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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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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월 24일 경남 거창에서 <우리 시대 왜 동학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 『개벽사상과 종교공부』(창비, 2024)가 출간되었습니다. 지난 2021년에 백낙청 선생이 진행한 김용옥, 백맹수 선생과의 특별좌담(<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과 함께 2023년에 저를 포함한 6명과 진행한 3편의 좌담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저는 두 번째 좌담 <동학의 확장, 개벽의 운동> 편에 김용휘 교수와 함께 참여했습니다. 세 번째 좌담은 방길튼, 허석 교무가 참여하여 원불교의 개벽사상을, 네 번째 좌담은 이은선, 이정배 교수가 참여하여 기독교의 개벽사상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 좌담집을 포함하여 백낙청 선생의 원불교와 개벽사상 공부에 대해서는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미흡하지만 일단 시론 형식으로 잠깐 언급했습니다. 앞으로 좀더 다듬고 보완할 생각입니다.
저도 필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끼어 있어 좀 쑥스럽지만, 『개벽사상과 종교공부』를 많은 독자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젊은이와 여성에게 이 책을 강추합니다.
그에 앞서 우선 강의의 서론에 해당하는 <동학과 개벽>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려고 합니다.
1. 동학과 개벽
아시다시피 올해는 동학 창도주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1824〜1864)의 탄신 200주년이 되는 해이자 갑오 동학농민혁명(1894) 130주년, 그리고 갑진왜란(1904) 1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와 황태연 동국대 명예교수, 서울대 일본연구소 남기정 교수,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 교수 등은 지금까지 승전국 일본이 사용해온 ‘노일전쟁’ 대신 ‘갑진왜란’이라는 다른 용어를 제시합니다. 일본이 개전 직후 불법으로 진해만을 점령하고 마산과 부산의 전신국을 제압하여 조선의 주권과 영토를 침탈하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리의 시각에서 임진왜란(1592)과 정유왜란(1597)에 이은 또 다른 왜란이라는 의미로 ‘갑진왜란’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이런 뜻깊은 때를 맞이하여 이곳 거창에서 동학에 대해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저 제가 동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동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고향은 충북 보은군 회남면 어부동, 교통도 불편하고 농지도 부족한 산골 마을입니다. 진천에 살던 5대조 할아버지가 동학에 가담하자 집안 망칠 놈이라고 큰집에서 쫓겨나 처가인 문의(현재의 청남대 자리)를 거쳐 금강을 건너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왔다는 것을 우연히 집안 종손인 형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나도록 집안 어른들 모두 그런 사실을 쉬쉬하며 감춘 것이지요. 그만큼 동학은 조선 왕조 시대는 물론이고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에도 자칫하면 목숨을 잃거나 패가망신을 가져올 수도 있는 금기의 영역, 요새 말로 트라우마였던 셈이지요.
저희 집안처럼 동학 관련자들이 깊은 산골로 피신하거나 동학 가담 사실을 숨기고 살아온 경우는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답사 중에 목격한 사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경북 예천에서는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 11명이 생매장된 강변에 1999년 시민단체에서 추모비를 세웠지만,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아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기항 선생은 소백산으로 피신하여 화전민으로 떠돌다가 돌아가셨고, 그의 손자 대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고향(정감록의 10승지 가운데 하나인 금당실 마을)으로 돌아왔는데, 예천 읍내나 금당실 마을에 추모비를 세우려 하자 보수적인 유림들이 완강하게 반대하여 결국 외진 산속의 종중 묘역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영남대 독문과에서 정년퇴임한 2012부터 동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서 책을 읽고 공부하다 동학 공부 모임에 합류하여 저명한 연구자들의 강의도 듣고 토론도 하고 답사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평생 남을 가르치다가 뒤늦게 학생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니 즐겁고 신이 났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전문적인 학술 연구나 종교적인 수행의 체험담이 아니라, 동학에는 문외한인 한 만학도가 책을 읽고 공부길의 선배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배운 것들을 저 나름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갑오 동학농민혁명(1894) 당시 조선 인구 1,100만 가운데 2, 3백만이 가담하여 30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경북 상주처럼 직접 농민혁명에 뛰어들지 않은 지역의 동학 도인들까지 합치면, 조선팔도가 동학천지였다는 말이니까요.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많은 민중들이 동학에 가담하여 목숨을 바치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지 궁금했습니다. 농민뿐만 아니라 일부 양반과 아전, 상인, 노비 등 광범한 민중이 가담한 것은 단순히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대의명분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절실한 어떤 의식의 깨우침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개벽사상’이라고 봅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도하고 해월 최시형 선생이 널리 전파한 동학의 가르침이 바로 개벽사상이지요. 동학은 양반 상놈이라는 신분의 장벽, 적자 서자의 구분, 빈부의 격차, 남녀의 차별을 넘어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개벽세상의 꿈을 민중들의 가슴에 심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우금치로 달려가게 만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벽이라고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낯설고 이질적이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저도 개화나 개화파, 대원군의 쇄국정책이나 위정척사파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개벽이나 개벽파라는 말은 자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변혁이나 혁명에 관한 서구의 담론들보다 동학과 증산교, 원불교 같은 종교의 ‘개벽’ 담론에는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낄지 모릅니다. 보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탄생한 동학과 증산고, 원불교를 신흥종교, 또는 민족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 세 종교를 관통하는 공통의 화두가 개벽입니다. 동학을 비롯한 이러한 개벽사상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사상담론으로 발표한 것은 바로 김지하 시인입니다. 그렇지만 김지하의 생명사상에는 공감하는 이들도 그의 개벽 담론에는 국수주의의 냄새가 난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나 백낙청 선생 같은 석학들이 심층적이고 치열한 토론을 통해 개벽 담론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힘으로써 많은 이들의 공감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백낙청 선생에 따르면(『개벽사상과 종교공부』의 서문 참조) 보통 개벽이란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 태초의 천지개벽을 말하는데, 동학에서 말하는 개벽은 이런 ‘선천개벽’의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일어나는 근본적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대변혁”을 말합니다. 그는 개벽을 영어로 Great Opening이라고 번역했지요. 수운은 『용담유사』에서 ‘다시개벽’이라는 말을 썼지만, 해월 최시형,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 등은 ‘후천개벽’이라는, 한반도 특유의 사상과 변혁운동의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개벽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우주의 빅뱅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서구 중심의 근대문명과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의 개교 표어는 수운의 ‘다시개벽’과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해월의 후천개벽, ‘천지공사’를 통한 증산의 후천개벽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백낙청, 김용옥, 박맹수 세 분의 좌담에서 집중적으로 토론된 새로운 개벽 담론에는 춧불혁명의 완성과 분단체제 극복, 서구식 자본주의 근대의 극복 같은 미완의 과제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 전지구적 과제인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개벽사상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지식인들과 시민운동단체들은 이러한 당면 과제들의 해법을 서구의 생태사상과 담론에서만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자생적 개벽사상과 동학의 가르침 속에서 생명평화사상의 뿌리와 해법을 찾는 일이 새로운 공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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