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8

묘법연화경이란 무엇인가 : 각원사 임기영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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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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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원사임기영 ・ 2018. 12. 1


‘누구나 다 부처님’ 초대승적 사상 담겨 수많은 불보살 출현…장대한 드라마 / <법화경>이라는 이름 을 처음 접한 것이 1957년경이니까 40여년쯤 전 일이다. 그 무렵 불교사상 강의를 듣기 위해 대각사의 청년단체모임인 대각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 모임의 부회장인 황대법선 보살님께서 <법화경>에는 굉장한 부처님세계가 전개되고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당시는 요즘처럼 경전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뿐 아니라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접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안진호 선생님이 <묘법연화경>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법화경>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여 부른 이름이다. 초발심의 도반들이 성북동 계곡에 있던 안선생님의 조그만 기와집을 방문했고 그때 나도 한질 구입했다. 별로 경전에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 ‘귀중한 진리가 있다’라는 주변의 권유로 나도 두터운 양장본으로 된 상하 두권을 샀다. 기독교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가 불교에 귀의했던 황보살님은 이 경전을 읽고 법화신앙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고 했지만 당시에 나는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냥 종교적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을 지닌 채 나의 서가 가장 끝자리에 <법화경>을 모셔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법화경>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천태와 법화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근래 십여년간의 일이다. <법화경>의 본 경명은 <삿드 달마 푼다리카 수트라> 이다. 바른 법을 흰 연꽃에 비유하고 있는 경이다. 바른법을 묘법(妙法)이라고 번역했다. 흰 연꽃은 진흙탕인 연못에서 핀다. 오염된 현실에서 올바른 부처님법을 실현하는 대승불교의 실현자를 흰 연꽃으로 상징한 것이다. <법화경>은 초기 대승불교경전을 대표하고 있다. 이 경을 보면 초기대승불교운동이 얼마나 격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초기 불탑신앙은 재가불교신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시대를 거쳐옴에 따라 출가와 재가의 구별없이 혼연한 사부대중이 참여하게 되면서 대승불교운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이 가운데서 새로운 경전의 결집을 지향하는 그룹 가운데 혁신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한 것이 법화신앙인들이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기존의 소승불교인이라고 하는 성문이나 연각을 얕보는 일없이 모두 대승보살로 인도하려는 의지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말하자면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념보다는 일체중생이 모두 다 성불한다 라는 초대승적인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말하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라는 대전제를 보여 주는 것이 이 경이다.그러기 때문에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고 수많은 보살의 명호를 <법화경>에서 읽을 수 있다. 수많은 부처님이 계신 것은 중생의 수가 무수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충만하시다. 과거세상에도 미래세상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빛으로 충만하다. <법화경>을 읽으면 실로 장대한 드라마를 연상케된다. 부처님은 세상 안팎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의 마음속에 충만하신 생명이시다. 이 생명의 부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불자라고 한다.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법화회’가 사찰에서 열렸고, 수많은 고승들이 <법화경>을 독송하고 연구하여 많은 영험담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 경을 서사(書寫)하고 마음에 새겨 읽고 외우며 주변인들에게 설법해 주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이들을 ‘법사’라고 하고, 이 설법하는 분들을 ‘여래의 사도’라고 하였다.여래의 사도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부대중을 위해 법을 설한다. 여래의 방은 자비심이요, 옷은 온유하게 참아내는 마음이요, 여래의 자리는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비운 마음자리이다.<법화경>은 중국에서는 천태종의 주요 소의경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삼론종 법상종 열반종 등 모든 조사들이 소중히 하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법화신앙이 큰 주류의 하나로서 <법화경> 연구가 크게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좀 약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인의 신앙관의 저변을 흐르고 있는 큰 맥은 법화신앙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법화경>이라는 이름 을 처음 접한것이 1957년경이니까 40여년쯤 전 일이다. 그무렵 불교사상 강의를 듣기 위해 대각사의 청년단체모임인 대각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 모임의 부회장인 황대법선 보살님께서 <법화경>에는 굉장한 부처님세계가 전개되고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당시는 요즘처럼 경전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뿐 아니라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접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후 안진호선생님이 <묘법연화경>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영자<동국대 불교대학원장>
 
부처님께서 무량의처삼매에 드시니 하늘에서 가지가지 꽃이 뿌려지고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큰 광명을 놓으시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신통변화를 나타내시니 미륵보살이 대중을 대표하여 문수보살에게 그러한 신통변화가 나타난 까닭을 물었다. 문수는 과거의 부처님이 <법화경(法華經)>을 설할 때 반드시 이러한 상서가 나타났는데 이제 또 그러하니 <법화경>을 설하실 게 틀림없다고 대답한다. ‘서품’에 나오는 이 말은 과거의 부처님이 항상 <법화경>을 설해 왔다 하여 이 경의 특별함을 강조하고 있다.

<법화경>은 <묘법연화경>을 줄여 부르는 말로 범어 이름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harmapundarika-sutra)이다. 연꽃이 물에 자라되 물에 젖지 않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뜻을 묘법이라 하여 붙인 말이다. 한역본에 7가지가 있으나 구마라습역의 <묘법연화경>이 가장 널리 유통되었으며, 달마급다의 역은 <첨품묘법연화경>으로 제명되었고, 또 법호가 번역한 <정법화경>도 유명하여 이의 3본이 번역이 잘 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예로부터 “뭇 별 가운데 달이 으뜸이듯이 수많은 경전 가운데 법화경이 으뜸”이라고 한 경의 말을 인용, 이 경이 최고의 경전이라고 주장해 오기도 했다. 이 경을 의지하여 생긴 종파도 여러 개며 중국불교사상 유명한 천태지의(天台智)대사의 천태교관은 <법화경>을 연구하여 수립한 것이다. <화엄경>과 쌍벽을 이루어 <법화경>은 천태교학의 체계를 성립시키고 <화엄경>은 화엄교학의 체계를 수립하여 중국 교학사상 가장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천태교학 정돈…화엄경과 쌍벽 적문.본문으로 구성…총 28품

28품으로 되어 있는 전체 경문의 전반 후반을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으로 구분하여 제법 실상의 이치를 천명하였는데 적문에서는 ‘방편품’이 가장 중요하고 본문은 ‘여래수량품’이 가장 중요한 품이다. <법화경>을 실교법문(實敎法門)이라 말하면서 삼승(三乘)의 방편으로 설한 권교(權敎)를 모아 구경 일불승(一佛乘)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 대의를 삼는다. 이를 회삼승귀일승(會三乘歸一乘)이라 말해왔다. ‘방편품’에서 부처님의 일대사 인연을 밝힌 대목과 제법실상을 밝힌 10여시설(十如是說)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님들은 일대사 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여래의 지견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들어오게 해주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10여시설을 근거로 하여 천태 지자대사는 일념삼천설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은 이미 구원겁 전에 성불하셨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정반왕궁에 태어나 출가하고 수도하여 도를 이루었다고 알고 있지만 나는 이미 구원겁 전에 성불하였느니라.” 본래성불의 이 이치를 바로 아는 것이 여래의 지견을 얻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일승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여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중생이 무상보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떤 것도 구경목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성불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 천차별 만차별의 방편이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경의 사구게(四句偈)에서 밝혀 놓은 실상법문을 깨닫는 것이다. “천지 만유는 본래부터 항상 적멸한 모습 그대로다.(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불자가 도를 닦고 나면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리라.(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이 본래 적멸상이란 이 말씀이 일승의 묘법이다. 결국 고요한 적멸의 모습 그 하나를 보여 주신 것이다.
 
대승불교경전의 하나. 천태종, 일련종의 중심 성전. 원제는 산스크리트어로 『사다르마푼다리카 수트라』(백연화처럼 올바른 가르침). 산스크리트 원전, 티벳어역 및 한역 3종이 현존한다. 한역은 축법호역 『정법화경』, 쿠마라지바 역 『묘법연화경』, 사나굴다 달마급다 공역 『첨품묘법연화경』인데,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쿠마라지바 역이다. 27(또는 28)장으로 되어있는데, 제2장 <방편품>을 중심으로 한 부분이 가장 일찍 성립하고, 그 사상은 <개삼현일(開三顯一)>, <개권현실(開權顯實)> 등이라고 한다. 즉 불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응해서 삼승의 가르침을 펼쳤는데, 궁극적으로 진리는 단 하나라고 하여서, 종래의 대승ㆍ소승의 대립의 지양통일을 도모하고 있다. 늦게 성립한 후반 부분의 중심은 <여래수량품(如來數量品)>으로, 여기에서는 보리수 밑에서 성불한 석가는 가짜 모습으로, 실은 오백진점겁(五百塵点劫)이라는 태고에 성불했다고 하며, 영원의 불의 이상을 밝히고 있다. 최후의 6장은 가장 새로운 것인데, 그중에서 관음의 신앙을 주장하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관음경』으로서 독립해서 존중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천태 지의가 『법화현의』, 『법화문구』의 2대 주석서를 저술하고, 본경을 제경 중에서 최고의 진리를 주장한 것으로서 존중했는데 경의 전반을 <적문(迹門)>, 후반을 <본문(本門)>이라고 하는 것도 지의에 의해서 보급되었다.
 
<사상적 배경>

법화경은 대승불교의 경전이다. 잘 알려진 대로 부파불교가 난해하고 번쇄한 교리를 수립하고 어려운 실천에 전념하던 때 민중들과 그 지도자들 사이에 하나의 새로운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대승불교이다. 이 대승불교는 한때 한곳에서 급속히 흥기한 것이 아니고 오랜 동안 여 저기에서 운동이 일어나면서 여러 가지가 한데 어울려 대승불교를 형성해 갔다. 이들의 주장은 부파불교에서 잊고 있었던 석가모니. 붓다의 기본입장으로 복귀하려는 면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부파불교의 일부 엘리트 중심의 불교나 전문가 중심의 불교가 아닌 모든 인간, 생명 있는 모든 존재에게 널리 개방할 것을 주장했다. 스스로의 실천에 의해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타인이 아니다. 자기만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곳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란 어려운 일이다. 일반 민중이 구하는 일은, 어려운 교리나 엄격한 실천이 아니다. 여기에 국한하다 보면 일상생활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운동은 이렇게 하여 자기만을 위한 독선에서 벗어나 민중에게 불교를 개방하고, 보다 자유롭게 사상을 해석하면서, 서서히 일반 민중의 구제, 즉 이타행을 강조하게 된다. 대승불교의 개방성은 불교의 궁극목적인 해탈. 열반. 붓다관에 극명하게 표출된다. 초기불교시대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열반의 개현은, 대승불교로 계승되어 모든 중생의 성불을 주장하게 된다. 이런 주장의 주체는 출가. 재가를 가리지 않는 佛敎를 숭배하는 그룹과 보살단들이었다. 법화경 결집을 한 것은 주로 보살단 즉 보디삿드바 가아나였다. 이들은 붓다란 현재 석가모니불만이 아니라 과거 미래에도 부처님이 계시고 공간적으로도 사방. 팔방. 시방에도 계시다고 보았다. 이제 부처님은 시간공간을 초월하게 되고, 그리고 성불은 특정계층 인종이 아닌 모든 성별을 초월한 중생에게 개방되었다. 법화경은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번역과 구성>
법화경의 번역은 한문으로 3세기 중엽이후 6회 하였는데 현재 세본 만이 남아 전한다. 竺法護가 太康7년(286)에 長安에서 번역한 것이 正法華經 10권이고, 羅什이 弘始 8년 (406)에 長安에서 한것이 유명한 妙法蓮華經 이다. 그후 隨나라 仁壽元年(601)에 闡那 館多. 灸多가 공역한 것이 添品妙法蓮華經이다. 이중에서 羅什역이 가장 널리 읽혀졌는데 이 세 본은 모두 原典이 다른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티벱역, 위글어역, 西夏어역, 몽고어역, 만주어역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한글역(간경도감)이 있다. 이 번역이 다수 있다는 것은 이 경이 많은 지역에서 여러 민족이 애호하였음을 입증한다. 19세기 이후 산스크리트 원전의 사본이 네팔과 카슈갈에서 발견되면서 로마자화하여 출판되었는데 그후 불란서의 뷰르누후(1852)가 불어로 번역하고, 케른이(1884) 영어로 번역하면서 日本어역도 20세기에 번역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元曉의 <法華宗要> 이후 이에 대한 연구와 신앙이 고려 天杻宗 개종이후,상당히 유포되었다. 이에 선행하여 중국에서는 라집이후 연구가 상당히 활발하였는데 天杻智凱(천뉴지개 : 538-597)의 三大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三大部란 [法華玄義] [法華文句] [摩可言止觀]을 말하는데 天杻사상을 응축시킨 저술들이다. 특히 이 경은 日本에 준 영향이 세계 어느나라보다 커서 그 연구만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도 日本佛敎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경의 제목인 妙法蓮華經(나집역)은 [白蓮華에 비유되는 훌륭한敎法]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인도의 世親은 이 경은 小乘을 떠나 여래의 깊고 깊은 비밀을 갈무린 법을 증험한다고 말했다. 즉 연화가 오탁한 물속에 피면서도 더럽혀지지 않고 꽃을 피우는 것은, 바로 모든 법이 그대로 실상이라는 대승의 법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경의 분류를 전 28품중에 앞에 14품은 迹門이라하고 뒤에 14품은 本門이라 하여 두 문으로 나누어 해석하였다. 앞의 迹門에서는 佛法에 대하여 말해주고 本門에서는 佛身즉 부처님의 영원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현대 법화경연구학자들에 의하면,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법화경의 구성을 제1류, 제2류, 제3류로 나누고 있다. 현대학자의 연구와 天杻해석을 대응시켜 본다면, 현대적 분류인 제1류에 해당하는 부분을 소위 원시8품(2品-9品)이라 하는데 이는 천태해석의 述門의 正宗分에 해당된다. 이 정종분은 方便品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천태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품이다. 이 방편품은 諸法이 곧 實相이라고 하는 법화경의 사상적 요체가 되는 품이고 8품 중에서 방편품 그다음품은 이 法說을 되풀이하여 낮은 근기를 위해 설한 것으로 본다. 현대학자의 연구에 의한 제1류의 청중(對傑衆)은 대개 聲聞과 緣覺들이고, 제2류와 제3류는 보살중이다. 이 청중들의 근기에 따라 이 내용을 분류한 것은 상당이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켜준다.
그리고 현대불교학의 분류인 제2류에 해당하는 부분(10品-21品)이 天杻해석의 本門의 正宗分이 된다. 여기에 如來壽量品이 핵심을 이루는데 천태해석에 의하면 <가까움을 열어 먼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가까움은 석가모니부처님, 먼 것은 영원한 근원의 부처님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대승불교의 佛陀觀을 읽을 수 있다.
<개략적 내용>
一乘과 三乘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한 초기에는, 대승과 소승이 대립하는 뜻에서 대승이었다. 초기의 대승이란 말은 가치적으로 우월하다는 의미가 강했다. 그러므로 초기대승불교는 대․소승 대립의 대승이다. 그런데 법화경의 근본정신은, 대승에서 다시 一乘을 주장한다. 一乘이란 一佛乘을 뜻하는데 이 一乘이 진실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초기 반야경에는 小乘대신에 아라한 법, 벽지불법이라 쓰고 보살법도 병용하고 있다. 따라서 小乘이란 말은 후대에 쓰여 진 것을 알 수 있다. 법화경에서 一乘을 진실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당시의 불교 교단 내에는 잘못된 사고 때문에 一乘을 알지 못하고 三乘 즉 성문. 연각. 보살승이 진실이라고 믿는 부류가 상당이 결정적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편품에서는 [여러 부처님이 중득하신 바 법에는 무량한 방편력으로 중생을 위해 설한다]라고하고, [시방불국토 가운데, 오직 一乘法만이 있을 뿐 三乘도 三來도 없다. 있다면 方便說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一佛乘이란 법화경의 가르침이 二乘이나 三乘이 아닌 오직 成佛의 한 가지 길만을 가르친다는 의미이다. 天杻불교에서는 이것을 敎一乘이라한다. 이 가르침은 여러 부처님(諸佛), 과거불, 미래불, 현재불, 석가불 등 五佛 모두가 一乘인 成佛의 같은 도를 가르친다고 天杻불교에서는 말한다. 따라서 혹 다른 성문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三乘이란 방편이기 때문에 三乘을 열어 진실의 一乘을 나타낸다는 것은 법화경의 일관된 사상이다. 경에는 [모든 부처님이 방편력으로 一佛乘에서 三乘을 分別하신다]라고 되어있다. 이 三乘觀은 有部派교설의 三乘觀을 법화경에서 비판한 것이 된다. 三乘의 뜻을 설명해 보기로 한다. 성문승, 연각승(혹은 벽지불승), 보살승을 三乘이라하는데, 우선 성문이란 부처님(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며 수행하는 사람으로, 구체적으로는 불제자들을 일컫는다. 성문이 이상으로 하는 것은, 四聖諦의 교설을 듣고 자기의 번뇌를 모두 단제해 버리고 아라한(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자신만을 위하는 수행이 중요하지 타인을 구제한다는 조건은 없는 것이다. 연각․ 벽지불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은 받지 않고서 홀로 진리인 법을 체득한 사람을 말한다. 역사적 석가모니를 이에 해당시키고 있다. 구체적으로 인도사상계에서는 홀로 가며, 홀로 머무르는 수행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자기의 깨달음에 안주한 사람들이었다. 보살이란 원래는 서원에 의해 성불한 석가모니의 전세의 명칭이다. 그 석가모니의 길을 본받아 자신의 성불을 자각하는 대승수행자들이다. 이 가르침을 보살승이라고 한다. 이들은 석가모니의 전세와 같은 보살행을 닦아서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성불할 것을 이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문. 연각 등은 부처님의 본의에 어긋난다고 하고, 성문․연각승은 열등한 가르침이라고 小乘이라고 폄하하고 비판한 것이다. 즉 [성문의 성불 못한다는 사상]을 小乘이라하여 大乘과 준별한 보살들이다. 유마경에서 보여주는 대․소승의 가치적 구별을 말한다.
<二乘의 구제>
상술한대로 성문. 연각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은 전통적으로 아라한이라고 한다. 흔히 四向四果에서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을 말하는데, 네 번째 단계인 아라한과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영원히 열반에 머물러 생사유전의 삶이 없는 자리를 이른다. 그러므로 이 二乘은 보살행을 실천하여 부처님의 과를 증득하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성불이 不可能하다고 주장하는 부류이므로 소승인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佛果를 얻어 成佛하려고 노력함으로 大乘이다. 법화경에서는 불교사에서 보는 이 두 체계 小乘․ 大乘 모두를 긍정하고 있다. 다른 대승불교 특히 유마경 같은 경에서는 보살승. 불승만을 강조하고 성문. 연각을 폄하하는 것이 특색인데 비해 법화경은 성문. 연각의 二乘들이 모두 구제의 대상이 된다. 二乘을 구제하는 일 즉 授記作佛이라고 하는데 성불의 기별을 주어 궁극에는 二乘이 모두 성불하도록 하는 것을 과제로 하는 것이 이 경이다. 다른 경전과는 달리 부파(소승)불교를 捨棄하는 것이 아니라 부파의 교리도 포용하고 있는 것이 二乘의 수기작불사상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佛法의 普遍性과 平等性을 一佛乘, 一乘妙法이라고 하였다. 一乘이란 超大乘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方便과 眞實>
불교에서 方便이란 사상은 아주 중요하다. 방편의 의미는, 중생이 부처 즉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처님이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의 경지로 끌어들이는 길도 방편이다. 후자는 대승불교의 입장이고 전자는 초기불교의 의미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가르침도 방편이다. 가르침은 그대로 깨달음은 아니지만 깨달음에도 인도해 준다.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하나 즉 一乘이지만, 배워야 할 사람의 능력, 소질, 성격은 허다하다. 그 많은 근기에 상응하여 가르치는 방법도 하나일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 "내가 성불한 이래 가지가지 인연. 가지가지 비유로 널리 가르치니 방편이 수없이 많다"고 하였다. 그 목적은 "중생을 인도하여 여러 곳의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방편이란 수단으로서 진실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임을 알수 있다. 따라서 불교는 모두 방편이 된다. 따라서 三乘의 불교는 모두 부처님의 방편력에 의해 설해진 법이다. 그런데 이세가지 다른 果에서 각각 안주한다면 부처님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그 궁극목적을 밝히고 三乘의 과득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三乘의 과득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 이상 아라한 벽지불도 모두 佛道를 구하려고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불도를 구하는 이는 누구나 보살임을 자각하여 전진해 가야 한다. 혹시 불제자 성문의 입장에서 그것이 궁극목적이라 생각하였더라도 부처님의 마음에서 보면 그 아라한이란 성불로 가는 과도단계이므로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진실인 佛乘를 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중생의 근기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심에서 부처님이 수단으로 이끈다는 것이 方便사상이다. 이 方便은 법사품에서는 [방편문을 여는 것이 진실상을 시현한다]고 하였다.
방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것이 방편임을 알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직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편이 방편임을 알았을 때 비로소 진실이 나타나 밝혀진다. 이 방편과 진실의 양자사이에는 앞뒤가 있지 않다. 三乘이 方便이라고 감득 했을 때 一乘이 진실임을 터득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
전술한대로 법화경의 후반 14품을 본문이라 하고 그 본론에 해당하는 품이 여래수량품이라고 하였다. 여래수량품은 久遠의 석가모니부처님을 명확히 밝히는 경전으로 유명하다. 석가모니불은 영원한 과거에 성불하고 몇 번이나 이 세상에 출현하여 이 법화경을 말씀한다는 것이 이품의 주제다. 그 성불의 시간은 5백천만억 나유타아승지겁에 비유되는 무한한 과거에 성불하였는데, 시간적으로 무량함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가 성불한 수명은 숫자로 비유할 때 무한, 즉 久遠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법화경을 설하시는 지금의 석가모니는 80년의 생애를 우리에게 보였지만 그것은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낸 것이며 실제로는 영원한 本佛 즉 근원불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육신을 보인 것은 모든 중생에게 佛知見을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경에서 말한다. 결국 이 세상에 육신을 나타내신 것이 방편이라면 적멸을 보인 것도 방편이라고 하겠다. 부처님이 영원이 이 세상에 머무르실 때 그 모습을 보고서 집착심 많은 범부중생들은 박덕한 생각으로 五欲에 탐착하고 정진할 뜻을 내지 않게 됨을 우려하여 스스로 부처님은 입멸을 선택하였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이 품에서 의사 父子의 비유는 이를 설명해 준다. 부처님 自我게라고 하는 게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보일지언정 실제로는 멸도한 것이 아니며, 항상 머물러 이 법을 설하노라" 그런데 중생이 전도된 생각 때문에 가까이 있는데도 나를 보지 못한다고 계속하고 있다. 법화경의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8相 성도의 모습의 그 석가모니불을 통하여, 생멸을 넘어선 영원한 부처님, 다시 말하면 모든 부처님을 통합하는 원리로서의 근원불을 현출시킨 것이다.
<종교적 신행>
법화경의 영원한 부처님은, 사리를 봉안한 불탑인 스투파신앙과 법신사리로 법화경을 봉안하는 차이티아 칠보탑신앙의 일상적 신행으로 구체화된다. 부처님 탑에서 경전을 지니는 신앙으로 변천된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을 받아 지니고 환희하며 다른 이에게 가르쳐 주고,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믿음을 심화시키는 것이 법화경의 신행생활이라 하겠다.
“모든 중생 성불할 수 있다”
가르침 종합 ‘敎觀 正法’체계 완성
육바라밀 수행 삼매체득 나타내
법화경만큼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애독되어진 경전도 드물 것이다. 일찍이 삼론 법상 화엄종의 학자 선사에 이르기까지 두루 이 경을 연구하고 주석서를 내놓았고 마침내 중국에서는 천태가(天台家)에서 소의경전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아마도 이 경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즉 이경은 기존의 경전들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을 화해하고 종합하여 비로소 하나의 거대한 정법체계를 완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소승 대승 연각 성문 보살의 사상을 방편과 진실이라는 조화의 틀위에 교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기존의 수행법인 수지 독송 해설 서사의 수행법을 선정삼매(禪定三昧) 체득의 수행으로 체계화하여 바야흐로 교관(敎觀)이 겸비된 경전이다. 그래서 역경가들은 이 경을 ‘정법화(정법을 설하는 경), 방등법화(방등의 가르침을 설하는 경), 묘법화(묘법을 설하는 경)’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법화경의 선정사상은 관(觀)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를 경에서는 삼매행으로 설하고 있는 것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이른바 깨달음이란 제법 실상이라는 우주만물의 진실된 실상을 깨닫는 것이니 이는 불지를 얻어야만 체득되는 경계이므로 보통 대승의 몰록 깨닫는(대승돈각) 법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 상근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하근기 나아가서 일체중생에게도 근기를 성숙시켜 성불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경의 특징이 있다.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불지는 무량의처삼매속에 들어 부처의 세계 불지견을 열어보이고(開示) 그 불지견에 깨달아 들어가는(悟人) 갖가지 삼매행이 묘음보살행, 약왕보살행, 관음보살행, 보현보살행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의 선정수행은 주로 육바라밀의 선정이 설해진다. 이와같은 선정사상으로 인하여 중국에서는 북제의 혜문(慧文) 혜사(慧思, 514~577)등의 선사(禪師)가 선정을 닦다가 법화경을 애독하게 되었고, 이어 천태대사(538~597)도 선정에 들어 법화삼매를 깨달아 개오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설잠(雪岑, 속명 김시습 1435~1493)은 <연경별찬>에서 ‘이 경에는 선가(禪家)의 뜻이 들어 있다’고 하는 등 법화경에서는 선정의 깨달음이 크게 중시된다. 현재 유통되는 법화경은 한역본으로는 축법호(竺法護)역의 <정법화경(正法華經)>, 구마라집(鳩摩羅什)역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그리고 사나굽다( 那 多)역의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의 세 본이 있는데, 이중 구마라집본의 묘법연화경이 비교적 쉬운 문장으로 법화경의 뜻을 잘 나타냈다고 평가되어 법화경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사용되어 왔다. 법화경의 범본 원전은 11세기 이전 필사본과 그밖의 단편적인 범본들이 전해오던 것을 모아 범어 원본을 복원한 범본 법화경이 있다. 법화경에서 얻는 깨달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승(성문 연각)도 성불할 수 있다는 이승작불(二乘作佛)사상과 석가모니 부처님은 본래 구원겁전에서 성불했다는 구원실성(久遠實成)사상이라 할 것이다. 첫째, 방편품을 중심으로 한 법화경 전반부에서는 제법실상을 십여시(十如是)로 설하여 모든 중생이 동등하게 법계의 실상을 갖추고 있다는 일승 묘법이 밝혀져 있는데 이와같은 입장에서 볼때 법화경을 설하기 이전까지 무상과 공에 집착하여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비난 받았던 이승, 여인, 악인마저도 부처님의 자비방편과 진실의 지혜에 의하여 수기받아 장차 성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한 본 뜻이 일대사인연이므로 부처의 지견을 열어서(開) 보여주어(悟) 부처의 지혜에 들어가게(入)한다는 법화경의 임무는 이승이건 삼승이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보장을 해주고 나아가서는 아이들이 놀면서 모래로 불탑을 만들거나 장난으로 불상을 그리거나 혹은 산란한 마음으로 ‘나무불’이라 하여도 조그마한 선심(善心)의 싹이 결국 발심하여 불도에 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아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불도에 이르게 하고 있다.
육근 청정해야 실상경계 본다


무량의 뜻으로 보살을 가르치는 법
오종법사 수행설해 염불의 길 안내
<법화경>에서는 몰록 깨달아 성불(頓悟成佛)하는 여래의 선사상을 설하고 있다. 돈오성불이란 중생으로 하여금 보살도를 이루어 곧 바로 불도에 들어가는 일불승으로, 일념으로 실상의 이치를 깨달아 일체의 번뇌와 습기를 끊고 일체를 보고 알아 통달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달리 일념신해(一念信解: 일념으로 믿음과 이해) 일념수희(一念隨喜:일념으로 따라 기뻐함)로도 표현한다. 그러나 <법화경>이 다른 대승경전보다 강조하는 것은 불도를 향해 나아가는 보살을 가르치는 법(敎菩薩法)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항상 호념하시는 경(佛所護念)이라는 데 있다. 부처님께서 호념(護念, Parigraha)하고 섭수(攝受)하는 경이란 ‘서품’에서는 ‘무량의 뜻으로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라고 설하고, ‘안락행품’에서는 ‘제천이 주야로 항상 법을 위하여 위호(衛護)한다’고 하며, ‘다라니품’에서는 ‘두 보살(막왕보살,용시보살) 두 하늘(비사문천왕, 지국천왕) 십나찰녀도 다섯가지 신주(神呪)에 의하여 <법화경>을 수지하는 오종법사(五種法師: 법화경을 수지 독송 해설 서사 하는 이)를 옹호(擁護)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이 <법화경>을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것은 곧 돈오의 일불승을 설하는 비밀법을 설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일불승 여래선정의 경계는 경의 서두로부터 보살 대중과 성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서품’에서 부처는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 법화삼매의 일종으로 실상을 아는 삼매)에 들어 백호에서 동방으로 만팔천토를 비추어 불국토를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무언의 설법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의 대중들은 문수보살을 제외하고 이 광명이 뜻하는 바 실상의 법을 알지 못하여 의혹에 쌓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방편품’에 이르면 삼매속에서 일어나신 부처님께서 온갖 선정 삼매등 미증유의 법을 성취했다고 밝히고 오직 부처님이라야만 제법실상을 깨달아 알게 된다고 선언하면서, 이른바 제법은 “이와 같은 상(相), 이와 같은 성(性), 이와같은 체(體), 이와 같은 역(力), 이와 같은 작(作), 이와 같은 인(因), 이와 같은 연(緣), 이와 같은 과(果), 이와 같은 보(報), 이와 같은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라고 실상의 경계를 밝히자, 지혜제일 성문제자 사리불도 부처님의 본 뜻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실상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여래는 삼승 방편 일승 진실의 법을 폈다고 선언하자, 오천의 대중이 퇴장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면 이러한 여래의 선정으로 도달하는 돈각의 실상은 어떻게 체득되는가? 이를 위하여 부처는 무수한 인연과 비유가 필요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이어 육근청정(六根淸淨)으로 얻어지는 수행법을 설하고 있다. 육근이 청정해지는 과정은 경을 통달해 지니고(受持), 읽고(讀), 외우고(誦), 해설(解說)하고, 베껴씀으로써(書寫) 끊임없이 <법화경>의 오종법사를 수행하면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六根: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에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의 육근은 자신의 업(業)에 의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의식하였으나, 이제 법화의 공덕으로 인하여 이것은 모두 허망한 감각들임을 깨닫고 참회하면 자연 오욕락이 허망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를 <법화론(法華論>에서는 “보통 사람들도 <법화경>의 힘으로 인해 뛰어난 근기의 활동력을 얻어 비록 초지(初地: 견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모가 낳아 주신 육안(肉眼: 육근)으로 삼천대천세계의 안팎을 꿰뚫어 보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육근을 장엄하면 이제 냄새만 맡던 비근(鼻根)에서 안근의 색을 볼수 있고, 소리를 듣고, 촉감을 느끼며, 법을 아는 등의 상호 작용이 이루어진다. 곧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안(肉眼)에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작용이 갖춰지므로써 신통력이 생기고 불가사의한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나머지 오근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이 육근청정을 얻는 과정이고 법화삼매에 드는 과정이다. 다음에는 법화삼매행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삼승 모두 깨달아 일승에 들라
법화삼매란 <법화경>의 대의인 삼승을 모아 모두 일불승에 들어가는 여래의 지견을 체득하는 선정삼매이다. <법화경>은 모든 중생이 속히 불도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하는데, 이 법은 스스로 깨달아 체득하는 것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도에 나아가는 차제행이 아닌 속히 불도를 이루는 돈각의 법이라 한다. 따라서 법화 보살은 불차제행을 닦아 번뇌를 끊지 않고 보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법화의 일승법은 여래장이며 대승법이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부처와 다르지 않고 여래장을 지니어 반드시 안락을 이룰 것이므로 가르침을 따라 행하면 차제행으로 이승의 길을 가지 않고 번뇌를 끊지 않고서 그대로 삼매와 각종 다라니를 얻어 불도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여 연꽃이 한꺼번에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법화삼매를 행하면 많은 결과가 한꺼번에 갖추어 진다고 한다. 삼매는 등지(等持)라고 하는데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는 것. ‘심일경성(心一境性)’ 혹은 ‘심일단성(心一端性)이라고 하여,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력을 말한다. 또 다라니는 총지(總持)라고 번역되며 삼매를 닦아 오랫동안 익히면 이루어지는데 제법실상의 지혜와 함께 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삼매와 다라니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삼매와 다라니는 정신통일하는 지와 관이 선과 관련되어 보살의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되어 있다.
<법화경>에서 법화삼매의 선정을 설한 곳으로는 방편품 일불승의 비유인 화택삼거(火宅三車)중 대력백우거와 안락행품의 선정수행을 들 수 있다. 화택삼거란 <법화경> 일곱 가지 비유중 첫 번째 나오는 비유이다. 어느 장자가 불타는 집에서 놀이에 빠져 있는 아들들을 구하기 위해 이들이 가장 좋아하던 사슴의 수레, 양의 수레, 소가 끄는 수레를 각각 주겠다고 하여 일단 불타는 집에서 나오게 한 다음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크고 힘이 센 소가 끄는 수레를 아들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수레는 여래의 법체를 비유하며 수레를 장식한 장엄구들은 일불승에 들기 위한 수행을 나타낸다. 여기서 수레에 깔아 놓은 고운 대자리나 붉은 베개등은 온갖 관(觀)을 닦아 선정이 이루어지면 삼매에 들고(煉) 삼매와 그 덕으로 정관이 바르게 성숙하며(熏) 자재한 선정에 들어감(修)을 가리킨다. 또 안락행품에서는 신 구 의 서원(身口意誓願)안락행을 설하여 보살이 행할 바 선정의 수행을 밝히고 있다. 곧 “인욕의 경지에 머물러 부드럽고 온화하며 착하고 순하며 조급하고 성질내지 않고 마음에 공포가 없으며 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온갖 사물의 여실상을 관하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다”라고 실상정관에 드는 보살이 수행하는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상불경보살 약왕보살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등도 보살행과 교화행을 펴고 법화의 법을 들은 다음 법화삼매와 다라니를 얻어 일불승에 드는 <법화경> 선정삼매의 모습을 설하고 있다. 불교의 실천체계는 계 정 혜(戒定慧)를 중심으로 되어 있다. 계로써 신 구 의(身口意) 삼업을 다스려 조절하며, 이렇게 계를 청정히 한 바탕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선정을 계발하며, 선정삼매가 청정해지면 지혜가 청정해져서 지혜로써 번뇌를 끊고 보리를 성취하는 수행이다. <법화경> 법화삼매 역시 계근(戒根)이 청정해지므로 여러 상서를 선정속에서 보아 법의 희열을 느끼고, 정근(定根)이 청정해져서 깊은 선정이 생겨 삼매에 들며, 혜근(慧根)이 청정해지므로써 법화삼매로 이끄는 보현보살 및 시방불을 삼매속에 뵙고 마침내 불지견을 얻어 보살정위에 들어간다. 따라서 법화삼매를 증득하므로써 <법화경>의 구경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법화실상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롭고 바르게 사는 길‘정법화경’ 산스크리트 원전과 가까워
<법화경>의 원래 이름은 산스크리트어의 ‘삿다르마-푼다리카-수트라(Saddharma-Pundarika-Sutra)’이다. ‘삿다르마(Saddharma)’란, ‘삿(Sat)’과 ‘다르마(dharma)’라는 말의 합성어로 ‘삿’은 ‘진실한, 바른(正), 훌륭한(善), 뛰어난(勝)’ 등과 같은 뜻을 가졌으며, ‘다르마’는 한역하면 ‘법(法)’이다. 여기서 ‘삿’과 ‘다르마’를 합친 ‘삿다르마’라는 말은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가 생긴다. 중국의 축법호(竺法護)는 ‘정법(正法)’이라 번역했고, 네덜란드의 케른(Kern)은 ‘진실한 법’으로, 또 프랑스의 부르뉴프(Burnouf)는 ‘훌륭한 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일본 이와나미(岩波) 문고의 범어 번역본에는 ‘바른 가르침’으로 되어 있고 쿠마라지바(鳩摩羅什)는 이를 ‘묘법(妙法)’이라 번역했다.‘푼다리카(Pundarika)’는 흰 연꽃(白蓮華)이다. 인도 사람들은 흰 연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여기는데, 진흙 속에서 나며 더러운 흙탕물에서 꽃을 피우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밝고 맑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은 속세에서 생활하면서도 속세에 물들지 않고 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 사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수트라(Sutra)’는 ‘꿴 실’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꽃을 실에 꿰어 머리에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줄기의 계통으로 정리한 것을 ‘수트라’라 했다. 중국의 ‘경(經)’이라는 말도 원래는 날줄이라는 뜻인데, 거기서 도덕이나 성인의 말씀을 엮은 책이라는 뜻이 나왔으니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 하겠다. 요컨대 ‘삿다르마-푼다리카-수트라’ 즉 <법화경>이란, ‘속세에 있으면서 현상의 변화에 현혹되지 않고 우주의 진리에 순응하여 바르게 살며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면서 세상을 이상향(理想鄕)으로 만들어 가는 길. 더욱이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본질을 평등하게 갖고 있다는 것을 설한 더없이 거룩한 가르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법화경>은 중국의 서진(西晉) 경제(景帝)의 태강(太康) 7년(286)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과 요진(姚秦) 문환제(文桓帝)의 홍시(弘始) 8년(406)에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수(隋) 문제(文帝) 원년(元年) (601)에 즈나나구프타( 那 多) 등이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7권 등의 완역본이 있고 일부분만 번역한 초역(抄譯)이 있다. 그러면 이들 번역본과 산스크리트 원전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첨품묘법연화경>의 서문에는 <법화경>의 여러 한역에 관해 설명한 문헌학적인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즉 “옛날 돈황의 사문 축법호가 진무(晉武) 때 정법화(正法華)를 번역했다.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은 다시 나습(羅什)에게 청하여 묘법연화를 번역케 했다. …” 현재 우리들은 <법화경>이라고 하면 무조건 구마라지바의 <묘법연화경>만을 <법화경>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전과 가장 가까운 것은 <정법화경>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생 구제할 수 있어야 부처
우주 대생명인 부처님 심부름꾼으로 살라
서품(序品) 즉 서(序)란, 발단(發端) 또는 ‘실마리’란 뜻인데, 사연(事緣)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 ‘서품’은 경전을 모두 작성한 후 마지막으로 쓰는 것으로, 이 속에는 경전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서품’이라고 해서 그저 <법화경>을 설하게 된 사연, 즉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왜 설했는가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쉽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경전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서품이기 때문이다.
우선 <법화경>은 보살행을 가르치는 것(敎菩薩法)이며, 모든 부처님이 꼭 간직하고 있어야 할 넓고 큰, 최고의 경전임과 동시에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믿고 간직하는 사람을 항상 보호하시는 가르침(佛所護念)이다. 첫 번째로 보살행을 가르친다는 것은 중생의 근기를 성숙시켜 보살로 인도하고 그 보살들이 해야할 일들 즉 보살도를 구체적으로 예시하는 가르침이란 말이다. <금강경>에서는 보살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라는 네 가지의 생각(四相)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법화경>의 가르침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가아(假我)나 브라흐만 교(婆羅門敎)의 실아(實我)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中道)인 진아(眞我)를 찾아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이른바 제법실상(諸法實相)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제법실상이라는 말에는 만물만상은 인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뜻도 있지만, 앞에서 말한 진아 즉 진리(眞理) 또는 우주의 대생명(大生命)이 현상세계에 나타난 것이라는 뜻에서 천태 대사(天台大師)는 “제법은 실상이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심부름꾼(使者)으로서 부처님을 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에게 전하여 그들을 모두 보살로 인도하자는 것이 교보살법이라는 것, 즉 보살을 훈계하며 그들이 모두 흰 연꽃(白蓮華)처럼 더러운 세속(世俗)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染) 말아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특히 ‘서품’에서는 부처님이란 우주의 대생명 즉 진리이며 그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에 수많은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과 ‘연등불(燃燈佛)’을 등장시키고 있다. 즉 처음의 일월등명불이 세상을 떠나자 또 일월등명불이 출현하였으니 이렇게 하기를 계속, 2만의 일월등명불이 세상에 출현하였다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최후의 일월등명불의 여덟 왕자 가운데 맨끝에 ‘활활 타오르는 등불’이라는 연등(燃燈) 또는 정광(錠光)여래라고 하는 이름의 부처님이 계셨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모두가 광명(光明)이라는 뜻이므로 이름하여 비로자나(毘盧遮那) 즉 바이로차나(Vairocana)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아미타바(Amitabha) 즉 무량광(無量光)이며 아미타유스(Amitayus) 즉 무량수(無量壽)이다. 이렇게 부처님이란 공간적으로 일체변조(一切遍照)임과 동시에 시간적으로 영원(永遠)한 것이므로 2만(二萬)의 부처님이 똑같은 이름의 일월등명불로 출현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부처님들은 모두가 여래(如來)이시다. 여래란 진리를 몸으로 나타내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는 실천의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혜를 완성한 사람이라도 중생을 건지지 못한다면 부처님이라 할 수 없으며, 부처님이 되려면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서품’의 에센스라 하겠다.
보살로 거듭나게 하는 가르침
현상은 인연 모임, 실상은 하나의 대생명
방편이란 ‘방법, 교묘한 수단, 편리한 수단, 진실에 바탕을 두고 진실의 세계로 인도하는 수단’ 등으로 해석되며, ‘중생을 구제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법화경>에서는 ‘여러 가지 사연(種種因緣)과 갖가지 비유(種種譬喩)와 이론적인 이야기를 널리 펴서 말한 것(廣演言敎)’이라고 방편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진리란, 말이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此法不可示 言辭相寂滅) 방편을 통해 진리를 나타낸다고 한다. 천태 대사는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출현하신 부처님의 설법을 적문(迹門)이라 하고, 모습도 이름도 없는 진리 그 자체로써 진리를 설하는 부분을 본문(本門)이라 말한다. 그리고 <법화경>은 부처님이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그 뜻에 맞도록 가르침을 설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근기에 관계없이, 묻는 사람이 없는데도 몸소 증득한 것을 부처님 스스로 말씀하신 것, 즉 무문자설(無問自說)인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적문의 부처님이신 석존(釋尊)께서는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고 한량이 없어, 그 지혜의 법문 즉 설법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諸佛智慧 甚深無量 其智慧門 難解難入), 일체의 성문과 독각(獨覺)인 벽지불은 부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一切聲聞 支佛 所不能知). 왜냐하면 부처님은 일찍이 수많은 부처님들을 섬기면서 갖가지의 가르침을 받고 그 많은 부처님들이 행하신 모든 수행을 그대로 몸에 익혀(所以者何 佛曾親近 百千萬億 無數諸佛 盡行諸佛 無量道法) 온갖 장애를 용맹스런 마음으로 완전히 극복해 정진하니 그 명성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이렇게 무한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아직까지 아무도 얻지 못한 최고의 진리를 마침내 깨달았기 때문에(勇猛精進 名稱普聞 成就甚深 未曾有法), 그 진리를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설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 깊이 담겨져 있는 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隨宜所說 意趣難解)”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보살이 갖추어야할 일체지(一切智) 즉 평등상(平等相)에 대한 설법이 바로 십여시(十如是)이다. 십여시란, 일체의 현상(現象)을 열 개의 카테고리로 묶어 설명한 것이다. 즉 1)사물마다의 모습(如是相) 2)성질(如是性) 3)체상(如是體) 4)능력(如是力) 5)작용(如是作) 6)원인(如是因) 7)보조원인(如是緣) 8)결과(如是果) 9)과보(如是報)가 10)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사실은 한결같이 평등한 것이다(如是本末究竟等)는 말이다. 즉 현상계(有爲)의 모든 것은 천태만상이지만, 그 현상은 일시적인 인(因)과 연(緣)의 모임에 지나지 않을 뿐, 그 내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의 대생명(眞理), 즉 절대(無爲)이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만물만상이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일체지를 증득토록 하여 보살로 거듭 태어나게 하는 <법화경>은, 부처님이 임시로 범정(凡情)에 순하여 세간의 욕락(欲樂)에 수응하는 교설(世界悉壇)이나, 중생의 근기를 살펴 각각 근기에 맞는 각각위인설법(各各爲人悉壇)이나, 번뇌·악업 따위의 중생의 미망을 없애는 대치설법(對治悉壇)이 아닌, 제일의(第一義)의 이치를 설하여 진증(眞證)에 들어가도록 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오직 위없는 깨달음만을 설한다(正直捨方便 但說無上道).
부처 출현은 일체중생 해탈선언
모든 존재 본래부터 열반 적정
부처님께서는 사리푸트라(舍利弗)의 간청을 세 번씩이나 거절하다가 “그대가 거듭 세 번씩이나 간청하니 내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이제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마음에 깊이 간직하라. 내가 그대들을 위해 더욱 자세히 알기 쉽게 말하겠다”며 청법(請法)을 승낙하셨다. 그러자 이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 가운데 비구·비구니·우바새· 우바이 5천 명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떠나가 버렸다. 그 까닭은 이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죄업이 무겁고 깊을 뿐만 아니라 증상만(增上慢)에 빠져 있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은 것처럼 착각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은 척해 왔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잠자코 계실 뿐 말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렇게 증상만에 빠진 사람들은 물러가는 게 마땅하다”고 하시며 설법을 시작하셨다. “모든 부처님은 때와 장소에 따라 법을 설하므로 그 참뜻은 알기 어렵다.
나 또한 무수한 방편으로 갖가지 과거의 사연과 비유와 적절한 말로써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고 있지만, 진실 그 자체는 헤아려 보거나 분별해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니, 부처님들만이 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모든 부처님 세존들은 오직 하나뿐인 중대사를 인(因)과 연(緣)으로 해서(一大事因緣), 이 세상에 모습을 짓고 출현하신다. 사리불이여, 무엇을 가리켜 부처님 세존들이 오직 하나뿐인 중대사(目的)를 인과 연으로 해서 이 세상에 출현하느냐 하면,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들은 일체의 중생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지혜(知見)를 스스로가 열어서(開) 청정한 마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시며, 또 부처님의 지혜를 중생들에게 나타내 보이기(示) 위해 세상에 출현하시며, 또 그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중생들이 스스로 깨닫도록(悟) 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시며, 부처님의 지혜에 깊이 들어가서(入) 평등상과 차별상을 모두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깨닫는 길(道)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가리켜 모든 부처님들은 오직 하나의 일대사(目的)를 원인(因)과 조건(緣)으로 해서 세상에 출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당장 중생들에게 최고의 가르침 설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착각하고 이 가르침 안 받으니, 이런 사람 과거세에 선행 쌓지 않았으며 5관 욕망 집착하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번뇌 끊지 못하더니 여러 욕망 인연되어 3악도에 떨어지고 육도(六途)를 헤매면서 여러 고통 갖추어 겪고 전생의 악업은 미세한 모습으로 모태(母胎) 속에 들었다가 날 적마다 불어나니 박덕하고 복도 없어 뭇 고통에 시달린다. 이런 사람 위해 방편을 베풀어 여러 고통 끊는 길 말해 마음의 평안(涅槃) 가르쳤으나, 이는 소승의 멸제일 뿐 참 열반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 본래부터(諸法從本來) 평안하고 조화되어 조용한 모습이라(常自寂滅相)” 하시며 지금까지 설한 열반은 소승의 열반이며 대승의 열반은 모든 존재가 바로 열반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부처님들은 오직 보살만을 교화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항상 이 하나의 목적 즉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가르쳐 그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는 것이다”고 하시며 앞으로 부처님이 될 보살은 소승의 열반을 구하지 말고 자기들도 일대사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 것을 깨닫도록 하셨으니, 정말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의 대전환이며 대선언(大宣言)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 아들
모래로 탑세우고 ‘나무불’외워도 불도성취
‘방편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천차만별이지만 그 속에 있는 진리 즉 대생명은 근원적으로 평등(平等)하다는 것과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확실히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시며 “마음의 평안만을 위하여 열반을 구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셨다. 이어서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적멸상(寂滅相)이므로 따로 적멸(涅槃)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아이들이 놀이할 때 모래 모아 탑 세우거나 혹은 부처님의 상(像)을 모신 절(廟)에 들어가 한 손을 들고 ‘나무불(南無佛)’하고 소리내어 불러도 그것을 연으로 하여 점차로 공덕 쌓아 고통 뽑아 주겠다는 큰마음(大悲心) 갖춘 후 모두 불도 성취했다”고 설하셨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리푸트라(舍利弗)는 너무나 가슴이 벅차 올라 뛸 듯이 기뻐하며 스스로가 이해한 것을 부처님께 여쭙는다.
“저는 부처님께서 오래 전부터 ‘누구든지 수행을 쌓으면 부처님이 된다’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고 또 많은 보살들이 장차 성불하리라는 예언(授記)을 받는 것을 보았지만, 저희들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에게는 전혀 그런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에 저는 오랫동안 수행에 수행을 거듭하더라도 결국은 부처님처럼 한량없는 지혜를 얻을 수 없는 몸이 아닌가 하고 매우 슬퍼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듣게 되어 모든 의혹(疑惑)과 원통해 하는 마음을 송두리째 없애버리니 마음과 몸이 느긋해져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평안합니다. 오늘 저는 비로소 참다운 부처님의 아들(佛子)이며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났고 부처님의 교화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반드시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하여 천신(天)과 사람(人)들에게 존경받는 몸이 되어 위없는 최고의 가르침 널리 설해서 많은 보살을 교화할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자 부처님께서는 “나는 전생에서 그대에게 최고의 깨달음인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도록 가르쳤는데, 이 세상에 와서는 그것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내가 손쉽게 설한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이미 완전한 열반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해 버렸으니, 나는 그대에게 부처님의 아들로서 세운 본래의 서원(誓願)과 그 서원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갖가지의 수행을 다시 기억해 내도록 하기 위해 그대를 비롯한 모든 성문들에게 이 대승의 가르침인 묘법연화(妙法蓮華)·교보살법(敎菩薩法)·불소호념(佛所護念)을 설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부처님께서는 “사리푸트라(舍利弗)여, 그대는 생각조차 미치지 못할 만큼의 아득한 미래 세에 이를 때까지 한량없는 수많은 부처님을 섬기며 그 부처님들이 설하는 바른 가르침(正法)을 굳게 지켜 보살로서 해야 할 수행을 완전히 닦은 후, 기필코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하리니, 이름은 화광여래(華光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이라 하며 그 나라의 이름은 번뇌가 없는 청정한 리구(離垢)라 하리라” 하시며 수기(授記)한다.
이렇듯 사리푸트라는 자기가 부처님의 아들 즉 보살임을 알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수기한 것이므로,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神子)임을 알았듯이 우리들도 중생이 아닌 원생(願生) 즉 부처님의 제자가 아닌 부처님의 아들(佛子)임을 알아야 한다.
사바세계는 불타는 집
3승 가르침으로 중생 불길서 구해내
부처님께서는 “지금까지는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菩薩乘)의 3승(乘)을 분별해서 설했다. 이것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한 것이나 이 3승 모두가 부처가 되기 위한 수단(方便)일 뿐, 사실은 모두가 성불을 위한 하나의 가르침 즉 1불승(一佛乘)이다”고 천명하시며, <법화경>의 유명한 일곱 가지의 비유(七喩) 가운데 하나인 ‘화택의 비유(火宅喩)’를 설하신다. 원래 <법화경>에는 열 여섯 가지의 비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명한 것이 일곱 가지다. 그러면 ‘화택유’ 즉 ‘삼계화택유(三界火宅喩)’를 듣기로 하자. “어느 마을에 자식 많고 나이 많은 억만장자가 있었다. 그는 넓고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은 이미 낡아서 폐가처럼 황폐해 있었다. 새들이 집을 짓고 있었으며 뱀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큰 저택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출입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에 불이나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장자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왔으나 그가 사랑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집안에서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므로 피할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인 장자의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위험하니 빨리 밖으로 나오너라’ 고 밖에서 크게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이 났다는 것이 무엇이며 불이 집을 태운다고 하는데 그 집이란 무엇인지, 또 불에 타서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집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문밖의 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자인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아이들이 평소에 원했던 것을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너희들이 항상 원하던 양(羊)이 끄는 수레, 사슴(鹿)이 끄는 수레, 소(牛)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라’고 소리쳤다. 장자는 비록 늙기는 했지만 힘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써서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와 소가 끄는 수레는 모두 아이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손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던지고 앞을 다투어, 오직 하나뿐인 좁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말한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는 그림자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으나 아이들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며 막무가내로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약속한 양·사슴·소가 끄는 수레보다 더 크고 훌륭하며 날쌘, 흰 소(白牛)가 끄는 수레를 아이들에게 전부 나눠 주었으므로 아이들은 모두 만족했다.” 이상이 장자화택(長者火宅) 또는 삼거화택(三車火宅),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다. 불난 집(火宅)은 3계(三界) 즉 사바세계를, 아이들은 중생을, 장자는 부처님을 비유한 것이다. 양·사슴·소의 세 가지 수레는 각각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인 3승을 비유한 것이며, 대백우거(大白牛車)는 1불승(一佛乘)에 비유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1불승을 3승으로 나누어 설한다고 하시며 앞의 ‘방편품’에서 설한 3승방편(三乘方便) 1승진실(一乘眞實)의 가르침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무지와 탐욕 괴로움의 근본
진리 깨닫고 보면 우주가 자기 것
3계(三界)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일컫는다. 바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바세계(娑婆世界)다. 사바(娑婆)는 범어 사바(Sabha)를 음역한 것으로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번역하는데, 원래 뜻은 노름판 즉 도박장이다. 정말 적절한 말이다. 더럽고 치사스럽고 구린내 나는 예토(穢土)임에 틀림없다. “이 세상은 마치 불타고 있는 집과 같아 조금도 편안치 못한 곳이니(三界無安 猶如火宅), 온갖 괴로움에 가득 차 있어 매우 두려울 따름이다(衆苦充滿 甚可怖畏). 항상 삶에 대한 괴로움, 늙음에 대한 슬픔, 병에 대한 근심, 죽음에 대한 걱정 등이(常有生老 病死憂患) 솟구치는 불길 같이 맹렬히 타오르며 그칠 줄 모른다(如是等火 熾燃不息). 여래인 나는 일찍이 이 미혹의 세계를 벗어나(如來已離 三界火宅), 세상의 번거로운 일에 영향 받지 않는 경지에 머물고 보니(寂然閑居 安處林野), 지금 이 세상은 모두 다 나의 것이며(今此三界 皆是我有),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자식들인데(其中衆生 悉是吾子), 지금 이곳은 갖가지 환난이 많아(而今此處 多諸患難), 오직 나만이 그들을 구하고 지켜줄 수 있다(唯我一人 能爲救護).” 위의 글은 비유품에 나오는 게송 중의 한 구절인데 쿠마라지바(鳩摩羅什)의 명 번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참으로 이 세상이란 범부에게는 조금도 편안한 곳이 없다. 마치 불난 집과 같아서 갖가지 고통이 가득 차 무서울 따름이다. 인생의 가지가지 괴로움과 늙어 가는 괴로움과 병들어 아픈 고통과 죽음에 대한 괴로움 등 모든 근심과 걱정이 불처럼 타올라서 그치지 않는다.” 이 말은 생·노·병·사 그 자체의 괴로움보다 그것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즉 무지와 탐욕에 의해 마음에 불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이 곧 괴로움의 근본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미혹한 세계를 이미 떠나 세상의 번거로운 일에 영향 받지 않는 경지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은 눈뜬 사람의 청정한 마음의 경지를 읊은 것인데, 이것은 번거로운 장소에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번거로운 곳에 있을지라도 그 마음은 거기에 영향 받지 않고 항상 청정하고 평안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삼계는 나의 소유이다. 따라서 이 삼계에 살고 있는 생명 있는 것들 모두가 내 자식들이다. 그런데 이 삼계에는 갖가지 근심과 재난이 넘쳐 살기 힘겹다. 오직 나만이 그들을 구제하고 지켜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 삼계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보면 이 우주가 자기 것이다’고 하는 대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즉 깨달음이란 이 우주와 자기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있는 동일체임을 아는 것이며 깨치지 못한 사람에게는 우주와 내가 상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우주 전체에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므로 ‘나’는 어느덧 우주 전체에 퍼져가게 되고 ‘우주는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자유자재하여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며, 제 뜻대로 행동하여도 모두가 남을 살려주는 행위가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속에 살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가 내 자식이며 형제이며 친구가 된다. 이와 같이 부처님과 우리들의 관계도 엄밀하게는 동일체이지만 자신을 존재케 해 준다는 측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부처님의 아들(佛子)이며 부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慈父)이신 것이다.
중생은 원래 부처님 아들
가르침 믿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지금까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들 즉 2승(二乘)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성문인 샤리푸트라(舍利弗)가 수기(授記)되는 것을 본 마하카샤파(大迦葉), 마하마우드가리야야니(大目 連), 마하카티야야니(迦 延), 수부티(須菩提) 등의 네 사람의 대성문(大聲聞)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완전히 이해하여 다시 향상(向上)하려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자신들이 불자(佛子) 즉 붓다-푸트라(Buddha-putra)임을 천명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 곁에서 실종되었던 궁자(窮子)가 여러 나라를 유랑하기를 50여 년, 지금은 완전히 타락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어떤 성(城)을 찾아왔다. 한편 아버지인 장자(長者)는 이곳 저곳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아들이 찾아온 그 성시(城市)에 삶의 터전을 꾸리고 재산을 늘려 지금은 큰 부자가 되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궁자가 예고 없이 장자의 저택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장자는 한눈에 그가 자기 아들임을 알아보고 급히 부리는 사람을 시켜 그를 데리고 오도록 했다. 그러나 아들은 뜻하지 않은 일에 놀라,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 지레 겁을 먹어 기절하고 만다. 장자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몰라보고 심근(心根)도 완전히 타락해 버린 것을 알고 일단 그 아들을 놓아 보내고 나서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그는 은밀히 두 사람을 보내 그 아들에게 접근시켜 자기 저택에 데리고 와서 일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장자는 이것저것 방편을 써서 그 아들에게 접근하여 차츰차츰 익숙해지도록 했다. 그러기를 20년이 흘렀다. 궁자는 아버지인 장자와 마음이 서로 통하여 재산 관리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궁자는 자기가 고용인이라는 처지를 잊지 않고 마음을 더욱 의연히 하여, 장자가 가진 재산은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궁자는 지금까지 자기가 비열하게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부끄러워 하며 넓고 큰 마음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런 아들의 마음을 알게된 장자는, 자기의 임종 때에 이르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의 친아들이니 내 모든 재산을 그에게 물려준다”고 선언했다. 그 아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 돌연히 생기자 “지금 이 보배(寶藏)가 스스로 내 것이 되었다”고 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제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첫째, 장자와 그 아들이 원래부터 아버지와 아들이었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비유인가. 장자인 아버지는 부처님으로, 그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간 어린 애는 직접적으로는 이 비유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마하카샤파(摩訶迦葉)를 비롯한 성문들에 의제(擬制)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버리고 여러 나라를 찾아 유랑(流浪)하는 궁자는 지금껏 부처님의 유인에도 접하지 못하고 따라서 성문으로도 되지 못한 미혹한 범부라고 한다면, 이 궁자는 생사의 세계에 침몰(沈淪)하는 미혹한 중생으로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까지도 포함된 우리 모든 중생이 원래부터 부처님과 친자관계에 있는 것이 된다. 즉 우리들 모두가 본래적으로 부처의 아들, 불자(佛子)라고 하는 사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이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스승이 제자의 득법(得法), 또는 설법 등을 증명하고 인가하는 경우를 인가(印可)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비유를 가지고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한 네 사람의 큰 성문들에게 각각 제6장 수기품에서 수기하게 된다.
부처님 설법은 평등한데…
중생의 소질과 능력 맞게 방편 제시
이 약초유품은, 앞장인 제4장 신해품에서 마하카샤파(摩訶迦葉)를 비롯한 네 사람의 큰 성문들이 자신들이 이해한 것을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자, 석존께서도 역시 비유를 들어 설법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지상의 식물과 그 위에 내리는 은혜로운 비를 소재로 한 것으로서 약초유(藥草喩)라고 한다. 특히 여기서는 약초란 사람들의 생활에 관계가 깊은 식물로 모든 식물을 대표한 것이다. 구마라지바(鳩摩羅什)의 <묘법연화경>에서 약초유는 다음과 같다. 3천 대천세계의 온갖 곳, 산과 강, 골짜기와 평지에는 여러 가지의 풀, 나무, 약초가 무성해 있다. 거기에 큰 구름이 몰려와 일시에 비를 뿌리면 초목은 크든 작든 모두 한결같이 그 비에 젖어 저마다 자기가 가진 종류와 성질에 따라 생장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도 이 큰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으며, 큰 음성을 내시어 널리 전 세계의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것도 이 큰 구름이 3천 대천세계의 국토를 덮고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에 부처님은 중생의 소질과 능력을 모두 아시고 각각의 중생에게 가장 알맞은 법을 설하신다. 그것을 들은 중생들은 저마다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불도(佛道)에 들어오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본래 본질과 작용이 하나(一相一味)이다. 그것은 동일한 해탈, 동일한 이욕(離欲), 동일한 열반이여서 결국에는 부처님의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설법을 받아들이는 중생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누구인가, 어떤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부처님뿐이다. 마치 여러 식물들이 자기들의 상·중·하 라고 하는 성질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오직 부처님만이 중생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의향을 살펴 아무렇게나 부처님의 지혜를 설하지는 아니했던 것이다. 이상의 비유 이야기 뜻은 방편품, 비유품, 신해품으로 차례차례 살펴보면 곧 분명해진다. 제2장의 방편품 이래로 설해온 방편과 진실이라는 테마가 여기서도 새로운 비유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3승방편 1승진실의 취지를 설할지라도 이 약초유품에서는 지금까지와 조금 시점이 다르다. 방편의 가르침과 진실의 가르침 중, 특히 방편의 가르침에 시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비에 비유되는 부처님의 설법은 평등하게 모든 중생에게 내린다. 그것은 본질과 작용이 하나, 즉 1상1미이며 본래 모든 사람을 부처님의 지혜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설법은 받아들이는 쪽에 있는 중생에게는 여러 가지의 차이가 있다. 큰 나무는 많은 양의 비를 흡수하나 작은 것은 작은 양만을 흡수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중생 측의 차이에 의해 본래 본질과 작용이 하나라는 가르침도 여러 가지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설법에 즈음하여 중생의 현 실태를 인식했을 때, 진실한 가르침은 어쨌든 방편의 가르침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의 큰 자비가 사람과 경우에 따라 교묘하고도 현실적인 방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중생 측의 현실에서 보면, 법화경의 1승진실이라는 뜻과 반대로 3승진실이라고 볼 수도 있다
깨달음의 경지는 오직 ‘하나’
용도 따르는 그릇처럼 의욕이 인간 구별
약초유품에는 쿠마라지바(鳩摩羅什)가 번역한 <묘법화>에 누락되고 없는 비유가 있다. 해와 달의 비유(日月喩)와 작병자의 비유(作甁者喩), 생맹인의 비유(生盲人喩)가 그것인데, 산스크리트 본(梵本)과 <첨품법화경(添品法華經)>에는 있다. 이 누락되어 알려지지 않은 세 가지의 비유 가운데, 해와 달 비유와 특히 병(甁) 만드는 사람의 비유를 소개할까 한다. “카샤파(迦葉)여, 여래는 사람들의 지도자로서 불공평하지 않다. 마치 해와 달빛이 모든 세간을 비춰,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또는 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래에 있는 사람이나, 방향(芳香)을 내뿜는 사람이나 악취를 내뿜는 사람을 불문하고, 어떠한 곳에서나 한결같이 비춰 얼룩이 없는 것과 같다. 참으로 이와 같이 완전히 깨달음에 도달한 여래가 놓는 부처님의 지혜와 의지의 광명은 다섯 갈래의 운명을 더듬어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빛나고, 바른 가르침은 각각의 의향(意向)에 따라서 위대한 탈 것(菩薩乘)이나 독각의 탈 것(獨覺乘)이나 성문의 탈 것(聲聞乘) 등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공평하게 가르쳐 준다. 또 여래의 지혜 광명은 과부족이 없어 그 결과 모든 사람은 복덕과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런 경우 카샤파여, 세 가지 탈 것 즉 세 가지의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람이 따로따로 행동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까닭에 세 가지의 가르침(三乘)이 설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자 장로 마하 카샤파는 세존에게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 가지의 탈 것이 없다면 어찌하여 현재 성문이라든가, 독각이라든가, 보살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까.” 이에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카샤파여, 마치 도공이 같은 점토로 여러 가지의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떤 것은 설탕 그릇이 되고, 어떤 것은 요구르트 그릇이 되며, 어떤 것은 버터(乳酪) 혹은 우유의 그릇으로 되고, 또 조악한 것은 오물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와 같이 사용되는 점토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담는 물건에 따라서 그릇의 종류가 구별될 따름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오직 하나의 탈것인 부처님의 탈 것만이 있을 뿐, 제2의 탈것도, 제3의 탈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장로 마하 카샤파는 세존에게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러 가지의 의향을 가진 사람들이 3계에서 벗어났다고 하면 그들에게 오직 하나인 깨달음의 경지가 있는 것입니까, 둘 혹은 세 가지의 깨달음의 경지가 있는 것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모든 가르침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 깨달음의 경지는 열리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인 깨달음의 경지가 있을 뿐, 둘 혹은 셋은 없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도공이 도기를 만들 적에 똑같은 흙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설탕이나 우유나 요구르트나 물 등의 그릇이 되는 것같이, 어떤 것은 오물의 그릇이 되고, 어떤 것은 버터 그릇이 되지만, 도공은 똑같은 점토를 가지고 갖가지 그릇을 만든다. 어떤 물건의 그릇이 되는가는 담는 물건에 따라 정해진다. 이와 같이 세상의 인간에게는 차별이 없지만, 여래는 그들의 의욕에 따라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다.
미래의 성불’ 의미로 사용
나라·시대명 등 六事열거 상례
이 수기품은 앞서 제4장에서 마하카샤파(摩訶迦葉)를 비롯하여 마우드가리야야나(大目 連)에 이르기까지 네 사람의 큰 성문들에게 부처님의 수기가 차례차례로 주어진다.‘수기’란 범어로 비야카라나(Vyakarana) 라고 하며 ‘기별(記 )’·‘기설(記說)’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수기(授記)는 주(授)는 쪽에서 말한 것이며, ‘수기(受記)’는 받는 편에서 말한 것이다. 불전 가운데 설해져 있는 수기라는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를 크게 나누면, (1) 제자 등이 죽은 뒤에 태어날 곳을 밝히는 것 (2)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또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의 마음을 굳건하게 해주는 증과(證果)의 예언 약속 (3) 미래에 성불한다는 예언(豫言) 등의 세 가지 뜻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대승경전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기라는 말은 세 번째의 의미인 ‘미래에 성불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대단히 많다. <법화경>도 그러하다. 미래 성불의 수기에는 반드시 성불하는 나라의 이름, 성불하는 시대의 이름, 정법과 상법이 존폐하는 기간 등이 열거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것을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 6사(六事)라고 칭한다. (1) 행인(行因)은 미래세에서 여러 부처님 세존을 공양하고 찬탄하는 모습 (2) 득과(得果)는 최후신(最後身)에서 성불한 부처님의 이름(佛名) (3) 겁국(劫國)은 성불하는 곳의 나라와 시대(劫)의 이름 (4) 불수(佛壽)는 성불한 부처님의 수명 (5) 정상(正像)은 정법과 상법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 (6) 국정(國淨)은 성불한 나라의 장엄된 청정한 모양 등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인데 이는 경론에 따라 다소 들고남이 있다. 이제 이 수기품에 설해진 네 사람의 큰 성문 수기 가운데, 한 가지 예로서 마하카샤파의 6사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미래세에서 3백만억의 여러 부처님을 섬긴다 (2) 부처가 되어 광명여래(光明如來)라 한다 (3) 그 국토의 이름을 광덕(光德)이라 하고 시대(劫)를 대장엄(大莊嚴)이라 한다 (4) 부처님의 수명은 12소겁(小劫) (5) 정법이 세상에 머무는 것은 20소겁, 상법 또한 20소겁 (6) 국계(國界) 장엄하여 청정하며 유리(瑠璃)를 땅으로 하고 평탄하다. 큰 성문 네 사람의 6사는 저마다 다르지만 장엄된 불국토의 모습에는 공통된 표현을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법화경>에서는 제1장 ‘수기’가 개설되어 4대 성문들의 수기 양상이 자세히 설해져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법화경>의 수기는 미래 성불의 약속 또는 증명이다. <법화경>의 제2장 방편품에서 ‘지금까지는 절대로 성불할 수 없다’는 성문 등 2승에 대한 성불의 예언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진실한 가르침은 단 한 가지의 부처가 되기 위한 가르침이며, 2승·3승이라는 가르침은 방편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제자들은 부처님의 아들(佛子)이어서 2승도 기필코 장래에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 즉 2승 작불(作佛)이 설해진 것이다. 따라서 2승에 대해 부처님께서 성불의 예언을 주신다는 수기는 2승 작불이라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증한다는 의미에서 설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법화경 ⑫수기품 ②수기(授記)의 참뜻
수기(授記)란, ‘그대는 반드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증의 의미로 부처님께서 기별(記 )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고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법화경>에는 이 수기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미 ‘비유품’에서 샤리푸트라(舍利弗)가 수기됐으며, 이 ‘수기품’에서는 마하카샤파(摩訶迦葉)·마우드가리야야나(大目 連)·수부티(須菩提)·카티야야나(迦 延) 등의 네 사람이 수기된다. 그런데 수기란, 어느 특정한 큰 제자들에게만 성불의 예언을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앞으로 ‘제8장 5백제자수기품’과 ‘제9장 수학무학인기품’까지 읽어가면 5백인이든 2천인이든 무수한 사람들이 수기되고, 다시 ‘제12장 제바달다품’에 이르면 악인 제바달다(提婆達多)와 겨우 여덟 살짜리 용녀(龍女)까지도 성불을 인정받고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필코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석존께서는 이 진실을 <법화경>에 의해서 밝힌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보증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석존께서 주신 수기는 안일하게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첫 번째, 석존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당신은 부처다’고 하시지 않고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신다. 원래부터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당신은 이미 부처다’고 한다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사람이 많을 것이다. 즉 범부는 자칫 그것을 안일하게 받아 들여선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이러이러한 행을 계속하면……’이라는 조건을 붙인다. 즉 수기는 앞으로 더욱 열심히 수행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렇다고 그러한 마음을 자기만족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오직 자기만의 기쁨으로 만끽하고자 한다면 부처가 된들 아무 의미가 없다. 자기만이 구제되어 부처가 되고 싶다거나 자기만이 부처가 되어 자유자재한 몸이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은 세상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세 번째로, ‘왜 꼭 수기를 받아야 하는가?’ 참으로 학문과 신앙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불교는 이성으로 아는 가르침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학문 쪽은 이성으로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종교는 아는 것만으로는 가치를 반쪽 밖에 붙잡지 못한 셈이다. 이해한 것이 마음의 감격으로 변하면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생기면 저절로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넓혀가야만 한다. 이와 같이 ‘이해’가 ‘믿음’이 되어 그것이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는 행동’으로 전개돼야만 비로소 신앙이라 말할 수 있고 종교라 할 수 있다. 참다운 신앙에는 ‘힘(力)’이 있다. 그렇다면 그 ‘힘’의 원천인 ‘감격’은 어디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감격은 이론이나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혼(魂)과 혼의 맞부딪침에서 솟아난다. 위대한 인격에 맞부딪쳐서 그 거룩한 말씀을 혼으로 들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들의 가슴은 불타오른다. ‘그대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 한마디의 말씀이 불제자들에게는 결정적인 ‘힘’이 되기에 수기가 필요한 것으로 수기의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6왕자에 12인연법 설법
중생들 세세생생 ‘가르침’ 믿고 따라
이 ‘화성유품’을 산스크리트 본에서는 ‘전생의 인연’이라고 제명(題名)을 달고 있다. 이 품에는 전반부에 <법화경>이 아득한 옛날부터 설해져 내려온 것임을 밝히고 후반부에는 화성의 비유(化城喩)가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대통지승불께서는 원래 전륜성왕의 아들이었고 그에게는 열 여섯의 왕자가 있었다. 대통지승불께서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16왕자들은 그 권속들과 함께 즉시 보리도량에 계시는 부처님께 이르러 부처님을 찬탄하고 “여러 천신과 백성을 위해 법을 설하소서” 하고 부처님께 간청했다. 또 부처님께서 깨달았을 때, 시방의 5백만억이나 되는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큰 광명이 널리 세계를 비추었다. 이 상서로움에 놀란 브라흐만 왕들이 앞을 다투어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날아왔다. 가장 먼저 동방의 브라흐만 왕들이 그 궁전과 함께 서방으로 날아와 그 까닭을 찾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대통지승불께서 보리도량에 앉아 계시고 여러 천신을 비롯해 많은 대중이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16왕자가 부처님께 법을 청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를 본 브라흐만들은 즉시 부처님께 예배하고 자기들의 궁전을 바치며 부처님의 설법을 간청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이를 허락했다. 다음에는 동남방의 브라흐만이 날아와 부처님께 궁전을 바치며 설법을 청하고, 또 다음에는 남방의 브라흐만의 왕들이, 서남방과 하방의 브라흐만 왕들도 똑같았다. 최후에는 상방의 시킨(尸棄)이라는 브라흐만 왕을 우두머리로 해 똑같이 궁전을 바치며 “바라옵나니 이 공덕으로 널리 일체에 미치게 하여 나와 더불어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간청했던 것이다. 이 게송은 너무 유명해 불교의 모든 종파들이 회향문에 널리 사용하고 있고 장엄염불의 마지막에 사용되고 있다. 시방의 브라흐만의 권청과 16왕자의 간청을 받고 대통지승불께서는 3전12행상(三轉十二行相)에 의해 네 가지의 진리(四諦)를 설하고, 널리 12인연의 법을 설했다. 이 설법으로 많은 중생은 해탈을 얻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설법에도 역시 많은 중생이 해탈해 무수한 성문 대중이 생겼다. 16왕자는 모두 출가해 사미가 되어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의 법을 설하소서”라고 청했다. 이 간청에 의해 2만 겁이 지난 후에 대통지승불께서는 <법화경>을 설하신 것이다. 대통지승불께서는 <법화경>을 8만겁 동안 설하시고 나서 조용한 방에 들어가 8만 4천겁 동안 선정에 드셨다. 그러자 16인의 보살 사미들은 법좌에 올라 많은 중생에게 <법화경>을 설해 각각 6백만 나유타 항하사 수만큼의 중생을 교화해 이를 ‘16왕자의 법화복강(法華覆講)’이라 한다. 대통지승불께서 멸도하신 후에도 계속 설해져 많은 중생을 교화했는데 그 하나 하나의 보살 사미가 교화한 많은 중생들은 세세생생 태어날 때마다 항상 함께 태어나 그 보살 사미에게 가르침을 듣고 믿고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보살 사미들은 모두 성불해 지금 8방(八方)에 두 분씩 계시고 중앙에 부처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가 곧 현재의 나 석가모니불이다”며 전생부터 계속 <법화경>은 설해지고 있고 현재의 여러 분도 그때의 사부대중이었다. 이렇게 부처님과 우리들 전생의 사연에 대해 말씀하셨다.
2승방편·1승진실을 비유
有餘·無餘는 중생 위한 임시 휴식처
‘화성유품’에는 법화칠유(法華七喩) 중의 하나인 화성(化城)의 비유가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여기에 5백 요자나(由旬)가 계속되는 황야(荒野)가 있는데 인적은 끊어지고 험난한 길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을 지나면 진귀한 보배가 있어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그 보배가 있는 곳에 도달하려고 했다. 그들 가운데에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험난한 길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을 인솔해 이 험악한 곳을 통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행들은 피로해 그 이상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어, “이제부터 앞길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이미 지쳐버렸으니 되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지도자는 수단을 강구해 그가 가진 신통력에 의해 광야 가운데 3백 요자나가 되는 곳에 하나의 성(城)을 출현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무서워할 것 없다.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저기에 성이 있다. 성안에 들어가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만일 더 가고 싶은 사람은 보배가 있는 곳에 갈 수도 있다.” 이 때 피로해 지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자진해서 성안에 들어가 험악한 길을 통과할 수 있겠다고 안심을 했다. 그리하여 지도자는 그들이 성에서 휴식하여 피로가 풀려서 건강해진 것을 보고 신통력으로 출현시킨 성을 소멸시키고 나서 “여러분 출발합시다. 보배가 있는 곳은 가깝습니다. 그 성은 모두를 쉬게 하기 위해 내가 거짓으로 만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화성의 비유담은 2승(二乘)의 열반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임시로 방편에 의해서 시설한 것, 1불승(一佛乘)에 의한 부처님의 열반이야말로 진실한 열반이라고 하는, 2승방편(二乘方便) 일승진실(一乘眞實)을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 이야기 중의 지도자란 부처님이시며 이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의 대도사(大導師)가 돼 그들을 생사 번뇌의 악도에서 구제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만일 1불승만 설한다면 보배가 있는 곳이 멀다는 것에 지쳐서 물러나려고 하는 것과 같이 불도를 피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중도에 임시로 휴식처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여(有餘)와 무여(無餘)라고 하는 두 가지의 열반이다. 이 두 종류의 열반은 성문과 연각의 휴식처에 불과하다. 이 휴식처, 즉 신통력으로 출현시킨 성에서 보배가 있는 곳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는 보배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2승을 얻은 열반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오직 여래의 방편에 의해서 거짓으로 시설한 것에 불과하다며, “보물은 가까운 곳에 있다. 앞에 있는 이 성은 진실한 것이 아니며 내가 임시로 환상(幻像)으로 만들었다” 라고 설하며 화성의 비유를 끝맺는다. 그런데 왜 ‘화성유품’의 전반부에 전생의 사연이 설해져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제3장 비유품’의 3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에서 ‘제5장 약초유품’의 3초2목(三草二木)의 비유까지 일련의 비유를 통해서 3승이라는 방편 시설, 1승 진실을 설해 밝히고 다시 2승의 수기를 전개하고자 할 때에 현재 <법화경>의 설상(說相)을 그 근원으로까지 소급시켜서 구원(久遠)의 과거에 그 근거를 두려고 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법화경>의 1승진실을 구원의 시간 속으로 짜 넣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집주인=석존, 구슬=불성 비유
보배 갖고도 고생한 사람은 성문·연각 2승
제7장 ‘화성의 비유’에 의해 화성(化城)인 2승의 열반은 부처님의 방편이며 1불승이야말로 참다운 보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는 취지가 설해져 있다. 그것을 이어받아 우선 푸루나·마이트레야니·푸트라가 1천2백의 아라한을 대표해 최초로 등장해 지금까지 부처님의 방편 설법, 샤리푸트라와 수부티 등 4대성문에 대한 부처님의 수기, 과거와 현재의 연결, 모든 부처님의 자재한 신통력 등을 듣고 말없이 이해한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대중을 향해 “푸루나는 변설제일로서 훌륭하게 나의 정법을 지켜 왔으며, 나를 도와 가르침을 널리 전해 사람들을 이익케 함이 매우 컸다. 그는 과거세에도 부처님을 수행하며 정법을 지켜 왔고 설법제일이었다. 그는 미래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어 가르침이 밝게 빛난다는 이름인 법명여래(法明如來)라 하고, 그 시대를 보명(寶明)이라 하며, 나라는 매우 밝고 맑다는 선정(善淨)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시며 푸루나에게 수기하신 것이다. 이 푸루나의 수기를 듣고 1천2백의 아라한들은 푸루나와 똑같이 기별이 주어지기를 마음 속으로 원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마하카샤파를 향해 이제부터 1천2백인의 아라한들에게 미래 성불의 예언을 주라고 하시며 대표적으로 카운디냐( 陳如)에게 수기를 설하신다. 이름은 보명여래(普明如來)라 하고 1천2백의 아라한 중의 5백의 아라한인 우루빌바카샤파·가야카샤파·나디카샤파 등도 모두 차례차례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게 되니, 모두 같은 이름의 보명여래가 될 것이라고 설하신다. 이 5백인의 아라한들은 부처님의 수기에 크게 기뻐하며 지금까지 자기들의 허물을 참회하고 자신들의 현재 심경을 비유 이야기로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 말씀드린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부유한 친구의 집을 찾아가 음식 대접을 받고 술에 취해 그냥 잠들어 버렸습니다. 마침 그 때 그 집 주인은 급한 공무로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잠들어 있는 친구를 깨운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 집 주인은 가난하게 지내고 있는 그 친구를 위해 비싼 보배 구슬을 그의 저고리 안쪽에 매달아 두고 떠났습니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친구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잠이 깨어 일어나자 친구가 없는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방랑의 길에 올라 다른 나라에 이르러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적은 돈이 생겨도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 후 친구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이 사람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이 답답한 친구야, 훌륭한 사내가 어찌해 먹고 입는 것 때문에 그렇게 초라해져 버렸나. 나는 자네가 안락하게 지내도록 어떤 욕망도 만족시킬 수 있는 비싼 보배 구슬을 언젠가 자네가 찾아왔을 때, 자네 저고리 안쪽에 매달아 두었으니 지금도 그대로 있을 것 일세. 자네는 그것도 모르고 고생하고 구차하게 살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구먼. 자네는 이제 그 보물로 소용되는 것을 사들인다면 항상 무엇이든지 뜻대로 돼 가난하거나 부족함이 없을 것 일세’ 라고 말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자신의 옷 안쪽에 있는 보석에 대해 알지 못했던 남자는 성문·연각의 2승, 그 보석을 매달아 준 친구는 석존, 보배구슬은 불성을 비유한 것이다.
내면에 간직돼 있는 불성
깨달음통해 드러 내는 것
샤리푸트라(舍利弗)가 대승 사상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었음에 대해 기뻐하는 말을 들은 석존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이 매우 흥미롭다.“샤리푸트라여, 그대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나의 제자였다. 그대는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자기 혼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나는 그대로 하여금 본래의 서원(本願)에 의해 행했던 바를 생각해 내도록 하겠다.” 이것을 <묘법연화경>의 번역자 쿠마라지바(鳩摩羅什)는 다음과 같이 격조 높이 기술하고 있다. 샤리푸트라여, 나는 전생에서 그대에게 (최고의 깨달음인)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도록 가르쳤는데, 이 세상에 와서는 그것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내가 손쉽게 설한 가르침만을 그대로 믿고) 이미 완전한 열반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해 버렸으니, 나는 그대에게 부처님의 제자로서 세운 본래의 서원(本願)과 그 서원으로 말미암아 행한 갖가지 수행을 다시 기억해 내도록 하기 위해 그대를 비롯한 많은 성문들에게 대승의 가르침인 묘법연화·교보살법·불소호념을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석존의 말씀에는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대는 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졌다”는 말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의미 심장한 말씀이다. 이 말의 뜻은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法·敎·道)’에 의해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불성(佛性), 다시 말해 부처님의 성품(性品)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미 부처가 된다는 수기(授記)는 받고 태어난 셈이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으므로 새삼 부처님께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의식(儀式)이 바로 수기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 즉 진리를 믿는 것이며 이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고통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생에서 그대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도록 가르쳤는데”라고 하는 부분은, 범문(梵文)에서는 “그대는 오랫동안 나의 제자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먼 옛날부터 샤리푸트라에게 불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샤리푸트라는 그 사실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자기는 이미 열반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해 버렸으니” 라고 하며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대해 석존께서는 훈계한다. 석존께서는 샤리푸트라에게 “그대는 자기 몸에 불성이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자기 힘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대의 힘이 아니라 그대의 몸과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는 불성이 그대를 깨치도록 한 것이다”라며 다시 석존은 “나는 이제 (옛날로 돌아가) 그대에게 (부처님의 제자로서 세운) 본래의 서원과 그 서원으로 말미암아 행한 갖가지 수행을 다시 기억해 내도록 하고자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잊고 있는 불성의 진실을 기억해 내는 것이 곧 제도되는 것이며 기억해 내고 눈뜨는 것이 깨침인 것이다. 이렇듯 ‘제도(濟度)됨’과 ‘깨치는 것’은 동의어(同義語)의 관계이다. 다음에 석존께서는 샤리푸트라가 본원(本願)에 의해서 얻은 바의 길을 잊어버리고 있으므로 이 사실을 “기억해 내도록(憶念)하련다”고 말한다. 즉 기억해 내도록 하려는 것이지 새롭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내(釋尊)가 말하는 가르침이란,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을 기억해 내도록 하여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배운 어떤 비유도 모두 이 ‘억념(憶念)’을 위한 것이었음이 여기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의리(衣裏) 계주(繫珠)의 비유’를 음미하면 진리는 가르치려 한다고 해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며, 본인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데도 잊어버리고 있는 그 진리를 어떻게 하면 생각해 내도록 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점에 교육의 가능성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아난다의 서원과 라훌라의 밀행
가르침 간직·보살교화 서원 아난다
미래세 성불, 부처님법 계승 라훌라
이 ‘수학무학인기품’의 내용은 아난다와 라훌라 및 2천 명의 샤이크샤(Saiksa) 즉 배우고 있는 사람(學人)과 아샤이크샤(Asaiksa) 즉 배움을 마친 사람(無學人)들에 대한 수기이다. 부처님의 시자 아난다와 부처님의 큰아들 라훌라는 지금까지 샤리푸트라를 비롯한 많은 성문들이 수기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그 수기를 받고 싶다고 원했다. 배우고 있는 사람과 배움을 마친 2천 명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아난다에게는 ‘큰 바다와 같은 지혜의 노닐음에 통달한 분’이라는 산해혜자재통왕불(山海慧自在通王佛)이, 라훌라에게는 ‘일곱 가지 보배로 된 붉은 연꽃을 밟고 넘어가는 분’이라는 답칠보화여래(踏七寶華如來)가 되리라고 수기하셨다. 이때 새롭게 불도에 뜻을 세운 보살들 8천 명은, ‘대보살마저도 얻을 수 없는 부처님의 성불에 대한 예언이 왜 성문들에게 주어지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그 보살들의 의문에 응답하여 설하신 것이 아난다의 과거이며 라훌라의 밀행에 관한 것이다.
“아난다와 나(부처님)는 그 옛날 전생에서 ‘가르침의 하늘에 오른 임금’이라는 부처님 즉 공왕불(空王佛) 아래서 불도를 지원했었다. 아난다는 항상 많이 듣기를 원했고, 나는 언제나 열심히 정진했다. 그리하여 나는 불도를 완성할 수 있었으나, 아난다는 가르침을 지켜 간직(護持)하고 또 장래에 걸쳐서도 부처님의 교법을 호지하고 많은 보살들을 교화할 것이다. 이것이 아난다가 전생에서 품은 서원이었던 것이다.” 이상이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수기를 주실 때 들려주신 전생의 사연이며 아난다는 이것을 듣고 즉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 것이었다. 다음에 부처님께서는 아들인 라훌라를 향해 설하신다. “라훌라는 미래 세에 성불할 것이니, 무수히 많은 부처님을 섬기고 그 여러 부처님의 맏아들이 될 것이다. 라훌라는 출가 전에는 석존의 맏아들이고 불도를 성취한 지금에는 부처님의 법을 계승하여 상속할 맏아들이며 많은 부처님의 맏아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라훌라의 밀행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아난다와 라훌라는 늦게 수기됐을까. 주제 넘는 생각이지만 석존의 마음 속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아난다는 자기의 4촌 동생이며 20여 년간이나 항상 곁에서 시봉하고 있었다는 것, 또 라훌라는 육신의 아들이라는 것, 즉 양쪽 모두 현재신(現在身)의 석존에게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도리어 수행을 위해서는 마이너스의 요소가 숨어 있음을 고려하여 그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늦게 수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교단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속된 해석일 것이다. 석존은 그런 옹졸한 분은 아니었다. 항상 곁에 있던 아난다의 경우, 아무래도 다른 제자들과 같은 순수한 귀의가 어려울 것이다. 육신의 아들도 마찬 가지여서, 아버지가 아무리 훌륭한 분일지라도 외부의 사람과 똑같은 마음으로 육신의 아버지를 대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고 도리어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을 암암리에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가까운 사람 즉 아내라든가 남편이라든가 또는 아들이라든가 혹은 부모를 교화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 된다. 이런 사람은 말로써 인도하려고 해도 쉽사리 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실제의 행에 의해서 감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그 행이라는 것도 훌륭한 일은 가끔 있을 뿐, 평소에는 자기 중심적인 행위나 보기 흉한 행위가 더 잦다면 감화의 결실을 거둘 수 없다. 항상 끊임없이(常住不斷),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도저히 가족이나 직장의 동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아난다의 사적(事跡)
기억력 탁월, 설법 정확히 전수
여성출가 허용 간청…비구니 탄생
아난다는 숫도다나(淨飯)왕의 동생 아므리타(甘露飯)왕의 아들로 석존의 4촌 동생에 해당하며 테바닷다(提婆達多)의 동생이기도 하다. 석존께서 성도한 후에 처음으로 카필라바스투(迦毘羅衛城)에 돌아갔을 때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샤리푸트라(舍利弗)와 마우드가리야야나(目連)의 추천으로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따르는 시자(侍者)가 되어 20여 년 동안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섬겼다. 그는 훌륭한 기억력을 가져 석존의 설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단 가운데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렸으며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제1회 결집 때, 법(法) 즉 경전의 송출자(誦出者)로 선출되었다. 아난다는 매우 선량하고 온순하여 마음이 약한 데가 있었다. 그렇지만 석존에 대한 충직함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니, 데바닷다가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석존을 해치려고 했을 때에도 다른 비구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아난다 혼자만은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석존께서 성도하신 지 5년 후, 숫도다나왕이 천수를 다하였다. 석존께서는 장례를 위해 카필라바스투에 갔었다. 그런데 석존의 이모로 석존을 양육한 고타미(摩訶波 波提)는, 앞서 친아들인 난타(難陀)와 손자인 라훌라도 출가하고 또 남편인 대왕도 돌아가시고 보니 점점 세상의 덧없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석존께 출가를 말씀드렸다. 그러나 석존께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석존께서는 바이샤리(毘舍離)를 향해 출발했다. 궁전에 남게 된 고타미는 아무래도 출가의 뜻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그 뒤를 따라갈 것을 결심했다. 그러자 남편들의 출가에 의해 같은 생각을 품고 있던 많은 부인들도 고타미와 동행하겠다고 말했다. 부인들은 일제히 검은머리를 풀어 내리고 허술한 옷을 걸친 후, 손에는 한 개의 나무 바루를 들고 맨발로 카필라바스투를 떠났다. 그리하여 석존이 계시는 정사(精舍)의 문밖에 겨우 당도했을 때는 모두 피로에 지쳐서 쓰러질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듣고 시자인 아난다가 나와 보았더니 고타미를 비롯하여 많은 부인들이 완전히 변한 모습으로 있지 않는가. 깜짝 놀란 그가 그 사유를 묻자 불도에 들어갈 결심으로 여기까지 왔노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난다가 즉시 석존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석존께서는 “아난다여, 여인이 엄한 계율 아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포기하도록 설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난다는 선뜻 승복하지 않았다. “(말씀을 거역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면 세존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만 문을 열고 여자에게는 닫는다는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진리라는 것은 인간계든 천상계든, 어디서나 진리이거늘 하물며 남녀의 차별 따위는 없다. 그렇지만 교단에 여자가 들어오면 교단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존이시여, 가르침의 문이 남녀의 어느 쪽에도 열려 있다고 하면 여인의 출가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출가를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아난다의 말에는 무리가 없었다. 원래부터 석존께서도 인정이 많은 분이었으므로 드디어 아무런 말없이 허락하게 되었다. 제1결집 직전에 마하카샤파는 다섯 가지의 허물을 들어 아난다를 결집회의에서 제외한 일도 있었다. 그 허물 중에 ‘여인의 출가를 억지로 세존께 간청한 것’, ‘세존의 유체(遺體)를 맨 먼저 여인에게 예배시킨 것’ 등 여인에 관한 조항이 두 개나 있는 것은 자못 아난다 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온화한 인품과 훌륭한 교학과 설법의 교묘함은 비구니 교단이나 재가 신도뿐만 아니라 차츰 교단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으니, 마하카샤파가 입적할 때에는 어느덧 교단 제일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법사(法師)
여래의 ‘심부름꾼’·‘대행자’
수지·독·송·해설·서사 5종법사 지칭
예로부터 <법화경>은 공덕경(功德經)이라고 불리고 있다. 공덕이란 덕(德)을 쌓으면 공(功)이 된다는 뜻인데, 덕이란 바로 베풂(施)을 말한다. 다시 말해 공덕이란 베풂(布施)으로 말미암아 공(功)이 된다는 것이니, 이러한 공훈(功勳)으로 인하여 부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여 지켜주신다(護念)는 뜻이다. 그래서 ‘법사품’은 곧 새로 뜻을 세운 보살이 중생에게 법을 나누어 주어 두려움(無畏)이 없도록 하기 때문에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약왕을 등장시키고 있다. ‘법사품’은 <법화경>이라는 경전이 여러 경전 가운데 가장 높은 경전이며 이 경의 한 시송(偈頌)이나 한 구절(一句)이라도 받아들여 믿는(信受) 사람은 모두 성불(成佛)한다고 설한다. 물론 성불이란 부처님이 된다는 이야기지만 성불의 조건으로서 모든 번뇌를 멸진(滅盡)한 아라한이 된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승을 믿는 우리들은 너무나 대승에 치우쳐 금욕(禁欲)을 근본으로 하는 근본불교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금욕생활이 출가자라는 일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만 일반인에게는 그와 같은 수행이 어렵기 때문에 보편성이 없는 단점이 있으므로 번뇌를 여의어 해탈에 이르는 길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법사품’에서는 이 거룩한 경을 받아들여 간직하고 넓히는 사람, 즉 해설(解說)·서사(書寫)하는 사람, 다시 말해 남에게 법을 나누어 주는 사람을 가리켜서 여래의 심부름꾼(使者), 또는 여래의 대행자라고 한다. 이 경전은 또 여래가 세상에 계시는 현재마저도 원망하는 사람이 많을진대 하물며 말법시대(末法時代) 즉 후악세(後惡世)에서는 이 <법화경>을 넓이는 것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하며, 여래 멸후에 이 <법화경>을 수행 즉 넓히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홍경(弘經)의 삼궤(三軌)’ 즉 가르침을 넓히는 세 가지의 바른 길이라 하여 설하고 있다. 이 ‘법사품’의 타이틀로 되어 있는 ‘법사(法師)’란 불교 전반에서는 법을 설하여 신도를 올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승려(僧侶)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즉 <법화경>을 설하는 사람은 출가 재가를 불문하고 모두를 법사라고 부른다. ‘법사품’에서의 ‘법사’에 대한 원어는 다르마바나카(dharmabhanaka)로서 ‘설법자’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을 독송하는 사람 즉 이 <법화경>을 신도를 위해 널리 읽어서 들려주는 것을 직분으로 하는 사람이다. 부처님께서는 약왕보살을 비롯한 8만의 보살들에게 “출가 수행인이든 재가 수행인이든 천신이나 인간 이외의 것들이 모두 불도를 구해서 이 <법화경>의 1게 1구(一偈一句)라도 듣고 비록 한 생각(一念)이라도 기쁨을 내는 이에게, 나는 모두 성불의 예언(授記)을 주겠다. 이것은 현재뿐만 아니라 여래가 멸도한 후인 미래세에서도 똑같다”고 설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이 <법화경>을 비록 한 게송이라도 믿어 간직(受持)하고 읽고 외우며(讀誦) 해설(解說)하고 옮겨 써서(書寫) 부처님처럼 공경하며 이 경전에 꽃(華)·향(香)·목걸이(瓔珞)·가루 향(抹香)·바르는 향(塗香)·사르는 향(燒香)·비단 해 가리개(繒蓋)·깃발(幢幡)·의복(衣服)·기악(伎樂)을 공양하고, 합장하여 공경하는 사람도 ‘법사’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수지· 독· 송· 해설· 서사의 다섯 가지 수행을 하는 사람을 5종법사(五種法師)라고 부른다. 이 5종의 수행을 다시 신(身; 서사)·구(口; 독·송)·의(意; 수지) 3업(三業)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수지를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하여 정행(正行)으로 하고 다른 네 가지를 조행(助行)으로 한다. 그리고 또 꽃·향·영락 등 열 가지의 공양을 열 가지 경전 공양 즉 10종 경전공양(十種經典供養)이라 부르고 있다.
홍경의 삼궤
법사의 3실천덕목 衣·座·室
여래 마음으로 법보시 교시
이 품에서는 “바이샤라쟈(藥王)이여,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가 멸도한 후에 사부대중을 위하여 이 법화경을 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고 물으며, 여래 입멸 후의 세상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의(衣), 좌(座), 실(室)의 ‘홍경의 3괘(三軌)’ 즉 실천해야 할 세 가지의 바른 길(法度)을 설하고 있다. “여래의 방(室)에 들어가, 여래의 옷(衣)을 입고, 여래의 자리(座)에 앉아 사부대중을 위해 널리 이 경을 설해야 한다. 여래의 방이란 일체 중생에게 꼭 들어맞는 대자비심(大慈悲心), 여래의 옷이란 유화인욕(柔和忍辱)의 마음, 여래의 자리란 일체의 현상(法)이 공(空)임을 말한다”라고 한다. 즉 여래의 방이란 중생에 대한 넓고 큰 자비의 마음이며,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고 화평한 마음과 인내심, 그리고 여래의 자리란 일체의 현상이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임을 아는 것이니, 이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법을 설하는 것을 ‘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 혹은 ‘홍경(弘經)의 삼궤’라 하여 말법시대에 <법화경>을 설하는 법도(法度), 또는 바른 길이라 일컫고 있다. 이것은 법사 즉 법을 보시(布施)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마음가짐으로서, 모든 사람을 자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비란, 일반적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 또는 사랑하는 마음 혹은 동정심 등의 감정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감정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직 반쪽만의 이해밖에 되지 않는다. 자비란 함께 즐거워하려는 마음이다. 즉 자비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든가 애타심(愛他心)이라든가 하는 말이 갖는 뜻보다도 더욱 깊은 불교 특유의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자(慈)’란 범어 마이트레야(Maitreya)의 번역으로서 마이트레야는 우(友) 즉 벗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인데 깊은 뜻은 ‘특정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 대해 우정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인은 이것을 보편적인 인애(仁愛)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悲)’란 범어 카루냐(Karunya)의 번역으로 원래 ‘신음(呻吟)’이라는 의미인데 인생살이의 갖가지 괴로움에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그 신음소리를 듣고 자기도 동감하고 동정하여 “음-”하고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비’이다. 즉 남의 괴로움을 내 괴로움처럼 느껴 마음 속에서부터 이해하고 걱정해 주는 것이 ‘비’다.
결론적으로 평등성의 원리 위에서 너와 내가 하나라는 것에 눈을 떠야만 비로소 참 자비가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속에 내가 있다는 동체(同體)사상을 온몸으로 체득하여 부처님의 지혜(般若)를 완성(波羅蜜多)하고 ‘남 즉 나’, ‘나 즉 남’이라는 일체감(一體感) 속에서, 즉 나와 남이라는 상대적인 생각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자기가 자기 아닌 자기에게 베푸는 것이 자비인 것이다. 다음으로 법을 설하는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라고 하는 것, 즉 일체의 존재가 공성이라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법을 설할 것을 말한다. 일체법공(一切法空) 즉 모든 존재에는 실체라는 것이 없다고 꿰뚫어 보았을 때, 보살 수행자인 보시자의 눈에는 이 세계가 너와 나, 사랑과 미움이라는 차별, 상대가 없는 절대 평등의 세계로 비치어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재무애의 경지가 나타난다. 이러한 경지에서 상대방이 그 무엇에도 취착(取着)함이 없어 노사(老死)·수(愁)· 비(悲)· 고(苦)· 우(憂)· 뇌(惱)에서 해방(解脫)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설법자의 태도이다. <법화경>에서는 “여래의 자리란 일체 법공(法空)이며 이 가운데 안주(安住)하여 해태(懈怠)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여러 보살 및 사부대중을 위해 널리 이 <법화경>을 설하라”라고 말한다.
고원천착의 비유
깨달음에 가까이 가는 것을
고원서 우물 파는 것에 비유
<법화경>에는 모두 열 여섯 가지의 비유가 있는데 그 하나인 ‘고원에서 우물을 파는 비유’ 즉 ‘고원 천착의 비유’가 제10장 ‘법사품’에 들어 있다. ‘법사품’에서 석존께서는 바이샤라쟈(藥王) 보살에게 <법화경>의 위대함에 대해 설한다. 그 가운데서도 <법화경>의 신앙에 의해 최고의 바른 깨달음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갈 수 있음에 대해 설한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요약하면, <법화경>을 설하고 읽어 주고 노래해 주고 옮겨 쓰며 <법화경>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라도 일곱 가지 보배로 된 탑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이 탑 속에는 부처님의 유골(舍利)을 두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법화경>에는 여래의 전신(全身)이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을 꽃(華)· 향(香) 등 갖가지 물건으로 공양· 존경· 존숭· 찬탄해야 한다. 이 탑에 예배·공양한다면 최고의 바른 깨달음에 가까이 감을 알아야 한다. 여래의 전신(全身)이 <법화경> 가운데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법화경>이 여래 그 자체를 설한 경전임을 지적하고, 다시 <법화경>을 신앙하는 사람 모두를 성불시킬 수 있는 경전임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음에 재가든지 출가든지 보살도를 수행하는 경우, <법화경>을 보고 듣고 읽고 외우고 옮겨 쓰고 믿어 간직하고 공양하지 않는 사람은 보살도를 완전히 수행한 것이 아니며 <법화경>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보살도를 완전히 수행한 것이 된다고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 <법화경>을 보고 듣고 믿고 이해하며 간직한다면 최고의 바른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한다. 요컨대 보살도 수행의 중심이 <법화경> 신앙임을 지적한다. <법화경> 신앙으로 최고의 깨달음에 가까이 가는 것을 석존께서는 고원에서 우물을 파는 비유를 들어 설하시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목이 타서 물을 필요로 하여 고원(高原)에서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한다고 하자. 마른 흙을 보면 물은 아직 먼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노력하며 계속 파서 차츰차츰 습기가 있는 흙을 보고, 이렇게 하여 점차로 진흙에 도달하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물이 반드시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안다.” 이상이 고원천착의 비유이다. <법화경> 자신은 이 비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법화경>을 아직 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해서 수행할 수 없다면 당연히 이 사람은 최고의 바른 깨달음은 아직 멀다고 알아야 한다. 만일 <법화경>을 듣고 이해하고 사유하며 수행할 수 있다면 반드시 최고의 바른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모든 보살의 최고의 바른 깨달음은 모두 이 <법화경>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이 <법화경>은 방편의 문을 열어서 진실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 <법화경>의 가르침의 창고는 깊고 견고하며 깊숙하고 아득히 먼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도달하는 사람이 없다. 지금 부처님은 보살을 교화하여 성숙시키고 그들을 위해서 <법화경>을 열어 보이는(開示) 것이다”라고 한다. <법화경>은 모든 부처님의 근원의 법을 열어 보인 것이기 때문에 성불을 지향(志向)하고 보살에게 최고의 바른 깨달음은 당연히 <법화경>에 소속되는 것이다. 이 ‘법사품’은 앞의 9장 ‘수학무학 인기품’까지와는 그 내용이 크게 달라져 <법화경>을 받아들여 간직함과 그 넓힘이 테마로 되어 있고, 경전 성립사상(成立史上)에서도 이 ‘법사품’에서 제22장 ‘촉루품’까지를 한데 묶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보살행의 실천을 설하는 이 한 덩어리의 부분이야말로 <법화경> 본론의 중심부라고 하여 이 한 덩어리의 맨 처음 부분인 제10장을 기점으로 <법화경>을 재검토하려는 사람도 있음을 말해 둔다.
보배탑이 솟아남
다보여래님의 全身 사리탑
“법화경 설할 때 탑과 함께 참석 正法증명”
이 ‘견보탑품(見寶塔品)’에 이르러 석가모니불과 이 법회에 동참한 대중들 앞에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룩된 큰 탑이 홀연히 땅에서 솟아나 영축산의 하늘 가운데 높이 떠올랐다. 이 보배탑은 높이가 5백 요자나(由旬), 가로 세로 길이가 2백 5십 요자나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보배구슬로 장식되고 5천이나 되는 난순과 1천만의 감실이 붙어 있었다. 또 7보로 된 깃발과 해가리개, 보석으로 된 목걸이, 보배방울 등으로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되고, 4면에서는 타말라 잎과 찬다나 나무로 만든 향(多摩羅跋 檀香)의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천룡 8부중이 보배탑에 온갖 꽃과 향, 영락, 깃발과 해가리개, 음악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공양을 드리자, 보배탑 안에서 큰 음성이 나왔다. “훌륭하고 훌륭하여라. 석가모니 세존이시여, 훌륭히 부처님의 지혜 즉 평등이라는 큰 지혜(平等大慧)로서 보살을 가르치는 법(敎菩薩法)이며 부처님께서 지켜주시는(佛所護念) <묘법연화경>을 가지고 대중을 위해 설하시니, 이와 같이 석가모니 세존께서 설하시는 것은 모두 진실합니다”라는 찬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모인 대중은 이 보배탑은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출현하였으며 그 목소리의 주인은 과연 어떤 부처님일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이에 석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 보배탑은 아득한 옛날에 입멸하신 다보여래(多寶如來)라는 부처님의 사리탑이며, 지금도 이 탑 안에는 그 부처님의 전신(全身) 사리가 계신다. 이 부처님은 옛날 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큰 서원을 세웠다. 자기가 입멸한 후에 언제 어떠한 장소이든 만일 <법화경>을 설하는 경우가 있으면, 자기는 이 보배탑과 함께 그 장소에 가서 <법화경>이 진실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찬탄하겠노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지금 이 <법화경> 설법의 자리에 이 큰 보배탑이 출현하여 다보여래께서 큰 음성을 탑 안에서 내시어 ‘모두 진실하다’고 말하며 ‘훌륭하고 훌륭하여라’라고 찬탄하는 것이다.” 석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대요설보살은 다시 “세존이시여, 원컨대 저희들은 이 부처님의 몸을 뵙고자 합니다”라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이 다보여래는 또 깊고 깊은 하나의 서원을 세웠다. 그것은 <법화경> 설법의 자리에 내 보배탑이 출현했을 때, 사람들이 만일 내 몸을 보고자 하면, 그때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부처님의 시방(十方)에 계시는 분신(分身)의 모든 부처님이 그 장소에 모이도록 한 후에 비로소 내 몸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라고 하는 서원이다. 그러므로 나도 시방에 있는 나의 분신의 부처님을 이제부터 이 곳에 모이도록 하겠다.” 이상이 지금까지의 개요를 기술한 것이다. 이 11장은 앞장의 ‘법사품’에 이어서 <법화경>의 호지(護持)와 유포를 테마로 하는 유통분에 해당되지만 돌연한 탑의 출현과 다보여래라는 과거에 멸도한 부처님의 등장 및 처음 밝혀진 분신의 여러 부처님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다보불은 아득한 옛날에 입멸하신 부처님이시다. 그 다보불은 보살수행 때에 세운 서원에 의해서 지금 이 석가모니불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자리에 나타나서 그 설법을 찬탄하고 <법화경>이 진실한 가르침임을 증명한다. 이 다보불의 찬탄과 진실의 증명은 석존의 설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걸쳐 <법화경>이 설해질 때에는 언제 어디서라도 출현하신다고 한다. 이것은 이 <법화경>이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걸쳐 언제나 진실한 바른 가르침(正法)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보편적인 진실, 이것이 <법화경>이다 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견보탑품 증명법화
불탑신앙 ‘보배탑출현’으로 설명
다보불 ‘법화경의 진실성’ 증명
이 ‘견보탑품’이 지금까지와 다른 것은 그 다보불(多寶佛)이라는 부처님이 칠보탑(七寶塔) 속에 전신(全身)이 흩어지지 않는 몸으로―석가모니불은 그 사리가 시방으로 분산되어 사리탑에 봉안되었지만― 앉아 계시면서 보배탑과 함께 출현하였다고 하여, 불탑과 결부시켜 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화경>에는 여러 곳에 탑공양과 조탑공양(造塔供養)이 설해져 있어 이 <법화경>의 기반에 강한 불탑신앙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견보탑품’은 그것을 보배탑 출현이라는 극히 구체적인 형식을 취해 설하고 있다. 그런데 다보불에 의한 <법화경>이 진실하다는 증명―이것을 증명법화라 한다―은 ‘서품’에서부터 이 11장에 이르기까지 하신 설법을 진실하다고 증명하는 것이 되므로 이것을 증명하기 이전이라는 뜻에서 ‘증전(證前)’이라 한다. 구체적으로는 지금까지 밝히신 1승진실, 3승방편과 2승작불(二乘作佛)의 설법을 가리키는 것이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형식상이고 실제로는 <법화경> 전체의 설법을 진실한 것이라고 증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에 다보불이 계신 보배탑을 열기 위해 석존의 분신인 여러 부처님이 밝혀지고 그 여러 부처님이 와서 모이는 것이 설해지는데 이것을 ‘기후(起後)’라 칭한다. 여러 부처님이 모임으로써 보배탑이 열리고 석존께서 그 보배탑 안에 들어가 다보불과 자리를 나누어서 두 분의 부처님이 나란히 앉는다. 그 후에 아래에서 설하는 것처럼 석존께서 세 가지의 고칙(告勅)에 의해 부처님께서 멸도한 후의 유통(流通)을 맡을 사람을 불러 모으자 뒤의 ‘제15장 종지용출품’에서 부처님 멸도 후의 유통을 담당할 보살들이 땅에서부터 출현하고, 이들의 보살들이 모두 전생에서 석존의 제자였음이 밝혀진다. 그러자 이 법회에 모인 대중은 지금의 석존과 땅에서부터 솟아난 지용(地涌)의 보살들과의 결부에 대해 의문을 일으킨다. 여기서 ‘제16장 여래수량품’에 이르러 지금의 석존은 실제로는 아득히 먼 옛날에 성불하여 지금에 이른다고 하는 본문(本門)의 구원실성(久遠實成)이 밝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견보탑품’에서 다보불의 보배탑, 석존의 시방분신(十方分身)의 여러 부처님 등을 실마리로 하여 후의 본문 ‘수량품’이 불러일으켜지는데 이것을 ‘기후(起後)’ 라고 한다. 그러므로 앞의 ‘증전’과 합하여 ‘증전기후(證前起後)’ 라고 하며 다보불의 보배탑을 ‘증전 기후의 보탑’이라 부르고 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이 ‘11장’이 현재의 형태로 정리되기 전에는 독립된 경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똑같이 독립된 경전으로서 유포되고 있던 ‘제바달다품’과 더불어 법사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널리 독송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하나의 큰 의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왜 다보여래께서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면 그 어디라도 칠보탑과 함께 출현하여 “<법화경>이 진실한 가르침이다”고 증명하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 <법화경>에서는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인도의 나가르주나 즉 용수보살은 그의 저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기를 “그 옛날 다보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 당시의 중생들의 근기가 미숙하여 <법화경>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법화경>을 설하지 못하고 열반에 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화경>을 다보여래 자신은 설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진실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앞으로 <법화경>이 설해지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가르침이 진실한 것이라고 증명하겠다고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이번에도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하시는 <법화경>이 진실하다고 증명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두 부처님 나란히 앉다
다보·석가모니불 보배탑 병좌
법신·보신의 鏡智묘합 나타내
세존께서는 이 자리에 모인 대중을 대표하여 다보탑을 열어 줄 것을 대요설(大樂說) 보살이 간청하자 시방 분신의 여러 부처님을 불러 모으셨다. 세존께서는 두 눈썹사이의 백호상에서 한 줄기 빛을 발하여 우선 동방의 무수한 국토에 계시는 부처님을 비추시고 그로부터 차례로 4방 8방, 상하를 합쳐 시방(十方)의 세계를 비추시며 그곳에 계시는 부처님들을 초청하여 오시도록 했다. 세존께서는 그 부처님들을 수용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를 신통력에 의해 더없이 청정케 하였는데 다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을 남기고 다른 천신들과 사람들을 다른 국토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이 사바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여러 부처님을 수용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각각 2백만 억 나유타의 나라들을 신통력에 의해 청정케 하고 그들 모두의 세계를 뭉쳐서 하나의 불국토로 만드셨다. 이것을 삼변토전(三變土田)이라 한다. 이리 하여 시방에서 오신 여러 부처님은 지금은 사바세계가 변하여 청정 광대한 불국토가 된 이 안의 각각 보배 나무 아래에 마련된 사자좌에 앉아서 모두 석존에게 탑을 열 것을 간청했으므로 석존께서는 영축산으로부터 공중에 올라 이윽고 보배탑을 여시려고 했다. 오른 쪽 손가락으로 문을 열자 마치 큰 성문을 여는 것처럼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그 속에는 사자좌에 앉아 마치 선정에 들어 계시는 것 같은 다보불의 전신(全身)이 보였으며 이윽고 다보불께서 “나는 여기에 <법화경>을 듣기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보불은 자기 자리의 반쪽을 나누어서 앉을 수 있도록 양보하며 석가모니불을 탑 안으로 초대했다. 석가모니불께서는 그 초대에 응하여 보배탑 안에 들어가 다보불과 나란히 앉으셨다. 이것을 ‘이불병좌(二佛 坐)’라 한다. 석존께서 보배탑 안에 들어가 다보불과 나란히 앉으신 것을 본 사람들은 자기들도 공중에 머물고 싶다고 원했다. 이런 뜻을 간파한 부처님께서는 즉시 이 법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허공에 올려놓으셨다. 이로써 <법화경> 설법의 자리가 지상의 영축산에서 허공으로 옮겨졌으므로 이후 ‘촉루품’에서 법회 자리가 재차 영축산으로 되돌아오기까지를 ‘허공회(虛空會) 설법’이라 한다. 이렇게 이야기의 순서를 따라가면 ‘보배탑의 솟아남’, ‘시방의 부처님들이 모여 옴’, ‘삼변토전’, ‘보배탑의 개탑과 이불병좌’, ‘법회가 허공으로 이동’ 등 어느 것이나 기상천외한 것이어서 이 ‘견보탑품’은 웅대하고도 장려한 하나의 드라마라고 해도 좋다. 중국 삼론종의 길장(吉藏)은 이 이불병좌에 대해서 “다보불은 오래 전에 멸도 했지만 불멸(不滅)이면서도 멸도의 상(相)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 다보불과 함께 석가불이 나란히 앉음에 의해서 지금의 석가모니불도 실제로는 생멸은 없으나 방편으로 생멸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천태(天台)는 보배탑의 문을 여는 것에 대해, 이것을 방편을 연다는 개권(開權)에 적용시키고 탑중 부처님 뵙는 것을 진실을 나타낸다는 현실(顯實)에 적용 해석하고 있다. 또 ‘이불병좌’에 관해서는 경(境)인 법신(法身)의 다보(多寶)와 지(智)인 보신(報身)의 석가(釋迦)와의 경지묘합(境智妙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해석도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상의 여러 가지 모티브가 경전의 유통이라는 커다란 목적 아래 통일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 ‘견보탑품’의 극적(劇的)인 구성도 모두 그 목적에 따라 기획된 것으로, 참으로 이 <법화경>을 듣는 사람으로서는 유통의 대원(大願)을 일으키기에 걸맞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엉뚱한 공상(空想)의 소산(所産)이 아니라 역력한 불교신앙 속에 계승되어 온 전승(傳承) 즉 <잡아함경> 권41에 기인하는 것임을 밝혀둔다.
허공법회와 진리는 하나
‘다보여래=완전한 진리’ 인격화
법화경 사상통일 最上乘 법문
이 ‘견보탑품’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허공회(虛空會)라는 것과 보배탑 안에 여래의 신체가 흩어지지 않고 한 덩어리로 안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허공회에 관해 허무맹랑하고 꿈같은 이야기라서 믿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법화경>이 드라마로 엮어져 있음은 이미 수차례 언급한 바이다. 허공회는 가능한 모든 지각과 감각 기능을 총망라한, 총지성적인 의식을 통한 상상에 의해 시간과 공간을 상호 관통케 하여 체험하도록, 즉 그 속에 몰입하여 감지하도록 극화(劇化)한 것(지식을 통한 이해를 배제하고, 다시 말해 분별을 버리고 오직 순박한 마음으로 지혜의 문으로 들어오게끔 의도된 것)으로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믿음도 없이 인간의 때묻은 지식만을 가지고 이 무구청정한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를 자기의 작은 잣대로 가늠하여 해석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어리석은 짓인지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부처님의 마음과 일치되는 마당이며 부처님과의 대화의 광장이다. 이 대화의 광장 밖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설명하려 함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에 지나지 않는 어리석은 소행일 뿐이다. 선정(禪定) 즉 삼매(三昧)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근(信根)이 필요한 것이다. 허공회 즉 허공법회란 하늘에서 법회를 가졌다는 것이니 ‘하늘’은 인간계를 떠난 이상(理想)의 세계를 말하며 ‘땅’은 인간과 가장 밀착된 현실의 세계다(천태대사는 땅은 무명을 말하고 하늘은 제1의공(第一義空) 즉 진리를 뜻한다고 함). 석존께서는 보배탑의 주체는 아득히 먼 동방 즉 과거의 세계에서 오신 다보여래(Prabhuta-ratna)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아득히 먼 동방의 부처님’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아득히 먼 과거에 출현하신 부처님, 즉 다보여래는 실제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모습(相)을 가진 부처님이 아니라 다만 ‘진리 그 자체’ ‘진리의 완전한 모습’을 인격화하여 이름한 것이다. 즉 보정세계(寶淨世界, Ratnavis-raddhalokadhatu)란 어머님의 태내(胎內)라는 말인데 그 태내에서 인간이라는 자연현상이 출현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곧 불성(佛性) 즉 진리 그 자체에 의해서 왔음을 일컫는다. 불성이란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말하는데 이 부처가 된다는 성질이 왜 진리인가 하면, 진리의 성질은 외향성(外向性) 또는 향상성(向上性)이기 때문에 불성이 바로 진리라고 한다. 그런데 불성이 바로 진리 그 자체라든가 또는 진리의 완전한 모습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 당시의 인도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부처님으로 인격화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함이 없는 것이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한 덩어리로 뭉쳐서 통일된 모습으로 상징한 것이 바로 다보여래이다. ‘많은 보배를 모은 여래’ ‘많은 불성을 한데 모은 것, 즉 사람’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래의 전신(全身), 즉 여래의 신체가 한 덩어리로 되어 안치된 의미는 무엇일까? 불전(佛典)문학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신 후, 그 유골(佛舍利)은 재가 신도인 여덟 부족들에게 분배되어 여덟 지방에 모셔졌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래의 신체가 한 덩어리로 되어” 라고 하여 일반적인 전승(傳承)을 부정하고, 영원히 가르침을 설하는 부처님의 출현이라는 복선(伏線)을 깔고 있다. 아무튼 <법화경>은 진리 그 자체 내지 모든 사상의 통일 즉 일승(一乘)이라는 거대한 의의를 가진 경전이다. 최상승(最上乘)의 법문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악인성불
살인등 5역죄 범한 악인 ‘제바’
석존 “미래세에 성불할 것” 예언
이 ‘제바달다품’은 쿠마라지바(鳩摩羅什)의 <묘법연화경>에서는 ‘제12장’으로 독립되어 있으나 <정법화경>이나 <산스크리트본(梵本)>에서는 ‘제11장 견보탑품’속에 포함돼 있어 여기서부터는 <묘법연화경>의 품수(章數)와 <범본>이나 <정법화경>의 품수가 서로 일치하지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 ‘제바달다품’은 석존의 전생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이 품은 ‘현재의 석존이 아득히 먼 옛날에 어떻게 하여 <법화경>을 얻었던가’라고 하는 석존의 과거 수행이야기이다. 석존께서는 이 법회에 모인 보살과 천신 및 사람들, 비구·비구니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옛날 오랫동안에 걸쳐 <법화경>을 계속하여 구해왔다. 큰 나라의 국왕으로 있을 때에 원(願)을 세워 최고의 깨달음을 구해왔다. 대승의 보살로서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六度)을 완성하려고 보시의 행을 닦아 재물, 나라, 처자(妻子), 심지어는 자신의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임금자리를 버리고 북을 쳐서 시방에 포고를 내려 법을 구했던 것이다. 그때에 아사선인(阿私仙人) 즉 무비(無比)라는 선인(仙人)이 있어 대승의 <묘법연화경>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선인에게 가서 필요한 것을 모두 주었으니 열매를 따고 물을 긷기도 하고 땔나무를 줍고 식사를 준비하며 이 몸을 모두 바쳐 섬기기를 1천년을 계속 했으나 그래도 몸과 마음이 피곤한 줄 몰랐다. 마음 속에 묘법을 구하는 마음을 계속 품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법화경>을 얻어 성불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법화경>을 구하는 과거세의 수행을 대중에게 설하고 또한 과거세와 현세를 연결시켜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의 왕이야말로 지금의 나이며, 내가 섬긴 선인은 누구인가 하면 지금의 데바닷타(提婆達多; Devadatta)이다. 그리고 데바닷타야말로 나의 좋은 벗(善友)이며 그의 덕으로 나는 깨달음을 완성하고 부처로서의 온갖 덕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설하신 다음 석존께서는 데바닷타에게 미래세에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授記)을 주고 그 이름을 천왕여래(天王如來)라고 하리라 한 다음 대중을 향해, “미래에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묘법연화경>의 제바달다품을 듣고 티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믿고 공경하며 의심치 않고 당혹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계에 떨어지지 않고 시방의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것이며 그 태어나는 곳에서 항상 이 가르침을 들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나 천신으로 태어나면 매우 높고 거룩한 즐거움이 가득한 생활을 할 것이며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경우에는 ‘부모의 몸을 의탁하지 않고’ 자연히 연꽃에서 ‘보살로’ 태어날(化生) 것이다.” 한문 번역에서의 제바달다란 데바닷타의 음역이며 제바(提婆)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고 조달(調達)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석존께서 성도한 후에 출가하여 5백인의 비구를 꼬여서 교단을 분열시켜 화합승(和合僧)을 깨뜨렸고, 큰 돌을 던져 부처님의 몸에서 피를 내게 하였으며, 마가다국의 아자타샤트루왕에게 술에 취한 코끼리를 풀어놓게 하여 부처님을 밟아 죽이도록 하였고, 주먹으로 화색(華色)비구니를 때려죽이는 등 악역무도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데바닷타는 이렇게 5역죄를 범한 악인이며 이러한 악인이 부처님으로부터 성불의 예언을 받았다. 대악인조차도 성불할 수 있다. 하물며 선인(善人)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악인 성불은 뒤의 용녀성불(龍女成佛)과 더불어 <법화경>을 수지하고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격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법화경>의 사상이 일체 만물만상이 평등하다는 대원칙으로 일관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다는 데 그 존재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용녀의 성불(일명 女人成佛)
보배 바치고 곧 남자로 변신·성불
불도성취 권고 분발의 뜻 담겨
이 ‘제바달다품’은 먼저 악인(惡人)인 데바닷다(提婆達多)의 성불을 밝히고 다음에 용녀(龍女)의 성불을 밝히는데, 여기서는 용녀의 성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선 줄거리를 말하자면, 데바닷다에게 석존께서 수기를 마치시자 다보여래를 따라온 지적(智積)이라는 보살이 다보불에게 본래의 국토로 되돌아가자고 종용했다. 그러자 석존께서는 지적보살에게 만주슈리(文殊師利)라는 보살이 있는데 그 보살과 묘법(妙法)을 서로 논한 후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큰 바다의 사가라(娑竭羅) 용궁(龍宮)에 사는 만주슈리 보살이 수레바퀴만한 1천 잎의 연꽃에 앉아 나타났다. 그는 다보불과 석존을 경배한 후 지적보살과 인사를 나누었으니, 여기서부터 두 보살의 문답이 시작된다. 지적보살은 큰 바다 속의 용궁에서 만주슈리의 교화 상태를 묻고 만주슈리는 항상 <법화경>을 설해 왔고 그 교화한 사람의 수가 수없이 많아서 헤아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에 대해 지적보살은 “<법화경>은 심심미묘(甚深微妙)하여 모든 경전의 보배인데 이 <법화경>을 수행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어떤가” 하고 묻는다. 여기서 만주슈리가 대답하기를 “사가라 용왕의 딸은 나이는 여덟 살이지만 지혜가 예리하고 여러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잊지 않고 간직하여 정(定)·혜(慧)를 갖추어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얻어 깨달음에 도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지적보살은 석존마저도 무량겁에 난행고행(難行苦行)하여 겨우 깨달음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용녀가 아주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며 의혹을 표명했다. 그러자 그 말이 끝나지도 않은 사이에 용녀가 홀연히 용궁에서부터 부처님 앞에 출현하여 부처님을 찬탄하는 시(偈)를 읊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본 샤리푸트라(舍利弗)가 용녀에게 질문한다. “여자의 몸은 때묻고 더러워서 다섯 가지의 장애가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여자의 몸으로 성불이 가능한 것인가?”
그러자 용녀는 한 개의 보배 구슬을 끄집어내어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은 즉시 이것을 받으셨다.
용녀가 지적보살과 샤리푸트라 두 사람을 향해 “나의 성불은 부처님께서 보배 구슬을 받으신 것보다 더 빠르다”고 말하자 금방 여자의 몸이 남자로 변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덕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묘법을 설하자 그것에 의해 모두 깨달음의 예언을 얻고, 그 불국토인 무구세계(無垢世界)는 여섯 가지로 진동했다. 이를 본 지적보살과 샤리푸트라의 두 사람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납득하고 믿게 되었다. 이상이 용녀 성불을 설하는 부분의 개괄적인 요점이다. 그런데 용녀는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다. 그 몸은 축생의 몸이어서 앞의 데바닷다보다도 성불에 관해서는 한층 불리한 조건에 있다. 그 용녀의 성불이 설해졌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의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역시 성불하기 어려운 존재의 성불이 설해졌다고 하는 데에 있다. 이것에 의해서 그 이상의 존재들에게 불도의 성취로 향하도록 마음을 일으키게 권함과 아울러 분발토록 격려함이 교시되어 있는 것이다. 샤리푸트라의 말로 설해진 “여자의 몸은 때묻고 더러워서 법을 담을 그릇이 아니다” “여인의 몸은 다섯 가지의 장애가 있다”하는 말들은 모두 당시의 인도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남존여비라는 여성관의 소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열반경>에서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고 설함과 같이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성불할 수 있다는 개성사상(皆成思想)을 표방하고 있다. 그것은 본래 출생이나 지위, 남녀의 성차별마저 넘어선 이상인 셈이다. 여성성불을 설하는 경전에 <불설초일명삼매경(佛說超日明三昧經)>, <무소유보살경(無所有菩薩經)>, <불설무구현여경(佛說無垢賢女經), <불설전여신경(佛說轉女身經)>, <해룡왕경(海龍王經)>, <승만경> 등이 있는데 그 수(數)는 매우 적으나 모두 대승불교의 이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믿음과 왕생극락
“법화경 듣고 충실히 수행하면
연꽃 가운데 보배자리서 탄생”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佛告諸比丘). 앞으로 오는 세상에 만일 훌륭한 신앙심을 가진 남자와 여인이 있어(未來世中 若有 善男子 善女人) <묘법연화경>의 제바달다품을 듣고(聞妙法蓮華經 提婆達多品), 더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믿고 공경해 의심치 않고 당혹하지 않는 사람은(淨心信敬 不生疑惑者) 지옥·아귀·축생의 악한 갈래에 떨어지지 않고(不墮地獄餓鬼畜生生), 시방의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것이며(十方佛前) 그 태어나는 곳에서 항상 이 가르침을 들을 것이다(所生之處 常聞此經). 만일 사람이나 천신으로 태어나면(若生人天中) 매우 높고 거룩한 정신적인 즐거움이 가득한 생활을 할 것이며(受勝妙樂)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경우에는 <부모의 몸을 의탁치 않고도 완전한 신체를 갖추어> 자연히 연꽃에서 <보살로> 태어나리라(若在佛前 蓮華化生).”근래 <법화경>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흔히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이 ‘즉신성불’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법화경>을 믿으면 곧 그 몸이 성불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밀교에서의 ‘즉신성불’ 즉 “그 몸이 곧 부처이다”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 즉 이것이 무엇이냐”하는 선문답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곧 그대가 부처이다. 그러니 부처다운 일을 해야 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런데 과연 <법화경>에 즉신성불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용녀성불(龍女成佛)’에서 볼 수 있다. 즉 샤리프트라(舍利弗)가 용녀에게 질문하기를 “여자의 몸은 때묻고 더러워서 다섯 가지의 장애(五障)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여인의 몸으로 성불이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용녀는 그 값이 삼천대천세계와 맞바꿀 수 있는 보배구슬을 부처님께 바치니 부처님께서는 곧 그 구슬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하는 말이 “부처님께서 내가 바친 보배구슬을 받는 것 보다 성불하는 것이 더 빠르다”라고 하며 남방의 무구세계(無垢世界) 즉 청정한 세계에서 남자로 변하여 성불하였다는 것이 바로 즉신성불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받으신 보배구슬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처님께서 뇌물을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 삼천대천세계와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믿음이란 그렇게 값진 것이니 믿음이 있어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 바로 값이 산천 대천세계와 맞먹는 보배구슬이다. 그런데 믿음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흔히 우리들 인간의 대뇌의 활동에는 좌우(左右)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 왼쪽 뇌는 ‘로고스 뇌’라 하여 말이나 논리나 계산 등을 관장하고 있으며 오른쪽 뇌는 ‘파도스 뇌’라 하여 울거나 웃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만족해하는 정동적(情動的)인 작용을 관장한다. 뿐만 아니라 새의 울음소리나 풀벌레 소리에 감동하는 등의 작용을 관장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믿음이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좌뇌를 구사하여 천태의 철학을 구축하였으니 로고스철학으로서 정밀하게 짜 맞춘(精緻) 천태의 교학은 너무나 이성적인 것이어서 믿음을 강조하는 일련종(日蓮宗)의 법화관(法華觀)하고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다. 오늘날의 <법화경> 신봉자들은 전자(前者)인 “그 몸으로 곧 성불한다”라고 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쿠마라지바(鳩摩羅什)가 번역한 <묘법연화경>에 귀의한다는 말인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구창(口唱) 즉 입으로 소리내어 부르기에 바쁘다. 사실 <법화경>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여래신력품 제21’에는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이라고 소리쳐 부르는 대목은 있지만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선종인 조계종에서는 그 소의 경전인 <금강경>의 제목인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중국의 천태종을 위시하여 고려 천태종 및 일본의 천태종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즉 영원한 부처님이라는 인도의 말, 아미타불을 부르며 정근하고 있다. 아무튼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 제23’에 “어떤 여인이 <법화경>을 듣고 그 설한 바와 같이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그 수명을 마친 뒤에 아미타불이 많은 큰 보살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극락세계에 가서 연꽃 가운데의 보배자리 위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인내와 노력
부처님 믿는 우리, 인욕의 갑옷입고
법화경 설하기 위해 어려운 일 참고…
이 13장의 장명(章名)을 옛날에는 ‘지품(持品)’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가르침(經)을 간직(持)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께서는 ‘제10장 법사품’이래 여래가 멸도한 후에 <법화경>을 넓히는 것에 대해 설해 왔다. 특히 ‘견보탑품’에서는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누가 이 <법화경>을 믿고 간직하며 읽어주고 외워줄 건가. 지금 부처님 앞에 나와 스스로 서원을 말하라” 하시고, 여래가 멸도한 후에 <법화경>을 홍통할 사람을 세 번에 걸쳐 모집했다(이를 세 개의 고칙(告勅)이라 함). 지금의 이 ‘권지품’은 이러한 부처님의 부름에 답하여 불제자들이 스스로 경전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넓힐 것을 맹세하는 장이다. 우선 최초에 약왕보살과 대요설보살이 2만의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앞에 나아가 여래가 멸도한 후의 험악한 세상에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 <법화경>을 믿어 간직하고 읽어주고 외워주거나 베껴 쓰거나 사람들에게 설할 것을 맹세한다. 그러자 다음에는 5백의 아라한들이 맹세를 하고, 또 8천의 배움을 마친 사람과 아직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 <법화경>을 넓힐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사바세계 이외의 다른 국토에서 넓힐 것을 맹세한다. 그 이유는 이 사바 국토의 사람들은 나쁜 습관이 많아 교만하며 덕을 베풀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극히 적고 성내기를 잘해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마하푸라쟈파티와 야쇼다라, 이 두 사람의 비구니를 비롯한 6천의 비구니들이 맹세를 한다. 이 13장에 이르기까지는 이해력이 높은 상근기인 샤리푸트라를 비롯해 이해력이 낮은 하근기인 푸루나와 카운디냐들이 차례로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성불한다는 예언(授記)을 받았지만 이 비구니들에게는 아직껏 아무 말씀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러 겨우 부처님께서 성불의 예언을 주시므로 더 없는 기쁨을 느끼고 타방 국토에서 <법화경>을 홍통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맨 끝에 불퇴전의 경지에 있는 80만억 나유타의 대보살들도 맹세를 한다. 이상 다섯 종류의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에 응하여 여래가 멸도한 후의 세상에서 경전을 간직할 것과 넓힐 것을 맹세한 사람들이다. 경전을 간직한다는 것이란, 가르침을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경전을 간직하는 사람 자신의 일이다. 하지만 경전을 널리 전파하는 것은 이것을 남에게 이해시켜 받아들이게 하여 믿도록 하는, 즉 남에 대한 역할이므로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뽑아 없애기 어려운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뚜렷한 객관적인 사실마저도 받아들이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런데 더구나 <법화경>의 교설은 당시에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상이었다. 나고 죽고 하면서 삼지(三祗) 백겁(百劫)이라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보살 수행을 거쳐야만 겨우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법화경>에서는 한 구절(一句), 한 시송(一偈)이라도 들으면 누구라도 성불한다고 한다. 혹은 ‘방편품’의 게송에서는 어린애가 놀이 삼아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거나, 누구나 한번이라도 ‘나무불’ 하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성불한다고 설한다면 종래의 가르침을 믿고 받드는 사람 편에서 보면 이것은 이미 불교가 아닌 외도의 가르침으로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시의 세상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은 스스로의 가르침을 비밀스러운 가르침(秘說)이라 부르고,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세상에 넓히려 할 때, 세상사람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비방과 박해를 받을 수 있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앞의 ‘법사품’에서 “이 가르침은 여래가 세상에 있는 현재마저도 미워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멸도한 후에야 말해 무엇하랴”라고 설함은 바로 그런 뜻이다. 부처님 믿는 우리 인욕의 갑옷 입고, 법화경 설하기 위해 어려운 일 다 참으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다만 무상도를 구해, 앞으로 오는 세상 부처님 분부대로 지키고 간직하오리다.
법화경 전법자 박해
감연대사, ‘3종류 박해자’열거
신봉자 비방·危害·승원서 추방
<법화경>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려 할 때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이 받는 박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경에는 미래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의 험악한 세상에서 받을 것이라고 설해져 있으나, 현실로는 신흥의 <법화경>을 신봉하는 집단이 실제로 만난 수난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천태종의 6조(六祖) 묘락대사(妙樂大師) 감연(堪然)은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에 그 박해를, 박해자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누고 있다.
1. 속중증상만(俗衆增上慢)― 이는 출가 수행자가 아닌 재가의 사람들로서 잘난 체 뽐내는 사라들을 가리킨다. <법화경>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정법을 홍통하는 사람들에게 악구(惡口), 잡언(雜言), 중상(重傷)하고 꾸짖고 헐뜯고 욕하며 몽둥이로 때리고 칼을 휘두른다고 한다. 2. 도문증상만(道門增上慢)― 도문이란, 출가한 사람들로서 잘난 체 우쭐대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삿된 지혜를 갖고 그 심근(心根)이 삐뚤어져 있어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깨쳤다고 생각하며 우쭐대는 사람들이다.
3. 참성증상만(僭聖增上慢)― 참성이란, 실제로 성자(聖者)가 아닌데도 그 분수를 넘어 성자의 흉내를 낸다는 뜻으로서 성자인 체하며 우쭐대는 출가자를 말한다. <법화경>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인적 없는 조용한 곳에 살며 누더기 옷 걸쳐 입고 스스로는 진실한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며 남들을 경멸한다. 악한 마음을 품고 마음속으로는 항상 세속의 일들을 생각하면서도 성자인 체하며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공경 받고 있다.” 이상이 세 종류의 박해자인데 이들이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을 비방하고 욕하며 위해(危害)를 가하고 승원(僧院)에서 추방시키는 것이다. 박해자들이 말하는 비난의 말은 “<법화경> 신봉자들은 제멋대로 경전을 만들어 세상에 넓히며 외도의 가르침과 같은 것을 설하여 세상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그것은 ‘자기들은 부처가 된다’고 하는 삿된 견해의 가르침이다”라고 한다. <법화경> 신봉자들에 가해지는 박해의 원인은 <법화경>의 내용 그 자체에 있다. <법화경>이 스스로를 ‘비설(秘說)’이라 부르고 있음은 아직 세상에 용납되지 않고, 더욱이 그 내용이 출가수행자뿐만 아니라 속인들도 놀랄 만큼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란 <법화경>이 설하는 1불승(一佛乘)의 가르침임은 말할 것도 없다. <법화경> 이전에 설해진 많은 가르침은 실제로 <법화경>을 설하기 위한 교화의 수단으로서의 가르침, 즉 방편(方便)이며 “<법화경>이야말로 모든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한다면 종래의 출가자는 놀라고 분노하며 <법화경>을 외도의 논(論)이라고 배척할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것이 박해의 원인이다. <법화경>은 이와 같이 하여 가해지는 박해에 대해 그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을 뿐더러 인욕의 갑옷을 입고 참고 견디며 가르침(法)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라도 찾아가 법을 설하겠다고 하는 결의를 말하고 있다. 일본의 니찌렌(日蓮)스님은 <법화경>을 넓혔기 때문에 사도(佐渡)로 유배되는 박해를 받았고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이 ‘권지품’ 20행의 게송을 특히 중요시하여 말하기를 “지금 니찌렌은 말법(末法)에 태어나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다섯 글자(五字)를 넓히려다 박해를 받는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2천 2백여 년 동안 실로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도 일체 세간에 원망이 많고 믿기 어려운 경문을 실천하지 않았도다. 자주 몰아낸다는 명문을 봄(見)은 오직 니찌렌 나 한 사람 뿐”이라고 하며 경문을 몸으로 읽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감연대사(堪然大師)가 열거한 세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세 종류(三類)의 강적(强敵)”이라 하고 “당세(當世)에 세 종류의 강적이 없다면 누가 불설(佛說)을 믿고 받아 간직(受持)하겠으며 니찌렌이 없으면 누가 <법화경>을 펴겠는가”고 하며 자신이 법화행자(法華行者) 즉 실천자(實踐者)라는 자각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법화경>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전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인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실상(實相)을 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제자→악인→여인→근친에 수기
“누구나 成佛”…皆成·일승사상 기조
본장(本章)에서는 석존에게 가장 가까운 두 사람에게 수기를 주고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샤리푸트라(舍利弗) 존자(尊者)를 비롯하여 성문(聲聞)으로 불리는 많은 직제자(直弟者)들에게 차례 차례로 미래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완성하고 부처가 될 것을 보증해 왔다. 그 가운데는 석존이 태자로 왕궁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태어난 라훌라의 밀행(密行)에 대해 도칠보화여래(蹈七寶華如來)의 수기를 준 것도 포함돼 있다. 라훌라는 석존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노력을 한 것을 ‘밀행’이라는 말이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차례 차례로 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연(緣)이 깊은 석존의 양모(養母)와 지난날의 아내에 대해서는 아직 수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은 이러한 근친자(近親者)들도 석존의 뒤를 좇아 출가하여 오랫동안 수행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석존은 이러한 근친자의 생각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우선 젊어서부터 수행자로서 깨달음을 구해 온 직제자들에게 수기를 주고, 그런 다음 비로소 근친자에게 수기를 줄 기회가 왔으리라고 본다. 즉 보살들이 미래의 악세(惡世)에서 나름대로 ‘인내(忍耐)’를 가지고 <법화경> 전할 것을 맹세한 정경(情景) 뒤에, 석존의 양모(생모의 동생)인 마하프라쟈파티가 근심 어린 얼굴로 석존을 우러러보는 것이다. 그러자 석존은 “아직 저희들에게는 장래에 성불을 이룰 것이 보증되지 않는다고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코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미 나는 모든 성문들에게 장차 성불함을 보증한다고 밝히고 있지 않는가” 하고 말씀하신 후, 다시 구체적으로 “미래의 세상에서 6만 8천 억의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대법사(大法師)가 된다”고 밝히고, 또 함께 있는 6천인의 비구니에게도 동시에 ‘법사(法師)’가 됨을 보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점점 보살의 수행을 쌓아가서 이를 완성하여 부처님이 될 것이니 그 이름은 일체 중생의 눈에 기쁨을 준다는 일체중생희견여래(一切衆生喜見如來)가 될 것이며, 이 일체중생희견여래와 6천의 보살들은 서로 차례차례 이어가며 수기하고 각기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라고 수기를 주신다. 그때 라훌라의 어머니 야쇼다라가 “석존께서는 미래 성불을 보증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나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는구나” 생각하자, 이를 아신 석존께서는 “그대는 장래에 백 천 만 억의 여러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보살행을 닦아 대법사가 되어 점차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완성해 축복받은 땅인 선국(善國)에서 마침내 성불할 것이니, 이름은 수많은 반짝이는 깃발을 가진 사람이라는 구족천만광상여래(具足千萬光相如來)라 할 것이다”는 수기를 내리신다. 이와 같이 ‘권지품’은 ‘제바달다품 제12’에서 설한 여인성불(女人成佛)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석존의 출가 이전의 양모와 부인에 대한 기별 즉 미래 성불의 보증이 밝혀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마하프라쟈파티는 석존의 이모로서 탄생이래 계속 석존을 양육한 분이며 또한 라훌라의 어머니 야쇼다라 비구니는 지난날 석존이 태자로서 카필라바스투에 있었을 때의 아내였다. 지금까지 석존은 이러한 가장 가까운 근친자에 대해 구체적인 미래 성불의 보증을 주지는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섯 사람의 직제자의 대표를 최초로 하여 차례차례 기별을 주어온 석존은 최대의 악인인 제바달다에게 기별을 주는 것에 의해 어떠한 악인에게도 성불이 허락됨을 설하고, 이어서 여덟 살된 용녀의 성불에 의해 여인성불을 밝힌 연후에 비로소 근친자 중의 근친자인 길러주신 어머니와 지난날의 부인에게 수기를 설한 것이다. 여기에 석존의 위대한 교화방식이 있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기별은 최초에 널리 주어지고 있지만, 제자들은 구체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들어서 수기를 밝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석존은 빼어난 직제자들, 오랫동안 석존을 따른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수기하고, 다시 악인·여인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통 사람들에의 지침을 우선하고 최후에 근친자에의 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법화경>은 평등대혜(平等大慧)라는 반야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누구나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개성사상(皆成思想)을 비롯한 일승사상(一乘思想)이 기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락행
법화경 설할때 몸·마음가짐 밝혀
천태대사, 몸·입·뜻·서원 4분류
앞의 ‘제13장 권지품’에서 바이샤쟈라쟈(藥王) 보살과 마하푸리티파나(大樂說) 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2만의 보살들에서부터 80만 억 나유타의 보살에 이르기까지,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 <법화경>을 간직하고 넓힐 것을 맹세했다. 이 ‘제14장 안락행품’에서는 그 맹세를 받고, 다음의 험악한 세상이 된 이 사바세계에서 어떻게 <법화경>을 설해 넓힐 것인가, 즉 경전을 넓힘에 있어 가져야 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밝히고 있다. 그 몸과 마음가짐에 대해 설한 것이 ‘4안락행’이다. 천태대사(天台大師)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을 몸(身)·입(口)·뜻(意)·서원(誓願)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먼저 몸(身)의 안락행에는 보살의 행위 즉 행동(行處)과 교제범위(親近處)가 설해져 있다. 행처(行處)란 인욕의 경지에 머물러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모습을 관(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친근처(親近處)에 대해서는 우선 최초에 보살이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열거하고 다음에 친근해야 할 것으로 (1)조용한 곳에서 좌선을 하여 마음을 닦아 다스릴 것 (2) 일체의 현상(一切法)이 공성(空)임을 관찰할 것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 14장의 이름의 유래가 된 ‘안락행’이란, 원어 수카-비하라(Sukha-vihara)의 중국어 번역으로, 원래 의미는 ‘낙(樂)에 머무는 것, 즉 심신이 안락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안락행이란, 안락한 수행이라는 뜻이 아니라 안락한 상태에 몸과 마음을 두기 위한 실천행법(實踐行法)을 말한다. 그래서 범본 즉 산스크리트 본에서는 이 14장을 ‘안락한 생활’이라 부르고 있다. 이 ‘안락행품’의 첫머리에서 만주슈리(文殊) 보살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여쭙는다. “세존이시여, 이 여러 구도자(菩薩)들은 참으로 보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부처님을 존경하고 따르기 때문에 큰 서원 세우기를,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의 험악한 세상에서 이 <법화경>을 수호하며 읽고, 외워, 배우고, 남에게 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큰 뜻을 세운 초심의 구도자들이 다음의 험악한 세상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앞 장(前章)의 ‘권지품’에서 다섯 종류의 사람들이 <법화경>을 마음 속에 간직(受持)하고 넓힐 것을 부처님 앞에서 맹세했다. 그것을 이어받아서 이 ‘안락행품’에서는 구도자 만주슈리가 대표가 되어,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다음의 악한 세상에서 이 <법화경>을 어떤 방법으로 설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부처님께 묻는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만일 보살마하살이 미래의 악한 세상에서 <법화경>을 설하려면 마땅히 다음의 네 가지 행법(行法)에 편히 머물러야 한다”고 하시며 다음의 네 가지의 행법에 대해 차례 차례로 설하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네 가지의 가르침을 ‘4안락행’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4안락행’이란,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의 악한 세상에서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이 지녀야할 마음가짐에 대해 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앞의 ‘법사품’에서의 ‘홍경(弘經)의 삼궤(三軌)’ 즉 <법화경>을 넓히는 세 가지의 바른 길과 비록 그 길은 하나이지만, 그 내용은 ‘법사품’의 옷(衣)·자리(座)·방(室)의 세 가지의 길보다도 훨씬 구체적이며 현실에 입각하여 설해져 있다. 첫 번째의 안락행은 앞서 말했듯이 천태대사에 의하면 이를 ‘신안락행(身安樂行)’이라 하는데 이를 둘로 나누어서 해석한다. 즉 보살의 행처와 친근처가 그것이다. 행처(行處)란, 아차라(acara)의 번역으로 행동(行動) 또는 거동(擧動) 등의 뜻이다. <법화경>에서는 “인욕(忍辱)의 경지에 머물러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고 제법여실(諸法如實)의 상을 관하라”고 설하고 있다. 즉 항상 모든 것에 대해 참고 견디며 어떠한 것에도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 그 마음에 집착이 있으면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보는 눈이 흐려진다. 그러므로 이 집착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법사품’에서 설한 “유화인욕(柔和忍辱)의 옷을 입고, 일체법(一切法)이 공성(空)이라는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말법시대에 <법화경>을 넓히려는 사람은 이러한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이 초심의 보살이 <법화경>을 넓히려고 할 때 지녀야할 마음가짐이다.
권력자·이교도·사냥꾼·예술가 등-멀리해야 할 사람
좌선·마음 다스리는 일, 空입장서 觀하기-가까이해야 할 일
지난 호에서는 ‘신안락행’에서의 행처(行處) 즉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친근처(親近處)이다. 친근처의 원어는 고차라(gacara)로, 행위의 대상 또는 행동 범위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이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과 반대로 가까이해야 할 것이 설해져 있다.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 대인관계에 관한 내용으로, 우선 다음에 열거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국왕이나 왕자, 대신이나 관리와 같은 권력자. 다음으로 이교도, 문학자나 음악가, 격투인 등 세상에 오락을 제공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오락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또 찬드라라고 하는 천민 계층의 사람들이나 짐승을 기르거나 어업과 사냥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 이와 같은 세속의 사람들을 자진해서 가까이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상대방이 찾아왔을 경우에는, 마음에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즉 어떤 대가도 바라지 말고 법을 설해 줘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성문(聲聞) 2승(二乘)의 출가자 및 그 남녀 신도를 가까이해서는 안 되며 또 성적(性的) 능력이 결여된 남성과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상이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들인데 맨 마지막, 성적 능력이 결여된 사람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교교단에는 원래부터 성적으로 건전한 남자가 아니면 승단(僧團)에 들어올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곧 출가 수행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성욕이 없거나 성적으로 불구여서 불능(不能)인 사람은 불도(佛道) 수행에서 성욕이 왕성한 사람보다 깨달음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욕망과 마찬가지로 성의 욕망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해탈 열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적으로 불능인 사람은 불교 수행 길에서는 결격자로 규정되어 왔다. 이상과 같은 배경에서, 수행자가 아닌 가르침을 받는 쪽의 사람에 대해서도 성적으로 건전해야할 것을 요구한 것이리라. 이 대인관계에서는 이상과 같이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 외에 또 나이 어린 제자나 사미(沙彌) 및 어린애 등을 기르지 말라고 한다.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이것도 앞의 성 문제(性問題)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그 근본은 어떤 경우에도 욕망의 생각(欲想)을 가지고 접근치 말라는 것이다. 성의 문제는 불교교단에서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출가수행자의 계율(戒律) 맨 처음에 바라이죄(波羅夷罪)로서 불음계(不淫戒)가 두어져 율(律)의 문헌에 갖가지 사례가 설해져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바라이(波羅夷)란 파라지카(parajika)의 음사(音寫)인데 ‘함께 살지 못한다’고 하는 뜻으로, 비구가 승단(僧團) 또는 그 결계(結界)에서 떠나가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은 모두 초심의 보살 즉 초발심의 보살이 가져야할 마음과 몸가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출가자의 본분은 독신(獨身)이어야 한다. 출가라는 말은 가족을 가지지 않아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중국의 유가(儒家)에서는 제가(齊家) 즉 집안을 다스리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데 불가(佛家)에서는 집안을 포기하는 것이라 하여 비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온갖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우선 본능적으로 집착하는 근친자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에 출가자는 가정을 버리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금욕(禁欲), 아니 극욕(克欲)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는 신출가(身出家)보다도 심출가(心出家)가 더 위라 하여 출가자들이 가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대승(大乘)이라는 이름 아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면에서부터 위반하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리하여 남방불교인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에서는 북방불교 즉 이른바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비불교(非佛敎)라고 규정짓고 있음에 대해 조용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본다. 다음에는 앞과는 반대로 친하고 가까이해야할 것이 있으니, 그 첫번째는 ‘항상 좌선(坐禪)을 부지런히 하고 한적한 장소에서 그 마음을 다스려라’고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공(空)의 입장에 서서,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라’고 하는 것이다.
혜사스님, 4안락행 수행 규범으로
日蓮 스님 “몸과 마음 ‘空’에 두라”
첫번째 안락행인 신안락(身安樂), 즉 보살의 몸가짐에서는 어떤 일에도 참고 견디며, 몸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가까이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좌선(坐禪)에 정진해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를 제13장 ‘권지품’과 비교하면 매우 소극적인 처신이라는 느낌이 든다. ‘권지품’에서는 “내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다만 위 없는 깨달음만 아낀다(我不愛身命但惜無上道)”고 하며 인욕의 갑옷을 입고 <법화경>을 넓히는데 매진하는,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설해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와 같은 결연한 모습은 없다. 이것은 다음의 구안락행(口安樂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천태는 “이 네 가지 안락행은 초심의 얕은 행을 하는 보살을 위해 설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삼론종의 길장(吉藏)도 똑같다. 즉 “초심의 보살이란 사실 사바세계에서 이 <법화경>을 전파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다른 국토에서 <법화경>의 홍통을 지원한 5백의 아라한, 8천의 성문들을 말한다. <법화경>에 의해서 보살이 된 이들은 아직 경험이 없어 위대한 보살로서의 힘을 갖추지 못했다. 이 사람들에게 사바세계에서의 경전 홍통에 대한 마음가짐을 설한 것이 바로 안락행이다”라고 <법화의소(法華義疏)> 권10에서 말하고 있다. 두 번째의 안락행이란, 천태가 구안락행(口安樂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왜 이렇게 이름했는가 하면 그 내용이 언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홍통자가 <법화경>을 남에게 설하거나 경을 읽어줄 때에는 사람이나 경전에 대해 그 허물을 지적하거나, 다른 법사를 경멸하지 말며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말라,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얼굴로 설하라,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대승으로써 답하라 등과 같이 말이나 태도에 대해 설하고 있다. 세번째의 안락행은 몸(身)·입(口)에 이어서 의안락행(意安樂行)이라 부른다. 이것은 주로 홍통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설한 것으로서 타인에 대해 질투, 거짓말, 아첨, 경멸 등의 마음을 품지 말며 다른 수행자의 장단점을 거론치 말라, 희론(戱論)으로써 남과 다투지 말라고 설한다. 그리고 홍통자는 모든 사람에게 대비심을 일으키고 모든 부처님에게는 자애로운 아버지(慈父)라는 생각을, 보살에 대해서는 큰 스승(大師)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설한다. 이와 함께 법을 설할 경우에는 어느 한 사람을 편애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설하라는 마음가짐을 가르치고 있다. 마지막 네번째의 안락행을 천태는 서원안락행(誓願安樂行)이라 이름한다. 그것은 홍통자에게 <법화경>에 의한 중생 제도의 서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은 출·재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자기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그 모든 사람들을 <법화경> 속으로 이끌어들이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설한다. 이상의 첫번째부터 네번째까지가 4안락행이다. <법화경>은 “말법시대에 이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은 이 네 가지의 몸과 마음가짐, 즉 마음을 닦음에 의해 그 설법에 과실이 없어, 출가수행자나 재가의 국왕을 비롯하여 브라흐만·거사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존경과 찬탄을 받는다. 만일 사람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받더라도 천신들이 밤낮으로 항상 그를 지켜 줄 것이다” 라고 설한다. 천태 지의대사의 스승인 남악혜사(南嶽慧思: 515∼577) 스님은 중국 남북조 말기에 강학(講學)불교로 변화한 당시의 불교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좌선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불교를 강하게 제창하였으니 그 때문에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정도의 박해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법화경>을 보살의 실천 수행을 설한 경전으로 보고 특히 ‘안락행품’을 그 실천 불교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의 저서 <법화경안락행의(法華經安樂行義)>는 법화삼매(法華三昧)라는 <법화경>에 의거한 제법실상을 관(觀)하는 삼매행(三昧行)을 설한 것이다. 이 가운데서 그는 4안락행을 보살 수행의 규범으로 파악하고 이를 무상행(無相行)이라 이름했다. ‘무상행’이란, 항상 좌선을 행하고 일체법공(一切法空)의 입장에서 몸을 두게 하는 수행을 말한다. 그는 이 4안락행에 의거하면서 다시 독자적인 해석을 하여 적극적인 절복(折伏)의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이 혜사 스님의 ‘법화삼매’는 제자인 지의 스님에게 이어져 그의 저서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에서는 이 4안락행이 그 행법으로서 채용되었다. 일본의 니찌렌(日蓮)은 이 14장의 4안락행을 절복, 즉 강제적으로 인도하는 행법이 아니라 섭수, 즉 온화한 태도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말법의 악한 세상에서 널리 유통케 하는 것은 섭수가 아니라 절복역화(折伏逆化)에 있다”고 하여 섭수를 부정한 것이다.
비밀장…가장 얻기 힘든 경전의미
악마는 수행 방해 마음속 번뇌 표상
<법화경>은 4안락행을 설한 다음 ‘계중명주의 비유’를 통해 <법화경>이 모든 부처님 여래의 비밀장(秘密藏)으로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경전이라는 점을 말한다. ‘계중명주’ 즉 ‘상투 속의 밝은 구슬’에 관한 비유는 아래와 같다. “만주슈리(文殊)여, 비유하면 강력한 전륜성왕이 그 위력으로 여러 나라를 평정하려 하지만 여러 나라들은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왕이 직접 토벌에 참가한다. 왕은 전공(戰功)을 세운 장병에게 각각 그 공로에 알맞게 여러 가지의 상을 내린다. 그러나 전륜성왕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상투 속에 있는 훌륭한 보배만은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보배구슬은 임금만이 상투 속에 비밀히 감추고(秘藏) 있는 것, 즉 왕위(王位)를 상징하므로 만일 그것을 주면 다른 왕들이 “왜 왕위를 남에게 줄까?” 하며 놀라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만주슈리여, 여래의 경우도 이와 같다. 여래는 선정(禪定)과 지혜의 힘으로 진리의 국토를 얻은 전세계(全世界)의 왕이다. 그러나 많은 마왕은 진리의 왕에게 복종하지 않으므로 진리의 왕은 부하인 수행자의 여러 장군을 마군(魔軍)과 싸우게 한다. 이 싸움에서 전과(戰果)를 올린 수행자에게는 다시 많은 가르침을 설하여 그들을 기쁘게 한다. 또 여래는 해탈과 번뇌에 물들지 않는 소질의 힘이라는 진리의 재물(法財)을 그들에게 나누어 준다. 포상을 받은 그들은 번뇌를 멸하여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기뻐하지만 그래도 여래는 이 <법화경>을 설하지 않는다. 만주슈리여, 전륜왕이 자기의 상투 속에 감추어 두고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밝은 구슬을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주려고 하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마음 속의 악마인 탐냄· 성냄· 어리석음의 세 가지의 독(三毒)을 멸한 위대한 수행자에게도 일찍이 설하지 않았던 <법화경>을 지금 여기서 설하려 한다. 만주슈리여, 왜냐하면 이 <법화경>은 일체 중생을 훌륭하게 여래의 지혜에 도달하게 하지만 그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는 도리어 원수가 될 수도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믿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까지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래는 지금 이 경을 여기서 설한다. 만주슈리여, <법화경>은 여래의 가장 높은 설법이며 수많은 설법 가운데서 가장 깊은 비밀의 가르침이므로 가장 최후에 그대들을 위해 자세히 설하려 한다.” 이 ‘계중명주의 비유’에 등장하는 악마란 불도 수행을 방해하는 마음속의 번뇌를 표상한 것으로서 이 악마를 극복하는 것을 ‘항마(降魔)’라고 한다. 석존의 전기(傳記)에 의하면 석존께서 깨달음을 완성하려고 보리수 아래 앉아 있을 때, 갖가지의 악마가 나타나 협박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며 석존의 깨달음을 방해하였지만 석존께서는 그 습격을 참고 견디며 결국에는 악마를 굴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때의 석존께서 취하신 좌선(坐禪)의 자세는 가부좌(跏趺坐)인데 오른손을 아래로 왼손을 무릎 위에 두었다. 이를 항마좌(降魔坐)라 하고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려 두번째 손가락으로 대지(大地)를 가리키는 모습을 하였더니 악마가 물러갔다고 하여 이 두 손의 모양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 이름한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악마가 밖에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 속에는 부처와 범부가 함께 살고 있으니 이를 선가(禪家)에서는 ‘불범동거(佛凡同居)’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와 범부는 모두 인격체가 아니며 부처는 불성(佛性)을, 범부는 인간성(人間性)을 비유한 말이다. 따라서 불성과 인간성은 원래 이질적이거나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것이니 이것이 대승불교의 사상이다. 윤리의 세계에서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선악과 정사(正邪)의 현상을 상대적으로 보고 선과 악, 정(正)과 사(邪)를 서로 싸우게 하여 선과 정이 악과 사에 이기도록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선과 악, 정과 사를 서로 적대적(敵對的)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동거(同居)하는 것으로 여겨 나란히 앉게 하여 선과 악, 정과 사를 하나의 몸(一體)으로 지향한다. 이리하여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진리(法)는 곧 중생심인데 그 중생심 속에 진여심(眞如心)과 염심(染心)이 있다”고 하며 의상대사(義湘大師)의 <법성게(法性偈)>에서도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 정사를 한몸으로 하여 그 위치를 향상시키려면 양자를 싸움에 의하지 않고 정과 선이 각각 사와 악을 조어(調御), 즉 컨트롤하여 정리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실천하는 것이 불교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땅에서 솟은 보살들
땅 갈라지며 ‘큰 뜻 구도자’ 솟아
무명 깨고 일어난 부처님 제자들
범본(梵本) <법화경> 제14장 ‘구도자(菩薩)들이 대지(大地)의 갈라진 틈새에서 출현했다’는 것을 <묘법연화경>에서는 ‘종지용출품제십오(從地涌出品第十五)’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종지용출품’에서는 첫머리에 6만 갠지스강의 모래(恒河沙) 만큼이나 되는 수없이 많은 구도자(菩薩)들이 땅속에서 돌연히 출현하여 이 사바 세계에서 <법화경>을 지키고 간직하며 넓히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법회에 동참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땅 속에서 솟아난 구도자들에 대해 당연히 놀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품는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이 구도자들이야말로 내가 옛날부터 교화한 사람들임을 밝히지만, 사람들은 성도한지 불과 40여 년밖에 되지 않으신 석존께서 어떻게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처님께 그 까닭을 해설해 주소서 하고 간청한다. 이것이 이 15장의 줄거리인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품은 의문은 다음의 ‘제16장 여래수량품’에서 밝혀진다. 그러므로 이 15장은 구성상에서 다음 ‘여래수량품’의 도입부에 해당하며 또한 ‘여래수량품’을 설하기 위한 복선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법화경>을 성립사상(成立史上)의 관점과는 달리 그 형태상으로 보면 ‘제14장 안락행품’과 ‘제15장 종지용출품’과의 사이에서 둘로 나누는 것이 중국이래의 전통적인 해석이다. 특히 천태지의(天台智 )가 전반(前半) 14품을 적문(迹門), 후반(後半) 14품을 본문(本門)이라고 부른 이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본(本)’·‘적(迹)’이라는 글자의 뜻은 ‘근본’과 ‘흔적’이라는 의미인데 원래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編)’에 나오는 ‘적(迹)’, 즉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과, ‘적하는 까닭’, 즉 그것을 생하게 하고 나타나게 하고 있는 근원적인 바탕(本)이라는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 15장에서부터 <법화경>의 본문(本門)에 들어간다.
이 15장의 첫머리에서는 타방(他方)의 국토에서 온 6만 갠지스강 모래 수보다 더 많은 구도자, 즉 보살들이 “만일 저희들에게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도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정진하며 이 <법화경>을 지켜 간직하고 읽어주고 외우며 쓰고 베껴서 공양할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참으로 이 국토에서 널리 <법화경>을 설할까 합니다”라고 말씀드린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그만두자, 선량한 남자들이여, 그 뜻은 고맙지만 그대들이 <법화경>을 지키고 간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거느리는 이 사바세계에는 6만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이나 되는 위대한 뜻을 세운 구도자가 있으며, 그 하나 하나의 구도자에게는 각각 6만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은 숫자의 제자들이 있어, 이 여러 사람들이 내가 멸도한 뒤에 <법화경>을 지켜 간직하고 읽어주고 외워주며 널리 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사바세계 전체의 땅이 모두 진동하면서 벌어지더니 그 속에서 한량없는 천 만 억의 큰 뜻을 세운 구도자들이 동시에 솟아 나왔다. 그 구도자들의 몸은 황금색으로 서른 두 가지의 위대한 사람이 갖는 모습(大人相)을 갖추었으며 무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상의 줄거리에서 <법화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 사바세계는 만주슈리(文殊)·사만타바드라(普賢)·아바로키테스바라(觀音)·마이트레야(彌勒)와 같은 관념상의 보살이 아닌 사바세계의 사람들에 의해 교화되고 구제되어야 한다. 즉 지구 속에서 솟아 나온 구도자들, 무명을 깨고 일어난 사람들은 석존의 제자이기 때문에 석존의 가르침을 넓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이 사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의 중생과 연(緣)이 깊어서 <법화경>을 넓히는 것이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새로 등장하는 네 사람의 위대한 구도자(四大菩薩)란, 모두 행(行)을 위주로 하는 구도자이므로, 앞으로 <법화경>을 설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할 구도자는 행을 통하여 구제해야 하며, 훌륭하게(上行), 끝없이(無邊), 청정하게(淨), 그리고 꿋꿋하게(安立) 행(行)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을 설할 사람들은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누구라도 한결같이 훌륭하게 끝도 없이 항상 맑고 깨끗하며 꿋꿋하게 굽히지 않고 <법화경>을 설해야 할 것이다. 즉 세간 법에 물들지 않음이 마치 연꽃이 물에 있음과 같아야 한다.
아비 젊고 아들 늙은 비유
구도자들 지용보살 존재 의심
부처님 “먼 옛날부터 대중교화”
금빛으로 빛나는 부처님만이 갖춘 서른 두 가지의 특별한 모습(三十二相)을 가진 위덕있는 구도자(菩薩)들이 땅 속에서 솟아 나왔다. 이 구도자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사바세계 아래의 허공 가운데 머물러 있었으나, 석가모니불께서 자기들에게 중생 교화를 맡긴다는 음성을 듣고 아래로부터 솟아오른 것이다. 이 구도자들 가운데 네 사람의 도사(導師)가 있었다. 첫째의 이름은 뛰어난 행을 하는 상행(上行)이요, 둘째의 이름은 끝없는 행을 하는 무변행(無邊行)이요, 셋째의 이름은 깨끗하고 맑은 행을 하는 정행(淨行)이요, 넷째의 이름은 확고한 행을 하는 안립행(安立行)이다. 이 네 분의 구도자는 대중의 우두머리로서, 앞에서 그들을 인도해 가는 지도자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그 구도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자리에 모인 대중들은 이 땅 속에서 솟아난 지용(地涌) 보살(菩薩)의 출현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함과 동시에 한결같이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이 구도자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또 그들이 오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은 누구에 의해서 교화되었으며 또 어떤 법을 간직하고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동의 의문을 구도자 마이트레야(彌勒)가 대중을 대표하여 부처님께 질문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 지용 보살들은 부처님인 내가 이 사바세계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은 후에 교화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나의 법, 즉 <법화경>을 배워 익히기를 밤낮으로 정진하며 사바세계의 아래쪽 허공 가운데에 머물고 있던, 오랜 옛날부터 내가 교화해 온 구도자들이다. 이 사실을 일심으로 믿어야 한다.” 이 말씀을 들은 구도자 마이트레야를 비롯한 대중들은 한층 더 의혹을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계시는 석가모니불께서는 출가하여 가야성 근처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여시고 붓다(佛陀)가 되신 지 불과 4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천만억겁이라는 세월에 걸쳐 가르쳤어도 가르칠 수 없을 만큼의 구도자들을 교화해 왔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 구도자 마이트레야는 이 의문을 비유를 들어 부처님께 질문한다. “머리털은 검고 얼굴과 살결이 고운 25세의 젊은이가 백발에 주름투성이인 100세의 노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내 아들이다’ 하고, 그 노인도 ‘이 분은 내 아버지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일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는 것처럼 지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고 여쭙는다. 이것이 ‘아비 젊고 아들 늙음의 비유’이다.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석가모니불께서 이렇게 많은 지용의 보살들을 교화해 왔다는 사실이 커다란 놀라움이며 의문이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진실한 말씀만을 하신다고 믿으면서도 마이트레야는 후세의 보살들이 이 <법화경>을 의심하고 법을 깨트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 부처님께 “그 까닭을 말씀하소서” 하고 간청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이트레야의 최초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지용보살들이 머문 곳과 교화의 스승, 그리고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해 대답하셨다. 그 대답 가운데의 게송 맨 끝에 “내 아득한 옛날부터 이 대중들을 교화해 왔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성도한 이래 40여 년, 현재 이렇게 대중 앞에서 <법화경>을 설하며 나이 80에 입멸하시는 석존이 실제로는 우주가 시작된 아득한 옛날부터 수명을 계속 유지하며 교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이트레야는 물론 현재의 우리들도 이 점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편 이 눈앞의, 나이 80에 입멸하는 우리와 가까운 석존이 실제로는 아득한 옛날부터 수명을 유지하며 지금에 이르렀음을 밝히는 것을 ‘개근현원(開近顯遠)’, 즉 가까운 것을 열어서 먼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 이러한 사실은 35세 성도(成道) 80세에 입멸(入滅)이라는, 현실의 석존에 대한 종래 사람들의 부처님에 대한 생각을 뿌리에서부터 변혁시키는 것이 된다. 한량없는 수명의 부처님이란 어떠한 존재이며 80세에 입멸하시는 현실의 부처님과는 과연 어떤 관계일까. 부처님의 신체에 관한 문제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이에 대한 해설이 다음의 ‘여래수량품’이다. 즉 수량(壽量)이라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무량수품(無量壽品)’이 되므로 지난날의 법화천태종에서는 <나무묘법연화경>이 아닌 <아미타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우주탄생~소멸까지의
‘영원한 절대 진리’를 인격화한 것
‘제2장 훌륭한 수단’이라는 ‘방편품(方便品)’이 이론적이며 공간적으로 사물의 참모습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면 이 ‘제16장 영원한 생명’의 수량품(壽量品)에서는 종교적이며 시간적으로 부처님(즉 진리)의 본체(법신, 法身)를 밝힌 것으로서, 이 두 장은 둘이면서 하나임과 동시에 하나이면서도 둘, 즉 불이이이(不二而二) 이이불이(而二不二)인 상즉(相卽)의 관계이다. 앞의 ‘제15장 종지용출품’에서 구도자 마이트레야(彌勒)를 대표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품고 있는 놀라움과 의문에 대해 부처님께서 대답하는 것이 16장 ‘여래수량품’이다. 첫머리에 부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그대들은 여래의 진실한 깨달음의 말을 똑똑히 듣고 이해하여 굳게 믿도록 하라”고 강조하셨다(‘三誠’). 이에 대해 대중들도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세존이시여, 원하고 원하오니 그 진실을 설해 주소서. 저희들은 반드시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겠습니다”라고 간청하고(‘三請’) 다시 한번 더 청한다(‘重請’).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를 받아 “그대들은 여래의 본체(‘如來秘密’)와 자유자재한 능력(‘神通之力’)을 자세히 들어라”고 하시며(‘重誠’) 비로소 설법을 시작한다. 이렇게 3성3청(三誠三請) 중청중성(重請重誠)의 형식을 거친 후 말씀하신 부처님의 설법 내용은 지금까지의 석가모니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흔드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물론 부처님의 본체에 대해서는 <법화경>의 개경(開經)인 <무량의경(無量義經)> ‘덕행품(德行品)’에서도 이미 밝힌 바가 있지만 그때는 시간성(時間性)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무량의경>에 의하면 무량의(無量義)에는 체무량(體無量)과 용무량(用無量)이 있다. 부처님의 본바탕(‘法身’)은 한량없이 크기 때문에 체(體)가 무량하다는 것이니, 다시 말해 오직 한정된 우리들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현상 세계 속에 있는 진실한 모습, 즉 현상 세계와 겹쳐서 존재하는 ‘실재’의 세계인 실상의 본체(‘佛’)는 헤아릴 수 없는 아주 무한한 것이므로 ‘그 본질은 한량이 없다’고 한다. 또 실상, 즉 부처님이라는 단 하나의 진실한 세계, 다시 말해 절대의 세계(‘無爲’)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모든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근본인 ‘실상(佛)’의 ‘작용(用)’ 또한 무한하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 미묘하기 때문에 ‘작용(用)이 무량’한 것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절대진리를 인격화한 것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 몸을 나타내신 석가모니세존을 부처님이라 하고, 또 영원히 불멸하는 상주(常住)의 법신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이 둘을 두고 의아심을 품는 경우가 바로 앞장의 ‘종지용출품’에서의 미륵보살을 비롯한 대중들의 경우이다. 물론 석가세존도 부처님이시고,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진리의 부처님도 부처님이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인도에서는 깨달은 분(‘覺者’)을 붓다(佛陀: buddha), 즉 부처님이라 했고 또 붓다란 진리에서 왔다하여 여래(如來: tathagata)라고 했다. 이는 변화하는 현실상(現實相)의 본래적인 상태, 즉 현실상의 진리는 변화하는 것이지만, 이 변화한다는 것의 영원상(永遠相) 혹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진리는 절대 불변하는 것(이를 무위(無爲)라 한다)이므로 이를 일반적으로 ‘여(如: tatha: 있는 그대로)’ 라든지 ‘진여(眞如: tathata: 있는 그대로의 상태)’라고 부르며 부처를 여래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진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든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불가침이라고 말하며 핵심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다’고 하며 이 세상의 만물만상은 ‘변화’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세속적인 진리는 ‘변화한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진리란 변화하지 않는 것(‘不變’)인데 변화하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틀림없이 반문하겠지만, ‘이 변화한다는 진리는 영원토록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는 불변한다는 것이다’ ‘공(空)’ 또는 ‘공성(空性)’이라는 것은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무릇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이것은 공성, 즉 실체(實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변화하는 것을 지탱하고 있는 것, 즉 불변하는 ‘그 절대’,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절대적 진리’를 인격화한 것이 부처님이다. 그렇다고 ‘공’이 부처님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부처님의 본체는, 아득한 그 옛날 즉 우주가 생겨나서부터 마지막날까지 영원토록 항상 있는 절대 진리를 이름하여 우리는 부처님이라 한다
여래수량품 제16 영원한 생명
현실의 모든 부처님은 무량수불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도 한 부처
“그대들은 여래의 진실한 깨달음의 말을 똑똑히 듣고 이해하여 굳게 믿으라”고 말씀하신 석존께서는 이제서야 비로소 설법을 시작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천신과 아수라도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출가 후에 가야성 부근에서 성도(成道)하여 정각(正覺)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의 붓다(‘覺者’)인 석가모니불은 아득한 구원(久遠)의 옛날에 성도하여 이미 한량없고 끝간데 없는(‘無量無邊’) 백천만억(百千萬億) 나유타(那由陀) 겁(劫)이라고 하는 한없이 길고 긴 시간이 경과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성불하여 지금까지에 이른 시간을 5백진점겁(五百塵點劫)이라고 하는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 5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3천 대천세계를 부수어 아주 작은 가루로 만들었다고 하자. 그 분말을 가지고 동쪽으로 날아가 5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번째의 별을 지날 때마다 한 미립자(微粒子)씩을 떨어뜨리면서 계속 날아가 마침내 그 미립자를 모두 떨어뜨렸다고 하자. 그대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천체(天體)를 거쳐왔는지 머리로 생각할 수 있겠으며 헤아려서 그 수를 알 수 있겠는가? 그 미립자를 떨어뜨린 세계와 그저 스쳐지나 갔을 뿐 그 미립자를 떨어뜨리지 않은 세계를 합해서 다시 부수어서 가루로 만들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미립자 한 개를 1겁이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성불하고서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은 그 미립자 수와 같은 겁에다가 다시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겁을 더한 세월이 지난 것이다”라고 한다. 우리들은 흔히 아득한 옛날을 이야기 할 때 ‘호랑이 담배 먹든 시절에’ 또는 ‘옛날 옛적에’라고 표현하지만 인도사람들은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즉 나유타(那由陀)는 10의 11제곱이고 아승지는 무앙수(無央數)를 말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무시(無始)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이 설법을 듣기 이전까지의 모든 사람은 물론 천신들이나 아수라(이 셋을 삼선도(三善道)라고 함) 등도 눈앞의 석가모니불은 우리들과 똑같이 태어나고 똑같이 나이 들어갔으며 이윽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실은 아득한 옛날에 이미 성불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기나긴 시간동안 석가모니불은 항상 이 사바세계에 계시면서 설법교화를 계속해 왔다고 한다. 이것이 종래의 부처님의 몸(‘佛身’)에 대한 인식의 일대 변혁(一大變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수량품’의 설법에 의해서 80세 입멸하는 현실의 석가모니불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다시 말해 한량없는 생명을 가진 부처님임을 밝힌 것이다. 이 ‘수량품’의 설법에서 밝혀진 영원한 부처님을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이라 하며 본불이란 적불(迹佛)에 상대한 말이다. 우리들과 똑같이 태어나 멸해 가는 부처님의 근본적인 뿌리(‘本源’)에 영원 불멸의 부처님이 계시고, 이 불멸하는 부처님의 응현(應現)이 현실의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생각 끝에 생겨난 것이 본불이다. 구원에서부터 불멸의 부처님은 중생 교화를 위해 여러 가지로 몸을 나타내어 “만일 어떤 중생이 나에게 찾아오면 나는 부처님의 눈(‘佛眼’)으로 그 사람의 신근(信根) 등이 날카로운가 둔한가를 관찰하고 어떻게 가르치면 깨달음을 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수단을 생각한 후, 그들에게 알맞도록 가지가지의 다른 부처님의 이름을 들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부처님들의 이름이 같지 않고) 또 그 부처님의 연대가 크고 작아 같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 가르침을 설하고 나면 또다시 이 세상에서 떠나(‘涅槃’)리라는 것도 말한다”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영원 불멸의 부처님을 본불이라 하고 거기에서 응현하여 현실에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는 부처님을 적불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본불이나 적불이라고 하는 본적(本迹)의 두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 불멸한 부처님인 본불이 수승한 것이 아니며 그 응현인 생멸의 모습을 취하는 적불은 보다 한 단계 가치가 낮은 것이라고 하는 우열론(優劣論) 등은 <법화경>의 참뜻에서 벗어난 것이다. <법화경>에는 원래 ‘본’이나 ‘적’이라는 말은 전혀 설해 있지 않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구체적인 석가모니불이 그대로 영원 불멸의 부처님, 즉 수명이 한량없는 부처님인 무량수불(‘阿彌陀佛’)이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아직껏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법화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진리의 나타남
석가불은 적불·화신불·응신불
세상 모든 현상은 본불의 화현
이 ‘16장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께서는 구도자 마이트레야(‘彌勒’)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극히 깊고 오묘한 여래의 본체(‘秘密’)와 자유자재(‘神通’)한 능력(‘力’)을 들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이란 생신(生身)의 석가모니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 다시 말해 이름 붙일 수 없고 그림으로 나타낼 수 없는(‘名不得 相不得’) 진리를 임시로 이름지어 부처님이라 한 것이다(그러므로 부처님이라는 말도 가명(假名), 즉 일시적인 이름이다. 왜냐하면 부처님도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 즉 변해 가는 존재(‘法空’)이기 때문이다). 앞에 설명했듯이 법이라는 말 자체가 변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부처님의 본성은 변하는 것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말이 바로 ‘비밀(秘密)’이라는 말이다. 천태는 비(秘)란 1신 즉 3신(一身卽三身: 法身·報身·應身)인 것, 밀(密)이란 3신 즉 1신(三身卽一身)인 것, 다시 말해 1신과 3신의 상즉(相卽)을 ‘비밀’이라 해석하여 <법화문구>에서 이를 “지금까지 설하지 않았던 것을 ‘비’라 하고,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을 ‘밀’이다”라고 설명한다. 또 삼론종의 길장도 그의 저서 <법화의소 권10>에서 말하기를, “지금까지 설한 바가 없는 것을 ‘비’라 하고 그 감춰져 온 법이 매우 깊기 때문에 ‘밀’이라 한다”고 하여 천태의 <법화문구>와 그 해석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데 법상종의 자은대사(慈恩大師) 기(基)는 해석을 조금 달리 하는데, <법화현찬 권9>에서 그는 “법신과 보신의 2신(二身)의 본성이 심묘(深妙)하므로 ‘비밀’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에 ‘신통(神通)’이란, 천태에서는 법·보·응 3신의 작용을 ‘신통지력(神通之力)’으로 해석하고, 길장은 부처님의 수명이 장원함을 짧게 나타낸 것이 ‘신통’이라 하며, 자은대사는 화신이 중생으로 응해서 나타나는 작용이 ‘신통’이라고 해석한다. 길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신론(佛身論)에 의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밀신통지력’의 원어는 가지력(加持力) 또는 위신력(威神力), 즉 신비한 힘이라는 뜻이다.‘아설연등불등(我說燃燈佛等)’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가 크다. 연등불이란 과거세에 출현하여 석존에게 성불의 예언(‘授記’)을 하신 부처님이신데 정광(錠光) 또는 보광(普光)이라 번역된다. ‘제1장 서품’에서는 묘광(妙光)에게 교화되어 차례 차례로 성불한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의 여덟 왕자 중 최후에 성불한 분이 연등불이라고 설하고 있지만 이 연등불과 석존의 관계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이 ‘아설연등불등’이라는 말은 쉽게 지나칠 글귀가 아니기 때문에 예로부터 두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그 첫번째는 “내(‘釋迦佛’)가 연등불 등이라 설해 왔다”라고 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설, 즉 연등불 등의 부처님들은 본불인 석존이 중생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나타난 응현불(應現佛)이며 본래는 석존과 동체(同體)라고 하는 설이다(천태 이전의 해석과 자은대사의 <현찬> 등). 이 설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두번째의 해석은 연등불과 석가는 별도의 부처님이라는 설이다. 이 해석은 천태의 학설인데 천태는 앞의 해석을 비판하여 배척하고, <법화경> 이전의 경에서는 석가불은 연등불 아래서 수행하고 연등불로부터 성불의 수기를 받았다고 설해져 있으나 그것은 모두 방편으로써 실설(實說)은 아니며 종래의 석가(‘迹’)에 대한 인식을 개혁시키기 위한 것이 <법화경>이 바라는 글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경을 해석하면 ‘아등연등불등’의 뜻은 “나(‘釋迦佛’)는 연등불 등의 일을 설해 왔다”라고 하는 의미가 되고, 이런 경우에는 첫번째의 해석인 연등불이 곧 석가불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연등불과 석가불은 별도의 부처님이 된다. 그러나 범문(梵文)에서는 “선남자여, 나는 그 동안 디판카라여래 등을 칭찬해 왔다”라고 되어 있어 “내가 연등불 등을 설해”라는 첫번째 설이 타당한 해석인 듯하다. 결론적으로 법신에서 법이란, 변화하는 능력(‘功能’)을 말하고, 이 법이 의지하는 자체를 몸(‘身’)이라 한다. 몸이란 마음(‘淸淨一心’)을 말하고 이를 세간에서는 진여·부처님·우주의 대생명 또는 본불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종래에는 석가모니불만을 가리켜 부처님이라 생각해 왔으나 그 석가불은 본불, 즉 대생명 또는 비로자나불이 일시적으로 변화해서 나타난 적불(迹佛)이며, 적불은 화신불 또는 응신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본불의 화현임을 말하고 있으니,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초초(花花草草)가 부처(‘如來’) 아닌 것이 없다. 이로써 우리 모두는 여여불(如如佛)임을 알아야(‘覺’) 한다. 이것이 바로 ‘여래수량품’이 가지고 있는 진면목이다.
여래수량품 제16
부처님 세계, 중생 세계
깨친 사람엔 현세가 극락정토
일체의 현상 마음이 만든 허상
원래 이 세상은 부처님이 보는 세계나 중생이 보는 세계나 어디까지나 절대 평등하여 똑같은 세계이지만 “(깨치지 못한) 중생들은 큰불이 나서 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지만, 부처님의 세계는 언제나 안온하여 천신과 인간들이 넘쳐흐르며 수 많은 놀이동산과 아름다운 누각에다 보배로 이룩된 산과 들에는 나무마다 꽃과 열매 무성하여 중생들이 놀며 즐긴다. 천신들은 북을 치며 갖가지 음악 연주하고 만다라꽃비 내려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뿌린다. 나(부처님)의 정토는 항상 이와 같이 허물어지지 않건만 중생들은 불에 타 없어진다고 생각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괴로움에 가득 차 있다(我此土安穩 天人常充滿 園林諸堂閣 種種寶莊嚴 寶樹多華果 衆生所遊樂 諸天擊天鼓 常作衆伎樂 雨曼陀羅華 散佛及大衆 我淨土不毁 而衆見燒盡 憂怖諸苦惱 如是悉充滿)”고 ‘여래수량품’은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는 허공법회(虛空法會)에서 본불(本佛)인 구원실상의 부처님(‘眞理’)께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등 다섯 갈래의 마음을 모두 없애고 오직 향상된 마음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설한 것이다. 예로부터 <법화경>을 설한 장소는 두 곳이며 법회는 세 번 열렸다 하여 2처3회(二處三會), 즉 2막3장(二幕三場)이라 한다. 그 세 번의 법회 가운데 두번째의 법회가 이 허공법회인데 인간의 마음을 공, 즉 제일의공(第一義空)의 세계로 끌어올렸음을 비유하여 허공이라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허공이란 ‘없다’ 또는 ‘허망’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일체 만법이 실체가 없는 공성임을 아는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인간 이하의 마음이 지배하고 있다면 이 <법화경>을 설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공을 아는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衆生心’)속에는 진여심(眞如心)과 염심(染心)이 평등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며 둘이 동시에 표출되지 않는다. 이렇게 표출되는 것이 하나라는 것은 생각이 하나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을 연으로 하느냐에 따라 정(淨)과 염(染)의 행이 생기므로 의상대사는 <법성게>에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 한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반야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 허공법회이다. 이렇게 허공법회에 동참한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공의 경지에 사무쳐 해탈을 하였고 동시에 너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알았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이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극락정토이며 너희들(‘衆生’)이 착각(‘顚倒’)된 눈으로 보는 세계는 너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즉 극락과 지옥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즉(相卽)된 것인데 그 어느 한쪽만 보고 지옥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올바로 보지(‘正見’) 못하고 삿되게 보는(‘邪見’) 것이니 중도(中道)로서 보면 나(‘佛’)와 같이 실상을 볼 수 있다. 즉 빛이 부처이고 부처가 빛인 것이다. 깨친 사람의 눈에는 현실 그 자체가 모두 빛(‘光明’)이니 이 세상이 극락정토인데 어디에서 극락을 구하려 하느냐고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3계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고 죽고 하여 기필코 변화하는 것이나, 그것은 현상 위에서 만 분의 일에 불과하며 여래의 눈으로 그 속에 있는 실상(불변의 진리, 즉 마음)을 보면 모든 것은 사라지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으며 모든 생명체는 그대로 살아있을 뿐 이 세상에 있다든지 혹은 세상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본래 없으므로 눈앞의 사물이 실제로 있다고 보는 것도 잘못이며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이다. 또 사물이 항상 변화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생각함도 미혹이지만, 그렇다고 현상만 보고 상주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함도 얕은 소견이다. 여래는 3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그와 같은 생각을 초월해 그 속에 있는 실상을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에 결코 잘못 보는 일이 없다. 일체의 현상(‘事物’)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지만, 깨치지 못한 중생은 저마다 각기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제각기 다른 욕망, 자기의 주관에 의해 분별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항상 이렇게 착각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진리(‘佛’)는 항상 이 세상에 있으면서 방편을 가지고 교화를 계속해 왔다. 이와 같이 진리는 항상 이 우주가 처음 시작되면서부터 존재해 왔고 또한 영원하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에 머물고 있어 없어(‘滅’)지는 일은 없다. 결론적으로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진리는 고통이 아니고 즐거움(‘樂’)이며 진리는 부처님(‘我’)이며 진리는 청정1심(‘淨’)이며 조화(‘寂滅’)된, 즉 평등한 모습인 것이다.
의사와 아들의 비유
충격요법으로 미혹에서 깨어나게
의사=석존, 묘약=불법, 아들=중생 의미
이 ‘여래수량품’에는 ‘훌륭한 의사의 비유’ 또는 ‘의사와 아들의 비유’라 불리는 유명한 비유가 설해져 있는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이름난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아무리 어려운 병도 거뜬히 고쳤다. 그는 또 많은 아이들을 둔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여행을 떠난 사이에 아이들이 무엇인가에 중독되는 불행한 일이 생겼다. 때맞춰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아버지의 모습을 본 아이들은 괴로워하는 가운데서도 기쁘게 아버지를 맞이하며 “저희들의 고통을 빨리 치료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한다. 아버지인 이름난 의사는 아이들이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보기만 해도 깨끗하고 향기도 좋은 약을 만들어 “빨리 마셔라”고 아이들에게 권한다. 증상이 가벼운 아이는 곧바로 마시고는 즉시 나았다. 그러나 증세가 무거운 아이는 독이 몸 속에 깊이 스며들어 마음도 평정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약의 색깔이나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다며 먹으려 하지 않았다. 훌륭한 의사인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중증의 아이들이 약을 먹을 마음을 일으킬까 고심한 끝에 한 가지의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는 “나는 늙었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지만 울며 슬퍼하지 말라. 여기 내가 조제한 약을 둘 것이니 마시고 싶어지면 마셔라”는 말을 남기고 먼 여행길에 오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는 거짓 소식을 전한다.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은 슬퍼하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가 최후에 남긴 말씀을 생각해 낸 아이들은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약을 마실 마음이 생겨나서 약을 먹고는 간신히 병이 나았다.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여행에서 돌아와 건강을 되찾은 아이들을 보고 기뻐했다. 명의인 아버지가 주는 약을 거부하는 중증 환자인 아들의 이야기는 극히 단순한 비유처럼 생각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의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으로 인해 생긴 슬픔이라는 충격에 의해 비로소 미혹에서 깨어난다고 하는 점이다.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서 석존은 이렇게 가르친다. “내가 언제까지나 살아있다면 사람들은 어느 때라도 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언제까지라도 가르침을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이 마음을 일깨워 주기 위한 방편으로, 매우 드물게 이 세상에 출현한다고 설한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놀라고 슬퍼하며 나의 가르침을 들으려 할 것이다.” 이 석존의 말씀을 통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서 ‘이름난 의사’는 석존, ‘중독된 아이들’은 미혹한 우리들, 그리고 ‘묘약’은 훌륭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어버이의 돈이 항상 내 곁에 있다고 생각지 말라”고 하는 말도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의 해석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어느 시대라도 아이들은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아버지의 잔소리나 훈계를 귀찮게 생각하지만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비로소 아버지의 존재가 중요함을 알게 된다. 이 비유도 이러한 일을 밑에 깔고, 병석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가까스로 아버지가 조제해 준 약(가르침)을 생각해 낸다고 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독이 몸에 깊이 스며들어 마음도 평정을 잃고 있기 때문에 약을 먹을 생각이 없다”고 하는 구절에서는 현대인의 많은 정신적 고뇌를 읽을 수 있다. 우리들은 머리가 아프거나 몸에 열이 나면 스스로가 이를 알고 즉시 약을 먹거나 의사의 치료를 받기도 하여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방지한다. 그러나 난치병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고 있는 가운데 병세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되는 것을 우리는 매일처럼 보고 듣고 한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잘못이다” 하는 자각 증상을 느낄 경우에는 사죄나 참회에 의해 그 죄과를 가볍게 할 수 있지만 나쁜 일을 하면서도 나쁜 일을 했다고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구제하기 어려운 사람은 없다. 마치 자각증상이 없는 병이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처럼 죄의식이 없는 악행은 본인의 인간성 상실이라는 중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두 분의 석존
事의 석존 육체가진 유한생명 존재
理의 석존 불생불멸 구원의 법신불
세 번째로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복선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양약(良藥)을 병든 아들에게 남긴 채 여행길에 올라 객지에서 “죽었다”고 알리는 명의인 아버지라는 석존과, 아이들이 완쾌된 것을 알고 귀국하는 아버지라는 석존과는 ‘다른 차원의 석존’이라는 점이다. 참으로 이 비유는 육체를 가진 역사상에 존재하는 유한(有限)한 생명을 가진 인간 석존과 육체를 갖지 않고 역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진리(法, 법) 상징으로서의 석존이라고 하는, 다시 말해 구원(久遠) 실성(實成)의 석존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석존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생신(生身)의 석존에 대한 신앙에서 진리를 몸으로 하는 고차원적인 석존에 대한 신심(信心)으로 몸을 바꾸(轉身, 전신)라고 하는 가르침이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 가득 채워져 있다. 즉 인격적인 석존 신앙에서 법(진리)인 석존에 대한 신심을 권장하는 가르침이 이 비유에 설해져 있다. <법화경>의 설정에 의하면 이때의 석존은 여든 살에 가깝고 입멸 직전의 시점으로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쟈그리하(왕사성) 밖에 있는 영축산에서 이 ‘수량품’을 설하고 있다. 석존으로서는 유한한 자기에 대한 인격신앙에서 자기가 깨닫고 또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법신심(法信心: 진리를 믿는 마음)으로 차원을 높이는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마땅히 최후의 설법이어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 심원(深遠)한 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해 우선 ‘의사와 아들의 비유’를 설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죽지 않은 아버지를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문제가 남는다. 석존과 제자들은 이 점에 대한 다음과 같이 문답을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의사가 방편을 사용한 것을 거짓말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고 제자가 대답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나도 아득한 옛날에 성불하여 지금까지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위하여 방편으로 ‘나는 죽을 것이다’ 하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리 그대로 말한 것이어서 거짓말 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한다. 이처럼 <법화경>에는 두 사람의 석존이 등장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한 사람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역사상의 석존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 육체를 갖춘 역사상의 석존을 ‘사(事實, 사실)의 석존’이라 하여 공경하고 이 사(事)의 석존이 깨달은 법을 ‘이(眞理, 진리)의 석존’이라 하여 신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사의 석존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므로 우리들과 똑같이 멸하는 시간적인 존재이다. 지금 석존께서는 “나는 죽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리 그대로를 말한 것이어서 거짓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대로이다. 이(理)의 석존은 사(事)의 석존과는 달리 육체가 없으므로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의 구원(久遠)한 존재이다. ‘또 한 분의 석존’이란 이 불멸의 이(理)인 석존을 말한다. 이렇게 사의 석존과 이의 석존이 같은 ‘석존’이라는 이름으로 <법화경>을 설하고 있다. 이 사(事)와 이(理)라고 하는 두 사람의 석존에 대한 관계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예를 들면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은 1643년에 태어나 172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인력은 뉴턴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뉴턴이 사망한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여기에 임시로 인간 뉴턴을 ‘사의 뉴턴’이라 하고 그 만유인력을 인격화하여 ‘이의 뉴턴’이라 부른다면 어떠할까. 두 사람의 석존에 대한 관계와 내용이 서로 다름도 이해될 것이다. 이(理)의 석존은 법의 인격체이므로 ‘법신불(法身佛)’이라 한다. 이 법신불은 모습이 없으므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수량품>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법신불인 석존이 눈에 비치는 인간인 석존의 모습(相, 상)으로 나타난(應, 응) 것으로 믿어 사(事)의 석존을 ‘응신불(應身佛)’ 또는 ‘화신불(化身佛)’이라 부른다. 응신이란 몸을 나타내는 것, 화신은 법신이 육신으로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중국의 천태는 이(理)의 석존, 즉 법신의 석존을 본지(本地: ‘근원’이라는 뜻)의 부처님으로서 ‘본문(本門)의 석존’이라 하며 ‘문(門)’이란 총합(總合)이라는 뜻으로 모든 진리나 가르침이 본문의 석존으로 통일·총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본문의 석존을 신심(信心)의 대상으로 삼는다. 또 천태는 사(事)의 석존, 즉 역사상의 석존을 ‘적문(迹門)의 석존’이라 하는데 ‘적(迹)’이란 인간으로 나타난 모습이라는 뜻이다. 법신의 석존·본문의 석존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점에서 인격 신앙이나 수상숭배를 초월한 ‘수량품’의 사상적인 깊고 오묘함이 여기 있다.
법은 아득한 과거와 현재를 거쳐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존재
천태 대사는 <법화경> 28품을 둘로 나누어 전반 14품을 적문의 가르침, 후반 14품을 본문의 가르침이라 분류했다. 즉 전반은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여신 ‘사(事)의 석존’의 설법이며 후반은 ‘수량품’에서 나타내 보이는 ‘이(理)의 석존’의 설법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수량품’ 이후는 인간 석존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설법한다는 법이 법을 설한다고 하는 지금까지 전혀 없었던 사상이 전개되고 있다.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진리임을 깨달은 석존이 진리의 몸으로 설법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적문의 석존’ 혹은 ‘법신·응신의 석존’이라고 한다면 역사상의 석존과 진리인 석존으로 2분화되어 마치 순위가 정해진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이 2분화의 인상을 하나로 정리하는 것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이다. 여행에서 병든 아들 곁으로 돌아와 약을 만들고 다시 여행길에 나서서 “죽었다”고 전했던 석존은 적문의 석존이며, 아이들이 완쾌한 후 귀국한 석존은 본문의 석존이다. “사망했다고 전했으나 참으로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말 속에 ‘두 사람의 석존’의 1인화를 느낄 수 있다. 아이들, 즉 미혹한 사람들은 아버지(적문의 석존)의 사망에 의해 미혹에서 깨어나니 비로소 아버지(본문의 석존)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의사와 아들의 비유’는 적문의 아버지와 본문의 아버지를 동일 인격으로 본다. 교리 상으로는 사(事)와 이(理)의 두 사람의 석존으로 나누어 설하지만 궁극에는 사와 이의 석존을 한 분의 석존으로 신봉하는 이지불이(理智不二)의 부처님이다. 법을 설하는 부처님은 아득한 옛날에 보살도를 행하고 성불한 보신의 석존이며, 법을 설하는 마음은 법신의 부처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대목은 기독교의 ‘부활’과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르다. 즉 부활은 인간이 죽은 후에 다시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이 비유에서의 아버지는 참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알린 것은 적문의 석존의 사망을 뜻하지만 적문의 석존에 깃들어 있는 깨달음의 진실, 즉 본문의 석존(법신)은 불멸인 것이다. 앞의 “보게 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만난다는 것을 뜻하므로 여기서 부처님을 뵙게 되었다는 것이니 바꾸어 말해서 깨달음을 얻음, 즉 마음의 눈이 열렸다는 뜻이다. <법화경> ‘수량품’에서 말하는 구원의 생명이란 요컨대 법(진리)을 말한다. 법·진리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서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므로 “법(佛)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여래수량품’이라는 말이 바로 ‘무량수품’이라는 말을 바꾸어서 한 말이다. 그리하여 이 본문의 부처님인 법신불은 수명이 한량없어 “때로는 다른 부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나므로 그 이름이 같지 않고 세상에 머무는 시간도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반야(般若)의 공(空) 사상, 즉 법공(法空)을 이해한다면 쉽게 이해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법신불은 이름이 없다. 흔히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이 법신으로 알고 있는 분이 많지만 사실은 비로자나불도 보신불인 것이다. 다시 말해 아득한 옛날에 보살도를 행해 마치고 성불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보신불인 것이다. 왜냐하면 법신불인 비로자나불과 보신불인 노사나불은 동일한 이름의 바이로차나를 음역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도 법신의 부처님, 즉 본불도 석가모니불이요, 법을 설하는 보신불도 석가모니요, 응신불도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것이며 단지 그 수명이 아미타라는 것이다. 3즉1(三卽一)이요 1즉3(一卽三)은 바로 법신에는 보신과 응신이 구족되어 있고 응신에는 법신과 보신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법화경>이 일승(一乘) 사상에 일관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삼승(三乘)을 일승으로 귀일시킨 것이 아니라 만법(萬法) 동귀(同歸)를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이든 회교이든 유교이든 도교이든 이 세상의 어떤 종교 및 어떤 사상이든 이를 통일하는 사상이 <법화경>이요, ‘묘법(妙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묘법에서 보면 예수이든 공자이든 마호메트이든 모두가 법신불의 화현인 것이다. 아! 나는 이로써 영원한 생명(아미타유스)의 소유자임을 알았도다. 이 어찌 기쁘고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춤이라도 한 번 덩실 추어나 보세 그려.
[출처] 묘법연화경이란 무엇인가|작성자 각원사임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