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철학 [한국어]
일본 철학(일본어: 日本思想)은 외국의 철학과 일본 고유의 요소(예를 들어 신토)와 융합된 철학 형태이다. 일찍이 중국 철학과 인도 철학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최근에는 서양 철학의 영향도 받고 있다.
고대[편집]
불교[편집]
<일본서기>를 보면 긴메이 천황은 백제왕이 보내 온 불상을 받고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신하들은 불교에 대해 찬성하는 이도,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천황은 시험삼아 불상을 안치하고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는데, 한번은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은 적이 있었다. 불교를 반대하는 신하들은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신(神)이 노한 까닭이라 하여 불상을 땅에 묻어 버렸다. 사실 일본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 하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권력의 문제였다.
비다쓰 천황이 즉위한 때에는 불교가 백제나 고구려에서 계속 유입되었다. 요메이 천황은 즉위하자 불교에 귀의하기를 결심하고 아나호베(穴穗部) 황자를 추대하여 황위를 계승하게 하려 하였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는 이 소식을 듣고 비타츠 천황의 황후(이후의 스이코 천황)의 조서를 받들어 군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가 권력을 장악한 후에 백제의 사원 건축가나 화공들이 승려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 왔다. 이 시기에 즉위한 스이코 천황은 쇼토쿠 황자를 태자로 봉하여 정권을 맡기고, 소가노 우마코를 여전히 요직에 등용하였다. 스이코 시대에 와서는 일본으로 온 고승들이 더 많아졌다. 스이코 원년(593)에는 고구려 승려 혜자가 일본에 왔고, 스이코 3년(595)에는 백제승 혜총(慧總)이 일본에 왔다.
쇼토쿠 태자가 죽은 지 20년 후인 645년, 일본에서는 '다이카 개신'이 일어났다. 황실은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과 연계 하여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정치·경제·문화의 전면적 개혁 운동을 진행하였다. 대화 원년에는 불교 융성의 조서가 반포되었다. 덴무 천황은 칙령을 내려 집집마다 반드시 불단을 설치하고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이것이 일본에서 집집마다 공양하는 '내불(內佛)'의 시작이었다.
쇼무 천황의 시대(729-749)는 나라 불교의 최고 전성기였다. 쇼토쿠 태자 시대부터 지배계급 가운데에는 불교를 국가 통일의 사상적 기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율령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더욱 강렬해졌다. 쇼무 천황은 사회 동요가 심각해지자 불교의 힘을 빌려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지방 각지에 절을 세웠다.
일본은 간무 천황이 헤이안성으로 천도한 정치적 중심이 북쪽으로 옮겨져 나라(奈良) 불교에 불리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헤이안 정부는 불교 보호 정책을 포기하는 동시에 나라의 사원들이 새 도읍으로 옯겨 오는 것도 금지하였다. 또 천황은 법률을 어기고 민중을 현혹시키는 요승들을 외지로 내쫓으라고 명령하였다, 헤이안 초기의 불교는 정교의 병립과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며 재앙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밀교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부합하였다. 이리하여 최징의 천태법화종과 구가이의 진언밀교가 다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도교[편집]
일본 고문헌 중 가장 일찍 도교사상의 흔적을 남긴 것은 <일본서기>의 '상세(常世)' 사상이다. <일본서기> 권6의 기록을 보면, 이른바 '상세'란 속인들은 갈 수 없고 신선들만이 살고 있는 곳인데, 그곳을 '상락지국(常樂之國)' 이라고 한다. 그 상락지국은 만리가 넘는 파도길을 헤치고 약수(弱水)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이것은 도교의 신선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이밖에 <일본서기> 권7과 권14, 권24 등에서 도교사상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보아 중국의 도교사상이 일본에 전파되어 널리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도교사상의 영향은 일본의 초기 제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서기> 권24 황극천황(皇極天皇) 3년(644) 가을 7월조(條)에는 '상세신(常世神)'에 제사를 지내면 "가난한 자는 부유해지고 늙은이는 젊어진다"고 씌어 있다. 이러한 제사를 지내는 방법에는 소와 말을 잡아 토지신에게 바치거나 물귀신에게 기도를 하는 등, 중국 풍습이나 종교적 형식에 가까운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제사가 조직화되고 종교집단이 형성될 조짐까지 보이자 일본의 통치자들은 이를 압제하였다.
나라(奈良) 시대의 도교는 점을 치고 신에게 기도 드리며 병을 고치기 위한 방기주술(方技呪術)의 형태가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것이 상위층에서만 유행하였으나, 점차 하위층에 전파되고 일본 고유의 신앙과 결합되어 많은 '폐단'을 낳게 되었다. 이리하여 통치자들은 이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전문적인 도교 연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695-775)와 구카이(空海)(774-835)는 도교를 아주 깊이 연구한 사람들이다. 기비노 마키비는 중국에 체류하면서 상당 수준의 도교 밀법을 배웠으며 귀국할 때에는 중국의 도교 서적들을 많이 들여왔다. 그는 귀국 후 일본에서 가장 도교적인 색채를 띤 '음양도(陰陽道)'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나라 시기의 일본에는 전약료(典藥寮)와 음양료(陰陽寮)라는 두 관청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중국의 음양오행설을 토대로 하는 방술(方術)만을 취급하였다. 전약료는 도교적인 방술을 중심으로 안마와 주문 암송을 주로 하였고, 음양료에서는 천문과 역수(歷數) 및 기상 관찰과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을 맡았다. 나라 시기에는 금지되었던 주술은 방식을 달리하여 음양료에서 계속 이어졌고,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양도로 발전하였다.
헤이안 시대는 일본 도교가 가장 흥성한 시기였다. 그 원인은 다음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헤이안 시대는 그 전대(前代)에 흡수한 외래 문화를 자국의 문화 속으로 소화시키는 단계에 들어선 시기였다. 게다가 당나라의 유학을 갔던 사람들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도교 경전을 이 시기의 도교 연구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우다(宇多) 천황 시기(889-897)에 후지와라노 스케요(藤原佐世)가 칙령을 받고 편찬한 <일본국견재서목록(日本國見在書目錄)>에는 아주 많은 도교 경전이 기재되어 있다. 둘째, 헤이안 시대는 공가(公家) 귀족의 시대였다. 이 시기 귀족 계급은 호화롭고 안일한 생활을 누렸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착취로 모진 고통을 당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에게 도교는 고통으로 가득찬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 되었고, 귀족들에게는신선 세계와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도구가 되었다. 도교는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여러 계층에서 환영받고 발전되었다.
유교[편집]
대략 서기 284년 백제의 사신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갔으며, 그 다음 해에 그의 추천을 받은 백제의 박사 왕인(王仁) 이 일본에서 가서 경전을 가르쳤다. 이것이 일본에 유학이 전래된 시작이었다. 그후부터 유학을 배우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게 되어 일본은 문자가 없던 시대를 벗어났다. 왕인이 한자와 유학을 오로지 황태자나 궁궐의 상위층 귀족 자제들에게만 전수하였기 때문에, 당시 유학의 보급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선 뒤 게이타이 천황 7년(513년)에 백제 박사 은양이(殷楊爾)가, 또 긴메이 천황 15년(554년)에 고구려 오경 박사 고안무(高安茂)와 왕유귀(王柳貴), 역학(易學) 박사 왕도량(王道良) 등이 일본에 간 후에 유학은 비로소 광범하게 전파되었다.
스이코 천황(562-628) 시기에 이르러 유학은 일본인들에 의해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접 전해졌다. 쇼토쿠 태자는 계급 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씨족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통치를 건립하는 등 일련의 개혁 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일본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전장(典章) 제도와 각종 문물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절실하였다. 이 때문에 한세기 동안이나 중단되었던 중·일 국교를 즉시 회복시켰으며, 스이코 천황 15년(617년)에는 오노 이모코(小野妹子)를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오노 이모코가 두 번째로 중국에 갈 때 그는 승려(일본에서는 학문승이라 칭함)와 유학생을 데리고 갔다. 이것을 계기로 여러 차례 사신과 학문승, 학생을 수나라에 파견하여 유학 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중국에 오래 머무르면서 수당의 정치와 경제, 문화에 대해서 심도 있게 이해하였다. 그들은 귀국할 때 대량의 유학 서적과 중국 문물을 일본으로 가져가 유학의 전파와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학의 전래는 일본 사회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7세기에 이르러 씨족제의 잔여를 지니고 있던 일본 노예사회는 이미 여러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었다. 645년 6월 일본에서는 신흥 봉건 세력의 대표였던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가 제사관 등과 연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고토쿠 천황(645-654)을 옹립하고 자신은 태자의 신분으로 섭정을 실시하였으며, 연호를 대화(大化)로 정하고 수도를 나니와(難波)로 옮겼다. 이듬해 정월 고토쿠 천황은 '개혁' 조서를 반포하고 수당의 경제·정치 제도를 본따 개혁을 진행하였는데, 이를 '다이카 개신'이라 한다. 다이카 개신의 목적은 봉건제를 전국적인 범위로 확립하며, 황실을 귀족 국가의 권력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조건하에서 유학은 사회 변혁을 위하여 정치이념을 제공하였으며 아울러 그 영향도 확대되었다.
다이카 개신 전후 일본에는 일찍 유학의 사회화 추세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와 신토의 배척을 받아 오래지 않아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794-1185)로부터 대량의 장원(莊園)을 소유한 후지와라가 정권을 장악하자, 귀족의 사유 토지는 급속히 증가되어 봉건 제도가 형성되었다. 봉건 통치 계급은 자체의 착취 제도와 통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유학의 전파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유학은 종전에 비해 더욱 폭넓게 전파되었다. 유학은 일본의 사회 각 분야에 응용되었으며 천황의 '조서'에도 반영되었다.
중세[편집]
불교[편집]
가마쿠라 시대(1192-1333)는 헤이안 시대에 이어 불교의 강렬한 영향을 받은 시대였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는 새로운 봉건 사회가 시작된 시기였다. 무사·평민 등의 새 계급이 새로운 통치자로 변하였거나 발전·성장하였다. 이러한 계급들은 불교 가운데서 새로운 내용을 찾으려 하였다. 정토종, 선종, 일련종, 진종, 시종 등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나타난 새로운 종파였다. 그 가운데 특히 임제(臨濟) 선종은 상류 사회에 광범하게 전파되어 남북조를 지나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이르러 날로 흥성되어, 이 시기 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도교[편집]
가마쿠라(鎌倉)·무로마치(室町) 시대는 사회의 실권이 무가(武家)에 있었던 무사시대였다. 무사들은 칼을 차고 싸움판에 나가는 사람들로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선의 경지나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고상한 흥취는 먼 나라 이야기와 같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사를 초탈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현실 세계는 허무하며 진정한 존재의 의미는 저 세상에 있다는 불교가 극성하게 되고, 도교는 자연히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 일본에 전래된 도교는 완전한 체계를 갖춘 종교가 아니라 도교의 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일본에 전래된 후 그 문화 모체에서 오는 보충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도교는 자생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유교·도교의 내용들을 부분적으로 일본 민족신앙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도(神道), 수험도(修驗道), 음양도(陰陽道, 밀교(密敎) 등인데, 이들은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각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도교는 자연히 이들 일본 종교 신앙 속에 흡수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근세[편집]
일본 주자학[편집]
주자학이 일본에 처음 전래된 것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로, 불교 승려들은 송나라에 왕래하면서 주자학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일본에 최초로 주자학을 전파한 승려 슌조는 1199년 송나라에 들어가 불학(佛學)을 배우면서 주자학도 함께 배웠고, 1211년 귀국하면서 많은 유학 서적을 가지고 왔다. 주자학이 전파된 이래로 줄곧 불교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주자학이 에도 시대부터 진정한 학문으로 전개되었다. 일본 주자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온 강항과 접촉하면서 주자학을 배우고,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청을 받아 에도에서 주자학을 강의하였다.
도교[편집]
에도시대는 헤이안 시대를 잇는 일본 도교의 제2차 흥성기이다. 이 시기에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첫째 중국의 도교 경전이 다시 대량으로 일본으로 들어왔고, 둘째 인쇄술이 발전함에 따라 많은 도경(道經)이 간행되었으며, 셋째 도교가 학문으로서 광범하게 연구되었다는 것이다. 에도 초기는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해당된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추진하던 중국의 인사들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자각하고 삼림 속에 은둔하거나 타국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때 일본으로 간 중국의 승려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불교와 더불어 도교도 전파하였다. 명청 시기 일본에 전파된 도교는 주로 중국에서 성행한 민간 도교였다. 그 가운데 은원선사(隱元禪師)가 영응(永應) 3년(1654)에 일본으로 가져간 <선서(善書)>는 일본 민간 도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명화(明和) 7년(1770)에는 <정통도장(正統道藏)>도 일본에 전해졌다.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에도 시대에 많은 도경(道經)과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 <태상감응편화해(太上感應篇和解)> 등이 있는데, 이 외에도 많은 도교 경전들이 출간되거나 번역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가 도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전례없이 도교의 연구열이 강했던 이 시기에는 도교 서적들이 일반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는데, 그 가운대 진정으로 도교를 숭상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상의 것을 총괄하면 일본은 도교를 완전히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의 민간 도교를 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도교를 다시 자국의 고유신 숭배를 핵심으로 하는 신앙 체계 속에 흡수하여 일본인의 심층의식과 사회 습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였다.
국학과 난학[편집]
일본에서의 상품 경제의 발전은 봉건 생산 방식의 경제 구조에 영향을 주어 막부 체계의 와해를 초래하였다. 봉건적 의식 형태로써 주자학도 점차 그 통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고쿠가쿠, 양명학, 난학 등이 각광받게 되었다.
근대[편집]
계몽주의와 인권[편집]
메이지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 사회가 소개되었으며, 영국에서 공리주의와 사회적 다윈주의가, 프랑스에서 장자크 루소의 대중 통치가 소개되었다. 초기 메이지 시대 사상가들은 영국의 계몽주의를 지지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권위와 봉건 제도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메이지 정부와 조화되어,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받아들였다. 1873년 모리 아리노리는 메이로구샤를 만들었다. 이 문화 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현실적인 학습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현실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포착하며, 국가의 상황을 받아들인 정부가 이상적이라고 가정하는 점에 대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노리는 교육부 장관으로서 국가 교육을 발전시켰다. 니시 아마네는 이익에 기반한 인간의 행동을 주장하였다. 가토 이로유키는 사회적 다윈주의 영향 아래의 자연적 권리를 버리고 대신 적자 생존을 지지하였다.
기독교와 사회주의[편집]
기독교도와 사회주의는 일본의 근대화로부터 파생된 사회적 모순과 함께 분투하였다. 기독교 사회 운동은 일본에 자본주의와 그 모순을 가져온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이후부터 활성화되었다. 많은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 인본주의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 점에서 이들은 기독교와 깊게 연관되었다.
에도 막부에 의해 금지되었던 기독교는 다수의 메이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전통적 무사도와 기독교 정신을 통합하기 위하여 "두 개의 J"를 개발하고, 이것이 "일본(Japan)"과 "예수(Jesus)"를 다룬다고 믿었다. 우치무라는 무교회주의를 주장하였고, 교육에 관한 칙어에 도전하였으며, 러일 전쟁에 반대하였다. 니토베 이나조는 퀘이커교도였으며, 일본의 문화와 기독교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일본의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고 국제 연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니시마 조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도시샤 대학을 교토에 세웠으며 기독교적 인격 수양에 매진하였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즈음, 일본이 산업 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도입에 성공하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유포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은 1900년 치안 경찰법에 의하여 악압되었으며, 마침내 1910년 고도쿠 사건(幸徳事件)에서 군국주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신문에 빈곤에 대한 기사를 기고하였고, 처음에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인적 개혁을 강조하였으나 나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서 사회적 강제에 의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고토쿠 슈스이는 원래 의회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조합주의자가 되어 총파업에 의한 직접적인 행동을 주장하였다. 고토쿠는 고토쿠 사건의 주동자로서 사형되었다. 오스기 사카에는 무정부주의와 조합주의의 원리를 이용한 개인적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는 정부에 의해 위협적인 인물로 간주되었으며, 헌병에 의해 1923년 간토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암살되었다.
재패니즘[편집]
계몽주의, 기독교, 사회주의는 메이지 유신부터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적 정치 문화와 민족적 전통에 대한 강조가 서구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는 일본의 서구화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대중주의를 주장하는 잡지를 출판하였으나 정치에 참여하는 부르주아지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구가 가쓰난(陸羯南)는 일본의 정치적 문화와 민족적 전통을 매우 존중하였다. 그는 민족적 감정을 복원하고 고취시키는 것을 도왔으나 좁은 시야의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가쓰난은 군부를 비판하고 의회와 참정권을 주장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신토를 보호하고 그것을 특정한 종교가 아니라 국가 신토로 다루었다. 정부는 신토와 신성한 천황을 관계짖고 신토를 국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국가 신토는 민간의 신토 종파와는 명백히 구분되었다. 이는 국가 신토를 형성하고 교육에 관한 칙어를 공포하기 위한 이념적 국가 지배의 모델이었다. 메이지 국가주의는 국가적 지배력을 회복하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통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국가주의의 군국주의적 경향은 근단적인 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기타 잇키는 자이바쓰(財閥), 원로 정치인, 정당의 배제와 천황과 신민의 직접적인 연결을 위한 정부의 수립을 지지하였다.
전후 일본에서 독일 철학이 열렬히 연구되고 소개되었으나 메이지 시대 말에서 다이쇼 시대까지 교토 학파는 선불교와 같은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을 조화시키려 하였다. 니시다 기타로는 선과 서양 사싱의 융햡으로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하였다. 니시다의 사상은 "니시다 철학"으로 불린다. 니시다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대립이 없는 순수한 경험을 주장하였다. 그의 존재론은 완전한 무에서 파생되었다.
현대[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다수의 철학자가 대륙 철학과 미국 철학에 대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둘 중
- 오모리 쇼조,
- 히로마쓰 와타루,
- 유아사 야스오,
- 요시모토 다카이는
마르크스주의, 현상학 또는 분석 철학의 영향 아래에서 독자적인 저작을 창작하였다.
오늘 날에는
일본 학계에서 주요한 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1]
각주[편집]
- ↑ See for example, Collected works of Shozo Omori Archived 2015년 12월 22일 - 웨이백 머신, Shozo Omori bibliography,Collected works of Wataru Hiromatsu Archived 2015년 5월 2일 - 웨이백 머신, Collected works of Yasuo Yuasa, Collected works of Takaaki Yoshimoto, Collected works of Kojin Karatani Archived 2015년 12월 22일 - 웨이백 머신
참고 문헌
日本思想
日本思想(にほんしそう、英: Japanese philosophy)は、日本の哲学・思想のこと。日本哲学とも言う[注 1]。太古にはアニミズム・シャーマニズムとしての神道があったが、仏教、儒教、西洋思想の伝来[注 2]によって習合・混合し、日本特有の思想風土が出来上がっていった。
研究史[編集]
「日本思想史」の形成[編集]
日本思想が学術的な考察の対象に上ったのは明治時代以降のことである。戦前の代表的な思想史家として津田左右吉、村岡典嗣、和辻哲郎などがいる。
以下、『日本思想史講座』シリーズ(ぺりかん社)の各巻「総説」を参考に記述する。
儒教と国民道徳論[編集]
「文明開化」に伴って、明六社の福沢諭吉や西周らによって西洋思想、西洋哲学の輸入が盛んに行われた。その中で、欧化主義に対して日本の伝統思想を回顧する動きも現れ、国粋主義・国家主義者たちは国民道徳論を唱えた。東京帝国大学で西洋哲学の普及に努めた井上哲次郎は、朱子学、陽明学、古学といった日本儒教・江戸儒学の研究を始め、西村茂樹も西洋哲学と伝統思想を融合した『日本道徳論』を著した。エドマンド・スペンサーの社会進化論を紹介した加藤弘之らは啓蒙思想を批判する国権主義に走った。元田永孚は儒教と天皇崇拝を一体化させた「教育勅語」を起草した。
ナショナリズム[編集]
歴史学者の津田左右吉は、日本古代史や『論語』の文献研究で知られるが、『文学に現はれたるわが国民思想の研究』を著して、初となる本格的な日本思想の通史的叙述を行った。自由主義的なナショナリストであった津田には『支那思想と日本』の著作もあり、中国が日本思想に与えた影響を否定することに力点を置いていた。村岡典嗣は『日本思想史研究』や『本居宣長』の著作があり、日本思想の文献学的研究を行った。村岡は宗教哲学者者の波多野精一から大きな影響を受けており、日本思想の中の宗教哲学の探求を動機として、江戸時代後期の国学者平田篤胤に日本伝統思想における宗教哲学の完成を見出していた。村岡典嗣の活躍した東北帝国大学では、西田直二郎の「文化史学」が興隆し、石田一良、佐藤弘夫らを輩出した。
昭和戦前期の状況[編集]
哲学者の西田幾多郎は『日本文化の問題』で、伝統思想を媒介とした西洋哲学の刷新を説いている。また、倫理学者の和辻哲郎は『人間の学としての倫理学』や『倫理学』で知られるが、彼もまた日本精神の研究を行った。和辻はドイツの解釈学を学び、それを思想史叙述に利用した。『日本精神史研究』は日本美術や芸能の中に日本精神を探る著作である。戦前に出版した『尊皇思想とその伝統』は、古代から近世の日本思想を尊皇思想という観点から渉猟し、戦争を控えて執筆が急がれた和辻倫理学の大きな目的の一つである、民衆を国家のために動員可能にする国家主義の完成を目的としていた。戦後にはこれを元にした完全版の『日本倫理思想史』が出版された。和辻門下には相良亨、源了圓、湯浅泰雄らがおり、現在では第三世代として佐藤正英などがいる。大川周明はイスラーム哲学の研究者であり、アジア主義の代表的人物だが、人物評伝の『日本精神研究』や文明史の『日本二千六百年史』を著した[2]。皇国史観によって日本史を論じた平泉澄もこの時期の代表的な思想史家である。唯物史観の立場からの日本思想史研究では、三枝博音や、『日本における近代思想の前提』の羽仁五郎らがいる。
日本仏教史[編集]
仏教の研究は古くから寺院の檀林・学寮などで行われていたが、近代的な仏教学研究は、サンスクリットやパーリ語を研究していたフランスやドイツの東洋学者の元に留学した僧侶たちにより始められた。マックス・ミュラーに学んだ南条文雄や高楠順次郎、エルンスト・ロイマンに学んだ荻原雲来、渡辺海旭、渡辺照宏らがいる。また、河口慧海や能海寛らチベットに直接渡って原典を研究した人物もいる。東京帝国大学では高楠が梵語、村上専精がインド哲学の講座を設けて、鷲尾順敬や境野哲が仏教史研究を開始した。私立大学としては井上円了が哲学館(のちの東洋大学)を設立、龍谷大学や大谷大学といった仏教系大学も林立した。鈴木大拙は禅を海外に紹介し、清沢満之は浄土真宗から精神主義の哲学を創出した。高楠に教えを受けた宇井伯寿の弟子には中村元、木村泰賢らがいる。田村芳朗は東京大学に日本仏教史講座を設け、弟子に末木文美士らがいる。
戦後の日本思想史研究[編集]
戦前には西洋哲学者や東洋史学者などが副次的に研究していた日本思想史だが、戦後には日本思想史専門の研究者が登場するようになった。また、研究分野が細分化し、政治思想史や仏教史などのほかに、研究者は古代・中世・近世・近代の時代区分ごとの専門を持つようになっていった。
丸山政治思想史学の登場と批判[編集]
政治哲学者の南原繁の勧めで日本政治思想史を始めた丸山眞男の『日本政治思想史研究』は、敗戦後の日本で学生たちを中心に広く読まれ、『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と共に戦後民主主義の普及に一役買っていた。丸山は朱子学に代表される政治秩序を「自然」と見なす前近代的思惟様式に対して、荻生徂徠が政治秩序は「作為」的であると考えたとし、近代的思惟様式の幕開けと論じ、日本人の思想の中に近代西洋思想を受け入れる素地があったと主張した。しかし、安保闘争を機に丸山の依っていた講座派理論のいう半封建的な社会が一向に民主化へ向かわない政治情勢に絶望して、「歴史意識の『古層』」が収められた『忠誠と反逆』以降は、古代から流れる「つぎつぎとなりゆくいきおひ」という日本人の思考方法がある限り近代化は不可能であるという結論に至った。丸山は藤田省三、植手通有、松本三之介、渡辺浩など多くの後進を育てた。狩野亨吉の発掘した安藤昌益は、エドガートン・ハーバート・ノーマンの『忘れられた思想家』で再度取り上げられ、封建制批判の先駆者として称賛された。
尾藤正英は『日本封建思想史研究』で朱子学と封建制を直接結びつける丸山を批判し、日本朱子学の中にも幕府の支配体制を擁護する山崎闇斎と批判する中江藤樹・熊沢蕃山という二つの流派が存在することを主張した[注 3]。吉川幸次郎や加地伸行らの中国文学者や中国哲学者は、丸山の漢文読解に誤りが多いことを指摘している。安丸良夫は『日本の近代化と民衆思想』を著し、大思想家ばかりを取り上げるのでなく、民衆史の視点から幕末から近代にかけての民衆思想を研究した。子安宣邦は『「事件」としての徂徠学』で丸山の「自然と作為」という見方を批判し、丸山は自身の近代主義的な歴史哲学に合わせて荻生徂徠をはじめとする思想家たちを実際のあり方から変形させてしまったとする。渡辺浩は『近世日本社会と宋学』で、中国近世と日本近世で同じ儒学用語でも意味が異なることを指摘した。
新しい日本思想史研究[編集]
若尾政希は『太平記読みの時代』で安藤昌益を始めとする思想家や藩主たちが朱子学よりも『太平記理尽抄』から学んで政治思想を形成したことを論じている。
国際的な日本思想史研究[編集]
日本学の研究は欧米やアジアの大学で行われており、アメリカのシカゴ大学ではテツオ・ナジタ、ハリー・ハルトゥーニアン、ヴィクター・コシュマンが日本思想史の「シカゴ学派」を作り出した。
各時代の思想[編集]
古代・中世[編集]
封建制が定着する以前の日本では仏教が日本思想の本流を占めた。聖徳太子によって政治的に導入された仏教文化は奈良時代に「国家鎮護」の思想として完成された。平安時代が始まると、「国家鎮護の思想」の代わりに密教が一般的になった。しかし後に、「末法思想」によって悲観主義が一般的になった有名な時代に、この世界での命をなげうって未来の声明を強く称揚する浄土思想が広がった。武士が政権を握る鎌倉時代が始まると、新しく起こってきた社会階級(武士)のための「新」仏教が現れた。
日本への仏教の到来と初期の影響[編集]
古代の日本では、仏教の到来は国家の建設や中央集権化と密接に関連していた。聖徳太子と蘇我氏は古代日本の宗教を牛耳っていた物部氏を戦争で打ち倒し、体系的な法典と仏教に基づいた国家統治の計画を起草した。推古天皇の摂政である聖徳太子は蘇我氏と協力しながら「外国の」仏教に深い理解を示し[注 4]、仏教によって国の政治を安定させようとした。仏教の力で国の平和と安全を得ようとする思想は「国家鎮護」思想と呼ばれる。奈良時代に、特に聖武天皇の時代に、国分寺・国分尼寺が全国に建てられ、東大寺と大仏が奈良に作られた。唐の鑑真が東大寺の戒壇をもたらした時期に、国家による仏教政策が頂点に達した。
奈良仏教が「国家鎮護」思想の面を強く持っている一方で、平安仏教は国の平和と安全だけでなく個人の現世利益ももたらした。それらが強く禁欲主義的な実践、つまり山中での加持祈祷を行ったため、これらの仏教は密教と呼ばれる。空海は中国の秘密仏教を学び、真言宗を開いた。最澄は中国の天台宗を学び、法華経の精神こそが仏教の神髄であると固く信じた
「罪深い時代」である平安時代に現世を信じる可能性は否定され、死後に仏教の楽園に転生することを求めることが流行した。「後世にこの世界で仏教が廃れる」という考えとともに、仏教の楽園へ連れて行ってもらうという「浄土」思想が広がった。空也が諸国行脚して阿弥陀如来への帰依を説いた。
鎌倉仏教[編集]
浄土信仰は平安時代末期に浄土宗によって始められたもので、浄土宗を開いた法然は、他の禁欲的な実践を完全に廃し、阿弥陀如来の力による救済を説いた。彼は弟子に「阿弥陀如来を信仰し熱心に「南無阿弥陀仏」と唱えれば極楽往生できる」と主張した(専修念仏)。彼の弟子の親鸞は新たに浄土系の宗派を開き、法然の教えを果たしぬいて、阿弥陀如来の力に完全に頼ることを説いた(他力本願)。そして「阿弥陀如来による往生の対象者は俗世の自ら自分の罪を自覚したがっている悪人である」と主張した(悪人正機)。時宗を開いた一遍は「踊念仏」を始めた。
浄土信仰とは対照的に、禅宗は坐禅による自己覚醒を試みた。栄西は中国の臨済宗を学んだ。彼は弟子に「公案」(難題)を与えてそれを解かせ、それによって弟子たちは自己啓蒙した。臨済禅は鎌倉時代の上流武士階級から広い支持を集めた。道元は中国の曹洞宗を学んだ。栄西に対して、彼は弟子に「只管打坐(しかんたざ)」(ひたすら坐禅すること)による覚醒を説いた。曹洞禅は地方の武士から支持を得た。
日蓮ははじめ天台の思想の影響を受けていたが、やがてその思想を発展させ独特の思想へとたどりついた。日蓮が生きた鎌倉時代、日本は戦乱状態で、政治は民の幸福を目指しているとはとても言えない状態で、民は貧しく不幸な状態におかれたままになっていたが、そうした政治の状況を目の当たりにし、また仏教界にもすでに諸宗があるにもかかわらず、そのどれも民の悲惨な状況を十分に改善する力になっていない状況をふまえて、日蓮は「諸宗は本尊に迷えり[注 5]」と指摘し、「(もともと平安時代には日本に届いていて、もともとは知られていた)法華経こそが正しい教えである」と説き、「南無妙法蓮華経」[注 6]と唱えることを広めた。日蓮によると「法華経以外の経典では、この世で人の行動や社会を改善することは半ばあきらめているものも多く、この世以外に空間を思い描かせること[注 7]で人々に悪い行動を思いとどまらせたり、心理的な救いをもたらそうとするが、法華経という経典の教えが目指す方向はそれとは異なっていて、人々にこの世で境涯(価値観や生き様)を変え、〈この世をたくましく生きるための教え〉や〈人々がこの世で生きている間に互いを幸せにするための教え〉が含まれている」という。日蓮は政治の実態を見たり、様々な経典の内容を学んだ後に、「民を救うためには他の経典ではなく法華経を選ぶべきだ」と見定めたのである。そして日蓮は「信心の目的というのは(死んでからではなく)一生のうち(つまり生きているうちに)に「仏に成る」こと(=正しい境涯を得ること)(=「一生成仏」)」と説き、また自身も社会の問題を解決すべく具体的に行動し、当時の権力者(幕府・将軍)に対しても、「(権力者のためではなく)民の幸福のために政治を行うという正しい思想を立てるべきこと」を説き、また「汝 須く一身の安堵を思わば 先ず四表の静謐を祷らん者か[注 8]」と説き、そうすれば結果として国も平和になるといった内容の手紙を届け(『立正安国論』)、結局は「皆が「南無妙法蓮華経」と唱え法華経の教えを実践することで(様々な働きによって)やがて国の平和が実現されてゆく」とした。なお、日蓮の教えには西洋のキリスト教の「受難」思想とも相通ずるような面があり[注 9]、《受難》を予期しつつも、むしろそこにも人生の意味を見出す思想が含まれていることは、様々な学者から指摘されている[注 10]。日蓮が広めた教えは日蓮宗となった。上述のような内容の教えなので、本尊(=祈る対象)が法華経以外になることを好まず、また積極的に他の宗派の信者にも働きかけて、他の本尊を捨てさせ法華経に向かわせ(=「破折」)ようとする傾向があり、既存の仏教宗派とは緊張関係が生まれた。
近世[編集]
日本の古代・中世思想は仏教と強く結びついていたが、近世では豊臣秀吉の朝鮮出兵の際連れ帰られた姜沆が朱子学を日本に広め、儒教(宋学)が盛んになった。林家の朱子学は江戸幕府の老中松平定信の時代に公認され、昌平坂学問所での朱子学以外の講義を禁ずる寛政異学の禁が制定された。また、江戸中期以降に国学、蘭学、その他民衆思想が合理主義的な儒教に刺激されて興ってきた。
朱子学の興隆、貝原益軒らからの朱子学批判、山鹿素行の聖学、伊藤仁斎の古義学、荻生徂徠の古文辞学、懐徳堂の徂徠批判、本居宣長の国学、水戸学、佐久間象山や横井小楠の明治維新
儒教[編集]
江戸時代には、儒教が盛んになった。中国の朱子学(宋明理学)が主流になり、その批判から古学派や国学など新しい思想が現れた。
朱子学は家族的な封建制の社会的地位の秩序を尊重した。中世以来五山文学の中で学ばれてきた朱子学は、藤原惺窩や弟子林羅山により復興し、江戸幕府の将軍により重宝された。孔子を祀る湯島聖堂が建てられた。寛政異学の禁により朱子学は権威を増した。さらに、朱子学の思想は江戸幕府末期に尊王攘夷を唱える社会的運動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要出典]。
朱子学とは対照的に、実践的な倫理を尊重する陽明学は江戸幕府によって一貫して監視・抑圧された、というのは江戸幕府の下での社会・政治的状態を批判していたからである。
古学派は孔子や孟子の原典の本来の意図を考慮に入れた。山鹿素行は儒教的倫理学に基づいた武士道を打ち立て、武士を最も高貴な階級だと強く信じた。伊藤仁斎は儒教の「仁」に注意を払い、「仁」を他の人に対する愛、そして純粋な思考としての真理であるとしてこれを尊重した。また、古代中国の古典に対する重要な研究によって、荻生徂徠は本来の儒教の精髄は世界を支配し民草を守ることであると主張した。
国学[編集]
江戸時代中期に、仏教や儒教のような外国の思想に対抗して、国学と呼ばれる日本の古代文学や思想、文化の研究が盛んになった。江戸幕府の鎖国政策によって江戸の知識人は西洋文明と積極的な交流を持てなかったため、蘭学、つまりオランダの研究が唯一の西洋を覗き見る窓であった。
江戸時代中期に、国学は背景としてナショナリズムおよび、大坂懐徳堂などの実証的な儒学の影響を受けながら広まった。国学は、『古事記』、『日本書紀』、『万葉集』を含む古代日本の思想・文化を実証的に研究した。国学は仏教や儒教と異なる日本の本来の道徳文化を発掘することを狙いとしていた。賀茂真淵は『万葉集』の研究に取り組み、男性らしく寛容な様式を「益荒男ぶり」と呼び、蔵書を純粋かつ簡潔に評価した。古事記の研究を通じて、本居宣長は、日本文学の本質は、物事に接した時に自然に起こってくる感情である「もののあはれ」から生まれてくると主張した。彼は中国の(儒教・仏教の)「からごころ」に代えて「やまとごころ」を尊重した。彼によれば、国学は神道という日本の古い流儀を追究するべきであるという。国学の研究を通じて、平田篤胤は国粋的な復古神道、天皇への服従、儒教及び仏教の廃止を唱えた。これが江戸幕府の崩壊と明治維新の駆動力となった。
蘭学[編集]
「鎖国」により、オランダ貿易を除いて西洋との直接交流はなかったが、享保の改革の頃に中国からの漢訳された西洋の書籍の輸入を奨励することで蘭学が流行した。前野良沢と杉田玄白はターヘル・アナトミアを和訳し、『解体新書』を著した。蘭学は江戸幕府末期までにはイギリス、フランス、アメリカ合衆国といった他の西洋の国々の研究にまで展開していた。「和魂洋才」という思想は佐久間象山の直接的な表現「東洋道徳、西洋芸術(技術の意)」に完成された。林子平は「三国通覧図説」を出版して取り締まられ、蘭学者の高野長英と渡辺崋山は鎖国政策を厳しく批判して弾圧された(蛮社の獄)。
民衆思想[編集]
江戸時代には、私塾が実際的な側面で働く武士、商人、学者らに開かれていた。彼らの中には封建秩序による支配に対する批判を行うものもあった。
石田梅岩は儒教、仏教、神道を統合して大衆のための実践的な哲学を創始した。彼は誠実さと倹約による効果として商業に精を出すことを奨励した。安藤昌益は自然の世界をそこで人間が農業に従事して不自然なものなしに自給自足的に生きる理想的な世界であるとした。彼は、封建的な階級差別や貧富の差が存在するとして法治的な社会を批判した。二宮尊徳は、人は徳に報いなければならず、そのことがその人個人の徳とともにその人の存在を支持すると主張した。
近代[編集]
明治維新から自由民権運動まで[編集]
近世日本思想が儒教と仏教の中で発展したのに対して、急速に西洋思想に影響を受けた明治維新の後にイギリスの啓蒙やフランスの人権が流行した。これは、横井小楠と福沢諭吉の近代主義に代表されて現出した[3]。日清戦争及び日露戦争の時期から、日本の資本主義がよく発展した。キリスト教と社会主義が発展し、様々な社会運動と結びついた。また、ナショナリズム的な思想・学問が外国の学問に反発しつつ形成された。
啓蒙と人権[編集]
明治維新において、イギリスとフランスの市民社会、特にイギリスの功利主義および社会的ダーウィニズム、フランスの国民主権とジャン=ジャック・ルソーが紹介された。
明治初期の思想家は西洋の市民社会の中でもイギリス的な啓蒙を唱えた。彼らは日本の伝統的な権力や封建社会を批判しようとした。しかし、彼らは結局政府と迎合して抜本的でない上からの近代化を受け入れた。1873年に、森有礼が明六社を結成した。この文化的会合に参加する人々は実学重視、人間の特徴を実践的につかむこと、国情に合った政府の形成を理想とすることといった点を共有していた。森有礼は文部卿として国民教育の普及に努めた。横井小楠は、幕末に実学党を結成して門閥制度に代わる能力主義や共和思想を反映し、儒学・朱子学の流派に影響された実学を提唱した。
福沢諭吉は科学技術やアレクシ・ド・トクヴィル、英国文明論を日本に紹介して、自然権は当然人権が天賦のものであることであると唱えた。彼は文明の発展は人間の精神の発展であり、人の独立は国家の独立を導くと考えた[4]。「便宜のために」政府は存在し、その出現は文化に見合ったものであると福沢は考えた。政府の唯一の理想的な形など存在しないと彼は言った。また、日本は列強に対抗して大陸へと対外進出するべきだと彼は主張した[5]。西周は人の振る舞いはその人の持つ関心に基づくと断言した。加藤弘之は社会的ダーウィニズムの影響のもとで自然権を放棄し、代わりに適者生存を唱えた。
明六社のメンバーは結局政府と人民の調和を唱えたが、民主思想家はフランスの基本的人権を吸収し、西南戦争後に明治寡頭制に対して言論によって国民が反抗・革命を起こすことを支持した。1874年に、板垣退助が民選議院設立建白書を提出した。このことが自由民権運動として日本中に広まった。植木枝盛は板垣を支持して基本的な草稿を作成した。ルソーに強く影響されて、中江兆民が主権在民と個人の自由を主張した。しかし、日本の状況を考慮して、彼は立憲君主制の重要性に言及している。彼によれば、大日本帝国憲法は議会によって徐々に改正されるのが望ましいということであった。
大正デモクラシーと社会主義[編集]
明治後期から大正期にかけて、ブルジョア階級の政治意識の背景として民主主義運動が広がった。この流れは護憲と普通選挙を求める政治運動を導いた。吉野作造は政党内閣制と普通選挙を主張した。彼は誰に主権があるかは深く追究しなかったが国民の幸福を狙った政治的目的と国民の意思を狙った政治的決定を主張した。美濃部達吉は主権を天皇ではなく国家に帰するものと解釈した。彼によれば、大日本帝国憲法のもとでは天皇はただ最上位の機関として自身の政治的権能を取り持つに過ぎない。彼の理論は初め広く認められたが、後には軍人や国粋主義者によって政治的に抑圧されることになる。
1911年に、平塚らいてうが青鞜社を立ち上げた。彼女は女性自身の目覚めとフェミニスト運動の発展を求めた。与謝野晶子はジェンダーの違いを否定したが、らいてうは子を育てる母性を強調し、女性が女性としての能力を説明するための公的な援助を認めた。1920年に、らいてうは市川房枝や奥むめおらと新婦人協会を結成した。彼女らの活動が女性が政治的演説に参加することに成功してすぐに、協会は内部分裂によって解散した。その後、市川が女性参政権運動を続けるため新しく団体を設立した。
キリスト教と社会主義[編集]
日本において近代化による社会矛盾と戦ったのはキリスト教徒と社会主義者である。資本主義と資本主義による矛盾を日本にもたらした日清戦争や日露戦争の後にキリスト教社会主義運動が活発となった。多くの日本の社会主義者はキリスト教的人間中心主義に影響を受けており、この点で彼らはキリスト教と強く関連している。
キリスト教は江戸幕府によって禁じられたが明治の知識人に影響した。内村鑑三は「二つのJ」の思想を発展させて伝統的な武士道とキリスト教を統合した。自分の天職は「日本(Japan)」と「イエス(Jesus)」に奉仕することだと彼は信じていた。彼は無教会運動を提唱した。彼は教育勅語に挑戦して日露戦争に反対した[6]。新渡戸稲造はクェーカー教徒で日本文化とキリスト教の融合に努めた。彼は日本文化を海外に紹介した。また、彼は国際連盟事務次長になった。新島襄は渡米して神学を学び、京都に同志社英学校(のちの同志社大学)を設立してキリスト教による人格陶冶に従事した。
日清・日露戦争期には、日本が産業革命を通じて資本化に成功するとともに資本主義に対抗する社会主義が広がっていた。しかし、社会運動は1900年に制定された治安警察法によって抑圧され、ついには1910年の大逆事件で社会主義者たちは軍隊及びファシスト政府によって根絶やしにされた。河上肇は新聞で困窮について記事を書いている。彼は、初めは個人の変革によって貧困を解決することを強調したが、後にマルクス主義者になって社会的強制による社会変革を主張した。幸徳秋水はもともと議会を通じての社会主義の実現を模索していたが、ユニオニストとなってゼネラル・ストライキによる直接的行動を訴えた。彼は1910年の大逆事件の首謀者として処刑された。大杉栄はアナーキズムとユニオニズムを利用して個人的自由を主張した。彼は政府によって脅威とみなされ、関東大震災の後の混乱の中で秘密警察に暗殺された。
1925年に、元軍人で新聞記者の夢野久作は九州日報連載「東京人の堕落時代」の中で、「田舎の人々が東京へ集まる傾向が強まり、世間が世智辛くなっていった。日本の教育は忠孝仁義を説きながら、実は物質万能、智識万能を教えており、日本の若者はことごとく物質万能主義者となっている。」「上流社会が平民的になってきて、風紀頽廃していった」と述べている。また、「無産階級の人々が目標とし、規準とする生活が、東京人の生活と同様の意味の文化生活を夢見るものであったならば、それ等の人々の覚醒と運動とは、将来に於て無価値のものとなり終るべき可能性を、充分に持っていはしまいかと疑い得られる」として都会人による社会主義にも警告を発しているほか、「農民文化が尊重される傾向が出来つつある」「新たに天下を取る者は常に田舎者である」「今日の如く、東京を憧憬する人々、東京の文化を本当の文化と信ずる人々が無暗に殖えて行ったならば、今に日本人全体が東京人のようになってしまいはしまいか」として地方の人々による警鐘が必要ではないかとした。
戦争まで[編集]
啓蒙時代、キリスト教、そして社会主義が明治維新以降の日本思想に影響を与えてきた。日本における政治文化と国家の伝統の強調は西洋化に対する反応として起こった。この流れは帝国主義と軍国主義(ファシズム)を正当化するというイデオロギー的な側面を持っている[注 11]。
徳富蘇峰は雑誌を出版し、その中で日本の西洋化に反対して自由民主主義とポピュリズムを主張したが、政治的な役割を演じるべきブルジョワに彼は幻滅した。陸羯南は日本の政治文化と国家の伝統を非常に優れたものとみなし、彼は国民感情の回復と強化を狙ったが、決して心の狭い国粋主義者ではなく、軍隊を批判して政府の議院内閣制と参政権の拡大を唱えた。竹越与三郎は南進論を唱えて南洋諸島への植民地主義を唱え、一方近衛篤麿は北進論を唱えた。北進論は関東軍における大東亜共栄圏確立の思想と結びついた。
明治維新の後、日本の政府は神道を保護して、それをしばしば単なる一個の宗教ではなく国家神道として扱った。政府は神道を天皇と密接に関連させ、神道を国家運営の道具として利用した。国家神道は明らかに民間的な神道の教派とは区別される。国家神道を組織して教育勅語を公布することはイデオロギー的な国家運営のモデルであった。明治国家主義は日清戦争・日露戦争を通じて国家主権を回復して帝国主義・植民地主義を追究しようとした。しかし、その軍国主義的な流れが極端なナショナリズムへ発展した。北一輝は財閥、元老、政党の排除と、天皇と国民が直接的に結びついた政府の設立を唱えた[注 12]。
柳田國男は日本の民俗学を創設し、『遠野物語』などで稲作民と全く異なる生態系を持つ「山人」の存在を紹介した。その後、「常民」と呼ばれる一般人に論点を移し、最終的には「海の道」を通じ日本民族のルーツを「海の道」を通じて南方に求めるようになった。他の民俗学者には淫祠邪教と呼ばれる民間信仰の保存を求め国家神道に反対した南方熊楠、民芸品の美を論じた柳宗悦、日本古来の宗教と国文学の発生を論じた折口信夫がいる。井筒俊彦と大川周明はクルアーンに基づくイスラム主義を研究した。
戦前の日本では、ドイツ哲学が熱心に研究・紹介された。しかし、明治後期から大正時代にかけて、京都学派が西洋思想と禅宗のような東洋思想を融合しようと試みた。西田幾多郎は禅と西洋思想の融合により独自の思想を打ち立てた。彼の思想は西田哲学と呼ばれる。純粋経験の中では主観と客観の間の対立は存在しないと彼は主張した[7]。彼の存在論は絶対無に由来する。和辻哲郎は西洋の利己的な個人主義を批判した[8]。彼の倫理学では人間は独立した存在ではなく関係的存在であると説かれる。個人的・社会的存在は自身が個人であることと社会の成員であることの両方を自覚すべきだと彼は主張した。彼は『風土』で自然環境と地域的生活様式の関係を研究した。
焼け跡からの出発[編集]
終戦とその混乱[編集]
連合国軍最高司令官総司令部(GHQ)により戦前の思想犯は解放され、占領統治を批判しない限りでの言論の自由が復活した(しかし、三木清などは戦後獄中死した)。戦没した学生の手記を編纂した『きけ わだつみのこえ』が発刊された。大岡昇平は『俘虜記』など戦記文学を発表。『真空地帯』の野間宏は『崩解感覚』で戦争終結による意識の変化を描き、無頼派の坂口安吾は『堕落論』で敗戦した日本は落ちきった先に新たな道を求めるべきであるとした。アメリカ哲学研究者の鶴見俊輔らは思想の科学を創立し、市民の立場から民衆の思想を研究し、また、共産党員幹部の獄中転向の問題を『共同研究 転向』で論じた。 一方で、柳田國男は『先祖の話』を著し、天皇の権威が失墜したあと、イエ制度がそれに代わる国民統合の支柱になると考え、和辻哲郎は戦中から国家主義の立場で書き続けていた『倫理学』や『日本倫理思想史』を完成させ、また、古代以来受け継がれてきた天皇制と連続するものとして象徴天皇制を肯定した。
戦後民主主義[編集]
南原繁に教えを受け、戦前には『日本政治思想史研究』で朱子学や荻生徂徠、安藤昌益、本居宣長らの研究を行った丸山眞男は、戦後『世界』誌上で「超国家主義の論理と心理」を発表し、注目を集めた。丸山は戦後民主主義の立役者として活躍し、これらの論考は「大日本帝国の実在より戦後民主主義の虚妄に賭ける」という言葉で名高い『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にまとめられた。その後も、『日本の思想』や問題作「歴史意識の『古層』」(『忠誠と反逆』)などを発表した。カール・マルクスとマックス・ヴェーバーに影響を受けた西洋経済史学者の大塚久雄や法社会学者川島武宜、文芸評論家の加藤周一ら、朝日新聞や吉野源三郎社長の岩波書店に依った進歩的文化人の思想は近代主義と呼ばれる。清水幾太郎は論壇の寵児であったが、後年保守に転向し、日本核武装論を唱えた。
戦後民主主義への懐疑と新左翼運動[編集]
魯迅の研究で知られる中国文学者の竹内好は、日本が維新以来採ってきた近代主義を批判し、「方法としてのアジア」などでアジア主義を説いた。政治思想史家の橋川文三は、『日本浪曼派批判序説』や『昭和維新試論』などで、忘却されてきた日本近代の右翼思想を再考した。英文学者の福田恆存は『中央公論』に「平和論の進め方に対する疑問」を発表し、新現実主義の高坂正堯や永井陽之助らも『正論』などで絶対平和主義を批判した。経済学者の小泉信三、政治学者の猪木正道、哲学者の田中美知太郎、数学者の岡潔らは保守論客として知られた。今西錦司は主体性進化論、梅棹忠夫は生態史観を唱えた。
スターリン批判とハンガリー動乱、六全協、60年安保闘争を機に日本共産党は威信を失い、谷川雁、吉本隆明、埴谷雄高、黒田寛一など多くの人物が新左翼運動に参加した。主体性論で知られるジャン=ポール・サルトルをはじめとするフランスの反体制知識人は彼ら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また、文化大革命の内実が知れ渡るまでは毛沢東も大いに評価されていた。戦後最大の思想家と呼ばれた詩人・評論家の吉本隆明は丸山らを批判し、「自立主義」を唱えた。「転向論」から出発した吉本は、古事記や柳田國男の遠野物語を参照した『共同幻想論』や、三浦つとむの言語論を応用する『言語にとって美とはなにか』などで独自の思想を展開した。大江健三郎は『ヒロシマ・ノート』『沖縄ノート』を著し、高橋和巳は『憂鬱なる党派』を著した。廣松渉は疎外論的なマルクス読解を批判し、物象化論を主張、『マルクス主義の地平』や『存在と意味』を著し、先駆的にポストモダン哲学への橋渡しを行った。後年、『<近代の超克>論』を著し、「東亜」の連帯による北東アジア共同体を提唱して物議を醸した。彼らの思想は全学連・全共闘といった学生運動に受け入れられていった。学費高騰、商業主義とマスプロ教育による質の低下が問題化していた日本大学などでは「大学解体」の実践が一定の支持を集めた。しかし、国立の東京大学では「自己否定」などの空虚な標語のもと観念論化が進み、安田講堂事件を機に終息し、その後は過激派による内ゲバやテロが相次いだ。その中で金嬉老事件や華青闘告発などを契機に、新左翼の中でも在日差別が行われていることが明らかになり、太田竜は「辺境へ向けて退却せよ」と唱え、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を批判し、階級闘争史観の中で忘却されていたマイノリティの思考への転換を主張した。学術の世界でもマイノリティに着目した研究が始まり、山口昌男の「中心と周縁」理論や色川大吉や安丸良夫の民衆史研究などが現れた。また、ウーマン・リブ、第二波フェミニズムもこの頃始まった。
保守論壇と歴史観の相克[編集]
東大全共闘の心情に理解を示し「諸君が一言天皇と言えば私はよろこんで手をつなぐ」と言った小説家の三島由紀夫は楯の会を組織し、1970年自主憲法制定のため自衛隊の決起を呼びかけ、自刃する三島事件を起こした。唐木順三は「現代史への試み」で新たな歴史観を示し、評論家の江藤淳はGHQ-WGIPを主張した。進歩派の歴史家・家永三郎は教科書検定制度を検閲とみなし、廃止を求めて教科書裁判を起こした。一方で、教育学者の藤岡信勝や哲学者の西尾幹二らは戦後の歴史教育を自虐史観と批判し、自由主義史観を唱え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を立ち上げた。しかし、内紛が相次ぎ西尾をはじめ保守系評論家の西部邁や漫画家の小林よしのりらも脱退した。
思想の現在[編集]
ポストモダンブーム[編集]
すでにフランス哲学研究者によりフランス現代思想の輸入がされており[注 13]、『マルクスその可能性の中心』の柄谷行人や『反=日本語論』の蓮實重彦などが論壇で活躍していたが、浅田彰は『構造と力』で日本にフランス現代思想を一般向けに紹介し、ニュー・アカデミズム(ニューアカ)の端緒を開いた。浅田は企業や大学に偏執するパラノ(パラノイア)から逃走し、スキゾ(統合失調症)として振る舞うことを説き(『逃走論』)、ポストモダニズムを「ノリつつシラけ、シラけつつノる」こととしている。その後も彼や栗本慎一郎らニューアカの代表者たちは三浦雅士が編集長を務めた思想誌『現代思想』を拠点に活動した。宗教学者の中沢新一は現地での修行を通じて体験的にチベット仏教や人類学を論じており、彼の東大教養学部教授就任は教授陣により拒否され、賛成に回った西部邁は辞職した(東大駒場騒動)。中沢らは結果的にではあるものの、オウム真理教の宗教活動を評価してしまい、その後起こったオウム事件に際し批判を受けた[注 14]。
80年代以降[編集]
柄谷行人は『日本文学の起源』や『探究Ⅰ・Ⅱ』、『批評とポストモダン』、『隠喩としての建築』など多数の著作があるほかスラヴォイ・ジジェク等との親交もあり、『トランスクリティーク』や『世界史の構造』は世界に紹介されている。また、西部忠とともに資本主義も社会主義も越えた第四の経済体制であるアソシエーション運動(NAM)を展開したが、失敗に終わった。柄谷に見いだされた東浩紀は『存在論的、郵便的―ジャック・デリダについて』によって、ポストモダンの知の更新を図った。2010年にゲンロン株式会社を設立し、日本の文化面での知のあり方の変革を実践している。千葉雅也は、『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 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を出版し、浅田彰、東浩紀に続き、日本現代思想の代表的論者となっている。哲学では大森荘蔵に学んだ、野家啓一、野矢茂樹、中島義道らや、鷲田清一、永井均などが活躍している。
脚注[編集]
注釈[編集]
- ^ この場合は「近現代の日本人による哲学」を指すことが多い。
- ^ 和辻哲郎はこのことを、日本思想の歴史は単線的ではなく、いくつかの山が重なった形で表現されると述べている[1]。
- ^ この山崎闇斎観はヘルマン・オームスが『徳川イデオロギー』と呼んだことに繋がる。
- ^ 三経義疏と十七条憲法を参照。
- ^ 「心や意識を向けたり祈る対象となる仏や仏典を選ぶ段階ですでに問題がある」という意味。
- ^ 「法華経に帰依します」という意味を含む言葉。「題目」。それまでの仏教用語で言えば「マントラ」に当たるようなもの。例えば真言密教では、祈る対象となる仏が非常に多数あり、その時々に意識を向ける仏ごとにマントラが設定されていて、それを繰り返し唱えることで唱える者に結果として様々なことが起きることを意図している。それに対して、日蓮の題目はただひとつで、法華経に焦点を当てている言葉であり、(ちょうど密教の「マントラ」が繰り返し唱えることで行者に様々なことが起きることを意図しているように)題目を繰り返し唱えることで、結果として、それを唱える人の心や行動に様々なことが起きることを意図している。
- ^ 例えば、地の下に「地獄」を描いたり、はるかかなたに「清らかな浄土」があると思い描かせること
- ^ 「あなたが自分の安泰を願っているのなら、まず周囲(世界)の平安・平和を祈るべきです」ということ。
- ^ 例えば日蓮の『開目抄』は、旧約聖書の『ヨブ記』と並ぶ、受難思想を記した作品の白眉と言われることがある。
- ^ 日蓮の受難とその思想の関係に言及している文献は非常に多数あるが、一例を挙げるとたとえば『法華經と日蓮聖人』大東出版社、1985、「仏教の思想」 第2巻 梅原猛執筆記事 等々でも受難に対する日蓮の考え方に関する記述がある。
- ^ 全面戦争と汎アジア主義も参照。
- ^ 二・二六事件を参照。
- ^ フランス現代思想の翻訳・研究者として、今村仁司(ルイ・アルチュセール、ボードリヤール)、塚原史(ジャン・ボードリヤール)、宇波彰(ジル・ドゥルーズ、ボードリヤール)、足立和浩(ジャック・デリダ)、渡辺一民(ミシェル・フーコー)、沢崎浩平(ロラン・バルト)らが知られていた。
- ^ 大澤真幸や宮台真司は社会学的にオウム事件の分析を行っている。
出典[編集]
関連文献[編集]
叢書[編集]
戦後思想[編集]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일본 사상
일본 사상 은 일본 의 철학 · 사상 을 말한다 . _ 일본 철학 이라고도 말한다 [주 1] . 태고 에는 애니미즘 · 샤머니즘 으로서의 신도가 있었지만, 불교 , 유교 , 서양 사상 의 전래 [주 2] 에 의해 습합·혼합해, 일본 특유의 사상 풍토가 완성되어 갔다.
연구사 [ 편집 ]
「일본 사상사」의 형성 [ 편집 ]
일본 사상이 학술적인 고찰의 대상에 오른 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이다. 전쟁 전의 대표적인 사상사가로 쓰다 좌우길 , 무라오카 노리토 , 와 쓰지 테츠로 등이 있다.
이하, 「일본 사상사 강좌」시리즈(페리칸사)의 각권 「총설」을 참고로 기술한다.
유교와 국민도덕론 [ 편집 ]
' 문명개화 '에 따라 명록사의 후쿠자와 유키치 와 니시즈키 등에 의해 서양사상 , 서양철학 의 수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유럽화 에 대해 일본의 전통사상을 회고하는 움직임도 나타나 국수주의 · 국가주의자 들은 국민도덕론을 주창했다. 도쿄 제국 대학 에서 서양 철학의 보급에 노력한 이노우에 테츠지 로는 주자학 , 양명학 , 고학과 같은 일본 유교 ·에도 유학의 연구를 시작해, 니시무라 시게키 도 서양 철학과 전통 사상을 융합한 「일본도덕론」을 저 했다. 에드먼드 스펜서 의 사회진화론을 소개한 카토 히로유키 등은 계몽사상을 비판하는 국권주의 로 달렸다. 모토다 에이즈 카는 유교와천황 숭배를 일체화시킨 ' 교육 칙어 '를 기초했다.
내셔널리즘 [ 편집 ]
역사학자의 쓰다 좌우 길은 일본 고대사 나 『논어 』의 문헌연구로 알려져 있지만 , 『 문학 에 나타나는 우리 국민사상의 연구』를 현저히 처음으로 본격적인 일본사상의 통사 적 서술을 실시했다. 자유주의적인 내셔널 리스트 였던 쓰다에는 『시나 사상과 일본』의 저작도 있었고, 중국 이 일본 사상에 끼친 영향을 부정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무라오카 노리쓰키 는 '일본 사상사 연구'와 ' 혼이 선장 '의 저작이 있어 일본 사상의 문헌학적 연구를 실시했다. 무라오카는 종교 철학자 의 하타노 세이이치 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일본 사상 속의 종교 철학의 탐구를 동기로, 에도 시대 후기의 국학자 히라타 아츠시에게 일본 전통 사상에서의 종교 철학 의 완성 을 발견 했다. 무라오카 노리히토가 활약한 도호쿠 제국대학 에서는 니시다 나오지 로의 '문화사학'이 흥성하여 이시다 이치라 , 사토 히로오 등을 배출했다.
쇼와전 전기의 상황 [ 편집 ]
철학자 니시다 기타 로는 '일본 문화의 문제'로 전통 사상을 매개로 한 서양 철학의 쇄신을 설교하고 있다. 또, 윤리학자인 와츠 지 테츠로 는 '인간의 학으로서의 윤리학'이나 ' 윤리학 '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도 일본 정신의 연구를 실시했다. 와츠지는 독일 의 해석학을 배우고 그것을 사상사서술에 이용했다. '일본 정신사 연구'는 일본 미술과 예능 속에 일본 정신을 찾는 저작이다. 전전에 출판한 『존황사상 과 그 전통』은 고대부터 근세의 일본사상을 존황사상이라는 관점에서 섭렵하고, 전쟁을 앞두고 집필이 서둘러진 와쓰지 윤리학의 큰 목적 의 하나이다 , 민중을 국가 를 위해 동원 가능하게 하는 국가주의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전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완전판의 「일본 윤리 사상사」가 출판되었다. 와쓰지문 아래에는 사가라 료 , 겐료고 , 유아사 야스오 등이 있으며, 현재는 제3세대로서 사토 마사히데 등이 있다. 오카와 슈메이 는 이슬람 철학 의 연구자이며,아시아주의 의 대표적 인물이지만, 인물평전의 「일본 정신 연구」나 문명사의 「일본 2천6백년사」를 저술했다[2 ] . 황국사관 에 의해 일본사를 논한 히라이즈미 스미도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상사가이다. 유물사관의 입장으로부터의 일본사상사연구에서는, 산에다 히로네 와, 「일본에 있어서의 근대사상의 전제」의 하닌고로 등이 있다.
일본 불교사 [ 편집 ]
불교의 연구는 예전부터 사원의 단림 · 학 기숙사 등에서 행해지고 있었지만, 현대적인 불교학 연구는, 산스크리트 나 파리어를 연구하고 있던 프랑스 나 독일 의 동양학자 에게 유학한 스님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맥스 뮐러 에게 배운 난죠 후미오 와 타카구스 준지 로 , 에른스트 로이 맨 에게 배운 오기 하라 운래 , 와타나베 해사 , 와타나베 테루 히로 등이 있다. 또, 가와구치 케이해나 노카이 관 등 티베트 에 직접 건너 원전을 연구한 인물도 있다. 동경제국대학 에서는 다카쿠스가 가미어, 무라카미 전정이 인도철학의 강좌를 마련하고, 와시오 순경 이나 사카노 테츠 가 불교사 연구를 개시했다. 사립 대학으로서 이노우에 엔가 철학관(뒤의 동양 대학 )을 설립, 류야대학 과 오오타니 대학 등 불교계대학 도 임립했다. 스즈키 오오츠키 는 선을 해외에 소개하고, 기요사와 미츠유키 는 정토 신종 으로부터 정신주의 의 철학을 창출했다. 타카 구스에게 가르친 우이 백수 의 제자에는 나카무라 전 , 기무라 야스케 등이 있다. 타무라 요시로는 도쿄 대학에 일본 불교사 강좌를 마련해 제자에 스에키 후 미미 등이 있다.
전후 일본 사상사 연구 [ 편집 ]
전전에는 서양철학자나 동양사학자 등이 부차적으로 연구하고 있던 일본 사상사이지만, 전후에는 일본 사상사 전문의 연구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 연구분야가 세분화되어 정치사상사나 불교사 등 외에 연구자들은 고대 · 중세 · 근세 · 근대 의 시대 구분 별 전문을 갖게 되었다.
마루야마 정치 사상 사학의 등장과 비판 [ 편집 ]
정치 철학자 의 미나미하라 시게루 의 권유로 일본 정치 사상사를 시작한 마루야마 마사오 의 「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는, 패전 후의 일본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널리 읽혀져,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함께 전후 민주주의의 보급에 한몫하고 있었다. 마루야마는 주자학 으로 대표되는 정치질서를 ' 자연 '으로 간주하는 전근대적 사유양식에 대해서, 오기후유가 정치 질서 는 '작위'적이라고 생각했다며 근대적 사유양식의 개막이라고 논하고, 일본인의 사상 속에 근대 서양 사상을 받아들이는 소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보 투쟁을 계기로 마루야마가 의지하고 있던 강좌파 이론이 말하는 반봉건적인 사회가 한결에 민주화로 향하지 않는 정치 정세에 절망해, 「역사 의식의 「고층」」이 담긴 「충성과 반역 '이후는 고대부터 흐르는 '쭉쭉이 되어가는 가이키오히'라는 일본인의 사고방법이 있는 한 근대화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마루야마는 후지타성 3 , 식수통유 , 마츠모토 미노스케 , 와타나베 히로시 등 많은 후진을 키웠다. 카노 마키요시 가 발굴한 안도 마 사유는 에드가 턴 허버트 노먼의 ‘잊혀진 사상가’에서 다시 다루어져 봉건제 비판의 선구자로 칭찬받았다.
오토 마사히데는『일본봉건사상사연구』에서 주자학과 봉건제를 직접 연결하는 마루야마를 비판하고, 일본 주자학 속에도 막부의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야마자키 암사이와 비판하는 나카에토키, 구마자 와 소야 마라 는 두 가지 유파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주 3] . 요시카와 코지로 와 카지 신행 의 중국 문학자 와 중국 철학자 는 마루야마의 한문 독해에 오류가 많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 야스마루 료오는 '일본의 근대화와 민중사상'을 저술해, 대사상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민중사의 시점으로부터 막부 말기로부터 근대에 걸친 민중사상을 연구 했다 . 코야스 선방 은 ''사건'으로서의 배회학'에서 마루야마의 '자연과 작위'라는 견해를 비판하고, 마루야마는 자신의 근대주의적인 역사 철학에 맞추어 오기 소후를 비롯한 사상가 들을 실제 본래부터 변형시켜 버렸다고 한다. 와타나베 히로시 는 '근세 일본 사회와 송학'에서 중국 근세와 일본 근세에서 같은 유학 용어에서도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새로운 일본 사상사 연구 [ 편집 ]
와카오 마사키 는 '태평기독의 시대'에서 안도 창익을 비롯한 사상가와 번주들이 주자학보다 '태평기리진초'에서 배워 정치사상을 형성한 것을 논하고 있다 .
국제적인 일본 사상사 연구 [ 편집 ]
일본학 의 연구는 구미나 아시아 의 대학에서 행해지고 있어 미국 의 시카고 대학 에서는 테츠오 나지타 , 해리 하르투니안 , 빅터 코슈만이 일본 사상사의 「시카고 학파」를 만들어냈다.
각 시대의 사상 [ 편집 ]
고대·중세 [ 편집 ]
봉건제가 정착하기 이전의 일본에서는 불교 가 일본 사상의 본류를 차지했다. 성덕태자 에 의해 정치적으로 도입된 불교문화는 나라시대에 ' 국가진호 '의 사상으로 완성됐다.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면 '국가진호 사상' 대신 밀교가 일반적이 됐다. 그러나 나중에 ' 말법사상 '에 의해 비관 주의가 일반적으로 된 유명한 시대에, 이 세계에서의 목숨을 낼 수 있어 미래의 성명을 강하게 칭양하는 정토사상이 퍼졌다 . 무사 가 정권을 잡는 가마쿠라 시대가 시작되자 새로 일어난 사회계급(무사)을 위한 ' 신' 불교가 나타났다.
일본에 불교의 도래와 초기의 영향 [ 편집 ]
고대 일본에서는 불교 의 도래가 국가 건설과 중앙 집권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성덕태자 와 소가씨 는 고대 일본 종교를 소 귀고 있던 물부씨를 전쟁으로 쓰러뜨리고 체계적인 법전과 불교에 근거한 국가 통치의 계획을 기초했다. 추고천황 의 섭정인 성덕태자는 소가씨와 협력하면서 '외국의' 불교에 깊은 이해를 보이고[주4] 불교에 의해 국가의 정치를 안정시키려고 했다 . 불교의 힘으로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얻으려는 사상은 ' 국가진호 ' 사상이라고 불린다. 나라 시대 에, 특히 세이부 천황 의 시대에, 고쿠분지 ·고쿠분 아마데라 절이 전국에 지어져 도다이지 와 대불 이 나라 로 만들어졌다. 당의 감진이 도다이지의 계단을 가져온 시기에 국가에 의한 불교 정책이 정점에 이르렀다 .
나라불교 가 '국가진호' 사상의 면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한편, 평안불교는 나라 의 평화와 안전뿐만 아니라 개인의 현세이익도 가져왔다. 그들이 강하고 금욕주의 적인 실천, 즉 산속에서의 가지기도를 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불교는 밀교 라고 불린다. 공해 는 중국 의 비밀불교를 배우고 진언종을 열었다. 모스미는 중국의 천대종을 배우고 호화경의 정신이야말로 불교의 신수라고 굳게 믿었다
‘죄 깊은 시대’인 헤이안 시대에 현세를 믿을 가능성은 부정되어 사후 불교의 낙원으로 환생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유행했다. '후세에 이 세계에서 불교가 폐해진다'는 생각과 함께 불교의 낙원으로 데려가달라는 '정토' 사상이 퍼졌다 . 쿠야 가 제국행각하여 아미타 여래 로의 귀의를 설했다.
가마쿠라 불교 [ 편집 ]
정토신앙 은 헤이안 시대 말기에 정토종 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정토종을 연 법연 은 다른 금욕적인 실천을 완전히 폐지하고 아미타 여래의 힘에 의한 구제를 설했다. 그는 제자에게 “아미타 여래를 믿고 열심히 “ 미나미 무아미타불”이라고 주장하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전수념불). 그의 제자의 친무는 새롭게 정토 계의 종파를 열고, 법연의 가르침을 완수하지 않고, 아미타 여래의 힘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을 설했다(타력 본원 ) . 그리고 “아미타 여래에 의한 왕생의 대상자는 속세 스스로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싶어하는 악인이다”라고 주장했다(악인 정기 ) . 시종을 열었던 일편 은 ' 춤념불 '을 시작했다.
정토신앙과는 대조적으로 선종 은 좌선 에 의한 자기 각성을 시도했다. 영서 는 중국의 임제종을 배웠다. 그는 제자들에게 ' 공안 '(난제)을 주어 그것을 풀게 하여 제자들은 자기 계몽했다. 임제선은 가마쿠라 시대의 상류 무사계급에서 넓은 지지를 모았다. 도원 은 중국의 조동종을 배웠다. 에이사이에 대해 그는 제자에게 ' 관관 타좌'(오로지 좌선하는 것)에 의한 각성을 설교했다. 조동선은 지방의 무사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니치렌 은 처음으로 천대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이윽고 그 사상을 발전시켜 독특한 사상에 이르렀다. 니치렌이 살아온 가마쿠라 시대, 일본은 전란 상태로, 정치는 백성의 행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백성은 가난하고 불행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채로 되어 있었지만, 그러한 정치의 상황을 목격하고, 불교계에도 이미 종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어느 것도 백성의 비참한 상황을 충분히 개선하는 힘이 되지 않은 상황을 근거로, 니치렌은 “제종은 본존 에 헤매는 [주 5] "라고 지적하고, "(원래 헤이안 시대에는 일본 에 도착하고 있었고, 원래는 알려져 있었다) 호화경이야말로 올바른 가르침이다"라고 설해, "남무 묘법 연꽃 경 " 주 6] 라고 주장하는 것을 퍼졌다. 니치렌에 따르면 “호화경 이외의 경전에서는, 이 세상에서 사람의 행동이나 사회를 개선하는 것은 중반 포기하고 있는 것도 많아, 이 세상 이외에 공간을 생각해 그리게 하는 것[주 7 ]에서 사람들에게 나쁜 행동을 마음껏 머물게 하거나 심리적인 구원을 가져오려고 하지만, 호카케이라는 경전의 가르침이 목표로 하는 방향은 그것과는 다르고,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경애(가치관이나 삶)을 바꾸어, <이 세상을 잘 살기 위한 가르침>과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서로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니치렌은 정치의 실태를 보거나 다양한 경전의 내용을 배운 뒤 “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경전이 아니라 법화경을 선택해야 한다”고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니치렌은 “신심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죽고 나서가 아니라) 일생 중(즉 살아 있는 동안)에 “불상이 된다” 것(=올바른 경애를 얻는 것)(=“일생성불”) "라고 설득, 또 자신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행동해, 당시의 권력자(막부·장군)에 대해서도,"(권력자를 위해가 아니라)민의 행복을 위해 정치 를 한다는 올바른 사상을 세워야 할 것"을 설명하고 또 "여우 스쿠 일신의 안도를 생각하면 먼저 네 표의 정적을 떠나는 사람인가 [주 8 ] " 라는 내용의 편지를 전해(『立正安国論』), 결국은 「모두가 「남무묘법 연꽃 경」이라고 주창하여 법화경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여러가지 일에 의해) 이윽고 나라의 평화가 실현되고 "테유쿠"라고했다. 덧붙여 일련의 가르침에는 서양의 기독교의 「수난」사상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어 [주 9] ,《수난》을 예상하면서도, 오히려 거기에도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는 사상이 포함 하는 것은 다양한 학자들로부터 지적되고 있다 [주 10] . 니치렌이 전파한 가르침은 니치렌 종되었다. 상기와 같은 내용의 가르침이므로, 본존(=기도하는 대상)이 법화경 이외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 적극적으로 다른 종파의 신자에게도 일하고, 다른 본존을 버려 법화경으로 향하게( = 「파절」)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기존의 불교 종파와는 긴장 관계가 태어났다.
근세 [ 편집 ]
일본의 고대·중세 사상은 불교 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근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때 끌려간 강범이 주자학 을 일본에 퍼뜨려 유교 ( 송학 )가 활발해졌다. 하야시가 의 주자학 은 에도 막부 의 노나카 마츠다이라 정신의 시대에 공인되어 창평 자카학문소 에서 주자학 이외의 강의를 금지하는 관정 이학의 금지가 제정되었다. 또, 에도 중기 이후에 국학 , 난학 , 그 외 민중사상이 합리주의적인 유교에 자극되어 왔다.
주자학의 흥 다카시, 가이하라 마쓰켄 등으로부터의 주자학 비판, 야마가 소행의 성학, 이토 닌사이의 고의학, 오기 소우의 고문 사학, 가이토쿠도의 소후 비판, 혼이 선장의 국학, 미토학, 사쿠마 상산 야 요코이 오구스의 메이지 유신
유교 [ 편집 ]
에도시대 에는 유교가 활발해졌다. 중국의 주자학 ( 송명리학 )이 주류가 되어 그 비판에서 고학파나 국학 등 새로운 사상이 나타났다.
주자학은 가족적 봉건제 의 사회적 지위의 질서를 존중했다. 중세 이래 고산 문학 속 에서 배워 온 주자학은 후지와라 히나 와 제자 임라산 에 의해 부흥되어 에도 막부 장군 에 의해 편리해졌다. 공자를 모시는 유시마 성당이 세워졌다. 관정이학의 금지 로 주자학은 권위를 늘렸다. 게다가 주자학의 사상은 에도막부 말기에 존왕회 이를 주창하는 사회적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요출전 ] .
주자학과는 달리 실천적인 윤리를 존중하는 양명학은 에도막부에 의해 일관되게 감시·억압되었다는 것은 에도막부 아래의 사회 · 정치적 상태를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학파는 공자와 묘 자의 원전의 본래의 의도를 고려했다. 야마가 소행 은 유교적 윤리학에 근거한 무사도를 세우고, 무사를 가장 고귀한 계급이라고 강하게 믿었다. 이토 닌 사이는 유교의 '仁'에 주의를 기울여 '仁'을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그리고 순수한 사고로서의 진리로 이를 존중했다. 또한, 고대 중국의 고전에 대한 중요한 연구에 의해 오기 교수 는 원래 유교의 정수는 세계를 지배하고 민초를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학 [ 편집 ]
에도시대 중기에 불교 와 유교와 같은 외국의 사상에 대항하여 국학이라 불리는 일본의 고대 문학과 사상, 문화의 연구가 활발해졌다.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에 의해 에도의 지식인은 서양문명과 적극적인 교류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난학, 즉 네덜란드의 연구가 유일한 서양을 들여다보는 창 이었다 .
에도시대 중기에 국학은 배경으로 내셔널리즘 과 오사카 회덕당 등 실증적인 유학의 영향을 받아 퍼졌다. 국학은 ' 고사기 ', ' 일본 서기 ', ' 만엽집 '을 포함한 고대 일본의 사상·문화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 국학은 불교나 유교와 다른 일본의 본래의 도덕문화를 발굴하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가모 마부키 는 '만엽집'의 연구에 임해 남성답게 관용적인 양식을 '익황남자'라고 부르며 장서를 순수하고 간결하게 평가했다. 고사기의 연구를 통해 혼이 선장 은 일본 문학의 본질은 사물에 접했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인 '모노노아레레'에서 태어난다고 주장 했다 . 그는 중국의 (유교·불교) ' 카라코 로로' 대신 ' 야마토코 로로'를 존중했다. 그에 따르면 국학은 신도 라는 일본의 오래된 유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국학의 연구를 통해, 히라타 아츠시 는 국수적인 복고 신도 , 천황 에의 복종, 유교 및 불교의 폐지를 주창했다. 이것이 에도막부의 붕괴와 메이지 유신 의 구동력이 되었다.
난초 [ 편집 ]
'쇄국'에 의해 네덜란드 무역을 제외하고 서양과의 직접 교류는 없었지만, 향보 개혁 시절 중국에서 한역 된 서양 서적 수입을 장려함으로써 난초가 유행했다. 마에노 라자 와와 스기타 현백 은 타헬 아나트미아를 일본어 로 번역해 ' 해체 신서 '를 저술했다. 란학은 에도 막부 말기까지는 영국 , 프랑스 , 미국 등 다른 서양 국가들의 연구에까지 전개하고 있었다. ‘ 화혼양재 ’라는 사상은 사쿠마 상산 의 직접적인 표현 ‘동양도덕, 서양예술(기술의 뜻)’에 완성됐다. 하야시코다 이라는 '삼국통람도설'을 출판해 단속되었으며, 난학자 타카노 나가히데와 와타나베 히로야마는 쇄국 정책 을 엄격히 비판 하고 탄압되었다( 만사의 옥 ).
민중사상 [ 편집 ]
에도시대에는 사학원 이 실제적인 측면에서 일하는 무사, 상인, 학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봉건질서에 의한 지배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도 있었다.
이시다 매화 는 유교, 불교, 신도를 통합하여 대중을 위한 실천적인 철학을 창시했다. 그는 정직과 절약 효과로 상업에 정성을 내도록 격려했다. 안도 창익은 자연의 세계를 거기서 인간이 농업 에 종사해 부자연스러운 일 없이 자급자족적으로 사는 이상적인 세계라고 했다. 그는 봉건적인 계급 차별과 빈부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법치적인 사회를 비판했다. 니노미야 존덕은 , 사람은 덕 에 보상해야 하고, 그것이 그 개인의 덕과 함께 그 사람의 존재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현대 [ 편집 ]
메이지 유신에서 자유 민권 운동까지 [ 편집 ]
근세 일본사상이 유교 와 불교 속에서 발전한 것에 비해 급속히 서양사상 에 영향을 받은 메이지유신 뒤에 영국 의 계몽 과 프랑스 의 인권 이 유행했다. 이것은 요코이 오구스와 후쿠자와 유키치 의 근대주의로 대표되어 현출되었다 [3] . 닛신전쟁 및 러일전쟁 시기부터 일본 의 자본주의가 잘 발전했다. 기독교 와 사회주의 가 발전하여 다양한 사회운동과 연결되었다. 또 내셔널리즘 적인 사상·학문이 외국 학문에 반발하면서 형성되었다.
계몽과 인권 [ 편집 ]
메이지 유신에서는 영국 과 프랑스 의 시민사회 , 특히 영국의 공리주의 및 사회적 다윈주의 , 프랑스의 국민주권 과 장-잭 루소 가 소개되었다.
메이지 초기 사상가는 서양 시민사회 중에서도 영국적인 계몽을 주창했다. 그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권력과 봉건사회를 비판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정부와 영합하여 근본적이지 않은 위에서 근대화를 받아들였다. 1873년 에 모리 유례가 명록 사를 결성했다. 이 문화적 회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실학 중시, 인간의 특징을 실천적으로 잡는 것, 국정에 맞는 정부의 형성을 이상으로 하는 것 등의 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모리 유례는 문부경 으로서 국민교육 의 보급에 노력했다. 요코이 오구스는 막부 말기에 실학당을 결성해 문벌제도를 대체하는 능력주의 와 공화사상을 반영하여 유학·주자학의 유파에 영향을 받은 실학 을 제창했다.
후쿠자와 사키요시는 과학 기술과 알렉시 드 톡빌 , 영국 문명론 을 일본에 소개해 자연권은 당연히 인권이 천부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정신의 발전이며, 사람의 독립은 국가의 독립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4] . 「편의를 위해」정부는 존재하고, 그 출현은 문화에 맞는 것이라고 후쿠자와는 생각했다. 정부의 유일한 이상적인 형태 등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또한 일본은 열강 에 대항하여 대륙으로 대외 진출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5] . 니시슈 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이 가진 관심에 근거한다고 단언했다. 카토 히로유키 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으로 자연권을 포기하고 대신 적자 생존 을 주창했다.
명록사의 멤버는 결국 정부와 인민의 조화를 주창했지만, 민주사상가는 프랑스의 기본적 인권을 흡수하고, 서남전쟁 후에 메이지 과두제에 대해 언론에 의해 국민이 반항 · 혁명 을 일으키는 것을 지지 했다. 1874년 에 이타가키 퇴조가 민선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했다. 이것이 자유민권운동 으로서 일본에 퍼졌다. 우에키 모리모리 는 이타가키를 지지해 기본적인 초고를 작성했다. 루소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중강조민이 주권재민과 개인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는 입헌군주제 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일본 제국 헌법은 의회 에 의해 서서히 개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다이쇼 데모 클래시와 사회주의 [ 편집 ]
메이지 후기부터 대정기 까지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 의식의 배경으로 민주주의 운동이 퍼졌다. 이 흐름은 호헌과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정치운동을 이끌었다. 요시노 작조 는 정당 내각제 와 보통선거를 주장했다. 그는 누구에게 주권이 있는지는 깊이 추구하지 않았지만 국민의 행복을 노린 정치적 목적과 국민의 의사를 노린 정치적 결정을 주장했다. 미노베 타츠요시 는 주권을 천황 이 아니라 국가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대일본 제국 헌법 하에서 천황은 단지 최상위 기관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이론은 처음으로 널리 인정되었지만, 나중에는 군인 이나 국수주의자 에 의해 정치적으로 억압되게 된다.
1911년 에, 히라츠카 등대 가 아오마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여성 자신의 각성과 페미니스트 운동의 발전을 요구했다. 요사노 아키코 는 젠더 의 차이를 부정했지만, 어쩌면 아이를 키우는 모성 을 강조하고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한 공적인 원조를 인정했다. 1920년 에, 나라테는 이치카와보지나 오쿠 무메 오라 와 신부인협회를 결성했다. 그녀들의 활동이 여성이 정치적 연설에 참여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협회는 내분열에 의해 해산했다. 이후 이치카와가 여성참정권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새롭게 단체를 설립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 편집 ]
일본 에서 근대화 에 의한 사회 모순과 싸운 것은 기독교인 과 사회주의자 이다. 자본주의 와 자본주의에 의한 모순을 일본에 가져온 일청전쟁 과 러일전쟁 뒤에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해졌다. 많은 일본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 인간 중심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 점에서 그들은 기독교와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는 에도 막부 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메이지의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우치무라 감조 는 ' 두 개의 J '의 사상을 발전시켜 전통적인 무사도 와 기독교를 통합했다. 자신의 천직은 '일본(Japan)'과 ' 예수 (Jesus)'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는 무교회 운동을 제창했다. 그는 교육 칙어 에 도전해 러일전쟁에 반대했다 [6] . 신도토 이나조는 케커 교도 로 일본 문화와 기독교의 융합에 노력했다. 그는 일본 문화를 해외로 소개했다. 또 그는 국제연맹 사무 차장이 됐다. 니지마 쇼우 는 도미로 신학 을 배우고 교토 에 동지사영학교 (나중의 도시사대학 )를 설립해 기독교에 의한 인격도장에 종사했다.
닛신·일러전쟁기에는 일본이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화에 성공함과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은 1900년 에 제정된 치안경찰법 에 의해 억압되었고 마침내 1910년 대역 사건 으로 사회주의자들은 군대 및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근절되었다. 河上肇은 신문 에서 곤궁에 대해 기사를 쓰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개인의 변혁에 의해 빈곤을 해결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나중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사회적 강제에 의한 사회 변혁을 주장했다. 유키토쿠 아키미즈 는 원래 의회 를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유니오니스트가 되어 총파업에 의한 직접적인 행동을 호소했다. 그는 1910년 대역사건의 수모자로 처형되었다. 오스기에 이는 아나키즘 과 유니오니즘을 이용해 개인적 자유를 주장했다. 그는 정부에 의해 위협으로 간주되어 간토 대지진 이후의 혼란 속에서 비밀 경찰 에 암살당했다.
1925년, 전 군인으로 신문 기자의 유메노 쿠사쿠 는 규슈 일보 연재 「도쿄인의 타락 시대」중에서, 「시골의 사람들이 도쿄에 모이는 경향이 강해져, 세간이 세세해져 갔다.일본 의 교육은 충효인의를 설득하면서, 실은 물질 만능, 지식 만능을 가르치고 있어, 일본의 젊은이는 것과 같이 물질 만능주의자가 되고 있다. 했다”고 말했다. 또, 「무산계급의 사람들이 목표로 하고, 표준으로 하는 생활이, 도쿄인의 생활과 같은 의미의 문화 생활을 꿈꾸는 것이었다면, 그 등의 사람들의 각성과 운동은, 장래에 무가치의 것이 되어 끝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의심받을 수 있다”라고 도시인에 의한 사회주의에도 경고를 발하고 있는 것 외에 “농민 문화가 존중되는 경향이 생기면서 있다" "새로운 천하를 취하는 사람은 항상 시골인이다" "오늘처럼 도쿄를 동경하는 사람들, 도쿄의 문화를 진정한 문화라고 믿는 사람들이 무암하게 자라 갔다면 지금 "일본인 전체가 도쿄인처럼 되어 버리는 건가"라고 지방의 사람들에 의한 경종이 필요하지 않을까 했다.
전쟁까지 [ 편집 ]
계몽 시대 , 기독교 , 사회주의 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정치 문화 와 국가 전통의 강조는 서양화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났다. 이 흐름은 제국주의 와 군국주의 ( 파시즘 )를 정당화한다는 이데올로기 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주11] .
도쿠토미소봉 은 잡지를 출판했고, 그 가운데 일본의 서양화에 반대하여 자유민주주의 와 포퓰리즘 을 주장했지만, 정치적인 역할을 맡아야 할 부르주아 에게 그는 환멸했다. 육후남은 일본의 정치문화와 국가의 전통을 매우 뛰어난 것으로 간주하고 그는 국민감정의 회복과 강화를 노렸지만 결코 마음이 좁은 국수주의자가 아니라 군대를 비판하고 정부 의 의원 내각제 와 참정권 의 확대를 주창했다. 다케고시 요사부로는 남진 론을 주창하고 남양제도 에 대한 식민지주의를 주창했지만, 근위 아츠코 는 북진론을 주창했다. 북진론은 관동군 에서 대동아공영권 확립의 사상과 연결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신도를 보호하고 그것을 단지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국가 신도 로 취급했다. 정부는 신도를 천황 과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신도를 국가 운영의 도구로 이용했다. 국가 신도는 분명히 민간적인 신도의 교파와는 구별된다. 국가 신도를 조직하고 교육 칙어를 공포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국가 운영의 모델이었다. 메이지 국가주의 는 일청전쟁 · 일러전쟁을 통해 국가주권을 회복하고 제국주의·식민지주의를 추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군국주의적인 흐름이 극단적인 내셔널리즘 으로 발전했다. 북일휘는 재벌 , 원로 , 정당 의 배제와 천황과 국민이 직접적으로 연계된 정부의 설립을 주창했다 [주12] .
야나기타 쿠니오 는 일본의 민속학을 창설해, 「토노 이야기」등에서 벼 작민과 완전히 다른 생태계를 가지는 「산인」의 존재를 소개했다. 그 후 ' 상민 '이라 불리는 일반인에게 논점을 옮겨 최종적으로는 '바다의 길'을 통해 일본 민족의 뿌리를 '바다의 길'을 통해 남방으로 구하게 되었다. 다른 민속 학자들에게는 음란 사교 라고 불리는 민간 신앙 의 보존을 요구하는 국가 신도 에 반대한 남방 곰 , 민예품 의 아름다움을 논한 야나기 무네요시 , 일본 옛 종교와 국문학의 발생을 논한 오리구치 노부오 가 있다 . 이츠키 슌히코 와 오카와 슈아키 는 쿠란 에 기초한 이슬람주의를 연구했다.
전쟁 전 일본에서는 독일 철학 이 열심히 연구·소개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후기부터 다이쇼 시대 에 걸쳐 교토학파가 서양 사상 과 선종 과 같은 동양사상을 융합하려고 시도했다. 니시다 기타로는 선과 서양 사상의 융합에 의해 독자적인 사상을 세웠다. 그의 사상은 니시다 철학이라고 불린다. 순수한 경험 속에서 주관과 객관 사이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했다 [7] . 그의 존재론은 절대적 으로 유래한다. 와쓰지 테츠로 는 서양의 이기적인 개인주의 를 비판했다 [8] . 그의 윤리학 에서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인 존재라고 설득된다. 개인적·사회적 존재는 자신이 개인임과 사회의 성원임을 모두 자각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 풍토 '에서 자연환경과 지역적 생활양식의 관계를 연구했다.
타는 흔적에서 출발 [ 편집 ]
종전과 그 혼란 [ 편집 ]
연합 국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GHQ) 에 의해 전전 사상범은 해방되어 점령 통치를 비판하지 않는 한 언론의 자유가 부활했다(그러나 미키 기요시 등은 전후 옥중사했다 ) . 전몰한 학생의 수기를 편찬한 「키케 와다츠미노코」가 발간되었다. 오오카 승평 은 『俘虜記』 등 전기문학을 발표. '진공지대'의 노마히로 는 ' 붕해 감각'으로 전쟁 종결에 의한 의식의 변화를 그려, 무뢰파의 사카구치 안고는 '타락론'으로 패전한 일본은 떨어진 곳에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 있다고 했다. 미국 철학 연구자 인 츠루미 슌스케 등은 사상의 과학을 창립하고, 시민의 입장에서 민중의 사상을 연구하고, 또 공산당원 간부의 옥중 전향의 문제를 '공동 연구 전향'으로 논했다 . 한편, 야나기타 쿠니오는 '선조의 이야기'를 저술하고, 천황의 권위가 실추한 뒤, 예 제도가 그 대신하는 국민 통합의 지주가 된다고 생각해, 와쓰지 테츠로는 전중부터 국가주의의 입장에서 계속 쓰고 있다 ‘윤리학’과 ‘일본윤리사상사’를 완성시키고, 또 고대 이후 계승되어 온 천황제와 연속하는 것으로 상징천황제를 긍정 했다 .
전후 민주주의 [ 편집 ]
미나미하라 시게루 의 가르침을 받고, 전전에는 「일본 정치 사상사 연구」에서 주자학이나 오기 소우, 안도 마사유, 혼이 선장 등의 연구를 실시한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후 「세계」지상에서 「 초 국가주의 의 논리와 심리를 발표하고 주목을 받았다. 마루야마는 전후 민주주의 의 입역자로 활약했고, 이들 논고는 '대일본 제국의 실재보다 전후 민주주의의 허망에 내기'라는 말로 유명한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으로 정리되었다. 그 후도 '일본의 사상'과 문제작 '역사 의식의 '고층''('충성과 반역') 등을 발표했다. 칼 마르크스 와 맥스 베버 에 영향을 받은 서양 경제 사학자 오오츠카 히사 오와 법사회 학자 카와시마 타케시 , 문예 평론가 카토 슈이치 등 아사히 신문 과 요시노 겐 사부로 사장의 이와나미 서점 에 의거한 진보적 문화 사람 의 사상은 근대주의 라고 불린다. 시미즈 기타로는 논단의 전아였지만, 후년 보수에 전향해, 일본 핵무장론을 주창했다.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신좌익운동 [ 편집 ]
류신 의 연구로 알려진 중국 문학자 다케우치 호 는 일본이 유신 이후 채택해 온 근대주의를 비판하고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등으로 아시아주의를 설교 했다 . 정치사상사가인 하시가와 후미조 는 ' 일본 낭만파 비판서설'과 '쇼와 유신시론' 등에서 망각되어 온 일본 근대의 우익사상을 재고했다. 영문학자 후쿠다 쿄존 은 '중앙공론'에 '평화론 진행 방법에 대한 의문'을 발표하고 신현실주의 다카사카 마사토와 나가이 요노스케 등도 '정론' 등으로 절대 평화주의 를 비판 했다 . 경제학자 고이즈미 노부조 , 정치학자 이노키 정도 , 철학자 다나카 미치타로 , 수학자 오카결 은 보수논객으로 알려졌다. 이마니시 니시키 는 주체성 진화론, 우메사다 타다오 는 생태사관을 주창했다.
스탈린 비판 과 헝가리 동란 , 육전 협 , 60년 안보투쟁을 계기로 일본 공산당은 위신을 잃고, 타니가 와 타작 , 요시모토 타카아키 , 시바야 유타카 , 구로다 히로이치 등 많은 인물이 신좌익 운동에 참가했다. 주체성론으로 알려진 장-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프랑스의 반체제 지식인은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문화대혁명 의 내실이 알려지기까지는 모택동 도 크게 평가되고 있었다. 전후 최대의 사상가로 불린 시인·평론가의 요시모토 타카아키는 마루야마 등을 비판해, 「자립주의」를 주창했다. 「전향론」으로부터 출발한 요시모토는, 고사기나 야나기타 쿠니오의 토노 이야기를 참조한 「공동 환상론」이나, 미우라 츠토무의 언어론을 응용하는 「언어 에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등으로 독자적인 사상 을 전개 했다. 오에 켄사부로 는 '히로시마 노트' '오키나와 노트'를 저술하고, 타카하시 카즈미 는 '우울한 당파'를 저술했다. 히로마츠 협상 은 소외론 적인 마르크스 독해를 비판하고,물상화론을 주장, '마르크스주의의 지평'과 '존재와 의미'를 저술해, 선구적으로 포스트모던 철학에의 다리를 실시했다. 후년 '<근대의 초극>론'을 저술해 '동아' 연대에 의한 동북아 공동체를 제창해 물의를 자아냈다. 그들의 사상은 전학연 · 전공투 등 학생운동 에 받아들여졌다. 학비 상승, 상업주의와 마스프로 교육 에 의한 질의 저하가 문제화하고 있던 일본 대학 등에서는 '대학 해체' 실천이 일정한 지지를 모았다. 그러나 국립 도쿄대학 에서는 ' 자기 부정 ' 등 공허한 표어 아래 관념론화가 진행되어 야스다 강당 사건을 계기로 종식하고 그 후는 과격파에 의한 내게바와 테러가 잇 따랐다 . 그 가운데 김우로 사건 이나 화청투고발 등을 계기로 신좌익 중에서도 재일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오타룡 은 “변경을 향해 퇴각하라”고 주장하며 일본 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고 계급투쟁사관 에서 망각된 마이너리티의 생각으로 전환을 주장했다. 학술의 세계에서도 마이너리티에 주목한 연구가 시작되어, 야마구치 마사오 의 「중심과 주연」이론이나 시라카와 다이요시 와 야스마루 료오 의 민중사 연구 등이 나타났다. 또 우먼 리브 , 제2파 페미니즘 도 요즘 시작됐다.
보수 논단과 역사관의 상극 [ 편집 ]
동대전 공투의 심정에 이해를 보여 “제군이 한마디 천황이라고 하면 나는 곧 손을 잡는다”고 말한 소설가의 미시마 유키오는 사카이의 모임을 조직해, 1970년 자주 헌법 제정 을 위해 자위대 의 결기를 불러 자절하는 미시마 사건을 일으켰다. 가라키 준조 는 '현대사에 대한 시도'로 새로운 역사관을 보여주고 평론가 에토 아츠시는 GHQ - WGIP 를 주장했다. 진보파의 역사가 이에나가 사부로는 교과서 검정 제도를 검열로 간주해, 폐지를 요구해 교과서 재판 을 일으켰다. 한편, 교육학자의 후지오카 노부카츠 나 철학자의 니시오 간지 등은 전후의 역사 교육을 자학 사관이라고 비판 해, 자유주의 사관을 주창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회 를 시작했다. 그러나 내분이 잇따라 니시오를 비롯해 보수계 평론가의 서부 매와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도 탈퇴했다.
사상의 현재 [ 편집 ]
포스트 모던 붐 [ 편집 ]
벌써 프랑스 철학 연구자에 의해 프랑스 현대 사상 의 수입이 되고 있어 [주 13]『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의 무라타니 행인 이나 『반=일본어론』의 연꽃 시게히코 등이 논단에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아사다 아키라 는 ' 구조와 힘 '으로 일본에 프랑스 현대사상을 일반용으로 소개해 뉴 아카데미즘(뉴아카) 의 단서를 열었다. 아사다는 기업이나 대학에 편집하는 파라노(파라노이아)로부터 도주해, 스키조(통합 실조증)로서 행동하는 것을 설해(『도주론』), 포스트 모더니즘을 「노리하면서 시라케, 시라케츠노노」 하고있다. 그 후도 그나 쿠리모토 신이치로 등 뉴아카의 대표자들은 미우라 마사시가 편집장을 맡은 사상지 ' 현대사상 '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종교학 자인 나카자와 신이치 는 현지에서의 수행을 통해 체험적으로 티베트 불교 와 인류학을 논하고 있으며, 그의 동대교양학부 교수 취임은 교수진에 의해 거부되고, 찬성에 돌린 서부 매장은 사직 했다 . 동대 고마장 소동 ). 나카자와 등은 결과적으로는 아니지만, 앵무새 진리교 의 종교 활동을 평가해 버렸다.앵무새 사건 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주 14] .
80년대 이후 [ 편집 ]
무라타니 행인 은 「일본 문학의 기원」이나 「탐구Ⅰ・Ⅱ」, 「비평과 포스트 모던」, 「은유로서의 건축」등 다수의 저작이 있는 것 외에 슬라보이 지제크 등과의 친교도 있어, 「트랜스 크리 티크 '나 '세계사의 구조'는 세계에 소개되고 있다. 또 서부충과 함께 자본주의도 사회주의 도 넘은 네 번째 경제 체제인 어소시에이션 운동(NAM)을 전개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무라타니에서 발견된 히가시 코리 는 '존재론적, 우편적-잭 데리다에 대해서'에 의해 포스트모던의 지식의 갱신을 도모했다. 2010년에 겐론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의 문화면에서의 지식 방식의 변혁을 실천하고 있다. 치바 마사야 는 「너무 움직이지 말아라: 질 드루즈와 생성 변화의 철학」을 출판해, 아사다 아키라, 히가시히로키에 이어 일본 현대 사상의 대표적 논자가 되고 있다. 철학에서는 오모리 장조 에 배운 야가 케이이치 , 노야 시게키 , 나카지마 요시 미치 등, 와시다 키요이치 , 나가이 균 등이 활약하고 있다.
각주 [ 편집 ]
주석 [ 편집 ]
- ↑ 이 경우는 「근현대의 일본인에 의한 철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 ^ 와 쓰지 테츠로 는 이것을 일본 사상의 역사는 단선적이지 않고, 일부 산이 겹친 형태로 표현된다고 말하고 있다 [1] .
- ^ 이 야마자키 암재관은 헬만 오무스 가 '도쿠가와 이데올로기'라고 부른 것으로 이어진다.
- ↑ 산케이 요시 와 17조 헌법 참조.
- ↑ 「마음이나 의식을 향하거나 기도하는 대상이 되는 부처나 불전을 선택하는 단계에서 벌써 문제가 있다」라고 하는 의미.
- ↑ 「호화경에 귀의합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 말. "제목". 그때까지의 불교 용어로 말하면 「만트라」에 해당하는 것. 예를 들어 진언밀교에서는 기도하는 대상이 되는 부처가 매우 다수 있어, 그 때때로 의식을 향하는 부처마다 만트라가 설정되어 있어 그것을 반복창창함으로써 주창하는 자에게 결과적으로 다양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도한다. 반면에, 니치렌의 제목은 단 하나이며, 법화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말이며, (단지 밀교의 「만트라」가 반복적으로 주창하는 것으로 행자에게 다양한 일이 일어나기 위한 것처럼 )제목을 반복적으로 주창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것을 주창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에 여러가지 일이 일어나기 위한 것이다.
- ↑ 예를 들어 땅 아래에 '지옥'을 그리거나 훨씬 '깨끗한 정토'가 있다고 생각 그리게 하는 것
- ^ "당신이 자신의 안태를 바란다면, 우선 주위(세계)의 평안·평화를 기도해야 합니다"라는 것.
- ^ 예를 들어 니치렌의 『개목초』는 구약성경의 『욥기』와 함께 수난사상을 담은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 ^ 일련의 수난과 그 사상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문헌은 매우 다수 있지만, 일례를 들자면 예를 들면 『호화경과 니렌 연인』 다이토 출판사, 1985, 「불교의 사상」 제2권 우메하라 맹 집필기사 등등에서도 수난에 대한 일련의 생각에 관한 기술이 있다.
- ↑ 전면전쟁 과 범아시아주의 도 참조.
- ↑ 2・26사건을 참조.
- ↑ 프랑스 현대 사상의 번역·연구자로서 이마무라 닌지 ( 루이 알 추세일 , 보드 리얄), 츠카 하라 사 ( 장 보드 리얄 ), 우나미 아키라 ( 질 드루즈 , 보드 리얄), 아다치 카즈히로 ( 잭 데리다 ), 와타나베 일민 ( 미셸 푸코 ), 사와사키 코헤이 ( 로랑 발트 ) 등이 알려져 있었다.
- ↑ 오자와 마유키 나 미야다이 신지 는 사회학적으로 앵무새 사건의 분석을 실시하고 있다.
출처 [ 편집 ]
관련 문헌 [ 편집 ]
叢書[ 편집 ]
전후 사상 [ 편집 ]
관련 항목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Japanese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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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philosophy has historically been a fusion of both indigenous Shinto and continental religions, such as Buddhism, Taoism and Confucianism. Formerly heavily influenced by both Chinese philosophy and Indian philosophy, as with Mitogaku and Zen, much modern Japanese philosophy is now also influenced by Western philosophy.
Ancient and medieval thought[edit]
Before feudalism was firmly established in Japan, Buddhism occupied the mainstream of Japanese thought. The Buddhist culture introduced politically by Prince Shōtoku was completed as the "making a country safe" thought in the Nara period. When the Heian period (794–1185) began, in substitution for the "making a country safe thought", a form of esoteric Buddhism collectively known as mikkyō became widespread. However, in the late noble era when pessimism was popular due to the "belief that Buddhism will decline during the latter days of this world", the Pure Land movements spread out encouraging anticipation of a "future life" as a means to cope with desperation over "life in this world". During the Kamakura period (1185–1333) when government dominated by the samurai class began, a “new” Buddhism for the newly-risen class (samurai) appears.
Arrival of Buddhism and early influence in Japan[edit]
In ancient Japan, the arrival of Buddhism closely relates to the national construction and the national centralization of power. Prince Shōtoku and the Soga family fought and overcame the Mononobe family, who had handled the ancient Japanese religion, and elaborated a plan for national governance based on the unification of the legal codes system and Buddhism. While cooperating with the Soga family, Prince Shōtoku, who was the regent of the Empress Suiko, showed a deep understanding in "foreign" Buddhism,[1] and planned to stabilize national politics through the use of Buddhism. The thought that national peace and security came through the power of Buddhism is called the "making a country safe" thought. In the Nara period, in particular the times of Emperor Shōmu, the Kokubun-ji temples and Kokubun-ni-ji temples were erected throughout the whole country and Tōdai-ji Temple and the Daibutsu were erected in Nara. The Buddhist policy of the state reached its apex during the Nara period, as evidenced by Jianzhen of the Tang dynasty bringing an imperial ordination platform to Todai-ji Temple,
While Nara Buddhism followed only the "making a country safe" thought, Heian Buddhism brought not only national peace and security but also the personal worldly profit. Because practitioners of Heian Buddhism frequently performed severe ascetic practices, incantations and prayers in the mountains; this Buddhism came to be called mikkyō. Kūkai, a Buddhist monk, learned Chinese esoteric Buddhism while on a diplomatic mission to the Chinese court, and combined Japanese Buddhism with Chinese esoteric Buddhist practices to form Japanese Shingon Buddhism. Saichō, a Buddhist monk who also journeyed to China, learned the practices of the Chinese Tendai sect and argued that the teachings of the Lotus Sutra should be the core of Japanese Buddhism.
By the late Heian era, the earthly focus of Heian Buddhism led Buddhist monks to declare a "sinful age" wherein the possibility of relief in this world was denied and therefore a trend of looking for reincarnation to the Buddhists' paradise after death arose. Additionally, the new thought that "Buddhism will decline during the latter days of this world" led to the rise of the Pure Land movement. This movement, spearheaded by Kūya, a follower of Pure Land Buddhism, preached faith to the Amitābha and taught that all people could reach the Buddhist paradise, not just Buddhist monks.
Kamakura Buddhism[edit]
The Jōdo faith, which affected by the Jodo sect of the late Heian period, relies on salvation through the benevolence of Amitābha, and is going to be relieved by its power. Hōnen, who initiated the Jodo sect of Buddhism, abandoned other ascetic practices entirely. He preached his pupils to believe in Amitabha and to earnestly pray "namu-amida-butsu", and so they would go to the paradise. His pupil, Shinran who initiated Pure Land Buddhism, thoroughly carried out Honen's teaching and preached the absolute dependence. In addition, Shinran advocated that an object of the relief of the Amitabha was a criminal who was aware of a worldly and desirous criminal oneself. Ippen, who initiated the Jishu sect, began "the chanting religious dance".
As contrast with dependent Jōdō faith, Zen Buddhism attempts to be spiritually self-awakened by Zen meditation. Eisai learned the Rinzai sect in China. He gave pupils a difficult problem and he made them solve it, and so they would be enlightened by themselves. Rinzai Zen was supported widely by the upper samurai class in the Kamakura period. Dōgen learned the Sōtō sect in China.[2] Oppose to Eisai, he preached enlightenment by earnest sitting meditation (zazen). Soto Zen was supported by the local samurais.
Most schools of Nichiren Buddhism (Japanese: 法華系仏教 Hokke-kei Bukkyō) refer to the priest and teacher Nichiren as their founding father. In his teachings he underlined the, to his mind, supremacy of the Lotus Sutra. He advocated the attainment of Buddhahood during one's lifetime and regarded his interpretation of the Buddhist teachings as the correct form of practice for the Latter Day of the Law mappō. One of his major treatises is the "Rissho Ankoku Ron" (On Establishing the Correct teaching for the Peace of the Land). The chanting of the Mantra "Namu Myōhō Renge Kyō" is to this day the central practice to almost all Nichiren Buddhist schools and organisations.
Early modern thought[edit]
Whereas the ancient and medieval thought of Japan was tied closely to Buddhism, the early modern thought of Japan was mainly Confucianism or Neo-Confucianism, which was designated for official study by the Tokugawa shogunate. In addition, rational Confucianism stimulated Kokugaku, Rangaku and the non-official popular thought after the middle Edo period.
Confucianism[edit]
In the Edo period, Confucianism was the authorised study. Various schools of neo-Confucianism were popular.
The Zhu Xi school of neo-Confucianism respected family-like feudal order which upheld fixed social positions. Hayashi Razan assumed the Zhu Xi school of neo-Confucianism to be the theoretical basics of the Tokugawa shogunate. Through the principle of civilian government, Yushima Seidō dedicating to Confucius was established. By the Kansei Reforms, the Zhu Xi school of neo-Confucianism were still more strengthened and authorized by the Tokugawa shogunate. In addition, the thought of a school of the Zhu Xi school of neo-Confucianism gave big influence to the political movement advocating reverence for the Emperor and the expulsion of foreigners of the late Tokugawa era.
In contrast with the Zhu Xi school of neo-Confucianism, the Wang Yangming school of neo-Confucianism respecting practical ethics was consistently monitored and oppressed by the Tokugawa shogunate because of its criticisms against the socio-political conditions under the Tokugawa shogunate.
The third schools of neo-Confucianism took consideration into the real intentions of original texts by Confucius and Mencius. Yamaga Sokō established his philosophy on Confucian ethics, and assumed the samurai to be the highest class. Itō Jinsai paid attention to "ren" of Confucius and he respected "ren" as the love for another person and "truth" as pure consideration. In addition, deriving from his substantial studies of ancient Chinese classics, Ogyū Sorai insisted that the original Confucian spirit is to rule the world and to save a citizen.
Kokugaku and Rangaku[edit]
In the middle of the Edo period, Kokugaku, the study of ancient Japanese thought and culture, became popular against foreign ideas such as Buddhism or Confucianism. By the Sakoku policy of the Tokugawa shogunate, Edo intellectuals could not have any positive contact with Western civilization, and so Rangaku, Dutch learning, was the only window to the West.
In the middle days of the Edo period, Kokugaku became popular while being influenced by positivist Confucianism with nationalism as a background. Kokugaku positively studied ancient Japanese thought and culture, including "Kojiki", "Nihon Shoki" and "Man'yōshū", and they aimed at excavating original moral culture of Japan which was different from Confucianism and Buddhism. Kamo no Mabuchi wrestled with the study of "Manyoshu" and called "masurao-buri" for masculine and tolerant style, and he evaluated the collection as pure and simple. Through his study of the Kojiki, Motoori Norinaga argued that the essence of the Japanese literature came from "mono no aware" which were natural feelings to occur when you contacted an object. He respected Japanese "Yamato spirit" instead of Chinese (Confucianism / Buddhism) "Kara spirit". According to him, Kokugaku should pursue the Japanese old way of "Shinto". Through his study of Kokugaku, Hirata Atsutane advocated nationalistic State Shinto, the obedience to the Emperor and abolition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It was a driving force to the end of the Tokugawa shogunate and the Meiji Restoration.
In the Sakoku period of the Edo period, there was no direct contact with the West, but Rangaku became popular by encouraging importation of Western books translated in Chinese from China during the Kyōhō Reforms. Maeno Ryotaku and Sugita Genpaku translated the Dutch "Tafel Anatomie" into Japanese. Dutch learning unfolded to other Western studies such as British, French and American studies by the late Tokugawa era. The manner of "Japanese spirit, Western civilisation" was completed by Sakuma Shōzan’s straightforward expression, "Eastern ethics and Western technology". Because Takano Chōei and Watanabe Kazan criticized Sakoku strictly, they were oppressed by the Tokugawa shogunate.
Popular thought[edit]
In the Edo period, private schools were opened by samurais, merchants and scholars who played an active part. Their thoughts were criticisms for the dominant feudal order.
Ishida Baigan synthesized Confucianism, Buddhism and Shinto, and established practical philosophy for the masses. He recommended working hard at commerce as the effect of honesty and thrift. Ando Shoeki called nature's world the ideal society where all human beings engaged in farming and they lived self-sufficiently without artificiality. He criticized a lawful society where there was feudal class discrimination and the difference between the rich and poor. Ninomiya Sontoku insisted that people must repay the virtues, which supported their existence, with their own virtue.
Late Modern thought[edit]
While the early modern Japanese thought developed in Confucianism and Buddhism, English Enlightenment and French human rights were prevalent after the Meiji Restoration had become rapidly affected by Western thought. From the time of Sino- and Russo-Japanese Wars, Japanese capitalism highly developed. Christianity and socialism also developed and became tied to various social movements. In addition, nationalistic thought and study were formed while being opposed to foreign study.
The Enlightenment and people's rights[edit]
In the Meiji Restoration, English and French civil society was introduced, in particular, utilitarianism and social Darwinism from England, and popular sovereignty of Jean-Jacques Rousseau from France.
The thinkers of the early Meiji period advocated the British Enlightenment values derived from Western civil society. They attempted to criticise Japanese traditional authority and feudalism. However they were finally in harmony with the government and accepted the modernization from the above without the radicalness. In 1873, Mori Arinori formed Meirokusha. The people who gathered in this cultural association had much in common with points such as regarding practical learning as important, catching human characteristics practically and assuming the form of government that accepted the conditions of a country an ideal. Mori Arinori promoted national education as Minister of Education. Nishi Amane affirmed a human behaviour based on interest. Katō Hiroyuki threw away natural rights under influence of social Darwinism, and instead advocated the survival of the fittest.
Fukuzawa Yukichi, who introduced British utilitarianism to Japan and advocated natural rights, assumed that human rights were given by Heaven. He considered the development of the civilization to be the development of the human spirit, and it was assumed that one's independence led to independence of one country.[3] Fukuzawa thought that government is for the "sake of convenience", and its appearance should be suitable to the culture. He said that there is no single ideal form of government. In addition, he insisted that Japan should have gone into the continent externally against the Great Powers.[4]
While members of Meirokusha finally advocated harmonization of the government and people, democratic thinkers absorbed radical people's rights from France and they supported national resistance and revolution verbally against the Meiji oligarchy after the Satsuma Rebellion. In 1874, Itagaki Taisuke introduced the establishment of the elected legislature. It spread nationwide as the Freedom and People's Rights Movement. Ueki Emori helped Itagaki and he drew up a radical draft. Strongly influenced by Rousseau, Nakae Chōmin argued for people's sovereignty and individual freedom. However, concerning the Japanese situation, he pointed out the importance of parliamentary monarchy. According to him, the Imperial Constitution should be gradually revised by the Diet.
From the late period of Meiji to the Taishō era, a democratic trend spread as a background of bourgeois political consciousness. Its current led to political movements for safeguarding the Constitution and for the popular election. Yoshino Sakuzō argued for party cabinet politics and popular election. He did not deeply pursue who was the sovereign but he insisted the political goal aim for people's happiness and political decisions aim for people's intentions. Minobe Tatsukichi interpreted a sovereign as not an emperor but the state. According to him, an emperor only excises his power as the highest organ under the Meiji Constitution. Although his theory was widely acknowledged at first, he was politically suppressed by the military and the rightists afterwards.
In 1911, Hiratsuka Raichō formed Seitosha. She asked for awakening of women's own right and development of feminist movement. While Yosano Akiko denied gender differences, Raicho emphasised motherhood raising a child and she acknowledged the official aids for women to demonstrate their feminine ability. In 1920, Raicho formed a new association for women with Ichikawa Fusae and Oku Mumeo. Soon after their activities were successful in getting women's participating at political addresses, the association fell apart due an internal schism. Later, Ichikawa formed a new one and continued a movement for female suffrage.
Christianity and socialism[edit]
It was Christians and socialists who struggled with social contradictions derived from Japanese modernity. Christian social movements were active after the Sino- and Russo-Japanese Wars, which brought capitalism and its contradiction to Japanese society. Many Japanese socialists were influenced by Christian humanism, and in that point they were deeply associated with Christianity.
Christianity, banned by the Tokugawa shogunate, influenced many Meiji intellectuals. Uchimura Kanzō developed "two Js" to unite Bushido and Christian spirit. He believed that his calling was to serve "Japan" and "Jesus". He argued for the nonchurch movement. He challenged the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and spoke against the Russo-Japanese War.[5] Nitobe Inazō was a Quaker and attempted to unite Japanese culture and Christianity. He introduced Japanese culture abroad and he became secretary-general of the League of Nations. Joseph Hardy Neesima studied theology abroad in the United States. He established Doshisha University at Kyoto and he was engaged in Christian character building.
About the time of Sino- and Russo-Japanese wars, Japan succeeded in capitalization through the industrial revolution as soon as socialism spread against capitalism. However, the social movements were suppressed by the security police law of 1900, and finally in the High Treason Incident of 1910 socialists were pressed by the military and the fascist government. Kawakami Hajime wrote articles about poverty in a newspaper. He emphasized personal remodeling to solve poverty at first, however, later he became a Marxist and he argued for social remodeling by social compulsion. Kōtoku Shūsui originally attempted to realize socialism through the Diet, however he became a unionist and he argued for a direct action by a general strike. He was executed as the mastermind of the high treason incident of 1910. Osugi Sakae argued for individual freedom using the principles of anarchism and unionism. He was seen as a threat by the government and was assassinated by military police in the disorder following the 1923 Great Kantō earthquake.
The development of Japanism[edit]
The Age of Enlightenment, Christianity and socialism have influenced Japanese thought since the Meiji Restoration. The emphasis on Japanese political culture and national tradition rose as a reaction against westernization. This trend has had an ideological side of legitimizing imperialism and militarism/fascism.[6]
Tokutomi Sohō published a magazine in which he argued for liberal democracy and populism against Japanese westernization. However, he was disillusioned with the bourgeois who should play a political part in ... Kuga Katsunan regarded Japanese political culture and national tradition very highly. He aimed for restoration and enhancement of national emotion; however, he was not a narrow-minded nationalist. He criticized the military and argued for a parliamentary system of government and expansion of suffrage.
After the Meiji Restoration, Japanese government protected Shinto and treated it not as a special religion but as State Shinto. The government closely related Shinto with the holy emperor, and they used Shinto as a tool for their state governance. State Shinto was clearly distinguished from private sects of the Shinto religion. It was a model of ideological state governance to form State Shinto and to promulgate the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Meiji statism attempted to restore national sovereignty and pursued imperialism and colonialism through the Sino- and Russo-Japanese Wars. However, its militaristic trend developed to ultra-nationalism. Kita Ikki advocated the exclusion of the zaibatsu, senior statesmen and political parties and the establishment of government for direct connection with the emperor and the people.[7]
Yanagita Kunio was at the forefront of study of Japanese folklore. He named members of the general public who are not political leaders and intellectuals as “jomin”. Other folklorists are Minakata Kumagusu, Yanagi Muneyoshi and Orikuchi Shinobu.
In pre-war Japan, German philosophy was eagerly studied and introduced. However, from the late Meiji to Taishō period, Kyoto School attempted to harmonize Western thought with Eastern thought such as Zen Buddhism. Nishida Kitaro established an original thought by fusion of Zen and Western thought. His thought is called Nishida philosophy. He insisted on pure experience in which there is no opposition between subjectivity and objectivity.[8] His ontology derived from absolute nothingness. Watsuji Tetsuro criticized Western selfish individualism.[9] His ethics says human beings are not in an isolated existence but related existence. He insisted that individual and social beings should be aware of their own individuality and social membership. He is also well known as his Climate and Culture in which he studi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natural environment and local lifestyle.
Contemporary Japanese philosophy[edit]
After World War II, many academic philosophers have published books on Continental philosophy and American philosophy. Among those, Ōmori Shōzō, Wataru Hiromatsu, Yasuo Yuasa and Takaaki Yoshimoto created original works under the influence of Marxism, phenomenology and analytic philosophy. Ōmori Shōzō created a unique monist epistemology based on his concepts of "representation monism", "double depiction", and "language animism". Wataru Hiromatsu developed his theory of "multi-subjective ontological structure of the world". Yasuo Yuasa advanced a new theory of the body influenced by Merleau-Ponty and the body image found in Chinese medicine. Takaaki Yoshimoto is famous for his "shared illusion theory" and various philosophical essays on Japanese culture. Today, such scholars as Kojin Karatani (literary theory), Hitoshi Nagai (solipsism), Shigeki Noya (analytic philosophy), Masahiro Morioka (philosophy of life), Motoyoshi Irifuji (analytic philosophy) are considered to be characteristic philosophers in the Japanese academy.[10]
See also[edit]
- Budō
- Giri (Japanese)
- Grace – "itsukushimi"
- Haibutsu kishaku
- Hakkō ichiu
- Hermit – e.g., Yoshida Kenkō, Kamono Chōmei
- Kami
- Kokutai
- Ma (negative space)
- Maruyama Masao – "Bamboo whisk" culture and "octopus pot" culture
- Nihonjinron
- Shame society
- Wabi-sabi
- Yamato-damashii
- Taoism in Japan
- William Vorilong, one of the first Europeans to get some knowledge about Japanese philosophy
Notes[edit]
- ^ See Sangyo Gisho and Seventeen-article constitution.
- ^ For a philosophical study of Dōgen's concept of language cf. Ralf Müller: Dōgens Sprachdenken: Historische und symboltheoretische Perspektiven [Dōgen’s language thinking: Systematic perspectives from history and the theory of symbols], Welten der Philosophie, vol. 13. Freiburg/München: Verlag Karl Alber, 2013; reviewed by Steffen Döll in Philosophy East & West Volume 65, Number 2 April 2015 636–639.
- ^ Encouragement of learning (1872–76) and An outline of a theory of civilization (1875)
- ^ Datsu-A Ron
- ^ How I became a Christian (1895)
- ^ See also Total war and Pan-Asianism.
- ^ See February 26 Incident.
- ^ An inquiry into the good
- ^ The significance of ethics as the study as man
- ^ See for example, Collected works of Shozo Omori Archived 2015-12-22 at the Wayback Machine, Shozo Omori bibliography,Collected works of Wataru Hiromatsu Archived 2015-05-02 at the Wayback Machine, Collected works of Yasuo Yuasa, Collected works of Takaaki Yoshimoto, Collected works of Kojin Karatani Archived 2015-12-22 at the Wayback Machine
Bibliography[edit]
- Texts
- James W. Heisig, Thomas P. Kasulis, John C. Maraldo (eds.), Japanese Philosophy: A Sourcebook, Honolulu: University of Hawaiʻi Press, 2011.
- David A. Dilworth & Valdo H. Viglielmo, with Agustin Jacinto Zavala (eds.), Sourcebook for Modern Japanese Philosophy: Selected Documents, Westport: Greenwood Press, 1998.
- R. Tsunoda, W.T.de Bary, D. Keene (eds.),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4, 2 vols.
- Studies
- H. Gene Blocker, Christopher L. Starling, Japanese Philosophy,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1.
- Hajime Nakamura, History of Japanese Thought: 592–1868. Japanese Philosophy before Western Culture Entered Japan, London – New York: Kegan Paul, 1969.
- Gino K. Piovesana, Contemporary Japanese Philosophical Thought, New York: St John's University Press, 1969.
External links[edit]
- "Japanese Philosophy" entry by Thomas Kasulis in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Japanese philosophy: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Online
- Japanese Aesthetics by Graham Parkes in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