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16

[전자책] 성령과 트라우마 | 셸리 램보 | 알라딘

[전자책] 성령과 트라우마 | 셸리 램보 | 알라딘


[eBook] 성령과 트라우마
셸리 램보 (지은이),박시형 (옮긴이)한국기독교연구소2020-01-31
원제 : Spirit and Trauma: A Theology of Remaining




종이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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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책소개
트라우마에 대한 최근 연구들에 근거해서 십자가와 부활, 구원을 재해석하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의 관점에서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새롭게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성토요일의 심연에 초점을 맞춘다. 발타자르의 설교들, 스페이어의 지옥에 대한 환상들,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와 애제자에 관한 본문들, 캐서린 켈러의 성령 해석 등에 근거해서,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제시한다.

숨, 위로자,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성령의 활동을 설명하고, 성령의 지속적인 목격과 증언을 사랑과 동일시한다. 죽음과 삶 사이의 증언이 말하는 진실은 사랑이 남았고, 우리가 그 사랑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끔찍한 고통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저자는 '끈질기게 버티는 힘으로 남아 계신 성령의 사랑'을 강조한다.


목차


옮긴이의 말 __ 7
서문 (캐서린 켈러) __ 13
감사의 말씀 __ 19

서론 __ 23
트라우마 27 / 신학 29 / 방법 37 / 개요 43 / 결론 46

1장. 트라우마를 증언함 __ 49
트라우마라는 렌즈 54 / 증언 62 / 트라우마를 이론화하기 70
트라우마의 증언과 신학 78 / 증언의 신학적 모델들 93

2장. 성(聖)토요일을 증언함 __ 107
성토요일의 발견 114 / 성토요일을 기록함 124
성토요일을 신학화하기 142 / 십자가 형태의 증언 153
중간의 성령을 향하여 160

3장. 요한복음의 증언 __ 177
막달라 마리아 180 / 애제자 197 / 고별 214
남아 있기 218 / 넘겨줌 225 / 중간의 영을 향하여 230

4장. 중간의 성령 __ 237
생명의 영 242 / 심연의 성령 244 / 성령은 숨이다 248
영은 시간 속에서 다르게 움직인다 265
성령은 사랑이다 274 / 사랑이 남았다 281 / 결론 288

5장. 사랑 안에 남아 있기 __ 295
구원하는 자기 299 / 2008년 1월, 뉴올리언스 305
러브스토리 313 / 중간으로부터의 구원 319
저류를 추적하기 329 / 삶을 느끼기 331
신학의 증언 335 / 사랑 안에 남아 있기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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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8~29 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만남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익숙한 삶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린 끔찍한 사건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부터 단절이 발생한다. 한 사건은 모든 것이 철저히 끝장난 것으로 생각되어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생존’이란 용어는 트라우마 사건 이후 삶이 중지된 상태를 말한다. 트라우마 사건은 그 이후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결정적 사건이 된다. 삶은 완전히 다르게 정의되며, 불확실하고 상처받기 쉬운 트라우마 이후의 삶은 늘 죽음이 함께 있음을 뜻한다. 접기
P. 32 나는 신학이 말하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고, 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고통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트라우마 속에서도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현존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구원 말이다. 삶과 죽음을 양극단에 놓는(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고 보는?옮긴이) 해석으로는 이런 구원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트라우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삶 속에 남아 있는 죽음, 혹은 삶 속에 만연한 죽음을 설명해야만 한다. 접기
P. 33 트라우마 경험은 죽음과 삶의 관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구원 이야기들에 도전한다. 죽음은 완결된 어떤 것이 아니고, 삶도 새로운 시작이나 출발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서로 반대되는 양극단에 놓은 채 구원 내러티브를 해석하는 한, 트라우마 경험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일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 내러티브는 대개 생명(부활)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이야기로 단순하게 해석된다. 이런 관점이 어떤 약속이나 희망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생명이 죽음을 극복했다는 단순한 해석은 위험하다. 이런 해석은 새 것이 옛 것을 대신하고, 선이 악을 무찌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마무리되고 새 삶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관점은 곤경에 처한 현실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갈 공산이 크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앨런 루이스(Alan Lewis), 코넬 웨스트(Cornel West)와 같은 신학적인 관점을 아우르는 종교학자들은 죽음(십자가)과 삶(부활)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이처럼 성급하게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그리스도교 승리주의(triumphalism)와 대체주의(supercessionism)가 될 수 있다. 만약 구원의 생명이 죽음을 이기거나 어떻게든 죽음이 종결되는 행복한 승리의 끝맺음으로 그려진다면,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경험은 이야기되지 않은 채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접기
P. 41 트라우마가 주는 통찰은 치유와 구원을 신학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해석학적 렌즈를 만들어 낸다. 그리스도교 내러티브 속 죽음과 삶의 관계는 이 렌즈를 통해 보다 다양한 빛을 발하게 된다. 트라우마는 신학이 반드시 탐구해야 할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신학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한 열쇠다.
P. 43 2장에서는 죽음과 삶 사이에 위치한, 신학적으로 중간의 날이라 부를 수 있는 성(聖)토요일을 살펴보려 한다. 나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 스위스 출신 가톨릭 신학자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역자주))와 아드리엔느 폰 스페이어(Adrienne von Speyr, 1902-1967, 스위스 출신의 가톨릭 의사이며 신비주의 신학자로서 60권 이상의 책을 썼다.?역자주)의 신학을 통해 이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이들의 신학은 성토요일의 독특한 구원 메시지를 증언하기 위한 중간 영역을 만들어 낸다. 이 렌즈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3장에서는 십자가와 부활 중간에서의 제자들의 활동과 이에 대한 요한복음의 해석을 살펴보려 한다. 이 렌즈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두 경우 모두, 죽음을 넘어서긴 했지만 살아 있다고 단순하게 말하기에는 찜찜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활동이 쉽지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이런 해석은 삶 속에 지속되는 죽음의 흔적들을 목격하고 증언해야만 하는 복잡한 상황을 드러낸다. 트라우마라는 렌즈를 통해 앞서 언급한 텍스트들을 해석해 낼 때, 그 텍스트들은 살아남은 삶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생존의 텍스트가 된다. 성서와 신학 텍스트들에 대한 익숙한 해석에서 벗어날 때 텍스트가 증언하는 측면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특정한 해석들을 유지하기 위해 묵살되고 묻혀진 측면들을 추적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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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셸리 램보 (Shelly Rambo)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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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서, 트라우마와 폭력에 대한 종교적 응답에 초점을 맞추어 그리스도교 전통을 탐구하며, 최근에 Post-Traumatic Public Theology (Stephanie Arel과 공저, 2016)와 Resurrecting Wounds: Living in the Afterlife of Trauma (2017)를 발표했다. 박시형 목사는 서강대학교 수학과와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Boston College에서 영성 전공으로 신학석사를 마쳤다. 박시형 목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는 공동체... 더보기

최근작 : <성령과 트라우마> … 총 10종 (모두보기)

박시형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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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트라우마에 대한 최근 연구들에 근거해서 십자가와 부활, 구원을 재해석하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의 관점에서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새롭게 제시한 책이다. 전통신학의 십자가 해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고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희생(죽음) 중심의 구원론을 만들었으며, 부활과 구원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지옥 정복” 교리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죽음을 이긴 부활의 승리”로 해석하지만, 이런 해석은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부응하며 미래의 희망과 성공을 약속하지만, 승리에 대한 보장이 없는 트라우마의 끈질긴 고통을 외면하며, 폭력을 정당화할 위험성마저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곧장 부활로 직선적으로 이어지는 “허울 좋은 구원”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가장 큰 적”이라고 보는 저자는 “많은 이들에게 삶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며, 그들의 삶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성토요일의 심연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발타자르의 설교들, 스페이어의 지옥에 대한 환상들,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와 애제자에 관한 본문들, 캐서린 켈러의 성령 해석 등에 근거해서, “성토요일의 성령론”을 제시한다. “성토요일의 성령”은 죽음과 삶 사이에 아주 미약한 모습으로 현존하며 예수의 죽음과 제자들의 활동을 목격하고 증언한다. 저자는 숨, 위로자,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성령의 활동을 설명하고, 성령의 지속적인 목격과 증언을 사랑과 동일시한다. 죽음과 삶 사이의 증언이 말하는 진실은 사랑이 남았고, 우리가 그 사랑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끔찍한 고통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저자는 “끈질기게 버티는 힘으로 남아 계신 성령의 사랑”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는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5.18 등 수많은 민간인 학살사건들로 인한 트라우마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 쌍용차 사태, 용산 참사, 천안함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 전 국민적인 트라우마, 그리고 OECD 최악의 산재발생률과 자살률이 보여주듯 트라우마가 만연한 사회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풍과 가뭄, 식량난과 식수난, 미세먼지, 지진 등 자연재해 역시 더욱 증가하고 있다. 때로는 평생 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트라우마에 대해 정신의학이나 사회적 관점에서 연구한 책들은 많이 출판되었지만, 트라우마 경험을 근거로 기본 교리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구원론을 재검토한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질문들
“아우슈비츠 이후” 시대에도 여전히 하느님을 “역사의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지옥 정복”이 상징하는 “우주의 지배자 하느님”은 아직도 살아 계신가?
“세월호 이후”에도 여전히 “십자가의 죽음(희생)을 통한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죽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잔인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왜 성금요일의 어둠에서 벗어나 서둘러 “부활의 승리”를 찬양하려 하는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구원론은 왜, 또 어떻게 온갖 트라우마 경험들을 외면해왔는가?
끔찍한 트라우마 경험들은 전통적인 신론과 구원론을 어떻게 재구성하도록 만드는가?
왜 트라우마는 신학담론의 한 문제가 아니라 구원 신학의 재구성을 위한 “열쇠”인가?
예수의 갑작스럽고 참혹한 죽음 앞에서 제자들은 어떤 트라우마를 겪어야만 했는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서 시력과 의식이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 이유는?
자기 인생이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승리”란 무엇인가?
저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 대신에 “성토요일의 성령”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저자가 몰트만처럼 성령을 “생명”과만 연결시키지 않고 죽음과도 연결시킨 이유는?
“성토요일의 성령론”이 강조하는 “남겨진 사랑”과 증언, 공동체의 의미는 무엇인가? 접기






저자의 말대로 ˝해피엔딩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트라우마는 외면당하기 쉽지만, 트라우마를 외면하는 부활 승리의 구원론은 억압자의 논리가 될 뿐이지, 삶 속에서 끈질긴 죽음을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더욱 절망시키는 구원론이 된다.
김준우 2019-04-03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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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담아낼 수 없지만 증언해야만 하는 진실


허울 좋게 반짝거리는 구원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가장 큰 적일 것이다.
이 구원은 약속만으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약속한다.
많은 이들에게 삶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며, 그들의 삶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125쪽)
메시아라 믿었던 스승이자 친구의 비참한 죽음, 예수를 저버린 자신들에 대한 죄의식, 오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재림,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고향, 자신들을 적대하는 동포들, 의지했던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 탄압속에 죽어가는 신앙의 친구들.....초대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상처와 깊은 트라우마는 단순히 신앙으로 극복했다는 한마디로 정의 될 수 있을까
성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불과 하루 사이로 이야기 하지만 제자들의 삶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방황하며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으로 힘겨워 하지 않았을까
트라우마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 상처는 몸 안에 영구적으로 각인된 흔적이다.
그 영향력은 영속적이고 언제든지 현재로 침입할 수 있다
죽음과 부활사이 침묵의 날, 성토요일이야말로 상처입은 자들을 경험하고 만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날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내려왔고, 그 사랑이 가는 길에는 고통과 승리, 죽음과 삶이 온통 뒤섞여 있다.
성토요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이다.
성토요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곳 즉 죽음과 부활사이, 지옥 깊숙한 곳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125쪽)
부활 신앙으로 대표되는 '승리주의' 신학이 우리에게 제시했던 고통에 대한 빈약한 대답은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는 커녕 비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남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증언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십자가에서 곧바로 부활로 직행하는 기독교 신학의 구원론은 트라우마 사건과 치유 사이의 중간 단계에서 생존자들이 겪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지지해줄 수 없는 구원론이다.
트라우마 생존자가 경험하는 삶은 새로운 것도, 더 나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이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한 삶으로 선포되는 한, 트라우마의 고통이 존재하는 현실은 묻혀 버린다.
우리는 이런 방식의 부활 선포가 죽음의 여파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침묵하고 그 경험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만남이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익숙한 삶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린 끔찍한 사건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부터 단절이 발생하고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죽음과 부활 사이, 그 중간에서 생존을 위해 상처를 증언하고 되짚고 해석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려고 한다.
'중간(the middle)이라고 비유하여 부르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 이 중간은 삶도 죽음도 아닌, 생존이라는 당혹스러운 영역이다.
그동안 신학은 죽음과 삶의 사건에 집중한 나머지 이 중간이라는 영역을 다루지 못했다.
중간은 위태로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가려지거나 무시되고 시간과 몸과 언어가 중간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에, 중간을 증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이 중간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한다.
고통경험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구원의 성급함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에 자리한 죽음과 부활이라는 내러티브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나는 신학이 말하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고, 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고통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트라우마 속에서도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현존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구원 말이다.
삶과 죽음을 양극단에 놓는(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고 보는 - 옮긴이) 해석으로는 이런 구원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트라우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삶 속에 남아 있는 죽음, 혹은 삶 속에 만연한 죽음을 설명해야만 한다.(35쪽)
생존은 한사람이 죽음을 넘어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늘 삶 안에 죽음이 잔존해 있는 것이고, 삶은 죽음의 빛 안에서 재형성되는 것이다.
죽음의 경계와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보는 저자의 관점은 피해 생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트라우마 경험을 상처가 아니라 증언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상처는 죽음을 증언하는 동시에 삶의 가능성을 증언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부활을 첫번째로 경험한 마리아를 보여준다.
성토요일, 내 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극심한 피로만 느꼈다.
영혼의 상태.
그녀는 그 고통을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심리적인 고통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극도의 고독, 버림받음, 포기가 지옥에 존재한다.
그녀의 경험은, 지옥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녀가 손에 넣을 수도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지옥의 고통은 그녀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마치 성자가 성부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졌듯이. 지옥은 고통을 떠맡는 곳이 아니라, 버려짐을 견디는 곳이다.(115쪽)
깊은 트라우마 속에서 예수를 만난 마리아의 증언은 누구에게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 증언은 미끄러지고, 받아질 수 없고, 지연된 것이다.
우리의 인지구조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경험이고 이들이 증언을 해도 우리는 그 증언을 알아차릴 수 없는 맥락에 서 있을 때가 많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증언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기에 있었으나 거기에 없었다.
그는 그녀가 전에 알지 못하던 방식으로 현존한다.
마리아에게 트라우마의 경험은 상처가 아닌 증언이 된다.
트라우마에 대한 통찰들은 또한 예수라는 인물 대신에, 증언이라는 행위에 의해 드러나는 성령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모델들은 예수가 떠나고 난 뒤, 예수의 부재로 인해 형성된 증언의 방식들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며, 성령이 하는 증언과 성령에 대한 증언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증언을 성령의 증언과 연관해 성령론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어떤의미가 있을까?
많은 경우에, 우리가 성서 속에서 보는 증언은 지금 제안된 해석들보다 훨씬 덜 직접적이다.
만약 증언이 말로 전달하기 어렵고, 간접적이며,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지도 확실치 않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의 증언에 대한 개념이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우리의 관심이 증언의 내용이 아니라 증언하는 행위 자체로 옮겨지고, 목격된것들은 계속해서 생략된다면 어떻게 될까?
트라우마라는 렌즈는 선포되어야 하는 분명한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담아낼 수 없지만 증언해야만 하는 진실을 주목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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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2020-07-2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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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성령과 트라우마


antibaal 2019-10-1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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