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입문 3] 명상하는 인도, 우주의 근본 웃다라
카(Uddalaka)의 사트(sat)론 / 정병조 불교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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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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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 3] 명상하는 인도, 우주의 근본 웃다라카(Uddalaka)의 사트(sat)론 / 정
병조
철인(哲人)웃다라카는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원리를 '사트 (sat)'라는 용어로
써 설명하였다. 그는 이 사트야말로 우주의 근원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이 사
트를 올바로 인식하고, 이를 회복했을 때 비로소 해탈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태초에 모든 것은 사트에서 비롯되었다. 사트가 모든 것을 만들었고, 인
간 존재도 사트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죽으면 사트로 다시 되돌아 간
다"고 하였다. 이것은 서양 철학의 영겁회귀(永劫回歸)라는 말과도 같이, 우주라는
거대하고 영원한 사이클이 사트에서 시작되어 사트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보았
다.
그 과정은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과 같다. 즉, 하늘에 구름이 모여서 비가
되어 내리면 빗물은 고여서 시냇물을 이룬다. 시냇물이 흘러서 강줄기가 되고, 강
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에서는 수증기들이 하늘로 올라가서 또 다시 구름
을 이룬다. 그 구름은 또 비가 되어서 대지를 적신다. 이 세상의 모 든 것들은 이와
같이 덧없는 윤회의 관계에 있고, 그 윤회의 실체를 사트로 본 것이다.
그의 아들 스베타케투(Svetaketu)가 어렸을 때, 집을 떠나 히말라야에서 신(神)에
대하여 공부하고 청년이 되어서 귀가한 후, 웃다라카와 나누는 대화중에 사트에 대
한 가르침이 있다.
"스베타케투여, 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질 수 있는,
그런 법을 배웠는가?"
"어떻게 그런 가르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아들이여. 여기 도자기와 물그릇과 항아리가 있다고 하자.
그 모든 것들은 흙으로 빚은 것이다. 만일 그대가 흙이라는 본질을 알면 그 모든 것
은 변형된 이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변형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우주의 근본원리만 깨닫게 되면 모든 현상들은 저절로 알 수 있다. 우주의 근본원
리, 그것이 바로 사트이다."
그리고 웃다라카는 아들을 큰 무화과나무 아래로 데리고 갔다.
"아들아, 이 무화과나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무화과나무의 씨에서 비롯되었겠죠."
"그러면 무화과나무의 이 작은 씨앗 속에서 저 큰 무화과나무가 나왔겠느냐? 그 씨
앗을 잘라 보아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자꾸자꾸 잘라나가다 보니 가루가 되고 말았다.
"아들아, 그 씨앗 속에 무엇이 있어서 무화과나무가 되었겠느냐? 비록 볼 수도 없
고 만질 수도 없지만, 씨앗 속에 들어 있어 무화과나무가 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사
트이다."
스베타케투는 그제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웃다라카와 스베타케투의 이러한 대화 속에 여러 번 반복되는 인도 철학적 원리는
'네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명구로 요약할 수 있다. 많은 대화의 끝은 이 구
절로 결론지어져 있다. 또 다른 설명을 들어보자 웃다라카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아들아, 물을 가져 오너라 거기에 소금을 넣어 물맛을 보아라. 용해된 소금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짠맛을 나게 한다. 그것이 바로 사트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상과 같은 예에서 웃다라카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사트란 근원자이면서 내재자
라는 것이다. 사트란 불가설(不可說), 불가지 (不可知)의 그 무엇이다. 이것은 불가
(佛家)에서 말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언어로서는 접
근할 수 없고 마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형이상학적 실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사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웃다라카는 <우파니샤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살아 있을 때, 사트를 인식할 수도 있지만, 언어나 실행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살아 있으면서 그것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살아 있을 때는 숙
면의 상태에서 사트와 가깝게 될 수 있다. 사트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결국 죽
은 후의 세계라야 가능하다.
여기에서 염세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인도 철학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은둔
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 현세중심적이기 보다는
내세지향적인 면이 강하다 고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사트에서 나와서 사트로 되
돌아가는 영겁회귀의 과정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트를 이해하고 인식해서 해탈을 얻는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웃다라카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무소유이다. 태양을 가리는 햇빛 가리개, 지팡이, 표주박과 삼의일발(三
衣一鉢)외에는 몸에 지닐 수 없고 오직 수행에만 정진해야 한다. 이것은 불교의 수
행 정신과도 합치한다. 인도의 출가수행 정신은 이러한 무소유의 이상을 토대로 하
고 있다.
둘째로 보시의 미덕을 내세우고 있다. 보시란 한없이 베푸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보시는 육바라밀 가운데 가장 먼저 꼽는 수행이다. 웃다라카도 베풂의 미덕을 중시
하였다.
이와 같이 웃다라카의 사트론은 현상을 보고 본체를 찾아가는 철학이며, 결과를 보
고 그 원인을 추구해 들어가는 철학이다. 이 사트를 불교적으로 말하면 일심(一心)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일심에서 나오고, 다시 일심으로 되돌아간다. 또
한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데아가 될 것이다. 이 우주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현상 세계는 이데아 세계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동. 서양을 막론한 철학적 성찰에 있어서 어떤 일치점과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웃다라카의 사트론은 우주의 본체를 해명하기 위한 철학적인 성찰임과 동
시에 그것을 해명해 들어가는 종교적인 실천행을 강조 했다는 점에서 힌두이즘의
원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해탈의 길을 묻던 사람들, 부처님과 거의 동시대에 공존했던 육사외도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다. 기원전 7-6세기, 대략 2천 5백여 년 전을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시대
라고 말한다. 외도라고 불리는 까닭은 힌두이즘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불교의 입
장에서도 외도(外道)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여섯 학파를 꼽을 수 있다.
첫째, 푸라나 카샤파(Prana Kassapa)를 들 수 있다. 그는 감각적 쾌락론을 주장하였
는데, 모든 도덕률을 부정하고 오직 감각적으로 쾌락을 얻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이
라고 하였다.
둘째, 파쿠다 카차야나(Pakudha Kaccayana)의 7요소설이다. 그는 이 세상에 실재
하는 것은 일곱 가지에 불과하며, 그밖에는 모든 환영일 뿐이라고 하였다. 7요소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와 고(苦). 락 (樂). 생명 등이다. 그 7요소 외
에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허망하다고 주장한다.
셋째,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의 결정론(운명론)이다. 우리의 삶이란 태어
나기 이전부터 예정된 것이며, 예정된 코스를 걸어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
하였다. 불교에서는 이들을 사명외도(邪命外道)라 하여 그릇되게 목숨을 이어가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7요소설에 다섯을 더하여 12요소설을 주장하였다.
넷째,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유물론이다. 유물론은 지수화풍의
사대만이 물질적으로 실재하며,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쾌락을 누리면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들을 순세파(順
世派)라고 부른다. 즉 이 세상에 순응하는 무리들, 이 세상이 하자는 대로 살아가
는 잘못된 무리들이라는 뜻이다.
다섯째, 산쟈야 벨라티풋타(Sa~njaya Belatthiputta)의 결정론, 회의론이다. 결정적
인 판단을 유보하고 모든 것을 의혹, 의심하는 학파이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이 학
파의 거두들이었는데 그들이 제자들을 데리고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이 학파가 불
교에 흡수되었다.
여섯째, 니간타 나타푸트라(Nigantha Nataputra)의 자이냐교이다. 이는 위의 다섯
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학파에서는 철학적으로 매우 독특한 성찰을 하였다. 또 니
간타의 생애 자체가 부처님과 흡사하다. 즉 왕의 아들이었고, 출가한 연령도 비슷
하며, 죽을 때도 비슷하다. 니간타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마하비라', 즉 '위대한 승
리자'라고 자칭하였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교리 자체도 흡사한 점이 많다. 그런
까닭에 약 2백여 년 전 서양에서는 니간타나 타푸트라를 부처님과 혼동한 적도 있
다. 그들은 불상의 모습도 불교와 유사하지만 분명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자이나교의 불상들은 한결 같이 나체인데 반하여 불교의 불상들은 가사장삼을 걸
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선, 그들의 철학적인 기본 입장은 상대주의라 할
이야기꾼의 사랑방 수 있다. 절대적인 판단은 금물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조건법이에블의로그하에여서존검색재하
고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살
아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 절대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
면, 죽음으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모든 판단을 내릴 때, 조건반사적으로 상대적
인 판단을 해야 하며 절대적인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그들은 카스트 제도를 부정한다. 태어날 때 이미 신분의 고하가 결정된다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런 입장은 불교와 같다. 부처님도 말하기를, "태
어날 때의 신분으로 인간의 고하가 결정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가 무엇을 하
고 있는가에 따라서 고귀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비천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고 하
였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불교의 업사상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자이냐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계의 근원은 지바(jiva, 영혼)라고 한다. 그리고
지바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인간이 라고 보았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까닭
은 영혼적인 면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러
한가? 물질적인 것이 영혼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이 물질적인 것을 아지바(ajiva,
비영혼)라고 한다. 지바, 즉 영혼이라고 부르는 순수한 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물질적인 아지바가 영혼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아지바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 물질적인 것들의 감각적인 쾌락을 억제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을 억
제해서 지바, 즉 영혼이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요컨대 자이나교에서는 아지바,
즉 비영혼인 물질적인 것들로 말미암아 윤회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다만 불교에서
는 육도윤회를 말하는 데 반하여, 그들은 네 가지의 세상, 즉 지옥. 축생. 인간과 천
상을 윤회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무엇인가? 자이냐교도들이 말하는 열반은 결국 육신적인 쾌락
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수행방법으로서 고행을 예찬하고 있다. 즉, 고행을
통해서만이 새로운 업의 유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행 가운데 가장 어
려운 것은 단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계율을 철저히 지킨다는 면에서 자이나교에
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자이나교의 계율에 오계가 있는데, 이는 불교와도 유사하다. 즉 불살생, 불투도, 불
음행은 같으며, 불망어를 진실어라고 하고, 무소유를 오계 중의 하나로 넣고 있다.
특히 무소유의 계율을 너무 철저히 지키려 하는 까닭에 자이나교의 성직자들은 옷
을 벗고 지낸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들을 나의행파(裸衣行派)라고 부른다. 또한
불살생의 계율 때문에 직업 선택의 애로가 있다. 어업, 농업에 종사하기는 어렵기
이야기꾼의 사랑방 때문에 주로 상업에 종사한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이.블영로그국에이서인검색도를 식민지화할 때, 인도의 민간자본을 조사하였더니 0.1%의 자이나교도가 전체인도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인 조직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를 간접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자이나교가 불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불교는 무아를 주장하고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 는 반면에 자이나교는 지바, 즉 영혼을 실
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실재론적 철학이다. 따라서 표현방법
상 유사한 몇 가지로 인해 불교와 자이나교를 혼동하거나, 그 교리 자체의 유사성
을 논하는 것은 부당하다.
결국 이 두 종교의 근원적인 차이점은 자이나교는 영혼의 실재를 주장하고 불교는
영혼의 비실재를 주장하는 데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즉 제사만능의 신 중심
적인 사고 경향과 극단적인 퇴폐주의 등의 흐름이 풍미하는 그런 시대 속에서 부처
님은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그 시대의 어둠을 밝음의 불길로 바로 잡은 것이다.
불교, 그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의 고향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싹텄다. 부처님은 질식할 것 같은 신 중심적 사고에도 감각적인 쾌락만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도덕부정론도 수긍할 수 없었다. 바로 여기에서 인도 종교가 가
지고 있는 한계와 특수성을 초월하는 불교의 보편성이 발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