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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30

[3분 양심] 공空의 체험 - 지금 이 순간 _홍익학당.윤홍식


[3분 양심] 공空의 체험 - 지금 이 순간 _홍익학당.윤홍식
13,920 viewsJan 8, 2019

Hongik 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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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익학당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bo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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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30 일요대담) 
그냥 이미 부처인 줄 아셔야 해요.

그냥 참나 상태라는 걸 아셔야 해요.
여러분이 "공부가 되네, 안 되네." 
뭐라고 해도 참나 상태입니다.

공부 안된다는 말이 어디서 나오는데요?
참나 자리에서 나와요.
죽겠다는 말도 참나 자리에서 나와요.
슬플 때 슬퍼서 미쳐버릴 것 같은 상태,
그것도 참나 자리에서 나옵니다, 다.

이걸 아는 게 법공(法空)이거든요.

만법이 다 이렇게 결국 이게, 여기가 공(空)자리고요.
이걸 이론으로 설명하는 분들은 
이 공에 대해서 온갖 얘기를 하시는데,
이론으로 말하면 끝도 없이 설명할 수 있죠.
그런데 여러분이 딱 체험하셔야 해요.

공 자리는 과거, 아까 하셨죠?
제가 보니까 아까 하신 것 같은데,
과거에 대한 집착, 내려놓고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시고.

그러면 뭡니까? 
과거는 사라지고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존재하시죠?
"그런가?" 하시면 과거입니다, 지금.
지금 이 순간 존재하시면 돼요.

이 순간 존재하기가 깨어있는 상태고, 
이게 가능한 이유는
여러분이 원래 공에 바탕을 두고 법(法)을 굴리세요.
이 법이라는 건 오온(五蘊)이죠, 육근(六根).
보고 듣고 하는, 오감하고 생각,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게 오감하고 생각, 감정을 하나로 쳐서 
이건 의근(意根), 이건 오근(五根) (합)해서 육근입니다.
여러분이 법이라고 하는 게 
여러분이 경험하는 게 생각, 감정, 오감밖에 없어요.
죽을 때까지 경험하는 게.

다음 생에 또 오셔도 그거밖에 경험할 게 없잖아요.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건 다 오감 아니면 
생각, 감정이에요.
생각에도 더 미세한 생각, 거친 생각이 있지만
결국은 어떤 분별입니다. 
따지는 거죠, 따지는 거.

에고도 생각이에요. 
'남하고 나는 다르다.'라는 생각하고,
'나의 동일성은 계속 유지된다.'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게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여러분이 에고 의식을 무의식, 7식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학에서 더 깊이 심층 의식으로 보는데,
결국 그것도 미세한 생각이에요.
내가 저 속으로 따지고 있는 거예요.

'나와 남은 다르다.' 
명심하고 계신 거예요, 늘.
'나는 늘 이렇게 유지되어야 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 이 생각을 계속하고 계세요, 
무의식 상에서.
그게 7식이라고 하는 게 하는 짓입니다.

에고도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생각, 감정, 오감 빼고는 참나 밖에 없죠.
이런 모든 법들이 본래 공에서 나왔다 하는데,
그러면 둘이 "여기서 이게 나왔다는 말이냐?"라고 
이해하시면 안 되는 게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이건 시공이 있는 세계이고, 
이건 시공 없는 세계예요.
지금, 이 순간에 딱 집중하시면 
거기는 시간도 공간도 안 느껴지고,
존재만 있습니다. 
차원이 달라요.

거기서 생각이 하나가 굴러가면, 시공 안에 들어와요.
생각이 하나가 굴러가면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고,
공간, 여기저기, 동서남북이 느껴지고,
나와 남이 찢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법이 공에서 나왔으니까 법공이다.' 
이렇게 아는 거죠.
그런데 이 공이 여러분이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명상을 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원래 있는 거예요.

원래 여러분은 무슨 짓을 해도,
이 육근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공에서 다 나퉈서 이게 일어나는 일이지,
여러분이 뭘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공에 터전을 두고 펼쳐지는 거죠.

여러분이 방향을 이쪽 방향, 이쪽 방향, 
에고가 거들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에고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원래 있는 걸 에고가 굴리는 거고,
원래 있는 거는 뭐가 원래 있는 거냐?
공(空)만 있습니다, 사실.

없는 게 원래 있어요. 
텅 빈 게 원래 있어서 거기서 뭐가 나오기 때문에
애초부터 여러분 참나 상태예요, 지금.
여러분 마음의 뿌리가 참나예요.

여러분이 “참나를 안다, 모른다.” 뭐라고 하시건 간에.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쉬시면 참나가 드러나요.
참나를 안 찾으면 참나가 드러나죠, 오히려.

참나를 안 찾는다는 게 
망상을 부린다는 게 아니고요,
참나 조차도 안 찾고 계시면
그 상태가 제일 깨끗하게 참나가 드러난다고요.
드러나는 상태라는 거죠.

[3분 법문] 대승불교의 법공사상 _홍익선원.윤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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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법문] 대승불교의 법공사상 _홍익선원.윤홍식
2,499 viewsJul 23, 2017


(170521 일요대담)  대승불교의 법공사상은, 
이거 헷갈리세요, 많은 분들이.
“법이 무아(無我)라고 했잖아! 
소승도, 초기불교도, 소승불교도.
그런데 대승에서 법공이 결국 오온(五蘊)이 공(空)하다인데, 
뭐 비슷한 거 아닌가?”

그래서 또 어떤 학자 분은, 
그 분도 또 유명한 분인데 논문을 써서 
“초기불교에 이미 대승사상이 보인다.”해서 
“법공사상이 부처님의 제법무아(諸法無我)에 이미 나타나 있다.”
라고 주장해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 텍스트에서 읽어 주셔야 되는데 막 섞어버려요, 지금.
반야심경에 법공사상은 뭐죠?
색(色)이 공(空)이고, 공(空)이 색色)이라는 거. 
다른 느낌입니다.

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오온(五蘊)이, 색수상행식이 오온이죠.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반야심경에서 이러죠. 
색(色)이 공(空)이요, 공(空)이 색色)이요. 
수상행식 역부여시(受相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도 똑같다.

즉, 내가 말을 더 안하겠는데 
수(受)도 공(空)이요, 공(空)도 수(受)고, 
상(想)도 공(空)이고, 공(空)도 상(想)이고, 
행(行)도 공(空)이요, 공(空)도 행(行)이고, 
식(識)도 공(空)이요, 공(空)도 식(識)이다.
이 말을 더 해야 되는데 말을 줄인다. 이 뜻이에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수상행식 역부여시(受相行識 亦復如是)  
또한 그것들도 똑같다, 사정은. 
이해되시죠, 이제?  

반야심경이 얘기하고 싶은 게, 
법무아(法無我)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색수상행식이 내뜻대로 안 된다, 무상해서. 
이 얘길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 관세음보살이 깨달았던 오온이 공한 줄 알고 
일체의 고행을 넘어가셨다는 반야심경의 주장이, 
그 대승경전의 주장이,
초기불교의 제법무아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 다음 뭔 얘기를 하죠, 반야심경에?
오온이 공하다고 해놓고, 그 다음 뭔 얘기를 해요?
공(空)이 또 오온이라고 했다가, 
공(空)은 불생불멸이라고 그래요.
이게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는 겁니다,

즉, 오온도 불생불멸이에요, 따라서. 
반야심경 논리상 오온이 본래 공(空)이라고 했죠?
공이 색이라고 했죠. 색이 공이고.
따라서 “공(空)은 불생불멸이다!”라고 한 얘기는, 
오온자체두요, 생멸이 없다.
오온도 생겨난 적이 없고, 멸할 일도 없다는 거예요.

그럼 불생불멸 해석만 해도 여러 가지가 있겠죠.
“생겨난 적이 없고 멸한 적도 없다? 없다는 거 아닐까?”
또 이런 학자가 있습니다. 이런 논문을 써요.

정말 많은 학자들이 있죠. 
함정 같은 함정에 다 빠져들고 계십니다. 제가 볼 때는. 
함정 비슷한 것만 보여도 다 뛰어드세요.
빠져들지 마시고 중도로 중도로만 가셔야 이해가 됩니다.
어떤 함정에 빠지시느냐?
불생불멸이라 그러면 없는 거래요. 
“생겨난 적이 없다잖아!” 
그게 아니에요. 
불생불멸이라는 거는 늘 있다는 거예요. 

자, 이게 언제부터 이 펜이 있었는지 몰라요. 
생겨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죽을 일도 없죠. 그 뜻 입니다.

따라서 오온은, 자! 수신호로, 수화로 제가 해볼게요. 
공(空)입니다. 공(空)에서 오온이 나왔어요. 
근데 자, 이게 다른 손인가요? 
요렇게 하며 손 아니고, 요렇게 하면 손인가요?
이해되시죠?

어떤 선사가 이렇게 하면~ 
이게 우주 천지창조에요. 
이건 다시 천지 소멸이죠.
근데 이게 창조하고 소멸하는 생멸상이 있으니까,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 같죠?
이 자체는 영원한 거예요.

그러니까 펼쳐졌다 갈무리됐다, 펼쳐졌다 갈무리됐다 한들, 
그게 사실은 그 자체로 영원한 공(空)의 작용이에요.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될 일도 없는
그 공(空)이 우주에서 끝없이 작용을 펼치고 있는 것 뿐이에요.

따라서 여러분의 추잡스러운 생각, 이기적인 탐진치의 마음,
아니면 어떨 때는 또 고귀한 마음,
그 모든 마음 작용이, 여러분 영혼의 작용이요, 
결국 본질이 공(空)이고 생겨난 적이 없는 거예요.

공(空)이 생겨난 적이 없듯이
여러분 마음도 영원하다는 거예요. 
변화할 뿐, 영원하다는 거예요.
여기까지 이해되세요?

내 영혼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하신다는 것도 
반야심경에 맞지 않아요. 
색(色)이 공(空)이고 공(空)이 색(色)이라는 걸 모르시는 거예요.
공(空)은 반드시 색(色)으로 나타나요. 
이렇게 계속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색(色)으로 나타나요.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불교평론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기자명 이병욱   입력 2008.07.15

이병욱 lbw33@hanmail.net


 1. 서론

세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서로 가까이 있는 두 나라 사이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차라리 거리가 먼 나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는 나라와는 감정의 골이 깊은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본에 대해 국민감정이 좋지 않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자면, 우리나라나 일본은 동아시아 문화에 속해 있고 상당부분에서 공통점도 있건만,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은 좋게 말해서 가깝고도 먼 사이이고, 달리 말하자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일상사에서도 발견된다. 이해관계도 없고 서로 만날 일도 없는 사람과는 원수 맺을 일도 없다. 그에 비해 자주 만나는 사람과는 친해질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가깝고도 먼 사이는 철학이나 사상분야에서도 적용된다. 불교와 노자사상은 동양사상으로서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 중국철학의 흐름에서 보자면 노자를 포함한 노장(老莊)사상과 불교사상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주장도 적지 않게 있지만, 그에 비해 상대편의 사상에 대해 서로 비판한 일도 적지 않다.

나는 이렇게 서로 공격을 했다는 점이 불교와 노자사상이 서로 다르다는 증거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동아시아문화에 속해 있고 그에 따라 서로 공통점이 많이 있는데도 서로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처럼, 불교와 노자사상도 공통점이 많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관계에서는 차이점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불교와 노자사상이 공통점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이 분야의 선행연구가 상당히 있지만 자세한 소개는 생략하고, 다만 필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2. 불교의 공(空)사상

불교사상의 흐름은 커다란 물줄기에 비유할 수 있다. 인도불교의 흐름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로 나누어진다. 그 가운데 부파불교에 속하는 상좌부가 동남아시아로 전해져서 동남아시아 불교의 중심이 되었고, 대승불교는 중국문화권에 전해져서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 꽃을 피웠다. 밀교는 티베트에 전해졌다. 현재 서구에서는 이 3가지의 불교가 서로 경합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의 전개과정은 복잡하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을 잡아서 불교를 대표한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노자와 불교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중국문화권에 속하는 대승불교와 비교하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대승불교라고 해도 그 경전이 많다. 어떤 경전을 기준으로 해서 노자와 비교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대표할 수 있고, 노자사상과 친연성이 있는 《금강경(金剛經)》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선택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1) 공(空)사상의 대한 설명

바둑을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두면 그 때는 자신의 실력보다 더 수가 잘 보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기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승부에 대한 욕심이 없으므로 평소보다 수가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공(空)사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공(空)은 집착의 마음을 비우고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되찾는 것이고, 그 마음상태에서 윤리적 행위를 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복덕(福德)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는 공(空)사상에 대해 3단락을 나누어서 접근하고자 한다.

(1) 공(空)의 의미
공(空)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을 꿰뚫어 보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을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5온(五蘊)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재앙을 건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반야심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5온은 다섯 가지 쌓임이라는 의미이고, 5온은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5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다. ‘색’은 물질과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4가지를 더 자세히 구분하면, 수(受)는 고통과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이고, 상(想)은 사물의 이미지를 받아들여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기능이며, 행(行)은 마음이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서 의지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識)은 수·상·행의 기초가 되어주는 마음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수·상·행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근거가 되어주는 마음의 터전이 식(識)이다. 따라서 5온이 공(空)하다는 것은 세상만물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을 직관(直觀)하였다는 의미이다.

(2) 중도(中道)로 표현된 공(空)
앞에서 말한 공(空)은 중도(中道)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중도는 일반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라고 표현되는데, 《반야심경》에서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不生不滅〕,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不垢不淨〕,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不增不減〕라고 한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공(空)이란 모든 개념과 분별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판단을 단순화하면, ~이다·~아니다라고 할 수 있고 공(空)은 이 두 가지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중도로 표현된 공(空)은 모든 개념과 분별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지에서 보자면, 불교에 집착해서도 곤란하다. 물론 처음에는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라야 하겠지만, 불교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조차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도 부처님의 경지에서 보자면 어쨌든 분별이고 집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에서는 초기불교의 기본적 개념인 5온·12처(十二處)·18계(十八界)·12연기(十二緣起)·사성제(四聖諦)·성인(聖人)의 지혜도 부정된다. 그리고 부정하는 이유는 이러한 개념이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고,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다 보면 마지막에는 불교의 가르침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3) 공(空)의 다른 표현: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는 도리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사상은 《금강경》에서는 청정한 마음을 낸다는 것으로 바뀌어서 표현된다. 여기서 말하는 ‘청정한 마음’이란 빛깔〔色〕에 집착해서 생겨난 마음도 아니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 관념의 대상)에 집착해서 생겨난 마음도 아니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생겨난 마음이 바로 청정한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공(空)이다. 그리고 이러한 청정한 마음을 얻었을 때, 언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범부는 언어와 실제가 서로 대응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의자’ 같은 단어는 언어와 그 실제가 일치한다. 그러나 ‘황금의 산’이란 말은 개념으로는 존재하지만, 그 개념에 상응하는 실제의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범부는 ‘황금의 산’이란 말을 들으면, 그 말에 상응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그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 만약 황금의 산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러한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사람들이 황금을 얻기 위해서 황금의 산에 몰려들 것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황금의 산은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중생이냐 부처냐 하는 차이는 언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부처는 언어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언어란 사물의 실제를 왜곡하는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진리를 전달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즉비(卽非)의 논리이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라고 한다”라고 표현한다. 이 말을 다시 풀이해보자. A라는 단어는 중생이 집착하는 것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A는 A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 진리를 전달할 수는 없으므로 일단 부정해서 집착심을 없앤 다음, 그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그러므로 A라고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莊嚴)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니, 이것을 장엄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할 것이다. 곧, 빛깔〔色〕에 집착해서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 관념의 대상)에 집착해서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다만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라!(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2) 공(空)사상의 활용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는 병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저 오로지 마음속에서 죽어도 좋으니 무조건 전쟁에서 이기겠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이 병사를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옛말에 살려고 하면 죽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오히려 산다고 하였으리라. 이 말은 공(空)사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공(空)을 자각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윤리적 행위를 할 때 윤리의 극치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사심(私心)을 이기고 순수하게 윤리적 행위를 실천할 때 그 행위는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금강경》에서는 위에서 말한 청정한 마음, 곧 공(空)에 기초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착한 행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보시는 남에게 자신의 재산을 주는 착한 행동이지만, 단순히 보시만을 행하지 말고, 이러한 착한 행동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윤리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 : 대상)에 대해 머문 바〔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 말하자면, 빛깔〔色〕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하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관념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해야 하니, 상(相: 모습)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금강경》〈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그러면, 왜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그렇게 보시를 행하면, 그 결과 얻는 복덕(福德)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허공을 헤아릴 수 없듯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의 복덕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헤아릴 수 없는 정도로 많은 이유는 이러한 보시를 행하면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복덕을 받지 않는다〔不受福德〕”라고 말한다.

3. 노자(老子)의 사상

노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사기열전》에서 소개하고 있다.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鄕) 곡인(曲仁) 마을〔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이(耳)이다. 자(字)는 백양(伯陽)이고, 시호는 담(聃)이다. 주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고 한다. 노자는 도덕을 닦고 그 학문은 스스로 몸을 숨기고 이름 내지 않는 것〔無名〕에 힘썼다. 주나라에 거주한 지 오래되었는데,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주나라를 떠났다.

국경의 관문〔關〕에 이르자 관령(關領)인 윤희(尹喜)가 말하기를 “선생님은 숨어 버리려고 하시니, 저를 위해서 억지로라도 책을 저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노자는 상·하편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도덕의 의미를 말한 5천여 언(言)의 분량이었다. 그리고 나서 떠나 버렸는데, 아무도 그가 죽은 곳〔所終〕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마천이《사기열전》을 쓸 때에도 노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說)이 있었다.

그래서 초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가 노자라고 하기도 하고, 주나라 사람인 태사담(太史?)이 노자라고 《사기열전》에서 소개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러 사람이 노자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노자》라는 저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노자》라는 책이 여러 사람에 의해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단일 관점이 유지된 것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래야 철학적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노자사상은 도(道)의 체(體)와 용(用)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道)의 체(體)는 불교의 공사상과 공통점이 있지만, 도(道)의 용(用)은 불교의 공사상과 관련이 적으므로 이 점에서 보자면 불교의 공사상과 노자사상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 노자사상의 근본 : 도(道)의 체(體)와 용(用)

《노자》에서 말하는 도(道)의 체(體)는 고요하고 고요한 것이어서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도(道)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도(道)의 용(用)은 일반적으로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는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절의 변화를 보자. 봄에서 여름으로 진행되면서 무척 더워지지만 이 무더위가 계속되진 않는다.

더위가 한창이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이제 점점 날씨는 서늘해진다. 또한 가을에서 겨울로 진행되면서 무척 추워지지만 이 추위가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에서 정점을 찍고 나서 이제 봄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처럼 날씨는 극단에 이르면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것을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곧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결국에는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도(道)의 체(體)와 용(用)은 《노자》 25장에서 잘 나타난다.

어떤 물건이 혼연히 이루어져 천지보다 먼저 생기었다. 고요하고 고요해서 홀로 서서 고쳐지지 않고 두루 다니지만 위태하지 않으니 천하의 어머니라 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이름하여 도(道)라 하고 억지로 그것을 이름하여 대(大)라 한다. 대(大)는 가는 것이고, 가는 것은 멀어지고, 멀어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는 위대하고, 하늘은 위대하며, 땅은 위대하고 왕(王)도 위대하다. 이 땅에 네 가지 위대한 것이 있는데 왕(王)은 한 가지에 속할 뿐이다. 따라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道)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1)

위 인용문에서는 도(道)의 체(體)와 용(用)을 모두 말했다. 도(道)는 천지보다 먼저 생긴 것이고, 고요하고 고요한 것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體〕, 만물에 두루 작용하는 것이다〔用〕. 따라서 천하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도(道)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위대한 것이라고 억지로 이름한다. 이 위대한 것은 작용하고, 작용해서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여서 멀리까지 활동하고, 그러다가 너무 멀어지면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 도(道)의 작용이다. 이 세상에 네 가지 위대한 것이 있는데, 왕(王)은 그 한 가지일 뿐이다. 따라서 왕(王)도 자연(自然)의 법칙에 따라 처신하고 정치에 임해야 한다. 여기에 노자의 인생관과 정치사상도 아울러 함축되어 있다.

그러면 초점을 도(道)의 체(體)에 맞추어 보자. 《노자》 1장에서 도(道)의 체(體)에 대해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언어로 도(道)를 표현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고 나아가 유(有)와 무(無)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도(道)를 도(道)라 말할 수 있으면 항상한 도〔常道〕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할 수 있으면 항상한 이름이 아니다. 무(無)를 천지의 처음이라 이름하고, 유(有)를 만물의 어머니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항상 무(無)에서 그 묘함을 관찰하고자 하며, 항상 유(有)에서 그 가장자리를 관찰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有·無〕는 같은 것이지만, 〔세상에〕 나와서는 이름을 달리하였다. 〔有와 無가〕 같은 경지를 현(玄)이라 하는데, 현묘하고 또한 현묘하니 〔이것이〕많은 묘(妙)의 문이다.2)

위 인용문에 따르면, 도(道)는 무(無)와 유(有)가 같은 경지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현(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도(道)는 유(有)와 무(無)를 벗어난 자리이다. 이 자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자리이다. 그런데 무엇 무엇이라고 이름한다면, 그것은 유(有)와 무(無)의 어느 한쪽에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도(道)를 도(道)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도〔常道〕가 아닌 것이고, 어떠한 이름도 그것을 이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이름〔常名〕이 아닌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즉비(卽非)의 논리 곧 “A는 A가 아니므로 A라고 이름한다”고 하는 것과 통하고, 또한 《노자》 1장에서 도(道)는 유(有)와 무(無)가 같은 경지라고 말한 것은 《반야심경》의 중도(中道)의 표현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도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인데 이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는 말이고, 이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자면, 이미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므로 유(有)와 무(無)는 서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유(有)에도 벗어나고 무(無)에도 벗어났으므로 이제는 거꾸로 유(有)와 무(無)에 걸리지 않고 유(有)와 무(無)가 대립되지 않는 광활한 정신적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러한 《노자》 1장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노자》 1장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노자》의 다른 부분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 56장에서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道)를 도(道)라고 하면 이미 진정한 도〔常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셈이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노자》 56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입을 막고〔塞其兌〕 그 눈과 귀를 닫고〔閉其門〕,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어지러움을 풀고, 그 빛과 화합하고〔和其光〕 그 티끌과 함께 한다〔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이라 한다. 그러므로 친(親)하게도 할 수 없고 소원〔疏〕하게도 할 수 없으며,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칠 수도 없으며, 귀(貴)하게도 할 수 없고 천(賤)하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하의 귀함〔貴〕이 된다. (《노자》 56장)

위 인용문에 따르면,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인식기관을 단속하고 자신의 날카로움을 뽐내지 않고 자신의 혼미함을 잘 풀어버리며, 자기 내부에 있는 광명과 화합하여 중생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따라서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친하게도 할 수 없고 소원하게도 할 수 없으며, 이롭게 할 수 없고 해롭게도 할 수 없으며, 귀하게도 할 수 없고 천하게도 할 수 없는 경지가 펼쳐진다.3)

한편, 《노자》에서는 도(道)를 닦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그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하면 지식이 쌓인다. 매일 영어단어를 10개씩 외운다면 일년이면 상당한 단어를 암기할 것이다. 하지만 도(道)를 닦는다는 것은 이처럼 쌓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비워서 완전히 비우면 그 때에는 모든 활용이 텅 빈 마음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야구경기에서 투수가 공을 잘 던지겠다고 어깨에 너무 힘을 주면 자기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평상의 마음을 되찾으면 자기 컨디션을 회복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내용을 《노자》 4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道)를 행하면 날로 줄어든다. 줄어들고 줄어들어 무위(無爲)에 이르러 함이 없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無爲而無不爲〕. 그러므로 천하를 취함에 항상 일 없음으로 하니, 일 있음에 미치면 천하를 취할 수 없다.4)

위 인용문에 따르면, 도(道)를 닦는 방법은 비우는 것이다. 그래서 도(道)를 닦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덜고 또 덜어서 어떠한 인위적 조작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이 경지에서는 인위적 조작을 없애어서 모든 것이 순전히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노자의 인생관

앞에서 말한 도(道)의 체(體)와 용(用)은 노자의 인생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앞에서 도(道)의 체(體)는 현묘하고 현묘한 것이어서 유(有)와 무(無)가 서로 같은 경지라고 했는데, 노자의 인생관에서는 이 관점을 받아들여 유(有)와 무(無)에 구애되지 않고 이 둘을 넘어설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도의 용(用)은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처음의 상태로 돌아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인생사에 적용해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의 논리를 편다.

(1) 대립되는 관념을 넘어선다.
《노자》 2장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을 넘어설 것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 추함이 있을 것이고, 이렇게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하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추악한 것이고〔惡〕, 모두 착한 것이 착한 것인 줄 알지만, 이는 불선(不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유(有)와 무(無)는 서로 생기는 것이고, 어려움〔難〕과 쉬움〔易〕은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길음〔長〕과 짧음〔短〕은 서로 나타내는 것이고, 높음〔高〕과 낮음〔下〕은 서로 의지하는 것이고, 음성(音聲)은 서로 화답하고, 앞〔前〕과 뒤〔後〕는 서로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무위(無爲)의 사(事)에 처하고 말 없음〔不言〕의 가르침을 행한다. 그 결과 만물이 일어나더라도 말하지 않고〔萬物作焉而不辭〕, 생기더라도 소유하지 않으며〔生而不有〕, 행위하였지만 믿고 의지하지 않으며〔爲而不侍〕, 공(功)이 이루어지더라도 머물지 않는다〔功成而不居〕. 오직 머물지 않았으므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노자》 2장)

위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는 대립된 개념, 곧 유(有)와 무(無), 어려움〔難〕과 쉬움〔易〕, 길음〔長〕과 짧음〔短〕, 높음〔高〕과 낮음〔下〕, 앞〔前〕과 뒤〔後〕는 서로 관계 맺어진 존재이다. 하지만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이런 상대적인 것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성인(聖人)은 상대적인 세계인 유(有)와 무(無)를 넘어서는 무위(無爲)의 사(事)에 처하고, 말 없는〔不言〕 가르침을 행한다. 그래서 성인의 공덕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자》 2장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노자》의 다른 부분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노자》 11장에서는 유(有)와 무(無)가 서로 짝하고 있음을 예를 들어 밝히고 있다.

30개의 바퀴살〔輻〕은 하나의 바퀴통〔퇶〕과 함께 한다. 그 무(無)에 짝해서 수레의 용(用)이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 경우, 그 무(無)에 짝해서 그릇의 용(用)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들 경우 그 무(無)에 짝해서 방의 용(用)이 있다. 그러므로 유(有)로써 이익을 삼는 것은 무(無)로써 용(用)을 삼았기 때문이다. (《노자》 11장)

위 인용문에서는 어느 하나의 사물이 이루어질 때, 그 무(無)에 기초해서 그 용(用)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처럼 《노자》에서는 무(無)와 유(有)가 서로 짝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노자》 27장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착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어느 한쪽도 소홀하게 할 수 없다.

잘 가는 것〔善行〕은 수레바퀴 자국이 없고, 잘 말하는 것〔善言〕은 허물이 없고, 잘 헤아리는 것〔善計〕은 계책을 쓰지 않고, 잘 닫음〔善閉〕은 문빗장이나 열쇠가 없어도 열 수 없는 것이요, 잘 맺음〔善結〕은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항상 사람을 잘 구하므로 사람을 버리지 않으며, 항상 사물을 잘 구하므로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습명(襲明 : 밝음을 계승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善人〕은 착하지 못한 사람〔不善人〕의 스승이요, 착하지 못한 사람〔不善人〕은 착한 사람〔善人〕의 바탕〔資〕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바탕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롭다 하더라도 크게 미혹한 것이다. 이것을 요묘(要妙)라고 한다. (《노자》 27장)

위 인용문에서는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바탕〔資〕이라고 한다. 따라서 착한 사람은 물론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여기서 자(慈)가 나온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항상 사람과 사물을 잘 구한다. 이 경지에서 잘 가는 것〔善行〕, 잘 말하는 것〔善言〕, 잘 헤아리는 것〔善計〕, 잘 닫는 것〔善閉〕이 펼쳐진다.

(2) 돌아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反者道之動〕
앞에서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되돌아오는 경향이 있는 것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이치를 인생사에 적용한다. 인생사에 적용되면 이 때는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이라고 한다. 이는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되돌아오는 경향이 있으므로 강한 것은 이미 극단에 이른 것이어서 이내 멸망할 것이고, 약한 것은 아직 발전할 조짐이 있는 것이므로 궁극에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의미이다. 《노자》 2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굽으면 온전하고, 굽히면 바르게 되고, 오목하면 가득 차고, 더러워야 새롭게 되고, 적어야 얻을 수 있고, 많으면 미혹된다. 따라서 성인(聖人)은 하나〔一〕를 안아서 천하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나타내지 않으므로 밝고〔明〕,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므로 드러나고〔彰〕,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功)이 있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길게 된다〔長〕. 다만 싸우지 않으므로 천하에서 함께 싸울 수 있는 존재가 없다. 옛사람이 “굽으면 온전해진다”고 말한 것이 어찌 빈 말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해진다면 만물이 돌아올 것이다. (《노자》 22장)

위 인용문에서 “굽으면 온전하다”고 한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것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과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굽은 것과 곧은 것을 비교하면 당연히 곧은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입장에서 보자면, 곧은 것은 이미 변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이고, 굽은 것은 이제 변화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따라서 곧은 것은 이내 변화가 극단에 이르러 퇴보할 것이지만 굽은 것은 아직도 발전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굽으면 온전할 수 있는 것이고, 곧은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목하면 가득하고, 더러워야 새롭게 되고, 적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노자의 특유의 논법이다.

우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노자의 주장에 주목해 보자. 강한 것은 오래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회오리바람은 강력한 바람이지만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도 거친 빗줄기이지만 하루 종일 내리지는 못한다. 그에 비해 보슬비는 가는 빗줄기이지만 오랫동안 내릴 수 있다. 이 점을 《노자》 2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희언(希言: 적은 말)이 자연스럽다.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이것은 누가 하는가? 천지(天地)이다. 천지도 오래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도(道)에 종사하는 사람은 도(道)에서는 도(道)와 함께 하고, 덕(德)에서는 덕(德)과 함께 하고, 잃음〔失〕에서는 그 잃음〔失〕과 함께 한다. 도(道)와 함께 한다는 것은 도를 즐기고 얻는다는 것이고, 덕(德)을 함께 한다는 것은 덕을 즐기고 얻는다는 것이고, 잃음〔失〕을 함께 한다는 것은 잃음을 즐기고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면 〔이러한 이치를〕 믿지 않는다. (《노자》 23장)

위 인용문 내용처럼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도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이것은 천지(天地)가 주관하는 것인데, 천지도 오래하질 못한다. 하물며 인간이겠는가? 그래서 도(道)에 종사하는 사람은 도(道)에서는 도(道)와 함께 하고, 덕(德)에서는 덕(德)과 함께 하고, 잃음〔失〕에서는 잃음과 함께 한다. 그래서 도(道)·덕(德)·잃음〔失〕을 즐기고 얻는다. 이처럼 도(道)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연스런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의 이치에서 배운 교훈을 인간사(人間事)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스스로 자랑하고 내세우기 좋아한다. 또 자기의 말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회오리바람이 오래가지 못하고 소나기가 잠깐 동안에 지나가듯이, 자신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은 결국 오래 가지 못한다. 강한 것은 이미 극단에 이른 것이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곧 몰락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노자》 24장에 소개되어 있다.

발끝으로 서면 오래 서지 못하고, 큰 걸음으로 활보하면 오래 걷지 못한다. 스스로 드러내면 밝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 하면 드러내지 못하고, 스스로 자랑하면〔伐〕 공(功)이 없고, 스스로 내세우면〔矜〕 오래가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은〕 도(道)에서는 남은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만물〔物〕은 〔이러한 것들을〕 혹 싫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도(道)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드러내고, 스스로 옳다 하고, 스스로 자랑하고, 스스로 내세우는 것에〕 처하지 않는다. (《노자》 24장)

또한 이번에는 자연에서 배운 이치를 상대방을 다루는 전술에 응용해보자. 바둑에서 먼저 큰집을 만들면 반드시 승부에서 진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간에 만족하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내용을 《노자》에서는 말하는 것이다. 또 《노자》에서는 상대방을 망하게 하려면, 먼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어서 상대방을 만족하게 한다는 전술을 편다. 그러면 상대방은 만족해서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고, 그 때는 가만 두어도 스스로 멸망할 것이다. 《노자》 36장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장차 거두어들이려고 한다면 반드시 억지로 펴게 해주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억지로 강하게 해주어야 한다. 장차 없애려고 한다면 반드시 억지로 흥하게 해주고, 장차 뺏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억지로 주어야 한다. 이것이 미묘한 밝음〔微明〕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니, 마치 고기가 연못을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국가를 통치할 때〕 국가의 이로운 기구〔利器〕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노자》 36장)

위 인용문의 내용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과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의 응용이다. 그래서 거두어들이고 약하게 하고 없애려고 하고 뺏으려고 한다면, 정반대로 펼치게 하고 강하게 해주고 흥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관점을 국가통치에도 응용하고 있다. 국가의 이로운 기구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정치사상에까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과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을 확대하겠다는 말이다.

이제 노자는 정치의 영역까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논리를 구사한다.5)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것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충돌하면 어느 것이 이길까? 상식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강한 것이 이기겠지만, 노자의 논법에 따르면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다. 가장 강한 것은 이미 충분히 변화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고, 가장 부드러운 것은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고 노자는 주장한다. 이 내용을 《노자》 43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지극히 견고한 것을 몰아내고, 형상 없는 것이 틈 없는 데 들어간다. 그래서 내가 무위(無爲)의 이익됨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과 무위(無爲)의 이익을 천하에서 당할 수 있는 것이 드물다〔天下希及之〕. (《노자》 43장)

4. 결론: 불교와 노자사상의 비교

이 글에서는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을 비교하였다. 불교의 공사상과 노자사상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우선, 노자가 말하는 도의 체(體)와 불교의 공사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불교의 공사상은 세상만물과 우리의 몸과 마음, 그 어느 것도 집착할 만한 것이 없음을 통찰하는 것이고,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것을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는 중도(中道)로 표현할 수 있다. 중도는 논리와 언어를 벗어났다는 의미이고,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면 논리와 언어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노자의 도(道)의 체(體)는 이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억지로 이름한 것이고, 또한 도(道)의 체(體)는 유(有)와 무(無)가 같은 경지인 것이다.

이 유(有)와 무(無)가 같은 경지라는 말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이 말을 불교의 중도의 의미로 파악하고자 한다. 불교의 중도는 무(無)와 유(有)의 극단을 부정하는 것인데, 만약 이 부정의 정신에서 현실세계로 내려온다면, 그 때는 무(無)이면서 유(有)인 경지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有)와 무(無),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정신적 경지이므로 이번에는 무(無)도 좋고 유(有)도 좋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정신적 경지를 《노자》에서는 유(有)와 무(無)가 같다고 말했다. 또한, 《노자》 1장에서 도(道)를 도(道)라고 말할 수 있으면 항상한 도가 아니라는 표현은 《금강경》의 즉비(卽非)의 논리와 연결점이 있다.

또한 노자의 인생관에서도 도의 체(體)에 근거한 대목은 불교의 공사상과 공통점이 있다. 《노자》 2장에서는 세상 사람이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악한 것이라고 한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이미 추악한 것을 상대로 펼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면, 아름다움과 추악함이라는 2원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상대적 2원관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금강경》에서도 공(空)을 자각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윤리적 행위를 하면 그 때 최고의 복덕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 말을 《노자》에 맞추어서 보자면, 2원성을 넘어서서 윤리적 행위를 실천하면 엄청난 복덕이 생긴다고 할 수 있고, 《노자》 2장의 표현으로 바꾸어서 말한다면 “머물지 않으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이 공통점이었다면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불교사상의 전반을 통틀어본다고 해도 《노자》의 도(道)의 용(用)을 말하고 있지 않다. 도의 용(用)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을 내용으로 하는 것인데, 이는 사물의 변화가 극단에 이르면 처음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한 것은 이미 발전한 것이므로 이내 쇠퇴하고, 약한 것은 더 발전할 여지가 있으므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불교사상에서 발견할 수 없다.

불교와 노자사상을 비교하면, 공사상이라는 점에 일정 부분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불교사상에서는 이 공사상이 중관학파, 유식학파, 여래장사상, 천태종, 화엄종, 선종에서 더욱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이 점에서 노자사상보다 불교사상이 더 깊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노자사상에서는 도의 용(用)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구체적 지침을 제시해준다.

이 점에서 보자면 노자사상이 불교사상보다 더 삶에 밀착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자사상은 불교사상에 비해서 현실적 응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와 노자사상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사상은 거의 2000년 이상을 서로 교섭해 왔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이 두 사상의 우열을 따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불교사상의 장점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한편으론 노자의 지혜를 수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

이병욱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졸.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ㆍ박사 과정(동양철학). 박사학위 논문으로는 〈천태지의 철학사상논구〉(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1995년)가 있으며, 저서로는 《천태사상연구》(경서원, 2000년), 《고려시대의 불교사상》(혜안, 2002년), 《에세이 불교철학》(운주사, 2003년), 《인도철학사》(운주사, 2004년), 《천태사상》(태학사, 2005년)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 강원대, 중앙승가대 강사로 있다.

 이병욱 lbw33@hanmail.net

[[공(空) 의미의 세 차원 - 3 무명과 번뇌를 타파하고 희론을 적멸케하는 수행 방법

공(空) 의미의 세 차원 - 불교신문

공(空) 의미의 세 차원
 승인 2003.02.19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절대자유

공사상(空思想)은 초기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을 재해석하여, 
붓다의 기본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종교철학 사상이다.‘

공(空)’이라는 용어는 ‘sunya’(텅 빈)라는 형용사나 ‘sunyata’(공한 것, 空性)이라는 명사의 번역어이다. 

초기경전(初期經典)에는 ‘공’이라는 용어가 
주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통찰한 결과 얻어지는 삼매(三昧)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대승불교에서 공의 개념은 보다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대승경전의 모체인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과 그 주석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공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여덟 차원(十八空)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내공(內空): 인식의 주관인 몸과 마음의 요소, 즉 감각 지각 사고 인식의 작용을 일으키는 요소가 다 공함을 말한다. 
2. 외공(外空):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적 객관이 공함을 말한다. 
3. 내외공(內外空): 이것은 앞의 두 가지를 함께 부정한 것이다. 
4. 공공(空空): 공도 또한 공함을 말한다. 
5. 대공(大空): 시방(十方)과 허공 등의 공간이라는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6. 제일의공(第一義空): 제일의는 궁극적 진리의 본체인 진여(眞如)나 열반 등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진리상도 사실은 공하다는 의미이다. 
7. 유위공(有爲空):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현상의 존재들은 변화하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8. 무위공(無爲空): 인연에 의해 생기지 않는 허공, 열반 등과 같은 무위법도 공하다. 

9. 필경공(畢竟空): 불교 외의 사상에서 말하는 실유관(實有觀)이나 불교의 나와 법에 집착하는 실유관 등을 모두 부정한다. 
10. 무시공(無始空): 시간적으로 세간이나 중생, 모든 사물에 어떤 시작이 있다는 관념을 부정함이다. 
11. 산공(散空): 현상계는 인연에 의해 생성되므로 인연의 화합이 없어지면 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12. 성공(性空): 일체 존재 요소의 자성(自性)이 공이라는 의미이다. 인연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본래의 실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13. 자상공(自相空): 성공(性空)은 불성과 진여는 본체가 그대로 공함을 말하는 총상(總相)이라면 자상공은 온갖 만물의 개별적인 존재성인 별상(別相)을 부정함이다. 
14. 일체법공(一切法空 ): 앞에 말한 일체 제법의 공함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15. 불가득공(不可得空): 인식론적으로 무엇을 알고 얻을 것이 있다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16. 무법공(無法空) : 현상의 모든 법이 이미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17. 유법공(有法空): 현상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假有)일 뿐 그 본질은 공하다는 것이다. 
18. 유법·무법공(有法·無法空): 시간적 존재뿐만 아니라 공간적 존재까지도 모두 공함을 의미한다. 

---

여기에서 공의 교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세 차원으로 나누어 해명해 볼 수 있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공은 모든 실체의 무자성성연기성을 의미한다.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현상의 존재들은 변화하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제법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假有)일 뿐 그 실체(substance)는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방(十方)과 허공 등의 공간 관념이나, 중생이나 모든 사물에 어떤 시작이 있다는 시간관념도 공하다고 한다. 이러한 공의 연기론적 의미를 공의(空義)라고도 한다. 

둘째, 인식론적 차원에서 볼 때 
공은 얻을 것도 없고 얻어야 할 진리(法, Dharma)라는 관념도 없다. 
무엇을 알고 얻을 것이 있다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 
이를 무소득공(無所得空) 또는 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고도 한다. 
깨달을 법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고 얻고 깨달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도 또한 공하다(空空)고 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요소가 다 공하다고 하면 공이라는 것은 존재할 것이라는 공의 실재화와 관념화의 오류를 논파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평등일미(平等一味)한 제법의 진실상을 공성(空性)이라고도 한다. 

셋째, 종교적으로 
공의 진리는 
무명과 번뇌를 타파하고 희론을 적멸케하는 수행 방법이다.
이러한 공의 목적과 효용을 공용(空用)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공의 체득에 의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절대 자유와 테두리 없는 마음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승 보살 윤리의 근본이 되는 
자타불이(自他不二)동체자비(同體慈悲)와 무연자비(無緣慈悲)의 실천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동국대 불교학과
====
자타불이
[自他不二, Jatabuli]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또 궁극적으로는 공 (空)인 인연법을 뜻하며, 여기에서 동체대비 (同體大悲)라는 불교 특유의 자비관이 나오는 동시에 일반적인 개념의 사랑과 구별된다. 다시 말해 자타불이 (自他不二)는 곧 자타불이 (自他不異) 또는 주객불이 (主客不二)인 동시에 우주의 법칙을 말함. 일반적인 개념의 사랑은 대개 인본주의 사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덕행 (德行)으로, 불교의 동체대비 사상이 뜻하는 우주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Non-duality or non-discrimination of the I and the not-I, this and that, you and me, the view that sees the whole universe as One: Hence the great compassion of One-root or One-body, not just humanitarian love or compassion. Cf. (Bulibeop) Non-duality, (Yeon-gi) Dependent origination or a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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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자비(慈悲)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
.법현스님-열린선원원장

온누리 2007. 12. 
자비(慈悲)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불교에 자비가 없으면 어떤 느낌일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니까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 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교리 비슷한 자비가 없어도
뭐 그리 달라질 것이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적은 숫자가 아님을 보고 놀란다.

싯다르타가 삶의 변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내 인생의 전부나 다를 것이 없는 숨(呼吸) 살피는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안정과 평화와 통찰지(洞察智)를 얻었고
존재와 발생의 원리라 할 수 있는 연기(緣起)의 묘리를 알게 된 것을 깨달음이라 부르고
그 때 부처님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기만 하면 부처가 되고
깨달음을 얻는 데는 자비가 충분조건일지언정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랄 수 있는 연기(緣起)는
어떤 것도 홀로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과 인연을 맺는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자타카(본생 이야기)에 도도히 흐르는 정신은 바로
나와 직,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이다.
그것을 우리는 자비라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깨달음을 이루는 필수 요인이며
피안(彼岸) 즉 깨달음에 이르는 바라밀(婆羅蜜)이라 한다.

한편 자긍심에 가득한 불자들은
불교의 자비는 사랑함(慈),연민함(悲),기뻐함(喜),평화로움(捨)의 준말이므로
기독교의 사랑보다는 네 배나 가치가 있는 덕목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 말을 쓰는 동네가 달라서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보아도 그것은 최고의 가치이며
무게 차이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연기의 가르침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때
다른 존재가 바로 나임을 아는 동체자비(同體慈悲)임을 확인할 때 더욱 그렇다.

우리는 요즈음 매우 많은 사건들을 만나고 있다.
신 정아-변 양균씨 이야기,버마의 민주화이야기와 스님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남북정상 이야기와 서해 그리고 납북자 이야기,
두타스님 이야기,조계종 스님들 이야기,
조계-태고의 다툼 속에 헐리는 천년고찰 안정사이야기 등이
눈과 귀를 통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 어느 하나를 보아도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다.
따라서 적당히 모른 체하고 넘어가면 될 것이다.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하지만 우리는 아니 나는 부처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르고 제대로 가고자 서원한 수행자로서
뚜렷이 살펴보고 엄밀히 반성할 때
어느 한 곳에도 나의 마음이나
몸의 힘이 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음을 느끼고 전율할 때가 많다.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는 분들도 있지만
신문이나 방송 또는 행사장이나 그 어떤 곳에서
스치고 지나간 인연이라도
나와는 오랜 인연이 있음을 생각할 때 소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설사 나쁜 일을 한 사람이라고 밝혀졌다 할지라도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나무랄 수가 없다.
특히 약자의 입장이 되어버린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든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을 기울여서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 때문이든지 헤아려주고
보살펴 주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두타스님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성자인 것처럼 추켜세울 때는 우리 사람 같고
문제가 있다니까 본래 우리가 아니었다는 식은 곤란하다.

우리 불교의 지도자들이 중국이나 태국, 미얀마나 스리랑카 등에 가서 한
수행자답지 못한 무자비한 이야기는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그것이 계율(戒律)을 입에 담지 않아도
‘인연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 하신
아니 인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 속에서
‘인연 없는 중생마저 사랑하라!’ 하신
무연자비(無緣慈悲)를 떠올릴 때
‘나는 그런 적이 없는가? 그럴 가능성은 없는가?’ 반성하게 된다.

자비(사랑)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중생을 향한 자비가 없다면 빛이 바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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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공’이란 무엇입니까 - 불교신문

[청년을 위한 불교기초강의] 쉽게 말해 ‘공’이란 무엇입니까 - 불교신문


[청년을 위한 불교기초강의] <33> 쉽게 말해 ‘공’이란 무엇입니까
이정우 군법사ㆍ육군 대령
승인 2019.09.27 
이정우

Q 부처님은 모든 것은 다 ‘공(空)’이라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 설명을 들어도 너무 어렵다. 쉽게 설명해 줄 수 없는가?


무엇이 있다가 비워졌을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


A 불교의 교리 가운데 ‘공(空)사상’은 부처님 가르침의 근간이기도 하고, 특히 대승불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상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단어는 인도 고어 산스크리트어의 순야타(nyat)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우리말로는 ‘비어있음·텅 빔’, 영어로는 ‘Emptiness’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순야타의 어근은 슈비(vi)라고 하는데 이는 ‘부풀다’는 뜻이고, 동시에 가운데가 ‘텅 비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외견상으로는 사물이 부풀어 올라와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비어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토대로 공을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공은 ‘비어있음’이라고 했는데 ‘무엇이 비어있다’고 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비어있음은 무엇이 있다가 ‘비워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컵에 들어있는 커피를 다 마셨다면 컵이 비어있다고 말합니다. 컵이 없다(無, 무)는 말은 아닙니다. 컵 안에 있던 커피가 비워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색이 공이라는 말은 색이 없다(無)라는 말이 아니라, 방금까지 색을 채우고 있던 그 무엇이 비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비었다는 것은 이전에 무엇이 있었던 것인가를 알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컵에 더 이상 커피가 없지만 공기까지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비워졌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비어있음인 공은 무엇이 비워졌는가하면 그 무엇이든 ‘홀로 영원히 존재함(自性)’이 비워졌습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하나 없고, 서로 상호연관성 없이 홀로 존재함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몸이 공이라고 하면 내 몸이 없다(無)는 말이 아니라 내 몸 속에 채워져 있는 것들이 ‘홀로 영원히 존재함’의 성질이 비워졌다는 것입니다. 몸은 심장과 폐와 위와 신장과 같은 장기와 뼈와 살과 근육, 피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폐는 산소를 공급해 피를 맑게 하고 피는 폐에 영양을 공급합니다. 피 없이 폐가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몸(오온)은 홀로 영원히 존재함(自性)이 불가능하므로 ‘비었다(空)’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확대해 보면 우주만물이 모두 ‘홀로 영원히 존재함(自性)이 비어있음(空)’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은 비어있음이고 무엇이 비워졌냐면, 다름 아닌 홀로 영원히 존재함(自性)이 비워진 것이다’라는 것을 이해하시면 여러분도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도리를 쉽게 깨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Śūnyatā - Wikipedia 공(空) emptiness

Śūnyatā - Wikipedia

Śūnya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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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s of
Śūnyatā
Englishemptiness, voidness, vacuity, openness, thusness
SanskritŚūnyatā
(Dev: शून्यता)
PaliSuññatā
(Dev: सुञ्ञता)
Bengaliশূন্যতা
(Shunnôta)
Burmesethone nya ta, သုညတ
Chinese
(PinyinKōng)
Japanese
(Rōmaji)
Khmerសុញ្ញតា
(UNGEGNSŏnhnhôta)
Korean공성(空性)
(RRgong-seong)
Mongolianхоосон
Tibetanསྟོང་པ་ཉིད་
(Wylie: stong-pa nyid
THL: tongpa nyi
)
Thaiสุญตา
VietnameseKhông ̣(空)
Glossary of Buddhism

Śūnyatā (Sanskritशून्यताromanizedśūnyatāPalisuññatāEnglish: /ʃnˈjɑː.tɑː/ shoon-YAH-tah), translated most often as emptiness,[1] vacuity, and sometimes voidness,[2] is an Indian philosophical and mathematical construct. Within HinduismJainismBuddhism and other philosophical strands, the concept has multiple meanings depending on its doctrinal context. It is either an ontological feature of reality, a meditative state, or a phenomenological analysis of experience.

In the Chandah-sutra of Pingala, dating perhaps the third or second century BC, Pingala's use of a zero symbol, śūnya, as a marker seems to be the first known explicit reference to zero.[3]

In Theravāda BuddhismSuññatā often refers to the non-self (Pāli: anattā, Sanskrit: anātman)[note 1] nature of the five aggregates of experience and the six sense spheresSuññatā is also often used to refer to a meditative state or experience.

In Mahāyāna Buddhismśūnyatā refers to the tenet that "all things are empty of intrinsic existence and nature (svabhava)",[5][6] but may also refer to the Buddha-nature teachings and primordial or empty awareness, as in DzogchenShentong, or Chan.

Etymology[edit]

"Śūnyatā" (Sanskrit) is usually translated as "devoidness", "emptiness", "hollow", "hollowness", "voidness". It is the noun form of the adjective śūnya, plus -tā:

  • śūnya, in the context of buddha dharma, primarily means "empty", or "void," but also means "zero," and "nothing,"[7] and derives from the root śvi, meaning "hollow"
  • -tā is a suffix denoting a quality or state of being, equivalent to English "-ness"

Development of the concept[edit]

The concept of śūnyatā as "emptiness" is related to the concept of anatta in early Buddhism.[8] Over time, many different philosophical schools or tenet-systems (Sanskrit: siddhānta)[9] have developed within Buddhism in an effort to explain the exact philosophical meaning of emptiness.

After the Buddha, emptiness was further developed by the Abhidharma schools, Nāgārjuna and the Mādhyamaka school, an early Mahāyāna school. Emptiness ("positively" interpreted) is also an important element of the Buddha-nature literature, which played a formative role in the evolution of subsequent Mahāyāna doctrine and practice.

Early Buddhism[edit]

Pāli Nikāyas[edit]

A simile from the Pali scriptures (SN 22.95) compares form and feelings with foam and bubbles.

The Pāli Canon uses the term śūnyatā ("emptiness") in three ways: "(1) as a meditative dwelling, (2) as an attribute of objects, and (3) as a type of awareness-release."[10]

According to Bhikkhu Analayo, in the Pāli Canon "the adjective suñña occurs with a much higher frequency than the corresponding noun suññatā" and emphasizes seeing phenomena as 'being empty' instead of an abstract idea of "emptiness."[11]

One example of this usage is in the Pheṇapiṇḍūpama Sutta (SN 22:95), which states that on close inspection, each of the five aggregates are seen as being void (rittaka), hollow (tucchaka), coreless (asāraka). In the text a series of contemplations is given for each aggregate: form is like "a lump of foam" (pheṇapiṇḍa); sensation like "a water bubble" (bubbuḷa); perception like "a mirage" (marici); formations like "a plantain tree" (kadalik-khandha); and cognition is like "a magical illusion" (māyā).[12]

According to Shi Huifeng, the terms "void" (rittaka), "hollow" (tucchaka), and "coreless" (asāraka) are also used in the early texts to refer to words and things which are deceptive, false, vain, and worthless.[12] This sense of worthlessness and vacuousness is also found in other uses of the term māyā, such as the following:

"Monks, sensual pleasures are impermanent, hollow, false, deceptive; they are illusory (māyākatame), the prattle of fools."[12]

The Suñña Sutta,[13] part of the Pāli Canon, relates that the monk ĀnandaBuddha's attendant asked,

It is said that the world is empty, the world is empty, lord. In what respect is it said that the world is empty?" The Buddha replied, "Insofar as it is empty of a self or of anything pertaining to a self: Thus it is said, Ānanda, that the world is empty.

According to the American monastic Thanissaro Bhikku:

Emptiness as a quality of dharmas, in the early canons, means simply that one cannot identify them as one's own self or having anything pertaining to one's own self ... Emptiness as a mental state, in the early canons, means a mode of perception in which one neither adds anything to nor takes anything away from what is present, noting simply, "There is this." This mode is achieved through a process of intense concentration, coupled with the insight that notes more and more subtle levels of the presence and absence of disturbance (see MN 121).[14]

Meditative state[edit]

Emptiness as a meditative state is said to be reached when "not attending to any themes, he [the bhikku] enters & remains in internal emptiness" (MN 122). This meditative dwelling is developed through the "four formless states" of meditation or Arūpajhānas and then through "themeless concentration of awareness."[10]

The Cūlasuññata-sutta (MN III 104) and the Mahāsuññata-sutta (MN III 109) outline how a monk can "dwell in emptiness" through a gradual step-by-step mental cultivation process, they both stress the importance of the impermanence of mental states and the absence of a self.

In the Kāmabhu Sutta S IV.293, it is explained that a bhikkhu can experience a trancelike contemplation in which perception and feeling cease. When he emerges from this state, he recounts three types of "contact" (phasso):

  1. "emptiness" (suññato),
  2. "signless" (animitto),
  3. "undirected" (appaihito).[15]

The meaning of emptiness as contemplated here is explained at M I.297 and S IV.296-97 as the "emancipation of the mind by emptiness" (suññatā cetovimutti) being consequent upon the realization that "this world is empty of self or anything pertaining to self" (suññam ida attena vā attaniyena vā).[16][17]

The term "emptiness" (suññatā) is also used in two suttas in the Majjhima Nikāya, in the context of a progression of mental states. The texts refer to each state's emptiness of the one below.[18]

Chinese Āgamas[edit]

The Chinese Āgamas contain various parallels to the Pheṇapiṇḍūpama Sutta. One partial parallel from the Ekottara Āgama describes the body with different metaphors: "a ball of snow", "a heap of dirt", "a mirage", "an illusion" (māyā), or "an empty fist used to fool a child".[12] In a similar vein, the Mūla-Sarvāstivādin Māyājāla Sūtra, gives two sets of metaphors for each of the sensory consciousnesses to illustrate their vain, illusory character.[12]

Other Sarvāstivādin Āgama sutras (extant in Chinese) which have emptiness as a theme include Samyukta Āgama 335 - Paramārtha-śunyatā-sūtra ("Sutra on ultimate emptiness") and Samyukta Āgama 297 - Mahā-śunyatā-dharma-paryāya ("Greater discourse on emptiness"). These sutras have no parallel Pāli suttas.[19] These sutras associate emptiness with dependent origination, which shows that this relation of the two terms was already established in pre-Nagarjuna sources. The sutra on great emptiness states:

"What is the Dharma Discourse on Great Emptiness? It is this— 'When this exists, that exists; when this arises, that arises.'"[20]

The phrase "when this exists..." is a common gloss on dependent origination. Sarvāstivādin Āgamas also speak of a certain "emptiness samadhi" (śūnyatāsamādhi) as well as stating that all dharmas are "classified as conventional".[21]

Mun-Keat Choong and Yin Shun have both published studies on the various uses of emptiness in the Early Buddhist texts (Pāli Canon and Chinese Āgamas).[22][23] Choong has also published a collection of translations of Āgama sutras from the Chinese on the topic of emptiness.[24]

Early Buddhist schools and Abhidharma[edit]

Many of the early Buddhist schools featured śūnyatā as an important part of their teachings.

The Sarvastivadin school's Abhidharma texts like the Dharmaskandhapāda Śāstra, and the later Mahāvibhāṣa, also take up the theme of emptiness vis-a-vis dependent origination as found in the Agamas.[25]

Schools such as the Mahāsāṃghika Prajñaptivādins as well as many of the Sthavira schools (except the Pudgalavada) held that all dharmas were empty (dharma śūnyatā).[25] This can be seen in the early Theravada Abhidhamma texts such as the Patisambhidamagga, which also speak of the emptiness of the five aggregates and of svabhava as being "empty of essential nature".[26] The Theravada Kathavatthu also argues against the idea that emptiness is unconditioned.[27] The Mahāvastu, an influential Mahāsāṃghika work, states that the Buddha

"has shown that the aggregates are like a lightning flash, as a bubble, or as the white foam on a wave."[28]

One of the main themes of Harivarman's Tattvasiddhi-Śāstra (3rd-4th century) is dharma-śūnyatā, the emptiness of phenomena.[28]

Theravāda[edit]

Sea froth at sunset

Theravāda Buddhists generally take the view that emptiness is merely the not-self nature of the five aggregates. Emptiness is an important door to liberation in the Theravāda tradition just as it is in Mahayana, according to Insight meditation teacher Gil Fronsdal.[29] The classic Theravāda text known as the Patisambhidamagga (c. 3rd century BCE) describes the five aggregates as being empty (suññam) of essence or intrinsic nature (sabhava).[30] The Patisambhidamagga also equates not-self with the emptiness liberation in a passage also cited by Buddhaghosa in the Visuddhimagga (Vism XXI 70):

"When one who has great wisdom brings [volitional formations] to mind as not-self, he acquires the emptiness liberation" -Patis. II 58.[31]

The Visuddhimagga (c. 5th century CE), the most influential classical Theravāda treatise, states that not-self does not become apparent because it is concealed by "compactness" when one does not give attention to the various elements which make up the person.[32] The Paramatthamañjusa Visuddhimaggatika of Acariya Dhammapala, a 5th-century Theravāda commentary on the Visuddhimagga, comments on this passage by referring to the fact that we often assume unity and compactness regarding phenomena or functions which are instead made up of various elements, but when one sees that these are merely empty dhammas, one can understand the not-self characteristic:

"when they are seen after resolving them by means of knowledge into these elements, they disintegrate like froth subjected to compression by the hand. They are mere states (dhamma) occurring due to conditions and void. In this way the characteristic of not-self becomes more evident."[32]

The modern Thai teacher Buddhadasa referred to emptiness as the "innermost heart" of the Buddhist teachings and the cure for the disease of suffering. He stated that emptiness, as it relates to the practice of Dhamma, can be seen both "as the absence of Dukkha and the defilements that are the cause of Dukkha and as the absence of the feeling that there is a self or that there are things which are the possessions of a self."[33] He also equated nibbana with emptiness, writing that "Nibbana,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of Dukkha, means the same as supreme emptiness."[33] Emptiness is also seen as a mode of perception which lacks all the usual conceptual elaborations we usually add on top of our experiences, such as the sense of "I" and "Mine". According to Thanissaro Bhikku, emptiness is not so much a metaphysical view, as it is a strategic mode of acting and of seeing the world which leads to liberation:[34]

Emptiness is a mode of perception, a way of looking at experience. It adds nothing to and takes nothing away from the raw data of physical and mental events. You look at events in the mind and the senses with no thought of whether there's anything lying behind them. This mode is called emptiness because it's empty of the presuppositions we usually add to experience to make sense of it: the stories and world-views we fashion to explain who we are and the world we live in. Although these stories and views have their uses, the Buddha found that some of the more abstract questions they raise — of our true identity and the reality of the world outside — pull attention away from a direct experience of how events influence one another in the immediate present. Thus they get in the way when we try to understand and solve the problem of suffering.

Some Theravādins, such as David Kalupahana, see Nagarjuna's view of emptiness as compatible with the Pali Canon. In his analysis of the Mulamadhyamikakarika, Kalupahana sees Nagarjuna's argument as rooted in the Kaccānagotta Sutta (which Nagarjuna cites by name). Kalupahana states that Nagarjuna's major goal was to discredit heterodox views of Svabhava (own-nature) held by the Sarvastivadins and establish the non-substantiality of all dharmas.[31] According to Peter Harvey, the Theravāda view of dhammas and sabhava is not one of essences, but merely descriptive characteristics and hence is not the subject of Madhyamaka critique developed by Nagarjuna (see below).[35]

In Theravāda, emptiness as an approach to meditation is also seen as a state in which one is "empty of disturbance." This form of meditation is one in which meditators become concentrated and focus on the absence or presence of disturbances in their minds; if they find a disturbance they notice it and allow it to drop away; this leads to deeper states of calmness.[34] Emptiness is also seen as a way to look at sense-experience that does not identify with the "I-making" and "my-making" process of the mind. As a form of meditation, this is developed by perceiving the six sense-spheres and their objects as empty of any self, this leads to a formless jhana of nothingness and a state of equanimity.[34]

Mathew Kosuta sees the Abhidhamma teachings of the modern Thai teacher Ajaan Sujin Boriharnwanaket as being very similar to the Mahayana emptiness view.[36]

Mahayana Buddhism[edit]

There are two main sources of Indian Buddhist discussions of emptiness: the Mahayana sutra literature, which is traditionally believed to be the word of the Buddha in Mahayana Buddhism, and the shastra literature, which was composed by Buddhist scholars and philosophers.

Prajñāpāramitā sūtras[edit]

In the Prajñaparamita sutras, the emptiness of phenomena is often illustrated by metaphors like drops of dew.

The Prajñāpāramitā (Perfection of Wisdom) Sutras taught that all entities, including dharmas, are empty of self, essential core, or intrinsic nature (svabhava), being only conceptual existents or constructs.[37][38] The notion of prajña (wisdom, knowledge) presented in these sutras is a deep non-conceptual understanding of emptiness.[39] The Prajñāpāramitā sutras also use various metaphors to explain the nature of things as emptiness, stating that things are like "illusions" (māyā) and "dreams" (svapna). The Astasahasrika Prajñaparamita, possibly the earliest of these sutras, states:

If he knows the five aggregates as like an illusion, But makes not illusion one thing, and the aggregates another; If, freed from the notion of multiple things, he courses in peace— Then that is his practice of wisdom, the highest perfection.[12]

Perceiving dharmas and beings like an illusion (māyādharmatām) is termed the "great armor" (mahāsaṃnaha) of the Bodhisattva, who is also termed the 'illusory man' (māyāpuruṣa).[40] The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adds the following similes to describe how all conditioned things are to be contemplated: like a bubble, a shadow, like dew or a flash of lightning.[41] In the worldview of these sutras, though we perceive a world of concrete and discrete objects, these objects are "empty" of the identity imputed by their designated labels.[42] In that sense, they are deceptive and like an illusion. The Perfection of Wisdom texts constantly repeat that nothing can be found to ultimately exist in some fundamental way. This applies even to the highest Buddhist concepts (bodhisattvasbodhicitta, and even prajña itself).[43] Even nirvana itself is said to be empty and like a dream or magical illusion.[44] In a famous passage, the Heart sutra, a later but influential Prajñāpāramitā text, directly states that the five skandhas (along with the five senses, the mind, and the four noble truths) are said to be "empty" (sunya):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
Emptiness is not separate from form, form is not separate from emptiness
Whatever is form is emptiness, whatever is emptiness is form.[45][note 2][note 3]

In the Prajñāpāramitā sutras the knowledge of emptiness, i.e. prajñāpāramitā is said to be the fundamental virtue of the bodhisattva, who is said to stand on emptiness by not standing (-stha) on any other dharma (phenomena). Bodhisattvas who practice this perfection of wisdom are said to have several qualities such as the "not taking up" (aparigṛhīta) and non-apprehension (anupalabdhi) of anything, non-attainment (aprapti), not-settling down (anabhinivesa) and not relying on any signs (nimitta, mental impressions).[46][47] Bodhisattvas are also said to be free of fear in the face of the ontological groundlessness of the emptiness doctrine which can easily shock others.[48]

Mādhyamaka school[edit]

Nāgārjuna and Āryadeva, two classic Indian philosophers of the Buddhist emptiness doctrine.

Mādhyamaka is a Mahāyāna Buddhist school of philosophy which focuses on the analysis of emptiness, and was thus also known as śūnyatavāda. The school is traditionally seen as being founded by the Indian Buddhist philosopher Nāgārjuna.[49][50] Nāgārjuna's goal was to refute the essentialism of certain Abhidharma schools and the Hindu Nyaya school.[51] His best-known work is the Mūlamadhyamakakārikā (MMK), in which he used reductio arguments (Sktprasanga) to show the non-substantiality of everything. Nāgārjuna equated the emptiness of dharmas with their dependent origination, and thus with their being devoid any permanent substance or primary, substantial existence (svabhava).[52][53][54][note 4] Nāgārjuna writes in the MMK:

We state that conditioned origination is emptiness. It is mere designation depending on something, and it is the middle path. (24.18)

Since nothing has arisen without depending on something, there is nothing that is not empty. (24.19) [55]

Nāgārjuna's Mādhyamaka states that since things have the nature of lacking true existence or own being (niḥsvabhāva), all things are mere conceptual constructs (prajñaptimatra) because they are just impermanent collections of causes and conditions.[56] Because of this, Mādhyamaka is also known as Niḥsvabhāvavāda. This also applies to the principle of causality itself, since everything is dependently originated.[57] If one is unaware of this, things may seem to arise as existents, remain for a time and then subsequently perish. In reality, dependently originated phenomena do not arise or remain as inherently existent phenomena and yet they still appear as a flow of conceptual constructs.[58][59][note 5] Thus both existence and nihilism are ruled out.[60][61] Any enduring essential nature would prevent the process of dependent origination, or any kind of origination at all. For things would simply always have been, and will always continue to be, without any change.[62][note 6] For Nāgārjuna, the realization of emptiness is a key understanding which allows one to reach liberation because it is nothing but the elimination of ignorance.

There has been significant debate, both in ancient India and in modern scholarship, as to how to interpret Mādhyamaka and whether it is nihilistic (a claim that Mādhyamaka thinkers vehemently denied).[63][64][65] Some scholars like F. Shcherbatskoy have also interpreted emptiness as described by Nāgārjuna as a Buddhist transcendental absolute, while other scholars such as David Kalupahana consider this interpretation to be a mistake.[66][67] According to Paul Williams, Nāgārjuna associates emptiness with the ultimate truth but his conception of emptiness is not some kind of Absolute, but rather it is the very absence of true existence with regards to the conventional reality of things and events in the world.[68]

For Nāgārjuna the phenomenal world is the limited truth (samvrtisatya) and does not really exist in the highest reality (paramarthasatya) and yet it has a kind of conventional reality which has its uses for reaching liberation. This limited truth includes everything, including the Buddha himself, the teachings (Dharma), liberation and even Nāgārjuna's own arguments.[69] This two-truth schema which did not deny the importance of convention allowed him to defend himself against charges of nihilism. Because of his philosophical work, Nāgārjuna is seen by some modern interpreters as restoring the Middle way of the Buddha, which had become influenced by absolutist metaphysical tendencies of schools like the Vaibhasika.[70][52]

Nāgārjuna is also famous for arguing that his philosophy of emptiness was not a view, and that he in fact did not take any position or thesis whatsoever since this would just be another form of clinging. In his Vigrahavyavartani Nāgārjuna outright states that he has no thesis (pratijña) to prove.[71] This idea would become a central point of debate for later Mādhyamaka philosophers. After Nāgārjuna, his pupil Āryadeva (3rd century CE) commented on and expanded Nāgārjuna's system. An influential commentator on Nāgārjuna was Buddhapālita (470–550) who has been interpreted as developing the 'prāsaṅgika' approach to Nāgārjuna's works, which argues that Madhyamaka critiques of essentialism are done only through reductio ad absurdum arguments. Like Nāgārjuna, instead of putting forth any positive position of his own, Buddhapālita merely seeks to show how all philosophical positions are untenable and self contradictory without putting forth a positive thesis.[72]

Buddhapālita is often contrasted with the works of Bhāvaviveka (c. 500 – c. 578), who argued for the use of logical arguments using the pramana-based epistemology of Indian logicians like DignāgaBhāvaviveka argued that Madhyamika's could put forth positive arguments of one's own, instead of just criticizing others' arguments, a tactic called vitaṇḍā (attacking) which was seen in bad form in Indian philosophical circles. He argued that the position of a Mādhyamaka was simply that phenomena are devoid of inherent nature.[72] This approach has been labeled the svātantrika style of Madhyamaka by Tibetan philosophers and commentators. Another influential commentator, Candrakīrti (c. 600–650), critiqued Bhāvaviveka's adoption of the pramana tradition on the grounds that it contained a subtle essentialism and argued that Mādhyamikas must make no positive assertions and need not construct formal arguments.[73]

Yogācāra school[edit]

The central text of the Yogācāra school, the Saṃdhinirmocana-sūtra, explains emptiness in terms of the three natures theory, stating that its purpose is to "establish the doctrine of the three-own-beings (trisvabhāva) in terms of their lack of own-nature (niḥsvabhāvatā)."[74] According to Andrew Skilton, in Yogācāra, emptiness is the "absence of duality between perceiving subject (lit. "grasper", Sktgrāhaka, Tib'dzin-pa) and the perceived object ("grasped", Skt: grāhya, Tib: bzhung-ba)."[75] This is seen in the following quote from the Madhyāntavibhāga:

There exists the imagination of the unreal, there is no duality, but there is emptiness, even in this there is that.[74]

In his commentary, the Indian Yogācāra philosopher Vasubandhu explains that imagination of the unreal (abhūta-parikalpa) is the "discrimination between the duality of grasped and grasper." Emptiness is said to be "the imagination of the unreal that is lacking in the form of being graspable or grasper." Thus in Yogacara, it can be said that emptiness is mainly that subject and object and all experiences which are seen in the subject–object modality are empty.[74]

According to Yogācāra thought, everything we conceive of is the result of the working of the Eight Consciousnesses.[note 7] The "things" we are conscious of are "mere concepts" (vijñapti), not 'the thing in itself'.[76] In this sense, our experiences are empty and false, they do not reveal the true nature of things as an enlightened person would see them, which would be non-dual, without the imputed subject object distinction.

The Yogācāra school philosophers Asaṅga and Vasubandhu criticized those in the Madhymamika school who "adhere to non-existence" (nāstikas, vaināśkas) and sought to move away from their negative interpretation of emptiness because they feared any philosophy of 'universal denial' (sarva-vaināśika) would stray into 'nihilism' (ucchedavāda), an extreme which was not the middle way.[74] Yogacarins differed from Madhyamikas in positing that there really was something which could be said to 'exist' in experience, namely some kind of nonobjective and empty perception. This Yogacara conception of emptiness, which states that there is something that exists (mainly, vijñapti, mental construction), and that it is empty, can be seen in the following statement of Vasubandhu:

Thus, when something is absent [in a receptacle], then one, seeing that [receptacle] as devoid of that thing, perceives that [receptacle] as it is, and recognises that [receptacle], which is left over, as it is, namely as something truly existing there.[74]

This tendency can also be seen in Asaṅga, who argues in his Bodhisattvabhūmi that there must be something that exists which is described as empty:

Emptiness is logical when one thing is devoid of another because of that [other's] absence and because of the presence of the empty thing itself.[74]

Asaṅga also states:

The nonexistence of duality is indeed the existence of nonexistence; this is the definition of emptiness. It is neither existence, nor nonexistence, neither different nor identical.[74]

This "existence of nonexistence" definition of emptiness can also be seen in Asaṅga's Abhidharmasamuccaya where he states that emptiness is "the non-existence of the self, and the existence of the no-self."[74]

In the sixth century, scholarly debates between Yogacarins and Madhyamikas centered on the status and reality of the paratantra-svabhāva (the "dependent nature"), with Madhyamika's like Bhāvaviveka criticizing the views of Yogacarins like Dharmapāla of Nalanda as reifying dependent origination.[74]

Buddha-nature[edit]

An influential division of 1st-millennium CE Buddhist texts develop the notion of Tathāgatagarbha or Buddha-nature.[77][78] The Tathāgatagarbha doctrine, at its earliest, probably appeared about the later part of the 3rd century CE, and is verifiable in Chinese translations of 1st millennium CE.[79]

The Tathāgatagarbha is the topic of the Tathāgatagarbha sūtras, where the title itself means a garbha (womb, matrix, seed) containing Tathāgata (Buddha). In the Tathāgatagarbha sūtras the perfection of the wisdom of not-self is stated to be the true self. The ultimate goal of the path is characterized using a range of positive language that had been used in Indian philosophy previously by essentialist philosophers, but which was now transmuted into a new Buddhist vocabulary to describe a being who has successfully completed the Buddhist path.[80]

These Sutras suggest, states Paul Williams, that 'all sentient beings contain a Tathāgata as their 'essence, core or essential inner nature'.[79] They also present a further developed understanding of emptiness, wherein the Buddha-nature, the Buddha and Liberation are seen as transcending the realm of emptiness, i.e. of the conditioned and dependently originated phenomena.[81]

One of these texts, the Angulimaliya Sutra, contrasts between empty phenomena such as the moral and emotional afflictions (kleshas), which are like ephemeral hailstones, and the enduring, eternal Buddha, which is like a precious gem:

The tens of millions of afflictive emotions like hail-stones are empty. The phenomena in the class of non-virtues, like hail-stones, quickly disintegrate. Buddha, like a vaidurya jewel, is permanent ... The liberation of a buddha also is form ... do not make a discrimination of non-division, saying, "The character of liberation is empty".'[82]

The Śrīmālā Sūtra is one of the earliest texts on Tathāgatagarbha thought, composed in the 3rd century in south India, according to Brian Brown. It asserted that everyone can potentially attain Buddhahood, and warns against the doctrine of Śūnyatā.[83] The Śrīmālā Sūtra posits that the Buddha-nature is ultimately identifiable as the supramundane nature of the Buddha, the garbha is the ground for Buddha-nature, this nature is unborn and undying, has ultimate existence, has no beginning nor end, is nondual, and permanent.[84] The text also adds that the garbha has "no self, soul or personality" and "incomprehensible to anyone distracted by sunyata (voidness)"; rather it is the support for phenomenal existence.[85]

The notion of Buddha-nature and its interpretation was and continues to be widely debated in all schools of Mahayana Buddhism. Some traditions interpret the doctrine to be equivalent to emptiness (like the Tibetan Gelug school); the positive language of the texts Tathāgatagarbha sutras are then interpreted as being of provisional meaning, and not ultimately true. Other schools, however (mainly the Jonang school), see Tathāgatagarbha as being an ultimate teaching and see it as an eternal, true self, while Śūnyatā is seen as a provisional, lower teaching.[86]

Likewise, western scholars have been divided in their interpretation of the Tathāgatagarbha, since the doctrine of an 'essential nature' in every living being appears to be confusing, since it seems to be equivalent to a 'Self',[note 8][88] which seems to contradict the doctrines in a vast majority of Buddhist texts. Some scholars, however, view such teachings as metaphorical, not to be taken literally.[81]

According to some scholars, the Buddha-nature which these sutras discuss does not represent a substantial self (ātman). Rather, it is a positive expression of emptiness, and represents the potentiality to realize Buddhahood through Buddhist practices. In this view, the intention of the teaching of Buddha-nature is soteriological rather than theoretical.[89][90] According to others, the potential of salvation depends on the ontological reality of a salvific, abiding core reality – the Buddha-nature, empty of all mutability and error, fully present within all beings.[91] Japanese scholars of the "Critical Buddhism" movement meanwhile see Buddha-nature as an essentialist and thus an un-Buddhist idea.[90]

Tibetan Buddhism[edit]

In Tibetan Buddhism, emptiness is often symbolized by and compared to the open sky[92] which is associated with openness and freedom.[93]

In Tibetan Buddhism, emptiness (Wyliestong-pa nyid) is mainly interpreted through the lens of Mādhyamaka philosophy, though the Yogacara- and Tathāgatagarbha-influenced interpretations are also influential. The interpretations of the Indian Mādhyamaka philosopher Candrakīrti are the dominant views on emptiness in Tibetan Buddhist philosophy.[94]

In Tibet, a distinction also began to be made between the autonomist (svātantrika, rang rgyud pa) and consequentialist (prāsaṅgika, thal 'gyur pa) approaches to Mādhyamaka reasoning about emptiness. The distinction was invented by Tibetan scholarship, and not one made by classical Indian Madhyamikas.[95]

Further Tibetan philosophical developments began in response to the works of the influential scholar Dolpopa (1292–1361) and led to two distinctly opposed Tibetan Mādhyamaka views on the nature of emptiness and ultimate reality.[96][97]

One of these is the view termed shentong (Wyliegzhan stong, 'other empty'), which is a further development of Indian Yogacara-Madhyamaka and the Buddha-nature teachings by Dolpopa, and is primarily promoted in the Jonang school but also by some Kagyu figures like Jamgon Kongtrul. This view states that ultimate reality is empty of the conventional, but it is itself not empty of being ultimate Buddhahood and the luminous nature of mind.[98] Dolpopa considered his view a form of Mādhyamaka, and called his system "Great Mādhyamaka".[99] In Jonang, this ultimate reality is a "ground or substratum" which is "uncreated and indestructible, noncomposite and beyond the chain of dependent origination."[100]

Dolpopa was roundly critiqued for his claims about emptiness and his view that they were a kind of Mādhyamaka. His critics include Tibetan philosophers such as the founder of the Gelug school Je Tsongkhapa (1357–1419) and Mikyö Dorje, the 8th Karmapa of the Karma Kagyu (1507–1554).[101]

Rangtong (Wylierang stong; 'self-empty') refers to views which oppose shentong and state that ultimate reality is that which is empty of self-nature in a relative and absolute sense; that is to say ultimate reality is empty of everything, including itself. It is thus not a transcendental ground or metaphysical absolute, but just the absence of true existence (svabhava). This view has sometimes been applied to the Gelug school because they tend to hold that emptiness is "an absolute negation" (med dgag).

However, many Tibetan philosophers reject these terms as descriptions of their views on emptiness. The Sakya thinker Gorampa Sonam Senge (1429-1489), for example, called his version of Mādhyamaka, "freedom from extremes" or "freedom from proliferations" (spros bral) and claimed that the ultimate truth was ineffable, beyond predication or concept.[102] For Gorampa, emptiness is not just the absence of inherent existence, but it is the absence of the four extremes in all phenomena i.e. existence, nonexistence, both and neither (see: catuskoti).[103]

The 14th Dalai Lama, who generally speaks from the Gelug perspective, states:

According to the theory of emptiness, any belief in an objective reality grounded in the assumption of intrinsic, independent existence is simply untenable.
All things and events, whether 'material', mental or even abstract concepts like time, are devoid of objective, independent existence ... [T]hings and events are 'empty' in that they can never possess any immutable essence, intrinsic reality or absolute 'being' that affords independence.[104]

Chinese Buddhism[edit]

Sānlùn school[edit]

When Buddhism was introduced in China it was initially understood in terms of indigenous Chinese philosophical culture. Because of this, emptiness (Ch.kong, 空;) was at first understood as pointing to a kind of transcendental reality similar to the Tao.[105] It took several centuries to realize that śūnyatā does not refer to an essential transcendental reality underneath or behind the world of appearances.[105]

Chinese Mādhyamaka (known as Sānlùn, or the "three treatise school") began with the work of Kumārajīva (344–413 CE) who translated the works of Nāgārjuna into Chinese. Sānlùn figures like Kumārajīva's pupil Sengzhao (384–414), and the later Jizang (549–623) were influential in introducing a more orthodox and non-essentialist interpretation of emptiness to Chinese Buddhism. Sengzhao argues, for example, that the nature of phenomena could not be said to be either existent or non-existent and that it was necessary to go beyond conceptual proliferation to realize emptiness. Jizang (549–623) was another central figure in Chinese Madhyamaka who wrote numerous commentaries on Nāgārjuna and Aryadeva and is considered to be the leading representative of the school.[106] Jizang called his method "deconstructing what is misleading and revealing what is corrective". He insisted that one must never settle on any particular viewpoint or perspective but constantly reexamine one's formulations to avoid reifications of thought and behavior.[106]

In the modern era, one major Chinese figure who has written on Mādhyamaka is the scholar monk Yin Shun (1906–2005).[107]

Tiantai and Huayan[edit]

Later Chinese philosophers developed their own unique interpretations of emptiness. One of these was Zhiyi, the intellectual founder of the Tiantai school, who was strongly influenced by the Lotus sutra. The Tiantai view of emptiness and dependent origination is inseparable from their view of the "interfusion of phenomena" and the idea that the ultimate reality is an absolute totality of all particular things which are "Neither-Same-Nor-Different" from each other.[108]

In Tiantai metaphysics, every event, function, or characteristic is the product of the interfusion of all others, the whole is in the particular and every particular event/function is also in every other particular. This also leads to the conclusion that all phenomena are "findable" in each and every other phenomena, even seemingly conflicting phenomena such as good and evil or delusion and enlightenment are interfused with each other.[109]

The Huayan school understood emptiness and ultimate reality through the similar idea of interpenetration or "coalescence" (Wylie: zung-'jug; Sanskrit: yuganaddha), using the concept of Indra's net to illustrate this.[110]

Chán[edit]

Chan Buddhism was influenced by all the previous Chinese Buddhist currents. The Mādhyamaka of Sengzhao, for example, influenced the views of the Chan patriarch Shen Hui (670-762), a critical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Chan, as can be seen by his "Illuminating the Essential Doctrine" (Hsie Tsung Chi). This text emphasizes that true emptiness or Suchness cannot be known through thought since it is free from thought (wu-nien).[111] Shen Hui also states that true emptiness is not nothing, but it is a "Subtle Existence" (miao-yu), which is just "Great Prajña."[111]

The Chinese Chan presentation of emptiness, influenced by Yogacara and the Tathāgatagarbha sutras, also used more positive language and poetic metaphors to describe the nature of emptiness. For example, Hongzhi Zhengjue (1091–1157), a key figure in the Caodong lineage, wrote:

"The field of boundless emptiness is what exists from the very beginning. You must purify, cure, grind down, or brush away all the tendencies you have fabricated into apparent habits. [Those tendencies are the clouds in our eyes.] Then you can reside in a clear circle of brightness. Utter emptiness has no image. Upright independence does not rely on anything. Just expand and illuminate the original truth unconcerned by external conditions. Accordingly, we are told to realize that not a single thing exists. In this field birth and death do not appear. The deep source, transparent down to the bottom, can radiantly shine and can respond unencumbered to each speck of dust [each object] without becoming its partner. The subtlety of seeing and hearing transcends mere colors and sounds. The whole affair functions without leaving traces and mirrors without obscurations. Very naturally, mind and Dharmas emerge and harmonize."[112]

Western Buddhism[edit]

Various western Buddhists note that Śūnyatā refers to the emptiness of inherent existence, as in Madhyamaka; but also to the emptiness of mind or awareness, as open space and the "ground of being," as in meditation-orientated traditions and approaches such as Dzogchen and Shentong.[113][114][web 1][note 9]

Hinduism[edit]

Influence on Advaita Vedanta[edit]

Gaudapada has developed his concept of "ajāta"[115][116] which uses the term "anutpāda":[117]

  • "An" means "not", or "non"
  • "Utpāda" means "genesis", "coming forth", "birth"[118]

Taken together "anutpāda" means "having no origin", "not coming into existence", "not taking effect", "non-production".[118]

According to Gaudapada, the Absolute is not subject to birth, change and death. The Absolute is aja, the unborn eternal.[119] The empirical world of appearances is considered Maya (unreal as it is transitory), and not absolutely existent.[119] Thus, Gaudapada's concept of ajativada is similar to Buddhist term "anutpāda" for the absence of an origin[115][117] or śūnyatā.[120][note 10]

But Gaudapada's perspective is quite different from Nagarjuna.[124] Gaudapada's perspective found in Mandukya Karika is based on the Mandukya Upanishad.[124] According to Gaudapada, the metaphysical absolute called Brahman never changes, while the phenomenal world changes continuously, so the phenomenal world cannot arise independently from Brahman. If the world cannot arise, yet is an empirical fact, then the perceived world has to be a transitory (unreal) appearance of Brahman. And if the phenomenal world is a transitory appearance, then there is no real origination or destruction, only apparent origination or destruction. From the level of ultimate truth (paramārthatā) the phenomenal world is māyā, "illusion",[124] apparently existing but ultimately not metaphysically real.[125]

In Gaudapada-Karika, chapter III, verses 46–48, he states that Brahman never arises, is never born, is never unborn, it rests in itself:

When the mind does not lie low, and is not again tossed about, then that being without movement, and not presenting any appearance, culminates into Brahman. Resting in itself, calm, with Nirvana, indescribable, highest happiness, unborn and one with the unborn knowable, omniscient they say. No creature whatever is born, no origination of it exists or takes place. This is that highest truth where nothing whatever is born.

— Gaudapada Karika, 3.46-48, Translated by RD Karmarkar[126]

In contrast to Renard's view,[115] Karmarkar states the Ajativada of Gaudapada has nothing in common with the Śūnyatā concept in Buddhism.[127] While the language of Gaudapada is undeniably similar to those found in Mahayana Buddhism, states Comans, their perspective is different because unlike Buddhism, Gaudapada is relying on the premise of "Brahman, Atman or Turiya" exist and are the nature of absolute reality.[124]

In Shaivism[edit]

Sunya and sunyatisunya are concepts which appear in some Shaiva texts, such as the Vijñāna Bhairava Tantra, which contains several verses mentioning voidness as a feature of ultimate reality - Shiva:

"The Absolute void is Bhairava who is beyond the senses and the mind, beyond all the categories of these instruments.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human mind, He is most void. from the point of view of Reality, He is most full, for He is the source of all manifestation."[128]

"The yogi should concentrate intensely on the idea (and also feel) that this universe is totally void. In that void, his mind would become absorbed. Then he becomes highly qualified for absorption i.e. his mind is absorbed in the absolute void (sunyatisunya)."[129]

In a series of Kannada language texts of Lingayatism, a Shaivism tradition, shunya is equated to the concept of the supreme. In particular, the Shunya Sampadane texts present the ideas of Allama Prabhu in a form of dialogue, where shunya is that void and distinctions which a spiritual journey seeks to fill and eliminate. It is the described as a state of union of one's soul with the infinite Shiva, the state of blissful moksha.[130][131]

In Vaishnavism[edit]

Shunya Brahma is a concept found in certain texts of Vaishnavism, particularly in Odiya, such as the poetic Panchasakhas. It explains the Nirguna Brahman idea of Vedanta, that is the eternal unchanging metaphysical reality as "personified void". Alternative names for this concept of Hinduism, include shunya purusha and Jagannatha (Vishnu) in certain text.[130][132] However, both in Lingayatism and various flavors of Vaishnavism such as Mahima Dharma, the idea of Shunya is closer to the Hindu concept of metaphysical Brahman, rather than to the Śūnyatā concept of Buddhism.[130] However, there is some overlap, such as in the works of Bhima Bhoi.[130][133]

In the Vaishnavism of Orissa, the idea of shunya brahman or shunya purusha is found in the poetry of the Orissan Panchasakhas (Five Friends), such as in the compositions of 16th-century Acyutananda. Acyutananda's Shunya Samhita extols the nature of shunya brahman:

nāhi tāhāra rūpa varṇa, adṛsha avarṇa tā cinha.
tāhāku brahmā boli kahi, śūnya brahmhati se bolāi.

It has no shape, no colour,
It is invisible and without a name
This Brahman is called Shunya Brahman.[134][full citation needed]

The Panchasakhas practiced a form of Bhakti called Jnana-mishrita Bhakti-marga, which saw the necessity of knowledge (Jnana) and devotion - Bhakti.[citation needed]

Alternative translations[edit]

See also[edit]

Notes[edit]

  1. ^ A common translation is "no-self", without a self, but the Pāli Canon uses anattā as a singular substantive, meaning "not-self".[4]
  2. ^ Original: "Rupan śūnyatā śūnyatāiva rupan. Rupan na prithak śūnyatā śūnyatā na prithag rupan. Yad rupan sa śūnyatā ya śūnyatā tad rupan."
  3. ^ The Five Skandhas are: Form, Feeling, Perceptions, Ment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4. ^ Mūlamadhyamakakārikā 24:18
  5. ^ Chapter 21 of the Mūlamadhyamakakārikā goes into the reasoning behind this.[58]
  6. ^ Nāgārjuna equates svabhāva (essence) with bhāva (existence) in Chapter 15 of the Mūlamadhyamakakārikā
  7. ^ Translations do differ, which makes a difference. Vijñāna can be translated as "consciousness", but also as "discernement".[76]
  8. ^ Paul Williams: "Some texts of the tathagatagarbha literature, such as the Mahaparinirvana Sutra actually refer to an atman, though other texts are careful to avoid the term. This would be in direct opposition to the general teachings of Buddhism on anatta. Indeed, the distinctions between the general Indian concept of atman and the popular Buddhist concept of Buddha-nature are often blurred to the point that writers consider them to be synonymous."[87]
  9. '^ Quotes:
    * John Snelling: "At the core of Mahayana philosophy lies the notion of Emptiness: 
    Shunyata. This is very much in the spirit of anatta (Skt. anatman) as first taught by the Buddha. It is often used to imply, not mere or sheer nothingness (that would be the nihilistic view), but 'emptiness of inherent existence; that is, the absence of any kind of enduring or self-sustaining essence. There is also a sense in which it has connotations of 'conceptual emptiness': absence of thoughts. It could be regarded too as a non-term signifying the ineffable understanding arising within the practice of meditation. Although seemingly negative, it also has its positive uses - and of course ultimately points beyond the positive negative dichotomy."[113]
    * Hans Knibbe: "There are at least to important meanings of this concept of emptiness, namely:
    - empty of independent existence;
    - openness and space as grounf of being.[114]
    * Nigel Wellings:[web 1] "Thus we have two types of emptiness, the emptiness of self in the skandhas that reveals the absence of an empirical and metaphysical self. And the emptiness of the self in Nirvâ.na that reveals nothing of the empirical self existing within the Nirvâ.na consciousness.
    Harvey seems to confirm this view when he tells us that all conditioned dharmas are empty of self because they are impermanent and a source of suffering, while the unconditioned dharma, Nirvâ.na, is empty because it does not "support the feeling of 'I-ness'", that is, the impermanent skandhas. (1990:52). This is very similar to the teaching of the modern Kagyu Nyingma Lama, Tulku Urgyen Rinpoche, a Shentong exponent:

    All appearances are empty, in that they can be destroyed or extinguished in some way [...] The whole universe vanishes at some point, destroyed by the seven fires and one immense deluge. In this way, all appearances are empty.
    Mind is also ultimately empty, but its way of being empty is not the same as appearances. [My italics] Mind can experience anything but it cannot be destroyed. Its original nature is the dharmakaya of all Buddhas. You cannot actually do anything to mind – you can't change it, wash it away, bury it or burn it. What is truly empty, though, is all the appearances that appear in the mind. (Tulku Urgyen (1999), As It Is vol.1 Rangjang Yeshe, Boudhanath, Hong Kong & Nasby. p.53)

  10. ^ The term is also used in the Laṅkāvatāra Sūtra.[121] According to D.T Suzuki, "anutpada" is not the opposite of "utpada", but transcends opposites. It is kenshō, seeing into the true nature of existence,[122] the seeing that "all objects are without self-substance Śūnyatā".[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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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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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ernal links[edit]