparinibbāna sutta(大般涅槃經), Mahāsudassana sutta(大善見王經), Janavasabha sutta(闍尼沙經) 등이다.
3) ①[遊行經](大正藏 1, pp.11-30); ②[佛般泥洹經](大正藏 1, pp.160-175); ③[大般涅槃經](大正藏 1, pp.191-207); ④[般泥洹經](大正藏 1, pp.176-191); ⑤[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大正藏 24, pp.384-402) 등이다.
4)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33.
5) 마스다니 후미오 지음, 반영규 옮김, [붓다, 그 생애와 사상](서울 : 대원정사, 1987), pp.264-5.
6) Dīgha Nikāya(PTS), Vol.Ⅱ. pp.73-76.
7) Dīgha Nikāya(PTS), Vol.Ⅱ. pp.76-77.
8) Dīgha Nikāya(PTS), Vol.Ⅱ. pp.77-81.
9) 후지타 코타츠 외, 권오민 옮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서울 : 민족사, 1989), pp.109-111.
10) Dīgha Nikāya(PTS), Vol.Ⅱ. p.81.
11) 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327.
12) Dīgha Nikāya(PTS), Vol.Ⅱ. p.82.
13) 사리뿟따와 붓다의 대화는 Dīgha Nikāya(長部)의 Sampasādanīya Sutta(自歡喜經)(D.Ⅲ, pp. 99-116)과 Samyutta Nikāya의 Satipatthāna Samyutta(念處相應)(S.Ⅴ, p.159)에 길게 설해져 있다. 이것은 분명히 인기 있는 대목이었으며, 아쇼카왕의 비문에도 인용되고 있다. [T. W. and C. A. 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Ⅱ (London: PTS, 1910), p.87, No.2 참조.]
14) 에드워드 제이 토마스(Edward J. Thomas)도 [대반열반경]에는 후대에 삽입된 부분이 많이 있다고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다.[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참조.]
15) 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329.
16) Dīgha Nikāya(PTS), Vol.Ⅱ, pp.85-6; Vinaya Pitaka(PTS), Vol Ⅰ, pp.227-8; Udāna (PTS), pp. 86-7.
17) 여기서 시골의 빠딸리가마(Pātaligāma)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그 이름이 빠딸리뿟따(Pātaliputta, 현재의 Patna)로 변경되었다. 나중에 이곳은 마가다 왕국을 발전시킨 아쇼카 황제의 수도로 유명해졌다.[Bhikkhu Ñānamoli, The Life of the Buddha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72), p.357.]
18) 와다나베 쇼오고는 이 기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o.332-3를 참조하기 바란다.

붓다의 마지막 여로(2)

1) 꼬띠가마와 나디까 마을

갠지스 강을 건너신 붓다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꼬띠가마(Kotigāma, 꼬띠 마을이라는 뜻)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에 관해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그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이겠는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은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다음에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원인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반대로 비구들이여!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의 깊은 의미에 도달한 사람 혹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각각 잘 이해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는 사람은 생존에 대한 갈애, 생존의 원인이 되는 것을 단절하고, 다시 미망된 태어남을 받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붓다께서는 꼬띠 마을에 머물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사성제는 불교의 가장 핵심 되는 교리입니다. 붓다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성제의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여로에서도 붓다는 또 다시 제자들에게 사성제의 가르침을 설한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붓다께서 사성제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이러한 붓다의 간곡한 법문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붓다께서는 이어서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셨습니다. 이 이후에도 붓다는 반복해서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계, 정, 혜 삼학은 불교 수행의 근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꼬띠 마을에서 충분히 머무신 다음, 붓다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나디까(Nādika)1) 마을에 도착하시어, 그곳 ‘긴자까와사타(Giñjakāvasatha, 벽돌 회관)’2)에 머무셨습니다.3)

붓다께서 나디까 마을에 머물고 계실 때, 어느 날 아난다 존자가 이곳 나디까 마을에 살다가 죽은 사람이 어느 곳에 태어났는지에 대해 붓다께 여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죽은 뒤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은, 여래(如來)4)에게 있어서는 별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후 일일이 여래의 처소에 와 묻는 것은 번쇄하고 번거롭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제부터 나는 ‘진리의 거울[法鏡, dhamma-ādāsa]’이라는 가르침을 설하리라. 이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성스러운 제자들은 ‘나에게는 지옥의 경계는 다했다. 축생의 경계, 아귀의 경계, 나쁜 경계에 떨어진 조건은 모두 다했다. 나는 성자의 흐름에 든 이가 되어 깨달음의 세계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 틀림없이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이가 되었다’라고, 각자 원하는 그대로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께서 나디까 마을의 ‘벽돌 회관’에 머물면서 비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2) 베살리의 암바빨리 동산

나디까 마을에서 충분히 머무신 다음, 붓다와 제자들은 베살리(Vesāli, 毘舍離城)로 이동하였습니다. 베살리에 도착하신 붓다께서는 암바빨리(Ambapāli, 菴婆婆利)의 망고 동산에 머무셨습니다. 여기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사념처관(四念處觀)에 대해 자세히 설하셨습니다. 그 자세한 설법 내용은 생략합니다.

당시 베살리에는 ‘암바빨리’라는 유명한 유녀(遊女)가 살고 있었습니다. 유녀 암바빨리는 붓다께서 베살리에 도착하시어 자신의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붓다의 처소에 이르러 붓다께 문안드리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유녀 암바빨리는 기쁨에 넘쳐, 내일 자신이 세존과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붓다께서는 침묵으로써 수락하셨습니다.

그때 베살리의 릿차비(Licchavī)족 사람들도 붓다께서 베살리에 도착하시어 암바빨리의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릿차비족 사람들은 서둘러 화려하게 장식된 수레를 타고 붓다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유녀 암바빨리의 마차와 부딪쳐 릿차비족 사람들의 수레가 부셔져 버렸습니다. 릿차비족 사람들은 유녀 암바빨리를 질책했습니다. 그러자 암바빨리는 내일 세존과 비구들을 공양에 초대하기 위해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사죄했습니다. 가문에 대한 긍지가 높았던 릿차비족 사람들은 자신들이 붓다께 공양 올릴 기회를 유녀 암바빨리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양할 수 있도록 십만금(十萬金)에 권리를 양도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암바빨리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여기서 릿차비족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릿차비족은 붓다시대에 인도의 강력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캇띠야(Khattiya, 刹帝利, 王族)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붓다 입멸 후, 자기들의 나라에 불탑을 세우기 위해 불사리(佛舍利)의 분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5) 그들의 수도는 베살리였으며, 밧지스(Vajjīs)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밧지족 연방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거대한 통일체를 형성했는데, 만일 릿차비의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면, 모든 사람들이 문병을 갔다고 합니다. 릿차비의 집에서 실시되는 행사에는 전체 부족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 방문한 사람은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고 명예스럽게 모두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6) 그들이 화려한 색상의 의복을 입고 밝게 색칠한 마차를 탄 모습을 매우 아름다웠다고7)고 합니다.8) 이처럼 부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던 릿차비족들이 자기 마을을 방문한 붓다께 공양 올릴 기회를 유녀 암바빨리에게 빼앗겼다는 것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한편 릿차비족 사람들이 붓다를 친견하고 법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붓다와 제자들에게 먼저 공양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미 암바빨리의 공양을 받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릿차비족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유녀 암바빨리는 자신의 정원에 잘 요리된 딱딱하고 부드러운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세존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이 끝났을 때 유녀 암바빨리는 붓다께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동산을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들에게 기진(寄進)하겠사옵니다. 부디 수락하여 주소서.”

붓다께서는 그녀의 청을 수락하셨습니다. 여기서 붓다는 유녀 암바빨리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했으며, 그녀를 격려하여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암바빨리의 거처를 떠났습니다.

3) 벨루와에서의 안거(安居)

붓다께서 암바빨리의 망고 동산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많은 비구들과 함께 벨루와(Beluva, Venu, 竹林) 마을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때는 우기(雨期)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벗이나 지인(知人) 혹은 지기(知己)를 의지하여 베살리로 가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우기를 지내도록 하여라. 나는 이 벨루와 마을에 남아 우기를 보내리라.”

그리하여 비구들은 베살리의 각 지방에 흩어져 그곳에서 우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붓다만은 혼자 이곳 벨루와 마을에 머물면서 우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우기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붓다께서는 중병(重病)에 걸렸습니다. 심한 고통이 엄습하여 죽어 버릴 것만 같았지만, 붓다께서는 바르게 사념하시고, 바르게 의식을 보존하시어 마음이 번잡하지 않게 고통을 참았습니다. 이러한 정진을 통해 붓다께서는 유수행(留壽行,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9)을 확립하여 병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때 아난다가 붓다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편찮으신 동안 저에게는 티끌만한 걱정도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숨 돌리는 정도의 시간이다’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사옵니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어떤 지시를 주지 않는 동안에는 결코 열반에 드시는 일은 없다’라고.”

“아난다여! 비구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였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는 중요한 것은 비밀로 한다는 ‘스승의 주먹(師拳)’이라는 것은 없느니라. 또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비구의 모임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여래는 ‘비구의 모임은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일은 결코 없느니라. 따라서 아난다여! 여래가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아난다여! 이제 나도 늙었다. 나이를 먹어 고령이 되었느니라. 장년기를 지나 노년에 이르렀다. 나도 이제 나이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조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느니라.”

이 대목은 불교 교단의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즉 여래의 법에는 스승이 특별한 제자에게만 전하는 은밀한 비전(秘傳)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교단을 통솔한다거나, 교단은 붓다께 의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 자귀의 법귀의와 사념처

이어서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 비구들도 자기의 섬[自洲]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自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 법의 섬[法洲]에 머물고 법에 귀의[法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10)

“아난다여!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 느낌(受)에 대해 … 마음(意)에 대해 …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와 사띠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을 일컬어, 비구가 자신을 섬으로 삼아[自洲]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自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한 법을 섬으로 삼아[法洲]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法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아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또한 법을 섬으로 삼아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곧 나의 제자들 중에서 최고의 비구가 될 것이다.”11)

위 인용문에서 앞의 것은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자귀의 법귀의’ 내용이 곧 사념처관(四念處觀)임을 설한 대목입니다.12) 이것은 붓다께서 입멸하기 직전에 사념처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매우 귀중한 법문입니다.

Notes:



1) 나디까(Nādika)는 꼬띠가마(Kotigāma)와 베살리(Vesāli)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밧지(Vajji)국에 속한 지역이다. 여러 책에서는 냐띠까(Ñātika)와 나디까(Nādika) 두 가지로 이 마을 이름을 표기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일찍부터 두 가지 철자법 모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Ñātika는 ñātigāma였기 때문이고, Nādika는 Nādika 연못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Rhys Davids는 Nādikā(복수)는 종족의 이름이고, Nādika는 그 종족의 마을 이름이었다고 한다. Woodward 역시 Nādika로 읽는 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 이름은 nadī(강)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New Delhi : Oriental Books Reprint Corperation, 1983; Originally Published in 1937), Vol. Ⅱ, pp.976-7 참조.]
2) ‘긴자까와사타(Giñjakāvasatha)’를 ‘연와(煉瓦)의 가(家)’ 혹은 ‘연와당(煉瓦堂)’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벽돌 회관’으로 옮겼다. Rhys Davids에 의하면, ‘벽돌 회관’은 여행자를 위한 공중 휴게소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대부분의 건물은 나무로 지어졌는데, ‘벽돌 회관’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그는 이 단어를 ‘Brick Hall’로 번역했다.[T. W. and C. A. F. Rhys Davis tr.,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Ⅱ, p.97, no.1.]
3) Rhys Davids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사용된 표현은 어떤 장소에 여행자가 도착했다는 것을 기술하는 관용구적인 어법이라는 것이다. 즉 X라는 곳에 도착하여 Y에 머물렀다. X는 도시 혹은 마을의 이름이고, Y는 여행자가 사용하는 숙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붓다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디까’ 마을에 도착하여 ‘벽돌 회관’이라는 숙소에 머물렀다는 뜻이다.
4) ‘여래(如來, Tathāgata)’라는 호칭은 붓다께서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1. No.1 : “Tathāgata is the title used when he speaks of himself. Etymologically it means ‘he who has gone(or come) thus’, but the exact sense is disputed.”;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 Gordon Fraser, 1959), p.1 No. 3: “Tathāgata lit. means ‘One who has come to truth’, i.e., ‘One who has discovered Truth’. This is the term usually used by the Buddha referring to himself and to the Buddhas in general.”] 이를테면 천자(天子) 혹은 왕(王)이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짐(朕)’이라고 자칭(自稱)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제자들이 붓다를 ‘여래’라고 부른 예를 초기경전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의례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여래십호(如來十號)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수정되어야만 한다. 현행의 여래십호는 사실상 열한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①여래(如來, Tathāgata), ②응공(應供, Arahant), ③정변지(正遍知, Sammāsambuddha), ④명행족(明行足, Vijjācaranasampanna), ⑤선서(善逝, Sugata), ⑥세간해(世間解, Lokavidū), ⑦무상사(無上士, Anuttara), ⑧조어장부(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⑨천인사(天人師, Satthā- devamanussānam), ⑩불(佛, Buddha), ⑪세존(世尊, Bhagavā)이다. 여기서 여래를 제외하면 정확히 십호(十號)가 된다.
5) Dīgha Nikāya(PTS), Vol. Ⅱ, p.165.
6) DA. Ⅱ, p.519.
7) Dīgha Nikāya(PTS), Vol. Ⅱ, p.96; Anguttara Nikāya(PTS), Vol Ⅲ, p.239.
8)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779.
9) ‘유수행(留壽行)’으로 옮긴 팔리어 원어는 Jīvita-sankhāram adhititthati이다.
10) Dīgha Nikāya(PTS), Vol. Ⅱ, p.100; Dīgha Nikāya(PTS), Vol. Ⅲ, p.58, 77; “atta-dīpa(bhikkhave) viharatha atta-saranā anañña-saranā, dhamma-dīpa dhamma-saranā anañña-saranā.” 여기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은 ‘자주(自洲, 자기의 섬) 법주(法洲, 법의 섬)’로 옮겨야 한다. 이수창(마성), “자등명 법등명의 번역에 대한 고찰”, 『불교학연구』제6호 (서울 : 불교학연구회, 2003), pp.157-184 참조.
11) Dīgha Nikāya(PTS), Vol. Ⅱ, p.100-101; Dīgha Nikāya(PTS), Vol. Ⅲ, p. 58, 77.
12) 임승택, “경전에 나타나는 위빠사나”, 『2004년 여름연수회 자료집: 고집멸도(DSNM)명상상담』(명상상담연구원, 2004), pp.23-38 참조.

붓다의 마지막 여로(3)

– 입멸의 예고 –

1) 짜빨라 영묘(靈廟)에서

붓다께서 벨루와(Beluva) 마을에서 우기(雨期)의 안거(安居)를 보내고 있을 때, 심한 병에 걸려 격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정진을 통해 자신의 병을 잘 극복하였습니다. 우기가 끝나고 붓다는 다시 베살리(Vesālī)로 돌아왔습니다. 붓다께서 베살리에서 탁발을 마치고, 짜빨라 쩨띠야(Cāpāla cetiya)로 자리를 옮겼습니다.1) 그곳에서 붓다는 아난다에게 우데나(Udena), 고따마까(Gotamaka), 삿땀바까(Sattambaka), 바후뿟따(Bahuputta), 사란다다(Sārandada), 짜빨라(Cāpāla) 등의 쩨띠야(cetiya, 制多, 支提)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쩨띠야(cetiya, Skt. caitya)는 원래 ‘성스러운 나무 혹은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영묘(靈廟)’ 혹은 ‘사당(祠堂)’을 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붓다 당시의 제띠야는 ‘노천의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었다고2) 합니다. 이기영(李箕永)은 쩨띠야를 흔히 ‘묘(廟)’ 또는 ‘예당(禮堂)’이라고 한역되지만, ‘신성한 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석조(石造) 혹은 벽돌로 된 것들은 대개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석조 또는 벽돌로 된 탑파(塔婆) 모양의 것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붓다 당시에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것은 죽은 사람의 유골 위에 만들어진 토총(土塚) 또는 그 위에 세상을 떠난 성자의 유골이나 유품 위에 총(塚)을 만들게 되면서부터 쩨띠야는 스투파(Stūpa, 塔婆)와 같은 뜻으로 이해되었다고 했습니다.3) 이 쩨띠야를 영어로는 ‘tumulus’(古墳), ‘sepulchral monument’(무덤의 기념물), ‘cairn’(돌무더기) 등으로 번역하는데,4) 우리말로는 ‘영묘(靈廟)’ 혹은 ‘사당(祠堂)’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쩨띠야를 불교의 사찰로 이해하면 잘못된 것입니다.5)

붓다는 이곳 짜빨라 쩨띠야에서 아난다에게 수행이 진전되어 네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四神足]을 획득한 사람은 그가 원한다면 일겁(一劫)6)이나 그 이상도 이 세상에 머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에게 ‘여래는 이미 신족(神足)을 닦은 자이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원하기만 하면 그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음을 아난다에게 암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악마에 의해 마음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세간의 자애를 위해, 인천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일겁 동안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붓다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처럼 세 번씩이나 암시했는데도 아난다는 이미 악마에게 홀려 있었기 때문에 세존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아난다에게 물러가라고 말했습니다. 아난다가 물러난 뒤, 악마가 세존 가까이로 다가와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바로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시옵소서. 선서(善逝)께서는 열반에 드시옵소서. 세존께서는 이제 열반에 드셔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 열반에 드시도록 권했을 때,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사옵니까?”7)

“‘악마여! 나에게 비구제자들이 있고, 또 그들이 총명하여 가르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받들어 지니고, 가르침을 바르게 행하고자 하며, 바른 방향으로 행동하며, 스승의 말씀을 잘 파악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설명하고 표현하며, 알리고 납득시키며, 이해시키고 분별하게 하며, 명백하게 하고, 또 외도의 삿된 설이 나타날 때는 그 삿된 설을 진리로 제지할 수 있고, 기적을 일으키는 가르침을 설할 수 있는 그러한 상태가 되지 않는 한 결코 열반에 들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세존이시여! 지금 이러한 바람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지금이야말로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시옵소서.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가 온 것이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열거하면서 열반에 들도록 유혹받으신 세존께서는 마침내 악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악마여! 나는 나의 입멸(入滅)에 대해 더 이상 마음 괴로워하지 않느니라. 여래는 머지않아 열반에 들 것이니라.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

2) 지진이 일어난 까닭

이리하여 세존께서는 짜빨라 쩨띠야에서 바르게 사념하시고 바르게 의식을 보전하셨던 지금까지의 유수행(留壽行,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을 중지하셨던 것입니다.8) 세존께서 유수행을 버렸을 때,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너무 무서워서 온 몸에 털이 곤두설 정도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의 큰 북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졌습니다.

한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아난다 존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벗이여!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벗이여!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참으로 이 지진은 대단하다. 이 지진은 매우 격심하고 무서워 몸의 털이 곤두섰다. 또 하늘의 큰 북도 갈갈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졌다. 도대체 어떤 직접적 원인(因), 어떤 간접적 원인(緣)이 있기에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서 아난다 존자는 그 이유를 묻고자 세존의 처소로 갔습니다. 세존의 처소에 가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아 세존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실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큰 지진이 오늘 있었사옵니다. 이 지진은 매우 격심하고 두려워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였사옵니다. 또 하늘의 큰 북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졌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떤 직접적 원인, 어떤 간접적 원인이 있기에 이런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이옵니까?”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대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직접적 원인과 여덟 가지의 간접적 원인 가운데 어떤 것이 있는 경우이니라. 그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우선 첫째로 아난다여! 이 대지는 수계(水界) 위에 있고, 수계는 풍계(風界) 위에, 또 풍계는 허공(虛空) 중에 있다. 그런데, 아난다여! 풍계에 어떤 원인으로 큰 바람이 불면, 그 큰 바람은 수계를 진동하게 한다. 수계가 진동하면 대지도 진동한다. 이것이 대지진이 일어나는 제1의 직접적 원인, 간접적 원인이니라.

다음으로 아난다여! 이곳에 한 사람의 사문 혹은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神通力)이 있어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자. 혹은 대단한 초능력(大神通力), 대단한 역량을 가진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자. 아난다여! 그가 대지의 관상(觀想)을 행하고, 혹은 한없이 수(水)의 관상을 행할 때, 그것은 이 대지를 대단히 그리고 격심하게 진동하게 하고, 격렬하게 진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지진이 일어나는 제2의 직접적 원인, 간접적 원인이니라.”

그리고 붓다는 이어서 나머지 여섯 가지의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셋째는 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지닌 채 어머니가 되는 사람의 태 안에 들 때입니다. 넷째는 이 보살이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지닌 채로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입니다. 다섯째는 여래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때입니다. 여섯째는 여래가 위없는 가르침의 바퀴[法輪]를 처음으로 굴리셨을 때입니다. 일곱째는 여래께서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지닌 채 유수행을 버리셨을 때입니다. 여덟째는 여래께서 남김없이 완전한 안락함의 세계(無餘依涅槃)에 드실 때, 이 대지는 크게 진동하고 대단히 진동하며, 격심하게 진동하고 격렬하게 진동합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의 직접적 원인과 여덟 가지의 간접적 원인이 있을 때 대지진이 일어난다고 붓다는 아난다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아난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입멸을 예고했습니다. 그때서야 아난다는 붓다께서 입멸하시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고, 열반에 드시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때 붓다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이제는 너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허나 어쨌든 아난다여! 나는 너희들에게 늘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것이라고 곧 이별의 상태, 변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어찌 피하겠느냐? 태어나고 살고 무너져 가는 것, 그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해 ‘무너지지 말라’고 막더라도, 그것은 이치에 부합되지 않느니라. 이러한 것을 아난다여! 여래는 이미 내던지고 배제하며 방출하고 버렸으며 벗어났다. 그리고 유수행도 나는 버렸다. 이리하여 여래는 결정적인 말을 했느니라. ‘머지않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라고. 이제 와서 생명을 영원토록 하겠다고 하여 그 말을 취소한다는 것은 존재의 도리(道理)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문을 아난다에게 설하신 다음, 붓다는 아난다에게 마하와나(Mahāvana, 大林)의 꾸따가라(Kūtāgāra, 重閣講堂)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베살리 주변에 있는 비구들을 모두 이곳으로 모이라고 당부했습니다. 비구들이 모이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진리를, 잘 알아 지녀 배우고 수행하며 많이 닦아야만 하느니라. 그리고 이 청정한 행이 이 세상에 오래오래 존재하며, 그 결과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의 바탕이 되고, 세상 사람들을 연민하여 신들과 인간의 복리가 되고, 이익과 안락이 되도록 하여라.

그러면 비구들이여!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이익과 안락한 진리란 도대체 어떤 것이겠는가?

그것은 예컨대 네 가지 바르게 사념하는 경지(四念處), 네 가지 바르게 노력해야만 하는 것(四正勤), 네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四神足), 다섯 가지 선한 과보의 뿌리(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지분(七覺支),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八聖道) 등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진리이니라.”

이상과 같은 가르침을 설하신 다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비구들이여! 지금이야말로 나는 너희들에게 마음을 기울여 알려야만 하리라. 명심해서 들음이 좋으리라. 비구들이여! 만들어진 것(有爲)은 결국 멸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여 수행을 완성하여라. 여래는 머지않아 열반에 들리라. 여래는 이제부터 3개월 후, 열반에 들 것이니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만한 이 큰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다시 다음과 같은 시를 노래하셨습니다.

이 몸에도 늙음은 닥쳐오고
생명의 불꽃 가냘퍼지니,
자,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귀의처로 하여, 끝없이

비구들이여!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바르게 사념하여
선계(善戒)를 지키고 사유를 다스리며
자신이 마음을 지켜라

내가 설시한 법(法), 율(律)을
결코 게을리 말고 정진하면,
세세생생 윤회를 끝내고
괴로움의 끝은 다하리.

이상에서 살펴본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우기의 안거가 끝나자 붓다께서 베살리로 탁발을 나갔습니다. 그때 아난다에게 여래는 만약 원하기만 한다면 일겁(一劫) 혹은 그 이상으로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악마에게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에 붓다께 일겁 동안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악마의 권유를 받아들여 3개월 후 입멸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역본(譯本)에서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붓다께서 빨리 입멸하게 된 까닭은 아난다가 붓다께 요청하지 않은 과실 때문이라고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에드워드 제이 토마스(Edward J. Thomas)는 “이러한 질책의 가혹함은 붓다에 의한 것이 아님이 거의 확실하지만, 이러한 전설이 창작된 후, 교단에서 일으킨 느낌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1결집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나는데, 이것에 의하면 아난다는 승단에서보다 먼저 자신의 과실을 시인했다고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학자들도 이 내용의 의미를 각자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에 의하면, 짜빨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대반열반경] 중에서도 하나의 절정을 이룹니다. 붓다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신자들에게도 있을 수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인간의 자연사(自然死)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원시적 심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죽음이 일어나는 데에는 무엇인가 ‘부자연스러운’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는 매우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물며 붓다와 같은 비범한 존재의 입멸이라고 생각할 때, 특별한 원인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짜빨라 사당에서의 ‘생명력의 포기’는 붓다의 입멸에 있어서 필요한 선행 조건입니다. 여기서 부수하여, 시자(侍者) 아난다의 허물과 악마의 유혹이 곁들여집니다. 붓다의 입멸 후 아난다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몇 가지 허물을 문책 당하게 되는데, 짜빨라 사당의 사건이 가장 큰 것이었다. 아난다는 그러니까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이며, 이것도 민속학에 많은 사례가 있는 일반적 현상의 하나라는 것입니다.”9)

Notes:



1) Cāpāla cetiya는 베살리 근처에 있었다. Anguttara Nikāya 주석서에서는 붓다께서 전도를 시작한 후 전반기 20년 동안 종종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곳은 한때 약카 짜빨라 (Yakkha Cāpāla)의 거처였지만, 나중에는 붓다께서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옆에 사찰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법현(法顯)은 그곳에서 탑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 탑은 짜빨라 쩨띠야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Ⅰ, p.863.]
2)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 김영사, 1984), p.236.
3) 李箕永, [석가](서울 : 지문각, 1965), p.257.
4) T. 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 The Pali Text Society’s Pali-English Dictionary (London : PTS, 1921-1925), p.272.
5) T. W and C. A. 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Fourth edition (London : PTS, 1959), p.100, n.2.
6) 겁(劫, kappa)는 한없이 긴 시간의 단위이다. 여기서 말하는 겁은 이러한 본래 의미로 쓰인 것이다. Mahāvastu(大事), iii 225에서는 분명히 이 의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Buddhaghosa(佛音)는 당시 인간의 완전한 생애 100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146. n.2.]
7) 여기서 인용한 말은 붓다께서 처음 염소지기의 니그로다(Nigrodha) 나무 밑에서 열반의 기쁨을 즐기고 난 뒤, 말씀하신 것이다.
8) 이 부분의 원어는 ‘āyu-sankhara ossaji’이다. ‘āyu-sankhara’는 수행(壽行)이고, ossaji는 ‘해방되다’, ‘버리다’, ‘제거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ossajati의 과거형이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생명 연장의 포기’라고 번역할 수 있다.
9)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338.

마지막 공양-수까라 맛다바

1) 베살리와의 이별

붓다께서 베살리(Vesālī, 毘舍離)에 머물고 계실 때, 근처에 있던 모든 비구들을 모아 놓고 석 달 후에 입멸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붓다는 베살리의 거리에서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베살리를 바라보고 아난다에게 “이것이 베살리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경전에서는 붓다께서 ‘코끼리처럼’ 뒤돌아보았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코끼리처럼’이란 커다란 코끼리가 뒤를 돌아볼 때 몸 전체를 천천히 돌리는 모양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이가 많고 또 병색이 짙은 붓다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역 경전에는 “대상왕(大象王)처럼 온몸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광암성을 바라다보았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장(玄奘) 스님도 이를 기념하여 세워진 스투파(Sthūpa, 塔)의 옆에 서서 지난날을 회상했다고 합니다.1)

먼저 붓다께서는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베살리를 뒤로 하고 반다가마(Bhandagāma, 반다 마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반다 마을에 도착하여 그 마을에 머물면서 비구들에게 네 가지 가르침2)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지 가르침이란 성스러운 계율[聖戒], 성스러운 정신통일[聖定], 성스러운 지혜[聖慧], 성스러운 해탈[聖慧]를 말합니다. 즉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네 가지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동안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유전하고, 끝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고 말씀했습니다. 붓다는 또한 반대로 이러한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아 그것에 통달한 사람은, 생존에 대한 갈애를 단절하고 생존의 원인을 멸진함으로써 다시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다 마을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붓다께서는 핫티가마(Hatthigāma, 象村, 코끼리 마을), 암바가마(Ambagāma, 菴婆羅村, 망고 마을), 잠부가마(Jambugāma, 閻浮村, 장미사과나무 마을)를 거쳐 보가나가라(Bhoganagara, 善伽城)에 도착하였습니다.

[대반열반경]의 여러 이본(異本)들에서는 모두 빠딸리가마(Pātaligāma)에서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3)에 이르는 사이에 붓다께서 통과한 마을이나 도시, 강의 명칭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효와 순서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팔리어로 씌어진 [대반열반경]에는 베살리를 지나서 벨바, 반다 두 마을을 거쳐 핫티, 암바, 잠부 마을을 통과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산스끄리뜨어 단편에서는 바이살리 다음에 도르나 마을 등 네 마을을 들고 있으며, 또 이어서 찾아간 마을들의 순서도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4)

2) 사대교법(四大敎法, Mahāpadesa)

팔리어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붓다께서는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보가나가라에 도착하여, 그 마을에 있는 아난다 쩨띠야(Ānanda cetiya, 靈廟)에 머물렀습니다. 이곳에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사대교법(Mahāpadesa)이란 ①이것은 붓다로부터 친히 들었다. ②이것은 규정에 맞는 교단에서 들었다. ③이것은 많은 장로들로부터 들었다. ④이것은 한 사람의 유능한 장로로부터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붓다 입멸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불설(佛說, Buddhavacana)에 관한 분쟁을 예견하고 설한 것입니다. 즉 분쟁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처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붓다 입멸 후 일어난 분쟁을 계기로 사대교법의 가르침을 만들고 붓다의 유훈으로 가탁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붓다 입멸 후 불설에 관한 논쟁이 있었음은 틀림없을 것입니다.5)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3개월 후 입멸할 것임을 알리고 나서 사대교법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대교법은 불교 경전이 어떻게 불설로서 성립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대교법은 불설과 비불설을 구분하는 아주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경우, 그 자리에서 바로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낱낱의 말을 잘 생각한 끝에 성전(聖典)의 문구와 비추어본 다음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

어떤 견해가 불설이라고 주장될 때, 네 가지 종류의 근거가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즉 붓다, 승가, 일군의 장로, 한 사람의 장로의 이름을 들어 불설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 진위 여부는 경(經)과 율(律)에 의거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가 주장하는 내용이 경과 율에 합치하면 불설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불설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7) 안양규의 견해에 의하면, “이 사대교법은 비구승가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붓다의 사후 그를 대신하게 될 권위적인 표준 경전을 만들기 위한 장치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8)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사대교법의 성립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사후, 법과 율은 붓다를 대신하는 각각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준비가 마련되어야 했다. [대반열반경]에 보이는 사대교법(Mahāpadesa)은 바로 법과 율을 텍스트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진실한 법과 율을 경전화함으로써 교단 내에 있을 수 있는 교리와 계율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사대교법이다. 구전 전통에서 표준적인 텍스트를 만드는 작업은 비구들이 승원 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승원이라는 조직은 비구들이 이러한 작업을 물리적으로 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9)

3) 쭌다의 공양

한편 붓다께서 보가나가라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빠바(Pāvā)10)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빠바 마을에 도착하여 대장장이 쭌다(Cunda, 純多, 淳陀)의 망고 동산에 머물렀습니다. 대장장이 쭌다는 붓다와 비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물 중에 ‘수까라-맛다바(Sūkara-maddava)’라는 음식도 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준비한 음식 가운데 ‘수까라-맛다바’가 있는 것을 아시고, 대장장이 쭌다에게 “이 음식은 나에게만 주고, 비구들에게는 다른 음식을 올리도록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수까라-맛다바는 구덩이를 파 그곳에 모두 묻도록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이것을 먹더라도 완전하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악마와 범천, 신들과 인간들, 사문과 바라문을 포함하더라도 붓다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쭌다에게 법을 설하여 기쁘게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쭌다가 공양한 음식을 먹고, 붓다는 중병에 걸려 붉은 피가 쏟아지고 죽을 정도의 격심한 고통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붓다는 정념(正念), 정지(正智)로써 그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도 차츰 치유될 무렵, 붓다는 비구들과 함께 꾸시나라로 향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붓다는 대장장이 쭌다가 올린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물을 드시고, 질병에 걸려 입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음식이 붓다의 마지막 공양이었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이 음식물을 드시고 ‘붉은 피가 쏟아지고 죽음에 가까운 심한 통증이 일어났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에 의하면 붓다는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 때문에 격렬한 설사를 겸한 병에 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붓다는 쭌다가 올린 음식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취한 마지막 음식물과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모든 불자들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한 논의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와 담마빨라(Dhammapāla, 佛護)와 같은 대주석가들의 해석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11) 그런데 대부분의 논문에서는 붓다가 취한 마지막 음식물, 즉 ‘수까라-맛다바’가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안양규는 “많은 논문들이 이 음식물은 고기가 아니라 채소라고 밝히려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육식보다 채식을 높이 평가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나 육식을 금지하는 불교도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다”12)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때 붓다께서 드신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이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대반열반경]을 주석한 붓다고사는 ‘수까라-맛다바’를 ‘연한 어린 돼지고기’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두 사람의 견해도 소개했는데, 첫 번째 견해는 마치 우유가 음료수의 총칭이듯이, 수까라-맛다바는 소에서 생산된 5종의 액체와 부드럽게 익힌 쌀을 섞어 만든 요리들의 총칭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수까라-맛다바가 일종의 불사약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13)

또한 주석가 담마빨라는 또 다른 두 가지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즉 첫째는 돼지고기 그 자체가 아니라 돼지들이 짓밟은(maddita) 죽순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돼지들이 밟고 다니는 장소에 생긴 버섯이라는 것입니다.14) 산스끄리뜨본에서는 ‘정결하고 훌륭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15)

또한 팔리어 [대반열반경]에 해당하는 한역본들에서는 각기 다르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대반열반경](대정장1, p.197a)에서는 다미음식(多美飮食)이라 하고, [반니원경](대정장1, p.193b)에서는 농미(濃美)로, [유행경](대정장1, p.18b)은 전단수이(栴檀樹耳)로,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대정장24, p.390b)에서는 종종상묘향미음식(種種上妙香美飮食)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반니원경](대정장1, p.167c)에서는 음식 이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수까라-맛다바’가 무슨 음식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붓다 입멸 이후부터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습니다. 주석서에서조차 여러 가지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석을 한 5세기경에는 이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오늘날 프랑스 요리에 사용하는 알 버섯[松露]이라는 설도 있습니다.16) 어쨌든 ‘수까라-맛다바’는 매우 특별난 음식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무슨 음식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여러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수까라-맛다바’는 돼지고기류이거나 버섯류 둘 중 어느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들은 굳이 이 음식을 버섯이라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으로 인해 붓다께서 입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반대로 그렇지 않다는 입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7) 이를테면 팔리어 [대반열반경]을 주석한 붓다고사는 쭌다가 올린 마지막 공양물은 결코 붓다의 치명적인 질병의 원인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즉 붓다고사는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수까라-맛다바’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야사까 유우소우(宮坂宥勝)의 견해에 의하면, 붓다의 사인(死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까라-맛다바’라는 특별한 음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께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일으킨 ‘수까라-맛다바’는 무엇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가공의 음식이라고 해도 좋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18)

“요컨대 극단적으로 말하면 여래가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죽음에 이르게 한 음식이라면 야생돼지의 고기, 버섯 그 외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죽음에 이를 병에 걸리게 한 소화불량에 의해 드러나게 된 여래의 불완전성이 역설적으로 법신의 영원성을 멋지게 논증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수까라맛다바 전설의 비밀은 이와 같이 이해될 수 있다.”19)라고 미야사까 유우소우는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4) 뿟꾸사와의 만남

한편 꾸시나라로 가던 도중에 붓다께서는 길옆에 있는 어떤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물을 길어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지금 막 5백 대의 수레가 지나갔기 때문에 물이 흐려서 도저히 마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다시 아난다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난다는 붓다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시냇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방금 5백 대의 수레가 지나갔으므로 물이 흐려져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은 깨끗하게 맑아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난다는 이러한 현상은 붓다의 신통력 혹은 위신력 때문이라고 경탄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알라라 칼라마(Ālāra Kālāma)의 제자이며 말라족의 아들인 뿟꾸사(Pukkusa)가 꾸시나라에서 빠바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붓다를 친견하고 선정(禪定)의 깊이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자신의 경험담을 일러 주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화들은 부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Notes:



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236.
2) 이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네 가지 가르침은 지계(持戒, sīla), 선정(禪定, samādhi), 지혜(智慧, paññā), 해탈(解脫, vimutti)를 의미한다.
3) 붓다의 入滅地인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는 Kuśinagara(拘尸那擖羅), Kuśinagarī, Kuśigrāma, Kuśigrāmaka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Kusinārā의 말라족 사람들은 자신들을 Kosinārakā(D.Ⅱ, p.167)라고 불렀다.
4) 中村元, 앞의 책, p.238.
5) 안양규, 「佛說과 非佛說의 구분: 불교 표준 경전의 시도」, [韓國佛敎學] 제34집(서울 : 한국불교학회, 2003), p.49.
6)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339.
7) 안양규, 「佛說과 非佛說의 구분: 불교 표준 경전의 시도」, p.51.
8) 안양규, 「佛說과 非佛說의 구분: 불교 표준 경전의 시도」, p.64.
9) 안양규, 「개인의 자율과 승단의 유지: 붓다의 유훈을 중심으로」, [불교문화연구] 제1집(경주 : 동국대학교 불교사회문화연구원, 2000), p.29.
10) 빠바(Pāvā, Skt. Pāpā, 波婆)는 현재의 Patna 지역의 Pāwapuri 마을과 동일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자이나교의 개조 Mahavīra가 죽었다고 한다.[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149, n.1.]
11) R. Gordan Wasson, “The Last Meal of the Buddha”,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Vol. 102, No.4(1982). 이 논문에서서는 마지막 음식과 관련된 최근까지의 논문 목록들을 수록하고 있다.
12) 안양규, “붓다의 마지막 공양과 그의 入滅”, [伽山學報] 제9호(서울 :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출판부, 2002), pp.12-13.
13) Dīghanikāya-atthakathā(PTS), Vol. Ⅱ, p.568.
14) Udāna-atthakathā(PTS), p.399.
15) 안양규, 「붓다의 마지막 공양과 그의 入滅」, p.13 참조.
16) 宮坂宥勝 지음, 안양규 옮김, [부처님의 생애] 만다라총서 2 (서울 : 불교시대사, 1992), p.232.
17) 안양규, 「붓다의 마지막 공양과 그의 入滅」, pp.13-14.
18) 宮坂宥勝 지음, 안양규 옮김, 앞의 책, p.234.
19) 宮坂宥勝 지음, 안양규 옮김, 위의 책, p.234.

입멸의 땅-꾸시나라

1) 꾸시나라의 살라 숲에서

붓다께서 빠바(Pāvā) 마을에서 대장장이 쭌다가 올린 음식으로 말미암아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뒤, 붓다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히란냐와띠(Hiraññavati)강(江) 맞은편 언덕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에 있는 말라족의 우빠왓따나(Upavattana)동산의 살라(Sālā, 紗羅) 숲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신 붓다께서는 한 쌍의 살라 나무[紗羅雙樹]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도록 침상을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붓다께서는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발을 겹치고, 사자가 누운 것과 같은 자세[獅子臥]로 누워서 정념(正念)과 정지(正智)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라 숲은 때 아닌 꽃이 만발하고, 그 꽃잎이 붓다의 온몸에 떨어졌으며, 허공에서는 만다라바(mandārava) 꽃과 짠다나-쭌나(candana-cunnā, 栴檀의 粉末)가 흩뿌려졌습니다. 또한 천상의 악기와 음악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러한 것들이 여래를 존경하고 공양하는 것이 아니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이 진리와 그것에 따라 일어나는 것을 향해 올바르게 행동하며, 진리에 수순하여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깊게 여래를 경애, 존경, 숭배하며 공양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때 우빠바나(Upavāna) 존자가 정면에서 붓다께 부채질을 해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우빠바나 존자에게 정면을 피해 비켜서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신들이 붓다를 뵙고자 몰려 왔지만, 우빠바나 존자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허공의 신들과 지상의 신들은 붓다의 입멸을 슬퍼하여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탐욕을 떠난 신들만은 ‘조건지어진 것은 모두 덧없는[無常] 것이다. 변해가는 것을 어찌 머물도록 하겠는가?’1)라고,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보전하여 슬픔을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안거를 마친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비구들이 붓다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붓다를 친견하고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여래 사후에는 신심 돈독한 양가의 자제들이 여래를 기념할 만한 네 곳을 보면서,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면서 깊은 종교심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네 곳이란 붓다의 탄생지(誕生地), 성도지(成道地),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 입멸지(入滅地)를 말합니다. 후일 이 네 곳이 붓다의 사대성지(四大聖地)가 되었습니다.2)

한편 아난다는 붓다께 출가한 사람은 여인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고 여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여인을 가능한 한 보지 않는 것이 좋고, 보았더라도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좋으며, 말을 걸어올 때에는 바른 사념을 보전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2) 붓다의 유해와 장례법

아난다 존자는 붓다의 사후 세존의 유해를 어떻게 모시면 좋겠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이에 대해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너희 출가자는 여래의 유해를 모시겠다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말라. 너희들은 단지 출가 본래의 목적을 향하여 바른 마음으로 노력하며,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면서 지내야 하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에 대해 각별하게 깊은 숭경의 생각을 품고 있는 현자가 왕족이나 바라문, 자산자들 가운데 있을 것이니라. 그러한 이들이 여래의 유해를 모실 것이니라.”

이어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의 장례 절차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붓다께서는 전륜성왕(轉輪聖王)3)의 장례법(葬禮法)에 따라 다비(茶毘)를 행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비가 끝나면 큰 길이 교차하는 사거리 중앙에 여래를 기념하는 탑을 건립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탑에 꽃다발과 훈향(薰香), 말향(抹香) 등을 공양한 다음, 합장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면 오랜 동안 안락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탑을 건립하여 공양할 만한 하다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네 종류의 사람이란 바른 깨달음을 얻은 자[正等覺者], 홀로 깨달음을 얻은 자[獨覺], 여래의 제자[聲聞], 전륜성왕 등을 가리킵니다.

한편 아난다 존자는 세존의 입멸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난다 존자에게 붓다는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아난다여! 너는 나의 입멸을 한탄하거나 슬퍼해서는 안 되느니라. 아난다여! 너에게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일지라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別離)의 상태, 변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여!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져 가는 것, 그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라.

아난다여! 너는 참으로 오랜 동안 사려 있는 행동으로 나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 게으름피우지 않고 일심으로 시봉하였느니라. 너는 또한 사려 있는 말과 사려 있는 배려로써 나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 게으름피우지 않으면서 일심으로 시봉하였다. 아난다여! 너는 많은 복덕을 지은 것이다. 이제부터는 게으름피우지 말고 수행에 노력하여 빨리 번뇌 없는 경지에 도달함이 좋으리라.”

이어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아난다는 훌륭한 시자였으며, 특별히 네 가지 훌륭하고 뛰어난 점이 있다’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붓다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꾸시나라와 같은 외진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열반에 드시지 마시고, 짬빠(Campā), 라자가하(Rājagaha), 사왓티(Sāvatthi), 사께따(Sāketa), 꼬삼비(Kosambi), 바라나시(Bārānasi) 등과 같은 큰 마을에서 열반하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난다 존자는 큰 마을에는 왕족, 바라문, 자산가의 대집회장 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래께 깊은 숭경(崇敬)의 생각을 품고 있는 이도 많이 있으므로 여래의 사리[遺骨] 공양도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붓다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제지했습니다. 비록 꾸시나라가 지금은 이처럼 작은 마을이지만, 옛적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자세한 전후 사정을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3) 마하수닷사나왕(大善見王) 이야기

옛날 마하수닷사나(Mahā-Sudassana, 大善見王)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로운 왕이었으며, 사방의 세계를 평정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고, 그의 영토는 안정되어 있었으며, 그는 전륜성왕의 상징인 일곱 가지 보물[七寶]4)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하수닷사나 왕의 수도였던 꾸사와띠(Kusāvati)가 바로 이곳 ‘꾸시나라’라는 것입니다. 이 왕궁은 동서로 12요자나(yojana, 거리의 단위), 남북으로 7요자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꾸사와띠 수도는 매우 풍요롭고 번창하였습니다. 많은 백성을 거느려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또 그만큼 풍부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신들의 왕궁인 아랄까만다(Ālakamanda)는 매우 풍요롭고 번성하여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또 거리가 약카(yakkha, 夜叉)5)들로 붐비니, 그만큼 풍요로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꾸사와띠 도읍지도 아랄까만다처럼 풍부하고 번성하며, 또 많은 백성을 거느리니 그만큼 풍부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꾸사와띠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열 가지 음향, 즉 코끼리 울음소리, 말 울음소리, 수레 굴러가는 소리, 큰북 소리, 작은북 소리, 비나(vīna)6) 소리, 노래 소리, 요(鐃) 소리, 바라 소리, 그리고 ‘먹고 마시고 먹어치워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예전의 꾸사와티는 이처럼 번화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꾸시나라가 결코 외진 시골 마을이 아님을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지금 곧장 꾸시나라 마을로 가서, 꾸시나라의 말라족 사람들에게 오늘 밤 세존께서 이 마을의 외곽에서 열반에 드실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혹시 나중에 세존께서 자기 마을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그 마지막 순간에 세존을 뵙지 못하였다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붓다의 분부대로 아난다 존자가 꾸시나라 마을에 도착했을 때, 꾸시나라 말라족 사람들은 마침 마을의 일로 집회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붓다께서 입멸하고자 하니, 입멸 전에 친견하라고 말라족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말라족 사람들은 세존의 입멸을 안타까워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존의 처소로 찾아와서 모두 세존의 발에 머리를 대고 마지막 예경을 드렸습니다. 말라족 사람들의 친견은 그날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4) 수밧다의 귀의

그때 마침 꾸시나라 마을에는 수밧다(Subhadda)라는 편력행자(遍歷行者)7)가 머물고 있었는데, 편력행자 수밧다는 오늘 밤 사문 고따마께서 열반에 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편력행자 수밧다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나이든 스승 가운데 스승이라고 할 만한 편력행자들이 여래, 존경받을 만한 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께서 예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문 고따마는 바로 그 여래, 존경받을 만한 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인데, 그 사문 고따마께서 오늘 밤이 깊어 열반에 드실 듯하다. 나에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는데, 나의 믿는 바로는 저 사문 고따마라면 그 의문을 해결해 줄 것이고, 진리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라고.

그래서 편력행자 수밧다는 서둘러 살라 숲으로 달려가서 붓다께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세상에는 사문, 바라문으로서 모임이나 교단을 가지거나 혹은 교단의 스승으로 잘 알려지고 명성도 있으며, 교조(敎祖)로 불러지는 매우 존경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사옵니다. 예를 들면 뿌라나 깟사빠(Pūrana Kassapa),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ī), 빠꾸다 깟짜야나(Pakudha Kaccāyana),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tthiputta), 니간타 나타뿟따(Nigantha Nāthaputta)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은 모두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어느 누구가 깨닫지 못한 것이옵니까? 아니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깨달았고, 그 밖의 어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것이옵니까?”

이러한 수밧다의 질문에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밧다여! 그 어떤 법(法)과 율(律)이든지, 거기에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제1, 제2, 제3, 제4의 성인다운 진정한 수행자가 없을 것이다.8) 그렇지만 그 어떤 법과 율이든지, 거기에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발견된다면, 제1, 제2, 제3, 제4의 성인다운 진정한 수행자가 있을 것이다. 수밧다여! 이제 내가 가르쳐주는 이 법과 율에서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발견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1, 제2, 제3, 제4의 성인다운 진정한 수행자가 있다. 다른 스승들이 가르치는 종교 체계는 진정한 수행자가 없다. 수밧다여! 만약 비구들이 바르게살기만 한다면, 세상에서 존경받는 아라한이 될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수닷다는 곧바로 붓다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 몸담고 있던 사람의 개종은 4개월이 경과해야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시기가 오면 수밧다를 출가시켜 구족계(具足戒)를 수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리하여 편력행자 수밧다는 세존으로부터 출가를 허락받았습니다. 그 후 수밧다 존자는 구족계를 받았으며, 곧바로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홀로 머물면서 게으름피우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윽고 훌륭한 집안의 아들들이 바로 그 때문에 집을 나와 가족을 거느리지 않고 출가한 목적인 위없이 청정한 행(行)의 완성에 스스로 눈뜨고 알며 달성하여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수밧다 존자는 ‘나의 생존 조건을 다했다. 나의 청정한 행[梵行]은 완성되었다. 내가 해야 할 바는 모두 끝났다. 나는 이제 다시 윤회의 생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밧다 존자는 존경받을 만한 이[阿羅漢]의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밧다 존자는 세존의 마지막 직제자(直弟子)가 되었던 것입니다.▣

Notes:



1) Dīgha Nikāya(PTS), Vol. Ⅱ, p.140; “Yā pana tā devatā vīta-rāga, ta satā sampajānā adhivāsenti: ‘Anicca Samkhārā, tam kut’ettha labbhā?’ ti.”
2) 사대성지(四大聖地)의 탄생지는 까삘라밧투 근처의 룸비니이고, 성도지는 비하르주의 붓다가야이다. 초전법륜지는 베나레스(현재의 사르나트) 근처의 이시빠따나이고, 입멸지는 꾸시나라(혹은 꾸시나가라)이다.
3) 전륜성왕(轉輪聖王): 인도의 이상적인 제왕. 이 제왕이 출현할 때는 허공에서 마차가 나타나 이 마차의 先導에 의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세계를 평정한다. 불교에서는 전륜성왕 역시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三十二相(32가지의 큰 특징)을 갖추고 칠보(七寶)를 소유하며, 세속세계의 지배자로서 진리세계의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4) 전륜성왕이 소유하고 있다는 일곱 가지 보물[七寶]은 다음과 같다. 즉 ①주권의 상징인 신비한 수레바퀴[輪寶], ②참으로 출륭한 코끼리[象寶], ③말[馬寶], ④아름다운 아내[女寶], ⑤진귀한 보석[珍寶], ⑥재상[主兵臣寶], ⑦조언자[居士寶] 등이다.
5) 야차(夜叉, yaksa)는 용건(勇健)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①팔부중(八部衆)의 하나. 수미산 중턱의 북쪽을 지키는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의 권속으로, 땅이나 공중에 살면서 여러 신(神)들과 불법(佛法)을 수호한다는 신(神). ②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친다는 사나운 귀신.
6) 비나: 하프와 유사한 현악기로서 베다시대부터 사용했다는 전통악기. 때로는 ‘비파(琵琶)’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7) 편력행자(遍歷行者): 일정하게 머무는 곳 없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수행하는 자.
8) 제1, 제2, 제3, 제4의 성인다운 진정한 수행자란 예류과(預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성자를 일컫는 말이다.

다비와 사리의 분배

1) 붓다의 마지막 말씀

세존께서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너희들 가운데 일부는 ‘스승의 말씀은 끝났다.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스승은 없다’라는 생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떠나면 너희들을 위해 내가 설하고 가르쳤던 법(法)과 율(律)을 스승으로 삼아라.

아난다여! 지금까지는 비구들이 서로 ‘벗이여!’라고 부르지만, 내가 떠나면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선배 비구는 후배 비구를 이름이나 성, 혹은 ‘벗이여!’라고 불러도 좋지만, 후배 비구는 선배 비구를 ‘존자시여!’ 혹은 ‘구수자(具壽者)여!’라고 불러야 한다.

아난다여! 내가 떠난 뒤 만일 승단이 원하면 사소한 계[小小戒]는 버려도 상관없다.

아난다여! 내가 떠나면 찬나(Channa) 비구에게는 브라흐마-단다(brahma- danda, 梵壇罰)을 부가하라. 세존이시여! 그러나 브라흐마-단다란 무엇입니까? 아난다여! 찬나가 생각한 바를 말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른 비구들은 그에게 말하거나 훈계하거나 충고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브라흐마-단다이니라.”1)

위에서 인용한 경전의 말씀은 붓다께서 입멸 직전 아난다 존자에게 직접 지시한 내용입니다. 먼저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멸한 뒤에는 법과 율이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불멸후에는 오직 법과 율이 불교교단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붓다는 상가 내부의 선배와 후배간의 호칭을 개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여기서 ‘벗이여!’는 팔리어 ‘아부소(āvuso)’를, ‘존자시여!’는 ‘반떼(bhante)’를, ‘구수자(具壽者)여!’는 ‘아야스마(āyasmā)를 번역한 것입니다. 지금도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또한 붓다는 자신이 입멸한 후 승단이 원한다면 사소한 계[小小戒]는 파기해도 좋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은 불교교단의 계율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그때 사소한 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붓다께 여쭈어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 입멸 후 아난다는 장로들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왜 그때 좀 더 분명하게 붓다의 의향을 여쭈어보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승단에서는 붓다 입멸 직후 이 안건에 대해 심사숙고했는데, 붓다의 의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계의 항목은 하나도 없애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2)

이어서 붓다는 찬나 비구에게 브라흐마-단다(brahma-danda, 梵壇罰)3)을 부가하라고 아난다 존자에게 지시했습니다. ‘브라흐마-단다’는 어떤 한 사람에게 전체의 다수가 일체 말하거나 권고하거나 지시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벌칙 가운데 가장 무거운 중벌(重罰)에 해당됩니다.

찬나 비구는 고따마(Gotama)와 같은 날 태어난 친구로서 고따마의 마부였습니다.4) 그는 출가 후에도 단체정신이 결핍하여 이따금 승단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는 고집 센 외고집의 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마지막 훈육상의 법령인 브라흐마-단다를 찬나 비구에게 부가하였던 것입니다. 팔리어 『율장』「소품」에 의하면, 나중에 아난다 존자는 이 사실을 승단에 보고하였으며, 승단에서는 그 집행을 아난다 존자에게 위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Kosambī)의 고시따라마(Ghositārāma)에 머물고 있던 찬나 비구를 찾아가서, 붓다의 지시에 따라 승단에서 브라흐마-단다를 부가한다고 통고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찬나 비구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고 합니다. 찬나 비구에게 이러한 사회적 형벌이 정식으로 부가되었기 때문에 그는 대중과 떨어져 혼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해졌으며, 더욱 정진하여 궁극의 목표인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합니다.5)

다시 붓다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부처이건 법이건 교단이건 도(道)이건 수행 방법이건, 의문이 있는 사람은 서슴지 말로 물어라. 뒷날에 가서,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 물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물어라.”

이렇게 말하고 두 번, 세 번 질문이 없는가 하고 반복해서 물었지만 비구들은 어느 누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붓다는 다시 “여래를 존경한 나머지, 걱정하여 묻지 않아서는 안 된다. 벗이 벗에게 묻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질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질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붓다는 모두 의심 없음을 확인하고, 이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최후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비구들이여!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모든 현상(諸行)은 소멸해 가는 것이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이다.”6)

붓다께서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들려준 말씀은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제자들을 향한 붓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2) 붓다의 입멸

이처럼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기고, 곧바로 선정(禪定)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초선정(初禪定)에 들고, 초선정에서 일어나 제2선정에 들고, 다시 제3선정를 거쳐 제4선정으로 명상을 높여 갔습니다. 그리고 제4선정에서 일어나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으로, 공무변처정에서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으로, 식무변처정에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으로, 무소유처정에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으로, 비상비비상처정에서 상수멸정(想受滅定)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때 아난다 존자는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존자에게 붓다께서 벌써 입멸하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누룻다 존자는 붓다께서 입멸하신 것이 아니라 상수멸정에 드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붓다께서는 반대로 상수멸정에 잠시 머문 다음, 비상비비상처정에 들고, 무소유처정, 식무변처정, 공무변처정, 제4선정, 제3선정, 제2선정, 초선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초선정에서 제2선정으로, 제2선정에서 제3선정으로, 제3선정에서 제4선정으로 들어갔습니다. 제4선정에서 나오자 곧 입멸하셨습니다.

붓다께서 입멸하시자 대지는 크게 진동하고 천둥이 울렸습니다. 그 모습은 매우 두려워 털끝이 곤두설 정도였습니다. 그때 범천 사함빠띠(Brahma Sahampati)가 시를 읊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마침내 육신을 버리게 되리라.
마치 세상에서 비할 바가 없는 사람,
이와 같은 스승, 힘을 갖춘 수행실천자,
정각(正覺)을 얻은 그 분이 사라지듯이.

또한 신들의 왕인 삭까(Sakka, 帝釋天)도 시를 읊었습니다.

아아!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생멸의 성질로 이루어진 것은
생하고 멸한다.
이것들의 진정이 평온이다.7)

아누룻다 존자와 아난다 존자도, 신들에게 화답하여 각각 게송을 읊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구들은 스승이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을 보고 슬퍼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탐욕을 떠난 비구들은 정념(正念), 정지(正智)하고 슬픔을 견디며 모든 것은 무상하다. 어떻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3) 붓다의 유해 화장

그날 밤 아누룻다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꾸시나라로 가서 말라족에게 붓다의 입멸 사실을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한 사람을 데리고 집회 중인 말라족의 의사당으로 가서 붓다의 반열반 소식을 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스승이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을 한탄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여 머리를 풀어 헤치고 울고, 팔을 벌리고 울고, 바위처럼 엎어져 울고, 데굴데굴 굴러서 울며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스승은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은 모든 향과 꽃장식, 악기를 모아 공양하였습니다. 말라족의 공양은 7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7일째 되던 날 꾸시나라의 남쪽 교외에서 다비를 하기로 하고 말라족의 족장 8명이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붓다의 유해를 옮기려고 했지만,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아누룻다 존자에게 여쭈었습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신들에게 다른 의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들은 마꾸따-반다나(Makuta-bandhana)라는 말라족의 영묘(靈廟, cetiya)에서 다비(茶毘, jhāpeti)할 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들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는 말라족 사람들에게 전륜성왕의 장례법에 따라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때 마하깟싸빠(Mahā-kassapa, 大迦葉) 존자는 오백 명의 대비구와 함께 빠바(Pāva)에서 꾸시나라로 오고 있었습니다. 큰 길을 따라 오는 도중에 만다라 꽃을 손에 들고 오는 어떤 아지바까(ājivaka, 邪命外道) 교도를 만났습니다. 마하깟싸빠 존자가 그에게 붓다의 소식을 물었습니다. 그는 붓다가 7일 전에 입멸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만다라 꽃은 그곳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탐욕을 떠나지 못한 비구들은 울며 소리 지르고, 탐욕을 떠난 비구들은 무상의 이치를 되새기며 참았습니다. 이때 수밧다(Subhadda)8)라는 늙은 비구가 이제 대사문이 떠났기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망발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때문에 마하깟싸빠는 불멸후 곧바로 제1결집을 개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말라족의 네 명의 족장은 장작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도저히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이것은 신들의 뜻이다. 마하깟싸빠 존자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마하깟싸빠 존자가 붓다의 발에 정례하지 않는 한 불붙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하깟싸빠 존자와 비구 무리가 도착했을 때 비로소 화장이 시작되었습니다. 꾸시나라의 말라족 사람들은 다비를 마친 세존의 유해[사리]를 자기네 공회당에 안치하고, 7일 동안 세존의 사리에 정중히 예배 공양하였습니다.

4) 사리의 분배

마가다(Magadha)의 아자따삿뚜(Ajātasattu) 왕은 붓다의 입멸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아자따삿뚜 왕은 “세존은 무사계급이고, 나 또한 무사계급이다. 그러니 나는 세존의 사리 일부를 받아서 그 분을 기리는 축제를 열 자격이 있다”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또한 베살리(Vesāli)의 릿짜비(Liccavi)족, 까삘라왓투(Kāpilavatthu)의 석가(Sakya)족, 앗라깟빠(Allakappa)의 부리(Buli)족, 라마가마(Rāmagāma)의 꼴리(Koli)족, 베타디빠(Vethadīpa)의 바라문도, 빠바(Pāva)의 말라(Malla)족도 똑같은 이유로 사리의 분배를 요구했습니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은 세존께서 우리 마을에서 입멸하셨기 때문에 사리를 나누어 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도나(Dona) 바라문이 중재에 나서, 사리를 평등하게 8등분하여 각 종족에게 배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는 도나 바라문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삡팔리와나(Pipphalivana)의 모리야(Moriya)족도 붓다의 입멸 소식을 듣고 뒤늦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분배를 끝낸 뒤였기 때문에 그들은 재를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와 같이 붓다의 유골[사리]는 8등분 하여 각 종족에게 나누어졌으며, 또한 유골을 담았던 항아리와 재를 가지고 가서 여러 곳에 사리탑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8개의 사리탑(舍利塔)과 병탑(甁塔), 회탑(灰塔) 등 모두 10개의 탑(塔, stūpa)이 각지에 건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팔리어 『대반열반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한역의 여러 자료를 대조해보면, 사소한 점에서는 전승의 다름이 있지만, 큰 줄거리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팔리문 『대반열반경』에는 최후에 시가 실려 있습니다.9)

1898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펩페(W.C. Peppé)가 까삘라왓투 옛터 근처 삐프라와(Piprāhwa)에서 납석(蠟石)으로 된 완전한 한 개의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사리호(舍利壺) 뚜껑에 새긴 명문(銘文)에는 붓다의 유골을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붓다의 유골을 수습한 뼈항아리[骨壺]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1957년 알테카르(A.S. Altekar)가 베살리의 옛터에서 사리호를 발견했는데, 명문은 없지만 붓다의 유골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대반열반경』에서 설한 사리팔분(舍利八分)의 기사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Notes:



1) Dīgha-nikāya(PTS) Vol. Ⅱ, p.154.
2) T.W. and C.A.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London : Pali Text Society, 1910), p.171, no.2.;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359.
3) 브라흐마-단다(brahma-danda, 梵壇罰)는 형벌의 한 종류인데, ‘가장 무거운 벌’(the highest penalty)이다. 이것은 ‘잠깐 동안의 사형 선고’에 해당된다. [Vinaya Pitaka(PTS) Vol. Ⅱ, p.290; Dīgha-nikāya(PTS) Vol. Ⅱ, p.154; Dhammapadatthakathā(PTS), Vol. Ⅱ, p.112; T.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 ed., Pali-English Dictionary(PTS), p.493.]
4) G.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New Delhi :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Originally Published in 1937), Vol.Ⅰ, p.923.
5) Vinaya Pitaka(PTS), Vol. Ⅱ, p.292; T.W. and C.A.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London : Pali Text Society, 1910), p.172, no.1.
6) Dīgha-nikāya(PTS), Vol. Ⅱ, p.156;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m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ti.’ Ayam Tathāgathassa pacchimāvāca.”
7) Dīgha-nikāya(PTS), Vol. Ⅱ, p.157; “Aniccā vata sam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m vūpasamo sukho’ti.”[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8) 이 수밧다는 붓다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던 편력행자 수밧다와 다른 인물이다.
9) 주석서에 의하면, 이 시는 탐바빤니(Tambapanni) 섬, 지금의 스리랑카의 장로들이 지은 것으로 여긴다.

붓다의 뛰어난 비구 제자들

1) 훌륭한 스승과 그 제자들

어떤 한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문하에 어떤 제자들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 스승의 인물됨과 인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는 반드시 훌륭한 제자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스승이신 붓다의 제자 중에는 매우 특출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 의해 스승의 가르침은 끊어지지 않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잘 전승되어 왔습니다.

붓다 재세시(在世時)의 초기교단에서는 뛰어난 출가 제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훌륭한 재가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초기교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훌륭한 업적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명성은 이미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특히 초기교단에서 출가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하여 거의 대부분 깨달음을 이루었으며, 또한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 붓다께서 교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미 훌륭한 교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 상가(Sangha, 僧伽)는 당시 사회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모범적인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붓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훌륭한 장점들을 여러 대중 앞에서 칭찬하였습니다. 팔리어로 씌어진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nikāya, 增支部)]와 한역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의하면, 붓다는 그 제자들 중에서 여러 가지 점에서 각각 제일가는 모범적인 제자들의 이름과 그 장점들을 열거하고 격찬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제자들의 장점을 본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팔리 니까야에 언급된 비구들

먼저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출가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내 제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출가한 사람은 안냐꼰단냐(Aññākondañña, 憍陳如)이다. 지혜제일은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1)이며, 초능력의 으뜸은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 大目犍連)2)이고, 청빈으로 으뜸은 마하깟싸빠(Mahākassapa, 大迦葉)3)이고, 세속을 초월한 눈을 가진 이는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4)이고, 가장 높은 가문의 출신은 밧디야 깔리고다야뿟따(Bhaddiya Kāligodhāyaputta)이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제일은 라꾼따까 밧디야(Lakunttaka-bhaddiya)이다. 사자후(獅子吼)를 하기로 제일인 자(者)는 삔돌라 바라드와자(Pindola Bhāradvāja)이며, 설교자(說敎者)로서 제일인 자는 뿐냐 만따리뿟따(Punna Mantāniputta)5)이고, 짧게 설해진 것을 상세하게 해설하기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6)이다.”7)

“비구들이여! 내 제자로서 생각으로 형상(形相)을 나타내기를 제일 잘하고, 마음을 해탈하는데 있어 교묘(巧妙)하기로 제일인 자는 쭐라빤타까(Cullapanthaka, 周利槃特)이다. 지(智)에 있어 해탈하는데 교묘하기로 제일인 자는 마하빤타까(Mahāpanthaka)이다. 평화로운 마음에 머물기로 제일이고 보시를 받을만하기로 제일인 자는 수부띠(Subhūti, 須菩提)8)이다. 숲 속에 살기로 제일인 자는 레와따 카디라와니야(Revata Khadiravaniya)이다. 마음의 평안이 제일인 자는 깡카레와따(Kankharevata)이다. 싫어함이 없이 부지런히 노력하기로 제일인 자는 소나 꼴리위사(Sona Kolivīsa)이다. 아름다운 말을 하기로 제일인 자는 소나 꾸띠깐냐(Sona Kutikanna)이다. 탁발을 잘 받기로 제일인 자는 시와리(Sīvali)이며, 믿는 마음이 굳기로 제일인 자는 밧깔리(Vakkali)이다.”9)

“비구들이여! 내 제자로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기로 제일인 자는 라훌라(Rāhula, 羅睺羅)10)이다. 신심으로써 출가한 제일인 자는 랏타빨라(Ratthapāla)이다. 맨 처음으로 음식표를 탄 자는 꾼다다나(Kundadhāna)이다. 제일가는 시인은 방기사(Vangīsa)이며, 모든 사람을 분기(奮起)시키기로 제일인 자는 우빠세나 방간따뿟따(Upasena Vangantaputta)이다. 숙소 배정의 제일인 자는 닷바 말라뿟따(Dabba Mallaputta)이다. 제천인(諸天人)이 좋아하기로 제일인 자는 삘린다왓차(Pilindavaccha)이며, 기민(機敏)한 천분(天分)을 가지기로 제일인 자는 바히야 다루찌리야(Bāhiya Dārucīriya)이다. 설법이 정성스럽기로 제일인 자는 꾸마라깟싸빠(Kumāra-kassapa)이며, 지장(支障)없는 배당(配當)을 찬양하기로 제일인 자는 마하꼿티따(Mahākotthita)이다.”11)

“비구들이여! 내 제자로서 가장 많이 설법을 듣고 깊이 깨닫고, 기억력도 좋고, 태만하지 않고 그리고 또 내 옆에서 시봉하기로 제일인 자는 아난다(Ānanda, 阿難陀)12)이다. 많은 제자들로 둘러 쌓여있는 자는 우루벨라깟싸빠(Uruvela-kassapa)이며, 집집마다 기쁨을 주기로 제일인 자는 깔루다이(Kāludāyī, 迦樓陀夷)이며, 앓지 않는 것으로 제일인 자는 밧꾸라(Bakkula)이다. 전생에 관한 투시력이 제일인 자는 소비따(Sobhita)이며, 승단의 규율을 지키기로 제일인 자는 우빨리(Upāli, 優波離)13)이다. 여성 수행자들을 가르쳐 인도하기로 제일인 자는 난다까(Nandaka)이며,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등 제근(諸根)의 문(門)을 잘 지키기로 제일인 자는 난다(Nanda, 難陀)이다. 제자들을 교도하기로 제일인 자는 마하깟삐나(Maha-kappina)이며, 불에 관해 교묘하기로 제일인 자는 사가따(Sāgata)이며, 문제를 내세우기로 제일인 자는 라다(Radha)이며, 녹의(鹿衣)를 입기로 제일인 자는 모가라자(Mogharāja)이다.”14)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비구들

다음은 한역의 [증일아함경]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출가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내 성문(聲聞) 중의 첫째 비구로서, 너그럽고 어질며 아는 것이 많아, 능히 잘 권하고 교화하여 성스러운 무리[聖衆]들을 붙들어 기르면서 그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 이는 바로 아약구린(阿若拘隣)15) 비구요, 처음으로 법 뜻을 듣고 네 가지 진리[四諦]를 생각한 이도 바로 아약구린 비구요, 능히 잘 권하고 인도하여 사람들을 복으로 제도하는 이는 바로 우다이(優陀夷) 비구요, 빨리 신통을 이루어 중간에 후회가 없는 이는 바로 마하남[摩訶男]16) 비구요, 항상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발로 땅을 밟지 않는 이는 바로 선주(善肘) 비구요, 허공을 타고 다니면서 교화하되 영화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이는 바로 파파(婆破)17) 비구이니라.

천상에 살기를 좋아하고 인간에 살지 않는 이는 바로 우적(牛跡) 비구요, 항상 오로(惡露)의 더럽다는 생각으로 관하는 이는 바로 선승(善勝) 비구요, 성스러운 무리[聖衆]들을 붙들어 기르되 네 가지로 공양하는 이는 우유비가섭(優留毘迦葉)18) 비구요, 마음이 고요하여 모든 결박을 항복 받는 이는 강가섭(江迦葉)19) 비구요, 모든 법을 밝게 관찰해 조금도 집착이 없는 이는 바로 상가섭(象迦葉)20) 비구이니라.”21)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로서, 얼굴이 단정하고 걸음이 조용한 이는 바로 마사(馬師)22) 비구요, 지혜가 끝이 없어 모든 의심을 푸는 이는 바로 사리불(舍利弗)23) 비구요, 신령스런 발을 가볍게 들어 시방으로 날아다니는 이는 바로 대목건련(大目揵連)24) 비구요, 용맹스레 노력하여 고행을 견디는 이는 바로 이십억이(二十億耳) 비구요, 열두 가지 두타(頭陀)의 얻기 어려운 행을 행하는 이는 바로 대가섭(大迦葉)25) 비구이니라.

하늘눈이 제일[天眼第一]이어서 시방을 두루 보는 이는 바로 아나율(阿那律)26) 비구요, 좌선해 삼매에 들어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이는 바로 이왈(離曰) 비구요, 능히 두루 권해 재강(齋講)을 베푸는 이는 바로 타라파마라(陀羅婆摩羅) 비구요, 승방을 세워 승려를 초대하여 베풀어 주는 이는 바로 소타라바마라(小陀羅婆摩羅) 비구요, 귀하고 큰 종족으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는 이는 바로 라타파라(羅吒婆羅)27) 비구요, 진리를 잘 분별해 도를 펴 연설하는 이는 바로 대가전연(大迦旃延)28) 비구이니라.”29)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로서, 중대[籌]를 잘 받아 금하는 법을 어기지 않는 이는 군두파막(軍頭婆漠)30) 비구요, 외도(外道)를 항복 받고 정법(正法)을 행하는 이는 바로 빈두로(賓頭盧)31) 비구요, 병을 잘 보아 약을 주는 이는 바로 식(識) 비구요, 옷과 음식 등 네 가지로 공양하는 이도 바로 식(識) 비구요, 게송을 잘 지어 여래의 덕을 찬탄하는 이는 바로 붕기사(鵬耆舍)32) 비구요, 언론으로 밝게 가려 의심이 없는 이도 바로 붕기사 비구요, 네 가지 변재를 얻어 어려운 질문에도 곧 대답하는 이는 바로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33) 비구이니라.

깨끗하고 한가한 곳에 머물고 대중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는 바로 견뢰(堅牢) 비구요, 걸식하고 욕을 참으면서 비바람을 피하지 않는 이는 바로 난제(難提) 비구요, 혼자 고요히 앉아 알뜰히 도를 생각하는 이는 바로 금비라(金毘羅) 비구요, 한 번 앉아 한 번 먹고 자리를 옮기지 않는 이는 바로 시라(施羅) 비구요, 세 가지 옷을 가지고 먹고 쉬기를 떠나지 않는 이는 바로 부미(浮彌) 비구이니라.”34)

이 외에도 수많은 비구들의 이름과 그 특징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였습니다. 한역의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제자들의 이름 중에는 전혀 원어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의 출가 제자 부분과 한역의 [증일아함경] 제3권 제4 제자품(弟子品)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한역 [증일아함경]은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보다 후대에 성립된 것이 거의 확실하며, 현재의 형태는 대승불교 성립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증일아함경] 제1권 서품(序品)과 제2권 광연품(廣演品)에는 대승불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법신상주설(法身常住說)과 정토사상(淨土思想)의 편린(片鱗)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3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붓다께서 제자들의 이름과 장점을 언제 설했느냐에 따라 그 대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증일아함경]의 첫 번째에는 우루벨라 깟싸빠(Uruvela-kassapa, 優樓頻螺迦葉), 나디 깟싸빠(Nadi-kassapa, 那提迦葉), 가야 깟싸빠(Gayā-kassapa, 伽耶迦葉) 등의 삼형제가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붓다께서 당시 결발(結髮)의 행자(行者)였던 깟싸빠(Kassapa, 迦葉) 삼형제를 교화하여 그들이 이끌고 있던 천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전도선언(傳道宣言)’ 직후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와 같은 2대 제자들이 승단에 들어오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어쨌든 붓다의 제자들은 각기 타고난 능력과 기질을 살려 그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데 한 몫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붓다의 뛰어난 제자들은 각자 자기의 특색을 살려가며 수행과 교화에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승단이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방불교에서는 붓다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열 명을 가려 뽑아 십대제자(十大弟子)36)라고 하여 높이 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십대제자로 정형화 된 것은 후대일 것입니다. 원래 붓다께서 제자들의 장점을 강조한 것은 각자의 능력과 특질을 높이 평가한 것일 뿐, 결코 제자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대제자들만이 붓다의 최고 제자였다는 선입견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붓다께서 언제 제자들의 이름과 장점을 언급했느냐에 따라 그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십대제자의 명단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Notes:



1)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는 십대제자 중 지혜제일(智慧第一)로 알려져 있다. 마가다국의 바라문 출신이다. 원래 목갈라나와 함께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Sañjaya)의 수제자였으나, 최초의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이었던 아삿지(Assaji, 阿說示, 馬勝)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250명의 동료들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2)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 大目犍連)는 십대제자 중 신통제일(神通第一)로 알려져 있다. 마가다국의 바라문 출신이다. 원래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사리뿟따와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탁발하는 도중에 바라문교도들이 던진 돌에 맞아 입적하였다.
3) 마하깟싸빠(Mahā-kassapa, 大迦葉)는 십대제자 중 두타제일(頭陀第一)로 알려져 있다. 마가다국 출신으로, 엄격하게 수행하였다. 바라문의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가정생활을 싫어하여 아내와 함께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붓다가 입멸한 직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 때, 의장이 되어 그 모임을 주도하였다.
4)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는 십대제자 중 천안제일(天眼)제일(第一)로 알려져 있다.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난다(Ānanda, 阿難), 난다(Nanda, 難陀) 등과 함께 출가하였다. 붓다의 마지막 입멸을 지켜보았다.
5) 뿐냐 만따리뿟따(Punna Mantāniputta)는 십대제자 중 설법제일(說法第一)로 알려져 있다. 바라문 출신이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붓다의 설법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인도의 서쪽 지방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다가 거기서 입적하였다.
6)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는 십대제자 중 논의제일(論議第一)로 알려져 있다. 인도의 서쪽에 있던 아반띠(Avanti) 나라의 끄샤뜨리야 출신이다. 왕의 명령에 따라 붓다를 그 나라로 초청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출가하였다. 깨달음을 이룬 후 귀국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교리 해석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7)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23.
8) 수부띠(Subhūti, 須菩提)는 십대제자 중 해공제일(解空第一)로 알려져 있다. 사위국(舍衛國)의 바라문 출신이다. 그는 공(空)의 이치를 설하는 경(經)에 자주 등장하여 설법하였다.
9)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24.
10) 라훌라(Rāhula, 羅睺羅)는 십대 제자 중 밀행제일(密行第一)로 알려져 있다. 붓다의 친아들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을 방문했을 때 출가하였다. 지켜야 할 것은 스스로 잘 지켰다고 한다.
11)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24.
12) 아난다(Ānanda, 阿難)는 십대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로 알려져 있다.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을 방문했을 때, 난다, 아누룻다 등과 함께 출가하였다. 붓다의 나이 50여 세에 시자(侍者)로 추천되어 붓다가 입멸할 때까지 시봉하면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었다. 붓다께 여성의 출가를 세 번이나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붓다가 입멸한 직후 개최된 제1차 결집 때, 법을 송출하였다. 이때 아난다 존자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세존의 법을 암송하면, 여러 비구들은 아난다의 기억이 맞는지를 확인하여 잘못이 있으면 정정한 후, 모두 함께 암송함으로써 경장(經藏)이 결집되었다.
13) 우빨리(Upāli, 優波離)는 십대제자 중 지계제일(持戒第一)로 알려져 있다. 우빨리는 노예계급인 수드라 출신이다. 석가족의 이발사였는데, 아난다, 난다, 아누룻다 등이 출가할 때, 그들의 머리털을 깎아 주기 위해 따라갔다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계율에 엄격하였다. 붓다가 입멸한 직후, 라자가하 밖의 칠엽굴에서 행한 제1차 결집 때, 계율에 대한 모든 사항을 암송함으로써 율장(律藏)의 성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4)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p.24-25.
15) 아약구린(阿若拘隣)은 팔리어 안냐꼰단냐(Aññā-kondañña)의 음역이다. 안냐꼰단냐를 아약교진여(阿若憍陳如) 혹은 지자교진여(智者憍陳如)라고도 번역한다. 안냐(aññā)는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최초 다섯 비구 중 한 명이다.
16) 마하남[摩訶男]은 팔리어 마하나마(Mahānāma)의 음역이다. 최초 다섯 비구 중 한 명이다.
17) 파파(婆破)는 팔리어 밧빠(Vappa)의 음역이다. 최초 다섯 비구 중 한 명이다.
18) 우유비가섭(優留毘迦葉)은 팔리어 우루벨라 깟싸빠(Uruvela-kassapa)의 음역이다. 우루벨라 깟싸빠는 우루빈나가섭(優樓頻螺迦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19) 강가섭(江迦葉)은 팔리어 나디 깟싸빠(Nadi-kassapa)의 음역이다. 나디 깟싸빠는 나제가섭(那提迦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팔리어 나디(nadi)는 강(江)을 뜻한다. 따라서 강가섭은 의역과 음역의 혼합형이다.
20) 상가섭(象迦葉)은 팔리어 가야 깟싸빠(Gayā-kassapa)의 음역이다. 가야 깟싸빠는 가야가섭(伽耶迦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팔리어 가야(gayā)는 코끼리[象]를 뜻한다. 따라서 상가섭은 위의 강가섭과 마찬가지로 의역과 음역의 혼합형이다.
21) [增一阿含經] 3권, 제4 弟子品(大正藏 2권, p.557上)
22) 마사(馬師)는 최초 다섯 비구 중 한 명인 앗사지(Assaji, 阿說示, 馬勝)를 가리키는 것 같다.
23) 사리불(舍利弗)은 팔리어 사리뿟따(Sāriputta)의 음역이다.
24) 대목건련(大目揵連)은 팔리어 마하 목갈라나(Mahā-moggallāna)의 음역이다.
25) 대가섭(大迦葉)은 팔리어 마하 깟싸빠(Mahā-kassapa)의 음역이다.
26) 아나율(阿那律)은 팔리어 아누룻다(Anuruddha)의 음역이다.
27) 라타파라(羅吒婆羅)는 팔리어 랏타빨라(Ratthapāla)의 음역이다.
28) 대가전연(大迦旃延)은 팔리어 마하 깟짜나(Maha-kaccāna)의 음역이다.
29) [增一阿含經] 3권, 제4 弟子品(大正藏 2권, p.557中)
30) 군두파막(軍頭婆漠)은 군두파한(軍頭婆漢)이라고도 표기한다.
31) 빈두로(賓頭盧)는 삔돌라 바라드바자(Pindola Bhāradvāja)의 음역이다.
32) 붕기사(鵬耆舍)는 방기사(Vangīsa)의 음역이다.
33)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는 마하꼿타따(Mahā-kotthita)의 음역이다.
34) [增一阿含經] 3권, 제4 弟子品(大正藏 2권, p.557中)
35) 한글대장경 [증일아함경] 1권, pp.3-6 참조.
36) 십대제자는 ①지혜제일(智慧第一)인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 ②신통제일(神通第一)인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 大目犍連), ③두타제일(頭陀第一)인 마하깟싸빠(Mahākassapa, 大迦葉), ④해공제일(解空第一)인 수부띠(Subhūti, 須菩提), ⑤설법제일(說法第一)인 뿐냐(Punna, 富樓那), ⑥천안제일(天眼第一)인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⑦논의제일(論議第一)인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 ⑧지계제일(持戒第一)인 우빨리(Upāli, 優婆離), ⑨밀행제일(密行第一)인 라훌라(Rāhula, 羅睺羅), ⑩다문제일(多聞第一)인 아난다(Ānanda, 阿難)를 일컫는다.

붓다의 뛰어난 비구니 제자들

1) 초기의 비구니 상가

불교의 상가(Sangha, 僧伽)는 비구와 비구니의 이부중(二部衆)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상가는 비구 상가보다 나중에 성립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구 상가와 비구니 상가에 우열(優劣)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불교교단사에서 비구니 상가가 성립된 것은 특기할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인도사회에서 여성이 집을 나와 집 없는 유행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유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어려웠던 점은 당시 바라문들의 반발이었습니다.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게 되면 바라문의 사회제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이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양모(養母)였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의 간청을 받아들여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였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비구니 상가가 탄생했기 때문에, 아주 특출한 비구니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의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니 상가가 없어졌지만, 붓다시대에는 비구니 상가가 잘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불교 교단에서 비구니들의 활동상황은 여러 문헌에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2) 팔리 니까야에 언급된 비구니들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nikāya, 增支部)]에는 붓다의 뛰어난 제자들에 대해 붓다께서 직접 언급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에서 비구니 제자들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나의 여성문(女聲聞, sāvikā) 비구니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다린 이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 비구니요, 큰 지혜를 가진 이는 케마(Khemā) 비구니요, 초능력을 갖춘 이는 웃빨라완나(Uppalavannā) 비구니요, 계율에 능숙한 이는 빠따짜라(Patacāra) 비구니요, 설법을 매우 잘한 이는 담마딘나(Dhammadinnā) 비구니요, 선정에 뛰어난 이는 난다(Nandā) 비구니이니라.

지칠 줄 모르고 정진한 이는 소나(Sonā) 비구니요, 투시력을 가진 이는 사꿀라(Sakulā) 비구니요, 속히 통달한 이[速通達]는 밧다 꾼달라께사(Bhaddā Kundalakesā) 비구니요, 과거의 생을 기억한 이는 밧다 까삘라니(Bhaddā- kapilānī) 비구니요, 대신통력을 얻은 이는 밧다 깟짜나(Bhaddā-kaccānā) 비구니요, 조잡한 가사를 두른 이는 끼사고따미(Kisāgotamī) 비구니요, 믿음을 실현한 이는 시갈라마따(Sigālamātā) 비구니이니라.”1)

위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에 언급된 열세 명의 비구니들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겠습니다.

①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 비구니는 붓다의 양모이며,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아내였습니다. 그녀가 최초로 상가에 들어옴으로써 비구니 상가가 형성되었습니다.

② 케마(Khemā) 비구니는 빔비사라(Bimbisāra) 왕의 왕비로서 외모가 아름답기로 유명했습니다. 붓다는 신통력으로 아름다운 요정(妖精)을 불러내어, 그 요정이 늙어가는 과정을 그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만심을 꺾고 붓다께 귀의했습니다.

③ 웃빨라완나(Uppalavannā) 비구니는 몸이 푸른 연꽃의 색깔과 비슷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테리가타(Therīgāthā, 長老尼偈)]에 그녀가 남긴 시 12편이 실려 있는데, 참으로 눈물겹습니다.2)

④ 빠따짜라(Patacāra) 비구니는 율장의 숙련자(vinaya-pitake cinna-vasī)였습니다. 그녀는 많은 여성 제자들을 두었습니다. [테리가타]에 그녀가 남긴 시 5편이 실려 있으며,3) 그녀의 제자들이 읊은 시들도 많이 실려 있습니다.

⑤ 담마딘나(Dhammadinnā) 비구니는 비사카(Visākha)의 아내였는데, 남편의 동의를 얻어 출가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황금 가마에 아내를 태워 비구니 승원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녀는 한적한 곳에 머물며 정진하여 네 가지 무애해(無碍解, patisambhidā)와 함께 아라한과를 이루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붓다께 예배드리기 위해 라자가하로 돌아갔는데, 전 남편 비사카가 그녀에게 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과 답변이 [쭐라웨달라 숫따(Cūlavedalla Sutta, 有明小經)]4)에 실려 있습니다.5) [테리가타]에 그녀의 시 1편이 남아있습니다.6)

⑥ 난다(Nandā) 비구니는 순다리 난다(Sundari Nandā) 또는 자나빠다 깔랴니(Janapada-kalyānī)로 불렸습니다. 자나빠다 깔랴니는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라의 미인[國美] 또는 ‘지방의 미인’ 으로 번역됩니다. 그녀도 케마 비구니와 마찬가지로 붓다의 신통력에 의해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⑦ 소나(Sonā) 비구니는 열넷 명이라는 많은 자녀를 두었던 때문에 바후뿟띠까(Bahuputtikā)라고 불렸습니다. 그녀는 전 재산을 자식들에게 넘겨준 뒤, 자식들의 박대에 충격을 받고 출가하였습니다. 그녀는 늦게 출가하였기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어서 아주 열심히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법구경] 제115게7)는 소나 비구니에게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입니다.

⑧ 사꿀라(Sakulā) 비구니는 빠꿀라(Pakulā) 또는 바꿀라(Bakulā)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제따와나(Jetavana, 祇園) 봉정식에 참석했다가 붓다를 뵙고 믿음을 일으켜 재가 신자로 신행하다가 나중에 출가하였습니다. 그녀는 명상을 통해 아라한과를 얻었으며, 붓다로부터 천안(天眼)제일로 칭송받았습니다.

⑨ 밧다 꾼달라께사(Bhaddā Kundalakesā) 비구니는 처음 자이나교에 입단하여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버렸습니다. 그런 뒤 다시 빽빽하게 곱슬머리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곱슬머리’라는 뜻의 꾼달라께사(Kundalakesā)가 그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이나교도들의 지혜가 빈약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자이나교를 떠나 아라한과를 얻기 위해 승단에 들어왔습니다.

⑩ 밧다 까삘라니(Bhaddā-kapilānī) 비구니는 [아빠다나(Apadāna, 譬喩經)]에 의하면,8) 그녀의 어머니는 수찌마띠(Sucīmatī)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까삘라(Kapila)였습니다. 그래서 ‘까삘라의 딸’이라는 뜻의 까삘라니(Kapilānī)로 불렸습니다.9) 그녀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 의해 승단에 들어왔습니다.

⑪ 밧다 깟짜나(Bhaddā-kaccānā) 비구니는 그녀의 머리까락이 황금색이었기 때문에 깐짜나(Kañcanā, 黃金)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라훌라(Rāhula, 羅睺羅)의 어머니, 즉 야소다라(Yasodharā)라고 합니다. 하지만 야소다라라는 이름은 여기에 언급되어 있지 않고, [테리가타]나 [아빠다나]에도 이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아빠다나]10)에 ‘야소다라’라는 이름이 한번 나옵니다.11)

⑫ 끼사고따미(Kisāgotamī) 비구니는 고따마족 출신이었는데, 죽은 아들과 그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겨자씨를 구하고자 쓸데없이 집집마다 찾아다녔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12)

⑬ 시갈라마따(Sigālamātā) 비구니는 미얀마 필사본에서는 삔갈라마따(Pingala-mātā)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테리가타]에는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정확히 ‘시갈라(Sigāla)의 어머니’로 불렸습니다. [아빠다나]13)에서 그녀는 싱갈라까 마따(Singālaka-mātā)와 시갈라까 마따(Sigālaka- mātā)로 불렸습니다. 시갈라는 여섯 방위에 예배했던 청년이었는데, 붓다께서 그에게 설한 가르침이 바로 [시갈로와다 숫따(Sigālovāda Sutta, 敎誡尸迦羅越經)]입니다. 그녀는 믿음에 의해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비구니들의 명단은 비교적 초기에 두각을 나타낸 비구니들입니다. [테리가타]에는 92명의 장로니(長老尼)들의 이름과 시구(詩句)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소개한 13명은 이 중에서 극히 일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명의 비구니 중에서 밧다 깟짜나와 시갈라마따를 제외한 나머지 비구니들이 남긴 시가 [테리가타]에 실려 있습니다.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비구니들

다음은 한역의 [증일아함경] 제5 비구니품(比丘尼品)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비구니 제자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내 성문(聲聞)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오랫동안 집을 나와 도를 배워 국왕의 존경을 받는 이는 대애도구담미(大愛道瞿曇彌)14) 비구니요, 지혜롭고 총명한 이는 식마(識摩)15) 비구니요, 신족(神足)이 으뜸이어서 모든 신들을 감동시키는 이는 우발화색(優鉢華色)16) 비구니요, 두타법의 열한 가지 제한에 걸림 없이 행하는 이는 기리사구담미(機梨舍瞿曇彌)17) 비구니요, 하늘눈이 으뜸이어서 걸림 없이 비추는 이는 사구리(奢拘梨)18) 비구니이니라.

앉아 참선해 선정에 들어 마음이 흩어 지지 않는 이는 사마(奢摩) 비구니요, 이치를 분별해 널리 도를 펴는 이는 파두란사나(波頭蘭闍那) 비구니요, 계율을 받들어 가져 범하지 않는 이는 파라차나(波羅遮那)19) 비구니요, 믿음의 해탈을 얻어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이는 가전연(迦旃延) 비구니요, 네 가지 변재를 얻어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최승(最勝) 비구니이니라.”20)

(2)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자기 전생의 수없는 겁의 일을 아는 이는 발타가비리(拔陀迦毘離) 비구니요, 얼굴이 단정하여 남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는 혜마사(醯摩闍) 비구니요, 외도를 항복받아 바른 교를 세우는 이는 수나(輸那) 비구니요, 이치를 분별하여 널리 갈래를 설명하는 이는 담마제나(曇摩提那)21) 비구니이니라.

더러운 옷을 입고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이는 우다라(優多羅) 비구니요, 모든 감관이 고요하고 그 마음이 한결같은 이는 광명(光明) 비구니요, 옷을 잘 바루어 언제나 법다운 이는 선두(禪頭) 비구니요, 여러 가지를 논의하되 의심이나 걸림이 없는 이는 단다(檀多) 비구니요, 게송을 잘 지어 여래의 덕을 찬탄하는 이는 천여(天與) 비구니요, 많이 듣고 널리 알며 은혜와 지혜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이는 구비(瞿卑) 비구니이니라.”22)

(3)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항상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사람 속에 살지 않는 이는 무외(無畏) 비구니요, 몸을 괴롭혀 걸식하면서 귀천을 가리지 않는 이는 비사거(毘舍佉) 비구니요, 한 곳에 한 번 앉아 쉽게 자리를 옮기지 않는 이는 발타바라(拔陀婆羅) 비구니요, 두루 다녀 구걸하면서 사람을 널리 제도하는 이는 마로가리(摩怒呵利) 비구니요, 도의 결과를 빨리 이루어 중간에 지체하지 않았던 이는 타마(陀摩) 비구니요, 세 가지 옷을 가져 끝내 버리지 않는 이는 수타마(須陀摩) 비구니이니라.

항상 나무 밑에 앉아 뜻을 쉽게 바꾸지 않은 이는 협수나(拹須那) 비구니요, 늘 노지(露地)에 머물면서 덮개 있는 집에 머물기를 생각하지 않는 이는 사타(奢陀) 비구니요, 호젓하고 고요한 곳을 즐겨 사람 속에 있지 않는 이는 우가라(優迦羅) 비구니요, 항상 풀 자리에 앉아 옷차림을 하지 않는 이는 이나(離那) 비구니요, 다섯 가지 누더기 옷을 입고 차례로 걸식하는 이는 아로파마(阿奴波摩) 비구니이니라.”23)

(4)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쓸쓸한 무덤 사이를 즐기는 이는 우가마(優迦摩) 비구니요, 생물들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많은 여행을 한 이는 청명(淸明) 비구니요, 도에 이르지 못한 중생을 슬피 여기는 이는 소마(素摩) 비구니요, 도를 얻은 이를 기뻐하고 소원이 일체에 미치는 이는 마타리(摩陀利) 비구니요, 모든 행을 단속하여 뜻이 멀리 떠나지 않는 이는 가라가(迦羅伽) 비구니이니라.

공(空)을 지키고 빈 것을 잡아 ‘없음’을 깨달은 이는 제바수(提婆修) 비구니요, 마음이 생각 없음을 즐겨해 모든 집착을 버린 이는 일광(日光) 비구니요, 구함 없기를 닦아 익히어 마음이 항상 넓은 이는 말나바(末那婆) 비구니요, 모든 법에 의심이 없어 한량없이 사람을 제도하는 이는 비마달(毘摩達) 비구니요, 진리를 널리 설명해 깊은 법을 분별하는 이는 보조(普照) 비구니이니라.”24)

(5)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마음에 욕됨을 참는 것을 품어 땅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하는 이는 담마제(曇摩提) 비구니요, 사람을 잘 교화해 시주 모임을 만들게 하는 이는 수야마(須夜摩) 비구니요, 자리를 준비하는 이도 또한 수야마(須夜摩) 비구니요, 마음이 아주 평온해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이는 인타사(因陀闍) 비구니요, 모든 법을 밝게 관찰하되 만족할 줄 모르는 이는 용(龍) 비구니이니라.

뜻이 굳세고 용맹스러워 물들지 않는 이는 구나라(拘那羅) 비구니요, 물 삼매[水三昧]에 들어 일체를 두루 적시는 이는 바수(婆須) 비구니요, 불꽃 빛 삼매[焰光三昧]에 들어 모든 중생을 두루 비추는 이는 항제(降提) 비구니요, 오로(惡露)의 더러움을 관하여 연기(緣起)를 분별하는 이는 차바라(遮婆羅) 비구니요, 그의 모자람을 주어 여러 사람을 기르는 이는 수가(守迦) 비구니요, 내 성문 중에서 최후로 제일가는 비구니는 발타군타라구이국(拔陀軍陀羅拘夷國)25) 비구니이니라.”26)

위에서 인용한 한역 [증일아함경]의 제5 비구니품의 첫 번째 부분이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와 그 내용이 가장 비슷합니다. 그 나머지 부분에 언급된 비구니 스님들은 대부분 그 원래 이름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Notes:



1)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25.
2) Therīgāthā, v.224-235.
3) Therīgāthā, v.112-121.
4) Majjhima-nikāya(PTS), Vol. Ⅰ, p.299ff.
5)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Ⅰ, pp.1142-3.
6) Therīgāthā, v.12.
7) Dhammapada v.115; “성스러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는, 단 하루라도 부처님의 위없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알고 사는 것이 훨씬 낫다.”
8) Apadāna(PTS), Vol. Ⅱ, p.583 (vs.57).
9) G.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354, no.1.
10) Apadāna(PTS), Vol. Ⅱ, p.584.
11) F. L. Woodward, The Book of The Gradual Sayings(Anguttara-nikāya), London: PTS, 1932, p.22, no.3.
12) DhpA. Ⅱ, 270; SA. on S. I, 129.
13) Apadāna(PTS), Vol. Ⅱ, p.603f.
14) 대애도구담미(大愛道瞿曇彌)는 팔리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의 번역이다. 대애도(大愛道)는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ī)의 의역이고, 구담미(瞿曇彌)는 고따미(Gotamī)의 음역이다. 그러므로 대애도구담미(大愛道瞿曇彌)는 의역과 음역의 혼합형이다.
15) 식마(識摩)는 참마(讖摩)의 오식(誤植)으로 보이며, 이것은 팔리어 케마(Khemā)의 음역이다.
16) 우발화색(優鉢華色)은 팔리어 웃빨라완나(Uppalavannā)의 번역인데, 음역과 의역의 혼합형이다. 이것을 연화색(蓮華色)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팔리어 웃빨라(Uppala)는 푸른 연꽃[靑蓮]이고, 완나(vanna)는 색(色)이다. 그러므로 연화색은 완전한 의역이다.
17) 기리사구담미(機梨舍瞿曇彌)는 팔리어 끼사 고따미(Kisā-gotamī)의 음역이다.
18) 사구리(奢拘梨)는 팔리어 사꿀라(Sakulā)의 음역이다.
19) 파라차나(波羅遮那)는 팔리어 빠따짜라(Patācārā)의 음역이다.
20)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8下)
21) 담마제나(曇摩提那)는 팔리어 담마딘나(Dhammadinnā)의 음역이다.
22)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9上)
23)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9上-中)
24)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9中)
25) 발타군타라구이국(拔陀軍陀羅拘夷國)은 팔리어 밧다 꾼다라께사(Bhaddā Kundalakesā)의 번역이다.
26)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9中-下)

붓다의 뛰어난 남자신도

1) 팔리 니까야에 언급된 우바새

초기교단에서는 출가 제자들 외에도 훌륭한 재가신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초기불교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름과 그 활동 사항은 출가 제자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는 재가신자이면서도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성자와 다름없는 안심(安心)과 법열(法悅)을 얻은 사람들의 예가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안심을 얻은 남녀 재가 불제자가 강한 신앙의 힘이나 법력을 지녔다고 하는 사실도 자주 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 왕과 귀족을 비롯한 자산가들의 헌신적인 외호가 없었다면, 그토록 짧은 기간 내에 교단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초기불교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재가자들의 업적과 활동 상황들은 여러 문헌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nikāya, 增支部)]에는 붓다의 뛰어난 재가자의 이름과 그 특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나의 제자인 우빠사까(Upāsaka, 優婆塞)들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귀의(歸依)한 자는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ā)1) 두 상인이다. 보시자 중 제일은 수닷따(Sudatta) 장자 즉 아나타삔디까(Anāthapindika, 給孤獨長者)이다. 많은 설법자 가운데 제일은 찟따(Citta) 장자 즉 맛치까산디까(Macchikasandika)이다. 사섭법(四攝法)으로써 대중을 통솔하는 자 가운데 제일은 핫타까 알라와까(Hatthaka Ālavaka)이다. 음식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 가운데 제일은 석가족의 마하나마(Mahānāma)이다. 보시를 하여 마음을 기쁘게 한 자 가운데 제일은 베살리 출신의 욱가(Ugga) 장자이다. 승가를 가까이서 받든 자 가운데 제일은 핫티(Hatthi) 마을 출신의 욱가따(Uggata) 장자이다. 절대적 신앙을 가진 자 가운데 제일은 수라 암밧타(Sūra Ambattha)이다. 사람들로부터 총애를 받은 자 가운데 제일은 지와까 꼬마라밧짜(Jīvaka komārabhacca)이다. 신뢰할만한 자 가운데 제일은 나꿀라삐따(Nakulapitā) 장자이다.”2)

우선 위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에 언급된 남자신도들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겠습니다.

①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ikā) 두 상인은 불교역사상 최초로 불(佛)과 법(法) 이보(二寶)에 귀의한 재가신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장(律藏)에 의하면, 이 두 상인은 대상(隊商)을 이끌고 붓다가야를 지나가다가 그때 마침 깨달음을 이룬 붓다를 발견하고 최초로 공양을 올렸던 사람들입니다. 이때는 아직 교단이 성립되기 전이었습니다.

② 수닷따(Sudatta) 장자는 후일 ‘외로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는 뜻의 아나타삔디까(Anāthapindika, 給孤獨長者)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는 소유주 제다(Jeta) 왕자로부터 금 조각을 표면에 덮는 값을 치루고 제따 숲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에 기원정사라는 절을 세워 승단에서 사용하도록 붓다께 기증했던 사람입니다.

③ 찟따(Citta) 장자는 맛치까산디까(Macchikasandika)라고도 하는데, 그는 핫타까 알라와까(Hatthaka Ālavaka)와 함께 우바새로서 가장 이상적인 재가불자의 대표로 거론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훌륭한 설법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④ 핫타까 알라와까(Hatthaka Ālavaka) 장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에 관한 정보는 극히 단편적입니다. [팔리고유명사사전]에 의하면, “새벽녘에 알라와까(Ālavaka) 왕의 신하들이 어린 왕자인 알라와까 꾸마라(Ālavaka-Kumāra)를 약카(Yakkha, 夜叉)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데리고 왔다. 그들은 붓다의 설법이 끝날 무렵 약카가 기뻐하는 큰소리를 듣고 크게 경탄했다. 그들은 알라와까 왕에게 제물로 바칠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보고하고, 그 아이를 왕에게 건넸다. 그때 왕은 그 자리에 붓다께서 참석해 계셨기 때문에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 알라와까 왕은 그 아이를 붓다께 주었고, 붓다는 다시 그 아이를 왕의 심부름꾼으로 주었다. 그 소년은 약카의 손에서 붓다께 전해졌고, 다시 왕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었다’는 뜻의 ‘핫타까 알라와까’로 알려지게 되었다”3)라고 합니다.

그는 성장하여 진리의 길에 들어갔으며, 자비(慈悲),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사섭법(四攝法, cattāri sangaha-vatthūni)으로 대중을 통솔하여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었다고 합니다.4)

⑤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男) 장자는 아미또다나(Amitodana)의 아들로서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뒤를 이어 석가족의 왕위를 계승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의 형이었고, 붓다의 사촌이었습니다. 까삘라왓투의 석가족 사람들이 특별한 혈연관계에 있는 상가에 들어가고자 했을 때, 마하나마는 동생인 아누룻다의 출가를 출가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아누룻다는 세속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하나마는 상가에 크게 보시하였기 때문에 ‘비구들에게 보시한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것입니다.5)

⑥ 욱가(Ugga, 郁伽)는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 출신의 장자로서 키가 크고 도덕이 고상(uggatā)했기 때문에 ‘욱가(Ugga)’라고 불렸다고 합니다.6) 그는 위 [앙굿따라 니까야]의 명단에서 ‘모든 재가 보시자 가운데 가장 유쾌하게 베푼 자’라고 붓다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7) 그의 원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도덕적으로 인품이 고상하였고, 특히 매력 있는 성격 때문에 ‘욱가 쎗티(Ugga-setthi, 郁伽長者)’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 붓다를 친견하고 곧바로 소따빤나(Sotāpanna, 預流者)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아나가미(anāgāmin, 不還來者)가 되었다고 합니다.8)

⑦ 욱가따(Uggata)는 욱가(Ugga)로 불리는데, 앞에서 언급한 베살리 출신의 욱가가 아니고, 밧지(Vajji)국의 핫티가마(Hatthigāma, 코끼리 마을) 출신의 장자입니다. 욱가따는 자기의 집이 코끼리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핫티가마까(Hatthigāmaka)’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상가를 시중 든 사람들 가운데 제일이라고 붓다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는 쎗티(setthi, 財務官)에 임명되었습니다. 한때 붓다께서 여행 중 핫티가마를 방문하여 그곳의 나가와누야나(Nagavanuyyāna)에 머물고 계실 때였습니다. 욱가는 7일간의 음주 축연을 마치고 마지막에 이르러 무용수들과 함께 유원(遊園)으로 왔습니다. 그는 붓다를 뵙자 큰 부끄러움이 엄습하여 취기가 사라졌습니다. 붓다는 그에게 법을 설하였는데, 그는 곧바로 아나가미(anāgāmī, 不還來者)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즉시 자기의 무용수들을 떠나게 하고, 상가의 스님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밤에 신들이 그를 찾아와 여러 스님들이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자기의 보시를 수용할 저명한 스님들을 선발하라고 제안했으나, 그는 누구나 기뻐하도록 평등하게 보시하였습니다. 붓다는 한때 욱가는 여덟 가지 특별하고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말했습니다.9)

⑧ 수라 암밧타(Sūra-Ambattha)10) 장자는 확고한 믿음에 있어서는 붓다의 재가신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붓다에 의해 선언되었던 저명한 분입니다. [팔리고유명사사전]에 따르면, “그는 빠두뭇따라 붓다(Padumuttara Buddha) 시대에 태어났을 때에도 이러한 명성을 얻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 붓다시대에는 사왓티(Sāvatthi, 舍衛城)에 있는 은행가의 가문에 태어났으며, 이교도의 추종자가 되었다. 어느 날 붓다는 수라(Sūra)를 개종시킬 수 있는 적당한 시기임을 알고, 탁발을 위해 그의 집 문 앞에 섰다. 붓다에 대한 존경심이 없이 수라는 그를 안으로 초대했고, 편안한 자리에 앉도록 권했으며, 음식을 대접했다. 공양 후 붓다께서 설법을 마쳤을 때, 수라는 예류자(預流者)가 되었다. 얼마 후 붓다가 떠난 뒤, 붓다로 변장한 마라(Māra, 惡魔)가 수라를 방문하여 그가 먼저 말했던 잘못된 진술을 번복하기 위해 되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조건 지어진 것[諸行]은 무상하다. 하지만 어떤 상까라(sankāra, 行)는 영원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수라는 그가 마라임을 알고 그를 쫓아버렸다.”고 합니다.11)

⑨ 지바까 꼬마라밧짜(Jīvaka-Komārabhacca)는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그는 라자가하의 매춘부 살라와띠(Sālavatī)의 아들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자 곧바로 바구니에 담겨져 쓰레기 더미 위에 버려졌는데, 아바야라자꾸마라(Abhayarājakumāra)에 그곳에서 구조되었습니다. 아바야(Abhaya)가 물었을 때, 사람들이 ‘그는 살아 있다(jīvati)’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지와까(Jīvaka)라고 불렸으며, 왕자에 의해 데려왔기 때문에 꼬마라밧짜(Komārabhacca)로 불렸습니다.

그가 성장했을 때, 자신의 출신 내력을 알고, 아바야에게 알리지 않고 딲까실라(Takkasilā)로 가서 7년 동안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의 스승은 약간의 돈을 그에게 주고 의술을 펼칠 적당한 곳으로 가라고 보냈습니다. 그의 첫 번째 환자는 사께따(Sāketa)의 백만장자의 아내였는데, 그녀를 완치시킨 대가로 엄청난 돈과 남자 하인과 여자 하인, 그리고 말과 함께 대형 마차를 답례로 받았습니다. 그가 라자가하로 돌아왔을 때 아바야는 그가 머물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골치 아픈 병에 걸린 빔비사라(Bimbisāra) 왕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답례로 빔비사라왕의 오백 명의 부인이 장식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과 부인들 그리고 붓다를 비롯한 승단의 의사로 임명되었습니다.12)

⑩ 나꿀라삐따(Nakulapitā)의 부인은 나꿀라마따(Nakulamātā)입니다. 그는 박가(Bhagga)국의 숭수마라기리(Sumsumāragiri)에 살았습니다. 붓다께서 이 마을을 방문하여 베사깔라와나(Bhesakalāvana)에 머물고 있을 때, 그는 부인 나꿀라마따와 함께 붓다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그를 보자 ‘아들아!’ 왜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오백 번이나 보살의 전생의 부모였으며, 그보다 많은 생애를 가까운 친척이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그들에게 법을 설했을 때, 그들은 예류자(預流者)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늙었을 때, 붓다는 그들의 마을을 한번 더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붓다를 기쁘게 했으며, 각자 이생에서 붓다께 귀의한다고 말하고, 내생에서도 마찬가지로 자기들을 지켜줄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붓다는 상가의 모임에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붓다와 가장 친밀한 관계는 그들이라고 말했습니다.13)

[앙굿따라 니까야]의 다른 부분에서는 위에서 인용한 열 명의 재가신자 외에 다시 열 명의 재가신자 명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따와깐니까(Tavakannika), 뿌라나(Pūrana), 이시닷따(Isidatta), 산다나(Sandhāna), 위자야(Vijaya), 왓지야마히따(Vajjiyamahita), 멘다까(Mendaka), 와쎗타(Vāsettha), 아릿타(Arittha), 사락가(Sāragga) 등입니다.14) 이들은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성스러운 계율[聖戒], 성스러운 지혜[聖慧], 성스러운 해탈[聖解脫]을 통해 불사(不死)를 성취한 재가자들입니다.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우바새

다음은 한역의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3권 제6 청신사품(淸信士品)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남자신도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⑴ “내 제자 중의 첫째 우바새(優婆塞)로서, 처음으로 법의 약[法藥]을 듣고 성현의 진리를 성취한 이는 바로 삼과(三果)의 장사꾼이요, 지혜 제일은 바로 질다(質多)15) 장자요, 신덕(神德) 제일은 바로 건제아람(犍提阿藍)이요, 외도를 항복 받는 이는 바로 굴다(掘多) 장자요, 깊은 법을 잘 설명하는 이는 바로 우파굴(優波掘) 장자요, 늘 앉아 참선하는 이는 바로 가치아라바(呵侈阿羅婆)16)요, 악마 궁전을 항복 받은 이는 바로 용건(勇健) 장자요, 복과 덕을 많이 가진 이는 바로 사리(闍利) 장자요, 큰 시주(施主)는 바로 수달(須達)17) 장자요, 일가 친척이 많은 이는 바로 민토(泯兎) 장자이니라.”18)

⑵ “내 제자 중의 첫째 우바새로서, 이치 묻기를 좋아하는 이는 바로 생루바라문(生漏婆羅門)이요, 성품이 지혜롭고 밝은 사람은 바로 범마유(梵摩兪)요, 모든 부처님을 믿는 사자는 바로 어마마납(御馬摩納)이요, 몸에 ‘나(我)’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는 바로 희문금(喜聞笒) 바라문이요, 이론으로 이길 수 없는 이는 바로 비구(毘裘) 바라문이요, 게송을 잘 짓는 이는 바로 우파리(優波離)19) 장자요, 말이 빠른 이도 바로 우파리 장자이니라.

좋은 보배를 기꺼이 주어 아끼는 마음이 없는 이는 바로 수제(殊提) 장자요, 선(善)의 근본을 이룩한 이는 바로 우가비사리(優迦毘舍離)20)요, 묘한 법을 잘 설명하는 이는 바로 최상무외(最上無畏) 우바새요, 주장에 두려움이 없고 사람의 성질을 잘 살피는 이는 바로 두마대장영비사리(頭摩大將領毘舍離)이니라.”21)

⑶ “내 제자 중의 첫째 우바새로서, 은혜로운 베풀기를 좋아하는 이는 바로 비사왕(毘沙王)22)이요, 보시함에 소심하지 않는 이는 바로 광명왕(光明王)이요, 선(善)의 근본을 이룩한 이는 파사익왕(波斯匿王)이요, 뿌리 없는 좋은 믿음을 일으켜 환희심을 얻은 이는 바로 아사세왕(阿闍世王)이요,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해 뜻이 변하지 않는 이는 바로 우전왕(優塡王)이요, 바른 법을 받들어 섬기는 이는 바로 월광왕자(月光王子)이니라.

성스러운 무리를 받들어 공양하되 뜻이 언제나 평등한 이는 바로 기원왕자(祇洹王子)23)요, 항상 남 건지기를 좋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이는 바로 사자왕자(師子王子)요, 남을 잘 공경히 받들되 높고 낮음이 없는 이는 바로 무외왕자(無畏王子)요, 얼굴이 단정하여 남보다 뛰어난 이는 바로 계두왕자(鷄頭王子)이니라.”24)

⑷ “내 제자 중의 첫째 우바새로서, 항상 자비로운 마음을 쓰는 이는 바로 불니(不尼) 장자요, 마음으로 항상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바로 석가 종족 마하나마[摩訶納]25)요, 항상 기뻐하는 마음을 쓰는 이는 바로 석가 종족 발타(拔陀)요, 항상 보호하는 마음을 써서 착한 행을 잃지 않는 이는 바로 비사선(毘闍先) 우바새요, 욕됨을 잘 참는 이는 바로 사자(師子) 대장이니라.

여러 가지로 잘 이론하는 이는 바로 비사어(毘舍御)26) 우바새요, 성현의 침묵을 잘 행하는 이는 바로 난제바라(難提婆羅) 우바새요, 착한 행을 부지런히 잘 닦아 쉬지 않는 이는 바로 우다라(優多羅) 우바새요, 모든 감관이 고요한 이는 바로 천마(天摩) 우바새요, 내 제자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깨달은 이는 바로 구이나마라(拘夷那魔羅)이니라.”27)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팔리본과 한역본의 내용이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팔리본에서는 청신사의 사례가 하나뿐인데 반해서 한역의 [증일아함경]에서는 청신사품에 네 가지 사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역의 [증일아함경]은 후대에 많은 부분이 첨가되었습니다.▣

Notes:



1) 주석서의 철자는 Tapassa Bhallika이며, 버마 장경에는 Taphusso, Tapussa로 되어 있다. A.Ⅳ, p.438에는 Tapussa로 되어 있다.
2) Anguttara-nikāya(PTS), Vol.Ⅰ, pp.25-26; “Etad aggam bhikkhave mama sāvakānam upāsakānam pathamam saranam gacchantānam yadidam Tapassu Bhallikā vānijā. dāyakānam yadidam Sudatto gahapati Anāthapindiko. dhammakathikānam yadidam Citto gahapati Macchikasandiko. catūhi sangaha-vatthūhi parisam sanganhantānam yadidam Hatthako Ālavako. panitadāyakānam yadidam Mahānāmo Sakko. manāpadāyakānam yadidam Uggo gahapati Vesāliko. Sanghupatthākānam yadidam Uggato gahapati. aveccappasannānam yadidam Sūro Ambattho. puggalappasannānam yadidam Jīvako Komārabhacco. vissāsakānam yadidam Nakulapitā gahapati ti.”
3)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DPPN),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Vol.Ⅰ, p.292.
4) F. L. Woodward tr., The Book of the Gradual Sayings (London: PTS, 1932), Vol.Ⅰ, p.23, no.3.
5) DPPN, Vol.Ⅱ, p.514.
6) Kindred Sayings, Ⅳ, p.67; A.Ⅲ, p.49 ff(Ugga-sutta); Gradual Sayings, Vol. Ⅰ, p.23, no.5.
7) Kindred Sayings, Ⅳ, p.67, no.1.
8) DPPN, Vol.Ⅰ, p.334.
9) DPPN, Vol.Ⅰ, p.333.
10) 버마의 원전에 따르면, 수라붓도(sūrabuddho)와 수라반도(sūrabandho)로 표기되어 있다.
11) DPPN, Vol.Ⅱ, p.1274; Gradual Sayings, Vol.Ⅰ, p.23, no.7 참조.
12) DPPN, Vol.Ⅰ, p.957; Gradual Sayings, Vol.Ⅰ, p.24, no.1.
13) DPPN, Vol.Ⅱ, p.3; Gradual Sayings, Vol.Ⅰ, p.24, no.2.
14) Anguttara-nikaya(PTS), Vol.Ⅲ, p.451.
15) 질다(質多)는 팔리어 찟따(Citta)의 음역이다.
16) 가치아라바(呵侈阿羅婆)는 팔리어 핫타까 알라와까(Hatthaka Ālavaka)의 음역으로 보인다.
17) 수달(須達)은 팔리어 수닷따(Sudatta)의 음역이다.
18) [增一阿含經] 3권, 제6 淸信士品(大正藏 2권, p.559下)
19) 우파리(優波離)는 우파리(優婆離)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팔리어 우빨리(Upāli)의 음역이다.
20) 우가비사리(優迦毘舍離)는 팔리어 욱가 베살리까(Ugga Vesālika)의 음역이다.
21) [增一阿含經] 3권, 제6 淸信士品(大正藏 2권, pp.559下-560上)
22) 비사왕(毘沙王)은 병사왕(甁沙王)으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팔리어 빔비사라(Bimbisāra)의 음역이다. 빔비사라왕은 붓다 당시 마가다국의 국왕이었다.
23) 기원(祇洹)을 기환(衹桓)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24) [增一阿含經] 3권, 제6 淸信士品(大正藏 2권, p.560上)
25) 마하납(摩訶納)은 팔리어 마하나마(Mahānāma)의 음역이다.
26) 비사어(毘舍御)는 비사카(毘舍佉)라고도 표기한다.
27) [增一阿含經] 3권, 제6 淸信士品(大正藏 2권, p.560上)

붓다의 뛰어난 여자신도

1) 팔리 니까야에 언급된 우바이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nikāya, 增支部)]에는 붓다의 뛰어난 제자들의 이름과 그 특징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즉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순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붓다의 뛰어난 여자신도(우바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경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나의 제자인 우빠시까(Upāsikā, 優婆夷)들 가운데에서 뛰어난 여성신자로서 최초의 귀의자는 세나니(Senāni)의 딸인 수자따(Sujātā)이다. 승단에 공헌한 자 가운데 제일은 미가라(Migāra)의 어머니인 위싸카(Visākhā)이다. 박식한 자 중 제일은 쿳줏따라(Khujjuttarā)이다. 자비심을 가지고 머무는 자 중 제일은 사마와띠(Sāmāvatī)이다. 선정(禪定)의 힘을 가진 자 가운데 제일은 웃따라 난다마따(Uttarā Nandamātā)이다. 특별한 음식을 보시한 자 가운데 제일은 숫빠와사 꼴리야디따(Suppavāsā Koliyadhītā)이다. 간병인 가운데 제일은 숫삐야(Suppiyā)이다. 흔들리지 않는 성실한 이 가운데 제일은 까띠야니(Kātiyānī)이다. 친밀한 관계자 가운데 제일은 나꾸라마따(Nakulamātā)이다. 소문으로까지 믿음을 일으킨 자 중 제일은 꾸라라가라(Kuraraghara)의 우바이 깔리(kālī)이다.”1)

위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에 언급된 여자신도들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겠습니다.

① 수자따(Sujātā)는 우루웰라(Uruvela) 근처의 쎄나니 마을[將軍村]의 지주 쎄나니(Senāni)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반얀 나무(banyan-tree)의 신, 즉 수신(樹神)에게 만일 아들을 낳으면 밀크-라이스(milk-rice, 우유로 밥을 뭉친 것)를 공양 올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공양을 올릴 준비를 위해 뿐냐(Punnā)라는 하녀를 반얀 나무가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날은 바로 고따마(Gotama)께서 깨달음을 이룬 날이었습니다. 뿐냐는 반얀 나무 아래 앉아 있던 고따마를 발견하고, 그가 공양을 받기 위해 사람으로 현신한 목신(木神)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냐는 곧바로 수자따에게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수자따는 크게 기뻐하며 황금 발우에 음식을 담아 그에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고따마는 발우를 들고 강가로 가서 쑷빠띳티따(Suppatitthita)라는 여울에서 목욕하고 그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49일 만에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었습니다.2) 수자따의 음식은 붓다와 신들에게 올린 공양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공양으로 여겨졌으며, 그것은 신의 맛과 향기가 더해졌다고 합니다. 그날 수자따는 귀의게(歸依偈)를 세 번 읊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붓다께 귀의한 여성신도 가운데 최초의 귀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3)

② 위싸카(Visākhā, 毘舍佉)는 붓다의 여자신도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승단에 공헌한 자 중 제일[dāyikānam aggā, 布施第一]이라고 붓다에 의해 직접 선언되었습니다.4) 그녀의 아버지는 다난자야(Dhanañjaya), 어머니는 수마나(Sumanā)였습니다. 그녀는 앙가(Anga, 鴦伽)국의 밧디야(Bhaddiya)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일곱 살 때 밧디야를 방문한 붓다를 친견하고, 직접 법을 듣고 예류자(預流者)가 되었습니다.5) 나중에 그녀의 아버지 다난자야는 빔비사라 왕에 의해 꼬살라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위싸카는 사왓티의 부자 미가라(Migāra)의 아들 뿐냐왓다나(Punnavaddhana)와 결혼했습니다. 시아버지 미가라는 나체 고행자들의 추종자였으나, 나중에 붓다께서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개종했습니다. 미가라는 며느리를 통해 예류과를 얻었기 때문에 자기의 어머니에게 하는 것처럼 위싸카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녀에게 ‘미가라의 어머니(Migāramātā, 鹿母)’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습니다.6)

위싸카는 시집올 때 값비싼 옷을 입고 왔는데, 그 옷을 팔아 정사를 건립했습니다. 그 정사가 바로 유명한 ‘미가라마뚜빠싸다(Migāramātupāsāda, 鹿母講堂)입니다. 이 승원의 원래 이름은 뿟바라마(Pubbārāma, 東園)였습니다.7) 그녀는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여자신도로 간주되었습니다.8)

③ 쿳줏따라(Khujjuttarā)는 부잣집의 유모로 태어났지만,9) 그녀는 나중에 사마와띠(Sāmāvatī) 왕비의 하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쿳자(Khujja, 곱추)였기 때문에 ‘쿳줏따라’라고 불렸습니다. 왕비는 왕의 허락을 받아 매일 꽃을 사라고 여덟 개의 동전을 쿳줏따라에게 주었습니다. 꿋줏따라는 수마나(Sumana)라는 정원사로부터 꽃을 사는데 네 개의 동전을 쓰고, 네 개는 보관해 두었습니다. 어느 날 붓다께서 수마나를 찾아와 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 꿋줏따라는 곧바로 예류과를 얻었습니다. 그 날은 그녀가 꽃을 사는데 여덟 개의 동전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왕비가 평소보다 많은 꽃을 보고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왕비에게 그 날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날 이후 왕비는 쿳줏따라를 존경하게 되었고, 향수 물로 목욕하고 그녀로부터 법을 들었습니다. 쿳줏따라는 사마와띠 왕비를 어머니로 삼고, 정기적으로 법을 들기 위해 붓다께 갔으며 돌아와 왕비와 오백 명의 궁녀들에게 설법했습니다. 쿳줏따라의 가르침을 받고 그들은 모두 예류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마와띠 왕비가 붓다를 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쿳줏따라는 왕비에게 궁전의 담에 구멍을 뚫어 지나가는 붓다를 지켜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사마와띠 왕비가 죽은 뒤, 쿳줏따라는 붓다의 설법을 듣는 종교적인 신앙에만 전념한 것으로 보입니다. 붓다는 그녀가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10)

④ 사마왓띠(Sāmāvatī)는 우데나(Udena, 優塡王)의 왕비 세 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는 밧다와띠(Bhaddavatī)의 대부호 밧다와띠야(Bhaddavatiya)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밧다와띠야는 꼬삼비(Kosambī)의 고싸까(Ghosaka)와 친구였습니다. 밧다와띠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그녀는 부모들과 함께 꼬삼비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고싸까가 마련한 급식소에서 음식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날 아버지가 죽고, 둘째 날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급식소에는 사람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우왕좌왕하여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사마와띠는 이 혼란을 막기 위해 급식소에 칸막이를 세워 입구와 출구를 구분했습니다. 그러자 소란스럽지 않고 질서를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고싸까는 사마와띠 때문에 혼란을 해결하게 된 것을 알고 그녀를 친자식으로 삼았습니다. 사마와띠의 본래 이름은 사마(Sāmā)였는데, 급식소에 칸막이(vati, 울타리, 담)를 세운 뒤, ‘사마와띠’로 불렸습니다.

축제일에 우데나 왕이 목욕하기 위해 강으로 가고 있는 사마와띠를 보고 사랑에 빠져 고싸까에게 왕궁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고싸까는 왕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왕은 다시 그에게 돌아와서 그의 부인이 밖으로 나가자 그의 집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사마와띠는 이것을 보고 고싸까에게 왕궁으로 보내 달라고 했고, 우데나 왕은 그녀를 첫 번째 왕비로 삼았습니다. 얼마 후 우데나 왕은 다시 마간디야(Māgandiyā)를 왕비로 채택했습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마와띠 왕비의 하녀였던 쿳줏따라가 붓다를 직접 보고 싶어 하는 왕비에게 왕궁의 담에 구멍을 뚫어 지나가는 붓다를 뵙도록 하였습니다. 둘째 왕비 마간디야가 이 사실을 알고 이를 핑계로 사마와띠를 왕궁에서 추방시킬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간디야는 결국 사마와띠의 처소에 불을 질러 왕비와 하녀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마간디야는 사마와띠를 죽여 자기가 첫째 왕비가 되기 위해서 그와 같은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합니다.11) 사마와띠는 붓다를 따르는 가장 저명한 여자신도의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가장 자비스럽게 살았던(aggam mettāvihārinam) 우바이라고 붓다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12)

⑤ 웃따라 난다마따(Uttarā Nandamātā)는 웰루깐따끼 난다마따(Velukantakī Nandamātā)와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13) ‘웃따라 난다마따’란 글자 그대로 ‘난다의 어머니 웃따라’라는 뜻입니다. ‘웃따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서로 구별하기 위해 ‘웃따라 난다마따’라고 불렸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붓다를 모셨던 여자신도 가운데 으뜸이었습니다.14)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여자신도 중에서 그녀가 선정의 힘, 즉 선정력(禪定力, jhāyīnam)이 으뜸이었다고 묘사되어 있지만,15) 이것은 다른 ‘웃따라’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16)그녀는 팔재계(八齋戒)의 포살을 준수한 여자신도의 명단에 다시 언급되어 있습니다.17)

⑥ 숫빠와사 꼴리야디따(Suppavāsā Koliyadhītā)는 시왈리(Sīvalī) 존자의 어머니입니다. 시왈리가 태어나기 전 7일 동안 그녀는 극심한 산고의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그녀는 죽기 전에 붓다께 공양을 올리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붓다께서 찾아와 축복해 주자 곧 아기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7년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아싸따루빠 자따까(Asātarūpa Jātaka)]에 설해져 있습니다.18)

숫빠와사는 꼴리야(Koliya) 왕의 딸이었습니다.19) 그녀의 남편은 릿차비(Licchavi) 족의 마할리(Mahāli)였으며, 삿자넬라(Sajjanela)라는 꼴리야족 마을에 살았습니다. 붓다께서 그 마을을 방문하여 그녀에게 음식을 보시하면 어떤 공덕이 있는가에 대해 설해주었습니다.20) 그녀는 특별한 보시를 행한 사람 가운데 으뜸(aggam panītadāyikānam)이라고 붓다에 의해 선언되었으며,21) 그녀는 빠두뭇따라 붓다(Padummuttara Buddha, 燃燈佛) 시대에 열반을 얻기로 진지하게 결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22)

그녀는 유명한 우빠시까(Upāsikā, 優婆夷)의 명단에 포함되었으며,23) 스님들에게 널리 보시를 베푼 아나타삔디까(Anāthapindika), 쭐라 아나타삔디까(Culla Anāthapindika), 위싸카(Visākhā)와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24)

⑦ 숫삐야(Suppiyā)는 베나레스(Benares)의 여자신도였습니다. 그녀의 남편 이름도 숫삐야(Suppiya)였는데, 둘 모두 승단에 크게 헌신하였습니다. 어느 날 숫삐야는 사찰을 방문하여 고깃국이 꼭 필요한 병든 비구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곧장 시종에게 고기를 사오라고 보냈습니다. 하지만 베나레스 전체에 고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칼로 자신의 넓적다리를 잘라 병든 스님을 위한 국을 끊이도록 하녀에게 시켰습니다. 그 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었습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 몹시 기뻐하여 사찰로 가서 내일 공양을 위해 붓다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 날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그의 집에 도착하여 아내 숫삐야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녀가 아프다고 하니, 붓다는 그녀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붓다께서 그녀를 보는 순간 상처는 모두 나아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붓다는 자진해서 준 것일지라도 비구들이 사람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율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25) 숫삐야는 이생에서 선행의 과보를 받았던 사람 중의 한 사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26) 그녀는 병든 사람을 간호한 사람 중에서 제일이라고 붓다에 의해 선언되었으며,27) 연등불 시대에 열반을 얻기로 결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28) 그리고 그녀는 저명한 여자신도의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29)

⑧ 까띠야니(Kātiyānī)는 절대적으로 청정한 믿음(aveccappasāda, 不壞淨)을 가진 가장 유명한 재가 여자신도라고 붓다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30) 그녀는 연등불시대에 열반을 얻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녀는 꾸라라가라(Kuraraghara)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깔리(Kālī)라는 친구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친구 깔리와 함께 소나 꾸띠깐냐(Sona Kutikanna) 장로에게 법을 듣고자 찾아갔습니다. 법문을 듣는 동안 그녀의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불을 밝히기 위해 기름을 가져오라고 보냈던 하녀가 도둑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까띠야니는 장로의 법문이 끝나기 전까지는 떠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도둑의 두목은 그녀에게 감동을 받아 훔친 모든 값진 물건들을 제 자리에 되돌려 놓도록 부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까띠야니는 법문이 끝나자 예류자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 도둑들이 와서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녀는 도둑들을 장로에게 데리고 가서 출가시켰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31)

⑨ 나꿀라마따(Nakulamātā)는 남자신도였던 나꿀라삐따(Nakulapitā)와 부부간입니다. 이들은 박가(Bhagga)국의 숭수마라기리(Sumsumaragiri)에 살고 있었습니다. 붓다께서 이 마을 방문했을 때, 이들 부부는 붓다를 보자마자 즉시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부부는 과거 오백 생 동안 붓다의 부모였던 것입니다.32) 붓다의 재가신도 가운데 가장 친밀한 관계였다고 선언되었습니다.33)

⑩ 깔리(kālī)는 꾸루라가리까(Kururagharikā)라고도 불렸는데, 그녀는 여자신도 중에서 소문으로 믿음을 일으킨 이 중에서 제일이라고 묘사되었습니다.34) 그녀는 소나 꾸띠깐냐(Sona Kutikanna)의 어머니였고, 그녀의 남편은 아완띠(Avantī)의 꾸루라가라(Kururaghara)족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라자가하(Rājagaha)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 발코니에서 산들바람을 즐기고 있는 동안,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관해 사따기리(Sātāgiri)와 헤마와따(Hemavata)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붓다에 대한 믿음을 일으켜 예류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날 밤 소나(Sona)가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깔리는 꾸루라가라로 돌아와 그곳에서 마하깟짜나(Mahā Kaccāna, 大迦旃延) 존자를 섬겼습니다. 소나가 자라서 깟짜나의 제자로 승단에 들어갔을 때, 붓다를 친견하고 그녀는 붓다의 방에 깔도록 값이 비싼 양탄자를 보시하였습니다. 이 방문 후 소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깔리는 아들 소나가 일찍이 붓다께 설법하여 붓다와 일만 세계의 신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던 법문과 똑같은 내용을 자기에게 설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깔리는 예류자가 된 여자신도 중에서 가장 으뜸이었다고 합니다.35) 그녀는 까띠야니(Kātiyānī)와 변치 않는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습니다.36) 그녀와 마하깟짜나 간의 대화는 깔리 숫따(Kāli Sutta)에 실려 있습니다.37)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우바이

다음은 한역의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3권 제7 청신녀품(淸信女品)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여자신도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⑴ “내 제자 중의 첫째 우바이(優婆夷)38)로서, 처음으로 도를 잘 깨달은 이는 바로 난타난타바라(難陀難陀婆羅) 우바이요, 지혜가 제일가는 이는 바로 구수다라(久壽多羅)39) 우바이요, 언제나 좌선하기를 좋아하는 이는 바로 수비야녀(須毘耶女)40) 우바이요, 지혜가 밝은 이는 바로 비부(毘浮) 우바이요, 설법을 잘 하는 이는 앙갈사(鴦竭闍) 우바이요, 경전 뜻을 잘 연설하는 이는 바로 발타사라수염마(跋陀娑羅須焰摩) 우바이요, 외도를 항복 받는 이는 바로 바수타(婆須陀) 우바이요, 음성이 맑고 트인 이는 바로 무우(無優) 우바이요, 여러 가지로 논리에 능통한 이는 바로 바라타(婆羅陀) 우바이요,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이는 바로 수두(須頭) 우바이이니라.”41)

⑵ “내 제자 중의 첫째 우바이로서, 여래를 공양하는 이는 바로 마리(摩利) 부인이요, 바른 법을 받들어 섬기는 이는 바로 수뢰바(須賴婆) 부인이요, 성스러운 무리를 공양하는 이는 바로 사미(捨彌) 부인이요, 미래와 과거의 어진 선비를 우러러 보는 이는 바로 월광(月光) 부인이요, 보시하기에 으뜸인 이는 바로 뇌전(雷電) 부인이요, 항상 자비삼매를 행하는 이는 바로 마하광(摩訶光) 우바이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쓰는 이는 바로 비제(毘提) 우바이요, 기뻐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 이는 바로 발제(拔提) 우바이요, 업을 지켜 행하는 이는 바로 난다(難陀)의 어머니42)인 우바이요, 믿음의 해탈을 얻은 이는 조요(照曜) 우바이이니라.”43)

⑶ “내 제자 중의 첫째 우바이로서, 항상 욕됨을 참는 이는 바로 무우(無優) 우바이요, 공삼매(空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비수선(毘讎先) 우바이요, 생각 없는 삼매[無想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우나타(優那陀) 우바이요, 소원 없는 삼매[無願三昧]를 닦는 이는 바로 무구(無垢) 우바이요,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이는 시리(尸利) 부인인 우바이요, 계율을 잘 가지는 이는 앙갈마(鴦竭摩) 우바이이니라.

얼굴이 단정한 이는 바로 뇌염(雷焰) 우바이요, 모든 감각 기관이 고요한 이는 바로 최승(最勝) 우바이요, 많이 듣고 널리 아는 이는 바로 니라(泥羅) 우바이요, 게송을 잘 짓는 이는 바로 수달(須達)의 딸 수마가제(修摩迦提) 우바이요, 겁내지 않는 이도 바로 수달의 딸이요, 내 성문 가운데서 최후에 깨달은 우바이는 바로 람(藍) 우바이이니라.”44)

한역 [증일아함경]에 나오는 여자신도의 원래 이름을 추정할 수 없는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Notes:



붓다의 열 가지 호칭

붓다의 호칭은 부처님의 위대함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붓다를 지칭하는 이름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1) 그 가운데 초기경전에서부터 후기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불리는 붓다의 호칭은 열 가지입니다. 이것을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부릅니다. 이 여래십호는 원래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습니다.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십호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불교적인 인격완성자라면 누구에게나 붙여질 수 있는 보통명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2) 다시 말해서 붓다의 호칭은 원래 고유명사였으나, 나중에는 불신관(佛身觀)의 변천으로 제불통호(諸佛通號)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선 불교사전에서는 여래십호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십호(十號): 부처의 열 가지 호칭. ⑴여래(如來). 진리에서 온 자, 진리에 이른 자. 진리에 머무는 자. ⑵응공(應供).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할 자. ⑶정변지(正遍知).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았다는 뜻. ⑷명행족(明行足). 지혜와 수행을 완성하였다는 뜻. ⑸선서(善逝). 깨달음에 잘 이르렀다는 뜻. ⑹세간해(世間解). 세간을 모두 잘 안다는 뜻. ⑺무상사(無上士). 그 위에 더 없는, 최상의 사람. ⑻조어장부(調御丈夫). 모든 사람을 잘 다루어 깨달음에 들게 한다는 뜻. ⑼천인사(天人師). 신(神)과 인간의 스승. ⑽불(佛). 깨달은 사람. ⑾세존(世尊). 모든 복덕을 갖추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자. 세간에서 가장 존귀한 자. 이와 같이 열한 가지이지만 여래를 제외하거나, 세간해와 무상사를 하나로 하거나, 무상사와 조어장부를 하나로 하거나, 불과 세존을 하나로 하여 열 가지로 함.3)

위 사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여래십호가 실제로는 열한 가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합니다. 붓다의 칭호들은 부처님의 위대한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붙인 이름들입니다. 붓다의 위덕이 무한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칭호도 무량(無量)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수(基數, fundamental number)가 극(極)에 이르러 한 자리의 수가 다 찬 ‘십(十)’으로 무량수(無量數)를 상징하는 뜻에서 예로부터 열 가지로 붓다의 무량덕(無量德)을 호칭해 온 것입니다. 즉 십호는 무량수(無量數)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불통호(諸佛通號)로서의 십호는 모든 부처님에게 호칭될 수 있는 무량칭호(無量稱號)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여래십호는 사실상 열한 가지의 칭호이지만 개(開), 합(合)에 의해 굳이 열 가지로 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4) 십호의 개(開), 합(合)은 경론(經論)에 따라 일정치 않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간해’와 ‘무상사’를 하나로 합하여 십호를 정한 경우입니다.5)
둘째는 ‘무상사’와 ‘조어장부’를 하나로 합하여 십호를 정한 경우입니다.6)
셋째는 ‘세존’을 빼버리고 십호를 정한 경우입니다.7)
넷째는 ‘불’과 ‘세존’을 하나로 합하여 십호를 정한 경우입니다.8)
다섯째는 ‘세존’을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의 십호를 갖춘 완성인의 총체적 칭호로 보는 경우입니다.9)

이와 같이 중국의 역경승들은 열한 가지를 십호 속에 포함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고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에서 신도교육용으로 편찬한 교재에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불과 세존을 나누고 ⑺과 ⑻을 하나로 헤아리거나, 세존을 제외하고 여래십호라 하기도 하며, 여래를 총체적인 이름으로 하고 불과 세존을 구분하여 여래십호라 하기도 한다.”10)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십호의 내용을 각기 달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이 생기게 된 까닭은 십호 가운데 ‘여래(如來)’를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십호에 대한 해석도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북전의 전승에 의하면, ①여래, ②응공, ③정변지, ④명행족, ⑤선서, ⑥세간해, ⑦무상사, ⑧조어장부, ⑨천인사, ⑩불세존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전에서는 ‘여래’를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남전의 전승에 따르면, ①응공, ②정변지, ③명행족, ④선서, ⑤세간해, ⑥무상사, ⑦조어장부, ⑧천인사, ⑨불, ⑩세존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전에서는 ‘여래’를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북전에서는 불과 세존을 합하여 하나로 하였으나, 남전에서는 불과 세존을 구별하고, 그 대신 여래를 제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붓다가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래는 십호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여래라는 호칭은 오직 붓다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왕이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짐(朕)’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실례를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緣起란 무엇인가. 生이라는 緣에 의해 老死가 있다. 如來의 興起와 不興起[出現과 不出現]에 관계없이 그것은 常住의 界이고, 確法이고, 定法이며, 緣起性이다. 이것을 如來는 깨달았던 것이고, 달성했던 것이다. 깨달아 도달하여 설명하고, 가르치고, 說示하고, 廣說하고, 分別하고, 명백히 함으로써 그대들은 그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11)

그런데 이러한 인도말의 용법을 중국의 역경승들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를 삽입함으로써 혼란이 생긴 것입니다. 남전의 전승에 따르면, 여래십호는 ‘여래’를 제외한 ①응공, ②정변지, ③명행족, ④선서, ⑤세간해, ⑥무상사, ⑦조어장부, ⑧천인사, ⑨불, ⑩세존입니다.

그러면 여래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여래(如來)의 원어는 따타가따(tathāgata)입니다. tathāgata는 tathā와 āgata의 합성어입니다. tathā는 ‘이와 같이’, ‘그렇게’, ‘그런 방법으로’, ‘마찬가지로’의 뜻이고, āgata는 오다(來)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여실히 왔다’[如來]는 의미가 됩니다. 즉 진리와 하나가 되어 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2)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붓다는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如來’(tathāgata)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자각하고 그 기쁨에 젖어 있던 붓다께서 ‘진리로 들어간 사람’(tathāgata, 如去)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하여 나타냈다고 하는 행위에 의해 비로소 ‘진리로부터 온 사람’(tathāgata) 즉 ‘여래’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래십호의 칭호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⑴응공(應供, arahant, arhat): 응공이란 사람과 천인[人天]으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룩한 성자, 즉 성성문(聖聲聞, ariya-sāvaka, 거룩한 제자)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붓다도 아라한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여래와 아라한을 구별하였습니다. 한자말의 응공(應供)은 응수공양(應受供養)의 줄인 말입니다. 즉 남의 공양을 받을만한 자격과 실력이 갖추어져 있음을 뜻합니다. 또 진인(眞人), 살적(殺賊), 불생(不生), 지진(至眞) 등이라고 의역(意譯)하기도 합니다. 살적(殺賊)이란 일체의 번뇌의 적을 죽인다는 뜻이며, 불생(不生)은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⑵정변지(正遍知, sammā-sambuddha, samyak-sambuddha): 정변지는 정등각자(正等覺者)라고 합니다. 즉 사제(四諦)의 진리를 여실히 통달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고(苦)를 알되 고(苦) 그대로의 모습대로 알며, 집(集)을 알되 집(集) 그대로의 모습대로 알며, 멸(滅)을 알되 멸(滅) 그대로의 모습대로 알며, 도(道)를 알되 도(道) 그대로의 모습대로 알며, 이와 같이 일체의 법을 모두 알아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붓다를 정변지라고 일컫는 것은 ‘완전히 깨달은 자(sammā-sambuddha, 正等覺者)’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의미의 전지(全知, sabbaññū)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맥락에서는 ‘모든 것’ 또는 ‘일체(一切, sabbam, 全)’라는 개념의 사용이 극도로 제한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 내지는 그런 경험적 인식으로부터 추론 가능한 것에 제한됩니다. 완전함이란 염오된 흐름들(āsava, 流漏)의 부재를 뜻하는데, 이런 흐름들 중의 하나가 주관이나 객관 속에서 영원한 절대 본질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13)

⑶명행족(明行足, vijjācaranasampanna, vidyācaranasampanna): 명행족의 명(明)은 지혜, 즉 삼명(三明: 天眼, 宿命, 漏盡)을 알고, 행(行)은 실천, 즉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말하며, 족(足)은 명과 행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즉 지혜(이론)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대로 행했고, 행한 대로 말씀하신 분이었습니다. ‘지목행족(智目行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의 눈과 행동하는 발’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명행족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붓다를 명행족이라 일컫는 것은 ‘인식과 행동을 겸비한 자(vijjācaranasam- panna, 明行具足者)’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인식과 아울러 행동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자신의 인식과 일치했다는 더 의미심장한 사실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절대적 인식에 대한 그 어떠한 주장도 거부하기에, 어떤 형태의 절대적인 도덕 원칙도 단언하지 않습니다.14)

⑷선서(善逝, sugata): 선서는 ‘피안으로 잘 건너가신 분’이란 뜻입니다. 여실히 저 언덕으로 건너가서 다시는 생사고해(生死苦海)에 돌아오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붓다를 선서라고 일컫는 것은 그가 ‘행복해진(sugata, 善逝) 사람’임을 뜻합니다. 이것은 신체적, 정신적 ‘안락’이라고 하는, 인간이 바라는 최상의 행복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부터 야기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인식과 이해와 연민을 통해서 타인에게 헌신하는 생활을 향유해 나갑니다. 그의 삶이란 자기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한 성취인 것입니다.15)

⑸세간해(世間解, lokavidū, lokavid): 세간해를 지세간(知世間)이라고도 합니다. 일체 세간의 온갖 일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즉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붓다를 세간해라고 일컫는 것은 그가 ‘세상을 아는 자(lokavidū, 世間解)’임을 뜻합니다. 붓다가 세상을 안다는 것은 가정될 수 있는 모든 수수께끼들을 풀어 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형이상학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영원불변한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일관성이 없는 제멋대로인 것으로 봅니다. 세상에 관한 이러한 단정들에 대해 아는 것 역시 세상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경향이나 습성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빠질 수 있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붓다가 세상을 ‘의존적인 일어남(paticcasamuppanna, 緣起)’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런 성향들을 가라앉히고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에의 추구를 단념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16)

⑹무상사(無上士, anuttara): 무상사는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두 발 가진 이 가운데 가장 높으신 분, 즉 양족존(兩足尊)을 의미합니다.

붓다를 무상사라고 일컫는 것은 ‘가장 탁월한(anuttara, 無上) 자’임을 뜻합니니다. 인생의 궁극 목표에 도달한 사람으로서 붓다에게는, 특히 유사한 상태의 도덕적 완성을 이룬 그의 제자들처럼,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우위에 서는 사람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인간이 종속되는 최고의 존재자가 있다거나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하는 궁극적인 도덕 법칙이 있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두 개의 절대주의적인 단정을 거부합니다. 그가 자신의 제자들과 구분하여 내세우는 유일한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스승(satthā, 師)이라는 사실뿐입니다.17)

⑺조어장부(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purusadamya-sārathi): 조어장부는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purisa는 사람을 말하고, damma[damya]는 ‘길들여져야 할’ 대상을 말하고, sārathi는 마부(馬夫) 혹은 조어자(調御者)를 말합니다. 즉 지금의 동물 수련사 혹은 조련사를 사라티(sārathi)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은 사람들을 잘 길들이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마부가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붓다를 조어장부라고 일컫는 것은 그가 ‘숙련된 조련사(purisadamma-sārathi, 調御丈夫)’처럼 사람들을 잘 제어하여 길들일 수 있는 자임을 뜻합니다. 비록 그에게는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지만, 이런 힘들이 그를 출중한 조련사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최상의 조정자로 만든 것은 인간의 심리적 구조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깊은 연민의 감정이었습니다. 앙굴리말라(Angulimāla)와 같은 살인자나 암바빨리(Ambapālī)와 같은 창녀를 잘 제어하여 도덕적으로 타당한 삶으로 이끌어 준 것은 심리적 요법이었지만 마술이나 강압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붓다란 최고의 정신과 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18)

⑻천인사(天人師, satthā-devamanussānam, śāstā-devamanusyānām): 천인사는 천신(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인간세계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천상세계의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즉 육도(六道), 사생(四生)의 스승이 바로 붓다인 것입니다.

붓다를 천인사라고 일컫는 것은 그가 ‘신들과 인간들의 스승(satthā devamanussānam, 天人師)’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계시를 내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감당하는 짐도 그렇게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피땀 어린 정신적, 도덕적 수련 과정을 통해 발견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 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가르침의 여정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붓다의 제자들은 그를 탁월한 지도자의 원형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런 지위에 올려놓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였습니다.19) 나아가 그는 스스로를 단순히 안내자라고 표현할 뿐, 자신을 구세주로 여기는 것을 분명하게 부정하였습니다.20)

⑼불(佛, buddha): 불은 ‘깨달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불타(佛陀)’라고 음사하여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붓다라는 말 자체가 곧 ‘깨달은 자[覺者]’라는 뜻입니다. 가장 많이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깨달은 자’를 일컫는 보통명사로 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⑽세존(世尊, bhagavā, bhagavat): 세존이란 글자 그대로 ‘세간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붓다를 세존이라고 일컫는 것은 ‘존귀한 자(bhagavā, 世尊)’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보통 ‘주인(Lord)’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떤 지배나 군림을 암시하는데, 이런 관념은 붓다 자신이 거부했던 것들입니다.21) 이와는 달리 이 말을 ‘축복받은 자’라고 옮기는 것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축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올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초기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세존을 ‘존귀한 자’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을 ‘존귀한 자’로 번역하면 군림과 타자에의 의존이라는 두 개의 극단적인 의미 함축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2)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도들은 앞에서 열거한 열한 가지 명칭 중에서 붓다 자신을 일컫는 ‘여래(如來)’와 ‘깨달은 자’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인 ‘불(佛)’을 제외한 ①응공, ②정변지, ③명행족, ④선서, ⑤세간해, ⑥무상사, ⑦조어장부, ⑧천인사, ⑨세존을 가리켜 붓다의 아홉 가지 특성[九德]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삼보에 귀의할 때마다 이것을 늘 암송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붓다께 구원을 청하는 것은 불교도의 올바른 신행이 아닙니다. 붓다란 이상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서 어떤 식의 보호(patitthā, 依止)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우리가 귀의를 한다는 것과 보호나 원조를 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개의 행위하고 할 수 있습니다.23)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붓다는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Notes:



1) 本緣部에 속하는 [方廣大莊嚴經] 卷11에는 272種의 佛陀 稱號가 나열되어 있으며, 法華, 華嚴部에도 여러 가지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다.
2) 朴先榮, [佛陀의 敎育思想](서울 : 同和出版公社, 1981), p.187.
3) 곽철환 편저, [시공 불교사전](서울 : 시공사, 2003), p.454.
4) 박선영, 위의 책, p.198.
5) [佛說十號經], 大正藏 17, pp.719下-720中 참조.
6) ①[大智度論], 大正藏 25, p.219中-下, ②[菩薩地持經], 大正藏 30, p.902上, ③[瑜伽師地論], 大正藏 30, p.499中-下, ④[成實論], 大正藏 32, p.242上-下, ⑤[大乘義章], 大正藏 44, pp.863中-864下 참조.
7) [菩薩瓔珞本業經], 大正藏 24, p.1020上 참조.
8) 이 경우에 대해서는 분명한 典據를 찾기 어려우나 실제로는 일반화되어 있다. 박선영, 앞의 책, p.199 no.38 참조.
9) [大般涅槃經疏], 大正藏 38, p.145上.
10)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편, [불교의 이해와 신행](서울 : 조계종출판사, 2004), p.282.
11) Samyutta-nikāya(PTS), Vol.Ⅱ, p.25 : “Katama ca bhikkhave paticca-samuppādo, Ja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nam uppādā vā Tathāgatānam anuppāda vā Tathāgatānam, thitā va sā dhātu dhammtthitatā dhammaniyāmatā idapaccayatā. Tam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tva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āpeti patthapeti vivarati vibbajati uttani-karoti passathāti cāha.”
12)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88.
13) D.J. 칼루파하나 지음, 김종욱 옮김, [불교 철학사 : 연속과 불연속](서울 : 시공사, 1996), p.190.
14) D.J. 칼루파하나, 위의 책, p.190.
15) D.J. 칼루파하나, 위의 책, p.191.
16) D.J. 칼루파하나, 위의 책, p.191.
17) D.J. 칼루파하나, 위의 책, p.191.
18) D.J. 칼루파하나, 위의 책, p.192.
19) Dīgha-nikāya(PTS), Vol.Ⅱ, p.100.
20) Dhammapada(PTS), v.276.
21) Dīgha-nikāya(PTS), Vol.Ⅱ, p.100.
22) D.J. 칼루파하나, 위의 책, p.189 참조.
23) D.J. 칼루파하나, 위의 책, pp.192-3.

1) Anguttara-nikāya (PTS) Vol.Ⅰ. p.26; “Etad aggam bhikkhave mama sāvikānam upāsikānam pathamam saranam gacchantīnam yadidam Sujātā Senānidhītā. dāyikānam yadidam Visākhā Migāramātā. bahussutānam yadidam Khujjuttarā. mettāvihārīnam yadidam Sāmāvatī. jhāyīnam yadidam Uttarā Nandamātā. panītadāyikānam yadidam Suppavāsā Koliyadhītā. gilānūpatthākīnam yadidam Suppiyā upāsikā. aveccappasannānam yadidam Kātiyānī. vissāsikānam yadidam Nakulamātā gahapatānī. anussavappasannānam yadidam kālī upāsikā Kuraragharikā ti.”
2) Jātaka, I, p.68 f; DhA. I, p.71, etc. Lalita Vistara, ed. S. Lefmann, p.334-7(267 f.)에서는 붓다가 고행 중일 때, 아홉 명의 소녀들이 붓다께 공양을 올린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Divyāvadāna, ed. Cowell and Neill (Cambridge), p.392에서는 Nandā와 Nandabalā라는 두 명이 언급되어 있다.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DPPN),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Vol.Ⅱ, p.1186, no.1에서 재인용.
3) SNA. I, p.154; cf. D.Ⅱ, p.135; DPPN, Vol.Ⅱ, p.1187에서 재인용.
4) A.Ⅰ, p.26.
5) DPPN, Vol.Ⅱ, p.900.
6)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p.105-6.
7) [望月佛敎大辭典] 5권, p.5061上.
8) A.Ⅳ, p.348.
9) AA.Ⅰ, p.232.
10) A.Ⅰ, p.26; DhA.Ⅰ, p.208 ff.; AA.Ⅰ, p.226, 237 f.; ItvA. p.23 f.; PsA. p.498 f.; DPPN, Vol. Ⅰ, p.719에서 재인용.
11) Visuddhimagga (PTS), p.380 f.
12) A.Ⅰ, p.26; cf. Ⅳ, p.348; DPPN, Vol.Ⅱ, pp.1102-4. 참조.
13) DPPN, Vol.Ⅱ, p.22.
14) Buddhavamsa (PTS), xxvi. 20.
15) A.Ⅰ, p.26.
16) DPPN, Vol.Ⅰ, p.361.
17) A.Ⅳ, p.347; AA.Ⅱ, p.791.
18) 여기서 7년은 아마 그녀가 일곱 번 연속적으로 유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DPPN, Vol.Ⅱ, p.1222, no. 2 참조.
19) Jātaka, Ⅰ, p.407.
20) A.Ⅱ, p.62 f.
21) A.Ⅰ, p.26.
22) AA.Ⅰ, p.244.
23) A.Ⅳ, p.348.
24) DhA.Ⅰ, p.339.
25) Vinaya Pitaka (PTS), Ⅰ, p.216 f.
26) Mindapañha, ed. Tranckner, p.115; cf. p.291.
27) A.Ⅰ, p.26.
28) AA.Ⅰ, p.244 f.
29) A.Ⅳ, p.348.
30) A.Ⅰ, p.26.
31) AA.Ⅰ, p.245 f.
32) DPPN, Vol.Ⅱ, p.3.
33) A.Ⅰ, p.26; Ⅱ, p.61 f.; AA.Ⅰ, p.216 f.; p.246; Ⅱ, p.514; SA.Ⅱ, p.182.
34) A.Ⅰ, p.26.
35) AA.Ⅰ, p.245.
36) AA.Ⅰ, p.133 ff.; SnA.Ⅰ, p.208 f.
37) DPPN, Vol.Ⅰ, p.587.
38) 한역 [증일아함경]에서는 우바사(優婆斯)로 표기되어 있다.
39) 구수다라(久壽多羅)는 팔리어 쿳줏따라(Khujjuttarā)의 음역이다.
40) 수비야녀(須毘耶女)는 팔리어 숫삐야(Suppiyā)의 음역이다.
41) [增一阿含經] 3권, 제7 淸信女品 (大正藏 2권, p.560上).
42) 난다[難陀]의 어머니는 Uttarā Nandamātā이다.
43) [增一阿含經] 3권, 제7 淸信女品 (大正藏 2권, p.560中).
44) [增一阿含經] 3권, 제7 淸信女品 (大正藏 2권, p.560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