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부의 ‘영혼학개론, 그 표준이론’
‘십년공부 허사’와 ‘삶 속의 죽음(1)’
정영부 | 기사입력 2023/10/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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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여 회에 걸쳐 연재 중인 「영혼학 그 표준이론」이 ‘지식과감성 출판사’에서 최근 출판되었습니다. 독자 제위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 CRS NEWS
이번 148회에는 다음 『영혼학 그 표준이론』의 제12장 내용 중 ‘십년공부 허사’와 ‘삶 속의 죽음(1)’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십년공부 허사
명상이든 참선이든 선도든 요가든 기도든 학습이든 궁구(窮究)든, 모든 정(定)과 혜(慧)의 목적이 단지 마음을 비우는 희열을 맛보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을 다잡아 영의 수하에 두고 합일의 길을 가는 것에 있다. 10년 공부가 정신의 지식습득이나 양심의 지혜터득에 그칠 뿐 혼이 성내고 탐하는 탐진치(貪瞋痴)를 못 벗어난다면 명상이고 깨달음이고 다 헛짓이다. 영은 공염불이요 혼은 도로 아미타불일 뿐이다.
명상이나 요가의 쿤달리니나 선도술로 얻는 기량(氣量)이 무협지의 무공(武功)과 같고 도력(道力)과 같다면 어찌 그것이 영적진보이겠는가. 그것은 건강증진, 지식습득, 기껏해야 의식발전과 지혜터득의 테크닉에 불과하다. 매일 매일의 수행(修行)이 매일 매일의 탐진치 죽이기로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혜의 실천없이는 혼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2.3.2. 참조). 선과 명상으로 우주의 이치를 깨우쳐 무량(無量)한 지혜를 얻어 본들 혼이 이에 자복(自服)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六道輪回의 수레바퀴(Bhavachakra)에 갇힌 ‘영원한 순례자’ 신세를 결코 면할 수 없다. 어쩌다 영이 돈오(頓悟)하였다 하여도 이는 우선 영의 발전을 의미할 뿐이다. 오수는 병행되어야 한다(悟修竝行). 돈오가 혼의 점수(漸修)로 이어져 혼이 생활에서 탐진치를 극복하고 변화를 이룩하는 데에 명약으로 사용되지 못하면 깨달음은 혼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이때 영도 ‘절반의 승리’밖에 얻지 못한다. 무릇 각 敎界 지도자와 글줄깨나 써서 사상가요 구도자라고 숭상받는 이들 중에 소유욕과 명예욕에 휘말려 개망신은 별도로 하고 십년공부를 허사(虛事)로 돌린 이가 얼마나 많은가?
불설에 탐진치 삼독번뇌의 장애(障礙)는 번뇌장(煩惱障)이요 지적오만이나 덜된 깨달음을 과시함(增上慢)으로 인한 장애는 소지장(所知障)이라고 한다. 전자는 아집(我執)의 우두머리요 후자는 법집(法執)의 우두머리다. 오죽하면 증상만(增上慢)이 번뇌와 같은 반열의 타파해야 할 장애(障礙)리스트에 올랐겠는가.
헉슬리(Aldous Huxley)는 그의 저서 「영원의 철학」에서 “자아는 스스로를 소멸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 도중 역설적이게도 자아의 존재를 더 굳건하게 만들기도 한다. 겸손(謙遜)이야말로 이런 ‘역설적 상황’을 돌파하게 만들어 준다.”라고 주장하였다. 역설적 상황이 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성찰이 부족하였지만 그 심각성은 인지한 것이다.
켄 윌버는 ‘역설적 상황’의 원인을 ‘의식의 상태’와 ‘의식의 구조’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즉 자신의 의식상태에 상응하는 경험과 그것을 해석하는 의식의 구조 사이에 불균형이 생기기 쉬운데, 경험을 해석하고 적용시키는 데에서 수준이 떨어지는 경우에 위의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 심리학과 영성을 통합한 미국의 임상 심리학자 존 웰우드(John Welwood 1943~2019)는 높은 영성(靈性)을 이유로 혼의 저질적 욕망과 감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해버리거나 초월하려는 ‘영적우회(Spiritual Bypassing)’ 때문에 그 역효과로 고승들에게서 자기애, 자만심 그리고 대인관계의 불안정성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이미 명언한 바와 같이 영이 어렵사리 道를 깨달아 얻었으나 혼은 이를 영에게 들어서 알 뿐 실천이 없어 아직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 도가 아직은 ‘남의 道’이기 때문이다. 이걸 가리키는 수많은 속담이 있다. 개발에 편자니,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니,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느니 하는 것들이다.
삶 속의 죽음
1.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영양부족으로 수명도 짧고 각종 질병과 재해, 전쟁 등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살았던 고대나 중세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죽음에 대한 공포의 총량이 컸을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만큼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금기어(禁忌語)는 아니더라도 가급적 잊고 살려는 심리가 지대하였다. 동양에서는 공자의 입을 통해 미지생언지사(未知生焉知死)라며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말이 나왔고 道家 또한 외단과 내단으로 삶을 우선으로 추구하였다. 서양에서도 카르페 디엠(Carpe diem)註1)이 원전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케세라세라(Qué será, será)적 심사를 표현하였다. 비록 동양에서는 사자의 서, 서양에서는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 같은 왕생술(往生術)이 유행일 때도 있었으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註2)가 수도자들의 담론에 그쳤던 것처럼 죽음의 담론은 중생들에게는 모두 귓전을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였다. 어느 때고 제례나 제사를 통하여 사자와 죽음을 가까이하는 시간과 의례는 있었으나 이는 죽은 자를 위로하고 죽음을 각성하려는 목적보다는 사자나 신령에 기대어 삶의 행복을 도모해보려는 축제적 의미가 더 컸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게다가 20세기 들어 의술발달로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이후 죽음은 인간들의 삶에서 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음을 대문 밖에 두고 살았던 우리나라도註3)갑작스런 물질문명의 혜택 속에 마찬가지 상황이 되었다. 결국 오늘날 ‘죽음’이란 단어는 사실상 금기어가 되었다.註4)
▲ 누구나 결국 죽는다. 고금을 통해 죽음의 공포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각종 방어기제를 생각해냈다. 사진은 용인공원묘지
2.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1)
의술발달로 수명이 고작 몇십 년 늘었다고 정말로 죽음이 인간들의 삶에서 뒤로 물러섰을까? 오늘날 사람들의 인생에서 고통이 줄어들고 대신 즐거움이 커졌으며 게다가 수명까지 길어진 만큼 현대인에게 죽음을 잊고 심지어 맘 편하게 무신(無神)으로 사려는 심리가 더욱 커진 것은 아닌가?註5)
고금을 통해 죽음의 공포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동원하였던 방어기제(防禦機制)에 대하여 알아본다.註6)
1) 뭐니 뭐니 해도 우선 무명(無明)을 들 수 있다. 무명은 다양한 측면에서 죽음의 공포를 가려준다.
(1) 무명은 개체성에 기인한다.註7)그렇다면 무명은 개체성을 가진 사람의 혼이 지고 가는 숙명이다. 무명은 상즉상입의 일원(一元)은커녕 죽음마저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처럼 이고 살면서도 못 보는 진실로 만든다.
(2) 소유와 명예욕에 기인한 14가지 감정(14情)도 단단히 한몫한다. ‘喜怒哀樂 愛惡欲 懼憂憎思 悲驚恐’에 온통 사로잡히면 머리에 죽음의 공포가 들어올 틈이 없다.
(3) 무명이 불러오는 삼독(三毒)과 오개(五蓋) 나아가 83,000 번뇌 역시 죽음을 잊고 살게 한다.註8)
2) 그 누가 죽음을 겪어 보았나. 그 누가 죽음을 제대로 아는가. 죽음은 직접 겪어 봐야 아는 것이니 말도 걱정도 소용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은 훌륭한 죽음의 방어기제다.
3) 언젠가는 결국 죽을 것이다. 피할 수도 없는 일을 미리 고민하고 두려워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자포자기(自暴自棄)주의 역시 강력한 기제다.
4) 나만 죽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당하는 죽음이 뭐가 무서우랴.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하니 죽을 때가 되면 한 손으로 거들면서 대충 동참하면 된다. 이는 영생하든 소멸하든 사람이라면 다 같은 처지일 것이니 누구 똑똑하고 절실한 사람이 나 대신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 하는 무책임(無責任)주의다. 이 같은 현상이 전쟁터에서 발생하면 무감각(無感覺)주의가 된다.
5) ‘삶에서 나를 지켜 주는 내가 속한 조직’의 논리와 가르침에 동조의식(同調意識)으로 맹종하는 조폭논리도 만만치 않다.註9)
6) 삶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판에 죽는 문제는 죽은 후에 일이라는 공자님의 미지생언지사(未知生焉知死)註10)주의 또는 부처님 식의 독화살주의도 의도치 않게 큰 몫을 한다.註11)
7) 하루살이나 매미 성체(成體)의 삶의 목적이 번식이듯, 연어가 알을 낳고 몸을 버리듯, 자손을 통해 새 몸을 얻는다는 집단생명주의, 또는 개별세포는 전체 몸의 일부이므로 개체는 전체를 위해 산다는 군혼(群魂)철학도 있다.註12)
8)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 천당에 갈 것이라는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 또는 지옥에 가더라도 적어도 영생불사이니 소멸보다는 낫다는 배짱철학도 좋은 방어기제역할을 한다.
<註釋>
註1) Carpe diem은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에피쿠로스 학파인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한 구절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현재를 잡아라(Capture the day)라는 말로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쓰이는 의미는 반대로 ‘Enjoy while you can’ 정도다.
註2) Memento mori는 ‘당신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예술과 영성에서 지상쾌락의 일시성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죽음을 기억 또는 기념한다’는 개념은 여러 문화권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동양의 각종 제사가 그러하고 서양의 할로윈 데이나 부활절의 재의 수요일이 그러하다. 또 장례 예술이라는 장르도 탄생시켜 조각으로는 winged skull이나 crossbones, 회화에서 해골, 모래시계, 시든 꽃 등을 정물에 등장시키는 기법 등으로 나타났다.
註3) 5.5.1. ‘우리나라의 민속 저승관’ 참조
註4) 소설가 베르베르(Bernard Werber 1961~)는 부럽게도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크게 성공한 몇 안 되는 소설가다. 그러나 그도 한때 어려움이 있었나보다. “예전에 이러저러한 일로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얻었지. 나는 그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어. 하지만 그런 선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편지를 병에 담아 바다에 던지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원고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네. 내 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은 나를 만나지 않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 믿네.” 이는 그의 소설 「신」의 한 구절이다.
註5) 삶과 고통 그리고 무신(無神)
1. 고통(苦痛) 하면 고(苦)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諦)의 첫머리에 꼽는 불교의 고통에 대한 고찰(考察, 苦察)이 으뜸이다. 불교에서는 고통을 三苦라 하여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 여기에 불교의 또 다른 고통의 종류인 팔고(八苦, duhkha)를 구분하여 넣고 다시 칠난(七難)을 더한 뒤 인도 삼키아학파의 세 가지 고통의 구분을 감안하여 고통의 종류를 다시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고(苦苦) : 추위와 더위, 기갈, 질병, 재난 등에서 생기는 육체적인 괴로움으로 八苦 중 生, 老, 病, 死의 四苦와 칠난(七難)(*)으로 인한 고통이 여기에 속한다. 인도 육파철학의 의외고(依外苦, 외계의 사물 또는 사람에게서 유래하는 괴로움)이다.
2) 행고(行苦) : 현실세계의 무상유전(無常流轉)의 변화로 인해 느끼게 되는 괴로움으로 삼키아학파에서는 의내고(依內苦, 자기 자신에서 유래하는 괴로움)로 보았다. 八苦 중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인 구부득고(求不得苦)와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거나 살아야 하는 괴로움인 원증회고(怨憎會苦)가 여기에 속한다 하겠다.
3) 괴고(壞苦) : 사랑하고 집착을 갖는 사물이 파괴되고 변화해 갈 때 느끼는 정신적 괴로움으로 삼키아학파의 의천고(依天苦, 신이나 운명에서 유래하는 괴로움)다. 八苦 중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인 애별리고(愛別離苦), 그리고 탐욕과 집착에서 오는 오성음고(五盛陰苦)(**)가 여기에 속한다.
2.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明言이다. 이를 名言으로 바꾸려면 이렇게 고쳐 써야 한다. “인간은 삶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다.” 불교는 삶은 苦라고 하며 고는 멸할 수 있다고 하고 멸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불교의 설립취지문인 사성제(四聖諦)의 말씀이다. 이처럼 종교는 삶이 苦라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자신과 가족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씨족과 부족 그리고 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名言은 “인간은 삶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다”이다.
3. 그러나 지금은 과학과 문명, 그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발전으로 과거에 비해 삶의 고통(八苦)은 현저히 줄고 삶의 달콤함(happiness)은 倍加되었으며 인간의 수명도 대폭 늘어났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전사고(前四苦)는 거의 사(死) 일고(一苦)만 남았고 후사고(後四苦) 중 애별리고(愛別離苦)는 팽배한 물질주의와 이기심으로 인해 드라마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원증회고(怨憎會苦)는 법으로 완화시켰고 구부득고(求不得苦)는 웬만하면 더 이상 苦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성음고(五盛陰苦) 정도만 남았으니 八苦의 시대는 去하고 기껏해야 二苦나 三苦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사실 死苦 또한 잊고 사는 인구가 9할이니 더 이상 고가 아니므로 현대는 苦다운 苦가 없는 ‘無苦의 시대’다. 특히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렇다.
4. ‘삶의 고통’이 줄고 ‘삶의 달콤함’이 늘어남에 따라 옛날보다 무신론자들이 열 배나 늘었다. 어떻게 계산하여 열 배인가? 무신론자의 비율을 계산하는 다음과 같은 무신방정식(無神方程式, cafe.naver.com/spiritsoulogy/500?boardType=L 참조)으로 계산한 결과다.
1) 우선 변수는 무신론자(atheist), 직관(einsicht), 지혜(wisdom), 지능(intelligence), 은총(grace), 과학(science), 삶의 고통(duhkha), 삶의 달콤함(happiness), 미디어와 법치(media)정도이고
2) 이때 변수 간에는 무신방정식 [a=100/e×100/g×(100×i/w+s+100×h/d+m)]이 성립한다. 물론 思考實驗으로 도출한 방정식이다.
3) 15세기 대비 현재의 상황을 감안하여 변수에 적절한 수치를 대입하면 a는 14倍가 나온다. 위키에 의하면 2005년 기준 우리나라 무신론자 비율은 30~52%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거(15세기)에는 백에 겨우 서너 명만 무신론자였고 지금은 길거리에 절반이 무신론자이다.
5, 無神비율은 무신론자의 증가 원인만을 따지는 데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각국에서 엉터리 지도자를 뽑는 이유, 사회에서 義人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 대중문화가 점점 타락하는 이유, 교회와 사찰에서 사람 보기가 어려운 이유, 성직자들의 수준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 주변에서 스승을 찾기 어려운 이유, 날이 갈수록 이혼율과 자살률이 늘어나는 이유, 소득구조가 점점 양극화되는 이유, 환경오염이 급속도로 심해지는 이유, 사법부와 고위공무원 그리고 정치인들 수준이 점점 낮아지는 이유 등 인류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의 원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무신방정식은 인간의 영적 수준의 비약적 발전만이 인류의 문명 발전과 구원의 전제조건임을 보여준다.
6. 무신론(無神論, Atheism)은 신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거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다. 사람에게 ‘無神의 경향’은 이드5욕의 미개(未開)에서 기인하는 혼죄에 불과하나 혼죄가 과도할 경우(미주 281 ‘신정론의 해답들’ 참조) 반신(反神)과 혐신(嫌神)(***)의 경향을 갖게 된다. 反神과 嫌神은 주혼의 에고2욕 또는 종혼이 보이는 해타적 自利추구에 원인하는데 이는 부인의 무신(無神)이나 무관심의 비신(非神)과는 달리 적극적 반감으로 신에 對抗함으로써(6.10. ‘업(業)에 대하여’ 참조) 자기와 이웃의 자아계발에 역행하여 자칫 혼의 소멸로 치달을 수 있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無神의 피와 회의(懷疑)의 눈’으로 불설의 무명(無明), 기독교의 원죄(原罪), 그리고 표준이론의 혼죄(魂罪)와 같은 천형(天刑)이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천형(天刑)으로서의 무신적 경향을 갖고 또 다소간의 反神的 경향을 가진다. 따라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무신론자와 반신론자는 있었다. 다만 내부적으로 自認하려 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 커밍아웃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서양의 경우 18세기 들어 전 세계로 퍼진 자유사상과 과학주의(scientism) 그리고 증가하는 종교 범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고 혐신(嫌神)하는 사람들이 공공연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동양 또한 사상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 공공연한 양심 표현은 혹세무민이었으니 커밍아웃은 쉽지 않았다가 20세기 들어 서양에서 밀려온 민주화와 산업화 덕택에 무신론자의 비율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오늘날 조사에 의하면 독일인 중 55%, 노르웨이 60%, 핀란드 60%, 스웨덴 85%, 덴마크 80%의 인구가 무신론자이다. 동양인 일본에서도 64%에서 80%에 달하는 인구가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 무교자라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보다 생활수준과 평균 지능지수가 모두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富와 명예는 心眼을 가리니 정신의 문명화 보다 부(富)와 장수(長壽)의 증가속도가 클 가까운 미래에는 무신론과 반신이 더욱 활개를 칠 것이다.
(*) 七難은 화난(火難, 화재), 수난(水難, 홍수, 태풍, 가뭄), 나찰난(羅刹難, 악령에 의한 재난), 질역난(疾疫難), 귀난(鬼難, 死靈에 의한 재난), 가쇄난(枷鎖難, 옥에 갇히는 재난), 원적난(怨賊難 , 전쟁과 반역의 재난)이다.
(**) 오성음고(五盛陰苦) 또는 오온성고(五蘊盛苦)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陰)에서 비롯한 我想에 탐욕과 집착이 번성함으로 인한 괴로움이다.
(***) “악령들은 천사를 보고 그 주위에 하나님의 영향권을 느끼면 일종의 분노가 솟아오른다고 했다.”(스베덴보리, 「천상여행기-천국편」 제2장 ‘신참 영이 천국의행복을 깨닫다’ 중에서)
註6) 열거하는 방어기제 중 하나에만 의지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註7) 무명의 공식은 [개체성 확보 → 자의식 발생 → 이기심과 자존심 등장 → 소유욕과 명예욕으로 구체화 → 무명 발생]이다(미주 151 ‘표준이론의 무명(無明)’ 참조).
註8) 5연기설에 의하면 [무명 → 망상 → 번뇌 → 苦 → 마음의 병]이다(미주 6 ‘마음의 병과 苦 그리고 번뇌’ 참조).
註9) 1. 동조(同調, conformity)는 동조를 부르고 세력이 되고 권력이 된다. “나보다 똑똑하고 존경할 만한 두목이 죽는 것 걱정 말고 일이나 잘하라는데 그 말을 따라야지. 다들 죽는데 나라고 못 죽을소냐. 무서워한다고 안 죽나?”라는 식이다.
2. 개인이 집단에 속해서 그 구성원 역할을 수행할 때 집단은 개인이 그 태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준거의 역할을 하거나 혹은 규범을 통해 개인의 행동을 강제한다. 이와 같이 집단의 압력에 의해 개인이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현상을 ‘동조 현상’이라고 한다.
註10) 미지생언지사(未知生焉知死)
너나 잘해
저승을 알면 뭐 하랴
이승도 제대로 모르면서
전생에 뭐 했는지 알면 뭐 하랴
현생도 제대로 못살면서
죽으면 알게 될 저승이고
죽으면 생각날 전생인데
알면 뭐 달라진다고
귀하고 아까운 시간
그걸 알려고 낭비하는가
자신은 전생의 결과물이고
현생은 전생의 연속극이야
모를 게 뭐 있고 뭐가 궁금해?
지금 너나 잘해
네 맘보나 뜯어 고쳐 봐
세상에 없는 말은 이제 없어 그러니
네가 세상에 보탤 말도 없어
남 가르쳐 줄 생각 말아
남은 너보다 더 나아
그러니 너나 잘해
註11) 전유경, 법화경 등에 14無記와 함께 전하는 부처님의 ‘독화살의 비유’는 “독화살을 맞은 자는 독화살을 빨리 빼내고 독을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지, 독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독화살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라는 것으로 공자님의 ‘未知生焉知死’와 같은 취지다(미주 142 ‘불교의 창조주와 영 그리고 혼’ 참조). 그런데 부처님도 공자님도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는 삶을 통해 독화살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세상에 왔는데 말이다.
註12) 일본 신도(神道)나 유교의 조상신에 대한 믿음도 크게 보면 여기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