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5

탈서구중심주의를 지향하는 비교사상 연구의 새로운 지평. 정치사상연구, 강정인 (2016).

2017. 10. 19. —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평자는 《천부경》은 물론 《루바이야트》, 단주 ... 2) 후자의 측면과 관련해서는 김태창의 이론에 대한 저자의 적절한 평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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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서구중심주의를 지향하는 비교사상 연구의 새로운 지평

- 김성국,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학사, 2015)


A New Horizon for Comparative Political Philosophy in Search of Post-Western-centrism - Hybrid Society and Its Friends:

Civilizational Transformation for Anarchist Liberalism by Kim Seongguk (Lihaksa, 2015

저자(Authors)  강정인  Kang Jung-in


출처

(Source)

정치사상연구 22(1), 2016.5, 109-129 (21 pages)

The Korean Review of Political Thought 22(1), 2016.5, 109-129 (21 pages)


발행처 (Publisher)  한국정치사상학회

Korean Society For Political Thought


URL

http://www.dbpia.co.kr/Article/NODE07060533


APA Style

강정인 (2016). 탈서구중심주의를 지향하는 비교사상 연구의 새로운 지평. 정치사상연구, 22(1), 109-129.



탈서구중심주의를 지향하는 비교사상 연구의 새로운 지평

김성국,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학사, 2015)*1)

강정인 서강대학교

I.  글머리에

김성국 교수(이하 저자’)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 학사, 2015)이라는 제목으로 아나키즘 연구에 대한 역저를 출간했다.1) 이 책은 한국 현대사상 의 주류에서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아나키즘 사상을 선구적으로 개척하고 체계적으로 집대성 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상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나아가 한국 현대사상에 풍성함과 깊이를 더한 매우 독창적인 걸작이다. 이 점에서 학문적으로는 물론 실천적으로도 이 책의 중 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저자는 사회학이론과 한국사회에 관한 연구에서도 이미 중요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있

, 다양한 시민운동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해 온 이론적 실천적 역량을 겸비한 사회학자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깊은 관심을 갖고 아나키즘 연구에 천착해 온 저자는 아나키즘 관련 3부작 을 완성하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2007년 출간한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이 학사)머리말에서 밝혔다. 첫 번째 책이 한국의 아나키즘의 역사에 관한 것으로 한국의 주요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한국의 아나키스트. 두 번째 책은 아나키즘의 이론 및 실천을 적용하여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나 변화를 설명하는 아나키스트 한국사 회론이다. 세 번째 책은 세계화 정보화 생태화로 특징지어지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의 도

* 이 글은 제7회 아산서평모임(2016/3/16)에서 발표한 서평을 논문형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 논문은 2014년 정부 (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이다(NRF-2014S1A3A2043763).

1)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김성국의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을 인용하는 경우에는, 편의상 괄호 속에 단순히 쪽수만 기재하도록 하겠다.

래를 염두에 두고 아나키즘을 포스트모더니즘과 노장사상의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재구성하고 새로운 실천전략을 모색하는 해방적 자유: 탈근대 아나키스트 사회 이론이 될 것이라고 언명 했다(김성국 2007, 5). 그런데 예정된 두 번째 책보다 세 번째 책이 먼저 출간되었다. 이 과정에 서 원래의 목표가 확장되고 내용이 확충되어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 명전환론이라는 바뀐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바, 전체 분량이 장장 93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 이다. 저자가 예정대로 두 번째 책마저 출간하여 3부작을 완성함으로써 저자 개인적으로는 아 나키즘 연구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남기고, 나아가 후학들이 저자의 연구를 이어받아 잘 숙성된 한국발 아나키즘 사상을 세계적으로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를 평자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정치사상의 탈서구중심적 형상화를 지향하는 연구자로서 평자가 저자의 책에 관심을 갖는

주된 이유는 아나키즘 사상에 대한 저자의 깊은 식견과 통찰에 대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동 서양의 아나키즘 사상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이를 보합 조제하는 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이 저작을 통해 우리 세대가 고심해왔던 서구 이론에 대한 종속성 탈피와 한국적 혹은 토착적 이론의 수립이라는 숙제동서 아나키즘 이론의 잡종화 및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포퍼-하이예크 자유주의의 잡종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고 연구방법론상의 동기를 추가적 으로 밝혔다(7-8). 다시 말해 아나키즘 이론과 사상을 종합한 동아시아 아나키즘사상을 전개 하면서 그 방법론으로 비교 정치(사회) 사상(철학) 방법을 적용하여 탈서구중심적 연구를 지향 하겠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저자의 연구는 시의 고금, 양의 동서를 가로질러 아니키즘과 관련 된 사상을 섭렵하여 통섭(通涉)을 시도함으로써 현대 한국사상 연구의 방법에서도 새로운 지 평을 열었다. 일반적인 철학자나 이론가는 말할 것도 없고, 《천부경》, 노자, 장자에서부터 단 주 유림, 하기락을 거쳐 현대 한국 사회학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미하일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

린 워드(Collin Ward)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니키즘의 영웅들은 물론 현대의 다양한 사상과 이론들을 두루 아우르고 넘나드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독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광대무변하고 천변만화하는 산맥이자 바다와 같은 저자의 사상에 평자는 압도되지 않을 수 없

.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평자는 《천부경》은 물론 《루바이야트》, 단주 유림, 하기락, 콜린 워드 등에 대해서는 이 책을 접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비록 방대한 분량의 저술이지만, 여전히 이 책은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입장에서 거시적으

로 밑그림을 그린 것이기에 원칙과 대강에 대한 선언적 서술 이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서술대표적으로 예를 들면, 사회국가의 구체적인 내용, “반자본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요소 (계획경제)”, “비자본주의적 혹은 탈자본주의적 요소(공유 협동경제와 탈물질주의 경제)” 및 자 본주의적 요소가 혼합된 경제체제의 구체적인 모습(300-01), 경제적 평등의 구체적 구현 양태 등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적지 않게 있다. 나아가 개별 사상가(이론가)나 여러 가지 사상에 대한 저자의 해석 및 다양한 사상들(이론들)의 매끄러운 연결, 기타 논리전개 등에 있어 서는 (당연한 얘기이지만) 허술한 점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1]) 이에 따라 책에 담긴 세부적인 논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는 것도 매우 유용한 작업이 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이를 가급적 삼가도록 하겠다. 부분적으로는 워낙 제한된 시간에 방대한 책을 읽고 논평을 시 도하는 과정에서 평자의 논평이 때로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 품평이 지닌 오류를 범할 수 있 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에 담긴 지식의 방대한 양과 심원한 깊이에 필적하지 못하는 평자의 지식으로 자신이 잘 모르는 영역이나 이론 및 사안에 대해 섣불리 논평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기는커녕 오히려 평자의 무지와 오류를 드러내는 데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평자는 저자가 풀어놓은 생각의 내용그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생각의 내용을 풀어

놓는 과정을 지배하는) ‘생각의 방법’(how to think) 또는 생각의 습관’(habits of thinking)에 대해 비교 사상연구의 관점에서 몇 가지 논점을 제기함으로써 논평을 전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이 책의 핵심개념인 잡종()’의 개념구성이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저자가 잡종사회의 다섯 친구들로서 제시한 바 있는 타협적 탈 국가주의자, 절제적 탈물질주의자, 협동적 개인주의자, 상대적 허무주의자, 현세적 신비주의자 를,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잡종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합당한지를 검토할 것이다. 이어 서 저자의 생각의 습관가운데 평자가 수긍하기 어려운 지점들을 논증이 생략된 유비적(類比的) 사고들’, ‘비교의 프레임의 공정성이라는 소제목을 설정하여 몇 가지 사례를 들면서 비판적 으로 검토하겠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남긴 독백으로부터 모든 유토피아 사상이 안고 있는 이행(移行)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연역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II. 잡종화에 관하여

이 책의 제목인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이 시사하듯이, 잡종()은 이 책의 핵심개념이다.

아가 저자는 2장에서 거론하듯이 잡종()과 잡종사회에 관해 그 역기능혼란과 무질서, 불안 정과 위기감, 방종과 전통문화 파괴 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108), 그 긍정적 기능들─“변혁 적인 잠재력”, 인간사회 해방의 잠재력,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의 원동력, “관용적 개방성”, “탈 권력성”, “탈경계성”, “타협과 절충의 미덕, ‘잡종성의 약화 = 다양성의 축소을 강조하면 서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102-10). 이처럼 잡종()는 이 책의 핵심어이자 빈번히 나오는 개념인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고 지칭하는지는 평자에게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에 따라 평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두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 ‘잡종()은 무엇이고 잡 종()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생각건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이 잡종()이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잡종화하는 좋은 것인가?’ 나아가 잡종화의 선악(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이 두 질문은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것 같지만, 경우에 따라 긴밀하게 상 호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저자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전체 적으로) 만약 모든 잡종()이 좋은 것이라면, 나쁜 잡종()은 잡종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하 고 이에 따라 잡종()의 개념 규정이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 그러나 잡종()’에 관한 저자의 빈번한 언급과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자의 의문에 대한 체 계적이고 명쾌한 답변을 적어도 잡종화와 잡종사회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책의 2장에서는 발 견하지 못한 것 같다. 따라서 평자가 놓친 구절까지 포함해서 잡종()에 대한 저자의 명쾌한 설명을 기대하면서 잡종()에 대한 평자의 문제의식을 전개해 보겠다.

저자는 2장에서 (역사상 모든 사회가 잡종사회이고, 역사상의 모든 주요한 변화가 잡종화

과정의 산물이지만)[3]), 21세기를 탈근대 잡종사회로 규정한다(89). 또한 잡종()의 예찬론자 로서 저자는 종래 순혈주의, 순종주의, 정통주의 입장에서 불순한 혼합또는 타협과 절충을 상징하는 잡종()’에 대한 비하적 편견이나 잘못된 고정관념을 불식시키려는 논변을 적극적 으로 전개한다. 저자는 자신의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역시 일견 모순되는 아나키즘자유주 의의 잡종화(급진화된 자유주의 + 실용화된 아나키즘)임을 선언한다. 잡종()의 전도사로서 저자는 머리말에서 유불도선의 지혜를 모아 화쟁을 이루고자 했던 원효를 잡종화의 선구자로 꼽는다(11). “원효의 화쟁은 나의 화두인 잡종화를 오래전에 가장 간명하고도 심원하게 표 현한 만세지표로서 비단 불교의 모든 종파를 초월한 귀일(歸一)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교와 도교까지 총섭(總攝)하고, 이에 더하여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라 일컬어지던 화랑도(花郞道), 국선도(國仙道), 풍월도(風月道)까지도 그 바탕에 까는 대종합의 화쟁을 추구하였 다”(86). 평자는 저자의 이러한 논변에 어느 정도공감한다. 종래 잡종()이 지닌 부정적인 어 감 때문에 우리는 긍정적인 잡종()에 대해서는 잡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그 대신 종합’, ‘집대성등 긍정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대표적으로 맑시즘은 영국의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독일의 관념철학의 종합(잡종)이다. 주희의 성리학은 공맹유 학과 도가 및 불가의 형이상학의 종합(잡종)이며, 주돈이, 장재, 이정(二程) 형제 등 북송대 유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집대성(잡종화한) 것이다. 플라톤 철학 역시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피스트 철학을 집대성(잡종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 한 것처럼, 평자는 저자의 논의에 상당히 수긍하면서도 잡종화는 무엇이고 잡종화가 아닌 것 은 무엇인가’, ‘모든 잡종화는 좋은 것인가라는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먼저, 여러 가지 것이 섞였을 때 어떤 것을 잡종()’이라고 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저자

잡종화는 차이를 가진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 작용이라고 간단하지만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88). 이 점에서 저자는 잡종화의 요소, 원리, 과정, 결합방식, 필요충분조건 등 무 엇이 잡종화를 구성하는지 명확히 논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4]) 일상적 용례를 든다면, 잉크/ 설탕//커피원두와 물이 섞이는 것은 잡종인가 아닌가? 커피와 밀크, 홍차와 밀크가 섞이는 것은 잡종인가 아닌가? 커피에 밀크 그리고 설탕을 섞는 것은 잡종인가 아닌가? 예를 들어 우리 는 커피와 홍차(계란)를 섞은 것을 잡종이라 부르겠지만, ‘커피+밀크+설탕의 혼합을 잡종이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홍차와 밀크 또는 녹차와 밀크를 섞으면 우리는 그것을 잡종이 라 부를 것인가? 영국인들(인도 등 영국 식민지배의 영향을 받은 국가의 인민들)은 홍차와 밀크 의 혼합을 잡종이라 생각하지 않을 법하다. 이와 달리 녹차와 밀크를 섞은 것을 잡종이라 부를 법하지만, 녹차라테에 친숙해진 사람들이 그것을 굳이 잡종이라 부를까 의문스럽다. 일상의 평 범한 사례를 벗어나 그리고 흔히 말하는 문화와 기술의 혼융을 넘어, 우리가 관심을 갖는 정치 사상으로 주의를 돌려보자. 국가독점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는 잡종인가 아닌가? 정권/국가 형태로서 개발독재 또는 발전국가는 잡종인가 아닌가? 남북한의 분단국가는 잡종인가, 그렇다면 어떤 잡종인가? 한국의 반공 민족주의는 잡종인가 아닌가? 독 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잡종인가?6)

둘째, 모든 잡종화는 좋은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잡종화의 선악을 평가하는 기준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저자는 이런 기준에 대한 논의 없이 잡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 는 전체적인 기조와 서술을 유지하고 있다.7) 그런데 그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삶 의 영역에 따라 잡종화를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손쉬운 예로, 애완동물들(예 컨대, 애완견 등) 가운데 비싼 것은 순종이고 족보가 있으며, 잡종은 대체로 덜 선호된다. 그렇 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어떤 영역에서 순종을 선호하고, 어떤 다른 영역에서 잡종을 선호하는 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좀 더 분석적으로 말하면, 전반적으로 잡종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 는 저자의 입장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뜻 보내기란 어렵다. 좋은 것과 좋은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나쁜 것과 나쁜 것이 잡종화하고, 또는 선악중립적인 것(과학기술 등)도 중요한 요소로 잡 종화에 참여하기도 하며, 어느 조합이든 그 선악에 대한 결과는 예단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저 자는 국가독점자본주의국가(주의)’독점자본이 결합(잡종화)한 것으로 보면서 부정적 으로 평가한다(10). 복지국가 역시 국가주의와 평등주의가 결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적으 로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저자는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일부 세력들은 종교적 순수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혐오하는 서구의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 하여, 곧 이슬람 원리주의와 서구의 과학기술을 잡종화하여, 9 11 테러를 저지른 것은 물론 테 러, 강간 등 무자비한 방법을 동원해서 IS(이슬람 국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국가의 감 시 속성과 첨단 정보기술이 결합(잡종화)하여 팬옵티콘(원형감옥) 국가가 도래하고 있다(이 감 시국가는 잡종화의 산물인가 아닌가?). 명시적인 악(부정과 사기) 역시 정보기술과 잡종화하여 고도로 진화하고 있다(피싱, 스미싱 등).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에 대한 반대 논변 중의 하나는 개인의 성적 취향(선택)을 존중하다 보면 그 끝은 어디인가라는 것이다. 최근 독일에서 일부 시 민이 동물과의 섹스를 허용해 달라고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가 기각되었다는 보도를 접한 바 있는데, 인간과 동물의 섹스 역시 잡종화 차원에서 지지할 것인가? 나아가 우리는 머지않아 출 현할 복제인간이나 기계인간이 자연인과 여러 가지 조합과 방식으로 잡종화하는 것을 어떻게

6) 나치즘의 원어적 표현은 국가(민족)사회주의이다.  

7) 예를 들어 저자는 나의 잡종화 개념은 세계화의 문화적 차원을 설명하거나, 기술상의 융합적 측면을 강조하는 서구의 접근법을 포괄하면서도 이를 넘어 보다 심원한 수준의 존재론적, 역사적-문명사적, 기능론적 영역으로 확 장된다”(88)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이브리드’(bybrid)는 통상 문화나 기술 영역에서의 혼융을 지칭하는데 저자는 이를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여 사용하며, 훨씬 빈번히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다룰 것인가? 그들이 교합하여 2세를 낳는다면 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독일의 사 회학자 율리히 벡(Ulrich Beck)이 말하는 위험사회는 역시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 또는 위험을 제공하는 사회적 원인들이 한데 섞이면서 곧 위험의 잡종화에 의해 위험이 중층적이고 다중적 으로 증폭 가중되는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평자가 제시한 사례들 중에서 어떤 것 이 잡종화이고 어떤 것이 잡종화가 아닌가? 평자가 제시하는 사례들의 대부분이 잡종화로 인정 된다면, 잡종화된 사회현상에 부정적인 것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 확인될 것이다.8)

위의 사례에서 이미 시사되었듯이, 사회현상 가운데 잡종()에 대해서는 이념적 입장에 따

라 평가가 분분한 것 또한 역사적 현실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잡종이라는 전제하에 논해보면, 19세기 말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 등 온건 사회주의자는 이를 긍정적인 것으로 주장 하고 평가했지만, 정통 사회주의자들(카우츠키, 룩셈부르크 등)은 이를 수정주의라고 극렬히 비난했다(그러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비서구세계에서 좌파는 계급을 중 시하는 정통’(또는 서구적) 좌파보다는 서구 제국주의에 반발하여 민족해방을 계급해방에 섞 은(잡종화한) 민족주의적 좌파가 주로 세력을 잡았다(김일성의 사회주의, 아랍민족주의, 3세 계주의, 중국, 쿠바, 베트남 등). 여기서 좌파 민족주의 또는 민족주의 좌파는 잡종인가, 그리고 좋은 것인가? 좋은 것이라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수정자본주의에 대해 같은 자유 주의권 내에서도 찬반이 엇갈렸다. 하이에크(Friedrich Hayek) 등 시장원리주의자들은 결사반 대하고 복지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지지했다. 저자 역시 모든 잡종화가 좋은 것은 아니라고 인정 한다. 저자는 자신의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이론이 호혜적 잡종화를 통해서 개인적 자유와 사 회적 해방을 동시에 추구한다고 주장한다(91). 만약 저자의 구분에 따라 호혜적 잡종화그 렇지 않은 잡종화를 구분한다면 전자를 산출하는 잡종화와 후자를 산출하는 잡종화는 그 원리, 과정, 결과에서 어떻게 유의미하게 구분되는가?

위에서 호혜적 잡종화와 그렇지 않은 잡종화를 구분하는 것처럼, 저자의 궁극적인 입장은

모든 잡종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많이 찾지는 못했지만, 예를 들 어 저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필요한 여러 대안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과감히 잡종화하여 자본주의를 개선하려 는 것이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의 과제이다”(10). 다시 말해 저자는 자본주의에 모든 것을 섞는

8) 물론 나쁜 것과 나쁜 것이 잡종화하여 긍정적인 잡종이 나오는 흥미로운 사례도 있다. 그리스 정치철학자 아리스 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나쁜 과두정과 나쁜 민주정을 섞은 혼합정을 긍정적인 정치체로 평가했다. 소위 나쁜 것 과 나쁜 것을 잡종화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필요한 여러 대안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섞어서 자본주 의를 개선하는 것이 좋은 잡종화라고 말하고 있다.[5]) 따라서 이 구절 역시 모든 잡종화가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저자의 인식을 드러내고, 나아가 좋은 잡종화와 나쁜 잡종화를 구분하는 (모호 하지만) 저자 나름의 기준을 탐색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원효에 대한 저자 의 찬양 역시 잡종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생략되어 있어 아쉬움을 자아낸다. 만약 저자가 원효 를 잡종화의 선구자로 본다면, 비록 원효의 전공자는 아닐지라도 그가 제시한 화쟁의 기본원리 예를 들어 원융회통(圓融會通) 를 탈근대 잡종사회의 필요와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의 목 표에 적합하게 업그레이드하고 확장하여 잡종화의 방식이나 평가기준을 도출하려는 시도가 필 요하지 않았을까?

좋은 잡종화에 대한 저자의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저자가 일견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잡 종화에 대해서도 이제 평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저자는 아니키즘과 자유주의 의  잡종화, 즉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포퍼-하이에크 자유주의의 잡종화를 통해서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의 길을 개척하고나아가 자유의 길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자 한다”(90)고 말한다. 그런데 선택의 기준, 잡종화가 작동하는 맥락, 잡종화의 결과에 대한 선악을 평가하는 맥락(과 그 변화가능성)에 대한 서술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평자는 저자의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를 긍 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에서 긍정적인 ‘a’, ‘에서 긍정적인 ‘b’를 도출하여 잡종화했을 때, 그 결과는 반드시 긍정적일까? ‘a’가 긍정적인 것은 라는 전체적인 맥락, ‘b’가 긍정적인 것은 라는 전체적인 맥락이 작용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판단이 사후에 얻어질 수 있다. 그런데 ‘a’b가 잡종화하여 탄생한 ‘c’가 작동하는 맥락은 본래의 또는 와는 전혀 다른 라는 맥락일 수 있다. 노자는 물론 루소 역시 언급한 것처럼 인간사회에서 복()에는 화()가 필연적으로 따르고, 선에는 악이 불가분적으로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또한 중 국의 새옹지마이야기가 보여주듯이, 한 맥락에서 부정적인 결과가 맥락이 바뀌면 긍정적인 결과로 전도되고, 또 그 역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잡종사회의 다섯 가지 친구들로 타협적 탈국가주의자, 절제적 탈물질주

의자, 협동적 개인주의자, 상대적 허무주의자, 현세적 신비주의자를 제시하고 각 친구들이 각 차원마다 일종의 잡종적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593). 이 친구들이 일종의 균 형과 조화를 추구한다는 저자의 해석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지만, 그것이 왜 잡종적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중요한 입장(가치)에 대해 중용적 덕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붙인 타협적’, ‘절제적’, ‘협동적’, ‘상대적’, ‘현세적이라는 수식어가 탈국가주의자’, ‘탈물질주의 자’, ‘개인주의자’, ‘허무주의자’, ‘신비주의자라는 명사(실체)와 잡종으로 결합하는 대당으로 적 절한가?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저자가 말하는 잡종화차이를 가진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작 용이다. 그렇다면 타협적 탈국가주의에서 우리는 어떤 관점과 기준에서 타협적탈국가주 의차이를 가진 이질적인 것들로서 인식할 수 있는가? 역으로 저자가 상정할 법한 급진적 탈국가주의에 관해 생각해 볼 때, ‘급진적탈국가주의차이를 가진 이질적인 것들이 아 니고 따라서 이들의 결합은 잡종화가 아닌 것인가?

이 문제를 일단 제쳐두고 저자의 논리를 따른다면, 예를 들어 과감한 용기대신 신중한 용 기를 발휘하는 사람 또는 날선 비평대신 애정 어린 비평을 하는 사람 역시 잡종적 균형과 조 화를 이루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법하다. 이런 식으로 저자의 논리를 따르더라도 구체적으 로 검토해 보면, 평자는 다른 세 친구들(가치들)은 몰라도 협동적 개인주의자’, ‘절제적 탈물질 주의자그 자체가 어떻게 잡종인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반적 이해에 따르면 서구 적 시민사회에서 시민의 개인주의는 보통 협력을 수반하는 개인주의(정교한 노동분업, 사회 계약의 체결, 시민운동 노동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연대활동 등)가 아닌가? 또한 탈물질주의자 를 물질주의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절제력을 발휘하는 절제적 물질주의자라고 해석한다면, ‘절제적 탈물질주의자라는 용어는 중복적이거나 동어반복적인 느낌이 나고 따라서 이질적인 것의 상호작용인 잡종화의 개념을 성립시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저자의 논리에 따 라 우리는 절제적 탈물질주의자를 급진적인 또는 원리주의적인 탈물질주의자고행을 하는 스님이나 수도사, 안빈낙도하는 공자의 제자 안회 등가 아니라 탈물질주의를 절제하는상 당한 수준에서의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인정하는인간으로 보고 이를 긍정해야 하는가? 그러 나 절제적 탈물질주의자에 대한 저자의 실제 서술은 평자가 말한 절제적 물질주의자의 모습에 접근한다. 평자의 이러한 혼란에는 평자 자신의 이해력 부족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잡종 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정교한 개념화가 미흡한 데도 그 중요한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 된다.

평자는 잡종화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동서 비교정치사상을 수행하기 위한 방법론 으로 교차문화적 대화라는 개념을 고민하다가 간디사상에 대한 파레크(Bikhu Parekh)의 해 석에서 그 사례(‘비판적 잡종화를 통한 사상의 쇄신’)를 찾아 인용하면서 논한 바 있다.

이런 상호문화적 실험의 방법론은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 문화 내부의 이질성과 유동성, 교차 문화적 대화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는 바, 이를 상호문화주의(interculturalism)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파레 크는 간디의 사상을 검토함으로써 상호문화주의의 방법론을 설명한다. 파레크의 설명에 따르면, 간디 는 인도의 정통 힌두교 가문에서 태어나 힌두교 전통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리고 이후 영국과 남아프리카에 체류하면서 기독교와 유대교 및 여타 서구 사상과 접하면서 힌두교 전통에 대한 비판적 인 사고를 키워나갔다. 간디는 힌두교의 비폭력(ahimsā) 개념에 오랫동안 매료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기독교의 사상과 실천을 접하면서 힌두교의 이 개념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피하기만 할 뿐 타인의 행복에 대해서는 아무런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소극적인 것임을 깨닫는다. 여기서 그 는 사회 지향성을 갖는 기독교의 카리타스(caritas, 또는 아가페, 신의 초자연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개념을 취해 이것을 힌두교의 비폭력 개념과 통합하여 보편적 사랑의 원칙에서 영감을 받은, 모 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적극적인 봉사라는 관념으로 이해한다. 나아가 그는 기독교의 카리타스 개 념이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쳐 있어서내적인 평정과 정서적인 충만함을 위태롭게 한다고 보고, “이를 힌두교의 비애착(anāsakti) 개념에 비춰 재해석하고 수정한다.” 이런 교차 문화적 대화 혹은 횡단적 비 교를 통해, 곧 힌두교의 비폭력 개념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기독교의 카리타스 개념을 힌두 교의 관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간디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되 초연하고 감정적이지 않은 보편적 사 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간디는 힌두교 전통, 기독교, 자유주의를 이종 교배 또는 교차 수정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창조했던 것이다. 그는 상이한 도덕, 종교, 문화적 전통 간의 대화를 전개함으로써 기존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새로운 정체성을 창안했다.” 물론 그는 힌두 전통에 견고 히 자리 잡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다른 전통에로 손을 내뻗 었던 것이다”(Parekh 2006, 370-72; 강정인 2013, 50-51).

우리는 테일러(Charles Taylor)가 문화간의 대화의 방법론으로 제시한 확장적으로 진화하는 중첩적 합의”, 가다머(Hans Georg Gadamer)지평의 융합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활용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강정인 2013, 51-52 참조). 지금까지 잡종화에 대한 평자의 논평이 장황 하게 전개된 점이 없지 않지만, 평자는 저자가 후속작업을 통해 이에 대한 명쾌한 해명을 보여 줄 것을 기대해 본다.

III.                     몇 가지 논점들

1. 논증이 생략된 유비적(類比的) 사고들

이 책에 제시된 저자의 서술에서 논증이 생략된 유비적 사고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서구 적 사고로 훈련된 탓인지 평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서술이 불편하게 다가온다. 여러 가지 사

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두 가지 사례를 검토하면서 논평하고자 한다. 1) 다섯 친구들, 사회의 다섯 가지 기능, 오행 및 오덕의 의심스런 상호 연관성

저자는 미국의 사회학자 파슨스(T, Parsons)가 자신의 사회체계론에서 사회가 그 존속을

위해 충족시켜야 할 네 가지 기능적 요건경제적 적응, 정치적 목표 달성, 사회적 통합, 문화 적 동기을 논함에 있어서 종교적 기능을 간과했다고 지적한 후, 종교를 문화와 분리시켜 사 회의 핵심기능에 포함하여 다섯 가지 기능을 제시한다. 이어서 다섯 가지 기능을 음양오행의 오행(목화토금수)과 연결시키고,[6]) 또 그것을 유가의 오덕인 인의예지신에 상응시킨다. 결과 적으로 저자는 정치타협적 탈국가주의자, 경제절제적 탈물질주의자, 사회협동적 개인주의자, 문화상대적 허무주의자, 종교현세적 신비주의자라는 도 식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저자는 다섯 가지 기능을 “‘구조/체계의 동태적 표현이자 혹은 라고 간주하면서 음양의 대대적 관계나 오행의 상생상극을 항상 전제하면서 사회의 제 세력들 간의 상호 균형과 조화를 세상과 개인적 삶의 최고 가치로 상정한다고 서술한다

(70-72, 591-94).

이러한 도식을 접하면서 평자는 저자의 (아나키스트에 걸맞게) 자유분방하고 상상력이 풍 부한 독창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현대 유가 사회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범적으로 제시 하는 것 같아 더욱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평자는 유교의 인의예지신이 어떻게 정치, 경 제, 사회, 문화, 종교에 연관되는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592-93)이 미흡하게 여겨진다.[7]) 잘 아 시다시피, 5덕에 대한 맹자의 해석에 따르면 인의 발단은 측은지심이고, 의는 수오지심이며, 예 는 사양지심이고, 지는 시비지심이다. 여기서 예를 사회적 기능, 지를 문화적 기능으로 연관시 키는 논리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겠지만, 그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먼저 유가의 인이 부자 지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친밀한 감정에서 발단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공사 영 역을 불문하고 인간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최고의 덕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저자처럼 유가의 인이 경제 사회 문화종교를 제쳐놓고 무엇보다도 정치영역에 우선적 으로 적용된다는 논리는, 비록 그것이 수긍할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에 대한 정교한 논리구 성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는데, 저자는 이러한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인을 우선시하 는 유가적 국가(정치)관은 가부장적 국가관으로서 사회의 폭넓은 영역에 걸쳐 국가의 온정주 의적인 간섭과 개입을 요구할 것이고, 상당한 수준의 복지국가를 지향할 것이기 때문에 인을 최소국가를 지향하는 아나키스트 자유주의(타협적 탈국가주의)와 연관시키는 것이 합당한지 도 의문이다. 다시 말해 정치나 국가가 을 표상한다면 인은 많을수록 좋은 것인데 왜 최소국 가를 지향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정작 11장에서 타협적 탈국가주의자를 논할 때, ‘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전혀 거론되지 않는 듯하다.

마찬가지로 수오지심으로 발단되는 역시 경제적 정의와 연관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지 만, 그보다는 도덕적 올바름에 직결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맹자가 양 혜왕과 나눈 유명한 대화편에서 왕이 나라의 이로움()에 대해서 묻자 맹자가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오직 나라의 인의(仁義)’에 대해서만 논하겠다고 공박한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孟子集註, 梁惠王章句上). 양혜왕과 맹자의 대화에서 공통의 화제가 단순히 나라의 경제가 아니라 치국의 전반적 원리였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와 유가의 를 연관 시키는 저자의 논리구성도, 추가적인 논리적 정교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타당성이 다분히 의심스럽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적 정의론의 전범으로 군림하는 롤스(John Rawls)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도 정의는 정치공동체 전반을 규율하는 원리이지 단순히 경제 영역만 규제하는 원리가 아니다. 롤스는 정의론의 모두에서 진리가 사고 체계에서 제1의 덕 목이듯이, 정의가 사회 제도에서 제1의 덕목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Rawls 1971, 3). 그렇게 보면 인과 의는 저자의 생각처럼 정치와 경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는 물론 경제(심지어 모든 영역)도 관장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끝으로 정작 12장에서 절제적 탈물질주의자 를 논할 때에도, 유가적 의 작동방식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 역시 오늘날 단어상의 의미로는 종교에 연관시킬 수 있겠지만저자는 신에 신앙심의 의미를 부여한다(593)─, 본래 유교에서 은 붕우유신처럼 주로 인간관계를 지칭하는 것이지, 인간과 초월적인 것의 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유교에서 종교적 심 성은 경()이나 성() 개념에 더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은 사회(협동적 개인주의)나 경제(절제적 탈물질주의)에 더 연관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온당할 것이다. 나아가 15장에서 정작 현세적 신비주의자를 논할 때, 저자는 유가의 개념을 의미심장하게 논하면서도 종교 와 적절히 연관시키지 않고 있다. 비슷한 비판과 의문을 예와 협동적 개인주의, 지와 상대적 허 무주의에도 제기할 수 있을 법하다. 평자는 저자의 독창적인 발상과 상상력이 풍부한 유추에 진심으로 감탄하지만, (사후의 작업을 통해서라도) 추가적인 논증이나 보완적인 논리구성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렇지 않으면 인의예지신과 저자의 다섯 개 영역(및 가치)의 연관성에 대 해 유교의 인의예지신을 인위적이고 자의적으로 심지어 수사학적으로 동원했다는 비판을 저자 가 비켜가기는 힘들 것이다.   2) 천지인 합일

저자는 “…사회학의 오랜 전통이던 개인 대 사회라는 구분법 대신에 천지인합일에 의거하

, 개인을 매개로/중심으로 국가와 사회를 연결 조화시키는 국가-개인-사회의 연합적 하나, 즉 합일()을 개념화하여 국가와 사회가 개인 속에서 재구성되는 사회국가를 제안한다”(72). 저자는 여기서 천이 국가, 지가 사회, 인이 개인을 표상한다고 지적한다(813). 평자는 천 지인 합일에서 왜, 어떤 논리구성에 따라 천지인이 국가, 사회, 개인을 각각 표상하는지 이해하 기 어렵다. -국가와 지-사회는 물론이고 인-개인의 연결고리도 매우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 유가적 국가가 천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천명)이지 국가가 천을 직접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아 니기 때문이다.[8]) 한 걸음 양보해서 유가사상에서 천이 초월적이고 신성한 국가를 표상한다 는 저자의 해석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 천이 어떻게 해서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이념에 따라 최소화된 국가’(여기서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높은 부정적인 존재다)를 표상 하는 천으로 전환되는지 그 논리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그 천(또는 국가)이 다시 천지인 합 일에 따라 사회 및 인과 하나로 된다는 발상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저자는 일체유심조나 천상천하 유아독존 등과 같은 구절에 기대며 인을 개인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평자가 보기 에 여기서 인은 개인이 아니라 집합으로서 인()를 지칭하는 것(또는 개체와 전체가 합일된 일자[一者])으로 보인다. 설사 개인이라 해도 불교나 《천부경》에서 말하는 인은 사회와 국가 (나아가 문명과 역사)를 초월한 개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어느 경우든 여 기서 ’(개인)은 형이상학적/종교적 개념으로 합당할지 모르지만, 사회사상(정치사상)의 개념 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또한 많이 사용되는 천인(신인)합일과 천지인합일에서 양 자를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천인합일에서도 천이 국가를 표상할 것인가? 이런 의문에 합당하 게 답변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천(천상)은 초월적인 것, (지상)는 세속(현세)적인 것, 그리고 인간은 양자 사이에 존재하면서 양자를 매개하거나 초월하는 것으로 개념화되어야 할 것이다

2. 비교의 프레임의 공정성 : 기울어진 운동장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타인과 비교할 때 또는 자신이 타인과 분쟁상태에 있을 때, 자신

의 입장(속성)은 이상주의적인 관점에서 과장(미화)하고, 타인의 입장(속성)은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또는 자신의 장점과 타인의 단점을 비교하는 성향이 있다. 그 렇기 때문에 분쟁상태에 있는 두 당사자 가운데 오직 일방의 이야기만을 듣다보면 그 일방이 옳거나 선하거나 합당한 것으로 판단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학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내세우는 논변대체로 자기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거나 자신이 동의하는 논변에 대해서는 그 이상주의적 버전을 제시하여 옹호하고,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논변에 대해서는 그것을 현 실주의적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그 결함이나 한계를 적나라하게(또는 과장해서) 드러내면서 결 과적으로 자신의 논변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학문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는 일반적으로 보수 와 진보, 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시장원리주의자와 수정자본주의자(복지자본주의자) 사이의 이념논쟁에서도 쉽사리 발견된다. 일견 객관적인 학문적 논쟁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어 렵지 않게 관찰되는 바, 저자 역시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

. 평자는 저자의 사회국가 옹호 논변과 중국 정치체제 옹호 논변을 예로 들어 이러한 경향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사회국가론의 이론 구성에 관해

16장에서 저자는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입장에서 자신이 제시한 탈권력적 사회국가(이하

사회국가①’)를 진보정치연구소가 내세운 사회국가(이하 사회국가②’)와 대비하면서 옹호한 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적 사회학자들이 흔히 수용하는 단순화된 이분법곧 사회= , 국가=을 통렬히 비판하는바, 평자 역시 공감한다. 그러나 저자는 개인-사회-국가의 구 도에서 개인을 이상화하여 무리하게 긍정하고, ‘사회의 현실모습을 직시하면서 과도하게 비 판적인 태도를 취한다.[9]) 저자는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국가의 이념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진보정치연구소(2007:8)사회를 통해 진보를 구현하는 인류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사회연대라는 공동체의 가치 속에서 개인의 고통과 아픔을 공유하고 치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적인 삶의 방식이 라고 믿는다(818).

이러한 이념을 신봉하는 진보정치연구소는 아직까지는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 국가 를 단위로 이루지고있다는 현실인식에 근거해서 사회국가론을 내세운다(819에서 재인용). 저 자는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국가론을 세 가지 논점에서 비판하는데, 이 글에서는 비교의 프레 임의 공정성과 관련하여 두 번째 논점만 검토하도록 하겠다.

공동체적 연대에 대한 신뢰는 사회주의적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좌파적 진보 세력에게는 인 민의 동원과 통합에 필요한 강력한 무기로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러나 이 책의 곳곳에서 아나 키스트 자유주의는 고정관념이 된 이상적 공동체의 허구성과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전국의 수만 개 아 파트에서 그리고 작은 시골 촌락에서조차 공동체를 못 이루고, 비리가 터지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 현 실을 보라. 사회학자로서 사회 = 공동체적 연대라는 아름다운 방정식은 슬프지만 부정하겠다(820). 

평자는 국내의 진보세력이 주로 신봉하는 독일 등 사회국가에 대해 저자가 제기한 비판을

이 인용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먼저 저자는 사회국가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사회국가를 비판하는바, 저자의 주장이 한국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논변이 아니라 일반적인 논변이라면, 저자가 언급한 적이 있는 독일을 중심으로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복지국가와의 연관 속에서 꾸 준하게 관심을 모으고”(818) 있는 사회국가를 좀 더 상세하게 검토하고 비판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한국의 진보세력은 물론 일반인들 역시 독일과 북구의 사민주의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국가들이 지향하는/현실화한 사회국가를 그 장점과 단점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평자가 읽은 바로는 이에 대 한 검토와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저자는 사회국가를 비판하는 첫 번째 논점에서 현대의 국가와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구현물인 현존 사회주의 국가의 오류를 적절히 비판하 고 있지만(820), 사민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오늘날의 변덕 많은 선거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권력이란 유용하지도 믿을 만하지도 그리고 (권력 장악이)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820)는 구절을 통해 사민주의 국가(사회국가②)를 포함해 민주주의 국가 일 반이 지닌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있는데, (사민당이 오랫동안 집권했던) 스웨덴과 (영국 등과 달리 사민주의적 가치가 정치체제 전반에 깊이 내면화되어 있어서 보수세력인 기민련이 집권 해도 사민주의의 성과를 상당한 수준에서 온존시킬 수밖에 없는) 독일의 사례 등을 본다면 이 구절이 설득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둘째 저자는 사회국가가 지향하는 공동체적 연대에 관해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한국의

수만 개 아파트와 시골 촌락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기대할 수 없다는 식으로 통렬하게 비판한

. 평자 역시 이상적 공동체의 허구성이나 불가능성에 대한 저자의 지적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평자가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과연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옹호하고 있는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가 이념적 토대로 삼고 있는 그 개인은 과연 현실에 얼마나, 어 떻게 실재하는가?’이다. 일단 사회국가를 다루는 장(161)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거기에 묘 사된 개인은 거의 신화적 존재이다. 저자는 개인을 옹호할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또는 일체유 심조라는 불교의 구절, 노자와 장자의 도가적 철인상, 《천부경》에 나오는 인중천지일 사상 을 즐겨 인용하지만, 이는 매우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인이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사회국가론에서 구현된 개인 권력에 대해 매우 이상적으로 서술한다.

국가권력이 사회권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 형태의 권력[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인간 으로서 모든 개인이 각각 권력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개인 권력으로 재구성된다. 이 개인 권력은 개인 이 다른 개인을 강제하거나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다. 개인이 자신을 개인답게 만드는 개인 실현의 권 력, 즉 개인의 자유를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개인 자신의 능력이다. 개인 권력은 바로 자유의 힘이자, 자 유를 위한 힘이다(815).

일단 이러한 서술을 받아들인다면, 평자로서는 저자가 이러한 개인 권력의 모습을 어떻게 예시 하는가, 정당화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처럼 개인 권력을 이상화하 여 서술한 다음에 곧바로 노자적 관점에서 개인 권력을 강제성이 없는 순리요, 천리요 자연으 로서 무위권력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승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저자의 국가는  노자의 이상인 무위이무불위의 유토피아라는 최소주의 국가로 비상한다.

개인이나 개인 권력을 정당화하는 저자의 서술에서 현실적인 근거를 확보한 개인을 보기란 매우 어렵다. 다만 우리 사회를 염두에 두고 저자는 개인 권력이 실현된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국가권력을 궁극적으로 개인 권력으로 변형시키려는 나의 탈권력화 프로젝트는 유토피아적인 것 같지 만 매우 현실적이다. … 우리는 다시 저 따뜻한 부모 자식관계, 훈훈한 사제지간, 부드러운 상하 관계, 아름다운 선후배 사이를 회복해야 하고, 또 회복할 수 있다. 권력과 힘, 지위와 서열, 연륜과 지혜 등 이 모든 권력자원을 자신을 포함한 타인의 자기 고양과 자기 성숙, 그리고 자기실현을 위한 능력으로 제공 하고 사용할 수 있다(817-18). 

   

저자의 이러한 서술은 군신관계, 부부관계가 제외되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관계중심적인 유가의 오륜이 온전히 구현된 또는 아시아적 가치의 현실적 완성본으로 비쳐진다. 서구의 자유 주의적 개인주의와 달리, 아마 저자의 개인주의는 이처럼 관계중심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가 신봉하는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의 개인주의는 관계중심적 인 간관에 기초한 유교적 집단주의 또는 공동체주의에 의존한다는 일견 모순된 현상을 빚어내지 않는가? 저자의 개인 또는 개인주의는 하이에크, 포퍼 등 서구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충돌 하는 것은 물론 오륜의 가치를 부정하는 도가적 세계관에 따라 관계중심적인 인간관에 얽매이 지 않고 자연과 인간세계를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노자나 장자의 초월적 개인의 모습과도 모순 된다

나아가 개인 권력에 대한 저자의 서술이 한국인의 이상화된 인간관계 일반을 포함하고 있 어서 현실성(‘규범적 현실로서의 친숙함)을 담보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국사회의 실상은 그렇 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부자지간, 부부간의 패륜적 살상과 학대가 빈번히 신문기사에 보도되 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성추행, 성폭력이 빈발하고 있으며, 유치원이나 보육원에서 빈번히 발 생하는 아동학대나 직장에서 상사의 부하에 대한 갑질은 상당히 일상화되어 있다. 아름다운 선 후배 관계 역시 낯선 꿈으로 남아 있다.

또한 저자처럼 한국에서 사회학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수행하는 김동춘 역시 저자가 전제 하는 개인주의와는 전혀 다른 한국사회의 실상을 묘사한다. 김동춘은 자영업자의 분석을 중심 으로 한국사회 전반의 무계급성을 설명하면서 그 원인 중의 하나로 한국사회에는 서구와 같은 수평적이고 독립적인 개체화된 개인이 존재하지 않고 가족 중심으로 결집된 가족 개인만이 존 재한다고 개탄조로 서술한다.

유교적 가족주의(familism)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한국사회에서 한국인들은 주로 가족 개인으로 행 동한다. 결혼 시에 가장 두드러지지만, 개인의 선택에는 개인의 자유의사보다는 (확대)가족의 판단이 주로 작용해 왔고, 개인이 가족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 한국의 계급・계층연구에서도 가족은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 친족질서의 지속적 영향력과 더불 어, 식민지 근대화 이후 강화・재구축된 가족주의는 산업화이후 구성원의 새로운 직업 획득과정에서 강 한 전략 단위로 기능해 왔다. 한국인들은 개인단위의 성취전략이 아닌 가족 단위의 상승과 이동을 기획 했다. 여기서 노동자 혹은 화이트칼라의 직업을 갖는 것 모두 가족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고, 직 업의식, 계급의식은 그의 행동을 좌우하는데 부차적인 영향만 미쳤다(김동춘 2016). 

저자는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로서 한국사회에 팽배한 제도적 일상적 폭력은 물론 부정

부패의 근절을 주장하면서 그 결정적 원인을 국가권력 체제와 (금융자본 등) 독점자본에서 찾 고 있는바, 평자 역시 이에 공감한다(829-40).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공직자이건 기업가이건, 자영업자이건 노동자이건, 그 사회적 지위에 우선하는 정체성이 가족 개인이라는 점을 기억하 는 것은 중요하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타난 공직후보자 비리의 압도적 부분이 자식을 좋은 학군에 보내기(또는 부동산 투기를) 위한 위장전입이나 자식의 부당한 병역면탈이라는 점, 부 당한 방법으로 축적된 부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자행된 편법/탈법 상속/증여라는 점 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보기술, 자동차 산업 등 첨단 기술로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오른 대기업 총수 가족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며 상속세를 가급적 면탈해 가면서 자식들에게 기업 을 물려주고자 하는 열망은 기업가이기 전에 가족 개인이라는 정체성을 상기하지 않으면 이해 하기 곤란하다. 조선시대 국가가 왕실(왕의 가족)이 지배하는 가족국가였듯이, 현대의 한국 재 벌 역시 재벌 일가에 의해 지배되는 국민기업(?)’이라는 모순적 존재다.[10]) 이러한 현실을 직시 할 때, 저자가 말하는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의 토대가 되는 개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진정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저자가 공동체적 연대를 옹호하는 진보적인 사회국가론자

에게 제기한 비판을 표현을 조금 바꾸어 이상적 개인을 옹호하는 저자에게 되돌려 보자.

[국가와 사회의 부정・부패・비리로부터 초월한] 이상적 개인에 대한 신뢰는 초월적 개인을 최고의 가치 로 간주하는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에게는 자신의 이념을 인민에게 호소하고 그들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강력한 무기로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러나 진보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 자 유주의자의 고정관념이 된 이상적 개인의 허구성과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고급 저택과 빌라는 물론 전 국의 수만 개 아파트에서 그리고 작은 시골 촌락에서조차 정치인이건 기업가이건, 자영업자이건 농민 이건 노동자이건, 가족 개인들에 의한 비리가 터지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보라. 진보세력으로 서 나는 인중천지일(사람 속에서 천과 지는 하나가 된다)이라는 아름다운 사상은 슬프지만 부정하겠다

혈연 지연 학연 종교연 등 수많은 인연의 질곡 속에서 가족 개인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영위하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을 저자는 국가나 사회 또는 종교단체 등 집합적 기제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이상적 개인으로 환골탈태시 킬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그러한 이상적 개인의 양성은 순수하게 개인주의적 방법보다는 국가나 사회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 아닐까?[11]) 또한 평자의 비판이 과한지 모르지만, 적 어도 진보적 사회국가론자가 꿈꾸는 공동체적 연대가 허구적이듯이, 저자가 꿈꾸는 초월적(신 인합일적) 개인 역시 그에 못지않게 허구적이지 않은가?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신인합일적 인간 이 될 것으로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2) 현대 중국체제 옹호 논변

저자는 동아시아의 잡종화와 문명전환을 논하는 10장에서 현대 중국체제에 관해 중국의

잡종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 해소?”라는 제목으로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거 기서 저자는 현대 중국체제를 혁명적 잡종화(사회주의 정치체제 + 자본주의 경제)로 이해한다. 나아가 저자는 고비용 저효율의 민주주의, 서구의 다수결 민주주의의 폐해(민주독재), 미국의 금권 민주주의 등을 비판하고, 중국에서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비판의 자유(사례)에 대한 긍정 적 평가, 현능정치로 개념화할 수 있는 중국의 인사시스템, 중국 엘리트의 탁월한 행정능력(인 기영합적인 인사 행정 비판), 공산당 정부에 대한 높은 신뢰도, 잡종화에 능한 중국의 실용주의 등을 거론하면서, 중국이 서구식 자본주의, 서구식 민주주의, 그리고 서구식 사회주의보다 더 낫거나, 적어도 그만큼은 되는 새로운 유형의 중국식 문명 창조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540). 그러나 전체적으로 평자는 미국이나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적나

라한 현실에 근거를 두고 있고, 중국에 대한 저자의 설명(옹호)이상화된 (버전의) 현실에 의거하고 있다는 인상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리하여 비판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제약, 인권 탄 압, 부정부패, 소수민족 탄압에 대한 서술은 침묵되거나 아니면 약화되어 서술되고 있다. 물론 저자의 논조가 대등한 차원에서의 서술(비판)이라기보다는 중국에 대한 서구 주류세력의 비판 을 염두에 두고 방어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런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저자의 서 술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학문적으로는 여전히 공정하지 못한 비교라고 느껴진다. 그리 고 부제가 시사하는 것처럼, 독자는 중국이 자본주의의 어떤 모순을 어떻게 해결했고, 사회주 의의 어떤 모순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또한 남은 과제는 무엇이고 그 해결에 대한 향후 전망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법한데, 정작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서술은 별로 없다. 필자 역시 (모든 위대한 문명, 곧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대 중국, 근대 서구의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그 랬듯이) 중국이 새로운 정치 경제 체제를 장기적으로 만들어 내리라고 믿는 편이지만, 저자의 서술 방식과 제시된 논거는 여전히 설득력이 약하게 느껴진다.

 

IV.  배를 떠나보내면서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해변에서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의 깃발을 단 배를 떠나보내지만, 정 작 그 배를 건조한 자신은 타지 않고 남는다. “이 과거로 무겁고 우중충하며, 현재로 찌들어 고 단한 육신은 여기에 남아야 한다고 중얼거리고 나의 미래가 현재의 순항을 질투하는 과거의 욕망으로 흐려지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바닷가에 남는다(891). 낭만적인 구절이긴 하지만, 이 러한 저자의 독백은 많은 유토피아 사상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토피아 사상 은 바람직함실현가능성’(이행가능성)을 충족시켜야 비로소 도덕적인 생명력[12])을 넘어 현 실적인 생명력을 갖는다. 실현가능성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행전략 또는 과도기의 문제로서 거의 모든 유토피아 사상을 좌초시켜온 절망적인 폭풍이자 최대의 암초다. 이는 (나갔다가 되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한) 중국의 무릉도원 설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서 설화적으로는 물론 현실적으로 확인된다. 저자는 과거의 나미래의 나의 건널 수 없는 심연(단절)을 고백 함으로써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로의 이행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러나 평자 역시 저자와 다른 이유로 승선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그려낸 아나키스트 자유주 의의 비전이 현재의 서술로는 그 실현가능성은 물론 바람직함을 옹호하는 논변에서도 아직 설 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孟子集註. 1992. 성백효 역주.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강정인. 2013. 넘나듦(通涉)의 정치사상. 서울: 후마니타스.

김동춘. 2016. “소사장(small businessmen)의 나라, 한국 - ‘가족 개인과 한국사회의 무계급성’.” 미출간.

김성국. 2007.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 서울: 이학사. 김성국. 2015.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 서울: 이학사.

Rawls, John. 1971. A Theory of Justice.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Parekh, Bhikhu. 2006. Rethinking Multiculturalism: Cultural Diversity and Political Theory. 2nd e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1] ) 후자의 측면과 관련해서는 김태창의 이론에 대한 저자의 적절한 평을 상기할 가치가 있다. “이론적 잡종화는 백화 만발의 화려함을 갖추기 쉽지만 그 사이사이의 연결과 연결에서 일종의 애매모호함이나 두루뭉술함이, 어쩌면 자 연스럽고 당연하지만, 흐를 수밖에 없다”(290).

[2] )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모든 사랑은 다 좋은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 이에 대해 긍정한다면, 가령 눈먼 사랑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 그 눈먼 사랑을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아닌 일종의 유사(의사) 사랑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와 달리 사랑을 중립적으로 규정한다면 눈먼 사랑도 사랑으로 규정될 것이다.

[3] ) “세상만사는 잡종화를 통해서 생성되고, 변화한다. 역사상의 모든 주요한 변화는 이 잡종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89).

[4] ) 잡종화는 (같은) 시대와 문화 내에서 또는 그것을 가로 질러 일어나는 것으로도 보인다. 잡종화는 동일한 범주 내 에서 일어나는가 아니면 범주를 가로질러 일어나는가? 예를 들어,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돌과 물을 섞는 것도 잡 종화인가?

[5] ) 따라서 독점자본에 국가를 섞는(잡종화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물론 좋은 잡종화가 아니다.

[6] )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를 각각 목・화・토・금・수와 연관시키는 저자의 이론구성은 형이상학적인 유비로서 특 별히 찬성하거나 반론을 제기하고 싶지 않다.

[7] ) 저자 역시 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하면서 그 점을 예상하고 있다(592).

[8] ) 예를 들어, 천성, 천륜, 천리, 천인(天人), 인내천에서 천의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가에서 천명이 왕조 나 통치자의 정당성과 관련하여 자주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공자의 유명한 지천명이라는 구절처럼, 천명은 또 한 개인의 운명과도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나아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 천이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님도 물 론이다.

[9] ) ‘국가역시 현실주의적 차원에서 과도하게 악마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을 여기서는 유보하겠다. 물론 유교의 가부장적/온정주의적 국가관은 국가를 부모와 동일시하면서 또는 비유하면서 과도하게 이상화해 왔다

[10] ) 심지어 대기업의 노동자들 역시 노조를 통해 특권화된 노동자 지위를 대물림하려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11] ) 저자는 부정부패 소탕을 위한 전면전을 선언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법을 강하게 새울 때다라고 역설한다(831, 839). 이는 결론에서 간략히 언급할 과도기의 곤경을 제기하는데, 그것은 최소국가라는 목표 도달(유토피아의 실현)을 좌초시키기 십상이다.

[12] ) 평자는 유토피아 사상의 도덕적인 생명력 자체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기존사회에 대한 치열 한 비판과 바람직한 사회의 희구라는 인류의 원망(願望)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