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0

알라딘: 청화 전기 : 위대한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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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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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전기 : 위대한 스승
김용출 (지은이) 한울(한울아카데미) 2023-11-10
정가
29,800원
판매가
29,800원 마일리지 290원


504쪽

책소개
행장도 감동적이었지만, 원통불교 사상과 정통선을 바탕으로 다양한 수행법의 회통, 염불선의 대중화 등 그의 사상도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부처님과 정통 조사들의 다양한 에피소드에, 풍성한 철학과 현대 과학이라니. 독서와 공부 범위는 책에서 논문, 법문 자료로 번져나갔고, 어느 순간 노트북에 그 내용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_에필로그

청화 대종사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전남 무안에서 탄생해 한평생 석가모니 부처의 정신을 우리 시대에 펼쳐 보이시다가 2003년 곡성 성륜사에서 열반하셨다. 2023년 올해로 탄생 100주년과 열반 20년을 맞이한다. 논픽션 작가 김용출은 수십 년 동안 장좌불와와 일종식, 토굴 수행을 감행하며 원통불교의 중흥과 염불선의 대중화를 이뤄낸 위대한 수행자 청화 대종사의 행장과 사상을 가감 없이 진실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800여 개의 법문과 저작, 역주서, 편지를 정독하며 5년의 시간으로 새긴 청화 대종사의 법향은 많은 불교도들과 일반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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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지도 청화주요 수행처와 창건·중건 사찰
추천사 대종사의 법향(法香) 되새길 길잡이_진우
대종사의 사상과 행장 일목요연 정리_용타
서장“나 갈라네, 승가는 화합이네”(2003.11~현재)
2003년 11월 12일 열반 “대중과 화합 잘 하시게”|“큰스님, 생사거래의 진상 다시 일러주소서”|원통불교의 중흥과 염불선의 대중화|위대한 수행자…전도에 최선, 미국 포교도

제1장 고해의 바다, 탄생과 젊은 시절(1923~1946)
1923년 12월 13일 비범한 탄생|생명을 귀하게 여긴 모범생|간난신고의 일본 유학|갑작스러운 결혼과 강제징집|해방과 광주사범 편입

제2장출가와 스승 금타, 새로운 출발(1947~1949)
1947년 발심 출가|수행의 원형과 운문암 시절|위대한 스승 금타|철학적 우주론의 규명과 「보리방편문」 저술|수행의 위차 정립과 「수릉엄삼매도(결)」 저술|금타의 열반과 영향

제3장 현대사와 불교 정화의 격류 속에서(1950~1958)
한국전쟁의 발발|망운중학교의 설립|첫 불사 혜운사의 창건|불교 정화의 혼돈 속에서

제4장 치열한 구도와 만행(1959~1977)
1959년 겨울 두륜산 양도암으로|진불암 수행과 초의의 『선문사변만어』|광주 추강사 시절|지리산 백장암 및 벽송사 두지터 수행|곡성 태안사 주지|구례 사성암 수행과 오도 |남해 부소대 및 진주 두방사 수행|『금강심론』 원고 입수와 조방원과의 교류|이어지는 안거 수행과 번역 불사

제5장 사상의 정립과 하화중생 모색(1978~1984)
상견성암 삼년결사(1978~1981)와 『금강심론』·『정토삼부경』의 번역 출간|돈점 논쟁의 불씨와 『약사경』 번역|첫 언론 인터뷰 “정통 불법의 부흥을!”|첫 대중 법문, 백장암 만등불사 법문|베일 벗은 사상, 백장암 연속 법문(1984)|안성 칠장사의 포효와 『정통선의 향훈』

제6장 태안사 시대와 회상의 형성(1985~1992.9)
1985년 태안사 조실 부임|태안사 삼년결사(1985~1988)|금륜회의 조직과 정중당 건립|천도재 등 각종 재의 봉행|대중 법문의 러시와 서울 전도|『원통불법의 요체』 연속 법문(1992) |회상의 형성과 성륜사 시대 개막

제7장 붕정만리 성화미주(1992.10~1998.3)
1992년 10월 미주순회법회|한국 불교 미주 첫 동안거 결제|짧은 귀국과 이어지는 대중 법문|카멀 삼보사 시대|순선안심탁마법회와 『안심법문』(1995)|팜스프링스 금강선원 삼년결사(1995~1998)

제8장 마음을 깨치면 모두 부처(1998.4~2003.6)
귀국과 마지막 안거 수행|“「보리방편문」은 『육조단경』에서 유래”|실상사 조실 및 조계종 원로의원 피선|대중 법문의 러시와 서울 광륜사 개원|『육조단경』의 역주|2003년 6월 마지막 대중 법문 “계율을 지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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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28~29
하루 전날, 그는 자신을 찾아온 오랜 제자 태호 스님에게 이제 떠나겠다고,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나, 내일 갈라네. 다비 그런 것 하지 마소. 그냥 그냥 흐르는 강물에 훠이 훠이 뿌려버리소.”
마침내 그날 2003년 11월 12일 수요일 저녁 무렵, 그는 성륜사 조선당에서 원을 조용히 불렀다. 낮에만 해도 사시 공양을 먹고 차담을 나누는 등 특이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였지만, 이때는 이미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의복을 좀 갖춰주소.”
중원은 그가 평소 만행 때마다 입고 다니던 승복을 가져와서 입혔다. 평소 쓰고 다니던 모자도 씌워줬다.
“나 혼자서 10분 정도 앉아 있을라네.”
중원은 그의 몸을 부축해 일으킨 뒤 바로 앉혀주었다. 그는 한동안 평소 수행하던 모습으로 앉아 있는 듯했다. 중원은 방에서 나오면서 생각했다. 큰스님이 평소처럼 앉아 계시는구나.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얼마 뒤, 그의 용태는 확연히 달려져 있었다. 깜짝 놀란 중원은 다급하게 제자 및 상좌들에게 알렸다. 천도재를 지내고 쉬고 있던 도일을 비롯해 상좌와 제자들이 조선당으로 달려왔다. 그가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도일이 스승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큰스님, 가시렵니까.”
“나, 갈라네.”
“큰스님, 앉혀드릴까요.”
“알아서 하소.”
도일은 이때 낮에는 눕지 않는 장좌불와 수행을 오랫동안 이어온 스승을 한 번쯤 편히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돌연 들었다.
“큰스님, 그냥 편안하게 가십시오.”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제자 및 상좌들을 향해서 힘겹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대중과 화합 잘 하고 살아가시게. 승가란 화합이네.”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자 한국 현대 불교의 큰스님 청화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화합이었다. 대중과 화합 잘 하라고. 승가는 화합이라고. 그는 성륜사 조선당에서 도일을 비롯한 제자 및 상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2003년 11월 12일 오후 10시 30분. 그의 나이 80세요, 법랍 56세였다. _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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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1
청나라 황제 순치의 「순치황제 출가시」, 부설 거사의 「사부시」, 금타 선사의 <수릉엄삼매도>를 보면서, 그는 속세에 대한 미련과 출가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었다. 결심을 서서히 굳혀갔다. 장정 500명이 빗장을 열어도 열기 어려운 대문 같은 출가를. 귀의하리라, 거룩한 부처님께. 위대한 가르침에. 훌륭한 스님들께⋯._제2장, 출가와 스승 금타, 새로운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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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2
붓을 집어 들었다. 토굴의 벽에다 없을 무(無), 나 아(我)의 무아를 써 내려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빌 공(空) 자를 쓰기도 했다. 쓰고 또 썼다. 벽이 검어질 정도로, 미친 듯이. 제법공과 무아를 체득하기 위해 백장암 토굴의 사방 벽에다 무아와 공 글자를 수천 번 썼다고, 그는 나중에 동안거 용맹정진 연속 법문에서 회고했다.
“겨울에 혼자 토굴에 있는데, 이놈의 ‘나’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무아인가, 어떻게 해도 무아, 내가 없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 말입니다. 머리를 제 아무리 찢어봐도 결국은 납득이 안 되거든요. 그때 사방 벽에다 무아, 공을 수천 번을 썼습니다. 이놈의 ‘나’가 하도 떨어지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_제4장 치열한 구도와 만행

P.155
“해제를 하고 며칠이 지나니, 큰스님의 이가 그냥 쑥 빠졌습니다. 이를 쓰지 않고 영양 섭취가 안 돼 그냥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때 큰스님의 모습은 마치 부처님 고행상 같았습니다. 저는 큰스님이 꼭 부처님처럼 보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배가 등에 붙을 정도로 되자, 좌복을 배에 대고 끈으로 몸에 묶었습니다. 몸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절대 벽에 기대지도 않고 눕지도 않으시니 그렇게라도 하신 것입니다.” _제4장 치열한 구도와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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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1~232
“우리는 비록 사람일망정 우리 마음의 본바탕, 본성은 역시 부처입니다. 지옥 같은 마음, 사람 같은 마음들이 단지 요소로만 거기에 조금씩 묻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역시 본바탕, 본 저변은 부처라는 말입니다. 겉에 뜬 초점에서만 지옥이고, 지옥 같은 인연 따라서 되니까 지옥 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인연 따라 업에 따라서 사람 같은 모양으로 태어나서 사람 같은 마음을 쓰는 것이지, 이 마음도 역시 저변에는 모두가 부처뿐이라는 말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회광반조(回光返照)라, 이 마음 돌이켜서 저변만 보면 그때는 우리가 부처가 되고 만단 말입니다.”_제5장 사상의 정립과 하화중생 모색


추천글
진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곡성 성륜사나 서울 광륜사에서 청화 대종사를 뵐 수 없습니다. 환한 미소와 하심으로 사부대중을 따뜻하게 제접해 주시던 대종사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종사의 삶과 사상을 정확하게 담은 책 『청화 전기: 위대한 스승』을 통해서 대종사의 풍모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용타 (벽산무주문도회 문장): 정통 불법의 부흥을 통한 원통불교의 중흥 시도, 정통선을 바탕으로 다양한 수행법의 회통과 염불선의 대중화, 청정한 계율과 치열한 구도 정신, 6년간의 미국 성화. 청화 대종사께서는 가히 한국 불교와 세계 불교에 지워지지 않을 깊은 영감을 심어주셨습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2023년 11월 17일자 '새책'
문화일보: 문화일보 2023년 11월 24일자 '이 책'
세계일보: 세계일보 2023년 11월 24일자
한겨레: 한겨레 2023년 12월 8일자 출판 새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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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김용출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청화 전기 : 위대한 스승>,<비선 권력>,<독일 아리랑> … 총 7종 (모두보기)
논픽션 작가 및 기자. 2003년 논픽션 『최옥란 평전』과 2006년 『독일 아리랑』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독서경영』(공저, 2006), 『비선 권력』(공저, 2017), 『역사 논픽션 3·1 운동』(공저, 2019) 등을 집필했다. 1997년 입사한 이래 세계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1969년 장흥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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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청화 대종사, 대표적 선승으로 정통 불법의 부흥을 통한 원통불교 주창 청화 대종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오랫동안 일종식과 장좌불와, 토굴 수행을 감행하면서 정통 불법의 부흥을 통해 인간론적 신앙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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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전기 위대한 스승>을 읽고
 지인 중에 실정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분이 있다. 파렴치범이나 폭력, 경제사범은 아니고 회사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다 법망에 걸린 분이다. 책임감이 있고 지적 교양이 넘치는 분이라 그의 재판결과를 알았을 때도 걱정은 되었을망정 크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그 분이 구치소에서 편지를 보내왔는데 민주화투쟁 시절 시국사범 못지 않게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보내고 계셨다. 남편에게 “참선과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잡았다”며 “형님도 언제 한 번 들어와 한 철 지내셔야겠다.”라고 써서 우리 부부는 한 참을 웃었다.
 그 분이 감옥에서 주로 하는 참선은 염불선이라는데, 보통 알려져있는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이 그것이다. 편지 말미에는 현대불교에서 염불선을 새롭게 주창한 청화스님을 가장 존경한다며 책 한권을 추천해주었다.
 불교에는 문외한이지만 이따금 원효 이후 우리 민중들의 삶 속에 깊숙이 뿌리내린 그 염불의 깊이를 이따금 생각해보던 터라 책을 사서 읽어보았다. 김용출 기자가 쓴 <청화전기 위대한 스승>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청화스님의 뜨거운 구도열정과 치열한 수행정진의 삶과 따뜻하고 자애로운 성품에 깊이 매료되었다.
특히 간화선만을 사실상 유일한 수행법으로 간주해온 조계종이 염불선을 비롯해 다양한 수행방법에도 문을 열고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길을 열게 한 선구자적 면모에 이끌렸다. 
"우주만유는 진여불성뿐이고 마음이 곧 부처라고 보는 반야의 지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수행한다면 어떤 수행도 참선이 될 수 있다"고 스님은 설했다. 간화선도 염불선도 묵조선도 주문수행조차도 그는 함께 품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유언은 바로 화합이었다. “대중과 화합 잘 하고 살아가시게. 승가란 화합이네.” 
그는 승과 속의 화합뿐만 아니라 불교내의 다양한 분파간의 통섭을 넘어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다른 세계종교와의 대화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우주만유가 진여불성'뿐이라는 일원론적이고 범신론적 존재론과 진리관을 바탕으로 종교와 사상간의 회통을 시도했으며 특히 삼신일불사상과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회통을 시도했다. 
나아가 불교의 참선과 삼매, 기독교의 기도, 힌두교의 명상 모두 같은 수행방법이라면서 수행법간 회통도 시도했다.
 청화의 피나는 노력으로 조계종단은 염불선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종헌도 그에 따라 개정했다.
고려시대 이래로 간화선이 중심이 된 한국불교계에서 청화스님의 염불선은 외도라고 비난받고 방편설이라고 폄하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청화는 하루 한끼 공양과 손수 빨래를 하는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평생 견지하고 특히 40여년의 토굴생활과 장좌불와정진, 3년결사를 다섯번이나 행하는 치열한 구도행각으로 깨뜨려왔다. 
말년에 청화는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실상선문 대표사찰인 남원 실상사의 조실로 정식 추대됐다. 당대 최고의 수행승으로 꼽히면서도 염불선 수행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그를 실상사조실로 추대한 것은 도법스님이었다. 그리고 도법 등의 추천으로 조계종 최고의결기구인 원로회의에서 원로회의 위원으로도 피선되었다.
도법은 “세상이 건강하게 가꾸어지려면 다양성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삶이 아름답게 피어나려면 개성이 온전하게 존중되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불교계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활기참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조계종단이 개성을 존중하는 자신감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며 청화의 성취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독서가 깊어가면서 내 속에는 현대불교계의 양대지주로 성철스님과 청화스님이 함께 자리잡았는데 두 스님의 개성과 주장하는 바에 사뭇 대조적인 면이 있어 흥미로웠다.
두 스님은 1910년대와 20년대에 열살 차이로 태어나 부모의 뜻을 거슬리지 못하고 혼인한 후 비슷한 나이대에 출가했다. 각각 해인사와 백양사에서 출가한 두 분은 선승이자 학승으로 이름을 떨친 거승으로서의 면모를 공통적으로 가졌다. 
하지만 그 추구하는 영성의 길에 있어 두 스님은 명백히 대조되는 개성을 보여준다. 경남 산청 출신으로 선이 굵은 얼굴을 한 성철스님은 신도들의 친견조건으로 삼천배를 요구할만큼 우뚝한 기상이 돋보였다. 반면 전남 무안 출신으로 선이 고운 마른 얼굴을 한 청화스님은 신도들이 절을 해오면 꼭 맞절로 받을만큼 자애로운 처신으로 회자되었다.
성철스님은 간화선을 한국불교의 정체성으로 삼았고, 보조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며 깨달음의 실체를 단박에 깨치는 돈오돈수로 보았다. 이에 대해 청화스님은 간화선에 밀려 진지한 참선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염불선의 부흥을 주창했고, 시대정신과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각기 강조된다며 회통을 꾀하였다.
“내가 부처임을 믿는 그 마음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염불은 원효대사부터 서산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불교의 전통이었습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 염불이죠. 그러므로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단순히 복을 비는 방편염불에 지나지 않지만, 대상을 떠나 본체를 부처로 설정하고서 그것을 안에서 구하면 바로 염불선이 되지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저만치 우리 마음 밖에 있는 어떠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자성, 즉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님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우리 법신불같이 생각할 때는, 비록 형식으로는 하나님을 부른다하더라도 이것도 역시 선(禪)이 됩니다.”
조상들의 유구한 불교전통과 함께 유소년시절을 카톨릭교회에서 보낸 나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회통하는 이런 마음자리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청화스님은 그 갈급한 마음에 촉촉한 봄비처럼 다가왔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읊조리는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에도 맑고 고아한 생명의 기운이 함께 깃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