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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6

알라딘: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2017

알라딘: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강대인,고병권,고세훈,김동춘,김용규,김혜진,류은숙,서동진,손호철,이남곡,이도흠,이부영,이재승,정성헌,정욱식,정일준,조명래,조성택,진태원,하승수 (지은이),진태원 (엮은이)그린비201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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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쪽

2023/09/15

탈서구중심주의를 지향하는 비교사상 연구의 새로운 지평. 정치사상연구, 강정인 (2016).

2017. 10. 19. —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평자는 《천부경》은 물론 《루바이야트》, 단주 ... 2) 후자의 측면과 관련해서는 김태창의 이론에 대한 저자의 적절한 평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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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서구중심주의를 지향하는 비교사상 연구의 새로운 지평

- 김성국,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학사, 2015)


A New Horizon for Comparative Political Philosophy in Search of Post-Western-centrism - Hybrid Society and Its Friends:

Civilizational Transformation for Anarchist Liberalism by Kim Seongguk (Lihaksa, 2015

저자(Authors)  강정인  Kang Jung-in


출처

(Source)

정치사상연구 22(1), 2016.5, 109-129 (21 pages)

The Korean Review of Political Thought 22(1), 2016.5, 109-129 (21 pages)


발행처 (Publisher)  한국정치사상학회

Korean Society For Political Thought


URL

http://www.dbpia.co.kr/Article/NODE07060533


APA Style

2023/07/19

[하나님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207호 다시 쓰는 기독교세계관⑭]9장 교회 : 하나님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中) < 복음과상황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207호 다시 쓰는 기독교세계관⑭]9장 교회 : 하나님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中)
기자명 복음과상황  승인 2007.12.1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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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가족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개인과 개인의 응답과 윤리, 혹은 그들의 집합으로서의 집단이 아닌 하나의 공동체, 세상과 구별 짓는 공동체를 창설하는 것이다. 구원은 개인적이고 인격적 측면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다. 본질적으로 사회적 차원을 지닌다. “복음은 바로 공동체적인 사안이다. 이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공동체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뱅크스, <바울의 공동체 사상>, 62). 하나님나라는 그것이 나라인 한에 있어서 결코 개인의 차원으로 축소될 성질이 아님을 자명하게 전제한다. 하나님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의 공동체요 사회이다. 하나님나라가 단순히 내세의 지복과 열락, 현세의 성공과 욕망의 결정체도 투사체도 아니다.

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새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어찌나 철저한지 가족 관계를 능가한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 어떤 의무에도 우선하는 부친의 장례도 후차적인 것으로 뒤로 밀쳐놓도록 만든다(마 8:21~22). 가족이 원수가 되고(마 10:34~39) 예수와 복음을 위해 가족과 재물마저 포기해야 한다(막 10:29~30). 대신에 당신과 함께 한 자들을 한 가족으로 선언(막 3:31~35)한다. 예수야말로 세상의 어떤 집단이 요구하는 충성과 족히 비길 수 없는 절대적 충성을 명령하신다. 그러한 충성을 바치는 이들의 모임이 이전의 가족 질서와 구별되는 대안적 가족을 만드는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 모든 기이한 본문을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N.T.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615).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는 혈연·지연·학연 등 온갖 인연으로 얼키설키 얽혀진 집단을 반대한다. 그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자신의 어떠함이 아닌 그의 이력과 경력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진군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나라는 이전에 소속되었고, 정체성이 형성되고, 충성을 다하던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인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인종·민족·씨족·가족에 근거한 혈과 육의 집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배타하는 예수에 대한 절대 충성과 어떤 것도 배타하지 않는 만인에 대한 절대 사랑으로 형성된 공동체이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에는 첫째,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다(<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154~62). 인종적·민족적 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 가족이 되는 데에 걸림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직 주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있을 뿐이다. 특수하게 민족과 인종의 교회가 예외적으로 가능하다. 허나, 타민족과 인종의 무시와 배제는 그리스도의 몸을 피부 색깔로 규정하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바울에게 율법과 할례가 그토록 불붙는 논쟁이 된 것을 이제 조금 이해하게 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축소한다. 바울은 복음과 교회가 내장하고 있는 민족과 인종 공동체를 넘어서는 비전을 보았다.

둘째, 노예도 주인도 없다. 바울이 빌레몬을 돌려보낸 것이나 종으로 그대로 있으면서 주인을 섬기라고 한 권면을 보아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어떠한 사회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는 그런 구별이 철폐된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스런 형제로 대우해야 마땅하다(몬 16).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소유에 따라 교회에서도 상응하는 발언권과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경제·사회적 신분이 타파되는 것은 사회가 지향하고 나아갈 바를 선취하는 것이다. 미리 보는 청사진이다.

셋째, 남자도 여자도 없다. 성(性)의 구별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남성이라는 이름만으로 우월하거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으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침묵이 강요되고, 순종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의 가족 질서와 대조되고 대척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체제의 반영일 뿐 창조의 동등성과 평등성에서 멀찌감치 이탈한 것이다. 여성이기에 사역과 직분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성을 판단 척도로 삼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서는 예수의 뜻과 길에 무지몽매한 남성 제자들과 그 길을 준비하고 동행하고 동참하는 여성 제자들을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지 않는가?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원수처럼 여기는 이들, 성적인 소수자들이나 이념의 차이 등, 그런 모든 것들은 세상이 그어놓은 온갖 경계와 위계일 뿐이며 교회 안에서 제 역할과 구실을 할 수 없다. 교회는 창조주를 다 함께 아빠(Abba)라고 서슴지 않고 고백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와 자매가 되는 한 가족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이들을 한 가족의 일원으로 대해야 마땅하다. “지금 예수를 따라가는, 하나님나라 때문에 종래의 것들을 물리치고 떠나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의 새 가족이 된다. 하나의 새로운 가정에 역설적으로 다시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들과 자녀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75).

교회는 신자들의 가족 공동체다. 가족이라는 상징은 교회란 모든 것을 넘어서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공동체를 말한다(Yoder, Body Politics, 34~35). 스토아 철학도 모든 인간의 존엄을 강조했지만 공동체 안에서 통합되고 통일되는 비전은 오로지 그리고 전적으로 예수의 것이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꿈이기도 하다. 그는 흑인들만의 사회를 추구한 맬컴 X와 달리 흑백이 차별 없이 한 식탁에 나란히 앉게 되는 미래와 현실을 소망했다. 한때나마 주인과 노예였으나, 한 형제 자매가 되어 피부색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지 않고 인격으로 사람을 대하고 평가하는 차별 없는 자유의 나라(카슨 엮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289)의 원천은 초대교회와 바울을 경유하여 예수에게로, 그리고 창세기의 하나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 그 꿈은 한갓 꿈이 아니다. 현실이요 실재이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은유는 필연적으로 교회를 가정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교회가 가족이기에 초대 교회는 정기적으로 가정에서 만났다. 모임의 빈도수를 확정할 수 없고, 크기는 저마다 달랐고, 공간 역시 다양했지만 가정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가족과 가정이라는 메타포가 함축하는 것 중의 하나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교회 공동체가 친밀한 관계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면 족하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독특성은 “가정에 기반을 두었다는 사실보다 그들 모임의 성격과 그 역동성의 원천에 있었다”(<바울의 공동체 사상>, 91). 그들은 가정에서 모이는 지역 교회를 우주적 교회의 일부도, 하나님나라의 부분으로도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교회 = 가정 교회였고, 지역 교회 = 하늘 교회였다(86~88).

또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내 뜻 삼고 그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침례(baptism)이다.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한편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나라의 가족이 된다. 그러니까 침례는 중생과 입교의 의미가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침례를 주라는 명령과 침례가 아닌 복음을 전한다는 바울의 말(고전 1:13~17)을 일치시키는 길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롬 6장)의 외적, 아니 공적인 표현이자 실천이라는 점에만 동의하도록 하자.

침례를 그 나라와 교회의 일원이 아닌 세속 사회의 멤버십 확보로 전락시킨 유아세례는 분명히 거부되어야 한다. “유아 세례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 세계, 기독교 사회의 기초이며,(중략)  민족 교회의 토대”이기 때문이다(몰트만,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334). 갓 태어난 아이에게 칭의의 관점에서 세례를 베풀 하등 이유가 없다. 게다가 오늘과 같은 다문화적, 다종교적 사회에서 “왜 기독교인 아이들만 아이들로서 세례를 받”(336)아야만 한단 말인가? 그러니 아이들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위탁하고, 아이에 대한 소명을 확인하는 하나의 행사는 될 수 있을 것이다(349).

내가 여기서 상당히 휘발성이 강한 침례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침례가 일면 교회 공동체의 한 가족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일뿐더러 또한 세계관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듭나서 받는 침례는 이전의 관계와 관점의 변화를 의미한다. 침례를 받는 것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이다. 로드니 클랩은 입양되는 아이가 새로운 가족과 친척, 이름, 전통을 물려받는 것처럼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A Peculiar People, 100). 이전의 생물학적 가족과 다른 인격, 국가와 다른 세계에 소속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새로운 피조물의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고후 5:17).

“이러한 빛에서 본다면, 침례는 상당히 전복적이다.” 가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 이전에, 그리고 그와 견줄 수 없는 충성을 전적으로 주님에게만 둔다는 것, 그래서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례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이며, 교회와 국가의 분리이며, 그에 따른 사회·정치·경제적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는 재빨리,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확하게 하나의 시민 불복종 행동으로 볼 수 있다”(102). 위험한 적이, 이원론이 아니라 혼합주의라면, 유아세례가 국가와 민족에 근거한 것이라면, 침례가 이전의 관계와 관점의 변화의 공적 표명이라면, 침례가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회와 문화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면 유아 세례는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여간에 교회는 새로운 정체성과 문화를 갖는 가족 공동체이다.

교회는 대조된다

신구약 전체를 일관되게 통합시켜주는 주제 중 하나는 대안 공동체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땅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애굽의 노예인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고, 바벨론에서 포로 된 백성들을 불러내신 것은 제국의 질서와 체제와 철저하게 단절된 새로운 사회 건설의 의미가 있다. 월터 부루그만의 말이면 족하다. “출애굽에서 출현한 현실은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종교이거나 하나의 새로운 종교적 관념이거나 자유의 한 비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한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의 출현, 역사적 몸을 지닌 하나의 공동체의 출현, 법률을 만들고, 지배와 질서의 패턴을 만들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규범과 책임 있는 권위를 내세워야 할 공동체의 출현이다”(<예언자적 상상력>, 19). 이스라엘은 제국에 대한 대안적 질서이자 세상에 대한 대답이다.

예수의 사역은 구약의 옛 이스라엘을 계승하면서도 대체하는 새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뉴비긴은 예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고 부정적인 진술을 먼저 한다(<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 33,46). 예수가 한 권의 책도 쓰거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 가지 긍정적 답변 중 첫째가 공동체이다. 그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예수를 통해 온전히 계시된 하나님의 이야기를 살아내는 제자 공동체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즐겨 듣고 기억하고 인용한다. 그 속에 담긴 진리가 참으로 오묘하고 깊은 탓이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를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로서는 글의 한계와 글의 최종적 지향이 다름 아닌 공동체 형성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다.

리처드 헤이스는 신약 전체의 포괄적인 윤리적 비전을 파악하는 느슨한 통일성을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라는 세 가지 이미지로 사용한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10장). 이것들은 신약의 가르침을 조화롭게 잘 설명하며 실제적인 윤리적 지침을 제공하는 틀이다. 여기서 공동체는 교회론이고, 십자가는 기독론, 새 창조는 종말론이다. 하나님나라는 십자가에서 완성되고 절정을 이루었으며, 종말에 있을 새 창조는 십자가로 인해 드러난 부활의 능력을 장차 도래할 그 날과의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현 시대를 변혁한다. 교회는 십자가의 삶과 새 창조의 삶을 예증하고 확증한 공동체이다. “성경 이야기는 언약 백성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초점을 맞춘다. 공동체는 그 집단적 삶을 통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표시로 서서 대안적 질서를 구현하라는 부르심을 입었다”(311).

교회란 세상에 대한 대안적 질서의 구현이며 하나님나라 질서를 미리 보여주는, 예시이자 예증이다. 이것이 신구약 전체의 일관된 주제와 일치한다. 이제 이것이 한국교회에 갖는 함의를 살펴보자. 김동춘은 그의 논문 “바른 교회를 향한 탐색: 양극적 교회론, 통전적 교회론, 대안적 교회론”에서 왜 교회가 대안이고, 대안 공동체인지를 잘 짚어주고 있다. 그가 보기에 현재의 교회는 영혼과 개인 구원을 지향하는 보수 교회와 사회 참여와 정의를 추구하는 진보적 교회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두 통전적 교회론으로 이동 추세가 뚜렷하다. 복음 전도와 사회 책임이 어찌 둘이며 분리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기독교철학연구> 2호, 164).

하지만 통전주의는 양극적 교회론을 극복하였지만 하나에 다른 하나를 더하는 것은 바른 교회 정립에 얼마나 기여할지 의문시 된다. “성장주의 교회론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지 않은 채 기존의 성장논리에 약간의 사회봉사적 교회관을 더하기 하는 형태의 통합적 교회론은 한국교회의 병리적 실체를 인식하고 근원적인 교회쇄신을 던져주기에는 역부족”이다(170~71). 물론 과연 통전적 교회론이 양자를 기계적으로 짜 맞추고 있는지는 의문이 남지만, 적어도 한국교회의 현실이 외형적 성장과 팽창을 가속화하기 위해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사회 참여와 봉사를 끌어들이지 않느냐는 지적은 십분 옳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교회론적 정체성의 상실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일차적 과제는 양적 성장도, 사회적 책임 수행 기관이 되는 것도 아닌 교회가 교회되는 것, “세속적 삶의 방식에 비타협적으로 대항함으로써 하나의 대안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세상질서와 차별화된 대조사회로서 교회, 그런 교회가 우리 시대의 대안적 교회상이 아닌가 한다”(178). 조금은 완곡하게 표현되었지만 입장은 분명하다. 자신의 본질은 그대로 둔 채 다른 어떤 것을 가져다가 포장하고 덧칠하는 형식의 교회 이해로는 성장주의를 벗어날 도리가 없으며, 더 나아가 예수가 원했던 공동체를 결코 이룰 수 없다.

자, 그러면 세상의 질서와 선명하게 구분되는 대안 질서의 실체는 무엇인가? 로핑크는 산상수훈에서 세 가지를 추려냈다. 폭력의 단념(5:38~42), 무조건 화해(5:23~24), 물질에 의지하지 않는 서슴없는 신뢰(6:25~34)이다(<산상설교는 누구에게?>, 184~200). 나중에 이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도 보탠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저 한정적인 몇 가지 규정일 뿐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목록들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에베소서(5:22~6:9)와 골로새서(3:18~4:1), 베드로전서(2:13~3:7)의 가정 규례는 신약의 윤리적 가르침을 인상적으로 집약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질서와 정체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들이다.

나는 오히려 예수의 광야 유혹 사건(마 4:1~11; 눅 4:1~13)에서 대조성을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상수훈은 워낙 대표적 본문인지라 상투적이고 진부할 수 있고, 예수 스스로 유혹으로 느꼈을 문제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도 동일한 유혹의 실체들이면서도 예수와 달리 유혹을 소명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작금의 상황을 폭로하기에 유익하다. 유혹의 핵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어떻게 인식하고 증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마귀는 돈, 성(聖), 힘을 리트머스 시험지 삼아 예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의 제자라면 응당 그런 것들을 활용해서 너의 너다움을 만천하에 드러내라고.

헨리 나우웬이 잘 간파하였듯이 오늘 우리에게는 “보통 그것이 시험으로 간주되지 않고 소명으로 간주”된다(<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39). 우리 안에 내재된 상향성을 향한 충동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상황에 부합하고, 이목을 집중하고, 권력을 확보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한다는데 무슨 시비며 그 얼마나 경건하기 그지없는 모습인가라고 경탄하는 우리에게 그것이 시험이 아니라 사명이요, 목표요, 긍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낮아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동참케 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자기의 욕망과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활용한다.

한국교회 안에 그러한 징후들이 안타깝게도 많이 포착된다. 언필칭 기독교 기업이라 자처하던 모 기업은 돈을 더 많이 확보하여 더 많은 섬김과 나눔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사회적 약자를 양산한다. 목전의 유익을 위해 기업 무를 자의 신성한 권리와 사명을 포기한 자를 성서는 ‘아무개’라고 기록한다. 영어성경은 친구라고 번역하고 있고, 공동과 새번역은 ‘여보게’로 하고 있으나 오히려 개역처럼 ‘아무개’로 하는 것이 어원적으로나 문맥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타당해 보인다(Ruth/Esther, WBC, 196은 아무개(So-and-So)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가난한 자를 돌본 자의 이름을 ‘보아스’로 기억한다. 눈에 보이는 돈을 따라 살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을 따라 살 것인가? 보아스로 기억될 것인가? 아무개로 기록될 것인가?

7,80년대 혹독한 독재 체제에 저항하고 투쟁하던 분들이 권력 쟁취에 골몰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저항이나 권력 획득을 통해 교회 밖의 정치적 구조를 개혁하려 했다는 증거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221). 교회의 대 사회적 참여가 권력의 재편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적잖이 염려된다. 우리는 한 사회의 진보나 보수가 하나님나라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나 여하 한에 있어서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19세기 문화 개신교를 통해, 그리고 월터 라우센부쉬를 통해 본 바 있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특별히 보수적인 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분단과 독재 체제와 암묵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하여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리고 그것도 지금?

마지막으로 교회가 대조되기 보다는 순응하고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경건 이해이다. 우리의 신앙과 종교 자체도 유혹거리가 된다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마태복음 6장은 경건을 과시하려는 우리 안의 끈질긴 유혹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리처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도 보듯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반복적으로 예수는 은밀하게 행할 것을 당부한다(6:4; 6; 18). 교회들이 너무나 요란하게 종교적 행위를 실천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로 불거진 교회의 선교 양태는 복음의 진정성으로부터도 멀고,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김동춘이 지적했듯이 교회 성장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바보다. 요는 그런 것들이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의 거부는 빵의 경제, 경건한 종교, 힘의 정치가 아니고, 그것들이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공적으로 증언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으로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왜곡이자 불순종이라는 점이다. 생각해 보라. 그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면 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예수가 거부한 것은 당시 시대의 발전이 뒤쳐있기 때문도 아니고, 사용 방법을 몰라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지혜롭다(고전 1;26). 그것으로 세상을 개혁할 수 없고,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광야 유혹 사건을 끄집어낸 것은 현재 우리가 세상과 대조되기 보다는 세상에 순응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고, 바로 이러한 영역에서 교회의 대조성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 이다.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에게 신실하며 세상을 대하여 대조되는 고유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독교 고유의 삶의 방식을 창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통합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안에서 창조적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엘룰,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53).

이는 세상에 대한 ‘저항의 도덕’도, ‘순응의 윤리’도 아니다. ‘대조의 정치’이다.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할 빛으로 어둠에 처한 세상과 극명히 대조될 때, 악으로 악을 더하는 세상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드러낼 때, 높아지기 보다는 도리어 섬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을 때, 교회는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행 2:12, 표준)라는 질문을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며, “마음이 찔려서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행 2:37)라며 세상이 한 번도 의심해보지 못한 자신의 타당성 구조를 반성하고 회심하게 된다.

간주곡

지금까지 나는 교회의 개념과 본질에 대해 세계관적 고찰을 하였다. 앞으로의 논의는 교회의 존재 보다는 행동에 집중하고자 한다. 하나님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를 살폈다면 당연히 그 교회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하나님나라를 반영하는 성품을 형성하는 곳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교회는 자신의 행동 기준을 찾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성서로 삼고 따르는 무리이다. 당연히 제자의 삶은 성서 이야기의 최신판 번역이며, 쉽고도 정확한 해석이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증언하는 증인 공동체이다. 이를테면 선교 공동체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국가와 관련 하여서는 자유하다.

여기서는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주는 것이 혼란을 줄이고, 이해가 증진될 것이다. 하여 나는 “독자들의 효과적인 이해를 위해 교차대구법을 선택했다”(<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168). 그 각각은 서로 교차한다. 천국 = 예배, 교회 = 자유, 신자 = 반영, 가족 = 해석, 대조 = 증언이다. 그리고 “이 간주곡은 교차대구법의 이음쇠에 해당한다.”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앞과 뒤에서 호응하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사실 형식적으로 미리 짜놓은 구성에 맞춰 책을 쓰기가 쉽지는 않다.” 어색한 조합으로 보일런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억지 조합은 아니다. 양자를 촘촘하게 결합하여 내적인 연관을 부각시키지 못한 것은 내 과문한 탓이니 다만 교회의 존재와 행동을 파악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이 전일적으로 통치하는 천국이기에 교회의 우선적 과제는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교회 = 천국이었으니, 교회는 예배한다. 둘째로 교회는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의 다른 말이다. 이는 교회가 국가가 아니란 말과 상통하고 일치한다. 교회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이해와 이익이라는 유무형의 자율적이고 타율적인 통제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신자는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다. 그러기에 교회는 자유인 것이다.

다음으로 신자는 반영한다. 교회 = 신자의 정식의 요체는 전 신자 제사장 교리이다. 세상에서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기준과 방법을 따르게 된다.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반영하고 반사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신자이다. 예수의 ‘주되심’과 ‘주다움’을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다. 넷째, 교회는 가족이라고 했다. 예수의 정의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의 모임이요, 그들이 한 형제요, 자매가 되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인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대조된다. 이는 증언과 상응한다. 대조가 지배와 분리, 폭력의 거부라면, 우리의 선교 양식 또한 그러해야 할 터. 어느 때나 그랬지만 지금처럼 콘스탄틴 이전의 선교 방식에 대해 처절히 반성하고, 이후의 선교 방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때는 드물다. 그 길은 지배하지 않으면서, 폭력과 무력으로 개종을 강제하지 않고, 복음의 담지자요 수혜자인양 행사하지 않는 방식의 전도와 선교이며, 이는 세상의 기업과 국가의 확장과 확대와는 분명 다르다. 자, 그러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에서 ‘교회답게’ 하는 것으로 논의를 넘어가도록 하자.

교회는 반영한다

먼저 작게 시작해 보도록 하자. 교회가 신자 공동체이므로 전 신자가 교회 안팎에서 사명을 따라 사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의 구원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듯이 우리의 사역 역시 억지로 짜내거나 퍼내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내면과 외면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외부 세계의 변혁을 꿈꾸는 자, 반드시 내면세계도 정돈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둘은 함께 그러면서도 서로 공존하면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외적인 행동이 우리의 내면의 성품을 형성하고 강화하기도 하고, 반대로 내면의 성품이 외적 행동을 유발하고 초래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이고, 하나님나라가 예수 자신이라면, 당연히 교회는 예수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다. 교회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을 본다. 마치 우리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듯이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세계 경영의 경륜이 무엇이고 어떠한지를 정사와 권세들이 알고자 한다면, “모든 성도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바울 자신과 교회를 주시해야 한다고 대담하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를 시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엡 3:10).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의 가시적 구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예수의 성품을 닮은 공동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 시대의 지상 과제인 통일에 대입해 보자. 김창수는 ‘페스카마호의 비극’을 통해 내용과 과정을 묻지 않은 채 무조건 통일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간 독재 시대에 적절한 구호였고, 지금은 통일을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 34~37). 페스카마호 사건은 비인격적 대우와 구타를 참지 못한 조선족 선원들이 한국인 선원 11명을 집단 살해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동포들 반응은 예사롭지 않다. 이들은 끔찍한 살인 사건을 일으킨 피의자들에 대해 광범위한 동정을 탄원서를 통해서 나타냈다. 그만큼 중국 동포와 한국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다. “조선족 사기 피해 사건,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은 관용을 실천하며 더불어 살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따라서 그는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을 연습하지 않은 채 맞이하는 통일은 ‘페스카마호의 비극’을 연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비극을 지양하고 공존을 연습할 수 있는 최고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물론 현재 교회는 일치보다는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불일치라는 스캔들은 우리가 사회적 과제를 인식하면 할수록 상당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화스러운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는 자가 되라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Hauerwas, The Peaceable Kingdom, 100).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분명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이며, 신자는 그 나라의 백성이다. 우리는 예수를 세상에 반사한다. 그것이 성도의 사명이자 과업이다.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도 용납되고 인정을 받는다. 예수가 원했던 교회 공동체가 ‘페스카마호의 비극’을 중지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교회 안에서는 “받아들여진 사람이며 따라서 하나님나라가 돌입하는 거기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종교적으로 완전한 가치가 없는 양으로 자격이 박탈되어서도 안 된다”(<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148). 하나님나라의 새 질서를 구현하는 교회 안에서 어떠한 억압이나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된다. 여자이기에, 어리다고, 가난하다고, 냉대를 받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인종적·민족적 차별도, 성차별도 없고,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사회적이고 신분적 인 차별도 없고, 그것이 더 이상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는 곳이다.

이것을 김창수의 말처럼 미리 연습하는 훈련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사회·경제·정치적 이해관계에도, 민족과 인종·성·나이·지역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가족이 되는 훈련과 경험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교회다움이고, 또한 그것이 통일의 준비요 과정이다. 따라서 교회가 복음에 신실한 것은 사회와 격리나 후퇴가 아니라 통일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사회변혁운동이 된다. 분단된 조국은 교회를 통해서 통일 이후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과정이 어떠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잠꼬대처럼 들리겠지만, 하나님의 꿈과 소원을 자신의 꿈과 소원으로 삼는 자의 마땅한 모습이 아닐까?

이러한 공동체와 삶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성품(character)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신자의 성품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바로 예수의 이야기를 살아내는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다. 모든 실천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와 이야기를 갖고 있다면,(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311) 응당 성서 이야기가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출처이자 결정의 근거이다. 이 성품은 자동적으로 습득되지 않고 노력해서 획득해야 한다(Hauerwas, Vision and Virtue, 49). 예수 이야기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실천하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예수의 성품을 수련하게 된다. 물론 개인과 공동체 간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각 개인의 성품은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다.

신자는 교회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다. 알란 크라이더는 교회 안에서의 삶을 평화를 만드는 자의 반사행동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평화교회는 가능한가?>, 45~48). 그는 평화교회로 알려진 메노나이트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그림을 들어 설명한다. 더크 윌렘스라는 사람이 물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 내는 그림이다. 17세기경 네덜란드에서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게 되자 이를 피해 달아난다. 마침 자신을 추적하던 사람이 물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다. 더크는 도망하는 대신에 그 사람을 구하고, 그 결과 체포되어 순교를 당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크라이더가 주목하는 것은 더크의 반사 행동이다. 얼음 속에 빠진 사람은 빨리 가라앉고 신속히 구조하지 않으면 생명을 구할 수 없다. 추적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즉각적이고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을 취해야 한다. 아주 잠시 머뭇거릴지라도 즉각 행동해야 구조할 수 있다. 완전히 순간적이고 반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더크로 하여금 그런 반사행동을 하게 했을까? 그는 어떻게 원수의 필요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행동과 습관을 개발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크라이더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를 믿는 제자가 되겠다는 결정과 다른 하나는 그가 속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에서 찾는다. “그러한 반사 행동은 더크에게는 개인적으로도 가능했지만, 주로 습관적으로 몸에 익히고 그런 규율을 지키는 사람들의 집단을 통하여 형성된다. 필자는 그가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원수를 사랑한 특정한 종류의 교인이었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행동 그대로 반응했다고 말할 수 있다.”
크라이더는 우리에게 묻는다.

누가 당신을 만드는가? 누가 당신의 반사행동을 훈련시키는가? 당신의 교회인가? 가족과 친구들인가? 아니면 TV 광고, 영화, 화장품인가? 만약 그 훈련의 주체가 교회라면, 당신의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분의 길을 세상에 증거 하기 위해서 당신의 일상생활에서처럼 개인적인 반사행동을 구체화하도록 도와주는가?(48)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반사적으로 뒤따르는 행동을 연습하고 지금 행하고 있다고 말이다. 교회는 예수의 성품을 반영하는 공동체요, 그것을 훈련하는 공동체이다.

김기현 목사 (부산 수정로교회)

2023/04/25

알라딘: 갈등전환 | 정의와 평화 실천 시리즈 존 폴 레더락

알라딘: 갈등전환
Conflict Transformation Clear Articulation

갈등전환 
 | 정의와 평화 실천 시리즈
존 폴 레더락 (지은이),박지호 (옮긴이) 대장간2018-08-15
































기본정보
112쪽



목차


추천의 글
역자 후기
1장·갈등전환이란
2장·갈등전환의 렌즈들
3장·갈등전환 정의하기
4장·갈등과 변화
5장·갈등해결과 갈등전환 연결하기
6장·갈등 지도 그리기
7장·과정-구조: 변화를 위한 토대
8장·수용능력 키우기
9장·갈등전환 틀 적용하기
10장·갈등전환, 변화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내라


추천글
존 폴 레더락 교수는 갈등을 보다 깊고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하려 한다. 인간과 세계, 그리고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대화를 중시하고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한다. 갈등전환(conflict transformation)이란 다소 낯선 이름을 붙인 것도 그런 관점과 접근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니 ‘해결’과 ‘전환’을 도식적으로 나누고, ‘갈등해결’ 분야를 너무 좁게 본 아쉬움은 있지만, 레더락 교수의 그런 문제의식과 강조점은 나 역시 깊이 공감한다. 이 분야의 명저로 꼽히는 그의 저서가 깔끔한 번역본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것을 환영한다.
- 강영진 (갈등해결학 박사.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갈등해결연구센터장·겸임교수)

남북관계를 말하면 언제나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틀 속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런 논쟁은 정치적, 군사적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해결할 수 없는 갈등만 증폭시키고 만다. 한반도의 평화구축을 위해서는 정치적 접근뿐 아니라 시민사회 구성원이 평화 감수성을 높이고 평화적 삶의 방식을 체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책을 통해 갈등전환적 패러다임으로 한반도 상황을 성찰하고 갈등을 긍정적으로 전환해내는 평화역량을 쌓게 되길 기대한다.
-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존재하고 당장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이 일반적인 한국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갈등전환”이라는 문제 설정과 접근 방법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대한민국은 왜' 저자)

‘갈등전환’이란 말을 역자에게 처음 들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 갈등해결적 접근에는 강자의 논리가 내포되어 있어 폭력적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갈등’ 자체를 창조적 힘과 변화의 동력으로 바라보는 데서부터 갈등전환이 시작된다는 저자의 설명에 깊이 공감한다. 갈등 속에서 한 편이 무릎을 꿇고 다른 한 편이 승리하는 모양새가 아닌, 서로 상생하는 지혜를 이 책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방인성 (하나누리 대표)

우리의 인간관계, 사회 그리고 교회 속에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어디서도 이런 갈등 해결방법을 우리가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갈등을 지혜롭게 전환시켜 저자의 말처럼 “폭력은 최소화 하고 정의는 최대화하는” 법을 교회가 먼저 배우고 익혀, 갈등으로 갈래갈래 찢겨진 사회 속에 대안을 제시하며, 더 나아가 사회적 구심점이 되길 기대한다.
- 김형국 (나들목교회 대표목사, 신학박사, 하나복DNA네트워크 대표)




저자 및 역자소개
존 폴 레더락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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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턴 메노나이트대학의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현재 노틀담대학의 존비크록국제평화연구소에서 갈등전환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갈등과 분쟁 현장에서 20년 넘게 활동하며 탁월한 업적을 남긴 국제분쟁조정 전문가로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북미 등지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콜로라도대학에서 사회학(사회갈등 프로그램)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풍부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평화교육에 관련된 15권의 책과 매뉴얼을 영어와 스페인어로 저술 및 공동집필했다. 가족으로는 아내, 웬디 여사와 두 자녀 앤지와 조쉬가 있다.

최근작 : <갈등전환>,<도덕적 상상력>,<화해를 향한 여정> … 총 4종 (모두보기)

박지호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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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스턴 메노나이트대학에서 갈등전환학을 공부하고, 현재 (사)하나누리 산하의 한국갈등전환센터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 언론사 기자 및 편집장으로 일했고, 한국평화교육훈련원 회복적정의 전문강사 및 ReconciliAsian 한국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난이도가 높은 편이지만 갈등 전환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seogarden 2023-02-0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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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Book of Conflict Transformation: Clear Articulation Of The Guiding Principles By A Pioneer In The Field Paperback – 1 January 2003
by John Lederach (Author)
4.5 out of 5 stars 235 ratings

This clearly articulated statement offers a hopeful and workable approach to conflict―that eternally beleaguering human situation.
John Paul Lederach is internationally recognized for his breakthrough thinking and action related to conflict on all levels―person-to-person, factions within communities, warring nations. He explores why "conflict transformation" is more appropriate than "conflict resolution" or "management." But he refuses to be drawn into impractical idealism.
Conflict Transformation is an idea with a deep reach. Its practice, says Lederach, requires "both solutions and social change." It asks not simply "How do we end something not desired?", but "How do we end something destructive and build something desired?" How do we deal with the immediate crisis, as well as the long-term situation? What disciplines make such thinking and practices possible?
A title in The Little Books of Justice and Peacebuilding Series.

80 pages
Product description

Review
"What I see is that our human community, local and global, is on the edge of historical change: Patterns of violence and coercion will be replaced with respect, creative problem-solving, individual and social capacities for dialogue, and nonviolent systems for assuring human security and social change."
About the Author


John Paul Lederach, a scholar with the Joan Kroc Institute of Conflict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Notre Dame and a distinguished scholar with the Conflict Transformation Program at Eastern Mennonite University, writes out of his more than twenty years of work in Central America, Asia, Africa, Central Asia, and North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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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details
Publisher ‏ : ‎ Good Books; Original ed. edition (1 January 2003)
Language ‏ : ‎ English
Paperback ‏ : ‎ 80 pages
ISBN-10 ‏ : ‎ 1561483907
ISBN-13 ‏ : ‎ 978-1561483907
Dimensions ‏ : ‎ 13.97 x 0.76 x 21.59 cmBest Sellers Rank: 248,351 in Books (See Top 100 in Books)17 in Communications Law (Books)
27 in Parental & Juvenile Law
27 in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Books)Customer Re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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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dle Customer david hollis
4.0 out of 5 stars Where the problem truly Lies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2 March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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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verview worth putting into practice with persons who claim to be leaders and have not
The ability to go beyond their group as their intellect is very limited. They like to believe they are leaders but are seen by many as educationally abnormal. They are caught in a time warp and need to see they have to stand aside as they continue to be a hindrance in working to a successful recognition of the first step in Trans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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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ames
2.0 out of 5 stars Incomprehensible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12 Apri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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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 recommended this book by a lawyer dealing with mediation, and as a trained counsellor I thought it would be good to develop my skills. The book is written in very academic language, is repetitive and to be honest I could have summarised what I have learned so far in a single paragraph. To be fair, I have only got 75% thro' the book, but I will persevere and hope it gets b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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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s KT Degro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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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esting concepts. Lots to ponder on. I reccomend it in the field of Peace & Development studies.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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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ifer Ene
4.0 out of 5 stars ... mind into an academic frame this is a very useful and informative book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28 Jul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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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you get your mind into an academic frame this is a very useful and informative book.
concentration is required but it"s excellent for students of conflict resolution etc.
definitely increased my understa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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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iva
5.0 out of 5 stars Review The Little Book of Conflict Transformation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2 Ma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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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ing book for anyone involved in the peace, conflict resolution and transformation field. it is also handy for those willing to understand the root basics of conflict be it in personal life and one to one individual relationship. as well as how to transform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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