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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내가 보고 겪은 북한 교통 실태 : 신동아



내가 보고 겪은 북한 교통 실태 : 신동아

내가 보고 겪은 북한 교통 실태

“마사지 받는다고 생각하시라우”
| 조현준 계명대 언론영상학과 교수 wesleycho7@naver.com
입력2018-05-2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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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시내 비포장 도로 위에 주차된 폴크스바겐 택시들. 이용하는 승객이 별로 없어 보였다. [조현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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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측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 솔직한 발언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열악한 내부 사정을 외부 세계에 굳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북한이기 때문이다. 내가 북한의 낙후된 농촌 마을을 촬영하려고 할 때마다 그곳 주민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2013년 11월, 함경북도 나선시와 청진시, 경성군을 다녀왔다. 영국, 호주, 러시아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 5명과 함께였다. 내가 북한을 가게 된 것은 일종의 궁금증 때문이었다. 2012년 여름, 북한자유연합 등 보수단체가 대북 전단, 일명 ‘삐라’를 북한으로 날리기 위해 임진각에 모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삐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던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임진각으로 향했다. 평화를 상징하는 임진각에서 거센 충돌이 일어났다. 삐라를 날리려는 보수단체와 이를 저지하려는 진보단체 및 지역 주민, 그리고 이들을 말리려는 경찰들까지 뒤엉켜 몸싸움이 벌어졌다.

삐라로 인해 생긴 남남 갈등. 과연 북한 주민들은 남한이 살포하는 삐라를 어떻게 생각할까? 호기심이 생긴 나는 북한이 허용하는 외국인 투어에 대해 알아봤다. 그러나 내 국적이 캐나다라고 하더라도 한국에 살기 때문에 북한 투어를 할 자격이 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캐나다에 거주하는 대학생’으로 서류를 제출해 북한행 여행 비자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북한 여행 중 정치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고국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한 오토 웜비어가 택했던 여행사를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


‘미스터 김’의 딸 걱정


나선 시로 향하는 길에 만난 버스 창밖 풍경들. 산에는 나무가 드물다. [조현준 제공]
당시 전에 없던 새로운 여행상품이 나왔는데, 함경북도 나선시, 청진시, 그리고 경성군을 돌아보는 코스였다. 중국 옌볜에서 차를 타고 국경 세관을 거쳐 나선시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마중 나온 안내원과 함께 미니밴을 타고 나선시 식당으로 향했다.

세관에서 나선 시내로 가는 길은 고불고불했지만, 양방 2차선 도로는 깨끗한 편이었다. 창문 밖 풍경은 보통의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과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슬로건이 드문드문 보였고, 시내로 들어서자 그것들은 더욱 자주 눈에 띄었다.

호텔 앞에는 광장 같은 공간이 있는데 바닥에 금이 많이 나 있으며 울퉁불퉁했다. 남한이라면 이러한 공간을 주차장으로 썼으리라.

나선 시내 도로에 다니는 자동차 중에는 택시가 가장 많은 듯했다. 택시 대부분은 폴크스바겐. 나선에서 택시비는 1km당 중국돈 4위안(약 670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택시를 타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택시 대부분은 항상 어딘가에 주차돼 있었다. 2013년 당시 서울 택시요금인 2km당 3000원에 비하면 나선 택시가 반값 수준으로 저렴하지만 북한의 국민소득을 고려한다면 일반 주민에게는 매우 비싼 교통수단이다.

나선은 경제특구 지역이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중국에서 들여오는 제품을 즐겨 사용하는, 북한에서 매우 잘사는 도시다. 다만 밤이 되면 도로에 가로등이 켜지지 않아 껌껌한 도로를 달릴 수밖에 없었다. 도로변에 있는 식당 몇 곳에만 불이 켜졌고,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다. 나선시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도중에 갑자기 불이 나간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식당 종업원이 배터리로 작동하는 스탠드 조명을 가져와 불을 밝혀줬다. 몇 분 후에 다시 전기가 들어오기도 했다.

위성사진에 나온, 남한 대비 어두컴컴한 북한은 외국 언론이나 보수단체가 북한의 열악한 전기 사정을 보여주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다. 북한의 전기 사정이 열약한 건 사실이다. 다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옥외광고가 없다. 옥외광고 없는 사회에선 그만큼 전기가 덜 필요하다. 따라서 위성사진으로만 북한의 전기 상태를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선의 한 호텔 로비에서 호텔 종업원들과 대화를 시도했다(물론 북한에서의 모든 인터뷰는 몰래카메라로 촬영했다). 내가 남한 발음의 ‘조선말’로 말을 걸자 신기해하는 눈치다. 북한 사람들도 남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식 걱정을 많이 했다. 자신의 자식이 평양에서 대학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호텔의 내 방 침대에는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덕분에 매우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로비 직원에게 그 점을 얘기하자 그는 “그럴 리 없다”며 대화를 회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나선에서 밴을 타고 여기저기 다녔고, 도로에 차가 없으니 막히지 않아 좋긴 했다. 안내원 말고도 전직이 교사였다는 한 북한 남성이 동행했는데, 그와 친해지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볼 수 있었다. 그는 “핵은 자위(自衛) 수단이다, 핵이 없으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듯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남한 보수주의자들은 “남한이 퍼준 돈으로 북한이 굶어 죽는 주민들을 살리지 않고 핵을 만들거나 군인들에게만 혜택을 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남한이 돈을 주든 말든 핵은 항상 만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남한 원조가 군인들에게 갔다면, 그것은 북한 주민의 자식들에게 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북한 인구의 상당 비율이 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내 배가 고프더라도 우리 자식이 배불리 먹었다면, 거기에 대해 뭐라 하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고도 했다. 그는 남한이 살포하는 삐라에 대해서는 “비겁한 행동”이라며 치를 떨었다. “삐라 속에 약품을 넣기도 한다”고 하자 “약품은 적십자를 통해 공식적으로 보낼 것이지, 왜 비겁한 방식으로 보내느냐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북한을 여행하는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이제부터는 그를 ‘미스터 김’이라고 부르겠다.


트럭과 리어카와 소달구지


경성에서 목격한 아이나 짐을 싣고 가는 리어카들. [조현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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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에서 어느 중학교에 방문했다. 거기 학생들이 닭싸움하는 모습은 한국과 비슷했다.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우수한 편이었다(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로 보였다). 아이들은 곧 평양으로 견학을 간다며 들떠 있었다. 담임교사는 내가 무슨 말을 하나 궁금했는지 자꾸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감시’를 피해 아이들에게 남한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교육을 받은 듯 대답을 회피했다. 이후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북한 주민들을 종종 만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와 별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이후 그는 점점 마음을 열었다. 그는 한국 대학의 등록금이 얼마나 되는지, 삼성이 휴대전화 외에 무엇을 더 만드는지 궁금해했다.

며칠 후 나선에서 청진으로 이동했다. 나선을 빠져나오기 전 우리 일행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공간에 차를 세워야 했다.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여권을 가져갔다. 다시 여권을 받아 이동할 때까지 30분가량 걸렸는데, 당시 우리 밴 근처에 있던 한 여자 군인은 나를 향해 미소 짓기도 했다.

나선을 벗어나자 다른 함경북도 관할시 소속의 다른 안내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운전기사는 출발 전에 우리에게 “마사지 받는다고 생각하고 3시간을 잘 버텨달라”고 당부했다. 길이 울퉁불퉁하다는 말을 우회해서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로 사정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과속방지턱이 쉼 없이 연결된 도로를 3시간 동안 달리는 것 같았다. 몸이 오르락내리락 덜덜 떨려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한번은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버스가 심하게 요동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안전벨트도 없이 좌석 손잡이를 꽉 붙들고 세 시간을 버텼다.

창밖 농촌 풍경은 남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에 나무가 없다는 걸 빼고는. 역시나 김정은과 사회주의 체제를 찬양하는 슬로건이 자주 나타났다.

북한에 도착한 첫날 안내원이 버스에서 바깥 풍경을 촬영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나는 DSLR 카메라로 버스 바깥을 몰래몰래 촬영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앞에 앉아있던 안내원이 뒤로 돌아 내게 오더니 버럭 화를 냈다. 밖에 있던 어느 주민이 내 카메라를 보고 불편하다고 신고했다는 것이다. 믿기 힘든 얘기지만 나는 카메라를 끌 수밖에 없었다. 대신 몰래카메라를 켰지만.

청진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차선이 없었다. 소달구지와 리어카, 트럭이 한데 뒤섞여 다녔다. 트럭들은 시도 때도 없이 경적을 울려댔다. 도로가 워낙 좁고 울퉁불퉁, 고불고불해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량에 경고하기 위해서다. 도로 위에서 리어카와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는 북한 주민들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거기까지는 얼마나 걸리까.

우리 버스가 마침내 청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땅을 밟으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평양에서 온 마사지사들


서울 지하철처럼 청진 시내 트램에는 승객들로 가득하다. [조형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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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 시내는 나선만큼 깨끗했다. 나선처럼 자전거가 많이 다녔고, 신호등 없는 도로에서 길안내원이 깃발을 든 채 신호등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차량이 많진 않아서 길안내원의 업무가 크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청진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거의 처음으로 발을 디딘 도시라고 했다. 촬영은 그만큼 쉽지 않았다.

청진에서 새롭게 합류한 안내원은 내가 DSLR 카메라로 김일성 동상을 어떻게 촬영했는지 보여달라고 했다. 김일성 목이 조금 잘려 촬영된 장면이 나오자 그는 매우 기분 상해하며 재촬영을 요청했다.

청진 시내에도 소달구지가 다녔다. 길 한복판에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아이들과 함께 소달구지가 지나가는 재미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차량은 많지 않았는데, 차가 보인다 싶으면 외제차일 정도로 외제차가 은근히 많았다. 아우디 A6와 벤츠 S클래스 등 중대형 외제차도 목격했다. 나선과 청진 모두 시내에 트램이 많았는데 서울 지하철의 출퇴근 시간과 비슷하게 붐볐다.

청진의 안내원은 남한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길에는 차가 얼마나 많은지, 어떤 차들을 주로 타는지 등을 물어봤다. 그는 일본부터 유럽까지 자동차 브랜드를 죽 읊었다. 그런데 현대차는 알고 있었지만, 기아차는 처음 들어보는 듯했다. 그는 “북한에선 자가용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면 건강에도 좋지 않으냐”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북한에 있는 동안 자전거 경주대회를 TV로 흥미롭게 보는 주민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청진에선 김정은과 사회주의 체제 찬양 포스터와 유명 화가들의 그림 판매소를 간 적이 있다. 멋진 그림도 있었지만 중국 세관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구매하진 않았다. 상점 여직원은 “북에서 산 그림을 중국에 가져가 비싸게 파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불만 섞인 목소리로 “북한 길거리에 김정은 위원장을 찬양하는 문구가 너무 많다. 이런 슬로건이 자신에게 득될 게 없다. 더 이상 새로 설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비록 간접적으로나마 불만을 터뜨린 것이지만, 북한에 머물면서 처음 접한 북한 당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불만이 없는지, 미스터 김에게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질문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며 “북한 주민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금기”라고 했다.

청진에서 갑작스러운 군사 훈련으로 도로에 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됐고, 우리가 탄 버스는 어느 식당 주차장에 정차했다. 주차장 문은 굳게 닫혀 밖을 볼 수 없었다. 청진에서 경성으로 이동할 때는 열차를 이용했다. 이 열차는 청진에서 함경남도 함흥 구간을 오가는 열차였다. 열차 내부엔 침대도 배치돼 있었으나 승객은 눈에 띌 정도로 많지 않았다.

열차는 시끄러웠고, 덜컹댔고, 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평균시속은 60km 정도로 느껴졌다. 기차 밖으로 달리는 차량보다도 느린 경우도 있었다. 창밖으로 다른 열차들을 목격하기도 했는데, 열차마다 사이즈도, 상태도 달랐다. 사이즈가 큰 것은 그만큼 속도가 빨라 보였다. 열차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보다는 더 편했다.

버스를 출발시키기 전 ‘마사지’ 받을 준비를 하라던 버스기사의 말처럼 우리 일행은 정말로 마사지를 받으러 가게 됐다. 경성에서 예정에 없던 마사지숍에 가게 됐는데, 마사지사는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평양 출신 여성이었다.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며 노래를 부르고 반기는 모습에 감동했다. 그들은 의사 못지않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고 했다. 나를 담당한 마사지사는 한국의 의료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궁금해하며 “통일이 되면 제주도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경성에서 나선으로 다시 이동하면서 한 번 더 ‘마사지’ 받을 각오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역시나 길 상태는 엉망이었고,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 혹은 리어카와 우리 버스가 부딪칠까봐 조마조마했다. 나선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에는 호텔을 몰래 빠져나와 옆에 있던 노래방에 갔다. 여종업원들은 북한 찬양 노래를 불렀다. 내가 서양 노래 좀 틀어달라고 하자 잠깐 고민하더니 틀어주었다. 다소곳하게 북한 찬양가를 부르던 그녀들이 서양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다. 한편 화장실에 가던 길에 옆방에서 대마초를 피는 북한 주민을 목격했다.


교류가 교감이 되어
북한의 도로 상태는 북한의 열악한 환경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 대부분은 밝아 보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그들은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일을 구하고자 장마당 주위를 맴도는 이들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친근감을 보여줬다. 간혹 남한 사람들은 이러한 북한 사람들의 웃음을 가짜로 여긴다. 사전에 짜인 각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본 ‘북한의 미소’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도 연기할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미소였다.

행복이란 돈 외에도 여러 가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 있다고 곧 불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포를 대할 때 이러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교류는 교감이 되고, 교감은 평화를 낳을 것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니 비행기 타고 평양에 오시라. 기다리고 있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말에 희망을 가져본다.



조현준
● 1981년 서울 출생
●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학사, 아카데미예술대학교 멀티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석사, 동국대학교 영화영상제작학과 박사
● 미국 ABC방송국 교양프로그램 프로듀서
● 現 계명대학교 언론영상학과 교수
● 영화 ‘시계’ ‘삐라’ ‘황색바람’ 등 연출



신동아 2018년 6월 호

17 북한 식수 및 위생시설 사정 그다지 좋지 않아



북한 식수 및 위생시설 사정 그다지 좋지 않아



북한 식수 및 위생시설 사정 그다지 좋지 않아
워싱턴-장명화 jangm@rfa.org
2017-07-20




북한의 한 시범농장에서 여성이 물지게로 물을 나르고 있다.
AFP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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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세계 각국은 18세기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경제 발전이라는 구호 아래 열심히 앞만 보고 뛰었습니다. 그 결과, 물질의 풍요와 생활의 편리성은 어느 정도 이루어 놓았지만, 지구 환경은 지금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환경문제는 어느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그 심각성은 큽니다. 장명화가 진행하는 주간 프로그램 '이제는 환경이다'는 세계 각국의 최신 환경 문제를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한국의 환경전문 민간 연구소인 ‘시민환경연구소’의 백명수 부소장과 함께 최근 유엔이 펴낸 ‘마시는 물과 위생 상황 2017’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들여다봅니다.

(브루스 고든) 20억명을 넘는 사람들이 이른바 ‘안전 관리 식수 서비스’의 접근권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이 서비스는 유엔 지속가능개발 목표와 표준을 나타내는 지표인데요, 이에 의해 전 세계가 물 분야에서 어느 정도 진보했나를 측정하게 됩니다.

방금 들으신 것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물과 위생시설 문제를 책임진 브루스 고든 조정자(coordinator)가 유엔 방송에 나와 밝힌 말입니다.

유엔 산하 전문기구인 세계보건기구와 유엔아동기금은 최근 ‘마시는 물과 위생 상황 2017' 보고서를 펴냈는데요, 특히 세계보건기구 측은 “깨끗한 식수와 위생적인 화장실이 부자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특권이 돼서는 안 된다"면서 "이 두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고 모든 나라는 국민에게 이런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백명수 부소장의 말입니다.

(백명수) 전 세계 인구 10명 중 3명에 해당하는 21억 명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263만명, 한국으로 치면 경상북도 인구에 해당하는데요, 이 263만명이 마시는 물을 구하기 위해 30분 이상 걸어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또 세계 인구 10명 중 6명, 즉 45억 명은 위생적인 화장실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시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특히 600만명은 공중화장실을 사용하고 있고, 892만명은 야외에서 화장실 없이 배변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지난 2000년 이후 점차 더 많은 사람이 마실 물과 화장실 시설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받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주택과 병원, 학교에서 비누와 물 부족으로 설사 등 질병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백 부소장은 특히 아동 건강을 우려합니다.

(백명수) 위생적이지 않은 화장실 사용이나 야외 배변은 인간의 배설물이 적절한 처리 없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이때 인간의 배변 속에 섞여있는 대장균이나 여러 병원균이 인근에 있는 물로 유입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적절한 정수처리를 거치지 않은 오염된 물을 마시면 수인성 질병이 쉽게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 혹은 A형 간염 등의 질병들이 자주 발생합니다. 유엔 보고서에 의하면, 5세 미만 어린이의 경우, 오염된 물로 해마다 36만 1천여명이 설사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는 매시간마다 41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고 있는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일반적으로 북한과 관련된 최신 자료나 통계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운데요, 백명수 부소장은 마시는 물과 관련해 한국의 민간연구경제기관인 ‘현대경제연구원’의 2014년 보고서와 북한 당국이 2001년 유엔에 보고한 자료를 인용해, 북한의 식수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평가했습니다.

(백명수)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2014년 발간한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 전체가구의 약 85%가 주택 내 물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수원의 상수도 보급체계는 갖춰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수도 보급이 1960년대 공급 이후 지속적으로 노후화됐기 때문에 실제로는 매우 열악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오래된 자료이긴 하지만, 북한 당국이 지난 2001년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상수도를 통한 물 공급이 1994년 86%에서 1996년에 63%로 감소됐습니다. 2년만에 33%가 감소한 수치입니다. 현재는 더 어려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1960년대에 설치된 상수도는 이미 상당히 노후화됐고 관리체계는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왜냐면 정수과정에서 필요한 원자재나 부품 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전력부족이나 누수 등으로 수도가 설치됐다 하더라도 불규칙하거나 물 공급이 중단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농어촌 지역에서는 재래식 우물로 식수를 보충하는 사례가 보통입니다. 그만큼 오염물질이 지하로 유입돼서 수인성 질병을 야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북한 주민들은 위생적인 화장실 시설에 대한 접근권은 제대로 보장받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백 부소장은 부정적인 대답을 건넵니다.

(백명수) 북한 주민들은 실제로 위생적인 화장실 시설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008년도 기준으로 단독 및 공동주택 모두를 포함한 북한 전체 가구의 약 40.5%, 즉 10가구 가운데 4가구가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재래식 화장실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의 보급률은 평양시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지역이 모두 평균 이하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양시에서는 10가구 중 7가구만이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 지역은 절반 이하로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양 시내 주택단지의 화장실 시설도 굉장히 열악하고 공중화장실의 관리는 더더욱 관리되고 있지 않아서 불편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활한 물 공급이 되지 않는 북한의 실정을 감안하면 위생적인 화장실 시설은 더욱 어려운 상황입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이 2008년 실시한 인구조사 결과, 북한가구의 55%는 수세식 화장실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어도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상수도 사정이 나쁘고, 고층에서는 수압이 낮아 물을 공급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평양 출신 탈북자가 2015년 한국 내 북한 전문 매체인 ‘배나TV’에 나와 밝힌 말, 잠시 들어보시죠.

(탈북자) 평양이니까 집에 화장실이 있는데, 전기가 없으니까 밑 펌프장에서 물을 퍼 올리지 못하는 거예요. 고난의 행군 때에는 광복거리, 통일 거리 같은 데는 엄청나게 층수가 높은데 물이 안 나와요. 아이들은 비닐 봉지에 변을 보고 들고 내려가요. 아침에요.

한국의 경우, 올해 초 공개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결과에 따르면, 전체 1911만2000가구 가운데 필수 주거시설을 모두 다 갖춘 가구는 96%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지난 2010년 실시한 조사 결과인 93%보다 증가한 수치입니다. 필수 주거시설은 전용 입식 부엌, 전용 수세식 화장실, 전용 목욕시설, 상수도 등을 말합니다. 한국에서 이 가운데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 가구는8%로 나타났습니다.

한편, 앞서 세계보건기구의 고든 조정자가 언급한 유엔의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오는 2030년까지 야외에서 배변하는 사례가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북한을 포함해 이런 목표가 그때까지 이뤄질 수 있을지 백 부소장에게 물었습니다.

(백명수) 안타깝게도 조금 어려워 보입니다. 위생적인 화장실 시설을 갖추기 위해서는 집중된 투자와 관리역량이 필요합니다. 화장실 시설 공급을 위해서는 예산을 우선해서 배정하고 실제로 사업을 집행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선진국의 원조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해당국가는 자국 내 유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즉 관련법을 만들거나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법을 만들어야 안정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데요,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지속적인 노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실제로 90여개 국가에서 투자의 어려움을 이유로 2030년까지 목표달성, 즉 위생적인 화장실 시설을 공급해서 야외에서 배변하는 사람을 없애겠다고 하는 목표가 달성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제는 환경이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진행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장명화입니다.

북한은 왜? <北, 무상 주택의 현실은?>



북한은 왜? <北, 무상 주택의 현실은?>



북한은 왜? <北, 무상 주택의 현실은?>기사입력 2016-09-26 20:55 최종수정 2016-09-27 15:59

거주이동 북한 통일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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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일]
"네, 지난주에는 북한식 뉴 타운인 여명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주민들의 주거 생활은 과연 어떨지 매우 궁금해지는데요. 일반 주민들에게 북한이 자랑하는 무상 주택 공급이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북한 주민들의 주택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은영]
"네 오늘 도움을 말씀 주실 두 분 모셨습니다. 안찬일 박사님 그리고 김설화 씨 안녕하세요?"

[신강균]
"안녕하십니까? 저희 북한 여명거리 공사 현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눠 봤는데 다른 일반 주민들에게도 어떤 형식으로든지 집을 무상으로 주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안찬일]
"어떤 거리에 어떤 규모로 짓느냐. 또 질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이제, 물론. 평양시민에게도 주택을 공급하는 거는 사회주의 공급 원칙에 따르게 되어 있는데."

[신강균]
"그렇죠."

[안찬일]
"문제는 소유 구조가 바뀌면서 돈을 많이 낸 사람. 이런 순서로 주는 체계가 바뀌고 또 신흥 부자들이 여러 채를 소유할 수 있는 이런, 불평등구조가 생기다 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어떤, 법적으로 북한 법률상. 부동산에 대한 개인 소유는 허용이 안 되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낮은 주택. 변두리에 들어서고 있는 일부 주택들에 대해서는 무상으로 공급하는 그런 제도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구은영]
"지난달에 망명한 태영호 공사 영국에 있을 때, 북한을 선전하면서 했던 인터뷰가 참 인상적인데요. 잠깐 들어보시죠."

[태영호 공사]
"you know. In my country, the government build the houses and the houses are all free.
아시다시피 저희 나라에서는 정부가 집들을 짓고 모두 무료거든요.
Because according to our socialist law, government is expected to take care of the ordinary live of people. So the government built the houses and the house is distributed free of charge. So that is why in my country don't have any idea how much we pay for the apartment. And also we have a free education.
사회주의 제도에서는 정부가 일반인들의 삶을 돌보아야 해요. 그래서 정부가 주택들을 짓고 무료로 나누어 줘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 나라 사람들은 아파트에 얼마를 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죠. 또 교육도 무상이에요."

[구은영]
"북한 정부가 일반인들의 삶을 돌보고 또 정부가 주택을 짓고 무료로 준다고 선전하는 인터뷰입니다. 어떻습니까? 박사님."

[안찬일]
"네, 그렇죠. 저 사람은 이제 사회주의 복지국가.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발언을 그 당시에는 해야만 했기 때문에, 하고 있지. 사실은 북한의 내부 현실과는 거리가 많이 멀죠. 물론 이제 60년대, 70년대 북한 사회주의 체제가 작동할 때는 나름대로 좋은 집이든 나쁜 집이든 하나씩 지어서 준 것 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북한사회주의가 경제적으로 붕괴되면서 90년대 고난의 행군 뒤에는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다 보니까 노동당은 역할은 축소되고 돈주 신흥부자들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나름대로 부동산 분야에도 사적인 건설과 분양이 진행되다 보니까 지금은 돈 위주로 돈을 많이 낸 사람이 좋은 집을 가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쁜 집도 차려지지 못하고 오히려 좋은 집에 가서 이제 동거 살이, 전세나 월세 사는 것을 동거 살이라고 그러는데."

[신강균]
"그러면 다른 가족하고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까?"

[안찬일]
"그렇죠. 제가 원래 이렇게 와이프, 애들 사는 데. 우리 설화 씨가 새로 신랑을 만나서 결혼했다. 그러면 이제 이, 설화 씨가 나한테 찾아와서 같이 삽시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당국에서 아직은 좀 당국의 힘이 존재하죠. 나한테 찾아와서 설화 씨라는 분이 제대 군인 남편 만나서 결혼해서 이 직장을 받았으니까 방 한 칸을 내놔서 같이 사시오."

[신강균]
"별개, 원래는 별개로 집을 하나 줘야 되는데."

[안찬일]
"없으니까, 없으니까 동거 살이 하라. 그러면 내가 아니 됩니다. 이렇게 못 한다는 거죠."

[신강균]
"그렇죠. 그것도 박사님의 집이 아니니까요."

[안찬일]
"그렇죠."

[신강균]
"나라가 빌려준 것이기 때문에."

[안찬일]
"그렇죠."

[구은영]
"네, 그런데 최근에도 북한은 모든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새집을 제공하고 있다, 라고 방송을 통해서 선전하고 있습니다. 화면으로 만나보시죠."

[SK 마을 건물 SK]
"세포군과 평관군, 이천군에 가는 곳마다의 살림집과 집짐승 우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서고 있는 지금."

[신강균]
"저 정도 집이며 굉장히 훌륭한 집 같습니다만 마치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가 나지 않습니까?"

[김설화]
"겉보기에는 집이 정말 훌륭합니다. 하지만, 저 집 다른 자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집을 지으려면 각자 판자. 철군. 모래, 시멘트. 집을 짓기 위해서 많은 자재가 보장이 되어야 되는데. 많은 보장이 되어 있지 않고 기껏해야 흙 자갈. 볏짚으로서 이런 걸로 집을 짓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집 같지만. 실제로 살만한 집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신강균]
"저런 집들이라도 북한 주민들한테 공급이 되면 나은 거 아니겠습니까? 박사님?"

[안찬일]
"그렇죠. 저런 집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차려진다면 그야말로 감지덕지라고 생각을 하는데. 문제는 저 집 역시 도시 평양에서 고층 건물 지어서 김정은 시대에 치적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저런 집도 아마 일부 지방. 이런 단위에다가 일반화시키지는 못하고. 아마, 어느 특정 협동 농장이나 이런 데 지어서. 이렇게 우리 농민들이 복지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 중앙 텔레비전에 방송하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지금 지방 농촌의 실정에서 저렇게 조립식 건물. 겉으로 보기에는 전원주택하고 뭐가 다릅니까?"

[신강균]
"그런 데요."

[안찬일]
"저렇게 하수도, 배관, 전기 다해서 저렇게 괜찮은 집을 짓는다는 것은 지금 북한의 경제 형평상에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살림집 마감 공사와 함께 메탄가스 생산 공정 건설, 외부 지대 정리를 동시에 진행해내고 있습니다. 우리 공업국 산하 종업원들이 한결같은 마음을 안고 힘찬 투쟁을 벌여서 이제 며칠 안으로 우리가 맡은 두 동의 살림집 공사를 완전히 끝내겠습니다."

[구은영]
"그러면 어쨌든 보여주기 식 집이라고 하더라도 북한 정권이 또 지어주는 건가요?"

[김설화]
"엄밀하게 말을 하면 북한 정권이 지어주는 것이 아니고. 북한은 명령만 내리면 집은 우리들이 짓는 겁니다."

[구은영]
"그러면 나라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무상으로 집을 준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서 집을 지어서 사는 건가요?"

[김설화]
"북한은 무상이라는 개념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안찬일]
"그러니까 북한도 조금 달라진 게. 어떻게 보면 중앙정부가 통치가 스톱이 됐고. 도 단위, 군 단위로 지방에 책임자가 능력이 있으면. 어디에 시멘트 공장, 목재 공장 가서 자재를 빼다가 집을 짓는 거입니다. 실제로 북한 전 지역에서 저렇게 주택이 척척 건설되고.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강균]
"김설화 씨가 무상이 없다라고 굉장히 힘주어 강조하신 이유는 내가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짜로 집을 지어주는 게 아니고. 북한 주민들 스스로가 일을 해서 저 집을 지어서. 갖는. 그런 구조니까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김설화]
"1%만은 예외가 있습니다."

[신강균]
"그 사람들은 자기가 이야기를 안 해도 집을 얻을 수 있고?"

[김설화]
"네, 1%만은 예외가 되는데. 학장, 당 비서. 보위부장. 이렇게 굉장히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원하지 않아도 좋은 집을 그냥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어머니 친구 분이 공산 대학교 학장 와이프였는데. 원하지도 않았는데. 고래 등 같은 다섯 칸짜리 집을 그냥 얻어서 살았습니다."

[구은영]
"그럼 보통 노동자나 농민들은 어떤 집에서 사나요?"

[김설화]
"노동자들은 경우에는 작은 1칸. 또는 2칸이 달린 집에서 살고 방안에, 그러니까 집안 안에 화장실이 없습니다."

[신강균]
"화장실이 없는 집들이 꽤 많이 있나요? 도시 사리원 같은. 사리원급의 도시에서도?"

[김설화]
"네, 신식 아파트가 아니고. 김일성 시대 때 지어졌던 그 아파트들은 한 칸 또는, 두 칸. 한 칸인 경우에는 홀수. 두 칸인 경우에는 작수로 해서 집안에 식구가 좀 있으면 두 칸으로 주고 없으면 한 칸을 줬는데. 안에 화장실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새벽에 일찍 나가서 줄을 서서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합니다."

[신강균]
"네, 그 아파트 단지에 있는 무슨 화장실을 따로 지어논 모양이군요."

[김설화]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이 되는데 북한은 이제 새해 1월 1일 첫 전투가 고름을 생산해야 되는데 개인 화장실을 집에 두면 고름이 생산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신강균]
"그렇죠. ** 나가버리죠."

[김설화]
"공동 화장실을 써야 하지, 네, 그래서 아마 옛날부터 공동 화장실을 그래서 쓰는 건 아닌지 하지만 최근에 들어선 아파트들은 집 안에 화장실들이 다 있습니다."

[구은영]
"네, 무상 공급 주택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아까 이야기하셨는데요. 주택 보급률도 굉장히 낮습니다. 그렇다면, 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주민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안찬일]
"주택이 이제 새로 이제 결혼을 했다든지 또 뭐 중앙에 있다가 어떻게 하방이 돼서 농촌에 내려왔다든지 이런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든 당국에서 당 위원회나 인민위원회에서 나서서 동거 살 이로 이제 배분을 하는 거죠. 뭐 집이 떡 남아 있어서 빈집으로 들어가 산다는 건 상당히 어렵고 방이 한, 두 칸이라도 더 있는 집에는 갔다 동거 살 이를 시켜서 거기서 살다가 또 주택 사정이 좀 풀리면 새로운 집을 배치 받고 그래가지고 이게 이렇게 보면 신규 공급자나 또는 이제 말하자면 그 집에서 물러나는 이런 사람들의 순환 사이클이 대단히 느립니다. 한번 차지한 사람은 그걸 죽을 때까지 내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신강균]
"그렇겠죠."

[구은영]
"네, 지금 평양에서는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평양이 아닌 지방주민들은 어떤 집에서 사는지가 궁금합니다. 화면으로 만나보시죠."

[구은영]
"외국인이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의 지방 모습인데요. 고층 건물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신강균]
"네, 단층으로 지어진 집들이 쭉 늘어서 있지 않습니까? 저것은 누가 사는 집입니까?"

[안찬일]
"저게 이제 농촌 문화 주택인데 저거도 아마 저게 60, 7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신강균]
"문화주택."

[안찬일]
"예, 문화주택, 그래서 지붕 꼭대기에다가 기왓골을 따라서 **가루를 칠해가지고 하얀색을 드러내죠."

[신강균]
"지금 보이죠."

[안찬일]
"전부 단층집이고 한집 당 저것은 농촌이니까 인구 밀도가 낮기 때문에 한집 당 한 세대씩 대부분 차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공장지대나 탄광, 광산 지대에는 적어도 저런 정도의 세대별로 볼 때 저런 덩어리 한 세대라면 두 세대 정도는 살아야 될 정도로 밀집이 돼 있고 저것은 좀 한가한 농촌 모습입니다."

[신강균]
"예, 그러면 사진에서 느껴지는 것은 마을에서 일부러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전원주택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느낄 수 있게끔 그 지붕들을 다 일률적으로 단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김설화]
"네, 농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농촌이 아닙니다. 저 농촌은 집은 아마 좀 더 시내와 붙어 있는 농촌이 아닐까 싶은데요. 진짜 농촌집을 가면 아직까지도 그 담벽에 볏짚 모래기 같은 것들이 다 붙어 있습니다."

[신강균]
"아까 그 평양 사리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만 큰 도시에도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데 저렇게 멀리 떨어진 집에는 어떻게 전기가 원활히 갈 수 있을까요?"

[안찬일]
"예 농촌지역에도 이제 전기선이 다 들어가고 돼 있지만 문제는 공급이 안 된다는 거죠. 당국이 자르면 변전소에서 자르면 전기가 안 들어가는 겁니다."

[신강균]
"저희가 화면이나 사진으로 볼 수 있을 때는 전봇대가 있고 전깃줄은 있지만."

[안찬일]
"네, 다 있습니다."

[신강균]
"거기 그 전깃줄이 전기가 극복이 안 된다. 이 말씀이죠?"

[안찬일]
"그렇죠. 그걸 이제 북한은 이제 각도별로도 요일별로 또 이제 전기가 정전되는 날이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장 기업소를 돌리는 데는 전기를 좀 주지만 뭐 가정집에서 무슨 뭐 TV를 본다든지 라디오를 들으라고 밤에 또 불키라고 이렇게 전기를 잘 주지는 못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당국이 변전소에서 스위치를 올려주면 전기가 가고 그렇지 않으면 끊어지는 그래서 농촌 지역 사람들의 문화수준이 상당히 그 낙후 돼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신강균]
"그 다른 화면에 보이는 집들은 출입문도 비닐로 막아놓고 하는 그런 집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지금 저게 3층짜리 아파트 아니겠습니까? 저기도 주민들이 사는 집이겠죠?"

[안찬일]
"저런 3층 정도는 이제 도시 근교, 도시 한복판은 아니고 예를 들어서 이제 평양시 근교에도 저게 2, 3층짜리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2, 3층짜리 이제 벽돌로 블록으로 지은 집들인데 저 한 동에는 뭐 수십 세대의 이제 집들이고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면 아주 ** 복잡한 그런 구조를 가지고 주거 문제를 지금 해결하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신강균]
"네, 특별히 앞에 앞쪽으로는 베란다가 있습니다만 저게 베란다가 있는 쪽 하나, 그리고 오른쪽에 창문이 있는 거 하나 해서 그럼 마루 하나 방 하나 그다음에 부엌 하나 이렇게 돼 있는."

[안찬일]
"그렇죠. 그리고 이제 저런 세대 한 동에는 이제 화장실이 그저 층별로 하나 있거나 밑에 그냥 하나 있어서 공동으로 사용하고 뭐 북한 주민들은 요즘 아파트 베란다 저런 베란다에서 뭐 토끼도 기르고 닭도 기르고 이렇게 말하면 가축 고기 문제, 또 뭐 가죽을 바쳐야 되는 그런 과제가 있어서 주택이 보면 어떻게 보면 주거도 되지만 동물들 우리는 애완동물 키우는데 평양도 뭐 애완동물이 늘어난다고 합니다만 저런 주변 저 뭐야 주민들은 이제 가축까지 길러야 되는."

[신강균]
"생산단위이군요?"

[안찬일]
"그렇죠. 거의 생산, 자가, 자력갱생 생산단위입니다."

[구은영]
"네. 그러면 설아 씨도 집에서 가축을 키워보셨나요?"

[김설화]
"네. 토끼 한 마리 정도 키워봤습니다. 토끼 한 마리는 왜 키워야 되냐면 4월 25일 되면 군인들한테 고기를 바쳐야 되기 때문에 시장 나가서 사려면 좀 비싸고 해서 토끼 한 마리 정도는 키워봤습니다."

[구은영]
"네. 그리고 화면 보면 아파트 지붕 위에 뭐라고 써 있는데요. 일심단결?"

[김설화]
"네."

[구은영]
"그리고 장군님 따라 천만리. 집 지붕마다 이런 구호가 써 있는 건가요?"

[김설화]
"네. 아파트들마다 다 그렇게 써져 있습니다. 저 평양엔 장군님 따라 천만리라고 썼지만 우리가 사는 데는 일심단결 결사 옹위 또는 그 앞에 총대를 그려져 놨기 때문에 총대 아파트 이렇게 얘기를 하면 무슨 동 어디매라고 얘기를 하지 않아도 그냥 사람들이 다 압니다."

[안찬일]
"그러니까 북한 아파트에는 브랜드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기업별로 무슨."

[신강균]
"건설회사 이름을 따라서."

[안찬일]
"예. 건설회사 이름이나 브랜드가 있지 않습니까? 근데 북한은 다 돌격대조직에서 집단적으로 당에서 지은 거니까 아파트 브랜드는 붙일 필요 없고 그저 설화 씨가 얘기했듯이 아파트에 뭔가 명칭이 있고 친구도 놀러 오라고 그럴 때는 천만리 아파트로 오라 뭐 일심단결 아파트 뭐 205호야 이렇게 말하는 그게 우리하고 또 좀 다른 점입니다."

[신강균]
"네. 아까 그럼 저 건물의 경우는 천만리 아파트로 와라."

[안찬일]
"그렇죠. 장군님 따라 천만리인데 뭐 장군님아파트로 오라 그럴 수는 없는 거고 천만리 아파트로 오라 그러면 찾아가는 거죠."

[신강균]
"네. 그러면 저게 이중의 효과가 있겠군요. 그 아파트에 대한 이름도 지어주고 사람들한테 북한체제를 옹위하는 그 구호도 외우게 하고."

[안찬일]
"그렇죠. 그런 이중적인 효과를 노렸는지도 모르고 아까 그 일심단결의 그림은 제가 볼 때 학교 건물 같습니다. 유리창이 잘 안 깨진 거 보니까 그건 학교건물 같고."

[신강균]
"그럼 아파트 주민들이 사는 아파트는 유리창이 많이 깨져 있습니까?"

[안찬일]
"저 지금 천만리 아파트 저러면 저렇게 거의 뭐 반은 깨져 있는 상태. 저게 이제 참모습이죠."

[신강균]
"지금 두 분 선생님 저희가 지금 지방에 있는 주택상황들을 살펴봤는데 상당히 첫 느낌으로도 평양과는 굉장히 차이가 많은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만 대부분의 도시가 저런 모양이죠?"

[안찬일]
"그렇죠. 평양은 아무래도 이제 전시 효과, 외국에게 보이기 위한 뭐 이런 여러 가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좀 뭐 당에서 투자도 하고 신건설을 하지만 또 지방도 이제 물론 지금 신흥부자들이 등장해서 나름대로 건설을 하고 있는데 중앙과 지방의 차이 이게 좀 북한은 아무래도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은영]
"네. 그렇다면, 초고층 아파트는 아니어도 북한의 대다수 주민들은 조금 안전한 집,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다라는 로망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김설화]
"아 네 북한에서는 높은 층보다는 낮은 층을 좀 선호합니다. 예를 들어서 5층짜리 아파트에서는 4층을 좋아하고 뭐 10층짜리 아파트라도 5층 이상 올라가는 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신강균]
"네. 그 이유는?"

[김설화]
"전기가 오지 않기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없고 다 그냥 사람의 다리로 일명 북한에서는 사람의 이 두 다리를 11호 차라고 하는데 11호 차를 잘 운영하려면 낮은 층이 좋습니다."


[신강균]
"네. 그 평양시를 주로 선전하는 조선중앙텔레비전의 화면이 지방까지도 다 방송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지방에 있는 북한주민들도 나도 저런 집에 한번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가질 텐데 그렇지 않나요?"

[안찬일]
"우선 북한에게 거주이동의 자유가 없으니까 좋은 집을 목표로 한다기보다 나도 평양시에 한 번 살아봤으면 이런 꿈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죠."

[신강균]
"아니 내가 있는 장소에서라도 저런 집의 반의 반절이라도 좀 깨끗하고 그런 집에서 뭐 하수구라도 있는 집. 아니면 상수도라도 나오는 집 그런 욕망이나 그런 바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안찬일]
"그렇죠. 그런 꿈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데 그 꿈이 너무 높기 때문에 갭이 너무 크니까 한 번 그야말로 꿈은 꿈이지만 현실적으로 이렇게 계산하면서 시간을 내가 10년 후에 저런 집에 살 수 있을까."

[신강균]
"계획을 세우거나."

[안찬일]
"네. 그런 계산은 거의 안 한다고 봐야 됩니다."

[신강균]
"네. 알겠습니다. 네.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까지 평양과 지방의 주택상황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 두 분 선생님 말씀 감사합니다."

2018/12/21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구월산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구월산지구

조선의 중서부 해안지구에 면하고있는 구월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관광지, 피서지이다. 명승들뿐아니라 안악3호무덤을 비롯한 력사유적들도 적지 않다. 평양을 가까이 하고있어 평양에 체류하는 손님들이 하루이틀 피서지로 리용할수도 있고 등산, 참관, 해수욕도 할수 있는 리상적인 관광지구이다. 가지가지 재미나는 전설도 많이 깃들어있다.






구월산



구월산은 조선의 6대명산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9월의 단풍이 류별나게 아름답다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였다. 구월산의 총면적은 110㎢이다.

구월산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정력적인 령도와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의하여 인민의 휴양지, 관광지로 훌륭히 꾸려졌다. 구월산에는 100여㎞의 탐승도로들과 수십개의 정각, 부감대들, 등산길들이 있다.

구월산관광지구에는 절승경개들뿐아니라 구월산성, 삼성사, 월정사, 안악3호무덤을 비롯한 많은 력사유적들이 있다.

평양과 가까이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등산, 참관, 해수욕을 하는 훌륭한 관광지이다.

평양에서 구월산까지는 약 100㎞이다. 남포시를 거쳐 서해갑문을 지나 륙로로 가는것이 편리하다.




구월산성



고구려시기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둘레길이는 5. 23㎞, 높이 3. 5~5. 2m이다.

성을 보위하는데 리용된 무기고, 식량창고, 병영 등의 터가 있으며 자기를 구워낸 가마터도 있다.

평양에서 구월산까지는 약 100㎞이다. 남포시를 거쳐 서해갑문을 지나 륙로로 가는것이 편리하다.




단풍골



구월산 서쪽비탈면을 따라 펼쳐진 명승구이다. 맑은 시내물이 쏟아져내리다가는 바위돌에 부딪쳐 무수한 물안개를 일으키는데 노을빛이 비끼면 령롱한 무지개색을 반사하여 마치 구슬을 뿌려놓은것 같다.

원래 옥류골이라고 하였는데 단풍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단풍골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구월산에서 제일 깊고 이름난 골안이다. 등산로정은 5km인데 차를 타고 유람할수도 있다. 단풍골에는 마당소, 삼형제소, 뱀장어소, 차대폭포와 같은 명소들뿐아니라 월정사와 같은 력사유적들도 있다.




월정사



구월산 아사봉을 배경으로 단풍골에 자리잡은 고구려시기 절이다.

지금의것은 조선봉건왕조초기에 다시 지은것이라 한다. 월정사란 월정대사에 의하여 세워진 절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만세루, 명부전, 수월당과 기타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건축형식이 독특할뿐아니라 주변경치 또한 매우 아름다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팔담골



관광도로를 따라 안악군 월정리 방향으로 내려가느라면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팔담골에 이르게 된다. 500m의 구간에 8개의 맑은 담소가 차례로 놓여있다고 하여 팔담골이라고 한다. 맑은 물우에 무도장, 휴식터도 있다.




삼성사



팔담골입구에서 2km정도 내려가면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고려말기에 세운 절인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도 함께 지냈다고 한다.

삼성이란 단군의 할아버지 환인과 아버지 환웅, 단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 서, 남쪽에 3채의 주요건물과 보조건물이 있다.




은정호



팔담골에서 1. 5km 들어가면 은정폭포가 있는데 그우에 자리잡고있다. 협곡의 시내물이 모여 형성된 산중호수이다.

깊이가 약 5m되는 호수는 물이 맑아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며 물밑에는 마치 살아움직이는것만 같은 세마리의 돌사자가 있다.




안악3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자리잡고있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무덤이다.

4세기 중엽에 건설되였는데 규모가 크며 특별히 화려하고 내용이 풍부한것으로 하여 고구려벽화무덤가운데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문화유산으로 되고있다.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력사와 건축, 회화, 음악, 춤, 무술, 음식차리기 등을 알수 있다.

안악3호무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다.




산성혁명사적지





구월산성중심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아버님이시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걸출한 지도자이신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 주체10(1921)년 11월 이곳에 오시여 이 지구 반일조직대표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오직 무장투쟁으로써만 반일투쟁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방침을 제시하신 력사적인 곳이다.

《조선의 오늘》서부지역 사리원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사리원지구

평양으로부터 65km 떨어진 곳에 있는 사리원시를 측으로 하여 이루어진 관광지이다.

사리원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정방산이 있는데 그 주변의 산들이 시의 북부를 둘러싸고있어 도시의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해준다. 가장 볼만한 곳은 사리원시내에 있는 민속거리이다. 력사유적들도 적지 않다.

이 지구는 평양-개성고속도로의 중간지점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있어 개성으로 오갈 때 휴식의 한때를 즐길수 있는 리상적인 곳이다.




사리원시

황해북도의 소재지이며 평양의 남쪽관문도시이다.

해방전 순수 상업소비도시였던 사리원은 해방후 현대적인 공업과 발전된 농촌경리를 가진 지역으로 전변되였다. 새로 진행된 토지정리로 미곡협동농장을 비롯한 농장벌들의 면모가 일신되였다. 사리원은 포도생산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것으로 만든 경암포도주는 시의 특산이다. 시에는 계응상사리원농업대학을 비롯한 10여개의 대학과 병원들, 현대적인 사리원경기장과 력사박물관이 있다. 시의 북쪽에는 정방산유원지가 있으며 시안에는 경암산을 중심으로 아담하게 꾸려진 유원지가 있다. 력사유적들도 있다. 시에는 큰 강이 없고 하천들만 있으며 서흥강을 막아 건설한 큰 규모의 운하가 있다. 년평균기온은 10℃, 년평균강수량은 937. 8mm이다.




사리원시민속거리



시리원시민속거리는 경암산기슭에 자리잡고있다.

평양에서 차를 타고 1시간정도 달리면 와닿을수 있다. 80여정보의 부지에 꾸려진 민속거리에는 민족적향취가 짙게 풍기는 조선식합각지붕의 살림집들과 민속음식점들, 정각들과 다리들, 편의봉사시설들, 력사박물관과 거북선, 첨성대, 측우기 등을 재현한 력사문화유적유물들이 있다. 민속놀이장의 한쪽면은 우리 민족의 건국력사를 보여주는 모자이크벽화들로 꽉 차있다. 민속오락장에서는 장기, 윷놀이 등 민속오락경기들을 할수 있으며 민속식당에서는 찰떡, 지짐, 막걸리 등 민속음식들을 맛볼수 있다. 경암산려관에서는 국내관광객들의 편의를 도모해주고있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반일투사들을 키워내시던 장소, 민속놀이터 무대와 경암루, 룡조각, 민속차집 등이 경암산기슭에 위치하고있다. 민속차집에서는 즐거운 휴식의 한때를 보낼수 있으며 경암산 마루에 있는 선군정에서는 사리원시내를 한눈에 부감할수 있다.

명절이면 화려한 민족옷차림을 하고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녀성들의 모습이 거리의 흥취를 돋구어준다. 녀성들의 민족옷자랑무대도 볼만 하다. 학생소년들의 연띄우기며 제기차기, 줄넘기 등 민속놀이도 사람들에게 웃음과 랑만을 더해준다. 또한 민족옷차림의 떡메군들이 큼직한 떡메를 휘두르며 먹음직스러운 찰떡을 쳐대는 풍경은 명절분위기를 이채롭게 장식한다.




정방산



사리원시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이다.

산마루들이 서로 잇닿아 정방형을 이루고있다 하여 정방산(높이 481m)이라고 부른다. 산세는 험준해보여도 곳곳에서 쏟아지는 폭포와 아득히 높은 기암절벽들, 울창한 수림으로 하여 볼수록 장쾌하다. 봄철이면 살구꽃, 벗꽃, 배꽃들이 한데 어울려 황홀경을 펼쳐놓는다. 꽃이 얼마나 많고 화려하였던지 저녁해가 져도 어두워지지 않는 특이한 절경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있다. 정방산에는 560여종의 식물들이 있다.

또한 딱따구리를 비롯한 온갖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은 참관자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경치도 좋지만 유적들이 많은것으로 하여 더욱 인기를 끌고있다.




정방산성



정방산중턱에 축성된 고려시기의 산성이다.

둘레가 12km이며 동, 서, 남, 북에 성문을 세우고 그 우에 문루를 만들었다.

성안에는 병실터, 무기고터, 식량창고터가 남아있다. 옛날 성안에는 48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고려시기의 유명한 불교절인 성불사와 돌탑이 남아있을뿐이다. 또한 조선봉건왕조시기 극도로 문란해진 나라의 정세속에서도 정방산성을 지킨 성장 김성업을 추모하여 세운 비석이 보존되여있다.

오늘 정방산은 피서지로, 즐거운 휴식터로 되고있다.




성불사



정방산성안에 있는 불교절이다.

898년에 처음 세운 절인데 지금의것은 고려말기에 다시 지은것이다.

성불사는 5층돌탑을 중심으로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등 6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졌다. 고려시기의 건축형식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경암산



사리원시내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경암산은 자연의 조화로 이루어진 여러가지 형태의 바위들과 갖가지 식물들이 어울려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봄철에는 꽃속에 묻히고 가을에는 붉고 누런 나무잎들이 산을 이채롭게 장식한다. 산의 높이는 140m이다.




경암루

1436년에 세워진 경암루는 경암산에 위치하고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봉산군수가 있던 관청의 루정이였다.

루정에 올라서면 정원처럼 꾸려진 경암산이 사리원거리들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은정축산전문협동농장



수곡차집에서 평양으로 올라오면서 오른쪽으로 약 10km되는 지점에 자리잡고있다.

농장에서는 축산과 함께 벼, 강냉이, 콩을 비롯한 알곡과 남새들도 재배한다. 12 000정보의 면적을 차지한 목장구역에는 7개 호동의 염소우리들과 젖가공설비, 자연갱도식랭동고 등이 있다. 요그르트, 빠다, 치즈 등을 생산한다. 무연하게 펼쳐진 풀판을 따라 산보도 할수 있고 참관자들의 요구에 따라 농장원들의 흥겨운 봉산탈춤을 관람할수도 있다.




범안양어장



황해북도 서흥군 범안리에 위치하고있다.

34정보의 부지면적을 가진 양어장에는 48개의 못이 있는데 이곳에는 칠색송어, 잉어, 기념어, 메기 등이 자라고있다. 양어못들과 농촌문화주택, 축사들, 범안발전소 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범안리는 오늘날 《선군8경》의 하나로 불리우고있다.




사리원 3. 8려관



사리원시 신양동 경암산기슭에 위치하고있는 4층짜리 려관이다. 려관은 크지 않으나 큰 호텔들에서는 느낄수 없는 평온과 집에 있는듯 한 감을 손님들에게 안겨준다. 수용능력은 60명이다.

방수:29개(1등실 1개, 2등실 3개, 3등실 25개)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남포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남포지구

조선서부 대동강하류연안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남포를 중심으로 한 관광지구이다.

와우도를 비롯한 명승지들과 강서세무덤과 같은 력사유적들, 서해갑문과 공장들, 농장들을 비롯한 수많은 관광대상들이 있다.

이 지구의 강서약수와 신덕산샘물이 유명하다.

지구에는 산지대의 식물로부터 간석지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퍼져있다. 산림속에는 메돼지, 노루, 여우 등이 있으며 야산지대와 공원들에는 꿩, 딱따구리, 종달새 등이 많다. 청산벌을 비롯한 논벌들과 간석지, 대동강하류일대에는 왜가리나 백로와 같은 철새들이 많이 날아든다.

평양에서 남포까지는 55km 이다.




남포시

조선의 중요한 공업기지일뿐아니라 조선서해의 이름난 항구문화도시이다.

기후는 조선서해와 대동강의 영향을 받아 내륙지대보다 겨울철에 따뜻하고 여름철에는 서늘하다. 년평균기온은 9. 9℃, 년평균강수량은 880mm이다.

이 지구는 경제발전에 유리한 자연환경과 자연부원을 가지고있다.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있다. 시에는 여러개의 대학들을 비롯한 교육기관들이 있으며 문화시설들과 체육시설들, 병원들이 훌륭하게 꾸려져있다.




서해갑문



항구려관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서해 8km의 날바다를 막아 건설한 거대한 갑문이다. 주체70(1981)년부터 주체75(1986)년까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건설되였다.

갑문에는 2천t~5만t급까지의 배들이 드나들수 있는 3개의 갑실이 있고 언제우에는 기차길, 자동차길과 걸음길이 있다. 갑문이 건설됨으로써 서해지구의 농경지들에 물을 대주고 공업지대와 주민지대의 공업용수와 음료수가 해결되였다. 또한 배통과능력이 높아지고 교통문제도 원만히 해결되였다. 서해갑문이 건설되기 전에는 남포에서 은률까지 200km를 돌아가야 하였지만 지금은 8km를 가면 된다.

또한 대동강하류의 풍치가 더욱 아름답게 변모되였다.




태성호



평양에서 서남쪽으로 30km가량 가면 해발 200~300m의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인공호수가 있다.

둘레가 30km가 넘는 산중의 바다를 련상시키는 호수이다. 호수의 기본수원은 대동강이다. 관개용저수지로 건설하였다.

풍치아름다운 호수가를 따라 소년단야영소와 휴양소, 평양골프장이 자리잡고있다.

호수가에서 낚시질과 뽀트놀이도 할수 있다. 그 주변에서 어죽을 쑤거나 불고기를 하면서 자연을 즐기는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평양골프장



태성호기슭에 자리잡고있다.

수려한 풍치에 잘 어울리게 들어앉은 골프장은 약 120정보의 부지면적을 가지고있다. 잔디면적은 45정보이고 그 연장길이는 7km정도이다. 골프장은 18개의 홀로 되여있으며 매개 홀은 호수가를 따라 특색있게 이어져있다.

하루에 100여명이 경기를 할수 있도록 기재들과 봉사인원들이 충분히 준비되여있다. 건물안에는 식당, 상점, 한증탕, 휴식실 등 봉사시설들이 편리하게 꾸려져있다.

경기를 하지 않는 방문객들은 멋있는 환경과 푸른 태성호를 굽어보며 기분좋은 산책을 하는것으로만 만족을 느낄수 있다. 당일려행으로 리상적인 명소이다. 또한 청춘거리의 서산호텔옆에는 30개의 타석을 가진 평양골프련습장이 자리잡고있다. 골프련습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나 골프장까지 갈 시간이 넉넉치 못한 사람들에게 알맞춤한 곳이다.

주변에 호텔들도 있어 짧은 기간에 골프를 배우기에는 이 련습장을 리용하는것이 좋다.




와우도유원지



남포시중심에서 서남쪽으로 10km가량 가면 자그마한 산을 보게 된다. 이것이 한때에는 섬이였던 와우도이다. 바다에 소가 누워있는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산마루에 정각이 있고 앞에는 배놀이장과 해수욕장, 백사장, 물놀이장, 낚시터, 휴양소, 화초원 등이 있으며 배구장, 롱구장, 탁구장 등 체육시설들도 꾸려져있다. 뒤에는 와우도회관이 특색있게 꾸려져있다.

회관에는 오락장, 무도장을 비롯한 봉사시설들이 그쯘히 갖추어져있다. 일요일에 이곳은 남포시뿐아니라 평양에서 온 휴양객들로 차고넘친다.




강서세무덤



강서구역 삼묘리에 위치하고있는 7세기중엽의 고구려벽화무덤이다.

이 무덤들은 오늘까지 조선에서 알려진 100여기의 고구려벽화무덤들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벽화인 사신도(백호, 주작, 현무, 청룡)가 있는것으로 하여 주의를 끌고있다.

사신도의 백호그림은 세계 명화중의 하나로 꼽히고있다.

주체93(2004)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되였다.




덕흥리벽화무덤



강서구역 덕흥리에 자리잡고있는 덕흥리벽화무덤은 고구려24대왕인 광개토왕시기(408)년에 만든 무덤이다.

무덤안에는 무덤의 년대를 가늠할수 있는 600여개의 글자가 씌여져있으며 강성한 고구려를 보여주는 벽화들이 그려져있다. 주인공이 벼슬을 지낼 때 13군태수를 만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무사들의 그림, 고구려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한 그림 등으로 벽화가 형상되였다.

주체93(2004)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되였다.




룡강온탕원



조선의 중서부에 위치하고있다.

예로부터 유명한 온천을 리용하여 고혈압, 관절염, 신경통이나 수술후유증, 부인성질환, 만성위염, 만성대장염, 피부병 등을 치료해주는 시설이다.

룡강온천은 조선의 온천가운데서 광물질이 제일 많고 브롬이온과 라돈이 들어있어 질병치료에 특효가 있는 매혹적인 온천이다. 이곳에는 라돈가스욕, 온몸치료욕, 국소치료욕, 물맞이치료욕, 내복치료 등을 할수 있는 시설들이 훌륭히 갖추어져있다.

온탕원에서는 음료수와 생활용수를 예성산샘물로 리용한다. 소화기에 좋은 이 물을 마음껏 마시면서 온천욕을 하고나면 10년은 더 젊어지고 청춘의 정력을 되찾을수 있다.

7개의 호동으로 된 온탕원의 매 방(총 28개방)에는 치료실, 침실 등이 훌륭히 갖추어져있다. 종합봉사건물에는 화면반주음악실과 연회장, 당구장을 비롯한 각종 봉사시설들이 꾸려져있다.

온탕원의 정원가까이에 있는 호수가에서 잉어, 숭어를 직접 낚아 맛있는 료리들도 해먹을수 있다. 온탕원에서 맛볼수 있는 조선서해대합조개불고기는 지울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령남배수리공장 2호도크



령남배수리공장에 현대적으로 일떠선 배수리기지이다.

수만t급배 여러척을 동시에 수리할수 있을뿐아니라 운영을 콤퓨터화한 대형도크가 새로 건설됨으로써 배수리능력이 훨씬 높아졌다. 여러개의 수리부두와 종합수리직장, 수백세대의 살림집 등 많은 대상들도 동시에 건설되였다.

집체같은 대형짐배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대한 도크와 수리시설들, 조종실, 전망대, 풍력발전기 등을 볼수 있다.




남포육아원



주체84(1995)년 10월에 개원한 남포육아원에서는 남포시안의 세쌍둥이들과 어머니가 없거나 부모들이 장기환자인 4살까지의 어린이들을 키우고있다.

주체93(2004)년에 개건되였다. 3층으로 된 육아원에는 해빛쪼임칸과 호실들, 지능놀이실, 종합놀이장 등이 있다.




청산협동농장



청산협동농장은 평양에서 28km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있다.

청산리는 벼를 비롯한 알곡을 재배하는 농업생산기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체49(1960)년 2월 이곳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창조하시였다.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은 조선로동당의 전통으로 되여있는 혁명적군중로선을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현실에 맞게 구체화하고 발전시킨 대중지도사상, 대중지도방법이다.

청산리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이곳을 사회주의농촌의 본보기농장으로 전변시키신 령도업적이 깃들어있는 뜻깊은 곳이다.




김응서집



남포시 룡강군 애원리에 있는 이 집은 김응서가 1564년에 출생하여 20살까지 살던 집이다.

김응서(1564-1624)는 임진조국전쟁시기의 애국명장이였다. 1592년 왜적들이 평양성을 일시 강점하자 그는 부대를 지휘하여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는 일생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바치였다. 원상그대로 보존되여있는 집은 본채와 부속건물, 1791년에 세운 충렬문, 1819년에 세운 충렬사 등으로 되여있다. 충렬사는 김응서와 그 조상들의 제를 지내던 사당이다. 충렬사에서 100m정도 올라가면 휴식터가 있는데 야외식사를 하기에 맞춤한 장소이다.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해주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해주지구

조선서해의 해주만기슭에 자리잡고있는 해주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관광지구이다.

이 지구에는 서부벌방지대의 《계곡미의 녀왕》으로 알려진 장수산과 같은 명산들이 있으며 부용당, 수양산성, 해주석빙고, 해주5층탑 등 력사유적들이 적지 않게 보존되여있다.

신천박물관을 비롯한 참관지들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손꼽히는 명승구는 석담구곡과 바다에 솟아있는 형제섬이다.




해주시

황해남도의 도소재지이며 조선서해의 주요항구도시이다.

해주시 면적의 90%이상이 200m미만의 구릉 및 벌지역이다. 상업 및 소비도시였던 해주시는 오늘 현대적인 항구문화도시로 발전하였다.

해주항은 예로부터 평양, 개성 등 국내의 주요도시들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을 발전시켜온 력사가 오랜 무역항이다. 시에는 10여개의 대학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교육기관들과 문화기관, 체육기관, 보건기관들이 있으며 공원과 유원지 등 봉사시설들도 훌륭하게 꾸려져있다.

또한 부용당, 사미정, 해주성개측비 등 력사유적들이 보존되여있다. 예로부터 해주배가 유명하다.

평양에서 해주까지 거리는 140km이며 년평균기온은 14. 7℃, 년평균강수량은 1 147. 5mm이다.




장수산



황해남도 재령군과 신원군의 경계에 있다.

예로부터 이 산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좋은 물과 공기를 마시며 오래오래 살았다고 하여 장수산(해발 747m)이라 이름지었다.

《황해금강》으로 불리우는 아름다운 산으로서 선조들은 《장수산은 서부벌방지대에 혜성같이 나타난 계곡미의 녀왕》이라고 하였다.

제일 높은 봉은 환희봉이며 동서길이 10km, 북남길이 8km이다. 장수산유원지는 열두굽이계곡으로 이루어졌다.

계곡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명소들과 천연기념물들이 재미나는 전설들과 어울리고있어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여섯굽이에 있는 300년수는 건강장수에 특효가 있을뿐아니라 예로부터 조선력사에 이름을 남긴 고구려 고국원왕, 장수왕, 황희장군 등 왕들과 명장들이 마신 소문난 약샘이라고 한다. 장수산에는 산성과 현암사, 묘음사와 같은 력사유적들도 보존되여있다.

또한 희귀한 식물들과 여러 종의 동물들이 있는데 특히 꿩이 많아 예로부터 일명 《치악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장수산의 제일 아름다운 계절은 서리꽃핀 겨울철이다.




수양산



해주시와 신원군의 경계에 있다.

해발 946m로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설류봉, 장대봉을 비롯한 우아한 산봉우리들이 솟아있어 더 높아보인다. 동서길이 12km, 북남길이 10km이다.

산의 남쪽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암절벽들이 천태만상의 산악풍치를 펼치고있다. 폭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수양산폭포가 유명하다.

또한 수양산성을 비롯하여 해주석빙고, 해주5층탑 등 력사유적들이 있다.




석담구곡



해주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석담천의 중류에 있다.

돌못과 아홉골짜기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산꼭대기의 큰 바위가 갓처럼 생겼다 하여 관암(1곡), 온 바위가 꽃으로 덮인다 하여 화암(2곡),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우에 록음이 우거진다 하여 취병(3곡), 늙은 소나무들이 벼랑우에 우거진다 하여 송애(4곡), 구곡의 으뜸이라 하여 은병(5곡), 약 1km 올라가면 맑은 물이 흰 모래우를 흘러 벼랑으로 떨어져 고인 넓고 깊은 못인 천연의 낚시터가 있다 하여 조협(6곡), 기암이 절벽을 이루고 가을이면 온 골짜기가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진다 하여 풍암(7곡),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거문고소리같다 하여 금탄(8곡), 주위가 고요하여 글읽기 좋은 곳이라 하여 문산(9곡) 이렇게 석담구곡은 저저마다 독특한 미를 자랑하는 아홉골짜기로 이루어졌다.

은병(5곡)에는 조선봉건왕조시기 교육기관이였던 소현서원 등 옛 건물들이 자리잡고있어 이곳의 품위를 한결 돋구어준다.

석담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수양산성



예로부터 황해도 3대산성의 하나로 일러오는 고구려시기 산성이다.

서쪽에 높이 솟은 장대봉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련결한 큰 산성이다. 성벽은 대부분 바위우에 쌓았는데 평균높이가 6~7m이다. 산성의 동, 성, 남, 북에 각각 문이 있는데 남문 가까이 성벽의 너비는 14m나 된다. 장대터와 많은 집터들이 보존되여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업적이 깃들어있다. 오늘 수양산성은 명승지로 훌륭히 꾸려져 문화휴식터로 널리 리용되고있다.

성안에 유명한 수양산폭포가 있다.




수양산폭포



수양산성안에 있다.

사계절 경치가 뛰여난 장쾌한 폭포(높이 128m)로서 해주8경의 하나로 일러온다. 폭포는 2단으로 흐르는데 중간에 넓다란 바위와 깊은 소가 있다.




해주석빙고

해주시 옥계동 수양산기슭에 있다.

고려초에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돌로 만든것이다. 화강석을 다듬어 남북으로 길게 무지개형으로 쌓은 다음 흙과 석회를 다져서 덮고 그우에 잔디를 입혔다. 지금의것은 1735년에 보수한것이다. 길이는 28. 3m이며 높이는 약 6m, 너비는 5m이다.




해주5층탑

해주시 옥계동 수양산기슭에 있는 고려시기 돌탑이다.

2층으로 된 기단우에 탑몸을 올려쌓고 탑머리를 놓은 정방형평면의 화강석탑이다. 지붕돌의 네귀에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가까이에 해주석빙고와 고려시기에 지은 사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소현서원



석담구곡의 5번째 골짜기인 은병에 있는 조선봉건왕조시기 사립교육기관이다.

조선봉건왕조중엽의 유학자 리이(1536-1584년)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저술사업을 하던 건물인데 후에 서원으로 꾸리였다. 선행한 유학자들을 제사지내던 사당집인 정묘와 강의를 하던 청계당이 있다. 청계당에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수군을 이끌고 왜적을 쳐물리치는데서 위훈을 세운 리순신(1548-1598년)장군이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연구하였다는 력사적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조선전쟁시기 파괴된것을 전후에 옛 모습그대로 복구한 조선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부용당



해주시 부용동에 있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루정이다.

1500년에 련못북쪽언덕가에 루정 한채가 있었는데 련꽃(부용)같은 루정이라는 뜻에서 부용당이라 불렀다.

1526년 물속에 26개의 기둥을 박고 정각을 한채 더 짓고 련못가의 루정과 다리로 련결시켰다. 못가와 못안의 루정이 하나로 이어진 아름다운 자태를 물우에 그림자로 비치던 부용당은 《련당청우》(련못루정에서 비오는 소리를 듣는것을 즐기는 일)로 유명하였다.

조선전쟁시기 파괴된것을 원상그대로 복구하였다. 여기에는 흥미있는 전설도 깃들어있다.




계남목장



황해남도 신원군 계남리에 위치하고있다.

계곡이 많다고 하여 계남리라고 부르는 곳에 자리잡고있는 젖과 고기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목장이다.

석담구곡에서 목장까지 20km이다. 15정보의 부지면적에 4개의 분장으로 이루어진 목장에서는 젖소, 돼지, 염소, 토끼 등을 방목하고있다.

목장의 매 분장에 있는 젖가공실들에서는 치즈, 빠다, 케피르, 요그르트 등을 생상하고있다. 목장은 특색있는 살림집들이 아담하게 늘어서있어 풍치가 좋다.




신천박물관

신천군 소재지에 있다. 조선전쟁시기 미군이 감행한 야수적학살말행자료들이 전시되여있다.

박물관부근에는 미제의 죄행을 고발하는 5 605명 애국자묘와 원한의 밤나무골, 화약창고, 화약창고에서 학살된 사백어머니묘와 백둘어린이묘가 있다.




형제섬

해주시 중심에서 서남쪽으로 9km 가면 바다가 시작되는데 배를 타고 또 6km정도 가면 자그마한 두개의 바위섬이 있다. 이것이 형제섬이다.

조선서해는 밀물과 썰물차이가 심하므로 형제섬에 이르러 조금 있으면 주변바다가 무연한 백사장으로 변한다. 이때 백사장과 군데군데 이루어진 《호수》들에서 미역도 감고 일광욕도 하면서 조개나 게잡이를 할수 있다.

밀물때가 되면 배를 타고 부두로 돌아온다.




해주다라니석당



해주시 해청동에 있는 고려시기 석당이다.

다라니석당이란 불교경전인《다리니경문》을 기둥곁면에 새겨서 세운 절의 돌시설물이다. 받침돌의 둘레에 탐스러운 꽃잎이 아름답게 새겨져있다.

해주다라니석당은 날씬하면서도 장중한 감을 준다.




해주려관(4급)



해주시 영광동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연회장과 안마실을 비롯한 여러 봉사시설들이 갖추어져있으며 식당에서는 해주교반과 서해수산물료리(해삼, 생복, 광어, 피조개, 바스레기, 대합 등)를 기본으로 한다.

방수:21개(1등실 2개, 2등실 2개, 3등실 17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