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16

이은선 칼 폴라니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이은선

<칼 폴라니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한국信연구소 오늘, 26.02.15 월-
설 연휴가 시작된 가운데 지난 토요일 밤 칼 폴라니 읽기 줌모임을 통해서 알게 된 이야기가 있다.
1800년대 초 샤토브리앙 등, 유럽 계몽적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나누어졌던 이야기, 만약 어떤 사람에게 요술 버튼이 있어서 한 번 누를 때마다 자기가 원하는것을 얻을 수 있고, 그러나 그 조건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 4억 인구 중 한 사람씩 죽어가는 조건이었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자기 눈 앞에서는 파리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는 고고한 인문학자도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는 대상과 관련된 이상 그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것이라고 크게 기대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바로 가까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심지어는 타인의 목숨이 달린 건이라 할지라도 눈앞의 자기이익을 위해 그 포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참으로 적나라한 이야기이다. 3백여년 전의 유럽 인류의식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오늘의 우리는 어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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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주식을 사고, 우리에게 크게이익을 남겨줄 것을 기대하며 방산산업 주식을 사기 위해서 버튼을 누르는 우리 손가락…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는 저 멀리 중국 만주인들이 거의 그 생명성이 고려되지 않던 익명성의 숫자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래서 오늘 21세기 같은 동북아 사람으로서 중국인이 그 대상이었던 것이 매우 경악스럽고, 유럽 서구의 자기중심주의에 대해 치를 떨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오늘 우리 대부분에게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등의 분쟁 지역 사람들과, 아니 우리 안에서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 그에 더해서 매일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비인간 동물들의 현실과 각종 자연물들의 현실은 …
먼 곳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산업 현장에서 오늘 내가 편리하게 쓰고 누리고 있는 물품들을 생산하기 위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형제 자매로서의 존재론적 사회적 책임을 말하기 위해 이런 우화를 가져온 폴라니는,
“내적 조망(inner overview)”을 강조한다.
눈에 잘 보이지 않더라도, 멀리 있더라도 그 생명과 삶을 위해서 나의 윤리적 책임의식과 행위가 가능하도록하는 내적 조망을 키워야한다는 것…
그러나 다시 또 한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그 내적 조망은 어디서,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유교적 격물(格物)의 방식이 어느 정도까지 이에 이르도록 할 수 있을까? 우주 전체, 생명계 전체, 우리 사회 공동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각각의 고통과 생멸이 나의 일이기도 하다는 의식과 내적 조망이 과연 앞으로의 인간의식에서도 보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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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연휴를 맞아서 손주들이 몰려왔다. 가까운 곳에 스키장이 있어서 부모들이 모두 손잡고 스키장으로 달려간다. 설은 바로 먼곳의 조상,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동시에 가까이의 가족과 친척, 친지들, 이 양쪽을 모두 챙기는 귀한 인간적 리추얼이다. 그런데 요즘 명절은 너무 눈에 보이는 가까운 존재에 대해서 집중되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위의 폴라니가 든 우화가 생각나기도 하는 시절이다
얼마전 한국기독교연구소의 김준우 소장님이 셸리 램보의 책 <성령과 트라우마>를 다시 재간했다는 소식을 올렸다. 세월호 5주기를 기해서 서평을 했었고, 나는 거기에 서구 페미니스트 성령론이 잘 펼쳐져 있다고 보면서 그러나 그 한계를 동아시아 信學의 관점에서 밝히고자 했다. 폴라니가 앞서 말한 내적 조망이란 마침내는 성령의 도움으로나 가능해지는 것일까?
위에서 맨처음 제기한 물음과 같이 연결된다고 생각하여 댓글에 당시의 글을 가져왔다. 기독교 사순절이 시작되었고, 우리의 설명절에 神과 靈이 함께 하는 내적 조망의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어제 쓰기 시작했지만 하루 지나서야 마무리해서 설 단상과 인사로 올립니다. 복되고 기쁜 명절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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