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8

개신교 장로교 신도에게 함석헌 사상, 동학 사상, 원불교 사상을 설명한다면

개신교 장로교 신도에게 함석헌 사상, 동학 사상, 원불교 사상을 설명할 때는 

그들의 익숙한 교리적 언어와 신학적 프레임을 다리(Bridge)로 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장로교 신학의 핵심인 <하느님의 주권>, <인간의 신성한 존엄성(하느님의 형상)>,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천>, <일반 은총> 등의 개념을 활용하여 설명하면 이해와 공감을 돕기 쉽다.

1. 함석헌 사상: 장로교 전통에서 출발해 확장된 <민중 영성>

장로교 신도에게 함석헌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접점은 <그 역시 장로교 계통의 신학적 뿌리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 장로교적 접점 (하느님의 형상과 주권): 장로교 신학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이다.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이 창조론적 존엄성을 한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사상적 설명: 함석헌의 씨알은 하느님의 영을 품은 거룩한 민중이다. 교회의 제도나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개개인이 직접 서는 영적 자율성을 강조했다. 이는 칼뱅주의의 핵심인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통하지만, 교권주의나 제도를 뛰어넘어 역사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씨알)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본 신앙이라 설명할 수 있다.

2. 동학 사상: 구약 선지자들의 <사회 정의>와 <하나님 나라>

동학은 유교적 봉건 사회에서 신음하던 민중을 향해 선포된 자생적 메시지이다. 장로교 신도에게는 구약 성경의 <선지자적 전통>과 비유할 수 있다.

  • 장로교적 접점 (시천주와 인내천): "모든 사람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시천주)"는 선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므로 신분이나 계급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성경적 평등관과 결을 같이한다.

  • 사상적 설명: 아모스나 이사야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불의를 규탄했듯, 동학의 <후천개벽>과 <보국안민>은 불의한 세상을 바로잡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 한국적 역사 변혁 운동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3. 원불교 사상: <일반 은총>과 <삶의 현장에서의 불공>

원불교는 타 종교이지만, 장로교의 <일반 은총(General Grace)> 개념과 <삶 전체를 통한 예배> 프레임으로 설명하면 이해가 명확해진다.

  • 장로교적 접점 (사은과 생활 예배): 원불교의 핵심인 <사은(四恩: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은혜)>은 하느님께서 만물과 이웃을 통해 주시는 보편적 은혜(일반 은총)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과 유사하다. 또한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는 <생활 예배> 개념은 원불교의 <처처불상 사사불공(모든 곳이 부처이니 일마다 불공을 드리라)>과 구조적으로 통한다.

  • 사상적 설명: 원불교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는, 서구식 근대화 속에서 영성을 잃어가는 세상을 향해 리처드 니버가 말한 <문화와 사회를 변혁하는 기독교적 실천>과 유사한 문제의식을 지닌 생활 종교 운동이라 설명할 수 있다.

요약: 장로교 언어로 재구성한 비교

  • 함석헌 사상: "제도 교회를 넘어, 만인제사장직과 하나님의 형상(씨알)을 역사 현장에서 구현하려 한 비폭력 민중 영성"

  • 동학 사상: "조선 말기 수난당하는 민중을 향해 '하느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존엄성'과 '새 하늘 새 땅(후천개벽)'을 선포한 선지자적 민중 운동"

  • 원불교 사상: "하나님의 일반 은총(사은)을 깊이 깨닫고, 일상의 모든 일터와 삶을 예배(사사불공)로 승화시키고자 한 한국 자생의 생활 종교"

결국 세 사상 모두 <소외된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삶과 역사 속에서 신성한 가치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장로교 신도가 지향하는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실천'과 맞닿아 있음을 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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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합니다. 오히려 장로교 신도에게 설명할 때는 처음부터 “이것은 기독교와 다르다/같다”라고 판정하기보다, 장로교 신앙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하나님–인간–은총–성화–교회–사회>라는 틀 안에 넣어 설명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제가 장로교 신도에게 설명한다면 먼저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퀘이커, 동학, 함석헌, 원불교는 서로 같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가 사회의 변화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장로교가 이것을 성령, 하나님의 형상, 성화, 이웃사랑, 하나님 나라라는 언어로 말한다면, 이들은 각각 다른 언어로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하나씩 풀어가겠습니다.

1. 먼저 장로교의 기준점을 세웁니다

전통적 장로교 신앙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입니다.

인간 안에 무엇인가 신성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존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존엄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자기 자신, 이웃, 자연과의 관계가 왜곡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인간이 자기 내면의 신성을 발견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성령의 역사로 인간이 변화됩니다.

아주 간단히 하면,

<창조 → 죄 → 은총 → 구원 → 성화 → 하나님 나라>

라는 구조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상을 보면 됩니다.


2. 퀘이커는 장로교와 가장 가까운 친척입니다

장로교 신도에게는 먼저 퀘이커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같은 기독교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퀘이커의 <Inner Light>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가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신다고 말한다면, 퀘이커는 그 하나님의 현존을 더욱 직접적으로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하는 예배보다 함께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립니다.

장로교 신도에게는 낯설겠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장로교에서도

<성령의 인도하심>
<양심>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을 말합니다.

차이는 퀘이커가 이것을 훨씬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것입니다.

장로교:

<성경 + 설교 + 성례 + 교회 + 성령>

퀘이커: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와 내면의 빛>

을 더욱 강조합니다.

따라서 장로교 사람이 퀘이커를 이해할 때 가장 큰 질문은 이것입니다.

“개인의 내면적 경험이 성경과 공동체의 검증 없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확신될 위험은 없는가?”

이것은 정당한 장로교적 질문입니다.

반대로 퀘이커는 장로교에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성경과 교회와 목사를 강조하다가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좋은 대화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3. 동학의 <시천주>는 <하나님의 형상>과 비교해서 설명하면 쉽습니다

동학을 장로교 신도에게 처음부터

<사람이 곧 하나님이다>

라고 설명하면 거의 틀림없이 거부감을 일으킬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입니다.

오히려 <시천주 侍天主>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장로교인은 자연스럽게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접점이 생깁니다.

장로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존귀하다.

동학:

인간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존귀하다.

그리고 최시형의

<사인여천 — 사람을 하늘같이 섬겨라>

를 예수의 말씀과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두 사상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신앙의 진실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강하게 만납니다.


4. 하지만 장로교와 동학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장로교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

이 매우 중요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같습니다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도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동학, 특히 후대의 <인내천>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훨씬 내재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그래서 장로교 신학자의 입장에서는 이 지점에서 질문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안에 계신다는 것과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은 같은 말인가?”

동학과 장로교가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동시에 동학은 장로교에 반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믿으면서 왜 양반은 상민을 멸시하고, 남자는 여자를 차별하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천대했는가?”

이 질문은 한국 기독교가 피하기 어렵습니다.


5. 함석헌은 장로교 신도에게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 자신이 기독교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함석헌은 ‘구원받은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신앙인이 역사와 사회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기독교 사상가입니다.”

그의 <씨알>은 장로교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사람>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석헌은 거기서 훨씬 더 나갑니다.

그는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 한 사람은 독재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쟁 앞에서는?>

<국가가 잘못할 때는?>

<교회가 권력에 붙을 때는?>

그래서 씨알은 단순히 존엄한 개인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저항할 줄 아는 인간>

입니다.

이 부분은 장로교의 예언자 전통과 연결하면 매우 잘 이해됩니다.

  • 아모스,
  • 이사야,
  • 예레미야,
  • 예수

모두 권력과 종교제도가 잘못될 때 그것을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장로교인에게

<평신도 중심의 예언자적 기독교>

라고 설명해도 상당 부분 통합니다.


6. 그러나 함석헌은 정통 장로교의 경계를 넘어갑니다

함석헌은 후기에는

<오직 기독교만 진리를 가지고 있다>

는 입장에서 상당히 멀어집니다.

  • 불교,
  • 노자,
  • 장자,
  • 간디,
  • 퀘이커

에게서도 진리를 발견합니다.

따라서 보수적인 장로교 신도라면 가장 불편해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어떻게 되는가?>

함석헌은 이 질문에 전통적 장로교와 같은 답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함석헌을 장로교 신학 안에 완전히 넣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기독교에서 출발하여 종교적 보편주의로 나아간 사람”

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7. 원불교는 <성화>와 비교하면 의외로 쉽게 이해됩니다

장로교 신도에게 원불교의 <일원상>부터 설명하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저는 오히려 <마음공부>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원불교는 묻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실제 생활에서는 화를 내고, 욕심을 부리고, 남을 미워하는가?”

장로교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

입니다.

장로교에서는 그 변화의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원불교에서는

  • <정신수양>
  • <사리연구>
  • <작업취사>

라는 삼학을 통해 마음과 행동을 훈련합니다.

그러므로 장로교 신도에게는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기독교의 성화와 비슷한 문제를 다루지만, 하나님의 은총보다 지속적인 수행과 훈련을 더 체계적으로 강조합니다.”


8. <사은>은 기독교의 감사와 청지기 정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원불교의

  • <천지은>
  • <부모은>
  • <동포은>
  • <법률은>

도 장로교인에게 의외로 쉽게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 하나님께 감사하고,
  • 부모를 공경하고,
  • 이웃을 사랑하고,
  • 사회질서를 존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원불교는 이것을 <은혜의 관계망>으로 체계화합니다.

이것은 장로교 신도에게 상당히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면서 나를 살리는 자연, 사회, 타인의 노동에는 감사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원불교의 사은론은 기독교의 감사 개념을 사회적·생태적으로 넓혀 생각하게 하는 좋은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습니다.


9. 결국 네 사상을 장로교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전통자기 언어장로교인이 이해할 수 있는 가까운 개념중요한 차이
퀘이커Inner Light성령의 내적 인도성경·성직·성례의 역할을 훨씬 약하게 봄
동학시천주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임재창조주와 인간의 구별이 장로교보다 약함
함석헌씨알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책임적 평신도종교다원주의와 제도교회 비판이 강함
원불교일원상하나님의 보편적 현존과 창조질서인격적 창조주 개념과 크게 다름
원불교삼학·마음공부성화·영성훈련은총보다 수행이 강조됨
동학사인여천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봄인간의 신성에 대한 해석이 다름
원불교사은감사·청지기 정신은혜를 하나님과의 관계 이상으로 확대
함석헌씨알 민주주의예언자적 사회참여교회·국가 권위에 훨씬 급진적으로 비판적

10. 그런데 제가 장로교 신도에게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같다/틀리다>가 아닙니다

종교 간 대화를 하면 흔히 두 극단으로 갑니다.

하나는

<다 똑같은 이야기다>

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는 진리이고 나머지는 잘못된 종교다>

입니다.

그렇게 시작하면 대화 자체가 끝납니다.

더 생산적인 방법은 각각이 <어떤 질문을 더 날카롭게 제기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장로교 신앙도 더 잘 보입니다.

  • 퀘이커가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있는가?>
  • 동학이 묻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정말 하나님 앞의 존재처럼 대하고 있는가?>
  • 함석헌이 묻습니다. <당신의 신앙은 권력 앞에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 원불교가 묻습니다. <당신은 믿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훈련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장로교 신앙을 파괴하는 질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장로교가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 충분히 실천하지 못했던 요소>를 다시 보게 하는 질문들이 될 수 있습니다.


11. 반대로 장로교가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도 있습니다

이것도 공평하게 해야 합니다.

  • 장로교는 퀘이커에게 묻습니다. <내면의 음성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 동학에게 묻습니다. <인간 안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간의 악과 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함석헌에게 묻습니다. <역사에서 ‘뜻’을 발견한다고 할 때 그것이 자신의 역사해석을 절대화하는 것은 아닌가?>
  • 원불교에게 묻습니다. <수행을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을 강조할 때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질문들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즉 종교 간 대화는 한쪽이 다른 쪽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비추어 주는 일>이 됩니다.


12. 결국 장로교 신도에게는 이렇게 한 문장씩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 <퀘이커> “성령의 내적 인도와 양심을 극도로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 전통입니다.”
  • <동학> “모든 사람 안에 하늘의 존엄이 있다는 것을 사회적 평등으로 밀고 나간 한국의 종교입니다.”
  • <함석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기독교적 사상가입니다.”
  • <원불교> “궁극적 진리가 우리 마음과 일상 속에 있으며, 그것을 지속적인 마음공부와 생활실천으로 구현하려는 한국의 근대 불교적 종교입니다.”

그리고 장로교 자체는 이렇게 놓을 수 있습니다.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죄로 깨어졌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어 성령 안에서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놓으면 서로 다른 점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더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장로교–퀘이커–동학–원불교–함석헌>을 

  • <인간은 본래 선한가, 죄인인가 / 
  • 구원은 은총인가 수행인가 / 
  • 하나님은 초월적인가 내재적인가 / 
  • 사회악은 개인의 죄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라는 네 질문으로 비교하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깊은 철학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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