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전통을 깊이 비교하면, 놀랍게도 출발점은 매우 가깝고 도착점은 상당히 다릅니다. 핵심을 먼저 말하면 이렇습니다.
<야마기시의 無我執·研鑽은 ‘자기의 판단에 대한 집착을 해체하여 일체(一体)의 진리에 접근하려는 방법’이고, 퀘이커의 Inner Light·Discernment는 ‘각 사람 안에서 비추는 자기보다 큰 빛에 귀 기울이면서, 개인의 양심을 공동체 안에서 검증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양쪽 모두 <내 생각이 곧 진리>라는 태도를 거부하지만, 야마기시는 점점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선 일체> 쪽으로 나아가는 반면, 퀘이커는 <나와 너의 차이를 남겨둔 채 더 깊은 일치 unity>를 찾으려 합니다.
1. 네 개념을 우선 정확하게 놓아보자
| 야마기시즘 | 퀘이커 |
|---|---|
| 無我執 | Inner Light |
| 자기 생각·소유·판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 |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신적 빛에 귀 기울임 |
| 研鑽 | Discernment |
| 자기 판단을 고정하지 않고 함께 조사하고 검토함 | 개인과 공동체가 침묵·경청 속에서 참된 인도를 분별함 |
| 궁극적으로 一体 | 궁극적으로 Unity |
| <참으로 하나인 상태> | <차이를 없애지 않는 영적 일치> |
야마기시즘 연구에서도 <一体·無我執·無所有共用共活·研鑽>이 핵심어로 꼽힙니다. 야마기시 미요조 자신도 후기의 <理念徹底研鑽会>에서 我執이 사라진다면 마찰·투쟁·승패감이 사라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퀘이커 쪽에서는 <Inner Light>와 <discernment>가 대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Inner Light는 흔히 오해하듯 <내 마음속 생각을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국 퀘이커의 <Quaker Faith & Practice>는 오히려 그것을 명시적으로 경고합니다. Light는 ‘나의 빛, 당신의 빛’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의 신적 Light이고, 개인의 경험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공동체 안에서 시험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을 잡아야 두 전통의 진짜 비교가 시작됩니다.
2. 첫 번째 공통점: <내가 옳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두 전통에서 가장 놀라운 공통점입니다.
야마기시즘의 출발은 대략 이렇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확신을 먼저 의심해 보자.
야마기시가 말년에 점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이 문제였습니다. 그의 사상을 설명하는 내부 자료에서는 그 과정이
<자기 확신을 갖지 않음 → 자기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음(無我執) → 계속 검토함(研鑽) → 서로 보완함 → 함께 진실을 탐구함>
이라는 식으로 정리됩니다.
퀘이커의 Business Meeting도 거의 똑같이 시작합니다.
<Quaker Faith & Practice>는 회의에 올 때 이미 마음을 결정하고 자기 안을 관철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open mind는 empty mind가 아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사실과 지식, 경험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오되 그것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간단히 표현하면,
야마기시:
<내 생각일 뿐이지 않을까?>
퀘이커:
<이것이 정말 내가 따라야 할 Leading인가?>
라고 스스로 묻습니다.
둘 다 일종의 <인식론적 겸손>에서 시작합니다.
3. 그러나 無我執과 Inner Light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갈림길이 생깁니다.
無我執은 <빼는 운동>이다
無我執은 말 그대로 <我執을 없애는 것>입니다.
내 견해,
내 소유,
내 이익,
내 가족이라는 독점적 의식,
내가 옳다는 확신
등을 절대시하지 않습니다.
야마기시의 근본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원래 자연과 타인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독립된 <個>가 실체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 공동체가 만들어진다기보다는, 본래 서로 연결된 생명의 전체 속에서 개인이 살아간다고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세계대백과사전>도 야마기시 사상의 특징을 개인·자아의 포기와 인간·자연이 하나가 되는 조화사회에서 찾습니다.
즉 방향은
<ego ↓ → 一体 ↑>
입니다.
Inner Light는 <밝히는 운동>이다
퀘이커는 조금 다릅니다.
Inner Light는 자아를 없애는 원리가 아닙니다.
<나보다 큰 것이 나 안에서 나를 비춘다>
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양심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조명하고 교정>합니다.
19세기 영국 퀘이커 문헌은 Light와 conscience를 명백히 구별합니다. 양심은 보는 눈과 같고 Light는 그것을 밝히는 빛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야마기시의 질문은
<어떻게 나를 벗어날 것인가?>
에 가깝다면,
퀘이커의 질문은
<어떻게 내 안에서 나보다 깊은 것을 들을 것인가?>
에 가깝습니다.
4. 그래서 <무아>와 <양심>의 관계가 정반대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야마기시즘에서는 이상적으로
<私意 → 公意>
의 이동이 일어납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함께研鑽하면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방향을 찾으려 합니다. 농림수산 관계 연구에서도 야마기시 생활의 기본어 가운데 하나를 <研鑽の一致点=私意尊重公意行>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퀘이커는 여기서 조금 멈춥니다.
공동체의 판단이 개인의 양심보다 자동적으로 우위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퀘이커에는 매우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a measure of the Light>가 주어진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가더라도 한 사람이 깊은 양심 때문에 동의하지 못할 가능성을 없애버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퀘이커 Business Meeting에서는 한 Friend가 결정에 동의하지 않지만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지 않고 <stand aside>할 수 있습니다. 매우 심각한 경우에는 결정을 미루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두 전통의 차이를 아주 날카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야마기시즘
<참된研鑽이 이루어진다면 결국 진실의 一致点에 도달할 수 있다.>
퀘이커
<참된 discernment를 해도 내가 아직 볼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Meeting 전체도 아직 충분히 clear하지 않을 수 있다.>
즉 퀘이커에는 <미결정 상태를 견디는 신학>이 있습니다.
5. 研鑽과 Discernment의 가장 큰 차이: <말>과 <침묵>
방법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차이가 있습니다.
야마기시의 研鑽은 상당히 <대화적>입니다.
문제를 내놓고,
질문하고,
서로 검토하고,
전제를 뒤집어 보고,
다시 묻고,
결론을 실행하고,
실행 결과를 다시研鑽합니다.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실험입니다.
그래서 양계도研鑽이고,
부부관계도研鑽이고,
재산도研鑽이고,
농업도研鑽이고,
공동체 운영도研鑽입니다.
야마기시의 말년에 남겨진 기록들이 <一体研鑽会>, <科学・研鑽態度>, <理念徹底研鑽会> 등 끝없이研鑽이라는 이름을 갖는 이유입니다.
퀘이커의 discernment는 반대로 <침묵>이 중심입니다.
Business Meeting조차 토론회의 연장이 아니라
<Meeting for Worship with Attention to Business>입니다.
말하기 전 침묵하고,
한 사람이 말한 뒤 다시 침묵하며,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논박하기보다 함께 듣습니다.
목적은
<내 논리가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디로 인도받고 있는가를 듣는 것>
입니다.
영국 퀘이커는 이것이 단순한 secular consensus와 다른 이유를 <silent waiting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것>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매우 단순화하면,
<研鑽 = 함께 검토한다>
<Discernment = 함께 듣는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그런데 더 깊이 보면 둘 다 <자아를 늦추는 기술>이다
여기서 둘은 다시 만납니다.
研鑽에서는
“잠깐, 그것이 사실인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묻습니다.
퀘이커 침묵에서는
“잠깐, 내가 지금 꼭 말해야 하는가? 이것이 정말 ministry인가?”
라고 묻습니다.
둘 다 인간에게 매우 어려운 일을 요구합니다.
<즉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ego deceleration>, 즉 자아의 감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가 솟아도 바로 반응하지 않고,
“왜 화가 났을까?”
라고研鑽합니다.
강한 정치적 의견이 있어도 바로 주장하지 않고,
“이것이 정말 내가 말하도록 요구받은 것인가?”
라고 discern합니다.
그래서 심리적 기술의 차원에서는 야마기시와 퀘이커 사이에 상당히 깊은 친연성이 있습니다.
7. 그러나 <진리의 원천>은 결정적으로 다르다
여기가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야마기시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끊임없이 검토함으로써 발견됩니다.
야마기시는 종교적 계시보다는 <과학적 태도>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확정된 교리를 믿기보다 계속 조사하고 실제로 해보고 다시 검증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구조는
<현실 → 관찰 →研鑽 → 실험 → 재검토>
입니다.
퀘이커
전통적인 언어로는 진리의 근원이 <God / Spirit / Christ / Light>입니다.
즉 인간들이 머리를 맞대어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자신보다 큰 Truth를 <받습니다>.
그래서 Quaker Business Method는 합의제 민주주의와 정확히 같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선호를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God's will>을 찾는 행위라고 퀘이커 스스로 설명합니다.
현대 자유주의 퀘이커들은 God 대신
Spirit,
Truth,
Love,
Life
등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구조는 여전히 비슷합니다.
<진리는 우리가 소유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8. 그렇다면 야마기시즘에도 일종의 <초월성>이 있지 않은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입니다.
야마기시에서 초월적인 것은
<一体의 실제>
입니다.
개인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닭,
흙과 식물,
생산자와 소비자,
나와 타인은
본래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퀘이커의 초월은 대체로
<하나님/빛이 인간을 초월한다>
이고,
야마기시의 초월은
<전체적 관계성이 개별 자아를 초월한다>
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야마기시즘에는 <종교 없는 종교성>이 상당히 강합니다.
9. 가장 위험한 지점: <당신의 반대는 아집이다>
여기서 야마기시즘의 구조적 문제가 나타납니다.
無我執 자체는 훌륭한 자기성찰 원리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A가 말합니다.
“나는 이 결정에 반대합니다.”
B가 대답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 아닐까요?”
A:
“그래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B:
“아직 無我執이 안 된 것 아닐까요?”
이 과정은 끝없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無我執>은 자기성찰의 도구에서 <타인을 교정하는 도구>가 됩니다.
실제로 야마기시 공동체에 관한 비판적 연구에서는 일상생활 곳곳에서 반복되는研鑽이 구성원들의 언어와 행동을 동질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을 지적해 왔습니다.
이것은 야마기시 미요조가 의도했던 결과라고 단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의견 차이가 있어도 대립하지 않고 모두가 납득할 결론을 찾는 것을研鑽의 이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모두가 납득한다>는 이상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10. 퀘이커에도 똑같은 위험이 있다
퀘이커가 자동적으로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퀘이커에서도
“Spirit이 이렇게 인도하고 있다.”
“Sense of the Meeting이 형성되었다.”
라고 말하면 상당한 영적 권위가 발생합니다.
소수자가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라고 말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 clerk이나 오래된 회원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퀘이커 전통은 오랜 경험을 통해 몇 가지 안전장치를 발전시켰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강한 conviction을 unity를 위해 약화시킬 필요가 없다.>
<Quaker Faith & Practice>는 바로 이 점을 명시합니다. 쉬운 합의를 위해 강한 신념을 희석하거나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clerk이
“이것이 Sense of the Meeting입니다.”
라고 선언한다고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그 minute가 정말 Meeting의 분별을 표현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Meeting 전체>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권력 통제 장치입니다.
11. 결정적인 차이: <당신 안의 빛>을 공동체도 완전히 빼앗을 수 없다
제가 두 전통의 가장 깊은 차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퀘이커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개인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개인 안에도 Light가 있다>
고 인정합니다.
따라서 공동체가 99명이고 한 사람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그 한 사람을 단순히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
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서 Meeting 전체가 아직 듣지 못한 Light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퀘이커에서는 소수자가 장애물인 동시에
<가능한 prophetic voice>
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매우 퀘이커적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퀘이커의 중요한 사회적 concern은 처음부터 다수의 의견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소수 개인의 leading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개인이 concern을 느낍니다.
↓
스스로 시험합니다.
↓
다른 Friends에게 가져갑니다.
↓
공동체가 함께 시험합니다.
↓
Meeting이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즉
<Individual → Community → Individual>
의 순환입니다. 개인의 concern은 공동체에서 시험되지만 공동체도 개인으로부터 새로운 Light를 받습니다.
야마기시즘에서는 이상적 운동 방향이 좀 더
<Individual → 研鑽 → 一体>
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12. 無我執과 퀘이커 <self-emptying>도 구별해야 한다
그렇다고 퀘이커가 자아를 그대로 긍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Quaker worship에는 상당한 자기비움이 있습니다.
<centering down>,
<waiting>,
<opening>,
<surrender>
같은 표현들이 그것입니다.
내가 계획한 것을 잠시 내려놓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퀘이커식 자기비움에는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지만 자기를 없애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이 특정한 사람을 통해 말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George Fox,
John Woolman,
Lucretia Mott
같은 사람들이 단지 집단에 잘 적응한 사람들이었다면 퀘이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공동체와 사회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영성에는
<obedience와 dissent>
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야마기시의 <一体>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입니다.
13. 야마기시의 一体와 퀘이커의 Unity
두 단어가 거의 번역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릅니다.
一体
이상적으로는
<나와 타인의 이해가 더 이상 충돌하지 않는 상태>
를 향합니다.
Unity
반드시 모두가 똑같이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Quaker Faith & Practice에는 매우 인상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The unity of the meeting lies more in the unity of the search than in the decision.”
즉
<Meeting의 일치는 결정의 동일성보다 함께 찾는 데 있다>
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두 전통의 차이를 거의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야마기시즘의 강한 버전은
<함께 찾아가면 결국 하나의 진실에 도달한다>
고 기대합니다.
퀘이커의 성숙한 버전은
<우리가 같은 진리를 찾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미 하나일 수 있으며, 아직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차이라고 봅니다.
14. 두 전통을 도식화해 보면
야마기시
<나의 생각>
↓ 의심
<無我執>
↓ 함께 검토
<研鑽>
↓ 사적 판단 초월
<一致点>
↓ 생활 속 실현
<一体>
퀘이커
<개인의 experience / leading>
↓ 침묵 속에서 검증
<Inner Light>↓ 공동체에 가져옴
<Corporate Discernment>↓ 다시 듣고 기다림
<Sense of the Meeting>↓
<Unity>
그러나 필요하면
↓
<아직 결정하지 않음 / stand aside / 다시 discernment>
이라는 출구가 있습니다.
이 마지막 출구가 매우 중요합니다.
15. 그래서 야마기시가 퀘이커에게 배울 수 있는 것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無我執을 타인에게 적용하지 말 것>입니다.
“내가 아집에 빠져 있지 않은가?”는 훌륭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집에 빠져 있다”
가 되는 순간 위험해집니다.
둘째, <불일치를 실패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건강하려면
<우리는 아직 모른다>
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개인의 양심에 최종적인 피난처를 남겨두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아무리 지혜로워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6. 반대로 퀘이커가 야마기시에게 배울 수도 있다
이쪽도 꽤 중요합니다.
퀘이커는 개인 양심을 보호하는 데 뛰어나지만 자칫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느슨한 영성 공동체>
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야마기시의 研鑽에는 훨씬 강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 깨달음이 실제 생활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무소유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재산관계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평등을 말한다면 노동은 어떻게 나누는가?
자연과의 일체를 말한다면 농업과 소비를 어떻게 바꾸는가?
부부가 하나라고 말한다면 실제 갈등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야마기시는 철학을 <생활 실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퀘이커가 평화·평등·단순함·지속가능성을 testimony로 말하면서 생활의 경제구조는 거의 그대로 유지할 때 야마기시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 질문은 퀘이커에게 꽤 아픈 질문일 수 있습니다.
17. 결국 제가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보는 것
<無我執>과 <Inner Light>의 차이는 결국 <인간 개인을 어떻게 보는가>의 차이입니다.
야마기시에게 개인은
<전체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착각하기 쉬운 존재>
입니다.
따라서 수행은 그 분리의식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퀘이커에게 개인은
<자기중심적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동시에 신적 빛이 비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리>
입니다.
따라서 수행은 개인을 제거하지 않고 <정화하고 열어놓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저는 두 전통을 다음 두 문장으로 압축하고 싶습니다.
<야마기시즘은 “나를 내려놓아 우리가 하나임을 발견하라”고 말한다.>
반면 퀘이커는
<“나를 내려놓되, 당신 안에서 비추는 빛까지 내려놓지는 말라. 그리고 타인 안의 빛도 똑같이 기다려라”고 말한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研鑽>은 잘 작동하면 대단히 급진적인 공동성찰법이지만, 잘못 작동하면 <동질화>로 흐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 <Discernment>는 느리고 답답하며 때때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지만, 바로 그 느림이 개인의 양심을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비교에서 저는 의외로 <무아집과 Inner Light>보다 <研鑽과 Quaker discernment>가 더 가까운 친척이라고 봅니다. 둘 다 인간이 혼자서는 자기기만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차이는 <공동체가 개인을 초월하여 최종적으로 하나가 되는가>, 아니면 <개인과 공동체가 끝까지 서로를 비추고 교정하는 긴장을 남겨두는가>에 있습니다.
그 점에서 퀘이커가 야마기시즘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一体가 진실이라 하더라도, 왜 하나님 혹은 진리는 서로 다른 사람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되는가?”>
반대로 야마기시가 퀘이커에게 던질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Inner Light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왜 당신들의 실제 소유관계와 생활방식은 세상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가?”>
저는 이 <두 개의 질문> 사이에 두 전통이 서로를 가장 생산적으로 비추는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