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6

[조성택] 배타적 주장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정의‘들’의 화쟁 - 불교닷컴 2015

[조성택] 정의‘들’의 화쟁 - 불교닷컴

[조성택] 정의‘들’의 화쟁
서현욱 기자
승인 .12.22

종교포럼 “지금여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타적 주장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화쟁문화아카데미는 지난 11월 28일 아홉 번째 마지막 종교포럼을 개최했다.

제9회 종교포럼은 종교포럼의 3부 '지금여기: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세 번째 자리이다. 끊임없이 사회에 경청과 대화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조성택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의 마지막 발제이다.

조 교수는 “정의‘들’의 화쟁”이라는 제목의 발제문을 통해 종교, 불교가 오늘날 갈등과 불통에 막혀있는 사회에 던질 수 있는 하나의 메시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조성택 대표는 오늘날 한국사회를 “지성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고 정의하며, 그 핵심은 진영논리에 있다고 보았다. 사회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서 하나의 ‘옳음’만이 인정되고 여기에 반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고 보는 데에서 비이성이 지배하는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논쟁이 아닌 대화가 필요하며, 그 실행 방안을 원효대사의 “화쟁(和諍)”에서 찾고 있다.

조성택 대표가 원효의 화쟁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각각의 진실들의 부분적 옳음이다. 그는 “상이한 견해들을 ‘옳음과 그름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즉 여러 개의 옳음들 간의 선택이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갈등은 현안해결과 더 큰 발전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갈등은 해결의 영역이 아니라 “전환”의 영역이다.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 상황을 수용함으로써 갈등을 ‘건설적 전환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각자의 정의를 인정하면서도 상대방의 정의 또한 옳을 수 있다는 이른 바 “정의‘들’의 공존”이 핵심이 된다. 그는 “나의 옳음’을 관철하고 ‘저들의 그름’을 타도하려는 독선적 정의감이 아니라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고, 서로의 ‘옳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개시개비’의 화쟁적 성찰이다.”고 말한다. 화쟁은 다툼이 없는 평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것, 그리고 화쟁적 대화를 통해서 갈등은 상승으로 나아가는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이번 포럼에서는 종교포럼의 마무리로 종교간 대화에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와 종교의 사회참여에 힘쓰고 있는 조계종 화쟁위 대표 도법 스님의 기조강연도 이루어졌다.

2015 화쟁문화아카데미 종교포럼 “종교를 걱정하는 불자와 그리스도인의 대화 - 경계너머, 지금여기”는 2월부터 11월까지 총 9회에 걸쳐 사회문제에 대한 종교의 접근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진지한 성찰을 논하였다. 김근수 가톨릭 프레스 편집인,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조성택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의 발제와 토론을 통해 각각 1부 “무엇이 걱정인가” 2부 “경계너머: 왜 걱정인가” 3부 “지금여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오늘날 한국 주류종교의 문제점과 원인, 그리고 극복방안을 고찰했다.

<불교닷컴>은 지난 9회의 화쟁문화아카데미 종교포럼을 연재했다. 조성택 교수의 마지막 발제를 소개한다. 앞으로 이웃종교와 함께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더 고민하는 자리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정의‘들’의 화쟁

조성택(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


진실을 모색하는 자는 신뢰하되, 진실을 발견한 자는 의심하라.
[André Gide, Ainsi Soit-Il, Ou Les Jeux Sont Faits(1952) 중에서]

단 하나의 진리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소유한 자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Max Born, 노벨 물리학상 수상연설(1954) 중에서]



1.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


지금 한국사회는 정치적 견해를 말하는 것이 두려운 사회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나 집단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침묵을 금(金)처럼 여겨야 한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진영논리만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 속에서 우리사회는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해 증오와 혐의의 딱지 붙이기를 서슴지 않는다. 인터넷과 같은 공론의 장에서 상대에 대한 언어폭력과 정신적 폭력은 거의 일상화 되었다.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도 오로지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하는 논쟁만 있을 뿐 현안을 해결하고자하는 대화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정한 논쟁도 없다. 논쟁이란 자신의 옳음과 상대방의 그름을 합리적으로 주장하는 과정인데, 진영논리가 압도하는 사회에서 ‘합리적 주장’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허공의 메아리이거나 말장난으로 치부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사회는 반지성적(反知性的) 사회, 혹은 몰지성적(沒知性的)인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만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지성의 역할 없이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옳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틀렸다”라는 확신의 무지(無知)가 압도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합리적 지성(知性)은 사치이거나 거추장스러운 장식으로 여겨질 뿐이다. 합리적 지성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인정할 수 있고 ‘확신’의 이면에 깔린 무지를 경계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사회는 그러한 합리적 지성이 기능할 수 없는 사회다. 그 대표적인 한 예가 바로 정치 분야에서다. 한국정치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 할 수 있는 대의정치의 본래 뜻이 사라지고, 투표행위가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오로지 지역연고와 왜곡된 이념적 편향으로만 이루지는 것도 한 편으로 보면 합리적 지성이 전혀 작동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집단적 몰지성/반지성적 상황에 대해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학력과 지적 수준은 세계에서 상위에 속한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을 역설한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말을 원용하자면 지금 한국사회는 ‘지성적 개인과 반지성적 사회’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고 지금 한국사회가 처해있는 문제 상황 전체를 ‘진영논리’와 ‘반지성’으로만 환원할 수도 없다. 좁은 의미의 정치 분야를 비롯해서 경제, 언론, 문화, 교육 등 사회 제 분야에서의 진단과 해법이 필요하고 또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모색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할 ‘만병통치’의 진단과 해법이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에 만연한 진영논리와 거기에서 출발하는 ‘대결’의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는 단초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갈등과 분쟁이 해결보다는 대결로 치닫고 또 다른 갈등과 분쟁으로 확산·증폭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한 방법으로 화쟁적 대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화쟁적 대화’라는 말은 동어반복적이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화쟁은 곧 ‘대화’를 의미하며, 그리고 진정한 ‘대화’란 화쟁을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논쟁을 대화의 한 유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적으로 보자면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논쟁과 대화는 다르다. 논쟁은 내가 옳음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결국 다른 사람을 제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화는 다르다. 대화는 상대방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상대방의 눈에 비친 나를 보는 과정이다. 사회적 현안을 해결하고자 할 경우 논쟁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논쟁은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 대화, 특히 사회적 대화의 최소한의 전제는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다는 인정이다. 이 경우 저 사람이 옳다는 것이 반드시 내가 틀렸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다만 저 사람이 왜 옳을 수 있는지, 그리고 저 사람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비로소 대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적 갈등 현안에 대해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정답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이한 견해들을 ‘옳음과 그름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여러 개의 옳음들 간의 선택이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갈등은 현안해결과 더 큰 발전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으로 이 글에서는 원효의 ‘화쟁론’을 중심으로 서로 상이한 배타적 주장들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2. 원효의 화쟁론과 화쟁의 정치학

잘 알려진 대로 화쟁(和諍)은 원효 고유의 용어다. 원효는 화쟁론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들이 결코 모순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점은 원효가 들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예화에서 잘 드러난다. 코끼리 전모를 다 볼 수 없는 장님들은 각자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코끼리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하며 또 다른 이는 “기둥과 같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가(百家)의 이쟁(異諍)’이지만 어느 한 사람의 장님도 자신의 주장을 굽힐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이 손으로 직접 코끼리를 만진 결과로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원효는 “모두 옳다”(개시, 皆是)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어느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코끼리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효는 또한 “모두 틀렸다”(개비, 皆非)고 한다. 어느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皆)라고 하는 동시적 상황이다. 

나의 옳음이 저들의 틀림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저들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다를 뿐이다.

이제 코끼리의 전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주장도 제한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코끼리 아닌 것을 만지고 코끼리라 주장하거나,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되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때 점차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해 갈 수 있다.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주장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펼쳐지면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어지럽지도 하겠지만 이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조금씩 코끼리의 전모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의 발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놓고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때론 갈등도 빚고 다툼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길만이 그 사회의 지속적 발전과 미래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단 하나의 옳음이 아니라 복수의 옳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옳음’이 절대적일 수 없으며 ‘저들의 옳음’과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더 큰 옳음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화쟁의 정치학’이라 할 것이다.

화쟁은 배타적 이견(異見)들을 절충하거나, 종합하거나 혹은 제 3의 견해를 통해 쟁점을 무화(無化)·용해(溶解)하는 것이 아니라 이견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데 있다. 이른바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 상황을 수용함으로써 갈등을 ‘건설적 전환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갈등을 ‘해결’이 아닌 ‘전환’(transformation)의 관점에서 “명백한 모순과 역설을 공존시키는 능력이 갈등전환의 핵심”이라고 규정하는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rach)의 주장은 화쟁의 정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레더락은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의 하나로 갈등을 딜레마로 규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둘 다/그리고(both/and)”라는 통합적 패러다임으로 질문할 때 우리의 사고도 전환된다 … 딜레마와 모순을 동시에 껴안을 때, 도저히 다룰 수 없을 것 같은 갈등 즉 완전히 양립 불가능한 갈등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다르지만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면이 공존하는 복잡한 상황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대응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만약 우리의 선택이, “이것 혹은 저것(either/or)”이라는 양자택일적 사고와 양립할 수 없는 두 속성이 공존하는 모순명사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복합적인 문제를 제대로 다룰 능력을 잃고 말 것이다.

상황을 딜레마로 규정하는 능력, 명백한 모순과 공존하는 능력이 갈등전환의 핵심이라고 보는 레더락의 관점은 원효의 용어로는 개시개비라고 할 수 있다. 코끼리를 “벽과 같다”고 하는 것과 “기둥과 같다”고 하는 것은 명백하게 모순이다. 원효는 양립 불가능한 이 두 주장을 “모두 옳다(皆是)”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두 그르다(皆非)”고 한다. 여기서 ‘개시’가 모순과 역설을 공존하게 하는 원리라면 ‘개비’는 모순적 상황을 새로운 변화로 이끌고자 하는 ‘갈등전환’의 관점이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코끼리’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상정함으로써 갈등이라고 하는 모순적 상황을 더 큰 그림을 위한 전환의 에너지로 삼게 되는 것이다.

원효의 개시개비는 ‘복수의 옳음’을 상정함으로써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모순적 상황을 용인/수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한 철학적인 원칙은 무엇이며 또 일상적인 실천원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한 편으로 상대 주장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타당함이 ‘부분적’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철학적 정직함이며 종교적 겸손이다. 그리고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무아(無我)의 일상적 실천이며 무주상(無住相, 머무르는 바 없이 행함)의 실천이다. 화쟁은 대화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논쟁이 나의 옳음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대화는 상대방의 옳음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U.C Berkeley 대학의 철학과 교수 도널드 데이비슨(Donald Davidson)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그들의 행동이 지극히 비정상적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상당한 진실과 동기를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데이비슨은 자비의 원칙(the principle of charity)를 강조하면서 “좋든 싫든 자애는 반드시 구현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싶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 그들이 옳다고 생각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화쟁의 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견해가 일종의 ‘조건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고통이다)와 같은 종교적 가르침도 예외는 아니다. 조건문이기 때문에 일정한 관점을 전제한 것이며 그 의미는 그 견해가 설파되는 ‘맥락’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건’을 결한 그리고 맥락을 떠난 절대적 견해는 없다. 특정한 의미와 맥락에서만 참일 수 있다.

진영논리는 견해의 조건성과 의미맥락을 용인하지 않는다. 자신의 견해는 무조건 옳다. 그리고 상대의 견해는 무조건 틀렸다. 그러나 무조건의 견해는 없다. 화쟁의 개시개비는 모든 견해가 ‘조건적’임을 용인하는 데서 출발한다. 서로 충돌하는 배타적 견해를 양자택일의 갈등국면으로 이해하지 않고 둘 다 맞는 말로 받아들일 때, 다시 말해서 ‘모순’을 용인할 때 상황을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중도(中道)가 바로 이것이다. 중도란 어느 한 극단(極端)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양 극단을 떠나 일종의 ‘무중력’의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다(離邊而非中, 원효 『금강삼매경론』, 대의장). 서로 대립하는 주장을 떠나 새로운 견해를 만들거나 양비양시(兩非兩是)의 무견해/무입장이 곧 중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도는 모순적 상황에서 ‘옳고 그름’이라는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입장을 취하는 대신 ‘복수의 옳음’이라는 모순을 용인함으로써 갈등의 국면이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자 입장을 말한다.


3. ‘옳음’과 ‘옳음에 대한 견해’는 다르다: 사실과 진실의 문제

사실과 진실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제 용례를 살펴보면 두 단어 사이에는 작지 않은 의미의 차이가 있다. ‘사실’이란 단어 앞에는 ‘나의’ 혹은 ‘저 사람의’ 등과 같은 소유격이 사용되지 않는다. 반면 ‘진실’이란 단어 앞에는 다양한 인칭의 소유격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이 객관적인 ‘단 하나’의 실제를 상정하는 것이라면 진실은 주관적인 ‘복수’의 실제를 상정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사실은 하나이지만 진실은 여럿일 수 있다는 것이다.

1950년에 개봉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 明)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여럿’의 진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세 사람과 이를 지켜본 목격자의 진술은 제각각이다. 영화는 네 사람의 엇갈리는 진술을 통해 인간의 조작적 기억과 그 바탕에 있는 자기보호 본능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각 진술에 담긴 ‘거짓’이 아니라 각 진술에 담긴 ‘진실’이다. 네 사람은 각자가 경험한, 서로 다른 진실‘들’을 얘기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사실에 대한 각자의 진실이다. 영화는 누구의 진술이 ‘사실’인지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건에 연관된 네 사람의 ‘진실’을 떠난, 독립적인 ‘사실’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인간의 현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인간은 흔히 나의 진실만을 사실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의 진실만이 ‘사실’이라면 저들의 진실은 ‘거짓’이 된다. 어느 한쪽의 진실만이 사실이며, 그래서 서로 다른 진실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갈등과 대립은 불가피하다. 또한 그 대립은 종종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여겨지면서 극한적인 대립적 상황으로 이어진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면서 끝없는 반목과 투쟁을 다짐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과 진실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사람들은 흔히 ‘옳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곧 ‘옳음’이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을 실천하려는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정의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의 방향과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자신의 옳음만을 ‘정의’라고 집착하면서, 다른 사람의 ‘옳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분열되고 대립과 갈등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쟁의 양상이 바로 그러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옳음’을 관철하고 ‘저들의 그름’을 타도하려는 독선적 정의감이 아니라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고, 서로의 ‘옳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개시개비’의 화쟁적 성찰이다. 화쟁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정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어느 한쪽 ‘진영의 승리’일 뿐이며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편일 뿐이다.

4. 결론: 정의‘들’의 화쟁

누구나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정의감은 옳음을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공동체 발전의 원천이 되어 왔다. 그러나 정의감은 또한 옳음에 ‘집착’하는 인간본성의 일부로서 여러 형태의 폭력들을 정당화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원천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진정한 정의가 하나일 수 있다 해도, 그 정의에 이르는 방법은 하나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옳음’과 ‘옳음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배타적 견해가 등장하는 것은 ‘옳음에 대한 생각’과 ‘옳음 그 자체’를 구분하지 않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갈등은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원천이 될 것이다.

사법적 정의, 사회적 정의, 정치적 정의와 같이 그리고 종교적 정의 등 다양한 층위의 정의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정의에 이르는 방법은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한다. 물론 그 ‘정의들’이 지향하는 정의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종교적 정의는 다양한 정의들, 특정한 분야의 특정한 정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쟁이 지향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화쟁은 정의 그 자체보다는 ‘정의로 나아가는 여러 가지의 길’을 주목한다. 화쟁은 파사현정(破邪顯正)에 이르는 평화로운 길‘들’을 강조하는 동시에 파사현정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또한 보여주고 있다. 화쟁은 다툼이 없는 평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것, 그것이 화쟁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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